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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노동개념을 살포시 훔쳐보기

헤겔의 노동개념을 간단히

 

 

 주노변증법에 나타난 노동개념의 해방성

노예의 자기의식이 해방되기 위한 두 가지 계기

①공포속에서 주인에 대한 봉사를 해야되것지....

②노동을 통한 교양Bildung-교양이라는 의미에 헤겔노동의 비밀이 숨어있어염...

⑴노예는 대상의 자립성 즉, 노예자신의 부정이라는 상태에 직면하고 그 이후에 대상 을 자신의 의도대로 변형, 가공하는 것을 익혀나간다.

⑵노예의식의 자립성 획득=노예의 노동은 대상세계의 가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예 자신의 의식을 풍부히 해서 자기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결국 자연으로부터 소외(공포)를 지양하고 또한 노동하는 자로서의 노예가 간직한 사유된 내면적 자아(자유)를 실현시킴으로서 노동하는 자를 미개한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리하여 강제 노동 속에서 노예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헤겔노동개념의 긍정적 요소를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맑스는 헤겔을 조낸 깐다....

비록 헤겔이 고대의 노동개념을 벗어나서 노동의 긍정성을 포착한 것은 고무될만한 점이지만 버뜨...but....여전히 헤겔은 추상적 정신노동을 벗어나지 못했고, 노동을 부의 원천으로 파악했으나 여전히 비참한 노동의 실상을 자연법칙으로 간주하는데 그친 국민경제학적 관점을 견지한다. 하지만 현실은 실상 그렇지 않은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헤겔은 주인이 강제하는 억압적 노동을 자기의식의 획득을 위한 해방의 외적 계기로만 위치지우고 계급적 적대상황에서 노동의 지속적 소외가 사실은 해방의 계기가 아니라 노동소외의 심화과정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만 것이다.

 

 법철학에서 헤겔 노동개념 쪼아보기

헤겔은 한 때 프랑스 혁명을 지켜보며 조낸 열광한다..보편적 자기의식의 고유한 통일로의 복귀라는둥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흥분하다가 시민사회의 모순을 직감하면서 역시 보수적 입장으로 회귀한다. 물론 자신의 체계상으로도 시민사회는 인정될 수 없기도 하다. 결국 시민사회는 관념론 체계에서 국가 아래의 단계로 격하되고 만다. 즉, 특수자의 보편자로의 고양이라는 자신의 체계완성을 위해 시민사회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바라본 시민사회의 모순은 무엇인가??

①천민의 증대...원인은 천민의 게으름과 낭비란다....뷁....

②사회적 분업에 의한 보편적 재산의 분배방식인데...여기서 개인의 노동에 대한 자질이나 자본의 소유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해서 분배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헤겔이 보기에 천민의 발생은 필연적이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해외무역이나 식민지 정책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결국 여기서도 국가로 귀속되는 것이다....

그럼 해외무역해서 손해보는 나라는?? 식민지배 당하는 나라는?? 어쩔.....

 

헤겔을 까보자....

비판

1-주노변증법에 의하면 해방의 계기는 노예, 즉 천민에게 내재한대매??

2-정신현상학에서도 인간의 구체적 노동이 절대지라는 리바이어던에게 삼켜지더니 법철학에서도 역시 노동을 허구적 관념으로 보는 헤겔이 발견된다....

 

아부지 잘 계시냐??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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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정신

홍세화 선생은 우리나라가 잽싸게 프랑스 시민사회와 같은 똘레랑스를 발휘해야 한다고 토론회때마다 똑같은 내용으로 강변하신다...

 

하지만 실상은 똘레랑스는 똘추랑스로 발현되기 십상이다......

 

도서관에서 방구낀 넘들......

 

이해하고 용서할까???

 

 

밀폐되어 있는데....??

 

 

나가서 십분있다 들어왔는데도......여전한데...???.

 

분명히 고구마나 계란인데....??

 

틀림없는데...??.

 

오호....통재라....

 

용서가 안되어라.....

 

어리석은 행자의 수행은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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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뭐냐.....동이 아닌게 노동이냐??

어줍잖은 노동개념 정리 개시탄

 

 

고대 노예제 사회의 노동개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자면

포이에시스=자기외부에 목적을 두는 대타적인 노예의 제작행위-비천한 행위로 취급

프락시스=자기자체내에 목적을 두는 자기목적적인 주인의 인간적 행위(정치, 전쟁, 철학)

 

 

근대 부르워주아 경제학

헤겔에 의하자면

노동은 정신의 자기실현의 계기, 인간의 자기 산출행위- 적극적, 긍정적 노동개념 포착

 

 

맑수의 노동개념

인간이 생존을 위해 욕구에 의해서 자연대상을 가공해 내는 감각적 물질적 생산행위

 

-감각적sinlich, 대상적gegenstaendlich 인간이 감각적 대상적 타존재를 목적의식으로 가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인간 자신의 본질적 능력들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sinlich, gegenstaendlich 는 비대상적ungegenstaendlich와 대비되는 용어. 즉,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자연대상의 존재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미루어 짐작만 할 뿐....ㅡ,.ㅡ)

 

 

♂맑스의 소외된 노동

유적존재의 자유로운 유적활동으로서의 노동이 오히려 유적존재인 인간자신에게 부자연스럽고 강제된 활동으로, 자신을 대상에 실현시킴으로서 또한 동시에 자기 자신 스스로를 새롭게 산출해나가는 창조적 활동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자신을 대상속에 대상화Vergegenstand 할수록 인간자신에게는 탈대상화Entgegenstaendlichung로, 탈현실화Entwiklichung로 나타나는 이러한 노동의 양상을 소외된 노동Entfremde Arbeit, 혹은 외화된 노동entäuserte Arbeit이라고 명명한다.-MEW40권 경철수고515P)

CF. 외화된 노동의 u뒤에 있는 s는 원래 에스체트......뷁.....못찾것어서.....걍....

 

 

 

헤겔의 노동개념을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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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뭐시기...광장인데.....

 

로마에 포풀러 광장인가......포뭐시기 광장이 있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용....

 

찾아보고 올리수도 있으나 귀찮은 관계로 패스.......쓰블......

 

이걸보면서 여의도에 있는 엘지 쌍둥이 빌딩이 떠올랐다는......두둥......

 

저기 오른쪽 골목옆으로 조매만 들어가면 피자집이 하나 있슴다....

 

물론 가게 이름은 기억안남......

