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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4/06
    해독을 하려면
  2. 2012/03/30
    식보가 약보라며 먹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은
  3. 2012/03/26
    쟁기가 변해서
  4. 2012/03/17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5. 2012/03/12
    감사합니다
  6. 2012/03/09
    내일은
  7. 2012/03/03
    지구를 움직이는 신나는 등배운동
  8. 2012/02/26
    당신 같은 친구가 있기에
  9. 2012/02/25
    피부가 살아야
  10. 2012/02/21
    명진

해독을 하려면

8시간 동안 먹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8시간의 소화과정을 거친다.  위장에서 탄수화물은 30분, 단백질 1시간, 지방은 3시간 정도, 소장에서 3~4시간의 흡수과정을 거치며 대장에서 16~24시간의 여행을 통해 배변이 된다.   어제 아침 먹은 것은 오늘 아침에 밖으로 나와 줘야 성공한 것이다.   이때 우리 신체는 한 번에 한 가지일 만 할 수 있다.   소화할 때는 소화만, 배설할 때는 배설만 한다.   소화가 모두 끝난 후 그때야 비로서 그날 먹은 것에 대한 해독을 개시하고 수개월, 수년 동안 시간이 없어 쌓아둔 쓰레기를 치우는데 관심을 돌린다.   쌓인 독소를 조직에서 순환계로 배출시키라는 신호가 켜진다.

 

밥을 먹고 8시간 정도 지나야 우리 몸은 해독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현대인들의 몸속 깊숙한 곳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하려면 최소 약 4시간이 더 필요하다.   결국 식사 후 12시간이 지나야 충분한 해독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간식 먹고 음료수 마시고 야식하면 해독 시간이 없다.   결국 몸에 좋다고 자주, 많이 먹는 것이 도리어 나를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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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보가 약보라며 먹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들 말을 합니다.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유지에 호흡을 하는 것과 함께 필수적인 요인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소중하다는 먹거리를 어떤 자세로 맞이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는, 단순히 내 몸에 무엇이 좋은가 많을 천착하는 이기적인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는 차치하더라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음식을 대할 것인가를 불교의식의 한 예를 들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가 지은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나의 몸을 지켜주는 약으로 알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이 음식을 먹습니다' 라고 생각하며 먹는다면...  기분이 좋지 않거나 마음이 편치않을 때 음식을 먹고 소화장애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심 불이' ,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먹거리의 오염이 극심한 시절인연입니다.  먹는 마음자세만이라도 바꾸어서 식보가 약보가 되도록 변화를 시도해 보심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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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가 변해서

경운기가 대중화된 것이 박통시절이었지요.  해서 우리는 쟁기가 우리의 전통농기계로 착각하며 논갈고 밭가는 것이 마치 우리의 전통농법으로 알고 있었지요.  인력이 부족한 지금, 경운기 없는 농사를 상상할 수 없는 세태입니다.  농사는 땅을 파 일궈야 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토양이 땅을 파지 않으면 농사에 부적절한 화산지대인 것과 달리, 우리의 땅에서 논갈고 밭가는 농법은 임진왜란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권장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지렁이는 항상 땅을 갈았습니다.  자신의 배설물로 미생물을 살찌게 했고 땅속을 파고다니며 산소공급을 담당했습니다.  농사에 이보다 더 중요한 작업이 무엇인가요?  인간의 먹거리를 위해 지렁이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생명이 과연 있을까요?

 

지금 화학농법 일변도인 우리 농촌의 전답에서 지렁이를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렁이에게 비료는 독약이지요.  농약으로 범벅인 우리의 농촌,  지렁이가 살아 움직이며 신토불이를 일궈내는 그날을 다함께 만들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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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이것이 모든 창조의 시작이자 내 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마음엔 집착을 몸속엔 숙변을 제거할 때 건강이 나를 반길 것이다.  특히 음식문화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는 것이 마음을 맑히는가 보다는 혀의 취향과 포만감을 즐기기에 급급했던 우리의 모습 아니었던가?   편식과 과식은 우리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두 내것이란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가?  주먹만한 위장에다가 그 몇배를 집어넣고도 오장육부가 편안하길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음식도 채워서 쌓이면 부패하고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할 수 밖엔...   비우고 또 비워야 한다.  몸과 마음의 비움을 통해 여유로움과 새로운 가능성으로 자신을 채워보자.

