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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7/25
    분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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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7/25
    계급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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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7/25
    계급론 개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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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7/25
    계급형성에 대하여(조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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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7/25
    한국의 노동계급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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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7/20
    [박준식]초기업노조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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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7/20
    맑스주의의 여성주의적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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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7/20
    [강수돌]경영과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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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7/20
    [박준식]세계화와 노동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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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7/20
    [박준식]생산의정치와 작업장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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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순례

 

[마니아의 세계]헌책방 순례

책더미에서
월척을 낚는 묘미

나는 헌책 수집광을 낚시꾼에 비유한다. 강이나 호수나 바닷가의 낚시꾼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다. 낚시꾼의 재미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낚시꾼에게도 같은 묘미가 있다. 가끔은 ‘월척’의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남재희 호남대 객원교수·전 노동부 장관


    이가 들면서 고민이 되었다. 비교적 큰 단독주택에 살지만 언제고 아파트로 이사는 하여야 하겠는데 그 많은 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답답하여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젊었을 때는 누가 물어보면 사설(私設) 도서관을 차리거나, 네 딸들 집에 골고루 나누어 주거나, 어디에 기증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사설 도서관을 차리기에는 내게 그만한 돈이 없고, 딸들은 아파트 살림이나 외국 살림에 책이라면 손을 내젓고, 그렇다고 기증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내가 평생 극성스럽게 모은 책이 어느새 8만 권이 넘어버렸다. 포켓 북이나 잡지들도 한 권으로 쳐서 말이다. 90평이 약간 넘는 집이 온통 책으로 그득하다. 20년 전 그 반에 반도 못 미치는 양일 때 이사를 하려고 밖에 쌓아놓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집 헌책 장사 하다가 망한 모양이군” 하더란다.

얼마 전 시인 고은 씨와 우연히 만나 이야기하던 끝에 책이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에 머물렀던 그는 “케임브리지의 뒷길을 가다 보면 집 앞에 책을 수북이 쌓아놓고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데도 있더군. 비 오는 날이면 비닐로 잘 가려놓기도 하고…”라며 그곳 소식을 전했다. 대학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케임브리지이니 노년이 된 교수가 많아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에 살면서 책을 모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갖고 있던 책도 가끔 정리하여 폐기 처분하는 게 사람들의 소일거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책들이 헌책방에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책종이는 산성화 방지처리가 안 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오래 되면 변색하거나 부식되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놓기도 하는데, 오래 전에 미국 잡지에서 도서관 책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고 책 자체는 폐기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논쟁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서울서 가장 큰 홍대 앞 온고당


책을 모으는 데 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그러니 50년이 넘었다. 그 덕분에 서울 장안의 헌책방 주인들 사이에선 책 수집광으로 이름이 난 지 꽤 오래 되었다. 그래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룹이 형성된 그 방면의 사람들한테 가끔 인사를 받기도 한다.

나는 책 이야기를 할 때는 고본(古本)과 헌책을 꼭 구분하여 말한다. 비슷한 말이지만 고본이라 할 때는 오래 되고 희귀한 책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헌책은 영어로 말하면 유즈드 북(used book), 즉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친 책들이다. 그래서 고본점이라 해도 될 것을 나는 꼭 헌책방이라고 고집한다.

현재 서울에서 가장 큰 헌책방은 홍익대학교 앞에 있는 ‘온고당’이다. 새로 지은 빌딩을 임대해 1층은 국내서적, 지하층은 외국서적 위주로 파는데 꽤 넓고 책의 유통도 빠른 편이어서 자주 가볼 만하다. 국내서적은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아파트 같은 곳에서 사온다. 지하의 외국서적은 약간 값이 높은 것으로 나까마(중간상인을 일본말로 그렇게 부르는데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므로 편의상 이 말을 쓴다)들이 가져온다. 온고당이 제일 큰 책방이다 보니 나까마의 활동이 집중되어 좋은 책이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 미술대학이 유명한 홍익대 근처이고 하여 미대생들이 미술책이나 디자인책을 찾느라고 쑤석대기도 한다.

청계천 복개도로변에 있는 평화시장에도 헌책방이 많이 몰려 있다. 그 가운데서 외국서적만 고집하는 곳이 이름 그대로 ‘외국서적’이다. 내가 다니기 시작한 것만도 30년이 되었으니까 역사가 꽤 길다. 헌책방 집결지의 유일한 외국서적 전문점이어서 전에는 좋은 책이 많이 들어왔다. 비교적 학술서적이 많았는데 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 집이나 교수들의 유족으로부터 나왔으리라고 짐작했다. 요즘은 한산해졌다. 규모가 작은 책방이어서 나까마들이 찾지 않아서인 것 같다.

서울 이태원에 영어로 ‘포린 북’라고 쓴 외국서적 전문 책방이 있다. 미군기지가 있고 외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이태원시장이 있어 그런대로 활발하다.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 특히 중년부인들은 포켓 북을 갖고 와 자주 바꿔가기도 한다. 트레이드(trade)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감축되고 난 후, 특히 징병제가 아니고 지원제가 되고 난 후로는 양이나 질에서 많이 떨어졌다. 예전에 징병제일 때는 대학재학생들이 군대에 와서 수준 높은 잡지들도 제법 흘러나왔는데 요즘은 찾기가 힘들다. 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더 네이션(The Nation), 더 포린 어페어스(The Foreign Affairs)등 좋은 잡지를 싼값에 많이도 샀다.

연신내에는 ‘문화당’이라는 좋은 헌책방이 있다. 주인 말이 문경의 친구 여럿이 서울에 와서 모두 헌책방을 하게 되었는데 책방 이름은 똑같이 문화당으로 하기로 약속했다나…. 그래서 장승백이나 구로 쪽에 있는 다른 문화당을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했다. 연신내와 같이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좋은 헌책방이 있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짐작으로는 그 주변의 갈현동 등에 지식인이 많이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80년대 초 망원동에 홍수가 들었을 때 물이 살짝 스민 책들이 책방에 더미로 나왔고 그 수준이 꽤 높았다. 망원동에도 지식인들이 많이 살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청 앞 지하도에도 알찬 헌책방이 하나 있다. 거의 모두 영서(英書)이며 일서(日書)도 얼마간 있다. 이곳이 번창까지는 못 가도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것은 근처에 호텔이 많아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

 

헌책방 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씨책방’과 ‘동아서점’


헌책방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공씨책방’과 ‘동아서점’이다. 공씨책방은 새문안교회 건너편에 있을 때 전성기를 누렸다. 서울에서 가장 크다고들 했다. 1층은 작았지만 지하층은 매우 넓었는데, 주인 공씨는 개미굴이라며 거기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재미있어 벗어나기 어렵다고 익살을 떨었다.

주인 공진석씨는 고졸 학력인데 월간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헌책방 이야기로 당선되어 그때 받은 상장을 상점에 자랑스럽게 걸어놓기도 했다. 또 ‘책사랑’이라는 얇은 개인 잡지도 열 번쯤 발행했는데 나도 거기에 수필 하나를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헌책에 재미를 붙여 열성적으로 헌책을 찾아 서울 장안을 헤집고 다녔다. 헌책 이야기를 할 때는 늘 의욕이 넘쳤으며, ‘서울에서 가장 큰 헌책방’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공씨는 어느 날, 나이는 30대 중반쯤이었을까, 여느 때처럼 헌책을 사갖고 오다 버스 안에서 혈압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 대단히 애석했다. 그의 부인과 여동생은 지금도 신촌에서 작은 헌책방을 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뜻으로 ‘책사랑’ 마지막호를 발행했을 때 나도 정성들여 회고담을 써서 기고했다.

동아서점은 동아일보사 건너편의 지금은 없어진 중부소방서 쪽에 있을 때 활발했다. 주인 강씨는 처음에는 무척 고생을 했단다. 원래 명동 쪽에서 헌책 노점을 하다가 발전하여 번듯한 책방을 차리게 된 것인데 새문안교회 건너편으로 이사하여 영업을 하다가는 출판업에 뛰어들어 좋은 영서를 냈다. 지금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라지는 헌책방들


헌책방은 대체로 사양길이다. 통계를 잡아가며 연구는 안 해보았지만 대충 이런 판단이 든다.

첫째, 시대적 추세가 점차 활자매체에서 시청각매체로 옮겨가면서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더구나 근래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온고당 지하층 책임자는 몇 년째 활자 중심의 책을 찾는 사람은 급감하고, 사진이나 그림 중심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현저히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나도 그런 느낌이다. 우선 나부터도 좋은 사진이 많이 든 책을 선호하게 되었다.

둘째, 아파트가 주된 주거공간이 되면서 사람들은 책을 간수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아파트에서 책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또 복사술이 발달하여 사람들은 꼭 필요한 부분만 복사하여 보기도 한다.

셋째, 건물 임대료가 다락같이 올라 헌책 장사로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렵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런 탓인지 헌책방이 사라진 자리에는 호프집이나 밥집이 들어서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영국에서는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헌책방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보화 혁명시대에 그런 아이디어는 시대착오가 될 것이라 체념하게 된다.

넷째, 주한미군의 감축과 징병제의 폐지로 미국 책의 유통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다.

용산 삼각지 골목 안에 내가 알기로도 30년이 넘은 양서 헌책방이 있었다. 좋은 책이 많이 나왔는데 5~6년 전쯤부터 시들해지더니, 나로서는 겨우 ‘포린 어페어스’를 살 정도의 효용밖에 없는 집이 되어버렸다. 그 오래 된 집이 작년에 불고기집으로 전업했다. 시대의 변화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집주인은 자녀교육에는 성공하여 그래도 위안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천 헌책방 이야기는 전에 ‘신동아’에 수필로 쓴 적이 있다.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과천의 한 빌딩 2층에 넓은 헌책방이 있어 가끔 갔는데 그 집의 중년 여주인은 “헌책방은 헌책을 버리지 않고 모아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사회 봉사를 하는 것이고, 그에 수반되는 집세 같은 적자는 아래층에서 경영하는 전통찻집의 수입으로 메운다”고 했다.

몇 년 후 찾아가보니 건너편 빌딩 안 슈퍼마켓 구석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 집 역시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전에 한양대 이영희 명예교수의 칠순 출판기념회에서 그 여주인을 만났다. 그이 역시 지식여성임에 틀림없다.

‘오거서(五車書)’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전철 홍대역에서 가까운 곳에 ‘오거서’라는 좋은 이름의 책방이 있었다. 옛날에 다섯 대의 수레에 실을 정도의 책이라 하면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어서 오거서(五車書)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 오거서 책방 주인도 수준이 있는 점잖은 지식인이다. 헌책에 약간의 골동품도 갖추고 하여 책방을 유지해 왔으나 역시 임대료 때문에 이리저리 옮기곤 하다가 지금은 극동방송 부근의 큰길가로 옮겼다. 가끔 들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나라 서적에 대해 넓게 알고 있으며, 사회문제에 대한 식견도 뚜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좁은 책방에 앉아 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더구나 지금은 헌책방 쇠퇴기가 아닌가.

지방여행을 갈 때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헌책방에 들러본다. 부산의 대청동 미국문화원 주변은 피난 시절 헌책을 사러 다니던 곳이어서 늘 반갑다. 지금은 그곳엔 책방이 없고 대신동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책방들이 몰려 있다. 거기에 가면 기념으로 여하튼 책 몇 권을 사든다. 대구에서도 헌책방을 찾았다. 그러다 모르던 교수들과 초면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헌책방을 찾는 동류의식이 발동하는 것이다. 광주에서도 헌책방 안내를 받아 가보았다가 역시 방문 기념으로 굳이 몇 권을 샀다.

외국도시에 가서도 며칠 머물게 되면 꼭 헌책방을 찾아간다.

일본 도쿄의 ‘간다(神田)’는 너무 유명한 곳이다. 한국의 헌책방에 비교하면 책의 수집이나 그 배열이 몇 급 위 수준이다. 가보면 이것이 전통 있는 헌책방이구나 싶다. 한국의 헌책방처럼 임대료에 치여 이리저리 이사 다니지 않고 부럽게도 몇십 년씩 한자리를 붙박이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간다에 들렀을 때 가와이(河合榮次郞) 교수의 ‘자유주의의 옹호’ 초판본을 사들고 감격한 기억이 생생하다. 일제 파시즘에 감연히 맞선 가와이 교수가 아니던가. 종이는 재생지로 형편없었지만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다.

파리에 가서는 유명한 센 강변의 헌책방 노점을 가보았다. 노틀담사원 근처에 노점 서너 개가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문화도시의 풍경에 귀중한 보탬이 되어 보였다. 노점이기 때문인지 헌책인데도 포켓 북조차 투명비닐로 포장하여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하버드대 케임브리지 이야기는 고은 시인 말을 인용했지만 30여 년 전 내가 유학 갔을 때는 하버드 쿱(공제조합이란 뜻) 책방 구석에 헌책 코너가 있어 싸게 살 수 있었다. 또 가끔 책을 ‘세일’하는 곳도 있어 지난 시절의 좋은 책을 헐값에 구입할 수도 있었다.

 

헌책방에서 낚는 ‘월척’의 희열


내가 사는 책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과학책도 좋은 이론서는 모은다. 인문 쪽에 비중을 두는데 문학서부터 철학·종교까지 광범위하다. 그리고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국의 페이비어니즘 관계 책은 기를 쓰고 모은다. 시드니 웹 부처, G.D.H 콜, 해럴드 라스키 등등의 책은 물론 관련 연구서까지 말이다.

요즘은 관심의 초점이 달라졌다. 이제는 나이 탓에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데는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사진으로나마 세계일주를 하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사진첩, 박물관·미술관 사진첩 등 되도록 컬러이고 영문으로 된 것을 모아 즐겨 뒤적거린다.

그러다 보니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의 사진첩, 블라디보스토크 사진첩, 상해혁명운동사 사진첩 등 재미있는 것도 구했다. 특히 러시아혁명의 시작부터 소련 붕괴까지를 담은 사진첩은 비장하다. 20세기 역사를 손으로 거머쥔 듯 느끼게 하는 좋은, 비극적 사진들이다.

나는 헌책 수집광을 낚시꾼에 비유한다. 강이나 호수나 바닷가의 낚시꾼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다. 낚시꾼의 재미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에게도 같은 묘미가 있다. 가끔은 ‘월척’을 낚는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영어사전으로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유명하다. 거기에는 20여 권으로 된 ‘Oxford English Dictionary’와 그것을 줄여 2권으로 된 ‘Shorter Oxford English Dictionary’가 있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흔히 콘사이스라고 부르는 ‘Concise English Dictionary’가 있다. ‘OED’를 처음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샀을 때의 그 희열감이란…. 나중에 영어를 전문으로 하여야 할 분에게 기증했다. 그리고 훨씬 더 뒤에 OED 20여 권을 2권으로 압축한 사전을 싼값에 사고는 기뻐했다. 2권으로 압축했기 때문에 확대경이 첨부되어 있어 그것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잘 보였다.

그 밖에도 월척이 많지만, 로댕의 에로틱 데생집도 희귀본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훌륭한 조각가에게 주기 위해 지금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면, 내 월척 중에 소중한 것은 영문으로 된 중국 건축 사진첩이다. 나는 서양 숭배자다. 건축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나 로마의 콜로세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 등 서양 건축물을 볼 때마다 항상 압도되어 왔고 거기서 동양의 열등감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중국 건축 사진첩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대리석이 없어서 그렇지 중국의 건축은 서양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건축물이지만 베이징의 천단(天壇)이 그랬다.

