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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닭둘기들과 먹이주는 할배

 

 

 

 

 

 

 

어찌나 평화로운 모습이던지요....

빵을 사다가 열심히 뜯어시더군요.....적어도 1시간은 뜯어시드라구요....

 

그러더니 비둘기들에게 확 뿌리시는데......

저도 뛰어들어 뜯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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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대성당

 

300년이 넘었다고 하는 세비야의 느티나무네요.....

흠.....정확히 느티나무인지는 몰겠구요....

걍 이정도 두꺼운 나무는 왠지 느티나무여야 할거 같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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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영화 파주는 불편한 영화이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요구하는 듯 하다.

중식(이선균)과 은모(서우)....

이야기의 축을 책임지는 두 주인공의 시선중 어느 것을 쫓아야 할 지 모르겠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있을 곳을 찾지 못해 허우적대는 중식이나 언니와 형부, 권력자인 나이트 클럽 사장같은 인간 군상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은모나.......

 

둘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둘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욕망이지 이루어지는 순간 더 이상 욕망이 아닌 것이다.

 

누구의 시선을 먼저 따라가 볼까....

음 중식의 시선을 먼저 따라가 보도록 하자...

 

중식은 운동권이다...하지만 그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모호하다..

수배를 받아 수감중인 선배의 집에서 선배의 와이프(중식이 사랑했으나 선배의 아내가 된)와 선배의 아기와 살고 있다.

중식은 시대적 마조히즘이 요구해서 만들어진 말그대로 '꿘'이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행복이 무엇인지 갈구할 틈도 없이...어느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은모는 중식에게 묻는다. 왜 이런짓을 하느냐고....

처음에는 멋져보였고 나중에는 하다보니 일이 자꾸 생긴다고 답한다....

여기에 중식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흔히 좌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안고가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는, 하지만 그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면서도 결국 되돌아가는.....

예수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있어야 행복해지는 걸까.....하지만 질 수 없음을 언제쯤 알게 될까??

 

선배아내와의 불륜을 벌이는 그 순간 방치된 아기는 끓는물을 뒤집어쓴채 화상을 입게되고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식은

파주에서 목회를 하는 선배의 집으로 다시금 도망친다....현실을 개혁하려는 운동권이지만 자신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해야하는

부조리의 연속....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

중식은 은모가 언니의 죽음이 자신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될까봐 그 모든 죄의 굴레를 자신이 뒤집어 쓰려한다.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99마리 양이 평온할 때에야 비로소 한 마리 양에 대한 시선이 올곧게 투사될 수 있는거다...

 

철거촌 투쟁은 용산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옳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옳은 것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한다.

 

요즘 션과 정혜영이 나오는 공익광고가 있다.

누구나 해야된다고 생각하지만 하지 않고 있는 사랑의 실천,,,나눔의 연대......

용산참사에서도 사건의 본질은 호도된다.

철거민이라는 이익단체의 자기보전이라는 이기심이 불러일으킨 비극이라는 조중동식의 흑색선전....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보다는 편안한 허구를 욕망한다.

불편한 진실속에 참가하는 순간 나도 불편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자괴감,,,,

중식의 포지션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지점.....중식이 파주에 있지 않았다면, 서울에 있었다면.....그는 철거촌 투쟁이 아닌 또 다른 투쟁속에

자신을 던져야 했을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지....의미도 알 수 없는 쳇바퀴굴리는 투쟁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작은 것이라도 내게 의미부여가 되고 나에게 삶의 충만함을 만끽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좋다....

 

작은 진실을 외면하지 말자....

우리는 여전히 흑백논리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운동을 하느냐.....운동을 접느냐.....

이러한 이분법의 자의적 해석.......바로 중식을 통해서 박감독은 이것을 지적하고 싶어하진 않았을까??

 

 

그러한 지점에서 보자면 은모는 훨씬 현명하고 훨씬 적나라한 고민속에 자신을 던져둔채 괴로워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하는 언니, 그 언니와 결혼한 서울에서 온 대학생....

 

이런 비극적 현실 속에서 은모의 선택은 역시나 도피이다.

하지만 중식의 도피가 포장된, 즉 정의라는 외피를 뒤짚어 쓴 채 자신을 정당화하는 도피라면 은모의 도피는 자신을 있는대로 까발리며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는 인간적 도피이다.

 

은모에게 자신을 정당화할 외피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이트 클럽의 사장은 은모에게 또 하나의 오브제 a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상을 은모는 붙잡아야 할 지 버려야 할지 알지 못한다.

솔직히 우리 모두가 알지 못하는 지점인 것이다.

 

은모는 왜 형부를 형부라 부르지 않았을까....

