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생각하기"에 해당되는 글 149건

  1. 2007/03/27 [프로이트] 꿈은 자신의 소망을 왜곡한다
  2. 2007/03/23 [우석훈]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3. 2007/03/20 파놉티콘(panopticon) 뒤로 숨은 권력의 전략! - 감시를 통한 훈육
  4. 2007/03/19 [보르헤스] 죽지 않는 사람
  5. 2007/03/19 [박노자] 제가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6. 2007/03/10 [고전다시읽기] ‘사화’ 판치던 절망시대 정치권력 정당성 묻다
  7. 2007/03/09 [박노자]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8. 2007/02/27 [루쉰]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9. 2007/02/20 [고병권] 니체가 말하는 참사랑 (1)
  10. 2007/02/14 [안치운]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11. 2007/02/13 [그림] 쿠르베와 밀레의 풍경화
  12. 2007/02/12 [이학수] 금주법, 매카시즘, 그리고 뉴라이트
  13. 2007/02/07 [박노자] "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4)
  14. 2007/02/07 [고전다시읽기] ‘선물’은 부족 공동체 묶는 끈
  15. 2007/02/06 [진중권]죽은 사물의 부활
  16. 2007/02/05 [박노자] 근대적인 "민중"에 대한 생각
  17. 2007/01/31 [박노자]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18. 2007/01/31 황금에 대한 생각
  19. 2007/01/23 들뢰즈의 ‘기관 없는 몸’
  20. 2007/01/23 레비나스 - 불면과 일리야
  21. 2007/01/23 몸 철학자 메를로-퐁티, ‘봄의 나르시시즘’
  22. 2007/01/23 “창조적 삶을 살아라!” -열정의 철학자 니체
  23. 2007/01/23 세상을 두 번 놀라게 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이론
  24. 2007/01/23 관계의 생성을 논하는 접속의 논리학 ‘리좀(rhizome)’
  25. 2007/01/23 혼재면(混在面)을 향해
  26. 2007/01/23 기예(技藝)/기예(氣藝) “암적인 리좀과 창조로 나아가는 리좀”
  27. 2007/01/23 되기(devenir) “자신의 존재의 외피를 뚫고서 나아가라.”
  28. 2007/01/23 [생각하기] 화가는 무엇을 그리는가 (1)
  29. 2007/01/23 [생각하기]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30. 2007/01/23 [생각하기] 잠재성과 가능성
 [프로이트] 꿈은 자신의 소망을 왜곡한다



욕망을 생물학적 필요의 충족이나 결여된 표상의 획득으로 이해하는 순간, 꿈은 어떤 ‘의도를 지닌 인격’의 표현물로 이해된다. 이 숨어 있는 인격이 꿈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이유는 낮 동안에 법적, 도덕적 검열을 받기 때문이다. 밤에는 그 마음속의 검열자도 꾸벅꾸벅 졸고 있다. 문제는, 졸기는 해도 완전히 쉬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수면 중에도 ‘숨어 있는 인격’은 검열자의 눈을 피하느라, 마치 범인이 탐정의 눈을 피하기 위해 범죄 현장을 어지럽히는 것처럼 자신의 소망을 왜곡시킨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 사례 1 - 어느 여성 환자의 꿈

여자는 저녁식사에 어떤 사람을 초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집에는 훈제 연어가 조금 있을 뿐, 손님을 접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시장을 가려는데 일요일 오후라 상점 문이 닫혀 있고 전화도 고장이 나서 배달이 되지 않는다. 결국 그 손님을 초대하려는 소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분석 : 여자에게는 친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항상 자신의 친구를 칭찬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질투의 감정을 느낀다. 남편은 통통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다행히 그녀는 마른편이다. 그러나, 이 여자친구도 자신이 좀 더 살찌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는 더 위기의식을 느낀다.


여자의 소망은 친구가 살이 찌지 않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찌고 싶어 하는 친구의 소망이 좌절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소망이 채워지지 않는(표면적 소망-손님 초대의 실패) 꿈을 꾸고 있다. 자신을 피해자로 보이게끔 함으로써 자신의 범행사실을 감추는 범인처럼 말이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 사례 2 - 어느 처녀의 꿈

한 젊은 여자의 언니에게는 칼이라는 어린 아들이 있다. 칼의 형 오토가 있었지만, 여자가 언니와 같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을 무렵 죽고 말았다. 여자는 조카인 오토를 꽤 귀여워했었고, 현재의 칼도 귀여워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옆에 칼이 죽어 있는 꿈을 꾼다.


분석 : 이 젊은 여자는 언니와 함께 살 때, 집을 방문했던 한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언니의 반대로 그 남자와의 사랑은 좌절을 겪는다. 오토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그 남자와 마주쳤던 것이 마지막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언니의 집을 나오게 된다. 하지만 칼이 죽는다면? 장례식장에서 다시 그 남자와 마주칠 수 있을까? 즉 남자와 다시 마주치고 싶은 여자의 소망이 귀여워마지 않던 조카, 칼의 죽음으로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프로이트의 결론은 이렇다. “꿈은 어떤 억압되고 배척된 소망의 충족이다.” 앞의 사례처럼 고통스러운 꿈 표상은 진정으로 소망하는 표상을 감추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법적, 도덕적 검열을 피하기 위해 왜곡된 형태로 자신의 소망을 드러내는 꿈. 별 거 아닌 것이라 생각하고 지나쳤던 꿈들이, 실은 당신의 ‘숨기고 싶은 본심’을 그대로 담고 있을지 모른다.



- 박정수 <정신분석학 입문: 프로이트, 파농, 푸코, 지젝 탐구> 중에서

- 출처: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들키고 싶지 않은 ‘본심’이 꿈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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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명랑국토부]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 우석훈/성공회대 외래교수


리빠나 모노 데스네, 리빠나 모노 데스네

낚싯대 접고, 고무 장화 벗고

순천의 특급 호텔 싸우나에 몸 풀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써비스 한 번 볼만한데 음, 음

환갑내기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그저 아이스 박스 가득,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

(정태춘, <나 살던 고향> 중)



국토라는 말을 듣자마자 어떤 생각이 들까? 조국강산이라는 말이 생각나고, 시인 서정윤이 노래하였던 먼 옛날 만주벌판을 지나 이 땅에 정착했던 그 옛날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국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개발해야 잘 산다”는 붉은 글씨로 논밭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와 “xx지역 개발 막는 정부는 각성하라”와 같은 날선 구호들이 연상된다. 내가 사는 집 앞의 “지주들 단결하여…”라는, 문정 법조단지에 보상금을 높여달라는 구호들이 국토와 관련되어 있고, 골프장, 임도, 경마장 등등 전국 그 어느 곳이든 개발이익과 관련해서 몸살을 앓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런 현장은 한 편으로는 “대한민국은 공사중”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며, 차를 세우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태춘의 해금 반주와 함께 애절하게 울려펴지던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는 노래 가사를 가슴에 떠올리게 한다.


