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기

from 우울 2005/07/23 02:04
대체 몇번이나 그를 죽이면 그가 잊혀질까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

신기하게도 아픔이 없는 상태로
나는 그를 몇번이고 몇번이고 죽이게 된다.

.
.
.
빠른 인터넷을 신청하지 못하게 했어야 한다고 김상이 말했다.
하루종일 언니네 죽순이가 되었다.
허접한 상념들을 토해내고 토해내고
이러다 또 말것이다.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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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3 02:04 2005/07/23 02:04

그녀에게 가는 길4

from 2005/07/23 01:47
멀리에 작은 건물이 보였다.
낮은 돌담과 공터, 작고 붉은 건물,
맨발에 조개껍질이 밟히는 것을 느끼면서
내달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버려진 집이었다.
곳곳에 유리창이 깨져있고
가구들도 완전히 망가진 모습이었다.

바닥에 버려진 기다란 나무막대를 들고
커다란 옷장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나니 어둠속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옷장 안은 외부와 연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깨어진 유리 조각을 밟았는지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의 이곳 저곳을 뒤지면서 점점 나에게 가까이 다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거운 것이 쿵하는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옷장 문이 열렸다.
나무막대를 힘있게 휘둘렀다.
그가 넘어졌다.
이마에 맞았는지 머리쪽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혹은 어둠속에서 어떤 것이 그의 머리 아래로 흘러 나왔다.
유리창에서 길게 잘려나온 유리조각을 뽑다가 손이 베었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가 몸을 일으켜 내가 다가와 나를 안았다.
유리조각은 그의 몸안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쑤욱 들어갔다.

그녀는 잠이 들어있었다.
그녀 옆에 나도 누웠다.
따듯했다.
그녀가 잠시 눈을 떠 나를 바라보고는
내 몸을 꼭 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
장을 보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나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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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3 01:47 2005/07/23 01:47

그녀에게 가는 길3

from 2005/07/22 20:27
처음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내리는 문앞의 넓은 공간에 여행가방을 세워놓고 그 위에 앉았다.
그는 내 앞에 서있었다.
속내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땀이 많이 나서 와이셔츠까지 젖어있었다.
목을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40여분을 지나자 버스 안에는 그와 나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닷바람이 머리를 확 뒤집고 지나갔다.
끈끈한 공기가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쥐어 감싸고
축축하면서도 미지근한 습기가 얼굴에 와 닿아
아찔했다.

그가 내 곁에 서류가방을 내려놓았다.
양복웃옷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일까
그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복웃옷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프린트한 그녀의 메일을 손에 들고
여행가방을 들고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바닷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
여행가방은 무거웠다.
모래밭에서는 가방에 달린 바퀴가 오히려 불편했다.
나는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너무 멀리 왔어.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어.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음악을 들었다가는 정말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각 사각 빠른 발자국 소리...
그가 서류가방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여행가방을 버리고
손에 그녀의 메일을 꼭 쥐고
바닷가를 달려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그의 불규칙적인 신음소리가 바로 귀뒷편에서 들려왔다.
곧 사정이라도 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짧은 '아'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우리와 함께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들이 발작적으로 눈과 코와 입으로 덮쳐드는 통에
나는 작은 구덩이들을 보지 못하고 자꾸 넘어졌다.
겉에 입고 있던 바바리가 벗겨졌다.
내 바바리를 잡아당긴 것이 그인지 바람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새 바닷물 속에 허리까지 빠져있었다.
치마가 풍선처럼 떠올랐다.
그가 나를 안아올렸다.
뜨끈하게, 옆구리에 그의 매끄러운 와이셔츠와 내의와 살이 느껴졌다.
그 다음에는 내 다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말랑한 손가락이 느껴졌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그리고 나서 내 허리쪽으로 그의 성기가 느껴졌다.
그의 가슴을 세게 물어 뜯었다.
나는 물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입안이 썼다.
코로 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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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20:27 2005/07/22 20:27

그녀에게 가는 길2

from 2005/07/22 19:18
그녀가 내게 보내준 이메일에는
간단하게 타야할 버스와 내려야할 장소만 적혀있었다.
언제 오라는 말도 없었다.
공항을 나와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그도 내 곁의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하늘은 짙은 회색의 구름으로 덮여있어서
오후 1시라기 보다는 어느 시간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구름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연한 하늘색이 낯설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사요나라 갱들이여'를 생각했다.
헨리 4세가 죽을 때, 나는 너무 슬펐다.
자꾸 작아진다는 것...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
몸이 썩어가는 것...내게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것...

