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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노동운동가 평전 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최재희 (고려대 노동사 박사과정)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하디는 임금향상과 노동시간단축을 목표로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6주간 지속된 1880년 라나크에서의 파업을 위시한 여러 광부파업은 파업자금의 부족과 자본가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하디는 해고당한다.


제임스 키어 하디는 1856년 8월 스코틀랜드의 광산 마을에서 한 가난한 노동자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메리 키어는 조선소 목수였던 데이비드 하디와 재혼했고, 하디는 새 아버지를 따라 스코틀랜드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당시 영국이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삶은 매우 열악했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디 또한 8살이란 어린 나이에 직업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교육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첫 직업은 하루 12시간 반을 일하는 빵가게의 점원이었다. 실직한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아 집을 비우고 있었고, 그의 임금이 가계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바로 밑의 동생이 열병으로 죽고 어머니가 다른 동생을 해산하는 어수선함 속에 15분 늦게 가게에 출근했고 그 때문에 급료가 지급되는 바로 그날 해고당한다. 맛있는 음식냄새가 진동하는 주인의 내실에 불려가 처음 보는 화려함에 눈이 부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불성실하다는 비난과 함께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쫒겨난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어머니 생각에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거리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어야 했던 아이, 그가 바로 영국노동당의 창건자라 불리는 어린 시절의 하디였다.
몇 가지 직업을 거친 후 하디는 10살에 그가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던 광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아침 6시에 막장에 들어가 해가 진 다음에야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므로 겨울에는 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라야 했다. 12살에는 막장이 무너져 갇힌 상태에서 지쳐 잠자다 구출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야학에서 글을 배웠고 노동조합의 집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속기법도 익혔다. 사려깊으면서도 반항적인 광부로 성장한 하디는 이런 자질과 더불어 노조활동의 헌신성으로 자연스레 광부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광부들의 지도자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하디는 임금향상과 노동시간단축을 목표로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6주간 지속된 1880년 라나크에서의 파업을 위시한 여러 광부파업은 파업자금의 부족과 자본가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하디는 해고당한다. 하디는 파업승리의 열쇠가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에 달렸다는 인식을 갖고, 1886년 에어셔광부연합과 스코틀랜드광부연맹을 조직하면서 동시에 기관지 『광부』(The Miner)를 발간한다. 이 과정에서 하디는 신생조합이 산업내의 분쟁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을 보장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설사 간헐적으로 성공한다 하더라도 경기 변화와 자본가의 변덕에 좌우되는 일시적인 이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국가를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며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개정을 통해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지만,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자유당과 보수당이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이 노동자의 표를 얻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일부 보수적인 노조의 대표가 자유당의 후원을 받으며 자유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지만, 이들 또한 개인적인 출세나 명성에 집착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 이해를 기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디는 기존 정당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노동자 대표만이 진정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디에게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온다.
1888년 미드라나크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하디는 노동자의 대표로 의원직에 도전한다. 광부밀집지역인 이곳에 런던출신의 변호사를 공천한 자유당은 하디에게 출마포기를 설득한다. 조건은 그 동안의 선거비용을 보전해주고 일년간 200파운드의 봉급과 다음 선거에서의 공천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하디는 이를 거부했고 곧 이 선거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된다. 각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작가였던 플로렌스 하크니스는 300파운드를 기부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하디는 617표를 얻었고 자유당의 필립스가 3847표로 당선되었다.

노동자 정당 결성을 향해

그러나 하디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선거 직후 8월에 그는 스코틀랜드노동당을 결성했고 이는 영국정치사에서 노동자당의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정당이었다. 이 당의 강령은 상원의 폐지, 토지와 광산의 국유화, 무상교육, 학생에 무료급식, 철도, 운하의 국유화, 누진세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노동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자본의 국유화였다. 이와 같이 하디는 노조활동과 정치활동을 통해 자연스레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경제문제 등에서 몇 가지 이론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하디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출신으로 누구보다 더 노동자의 삶의 현실과 소망을 잘 알고 있던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중간계급 출신의 일부 도그마적인 구호성 사회주의와 달랐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전체노동자의 이익을 외면하던 기성노조의 보수적인 태도와도 다른 입장이었다.
하디와 그의 입장이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될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891년 총선거에서 그는 런던 사우스웨스트햄의 노동자후보로 지명된다. 이곳은 런던에서 가장 빈곤한 노동자 밀집지역이었다. 선거 결과, 하디는 시장 출신의 보수당후보를 1232표차로 물리치고 의원으로 당선된다. 새로운 의회가 개회하던 날, 그는 노동자의 평상복 차림으로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의회에 입장한다.
그의 첫 의회연설은 실업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실업이 노동자와 그 가족에 얼마나 큰 정신적, 육체적, 도덕적 폐해를 끼치는 지를 역설하면서 국가차원의 실업구제책을 마련할 것을 주장한다. 실업구제책의 핵심은 8시간 노동법이었다. 노동시간의 법적 규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뿐 만 아니라 일자리를 늘려 실업자를 구제하는 방안이었다. 그에게 이것은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넓혀간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했다.
"한사람이 하나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도 좋지만 각 개인에게 하나의 직업은 더 중요하다." 그는 곧 실업자의 의원이란 별칭을 얻게된다. 1894년 알비온 탄광이 무너져 20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바로 그날 빅토리아여왕의 손자가 태어난다. 의회가 왕위계승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결의안을 논의할 때 수많은 야유에도 불구하고 홀로 서서 왕실을 비난하며 광부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보상하는 것이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역할이라 역설하던 그의 모습은 특이하기까지 했다. 하디는 영국정치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첫 노동자의원이었다.
하디는 당선 이후 곧 새로운 전국정당의 결성에 몰두한다. 그 결과 1893년 독립노동당이 탄생한다. 그는 노동자정당의 건설에 기존 노동조합의 지지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노조는 자금, 인원, 조직의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당명을 둘러싼 논란에서 나타난 하디의 입장은 이런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디는 당명에 '사회주의'를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주의에 거부감을 가진 노조를 배려했고, '노동'이란 명칭을 통해 당의 입장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사회주의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선언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독립'은 계급기반이 다른 기존 정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노조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노조는 참여를 거부했고 하디를 포함해 1895년 총선에 나선 당의 모든 후보들은 패배한다. 정치활동이 조합의 기금을 헛되이 소모시키며 조합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기존 노조의 인식은 하디의 입장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 및 실업자의 이해가 배치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조가 자신들의 자금과 희생으로 전체노동자의 이익과 사회진보를 옹호려는 분위기는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사회문제의 본질이며 사업장 안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단초는 곧 마련된다. 태프 베일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당의 결성

1900년 웨일즈남부 태프 베일 철도회사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회사는 소송을 제기한다. 즉 파업이 야기한 손해에 대해 노조의 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법원은 2만 3천파운드의 배상을 결정했다. 이제 파업권은 사실상 부인되었으며 노조의 모든 일상행위도 손해배상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노조는 다시금 법과 정치활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0년 독립노동당을 위시해 노동조합, 노동단체, 사회주의단체들이 결집해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는 1906년 영국노동당으로 발전한다. 하디를 위시한 독립노동당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당의 노선과 활동의 결정에서 유일한 준비된 집단이었다. 1900년의 총선에서 하디만이 다시 홀로 노동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당의 세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1906년에는 29명의 후보가 의회에 진출했고 영국의 정치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혁명과 무장봉기를 주장하던 완고한 사회주의집단과 한줌의 기득권에 집착하던 보수적인 노조 사이에서 양자의 공통점을 찾아내 연결하고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사회진보와 인간해방의 선봉에 서고자 했던 하디의 소망이 다소나마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영국노동당에서 하디의 이름은 절대 부패하지 않는 이상주의와 연대와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1918년 영국노동당은 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국유화를 위시한 사회주의 강령을 선언한다.

제국주의 반대! 전쟁 반대!

하디가 말년에 몰두했던 작업은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보어전쟁을 반대해 곤욕을 치렀던 그는 대륙의 사회주의자와 연대해 전세계적인 총파업으로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전쟁을 막고자 했다. 레닌은 그를 "제2인터내셔날의 지도자 중 끝까지 진정으로 전쟁을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라 평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하디는 전쟁반대와 평화를 역설하며 전국을 돌았고 무분별한 애국주의의 분위기에서 그의 집회는 총성과 함께 끝나곤 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하디는 영국의 정치사와 노동운동사에서 특이한 인물이었다. 전쟁이 그의 계급과 당을 분열시키는 것을 보면서 키어 하디는 1915년 9월 26일, 59세의 나이로 자신이 꿈꾸던 이상세계로 떠났다.


출처: 노동사회 1999년 2월호, 통권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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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립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

* 늑대비님의 [자본주의 발생과 노동자계급의 기원] 에 관련된 글.

세계노동운동사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자들의 투쟁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은 정권을 교체한 노동자계급 투쟁의 첫 번째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얻은 게 없습니다. 투쟁의 결실을 전유한 것은 부르주아 엘리트였어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기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정치적 성숙은, 노동운동이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제도를 변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다수가 근본적 개혁이 바로 자신들의 직접적 이익이라는 점을 현실 속에서 깨닫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본래 의미의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A. 스터름탈, 1983: 57)."

1. 영국의 차티즘 운동

차티즘 운동(Chartism)은 1838년 5월에 공포된 인민헌장(the People's Charter)의 실현을 목표로 이십 년 가까이 전개된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대중적·독립적·조직적인 운동입니다. 인민헌장이 내세운 여섯 개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 ② 비밀 투표, ③ 평등한 선거구, ④ 매년 선거(의원 임기 1년), ⑤ 후보자에 대한 재산 제한 철폐, ⑥ 의원에 대한 세비 지급 등이 그것이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란이자, 국제 노동운동의 빛나는 서막이라 표현되는 차티즘 운동의 배경과 동인을 살펴봅시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산업 혁명이 진행되어 세계 최초의 공장 프롤레타리아가 발생했고, 1830년대에는 기계가 대규모로 도입됨으로써 공장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진전과 더불어 자본가들은 자본 축적과 부의 집중을 이룰 수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실업과 저임금, 그리고 무권리 상태에서 격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죠.
정치적으로도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지 못했어요. 1832년에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중산계급의 투쟁으로 선거법이 개정되는데, 이에 따라 부르주아들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토지 귀족층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 인구 1천6백만 명 가운데 유권자는 16만여 명에 불과했어요.

전국노동조합대연합
1832년 정치개혁에서 노동자들의 선거권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1839년 영국 노동자와 자본가의
충돌
이것은 자본가계급 또는 중산계급이 선거제도 개혁 운동을 벌이면서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가 자신들의 요구만 관철하고 노동자들의 선거권과 출판의 자유 확대를 반대한 데 따른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부르주아들의 행위에 반발하면서 노동자들은 계급 의식을 일깨우게 됩니다. 한편, 1834년에는 의회가 새 구빈법(救貧法)을 가결했는데, 이에 따라 종래의 빈궁자 구제제도는 폐지되고, 노역장(勞役場)이 빈궁자 '원조'의 주요한 형태로 됩니다. 새 구빈법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할 의도로 제정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들은 가족과 떨어져 감옥과 다름없는 규율, 굶주림, 단조롭고 무의미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832년 이후 노동조합 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노동자는 부르주아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834년에는 전국노동조합대연합(the 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s Union)이 결성되었는데, 이 조직은 건설노동자, 방적공, 도공(陶工), 재봉사, 모직공, 농업노동자의 큰 노조들을 포괄했다. 로버트 오웬이 이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기본 이념은 "노동조합이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산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대연합은 분산성을 띤 직인조합(craft union)과 달리 전국 단위의 중앙집권적인 계급 조직이었습니다. 대연합은 1834년 조합원 50만 여명을 확보했고, 파업을 조직했으며, 오웬의 '교환시장' 사상을 실현함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려 했죠. 그러나 대연합은 지도부의 분열과 지배 세력의 공격, 파업 준비 부족으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개혁 법안에 대한 환멸, 새 구빈법에 대한 분노, 노동조합 사업 부진에 대한 좌절, 오웬의 계획 실현 실패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한층 절박하게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국가 권력에 다가가야 자신들의 곤경을 덜 수 있다는 확신이 커진 것이죠.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이해 관계는 적대적이며,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는 자주적인 행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런던노동자협회
이런 시대 상황에서, 차티즘 운동은 1836년 6월 런던노동자협회(the London Working Men's Association)의 창설로 본격 시작됩니다. 런던노동자협회는 인민헌장을 작성하여 노동자 운동에 '차티즘'이라는 명칭을 주었고, 초기 운동을 주도하면서 차티즘 운동의 산파 역할을 수행합니다. 런던노동자협회를 보면 이전의 급진주의 단체와 구분되는 특징이 발견됩니다. 협회가 노동자 출신만을 회원으로 인정한 점이 대표적입니다.
런던노동자협회는 노동자 자신의 힘과 자각, 그리고 독자 활동을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부르주아적 민주파나 급진적 부르주아와 협조했습니다. 말하자면, 런던노동자협회는 노동자의 독자 활동을 강조했음에도 중산계급의 협조를 소망했고, 또 그들과 맺는 제휴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이죠. 런던노동자협회가 1836년 10월18일 채택한 결의안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지금과 같은 갈등상태에서는 이해 관계가 우리와 적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평등한 권리 및 법률과 정의를 열렬히 주장하는 자비심 있고 열성적인 친우들에게, 의회가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한다", "그런 결함이 모두 해롭고 분파적인 경쟁심을 망각으로 사라지게 하고, 이 나라의 모든 자원을 전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기본 방침에 따라 런던노동자협회는 1834년 해체했다가 1837년 다시 발족한 급진 부르주아 연합 '버밍엄 정치동맹'(the Birmingham Political union)과 연대하여 활동합니다. 1838년 5월 런던노동자연합 지도자들은 인민헌장을 공식화하는 한편, 버밍엄 정치동맹이 '국민청원'을 발표하자 노동자들은 한 손엔 인민헌장을, 다른 손엔 국민청원을 들고 의회 개혁 운동을 활기차게 벌입니다. 런던노동자협회와 버밍엄 정치동맹은 전국 각지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노동자 조직 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 집회가 열리고, 이들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인민헌장을 채택하고, 청원에 서명함으로써 명실공히 차티즘 운동이 전개된 것입니다. 1839년 행해진 제1차 청원은 128만 명의 서명을 받았는데, 이 서명은 214개 도시에서 열린 5백 회가 넘는 집회에서 모아진 것이었어요. 가짜 서명과 선거권 요구에서 제외된 여성들의 서명을 고려한다 해도, 그것은 실제 유권자 보다 훨씬 많은 수의 국민을 대표하는 것이었어요. 청원은 다음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영국은 풍요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다. 그러나 국가의 번영을 약속하는 모든 이런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자신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우리는 그처럼 고통스럽고 오래 계속되는 참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신중히 고찰해 왔다. 결국 지배자들의 우매함이 신의 섭리를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이 나라의 모든 에너지가 이기적이고 무지한 자들의 권력을 쌓는 데 소비되었고, 그 자원은 그들의 힘을 강화하는 데 낭비되었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지배하고 있다. 다수의 이익이 무시되고, 무지막지하게 짓밟히고 있다.
1837년∼1838년에 걸쳐 노동자들은 런던민주주의협회와 대(大)북부동맹 등의 정치조직을 설립하고, 소부르주아 민주파가 제시한 헌장의 슬로건을 채택합니다. 당시의 차티즘 운동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공장 지대의 산업노동자들, 웨일즈의 광부들, 런던의 저임금 노동자들, 수공업 부문 직인이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죠.

차티즘의 절정, 전국헌장협회
1839년 2월 런던에서 차티스트 전국회의가 열렸지만, 모인 대표들은 부르주아 급진파를 비롯해 다양한 노선을 주장하는 여러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명확한 투쟁 방침을 설정하기 어려웠습니다.
1848년 켄닝턴 코먼에서 열린 차티스트 집회
하지만, 청원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인민헌장을 법으로 채택하도록 만든다는 목표에는 일치했어요. 이런 가운데 노동자 대표들이 차티즘 운동 목표의 실현을 위해 물리적 강제력을 비롯한 '최종 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하자 부르주아 급진파들은 총회에서 퇴장하고 전국회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 회의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차티스트들은 명확한 행동계획을 세우지 않았어요. 여기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슬로건은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 폭력적으로"였어요.
1839년 7월 하원은 청원서 심의를 거부하였고, 총파업을 비롯한 최후 조치를 시행하려던 전국회의의 노력은 실패로 끝납니다. 1840년 7월 노동자계급 최초의 대중적 정치조직인 전국헌장협회(the National Charter Association)가 설립되고, 1842년 제2차 국민청원이 시작되면서 차티즘 운동은 절정기를 맞게 됩니다. 1842년 경제 불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은 한층 더 곤궁 속으로 빠져들었고, '저주받은 공장제'에 대한, 그리고 억압과 잔인함에 바탕을 둔 사회 제도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이 고양됩니다. 제2차 국민청원은 다음 내용으로 시작되죠.

정부는 모든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생겼으며, 모든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하원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았고 무책임한 행동만을 일삼으며, 다수의 비참함과 불만과 호소를 무시한 채 소수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하원은 국민이 표현하는 희망에 반대되는 법률을 제정하고 비합리적인 수단으로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한편에는 참을 수 없는 독재정치를, 다른 한편에는 점점 몰락해 가는 노예를 만들어내고 있다. 소규모의 직업인과 노동자계급을 전적으로 몰락시키면서 토지와 자본의 이익을 옹호한다. 부정과 부패와 협박과 사기가 모든 선거에서 난무하여 … 세금은 현재 참기에는 너무 과하다. 부와 사치가 지배자들 사이에 만연하는 반면, 피지배자들은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 모든 이런 악폐는 계급 입법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하원은 이를 철폐하기는커녕, 오히려 늘리려 항상 노력하고 있다.
한편, 중산계급 자유무역 주창자들은 1815년에 제정된 곡물법이 지주층의 특권을 유지하게 만드는 커다란 악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폐기하기 위해 1839년 반곡물법연맹(Anti Corn-Law League)을 창설했습니다. 자유무역에 호의적인 대부분의 부르주아들이 인민헌장에 정식화된 요구들을 지지했고요. 자유무역주의자들이 의도한 것은 곡물법 반대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그것을 폐지하고, 그 뒤에는 어제까지의 동맹자인 노동자들을 배반하여 보통선거권 요구를 방기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차티스트들은 자유무역주의 부르주아와의 동맹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무역주의자들과 공동으로 추진하는 곡물법 반대 투쟁이 실제로는 차티즘 운동을 자본가의 이익에 종속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곡물법이 폐기되어 곡가가 떨어지면, 자본가들은 이에 따라 임금을 내리게 될 것이어서 노동자들은 곡물법의 폐기로부터 얻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죠.
이처럼 계급적 자립을 추구한 차티즘 운동은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노동자 대중은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의 공통적인 계급 이익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했고, 노동자 당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자립적 정치조직으로 결합하여 행동했습니다.
차티즘 운동의 영향력 증대는 3,317,752명이 서명한 제2차 국민청원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통해 반영되었습니다. 제2차 국민청원서 제출을 위해 5월 2일 하원으로 행진한 사람의 수를 『타임즈』는 5만 명이라고 밝혔으나, 차티스트 신문인 『노던 스타』(Northern Star)는 이보다 열 배는 더 될 것으로 추정했죠. 이 무렵 노조운동 안에서 차티즘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수많은 노조들이 전국헌장협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1842년 8월 총파업
차티즘 운동의 정점을 이룬 것은 아무래도 1842년 8월 총파업이라 할 수 있어요. 8월8일 며칠 전에 일어났던 애쉬톤 하이드 스탤리브리지 지구(랭카셔) 파업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8월10일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파업은 총파업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8월16일까지 파업은 랭카셔, 체셔, 웨스트 요커셔 일부로 크게 번집니다. 노동자들과 정규군 부대의 지원을 받은 경찰부대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유혈 사태가 빚어지기도 합니다. 영국 산업의 심장부를 형성하는 넓은 지역이 사실상 내전 상태에 들어간 것이죠.
파업이 내건 슬로건은 '인민헌장과 공정한 임금'이었어요.
1848년 라이스터 지역 차티스
트 모임 광고. '때가 찼다'(NO
W IS THE TIME)는 선동문구
가 뚜렷하다
이것은 인민헌장이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공정한 임금'의 원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표현한 것이었죠. D. H. 코울은 『영국노동운동사』에서 "차티즘 운동은 순수하게 정치적 강령을 갖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운동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박지향은 「초기 차티즘 운동과 계급의식」이라는 논문(『노동계급의 형성』, 1989, 느티나무)에서 "인민헌장의 정치적 요구는 사회경제적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든 차티스트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파업이 대중적이고 전반적인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그것은 대규모 차티스트 시위로 바뀝니다. 8월15일∼16일 맨체스터에서 열린 대집회가 이런 사실을 반영합니다.
이런 사태 진전에도 불구하고, 파업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운동을 '법과 질서' 테두리 안에 한정시킬 것을 호소하면서 실제로 파업을 이끌 어떤 지도 방침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파업을 끝내는 데 동의합니다. 이 무렵 부르주아 시의회는 정규군의 지원을 받아 중심 산업들에서 일어난 파업을 억누릅니다. 8월 20일 이후 파업은 몇몇 지역에서 고립되어 남았을 뿐입니다. 지배계급은 파업 참가자들을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노동자 수천 명이 투옥되거나 식민지로 추방되었고, 많은 지도적 차티스트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어요.

차티즘 운동의 쇠퇴
1842년 패배는 차티즘 운동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이는 차티즘 운동 지도자들이 1842년에 야기된 혁명적 긴장을 이용할 능력이 없었고, 차티즘의 이데올로기와 전술 사이에 심각한 내적 모순이 존재했으며(즉, 차티스트들의 계급적 자립 지향과 초계급적 환상 사이의 모순, 투쟁의 혁명적 성격과 '법 일반'에 대한 신뢰 사이의 모순), 1843년∼1845년 사이에 걸친 상공업 붐이 노동자들의 상태를 얼마간 개선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차티즘 운동의 마지막 정치 투쟁은 1848년에 일어납니다. 1847년 영국이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져든 가운데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유럽의 혁명적 정세에 고무되어 대중운동이 고양됩니다.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1848년 4월 570만 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가 의회에 제출되었어요(당시의 영국 인구수는 1,900만 가량이었죠). 정부는 25만 명에 이르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집회와 시위 등을 막으며, 다수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장기간 투옥합니다. 그 뒤 차티즘 운동은 두 서너 해 동안 계속되기는 했으나, 그 위력과 영향력이 회복되지 못한 채 약화됩니다. 차티즘 운동은 1847년 6월 제정된 10시간 노동법, 공장법, 탄광법 등 사회입법을 노동자들에게 성과로 가져다 주었습니다.
차티즘 운동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에릭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1999, 한길사)에서 차티즘 운동의 실패 원인으로 지도층의 무능력, 지방 및 부문간의 차이와 의견대립, 그리고 거대한 청원운동 이외에 통일된 전국적 행동을 취할 줄 몰랐던 무능력을 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뒤로 전개된 국제노동운동 역사에서 독특한 하나의 서막 구실을 합니다. 노동자 운동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종속에서 정치적 자립으로, 경제 투쟁과 계급 평화에 바탕을 둔 사회개혁 계획에서 정치적·사회적 혁명으로, 분산적 행동과 분립적 조직에서 전국적 규모의 강대한 운동과 통일된 조직으로 전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차티즘 운동은 노동자 투쟁에서 대규모의 통일성을 이룩함으로써 노동운동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영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발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2. 프랑스 노동자들의 봉기

1830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은 유럽 정치 지형에 큰 충격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이 혁명에서 파리 노동자들은 가장 전투적이고 무서운 세력으로 등장했어요. 부르봉 왕조 권력을 무너뜨린 '영광의 3일'을 쟁취한 것은 노동자들이 힘차게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권을 교체한 노동자계급 투쟁의 첫 번째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얻은 게 없습니다. 투쟁의 결실을 전유한 것은 부르주아 엘리트였어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기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리용 봉기
7월 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31년 11월, 프랑스에서 둘째로 큰 도시 리용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납니다. 리용 봉기는 매뉴팩처 방식에 기반한 특유한 산업조직 체계에서 발생했죠. 당시의 생산 방식은 자본가적 매점 상인이 견직 원사를 구입하여 직조공(織造工)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 소유주에게 이를 제공해 제품을 주문하는 방식이었어요. 작업장 소유주와 그 가족들은 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들 소경영주와 노동자들은 합세하여 매점상인에 대항하기도 했어요.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열악했습니다.
리용의 견직산업은 1826년 이후 수출 부진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고, 노동자들의 상태는 더욱 곤궁해졌습니다. 게다가 '7월 왕정'이 새로운 재정법을 만들었는데, 이는 빈곤층의 부담을 한층 더 키웠습니다. 더욱이 매점상인들은 실업을 악용하여 구매단가를 낮추었고, 그 결과 임금은 낮아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상인들이 시 당국의 임금인상 종용을 거부하자,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11월20일 노동자들이 끄롸 루스(Croix-Rousse) 교외 광장에 모여듭니다. 그들은 일을 멈추고 다음날 자신들의 요구를 공동으로 시 당국에 제출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갈 것을 결정합니다. 시 당국은 이를 저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부르주아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이 끄롸 루스에서 리용으로 통하는 도로 다섯 개를 모두 점거하여 노동자들을 막았어요.
11월21일 이른 아침,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납니다. 직조공들이 방위군을 밀치자 방위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노동자들은 돌과 몽둥이로 맞서면서 리용 시내로 돌입하여 건물 몇 개를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합니다. 파리에서 바리케이드 봉기의 역사는 적어도 15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30년 7월 파리 혁명에서는 바리케이드를 민중 반란의 상징으로 삼았죠. 그 사이 정규군 대대가 끄롸 루스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전투는 밤늦게까지 계속됩니다. 무기상점과 무기고를 탈취한 노동자들은 재빨리 무장했고, 다음날 아침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죠.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죽을 것인가"라는 슬로건이 적힌 검은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11월22일 리용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날에 비해 한층 더 격렬했어요. 끄롸 루스와 리용 지구의 노동자들을 도우러 여러 지역 노동자들이 몰려옵니다. 격렬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노동자들은 시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죠. 11월23일 군사령부는 리용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시는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옵니다. 3일 동안의 리용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엄청났어요.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당국의 보고로는 약 3만여 명이 봉기에 참가했습니다.
군대가 퇴각한 뒤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의 자치정부도 세우지 않았으며, 다만 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봉기 본부'는 설치했으나, 시장이나 행정장관을 체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수도 파리와 연락하는 것까지 허용했어요. 노동자들의 이런 행동양식은 대체로 봉기에 참여했던 소규모 작업장 소유주들의 타협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11월24일자로 리용 검사장이 법무부장관 앞으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냅니다.
"주민들의 행동은 여러 가지 대조적인 면들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굶주리고 있지만 약탈하지 않는다. 폭동을 일으켰지만 승리를 남용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정권의 깃발을 끌어내리지는 않고 있다. … 인격과 재산은 존중되고 있다."
11월28일 리용에서 퇴각했던 군대는 증원부대 2만 명과 합세하여 다시 시내로 들어왔고, 시 당국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놓으라고 명령했어요.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굴복했습니다. 12월1일 군대는 시 변두리를 점령했고, 12월3일에는 정규군 4개 연대가 시내로 진입했어요. 정부는 사건 재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량 유혈보복 조처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노동자 수천 명이 시에서 추방당합니다. 견직공들이 선두에 선 리용 봉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리용 봉기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과 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부르주아 소유 체제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음을,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본가계급을 포함하여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전체 사회의 위계로부터 독립해서 행동할 수 있음을 표출한 것이었어요.

