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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국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최장집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I.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사회경제관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대다수 일반 시민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생활의 질적 저하와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적, 인간적 피폐화만큼 큰 문제는 없다. 고실업, 고용불안정, 노동시장의 내부분화에 의한 이른바 대규모 비정규직 노동자의 누적,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가계파산에 의한 신용불량자의 양산, 빈곤층의 확대 등 오늘날 한국의 노동시장 상황을 나타내는 양상들은 IMF개혁패키지를 통해 급격하게 전개된 한국경제의 구조변화를 특징짓는 중심 내용들이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가 초래하는 사회해체 효과는 더 파괴적인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살인 및 강력범죄의 급증, 가족동반자살이라는 비극적 형태를 포함하는 자살률의 급증, 세계 최고수준의 이혼율과 거꾸로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 등의 지표들은 사회해체의 급격함과 그 심각함의 일단을 드러낸다.

빠른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온존되고 있었던 전통사회적 구조와 인간관계의 공동체적 연계들, 사회안정에 기여했던 잘 발달된 중산층이 중심이 된 계층구조, 높은 경제성장의 지속 등은 그 동안 한국사회의 안정화와 공동체성의 유지를 가능케 했던 요소들이었다. IMF위기의 충격효과와 더불어 이러한 구조들이 해체되면서, 급속히 팽창한 사회저변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계층구조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의 문제는 그만두고라도 변화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회적 격변이 우리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종국적으로 어떤 한국사회로 귀결시킬지, 그것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게 될 것인지, 과연 이런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대체 어떤 내용을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갖는 지식의 한계는 크다.

오늘의 노동문제가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노동운동의 한계 즉 노동운동이 서 있는 기반의 협애함이라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환경과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조건에서도 한국경제의 생산체제는 과거 권위주의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중심축이 재벌중심의 대기업생산체제라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재벌기업과 그 하청업체의 위계구조하에 중소기업이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고용문제에 있어서나 노동운동에 있어서나 그 중심적 이슈가 비정규직 문제라는 것은 두루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비해 현격하게 낮은 임금, 높은 고용불안정, 낮은 조직률, 기업복지 및 노동보호입법으로부터의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정규-비정규직 차이는 단순한 차이를 넘는 의미를 갖는다. 공공부문의 노동자도 수혜의 정도에 있어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범주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과 그 전투성은 그들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대규모 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운동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서있는 기반의 협애함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재벌중심의 경제체제와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제어하는 영향력을 조직하는 데 큰 한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노동문제가 전체 생산체제와 사회적 역할에 있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기업 및 조직에서의 노동문제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로의 한국경제의 급속한 재편은 기존의 사회계층구조를 새로운 형태로 양극분해하고 있고, 국가정책에 의해 지원되었던 ‘지식기반산업화’ 역시 이러한 경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기존의 안정적 대기업군, 자산소득자, 경영 및 지식산업 분야의 전문가들이 새로운 사회구조의 상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동안, 중소기업과 영세산업, 서비스산업 등 주변적 산업부문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노동자집단은 분명 보다 절실한 노동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들 주변적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여성이나 파견직 노동자, 중소 영세산업의 저학력 고령노동자, “계급 이하의 계급”으로 범주화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임금, 고용 및 노동조건은 실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즉 실업자와 취약계층, 그리고 신빈곤층으로 분류된 신용불량자들의 경우는 주변적 노동자집단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노동시장으로부터의 퇴출과 진입이 유연하고, 열려있는 미국이나 서구에서의 노동시장과는 달리, 시장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극히 폐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구조에서, 그리고 열패자들에게 가혹한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이들은 실로 소외와 궁핍, 사회적 차별과 천시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의 생산체제가 어떤 구조와 내용으로 변하든, 예나 지금이나 재벌중심 생산체제의 중심적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한 나라의 경제성장, 한 정권의 경제적 업적이 실제로 이 재벌기업의 투자와 업적에 의존하게 될 때, 정부의 성장정책은 곧 이들 기업의 투자인센티브와 투자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전환의 직접적 결과로 재편된 현재와 같은 노동시장구조에서, 이러한 정책이 갖는 한계는 수출이 호조를 띠고 기업이윤이 증가되고 경제 전체의 성장률이 상승한다하더라도 고용의 증대와 아울러 이들 주변적 노동자집단의 권익증대, 노동조건의 향상을 결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고용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그리고 바로 경제의 호전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고용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다가오는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아마 저조한 고용증대는 테크놀로지 향상에 따른 노동력의 대체효과일 수도 있고, 국제경쟁력 약화로 인해 미국국내의 고용수요가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콜럼비아대학의 글라시엘라 치칠니스키(G. Chichilnisky) 교수가 강조하듯이, 튼튼한 중소기업의 발전이 고용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Financial Times 04/05/14). 중소기업의 고용효과에 관한 한 한국경제도 미국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소기업의 발전이 중요한 이유는 거시적으로 볼 때 재벌기업보다 더 큰 고용을 포괄한다는 것과, 광범한 주변적 노동자군이 이 허약한 중소기업부문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컨대 오늘의 한국경제 문제는 재벌기업의 노사가 민주적 틀 내에서 어떠한 공존협력관계를 설정하느냐, 어떻게 중소기업 발전이 가능한 생산체제를 만드느냐, 어떻게 재벌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다이나믹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시장구조를 창출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광범한 중소기업부문이 재활성화되지 않는 한 주변적 노동자집단의 ‘2등 노동자화’의 경향은 억제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보편적 기반은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다.