 

모으는 재미 못지 않은 주는 재미


나는 멍청하다. 50년 동안 희귀본인 고본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지금 엄청난 희귀본 소장가가 되었을 것이다. 내 지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그는 국내책 중에도 특히 잡지와 시집의 초판본만 모은다. 그리고 외국책으로는 이집트에 관한 것과 에로티시즘의 수작을 수집한다. 쉽게 말하여 환가(換價)성이 있는 책들이다.

한번은 어느 마음씨 좋은 책방 주인이 내가 희귀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자 최남선의 ‘백팔번뇌’ 시집을 굳이 사두라고 했다. 장정·서문·발문에 노수현·이광수 등 우리나라 명사가 대거 동원된 책이어서 가치가 있단다. 희귀본으로서의 고본이라고 산 것은 그것 정도다.

책은 모으는 재미도 있지만 주는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망원동에 물이 들었을 때 하베이의 혈액순환에 관한 고전의 한정 복사본을 샀다. 그래서 의학을 하는 권이혁 박사(전 서울대총장)에게 선물로 주었다. 연필로 ‘몇 권 가운데 몇 권째’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 한정판으로 그리 흔치 않은 책이라 한다. 나중에 권박사에게 식사대접을 정중하게 받았다.

한번은 한 교수가 마야나 잉카문명에 큰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듣고는 ‘멕시코’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옥타비오 파스가 서문을 쓴 결정판이라 할 책을 선물했다. 또 한 교수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필을 집필하는 데 골몰하고 있어 ‘영혼을 위한 수우프’라는 영문판 책을 선물했더니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고마워 했다.

한 친구는 신학 전공이 아닌데도 성경 공부에 열중하기에 성경에 나오는 일상의 모든 것에 대한 전집(예를 들어 여성·의식 등등)을 읽어 보라고 주었다.

후배 관리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는 라켈 카슨의 ‘침묵의 봄’을 한 권씩 선물하며 환경에 관한 명저라고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내가 아끼는 신문사 후배와 만나서는 헨리 키신저의 영문 회고록을 선물하며 공부하라고 했다. 어렵지만 꼭 읽어 안목을 넓히라는 것이다.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는 기자들에게 책을 많이 선물했다.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후배들에게 몇백 권을 주었을 것이다. 노동부에 있을 때도 출입기자들에게 영문 원서를 몇 권씩 주었다. 다른 것을 주는 것보다 내 마음도 편하고 흐뭇했다. 정치를 하면서도 당직자들이나 유권자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했다. 손쉬운 문학전집이나 역사물을 위주로 선물했다. 유권자나 당직자들의 교양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회식만 하는 것보다는 내 마음도 훨씬 편했다.

요즘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는 ‘한 학생에게 한 권의 책’을 목표로 책을 선물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는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스카레트’ ‘장미의 이름’ 등 영문 포켓 북을 주로 주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영문 아니에요. 읽기 힘들어요” 한다. 그러면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자네들 영어를 잘해야 하네”하고 읽기를 강권한다.

그러면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 대학 초년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심장’, 토머스 울프의 ‘시간과 강’ 등을 영문으로 읽은 경험, 그래서 공부나 인간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왜 헌책을 그리도 많이 모았을까?


헌책을 거의 광적으로 수집한 나의 50년을 가끔은 미련했다고 후회한다. 이제 그 많은 책이 때로는 거추장스럽다. 특히 이사할 때를 생각하면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왜 헌책을 그렇게도 많이 모았을까? 심리학적인 분석대상이다. 어렸을 때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고 그래서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탐욕이 생겨난 것만 같다. 모든 것에 만족하며 자랐으면 그런 탐욕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은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책을 사는 데에는 몹시 관대했다. 그래서 책을 산다면 두말하지 않고 돈을 주셨기 때문에 책 모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무슨 책을 그리 많이 사느냐고 핀잔을 줄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익살을 섞어 이렇게 반문한다. 어느 재벌은 자동차 수집광이지 않느냐, 또 어느 재력가는 여자 수집광(?)이지 않느냐, 거기에 비하면 책 수집은 돈이 덜 드는 것이다. 또 수석을 모으는 취미, 난초를 모으는 취미, 우표를 모으는 취미보다 더 생산적이다, 그렇게 답변하곤 했다.

헌책을 사면 우선 앞뒷면에 있는 추천문을 읽는다. 그리고 목차를 천천히 살피고 서문을 읽는다. 가끔은 결론 부분까지 가는데 그런 ‘대접’을 받는 책은 드물다. 끝까지 독파하는 책은 훨씬 더 드물지만. 그래서 나는 책을 수집하는 것이지 읽는 것은 아니라고 꼭 힘주어 해명한다.

어쨌든 책수집 취미 덕분에 나는 책 세계의 짜임새를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도서관의 사서들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떤 테마가 나오면 대개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고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선 잡지 편집에 도움이 되었다. 옛날에 ‘서울평론’이라고 하는 주간지를 2년간 편집했는데 그때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지금도 가끔 ‘서울평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요즘 계간 ‘다리’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데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내 나름대로 헌책 수집으로 얻은 안목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를 먹어가니까 감각 면에서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은 있지만 말이다.

 

나의 헌책방 순례는 치유될 수 없는 병


요즘은 인터넷 시대다. 나는 ‘컴맹’일 뿐만 아니라 인터넷도 외면하고 있다. 스스로 인터넷 시대의 석기시대인을 자처한다. 하기는 나는 항상 유행에 몇 발짝씩 뒤늦게 살아왔다. 대학 시절 사르트르가 휩쓸 때도 그러려니 하다가 10년, 20년 후에 관심을 갖고 좀 읽어보았다. 마셜 맥루한이 여기저기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기는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도 그랬다. 젊은 시절 한참 마르크스가 운위될 때도 기본적인 것 몇 가지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마르크시즘이 아주 한물 가다시피한 요즈음 가끔 기본적인 이론서를 끄집어내 음미하는 것이다. 아마 인터넷도 유행이 휩쓴 후 멍청하니 따라가려 할지 모르겠다. 나이 든 사람의 완고함이라 할까. 하기는 인터넷 운운하는 것도 속도의 문제, 공간의 문제이지 인간의 근본적인 생각의 문제는 여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자신과의 씨름이 아니겠는가.

요즘도 계속 헌책방 순례하느라 용돈의 대부분은 거기에 지출되지만 나는 골프를 안 치니까 그 비용으로 충당한 셈으로 친다. 치유될 수 없는 병이다. 그동안 모은 책들은 대충 정리를 마쳤는데, 다시 사모으니 집안식구들의 눈치가 보일 뿐만 아니라 개과천선(改過遷善) 없이 또다시 골칫덩이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미련함은 죽기 전에는 못 고치는 것인가.

역시 시대의 변화를 말하는 듯 요즘은 중국의 사진집이 많이 눈에 띈다. 나는 오늘도 온고당에 가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이지만 중국의 자금성·만리장성·이화원 등의 사진집을 살 계획이다. 동네 후배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내게 서울에 사는 재미를 묻는다면 그 첫째가 헌책방 순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재미 때문에 도저히 시골 생활은 못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두 번째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허름한 대폿집이라 해둘까.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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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웹이 만든 세계 최고의 사회과학 도서관

세계 최고의 사회과학 전문도서관  "영국정치·경제학도서관" 웹으로 이용하기

 

열람과 문 정 순(참고자료실 ☏ 810-3609)

 

BLPES 홈페이지

 

  영국 런던정치?경제학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이하 LSE)의 도서관인 "영국정치?경제학도서관(British Library of Political & Economic Science: 이하 BLPES)"은 영국노동운동의 아버지인 시드니 웹(Sidney Webb)이 1896년에 설립한 세계 최고의 사회과학 전문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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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웹의 노동조합 이론과 우리나라 노동조합법의 정의

 

(2) 노동조합의 의의와 기능

① 노동조합의 의의(意義) : 시드니 웹(S.Webb)의 노동조합이론은 그의 조국(영국)뿐만 아니라, 여러 자본주의 국가의 조합이론 및 법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은 가령 우리 나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상의 노동조합정의(제2조 제4호본문)가 Webb의 정의와 유사한 점을 보아도 명백하며, 이에 의하면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를 말한다’고 하고 있다.

② 노동조합의 기능 : 노동조합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활동한다. 노동조합의 목적달성을 위한 활동으로 우선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근로조건을 유지․개선하는 경제적기능(단체협약 채결기능)과 공제적 기능 및 산업사회의 발전과 정치․사회제도의 변화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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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쇼]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쇼, Yousuf Karsh가 찍은 사진
 

George Bernard Shaw

1856. 7. 26 더블린~1950. 11. 2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아이엇세인트로렌스.

아일랜드의 극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주의 선전문학가.

192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청년시절

조지 버나드 쇼는 조지 카 쇼와 루신다 엘리자베스 걸리 쇼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족보상으로는 아일랜드의 지주계급으로서 프로테스탄트계의 '권력층'에 속하지만 현실에 어두웠던 아버지는 처음에 한직인 공무원으로 시작했다가 곡물상 일을 벌여 실패했다. 가난하면서도 귀족행세를 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이는 그에게 단순한 가난 이상의 굴욕이었다. 처음에는 친척 목사에게 공부를 배웠고 그후 학교에 다녔지만, 학교 자체를 거부해서 16세 때 토지중개인 사무소에서 일했다. 쇼는 어머니의 영향과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을 자주 방문한 덕분에 음악·미술·문학의 폭넓은 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 1872년에 어머니는 1866년 이래로 더블린에서 쇼 일가와 한집에서 살던 그녀의 음악교사 조지 존 밴덜리어 리를 따라 남편을 버리고 두 딸과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1876년 쇼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런던에 자리잡은 어머니와 큰 누나에게 합류했는데 이때 작은 누나는 죽고 없었다. 그는 20대에 계속되는 좌절과 빈곤을 겪어야만 했으며, 어머니가 그녀의 남편에게 받는 용돈과 그녀가 음악교사로 버는 수입으로 생활했다. 오후에는 대영박물관 독서실에서 소설을 쓰고 학생 때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으면서 보냈고, 저녁에는 당시 런던 중류계급 지식인들 사이에 성행한 강의와 논쟁에서 부족한 지식을 스스로 보충했다.

그의 소설은 완전히 실패했다. 반자전적이며 적절한 제목이 붙은 〈미성숙 Immaturity〉(1879, 출판 1930)은 런던의 모든 출판업자에게 거절당했다. 그후에 쓴 4편의 소설과 10여 년 간 언론에 기고한 대부분의 글도 마찬가지로 퇴짜를 맞았다. 그가 첫 문학작품으로 번 돈은 1년에 10실링도 못 되었다. 1887~88년에 씌어졌으나 죽은 뒤인 1958년 출판된 작품〈미완성의 소설 An Unfinished Novel〉은 그의 소설 중 마지막 실패작이었다. 1880년대에 그는 소설가로서는 실패했지만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가, 논객, 극작가로서의 경험을 했다. 1884년에는 영국 중류계급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설한 페이비언 협회의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이 협회는 혁명이 아닌 지적·정치적 생활의 '침투'(시드니 웹의 표현)를 통한 영국 사회의 변화를 목표로 했다. 쇼는 이 협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영국 사회주의의 고전이 된 〈사회주의에 대한 페이비언적 연구 Fabian Essays in Socialism〉(1889)을 편집하고 두 장(章)을 직접 쓰는 등 눈부신 활동을 했다. 1885년 마침내 연극비평가 윌리엄 아처가 쇼에게 고정적인 저널리스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초기에 잡지에 기고한 글로는〈펠 멜 가제트 Pall Mall Gazette〉에 쓴 서평(1885~88),〈월드 World〉에 쓴 미술평론(1886~89),〈스타 Star〉에 쓴〈바셋 호른 Corno di Bassetto〉등의 재기 넘치는 음악평론(1888~90)과〈월드〉에 쓴〈지 비 에스 G.B.S.〉등의 음악평론(1890~94) 등이 있다. 쇼는 음악, 특히 오페라에 탁월한 식견을 지녔으며, 여기에 재치 있는 여담을 곁들임으로써 그의 평론은 오늘날까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프랭크 해리스가 그를 〈새터데이 리뷰 Saturday Review〉지의 연극평론가(1895~98)로 임명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치와 언변을 동원하여 빅토리아 시대의 허위와 위선에 찬 무대를 생명감 넘치는 무대로 일신시킬 운동을 전개했다.

 

초기 극

쇼가 희곡을 쓰기 시작했을 당시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극작가는 A.W. 피네로 경과 H.A. 존스였다. 이들은 근대적 사실주의 극을 개척하고자 했지만 인위적인 구성과 진부한 인물유형에서 벗어날 힘이 없었다. 이러한 극의 빈곤은 입센의 여러 작품이 런던 무대에 소개되면서 분명해졌다. 1890년〈인형의 집 A Doll's House〉, 1891년에〈유령 Ghosts〉이 런던에서 공연되었고, 영국 무대에 새로운 자유와 진지함의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쇼는〈입센주의의 정수 The Quintessence of Ibsenism〉(1891)를 막 출판하려던 참이었는데, 미발표작인 희극〈홀아비의 집 Widowers' Houses〉을 급히 손질해 런던 빈민가의 악명 높은 지주제도를 다룬 '입센풍' 작품으로 고쳤다. 1892년에 공연된 이 극은 당시 대담한 신예 극작가들조차 여전히 자주 사용하던 진부한 낭만적 인습을 흔들어놓았다.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선량한 영국 젊은이가 미래의 장인의 재산과 자신의 수입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결과임을 깨닫는다는 줄거리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비극적 상황이지만, 쇼는 늘 비극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의 사랑이 연민을 일으키지 않는다. 주의를 끄는 것은 낭만적 곤경이 아니라 사회의 악이며, 인물의 행위는 풍자적 희극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893년에 쓴 이와 유사한 경향의 극〈워렌 부인의 직업 Mrs. Warren's Profession〉은 검열관인 궁내부장관의 반대로 1902년에야 공연될 수 있었다. 이 극의 주제는 조직 매춘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가 그 '직업'을 거쳐 유럽 전역 매춘굴의 일부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극 전환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도 상황을 결정하는 경제적 요인이 강조되고, 당시 성행하던 '타락한 여성들'을 다룬 희극과는 달리 주제가 냉혹하게 다루어진다. 쇼의 여러 작품처럼 이 극도 일정한 범위에서는 관념극에 속하지만, 관념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보면 본질적으로 고급 희극이다.

