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from 2002/07/29 19:29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무겁고 깊은, 땅속같은 잠은 어디론가 가라앉아버렸고
기분나쁘게 둔중한 느낌이 머리를 중심으로 온 몸에 남아있었다.
게다가 목 안에는 가는 쇠가루가 뭉쳐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침을 삼켜도 쇠가루 뭉치같은 그 느낌은 개운하게 넘어가지 않고
끈적한 가래만 조금씩 올라올 뿐이었다.
너무 더웠다.

어제 너무 고생을 한 덕분이다.
지하3층과 옥상에서 벌어진 2개의 행사를 번갈아 가며 치뤄야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었다.
위아래로 몇번을 왔다갔다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일요일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도 고치러 오는 사람이 없다.
행사에 온 사람들은 좀 투덜대긴 했지만 또 뭐 엘리베이터를 고치게 할 만큼 분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번씩만 오가면 되는 거니까.

밖에 나가 점심을 사먹고 집에 들어오니 다시 잠이 올 듯했지만
지독한 더위에 잡념이 합세해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선잠이 든 상태로 누워있었다.
이렇게 남의 일을 뒤치닥꺼리나 해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번 달 월급을 받아서 일단 자금을 투자하면
쉽게 돈을 벌만한 장사가 떠오른 것이다.
조금씩 생각을 구체화 시켜가면서 이생각 저생각 하던 중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주인은 자주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리곤 해서
집 주인인 줄 알고 생각보다 무겁게 감긴 눈을 비벼대며
문에 다가가 의례적으로 '누구세요?'하고 물었다.
바깥에선 집주인 혼자가 아니거나 혹은 아예 집주인이 아닌듯 두세명의 목소리가 소곤대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네인데 계단에서 넘어졌어. 잠시 좀 들어가서 물좀 얻어먹으면 안될까?'
이거야 원, 안봐도 비디오였다.
분명 방문판매이거나 선교하러 다니는 신자일 것이다.
'지금 바빠요. 다른 집에 가봐요.'하는 순간 우리집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 뭐 잠자던 모양인데, 물이나 한잔 줘.'
산발이 된 머리를 본 할머니가 황당하고 졸린 내 눈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물을 요구했다.
비쩍마르고 골골이 주름이 진, 눈조차 하나의 주름으로 보일만큼 살갗이 주름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특유의 할머니 냄새가 멀리서도 맡아질 만큼
어딘가 괴상하게 할머니스러운 하얀 파마 머리의 할머니였다.
그 뒤로 굉장히 하얗고 붉고 뚱뚱한 한 할아버지가 연신 목과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는데
닦아내는 땀보다 도로 만들어지는 땀이 더 많아보였다.
땀때문인지, 뭔가를 발랐는지 듬성듬성 검은 머리칼이 보이는 흰머리가 젖은 것처럼 머리에 가지런히 붙어있었다.
옅은 옥색 남방은 겨드랑이부분이 잔뜩 젖어있었고
배부분과 가슴부분이 속 내의에 척 붙은 느낌으로 약간 젖어있었다.
할머니는 말과 동시에 머리를 불쑥 내밀고 집안을 슬쩍 살피더니
곧바로 문을 활짝 열고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할아버지도 천천히 그 뒤로 따라 들어왔고 나는 별달리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어 그냥 서있었다.
'물만 먹고 갈꺼야. 빨랑 좀 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잔에 따라 주니 둘 다 벌컥벌컥 잔을 비웠다.
한 잔을 다 마시고도 미적미적 하기에 한잔씩 더 따라주었다.
또 금새 다 비웠다.
'화장실만 좀 쓰고 갈께.'
대답도 듣지 않고 할머니는 화장실을 사용했고 나는 먼산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잠깐 쳐다보다가
잔을 모아 싱크대에 담갔다.
너무 졸려서 쓰러질 것 같았다.
할머니가 나오자 두 사람은 현관으로 나갔다.
정말 물만 먹으려던 건가 싶어 문을 잠그러 나섰는데
나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너머로
아저씨 하나와 아줌마 하나가 나타났다.
'아차!'싶은 마음이 들기도 전에 아저씨와 아줌마는 아예
마루 곁의 방으로 들어섰고
너무 졸려서 무슨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고, 제발 나가달라고 이야기하면서
'이건 정말이야. 너무 졸려서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생각했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가방을 열어 뭔가를 꺼냈고
아줌마가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세상에 나보다 더 말도 안되는 인간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너무 지쳐서 나가라고 할 힘도 없었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한 머리를 침대가 있는 큰방으로 돌리고
몸도 천천히 돌려 미끄러지듯 움직이다가
으스스한 기분에 뒤르 돌아다보니...

엄마, 아빠가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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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29 19:29 2002/07/29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