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생각하기"에 해당되는 글 149건

  1. 2007/01/23 [생각하기] 거짓과 진실
  2. 2007/01/18 [박노자]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3. 2007/01/18 [이정우] 노마디즘에 대한 오해(제도에 대해서)
  4. 2007/01/18 여성에 관하여
  5. 2006/02/02 [박노자]소련 국기에 대한 맹세를 추억함
  6. 2005/12/12 [박노자] 개화기와 그 후의 신여성, 또는 욕망의 정치 (1)
  7. 2005/12/12 [비나리]노무현 10개년 농정로드맵, 나를 웃긴다
  8. 2005/12/12 [비나리]청계천을 막지 못하다니...
  9. 2005/12/12 [비나리] 새만금을 디벼주마
  10. 2005/12/12 [슬픈열대-레비스트로스]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
  11. 2005/12/12 지구는 돈다... 그래도 신은 존재한다
  12. 2005/08/10 [박노자] 국적이란 움직이는 것
  13. 2005/03/07 [비나리] 까우디요(Caudillo) 경제와 ‘생명없는 발전’
  14. 2005/03/07 나와 우주의 벽을 깨부수다 (아인슈타인)
  15. 2005/03/04 '제국의 양심'엔 한계가 있다
  16. 2005/01/31 [진중권]군대 가면 똥개 된다 (1)
  17. 2004/12/20 [비나리]개혁정부가 ‘개발’ 정권이 된 사연 : 개발정부는 생명정부로 진화해야 한다
  18. 2004/12/20 우리 마음 속의 슬픈 괴물
  19. 2004/10/01 [박노자] 민중이여, 공범이 될 것인가 (주체형성의 문제의식)
  20. 2004/09/20 [비나리]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과 지하경제
  21. 2004/09/16 샤먼과 자본주의의 역사 (1)
  22. 2004/09/06 [고병권]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23. 2004/09/05 [강수돌]노동거부: 시대착오적 망상? 대안의 돌파구?
  24. 2004/09/03 [진중권] 그의 물건은 서지 않는다 - 박정희
  25. 2004/09/03 문신의 미학
  26. 2004/09/03 남의 '우주' 구경하기
  27. 2004/09/03 [박노자]애국계몽운동은 '애국'이었나
  28. 2004/09/03 올림픽 선수촌, 혹은 어덜트 디즈니랜드
  29. 2004/09/03 47일의 단시과 저 위의 그들: 지율스님 단식 47일째에 붙여

[생각하기] 거짓과 진실

2007/01/23 13:24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거짓말이란 나쁜 것이며,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왔다. 또 그 가르침을 받고 자라면 후손에게 그 가르침을 전하며 언제나 진실할 것을 강요한다. 과연 인간은 언제나 진실을 말해야 할까? 거짓말에 대한 여러 입장들을 살펴보자.


먼저, 『원숭이는 왜 철학 교사가 될 수 없을까』의 저자 미셀 옹프레는 “진실을 말해서 좋을 때는 거의 없다. 왜 그런가. 가감 없는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폭력이 될 때가 있다. 선생이 학생한테 너는 못한다고, 절망적이라고 진실을 얘기한다면 일종의 폭력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므로, 일상생활은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 일종의 거짓말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라며 거짓말에 대해 찬성의 의견을 밝혔다.


미셀 옹프레와는 다르게 거짓말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먼저,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진실하지 않은 것은 전부 죄다.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거지를 만났는데 돈을 주지 않았다면 이것은 선한 행동인가, 악한 행동인가.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선한 행동은 아니다. 그렇다고 악한 행동 역시 아닐 것이다. 선과 악 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순이다. 제3의 선택, 즉 중립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선도 악도 아닌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 둘로만 본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게으름’이 죄가 된다. 착한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또한 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전부 나쁜 것이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칸트 역시 거짓말에 대해 부정의 의사를 밝힌다.

“거짓말은 의도적으로 틀리게 하는 진술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 거짓말이 행복을 의도하거나 단기적으로 행복한 결과를 보여줄지 몰라도 실제적으로 상대를 해치게 된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법인데,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상황을 자꾸 겪게 하면 법을 지키려는 신의나 신뢰를 떨어뜨려서 일종의 도덕의식 또는 법질서 전체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거짓말은 결과적으로 항상 나쁜 것이다.


거짓말에 대한 의견은 진실을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가치로 놓을 수 있는지, 아니면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되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일종의 의무의 관점에서 진실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므로 무조건 진실해야 된다는 관점이 있을 수 있고 또, 결과주의의 관점에 서서 접근을 하는 것도 하나의 관점이다.


일상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정하 <철학기초입문:『거꾸로 읽는 철학』함께 읽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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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기] 박노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만복이   | 2006·12·21 09:56 | HIT : 35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 만감: 일기장  2006/12/20 20:27 

   

제 애독서 중의 하나는 다이쇼 시대의 일본 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 龍之介; 1892-1927)선생의 "슈쥬노 코토바" ("侏儒の言葉 ":"보잘것 없는 글쟁이의 말들"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1922년 작)라는 일종의 명언집입니다. 아직은 한글로 안나온 것 같은데, 그건 아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 명언 중의 압권 하나는 이것입니다:


"軍人は小児に近いものである。英雄らしい身振を喜んだり、所謂光栄を好んだりするのは今更此処に云う必要はない。機械的訓練を貴んだり、動物的勇気を重んじたりするのも小学校にのみ見得る現象である。殺戮(さつりく)を何とも思わぬなどは一層小児と選ぶところはない。殊に小児と似ているのは喇叭(らっぱ)や軍歌に皷舞されれば、何の為に戦うかも問わず、欣然(きんぜん)と敵に当ることである。

 この故に軍人の誇りとするものは必ず小児の玩具に似ている。緋縅(ひおどし)の鎧(よろい)や鍬形(くわがた)の兜(かぶと)は成人の趣味にかなった者ではない。勲章も――わたしには実際不思議である。なぜ軍人は酒にも酔わずに、勲章を下げて歩かれるのであろう" (http://www.aozora.gr.jp/cards/000879/files/158_15132.html)


아주 대략적으로 번역을 하자면 대충 그렇게 될 거에요: "군인들은 작은 아이들과 같은 것들이다. 소위 '영웅적인 행동'을 기쁘게 여긴다든가 소위 '명예'를 좋아하는 이러한 그들의 처신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도 없다. 기계적인 훈련을 귀하게 여기고, 동물적인 용기를 중요시하는 것은, 소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살육을 하는 것도 작은 아이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작은 아이들과 비슷한 것은, 나팔소리과 군가에 고무되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고 적 앞으로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인들이 자랑하는 것은 필히 작은 아이들의 완구와 흡사하다. 번쩍가리는 갑옷이나 투구들은 성인들의 취향이 아니다. 훈장이라는 것도 나에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왜 술에 취하지도 않은 채 군인들이 훈장을 달고서 거리를 활보하는가?"




일제의 군사주의적인 광기가 사회를 꽉 잡았던 시절에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아쿠타가와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약간 고치고 싶습니다. 군인이 작은 아이와 흡사하다 라기보다는 군대가 인간의 퇴영적인 심리를 십분 이용한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가부장적인 가정이 키우는 "강한 남자"의 콤플렉스를 이용하여 살육의 전문가인 군인을 마치 "진정한 남성"으로 포장하는가 하면, 인간의 로봇으로 만들려는 기계적인 훈련을 무슨 놈의 "낭만"으로 포장하여 팔지 않습니까? "용기"에 대한 숭배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간사한 전략이지요. 가부장적인 남성의 이미지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담력이 좋은 남성"이 대접을 받게 돼 있고 군대가 이를 이용하지요. 한데, 자신과 남의 생명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란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본능인데 "용기"의 숭배는 그 본능을 스스로 압박하게 하여 그 본능의 발로에 대한 스스로의 수치심을 키우지 않습니까? 마치 중세적인 종교들이 섹스에 대한 수치심을 키우듯이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온갖 가미카제, 육탄용사, 결사대 등등이 세상의 본보기가 되고,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돼 있지 않는 장삼이사가 "비겁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함께 "용감한 군인"에 대한 동경의 염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도대체 아쿠타가와 선생 시대의 평범한 일본인이 미쯔이와 미쯔비시가 중국에서 사업을 편하게 하기 위해 진정으로 목숨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나요? 오늘날의 한국인이 모 건설업체가 미 점령군의 총독부로부터 수주를 잘 받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자이툰 부대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것은 과연 합리적이고 올바른 일인가요? 사실, 건군 이후로 한국군이 해온 일이란 무엇입니까? 남한 지배계급과 북한 지배계급이라는 두 개의 깡패 집단의 다툼의 과정에서 전자를 지켜준 것과, 두 번 정도로 상국의 부름을 받아 "화려한 외출"을 한 것 이외에는 뭐가 있나요? 군대를 당장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닌데, 이와 같은 기능들을 "신성한 병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닌가요?  필요악일지는 몰라도 "신성한" 그 무엇도 찾아보기 어렵지요.  



출처 :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3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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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에 대한 오해(제도에 대해서)


- 이정우(철학아카데미)


모든 사상들이 그렇지만 노마디즘에도 중대한 오해들이 따라다니는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노마디즘을 해체주의적으로 읽는 것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구성주의/구축주의'라고 분명히 밝혔거니와,

노마디즘의 핵심은 해체보다는 구축에 있다.

그리고 해체와 구축을 대립(opposition) 개념으로 보는 것 자체가 오해이다.

해체와 구축은 언제나 서로의 안감=裏面인 것이다.

해체와 구축은 언제나 정도(degree)의 관점에서, 차생적/미분적(differential)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정치적 관심은 제도들을 해체하는데 있기보다는,

새로운 제도들, 새로운 삶의 양식들을 구성하는 것, 창조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과 창조는 항상 그 이면에 해체를 동반한다.

해체를 한 후에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바로 이 이미지가 들뢰즈에 대한 오해의

원천이다)

해체와 구성은 대립 관계도 아니고 선후 관계도 아니다. 한 사태의 양면인 것이다.

미분적/차생적 관점에서 볼 때에만, 기존의 제도들이 해체되는 동시에

새롭게 구성되어 나가는 과정을 볼 때에만 노마디즘을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가 흄에 관한 데뷔작을 쓰기 이전에 편집한 책의 제목이

[본능과 제도]이다. 그리고 [차이와 반복] 서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거기에서도

제도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제도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제도들의 동일성을 부단히 무너뜨리는 동시에 그 무너뜨림의 과정이

새로운 제도들의 창조/구성의 과정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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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관하여

2007/01/18 20:36
 

1. 여성이 만들어내는 길


그래서 삶이 짜라투스투라를 쥐었다 놓았다 한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머리카락을 날린다.

살짝 고개를 돌리는 요염함. 삶이 도망치다가 쳐다본다.

결국 그것을 잡으러 뛰어가고 싶은 것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막 가리켜준다.

비지니스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미로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구불구불한 길을 찾아나간다.

다급한 사람은 미로가 닥치면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여행하는 사람은 길이 많다고 생각한다.

미로나 카오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즐길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차이다.

꼬불꼬불하게 하는 길, 그게 여성이다.



2. 여성이 지닌 내적인 야성


무식한 남자들은 모르지만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즐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게 놀라운 것이다.

아직도 원본을 찾는다면 그 편견 속에서 드러난 것을 전혀 못 볼 것이다.

여성은 지혜롭고 영리하고 길들여지지 않고 방랑하는 어떤 존재하다.

확정하려는 순간 빠져나간다. 히스테리라는 병도 그렇다.

여성은 즉 확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불안하게 하게 만든다.

남성들은 거기에 공포를 가지고 있다.

니체 이 완벽한 여자. 지하세계의 맹수, 내가 사랑하는 여성이라고 말한다.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교활한 유연함, 교육시키기 어려운 내적인 야성.

이 같은 공포가 있음에도 얼마나 매혹적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고병권의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 강의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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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기에 대한 맹세를 추억함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조국의 부름을 받아 총을 드는 것’을 신앙생활처럼 여기던 죽마고우
위대한 소비에트연합과 빨간 깃발에 충성을 다짐케 만든 상징 조작들
'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소련·중국·북한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적’ 사회들에 대해 정치학자들은 ‘극단적으로 정치화된 사회’라 말한다. 추수가 ‘수확을 위한 전투’가 되고, 생산은 ‘속도전’과 같은 ‘돌격대’ 방식으로 이뤄지는 등 개인에 대한 정치적인 호명이 모든 분야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소련이 일상적 생활과 언어를 극단적으로 정치화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1980년대의 말기적인 소련 사회에서는 정치적 언어를 일상에서 잘 쓰지 않았다. ‘사상 학습’에서 ‘지도자의 말씀’들이 인용되고 ‘당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한 미사여구가 남발돼도 일상적으로는 노망에 든 듯한 브레즈네프 공산당 총서기관과 같은 지도자들은 관심 밖이거나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소련 사회가 낡은 체제를 아래로부터 전복시킬 힘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상당 부분 상실해가고 있었다.

국가와 군에 대한 외경의 정서

당시 브레즈네프는 누군가가 써준 연설문조차도 제대로 낭독해내지 못할 만큼 노쇠해 있었는데 그에게 국민은 냉소와 멸시를 보냈다. 이렇게 구체적인 ‘지도자’들이 권위를 잃었지만, 국가나 군사력에 대한 소련 국민의 태도는 마치 독실한 교회 신도들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지금도 1980년대 중반에 중학교 동급생들과 나누던 대화가 기억난다. 몇몇 동급생의 형이나 친척 등이 아프간을 침략하는 소련군의 일원으로 아프간에 파견돼 있었다. 한 동급생이 아프간 빨치산들의 ‘무자비함’을 이야기하자 다른 친구가 응수했다. “그 짐승들에게 포로로 잡히느니 수류탄 하나만 남아 있다면 남자답게 그냥 자폭하고 마는 게 낫지. 저 짐승들 죽이고 명예도 세우게 말이야.” 그것은 ‘사상적 건전성’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온 말로 평범한 소련 청소년의 의식 세계를 잘 반영한다. 브레즈네프가 아프간에 보낸 군대와 ‘나’는 동일시됐으며 ‘전우애, 담력, 희생정신, 조국 사랑’에 대해서는 토를 달 수 없는 분위기였다. 국가와 군대가 도덕적 최고선이었기에 거기서 침략의 불법성이나 잔혹성은 논외로 치부됐다. 소련 군대가 철수되고 침략이 정치적 오류로 판명된 1989년 이후에도 많은 소련인들은 “잘못은 정치인에게, 명예는 우리 전사들에게 있다”는 식의 사고를 했다.


△ "조국과 공산당에 맹세한다!" 2002년 5월 소년 공산당원들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근처 무명용사의 무덤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EPA)

비판적 지식인을 부모로 둔 아이들도 분위기에 휩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필자의 한 죽마고우는 1980년대 말 병영에서의 구타나 자살 사건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자, “조국을 지키는 것이 남자의 의무고 어차피 군대 갈 사람은 가야 하는데, 징병 대상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쳐 악질 고참을 막는 방법을 익히게 하자”라고 말했다. 그는 아프간 침략과 같은 만행이 ‘조국을 지키는’ 일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군대’ 같은 단어가 나오면 흥분된 말투로 변했다. 그에게 ‘조국의 부름을 받아 총을 드는 것’은 이성의 개입이 불가능한 성(性)이나 신앙생활과 같은 진리와 격정의 세계에 속했던 것이다.

서민을 총알받이로 만들고 고참의 주먹 앞에서 인격과 자존심을 상실케 하는 군대가 어떻게 해서 수많은 이들의 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신성한’ 위치를 획득하게 됐는가? 사회경제적인 이유에서부터 성·정치 영역까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예컨대 남성의 ‘군인’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권위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군 사랑’의 이유 중 하나다. 그 외에도 시민사회를 압도한 ‘과대 성장 국가’의 상징 조작도 ‘국가와 군에 대한 외경’의 정서를 체계화하고 유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징·의례들이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없는 내밀한 ‘나만의 세계’에 속하기에 국가의 상징 조작 앞에서 개인은 무력해진다.

그 애국가 가사에 구토를 느끼다

예컨대 남한만큼이나 크고 작은 행사마다 자주 울려퍼졌던 소련 애국가를 생각해보자. 1944년 스탈린의 지시로 제정된 소련 애국가는 ‘위대하고 강력한 소비에트연합’과 ‘빨간 깃발에 영원히 무조건 충성을 바칠 우리들’의 이미지를 합치게 한다. ‘나’의 존재를 영원히 기탁해도 될 위대한 조국의 힘…. 우리 무의식의 ‘아버지’ 원형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이 ‘조국의 힘’의 이미지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자란 사람들의 몸에 배게 된다. 1944년 이전까지만 해도 소련 애국가는 국제 노동운동의 노래 ‘인터내셔널’이었지만, 그 뒤 전세계의 3분의 1이나 장악하게 될 스탈린 제국에는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가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재미있게도 새로운 자본주의적 러시아는 과거 소련 시절의 애국가 음악은 그대로 놔두고 가사만을 ‘상황에 맞게’ 변형시켰다. ‘무조건적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 보호하는 신성한 우리 조국’이 됐으며, ‘조국에 대한 충성이 우리에게 영원히 힘을 줄 것’으로 돼 있다. 남한의 애국가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오듯이 푸틴 정권의 새 애국가에는 ‘남쪽 바다부터 북극권까지 놓인 우리의 광활한 숲과 바다’에 대한 긍지가 강조된다. 필자는 이 애국가를 구토가 나는 심정으로 들으며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그러면 그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도 보장받지 못하는 빈민까지도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오늘과 같은 참경에 내몬 상전님들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가?

애국가는 정교회 신앙이 지배했던 1917년 이전의 러시아의 주기도문을 ‘최고의 신성성 텍스트’로서 대체했지만 이외에도 젊은이들을 ‘선량한 국민’으로 만드는 의례들이 대단히 많았고 개인 생활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개입할 수 있다. 예컨대 1917년 이전의 성탄절을 대체한 소련 국민 최대의 가족적 명절은 신년맞이였다. 가족끼리 신년을 맞이할 때 텔레비전을 켜놓고 밤 12시를 기다리는 것은 소련 체제의 ‘국민다운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송구영신의 12시가 되자마자 텔레비전에서 크렘린궁의 커다란 시계가 보이고 모스크바 중심의 붉은광장의 풍경이 보였다. 국가의 중심축이 개인적·가족적 시공간의 중심축까지 돼야 한다는 것은 이 ‘국민다운 습관’의 의미였다. 더군다나 정치적 색채가 지배적인 5월1일의 노동절이나 11월7일의 혁명기념일에는 시위대에 합류하고 군사의 사열대를 보고 애국가의 울려퍼지는 소리에 ‘차렷’ 하고 경건한 표정을 짓는 것은 거의 계절 의례였다.


△ 빨간 깃발에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소년 공산당 여름 캠프의 조회 모습(왼쪽). 군사주의적 색채가 짙은 소련 시대의 포스터(가운데)와 전승기념일 포스터.

군인들이 행진하고 탱크들이 굉음을 내면서 지나가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그 정치적 명절의 광경은 대다수 소련 국민에게 결정적인 성장기 경험이 되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한 달에 한두 번씩 ‘행군과 군가 가창대회’란 이름으로 ‘군인답게’ 행진하고 군가를 부르고 군기를 방불케 하는 소년 공산당의 깃발 앞에서 충성의 맹세를 바치고, 고등학생이 되면 정식 교련수업을 받는 것이 일반 수업 못지않게 중요한 ‘정신교육’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필자는 교련수업 때 자동총을 정해진 시간인 40초 내에 분리·조립하지 못해 교련 교사에게 “자동총도 제대로 분리·조립할 줄 모르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껴 결혼할 여자가 어디 있겠냐”라는 질책을 들었다. 당시에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다. ‘남자의 매력’과 자동총을 다루는 솜씨, ‘남자의 자존심’과 ‘빨간 깃발에 대한 충성 맹세’가 동일시됐기에, 아프간의 양민을 학살한 소련 군인들은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적 상징 세계의 존재가 ‘국민’의 의식을 결정짓는 슬픈 광경이었다.

한때 폐지됐던 교련 수업 부활

대자본들이 그 국적과 무관하게 전세계로 문어발을 뻗치는 요즘 세계에, 미국 학교에서는 ‘국기에 대한 충성의 맹세’가 강조되고, 러시아에서는 한때 폐지됐던 교련 수업이 부활되고, 대한민국에서 대형 스포츠 행사마다 ‘태극기의 바다’와 흥분이 이루어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황우석씨가 한 발언을 좀 바꿔보자면, 자본의 이윤 추구에 국경이 없지만 자본가들은 국민국가의 행정력과 군사력을 필요로 하고 착취 대상자들을 국적별로 유순한 ‘국민’으로 묶어둘 필요를 느낀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저들의 ‘게임 룰’을 그대로 받아들여 ‘신성한 국기’ 앞에서 ‘우리’의 자본을 위해 ‘남’의 나라 노동자를 유사시에 살육할 것을 맹세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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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근대를 경제적인 차원에서 하나의 피라미드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자본의 집중이 고도화된 후기 자본주의 같으면 맨 위에 있는 극소수의 다국적 대기업 대주주들을, 밑에다가 대다수의 고용 근로자들이 피라미드형으로 받쳐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19세기 – 20세기초기의 근대 사회들을 보면 경제 뿐만 아니고 욕망의 충족이 허락되는 정도를 척도로 삼아도 피라미드형 사회의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예컨대 당대의 근대 사회의 준거틀로 인식됐던 빅토리안 시대(1837-1901)의 영국을 생각해보시지요. 귀족층이나 부유한 중산층의 성인 남성들은, 말로는 "자제의 도덕"을 들먹여도 고급 포르노그래피나 에로틱 문학을 열람한다든가, 고급 매춘부의 고가 "서비스"를 이용한다든가 등의 성적 욕망의 자극과 충족에 있어서는 별다른 제한을 느끼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류층의 매매춘 행위 같으면, "전염병 방지법" (1864, 1866, 1869)과 같은 국가적 위생기구의 통제와 교회, 자선가의 지탄을 늘 받아야 됐지요. 남성의 성욕 충족은 쉬워도 여성에게 "가정주부의 덕목"이 강요됐으며, 성인의 성생활이 다채로워도 청소년의 자위 행위마저도 "비도덕적이며 비위생적인", "힘과 담력의 함양을 방해하는" 요소로 규탄받았지요. 즉, 그 성적 욕망을 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충족시킬 수 있었던 부유한 성인 남성이 "욕망의 피라미드"의 상부를 이루었지만, 그 상부를 받쳐주는 것은 "자제"가 강요된 대다수의 빈민, 여성, 청소년들이었습니다.
  
  다소의 차이도 있었지만 "욕망의 피라미드"의 기본틀이 초기 근대의 조선에도 그대로 이식된 것 같습니다. 중류 이상의 성인 남성이 요정에서 〈조선미인도감〉이나 권번의 "초일기(草日記)"의 유혹적인 사진으로 그 색욕을 자극하여 기생을 불러 노는 것은 어려운 일도 이상한 일도 별로 아니었습니다. 아니, 직업을 찾지 못한 대학 졸업생 - 소위 "고등 실업자" - 이라 해도, "중류" 남성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던 이상 유곽에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다반사로 삼았습니다.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의 명작 〈레디 메이드 인생〉(1934)에서 법률 책을 잡혀 술집 갔다가 유곽에 가는 몇 명의 무직 인텔리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카폐 여성들을 희롱하는 것을 특기로 삼는 염상섭(廉想涉, 1897 ~1963)의 소설 〈만세전〉(1922)의 주인공 "이인화"의 표현대로 "여성의 뭉실뭉실한 살"을 걱정을 잊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은, "중류"성인 남성의 일종의 계급적인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절지"(折枝 – "꽃 꺾기" – 기생 부르는 일의 별칭)가 "위"의 일상의 일부분이 된 개화기, 일제 시절의 사회에서는, 연령적, 사회경제적, 성별적 "하부"에 강요했던 것은 역시 맹목적인 "자제", "정숙", "정조"였습니다.
  
  〈황성신문〉(1909년 9월3-4일, 논설 "조혼의 폐해")이 조혼 (早婚)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주된 원인 중의 하나는, "규문의 일"(즉, 10대 부부의 성관계)로 남성의 지기(志氣)가 박약해져 민족을 위한 영웅, 사업가나 학자로 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0대 중,후반의 청소년이 근대성 담론의 차원에서 사회적 "보호"의 대상물로 전락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개화기입니다.
  
  "정결과 정조를 늘 지켜라",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돼서 근대적 학식을 익혀 민족 영웅이 될 사내 아이를 어릴 때부터 잘 가르쳐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17일자, "여자 교육에 대한 의론")와 같은 요구는, 여성에게는 한층 더 강력했습니다. 한국 전통 에로스의 진수라 부를 만한 〈춘향전〉을 "음탕교과서"(
이해조, 〈자유종〉, 1910)라고 매도할 만큼 빅토리안적인 "정숙"과 "자제"가 절대시됐던 것이지요.
  
  우리는 대개 개화기 때 성취한 것 중의 하나로 여성을 위한 근대적인 교육을 꼽지 않습니까? 물론 1910년 이전에 근대 교육의 수혜자가 된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했지요. 1909년 같으면 공립, 사립 보통(즉, 초등) 학교에 재학 중인 여학생은 1,274명이었는데, 여성만이 다니는 이화, 정신(貞信), 배화, 숭의와 같은 사립 고등보통 여학교의 수는 말 그대로 열 손가락으로 셀 만했습니다. 수백 명에 불과했던 그 신식 학교 여학생들은 대개 개화 지향적인 신흥 지배계급에 속하거나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여, 나중에 선교사 밑에서 일하게 돼 있는 "주변 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여학교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기독교 계통의 계몽주의자 노병희(盧炳喜)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1909년에 발간한 〈여자소학수신서〉라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여성 윤리 교과서를 한 번 펼쳐봅시다.
  
  그 제일과는 – 예상대로 – "얌전"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고 그 내용인즉: "대저 여자의 행하는 것과 앉는 것과 눕는 것과 일어나는 것은 남자와 다름이 많으니 마땅히 얌전하고 씩씩하며 단정하게 하되 머리를 자주 빗으며 윗옷과 치마를 (…) 깨끗하게 하고 (…)
서기와 앉기를 기울게 말며 거만한 모양을 드러내지 말며 크게 웃지 말며 소리 지르지 말며 공연히 심술내며 성내지 말며 음식 먹을 때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말며 (…) 한 마디라도 헛되이 말며 (…) 경망하다는 책망을 없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마땅히 얌전해야 한다"… 말 그대로 노예 교육이라고 할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개화기 때 최초로 근대적으로 정형화된 뒤에 과연 한반도에서 그 족적을 감춘 적이 있었습니까? 물론 〈엽기적인 그녀〉와 같은 최근의 영화들을 보거나
엄정화와 같은 대중문화의 여성적인 우상들을 보면 요즘 "발랄한 여자"가 어느 정도 하나의 행동 패턴으로 그 위치를 획득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데, 그게 오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속에서의 '발랄한 그녀"는, 일상 생활 속에서 개화기 식의 그 "얌전함"에 그대로 옭매여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일종의 대리 만족을 제공하고, "얌전한 여성"을 "정상"으로 알고 있는 남성들에게 이질적인 여성상을 맛보게 하는 재미를 가능케 하는 것이지요. 영화는 아무리 "발랄"해도 회사 생활이나 가정 생활은 역시 "얌전한 행동", "단정한 외모와 의상", "누나나 어머니와 같은 인내심과 자상함" 등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독립적인 자아를 찾으려는 여성에게는 "얌전"은 저주와 같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여성에게 순종주의를 강요하려는 사회로서는 아주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지요.
  
  그 교과서의 내용을 계속 말씀드려 볼까요? 물론 여성의 "일"로 방직과 음식 만들기, 집안일하기, 쓸기와 닦기를 제시하고 특히 음식 만들기를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권하는 것이고, 여성의 본분으로서 특히 부모 섬기기와 시부모 섬기기를 강조하지요.
  
