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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대추리 들에 서서 ‘국가’를 생각한다.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활동가가 3월 6일, 7일 대추리에서 보낸 이틀간의 경험을 정리한 글을 쓰셨네요. hrnet 메일링리스트로 돌리신 글을 퍼옵니다.
그날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대추리 들에 서서 ‘국가’를 생각한다.

평택 대추리에서 보낸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이틀


3월 7일 아침 7시, 막 K-6 미군기지 위로 붉은 해가 솟았다. 옅은 서리 속에서도 쟁반만한 붉은 해, 대추리에서는 떠오르는 해도 지는 해도 유달리 붉고 크다.
아침 바람을 맞으며 들에 내려선다. 옅게 서리가 깔리고 지난 가을 추수 뒤로는 빈 들인 이 논바닥에서 물꼬를 손보는 농민을 만난다. 농사를 지을 채비를 하는 것이다. 시야가 닿는 곳 모두는 논이다. 들이다. 아침 들녘에는 냄새가 있다. 밭과는 다른 물기 배인 흙냄새가 바람에 실려 온다.
들은 아직 잠자고 있다. 햇발이 퍼져 햇살의 따사로움이 이 들에 내리쬐는 이른 봄 한낮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이다. 안개처럼. 들 가득히 내려앉았던 오리 떼가 인기척을 느끼고 비상한다. 이처럼 넓은 들이면 농민들이 흘린 벼 이삭들을 주워 먹는 것으로도 저 많은 오리 떼가 겨울을 충분히 날 수 있었을 것이다.
발끝은 벼 끄트머리에 자꾸 걸린다. 아직은 흙이 채 목지 않아 성에가 남아 있다. 논갈이를 하기에는 이른 철이다. 새가 깨어나듯이 수런수런 들도 깨어난다. 문인상 가는 길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미군기지 확장 반대 구호들을 적은 헝겊 쪼가리들, 문인상 이곳은 절반도 되지 못한다. 안성천까지 걸으려면 1시간은 족할 것이다. 안성천 끝으로는 서해 바다가 넘실대겠지. 내가 걷는 이 벌판도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벌이었을 것이다. 염기 머금은 땅에서만 자라는 칠색초, 나문재, 갈대만 자라는 버려진 갯벌, 그 갯벌을 오늘의 옥토로 만들기까지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의 노력을 잠시 생각한다.

버려진 갯벌, 옥토로 되기까지
기록에는 1943년에는 일본에 의해서 원대추리에 살던 농민들이 쫓겨났다. 오늘의 미군기지 그 터에 있던 농민들은 밀려났다. 해방 되고 다시 전쟁 중이던 1952년 미군은 아무런 통보도 없이 포크 레인으로 밀어붙였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쫓겨나 오늘의 대추리와 도두리 마을을 형성했다. 이들이 살 방법은 버려진 갯벌을 간척하는 일밖에 없었다. 어딜 가나 먹을 것 없어 굶주리던 전쟁 그 전후에 농민들은 버려진 갯벌을 정성껏 개척했다. 이 나라의 간척사가 그랬듯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량증산정책에 의해 강제로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 1970년대 박정희식의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뺀다면 농민들이 자구책으로 갯벌을 일구어 농토로 바꾸었다.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밀어내고, 돌을 골라내고, 개토를 하기를 몇 번씩, 새벽별 뜰 때 나가 저녁 별 뜰 때까지 어느 농민의 말마따나 “죽을 똥 살 똥” 다 싸면서 농토를 일군 것이다. 손은 갈라지고, 갈라진 손바닥에 피가 고이면서도 리어카 하나 변변히 없는 사정은 번한 것, 그들은 거의 맨 손으로 이 농토를 만들어냈다. 땅만 평평하게 한다고 작물이 자라는 것은 아니어서 보통 갯벌을 일군 땅에다 벼고, 보리고, 콩이고 심으면 마지 제초제를 맞은 것처럼 소금기-간기- 때문에 빨갛게 타들어 가 버린다. 거기에 바닷물은 안 되므로 저 멀리서부터 물을 끌어와야 했지 않겠는가. 그 모든 일에 좌절하지 않고 이 천만 평에 가까운 농토를 일구어냈고, 그 안에 미군기지로 사용하겠다며 강제 토지수용 절차를 밟고 있는 2백 8십만 평의 땅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전국 공통의 과정인데, 기껏 농민들이 버려진 갯벌을 피땀 흘려 개척해 놓고 나니까 땅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왜 남의 땅에 허락도 없이 농사를 짓고 있냐며 당장 땅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급기야는 법의 이름으로 집달관을 앞세워 그 땅을 빼앗았다. 참다못한 농민들의 투쟁으로 가까스로 타협을 이루어 이 들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추리, 도두리 들판에는 유난히 부재지주가 많고, 그러므로 그들은 미련 없이 맨 먼저 국방부에 협의 매수하고 넘겨줄 수 있었고, 이것을 마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협의매수에 응한 것이 대부분인 것처럼 정부에서 선전해대는 것이다.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은 그러기에 더 자부심이 있다. 바다를 메우고 갯벌을 일구어 만들어낸 옥토, 그 들에서 난 식량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고, 자식들 공부시켰다. 전국에서 가장 맛좋은 쌀이 이곳 쌀이라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그러니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의 손은 단단할 수밖에, 그러니 이 농토는 목숨과도 같은 곳이다. 그 땅을 지키겠다는 농민들의 마음은 절절할 밖에. 그곳에서 나고, 그곳에서 땅을 일구고, 그곳에서 늙은 이곳 마을 주민들에게 보상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들이 사람이고, 사람이 들이 되고, 속 쓰린 가슴으로 들의 주인들이 우니 “들이 운다.”
K-6 미군기지에서는 소음이 커진다. 곧 전투기가 이륙하고, 아파치 헬기가 뜨고 내린다. 어느 것 하나 생명을 죽이는 연습이고 훈련이다. 이 아침, 들에서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데, 철조망 너머의 식수탑, 감시탑이 서 있는 미군기지에서는 생명을 빼앗는 죽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 죽음의 소리는 이제 법의 이름으로, 공권력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헌정한 이 들까지 확대될 것이었다. 이곳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이 몸을 던져 막지 않았다면 말이다.