서양에서 가장 먼저 화폐를 사용한 사람들은 페니키아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또한 가장 먼저 창녀 제도를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오따르는 상품화폐가 아닌 진짜 화폐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기 딸을 창녀로 팔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뭔지 아는” 사회에서야 비상품 화폐라는 제도가 도입될 수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딸을 파는 비정함과 물건이 아닌 화폐를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내어주는 정신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선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아버지가 딸을 내어주고 몸값을 받는 것과 똑같은 원시적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국토를 혹은 고향을 내어주고 외지에서 온 골프장 주인이나 건설업체에 동네마다 환영 깃발을 걸어놓고 있는 저 사람들이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의 진짜 아버지일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리스 시대의 페니키아처럼 결국 사라지고 말 타락한 문명의 길 한 가운데 들어서 있는 셈이다. 정부는 “돈돈”하고 외치는 건설업자의 입에 새만금을 내주었고, 지방정부는 인천 계양산부터 제주도 한라산까지 마찬가지 방식으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생태계를 내어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신석기부터이든 아니면 요즘 얘기하듯이 구석기 문명부터이든 이 땅에 깃들어 산 것은 긴 땅의 역사에 비하면 찰라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 민족은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비장한 심정의 아버지처럼 “단돈 육만엥”에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있다.


몸서리치는 이 국토 인신매매의 현장에서 우리는 딸을 내어주는 아버지 또는 주5일제를 내세우며 “나에게 놀 곳을 내놔”라고 말하는 비정한 성매매범과 논리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지방정부는 포주고, 중앙정부는 더 큰 포주고, 손님들은 “이렇게 지저분해서 내가 돈 쓸 맛이 나겠어”라고 외치는 관광객이다. YS가 사투리로 “강간 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실수를 했다고 했는가? 현실은 ‘관광입국’을 꿈꾸는 온 국민이 ‘강간입국’을 철학적으로 외치는 셈이다.


이걸 눈 앞에 보면서 경제학자가 왜 “육만엥 밖에?”라고 질문하는 것은 정신분열증이다. 이 사태를 보고도 정신분열증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있을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이 상황에서 뇌구조가 붕괴하지 않을 수 있는 알리바이는 딱 하나다. “저들은 지방토호들이다.” 그리고 “저들은 지방토호”들이다를 입증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상황을 보면 어머니처럼 그 지역에서 살포시 살았던 주민들 중에 돈 독 오른 사람은 없다. 이 싸움은 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랑이 같아 보이지만, 만약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현실을 훨씬 부드럽고 정신분열증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명랑해질 수 있다.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퐁당퐁당 던져줄 수 있게 된다. 돈독오른 아버지를 비판하기 어렵지만, 돈독 오른 날강도와 포주를 비판하기는 너무 쉬울 뿐 아니라 즐겁기까지 할 수 있다. 지역별로 좀 다르지만, 돈독 올라 지역의 생태계를 외지에 팔아넘기는 지역의 외지인 토지소유 비율은 60%가 넘는다. 부재지주와 악덕지주 그리고 그들과 붙어먹었던 마름들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한 것이 바로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의 정신이다. 왜 아버지는 딸을 이렇게 파실 수밖에 없느냐고 비장하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저들은 조선조부터 이 땅과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근본정신을 배신한 바로 그 내부 부패세력, 친일파 그리고 유신세력과 연결된 악질들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점점 명랑해진다. 멀게는 몰리에르의 코메디와 가깝게는 아르헨티나 에두아드 갈레아노의 글들과 만나게 된다. 몽환적이거나 명랑하거나 두 가지의 방식이 있는데, 판소리와 마당극에 등장하는 우리의 “가짜 아버지” 다루는 방식은 명랑한 방식이다.


그런게 내가 생각하는 명랑국토의 정신이었다. 진짜 아버지를 비난하는 컴플렉스 가득한 시리적 증후군의 두려움 없이 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는 가짜 아버지를 두둔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명랑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진취적인 미래 자세이며, 또한 판소리의 즐거움과 만나고 장터의 흥을 만나는 흥겨운 길이 아니겠는가. 여러분들도 “돈이 뭔지 아냐?”는 지방토호와 건설업자들에게 어깨에 힘빼고 “명랑이 뭔지 아냐?”는 작은 돌덩이를 퐁당퐁당 던져주시길 바란다. 이 시대에 국토가 장터처럼 흥겹게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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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panopticon) 뒤로 숨은 권력의 전략! - 감시를 통한 훈육



“죄인의 가슴과 사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하고,국왕을 살해하려 한 단도를 집어 유황불로 지지고…(『감시와 처벌』1부「신체형」 중)”


법률 기록에 의하면 ‘감금’ 이전의 형벌은 ‘수형자의 신체’, 즉 끔찍한 체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들은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였고, 비용 부담이나 집행 절차에 있어 국가가 관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또한 잔혹한 처형 장면으로 대중의 폭동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권력은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된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차츰 과시적 의식으로서의 체형, 그리고 감금형과 강제노동 등 새로운 형태의 형벌이 도입된다. 이것을 진보된 형태의 형벌로 보고 인본주의적인 변화로 진단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푸코는 그것에 회의적이었다. 형벌의 변화는 한계에 부딪힌 권력이 그 대안으로 전략 · 전술을 바꾼 결과일 뿐이라고 보았다.


일망 감시체제: 파놉티콘


18세기 말 영국의 제레미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이름의 아주 특수한 건축 설계도를 고안했다.


독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하나는 안쪽을 향하여 탑의 창문에 대응하는 위치에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에 면해 있어서 이를 통하여 빛이 독방을 구석구석 스며들어 갈 수 있다. …역광선의 효과를 이용하여 주위건물의 독방 안에 감금된 사람의 윤곽이 정확하게 빛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탑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망 원형 감시의 이 장치는 끊임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있고, 즉각적으로 판별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적 단위들을 구획 정리한다. …충분한 빛과 감시의 시선이, 결국 보호의 구실을 하던 어둠의 상태보다 훨씬 수월하게 상대를 포착할 수 있다. 가시성의 상태가 바로 함정인 것이다. (『감시와 처벌』중)




애초에 파놉티콘은 감옥 건축을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파놉티콘이 감옥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병원, 정신병동, 공장, 병영, 즉 개인들의 감시와 거기와 관련된 조직의 문제를 전제하는 모든 기관들의 구축에도 확대 적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상에서 흔히 시간을 보내는 거의 대부분의 기관들이, 권력으로 하여금 우리를 감시하기 쉬운 구조로 지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러한 감시 형식은 놀라운 훈육효과를 허용한다. 개인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계측과 검증이 가능하며 보다 쉽게 통제가 가능한 개인들을 추출해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파놉티콘은 학생, 수감자, 병자, 혹은 광인에게 빛 속에서 항시 그들을 염탐하는 감시인들이 있고, 잠재적으로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준다. 이러한 가시성의 체제 하에서 매 순간 감시 받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각각의 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억압한다.

덕분에 권력은, 감시를 통해 생명을 가두거나, 제거하거나, 억압하지 않고서도 개인의 신체와 행동에 훈육효과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감옥의 구조로 권력의 숨은 의도를 파헤친 푸코의 놀라운 연구 성과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권력에 훈육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자각을 깨우쳐준다.