  "시부모가 부르시거든 공순히 공경하며 대답하며, 먹을 음식이 있거든 먼저 드려 공경하고, 일이 있을 때 그 음성을 살피며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성내지 말고 얼굴빛을 화평하게 하며 말을 공순히 하며 부드러운 기운과 참는 마음으로 그 당한 일을 참아 지내라"… 어떻습니까? 이 교과서가 나온 지 이미 거의 100년 가까이 됐지만 한국 남성이 하루에 집안 일을 하는 시간이 평균 30여 분 정도 되고 "음식 만들기" 정도는 아직까지 "당연히 여자가 해야 할 일"로 치부되지 않습니까?
  
  이 교과서에서처럼 남편을 더 이상 "부녀자의 하늘"로 부르지 않으니까 정도의 차이야 당연히 있지만 지금도 술 먹은 남편이 밤 늦게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오면 아내로서 화내지 말고 상을 차려주는 것이 "여성다운 인내심의 덕"으로 보지 않습니까? 즉, 개화기 때 정형화된 남성우월주의적 근대의 젠더 담론은 지금 비록 그대로 존속된 것은 아니지만 그 노예적
  
  거짓 "도덕"의 골자인 순종주의의 강조는 계속 이 시대의 여성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성에게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제대로 나누어주지 않는, 남성이 실권을 잡은 사회인 만큼 여성에 대한 초기 근대의 극단적인 억압성이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한국 개화기의 근대는 남성의 욕망을 부추기면서도 여성의 욕망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방향으로 그 틀이 잡힌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는 물론 이웃 나라에 비해서도 훨씬 심한 성리학적 사회의 반(反)여성적인 성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1850년대에 태평천국의 반청 (反淸) 봉기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운 태평군의 여군 (女軍)과 같은 존재를, 조선말기의 어떤 민란에서도 아마도 찾기가 힘들 듯합니다. 민중 투쟁에서의 여성의 참여야 당연히 있어서도 수많은 여성이 무기를 든 투사가 된다는 것은 조선 사회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물론 태평천국 때의 여군의 성분을 보면 상당수가 광서성의 장족(壯族) 출신들이었는데, 모계 사회로서의 면모를 부분적으로 간직해온 장족의 젠더 질서의 구조가 조선은 물론, 가까이 사는 한족과도 많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한족이라 해도, 남성보다 더 적극적으로, 더 용감하게 폭력 투쟁에 앞장서는 여성 투사의 상을 꽤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감호여협(鑑湖女俠)"이라는 아호를 가질 만큼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검술 등을 즐겼던 청나라 말기의 혁명 투사 추근(秋瑾: 1875~1907)을 생각해보시지요.
  
  아이를 가진 뒤의 남편과의 이혼과 일본 유학, 일본에서의 동맹회라는 공화주의 조직에서의 맹활약, 귀국 이후의 여성 신문 발간과 비밀리의 혁명군 조직, 그리고 굴복함이 없는 장렬한 죽음…
잔 다르크는 그 "애국 정신" 덕분에 개화기의 조선 신지식인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를 모은 인물이었는데, 살아 있는 잔 다르크, 즉 추근처럼 남편도 버릴 줄 알고 칼도 들 줄 아는 여성을 동지로 삼기에는 "자강회"나 "신민회"의 남성 계몽주의자들은 개방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남존여비 사상을 "양처현모"라는 방식으로 근대화시켜 새로운 젠더 이데올로기를 창출한 메이지 일본의 영향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구한말의 여성을 위한 수신 교과서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일본의 수신 책을 본딴 것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성의 목을 옥죄는 끈질긴 유교주의와 일본 영향에다가 여성을 "얌전" 등의 이름으로 압박한 것은 바로 그 당시의 조선 신지식인계의 젠더 담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기독교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조선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1886년에 바로 선교사들에 의해서 설립됐다는 것도,
황신덕(1898-1983)과 같은 "주류"의 신여성이 "조선 부인의 생활에 광명은 기독교이었다"라고 공언하는 등 일제시대 이후의 "개명한 여성"들이 대개 기독교와 인연이 두터웠다는 것도 다들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들이 기독교 전파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세워 그 학당에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심어줄 수 있는 미래의 주부들을 양성할 계획으로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는 것까지는 우리가 보통 잘 인식하지 않는 듯합니다. 구미 사회의 보수적인 종교계를 대표했던 그들이 "가정과 교회에 충실한 정숙한 부인" 만들기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는데, 이와 같은 젠더의 논리는 아주 쉽게 조선의 성리학과 접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몽기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대개 기독교가 "우주와 사회의 절대적이며 전반적인 진리"로서 성리학을 그대로 대체하면서 상리학적 색채를 띠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성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그 접목의 과정은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개화기 때 조선에 이식되어 유교화된 기독교의 여성관을 살펴보기 위해서 초기 기독교 문학을 조금 흝어보는 게 어떨까요? 예컨대 기독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전형적인 친일 언론인
이상협(1893-1957)의 소설 〈눈물〉(〈1913-1914년 〈매일신보〉 연재)을 보시지요.
  
  거기에서 관료였다가 근대적 실업에 투신한 은행가 서협판의 딸 서씨부인은 바로 결함이 없는 모범적인 규수입니다. "남자의 안목이 황홀할 정도"로 용모가 뛰어나지, 엄격한 유교적인 가풍 속에서 자라와서 남편을 섬기는 정성과 예의가 대단하지, 부모들이
정해준 가정의 사업 계승자인 조필환과 "아무런 추잡함이 없는 순결하고 신성한 연애"를 잘하여 결혼하지 – 말 그대로 문제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조필환에게 한문까지 배웠으니 여중군자인 셈이지요. 부유한 집에서 순결하게 성장하고 "여자에게 필요한 만큼" 교육을 조금 받고, 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내조하는 "정숙한 규수"야말로 본인들도 대다수 상류층이나 중산층에 속했던 계몽주의자들의 긍정적인 여성상이었던 모양입니다.
  
  서씨부인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주인공은, 그 남편 조필환을 유혹하여 일시적으로 현명한 부인을 버리게 만든 악한 기생 "평양집"입니다. 지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 천한 "평양집"은 남자를 유혹하는 음탕함이 가득 찬데다가 성냄과 시기심이 많고 올바른 여덕(女德)이 뭔지도 모르는 부류지요. 그런데 이러한 부류도 결국 구세군의 설교로 그 악행을 깨닫고 뉘우치고 하나님을 믿게 되니 서씨부인과 조필환의 가정 평화가 결국 회복되고 맙니다.
  
  "정숙한 숙녀"와 "음탕한 요부"라는 두 범주로 모든 여성들을 나누고 심판하는 남성중심주의적, 중산층 위주의 이분법, 그리고 "가정"과 "종교"의 결합… 개화기 때 처음으로 마시게 된 이 독약의 여독(餘毒)은 지금도 사회의 곳곳에서 남아 있어 우리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한국 사회에서 지금이라도 자기 친구나 가정에게 자신과 동거하고 있는 여자 친구를 "나의 동거녀"라고 소개하려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습니까? 노르웨이 같으면 20대 중에서 결혼한 쌍들보다 동거하는 쌍이 더 많고 "동거녀"나 "동거남"은 "부부" 못지 않게 정상적인 명칭이 됐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신성한 가정"의
허상을 그대로 붙잡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공인(公人) 여성으로서 "나는 레즈비안"이라고 공언하기가 쉽겠습니까? 빅토리안 시대 가정 윤리주의의 철폐, 남들과의 다양한 형태들의 평등한 성적인 결합을 용인하는 개인 만들기 차원에서는 우리로서 아직 갈 길이 참 먼 것 같고, 대형 교회들이 지금처럼 막대한 영향력을 보유하는 이상 그 길로 가기가 그리 쉽지도 않을 듯합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만든 "양처현모"라는 표현을 개화기 때 "어머니"와 "후사(後嗣)"가 중시되는 조선 식으로 "현모양처"라고 바꾸었는데, 크게 봐서 이는 19세기 후반 구미 지역의 중산층 사회의 위선적이며 억압적인 성적 모럴을 기원으로 해서 그 내용이 유교화됐다 뿐이지, 이렇다 할 만한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던 듯합니다.
  
  "현모양처"가 돼야 된다는 성차별적인 가치관을,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신여성"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보통 "신여성"들을 "사회 활동가"로 상상하지만, 실제로 공산당 지도자와 동지 결혼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거나 아예 독신으로 살면서 사회 활동을 하는 소수(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최창익의 처 허정숙, 독신녀 김활란 등)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신여성"들의 꿈은 남편을 보필하여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정도였습니다. 남성은 호탕해야 하지만 여성은 정조를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그들도 그대로 길들여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 유부남인 애인과의 동반자살(1926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프라노이자 여배우
윤심덕(尹心悳)과,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과정을 그 유명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년 8-9호)에서 솔직하게 서술하고 무책임한 애인 최린으로부터 당당히"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요구해 합의금을 받는 데에 성공한 화가이자 문필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진정한 영웅으로 보입니다.
  
  왜 굳이 "영웅"이냐고요? 여성의 욕망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던 근대 초기의 사회에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이 2명의 조선 여인들은 개인적 불행을 끝까지 감수하면서 그 욕망을 솔직하게 실천할 권리를 위해서 싸우다 갔기 때문입니다. 윤심덕은 아까운 젊은 나이에 죽고 나혜석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무의탁 폐인의 생활을 몇 년 하다가 갔지만 둘 다 현모양처를 되라는 체제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한 셈이지요.
  
  이와 같은 "반란자"들이 암울했던 그 시대에 여성 몸의 독립의 길을 텄기에 오늘날의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한 페미니즘 운동을 자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둘 다 자산 계급의 딸이었지만, 왠지 그 몸의 주권을 되찾은 그녀들을 "혁명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햇빛이 보이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참고 문헌:

  
  
신영숙, "일제하 신여성의 연애결혼 문제", - 〈한국학보〉, 45, 1986.
  이배용, "개화기, 일제 시기 결혼관의 변화와 여성의 지위", -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집, 1999.
  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 책세상, 2001.
  
이길연, 〈한국 근현대 기독교 문학 연구〉, 국학자료원, 2001.
  Wells, Kenneth M. "The Price of Legitimacy: Women and the Kunuhoe Movement, 1927-1931." In Gi-Wook Shin and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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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2. 25

 

FTA 대신 만들어 10개년 농정로드맵, 이거, 정말 웃긴다. 간만에, 정말 웃어본다.

농업에 경영능력을 들이대고, 경영 능력없는 농가는 시장의 움직임에 의하여 퇴출되어야 한다는, 기업과 노동자에 대한 논리를 들이대는데... 글쎄올시다.

현재 20대 농가가 우리나라에 몇 개나 있을까? 2002년 통계로 정확히 3048가구가 20대에 농사를 짓는다.

서울특별시에는 딱 한 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다. 전라남도가 668호로 가장 많고, 경기도, 충청북도, 경상북도가 300호 이상의 20대 농업가구가 존재한다. 전라북도에는 203호의 20대 농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전체 농업인구의 55% 정도가 65세 이상의 농가이다. 65세 이상은 농사가 되든 안되든 농업을 안지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퇴출에 관한 얘기와 경영능력에 관한 것이 도대체 누구를 겨냥한 얘기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기본적으로 누가 농사를 짓고 있고, 우리나라 농업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관해서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느낌이다.

전국의 3048호의 20대 농가... 한 대학교의 한 학년 수도 안되는 숫자가 우리나라의 "젊은 영농인이다." 그리고 5년 후에 우리나라 농업인구의 절반이 70을 넘어선다.

이런 숫자들로 주요 수치들을 검토해보자. 농가 인구가 전체 인구의 7.5%에서 2013년도에서 3.4%로 낮추겠다... 그냥 있어도 이렇게 된다. 10년 후면 30대 농업인구가 3000명대가 되고, 상당히 많은 농업인이 고령과 사망 등의 이유로 자연스럽게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서 헥타아르등 64세 이상 농민에게 24만원의 보조금이 지급된다. 역시 70% 이상의 고령 농민들은 1 헥타르 미만이므로, 어지간하면 논 좀 많이 가지고 있는 노인들은 평균 50만원 정도 받고 논 좀 파시라는 얘기랑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서 결국 6헥타르의 전업농 7만 가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 농정 로드맵의 핵심이다. 실제 10년 후에 30대로서 농업의 허리를 담당할 사람이 지금 3000호 정도인걸 알고 하는 얘기인지 모르겠다. 30대로 범위를 넓혀보면, 전국에 4만 가구정도 존재한다.

어떻게 생각해도, 현재의 50대 이상의 가구는 어차피 늙어서 손댈 필요가 없으니까, 40대와 50대 숫자로 6만호라는 숫자를 꺼집어냈겠지만, 20대 농업인구 3천호를 놓고 보면, 지독하게도 농업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감추기 어렵다.

이제는 그만둘 사람이 더 이상 농촌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 그 다음에 내친 김에 몇 가지만 더 들여다보자.

이 6헥타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농지도 풀고, 구매를 쉽게 하지만, 이미 작년에 주말 농장 이름으로 3백평을 풀면서 증명이 된 것이 외지인들이 투자 목적으로 농지를 구매하게 된다는 사실이고, 현 경제팀은 이렇게 더 쉽게 농지를 풀고, 여기에 아파트와 공장을 지으려고 하는데, 이 농지 전환이 6헥타르로 간다는 건, 그야말로 당신들의 희망이다.

근데 이렇게 비농지 목적으로 인근의 농토가 계속 풀리면서 토지가격이 높아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설령 6헥타아를 구입하더라도, 높아진 토지 가격 때문에, 더욱 더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국가가 전부 나서서 아예 구매해주고 임대한다면 모를까, 경자유전의 원칙과 신자유주의 원칙이 동시에 작용하는 현재의 농업 조건상, 이렇게 해서 6헥타아를 확보하게 되더라도, 이미 높아진 토지 구매 비용 때문에 경쟁력은 택도 없는 얘기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이는 것이 내년에 실시하겠다는 추곡수매제다 폐지이다. 지금까지 그나마 10년 동안 우리나라 농사를 지켜온 추곡수매제 폐지를 다른 말로 번역하면, 6 헥타아르 만큼 크게 망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우리나라 농업수익률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는가? 평균 1.5%의 수익률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농가부채를 피해나갈 수 없다는 얘기다.

거기에 더욱 '그림의 떡'처럼 붙여놓은 농약과 화학물질을 차단한 농산물에 대한 우수농산물관리제도라는 거가 그렇다.

6헥타르, 즉 만 팔천평에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지을 수 있는 슈퍼맨 있으면 나와봐라다, 정말... 다이옥신 성분으로 이루어진 제초제 사용하지 않을 방법이 없는 만큼, 이 대규모 기업농화라는 건, 머리 속에만 있는 그야말로 상상 속의 경영이다.

상황이 이런데, 경영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정책지원을 한다는 얘기가 의미하는 바는? 머리 있고, 경영 능력이 있는 사람은, 1.5%의 수익률에 그나마 수급 조절 기능을 가진 추곡수매제도 사라진 상태에서, 그리고 6헥타르의 농토 역시 거꾸로 가격이 올라갈 상태에서 투자할 것인가?

경영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면 절대로 이런 투자는 안한다.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좀 더 총체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소농 위주의 유기농 형태로의 사회적 전환과 이를 위한 단계적 계획 같은 것이지만, 지금 정부가 로드맵으로 제시한 건,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농업이 망할텐데, 그 때까지 뭔가 정부가 했다는 면피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로 의지가 있다면, 이런 모순에 가득찬 6헥타르, 전문농업인 7만이라는 구호부터 폐지해야 한다. 이 대규모 소수 정예 기업농 방식은 온 국토를 망칠 뿐만이 아니라, 온 국토를 화학농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각조각 만들어낸 6헥타르가 캘리포니아처럼 한 군데 바둑판처럼 몰려있기를 기대하는가?

또 다른 한편에서의 농림부 기준으로 농약과 제초제를 강화하는 종합계획이 수립되어 이미 집행되고 있다. 지금 6헥타르를 따라가는 농업인들은 현재의 농림부 계획대로라면, 2~3년후면 반환경적인 농업으로 국토를 좀먹는 농업의 적으로 내몰릴 사정이다.

한 쪽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규제를 강화한다고 하면서, 한 쪽에서는 수익성과 환경적인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퇴출될 수 밖에 없는 대규모 영농으로 전환하라는 로드맵을 제출하면서, 그래도 우리는 농업을 위해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얘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녹색정치는 6헥타르, 7만 전문영농인을 위한 로드맵에 대하여 반대한다. 국토환경과 생태계 보호를 위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로 전락해버린 농업인이 더 이상 오락가락 정부의 미친 영농정책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원칙 때문이다.

정부는 이 사기와 기만,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자기 통계와 자료 분석도 제대로 안한, 보여주기 정책을 앞뒤맞지 않게 모아놓은 농정 로드맵을 부디 폐기해주시기 바란다.

조각조각난 6헥타르 위에 농업인의 눈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고, 농정경영능력이라는 미사 여구 아래, 농촌 지역에도 아파트를 지어줘야 한다는, 미친 경제정책을 그만보고 싶다.

지금 농업에 20대가 3,000가구, 전국에 달랑 3,000 가구가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농촌 지역의 아파트가 아니다. 이들은 헬기로 날아다니면서 농사지을 수 있을 것 같은 6헥타르가 아니다. 제대로 된 직불제와 제대로 된 유통구조, 그리고 기본적인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거지, 경영능력을 입증할 '경영 마인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거의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해준 100헥타르 이상의 대평원에 헬기로 농약과 제초제를 무한정으로 살포하는 카길사와 우리나라의 농촌이 같은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TV를 너무 많이 봐서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꿈의 6헥타르가 아니라, 악몽의 6헥타르가 펼쳐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

당신들 정부는 이렇게 몇 년 버티고 농업을 경제 부흥의 이름의 개발정책으로 건설경기나 일으키고, 허울만 가지고 시간을 때우면 그만이지만, 지금 당신이 망가뜨리는 것은 우리나라의 몇 백년을 한꺼번에 해치우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아실지 모르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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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청계천을 막지 못하다니...

2005/12/12 12:00
새만금도 어렵지만, 청계천은 더욱 어렵다.

그리고 새만금도 죄질이 나쁘지만, 청계천은 더욱 죄질이 나쁘다.

새만금에는 힘들게 살아온 전북이라는 특정한 지역의 경제가 저당잡혀 있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청계천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냥 죄질이 나쁘기 때문에 아주 마음 편하게, 이 나쁜 놈들 하고 말해줄 수 있어 속만은 편하다.

그러나 막기는 매우 어렵다. 명박이형이라는 써글 놈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복잡한 서울이라는 특별한 도시의 발전상, 그리고 도시 빈민의 문제, 게다가 조악한 인프라라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생태하천 복원이라는 말 좀 쓰지 마라!


청계천은 생태계라는 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정확히 얘기하면 조경에 가까운 일이다... 쓰바...


생태하천이라구 허벌 썰레발 떨지만, 그냥 쉽게 얘기하면 집에다 어항을 하나 갖다 놓는 거랑 똑같다구 보면 된다. 한강물을 푸든, 아니면 지하철 역사의 지하수들을 퍼오던, 하여간 그냥 커다란 어항 하나를 갖다 놓는다고 보면 똑같다.

원래 청계천 자체가 인공하천이기 때문에 건천이라고도 하는데, 하여간 물은 별로 없다. 아무리 삐가번쩍하게 해두, 늘상 물이 흐르는 하천이 아니기 때문에 명박이 형, 참을 수가 없다. 물 퍼다가 다시 흘리는 거다.

그냥 물만 흘리면 분수 같은 개념이지만, 물고기도 몇 마리 푼다고 하니까 그냥 어항 하나가 도심 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걸 생태계라고는 안하고, 그냥 조경사업이라고 한다.

더 쉽게 얘기하자. 집 안 한 가운데 어항이 있으면 기분은 좋다. 거기에 자라를 키워두 되고, 아니면 아무 거나 넣어두 된다. 기분 나쁘면 치우면 그만이다.

그런 어항이 허벌 큰게 하나 서울 한 가운데 들어온다고 보면 딱이다. 문제는 치우기 어렵다는데 있다. 집에 있는 어항은 애가 다치면 치우면 그만인데, 사대문 안에 떡하니 들어온 청계천이라는 어항은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치우기가 좀 어렵다.

물론 그건 명박이 형이 걱정할 건 아니다. 다음에 들어올 시장이 걱정할 일도 아니다. 그냥 그게 부영양화가 되든,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들, 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어, 좋은 어항 하나 생기는구나 했던 시민 전체의 조금씩의 희생, 그리고 좀 될만한 세금으로 그냥 때우면 될 일이다.

하여간 이건 어항 만드는 사업이다. 여기다 제발 생태하천 복원이니, 도시 생태계 조성이니 하는 얘기 좀 하지 마라...

쉽게 생각하면, 진짜 하천은 청계천 밑의 파이프로 흐르고, 그 옆으로 또 강에서 물퍼올 또 다른 파이프가 흐르고, 대충 예쁘게 조성된 청계천이라는 파이프 위로 물이 흐르는 거다.

왜 내가 이게 생태계 복원이라고 하지 않냐면, 강의 하구에서부터 시작되는 생태계가 여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냥... 미끈둥한 파이프가 강 밑으로 나오고, 강물이 스며드면서 시작되는 정상적인 생태계의 기초가 여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 속에 사는 물고기들... 비들기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파리의 비들기들은 자동차가 달려오면 열심히 뛰어간다. 정말 열심히 뛰어간다. 나는 본능마저 까먹은 비들기 같은 것들을 어항 안에 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2. 이거, 개발 파쇼의 복권이다!

전설이 몇 가지가 있다. 무슨무슨 위원이라고 참가한 사람들이 다 빙신이거나다 꼴통들인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양심있는 사람들도 있다.

쌩깐다는 말은 이럴 때 쓴다. 회의에 참가한 명박이 형, 계속 졸다가, 회의 끝날 때쯤, 그럼 언제부터 첫 삽을 뜨게되는 거지요?

건설회사는 노난다. 이건 새만금과 비슷하다.

명박이 형과 서울시 선거 같이 뛰었던 사람들. 인생 풀린다.

좋은 건? 명박이 형, 건설업체, 인근에 땅 있는 소유주들...

죽어나는건? 이와 상관없이 세금을 내야하는 나머지 서울 시민들, 강북으로 출퇴근 해야하는 사람들과, 어쨌든 그 근처에 가야하는 사람들, 청계천 일가에서 먹고 살았던 사람들, 그리구 강북 뉴타운 건설이라고 명박이 형 꾀임에 넘어가 허벌레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거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건 없는 사람들과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땅을 가진 사람들과 그냥 임대해 가계하나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 뭐 그런 사람들간의 문제이다.


3. 왜 어려운가?

여기에 프로들이 개입하지 못한 것은 복계하천 청계천의 상태가 꼴이 아니었고, 또 청계고가의 안정성에도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없던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그럼 그냥 청계천 썩도록 하면 좋겠어? 니가 청계고가 무너지면 책임질래?

이 두 가지 문제에 프로 중의 프로라고 자부하던 자칭 전문가들이 전부 입 다문게 청계천 복원사업의 또 다른 핵심이다. 그래서 어려웠고, 다들 입 다물었다.

청계천 복원은 대의적으로 좋은게 아니었을까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나, 별 다른 대안은 없었다...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 정답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벙벙한 말 밖에 할 수 없는가? 실제로 그렇다.

무엇보다도 서울시에서도 아무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건 안되고, 저건 되고라는 검토를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 이제 내일이면 고가가 헐리고 남은 것은 숙제들 뿐이다...


이제 청계고가의 통행금지가 시작되고, 헐릴 것이다. 고가를 다시 손을 보고, 시간을 갖고, 적절한 복원에 대해서 검토를 하자는 대부분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된다.

명박이 형은 생각보다 쉬웠다고 샴페인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악랄하게 여기서도 교훈 하나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청계천에서 내몰린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라도 무엇인가 필요하다.

그리고 긴긴 싸움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더 이상 이 땅에 이런 개발파쇼, 정보독재와 밀실행정에 의한, 그리고 '환경을 위한다는' 어항 행정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말만으로 그러한 것들은 생겨나지 않는다.

헐린 고가 아래로, 우리는 하나의 패배를 가지게 된다. 이명박이라고 대표되는 개발 아이콘에 대하여, 패배 하나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건 지난한 싸움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의 5년 내내, 늘 지고 싶지는 않다. 5년 동안, 기나긴 방어가 지리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의 선방을 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5년... 그 때도 지금처럼 암울하게 패배하고 싶지는 않다.

손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밀리는 이러한 싸움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정치세력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절감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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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 새만금을 디벼주마

2005/12/12 11:58

2003. 6. 8

 

새만금을 둘러싼 고도의 술수들을 디벼주마…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서 말이 많다. 현재 상황, 졸라 복잡하다. 하꺼야 마꺼야…

오해가 오해를 불러온다. 청와대도 바짝 긴장했다. 정신 차려야해… 한 발만 잘못 딛으면 여기서 지옥이야.

전북도 바짝 긴장했다. 밀리면 죽는다. 이건 지역감정으로 끌어 가야해…

하여간 새만금을 둘러싸고 별 상관없는 사람과 쫌 상관있는 사람들이 정식으로 한탕 붙기 직전이다.

삼보일배가 끝나고 나서 전북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도지사가 삭발을 했다… 엽기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하여간 지금 새만금 반대하는 편에 서면 응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다… 졸라 무섭나? 하여간 여기까지 와버린 통에, 애꿎은 새만금… 조금씩 죽어간다.

하여간 새만금을 둘러싼 거짓말과 오해, 그리고 편견을 지금부터 디벼주마…

1. 담수호의 비밀

2000년에 민관합동조사단이라는 게 있었다. 졸라 빙신들 모여서 삽질 했다고 하는게 딱이다. 하여간 할 수 있는 거짓말들은 다 갖다 붙여서 했다는게 이거고, 그나마도 합의가 안되어서 위원장 양반이 대충 자기 개인의견인 것처럼 정부에 ‘걍 해’라고 보고서를 올렸는데, 이게 지금 말하는 2년간의 사회적 합의라는게 그거다.

근데… 이 사람들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빙신 같은 답을 냈다고 사람들이 방방거렸지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던 이유가 있다.

새만금에 흘러오는 강에는 만경강과 동진강이라는게 있는데, 이 만경강이 열라 썩어있다는게 고민의 시작이다. 부분적으로 5급수고, 전체적으로는 5급수 이상되겠다. 그래서 목표 수질로 4급수를 맞췄다.

열라 복잡한 얘기해서 본 우원 가슴이 아프지만, 하여간 물 얘기 좀 하자. 1급수라는 게 있다. 청정수역이라는게 그런 건데, 걍 마셔도 되는 물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쉬리, 이런게 여기 산다.

2급수라는 건 뭐냐? 정수하면 마실 수 있는 물이라고 보면 된다. 잉어같은게 여기 살고, 놀래미 같은 놈들도 여기서 대충 산다.

3급수? 이게 고도처리하면 마실 수 있는 물이다. 하여간 생난리를 좀 치면 먹어도 되는 물이 3급수다…

새만금 담수호의 목표 수질인 4급수, 두둥, 이게 용업용수 혹은 2급 공업용수로 불리는 물이다. 그냥 논바닥에 물대주거나 아니면 뜨거운 기계의 물을 식히는 용도로 사용해도 괜챦다는 물이 이 새만금 호수의 ‘꿈의 목표 수줄’ 4급수이다.

붕어… 이거 강한 놈이다.


< 나, 붕어… >

붕어같이 강하고 독한 놈들은 4급수에서도 죽지 않고 산다.

옛날 전두환 이전에 한강 졸라 속상하게 더러운 적 있었다. 그때에 가끔 붕어에서 휘발유 냄새가 난다더니, 하던 시절이 있었다… 목표 수질인 새만금호의 수질이 이거다.

