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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주민

미국에 온지 넉 달 동안 참으로 기이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집에 있는 텔레비젼의 떨림 현상이 너무나 심각해져서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가 유일하게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심슨]인데, 지난 주 그거 보려고 앉아 있다가 결국 화면이 안 나와서 못 본게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벼룩시장 같은데 들어가보니 삼성 25인치 칼라TV가 20불이라고 해서 얼른 메일을 보내 찜하고 오늘 아침에 찾으러 갔다. 갔더니 이게 웬말인가. 이 아저씨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오케이라고 답을 해놨고 자기 나름대로는 먼저 오는 사람에게 주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우리(?)한테는 말을 안 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도 전혀 모른채 지하실에 있는 TV를 꺼내와서 잘 나오는지 시험을 하는 중에 웬 여자가 들어오더니만 TV 찾으러 왔다면서 20불을 획 던지고 들고나가려 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이게 뭔 일이냐 했더니만.. 아저씨 주저리주저리 사람들이 온다 해놓고 안 오는 경우가 많아서 어쩌구저쩌구... 짧은 영어로, 나는 이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신경질을 좀 냈더니만, 기껏 내놓은 안이 동전을 던져서 임자를 결정하잖다. 기가 막혀서.. 이 주말 꼭두새벽(9시 반), 차도 없어서 김**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찾아갔는데(샘 부부는 아침도 안드시고 오셨단다 ㅜ.ㅜ), 이 띨띨한 아저씨 땜에 10년도 더 된 텔레비전을 놓고 저 싸기지 없게 생긴 여자애랑 동전 던지기를 해야 하다니..... 기가 막혔지만 동전은 던져졌고 내가 이겼다. 정말 기분 더럽더라. 그나마 여기서 졌으면 얼마나 더 황당했을까.... 미국 생활 4개월만에 별 해괴한 경험을 다 한다 싶었다.

 

아침에 그렇게 설쳐대고 집안 청소를 하고 나니 정말 피곤했다. 오후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전화벨 소리 우렁차게 ..때르릉....  전화를 받아보니 미국질병관리본부(CDC)에서 온 것이다. 아동 예방접종에 관한 설문조사 중이란다. 다행이 우리 집에는 3살 이하의 어린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화 통화는 1-2분만에 끝냈 수 있었다. 전화설문은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는 Mass 주 정부에서 하는 건강 조사(특히 의료보험)에 대한 것이었고, 나는 외국인이고 여기 임시로 살고 있다고 둘러대서 겨우 피해갔었다. 여기 산지 채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벌어진 일이다. 두 번째 설문조사는 CDC의 BRFSS 라는 유명한 건강행동 조사였다. 영어 못하고 나 외국인이라서 못하겠다고 했는데도 설문 아줌마 막무가내였다. 아마도 할당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20분 넘게 흡연, 음주, 식이, 운동, 예방접종, 질병 과거력, 의료 이용 등 두루두루 답변을 해야만 했다. 성 정체성을 묻는 문항도 있어서 적잖이 당황했다. 사실 한번도 나의 성정체성에 대해 의심해본적 없었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누구도 그런걸 물어본 적이 없었는데 전화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니까 그냥 당황.... 몆 주 후에는 설문 협조에 감사하는 편지까지 받았다.

 

미국에 산 지 이제 겨우 네 달 째... 마치 10년은 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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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기록 [4]

이번 주에 있었던 허접 시리즈 발표는 오늘로 끝이 났다. 인내심을 갖고 경청해준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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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했다. 우리 때는 입시가 전기/후기로 나뉘어졌 있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나는 후기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은 우리 집이 심하게 안 좋을 때였다. 아빠가 많이 편찮으셨고, 그래서 오빠는 진학을 포기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내가 3학년 되던 해에 입대를 했다. 전기에 불합격 되고 일단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후기에 응시했고 운좋게 합격을 했다. 당시 유명한 모 입시학원에서 내가 무시험 합격자(ㅎㅎㅎ)에 해당한다고 전화가 오기는 했는데, 학원 등록금도 무지하니 비싸서 일단은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를 해서 재수를 하자..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었다. 

 

