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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창간1주년 좌담회 중에서

프로메테우스의 편집에 대한 의견

오창엽 : 평소 애독자로서 프로메테우스에 편집방향과 관련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아울러 진보매체 일반에 대한 의견도 궁금합니다.

고남권 : 현장에서 일하는데 북한 핵문제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기존 언론을 보면 북한의 핵 포기를 이야기 하고 자본의 관점에서만 북한 핵을 다룹니다. 마치 가진 자들이 못 가진자들에 대해 억압하는 것처럼 핵을 못 가진 북한을 억압하는 기사만 나옵니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프로메테우스에서 한번 다뤄봤으면 좋겠습니다.

세금 문제, 국민연금문제도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임금인상이 돼도 세금으로 떼어 나가면 소용없는 것인데, 사회제도 개선의 문제도 심층적으로 방향을 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헌석 : 어차피 인터넷 신문이 연합뉴스가 아니라는 것이죠. 모든 지역의 뉴스를 다룰 수 없고 프로메테우스는 노동과 정치에 관련된 부분에 집중돼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30대 중반 남성을 타깃으로 하는 신문이 프로메테우스로 보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좀 더 깊은 분석기사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출입처의 문제도 있는데, 진보매체의 기자들이 너무 모릅니다. 환경문제를 보더라도 기자들에게 어떤 문제를 매번 다시 설명해줘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진보매체에서 다루었으면 합니다. 전문성을 갖고 한쪽으로 팠으면 좋겠습니다.

신석준 : 저는 프로메테우스 기사의 절대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질 좋은, 많은 기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웃음) 진보매체 전체적으로 보자면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력이 있어야 하죠. 지금보다 기사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언론으로서 먼저 크게 성장을 해서 유명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층분석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 기존 운동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진보매체 전체적으로는 우선 경쟁력을 가지고 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고남권 : 프로메테우스가 노동 관련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역시 답답한 것 또한 노동 문제입니다. 노동운동의 정책 방향을 놓고 프로메테우스가 오늘과 같은 좌담회를 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층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사건보도는 어디가나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양심상 조선일보를 보지 않는데, 누가 가져오면 봅니다. 경향신문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허전합니다. 조선일보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기획기사를 꼭 내죠. 자신이 추구하는 논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노동운동 관련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생산해 내는 그런 것들을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좌담회가 개별 분야에 대해서 진행 돼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내면 좋겠습니다.

심층분석, 전문성, 기사의 절대량, 조명

원용수 : 얼마 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미디어오늘 기자가 진보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생각을 했죠. 우선 뭐가 진보언론인가? 그것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지금의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일종의 비주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늘 어떤 문제를 중심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는데 우리는 비주류의 모습을 다루려고 합니다. 어쨌든 전투적인 자세로 비주류적인 모습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386세대를 보면 그 당시에도 일종의 주류였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그들은 지금 주류가 됐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볼 때 아주 주도면밀히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주류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욕심은 끝이 없겠지만 이런 측면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상훈 : 언론이 권력화 되는데, 프로메테우스는 보통사람에게 권력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투쟁을 하지 못하거나 뉴스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은 언론에서도 보도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는 것이 진보운동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프로메테우스가 그런 분들을 조명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상계동 쪽에서 중증장애인들에게 활동을 하려 하는데, 힘든 점이 그런 중증 장애인 분들을 발굴 하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실제로 도우려고 노력을 하는데도 그런 분들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런 것을 전국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언론에서 해야 하고 기존 언론은 오히려 더 그런 것들을 많이 합니다. 진보매체는 그런 것을 못하고 있습니다. 언론만큼 그런 것에 유리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창엽 : (손으로 고 의장, 신 대표, 이 대표, 정 대표를 가리키며) 결국 프로메테우스가 심층기획을 하고, 기사량을 늘리고, 전문성을 갖고, 찾아가는 서비스를 하면 좋은 신문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모두 웃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인연콘서트에 대해 논해 보죠.  

..........

 

 

5월 18일 창간한 프로메테우스

오창엽 : 이제 모든 좌담이 끝났습니다. 끝으로 오늘 좌담을 마무리 하는 인사말을 듣겠습니다.

이헌석 : 오늘 많은 이야기 나왔는데 뭔가 좀 달라져야 할 때라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내부적인 변화의 기운을 느낍니다. 그것이 어떠한 형식이든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뿌리를 내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올해와 내년에는 정말 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남권 : 노동자에게 사랑받는 프로메테우스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준이라는 노동가수가 명동성당 앞에서 노동복지 재단 설립을 위해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3천만 원을 모았다고 합니다. 노동가수가 노동복지 재단 설립을 위해 공연하는 것, 정말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좀 취재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연대도 그런 일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석준 : 사회당의 처지, 외부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2년 정도 있으니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강해졌습니다. 그런 확신이 더 강해지는 올해가 됐으면 좋겠고 프로메테우스에 그런 것으로 자주 등장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상훈 : 프로메테우스가 여러 차례 행동하는 의사회를 다루어 주어서 고마웠습니다. 부탁드리자면 올해 대중적 연대운동에 대해서 프로메테우스가 많은 비판 바랍니다.

원용수 : 이런 저런 기회로 의견을 나눈 적이 많지만, 이렇게 한 자리에서 이야기 하니 좋습니다. 이런 자리가 많아지면 집중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이야기들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창엽 : 내일 광주에 가면 보시겠지만 현수막 요청이 왔을 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 2004년 5월 18일 창간한 프로메테우스>와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 2004년 5월 18일 창간한 프로메테우스>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그러한 정신을 놓지 않고 훌륭한 매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5/05/18 [02:40] ⓒpromet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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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건설플랜트노조, 5/18 SK본사앞 집중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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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조선 저녁문화

http://blog.jinbo.net/hi

 

편집 예술

신문을 인터넷 판으로 보는 것과 지면으로 보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기사의 배열에 따라 느끼는 감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왠만한 기사는 인터넷으로 훑어보더라도 종이신문을 손에서 놓기가 어렵다. 같은 기사가 말투와 단어의 차이로 전혀 다른 기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 또한 똑같은 내용이라도 지면의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기사와는 별개의 느낌을 가지게 한다.

 

편집의 묘미에서 오는 이런 차이는 편집기술이 뛰어난 신문일수록 크게 느끼게 된다. 지면배치의 편집술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킨 신문은 당연히 조선일보다. 조선일보의 카피와 지면배치, 이건 다른 신문들이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수준이다. 흔히 조선일보의 일가친척으로 이야기되는 중앙일보나 동아일보조차도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편집술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일보의 하수임에 분명하다.

 

조선일보편집술의 특징은 지면의 배치를 매우 자연스럽게 한다는 점이다. 기사의 순서를 정리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밝히는 한편, 그러한 의사표현이 극단적인 형태로 누구나 그 의도를 뻔히 꿰뚫어볼 수는 없도록 하는 것이 또 이 조선일보의 편집술이다. 그래서 이러한 편집술을 쫓아가려는 다른 신문사들의 노력이 때로는 매우 유치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비교되기도 한다.

 

짝퉁임에도 불구하고 프로페셔널을 모방하려던 신문지 한 장이 또 기가막힌 편집술을 보였다. 역시 "아침조선 저녁문화"라는 꼴통 양대산맥의 한 축 문화일보다. 이 문화일보, 5월 17일자 신문에서 편집의 예술을 보여준다. 신문 6면과 7면은 신문을 펼칠 때 하나의 면으로 나타난다. 문화일보 5월 17일자 6면과 7면을 보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보인다.

 

왼쪽, 즉 6면에는 "Future 2030"이라는 주제로 2030년까지 로봇이 혈관을 청소하고 연료전지차가 돌아다니는 등 엄청나게 발전된 형태의 기술문명이 도래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 한 면 전체를 통틀어 SF적 환타지를 묘사하는데, 기술발전에 대한 엄청난 기대와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제목만 훑어보면, '미생물 농약 대대적 보급, 대체장기용 동물 개량', '가상현실 게임 실용화, 유리형태 디스플레이', '국산우주선 타고 여행, 국제공동 달기지 개발', '접이식 디스플레이 출현, 생분해성 플라스틱도', '급성바이러스퇴치, 생체시계 이용 노화방지'... 헉헉헉... 숨이차서 더 이상 자판 못두드리겠다. 어쨌든 환타스틱하지 않은가? 영생불멸의 시대가 오고 있다뉘...

 

그런데 7면을 들여다보자. 맨 윗면에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왼쪽 사진은 고개숙이고 있는 한국노총 간부들의 모습, 오른쪽에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고 있는 기업임원들의 모습... 기획기사 제목 자체가 요염하다. "'고급차'타는 노조간부 '옆길'로"라는 대제목 아래 "경영진 못잖은 파워... 인사 등에 막강한 입김, 수십억대 주무르며 채용비리 등 '몸통'으로"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이 기사 안에는 그동안 소위 '귀족지도부'들이 저지른 온갖 파렴치한 행위가 일일이 열거되어 있다. 게다가 메인기사 옆에 박스기사로 '대기업 전 노조부위원장의 고백'까지 싣고 있다. 거의 "선데이서울" 고백시리즈같은 기사제목 붙여놓고 있는데, 그 밑에다가는 검찰이 진행하고 있는 노조비리 수사에 대해 소개하면서 굵은 제목으로 "노조비리 수사확대"라고 써놓았다.

 

물론 문화일보가 명명한 바 일부 '귀족지도부'로 인해 노동운동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는 거 인정한다. 그리고 그동안 노동운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도덕성을 훼손하는 치명적 오류를 저지르는 자들에 대한 자정이 부족했다는 거 그거 인정한다. 그런데, 이 기사 읽어보면 마치 대한민국에서 노조활동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종비리에 직간접적으로 다 껴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교묘한 마타도어.

 

기사에 대한 소개는 이쯤 해두고, 이 기사들이 7면에 실려있었음에 다시 주목하자. 6면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발전상을 이루어버린 2030년의 상황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난리가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픈 욕망이 불끈 솟게 만든다. 그러다가 7면으로 눈을 옮겨보자. 2030년 도래할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들이 거기 있다. 이 '귀족지도부'들과 이들을 지도부로 모신 노조들. 얘네들이 뭔가 사고칠 것 같다. 아니 이미 사고를 치고 있다. 그리하여 6면의 2030년이 얘네들로 인해 왠지 불길해진다.

 

그리고 이 불길함의 근원지가 어딘지 결국 밝히고야 만다. 30면 하단 "오후여담" 코너는 "보지 못하는 '꽃'"이라는 제목으로 신비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어떤 교수가 이런 시를 읊었단다. "내려올 때 보았네/올라갈 때는 보지 못한 그 꽃". 그리곤 그 속내를 유감없이 드러내버린다. "경쟁은 개인은 물론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다. 모든 분야에서 정정당당한 경쟁이 필요하고 그 결과 역시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이 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빗나간 평등주의에 눈이 가려져 경쟁을 꽃으로 보지 못하고 몹쓸 병균쯤으로 여기는 행태와 풍조가 정부정책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 기회균등이 아니라 결과의 균등을 요구하는 일부 시민운동단체 등도 그런 사례다. 아름다운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하는 사회의 미래가 밝을 수 있겠는가."

 

이거다. 자본의 무한경쟁은 2030년의 꿈을 현실로 만든다. 그런데 그 비전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 바로 노조, 시민운동단체 등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하는 미물들이다. 요거 처단을 하고 정리를 해야 2030년의 꿈이 우리 앞에 도래한다. 그러니 돈 많은 분들 열심히 돈지랄 하시는 거 꼬운 눈으로 째려보지 마라... 장하다, 김종호 논설위원. 곡학아세, 아전인수도 이정도면 한 일가(一家)를 이룬 수준 되겠다.

 

그런데 그런 결론을 유도하기에는 문화일보 편집의도가 너무 뻔하게 드러난다. 즉, 매끄럽지가 않다는 거다. 잔머리는 굴리는 놈만 알고 딴 놈은 몰라야 효과가 있는 건데, 다른 놈들이 그놈 잔머리 굴리는 거 다 알고 있으면 잔머리 백날 굴려봐야 뇌만 익는다. 문화일보 편집하시는 분들, 차라리 조선일보 가셔서 좀 더 배우기 바란다. 하긴 뭐 이젠 조선일보의 편집술도 백일하에 그 노하우가 드러난 형편이라 배워봐야 남는 것도 없겠지만.