근데 이걸 위해서 졸라 복잡한 조건을 걸었다 이거야…

만경강이 왜 이렇게 열라게 물이 안좋냐 그러면, 그 위에서 축산폐수, 그러니까 소똥 같은게 열라 내려오기 때문이거던… 근데 이 축산폐수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리하기 어려운 수질오염물질이라는 사실…

그래서 이 4급수를 맞추기 위해서 전주를 포함한 위쪽의 개발은 전부 막고, 그리고, 에또, 비료 사용도 30% 줄이고, 또 음… 위에 가축사육도 하지 않도록 권장(?)하고…

그리고도 두둥, 위의 금강호의 물을 계속 이리로 끌어다가, 소위 물에다 물타기를 한다…

이런거거던… 그래도 4급수를 맞추기가 어렵거던… 씨바…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하여간 이래… 게다가 엿 같은 건 이게 질소나 인, 하여간 말은 복잡하지만, 그냥 변 성분이라고 보면 돼… 한마디로 똥물은 질소와 인, 그리고 암모니아 - 이거 뭔지 알지? 방구가스의 주성분 - 같은 거로 구성되어 있거던…

거꾸로 얘기하면 비료라고도 하지. 그래서 2년 전에 똥물에서 뱃놀이하고 관광할 똘아이가 누가 있겠냐고 했더니, 농업기반공사 아그들, 그건 비료성분이라서 오히려 농업에 도움이 된다고 한거야. 음… 똥물이 비료긴 하지…

이 물이 새만금 담수호로 들어가면, 으찌돼나? 농기반 아그들 얘기로는 일단 들어간 강물이 호수에 두달 반 동안 있다 나간대거던…

따땃한 여름날, 비료 성분 잘 썩인 물에 플랑크톤이니 녹조류니 하는게 한 번 팍 퍼져나가면, 골때리게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겠다. 대충 여의도 30배쯤 되는 잘 썩은, 아니 잘 삭은 비료더미같은게 되는거지… 죽여줄껄… 상상도 못하게 아름다운 광경되겠다…

너같으면 그런데서 뱃놀이 하고 싶겠냐?

산업단지니 중심도시가 못되는건 이 물 때문에 그래. 마실 수 없는 물을 누가 마시냐? 너 같으면 마시고 싶냐? 그래서 금강호에서 또 지하수로로 엄청나게 물을 끌어오면 된다고 하는데… 충청도 사람들은 또 바보냐. 나중에 지네 마실 물도 없어지는 10년 후에, 나 몰라 하고 자빠지면…

골 때리게 아름다운 장면 나오겠다. 세계 최고의 간척지에 세계 최대의 오염지대… 이 오명을 새만금이 뒤집어 쓰게 되거던…

2. 갯벌이 새로 생긴다?

이 얘기만 나오면 본 우원, 또 꼭지돌기 시작한다. 음… 갯벌이라는게, 그냥 맨 갯벌이 있고, 하구갯벌이라고 하는 상당히 귀한 갯벌이 있는데… 하여간 강을 끼고 있는 갯벌과 강을 끼지 않은 갯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거야… 동진강, 만경강을 끼고 있어서 새만금 갯벌을 1급으로 쳐주는 거거던…

옛날에도 생겨나지 않았냐고 하지만, 옛날에는 강을 안막았쟎아, 븅신들아…

갯벌을 구성하는 고운 모래는 바다에서도 오고 강에서도 오는데, 실제 영양분은 다 강에서 내려오거던…

그냥 바닷가의 모래사장 알지… 거기에 별 거 없는건, 그냥 모래구, 별 영양이 없어서 그렇거던…

여름에 모래사장에 해수욕가서 낙지 잡아본 적 있냐? 이상하게 모래사장에는 별 거 없지? 그게 영양분 때문이거던…

그걸 강이 숨을 쉰다고 그러는건데, 새로 생기는 갯벌은 크기도 허벌 작을 뿐더러, 강이랑 끊겨 있어서, 모래사장 비슷한데, 모래가 곱지는 않고… 하여간 모래더미 같은거거던…

물론 독한 넘들은 거기에서도 살지… 5급수 이상 물에서도 사는 넘들 있으니까…

그걸 ‘죽벌’이라고 해. 죽어있는 갯벌이라는 거지…

3. 전북경제에 도움이 된다?

쓰다보니까 또 열받기 시작한다. 지금 국민소득 만 불이라고 하지만, 전북 지역은 7천불도 안돼… 가슴 한구석이 아리기 시작한다.

하여간 정치하는 죽일 넘들이, 그런 전북 사람들을 댓구 사기치는 거랑 비슷해. 그래도 워낙 전북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이해도 되고, 맘도 아프지.

근데, 이런 거야. 지금 아무리 뭐라고 해도, 거기에는 농지 밖에 못들어가. 지금은 다 아는 척 하지만, 자료 갖다놓고 검토하면 그렇게 결론날 수 밖에 없거던…

옛날 총리시절, 이한동이라는 한또도 잘 해줄려고 했는데, 가만 보니까 이거 완전 청문회 감이거던… 그래서 농업이라고 결론을 낸 거야. 누가해도 물문제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어.

물막이 끝나면, 공사는 그때부터 시작이야. 물빼고, 열라 빼고, 거기에 소금기 빼고, 10년은 기다려야 하는데, 실제 정부예산은 1700억원씩 밖에 안 들어가니까, 사실 그 예산으로 이거 끝낼려면, 백년이 걸리거던…

음… 좀 정부에서 신경 써주면 50년…

그야말로 공사는 조금씩 하면서, 갯벌은 죽고, 그안에 있던 넘들도 다 죽고…

먼지 풀풀 날리면서 그냥 10년 동안 공사장으로 되거던… 냄새도 좀 날거야. 갯벌 안에 있는 넘들 죽은거… 그리고 담수호로 바뀌면서 바다고기들, 죽거던… 어느 날 한 번에 죽으면, 바다 위에 배를 내밀고 좀 썩을 거거던…

관광? 이 10년 동안 물썩고, 고기들 죽은 거 보러 오겠냐? 너 같으면 공사장 먼지 날리는데 회먹으로 오고 싶겠냐?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십년 동안 ‘우리의 옥토’ 기다리는 동안에 전북 경제가 살아난다구?

살아나면, 지금 전북경제의 꿈이고 희망이라고 한 사람들, 노벨 경제학상 다 받을거야. 간척으로 지역 경제가 살아나다! 케인즈 선생의 뉴딜로도 미국 경제가 살아나지는 않았거던…

하여간 어쨌든 새만금이 죽더라도 전북경제라도 살아났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정말 지금 사기꾼들이 경제학 이론을 바꾸는 셈이야. 아니라구?

시장의 철의 법칙이 10년 후에 작동되는걸 함 구경하는 재미도 솔솔치 않을거야.

아, 물론 농기반 아그들은 살아나지. 지금 걔네 예산 90%가 새만금 관련 사업이거던… 다시 말하면 밥줄 없을 놈들이 10년 동안 덩더쿵 덩더쿵 하면서 월급 받는데는 지장없지만, 전북경제에는… 큰 도움 안돼…

왜냐구? 다른 동네는 10년 동안 노냐? 광주, 평택, 부산, 대구… 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거던… 물론 전북이 티나게 살기 어렵구… 그래서 내고 맘이 아프지만…

그러나 하여간 딴 동네는 살자구 10년 동안 허벌라게 열심히 뭔가 할꺼거던…

심하게 얘기하면, 1,700억원만큼 들어오는 돈, 그나마도 기획예산처에서 짤려서 내년에는 1,600억원이거던… 이거 머리수로 나눠봐? 1인당 5만원 정도?

매년 5~6만원 정도… 그나마도 이거로 돈 버는 분들은 만 명도 채 안될걸… 연간 5만원 정도 받고, 아, 기분좋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는구나, 하면서 10년 동안 그냥 기다리고 있는거야.

그래두 그거나마 없는 거보다 낫다구? 생각해봐라… 지난 9년 정도, 매년 공사 했쟎아. 근데 좀 나아졌어? 앞으로 10년 동안 똑 같은 상황이라니까…

괜챦다구? 그럼 그러구 있든지. 5년 후의 상황을 생각해봐. 전국, 아니 세계 최대의 오염지역, 전북… 그나마 내륙지대는 만경강 상류라고 개발이 꽁꽁 묶이구…

왜 전북만 미워하냐구? 미워하긴 뭘 미워해. 그렇게 되는게, ‘경제적 과정’이라는 거지.

통일되면 새만금이라는 땅이 필요하다구?

장난하나… 독일이 통일하면서 동독 지역에 열라 돈 쏟아부어준거 몰라? 새만금의 땅을 기다리면서 열라 땅 만들다 통일되면, 그땐 모든 돈이 다 북한으로 들어가게 되있거던…

통일되면 쌀 많이 필요하다구? 장난하나, 진짜… 쌀 값은 20년 후에는 더 떨어져. 그리고 농업기술도 더 발전하게 되거던… 쌀, 제발 쌀 걱정 좀 하지 마시라.

쌀이 남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밥을 덜 먹는거거던… 미치겠군. 앞으로 쌀 더 안먹어.

4.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나라 법치주의 맞나?

법 얘기는 재미없지만, 그래도 해주겠다. 공유수면매립법에 의한 공유수면매립허가, 이런게 있거던. 여기에 ‘농업목적’이라고 해서, 갯벌에 대한 매립허가를 받은 거거던…

너무현 아저씨가 맞습니다, 맞고요라고 말한 건 행정행위라고 안해. 정치행위 혹은 통치행위 같은 거지…

근데 신구상기획단이 새만금 갯벌의 용도변경을 논의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순간, 이걸 행정행위라고 하거던…

정부에서 오늘부터 신구상기획단을 만들었습니다, 발표하는 순간부터 공사는 불법 공사가 되는거거던… 왜냐구? 목적이 바뀌었으니까…

그럼 그 다음날부로 법 좀 한다는 넘들이 바로 소송을 내는거지. 불법공사 강행에 대한 가처분소송… 뭐 이딴 비스무레한 건데, 미안하지만, 공사 중지 결정이 나올 확률이 높아.

계속하고 싶으면? 그냥 대법원까지 올라가는거지.

근데 공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재판에서 이길려면, 용도변경을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한 환경영향평가와 경제적 타당성까지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데… 왜냐구?

이게 국책사업이라서 그렇거던… 정부는 그렇게 행위하도록 법에서 정해놨어. 근데 환경영향평가 1년 걸리는 거 알아? 그거 다시 해야되거던… 근데 아마 통과시키기가 쉽지 않을걸?

경제적 타당성 검토도 쉽지 않을걸? 왜냐구? 공단이나 하여가 다른 거로 할려면, 20조쯤 들어가는데, 거기에서 그 돈 나오는걸 만들어내기가 만만치 않을거야…

산업공단 같은거로 할려면, 간단하게 남산이 150개 정도 필요하다구 보면 돼. 왜냐구? 여의도 140배가 생겨나는데, 안 그렇겠어?

근데 이 땅을 다른데서 가져올 수 있나? 다른 동네가 다 바보야? 전북의 산이란 산은 전부 파다가 새만금에 쌓아주겠다는 얘기를 하는거거던…

농기반 아그들은 신나지. 덩더꿍 덩더꿍… 전북엔 뭐가 남아?

사실은 공사도 하지 못할거야. 바다에서 파오면 된다구? 물론 되지. 그럼 30조쯤 들겠다구 계산하겠지. 그 타당성 보고서가 깔끔하게 나오기 전까지, 새만금에는 손가락 하나 못대…

그러지좀 말라구?

내가 하는게 아니라니까… 변호사들 많쟎아. 함 보자구 지금 벼르고 있거던… 법 좀 알아? 함 고민해봐.

전북에 도움이 안될 뿐더러, 죽는 길이라니까… 환경만 죽어서가 아니구, 그런 대형 국책사업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니까. 있는 돈은 농업에서 들어오는 돈 매년 1700억원이 다야.

1인당 5만원씩 받는다고 좋아하는 동안에 하여간 처절한 일들이 벌어질 거라니까…

기분 나쁘다구? 미안해. 그런데 시장법칙이라는게 그런건데 어떻게 해. 그리고 국책사업에 대해서는 그만큼 머리 아픈 절차들을 변호사 아찌들이 그렇게 만들어놨거던…

하여간 생각들좀 해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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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
열대 내 부족 삶과 문화 찾아 떠난 여행기
먹거리 모자라도 가축과 함께 나누고
족장은 권력 휘두르는 대신
솔선수범으로 지도력 인정받는 세계
어찌 미개한가

고전 다시읽기/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열대’라는 단어 앞의 ‘슬픈‘이란 형용사가 인상적인 이 책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1935년 브라질의 상파울루 대학에 사회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된 여행의 기록이다. 이후 약 20년이 지난 뒤 쓰인 이 책은, “모닝 빵처럼 팔렸다”는 말로 묘사되는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면서 그를 대중적인 스타 지식인으로 만들어준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그는 박사학위 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로 프랑스 사상계의 새로운 거목으로 떠올랐으며, ’구조주의‘라고 불리게 되는 새로운 철학적 흐름을 창안했다. 이어 <슬픈 열대>, <야생의 사고> 등 저작을 통해 그는 프랑스 사상계 전반을 뒤바꿔놓은 중심인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이 주도하고 있던 유럽의 철학적 주도권을 프랑스로 이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구조주의라면 “한물간 지 오래”인 1990년대 중반인가에 프랑스의 문화 관련 기자들의 투표에서 여전히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행은 다른 세계, 내게 익숙하지 않은 세계와의 만남이다. 그래서 문학도, 영화도 여행자를 좋아한다. 오디세우스의 여행, 파우스트의 여행, 혹은 손오공의 여행, 레인맨의 여행 등등. 거기서 작가는 여행자를 따라가면서 그가 다른 세계와 만나며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삶을 향해 떠나자고 슬며시 우리를 부추긴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레비스트로스의 이 여행기도 그렇다. 그가 정말 여행을 싫어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의 여행은 뜻밖의 전화 한 통으로 인해 떼밀리듯 시작된, 그래서 더 운명처럼 여겨지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어쩌면 그 전화를 받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역사학이 자기가 사는 것과는 다른 시간을 여행하고 탐사하는 것이라면, 그가 좋아하게 되었던 인류학은 다른 공간을 여행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탐사하고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종류의 인류학자여서, 현지조사보다는 수많은 조사자료들을 비교하고 교차시켜 다양한 문화나 신화들 안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된 것(그가 ‘구조’라고 부르는 것)을 찾고자 했다. ‘구조주의’란 한편으론 구조주의 언어학을 연구방법으로 삼아서 생긴 이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바로 이 공통된 것을 찾고자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 주도권 독일서 프랑스로



그렇지만 이 책에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단지 책상에서 남이 쓴 글을 보며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본다. 또한 모든 문화에 공통된 것만을 찾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음을 또한 본다. 이 여행기의 줄기는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의 삶과 문화다. 그것을 천천히 거쳐가면서 그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다른 종류의 삶을 체험한다.

그림 그리길 즐기는 카두베오족의 문신과 문양에서 주어진 신체, 주어진 얼굴을 변형시키는 예술가적 창조의 욕망을 본다. 남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나누는 남비콰라족의 사랑법에서 오히려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서적이고 유희적인 쾌락의 감각을 보기도 하고, 그 대담한 사랑의 와중에도 발기된 흥분으로 빠져들지 않는 태도에서 육체의 노출이 아니라 평정의 상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고상한(?) 윤리감각을 발견하기도 한다. 혹은 인간의 형체란 물고기 형체와 앵무새 형체 사이의 과도기라고 보는 보로로족의 윤회적 우주관에서 인간과 동물 세계의 연속성을 보기도 하며, 가축에게도 인간과 동등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먹을 것이 부족해도 ‘함께 식사하는’ 남비콰라족의 태도에서 그러한 연속성이 함축하는 실제적인 의미를 보기도 한다. 또 고유명사를 감추고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남비콰라족 사람들에게서 문자 없는 세계에 대한 루소적 꿈을 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이 사용하는 문자를 흉내내 주민들을 설득하거나 ‘지배’하려는 한 추장의 태도를 보면서 문자의 짝이 권력임을 보기도 한다.

좀더 인상적인 것은 추장에 관한 정치학이다. 가령 남비콰라족의 경우 추장은 유랑생활을 편성하고 여정을 선정하며 숙영할 곳을 정하는 지도자다. 그러나 그에게는 강제를 수반하는 권력은커녕 공적으로 인정된 권한도 없다. 그는 오직 대중의 호감이나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조달해줄 능력, 혹은 솔선수범하는 능력에 의해서만 추장의 지도력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추장의 지도력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관대함’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정보제공자이기도 한 남비콰라의 추장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그것은 어느새 다른 주민들 손으로 넘겨졌음을 발견한다.

다른것 동질화 목격 깊은 슬픔

이러한 삶과 문화를 어찌 ‘미개하다’고 말할 것이며, 어찌 ‘야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알다시피 그것은 서구인들에 의해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이 되어 파괴되어 버렸고 ‘문명화’ 내지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동일한 양상으로 변형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안다. 럼주 한잔의 미묘한 맛은 거기에 섞여 들어간 불순물 때문임을. 사람들의 삶에서 이질적인 것, ‘불순물’을 제거해버리려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좋은 향기를 제공하는 것들을 스스로 완전히 파괴해버리려고 하는 것”임을.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비난하고 이질적인 모든 것을 자신의 모습대로 동질화해버리는 서구문명에 대해, 바로 자기 자신이 속한 그 세계에 대해 거대한 분노를 느끼며, 그것으로 파괴된 열대의 세계에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틀림없이 그의 여행은 이 침략과 파괴에 의해 말살당한 흔적을 목격하고 체험해야 하는 여행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여행기에는 또한 깊은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을 ‘슬픈 열대’라고 붙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레비스트로스를 무척 좋아한다. 이 책 속에 배어 있는 그 따뜻한 마음을, ‘야만인’에 대한, 자기와 다른 종류의 삶에 대한 애정을 깊이 사랑한다. 데리다의 비판처럼 원시적인 것에 대한 향수나 구조주의적 방법에 문제가 있음은 사실이지만, 몽상이나 향수마저 지울 수 없었던 그 따뜻한 안타까움을, 그 깊은 슬픔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비판은 너무 쉽고도 안전한 투자 같아서 싫다.

슬픔과 분노를 안고 그는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돌아가는 곳은 또 다른 원시의 열대도, 그가 속했던 문명화된 대륙도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인 것 모두가 서로에 기대어 있는 세계다. “역사, 정치, 사회적·경제적 세계, 물리적 세계, 심지어 하늘까지, 이 모든 것들이 동심원을 이루며 나를 둘러싸고 있다.” 여행의 끝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당신이 신이 된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자기 몸에서 빛이 난다는 것을 느끼거나 기적을 행할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가 아니라 야생의 짐승들이 가까이 다가와도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고, 그 온몸을 엎고 있는 악취나 분뇨에서도 예사로워질 때랍니다. 모든 시체, 모든 부패물, 분비물이 다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때랍니다. 신이 되고 나면 나비들이 당신 목덜미에 앉아서 교미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마지막은, 그 ‘귀로’의 끝은 미얀마의 챠웅(불교사원)이다. 외부, 타자, 이질적인 것을 견디지 못하는 획일적 문명, 혹은 그것의 좀더 남성적이고 호전적 형태인 이슬람에서 더 없는 불편함을 느끼는 그는 여성적이거나 탈성화된 불교에서, 외부의 이질적인 것에 열려 있는 불교에서, 그것과 만남을 통해 기독교적 문명이 여성화되는 것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러나 그 희망은 기독교의 서구와 불교의 인도 사이에 발생한 남성적 이슬람으로 인해 이미 오래전에 절단된 것이다.

귀로의 끝은 ‘열려있는’ 불교사원

하지만 ‘서양’과 ‘동양’을 잇는, 실현되지 못한 희망을 대신할 또 하나의 희망을 찾아낸다. 그것은 뜻밖에도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만남이다. 형이상학과 인간행위의 조화를 실현했던 이 두 사상의 만남을 통해, “인간을 첫 번째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과 그 해방을 완결시키는 불교의 비판”의 만남을 통해 “동양으로부터 서양으로 흐르는 확고한 운동”이 이루어지리라고 말한다.

그는 한때 열대를 찾아 떠났지만, 그 열대를 통해 자신이 속한 세계를 떠난다. 그리하여 너무도 익숙해진 그 ‘문명화된’ 세계를 떠나도록 사람들을 촉발한다. 다른 삶으로 떠나는 여행을.

서평자 추천 도서

슬픈 열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한길사 펴냄(1998)

(<슬픈 열대>의 완역본)

야생의 사고

레비스트로스 지음, 안정남 옮김

한길사 펴냄(1996)

(토테미즘이라 불리는 미개인의 사고법이 턱없는 미신이 아니라 사물을 분류하는 또 하나의 과학, 구체성의 과학이란 점을 보여주면서, 서구인의 자기중심주의를 비판한 책)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디디에 에리봉 지음, 송태현 옮김

강 펴냄(2003)

(기자인 에리봉과 레비스트로스의 대담을 통해 쓰여진 레비스로스의 ‘회고록’)

 

 

족장의 권력이 지닌 무기는 관대함이다


“족장은 전쟁을 할 때 선두에 서서 싸우는 사람이다.” 몽테뉴는 이 이야기를 그의 <수상록>의 유명한 한 장에서 기술하면서 그 원주민의 자신만만한 정의에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그로부터 거의 4세기 후에도 동일한 대답을 들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커다란 놀라움과 존경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족장은 명확하게 규정된 권한이나 공적으로 인정된 권위에서 그의 기반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을 우선 말해두어야 하겠다. 동의가 권력의 근원을 이루며 또한 동의가 족장의 지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족장은 어떻게 그의 의무를 완수해 나가는가? 그의 권력이 지닌 무기 가운데 가장 주요한 수단은 관대함이다. 대부분의 미개민족들 사이에서,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관대함이 권력의 본질적인 속성이다.···[그래서] 그는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들일지라도 빈곤이 닥칠 경우에는 상당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식량, 도구, 무기, 장신구 따위의 여분의 양을 그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 개인이거나 가족이거나 또는 전체로서의 하나의 무리가 어떤 것을 욕구하거나 필요로 할 때 그 호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바로 족장이다. 그러므로 관대함이란 새로운 족장에게 기대되는 가장 중요한 속성이라 하겠다.···

족장들은 가장 적합한 나의 정보 제공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있었으므로 기꺼이 그들에게 풍부한 증여물을 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에게 준 선물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들의 손에 있지를 않았다. 내가 어떤 무리들과 몇 주간을 함께 지내고 헤어질 때가 되면 주민들은 내가 [족장에게] 주었던 도끼·칼·진주 따위를 소유하고 있고는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반적으로 족장은 물질적인 면에서는 내가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빈곤한 상태에 있었다.···

훌륭한 족장은 그의 솔선수범하는 능력과 기술을 증명한다. 화살의 독을 준비하는 사람은 족장이다. 마찬가지로 족장은 남비콰라족의 유희에 사용되는 야생의 고무로 된 공도 만든다. 또한 그는 무리들이 단조로운 일상생활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출 줄 아는 쾌활성을 지녀야만 한다.(박옥줄 옮김, <슬픈 열대>(한길사), 564~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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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돈다…그래도 신은 존재한다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

지구 중심주의 깨부순 지동설
인간의 자존심엔 상처 주지만
신의 섭리는 우주로 확장시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는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가지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라는 긴 제목의 저서를 줄여서 일컫는 표현이다. 1632년 출판된 이 책은 지동설 주장으로 금서 목록에 올랐고 갈릴레오가 그로 인해 종교 재판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해설자들도 종교 재판에 연관한 역사적 의의를 많이 강조한다. 하지만 이 책은 문장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읽을 가치가 있는 고전이다. 깊고 넓게 다양한 생각 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저자가 밝혔듯이 “주된 줄거리 못지 않게 재미있는, 딸린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대화>의 과학적 의의는 지동설 주장과 함께 갈릴레오의 방법론이다. 자연을 수학화하는 근대 물리학의 전통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적 성과를 넘어서 <대화>는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지구중심주의 및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이다. 이를 합하면 ‘지구인 중심주의’로부터의 해방이다. 당시까지 서구인의 의식은, 세계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에서 사는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들에게 유용하도록 질서가 잡혀 있다는 믿음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천문학적 발견은 지구(따라서 그곳의 거주자)가 우월적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천체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대화>의 화자 사그레도는 말한다. “지구도 달, 목성, 금성, 또는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있고, 실제로 움직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구는 하늘에 있는 천체들과 같은 위치에 놓여 그들의 특권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지구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일이 지구에게 마땅한 권리를 돌려주는 것이라는 역설적 은유는 흥미롭다.

 

지구와 다른 천체들을 연속선상에 놓고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타격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에서는 생성, 소멸, 변화의 현상이 있지만 다른 별들과 우주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믿었다. “지구에는 풀, 나무, 동물들이 태어나고 죽고 합니다. 비, 바람, 폭풍우, 태풍이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구의 생김새는 계속 바뀝니다. 그러나 하늘의 물체에는 이런 변화를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천동설을 믿더라도, 항상 순환해서 제 자리로 돌아오는 천체의 운동을 확인할 뿐이었지, 육안으로 보아 전혀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천체의 물질적 변화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천체들이 변화하고 생성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영생에 대한 욕망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그는 <대화>의 화자 살비아티의 입을 통해 육체뿐만 아니라 “인간 영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혼불멸설조차 부정할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인간의 ‘숭고한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인간이 우주에서 특별하지 않은 존재일 수 있다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으로도 중요하다.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해방은 신앙심을 축소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대시키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과학적 탐구로 지구인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인간만을 위한 신이 아니라 진정으로 세상 만물을 위한 신을 확인한 것이다. 그때까지 인간중심주의는 오히려 신의 위상을 인간에 맞춤으로써, 신의 섭리를 한정시키고 신앙심을 축소시켰던 것이다. 반면 인간이 무한한 우주에서 아주 미미한 존재라는 것은 신의 위상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음으로 해서 신의 손길을 느끼고 신의 은총을 받는 게 아니라, 우주의 변방에 있더라도 그렇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신의 손길은 광활한 우주의 한 귀퉁이에 있는 미물에게도 미친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어서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신이 편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갈릴레오의 신앙심은 더욱 돈독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과학적 업적은 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신을 온전히 긍정한 것이다. 종교 재판 후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말을, 과학적 발견 이후 더욱 새로워진 그의 신앙심을 위해 빌려 쓴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신은 존재한다.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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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국적이란 움직이는 것

2005/08/10 13:59
[펌] 한겨레21 > 칼럼 > 박노자 칼럼  > 내용   2005년08월04일 제571호

 

국적이란 움직이는 것!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근대적 개념 형성 이전에 ‘이탈자’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스위스 출신 프랑츠 레포르트에서 신라 출신 설계두, 개화기의 서광범까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최근에 일어난 ‘국적 포기자’에 대한 여론재판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이 상황을 단순히 유산층의 병역 면탈에 대한 반감으로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병역을 천역(賤役)으로 알았던 전근대 지배층의 사고를 이어받아 빈민개병제의 국가를 운영하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특권층에 대한 빈민개병제 희생자들의 분노는 클 수밖에 없다. 살인적인 경쟁 사회를 만들어놓은 한국 지배자들이, 평민의 자손에게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억압적인 규율과 막노동을 강요하고 자기 자손에게는 사회 진출 준비를 더 잘할 특별한 기회를 준다니 기회 균등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모두 ‘배신자’였나

그러나 병역 이행에서의 부정이 보여주는 계급 불평등 현실의 다른 측면들을 지켜볼 때도 우리는 과연 이 정도로 흥분하는가? 예컨대 국회의원 등 특권층의 병역 면제자 비율에 대한 통계가 발표될 때도 이 정도의 분노의 파도가 일어나는가? 전방근무 등 가장 어려운 종류의 병역을 이행하는 사람들 중에서 특권층의 자손이 몇명인지 그리고 특권층의 자손이 군에서 어떤 종류의 특별한 근무를 맡는지에 대해서는 왜 우리가 공개적으로 묻지 않는가. 즉,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이번 ‘국적 사태’에서의 분노의 강도를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도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국적 포기자들이 해외동포로서 권리를 박탈당하게 만드는 ‘홍준표 법’의 국회 부결에 따른 성난 누리꾼의 움직임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국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국적에 대한 의식이 현대사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짚어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검토를 하지 않고서는 국적 포기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배신자’로 비치게 된 원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 스위스 출신으로 ‘국적’ 문제에 대한 별 생각 없이 표트르 대제의 총신이 되어 러시아를 좌지우지한 프랑츠 레포르트. 300년 전 유럽에는 아직 국적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국적에 대한 의식의 원류를 찾노라면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근대적인 국민국가에의 소속이란 의미의 ‘국적’이란 말은 한국사에서 극히 최근에 형성된 법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18세기 후반 이후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봉건적인 ‘신민’의 개념에서 근대적인 ‘시민권자’ 개념으로 이동했다. 예컨대 17세기 말만 해도 제네바 출신의 모험적인 군인 프랑츠 레포르트(1655~99)는 러시아군 장교로 고용된 뒤 차차 명성을 얻어 외국인 출신임에도 표트르 대제의 가장 가까운 총신(寵臣)이자 러시아에서 ‘황제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 뒤 19세기 중반이 되면 레포르트처럼 러시아군 장교로서 출세하려는 서구인들은 이미 국적 변경 절차를 밟아야 했다. 조선에서 조선 국적 소유자를 최초로 국제법적으로 규정한 문서들은 구한말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들이었고, 국내 최초의 근대적 국적법은 1948년 5월11일에 남조선 과도입법원이 만든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였다. 우리에게 늘 있어온 것으로 느껴지는 이중 국적 불허나 국적 상실과 같은 개념들은 한국 법제도사에서 기껏해야 반세기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국적이라는 일본식 근대적 법학 용어가 차용되기 전에 인접 국가의 신민이 된 ‘이탈자’에 대한 시선은 과연 어땠을까? 물론 한 군주국의 장교로 복무했다가 조건이 안맞거나 갈등이 생기면 경쟁 군주국에 가서 그 군에 복무해도 누구라도 ‘배신자’라 하지 않았고, 국가적 소속이 매우 상대적이었던 18세기 말 이전의 서구에 비해 동아시아에서의 국가 소속 의식은 훨씬 더 뚜렷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의 책임자 김부식이 아무리 유교적인 충(忠)을 중시한 사람이었어도, 신라에서 621년에 당나라로 밀항해 당나라 군대에 입대해 나중에 전장에서 장렬히 죽은 신라의 육두품 준귀족 설계두 이야기를 ‘열전’에 집어넣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불법적 국적 이탈자’인 설계두는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 고구려에 대한 침략에 참전했다가 고구려인의 손에 죽은 당나라 군대 장교로서 반역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진골로 태어나지 않은 죄로 신라에서 그 포부를 펼치지 못해 결국 ‘동족’과의 전쟁에 내몰린 비극적 인물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김부식이 그를 영웅의 반열에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고구려보다 신라를 정통으로 인식한 김부식의 편벽된 역사의식이나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도 작용했겠지만 “본국의 신민이냐 타국의 신민이냐”보다는 “어느 정도 충실한 신민이냐”를 훨씬 더 중요시했던 유교의 보편주의적 논리가 고구려인과의 싸움에서의 당나라 장교 설계두의 장렬한 죽음을 신라 전사들의 전장에서의 순국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할 수 있는 근본적 근거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계몽주의자들처럼 역사를 혈연적이며 불변한 ‘아(我)와 피(彼)의 투쟁’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본국을 이탈한 타국 신문의 충성뿐 아니라 적국 신민의 충성도 우러러볼 수 있는 것이다. 165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나선정벌’, 즉 러시아 카자크 비정규군과의 국지전에 나선 조선의 병마우후 신류(申瀏)가 포로로 잡힌 적군들을 위로하면서 ‘군주를 위하여 이렇게도 멀리 온’ 그들의 충성을 치하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논리다.