 

역시 여행기 찾아보면 있지만 귀찮은 관계로 패스......

 

거기가 맛나다고 외로운 행성에도 소개된바 있슴다....

 

가실분은 말하면 찾아보고 친절하게 설명드립죠....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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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공휴일

 

 

로마의 공휴일에서 오드리 햇반이 아이수크림 잡샀다는 바로 그 광장....

 

소문난 잔치에 먹을거 없다고.....막상 가보니.....뭐....걍......

 

삐끼만 조낸 많고.....

 

주의사항....꽃을 그냥 준다고 받으면 절대 안됨다....

 

안산다고 해도 프리라고 주면서.....좀있다 돈달라 칸답니다.....

 

니주구리 히빠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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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당구의 짜릿함....

3월 1일....

 

유관순 언니의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당구쳤다....

 

 

진사람은 게임비 내고 만원 지불하기.....

 

이악물고 쳐서 이겼다....

 

 

 

움하하하하하.........

 

 

졌다면 내가 지불해야 되는 비용

1. 당구비...12000원

2. 내기비...10000원

 

한시간 반정도 노동을 투하해서 22000원 득템....

 

 

보람찬 하루....

 

늘 오늘만 같아라....

 

유관순언니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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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가 알까 겁나는 하다만 스피노자 정리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존재론: 실체, 속성, 양태

통념에 의하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데카르트가 코기토의 확실성에서 모든 학문적 진리의 토대를 발견한데 비해 스피노자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 절대자에 대한 지적직관으로부터 출발하는 독단적인 절대자의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개인의 자유나 주체성의 여지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스피노자의 철학은 절대자의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수동적 조건과 가상적 인식에서 비롯된 자유의지의 환상 및 목적론적 편견과 이와 긴밀히 결부된 유태교-기독교의 창조론 신학을 비판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인식과 존재역량의 원천이자 해방과 지복의 원천인 신에 도달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목표이다.

스피노자 존재론의 최대쟁점은 유일한 실체만이 실존함을 보이려는 데, 즉 다시 말해 어떻게 ‘자신의 유(類) 안에서 무한한’ 속성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을 구성할 수 있는가를 보이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때 스피노자의 신은 기독교적 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연화된 신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신 존재 증명은 전통적 의미의 신 부재 증명이기도 하다.

 

개념의 쇄신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먼저 실체와 속성, 양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간단하게 스피노자의 실체는 신이기도 하며 자연이기도 하다.

실체는 무언가를 무한히 산출하는 능산적 자연인 동시에 그렇게 산출된 소산적 자연이기도 하다. 능산적 자연으로서 실체는 순수한 힘, 역량, 에너지이다.

 

속성은 이 순수한 힘이 표현되고 전개되는 차원, 혹은 그것이 파악되는 관점에 해당한다.

 

양태는 이 속성의 차원에서 산출되는 개별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 있어 우리가 마주치는 특수한 사물은 모두 양태이다.

 

스피노자 철학의 혁신성은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드러난다. 그의 철학에서 실체는 자기안에 있고 자기를 통해 인식되는 것, 즉 그 개념이 다른 사물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를 통해 인식된다는 구절이다. 데카르트 철학을 비롯한 전통 철학에서 실체는 존재론적 자립성은 있지만 개념적 자립성은 지니지 못하므로 항상 어떤 술어나 속성들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개념적 자립성을 자신의 실체개념에 포함시킴으로서 전통철학에서의 실체는 실체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스피노자 실체개념의 특성

1.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한하다. 유한한 것은 자기안에 있지 않으며 자기를 통해 인식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2.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산출될 수 없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과 공통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이 유한자를 창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함축한다. 또한 실체가 개념적 자립성을 가짐으로써 초월적이고 파악불가능한 실체라는 관념은 배제된다. 자기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실체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가능성의 원천일 뿐 아니라 인식가능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실체의 개념적 자립성을 통해 실체 전체는 합리적 인식가능성을 획득한다.

 

실체개념의 변화는 속성 및 양태개념의 변화를 가져온다.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의 특징은 그것이 실체가 소유하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속성은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 즉 다만 지성과 관련해 속성이라 불린다는 점만이 다를 뿐,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실체와 동일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한히 많은 속성들은 각기 유일한 실체의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면서 이 실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무한히 많은 속성들이 동일한 실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는 스피노자 존재론의 핵심적인 쟁점이다.

 

양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전 철학에서 양태는 비본질적이고 우연적 성질이있으나 스피노자에서 유한양태는 개별적인 사물들을 의미한다. 무한양태는 유한양태들의 본질 전체(이는 신의 속성들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직접적 무한양태의 경우로, 연장속성에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 사유속성에는 무한한 지성이 있다. )이거나 유한양태들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칙들(이는 매개적 무한양태의 경우로, 연장에는 우주전체의 모습이 있다.)을 의미한다.

 

신의 구성 또는 역량의 존재론

이러한 개념을 기초로 윤리학 1부에서 스피노자는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유일한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함을 보이고자 한다. 유일한 신 존재의 증명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어떻게 그 자체로 무한한 속성들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량(potentia)개념이 핵심 역할을 떠맡는다. 자연 전체의 궁극적인 존재원인과 설명근거를 제시하는 이 논증과정은 전통적인 창조주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인 동시에 실체다원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논증은 2단계로 이루어진다.

1. 실체가 무한함을 증명한다.

2.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인 신이 필연적으로 실존하며, 이 실체는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1번 논증은 동일한 속성을 지닌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동일한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같은 유(類)간의 동일성, 보편성의 획득은 어떻게 설명되는지 몰것으,,,), 그리고 이 실체는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논증의 핵심은 자연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가진 둘 이상의 실체들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체들은 속성의 차이나 변용의 차이로 구분되는데, 그 본성상 변용에 선행하는 실체들은 속성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동일한 속성을 가진 다수의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의 반론= a와 b라는 속성을 갖는 A와, b와c라는 속성을 갖는 B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스피노자의 이 정리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반론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임을 간과한 반론이다.

2번논증에서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산출될 수 없으므로 자기 원인적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무한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 논증은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 이상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속성은 무한히 많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실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이제 각자 자신의 유(類)안에서 무한히 많은 속성들이 어떻게 동일한,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구성하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논증과정은 간단하고 압축적이지만 그 함의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다. 이 논증의 기본전제는 ‘각각의 사물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가질수록 자신에 속하는 더 많은 속성들을 가진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서 실체는 하나 이상의 주요속성을 갖지 못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실재성의 증대와 속성들의 증대를 결부시킴으로서 논의의 방향을 바꾸어놓는다. 즉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이상,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서의 신이 가장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따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무한히 많은 각각의 속성이 동일한 실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내적으로 모순이 아니며, 가장 자명하다는 점이 증명된다.