 

"공갈꽃"이라는 꽃이 있다. 쬐끄만게 참 이쁘게 생겼다. 그런데 코를 들이 밀고 냄세를 맡으면 백이면 백 기절을 하고 만다. 홍어삭히는 냄세가 나기 때문이다. 칠팔월 땡볕에 서있는 이동식 화장실 들어갔을 때 느끼는 현기증, 그런 거 느끼게 된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속화하면서 도태된 자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무한경쟁의 논리, 이게 바로 공갈꽃이다. 그 결과가 겉으로는 아름다워보일지 모르나 그 속은 썩고 썩어 사람들을 기절시키는 그런 꽃. 김종호 논설위원, 함부로 꽃 같다 붙이면서 곡학아세 하지 말지어다. 머리 나쁜 티를 꼭 그렇게 내야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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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여성해방을 위한 115주년 메이데이 평가 - 노학연

 

노동해방/여성해방을 위한 115주년 메이데이 평가


0. 왜 평가를 제출하는가


우리는 이 세계의 사물과 현상을 해석할 때 언제나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계급사회에서 어떤 개인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분석하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하지만 동시에 생산의 주역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 노동계급의 이해를 옹호하고 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난 5월1일 충북 노동절 집회를 보자. 당시 집회에서는 집회 대오와 전투경찰의 커다란 충돌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심지어 주유소를 거점 삼아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경찰 측에서는 노동자들이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동원해 공장 진입을 시도하는 등 불법폭력시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몇 백 일이 넘어가는 투쟁과정은 사내하청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하이닉스 매그나칩 자본의 부당한 정리해고와 노동탄압,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전투경찰의 지속적인 과잉진압과 폭력진압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또 자본주의 이래로 이어져 온 노동계급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과 착취의 현실로부터 우리는 경찰의 선전이 투쟁 대오를 매도하기 위한 비열한 왜곡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너무나 정당한 것임을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우리는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보다 더 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더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다. 또한, 일상적인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여성을 상품화하여 이윤을 불리는가 하면 전근대적 가부장적 의식을 활용하여 남성노동자에게 허위의식을 유포하고 그를 통해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방해하고 있다. 한편, 이른바 진보적이라 불리는 운동진영 내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폭력이 존재하고 있으며 성평등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노동운동 혹은 진보운동 내에서 벌어졌던 성폭력 사건들을 접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문제를 다루거나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접했을 때 우리는 함께 투쟁하는 여성 동지들의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입장에 서서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때 피해자의 관점에 입각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노학연은 지난 115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4월30일, 5월1일 이틀간 힘차게 노동계급의 투쟁에 연대하고자 하였다. 이틀 간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투쟁 속에서 여성 동지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지는 않았는지, 성평등을 실천하고자 하였는지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었다. 이른바 계급적인 운동진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부위들 내에서도 여성문제에 대한 이해는 그리 높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실질적인 여성문제의 해결은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문제제기와 고민, 실천을 통해서 노동해방과 함께하는 여성해방은 보다 앞당겨지고 구체적인 과제로 다가올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따라서 제기된 평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고민하여 우리의 실천을 변화시키고 보다 강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의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우리는 우리의 문제의식을 함께 메이데이에 참가했던 학생동지들과, 또 계급운동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는 동지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따라서 메이데이 기간 동안 접수된 문제의식들을 이렇게 정리하여 공개한다. 이를 바탕으로 동지들 사이에 논의가 확대되고 적극적인 실천의 변화가 존재하길 바라며, 성평등한 노동계급운동이 확장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1. 언어를 통한 성차별과 성폭력


성폭력이란 것은 꼭 강간과 추행처럼 신체접촉이 이루어져야만 성폭력인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이란 것이 여성에게 차별, 무시, 배제 당했다는 소외감과 불쾌감을 던져 주고, 부당한 여성억압의 현실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성폭력이다.


이틀 간의 일정 동안 출정식, 중간 정리집회, 총정리집회 등 메이데이에 참가한 학생들의 투쟁결의를 고취시키고 활동을 평가하기 위한 자체 약식 집회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발언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올 때, 특히 새내기들이 앞으로 나올 때 대오 내에서 여학생들에게는 “예쁘다!”, 남학생들에게는 “잘 생겼다!” 등의 발언이 있었다. 물론, 격려하려는 의도로 그런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발언들은 여성은 ‘예쁘고, 아름다워야’ 하고 남성은 ‘잘 생겨야’한다는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이어간다. 특히 여성을 외모로만 판별하는 것은 성차별에 해당하며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한편, 사회자가 새내기들을 소개하면서 “새내기들이 우리의 꽃과 같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사람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칭찬하고 격려하는 의미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동시에 ‘꽃’이라는 단어는 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데 많이 쓰이기 때문에 이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보통 여성은 아름다움의 상징인 ‘꽃’에 비유된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여성은 꽃처럼 아름다워야 하고, 누군가 꺾어주거나 와서 보아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사실상 여성들을 사물로 비하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여기는 꽃밭이네”하는 얘기나 남성들만 모여 있는 장소에 “꽃꽂이 좀 해야겠다”는 얘기들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이렇게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하고, 고정적인 여성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은 ‘예쁘지 않은’, ‘적극적인’, ‘행동적인’ 여성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단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항의하고 투쟁을 시작하면 “여자들이 감히”라는 식으로 탄압이 자행되지 않는가?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외치는 현자 울산공장의 중년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은 “아줌마는 집에 가서 밥이나 하고 애나 보지 왜 나대냐”는 식으로 무시받는다. 또 의외로 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이런 생각에 젖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도 동지라고 불리기보다 ‘아줌마’ 혹은 ‘예쁜 동생(후배)들’로 지칭되기도 하고 같이 투쟁하면서도 소극적인 존재라는 인상을 남긴다. 이 때문에 투쟁의 주체를 남성만으로 한정시키는 효과를 낳는 ‘노동형제’라는 표현도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여성 동지들에게 고정적인 모습과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사람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한편으로 발언이나 구호에 성기나 강간 같은 성행위를 빗댄 욕설을 섞어 사용하는 것 역시 성폭력이 될 수 있다. 덤프연대 파업출정식에서 발언한 어느 동지가 “x나게.. x같이..”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나 혹은 행진 중에 노동자 동지들이 구호를 외치다가 끝에 “죽여 밟아 묻어 씨x" 등의 끝 구호를 붙이는 것이 그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으며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주의와 남성우월의식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성폭력의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 이것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일본군 성노예이며 감금 상태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은 성매매 여성들이다. 언론에서는 매일 같이 강간, 성추행 (그리고 그와 이어지는 살인) 등의 범죄가 보도되는데 이는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여자들은 함부로 밤길 늦게 다니지 말라거나 옷을 야하게 입지 말라는 등의 반응이 일반적인데 성폭력이 만연하는 원인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다시금 여성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차별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기나 성행위를 빗댄 욕설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여성 동지들에게 불쾌감과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또,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감하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런데 자본가들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혹은 남성들에게는 욕설 사용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하나의 자연스러운 문화라서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적들을 향해 표출하는 분노의 욕설이 자신의 곁에 있는 동지에게 피해로 다가간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 동지를 투쟁으로부터 내모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남한의 1500만 노동자계급, 혹은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는 남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있고 장애인도 있다. 자본가들과의 싸움을 위한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위해서는 옆에 있는 동지에 대한 배려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언어를 통한 성차별과 성폭력은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집회나 행사 도중에 나타나는 경우들이 많다. 이 경우에는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적절히 지적하여 언어 성폭력을 예방하거나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는 효과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2. 여성 동지들을 위한 공간적 배려


우리는 4월30일에 기존에 연대하던 인쇄노조 성진애드컴 투쟁집회부터 시작하여 서울지역  비정규직 차별철폐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차별철폐 대행진을 마치고 민주노총 전야제로 이동하기 전에 대행진 전체 대오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식당 화장실이 남녀 공용인데, 설비가 낡아 문이 잘 잠기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성 동지들이 화장실을 이용하기에 불편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비장애인 중심의 현재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설비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장애인들은 생존권이나 다름없는 이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벌인다. 비장애인 중심으로만 설계되어 있는 교통수단, 설비나 공간을 장애인들이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문제는 공간을 마련하고 사용하는 것에서도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비단 화장실 문제 뿐만 아니라 MT, 수련회, 현장방문단에서의 숙소 문제 등에서 공간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즉, 여성들이 공간의 사용에서 소외되거나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기존에 학생운동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들은 생활방 내에서 잠들어 있는 도중에 벌어진 경우들이 많았다. 또한, MT에서도 부득이하게 한 방을 쓰는 가운데 성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성폭력을 예방하고, 여성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여성들이 독립적으로 사용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 내 여학생 휴게실은 그런 측면에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간 문제는 보통 비용과 조건 등의 문제로 덮어두고 가는 경우가 많다. 공간 보장을 요구하려는 여성 동지들도 비용 문제를 고려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고, 특히 여성 동지들이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소수일 때에는 요청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을 함께 논의하고 실천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3. 민주노총 주최 노동절 본집회의 걸개그림


노동절 이후 민주노총 자유게시판과 참세상 속보게시판에는 쏘냐라는 명의로 [민주노총 노동절 대회의 반여성주의 -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언정 거꾸로 돌아가진 말지어라!]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의 내용은 노동절 집회 걸개그림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걸개그림에 투쟁조끼와 머리띠를 착용한 남성노동자를 그리고 그 오른쪽에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남성만이 투쟁의 주체로 보일 수 있도록 했다는 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형제라는 남성만을 투쟁 주체화하는 표현 역시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이 글은 내용에 동의하는 한 동지에 의해 노학연 홈페이지로 옮겨졌다. 그런데, 옮겨진 글에 한 사람이 반박하는 내용을 올렸고 쏘냐의 글에 동의하는 사람이 재차 반박하면서 짧은 논쟁이 진행되었다. 비판의 내용은 “문제제기가 너무 주관적이다. 과도한 해석이다.”라는 것이 주였다.


우리는 쏘냐가 제기한 문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투쟁조끼와 머리띠는 노동자들에게 투쟁의 상징이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투쟁을 결의하는 모습을 종종 ‘머리띠를 묶는 것’으로 묘사한다. 작년 LG칼텍스 노조가 파업에서 패배한 이후, 회사는 관리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합원들에게 투쟁조끼를 가위로 절단할 것을 강요했다. 노조를 철저하게 짓밟고 다시는 노동자들이 회사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인간적인 모멸감과 수치심, 패배감을 안겨 주려는 비열한 탄압이었다. 그런데, 걸개그림은 남성에게만 투쟁조끼와 머리띠를 착용케 하고 여성에게는 분홍색 티셔츠를 입혔다. 투쟁조끼와 머리띠의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그림은 남성만을 투쟁주체로 형상화한다. 또 색상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다. 남성들은 파란 티셔츠와 파란조끼를 입고 있으며 여성은 분홍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일반적으로 분홍색 계열은 여성들에게 어울리고, 파랑색은 남성들에게 어울리는 색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근거도 없다. 여성들이 태어날 때부터 분홍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니다. 여성에게 분홍색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성차별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남성이 투쟁조끼를 입고 힘차게 팔뚝질을 하고 있고,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채 그를 보며 웃는 여성이 그려진 그림은 기존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성폭력의 기준으로 불쾌감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사실 그것 역시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제기가 너무 주관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성폭력에 대해서 문제제기 하면 이런 반응들이 돌아온다. “너무 주관적인 것 아니냐, 객관적인 시야에서 보아야 한다, 오버하는 거다” 등등.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문제제기하는 사람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를 주관적 감정에 너무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객관적’임을 내세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객관이란 것은 여성들이 차별받고 억압받는 현실, 성폭력이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객관이다. 따라서 성폭력이 제기되었을 때 객관성 혹은 중립성을 따지는 것은 사실상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잘못된 현실에 손들어 주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사실상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주관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주관적인 태도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폐지되고 실제로 성별에 관계 없이 평등한 사회가 수립된다면 이러한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계급사회의 폐지가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의식적인 실천을 방기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 내는 가운데서 여성해방과 성평등은 보다 가깝게 다가 올 수 있다. 남성만을 투쟁 주체로 형상화하는 걸개그림에 반대하고 남성 여성 모두가 투쟁의 주체로 그려지는 그림을 선택하는 실천 속에서 말이다.


4. 마치며


전 사회적으로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은 운동 진영 내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최근 들어 이에 대한 각성과 변화의 움직임이 도처에서 보이고 있다. 그 흐름에 노동해방 학생연대도 자리잡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이 더딘 흐름을 더욱 크고 넓게 확산시켜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더 이상 성폭력으로 인한 여성 동지들의 피해가 묻혀 버리지 않도록, 그래서 운동으로부터 밀려나고 소외받는 일이 없도록, 70년대 서슬퍼런 군사독재 치하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전통을 노동운동 위기의 시대에 복원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해체된 계급적 단결을 복원하고 노동해방 투쟁으로 더욱 힘차게 진군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진지한 고민과 토론을 기대한다. 또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비판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며 실천할 것을 약속한다. 투쟁!


2005. 5. 18

사회주의 정치 실현을 위한 노동해방 학생연대

nohak.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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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노동뉴스 기획특집 -건설플랜트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정규직외 출입금지" 노가다 인생은 씻을 권리도, 식당을 이용할 권리도 없다
정기애 기자

▲ 플랜트 노동자들의 요구사항<플랜트 노동조합 제공>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이 40일을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은 여전히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820명의 사상초유의 연행사태에 이어 수십명이 구속되고 많은 노동자들이 부상당했다.
파업 이후 누구보다 더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여야 할 노동부와 사용자들은 여전히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해 노동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이시간에도 플랜트 노동자들은 SK 본사 앞에서 길바닥 잠을 청하고 있으며, 3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울산노동뉴스는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사용자들의 불법행위, 그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정규직외 출입금지" 노가다 인생은 씻을 권리도, 식당을 이용할 권리도 없다

"예전에 화장실, 탈의실, 샤워장에는 모두 '정규직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지금은 화장실은 눈치보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식당과 샤워실은 아직도 이용을 하지 못한다."

16살부터 건설현장의 기계일을 하고 있다는 플랜트 노동자 박모씨의 말이다.

박씨는 현장에서 먹는 도시락 얘기를 하며 가슴 아픈 표정을 짓는다.

"일을 하다 작업장에서 도시락을 먹으려 하면, 밥은 싸늘하게 식어 딱딱하게 굳어있고, 반찬은 돼지고기가 있으면 다 식어서 기름끼가 허옇게 떠 있는 걸 볼 수 있다. 가끔 도시락 업체가 바빠서 오전 10시쯤 미리 가져다 놓기도 하는데 한여름엔 콩나물이나 시금치는 더운 날씨 때문에 상해서 못 먹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다 시어빠진 김치쪼가리와 함께 국에 밥을 말아 먹고 치우고 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서 밥을 먹게 되는데 비바람이라도 치면 밥에 온통 빗물이 들어가게 된다. 또한 그라인더에서 튀는 돌가루와 쇳가루가 날라와 밥에 들어가 그나마 도시락도 먹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의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대접받고 사는 거라고, 일당에 만족하고 살았는데 이제 아니다. 일용직 노동자도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를 누릴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으로 단결해서 싸운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건설연맹, 울산건설플랜트노동조합이 조합원 설문조사를 리서치에 의뢰한 결과에 따르면 조합원들이 작업현장에서 이용할 수 있는 각종 편의시설이 매우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복지시설에 관한 리서치 통계결과>


울산지역건설플랜트노동조합 조합원들은 10년에서 30년 이상 플랜트산업에 종사한 숙련공들이다. 그럼에도 조합원들은 장시간, 저임금 및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해 왔다고 한다.