II. 대안적 사회경제정책 없는 민주주의의 취약성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뤄져야 할 실제 문제(real issue)는 절대다수의 노동인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매우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며,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정책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일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없다면, 사회적 불만이 확대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의 기반도 약해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의 한국경제의 위기와 그로 인한 사회적 효과들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IMF위기라는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충격에 의한 결과일 뿐 아니라 이에 대응했던 민주정부들에 의한 주체적인 정책적 대응이 빚어낸 복합적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만약 민주주의가 평등한 정치참여의 권리를 통해 실현되고, 시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밖으로부터 주어진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은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역량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IMF개혁패키지로 대변되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경제개혁이 한국의 민주정부를 매개로 어떻게 관철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정부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면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IMF충격의 효과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전면적 확대가 엄청난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민주정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중대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부정책의 의제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정치적 이슈 내지는 정치적 사안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우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사회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정치의 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그 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적 내용과 이를 실천할 정책적 수단을 마련하도록 하는 제도적 힘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는 실제 이슈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학자 바크라크와 바라츠(Bachrach & Baratz)는 다원주의적 권력 개념을 비판하면서 ‘비결정’(non-decision)이라는 개념으로 이 문제를 설명했다. 그들은 먼저 ‘결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원주의적 권력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이나 이익들이 표출되고,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모든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은, 만약 그것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정치경쟁의 장에서 이익집단이나 정당을 매개로 표출되고 선거를 통해 대표되고 종국에는 정책으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 경우 실제의 정책은 이러한 이슈를 둘러싸고 이해당사자들이 경쟁하고 타협한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때 이러한 정치과정을 우리는 정치세력과 갈등들의 다원적 경쟁 내지는 다원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의 결정이 곧 사회적 갈등과 힘 관계의 정직한 반영이라고 한다면, 정책결정 수준에서의 정치적 다이나믹스와 정책의 산출은 사회갈등의 축약이며 정치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사회경제적 현실과 정치 간의 매개가 순기능적으로 작동된다면,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용이하게 정치적으로 해소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고, 사회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낙관적 사회발전의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 정치관에 도전하는 비결정의 개념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관찰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정책과 그 결정은 전체 정치과정과 권력관계의 다만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중대한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을 마땅히 이슈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이유는 이슈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슈화하지 않는 또는 못하게 하는, 다시 말해 정책결정의 사안으로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힘 또는 영향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즉 이 관점은 이 비결정의 영역/수준이야말로 보다 더 중요한 정치과정이요, 권력관계라는 사실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민주주의에 있어 논의되는 이슈/사안의 범위와 성격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회의 중요 문제에 대한 시민개개인들의 계몽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루 알다시피 정치참여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슈의 범위와 계몽적 인식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상적으로 지나쳐 버린다. 한국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유권자 개개인이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올바른 이해에 근거한 판단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참여가 아무리 확대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발전을 도모하기 어려우며, 역으로 한 사회의 중대문제는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민주정부의 무능력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무관심, 냉소주의, 투표율의 하락현상이 보여주는 정치참여의 저조함은, 사회의 중대이슈를 의제의 범위 밖으로 밀어내고 덜 중요하고 나아가서는 하찮은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정치가 왜소화되고 타락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정치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에서의 정치적 대립이 아무리 격렬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높고, 시민들의 시민운동에의 참여가 아무리 열성적이라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중대문제가 정치사안으로부터 배제되고, 쟁점으로 떠오르지 못할 때 민주주의를 통한 집단적 결정의 내용은 민주적 가치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뭐든 참여의 확대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계몽적 이해로 뒷받침된 중대사안이 이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할 때, 새로운 영역으로의 정치참여는 다른 분야에서의 참여를 오히려 떨어뜨린다는 ‘참여적 다원주의의 역설’이 나타나기 쉽다(Dryzek 1996, 7). 바꾸어 말하면 정당간의 경쟁이든, 시민사회의 운동이든 잘못된 이슈, 중요하지 않은 이슈에 열정을 쏟는다면 정작 중요한 이슈에 대한 참여를 제약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은 사회의 중대사안을 정치영역에서의 중대사안과 병행시키는 일을 통해 민주정부의 효능을 창출할 수 있었는가? 그럼으로써 체제로서의 민주정부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는가? 이 문제들은 우리 모두의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민주정부들의 경험을 통해, 여야당간의 갈등이 첨예하였던 정치적 이슈영역은 대체로 네 가지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정당간의 정치경쟁의 규칙을 어떻게 제도화하는가 하는 정치의 제도개혁을 둘러싼 이슈이다. 집권정당은 어떻게 권력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야당은 어떻게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다음 선거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쟁투로 정치는 요란했다. 둘째는 역사, 이념 및 가치, 정서적 문제를 둘러싼 이슈영역이다. “역사 바로세우기”, “지역감정 극복”, “과거사 진상규명”, “용공 전력조사” 등은 모두 민족주의, 반공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가치, 또는 지역정서의 동원이 중심이 되는 이데올로기적, 감정적, 상징적 이슈영역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데올로기나 집단적 열정을 쉽게 동원하게되어 정치를 극한적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현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새로운 중요이슈가 된 행정수도 이전 및 이른바 “지역혁신체제”의 추진과 같은 지역개발정책 분야이다. 그러나 정책추진자들이 중앙집권화의 폐해와 분권과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안, 그것이 과연 주장하는 대로의 바람직한 효과를 낳게 될지, 정말 모든 지역이 자립적 발전모델을 갖는 사회가 될 것인지에 대한 우리사회의 확신은 더욱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넷째는 사회경제적, 정치경제적 이슈영역이다. 이 문제는 그간 정치적 이슈로서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분명 현실적 삶의 세계에서 중심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슈영역의 우선순위가 있다면, 네 번째 사회경제적 이슈가 최우선 순위에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최소한 서구민주주의에서의 상황은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현실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문제가 제일의 우선순위를 갖는 정치사안이 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중요 의제로 부각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정치의 제도개혁, 이념대립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상징적 이슈 또는 삶의 현실적 문제와는 거리가 먼 지역개발주의적 사안들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자리잡았다.

물론 기존의 지배적 담론을 당연시하면서 정치에 있어서도 경제문제가 최대 이슈라고(또는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문제인식에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이슈를 곧 경제성장의 문제와 동일시한다. 고용확대, 노사관계, 경제적 불평등의 완화, 복지의 증대, 빈곤문제 등을 포함하는 모든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성장이 창출하는 넘쳐흐르는 효과(trickle-down effect)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정부의 가장 중심적 정책은, 나아가 정치의 핵심적 역할은 모두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시장의 작동과 자본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든 정책이나, 행위는 부정시된다. 이러한 일면적 경제성장관이나 독트린은 과거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통해 신화가 되었고, IMF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적 논리 기반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 사실상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대안적 경제성장관이나, 재벌중심 생산체제의 거버넌스 문제와 같은 정치경제적 문제 혹은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가 가져온 여러 사회정책적 문제들이 중대이슈로 자리잡을 여지는 별로 없다.