쇼는 자신의 초기 극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즐겁지 않은 사실에 직면하도록 극적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유쾌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뒤 그는 이 신랄한 희극들에 감정이 상해 있던 감독과 관객을 새롭게 끌기 위해 '유쾌한' 4편의 극을 썼다. 이 두 부류의 작품들을 개정해서〈유쾌한 극과 유쾌하지 않은 극 Plays Pleasant and Unpleasant〉(1898)으로 출판했다. '유쾌한 극'의 첫번째 작품〈무기와 인간 Arms and the Man〉(1894 공연)에서는 발칸 반도를 배경으로, 사랑과 전투라는 낭만적 소재를 가끔 신랄하기는 하지만 재미있고 쾌활하게 다루고 있다. 2번째 작품〈캔디다 Candida〉(1897 공연)는 영국 연극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1904년 이 극이 왕립극장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것을 계기로 할리 그랜빌 바커와 J.E. 베드렌이 손잡고 그곳에서 뛰어난 무대를 잇달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 극의 여주인공은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성격이 둔감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인 목사 남편과 그녀를 사랑하는 젊은 시인 사이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녀는 남편이 실제로는 약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척하는 남편을 선택한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인은 병적으로 흥분하지만, 예술가로서 더 큰 창조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포기할 만한 아량을 지닌 사람이다. 이것은 쇼에게 중요한 주제이며, 정신적 창조자인 남성과 인류의 생물학적 존속을 이끌어가는 여성 간의 갈등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이 주제는〈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의 근간을 이룬다.〈캔디다〉에서 이러한 사변적 주제는 가볍게 다루어질 뿐이며, 이는〈아무도 모른다 You Never Can Tell〉(1899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서 남녀 주인공은 각각 능란한 호색가와 이성적이고 해방된 여성임을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이러한 관념과는 무관한 생명력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

쇼는 비평서와 정치적 작품을 계속 왕성하게 발표하는 한편 이러한 극까지 쓰느라 겹친 과로로 건강을 해쳐 중병에 걸렸다. 1898년 그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베아트리체와 시드니 웹의 친구이자 상속인이며 그의 개인 간호사였던 아일랜드인 샬럿 페인 타운센드와 결혼했다. 표면상 금욕적인 결혼생활은 평생 계속되었으나 엘런 테리, 패트릭 캠벨 부인 등 여러 여성들과의 서신왕래를 통해서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쇼는 다음 희곡집〈청교도들을 위한 3편의 희곡 Three Plays for Puritans〉(1901)에도 희곡 자체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이 암시하는 주제까지 감동적인 산문체로 다룬 서문을 붙였다.〈악마의 제자 The Devil's Disciple〉(1897 공연)는 미국 독립전쟁중의 뉴햄프셔가 배경이며, 여기서 전통적인 멜로드라마가 전도된다. 쇼의 최초의 대작〈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Caesar and Cleopatra〉(1901 공연)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셰익스피어의〈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에 등장하는 38세의 요부가 아니라 버릇 없고 포악한 16세의 아이이다. 카이사르는 군인의 면모뿐만 아니라 철학자의 면모도 지닌 고독하고 준엄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극의 빼어난 성공은 카이사르를 무대 위의 초인적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아량과 '본유의 도덕성'을 갖춘 설득력 있는 인물로 다룬 데 기인한다. 3번째 연극〈브래스바운드 대장의 변절 Captain Brassbound's Conversion〉(1900 공연)은 의무와 정의로 위장한 여러 종류의 위선에 대한 설교이다.

 

국제적 명성

〈인간과 초인〉(1905 공연)에서 쇼는 인류는 더 높은 삶의 형태를 향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력' 운동의 최종 단계라는 자신의 철학을 피력한다. 이 희곡의 주인공 잭 태너는 여주인공 앤 화이트필드의 집요한 청혼을 뿌리치고 이러한 철학에 걸맞게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추구한다. 결국 잭은 인류의 존속과 운명이 앤과 다른 여성들의 생식능력에 달려 있으므로 그녀야말로 '생명력'의 강력한 도구임을 깨닫고 가엾게도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극의 비현실적인 제3막〈지옥에 빠진 돈 주안 Don Juan in Hell〉의 꿈 장면은 가극풍이며, 자주 개별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쇼는 유럽 대륙에서 극이 공연됨으로써 일찍이 극작가로서의 자리를 굳혔지만, 이상하게도 영국에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훨씬 뒤에 런던에서〈존 불의 다른 섬 John Bull's Other Island〉(1904 공연)이 공연되면서 에드워드 7세를 위해 특별공연을 한 뒤였다.

쇼는 계속해서 고급 희극을 통해 종교적 자각을 탐구했고 사회와 사회악의 결탁을 파헤쳤다.〈소령 바버라 Major Barbara〉(1905 공연)에서 구세군 소령인 여주인공은 자신과 등을 돌린 군수품 제조업자인 아버지가 죽음을 거래하긴 하지만 그의 원칙과 행동은 가장 높은 차원의 의미에서 종교적인 반면, 구세군은 대개 위선적인 대중의 참회와 자신들이 신랄하게 매도하는 양조업자·무기제조업자의 헌금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의사의 딜레마 The Doctor's Dilemma〉(1906 공연)는 보편적인 직업의 자기 보호의식을 대표하는 의료직에 대한 풍자이자 동시에 예술가 기질과 그것을 예술가의 업적과 구분할 줄 모르는 대중의 우매함에 대한 풍자이다.〈안드로클레스와 사자 Androcles and the Lion〉(1912 공연)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철학적 희곡으로, 종교적 찬양의 참과 거짓을 다룬 작품이다. 집단 공개처형을 선고받은 초기 그리스도교 집단을 통해서 보여준 주된 주제는 누구나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쇼의 걸작 희극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인기 있는 작품은〈피그말리온 Pygmalion〉(1913 공연)이다. 그는 이 작품이 음성학에 관한 교훈극이라고 주장했으며 반영웅적인 주인공 헨리 히긴스는 음성학자이지만, 이 작품은 사랑과 영국의 계급제도를 다룬 인간적인 희극이다. 이 극은 히긴스가 런던 토박이인 꽃 파는 소녀를 훈련시켜 귀부인 행세를 하도록 하는 과정과 이 실험의 성공이 몰고온 결과를 보여준다. 정확한 억양은 익혔지만 예의 바른 대화술은 배우지 못한 엘리자 둘리틀이 상류사회에 등장하는 장면은 영국의 극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1938년에 영화화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쇼에게 안겨주었고, 뮤지컬〈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56, 영화화 1964)로도 각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작품

쇼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분수령이었다. 처음에 그는 극작을 그만두고 논쟁적인 소책자〈전쟁에 관한 상식 Common Sense About the War〉을 출판해 대영제국과 그 동맹국을 독일과 마찬가지로 비난하면서 협상과 평화를 주장했다. 그는 반전연설로 악명이 높아졌고, 많은 이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상심의 집 Heartbreak House〉(1920 공연)에서는 전쟁 발발 직전의 한 시골집을 배경으로 전쟁의 유혈에 책임져야 할 세대의 정신적 파탄을 폭로했다. '낙담시키는 비관주의의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으려고〈므두셀라로 돌아가라 Back to Methuselah〉(1922)라는 제목으로 쓴 5편의 연작 희곡에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AD 1920년에 걸쳐 진행된 극적 우화를 통해 창조적 진화라는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1920년에 잔 다르크 시성식을 본 쇼는 그녀에 대한 역사극을 쓸 결심을 했다. 이렇게 탄생된 걸작〈성녀 조앤 Saint Joan〉(1923 공연)에서 잔 다르크는 가톨릭 성자와 순교자로서뿐 아니라 실천적 신비주의자, 이교도 성자, 영감을 받은 천재가 결합된 인물로서 다루어진다. 조앤은 '교회와 법률이라는 강력한 힘 사이에서 파괴된' 탁월한 존재로서, 비극적 여주인공의 화신이다. 그녀의 죽음은 인류가 성자와 영웅들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살해하기도 하는 모순을 보여주며, 인류가 두려워하는 높은 차원의 도덕성이 진화과정을 거쳐 인간의 보편적 기준으로 될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성녀 조앤〉에 대한 격찬은 1925년 노벨 문학상으로 이어졌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했다.

후기 작품들에서 쇼는 자신의 탐구를 심화시켜 희비극적·비사실주의적 상징주의를 완성시켰다. 그후 그는 5년 동안 희곡은 쓰지 않고 1930~38년에 쓴 작품을 편집하는 한편, 백과사전적 정치 소논문인〈여성을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입문 The Intelligent Woman's Guide to Socialism and Capitalism〉(1928)을 썼다. 그뒤 발표한〈사과 수레 The Apple Cart〉(1929 공연)는 미래파 시각에서 쓴 고급 희극으로, 쇼가 평생 동안 지켜온 급진적 정치철학과 보통사람의 자제력을 불신하는 근본적인 보수성향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외 후기 작품들로는〈너무나 진실해서 선할 수 없다 Too True to Be Good〉(1932 공연)·〈바위 위에서 On The Rocks〉(1933 공연)·〈이상한 섬의 바보 The Simpleton of the Unexpected Isles〉(1935 공연)·〈제네바 Geneva〉(1938 공연)·〈선왕 찰스의 황금기 In Good King Charles's Golden Days〉(1939) 등이 있다. 전쟁 동안 극작을 중단했던 쇼는 전후 90대에도 희곡〈부자연스런 우화 Farfetched Fables〉(1950 공연)〈셰이크스 대 셰이브 Shakes Versus Shav〉(1949 공연)를 비롯해 초기에 보여준 날카로움의 흔적만이 엿보이는 백일몽〈왜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Why She Would Not〉(1956 공연) 등을 발표했다.

건방지고 불손하며 항상 자기과시적이던 쇼는 94세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쾌활한 기지를 발휘하여 줄곧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깡마른 체구, 무성한 턱수염, 멋진 지팡이는 그의 희곡만큼이나 전세계적으로 유명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중에 아내 샬럿이 지병으로 죽자 쇼는 더욱 전쟁의 궁핍함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그는 런던의 아파트를 떠나 1906년부터 살았던 고향 하트퍼드셔의 아이엇세인트로렌스에 있는 시골집으로 내려가 1950년 그곳에서 죽었다. 쇼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로서 당시 가장 뛰어난 희극작가 이상의 역할을 했다.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인간과 초인〉의 일부인〈지옥에 빠진 돈 주안〉,〈소령 바버라〉,〈상심의 집〉,〈성녀 조앤〉 같은 작품들은 당대의 다른 극작가들과는 견줄 수 없는 수준 높은 진지함과 수려한 산문체를 갖추었다. 그는 도덕적 열정과 지적 갈등 및 논쟁이 담겨 있는 극을 발전시켰으며, 풍속희극을 재생시키고, 상징적 소극과 이단적인 극을 과감히 시도함으로써 그의 시대 이래로 연극의 개념을 새롭게 형성했다. 몽상가이며 신비주의자인 쇼의 작품에는 도덕적 열정에 관한 철학이 스며 있다. 쇼는 스위프트 이래로 가장 신랄한 격문의 저자였고,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평론가였으며, 그당시 가장 탁월한 극비평가였다. 또한 정치학·경제학·사회학에 관한 비범한 연사이자 평론가였고, 가장 많은 편지를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대담한 비평적 관점을 많은 다른 관심분야에까지 확장하여 그가 살았던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사회학적 사상 형성에 기여했다.

S. Weintraub J. I. M. Stewart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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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사회주의(웹부부)를 전파한 한국의 자본가

[인물포커스] 한국전기안전공사 송인회 사장
[주간한국 2005-01-04 16:27]

한국전기안전공사가 새해를 맞아 대대적인 경영 혁신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공기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위 공모제를 도입하는가 하면 고객인 국민들을 대상으로 획기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참여 정부가 강조하는 국정 원리인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 ‘대화와 타협’, ‘분권과 자율’ 등을 경영 근간으로 삼아 대국민 서비스 기관으로서 효율적 공기업의 모습을 그려 나갈 생각입니다.”

한국전기안전공사 송인회 사장(53)은 “취임 후 6개월간 유능하고 의욕이 넘치는 직원들로 경영 혁신 위원회를 구성, 밤낮을 가리지 않는 작업 끝에 경영 혁신 로드맵을 완성했다”며 을유년 새해를 맞아 강력하게 실천에 옮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강조하는 경영 혁신의 목표는 고객 가치 극대화, 미래 성장 기반 확충, 신바람 나는 기업 문화 구축 등이다. 이를 위해 고객 중심의 경영, 핵심 역량의 강화, 효율 중심의 운영, 성과 중심의 보상이라는 전략을 적극 펼치겠다는 것.

“국민과 고객은 높은 품질의 다양한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안전공사가 수행하는 고유 사업에 민간 부문을 참여시켜 달라는 요구와 정부 산하 기관의 업무를 혁신시켜 달라는 사회적인 요청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강력한 경영 혁신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다.

 

공기업 첫 직위 공모제 도입
송 사장은 경영 혁신의 성공 여부를 사람에게서 찾았다. 국가 경영, 회사 경영은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평소 지론에서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기획 관리 이사의 공모 선임제다. 공기업으로선 처음이다. 이와 함께 사내 직위 공모제를 실시하고, 적극적인 업무 추진을 위해 전결 권한을 하부에 대폭 이양했다. “산업자원부를 설득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민간 부문에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우수 인력들이 대거 지원한 덕분에 결과에 대해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송 사장이 민간 분야의 우수한 인력을 활용하게 된 것은 잘 훈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고급 전문 인력들이 이쪽에 많아, 이들을 활용하는 것이 국가 성장 발전에 유익하다는 판단에서다. 송 사장이 고객 중심의 경영을 펼치겠다고 선언한 것도 역시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에서 나왔다. 법정 검사, 점검 기관으로서는 최초로 실시하는 서비스 리콜 제도와 전기 안전 스피드콜 제도, 고객 만족 센터와 온라인 민원 처리 시스템인 고객관계관리시스템(CRM) 등을 구축하는 것도 모두 고객인 대 국민 서비스 혁신 차원에서다.

업무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을 구사, 순서를 둬 핵심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복안이다. 이를 위해 IT기반인 자동 사고감지시스템(KAF) 구축과 수익 사업 개발, 경력개발제도(CDP) 도입, 권한과 책임이 대폭 강화된 사업부제 도입 등을 적극 추진할 생각이다.

송 사장은 철저히 신상필벌을 강조한다. 성과중심으로 회사를 경영하기 위한 포석이다. 사내 직위공모제와 다면평가제도의 확대 실시는 물론 성과 보상제도 확대에 따른 인사제도의 개선과 승진제도 개선, 그리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우리 공사 3,000여 임직원이 하나가 되어 경영 혁신을 적극 추진하면, 2007년도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먼저 현재의 101%대인 사업 수익률은 116%대로, 청렴도 지수는 70점 대에서 90점 대로, 고객 만족도는 65점 대에서 80점 대로, 전기 화재 점유율은 현재 28%대에서 25% 이하로 감소되는 등 큰 성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안전문화 선도하는 공기업
송 사장은 전기안전공사가 변화와 혁신을 통해 21세기 초일류 공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대화와 타협을 근간으로 하는 성숙된 노사 관계다.

송 사장은 노동 문제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국내에 노동 관련 서적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고 영국의 시드니 앤 베아트릭스 웹이 저술한 ‘노동 조합의 역사’를 번역, 필사본으로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송 사장은 ‘노사’라는 표현보다는 ‘노경(勞經)’이라는 말을 즐겨 한다.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산업혁명 후 커다란 자본에 대항하기 위한 노동자의 결사체 조합이기 때문에 노사 관계가 대립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게다가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치적으로 독재 정권 하에서 경제 발전이 압축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노조에 대한 탄압과 억압으로 얼룩져 대화와 타협의 성숙된 문화를 가꾸어 가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취임하자마자 ‘노경 협력’을 주창했고 대화와 타협을 근간으로 하는 ‘신노경 문화 창출’을 슬로건으로 제시한 것도 바로 이 같은 그의 노사관에서 비롯됐다. “공기업의 노사 관계는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공기업의 사용渼?엄밀히 말하면 국민입니다. 따라서 공기업의 사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정부가 임명한 경영자입니다. 따라서 노사보다는 노경이란 말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조를 경영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는 송 사장은 매월 셋째주 목요일을 사장과 노조위원장, 지역본부장, 노조지부장들이 참여하는 ‘노경 협력의 날’로 정하고 본사와 전국 각 지역본부에서 간담회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 34조는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재해를 예방하고 재해로부터 국민을 보호 해야 할 의무가 국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송 사장은 “참여정부는 21세기 우리나라의 새로운 도약과 함께 통합되고 균형잡힌 성숙한 사회로 발전해야 하는 과제로서,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를 3대 국정 목표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균형 발전 사회를 지향하는 현대 복지 국가에서 국가 행정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국민의 안전한 생활을 보장하고,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 “한국전기안전공사는 전기로 인한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전기 설비에 대한 검사와 점검 업무를 수행하고, 전기 안전에 관한 조사, 연구는 물론 기술 개발과 홍보 업무를 수행하는 안전 관리 전문 기관 입니다. 산업자원부 산하 공기업으로서 재난 발생시 재난의 수습, 복구를 책임지도록 정부가 지정한 재난 관리 책임 기관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성숙한 노사관계 구축
송 사장은 최근 전기 설비가 대형화, 첨단화, 복잡화 됨에 따라 전기로 인한 재해의 가능성과 위험성은 점점 커지고 있는 반면,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일상 생활에서 국민의 안전에 대한 욕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고도 산업 사회에서 전기 안전을 위한 전문 기관인 한국전기안전 공사의 기능과 역할, 사명 등이 더욱 요구되는 때라는 것.

