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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감증

오감이 살아야 제대로 사는 맛을 느낄텐데...나이 먹을 수록 감각이 점점 더 무뎌지고 있는 것 같다. 때론 바늘로 콕 찔러서 피가 나면 굳었던 근육이 풀어지듯 굳었던 감각이 풀리지 않을까 이런 저런 주책없는 생각까지 해보곤 한다.


어떤 때는 느낌이 살아 있어야 할 때 죽고, 덜 느껴야 할 때는 매우 심각하게 느끼는 불감증이상을 겪곤 한다. 특히 요즘 같은 때가 그렇다. 내부의 이런 저런 일들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제대로 대응해야 할 투쟁들에 대해선 '누군가 하겠지'라면서 설렁설렁 넘어간다. 아마 균형감을 잃었기 때문인가보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간혹 이런 나를 멀리서 바라볼때면 '이래선 안되지' 생각하면서도 그 때뿐이다. 눈에 보이는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고 사소한 것에 분노하며 집착한다. 정도가 심할 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이런 가운데서 노동조합의 밥을 먹으면서 오늘처럼 '부끄러운 날'이 또 있을까 생각한다. 

가장 잘못하고 나쁜 놈들은 자본과 정권이며, 이들과 뒷거래를 한 한국노총이다. 
한국노총 이용득이 노사정위에서 복수노조허용금지와 전임자임금지급금지 3년 유예를 비롯한 노동자의 권리를 팔아먹은 개악내용이 그대로 들어있는 로드맵에 합의했다. 그렇게 해놓고도 잘한 짓이라고 뻔뻔스러운 이용득은 노사정위가 있는 동양증권건물의 정문으로 나오려다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잘못한 것을 합리화시키려고 그런 것인지 전혀 미안해하는 구석없이 포부도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나오겠다고 한 것이다. 이런 불감증이 또 있을까싶다. 그들은 중증을 넘어 완전히 돌아버린 것이다.

 

오후 1시30분부터 시작한 노사정위는 4시가 되어 합의했고, 노사정위 건물 안에서 농성하던 민주노총 간부들 11명을 연행했다. 노사정위 건물 앞에서 항의농성을 벌이던 민주노총 간부들 약 40-50명은 민주노총을 배제하고 노동자의 기본권을 말살한 노사정위 야합을 규탄했다. 경찰과 몇 차례 몸싸움을 벌이던 중 이용득이 나왔다. 이용득의 얼굴을 본 금속 간부들이 강력히 항의하면서 이용득의 뺨을 때리고, 멱살을 잡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자 이용득은 잽싸게 경찰 뒤에 숨어 있다가 5시경부터 한국노총의 구사대 같은 간부들 20-30여명을 호위를 받으면서 경찰과 공동 작전이 개시되었다.

일명 '한국노총 위원장 사무실(한국노총건물)로 모시기'작전인 듯.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간부들 사이에 서있던 경찰이 쭉 뒤로 빠지고, 민주노총 간부들이 한국노총 사람들에게 항의하는 등 군데군데 싸움이 더 붙자, 경찰은 밖에서 에워싸면서 안으로 점점 압박해 들어왔다. 완전히 밀어붙이면서 이동을 시작했다. 한국노총은 대책 없는 너희(민주노총)보다 낫다는 식으로 뻔뻔하게 나오고, 경찰은 방패로 밀고, 때리면서 수백여미터 거리에 있는 한국노총 건물까지 밀고 갔다. 밖에서 보면 한 무더기 경찰이 떼지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노동자를 팔아먹은 이용득은 경찰백여명과 민주노총 간부수십명 그리고 그쪽 호위대 수십명의 무리를 이끌고(?) 너무나 뻔뻔스레 한국노총으로 들어갔다.

 

앞서 말한 이용득의 불감증이 아니라 지금부터가 진짜 말하고 싶은 불감증이다.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나올거라는 것을 몰랐다고 하면 어쩌면 양심이 없는 것이거나 너무나 게으른 간부임에 틀림없다.
오늘 민주노총이 오후3시 노사정위 앞으로 모이라는 지침을 내리기 전에 연맹 상집에서 로드맵에 관한 대응방안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거다. 이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거나, 차분하게 장기적으로 종합적으로 대응하자고 한다. 노정위 합의나 노동부의 입법예고는 지난주에 지나갔을 사항이라서 그런가? 사실 이번 주로 넘어 온 것이기 때문에 매우 긴박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했다. 그러다 회의 때 얘기가 나온 정도다. 그러나 회의 때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기타 안건으로 다뤄지자,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시급하니 한국노총에 박자, 노사정위 앞에 박자는 얘길 했다. 얘길 한 뒤 임원들이 종합적으로 판단키로 하고 회의가 끝났다. 그런데 갑자기 창피해졌다. 입으로만 떠드는 내가 너무 한심스러웠다. 입만 살아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지난주에도 회의 때는 가만있다가 임원에게 전화해서 성명서 하나 간신히 내게 해놓고는 가만있다가, 신문 만들 때 1면에 깔자고 했다가 설득을 못해내고, 오늘은 아무 생각 않다가 그런 제기가 나오니까 생각했던 것을 쏟아 놓았던 것이다.

이런 게 불감증이 아니고 무엇인가? 회의 때 또는 얘기할 때만 생각나고 평소에는 제 하고 싶은 일만 하는...
비정규직단위들이 내일 열우당 앞에서 야합분쇄 기자회견을 한다고 한다. 정말 창피하고 미안하다. 왜냐면 지난 주 한국노총 앞에 민주노총에서는 유일하게 항의방문을 하고, 연맹 에도 함께 하자고 했다. 그러나 성명서 한 장 떨렁 내고 끝했다. 그러니 민주노총의 00연맹 간부 한 명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00에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투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그 얘길 듣고 정말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혹시 우리 간부들은 지금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복수노조를 유보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내 조직을 지키기 위해 미조직 노동자 결사의 자유를 유보시켜도 좋다고 하는 그런 생각은 노동자를 팔아먹었다고 매를 맞는 이용득과 같이 조직이기주의에 빠진 '정의' 불감증인 것이다.

 

올바른 것. 노동운동은 다수를 위한 것이며,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의 안일을 위해 다른 이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은 비겁한 일이며, 잔인한 짓이다. 더는 노동운동이 아닌 것이며, 노동자를 배신한 행위다. 때문에 이런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온도가 그리 높지 않다.

이제 여름이 갔다. 따뜻한 게 더 손이 가는 가을이다. 더워서 피하고, 별로 느끼지 못하고 했다면 이제는 투쟁의 군불을 지펴야 하지 않을까. 노노갈등처럼 비칠까봐 민주노총이 노동자를 배신한 한국노총을 가만히 놔두는 것은 한국노총의 배신행위를 용서해주는 것과 같고, 더 나아가 그들 덕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싸잡아 비판받아도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슬픈 날이 없도록.

 

비정규직 노동자가 경찰에 맞아 죽었어도 대통령의 사과는커녕 경찰의 사과도 없이 그냥 보냈다. 발전 파업이 중단되고, 건설노동자투쟁이 전에 합의했던 안 수준에서 타결됐다. 오늘 로드맵에서 정리해고 예고일을 60일 전에서 30일 전으로 합의했다. 밀리고 또 밀리고 있다. 이 지독한 불감증에서 빠져 나올 때만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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