그리하여 알바가 시작되었는데.... 합격자 발표가 난 그 다음 주부터 바로 일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한 공부 했었기 때문에(호호).. 여기 저기 과외 자리가 줄을 이었다. 대학 입학식도 하기 전에 시작된 과외는 본과 4학년 국가고시를 치르기 두 달 전까지 7년 동안 거의 한 달도 쉬임 없이 지속되었다. 어찌 보면 여지껏 내가 가졌던 일자리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네는 주로 우리 고등학교 인근 지역을 커버했다. 홍제동, 홍은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녹번동, 불광동, 세검정, 부암동, 평창동, 정릉.. 등등... 그리고 서클 사람들의 소개로 멀리 여의도, 반포동까지 진출하기도 했었다. 한창 때에는 두 개, 방학 시즌에는 세 군데를 뛰기도 했는데, 끼니도 거른 채 땡볕에 돌아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다른 일들에 비하면 과외라는게 심하게 (!) 편한 일이기는 하지만, 스트레스는 정말 컸다. 학생 부모나 학생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하는 각종 활동이나 시험 등에 일정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주변에서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다. 내 용돈을 벌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게 중요한 생계였는데, 그게 없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 의대에 다니는 사람들, 심지어 운동을 한다는 선배들도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은 세미나 일정을 잡는데  "제가 과외 때문에 그 때는 좀.... ㅜ.ㅜ" 했더니만 대뜸 그거 꼭 해야 하는 거냐고 신경질을 낸 선배도 있었다. 사실 나만큼 세미나 시간을 잘 지킨 사람도 없었건만....본과에 들어가서는 수업과 시험 때문에 좀 힘들기는 했었다. 본 3때.. 화요일 마지막 교시가 성형외과 였는데 교수가 시간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슬라이드를 몇 박스씩 가지고 들어와서는 저녁 여덟 시나 되어야 수업을 끝내주고는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한 학기 동안 그 수업을 한 번도 못 들었다. 다섯 시가 넘으면 살금살금 빠져나가 일터로 달려갔다. 그 시간이 엽기적이고 황당한 사진 많이 보여주기로 유명했는데.. 좀 안타까운 일 ㅎㅎㅎ



내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한번은 예고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여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반짝 과외.. 거의 문제집 암기 수준), 그 집은 평창동 고급 빌라촌에 위치하고 있었다. 빌라 두 채를 터서 개조한 집이라 무지무지 넓었다. 내 기억에는 현관에서 저쪽 마루 끝이 운동장만큼 멀었던 것 같다 ㅎㅎㅎ. 하여간 학생 방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에어컨을 조절해주시면서 생과일 쥬스를 내오시고.. 끝나면 (다른 레슨 때문에 내 과에는 밤 12시에 끝났다) 승용차로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방에는 책상과 피아노, 탁자 등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런 부잣집 아이가 침대를 안 쓰나보네 하고 의아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이건 공부 겸 레슨 방이고 침실은 따로 있었다. 반포 아파트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새끼 선생이었다. 당시 모 학원에서 잘 나가던 수학 강사가 본 선생이고, 그 사람의 수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게 아마추어 강사인 나의 일이었다 (당시에 세미나를 했던 쿠바 혁명사에 보면 혁명전 쿠바의 부패와 빈부격차를 이야기하면서 새끼 과외선생에 대하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랐었다). 이 집 엄마의 극성은 정말 대단해서... 암기과목 시험보는 날이면 엄마가 고등학생 딸과 같이 앉아서 책을 외우고 그걸 퀴즈로 내주기까지 했다. 나로서는 상상 못할 일이었다. 허나... 홍제동 인근에서 했던 과외들 중의 일부는 차마 돈을 받기가 미안한 형편인 경우도 꽤 있었다. 내가 보기에 과외를 할 상황이 아닌거 같은데 부모님들이 무리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경우였다. 다행히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본인들 스스로도 열심히 해서 비교적 짧은 기간이 지나면 자신감을 갖고 혼자 공부하기를 원했다. 덕분에 나는 일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심리적으로는 다행감을 느꼈었다.

중간에 휴학했을 때에는 잠깐 학원에 나간 적도 있다. 월급은 별로 안 많았던 거 같았는데 난생 처음으로 중학생도 갈쳐보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멀쩡하게 생긴 범생이 여중생들이 담배 피우는거 보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도 난다 ㅎㅎㅎ 

 

이렇게 모은 돈은 참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학비와 각종 부대비용(책값이 정말 비쌌다 흑.), 활동비(?)... 다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졸업할 때까지 4백만원 정도 저축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공부를 잘 해서 이기도 하지만(음하하.. 자만심..) 장학재단에서 기준으로 제시하는 가정형편에 해당하는 사람이 의대 내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경쟁이 없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다. 참 잘들 살더라....어쨌든 그 코묻은 돈은 오빠 결혼 때 전세값으로 모두 기부당했다.

 

이후.. 인턴, 레지던트 하면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나 개인의 경제적 곤란은 상당부분 해결되었지만, 그 와중에 집안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이드신 부모님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점점 줄어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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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기록 [3]

오만가지 다른 잡다한 일들이 많았던거 같은데 짧게 했던 일들은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최근의 두 가지 일은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다.