“한국전기안전공사는 안전문화를 선도하는 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안전 관리 조직은 공공재로서의 안전ㆍ경계성ㆍ가외성ㆍ현장성 등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며, 일반 조직과는 그 원리와 특성을 달리해야 합니다.”송 사장이 내다보는 공사의 향후 진로다.

공공성(공익성)과 기업성 가운데 공공성을 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공공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 조직이 비효율적이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공공성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공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송 사장의 공기업론이다.

사실 그 동안 공기업은 ‘복지 부동’, ‘무사 안일’, ‘철밥통’ 등의 말이 암시하듯 경영 비효율의 대명사처럼 불려져 왔다. 이유는 뭘까? 송 사장은 “공기업의 근본적인 비효율은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과 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장 임명을 비롯한 인사 문제와 예산에 대해서는 사장에게 전권을 줘야 한다는 것. 권한을 주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송 사장의 생각이다.

그래야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막중한 국가적인 일을 수행할 수가 있다는 강조다. 게다가 경영진이 만에 하나 정치적인 생각을 하면 사(私)가 개입되기 때문에 투명과 공정성을 지켜나가기 어렵다는 것. 따라서 송 사장은 직원들에게 항상 소명 의식을 강조한다. 송 사장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기업성을 추구, 경영혁신에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연유에서다.


송 사장은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에 취임하기 전에 이미 안전 관리와 공기업론 등을 전공, 고려대 정책대학원에서 ‘재난 관리 체계에 있어 지휘 체계 개선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행정대학원에서는 ‘공기업 경영 평가 제도의 유효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기업 경영평가론’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공기업 경영에 대해 이론적으로 해박하다는 증거다. 송 사장이 전기안전공사 사장에 선임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주위평.

송 사장은 1952년 4월 6.25 동란 중에 전북 고창에서 당시 초등학교 교장이셨던 부친 송희중씨와 모친 장성서씨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전쟁이 남긴 갖가지 아픈 모습을 체험했고 자녀가 많은 교육자 집안의 막내로서 경제적 궁핍을 톡톡히 맛보았다. 초등학교 졸업 전에 일찍 부친을 여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있는 장형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보성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나왔다. 박계동ㆍ정세균 의원, 윤성식 정부혁신지방위원회 위원장 등 정계와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송 사장의 사회 경험은 참으로 다양하다. 송 사장은 대학을 졸업한 1978년부터 14년간 범양상선(주)에서 관리 및 영업부문 책임자와 해외지사장, 본사 기획실장으로 조직 인사 예산을 총괄 관리했다. 이후 (주)하나로문화, 미래해운(주)와 ㈜미래창호의 대표 이사를 맡아 경영 일선에 뛰어 들었다. 또 국내의 대표적 SI업체인 현대정보기술(주)의 경영 고문을 역임하는 등 사기업의 간부 및 경영자로서 경험도 가지고 있다.

“조그마한 일도 나누어 함께 하는 단란한 가정 생활이 최우선이라고 봅니다. 가족 모두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점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아내와 두 아들이 있다.

 

학력 ▲52년 전북 고창 출생 ▲71년 서울 보성고 졸업 ▲78년 고려대 법대 졸업 ▲95년 고려대 정책대학원 행적학 석사 ▲2000년 서울시립대학원 행정학 박사

경력 ▲78-91년 범양상선 호주지사장,기획실장 ▲92-98년 하나로문화 대표, 월간 AUTO 발행인 ▲95-98년 제 4대 서울시의회 의원(강동구) ▲96-97년 민주당 강동을 지구당위원장. ▲2003년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무분과위원회 자문위원 ▲03-04년 대통령정책실 동북아경제중심 추진위원회 자문위원 열린우리당 중앙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04~ 현재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 대한전기협회 부회장

 

최영규 편집위원 choiyk56@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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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페비안협회 선언문

영국페비안협회의 선언문과 자치헌법 소개
빵장사 2003.08.26
338 24
유시민님 많이 바쁘시지요. 개혁당, 개혁신당의 정치경제적 진로에 참고가 될까하여
헨리조지의 영향하에 출범하였던 영국 페비안협회의 초기 강령과 자치헌법을 소개합니다.

노무현정부의 경제개혁과 개혁신당의 정치경제적 강령작성에 참고가 되었슴 합니다.
헨리조지의 영향하에, 버나드쇼가 주도하여 작성된 문건이고, 영국 사회주의의 부활에 기폭제가 된 내용입니다.

버나드 쇼가 1884년 9월 5일 페비안 협회가입후, 9월 9일 작성하여 페비안 트렉트 2호로 발표한 페비안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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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비안선언

폐비안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들을 널리 알리고, 그리고 그와 같은 여러 의견들의 귀결에 관하여 토의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현재의 정세하에서는 불명예를 수반하지 않고는 부(富)를 향유할 수 없고, 부(富)없이 살아갈려고 하면 빈곤이 발생한다. 남녀 누구나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필수품을 손에 넣는 것은, 국가의 각 성원의 의무이다.

국가의 토지와 자본에 대한 종신소유권은 이 나라내에서 태어난 모든 개인의 생득권(生得權)이며, 이 생득권은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의사에 기초하여 획득되어야 할 것으로, 그 외의 어떠한 사람의 의사에 기초해서 획득 되어서는 안된다.

한쪽편의 극에 있어서는, 왕성한 식용이 있음에도 전연 식사를 할 수가 없고, 다른 쪽의 극에 있어서는 풍부한 음식이 있음에도 전역 식용이 없다고 하는, 서로 적대적인 두 계급으로 사회가 분열되어 있는 현상은, 국가의 토지와 자본을 사인(私人)에게 맡겨 놓고 있는 현 체제가 만들어 낸 가장 두드러진 결과이다.

사인(私人)이 토지를 가장 잘 활용할 것이라고 기대하여, 국가의 토지를 사인에 맡기는 정책은, 사인이 철저하게 토지를 악용해 왔다는 사실로서, 이제 불신을 받기에 이르렀다. 공적인 의무는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지, 토지를 국유화시킨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명(기술혁신)을 장려하여, 가능한 한 공정한 방법으로 그 권리를 분배한다는 주장은, 19세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국가적 산업을 조직하는 일을 당해 산업에 맡겨 놓고 있는 현체제하게서의 품질의 저질화, 불공정한 거래, 그리고 비인간적인 강제는 경쟁의 결과가 가져온 현상이다. 생산자의 경쟁은 명백히 대중에게 가장 만족할 만한 생산물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는 모든 생산부분에서 전력을 기울여 그와 같은 경쟁을 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입은 직접세에 의해 징수되어야 한다. 또한 중앙관리기구는,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산업의 수익 중 어떠한 부분이라도, 국고를 충실히 하기 위하여 빼앗아버릴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져서는 안된다.

국가는 아동을 위하여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모든 아동이 친권자의 학대와 방임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도록 사인(私人)-특히 부모를-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가 위한 특수한 정치적 특권을 더이상 필요로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남여가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향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개인도 양친, 그 밖의 친족이 국가에 대해서 행했던 공헌에 대한 보답으로서 어떤 특권도 누려서는 안된다.

국가는 그 모든 구성원에 대하여 자유로운 교육과 국가산업에의 평등한 참여를 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의 정부가 스스로를 국가라고 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은, 마치 런던의 검은 매연이 스스로를 공기라고 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지금과 같은 곤궁의 세기가 또 다시 도래하기 보다는, 차라리 시민전쟁이 일어나는 편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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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쇼, 시드니 웹, 월리엄 크라아크, 시드니 올리비어, 그라함 왈라스, 에니 베잔트, 허버트 브란드, 등 8명의 만장일치의 안으로 만들어 협회는 수정없이 채택한

1887년 6월 3일 [페비안 협회의 기본원칙]-협회의 헌법-

[페비안협회의 기본원칙]

페비안협회는 사회주의자로 구성된다. 때문에, 협회는 토지 및 산업자본을 개인 및 특정 계급의 손으로부터 해방하여, 일반의 이익, 공동사회에 그것을 귀속시킴으로써, 사회를 재편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 방법에 의해서만이 이나라의 생득적(生得的) 및 후천적 제이익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히 분배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협회는 토지재산 사유를 폐지하기 위하여 노력함과 함께, 좋은 경지 및 단지의 이익뿐만이 아니라, 토지사용의 허가에 대해 지불되는대가가 지대(地代)라는 형태로서 당연히 개인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더우기 협회는, 사회적으로 운영되는 쪽이 편리하다고 사료되는 산업자본의 관리를 공동사회에 이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 이유는, 과거의 경우 생산수단의 독점으로 인하여, 산업상의 발명과 잉여소득의 자본으로의 전환은, 주로 유산계급만을 부유하게 하였고, 노동자는 눈 앞의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유산계급에 종속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시책들이 보상없이(사회적으로 보아 적당하다고 사료되는 구제를 몰수된 개인에게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실시된다고 한다면, 지대와 이자는 노동의 보수에 보태어 질것이고, 현재 타인의 노동에 의존해서 생활하고 있는 게으른 유한계급은 필연적으로 그 모습을 감출 것이며, 그렇게 해서 사회의 진정한 평등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현체제보다 월등히 적은 경제력의 자발적 활동에 의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페비안협회는 사회주의적 견해의 보급에 노력함과 동시에(남여 평등의 시민권을 확립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 결과로서의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희망한다. 협회는 경제적 윤리적 및 정치적 상황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지식을 일반 사람들에게 보급시킴으로써,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기대한다.

- 주- ( )의 문구는 1907년에 추가 (삽입)된 것이다. 1919년 노동당에 참여할때 까지 전혀 수정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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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장사 보충설명]

헨리조지의 사상과 정치경제학 ,그의 책[진보와빈곤]이 직접 영국 페비안협회의 구성원들과 협회선언문, 기본원칙(헌법이자 강령)에 미친 영향을 소개한 한국어 책은 한권 있습니다.

[페비안 사회주의와 복지국가의 형성] 박광준, 대학출판사

저자인 박광준교수는 사회복지전공으로 웹부부의 영국노동복지정책을 공부하러 갔다가, 웹부부의 일제식민지 찬양에 충격을 받았고, 고민 하던중에, 헨리조지의 사상이 페비안협회의 초기에 미친 영향을 공부하고 책으로 ?㎧윱求?.

토지독점의 정도가 1890년대 영국과 현재 우리나라가 비슷합니다. 페비안 협회의 강령과 정치적 실천 방안은 개혁당이나 노무현 정부, 사회당, 민주노동당 등, 개혁정당과 좌파운동권 모두 참고할 사항이 매우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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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쇼를 대표로 페비안 협회의 초기멤버들 대부분이 헨리조지의 직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강연을 들었고, 1882년에 런던에서만 [진보와빈곤]이 10만부가 팔렸습니다. 페비안 협회의 헌법격인, 위 기본원칙에서도 토지의 무상몰수 후, 지대의 사회화를 가장 기본경제원칙으로 하는바, 보상을 주장한 존스튜어트밀의 방식과 차이나는 조지의 정치경제학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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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장사 :
버나드쇼를 대표로 페비안 협회의 초기멤버들 대부분이 헨리조지의 직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강연을 들었고, 1882년에 런던에서만 [진보와빈곤]이 10만부가 팔렸습니다. 페비안 협회의 헌법격인, 위 기본원칙에서도 토지의 무상몰수 후, 지대의 사회화를 가장 기본경제원칙으로 하는바, 보상을 주장한 존스튜어트밀의 방식과 차이나는 조지의 정치경제학의 내용입니다.
2003-08-25ⓧ
빵장사 :
그러나 초기의 선언문과 기본원칙제정을 정점으로 이후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웹부부가 협회의 주도권을 갖게 되고, 헨리조지의 토지부분은 점점 희석(보상을 일부할수도 있다.) 무시(실제 페비업협회활동에서 토지관련 조사를 안하게 됨)되어서,일부는 그린벨트, 토지재산세 조금더 부과 등 자유당정권에 의해 실현되기도 하면서, 그 취지가 없어져 갑니다.

1910년, 이후 일차세계대전을 지나고, 1919년 노동당에 참여하면서, 토지공유, 지대의 사회화 정책은 희미한 흔적만을 남기게 되고, 그 이론적 본질이 거부됩니다. 현재까지 그러합니다.
2003-08-26ⓧ

빵장사 :
맑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서, 지대의 사회적 사용만 실천되지 못한것 처럼, 위 페비안선언과 기본원칙에서, 지대의 사회화, 토지의 공유화만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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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장사입니다. 다음까폐에 헨리조지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http://cafe.daum.net/hgstudyroom

위 강령과 자치헌법의 정치경제학적 내용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들의 방문과 공부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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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동북아 국제질서와 새로운 세력균형체제 모색

          21세기 동북아 국제질서와 새로운 세력균형체제 모색

                                -동북아 5개국 체제-

           

                                          李 昊 宰(고려대학교 교수, 국제정치학)  


I.  21세기 동북아 세력 재편의 몇 가지 시나리오


  1990년대 초엽의 소련 공산체제의 와해 와 동서냉전체제 종식 이후 미국과 중국관계가 새롭게 재편중인 동북아 국제정치 갈등구조의 중심축으로 급격히 부상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과 소련이 2차 대전 후 국제정치 갈등구조의 양 축이던 동서냉전 시대에 “탈냉전”만 되면 미국이 고립주의 전통을 따라 태평양 넘어 복귀 할 것이기 때문에 19 세기말과 20세기 초엽처럼 전통적 지역국가인 중국, 일본, 러시아가 주역이 되는 국제 관계가 재현될 것이라는 일반적 전망이 오판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탈냉전이 되면, 일본이 이 지역에서 미국이 담당하던 정치 및 군사적 역할을 승계 받아 사실상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던 전망도 빗나갔다.

  오히려 중국이 동북아의 권력재편과정에서 급속히 부상하여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대상이 되고 있다. 냉전시대 서방진영의 主敵이던 소련의 지위를 중국이 이어받게 된 국제적 상황인식의 변화가 중국 부상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중국이 개방과 경제개발정책의 성공으로 80년대 이래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21세기에는 세계적 경제력을 갖춘 초강대국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경계심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초강대국화는 국제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는 “중국 위협론” 혹은 “중국 경계론”이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냉전 후기 미국의 아시아정책 형성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미국이 소련의 붕괴로 얻은 세계적 군사 패권을 최대로 활용하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냉전시대의 적대 진영이던 공산주의 국가들에게까지 확대하려는 야심적 정책을 추진하면서 중국문제는 더욱 큰 논쟁점이 되고 있다.

