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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비판적 서론 60-71
원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벤야민에게 와서 어떤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는가? 벤야민은 ‘원천’(die Ursprung)에 대한 탐구 속에서 이데아론을 혁신하고 있다. 이데아, 즉 이념은 개념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데아를 단지 어떤 추상적인 개념처럼, 이를테면 ‘개’라는 이데아가 있고, 현상태로서의 ‘개들’이 있다는 식의 이해는 진정으로 플라톤주의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벤야민은 그런 이념적 ‘본질’이 놓인 지점인 원천을 이야기함으로써 이러한 사고로부터 벗어난다. “즉 연구자는 사실의 가장 내적인 구조가 사실을 하나의 원천으로 드러나게 할 정도로 본질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사실을 확실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63)
그렇다면 원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역사’이다. 그러나 어떤 ‘발생’은 아니다. “원천이란 생겨난 것의 생성(Werden)이 아니라 오히려 생성과 소멸에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62) 즉 원천은 어떤 사실적인 것, 생겨난 것이 발생하는 어떤 지점 같은 것이 아니다. 벤야민은 원천적인 것의 리듬이 “한편으로 복원과 복구로서, 다른 한편 바로 그 속에서 미완의 것, 완결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원천에 있는 이념적 형상은 그 자신의 역사적 ‘총체성’(그리고 이것은 보편성이나 공통점과는 다른 것이다) 속에 완성되어 나타날 때까지 역사적 세계와 ‘갈등’을 빚는다!(62) 따라서 우리가 어떤 현상을 볼 때 진정한 것은 ‘발견’되며, 정확히는 ‘재인식’된다. 개별적인 것들(현상들, 사실들)은 바로 이념 속에 위치하며 ‘그것이 아니었던 것, 즉 총체성’(63)이 되는 것이다.
단자론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은 이념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을 잘 표현해주는 개념이 된다. “단자들은 한 단자 속에 그때그때 다른 모든 단자들이 불분명하게 함께 주어져 있는 것과 같다. 이념은 단자이다. 이념 속에는 현상들의 재현이 그것들의 객관적 해석의 형태로 미리 정해져 들어 있다.” 즉 단자들은 현실세계를 함축하며, 현실세계는 이념의 ‘펼쳐짐’이다.(들뢰즈 역시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에서 ‘접힘’과 ‘펼쳐짐’의 테마를 중요하게 끌어온 바 있다.)
‘현실의 객관적 해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이 어떤 단순한 사건들의 모음집 형태로서 이념에 함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념들의 재현, 그것은 아주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트락타트의 서술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벤야민은 원천의 이념에 포함된 것은 ‘역사’이지, 어떤 ‘사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역사란 “무한정한 의미의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를 그것의 전사와 후사로 특징짓도록 해주는 의미, 본질적인 존재와 관련된 의미의 역사”(64)이다. 벤야민은 그것을 ‘순수한 역사’와 구분된, 본질적 존재들의 전사와 후사로 이루어진 ‘자연적 역사’라고 말하며 그것을 ‘잠재성’의 차원에 위치시킨다.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경시와 오해
사실 이 절의 앞부분까지는 정작 교수자격논문에서는 빠진 이론적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본격적인 논문이 시작하는 부분은 바로 이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경시와 오해>부분부터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선행연구의 불충분함을 다루고 있다. 그 연구들은 모두 바로크 비애극에서 형식으로서의 ‘이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에 대한 분석은 ‘규칙과 경향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파악된 그 형식의 형이상학을 제대로 천착해야 하는 분석’이다.(66) 벤야민 이전까지 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형식(이것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의 의미로 이해된 듯 하다)은 비평가들이 이것을 다루는 데 압박감을 느끼도록 했다. “비애극의 뻣뻣한 형식은 양식비평과 형식분석을 최하등급의 보조학문 정도로 여기는 학문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것이었다.” 비애극은 모호했으며, 독일적이지도, 민중(volk)적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단연코, 독일 비애극의 무게중심은 그 형식에 있다고 주장한다. “한 형식의 이념은 그 어떤 구체적 작품 못지않게 생명력이 있다. 아니 비애극의 형식으로서의 이념은 바로크 시대의 개별 작품들과 비교할 때 단연코 더 풍부하다.” 즉 벤야민의 작업은 독일 비애극의 각 작품들을 분석하고, 거기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고, 의미를 추출하는 방식이 아니다. 벤야민은 처음부터 비애극이라는 형식의 이념을 드러내고자 하는 트락타트적 서술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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