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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6/27
    블러그 쉽니다...^^;;(3)
    우중산책
  2. 2009/06/24
    [액체근대]..일과 공동체...너무덥다.
    우중산책
  3. 2009/06/23
    [액체근대](4)..시공간에 대하여
    우중산책
  4. 2009/06/22
    [액체근대(3)]..무거움과 가벼움..ㅎㅎ
    우중산책
  5. 2009/06/22
    [적린]님의 블러그를 보다가...ㅎㅎ(4)
    우중산책
  6. 2009/06/21
    [액체근대(2)]..사적인것의 공적공간 침탈...^^;;(2)
    우중산책
  7. 2009/06/21
    나름함....펜그림은 기장된다...^^;;
    우중산책
  8. 2009/06/19
    [액체근대(1)]..사적인 것의 공적공간침탈..??(1)
    우중산책
  9. 2009/06/19
    만화나 해볼까..??
    우중산책
  10. 2009/06/17
    [감옥에서 보낸 편지]...아 ! 그람시...!!
    우중산책

블러그 쉽니다...^^;;

  • 등록일
    2009/06/27 22:52
  • 수정일
    2009/06/27 22:52

이제 블거그를 쉴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정리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

스스로 너무 정리하고 살질 않은듯해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결정할 것들  빠른 시일에 결정하며 살아야 할듯해서....ㅎㅎ

 

여튼

그냥 사라지면 욕먹을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동안

이 블러그가 소중했었던 듯 싶네요...ㅎㅎ

 

여튼

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 공간에서 잠시 떠남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또 꼭 돌아온다고 말하기도 그렇고....ㅎㅎ

 

여튼 그동안 즈래도 즐거웠다는 것 만으로도

이 공간이 제게는 너무 소중한 듯 하네여...ㅎㅎ

 

여튼

언젠가 만날날이 있겠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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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일과 공동체...너무덥다.

  • 등록일
    2009/06/24 12:30
  • 수정일
    2009/06/24 12:30

너무 덥다.....

완전 덥다.....

그래......

덥다.......

 

제 4장 일

-- '진보'는 역사의 특징이 아닌, 현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가장 심오하고 아마도 유이한 진보의 의미는 두가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믿음,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믿음과

    그리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라는 믿음으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 믿음은 공존 공생한다.

    그리고 이 둘의 공존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어떤 일을 이루어지게 할 힘이 있는 한 계속 유지된다 .

    알랭 페르피트는, "가나안 땅의 황무지를 변화시킬 유일한 자원은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갖는 확신이며

      그들이 공유하게 될 미래의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이다"라고 적고 있다.

 

-- 변화를 만들어 낼 힘이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 '진보'는 자명한 것이다.

    반면에 일이 자신들의 손을 벗어나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진보란 개념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며 어쩌다 그런 말을 들어도 비웃어 넘길 것이다.

 

-- 지금 시대는 '현재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는 확신감이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자리할 유일한 기초라면,

   우리 시대에 믿음이 불안정해지고 취약해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먼저 '세상을 앞으로 가게끔 하는' 힘이 뚜렷하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해답이 요원한 질문은 (세상을 더 나은,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이다.

   두번째로, 실천주체가--어떤 실천주체이든지 간에-- 세상을 개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자꾸만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 확실히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론이 아닌 실재

      즉,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할것인가 혹은 누구랑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같다.

       특히, 지방에서 산다는 것은

       이런 실행의 주체의 문제가 언제나 운동/활동 전체의 문제로 둔갑하고는 한다.

      할수 있고 해야할 일들이...이런 기획들과 아이디어가 부족한 적은 없다.

      언제나 부족한 것은 "누가"이고 "누구"이다.

 

 

-- 진보 역시 '개인화'되었다.

    좀더 핵심을 말하자면 진보 개념에서 공적인 성격이 빠져나가고

    사적인 것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보, 그것은 이제 공적인 성격이 사라졌다.

    이는 지금 현실을 '업그레이드'하려는 제안들이 다종다양해졌기 때문이고,

    기발하고 새로운 것이 정말 개선을 의미하는가라는 논쟁이

    그것이 도입되기 전후로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고

    선택된 연후에조차도 논박당할 여지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개선이란 문제가 이제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 차원의 기획이 되었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제 자신들의 지혜와 자원과 근면함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좀더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끌어 올리고,

    불쾌한 현재의 조건들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바로 개개 남녀들이기 때문이다.

 

==> 최근 지역의 활동가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과거의 지인들을 만나면 공통된 현상이 이것이었다.

       우리가 추구하던 '진보'라는 것이 사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는 거다.

       심지어는 요즘 무엇인가 함께하고자 하는 나의 주변 지인들마저도

       이렇게 '진보'를 사적인 것 화...개인화하여 다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처럼 강박일 정도의 공공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진 않더라도

       이렇게 개인화하는 진보란 실은 자기만족을 위한...자기방어의 목적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어보이고 심지어는 칙칙한 패배자의 이미지마저 묻어나는대도

       개인화의 길로 나아가는 모습은 옆에서 보는 이들마저 질리게 만드는 경향인 것 같다.

 

--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부여잡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를 고수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설계도에서 '미래'를 포용할 여지는 적어진다.

 

-- 통상 '중심'을 전적으로 지배하게 된 경향은

    '주변'에 속한 곳들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탐지되고 가장 분명하게 발언된다.

    문명의 중심 그 외곽지대에 산다는 것은 현상을 분명하게 관찰할 만큼,

    그것도 현상을 '객관화'해서 볼 만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 인식을 개념화하여 빚고 응축시키기에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 이 중심을 주변에서 파악하는 문제는 새삼스럽진 않다.

        우리 개인들의 삶속에서도 충분이 눈치챌수 있는 보편화된 현상이랄까...?

        이 중심을 주변에서 파악해 보는 것때문에 요즘 내가 힘든 것 같다.

        ...??......??.....^^;;

        그냥 우연찮게 주변에서 서성이다보니 보인다는 거다

        그 활동 혹은 삶의 중심적 경향이.....ㅎㅎ

        그래서 걱정하고 우려하고.....나까지 힘들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ㅎㅎ

         이런 나를 보면서 가끔은 이게 뭐하자는 거냐..?...싶어진다.....크크크

 

-- 현재의 일상은 (지위와 자격과 생계의) 불안정과

    (이것들이 지속되고 미래에도 안정적일지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일신상의,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

    즉, 소유물, 이웃, 지역사회의) 불안함을 결합한 것이다.

 

-- 유대와 동반관계는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5장. 공동체

 

--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달리 표현한 것 자체에 때로 신랄한 실용적 여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나는 '[현재] 그러함'의 담론을 측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다른 것은 '되고 있음'의 담론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 필리페 코엔은 당대의 삶의 고난들에 대한 치유책으로

    그들이 고아원, 감옥, 혹은 정신병동같아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코엔의 말은 타당하다.

    해방의 가능성은 공동체주의자들의 관심사였던 적이 없다.

    장래의 공동체가 치유하길 바라는 고난들은 바로

    해방의 과잉, 안락함을 누리기에는 너무나도 큰 해방의 가능성이 누적되어 생긴 침전물이다.