그리고 이어서 이 실체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사실은 네 가지 증명을 통해 입증된다.

이 네가지 증명의 핵심은 역량에 의한 논변이다.

두 번째 증명-근거율의 원칙/ 실존과 비실존의 원인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모든 것은 근원적으로 실존의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증명에서 역량의 논변이 제시되는데,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은 역량이 없다는 것이고, 역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역량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실재적인 존재,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가장 많은 역량을 지닌 존재자, 절대적인 역량을 지닌 존재자이며, 따라서 이 존재자가 실존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역량과 권능은 존재론에서 인간학, 정치철학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개념이다.

전통철학에서 역량은 잠재력이나 가능태로 이해되기 때문에 신의 의지를 통해 비로소 실재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본질과 역량을 동일시하고 나아가 모든 사물의 현행적 본질을 역량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되면 역량은 더 이상 현실태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현행적인 힘이 된다.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태적인 능력을 권능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의지는 독립적인 능력으로 존재하지 않고, 역량은 모든 사물의 본성에 내재적인 실존의 충동이기 때문에, 권능이라는 개념은 항상 가상과 수동성, 나아가 예속의 상태와 결부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은 기독교 철학 및 신학의 창조론에서 중심적인 신의 자유의지와 가능태로서의 권능개념을 비판할 수 있는 개념적 지주이다. 나아가 역량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간학에서 코나투스 및 욕망 개념과 이어져 인간의 능동성의 기초를 확보하며, 그의 정치철학에서 자연권개념을 재정립할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또는 인과성의 쇄신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는 이 정리로부터 신의 역량에 의한 자연의 생산, 다시 말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인관관계가 논의된다. 여기서 인과관계는 스피노자에 의하자면 ‘신은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여기서의 구분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오히려 두 측면에서 고찰한 하나의 인과관계이다.

신이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것은 ‘신은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임을 뜻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자기원인의 정의로 시작한다. 이는 원인의 일차적 의미가 전통적 의미의 작용인이 아니라 자기원인으로서의 내재적 원인임을 함축한다. 나아가 자기 원인은 ‘신 자신만의’ 인과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신안에 존재하므로 자기원인은 모든 사물안에서 활동하는 원인이다. 모든 사물 안에서 일어나는 신의 인과적 활동은 모든 사물의 본질과 실존의 근거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존재와 활동 일체에서 항상 신의 내재적 인과활동을 전제한다.

이러한 인과론의 중요성

1. 내재적 인과론을 통해 스피노자 철학의 반 유출론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헤겔은 스피노자 철학을 유출론적 체계로 특징지었다. 헤겔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체계는 절대자로부터 속성, 양태의 순서로 실재서이 점점 줄어드는 쇠퇴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유출론적 체계는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외재성을 전제한다. 스피노자에게서 능산적 자연은 항상 소산적 자연의 내부에서 작용하므로 이런 비판은 전제 자체에서부터 성립할 수 없다. 나아가 이런 내재적 인과관계는 왜 무한자가 유한자를 산출하는가의 문제도 허용하지 않는다.

2. 내재적 인과관계는 중요한 윤리적 함축을 갖는다. 신이 모든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필연의 법칙에 구속함으로써 사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이 사물들의 능동성의 근거가 된다. 그 정의상 강제나 구속은 외재적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은 무한한 존재자이기에 일체의 외재성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자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강제하거나 제약하지 않는다. 신은 오히려 유한한 사물의 ‘자기’, 즉 능동성의 근거를 제공한다. 유한한 사물은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하는 존재자이므로 절대적 자기,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존재자일 수는 없으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덕분에 원초적인 능동성을 부여받는다. 이를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정치적, 윤리적 노력에 달려 있다.

 

평행론과 인식의 종류

평행론의 함의

속성들의 독립성-속성과 속성 사이의 상호작용 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

속성들의 자율성- 속성들 각각이 무한하다는 것, 따라서 속성들은 실체에 속하는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속성들의 동등성- 특정한 속성, 예컨대 사유속성이 연장속성에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

 

이처럼 속성들이 독립성, 자율성, 동등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다양성이 성립한다. 반대로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저에서 존재론적 통일성이 성립한다.

이렇듯 무한한 속성들이 각기 동등하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실체를 표현한다는 존재론적 사실로부터 평행론이 전개된다. 즉 속성들 각자는 서로 인과관계를 맺거나 상호작용하지는 않지만 동일하게 실체를 표현한다. 이러한 동일성으로부터 속성들 사이의 삼중적 차원의 평행성이 존재하게 된다. 먼저 각각의 속성들에 따라 실체에 의해 생산되는 양태들 사이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예컨대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그러하다. 그리고 각각의 양태들의 질서와 연관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속성에 따라 생산된 각각의 평행한 양태들이 동일한 사태를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존재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실체를 표현하는 속성들은 무한히 많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에 따라 생산된 우리 인간은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평행론적 원칙에 따라

1.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들은 그 자체의 실재성을 지니며 자율성을 유지한다. 즉, 관념들은 표상적인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형상적 실재성을 지닌다. 이는 무엇보다 적합성 개념을 새로운 진리기준으로 도입하는 결과를 낳는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을 대상과의 관계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적 특징들을 지니는 관념으로 정의한다. 이때의 내적 특징은 관념과 대상의 일치라는 외적 특징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관념 그 자체의 본성에 준거하는 적합성 개념은 관념과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관념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관계를 인식론의 핵심문제로 부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관점에서 스피노자는 관념의 내적 원인을 파악하여 그로부터 가능한 모든 결과들을 도출해내는데서 지성의 역량을 발견한다.