254번 버스가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공항에서 내리면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탈 수 있다.
그는 내게서 조금 떨어진 뒷좌석에 앉았다.

셀로니오스 몽크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음습한 낯선 도시의 건물을 바라보자
이대로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고 계속 살아야 할 것만 같았지만
곧 시내였다.
시내에서 또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버스는 한시간에 한대뿐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낯선 얼굴로
줄지어 오는 버스에서 내리거나 또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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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19:18 2005/07/22 19:18

그녀에게 가는 길1

from 2005/07/22 14:53
그 남자를 내가 처음 본 곳은 시테 공항이었다.
그 남자가 나를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단 한마디도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삶에 가장 의미심장할 수도 있는 시간을 함께 했다.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꿈처럼 어떤 색깔과 느낌만이 선명할 뿐
실제로 그런 시간이 존재했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공항에서 그를 보았을 때
나는 목구멍과 콧구멍으로
콧물처럼 혐오가 쏠려나오는 것을 겨우 삼켰다.
찝찝한 느낌.
그는 내가 본 동양인들 가운데 가장 뚱뚱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중국인일 거라 생각했다.
막연하게, 한국에서는 그렇게 뚱뚱한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중국인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공항의 철제 의자 2개를 차지하고 앉아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그가 햄버거 조각을 흘리기라도 하면
대책없이, 하얀 와이셔츠가 더러워질텐데...
보통 사람들처럼 몸을 피하거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는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고 둥근 은색안경테 안으로 두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작은 빨간 점이 대각선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수놓인 감색 넥타이와
감색 양복,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보이는 투실투실한 팔과
그 아주 뚱뚱한 사람들 특유의 손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만.

옷이 예뻤다.
와이셔츠는 눈이 부시게 깨끗한 연한 푸른 색이었다.
아니 하얀색이었다...아니 푸른색일지도 모르고 하얀색일지도 모른다.
검은 반곱슬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무스나 스프레이로 머리위에 고정되어있었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뿐,
나는 멀리 떨어진 스시 바에서 남은 스시에 다시 집중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점심을 준비해 주는 타입은 아니다.
아마 자신의 위한 점심조차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가 고파지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것 저것들로
괴로워하면서 배를 채우고는 무언가에 또 골몰하겠지.
스시를 먹고 가는 것이 좋았다.
스시를 먹은 후에 간단하게 장을 봐서
그녀에게 먹을 만한 저녁을 차려주는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변변한 가게하나 없다고 들었다.

스시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가방을 끌고 게이트를 향해 그 남자의 옆을 지나치자 마자,
그 남자가 자신의 작은 서류가방과 양복 웃옷을 들고 일어나면서
공항의 철제 의자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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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14:53 2005/07/22 14:53

비가 와

from 우울 2005/07/22 07:00
예전에는 이런 날씨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하루종일 쏟아지듯 비가 내린다.
이곳에는 작은 산들도 없고
막막하게 펼쳐진 대지위에
끝없이 끝도 없이 비가 내린다.

산이 없으니 하늘이 정말 넓다.
하늘이 무척 크다.
이렇게 넓은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이 많은 구름은 대체 어디서 온것일까

바람을 막아주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인지
아주 먼곳에서부터 달려온 듯한
강한 바람이
이렇다할 방향도 없이
사방으로
비를 내동댕이 친다.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까지
온 공중이
바람과 비로 가득하다

이런 날씨가 며칠이고 계속된다.
며칠이고 계속된다

집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집에 머무르는 건 싫다.
무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
생각을 하다보면 자꾸 나 자신에 대해 불안해진다.
남은 삶을 어떻게 버텨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춥다...
추운건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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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07:00 2005/07/22 07:00

책을 읽지 못하다

from 우울 2005/07/22 05:20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이다.
나의 뇌는 생각보다 게을러서 오감이 가져다 주는 것들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려들지 않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으면 아주 쉽게 단순해져 버린다. 단순해진 뇌는 삶을 단조롭게 만든다. 단조로움은 삶을 지루하게 만든다. 지루한 건 딱 질색이다.