권위주의적 관치경제 시기로부터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만큼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그간 경제정책에 대한 민주정부들의 개혁레토릭이 어떠했든, 혹은 정부 내 이른바 개혁파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언표화되는 주장들이 얼마나 개혁적이든, 반대로 민주정부의 경제관이 급진적 또는 반시장적이라는 주류언론들의 우려가 어떠했든 민주정부에서조차 실제의 경제정책은 민주화 이전과 그 차이를 실감하기 어렵다. 가장 변하기 어려울 것 같아 보였던 냉전반공주의의 구조조차 민주화 이후, 특히 “햇볕정책” 이후 크게 변화했고 또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확실히 경제영역에 관한 한 일면적 경제성장의 독트린은 어떠한 대안적 도전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경제문제, 또는 경제정책 사안을 둘러싼 이슈들이 국회에서의 정당간 논쟁에서, 신문의 지면에서 언제나 가장 빈번하게 가장 중요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성장의 방법론을 둘러싼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결정’의 수준에서, 거의 의식화(儀式化) 되어버린, 그리하여 사태를 변화시키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익숙한 주제에 불과할 뿐이다.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고 있으며 정치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기득이익이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영역은 냉전반공주의도 아니고, 친일파청산 문제와 같은 역사적 가치의 문제도 아닌, 경제와 관련된 이슈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의 이론가 시리아니(C. Sirianni)는 여성운동의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한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 이 새로운 정의는 그 동안의 전통적인 사회관계에서는 전혀 이슈가 될 수 없었던 부부관계를 포함하는 가부장적 가정 내의 관계나 가사노동과 같은 사적관계의 영역으로까지 여성운동을 확대할 수 있는 이론화에 기여했다. 같은 논리로 “경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또는 “시장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정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경제나 시장이 성장을 추동하고, 경쟁과 같은 자연스런 본성적 인간행위가 필연적으로 효율성을 창출한다는 신화가 아닌, 성장이든 시장효율성이든 그것은 사회의 힘의 관계와 가치가 반영된 정치적 결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이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포괄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경제를 향한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통합의 효과를 가짐으로써 정치안정화에 기여하며, 일의 윤리, 일에 대한 헌신을 높이고, 갈등적 노사관계를 보다 민주적이며 협력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며,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통해 기업의 투자의욕을 높일 뿐만 아니라, 수요의 증대를 통해 성장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온 한국 정치의 한 속성이 드러난다. 정치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중심적으로 대면하고, 그 영역에서의 갈등을 해소해 가는 과정에서 정치의 제도개혁 이슈나 역사적 정서적 이슈를 흡수통합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후자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몰두하면서 전자를 방치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후자의 비정치경제적 이슈들이 과도하게 정치화되고 결과적으로 정치는 이데올로기적 쟁투의 장이 되는 동안, 전자의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탈정치화된다. 선거를 통해 사회로부터의 요구를 위임(mandate)받은 것과는 무관하게 정부가 된 민주파의 경제정책은 권위주의적 성장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정책은 그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유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과거 권위주의적 관치경제를 주도하고 운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정책은 관료의 수중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그간 여야 정당은 상호 공존이 가능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적 담론과 감정으로 충돌해왔다. 정치인들과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짧은 사이클로 순환하면서 파노라마처럼 명멸하였고, 국회의원 교체율이 세계 최고임을 자랑할 만큼 매 선거마다 대규모 퇴출이 계속되었다. 여러 수준과 여러 정책영역에서 수많은 전문가집단의 참여가 확대되었고 뭔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한 인상과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정책 영역에 관한 한 변한 것은 없다. 어찌보면 여야간 정치적 갈등의 격렬함은 실제로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가 배면에서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실제 이슈에 있어서는 극히 좁은 갈등의 범위에 한정되어 다퉈야 하는 협애한 정치적 대표체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사회경제적 이슈를 전면으로 끌어낼 것인가? 그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투표자 다수의 지지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부가 일차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치 않다. 사회경제적 이슈는 갈등의 정도와 폭이 가장 큰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이슈를 전면으로 끌어내는 데는 부와 권력에 있어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갖는 기득이익들의 도전이 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많은 정치적, 사회적 힘들이 투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은 이 영역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정당은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선출된 민주정부로 투입되는 통로이고, 정부의 정책결정이 사회로 전달되는 정치의 조직망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좁고 얕은 사회적 기반을 갖고, 협애한 이념적 스케일로 정당간 차별성이 적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집단이 과다대표되고 있으며, 제도화의 수준도 낮고 정체성도 약한 정당들이 정책적 대안을 유능하게 조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문제는 아직도 지난한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민사회로부터의 운동의 힘들이 투입될 필요가 있다. 그 정책이슈를 지지하는 많은 사회적 힘이 투입되지 않고서는, 즉 대통령이나 최고 정책결정 수준의 결정자나 정치엘리트들의 의지라든가, 개혁마인드라든가 하는 것만으로는, 많은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정치적 이슈의 전면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정책사안이 중대할수록, 이해당사자들의 갈등의 정도가 클수록 특정의 정책은 그 정책에 대한 사회적 힘의 투입 없이는 실현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안을 조직하는 문제에 있어, 헤게모니의 영역 밖에서 사고하고 행위하는 지식인들의 역할 또한 필수적이다.