두 번째 리용 봉기
리용 노동자들의 다음 봉기가 발발한 것은 1834년 4월9일입니다.
프랑스에서 19세기는 '봉기의 세기'였다. 정
부군과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 민중들
이 때는 노동자들은 공화주의 슬로건을 내걸고 싸웠어요. 이날 아침 공화주의자들이 시내에 뿌린 전단에는 "자유, 평등, 우애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 전단은 단결금지법에 반대해 투쟁할 것을 호소했고요. 노동자들이 시내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전 10시 무렵 헌병들이 무장을 하지 않은 직조공들을 향해 발포를 했습니다. 리용의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서둘러 무장했고, 봉기자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공화국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투에 참가합니다. 리용 중심부의 주요 지점들을 점거한 봉기자들은 근처에 사는 농촌 사람들에게 봉기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지요.
정부군은 포격을 개시했고 격렬한 전투가 며칠 계속되다가 4월15일 노동자 봉기는 진압되었는데, 정부가 마지막에 동원한 병력은 정규군 3만 명이 넘었어요. 리용 봉기가 계속되는 동안, 생 떼띠엔느(Saint Etienne), 그레노블(Grenoble) 등 다른 도시와 군구들에서도 노동자들이 전투에 참가했어요. 4월13일과 14일에는 파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4월13일 파리는 마치 전쟁 진지처럼 보였고, 4만 명의 장교와 병사가 전투태세를 취했어요. 이틀 동안의 바리케이드전이 일부 지역에서 벌어졌으나, 4월14일 아침나절 봉기자들은 포위를 당했고, 군대는 바리케이드 방어자들을 표적 거리 안에서 발포합니다. 그리고 장교와 사병들은 봉기자들을 숨겨주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총검과 소총으로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리용 노동자들의 두 번에 걸친 봉기는 지배세력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자립적인 투쟁이었으며,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계급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세계노동운동사에서도 획기적 중요성을 갖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독일 노동자들의 투쟁

독일에서 전개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늦은 1820년대에 들어 본격 발전합니다. 1820년부터 1840년까지에 걸쳐 산업생산은 75%가량 증대했고요. 섬유산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석탄생산이 증대되었으며, 철도망이 괄목할 만큼 신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1816년에서 1845년 사이에 2480만 명에서 3440만 명으로 증가합니다. 그러나 독일은 여전히 반봉건적인 농업국가로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는 낙후되어 있었어요.
독일에서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계급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정치적으로는 무력한 편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점점 강력한 힘을 장악했던 부르주아지가 형성되었고, 노동자계급도 성장했어요. 노동자계급의 핵심 부분인 산업노동자층도 증대합니다. 1832년 약 32만5천 명이 공업과 광업에 종사했는데, 1848년에는 그 수가 약 70만 명으로 불어나죠.
당시 독일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매우 열악했어요.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정도 노동을 했지만, 임금은 기아 수준이었고 형편없는 빈민가에서 생활했으며, 사회보장과 선거권마저 보장받지 못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공공연한 형태의 계급 충돌이 일어납니다.
당시 독일의 정치 지형은 복잡했습니다. 독일은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라 38개의 봉건제후국으로 나뉘어 서로에 대해 경제적·정치적 장벽을 구축하고 있었어요. 또한 봉건적 지주의 통치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영주국들도 많았고요. 이런 상황은 시장 확대를 바라는 부르주아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죠.
그래서 독일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본받아 봉건적 통제와 장해를 철폐하려 했어요.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성장하고 있던 노동자계급에 두려움을 느껴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결국에는 프로이센 토지 소유계급인 융커와 비굴한 타협을 합니다. 이 타협으로 융커는 정치적 지배권을 계속 유지했고, 독일의 통일은 실현되지 못하죠.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의 길은 진척됩니다.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성과의 하나로 독일에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대두합니다.

의인동맹
독일 수공업자와 소(小)부르주아 지식인 출신의 정치적 망명자들이 1832년 파리에서 민주주의적 강령을 내건 최초의 정치조직 '독일 인민연맹'을 결성합니다. 이 연맹은 독일의 영주국가들에 흩어져 있던 지지 그룹이나 개인들과 비합법적인 결합을 가졌고, "성실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노동으로 빵을 얻지 않고는 먹지 못하리라"를 신조로 내걸었죠.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정이 1834년 4월 결사금지법을 공포함에 따라 해체된 연맹의 구성원들은 비합법적인 '법익박탈자 동맹'(Outlaws' league)을 결성합니다.
1848년 혁명기 독일의 수도 베를린 모습
이 동맹은 엄격한 비밀조직으로서 그 구성은 주로 노동자들이나, 조직을 주도한 사람은 소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이었어요. 법익박탈자 동맹의 본부는 파리에 있었지만, 조직의 지부들은 독일 안에도 있었죠. 법익박탈자 동맹은 자신의 목표를 독일 해방으로 설정했으며, "먼저 독일 언어와 관습이 통용되는 나라들에서, 다음으로 세계 모든 나라들에서 사회적·정치적 평등, 자유, 공공윤리, 국가통일의 확립과 보전"을 선언했어요.
1836년∼1837년 '가장 급진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사람들'이 법익박탈자 동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의인동맹'(Bund der Gerechten, the League of the Just)입니다. 의인동맹 결성 직후 이 동맹의 정치적 핵심은 스위스에서 온 수공업자들로 보충되었는데 그들은 스위스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조직 '청년 독일'(1834년∼1836년)의 노동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공업자는 소부르주아가 아니라, 상인으로부터 재료를 제공받아 제품을 생산하여 납품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람들로서 신분상 직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이 조직이 내세운 주요 목표는 통일된 독일 민주공화국 수립입니다. '청년 독일'의 급진파들은 독일 수공업자 그룹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이 조직은 정치세력으로 바뀝니다.
스위스의 현(縣) 당국이 독일 연방의 압력을 받아 '청년 독일'의 열성 활동가들을 추방하자, '청년 독일'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수공업자 그룹은 파리로 가게 되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의인동맹에 참가합니다. 그리하여 주로 직인 중심의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이 조직의 안정적 핵심을 이루게 되죠.
1839년 5월 무렵에는 프랑스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의인동맹의 구성원 일부가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갑니다. 그들은 런던에서 의인동맹 본부와 '노동자교육협회'(the Workers' Education Association)를 조직했어요. 런던 본부는 파리와 스위스의 지부들뿐만 아니라 독일 지역 내 국가들에 있는 수공업자 비밀조직과도 연결을 맺고 있었습니다.
의인동맹의 활동은 주로 이론적·선전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조직 안으로는 이념의 혼란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의인동맹 결성 초기에는 프랑스의 공상적 공산주의자인 E. 까베와 재산공유제 주창자이면서 통일 민주독일을 지향하는 결연한 투사인 K. 샤프의 주장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1830년대 말부터 1840년대 초에는 빌헬름 바이틀링의 사상 체계가 의인동맹 안에서 우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바이틀링은 노동자계급을 사회 변혁의 담당자로 보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피압박 계급과 구별하지 않았어요. 그는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을 설명하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반대했죠. 또 그는 노동자계급이 정치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고 정당 건설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이런 바이틀링의 체계에서 종교적·감상적 구상들이 현저하게 드러나면서 1840년대 중반 들어 바이틀링의 사상이 쇠퇴합니다.
그 뒤를 이어 의인동맹 회원들 상당부분이 '진정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습니다. '진정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추진하는 자립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보편적 사랑'의 설교와 불공정에 대한 폭로 등 도덕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그리하여 '진정 사회주의'는 감상적 원망과 민족주의적 지향, 그리고 사이비 혁명의 언설로 가득 차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1845년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여행을 하게 되고, 이 때 이들은 의인동맹 런던본부 지도부와 만나 유물론적 세계관의 기본 명제에 관해 토론합니다. 그 뒤로 맑스주의가 의인동맹의 이념체계 수립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슐레지엔 반란
1844년 독일에서 최초의 노동자 대중 행동인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19세기 독일은 산업혁명을 겪는다. 사진은 1837년 무렵의 철도
1842년∼1844년에 걸쳐 슐레지엔 직물 산업에서 생산한 면직 피륙 판매가 감소했고, 당시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은 상인들로부터 면사의 공급을 받는 촌리의 수공업자들이었죠. 1844년에는 직조공의 수입은 떨어진 반면에 식료품 가격은 올라갔어요. 슐레레지엔 직조공의 생활은 영국 노동자들 보다 훨씬 열악했죠.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사건이 발생합니다. 슐레지엔 상인들 가운데서도 쯔반지거를 비롯한 '탐욕과 나쁜 성향'을 지닌 몇몇 악덕 기업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임금을 내리고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노동자들에게 난폭하게 굴었죠. 1844년 5월 들어 페테르스발다우 지역에서 심한 동요가 일어났으며, 슐레지엔 직조공의 '라 마르세이에즈'가 된 '피의 학살'(the Bloody Massacre)이란 노래가 점점 더 자주 들리게 됩니다.
6월3일 쯔반지거 집 근처에서 그 노래를 부르던 한 직조공이 하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현지 경찰에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다음날 노동자들 한 대열이 쯔반지거의 공장으로 몰려가 서류를 불태우고, 집에 들어가 물건들을 부수었죠. 그 다음날인 6월5일에는 다른 '악덕' 기업주들의 사업체로 몰려갑니다. 이런 사태에 놀란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에게 돈과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이날 낮에 군대가 페텔스발다우에 도착합니다.
그 사이에 노동자들은 대열을 지어 근처에 있는 랑겐빌라우로 행진했고, 기업주들은 돈으로 노동자들을 달래려 했으며, 마을 목사는 노동자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이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업주의 수하들을 밀쳐내고 목사들을 개천에 빠뜨렸으며, 악덕 기업주의 공장 건물과 집을 마구 부수었어요. 군대가 도착하자, 노동자와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충돌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행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군대는 퇴각하죠.
6월5일 밤부터 며칠에 걸쳐 군대가 반란이 일어난 지역으로 다시 투입되었어요. 정부당국은 압도적인 우세를 확보한 다음 대량 검거에 들어갔고, 이런 상황에서 6월9일 들어 직조공들은 직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슐레지엔 노동자들의 반란은 독일의 다른 지역과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습니다.
슐레지엔 반란은 많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기아 폭동'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자에 대한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억압과 착취 체제에 대한 반란이었죠. 그런 점에서 슐레지엔 반란은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즘 운동이나 프랑스 리용 노동자의 봉기 등과 같은 반열에 든다고 볼 수 있어요. (다음호에 계속)


* 더 읽을 책

박지향, 「초기 차티즘 운동과 계급의식」, 이민호·김인중·박지향·안병준·정현백·유경준, 『노동계급의 형성』, 1989, 느티나무.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꼬뮨까지』,1991, 까치.
박남일, 『반역의 역사 상』, 1994, 계백.
A. 스터름탈,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1983, 풀빛.
W. Z. 포스트, 『세계노동운동사Ⅰ』, 1986, 백산서당.
D.H. 코울, 『영국노동운동사 상』(김철수·김천우 역), 1980, 광민사.
H. 바른케, 『독일노동조합운동소사』(국민문고편집위원회 역), 1970, 日本 大月書店.
헬가 그레빙, 『독일노동운동사』(박경서 역), 1985, 한벗.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정도영 역), 1998, 한길사.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정도영·차명수 역), 1999, 한길사.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칼 마르크스 전기 1권』(김라합 역), 1987, 소나무.
칼 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2001, 박종철출판사.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nal Working-Class Movement, 1976,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loblems of History and Theory-Progress Publishers Moscow. USSR Academy of Sciences, 1976, volume 1: 312).


출처: 노동사회 2002년 1월호, 통권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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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문예계간지 및 무크지의 시대

주제가있는책 (80년대풍향계 )
지난 80년대는 각종 문예계간지와 무크지의 시대였습니다. 선명한 깃발 펄럭이며, 시대의 아픔을 과감하게 담아왔던 이 지면들은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일찌감치 깃발을 내리기도 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면서 우리 문학과 사상의 지평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어떠한 책들이 창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시대적 고민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확보된 자료들이 빈약하여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창간되었던 창간호의 일부만을 소개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준비되는 대로 보완해가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을 주실 분은 언제라도 책이있는 글터 서점으로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녹두꽃 1 (녹두)글쓴이:녹두 1988.09
역사비평 제1집 (형성사)글쓴이:역사문제연구소 1987.09
사상문예운동 (풀빛)글쓴이:풀빛 1989.08
애국의 길 1 (녹두)글쓴이:녹두 1989.04
우리사상 1991 (새벽별)글쓴이:새벽별 1991.03
실천문학 1985년 봄 (실천문학사)글쓴이:실천문학사 1985.04
생활과 문학 (노동자문학학교)글쓴이:노동자문학학교 1988.12
문학과사회 1988년 봄 (문학과지성사)글쓴이:문학과지성사 1988.02
노둣돌 1992 가을 (두리미디어)글쓴이:두리 1992.08
문학동네 (문학동네)글쓴이:문학동네 1994.11
작가세계 1989년 여름 (세계사)글쓴이:세계사 1989.06
노동해방문학 창간호 (1989년 4월) (노동문학사)글쓴이:편집부 1989.03
현대시세계 1 (창간호/1988 겨울) (청하)글쓴이:편집부 1988.12

 

 

 

*출처: 책이 있는 글터서점, [주제가 있는 책] 중에서



제목(원제목) 녹두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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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녹두꽃  글쓴이 녹두  옮긴이  
출판사 녹두   출판년도 1988.09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이 문예지가 비슷한 시기의 것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편집자의 포부를 통해서 밝히고 있듯이 그 동안 소시민적인 독자대중을 상대로 한 문예지는 많았으나 문예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길을 모색하는 문예운동가나 창작을 통해 진보의 내용을 살지워 가는 작가. 시인에게 창조적 자유의 폭을 넓혀 주려는 매체를 표방했다는데 있다. 따라서 창간호에서 부터 창작적 성과물에 대한 폭넓은 수용의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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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통일전선과 80년대 후반기 민족문학의 대오/백진기

대작시선

김남주 옥중서신

문예조직론 시론
  노동운동에서 문예사업이 전개되어야 할 방향/박승옥
  지역문예대중화조직의 건설은 이렇게/정채화
  창작역량의 조직적 운용에 대하여/심산
  학생운동 내의 문학예술투쟁에 대한 제언/김동해

우리시대의 창작방법론과 창작자들의 임무
  왜 민중적 내용에 민족적 형식인가/광주청년문학회
  창작실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광주청년문학회
  오늘의 작가는 무엇을 써야 하는가/장명국
  한국현대사는 대작을 요구한다/류청하

소설


문예조식 운용 사례
  조직활동의 문예적 전망/용봉문학회
  전문창작패의 활동내역/비나리패

창작보고서/김남일/김인숙
문학동향/김진경/김재용/이재현

 

제목(원제목) 역사비평 제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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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역사비평  글쓴이 역사문제연구소  옮긴이  
출판사 형성사   출판년도 1987.09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무크지로 출발하여 이제는 우리 역사학의 핵심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역사비평]의 출발은 당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대중적인 수준에서 폭넓게 탐구하고자 하는 의미있는 것이었다. 1986년 2월에 개소한 역사문제연구소을 중심으로 구성된 필진들의 꾸준한 노력은 왜곡되고 삭제된 우리 역사 연구의 맥을 잇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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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현실과 역사인식/서중석
실천적 지식인상 정립을 위한 제언/윤대원

미군정의 성격과 민족문제
  8.15직후 한국사회와 미군정의 성격/김광식
  해방 직후 대구지방 정치의 전개과정/정해구
  8.15 직후 광주 지방에서의 정치투쟁/김창진
  8.15 직후의 민족문학관/임헌영

19세기 민중의식의 성장과 민중운동/안병욱
역사소설의 반역사성/이이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박호성
중국혁명에 대한 스탈린.트로츠기 논쟁/최창남

[한국민중사]사건 증언기록/정창렬.강만질.김진균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를 위한 전제/김남식
식민지시대 한국노동운동사 연구의 성과와 과제/전현수

 

제목(원제목) 사상문예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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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사상문예운동  글쓴이 풀빛  옮긴이  
출판사 풀빛   출판년도 1989.08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끝나고 80년대가 끝나가던 시기에 변혁운동진영의 이론적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사상문예운동]은 변혁사상의 현실적 외화형태인 제반 정치 사회 운동의 이론과 문학, 예술, 학술 등 이데올로기 문화전선의 형성과정 및 그 동향에 주목하면서 변혁운동진영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주체적 변혁사상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론적 책임을 맏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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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원제목) 애국의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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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애국의길  글쓴이 녹두  옮긴이  
출판사 녹두   출판년도 1989.04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한반도 모순의 주범이 분단상황임을 명백히했던 이 잡지는 통일을 극력 방해하는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군정독재를 종식시키는 것인 애국운동의 길임을 선언한다. 또한 이 잡지는 창간사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현실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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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원제목) 우리사상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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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우리사상  글쓴이 새벽별  옮긴이  
출판사 새벽별   출판년도 1991.03   쪽수 448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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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세계정세와 남한 혁명운동 승리의 전망/김승조
노동해장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북한의 "혁명전통론"비판/박종수
필리핀 바안당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최천수

PDR론-민주주의혁명에서의 조편향과 사회주의혁명에서의 우편향/류선종
"종속악화-종속심화"논쟁의 오류와 사회구성체 논쟁의 새로운 방향/김명환

진단과 대안/주택문제의 정치경제학과 민중진영의 대안/이해경
남민전의 안재구/남한변혁은 남한 민중에 의해서/최현숙

남한 사회민주주의의 등장과 제2인터내셔널의 교훈/정민재

학생운동사연재1/혁명적 학생운동의 출발점
민청학련.민학련.전민학련.야비-전망논쟁/김석형

사회구성체논쟁 개막의 주역,박현채/정현주

 

제목(원제목) 실천문학 1985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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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실천문학  글쓴이 실천문학사  옮긴이  
출판사 실천문학사   출판년도 1985.04   쪽수 493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70년대 반유신투쟁 속에서 탄생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모태로 창간된 『실천문학』은 모든 지배주의를 거절하는 의로움 싸움으로서의 문화운동에 기여할 것을 명백히 했다. 이후 현재까지 『실천문학』은 일정한 자기의 목소리를 지키며, 우리 시대의 문학적 지향점을 강하게 응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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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민중 그리고 문학/백낙청/김지하
민중사상의 뿌리를 찾아서/이문구
시대와 형식/한정숙/성민엽/최원식/장선우

연재소설/전쟁과 도시/안정효
연재서사시/백두산/고은

지역 노동운동의 가능성/송정남
이대로 얼마나 갈 수 있겠읍니까/임정남

 

제목(원제목) 생활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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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생활과문학  글쓴이 노동자문학학교  옮긴이  
출판사 노동자문학학교   출판년도 1988.12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기타
분류(2):

살아가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적어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근본정신이라고 믿었던 이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문학, 솔직하고 생생한 문학, 친근한 문학을 일구고자 하였다. 각 지역의 노동자문학회들이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던 시대적 상황을 증거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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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원제목) 문학과사회 1988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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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문학과사회  글쓴이 문학과지성사  옮긴이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출판년도 1988.02   쪽수 1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문학과 지성사는 이 창간호를 통해서 80년대 무크운동을 총제적으로 점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이자 대안인 지점에 바로 『문학과 사회』를 놓아두고자 하였다. 그것이 "문학과 사회의 동시적 포괄 관계를 통해 한국 사회의 진정한 변혁의 전망을 추구"하고자 했던 『문학과 사회』의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 『창작과 비평』과 함께 우리 문단의 양 산맥을 이루어온 문학적,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70년 가을에 창간되어 80년 가을 강제 폐간 되기까지 우리 문단의 한 축이었던 『문학과사회』의 뒤를 잇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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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회』를 창간하면서       
 권두 주제    사회 변화와 문학적 인식   
         전환기의 문학과 사회 성민엽  
         문학 제도와 문학 홍정선  
         80년대 분단 소설의 새로운 전개 임우기  
         민중문학론의 인식 구조 정과리  
 
기획 서평    80년대 무크 운동의 의미   
         무크지 시대의 종언 혹은 전환기의 문학적 움직임 한기  
         한국 사회의 성격과 민주주의의 전망 허석렬  
         역사의 대중화를 향하여 송기호  
 
비평·논문       
         증오와 폭력 김현  
         풍자(諷刺)의 제의(祭儀)를 넘어서 김주연  
         독일의 분단 문학 안삼환  
         연행 예술로서의 놀이 문학과 민중적 현실 인식 임재해  
         문화와 매스 코뮤니케이션에 대한 기호학적 전망을 위하여 홍석경  
 
시       
 
        귀국 고은  
         까통 외 3편 오규원  
         蓮亭里 이야기 이동순  
         어두워질 때까지 외 4편 이성복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외 4편 최명  
         고향, 다시 강가에서 외 2편 윤중호  
         길목 거대한 숲길 외 4편 정남식  
 
소설       
         전짓불 앞의 방백(傍白) :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2 이청준  
         이미 그를 찾아간 우리의 소설 기행 : 한없이 낮은 숨결 9 이인성  
         풍적(風笛) 김성동

 

제목(원제목) 노둣돌 1992 가을  
절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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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노둣돌  글쓴이 두리  옮긴이  
출판사 두리미디어   출판년도 1992.08   쪽수 520 
권장도서여부   가격 10원 포인트:1(5%) 서적상태:절판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시대의 문학적 담론을 이끌어가던 이들이 편집위원으로 포진했던 이 계간지는 지금은 고인된지 오래인 권운상의 [녹슬은 해방구]에 대한 창작보고서를 담을 뿐만 아니라 [역사는 끝났는가](당대)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송두율의 글이나 권순응. 김형수의 글들이 창작의 실천적 근거를 마련해보려는 이 잡지의 희망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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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열렸다/창간사
관념성을 극복하고 발을 딛고 있는 곳으로부터 나아가자/권두좌담
(참석자)최원식/김진경/임규찬/백진기
통일을 위해 문학의 길을 걷다보면 어디나 조국이었네/특별기고
만인의 시 만인의 진실/고은
[녹슬은 해방구] 전9권 창작을 보고합니다/권운상
사회주의 변화 이후 전환기의 문화와 그 지평들/송두율
민족문학 논쟁, 그 이론과 실천적 근거에 대한 비판/권순긍
창작자의 입장에서 본 리얼리즘 논쟁/김형수
구체적 전체성을 위한 발돋움/최유찬
진보적 시문학의 어제와 오늘/오성호
시/김규동/이광웅/심호택/이영진/고규태/정해동/김주대/문부식(신인)
소설/남정현/현기영/정해천
지금 누군가 이런 글을 써야 한다/장명국
격동하는 역사 속의 인식의 동요에 대하여/채만수
노동자문학 우리들의 이야기

 

