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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3/15
    유연성과 원칙 사이
    hongsili
  2. 2012/03/09
    선거 단상
    hongsili
  3. 2012/02/20
    사사로운 간단 원칙(1)
    hongsili
  4. 2012/02/19
    자존감의 정치...(2)
    hongsili
  5. 2012/02/10
    생각난 거 메모..(1)
    hongsili
  6. 2012/01/08
    참세상 연재글 모아두기
    hongsili
  7. 2011/08/10
    나랑 싸우자!(7)
    hongsili
  8. 2011/08/04
    우리에게 '일'이란 어떤 존재일까?(4)
    hongsili
  9. 2011/07/24
    판결 관련 메모(1)
    hongsili
  10. 2011/06/21
    한겨레 21 유감(4)
    hongsili

잡생각 메모

밀린 일 때문에 바쁘기도 하고 지독한 목감기 때문에 컨디션이 정말 메롱이다.

 

근데 꼭 기록해두고 싶은 게 있다.

 

얼마 전에 변영주 감독이 진보신당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나섰다.

전후 사정은 나도 잘 모른다.

허나, 누가 부탁한다고 마음에도 없는 일을 그녀가 억지로 했을 것 같지는 않고

또 평소의 행보에 비추어볼 때 그닥 예상못한 일도 아니기는 하다.

 

그런데, 그 전에 나는 그녀가 당적을 옮겼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예전에 연구소 모임에 특강 오셨을 때 뒷풀이 자리에서 그녀는 노와 심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표명한 바 있다. 

이들의 생각에 동의할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이 사람들이 너무 좋다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그래서, 혹시나 그녀가 그들을 따라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권력에 대한 욕심입네 뭐네 사람들이 거품을 물고 욕을 해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노/심/조에 대한 애정이 적지 않다.

그들의 행보가 아쉽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개인의 야욕 때문이었다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심으로 잘 되었으면 좋겠고, 

국회에 입성한다면 기여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우리 불쌍한 '조'... ㅜ.ㅜ)

아마, 예전에 노심조를 좋아하고 지지했던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들이 다 남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애정 (?)과 정당 활동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당원'과 '빠'의 차이점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노동없는 민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최장집 교수가

개인적 인연을 들어 손학규 후원회장으로 나섰을 때 세상이 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정실 정치, 정당없는 정치, 노동없는 정치를 비판하셨던 분이... 이게 뭔 일인가....

일개 필부도 아니고... 그것이 미치는 파장에 대해서 모르지도 않으실 분이....

 

이런 맥락에서

변영주 감독이 그 좋아하던 노/심이 아니라 진보신당의 당원으로 남아 있고 공개적 지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은 다소 상징적이다. 그리고 이건 변 감독 개인 뿐 아니라 노/심을 아직도 아끼고 지지하지만 진보신당 당원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정치학자도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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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성과 원칙 사이

기본적인 원칙을 강건하게 지켜나가는 가운데,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전진'에 대한 목표를 잊지 않는다면,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현실 세계 속에서 이 문제는 좀처럼 분명하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또, 거대담론으로서의 진보와 일상 정치에서의 진보가 항상 함께 가는 것도 아니다.

 

현실성, 유연성을 이유로 들면서

일상의 가부장과 권위에 순응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결코 버릴 수 없는 가치일텐데 그것을 전술적으로 잠시 접어둘수도 있는 것인양 취급하는 모습을 요즘 많이 본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더랬다.

"그깟" 전향서 한 장의 무게가 무엇이길래, 저들은 그 고통을 감내했던 것일까?

 

엊그제 일본어 수업 중에 선생님께서 예전에 아들 출생신고를 하면서  '소화@@년' 이 아니라 '서기@@년'이라고 쓰기 위해 공무원과 얼마나 실랑이를 벌였는지 말씀하시는 걸 들으며 또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싸움에 져서 '소화'로 표기했던 일이 아직도 속상하시단다..ㅡ.ㅡ

나도 주민등록증을 안 쓰려고 필요할 때마다 여권을 제출하고 들고 다니면서 실랑이를 벌이고 불필요한 설명을 하느라 고샘했던 기억,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하면서 뒤통수가 따가웠던 소소한 기억들이 있는지라,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갔다.

