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from 영화에 대해 2004/02/23 21:46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중에서

도식적으로 이 영화를 해석한다면,

주인공 원상이 사랑하는 배종옥 분의 두 여성은 그가 쫓는 이상이다.
그도 순수하게 이상을 쫓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현실에서 권력에 무릎꿇고 그를 배신하며
한 번 배신당한 이상, 그는 그의 이상을 쫓아갈 생각이 없다.
그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놈이다.

권력은 역겹지만 아름답다. 단순 명쾌하다.
노동자 계급은 안스럽지만 구질구질하고 복잡하다.
그들과는 살 수 없다.
공부도 많이 했는데, 그들과 살기 위해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내 이상을 위해서 공부한 건데, 그 이상이 권력 없이는 못 산댄다.
권력을 사랑한댄다.
공부를 했다한들 뭐 인생이 역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권력과 함께 살아갈 수는 있게 되었다.

권력은 쉽게 이야기한다.
'노동자 계급을 사랑해? 아니잖아. 그쪽에서 불편하면 이쪽으로 와서 나랑 살아.'

내 이상이 권력에 놀아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이미 한번 권력에 놀아난 이상, 사실은 이쪽에서 버리고 싶었던 이상이었다.
순수한 이상은 버리리라.
이상이 권력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버리고
권력에게 가리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이 영화와 비교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시선이라는 단어가 두 영화를 이어줄 수 있을까?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집요한 시선이 스스로에 대한 처벌처럼 느껴지는 반면,
박찬옥 감독의 이 영화는 그야말로 담담하며 타인에 대한 냉정한 관찰로 느껴진다.
주인공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홍상수 감독의 시선은 주인공 내면을 잘 이해하고 있고 공감하거나 괴로워하고 있지만
박찬옥 감독의 시선은 주인공을 약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왜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박찬옥 감독이 여성이기 때문에 홍상수 감독과 다르다는데 한 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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