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소유

from 우울 2009/11/20 10:36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굉장히 오래 전, 아마도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아버지들의 아버지'라는 책에서

내 머릿속에 선명한 영상으로 남겨진 부분이 있다.

 

24시간 하얀 형광등이 켜져있는 거대한 축사,

축사를 빼곡히 메우고 있는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어진 좁은 쇠창살 우리,

그 우리 하나마다 분홍색 혹은 얼룩덜룩한 무늬의 지저분한 돼지가 한마리씩 들어앉아서

끊임없이 배급되는 사료를 먹고 있다.

돼지의 살을 찌우는 것 - 공공의 목적을 위해

돼지의 사적인 삶은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24시간 하얀 형광등. 밤의 은밀함. 이것은 은유다. 주행성 생명에게는 밤의 은밀함이 필요하다.

 

이 거대한 축사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스미스가 살고 있던 방을 연상시킨다.

 

시선은 익명이다. 그들의 사적인 삶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사적인 공간이 100% 공적인 공간이 된다.

밥을 먹고 똥을 싸는 것조차 공공의 영역에 속한다.

 

내 머릿속의 생각만큼은 사적인 것으로 끝까지 남아있을 수 있을까?

조지 오웰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시선은 투과한다. 투과율이 낮은 벽이 필요하다.

 

100% 사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한다.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시선은 모든 것을 투과한다. 투과율이 낮은 물질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투과율이 낮은 벽을 원한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적인 공간.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배를 긁고 방귀를 끼고 섹스를 할 수 있는 공간.

 

 

 

사적 소유가 보장되어야하는 이유.

공유의 영역이 넓어져야 하는 이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11/20 10:36 2009/11/20 1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