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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읽어보니 나름 재미는 있네...ㅎㅎ
실은 이런 류의 프린트물을 읽는 게 간만이어서 흐흐흐 하기도 했지만
이 문건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에전에 여기저기서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 나기도 하네...ㅎㅎ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
-[맑스주의의 역사], 에티엔 발리바르 외 지음, 윤소영 엮음, 민맥, 1991. pp. 213-256
이 글은 발리바르가 쓴 글인듯 싶고
프랑스에서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을 역사적으로 혹은 문맥(?)적으로
해석해 놓은 글인 듯 싶다.
자유와 평등을 동일화 시킨 위의 권리선언을 보면서
일반적으로 이야기되어지는 인간과 시민의 동일화를 따지고 있는 듯,
자유가 보다 인간적인 권리 즉, 자연권에 가까운 개념이라면
평등은 시민의 권리이면서 체제적이고 법적인 개념이라는 것이고
이러 상반된 두 개념을 섞어서 동일화한다는 것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듯 싶군....ㅎㅎ
우리가 쉽게 자유와 평등을 동일시하지만
이 두개념은 실은 상반된 입장을 견지하는 개념이라는 것인데
이는 쉽게 우리들이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게 되는 보다 개인적인 권리로서의 자유와
보다 사회적인고 집단적이며 어저면 서로간의 약속처럼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성격의 평등의 개념이
주되게는 서로를 이율배반적으로 어긋난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이 둘을 묶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는
인간=시민 이라는 동일화의 오류라는 지적이다.
즉,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와 연합(?)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그대로 담지하는 것이선언에서 보여지는 자유와 평등의 동일화 혹은 연합(?)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즉, 자유라는 것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존재의 권리인 반면에
평등이라는 것은 일종의 의무적 체계로서 법적 제도적 강제성을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체제의 산물로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러한 자기규정때문에 자유와 평등은 서로 상반된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반된 입장들이 자유=평등으로 받아들여지는 동일화 작용들이 일어나기위해서는
일종의 매개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당시의 이 자유=평등의 동일화는 결국 [민족]이라는 매개와 [소유]라는 매개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동일화 작용이라는 것이
발리바르의 분석이다.
즉, 피억압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연합의 성격은
결국 [민족]이데올로기라는 매개들이 있음으로해서
실은 자신들을 혁명이후의 사회에서 자신들 스스로를 배제 혹은 억압하는 상황으로 몰아갈 것이 뻔한
평등의 논리에 너무나도 쉽게 동의하게 되는 것이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자유=평등의 근대적인 권리들은 [근대적 소유]의 매개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피억압자인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과정에서 쉽게 부르주아와 타협하게 되는 것은
[소유]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소유의 자유와 소유에서의 평등을 동의하는 과정이라는 것이겠지...ㅎㅎ
우리가 혁명에서 자유를 견지한다는 것은 결국 [영구혁명]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이고
이러한 체제극복 혹은 계급극복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신흥자본가들은
결국 소유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평등을 내세워서
혁명을 반동으로 몰아가든지 아니면 스스로 새로운 법적 혹은 제도적 지배를 가능하도록 만들어 갔다는것이다.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쉽게 주장되어지고 인정되어지는 평등의 개념이 결국 자본주의의 발전과 영합하는 측면이 있으며
이러한 반동적 상황들은 우리 스스로 평등을 소유의 개념에서 찾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정치적 평등
즉, 기존의 정당운동 혹은 노동조합 등에서 노동하는 권리로서의 평등을 강요함으로서
자본주의를 영구화 시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고
이로서 이러한 소유를 매개로 한 집단화는 결국 평등을 가장한 억압의 한 측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은 스스로 법적으로 혹은 주권의 개념화를 통하여 혁명을 고착화시키면서
자본주의의 안착화 혹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화를 보다 강고하게 만들어주는
측면이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현실운동에서
대의제를 바탕으로 하는 진보정당의 보수화
노동할 권리를 자유=평등으로 몰아가면서 스스로 자본주의의 한축을 담당하는 것으로 운동을 격하시켜버리는 전통적 노동조합의 예에서 충분히 증명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즉, 노동에서의 자유 혹은 정치적 자유를 스스로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구속시켜버리는 운명을 우리 스스로 정당화햇가는 것이 결국 자유=평등의 동일화의 오류라는 지적이다.