    자유와 안전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오랜 기간 결론없이 모색하면서,

    공동체주의는 후자의 편에 확고히 서 있다.

    인간이 소중히 여겨온 이 두가지 가치가 서로 충돌하고 반대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

    한 쪽을 맛보려면 다른 쪽의 일부, 아니 어쩌면 큼지막한 부분을

    반드시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한 가지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파고들어가게 되면 인간 전체의 안전의 합이 늘어날 수도 있고,

    자유와 안전이 상호 공존 속에서 각각 증대됨은 물론이고

    이들이 같이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새삼 등장한 몸의 우선성은

    공동체 이미지(확실성을 겸비한 안정감을 주는 공동체, 안전의 온실과도 같은 공동체)를 형성할 때

    몸이 이상적으로 보호되는 유형을 따르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경향에서 반영되고 있다.

 

 

====

우하핫 ...드뎌 정리 끝...^^;;

읽으면서 그때 그때 재빨리 정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읽자마자 정리해야 머릿속에 그나마 잠깐씩이라도 떠돌던 생각들을 남겨놓을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시차를 두고 정리하다 보면

점차로 그저그런 생각들만 머리에서 맴돈다...

그러니 결국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것도 시간에 따른 부지런함이 있어야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다....ㅎㅎ

 

분발하자....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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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4)..시공간에 대하여

  • 등록일
    2009/06/23 12:44
  • 수정일
    2009/06/23 12:44

정리가 서서히 지겨워진다.

이 책 읽기는 다 읽었고 재미도 상당했었는데

문제는 정리하는 것이 지겨워지는 거다...ㅎㅎ

 

뭐 딱히 이걸 왜 정리하려고 할까 하는 의구심도 뭉게뭉게 피어난다...ㅎㅎ

게으른자의 최후처럼 하기 싫으니까 온갖 핑계거리들이 마구마구 쏟아진다...ㅎㅎ

 

하지말까..?

 

3장. 시공간

 

-- 도시라는 것은 이방인들이 서로 마주칠 만한 장소를 뜻한다.

    덧붙이자면 이 말은 이방인들은 이방인으로서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 등장 뿐 아니라

    사라짐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상대를 보호해주면서 상대와 즐길 수 있게끔 하는 활동, 가면을 쓰는 것이 예의의 본질이다.

    각각의 가면들은 그 가면을 쓴 이들이 권력과 불쾌감, 개인적 감정과는 거리를 둔 순수한

    사회적 친분을 가능케한다.

     예의의 목표는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자신으로부터 타인을 보호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목표는 자신도 그만큼 보답을 받으리라는 희망속에서 추구된다.)

 

-- 예의의 기술을 개인적으로 습득하여 실천하기 전에, 그것은 우선 배경이 되는

    사회의 특성이 되어야 한다.

    만일 어느 도시의 주민들이 예의의 그 지난한 기술을 터득하려 한다면,

    예의바른 것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 도시의 환경인 것이다.

 

-- 그리하여 개인이 아닌 '공공의 가면'을 쓰는 것은 일종의 적극적 결속과 참여 행위가 된다.

    즉, 가면을 쓰는 일은 상호 교류하고 관련을 맺는 삶에서 이탈하여

    그냥 나를 좀 가만 내버려두라고, 그냥 이렇게 살자는 식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거나

      '진정한 자아'를 몰수해버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 결국 액체근대에서 각 개인들이 선택할 문제는 각 개인의 가면을 쓸 것인가

        아니면 공공의 가면을 쓸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와 예의바르게 되기위하여

        나 자신을 바꾸어 갈것인가 아니면 도시를 예의바른 환경으로 만들것인가 하는 문제인 듯 싶다.

        액체근대 즉, 유동하는 근대에 있어서 지나치게 개인의 능력과 책임으로 파편화되는 일상들을

        어떻게 공공의 문제로 집단화 할것인가가 첨예한 문제라면

       우리는 언제나 적극적인 결속과 참여의 방식으로써의 공공의 가면을 고민해 봐야 할 듯 하다...ㅎㅎ

       가면 무도회라도 열어보아야 하는 것일까...?...푸하하하

 

-- 공적 공간이면서도 예의바르지 않은 두번째 공간은 소비자들을 위한 역할, 정확히 말해서

    도시 거주자들을 소비자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소비자들은 흔히 별다른 실제적 사회 교류 없이도

    물리적 소비 공간을 서로 공유한다. 그러한 공간들은 상호적이지 않은 행위를 장려한다.

 

-- 쇼핑은 기본적으로 공간 여행이며 시간 여행은 부차적인 것이다.

    카니발은 변형된 도시, 더 엄밀히 말하면 변형된 도시가 원래의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동안의 시간의 틈이다.

 

-- 카니발은 현실이 겉으로 보는 것처럼 가혹하지는 않으며,

    도시가 돌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소비의 사원들은 일상적 현실의 무미 건조한 견고함과 난공불락의 성격말고는

    어떠한 본질도 드러내주지 않는다. 소비의 사원은 미셸 푸코의 '보트'처럼

    "홀로 존재하며 문을 닫아건 동시에 망망대해의 무한함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부유하는 공간의 조각이자 장소 없는 장소이다"

 

==> 소비 혹은 쇼핑에 대하여 좀더 많은 고민들을 해야겠다.

우선 소비는 자본주의의 내성, 본질로서의 [교환]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한 것 같고

쇼핑은 공적공간 혹은 자본의 공간에대한 점유 형식으로서의 고민들을 해봐야 겠다.

음....아무래도 조금은 무거운 공부가 되려나 ...?....ㅎㅎ

어쨋든 열공....ㅎㅎ...언젠가는....ㅎㅎ

 

-- 공간은 그것이 통제될때 진정 '소유되었다'.

    그리고 통제는 무엇보다도 '시간을 길들이는 것',

    시간 속에 존재하는 역동성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었다.

 

-- 시간의 새로운 즉시성은 인간의 공존 양식을 바꾸어 놓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인간이 공동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

    (혹은 때에 따라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방식),

     인간이 어떤 일들을 공동의 일로 만드는 방식(혹은 그렇게 하지 않는 방식)에서 일어난다.

 

-- 즉시성의 시대에 '합리적 선택'은 결과를 회피하면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결과가 내포하고 있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의 만족을 위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내일 만족할 기회를 저당잡힌 것이다.

    지속은 자산을 부채로 바꾸어 놓는다. 

   모든 육중하고, 고체이고 무거운 것들--이동을 가로막고 제한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시간, 즉시성, 저당잡힌 시간에 대한 고민은 진즉부터 했었다.

        시간이 현대인들 특히, 우리같이 마을의 새로운 생성에 대한 고민들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 듯 싶다.   

