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라고 스스로를 이름짓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텍스트에 빠져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진보블로그에 올라온 글들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텍스트를 맹신하는가 혹은
남들이 다 읽은 텍스트를 읽지 못할까봐 안달인가, 혹은 텍스트에서 답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에 대해 강박증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은밀하게 '텍스트의 즐거움'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순수한'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파의 것이어서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옳은 것과 옳지않은 것, 좌파와 우파)
그들은 모든 텍스트에서 '좌파적 상상력'이라는 불가능한 장치로
(좌파적 상상력이란 불가능하다. 좌파적인 것은 언제나 정치적인 것이어서
그 어떤 상상도 좌파적 강령에 의거하므로 그것든 결코 상상력일 수가 없다.)
텍스트에서 도덕적 근거들을 걸러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여송연을 피웠듯이,
그들은 그런 텍스트의 여과과정에서 나오는 불순물들을
오히려 즐기고 있으며
어쩌면 그들 대다수는 민중들보다 더 많이 즐길 기회를 가지고 있다.
한편, 과연 '순수한'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파의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좌파가 '중성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파의 손에 들어가버렸을 뿐이다.
[즐거움은 오성과 감성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표류이자 동시에 혁명적이며 비사회적인 그 무엇으로 어떤 집단이나 심적 상태, 개인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중성적인 그 무엇? 텍스트의 즐거움이 파렴치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우파 중에서 -]
최근 좌파들은 그 즐거움의 거대한 힘을 발견하고
그 즐거움을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권력을 가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보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문학적인 어떤 텍스트도 정치적일 수 없다.
정치적이게 되는 순간 문학적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음... 보니까 개토님은 좀 분석 기능이 되는 거 같아요. 난 사실 상황이나 텍스트가 분석이 안 되고 막연히 불안하고 불편함. 그래요, '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비굴해서 거부당하기 싫고 적이 되기 싫고 그래요-_-; 근데 암튼 우리만 심각한 거 같기도 하고 정말 그래요 :)
어쨌든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어 보는 거죠. 달리 갈데도 없고...^^
마티스 생전, 3차례 중요한 전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그 시기 그는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기도 했지만. 마티스는 집단아닌 ‘개인’으로써 살고 작업하였다. 그가 당시에 작업한 그림들, 댄스, 붉은 실내, 블루누드는 지금 세계대전 이상으로 중요해졌다-프랑소와 트뤼포가 자신의 정치적 액션의 부재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트뤼포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부의 검열반대 서명에도 앞장서지 않았고 사르트르와 같은 지식인과 예술인이 주축이 된 모든 정치적인 집단행동에 동참하지도, 심지어 -손안대고 코푸는 명예를 얻을수도 있는-간단한 서명조차도 거부하였다. 한반도에서라면 참으로 깐깐, 쪼잔해보이기 쉬운 이 인간은 항상 개인으로써의 자신의 어떤 부분이 변질됨을 두려워하였다. 어엿하게 프랑스에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호기심에서라도 만날법한 자신의 생부가 죽기전에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자함은 그의 쪼잔함이 아니라 장정일 왈 "그 어떤인간보다'개인'인 예술가", 그리고 개토님말을 빌자면 "정치적이게 되는 순간 문학적일 수 없게 되버리는" 것을 일평생 경계한 그들의 눈물나는 이성적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