--- 심세광 <미셸 푸코 가로지르기> 중에서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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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죽지 않는 사람

2007/03/19 09:54

보르헤스는 [죽지 않는 사람]을 빌어 불사에 대해 말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불사의 존재임을 확인한 후, "불락에서 [천일야화]를 필사하기도 하고, 사마르칸드의 감옥에서 장기도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하며 수많은 삶을 산다. 불사의 존재란 이처럼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죽는 존재고, 그 모든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삶 안에 담을 수 있는 존재다.

죽음을 거부하고 기존의 동일한 삶을 지속하려는 집착을 던진다면, 사실은 우리 모두가 불사의 존재임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 한계레신문 2007. 3. 16. [책과 지성], 이진경 [고전다시읽기] 소설로 담은 '색즉시공 공즉시색'(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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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제가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만감: 일기장  2007/03/17 17:11 

  

 출처: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980   


사람이 왜 신을 찾게 됩니까? 레닌의 고전적인 설명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탐색하지 못한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원시공동체 해체기의 인간의 집단을 갖고 이야기한다면 맞겟지만 이미 완숙한 계급사회 안에서의 한 개인의 다양한 내면적인 움직임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종교발생론이 아닌 듯합니다. 붓다가 병들고 가난하고 노년이 된 사람의 모습,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직면한 것이 수행의 계기가 됬고, 예수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의 "악마"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또 하나의 목소리겠지요?) 속삭임에 유혹을 받았다가 결국 세속의 권력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 계기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모순이든 계급 사회의 현실적인 모순이든 우리가 당장 현실적으로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할 때에 인간에게 종교심, 즉 자기 내면 안에서의 "신성한 것", 모순 해결의 능력을 갖는 "영원하고 안락스러운 것"을 찾으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저 같으면 제가 부딪쳤던 모순이 "폭력"이라는 사회의 현상이었는데, 그 시기는 아주 일렀습니다. 지금 기억 같으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한 번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위대한 조국 전쟁" 관련의 영화가 또 방송됐습니다. 소련이 철저하게 군사화된 사회이었는데, 텔레비전의 일정표 중에서 상당부분은 소독 전쟁 ("위대한 조국 전쟁") 때의 소련군을 찬양하는 "국책 영화"들이 차지했지요. 대체 전쟁 영화란 다 폭력적이지만, 그 때에 제가 본 영화는 개중에서도 좀 특별했어요. 감독에게 무슨 사디즘 취향이 있어서인지 그 영화의 여러 "클라이막스" 중의 하나는, "영웅적인 소련 군인"이 독일 여군의 가슴에 칼을 꽂아 그 여군을 "장렬히 처단"시키는, 꽤나 긴 장면이었지요. 죽어가는 "적"과 그 옆에서 "아, 참, 내가 수고했구먼!'과 같은 만족스러운 표정의 "아군의 용사"를 카메라가 약 5분간 클로즈업한 것이에요. 그런데 제게 있어서는, 그 장면의 효과는 감독이 의도한 바와 정반대이었어요. 제 어머니와 같은 중년의 여성을 근육질의 남성이 칼로 찔러 죽이기에, 저는 "불쌍하게 죽은" 그 여성에 대한 동정과 함께 제 어너미도 누군가가 이렇게 죽여 제가 고아가 될 것 같은 절망과 공포만을 느꼈을 뿐이지요. 그러다 영화를 보다가 씩씩해야 할 남아 초등학생답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 후로는 "국책 영화" 시청을 가급적 피했는데, 학교에서 교련을 시키고 전쟁게임까지 시키는 것이 하도 부담이 되기에 근육질의 남성들이 무기라는 나쁜 노리감을 갖다가 남을 괴롭히는 일이 없는 좋은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한 번 이렇게 "국책 영화"의 폭력성에 놀란 뒤에는, 제가 이 세상에 폭력을 금하는 윤리체계가 있는가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어요. 소련의 공식 윤리체계는 "적군의 살해" 정도를 당연지사이자 "남자다운 일"로 봤기에 제가 기독교에 눈을 돌렸는데, "애국애족"을 외치는 것은 주류 기독교 집단, 즉 희랍정교회도 마찬가지이었어요. 그러다가 병역거부의 전통을 자랑하는 비주류 교파 - 소련말기에는 그게 주로 침례교파이었어요 - 에 관심을 가졌다가 그 쪽의 아주 엄격한 "집단적 규범"에 압박감을 느껴서 결국 원시 불교의 경전을 읽는 것을 본업으로 삼게 됐어요. 저는 고교시절에 <법구경>과 <숫타니파타>의 초역본을 읽고서야 자기 내면에서의 분노와 그 분노의 원천인 탐욕, 아집, 어리석음을 없애고 자기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역시 "남성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을 찾았어요. 남을 칼로 찌를 생각과 능력이 없는 저 같은 사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결국 제게 종교적 심성을 심어준 것은 "폭력", 그것도 알고 보니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었던 셈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미 고교시절부터 인식한 이 문제의 복합성은, "폭력"의 사회적인 연원에 있었던 것이지요. 군대를 운영하는 국가,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계급, 지배계급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계급적 지배 질서가 있기에 결국 칼침 놓는 일을 찬양하는 영화들이 만들어져 저와 같은 사람들을 울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불교 같은 종교의 경전들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는 내면의 길, 즉 팔정도를 가르치지만, 내면이 아닌 외면의 차원에서는 불교가 역사상 한 번이라도 계급적인 평등을 외치거나 승려가 아닌 속인의 병역거부를 제창했던가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삼계도와 같은 특수 불교 종파, 그리고 일부 특수 개인 빼고는, 불교는 일부 성직자의 평화로운 "내면의 구도" 가능성을 지배계급의 폭력자로부터 보장 받기 위해 폭력자와의 대결/투쟁은 물론 폭력자에 대한 솔직하고 바른 말까지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지요. 사상으로서의 불교는 제 초발심에 그대로 맞지만 제도로서의 불교에 대해 늘 느끼는 것은 심한 배신감일 뿐입니다. 종교적 심성의 초발점은 "모순"과의 만남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만남의 과정에서는 종교적 심성은 생기지만, (계급 사회의 하나의) 제도로서의 종교는 이 "모순"의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금으로서는 주로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를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여 절에 가지 말자!"라고 외치면 제 자신도 마음의 일면에서 미안함을 느끼지만 사실 부처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승방에서 예비군 군복이 걸려 있다는 것이 어쩔 수없다는 셈친다 하더라도 <법구경>을 갖다가 설법하시는 분들이 총들고 살인 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계속 하시고 계시다면 - 즉 병영화된 사회와 불교 교의의 기본적 충돌에 대한 의식조차 없다면 - 이건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초발심도 배반하고 짓밟는 "가사 입은 도둑"의 집단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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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사화’ 판치던 절망시대 정치권력 정당성 묻다

고전 다시읽기 / 조식 <남명집>



지·리·산이란 ‘앎이 다른 산’(智異山)이다. 앎이 다르면 꿈이 달라지고, 꿈이 다르면 삶이 달라진다. 이미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은 도회나 들에서 살 수가 없다. 지리산은 앎과 삶이 다른 사람들을 품어온 산이다. 파르티잔, 이현상과 남도부가 지리산으로 숨어든 까닭도 그 산이 ‘앎이 다른’ 이들을 품어온 이력 때문이리라.