        특히 시간을 기록하고 그 속의 사람들의 공존의 방식들을 탐구한다는 것은

        보다 엄밀한 시간에 대한 분석들을 필요로 하기때문이다...ㅎㅎ

        이래저래 공부할 것들만 풍족해지는 삶이다...아니 나의 시간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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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3)]..무거움과 가벼움..ㅎㅎ

  • 등록일
    2009/06/22 13:10
  • 수정일
    2009/06/22 13:10

작정하고 정리는 하는데 더워지는 만큼 귀찮아지는 듯...ㅎㅎ

읽는 재미는 솔솔했는데 막상 정리하려니 조금은 귀찮아지는....ㅎㅎ

아마 더위 탓이겠지...?....ㅎㅎ

 

2장. 개인성

-- "생각하는 자에게 이 세상은 한편의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 이세상은 한편의 비극"...호레이스 월폴

 

--"수단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목적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확실성이다....게르하르드 슐츠

 

-- 새로운 상황에서 어려운 점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대부분의 인간의 삶이,

    돌아볼 것도 없이 자명한 목적들을 위한 수단을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선택할지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보내게 될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대조적이게도, 가벼운 자본주의는 가치-강박적일 수밖에 없다.

    '구직란'에 나온 출처가 의심스러운 작은 광고 -- "차를 가져라, 그러면 여행할 수 있다."--는

    오늘날의 과학기술 연구기관들과 실험실의 총수들이 던지는 질문인

    "우리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니 이제 문제를 찾아보자"라는 말과 나란히,

    새롭게 등장한 삶의 문제점을 집약해주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행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어떻게든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제일 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왜소화시키고 밀어버렸다.

 

==> 무거운 자본주의, 무거운 근대를 대표하는 양식인 포드주의에 대하여 좀더 고민해 봐야겠다.

   여하튼 이제까지의 자본주의 혹은 근대의 삶이 포드주의라는 갇힌 구조와 연결된 사슬안에서

   강한 고리들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레 수단들에 집중된 삶의 방식이었다면

    가벼운 자본주의, 유동하는 근대는 결국 목적을 잃어버린세대...그럼으로써 목적들을 찾아가는데

   막대한 삶의 에너지들을 소비하도록 하는 사회인 것 같다.

   결국 이런 목적들을 상실함으로써 근대체제에 저당잡혀버리는 삶은 어떻게 탈주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집단적인 삶의 목적들을 상정할 수 있을까..?

 

-- 그들의 사적인 문제들,  그와 비슷한 내 자신의 문제들은 공적으로 토론하기에 적합하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공적 이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정확히 사적이슈라는 테두리안에서 토론된다.

 

-- 공공의 의제에서 '사적이지 않은' 다른 모든 문제들을 밀어내는 것이다.

-- 과거에는 사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대중적, 공개적 표출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문제들이 공적 영역을 식민화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사이의 그 악명 높을 정도로 쉽게 이동하는 경계를

    단지 새롭게 재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공적 영역을 사적 드라마가 상연되거나 공개적으로 전시되고

    관람되는 영역으로 재규정하는 문제이다.

    대중매체에 의해 유포되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서 널리 용인되고 있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말의 현재 정의는 그러한 드라마를 공개석상에서 상연해야 할 의무와

    그 공연을 관람할 대중의 권리를 지시하고 있다.

--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잘못된 것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라는 것,

    자신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자신들의 수단과 노력으로 뜯어고쳐야만 한다는 말을 매일 듣는다.

     따라서 이들이 어떻게 도구를 사용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것이

     '사정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가장--아마도 유일하게--쓸모 있게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울 것이 못된다. 이들이 '사정을 아는'사람들한테 거듭 들은 말은,

     그들 각자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렇게 가벼운 자본주의하에서의 개인성은 결국 사적인 영역의 공적영역에서의

        일방적인 소비인것 같다. 교류 혹은 공유가 아닌 개인적 사적 영역들의 소비...

        가장 끜직한 이런 상황들이 결국 공적영역의 결핍으로 나타나고

        이런 결핍이 더욱더 개인들을 고립/파편화 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사적 영역의 공적 영역의 침탈을 막는 방식은 무엇일까..?

        과거로...무거운 근대로...혹은 잘 짜여진 포드주의적 삶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구체적인 방식의 구현은 무엇일까...?

 

--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면 두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달아나고 있는가...?

    소비....

    건강한 몸과 균형잡힌 몸

    쇼핑에 대한 고민들....

-- 오늘날 기준에 대한 복종을 얻어내는 것은 강제가 아닌, 유인과 꼬드김이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하나의 압력임을 드러내기보다는 마치 자유의지를 실천하는 것처럼 위장된다.

 

==> 결국 우리는 따로 떨어져 쇼핑한다....

 

요약 하자면 이렇다.

'쇼핑하고 다니는'식의 삶을 특징짓는 정체성의 이동성과 유연성은 해방의 도구가 아니고,

자유의 재분배이다.

때문에 이러한 삶은 절반의 축복이라 하겠다.

그것은 불쾌감이 들고 두려운 만큼이나 달콤하고 갈망의 대상이 되는,

그리고 가장 모순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축복이다.

이 축복은 앞뒤가 안 맞고 거의 신경증적인 반응을 낳게 되는, 지극히 모호한 가치이다.

소르본의 철학자 이브 미쇼의 표현대로

 "기회들이 과도해짐에 따라 파멸과 파편화, 해체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제는 첨예하게 분열적인 부작용을 낳는다.

이 과제가 갈등의 초점이 되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충동들을 촉발한다.

모두가 이러한 과제를 떠맡게 되지만, 문제의 해결은 각 개인들이 대단히 다른 환경에서

제각기 구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협력과 유대를 발생시키는 쪽으로 인간조건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인간의 처지들을 분할하고 흉포한 경쟁들을 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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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린]님의 블러그를 보다가...ㅎㅎ

  • 등록일
    2009/06/22 12:12
  • 수정일
    2009/06/22 12:12

[적린]님의 블러그를 보다가

간만에 푸하하 하면서 웹써핑을 즐기다.......ㅎ

우와 !!...역쉬 고수들은 다르군...하는 감탄연발과 감동..?....크크크

 

[적린]님 블러그에  소개된 글....ㅎㅎ..

ZZiRACi의 "나에게 독서란 [혁명]이다"에 관련된 글.

 

"독서란 [   ]다"를 채우는, 트랙백 릴레이.

 

맨 처음 제안하신 inuit님의 규칙....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그런데 6월 20일까지니 이미 마감한 릴레이다.

(위의 "릴레이의 오상"을 보니, "6월 20일까지만"이라는 규칙을 벗어나는,

"불의"(不義)의 포스팅이 되겠다.

ㅎㅎ 마감했으니 여기서 "땡"하려 한다. 후발주자 지정은 안 하고...)

 

여기까지 온 경로를 적어보면...

- inuit : 독서는 [자가교육]이다.

- 유정식 : 독서는 [성장]이다.

- 쉐아르 : 독서는 [확장]이다.
- 최동석 : 독서는 [삶]이다.
- 구월산 : 독서는 [여행]이다.
- easysun : 독서란 [영양제 챙겨먹기]다.
- 민노씨 : 독서란 [연애감정]이다.
- leopord : 독서란 [만남과 헤어짐]이다.
- Hendrix : 독서란 [연애]다.
- capcold : 독서란 [허세]다.
- TheQ : 독서란 [자뻑]이다.
- ZZiRACi: 독서란 [혁명]이다.

 

독서 릴레이: 나에게 독서란 [혁명]이다
Posted on 2009-06-20, 5:49 pm, by ZZiRACi, under 만물상.
낮잠을 잤다. 일어났더니 TheQ군께서 릴레이를 쏴주셨다.