 

그런데....

대개는, 고루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비춰지겠지만,

그래도 짧지 않은 (?) 인생 돌아보건데, 유연성보다는 원칙이 우선인 것 같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것도 우습다. 

 

물론, 하늘에 한점 부끄럼 없는 원칙적인 삶이라는 게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겠지만,

그나마 최대값을 지향해야, 최소값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삶은, 사실 많~이 피곤하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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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단상

요즘처럼 정치판이 어지럽고 엉망진창인 시기는, 철들고 나서도 처음 보는 것 같다.

혹시 해방 정국이 이랬을까나??? ㅜ.ㅜ

 

도대체 인지부조화 때문에 정신사납기가 그지없다.. 

 

공천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 새삼 원칙이 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마치 새인물을 공천해야 개혁이고, 기존 의원들을 재공천하면 구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참 우습다.

무슨 최신 휴대폰 세일즈 하는 것도 아니고... ㅡ.ㅡ

 

거기에다 모바일 투표하고 국민경선해야 '민주적'인 것이고, 당원들만 후보 추천에 참여하면 그건 구악이다

진보정당에서 '진성당원' 제도를 자랑으로 내세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건 도대체 뭔가 모르겠다.

정당이고 뭐고 다 해체하고, 방송국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그냥 모바일 투표로 다 결정해버림 어떨까 싶다.

 

현재의 경제상황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새누리당에서 출마한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자기와는 무관한 일인양 이야기하고

실질적으로 현 정권의 정책과 그리 다르지도 않았던 이전 정권 사람들은 모두 집단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 싶다.

 

통합진보당, 진보신당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문제를 두고 한창 신경전인데

민주노총 전직 간부들은 민주당에 개선장군처럼 입당....

닭쫒던 개라는 표현은 딱 이럴 때 쓰는 거 아닐까....

 

진보신당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접었던 상황에서

또 사람들이 비장한 각오로 한걸음씩 옮기는 걸 보니 차마 모른 척 못하겠고...

 

이번 총선과 대선을 지나고 나면 '일단' 87년 체제는 문을 닫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모두 안녕 이라고나 할까...

물론 역사에 단절이야 없다지만

좀더 차분하게 새로운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포맷 (!) 상태'에는 이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당장 선거에서 진보신당이 '공식적으로' 소멸될 것이 거의 분명해보이지만 (ㅜ.ㅜ)

그 이후를 웬지 기대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모두들 장렬하게 '산화'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저,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 생각하며 조금만 숨을 고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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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간단 원칙

뭐 하찮은 소생의 도움을 갈구하는 곳이 많은 건 아니지만,

활동의 총량을 늘릴 수 없다는 점에서 원칙을 준비해두는 건 필요하겠다.

 

몇 가지 예전부터 생각해두었던 건데, 잠깐 메모로 정리해두자

 

1. 각종 '자문'

뭘 안다고 어디 자문하러 다니겠냐마는

의외로 면피용/정당화용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는 곳이 적지 않아 종종 불려다닌다.

 

이 때 참여 원칙은 세 가지

 

첫째, 정부(관련)기관의 경우 내용적인 측면에서 국가단위 서베이/조사 같은 기초자료를 만드는 과정에는 사회역학 연구자로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

 

둘째, 그밖의 정부(관련)기관의 자문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칙은 에드워드 사이드 할배의 co-optation 에 대한 지적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또한 추상적인 자문일수록 실제 내용보다는 구색갖추기나 면피용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경험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또한 나 말고도 도와줄 사람이 수두룩하다.

