謹 고 김동윤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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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윤 열사 정신계승 및 화물노동자 생존권 쟁취! 제도개선!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전 국 투 쟁 대 책 위 원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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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노동자는 앵벌이(?), 올해는 승리하는 투쟁을! 2 현장 이야기 |
기관지노힘 제51호 |
주봉희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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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5월부터 함께 싸워왔던 동지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진한 감동과 의리를 느껴본 적이 없다. '용역새끼들, 렌트카 새끼들'이란 소리를 들으며, 비정규직이였지만 우리는 십 수년을 '형, 아우'하며 함께 동거동락 해왔다. 2000년 파견법이 우리를 슬프게 하였고, KBS의 비열함을 고발하려 투쟁했지만,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조합원들의 생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의 성화에 지치고, 더위에 지치고, 조합비는 바닥나고, 어디 하나 기댈 곳조차 없던 그때를 생각하노라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 |
2004-03-30 21:48:20 |
주봉희(52) 전국언론노조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이 시집을 출간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소장 김성희)가 발행하는 ‘월간 비정규노동’에 틈틈이 써온 시를 책으로 엮은 것.
제목은 ‘어느 파견 노동자의 편지’.
2000년 5월말 해고돼 2004년 7월 복직하기까지 힘들었던 과정과 비정규 관련입법을 바라보는 파견노동자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집 출간 기념식이 있었던 7월13일 아침, 서울 여의도 KBS본관 배차대기실에서 노사저널과 만난 주 위원장은 “좀 쑥스럽다”면서도 “파견노동자의 실상을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절망을 안겨준 파견법
지난 98년 7월1일부터 시행된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파견법)은 그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줬다.
희망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솔직히 방송차량 운전직들은 파견법 제정으로 들떠 있었어요. 2년이 지나면 직접고용이 된다니까요.
저만 해도 95년부터 KBS에서 일했으니까.
KBS에 고용되면 렌터카회사가 설립한 인력회사에서 파견돼 일하는 ‘이중파견’ 신분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죠.
참 순진했어요.”
그를 오해하게 만든 조항은 다름 아닌 파견법 6조3항. “사용사업주가 2년을 초과하여 계속적으로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2년의 기간이 만료된 날의 다음 날부터 파견근로자를 고용한 것으로 본다.”
사용사업주가 2년이 되기 전에 해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 노조를 만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노조 필증이 나온 다음날인 2000년 5월30일 해고통보를 받았다.
당시 파견기간 만료를 이유로 KBS, MBC, SBS, YTN 등 방송사 4곳에서 해고된 파견 노동자만 무려 849명에 달했다.
억압, 슬픔, 괴로움, 분노 등의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여의도 공원 벤치에 앉아 시를 썼다.
군대(74~77년) 시절 10여편의 시를 ‘전우신문’(현 국방일보)에 기고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는 해마다 2년을 주기로 해고와 채용이 반복되는 파견노동자의 현실을 ‘분노의 탁구공’이라고 표현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자본의 법칙/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으로 만들고/ 파견노동자는 탁구공인가/ 이리 갔다 저리 돌고/ 올해는 KBS 내년에는 MBC 후년에는 SBS/ 파견 노동자의 탄식은 분노로 넘쳐오른다”(‘우리는 탁구공이다’ 중에서).
4년30일의 기다림, 그리고 복직
주 위원장은 2000년 6월부터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혼자 KBS 앞에서 1시간이 넘게 해고의 부당함을 규탄하는 날이 쌓여갔다.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머리를 박박 밀고 ‘파견철폐’라는 빨간 글자를 새겨 넣기도 했고, 방송사 청원경찰들이 제지할 땐 온몸에 고추장을 바르고 밀어붙이기도 했다.
비정규직 집회현장이면 어디든 쫓아다녔고,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파견법 철폐 투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필승, 주봉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비껴갈 순 없었다.