16세기 조선 중엽, 도회(서울)와 들(김해)을 벗어나 지리산 밑으로 파고든 이가 있었다. 짱짱한 유교의 시대였음에도 짐짓 ‘다른 생각’을 품은 <장자>에서 이름을 따 남명(南冥)으로 자호한 이였다. 조식(1501~1572)! 이황과 한 해에 태어난 유자가 그였다. 하나 고작 책상물림의 백면서생은 아니었다. 방울을 옷 춤에 달아 거기서 나는 소리로 제 행동거지를 단속한(敬) 엄한 ‘선비’였으면서 동시에 칼로써 정의(義)를 세우려던 ‘사무라이’이기도 했다. 곽제우가 그의 제자였음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유자로서의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비틀어버린 것은 연이은 사화였다.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송인수를 비롯한 많은 벗들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으며 몰살을 당했다. 그에게 이 시대는 실로 절망의 시대였다. 마치 ‘광주사태’가 1980년대 젊은 지식인들에게 물었듯, 연속된 사화는 당시 살아남은 유자들에게 물었다. “정당한 권력이란 무엇이냐?” 라고.


적어도 이황과 조식에게 중년이후의 삶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황이 스스로 퇴계, 즉 ‘골짜기로 물러난 사람’으로 정의하고 긴장된 삶을 살았다면 조식은 남명, 즉 딴 세상으로 떠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황이 정권으로부터 물러서긴 했으나 돌아서지는 않았다면, 조식은 끊고서 다시는 돌아서지 않았다. 미진한 듯 도회에 끈을 남긴 동년배, 이황을 그가 힐난한 것도 그래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 사태는 유자였던 조식에게 몇 가지 선택적 질문으로 와 닿았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아버지와 숙부를 죽인 정권에 충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 사이에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유교이념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 관계는 천륜(운명)이요, 국가와 신민의 관계는 인륜(계약)이다. 부모를 죽인 정권에 저항은 못할망정 참여하는 것은 유교의 기본원리에 어긋난다. 이것이 조식이 유자였으면서도 장자풍의 은둔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다. 유교적 이념에 충실할수록 도교적 실천으로 빨려드는 아이러니, 아마 이것이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든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둘째, 정치사상의 차원에서 사화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연이은 살육의 사태에 대한 궁극적 책임자는 누구인가. 조식은 그 근원적 책임이 군주에게 있다는 점을 단단히 못 박는다. 숨어사는 그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면서 손길을 내민 군주에게 이런 날선 언어로 응대한 터다.


“나랏일은 벌써 결단이 났소이다. 신하와 관리들은 둘러서서 쳐다보기만 할 뿐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소. <논어>에서 말하듯 ‘어쩌면 좋을까’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시점은 진작 지나가버린 거요. 그런데도 임금이 이 꼴을 보고서도 모른 척한다면 장님이요, 알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이 나라의 소유자가 아닌 것이외다.”(“음식물을 베풀어준 것을 기화로 올리는 상소문”)


정책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는 자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의 형국이라는 것. 유교이념에 의하면 군주란 ‘하늘 아래 자기 땅이 아닌 데가 없고, 인민 가운데 자기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는’ 국가의 소유권자다. 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데 지금 조선의 국왕은 정책적 결과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중종, 명종, 선조는 옳은 군주가 아니다. 섭정의 명목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문정왕후(명종의 모친)에 대해 “궁궐 속의 한낱 과부에 불과하다”(즉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는, 사적 존재다)라는 파격적인 비판을 행할 수 있었던 것도 ‘정치가는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인식의 선상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는 그 책임의 소재를 더욱 분명히 한다. “내가 권할 말씀은 단 한 마디, 군의(君義)라는 글자올시다. 이 글자로써 임금의 몸을 닦고 나라를 잡는 근본으로 삼기를 권하외다.”(상동) 여기 ‘군의’, 즉 “임금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은 거꾸로 ‘임금이 의롭지 못해 빚어진 사태에 대해 통절히 반성하라, 또는 문제의 핵심은 곧 임금이 의롭지 못한데 있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임금이 정의로워야 한다’라는 이 한마디에 그의 정치 생각이 응축되어 있다. 당시 정치의 실패와 천륜 파괴의 궁극적 책임이 ‘임금의 불의’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조식에게 정치는 적법한 행정절차, 분배의 정의, 사건 처리의 효율성 따위가 아니었다.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도덕적 행위였다. 이것은 군주뿐만 아니라 정치참여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그가 “선비의 가장 큰 일은 정치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그 순간에 있을 따름”이라고 지적한 것도 정당성에 대한 판단과 선택에 정치성의 핵심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선비들을 다 죽여 놓고도 뻔뻔하게 왕정의 이념을 내건 정부와 그런 정부에 눈을 질끈 감고 꾸역꾸역 참여하는 지식인(선비)들의 몸짓, 두 방면에 대한 문제제기다.


셋째 ‘폭력집단으로 타락한 국가에 대해 지식인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실천적 질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선택을 가상할 수 있다. 망명, 혁명 그리고 은둔의 길이다. 첫째, 망명이란 춘추전국시대처럼 유동성이 강한 사회는 몰라도 반도의 갇힌 지형에다 이미 중앙 집권력이 강고해진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둘째, 혁명은 내심으로야 강한 충동을 가졌을지 모르나(그의 ‘칼’에 대한 깊은 욕망을 두고 보건대) 실제로는 행동으로 드러낼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소극적이긴 하지만 은둔 외에는 정치적 불만을 표현할 길이 봉쇄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은둔은 정치적 영향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힘을 발휘할 계기일 수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는 조선이 유교경전을 통치정당성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조식의 행동이 근거하고 있는 경전 구절은 “천하에 도가 있으면 출사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논어>)는 대목인데, 이것은 권력자에게 당혹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은둔 자체가 ‘도가 없음’ 곧 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숨은 선비가 신망을 얻을수록 권력의 부당성은 더욱 짙게 채색된다. 즉“정당하면 나아가고, 부당하면 곧 숨는다”는 선비의 출처(出處) 구도는 은둔자의 도덕적 파워에 따라 정권의 정당성이 결정되는 곤혹스런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둔은 겉으로는 도피일지 모르지만, 안으로는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 된다.


요컨대 조식의 행동과 언설은 여러모로 정치사상적 문제를 제기한다. “유교국가에서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서 비롯하는가”라는 주제 아래 (1) 충성과 효도 사이의 선택문제, (2) 정치적 실패(사화)에 대한 책임의 문제, 그리고 (3) 부당한 권력에 대해 신민은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문제가 그것들이다.