 

셋째, 사회운동 진영의 자문이나 도움 요청은 시간을 낼 수 있고, 전문성으로서 자신이 있는 분야라면 성실히 응한다. 하지만 문어발식 영역 확장이나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이름 올리는 것은 하지 않는다

 

 

2. 토론회나 발표

 

첫째, 독립적인 (?) 학술 행사에는 연구자로서 열심히 (?) 참가한다.

 

둘째, 사회적/정치적 성격의 토론회, 학술행사에는 개인이 아닌 조직의 이름으로 참가한다.

 

 

3. 프로젝트

 

첫째, 정부의 정책용역에는 가급적 참여하지 않는다. (비교적 독립성 보장되는 연구재단이나 기금과제는 오케이)

근데 이 경우 가끔 생계형 일자리로 연루될 때가 있어서 고민이여... ㅡ.ㅡ

 

둘째, 시민사회 진영의 프로젝트성 과제는 시간이 나고 전문성이 있는 영역이라면 기꺼이 참여한다. 마찬가지로 마구잡이 참여는 절대 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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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생각나는 거 있음 나중에 추가하자...

쓰고 보니 어디에서 대단한 러브콜이라도 받는 사람 같네 ㅋㅋ

아무도 찾지 않는데 혼자서 막 복잡한 원칙을 만들고 있는 꼴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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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의 정치...

지난 1년, 아니 민주노동당의 분당 이래로 '안정'의 시기는 없었던 것 같다.

무언가 항상 유동적이고 잠정적이었으며, 그래서 확신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돌아보면,

생애 처음으로 당원이 되고, 또 당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활동을 함께 하면서,

항상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뿌듯했었다.

가슴벅찬 순간들도 적지 않았다.

대중강연이나 포럼 등에서 당의 이름으로 발표를 하고,

청중들로부터 비판과 격려, 혹은 하소연이나 부탁을 들으면서

당이 나에게 부여하지도 않은 괜한 (?) 책임감마저 느끼곤 했었더랬다.

 

사회운동에는 여러 영역과 층위가 존재하지만,

운동과 제도를 매개하는 고리이자 현실정치 수단으로서 "결국은" 당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정치적인 정체성을 당과 동일시하려고 했다.

별도의 정치서클이나 정파조직에 가담되어 있지 않은데다 내가 활동하는 단체들은 특정 부문에 집중하고 있는 터라

정치성과 관련해서라면 나에게 당이 유일하고 우선적인 귀속단체였다.

 

그러나 지난 통합과 독자생존을 둘러싼 논쟁의 과정은 피로 그 자체였다.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할 때와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기어이 다시 합쳐야 한다고 했다. 그리할 수밖에 없는 정세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그런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석연찮기는 하지만 통합이 되면 어쨌든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통합안이 부결되었다.

그 과정 또한 석연치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독자적인 생존 노력을 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일부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탈당해버렸다. 그럴 거면 투표는 왜 했나 싶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이 국참당이라는 자유주의 세력과 합쳐지는 걸 막아야 한다던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국참당과도 통합을 이루어냈다.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했다고는 하지만, 유시민은 사회 정책 영역에서 박근혜보다 더욱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이라크 파병, 의료급여 제도 등을 둘러싸고 보여준 그의 행태, 민주노동당 사표론 등등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선거 때 전술로서 '비판적 지지'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유시민이라는 인물, 또 그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세력이 포진한 정당에 내가 귀속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그렇다고 소위 독자파들이 보여준 당내 정치의 모습도 가히 아름답지는 않았다. 

더구나 당내 게시판의 정신병적 상태는 정말 환멸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도 저도 다 보기싫어 탈당하려 했지만, 미적거리던 와중에 홍세화 선생이 대표로 출마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는" 그의 심정을 듣고서도 탈당할 만큼 매정하지는 못했다. 

 감정은 그러했지만 피로는 가중되었고, 모든 것에 심드렁해져갔다.

물론 당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가 그리도 힘들다는데,

출마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그 어떤 선거보다 정치가 아닌 정치 공학이 만개 중이다. 