제목(원제목)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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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문학동네  글쓴이 문학동네  옮긴이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년도 1994.11   쪽수 475 
권장도서여부   가격 6,000원 포인트:300(5%) 서적상태:정상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동구권의 몰락과 이념적 공백기에 사회적 합의가 없는 진공상태에서 문학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다. 계간 『문학동네』는 이러한 문단 안밖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보다 좋은 사회를 위한 문학인들의 직간접적인 노력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들과의 동지적 연대감을 확고히 하고 확산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것이 『문학동네』가 세상에 밝힌 약속이었다. 몇 번의 어려움을 겪었고, 아직 『문학동네』의 약속을 지켜보는 독자들의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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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사   계간 『문학동네』를 창간하며 

특집 - 문학, 절망 혹은 전망 

황종연   민족을 상상하는 문학 -한국소설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 영 채   환멸의 시대와 소설 쓰기 
류 보 선   전환기적 현실과 민족문학의 운명 
장편소설 

연재 제1회 송 기 원   여자에 관한 명상 
연재 제1회 신경숙   외딴 방 
분재 제1회 김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산문 

박상륭   아으, 누가 이 공주를 구해낼 것이냐 -동화(童話) 한 자리 
고 종 석   명교에게 
기획서평 

채호석   역사와 소설이 만나는 네 가지 방식 -최근 발간된 동학관련 대하소설을 읽고 
젊은작가특집 최윤 

작가초상 박해현   텅 빈 중심에서의 즐거움 -최윤 소설을 읽기 위한 대담 
작가론 최 인 자   새장을 든 여인 
자전소설 최 윤   집 방 문 벽 들 장 몸 길 물 -파편 자전 : 공간 
단편소설 

이 청 준   아우 쌍둥이 철만씨 
이문구   더더대를 찾아서 
공 선 옥   내 생의 알리바이 
시인을 찾아서 

이 문 재   중년, 시와의 불화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후 침묵해온 이성복 시인

 

제목(원제목) 작가세계 1989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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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작가세계  글쓴이 세계사  옮긴이  
출판사 세계사   출판년도 1989.06   쪽수 440 
권장도서여부   가격 3,800원 포인트:190(5%) 서적상태:정상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다소 경직된 문단 안팎의 상황을 조심스레 살피면서 다양성의 확보라고 하는 측면에서 『작가세계』의 지평을 다지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창간사를 통해서 또 하나 엿볼 수 있는 것은 작품의 성과를 보다 풍성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지금까지도 『작가세계』는 출발 선상에서 다짐했던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어져오고 있어 우리시대의 젊고 의미있는 작가들을 발굴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제목(원제목) 노동해방문학 창간호 (198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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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글쓴이 편집부  옮긴이  
출판사 노동문학사   출판년도 1989.03   쪽수 415 
권장도서여부   가격 3,400원 포인트:170(5%) 서적상태:정상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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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사/새날의 진정한 주인인 노동형제들에게...2
이달의 명언“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7
특집/노동해방투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는 박노해 시인의 신작시 12편...9
이달의 전선...44
이달에 만난 동지...68
집회취재...82
투쟁현장에서...101
정치논평...126
지상논쟁...130
기획대담...147
일터의 하루...164
사진글...169
기획탐방...220
기획문학평론...240
노동해방 시...268
노동해방 소설...285
연재수기...330
문예이론...356
영화비평...368
현장의 목소리...374
설문취재...376
이달의 추천도서...384
노동해방선동대...390

 

제목(원제목) 현대시세계 1 (창간호/1988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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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명   글쓴이 편집부  옮긴이  
출판사 청하   출판년도 1988.12   쪽수 251 
권장도서여부   가격 3,000원 포인트:150(5%) 서적상태:정상
도서분류 분류(1): 잡지총류/잡지/문예지
분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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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를 내면서...14
신작시...16
평론...46
시인연구...90
장시...108
나의 삶 나의 시...143
소련 현대시 특집...156
좌담...205
번역평론...220
시집서평...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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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지역파업 전국노대 개최

울산건설플랜트, 하이닉스매그나칩 문제해결
민주노총, 지역별 파업 및 전국노동자대회 개최
13일 기자회견…금속연맹도 6월14-17일 1만 확대간부 파업
 
울산건설플랜트노조, 금속노조 하이닉스매그나칩지회 투쟁이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 등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민주노총이 이들 사업장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27일 전국노동자대회, 6월20일 충북지역본부 총파업 등 투쟁 계획을 밝혔다.

민주노총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울산플랜트와 하이닉스매그나칩의 구속조합원 석방, 수배해제, 정부가 직접 SK와 하이닉스-매그나칩 원청회사들이 직접 교섭에 나서도록 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

 ⓒ 매일노동뉴스

민주노총은 이를 위해 울산건설플랜트노조가 투쟁 중인 울산에서 17일 영남권 노동자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23일부터 24일까지는 울산본부에서 총파업 찬반투표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또 27일에는 역시 울산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금속노조 하이닉스매그나칩지회가 투쟁중인 충북지역본부에서도 다음달 20일 총파업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민주노총은 “6월 하순 각 연맹의 임단투와 더불어 차별철폐 총력투쟁기간을 설정, 총파업을 포함한 강력한 총력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전재환 금속산업연맹 위원장도 6월14일부터 17일까지 나흘간 1만여명 규모의 확대간부가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상경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금속연맹 확대간부 투쟁은 비정규 투쟁이 한창인 울산, 청주로 장소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금속연맹은 또 6월22일부터 총파업 찬반투표를 벌일 예정이다.

민주노총은 “조속한 시일내에 다시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속개해 비정규법제도를 마무리해야 한다”면서도 “사업장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용자들의 의식과 노무관행이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법만 만들어지면 사문화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현대차 채용비리 연루자 처벌 등 현대차노조 전현직 간부들의 비리에 대한 공식입장을 처음 밝혔다. 민주노총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대차비리 등에 대해 모든 조사를 신속히 진행해 뇌물로 노조간부를 매수한 자와 매수당한 자를 같이 엄벌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신승철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기아차비리에 이은 현대차 채용비리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라며 “민주노총은 이에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학태 기자  tae@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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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별 금서 목록

 

 

미군정 시기

* 김오성, 『지도자군상』, 1946
*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 『조선해방연보』
, 1946
*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의사록』
, 1946
*
박순규, 『조선토지문제논고』, 신한인쇄공사
, 1946
*
이강국 외, 『민주주의 12강』, 문우인서관
, 1946
*
이강국,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 조선인민보사
, 1946
*
정시우 엮음, 『독립과 좌우합작』, 삼의사
, 1946
*
조선인민당 선전부, 『인민당의 노선』
, 1946
*
조선통신사, 『조선연감』, 1947,1948

 

 

 

 

 

 

 

 

1공화국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의식과 아울러 이데올로기성의 모든 해외 출판물의 국내 출판이 불허되는 등 정부의 지나치게 경색된 반공문화정책 때문에, 1공화국 시기에는 오히려 금서가 될 만한 책이 별로 없었고, 서적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도 비교적 적었다.

 

미군정 시기제2공화국

4월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붕괴되자, 그동안 억눌려 왔던 표현의 욕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에는 언론, 출판의 자유가 거의 무제한적으로 보장되다시피 한 시기로, 서적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은 있을 리가 없었다.

 

 

 

 

3공화국 시기

이 시기는 이승만 시대와 같은 원천적인 금서 시대로서, 공산주의계열의 저작물이나, 월북(혹은 납북) 좌익문인 혹은 공산국가 출신 문인들의 문학작품이 금지되었고, 반미의식,계급의식 등의 내용을 담은 저작물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유신 시기(10.26 이전)

* 강춘봉, 『단상단하』
*
구스타브 구티에레즈, 『해방신학』, 분도출판사, 1977
*
권지숙 외, 『반시』 제4, 한겨레
, 1979
*
김경수, 『목소리』, 현대문학사
, 1975
*
김동길, 『가노라 삼각산아』, 정우사
, 1977
*
김동길, 『길을 묻는 그대에게』, 삼민사
, 1978
*
김동길, 『우리 앞에 길이 있다』

*
김병익, 『지성과 반지성』, 민음사
, 1977
*
김용기, 『운명의 개척자가 되어』

*
김우종, 『그래도 살고픈 인생』

*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
김윤환 외, 『한국노동문제의 구조』, 광민사
, 1978
*
김응삼, 『오늘의 민족전선』, 한일출판사
, 1975
*
김정길, 『우리의 가을은 끝나지 않았다』

*
김지하, 『황토』, 한얼문고사
, 1975
*
김홍철, 『전쟁과 평화의 연구』, 박영사
, 1977
*
라이머, 『학교는 죽었다』, 한마당
, 1979
*
마르쿠제 지음,유효종 옮김, 『위대한 거부』, 광민사
, 1979
*
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
문병란, 『죽순 밭에서』, 한마당
, 1979
*
박현채, 『민족경제론』, 한길사
, 1978
*
박형규, 『해방의 길목에서』

*
백기완,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시인사
, 1979
*
브라이덴시타인, 『인간화』

*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 1976
*
송건호,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 1977
*
신동엽, 『신동엽 전집』, 창작과비평사
, 1975
*
신석상, 『속물시대』, 관동출판사
, 1977
*
싱클레어 지음,채광석 옮김, 『쟝글』, 광민사
, 1979
*
안병욱, A교수 에세이 21장』, 삼육출판사
, 1974
*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 1977
*
염무웅, 『민중시대의 문학』, 창작과비평사
, 1979
*
우인기, 『건국전야의 비화』

*
유동우, 『어느 돌멩이의 외침』, 대화출판사
, 1978
*
이기용, 9대국회 13인전집』

*
리영희, 『우상과 이성』, 한길사
, 1977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비평사
, 1974
*
리영희, 8억인과의 대화』, 창작과비평사
, 1977
*
장익 옮김, 『세상에 열린 신앙』, 분도출판사
, 1977
*
장준하, 『죽으면 산다』, 사상사
, 1975
*
전 미카엘, 『노동자의 길잡이』, 가톨릭출판사
, 1977
*
전 미카엘 외, 『한 아이와 두 어른이 만든 이야기』, 새벽사
, 1979
*
정연희, 『갇힌 자유』, 삼익
, 1974
*
조기탁, 『밀 경작』, 삼현출판사
, 1975
*
조용범, 『한국 자본주의의 원점』, 법문사
, 1976
*
조태일, 『국토』, 창작과비평사
, 1975
*
존스 지음, 안재응 옮김, 『제3세계와 인권운동』
, 1977
*
파울로 프레리 지음,성찬성 옮김, 『페다고지』, 한국천주교평신도회
, 1979
*
프란츠 파농 지음,박종열 옮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광민사
, 1979
*
한완상, 『산업선교를 왜 문제시하는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 1978
*
허요석, 『한국의 문제들』, 인간사
, 1975
*
현기영, 『순이삼촌』, 창작과비평사
, 1977
*
황명걸, 『한국의 아이』, 창작과비평사, 1976

 

유신 시기(10.26 이후)

* 강석원 옮김, 『인간없는 학교』, 한마당, 1980
*
강원룡 옮김, 『크리스찬의 정치적 책임』, 대한기독교서회
, 1979
*
김대중, 『내가 걷는 70년대』, 범우사
, 1980
*
김대중, 『조국과 함께 민족과 함께』, 한섬사
, 1980
*
김정준, 『시편 명상』, 기독교서회
, 1980
*
김지명 옮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대화출판사
, 1979
*
김창완, 『새끼를 꼬면서』, 평민사
, 1980
*
박권흠, 『대변인』, 한섬사
, 1980
*
박종화 옮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기독교서회
, 1979
*
송기준, 『송기준 연설문』, 한일출판사
, 1980
*
양성우, 『북치는 앉은뱅이』, 창작과비평사
, 1980
*
이광복, 『사육제』, 대청문화사
, 1980
*
이무영, 『체제와 민중』, 청사
, 1980
*
이문구, 『누구는 누구만 못해서 못하나』, 시인사
, 1980
*
이병주, 『왜 김영삼이냐』, 신태양
, 1980
*
이순기, 『서민이 나의 친구다』, 관동출판사
, 1980
*
이주억 옮김, 『청년과 사회변동』, 대한기독교서회
, 1979
*
이호채, 『한국 외교정책의 이상과 현실』, 법문사
, 1980
*
장동성, 『한글세대론』, 공학사
, 1980
*
장일조, 『사회운동이념사』, 전망
, 1989
*
정을병, 『인동덩굴』, 세광공사
, 1980
*
정 철, 『인간 이상향』, 신기원사
, 1980
*
조태일, 『고여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 전예원
, 1981
*
채선웅, 『맞벌이꾼의 수기』, 관동출판사
, 1979
*
한완상 외, 『다시 하는 강의』, 새밭
, 1981
*
한완상 외, 『이 시대에 부는 바람』, 대양문화사
, 1980
*
한완상, 『불균형시대의 문제의식』, 일월서각, 1980

 

5공화국(정치)

* 편집부, 『현대제국주의와 정치경제학』, 미래사, 1986(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
강석호, 80년대 주변정세』, 거름
, 1985
*
걸리 존 지음,이성희 옮김, 『혁명의 건설자들』, 동녘
, 1986
*
권유론, 『그람시의 마르크스주의와 헤게모니론』, 한울
, 1984
*
그람시 지음,이상훈 옮김, 『옥중수고』 I, 거름
, 1986
*
그루피 지음,최광일 옮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전예원
, 1986
*
그린, 페릭스 지음,송우영 옮김, 『제국주의와 혁명』, 백산서당
, 1983
*
김동주, 『알기 쉬운 정치 사회』, 한울
, 1985
*
김성윤 편역,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I,II, 거름
, 1986
*
김일산 외, 『희망과 힘』, 청운
, 1985
*
김천영, 『연표 한국현대사』, 한울림
, 1986
*
김학노 외, 『국가,계급,사회운동』, 한울
,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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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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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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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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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버 헤리 지음,현웅 옮김,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풀빛
, 1986
*
튜록 벤 엮어지음,박영호 옮김, 20세기 혁명사상』, 동녘
, 1986
*
튜린 S.P. 지음,강철훈 옮김, 『러시아 노동운동사』, 녹두
, 1986
*
파농 프란츠 지음,박종열 옮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광민사
, 1977
*
파이크 더글러스 지음,편집부 옮김, 『베트남 공산주의운동사』, 녹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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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부 엮음, 『러시아 혁명사』 I,II,III, 거름, 1987(황인평 엮음, 1985년도 판을 개제하여 재출간
)
*
편집부, 『정치경제학 원론』, 녹두, 1986(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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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터 W.Z. 지음,정동철 옮김, 『세계노동운동사』 I,II, 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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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렐리히 파울로 지음,하민영 옮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과 실천』,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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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 에른스트 지음,노승우 옮김, 『레닌주의의 이론구조』, 전예원
, 1986
*
피셔 에른스트 지음,노승우 옮김, 『마르크스 사상의 이론구조』, 전예원
, 1985
*
한수인 지음,김자동 옮김, 『대지의 별』, 일월서각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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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평 엮음,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 I,II,III, 거름, 1985,1986(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편저, 『소비에트연방 공산당사
)
*
今川瑛一 외 지음,강대호 옮김, 70년대 이후 아시아 한반도』, 한겨레
, 1985
*
大森實 지음,편집부 옮김, 『카스트로』, 예맥
, 1983
*
小西誠 지음,이용희 옮김, 『현대정치와 군사』,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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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넬 베라 지음,편집부 옮김, 『러시아의 밤』, 형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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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근대 사회관의 해명』, 풀빛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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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대중사회와 인간문제』, 풀빛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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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대중운동세미나』, 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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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사회과학 사전』, 사계절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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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프랑스 노동운동사』, 광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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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너 필립 지음,조금안 옮김, 『클라라 체트킨 선집』, 동녘, 1987

 

5공화국(종교,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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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철학의 기초이론』, 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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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세연 엮어옮김,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중원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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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本進治 지음,편집부 옮김, 『인식의 발전구조』, 이론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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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川弘 외 지음,편집부 옮김, 『사적 유물론의 구조와 발전』, 이성과 현실, 1987

 

5공화국(역사, 교육)

* 교육출판 기획실 엮음, 『교육노동운동』, 석탑,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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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리 파울로 지음,김쾌상 옮김, 『실천교육학』, 일월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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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리 파울로 지음,성찬성 옮김, 『페다고지』, 한국천주교평신도회,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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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리 파울로 지음,편집부 옮김, 『제3세계 교육론』,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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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리 파울로 지음,한준상 옮김, 『교육과 정치의식』, 학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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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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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田求, 지음,편집부 옮김, 『세계관의 역사』, 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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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梶村秀樹 지음,이현무 옮김, 『한국사 입문』, 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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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幷木眞人 외 지음,편집부 옮김,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 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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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谷江之 지음,조금안 옮김, 『현대 역사과학 입문』, 한울, 1986

 

5공화국(문학, 예술)

* 루카치 외 지음,홍승용 옮김,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실천문학사, 1985
*
모예바비처 지음,정순이 옮김, 『어머니들』, 한마당
, 1986
*
무크 『녹두서평』, 녹두
, 1986
*
봉 구엔 반 지음,편집부 옮김, 『사이공의 흰옷』, 친구
, 1986
*
오스트로프스키 지음,조영명 옮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I,II, 온누리
, 1986
*
온구기와시옹고 지음,김종철 옮김, 피의 꽃잎』 상,, 창작과비평사
, 1983
*
이오덕 외, 『겨레와 어린이』, 풀빛
, 1986
*
카베싸 오마르 지음,황진우 옮김, 『타오르는 산』, 청년사
, 1986
*
富山好子 지음,이연경 옮김, 『해방의 미학』, 한울, 1985

 

6공화국

(필자명과 출판사명 및 발간연도가 미확인된 것은 생략하였음)
* ,
『국가독점자본주의론』, 한울
, 1986
* ,
『국제노동운동사』

* ,
『꽃 파는 처녀』, 아침,황토,열사람

* ,
『노동계급의 민족이론』, 형성사
, 1989
* ,
『노래얼』

* ,
『닻은 올랐다』,
, 1989
* ,
『레닌그라드에서 평양까지』, 함성(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
* ,
『레닌의 청년,여성론』, 함성

* ,
『레닌저작집』 I, 전진
, 1988
* ,
『미학의 기초』 1,2,3, 논장, 1989(원저: 소련 과학아카데미
)
* ,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이론』(『주체사상총서』 제4), 백산서당, 1989(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
『반제반파쇼운동론』, 온누리
, 1989
* ,
『변혁과 통일』, 그날, 1989(원저: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 구월서방, 일본
)
* ,
『북한 보건의료 연구』, 청년세대

* ,
『북한사회의 새인식』, 남풍

* ,
『북한현대사 입문』, 백의
, 1990
* ,
『사회주의 경제건설이론』(『주체사상총서』 제7), 태백, 1989(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이론』 (『주체사상총서』 제5), 태백, 1989(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논쟁』, 벼리
, 1988
* ,
『영도예술』 (『주체사상총서』 제10), 지평, 1989(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박상훈, 리근영, 고신숙, 『우리나라의 어휘정리』, 백의
, 1989
* ,
『우리의 전술』, 이상

*
김소민, 『원전 마르크스-레닌주의 입문』, 백의
, 1989
* ,
『인민민주주의혁명 전략전술』, 온누리
, 1989
* ,
『전기 김일성』 상,, 형성사, 1989(미발간) (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
『조선의 맥박』, 대동

* ,
『조직노선』

* ,
『주체사상에 대하여』, 진달래, 1988(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적 원리』 (『주체사상총서』 제2), 백산서당, 1989(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리』 (『주체사상총서』 제3), 백산서당, 1989(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주체사상총서』 제1), 백산서당, 1989(원저: 『위대한 주체사상총서』,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85)
* ,
『주체의 학습론』, 미래사, 1989(원저: 금성청년출판사, 북한
)
* ,
『진달래』 I,

* ,
『통일국가론 입문』, 남풍

* ,
『한 자위단원의 운명』, 황토

* ,
『한국사회구성체논쟁』 I,II, 죽산

* ,
『한라가 백두에게, 백두가 한라에게』

* ,
『항일무장투쟁 회상기』 상,,, 대동
, 1989
* ,
『항일혁명문학예술』, 갈무지, 1989(원저: 사회과학출판사, 북한
, 1971)
* ,
『혁명의 여명』,
, 1990
* ,
『혁명적 세계관과 청년』, 광주, 1989(원저: 금성청년출판사, 북한
, 1977)
* ,
『혁명전통강좌』, 갈무지

* ,
『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전』

* ,
『현대민족사의 재인식』, 그날, 1989(원저: 구월서방,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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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진, 『대중선동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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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자료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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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법

수사법

희망의 문학

square02_red.gif 비유법   square02_red.gif 강조법   square02_red.gif 변화법

 글쓴이의 사상과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표현의 기교, 크게 보아 세 가지로 구분된다.

비유법 : 표현하려는 대상을 그와 비슷한 사물과 비겨서 표현

강조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변화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적히 주는 방법

 1. 비유법 (比喩法): ① 비유란 말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② 비유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원관념)과 비유하는 사물(보조 관념)의 상관 관계가 성립된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③ 대개의 경우 비유는 표현의 구체성, 직접성, 선명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며, 일상어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서 특히 많이 쓰인다.

비유의 효과

 사물을 통하여 시인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대상의 새로운 모습이나 의미의 발견을 유도하며,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하거나 가시화함으로써 의미와 정서를 확대하고, 작품 안의 내용과 형식을 긴밀히 연결시켜 작품 전체의 유기성을 강화한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

원관념 : 원래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

보조관념 : 빗대어진 사물이나 관념.

비유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성과 차이성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하고, 이질적인 두 사물이 원관념과 보조 관념으로 결합함.

유사성의 원리 : 비유는 이질적인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원관념은 꽃이고, 보조 관념은 누님으로 유사성은 원숙미]

차이성의 원리 : 비유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직접 관련이 없는 대상의 결합인 경우가 많으므로 표면적으로는 차이성이 나타난다. 이런 차이성이 클수록 시적 긴장감이 생기고, 표현의 참신성을 획득할 수 있다.

예)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원관념은 바람이고, 보조 관념은 '머리채, 투명한 빨래'로 비가시적인 바람을 가시적인 '머리채', '빨래'에 비유함으로써 참신성을 획득하고 있다. - 김남조 '설일'에서 ]

비유의 유형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 : 일반적으로 비유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화하는 경우가 많음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김남조, '정념의 기') [추상적인 '마음'을 구체적인 '기'에 비유함]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에 비유 :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윤동주, '별 헤는 밤')[구체적인 '풀'을 추상적인 '자랑'에 비유함]

★ 내 마음은 어둠이노라(추상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비유)

★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구체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

 

원관념이 드러난 경우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님의 침묵')

 

원관념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 : 다른 시어들과의 전후 관계(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에 소리없이 흩날리뇨(김광균의 '설야'에서)[원관념인 '눈'이 드러나지 않음, '흩날리뇨'란 표현에서 원관념이 '눈'임을 알 수 있음]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난 경우

 

★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김광섭, '마음'에서)['나의 마음'과 '물결' 사이에 '고요하다'는 유사성이 직접 드러남]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음

 

★ 내 마음은 호수여(김동명, '내 마음은')[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유추'의 방법으로 유사성을 추리하여 시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활유법, 의성법, 의태법, 풍유법, 대유법, 중의법, 상징법, 우화법

(1) 직유법(直喩法) : 원관념을 보조관념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수사법. 이를 명유(明喩)라고 하는데 '마치', '흡사', '∼같이', '∼처럼', '∼양,' '∼듯' 등의  연결어 사용.

★ 확 트인 벌판에 곡선의 부드러움으로 버섯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있는 미륵산이 앞에 보인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박목월 '나그네'에서>

꽃의 둘레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가 꺼져도···.   <문덕수의 '꽃과 언어'에서>

한밤에 불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할 때···.<양주동의 '조선의 맥박'에서>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2) 은유법(隱喩法) :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김동명 '파초'에서>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깃발'에서>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김동명 '내마음'에서>

★ 마음은 한 폭의 기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김광균 '데생')

사은유(死隱喩) : 언중(言衆)들에 의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됨)

(3) 의인법(擬人法) :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상을 인격화하여 존엄성 있게 나타내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과 같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작품 전체가 의인화된 소설을 '의인체 소설'이라고 한다. 고대 소설의 '장끼전', '섬동지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춘원(春園)의 '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바다여/ 날이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베에    토벤처럼 귀가 멀었다. <신석정 '바다에게 주는 시'에서>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정비석  '산정무한'에서>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에서처럼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의인법(personification) - 활유

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서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비유로서, 활유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많이 쓰던 이 수사법은 메타포(metaphor)의 한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성난 파도', '시냇물이 소근댄다', '구름이 달린다'등 자연물을 인간화해서 그 성질과 동작을 표현하는 이러한 의인법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의 조선소설 중에는 '장끼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같이 전체가 의인법으로 되어진 작품들이 있다.

(4) 활유법(活喩法) :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살아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방법이다. 단순히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면 활유이고 인격적 속성을 부여하면 의인법이다.

★ 안개가 날개를 치면서 산 정산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청산이 깃을 친다.

대지가 꿈틀거리는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

★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생명의 모태로서의 '어둠'의 긍정적 이미지를 활유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5) 의성법(擬聲法) : 어떤 대상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 내어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사성법' 또는 '성유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살리는 방법이다.