 

5. 부적 다듬기

이게 뭔 황당한 일인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 그것들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대전에서 지내다가 주말에 모처럼 집에 갔더니 마루에 금박 문양이 찍힌 새빨간 부적들이 널부러져 있다. 울 부모님 두분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ㅜ.ㅜ). 진상 파악에 나서본 즉.. 당시에 우리 동네에서 잘 나가는 부업 중 하나란다. 금박 찍힌 빨간 천이 테이프처럼 길게 말려서 나오면 그걸 일정한 길이로 잘라서 반을 접어 (인쇄한 쪽이 나오게) 투명한 비닐 커버 안에  끼우는 작업이었다. 울 엄마의 설명으로는 그게 외국으로 수출되는 거라는데, 여태까지 집에서 한 일 치고 외국에 수출한다는 설명이 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집도 당당한 수출 역군이었던 것이다. 이 일은 가위질, 그리고 자연히 날리는 섬유먼지들이 좀 고달프기는 했지만 커버에 끼우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크기가 꼭맞는 플라스틱 자를 찾아내서 이 작업 할 때 엄마의 수고를 반으로 줄이는 기특한 일을 하기도 했다. 하나 끼우는데  십원 정도 했으니까 단가도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 당시에 집에 귀신이라도 찾아왔으면 혼비백산해서 도망갔을 거다. 집에 수 천개의 부적이 그득이... 쌓여 있었으니...

 

6. 딱지 다듬기?

다듬기.. 라는 표현말고 뭐가 적합할지 모르겠다. 이것도 최근, 내가 미국에 오기 거의 직전까지 엄마가 드문드문 하시던 일이다. 여기서 딱지라 함은 우리가 어렸을 때 달력 종이나 신문지, 공책 표지 등으로 접어서 가지고 놀던 사각형의 그 딱지를 말한다. 처음에는 나도 이 품목을 보고 도대체 뭐에 쓰는 물건인고 의아했는데, 그것이 딱지 재료라는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다. 요즘 아이들은 남는 종이를 가지고 딱지를 만드는게 아니라 포켓몬이나 디지몬이 그려진 이런 "고급" 재료를 이용하는구나..... 각종 만화캐릭터가 접이면마다 인쇄된 딱지 재료(ㅎㅎ)가 여러개 줄줄이 붙어있는 형태로 배달이 되는데, 이걸 뜯어서 반을 접고, 그걸 10장씩 묶어서 얇은 종이봉투에 담으면 끝나는 일이다. 종이를 뜯다보니 먼지가 좀 난다는 단점은 있지만 정말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로 주말에 서울에 가다보니, 이 딱지 생각을 하면 자연스럽게 토욜 밤에 일을 하면서 보던 "느낌표" 와 일욜 아침 "서프라이즈"가 떠오른다. 그러나 암 생각 없이 TV 보면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일어날 때면 어깨, 허리, 무릎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울 엄마도 아파 죽겠다고 했다. 후딱 해치우려는 욕심에 자세도 바꾸지 않고 열중한 탓이다. 이거는 단가가 기억이 안 나네...

 

밖에 나가면 의과대학에서 일하는 교원이요, 집안에서는 딱지 접기를 돕는 무급가족봉사자...어떻게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ㅎㅎㅎ

또하나..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가설... 표준직업 분류 상 "주부"로 표기되는 우리 어머니들의 이런 비공식 노동이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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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기록 [2]

내용도 허접하고 영어는 더욱 허접했던 오늘의 발표. 아... 좌절이다. 내일 또다른 제 2, 제 3의 허접 발표가 또 기다리고 있으니 이번 주 좌절 연속이다. 듣는 사람들도 괴로웠을 거다. 어찌 보면 고마운 사람들 (ㅜ.ㅜ)...

 

이 와중에 짬을 내어 글을 쓴다. 망중한이라 했던가.. 나의 방어기제는 급한 일들이 많아지면 역치가 상상초월 수준으로 높아져서 마음이 오히려 안정된다는 것. 아마도 무의식 세계는 지금 난리굿이 벌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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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갑 만들기

이건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일 같다. 연대기는 주로 살고 있었던 집에 근거해서 파악할 수 있다. 전세방을 옮겨다녔기 때문에 기억나는 집의 구조를 통해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장갑이라 함은 털장갑이 아니라 (가짜) 가죽 장갑(진짜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이라 구분이 불가능), 결혼식 등의 예식에 사용하는 레이스 장갑, 체육대회나 각종 테이프커팅 행사에 사용하는 흰색 장갑을 말한다. 나이 드신 아저씨 한 분이 재단된 보따리를 우리집에 풀어놓고 가면 재봉틀로 바느질하고, 마무리해서 뒤집는 것이 일이었다. 엄마는 재봉틀에 앉아서 재단된 감을 두장 겹쳐 손가락 모양을 따라 박음질을 하셨고,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감을 재봉틀에 올려주기, 경쾌한 소리와 함께 줄줄줄 꽈배기처럼 내려오는 장갑들을 쪽가위로 잘라서 하나씩 떼어놓기, 모양을 내기 위해 2차 박음질이 필요한 장갑들을 다시 재봉틀에 올려놓기, 그리고 마지막에 뒤집기 등이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까 오빠는 일을 별로 거들지 않았던거 같다. 이미 그 때 학생이어서 그랬나?  그래봤자 초등학생인데? 하여간 장갑이 재봉틀에서 뚝딱 만들어져 내려오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밌었다. 새로운 장갑이 오면 꼭 끼어보고는 했다. 그렇게 많은 레이스 장갑이 필요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 집 말고 이 일을 하는 곳이 또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엄마 없을 때 재봉틀에 올라가서 전등 켜놓고 장난치다가 감전되어 화들짝 놀랬던 기억은 난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우리 엄마가 받았던 임금이 얼마였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나 실밥이 많이 날렸고, 엄마가 하루종일 백열전구 밑에서 일을 하면서 몹시도 힘들어했었다는 건 기억이 난다. 