III. 현실적 대안의 중요성

그렇다면 노동과 복지문제를 포괄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대면하고 주요 정치적 사안으로 이슈화함에 있어서 어떤 대안적 처방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검토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의 제안이기보다도 정치인, 지식인, 대의(大義)추구적 사회운동, 노동 및 민중운동 등 여러 사회집단들 사이의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한 정치적, 사회적, 지적 노력이 진지하게 이루어낸 결과물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대안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대안의 성격, 방향 및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대안형성의 방법론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권위주의시대 이래의 경제정책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배제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현실에서 기존의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는 경제정책 노선에 수정을 가하기 위해서는 그 대안은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하고, 그럼으로써 넓은 범위의 콘센서스를 창출할 수 있고, 그리고 집행 가능한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실현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면 대안으로서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진지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결의라기보다는 단지 “나의 이념은 이것이다,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것을 천명하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운동의 한 타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비결정’이 만들어지는 데는 양 측면이 존재한다. 하나는 개혁의 외적 제약이다. 민주정부의 어떤 개혁적 의지, 비전, 정책은 헤게모니의 제약으로 인해 정치적 이슈로 전환되지 못하고 보다 강력한 외부적 힘에 의해 좌절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개혁의 내적 제약이다. 민주정부를 포함하여 개혁을 만드는 사람, 세력이 실현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한계 때문에 정치이슈화하지 못하고 개혁적 대안이 내부로부터 소멸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문제보다도 두 번째 문제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민주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적 요구들이 투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권위주의시대의 정책이 지속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가 민주적 시민/시민역할에 대해 두 가지 구분되는 개념, 즉 ‘긍정적/적극적’인 것과 ‘부정적/소극적’인 것의 개념 구분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논의와 맥락을 달리하지만 시사하는 바 크다. 긍정적인 시민권 개념에서는 특정의 집단이나 조직들이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발전시키고, 이익을 공유하면서 정부정책에 자신들의 요구를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독자적으로 형성한다. 반면 비판과 불평을 중심으로 하는 부정적 시민행위는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묻고, 이들의 공적 사적 도덕성을 통해 정치인들에게도 강력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 부정적 시민행위는 정치란 기본적으로 엘리트들의 일이고 시민은 관중이나 감시자의 역할에 만족하는 수동적 관점을 견지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이들을 감시감독하기 위해 정치계급에 대해 극히 공격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창의적 에너지를 대변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시민권의 역할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들 두 측면이 모두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부정적 행위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은 우려할만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맥락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운동이 중심적 동력을 제공하는 민주정부는 당연히 긍정적 시민의 역할이 중심이 되고 그러할 때 그 에너지를 통해 많은 대안정책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민주정부 내의 개혁적 정책결정자들과 시민사회로부터의 운동과 지식인들에 의한 개혁의 비전과 정책의 입안은 개혁적이되,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한편에는 권위주의적 관치경제에 그 연원을 갖는 국가-재벌연합의 견인차가 중심이 된 ‘신자유주의적으로 변용된 성장정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민주화운동 및 노동운동에 기반을 갖는 ‘신자유주의 반대’, ‘사회민주주의의 길’이라는 방향이 있다. 그러나 두 방향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테제와 안티테제를 한국적 현실에서 실현가능할 수 있도록 취합하는 설득력을 갖는 대안적 정책비전이며, 그 틀 안에서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의 수준에서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민주세력들에게 민주정부의 수립과 아울러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희망과 기획을 실현할 기회가 부여되었을 때, 현실적 대안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기보다 쉽게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가져온 무책임한 관성적 결과물일 수 있다. 즉, ‘긍정적’ 시민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여전히 ‘부정적’ 시민으로서의 역할에 안주하는 모습이라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이론적 수준에서, 가치와 신념의 차원에서 그리고 운동의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의 정책적 대안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싫든 좋든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사회의 부문, 수준, 그리고 집단, 계층들에 있어 어떤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인 것이다. 혹자는 영미식의 신자유주의형 경제모델에 대비되는 유럽식 복지국가모델 혹은 일본형의 조율된 자본주의형과 같은 어떤 비자유주의적 자본주의경제(non-liberal capitalism)를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정부는 후자의 비자유주의적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현실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세계화라는 조건에서 무엇보다 먼저 이론적으로 케인지언적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포함한 비자유주의적 경제이론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가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현실적으로 추진된다고 가정할 때 현재와 같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무역자유화를 포함하는 세계화라는 국제환경적 압력과 조건, 현재와 같은 재벌중심의 경제적 생산체제의 특성, 그 정책을 위한 정치적 지지의 동원, 신자유주의적 및 성장이데올로기, 사회적 힘의 관계 등, 여러 측면과 여러 힘들이 연관되어 작동되는 조건하에서 정치적으로 취약한 민주정부가 이러한 대안적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검토해야 하고, 없다면 이를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2만불성장시대라는 성장의 목표와 가치를 천명하였는데 그러면서 한편으로 정부 내 개혁파들은 간헐적으로 사회정의, 사회복지, 분배의 가치실현을 언명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하나는 진정한 정책적 목표, 내용과는 무관하게 분배와 복지를 요구하는 지지세력에 부응하는 슬로건 내지는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 복지,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2만불의 성장목표를 달성하기도 어렵고 또 달성한다 하더라도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경우이다. 만약 후자를 진지하게 추진한다고 할 때, 그것은 마치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 Przeworski)가 ‘전환의 계곡’이라고 말하듯, 구조개혁이 진행되는 일정한 기간동안 저성장이라는 계곡을 지나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와 같은 생산체제가 획기적인 구조전환을 해야 할 것이고, 이를 감당할 만한 정치적, 정책적 역량이 존재해야 하며,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한 투자자, 기업가집단의 동의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본의 투자회피, 해외로의 자본도피, 해외투자의 확대 등으로 인해 ‘전환의 계곡’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경제는 공동화되고 사회는 커다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이러한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요컨대 정부 내 개혁파들의 노동, 복지, 분배정의에 대한 강조는 정책적 진정성으로 뒷받침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혹자는 기업의 안정적 투자유인, 고용안정, 노동, 복지의 실현을 위해 영미식의 자유경쟁시장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독일식의 ‘이해당사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존과 협력의 노사관계도 발전시키지 못하는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노조의 조직이나 활동도 어려운 조건에서, 이해당사자들이 목소리를 갖고 결정에 참여하는 유럽식의 생산체제로의 비약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독일식 모델은 노사의 극한적 대립이 파시즘과 2차대전을 초래했다는 파멸의 역사적 경험, 전후 반노동자적 자세로부터 친노동자적 자세로 전환한 기독교의 변신, 이 과정에서 노사화합을 가능케 한 기독교 박애정신, 이를 당의 이념으로 한 기민당의 존재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 등,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독일식 모델을 진지하게 정책대안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단순한 천명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한국적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정책대안을 만들기 위해 논의되어야 할 문제의 차원은 복합적이다. 먼저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기존의 어떤 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면 이를 대체할 대안적 처방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그 가운데서도 필수적인 문제들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어떤 모델이 우리의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준거가 될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검토한 후에도 따져봐야 할 문제들은 많다. 그것은 개혁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은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나? 개혁자들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나? 민주정부는 국가 행정기구들을 통솔하고, 새로운 개혁안을 수행할 능력을 갖고 있나?

IV. 우리는 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적이지 못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일련의 제도적, 절차적 요건들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시민권, 일인 일표의 투표권에 의한 정치참여의 권리,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주기적 실시와 이를 통한 정부의 선출,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의 자유로운 조직과 이들간의 상호경쟁과 협력 등이다. 그러나 이렇듯 단순하게 보이는 정치체제를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실제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다이너믹스는 제도나 절차로서 이해하는 민주주의보다 훨씬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정의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다중의 보통사람들의 힘이 체제의 중심에 자리잡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군부권위주의라든가, 군주정, 귀족정과 같은 다른 경쟁적인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체제보다 보
통사람들의 삶의 질의 개선을 포함하는 시민권의 확대와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경제 또는 시장의 영역에서 약자이며 소외된 보통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방법을 통하여 시민권을 획득, 확대하고 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을 때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절차적 방법을 통한 실질적 문제의 해결 또는 개선이 그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절차적, 형식적 내용과 실질적 내용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체제이며 따라서 일차원적인 것이 아닌 복합적인 구조와 과정을 갖는 것이다.

평등의 원리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불평등을 창출하는 자본주의와 항상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 양자간의 긴장관계와 갈등은 민주주의 자체를 제약하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의 갈등은 크건 작건, 민주주의는 건설적인 타협을 통하여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 바 컸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갖는 커다란 제약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문제해결의 공간을 갖는 것이고, 그것은 민주정부의 능력의 함수이기도 하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이러한 가능성을 기대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와 신뢰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 중심적 지지세력으로부터 괴리되기 시작하는 민주주의는 그 취약함으로 인하여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혹은 민주주의와 갈등관계를 갖는 힘들에 의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시민생활의 실질적 향상에 기여하도록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민주정부의 책무라고 할 수 있음에도 오늘의 민주정부들이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들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대표-책임의 연계고리로부터 상당정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중산층과 서민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의 정책적 책임성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IMF위기 이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악화시켜온 부정적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민주정부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우리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비전, 의지, 정책대안의 부재를 반영하듯, 오늘의 민주정부는 이렇다할 경제정책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하여 민주정부들이 세계화의 조건하에서 보통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더 악화시키는 데 앞장선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도,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과는 사회양극화의 급속한 심화이다. 한편에서는 세계화로 재구조화된 시장경제 경쟁에서의 승자들, 거대기업들, 정치인들, 사회엘리트와 지식인 그리고 주류신문을 통하여 익숙하게 소개되는 이들의 세계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시장경쟁의 열패자 내지 탈락자들, 사회계층구조의 하층에 위치하면서 점차 생산과 소비의 중심영역으로부터 주변화, 배제되고 있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가 광범하게 존재한다. 우리사회에서 이 두 세계 사이의 격차와 분리는 그간 심화될대로 심화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정치인들, 언론들이 ‘사회통합’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인 듯이 강조하는 소리를 듣는 데 익숙해있다. 통합을 강조하는 정치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듯 분리되어가는,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적 권리를 통하여서도 대표되고 보호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와 정책을 말하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투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문헌

Bachrach, Peter and Morton S. Baratz. 1970. Power and Poverty: Theory and Practice. New York: Oxford U. P.
Chichilnisky, Graciela. 2004. “Think Small If You Want to Create More Jobs.” Financial Times(May 14).
Crouch, Colin. 2004. Post-Democracy. Cambridge: Polity Press.
Dryzek, J. S. 1996. Democracy in Capitalist Times. New York, Oxford: Oxford U. P.
Przeworski, Adam. 1991. Democracy and the Market.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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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와의 짧은 대화

오늘 이치로와 주기적인 미팅을 하는 날이라...  만난 김에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사실 좀 민망했던 것이.. 오늘 수업 시간에 어찌나 졸리던지 잠깐 졸았던거 같은데, 만나자마자 나보구 "다 아는 걸 해서 강의해서 좀 지루했지?" 하는 것 아닌가. 의례적인 인사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뜨끔한지라... 사실은 어제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건데....