겨우 10여명의 인권활동가들
문인상 앞에서 발길을 돌려 서둘러 마을로 돌아왔다. 그곳까지 걸어갔다 오는 데만도 1시간이 걸렸다. 핸드폰 문자 메시지로 오늘 상황을 알려달라고 쉴 새 없이 물어온다. 서울에서 울산에서 일이 있으면 알려달란다. 어제처럼 오늘도 경찰을 앞세우고 국방부 놈들이 대추분교를 집어먹겠다고 덤벼들 지 모를 일.
어제는 참 아찔했다. 우리는 기껏해야 3백도 안 되는데, 저들은 천명도 넘는다. 거기에 법의 권위를 앞세우고 있지 않은가. 오전 10시 이후부터는 다급한 상황이 이어졌다.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대추분교 정문을 막기로 했다. 대추분교도 이곳 농민들이 한푼 두푼 모으고, 서로의 힘을 모아서 세웠던 학교다. 이곳을 국방부가 현장 사무소로 쓰겠다고 접수하겠다는 것이고, 주민들과 범국민대책위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으니 법원의 인도명령을 받아서 그것을 집행하겠다고 들어오는 것이다. 국가가 지어준 학교가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운 학교인데도 그들은 거침이 없다.
대추분교 정문과 학교 울타리 안쪽으로 트랙터를 비롯한 농기구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연행하면 전원 잡혀가겠다고 집회를 열고 있었다. 대추분교 정문이 뚫리면 그들은 대추리 주민들의 공동체를 지탱해주던 상징적인 장소를 거침없이 짓밟을 것이었다. 인권활동가들은 겨우 15명 정도, 우리는 쇠줄로 엮어놓은 정문 앞에 섰다. 무슨 힘으로 그들을 용역과 경찰을 막겠다는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니까, 연행하면 어쩔 수 없지 하는 심정으로 그 앞에 섰다. 몇은 쇠사슬로 몸을 감고 연좌했다. 전국 152명의 인권활동가 명의로 미군지기 확장 반대 선언을 했다. 얼굴을 서류로 가린 집달관을 앞세우고 용역과 경찰이 몰려왔다. 주민들이 소릴 지르며 항의했지만 주민들도 기세등당한 그들에게 위축이 된 듯 우리와 합류하지 않았다. 오로지 15명 정도 되는 인권활동가들이 정문에서 고립된 채 싸워야 했다.
먼저 한자로 집행이란 글자를 새긴 검은 복장의 집달리들이 나섰다. 주민 대표를 불러달란다. 서류를 보자 했지만, 묵묵부답, 여전히 서류로 얼굴을 가린 집달관으로 눈짓으로 지시한다. 그들은 법원의 결정 내용도, 인도명령서의 내용도 제시하지 않았다. 집달리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비키라고 하고, 비키지 않으니 쇠줄을 자를 심산으로 절단기를 동원한다. 몸으로 막는다. 어떻게 쇠줄의 한 가닥이 잘려 나갔다. 그래도 완강히 버티자 이번에는 경찰이다. 법원의 집행을 가로막는 공무집행 현행범이므로 3차 경고 후에 전원 체포하겠다고 메가폰을 들고 경찰 지휘자가 떠든다. 3차례의 경고가 끝나자 항의하는 우리를 한 사람씩 달려들어 사지를 들어 연행한다. 주위에 있던 주민들이 “네 놈들은 어느 나라 경찰이냐! 미국 놈들 경찰이냐!” 항의했지만 그들은 끄떡없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연행되어 경찰 봉고차에 실렸다. 허탈하다. 이렇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투쟁의 거점이었던 대추분교는 이렇게 짓밟힐 것 같았다. 그런데 1시간여가 지났어도 대추분교 정문은 뚫리지 않았다. 한 인권활동가가 정문을 묶은 쇠사슬 틈새로 팔을 집어넣어 버텼던 것, 저들은 어떻게든 이 활동가를 끌어내려 했다. 절단기를 동원해 정문의 철망을 뜯어냈지만, 결국은 그 활동가를 떼어내지 못했다. 문정현 신부가 정문 안에서 그 활동가와 손을 맞잡고 버텼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떨구고 하염없이 울어야 했다. 여기가 어딘데 저놈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팔은 피가 통하지 않아 저려오고, 팔의 통증도 이곳만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는 일념 앞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전국의 동영상으로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이들도 울었다.
그 완강한 저항 앞에 저들은 물러났고, 연행되었던 19명의 인권활동가-그중에는 한겨레신문 기자도 있었다.-들은 한 시간여 만에 풀려났다. 현행범으로 체포한다고 호기 있게 덤비더니 격리 차원이었다나.