★ 실개천은 돌돌돌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저 지방저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유산가'에서>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하고, 조팝에 피죽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요, 방울새 떨렁, 물레새 찌꺽, 접동새 접동, 뻐꾹새 뻐꾹, 가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슬피우니, 근들 아니 경일쏘냐.  <'토끼 화상'에서>

(6) 의태법(擬態法) : 어떤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시늉하여 나타내는 기교로써 '시자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한 방법이다.

★ 마당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해는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어 내 절믄 가슴에도 붉은 해 떠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김해강 '출범의 노래'에서>

★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 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 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는 날이면, 동해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하는 나 같은 속인에겐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현진건 '불국사'에서>

(7) 풍유법(諷喩法) :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이야기나 속담, 격언, 문장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에 숨기고 그것을 뒤에서 암시하는 방법으로써, 이를 '우의법(寓意法)' 또는 '우유법(寓喩法)'이라고 한다. 풍유로 표현하기 위하여 도입된 비유는 문장전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 본뜻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 핑계 없는 무덤 없다.

★ ㉠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 ㉡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 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은 지식이 없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더 아는 체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   다. 때로는 작품 전체가 풍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 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믈며 못다 핀 곳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유응부>

★ 야, 이눔아,

뿌리가 없으믄 썩는 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알아들지 못하는 소리를 혼자 중얼거린다는 속담을 통해, 뿌리(근원)없는 삶을 비판하고 있다.] 허지두 말어.(김진경, '뿌리가 없으믄 썩는 겨')

(8) 대유법(代喩法) :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쓰지 않고 그 일부로써 혹은 그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써 이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어느 한 부분으로써 전체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고,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들은 국토)

☆ 금수강산 - 우리 나라

★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빵 - 음식, 먹거리)

★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빈주먹 - 가난)

은 '들'은 국토의 일부분으로서 조국을 상징하였으므로 제유법이고 ☆은 금수강산이라는 특징으로 우리 나라를 상징하였으므로 환유법이다.

★ 펜은 칼보다 강하다(펜 - 문학의 힘, 칼 - 무력) - 제유법

★ 금테가 짚신을 깔본다(금테 - 신사, 짚신 - 시골뜨기) - 환유법

(9) 중의법(重義法) : 하나의 말을 가지고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두 가지 의미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파생적인 의미나 유사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과 뜻을 재치 있게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해 났다니.  <성삼문>

 ⇒ '수양산'은 중국의 '수양산'과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을 뜻하고, '채미'와 '푸새엣 것'은 ' 고사리'와 '수양대군의 녹'을 뜻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 벽계수는 자연인 '푸른 시냇물'과 '왕족 벽계수를' , '명월'은 자연인 '밝은 달'과 '기생  황진이'를 의미한다.

 

★ 깊은 가슴 안에 밧줄[관을 아래로 내리는 데 쓰는 줄, 끊을 수 없는 혈육에의 인연과 정의 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작별을 고했다. 흙을 아래로 떨어뜨렸다라는 말로 동생을 잃은 무너질 듯한 슬픔을 의성어로 나타내어 감정을 절제하고 슬픔을 객관화하고 있다.]했다.(박목월, '하관')

(10) 상징법(象徵法) : 원관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이는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원관념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원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유법이다.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    머서···<박두진의 '해'에서>  이 시에서 '해', '어둠' 등은 상징법이다.

상징의 종류

① 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 : 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예)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② 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예)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③ 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예) 해 → 희망, 밤 → 절망

④ 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예) 빼앗긴 들 → 일제 치하의 조국

⑤ 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예) 숫자, 문자, 부호, 신호

⑥ 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예) 날개에서의 『방』→ 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상징과 은유 :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11)우화법(寓話法)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뜻을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풍유법과 같다. 그러나 풍유법은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식물이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화법은 비인격적인 것이 모두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동물이나 식물의 속성과 풍습으로써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는 방법 등이다. 이솝 우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 강조법(强調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과장법, 반복법, 열거법, 점층법, 점강법, 비교법, 대조법, 억양법, 예증법, 미화법, 연쇄법, 영탄법, 현재법

(1) 과장법(誇張法) : 사물의 수량, 상태, 성질 또는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이거나 줄여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등의 표현이 과장에 해당하는데, 때로는 "눈물의 홍수"에서처럼 은유와 함께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과장법은 시적 감정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보다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대 과장(向大誇張)'이라고 하고, 더 작고 약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소 과장(向小誇張)'이라고 한다.

★ 그가 북을 치자,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 - 향소과장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향대과장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2) 반복법(反復法) : 같거나 비슷한 단어나 구절, 문장을 반복시켜서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는 문장의 율조로써 흥을 돋구어 강조할 때에 사용되는 기교이다.

★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 꽃이 피네 /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금잔디

★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고운 얼굴 해야 솟아라.

(3) 열거법(列擧法) :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그 내용을 늘어놓음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다른 자격과 표현가치를 가진 어휘로써 전체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대체로는 셋 이상을 늘어놓아야 열거법으로 본다. 같은 어구가 놓인 것은 열거법이 아니라 반복법이다.

★ 우리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 어    머니.... 어머니,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 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신석정, '작은 짐승'에서)

(4) 점층법(漸層法) : 어떠한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비중이나 정도를 한 단계씩 높여서 뜻을 점점 강하게, 높게, 깊게 층을 이루어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끌어 올리는 표현방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를 설득시켜 감동시키는데 효과적이다.

★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

★ 유교의 목적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에서)

(5) 점강법(漸降法) : 점층법과는 반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의 내용이 작아지고 좁아지고 약해져서 고조된 감정으로부터 점점 가라앉게 하는 표현방법이다.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여야 한다.

★ 명예를 잃는 것은 모두를 잃는 것이요.

    용기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돈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안 잃은 것이다.

 점층이나 점강법은 자연히 열거법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점층이나  점강을 아울러 점층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6) 비교법(比較法) :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써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아름답구나.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변영로의 '논개'에서>

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직유와 비교의 차이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7) 대조법(對照法) :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의미, 단어, 색상, 감각의 대조 등이 있다.

① 단어의 대조 :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정한모 '가을에'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푸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③ 색상의 대조
★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들을 제난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8) 억양법(抑揚法) :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든지 하는 표현방법.
 

★ 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 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 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 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9) 예증법(例證法) :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10) 미화법(美化法) :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 집 없는 천사(천사 - 거지)       

★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 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

(11) 연쇄법(連鎖法) :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으키게 하는 데 있다.

★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 <최인욱의 '단편 소설의 특질'에서>

(12) 영탄법(詠嘆法) : 감탄사나 감탄형 어미 등을 써서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

★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가 없구나!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 소리 / 들으며 여물었나니(열매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화자는 자연의 섭리와 그 위대함을 깨닫는다. 이때의 '기쁨'과 '놀라움'을 영탄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13) 현재법(現在法) :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김원룡의 '한국의 미'에서>

★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이광수의 '산중 일기'에서>

3. 변화법(變化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절히 주는 방법.

도치법, 대구법, 설의법, 인용법, 반어법, 역설법, 생략법, 문답법, 명령법, 경구법, 돈호법.

(1) 도치법(倒置法) :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 + 목적어(보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비애와 탄식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냄]- 유치환 '깃발'-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    니 이 밤을 분쇄할 벽력을.

★  정말 아름다웠다. 눈앞에 펼쳐진 우리 강산이.

 

(2) 대구법(對句法) :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님은 탄식한다/ - 김억'봄은 간다' -

(3) 설의법(設疑法) :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표현형식이다. 내용상으로는 의문이 아니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  이 푸르고 아름다운 한국의 가을 하늘을 그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 의문문의 형식만 빌려 독자에게 '생명의 기척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함]

★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박대인(Edward W.POITRAS)의 '온돌'에서>

★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춘향전'에서>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가난할지라도 사랑은 안다.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4) 인용법(引用法) :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이다.

★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하잖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해 봐.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5) 반어법(反語法) : 겉으로 표현할 내용과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나타내어 독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교이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꾸짖고, 겉으로는 꾸짖는 척하지만 사실은 칭찬하는 방법으로 '아이러니(Irony)'라고도 한다.
 

★ 얘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데요? 얘 뒤에 두 명이나 더 있어요.

★ 아휴~~~ 이 얄미운 내 새끼

'자네'라고? 말씀 좀 낮추시지.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하였으니 시합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밑수로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교육자에게 자녀를 맡기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자녀를 버린다.)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마음 속으로는 슬프지만 그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겠다'는 말로 '애이불비'의 자세가 나타나 있다. 이는 너무나 슬퍼 울고 싶은 화자의 심리를 반대로 나타냄으로써 의미를 강화한 것이다. 또한 도치법도 사용되었다.)

★ 말없이 함박눈도 잘도 내리느니. - 국권을 상실한 조국에서의 삶이 힘겨워서, 눈 내리는 겨울에 북극으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 '흰 눈'은 축복의 눈이 아닌 앞날의 혹독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잘도 내리느니'는 화자의 내면과는 상반된 표현인 것이다. - (김동환, '눈이 내리느니')

다른 설명 ( 반어 -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질적인 의미 사이에 상반(相反) 관계가 있는 말을 뜻한다. 기교로서는 어떤 말의 뜻과 반대되는 뜻으로 문장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것을 이른다.)

(6) 역설법(逆說法 : Paradox, 모순형용) :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나, 실은 그 속에 절실한 뜻이 담기도록 하는 수사법.

★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한용운의 '님의 침묵')

★ 찬란한 슬픔의 봄을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서정주 '견우의 노래'에서 긴 이별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사랑이 성숙될 수 있다는 역설적 표현)

★ 외로운 눈부심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른 설명 :

역설-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모순되고 부조리하지만, 표면적 진술을 떠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근거가 확실하든지,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을 뜻한다. 표면적 역설은 보통 서로 반대 개념을 가진, 또는 적어도 한 문맥 안에서 같이 사용될 수 없는 말들을 결합시키는 '모순 어법'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내면적 역설은 표현에 담긴 내용 자체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특히, 종교적 진술 가운데 만유의 본질이나 우주의 섭리에 관하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 시의 문맥에 수용될 때, 내면적 역설로 설명될 수 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가 이에 해당한다. 즉, 이 경우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종교적 역설로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초월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내면적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7) 생략법(省略法) : 글의 간결성, 압축성, 긴밀성을 위하여 어구를 생략함으로서 여운을 남기는 기교,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판단이나 추측에 맡긴다.

★ 봉네의 눈동자 속에 푸른 하늘이 부풀어 오른다 하는 순간, 따르르 눈물이 뺨으로 굴렀다. "학이………" 봉네는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뢰 소리가···· 바다 소리가···· 바퀴   소리가……… <이효석의 '돈'에서>

★ (그들이)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도랑물은)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8) 문답법(問答法) : 글 속의 어느 일분의 문장을 문답형식을 빌려서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 그러나 단순한 대화를 문답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것을 변화 있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문자답형식으로써 표현하는 방법이다.
 

★ 아희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 그렇다면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이다.

연즉(然則), 차(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저항(抵抗)하는 방법(方法)은 하(何)인가? 왈(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분휘(奮揮)함이 시(是)이니라.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박종홍의 '한국의 사상'에서>

(9) 명령법(命令法) : 평범한 서술로 해도 된 것을 더욱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변화를 주기 위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

★ 빨리 책을 읽도록 하십시오.

★ 보게나,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 보라 : 문어체(文語體), 보아라 : 구어체(口語體)

(10) 경구법(警句法) : 격언이나 속담에서처럼 엉뚱하거나 재치 있거나 익살스러운 기발한 표현 속에 진리를 내포시킴으로써, 교훈적 효과를 내는 변화법.

★ 시간은 금이다.

★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 유비면 무환이다.

(11) 돈호법(頓呼法) :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대상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편지글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문에서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두진의 '해'에서>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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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보도의 어려움

진실 보도의 어려움


송건호

길가에서 택시 운전수들이 다투고 있다. 차가 서로 스쳐 차체가 우그러졌는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로 시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말이 서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 어렵다. 우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조그만 광경이다.

신문에는 거의 날마다 몇 건의 교통사고가 보도되고 우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기사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지금 예에서 본 바와 같이 하찮아 보이는 교통사고 보도에서조차 엄격히 따질 때 진실 보도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무엇이 진실이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순한 교통 사고조차 진실 보도가 이처럼 어렵다면 진실 보도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나 큰 문제일수록 진실 보도가 더욱 어렵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또 신문 기자 자신들조차 진실 보도를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또 말하고 있으나 문제를 좀더 파고들어 가 생각해 보면 생각할수록 독자들에게 진실 보도를 하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을 파악하는 방법

'진실' 이란 어느 사건 또는 어느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 어떤 사실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사실을 그 존재가 다원적이다. 꼭 진실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이다. 꼭 진실을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일수록 그 존재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면만 보고서는 그 사실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위에서 인용한 교통 사고의 경우도 시비하는 두 운전사의 말을 이쪽 저쪽 다 듣지 않고서는 공정하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언론에 있어 '진실'이란, 첫째 사물을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신문이 사건이나 문제를 전체적으로 또는 그 전모를 밝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확대시켜 과장 선전하기도 하고 불리한 면은 이를 은폐하여 알리지 않거나 보도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정확한 보도는 우선 일방적이며 편파적인 보도임을 말한다.

논평에서도 진실한 논평을 하려면 이런저런 측면을 다 같이 검토하고 거기에서 공정한 판단과 결론을 내려야 한다. 공정한 논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못 쓴다'거나 또는 '이 문제는 이런 방향, 이런 각도로만 생각해야 하며 그 밖의 각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곧 진실과 반대되는 曲筆 論評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곡필을 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사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곡필은 어느 선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자유롭게 다각도의 사고를 하면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둘째, 언론에 있어 '진실한 보도와 논평'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역사적으로 관찰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물을 옳게 보도하거나 논평할 수 있으려면 그 사물의 의미 또는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의 가치는 역할의 발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도 내일에는 부정되고 오늘 부정된 가치라도 내일에는 평가를 받는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란 발전하는 새로운 가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 치고 누가 발전하는 입장의 가치를 거부하겠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사물을 보는 입장이 서로 달라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긍정적 가치도 어떤 사람에게는 부정적 가치가 된다. 이것은 이해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해 관계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같은 사물 , 같은 문제인데도 보는 관점이 서로 달라 견해차가 생긴다. 따라서 사물을 볼 때에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퇴보의 가치가 아니라 발전하는 가치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사물을 볼 때에는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덜 중요하다는 점을 똑똑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이라고 했다 교통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버스가 전복했는데 차체가 어느 만큼 파손됐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면이 그 사건의 근거가 되고 그렇지 않은 면이 그 사건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 사물의 어느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 사물의 어느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조건이 되는가를 예리하게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근거와 조건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한 문제 또는 사건의 이해가 크게 달라지고 이미지가 전혀 달라진다. 보도 기사에는 '리드'라는 것이 있다. 그 보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리드'로 하여 기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기사의 어느 부분을 리드로 잡느냐에 따라 기사가 독자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사물의 어느 면이 중요한 가는 관심도에 따라 다르며 관심도는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외신을 다루어 보면 같은 사건인데도 입장에 따라, 즉 기자의 국적에 따라 리드가 제각기 달라 사건을 보는 눈에 묘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월남의 최후를 보도하는 각국의 신문을 보면 이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반공 진영의 나라라도 역점을 두는 측면이 나라에 따라 다르다.

가장 주관적인 보도가 진실 보도이다.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보도하려면 기사를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있는 그대로를 조금도 주관을 섞지 않고 기사를 써야만 정확한 보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표현은 좀 주의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가장 정확하고 올바를 보도일수록 객관적이기보다 오히려 훌륭한 의미에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정 가장 정확하게 알리는 보도일수록 주관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얼핏 납득하기 어려운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구체적 예를 들면서 설명해 보면 조금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가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시라까와 대장 등을 폭사시킨 테러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정확한 보도라는 것이 주관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은 거울같이 보이는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윤 의사는 일본군의 엄숙한 대식전을 피바다로 물들인 엄청난 살인적 '테러리스트'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문은 마땅히 윤 의사를 규탄하는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가 사건을 정확히 알리는 보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윤 의사의 장거는 우선 역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식민지 제도라는 것이 인류 역사상 배격, 규탄되어야 할 역사적 遺制라는 판단이 앞서야 하고 이러한 역사적 가치 판단뿐 아니라 윤 의사의 장거 당시 국내의 삼천만 동포가 일제의 착취와 탄압 아래 얼마나 신음하고 있었느냐를 윤 의사의 '테러' 행위와 관련시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건을 전체적 역사적 근거와 조건을 식별하는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판단 위에 서야만 이 사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윤 의사의 테러 행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위와 같이 수많은 다른 사실들과 횡적 종적(역사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우선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건을 정확히 보도하는데 만약 이와 같이 풍부한 학문적 지식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높은 차원에서 주관적 보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한 보도 활동에는 고도의 사회 과학적 소양, 이 밖에 문학적 철학적 소양까지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 대기자 올솝 형제가 '훌륭하고 정확한 보도는 본래 가장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점을 지적해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윤 의사의 '테러' 행위라는 좀 극단적 예를 든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가장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일수록 진실을 전달하려면 오히려 고도의 주관적 보도를 동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 관계가 진실을 좌우한다

신문이 진실 보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전적으로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양심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정의감에 불타 있으면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는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양심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정의감에 불타 있으면 진실보도에 과감하고 그렇지 않으면 곡필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또는 좀 좋게 말해서 취재 기술의 미숙에서 진실 보도를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어느 편이나 다 같이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는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 쪽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지극히 피상적 견해임을 면치 못한다.

물론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의 책임이 기자 쪽에 있다는 말 자체에 잘못이 있다고 것은 아니다. 다만 진실 보도가 안 되는 이유를 전적으로 기자들의 윤리 문제로 해소시켜 버리는 것은 신문 제작의 현실을 모르는 불충분한 견해라는 것이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봐야 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가치의 편에서 봐야 하며 무엇이 근거이며 무엇이 조건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준칙을 강조하는 까닭은, 문제를 전체가 아닌 부분만 보고 새로운 것 대신 낡은 역사적 가치의 측면에서 보고, 근거를 조건을 근거로, 즉 중요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뒤바꾸어 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신문 방송학과에서 배우는 것처럼, 기사 작성의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특정 문제를 보도하는 데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이해 관계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진실 보도다 아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A를 B라고 보도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님을 말할 것도 없다. 현대 신문이 이렇게 졸렬한 거짓말 보도를 하는 예는 지극히 드물다. 사실에 입각해 보도하면서도 어느 특정 면을 특히 확대시킨다든지, 발전적이 아니고 낡고 소수를 위한 전시대적 가치의 편에서 보도한다든지, 중요한 점이 아닌 면을 중요한 것처럼 확대시킨다는지 하는 것은 모두 무엇인가 이해 관계가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중요한 문제로 보고 또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기대되는 보도일수록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인 압력을 가하려는 외부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시정할 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보도하고 논평하는 것이 진실한 언론임을 의미한다면 진실한 언론은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다분히 현실 부정적, 현실 지양적 언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만약 곡필이 부조리한 현실을 추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표면상 온건하고 긍정적이며 따라서 건설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진실의 언론'이라기보다 '곡필의 언론'이며, 그것은 더욱 그럴싸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진실 보도를 하려는 언론은 항상 현실 비판적이며 때로 현실 부정의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진실의 언론일수로 '파괴적 언론'으로 당시의 권력에 의해 탄압받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실 보도는 일반적으로 수난의 길의 걷기 마련이다. 권력에 저항하여 진실을 위해 살기는 어렵다. 양심적이고자 하는 신문 또는 언론인이 때론 형극의 길과 고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건호/서울대 법대 졸업, 주요 일간 신문에서 논설 위원과 편집 국장을 지냈다. 한때 언론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현재 (한겨레 신문)대표 이사 .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저서로는 (분단과 민족), (한나라 한겨레를 향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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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역까지> 중 푸리에와 오웬

푸리에와 오웬이 꿈꾸었던 멋진 신세계


에드먼드 윌슨

19 세기의 두 괴짜

샤를르 푸리에 (Charles Fourier)와 로버트 오웬 (Robvert Owen)은 19 세기 전반의 독특한 특성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한 생애를 살아갔던, 서로 매우 닮은 인물들이다. 푸리에는 브장송의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행상인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녔고, 오웬은 웨일즈의 말 안장을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포목점 점원으로 일했다. 두 사람 다 당대의 자유주의 정치에 실망하였으며, 당대의 인습적인 문화를 외면하였다. 푸리에는 '과학의 세기인 지난 23 세기 동안' 인류를 '피로 뒤범벅되게' 이끌어 온 유럽 철학의 전통을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그리고 '거의 반무식쟁이이자 상점 점원'인 샤를르 푸리에 자신을 인류에게 신의 뜻을 설명하는 사람으로 선택한 것은 신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업적 철학가들을 불신하고 '정치 및 도덕에 관한 모든 서적'을 논박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다. 푸리에의 말에 따르자면 천 여 년 동안의 정치인의 잘못은 오직 종교와 행정상의 폐단만을 다루어 왔다는 점에 있었다. "신의 율법은 우선 근본적인 기능인 산업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 정부가 이 일에 착수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더구나 그들은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산업상의 분열과 상업적 사기'를 조장하는 그릇된 방향을 취했다는 것이다. 한편, 로버트 오웬은 『정치적 정의에 관한 연구』(1793)의 저자인 윌리엄 고드윈 (William Godwin)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이나 이 비슷한 다른 어떤 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던 적이 없었고, 통계 이외의 다른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뜨인 적도 없었다. 정치 조직을 통해 일해 보겠다는 시도는 실패하였으며 단기간이었을 뿐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곤경으로부터 사회를 구제할 다소 합리적인 '그 무엇'을 급진당, 휘그당, 토리당 혹은 어떤 특수 종교 종파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로버트 오웬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고집스럽고 자주적인 영국인다운 코와, 뺨 둘레까지 뻗어나올 듯한 움푹 들어간 순진스런 타원형의 두 눈과, 달걀 모양의 갸름한 얼굴을 지닌 사색에 잠긴 유순한 큰 산토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치켜올려 감고 있는 흰 목도리 위의 푸리에와 얼굴은 비록 굳게 다문 입과 날카로운 콧날과 다소 양미간이 넓지만 또렷하고 자애스런 두 눈이 강인한 옛 프랑스인의 합리주의적 위엄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오웬과 비슷한 기이한 순진성을 풍기고 있다.

오웬과 푸리에는 모두 완전히 세속을 벗어난 솔직 담백한 사람으로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지니고 있었다. 양자 모두 심원한 인도주의적 연민과 체계적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 둘은 서구 사회를 가속도로 지배해 가는 상공업제도의 가정 추악한 면을 직접 체험하였다. 푸리에는 국민 의회의 혁명군이 리용을 포위 공격했을 때 자신의 가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가까스로 단두대를 면했다. 또 직물 공업의 성장으로 인해 리용 주민의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그의 고용주가 기근이 한창일 때 쌀 매점에 성공하여, 가격을 유지할 목적으로 일부러 쌀을 썩게 만든 뒤 마르세이유항 앞바다에 내다버리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푸리에는 잔혹한 것을 극도로 혐오했고 동정심이 유별나게 강했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힘이 약한 동무들을 두둔하다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예순 살 때는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다만 주인 마나님이 몹시 학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 어떤 불쌍한 하녀를 위해 무엇인가 도와줄 작정으로 비를 맞아 가며 몇 시간 동안 헤매고 다닐 정도였다. 인간생활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이와 같은 억제할 수 없는 강인한 충동은 그에게 낙관적인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그를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보상받지 못하는 일들로 몰고 갔다. 이상스럽게 고독한 생활을 해나가며 푸리에는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를 구성할 다양한 집단들의 상호 관계를 구상하고, 그들이 거주할 건물들의 정확한 비율까지 계산해 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주의 수명이 정확히 8만 년이라는 것을 계산해 내었다. 그의 계산에 따르자면 그 기간 동안 모든 영혼은 분명히 인간이 살고 있다고 그가 간주한 다른 혹성들과 지구 사이를 810번 여행하며, 정확히 1,626번까지의 생애를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푸리에와 마찬가지로 로버트 오웬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매우 민감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어린 시절 그가 다녔던 무용학교에서 어린 소녀들이 자기 짝을 구하지 못해 실망하였던 광경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떠올리곤 했다. 그는 열 살 되던 해에 집을 뛰쳐나와 단시일 내에 출세하여, 20세에는 벌써 5명의 직공을 거느린 면직 공장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새로운 면방직 기계를 초창기부터 이용했던 오웬은 이윽고 '생명 없는 기계에 대한 끔찍스런 정성과 살아 있는 기계에 대한 혹사와 천대'라는 엄청난 모순에 깊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미대륙의 노예제도는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악하고 어리석은 제도일 터이지만, 이 자제할 줄 모르는 시대에 영국의 공장에서 일하는 백인 노예들은 후일 내가 서인도 제도 및 미국에서 보게 된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보다 훨씬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영국 농촌의 소작인과 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의 본토의 가내 공장에서 학대받던 소년들과 노동자들보다 여러 면에서, 특히 보건て식품て의복 면에서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그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받던 사람들은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용주 자신도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웬은 말한다. "나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데에만 능숙해진 동료들이 정말 싫어졌다. 이 직업은 우리 본성의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면들을 타락시키고 때로는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온갖 다양한 무역업, 제조업, 상업을 두루 겪어 온 나의 오랜 인생 경험으로부터 나는 이러한 철저히 이기적인 제도 아래에서는 어떠한 훌륭한 품성도 나타낼 수 없음을 깊이 확신한다. 진실, 정직, 미덕은 현재도 그렇고 과거에도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미래에도 오직 명목에 그칠 것이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진정한 문명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것은 사람들 간에 대립적인 이해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서로 적대하도록, 심지어 서로 파멸시키도록 제도적으로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세상사를 처리해 가는 방식으로서는 저열, 비속, 열등, 무지한 것이다. 인격을 배양하고 부를 창조하는 방식으로서 좀더 나은 방식이 이를 대처하지 않는 한, 항구적이고 전면적이며 실질적인 진보는 이룩될 수 없다."

