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의 암소

from 책에 대해 2007/01/23 15:41

그 문학은 사드, 아르토, 루셀, 초현실주의, 카프카, 바타이유, 블랑쇼로 이어지는 체험의 자리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육제적 죽음과 언어의 죽음을 동시에 맛본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남아있는 것은 글쓰기의 모험뿐이다.

p 151

 

자기 소모적인 글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네르발은 계속 글을 썼으나 완성된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것이 그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p 152

 

사유하는 주체 대신 사유의 사유를 대상으로 삼으면, 진/위와 관계 없는 사유, 통일성이 없는 사유, 그러면서도 사유라는 점에서는 통일성이 있는 사유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사유라는 주제 체계 속에서는 누가 말하든 관계없다(베케트), 혹은 무엇을 말하든 관계없다. 사유란 "모든 체계 내에서 그것을 벗어나는 움직임" 자체이다. ............그 사유야말로 자신의 본질을 찾아 ?g황하는 시대의 문학,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시대의 문학이라는 블랑쇼적 문학, 아니 문학적 체험의 본질 그 자체이다................................. 문학도 "글쓰는 주체로서 자신에게 말을 하여, 자신을 태어나게 한 움직임 속에서 온갖 문학의 본질을 다시 파악하려 애쓰는" 문학만이 그의 주의를 끌며, 철학도 "무한한 지평 위에 놓인 끝없는 작업"으로서의 철학만이 그의 주의를 끈다. 자신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는 사유야말로 모든 전도. 전복의 기본 원리이다.

 

체계에서의 벗어남은 지배적 규칙, 법칙에서의 벗어남이며, 그런 의미에서 지배적 권력에서의 벗어남이다. 사유의 사유는 체계에서의 벗어남이며, 권력에서의 벗어남이다. 그것은 역으로 모든 사유는 체계에 의해 권력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뜻한다.

 

 

 

 

권력이 담론을 조정하는 것은, 그것이 권력을 행사할 위험을 제거하고 그것 때문에 뜻하지 아니한 사건들이 생기는 것을 막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권력이 담론을 규제하는 절차는 대개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세번째 부류는 말을 하는 주체에 대한 제한이다. 담론의 보존, 생산, 분배의 법칙을 고수하는 담화회(한국의 예를 들자면, 판소리 전수회), 말하는 주체를 예속시키고 그들을 모아 집단을 이루게 하는 주의, 주장(계속 한국의 예를 들자면, 운동권의 주의, 주장), 교육 등이 그 예들이다.

 

p154~155

 

 

 

"오늘날의 글쓰기는 표현의 주제를 뛰어넘었다." 그것은 내용에 따라서라기보다는 시니피앙의 본질에 따라 놓여진 기호의 놀이이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자꾸 위반하고 넘으려 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행위의 과시가 아니라, 저자 대신에 시니피앙들이 솟아오르는 공간의 획득이다. 저자는 사라져가고 기호들의 놀이는 심해진다. 그러니 글쓰기는 당연히 저자의 죽음과 연결된다.

 

 

그런데 현대에서 작가의 삶은 작품 속에 들어가 불멸성의 근거가 되는 대신, 작품을 쓰면서 희생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글쓰기에는 개인성이 제외되고, 개인은 노동하다 죽는 누군가가 된다.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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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5:41 2007/01/23 1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