주민들이 누워 버리다
오후에 경찰은 정문 앞에 1001 기동대를 깔아놓더니 이번에는 논을 가로질러 학교 측면으로 두 차례나 공격해 왔다.
그렇지만 상황은 오전과는 딴판이었다. 인권활동가들이 지키던 정문 앞에는 동네 아주머니들-나이로야 할머니들이지만-이 먼저 주저앉았다. 우리가 세운 학굔데 우리가 지킨다, 저놈들은 자격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세금은 꼬박꼬박 걷어가고, 해준 게 뭐야, 백성 지키라고 경찰도 있고, 군대도 있는 거지, 백성 죽이라고 있는 거냐, 미국 놈들 앞잡이 노릇 그만해라, 아주머니들은 경찰들 앞에서 당당하게 주장했다.
인권활동가들 모두는 쇠사슬로 몸을 묶었다. 오전 투쟁의 승리가 있었으므로 결의는 드높았다. 인권활동가들은 그렇게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묶었고, 주민들과는 절절한 마음으로 서로를 묶었다. 오전에는 떨어졌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논을 가로질러 학교 측면을 경찰들이 공격하자 아주머니들이 길바닥에 누워버렸다. 나를 밟고 가라, 나를 죽이고 가라, 이놈들아 미국 놈들 전쟁기지 맹글어 줄라꼬 이 땅을 뺐냐, 이 날강도 같은 놈들아. 어떤 이는 야단을 치고, 항의하던 끝에 겨워서 울기도 하고, 그렇게 서로 스크럼을 짜고 드러누워 버렸다. 경기남부의 노동자들, 학생들, 단체 회원들이 그들과 함께 했다. 차마 그들을 짓밟고 넘어서지는 못했던지 그들은 해가 지기도 전에 논길을 따라 철수했다.
그렇게 3월 6일 행정대집행 첫날을 이겨냈던 것이다. 선도투쟁으로 기꺼이 연행되고, 끝내 정문에서 팔을 낀 채로 저항했던 인권활동가들의 인기가 높아졌다. 촛불집회장은 승리감으로 넘실댔다. 자신감과 일체감이 절로 느껴지는 밤이었다.