푸리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을 거부했다고 믿었고, 오웬은 관찰만으로 자신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지만, 양자 모두 자신들 주장의 토대를 루소의 사상에 두고 있었다. 인류는 천성적으로 선량하며 인류를 사악하게 만들어 온 것은 제도일 뿐이라는 루소의 사상은 당대를 완전히 휩쓸었던 사상이었으므로, 책에서 읽지 않더라도 누구나 물들어 있을 지경이었다. 푸리에는 주장하기를 마치 도구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보듯이 인간의 천성을 꺼내 보면, 신이 다양한 목적에 쓰라고 인간에게 주신 몇 가지 인간적 '열정'―본능과 기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열정'들은 모두 필요한 것들인데, 근대 사회에서 문제는 이들 '열정'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을 뿐이요, 적절한 열정이 적절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조화'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버트 오웬이 전 생애를 통하여 역설한 원리가 있었다. 즉 자기 스스로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교육과 어린 시절의 감화가 인간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것인 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쁜 일 대신에 옳은 일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인간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수학적 정확성'을 띠고 누구나 행복하고 선량해질 수 있다는 원리이다.

절대 평등의 이상 사회

개인의 이해가 전체의 이해와 상충되지 않음을 실례로써 입증하기 위해, 푸리에와 오웬은 모두 대사회 내부에 제한된 규모의 몇몇 자족적 사회를 결성해 볼 것을 주창했다.

푸리에가 요구한 공동체는 개인 자본에 의존하며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보통 선거제가 실시되며, 부자와 빈자의 자제가 동일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푸리에는 소득 격차가 너무 현격한 사람들을 동일한 공동체 내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소득 격차와 더불어 종래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긴 하나 계급 제도가 존재하긴 한다. 이 계급 제도에서는 자본가가 맨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공동체 성원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줄 몫을 공제한 뒤)배당제로 소득을 분배한다. 단지 4/12만을 자본량에 따라 분배하며, 5/12는 노동량에 따라 나머지 3/12은 발휘한 기량에 따라 분배한다. 하기 싫은 노동은 편한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필수 노동은 단순 유용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유용 노동은 사치품 생산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다.

푸리에에게서 문제의 초점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관계를 모든 '열정'이 유익한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한다는 간단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하고 싶어하는 몇 가지 일은 있으니, 모든 일이 행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든 인간적인 충동에는 유용한 용도가 있으니 모든 충동을 만족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일만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권태나 피곤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누구나 제 나름의 취미와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각자는 다양한 일에 종사함으로써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산업상의 능률은 다양한 집단 간의 경쟁에 의해 촉진된다. 푸리에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조직을 구상해 내었다. 그의 골치를 썩혔던 두 가지 문제―아이들이 흙장난을 좋아한다는 문제와 공동체 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문제―는 서로가 서로의 해결책이 되었다. 즉 쓰레기를 아이들이 치우게 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이 구상한 공동체는 이와 반대로 절대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공동체의 유일한 계급 제도는 연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장년층이 통치 평의회를 구성한다. 어린이들은 세 살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전문 교육자와 보모 밑에서 양육되고, 교환 수단의 단위는 한 시간의 몫의 노동으로 한다.

푸리에는 자기 계획의 자기 재정을 담당하고 싶은 부자와 기꺼이 상의하기 위해 매일 정오 자기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공고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기다렸지만, 한 사람의 후원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확고한 신념을 지니긴 했지만 매우 실망한 채로 1837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 오웬은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오웬은 한때 자기에게 도움을 기대한 푸리에가 자기에게서 제한된 집단으로 공산주의를 실천하려는 사상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여기서 중심 인물―그리고 그 당시 가장 특출한 인물―은 역시 오웬이다.

꿈을 현실로 바꾼 뉴 라나아크

로버트 오웬의 실제 행적은 오늘날에는 그 당시 소설의 주인공인 칼렙 윌리암스나 프랑켄슈타인만큼이나 기괴하다. 푸리에와 똑같이 사욕을 떠난 사회적 이상주의자인 그의 생애는 헨리 포드의 생애를 연상시킨다. 오웬은 스코틀랜드의 뉴 라나아크에서 최초의 면직 공장을 인수하였을 때, 그 공장 직공들은 더럽고 주정뱅이인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남녀들과―그 당시 어쨌든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고아원에서 실어온 5~10세의 어린이들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인간들을 바탕으로, 또 게다가 모두 스코틀랜드인인데 자기만이 웨일즈인이라는 특히 불리한 조건을 지닌 채, 오웬은 25년 이내에 높은 생활 수준과 상당 수준의 교육을 갖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웬 자신은 그 공동체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오웬은 공동체 성원들에게 다른 어떤 경쟁 상대보다 높은 임금을 주고 짧은 시간 일하게 했으며, 그들과 함께 불황을 이겨냈다. 그는 자기의 동업자들에게 지불할 배당금을 일정액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동체의 개량 사업에 돌렸다. 오웬은 사회전체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전세계를 향하여 호소했다. 모든 어린이들을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인수하여 처벌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내가 우리 노동자들의 어린이들 교육하는 방식처럼 교육시키기만 한다면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오웬은 인적 자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혹은 그 인적 자원을 다듬기에 적합한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어디인지를 우선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인간이란 전반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와 누구에게 그 시작을 맡길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는 가장 가망성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뉴 라나아크에서 스스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매우 고상한 인격을 지닌 예외적인 인물이며, 뉴 라나아크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만든 것은 질이 나쁜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들의 천성적인 선량함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가 자기 자신이 건설했으며, 자기가 관리하고 운용해야만 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로버트 오웬은 자신의 공장에서 자애롭고 전능한 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고만으로는 직공들을 근면하고 정직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을 점검하고 억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머리너머로 작은 사각 나무 패찰을 걸어 놓았다. 이 나무 패찰의 네 변에 각각 다른 색깔을 칠해 놓았는데 각 색깔은 각각 다른 품행 등급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그는 어느 날이건 공장을 둘러볼 때면 십장이 돌려 놓은 패찰의 색깔을 보고 그 직공이 전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품행 극히 나쁨'이나 '품행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색깔의 표찰과 마주칠 때마다 그는 지나가면서 태만한 근로자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그는 색깔이 점차로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마침내는 흰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매일의 등급을 일지에 기록하게 하여, 그가 없었던 동안에 노동자들이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돌아온 뒤 자신이 항상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도둑을 추적하여 찾아내는 전혀 실수 없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덕적인 세계를 창출해 낸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던 오웬은 자기가 거느린 교사들이 다른 곳에 가서는 뉴 라나아크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에, 그리고 그의 공동체를 다른 사람이 관리하도록 맡겨 두자 번영하지 못하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후일 오웬과 함께 협동 조합 운동을 벌인 차티스트운동의 한 지도자인 윌리엄 로베트는 오웬이 본래 독재적인 성격이어서 여하한 민주주의적 기반 위에서도 함께 일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의 동업자들이 자신의 방법에 반기를 들 기세가 뚜렷해져서 그가 항상 새로운 동업자를 찾으러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새로운 동업자를 발견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감에 따라, 그는 점차적으로 자본가들이란 탐욕스럽고 무지한 족속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의회를 통해 로비 공작을 벌여 온(영국에서는 최초로 제출된) 연소자 노동 금지 법안이 면방업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신뢰해 온 피일과 같은 정치가들에 의해 그 법안 내용의 핵심 조항을 삭제당해 버리자 그의 신념은 한층 더 흔들렸다. 오웬은 기대를 걸고 런던의 경제학자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들이 실제 경험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로서, 오웬의 말에 따르자면, 단지 공장주들의 추악한 행위를 합리화할 체계를 만드는데 골몰하고 있음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에 뒤따른 절망적인 경제 사정의 타개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캔터베리 대주교를 의장으로 하여 저명한 경제학자, 박애주의자, 정치가, 실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그도 초대를 받고 참석했다. 그런데 그 회의에서 그는 당시의 실업 사태의 원인이 제대 군인과 군수 산업의 급격한 붕괴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참석자가 변변히 교육도 받지 못한 자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기계로 인해 수백만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설명하자 모든 참석자들이 놀랄 정도였다. 젊은 시절 그는 면직 공장의 관리자 노릇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매우 가까이 살고 있던 공장주는 단 한 번밖에 공장을 방문한 일이 없었으며, 그 방문조차도 외국 손님에게 공장을 구경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이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이해시키자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리라는 것을 염려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가혹한 현실

그런데 그럴 즈음에 그들⇬수상, 대주교, 왕 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류 계급의 불온한 정세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하류 계급을 행복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오웬은 여전히 그들의 공평 무사함을 신뢰하고 있었다. 엄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는 그들 같은 사람들이 인류의 전반적인 향상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1817년 엑스라 샤펠에서 개최된 열강 회의에 참석하여 그 회의의 간사장인 한 노련한 외교관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 저명 인사에게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덕택으로―만일 인류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인류 자신의 최고의 이익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만 된다면―이제 소수 특권 계급만이 아닌 전체 인류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훌륭한 음식을 먹으며,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여태까지 다종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었다. 그러나 간사장의 대답을 듣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련한 외교관은 맞는 말이라고 대답한 뒤, 그들―그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유럽의 지배 세력―은 그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일반 대중이 잘 살게 되고 자립적이 된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지배 계급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간사장의 이러한 고백을 듣고 난 뒤, 나는 회의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어버렸다. 장기간에 걸친 험난한 과제가 내게 주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과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다툰다는 것이 양자 모두의 진정한 이해와 참된 행복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음을 양자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쳐부수어야 할 편견이 모든 나라 모든 계급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감지했다. 이 편견을 뿌리 뽑자면 무한한 인내와 끈기 이외에도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함과 사자의 용맹함이 요구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굳은 결의로 시작한 일이니 만큼 단호하게 목표를 향하여 곧장 전진해 나가야 함을 절감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이미 오웬을 파괴적인 이상주의적 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는 공개 연단에서 진리의 주요한 적은 종교라고 단언하였으며, 종교만이 아니라 재산제도와 가족 제도까지 공격했다(이리하여 그는 푸리에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갔다. 푸리에는 이 세 가지를 수정한 채로 유지하는 공동체를 계획했었다.). 이제 교회가 그에게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는 유럽은 병들었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창건하려면 신선한 땅을 찾아야만 한다고 단안을 내렸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일계 라파이트 교파로부터 인디애나주 뉴우 하모니의 3만 에이커의 땅을 인수했다. 오웬은 1826년 7월 4일에 인류의 3대 억압자인 '사유 재산て불합리한 종교て결혼'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정신 독립 선언>을 선포하고, '근면하고 선량한 사람은 국적을 불문하고' 그의 공동체에 참가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유럽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다. 그러나 미국인은 영국인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뉴 하모니에서 그들은 더욱 형편없었다. 서부인들은 뉴 라나아크의 스코틀랜드 프롤레타리아처럼 온순하지가 않았다. 또 제한 없이 누구나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종 부랑자와 악당이 들끓었다. 오웬은 테일러라는 파렴치한 인물과 동업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그와 손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테일러는 자기도 그 땅 위에 공동체를 하나 세울 생각이라고 하면서 오웬에게 손을 끊는 대가로 한 구역의 땅을 요구했다.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날 밤 테일러가 많은 양의 농기구와 가축을 몰래 자기쪽 땅으로 날라 갔기 때문에 그 다음날 거래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것들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테일러는 자기 땅에 위스키 제조소를 만들어 오웬의 금주 설교를 조롱했고, 제혁 공장을 세워 오웬의 제혁 공장과 경쟁했다. 뉴 하모니는 3년도 버텨 내지 못했다. 오웬은 마침내 재산을 여럿으로 갈라 팔아 버렸다.

그는 그 뒤에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같은 일을 벌여 많은 돈을 이러한 공동체에 날려 버렸다. 그는 돈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뉴 라나아크 시절의 초창기에는 면직업의 경기가 좋았었고 그가 자신의 최초의 공동체만을 소유하고서 스스로 감독할 수 있었으므로, 돈 관계에서의 약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유지해 나갈 방도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설비와 공장을 사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림으로써 많은 돈을 날려 버리곤 했다.

외로운 죽음

그는 마침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자식들의 부양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이상 부유한 공장주도 아니요, 또한 지배 계급의 호의마저도 잃어버린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32년의 개정 선거법은 오직 중산 계층에게만 지지를 얻었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환멸과 반항심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환멸을 느낀 오웬은 노동자계급에 가담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마저 포기해 버렸으며 이제는 고용주 신분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제 오웬식 협동 조합 운동과 전국 대통합 노동 조합에 관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너무도 못 견뎌한 까닭에, 즉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여전히 자기 제도의 확신성과 필연성을 너무도 확신한 까닭에, 그는 노동자 계급의 장기간에 걸친 고통스런 투쟁에서는 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조직한 후 1년도 채 못되어 노동 조합 운동은 와해되어 버렸다. 오웬은 차티스트 운동과 곡물법 폐지 운동에는 관심이나 공감을 거의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일거에 대뜸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인류가 아직도 너무나 몽매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저승에 간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려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고결한 인물들―생시에 그의 주장을 공감을 갖고 경청하였으며 그의 이상을 정말로 공유하고 있었다고 느껴졌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죽어 그의 곁을 떠나간 모든 사람들―즉 셸리, 토마스 제퍼슨, 채닝, 켄트 대공(이 대공이 그에게서 돈을 빌어 쓴 뒤 갚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등이 자기와 여러 가지 약속을 맺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자기와 의논하고 자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저승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에게 죽은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은 여러 해 전에 그의 머리에 떠올랐으나 지금 세상에서는 아직 확실한 근거를 잡지 못한 몇 가지 생각―"지금의 무지몽매한 인류로서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을 매우 중대한 어떤 변화가 명백히 진행 중"이라는 생각, "쌓이고 또 쌓이는 엄청난 부 속에서 모든 사람이 빈곤에 허덕이거나 아니면 남의 빈곤 때문에 절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상호 간의 적대적인 이해 관계에 기초한 제도가 인류를 위해 다행스럽게도 이제 오류와 모순의 극한점에 도달하였다."는 생각, 곧 '단결의 원칙'이 '분열의 원칙'을 대체하게 된다는 생각, 또한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확인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큰 돈을 모았다가 깡그리 날려 버린 로버트 오웬은 1858년 웨일즈의 조그마한 마을―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열 살에 사회로 진출하여 꿈같은 출세를 거듭하고, 마침내 면방업계의 개척자가 되었다―로 돌아가 아버지의 말 안장 가게 옆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에드먼드 윌슨/미국의 뉴저지주 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차 대전 이후 신문 기자 등으로 활약했다. 후에 비평에 눈을 돌려 20세기 비평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To the Finland station』, 『Axel's Castle』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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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의 페이비어니즘

* 늑대비님의 [[버나드 쇼]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에 관련된 글. 

쇼우의 페이비어니즘과 사회개혁관 연구

서 윤 교

버나드 쇼우(Bernard Shaw)는 19세기 후반 이후 기존의 극과 유사한 사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것들을 정치, 사회, 철학의 여러 문제들과 연관시키면서 사회라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체제 내에서 공존하는 인간의 삶과 현실을 다양하고 심도 있게 묘사하여 독창적인 사실주의 극을 확립시켰다. 아울러 그의 극은 사회비판의 주제를 냉소적 어조로 드러낸 사회문제극으로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술가란 현실의 모사 외에 어떤 비젼을 제시해야 하며 그러한 비젼을 통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이상세계의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녔던 것이다. 그는 빅토리아조 시기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 혼란 속에서 사회개선의 필요성과 페이비어니즘(Fabianism)을 선전하였다. 

1880년대 후반에 명료한 특질을 지니게 된 페이비어니즘이란 어휘와 관념은  혁명에 대립되는 점진적 변화, 격변에 대립되는 점진주의, 합헌적이고 의회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의 달성(현존 정치정당과 지방정부에로의 침투를 통해) 그리고 진보적이고 사회개선적 세력과의 협력(순수한 관념적 입장에 대립되는 실용적 사회주의), 마르크스(Marx)의 프로레타리아니즘에 대립돼는 중산층의 지성주의(지적 존중)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사회학의 역사적 기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페이비언협회의 실행위원으로 쇼우와 같이 활동했던 시드니 웹(Sydney Webb)은 사회적 유기체설(Social organism)의 개념의 후기다윈주의(Post-Darwinism)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의 목표로서의 정적인 유토피아의 개념을 거부하며, “사회적 진화는 모든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현재의 경로로 간주할 수 있고, 전략, 과정, 혹은 목적 -사회정의와 개선된 세계 등 -을 위한 수단으로서 진화는 혁명을 대체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과정이 목적 그 자체가 된 것같이 보인다”1)라고 언급하고 있다. 생명과 제도라는 근본적 모순은 비실제성이라는 한계로 인해 혼란과 억압을 가져왔고 아울러 생명과 제도가 수평적 상호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위계질서의 구조 속에 폐쇄되어 온 것도 역사발전의 장애로 간주되었다. 모순에 대한 균형감각과 진보에의 의지는 현실과 초현실에 대한 인식에 공히 적용되어 그의 독특한 전략을 만들어내었다. 상황개선과 생명의 진화발전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과업이므로 침투와 점진주의는 그의 사상과 문학활동에 기본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침투와 점진주의가 페이비어니즘의 주요한 핵심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쇼우의 저서인 ꡔ페이비언논집ꡕ, ꡔ페이비언논집 1908판 서문ꡕ, ꡔ페이비언논집 1931판 서문ꡕ 등을 중심으로 그의 페이비어니즘 사상을 그리고 아울러 그의 일부 극작품을 통해 페이비어니즘과 사회의 점진적 개혁 사상, 마르크스(Marx)주의비판 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검토할 것이다.



 

쇼우의 페어비어니즘, 사회개혁사상과 이러한 사상이 잘 나타나있는 극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살던 시대환경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페이비언 협회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병폐를 가져왔으며 ,그에 따른 고도 성장은 사회적 부조리의 만연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가 활동한 19세기 말은 기존의 절대적 세계관과 사상체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사상적 전환기였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이론이 기존의 경제사상 및 체계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고,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ꡔ종의 기원ꡕ(Origin of Species)(1859)은 서구 문명의 정신적 지주인 기독교 사상에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영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중산계층과 노동자들의 자유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노동자의 시위가 일어나고 경제공항의 조짐이 감도는 등 사회는 일대 변혁을 겪는 시기였다. 1870년 말 미국, 독일 등의 후진 자본주의 국가의 약진에 따라 영국은 불경기를 겪었다. 불황과 더불어 노동조건의 악화와 실업자의 증가로 노동자운동이 빈번했고, 챠티스트운동의 종식이래 사회주의 운동이 1880년대에 급격히 부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가운데 쇼우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당시 영국 사회가 지니고 있던 갖가지 모순점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능동적이고 낙관적인 사고 방식이 사회 개혁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882년 미국의 사회주의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연설을 듣고 감화를 받아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저서ꡔ진보와 빈곤ꡕ(Progress and Poverty)과 마르크스(Marx)의 ꡔ자본론ꡕ(Das Kapital)을 읽은 후에는 일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는 여기서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낭비적이고 어리석음을 인식하였고 사회주의(Socialism)가 오히려 도덕적이며 지성적이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마르크스의 사상 중 계급투쟁이라든가 노동가치설 또는 혁명에 의존하는 사회개혁의 방법이 비실제적임을 발견하고 곧 마르크스의 사상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계급투쟁과 노동자의 혁명없이 점진적인 의식의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가 도래해야 한다는 페이비어니즘을 택하게 되었고, 당시 종교와 과학의 갈등,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 혼란과 난민의식이 팽배했던 19세기 후반 영국적 상황에서 1884년에는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에 가입하여 8여년을 사회개선의 필요성과 페이비어니즘을 선전하는 데 주력했다. 이 때의 사회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그는 작가인 동시에 사회사상가로 인식된 것 같으며, 그의 극이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 도구라거나 그의 시대의 사회주의사상과 관련된 여러 사상을 수합한 절충주의자라고 간주되었던 것 같다.

페이비언 협회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의회주의적, 점진주의적 경향의 영국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영국의 지식인 단체였다. 사회주의 단체 중에도 미국의 철학자인 토마스 데비드슨(Thomas Davidson)의 영향을 받아 소수의 젊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최고의 도덕적 가능성이 실천될 수 있는 사회실현을 추진하는 새생활동우회(Following of the New Life)가 조직되었고, 이 단체는 모든 개혁의 기본을 개인의 도덕적 개혁에 두려는 개인주의적 도덕주의자들의 모임이였다. 이 단체가 1880년 1월 4일 새로이 사회문제연구를 위한 단체를 창립하니  이것이 페이비언 협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 페이비언 협회를 설립한 사람들은 작가, 교수, 성직자, 관리 등 다양하게 구성된 지식층의 젊은이였다. 이 페이비언 협회에서 쇼우는 리더로서 활약하게 된다. 페이비언 협회의 활동은 다방면으로 확대되었고, 노동조합, 중산계층, 자유당, 보수당 등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특히 후일 자유당이 1901년에 실시한 양로연금제도 제안하였고, 영국사회보장제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페이비언 협회는 1884년 5월 쇼우와 시드니 웹이 참여함으로써 활발해졌다. 페이비언 협회는 회원의 유입으로 조직화를 시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사, 연구를 통한 주장을 사회개혁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협회에서 쇼우는 선전자역할을 맡았고, 실행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ꡔ페이비언 에세이ꡕ(Fabian Essays)를 웹 등의 실행위원회의 위원 등과 같이 저술하였다. 한편 연구 결과를 팜플렛 「페이비언 트랙트」(Fabian Tract)와 월간지 「페이비언 뉴스」(Fabian News)에 싣고, 강연과 집회를 통해서 그의 사상을 사회에 알렸다. 이 「페이비언 뉴스」는 모임에서 읽혀진 논문들을 요약하고, 서적에 대한 비평을 활자화하고, 선전에 유용한 사실들을 간행하고, 페이비언에 의해 이루어진 강연일지를 제공하는 등 페이비언 협회의 근황과 활동에 대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하였다. 페이비언 협회는 회원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협회의 목표인 사회제도의 재건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일련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페이비언 소책자 중 1884년 발간된 이후 페이비언 협회의 전략에 합치하는 것, 혹은 페이비언 협회의 전략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제5호 「사회주의자를 위한 사실」(Facts for Socialists)이 최초이다. 쇼우와 시드니 웹은 1887년 말 제 7호 「진정한 급진주의 정강」(The True Radical Program)에서 자유당의 선거정강에 대하여 비난하고, 성인참정권, 선거비용에 대한 지불, 불로소득세, 철도의 국유화, 1일 8시간 노동 등을 요구하였다. 1889년의 「런던사람들에 대한 사실」은 대도시 런던에 대한 통계적인 사실들을 열거하고, 사회주의적인 원칙 위에서의 개혁을 제안하고 있다.1) 이 책자는 지방자치 사회주의에 대한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제 14호 「신개혁법」과 제 17호인 「구빈법개혁」은 구빈법에 관한 다양한 계획과 개혁안을 엿 볼 수 있다.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페이비언에 대한 영향은 ꡔ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에로의 발전 과정ꡕ(English Progress towards Social Democracy) 이라는 소책자 제 15호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에 관해 언급한 부분과 매우 유사하다. 역사과정을 제시하고 있는 그 내용은 잉여생산을 위한 투쟁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해결책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전과 집합주의적 소유권으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생산 수단에 대한 개인 지배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2) 페이비언 소책자를 검토해 보면 관념적인 문제를 취급하거나 추상적인 이론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은 몇 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거의 모든 책자는 정리된 자료에 의해 분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페이비언의 다른 저작에도 공통적이다. 쇼우와 웹의 ꡔ페이비언 논집ꡕ에서의 이러한 경험주의적 요소는 페이비언주의의 저변에 깔려 이 사상의 방법론적 토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이론 전개에 앞서 먼저 정확한 사실에 대한 파악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은 실증주의 사상으로부터의 영향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페이비언 뉴스」는 후일 독립적이고 독립된 회사로 경영되지만, 1913년 5월 이것은 노동당의 기관지가 아니라 페이비언주의의 잡지였고, 어떤 정당의 편견도 지적하지 않았다. 새 잡지에 쇼우는 정기적인 기고자로 활동하게 된다.