 

숙변이란 묵은변, 오래된 대장벽의 유착물, 찌꺼기등으로 표현가능하다.  즉 숙변은 하수도의 관이 녹슬어 관벽에 이물질이 붙어 있는 것과 같이 대장에 변이 정체된 것을 말한다.  육식과 지방질 과다의 식사는 장에 자극을 주고 배출을 어렵게 한다.  대장이 늘어지고 부풀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여 변이 정체된다. 찌꺼기가 쌓여 부패하고 거기서 나오는 독소로 인하여 신경이 마비된다.  숙변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숙변제거에 탁월한 서해안갯벌의 함초는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한 보배다.  텅빈 충만의 진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찌울 것이다.

 

'음식공급이 중단되면 배고품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숨겨진 놀라운 기능이 작동하게 되는데 간에 쌓인 노폐물과 독소가 제거되고 피하지방이 소모되며 근육의 일부도 감소한다.  그러나 심장, 혈액, 뇌신경은 놀랍게도 정상적으로 유지된다.  단식은 몸을 정화시키고 조직을 개선하며 독소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능을 한다.'  노벨의학상 수상자 Dr. Alexis carrel

 

生命과 生死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생은 어디에서 왔으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생이란 한조각 구름이 뜬 것과 같고 죽음은 그 한조각의 구름이 없어진 것과 같다.  일어난 구름 스스로는 본래 실다움이 없다.  生死도 이와 같다. 구름이 일어나고 없어짐에 따라 물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연에 의해 수증기로, 얼음으로, 물방울로 변해갈 뿐이다. 

 

생명에는 두가지 필수조건이 있다. 대사능력과 복제능력이 그것이다. 대사능력이란 생존을 위한 에너지의 생산과 회전을 말하고 복제능력이란 종족번식을 위한 생산능력을 말한다. 생명이란 결국 어떤 원소들이 어떻게 만나 어떻게 서로 반응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일종의 상태이며 현상인 것이다. 늙고 병든다는 것은 생명현상의 시스템이 변화하는 것이다.

 

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하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역시 변화의 과정중 사망이라는 절차를 경유, 본질인 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다양한 원소로 구성된 물질이다. 프로판에 불을 붙이면 연소한다.  그러나 불이 있다고 타는 것은 아니다.  연소한다는 것은 프로판과 산소가 결합한다는 뜻이다.  프로판분자를 구성하는 탄소와 수소는 연소의 과정을 거쳐 이산화탄소와 수중기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생노병사라는 과정을 거쳐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에너지의 운동과 변화의 모습일 뿐이다.

 

인간의 체질이나 성격형성은 유전자의 기능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수정된 세포는 분열(성장)과정의 정보와 영양상태에 의해서 결정된다.  난자와 정자, 그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하고 또한 인식과 의식도 새롭게 시작된다. 태아는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  부모들의 감정과 주변환경은 태아들의 유전자에 정보를 전달하고 성격을 형성한다. 어머니의 감정 즉 공포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즐거움같은 감정은 유전자에 정보로 작용하고 잠재의식에 기억되어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자궁속의 태아는 산모로부터 전달되는 영양분, 산소, 호르몬등 생리학적 조건에 적응하기위해 태아의 조절시스템을 미세하게 변조하게되며 이렇게 결정된 태아의 삶의 질서가 프로그램되어 성인이된 뒤 건강을 지배한다.  태교가 태아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환경은 정보를 유발시키고 유전자는 정보에 반응하며 마음을 만들고 마음은 행동을 만든다. 그리고 행동은 다시 환경을 만든다.  좋은 환경은 좋은 정보를 유발하고 좋은 정보는 좋은 기억을 저장하고 좋은 정보와 좋은 기억은 좋은 마음으로 반응한다.  내적정보란 유전자의 기존기능과 뇌세포에 기억되어 있는 정보를 말한다.  그리고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접촉의 오감을 통하여 들어온 새로운 정보를 외적정보라 한다.  이러한 내외 정보가 상호작용하여 정신 또는 마음이라는 반응현상을 유발시킨다.  상생호발의 시스템인 것이다.  건강한 삶이 영위되기 위해선 출생과정의 정성스러움, 그리고 출생이후 오감을 통한 좋은 정보를 끊임없이 유전자에 입력시켜야 한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나듯.  나의 미래는 내가 만드는 것.  운명이니 숙명이니 누구의 뜻이니...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양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본질적으로 에너지라는 동질성이다.  우주는 극미세계에서 거시세계인 거대우주에 이르기까지 알고리즘으로 짜여진 치밀한 시스템이다.  단세포 생명체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가 개체이면서, 全一性인 우주의 한 부분이다.