 

2. 라디오 부속품?

그 때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그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가는 품목이다. 길이 1~2센티미터 되는 플라스틱 사출물 ("ㄷ" 모양)의 홈에 여러 개의 철심을 끼우고 자그마한 프레스 같은 것으로 꾹 눌러주는 것인데, 사람들 말로는 이것이 라디오의  부속품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 일은 우리 동네 전체에서 아주 인기(?)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해서 한 거 같지는 않고, 인근 공장에서 물량이 딸려 온 동네에 이 일을 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단가가 무지하니 싸서 천 개를 조립해야 겨우 백원 정도 받았던 거 같다. 그 때도 힘든 것에 비해 가격이 형편없이 싸다고 온동네 사람들(울 엄마, 아줌마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욕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도 안 하는 철심 대여섯 개를 하루 종일 박고 있다보면 손가락 허물이 벗겨지고 시커멓게 색도 변하고, 어깨도 아프고, 무엇보다 쇳가루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다. 그래서 이 일은 주로 마당,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하고는 했다. 겨울에는 일이 없었나?

 

3. 신발 주머니

울 엄마가 처녀 적에 익힌 재봉 기술은 두고두고 우리 집 살림에 큰 (아니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중학교 동안에는 신발주머니 만드는 일을 하셨다. 근데 이게 이쁜 만화 그림 그려진 신발주머니가 아니라 시커먼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그야말로 가장 싸구려 품목이었고 울 엄마는 남는 천을 이용해서 우리 신발주머니랑 도시락 가방 같은 것도 만들어주셨다. 정말 뽀다구 안 나는 품목이었다. 이것도 장갑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엄마한테 재단된 감 올려주고, 줄줄이 내려오는 신발주머니 받아서 쪽가위로 자르고, 실밥 정리해서  다시 올리고, 그리고 마지막 뒤집기.. 먼지는 장갑보다 덜했던거 같은데, 천에서 나는 화학약품 냄새가 싫었고, 무엇보다 감이 뻣뻣해서 뒤집기를 할 때 손의 피부가 많이 상했던거 같다. 임금은 역시 형편없이 낮았던 걸로 기억되고 심각했던 것은 물량 공급과 기한이 일정치 않아서 아주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무렵 다른 집들에서는 또다른 일감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레이스 자르기. 이게 뭐냐 하면, 레이스는 보통 넓은 폭으로 한꺼번에 여러 칼럼(?)이 직조되는데, 그걸 가위로 잘라 분리하여 여러 개의 레이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 일도 먼지가 굉장히 많이 날리고, 하루 종일 가위질을 해야하는 데다가,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또 기억나는 일은 구슬 만드는 일인데.. 목걸이 알처럼 가운데 구멍이 뚤린 구슬의 양쪽을 실로 왔다갔다하면서 겉을 감싸는 일이다. 장식용 비드처럼 쓰였던거 같은데, 나중에 고정을 시키는 본드 냄새가 문제였다.

 

4. 내가 학업도 작파하고 이런 일에만 매달렸다는 것은 아니다. 울 엄마한테는 이게 생업이었지만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효도의 한 품목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일하는데 옆에 디비져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어려서는 싸가지가 있는 편이었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같이 신발주머니를 뒤집으면서 수다를 떨었던 기억도 난다.

울 아빠가 실업자도 아니었고, 빚보증을 잘못 서서 가정 경제가 파탄난 것도 아니었는데, 항상 그렇게 아둥바둥 일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는게 새삼 놀랍다. 울 엄마의 (생업에 가까운 부업)  행렬은 최근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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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기록 [1]