중식은 자신이 보호자의 포지션에 머무를때 은모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모가 자신을 형부라 부르는 순간 부모의 입장을 벗어나 수평적 관계의 회복으로 돌아선다..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는 이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관계로 전환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때 은모는 잡을수 없는 욕망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그 욕망을 집어 던지고 만다.

 

은모는 도피를 한다...그리고 되돌아온다. 그리고 또 도피한다...

왜??

 

영화는 은모의 귀환으로부터 시작해 은모의 도피로 막을 내린다.

우리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은모와 중식은 끝끝내 서로의 속내를 확인하지 못한다.

아니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군상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아마도 감독이 그러한 비약의 가능성을 암시했다면 파주는 그렇게 어려운 영화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고...

이러한 호평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파주라는 신비스러운 '이미지'의 공간.....

현실이지만 비현실적인 공간....

 

우리는 어떠한 공간에 살고 있는걸까.....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으로부터 도피해야 하는가.....

 

이것이 파주가 우리에게 묻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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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3탄

『서양 근대철학』-서양근대철학회 엮음-

 

칸트의 비판철학(by한자경 선생님)

 

 

인간 인식의 기원은 무엇인가?

 

순수이성비판 서론: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인식의 기원이 모두 경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론이 자체로 가지고 있는 한계인 귀납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칸트 작업의 시발점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칸트는 전제하게 된다.

Ⅰ.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여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적 인식이면서,

Ⅱ. 그 기원이 경험에 있지 않은 선험적(경험 이전)인식

즉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제에 의하여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근대철학의 질문은 칸트에 의해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선험적 판단

vs

경험적 판단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보편타당성을 얻을 수 없는 판단

종합 판단

vs

분석 판단

새로운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 즉 주어개념을 분석한 것이 아닌 판단

술어가 단순히 주어개념을 분석한 것.

ex)아빠는 아들이 있는 남자이다.

 

 

그렇다면 선험적 종합판단은?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식이면서 단지 경험적으로 귀납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설정된 신으로부터 기원하는 것도 아닌 판단이 되시겠다.

그러믄 신도 아니고 세계를 통해 얻은 경험도 아니라면 인식의 보편타당한 기원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감??

 

칸트 왈= 선험적 종합인식은 바로 인식의 주체인 인간자신에게서 구할 수 있느니라...

합리론의 사고-신도 아니믄서 세계의 질서를 한낱 미물인 인간이 어찌 아느뇨?

경험론의 사고-백지상태에서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세계를 알아가는게 인간이여

 

칸트 옹의 사고- 인간은 바로 인식주체로서 그 자신의 고유한 틀(형식)에 따라 세계를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느뇨..... 그리고 인식대상으로서 세계는 바로 그 형식에 따라 보여지고 이해되고 해석되기에 그 형식은 인식된 대상세계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제기-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감?

그게 없다면 사람 수만큼 다양한 세계가 존재할 것 아닌감??

 

그래서 칸트의 비판철학은 ‘상호주관적 보편성’을 강조한다. 즉 나의 주관과 너의 주관이 합치되는, ‘객관으로서의 주관’을 강조하게 되는거여....즉 공통된 세계로 읽혀지는 것이 있다면 세계를 읽는 공통적 틀이 존재할 것이란 말이여.....미분화된 차이들은 존재하겠지만 그에 앞서 공통점도 있는 것이지....예를 들어 동해의 일출을 보고 눈이 조낸 좋아 태양의 흑점까지 보는 사람도 있을거구, 눈이 조낸 나빠서 그냥 불그스름한 동그라미로 보는 사람도 있을거구....하지만 모두가 그 불그스름한 뭔가를 본다는 공통의 인식은 있다는 거쥐.....

 

자 그런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바로 이러한 인간 인식의 보편적 틀,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계를 그렇게 보고 그렇게 사유할 수 밖에 없는 최소한의 기본적 틀을 밝혀내고자 하는 거임...

그 틀 자체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식의 형식인 것이다. 즉 바로 선험적 형식의 인식은 인간의 주관 자체에 기원을 둔 선험적인 것 되시겠다...

 

그렇다면 그 틀의 정체는 뭥미??

