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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파 복음주의자들께 드리는 고언

1. 김강기명이다. 민중신학과 스피노자의 정치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참고로 스피노자는 합리론 철학자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실은 당대의 주류 신학/정치철학이었던 칼빈주의와 평생을 싸웠던 정치신학자, 혹은 정치철학자였다.

오늘 나의 발제도 어쩌면 당대의 칼빈주의와 비슷한 논리구조를 가진 기독교 세계관, 운동권의 조직논리,

정치권의 정치행위에 대한 스피노자주의에 입각한 비판이 될 것이다.


2. 나는 복음주의 기독교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권, 정치권이 이번 사태에 대해 삼위일체적 무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하고 싶다.

 

그 무능력은 첫째, 무엇보다 “주권”이라는 표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둘째, “대중”이라는 존재를 공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근본에는 하느님 주권사상이 있다.(후에 칼빈주의는 여기에서부터 영역주권론을 발생시켰다.),

정치인들 역시 정치를 위로부터의 주권의 실행으로 파악하고 있다.

운동권은 어떤가? 운동권의 익숙한 조직방식인 민주집중제는 국가의 주권 논리와 지독한 동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현재의 대중이 보여주고 있는 민주주의적 행위와 감성을 절대로 파악할 수 없다.


3. 우선 기독교인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비평해보자.

나는 지난 대선국면에서부터 지금까지 뉴스앤조이와 복음과 상황을 통해

공의정치실천연대로 대표되는 복음주의권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지속적으로 비평해왔다.

무엇보다 그것은 정치와 정책을 혼동한다는 점이다.

유능한 리더가 “기독교적”인 혹은 “훌륭한” 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항상 위만을 바라본다.

어떻게 지금의 대의제 정치구조 속으로 접근할 것인가가 항상 관심거리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통 복음주의권의 정당 지지는 소위 “민주개혁세력”으로 불리는 중도우파로 수렴된다.

박득훈 목사 정도가 예외다.

강경민 목사, 최은상 목사 등은 노골적으로 중도우파 혹은 ‘창비’의 주장을 복음과 상황등의 지면에서 반복한다.


4. 여기에 “대중”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나, 혹은 신학적 입장 정리는 전무하다.

여기에는 보수파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원죄”론도 한 몫한다.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능력하니 하느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바로 위만 바라보는 주권의 신학, 주권의 정치철학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운동권이나 대의제 안의 정치정당들도 비슷하다. 대중은 우중일 뿐이다.

대중은 운동조직의 지도를 받아 혁명에 나서야 하거나,

엘리트 정치인들이 훌륭한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유권자의 역할을 다하면 되는 존재로 바라본다. 


5. 그렇다면 어떻게 이번 국면을 평가하고,

또 나는 무엇을 이 삼자에게 주지시키고 싶은 걸까?

하나는 “존재” 대신 “사건”과 “관계론”을 사유와 실천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권 대신 “구성”을 사유와 실천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6. 이미 70년대에 안병무는 “민중 사건”이라는 개념을 주창한 바 있다.

민중은 보통은 억압받고, 또 이데올로기적 통제 속에서 우중으로 나타나는 존재이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초월하는 잠재성이 있고, 이 잠재성이 봉기하는 것으로서 민중 사건을 이야기한다.

“자기 구원”이라 할 수 있는 이 민중의 자기 초월, 민중 사건 속에서 지식인들도 구원받는다.

“민중이 곧 예수다.”라는 이단적 테제는 사실 존재론적 테제가 아니라 이런 사건론에 기인한 것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민중 사건이 곧 예수 사건이라는 게 민중신학자들의 신앙고백이다.


7. 사건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과 어떤 것이 마주치는 것이 사건이다.

마주침을 통해 관계가 만들어지는 운동과정이 곧 사건인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를 보면 단순히 대중이라는 “존재”가 어떤 주장을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대중이 진화하고, 또 정치권이 요동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은 모든 봉기, 혹은 모든 “정치 과정”이라는 건 이런 사건의 연속이다. 정태적인 모습으론 파악할 수 없다.

관계론적 시각, 그리고 사건론적 시각을 갖지 않으면

너무나 쉽사리 이런 사건을 화석화된 몇 가지 “주장”들로, “조직”들로 환원하기 십상이다.


8. 또 하나는 주권의 논리 대신 아래로부터의 “구성”의 논리, 구성의 실천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스피노자는 원죄론과 대중의 무능력을 말하던 17세기의 칼빈주의 정치인들에 대항해 대중의 능력을 지지했다.

대중이 무능력한 존재로 나타나는 건 바로 원죄론과 같은 신학자들의 미신적 선동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이 그러한 환상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구성해나가기 시작할 때

무지를 벗어나 이성의 상태, 즉 정치철학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상태로 이행해나간다.

(여기에서도 관계를 맺고 맺고 맺는 운동의 과정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대중은 ‘진화’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주권적 질서에 대항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평등한 지배"운동"을 말한다.


9. 이것은 바로 오늘날 어떠한 전위도 거부하는, 어떠한 지도도 거부하는 대중의 모습과 상응한다.