 

적국 신민의 충성도 우러러볼 수 있다.


△ 조선 후기 ‘국적 이탈자’ 중 ‘외국인’임을 가장 선명하게 밝힌 사람은 아마도 서재필일 것이다. 그는 조선에 돌아와서 독립신문 발행 등의 계몽 활동을 할 때 꼭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라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썼다.

물론 ‘국적 이탈자’에 대한 전통 사회의 시선은 꼭 곱지만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부역했다가 나중에 자진해서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간 자들을 역적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이탈’ 그 자체보다 적군에 대한 ‘부역’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15세기에 황해도 출신의 정동(鄭同) 등 어렸을 때 조선에서 명나라 환관으로 바쳐진 여러 사람들이 나중에 명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고국에 다녀왔을 때 그들에 대한 조선 사대부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이 경우에는 ‘이탈’ 자체가 문제됐던 것보다는 환관이라는 계층에 대한 양반들의 멸시가 작용한데다 명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여러 횡포를 부렸던 조선 출신의 명나라 대인의 행동에 대한 원망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정동은 본인이 태어난 신천(信川)을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도록 조선 정부를 성공적으로 압박할 정도의 위세를 떨쳤는데, 조선 조정 신하의 입장에서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명나라로 적을 옮긴 조선 출신의 환관들이 고국에 올 때 조상 분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편의 제공을 받는 등 조선 초기 식의 ‘동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도 했다.

 

쇄국을 지향한 명나라와 조선의 경우 두 나라 신민의 경계가 분명했는데 그 전에는 달랐다. 예컨대 9세기에 산둥반도의 신라방(新羅坊)이나 신라촌(新羅材)에서 거주하면서 일본과 무역을 했던 신라 계통의 상인들은 일본의 사문서에는 신라인으로 서술되는 반면 신라에 적대적이었던 일본 정부의 공문서에는 주로 당나라 사람으로 기재돼 있었다. 서술자의 성향에 따라 당나라 사람으로도 신라인으로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신라에서는 신라 신민으로 당나라에서는 역시 외국 계통의 당의 신민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질적 이중 국적의 회색지대는 러시아나 미국 거주의 일부 조선 정치인들이 러시아 내지 미국 국적을 가졌으면서도 조국 정치에 계속적으로 개입한 개화기에도 실제로 존재했다. 예컨대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미국으로 도주해 1892년에 ‘조선의 국왕에게의 모든 충성을 영원히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얻은 서광범(徐光範·1859~97)은 나중에 고국에 돌아와 법부대신(법무부 장관)과 학부대신(교육부 장관)을 지내고 주미 조선 공사(대사)까지 역임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외국 국적을 가져도 일단 조선 신민으로 태어난 사람은 완전한 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의식이었다.

 

그러면 최근의 ‘국적 포기 사태’ 때 감지될 수 있었던 ‘국적’의 신비화, 절대화는 언제 이루어졌을까? 아마도 그 결정적 시기는 박정희의 집권기, 특히 유신 시대라고 보인다. 민주적 정통성도 민족적 정통성도 결여된 무법 종속 정권이 대민 세뇌 도구로 삼았던 것은 무엇보다 일제 시기 방식의 국가주의였는데, 이 국가주의의 핵심 개념은 ‘대통령 각하’를 모시고 병역 의무를 즐거이 이행하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과, ‘악마 같은 이북 공비’나 ‘불온사상’에 전염될 확률이 높아 믿기 어려웠던 해외 동포 사이의 확실한 경계선을 긋는 ‘국적’이었다.

 

국적의 신비화는 유신시대부터

‘국적 있는 교육’ ‘국적 있는 문학’ ‘국적 있는 역사학’ 이야기가 쏟아졌던 그 시기야말로 국민들로 하여금 ‘국적’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게끔 유도했다. 병영 국가에서의 국적 신성화인 만큼 한국 국적을 보유하는 남성 정상인은 무엇보다 먼저 ‘군인’으로 규정되었다. 학교에서의 교련, 대학에서의 군사훈련, 아무런 대안이 없으며 본인의 의지·신념과 무관한 군복무, 그리고 그 뒤의 예비군 훈련과 방위세 납부는 대한민국 국적 정상인 남성의 ‘당연한’ 생활리듬처럼 돼버렸다. 이와 같은 광적인 군사주의의 분위기에서 전통사회에 존재해왔던 ‘우리’와 ‘남’ 사이의 관용의 ‘회색지대’는 없어지고, 국적 포기자는 마치 전시라면 총살당해야 할 탈영병처럼 인식되고 병역 불이행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거나 ‘비국민적’ ‘반국민적’ 행각으로 개념화됐다. 유신시대가 막을 내린 지 꽤 됐지만, 그 시대에 제도화된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는 지금까지도 우리 현실적 생활을 지배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흙에 대한 사랑과 그 땅의 민중에 대한 애착이 꼭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는 걸, 특정 국가에서 출생한 남자라고 해서 살인 훈련을 받을 아무런 천부적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언제쯤이면 이해할 수 있을까.

 

참고 문헌

1. 조영록, <근세 동아시아 삼국의 국제교류와 문화>, 지식산업사, 2002.
2. 권덕영, ‘9世紀 日本을 往來한 二重國籍 新羅人’, <한국사연구>, 제120집, 2003, 85~114쪽.
3. 이광린, <개회기의 인물>,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203~242쪽.
4. 도회근, ‘국민과 국적’, <울산대학교사회과학논집>, 제9집, 제2호, 1999, 59~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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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우디요(Caudillo) 경제와 ‘생명없는 발전’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경제학 박사)

1. 세 명의 여성경제학자
내가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지 이제 20년이 되어가고 박사 학위를 받은 걸로 생각해보더라도 10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경제학자가 누구일까라고 지난 연말에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우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그 세 명은 전부 여성 경제학자들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스팔타쿠스당을 만들고 이끌었던 여성 정치인 정도로 알려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g), 케인즈의 제자 정도로 치부되는 죠안 로빈슨(Joan Robinson) 그리고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도넬라 메도우즈(Donnella Meadows)가 그 세 명이다. 아마 나의 학문적 계보나 이론적 흐름은 이 세 명의 여성 경제학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합친 것 혹은 그들의 공통점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메도우즈라는 이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로마 클럽이 세상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전망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최고의 시스템 공학자가 바로 2년 전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메도우즈 여사였고, 이제는 사라진 학파인 제로성장론학파를 70년대 10년 간 끌었던 사람이 바로 메도우즈 여사였다. 세상이 자원 고갈로 인하여 멸망할 것이라는 로마 클럽의 우울한 예언의 기술적 근거를 만들었던 메도우즈 여사는 0%의 성장률로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경제적 운용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정부가 도로공사 등 쓸데없는 공공사업과 군수산업을 후생 분야에 투입하면 물량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행복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10년간 ZEG(Zero Economic Growth)라는 개념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의 상당 부분은 미국의 철도 산업에 맞추어져 있고, 그렇게 건설과 토목으로 확장된 자본주의가 결국에는 더 이상 착취할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사라져 제국주의 단계를 거쳐 멸망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죠안 로빈슨 역시 축적과 성장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가난한 사람과 고용에 관심을 갖지만, 정부의 토목산업에 재정지출로 성장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 세 명의 여성경제학자들이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에 대한 담론을 보았다면, 아주 이상한 논리들이라고 웃어버렸을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는 짓고 부수는 것으로 경제를 살리자는 논리가 지고지순의 사회정의론처럼 되어있는 사회이다.

2. 쿠즈네츠와 팬 테이블
남성 경제학자 중에서 건설산업으로 경제가 좋아질 수 없고, 빈곤의 문제가 오히려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7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하버드 대학의 사이몬 쿠즈네츠(S. Kuznets)이다. 쿠즈네츠가 젊은 시절 통계자료를 만들면서 고단한 시절을 보낸 유펜(UPenn)에는 펜 테이블이라는 대단히 훌륭한 국가별 거시경제 통계가 아직도 업데이트되고 있다. 이 쿠즈네츠가 사용한 방식대로 국민총생산과 건설업 지출액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경제를 간단히 분석해보고, 이를 국제 통계와 비교해 보았다 졸고, “아픈 아이들의 세대”, 2005. 뿌리와 이파리
. 건설업매출액/GDP가 선진국은 8~13 사이에 존재하고, 이를 벗어난 선진국은 일본 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18을 넘어서면서 헤이세이 공황이라고 하는 10년 공황에 빠져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두 번 20을 넘어서는데, 79-80년 공황이 그렇고, 97-98년도의 IMF 경제위기 때 20을 넘어 26까지 증가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20을 넘어서면 누적된 건설산업이 공황을 일으키는 셈이다. 이론적으로는 경제의 다른 부분에 투입되어야 할 요소가 건설산업으로 집중되면서 요소 부족을 일으키는 일과 ‘지대(rent)’를 과잉으로 획득하기 위한 투기로 인한 거품(bubble)이 발생하게 된다는 두 가지 경우로 설명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국민경제 내에 건설 관련 활동이 13% 내외 정도에서 유지되어야지, 20%를 넘어서면 이미 건설 중심의 투기경제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다.

3. 중남미형 경제와 스위스-덴마크형 경제
남미 경제를 설명하는 가장 큰 요소가 지방 토호 즉 ‘카리스마를 가진 사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까우디요(Caudillo)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졸고, “한국경제의 위기가 저성장이 아닌 이유 - 참여정부의 실체, 까우디요 경제로 가는 길”, 당대비평 2005 신년 특집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던 착취 경제였던 스페인의 중남미 수탈이 끝나고도 중남미의 고통은 끝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페인이 물러난 다음에 토지를 불하받은 까우디요들이 계속해서 플렌테이션과 광산을 중심으로 수탈 경제를 운영했고, 중남미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부터 양극화된 중남미 경제는 21세기에도 이 까우디요 경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보다 낮은 국민소득을 가지고 있던 덴마크와 스위스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경제 발전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가족형 소농이 아직도 존재하고, 직접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으며, 가족형 기업에 의한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고, 현재 국민소득은 3만 5천불을 넘은 상태이다. 현재의 건설산업을 중심으로 한 각종 경제 살리기 움직임은 한국형 대공황의 전주곡일 뿐만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새로운 한국형 까우디요라는 새로운 계층을 발생시키거나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골프장이 개발될 산을 소유한 지방지주, 도로 옆의 생태보존지구의 지주 그리고 만평 이상의 농가소유주들은 현재의 전국적 개발정책에서 새로 까우디요로 편입되고, 이와 상관없는 대다수의 1주택 소유자나 전세거주자, 도시빈민과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대부분의 선량한 농민은 건설을 내세운 새로운 부의 ‘부등가 교환’을 둘러싼 경제 게임에서 일방적인 피해를 입고, 중산층에서 하류민으로, 그리고 하류민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4. 생명 없는 발전의 말로
건설 위주의 경기부양책은 현재 한국 경제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 중에서 최악의 선택이지만, 이미 이 정부는 이 선택의 버튼을 눌렀다. 금년 7월 헌법 121조의 ‘소작금지’ 원칙을 어겨가면서 도시투기자들에게 전면적으로 농지보유를 허용하는 농지법 개정안을 실행할 것이고, 국토의 생태적 안전장치를 해체할 ‘토지규제기본법’을 제정할 것이다. 카지노와 골프장을 시범사업 종목으로 선정한 기업도시나 국내 법규가 적용되지 않는 경제자유구역은 이 전면적 건설업 활성화의 전주곡에 불과하다. 이러한 발전을 ‘생명 없는 발전’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짓고 부수기 좋아하는 폭력만 남은 남성들의 경제학에 대하여 여성들의 시각으로 본 대안 경제학이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환경은 미래가치이고, 개발은 현재가치라는 조악한 2분법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 국민들이 행복하고 잘 사는 길인가라는 ‘어머니의 경제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간절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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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우주의 벽을 깨부수다

우리의 생각을 바꾼 아인슈타인의 세계관… 세계의 기본단위를 입자 대신 사건으로 설명

▣ 김동광/ 고려대 강사 · 과학사회학

정녕 아인슈타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 흔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에 해당하는 이론체계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그것이 우리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올해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아인슈타인 기념행사를 접하면서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상대성이론이 우리에게 준 영향은 생각보다 깊고도 근본적이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큰 폭으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4차원의 시공간 ‘시공연속체’

우리는 흔히 이런 변화를 세계관의 변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간단하거나 쉬운 것이 아니다. 세계관의 변화는 토머스 쿤의 말을 빌리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며, 말 그대로 혁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아인슈타인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점은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에 기반한 것이었다. 즉,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움직이고 활동하는 배경이자 무대로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을 서로 분리되지 않은 ‘시공연속체’로 인식했다. 오늘날 우리가 공간 3차원에 시간의 1차원을 더해서 4차원의 시공간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우주와 나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어느 쌍성계가 거느린 한 행성의 표면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시공연속체 개념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말 그대로 서로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던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통일된 연속체(continuum)로 인식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시공연속체의 특성이 관찰자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가지는 중요한 함축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어떤 물체의 속도가 빛에 가까워질 때 나타나는 길이의 수축이나 시간의 지연과 같은 기괴한 효과를 연상시킬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관찰자가 속한 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가령 지구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게 달리는 우주선의 시계가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선에 탄 사람은 자신의 시계가 정상으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여서 수많은 공상과학(SF)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동안 인간이라는 주체와 분리되어 ‘저 너머’(out there)에 우리와 무관하게 있는 것으로 생각되던 세계가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로 이어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 발견의 함의는 관찰자인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 모두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며,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라는 인식을 열어주었다. 따라서 세계는 더 이상 인간활동의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 역시 데카르트 이래 물질로만 간주했던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단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 이전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만물의 기본은 입자였다. 근대물리학의 집성판인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힘과 운동을 통해 세계의 작동원리를 설명했고, 여기에서 삼라만상의 기본단위는 입자였다. 그에 따르면 지상에서는 입자로서의 포탄, 사과 등이 운동 3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천상에서는 입자로서의 행성들이 중력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이 입자는 손으로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이며, 근대적인 존재론은 이러한 입자를 기반으로 삼는다.


△ 아인슈타인은 나홀로 입자에서 관계망의 사건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사건의 개념은 뉴턴(오른쪽)의 입자론에 기초한 존재론을 바꾸었다.

이런 뉴턴의 생각이 아인슈타인에 이르면 입자는 그 의미를 잃고 사건(event)이라는 개념이 제기된다. 사건은 사상(事相)이라고도 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입자 개념과는 달리 관계망(network)을 기반으로 삼는다. 따라서 포항공대 소흥렬 교수(과학철학)는 “아인슈타인의 사건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기존의 존재론을 바꾸어놓았다”고 설명했다.

아인슈타인은 물질과 에너지, 가속도와 중력이 실제로는 하나라고 말한다. 우주 탄생 초기에는 물질과 에너지의 구분이 없었고, 오늘날 우리가 자연력이라고 생각하는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도 모두 단일한 ‘초힘’으로 통일돼 있었다. 오늘날 표준가설로 받아들여지는 ‘빅뱅 이론’에 따르면, 그 뒤 우주가 팽창하면서 온도와 압력이 내려가자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네 가지 자연력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은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전약력’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외따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무수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는 연결망 속에서 끝없이 명멸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결국 오늘날 지구를 지배한다고 자부하는 인류도 우주의 역사라는 척도에서 보면 지극히 일시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오늘날 생명현상 자체를 개체나 종의 실체가 아닌 생태계로 인식하는 생태적 관점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세계가 법칙성에 지배된다고 믿어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아인슈타인이 근대적인 인식론을 철저히 부정한 사람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그는 세계가 조화롭고 법칙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굳게 믿었고, “세계가 가장 불가사의한 점은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말로 세계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견지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기초를 닦은 양자역학의 함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세계가 확률과 우연에 지배된다는 생각을 거부한 사례는 유명하다. 근대과학의 기반을 다진 뉴턴이 물리학에 대한 연구보다 연금술에 대한 연구가 더 많았던 것처럼 아인슈타인도 자신이 열어놓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선뜻 쥐지 못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이 남긴 유산은 실로 풍성하다. 우리는 대개 그의 과학이론이 우리 생활에 응용된 기술품이나 과학이론으로 그 영향력을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그에게 빚진 셈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의 이론이 우리의 인식과 세계의 존재에 대해 갖는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비틀스에서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김을 받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옳고 부분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특수상대성이론 100주년을 맞이해서,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본격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다.

 

[한겨레21 2005년03월02일 제5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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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양심'엔 한계가 있다

2005/03/04 23:38
‘제국의 양심’ 엔 한계가 있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한겨레21] 2005년03월02일 제549호

가끔 쓰이거나 듣게 되는 용어 중에 ‘양심적 지식인’이란 말이 있다. 권위주의 정권 밑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나 야수들의 싸움터인 세계에서 지식·양심을 겸비하는 누군가가 암흑 속의 빛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역사적 한계점이 망각되고 양심적 지식인이 초역사적인 성현이나 선지자쯤으로 과장되게 이해되기도 한다. 과연 특정 ‘국민’의 일원으로 편입돼 있고 특정 계급을 배경으로 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양심과 지식이 풍부하다 해서 그 ‘국민’ 사회와 계급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장준하의 ‘반공주의’한계처럼


△ 1890년대의 후반의 우치무라 간조.

예컨대 한국 양심의 대표자라 할 장준하(張俊河·1918~75)를 생각해보자. 그의 독립운동이나 반독재 투쟁, 그리고 1970년대 초반 평화통일 논리의 정립은 꿋꿋한 양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사상계> 창간 시절 미국쪽과의 유착이나 5·16 정변 직후 반란범 집단에 대한 지지 표명과 같은 장준하의 이면들을 과연 상황의 논리와 판단 오류만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서북 유산층 출신의 기독교 우파로서 장준하가 갖게 된 ‘조국 개발’ 지상주의와 미국의 이상화, 반공주의와 같은 한계는 그가 오랜 시련 속에 노력했음에도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암흑기 한국 양심의 상징인 장준하에게도 만만치 않았던 계급적 한계가 있었음을 보면 1970년대 제도 야권의 반독재 투쟁을 지도했던 한 종교 지도자의 최근의 극우적 발언들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진 자들에게 복무하게끔 돼 있는 제도 종교의 한계를 그 조직 안에서 극복하기란 거의 초인적 과제일 것이다.

제도권 속의 양심·지식의 한계는 국내의 문제만도 아니다. 필자는 최근 미 제국의 악행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헤쳐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의 인터뷰를 읽고 의문을 가졌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라크에서 미 점령군이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으로부터 부단한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 ‘놀라운 일’이라면서, 미국이 유엔 제재로 약해진 이라크를 점령해 식민화해버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리라 예상했다고 회고했다.

베트남전쟁 때 인민전쟁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충분히 관찰한 바 있는 촘스키가 어떻게 미 제국이 같은 낭패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저항세력의 공격이 아무리 지속돼도 미군은 석유 매장량이 많은 이라크를 떠날 리가 없을 것”이라는 촘스키의 ‘독립전쟁 무용론’은 무엇보다 의문스러웠다. 이라크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미 미국으로 하여금 하루 약 2억달러의 전비를 쓰게 함으로써 쌍둥이 적자를 심화하고 달러의 급락과 제국의 도산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만들었는데 이라크의 안중근·허위·신돌석 들의 희생이 그렇게까지 소용없는 일이란 말인가?


△ 우치무라 간조가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기희생적인 의전으로 합리화한 1894년 8월11일 영문기사.

미국 자료를 가장 많이 보고 알게 모르게 미국의 분석가들의 관점을 참고하게 되는 촘스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의 능력을 과장되게 생각하고 약자의 저항능력을 미미한 것으로 평가하게 된 게 아닌가? 미국 지식인 사회 안에서 생활하면서 바깥의 약자들의 저항이 촉매가 되어 거대한 미 제국도 몰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양심’이 가지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잘 보여주는 친근한 사례로 동아시아 무교회(無敎會)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가 있다. 1921~27년간 한국 무교회주의의 선구자 김교신(金敎臣·1901~45)을 지도하고, 장준하와 함께 한국의 양심이라 부를 함석헌(咸錫憲·1901~89)에게 세례를 준 우치무라가 한국과 직접적 인연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치무라 양심의 발로가 한국의 오늘날 현실과 맥을 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에서 돌을 맞다

그의 최초의 의거(義擧)는 일본 역사책에 ‘불경(不敬) 사건’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1891년 1월9일의 도쿄 제일고등중학교에서의 작으면서도 큰 일이었다. 모든 것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이 바로 도덕이라고 가르쳤던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가 성상처럼 학교에서 봉안·봉독되어 교원들이 깊은 절로 황민(皇民)으로서의 경배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 일개의 젊은 선생인 우치무라는 머리를 약간 숙여 ‘칙어’에 인사할 뿐 경배를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으로서 천황은 같은 인간이니 신격화할 수 없다라는, 내세의 자유로 현세의 속박을 뛰어넘는 논리였다. 곧장 매스컴이 ‘비국민의 행각’이라고 침소봉대한 이 사건의 결과 우치무라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의 집에 욕을 퍼붓고 돌을 던지는 ‘애국자’들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는 등 전 사회적 이지메를 겪은 것은 물론, 이 ‘만고의 역적을 낳은’ 기독교 교단 전체도 공격을 받아 난처해졌다.

오늘의 입장에서 정신병동을 방불케 하는 당시 일본 주류의 국가주의적 분위기는 섬뜩해 보이기만 하는데, 그러면 박정희 왕국에서 ‘교육칙어’를 닮은 ‘국민교육헌장’의 암기를 거부한 사람은 어느 정도의 국가적 이지메를 각오해야 했을까? 오늘날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은 국민의례를 종교적 신념에 따라 거부하는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독재가 끝난 이 시절에도 내세에 대한 신념에 입각한 자율적인 ‘나’를 지키기는 거의 우치무라 시대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다.

우치무라의 두 번째 의거는 러일전쟁(1904) 때 비전론(非戰論)을 제창해 일본과 러시아 두 ‘강도 국가’를 동시에 준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그 뒤 그는 정부로부터는 물론 ‘애국주의’ 노선을 걸었던 다수의 기독교인에게까지 미움을 받아 완전히 비주류가 되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리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국가가 진리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과 다름이 없다.


△ 장준하(왼쪽)과 촘스키. 그들은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존경할 만하지만 계급적 한계 또한 뚜렷하다.

그러면 기독교 계통의 조선인 도일 유학생들이 1920년대에 그렇게도 존경했던 우치무라는 평화주의와 반제국주의 신념을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전개해왔을까? 그의 천부적 정의감이나 용기, 신앙심은 아주 감동적이지만, 사무라이 가문의 유명한 한학자 아들이자 당시 명문이었던 삿포로 농학교 출신, 정부 공무원과 중앙 일간지 편집실 직원 이력의 소유자,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고급 개화인’인 우치무라는 ‘국민’ 집단으로부터의 탈주를 끝까지 일관되게 시도하지도 않았다.

‘국민적’ 본적을 중심에 두고 살다

1890년대의 우치무라는 청일전쟁 발발 당시에 ‘조선 독립과 문명을 위한 이 전역의 정당성’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영어로 써서 외국인을 상대로 일본 정책을 선전하고, 스페인에 대한 미국의 승리와 필리핀의 점령(1898)을 ‘문명과 정의의 승리’로 오해할 정도로 (종교인의 자율적 영역을 주장하면서도) 국민주의와 문명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1920년대에도 그에게는 조선에서의 일제의 여러 횡포보다는 미국의 일본인 이민 금지 정책이 훨씬 더 중요하고 마음 아픈 사항이었다.

그는 태생적인 독립심이나 정의감으로 천황의 신격화나 조선에서의 폭력적인 식민화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지만, 서구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과 아시아에서 ‘개화의 영도자’가 된 일본의 특별한 역할, 일본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같은 허망한 근대주의적 편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의 말로는 그가 “평생 두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섬겼다”고 하지만 이를 다르게 보자면 그는 서구의 기독교와 일본이라는 자신의 ‘국민적’ 본적을 늘 중심에 두고 살았던 ‘선량한’ 부르주아적 근대인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를 ‘하나님에의 복종을 거부하는 악마의 유혹’으로 생각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할 줄 몰랐던 그로서는, 감성으로 그렇게도 혐오하던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선의의 부르주아 지식인의 양심과 지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인 제자들에게까지 광신적 국가주의에 대한 혐오와 인도·박애의 이상을 심어준 그의 양심은 고귀하지만,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테두리를 넘어 혁명·변혁으로 가는 길을 끝내 몰랐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와 같은 양심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물론 이와 같은 양심들을 존경해야겠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과장되게 이해해 우상으로 받드는 등의 과오를 저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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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군대 가면 똥개 된다

2005/01/31 23:52
군대 가면 똥개 된다


육군에서 이번 ‘인분’ 사건을 계기로 훈련소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에 들어간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정작 훈련소는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실은 마음의 천국이다. 왜냐하면 훈련소 내무반에는 위아래 없이 동기들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식판에 올라갈 깍두기의 개수를 둘러싸고 싸움은 벌어져도, 일방적 폭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육체적, 정신적 폭력은 자대배치 받은 후에 내무반에서 일어난다.