전망 좋은 집을 수리하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3월 7일에는 저들의 공격이 없었다. 절반 정도는 멤버가 교체되어 다시 10여명이 되어 버린 인권활동가들은 인권단체 공동의 집을 수리하기로 했다. 대추리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2층 집이었다.
대추리 마을에는 지난 해 하반기 들면서부터 빈 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상금 받고 떠나는 집들이 늘자 남은 주민들도 마음이 산란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필시 국방부 사람들이 시켜서 한 짓인지는 몰라도 나가면서 집을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살 생각도 못하게 엄처 파괴한다. 수도도 끊기고 전기도 끊고, 보일러도 파괴하고, 유리창은 유리창대로, 문은 문대로 파괴된 2층 집. 꽤나 돈 들여서 집은 집이었지만 바닥에는 깨진 유리가 즐비하고, 여기저기 가재도구가 널려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엄두가 나지 않던 집이었다.
우리는 1층은 포기하고, 2층만 수리해서 쓰기로 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치우기 시작하니까 어느새 집 꼴이 돌아왔다. 감탄할 지경이었다. 가구를 옮기고, 쓰레기를 분리 처리하고, 문짝을 떼다 달고, 옆집에서 물을 끌어다 청소를 했다. 전기가 연결되어 2층에 불이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팔짝팔짝 뛰었다. 그날 연장을 구하랴, 아메리카 타운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날라 오랴, 노인정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허락도 없이 끌어다가는 엄청 타고 돌아다녔다. 거기에 흰 모자까지 눌러쓰니까 동네 이장이라고 깔깔대고 웃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두 먼지를 뒤집어쓰고 빈집 수리를 하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서 와서 밥 먹으라고 독촉이다. 밥 떨어진다고, 밥 먹고 하라고 일부터 와서 손을 잡아끈다.
결국 그날 집수리는 완전히 끝맺지는 못했다. 수도를 연결하고, 외부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 문을 달아야 하는 일이 남았지만, 대체로 성공적으로 우리는 일을 끝냈다, 위대한 협동의 힘을 보인 하루였다. 저들이 파괴한 그 폐허 위에 우리는 생활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곳 농민들이 올해도 농사짓자며 일상의 생활을 계속 하는 것으로 저항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 폐허 위에 공동체의 일상생활을 건설할 것이었다. 저들은 늘 파괴하고, 철조망으로 분리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의 저항은 삶과 연결되는 저항이다.

우리는 저항한다.
그 이틀 동안의 투쟁에서 우리는 위태로운 상태지만 헌법적 가치인 평화적 생존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저 생명의 땅이 미군의 세계침략지기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 이곳을 지키는 것은 농민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일이고, 세계평화를 지키는 일이다.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기초한 미군 재배치 계획을 저지하고, 파탄시키는 일이다.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미국이 이곳 평택에서 그 침략 야욕의 꼬리를 내려야 하고, 그래서 결국은 미군이 철수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물러설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국가는 국가라야 국가로 인정받는다. 백성의 생명, 평화를 지켜주어야 할 의무를 국가는 지고 있다. 국가의 목적은 인권이다. 그 목적을 위해 국가는 국민들로부터 대표성을 위임받는다. 이 논리는 불온한 사상이 아니라, 이 나라의 정상배들이 그토록 입에 달고 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이고 원칙이다. 만약 국가가 그 목적을 등지고 국민을 억압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법이 법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그 권력을 변경하는 것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정부는, 그 국가는 뒤집어야 하고, 권력을 변경해야 한다. 그것이 이 나라 정치가들은 입에도 담지 않는 저항권의 원리다. 이 저항권의 원리는 자유민주주의 인권관의 근간이 되는 로크란 사람이 말이다. 어느 사회주의자의 말이 아니다.
지금 평택 대추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스스로 저항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회가 미군에게 평택 땅을 미군기지로 넘겨주는 법을 만들었고, 정부는 그 법을 집행한다. 주민들의 말마따나 지금까지 해준 것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고, 오로지 고통만 선사했던 그 국가가 급기야 삼권분립의 한 축인 법원마저 야간과 휴일에도 집행이 가능한 행정대집행을 허가한다.
내 나라의 백성들이 피땀 흘려 일군 땅을 그 땅의 주인인 농민들의 동의도 얻지 못한 채 법과 공권력으로 빼앗으려 한다. 가진 자에게는 철저하게 보장해주는 사유재산제 원칙도 여기서는 예외다. 왜? 이들 농민들은 힘도, 돈도 없으므로, 무시해도 되는 상대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본다. 인권과 평화의 꿈으로 일어나는 주민들, 이제 그들은 쉽게 통치되는 백성이 아니다. 법을 무서워하고 공권력을 두려워 떠는 무지랭이가 아니다. 그들은 삶 속에서 세계의 군사적 패권을 향하는 미국의 군사전략을 간파한다. 그들은 저 빈들을 논갈이하고 그곳에 벼를 심어 전국에서 가장 맛난 쌀을 생산하면서 미국에는 한없이 아부하는 집권자들의 간특한 속임수를 정확히 분석한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있다. 이번 대추리에서 지낸 이틀은 우리가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줬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저항의 땅, 그래서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인권적 가치를 지키는 그 일, 그 저항의 길에 분명히 선다. 인권의 원칙을 거스리는 국가를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꼭두각시 춤이나 추는 대한민국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와 국회와 사법부에 저항한다. 그것이 정의이므로, 그것이 인권이므로.

다시 대추리에 가면 미군기지 위로 붉은 해가 뜨고 지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지는 그 너른 들에 꼭 설 것이다. 그 들 앞에 서서 그 들이 우는 사연을 생각할 것이다. 그 들과 더불어 그 들의 주인인 그 곳 농민들과 함께 할 것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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