 

한개의 유전자에 생명의 전체비밀이 온전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다.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 다르지 않다(不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벌레나 인간이나 동일형이다.   인간은 '인간만이 인식하고 사고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빠져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질이 있다.  원자는 핵과 전자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100여가지의 원자가 된다.  생체를 구성하는 물질 즉 바이러스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 구성물질은 모두가 같다.  핵산과 단백질, 그리고 당질과 지방을 생체를 구성하는 4대물질이라 한다.  모든 생명의 구성물질이 같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본질은 결코 하나(不二)라는 것이다.  온 곳도 돌아가야 할 곳도... 이것은 모든 생명이 하나의 생명체로부터 진화되어 현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찌 분별심으로 시기, 질투, 증오한단 말인가?   풀 한포기, 개미 한마리까지도 나의 또다른 모습일진데...

 

인간은 눈과 귀 그리고 맛과 냄새와 촉감으로 들어온 정보에 의한 경험을 통하여 의식하고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감으로 인지되지 않은 바깥세계를 알 수도 없고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현상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을 알기엔 절대부족인 오감의 능력에 의존해 시비, 선악, 증애의 놀음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미완성인 현대물리학의 성과조차 우리의 삶에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원자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본질이란 에너지의 다른 모습이다.  쿼크의 수준으로 내려가면 물질은 그 본색인 파동과 물질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원자란 화학적 방법으로는 더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기본입자인데 그것의 크기가 운동장만하다면 원자핵은 골프공정도이며 전자의 크기는 무시해도 좋을만큼 작다.  전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돌고 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미시세계에서는 물질은 없다.  결국 모양이 있는 모든 존재의 본질은 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이것이 현대과학에 의해 밝혀진 물질의 본질이자 존재의 실상임에도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온갖 것에 집착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하고 화내고, 그래서 우리의 삶을 스스로 황폐화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중도(中道)는 중간(中間) 또는 중용(中庸)이 아니다.  중도는 시비선악등과 같은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이다.  이것은 평면적인 절충점으로서의 중간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양극단, 또는 대립되는 상대적 위치에 얽매이지 않고 존재의 본질이 공(空)임을 인식, 어느것에도 끄달리지 않으며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임이 입증되었으니 이것 역시 중도의 한 원리이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과오만 생각하는 자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시비가 그칠 날이 없어 고달픈 삶을 살아간다.  어떤 사람이 미워서 용서할 수 없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좌지우지 당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은 상대방이 아니고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속에 인생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내고 그래서 이성적 판단을 놓치지는 않는지, 어려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의 생존에 필수인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는지 등등... 이야말로 용서해선 안될 일이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갈등과 괴로움이 따른다.  미움과 원망, 증오의 마음을 느낄 때는 그럴만한 과거의 기억과 그에 대한 집착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다.   과거에 얽매이는 집착심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까지 증오와 원망을 그대로 가져와 현재에 투사하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은 결코 두번다시 올 수 없는 과거와는 전혀 새로운 온전한 '지금 여기'의 현실일 뿐, 과거에 얽매인 기억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지금 여기'를 순간순간 온전히 살아 갈 수 있게 된다.   과거는 흘러가서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없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얽매이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쉴 수 있어야 상대를 치우침없는 바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고 그랬을때 미움과 사랑이 투사된 대상이 아닌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 원망스런 마음과 미운마음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마음이 근본이 되어 앞으로 펼쳐질 나의 미래는 원망스럽고 증오로 가득찬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늘 새로움의 '지금 여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미래의 밝은 내 모습일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는 '미운사람', '좋은사람'이 아닌 그저 지금 이 순간 전혀 '새로운 사람'일 뿐이라고 느껴야 한다.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좋은 사람이라는 수식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대상을 좋다고 분별해버리면 이미 좋고, 싫은 상대적 마음의 굴레에 나를 가두고 미움의 싹을 남겨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 깊이 살피고 또 살피어 존재의 본질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날마다 좋은 날을 이룰 것이다.

 

더불어 삶은 교만속의 돌봄이나 차별속의 도움이 아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不二의 자세를 실천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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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제 딸 혼례에 보내주신 정성 잊지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일진 김명희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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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제 딸 김기정이 짝짓기 하는 날입니다.  13시 사당역  6번출구 서울시 교통문화교육원, 두사람의 힘찬 출발을 축하해주세요.  일진 김명희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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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움직이는 신나는 등배운동

 모든 운동과 요법이란 정확하게 실천할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것을 요법이나 운동에서 실감한다.   동작 하나하나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곳이 없으니 오랫동안 실천하셨던 분들도 부족한 점이 있다.