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와 울산건설플랜트노동조합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건설플랜트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근무경력 20년이 넘는 숙련공 조합원의 일당은 평균 110,000원 정도이다. 그러나 이 일당에는 ▲퇴직금, 주휴일 및 연월차 수당 포함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비용을 절감하러 사회보험을 적용하지 않아 이를 개인이 전액 부담 ▲안전화, 작업복, 점심식사 비용까지 개인이 부담 ▲이 일당이 1일 9시간 근무하는 것을 전제로 지급되고, 한달 취업일수가 평균 20일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조합원 년간 임금소득은 2,000만원에 미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에 대해 건설플랜트노동조합 강상규 상황실장은 "예전에는 수당개념이 없었는데 노동조합에서 문제제기를 하니까 일당에 모든 수당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른바 '포괄임금제'를 적용한 것이라고 사용자측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사용자들이 근로계약서를 체결할 때 임금에 관한 사항은 명시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자들에게 서명을 하게 한다."고 폭로한다.

건설플랜트노동조합은 "1,000여명의 조합원들을 상대로 조사해 그들이 받지 못한 주휴, 월차, 휴일근로수당 등에 대해 3년을 기준치를 계산해서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노동부에 진정서를 접수해 놓은 상태"라고 밝혔다.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60년대 석유화학단지가 울산에 처음 조성될 때부터 잔뼈가 굵은 노동자들이다.

플랜트노동조합 강상규 상황실장은 "우리 조합원들의 작업 기술은 스스로 자부할만큼 전국에서 최고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의 기술은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최고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한다.

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의 한 관계자는 "건설 노동자들은 호주등 다른 나라에 가면 한달에 6-7백만원은 벌 수 있어 이민의 기회를 찾고 있기도 하다. 실제 호주, 독일, 캐나다 등 유럽에 불법체류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돈을 벌기위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라고 얘기한다.


이 나라의 경제발전이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이제 식상하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경제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건설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아직도 70년대 수준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 열악한 노동환경이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 것이다.

 

명절은 부담스러운 날일뿐이다
플랜트 조합원 인터뷰
정기애 기자

강원도가 고향인 건설플랜트 노동자 정모씨.

울산공대 시절 학비 조달을 위해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제관 일이 평생 그의 직업이 되었다. 정씨가 일을 시작하던 80년대 당시만 해도 건설일이 공장의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오히려 좋았다고 한다. 그러던 일이 "97년 IMF를 거치면서 50% 이상씩 일당이 깎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주5일 근무를 요구하고 관철시켜 나갈 때도 당장 내일 일거리를 걱정해야 했던 정씨는 "아이들과 놀 수 있게 일주일에 하루라도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정씨는 아이들의 유치원 발표회조차 가지 못했고, "명절에는 오히려 일거리가 없어 쉬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명절 때면 받는 보너스는 언감생심 상상도 하지 못할뿐더러 그나마 한달 내내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명절이 일주일 정도 되면 그달은 거의 공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휴유증이 가정경제에 최소 몇 달은 간다"면서 길게 한숨 짓는다.

정씨가 하는 제관업무는 건물골격을 짓는 일이다. 제관업무는 3-4년은 숙련공을 따라다니면서 배워야만이 기술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제관일을 15년동안 한 숙련공인 그는 현재 받는 일당이 100,000원선이라 한다. 그러나 일당 100,000원이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
그의 일당에는 근로기준법에서 보장하는 각종수당과 퇴직금은 물론 밥값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밥값이라고 일당에서 3,000원을 공제하면서 점심 때 나온 도시락은 험한 노동을 하는 정씨의 허기를 채워주기에는 너무나 부실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는 이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가입되어 있어야 할 4대 보험조차 개인의 돈으로 가입해야 했다.


단지 법대로만 해달라. 이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건설노가다 15년 세월동안 근로기준법은 물론 4대 보험 적용조차 받지 못한 정씨는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고 한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뜻있는 동료 노동자들이 함께 할 수 있어 용기를 내게 됐다"고 한다. 그는 "파업이 힘들고 어렵지만, 건설 노가다꾼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말한다.

정씨와 동료들은 일상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업체에 "단지 법대로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업체들은 이 핑계,저 핑계를 대며 교섭에는 나오지 않고 정부에서는 오히려 이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파업이 한달을 넘어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부인이 새벽에는 우유와 신문배달을 하고, 저녁에는 학교 급식일도 하면서 집안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아이 둘이 있는 가정의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워 대출을 고려중이라고 한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생계문제가 심각하지만, 그래도 동료들을 설득시켜 적극적으로 파업에 동참시키기도 하면서 "찔기게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말하며 눈빛을 반짝인다.

 

다단계 하도급 실태와 사용자, 정부의 태도
사용자의 전근대적 노사관과 정부기관의 사용자 봐주기식 법집행이 불러온 예견된 파행
이종호 기자

장시간노동과 중대재해를 부르는 다단계 하도급

건설산업기본법은 건설공사의 하도급을 제한하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건설업자는 도급받은 건설공사의 전부 또는 주요부분의 대부분을 다른 건설업자에게 하도급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고, 또 수급인은 도급을 받은 건설공사의 일부를 일반건설업자에게 하도급할 수 없도록 재하도급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울산건설플랜트노조에 따르면 울산지역 대부분의 플랜트 건설현장에서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출처 : 울산지역건설플랜트노조


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가 작성한 '울산지역건설플랜트노동조합 투쟁, 그 원인과 정당성'이라는 자료집을 근거로 다단계 하도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

발주자(예를 들어 SK주식회사)는 건설공사를 일반건설업체(예를 들어 SK건설)에 도급주고, 일반건설업체는 전문건설업체(예를 들어 제이콘)에 하도급을 준다. 전문건설업체가 소장, 공사과장 또는 반장으로 호칭되는 하수급인에게 재하도급을 주면(3단계) 하수급인은 여러 명의 모작반장에게 다시 재하도급을 주고(4단계) 모작반장은 시공에 참여할 노동자들을 자신이 직접 모집하여 건설공사를 시공 처리한다. 이때 노동자들이 맺는 근로계약은 형식적으로 전문건설업체와 체결하는 것으로 한다.

울산건설플랜트노조는 다단계 하도급구조야말로 건설현장의 비리와 부실공사의 원천이고 장시간노동과 중대재해 등 플랜트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가져온 핵심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노조 김태경 산업안전국장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는 일반건설업체나 전문건설업체에서 10명이 10일 할 일을 5명이 5일 일해야 하기 때문에 고용이 불안하고 노동강도도 무지 높다. 광양과 여수에서는 노동조합이 단체협상을 체결한 후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 많이 사라졌고 이 때문에 산재가 1/10로 줄고 임금체불도 1/10로 줄었다. 우리가 불법 하도급을 막아달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노조의 불법 하도급 주장에 대해 전문건설협회의 한 관계자는 "건산법상 재하도급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도급받은 전문건설업체가 오야지, 십장, 반장 등으로 불리는 건설업 면허가 없는 시공참여자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법으로 가능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공참여자가 다시 또 다른 시공참여자에게 재하도급을 주는 것은 불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재하도급이 되더라도 전문건설업체는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결국 현실에서는 법률적 사각지대가 존재한다"고 하여 불법 하도급을 막지 못하는 법률 자체의 헛점을 지적했다.

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 이영도 정책국장은 "발주회사인 SK의 경우 연월차를 제외한 기능공 일당이 8시간 기준으로 12만원, 조공의 경우 10만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도급을 여러 단계 거치면서 이 일당은 연월차, 사회보험 개인 부담분, 안전장구, 식사비용까지 다 포함된 소위 포괄임금제로 쳐서 하루 9시간 기준 11만원으로 줄어든다. 결국 하도급 단계가 많아질수록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중간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또 중간 건설업자들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할 목적으로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노동강도를 강화하기 때문에 중대재해가 빈번해진다"고 말하고 "행정관청이 불법 다단계 하도급의 실태를 명확히 파악하고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통해 이를 시정해나가야 하는데 건설업주들로부터 등록을 받고 그 적정성을 심의해서 건설업등록증을 교부하고 법률을 잘 지키는지 관리 감독해야 할 울산시청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남구청에 공을 넘긴 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울산시청의 적극적 자세를 촉구했다.

사용자의 전근대적 노사관과 정부기관의 사용자 봐주기식 법집행

◇ 작년 1월 6일 울산건설플랜트노조가 설립된 이후 노조 간부 대부분이 작업현장에 취업하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 때문에 사용자들이 블랙리스트를 운용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노조에 따르면 "SK와 삼성정밀화학 작업현장에서 1년에 보통 2-3개월씩은 일을 했는데 노조결성 후부터는 거의 모든 간부들이 단 하루도 이 회사에 취업하지 못했다"고 한다.

노조는 또 "올해 1월 22일 삼성정밀화학 울산공장 나원호 총무주임의 지시로 노조 임시총회에 참석하는 조합원을 사찰하던 자를 적발하여 검찰에 고소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많은 조합원들이 모작반장으로부터 "조합원이기 때문에 취업이 곤란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노조가 단체교섭을 추진하기 위해 사용자측에 제시한 조합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던 조합원들 대다수는 공사 중단 등을 이유로 해고되거나 노조탈퇴확인서를 받아갔고, 체불임금 등을 이유로 노동부에 진정서를 제출할 때 진정인으로 적시된 조합원들 또한 그 이후 SK와 삼성정밀화학 울산공장에 단 하루도 취업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 블랙리스트를 통한 사용자의 취업방해를 일차적으로 관리감독해야 할 울산지방노동사무소에 대해 노조는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노조에 따르면 "체불임금은 노동부에 진정서를 접수한 지 4개월이 지나서야 무혐의 처리됐고 취업방해에 대해서는 아예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울산노동사무소가 12개 교섭대상 사용자를 선정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교섭을 성사시키고 단협을 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지난 5월 3일 2차 교섭을 위해 노동사무소를 찾았을 때 경찰이 정문까지 틀어막고 노동부가 교섭장소인 회의실 문까지 걸어잠근 걸 보고 분통이 터진다"고 항변했다.

민주노총울산투본은 이러한 노동부의 태도에 항의하는 뜻으로 산하 단위노조에 노동부 직원들의 출입금지 공고를 내기도 했다.

◇ 사용자측은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대해 "200여개 발주사와 1,300여개 전문건설업체가 제각기 입장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개별교섭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사용자단체인 울산시공장장협의회는 5월 6일 기자회견을 갖고 플랜트노조의 파업을 불법행위로 몰아부쳤다. 또 울산공단건설경제인협의회는 5월 9일 '건설플랜트 노사화합 촉구궐기대회'를 갖고 플랜트노조가 개별교섭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전문건설업체들의 경우 발주사인 원청회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어 사태 해결의 열쇠는 SK(주) 등 대형 발주회사들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 검찰과 경찰은 강경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 4월 8일 플랜트 조합원 820명을 연행하는가 하면 5월 5일 베셀타워에 올라간 고공농성자들에게 비옷과 음식물을 전달해달라며 남부경찰서를 찾은 플랜트노조 조합원 가족들을 폭행하는 등 강경 일변도로 대응하고 있다. 5월 10일 현재 구속 22명, 수배 7명, 시위 과정에서 부상당한 조합원이 100여명에 이른다. 노조가 입수한 검찰측 자료에 따르면 노조 직책을 가진 노조간부 전원이 형사입건 대상자로 되어 있고 분회 대의원 이상 간부들은 구속 검토자로 분류되어 있다.

◇ 박맹우 울산시장은 5월 7일 김태현 울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송인동 울산지방경찰청장과 함께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불법 폭력시위에 대해서는 법질서 수호와 시민 보호 차원에서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대처해나갈 것"이라고 밝혀 파업에 대한 적극적 중재노력보다는 검경의 강경 탄압기조에 편승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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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와 노동체제(멕시코와 한국) - 임영일

경제위기와 노동체제, 그리고 노동운동의 대응

- 멕시코와 한국 -

임 영 일 (경남대 사회과학부)

1. 머리말

멕시코와 한국은 역사, 정치, 경제, 문화적인 모든 면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비교해보고자 하는 노동체제나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둘 사이에 가로놓인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실제로 멕시코에 대한 관심은 별로 크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멕시코를 연구하는 학자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7년 말 한국에서 발발한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멕시코에 대한 많은 관심이 일었다. 멕시코는 한국에 앞서 이미 두 차례의 대규모 외환위기를 경험했는데, 특히 1982년 외채위기 때와는 달리 1994년의 외환위기를 불과 1년여만에 신속하게 극복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의 대상이었다. 1994년 멕시코 외환위기의 성격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와 유사한 것이었고, 그 대응에 있어서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적극적으로 IMF의 처방을 받아들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나아가 그 결과도 매우 유사하여, 두 나라 모두 1년여만에 외환위기를 종식시키고 마이너스 성장을 플러스 성장으로 반전시켰다.