 

내가 청강하고 있는 수업 제목은 "Society & Health", 사회역학의 주제들을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공통필수 과목 중 하나다. 이치로는 예의 그 현란한 사진자료, 신문기사, 만화, 그리고 논문들을 활용하여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는 편이다. 그가 보여주는 자료 중에는 다소 자극적인(!), 혹은 선동(?)적인 내용들이 드물지 않다. 뭐 이를테면.... 소득 불평등을 이야기하면서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 - 미국의 최고 부자 두 명이 벌어들이는 소득이 부시가 지난 7월에 방문한 4개국의 국민소득을 모두 합친 것과 같다는 식의 -  를 보여주거나, 부시가 집권한 이래 부유층의 세금이 30%에서 17-8%로 줄어들었다는 등...  강의를 듣고 있자면 미국은 정말 불평등한 나라고 세계 불평등의 기원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이지 ^^).

 

과연 학생들은 어찌 생각할까나?



사실 학생들의 활발한 질문이 가끔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를테면 미국의 경우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한 비율이 국민 소득 대비 0.14%로 주요 선진국 중 거의 꼴등이라는 슬라이드를 보고 나면, 그 금액이 민간 기부 (이를테면 게이츠 재단)까지 다 합친 것이냐. 뭐 이런 식의 질문.  그게 뭐 그리 중요하지? 그리고 이치로의 질문에 대한 답도 가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남녀간의 임금격차가 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여성이 오래 살기 때문에, 여성의 교육 수준이 낮기 때문에, 혹은 차별 때문에.... 가장 상식적인 답은 노동의 성별 분업 때문 아닌가? 도대체 신문도 안 보나? 사실 내가 진심으로 절망하는 것은... 비장하고도 심각한 내용의 슬라이드와 그에 대한 폭포수 같은 학생들의 질문과 의견 발표가 지나간 후, 수업 종료와 함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 동료들과 재잘거리는 모습.... 수업은 그저 수업일 뿐.... ?

 

이치로가 막 웃으면서 이야기해준다.  어떤 학생들은 와서 따진단다. 왜 우리나라 대통령을 그렇게 비난하느냐. 강의 평가서에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거나, 혹은 선생 그만두고 꺼져버리라고 쓰는 학생도 있단다 (믿거나 말거나 ㅎㅎㅎ ) 일부는 당신 덕에 내가 공화당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다는 학생도 있단다. 내가 학생들의 보수적인 성향에 놀랐다고 했더니만, 자기는 매년, 새록새록 놀란단다 (-_-).  다른 곳도 아니고 소위 "공중보건"을 전공하는 학생들인데도...  사담 후세인이 9/11 사건을 저질렀다고 믿는 학생, 이란과 이라크가 다른 나라인지조차 모르는 학생, 북한이 이라크와 붙어 있는지 아는 학생들도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어디 붙어있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누가 죽어가던 그들이 뭔 상관이란 말인가.  

 

내일은 첫 대선토론회가 있는 날이다. 펠로우 짝꿍인 카비(인도 출신)는 시간이 되면 함께 모여서 보잖다. 미국 사람들 빼놓고는 다들 crazy Bush 때문에 걱정이 늘어졌다. 나도 내일은 준비물(술과 안주 ^^) 챙겨서 꼭 시청해야지. 김** 선생님네 TV 는 비싼거라 그런지 자막 방송도 나오던데... 그 기능이 없는게 안타까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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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준 샘의 궁금증에 대한 짧은 답변

* 이 글은 최용준님의 [미국에서 건강불평등 연구의 정치성 (2)]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최용준 샘의 걱정대로 송편은 구경도 못 했다. 어제 여기에서 휘영청 뜬 보름달만 확인했는데... 좀 으스스했다. 왜냐.. 영어 강좌가 끝나고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늑대나 다름없는, 하지만 필시 개로 짐작되는 짐승이 (그것도 허연 색) 어슬렁거리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 때 문득 쳐다본 하늘에는 구름이 살짝 걸치운 창백한 보.름.달....  오홋... 갑자기 어제의 상황이 ........

 

그나저나 최용준 샘의 궁금해하는 이유...  내가 이론적인 지적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관대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아직까지 (단서는 아직까지!!! 왜냐, 아직 미국 사회를 잘 모르니까) 간단하다. 내가 그동안 본 미국은 학술 영역에서의 진보적 담론이 취약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일상 생활이 탈 정치화되어 있고 변혁은 고사하고 개혁이란 단어도 씨가 먹히기 어려운 구조로 보이기 때문이다. 캐리하고 부시하고 접전을 벌이고 있는 걸 보노라면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나마 캐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진보적 (^^) 으로 보이는 것도 정말 웃기고....

이런 상황에서 건강 불평등에 관한 대중적인 교양 서적이 자본주의 생산 관계라는 근본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바로의 생각은?  글쎄.... 오랜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노학자의 견해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냐만...  이러한 비판의 대상이 극우 반동이 아니라 범 좌파 내의 우파그룹(이런 편가르기가 맞나? 이런 표현에 나바로도, 이치로도 각기 다른 이유로 기분 나빠 하려나? 이 사람들 한글 모르니까ㅎㅎ)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역사에서 많이 보아왔던 사투의 한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바로의 견해에 대한 하버드 그룹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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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로 논문 감상(^^) 이어쓰기...

* 이 글은 홍실이님의 [미국내 건강 불평등 연구의 정치학 - 나바로]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에 인터넷 서핑하고 있는 주변의 모모 인사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못했다. 이 열화(^^)와 같은 성원에 감사해야 할지 원....

 

우선 나바로의 Health of Nations (우리말 제목 "부유한 국가, 불행한 국민") 비판을 잠시 옮겨보면....