이 문건을 읽으면서
우리가 너무나 쉽게 인정하는 인간=시민의 동일화의 오류가 현실운동에서
어떻게 혁명적 에너지들을 갉아먹는지
그리고 일상의 삶을 반동적 억압기제로 자연스레 교육시키는지 다시 한번
깊게 고민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보다더 우리는 평등이 아닌 차이를 전제로 한 자유의 주장이 갖는
혁명적 에너지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보다 더 자유로와져야 한다는 사실
이것이 오히려 현시대의 평등보다도 중요한 계기일 것이다...아마도.....^^;;....
밤일 하기전에 급히 읽어서 제대로 파악했는지 모르겠지만
허겁지겁 읽고나서 되는 대로 정리해 보았다.
문건에서 몇가지 중요한 부분으로 지적한 [민족]으로서의 권리와
그 속에서 잉태되는 성 역할의 폭력적 억압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름 중요한 키워드가되는 것 같다.
결론은 발리바르의 난해한 글쓰기는 다소 짜증스런 불편함을 주지만
결국 반자본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중요한 뽀인트는
잡아질 전망이다.....?.....^^;;
에구구
종민의 제안으로 나름 진중하게 읽고 이야기하려 했으나
결국 여의치않은 시대에 사는 원죄로 깊은 고민보다는 피상적인 이야기로 빠져버린 느낌...ㅎㅎ
뭐 여하튼
자유와 평등의 상호 배타적인 조합을 어떤 식으로 결말지어야 할지
아직은 막막하다....ㅎㅎ
힘내보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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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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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님이 언급하신 책을 읽지 않아서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지만, "평등은 시민의 권리이면서 체제적이고 법적인 개념"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한 평등은 형식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 같네요. 보통 평등이라고 하면 법앞에 평등을 의미하는데 이번 용산참사판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법이란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죠. 그래서 법앞에 평등이란 말은 한편으로는 이 사회가 철저하게 두 개의 계급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은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 평등이어야겠죠. 시민사회란 평등한 개인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한다는 것인데 이 말 자체도 노동하지 않는 자들과 노동하는 자들이라는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은폐하는 것이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님이 언급하신 "평등이 아닌 차이를 전제로 한 자유의 주장이 갖는 혁명적 에너지"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할 수가 없네요. 차이를 전제로 한 자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실질적 평등이 보장되지 않을 때 자유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자연의 세계에서는 늑대의 자유와 양의 자유 중에서 늑대의 자유가 실현되니까요. 누구에게는 살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누구에게는 팔 수 있는 자유밖에 없다면 그것이 실질적으로 평등한 것일까요.부가 정보
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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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를테면 성을 사는 남자가 있고, 성을 파는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 사회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이지만 합법화가 되면 구매자와 판매자는 동등한 주체가 됩니다. 하지만 구매자와 판매자는 동등한 관계일까요. 집결지여성들이 구매자를 처벌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존권이 실질적으로 구매자들의 손에 놓여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서는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교환관계로 둔갑하죠. 노동조합도 시민사회속에 있는 한 노-사가 동등한 주체로 만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노동자의 생존권은 자본가들의 집단적 소유죠.부가 정보
우중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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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인간적 권리로서의 자유란 결국 자유,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 등이 인간에게주어진 시효없는 권리들이라는 것이 겠지요...ㅎㅎ따라서 인간이 끝없이 추구하는 이 자연권적인 권리들 특히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권리들은 결국 인간이 끝임없이 체제극복을 하는 길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민 이라는 것 즉, 개별화된 주권자로서의 부단한 질서 옹호자들의 공동체에서는 일차적으로 질서 혹은 체제에 대한 수호를 전제로한 주권자들의 평등이 전제되는 듯 합니다.