이런… 귀찮기도 하지만 그래도 던져준 떡밥을 무시해서는 안되겠기에 이렇게 글을 쓴다.

근데 며칠동안 RSS를 통해 다양한 독서론을 보았지만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이렇게 나에게까지 올줄은 몰랐다고 해야할까? 여튼 세계는 넓고, 노는 바닥은 좁다.(응!?)

나에게 독서란 [혁명]이다.

뭔가 꽁끼한 말을 뽑아내고 싶기도 한데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허세]나 [자뻑]을 뒤 이어 [거세]나 [자폭] 등을 생각해봤지만,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닌거 같아 접기로 했다.

그래도 릴레이인데 좀 뽀대나는 말을 내세워야겠다 싶어 생각한 말이 [혁명]이다.

혁명革命. 사전을 찾아보니 설명이 꽤 복잡하다.

국어사전에서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Daum 국어사전)”이라고 한단다.

백과사전에서는 한술 더 떠서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으로 해석하려 든다.

좀 뽀대나고 싶어서 선택한 [혁명]이지만 그런 뜻은 아니고.

혁명革命이란 말 그대로 명命을 바꾸는 것(革)을 말한다.

명命이란 주어진 객관적인 조건을 말한다.

선택이전에 이미 주어진.

독서란 바로 그 현실을 깨뜨려 새로운 삶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독서는 삶의 변화를 수반한다.

끊임없이 다른 ‘나’를 만나도록 하는 힘이라고 할까나?

 

<논어서설論語序說>에 소개된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논어]를 읽는 데에 다 읽은 뒤에 아무 일이 없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한 두 구절을 얻어 기뻐하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그것을 알고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었을 때에, 읽기도 전에 이러한 사람이었고

읽은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읽지 않은 것이다.

 

===

푸하하하....다들 재미나게 사시는 듯 부러웠다...ㅎㅎ

 

그래서 찾아 보았다.....ㅎㅎ

 

 [inuit]님이 쓰신  블로그 릴레이의 五常
Culture | 2008/12/28 13:15 | Inuit
그간 블로그 릴레이로 이웃 블로거들이 시끌벅적했습니다.

그그 탓인지 며칠 전 꿈에 블로그 신령을 만났습니다.

저는 저는 물었습니다.

블로그 릴레이는 어떻게 해야해야 잘하는 걸까요?

 

인 (仁)
릴레이 받는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고, 반드시 그에게 도움되는 릴레이를 넘겨야 하느니라.

이를 릴레이 부여의 仁이라 한다. 비단 릴레이 뿐 아니라 블로거의 기본이니라.

만일, 도움 될지 안될지 모르고 무작정 넘기려면 차라리 자폭을 하라.

앞 사람 민망하지 않게 릴레이가 중단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에 준하는 포스팅으로 보상해야 함을 잊지 말거라.

가급적 릴레이가 이어지도록 새사람을 소개해줘라.

이를 일컬어 자폭의 仁이라 한다.

그냥 어정쩡한 (^^; ) 표정짓고 우적우적 씹어 먹음은 不仁이다.

절대로 앞사람 손을 부끄럽게 하지 말라.

 

또한, 릴레이 받는 사람의 사정을 살핌이다.

전에 준거 까먹고 연타로 또 주지는 않는지, 최근 2주내에 다른 이의 릴레이 받은 적이 있는지,

요즘 편찮은 기색이 있는지, 아니면 회사나 학업에 어려움은 없는지,

또는 태생적으로 릴레이에 앨러지 반응이 있는지,

저번 릴레이에 받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 줘서 내심 섭섭해 했던 적이 있는지

이 모든 심기를 세세히 헤아려야 하느니라.

이는 릴레이 주자 선정의 仁이다. 사랑과 배려의 마음이다.


의(義)
릴레이 규칙 함부로 바꾸지 마라.

창시자의 취지를 충분히 존중하라.

블로거 답게 최대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답하되, 원뜻은 충실히 이어가야 하느니라.

이야말로 릴레이의 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간부터 구경하는 사람 이해를 돕기 위해,

릴레이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계보를 낱낱이 적어라.

릴레이 친구들 돌아다니다 보면 누가 누구로부터 받았는지 서로 헛갈린다.

아마 너조차 헛갈릴거다.

릴레이 따라오는 마음의 흐름을 잊으면 릴레이가 아니라 낱글 모음에 다름 아닐지어다.

이렇게 남을 위해 꼼꼼히 기록하는 마음을 릴레이 기록의 義라 일컫는다.

 

또한, 구경하다 재미난 릴레이가 소강이다 싶으면, 주저말고 자발적으로 릴레이를 떠안아라.

이는 블로거 군자의 도이며 릴레이 구경꾼의 義이니라.

내 대에서 릴레이 불씨 꺼뜨릴까 저어하던 블로거는,

자발적으로 소방수 역할을 맡은 선수를 평생 잊지 못할지니.


예(禮)
이왕 릴레이 받을진대, 궁시렁대지 말고 감사히 받아라.

릴레이 주는 사람은 고민하고 번민해서 네 이름을 부른 것이다.

너는 꽃이 되어야 한다.

그 지워지지 않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라. 이를 릴레이 수용자의 禮라 한다.

 

일단 받은 릴레이는 시일이 걸려도 반드시 완수를 해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릴레이 준 사람 마음 멍들지 않게 하라.

시간이 좀 걸리면 댓글로라도 봤다고 말해라.

릴레이 준 사람은 봤는지 안 봤는지 알길 없어 번민할터이다.

이를 릴레이 확인의 禮라 한다.
 
하지만, 정말로 피치 못할 사유가 있다면,

반드시 댓글이 아닌 포스트로 설명을 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라.

블로거는 포스트로 말한다.

익명잡배는 댓글로만 말한다.

따라서, 해명 포스트 자체도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갖춰라.

이것은 블로거의 禮이며, 릴레이 거절의 禮다.

그리고 나중이라도 반드시 마음의 빚을 갚아라.

이는 블로거를 떠나 사람으로서의 禮일지어다.


지(智)
릴레이 아무나 돌리지 마라.

받을 사람은 적어도 댓글 10회 이상 주고 받고, 한달 이상은 알고 있는 사이여야 하느니라.

시간과 댓글 횟수가 대수 아니다.

다만, 말 몇마디 섞었다고 친한 척 하지 않음이다.

진정으로 그 마음을 알고 이해할 때 주어라.

RSS 리스트에서 제목 없이 포스트 본문만 보고 그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가.

메타블로그 어지러운 리스트에서, 제목만 보고도 그 사람을 찝어낼 수 있는가.

남의 블로그 놀러갔다 스크롤 내려 읽게된 댓글 글투만 보고 그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블로고스피어에서 그를 초큼 안다고 한다.

이런 사람에게야 넘기는 것을 릴레이의 智라고 하느니라.


신(信)
릴레이 주는 사람은 나를 믿고 의지해서 준다는 그 마음을 믿어라.

서로 믿지 못하는 사이의 릴레이는 시간만 소모하는 무의미일 뿐이다.