조식은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호한한 연구를 남긴 이황에 비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도리어 그는 글에 파묻히는 것을 경계하였다. 각인이 처한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령이라고 믿었다. 현인이 남긴 전적이나 성인의 경전마저도 나의 성찰과 실천을 위한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실천지향의 노선은 그에게 ‘칼을 찬 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넉넉한 것인데, 임진왜란을 맞은 그의 제자들이 각처에서 의병으로서 활동한 것도 이런 가르침 때문이리라. 본시 스스로 남긴 자료가 적은데다, 훗날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그의 제자들이 몰락하는 와중에 또 남은 글마저 덧칠을 당하면서 그의 생각의 전모를 알기 어렵게 된 점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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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2007/03/09 12:56
 

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 만감: 일기장 

 출처 :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862   

최근 며칠 도올의 "구약 폐기론"으로 세상이 약간 시끄러웠습니다.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구약을 읽었을 때에는 가끔 가다 이게 무슨 대량 학살 찬양서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의 땅을 정복했다는 걸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몇 백 명을 칼에 맡겨라고 분부하셨다"는 이야기가 하도 자주 나와서 제 어린 심정으로는 가히 공포없이 읽기가 어려웠어요. 실제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에 가나안의 정복이 없었다는 사실 ("원 유대" 부족들이 원래 주민들과 실제 "섞인" 것이지요)과 야훼가 원래 벼락과 전쟁, 무사의 신이어서 야훼의 숭배에 남성 우월주의적, 폭력적 요소가 강했지만 이는 고대 유대인의 문화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는데, 구약에 대한 반감은 오래 갔습니다 (<아가> 정도는, 여성 가슴에 대한 관능적인 묘사를 포함한 애로틱한 요소도 있고 해서 참 좋았지만....). 결국 종교의 텍스트란 해석 나름이고 구약의 살인주의적, 선민주의적, 폭력주의적 요소들을 "해석"을 통해 어느 정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예컨대 상징적으로만 이해하기를 촉구할 수 있지요) 이걸 인생의 지침서로 삼으면 큰일 나지요. <법구경>이나 신약, <도덕경>과 같은 수준의 보편주의적인 종교 텍스트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수준이기에 구약과 같이 논하기도 어렵지만 제가 봤을 때에는 내부적 모순이 적지 않고 일부는 아나코코뮤니스트로서의 예수의 본격적인 주장과 거리 먼 주장들도 수록된 듯합니다. 예컨대 재판관에게 가지 말라고 하여 사법부 권력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이 세상 (즉, 현존하는 계급 사회)이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부 축적의 부도덕성을 강조하는 예수는, 갑자기 "황제 (시서)의 것을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주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물론 어디까지 예수 본인의 행적에 대한 (이미 애매해진) 기록이고 어디부터 성경 편찬시의 가탁인지 알 게 없어서 "예수의 말"이라고 단정짓기 어렵지만 이게 참 모호한 표현에요. 당장에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일단 바치고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모르지만 만약 보다 깊은 차원에서 "황제에게의 충실한 신민 의무 다하기와 하나님 섬기기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면 이는 원시 기독교의 일부 "반란적" 주장들과 잘 안맞아요.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 전시에 전쟁 자금으로 쓰인다면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의 입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사실, 일반 선남선녀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나라"의 충실한 신민으로 살아가기가, "하나님"을 자기 마음 속에서 찾는 것보다 훨씬 쉽지요. 학교의 상황을 생각해보시지요. 자기 성적을 올리려고 자기의 등수를 높이려고, "황제의 나라" 규칙대로 "열심히 사는" 아이들이 많지만, 서열화된 등수 체계의 비윤리성, 반교육성을 반대하고 탈학교 운동을 벌이고 대안 학교를 찾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있긴 있어도 아직 소수지요. 즉, 이미 우리 마음까지도 상당부분 다스리는 "황제"를 받아들이기는, 무형 무성, 불가시, 불가문의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폭력들을 다 거부하는 "하나님"을 위주로 종교를 조직하자면, "황제"에 대한 거부의 수위를 조금 더 높이는 것이 적절치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거부 수위를 높여도 어차피 대다수가 마음 속의 하나님을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보다 "다들 가는" 군대에 순순히 가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 불가피하다 해도 - 하나님의 논리를 배반하는 행위라는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저 같으면 예수의 "황제와 하나님"의 담론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을 것입니다: "저항할 만한 자신이 없으면 황제에게 당신의 것이 빼앗기도록 일단 두라.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만하지 말라. 황제의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수 없는 것이고, 황제를 거부하는 자만이, 최소한 마음으로라도 황제를 떠난 자만이 하나님에 접근할 수 있다".


제 종교도 아닌데, 이렇게 종교의 경전을 고쳐보는 것이 외람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산 종교가 되자면 그 경전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 계속 이루어지고, 예수 그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 일부의 "빈란적인" 의지와 성경 편찬 당시의 순응주의적 분위기 사이의 차이도 명확히 밝혀져 원시 기독교의 "참신한 반란"에 대한 사상사적 복원도 좀 이루어져야 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종교란 믿는 자의 것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이가 결국 황제에 대한 보다 강력한 거부에 개인적으로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의 대형 교회 같으면 하나님 자체도 이미 황제화됐으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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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든 안락한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그 반대의 생활로 떨어져 버렸다면, 그 떨어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서』)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 ‘중국의 기상나팔’로 불리는 루쉰은 1881년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고 아버지가 병환을 얻으면서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루쉰은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약방으로, 돈을 구하기 위해 전당포로 뛰어다니게 되었는데 약방 계산대와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이 느끼는 세상의 벽만큼이나 높은 것이었다.


“약방 계산대는 내 키만큼 높았고, 전당포의 계산대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었다” (『자서』)


약방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도 익숙했던 현학적인 전통의 세계였기에 루쉰의 눈높이를 뛰어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 화폐의 소중함, 그리고 더러움을 동시에 알게 해준 곳이므로 심리적으로 훨씬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루쉰이 느꼈던 세상의 두 가지 벽이다. 또한 이것은 전통적인 낡은 시대의 유물(약방), 그리고 자본주의적 질서인 서구의 문명(전당포) 사이의 긴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루쉰은 성인이 되어 이 두 가지 것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게 된다.


성장한 루쉰은 양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의학을 통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겠다는 결심으로,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곳에서 인생의 길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바로 ‘환등기 사건’이었다. 수업시간에 환등기로 뉴스필름을 보여주었는데 어떤 중국인이 군사재판을 받고 있고 그 주위에 다른 중국인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이었다. 그 중국인은 곧 일본인에 의해 총살되었고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중국인들을 욕하고 있었다. 루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수련하는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 환호할 수 있는가?’ 라는 분노와 함께 자기 동족이 죽는 것을 둘러서서 가만히 보고 있는 중국의 무지몽매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자신도 무지한 중국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술을 통해 몸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의 낙후된 정신을 각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사의 길을 포기한 채 비로소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허구를 비판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들로 10억 중국인을 깨어나게 한 ‘중국의 기상나팔’ 루쉰이 탄생한 것이다.

- 권용선 <루쉰을 읽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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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니체가 말하는 참사랑

2007/02/20 10:29
 

[니체가 말하는 참사랑]


비둘기 걸음으로도 폭풍을 불러올 줄 아는 사람, 혁명에 웃음을 선사한 사람, ‘신은 죽었다!’ 라는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은 사람, 하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숫기 없는 사람.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에게는 도덕사학자 파울 레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살로메와의 관계에서 연적이기도 했다. 니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살로메에게 편지를 직접 전해줄 용기가 없어서 레에게 대신 전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연적에게 편지를 전해줬으니 그 편지가 살로메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었고 당연히 니체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현실적인 사랑에는 서툰 니체였지만 이론으로는 사랑에 대한 장광설을 펼쳐놓았다. 니체가 말한 사랑에 대해 한번 들어보자.