또다시 온 국민이 정치평론가가 되었고, 내놓는 정책들만 봐서는 정당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짐작할 재간이 없어졌다. 소위 새인물들이 소용돌이처럼 정치판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데, 그야말로 빨려 들어갈 뿐 흐름이 바뀌지는 않고 있다.

나는 그저, 내 손으로 탈당계라는 비수를 꽂고 싶지 않을 뿐,

4월 선거가 지나면 진보신당이 자연스럽게 해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냉정하게 이 예측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홍세화 대표의 때늦은 신년 인사글 때문에 마음이 무척 무겁다.

 

 

척탄병이 되기에는 회의주의가 너무나 강렬하고, 

눈감아 버리기에는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내면의 불꽃이 불편한 충동질을 해대는 판국이다.    

누구도 시지프스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이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면, 하기 싫어도 그리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자기기만과 자만심이 아닌,

자존감으로 정당활동을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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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 거 메모..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겠는데,

예전부터 한번 의견을 정리해보고 싶었던 것...

 

왜 멀쩡한 성인 여성들이 혀짧은 소리를 하는가..... ㅡ.ㅡ

모든 여성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예전에 본과 2학년 (말하자면 4학년) 여학생이 토론수업 중에

'그래서여~~~' 하면서 혀짧은소리로 대대대대' 하는 거 보고 식겁했는데

공적 자리에서 그런 말투를 쓰는 여학생과 심지어 직장인 (?)이 의외로 많더라는....

 

중딩인 조카 토끼도 이런 현상을 지적하는 걸 보면, 하나의 사회적 현상아닐까 싶기도....

 

이건 변종 가와이 문화인가???

 

시간 날 때 좀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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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싸우자!

골치아픈 문제가 있어서 이리저리 잔머리 굴리다가 상관없는 글 한편...

 

예전에 동네 노점상 벽에 "서울형 데이케어센터" 써붙여 놓은거 보고

아주 지랄도  풍년이라 생각했다.

노인들 찾아올까봐 걱정되서 일부러 영어로 이름 붙였냐?

 

서울시청 내에 영어전용카페를 차렸다는 소리를 듣고는 어이가 가출해버렸다.

세상에 어떤 나라에서 수도 청사 안에 남의 나라말 전용 카페를 차려놓는다냐...???

알고 보니 내선일체가 수도서울의 정책 원칙이었던 겐가?

 

이제 "마더하세요" 니 "유스하우징" 까지 듣고 나면

이 인간들 머리 속에는 뭐가 들어 있나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너네들 영어 얼마나 잘하냐?

 

사실, 한겨레 21의 "히든스폿" 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영어 모르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가서 물흐리는게 두려워 되도 않는 영어로 쓴 것일까?

 

하긴.... 요즘 영어 이름붙이기의 진정한 슈퍼갑은 아마도 "인 어 베러 월드" 일 것...

덴마크어 원제는 "복수 (Hævnen)"라는데, 그걸 굳이 영어발음 한국어로, 심지어 "베터 월드"도 아니고 "베러 월드"라고 표기한 수입사의 초감각에 그저 감탄할 밖에....

 

이자들, 다 나오라고 하고 싶다.

나랑 싸우자!      꼭 영어로!!!

영어 얼마나 잘하나 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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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이란 어떤 존재일까?

낮에 뻐꾸기 선배랑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며 그녀의 요즘 고충을 들었다.

일, 일터, 동료.... 들에 대한 이야기들...

인간사 많은 공통점들이 있으니, 익숙한 이야기들이지만서도,

또 세부적인 차이점이나 구체적인 맥락 효과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친구들 만나면 이야기의 거의 8할이 '회사' 이야기다. (나머지 2할은 무한도전 이야기 ㅋㅋ)

이자들이 첨 직장생활 시작할 적에는 누구네 상사가 더 일을 못하고 성격이 괴팍한가 배틀을 벌이더니,

한동안 서라운드 비난 시기를 지나,  이제 중간관리자에 이르러서는 하급자들에 대한 성토로 너무나 분주하다.