1889년에 쇼우 등에 의해 만들어진 ꡔ페이비언 논집ꡕ에 표현된 페이비언 사상의 주요한 특성을 살펴 보면 첫째로 단일지도자를 따르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 중에서 그들 자신의 노선에 적합한 것을 발전시키는 절충주의라는 것과 둘째는, 쇼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이 지난 1세기동안 유럽사회를 사회주의로 향하게 하는 주요한 흐름이 경제적인 영향력과 함께 민주주의라고 믿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페이비언의 세 번째 특성인 점진주의를 낳았다. 맥브라이어(A. M. McBriar)는 페이비언들이 점진주의를 선택한 이유를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의 도덕적 배경이 전체 사회의 구성원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는 기대를 들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영국의 경험주의적 전통으로 여겨진다. 페이비언들은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도 계약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그 근간으로 하는 순수한 방임주의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자본주의는 점차 집합주의의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쇼우는 자연과 역사에 대한 진화론인 해석을 수용하여 영국에서 사회주의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민주적, 점진적, 합헌적, 평화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쇼우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의 정치적인 대행자이며, 국가의 중앙집권적 기구는 결국에 가서는 민주적인 힘에 의하여 장악된다는 것이다.

쇼우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현과, 정치적 방법에 의한 사회주의의 목표달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헨리 조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ꡔ페이비언 논집ꡕ에서 쇼우는 모든 경제분석론이 토지경작에서 시작한다고 규정하면서, 사회주의의 시작에 대해 “인간은 자연이 준 이 임의적인 산물들이 그들에 대한 집단적 추구 속에서 각자에 의한 노동에 따라 그들에게 정당하게 배분하는 권력과 성의를 가지고 있는 어떤 기관에 의해서 가로채질 수 있다는 소망에 상당히 도달하게 되었고, 그 소망이 사회주의이다”3) 라고 언급하고 있다. 동일한 노력과 시간을 투여했을 때도 자연이 주는 보답은 균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지역내의 불균등한 생산물을 통괄하여 주민들의 노력에 비례, 배분하는 선의의 강력한 대리기구에 대한 소망이 쇼우의 사회주의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불균등한 생산물 가격에 해당되는 돈은 지대란 명목으로 지주에게 돌아갔다. 인구증가, 기술진보, 산업화에 따른 지가상승으로 지대수입이 증대되자 활성화된 생산력의 과실 또한 지주계급에게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쇼우는 지대에서 자본주의의 특징적 독소를 발견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창출한 가치가 유한계층에 의해 잠식되는 불합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헨리 조지의 토지단일세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쇼우는 토지공개념을 포함한 사회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쇼우가 제시한 페이비어니즘의 실천전략은 자본주의 속에 침투하여 자유주의자와 제휴하고 의회에 진출하여 점진적으로 자신의 견해가 확산되도록 노력하고 기다린 후, 시기가 도래하면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쇼우는 인간개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전통적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생활양식과 개선된 세계를 창조 운영할 주체로서의 초인상정은 생명력의 진보의지와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쇼우는 기존 종교의 인위적 체계를 공격하고 자신 나름의 종교를 구축한다. 완전한 신 대신 불완전한 초인의 탄생을 통하여 자신의 완성을 원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인간들이 문명 속에서 인위적 삶을 영위하고 생명력으로부터 이탈되어 있고, 개인적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생명을 소모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쇼우는 독자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각하고 생명원과의 교류를 회복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으며, 작품활동도 인간과 생명력 사이에 창조적인 교류를 차단시키는 모든 제도와 의식의 틀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다. 점진적 개혁의 현실적 가능성에 주목한 페이비언들은 의회로 진출하여 자유주의자들 속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특히 쇼우는 온건한 정신이 광기보다 덜 자극적이고 침투와 점진은 페이비언 정책의 시발이지 목표가 아니란 인식을 하고 있다. 페이비언들은 상대가 있음을 인정하고, 소기의 목적을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현실적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지적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들의 의회 진출 시도는 그들이 의회주의 신봉자여서 보다는 그 외의 다른 개혁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며 비폭력의 선택도 폭력이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사용은 진보세력의 소멸로 인도한다는 역사적 교훈 등을 프랑스혁명 등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쇼우는 그의 저서 ꡔ페이비언논집 1908년판 서문ꡕ(Preface to the 1908 Reprint)에서 “페이비언들은 유산자들이 학살을 주저않는다는 것과 성공할 수 없는 혁명가는 중상, 위증과 무자비한 법적, 군사적 대량 학살을 기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4) 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페이비언들은 폭력이나 소수 혁명가에 의한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페이비어니즘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여기에서 페이비언들의 계몽적, 교육적 성격이 뚜렷이 나타난다. 페이비언들에게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은 곧 국민적 자질을 질적으로 높이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쇼우는 인간에게 아무리 원초적인 생명력이 넘친다 할 지라도 페이비언주의자가 될 만큼 지적이지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에게 미래가 없다고 말한 것은 페이비언주의 하에서의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페이비언들에게 있어서 특히 쇼우에게 있어서 사회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 전반에 걸쳐 페이비언사상이 보급되고 전파되어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페이비언사상을 국민들에게 보급시키고 확산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임무였던 것이다. 쇼우는 페이비언의 본질적인 성격은 타협정신이라고 하고 있다. 타협이란, 한 사람의 신념이 다른 사람의 신념을 누르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패자와 승자가 생기고 강제에 의해서 한쪽이 굴욕적인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타협은 곧 설득이며 토론이다. 이러한 타협과 토론의 강조가 그로 하여금 토론극을 도입하게끔 하게 하는 것이며 ꡔ인간과 초인ꡕ과 같은 극을 통하여 등장인물인 앤과 테너, 램즈던의 심각한 사상적인 충돌을 유도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토론을 통해 모든 인물간의 갈등이 표출되고 긴장감이 더해 가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토론 방식은 결국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담은 교훈적인 내용을 독자나 관객이 수용하도록 하는 한 과정이다. 여기서 쇼우가 강조하는 교육과 계몽을 살펴보면 첫째로 상식을 강조하는데 있다. 페이비언들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연약함과 무지함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앞길을 바라보고 선택할 수 있는 계몽의 길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한 단계에 불과하며, 따라서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덕은 상식이외의 덕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로 사실과 지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조하였다. 페이비언들은 사실이 중요하며 궁극적으로 사실의 영향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시킨다는 것을 확신했다. 페이비언들은 정확성 부족은 단지 진보를 연기시킬 뿐만 아니라 더 큰 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과 확실한 권위있는 진술의 꾸준한 투하에 의해서만이 현금 자본주의의 부도덕성, 잔인함, 비효율성이 모든 편견 안에서 축출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쇼우는 ꡔ홀아비의 집ꡕ(Widower's houses)에서 자본주의의 낭만적 이상에 빠진 대중이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고, 사회주의로 가치관을 전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의미는 주인공인 사르토리우스(Sartorius)가 빈민 착취의 도덕성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관습과 현실과 유리된 이상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자하는 사회의 개혁에 있다. 쇼우는 낭만적인 이상주의나 관습적 도덕률에서 벗어나 계층 간의 문제를 단절된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사회구조와 그 체계를 수용하는 사회주의적인 의식의 개혁을 강조한다. 쇼우가 이 극에서 전하려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아무도 자본주의의 부패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하고자 하는 쇼우의 메시지라는 지적처럼, 이 극에서도 부패한 자본주의를 몰아내서 모든 경제적인 부패상을 제거하는 체제, 즉 페이비언체제로 들어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쇼우의 의도이다. 그러나 쇼우는 이 작품에 나타난 사회주의적 개념이 비평가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을 밝힌다.


사회주의를, 마치 빅터 위고(Victor Hugo)의 레미제라블 ꡔLes Miserablesꡕ에서 절정화되어있지만 고통과 부정의에 대한 가난한 자의 항의와 함께 동정의 정신으로 받아드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단계의 사회주의는 슬럼의 공포를 단지 슬럼의 주인에 입장에서 잔혹한 개인적 비행의 결과로 간주하는 나의 작품에 주인공들의 후회에 잘 나타나있다.5)


쇼우가 추구하는 페이비언주의는 빈민의 비참함과 부자의 횡포를 역설하며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의 주체인 중산층을 그 대상으로 중산층의 변화를 촉구하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페이비언주의와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살펴보면 페이비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평등, 자유, 그리고 우애라는 근본적인 사회주의 가치를 수용한다는 점에선 유사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문제에 관한 입장에서는 그 차이점이 현저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에 강하고 특정한 제안에 약한 반면, 페이비언주의는 이론에는 약하지만 처방에는 강하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를 집합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정치기구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국가를 부인하며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혁명을 시도하는 반면에, 페이비언들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 국가가 사회개혁사상을 수용해야 하며, 보통선거 기반의 민주정치에서 국가가 언제나 다수파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하며, 의회민주적인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의 진화를 확신했다는 점이다. 이는 페이비언들의 점진주의의 불가피성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페이비언들은 복지국가가 시장요소의 자유로운 활동을 수정하는 사회정책을 사용하여 시장경제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완전히 붕괴되기를 원했다. 넷째, 페이비언들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데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복지국가를 상당한 성취로 간주하였다. 일부는 복지국가 자체를 목적으로 보았고, 일부는 사회주의를 향한 단계라고 보았다.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지국가가 노동계급에게 어느 정도 혜택을 주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주요 수혜자들은 자본가계급이라고 주장했다. 노만 존슨(Norman Johnson)은 복지 국가가 자본축척을 지지하고 자본주의체제를 정당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6) 1896년 쇼우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환상을 견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페이비어니즘 이외의 사회주의론을 프롤레타리아 자유주의의 지적 위장형태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가 지적한 두 개의 환상은 혁명의 날을 황금시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종교적 환상과 마르크스주의자적 계급 전쟁 드라마이다. 쇼우는 사회주의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만과 타협에 대한 부단한 저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쇼우의 자기반항은 변증법적 진화를 위한 행위이지 자기 진영내의 경쟁자를 증오하여 적과 제휴하는 급진주의자의 저급한 전략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다. 그의 사회주의 허상에 대한 비판은 좌파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필연성과 가상된 대중의 정치적 우월성에 대한 반발이라 볼 수 있다. 구체적 사실에 대한 쇼우의 판단은 물론 오류의 가능성은 내포하고 있으나 세계에 대한 총체적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쇼우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아니라 노동자와 유한자의 공존이란 모순을 발견하고 그 해결방법으로 구성원 전체가 노동하는 사회구조에로의 전환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 ꡔ페이비언논집 1931년 재판 서문ꡕ(Preface to the 1931 Reprint) 에서 “분배란 단지 물질적 생산물의 분배뿐 만 아니라, 일과 여가의 분배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7)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제안은 그의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상의 근간으로 도덕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에 대한 비젼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쇼우는 엥겔스(Engels)가 쓴 「사회주의, 이상국가 및 과학」(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에 대해 그의 저서 ꡔ버나드 쇼우의 서평ꡕ(Bernard Shaw's Book Review)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칼 마르크스와 프레데릭 엥겔스, 1848의 공산당선언의 공동저자로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위한 고전적인 모델이지만 사실상 말하자면 학문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거의 실효성은 없다. 아울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둘 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며, 경제학자들의 군주와 같은 존재로써 마르크스는 그 자신과 엥겔스에 의해서 날조된 극적으로 허구적인 것이다.8)


결국 쇼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상에 대한 철학적 취약성이 이러한 퇴화된 가치이론을 아이러니컬하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쇼우는 비록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헤겔(Hegel)을 올바로 정립시키기 위해 시도하였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컨(Bacon)이나 록크(Locke)의 형이상학에 반대되는 헤겔의 변증법의 옹호자가 되었고 일면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어서 가치이론이 실패가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우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억눌린 노동자들의 혁명에 의한 개혁은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믿게 되었고, 중산층 계급의 양심의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중산층이 즐길 수 있는 극무대를 통해 사회주의를 설교함으로써 자연스러운 효과를 거둘 수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데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중산계층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이 이기심을 극복하고 인생의 목적을 전체 지역사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두어줄 것을 호소한 것 같다. 쇼우가 이렇게 하게 된 것은 쇼우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의 출신이 대부분 중류계층이고 여러 직업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이 중산계층 사상가이며 어느 누구도 하류계급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ꡔ홀아비의 집ꡕ에서 주인공 트렌취(Trench)는 현실의 사회조직을 직시하지 못하는 중산층 이상주의자이지만 나중에 인간의 정의와 도덕 등의 가치관에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마침내 환상에서 벗어나 리얼리스트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트렌취와 같은 중산층 계급의 도덕적 이상인 환상을 타파하는 곳에 쇼우의 문학의 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쇼우가 견지한 사회주의의 가장 중심이 되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욱 열정적으로 부와 힘의 분배가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동등한 분배계획에 대한 긍정적 이유. 나는 그것이 나의 선호하는 계획이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이 있다. 내가 수입의 불평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수입의 평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검토하도록 도와주고 있을 때, 당신은 내가 공평히 행위하는 것을 신중하게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9)


그의 작품 ꡔ바바라 소령ꡕ에서 등장인물인 언더샤프트(Undershaft)는 무기 제조 공장을 경영하는 백만 장자로 자본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에 구속받거나 얽매이는 것이 아니고, 돈과 화약에 의존한다. 이에 반해 그의 딸 바바라(Barbara)는 구세군의 소령으로 전통적으로 제도화된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언더샤프트의 부에 대한 신앙은 물질주의의 상징으로 육의 세계를 나타낸다. 반면 바바라의 구세군 구호소에서의 봉사는 알프레드 터코(Alfred Turco)가 언급하듯이 정신의 세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바라와 언더샤프트 사이의 대조가 더욱 명확히 그려진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대포 사이의 차이와 같다. 따라서 가장 가능한 용어로는 지혜와 권력사이의 갈등을 양극화했다.10)


언더샤프트는 돈에 그 첫째 가치를 부여하고, 또 돈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가난하지만 정직하다는 등의 가난을 합리화하는 그의 말은 모두 거짓인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가난이 축복인 양 내버려두고, 비겁한 자에게 겸손을 가르침으로 비겁한 자가 그의 비겁을 신조처럼 지키게 하라. (85)


여기서 극의 주요 주제인 돈과 도덕성, 즉 현실과 이상은 상호 연결되고, 상호 영향을 미치고 결국 융합한다. 언더샤프트의 공장으로 대표되는 힘의 중심을 향한 커진스(Cusins)와 바바라의 결합은 돈과 도덕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 무력하지만 지적인 인물인 커진스에게 언더샤프트는 힘을 제공하여, 사상을 행동으로 바꿀 기회를 제공한다. 악을 제어하는 힘이 없이는 선을 위한 힘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커진스는 언더샤프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평민에게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식층들에게 대항할 수 있게 하고, 사회의 구조를 개선할 수 있도록 무기공장을 훌륭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그가 지식층들이 보편 선을 위해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할 만한 강한 힘을 일반인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커진스가 언더샤프트의 사회적 진보를 기초로 하여 지혜와 힘, 지성과 실용성을 화합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쇼우가 주장한 사회주의 이상은 동시대의 사회주의와는 달리 자본주의를 이상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상세계의 지향점을 동등한 수입을 바탕으로 한 공동의 복지에 둠으로써 특히 공동체(community)속의 삶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악덕으로 간주하였다. 아울러 쇼우는 결코 물질적인 것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는 태도를 타파하려고 하고 동시에 부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사회 하류계층의 환상도 깨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쇼우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우리는 물질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사회가 전반적으로 상향 발전되고 사회가 개혁되기 전에는 아무도 지신을 개혁할 수 없다는 쇼우의 인식 속에는 깊은 인도주의가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앞에서도 페이비어니즘이라고 하는 것이 일면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니즘에 대립한 중산층의 도덕주의, 지성주의(지적 존중)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쇼우의 이중성은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당시의 급진적인 사고들을 흡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시대의 특징인 점진주의와 낙관주의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데 있다. 사회 변화와 개혁과 관련해 쇼우가 중요시한 것은 체제나 사회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정신적 도덕적 의식 구조의 변모였다. 쇼우는 페이비어니즘의 평등 이념에 입각해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공격하지만. 실제로 사회주의의 기능은 자유주의가 현실적 존재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어서, 자유주의자들은 쇼우의 사회주의가 자유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라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의 영역확대라는 것은 경제의 빠른 사회화에 비하면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며, 진정 자유와 민주주의는 전 인구가 책임을 분담할 때만이 작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우는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은 자신의 생이 사회에 대한 유용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각자가 인식하고 깨달을 때 비로소 도덕적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쇼우가 외계에 대한 통제에 인간 자신에 대한 통제도 포함시켜 자신과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책임을 지고 실천할 수 있는 적합한 사회제도로 페이비어니즘을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쇼우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이나 역사적 필연성 등의 결정론적 입장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충돌했다. 그는 노사간의 이해 상충이 무산자들을 자발적으로 권력 투쟁에 임하게 할 것이라는 견해나, 역사법칙, 필연성, 불가피성 등의 개념과 용어에 반대했다. 아울러 무노동자가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사회제도는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빈자의 순수성과 부자의 단점을 도식적으로 신봉하지 않았으며, 사회내의 어떤 한 집단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쇼우는 교육과 제도개혁을 통해 무산계층을 소멸시키고 그들을 신사계층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사회가 전반적으로 상향 발전되어 가기를 원했다.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동인을 물질적, 경제적 여건을 위한 급진적 계급투쟁으로 보았지만, 쇼우는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에 기초를 둔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제외시키고 단지 경제적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사회주의 그 자체만을 강조하여 민주주의를 이념적으로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마르크스 사회주의이론은 공산주의의 길을 걷게 된 반면, 페이비어니즘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는 영국적 전통 하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발전 민주주의를 밑거름으로 한 정치토양에서 싹을 틔웠던 것이다. 요컨대 페이비언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 개혁을 유도한 쇼우의 기여는 문학적 측면 뿐 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크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서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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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f B. Shaw's Fabianism and His Thought

of Social Reform

Suh, Yun-kyo

In the late 19th century when spiritual confusion through social and  economical contradiction and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and  sufferers consciousness surged in the Britain, Bernard Shaw joined the  Fabian Society and over eight years exerted himself for the propaganda of  the Fabianism and the need of social improvement. Bernard Shaw was one of the leaders as a member of the execution committee in the Fabian  Society. In taking active part in the Fabian Society, Shaw wrote Fabian  Essays with Sydney Webb. Here Shaw expressed his Fabianism well and published Fabian Tract and the monthly Fabian News, too.

Fabianism was formulated from the ethical attitudes obtained from the inversion of capitalistic logic and optional addition of economical knowledge from Marx, Ricardo, and Adam Smith as well as the influence upon J.S. Mill and Robert Owen. Shaw was greatly influenced by Henry George in the  realization of socialistic policy as the criticism of the capitalism and  object  achievement of socialism.

In the Fabian Essays in 1889 Shaw's wish was the formation of  beneficial agency organization which synthesized ill-balanced produce in a  region and distribute it as residents' effort, and he found that the land rent was the capitalistic toxin of the capitalism. Shaw tried gradual reformation  through the permeation into liberalists. Those days he pointed out  socialists' illusion boldly. He recognized that success or failure of a nation's  organization depends on how people operate it and found the realistic method of mass production of gentlemen class. But Shaw recognized that human remodeling needs a considerable time because men are accustomed to the traditional method of life and thinking. The presentation of Shaw's superman as the subject who can create and manage a new way of life and improved world may be connected with the progress will of Shaw's Life Force. He pointed out that the socialism as well as Marxism except Fabianism is the intellectual disguise of proletariat liberalism, criticizing that socialists have a point of view of liberalistic illusion. The illusion he pointed out is a religious one that the revolutionary day would be the beginning of golden age and the Marxist drama of class struggle.

Shaw insisted that the institution of human society must satisfy requirements of flexibility to keep face with the ascending movement of life and suggested that Fabianism would overcome defect of the capitalism and remove the socialistic illusion. It is reasonable that Shaw's socialistic thought is spiritual rather than material. Shaw's recognition that no one can reform himself before the society would develop upwards and reform itself is humanistic and for this reason, as I pointed out previously, Fabianism means moralism and intellectualism of the middle class against Marx's proletarianism. So we can judge that Shaw's Fabianism is conspicuously moral and intellectual.



주제어: 페이비어니즘, 사회개혁, 마르크스주의비판



이름 : 서 윤 교

소속 : 서경대학교

주소 : (집)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한신 Apt. 213-501

Tel : 직장: 02-940-7207 휴대전화: 018-220-1878

E-mail: suhy@unitel.co.kr


원고접수일: 2002년 3월 31일     게재판정일: 2002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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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사회주의

사회주의 社會主義 socialism

자본주의의 시장원리를 반대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화함으로써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학설 및 정치운동.

개요

영국의 사회주의자 앤서니 크로스런드가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가 사회기구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일련의 가치 또는 열망"이라고 말했듯이 사회주의의 뜻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근대 사회주의 이념의 싹은 플라톤의 〈국가 Republic〉,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와 18세기 계몽주의시대의 풍부한 유토피아 문학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지만, 실제로 근대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이 야기한 사회·경제 관계와 전통적인 질서의 붕괴에 반대했던 다양한 작가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야기한 부정·불평등·피해 및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체제에 대해 비판의 화살을 쏘았다. 당시의 탐욕스런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그들은 형제적 결속감으로 결합된 새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들은 미래에는 대중이 자본가로부터 생산수단과 정부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세기에 사회주의자로 자칭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같은 생각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의 특정한 이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생산수단의 완전한 국유화만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시켜 줄 것이라고 주장한 사회주의자도 있고, 주요 산업의 선택적 국유화와 상속권자의 사유재산권 통제를 제안한 사회주의자도 있다. 또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와 계획경제를 주장한 반면 그밖의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적 입안자가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시장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 역시 다양하다. 몇몇 사회주의자는 정부의 지도를 요구하지만 다른 사회주의자는 공공기관, 준(準)공공 위탁기관, 지방자치기관, 생산자의 자치공동체 등의 정책결정기구를 통해 가능한 한 분산·분권화를 주장한다. 노동자의 지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정부의 계획기구에 의존하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국가수입이 보다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사회주의자가 공통되지만 수입의 절대적 평등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직업에 따른 차등지불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각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부르짖는 구호이다. 그러나 많은 사회주의자는 각자가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자신의 몫을 받는 것이 사실상의 사회유지라고 보며, 사회는 먼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보장해야 하고 그들을 교육·건강·교통·오락 등의 기본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는 또 모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신분차이를 평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야 하는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책결정의 불평등이 유지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사용되고 악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일찍이 1845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인들이 사용하는 사회주의라는 말이 "모호하고 막연하며 정의할 수 없는 용어"라고 토로했다.

엥겔스 시대 이래 사회주의는 이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독일 내의 어떠한 단체도 불법화했던 1870년대 후반 독일의 총리 비스마르크조차도 몇 년 뒤에 "국가는 우리의 제국(帝國)을 위해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파시스트와 전체주의적 독재자 등 현대의 궤변적 보수주의자들도 종종 자신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종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이념의 기원

근대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 용어는 1830년경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용어는 프랑스에서는 푸리에와 생시몽주의자의 저작, 영국에서는 로버트 오언의 저작에 적용되었다.

생 시몽과 푸리에

앙리 드 생 시몽 백작(1760~1825)은 풍부하지만 비조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괴짜 천재였다. 그의 사회주의 저작은 사회질서와 교권적 위계질서의 붕괴에서 비롯된 당시의 불건전하고 제멋대로인 개인주의적 사상에 관한 생각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싹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싹은 높아지는 과학과 기술 수준 및 이미 새로운 산업질서를 건설하기 시작한 산업가와 기술자들 속에서 자라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적·기술적 지식이 산업주의에 합류함에 따라 전문가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생 시몽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똑같은 능력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가 평등주의적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재능에 어울리는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음으로써 잠재능력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공무질서를 근절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는 강제적 제도로서의 국가를 사실상 제거할 수 있다. 미래의 사회는 거대한 작업장처럼 운영될 것이며 이 속에서 사람에 대한 지배는 사물의 행정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생 시몽의 추종자들은 생 시몽의 학설을 보다 정확하게 사회주의화하는 데 힘썼다. 그들은 사유재산권이 새로운 산업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고 권력과 재산권의 세습적 양도는 합리적인 사회질서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시몽주의자들이 생시몽 교회를 세우려는 다소 기묘한 시도를 했다고 해서 그들이 부르주아-자본가들의 재산권이 더이상 신성불가침일 수 없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1772~1837)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고독한 사상가로 거의 정신이상자였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영업사원으로 보내면서 경험한 경쟁세계와 낭비적 상업에 대한 혐오감을 통해서 반(反)자본주의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을 가졌던 덕분에 그는 다가올 재생된 세계는 사회적 변형뿐 아니라 자연적 변혁과 심지어 우주의 변혁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양은 레모네이드로 변할 것이며 야생동물은 인류에게 봉사하는 반(反)사자와 반(反)호랑이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지나치게 세심하고 망상적이었던 푸리에는 자신의 공동체 모델로서, 좋은 미래사회의 발아세포인 '팔랑스테르'(phalanstère)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더이상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을 강제로 하지 않아도 되며 자신의 기질과 기호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다. 아침에는 양배추를 재배하고 저녁에는 오페라를 부를 수 있다. 푸리에는 인간의 자발성은 불필요한 규정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반(反)율법주의적 견해를 가졌다. 생 시몽이 전문가의 지배를 예언했던 데 반해 푸리에는 사랑과 열정이 조화되어 있고 강제 없는 질서 속에서 인간이 서로 결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언주의

웨일스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은 보다 진지한 견해를 피력했다. 처음에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직물업을 경영하면서 모범적인 고용주이자 교육개혁가 및 공장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동료 자본가들에게 절망을 느끼고 신생 노동조합운동을 추진했다. 자신에게 부(富)를 얻게 해준 산업주의의 해악을 날카롭게 의식하면서, 경쟁이 없어지고 교육의 나쁜 결과를 합리적인 계몽에 의해 상쇄시킨다면 새로운 생산력은 인류의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산업에 대한 공동협동통제와 '통일과 협동 마을'의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 마을에서 주민은 수확고를 증가시키고 더불어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오언식의 공동체는 인디애나 뉴하모니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곳에 설립되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협동에 대한 그의 시도와 '위대한 노동조합' 속에서의 노동조합운동 역시 실패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사회주의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경쟁체제에 대한 비난, 협동과 교육에 대한 강조, '불건전한 환경이 일으킨 어리석은 결과를 없애면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 메시지는 사회주의 운동이 지속되는 데 이바지했다.