  전 적대세력들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순화시켜 미국의 세계적 지도권이 다시는 도전 받지 않도록 하려는 정책에 중국이 그 가장 큰 대상이 됨과 동시에 걸림돌이 될 잠재력을 가진 강대국이기 때문에 미-중 관계가 벌써 동북아 국제정치의 갈등구조의 중심 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1) 

  21세기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중국 대 미-일 관계가 세력 갈등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미국정책 전문가들의 판단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문서가 1994년 7월 발표된 “참여와 확산의 국가안보전략”(A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Engagement and Enlargement)과 1995년 2월의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 전략”(U. S. Security Strategy for the East Asia-Pacific Region)이란 보고서이다. 그리고 상기전략의 집행을 위한 미국과 일본의 공조를 구체화시킨 것이 1996년 4월의 “미-일 안보 공동선언”과 “미-일 방위 협력지침”이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최근에 와서 미국의 이상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확대를 강조하면서, 미국은 현상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의 세기”였던 20세기처럼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아 21세기에서도 전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고 자주 다짐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력으로 미국의 외교를 뒷받침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2)

   미국과 일본의 외교구상과 전략을 가늠할 기본문서들을 보면, 21세기의 동북아 세력 구조의 시나리오로서 중국을 한 축으로 하고 미-일 동맹이 다른 한 축이 되어 경합하는 체제를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한 체제로 가장 먼저 가상하고 있다. “중국 대 미-일 동맹 대결”체제 시나리오에서는 동서냉전 종식 후 구 소련이 사실상 여러 독립 공화국으로 해체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의 러시아도 경제적 파탄으로 과거 러일전쟁의 패배 후처럼 매우 약화되어 동북아 지역문제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으로 전제한다.

  “중국 대 미-일 동맹”체제는 구조면에서 중, 미, 일 3강대국 체제인데, 이 체제하에서 한반도의 2개 한국정부가 어떠한 상황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2종류의 동북아 국제체제형태가 나타날 것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는 한국과 북한이 현재처럼 냉전시대의 대결관계를 지속할 뿐 아니라 남한은 미-일 동맹을, 북한은 중국을 지지하는 동서냉전기의 2블록 대결체제와 같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과 북한이 21세기에 상호 협력적 평화공존관계를 이루거나 통일되어 강력한 단일세력으로 중국 대 미-일 관계를 평화 공존적 3강 체제로 완화시키는 역할을 효과적으로 담당할 수 있을 때 발현될 체제이다.

  한민족은 전체로서는 중국 대 미-일 동맹 대결체제 같은 것에 참여하기보다는 독자적 지위에서 중재 역할을 더 바랄 것이나, 남한과 북한이 지금처럼 대결을 계속한다면 주변 강대국들의 대결구조에 편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가 중재적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기회는 통일되거나 2개의 한국이 통일된 것 같은 평화공존 상태에 있을 때 주어질 것이며, 더욱이 중국 대 미-일 대결관계가 완화되고 상호간에 평화공존을 바랄수록 높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모든 지역 국가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냉전시대의 미-소 블록과 같은 2블록 대결체제가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될 것이다.

  이상의 2가지 시나리오는 “중국 위협론”의 가정처럼 21세기에 중국이 초강대국화하여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또 미국이 소련붕괴 이후 장악한 세계적 군사패권과 냉전의 승리에서 얻은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세계의 경찰”이 되어 전 세계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개편하려 할 때 전개될 상황이다.  간단히 말해서 21세기를 미국의 것으로 만들려는 절제를 잃은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과 “중국 위협론”이 상정하는 것과 같은 중국 제국주의가 상충할 때 가상되는 동북아의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강대국들이 21세기에 가서도 20세기를 여러 번의 세계 대전으로 몰고 갈 때 범한 과오를 무모하게 반복할 것이라는 전제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현실성이 논박의 대상이 된다. 다음 세기에 도래할 정치, 경제, 군사적인 국제사회의 변혁을 감안하면 그만큼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이 2가지 시나리오와는 다른 전제를 근거로 하여 성립 될 수 있는 상황을 여러 가지로 가상하여 볼 수 있다.

  21세기에 초강대국으로서 동북아 지역의 세력 개편에 주역을 담당할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이 20세기적 제국주의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서로 상대국의 정책을 제국주의로 의심하는 악순환적인 권력투쟁의 극복에 성공하여 위험한 대결보다는 공동번영을 보장하는 평화공존적 관계가 성립된다면 다른 형태의 동북아 국제 질서가 형성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중국 대 미-일 동맹이 2블록을 결성하여 대결하기보다는 적절히 타협하여 평화공존적 방향으로 동북아 국제정세가 전개되는 조건 하에서 중국, 미국, 일본 등 3개 강대국과 러시아, 한국, 북한 등 비교적 작은 3개국 등 모두 6개의 국가가 새로운 동북아 국제질서의 형성과 운영에 참가하는 “동북아 6개국 체제”같은 것을 가상할 수 있다. 이러한 6개국 체제가 성립되려면 주도적 힘을 가진 3 강대국 즉 미국, 중국, 일본간에 제국주의적 대결이 완화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적으로 적은 영향력을 가진 3개 국가 즉 남북한과 러시아가 긴밀한 협력을 통해 동북아의 세력 판도가 2블록 대결의 방향으로 악화되는 것을 적극 예방하는 것도 강대국의 역할 못지 않게 중요하다.

  “동북아 6개국 체제” 유도의 중요 조건은 이 지역의 3대 강국을 견제할 입장에 있는 다른 3개 국가들이 2블록 대결체제 결성을 위해 강대국들이 각각 요구할 동맹결성 및 블록 참여를 유보하면서 가능한 한 중립적 지위에서 중재 역할을 적극 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한반도의 한국과 북한이 분단시대처럼 남북대결의 승자가 되기 위해 미국 혹은 중국과의 동맹강화를 추구하지 않고 평화공존에 이해를 같이하며 마치 통일한국처럼 모두 중립적인 지위에서 3강대국의 이해대립을 중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상과 같은 “동북아 6개국 체제”가 현실화될 수 있다면, 그 다음으로 가상하여 볼 수 있는 것은 “동북아 5개국 체제”이다. 이 체제는 6개국 체제와는 달리 한반도의 2개 한국 정부가 연합 혹은 통일국가가 되어 동북아 국제질서의 구성 국가의 수가 5개 국가가 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국가는 분단시대와는 달리 남북의 힘을 합쳐서 “준 강대국” 같은 지위를 누리는 반면에 중국, 미국, 일본 등 이 지역의 전통적 강대국은 상호간의 견제로 한반도 같은 약소지역에 서로 제한된 영향력만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이 체제 유도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된다.  결국 이 체제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통일 한국 등 5개국이 모두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과거 5개국 이상의 유럽 강대국들이 세력균형 원칙에 따라 안정과 평화를 얻었던 “유럽 협조체제” 같은 것을 이 지역에 형성하려고 할 때 성립될 수 있는 일종의 세력균형 체제이다. 

  마지막으로 가상하여 볼 수 있는 것은 “동북아 다다국(多多國) 체제”이다. 이 체제는 “중국 위협론”의 가정과는 달리 21세기에 중국 대륙이 분할되는 것을 가정한다. 이것은 예를 들면 현재 중국을 강력히 통치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이 상당한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후 국내 정치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될 민주화와 분권화 그리고 빈부 격차의 심화와 부의 공정 배분요구 등을 처리하는데 실패하여 국민의 신뢰와 통치력 상실로 구 소련 해체 후의 러시아처럼 “보통 국가”가 될 때 나타날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이다. “보통국가”화한 중국과 그 기회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대만, 티베트, 몽고, 신장 지역 그리고 미국, 일본, 러시아, 한국과 북한 등 약 10여 개 국가가 동북아 국제 질서의 구성에 참여하는 체제이다.

  “동북아 다다국 체제”는 중국이 “하나의 중국”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대륙이 분할될 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정부가 결코 용납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거부할 체제이다. 그러나 영국 미국 등 해양세력은 유럽대륙을 분열 상태에 두어 안전을 확보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아 온 것처럼, 중국대륙에 강력한 하나의 통일국가가 존재하는 것보다는 분할 상태에 있는 것이 자신들의 안전에 덜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을 경계하는 일본 같은 국가들은 중국의 분열을 전제로 하는 “동북아의 다다국 체제”를 매우 선호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동북아는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 위협론”을 경계하여 동북아에 “다다국 체제” 같은 것을 유도하려는 미국, 일본 같은 해양세력과 “하나의 중국”원칙 하에 강력한 통일 중국을 더 한층 강화하려는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판도가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다.



II.  20세기 신질서 모색의 실패와 지역국가간의 갈등악화


  19세기 후반까지 동북아에는 중국대륙을 장악한 강력한 통일제국이 종주국적 지위에서 주변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는 “中國一帝國支配”적 질서가 약 2천년 이상 자리를 잡아 왔다.3) 그 질서는 중국 중심의 “華夷觀” 혹은 “유교적 국제질서관”으로 정리되어 이 지역 전체가 하나의 통일국가로 통치되는 것이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옳은 길 즉 “正道”이고, 통일성을 잃고 여러 왕조로 분열되어 패권싸움을 하는 상황을 아주 잘못된 길 즉 “覇道”라는 믿음으로 일반화되어 역사적으로 오랜 동안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유지에 기여하여 왔다.4)   이러한 믿음은 로마제국 해체 이후 특히 유럽의 근현대사에서 유럽국가들이 유럽 대륙의 하나의 강대한 제국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고, 여러 국가로 분열된 상태에서 세력균형 원칙에 따라 각국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유럽대륙 전체의 안정을 얻는 것을 정상시했던 경향과는 매우 대조된다.5) 그래서 동북아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분열과 패도상황을 극복하고 통일을 달성하는 것이 정도라는 “통일천하” 개념이 질서와 안정 유지에 도움이 된 반면에, 유럽대륙에서는 기회를 얻은 1개의 강력한 제국의 세력균형원칙을 무시한 통일 유럽제국의 건설 시도가 1차, 2차 대전처럼 유럽의 평화와 안전을 파괴하는 잘못된 길로 간주되었다.

  결과적으로 전 유럽을 지배하던 강력한 로마제국 같은 통일된 중국제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19세기 말엽까지 오랜 동안 동북아 지역 질서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중국중심의 동북아 국제질서가 19세기 후반부터 월등한 무기로 무장한 서양 강대국과 일본의 도전으로 와해되는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그에 따라 동북아 지역은 유럽적 국제질서를 수립하려는 시도에 의해 중국 대륙이 구미 열강에 의해 분할되었고, 한반도는 청, 일, 러 3국이 불안하게 세력균형관계를 유지하는 “3국의 불완전 세력균형체제”로 변하였다. 그 후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한반도의 청, 일, 러 3국간의 불안한 세력균형관계를 타파하고 한반도의 병합 그리고 1차 대전의 전승국으로서의 월등한 힘과 국제적 지위를 얻어 더욱 제국주의적 영토 팽창을 추구하면서 중국 대륙은 더욱 통일성을 잃어 갔다.

  1차 대전 후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 등 중국대륙의 일부를 장악하여 동북아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는 지위를 구축하였으나, 중국과 소련 그리고 구미 열강들의 견제와 도전 때문에 결코 안주할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6) 그래서 일본은 대 중․소 및 대 서방 방위의 필요성을 내세워 1932년에는 일차로 만주국을 수립하고, 다음 단계로 내몽고와 동북부의 화북지방 5개성, 즉 하북(河北), 산동(山東), 산서(山西), 차하르, 수원(綏遠)에 자치정부를 수립하려고 획책하였었다.7)  더 나아가 일본이 이 지역의 주도국이 되는 “대동아 공영권”의 수립이 일본의 동북아 국제질서의 구도임을 내외에 분명히 천명하였다.

  일본이 1930년대에 와서 만주국 그리고 몽고와 화북지방 5개성에 자치정부를 적극 수립하려했던 정책은 아시아인을 위한 “대동아 공영권” 수립이라는 원대한 야심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본이 국가 간의 권력투쟁에서 흔히 쓰는 분할지배 정책을 좇아 잠재적 경쟁국인 중국을 여러 세력으로 분열된 상태에 놓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예방적 측면도 있었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동북아 지역에 오랜 동안 존재해 왔던 “중국 일제국 지배체제”를 대신할 “일본 일제국 지배체제” 즉 대동아 공영권을 수립하려던 일본의 야심적 시도는 실패하였다. 다시 말해서 중국 중심의 이 지역 국제질서가 붕괴된 기회에 일본 중심적 질서를 창건하려던 오랜 일본의 노력은 결국 한민족과 중국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와 지역적 혼란만 야기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 패망 이후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고, 그 무렵에 시작된 동서간의 냉전과 상호봉쇄정책에 따라 친미적 한국과 친소적 북한정부를 각각 수립하면서 “미. 소 양 블록 대결체제” 같은 것이 동북아 지역에도 점차 자리잡아 갔다. 1949년 모택동의 중국대륙 장악과 장개석 국부군의 몰락, 1950년 6월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참전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동북아 지역도 유럽과 같이 동서냉전의 양대 대결장의 하나가 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이 대 소, 중, 북한 봉쇄정책을 위해 일본과의 동맹정책을 적극 강화하면서 일본은 일찍부터 지역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고 있었다.

  소련-중국-북한 동맹 대 미국-일본-한국 동맹 대결형태의 미, 소 양 블록 대결체제는  50년대 말경 시작된 중-소 분쟁과 모택동의 독자노선 그리고 북한의 대 중, 소 등거리 외교와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유일 체제 강화 등으로 공산 블록의 내부 균열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내용 면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오랜 월남전쟁의 종식과 미군의 완전 철수 그리고 1971년 중국이 대만을 축출하고 유엔 대표권을 차지하고 1978년에 중국과 미국간의 국교정상화가 성립된 후에는 중국이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견제하는 미-일 동맹체제와 협력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서방세계와 협력하는 개방과 경제개발 우선 정책을 추구한 것이 미-소 패권 경쟁을 미국의 승리로 기울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 후 80년대의 동북아시아 세력판도는 미, 소 뿐 아니라 중, 일이 각각 독자적 발언권을 갖고 참여하는 “4강 체제” 같은 것으로 점차 변화되어 갔다.