해고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딸은 누님 집에 의탁해 놓은 지 오래였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를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이 그를 도와줬지만 역부족이었다.
단적인 사례 하나.
그는 2001년 여름, 명동성당에 사수대로 참여했다.
단병호, 이홍우, 양경규, 차봉천 등 노동계 지도부들이 농성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장 큰 이유는 밥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사수대를 하면 밥 세끼를 먹을 수 있잖아요.
배고픔은 못 참겠더라고요. 좀 미안했죠(웃음).”
주 위원장은 노조 위원장으로서의 역할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선 ‘이중파견’을 ‘직접계약’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를 테면, ‘KBS-렌터카 회사-인력회사’로 이어지던 구도를 KBS와 인력회사가 직접 계약하는 형태로 전환한 것이다.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3교대 근무로 바꾸었다.
지난해부터 각 방송사는 도급업체에서 인력을 공급받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도 2004년 7월1일 KBS 자회사로 복직했다.
4년30일만의 일이었다.
이젠 파견노동자가 아니라 도급업체의 정규직(그는 “고용이 보장된 비정규직”이라고 했다)이 된 셈이다.
‘배차반장’이라는 직함도 받았다.
그렇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그가 복직한 날은 2년 주기로 돌아오는 ‘파견노동자 해고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출근 당일 아침, 그는 회사 앞 벤치에 앉아 착잡한 심정으로 시를 써내려갔다.
“내가 사랑하던 동지들의 피멍진 자리/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 자리에 가슴팍 쥐어뜯으며/ 동지들이 떠나던 날/ 그리 슬피 울어주던 여의도 매미들과/ 그날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소”(‘매미와 울다’ 중에서).
그는 시집의 후기에서 시집발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패배의 연속 속에서 움츠리며 비겁하게 그늘에 숨어 글로써 문드러진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야했던 나약하기 짝이 없는 한 늙은 파견 노동자는, 똥구린내 나는 세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지난 5년의 세월을 시집으로 묶어보았습니다.”
▒ 주봉희 위원장은 1953년생. 언론노조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
74~77년 공수부대 근무. 79년 쿠웨이트, 81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일용직 잡부로 일함.
87년 통인익스프레스 노조 결성 후 초대 위원장 맡음.
89년 동양제과 영업사원으로 1년여 근무. 92년 SBS 운전직(파견)으로 입사. 95년부터 KBS에서 일함.
파견법에 의해 2000년 5월30일 해고. 4년30일 만인 2004년 7월1일 KBS 도급업체 직원으로 복직. 2005년 7월13일 첫 시집 ‘어느 파견 노동자의 편지’출간.
![](http://blog.jinbo.net/attach/455/171154408.jpg)
나는 분노없이 파견법 5년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 공동행동 | 2004/09/06 22:23 |
http://blog.naver.com/onlymom3/100005563692 | |
================ 나는 분노 없이 파견법 5년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 집행위원장 97년 노동악법이 통과되었을 때만 해도 내 관심은 '정리해고제'에 있었지 이름도 생소한 '근로자파견제'에 있지 않았다. 98년 7월 1일 파견법이 시행되고 나서 2년이 지난 2000년에 와서야 나는 자본가들이 왜 93년부터 이 법을 만들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지, 또 96년말 왜 날치기까지 하면서 이 법을 통과시키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파견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그 이름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었다. 자본가와 정권은 이 법이 만들어지면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어하는 전문가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고, 2년이상 된 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있으며, 불법파견에 대해서도 규제할 수 있으니 1석 3조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지난 파견법 5년 동안 우리가 본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일단 파견법에 의해 정규직 일자리를 박탈당한 노동자들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사무보조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노동자들, 쉴새 없이 전화에 매달려 있는 텔레마케터들, 나이 많은 청소용역 아주머니들, 간병인들, 홀대받는 운전직들이었다. 이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정규직의 반도 안 되는 임금으로, 게다가 자신의 임금의 일부를 파견회사에 헌납하면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런 일자리에서는 정규직을 뽑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견직이 된 노동자들이다. 