어쩌면 그렇게 개념없고 일 못하는 인간들이 내 친구 주변에만 몰려있단 말인가? ㅋㅋㅋ

네가지가 없다거나 성격이 이상하다는 건 주요 주제가 아니다.

대개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그냥 일이나 말끔하게 잘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영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니, 뻐꾸기 선배가, 담에 내 친구들 만날 때 자기도 끼워달랜다.

자기가 1등할 수 있을 것 같다나? 천만의 말씀이다...  이자들이 얼마나 강력한데 ㅋㅋㅋ

 

대개 그런 자리에서 나는 거의 할 말이 없다.

뭐 쪼그만 연구소에 비슷한 지향을 가진사람이 모인데다 실적, 갑과 을... 뭐 이런 갈등관계의 여지가 적다보니 그렇게 고통을 받을만한 일이 여간해서는 없다. 그래서 주로 이야기를 들으며 '관찰'한다.....

 

그 때마다 도대체 한국의 이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다들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행복과 불행의 근원이 다 일로부터 올 수 있는지...

정말 생활을 '압도'한다고나 할까...?

가정생활이나 기타 사회생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압도'라고 표현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프로젝트, 마감, 실적...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ㅡ.ㅡ

 

예전에 오빠 머리에 동전만한 땜빵 (원형탈모증)이 생긴 걸 보고 깜놀했다. 심지어 역류성 식도염도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나 자기 몸을 아끼고, 운동에 미처있는 사람이지만, 그자 역시 모든 정신은 회사 일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  참여하고 있는 SSK 과제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을 물었는데, 압도적으로 '일' '직장' '회사'가 꼽혔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주변의 '직장인'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중독'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한편으로는 일로부터 좀 벗어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토록 중요한 삶의 가치인 일을 함부로 빼앗거나 혹은 더욱 열악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훌쩍 새 삶을 찾아 떠나거나, 아니면 개척자 정신으로 새로운 일들을 쓱싹쓱싹 시작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문화적/경제적/사회적 자본을 갖지 않은 자에게 이는 더더군다나 어려운 일...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일이 좀더 할만한 것이 되도록, 고통보다는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게 필요할 것이다....

 

* 지난 4월에 노건연과 프레시안이 함께 기획기사를 낸 적이 있다. 그 때 썼던 글 한 편....

 

 

쌍용자동차 주변에서 벌어진 일련의 죽음들은 연민, 분노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철학적 주제를 생각해보게끔 만들었다. 흔히 한 사회의 실업률이 높아지면, 정신건강이 악화되고 자살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살이나 다른 건강 문제를 경험할 확률이 높다는 것도 거의 상식이다.

 

이것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보편적이며 불가피한 현상인 것은 아니다. OECD 국가들을 비교해보면, 동구권 국가들을 제외할 때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포함하는 남부유럽 국가들의 실업률이 가장 높지만 정작 이들 국가의 자살률은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같은 맥락에서, 일국 내에서 실업률과 자살률의 시간적 변동이 모든 나라에서 일관되게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또 자살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망률 측면에서도, 실업률이 상승하거나 경기가 악화된다고 반드시 그에 상응하여 사망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사회가 겪는 실업의 고통은 다소 남다른 데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진 걸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물질적 보상,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다.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수억대의 주식부자로 신문에 이름을 올리든가, ‘별볼일 없는’ 상가 건물이라도 물려받지 않는 이상,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해서 벌어오는 돈’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또한 사회학자 Jahoda는 일이 주는 사회심리적 편익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상에 시간 구조를 만들어주고, 핵가족 바깥의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접촉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삶의 어떤 목표나 목적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개인의 지위와 정체성의 중요한 측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1 학술적으로 표현했다 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어쨌든 이러한 본성 때문에, 실업 혹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으로도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에는 부정적 영향이 발생한다.23