IMF의 정책 기조를 충실히 따르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의 구사와 그 결과에 있어서만 두 나라가 유사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내용과 정도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이러한 경제정책이 초래한 사회정치적 결과에 있어서도 두 나라는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시간적 선후의 차이는 있으나 경제환경과 경제정책의 변화에 따라 경제적 불평등의 증대, 고용구조의 악화, 실질 소득의 후퇴와 빈곤화, 공동체와 가족 해체의 가속화, 범죄를 비롯한 사회문제의 증폭 등의 현상이 공통적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나아가 정치체제 및 노동체제의 변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이 변화가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 것인지는 아직 예측하기 힘들지만, 두 나라 모두에 있어서 이 변화는 단기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고도 구조적인 여파를 미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이 중에서 특히 위기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대응 및 노동체제의 변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두 나라의 사례를 비교해보려 한다. 두 나라의 노동운동은 모두 위기 상황 속에서 노동운동의 전략적, 전술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거나 실패하고 있으며, 그 결과 심각한 조직 약화와 노동운동의 위기에 직면했다. 국가와 자본은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기존의 노동체제를 해체하거나 재편하려는 강한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은 적극적인 동원화 전략으로 이에 맞서지 못한 채 수세에 몰려 있다. 이 과정에서 두 나라 모두에서 기존의 노동체제는 급속히 부식되고 있다. 국가 코포라티즘의 한 전형을 보여 온 멕시코의 노동체제는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그 기반이 부식되어 완만하게나마 보다 다원적이고 갈등적인 노동체제로 이행하고 있으며, 멕시코에 한 발 앞서 다원적 갈등체제로 전환했던 한국의 노동체제는 경제위기 속에서 급속히 그 기반이 부식되고 있다.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직면하고 있는 두 나라 노동체제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 나갈 것인지의 문제는 두 나라 뿐아니라 유사한 고민을 안고 있는 여타의 제 3세계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2. 기존 노동체제의 특징: 국가 코포라티즘과 '1987년 노동체제'

1) 멕시코의 국가 코포라티즘

멕시코는 제 3세계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를 장기간에 걸쳐 형성시켜 왔다. 멀리는 1910-17년간의 멕시코 혁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가까이는 1930년대 까르데나스 대통령 시대에 그 틀이 잡힌 이 노동체제는 그 정교함과 높은 제도화 수준, 이데올로기적 통합력, 그리고 그것이 포괄하는 노동자의 규모 등에 있어서 제 3세계의 노동체제 중에서는 가히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국가-당(제도혁명당, PRI)이 사실상 일원적으로 통합된 속에서 노동조직은 이 당의 한 핵심 부문으로 통합되었으며, 멕시코 혁명의 이념인 혁명적 민족주의가 통합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국영 기업과 사회보장제도를 이에 결합시켜 대중 통합의 물질적 기반으로 활용한 이 체제는 수십년에 걸쳐 정교하게 제도화되었으며 또 실제로 운영되어 왔다.

까르데나스는 당시의 대표적 노동조합조직인 '멕시코노동자지역총연맹(CROM)'을 배제하고 이 조직을 이탈한 소수파 노조인 '멕시코노동총동맹(CTM)'과 연합하여 정부-PRI/CTM을 긴밀한 상호적 수혜-후원의 관계로 유기적으로 통합한 유례없는 코포라즘 체제를 구축했다. 1980년대까지 본질적 변화 없이 유지된, 그리고 현재까지도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는 이 관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는 것이었다.

우선 정부 혹은 PRI가 공식노조에게 제공하는 후원관계를 보면,

첫째, 정부는 노조 등록제를 활용하여 친정부적 '공식노조(official union)'를 인정, 후원, 보호하고 그렇지 않은 노조들은 배제, 억압한다. 여기에는 배타적 단체교섭권, 조합원 축출권의 부여도 포함된다. 초기에 이 공식노조는 곧 CTM이었으나, 정부는 CTM과는 대립 혹은 경쟁관계에 있더라도 친정부적인 노조인 경우에는 이 틀 속으로 이끌어 들였다.

둘째, 정부와 PRI는 이 공식노조에 대하여 여러 형태의 제도화된 후원을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공식노조 조직에 대한 재정지원과 그 간부들에 대하여 제공되는 PRI와 정부의 각종 정치적, 행적적 직위들이다. 예컨대 PRI는 선거 때마다 하원과 상원, 그리고 주지사 등 지방선거직에 이르기까지 PRI의 '노동부문'을 대표하는 공식노조 간부들에게 일정 비율의 후보직을 할당해왔다. 정부가 제공하는 행정적 지위에는 정부 기구 뿐아니라 국가소유의 각종 공기업과 사회보장 기구 등에서의 고위직들이 포함된다.

셋째, 공식노조들은 연방과 주 수준에서 헌법과 노동법에 명시된 각종 위원회들에 참여한다. 특히 노 사 정 3자위원회인 '알선조정위원회'는 노사관계에서 사실상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판결기관이다.

넷째, 정부는 공식노조 조합원들에게 다른 조직의 노동자나 비조직노동자들, 그리고 나아가 일반 민중과 구분되는 각종의 사회경제적 특혜를 배타적으로 배정한다. 예컨대 이들은 정부가 출연하여 설립하고 노 사 정 삼자가 공동운영하는 사회보장기구인 멕시코사회보장원(IMSS)의 정식 등록할 수 있다. IMSS는 이들에게 연금, 의료, 가족계획 등의 사회복지를 제공한다. 국가부문 노동자들은 IMSS와 별도로 설립된 '정부노동자사회복지원(ISSSTE)'에 등록한다. 대체로 전체 노동력의 30%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인 이 등록인원이 대체로 멕시코의 공식부문(formal sector) 고용을 말해준다. 멕시코 노동자들 중 이들은 그나마 보다 나은 임금과 고용조건, 후생복지, 최소한의 사회복지의 수혜자이다.

정부와 PRI로부터 주어지는 이러한 후원의 대가로 공식노조들이 정부와 PRI를 위해 수행하는 기능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공식노조들은 경제발전을 위해서 최대한 파업을 억제하도록 요구된다. 실제로 CTM을 위시한 공식노조들은 그 동안 이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특히 경제적 위기의 시기 동안 노동자들의 요구를 억눌러 '위기 극복'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둘째, 지배적 노동정치로서의 "혁명적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공식노조들은 그 이데올로기의 지속적인 부식과 퇴락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멕시코 노동운동과 노동자계급이 보다 급진적인 이념과 의식으로 무장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안전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셋째, 중요한 정치적 고비 혹은 위기 때마다 공식노조들은 정부(PRI)를 지지함으로 강력한 정치적 후원을 제공해왔다. 1968년 학생시위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유혈진압에 대한 지지성명, 1982년 은행 국유화에 대한 대규모의 지지 시위, 그리고 경제위기 속에서 1987년부터 10여 년간에 걸쳐 진행된 소위 '사회협약(social pact)' 등, CTM을 중심으로 한 멕시코 공식노조는 많은 경우 산하 조직의 반발이나 조합원에 대한 심각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정부에 대한 단호한 지지를 표시함으로써 멕시코 코포라티즘의 효능을 입증해왔다.

넷째, 공식노조는 연방, 주(州), 그리고 지방의 모든 정치적 선거 과정에서 집권 PRI에 후보를 제공하고, PRI 후보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선거운동을 도우며, 대중들의 '표'를 동원하는, 잘 준비된 선거기구로 기능한다. 선거 과정에서 벌어지는 집회, 행진, 유세, 대규모 시위 등 모든 대중행사들은, 노동절(메이데이) 행사가 매년 그러하듯이, 노동조합과 집권 PRI의 유대를 과시하는 기회로 활용된다.

다섯째, 노동조합과 정부(PRI)의 이러한 결합은 멕시코 정부가 "멕시코 혁명"의 정부, 민중의 정부, 노동자의 정부라는 이데올로기적 신비화 효과를 수반한다. 노동조합의 정부 지지는 멕시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의 이러한 국가-노동간의 긴밀한 유착관계는 과거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치체제 하에서의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등 남미 국가들,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 하의 한국과 대만 혹은 싱가포르의 계급정치 구조와 구분되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국가가 노동부문에 대하여 정당을 매개로 해서 상징적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실질적으로 유의미할 정도의 정치적 대표성과 정책적 참여의 권한을 부여했고, 이것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제도적 기반이 확보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80년대 경제위기 이전까지는 적어도 노동계급의 핵심부문을 이 체제의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필요할 경우 이들을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있을 만큼의 실질적인 경제적 혜택을 부여하고 있었다는 점(국가가 이를 위한 경제적 자원-국영기업-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차이이다.

여타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들과 매우 다르게 멕시코의 이 코포라티즘 국가는 군부가 배제된 민간 기술관료들 중심의 정치적, 행정적 엘리트 지배체제를 이루어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물리적 통제력과 경제적 자원을 기반으로 장기간에 걸쳐 매우 안정적인 지배체제를 형성해왔다. 이 구조는 아래의 그림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멕시코 국가 코포라티즘의 기본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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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부문(자본) ------- 국가(정부) -------------- 당(PRI)

| +------------+ | |

+------+ 3자위원회 +--+ |

+------+-----+ +------------------+--------------+

| | | |

+---------노동(공식노조) 농 민 공공부문

(공식부문 노동자층) (공무원 국영기업)

노동인구 25-30% 대표 노동인구 3-5% 대표

IMSS 등록 ISSSTE 등록


2) 한국의 '1987년 노동체제'

멕시코의 이 노동체제는 한국의 노동체제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 체제는 예컨대 1960-70년대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의 '배제적 국가 조합주의' 체제와는 몇 가지 유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한국노총을 유일노조로 강제하는 노조 등록제(신고제), 이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 후원과 그 상층 간부들에 대한 독점권의 보장 및 특혜의 부여, 정부에 대한 충성과 하부 조직에 대한 통제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노조관료제, 노조 대표의 주기적인 정치적 호선(co-optation), 통제 이탈자에 대한 정부의 물리적 억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멕시코의 경우와는 달리 후원자-수혜자의 통합관계가 아니라 최상층부 노조간부에 대한 최소한의 혜택만이 부여되는 일방적인 배제와 통제의 체제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나마 한국의 이 노동체제는 1980년대 급진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한국노총과 정부와의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어 왔으나,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새로운 노동운동(new unionism)이 출현하여 급성장함으로써 한국의 노동체제는 형식적으로는 각각 통합과 배제의 대상이 된 두 세력의 이중주의(dualism) 체제로, 실질적으로는 현장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민주노조 운동 세력과 정부-사용자 간의 격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대립적 노동체제로 바뀌게 된 것이다. 편의상 이 체제를 '1987년 노동체제'로 부를 때 우리는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이 체제는 매우 제한적이고 불균형한 제도화를 그 특징으로 한다. 노사관계의 층위를 정치적 수준과 사회적 수준, 그리고 작업장 수준으로 나눌 때, '1987년 노동체제'는 작업장 수준에서의 노사관계만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제도화되고 있었을 뿐, 사회적, 정치적 수준에서의 노사관계 제도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작업장 수준의 노사관계 제도화 역시 매우 제한적이어서, 주로 기업단위 노조들이 상대적으로 안정화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부문들(대기업들, 공공부문, 그리고 일부 성장산업 중소기업들)에 국한된 것이었다.

둘째, 매우 높은 수준의 정치적 산업갈등을 수반하는 체제였다. 이 갈등은 무엇보다도 1987-88년의 개정 노동법이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수준의 노사관계 형성 혹은 제도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었음으로 인해 빚어진 '정치적 갈등'을 말함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을 '국가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예외적인 노동운동으로 파악하는 것도 이 문제와 관련된다.

셋째, 기업별노조와 기업별 교섭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제도화 수준을 보이고 있었던 작업장 노사관계 역시 매우 높은 수준의 산업갈등을 보여 왔다. 배제적 노동통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노동운동의 지도부(리더쉽)들은 필연적으로 현장의 평조합원 노동자들과 높은 수준의 호응성관계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지도부와 현장조합원의 높은 수준의 호응성에 기반한 대중동원화 전략은 한국의 노동운동 지도부, 특히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을 주도해온 민주노조운동 지도부에게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작업장 수준에서 촘촘히 짜여진 활동가들의 공식적, 비공식적 그믈망 조직의 존재는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에 있어서는 '강력한 노동조합'의 바로미터로 여겨져 왔다.

넷째, 그러나 '1987년 노동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것이 기업별노동조합이라고 하는 매우 분산적인 노동조합 조직체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 있다. 한국의 기업별노조는 일본의 그것과도 성격을 달리하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일본의 기업별노조가 기업조합주의(enterprise corporatism)의 틀 내에서 노사협조적인 '종업원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사실상 직종간 분리에 기반하여 조직된 한국의 기업별노조는 기업수준에서의 강한 대립적 노사관계를 특징으로 해왔다.