각종 세미나 발표"들"이 임박한 가운데, 또다시 잡념이 왕성하게 들끓어오른다. 병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내가 해보았던 노동 혹은 부업에 대해 정리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봤자 뭐 대단한게 있을까마는... 시골에서 자라나 어린 시절 닭서리하고 논밭에 나가 부모님 거들고... 우리 세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서울 달동네에서 내내 살아온 나에게 이는 책과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유사체험이다. 농활가서 9박 10일 있어본게 나의 가장 긴(!) 농촌 생활이다. 그런데 도시 아이들이라고 매일 다방구하고 구슬치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집안 일을 거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설겆이하고 빨래하고.. 이런걸 했다는게 아니라...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엄마들이 많이 했던 부업(? 말이 부업이지. 이거 없으면 살기 힘들다) 이야기다. 음.. 이야기는 1) 초중고 시절의 가내 부업 도우미, 2) 대학 시절의 알바, 3) 대학 졸업 이후의 각종 돈벌이.. 발전과정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사실 이걸 써보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은 아니다. (또 시작이 영 창대한걸... 꼭 이러다가 본론은 못 쓰지) 대학에 입학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의/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대학이라는 곳에 취직을 하면서 나는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우리 집이 특별히 가난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우리 집보다, 우리 동네보다 어려운 곳도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가보니 다른 세상이 있었다. (울 학교는 세검정에 위치해 있어서, 달동네 홍제동과 우아한 평창동 학생들이 함께 공부를 할 수 있는 천혜의 계급 친화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후 대학에 들어가고 의사가 되고, 교원이 되고 나서는, 주변에 나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새록새록 깨달아야만 했다.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현재 내 주변에서 나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만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지금의 어린이들은 출신이 다른 서로를 "정상적으로는"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래서.. 내기 지금 속한 사회에서는 "특이"하기만 한 "평범한 달동네" 생활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고 싶었다.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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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도발"

* 이 글은 해미님의 [술을 빌미로 노동자를 통제하라!?] 에 관련된 글입니다.

후배가 올린 글을 보고, 이전에 썼던 글을 올린다는 것을 까먹었음을 깨닫다. 이목희 의원의 깜찍한(^^) 주장에 대한 반론을 노건연에 있는 * 선생님이 쓰셨는데, 거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옴에 따라 재반론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원래 글이 좀 길어서 노건연의 전** 동지가 편집을 해서 매일노동뉴스에 보냈었다. 사실 나는 재반론이라는 성격 때문에 가급적 꼬치꼬치, 좀 폼나는 학술 용어도 사용하면서, 그리고 아주 매너있게(!!!) 썼는데.. 나중에 수정된 걸 보니 원래 글에 사족이 너무 많았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원문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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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과학 사이

 


 이 의원은 다양한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산재와 음주의 관련성, 음주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정책 자료집에 인용된 외국 자료에 의하면 전체 산업재해의 25%가 음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국내 현황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요한 근거가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조/건설업종이 산재의 총 66.7%, 산재사망의 50.9%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 두 업종 노동자들의 스트레스가 월등히 높고, 음주량과 음주빈도가 높다. 둘째, 연간 주류 출하량과 산재 사망자 수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관찰된다.

 

 음주는 작업장에서의 재해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런데,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위험을 “증가시켰다”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동안의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산업재해는 소규모 사업장, 특히 1-49인 규모의 사업장에 집중되었다. 이를테면 2002년에 전체 산재의 71.2%가 5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했으며, 사업장 규모에 따른 재해발생의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표 1 참조).  또한 소규모 사업장 중에서도 건설업이나 운수창고 통신업보다는 제조업에서의 재해율이 두드러졌다(표 2). 이러한 상황을 소규모 사업장의, 특히 제조업 사업장의 해이한 음주 문화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자면, 대규모 사업장, 혹은 소규모 사업장 중에서도 제조업 이외 다른 업종의 사업장들이 소규모 제조업 사업장보다 적극적인 음주규제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낳았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참고 표1 . 연도별 규모에 따른 재해자 수 및 재해율 (인권위원회 보고서)
참고 표2 . 연도별 1인에서 49인 규모의 사업장의 재해자 및 재해율(인권위원회 보고서)

또한, 정책자료집에 제시된 그림에 의하면 주류 출하량과 산재 사망자 수는 일정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림 1). 그러나, 사망자 수가 아닌 사망률을 적용하면, 주류 출하량이 급격히 증가한 98-2001년도에는 사망률이 감소하고 2001년 이후 증가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음주와 관련성이 높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고에 의한 사망률은 더욱 크게 감소하며,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그림 2). 특히 이 기간 중 뇌심혈관 질환과 근골격계 질환이 가장 많이 늘어났는데 전자의 경우 과로, 스트레스 및 노동강도의 증가가 직접적 원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자는 작업 요인(반복성, 신체부담 자세, 힘, 진동 등)과 장시간 근무 및 노동강도의 증가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 그림1.  주류 출하량과 산재 사망자와의 상관관계(이목희 의원 정책 자료집)
참고 그림2.  연도별 산재 사망(사고+질병) 만인률 (인권위원회 보고서)

 