  이처럼 동북아의 세력판도가 미, 소를 중심으로  2블록을 지어 대결하던 냉전구조와는 매우 다른 4강 체제적 구조로 변화되면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문제도 주변 4강이 남북한을 교차 승인하는 방법을 통해서 해결하는 “4강의 남북 교착승인”을 전제한 “동북아의 평화공존적 4강 체제”로 발전될 것이 기대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힘입어 1991년 9월 한국과 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고, 한국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북방외교로 소련 및 중국과의 국교정상화가 급속도로 실현되었다. 한편 남북한간에는 1988년이래 계속 열렸던 남북 고위당국자회담에서 1992년의 남북 기본합의서 즉 “남북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 서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합의되어 공동 발표되기까지 했다. 한국 북방외교의 성공적 결과였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국제적 의혹과 적절한 사찰문제로 남북대화가 중단되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 핵 개발 저지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면서 북한 핵 시설에 대한 폭격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정책이 한반도의 전쟁돌발 위기감을 극도로 고조시켜 그 동안 남북한이 무력대결을 청산하고 새로운 평화공존시대를 열기 위해 수행해 온 많은 노력의 결과들이 무산되어 버린 사태가 일어났다. 이 무렵 김영삼 정부의 외교 안보 팀이 미국의 대북 무력 응징에 의한 한반도의 전쟁 발발을 예방하기 위해 수행한 대미 외교 노력은 한민족을 위해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전쟁 발발의 방지에만 매달림으로써 아주 약화된 한국의 주장에 별로 주의하지 않고 결국 미국 클린턴 정부는 1994년 10월 “제네바 북-미간 기본 합의서”를 채택, 북한의 핵 개발을 동결하는 수준에 만족해야 하는 협정을 북한과 체결했다. 북한의 핵 개발 동결 보상으로 미국은 KEDO를 통한 2기의 원자로 건설(50억 달러)과  5천만 달러 규모의 중유 지원 그리고 대북 경제제재 해제와 북-미 국교수립원칙 합의 등에 동의함으로써 북한에게 그들이 원하는 북-미 직접 협상의 길을 열어주어 미국은 사실상 한반도 문제 협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제네바 북-미간 기본 합의서”는 낙관적 견지에서, 그것이 북-미 뿐 아니라 북-일 국교정상화까지 실현시켜, 남북한의 평화공존 뿐 아니라 동북아에서 4강 간 평화공존을 보장할  새로운 동북아 체제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금창리 핵 개발 의혹 사건,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로 주장하고 있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 사건, 북한의 간첩 잠수정의 동해 침투 그리고 금년 6월의 연평 해전 등 이 지역의 정세를 불안으로 몰고 가는 나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대만의 이등휘 총통이 “하나의 중국”원칙을 부정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국가 대 국가관계로 정립하겠다고 선언하여 대만과 중국관계를 극도로 긴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종래의 국제적 합의를 부정하고 대만의 독립을 추구할 것을 사실상 선언한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 국제 관계에 매우 심각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와 같은 심상찮은 대만정부의 움직임은 97년 9월 미-일 군사동맹의 협력 방안인 “미-일 방위지침”의 개정과 그것에 따라 미군이 전개할 모든 작전에 일본 자위대의 참여에 필요한 “일본의 주변 사태법”이 1999년 5월 24일 일본 국회의 통과로서 확정된 시점에 표면화되어 국제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일 동맹체제가 더 한층 강화된 시점에 표출되었기 때문에 중국은 “하나의 중국”원칙을 부정한 대만에 무력응징도 불사한다는 강경 입장에서 군사적 대응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999년 5월 미국의 전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가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그 방문이래 특히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동결과 미국의 대북한 경제제재 해제 및 식량 등 경제지원 그리고 북-미 관계정상화를 일괄 해결하려는 소위 일괄 타결안이 북한문제 조정안으로 부상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일괄타결 정책으로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일관성을 갖고 추구하고 있고, 북한도 핵 및 미사일 협상에서 보인 것처럼 미국과의 협상에 성실성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한반도에 관한 한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주변 4강이 남북한을 교차 승인하는 바람직한 상황 즉 미, 일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상황이 도래할 것 같다.8) 그러나, “중국 위협론”을 전제로 중국 대 미-일 동맹 대결 같은 사태가 전개되면, 남북한 관계도 평화 공존적으로 자리잡기 매우 어렵게 되어 동북아의 장래를 결코 낙관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처럼 동북아 국제관계를 개관하여 보면, 19세기 말 중국대륙 중심의 동북아 질서가 붕괴된 이래 일본제국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적 방법으로 대동아 공영권 같은 독점적 질서를 수립하려다가 결국 미-일 전쟁으로 패망하였다. 2차 대전 후 전승국 미, 소는 편의주의와 단기적 손익에 따라 한반도를 분단하는 실책을 저지름으로써 한국전쟁을 일으켜 동북아 지역을 유럽대륙과 같이 동서냉전의 세계적 대결장으로 만들어 이 지역에 새로운 질서 수립에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지역 국가 간의 갈등과 상호불신감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20세기의 동북아 역사가 확실히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1국 패권주의” 혹은 “2국에 의한 분할 패권”정책은 결코 성공 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지역 국가들이 소련체제의 붕괴 후 도래된 새로운 시대상황에서 장래의 동북아 국제관계에 대한 창조적 구상이나 모색도 없이 21세기에도 “중국 대 미-일 동맹대결”같은 잘 못 된 길을 좇아 20세기의 실패를 반복할 것이 염려된다. 이러한 사태발전은 이 지역 정치지도자의 “비전”부재의 결과로서 그들의 책임이 크지만, 지역의 국제정치학자의 한 사람인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III.  동북아의 세력균형 모색과 “동북아 5개국 체제”            


  19세기 말엽이래 동북아 국제관계가 여러 번의 전쟁으로 극도로 악화된 지역 국가간의 대결과 불신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쁜 과거에만 매달려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상태에 계속 머물고 있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동북아의 현재는 오랜 구미열강들의 제국주의 횡포와 지배권의 현상유지 야욕, 악랄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무단정치의 유산, 그리고 전후 미소의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중국내의 국-공 내전을 계기로 한 냉전적 이념대결의 전 지역으로의 확산 등 많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세력분포의 측면에서 보면 비슷한 힘을 가진 5개 이상의 국가들이 세력균형원칙에 따라서 상호 견제로 질서를 유지하던 유럽 대륙과는 달리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 1개국 혹은 중, 일 2개국 아니면 중, 일, 러 3개국에 힘이 편중되어 있어서 세력균형체제가 형성, 유지되기 어려운 객관적 조건이 중대한 결함이 되었다. “1개국 패권”, “2개국 분할 패권” 그리고 “3개국 불완전 세력균형체제”만 형성된 것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 파괴의 중대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근대이래 유럽의 역사가 증명한 것처럼, 비슷한 힘을 가진 5개국 이상이 형성한 유럽의 세력균형체제가 지난 4세기 동안 유럽국가들의 독립과 지역의 평화 확립에 반드시 기여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세력균형체제를 평화에 기여한다고 긍정적으로만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유럽 국가들이 동서 냉전시대를 지나 “하나의 유럽“을 목표로 하면서 평화 공존적 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데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유럽 국가들 그리고 러시아 등 전통적인 유럽 열강들이 국력 분포 면에서 대체로 균형을 이루어 확실한 세력균형체제로 뒷받침한 객관적 조건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국제사회에서는 과거 중국 혹은 일본이 누렸던 “1개국 패권” 혹은 “2개국 분할 패권”은 민족주의 정치이념으로 무장하고 있고 또 상당한 국력을 가진 다른 국가들의 저항으로 결코 성공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지역의 크고 작은 모든 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하는 평화 공존적 세력균형체제만이 수용될 수 있는 오늘의 국제적 현실 때문에 우리가 21세기를 향한 미래 지향적 국제질서를 창의적으로 구상하는 데에는 유럽의 세력균형체제에서 가장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21세기 동북아 문제는 지역국가들간의 힘의 불균형상태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전통적 유럽의 세력균형체제 같은 것을 이 지역의 새로운 질서로 유도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모겐소 교수의 논리처럼 여러 독립국가로 구성된 복수적 국제체제 하에서는 모든 구성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체제 전체의 안정을 얻는 유일한 길은 세력균형원칙을 준수하는데 있고, 현재와 같은 복수적 국제정치 체제의 존속에는 모든 구성국가의 세력균형원칙 준수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9) 그래서 여러 독립국가로 구성된 국제정치에서는 세력균형원칙에 충실한 세력균형체제가 형성되고 유지되어야  모든 국가의 독립과 체제안정이 동시에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 절에서 개관한 것처럼 동북아에서는 힘이 몇 나라에 편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역국가들은 중국 혹은 일본 중심의 “1국 패권” 과 미, 소 2국의 “분할 패권” 등 패권적 질서에만 익숙하고 비슷한 힘을 가진 5개 이상의 국가들이 세력균형원칙에 따라 離合集散하면서 모든 지역국가의 독립을 허용하는 평화공존체제를 경험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지역에 세력균형체제를 유도하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도 21세기의 동북아 지역에 일종의 세력균형체제를 유도하는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조건이 현재 발전하고 있다.

  첫째, 미국이 반세기 동안의 동서냉전 과정에서 동북아 지역분쟁에 직접 개입하여 전통적인 지역 3강대국인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이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 절대적 이해관계를 가진 직접 당사국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동북아의 국제관계는 미국의 적극적 참여로 역사상 처음으로 “4강 체제”같은 것이 자리 잡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은 근년에 이 지역의 절대적 이해 당사국임을 강조하면서, 자국이 이 지역의 지역국가임을 동북아 지역의 자국의 이익과 함께 미국이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보다 더 넓은 지역 개념인 “아시아. 태평양 공동체”의 지도 국임을 강조함으로써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10) 이점을 미국은 소련 붕괴 후 냉전의 승리국가로서 세계적 군사패권 장악 이후 더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를 클린턴 대통령은 소련붕괴로 냉전이 종식 된 후인 1995년 2월 전통적 고립주의로 복귀하는 대신 “참여와 확산의 안보전략”에 따라 약 10만 명 규모의 아시아 주둔 미군을 유지하여 미국의 정치, 군사적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지켜 나가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동아시아-태평양지역 전략지침”에 아주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11) 그래서 21세기의 동북아는 미국이 어느 때보다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깊이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특색이 될 전망이다. 과거와 달리 절대적 이해를 가진 미국이 직접적 당사국으로 적극 참여하는 것은 동북아 지역에 일종의 세력균형체제를 유도하는 데에는 좋은 조건이 된다.

   둘째, 과거와 달리 이 지역의 전통적인 3대 강국간의 힘의 분포가 어느 한 쪽으로 편중되어 있지 않고 각국의 힘이 비슷한 균형상태에 있어서 조건만 주어지면 3국이 각각 독립변수로서 일종의 세력균형체제의 유도에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과거 보다 높아진 점이다. 20세기까지의 상당한 기간 동안 중국 혹은 일본은 한쪽이 너무 강하거나 약한 상태에 있었고, 한때는 소련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어서 이들 3 국간에는 세력균형이 잘 성립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특히 90년대 이후 중, 일, 러 3 국은 각기 다른 장점을 가진 강대국으로서 서로 상대국들의 패권 추구를 저지할 상당한 힘을 보유한 사실과 미국의 적극적 참여 때문에 이들 4국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종의 세력균형관계가 성립되어 앞에서 논한 “5개국 세력균형체제” 유도의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         

   상기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지역에는 미국까지 포함해도 4개국 밖에 없다는 결함 때문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5개 이상의 구성국가가 있을 때 성립이 가능한 완전한 세력 균형체제는 현재로서는 어렵다는 것이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논할 때 근본적 문제로 제기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한반도와 한민족의 위치 및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다시 말해서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모든 지역국가들의 평화공존을 가장 잘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5개국 세력균형체제”가 요구하는 1국의 역할을 한반도가 담당할 수 있을지가 동북아의 장래를 크게 좌우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민족이 주변 4강과 같이 1강의 지위에서 한반도 뿐 아니라 동북아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을 "5개국의 세력균형체제", 즉 “동북아 5개국체제”를 새롭게 창조할 역사적 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한갖 한민족의 허황한 꿈이 아니다. “동북아 5개국체제”는 과거와는 달리 장차는 현실화될 수 있는 이상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남북한의 한민족이 단합하여 1강의 역할을 담당할 운과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는 크게 의문시된다.

   전후 냉전 반세기처럼 남북한이 극단적 대결을 지속하면, 현재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4강 체제가 평화공존적인 것으로 발전 못하고 균형을 잃고 깨어져 제Ⅰ절에서 가정하여 본 21세기 동북아질서의 여러 시나리오 중에서 “중 대 미-일 동맹”에 한국과 북한이 각각 다른 편에 가담하여 대결하는 “2블록 대결체제”로 재편될 것이다. 이러한 2블록 대결체제에서는 과거 냉전 시대 같은 전쟁과 갈등 그리고 혼란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의 한민족이 92년에 채택한 남북 기본합의서인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잘 준수하면서, 이미 설립되어 있는 군사, 경제 교류협력, 사회문화 교류 협력 등 3개 공동위원회를 잘 운영하여 남북한이 평화 공존하는 새 시대를 열면, 동북아시아는 장래 다르게 발전할 여러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한반도의 남북한이 지금과 같은 民族相殘的 대결을 계속하면 동북아의 장래는 매우 비관적이다. 반대로 한민족이 남북 평화공존시대 혹은 통일시대 개척에 성공하면 동북아의 장래를 낙관할 수 있다.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문제는 한민족의 역할과 한반도의 미래 상황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말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한반도처럼 허약한 세력으로서 주변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한 강대국이 먼저 한반도를 선점하면 다른 강대국에게 큰 위협이 되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강대국의 권력투쟁의 대상이 될 뿐 일 것이다. 한반도가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약소국으로 남아 있는 한 동북아의 국제관계는 과거와 같은 불행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통일 한국이라도 “2류 국가”로서 동북아의 전쟁과 평화문제에 발언권을 갖지 못할 존재라면, 주변 강대국들도 한국이 세력균형체제의 형성과 유지에 절대로 필요한 1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유럽 같은 세력균형체제 수립을 통해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한반도 주변의 국제관계가 2강, 3강 혹은 4강 상태로 전개되어도 세력분포와 구조면에서 매우 불안하기 때문에 한민족이 다른 열강과 같이 1강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조건하에서는 세력균형 보다는 블록 대결정책을 통해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려 할 것이다. 그 길이 더 쉽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21세기에 한반도가 통일되거나 2개의 한국정부가 존재하더라도 내적으로 상호 보완하고 대외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1강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면, 주변 4강들도 한민족이 독자적 존재로서 1강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을 믿기 때문에 한민족과 협조하여 새로운 “동북아 5개국체제”의 유도를 위해 적극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은 매우 어렵고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현재는 남북한이 대결상태조차 완화시키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동북아 5개국체제”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실패를 21세기에 다시 반복하는 것은 더 큰 악몽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민족들은 21세기를 위해 새로운 동북아의 국제관계를 창조해야 할 역사적 과제에 대한 도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IV. 한반도의 지위 강화와 한민족의 선택과 역할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공동번영에 “동북아 5개국 체제”같은 것이 더 기여할 것이고 또 그것이 바람직한 이상이라고 할지라도 한반도와 한민족은 지정학적으로 약소한 조건 하에 있기 때문에 남북한이 이 지역에 새로운 “동북아 5개국 체제” 시대를 주체적으로 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많다. 설사 한민족이 통일국가를 이룩한다 해도 주변 4강대국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하기 때문에 동북아에는 유럽적 세력균형체제가 성립할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북아와 한국 관계의 오랜 역사적 사실들은 더욱 한민족이 주변 4강에 비견될 영향력과 지위를 가진 1강으로서 “동북아 5개국체제”에 참여할 가능성을 완강히 부정한다. 그래서 한국이 21세기에 동북아 5강의 1국이 될 가능성은 중요한 논쟁점이 된다.     