안녕, 내 작은 책.

야옹 같은 건 딱 질색이야.
침대 옆의 라디에이터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말한다.
차라리 어흥이 나아.

뉴트롤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담배를 피우면 기분이 좋다.

내 안의 작은 야옹이 말한다.
내가 야옹인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는지도 몰라.
어렸을 때는 세상이 아주 대단한 건 줄 알았어.
나는 자연스럽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할 거라고 생각했지.
돈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 정말 잘 몰랐어. 가난한 것이 돈 때문인 줄도 몰랐지.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돈을 벌어주어야만 하는 줄은 몰랐어.
크면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줄도 몰랐어.
.
.
.
사실은 어흥이 정말 나은지 잘 모르겠어.
.
.
나도 그래.
.
.
정말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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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05:20 2005/07/22 05:20

그리움

from 우울 2005/07/20 16:32
먼곳에 혼자 있다보니
생각의 넓이가 달라진다.
지난 일들이 하나 하나 참 별별 것들이 다 생각나기도 하고
뭐 그렇다.

어제는 하루종일
예전에 '지지, 공감, 감동' 버튼이 없던
언니네 시절에 대해 그리워 했던 것 같다.

벌써 한참 전 일이라
좀 우습기는 하지만....
당시의 언니네 자기만의 방은
여성주의의 발언대라기 보다는 비밀일기장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
소리 소문없이
밤새워 온 동네 자기만의 방들을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방을 찾으면
참 기뻤던 것 같다.
방이 하나 마음에 들면 그 방의 글들을 또 밤새 읽기도 했다.
글을 훔쳐본다는 미묘한 느낌.
누군가 한 사람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본 듯한 미묘한 느낌.
그녀에 대해 이해할 것 같고 친해지고 싶고...

요새는
자기만의 방이 하나의 방으로써 한 개인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기 보다
낱낱의 글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가가 중요해지면서
예전의 그 미묘한 분위기가 사라진 듯하다.

글의 성격들도 확실히 변했다.
직접적인 선전 선동의 분위기랄까..^^;;
은근하게 흐르던 끈적함이 사라졌달까....

게다가 지지, 공감, 감동의 세가지 기준으로는
대체 손에 잡히지 않는 너무 많은 감정들이 있어서
차라리 예전의 그냥 '추천'제도가 더 나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해진 기준없이 각자의 기준에 따라
마음에 드는 글을 추천하는 것이 아무래도 낫다 싶다.

제도라는 것이 참 신기해서
나는 확실히 언니네의 자기만의 방이 변화된 형식에 따라 변화되었다고 느낀다.
다들 지지 공감 감동의 기준에 맞는 글을 쓰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전의 자기만의 방이 좋다.
발밑으로 서서히 흐르는 여성주의를 타고
흐르던 말던 그 위에서 각자 삶의 시를 엮어가던
그때 분위기가
좀 더 다양하고 다채로웠던 것 같다.

요새는 자기만의 방 첫화면에 들어가서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다.
추천된 글들을 한번 돌아보고 나면 길을 잃은 듯한 느낌.
역시 나의 노력으로 찾아다녀 얻은 소중한 곳이라는 느낌없이
추천받아 들어간 곳은 마음에 오래 남질 않아 준다.
광범위한 공감대는 있을지언정
마음 깊은 곳에서 '아, 이사람이 참 마음에 들어'하는 그 느낌이 없다.....

아쉽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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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0 16:32 2005/07/20 16:32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서로의 삶에 바쁘다보면 그리운 이, 소중한 이들이
소리도 없이 별다른 인사도 없이 잊혀지곤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작은 흔적으로부터 그를 기억하게 된다.
예전에 청테이프가 앞에 있기만 하면 조그맣게 자꾸 뜯는 아이가 있었다.
청테이프를 보면 그가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청테이프 쓸 일이 많지 않아
대형 마트에서 우연히 지나다 보거나 이사할 때가 되어 테이프 살 일이 생기면
그가 떠오르곤 했다.
유난히 손톱이 작고 손이 통통한 아이가 있었다.
흔치 않은 그런 비슷한 손을 어디선가 만나게 되면 그녀가 떠오른다.