또한 릴레이를 받았으면 그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가

다른 릴레이로 되돌려주는 정성을 보여라.

장난으로 앙갚지 말고, 반드시 보답하는 마음을 담아라.

이때 비로소 우리는 블로거 릴레이의 信이 이뤄졌다 한다.

 

이 다섯 가지 인의예지신을 이루는 자를,

우리는 블로거 릴레이의 오상(五常)을 이뤘다 부른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블로그를 조금 안다고 칭할 수 있을지어다.
 

====

푸하하하....날도 더운데 마음 상쾌해지는 글이라서

이렇게 퍼와서 남긴다....잊지 않기 위해서......ㅎㅎ

그리고 언젠가 나도 한번 이런 릴레이 에 도전해 볼까나 싶기도 하구.....ㅎㅎ

여튼 부러운 세상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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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2)]..사적인것의 공적공간 침탈...^^;;

  • 등록일
    2009/06/21 10:11
  • 수정일
    2009/06/21 10:11

이어서 정리....ㅎㅎ

 

1. 해방

-- 장 폴 샤르트르가 언명했듯이 부르주아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르주아로 살아야만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다.

-- 내가 누군가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근대적인 삶을 특징짓는,

    오직 근대적 삶에만 존재하는 요소이다.

-- 계급은 신분과는 달리 "합류"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 구성원들은 매일의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확인되고, 시험되어야 했다.

 

==> 결국 현대사회에서의 계급은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신분제적 질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생각해 보면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은 어쩌면 노동자 계급으로써 살아가면서

       스스로 매일매일을 지속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소위 잘나가시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위치로보면  노동하는 계급이지만

       비정규직,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만나는 순간 어쩌면 스스로 부르조아계급화되는지도 모른다.

       결국 스스로 노동하는 계급임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몫으로 남아 있는 측면이 있는것 같다.

       우리가 일상에서 비정규직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볼때 어떻게 바라보고 함께 하는냐가

       언제나 입으로써의 계급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위치로써의 계급을 결정짓는 것 같다.

 

-- '공적인 것들'은 '사적인 것들'에 위해 식민화 되어 버렸다. '공공의 이해'는 공적인 인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격하되고 공공생활의 기술은 개인사의 공개적 나열과 사사로운 감정의

    공개토로(내밀할 수록 더욱 좋은)라는 협의의 의미로 축소되었다. 그러한 지위 격하에 맞서는

     '공적인 현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그들을 공적무대에 오르게끔 촉구하는 것은 공공의 대의명분을 모색하거나 공공의 선

    혹은 공동의 삶을 영유하는 원칙이 의미하는 바를 조정하는 방안을 찾기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네트워크'에 대한 절실한 필요이다.  리처드 세넷이 줄곧 지적하듯이,

    친밀함을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가장 선호되고, 아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방안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건설하는 기술은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지고

    오락가락하는 정서반응들처럼 나약하고 단명하는 '공동체들'을 양산한다.

     그 공동체들은 변덕스럽게 한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이동하며 정착할 항구를 찾아

     결론이 나지 않는 탐색을 하며 영원히 또도는 배와 같다.

     근심 걱정을 나누고, 고뇌와 증오도 나누지만 각각의 공동체들은 수많은 고립된 개인들이

     그들만의 고립된 개별적 두려움을 매달아 놓은 말뚝주위로

     일시적으로 집결한 '말뚝'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 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수 있는 광경인 것 같다.

     최근의 시민사회단체의 행사들 그것도 진지한 토론의 자리에 가보면 결국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삶의 내밀함들이 너무나 쉽게 고백처럼 떠돌아 다니지만

     그런 고백들이 결국 공동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 같은 공적인 처리가 아니라
     그저 각 개인 스스로가 그저 공적인 영역에서의 자신에 대한 공감정도..?...그렇게   

     소비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가장 많이 당황스럽게 하는 측면인데

     가령 함께 수업하였던 어떤 교사 혹은 다른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누군가를 만나다 보면

    너무나 쉽게 자신의 힘든 점들을 이야기하고 나로 하여금 공감 혹은 지지를 바라지만

   언제나 그것은 거기까지 이다, 그 해결을 위한 어떤 시도를 나름 구상하는 순간

   그 개인은 무척 당황하고 언제나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풀겠다고 냉랭하게 가버린다.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이야기 나눌 무엇인가의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적인 것에서 끝난다는 것...

  즉, 모든 과제와 책임은 그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갈 뿐이다.

   항상 그정도의 연계만을 바라고 그렇게 사는 것이 쿨한 세상이라고 느낀다

   물론 그래서 힘들어지는 자신의 삶은 또한 자신의 몫이라고 자조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이 사는 모습은 아닐까..?

 

-- 자기주장을 할 권리와 그러한 자기주장을 실행 가능한 것 혹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사회환경을 조정하는 능력간에 도사리고 있는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유동적 근대의 주요모순 -- 우리가 시행착오와 비판적 사고, 과감한 실험을 통해

    그것과 집단적으로 대결하는 법을 역시 집단적으로 익혀야 할 필요가 있는 -- 인 듯 보인다,

-- '전기적인 해결책들'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효과적인 '체제모순에 대한 전기적인 해결책들'이 없기 때문이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효과적 해결방안이 부족한 것을 상쇄하기 위해 상상의 해결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상상에 의한 것이든 진정한 것이든 모든 '해결책'이 합리적이고

    실행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그 과제나 책임에서 '개인화'와 한편이거나

    동등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두려움을 느끼는 개인들이 비록 짧은 순간이 나마

    그들의 두려움을 집단적으로 의지할 어떤 개별적 말뚝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 개인의 입장에서, 공적 공간은 사적인 근심거리들이 더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게 되거나

    새로운 집단적 특성을 획득하는 일 없이 투사되는 거대한 은막에 지나지 않는다.

    공적 공간은 개인의 비밀이 공개적으로 토로되고 친밀감이 형성되는 곳이다.

    마치 가이드를 따라 정해진 관광 일정을 밟는 식으로 이러한 나날의

    '공적'공간을 여행하고 난 개인은, 법률상 개인의 위상이 더 강화되는 한편,

    그들이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다른 모든 개인들이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비틀거리고 (일시적이라면 다행) 패배를 감내하고 있다는 

    확인을 새삼 갖게 된다,

 

==> 이 부분에서 아 !!....하는 감탄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다는....ㅎㅎ

  결국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고백이라는 것들을 지나치게 쉽게 행하고 그것을 통해

  감정적인 지지들을 받아가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점차 그들은 개인화되어버린다는 거다

아 !! 누구나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지면서

내일부터 나도 더 철저히 개인화되어 살아가야 겠다는것을 재확인하고 강화해 가는 식으로

공적인 영역들을 사용해 버린다는 거다.

물론 이런 것들이 온전히 개인의 탓이 아니라 유동하는 근대가 우리에게 숙명처럼 안겨줘 버린 

체제의 모습이 그렇다는거다.

그렇게 유동하는 근대의 체제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이 어저면 

그런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집단적 모색과 집단적 해결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럴때 우리가 보심해야 하는 것 또한 그런 개인화 하려는 경향을 어떻게 공동화 할 것인가 이다.