자대 배치를 받아 간 내무반에서 내가 처음 목격한 풍경도 구타 장면이었다. 무슨 일인지 화가 잔뜩 난 병장이 일등병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야전삽으로 엉덩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앞으로 2년을 넘게 살아야 한다니.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문에는 “이 문을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씌어 있다. 그때는 내무반의 문이야말로 내게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할 지옥문처럼 여겨졌다.

이번에는 소대장의 가혹행위가 문제가 됐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군대에서 정작 심각한 폭력은 피라미드의 바닥에 있는 사병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프란츠 파농은 ‘수평폭력’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식민지의 인민들이 억압자들에게 당하는 폭력에 대항할 수 없을 때, 자신의 폭력성을 동료들에게 폭발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없애자고 해도 아직도 구타가 성행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군대의 소통방식에 아직도 위계성과 폭력성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증거다.

“군기가 빠졌다”는 말을 군대에서는 흔히 “당나라 군대 같다”고 표현한다. 듣자 하니 한국전쟁 때 중공군은 의용군 행세 하느라 사병들의 계급장을 뗐고, 거기서 유래한 표현이란다. 군대에서 듣는 얘기는 워낙 허구가 많이 섞여 있어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나라 군대는 계급의 차이 없이도 얼마든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 아니, 계급장이 없다니. 그 얼마나 선진적인 군대인가.”

군대 생활 해 보면 알겠지만 장교, 하사관, 사병 사이에는 뚜렷한 기능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사병들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거의 없다. 이병이나 일병이나 상병이나 병장이나 어차피 하는 일은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졸병들은 임무 끝난 후에 식기를 닦고, 고참들은 배 깔고 누워 TV 본다는 것뿐. 그런데 왜 계급의 구별이 필요할까? 미군처럼 직업군인이라면 계급의 구별이 월급의 차이라도 의미할 텐데, 우리의 경우는 징병제라 어차피 돈 몇 천원 차이 아닌가.

설사 이병, 일병, 상병, 병장을 구별하는 심오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분의 높낮이가 아니라 수행하는 임무의 기능적 차이를 의미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그 기능적 차이는 분명하지 않고, 외려 신분의 차별만 남아 사병들의 군대생활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계급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같은 계급 내에서도 입대 날짜에 따라 기수별로 위계질서를 만들어낸다. 꼭 그래야 할까? 국방부는 사병들의 계급이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 효력이 어디까지인지 분명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번 일은 군대에서 터졌지만,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끔 개그맨들을 보며 섬뜩할 때가 있다. 개그맨의 원조는 궁정의 광대다. 모든 이가 왕 앞에서 굽실거려도 왕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 게 광대의 특권. 그런데 누가 대한민국 광대 아니랄까봐 가장 자유로워야 할 광대들까지도 자기들끼리 위계가 아주 엄격한 모양이다. 텔레비전에 나와 ‘선배님, 선배님’ 하며 군대 내무반 뺨치는 위계질서를 흘리곤 한다. 선진 당나라 군대에서 배워야 할 것은 국방부만이 아니다.

“사병의 인권유린.” 이 말은 너무 신선해 생뚱맞게 느껴진다. 언제부터 사병이 인간이고, 언제부터 그에게 권리가 있었던가? 어차피 훈련소 문 들어설 때 우리는 인간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배웠다. 툭하면 “군대 가야 사람 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게 어디 군대 가서 인간으로서 권리를 자각한 개인이 되라는 뜻이던가? 주는 똥 군말 없이 받아먹는 똥개를 ‘사람’의 모범으로 추켜세우는 ‘인간-똥개’들이 짖어대는 한, 사람이 개가 되는 엽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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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 유감, 겨울의 한 자락에서

겨울이 시작되고 활동가들이 길바닥에 누웠다. 열린마당 한 가운데 활동가들이 드러누우면서 매일 밤 잠자리가 편치 않다. ‘자연아, 미안해’라는 작은 구호가 마음 한 구석을 쓸고 지나간다. 나는 이들을 지지할까? 물론 지지한다. 서울에 다시 돌아온 것이 1995년이다. YS 시절은 기업에서 보냈고 DJ 시절은 정부에서 보냈다. 잠깐 기업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강사실을 나선 것이 10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 내내 환경에 대한 갖가지 정책들을 평가하거나 만들면서 지금과 같은 시대는 본 적이 없다. 생태의 눈으로만 보자면 지금은 악랄한 시대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2. 이 정부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나?

사람들은 흔히 노무현 정부의 철학의 부재가 문제라고 한다. 철학의 부재가 문제일까? 철학이 없는 것은 노무현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없이 살아가지만 이들이 다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매일매일 움직이는 철학 없는 수많은 일상들이 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DJ 시절의 관성대로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건 신자유주의 정부도 아니다. 신자유주의로서의 최소한의 매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개발주의? 박정희 시대에도 이렇게 전국토를 일시에 혼란으로 밀어넣은 적은 없다. 산업화의 폐해를 녹화사업과 그린벨트로 보완하는 유신 정부가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염치도 사라진지 오래이다. 정부의 지금 움직임은 개혁정부라기 보다는 ‘개발정부’로 규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고, 농림부는 농업지역 개발부, 재정경제부는 개발재정 조달부, 외교통상부는 통상개방부로 변화했고, 환경부는 개발환경촉진부로 변한지 오래이다. 총체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시대의 절대명제에서 한 발도 벗어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지역의제는 이제 어떻게 친환경적 골프장을 지역에 들일 것인가라는 것을 주요 회의안건으로 다루고 있다. 이렇게 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인가? 물론 불가능하다. 쿠츠네츠라는 위대한 경제학자가 20년 동안 만든 쿠츠네츠 통계를 들여다본다. 50년대 이후로 사회의 총지출을 100으로 볼 때 15 이상의 지출을 집과 도로, 즉 건설에 사용한 나라 중에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은 17 정도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사회의 총지출 중 24를 건설에 사용하고 있다. 2001년 기준이다. 20 이상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요르단, 베트남이나 아프리카의 몇 개 국가이다. 스위스는 13 정도 되고, 영국, 프랑스 대부분이 10 이하이다. 지출통계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는 아프리카 수준이다. 이 상황에서 정부의 시대 인식은 2,000불 정부의 시대인식과 일치한다.

3.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꼬였는가? : 국토생태 개념의 출발을 위하여

생태학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현재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생태라는 표현은 대부분 경관생태학(land-scape ecology)에서 유래한 개념들인 경우가 많다. ‘조경’이라고 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생태도시나 생태적 접근이라고 할 때, 이 개념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눈에 보이는 것을 가꾸는 접근을 끝까지 밀고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생명’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현재의 ‘개발’이라는 대단히 독특한 한국적 개념은 특정계층의 이익을 위하여 나머지 모든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그리고 대변 받을 수 없는 것들을 죽이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이 정부는 개발정부가 아니라 죽임의 정부이고, 살육의 정부라고 할 수 있다. 국토생태라는 개념이 가능할까? 혹은 도시생태라는 개념이 가능할까? 국토 생태라는 개념에서 볼 때 시대는 최악이다. 골프장으로 상징되지만, 문제는 골프장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모르는 동안에 국토생태의 안전판 노릇을 해왔고 묵묵히 기여했던 농토에 대한 침탈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10%를 사람들의 거주지역으로 활용해오고 있다. 절대농지로 분류된 농지의 50%를 제외한 나머지 땅이 이제 전면적으로 풀리게 된다. 1%의 사람들을 위해서 5%의 자본이 국토의 50%를 자기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 2005년에 펼쳐질 세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활동가들이 차가운 겨울, 길바닥에 누워있는 것이다.

4. 국회가 정상화되면 무서운 일이 시작된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국회가 공전하고 있다. 민생법안이라고 표현하는 것 중에 농지법 개정안이 포함되어 있다. 국회계류중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농지법 개정안에는 이승만 정부 이후 사회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경자유전의 원칙 포기가 포함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가 바꾼 제도 중에 가장 오래 동안 영향을 미칠 악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 법과 쌍둥이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토지규제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7월 제정예정이다. 토지와 관련된 모든 제도가 이걸 통해서 풀린다. 농지법과 토지규제기본법 두 가지로 국토생태의 양 대 법이 해체된다. 농민도 농지법을 지키지 못했지만, 환경단체도 토지규제기본법을 막아내지 못한다. 지금과 같이 고립되어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에서 국토생태라는 개념은 설 곳이다 없다. 그래도 지금은 국회가 이전투구로 조금 바쁘다. 그래서 ‘농업 포기’라는 선언을 할 시점은 아니지만, 농지법이 조만간 개정되고 나면, 농업은 6헥타르의 농가 7만 가구를 남기고 결국 농업에서 모두 철수하게 된다. 농지법은 이 시대를 위해서 도시자본과 투기자본에게 농지를 넘겨주는 법이다. 그래도 남아있는 규정들, 예를 들면 녹지지역이나 보존지역 같은 규정들을 없애기 위해서 토지규제기본법이 필요한 것이다. 국회가 정상화되면, 이 무서운 흐름이 시작된다. 열린우리당의 무뇌아 거수기들은 개발정부가 던지는 법안을 중독된 마약을 받아먹듯이 덥썩덥썩 받아먹을 것이다.

5. 환경이 농업을 만나면 새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정부는 농업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노무현 농정로드맵 10개년 계획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풀려난 농지를 노리고 기업도시법과 골프장 정책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렇게 농지로 투기자본이 몰려가면 도시의 자본이 빠질 것이 두려워 서울시의 뉴타운 개발과 각 지자체의 자본유치운동이 시작되는 것이 지금의 정확한 진단이다. 투자가 안되는 것은 이렇게 거대한 투기판이 돌아가는데 어느 기업이 골치 아픈 국제경쟁과 기술투자라는 힘든 길을 걷겠는가?

이제는 농지를 사회적으로 지키는 것이 환경운동의 핵심이 되는 시기이다. 공해추방의 한 시대가 거하고, 농업살림, 생명살림으로 전환되는 또 다른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환경운동이 농업과 만나서 생명산업, 지역산업 그리고 작은 것들의 미학을 만나는 새로운 시대가 이제 열리는 것이다. 그 새로운 환경운동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 지금 활동가들이 길에서 고통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통은 잉태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전농이 친환경 선언을 하고, 환경이 농업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할 때, 비로서 21세기가 한반도에서는 잉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환경은 농업이다. 농지의 해오라기들을 지키기 위해서 농업보조금을 생태보조금으로 전환하는 것이 WTO 시대의 농지와 농업 그리고 환경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생협을 통해서 먹어도 괜찮은 음식이 유통되고, 믿음으로 생명이 진화할 때 비로서 세상은 이 악의 시대를 종료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서 1만불의 소득을 만끽하고 새로운 발전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개발정부의 시대를 종료하고, 생명정부의 시대로 진화하게 된다. 그 대반전은 2005년도에 시작되어야 한다.

 

 

* http://www.greens.or.kr/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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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속의 슬픈 괴물

2004/12/20 02:19

이달 초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꽤 기분 좋은 연말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8년을 끌어 온 박사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학위를 받는다고 지금 생활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속시원함 같은 것을 기대했던 셈이다. 하지만 심사가 끝난 지금의 나는 그다지 즐겁지도 시원하지도 않다. 반은 필요에 의해서, 반은 관성처럼 얻고자 했던 앎의 자격증. 그것의 획득을 앞둔 지금의 나는 그 동안 내가 무의식적으로 쌓아왔고 그 안에서 편안했으며 때론 우쭐대기까지 했던 벽의 존재를 실감하며 우울하다.

 

내 12월의 기대가 뒤틀어진 직접적 계기는 열린우리당의 이상락 의원 구속 기사였다. 그의 구속은 국가보안법을 사이에 둔 여야의 가파른 대치 속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그의 의원직 상실로 여당의 과반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그의 구속 이유는 ‘초졸’의 학력으로 ‘고졸’ 행세를 한 것에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너무 부끄러운 말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초졸’의 학력을 숨겼다는 것보다 ‘고졸’로 ‘행세’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졸자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이왕 거짓행세를 하려면 최소한 ‘명문대 졸’, 아니면 돈 주고 산다는 ‘명예박사 학위’ 정도는 적어두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한겨레21〉에서 그 복잡한 사연을 읽고 나서 내 기분은 착잡해졌다. 그는 충남의 어느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겨우 초등학교를 마쳤다. 농사를 짓다가 상경한 그는 공장 노동자, 밤무대 가수 생활을 했고, 1980년부터 성남 지역에서 과일 노점상, 목수 보조 등의 막일을 했다. 그러다 성남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를 통해서 사회 문제에 눈을 떴고, 이후 운동가로 변신해서 80, 90년대 수도권 빈민 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성장한 운동가가 그런 거짓행세를 해야 했을까? 바리케이드 너머의 무서운 적들에도 꿈쩍 않던 그를 이토록 왜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싸우기 힘든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적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고, 나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적이라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무식한 놈이라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은 ‘무학’의 부끄러움이 괴물이 되어 한 운동가를 먹어치운 것이다. 가난 때문에 채우지 못한 학력이 빈민 운동가를 무너뜨린 이 슬픈 현실에 무어라 말해야 할까.

 

지난 주 학위논문 심사가 끝났을 때 내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어머니였다.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말에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잘했네, 잘했네”를 연발하셨다. 아들의 학위 소식에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어머니의 관심은 각별했다. 심사일정을 자주 물었고 그 뒤에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는 어머니의 조바심과 기쁨의 정체를 알고 있다. 어머니의 최종학력은 ‘초졸’이다. 그것도 서류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2년 정도 학교에 나간 게 전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마도 읽고 쓰고 셈하는 것 대부분을 살아오면서 터득하셔야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삶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지만, 어머니의 최종 학력은 평생 그대로였다. 어머니도 마음 속에 슬픈 괴물을 키워 오셨던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한’이라고 말했던 그 괴물은 내 학위를 나보다도 더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터이다.

 

많이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것이 자격증이 되고 차별의 근거가 된다면 배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배운 자가 배웠다는 이유로 혜택을 요구하고 못 배운 자는 바로 그 때문에 또 다른 불이익을 받는, 이중의 혜택과 이중의 불이익 속에서 살고 있다. 차별하는 자는 우쭐대고 차별받는 자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우리 맘 속 괴물을 도대체 어떻게 죽여야 할까? 올 연말 내게 슬픈 물음이 던져졌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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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여, 공범이 될 것인가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필자는 어릴 때 청소년을 위한 캠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함께 지내던 학생들은 조회하고 군가(軍歌)를 부르며 행진하고, 단체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등의 군사적 규율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학생들이 부르던 가요였다. 그 내용은 1968년의 체코에 대한 소련군의 침략을 찬양하고 “프라하의 부르주아들을 탱크로 무찔러 해산시킨 장한 우리들”을 영웅화한 것이었다. 필자가 노래 부르던 친구들에게 남의 도시를 무찔러야 할 까닭을 묻자, “우리를 배반하고 미국에게 붙으려는 놈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라는 격분에 찬 답이 날라왔다. 겁이 나서 더 이상 이야기를 못했지만 그 뒤로 필자가 고심해온 문제는, 군사적 규율을 귀찮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주의의 결과인 침략을 지지하는 세계관의 논리가 무엇이었는가라는 것이다.

체제가 심어준 수구적 환상

군사주의의 폐단을 인식하는 그들은 초보적으로나마 반항 의식이 있었지만 침략을 미화하는 선전에는 포획되고 말았던 것이다. 민중의 아들들인 그들이 과연 저항세력으로 자랄 가능성이 있었는가, 아니면 체제의 사유에 깊이 몰입되어 이미 체제의 공범이 된 것이었는가? 민중은 희생자이자 저항 가능성의 보유자인가, 아니면 관제 애국주의를 위시한 각종 마약의 힘없는 중독자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이 고민은 더 무거워졌다. 박정희 시절 저곡가 정책에 신음하고 군대에서 실컷 구타당했음에도 박정희를 비판한 필자에게 호통을 쳤던 농촌 아저씨, 외유나 일삼는 국회의원들이 더럽고 밉다 하면서도 데모하는 민중을 가리켜 “아주 역적들이야, 잡아가서 잘 패야 정신 차릴 거야” 말하던 택시기사 아저씨, 공주님을 뵙고 싶은 백성의 심정으로 모 대표가 연설하는 곳으로 모여드는 경상도 서민들…. 체제의 피해자임에도 체제의 사고를 받아들여 수구적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기층 민중의 모습에서 ‘희생자’의 측면과 ‘공범’의 측면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들이 과연 지배자들에게 끌려다니는 처지에서 벗어나 계급적인 연대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생각하는 백성’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화두는 동아시아 근대사를 공부하던 필자를 무거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관제 애국주의라는 마약을 유포해 ‘수령님’과 ‘각하’들을 백성의 유사(類似) 가부장으로 만드는 데 남북한의 지배자들이 일제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계급·개인인권 의식이 자리잡히기도 전에 ‘신민’(臣民)으로 호명돼버린 메이지 일본의 피지배민들의 대다수는 결국 체제의 공범이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의병 토벌’ 때 한국 땅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일 군졸들, 일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된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아버지 김성도(金性燾)의 경우처럼 조선인을 폭행하는 조선에서의 일본 막노동자들…. 일본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영세민들은 현해탄을 건너간 뒤 악질적인 가해자로 돌변했던 것이다. 계급 투쟁을 진보의 원천으로 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저항 의식이 그들에게 처음부터 전무했던 것인가? ‘선량한 황민’으로서 국가적 범죄의 하수인이 되기 전, 그들은 한번이라도 저항할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이 돼본 적이 있었을까? 만약 그러한 시도가 있었다면 왜 좌절됐을까?

통치자의 목을 쳐본 일이 없는 메이지 시대의 ‘해방되지 않은 노예들’은 한 진보 사학자의 말대로 ‘황민’의 신분에 안주하여 ‘남들에게 족쇄를 씌우는 훌륭한 대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이라는 번벌(藩閥) 정객과 재산가의 위로부터의 혁명만 한 아래부터의 혁명이 일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민초들이 단순히 정부쪽의 ‘국민 만들기’ 정책에 순응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아무리 계급의식과 조직이 결여된 마을 단위의 농민이라 해도 가혹해진 세정(稅政)과 민중종교인 불교에 대한 메이지 초기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는 탄압, 공립 소학교들의 강제적인 설립 등의 반민중적 정책들을 좌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이키’(一揆), ‘소요’라고 불리던 민중 저항의 건수는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진 1868년 직후 30~40%로 늘어났다.

일본 농민들이 죽창을 들게 한 징병령

그러나 가장 큰 저항을 부른 것은 바로 ‘국민’들을 제국의 충견으로 만들려는 1873년의 징병령이었다. 20년 뒤에 징집병들이 조선과 중국의 땅을 짓밟게 됐지만, 1873년 당시 상당수 농민들은 ‘황국’의 살육자가 즐겁게 되기는커녕 징병령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죽창을 들고 무리지어 관공서를 파괴하려 달려갔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민(愚民)관의 차원에서 한국 개화파와 다를 게 없던 메이지 집권자들은 ‘우매한 백성’이 징병고론(徵兵告論·징병령 포고문)의 ‘혈금’(血金·생명을 바쳐 병역 의무를 다한다는 의미의 상징적 표현)의 용어를 잘못 해석하여 “관료들이 우리 피를 뽑는다는 뜬소문으로 무지에 의한 소요들을 일으켰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유언비어들이 반란의 동기가 됐다 해도 그 기본적인 원인은 억압에 대한 합리적인 저항 의지에 있었다. 장정의 징집이 그 가족의 노동 부담 가중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혈세(血稅)의 부담은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늘날의 한국은 현실적인 ‘빈민개병제’를 갖고 있지만, 한국 징병제의 원형인 메이지의 징병제는 아예 명실공히 빈민개병제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 징병제의 규정상 관리·특정 학교 출신은 물론, 270엔 정도의 대인료(代人料·다른 장정을 고용할 돈)를 납부할 수 있는 토호도 면제 대상이 됐다. 결국 ‘천황 폐하를 위해서 옥쇄할 영예’는 역시 빈민들의 몫이었다. 거기에다 많은 농민들은 “우리의 목숨을 혈세로 거둘 천황이 도대체 누구냐”라고 분노했다. 지배자들이 ‘현인신’(現人神)으로 치켜세운 천황의 존재를 벽촌에서는 잘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1873년 6월 징병령을 알게 된 뒤에 죽창을 들고 관공서·관립학교·지주의 집들을 파괴·방화한 수만 명의 돗토리현(鳥取縣·혼슈의 서쪽에 위치)의 농민들, 1873년 거의 600개의 관공서와 관료·부자의 집들을 파괴하여 마루가메시(丸龜市)란 지방 도시를 점령하고 군대와 격전을 벌이던 가가와현(香川縣·시코쿠의 북쪽)의 약 15만명의 반란 농민들…. 목숨을 걸고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싸움을 벌였던 그들은 총포의 힘으로 눌러졌고 그 뒤 소학교에서 천황의 사진 앞에 절하고 천황이 신이라고 배운 그들의 자손이 침략 과정에서 ‘족쇄를 채우는 대리인’이 된 것이다. 

저항 에너지는 고갈되지 않는다


△ 1867년 반란농민들을 그린 일본의 옛날 그림.

1873년의 반란 농민들은 본능적으로 희생만을 강요하는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불신했지만 그 이상의 어느 체계적인 대안적 세계관도, 어떤 전국적 조직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의 크고 작은 ‘이키’ ‘소요’들에서 확인된 민중의 저항 에너지는, 국가의 포섭·탄압 양면의 ‘국민화’ 정책에도 고갈되지 않았다. 군대에 끌려간 뒤 피침 지역 주민들을 폭행하면서 자신이 당한 억압을 ‘이양’한 자들도 민중이었지만, 해마다 징병을 기피하고 도망다니던 2만~4만명의 장정들, 각종의 ‘소요’와 쟁의를 계속 일으키던 농민·서민들, 태평양전쟁의 파시스트적 체제하에서 반항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한 주민들 역시 민중이었던 것이다.

야누스처럼 다른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진 ‘민중’…. 민중으로서 체제에 대한 환상이나 가부장적인 습관들, 시장 질서를 당연지사로 아는 각종의 왜곡된 ‘상식’들, 그리고 체제 안에서 신분 상승적 욕망을 버리고 혁명 주체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오랜 역사적 준비 기간과 특수한 계기들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벌한 체제하에서 민중이 순응적인 자세를 취해도 민중의 저항적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결국은 “못살겠다!”라는 함성이 들릴 때가 오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김필동, <근대 일본의 출발>, 일본어뱅크, 1999.
2) 이토야 도시오·이나하타 미치 공저, 윤대원 역, <일본민중운동사: 1823∼1945>, 학민사, 1984.
3) 박영준, <명치시대 일본군대의 형성과 팽창>, 국방군사연구소, 1997.
4) 도야마 시게키, <명치유신>, 동경: 岩波書店, 1978
5) 나카무라 유지로·기무라 모토이 공저, <村落·報德·地主制: 日本近代の基底>, 동경: 東洋經濟新報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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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 디노미네이션인가 화폐개혁인가?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은 아직 위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경제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을 잡은 건 전두환 시절의 일이다. 77년 석유파동을 만나기 전까지 그야말로 완전고용의 신화 속에 중화학공업의 단 꿈에 젖어있는 우리나라 경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만난 공급 과잉에 의한 전형적인 공황이 78~79년 경제공황을 만들어냈다. 박정희가 피격당하던 순간은 정치적으로만 혼란기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몰려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가장 큰 경제적 위기는 공급과잉이 촉발시켰던 물가상승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물론 별다른 경제대책을 했던 것은 아니고 하여간 지 맘대로 물건값 올렸다가는 전두환한테 끌려가서 그야말로 줄경을 쳤다. 그렇지만 그렇게 물가를 잡는다고 해서 원화의 평가절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달러당 600원 시절에서 달러당 1200원 시절을 살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면 물가상승 때문에 거래 단위가 커져서 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크게 설득력은 없다. 물가상승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국에도 동일하게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화폐 개혁에 대한 논의는 고액권 발행 논의와 맞물려서 진행된다. 물론 고액거래의 문제점 때문에 임의로 발행되어 사용되는 자기앞수표라는, 은행 발행 수표가 수수료 등의 문제와 환전상의 문제로 그야말로 불필요한 비용이 사회적으로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수면 위에서 논의되던 고액권 발행과 관련된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의 일이다. 거래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다보니까 고액권 발행을 정책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한나라당에서 추진된 일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차떼기를 할려고 고액권을 발행하려고 한다고 보는 것은 약간은 지나친 억측이다. 나쁜넘이 하면 모든 일이 나쁜 넘 같아 보인다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다시 국회의원 이계안을 비롯한 몇 사람들이 그게 아니라 아예 디노미네이션 즉 화폐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당론을 몰아나간다. 이계안.... 이명박과 비교할 수 있는 린간이다. 이명박이 건설업으로 거물이 되었다면, 이계안은 90년대 석유화학을 만든 사람이고, 자동차 호황구도를 만든 사람이다. 전형적인 반개혁인사이기도 하지만, 혁신의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혁신을 만드는 사람이다.

 

여기에서의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는 메카톤급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이다. 당연히 현 경제팀은 강력 반대한다. 물어보나 마나다. 이헌재는 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그려내고 싶은 의욕도 없을뿐더러 기업과 정부의 원할한 관계라는 관점을 가지고 현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 경제팀 혹은 재정경제부 자체가 그런 식의 세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초록화폐개혁을 지지한다. 언젠가는 그런 일을 치밀하게 준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한 번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화폐개혁은 일본과 우리나라 경제의 근본을 가르게 되는 사건인 김영삼의 금융실명제와 연결되어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지금도 바보 아니면 쪼다 정도로 막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해체만큼은 김영삼의 공적으로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금융실명제가 가지는 힘은 아무리 과장해도 모자르지 않는다. 덕분에 전두환 선생이 감추어놓은 돈들이 움직인 흔적이 자꾸만 꼬리를 밟히게 된다. 어지간해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는 잘 파악되지 않고, 이 지하경제는 현실적으로 국민소득의 10% 정도라고 추정하지만, 추정 방식의 문제점과 별도 항목들을 놓고 계산해보면 15%는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3% 정도가 국방비에 해당하니까 군대를 세 개 정도 움직일 정도의 돈이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를 형성한다고 보면 된다.

 

디노미네이션은 이 지하경제에 대해서 날리는 미사일 같은 거다. 고액권은 지하경제를 키우는 힘이 있는 반면에 디노미네이션은 지하경제가 움직일 공간을 한 번에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화폐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숨어있는 힘들을 한 번에 무장해제시키는 방식이 디노미네이션이고,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은 잘 단행하지 않는다. 대개는 국민경제 4~5% 선에서 지하경제가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화폐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국민소득 만 불 대에서 한 번은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지하권력의 힘을 한 번은 털고 가야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김영삼 시절에 화폐개혁까지 패키지로 진행되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화폐개혁 대신 투신사를 통한 양성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투신사들이 없어져버리는 바람에 정책적인 토론거리가 잘 되지 않지만, 이 투신사들이 IMF 경제위기 때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다.

 

지금이 화폐개혁하기에 좋은 시점일까? 화폐개핵에 대해서 특별히 좋은 시점은 없다. 공황이나 호황이나 어렵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으로 개혁의 분위기나 사회구성원들이 동의가 있는 시점이 유일하게 화폐개혁이 가능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선진국이 지하경제를 관리하는 방식은 세원관리와 신용거래 확대라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다. 부당한 소득을 끝까지 찾아내 세금을 물리겠다는 강력한 세무당국과 개인 수표와 카드의 활성화라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서 돈의 흐름을 감시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 두 가지가 우리나라에서 잘 통하지 않는 것은 카드를 거래의 투명화를 위해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안전망 대신 카드발급 간소화라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화폐개혁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필요할까?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지하경제를 적절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고 또 한 번은 지하경제에 집중된 경제적 권력을 털고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노미네이션은 열린우리당 보다는 한나라당에 대해서 결정타로 작용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고액권은 약간의 선의를 가지고 있는 정책이지만, 이걸 디노미네이션으로 화답(?)한 것은 초강수 개혁정책 같은 것이다.