다음으로 평행론은 인간의 두 측면을 이루는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 즉 양자는 각기 자율적으로 인간이라는 통일체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인식의 종류

신체의 부분들에 대한 완전한 지각은 이 부분들 자체가 아니라 외부 물체가 신체를 변용시키는 방식들을 반영해야 하며 외부 물체의 지각역시 그 물체 자체의 본성이 아니라 이 물체가 우리의 신체를 매개로 드러나는 방식들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정신이 자신의 신체나 자기자신에 대해 갖는 관념은 부적합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자기의식의 명증성에 기초한 근대 관념론 철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부적합한 인식의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인식론적 문제이자 동시에 실천적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서 부자유와 예속은 항상 부적합한 가상적 인식과 결부되고, 역으로 자유와 해방은 항상 적합한 인식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식의 종류 이론으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 이론의 의의

1.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2. 인식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해명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스피노자 윤리학에서 인식의 세 종류

1종인식- 상상 혹은 가상작용-표상과 간접경험등-오류의 원인

2종인식- 공통개념에 기초하므로 적합한 인식을 제공함. 공통개념의 특징은 이것이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공통개념은 여러 종류가 있고 모든 사물에 공통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항상 참이지만 정보상으로는 그만큼 빈약하다. 하지만 부적합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최초의 관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극히 유용한 개념이다.

3종인식-신적 인식/직관적 인식-신의 한 속성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감. 이 인식은 인간의 해방과 지복의 근원.

 

 

예속에서 해방으로

코나투스

스피노자 존재론에서 내재적 인과성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내재적 관계를 정립시키고 유한자가 능동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데 신의 이러한 내재적 활동은 유한자 안에서 코나투스로 표현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유한한 사물들의 현행적 본질이라 정의한다. 즉, 각각의 사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만큼 자신의 존재속에서 스스로의 보존을 추구한다. 여기서 자기스스로 할 수 있는만큼이라는 규정이 중요하다. 이는 정진 어떤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도출되며, 그 본성에서 어떤 결과과 도출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스피노자의 인과론의 근본원칙과 연결되어 있다.

윤리학1부에서 양태는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한다고 규정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불일치는 유한양태들이 전적인 수동성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재적 원인인 신에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유한양태들은 원초적 역량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과 실존의 불일치 때문에 유한양태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타동적 관계를 자신의 실존조건으로 지니게 된다. 이러한 실존 조건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물들로부터 제약과 이와의 갈등을 함축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구속적이다. 다시 말해 유한양태들을 수동성의 조건에 얽매이게 한다. 나아가 이러한 제약과 수동성은 유항양태들이 기본적으로 지닌 긍정적 역량의 여지를 협소화하기 때문에, 존재보존의 추구인 코나투스에 반하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유한양태의 존재 보존의 추구는 정의상 ‘수동적인 자기보존’에 그칠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의 실존조건을 구속하고 수동화하는 경향에 맞서 원초적인 실존역량을 확대하고 능동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인간의 실존조건은 항상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므로 능동화의 노력은 수동적 의미의 자기이익에 대한 추구일 수 없다. 그것은 자기이익의 성경 변화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성적 개조의 노력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은 근대 초기 부르주아의 소유적 개인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예속적 실존조건의 이성적 개조에 토대를 제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욕망과 정서

코나투스의 인간학적 표현은 충동 또는 욕망이다.

‘코나투스가 정신과 신체에 함께 관계할 때 충동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이러한 충동은 그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을 증진하는 것들을 낳는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욕망은 충동에 대한 의식이 포함된 충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본질을 욕망으로 정의한 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 즉 인간은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인과관계속에서 존재하며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정서이론에서는 변용과 정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용-일차적으로 신 또는 신의 속성들의 변용, 즉 양태들 자체/ 스피노자는 물체와 물체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 또한 변용이라 부른다.

정서-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진 혹은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들인 동시에 이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서는 정신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체나 신체 일부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은 실존의 힘을 긍정하게 되는 혼란스러운 관념

 

변용이 외부 물체나 인간 신체의 한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인데 비해, 정서는 변용되는 사물의 존재역량의 증대 혹은 감소와 사물의 작용의 변화, 즉 이행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본질이 코나투스의 인간학적 표현인 욕망에 있는 이상 당연히 정신이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대 혹은 증진하는 것을 가능한한 상상하려고 한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수동적인 실존적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이 코나투스를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역량을 증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상과 예속

인간해방을 위해서는 먼저 가상과 상상의 예속상태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스피노자 정서이론에서 핵심적인 메커니즘은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가령 우리가 자신과 동일시하던 인물이 어떤 대상을 미워하거나 좋아하면 우리도 그 대상을 미워하거나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정서들의 모방이라 부른 것이다.

이러한 정서들의 모방은 자유로운 주체라는 가상에서 비롯하므로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선과 악에 대한 비판

스피노자에게서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이를 의식하는 한에서는 기쁨과 슬픔의 정서일 뿐이다. 이는 도덕적 가치를 쾌감과 불쾌감이라는 심리적 상태로 환원시키려는 주장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

1. 선과 악은 실제로는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인식의 결과일 뿐이다. 선과 악이라는 범주를 이 정서들로부터 독립시켜서 거꾸로 존재의 증대와 감소의 원인으로 만들어서 선과 악을 코나투스의 초월적 목적으로 승격시키려는 목적론적 가상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고 의욕하고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추구하고 의욕하고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이를 선이라고 판단한다.

2. 선과 악은 인간들 사이의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성이 있다. 이는 특히 우리가 목표로 삼을 만한 인간 본성의 전범을 세우려 할 때 유용하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선을 그것이 우리가 인간 본성의 전범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수단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악은 우리가 이 전범에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스피노자가 수동적 정서를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고 선과 악을 재규정한 데서 알수 있듯이, 가상과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주요전략은 수동성과 가상의 조건 자체 속에서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연적으로 생겨난 존재역량의 증대 기회를 보존 확장하려는 노력과 비록 가상적이고 부적합한 관념이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의 전범을 설정하고 이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노력은 능동성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5장 정치철학

종교와 정치의 분리

자유로운 학문과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신학-따라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반드시 필요[신학정치론]

방법론

1.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을 제안/우리의 이해관계로 성서를 해석해서는 안됨.

2. 성서에 씌어진 그대로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최고의 도구인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이성이 철학의 시녀라는 중세의 원칙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정치체제론

신학정치론-정치에 대한 종교의 간섭을 비판하면서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한다.

정치론-한층 현실주의적인 자연권 이론의 관점에서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탐구한다.

 

바람직한 국가체제

스피노자는 혁명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형태의 국가이든 기존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치명적 실수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을 모두 인정하고, 여러 제도와 조직들을 제안하면서 각각의 체제내에서 최상의 형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절대군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스피노자는 군주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제도의 설립에 대해 언급한다.

1. 의회의 설립-군주정내부에는 귀족정의 요소가 숨어있다. 이러한 요소는 군주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영향을 주므로 의회를 통해 개선되어야 한다.