이런 공공 혹은 공동의 해결모색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무척 불편하게 만들고

또한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공동체에서는 어떤 집단적 실험들이 가능할 것인가..?

 개인화 해버리는 경향을 버리고 어떻게 집단적 모색과 해결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 통찰하지 않고도 사는 법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통찰이 시작되는 것을 달콤한 해방의 전망으로 환영하는 일은 거의 없다.

    순진함때문에 가장 괴롭고 반역적인 친숙한, 그리하여 확고한 어떤 것으로 보이게 된다.

    또한 그런 악조건이 근거한 빈약한 발판을 꿰뚫어 보는 그 어떤 통찰도

    불신임, 의혹, 불안의 전조가 되며 이를 즐거운 기대감으로 맞이할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아도르노의 입장에서는, 비록 손쉬운 성공을 예언해주지는 않지만

    통찰에 대한 널리 유포된 적개심은 오히려 길조이다.

    순진한 이들의 속박은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고립"이 훨씬 용이해진다.

    "아무도 사지 않을 독특한 어떤 것을 팔려고 내놓은 자는 자신이 뜻하지 않는 경우에도

     교환으로부터 자유롭다." 이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교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원형적 조건으로서의 망명에 대한 생각이다.

     망명이 제공하는 상품은 어렴풋하게나마 사고 싶어하는 이가 있을 턱이 없는 그런 것 들이다. .....

     ...사유하는 사람의 초연함, 그의 일상적 생활방식이 생존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망명속에서다. 

 

==> 결국 망명이라는 것이 체제에서의 일종의 불구적 삶이라면 어저면 우리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그런 망명의 조건이라는 것 같다. 즉, 기거이 망명하려는 자,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려는자여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순진한(?) 사람들이 통찰...사회/체제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혼란스러워하고 불편하고 힘들어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행운일 수 있다.

그런 행운들 ....순진함 사람들에게 그런 불안/당혹스러움을 주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교육이 아닐까 싶다.

 

-- 실행하라는 명령도, 실행을 거부하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전자는 불가피하게 지배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

    결과에 대한 공리주의적 고려가 동기라는 윤리적 원칙을 앞지르고

    자유에 대한 갈망이 희석되고 왜골될 것이라는,

   새로운 억압들에 수반되는 모든 공포들이 자유에 부과된다.

   후자는 아마도 타협하지 않는 순수성이 자아도취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러한 사유는 비효율적이고 황폐한 것으로 방치될 것이다.

-- 사유하는 삶과 행동하는 삶 사이의 딜레마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점에서만 닮았다고 할

    두가지 전망중 택일을 하는 문제로 응축된다.

    사유를 통해 유지되는 가치들을 타락으로부터 잘 보호할 수록

    그들의 삶에 봉사해야 할 가치들이 그들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꾸만 축소된다.

    그 가치가 그들 삶에 끼치는 영향이 클수록

    혁신을 촉구하고 장려했던 가치들에 상응하는 개선된 삶을 떠올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 자유로운 수행자의 운명은 그 얽힌 양상을 풀기는 커녕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운 이율배반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인정맏을 만큼 견고해야 할 스르로 주조한 정체성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덕스러운 상황속에서 미래의 활동에 대한 자유를 해치치 않을만큼 만 유동적일 때 생기는

    모순을 생각해 보자. 혹은 이전보다 유례없이 커진 기대감이란 짐을 지게 된 사람들간의 협력에서

    드러나는 위태로움, 즉 제도적 뒷받침이 변변치 않아 더 커진 기대에

    맞서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 그렇다.

    혹은 무관심과 강압의 험준한 암벽들 사이로 위험한 항해를 해야하는,

    다시 되찾은 책무가 처한 딱한 난관이 그렇다.

    혹은 의지할 데라곤 행동하는 자의 열정과 헌신밖에 없는데도 목표를 달성하려면

    그 행동의 완전함을 유지해줄 좀더 지속적인 접착력이 요구되는 모든 공공행동의 허약함이 그러하다.

    또는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일관한 삶의 경험을 공공의 의제에 걸맞게

   공공 정책 문제로 일반화시켜 가다듬는 지독하게 어려운 일도 그렇다. 

 

-- 개인의 의지, 욕망, 목표가 어떻게 기능하고 그 용도와 의도는 무엇인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는 경향인 창조적 능력과 창조적 리비도, 바로 이러한 것들이

   그저 바깥에 떠도는 수많은 자원들이거나 어떤 경우에는 장애물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 '소극적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이에서 승리했지만, 무게중심이 '적극적 자유',

   즉 선택의 범위와 선택과 관련된 의사일정을 결정할 자유로 옮겨지자

   투쟁은 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공적 권력은 그것이 지녔던 애초의 근사함을 잃고 억압적 가능성에 분개했지만

   합법화하는 그 능력의 상당부분 역시 잃게 되었다.

   해방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진척을 보기 위해서는 이제 공적 권력은 권력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서

   힘껏 파괴하고 제거하려 했던 것을 소생시켜야만 한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영역'과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 결국 결론은 공적 영역에 침투하는 개인화하려는 경향 혹은 '사적영역'의 공적 의제화를 막는 것

        지나친 사적 영역의 범람에 대하여 공공의 혹은 공동의 논의/의제/활동 을 복원하는 것이리라

        더이상 개인화해버린 개인들의 감정적 지지가 아닌

        그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제들을 공공 혹은 공동의 의제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들 공동체에서도 우선은 이러한 개인화 하려는 경향들을 공공/공동의 행동 혹은 이야기로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 그 방식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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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함....펜그림은 기장된다...^^;;

  • 등록일
    2009/06/21 08:21
  • 수정일
    2009/06/21 08:21

평소에 연필로 끄적대다가

간만에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밖에 비도오고  간만에 진지한 강의를 듣다보니

잠자지 못해서 그런지 졸음이 밀려온다.

꾸벅꾸벅 졸기에는 조금 미안한 상황이라서

펜으로 낙서를 했다..ㅎㅎ

 

연필로 할때는 지우개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서 편하더니

펜으로 그리려 하니 손이 무척 긴장되더라...ㅎㅎ

아마 지우지 못한다는 것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인듯 싶다.....ㅎㅎ

그래서 평소 그럭저럭 그린다고 나름 자신 붙었던 손그림도

이리 못나져 버리는 것 같다,

 

 

내친 김에

요 며칠 속으로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충동에 못이겨

만화식으로 그려 본다...ㅎㅎ

원래는 콘티를 짜 볼까 했는데

앞에서 강의하시는 분께 미안해서

그저 몰래 이미지 따라 그리기 정도를 해봤다....ㅎㅎ

 

 

 

푸하하하....^^;;

고등학교땐가

수업시간에 하두 졸려서 그려보곤 했던 그림 이미지인데

얼마전 변병준씨 그림에서 보고 빙그레 웃었던 기억이 난다.

뭐 나름 고딩시절에는 이런 그림 그리는 것이

나에게 제법 낭만스러워(..??..) 했던 적인 있는 것도 같다.....ㅎㅎ...^^;;

 

여튼 곧 강의가 끝나려나 보다...ㅎㅎ

아 !!......졸린다.