  필자는 일찌기 “한국과 일본, 21세기로 가는 길”이라는 논문에서 한국, 일본, 미국 등  관련 국가들이 공동으로 추구하여야 할 21세기의 목표로 “동북아 5개국 체제”를 제의하면서, 그 가능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망하였다. 즉,


“21세기 동북아 질서는 통일된 한국도 힘과 능력을 가지고 참여하는...5개국 체제로 발전하여야 한다. 몇 년 전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보고서는) 대략 2000년 무렵에  남한이 인구 5000만과 GNP 2500억 불에 이르는 국력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였는데, 작년의 남한 GNP는 2천 1백억 불을 넘어서서 세계 13위가 되었다. 그러므로 2000년대에 남한과 북한을 합친 총 국력은 인구 약 8천만에 GNP 3천억 불로서 주변 강대국에 비교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동북아 5개국체제’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할 능력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상기한 것 같은 국력을 가진 통일된 한국은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과거와 달리 약소국의 지위를 벗어날 수 있다.”12)


  21세기로 들어가면 갈수록 남한과 북한의 국력이 강화되겠지만, 과거와는 달리 자원, 군사력 등 물리적인 것 못지 않게 일본과 독일의 경우가 증명한 바와 같은 경제 개발과 첨단 기술 및 과학분야의 개척 그리고 국민의 교육력 신장 등 비물리적 분야의 개척을 통해서도 한국은 경제력 신장을 중심으로 국력 신장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13) 그래서  21세기에 가서도 한국의 국력이 약소국 수준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 것은 미래 국제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잘못 읽은 결과가 될 것이다.  미래의 국제관계에서는 강대국간에 군비경쟁이 시작되면 모든 강대국의 군사력이 서로 치명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는 ‘상호상멸’의 수준을 쉽게 넘게 됨에 따라 종래 군사력이 누리던 막강한 영향력이 점차 상실될 것이므로 강대국들은 군사적 대결의 한계를 깨우치고 경제력 등 비군사영역의 경쟁에 치중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대국간의 군비경쟁이 21세기에 가서 더욱 치열해질수록 “상호상멸”의 수준을 넘는 군사력의 포화 상황이 되어 국제정치에서 군사력의 위력은 약화될 것이고,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에서도 약소국의 군사력이 상대에게 치명적 손상을 가할 수준만 되면 강대국의 월등한 군사력과 자원이 누리던 영향력이 많이 상실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핵 시대 국제정치에서는 강대국과 약소국간에도 핵무기로 인한 “공포의 균형”이 쉽게 달성되어 군사력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군사력의 중화” 현상 혹은 “군사력의 평등화” 현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군사 패권주의는 점진적으로 후퇴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14)  따라서 만약 한국도 통일되어 어느 정도의 군사력만 갖추면 질과 양면에서 월등히 적은 규모의 것일지라도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군사적 압력에 맞서서 대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군사력 중화현상 때문에 한국이 주변 4강대국과 같이 “동북아 5개국 체제”의 중요한 구성국으로서 참여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15)

  이상과 같이 21세기의 국제관계에서 일어날 군사력의 한계와 국력 구성요인의 변화 그리고 핵무기 등 첨단 무기의 발전과 확대로 동북아 국가 간의 질서가 변화할 것을 가상하면서, 한국이 장차 “동북아 5개국 체제”의 당당한 구성국이 될 수 있을 것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계속 믿고 있다. 즉,


  “한국이 장차 ‘동북아 5개국 체제’의 당당한 구성국이 될 수 있는 것은 ... 엄청나게 성장한 한국의 국력 자체에 일차적으로 근거하지만, 단순히 한국의 국력 자체뿐만이 아니라, 주변 4강대국간의 경쟁과 상호견제 그리고 지역의 세력 균형의 필요상 서로 한국의 도움을 필요로 할 국제적 환경 변화로 한국의 국제 적 지위와 역할이 확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준 강대국’인 한국의 향배가 4강간의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주변 강대국들이 약소한 한민족을 희생시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한국의 참여와 협력을 얻어 세력균형적 방법으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얻으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미국이 한국과 협력하면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과거와는 달리 지역 강대국 일본 혹은 중국과 경쟁  할 수 있고, 한국 역시 미국의 협력을 얻어 주변 강대국의 패권욕심을 견제할 힘을 더 얻게 될 수 있을 것이다.“16)


  더욱이 필자는 상기 논문에서 “동북아 5개국 체제”의 유도가 동서냉전의 종식 직후부터 악화되고 있는 중국과 일본간의 군비경쟁 그리고 미-중간의 대결을 완화시켜 서로 협력적인 평화공존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다.17)  뿐만 아니라 21세기 한민족의 역량과 가능성에 관한 필자의 낙관적인 믿음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유효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즉,


  “장차 100년 동안 지속될 21세기의 어느 시점에 가면 한민족은 남북 합쳐서 약 1억 인구와 국민당 소득 1-2만 불 혹은 그 이상을 누리는 “준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그 시기가 2020년이 될지 2030년이 될지 확실히 말할 수 없어도, 한민족은 21세기에 “준 강대국”의 힘을 가진 뚜렷한 존재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상기한 국력규모는 현재 영국의 인구 5,760만, 1인당 소득 20,400 달러, 프랑스의 인구 6,090만, 1인당 소득 24,900 달러 그리고 통일독일의 인구 8,100만, 1인당 소득 28,779 달러에 비해 손색이 없으므로 “준 강대국”이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숫자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21세기의 한민족은 국력 면에서 지금보다 월등하여 국내외 문제에 보다 큰 자결권을 가지고 동북아 세력판도 결정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된다.“18)

  위에서 낙관적으로 전망한 것처럼 장차 한민족이 “동북아 5개국 체제”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Morton Kaplan의 적절한 지적처럼 세력균형체제의 성립과 유지에는 비슷한 힘을 가진 국가의 수가 5개국 이상 존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제의 구성국가들이 모든 구성 국가의 독립을 보장할 평화 공존적 세력균형체제를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세력균형체제가 요구하는 기본 행동 율을 충실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Kaplan 교수는 세력균형체제의 원만한 운영과 존속을 위해서 모든 구성 국가들이 지켜야 할 기본 행동 율로서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의 역사적 경험을 근거로 여러 가지 기본 행동율을 제시하고 있다.19) 그 가운데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국가들은 다른 국가를 압도할 초국가적 지위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2) 전쟁에 승리해도 패전국을 소멸시키지 말고, 언제든지 세력균형체제의 일역을 담당할 수 있도록 존속시켜야 한다.

 (3) 2류 혹은 3류급 국가라도 체제유지에 필요하면 1류 국가로 강화하여 세력균형체제 운영의 파트너 국가로 삼아야 한다.


  세력 균형체제의 구조적 특징과 그 체제의 기본 행동 율을 매우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중국 위협론”을 전제로 중국 대 미-일 동맹 대결체제로 재편되고 있는 중, 미, 일 3 강 관계는 바람직한 “동북아 5개국 체제”유도에 역행하는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동북아의 당사국들은 우선 “동북아 5개국 체제”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이 과거 경험만 믿고 미, 일의 경우 미-일 동맹의 강화를 통한 대결체제를 구축하려는 잘못된 관성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주변 열강은 “2류 혹은 3류 국가라도 체제유지에 필요하면 1류 국가로 강화하여 세력균형체제 운영의 파트너국가로 삼아야 한다”는 상기 행동 율에 따라 서로 협력하여 한민족과 한반도를 1류 국가로 조속히 육성시키는 것이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조건임을 빨리 배워야 한다. “독립되고 강력한 한국 없이, 동양의 평화도, 세계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20)는 한민족의 오랜 주장은 바로 “동북아 5개국 체제”의 성립이 동북아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임을 일찍부터 깨우침으로써 나온 지혜이다.


V.  결 어    


  여러 가지로 가상할 수 있는 21세기의 동북아 국제질서 시나리오는 크게 2가지 형태 즉 (1) 냉전시대의 미-소 대결 같은 중국 대 미-일 동맹의 2블록 대결체제와 (2) 중, 미, 일, 러 그리고 남북한 등 5-6 개국이 참여하는 유럽적 “세력균형체제”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 대 미-일 동맹 대결체제에서는 냉전시대의 미-소 대결 같은 군사적 대결이 계속될 것이고 20 세기의 실패를 반복 할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 위협론”이 미국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있고, 최근 미-일 동맹이 강화되고 있는 동북아의 정세를 볼 때 현재의 4강 체제가 21세기에 평화공존적인 것으로 발전하기보다는 미, 중 중심의 2불록 대결체제로 재편되어 갈 가능성이 더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세력균형체제”가 지역의 모든 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할 뿐 아니라 시대적 요구인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을 더 보장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관련 당사국의 지도자들은 보다 낳은 미래를 위하여 이 체제의 가능성과 필요조건을 연구하여 새로운 동북아 질서의 모형을 제시하고 그 체제의 실현을 위해 적극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21세기의 분명한 시대적 요구이다.   

  미국의 적극적 참여와 개입, 중, 일, 러의 국력 평준화 그리고 한반도가 분단상태에 있으면서도 상당한 국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한 객관적 조건의 변화가 과거와는 달리 동북아 지역에서도 바람직 한 세력균형체제인 “동북아 5개국 체제”의 유도를 좀 더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지역 국가 간의 국력 분포가 중국 대륙에 심하게 편중된 조건 때문에 동북아에서는 유럽적인 세력균형체제 같은 것이 성립되기는 구조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장차 21세기에 중국이  현재와 같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계속하여 미국, 일본 수준의 경제대국이 되고, 그 경제력을 뒷받침으로 막강한 군사력까지 가진 초강대국이 될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동북아의 안전 뿐만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과의 세력균형도 위협할 것이라는 “중국 위협론” 같은 것이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중국 봉쇄 이외의 다른 정책의 모색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의 새로운 동북아 질서 수립을 위해서는 관련 당사국들의 다음과 같은 동북아 질서에 대한 구상과 인식의 과감한 수정 그리고 열강의 역할에 대한 발상의 전환 없이는 21 세기도 20세기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 이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즉,

  (1) 미국과 일본이 미-일 동맹 강화를 통해 장래의 중국 위협에 대비하기보다는 한반도의 남북한이 분단과 대결상태를 벗어나서 강력한 통일 국가가 되어, 동북아 5개국체제의 당당한 1강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중국문제에 대한 보다 근원적 해결책이고, 동북아에 평화공존적 세력균형체제를 수립하는 길이다. “天下無敵”인 미-일 동맹 강화로 동북아의 모든 사태에 대비하려는 미, 일의 기본 입장은 중국 대 미-일 대결의 완화에 결코 도움이 안 된다.

  (2) 중국도 미-일 동맹과의 대결을 지속하면, 구 소련처럼 국력의 낭비와 중국 대륙의 분열 사태에 직면할 수 있고, 그 기회에 다른 열강이 협력하여 그들의 안보를 위해 중국의 분할을 전제로 성립될 “동북아 다다국 체제”의 수립을 추진하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중국은 한민족과 협력하여 통일 한국이라는 강력한 새 변수를 출현시켜 “동북아 5개국 체제”를 조속히 성립시키는 것이 열강과의 타협책이 될 것이라는 점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 

  (3) 21세기의 평화 공존적인 세력균형체제 유도에는 한반도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한민족의 확신과 국제적 인식의 증대가 필요하다. 21세기 동북아 질서에 대한 지역 국간의 합의와 공동 목표를 “동북아 5개국 체제”의 수립으로 설정하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

 특히 남북한간에는 21세기의 한민족 공동 목표로 “동북아 5개국 체제”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지금과 같은 대결적 경쟁을 비로소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남북한이 냉전시대처럼 각각으로 나뉘어 중국 대 미-일 동맹 대결체제에 가담하면 동북아는 대결체제로 굳어 질 것이다. 그런 상태가 도래하면 한민족은 물론 동북아 여러 민족의 장래는 매우 어두울 것이다. 반대로 분단상태에서라도 남북한이 중립적 입장에서 중재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주변의 4강이 협력하면 그 관계를 평화 공존적인 것으로 유지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남북관계의 개선과 한반도의 통일은 결코 한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다.(국제정치논총 제39집 3호, 1999년)


By Lhee, Ho-J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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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코리아]구해근<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서평

[서평]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일어서기까지, 『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업코리아 2003-11-19 15:00]
화염병과 각목으로 무장한 한국 노동자들의 시위가 낯설지 않은 요즘, 한국노동운동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노도와 같이 일어났던 민주노조운동, 사회변혁의 주역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한국노동운동이 점차 국민의 마음 속에서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서도 자꾸 잊혀져가는 그날의 기억과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 보고자, 빛바랜 사진첩을 열어보는 심정으로 구해근의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신광영 역, 창작과비평, 2002)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공돌이, 산업전사에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발전

E.P 톰슨의 계급형성론적 시각에서 한국 노동운동을 분석한 이 책은, 영문명 헤이근 쿠 (Hagen Koo)로 더 유명한 하와이대 사회학과의 구해근 교수의 10여년에 걸친 조사와 연구가 낳은 역작이다. 사회과학자들이 한번쯤은 출판을 꿈꿔보는 코넬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영문책 (Korean Workers: The culture and politics of class formation)을 한국 사회과학계의 간판급 학자인 중앙대의 신광영교수가 번역하였다. 함량미달의 번역이 원전의 깊이와 무게를 가벼이 만드는 안타까움이 횡횡하는 한국 출판계에서, 오히려 번역을 통해 원전의 무게가 더해진 작품을 만나는 기쁨도 작지 않은 책이다.

저자 구해근 교수는 “어떻게 공장 노동자들이 공순이. 공돌이처럼 노동자를 경멸하는 문화적인 이미지와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라는 타의적 정체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한다. 저자는 계급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부터 다소 자동적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맑시스트의 환원주의적 시각을 배격한다. 대신 한국노동자들로 하여금 그처럼 놀라운 용기와 열정으로 국가와 자본의 가부장제적 권위에 도전하게 만든 공장 내의 실존적 경험이 무엇인지를 파헤친다. 민주화 이전 압축성장과정에서 가해진 공장 내의 비인간적이고 전제적인 작업관계, 특히 여성노동자에게 가해진 계급착취. 여성억압. 신분종속에 대한 재조명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 분석되고 있다. 민주화이후 대공장 남성노동자의 전투적 노동운동에 가려져 있던, 초기 한국노동운동의 주역인 여성노동자들의 역할과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작업인 것이다.

대공업 노동자 수 늘어나고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

저자가 비록 영국의 역사학자 E.P 톰슨의 계급형성론적 시각을 빌려 왔지만, 사회학자로서 비교론적 관점에서 구조적인 분석도 병행하고 있어, 한국노동계급형성에 관해 입체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 노동운동을 낳은 구조적 조건은 무엇인가?

저자는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가 낳은 구조적 변화이다. 즉, 대공장노동자의 급속한 양적증대와 울산 등 소수 산업단지의 공간적 집중이다. 둘째, 권위주의 시대, 공장 밖에서 급성장한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다. 권위주의정권과 경제적 불의에 반대하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 사이의 계급동맹을 목적으로 하는 민중운동은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으로, 야학의 성장으로, 노학연대로, 그리고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으로 표현되었다. 셋째, 권위주의정권의 배제적 노동통제이다. 한국정부는 노동자를 조직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 노력하였고, 공안조직을 통해서 노동운동을 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노조활동가를 해고하고 다른 사업장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방식으로 노조활동가를 산업현장에서 몰아내었지만, 이러한 배제적 노동통제는 오히려 노조활동가를 급진적인 민중운동가와 강한 연계를 맺게 하였고 골수 노조운동가집단을 양산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한국노동운동을 규정짓는 ‘대기업조직노동자들의 전투적 노동운동’의 구조적 뿌리는 바로 지역적으로 집중된 전략산업분야의 대공장제, 민중운동의 이념적 세례, 그리고 강한 노조운동가집단의 존재라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로서 냉철한 이성에 의해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을 추적하고 있지만,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특히 YH 사건 등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룰 때는 전태일평전을 보는 듯한 감동이 느껴진다. 그리고 1997년 국민의지지 속에 총파업궐기로 노동법개정을 이끌어내고, 1998년 IMF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사회협약을 맺는 등 한국노동운동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역사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저자가 바라보고 있음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빛바랜 사진으로 열정을 깨운다

하지만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사회과학자의 냉철함을 무디게 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현 단계 한국노동운동이 전체 노동계급을 대변하고 나아가 시민과 함께하는 사회운동노조주의로 전환해야하는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노동자의 이익집단활동으로 전락하는 상황에 대한 진단도 잊지 않는다. 권위주의시대의 유산인 기업별 노조운동, 재벌-하청관계로 대변되는 이중적 산업구조, 노동시장유연화로 인한 노동시장의 분절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노동해방’이라는 상투적이지만 전체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었던 이념성의 약화, 노동자정당의 부재...