한국 '1987년 노동체제'의 기본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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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부)-----------------------------자본(기업)

| |

| |

| |

배제 |저항 대립

| 통제 억압 |

| |

| |

노동(민주노총)---------------------------개별노조

조직노동의 1/3 대표

3. 노동체제 전환의 압박: 신자유주의 공세

노동체제는 축적체제의 한 구성 부문이며 따라서 노동체제의 전환은 기존 축적체제의 위기와 그 재구축의 동학 속에서 구체적인 계기가 주어진다. 축적체제의 위기는 기존 체제의 효율성에 지배계급의 확신 약화, 그리고 체제 정당성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신뢰의 철회를 야기하며 타협의 물질적 기반을 약화시켜 계급 주체들간의 명시적, 묵시적인 갈등과 투쟁을 격화시킨다. 이 체제 전환의 방향과 내용, 속도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계급역량(class capacity)의 대비에 의해 좌우된다. 예컨대 전후 서구의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와 사민주의 노동체제의 구축이 서구 지배계급의 계급역량 약화와 노동계급의 계급역량 증대가 맞물려 빚어 낸 타협의 계급정치의 산물이라면, 멕시코의 통합적 국가 코포라티즘이나 한국의 배제적 국가 코포라티즘의 형성은 노동계급의 취약한 계급역량 위에서 구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82년 남미 공황은 멕시코 뿐아니라 거의 모든 남미 국가들에게 심각한 축적 위기를 초래했다. 멕시코의 지배계급은 이를 계기로 오랜 기간 계속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을 수출지향 산업화 전략으로 전환시켜 나갔다. 그러나 기존의 통합적 국가 코포라티즘 노동체제는 완만한 부식 과정을 거치기는 했으나 큰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마찬가지로 멕시코 노동계급의 취약한 계급역량이었다. CTM을 중심으로 한 주요 노조 조직들은 수십 년에 걸쳐 기존 노동체제 내에 과잉통합된 상태에 있었고, 외형적인 조직규모와는 상관없이 구조적, 조직적 계급역량 모두가 매우 취약해진 상황이었다. 일부 전략산업의 투쟁적 노조들은 산발적이고 고립적인 투쟁 역량을 발휘할 수는 있었으나 대안적 축적체제나 노동체제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고, 노동세력 내에서라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역량도 발휘하지 못했다. 멕시코 노동체제 전환의 계기는 1994년의 공황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싸빠띠스타 해방군(FZLN)의 무장봉기가 가져다 준 새로운 대안적 이데올로기 구심의 출현, 독립노조 세력의 새로운 연대조직의 형성과 그 확산, PRI 일당독재 체제와 어용노조 세력의 분열 및 입지 약화, 제도 야당들의 득세를 통한 다원적 정치구조로의 이행 등의 커다란 변화가 1994년 공황 이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1987년 노동체제'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기존 축적체제의 심화된 위기를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빚어진 국면적 정치위기를 배경으로 노동계급의 조직적 계급역량이 일시적으로 분출함에 의해 빚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노동체제의 과도기성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즉 이 체제는 기존 노동체제의 중요한 요소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노동시장, 노동조직, 노사관계 등) 주로 노동정치의 구조 변화만을 수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체제는 1987년을 계기로 형성되었으나 그 형성의 과정은 동시에 보다 본질적인 체제전환의 압박이 가중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97년 공황의 발발은 지체된 체제전환의 모순을 일거에 드러낸 계기가 되었고, 이 전환의 방향과 내용을 둘러싼 노자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진행되고 있다.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멕시코와 한국 모두 체제 전환을 압박하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은 동일한 것이다. 약간의 시차가 있기는 하나,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두 나라 모두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범세계적 경제개방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압박 하에 놓여 있었다. 멕시코의 경우 1982년이 결정적인 고비가 되었던 것에 비해 한국의 경우에는 1979-80년의 커다란 정치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던 경제위기를 덮는 효과를 발휘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칠레의 경우처럼 재강화된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통제된 신자유주의적 개방화와 구조조정의 과정이 진행되었지만 지배적인 쟁점은 정치적 민주화였고, 노동운동 역시 뒤늦은 정치적 급진화의 과정에 돌입했다. 한국의 노동정치가 남아공이나 브라질, 필리핀 유사한 양상을 보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적 급진화의 거품효과가 소진되어 갔고 있었던 1990년대에 들어서 작업장 수준에서 진행된 소위 '신경영전략'을 둘러싼 노자간의 공방은 격렬한 대립적 노동정치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체제 전환의 진정한 압박요인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 작업장정치의 양상은 1982년 이후 멕시코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진행된 유연화투쟁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수출산업화로 방향전환을 하고있었던 멕시코의 자동차 산업체들은 수출경쟁력 향상을 위한 유연생산체제의 구축과 노동조합의 약화를 동시에 추구하였고, 노동조합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기존의 어용노조 상층부는 경제위기의 상황 속에서 정부 및 사용자들과 맺은 허구적인 사회협약의 틀 속에 안주했으나, 현장 노조들은 장기 파업투쟁을 포함하여 강력한 저항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사용자들의 생산입지 전환 전략, 그리고 정부의 탄압에 의해 좌절되었다. 한국의 경우 민주노총 소속의 주요 대공장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합리화 반대 투쟁이 계속되었고, 사용자들이 입지 전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지 못하여 기업 수준에서 부분적인 양보와 타협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 정도가 차이일 수 있겠다.

경제위기는 이 사용자 공세를 총자본 수준에서 강제할 기회로 이용되었다. 멕시코의 경우 주로 1980년대 말 이후 공기업의 광범위한 민영화 조치가 이루어졌고, 이후 1994년 위기를 거치면서 대외 개방의 확대와 광범위한 외자 유치, 공장 폐쇄와 설비 이전을 포함하는 구조조정,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 완화, 임금삭감과 고용 축소, 복지 재정 축소를 포함한 긴축재정 정책 등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멕시코 경제는 다시 성장세를 회복하였으나, 노동자와 하층 민중들의 생활조건은 대폭 후퇴되었다. 코포라티즘 체제하에서 장기간 유지되어 왔던 노사정 합의 구조는 급속히 약화되었으며, 1987년 이후 10여 차례에 걸쳐 추진된 사회협약은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합의 체제의 가동이라는 성격보다는 기왕에 존재해온 합의 구조의 약화 혹은 폐기를 대체하는 이데올로기적 치장물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사회적합의주는 본질적으로 상호 모순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경제 위기를 계기로 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은 정도의 차이, 시차의 차이가 있을 뿐 멕시코의 경우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크게 두 가지 정도이다. 우선, 1982년 이후의 멕시코와는 달리 한국의 경제위기는 높은 인플레이션을 수반하였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당시 멕시코가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한국은 이미 수출지향 산업화 전략을 장기간에 걸쳐 채용해왔다는 축적체제상의 차이를 반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멕시코도 1994년 위기는 이미 수출지향 산업화 전략으로 전환한 이후 발생한 것이어서 급속한 페소화 가치하락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같은 초 인플레를 수반하지는 않고 있다. 두 번째로, 한국의 기본 노동체제는 조직노동자의 통합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 멕시코와는 달리 일방적인 긴축재정을 운영하지는 않았다. 해고와 실업의 증대를 수반하는 고용조정의 과정에서 정부는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도 확대재정 정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부 재정적자의 대부분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본 보조적 공적 자본 투입에 대부분 충당되고 있지만, 제한적인 범위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정부의 복지재정 지출 역시 급격히 증대했다. 그러나 이 차이 역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정부 정책의 기조가 초기부터 '생산적 복지'로 정향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팽창된 정부재정과 외자 도입은 앞으로 인플레를 수반하면서 긴축 재정 정책으로의 선회를 강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복지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가 그것의 제도화에는 지극히 냉담하면서 일시적인 구호자금 확대 정도로 위기를 넘기려 하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두 나라 모두 경제위기를 매개로 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압박은 기존 노동체제의 지속가능성을 크게 위협했거나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1980년대 이후 진행되고 있는 범세계적인 현상의 일환이다. 이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초국적)자본의 관점에서는 유럽의 사민주의적 노동체제든 멕시코와 같은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든 혹은 한국과 같은 대립적 노동체제이든 그 특수성과는 상관없이 유연 노동체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탈계급화된 다원주의적, 원자적 노동체제로 전환되기를 강압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사민주의적 노동체제를 해체하는 것, 멕시코의 경우에는 어용노조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국가-노동의 후원-수혜 관계를 해체시키는 것, 한국의 경우 대기업을 중심으로 포진해있는 강력한 투쟁적 노동조합을 약화시켜 '1987년 노동체제'의 노동 측 골격을 허무는 것이 그 목표라 하겠다. 노동시장 조건으로는 이미 높은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던 한국 노동시장의 유연화=정리해고제의 도입이 위기 초기에 그토록 중요했던 까닭이다.

4. 노동운동의 대응: 조직역량의 취약성과 위기

한국과 마찬가지로 멕시코의 좌파 정당이나 정치조직들, 다양한 민중운동체들, 그리고 노동조합 세력들은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는 투쟁을 줄곳 전개해오고 있다. NAFTA 협정을 계기로 미국과 캐나다의 진보적 노동조합 조직이나 사회운동 단체들과의 연대 투쟁도 활발하다. 그리고 싸빠띠스타 세력은 비록 남부 치아빠스의 해방구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1982년 이후, 그리고 1994년 이후에도 이러한 저항운동이 폭넓은 대중운동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조짐은 별로 없다. 멕시코의 좌파 정치세력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대중적 기반이 별로 없는 상황이며, 도시 빈민이나 가난한 농민들의 공동체 운동도 활발하기는 하지만 고립적이고 국지적인 운동의 차원을 크게 넘어서고 있디 못하다. 싸빠띠스타는 멕시코 정부와의 평화협정으로 작은 해방구 안에 갇혀 있고, 이 해방구 밖의 지역에서는 무장활동이 아닌 공개 정치조직 활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여 1997년 FZLN이라는 정치조직을 결성한 바 있으나 그 결과는 대실패로 끝나 버렸다. 앞에 언급하였듯이 자동차 부문의 노동조합들이 산발적으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는 했으나 초국적 자동차 산업체들이 기존 공장을 폐쇄하거나 생산축소를 단행하면서 북부 저임금 지역으로 새로 공장을 지어 옮겨가는 입지이전 전략을 추진하면서 결국 무력화되어 버렸다. 그나마 투쟁적인 자동차 노조들은 CTM이 아닌 CROC 소속이 다수였는데, CROC가 CTM보다 더 진보적인 노동조합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노동조합에 의해, 그나마 기존의 어용노조 세력인 CT와 그 중심 노조인 CTM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멕시코 민중운동의 이러한 취약성 때문이다. 1997년 여름 97세의 나이로 사망한 벨라스께스가 반세기 이상 위원장으로 있었던 CTM은 1982년이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줄곳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국가 코포라티즘 노동체제의 한 중심 축이었던 멕시코의 공식노조 세력들, 그 중심인 CTM으로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지니는 반민중성 보다는 그것이 기존에 그들이 누려 왔던 여러 가지 특권들을 축소하고 조직 내부적으로도 어용 지도부에 대한 하부 조직원들의 충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다. CTM은 민영화, 임금 삭감, 최저임금 인상 억제, 구조조정 등 1982년 위기이래 계속된 마드리드-살리나스-쎄디요 정권의 일관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노사정 협상 테이블에서의 철수, 파업 위협, 선거에서의 PRI 지지 철회 위협 등을 반복해왔으나 그 한계는 너무도 분명했다. 모든 것은 위협의 제스츄어에 그쳤으며 결과적으로는 항상 협상 테이블로 복귀했고 선거 시마다 정부와 PRI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으며 실제 파업투쟁을 조직한 바도 없었다. 그러나 CTM의 지도부에 대한 정부와 PRI의 정치적, 경제적 혜택은 계속 축소되었고, 조직노동자들의 임금, 고용조건, 복지 혜택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었다.

자기 조직의 유지, 혹은 조직에서의 어용 지도부들의 입지 유지를 위해서라도 투쟁하지 않으면 안될 때에도 실제로 투쟁에 나서지 못하고 곧바로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는 '사회협약'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멕시코 공식노조의 이 취약성은 예컨대 한국의 한국노총의 처지와도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CTM은 공식적으로는 600만에 가까운 조직원을 가진 거대 노조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계상의 숫자일 뿐, 실제로 그 내부를 드려다 보면 조직적 취약성은 바로 드러난다. 우선, CTM은 주로 지역노조들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고, 이 지역노조들은 핵심적 공공부문 노조나 대규소 사업장이 아닌 중소 및 영세 노조들을 포괄하는 조직이다. 지역노조들은 CTM 중앙조직과 다를 바 없이 지역 차원에서 정부와 PRI, 그리고 사용자들과 결탁하고 있는 어용 노조간부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고, 이들은 조합원들의 참여와 지지를 자기 권력의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고 있는 자들이다. 조합원들의 조합비는 자동 공제되어 이들의 수중으로 넘어 가나 그 액수는 별 의미가 없다. 이들은 '보호계약'의 대가로 사용자들로부터 임금을 지급받는 존재에 불과하다. CTM 중앙조직은 재정의 10% 미만(6% 정도일 것으로 추산됨)만을 조합비와 의무금에 의존할 뿐 대부분의 재정은 정부의 보조금에 의해 충당된다. 요컨대 조직 자체가 동원화와 투쟁의 조직이 아니라는 노동자 통제조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고, 설사 정부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투쟁에 나서야만 할 때가 되더라도 지도부는 실제 동원능력에 대한 자신이 없고 그 효과도 기대할 수 없으며, 그보다 대중동원화가 초래할 통제능력의 상실에 대한 우려가 더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멕시코의 독립노조 세력들은 1994년 위기 이후 독자적 조직화의 노력을 강화하였고, 그 결과 1997년 새로운 독립노조 연합체인 전국노동자연합(UNT)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조합원 수로는 대략 150만 정도를 대표하는 UNT는 공식노조와는 달리 정치적으로는 야당인 PRD와의 연대를 지향하고 정부에 반대한 대중동원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4년 위기 발발로 3년간 중단되었던 노동절 행사가 다시 재개된 1998년 5월 1일에 이들은 실제로 쏘칼로 광장에 30만에 달하는 조직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항의 시위를 조직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이 현장 수준에서의 대중동원 투쟁, 즉 파업투쟁을 적극적으로 조직한 바는 없다. 그리고 UNT에 참여하고 있는 주요 노조와 간부들은 CTM이나 CT를 탈퇴하지도 않고 있으며 PRI 당적을 버리고 있지도 않다. UNT 조직 내에서 분명한 독자 노선을 지닌 독립노조 세력은 민중연대조직체인 진정한 노동전선(FAT) 소속으로 UNT에 가입해있는 금속노조(STIMACH) 정도인데, FAT의 조직원이라야 모두 4만 여명, STIMACH은 1만 8천에 불과하여 아직 그 세력은 미미하다. UNT 소속 조직들이 과거의 경험처럼 정부와 PRI로부터 일정한 반대급부를 보장받는 대가로 다시 공식노조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은 과거보다는 크지 않다. 절대적 지배 정당으로서의 PRI의 입지가 많이 약화되어 있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으로 인해 조직노동부문을 통합할 수 있는 정부-PRI의 물질적 기반 자체가 크게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유인(incentive) 제공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CTM이 그러했듯이 '더 많은 떡'이 아니라 '덜 적은 떡' 조차도 어용노조 간부들에게는 커다란 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아직은 상황을 낙관할 수 없다. UNT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급진 좌파계열의 노조운동이 메이데이 노조협의체(CIPM)로 남아 있으나 그 세는 더욱 작고 게다가 이 조직은 노조 조직이라기보다는 급진 좌파 이념을 가진 민중운동 조직체의 연합으로 아직은 그 힘이 매우 미약한 상황에 머물러 있다.