 

등배운동만 하더라도 척추가 앞뒤로 굽어져있는 경우는 좌우로 흔들어도 배가 쏙 앞으로 구부러진다.   이럴 때는 지구축을 움직인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하면 척추가 바로 펴진다.

 

또한 어떤 분은 좌우로 흔드는데 꺽쇠처럼 꺽어지며 각도가 맞지 않는다.   그럴 때는 머리위에 달이 있다라고 생각하며 흔들어주시라.   그런데 오랫동안 하다보면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지구에 올라탓다는 생각으로, 좌우로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맞춰주면 쉽게 할 수 있다.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지구를 움직여준다?   자연과 하나되는 정말 신나고 멋지지 않는가?

 

누워서 발과 손을 들고 흔들어 주는 모관운동, 혈액순환은 물론 소화기계에 탁월한 운동이지요.  열심히 해서 모두가 건강을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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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같은 친구가 있기에

내가 축복받은 사람이라 느끼게 하는 수많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인생엔 행복한 날도 우울한 날도 있으나  내게 허락된 축복 가운데
최고의 기쁨은 바로  당신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죠.
 
 
삶이 힘겨운 친구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저 부탁만 해. 내가 함께 헤쳐가게 도와줄테니.”  당신은 내가 부탁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묵묵히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인생을 돌아볼 때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이라 장담하는 한 가지.
바로 당신이란 친구를 알게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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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살아야

원주민들은 아직도 나체지만, 지구상 존재하는 어느 동물도 속옷을 입거나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냉난방 장치와 두꺼운 옷을 입는다.   피부염과 아토피도 불결함이 원인이라고 매일 계면활성제의 세제로 피부를 씻으며 혹사시킨다.   인간은 피부를 통해 자연과 접점하며 산다는 것을 상기해야하고 피부를 쉬게해야 한다.   자연과 접점 부위 피부를 외부와 자주 노출시켜야 건강해진다.   몸에 페인트칠을 해보시라, 피부를 통한 호흡은 중지되고 심한 경우 사망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화장품 오남용의 심각성은  모두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생긴대로,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화장은 결국 모공을 메움으로 표면을 매끈하게 하는 기능의 충족조차 검토해야 할 사안임에도 현실은 모두가 영화배우라도 될 양인 것 처럼 마구 변신을 향해 달리고 있다.  자신의 건강을 담보로 어줍잖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겠다니, 내실보다 형식을 탐하는 세태가 아쉽다.  사실 모공을 좁혀서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싶다면 비싸고 해로운 화장품 대신 세면이나 목욕시 마무리를 찬 물로 처리하므로 얼굴이나 몸통의 피부를 수축시켜서 상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피부는 배설시키는 가장 큰 기관이다. 적당한 배설을 못하면 간장, 폐, 장, 신장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노폐물 배설기관 중 어느 하나가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기관들이 떠맡아야하고 그 기관들은 추가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침에 피곤하고 추위도 더위도 잘 참지 못하고 근기도 부족하다면 나의 피부관리는 어떤가를 한번쯤 되돌아 보자. 그 첫째 단추는 피부에서 시작한다.   풍욕과 냉온욕은 못할망정 피부가 신선한 공기를 접할 수 있는 나름의 환경 조성과 건강법을 실천해야 한다.

 

오늘 사우나에서 드라이기로 머리와 거시기를 말리는,  '두한족열'에 절대 반하는 이웃을 보고는 답답했다.  더우기 사우나에 비치된 크림으로 몸 전체를 쳐바르는 분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  머리와 남자의 거시기를 따뜻하게 하는 것은 뇌세포나 정자의 생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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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내가 영문학 비평과 이론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근대성의 이분법과 후기근대성 혹은 말기근대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상대성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주의다,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는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의 근대성이나 후기근대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게 익숙해져서  “모든 사물을 유무의 상으로 보도록 익혀온”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근대성이나 후기근대성에서 벗어나는 길을 탈근대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명진 스님은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 등등의 모든 이분법과 상대성에서 벗어난 진정한 탈근대인이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접어드는 역사적 길목에서 일제식민지를 경험한 우리가 선진국과 후진국,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이분법이나 상대성에서 벗어나는 근대에서 탈근대의 시대로 접어드는 역사적 길목에서 진정한 탈근대인,  명진 스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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