비오는 날은

왠지 한없이 나른해 진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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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1)]..사적인 것의 공적공간침탈..??

  • 등록일
    2009/06/19 17:20
  • 수정일
    2009/06/19 17:20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는 중이다...ㅎㅎ

 

처음에 액체적 공포...한국 번역본 이름은 [유동하는 공포]라는

책을 저번달에 읽었었는데

책읽고도 정리하지 않은 것이 찜찜하기도 하고.....ㅎㅎ

 

무슨 의무감에 꼭 정리하자는 것은 아니고...ㅎㅎ

  나날이 감퇴하는 기억력을 믿을 수가 없어서 가급적 정리하자는 결심을 했더랬다...ㅎㅎ

그런데 실은 제대로 집행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짜증내고 있다 는...ㅎㅎ

한달에 10 여권을 읽는 편인데 문제는 맨날 읽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ㅎㅎ

읽는 순간에는 잼나게 신나게 읽는데 나중에 조금은 사용하려면

다시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ㅎㅎ

그래서 가급적 메모...정리...발제...?....뭐든 기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자는 생각을 했었다.

.......ㅎㅎ

 

여하튼 그래서

[유동하는 공포]를 정리할까 하다가

날도 덥고 몸도 피곤하고...ㅎㅎ...뭐 그런 핑계로 에어컨 찾아 서점에 도망왔는데(..??..ㅎㅎ)

우연찮게 이 책을 보아서 충동구매를 했다는 거다....ㅎㅎ

 

 

그래서 약간은 어이없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ㅎㅎ...의외로 너무 재미있는 거다...ㅎㅎ

 

간만에 월척을 건졌다 싶은 마음에 신나게 읽어 가다가

갑자기...아 !!...정리정리...?....ㅎㅎ

그래서 다 읽지도 않았는데 정리하기 시작했다....ㅎㅎ

 

실은 책이 무척 쉽기도 하고

나름 최근 고민하던 것들을 다른 측면으로 해석해 볼 수 있어서 좋은데

어렵지 않은 만큼 대략적인 내용 파악이 쉬운 편이다...ㅎㅎ

 

그래서

그냥 편한 마음으로 정리하자...싶은 마음이다.....ㅎㅎ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가 고정된 고체적 상태에서 유동하는 액체의 상태로 하였다는 것이고

현대의 문제는 바로 이 액체화 되었고 액체와 되어가는

모든 사슬과 규제와 억압들이 녹아나고 있는데서 발생한다고 본다.

기존의 비판철학 혹은 현대의 문제점들을 사고하는 철학들이 당면한 문제 또한

바로 고체화된 형식인 전근대 혹은 초기 근대의 문제의식 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발생한다는

그래서 이젠 액체화 된....유동적이고 규칙 등이 없는 아니  형태화 되지 않는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거다....

 

전체적으로

이런 문제의식이 바우만의 특징들은 아닌듯 하지만

(들뢰즈 등에서 이미 그 모습을 확인....조금은 익숙한 개념...ㅎㅎ)

그의 통찰력 중 개인의 문제....개인화하는 경향에 대한 인식은 많은 생각과 고민거리를 던져 주었다.

아니 고민거리를 주었다기 보다는

내가 정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정리의 방향들을 암시해 주었다는 생각이다...

 

-- 대부분의 디스토피아적 각본과는 정반대로 이러한 결과는 독재나 종속, 억압이나 노예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체제'가 사적영역을 '식민화'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데서 발생하였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의무를 덜어준 결과이다.....체제와 자유로운 행위자들이

근본적으로 결속을 끊고, 서로 만나지 않고 스쳐갈 수 있도록 해준 기술들의 산물이다.

 

-- 유동적 근대성의 시대인 현재까지도 계속 녹고 있는 중인 견고한 것은 바로

    개인의 선택들을 집단적 기획들이나 행동들과 연결시켜주던 유대관계들

    - 개인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상호조절을 할 수 있게 해온 패턴들-이다.

 

-- 자유로운 개인들이 직면한 과제는 그들의 새로운 자유를 이용하여 알맞은 장소를 찾아 그 곳에

   순응하며 정착하는 것이었다. 그 위치에 걸맞고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규범과 양식을

   충직하게 따름으로써 말이다.

    오늘날 점점더 공급이 부족해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순응하고 안정적 지향점으로 선택할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인도해 줄 수 있는 그러한 행동 유형들, 규약들, 규칙들이다.

 

-- 그결과 우리 시대는 개인화되고 사적으로 변한 근대,

    유형을 짜야하는 부담과 실패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개인의 어깨위에 떨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 결국 현대는 액체화 한다는 것...이는 결국 우리들을 속박하는 것에서 벗어난

무제한의 자유를 주지만 그 자유란 결국 철저한 개인화라는 거고

이러한 개인화의 자유는 모든 선택과 그 책임도 전적으로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

결국 권력이 지배는 하되 책임지지 않는 것...이  모든 책임을 선택하는 자에게 주어버린

사회라는 분석이다. 즉, 현대는 그래 마음놓고 선택하라...대신 모든 자유와 책임은

모든 각 개인의 능력이다...사회는 없다...공동체도 없다...다만 개인만 있을뿐....^^;;

이렇게 바라보는 것일까...?

 

우리를 압박하고 속박하던 것들을 풀어주는 대신에

모든 책임과 선택조차 상호작용에 의한 공적 영역이 아닌 파편화된 개인의 사적영역으로

부과한다는 것이 현대의 시대적 욕망이라는 것...자본의 욕망....^^;;

결국 개인화와 함께 지워진 이런 고립된 사적 영역의 과도화가 문제라는 것일까..?

 

개인화...사적영역....고립과 파편...그리고 부과된 책임과 불안한 선택....^^;;

 

이런 사회에서 혁명 혹은 진보는 가능할까...?...방식은...?

 

1. 해방

-- 마르쿠제에게 문제가 된 것은 우리가 기필코 해방을 이루고 반드시 '사회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상품을 배달하는'사회에만 생기는 현상, 즉 해방을 이루어야 하는데

'대중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해방되길 원하는 사람이 드물고,

그러한 소망에 따라 행동에 선뜻 나서는 이는 더더욱 없다는 것,

아니 그 어떤 사람도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기왕의 처지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 지식인들을 근심케 하는 더욱 암울한 예감은 자유를 실행하는데 야기될 법한

   여러 곤경을 놓고 볼때, 사람들이 자유로움 자체를 싫어하고

   해방의 전망에 오히려 분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베풀어진 전대미문의 자유는 전대미문의 무능을 동반하고 온것이다.

 

==> 결국 현대인들의 문제는 절대적 자유가 주는 공포, 불편함을 싫어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불편/불안때문이라도 절대적 자유나 해방의 전망을 애써 외면하면서

스스로 어떤 집단적 최면에 스스로를 자리매김 시킨다는 것 같다.

결국 자유를 얻기위한 활동 즉, 목표 목적 등 고정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체로써의

사회가 제시되었을때 까지의 운동에 대한 열망이 액체의 즉,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성으로서의 운동에 직면하는 순간 갑자기 보수화 혹은 스스로를 속박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 생성에는 물론 수많은 것들에 대한 선택의 불편함...매순간의 결과에 대한 책임 등등이

뒤따른다는 거고 그러는 순간 그들은 혁명을 배신한다는 것일까..?)