저자의 지적대로 한국의 노동계급은 새로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계급의식적이고 정치적으로 조직된 계급이 될 것인가, 아니면 협소하고 특수한 경제적 이해에 사로잡힌 분해된 노동자집단이 될 것인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 누구보다도 한국노동운동의 한가운데 서있는 노조활동가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한권의 빛바랜 사진첩에 불과하다고 외면당할지 모르겠으나, 한국노동운동 초기의 강한 저항정신, 계급불평등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강한 연대의식과 정치적 자신감을 회복하는데, 그 어떤 채찍보다도 추억어린 사진 한 장이 절실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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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흐름 금맹선거 기조

* 늑대비님의 [4기 금맹선거 평가 - 통합선본] 에 관련된 글.

 

4기 3차 선거 운동 기획(안)



1. 선거의 의미와 목표


○ 문제를 제기하는 선거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주목받는 선거

  - 기아차 비리, 민주노총대대를 둘러싼 파행 등 민주노조운동의 한계와 문제점이 고스란하게 드러난 상태에서 진행되는 선거임.

  - 결국 이렇게 확연해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과 태도, 입장을 요구받고 있음.


○ 3파 연합과 그에 반대하는 구도가 형성됨으로써 ‘대안’을 둘러싼 논란이 형성될 여지가 형성되었음.

  - 연맹 대대에서 거듭된 부결 속에서 ‘어떻게든 연맹을 세워야 한다’는 정서가 흐르고 있는데 이에 대해 별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대세적 인식이 3파 연합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만들고 있음. 즉, 3파 연합은 단순한 ‘야합’을 넘어 ‘대안없음’의 솔직한 자기 표현임.

  - 그렇지만 3파 연합세력들은 ‘분열을 딛고 대통합의 결단’을 주장하면서 ‘산별노조’ 등을 대안으로 제출할 것으로 보임. 이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특히 다수 대의원을 장악하는 3파가 연합한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며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임.


○ 새 흐름을 객관화하는 계기인 한편, 대중 속으로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선거가 될 수밖에 없음.

  - 그렇다면 3파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새 흐름은 무엇인가? 무슨 대안이 있어서 저렇게 하는가? 이에 대한 관심이 유발될 수 있음. 당연히 대세에 따르지 않는 무모함과 조급함, 경멸과 무시가 한데 어우러질 것임.

  - 결국 후리는 문제를 감추어버린 거대한 3파 연합의 괴물에 맞서 그 장엄함에 굴복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를 분명하게 하는 집단으로 대중들에게 인식되어야 함.(골리앗의 거만함에 맞서는 다윗... 그 다윗이 승리한다.)

  - 현재 조적에서 당선은 객관적으로 무망함. 조합원 선거가 아니라 대의원 선거이고, 대의원들 대부분이 3파의 줄을 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뒤집기는 객관적으로 어려움. 뿐만 아니라 우리 후보와 선대본의 구성이 대중적인 관심을 끌기에도 부족함.(명랑대첩에 나서는 이순신의 초라함에 비견할 수 있음.)

  - 그러므로 당선 그 자체보다 최대한의 득표(30%)를 현실적 목표로 설정하되, 거대한 대중의 바람을 일으켜서 괴물을 넘어뜨리는 당선의 의지를 불태워야 함.



2. 선거 운동의 기조와 방향


○ 3파 연합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문제제기하면서, 새 흐름의 선거 출마의 근거와 명분을 확보한다.

  - 3파 연합은 이미 드러나 있는 민주노조운동, 금속노동운동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집단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보다는 현재 상태에 안주하면서 권력을 나눠갖기로 ‘담합’한 것으로 규정해야 함.

  - 이를 바탕으로 3파 연합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은폐’이며, 대단결이 아니라 추악한 ‘야합’으로 공격해야 함.


○ 3파 연합식의 운동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대중의 공감을 얻어내는 선거 운동이 필요함.

  -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서는 전면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분명한 계획의 제출이 필요함. 사회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를 매개로 기업별 자기 고용과 임금 중시 정책을 과감히 탈피하고 산업 차원의 노동자 연대와 단결을 형성하는 내용과 계획을 제시해야 함.(이권노조냐 연대노조냐, 일정잡기 산별이냐, 단결 만들기 산별이냐)

  - 파벌적 연맹 운영을 타파해야 함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할 필요. 연맹 내 조합원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전면화해야 할 내용과 계획을 분명하게 제시(파벌의 온존이냐, 조합 민주주의의 전면화인가)

  - 노사관계 로드맵,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긍지 등 노조운동의 일대 소용돌이가 예견되어 있는 상태. ‘자주적 노조’의 원칙에 기반하여 노동운동 차원의 대응 마련을 주도할 내용과 계획의 제출(자주인가 예속인가)

  - 민주노조운동 기층에서부터 상층에 이르기까지 만연한 노사 담합과 협조주의를 척결하기 위한 내부 지정운동을 분명히 선언해야 함.(묵인인가 정면 돌파인가)


○ 후보 이미지와 선거 기조의 결합

  - 현장, 투쟁과 지략의 겸비,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결합

  - 경륜과 패기의 결합



3. 선거운동 방식


○ 조직 가동보다는 문제제기를 통해 바람을 일으키는 선거가 되어야 함.

  - 이슈와 쟁점을 만드는 선거가 되어야 함.

    : 초반에는 ‘야합’으로, 중반에는 ‘희망/대안’으로, 종반에는 ‘다윗/승리’로 쟁점 형성

  - 취약한 조직력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통한 적극적인 선전(웹자보 및 자유게시판 사이버 대응)이 필수적임.


○ 대중과 대의원을 ‘직접’ 만나는 선거운동을 전개한다.

  - 후보와 수행팀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함. (유세와 토론회를 선관위에 적극 오청하여, 대의원 대변 접촉의 횟수를 공개적으로 늘리는 한편 각 지역과 사업장에 파고들기를 시도한다.)

  - 득표여부와 무관하게 각파의 안방을 파고들어 줄 세워진 대의원들을 공세적으로 만나야 함.(우리가 주눅 들어서는 안 됨. 당당한 자세로 파벌의 운동을 힐책해야 함.)

  - 후보들이 각자 움직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유세 시 지역 공동일정 배치(위원장-창원, 울산, 대구경북, 대전충북/비정규직과 조선(자동차), 수석-광주, 전남, 전북, 충남/일반금속(조선, 철강), 사무-경기, 서울, 인천/자동차(철강))

  - 연맹 상근자들의 경우 자기 업무 영역 속에서 적극적인 대의원 파고 들기


○ 선거의 ‘비대중성’을 넘어서는 대중적 선거운동을 적극 모색함.

  - 각 지역과 사업장에서 파견 대의원들의 현장 토론회를 요청하고, 그 결과에 의한 투표 요구(주요 사업장에서 현장 토론 요구)

  - ‘노사 담합과 노동자 대단결을 위한 금속연맹 바로 세우기 현장 선언’ 조직(숫자에 구애받지 않고 50인 이상의 단위로 선거 기간 내내 현장 선언 조직)


4. 선거 운동 일정


○ 3.6 - 12시 추보단과 실무단 모임(후보등록준비-사진촬영 등)

○ 7 - 추천선전, 후보등록

○ 8 - 선거홍보물 제출

○ 9~10 금속노조대대

○ 12일 - 선대본 출범식


* 3/6 당장 준비해야 할 사항

  - 선거기획안 완료

  - 후보단

  - 등록준비(사진, 재직증명서, 약력 소개 등)

  - 대의원 서명조직(3개 지역 15명 이상)

  - 추천인 조직(전현직 위원장 - 7일 오전까지 조직, 8일 오전 발표)

  - 선거사무실 집기(전화, 팩스, 컴퓨터)

  - 지여조직 담당자 연락체계 구축(기본 내용 설명)



5. 선대본 체계와 운영


○ 선대본 기본 체계(안)

  * 선대본부장 : 다수의 공동본부장(후보 추천 성명 연서명)

  * 수행팀 : 현장 인원 중심으로 배치

  * 집행위원장: 정책기획, 선전, 총무, 조직을 총괄, 중앙 상황실 운영

  * 조직 : 지역과 상황실을 이어주는 조직 단위를 골간체계로 운영

  * 정책기획 : 유세 및 토론회, 정책 쟁점과 내용담당

  * 선전홍보 : 사진(포스터), 동영상, 자유게시판, 웹자보 등 선전 활동 담당

  * 지역모임 : 지역별 모임과 체계 구성


 

 

 

 

 

공동 선대본부장

 

 

 

 

 

 

 

 

 

 

 

 

 

 

 

 

 

 

 

 

 

 

 

 

 

 

 

 

 

 

 

 

 

 

 

 

 

 

후보단

 

수행팀

 

 

 

 

 

 

 

 

 

 

 

정책기획

선전홍보

총무

 

 

 

 

 

 

 

 

 

 

 

 

집행위원장

 

 

 

 

 

 

 

 

 

 

 

 

 

 

 

 

 

 

 

 

 

 

 

 

 

 

 

 

 

 

 

 

 

 

 

 

 

 

 

 

 

 

 

 

 

서울

 

경기

 

인천

 

대전충북

 

충남

 

 

 

 

 

 

 

 

 

 

 

 

 

 

전북

 

창원

 

부양

 

울산

 

광주전남



○ 운영

  - 재정 : 자립 재정(선거재정 마련 계획 논의)

  - 사무실 : 단체사무실 활용(별도 전화 가설)

  - 회의 : 1일 상황 점검 회의(오전, 저녁)/ 주간 점검 회의(토요일 저녁)

  - 숙박 : 별도의 공간 마련



향후 선거운동 방향에 대하여


제출 : 정책기획팀

날짜 : 3월 12일



<> 현재의 구도

- 계파를 질서를 이용한 조용한 선거 ⇔ 현장을 돌기도 쉽지 않은 상황

- 계파 질서를 통한 왜곡된 정보와 마타도어 난무

- 우리가 제기한 ‘계파 연합’을 둘러싼 공방전 : 우리의 문제제기가 쟁점이 되고 있음.

⇒ 표로 연결될 것인가? 3파 내부의 불협화음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임

   3월 15일 민주노총 대대 상황과 전노투 등의 대응이 상당한 변수가 될 전망



<> 어떻게 할 것인가?


- 계파 연합에 대해 ‘야합’ 혹은 ‘권력담합’으로 공세를 폈던 부분에서 ‘대안을 가진 적극적 문제제기’로 전환해야

⇒ 민주노총 대대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다시 표출될 개연성이 높으므로 문제제기와 대안 부문도 이에 맞추어 집중할 필요


: 공조직을 통한 선거가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는 현실, 공식적인 선거운동을 통한 정보 전달이 사실상 부재한 상황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제기 ⇒ ‘연맹을 조합원에게’ 공약 구체적 제기

: (대대) 노사정 합의주의와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심층진단 ← 정권의 협력적 노사관계 로드맵에 맞선 자주적 노조운동의 전망 상실 위기. 노조의 전망과 계획의 부재가 부른 상황 ⇒ 상급노조의 노사정 합의주의와 그것을 위한 사회적 교섭만이 문제가 아님. 단사에 팽배한 경제적 실리주의와 노사 담합, 기존 노동자들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노조 대응. 이미 현장의 위기 팽배 ⇒ 사회적 교섭안을 폐기 또는 유보하고 노사담합 척결! 비정규 투쟁을 비롯 사회 양극화에 맞선 전국 노동자 투쟁의 조직화에 집중(1번 진영에 대대 안건 유보 공동 제안 요구 → 상황에 맞추어 민주노총 방문)

: 입장과 노선이 다른 세력들의 ‘권력 담합’ 현실 폭로

   ⇒ 공조직 복원과 대중조직 질서에 걸맞는 운영 계획 제출(대대 변수에 따라 수위 조절)


- 대의원들을 만나 표를 구걸하는 선거운동에서 조합원을 만나고 투쟁하는 현장과 함께 하는 선거운동으로 전환

: 한편에서 거대 계파 연합의 공조직을 통한 선거운동 차단 ⇒ 현장을 만나는 것으로 돌파하겠다는 태도 천명

: 위수사 후보 투쟁 사업장 적극 방문

: 현장의 조합원을 직접 만나는 선거운동 ⇒ 현장선언으로 표현



<> 현장 들쑤시기


- 개별 대의원 만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현장 투쟁 방문, 주요 회의 결합, 공중전 강화, 현장 선언 조직 박차’를 결정한 바 있음.

⇒ 현장 들쑤시기와 공중 쟁점 만들기로 압축할 수 있음.


- 후보자들이 한 주간 정도는 함께 돌면서 현장 투쟁 방문, 현장 선언 조직화를 추진한다.

: 13일 이후 14일과 15일 울산에 다시 집중 - 현장 선언 조직화 및 투쟁 현장 방문

: 16일과 17일 광주에 집중 - 현장선언 조직화 및 투쟁 현장 방문

: 18일과 19일은 창원으로 집중하는 게 맞을 듯.

: 금속노조 지부 대대에 적극 결합한다.(일정 확인)


- ‘현장 선언’ 조직화에 집중

: 일단 울산, 창원, 광주에서 현장의 거센 바람이 일어야 함. 현장 선언에 모든 조직력을 올인하고 현장을 조직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필요함(광주에 제안한 현장 스티커 여론 묻기 등)

: 기아 <현장의 힘> 내부에서 적극적인 지지가 조직되어야(후보와 집장이 현장의 힘 직접 처리)..... 기아차 기노회, 현자 울산과 전주의 자주 쪽을 만날 필요가 있을 듯.....

⇒ 후보들이 다음 주에 지역을 돌면서 다시 한번 지역 역할을 분명히 세울 필요. 그 전에 조직팀에서 주요 지역에 내려가서 지역 담당자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봄.



<> 대대적인 공중전


- 사이버 공간을 통한 대대적 공중전

: 현재로서는 ‘사이버 공간’을 이용하여 우리의 문제제기와 내용을 적극적으로 제출할 필요 있음. 

⇒ 퍼나르미가 필요함.

: 연맹 게시판에서는 건전한 토론과 비판이 사라졌음. 그러므로 연맹 이외에도 각 노조, 지부, 지회 사이트 그리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타 연맹과 대기업 노조 사이트,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주요 민중사회운동 단체 사이트에도 올려야 함.


- 웹자보의 다양화

: 선대본 체계를 통한 웹 자보 작업 단일화 필요(위원장 후보의 노동일기 작업 단위 확인)

: 기본적으로는 후보 동정이 이틀에 한번은 인터넷에 올라갈 수 있도록 작업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함.(수행팀 인터넷 교육과 후보동정 작성 요령 전달)

: 정책 공약 해설은 우리 공약 설명도 중요하지만 이런 공약을 제시하게 된 배경을 드러내면서 쟁점을 만들어내기

: 현장 선언

: 투쟁 현장 방문 시 그 곳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웹자보로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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