 

미국에서 건강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것은 이미 Lancet 논설로 실릴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미국 내 좌파 -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등등 - 연구자들이 미국 공중보건학회 내에 독립적인 그룹을 만들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에 대한 미국 기득권의 반응은? 앞서 이야기했듯, radical tradition 에 대안이 될만한 보다 건전한, 소위 "respectful left"의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다. 계급이 아닌 소득, 사회적 지위, 사회적 자본 등등.. (사회적 자본은 미국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따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새로운 용어일 뿐더러 그 영향으로 유럽과 남미에서도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고 지적).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연구자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들은 기득권 세력에 별 위협이 되지 못하며, 매우 학구적이고 방법론적 이슈를 중요하게 여기고 광범위한 통계도구들을 활용하며, 어떤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오염(^^)에서도 벗어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정점에 바로 The health  of Nations 가 있다. 이 책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회과학 연구 재단인 MacArthur Foundation 의 지원으로 쓰여졌고, 아마티야 센의 추천사에 보면 "아마도 우파들이 싫어할 left proposal"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참고문헌들에는 그동안 계급 관점에서 불평등을 분석한 연구자료들은 거의 실려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불평등의 내용은 소득, 그리고 소비 (개인간, 국가간) 문제이다. 

나바로가 지적한 문제점이라면... 우선 이 책에서는 개인들의 "소비"를 생활수준의 중요한 잣대로 파악했는데, 사회의 집합적 소비 (공공재나 사회적 이전지출)와 하부구조가 삶의 질과 안녕에 더욱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국가 간의 차이를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데, 이를테면 북반구에서 애완동물을 돌보는데 수백만 달러를 쓰는 사람들과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남반구 어린이를 대조하는 형식은 독자들의 양심과 죄의식(-_-)을 부추기는 것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대립의 양상은 북반구의 경제적 지배 계급과 남반구의 일부 지배계층, 그리고 북반구의 노동계급과 대다수 개도국의 민중들 사이에 나타나는 것 아닌가. 실제 우리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착취"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책에는 미국의  공공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예가 나오는데, 이것이 자가용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선호 때문이 아니라 자동차/에너지 산업의 정치적 영향력이 이의 발달을 저해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인들이 세금 감면을 선호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약하다고 지적했는데,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대다수의 노동계급은 매우 취약한 복지체계를 확대해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있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현재의 취약한 계급 영향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 이 외에도 세부적인 여러 가지 지적 사항 등등등... 

하여간 요약하자면, 이 책은 파워, 착취보다는 선택과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정치색을 벗어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득이 물론 중요한 요인이기는 하지만 이는 다른 변수들에 비해 비교적 다루기가 쉽고 그보다 중요한 다른 변수(계급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쓰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들은 그동안 계급 관점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건강불평등 연구를 애써 무시한 채 소득 요인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잠시 딴 소리... 이 책 Health of Nations 에 대한 비판은 John Lynch & George Davey Smith 의 Rates and states: reflections on the health of nations (int J Epi 2003;32)에도 실려있다. 이 글도 조만간 소개할 생각... 하여간 뭐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책이 나오자마자 집중포화(^^)를 맞는 것을 보니 저자들이 좀 안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더구나 공저자인 케네디는 심한 병세 때문에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계를 떠났다니 관점을 떠나서 ....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그나저나  이치로가 최근에 준비하고 있는 책(Globalization & health)이 출간되면 또 어떤 논쟁이 벌어질까나.. 뭐 대략 짐작이야 가지만...

 

일단 두 가지 개인적 의견...

우선, 미국 내에서 건강 불평등과 관련한 연구, 연구네트워크의 정치적 지형에 관한 나바로의 지적은 사실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다. 세부적인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서 낯익은 설정 아닌가?(보건학 연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님)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분석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딱히 건강 불평등이라는 이슈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예방의학/보건학 연구들이 한국사회의 고유한 정치경제적 문제들을 어떻게 접근해왔는지, 그러한 접근을 (불)가능하게 했던 제도적 기반(이를테면 여러 정치권력과의 관계, 연구비 제도, 학풍 혹은 학연), 연구자들의 개인적 성향(^^)은 어떠한지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에 건강 불평등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이 많아지고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고유한 시대적 배경(ㅎㅎ)이 있지 않은가. 이러한 분석이 다소 이론적 작업에 치우치고 당장의 실천적 의미가 적다고 해도, 보건 분야 내에서 쟁점의 숨겨진(!!!) 성격을 드러내고 논쟁을 활성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두번째, health of nations에 대한 비판.... 사실 번역 전에는 나도 책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다. 번역을 하면서 들었던 첫번째 생각은.... 참으로 대중적으로 썼구나.. 물론 "대중적"이라는 단어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일단은 쉽고, 상당히 구체적인 실생활의 사례들이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일반 독자들이 바로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불평등의 문제를 성찰해볼 수 있게끔 만들어준다. 물론 그 불평등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나바로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저자의 의도와 성향을 잘 모르겠다.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그만 둔 것인지, 아님 정말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개인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소위 근본적인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뭐 학자는 논문으로 말하는 것이라니까 ....  이번 주말에 만나기로 했는데 조심스럽게 물어봐야겠다. 과연 영어 땜시 나의 의도가 잘 전달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이 책이 특히 우리 사회의 "중산층" (정체도 없는 이 단어 정말 싫지만) 들, 그리고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여전히 좋은 자원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한 연구나 대중적 담론이 극도로 취약한 한국사회에서 한편으로는 입문서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논쟁거리로서..... 그리고 바램은... 건강 불평등을 초래하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 결정요인에 대한 학술적/대중적 저작들을 빨리 만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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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내 건강 불평등 연구의 정치학 - 나바로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 2004:34(1)에 발표된 나바로의 글 (원제  "the politics of health inequalities research in the United States".

2003년도에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6th conference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Health Policy 에서 강연했던 내용이란다.

 

나바로는 미국 내에서 (다른 분야는 차치하고) 보건의료 분야의 연구들이 어떻게 탈 이념화되고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미국 학문 사회의 구조를 이야기하고, 이치로와 케네디가 저술한 (그리고 내가 번역에 참가한) "the Health of Nations"에 대한 비판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주로 생의학적 이슈들을 다루는 NEJM 이나 JAMA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건의료 정책들을 다루는 대표적인 저널들에서 계급 관점의 분석을 시도한 논문들은 거의 발견할 수 없고, 저자들이 혹시라도 "노동계급, 계급투쟁"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면 교조적이라고 게재거부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계급 이슈를 다룬다는 것은 그 연구자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걸 뜻하게 되고, 이는 곧 학문적 사망 선고나 다름 없다. 베버, 혹은 뒤르켐의 분석 틀을 쓴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베버주의자, 뒤르켐주의자"라고 딱지를 붙이는 건 아니지만, 유독 마르크스의 경우만 특별하다 ^^

연구기금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도 중요하다. 이를테면 나바로가 재직하고 있는 존스홉킨스 대학만 해도 교수(와 그 비서) 월급의 80%가 연구비에서 비롯된다. 연구비를 못 딴다는 것은 일자리를 잃는 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펀딩기관, 대개 정부와 록펠러, 맥아더 등의 거대 민간 재단의 정책과 성향에 맞는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Elizabeth Fee 같이 명성자자한 사람(미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공중보건 역사학자 중 한 명,[Women's Health, Politics, and Power: Essays on Sex/Gender, Medicine, and Public Health] 의 편집자 )도 연구비를 못 따서 결국 존스홉킨스를 떠났다고 한다. 