흥미롭게도 니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소유욕이자 상대방을 자기화 시키려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소유(Property)라는 단어를 보면 소유라는 뜻 외에도 재산, 고유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은 없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도둑질하여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소유는 한 마디로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도둑질을 은폐하기 위해 정체성이니 고유성이니 하는 말들을 끼워 넣어 신비화 시켜버렸다.’ 라고 니체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니체는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리를 사랑스럽게 창조하고 정말 친구를 사랑한다면 사랑할 친구를 만들어라. 즉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사랑할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만드는 것이다.

니체의 사랑은 놀랍고도 힘들다. 하지만 그만큼 아름답다.

- 고병권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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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운]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2007/02/14 13:03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지난주에 열린 한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 갔었다. 곧 복학할 제자가 복싱을 배워 처음으로 하는 경기라서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요사이 케이원(K-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격한 운동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줄 알지만, 그런 싸움질은 복싱과 크게 다르다. 순수한 아마추어 복싱도 잊혀진 스포츠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시 신인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는 아마추어 복싱연맹 주최로 신인을 위해서 일년에 한번 열린다. 한번 출전하면 다시는 출전할 수 없는 것이 대회의 규칙인 모양이다. 전국 신인 아마추어 복싱대회가 있지만, 권투 체육관이 주로 서울에 있기 때문에 서울 대회는 아마추어들을 위한 전국대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대회가 열리는 대학 복싱체육관은 낡고 비좁았다. 선수들은 구경 온 이들과 함께 바닥에 누워 쉬면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서서 몸을 풀어야 했다. 이들이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곳도 없어 보였다. 연맹이 구청의 체육관을 빌려서 진행해도 이것보다는 나은 대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은 죄다 완강하게 주먹을 쥐고 링에 올랐다. 서툰 선수들이지만 허투로 하는 시합은 없었다. 어둠 속에 눈이 빛나 보였지만 몸은 얻어맞고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했다. 링 아래에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선수들이 늙은 코치가 되어 자신의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어린 아마추어 선수와 늙은 코치는 희망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복싱이 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혼자 추는 춤도 아니고 둘이서 추는 춤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싱은 격한 스포츠이긴 하지만 삶의 격정과 슬픔이 묻어 있다. 아마추어 복싱은 육화된 순수이다. 젊은 아마추어들 선수들에게 복싱은 삶의 동력과도 같아 보였다. 말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좁은 링에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피한다. 상대방과 갈등하는 복싱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의 소산일 터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아마추어 복싱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야말로 링 위에 오른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일 터이다.


복싱을 즐기는 제자를 보면서 삶과 연극 그리고 복싱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의 결과이고, 말과 같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어떤 것을 생산하는 씨앗이다. 그러므로 삶과 연극 그리고 복싱에서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삶의 큰 자장이며 밑변이다. 말 없는 삶이 있을 수 없고, 삶 없는 연극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복싱은 육체적 긴장을 넘어서는 절실함이다. 내 앞에 바로 상대가 있고, 나와 상대는 서로 뚫어지게 쳐다보아야 한다.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눈은 링 위에 없다. 연극은 말하는 예술이되, 말하는 이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재의 예술이다. 복싱은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저 아마추어 선수들은 2분 4회전 동안 쓰러지지 않은 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쓰러져 지리멸렬해지면 금세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링 위의 삶은 눈물겨운 좌초이며 끝장이다. 한 생애가 몸부림치는 것이 아마추어 복싱이다.


연극이 말하는 이들을 위해서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처럼, 복싱은 링이라는 공간 위에서 벌어진다. 복싱은 주먹 이전에 링이라는 공간의 역사이다. 연극은 사람이 사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독백, 방백, 고백, 침묵 등. 이 모든 것이야말로 연극이 말하는 형식들이다. 복싱에서 주먹을 내미는 잽, 훅, 어퍼컷이라는 것은 주먹으로 말하는 형식이다. 선수마다 주먹을 내미는 특기가 다른데, 그 이유는 개인의 기억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수마다 다른 주먹의 형식은 그가 관계맺고 있는 가족과 사회라는 그물망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격렬하게 내미는 주먹이 있고, 공허하게 주고받는 주먹이 있다. 말의 형식은 삶의 형식이고, 집단적 기억의 형식은 연극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복싱은 지극히 개인적 삶의 형식과 형식의 대결이다.


말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 삶을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싱에서 발을 움직이고 주먹을 내미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생각해 보라, 제 삶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며, 말하기는 곧 자신에게 말걸기가 아닌가. 제 삶은 모두 제 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복싱에서 주먹은 말이고, 주먹을 내미는 것은 말걸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복싱에서 링은 큰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작은 세상이다. 여기서 각자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복싱의 미덕은 마지막 종소리가 울린 후, 뜨거운 눈물과 땀, 증오가 아닌 피로 범벅이 된 몸들이 첫사랑의 연인들처럼 껴안으며 서로 상대방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이다. 이 순간 얕은 패배도, 초라한 승리도 없다.   


제자는 이제 자신을 겨우 말하기 시작했다. 제 삶을 말하기 위해서 그는 힘들게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했고, 그것을 몸으로 말하기 위해서 링에 올랐다. 그가 치른 첫 번째 경기는 그가 육체로 구현한 삶의 연극이었으리라. 그의 삶과 아마추어 복싱은 짝패이다. 처음으로 링에 올라 타인들 앞에서 경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야만 하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래서 권투하는 이들의 시선은 낮은 곳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반목이 없는 그들은 언어의 순수성과 같은 것을 고민한다. 제자도 어느 날 링에서 육체가 몰락하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더 크게 그의 생애를 알 것이다.


안치운/호서대학교 연극학과 교수, 연극평론가

(출처 : 한계레 신문 2007. 2. 9. 책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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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쿠르베와 밀레의 풍경화

2007/02/13 09:34
 

[ 같은 소재로 다른 느낌을 주는 쿠르베와 밀레의 풍경화 ]



19세기 중반,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활을 꾸려 나가기에도 힘든 민중들은 가난에 허덕였지만 부르주아들은 미술과 음악 등 문화를 마음껏 영위했다. 주 고객층이 부르주아들이다 보니 예술의 흐름도 부르주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점차 흘러가게 되었다. 하지만 쿠르베는 그런 부르주아들의 취향에 어긋나는 그림을 그려 화제가 되었다.

쿠르베를 스캔들 메이커로 만들어놓은 것이 바로 이 <석공>이라는 작품이다.


당시에 이 그림을 본 부르주아들은 그림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인물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위협적인 느낌을 받는데다가 노동자들이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 그림이니, 부르주아에게는 더욱 꺼림칙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 속 시야가 막혀있어서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거리감이 사라지고 내가 ‘그 안에 있다’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위의 <석공>과 비슷한 소재를 다뤘지만 평가가 완전히 반대로 나뉘었던 작품이 있다.