또 2년이상 된 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로 쫓겨났다. 방송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왔던 운전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채용을 회피하는 방송사측에 의해 해고당했다. 간병인으로 일해왔던 길병원 제니엘 파견노동자들도 2년이 되기 하루 전, 자신의 유일한 생계수단을 박탈당했다. SK텔레콤 노동자들의 경우 파견에서 1개월짜리 계약직으로, 또다시 파견으로 자기도 모르는 새 이리저리 다른 회사들에 고용계약서가 팔려나갔다. 지금도 파견노동자들은 2년에 한번씩 해고당한다. 삶의 불안정성이 그만큼 심해졌다. 불법파견을 규제할 수 있다고 떠들었으나 오히려 불법파견은 더욱 성행하고 있다. 대구 성서공단의 아세아시멘트 노동자들, 현대 모비스 노동자들, 미포조선 노동자들, 대우조선 노동자들, 한진면세점 노동자들…. 셀 수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불법적인 중간착취로 고통받아도 노동부는 불법을 제대로 조사할 생각도 않고, 불법파견이 명백해도 눈감아주고, 설령 불법파견 판정이 나와도 노동자들 계약해지 해버리면 그만이다. 누가 노동자들을 중간 착취할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폐기처분할 권한을 주었는가? 이런 인신매매에 재미를 붙였는지, 자본가들은 이제 노동자들을 파견으로 쓰는 것도 모자라 파견업체를 차리려고 난리다. 중간착취까지 해서 돈을 더 벌어볼 심산이다. 맨파워 같은 외국계 파견회사도 눈독을 들인다. 자본가들에게 파견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파견노동자들을 일을 시키면 자신은 사용주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름만 달랑 있는 파견업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된다. 노동자 한 사람씩 정규직으로 고용할 때 들어가는 임금보다 엄청난 싼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부린다. 그러니 자본가들은 26개 대상업종만 파견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현행법이 문제라고 아우성친다. 빨리 모든 업종에 파견을 허용하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업종과 기업의 규모와 기업의 형태에 상관없이 노동자들은 2년살이 노예생활을 감내하게 될 것이다. 정부와 자본은 이미 파견법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왔다. 노사정위원회에서는 속칭 '공익위원'이라는 자들이 불법파견도 합법파견에 준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그렇다면 도대체 합법과 불법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앞으로 파견법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논의를 하자고 말한다. 남의 생존을 놓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재단하는 자들은 파견노동자들의 고통을 똑똑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이미 노동자를 노동자로 보지 않는 것이다. 또한 노사정위원회의 논의와 별도로 '경제자유구역법'을 통과시키면서 경제자유구역 안에서는 파견법 대상 업종을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회사가 하고 있는 업무에 '전문'이라는 말만 붙일 수 있다면 이제 마음대로 파견노동자들을 쓸 수 있다. 또한 파견노동자들이 2년마다 한번씩 짤리는 것이 안타까우니, 이제 3년으로 파견기간을 연장하자고 한다. 자기들도 2년마다 노동자들을 교체하려니 그동안 노동자들을 길들여놓았던 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3년마다 짤리든, 2년마다 짤리든 노동자들의 신세는 하루살이 신세다. 지하철에서 예쁜 웃음을 지으며 "우리는 보보스 파견사원"이라고 외치는 광고 속의 노동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웃음 뒤에 숨어있는 파견노동자들의 눈물을 본다. 인재를 키운다고 떠들어대는 '맨파워'사의 광고에서 낮은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읽는다. 그리고 97년 총파업투쟁 때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를 막지 못하고, 그것이 우리사회에서 홀대받아왔던 노동자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더 깊은 고통의 수렁으로 빠질 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외면해왔던 우리들의 뻔뻔함도. 그래서 파견법이 시행된 지 5년이 되는 지금 '파견법 철폐하라고' 목놓아 외치는 방송사 비정규노조 주봉희 위원장님과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라'고 외치는 인사이트코리아 동지들의 길을 따라서 우리 노동운동 진영 모두가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책임져야 할 우리의 과제이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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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남은 자들이 이루겠다." | 마이너리티 이야기 | 2003/12/09 11:33 | |||
http://blog.naver.com/kysrcw/40000420223 | ||||
꽃다운 비정규직노동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하늘의 눈물이 얼어붙은 것이었을까. 비정규직이 차별받는 더러운 세상을 하얗게 뒤덮기 위한 것이었을까. 고 이용석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 광주본부장의 장례식이 열린 지난 8일 오전에는 숨 막히도록 굵은 눈발이 날렸다.