 

물론 열린우리당도 디노미네이션은 받아내기 어렵다. 관료들한테 전부 맡겨놓고 있는 경제정책은 한나라당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개혁성향만 놓고 얘기하면 정부의 정책 보다는 차라리 한나라당의 정책이 그래도 비교적 개혁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결국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확률이 많다. 1년 전 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이헌재 부총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한 바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제대로 한다고 하면,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정말 국기를 흔들 정도의 토목공사를 시행하기 이전에 투기 억제책 같은 것으로 디노미네이션 같은 것들이 같이 만들어지는 것이 옳다. 골프장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혁신이라고 하지만, 쉽게 돈을 벌고, 어둡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쉽게 늘어져 있는 경제운용

기조에서 사회적 혁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외국기업이 환경규제나 세제가 복잡해서 우리나라에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하경제와 골 아픈 관행 같은 것들이 많으니까 쉽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경제개혁... 변화는 단순히 노동자 위주의 소득개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투명하게 질서와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경제개혁의 방향이고, 그런 면에서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혁은 투명보다는 불법이었던 사실을 법을 고쳐서 합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디노미네이션은 경제를 더욱 더 어둡고 음침한 사람들이 돈을 잘 벌게 만들어주는 지난 1년간의 변화에 던져진 숙제 혹은 퀴즈놀이 같은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화폐개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개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입장에 대한 리트머스 같은 것이다. 새만금이 환경정책의 리트머스였다고 하면, 디노미네이션은 경제의 개혁성에 대한 리트머스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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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과 자본주의의 역사

2004/09/16 22:06

 "[비나리]  왕꽃선녀님 : 노래불러줘, 노래"에서 일부 발췌


 
흡혈귀 전설은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이다. 북구에 흔한 전설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흔한 귀신이나 도깨비 얘기에 사람의 피를 먹고 그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전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흡혈귀가 지금처럼 흔한 전설로 변한 데에는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귀신 얘기 중에서 가장 자본주의와 잘 어울렸던 얘기가 바로 드라큐라 얘기이다. 20세기의 경제사를 얘기할 때 꼭 기억해야 하는 숫자들이 몇 개가 있다. 1929와 1945 그리고 1974 같은 숫자들이 그렇다. 1945는 2차대전이 끝난 시기이고, 이때부터 1974까지의 30년을 ‘영광의 30년’이라고 한다. 무얼 해도 잘 되었고, 자본주의가 후기 산업사회로 전개되면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신화를 만들던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발전의 배경은 바로 이 시기에 벌어진 2차 세계노동분업 과정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우파들이 좋아하는 숫자이다가 1945에서 1974까지에 해당하는 연도들이다.

 

반면에 1929는 대공황의 숫자이다. 플로리다에 대한 투자붐이 깨지면서 발생한 미국발 대공황이 마샬 플랜으로 막 일어나기 시작하는 독일 경제에 1차 타격을 주고, 여기서부터 다시 발발한 농업공황이 일본을 덮치고 결국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주게 된 세계적인 대공황이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케인즈라는 우울한 보헤미안에게 미국 최고의 자문관 자리를 주게 된 계기가 이 대공황 시절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인 투자붐을 제어할 수 없고, 그래서 소비에트 경제가 더욱 우수하다는 사회주의의 1차 경쟁력을 대부분이 지식인들이 별 무리없이 수용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 이 1929년의 공황이다.

 

박정희의 경제정책, EPB 시스템이 바로 이 1929년에 충격을 받은 유럽 지식인들이 만든 소위 mixed economy 정신에 있다는 얘기는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는 우파 경제학자들이 어지간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지적이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교묘한 선을 타던 프랑스의 경제계획 시스템이나 가장 좌파적인 시스템을 채택했다고 하는 이집트의 경제정책 보다는 훨씬 더 사회주의 시스템에 가깝다. 그래서 세계은행에서는 이 시절의 한국 경제를 ‘동원경제(national mobilization)’이라는 붙여준다. 정치적인 담론을 탈탈 털고나면, 이승만은 훨씬 더 자본주의적인 경제를 그렸다고 한다면, 박정희는 그보다는 훨씬 더 사회주의적인 경제 운영에 매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경제계획이라는, 전혀 자본주의답지 않은 경제계획의 첫 그림을 그렸던 사람은 말기의 이승만이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시스템이 자본주의 경제에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하게 될 계기를 만든 1929년이 만든 대중 스타가 두 개가 있는데, 첫째가 채플린 현상이다. 스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를 비롯한 일련의 문학은 대공황이라는 현실 앞에서 자본주의의 비극과 비인간성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휴머니즘에 호소하면서 서로가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 남은 것은 사랑밖에 없어... 어쩌면 채플린을 가장 정면으로 계승한 사람은 우디 알렌이 아닐까라고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맨하탄을 공간으로 지긋지긋하게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단 1분도 숨쉴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걍팍’한 사람들을 그리는 우디 알렌의 시각은 악랄하다 못해 지긋지긋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대공황이 만든 최고의 스타는 드라큘라다. 드라큘라의 영화화가 이 때 만들어지고, 왜 내가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흡혈귀라는 코드는 그야말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는 코드이다. 이후에도 흡혈귀 영화는 큰 공황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돌아온다. 1974년에도 흡혈귀 영화 붐이 있었다. 물론 공포영화는 여름이면 만들어지지만, 피를 빠는 흡혈귀가 유독 유행하는 여름은 공황과 관련되어 있다.

벰파이어와 샤먼의 차이는 접신의 기능이 가지고 있는 차이 정도라고 하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20세기의 최후로 달려가던 90년대가 죽음과 죽음을 잊기 위한 퇴폐가 극단적으로 강조되던 시기라고 하면, 21세기 초반은 어설픈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0이라는 숫자를 넘어들면서 더 이상 세기말 현상에 집착할 수 없는 예술의 고민이 여기에 있을런지도 모른다.

 

...(중략)...

 

일일드라마에 샤먼과 접신 그리고 내림굿과 씻김굿이 등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여기에 자매가 사랑한 한 남자와 또 짝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얘기들 그리고 신데렐라식의 신분상승이 버무러져 있지만, 그래도 접신에 의한 변신이 저녁 드라마 한 가운데로 들어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다. 대공황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흡혈귀에 대해서 열광하였던 것만큼, 접신에 대한 얘기가 살기 어려운 시절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것 같다.

 

참여정부가 매일 같이 하나씩 만들어내는 기본계획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만 매우 특별하게 존재하는 이 기본계획이라는 것의 특징이 무엇일까 가끔 생각해보게 된다. 전체적인 계획경제는 이제 사라졌지만, 부문별로 만들어내는 계획체계는 이제는 부문별로 익숙하게 남아서 우리나라의 정책에 대한 기본틀로 자리를 잡고 있다. YS 때도 기본계획이 있었고, DJ 때에도 기본계획이 있었다. 2001년에 친환경농업기본계획이라는 5개년 계획이 등장했지만, 2004년 2월의 농어촌종합계획이라는 10개년 계획이 나오면서 6헥타르 7만호 정책으로 농정의 기본틀이 바뀌었다. 골프장도 지자체의 기본계획에 들어가 있다. 이 기본계획이라는 정책틀과 민주주의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가끔 질문해보게 된다. 기본계획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할 때에는 불법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법에 의해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절차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기본계획에 불법은 거의 없다. 정부라는 레비아탄이 움직이는 방식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기본계획이다.

 

정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 시민이 도대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체계적으로 문제점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정책이 기본계획과 실행계획 그리고 연간계획이라는 틀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왜 이래라는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는 이 정책의 기본틀을 이해해야 한다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담당 공무원에게 한 마디도 더 추가하지 못한다. 반면 기본계획과 법령까지 한 번 읽어보았다면, 담당 공무원이 대단히 친절하게 돌변하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강한 모습을 보이는 변신을 경험하게 된다.

 

시대가 어렵기는 어렵다고 생각을 한다. 접신과 샤먼이 일일드라마에 매일 밤 저녁상을 찾아오는 걸 보면 확실히 특별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정치권과 남자들이 국가보안법 가지고 거대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밥상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무당의 접신들인 모습을 보면서 시대를 읽고 있다는 걸 과연 상상이나 할까? 누가 뭐라고 해도 위기의 한국 사회라는데 동의하고 싶다. 유쾌한 접신이 사회의 유쾌한 돌파가 되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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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2004/09/06 13:13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빈곤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유 시장경제의 일상이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처음 올라온 내 눈을 휘둥그레 만든 것은 대우 빌딩이 아니라 곳곳에 누워있던 노숙자들이었다. 대학로에서 생활할 때는 마로니에 공원에 길게 늘어선 급식 줄을 바라보며 아이엠에프 이후 경제 사정이 어려워졌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제 종묘 산책을 즐기는 내 눈에 점심 한 끼를 얻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은 익숙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교통체증으로 늘어서 있는 종로의 자동차들을 보듯이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줄을 그렇게 보고 있다. 아,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한 사회의 익숙한 풍경으로 간주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빈곤을 풍경처럼 보는 내 눈이 무섭다. 잘 사는 사람이 더 잘살게 되고 못 사는 사람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을 보면서도 경제가 어렵다는 허망한 말에 수긍하는 내 고갯짓이 놀랍다. 잘 사는 소수를 만드는 과정이 비참한 다수를 만드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는 나의 신속한 패배주의. 빈곤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악랄한 방해자가 이것이다.

지난 달 말 미국 인구통계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빈곤층은 3500만명을 웃돌고, 18살 미만을 기준으로 여섯 명 중의 한 명이 빈곤 아동이라고 한다. 사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 지구 전체가 ‘슬럼투성이’다. 20세기 말 지구의 지니계수는 낮추어 잡아도 0.67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세계의 상층 3분의 1이 모든 것을 갖고, 하층 3분의 2는 굶어죽을 상황이라는 것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올봄에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도와 빈곤율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1996년과 2000년 사이 절대빈곤층은 두 배로 늘었고, 전체가구의 15%, 즉 6~7가구 중 한 가구는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불행히도 한국개발연구원이 되뇌는 것은 빈곤 양산의 주범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그것이다. 시장의 폭력으로 생겨난 빈곤층을 없애기 위해 시장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시장활성화론’, 정부의 복지 지원이 자칫 사람들의 버릇을 나빠지게 해서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근로복지연계론’. 빈곤 상황에 대한 보고보다 우리를 더 암담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제안들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디파치오는 지구적 비전을 놓고 경쟁하는 담론이 없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빈곤 문제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잘 지적했다.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복지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비용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복지 담당자들은 재정경제부 눈치를 보고, 시민단체들은 예산을 따내기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을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은 빈곤을 끝내는 게 아니라 연장하는 것이다. 구걸하다시피 해서 따낸 예산이나 기부금이 축소된 복지를 만회해 줄 수도 없지만, 빈곤에 대한 그런 접근이야말로 빈곤층을 사회적 부를 축내는 문제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며, 빈곤층을 양산한 자본과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빈민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왜 빈민운동이 없는가. 디파치오는 이렇게 답했다. 빈민을 돕고 대변한다는 자들이 무엇보다도 빈민을 양산하는 원리에 눈감으며, 빈민을 대신해 자본과 국가에 구걸해주는 선행으로 빈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세력화를 막았다는 것.

결국 빈곤을 둘러싼 투쟁에서 나오는 새로운 비전이 없다면 우리의 패배주의적 시각과 고갯짓은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1% 나눔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는 시민단체가 진정 빈곤을 없애고자 한다면, 그 수익을 빈민들의 생계지원이 아니라,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을 향한 빈민들의 투쟁 자금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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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14) 高大文化 [50호]


노동 거부: 시대착오적 망상? 대안의 돌파구?


강 수 돌 (고려대 국제정보경영학부)

1.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들뜬 기분으로 이야기하는 21세기, 아니 새로운 천년은 과연 희망의 시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전례 없이 비참한 종말의 시대가 될 것인가? '더 이상 착취당할 기회마저 상실한 사람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현재의 지구촌을 둘러보면, 최소한, 21세기는 희망의 시대가 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비참한 종말이 자동적으로 다가온다고 믿고 싶지도 않다. 결과는 우리들의 집합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 책임성(self-responsibility)과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를 기본 원리로 하는 '풀뿌리 자율성 운동'이 그 얼마나 성공적으로 전개되는가가 핵심일 것이다. 결국 절망의 시대를 희망의 시대로 전화시켜낼 수 있는 거대한 힘은 시장 경쟁력에도 있지 않고 국가(또는 엘리트) 권력에도 있지 않으며 바로 민초들의 자율 역량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적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자율 역량의 문제와 노동거부의 문제는 과연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또한 노동권, 즉 노동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거부권의 상충적인 개념들을 민중의 자율성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도 부분적으로만 문제시되고 있는 노동중독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노동거부와 삶의 자율성 강화를 이루기 위한 탈구들은 어떤 것일까? 이런 점에서 노동시간단축 운동을 다르게 자리매김할 수는 없을까?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이다.
자유로운 노동 내지 노동 해방을 향한 외침은 오래되었으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에 관한 노동자 내부의 논의는 그리 깊지 않다. 내가 보기에 자유와 해방을 향한 돌파구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당연한 듯 '신성시'하는 '노동'의 권리를 되짚어보는 것에서, 둘째, '자본'을 닮아있는 우리 자신의 의식과 행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에서, 셋째, 삶의 재생산과정이 전적으로 화폐의존적으로 변하고 있는 경향성에 맞서는 것에서 찾아지리라 본다. 이 세 가지 사례는 원래 노동시장, 노동과정, 생활과정이라는 세 범주로부터 추출된 것이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2. 노동권과 노동거부권

* 에피소드 1: 어느 조용하고 아늑한 어촌 마을의 아침이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한 고기잡이 노인이 평화롭게 단잠을 곤하게 자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 휴양을 온 한 관광객이 바닷가를 거닐다 이 노인이 잠자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그 노인이 행복하게 잠자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에, 그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찍어댔다. 그런데 이 찰칵거리는 소리에 그만 이 고기잡이 노인은 잠을 깨고 말았다.
"그 뉘시오?"
"아이쿠, 죄송합니다만,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할아버지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아 그만 ...…, 이거 어떡하지요?"
"......"
"그런데 할아버지는 고기 잡으러 나가지 않으세요? 벌써 해가 저만치 ..."
"벌써 새벽녘에 한 번 다녀왔구만."
"아, 그러세요? ... 그러면 또 한 번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 뭐하게?"
"... 참, 할아버지두, 고기 많이 잡으면 할아버지의 저 낡은 거룻배를 새 걸로 바꾸실 수 있쟎아요?"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는 새 거룻배로 고기를 잡으시면 훨씬 빨리, 한결 많이 ..."
"음... 그 다음에는?"
"그야, 크고 좋은 배를 몇 척 더 사시고, 사람도 많이 부리고... 그렇게 되면, 한꺼번에 뭉칫돈 버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습니까?"
"옳거니, 그래서는?"
"그 다음에야... 이 마을에 생선 가공공장도 세워, 싱싱한 통조림도 ..."
"흠... 그리고나서는?"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께서는 별 일도 않고 가만히 누워, 그저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지요."
이 말에 고기잡이 노인이 대답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잘 지내고 있네."
"......"(원작 하인리히 뵐; 강수돌 <경영과 노동> 제14장 참고)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음속에 '뿌듯함'을 느낀다. 성과가 나타나거나 돈을 버는 데 도움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 즉 노동이란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으로서의 노동이기 때문에, 이 노동은 자본의 가치를 증식시켜 주는 한에서만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지극히 역사적인 개념이다. 한마디로, 여기서 노동은 곧 자본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은 실업과 해고라는 삶의 위험성 앞에서 노동을 할 권리(das Recht auf Arbeit), 즉 노동권을 주장해왔다. 그 위에서 오늘날 노동3권, 즉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노동자에게는 지극히 당연시되는 노동기본권으로 되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이러한 노동권조차도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로서의 자본종속적인 노동을 당연시하고 나아가 노동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부터 주장되고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자연과 부단히 교류하며 자연의 일부로서 생명 활동을 수행하던 인간이 마침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의 형태로 거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노동권 개념이 나왔던 것이다.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은 달리 보면 민중들의 삶의 자율성이 거세되는 과정이었다. 삶의 문제를 공동체적인 관계 속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노동시장에 경쟁력 있게 내다 팖으로써 해결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노동자들은 노동권이야말로 '생존권'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자본 아래 실질적으로 복속되어 노동을 해야지만 임금이라는 소득이 생겨 비로소 삶의 문제(먹고사는 문제, 자녀 양육 문제 등) 해결이 가능하므로 '노동할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실업과 해고는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에게는 죽음이다. 그것은 경제적 토대의 박탈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정체감의 상실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자신의 노동이야말로 '자아실현'의 기회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량실업 시기에 자살율이 높은 것은 경제적 위기 의식과 더불어 사회적 위기 의식이 극단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제 발로 선 자본주의의 역사 200년만에 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는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대량실업이 활개를 치게 되었고 민중들의 노동권에 대한 강한 정열은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더 활활 불타오른다: "노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바로 이런 맥락에서, 노동거부권(das Recht auf Faulheit), 즉 일하지 않을 권리, 게으를 권리, 여유롭게 살 권리는 결코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요구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완전고용'을 이룰 수 없는 시장의 실패 문제나 정책의 실패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 자체가 이미 삶의 기쁨이 아니라 삶의 억압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인식이다. 가변 '자본'으로서의 노동은 그 자체로 자본이므로 마치 흡혈귀처럼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부단히 흡수해야지만 시장경쟁 구조에서 생존이 가능하다. 또한 '가변' 자본이기 때문에 자본의 몸뚱어리를 갈수록 더 크게 변화시켜주어야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삶을 억압하는 과정이 아닌가. 만일 일시적으로나마 삶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가변자본이 증식시켜 준 자본의 떡고물을 좀더 많이 분배받을 때뿐이다(임금인상과 휴가, 승진, 복지라는 형태로).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동하는 사람들을 억압 구조 속으로 더욱 더 단단히 묶어놓는다. 따라서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삶의 기쁨은 그 안에는 없다. 따라서 단호한 요구가 나온다. "노동거부!" 어차피 시장경쟁 속에서 20%도 안되는 '똑똑한' 자들 뒤에서 80% 이상이 들러리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나만이라도 20% 대열에 합류하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에피소드 속의 노인처럼 삶의 자율성의 누리며 '주인공'으로 살 필요가 있다! 또한 실업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실업자의 취업 능력(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업을 낳는 구조(경쟁 구조) 자체를 타파해야 하지 않을까? 20%의 경쟁력 있는 노동력과 80%의 경쟁력 없는 노동력으로 갈라지는 분열의 패러다임 속에서 서로 처절히 경쟁하지 않고 모두가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분열과 경쟁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노동시장(labor market)이라는 공간 위에서 나름대로 사회적 인정을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결코 진정한 대안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본증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서로 경쟁하는 그런 노동을 거부하겠다는 구호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도 새로운 햇살을 강하게 받고 있다.


3. 노동중독증에 대한 고백

* 에피소드 2: "30대 후반의 직장인입니다. 이상하게 저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일을 안하고 쉬는 것을 못 견딥니다. 불안한 데다 컨디션도 평소보다 더 나빠지곤 합니다.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물론 일을 할 때도 몸의 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쉬는 날보다는 낫습니다."(1999. 8. 25. 서울 논현동의 한 회사원)

* 에피소드 3: 주부 박아무개(35)씨는 요즘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원만한 가정생활을 했다. 그런데 지난해 초부터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은 집에 들어와 '일찍 나가야 되니 건드리지 말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저도 남편 들어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죠."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비롯된 일이다. 그때부터 남편은 "먹고 살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언제 그만두라고 할지 모른다"며 주말에도 쉬지 않고 회사에 출근했다. 평일에도 밤 12시가 돼야 집에 들어오고,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박씨는 "사는 게 허무할 뿐"이라고 말한다. 격무에 시달려 일만 쫓아간 남편의 생활이 부인한테 우울증세를 유발한 것이다.(한겨레 21, 99. 8. 26)

일찍이 110년 전에 맑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일중독증'에 사로잡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노동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외친 적이 있다. 그만큼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고 있는 일중독증은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사회적 병이다. 그런데 알코올중독증이나 마약중독증, 섹스중독증, 쇼핑중독증 등 다른 중독증과는 달리 일중독증만큼은, 위 에피소드들의 사례에서처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권장'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과 성과를 내야지만 편안함을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진는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일이란 우리 사회에서, '미친 놈, 한가한 소리한다'고 욕먹을 가능성이 크다.
대개 사람들은, 늦게 자더라도 일찍 일어나 다음날 할 일을 일일이 리스트로 작성하고 정말로 일에 흠뻑 빠져 일을 즐기면서 하는 이들을 두고 성실하고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경영학에서는 '직무몰입'이나 '조직몰입'과 같은 용어를 쓰면서 이것이야말로 조직의 성과를 내는 데에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정신과 의사들은 그런 사람들을 일중독증 환자라고 문제시한다. 의사들의 정신이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이상한가? 정확한 답은, 오늘날 한 해 동안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에 버금가는 '과로사'(work to death) 숫자가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그 심각성이 사회문제화 되기는커녕 '국가경쟁력 강화'니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니 하면서 자본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일중독에 빠지도록 몰아간다.
일반적으로 중독증의 이면에는 모종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이하 Heide 1999, 강수돌 1997a 제14장 참고). 이 두려움은 사실상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전일적 삶의 총체성에 대한 이해의 결핍(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끊임없는 대립과 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제 사회는 갈수록 이를 부채질한다)에서 온다. 만일 만물의 삶과 죽음 일체에 대해 전일적으로 심층 이해하게 된다면 그 두려움은 극소화되고 대신 삶의 자율성이 극대화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해의 부족으로 생긴 두려움을 적극 끌어안거나 올바로 극복하려는 내면적 자율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일시적으로나마 '회피'하기 위해 다른 대체물에 의존하게 된다. 일중독 또한 삶의 자율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삶의 전반적 불확실성에 대한 은근한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일을 통해 모든 것을 잊으려고 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삶의 불확실성이란 사실은 인간이 자연과(그리하여 동시에, 자기의 내면적 본성과) 맺는 관계가 잘못된 데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적대시하고 또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 외면과 내면의 분리가 강화될수록, 또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적대시할수록 인간은 결코 스스로 평화로이 살 수 없는 것이다. 삶이 불안해지고 불확실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수단을 찾고 마침내 그 수단에 종속된다. 그러나 결코 원래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고 공허감만 커져, 갈수록 그 수단에의 종속도가 커지는 것이다. 일중독자의 경우 갈수록 더 많은 성취(가시적 성과)를 이루어야지만 뭔가 하는 것 같고 성공적인 것으로 비춰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는 결코 진실한 만족감을 갖다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큰 공허감을 느끼게 되고 불안감에 젖은 채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더 많이 일중독에 빠져들게 된다.
다른 병들이 그러하듯 일중독증도 가장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열심히 일에 파묻힌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인 칭찬과 보상이 일중독증을 드러내기는커녕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성실성과 일중독증을 동일시하는 문화 자체를 단호히 타파해야 한다: "노동거부, 여유로울 권리!"


4. 노동자에게 내면화된 자본 털어내기

* 에피소드 4: "…그분은 결국 회사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짝사랑의 보람도 없이 문 밖으로 쫓겨나면서도 여전히 회사를 사랑한다는 그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온갖 수발을 다 들다가 헌신짝처럼 버림을 받고도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비련의 여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심봉사(회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정상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인당수(해고)에 빠졌던 심청이를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 심청이를 희생시키고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는 것보다 심봉사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웃들의 도움에 의해서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임원택 1998)

* 에피소드 5: "… 남성들은 회사 다니면서, 회사생활에 적응하면서 '회사가 내 목을 쥐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래서 성을 회사의 스케줄에 따라 조절하지요. 이른바 회사형 인간이 되는 거예요. 회사가 '너 오늘은 성관계 하지마' 이렇게 대놓고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따르는 순응적인 인간이 되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회사 일정에 성 스케줄을 맞추면서도 그게 자연스럽다고 느끼고 또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게 제일 비극이죠."(엄인희,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의 작가)

일(성과)과 자신(행복)을 동일시하는 문화를 극복하는 것은 곧, 노동하는 사람들 속에 내면화된 자본의 논리를 훌훌 털어내는 것이다. 가변 '자본'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노동이란 곧 자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 털어내기 운동'은 앞서 말한 노동 거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앞의 에피소드에도 나오듯이, 내가 회사를 '짝사랑'하고 있음을 냉정히 깨닫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돈벌이 기계(회사)의 스케줄에 삶의 세계를 종속시키지 않는 것 등등 매우 많다. 몇 가지 현실적 사례들을 더 살펴보자.
노동자들이 그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거나 다른 회사의 소액주주가 되는 경우에 그들은 노동자의 모습과 자본가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굳이 그러한 지분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노사 협력 하에 '파이를 많이 늘여야지만 나눠먹을 파이가 생긴다'라고 생각하는 때부터 이미 그들은 자본을 닮게 된다. 여기서 자본의 핵심은 본전 생각하기, 끝없이 불려나가기, (그러기 위해서라도) 모든 살아있는 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기('상품화'하기),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경쟁과 분열하기 따위에 숨어 있다. 이른바 '물신주의'는 자본의 논리가 우리의 일상생활로 전화되는 통로이다(상품 물신, 돈 물신, 자본 물신 등에 대해서는 힌켈라메르트 1999 참조).
따라서 우리가 돈을 은행에다 맡기고 높은 이자를 기대하거나 더 높은 이자를 주는 은행을 찾아다니는 것은 바로 자본의 모습이다. 은행에 예금된 돈은 자본으로 투자되어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영행위가 이뤄진다면 가변자본(노동력) 덕택에 불어나게 된다. 이 불어난 자본의 일부를 이윤분배, 이자, 배당금의 형태로 사람들이 나눠먹는 것이다. 크게 보아 한마디로 우리는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여 경영의 수익성 내지 경쟁력 향상이나 위기 관리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공동경영자'(Co-Management)가 되는 길이다. 물론 노동자가 철저히 배제되어 어떠한 영향력 행사도 어렵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다. 그러나 경영 참여의 과정이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삶의 자율성 향상을 위해 일관되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익성과 경쟁력, 생산성의 울타리에 새로이 갇혀 자본의 합리성을 앞장 서서 대변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본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요컨대 '내 마음 속의 자본'(internalized capital)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자본의 모습을 닮아있거나 닮아 가는 행위 논리와 구조를 철저히 파악하고 발본색원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 운동은 생활임금 쟁취와 노동시간 단축, 고용안정성 유지, 노동 환경 개선, 인격 대우 및 평등 대우, 복지 향상 등과 같은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하는 차원에서는 지극히 정당한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바로 그러한 노동조건의 개선이 역설적으로 임노동관계의 강화와 일중독증을 부채질하는 역설적 한계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노동이 자본 안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게 보면 노조운동도 사실은 경쟁과 분열의 패러다임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경쟁 업체를 물리쳐야만 안정된 고용과 소득이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의 현실적 딜렘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노동운동은 스스로 노동운동의 한계를 인정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허재영 1997 참고).