순수이성비판은 우리의 경험적 세계인식이 이미 그러한 틀에 기반한다는 통찰 위헤서 우리의 경험적 세계인식을 분석함으로써 그 안에 내재된 선험적 형식을 밝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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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2

 

칸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

①합리론의 한계: 독단론에 빠짐

②경험론의 한계: 회의론에 빠짐

③제 3의길에 대한 모색⇉ 비판철학

 

 

서양근대 철학의 과제는 어떻게 인식이 가능한가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자연에는 객관적 법칙성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객관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자연법칙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등의 경험이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인식의 가능 근거 및 필연관계와 보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찰과 같은 경험만으로는 불충분함을 알게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철학적 물음이 인식주관이 객관세계에 대한 보편타당한 필연적 인식을 갖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는 인식의 연결고리는 초월자로서의 신이다.신은 주관체인 인간과 객관체인 자연을 창조한 공통 근거이고, 여기에 기반해 인간의 영혼은 신의 창조이념을 신에 의해 획득하게 됨으로써 세계의 원리를 알게 된다. 신은 인간이 파악하는 진리의 확실성을 담보해주는 확실한 근거로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 데카르트의 회의를 통해 그 확고한 기반은 흔들리게 되고 다시금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물음과 그의 근거 확보에 대한 것이 근대철학의 1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자신의 회의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는데 있어 스콜라 철학에서 해왔던 방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이 가지고 있는 본유관념의 근거는 신의 창조이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신이 부여한 본유관념을 통해 파악되는 이성적 진리는 세계 자체에 필연적인 신적 진리이며, 따라서 그 인식은 선천적으로 보편타당성을 지닌다.

 

하지만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신의 피조물인 인간들사이에서도 논의가 엇갈리는 지점이다. 설사 신의 존재가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신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본유관념을 부여했는지는 어떻게 확인되는가? 수많은 피조물들 중 왜 하필 인간에게만 본유관념이 주어지는가?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경험론자들의 비판은 시작된다. 이러한 합리론의 독단은 경험론자들이 볼때 중세신학의 답습에 불과한 것이다. 경험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영혼은 본유관념이 없는 백지상태에 불과하며, 인간의 인식은 감각적 경험과 그로부터의 귀납적 추론에 의해 얻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회의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귀납추론은 예외적 사실이 발견되는 순간 그 논거가 상실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아직 예외가 발견되지 않은 지식이라 하더라도 언제 예외가 발견될지 모르는 상황에 불과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발견되기 전에 뉴턴역학은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결국 경험과 귀납논리의 한계에 의해 인간의 이성은 필연성이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 경험적 인식은 우연적이고 개연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경험론에 의하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연과학적 명제는 개연성만 있을 뿐 필연성을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확실성을 가진 수학적 명제 또한 세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분석명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학이나 물리학등에서 가지고 있는 근본명제들은 각 분야에 있어 철학적 정당화없이도 이미 세계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런 인식의 가능근거를 설명하지 못하는 경험론의 회의론은 개별과학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철학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수학적 진리가 세계의 존재질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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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은 내부 관람료와 외부관람료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물론 외부관람료는 처음에 내는게 아니라 궁전입구에서 내부관람료를 구입하고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면 뒤편에 다시 궁 정원으로 나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답니다...

 

이미 내부를 한참 돌아본 뒤라 지친 상태.....그래서 피곤한 마음에 '패스'를 외친다면 그것은 천추의 한을 남길 일....

 

정말,,,조낸,,,,,매우,,,,몹시,,,,아주,,,,,무척,,,,,,대끼리....이빠이.....

아름답고 좋답니다....

 

내부를 안보더라도 외부 정원 구경은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슴다.....

 

이 사진은 암 것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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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면 에펠탑....

에페르탑...!!!

 

파리의 상징....에펠탑.....

 

에펠탑 건너편에 있는 궁전위에 올라가서 본 광경....

 

여러곳에서 에펠탑을 바라볼 수 있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야경이야말로 절경이 아닐 수 없다오.....

 

그 궁전이름이 샤이오궁이라 하더이다....

 

물건팔려고 하는 '삐끼들이 너무 많아 기분을 약간 잡치게는 하나 파리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라오...

 

좋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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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히의 개선문....

파히....개선문....

 

 

개선문.....역시 사진으로 보는 거와 실물로 보는 거는 차이가 있더이다.....

 

생각보다 조낸 크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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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전체 모습....

루브르박물관이더래요...

 

루브르박물관앞에서 한장 찰칵!!

 

한 번 보는데 적어도 3일이상은 걸린다는 거대한 박물관.....

 

그래서 들어가지는 않았더이다....

 

여행자는 시간을 포기할지 돈을 포기할지 결정해야 하더이다...

 

그래서 빡빡한 일정을 고려해 박물관 내부 관람은 패스......

 

ㅠㅠ

 

언젠가 꼭 다시 가서 볼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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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하이델베르그의 정경

 

칸트가 규칙적으로 걸었다고 전해지는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그의 정경

 

사진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정말 평화롭고 여유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작은 도시.....

 

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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