촛불 집회에 처음부터 결합했는데, 참가자들은 정말로 어떤 지배도 거부하고 스스로 질서를 만든다.

물론 작은 단위에서는 나름의 이끄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전체적인 구도에서는 그야말로 수평적이고 평등한 네트워크들을 끊임없이 구성하면서 “민주주의적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10. 교회와 운동권, 정치권이 공히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대중의 능력이다.

그간 교회는 대중을 동원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의사결정할 자유를 뺐었다.

이건 보수나 진보나 마찬가지다.

보수 교회에선 보수적인 목회자의 입장에 대중이 동원되고,

진보적인 교회에서는 진보적인 목회자의 입장에 대중이 동원될 뿐 자기 주체화는 거기에 없다.

교회가 이번 집회에서 나타난 대중의 자기조직의 능력,

수평적 네트워크의 능력을 배우지 않으면 교회는 정치에 더 이상 참여할 자격이 없다.

나와도 대중들이 거부할 것이다. 이미 그러고 있다.


11. 운동권이나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섣불리 대중을 대의제 정치 속으로 봉합해선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운동정치가 꽃필, 그야말로 참여의 정치가 만개할 가능성의 시간이다.

이 시도를 다시금 이전의 운동권의 조직논리로, 대의제 정당정치의 구도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시도를 철저히 막아내야 한다.

운동권과 정당이 작금에 나타난 대중으로부터 오히려 조직 논리를, 정치 행위방법을 배워야 한다.

수직적 구조에서 수평적 구조로, 대중을 지도하는 것에서 대중의 자율성을 긍정하는 것 등등, 배울게 많다.


12. 마지막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자꾸만 종교개혁 당시의 교리를

마치 어느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완벽하고 영원하고 성서적인 교리인것처럼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느님에 대한 초월적 인격신의 견해, 원죄론, 하느님의 주권과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 등등...

이것이 과연 성서적인지고 검토해야 할 것이고, 오늘날 계속 우리가 붙들어야 할 교리인지도 고민해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교리들이 만들어질 당시에도 분명히 당대의 정치 구조의 상층부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칼빈과 루터가 가진 정치적 위치와 입장을 고려해야 그들의 교리가 고정불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대중을 몰랐다. 아니면 너무 잘 알아서 그들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나.


13. 바야흐로 오늘날 대중의 시대가 열렸다.

부디 기독교와 운동권과 정치권 삼자가 이 대중의 역량을 이전의 죽은 주권논리 속으로 몰고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사건을 긍정하라. 존재 대신 관계의 철학을 배워라,

지도와 지배 대신 구성을 통해 자기구원하고 자기 진화하는 대중의 역량에서 오히려 배워라.

이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참고로 ‘구성’이라는 용어는 영어로는 “constituent”로 번역한다.

여기 계신 헌법학자인 이국운 교수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이건 “제헌”으로도 번역된다.

안토니오 네그리라는 정치철학자는 바로 이 콘스티튜언트 파워,

제헌 역능 혹은 구성 역능이 언제나 구성된 헌정 권력보다 우선하는 대중의 능력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힘과 능력이 존재에 우선한다. 부디 이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추기_ 이날 토론회와 또 뒤이어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논점은 주로 촛불 이후로 모아졌습니다.

(아, 토론회 자리에서는 "진보적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지요.)

여하간 다른 패널분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제 입장은 조금 더 대중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고, 또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섣불리 대의제 민주주의 속으로 이 활력을 끌고 들어가지 말구요.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또 가장 안타까운 시나리오인 박근혜 총리카드와 보수의 혁신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통제)

"정치적인 것" 바깥의 대중운동이 쉽사리 잦아들진 않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단 권위라면 무엇이든 학을 떼는 일종의 '미학적 감성'이 특히 10대들에게 분명히 형성되어 있고(cf.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

또 조금만 대중에게서 배워서 혁신한다면

여전히 무서운 파워를 발휘할 수 있는 여러 운동권

(민중운동, 사회운동, 인권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생협운동, 대안학교운동 등등....)이 있기에

장기전을 제대로 끌고 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지금 할 일은 걱정을 하는 것보다, "대중-되기"를 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 진보파라면 교회 청년들, 선교단체 회원들 다 같이 촛불집회에 나와서 그들의 활력을 배우고, 또 참여를 통해

그간 목회자들의 훈육과 동원 속에 갇혀 있던 "자기 주체적 신앙"의 역량들을 좀 키워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동력을 복음주의 오피니언들이 소중히 생각하고

앞으로 어떤 예배, 어떤 공동체 조직방식이 필요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냥 하나의 예로 제시했던 건 예배나 성서한국 집회, 또 시국집회 같은데서 '자유발언대'를 두자는 거였습니다.

물론 운영의 묘는 필요하겠죠?)

이걸 바탕으로 더이상 복음주의 운동이 명망가 운동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대중운동으로 자란다면 충분히 시민사회가 복음주의 운동을 수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특히 환경운동이나 공동체 운동, 생협운동, 평화운동등은 종교단체에게 있어 블루 오션입니다.

이런 운동에 투신할 자발적 대중들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진보파 복음주의자들의 미래를 결정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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