 

그러나 이런 보편적 설명에 덧붙여, 한국사회에서 일과 실업의 의미는 특별히 각별한 구석이 있다. 우선 이 사회에서 나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줄 이는 우리 자신밖에 없다. 2008년 현재 실업자들의 실업급여 수급률은 40% 남짓에 불과하다. 임금근로자의 고용보험 적용률이 60% 내외인데다 실업율이 과소추정된다는 비판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실업급여 혜택의 범위는 상당히 제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실업급여를 받는다 해도 임금 대체율은 형편없다. 국제 비교가 가능한 2007년 시점에 실업 1년차의 임금대체율은 31%로 미국․영국과 더불어 OECD 국가들 중 최하위권이다.4 일자리를 잃으면, 그야말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돈 뿐인가? 한국 사람들의 근로의욕은 유난해 보인다. 2005-2008 세계가치조사에 참여한 OECD 19개 국가들 중 삶에서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응답한 비율이 51.8%인데 비해 한국은 61.9%로 최상위권에 포함되어 있다.5  강수돌 교수의 보고에 따르면, ‘이혼보다 실직이 더 고통스럽다’는 말에 미국인의 41%, 일본인의 36%가 동의한 반면, 한국인은 65%가 여기에 동의했다.6 

 

하지만 한국인들이 태생적으로 ‘근로윤리’가 유별나다고 보기는 어렵다.

“망국의 운명에 처한 민족이지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자체를 서럽게 생각하며, 마땅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야 할 시간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손실이라고 여깁니다. 불필요한 노동은 건강을 해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1904년 한 일본군 대위는 서방의 저널리스트에게 이렇게 조선인을 흉보았다.7  한국인이 원래부터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게다. 그보다는, 앞서 살펴본 대로 일 아니면 살아갈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2008년 시점 OECD 국가들의 연평균 노동시간이 1,764 시간인데 비해, 한국은 2,256 시간으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일중독이라고 알려진 일본조차 1,772 시간이니, 그에 비하면 500여 시간, 일일 8시간 근무를 가정하면 무려 60일, 두 달을 더 일하는 셈이다.8  생활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는 실정이니, 그것이 애정이든 애증이든, 한국인의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에 비해 클 수밖에 없다. 일이, 혹은 회사가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로는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한국사회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이 남다른 상처가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노동시장 유연화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노동자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는 세계의 여러 연구자들이 반복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논문도 한국의 쌍용자동차 ‘사태’만큼 극적인 사례를 보여준 적이 없다.

노동자들은 그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 날 외국 기업으로 주인이 바뀌었고, 또 어느 날 그 주인은 변심하여 회사를 팽개치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노동자들이 일을 안 해 회사가 어려워지기라도 한 듯, 해고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헬기가 상공을 날고, 투석전과 곤봉이 난무하는 전투가 벌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다쳤다.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 또 그 가족들도 위태롭기는 매한가지다. 파업 참가 노동자들에게 청구된 손해배상 금액은 상상을 초월한다. 필자가 읽었던 논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올 ‘잠재적’ 영향들을 경고했지, 이렇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효과를 나타난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었다.

 