따라서 "시민"이라는 말 자체는 이미 그 체제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주권자들만의 권리라는 것을 강제하게 되고 그 체제의질서에서 벗어나는 비시민들을 배제하는 논리들이 있는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인간과 체제질서내의 주권자들을 상징하는 시민이라는 말의 차이만큼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등의 색깔은 결정된다는 것...?..
ㅎㅎ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네요...ㅎㅎ
그저 이정도 생각이....ㅎㅎ
여튼 각자의 존재로서의 차이들이 인정되는 한에서 각자의 자유들이 끊임없이 주장되고 인정되는 사회가 어쩌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평등이 강조되는 것보다는 일차적으로 중요한 사회의 기반이 아닐까 싶다는 이야기를 하네요...ㅎㅎ
여튼 자유와 평등이 조화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매개물로서 현재의 [소유]가 아닌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결론을
이야기한답니다....ㅎㅎ
저도 이 책 전체내용을 읽은 것이 아닌 단락의 프린트물만 읽은 터라서 정확한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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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f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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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레디앙에 실린 최원의 글(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985)에 이런 말이 있지요."(주로 평등만을 강조하는) 좌파 자신의 담론전략을 변화시켜야 하고, 그러한 변화된 관점에서 (자유를 평등과 분리시키는) 자유주의 세력 일반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바로 개인들 사이의 관개인적 관계들(transindividual relations)을 파괴함으로써 개인성 그 자체를 파괴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요.
진정한 개인들의 자율성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을 집산주의적으로 집단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들을 민주적으로 접합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을, 국가적인 방식으로든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든 간에, 새롭게 발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주의할 점은 여기서 국가적 경로들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 우리의 대안들은 오히려 현실적 설득력을 상실할 것이며 다시 국가와 사회의 대당의 함정에 빠질 뿐이라는 점이고 이것이 바로 이승원 교수의 글에 제가 동의하기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발리바르가 인간/시민, 자유/평등의 구별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다름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언뜻 상극으로 보이는 두 쌍들의 '관주체적 관계들'의 변증법적 총화를 통하여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온전한 인간'을 찾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평등없는 자유는 공허하고 시민없는 인간은 맹목'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시말하면, 시민성을 획득하기 이전의 인간은 이성적-정치적 공동체의 가치를 담보하지 못하는 단순한 자연적 존재에 불과하니 아직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형태가 아니며, 그렇다고 시민성의 강조가 인간의 본연적-감성적 가치를 모두 무시하면서 공동체적 가치를 성공적으로 일궈낼 수 없다는, 그래서 둘의 변증법적 총화가 요청된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유/평등도 같은 도식 속에서 고려될 때만이 '진정한 자유'의 획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평등이 아닌 차이를 전제로 한 자유의 주장이 갖는 혁명적 에너지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님의 생각에 위의 adelitas님이 공감을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님이 말하는 '차이의 존중'이 '평등과 관계하기 이전의 모습으로서의 자유'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면, 이 차이(자유)는 결국 평등과의 '관주체적 관계'를 통한 변증법적 승화를 통해서만 존중될 수 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말씀이 아니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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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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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저도 워낙 아는 것이 짧아서....ㅎㅎ
발리바르가 이야기 하는 것(제가 읽은 글에서...ㅎㅎ)
혹은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자유와 평등이 변증법적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매개물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현재의 자본주의하에서의 평등이라는 것은 자유와 평등의 매개가 [소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겠지요...ㅎㅎ
결국 우리가 진정한 자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호혜의 원칙하에 평등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을 매개하는 것이 [소유],[민족], [국가]가 아닌 다른 원칙들을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경쟁 혹은 소유의 평등이 아닌 인간 자체의 존재로서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원칙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작금의 사회에서 평등을 찾는 주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ㅎㅎ