 

현재 우리의 상황이 새롭고 다른 이유

-- 우리가 밟는 길에 끝이 있다는 사실이 사라짐

-- 근대화의 과제와 책임의 규칙이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사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 결국 공동체가 사라지고 개인만이 남았다는 것 같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 혹은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한 공동체의 상실과

그러한 모든 과제와 책임들이 사적인 영역으로 변함으로써 생기는

각 개인들의 어려움이 겹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인 것 같다...ㅎㅎ

 

---

아...!!...정리하다 보니

이제 밤근무 준비할 시간이 되어 버렸군....크크

내일 낮은 수련회로 바쁠 듯....ㅎㅎ

바로 정리해야 하겠는데 또 다시 며칠 씩 늦추어질 듯도 싶군....^^;;

여튼 필받았을때 정리하자.....홧팅....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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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나 해볼까..??

  • 등록일
    2009/06/19 10:34
  • 수정일
    2009/06/19 10:34

요 며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지치기도 하고 이젠 서서히 지겨워진달까...??

 

이유는 아마도 무엇인가를 보고 그린다는 것이 조금은 짜증난다고나 할까..?

그래서 만화를 그려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나 보다...ㅎㅎ

 

그래서 내가 좋아라 하는 만화가의 그림을 흉내내 본다.

 

 

그려놓고 보니 에게게 이게 뭐야...??.....^^;;

창피함의 극치군...크크크

 

그냥 보고 그리기나 해야하나...??/.....싶다....^^;;

그래도 시작한 것 한번만 더 해볼까 해서 그렸는데

역시

만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무엇인가 전달하려는 메세지가 있어야 하고

일종의 콘티가 있어야 하는 법

그냥 흉내내는 것으로는 안되나 보다.

만화를 하려면

우선 할 이야기부터 정리해야 하는 것이 맞나보다....ㅎㅎ

 

 

이왕 하는 거 콘티를 짜봐...?....ㅎㅎ

그냥 그림이나 그리자....오버하지 말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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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보낸 편지]...아 ! 그람시...!!

  • 등록일
    2009/06/17 17:58
  • 수정일
    2009/06/17 17:58

그람시를 읽었다.....

 

원래는 옥중수고를 읽을까 하다가

요즘 날도 너무 덥고 몸도 많이 피곤한 터라

쉽고 편한 책 중심으로 읽자..!!...라는 생각에서

그냥 이 책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읽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람시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서 감옥에 감금된 11년동안에

그람시가 지인들에게 쓴 편지글 모음 책이다.

 

[옥중수고]가 전문적인 사회과학적 작품이라면

이 책은 그의 삶을 보여주는 문학 혹은 자서전이랄까...?

감옥에 철저히 고립되고 격리된 삶을 살아가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삶들을 읶르어 나가고 [옥중수고]와 같은 원대한 연구들을 진행하였는지

그 수감기간 동안 어떻게 버티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들을 구성해 나가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읽는 내내 가슴이 아프게 만든 책이다....^^;';

 

오히려 [옥중소고]에서 보여주는 명철한 사상가로써의 모습보다도

이 책에서 보여주는 강인하고 흔들림없는

그리고 언제나 현실에 기반한 운동을 고민하고 정리한는 그의 모습은

새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가 어떻게 운동이라는 삶을 나의 주체적인 삶으로 재구성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마음에 그 치열함이 지독하게 각인되는 그런 책이다.

 

읽으면서

쉽고 편하게 읽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많은 현실적 활동들을 내 삶의 기반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반성을 하게 만들어 준 그람시에게

언제나 흔들림 없는 존경을 보내본다....ㅎㅎ...(받아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ㅎㅎ)

 

-- 일반적으로 숙명적인 사회적 후진성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던 바로 그 범죄들(가정파괴)은

    사르데냐에서의 자본주의적 착취가 진전됨에 따라 무서운 증가세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증가세는 보다 선진적인 경제 질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르데냐 경제가 사르데냐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적 틀 내의 다른 지역들을 위해 조직되었던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 3년째 되는 해에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이전 활동들로부터 얻은

     잠재적인 자극 덩어리가 꺼지기 시작하고 상투적인 의지가 어스레한 빛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데, 그나마 이 의지는 결코 실현될수 없는 거창한 계획들과 공상들 속에서

     스스로를 고갈시킵니다.

 

--  지루함은 저의 최악의 적입니다.

     하루종일 읽거나 쓰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지루함으로서 게으름에서 비롯된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저는 계속 일을 하니까요...)

     바깥세상과의 접촉의 부재에서 오는 것입니다........

     ..........

     그것은 그저 지루함이었습니다.

     외로움에서, 그리고 항상 똑같은 것을 보고

     항상 똑같은 일을 하는데서 오는 끔찍한 지루함이지요

 

--  솔직하게 말하면 희원적 사고가 구체적인 의지력의 자리를 차지하는 걸 볼 때 만큼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일이 내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나 <쓸모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생기면

     나는 부화가 치미는 정도지만, 이런 현상을 나와 가까운,

     내가 그 사람의 <쓸모>에 대해 거의 객관적일 수 없고

     내가 격려해 주고 싶은 누군가에게서 목격하게 되면

     그때는 나는 고통스럽습니다......

     .............

     눈을 뜬채 꿈을 꾸는 대신 우리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목표들만을 설정하고,

      그것들을 이루는 최선의 수단들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  문제의 일부는 당신이 나에 관해 너무 진지하고 열심이라는 점이고,

     이것은 종종 당신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행동들 가운데 많은 것이 지나칠 정도의 소박성을 드러냅니다

 

-- 나는 당신에게 내가 근본적으로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당신은 그게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 입장에 자신을 갖다 놓을 수도 없어요. 결과적으로 나는 당신에게

    희극 배우들처럼 보일 수 밖에 없지요.

    나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벽에 내 머리를 부딪히면 벽이 아니라

    내 머리가 부서질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당연한 얘기인지 모르나

    자신의 머리를 부딪혀야만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본적이 없는 사람,

    그리고 벽을 열기 위해서는 <열려라 참깨>라고만 말하면 된다고

    배운 사람에게는 당연한 얘기가 아닙니다

 

--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려는>만큼 그 속으로 더 <들어가서> 생활의

     규칙적인 리듬을 받아들일 때에만 큰 고난을 만나도 일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1919년에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 1930년에는

     우스꽝스러운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지요.

     이 문제는 내가 보기에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사실, 당신과 내가 그것에 대해 무어을 할 수 있겠어요 ?

     잔소리와 경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겁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상황들에서 유일한 방법은 설득과 강압을 함께 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

 

그는 아마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철저한 고립에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순간도 자신의 삶을 놓지 않았고

한순간도 자신의 신념을 내려 놓지 않았다.....

 

나는...?

나는 그 만큼 괴롭고 외롭고 아팠을 까...?

 

오늘따라 나 스스로가 너무 어리고 유치한 듯해서

부끄러워졌다는 거다...이 책을 읽는 내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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