2000년대 중반 세계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는 의료보험 문제를 두고 진보진영은 물론 중도 우파에게서도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회사에서 보험을 안 들어주니까 많은 직원들이 무보험자, 혹은 메이케이드 (의료급여) 수급자가 되어 결국 납세자들의 부담을 증가시킨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이 문제를 노동자들의 건강권이 아닌 납세자의 권리 침해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기업이 이윤 창출에 드는 비용을 노동자나 다른 시민들에게 전가했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9  도쿄 전력, 그와 결탁된 소수의 관료들의 이해 추구가 현재 일본 시민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어떤 부정적 결과를 미치고 있는지는, 이러한 비용 외부화의 또 다른 생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해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고는 기업이 언제고 택할 수 있는 쉬운 옵션이어서는 안 된다.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업에게 ‘도덕’을 요구한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 노동과 다른 요소(원료, 기계)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 노동자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생산라인 가동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지면 가동을 중단하기도 하는데, 이때 기계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자원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기업들이 절감한 비용, 증진시킨 효율성이라는 것이, 창의적인 혁신에서 추가적으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파괴시키고,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비용을 전가시킴으로써 얻어진 것이라면 사회는 그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는 도덕성 이전에,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소위 ‘기업가 정신 (entrepreneurship)’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명문대 MBA를 자랑하는 경영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게 고작 물량에 맞춰 노동자 숫자를 조정하는 것밖에 없다는 걸 믿기 어렵다.

 

해고를 사기업의 내부 문제로 생각하여 방치하거나, 고용유연화를 조장하는 정부의 행태 또한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유시장 원칙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지만,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장바구니 물가를 챙기고, 한복 차림의 고객을 홀대했다는 호텔에게 국회의원이 호통치는 곳이 한국이다. 또한 이 나라는 정부가 직접 나서 파업 참가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곳이기도 하다. 해고와 비정규화가 구조조정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기업들 앞에서, 국가는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노동자는 기업의 종복이 아니라 국가의 시민이다. 특히나 이번 쌍용자동차 사례에서처럼, 책임있는 경영진의 존재가 불분명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역할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은 착한 소비자가 되어 기업의 양심에 호소하기보다, 그 자신이 노동자로서 연대할 필요가 있다. 매일 당장 때려치우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맡은 일을 해내려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봄날 월차 내기를 꺼려하는 성실한 직장인, 당신들이 바로 노동자다. 생계를 위해서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든, 일이 우리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서 해고와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화는 기업이 너무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되어버렸다. 반면 사회적 안전장치가 전무한 속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유례없는 상처와 고통이 되고 있다. 정부는 팔짱끼고 앉아서 사태를 ‘관람’하거나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세 가지 모두 ‘정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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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hoda M. Work, employment, and unemployment - values, theories, and approaches in social research. American Psychologist 1981;36(2):184-191.텍스트로 돌아가기
  2. Dooley D, Fielding J, Levi L. Health and unemployment. Annu Rev Public Health 1996;17:449-65텍스트로 돌아가기
  3. Ferrie JE, Shipley MJ, Marmot MG, Stansfeld SA, Smith GD. An uncertain future: The health effects of threats to employment security in white-collar men and women. Am J Public Health 1998;88(7):1030-1036.텍스트로 돌아가기
  4. 한국노동연구원. 월간 노동리뷰 2010년 4월호 p.62-65텍스트로 돌아가기
  5. http://www.worldvaluessurvey.org/ 텍스트로 돌아가기
  6. 강수돌. <일중독 벗어나기> 메이데이 2007텍스트로 돌아가기
  7.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책과 함께 2005 텍스트로 돌아가기
  8. http://stats.oecd.org/Index.aspx?DataSetCode=ANHRS 텍스트로 돌아가기
  9. http://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walmart/transform/protest.html 텍스트로 돌아가기

판결 관련 메모

반도체 산업 종사노동자들의 행정소송 결과를 듣고, 좀 울컥했다.

반올림 활동가들이나 직접 소견서 작성하니라 고생한 산업의학 샘들에 비하면 뭐 그리 애쓴 것도 없지만, 웬지 손톱만큼 기여를 했다는 생각도 들고, 또 예상보다 우호적인 판결 결과에 약간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판결문을 살펴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호적인' 판결을 환영하기만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어영부영 넘어가게 될 것 같아 메모를 간략히 남겨둔다.

 

#.