5. 삶의 화폐의존도 줄이기

* 에피소드 6: "그는 월 30만원을 벌고 그 돈으로 한 달을 산다. 그는 시인이다. 게다가 다른 직업이 따로 없는 '전업시인'이다. 시는 많이 써야 한 달에 두어 편 정도. … 그 친구는 시 한 편당 2만-5만 원을 받는다. 가난한 잡지에 시를 발표할 경우엔 그나마 원고료도 못 받고 대신 그 잡지의 정기구독권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게 된다. … 한 달에 30만 원으로 살려니 그건 생활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극기훈련이다. 우선 집밖을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버스를 타도 거금 500원이 들기 때문이다. 방안에 틀어박혀 사는데도 전화코드를 빼놓는다. … 대신 누군가에게서 '호출'이 오면 코드를 꽂아 전화를 한다. 누군가가 호출을 했다는 건 술이든 밥이든 사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내 시인 친구의 화려한 외출은 그렇게 이루어진다."(김중식, 돈에 관한 쓸쓸한 삽화 둘, <공동선> 1998년 5·6)

* 에피소드 7: "몇년 전부터 농사는 내 먹을 만큼만 하고 나무를 주로 키워. 없는걸 만들어내는 건 농업밖에 없어. 상업이야 있는 물건 사고파는 거고 공업도 모양만 바꾸는 거 아냐. 식물만 새로운 걸 만들어내지. 내가 나무와 풀을 좋아하는 건 그것들로부터 세상살이 이치를 배우기 때문이지. 한 자도 안되는 도라지는 겨울 땅 속에서 완전히 얼었다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살아나. 시련을 달게 이기고 일어서는 게 사람보다 나아. 나무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가지 뻗으며 사는데 빛 많이 받는 남쪽가지가 북쪽보다 길고 크지. 그렇다고 북쪽 가지가 남쪽으로 가진 않아. 사람은 어떤가. 편하게 살겠다고 농촌을 버리고 다들 도시로 갔잖아. 그래서 남은 게 뭐야. 눈에 쌍심지 돋우고 분초 다투며 산 끝에 다들 나가 떨어지잖아. 도시에서는 요즘 매일 30명이 자살을 한다며. 남 탓할 것 없어. 서울가면 큰 수나 날 줄알고 몰려간 거 아냐. 어떤 사람이 취직해 열심히 일했더니 과장 부장 사장된 다음 송장이 되더라는 농담도 있더구만. 내가 좋아하는 도연명 말처럼 '헛살아야 해'. 이루지 못하고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해서 아쉬워할 거 없어. 괜히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그저 살아있으니 산다는 생각으로 단순하게 살면 돼. 마누라는 오륙년 전에 죽었고 애들(3남3녀)은 모두 나가 살아. 고등학교 나온 놈도 있고 초등학교만 마친 놈도 있어. 막내딸은 공부 지지리 못했는데 시집가서 잘만 살아. 처음 혼자 됐을때는 미치겠더니 차차 익숙해지더구만. 혼자사니 생활이 단순해져 좋아. 결국은 혼자 살고 죽는거야. 잘 산다는 건 옳게 사는거지 사람 많은데 따라가며 사는 게 아니야. 한 삼십년 쉼없이 움직거리며 일하다보니 일에는 워크(Work)와 레이버(Labor)가 있는 거 같아. 워크는 그야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고 레이버는 팔기 위해 노동을 하는 거지. 요즘 직장잃은 사람들 많은데 그렇다고 일(Work)이 없어진 게 아니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어. 벼룩은 보통 한번에 3m를 뛴데. 2m 유리병에 벼룩을 가둬놓았더니 유리병을 치워도 1.8m만 뛰고 말더라구만. 사람도 똑같애. 직장은 어쩌면 유리병같은 거라구. 인생은 사는 길이 참 많아. 남들이 옳다고 하는 관습, 상투 이런 것에서 벗어나야 해.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 말이야."(경북 봉화에서 강아지와 함께 사는 전우익씨, 동아일보 1998. 5. 6)

실업자가 많아지면 한편으로는 자살율이 높아지지만 다른 편으로는 범죄율이 높아진다. 정상적인 소득원이 사라지게 되므로 비정상적인 소득원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거나 심지어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성마저 상품화하게 된다. 갈수록 교도소가 많아져야 하므로 교도소의 민영화가 이루어지는 반면에, 소수의 부자들은 불어나는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사설 경비원을 두고 자기들만의 성곽을 구축하게 된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돈'을 통해 해결하려는 구조를 강화해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돈 놓고 돈 먹는 사회'라고 하지 않던가. 다시 말해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영리주의가 삶의 전 과정을 돈벌이의 합리성 속으로 포섭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시스템이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고 말했다. 이미 우리 모두의 생활은 충분한 돈이 없으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갈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지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생활비가 오르면 노동자는 임금인상투쟁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고, 임금이 오르면 자본가는 물가를 올린다. 그리하여 갈수록 삶의 문제 해결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먹는 것도 재료부터 요리까지 사서 먹어야 하고, 옷도 사서 입어야 하고, 집도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줄어드니까 신문이나 잡지를 사서 보아야 하고 재미나는 놀이 문화를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되니까 노래방과 오락실을 찾거나 게임 프로그램을 사야만 한다. 심지어는 집안 일이나 계단 청소까지도 돈을 주고 해결한다. 육아, 교육도 모두 그러하다. 도둑이 설치니까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 경비 체계도 구축한다. 특히 광고와 유행(패션)이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따위를 통하여 인간 본연의 욕구를 지속적으로 조작하고 '자본친화적으로'(kapitalfreundlich) 변동시켜 나가기 때문에 소비중독, 돈중독, 이윤중독의 경향성이 커진다. 나중에는 별로 필요 없는 상품마저 이미지나 유행 때문에 구매해야만 하는, 그리하여 긴박한 필요가 없이도 많은 돈을 지출해야만 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도 벌어진다. 이런 식으로 삶의 전 과정이 화폐를 통해야 해결되는 양상으로 가다보니 결국 화폐의존도가 높아지는 대신 삶의 자율성은 급격히 약화되고 임금노동에의 종속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결국 일을 더 많이 해야지만, 또 소속된 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더 높여야지만 돈을 많이 벌게 되므로, 생활의 화폐의존도 강화는 마침내 일중독증을 구조적으로 부채질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반면에 위 에피소드의 시인이나 농부처럼 화폐의존도가 지극히 낮은 생활방식을 하나씩 실험해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생활구조를 근원적으로 혁신하여 '돈'이 별로 필요 없는 삶의 문화를 만들거나, 갈수록 돈이 적게 들도록 바꾸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컨대 미국의 애미쉬 공동체나 일본의 야마기시 실현지처럼 '자발적 간소함'과 '내면적인 풍요'를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공유하는 새로운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도 곳곳에 그러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생활과정에 돈이 별로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일중독에 빠지기보다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이 가능하고 또 남, 여, 노, 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공정하고 평등하게 일을 나누어 가지면서 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삶의 질 향상에 꼭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소비하려 하니 그렇게 많은 노동을 할 필요도 없어지고 대신에 창의적인 문화생활을 할 여유가 많아진다. 혹시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함께 사는 이들이 각자의 역량에 맞게 도와가면서 하게 되니까 비교적 거뜬히 해낼 수 있다. 이것이 일종의 '자율자치 공동체'일 것이다.
굳이 마을 단위의 구조변화가 아니라도 먹거리의 자립도를 높여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텃밭이나 주말농장 따위를 통해서 당장이라도 간단한 야채는 스스로 경작하여 먹어보자. 품질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다. 동시에 흙과 물, 공기와 햇볕, 벌레와 곤충 따위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시야가 확장되면 인간이 우주 만물과 맺는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삶의 원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만나 교류하고 마을을 만들고 또 그 마을들이 연대하게 되면 우리를 억압하던 커다란 삶의 구조마저도 허물어뜨릴 수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사람이 가지는 새로운 삶의 원리(다른 사람과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화되는가이다.


6. 다시 생각하는 노동시간단축 운동

대개 사람들은 그러한 '자율자치 공동체'라는 밑그림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현실적 조건은 자본과 국가의 억압이 첨예화되고 일상적인 노동자의 생활이 임노동에 묶여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대안적 밑그림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우선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실성이라는 것조차도 결코 저절로 주어지기보다는 사람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얼마나 절박하게 열망하는가에 따라, 그리하여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쳐가면서 그 얼마나 새로운 돌파구들을 만들어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리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적 조건 타령만 하고 앉아있다가는 아무 것도 현실화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바로 우리들의 의식적 행위와 온갖 분열의 벽을 뛰어넘는 연대 활동이 새로운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조건 속에서 더욱 넓은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세계 변화의 원리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우리가 공동전선을 칠 수 있는 구호가 무엇이겠느냐고 묻는다. 그렇다. 그것은 단연코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아닐까 한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건강의 수호와 노동의 인간화라는 차원, 일자리 나누기라는 사회 연대의 차원, 여가 선용과 시간주권의 확보라는 차원 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간의 생산성 향상이나 기술발전, 노동자 의식과 욕구의 변화, 대량실업과 불완전고용의 증대라는 조건들은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현실적 절박성을 더 크게 해 주고 있다.
만일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일할 수 있다면 삶의 구조는 엄청 달라질 것이다. 텃밭을 일구며 새로운 감각을 키울 것이고 삶의 기쁨을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다양한 사회운동 속에서 진보의 방향과 내용을 세우는 데 보다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주권이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고 일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파열구들이 열릴 것이다. 따라서 어중간한 노동시간 단축보다는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 비록 단기간에 어려울지라도.
그런데 정치경제학적으로 볼 때, 노동시간의 단축은 잉여노동의 감소를 초래하므로 자본은 당연히도 잉여노동을 더 많이 추출하기 위해 노동시간의 유연화 전략을 들고나올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실질임금 문제는 물론이요, 노동시간의 유연화 문제까지도 함께 걸려 있어, 전 사회적인 지혜와 힘의 결집이 없는 한 관철되기가 어렵다. 이런 점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계운동의 상호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한 시점이다.



7. 맺음말

'노동거부!'라는 구호. 이것은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노동, 자본을 지속가능하게(sustainable) 만드는 노동, 그리고 자본의 생존 논리 그 자체,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경쟁과 분열의 패러다임 속에서 온갖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시켜 자본의 몸불리기에 동원해내는 이 구조적 모순을 깨닫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구조와 그 구조를 온존시키는 삶의 방식을 어디서부터 바꾸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아이디어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 유능한 노동능력과 왕성한 노동의지를 갖춘 노동력을 양성하는 사회적 공장인 학교를 바꾸어야 한다. 커리큘럼을 바꾸고 학습방식을 바꾸고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맺기 방식도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일류주의, 일등주의, 엘리뜨주의, 기능주의, 적응주의, 국가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기존 학교에서의 참교육 운동, 새로운 대안 학교 건설 운동, 그리고 이들 사이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류가 필요하다.
둘째, 경쟁력과 생산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시키면서 자본증식에 혈안이 된 일터를 바꾸어야 한다. 작업방식을 바꾸고 노동시간을 과감히 줄이며(예컨대 하루에 한나절 노동) 생산물의 내용을 사회·생태적 필요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동료끼리, 상사와 부하끼리 맺어진 관계들도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생산력주의, 경쟁지상주의, 효율지상주의, 이윤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존재하되 차별과 지배가 없는 일터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노동운동이 매우 중요하긴 하나 그 근본적인 내부 혁신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특히 노동시간단축 운동은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계운동이 내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공통분모로 작용할 것이다.
셋째, 개인주의화되고 물신주의에 젖어 가는 마을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마을을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공동체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삶의 자립도와 자율성을 증대시켜 나가야 하고 공동체적인 관계를 증진시키는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개발해야 한다. 두레나 품앗이에 의한 건강한 집짓기와 건강한 먹거리 만들기, 건강한 옷 만들기, 건전한 놀이 공간과 문화 공간 조성하기, 교환가치를 중심에 두는 거래의 경제가 아닌 선물의 경제를 확대시키기 따위가 구체적인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구조를 갈수록 화폐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화폐독립적인 것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탈상품화' 전략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요컨대, 이 세 가지 핵심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란,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따라서 자본)을 직·간접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보람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본 원칙에 동의하는 다양한 실험과 노력에 대해서는 많은 수의 "예스!"가 필요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여전히 경쟁과 분열, 억압과 지배, 착취와 수탈,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을 고집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이구동성으로 "노우!"를 외쳐야 한다("one No!, many Yes!").
이러한 대안적 운동에 필수적인 요소 두 가지는 첫째, 지금까지 우리를 억눌러 온 온갖 피해의식이나 의무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기자신에게 책임성을 가지며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일이며(self-responsibility), 둘째, 어떠한 엘리뜨나 지도자에 의해 상층 중심적으로 이끌려가는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조직화를 통해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어져 가는 운동(self-organizing)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노동자의 권리(내지 '노동권')란, 한편으로 자유롭고 창의적인 노동을 할 권리와 다른 편으로 반생명적이고 물신주의적인 노동을 거부할 권리의 통일물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삶의 자율성(life autonomy)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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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울역에 가면 길바닥에서 장기판 벌여 놓은 야바위꾼들이 제법 있었다. 대개는 장기판 벌인 녀석만이 아니라, 돈 내고 장기 두는 손님이나, 둘러서서 분위기 잡는 구경꾼들까지 한 통속으로 보면 틀림없다. 그렇게 거나하게 판을 벌려놓고, 이제나저제나 순진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야바위에 속지 않으려면 그 판에서 자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같은 조직에 속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말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도 도저히 이길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는 게임에서 빠져 나와 게임규칙 자체를 뜯어봐야 한다. 게임의 규칙 자체를 남이 이길 수 없게 짜는 게 야바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 게임은, 그 규칙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균적 아이큐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게임에 무턱대고 들어가기보다는, 그 시간에 야바위꾼의 뒤통수를 갈길 궁리나 하는 게 좋겠다.

박정희 논쟁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 논쟁은 예외 없이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크냐"는 식으로 진행된다. 게임 규칙이 이렇게 놓여지면 그 안에 들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공이 크든, 과가 크든, 25년 전의 죽은 독재자가 졸지에 중요한 인물로 컴백하는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이 야바위판에서 휘파람 불며 유유히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박정희는 죽었다. 아무리 애무해도 그의 물건은 서지 않는다."

신드롬의 이데올로기

5년 전이던가? 그때는 지금보다 더 했다. 때는 바야흐로 IMF 전야, 사람들은 잘 풀리지 않는 경제에 대한 불만을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표출했다. 영악한 언론사들은 바로 이런 대중심리에 영합해 박정희 띄우기에 나섰다. 신문사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박정희 신드롬을 부추겼고, 조선일보에서 아예 한 면 전체를 통으로 써가며 매일 박정희 전기를 내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박정희가 IMF 사태의 해법이 될 수는 없는 일, 잠시 후 박정희 신드롬은 급속히 가라앉아 버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잘 안 풀리면 사람들은 좋았던 시절,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끔찍했던 과거의 좋았던 측면만을 기억하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박정희 향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치적 동기까지 겹쳤다. 지금 한나라당의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의 귀하신 따님이 아닌가. 그러니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박정희 뒤로 결집할 정치적 이유까지 생긴 셈이다. 이게 지금 다시 반짝하고 있는 소위 박정희 향수의 본질이다. 이 논쟁(?), 애써 리바이벌 해야 이미 5년 전에 다 정리된 얘기다.

한때 박정희 신드롬에 고무되어 박정희 기념관 짓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신문을 보니, 국민들의 자발적 후원이 거의 없어 사업 자체가 취소될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이게 대중들의 평가다. 한 마디로 대중들이 입으로 박정희를 높이 띄우는 데에는 어떤 경제적, 혹은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얘기다. 그것을 떠나서 정작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문제가 되면, 그토록 박정희를 그리워하던 이들이 아주 냉랭한 태도로 돌아서는 것이다.

신화, 민중창작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던가? 자기 책에 그는 "Das Volk dichtet"(민중은 詩作을 한다)이라는 독일어 속담을 인용했다. 한 마디로 민중은 어떤 이야기라도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신화는 민중들의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뜻일 게다. 실제로 수많은 영웅들의 신화를 만들어냈던 그 아득한 그리스의 민중들처럼, 이 땅의 민중들 중의 적어도 일부는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대에도 계속 영웅시를 지으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다.

'신화'를 의미하는 'mythos'는 원래 '제멋대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신화적 사고방식에 대항해 합리적 사고방식을 내세운 철학자들이 '신화'라는 말에 그런 부정적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어쨌든 신화는 구술문화에 속하고, 철학은 활자문화에 속한다. 이는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개의 상이한 틀 사이의 대립이다. 구술문화에 속하는 이들은 세계를 영웅들의 행위를 통해 이해하고, 활자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세계를 법칙들의 연관으로 설명하려 한다.

가령 폭풍우의 원인을 설명한다고 하자. 활자문화에 속한 이들은 이를 온도, 기압, 증발과 같은 비인격적 용어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반면 구술문화에 속한 이들은 폭풍우 속에서 어떤 인격적 힘을 찾으려 한다. 폭풍우, 그것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진노다. 경제발전이나 경제위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구술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것의 '범인'을 찾아 심판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경제발전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것의 '은인'을 찾아 감사부터 하러든다.

은총과 믿음

박정희에 대한 논쟁은 그의 '공과 과'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실은 두 개의 사고방식 사이에 벌어지는 문화적 논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사회의 구술문화층과 활자문화층 사이의 공시적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좀 산다고 하는 서구의 그 어느 나라에도 자기들이 그만큼 먹고사는 공로를 특정 개인에게 돌리고 감사해대는 어법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다. 이 재미있는 정치적 의인법은 우리 사회에 아직 강하게 남은 어떤 시작(詩作)의 욕구, 즉 영웅서사시를 갖고 있었던 구술문화의 잔재다.

박정희 추종자들의 태도를 보면 재미있게도 우리 어머니의 그것을 닮았다. 독실한 신자이신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님의 은총으로 설명한다. 그 어떤 사건이 터지고, 그 어떤 사안이 걸려도, 어머니는 그 배후에서 결국 주님의 손길을 읽어내고야 만다. 내가 일해서 번 돈도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는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설명된다. 운이 좋은 것은 주님의 은총이요, 운이 나쁜 것은 주님이 내리신 시험으로 간주된다. 이 반석 같은 믿음을 과연 어떤 논리로 깰 수 있을까? 또 그것을 깨어서 무엇하겠는가?

경상북도 구미에 있는 박정희 생가에 가면, 아직도 그 초상사진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노인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박정희 신드롬의 종교적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가끔 대학의 교수들 중에서도 논문식 글쓰기로 박정희 영웅시를 쓰는 해괴한 분들이 계신데, 그들은 모종의 범주 오류에 빠져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가진 전제자체가 '신화적'이라는 것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화적 내용과 과학적 형식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주체성의 문제

남이야 마징가 제트를 구세주로 섬기든, 도널드 덕을 하나님으로 모시든, 간섭할 게 못 된다. 박정희 덕분에 먹고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 믿음을 갖고 살아가면 된다. 그 믿음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헌법이 보장하는 신앙의 자유는 맘껏 누릴 일이다. 아직도 청학동에서 상투 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존재로써 이 사회를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만드는 것처럼, 21세기 넘도록 박정희를 추종하는 이들도 그 존재로써 인류학적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큰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

박정희는 그 추종자들에게 심리적 '아버지'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자신을 그의 '자녀'로 생각하는 것처럼, 박정희를 가부장으로 모신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자신의 그의 '자녀'로 생각한다. 발달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들은 아직 자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독자적으로 무슨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자기들은 오직 '지도자'를 만나야 비로소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들의 의식의 바탕에 강하게 깔려 있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그들은 스스로 행동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자신들을 끌어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기를 기대한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한 지도자를 갖는 것이라고, 경제를 되살리는 유일한 길도 훌륭한 지도자를 갖는 것뿐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가 자신을 다스리는 자율적 정체, 즉 민주주의의 능력이 없다. 사실 이념적 방향만 다를 뿐, 박정희 추종자는 실은 김일성 추종자와 본바탕이 같다.

경제 문제

경제가 어렵다. 대충 풀릴 경기가 아닌 모양이다. 수출은 늘어도 내수는 살지 않고, 경제는 성장해도 고용은 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백약이 무효라는 푸념을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구술문화에 속한 이와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이 상황을 각각 다르게 이해하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도 각각 다른 식으로 마련할 것이다. 구술문화에 속한 이는 경제문제에 대단히 인격적인 접근을 하고,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그 문제를 건조하게 비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가령 구술문화에 속한 이는 현재의 경제위기가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것이다. 만약 노무현이 박정희와 같은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면, 애초에 경제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박정희, 전두환 때만큼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이것으로 보아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역시 권위주의적 리더쉽을 다시 도입해야 마땅하고, 그 리더쉽 아래 온 국민을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총화 단결시켜야 한다. 그러면 아직도 고속성장이 가능하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아마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반면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위기의 '범인'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을 찾으려 할 것이다. 경제에 위기가 왔다면, 그것은 경제적 소통의 어느 지점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소통의 시스템 자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길을 찾을 것이다. 아울러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힘도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끌어낼 것이다. 경제를 발전시켜온 것도, 앞으로 경제를 다시 회생시킬 것도 각각의 경제주체들의 합리적 판단과 적절한 행동뿐이다.

"바람이 왜 부는가?" 어떤 이는 온도의 차이에 따른 기압의 차이, 그로 인한 공기의 이동 등등을 얘기할 것이다. 이런 과학적 설명의 건조함을 싫어하는 이들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풍백'이라는 가설을 더 선호할 것이다. 둘 다 맞는 얘기다. 바람은 기압의 차이로 공기가 이동하는 현상이자, 환웅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온 풍백이 일으키는 조화이기도 하다. 이 두 견해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논쟁하는 것은, 부처님과 예수님의 대결만큼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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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의 미학

2004/09/03 18:48
문신의 미학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조폭들의 전유물에서 관능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머리가 나빠서 이 얘기를 엄마한테 했는지 모르겠다. 3년 전에 문신을 했다. 뉴욕에 출장갔을 때였는데 당시 묵고 있는 호텔이 그리니치빌리지에 있었다. 한때 예술가들과 보헤미안, 밥 딜런 같은 포크 뮤지션들의 보금자리로 유명했던 동네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클럽보다 옷가게나 타투숍이 즐비한 상업 공간으로 쇠퇴해 있었다. 그때 혼자 타투숍에 들어갔다. 결코 술김이 아니었다. 맥주 한잔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샤워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문신 견본이 진열된 두꺼운 책자를 두권이나 봤지만 마음에 드는 문양이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도안을 그려 타투이스트(문신 시술자)에게 보여줬다. 이제는 아무도 외치지 않는 ‘사랑과 평화’. 내 스스로 하트 문양과 ‘Peace’라는 영문자를 연결해 소박한 도안을 그렸다.


△ 사진/ 김태은

세상의 모든 타투이스트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한 화려한 문양을 원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디자인이 너무 단순하니까 컬러나 음영을 넣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NO Color, No Shadow.”

잉크 묻은 바늘이 내 어깨죽지의 얇은 살갗을 뚫어주길 기다리며 문신 시술대 의자 위에 숫처녀처럼 앉아 있었다. 두렵고 떨렸다. 첫 번째 바늘이 내 살갗을 관통할 때 양팔의 솜털이 곧추섰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자 온몸에 얼얼한 열기가 번졌다. 난 바늘이 살갗을 뚫으며 내 어깨죽지에 ‘사랑과 평화’를 아로새길 때 느껴지는 내 몸의 감각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 감각이 바로 문신의 미학이며 관능이라 여겼다.

예전에는 문신이 조폭 아저씨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확실히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무엇보다 안젤리나 졸리, 위노나 라이더, 주드 로, 조니 뎁,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할리우드 스타나 베컴과 안정환 같은 축구 스타들의 공이 컸다. 주변에도 멋진 타투를 자랑하는 스타들이 부쩍 많아졌다. 공효진은 가리기도 쉽고 드러내기도 쉽다는 이유로 발등에 별 모양을 새겼고, 양 어깨죽지에 천사의 날개를 그려넣은 모델 이유의 타투도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특히 얼마 전에 결혼한 이혜영은 엉덩이 부분에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인디언 부족들의 자유와 희망을 상징하는 새의 깃털을 새겼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레이저로 문신을 지우거나 다른 그림을 덧입혀 원래 글자를 은폐하려는 ‘헛짓’을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헌사 또는 같은 할리우드 스타와의 애정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용도로 문신을 했던 안젤리나 졸리나 조니 뎁 같은 스타가 그 대표적 예이다. 특히 ‘위노나 포에버’라고 새긴 조니 뎁이나 ‘섹시 새디’라고 새긴 주드 로의 문신이 제일 어리석게 느껴진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에 빠지게끔 디자인되어 있는데, 동시에 그 사랑 안에 머물지 않게끔 디자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말인가?

나중에 눈꼽만큼이라도 후회할 것 같으면 차라리 헤나를 해라. 진짜 문신의 미학을 아는 사람들에게 헤나는 쉽게 입고 벗는 양말짝 같은 패션 아이템에 불과하지만 나중에 레이저로 지울 바에 차라리 헤나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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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우주' 구경하기

2004/09/03 18:46
남의 ‘우주’ 구경하기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제각기 취향 부린 그들의 집에 가면 틀림없이 그들이 보인다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얼마 전, <한겨레신문>의 김선주 논설위원으로부터 젊을 때는 ‘시간’을 즐기고 ‘공간’은 나이 들어 즐기는 것이라는 멋진 말을 들었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10대 때부터 줄곧 공간에 집착해왔다. 10년 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엄마 지갑에서 달랑 10만원을 훔쳐서(훔친 건지, 빌린 건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길음동 옥탑방으로 독립할 때부터 줄곧 그랬다. 세계 어디를 가도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남의 집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걸핏하면 길을 잃었고, 때로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집들을 책으로 구경하며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 사진/ 바자 이보경

그런데 최근에 문화평론가 강영희 선생이 쓴 <한국인의 미의식>이라는 책을 보고 내가 왜 그토록 공간에 집착했는지 깨달았다. 그건 ‘악착같이 벌어서 내 집 장만하자’ 식의 어머니 세대의 구호와는 좀 다른 의미였다. 그 크기로 보나 방식으로 보나 나만의 이런저런 취향을 제 멋대로 부려놓기에 집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 집은 책이며 음반, 책상, 꽃과 나무 등 내가 좋아하는 오브제들이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놓인 나만의 우주였다. 그러니까 집은 나라는 인간의 가장 가시적이고 가장 거대한 ‘일부’였다.

내가 취재원 집에 놀러가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취향이나 세계를 들여다보기에 그 사람이 사는 공간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그 집에 가면 틀림없이 그 사람이 보였다. 한대수 선생의 집에 가면 샤워할 수 있고 기타를 칠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히피 뮤지션의 일상이 보였고, 만화가 이우일 집에 가면 영화나 책 같은 자기 취미에 빠져 낙천적으로 사는 어린아이 같은 30대 남자가 보였다.

최근에 방문한 집 중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황산벌>이라는 영화를 만든 이준익 감독의 집이었다. 자동차로 진입할 수 없는 좁디좁은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낡은 슬레이트 집인데, 집 한복판에 오랫동안 가꾸지 않은 야생의 정원을 품고 있어서 홀로 사색하기 좋아 보였다. 그런데 씨네월드라는 견실한 영화사의 대표이기도 한 이준익 감독은 그 누추한 집의 사랑채를 전세 내어 혼자 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집도 사람도 눈곱만큼도 허세가 없었다. 어느 스태프가 이준익 감독을 두고 “촬영하는 내내 고환에 습진이 생길 정도로 생고생을 다 했는데도 걸핏하면 그 망할 놈의 감독이 자꾸 보고 싶어진다”고 했는데 그의 집도 그랬다. 누추하지만 편안하고 아름다워서 자꾸자꾸 가고 싶어지는 집이었다. 마침 부암동이라는 동네 전체가 그런 고졸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나는 이사할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그 동네에 전셋집을 보러 다닐 정도로 좋아하고 있다.

반면 최근에 나를 가장 숨막히게 한 집은 ‘대한민국 1% 아파트’로 불리는 도곡동 타워팰리스였다. 일단 초고층 건물이라 창문을 열 수 없다는 점이 ‘쥐약’이었다. 게다가 집약된 고도의 기술력으로 가장 편리하게 지어졌다는 최고의 홈네트워크 주거 공간이 내게는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거대한 기계장치처럼 보였다. 또 입주하기 전부터 완벽하게 세팅된 곳이라 거주자가 그곳에 자신의 취향을 부려놓을 만한 여지도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타워팰리스에 못 살아서 난리일까? 그건 4억원에 분양받는 순간 곧 10억원이 되는 집이기 때문이다. 강영희 선생 말마따나 그 경제성이 공간에 대한 인간의 취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내 눈에는 타워팰리스에 사는 ‘대한민국 상위 1%’가 미국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 ‘닭공장’에 가는 화이트칼라처럼 좀 안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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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은 ‘애국’이었나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구한말 계몽주의자들이 추종한 일본인 마당발 오가키 다케오… 친일 환상 부추겼음에도 찬양받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애국’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행동을 애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각자가 생각하는 ‘나라’와 ‘사랑’의 내용이 각각 다르기에 애국을 주장하는 두 쪽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예컨대 ‘나라’ 개념의 내용을 이라크에 가서 제국의 총알받이로 죽을 서민층 젊은이를 중심으로 본다면 파병 반대가 애국이 되지만, 파병으로 인한 한-미 동맹(대미 예속)의 강화로 미국 투자가 활성화돼 주식값이 오르리라고 군침을 흘리는 투기꾼이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면 파병은 애국이 될 것이다.