결론적으로, 음주가 작업장에서의 사고 위험을 높일 것 같다는 직관은 가능하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산업재해의 양상을 설명하는 주요 요인이 음주라는 것을 입증할 과학적 근거는 없다. 이 정책 자료집에서 채택한 분석 방법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생태학적 오류라 할 수 있다.  “생태학적 오류”는 집합적 수준의 관계로부터 개인 수준의 관계를 추론할 때 나타나는 오류를 말한다 (신영전 등 『사회역학』2003). 예를 들면, 산재 사망자 수가 증가한 시기 동안 출산률은 급격히 감소했다. 하지만, 출산률 감소가 산재 사망과 관련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처럼, 주류 출하량이 늘어났다고 해서 이것을 바로 산재 사망에 연계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

 

 비록 음주가 산업재해 발생에 결정적인 기여는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충분한 개연성은 존재하며 따라서 음주규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노동자 건강에 해로울 이유는 전혀 없다. 산업재해 때문이 아니더라도, 노동자 건강증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가.
 이 의원은 정책자료집 발간사에서 이러한 정책제안을 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선진국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하드웨어적인 안전조치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산재로부터 작업자를 지켜주는 것은 안전모나 낙하방지물이 아니라 결국 그들 자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사회의 노동안전보건 관리가 과연 그 “어느 수준”에 도달했을까?

 “세계화”를 지상과제로 삼았던 김영삼 정부 이래 기업 활동에 관한 각종 규제들이 완화되면서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각종 규제들도 함께 철폐되거나 완화되어왔다. 이를테면 97년의 기업규제완화법 개정으로 2년 또는 1년 주기로 시행되던 프레스,리프트에 대한 정기검사가 면제되었고, 30-49인 사업장 중 유해위험업종에 대해서 안전 관리자를 선임토록 한 규정도 철폐되었다. 또한 광범위한 구조조정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급속한 비정규직 확대를 가져왔다. Qulian 등(2000)은 선진국에서 발표된 90여 편 이상의 논문을 검토한 후, 불완전 고용 형태는 전반적인 안전보건의 퇴조와 관련이 있으며, 특히 외주, 구조조정/기구 축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이러한 구조 조정은 필연적으로 노동 강도의 강화를 야기했으며, 이는 뇌심혈관 질환, 근골격계 질환의 가장 중요한 위험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이제 가능한 안전 조치들이 다 이루어졌고, 노동자 자신의 생활습관만 바꾸면 될 차례인가? 노동 강도와 직무스트레스가 점증하는 현실은 그냥 둔 채, 스트레스 대처기술과 음주 습관을 바꾸는 대증요법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규제 때문에 기업 운영이 어렵다며 정기 검사도, 안전관리자도 없애는 마당에 EAP 도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의원의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보인다. “우리사회가 조속히 그들의 위험천만한 관행을 멈추게 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상담하고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하루하루 술을 위안삼아 술독에 빠져 지내는 그들을 도와주고 치료해내야 된다.”
 우리도 노동자들이 좀더 건전한(!) 음주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들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휴식 시간에 운동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사내 급식을 통해 권장량의 야채와 과일도 충분히 섭취하면 좋겠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작업장이 좀더 안전했으면, 일이 덜 힘들었으면, 스트레스가 더 적었으면, 그리고 특히 안정된 일자리였으면 좋겠다.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건강을 염려하여 제기한 “도발”은 아직 때 이른 것이었고, “몸통”은 놔둔 채 “깃털”만 건드린 꼴이 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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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수적인가?

나름대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가끔은 생활 속의 내모습은 의외로 보수적인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인류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인도 여학생이 있는데, 의상이 영.. 당혹스럽다. 나는 그런 골반바지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입고 다니는 줄 알았지, 일반인(ㅜ.ㅜ) 도 입는 줄은 몰랐다. 서 있을 때는 그냥 견딜만 한데 앉으면 바지 허리 선이 심하게(!!!) 내려간다. 한번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나 봤더니 거의 Iliac crest 높이에 근접한 듯.. 물론 상의의  길이는 짧기 때문에 등짝-허리-엉덩이 일부까지 훤하게 드러내놓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참으로 심란하다. 그 뿐이랴.. 윗옷을 보면, 스판 섬유의 놀라운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저렇게 조여대면 숨쉬기는 괜찮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때가 있다. 어쩜 숨쉬기가 힘들어서 윗단추를 그렇게 많이 풀어놓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해보았다. 그 아가씨가 옷을 입고 수업하던, 홀라당 벗고 수업하던 사실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이리 맘에 안 드는거야...