우선 '인과성'에 대한 판단이 학술적 논의가 아닌 법적 논의를 통해 확정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질판위라는 전문가 기구에서의 결정은 차치하더라도, 산보연의 역학조사 보고서는 작업과의 백혈병 사이의 인과성을 확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었다. 그런데, 바로 그 보고서를 근거자료로, 법정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물론, 통계적 검정력이 낮기 때문에 신뢰구간의 폭이 넓어 유의한 차이를 확정할 수 없다는 점이나, 건강근로자 효과 때문에 전반적으로 초과사망의 효과가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충분히 언급하지 않은 보고서에 대해 우리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또한 통계적으로 유의하지는 않지만 일관성 (consistency)있는 point estimate 의 상승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이 반론이었고, 이러한 논거가 이번 법정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

과학적인 차원에서 인과성을 확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개는 광범위한 회색지대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학술적인 논쟁과 재현 속에서 인과성은 최대 가능성으로 그저 추정될 뿐이다. 

인과성 판단에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최대한의 근거를 종합하여 그 사회가 수긍할 수 있을만큼의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과학의 역할은 informed decision 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

그러나, 하물며 '순수한 (?)' 것으로 여겨지는 학술적 판단도 정치적 이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진대, 과연 법정에서 인과성을 판단하는 것은 과연 정당할까?

이러한 우려는 비단 학술적 판단 뿐 아니라, 대법관들이 우리사회의 중요한 가치와 인권의 기본을 확정하고 재단해버리는 것에도 해당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이 학술적으로 ( 혹은 철학적으로) 논의되거냐 확정되어야 할 주장들에 결론을 내버린는 것에 대해 우려하지 않아도 될까?

 

#.

이번의 우호적 판결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다.

실제로, 이번 다섯 건 사례 중 두 건은 나름 전향적인 해석과 함께 원고승소의 결과를 낳았지만, 나머지 세 건의 사례들에서는 원고와 피고 (실제로는 진짜 피고말고 보조참고인!!!)의 팩트를 둘러싼 주장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피고측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인과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드물지만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많은 경우 사법부의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정보에 기반한" 판단에 따라 여태까지 그래왔듯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판결들이 내려지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호적 판결결과만을 두고, 사법부의 결정을 환영하게 되면, 그 결정에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후자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

이 문제에서 보다 본질적인 것은 산재인정을 개인 수준의 인과성과 연계시키고 그것을 특히 노동자 입증책임으로 정해놓은 제도, 그리고 학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인과성에 대한 판단을 법원이라는 정치적 기구,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맡기고 있는 현행 제도가 아닐까 싶다.

 

 

#. 사족이지만....

 

내가 산보연 역학조사팀의 일원이라면, 이번 판결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내가 쓴 보고서를 가지고, 소위 '비전문가'가, 나와는 다른 결론을 내리는 이 상황.....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역학조사가 '엉터리'라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가용한 최선의 자료를 이용하여, 현재 가능한 최선의 분석을 했다. 

이를테면 진보진영의 연구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리는 만무하다.

문제는 분석 그 자체라기보다 자료 특성과 한계를 고려한 세심한 해석과 고찰의 부족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자료 확보와 관련해서는 연구자들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을 거라 짐작은 된다. 압수수색 영장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없다고 안 내놓는 자료를 어디서 확인한다냐... ㅡ.ㅡ ( 역학조사 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니 따로 논문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듯!) 

어쨌든, 연구결과가 나왔을 때, 그것이 선별적으로 법원에 의해 인정되거나 부정되는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연구자의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일지 고심이 필요하다. 

 

 

#. 또다른 사족이라면...

기밀이라며 역학조사보고서를 여태 공개도 안 하더니만, 얼마 전에 학술지에 떡 하니 영문으로 실렸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영업기밀이라며 작업환경조사 보고서를 공개하지 못하게 하는 업체도 황당하지만 (그거 공개하도 그 보고서보고 우리 반도체 못 만든다... ㅜ.ㅜ), 꽁꽁 싸맨 역학조사 내용을 낼름 학술지에 내놓는 산보연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자기네 논문 쓰려고 그 자료를 기밀로 했던 건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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