여전히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ㅎㅎ
여튼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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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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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다 고맙습니다. 발리바르를 읽은 적이 없어서 논의가 좀 어렵긴 하지만 저 역시 자유주의자들처럼 자유와 평등이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평등을 위해서는 자유는 제한되어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tnffo님은 관주체적 관계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제가 좀 덧붙인다면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타인의 삶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합니다. 이를테면 포르노를 금지해야한다는 주장과 포르노를 만들거나 보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는 주장 속에는 포르노를 만드는 배우들의 노동의 현실과 그들 삶에 대한 고민이 없죠. 저는 인간을 억압하는 도덕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 책임을 지겠다는 윤리가 필요한게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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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발리바르를 띄엄띄엄 읽어서 잘은 모릅니다....ㅎㅎ윤리적 측면에서 타인의 삶을 책임지는 의무적인 측면보다는 타인과함께 접촉하고 함게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윤리가 무엇인지 조금식 고민중이랍니다...ㅎㅎ
여튼 좋은 말씀 감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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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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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시민의 권리로서 자유와 평등, 이것의 매개로 설정한 소유(자본/노동)과 공동체(민족/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해설이라 할 수 있는 논문들이 실려있는 것이 발리바르, 윤소영 편역,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입니다. 사실 포스팅되어 있는 "인권의 정치..." 자체가 여기에 실린 발리바르의 논문들을 잘 정리해놓은 글입니다. 그러니 부분부분 자세히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이 책의 논문들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발리바르의 입장이 여기에 실린 글과는 별개로 현재 어떤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인권의 매개인 '소유'를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견지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발리바르 자신도 그렇고 발리바르를 다루는 글들에서도 그렇고 '소유'는 거의 보지 않는 듯 하지만...
아무튼 철학자들의 글이란 전체적인 그림, 구성, 각 개념들의 맥락을 무시하면 잘못 읽히기 십상이라 생각하는데, 발리바르처럼 생각도 철학도 복잡한 사람은 더욱 그렇겠죠. 발리바르가 인권의 정치를 구성할 때의 소유라는 관념을 어떻게 사고했는가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발리바르의 (혹은 윤소영선생님이 말하듯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에 적합한 정치적 이념으로서) '인권' 개념을 심각하게 곡해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덧말. 포스팅하신 발리바르의 글은 공감출판사에서 2005년 쯤에 재번역하여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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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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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홋 그렇군요...ㅎㅎ좋은 정보 감사....ㅎㅎ
님이 말씀하신대로 철학자들(?)의 글뿐아니라 누구의 글이든
단순히 짧은 텍스트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미, 구성 그리고 그 저자가 사용하는 개념에 대한 종합적 고려뿐만 아니라 그 저자가 춰한 현실이라는 것가지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어떤 철학자의 글이든 종합저긍로 읽으려 하는데
그렇게 모든 것들을 읽기에는 스스로 너무 읽을 것들이 많을뿐만 아니라
솔직히 알고 싶은 것들도 많아서 모든것들을 그렇게 다 찾아보며 읽기가 힘들다는...^^;;
가령 최근에 다시 읽으려는 들뢰즈의 경우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책들도 읽어야 겠고
스피노자나 베르그송 나아가 니체의 책들도 조금은 읽어야 겠고
또 그렇게 확자오디어서 읽다보면 같은 시기를 살면서 주고받은 다른 철학자들의 책들도 읽어야 겠고...^^;;
이래서 읽어야 할 책들은 많은데 다 읽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무시하고 안읽기도 힘들고....^^;;
뭐 여튼 부지런히 읽기는 읽고 있는데 또 그것이 읽으면서
다 알아듣고 있기는 한건지 걱정되기도 하구...헤헿
여튼 초짜 독서인으로 살기가 힘들군요....ㅎㅎ
여튼 간만에 좋은 덧글에 마음이 흐믓해지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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