그밖의 초기 사회주의자

1840년대에는 많은 사회주의 학설이 등장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프랑스의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급진적 사회주의(그는 이것을 공산주의라 불렀음)를 발전시켰는데 급진적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체제인 자본주의는 곧 협동결사체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믿음과 인민적 민주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론화를 서둘렀고 자발성과 혁명적 행동의 미덕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졌으나 이론적인 공헌보다는 수많은 반란을 기도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에티엔 카베는 자신의 영향력있는 유토피아 저서 〈이카리아 여행 Voyage en Icarie〉(1840)에서 토머스 모어와 푸리에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노동자 조직 L'Organisation du travail〉(1839)으로 가장 유명한 루이 블랑은 이 책에서 정부가 융통해준 자본으로 국유 작업장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이 작업장들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노동자들은 그들의 경영자를 선출할 수 있다.

그가 1848년 혁명 이후 파리에 세운 국유 작업장은 부활하는 중간계급에 의해 곧 폐쇄되었으나 그가 '노동조직'을 계획하고 '노동권' 인정을 주장한 것은 근대 복지국가를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65)은 무정부주의 전통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사유재산과 사유재산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를 비판했는데 상호관계·평등·정의로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강탈·착취·탐욕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은 사회주의자들의 상상력을 강렬히 자극했다. 또 생산자 공동체에 대한 그의 반(反)국가통제주의적·연방적 시각은 사회주의 전통 내에서 집권적·국가통제주의적 시각과 균형을 맞추는 대안을 제공했다.

19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출현하여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공격했고, 저명한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사상을 급진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임금노동을 비난했다.조금 뒤에 일어난 프레더릭 데니슨 모리스와 찰스 킹즐리가 이끄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운동은 경제적 급진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1830, 1840년대의 급진적 차티스트 운동에서는 반(反)자본주의 이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운동은 특정 사회주의 집단의 운동이기보다는 노동계급의 정치운동이었다 (→ 색인 : 차티스트 운동).

마르크스와 사회민주주의의 등장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매우 본질적 가치가 있는 이념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후 사회주의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이념은 19세기 후반에 사회주의 전통을 풍미했던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강력한 조류가 뿌리내리는 데 이바지했다.

공산당선언

카를 마르크스(1818~83)는 정신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독일의 관념 철학과 영국의 정치경제,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결합했으며(→ 마르크스주의), 평생 동안의 지적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을 집필했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역동적인 대립자의 균형으로 존재한다고 이해했다.

불화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사회갈등은 역사과정의 핵심이다 (→ 색인 : 역사철학).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생계를 빼앗기 위해 자연에 대항해 싸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상호관계를 맺으며 이 관계는 인간이 생산활동에 도달하는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사회에서 출현하는 노동의 분화는 역사 드라마의 주역인 적대계급의 형성을 이끈다 (→ 색인 : 분업) .

전임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역사를 단순히 부자와 빈자 또는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 투쟁이 주어진 역사적 단계에서 출현하는 특정한 역사적 계급에 따라 크게 다르다고 가르쳤다. 마르크스가 정의한 계급은 생산과정 속에서 공동지위를 공유하며 그들의 상호이익에 대한 공동전망과 실현을 개발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헤겔과 몽테스키외처럼 마르크스는 사회를 구조화한 전체로 생각했다. 법전·교육체계·종교·예술 등 사회의 모든 측면은 상호 관련되어 있고 경제적 생산양식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생산양식이 역사운동의 결정적인 요소임을 강조한 점에서 마르크스는 다른 사상가와 달랐다. 그는 생산관계가 사회 전체의 문화적 상부구조를 세우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 학설을 전임자들의 학설과 구분해 그들의 학설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자신의 학설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인간발전을 위한 단순한 관념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 자본주의의 저작과 역사운동에 대한 과학적 검토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이 학설은 과거역사에 대한 해석일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측이 될 것이다.

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형성되며, 자본가의 감독에 대항한 동시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결국 사회주의 사회를 이끌어올 것이고 이 사회에서 서로 결속한 생산자는 자신들의 집단적인 운명을 공동으로 만들어가면서 경제적·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하나의 목적이 된다.

제1인터내셔널

〈공산당선언〉은 유럽 대륙의 노동자 집단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씌어졌으나 1848년의 유럽 혁명들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마르크스·엥겔스는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발전하는 노동운동과 완전히 고립되어 살았다. 당시 사회주의는 고립된 분파, 특히 망명자들의 교의였다. 그러나 1864년 런던에서 유럽 대륙 및 영국의 노동자 대표들과 지식인들의 회의가 열린 뒤 국제노동자연합, 즉 제1인터내셔널로 알려진 조직이 출현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단순한 노동조합주의에서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을 포괄했지만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이 조직을 이끌었고 이 조직을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도구로 만들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었지만 영국의 노동운동이 마르크스주의 혁명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에서 제1인터내셔널은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럽 대륙, 특히 독일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곧 당시 노동운동의 주요학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독일 노동운동의 창시자 페르디난트 라살(1825~64)은 자율적 노동계급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와 의견을 같이했지만 자본가의 지배로부터 노동자를 해방시킬 생산자의 협동조직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정부가 제공해주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달랐다.

마르크스에게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어떤 호소도 생각할 수조차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독일에서 라살에 대항해 자신의 추종자를 결집했다. 1869년 그들은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 색인 : 독일 사회민주당). 라살 추종자와 마르크스 추종자 사이의 분열은 1875년 두 분파가 타협안(마르크스는 이 타협안에서 라살의 흔적이 보이는 부분을 강하게 비판했음)을 기초로 연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운동은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반(反)사회주의 입법을 통해 그들을 억압하고 사회개혁을 실시하여 그들의 호소를 근절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성장했다. 1877년 사회당은 독일 제국의회에서 50만 표를 얻으며 1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사회민주당의 당원수는 1881년 31만 2,000명, 1890년에는 142만 7,000명으로 불어났다.

반사회주의 입법이 폐지된 뒤 사회민주당은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했는데, 이 강령은 라살의 국가 보조를 받는 기업을 설립하자는 주장을 묵살하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목표인 '계급지배와 계급 자체의 폐지'를 서약했다.

마르크스 사상은 여러 차례의 발전과정을 경험하면서 여러 유형의 추종집단이 생겨났다. 그들은 각각 마르크스의 구절와 어휘를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정당화했다. 1840, 1850년대 초기에 부르주아 지배에 대한 폭력적인 혁명적 전복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출현에 의해서만 노동계급이 해방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견해는 18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매우 온화해졌다.

상층 노동자 계급에게 유리한 제2차 개혁법(1867)이 통과된 뒤 영국에서 쓴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영국이 평화롭게 사회주의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또 그러한 평화적 방법이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 웅변가처럼 보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점점 의회활동에 익숙해져갔다. 이론가 카를 카우츠키(1854~1938)의 지적 지도를 받으면서 그들은 경제력의 필연적인 발전이 반드시 사회주의를 출현시킬 것이라는 경제결정론을 전개했다. 사회민주당의 공식 강령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여전히 완고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점점 실용주의적으로 되어갔다.

한때 엥겔스의 가까운 동료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은 유명한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1899)에서 사회민주당에게 혁명이라는 짐에서 벗어나 이미 실제로 받아들였던 것을 이론적으로도 인식하라고 호소했다. 즉 독일은 사회주의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혁명적 격동을 겪어서는 안 된다.

독일과 영국의 정치적 상황 차이를 무시하면서 베른슈타인은 의회의 압력을 통해 사회주의 개혁을 이룩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변형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의 사회민주당에 영국과 같은 길을 걸으라고 촉구했다. 카우츠키의 정통교리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간의 투쟁은 독일 사회민주당을 동요시켰다. 베른슈타인의 학설은 1903년 공식으로 무효화되었지만 실제로 수정주의는 당 전체에 퍼졌고 특히 당의 의회 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회민주당 지도자는 자국 정부와 전쟁을 지지했고 따라서 사회민주당의 혁명적 요구는 종말을 고했다.

기타 유럽 대륙의 사회민주당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랑스 노동계급의 역사에 깊게 뿌리박고 있는 사회주의 전통과 경쟁해야 했다. 블랑키와 푸르동의 추종자들은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그뒤 프랑스 사회주의는 갈등에 의해 분열되었다. 1875~76년 쥘 게드가 세운 노동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으나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은 18세기의 혁명적 유산뿐 아니라 블랑키·블랑·프루동의 영향력을 받아들였다.

1905년 다양한 정당이 합병된 뒤에도 사회주의운동은 혁명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불화로 계속 분열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주의는 계속 성장했다. 초대 의회 때 3만 5,000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주의 연합당은 1906년 선거에서 54석, 1914년 하원선거에서는 100석 이상의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도 혁명적인 웅변은 실용적인 활동으로 바뀌어갔고 당은 제3공화국 의회에 노련하게 참여했다. 위대한 사회주의 웅변가이면서 평화선거의 주요지도자였던 장 조레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날 암살된 뒤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는 프랑스의 전쟁노력을 지지했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당은 유럽 대륙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타올랐던 마르크스주의 학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덴마크의 사회민주당은 1870년대에 창당했고 스웨덴의 사회주의 운동은 1889년에 시작되었다. 노르웨이 노동당(처음에는 사회민주당으로 불렸음)은 1887년에 결성되어 20세기 초기에는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중부 유럽에서도 사회민주당은 빠른 속도로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은 1888년에 결성되어 1908년 의회선거에서 전체 1/3의 득표를 얻으면서 독일 이외의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이 되었다. 1885년 노동조합과 협동조직 등이 합병하여 결성된 벨기에 노동당 역시 빠른 속도로 수천 개의 상호원조결사체를 조직했으며 매우 강력한 노동조합운동을 일으켰고 보다 자유로운 보통선거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수많은 파업을 이끌었다. 1894년에 창당한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활동하면서 1912년 하원선거에서 20%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덜 산업화한 유럽 지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주로 전(前) 자본가와 농민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무정부주의 경향과 경쟁해야 했다. 정치세력으로서 유럽의 무정부주의는 매우 유력한 러시아의 자유주의 사상가인 미하일 바쿠닌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의 '무정부주의 연맹'은 제1인터내셔널에 속해 있었으나 마르크스와의 불화로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1872년 제1인터내셔널에서 추방되었다.

스페인에서는 1879년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었으나 바쿠닌주의자를 비롯한 무정부주의 사상의 흐름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뒤에도 사회주의 운동은 계속 무정부주의와 경쟁해야 했다. 스페인의 사회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무정부주의를 청산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제1인터내셔널의 이탈리아 대표들은 바쿠닌의 가르침을 따랐다.

189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필리포 투라티의 지도로 독립된 사회당이 형성되었다. 1913년 시민의 선거권이 확대된 뒤 공식 사회당은 의회에서 51석을 얻었고 분열된 다른 2개의 사회당도 31석을 얻었다. 계속적인 내부 불화에 시달리고 있던 보다 후진 지역에서는 무정부주의 경향이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이탈리아의 사회당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하나로 성장했다.

제2인터내셔널

제1인터내셔널은 유럽 전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다양화했다. 제1인터내셔널이 각 나라 나름의 정치체제에 근거하여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국제적 운동은 더이상 단일한 제도기관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876년 제1인터내셔널이 해체된 뒤 마르크스·엥겔스는 사회주의운동이 열렬히 추구하는 바에 대해 자문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더이상 그 운동을 지도하지 못했다.

이제 사회주의의 역사는 분리된 민족운동의 역사가 되었고 민족운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형식적으로만 인정하고 점차 수정주의적·비혁명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20세기 초기에 사회주의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강력한 의회세력으로 부상했다. 귀족정치가 아직도 강력한 러시아를 제외한다면 유럽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기존 체제의 폭력적인 전복보다는 기존 체제의 변형을 추구하는 개혁가였다. 다양한 정당 속에서 단지 소수 좌파만이 혁명적인 정통교의를 고수했다.

1889년에 창설된 제2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운동의 변화된 성격을 반영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제1인터내셔널이 시도했던 통일되고 순수 교의적인 조직이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의 국제적 의회와 같은 것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독일의 당이 주도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웅변가였던 독일 대표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좌익'노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사회주의자의 정부참여는 빌헬름 황제가 이끄는 독일에서는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독일 대표들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완고한 견해를 펼 수 있었다.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이 문제가 표결에 부쳐졌을 때 독일 대표들은 이에 찬성하는 조레스 등에 대항해 반대편에 섰다. 그러나 조레스는 "당신들의 뛰어난 동지 카우츠키가 제공한 이론적 공식의 확고함 뒤에서 당신들은 죽을 때까지 숨어 있을 것이고……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독일의 대표들을 승복시켰다.

정부 참여 문제와 전쟁 문제에 있어서 독일이 주도하던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을 반대하는 많은 선동적인 선언을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이미 제2인터내셔널은 마비상태임을 드러냈다. 제2인터내셔널의 대표 대부분은 노동계급의 국제적 결속성이라는 이념을 버리고 각 민족정부 편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비밀리에 믿어왔던 생각, 즉 '노동자들에게도 결국 조국은 있다'라는 신념을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여러 사회주의 경향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유럽 대륙의 사회주의운동을 풍미했지만 영국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880년대에 급진적인 언론인 헨리 하인드먼은 엄격한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입각해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지만 이 단체는 영국 사회주의운동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었다. 시인 윌리엄 모리스가 자유주의-생디칼리슴의 이념에 입각해 세운 '사회주의자 동맹' 역시 유력한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바탕한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영국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페이비언 협회는 시드니 웹, 베아트리스 웹, 그레이엄 월러스, 시드니 올리비에, 조지 버나드 쇼 등 당시의 유명한 젊은 급진적 지식인들에 의해 1880년대에 조직되었다. 이 협회는 진보적이고 온건한 사회주의 형태로 발전했다. '점진주의의 필연성'을 확신하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대중조직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인간권력에 대한 실제적이고 겸손한 충고를 통해 사회를 변형시키는 활력있는 지식인 집단이기를 원했다.

매우 영향력 있는 기관지 〈페이비언 에세이스 Fabian Essays〉(1889~)에는 사회주의자이건 사회주의자가 아니건 간에 정책형성자에게 영향을 미친 사회입법과 개혁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 쇼가 "사회주의자의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한 정부 이면의 공작"으로 정의한 '침투'를 통해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핵심 정치가, 공무원, 노동조합 간부, 지방의 정책형성자들에게 계획적·건설적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확신시키는 데 힘썼다. 비마르크스주의 경제학만큼이나 대륙 사회주의 전통에 근거한 이론을 폈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전체 사회조직의 지속성을 해치거나 급작스럽게 변화시키지 않는' 새로운 질서를 추구했다.

생디칼리슴

프랑스의 노동조합주의에서 나온 생디칼리슴 운동은 파리 코뮌(1871)의 유혈사태가 끝난 뒤 재조직되었다. 의회와 정치활동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생디칼리스트들은 그들 자신의 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만이 원하는 사회주의로의 변형을 이끌어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페르디낭 펠루티에의 지도 아래서 '노동조합사무소 연맹'(1892년 설립되어 1902년 노동총회 연맹과 합병했음)은 국가를 마비시키고 조직노동자의 수중에 권력을 장악시키는 '총파업'을 통해서 노동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념을 제시했다. 노동조합은 생산의 핵세포를 지도·경영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수많은 지식인들을 그들 대열에 끌어들였고 이들 지식인들은 생디칼리슴과 정치적 노선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진입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려 했다. 그들의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 조르주 소렐의 〈폭력론 Réflexions sur la violence〉(1908)은 소렐 자신이 곧 극우파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혁명투사들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길드 사회주의

길드 사회주의 전통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몇 년 동안 영국에서 발전했다. 임금제도와 이윤생산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가진 적대감을 공유하면서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생디칼리슴에서 국가에 대한 불신과 생산자의 지배에 대한 강조를 빌려왔다. 그들은 길드로 조직된 독립된 생산자가 자신들의 고용상태를 관리하고 창조적인 일에 참여하는 중세로 거슬러올라갔다. 산업에서의 자치를 목표로 삼으면서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산업조직·교회·노동조합·협동결사·지방자치단체에 자율성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또 모든 사회집단은 위로부터의 통제 없이 자신의 특수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며, 개인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모든 기능집단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능집단간의 협동은 국가에 의한 관리를 대체할 것이고 경찰의 보호와 같은 국가의 업무를 제한할 것이다. 국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집단이 될 것이다.

길드 사회주의는 여러 사상가에게 기원을 두고 있지만 성숙한 길드 사회주의 학설을 발전시킨 사람은 뛰어난 옥스퍼드 명사인 G.D.H.콜이었다. 그의 초기저서인 〈노동의 세계 The World of Labour〉(1913)· 〈산업에서의 자치 Self-Government in Industry〉(1917) 등에는 길드 사회주의 이론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길드 사회주의운동은 대중의 지지를 널리 얻지는 못했지만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관료적·집중적 경향과 대비되는 한에서 계속 영국의 노동운동의 근원적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사회주의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유럽만큼 유력하지 못했다. 그러나 1901년 사회당이 결성되었을 때 1만 명이었던 당원수는 1912년 15만 명으로 불어났고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총 득표수의 6%에 해당하는 89만 7,000표를 얻기도 했다. 미국의 사회주의는 유럽 출신의 이민 인구에게 가장 강력한 뿌리를 두고 있지만 19세기의 유토피아적 식민지, 노예제 폐지론자, 노동조합주의자, 농업개혁가, 1880, 1890년대의 소외된 사회주의자 집단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사회당의 전신인 사회노동당은 1877년에 설립되었지만 1890년 언론인이자 논객인 다니엘 드 리온이 참여함으로써 독특한 전망을 펼칠 수 있었다. 드 리온은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적 경향과 프랑스의 생디칼리슴 속에서 발전된 '노동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동조합원이 '시시한 판에 박힌 기업' 위로 올라서고 비밀투표와 산업전투를 통해 자본력과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사회노동당은 하나의 분파로 남아 있었으나 사회당은 유진 데브스의 지도를 받으며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전 노동조합 관리였던 데브스는 투옥기간 동안 다양한 사회주의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데브스가 이끄는 사회당은 중앙집권화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 동질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회당은 개혁주의자, 혁명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그리스도교 목사, 지방자치단체 개혁가, 철도사업·기업활동을 증오하는 인민주의자, 그리고 저임금으로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형제애를 꿈꾸는 유대인 피복 노동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사회당은 주요한 이론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비(非)교조적 방법을 통해 미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효과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미국 사회당은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쇠퇴했는데 마지막의 저명한 지도자는 노먼 토머스였다.

러시아 사회주의의 등장

인민주의 전통

19세기에 러시아를 지배한 급진적 경향은 인민주의였다. 인민주의 학설을 처음으로 전개한 작가이자 편집자 알렉산드르 헤르젠은 농민의 공동사회에서 미래에 다가올 사회주의 사회의 싹을 보았고,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어 고대 농민의 전통에 근거한 협동사회를 건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헤르젠은 농민계급을 이상화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혁명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인민에게 가라"고 영감을 불어넣었다.

1860, 1870년대에 보다 급진적인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반란에 대한 신념을 잃고 테러리즘으로 돌아섰다. 소규모의 학생 혁명가 집단은 테러리즘을 통해 차르 체제를 타도하려 했고 이런 그들의 노력은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바쿠닌이 입수한 저서 속에 있던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 문답 Revolutionary Catechism〉은 혁명의 유일한 목표가 "모든 기존 목표의 뿌리와 가지를 자르고 러시아에 있는 모든 국가전통·질서·계급을 소멸시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유럽에서는 숙련공과 농민에게 지지를 받으면서 푸르동의 계승자로 출현했던 바쿠닌이 러시아에서는 거의 소외된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엘리트적·테러리스트적 운동이 일어나도록 도왔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꼽힌다. 인민주의의 광범한 흐름 속에서 테러리즘은 대중의 교육과 평화적 선전을 믿었던 진보적 사회주의의 반대를 받았다. 엘리트주의자들이 테러 운동을 추구하는 동안 점진주의자들은 인민 속에서 선전활동에 열중했다.

혁명 전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처음에는 인민주의자였다가 1880년 제네바에 정착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고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 노동해방단'(Osvobozhdenie Truda)을 결성했다. 그는 러시아 사회주의가 우선적으로 성장하는 공장 프롤레타리아를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예외적이라는 헤르젠의 생각을 거부하면서 그는 혁명은 성격상 유럽적일 것이고 그 속에서 러시아의 자리는 러시아 나름의 노동운동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80, 1890년대의 다양한 저서와 팜플렛을 통해 플레하노프는 인민주의자를 공격했고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객관적인 역사적 필연성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사회진보의 법칙은 경멸받을 수 없으며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이다. 조직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혁명의 이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독일식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면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1870~1924, 후에는 당 이름인 레닌으로 알려짐)는 혁명에 대해 더욱 호전적으로 접근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1902)에서 그는 자신의 독특한 학설을 공식화했다. 사회주의는 전문혁명가들이 노동자와 농민 대중을 동원·활성화할 때에만 성취할 수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노동자는 노동조합의식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호전적이고 훈련받은 비타협적인 혁명가 조직이 대중을 행동으로 이끌어야 한다.

레닌의 추종자들은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불법단체) 제2차 대회에서 다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반(反)레닌주의는 보다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지도자인 L.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마르토프는 "우리가 볼 때 노동당은 전문혁명가의 조직에만 국한될 수 없다. 노동당은 전문혁명가뿐 아니라 활동적·지도적 프롤레타리아의 전체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2개 분파는 처음에는 협동하여 합동회의까지 개최하기도 했으나 1912년에 완전히 갈라섰다. 각 지도자들은 한 분파에서 다른 분파로 전환했다(플레하노프는 원래 레닌편이었으나 1904년 반대파와 제휴했음). 레온 트로츠키 등은 일시적이라도 어느 한 분파에 속하지 않고 자유를 누리려고 했다. 이같은 분쟁은 2개 분파 대부분의 망명 지도자가 살던 서유럽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러시아 내부에서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하층 노동계급을 끌어들인 반면 레닌의 반대집단 멘셰비키는 주로 교육받고 숙련된 노동자와 유대인 지식인을 끌어들였다. 1917년 2월혁명이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주의적이면서 막연하게나마 사회주의적인 지도력을 형성시킨 뒤 볼셰비키는 도시대중에게로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1917년 4월 레닌이 망명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요구하여 추종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까지 볼셰비키는 미래에 다가올 혁명의 기회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들의 당면과업은 민주공화국의 한계 속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레닌은 그들이 즉시 권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을 원하는 대중의 바람, 토지에 대한 농민의 갈망, 새로운 정치체제의 허약함이 1905년 볼셰비키 간부들이 이끈 유산된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지 못한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 뒤이어 곧 독일 혁명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고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르의 권력이 붕괴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확대된 소비에트(노동자와 농민의 평의회)는 볼셰비키가 기존 체제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주된 조직기반이었다. 레닌의 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주요 도시중심지에서 반응을 얻었다. 1917년 9월 볼셰비키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소비에트들은 공식 정부에 도전하는 '이중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7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트로츠키에게 임시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군사력을 부여했고 레닌이 이끄는 혁명정부체제를 출범시켰다.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혁명이 곧 퍼질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착수되었다. 레닌의 관점은 언제나 국제주의적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 지도자 대부분이 1914년 자신들의 민족정부를 지지하고 나섰을 때 레닌은 그들을 새로운 혁명 사회주의자 조직의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권력을 장악한 뒤 볼셰비키들은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하기로 결심했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대표들이 모여 있는 동안 베를린에서 일어난 혁명적 봉기가 진압되어 지도자들은 처형당했으며 독일 노동계급의 대다수는 새 독일 공화국의 지도력을 기꺼이 사회민주당에게 넘겼다. 그러나 러시아 지도자들이 꿈꾸는 세계혁명은 여전히 가까워 보였다. 제3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 직후 헝가리와 독일의 바이에른에서는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모든 유럽의 주요국가에서는 공산당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1920년 7월 제2차 세계대회를 열었을 때 이 조직은 더이상 소분파 개인이나 대표의 소규모 모임이 아니라 12개의 주요공산당에서 파견된 대표들의 연합체였다. 이 대회로 러시아 지도자들은 이제는 사회주의운동과 완전히 분리된 코민테른의 지배권을 얻었다. 또 이 대회는 코민테른의 지지자는 전쟁에서 '사회적 애국자'였던 사회당 지도자와 중도파를 모두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21개 조항의 코민테른 회원규정을 채택했다. 코민테른은 러시아를 모델로 한 훈련받은 군사적 세계혁명조직의 창설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 조직은 러시아의 지도력과 권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3년에 유럽에서는 희망적인 혁명의 흐름이 멈췄다.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새로운 봉기는 1923년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소련 적군(赤軍)의 폴란드 침략 기도 역시 저지되었다. 노르웨이의 노동당, 독일의 좌파 공산당, 프랑스와 스페인의 생디칼리스트 등 일시적으로 코민테른에 참여했던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을 탈퇴했고 중앙집권식으로 하달되는 코민테른의 정책을 거절했다. 유럽은 경제적·사회적 안정책을 마련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모스크바는 그때까지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당을 러시아의 외교정책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 등의 코민테른 지도자는 여전히 세계 혁명을 의제로 삼았지만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더이상 이것을 믿지 않았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사회주의

공산당과의 분열

전 세계에서 공산당은 사회당을 재건하려는 지도자들을 자본주의 유지를 '객관적으로' 조장하는 '사회주의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공산당은 사회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보호하면서 전쟁 동안 부르주아와 연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저버리고 국제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사회당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국가의 독재적인 성격을 지적하면서 이에 응수했고 공산당이 민주적인 사회주의 전통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 색인 : 소련).