2. 국가의 전 영토는 군주가 소유해야 한다. 군주는 세를 받으면서 영토를 임대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땅을 소유하는 계급이 없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교역과 상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어느정도 국민들간의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3. 의용군제도의 옹호. 오직 필요할 때만 싸우는 의용군은 시민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보호책이다.

 

이렇듯, 스피노자는 군주정을 어렵게 허용하는 반면 귀족정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귀족정의 장점

1. 귀족정은 다수의 통치체제이므로 정부가 충분한 권력을 가질 수 있고 국민의 의견수렴도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의회는 불필요하다.

2. 최고 통치자가 사망하더라도 최고통치권을 가진 의회는 유지된다. 따라서 격변을 겪지 않는다.

3. 군주정의 군주는 그 자신의 재능이나 주변여건에 따라 절대적이기도 하고 미력하기도 하지만 의회의 권력은 불변이다.

4. 군주정의 법은 군주의 선포된 의지이지만 군주의 모든 의지가 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귀족정에서는 선포된 의회의 의지는 모든 경우에 필연적으로 법이 된다.

통치권의 조직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귀족정은 군주정과 다르다. 스피노자는 군주정에서 용병제와 사유재산을 부정했지만 귀족정에서는 이를 인정한다. 귀족정은 이미 절대권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군주정에 내포된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즉 싸워서 지켜야 할 자신들의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귀족정에서 국민들이 돈을 받지 않고 군인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군주정에서는 의용군이 귀족정에서는 용병제가 적절하다. 사유재산권의 인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국민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재산 소유권마저 없다면 정부에 완전히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에 대해서도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한다. 즉 사유재산의 인정은 정부를 지지하도록 국민들을 자극한데 필요하다.

 

민주정에 대한 논의-귀족정과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민주정은 의회의 구성방식에서 귀족정과 다르다. 민주정은 독립적이고 정직하게 사는 모든 시민이 최고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될 자격을 지니며, 국가의 공직을 맡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어린이와 금치산자, 여성과 하인은 시민의 자격이 배제된다. 여성은 남편에게 하인은 주인에게 종속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지적으로, 물리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이 그 바탕이 된다. 스피노자의 민주정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죽는다. 뷁

단지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민주정이 정부의 가장 자연적인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최상의 국가형태라고만 언급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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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가 보면 욕할만한 라이프니츠 정리

라이프니츠

 

1.방법론과 인식론

라이프니츠의 사고는 분석적 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을 두 축으로 한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체계에 대한 불신이 근대의 지적경향을 이룬 가운데, 많은 이들은 범주론과 삼단논법을 축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가졌다.

근대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러한 학문적 방법으로는 세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논리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라이프니츠는 언어가 알파벳의 조합으로 구성되듯 인간의 모든 사고도 기계적인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라이프니츠가 사용한 방법은 수학적 공리적 방법이다. 그는 언어를 단순개념과 공리적이고 분석적 체계로 재구성하고 기호학을 창안하며 컴퓨터의 시초가 되는 계산기도 발명했다. 또한 새로운 진리의 파악을 위해 조합법을 시도했다.

이러한 논리학적 시도들과 더불어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고와 언어를 하나의 통합된 원리에 따라 이해하고자 하는 보편언어학의 창안을 모색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당대의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모든 자연활동이 기계적 과정으로 환원된다는 신념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갈릴레이, 케플러, 뉴튼 등 근대과학자들의 기본방법론이 수학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로서의 수학을 라이프니츠도 채택한 것이다. 또한 보편언어에 대한 이념은 중세 이후 전개된 언어사적 상황과 관련깊다. 라틴어 중심의 중세언어체계가 붕괴되면서 언어가 민족언어로 분화되자 이전의 보편언어체계로 되돌아 가려는 움직임이 전개되었고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각 민족언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인류가 공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언어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구축하려 하였다.

 

논리학에 있어 라이프니츠의 주된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 혹은 대체하는 것이었지만, 존재론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근대의 형이상학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수준에서 재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일반존재론적 문제에서부터 특수형이상학적 주제들을 두루 포괄하며, 목적론을 핵심사상으로 계승한다. 당시의 대부분 학자들은 목적론을 과학적 사고에서 추방했지만 라이프니츠는 ‘이유가 없이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충족이유율로 목적론을 수용한다. 그밖에 라이프니츠는 자연에는 근본적으로 비약이 없다는 연속성의 원리와 자연의 단순성 및 풍요성 이론 그리고 창조의 완전성에 관한 가설들을 존재론적, 자연철학적 전제로 채택한다.

 

본유관념과 인식의 원리

라이프니츠는 인식의 근거와 방법에 대해 합리주의적 관점을 취한다. 인간의 인식의 원리는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라이프니츠도 본유관념, 선험적 원리를 인정한다.

 

경험론에서 특히 로크는 인간의 정신을 백지상태tabula rasa라고 생각하고, 어떤 종류의 타고난 관념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인식을 감관(感官)을 통한 경험과 관념연합, 추상 등의 관습적이고 심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경험론적 관점에 맞서 인간 정신은 일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원리가 바로 감각적 경험들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원리인데, 이는 모든 사고의 전제가 되는 모순율과 충족이유율 그리고 연속성의 원리를 비롯한 다양한 존재론적 원칙들로 이루어진다.

라이프니츠는 이에 대한 근거로 동물과 인간의 의식차이를 들어 뒷받침한다. 그에 의하면 동물은 단지 경험과 기억 그리고 단순한 관념연합과 추상행위를 하는 정도의 의식을 갖는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별 차이가 없을뿐더러 동물도 과학을 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동물과 인간의 의식수준 및 그에 따른 경험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의식활동의 수준을 지칭하는 지각의 명증성 개념으로 밝힌다. 명증성은 명석과 판명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명석은 어떤 대상을 그것의 외연적 징표에 근거하여 다른 대상과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의 의식상태를, 판명은 대상을 그것이 그것이게 하는 원리적 근거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명석은 경험을 단순히 수용함으로써 주어지는 인식을, 판명은 인과적 근거지움 또는 정당화라는 논증적 행위에 의해 주어지는 인식의 질을 가르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단순경험적, 관념연합적 인식과 그가 주장한느 과학적 인식의 차이는 명석과 판명이라는 의식활동의 차이에 기인한다. 의식활동이 판명하지 못한 동물은 논증적 과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라이프니츠는 과학과 같은 보편타당한 인식은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박한 경험적, 심리적 방식에 의해서는 주어질 수 없으며, 선험적 원리에 따라 논증적으로 경험을 구성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의 의식, 즉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데카르트 반박

데카르트는 수학적 인식도 공간적 직관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인식에 있어 경험의 비본질성과 선험적 사고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예를 들자면 공간지각을 경험할 수 없는 맹인도 논리적 사유에 의해 공간기하학을 배울수 있다.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감각자료의 비교추상도 원리적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이는 현대의 방법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관찰의 이론의존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논지는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실험과 관찰 검증이라는 경험적 통찰이 선험적 원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식으로 곡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진리의 종류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진리에는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가 있다.