현장 수준에서의 유연화 공세가 수년간 지속된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한국 노동운동의 1996-97년 노동법 총파업 투쟁은 신자유주의에 적극 대응하는 대중투쟁의 모습으로 비추어져 전세계적인 각광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냉정히 관찰할 때, 이 투쟁은 '1987년 노동체제'의 틀 내에서 전개된 대중동원 투쟁의 마지막이 되었다. 이 투쟁은 그것이 목표로 했던 것 두 가지 모두를 획득하지 못했다. 우선, 이 투쟁은 '1987년 노동체제'를 해체하려는 정부와 자본의 시도를 저지하지 못했고, 유연 노동시장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데에도 실패한 셈이 되었다. 민주노총이 총력을 기울여 조직한 이 투쟁은 '어설픈 신자유주의 정권'의 몰락의 기폭제가 되었고 '1987년 노동체제'의 해체 시기를 다소 연장시키는데 그쳤을 뿐이다. 1997년 봄의 노동법 개정은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되었다.

1997년 말 경제위기의 발발과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총체적인 위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의사 코포라티즘적인 노사정위원회 참여와 정리해고를 수용하는 '사회협약' 체결, 이에 대한 조직 내 반발로 인한 지도부 사퇴, 강경파 지도부의 재선출과 총파업 등 강경투쟁 노선으로의 선회, 파업 실패와 노사정위원회로의 복귀, '사회협약' 불이행에 항의하여 다시 철수, 거듭된 총파업 선언과 철회, 노정교섭 요구, 현대자동차에서의 대규모 정리해고와 파업투쟁, 그리고 그 이후의 조직분열, 만도기계에 대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 1998년 한 해 동안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혹자의 표현에 의하면 '지그재그 노조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급속히 위축되었고, 1999년에 접어들어서는 사실상 거의 조직 마비 상황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1987년 노동체제'의 실질적인 노조 조직의 축을 이루어 왔던 민주노총은 이 과정에서 실제 동원가능한 내부 조직역량의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게 된 셈이다. 경제위기 발발 이후 한국노총이 보여 준 모습이 멕시코의 CTM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음은 양자가 매우 비슷한 성격의 노조 조직체라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CTM이 산하 조직과 노동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노조간부의 특권 축소에 대한 반발로 주기적으로 파업의 위협과 협상 테이블로의 복귀를 반복하였던 것과 한국노총의 전략은 거의 같은 것이었다. 양자는 모두 '덜 작은 보상'을 추구하는 전략을 취한 셈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민주노총은 사실상 한국 노동계급의 계급역량을 대표하는 조직이다. 구조적 역량의 측면에서 보면, 민주노총은 조직의 크기에 있어서는 전체 조직노동자의 1/3, 조직대상의 4% 정도를 대표하는 작은 조직이지만, 핵심 산업부문의 장악력이라는 지표에서는 매우 강력한 조직이다. 그러나 조직적 역량의 측면에서 보면 민주노총은 기업별노조라고 하는 고도의 분산적 조직체계를 골간으로 하는 매우 취약한 조직이다. 민주노총은 낮은 조직적 집중성을 투쟁성, 이념적 결집성, 헌신적인 리더쉽이라고 하는 추상적 요소로 보완해온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의 이익을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방어할 제도적 장치가 전무했고, 양보할 수 있는 조직 자원도 없었으며, 양보의 대가로 약속된 보상의 실현을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다시 이 추상적 운동성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대량실업의 상황 속에서 급격히 위축된 대중의 자발성, '사회협약'에 대한 조직 내부의 반발, 산업과 업종과 사업장 수준에서의 서로 다른 조건과 이해관계의 차이, 이를 극복하고 재동원화를 준비하기 위한 전략과 시간의 절대적인 부족 등을 추상적인 운동성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신자유주의와 계급연합, 혹은 대안의 부재

남미 군부독재를 분석한 한 논자는 이것이 신, 구의 중간계급 출신 엘리트 장교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고 또 같은 계급적 기반 위에 선 것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시작되고 민간정부 하에서도 지속성을 가지고 추진되고 있는 개방화, 시장자유화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부르주아, 민간 기술관료층, 그리고 도시 중간계급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 사회정책의 지속은 도시 중간계급 역시 날카롭게 균열시킨다. 소득 분배 구조의 변화를 지표로 하더라도 그 중 소수의 상층 지식계급 엘리뜨를 제외한 나머지 중간계급의 고용조건과 생활조건은 가파르게 악화되고 있음을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구 체제에 대한 신뢰가 극도로 저하되는 위기 발생의 초기 국면을 경과한 이후에도 이들이 신자유주의의 계급적 지지 기반으로 남아 있으리라 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신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제 뿐아니라 사회 자체를 해체하는 파괴적 본질을 지닌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계급(연합)적 기반을 가진 것이든, 지지 계급(들) 자체도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초래하는 결과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나아가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것을 우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복구, 혹은 현재의 고수가 그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고, 나아가 체제 전환의 급진적 변혁의 과제를 새롭게 제기하거나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사회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 대안 부재의 세계적 공간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신자유주의를 적극 지지하지 않으나 누구도 그것을 제어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서구의 사민주의,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국가주도 개발주의와 날카로운 대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남미의 주요 산업국들의 경우 1982년 외채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는 이미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조류가 되었다. 이들 남미 나라들에서 신자유주의는 이미 파괴적인 사회해체의 결과들을 빚고 있고, 그것을 조율하거나 제어할 사회제도적 장치나 조직화된 사회세력의 교두보들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상당 기간 동안 불가능할 정도의 상황에까지 도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싸빠티스따에 대한 과잉 관심과 과잉 기대는 그것이 어떤 대안을 형성할 수 있어서라기보다는 절박한 한계 상황에 내몰린 멕시코와 멕시코 민중의 절박한 처지를 극적인 모습으로 상징화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성형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제도화의 결핍에 대한 시민사회 최후의 응답"이다. 미들브룩은 1982년 공황 이후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멕시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무기력한 대응을 '침묵의 소리'라 묘사한 바 있다. 최근 수년에 동안 국가 코포라티즘의 해체 현상, 정치적 다원화의 진전, 독립노조운동 세력의 성장 등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만, 멕시코 민중운동이 신자유주의의 추세에 거스르는 강력한 연대운동의 전선을 복구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는 당분간 불가능한 듯하다.

신자유주의가 사민주의와 주 전선을 이루고 공방을 계속하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사민주의 혹은 복지국가의 제도적 교두보를 가지지도 못했고, 동아시아 국가들과 같은 발전주의 국가의 전통도 가지지 못했으며, 시민사회의 형성과 발전도 크제 지체되어 있는, 그리고 급진 계급주의 세력의 영향력도 매우 미미한 남미 나라들에서의 남아 있는 유일한 대안은 전통적인 공동체주의적 민중연대 전선의 구축뿐인 듯하다. 멕시코의 경우는 바로 이 점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 전망은 결코 밝지 못하다.

멕시코와 비교한다면,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 공세가 본격화하기 이전의 시기에, 그리고 경제위기에 직면하기 이전에, 정치적 재민주화의 과정이 시작되고 시민사회의 활성화가 진행되었으며 특히 배제적 국가 코포라티즘 노동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노동운동의 급진화가 진행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민중연대는 급속히 해체되어 반신자유주의 전선 구축의 과제는 거의 온전히 노동운동의 몫으로 주어져 있다. 새로 성장하고 있는 시민운동 세력들과 더불어 새로운 민중연대를 재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이는 한국의 시민운동이 그 자체의 급진화, 진보화의 운동 단계를 우선 경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제위기 이후 민주노총의 외로운 투쟁은 한국의 상황을 '침묵의 소리'는 아니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메아리 없는 외침'의 상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정황 때문이 아닌가 한다.

멕시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계급적 기반을 찾아내기는 힘들 듯하다. 결국 문제는 반신자유주의 정책연대, 운동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사회운동의 역량에 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딜렘마는 그것이 기존의 계급구조 혹은 계급연대를 해체하고 다차원적으로 분해하며 사회구성원들의 연대와 결속의 끈을 잘라 내어 그들에게 개별자적 대응을 모색하도록 강압한다는 점에 있다. 한국의 경우 과거의 민중연대는 이제 거의 해체되었으며, 새로 대두하고 있는 시민운동 세력들은 기층 대중을 조직화하지 못하고 있을 뿐아니라 다양하고 분산된, 그리고 많은 경우 상호 모순적인 쟁점들의 분화선에 따라 흩어져 있다.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경우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이중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 상호 연대는 쟁점별로 형식적인 결합을 이루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일시적으로 고삐풀린 자본주의라 느끼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대표들이 이에 대해 무엇인가 행동을 취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들이 이것이 현재와 같은 시장 경제의 논리적 귀결이며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런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구조적 이유가 있음을 직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힘에 진정으로 맞서고자 한다면 반자본주의적 시각으로부터 수혈받는 운동을 건설해야 함을 직시하기 바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반대자들이 모두 이런 시각을 공유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 또 다른 도전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본주의 자체가 점점 더 나쁜 대안과 선택지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노동대중들이 이를 인식하고 분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Martin Hart-Landsberg)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이라도 교두보 역할을 해내어야 할 책임이 그나마 노동운동에게 지워져 있는 것이 멕시코와 한국 모두의 상황이다. 누구도 그 전망을 쉽게 밝게 보지 못하고 있지만, 양국의 노동운동은 어떻든 기존의 노동체제를 해체하고 스스로 새로운 노동체제를 형성해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다. 멕시코의 신노동운동인 UNT가 해체되어 가고 있는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모델을 형성해낼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고, 한편으로는 분산적 노동조직 체제의 골간인 기업별노조를 해체하고 집중적 산별노조 체제를 건설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중심의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작업에 애쓰고 있는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어떤 식으로든 미래 운동의 교두보를 확보해 나갈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그러나 대안의 확보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어떻든 그런 노력 속에서만 비로소 찾아질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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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엥 헌장 - CGT

아미엥 헌장


아미엥에서 개최된 총동맹 회의는 CGT의 규약 제2조를 재확인한다.
"CGT는 모든 정파를 초월하여, 임노동계급과 고용주 계급을 폐지할 목적의 투쟁을 자각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를 결집시킨다."

회의는 이 선언이, 노동자계급에 대해 자본가계급이 강요하는 일체의 도덕적, 물질적인 착취와 억압에 맞서 경제적 영역에서 노동자를 들고 일어서게 하는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이라고 간주한다.

회의는 이러한 이론적 주장을 다음과 같은 점들을 통해 명확하게 한다.

생디칼리즘은 일상적 요구 속에서,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등과 같은 당면 성과물을 쟁취함을 통해 노동자 상호간의 협력과 노동자 복지를 증대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임무는 생디칼리즘의 단지 일측면일 뿐이다. 생디칼리즘은 완전한 해방을 예비하며, 그것은 오직 자본가 계급의 몰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생디칼리즘은 행동수단으로 총파업을 인정하며, 오늘날 저항의 조직인 노동조합이 미래에는 생산과 분배의 조직이자 사회 재조직화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회의는 이러한 이중적 임무, 일상적 임무와 미래의 임무가 임금 생활자의 지위로부터 도출된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지위로 말미암아 노동자계급은 속박당하고 있으며, 정치적, 철학적 주의주장과 지향에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본질적인 조직 - 노동조합에 가입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결과적으로, 회의는 개인에 관하여 조합 외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철학적 관점에 부합하는 어떠한 형태의 투쟁이든 참여할 수 있는 조합원의 완전한 자유를 확인하며, 대신 조합과는 무관하게 가지고 있는 견해를 조합 내부로 도입해서는 안된다는 부탁으로 그 자유를 제한한다.

회의는 조직에 관하여, 생디칼리즘이 최대의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행동이 고용주와 직접적으로 맞서야 하기 때문에 가입조직들은 노동조합인 이상,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노조와는 별개로 혹은 함께 사회이행을 추구하고 있을 수도 있는 당이나 정치단체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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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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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과 대중적 노동운동 - 김금수

세계노동운동사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 운동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1917년 무렵 노동자 대중은 극도로 궁핍해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손실된 데다가 생활수준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입니다. 게다가 수십 년에 걸친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와 자유가 박탈되면서 사회적인 적대모순이 확대되고 첨예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 투쟁들은 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쟁을 유발한 제도에 대해서도 저항한 것이었죠.