최근에 뉴스를 보는데
한 영화배우가 고속도로를 건너는 고슴도치 가족을 구하려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에 치여 죽었다고 한다.
고슴도치 가족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예전 내 방 지붕에 살던 두더지 세마리가 떠올랐다.
고슴도치와 두더지는 상당히 다르기도 하지만
왠지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방에서 이사한지 벌써 3년이 훨씬 넘었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기간은 길어야 6개월남짓이다.
그간 서로 얼굴을 보았던 날은 많아야 열흘 정도 뿐이다.

꽤나 과묵하고 예의발라서
내 삶에 슬쩍 들어앉기보다는
아주 가끔 작은 선물이 되어주었던 그들.

나는 특히 두더지 아가씨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알지 못했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둘 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뿐.

오늘은 그녀와의 세번째 만남을 기억해 보려고 한다.

여름밤이었다.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모기가 들어올까봐 불은 모두 끄고
존 콜트레인의 블루트레인을 들으면서
달을 보고 있었다.
춤이라도 한판 춰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겁고 느린 바람이 있었다.
하얀 달 둘레에 조금 푸른 공기가 있었다.

누군가가 머리위에 있다는 걸 느꼈을 때
나는 사실 벌거벗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지붕위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 한것은
내가 벗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두더지이기 때문에 어차피 옷을 입지 않고
따라서 내가 옷을 입고 안입고는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은 나의 개인적 즐거움이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달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조금 힘겹게 숨을 몰아서 짧게 물어야 했다.
'달을 보고 있구나.'
'응'

나도 달을 바라 보았다.
무겁고 느린 바람조차 땀범벅의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달은 산속에 흐르는 개울 속의 하얀 돌처럼 차가와 보였다.
발을 대면 이까지 시릴 것만 같아.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만화속에 나오는 것처럼 검은 그림자같았다.
끝이 뭉툭한 작은 코.
달이 들어있는 작은 눈.
나는 그날의 그녀를 그렇게 기억한다.

콜트레인의 음악이 모두 끝났을 때
그녀는 천천히 몸을 들어서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지붕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마도 나에게 인사를 했던 것일 거다.
나는 그녀의 눈에 들어있는 나를 보았었다.

그날 밤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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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07:12 2005/07/19 07:12

돌아보기

from 우울 2005/07/19 06:12
인터넷이 잘 되니 자주 인터넷을 쓰게된다.
오늘은 언니네에 있는 내 방을 몇시간에 걸쳐 돌아보았다.
내 글도 하나하나 다시 읽고
자유게시판의 글들도 하나하나 다시 읽었다.
언니네에 내 방을 만든지도 4년이 되었다.
처음 언니네에 왔을 때는 내가 참 한가해서
글도 많이 쓰고 커뮤니티도 만들고
하고 싶은게 참 많았는데
내가 참 많이 변했다.

자유게시판을 읽다보니
여러사람들이 그리워졌다.
무희님, 장미님, 달리잉님, 공기밥님 등
그 분들은 다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그 때는 참 언니네 분위기가 달랐던 것 같은데
뭐가 어떻게 달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참 그립다...
언니네가 달랐던게 아니라 내가 달랐던 거겠지...
글을 제대로 한번 써볼걸 그랬구나 싶기도 하다.
바보같이 조금 쓰다 말았다.
카툰도 조금 그리다 말았다.
바보같이.

무언가 새로운 걸 해보겠다고
엉뚱하게 베를린에 와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중이기도 하다.
마음가짐도 새롭다.
성실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 성실함에 지난 내 삶들이 녹아나겠지.
나는 그 삶들을 잊지 않겠지.
잊지 않게 해주는데 언니네가 참 많은 도움이 돼준다.

재밌는 걸 해보겠다고 늘 생각하며 살았다.
재밌는게 오죽 많아야 할텐데
세상엔 재밌는게 참 많다.
이번에는 오래 해봐야지 마음먹는다.
쓰다 말지도, 그리다 말지도 말고
오래 오래 견디는 힘을 길러야지 생각한다.
혼자 있으면서 한가지를 계속 해내는 힘이 부족해서
일부러 멀리 왔다.
먼 곳에서 혼자 있어보려고.
사람들이 참 그립지만 개토에게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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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06:12 2005/07/19 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