 



사실 1960-70년대에 사회 전반적인 흐름에 맞춰 사회의 근본 구조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소위 "유물론 역학" 이 성장을 했고, 사회에 매우 비판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았으나... 기득권의 대응 전략은 첫째, 무시, 둘째,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을 때는  좀더 건전(^^)한 주류 연구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이 과격분자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낯익기도 하여라~). 그리고 일부 ex-radicals (우리 말로 하면 전향인사, 내지는 귀순자들 ㅎㅎ)이 이러한 순화 과정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이것도 낯익다 ㅎㅎ). 이는 미국 국내 뿐 아니라 외국, 개도국에 대한 지원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남미에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칠 때에는 사민주의 방식에 대한 연구를 지원했고, 공산주의가 더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자 이제는 신자유주의적 지향의 연구들에 대해 지원을 하고 있다. 무시, 배제, 주변부화...

 

이런 의미에서 미국 내에 건강 불평등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활발한 듯 보이지만, 주류 연구들은 계급 관계보다 대개 소득, 소비, 혹은 사회적 자본, 결속력 등에 집중되어 있다. 나바로는 이 지점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health of Nations 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부터가 본론인데, 넘 졸리네... 글의 시작이 너무 창대했던 탓이다 ㅜ.ㅜ  오늘은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고 낼 이어서 쓰자... 1. health of nations, 2 나바로의 글과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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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실신한 국보법 : '김용갑 의원 졸도' 사태를 보고

실신한 국보법
  
  김용갑 의원이 국회 단상에서 제 분을 못 이기고 쓰러졌다. 대한민국을 한 몸으로 떠받치던 인간 국보법이 제 풀에 지쳐 졸도했다. 상징적이다. 50년 동안 선무당처럼 펄펄 뛰던 그 악법도 이제 기운이 다 쇠한 모양이다. 물론 아직도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칼로 제 배를 갈라 그 놈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이 미련한 신체 예술로 그들이 보여준 것은 ‘국산 칼, 더럽게 안 든다’는 사실뿐이다.
  
  언뜻 보면 국보법의 폐지에 반대하는 흐름이 대세같다. 착시현상이다. 촛불도 꺼지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낼름거리는 법. 우익 시위의 격렬함은 ‘마지막 발악’이다. 그 살벌한 제스처로 저들은 국가의 안보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공포는 북한의 안보위협에서 오는 게 아니다. 국보법이 폐지되면 도대체 이 사회에 자신들이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 저들은 그게 무서운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그 또한 착시현상이다. 여론은 추이를 따라 동태적으로 읽어야 한다. 국보법에 관한 여론의 추이는 목하 ‘개정불가’에서 ‘개정가능’을 거쳐 ‘폐지가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게다가 반대론자들의 상당수가 사안 자체에 대한 판단보다는 “경제가 급한데 웬 국보법 논란이냐”는 상황논리에 잠시 설득된 상태. 경제가 급한데 국보법 ‘폐지’에 목숨 거는 것을 이해 못하는 이들은 경제가 급한데 국보법 ‘수호’에 목숨 거는 것도 이해 못한다.
  
  50년 넘게 존속했던 법을 없애자니 시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정치권에서 자꾸 대체입법이니, 형법보완 운운하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최근 형사법 전문가들은 국보법의 공백은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뭘 더 대체하고, 뭘 더 보완한단 말인가? 대체입법이니 형법보안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국가의 ‘안전’(安全)을 위한 법적 조치가 아니라, 유권자의 ‘안정’(安靜)을 위한 심리요법일 뿐이다.
  
  대체나 보완은 필요 없다. 형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을 처벌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권유린이다. 고작 “불안감” 따위를 해소하기 위해 시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불안감을 해소하는 길은 따로 있다. 국보법을 확실하게 폐지하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이미 사문화되어가는 법, 폐지해도 별 일 없다는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하게 “불안감”을 해소하는 길이 또 있을까?
  
  여당 내의 기회주의 분파는 제 이름대로 개혁을 “안개”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어영부영 타협하거나 질질 끄는 것은 전술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다. 빈틈을 주면 안 된다. 선명하고 명확한 입장을 정해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보수층이 국보법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 상징성 때문이다. 국보법의 폐지가 기정사실이 되면, 깃발을 잃은 저들의 반항은 순식간에 무력화할 것이다. 국보법은 죽었다. 남은 것은 진단서를 떼고 송장을 치우는 일뿐이다.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표면에 이는 보수의 거센 파도에 불구하고 바다 속의 조류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지금 개혁정권은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차기정부의 성격을 묻는 설문에 시민의 56.9%가 “진보개혁 성향의 정부”라 응답했고, 오직 35.7%만이 “보수안정 성향의 정부”라고 대답했다. 현 정권의 보수화에 실망해 떨어져나간 지지층이 정권과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진보개혁”을 원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 뭘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은가?
  
  대체입법이나 형법보완 따위에서 국보법의 대안을 찾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누군가 국보법 폐지의 ‘대안’을 요구하거든, 가령 취약한 정보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 등, 안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 제시할 일이다. 안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을 못 받아들이겠는가. 야당 역시 제발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겠다는 부정적 발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뭔가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 2004.9.25 진중권 (정치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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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sible people

오늘은 Cambridge Center for Adult Education 에서 ESL 강좌가 개강하는 날이다. 강의 시간이 저녁 8시라, 모처럼 사무실에 늦게까지(일곱 시 ^^)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초저녁이지만, 사실 여기에서는 처음으로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일단, 남아 있자면 저녁을 해결해야 하는데.. 사먹자니 돈이 없고.. 또 밤에 혼자 남아 있는것이 괜찮을까 싶어서 아직 시도를 해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할 수 없이 도시락을 두 개 (그래봤자 샌드위치 두 덩어리) 싸가지고 와서 저녁까지 떼웠는데....

여섯 시에 한 낯선 남자가 건물에 들어왔다. 하도 들락거리는 연구자들이 많다보니 또 다른 펠로우인가 싶었는데...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청소와 정리 등의 일을 한단다. 인도에서 왔고, 이곳에서 일한지 15년 째.. 그동안 수많은 펠로우들이 이 곳을 거쳐갔고 사진과 명패를 통해서 나를 이미 알고 있단다. 일하는데 방해가 되는게 아닌가 싶어서 남아 있어도 괜찮겠냐고 했더니만.. 걱정 말란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이 전에도 여러 명의 펠로우들이 밤늦게까지 남아서 공부하고는 했으니 걱정말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쓰레기통이며 회의실 탁자며.. 아침마다 항상 치워져 있었는데, 나는 그게 연구자들의 자발적인 셀프 서비스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그런 깜찍한 생각을 했을까? 보건대학원에서도 대개 강의가 5시 반에 끝나는데, Women, Gender & Health 강좌는 6시 반에 끝나고 이걸 듣고 나오면 계단과 복도를 부지런히 닦고 있는 노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대부분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이다. 우리가 일과 수업을 끝낸 후에, 이들은 유령처럼 나타나서 소리없이 일하고 사라진다. 이들은 낮동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들도 용역, 혹은 파견 노동자들일까? 노조는 있을까? 일당은 얼마나 받고 있을까?