유럽의 사회당 운동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었다. 독일에서는 다시 연합한 사회민주당의 깃발 아래 대부분의 노동계급이 결집했기 때문에 공산당은 독일 노동운동에서 소수의 위치로 전락했다. 처음에 공산주의가 사회당들의 관심을 끌었던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이 다시 지배권을 차지했고 공산당은 프랑스 좌익에서 소수가 되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는 공산당·좌파사회당·우파사회당으로 분열함으로써 무솔리니의 권력장악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영국의 공산당은 노동당 속에서 거의 성장하지 못했고 급진적 분파 이상의 세력이 되지 못했다. 다른 대륙의 사회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사회주의 역시 제2인터내셔널의 추종자와 제3인터내셔널에서 조직된 공산당 사이의 강한 분열을 드러냈다.

코민테른은 때로는 혁명노선으로 전환하고 또 때로는 호전적인 사회주의 계층과의 연합을 시도하는 등 특이한 노선을 보여주었다. 1929년 경제공황이 엄습한 뒤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최후 위기'가 모든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리라 기대하면서 극좌편향했다.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노동계급의 적인 "사회주의적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프로이센 주의회에서 공산당은 나치 운동이 하나의 과도적 현상이라는 이론을 근거로, 사회민주당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나치에 찬성표를 던졌다 (→ 색인 : 나치즘).

동시에 사회당은 이론적으로는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혁명교리에 대한 서약을 포기했다. 이제 사회당은 각각의 민족정부로부터 노동계급의 최대이익을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압력단체가 되었다. 독일·영국·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당은 정부에 참여했고 프랑스 등지의 사회당은 마음이 맞는 좌파 부르주아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구체적인 사회·경제 활동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 경제공황이 서유럽과 중유럽의 경제와 정치체제를 혼란에 빠뜨렸을 때 무능을 드러냈다.

세계 경제공황에 대한 반응

스웨덴과 벨기에를 제외한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경제공황 동안 종합적인 사회주의 계획을 추진하지 못했다.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정통적인 예산행정과 공공재정 정책을 따랐고 권력을 얻지 못했을 때는 더 많은 실업보험을 요구하고 임금감축에 반대함으로써 노동자의 즉각적인 이익을 서로 경쟁적으로 옹호했다. 경제위기의 심화에 따라 공산당이, 특히 공황에 의해 가장 심하게 타격받은 실업자와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밖의 노동자들에게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파시즘의 등장

독일에서 히틀러의 출현은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당 모두를 붕괴시켰다. 공산당은 나치의 승리가 단지 일시적이고 그뒤에는 자신들이 독일 대중을 승리로 이끌기를 희망했다. 공산당의 구호는 "나치 다음에─우리"였다. 사회당은 경제공황이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그뒤에는 나치라는 열병이 점진적으로 쇠퇴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평상시와 다름없는 정치적 역할을 했다. 분열된 노동운동은 나치의 권력장악을 정지시킬 수 없음을 드러냈다. 이 불행한 사태로 공산당과 사회당은 그들의 이전 정책을 재검토하고 전략과 전술을 수정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가 이끄는 혁명정부에 의해 붕괴될 위협에 놓이자 1934년 2월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이론적 기여와 구체적인 업적이라는 2가지 면에서 오랫동안 모범을 보여왔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거의 모든 노동자의 지지를 받았고 빈 인구 200만 명 중 50만 명에 이르는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은 거의 전적으로 대도시적이었다. 따라서 1934년 2월 유혈싸움은 빈에만 국한되어 일어났고 이 봉기가 4일 만에 진압되자 사회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정부 속에서의 경험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민주당은 마지 못해 독일 정부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민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당은 내부적으로 분열해 우파인 '다수 사회당'은 조심스럽고 실용적인 방안으로 나아가려고 했고 카우츠키와 그의 전(前) 베른슈타인 반대자들이 이끄는 '독립 사회당'은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추진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극좌파는 혁명당을 조직하려는 열망에서 독일 공산당을 창당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능가하는 젊은 극단주의자들은 1919년 초기에 좌익 폭동을 일으켰으나 다수 사회당 정부와 그들의 동료인 우파 장교에 의해 가볍게 진압되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암살당했고 나머지 지도자들은 코민테른으로 들어갔다. 몇 개월 뒤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좌파와 공산당의 폭동 역시 실패로 끝났다.

1920년대 초기에 독립 사회당은 다수 사회당과 다시 연합했다. 1919년 새 국민의회 초대 선거에서 다수 사회당은 대다수인 39.3%, 독립 사회당은 8%의 지지를 얻었다. 사회당 정부는 독점산업 사회화의 필요성을 비롯한 급진적인 조치들을 공표했다. 그러나 1920년 6월 선거로 비(非)사회당 내각이 출범했고, 사회당원이 몇 명 참가하기는 했지만 내각의 성격은 비사회주의적이 되었다. 중간계급이 권력을 잡았고 1925년 에베르트 대통령이 죽자 보수적인 국가주의자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기 혼란상태 속에서 사회민주당은 극우와 극좌 모두에 반대하는 공화국 적법성의 보루였다. 여러 주(州, Länder), 특히 프로이센에서 사회민주당은 정부를 장악했고 많은 개혁주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국 정치무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28년 5월 선거를 통해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출현했다.

다수득표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지도자 헤르만 뮐러가 총리가 되었고, 그들의 재정전문가가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정부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직면하고 있던 경제공황에 거의 대처하지 못했다 (→ 색인 : 대공황). 사회민주당 정부는 정통 통화수축정책에 입각하여 세금을 저축하기 위해 실업수당을 감축하고 예산적자를 감소하려 했으나 이런 정책은 효과를 보지 못해 1930년 물러나야 했다. 이 정부는 사회민주당이 참여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정부였고, 그 직후부터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923년 총선거에서 5년 앞서 사회주의 계획을 채택했던 노동당이 다수를 얻어 여당이 되었다. 노동당은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1924년 1월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제1차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노동당 내각은 몇 개의 온건한 개혁조치를 취한 뒤 1924년 10월 선거로 물러났다. 노동당 내각이 단명한 것은 어느 정도는 '볼셰비키주의자 위협'이라는 조작된 공포로 유권자들이 갑자기 우파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1929년 6월 노동당은 2번째 기회를 얻었다. 노동당은 하원의석 총 615석 가운데 288석을 얻었고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맥도널드가 이끄는 제2차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노동당 역시 불경기, 특히 솟아오르는 실업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노동당은 원대한 사회개혁을 약속했지만 이 개혁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런던으로부터 도피된 자본의 양은 대격변을 불러일으켰고 기업측은 균형예산과 실업수당의 감소를 요구했다. 맥도널드가 기업의 요구 몇 개를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노동조합은 격렬히 반대했다. 이 문제로 분열한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과 자유당과의 전국연합을 결성했고 이때문에 노동당은 1930년대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919년 선거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은 총 550만 표 중 200만 표를 얻었다. 이탈리아는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대규모 파업, 대중시위, 공장점령, 토지재산의 자발적 몰수 등이 이탈리아 전체로 확산되었다. 1920년 8월 임금협상이 깨진 뒤 북부 산업지역에서는 혁명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50만 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점령했고 생산을 계속하면서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극좌세력이 파업 확대를 주장했으나 분열된 사회당 지도자들이 주저하자 노동자들은 이에 실망하여 기세가 꺾였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이 노동계급의 모임을 해산하기 시작했다. 1921년 우파 당원들은 사회당과 자유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했으나 좌파는 이를 거부했다. 무솔리니의 테러단은 점점 더 산업 중심지로 침투해 들어갔다. 노동조합이 일으킨 총파업은 형편없는 실패로 판명되었다. 그 직후 무솔리니는 로마 행진(1922. 10)을 감행하여 권력을 잡고 총리에 취임했다. 1926년 이탈리아에서 의회제 정부는 완전한 종말을 고했고 사회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프랑스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정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사회당은 실제로는 점진주의를 택했지만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전(戰前)의 정책을 고수했다. 1930년대 중반 호전적인 우파집단이 제3공화국을 위협했을 때 사회당은 그들의 정책을 전환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의 대표로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인민전선은 사회당 지도자 레옹 블룸이 이끌었으며 좌파 공산당부터 중도파 급진사회당까지 포괄했다 (→ 색인 : 프랑스 급진사회당).

마침내 공산당은 '사회 파시즘' 교리를 버리고 기꺼이 중도파·좌파 정당과 연립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의 승리는 공장에서의 연좌농성파업과 함께 일어났다. 이 파업은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전선 정부를 급진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전까지 프랑스 고용주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집단교섭권이 법으로 규정되었으며 사회보장과 전반적인 노동조건도 매우 개선되었고 주 40시간 근무가 의무화되었다.

블룸 정부는 미국의 뉴딜 정책을 프랑스식으로 실시하려 했으나 처음에 가졌던 열정이 퇴색한 고용주들은 정부를 자극해 전통적인 재정·예산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가했다. 1937년 6월 연립정부의 중간계급 출신 각료들은 블룸의 긴급재정권 요구를 거절했고 블룸은 사임했다. 사회당은 급진사회당이 이끄는 차기 정부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블룸은 별도의 인민전선 정부를 구성했고 이 정부는 1938년 약 1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1939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항한 전쟁에 들어갔을 때 전쟁을 반대했던 공산당은 불법화했다. 1940년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 사회당은 비시 프랑스에 의해 해체되었다.

스웨덴에서만이 사회당은 정부정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스웨덴 노동당 정부는 1932년에 처음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유럽의 사회당과 달리 스웨덴 사회당은 정통 재정정책을 버리고 경제계획에서 정부의 대규모 개입을 강조했다. 광범한 공공업무는 유효자본에서 재정지원을 받아 실업의 감소를 도왔고 경제를 장려했다. 개인소비의 감소에 따른 상쇄효과를 이용해 공공투자가 이루어졌고 1933년에 16만 4,000명에 이르렀던 실업자는 꾸준한 경제팽창정책을 통해 1938년에 사라졌다. 스웨덴의 혁신은 제2차 세계대전 뒤 거의 모든 서유럽 국가가 실시했던 경제정책의 본보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주의

전세계로 퍼진 사회주의 정당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산업화한 국가에서 먼저 사회주의가 출현할 것이라고 항상 주장해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는 농업사회와 후진국가에 급속하게 퍼졌다. 이런 국가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바와 상관 없이 산업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식민주의에 대항한 투쟁에서 특히 지식인과 반(半)지식인은 자신들이 사회주의라 생각한 이념을 택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민족독립은 국가의 경제통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들은 소비를 제한하고 국가자원을 생산력 촉진에 이용함으로써만이 급속한 경제성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생국들은 소련을 급속한 산업화의 본보기로 삼았다. 전체주의 일당지배국가에서부터 군사독재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체제는 그들이 사회주의라고 선언했다. 사회정의·평등·민주주의에 대한 서유럽의 전통 사회주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지배정당은 인도 등 소수국가에 불과했다.

반면 역설적이게도 서유럽의 사회당은 마르크스주의 시각을 포기하고 복지국가 이념으로 전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거의 모든 사회당은 민족 단위의 정부에 참여했다. 곧 그들은 의회제를 따라 권력을 추구하는 대중정당이 되고자 했고 자유당이나 기독교민주당 등과의 연립정부에 기꺼이 참여했다. 완전한 국가소유권만이 좋은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은 공공의 통제와 일정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혼합경제체제가 모두에게 사회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보았다. '점진주의의 필연성'이라 할 수 있는 이 이념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와 독일의 수정주의자가 소리 높여 주장했던 것이다.

서유럽 사회주의의 변형

전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방향을 전환했다 (→ 색인 : 독일). 이 선언은 계급투쟁을 비롯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언급하지 않고 대신 사회민주당이 "경제권을 전체 국민의 손에 넣어주고 자유민들이 평등하게 함께 일하는 공동체를 창설하는 데 목표를 둔다"고 했다. 사회민주당은 경제의 공공통제를 주장했지만 포괄적인 국가의 소유권은 거부했으며, 계획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 계획은 공산주의나 전체주의와 전혀 다른 종류의 민주사회주의적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몇 년 뒤인 1959년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채택된 행동지침 강령에서 사회민주당은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유산을 버렸다. 이 강령은 생산수단 속에서 사유재산권을 주장했지만 마르크스라는 이름과 '계급'·'계급투쟁' 등의 말은 어디에도 사용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중앙계획경제를 거부했으며 자유경쟁시장 이념과 "가능한 경쟁-불가피한 계획"을 지지했다. '혼합경제'는 이상처럼 보였다.

사회민주당은 더 이상 보편적으로 타당한 학설을 가지려 하지 않았고, 어떤 정당도 전체로서의 사회에 자신의 독특한 철학을 부과하지 않는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했다. 그래서 모든 의도와 목적 면에서 독일 사회민주당(1969년 빌리 브란트의 지도 아래 정부를 구성함)은 복지국가 확대를 위해 힘쓰는 개혁주의 정당이 되었다.

영국 노동당은 결코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후 세계의 정치현실에 쉽게 적응했다. 1945년 노동당은 처음으로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얻었다. 6년 동안 지속된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이끈 정부는 영국 복지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석탄·철도·교통·철강 등 많은 기간산업을 국유화했고 종합적인 국유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사회보장이 확대되었고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다.

노동당은 1951년 선거로 물러났지만 그들이 이룬 주요업적은 계속 유지되었다. 철강산업은 다시 사유로 바뀌었으나 보수당은 그밖의 복지국가의 성격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애틀리의 뒤를 이어 노동당 당수가 된 휴 게이츠컬은 '당이 대규모 산업의 국유화를 추구한다'는 초기 약속을 버리고 당의 공약을 바꾸려고 했다. 이런 게이츠컬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동당은 복지국가의 확대와 실용계획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개혁주의를 실제로 받아들였다.

1965년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 지도자 해럴드 윌슨(1970년 선거 때까지 총리를 지냄)은 신중하게 개혁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내부개혁보다는 지출의 균형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성 때문에 사회주의 성격이 뚜렷한 정책을 택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뒤 재건된 프랑스 사회당이 전후 프랑스 정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사회당은 프랑스 산업, 특히 공공시설·광업 및 은행·보험의 국유화, 경제에 대한 광범한 공공통제 정책, 사회보장분야의 구조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전전(戰前)에 노동자로부터 얻었던 많은 지지를 공산당에게 빼앗겼다. 사회당은 점점 공무원, 전문직 중간계급, 그밖의 화이트칼라 피고용인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취했던 공약변경을 시도하지 않았고 온건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아래서 권력을 잡았을 때 사회당은 산업·재정 분야의 국유화에 착수했지만 세계적 불경기라는 비상사태와 프랑에 대한 압박으로 매우 온건한 노선을 유지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운동은 수많은 정당으로 분열했다. 가장 큰 조직인 이탈리아 사회당은 피에트로 넨니의 지도로 무솔리니 이전의 좌파 사회주의 전통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협동에 의해서 노동계급의 이익이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사회당 중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은 계급갈등과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전전(戰前)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가장 가까웠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사회당은 점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었고 1963년에는 기독교민주당과의 중도파-좌파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사회당 역시 다른 서유럽의 사회당과 사실상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제2의 사회당은 주세페 사라가트가 결성한 민주사회당이었다. 이 당은 온건한 사회개혁을 추진했고 1947년 이후 거의 모든 이탈리아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1966년에 2개의 주요 사회당이 출현했으나 1960년대 후반에 다시 분열했다.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으로 포기한 정도는 서로 달랐지만 서유럽에서 모든 사회당은 복지국가를 지향했다. 사회당 이론가 중에는 사회주의가 결국 복지국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계급구분이 사라지고 보다 평등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들의 꿈이었을 뿐 더이상 그들의 정치행동이 되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사회주의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아프리카 지식인들에 의해 주로 북부 아프리카에서 전파되었다. 또 많은 프랑스 이주민, 특히 교사와 공무원들은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였다. 특히 튀니지와 알제리에서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주의 이념을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투쟁과 연결되었다 (→ 색인 : 식민주의).

알제리가 독립을 획득했을 때 최초의 지도자 아흐메드 벤 벨라 주변에는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집단 출신의 프랑스 자문관들이 있었다. 농업의 집산주의와 산업의 자영은 알제리 민족정부가 실천해야 할 시급한 과제였다 (→ 색인 : 민족주의). 이 계획이 실패했을 때 벤 벨라는 물러나야 했고 그의 후임인 우아리 부메디엔은 '알제리 사회주의'를 계속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국가주도 기업과 토지사유에 입각한 경제체제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상 알제리는 군사독재로 나아갔다.

튀니지에서는 1956년 독립한 뒤 일당체제가 출범해 하비브 부르기바의 주도로 주요기업을 국유화했다. 지배당인 데스투르 사회당은 경쟁 정치조직을 금지했고 계획된 경제발전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밖의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1950, 1960년대에 '아프리카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은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주창했고 기니 대통령 세쿠 투레는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의 공동체적 가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결합한 '아프리카화한'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했다.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가나 정치의 토대가 '양심주의'에 있다고 선언했고 "전체주의 방안만이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66년에 권좌에서 쫓겨났다.

케냐·탄자니아 등 그밖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지배엘리트들은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아프리카 사회주의' 관점의 고수를 선언했다. 많은 아프리카 사회주의 작가들은 공동 토지소유, 몇몇 부족의 평등주의 관습, 한때 부족사회에서 존재했던 호혜조직 등 아프리카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공약은 이상에 가까운 말에 지나지 않았다. 단순한 생계차원에서 시장경제와 산업화로, 보건, 교육, 주택, 공공행정 조직에로의 이동이 시급했다. 자율적 기관에서 인간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힘쓸 수 있지만 아프리카에서 이런 기관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에서 강제와 구별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전망은 너무나 먼 일이었다.

아랍의 사회주의

중동의 사회주의운동은 공무원·군대장교·교사 등 신(新)중간계급에 속하는 유럽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주도했다. 계급구분 없이 아랍 인민 전체에 호소하고자 그들은 근대화와 모든 아랍인의 형제애를 위해 힘썼다.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한 것은 보통 바트당이라 불린 아랍 사회당이었다. 시리아에서 결성된 이 당은 종족이나 지역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 이 당의 분파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특정 사회주의 정책이나 구체적인 개혁을 추진하지는 못했다.

1952년 이집트에서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권력을 잡았을 때 중하층 계급 출신의 그의 젊은 장교집단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나세르는 외국기업의 지배에 대항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도입했다. 1960년대 중반 이집트는 국내외 모든 대규모 산업·재정 기업을 국유화했고 대토지소유자의 땅을 몰수했으며 모든 중요한 경제분야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었다. 그러나 이 권력구조는 군사독재 형태였다.

아시아의 사회주의

아시아 사회당 12개 대표가 1953년 1월 랑군(지금의 양곤)에서 모여 제1회 아시아 사회주의자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표 가운데는 국제적 명성을 얻는 인사도 있었다. 인도·미얀마·스리랑카·인도네시아·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의 정부들은 그들 자신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곧이어 사회당들은 명목상의 권력마저 잃었다. 몇 개의 사회주의 조직이 경쟁하던 인도에서는 지배당인 회의당이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경향을 흡수통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실상의 전국적 정당이었다.

미얀마 사회당은 몇 년 동안은 연립체제 속에서 미얀마를 지배하기도 했으나 1962년 네 윈 장군이 정권을 잡자 불법화했다. 인도네시아 사회당은 1960년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전후 동남 아시아 사회당들은 1960년대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럽식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쇠퇴함에 따라 사회주의 형식을 표방한 다양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등장했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는 자신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레소핌'(Resopim:혁명, 인도네시아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이라고 선언했다. 미얀마의 군사독재자들은 미얀마가 사회주의국가라고 공표했다. 북베트남(나중에는 베트남 전체)은 공산당의 지배를 받았다. 나머지 인도차이나 국가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혁명운동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전통주의 세력과 싸웠다. 중국에서는 1949년 이래 인민공화국 공산당 정부가 권력을 잡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사회당들은 독립투쟁에서는 잠시 능력을 발휘했으나 그뒤에는 전국정치 무대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유럽에서 교육받은 지식인인 사회당 지도자들은 유럽의 모델에 뒤지지 않으려 했고 민주주의라는 길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념을 지지했으나 유럽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동남 아시아 국가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 산업발전을 추구했다. 싱가포르와 인도에서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계획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도 '사회주의'는 근대화와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하는 신엘리트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 일본은 확고하게 설립된 전통적인 사회주의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일본사회당은 1901년에 처음으로 결성되었으나 곧 해체되어 지하로 들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이후에 사회주의 조직은 다시 확산되었다. 1936년 사회대중당은 의회에 18명의 의원을 배출했고 50만 표 이상을 얻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1940년대 이후 다시 출현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뒤 억압받았다. 1946년 사회당은 90석의 의석을 얻어 3번째로 강력한 정당이 되었고 1년 뒤에는 의회에서 최대다수 의석을 얻어 지도자 가타야마 데쓰[片山鐵]는 연립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사회당은 점진주의자와 혁명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좌파 혁명주의자는 미국에 극력 반대하며 소련편으로 돌아섰고 우파 점진주의자는 미국과의 밀접한 군사적·정치적 관계를 점진적으로 완화할 것을 주장했다. 2개 파는 1950년대에 완전히 갈라져 좌파는 일본사회당, 우파는 민주사회당을 결성했다. 이 2개의 당은 의회 내에서 1/3 정도의 의석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영원한 소수의 위치에 운명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일본 사회주의는 아직도 전후시대에 유럽 사회주의가 겪었던 것과 같은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밖의 지역과 국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에서도 사회주의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출현한 1901년에 결성되었고 불과 3년 만에 그 지도자 J.C. 웟슨은 세계 최초의 노동당 출신 총리가 되었다. 1908년, 1910년 5월, 1913년 6월에 노동당은 정부를 주도했으며 그뒤에도 자주 권력을 차지했다.

뉴질랜드의 경우 1893~1906년 뉴질랜드 정치를 지배한 것은 자유당과 노동당의 느슨한 연립이었으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서 뉴질랜드 노동당이 출범한 것은 1913년의 일이었다. 이 당은 꾸준히 성장하여 1935년 권력을 잡았고 그뒤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노동운동은 처음부터 점진주의와 개혁주의 노선을 따랐다. 그들은 노동조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원칙상으로는 사회주의 공약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당면문제를 다루는 수단으로서 정부의 통제를 이용하고 사회사업을 확대하는 데 주된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도입한 다양한 사회보장책 덕분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근대 복지국가와 매우 평등한 사회로 발전했다.

캐나다의 사회주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비해 느린 속도로 전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캐나다 사회주의 운동은 2개 분파로 갈라졌고 이 2개 분파는 모두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1920년대에 캐나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사회당과 노동당이 번창했으나 역시 연방의회에 거의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1932년 '협동사회연합당'(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CCF)의 조직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전국적인 중요성을 얻기 시작했다. "대담하고 포괄적인 규모의 사회·경제 계획"의 필요성을 선거운동의 토대로 삼아 CCF는 대부분의 지방선거에서 지지를 얻었고 1944년 6월에는 서스캐처원 지방에서 정부를 구성하여 20여 년 동안 이 지방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1961년 진보적인 노동조합 지도자와 CCF 지도자가 만나 신민주당을 결성했다.

CCF가 성격면에서 농민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데 반해 신당은 산업분야의 지지를 받았다. 계획경제를 주장하면서 신민주당은 사회보장의 확대, 정부의 고용보장, 저임대 주택의 대규모 건설 등을 추진했다. 신민주당의 정책은 전후 서유럽의 사회주의가 추진한 정책과 비슷한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매우 깊다. 1870년대 초기에 아르헨티나에서는 제1인터내셔널의 지부가 몇 개 설립되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적도 있지만 다양한 분열과 이주한 산업노동자의 지지에 주로 의존하는 현실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그들은 농촌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칠레에서 사회주의자들은 1920, 1930, 1940년대에 여러 연립정부와 인민전선정부에 참여했다. 1958년 선거에서 칠레 사회주의자들은 인민행동전선(FRAP) 후보자인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했다. 아옌데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고 1964년에도 다시 패배했지만 197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3명의 후보 중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어 공산당에서부터 민주주의 개혁가에 이르는 인민전선의 지지를 받으며 정부 수반이 되었다. 아옌데 정부는 외자산업의 국유화와 국가의 계획적 건설을 약속했으나 경제혼란의 증가와 중간계급의 반대에 부딪혔고, 아옌데가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자 칠레에서 사회주의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L.A. Coser 글 | 이호성(李豪城)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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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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