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슈슈의 모든 것, 혹은 리리이 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슈운지 감독

사람들은 누구나 두개 이상의 '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들이 완벽하게 분열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분열을 꿈꾸며 살기도 한다.

'나'들은 각기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갈망한다.
현실은 하나이기도 하고
어쩌면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자의 '나'들이 살고자 하는 현실.

인터넷이라는, 또다른 현실세계가 자리잡은 덕에
적어도 두 개의 '나'는 각자의 현실을 갖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아마도 그러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속에서 살고 있는
- 믿음이라기보다 강력한 고통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라 -
내 몸의 현실과

몸과 연결되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써 떼어놓고 싶은
내 '어떤' 욕망들의 현실.

내 몸이 살고 있는 현실은, '나'를 괴물로 만들어 간다.
그 현실은 더럽고 추악하고 냄새나고 폭력적인데다가
심지어 엄청나게 잘 포장되어 있어서 진실하지조차 못하다.
그 안에서는 '나' 역시 잘 포장된 오물이다.
포장이 벗겨지면 촤르르 무너지리.

내 욕망의 현실, 인터넷 안에서 '나'는 '에테르'이다.
어쩌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순수한지도 몰라, 진실할 지도 몰라...
몸의 현실을 부정하는 아름다운 나 자신.

에테르는 빛의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
'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전파하는 맑고 깨끗한 대기.

'에테르'인 '나'는 너무 눈부셔,
감히 '나'라고 부를 수 없어.
그를 '리리이 슈슈'라고 부르리.

일본 특유의 오타쿠 문화는 일본 현실의 극단적인 폭력성에서 기인한다.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만의 현실을 꿈꾸게 마련이다.

일본 특유의 왕따 문화 역시 일본 현실의 극단적인 폭력성에서 기인한다.

소외된 삶이 타인의 삶을 잡아먹는 일은 끊임없이 연결된다.

주인공 유이치는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리리이 슈슈'를 만나고 그 안의 현실을 살아보려 하지만
결국은 몸의 현실이 '리리이 슈슈'를 만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몸의 현실이 욕망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사실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몸의 현실을 스스로 부수기 시작한다.
'리리이 슈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었을거야.
하지만 모두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돼, '리리이 슈슈'까지도.
'리리이 슈슈'를 만나게 해준 그 어떤 현실도.

그리고 처음으로 몸의 현실 속에서
'리리이 슈슈'에게 말을 건다.
'리리이 슈슈'의 다른 이름은 '쿠노', 혹은 또다른 '나'.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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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6 13:04 2002/09/16 1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