 

가끔씩... 누군가의 노동을 통해 나의 일상이 굴러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는 한다. 그걸 깨달을 때면.. 그냥 혼자 쪽팔리지...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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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방문기 #2


인디언 거주 지역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인도 이외에 인디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남아공이라고 하더군요. 같은 식민모국을 둔 덕분이랄까.... 그들은 플랜테이션에서 일하기 위해 끌려왔고, 남아공의 민주화 투쟁 동안 역시 "유색인"으로서 함께 투쟁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디의 비폭력 평화 사상은 남아공의 투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네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세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수학, 문학.. 그리고 lifeskill... 도대체 이건 뭐냐 물었더니만... 자기 몸의 소중함, 영양, 에이즈, 다른 인종 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평등과 민주주의... 이런 걸 배우는 과목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초등학교 선생님은 고개를 숙여서 동양식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바로 이런 걸 배우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고.... 저는 이런 걸 배운 적도, 학교에서 가르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 운영은 물론 각종 지원금 유치나 결연을 통해 어린이들의 생활 문제를 해결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나라 경제는 어렵지만 기본 교육 12년은 무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새삼... 중요한 것은 가치.... 비록 남아공이 지금 경제적으로 어렵고, 과거의 불행한 유산으로 인해 커다란 교통을 겪고 있지만 그 어느 곳보다 인간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아공의 주요 종족은 줄루 족입니다. 11개의 언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 있을 만큼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줄루 킹덤이 가장 강하고 아직도 국가 중대사는 정부 관계자가 국왕이나 족장들과  협의를 하고 자문을 구한다고 하더군요. 사진은 이들의 전통 청혼 의식입니다. 일부다처제 사회인데, 경제력이 되는 한 부인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소 열 마리 이상을 주고 신부를 데려온다고 합니다. 제가 방문한 곳은 일종의 민속촌 같은 곳이었는데 단지 보여주기만 하는게 아니라 실제 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 엄마는 남자친구가 돈이 없어서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줄루족 마을 바로 옆에 악어와 뱀 농장이 있었습니다. 제 평생 이렇게 가까이서 악어를 본 적은 첨.... 손만 뻗으면 만질 수도 있었는데, 엄청 무섭더만요 -_- 안내원 총각(?)이 어찌 해박한지 악어의 종류, 습성, 그리고 뱀의 경우 cytotoxic, neurotoxic toxin에 이르기까지 정말 재밌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악어가 90살이 넘어서까지도 몸이 계속 자란다는 거 모르셨죠? 부화 온도에 따라 성별이 달라진다는... 퀴즈 프로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

지역 공공병원의 소아과 대기실 풍경입니다. 이곳의 의료 체계는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단 민간의료보험제도에 의해 많은 부분이 이루어지고... 6세 미만의 어린이, 임산부, 실업자, 장애인, 노인 등은 조세에 의한 완전 무상의료 혜택을 받고 있었습니다. 좀 부끄럽더군요. 도덕적 해이니, 재정 파탄이니.... 교육 사례에서 보았듯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보호해야 할 핵심인지 잘 알고 있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기관은 낡기는 했지만 상당히 큰 규모에 괜찮은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보수를 했다더군요. 부유층이 모여있는 주택가에는 민간 클리닉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의대는 엄청 인기가 있다고 하네요. 문제는 고급인력들이 자꾸 해외로 유출되는 것이고, 농촌 지역일수록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더번 시 ANC 지부 사무실을 방문했었습니다. 이전 혁명 동지들의 기념 사진과 선거 포스터가 어지럽게 붙어있었습니다. 현재 움베키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이전 만델라만큼은 못하지만 지난 선거에서 90%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만큼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코사투와 SACP(남아공 공산당)의 연합 전술 덕분이었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어려운 상황이지만 정말 노력하고 있구나... 그리고 가치와 철학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 사무치는 평등과 연대의 정신, 그리고 놀라운 민중들의 평화 존중... 이 모든 것에서 남아공의 밝은 미래를 보았습니다. HIV 유병률 22%, 실업률 40%라는 이 사회가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힘을 잃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더욱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유인물 한 장.. 열추적 미사일에 발각될 수 있으니 작전 지역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자는 피델 카스트로의 메시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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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방문기 #1



난생 처음 본 남반구의 일출입니다.
묵고 있는 호텔에서 걸어나와 1분만 걸어가면 바로 이 해변. 한가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지만, 막상 은행에라도 갈라치면 호텔 경비원과 함께 동행해서,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는 통제된 출입구를 지나야 하죠. 보건대학원의 한 선생님은 이 멋진 해변에 신발을 벗어놓고 달리기를 한 후 신발을 잃어버리셨습니다. 남아공판 선녀와 나뭇꾼?



지역 사회 청소년 교육 기관인 Love Life Y center 입니다. 이곳에서는 에이즈에 대한 직접적 교육은 물론 컴퓨터, 자아 개발, 스포츠, 방송 활동 등 폭넓은 활동을 통해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기 몸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들 스스로가 교육자가 되어 지역 내 다른 청소년들의 리더가 되도록 하는 곳입니다.

아프리카식 저녁 만찬에서 한 남아공 흑인 여성이 자신의 살아온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남아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영어가 짧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감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 곳이 흑인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처음 보면 정말 어리둥절하죠. 도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비탈에 허름하게 모여있는 판잣집들...동사무소, 학교, 하다못해 교회 하나 보이지 않는..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었을까요? 지금은 새마을 운동과 같은 주택 건설운동이 한참 진행되면서 일부는 철거되고 일부는 건설 노동자들이 임시로 묵기도 하고, 또 여전히 주민들이 살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곳이 주택사업에 의해 새로 건설되고 있는 단지입니다. 무슨 창고같기는 하지만, 아직 전기나 수도 설비가 미비해서 많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 곳이 없던 이들에게 정말 소중한 보금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업이 진행되기까지 불만없이 차근차근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남아공 민중들의 인내에 사실... 놀랐습니다.

차를 타고 20분 이상 도심을 빠져나가면, 코엑스 몰 만큼이나 큰 대형 쇼핑 센터가 있습니다. 가는 길 또한 어디 미국의 부유한 도시를 지나는 듯 했습니다. 아름다운 대저택들과 놀라운 조명들....  남아공의 백인들은 다 어디 있나 했더니 이 쇼핑몰에 다 와있더군요 (^^). 물론 공식적으로 흑인이 입장금지된 것은 아닙니다만... 굳이 금지시키지 않아도 돈도 없고, 차도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또래들과 뛰어다니며 장난치는 백인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지만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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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나이 (민지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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