바로 농민생활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밀레의 <이삭줍기>(왼쪽)와 <만종>이다. 이 그림이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풍경 때문이다. 그림은 전체적인 자연과 더불어 인물들을 보게 한다. 게다가 <만종>의 주인공들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들의 노동하는 험한 옷차림들까지도 그 풍경의 일부로 만들어 경건하고 평화로운 의미를 띠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현실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미적인 형태로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그림의 특성 덕분에 <이삭줍기>와 <만종>은 최고의 명화로 칭송받으며 부르주아들에게 사랑받았던 것이다.

- 채운 <풍경을 보는 여섯 개의 시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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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법, 매카시즘, 그리고 뉴라이트  [한계레 신문 2007. 2. 9.책과 지성]

2006년부터 한국사회는 뉴라이트 운동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뉴라이트 운동의 중심에는 교회세력이 있다. 교직자들은 지금까지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점잖음을 유지하던 종래의 태도를 버리고 아주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사학 개방이사제를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미군이 계속 한국에 주둔해야 한다며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에 되돌려주지 말도록 간청했다. 그리고 북핵문제가 불거지자 이제는 반미를 매국으로 몰아가고 여당과 대통령을 무능하다고 몰아붙였다.


미국의 금주법은 식량을 절약하고, 공장의 작업능률을 향상시킨다는 목적 외에 맥주를 제조하는 독일인들에 대한 반감 등을 배경으로 ‘미국 영토 내에서 알코올의 제조 판매, 유통 수출입을 금지한다’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8조로 1920년 1월에 발효되었다(법안 명칭은 법안 제안자인 하원의원의 이름을 따 ‘볼스테드 액트’라 붙였다). 미국 중산층에 속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침례교) 교인들, 일부 농민들, 일부 여성들, 보수적인 정치인들과 일부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금주법의 입법화를 적극 지지했다.


당연히 금주법 시행은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금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주를 제조하거나 비싼 값을 주고 외부에서 은밀하게 반입한 알코올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밀주단속을 위해 연방정부는 1500명의 공무원을 고용했지만 미국의 국경과 해안선을 모두 감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층민들은 공업용 알코올을 물에 타서 마셨고 대략 2천만 가구의 중산층이 가정에서 비밀리에 배스터브 진(bathtub gin)을 제조했는데 이들을 모두 단속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주법 실시와 함께 확산된 밀조 밀매로 범죄도 증가했다. 알 카포네 같은 범죄자들이 만든 폭력단체들은 밀주수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애주가들은 술을 구입하기 쉽지 않자 술 마실 기회가 오면 한꺼번에 많이 마셔두려고 했다. 공업용 알코올을 마시던 노동자들은 건강을 버렸고 숨지기도 했다. 가장 큰 피해는, ‘선량한’ 미국인들이 이중적 사고를 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공개적으로는 금주법을 지지하면서 몰래 술을 구입해 가까운 친구들과 숨어서 술을 마셔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주법은 쉽게 폐지되지 않았다. 금주법에 대한 반대도 많았지만 금주법을 호전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1929년 경제공황의 여파로 1933년 제정된 수정헌법 제27조에 의해 비로소 금주법은 폐지되었다.


금주법 제정으로 기세를 올리던 당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세력은 막강했고 전 세계에서 전도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특히 동양의 조용한 나라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개신교가 오늘날 강한 보수성을 띠고 민족 정체성과 관계없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금주법 시대의 복음주의가 한국에 상륙하여 오늘날까지 교회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금주법은 음주 자체의 범위를 넘어서는 전통과 현대 간의 갈등으로 파악해야 한다. 1차 세계대전 뒤의 산업화와 도시화, 공장 노동자의 대두 등은 전통세력에게 생소했다. 더구나 일요일 교회에 가는 대신 팝에서 술을 마시는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질적인 도전문화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아메리카의 구 지배세력은 미국사회가 이제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그 수단으로 죄없는 알코올을 찍었고, 음주를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것, 다시 말해 도시의 악으로 선전한 뒤 금주법으로 자신들의 힘을 결집시키고 사회의 주류자리를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미국사회 지배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금주법 제정으로 사회적 경비가 얼마나 소모되든, 미국인들이 위선적인 삶을 살든말든 그것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대원으로 참전했다가 1946년 위스컨신 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1908-1957)는 1950년 2월 상원 비미국활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자 적색분자 추방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화당 여성당원대회에서 매카시는 수첩을 꺼내 흔들면서 “미국 국무부 내에 공산당원들이 205명이나 근무하고 있다”고 폭로 아닌 폭로를 하자 미국사회는 반공광기로 치달았다. 그가 특정인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을 때마다 대중들은 열광했고,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매카시는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것은 공산주의요, 공산주의는 미국의 국익을 해친다.”는 등식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1946-1956년 10년간 등 뒤에서 빨갱이란 손가락질을 당한 1만2천명이 직장을 잃은 채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사람들은 단체나 모임에 가입하지도, 감히 호소문에 서명을 하지도 못했다. 미국인들은 집단광기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매카시는 1952년 상원의원선거에서 상대후보를 빨갱이로 몰아 다시 당선됐다.


흔히 매카시즘을 소련의 핵보유,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 등으로 전 세계에 공산화가 진행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미국 시민들이 지지한 운동이라고 말한다. 매카시즘이란 사회적 병리현상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사회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사회와 2차대전을 치른 후의 미국사회는 달라졌기 때문에 당연히 사회는 재편되어야 했다. 하지만 재편을 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도 종교인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도덕이 땅에 떨어진 데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익숙하지 못한 보수세력이 반공의 이름으로 결집하여 사회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매카시즘은 소련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조국을 지키자는 애국운동이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매카시즘을 정착시키기 위해 차관과 원조를 이용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세계 각국에 설치한 미국 문화원을 통해 문화로 포장한 매카시즘을 전파했다. 같은 시기에 한국의 미 공보원은 매카시즘을 <논단>을 통해 전파했다. 당시 대학교수들은 <논단> 기사의 번역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나오면 폼을 잡을 수 있었다. 미국이 알아주는 한국인이고 무엇보다 원고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포장된 매카시즘을 CIA 공작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하자 미 공보부 잡지들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하지만 한국의 <논단>은 장수했다.) 문제는 매카시즘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미국 정부는 2차대전의 여파가 채 가지지 않았지만 매카시즘 덕택으로 큰 어려움 없이 미국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가들은 방향성이나 한국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 효순이 미순이 촛불시위를 반대하고, 미군 철수를 반대하고, 교육법 개정을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 이들이 기획하는 교과서포럼 내용을 보면 친일, 친유신, 친독재, 친시장주의다. 그런데도 이들은 우파 언론에 의해 한국사회를 선도하는 인물들로 평가되었다. 이들은 부패한 사학은 극소수라며, 사립학교법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학교를 사유물로 생각하는 이들은 약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동원하는 삭발, 단식까지 하고 여당과 정부를 사악한 무리라고 비분강개했다.


