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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9시 퇴근 6시 출근의 지루하고 고된 일상에 오아시스처럼 여름 휴가가 찾아왔다. "이번 여름에 꼭 새만금을 가보리라"고 계획하던 차에 마침 멍청이로부터 부안 소식이 날아들고 오마이뉴스에서 부안 투쟁에 관한 짧은 비디오 스트림을 보고 나서 "부인이 먼저다"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 불과 이틀 전이다. "이곳은 마치 해방구와 같다"라는 멍청이의 말에 다소 로맨틱한 감성이 나를 사로잡았다고나 할까?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한다는 내 특유의 강박관념이 그 짧은 휴가를 이곳에서 보내라고 독촉하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11시에 버스를 타고 부안에 도착하니 4시가 다 되었다. 시내는 곳곳에 플래카드와 깃발이 걸려있고 군데군데 몇명의 전경들이 도열해있을 뿐,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자본가와 권력가, 이른바 가진자들이고 환경 파괴를 고스란히 떠맡는 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라고 잠시 도다키 요시의 [환경정의를 위하여]의 서문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그래서 환경운동은 단순히 환경문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그 문제에 얽킨 사회 불평등 관계를 함께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고...그래서 환경운동이 아니라 환경정의운동이라고...
부안은 낡았다. 활동가들이 기거하는 성당을 가기위해 골목을 돌아서니 조그만 시계방이 눈에 띈다. 분침과 시침이 언제 멈추었는지도 모를 낡은 시계가 진열대에 먼지를 뽀얗게 맞으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그 옆에 어렸을 적에나 보았던 연탄가게. 같이간 캐나다 친구가 신기한듯 연탄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핵 쓰레기를 버리겠다는 곳이 청화대 앞마당도 아니고 날고 긴다는 자본가들의 주택가도 아닌 바로 이곳인 것이다. 가난한 이곳 주민들에게 대도시의 엄청난 에너지 낭비와 자본가들의 탐욕의 결과를 모두 받아안으라는 것이다. 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그들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어여쁜 땅에 함께 핵을 묻으라는 것이다.
메이저 언론들이 조장하는 여론은, 사람들의 행동은 과격하다, 그들의 행동은 단순히 지역 이기주의, 님비(not my backyard)현상에 불과하다, 어차피 핵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화석연료의 고갈에 앞서 미래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겠는가, 그러니 부안이든 어디든 핵폐기장은 있어야 하지 않는냐, 정부가 그렇게 많은 돈을 지원하겠다는데 또 무슨 욕심이 있어서 부안사람들은 그렇게 과격하게 나오냐고... 한결같이 떠들어댄다.
정부 지질조사팀의 단 한차례 조사, 그리고 과학자들이라고 하는 비양심적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지질학적 안전성"에 대한 증거들... 그러던 와중 절대로 폐기장을 유치하지 않겠다던 군수 김종규가 부안 군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쥐새끼처럼(부안군민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어느날 아침 조간 신문에 정부관계자들과 함께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위도에 핵폐기장 건설 확정" 이라는 대문짝만한 타이틀과 함께.
이게 왠일인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칠 일이다. 한번도 그곳 주민들과 상의한 일도 없고 또, 군의회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지 혼자 이 일을 강행했다. 간이 배밖으로 나온 인간이다. 한 주민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이번 결정이 전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군수의 그러한 배신행위 더 화가 나 있다."
"김종규는 무소속으로 그래도 꽤 인기가 많은 군수였다. 그런데 이번일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지도자"도 믿을 수 없다. 우리 주민들의 힘밖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기댈 언덕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히 깨닫는다."
라며 말하는 그 사람의 얼굴은 열에 달뜬 에로틱함 그 자체다. 그 사람 뿐 만이 아니었다. 8시가 되어 거리에 모인 수백명의 사람들 하나같이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람들처럼 보였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곳 저곳에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 환호성,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모두가 흡사 축제를 여는 듯한 분위기에 스스로 취해있다.
"처음에는 김종규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었지만, 이제는 정부와 자본과의 싸움이다."
22일 경찰의 가혹한 탄압이 있은 다음부터 계속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주민 활동가의 이야기다. 그는 이미 새만금반대 운동을 통해 잔뼈가 굵어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새만금처럼 장기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 투쟁은 단지 '우리 지역에 양성자가속기(핵폐기물 재처리시설)를 설치하지 않겠다'는 차원이 아니다. 만약 핵산업에 대한 합리적인 중장기 대안이 제시되고 그 결과 정말로 꼭 핵폐기장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치할 의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굳이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핵산업을 추진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지 한수원의 권력유지를 위한 구실일 뿐이다."
한편 핵폐기장 반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그는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내어놓는다.
"미래에너지 단지"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부안의 핵폐기장 건설을 시발로 전북을 이 "미래에너지 단지"로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라북도를 핵단지화하겠다는 거다. 앞으로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핵발전소만해도 무려 10여기가 넘고 그걸 전북에 고스란히 심겠다는 것이다. 왜 하필 핵폐기장까지 있는 전라북도에다 또 핵발전소를 건설하는가? 이미 핵폐기장이 들어섰으니 "더렵혀진 땅" 더 더렵혀지면 어떠리. 돈 한줌 안기면 그것으로 되지 않겠는가!
"다른 지역에 핵폐기장을 짓는다고 해도 우리는 반대다"
몇몇 주민들의 생각은 벌써 이만큼 나아가 있다. 그들의 생각은 "과학주의"를 뒤집어쓴 엘리트들의 핵논리, 대체 에너지 논리에 저항하며 이미 핵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에까지 닿아있다. 우리가 왜 궂이 핵에너지를 계발해야하는가? 결국 그것은 현사회의 에너지 낭비 경제 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나아가 계속해서 경제는 발전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그것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을 사는 주민들까지 포함해서) 은 쩔 수 없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해야한다는 경제발전, 자연파괴 논리가 아닌가? 또 그 인간의 이익이란 결국 자본가들의 이익이 아닌가?
온갖 기만과 술책, 유혹과 탄압,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아무래 이곳의 민주주의를 말살하려고 하면 할 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손에 손에 건내는 촛불을 통해 자신들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연대감을 깨닫는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들밖에 없다.
이제 8시만 되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광장으로 모여든다. 내 옆에 선 캐나다 친구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어디서 왔냐, 왜 왔냐, (내 친구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인) 나이가 몇살이냐 등등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짜고자 내친구앞에서 "한국 사람들은 아주 성숙하고 순결한 민족이다"라고 뜬금없는 "민족 찬양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나에게 한번 놀러오라며 자기 집 주소까지 적어주었다.
10시쯤이 되자 시위대는 행진을 하기 시작해서 군청앞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바퀴벌레같이 갑옷과 투구를 쓴 다스베다의 군인들이었다. 멍청이의 말에 따르면, 방패를 뽀죡하게 갈아서 사람들을 찍는다는 1001부대 대원들도 전방에 도열해있다. 지난 토요일에 크게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문규현 신부의 형 문정현 신부의 모습도 보인다.
뭔가가 일어나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에 같이 구호를 외치던 중, 한 사람이 나와 이제 보다 긴 투쟁을 위해 우리의 힘을 비축해야하지 않겠냐며 집회해산을 제안한다. 그리고 모두 박수를 치며 다들 집으로 해산했다.
시위가 끝난 지금 나는 아직도 좀 유치하다싶게 로맨틱한 감정에 휩싸여 있다. 너무 과장되거나 신비화되어 촉촉해져버린 문장들은 내일 아침이면 다시 빳빳하게 말라버리겠지만 어쨌든 오늘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 나름대로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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