 

한 2-3주 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관계사를 이용한 대화연습을 하는데 50도 훨씬 넘은 브라질 아줌마가 나한테 "네가 마지막으로 춤추러 갔던 것은 언제니?" 하고 물어보았다. 음.. 언제였더라. 아마도 문* 형 결혼식 때 였던거 같은데.. 춤을 추러 갔다기보다 나이트에 가서 술을 마시고 왔지... (그 때 생각하면 정말 웃겼다. 새신랑만 신나서 머리에 넥타이 두르고 광란의 스테이지를 벌이고 우리 하객들은 그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ㅎㅎㅎ). 그래서 "약 5년 전 인거 같아" 하고 대답했더니 아줌마가 화들짝 놀라면서 옆에 앉은 페루 아줌마한테 "어머, 얘 정말 보수적이다. 춤을 춘지 5년 되었대. 나는 매주 두 세번은 춤추러 가는데.."  허걱..... 충격받았다. 보/수/라/니....

 

선배 언니 왈, 요즘에는 육체를, 욕망을 이야기해야 진보 명함을 내밀 수 있단다. 

그래요? ......... ㅡ.ㅡ

혼란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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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의심하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자 누구인가... 따위를 읇조리며 포스트모던의 분위기를 풍기려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인류 생태학" 수업을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 몇 자 끄적...

 

올해 초, 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비용-편익 분석에 대해 고민을 했었다.

사실 그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비용-편익 분석은 그야말로 투입과 산출의 비교를 통해 여러 가지 대안들 중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 찾는 "과학적" 도구였다. 위해도 평가도 마찬가지다. 방법론이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위해(hazard)에 대해 수용가능한 기준점을 찾는 역시 "과학적" 도구였다.

근데 이렇듯 무미건조한 "사실"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의 건강이 관련되어 있는 한, 과연 비용은 무엇이고 편익은 무엇인가? 노동자 한 사람 죽어서 보상하는데 5천만원 들고, 안전 설비를 설치 유지하는데 1억원이 든다면 우리는 기꺼이 안전 설비를 포기해야 하는가? 실제로 대처와 레이건 시대에 이루어진 많은 규제완화 조치들이 "비용/편익 분석"이라는 evidence-based policy 채택하고 있었다. (사실, 비용/편익 분석은 자본론만큼이나 인간 노동의 "상품"가치를 잘 보여준다. 훌륭도 하지)

 

불확실성과 복잡성의 위험사회에 위해도 평가는 어찌 보면 가장 인기 있는 연구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전자파가 어떻고 라돈이 어떻고, 유전자 조작 식품이 어떻고.... 그래서 여차저차 계산해보니 최대 허용량은 어떻게 되겠더라, 혹은 이거는 인간한테 위해하지 않은 거 같더라 등등... 근데, 위해도 평가는 수많은 가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를 보일 수 있다. 환경역학자들은 동물실험 결과와 기존의 문헌 리뷰를 통해 충분히! 합리적인 가정을 설정한다고 스스로들  믿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러다보니 연구 결과가 하나 나올라치면 연구 방법론, 가정의 타당성에 관한 논쟁이 주류를 이루고 정작 본질은 논의 대상에서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테면 GMO(유전자 변형식품)에 대한 위해도를 평가할 생각은 하면서도 굳이 GMO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해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신발 가게에 가서 구두를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점원이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빨간 거 살래요, 파란 거 살래요 하는 식이다. 이러면 대개 정신이 팔려서 살까 말까를 고민하는게 아니라 빨간색과 파란 색중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게 된다)

 

이런 방법론들은 대안적 전략(alternative strategy)에 대한 가능성을 가려버린 채 객관식 문항처럼 좁은 틀 안에서 주어진 것들 중 무엇이 제일 좋을까만 고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과학이 사회적으로 재구성된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줄곧 까먹고, 또 가끔씩 새로운 일인양 다시 깨닫고는 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학부 때, 전공의 때 배운 예방의학은 너무 "맥락"이 없었다. 사회적 고려 없이 진공 상태에 놓여있는 창백한 과학을 배운 듯 싶다. 뭐 누굴 탓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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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간의 민주적 소통

요즘 읽은 몇 편의 논문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interdisciplinary or transdisplinary approach 를 강조하는지 마치 이것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나 생물학과 사회과학이 만나는 접점이라 할 수 있는 사회역학 분야는 이러한 접근법이 그 어느 분야보다도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Kaplan 이 사회역학의 한계와 미래를 전망한 리뷰 논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회역학의 많은 개념과 주제들이 사회과학으로 유래한 것인데 사람들(소위 사회역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그 용어의 일상성과 친숙함으로 인해 마치 자신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haplotype"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겠지만, "빈곤", "지역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내 이야기다). .  