△ 1907년 7월20일,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이토 히로부미와 그 행렬이 궁궐에서 물러나고 있다. 이토의 중요한 협력자는 오가키와 같은 민간인 국수주의자들이었다.

애국항일 계몽지의 놀라운 이면

‘애국’이 주관적인 개념이기에 객관성을 내세우는 사학자들이 애국이라는 수식어를 쓰려 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애국이라는 수식어가 꼭 붙는 것은 1900년대 후반의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다. 1980~90년대의 민중사학자들이 애국계몽운동 지도자 대다수가 통감부 권력자들과 조화롭게(?) 공존했던 부르주아·지주·관료였음을 입증했는데도, 오늘날까지도 국사교과서를 외워야 하는 학생들은 대한자강회-대한협회(1906년 4월~1910년 9월)나 서우-서북학회(1906년 10월~1910년 9월) 등의 계몽단체 간부들을 ‘애국적인 항일 인사’로 인식하고 있다.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라 할 만한 계몽단체들의 출판물들을 읽으면 ‘자강’과 ‘문명’을 부르짖었던 지도자들에게 일제는 위협이면서도 동시에 모방이자 제휴의 대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00년대 후반 계몽단체의 선구자라 할 만한 대한자강회의 <월보> 제1호(1906년 7월)를 들여다보자. 교과서에서 배웠던 박은식·장지연 등의 이름들이 맨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웬일인가. 머리말 격인 3편의 ‘서’(序)를 쓴 사람 중에는, 회장 윤치호(尹致昊), 대문장가 이기(李沂)와 나란히 일본 이름 하나가 보인다. 러시아에 붙었다가 중국에 붙었다가 하는 ‘독립정신이 없는’ 한국 당국자들을 비난하고, “한국이 군대를 키우지 않아도 된다. 문명 열강들이 한국을 정의로 대해줄 터이니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침략당할 일 없다. 일단 교육과 식산흥업에 힘쓰고 나중에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되찾자”는 취지의 머리말을 쓴 사람은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1861~1929)였다.

미국·영국을 위시한 열강의 적극적인 방조 아래서 일제 침략을 당해 ‘보호국’이 된 나라의 국민들에게 “안심하여 교육이나 힘쓰라”고 훈시하는 것은 그 당시 통감부의 대(對)지식인 선전 방침과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로 이 서(序) 밑에다 이기는 “국가 정의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인간의 정신을 감동시키는 내용이며, 세상을 깨우치게 하는 큰 종(鍾)”이라는 찬양의 코멘트까지 달아놓았다. 이게 애국항일 계몽지 같은가?

<월보>를 계속 정독해보면 놀라움은 더해간다. 13호까지 발간됐다가 정간을 당한 <월보>에 23편(!)의 글을 기고한 오가키야말로 학회의 가장 근면한(?) 필자로 보인다. 기고의 내용은 계몽주의자들의 거의 모든 관심 분야를 아우른다. 예컨대 “40~50년 전에 일본도 한국처럼 미개한 나라였지만 서구 문명을 흡수하고 ‘국혼’(國魂)인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배양했기에 오늘처럼 발전됐으니 한국도 교육·식산흥업에 힘쓰고 한국혼(韓國魂·국민 정신)을 키우면 언젠가 독립을 되찾아 하나의 열강이 될 것이다. 단, 참다운 국민이 정부의 뜻을 받들고 국법을 준수할 뿐이지 독립운동과 같은 ‘무모한 짓’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대한자강회의 창립 때 오가키 연설의 요지였다(<월보>, 제1호).

오가키, 계몽운동의 실세로 통해

또 그는 인종적으로 일본과 같은 뿌리의 한국인들이 교육만 잘 시키면 중국 영향으로 말미암은 나태·사대주의를 극복하여 곧잘 문명개화로 중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통감부하 반(半)식민지의 ‘진보’를 낙관했으며(‘외국인의 오해’-<월보>, 제2호),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잘 뭉쳐서 교육에 열중하면 아예 백인종까지도 능가하여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되리라고 내다봤다(‘교육의 효과’-<월보>, 제1호). 인종적인 형제 국가인 일본에 번거로운 외교를 편하게 맡겨놓은 채 실력 양성을 잘하여 국민 정신, 즉 국가에 대한 충성만 잘 키우면 한국이 곧 개명진보의 역에 도착하겠다…(‘한국 목하(目下)의 급무’-<월보>, 제9호).

이것이 대한자강회 잡지에 우연히 실리게 된 일개 일본인의 망설뿐이었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일한 동맹론’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찬사까지 얻어(‘論大垣氏同盟說’-1906년 2월25일치 논설) 장지연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 문사와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그리고 <황성신문> 등의 매체를 연설과 기사로 자주 장식했던 오가키가 단순히 대한자강회와 무관한 일개의 궤변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를 고문으로 둔 대한자강회의 상당수 한국인 논객들이 ‘황인종의 연합’과 집단주의적인 ‘국가 정신’, 그리고 ‘선 실력양성 후 독립’ 등을 뼈대로 한 그의 논지를 그대로 따르기도 했으며, ‘이름을 밝혀 이득을 낚으려는’(황현, <매천야록>, 제5권) 계몽주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그가 마당발이자 실세로 통하기도 했다. 통상 ‘항일 애국운동가’로 생각되는 계몽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일제의 속뜻을 대표했던 이 ‘호걸’(장지연의 오가키 평)을 이렇게 환대하게 됐는가?

오가키의 전기가 일본 국수주의자들인 ‘흑룡회’(黑龍會)가 1936년에 편찬한 <동아선각지사기전>(東亞先覺志士記傳-‘선각지사’는 침략의 주역을 뜻한다)에 실린 것만 봐도 그의 정치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국수주의 운동 활동가로서 전형적인 자금 조달 방법인 기업인 공갈협박의 죄로 일본에서 1902년에 형까지 받은 오가키는 원래 지역 정치인이자 ‘국가 원기 회복’을 주장하는 한 국가주의적 신문의 사장이었다.

본인의 말대로라면 1906년 2월에 이루어진 그의 도한(渡韓) 동기는 “국은(國恩)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한국인들의 지도계발을 맡아 제국의 정책에 보탬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백성이 돼가는 한국인에 대한 그의 ‘지도계발’의 전술은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적어도 겉으로- 또 다른 ‘대륙 낭인’(재야 국수주의자)들의 ‘합방론’에 반대하여 이미 허울뿐인 한국의 주권이 명목상 유지돼 일본과 ‘동맹’ 관계가 돼야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성공적으로 차별화하고 한국의 계몽주의자들과의 교분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물론 그가 이야기한 ‘동맹’이란 한국의 대일 종속에 대한 기만적 수사에 불과했다. 그는 초기에 아예 <대한매일신보>에 광고를 내 일본인에게서 구타·임금체불을 당할 경우 자신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억울함을 다 풀어주겠다고 약속하는 등(1906년 3월13일 잡보란) ‘착한 일본 해결사’의 노릇을 맡은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미 유행한 ‘황인종 연합론’의 인종주의적인 친일적 환상들을 더 부추기고 국채보상운동에 훼방을 놓고 대한자강회의 강제 해산과 같은 일제의 폭거에 대한 분노를 무마하는 데 공을 들였다. 1907년 8월에 대한자강회가 해산당하자 오가키가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계몽주의자를 결집할 새 단체, 즉 대한협회의 설립허가를 따주고 그 활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

식민지 거물로 거듭난 극우 공갈꾼


△ 오가키와 가장 친했던 계몽주의자 중의 한 사람인 대한협회 부회장 오세창(왼쪽). 위암 장지연(오른쪽)은 오가키를 “천하의 호걸”로 평가하고 그의 ‘황인종 연합론’에 동조했다.

이완용과 결탁한 오가키는 1910년에 ‘합방의 공로’를 독차지하려던 일진회의 한쪽과 한때 공방을 벌여 일본 당국의 제지까지 당한 바 있었지만 결국 식민지의 ‘개명진보’를 찬양하면서 죽을 때까지 서울에서 눌러살게 됐다. 일본의 한 극우적 공갈꾼이 명예직을 두루 거친 식민지 ‘거물’로 거듭났다.

1900년대 말에 오가키에 대해서 ‘사기꾼’ ‘고등 첩자’ 등의 소문이 나돌았음에도 그가 대한자강회의 고문이 되어 윤효정(尹孝定),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등의 주요 정객들을 친구로 사귀고 계몽담론의 생산자로 기능할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인가? 현실적으로는 계몽주의자 집단들에게 오가키처럼 그들과 일제 당국 사이의 매개체가 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부분도 있었지만, 더 근원적인 이유는 초기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모순적인 대일관(對日觀)에 있었다. 일제에 국권이 넘어가는 현실을 안타깝고 분하게 여기는 의미에서 그들이 애국자였지만, 그들이 대표하는 신흥지배계급(개명관료, 개항장의 부르주아, 쌀 수출의 주역인 지주 등)이 도일 유학과 대일 무역을 부·문화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여기고 일본의 국가주의적 규율을 흠모했던 만큼 그들에게도 일본은 ‘위협’이기에 앞서 ‘인종적 형제’이자 모델이었다.

오가키가 주장한 인종주의적 ‘일한 동맹론’이나 ‘국혼(國魂) 배양’ 식의 집단주의·국가주의, 그리고 반(半)식민지적 현실의 인정과 ‘실력양성론’은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상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이 벌인 운동을, 과연 ‘애국’으로 지칭해야 되는가? 만약 ‘나라’를 침략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으로 해석한다면 침략자들과 ‘인종적 동맹’을 모색했던 운동에 ‘애국’과 같은 수식어를 붙일 여지는 없어지고 만다. 외세의존적인 초기 부르주아의 메이지 일본식의 계몽이 곧바로 식민지 엘리트의 ‘소신친일’의 논리로 이어지고 지금까지도 일본 극우파를 닮은 수구 기득권층의 군사주의적·국가주의적 논리로 계속 이어져가는 것은 우리가 바로 봐야 할 현실이다.

[오가키 관련 연구]
- 이케가와 히데가쓰(池川英勝), ‘大垣丈夫について-彼の前半期’, -<朝鮮學報>, 제117호, 1985.
- 다구치 요조(田口容三), ‘大韓自强會-大韓協會の日本人顧問に對する 評價をめぐって’, - <朝鮮史硏究會會報>, 제66호, 1982.
- 정관, <한말 계몽 운동 단체 연구>, 효성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2
- 최미숙, <大垣丈夫 연구-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5.
- 최덕수, ‘대한제국기 일본인의 조선론 연구’, -<宋甲鎬 교수 정년퇴임기념 논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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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선수촌, 혹은 어덜트 디즈니랜드


최근 미국의 듀렉스 社가 13만개의 콘돔을 아테네 올림픽 선수촌에서 무료 배포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선수촌에는 대회 기간 동안 10,000여명의 선수와 5,500여명의 코치 및 임원들이 머물 것이므로, 남녀 구분 없이 배포한다면 개인 당 6개 정도의 콘돔이 돌아간다. 그 콘돔은 도대체 어떻게 사용되는 것일까?

이정화

(편집자 주) 최근 미국의 듀렉스 社가 13만개의 콘돔을 아테네 올림픽 선수촌에서 무료 배포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선수촌에는 대회 기간 동안 10,000여명의 선수와 5,500여명의 코치 및 임원들이 머물 것이므로, 남녀 구분 없이 배포한다면 개인 당 6개 정도의 콘돔이 돌아간다. 그 콘돔은 도대체 어떻게 사용되는 것일까? 짐작이야 할 수 있지만 정확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얼마 전 스코틀랜드의 일간지 '더 스코츠맨 (The Scotsman)'이 올림픽 스타들의 '체험'을 상세히 보도했는데 기사를 발췌 번역 한다.


현대 올림픽의 비밀은 필드가 아닌 선수촌에 있다. 최근 선수촌 내 비기(?)의 트레이닝이 외부에 알려져 화제다. 선수촌에 입성한 선수들의 '마지막 컨디션 조절'은 수영도, 조깅도, 페달링도 아니다. 바로 섹스다.

열전에 들어선 아테네 올림픽의 올림피아드 선수촌. 최근 US 올림픽 팀 소속인 한 여선수가 평소 출입이 금지된 선수촌 기숙사 건물 옥상에서 타국 팀 선수들과 섹스파티를 벌인 것이 화제가 되었다. 놀라운 건, 정작 선수촌 내부에서는 이를 '일상다반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 전 선수촌 생활은 고된 트레이닝에 시달려 왔던 혈기왕성한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2주간의 초호화판 휴가이자 수천이 넘는 탄탄한 육체들의 향연이죠." 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수영 2관왕인 넬슨 디벨(美)의 말이다.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선수촌에 입성한 각국의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한 마디로 '성인들을 위한 디즈니랜드'에 가깝다. 24시간 방영되는 스포츠 TV, 언제고 무료로 양껏 즐길 수 있는 최고급의 세계 진미, 드라이브인 콘서트(모든 선수들에게 BMW 한대 씩 대여된다), 수영장, 극장, 볼링장, 디스코 텍 등등이 갖추어진 올림픽 선수촌은 지구 상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VIP 전용 휴양지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곳을 누비는 건 라이벌, 코치, 트레이너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잘 빠진 선남선녀들의 육체다.

"코치의 엄격한 통제 하에 고된 운동 스케줄에 시달리던 선수들에게 갑자기, 2주간의 초호화 무상 휴가가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건이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하죠." 아틀란타 올림픽 투포환 은메달 수상자인 존 가디나의 말이다. 그들은 200여개국에서 온 혈기왕성한 관광객(?)에 가깝다.

선수촌 입성 후 변화하는 트레이닝 방법도 선수들의 테스토스테론 지수를 높이는데 일조한다. 선수들은 보통 때 정해진 시간에 수영이나 자전거 페달링 등의 트레이닝으로 하루 9천 칼로리를 소모한다. 그러나 선수촌 입성 후, 경기를 위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경기가 있기 며칠 전부터 트레이닝 시간을 조금씩 줄여나간다(이를 '테이퍼링 taper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로리 섭취량은 줄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선수촌 선수들은 경기가 가까워올 수록 '놀 시간은 많은데, 원기가 끓어 넘치는' 상황에 처한다. 이른바 클라이맥스에 달한 신체조건에, 건장한 육체들이 종횡무진하는 선수촌만의 풍경이 이들의 성욕지수를 높이게 되는 건 자명하다.

"글리코겐으로 충만한 만 여명의 사람들이 종횡무진하고 있는 걸 보면, 그들 몸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아요." 시드니 올림픽 배영 종목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BJ 베드포드의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선수촌에 비치된 자판기 중 빈번히 품절표시등이 켜지는 건 소프트 드링크가 아닌 콘돔 자판기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의 경우 매 두 시간마다 품절이 되었다. 시드니 올림픽 때에도 선수촌 운영진 측이 애초 비치한 7만 개의 콘돔이 완전히 동이 나는 바람에 운영진은 황급히 2만개의 콘돔을 추가주문해야 했다. 이렇게 추가로 비치한 콘돔도 경기 스케줄이 종료되는 3일 전에 다 동이나고 말았다. 쿠바 선수들이 선수촌에 입성한 날 처음으로 품절표시등이 켜졌다.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올림픽은 더 가관이었다. 금욕주의로 유명한 몰몬교도들이 절대다수인 솔트레이크 시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 2십 5만 개의 콘돔이 선수촌에 공수된 것이다.

시드니 올림픽 때 투창 경기에 참여한 캐나다 선수 브리오 그리어는 "여기저기서 섹스판이 벌어진다. 몸매 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으니 테스토스테론 지수도 올라가기 마련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파인 스키 챔피언인 캐리 셰인버그는 선수촌의 섹스파티가 난잡하다는 설에 반대한다. "하지만 난잡한 섹스파티는 절대 아니예요. 우린 좀더 왕성하게 사교적일 뿐이죠. 자유연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랄까."

인터넷 시대와 함께 선수촌 내의 섹스파티는 보다 가속화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알파인 스키 레이서인 마르코 부첼은 인터넷으로 선수촌에서의 멋진 원나잇스탠드를 경험했다. "인터넷 덕에 선수촌 내의 어떤 선수들과도 즉각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선수들이 선수촌에 도착하면 선수들의 프로필이 기재된 리스트가 나와요. 모든 선수들이 그걸로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죠. 저 역시 그리스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온 '아름다운' 스키 레이서들과 접촉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스 스키 레이서에 한 눈에 반해서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서투른 영어였죠. 그런데 곧장 답장이 오더군요. '영어가 그다지 능숙하진 않군요. 하지만 만나보고 싶군요.'라고요." 그렇게 접선(?)한 두 선수들은 잊지못할 아름다운 섹스를 나눴다고. "아름다운 국제적 사건(!)이었죠."

선수촌에 오는 선수들은 두 부류다. 금메달을 목표로 오는 성실파, 아니면 일생일대의 호화 리조트에서 2주간의 무상휴식을 노리는 쾌락파 . 성실파에게 섹스는 금기이다. 특히, 메달이 걸린 경기 전날이라면 봐서도, 해서도 안될 게 섹스다.

배영 선수 베드포드는 "내 생활 신조 중 하나가 '회사 앞 부둣가에서는 낚시하지 마라'예요. 세상은 너무 좁아요. 다른 나라에서 온 매력적인 수영 선수와 눈이 맞았다고 해도 원나잇 스탠드와 메달 중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지를 생각하면 고민할 이유가 없죠."라며 경기 전 섹스는 선수의 커리어를 망치는 지름길임을 강조한다.

경기 전 섹스가 선수의 컨디션과 경기결과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최근 경기 전 섹스가 메달 획득의 지름길이라는 이색 연구보고가 발표되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리기 전, 예루살렘의 섹스 클리닉 담당의들은 이스라엘 팀 여자 선수들에게 경기 전 섹스를 권장했다. 소속 담당의 중 한 명은 "여선수들의 경우 오르가즘을 느끼고 난 후 훨씬 더 향상된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습니다. 특히 높이뛰기 선수와 주자들에게 섹스는 좋은 에너자이저입니다."라고 말한다.

독일팀 선수 담당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기 전 섹스에 여자, 남자 따로 없다'는 의견을 개진하며 남녀 선수 모두에게 섹스를 권장하고 있다. 올해 러시아의 한 심리학자는 독일 신문에 게재한 칼럼에서 "올림픽에서 섹스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이는 성차와 상관없다. 섹스를 많이 할 수록 메달을 딸 확률도 더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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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일의 단식과 저 위의 그들 : 지율스님 단식 47일째에 붙여

 

비나리(http://www.greens.or.kr/)

요즘은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한다. 사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잠깐 움직이면, 움직임의 대가로 이틀간을 거의 죽은 것처럼 자야한다. 그래도 여전히 몸이 아프다. 그래서 살살 움직이려 한다.

몇 번 정도 죽을뻔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집에는 전혀 효자와는 상관없는 나한테 부모님들이 약간의 방황을 참아주는 건, 그래도 살아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있지 않을까... 괜히 그런 생각을 해본다.

천성산 문제에 대해서 올 1~2월경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도롱뇽 소송으로 알려져 있는 천성산의 문제는 쉽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1. 유마힐의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다

얼마 전에 유마경을 읽었다. 삼보일배를 떠날 때의 수경스님이 유마경 얘기를 잠깐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얘기가 뭔지 잘 몰랐다.

석가 시절에 이미 깨달은 사람이 있었다. 이미 부처인 사람의 이름은 유마힐이었다. 병문안을 가라고 석가가 제자들에게 얘기를 했다. 예전에 한 번씩 유마힐한테 쫑코, 요즘 식으로 하면 선문답에 한바탕 당한 제자들이 병문안을 가기를 꺼려했다. 석가의 10 제자 중 막내인 문수가 유마힐에게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다.

문수는 유마힐에게 병문안을 가서, 유명한 세상 만물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중생들이 아픈데 석가가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문수는 부처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마지막 중생까지 해탈할 때까지 세상에 머물기를 자청하고, 그래서 문수는 문수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고, 세상 어디에선가 아픈 중생들을 해탈시키기 위하여 떠돌고 있다...

이게 유마경과 관련된 얘기이고, 실제 법전에는 나머지 9명의 제자가 왜 병문안을 가지 못하는지 핑계대는 얘기가 나와있다. 온갖 좋은 얘기나 가치도 다 뻥이라는 소리로 들린다.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다... 이게 유마경이 우리에게 던져준 질문이다.

2. 지하수법과 습지의 문제

우리나라의 지하수법은 건설교통부 소관사항으로 되어있고, 기본적인 법의 정신은 지하수를 이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어떻게 관리사항으로 유지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태계의 관점에서 지하수는 시선에서 멀어져 있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 한참 터널을 시공할 때 지하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가 논란거리에 있다고 보면 된다. 대형 택지개발과 지하수의 관계는 아직 법에서 어떻게 처리할지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건설교통부의 자하수 담당관을 한 달 전에 직접 만났다. 착하게 생긴 아저씨다... 눈 껌벅껌벅 거리면서 터널은 어떤 식으로 갈래가 잡힐 것 같다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민원인 신분이다. 택지에 대한 건, 선생님이 어떻게 좀 해결을 해주셨으면 한다고 오히려 나에게 담당관이 부탁을 한다. 마음이 답답했다.

지하수 문제가 앞으로는 사람들의 시건 한 가운데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큰 흐름에서 보면 지금 생태를 주장하는 소위 '경관생태(land-scape ecology)'와 식생 중심의 생태주의가 가져온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지하수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경관생태를 가장 활용한 사람으로서 이명박 같은 사람을 들 수 있다. 녹색이라는 이미지로 '녹색서울'이라고 얘기할 때는 조경으로서의 생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은 생태계의 1/10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녹색이라는 사실이나 나무 몇 그루 심는다는 것이 생태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천성산에 터널을 관통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지하수 문제 때문이다. 터널을 관통하면 상당히 보존가치가 높고 - 그야말로 괜찮은 - 천성산의 습지가 말라버리게 된다. 다른 산은 괜찮을까? 물론 다른 산도 무턱대고 터널을 뚫으면 터널을 통해서 지하수맥이 이리저리 잘려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다.

크게 보면 천성산 문제와 서울시의 은평 뉴타운에서의 지하수 문제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터널을 뚫으면서 천성산의 습지가 어떻게 될 것인가의 문제가 하나는 진관내동, 진관외동의 북한산 바로 밑에 30층 짜리 건물을 짓는다고 지하 10미터 이상을 파내려갈 때 다른 지역에서 - 이 경우는 산 - 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의 문제이다.

천성산의 습지의 경우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동의하는데, 이게 고속철 통과와 연관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개별 습지에 대해서는 보호해야 한다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 보호의 대가가 천성산을 고속철이 통과해서 안된다고 하는 순간에 그렇다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작은 것에 대한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한가운데 떡하고 들어앉은 것이 도롱뇽, 정확히 얘기하면 제주도롱뇽이 천성산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은 중요하지 않고 도롱뇽만 중요하냐고 하면 별 할 말은 없지만, 제주도롱뇽은 멸종을 눈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멸종위기 야생동식물보호법의 시행규칙이 내년 1월에 발효될 예정이다. 여기에 의하면 제주도룡뇽은 2급 보호대상이다. 1급도 아니고 2급 보호대상의 동물가지고 이런 난리를 펴냐고 하면, 사실 할 말은 없다. 이 시행규칙은 내년 2월에나 발효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이 이런 법리 해석의 문제로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여기에서 불법적인 요소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애초의 환경영향평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태조사가 제대로 되었다면, 그래서 제주도롱뇽을 비롯한 인근의 식생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되고, 그리고도 환경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없다고 해서 시행이 된 것이라면 적어도 적법성에 대한 논란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3. 47일째의 단식과 환경영향평가

문제인 청와대 시민사회 수석이 중재에 나선 것은 KTX와 법정소송의 2심에 올라가 있는 사건의 당사자인 지율 스님 사이에서 적당한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고, 그 주된 내용은 도롱뇽을 비롯한 생태계의 식생조사 부분을 다시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의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얘기가 불거진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고, 두 번이나 재검토 약속이 있었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이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해보자는 얘기가 나오는데 2차에 걸친, 그리고 지금의 47일 단식이 가운데 들어가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얘기가 좁혀진 것은 3개월 조사, 6개월 조사라는 두 가지 기간과 누가 할 것이냐의 문제 사이에 협상의 핵심이 들어가 있다. 잘못된 결정이라도 정부가 번복하는 일은 없다는 오만함(!)이 환경영향평가의 주체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환경영향평가가 잘못된 경우에 어떻게 한다는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를 새로 하더라도 시민사회 혹은 불교계에서 알아서 한다가 첫번째 문제이다.

두 번째 문제는 하더라도 3개월 내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영향평가가 사업시행측에서 가지고 있는 불편한 점은 현재로서는 딱 한 가지이다. 4계절 평가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서 봄이나 가을에 시작하면, 3계절 평가만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시공사들은 대개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환경영향평가를 미리 시작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착공일자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6개월이라도 두 달 동안 제대로 된 조사를 하기는 어렵다. 이걸 3개월로 줄이면, 현실적으로 조사인단을 꾸리고 또 조사를 위한 용역비를 마련하고 하여간 하다보면 한 달이 그냥 지나가게 된다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 조금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본질보다 더 본질에 가까운 문제가 그 동안에 공사를 중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도 천성산 공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사 진행과 조사 사이의 위계 문제 같은 것들이 불거져 있다.

4. 생명...

협상을 결렬되었고, 지율스님은 단식에 묵언 하나를 추가하였고, 매일 두 시간씩 사람들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하신다.

불교계가 여기에 대해서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불만감은 현 정부와 사찰 사이의 관계인데, 전국토에 대해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사를 벌여서 경제를 단기부양하겠다는 정부의 긴급처방이 산마다 사찰을 가지고 있는 불교계와의 힘겨루기 양상을 가지고, 차제에 아예 정부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거 아니냐는게 불교계가 가지고 있는 그ㄴ본적인 불만감이다.

예전 식으로 표현하면 곡기를 끊고 고단했던 삶을 정리하기로 결심을 하신 지율스님을 보면서 과연 모순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다시 한 번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생명... 생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도롱뇽 몇 마리라고 이해하는 것과 제주 도롱뇽 몇 마리가 현 사회에서 그리고 현 정권에서 죽어가는 것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한 사람의 생명이 계산상 많은 경우에 20억 정도 작은 경우 10억 정도를 계산에 포함시킨다. 도롱뇽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개 한 마리의 가치를 이런 가치환산법으로 계산하면, 한 근에 4,000원에서 8,000원 정도의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새만금 사업에 대해서도 이렇게 계산했다. 도롱뇽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과연 옳은 질문인가 그리고 옳게 생각하는 방식인가에 대해서 뿌리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방식이 사유가 '합리적인 사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과학적 근거에 의해서 합리적인 사유로 토론하자...

동일한 방식의 사유가 김선일씨의 죽음에서도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율스님의 환경영향평가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은폐와 법리적 순서가 잘못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생명의 합리성... 과연 생명에 대해서 합리성이라는 말을 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통합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고, 천성산의 의미는 도룡뇽의 의미만도 아니고, 도롱뇽이 살고 있는 깨끗한 물을 가지고 있는 습지의 문제만도 아니고, 산 자체의 의미도 아니다. 도롱뇽이 살 수 없는 곳에 다른 것들이 살기 어렵다는 의미와 함께 돈으로 표현된 모든 것만이 가치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생명과 평화...

5. 대체노선에 대한 논의와 현재의 논의

천성산을 관통하지 않는 또 다른 노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대체노선에 대한 논의의 제기가 있었지만, 이런 얘기가 별로 힘을 받지 못한 이유는 대체 노선과 관련된 다른 지역의 주민들에게서 또 다른 문제점이 있을 수도 있다는 문제제기의 이유도 있지만, 실제로는 별로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불거진 일이다.

47일... 얼마나 더 갈지 모르지만, 현재의 단식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적... 도대체 문제의 출발이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논의는 지율스님을 어떻게 양보하게 만들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한 스님의, 한 선각자의 고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야말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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