마치 먹구름이 폭풍우를 몰고 오듯 자본주의는 전쟁을 몰고 온다고 조레스가 말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황의 위기를 가져오고 새로운 영토 정복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만든다. 그리고 각 국가의 사회구성 내 자본주의 발전과 각국 자본주의의 대결이 전쟁을 불러일으킨다(Michel Beaud, 1981: 218). 자본주의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세계를 국가경쟁, 제국주의적 팽창, 갈등과 전쟁의 방향으로 몰고 갔다(Eric Hobsbawm, 1987: 549).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노동자들의 상태
1914년 8월 제1차 세계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914년 6월의 사라예보 사건을 구실로 7월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 그 시작이었죠. 이것이 동맹국들(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과 협상국들(프랑스, 러시아, 영국) 사이의 충돌로 발전하면서 바야흐로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되었습니다. 교전국가들의 독점부르주아지, 군부, 정부들이 이 전쟁을 장기간 걸쳐 준비한 주역들이었어요.
제1차 세계대전은 그 규모나 결과 면에서 미증유의 전쟁이었습니다. 34개에 이르는 국가가 이 전쟁에 관여했고, 직접적인 군사비가 2080억 달러에 달했죠. 이 전쟁에 동원된 군인은 7천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1천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고 2천만 명 이상이 불구가 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쟁은 많은 나라들에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고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경제관계를 깨뜨렸어요. 많은 산업부문과 교통기관이 파괴됐고, 농업생산이 격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속, 연료, 전력, 면화 등 주요 자원들이 비생산적인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어, 사람들을 살상하는 데 이용되었죠.
전쟁은 자본의 집적·집중을 촉진하고 독점체의 힘을 강화하여, 독점자본이 국가독점자본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가속시켰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로 그리고 독점에서 국가화로 나아가게 했죠. 그런 점에서 전쟁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킨 셈입니다. 한편, 제국주의전쟁이 만들어놓은 조건들은 부르주아 국가와 금융과두제 힘의 결합을 바탕으로 '전시국가자본주의'가 성립되도록 했습니다. 전시국가자본주의는 생산·에너지·원료·인적 자원 등 모든 잠재력을 전쟁목적에 동원하고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강력하게 규제했습니다. 이 체제는 자본에게는 이윤을 보장했지만,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족의 투쟁에 대해서는 억압으로 대응했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은 이전에 비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그들의 가족들도 일시적으로나 영구적으로 생계수단을 상실하게 되었죠. 그리고 군사행동이 행해진 곳이나 적군이 점령한 국가 또는 지역에서는 경제적인 황폐화가 급속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군사행동에 따른 생산력의 파괴, 국민경제 기본부분의 군수부문으로 대체, 생산의 위축 등으로 생활필수품이 심각하게 부족해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세르비아, 발칸 지역 등의 노동자들이 특히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전쟁 중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의 구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쟁에 동원된 남성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비노동자층과 여성·청소년들이 메우게 된 것이죠. 광산업과 기계제조 그리고 화학 등의 산업부문에서 일하는 여성과 연소노동자의 수가 나라에 따라서 4배에서 8배까지 증가했습니다. 또, 점령 지역에서 피난해 온 난민, 외국인 노동자, 군사 포로, 군인 등의 노동이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에 종사했죠. 어느 교전국가에서든 노동조건이 현저히 악화됐습니다. 기업주들은 '애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서 노동일을 연장하고 노동 강도를 강화했어요. 만성적 식량부족으로 기아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노동 강화와 장시간 노동이 일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또, 여성·연소노동자와 난민 또는 군사포로들이 산업부문에 활용되면서 산업재해가 급증했고,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1917년 무렵 노동자 대중은 극도로 궁핍해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손실된 데다가 생활수준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입니다. 게다가 수십 년에 걸친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와 자유가 박탈되면서 사회적인 적대모순이 확대되고 첨예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 투쟁들은 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쟁을 유발한 제도에 대해서도 저항한 것이었죠.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극히 불리한 여건들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심각하게 제약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 내부에서도 매우 복합적인 모순들이 형성되도록 만들었죠. 언론·집회의 자유가 억압당했고 파업과 시위의 참가자와 반전 문서의 필자, 출판자, 배포자들이 투옥되거나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런 일은 러시아와 같은 반민주주의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영국과 같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전통을 유지한 국가들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형태나 방법 그리고 강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교전국들은 모두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했습니다. 사회배외주의자들(Social-chauvinists)이 주장한 노동과 자본 사이 '국내평화' 정책은 공통적인 현상이었죠. 많은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이 '자국'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옹호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혼란과 동요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전쟁 기간 동안 노동자계급 구성이 급격하게 변화한 것도 노동운동 발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어요. 기존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군대에 동원되고 수많은 소부르주아 층과 여성 및 청소년들이 공업과 운수부문에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의식이나 노동운동의 수준이 저하되었죠. 그러나 가혹한 전쟁 조건들은 노동자들이 거센 불만과 분노를 품도록 만들었고, 반전 투쟁과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전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투쟁들이 진전됨에 따라 노동자들은 맹목적 애국주의에서 점점 벗어났지요 그리고 전쟁의 진정한 원인과 성격을 알게 되면서 계급적으로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노동자 대중의 반전의식과 투쟁이 자연발생적으로 고양되면서 사회의 민주주의적 정치역량을 강화했고, 이것은 노동운동의 변혁적 사고와 행동을 촉진했습니다.
이제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주요 국가별로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과정을 살펴봅시다.

러시아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는 모습은 두드러졌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탄압 때문에 러시아 노동운동도 일시적으로 후퇴를 경험했죠. 많은 합법적 노동자 조직이 금지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노동조합의 활동도 '특별 감시' 하에 놓여있었습니다. 군사행동이 벌어진 최초의 5개월 동안에는 파업이 70건, 파업 참가 노동자는 4만 명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어요. 그러나 1916년 2월과 3월이 되면서 노동운동이 차츰 활발해졌고, 같은 해 봄과 여름에는 차리즘(tsarism)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전쟁 발발 반년이 된 1915년 2월부터 그 해 7월 사이에는 파업 발생이 574건, 파업 참가자가 24만1천 명에 이르렀죠. 또 전쟁 개시부터 1916년까지 파업건수는 606건에 이르렀고 참가자 수는 43만2천 명이었습니다. 이 파업들 중에서 36%는 정치적 파업이었으며, 정치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전체 참가자의 45%에 달했습니다.
1915년 이후에 일어난 파업들은 전선에서 차르 군대의 심각한 패배와 시기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고양되면서 전국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죠. 특히, 농업이 황폐해진 상황에서 발생한 파업투쟁들은 차리즘과 전쟁에 대한 병사와 농민대중의 투쟁을 촉발시켰습니다. 노동자계급의 과감한 투쟁이 농민들의 자각을 촉진하고 군인들의 전쟁에 대한 의식을 변화시킨 것이죠. 전선의 불안하고 힘겨운 상황, 전쟁에 따른 막대한 희생, 물가 폭등, 기아와 궁핍, 곡물과 가축사료의 태부족 등이 농민과 군인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끔 만들고, 자신들의 정치적 의식을 일깨우도록 한 요인이었습니다. 1915년에 177건이었던 농민투쟁은 1916년에는 294건으로 증가했죠.
노동자 투쟁이 규모가 점점 커지고 완강해지면서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리고 농민운동이 고양되고 군인들의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었습니다. 혁명적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1916년 10월, 세 개의 강력한 정치적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식량위기와 생활필수품 값의 폭등, 그리고 부당이득에 저항한 파업이죠. 6만7천 명이 참가했고, 노동자와 경찰대의 충돌 과정에 군인들이 오히려 노동자 편에 섰습니다. 두 번째는 차르 정부가 볼셰비키 조직에 속한 해군 병사를 탄압한 데 대한 항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50여 공장의 12만 명 노동자가 주축이 되고 거기에 중소기업 노동자와 학생들이 참가한 파업이었습니다. 이렇듯 대규모적인 대중 정치투쟁이었던 10월의 파업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죠.

독일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군사행동이 시작되면서 크게 위축됐습니다. 이는 사회배외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전쟁 옹호자들이 자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국내 평화'를 강조한 결과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도 노동자들은 점점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준비했습니다. 전쟁 조건에서 박탈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반전 투쟁에 참가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14년 12월2일, 칼 리프크네히트는 당의 결의를 어겨가면서까지 군사예산에 대해 반대 투표를 했습니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운동의 국제주의 경향 강화와 반전운동 발전에 큰 의의를 갖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베를린, 드레스덴, 브라운슈바이그, 고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등 여러 도시의 사회민주당 조직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죠. 칼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해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제트킨, 프란츠 메링, 빌헬름 피크 등을 중심으로 사회민주주의자 중핵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제국주의 전쟁 정책에 반대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915년 봄부터 대중적 반전행동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3월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여성들이 평화와 물가 억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5월에는 시위대 약 1천5백여 명이 제국의회에 몰려들어가 전쟁 반대를 외치기도 했죠.
가을이 되면서 반전투쟁이 한층 더 활성화되었습니다. 1915년 11월 베를린에서 시민 1만여 명이 '빵과 자유', '전쟁 반대' 슬로건을 내걸고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칼을 빼든 기마 경찰대가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다음 날에도 되풀이되었습니다. 많은 도시에서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저항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집회·시위와 결합된 것이었죠. 켐니츠에서는 이런 성격의 투쟁이 몇 주 동안 진행되면서 경찰과 충돌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라인 지방의 광산 노동자, 함부르크의 조선 노동자와 섬유 노동자들도 저항에 참여했습니다.
대중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경찰은 감시를 확대하고 반전운동 활동가들을 체포했습니다. 정부는 반전운동과 저항운동 참가자들을 전선으로 보내버리기도 했죠. 게다가 17세부터 60세까지 노동능력을 가진 모든 남자의 강제적 노동의무를 규정한, '조국을 위한 보조적 봉사에 관한 법률'이 1916년 말 채택되었습니다. 이 법률은 고용의 자유를 박탈한 것이었고, 사실상 노동자들을 기업주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대중적 반전운동이 진전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가 없었어요. 새로운 노동자들이 투쟁에 참여했죠. 여기서 적극적 역할을 담당한 세력이 여성과 청년들이었습니다. 1916년 4월 예나 지방에서는 칼 리프크네히트의 주도로 '계급평화의 허구'를 거부하고 '국제연대와 계급투쟁'을 첫 번째 의무로 제기하는 혁명적 청년 그룹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모든 힘과 수단을 동원하여 반전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전쟁이 조성한 정세를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앞당기기 위해 이용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도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은 1916년의 메이데이를 겨냥하여 국제연대와 제국주의전쟁 반대를 위한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메이데이를 맞은 베를린에서는 보병과 기마경찰의 경계가 삼엄했죠. 그럼에도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포츠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리프크네히트가 외친 '전쟁 반대', '정부 타도' 구호에 맞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리프크네히트가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군중들은 구호를 계속 외쳤죠. 같은 날 독일에서는 여러 도시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그 뒤로 2개월 가량 계속된 반전운동의 서곡이었어요. 이와 함께 여러 도시에서 '기아폭동'이 빈발하였는데, 어떤 곳에서는 정부가 계엄을 선포해야만할 정도였습니다.
새로운 탄압이 시행되었습니다. 리프크네히트는 4년 1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고, 룩셈부르크와 메링 등은 구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대중투쟁은 점점 고양되었습니다. 여름이 되면서 반전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어요. 1916년 6월28일부터 30일 사이, 베를린에 사는 노동자 5만5천 명이 정치파업을 벌였습니다. 이 파업은 리프크네히트의 재판과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던 것이죠. 스파르타쿠스단은 이 파업을 독일 노동운동 발전의 전환점으로 평가했습니다.
1916년 초 베를린에서는 기계제조, 병기·장비, 항공기 등 군수공장에서 6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전쟁의 참화에 반대하며 정치파업을 일으켰습니다. 1916년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가을에 걸쳐서는 독일 전역에서 반전 시위와 파업 그리고 정부와 노동자 사이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8월에는 함부르크에서 '전쟁 반대', '정부 타도', '빵을 달라'는 구호를 내건 대중시위가 일어났죠. 그리고 11월2일 드레스덴에서는 노동자 7, 8천 명이 지방정부로 몰려가 식량배급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1916년 한 해 동안 독일에서 일어난 파업 총 건수는 240건이었고, 파업 참가자 수는 12만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총칼을 동원한 독재와 가혹한 착취 때문에 쌓인 광범한 대중들의 불만이 전쟁, 기아, 물가폭등에 반대하는 대중행동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이는 전쟁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국내평화'에 대신에 첨예한 사회적 긴장과 대규모적인 계급적 갈등이 확산되고 있음을 여실히 표현한 것입니다.