이성의 진리-형이상학적 명제=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는 충족이유율을 비롯한 존재일반에 관한 원리와 그로부터 도출되는 명제들

-논리학과 수학의 명제=모순율과 공리적 구성을 통해 성립하는 명제들

사실의 진리-경험적, 역사적으로 얻어지는 지식들, 즉 반대가정이 가능한 것들이므로 우연 적 명제라 칭한다.

이성의 진리는 오늘날로 치면 종합명제, 사실의 진리는 분석명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실의 진리가 궁극적으로는 필연적인 이성의 진리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충족이유율에 따라 모든 현실적 사실들이 사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근본적으로 우연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실은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철저하게 합리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인간이 선천적인 지적 한계로 논증적이며 경험적 방식으로 단편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밖에 없지만 세계의 모든 존재자와 사건은 합리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생각이다.

 

충족이유율과 경험과학

이성의 진리=모순율에 근거=논리학, 수학등의 순수과학 성립

 

한계-관념적 구성에 근거한 가능성의 과학/실재하는 물리적 존재자인 자연을 인식하는데 있어 필수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음. 우리 삶의 사실은 논리적 가능성을 넘어 존재자의 사실적 근거가 되는 충족이유율에 따라 인식되어야 함=충족이유율은 주어진 현상을 원인에 따라 설명하는 자연과학의 인과율

 

사실의 진리=충족이유율에 근거=경험과학

 

라이프니츠의 경험과학에 대한 인과율적 요구는 근본적으로 양상논리적 사고(model logic)에 근거-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논리적으로 수많은 세계가 성립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특정한 하나의 세계만이 물리적 실재로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며 왜 하필 이 세계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자연과학의 과제이다.

라이프니츠는 최적의 원리, 조화의 원리, 단순성의 원리등을 인과율적 인식의 보편적 척도로 규정한다. 예를 들자면 공간의 형태에 관한 다양한 기하학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논리적 모순이 없다면 모두가 진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체계들중 물리적 사실과 부합하는가의 문제는 과학자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 선택의 기준은 인식의 경제성, 단순성, 미적통일성등이 통용된다.

 

라이프니츠가 충족이유율의 기준으로 규정하는 최적, 조화, 단순성의 원리들은 ‘생산적 자연의 건축술적 원리’라는 표현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통용되어온 자연철학적 가설들이다. 그리고 이는 바로 근대과학의 실증적 전개과정에서 경험론자들이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요인으로 배격한 것이다.

◎베이컨은 전통의 모든 목적론적 관점에서 유래하는 개념들-목적인-을 과학적 사고에서 배제하고 오직 현상의 인과적 진행방식을 나타내는 운동인과적 개념-작용인-만을 과학적 인식의 목표로 규정했다.

◎뉴튼 역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이 보여주듯이 형이상학적 가설의 배격을 물리학적 탐구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와 반대로 라이프니츠는 경험과학은 선험적 원리에 근거해야 하며,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합목적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기계론과 실증주의적 방법론의 한계는 여전하다는 것으로 라이프니츠의 유효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존재론과 자연철학

 

모나드 형이상학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실체관을 기본관점으로 하고, 거기다 자신의 논리주의적 합리론적인 방법론에 따라 형이상학을 재창출함으로써 근대적 차원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이것은 모나드론에서 실체개념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개진되어 있다.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 즉 실체를 모나드라 칭하는데 이는 그리스어중 하나 혹은 단위를 의미하는 monas에서 유래한 말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나드는 단순함과 분할 불가능함을 기본특성으로 한다.

모나드가 단순해야 하는 이유는 물리적 성질이 아니라 정신적 활동성에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 정신적인 활동성을 표상 또는 지각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의식적인 정신활동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라 부르는 수준의 활동까지 포괄하는 의식활동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모나드는 정신적 실재이다.

원자론과의 차이=원자는 무한히 작은 물리적 원소

→원자론으로 자연을 설명할 경우 제논과 같은 패러독스에 봉착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의 활동=의식=지각

→존재론적 의미; 다른존재와 관계하는 동시에 자신을 세계내적 존재로 가져오는 실체의 역동적인 자기 정립적 행위

→인식론적 의미: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의미

 

즉, 모나드는 무엇을 구성하는 원자적 요소가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역동적인 정신적 존재자이다. 또한 모나드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존재자이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모나드론의 의의

①정신적 자족성=모나드는 존재근거를 스스로 가진다. →다른 존재자로부터의 영향이나 도 움을 필요로 하지 않음/예를 들어 모나드들은 상호인과적 관계를 맺거나 정보교환을 위한 어떤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예정조화설

②지향성, 합목적성

모나드=전체(무한성)와 완전성을 지향한다. 여기서 완전성이란 시공간적 무한성, 인식적, 도덕적 가치를 모두 포괄하는 요어로 사용된다. 즉 모나드는 진선미의 이데아이거 나 혹은 순수형상적인 최고의 가치를 지향하며 변화발전하는 존재자이다.

 

=현실적으로 경험되는 존재자의 위상? 모나드의 실천, 즉 지각은 그것이 얼마나 명료하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모든 모나드는 지각활동에서 완전성을 지향하지만 지각활동은 선천적으로 부여된 한계안에서 이루어지므로 그들이 도달하는 명료성은 제한됨. 각 모나드들이 도달하는 명료성의 정도에 따라 세계에 대한 모나드의 존재방식과 인식내용이 구분된다.

③모나드의 신체성=정신의 현상형태로 신체를 수반

모나드는 인간의 의식에 명료한만큼 정신으로 나타나고

의식에 불명료한만큼 신체에 종속된 형태로 현상한다.

 

인간정신=논리적, 인과적 사고로 과학을 창출하고 반성을 통해 최고존재자에 대한 사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식=통각apperception↔지각perception

통각이 바로 이성이며 인간의식도 완전하지는 못한 것이다.

