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현이.

from 우울 2002/09/12 14:41
그 아이의 이름은 영현이가 아니다.
하지만, 실명을 밝힐 수는 없으니까 영현이라고 부르겠다.

외고입시를 준비한다는 중학교 2학년 아이,
매일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와
학교수업 진도를 훨씬 앞당겨서 고등학교 수업을 들으러
월수금 종합반 학원을 다닌다.
종합반 학원에서는 매일 엄청난 양을 숙제를 내 준다.
그걸 다하려면 잠 잘 시간이 부족하다.
보통, 새벽 1시에 잠들어서 아침 7시에 일어난다.

학원 외고입시반에서는 자주 시험을 본다.
외고입시반에 남기 위한 시험이다.
그 시험에서 떨어지면 외고입시반에 있을 수 없다.

목토, 주말에는 수학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학원에 다닌다.
거기서 내주는 숙제도 영현이는 전부 해낸다.

영현이는 성실하다.
성실하지 않고는 그 상황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라도 소홀히 했다가는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자신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영현이가 나와 만나는 시간은 화요일 저녁 시간,
수업시간에 영현이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나와 다른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왜 휘파람을 부느냐고 물었더니
하모니카를 불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다.
하모니카를 불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휘파람으로 하모니카 불 듯이 연습하고 음계를 익힌단다.

다같이 생각할 시간을 갖고 있는데
내가 영현이를 바라보자
영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아, 집에 가기 싫어..."

"왜?"

"집에 가면 바느질 해야 돼요."

"숙제야?"

"네."

"..."

"단어장이 너무 어려워요."

"그래? 뭔데?"

"그냥, 많이들 쓰는거요. 외울 게 너무 많아요. 좋은 단어장이라는데."

"..."

"할게 너무 많아요. 아, 짜증나..."

...

교실문을 나서면서도 영현이는 아쉬운 듯 이야기한다.

"아, 집에 가기 싫어..."

영현이의 투덜거림은 몇달전부터 수업 전반에 걸쳐 계속된다.
그나마, 그런 투덜거림을 할 수 있는 일주일에 단 한시간일텐데,
나는 그걸 듣고 있기가 너무나 힘들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들이 미쳐간다.

지혜는, 모자를 쓰지 않고는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지혜는 어떤 면에서 왕따다.
아이들은 매일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 몰두하는 지혜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아마도 지혜에게 모자는 사람들과의 벽일 것이다.
지혜는 그 벽을 넘어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분당 아이들은 공부를 엄청나게 해야 한다.
성남 다른 지역아이들이 학원 한 군데 다닐 수 없어서
교과서만 공부하는 동안
그 집 한가족 생활비만큼 들어가는 학원비를 들여서
초인적으로 깨어있는다.

자기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이상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씩 미쳐가는 걸 보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다.

스스로가 미쳐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게
사실은 가장 괴로운 일이다.
아이들은 부끄러워 하면서 내 눈을 쳐다본다.

그러면, 그 모든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
불안한 눈동자가
너무나 미안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09/12 14:41 2002/09/12 1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