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시간도 없이 살고 있지만,
그의 영화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폭력의 진실성]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이 영화의 제목은 [피도 눈물도 없이].

일찌기 저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에서 모든 마초들을 헤모글로빈 저수지에 익사시키고
단 한 놈의 마초만 놓아주었더랬는데...

여기 그가 돌아와 다른 마초를 모두 죽이고 자신도 익사하다.

마돈나와 여급의 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첫번째 씬을 제외하고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영화에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
[피도 눈물도 없이]의 주인공이 두 여자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저수지의 개들은 마돈나와 여급에 대해서 100% 무지하다.
그들의 대화에서 여성에 대한 이해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타란티노는 이 씬에서 왜, 저수지의 개들에게 마돈나와 여급을 이야기하게 했을까?
생존을 위한 폭력에서 쾌락을 위한 것으로 진화한 폭력까지 남김없이 보여주면서
경제적 의리로 뭉친 남성 사회가 정의의 배신으로 붕괴하는 과정을 표현한 저수지의 개들.

여성에 대한 이해 없는 남성 사회의 붕괴를 예언하신 타란티노 님의 뒤를 이어
류승완은 쾌락을 위한 것으로 진화한 줄 알았던 폭력이 다시 생존을 위한 폭력으로 퇴화된
우리 사회를 보여주면서 모든 마초를 스스로 죽게 하시고
아무 생각없는 우리 청소년(과연 그들도 마초가 될 것인가)과 멋진 여자들에게 세계를 넘기시다.

누구도 자본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돈가방은 내것이 되지 않는다.
문화를 이야기하고 삶의 여유를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가 쾌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결국 돈가방이었던 거야.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는데, 왜 사람을 죽이려고 해요?"
구조조정에 정리해고된 '독불'은 자본에게 외친다.

더러운 꼴 다보고도 빈대처럼 남자한테 붙어살던 여성도
남자처럼 살아보려고 있는 폼 없는 폼 다잡던 여성도
사실은 남자따위 필요없어.
내가 불쌍해서 살아줬지 필요해서 살아준줄 알아?

"수진아, 내가 그렇게 싫니?"
'독불'은 그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나선 여성들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성질급한 그의 뒷세대가 뭐 대단할 것도 없는 기술로 그를 치어 죽인다.

영화속의 폭력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하고 너무 폭력적인" 그 영화는 그 보다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인간의 시선으로 똑바로 쳐다본다.
"이봐, 잔인하다고? 니네가 더 무서워."

마지막으로 감독을 칭찬해주고 싶은 한 가지는,
그가 이 영화에서 여성을 전혀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아름다운 여성만들기, 섹시한 여성 만들기보다
그녀만의 성격, 그녀만의 표정을 보여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렇게 내맘대로 해석해도 되냐고? 내 맘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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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7 12:29 2002/03/07 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