 

라이프니츠 논의에서 주목할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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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보면 신경질낼만한 데카르트정리

1.데카르트의 방법론과 과학철학

 

데카르트는 올바른 판단능력인 이성을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당시의 학문적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았지만 그럼에도 회의론으로 빠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보편적 인식능력으로서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학문적 위기상황을 겪고 있는 당시 상황을 이성에 대한 결함, 즉 이성은 진리를 담보해주는 기원적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사용에 대한 방법적 결함으로 보았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는 방법론이 중요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신의 방법론적 규칙을 네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1. 명증하게 참이라고 인식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2. 검토할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각각의 대상을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3.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갈 것. 단순한 인식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의 인식

4.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정도로 완벽하게 열거하고 전반적으로 검토할 것.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이 너무추상적이라 실제로 구체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진리 획득과정은 철저한 시행착오의 과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데카르트가 스스로 지적했듯이 위의 규칙들에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실질적 탐구활동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론을 통해 형식적 추론 규칙 때문에 초래될 위험성을 피하고자 했다. 이것은 삼단논법에 대한 그의 비판을 살펴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비판의 핵심은 삼단논법이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삼단논법의 본래적 기능은 이미 획득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도구이다. 문제는 삼단논법을 미지의 진리에 대한 발견의 도구로 보고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대전제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는 삼단논법은 새로운 진리 즉, 대전제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는 무력하다.

 

데카르트는 당시 현존하는 학문들 중 기하학과 대수학만을 신뢰했다. 그리고 어떤 지식체계가 성립하려면 모든 학문이 수학적 형태를 띠어야 하며 나아가 수학적 지식만큼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수학을 성립시키는 방법론이 모든 인식대상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의 영역밖에 있는 대상들에도 수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수학에서만큼 확실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확신은 어떻게 정당화 될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다. 인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데카르트는 우리의 인식조건들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물음에 답한다. 여기서 분석의 출발점은 수학적 지식과는 다른 기원에서 유래한 지식의 획득과정이다. 수학과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지식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 지식은 어떻게 획득가능한가? 그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일단 물질적 대상이 주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인식주체인 인간의 인식능력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동물로 간주하며 우리의 인식능력을 각각의 기능에 따라 감각 상상력 기억 이성으로 나눈다.

여기서 유의한 것은 본래적 인식능력을 지니는 것은 이성이 유일하다. 나머지 감각 상상력 기억은 이성의 인식활동을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식의 대상이 물질적 대상인 경우 이성은 이러한 보조수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대상이 비물질적 대상일 경우 이성은 혼자 활동해야 한다.

 

이제 데카르트가 어떻게 수학과 다른 영역에서도 수학만큼 확실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수학을 자연과학에 적용하는데 방해물이 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때문이라고 보았다. 그 견해에 의하면 사물들은 종류마다 성질이 다르며 유적으로 다른 대상들은 서로 다른 방법에 따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사고의 혁명성은 이런 생각을 뒤집는데서 출발한다. 데카르트의 관점에 의하면 모든 학문들이 탐구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대상들의 순서와 척도이다. 수학과 다른 학문간의 차이는 단순하냐 복잡하냐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닫. 즉 모든 학문은 하나이다. 이러한 학문간의 통일성은 방법론적 통일성에, 그리고 이 방법론적 통일성은 정신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규칙1: 인식대상이 아무리 달라지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정신의 방법적 사유는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자연과학을 확실한 방법으로 세우기 위한 데카르트의 첫걸음-

◎1성질과 2성질의 구분

1성질-수학적으로 해석되는 양적성질-대상에 내재하는 객관적 성질

2성질-대상이 신체에 작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여러 가지 감각적 성질-인간의 표상에만 있는 주관적 성질

◎새로운 지각(표상)이론의 고안

이런 구분에 바탕을 둔 데카르트의 지각이론은 단순히 지각과정을 설명하는데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대상이 제1성질만을 지닌다고 전제할 때 지각의 개념을 어찌 설정할지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뭣보다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제2성질에 대한 지각을 인간의 신체적 조건들과 물리적 대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1성질과 2성질의 구분은 물리적 대상들을 탐구하는데 있어 단순히 1성질만 고려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는 단지 제1성질만이 대상이 갖는 고유한 성질임을 역설하려는데 있다. 물리적 대상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를 통해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적 증명이 수학적 증명과 동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즉 자연과학과 수학은 모두 양적인 대상에 대한 탐구이므로 양자는 같은 종류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2. 데카르트 형이상학-이원론의 의미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17세기 등장한 새로운 과학의 탐구계획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정당화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한다.

① 새로운 과학을 규정하는 범주들의 정의, 새로운 과학의 인식론적 전제와 존재론적 토대 마련

②새로운 과학과 당대의 종교적 믿음 사이의 갈등을 제거하고 양자의 화해와 일치를 모색

 

이런 동기에서 시작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세 가지 존재증명을 내용으로 한다.

1. 자아(영혼)의 존재증명

2. 영혼을 전제로 한 신의 존재증명

3. 신을 전제로 한 자연적 사물의 존재증명

 

이 세가지 존재증명은 영혼, 신, 자연 사물의 본성을 새롭게 정의한다.

자아= 물질적 요소가 없는 사유로 정의

사물= 심리적 요소가 없는 순수한 물질, 물질의 본성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의미로 삼차 원적 연장으로 정의

신= 영혼과 자연세계의 존재론적 기원인 동시에 정신 안에 있는 특정한 관념의 원인으로 정의되는데, 그것은 가장 완전한 존재자이자 무한한 권능의 소유자를 표상하는 관념

 

이러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성찰의 내용은 ‘제1철학에 대한 성찰: 신의 존재 그리고 인간영혼과 신체의 구분에 대한 증명’으로 요약된다.