 그러나 막상 interdisciplinary reseach 를 하려면 결코 쉽지가 않다. 인접한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한다고 해도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 연구 방법론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본인 스스로의 전문분야가 아닌 것을 스스로 다 파악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빠르게 변화하는 여러 학문 분야의 최신지견을 다 알기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대한 실례로 kaplan 은 다소 충격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바닥에서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면 영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기념비적 연구인 화이트홀 연구와 중심 연구자인 Marmot 를 알 것이다. 이 연구의 가장 큰 의미라면, 절대 빈곤을 넘어서 사회적 위계 그 자체가 건강 격차를 낳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곧잘 영장류에 대한 Sapolsky 의 연구와 비교된다. 원숭이 집단에서조차(!) 사회적 위계가 낮을수록 코티졸 (스트레스 호르몬)이 높다는 것이다. Marmot 는 이를 Serengeti 생태계와 whitehall  생태계의 유사성이라고 표현하였고 건강불평등을 매개하는 사회심리적-신경내분비 기전의 훌륭한 근거로서 수많은 논문들에 인용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장류에 대한 연구들을 모아서 리뷰해본 결과 위계와 건강위험에 대한 연관성을 확정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Sapolsky 도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배제한다면 이러한 연관성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천하의 Marmot 도 타 영역을 빠삭하게 알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Richard Levins 는 ecosocial epidemiology, 복잡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성과들은 대개 분야의 경계, 혹은 분야를 가로지르는 도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학문의 민주주의가 중요하며 학교들의 department system과 학회 중심, 분야에 따른 연구비 배분 등이 이러한 소통을 가로막는 주요한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는 토마스 쿤이 이야기한 "정상과학"의 정상적인(?) 발전과정 아닌가?



학문 분야 중심으로 돌아가다보니 그에 대한 반성과 반동으로 학제간 연구에 대한 강조가 넘쳐나는 듯 싶다. 세미나 때 사회역학 포스닥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처절하기는 하다. 대개 취업은 본인의 전공분야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인데, 이렇게 학제간 연구와 트레이닝을 마치면 막상 전공분야의 "업적"이 없어서 힘들단다. 이를테면 자기가 사회학과 나와서 사회역학과정 포스닥을 하고 있는데, 임상의학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것들은 나중에 취업하는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거다. Levins 는 제자들의 추천서 쓰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단다. 생태학 혹은 생태역학을 전공했다게 뭔지, 이게 회사나 학교에 어떻게 중요한지 설명하는 것 자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반면 캐나다에서는 연구비를 받을 때 여러 학문분야가 같이 한 과제에게 높은 우선순위가 부여된단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할 말이 많지만 짧게 ㅡ.ㅡ+

미국 연구자들은 학제간 연구가 부실하다고 불만이지만, 사실 나한테는 이러한 수준도 놀라웠다. 한 20여명이 참여하는 사회역학 관련 세미나에 MD 는 기껏해야 4-5명을 넘지 않는다. 심리학, 생리학, 생물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causal inference 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한다. 내가 있는 연구소만 해도 펠로우 4명 중 나만 MD. 나머지는 사회학과 인구학, 심지어 공학(road safety)을 전공했고 스탭들도 상당수 사회학, 경제학 전공자들이다.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가끔은 터무니 없기도 하고(ㅎㅎㅎ) 가끔은 기발하고 창조적인 의견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다른 분야의 최근 경향들, 그리고 건강과의 관련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한국에서 역학회는 어땠었나? 일단 아무도 공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역학은 일단 MD 의 영역이다. 최근 일부(!) 나아지기는 했지만 역학이 마치 "예방의학"의 한 분과인 양 존재하는 이상 이러한 MD 편향은 바뀌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 다양한 요인의 causality 에 대한 논의는 거의 불가능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숫자도 얼마 안되는 역학 전공자들이 하나같이 molecular or genetic epi 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이 생태계 유지의 필수적 조건이듯 학문 분야에서의 다양성도 매우 중요할텐데, 영 그렇지가 못한 상황이다. 이러다가 재난이라도 닥치거나 치명적이 천적이 나타나면 다함께 멸종(? 헉.)할 수도 있다.

 

근데.. 아쉽게도 kaplan 의 논문이나 Levins 의 논문들은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강조하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답을 주고 있지 않다. 뭐 딱히 답이 있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이거 다시 "조직화".. 좀더 거창하게 이름붙이면 "네트워킹"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인가? 나혼자 북도 치고 장구도 치고(사물놀이?) 다 하려고 하기보다 연구자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데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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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안 되는 시기

요즘 한국 상황이 참으로 거시기하다.

도대체가 *** 했으면, ***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중에 하나도 되는게 없다.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

 

대략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자

. 비정규법 개악

. 공무원 노조 탄압

. 경제특구내 영리병원 및 내국인 진료 허용

. 이라크 파병 연장..

 

물론 이게 끝은 아니다. 양심적 병역거부 법안은 아마도 물건너갈것 같고, 새로 임명된 국가인권위 위원장의 이력은 참으로 가관이다. 복음주의자들의  준동까지 더하면 반동의 셋트메뉴라 보기에도 너무 과한거 아닌가?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곰곰 생각좀 해보자. 이역만리에서 그냥 혼자 답답해 어쩔 줄 몰라하는 것 말고 무엇이 더 가능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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