프랑스
1914년 8월과 9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를 침입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 파리를 위협하자, 프랑스의 지배세력은 '국가 방위'를 강력히 선전했습니다. '국방정부'는 '신성한 거국일치', '계급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노동총동맹(CGT) 지도자들은 노동자 조직의 활동을 부상병과 포로 그리고 난민 등에 대한 사회적 원조에 한정하려 했죠.
1914년 후반부터 1915년 들어서까지, 물질적 상태가 현저히 악화되었음에도 프랑스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동원 때문에 조합원이 절반으로 줄어든 조건에서 노동자 파업이 위력을 갖기 힘들었던 것이죠. 1914년 8월부터 12월에 사이에 모두 18건의 소규모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노동자 1천 명이 참여했습니다. 1915년에는 파업이 98건이었고 파업 참가자수는 9천3백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오래 가지 못 했죠.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현실적 참상이 민중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면서, '국가 방위', '계급 평화' 등의 선전은 위력을 잃게 됩니다. 1915∼1916년에는 반전운동이 점점 확산되면서 대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죠.
프랑스 반전운동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주로 생디칼리즘 신봉자들인, 노동조합 내 좌파세력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항의하기 시작한 것도 그들이었지요. 1915년 5월 금속노동조합연맹 사무총장 메르하임은 신문지상을 통해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고 자신들의 주장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금속노동조합연맹은 '민중 살육을 그만 두라'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의 슬로건에 찬성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금속노동조합연맹은 건설노동자와 토목노동자 노동조합과 더불어 1915년 5월1일 파리에서 국제연대와 병합이나 배상 없는 강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죠. 그리고 1916년 봄에 결성된 생디카방위위원회(CDS)는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의 '계급평화' 노선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 대중적 투쟁 방침을 선언했습니다. 이들은 파업행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죠.
1916년은 파업이 활발한 시기였어요. 파업 건수가 전년에 비해 3배 이상(315건), 파업 참가자수는 4배 이상(4만1천 명),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5배 이상(23만6천 일)으로 늘어났고 성격도 한층 완강해졌습니다. 1916년 말 무렵에는 파업투쟁이 확대되어 총파업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죠. 주로 섬유, 운수, 금속, 화학 부문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주도했습니다. 금속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파리의 군수품 공장에서 벌인 12월 파업은 1916년에 일어난 최대의 파업이었습니다. 공장 종업원 6천 명 중 절반 이상이 참가했던 이 파업은 임금인상뿐만 아니라 반전 요구도 내걸었죠. 이렇듯 1916년 들어 전쟁과 지배세력의 전쟁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게다가 전쟁에 대한 항의는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농민, 병사들에게도 확대되어 대중적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영국
영국의 노동당과 노동조합 지도자 대부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국일치정책과 계급협조정책의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1914년 8월24일, 영국노동조합회의(TUC)는 기업주 측과 이른바 '산업강화'에 조인했습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이 전쟁 종료 때까지 파업을 하지 않기로 하는 약속이 포함되었어요. 영국 노동당 집행위원회도 부르주아 정당들과 전쟁 기간 동안 선거휴전을 하는 것과 병사모집 캠페인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노동조합 운동은 이론적으로는 국제주의자에 동조하고 국내외의 '군국주의'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는 철두철미하게 운동의 총력을 국가 방침 쪽으로 기울였어요. 열렬하고 정력적인 노동당원들 몇몇과 사회주의 단체인 독립노동당(ILP) 소속의 조합원들 등 평화주의를 확신하는 소수가 있긴 했지만, 모든 산업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커다란 격려와 원조를 받으며 군기 아래 집결했습니다. "독일이 승리한다면, 유럽 민주주의와 자유의 패배와 일소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는 것이 영국 노동자조직 지도자들이 제2인터내셔널의 반전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명분으로 내세우는 논리였죠.
1915년 3월, 노동조합 운동 지도자들은 정부조정이 노동쟁의 해결의 주요 방책이 되는 것과 여성과 청년의 고용통제 문제에서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적으로 삭감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시간외 노동, 심야작업, 일요일 노동의 제한 폐지 등에도 동의했죠. 계속해서 정부는 국가적인 비상사태라는 것을 구실로 노동조합에게 이전보다 더 큰 애국심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호응하여 노동조합은 전쟁 사업에 관련된 구인광고를 금지하고 다른 지역 노동자와 고용계약을 맺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받아들였죠. 업무를 둘러싼 고용주들의 경쟁을 폐기하는 이 법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대한 유례 없는 간섭이었습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크롬웰 시대이래 처음으로 국민개병제를 뼈대로 하는 병역법을 제정하는 것에 노동당 집행위원회와 영국 노동조합회의(TUC)가 동의했습니다. 사회배외주의자들도 노동자들을 전쟁 봉사의 길로 이끌기 위해 열성적이었죠.
노동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이러한 적극적인 양보는 영국의 지배층에게 충분히 평가받았습니다. 노동당 사무총장이었던 아서 헨더슨은 연합정부의 일원으로 입각했고 다른 노동당 간부 두 사람이 정부 내부의 책임 있는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계급협조 방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닥치게 되었죠. 1915년 초부터 파업이 급증했고, 1916년 말부터 1917년 초에 걸쳐서는 현장위원(shop steward) 및 노동자위원회가 전국규모에서 조직되어 '현장위원 및 노동자위원회 전국운동'이 결성되었습니다. "직장의 노동조건에 대한 통제와 고용환경에 대한 규제를 획득하고, 노동자들이 승리하는 그 날까지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계급적 기초에 바탕을 둔 노동자조직을 결성한다"는 것이 규약에 명기된 이 운동의 목적이었죠.
1915년 영국의 파업운동은 그 규모가 매우 컸습니다. 1915년에는 627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노동자 44만8천 명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노동손실일수는 295만3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파업들이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15년의 파업들은 151건에 노동자 2만5천 명이 참가했고, 노동손실일수가 14만7천 일이었던 1914년 후반 6개월과 비교하면 그 규모를 어림할 수 있지요. 1916년에는 전년에 비해 파업이 다소 줄어들어서, 파업건수는 532건이었고 파업참가자수는 27만6천 명이었으며, 노동손실일수는 244만6천 일 이었습니다.
1915∼1916년에 일어난 파업 거의 대부분 노조의 통제를 받지 않은 것(wildcat strike)이었습니다. 정부는 그러한 파업들을 빌미로 정부는 일련의 엄격한 정책들을 시행했어요. 1915년 7월에 발효되고 1916년 1월에 보완된 군수생산법은 노동쟁의를 강제조정하고 노동조합의 권리를 중대하게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령은 사실상 파업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죠. 그리고 애초 기계공업과 조선업종에만 적용되었던 이 법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중요 공업부문 전반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탄압과 노동조합 지도부의 노자협조정책도 노동운동과 민주주의운동이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1915년 봄, 여름부터 대중적 반전행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집회에서 전쟁을 침략적·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1915년 겨울에서 1916년 봄에 걸쳐서 전개되었던 병역의무제 시행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반전투쟁은 매우 격렬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죠. '반징병제위원회'가 영국의 공업중심지 곳곳에 설치되어, 1916년 초 의회에 상정된 병역의무법안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노동조합이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1916년 1월에는 반징병제운동 전국협의회가 결성됐습니다. 징병제반대운동은 1916년 2월에 병역법이 채택된 뒤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노동조합회의가 총파업을 행사하겠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장기적인 전쟁을 치르기에는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고 지역에 따라 경제발전의 불균등이 격심했어요. 전쟁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적·민족적 모순의 심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따르는 피해와 손실이 막대해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국내평화' 선전과 민족적 반목, 그리고 군사·관료적 강제제도의 영향 또한 받지 않을 수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외국 제국주의에 예속화되지 않기 위해" 조국방위 전쟁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선전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들도 기업과 '국내 평화'에 관한 형식적 협정을 체결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들의 권익투쟁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취하면서 계급협조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이 발발한 바로 뒤, 오스트리아의 몇몇 지역에서는 소규모 파업과 집회,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1914년 말과 1915년 초에 걸쳐 임금 인하와 노동일의 연장에 반대하고 물가등귀에 항의하는 파업이 체코와 오스트리아의 광업, 체코의 섬유산업, 빈의 금속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1916년 봄부터는 파업이 더욱 빈번해지고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전에 비해서 노동자들의 요구 관철 정도도 증가했지요. 투쟁들은 경찰이나 군대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점점 반전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헝가리에서는 이미 1915년 봄부터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투쟁과 파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파업투쟁을 주도한 쪽은 군수산업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된 파업이 비교적 평온하였던 지방으로 확산되는 등 1916년의 파업투쟁은 활기를 띠었죠. 같은 해 여름에는 농업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처럼 전쟁이 발발하고 3년째에 접어들면서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었죠.
전쟁이 진행되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대립도 날카로워졌어요. 헝가리 의회에서는 양국을 결합시키고 있는 이중제국의 조건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야당 측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헝가리와 제국 전체 사이의 동맹, 즉 독일과의 동맹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는 발언들도 점점 많아졌죠. 1916년 말 군사적으로 큰 패배를 겪고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격화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르주아 층 안에서는 타협적 강화를 주장하는 경향이 우세해졌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부른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한 1914년 8월부터 이탈리아가 참전한 1915년 5월까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은 거의 끊이질 않았습니다. 1914년 8월에는 실업과 물가앙등, 그리고 임금 인하에 반대하는 저항행동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토리노의 자동차공장 노동자와 카탄자로의 전차 종업원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1914년 가을에는 '전쟁을 중지하라', '빵과 일을 달라'는 슬로건을 내건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토리노,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플로렌스 등의 도시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14년 9월에 열린 이탈리아 노동조합 대회에서는 모든 교전국과 중립국의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전쟁이 초래한 위기를 자본주의제도와 군주제도의 폐지를 위한 계기로 삼자는 주장이 역설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자의 반전 움직임과 저항에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1915년 초 이탈리아의 참전계획에 항의하는 렉지오 에밀리아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경찰이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쌍방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죠.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서 집회와 시위가 '사회질서에 위협'을 줄 경우, 이를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서장에게 부여하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노동자의 민주주의적 권리가 경찰의 전횡에 맡겨져 버린 것이지요. 결국 각지의 경찰 당국은 이 법령에 근거해서 반전집회 뿐만 아니라 공동체 조직과 노동조합의 다른 집회까지도 금지했습니다.
1914년 8월4일 이탈리아 사회당(PSI)과 노동총동맹(CGL), 이탈리아 노동조합연맹 지도기관 합동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참전에 반대하며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러나 1915년 여름에 막상 이탈리아가 참전하게 되자 사회개량주의자들과 노동조합 온건파 간부들은 전쟁을 저지한다는 이전의 결정을 뒤집으려 온갖 노력을 쏟았습니다. 서유럽 다른 나라 사회배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내평화'정책을 실행하려 열심이었죠. 이들은 이탈리아가 협상국 측과 동일 보조를 취하며 참전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부와 기업 측에 협력하면서 '산업위원회'에 참가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참전을 결정한 직후 정부는 '산업동원' 포고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군부의 주문을 수행하는 공장 노동자와 직원들에게 군대 의무가 주어졌지요.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파업권을 상실했고 일을 그만둔다든지 또는 자기 마음대로 다른 기업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부질서의 위반은 전시법규로 규율되었고, 징병유예를 취득해도 기업관리부의 결정으로 취소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소한 과실에 대해서도 벌금이 부과되었는가하면 구속되기도 했죠.
그러나 억압정책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대중운동의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공장위원회와 같은 새로운 노동자 조직이 생겨나면서 투쟁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위원회들은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하여 구성되었죠. 이 조직들은 대중적이고 적극적이었고 노동운동의 변혁적 지향을 잘 반영했습니다.
1915년 후반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시칠리아, 기타 지역에서 전시공채에 반대하는 격렬하면서도 자연발생적인 시위와 집회가 열렸습니다. 파업도 빈번했죠. 1915년 6∼7월 파업은 거의 모든 산업에 파급되기도 했습니다. 1915년 한 해 동안 발생한 파업은 53건, 파업 참가자는 13만2천 명, 노동손실일수는 63만3천 일이었습니다. 1916년에는 파업건수와 파업 참가자수는 다소 줄었으나 노동손실일수는 73만7천 일로 증가했습니다.
혹심한 궁핍, 광범한 실업, 식료품의 부족과 가격폭등, 노동강화 등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상황은 '계급적 휴전'을 고수할 수가 없는 것이었어요.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반전과 변혁 지향의 그룹이 형성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탈리아 노동총동맹 내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움직임에 대해 동조하였죠.

미국
미국에서도 반전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미국 노동운동의 반전 분위기는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죠. 중립적인 처지에 있는 미국에서 고조된 반전 분위기는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참전준비가 진행됨에 따라 미국노동총연맹 지도부는 온건한 부르주아적 평화주의 노선에서 군사력 증강을 꾀하는 부르주아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바꾸었죠. 미국노동총연맹 지도부의 이 같은 방침 전환은 지방조직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1915년 열린 미국노동총연맹 대회는 결국 군국주의적 캠페인에 동의했어요. 이런 가운데서도 많은 대의원들의 강한 요구에 따라 대회는 징병제와 학생 군사훈련 도입에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미국에서 반전운동을 추진한 세력은 주로 사회당의 일부 그룹과 세계산업노동자조합(IWW)이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참전과 전쟁에 대한 '국민적 준비' 캠페인에 반대하며 집회와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파업투쟁과 반전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산업노동자조합의 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엄격한 통제를 가했죠.
전쟁 붐이 일어나면서 파업은 불어났어요. 전쟁 붐으로 인한 경제성장은 생활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노동자 투쟁에 유리한 조건이었죠. 1915년 미국에서는 1천405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노동자 50만4천 명이 파업에 참가했는데, 1916년에는 파업건수는 3천786건으로 증가했고, 파업참가 노동자수는 160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 등 사용자들의 양보를 받아냈죠. 파업투쟁들은 반전 시위, '참전준비 퍼레이드' 참가자들과의 충돌, 의용병 참가 거부, 병역의무제 도입 반대 등을 수반했습니다. 이러한 파업과 반군국주의 투쟁들이 미국의 참전준비를 방해하여, 전쟁'준비' 일정을 지연시킬 수 있었죠.

제1차 대전 중 노동조합의 활동
무장한 수천만 명이 대치하고 있음에도 1916년 당시 주요 전선에서는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선과 후방에서는 수백만 명이 사망했고 식량부족과 기아 사태가 심각해졌죠. 생필품의 부족과 물가등귀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조건이 노동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가운데 각종 탄압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이 노동자와 병사 그리고 농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공공연한 반정부적 저항을 야기했습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의 정치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자국 정부의 전쟁기구 속에 완전히 끌어넣기 위해 계급협조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노동자 대표를 협력자의 지위에 고정시키려는 이러한 작업은 각 나라의 국내정세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됐죠. 자본가들은 노동운동이 전쟁을 이용해서 위신을 높이거나 일반적 입장을 강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배계급이 노동운동 관계자를 전시 지배체제의 일부로 이용하면서 기대했고, 또 획득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전쟁에 대한 전면적인 찬성.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이 대량학살을 묵인하도록 할 수 있었죠. 둘째, 전시 중 사회평화의 확보. 즉,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사실상 해소하는 것입니다. 지배계급은 완전히 길들여놓은 노동운동 내부 그들의 종복들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범위에서, '사회평화'를 획득했죠.
1916년에 접어들면서 교전 국가들에서는 계급적 투쟁이 격화되고 각지에서는 파업이 고양되었습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의 군수공장에서는 장기파업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파업이 총파업으로 전화된 경우도 있었죠. 1917년 초에는 거의 모든 교전 국가들에서 반전운동이 대중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제국주의전쟁을 사회변혁투쟁으로 전화시키려는 움직임마저 있었어요.
변혁을 지향한 노동자들은 사회개량주의자들이 파괴한 인터내셔널과 전쟁반대 투쟁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전쟁 중에 스위스의 짐머발트(1915년 9월)와 키엔탈(1916년 4월)에서 반전과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회의가 열리기도 했죠.

출처 : 노동사회 2004년 1월호, 통권 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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