 

신의 존재 증명은 학문적 진리의 항구적 견고성을 보증하는 궁극적 근거에 대한 발견과정이다. 수학을 모델로 하는 데카르트적 의미의 이론적 인식은 명석,판명하게 직관되는 전제와 그에 따른 추론과 연역에 의해서 성립한다. 학문적 진리는 어떤 증명을 통해 그 참이 확인된 논증적 진리이므로 언제나 어떤 연역의 결론이다. 그러나 명증한 것은 왜 참인가?등등

 

데카르트가 신의존재를 증명하게 된 이유는 명증한 것을 참된 것으로 판단하는 정신의 본성과 그 존재론적 기원을 검토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석판명한 것은 왜 참인가? 정신이 참되다고 확신하는 것은 왜 참인가? 연역의 확실성은 전제와 추론과정의 명증성을 보존하는 기억에 의존한다면, 그 기억속의 명증성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가? 하나의 확실한 연역적 증명의 결론이 다른 증명의 전제나 원리로 사용되기 위해 자신의 전제와 증명의 문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자신의 근거로부터 떨어져나온 결론은 매번 재검토되어야 하는가? 한 번 성취된 명증성은 나중에 기억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데카르트가 자아와 사물의 존재증명을 한 것은 궁극적으로 정신과 신체를 포함하는 물질이 서로 다른 종류임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중세 스콜라 자연학과 17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자연과학간의 갈등관계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스콜라 자연학: 자연적 사물은 모두가 실체이며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실체적 운동의 원리는 식물과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에서 찾는다.

하지만 17세기 자연과학에서는 자연적 사물은 수학적 언어로 번역되는 양적 성질로 이루어져 있고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으로 표상된다. -기계론적 운동관

데카르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기계적 운동이며 이 운동은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다.

결국 데카르트가 영혼과 물체사이의 실체적 구분을 증명하고자 한 것은 기계론적 자연관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연장이 없음으로 파괴될 수도 없고 분할될 수도 없는 영혼의 불멸성을 보장함으로써 종교와 과학의 화해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3. 데카르트적 회의의 의미

데카르트 형이상학에서 회의는 형이상학적 성찰의 입구이자 형이상학적 체계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이다.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중세적 세계관은 치명적으로 붕괴되었다.

 

회의가 형이상학의 출발점인 이유

1. 상식과 이론 사이의 괴리 때문에(예를 들자면 중세때는 천동설이 대세였죠)

근대 과학의 세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감각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이성사용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더욱이 신이나 영혼 등의 형이상학적 대상은 감각적으로 표상할수록 애매하고 혼잡해진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었다. 초감성적 대상을 주제로 한 형이상학적 성찰은 그 어떤 경우보다도 감각으로부터 해방된 정신을 요구한다. 형이상학적 성찰이 회의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을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이를 통해 이성을 중세적 상식과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견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여기에 회의의 최대 유용성이 있다.

 

2. 회의의 과정이 자세하고 엄밀할수록 형이상학적 증명도 상세하고 엄격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논증은 회의의 근거에 대한 반대논증이며 형이상학적 사유의 여정은 회의가 열어놓은 길의 재정복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회의를 방법적 회의라고 하거나 또는 과장법적 회의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최소한의 근거로 최대범위의 부정으로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4. 코기토와 신

체계적 회의를 통해 데카르트는 회의할 수 없는 진리로 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코기토, 즉 자아가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데카르트는 이 회의 불가능성을 확실성 혹은 명증성으로 표현한다. 명석판명⇔애매혼잡

 

새로운 의문

한번 명증하다고 하면 언제나 명증한 것인가? 왜냐하면 명증성은 대상이나 명제 자체가 갖는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정신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고 새로운 사태로 나아가려고 하므로 하나의 사태에 집중할 수 없다. 정신의 이러한 시간적 한계 때문에 명증성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해야할 필요가 생긴다.

만약 이성이 한 번 명증한 것으로 파악한 것이 지속적으로 참됨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이성은 매번 그 명증성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가? 데카르트는 정신의 존재론적 기원인 신의 존재와 그의 선한 본성을 논증함으로써 이 물음을 해결한다. -명증성의 항구적 타당성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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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4일 수요일 스터디

스터디가 스터디 다워야 할터인데.....걱정이 크다.....맨날 딴 이바구만하다가.....술먹으러 가는 모임이 되고 있군하.....

본말전도.....뷁......

 

 

욕구, 생산과 분업

 

 

맑스는 사회주의에서의 욕구와 국민경제학 아래서 만들어지는 욕구가 다르다고 본다.

각각의 사람은 타인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데 이는 타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제하기 위해서이고...

-생산관계가 착취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나의 욕구 충족은 즉 타자의 희생이 전제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에서의 욕망은 정말 맑스가 예상한대로 자아실현의 욕구, 창조의 욕구, 그야말로 생산적인 욕구일 것인가......

 

라캉은 생존에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키는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구분한다.

그가 보기에 욕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언어체계인 상징계에 진입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타자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여기서 굳이 논거를 제시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모델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라캉의 사유에 대한 동의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trend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라캉의 논의에서 드는 의문점은 타자의 욕망이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전이되는 순간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의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의 정체도 사실 명석판명하지 않고 애매하고 혼잡스러운 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욕망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해답을 내리는 것은 사양......사실 잘 모르겠으니깐......패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맑스의 논의대로 사회주의체제라는 목가적 상태에서 욕망이 과연 타인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가에 대한

타당성의 확보가 아니라,  맑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라는 이윤이 지배하는 시스템에서는 나의 욕망의 실현은 타인의 희생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그 자체의 확인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사유체계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조급함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욕망을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한 지난한 단계의 실현을 가능케 하기 위한 충분조건으로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1단계일지도......

 

사유재산은 조야한 욕구를 인간적 욕구로 만들줄 모른다.

-왜겠니?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화폐의 지배를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가? 사람들의 생활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삶으로 바뀐지 오래가 아닌가......

 

국민경제학은 금욕적이지만 폭리를 취하는 구두쇠이자 동시에 금욕적인 그러나 생산하는 노예이다.....

 

국민경제학은 도덕적인 학문이다. 자기체념, 생활의 체념, 모든 인간적 욕구의 체념이 국민경제학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대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화폐는 할 수 있다. 화폐는 먹고 마실수 있으며 극장에 갈수 있고, 화폐는 예술, 학식, 역사적 진품, 정치권력을 알고 있으며, 화폐는 여행할 수 있으며 화폐는 그대가 모든 것을 갖게 할 수 있다.

화폐는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다. 화폐는 진정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인 화폐는 자기 자신 이외의 어느것도 창조하고 싶어하지 않고, 자기 자신 이외에 어떤 것도 구매하고 싶어하지 않거니와, 다른 모든 것은 결국 화폐의 종이기 때문이며 내가 주인을 갖고 있다면 나는 종을 가지게 되고 그의 종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모든 열정과 모든 활동이 탐욕 속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멜더스는 사치를 장려하고 절약을 저주한다. 결국 절약하기 위해서

리카아도는 절약을 장려하고 사치를 저주한다. 결국 사치하기 위해서

 

 

 

 

쉽하.....알바갈 시간이군하.....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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