비정규직 차별을 외치며 분신으로 항거했던 고 이용석 본부장이 숨진 지 37일 만인 8일, 광주 망월동 5.18 묘역 민주열사들 곁에 묻혔다. ‘고 이용석 노동열사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전8시 발인제, 오전 10시 영결식, 오후 5시 노제를 거치며 전국노동자장으로 고 이용석 본부장의 장례를 치렀다.
“동지 여러분! 하나가 모여 둘이 되고 둘이 모여 넷이 되듯,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린 정당하고 새로운 길을 찾았으므로 꼭 승리할 것입니다.” 고인의 유서가 낭독됐다.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 깨어나지 않은 조합원에게 몸으로써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몫을 제가 다하고자 합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비정규직 차별이 없는 세상, 정규직으로 거듭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싸워오지 못한 민주노총이 당신을 죽였습니다. 저들이 쳐놓은 분할지배의 그물에 갇혀 연대하기를 주저했던 우리 정규직이 당신의 결단을 재촉했습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의 염원을, 당신이 몸 살랐던 그 비장한 결의로 이루어 낼지니 그 무거운 짐 그만 내려놓으시고 이젠 편히 쉬십시오.”
공공연맹 이승원 위원장은 무거운 짐을 남겨놓고 먼저 간 동지에게 숨겨놓은 서러움을 토했다. “32살의 족적이 너무나 아름다워 불혹과 지천명의 나이에도 고개 숙이게 한 사람아. 저는 당신이 밉습니다. 미치도록 밉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투쟁의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가버렸기에 (중략) 우리는 작으나마 동지 앞에 단체협약서와 정규직 추서, 고용안정 협약서를 바칩니다.” 고인의 형 병우 씨는 “동생이 마지막 가는 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용석이는 행복할 것”이라면서 고마움을 표했고,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자존심을 남겨두고 떠나라”며 울부짖었다. 모친 오강님 여사도 먼저 보내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중앙무대 빈소에 있던 영정이 내려와 광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흐리던 하늘은 이미 개였고 영정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광주역 광장에서 노제를 지낸 뒤 고인은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됐다. |
죄송해요 | 2005/03/13 05:19 |
화이팅입니다. 지난 2004년에 방송차량서비스의료보험증을 받았습니다. 2003년에 취업했구요. 전 2년후에 퇴직이라는 것도 모르고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나게 투쟁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덕분에 제가 정년까지는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어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는지요... 비록 월급은 많지 않지만, 60세까지 일할 수 있는 곳을 얻었다는데에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새벽내내 주봉희 위원장님의 기사를 검색해 보면서 수년간 피와 살을 태워 투쟁해 오신 것에 저는 빈대의 간을 빼먹듯이 염통머리없게 위원장님의 후광에 살짝 업혀져 이자리에 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드러내놓고 응원을 못 할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평생 감사하는 맘으로 살겠습니다.
파견법 철회를 위해 고생하신 모든 분들께 고개숙여 감사드리며 특별히 주 위원장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언제 직접 뵐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어떻게 이 부끄러운 육신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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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파견 철폐 | 낙서장 | 2005/08/10 13:11 | |||||
http://blog.naver.com/kmsy1953/600159968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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