이들은 초절정 코미디언이 되었을까? 코미디라니! 그들에겐 처절한 몸부림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움직여온 주류인 자신들이 한국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을 온몸으로 감지했다. 더 이상 한국사회가 자신들이 정해준 아젠다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자 이들은 ‘고상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과 그들의 행동은 얼핏 보면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오죽했으면 정용섭 대구 성서학아카데미원장이 “한국 보수파가 보이는 모습은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임상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역사에 교훈이란 없는 것이어서 세상은 정말 언제나 몇십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걸까?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의 가운데에는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가 격렬한 어조로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기독교계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통와위기(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이후로 기독교계는 신도수와 헌금액수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립학교법이 터지게 되었고 이는 교계 전체의 이익을 건드리는 일이었으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셈이었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도 미국 사립학교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했을 때 복음주의 신도들이 굳건한 복음주의 신앙을 지닌 그한테서 등을 돌리고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는 바람에 낙선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사학법 문제에서 교회와 보조를 같이하겠다는 것은 득표와 연결되는 현실적 전술을 구사하겠다는 메시지다.


미국의 금주법과 매카시즘,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의 공통점은 사회의 주류였던 사람들이 사회가 변화하고 패러다임이 바뀌자, 변화를 수용하지도 않고 주류에서 비주류로 밀리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는 점이다. 대안을 제시하는 건전한 보수가 아니어서 무조건 저항하다 보니 사회적 병리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역사의 도도한 변화 물결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이학수 /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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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박노자 |만감: 일기장  2007/02/07 20:59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379


요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라는 신간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반갑게 느껴지는 측면은, 정 교수께서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정의하시면서도 일단 트로츠키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무오류의 교황"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역시 꽤나 야만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타개하려 했던 그들의 자기 모순 투성이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닌과 트로츠키가 잘한 부분 - 예컨대 처음에 멘세비키들이 추진했던 "소비예트식 노동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적어도 이론상 수용한 것 - 도 배워야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정 교수께서 1920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가 하나의 오류이었음을 매우 옳게 지적하시더랍니다 (445-446쪽). 물론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한 상황의 영향", "레닌, 부하린 등 다수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차원의 착각" 등의 여러 가지 단서를 달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오류의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츠키와 레닌 등이 왜 그러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한번 깊이 고심해보고, 그 당시에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세력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이론상으로 주장했던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기관으로 만들어 그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징집하여 군대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요충지"에 배치하려 했을까요? 노동자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같으면 '징집'되어 가족과 헤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노동자의 심정을 이해해서라도 진시황의 부역 노동 징발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안할 터인데, 트로츠키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단순히 국방부 장관이라는 벼슬의 포획력일까요?


물론 국방부 장관으로써 가지게 돼 있는 "행정 편의주의"란 부분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의 한 가지 비극적인 파행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 정당"을 이끌었던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과연 하루라도 "노동"해본 적이 있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80년대식의 유행어로, 다들 "학출 군단"이었지요. 그들 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짧은 스탈린이라 해도, 그래도 신학 대학을 좀 다녀본 사람이었고 그루지아어로 꽤나 괜찮다는 시 몇 편을 잡지에 싣는 등 "문단 데뷰"까지 했었지요. 상트페데르부르그 제국대학의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해본 레닌 정도며는, 형님이 황제 암살 음모 혐의로 사형집행돼서 그렇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출세를 크게 할 수 있는 "먹물"의 대열에 속했어요. 고급학력이 하도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는 "문단 데뷰"나 "변호사 경력"은 별 것처럼 안보이지만, 인구의 70%가 아예 글을 몰랐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는 레닌/트로츠키와 일반 공장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거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었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글쎄, 1920년대의 조선에서 고급 한문 문장을 잘 구사했던 조공의 최초 책임비서 (1925년) 김재봉선생과 일선 노동자의 "관계"의 형태를 생각해보시기를. 그러니까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지도하의 전위당" 이론은 운동판에서의 "학출 군단"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그들의 "지도, 계몽"에 피로를 느꼈던 많은 일선 노동자 활동가들이 차라리 조직 형태가 조금 더 느슨한 멘세비키 쪽을 택하기도 했었어요. 일찍부터 현장 활동을 한 일도 별로 없이 노동자들을 "조직, 지도"해온 트로츠키 같은 "고급 학출"에게는,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대오로 세워 노동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꽤 쉽게 들 수 있었어요. 즉, 그의 "노동의 군사화" 망상의 근원을, 실제로 자본주의적 사회의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운동판의 정치 역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참, 지금의 한국의 운동판은 좀 달라졌나요?


그러면, 이 망상에 맞선 이들은 누구이었을까요? 1921년3월의 소련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의 "노동 군사화"에 반대한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는 슬랴프니코프 (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1885-1937)이었지요. 최종 학력은 보통학교 3학년 퇴학, 12살부터의 공장 노동, 1890년대 후반에 노동자 파업 주도, 현장 운동하다가 1901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08년 해외 망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레닌과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독일 사민당의 후원금을 받거나 "문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슬랴프니코프는 프랑스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거기에서도 노동 운동의 현장 지도자가 됐지요. 그가 1918년부터 인민위원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늘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서 "벼슬"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국 금속노조의 집행위원을 하는 등 "현장"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에거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독재 아닌 당의 독재를 겪게 되는 감이다"라고 일갈하고 "당의 관료화 위험"에 대해 - 트로츠키보다 훨씬 일찌기! - 경고하고 당과 국가 관료들을 일정 기간의 만료 이후에 다시 공장의 현장으로 보내고 현장 노동자들을 관료를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리고 공장에 대한 관리권과 소비예트 공화국 공업 전체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노조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었지요.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경제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즉,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 그렇게 됐다면 그나마 소비예트 민주주의를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학출" 출신의 고급 "직업 혁명가"들은 어찌 보통학교 출신의 노동자들의 감독을 달게 받겠습니까?


레닌이 슬랴프니코프에게 "신디칼리즘"같은 딱지를 붙였고, 당 대회는 슬랴프니코프와 그 동지들의 주장을 부결한데다 아예 당내의 "종파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후로는 일선 노동자보다 당 관료들이 당의 주인이 되고 말았지요. 트로츠키가 1923년에 정신을 차려 당의 관료화 위험을 눈을 떴을 때, 이미 다 늦었어요...그런데, 우리 주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많이 볼 수 있어도 "슬랴프니코프주의자"들은 별로 없어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갈구했던 보통 학교 출신의 슬랴프니코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안보이나요?


 슬랴프니코프: 그는 1920년대에 혁명사에 대한 좋은 책을 꽤 썼어요 (물론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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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선물’은 부족 공동체 묶는 끈 

- 마르셀 모스 <증여론>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미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까? 아마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을 것이다. ‘원시사회(promitive society)’라는 단어로 그들이 사는 세계를 표현하는 현재의 관습이 남아 있는 한, 그 단어를 통해 작동하는 ‘문법의 환상’은, 다시 말해 그 사회는 ‘원시적’이고, 따라서 뒤처진 사회며 미개한 사회라는 식의 환상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원시사회를 연구하러 그 속으로 들어갔던 인류학자들은, 그 세계가 '본원적(primitive)'일지언정 결코 미개하거나 뒤처진 사회가 아님을 발견한다. 가령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아직도’ 돌도끼를 사용하는 남미 원주민들에게 그보다 10배는 효율이 좋은 쇠도끼를 주었을 때, 그것으로 동일한 시간 일해서 10배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10분의 1시간만 일해서 동일한 물량만을 생산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뒤처진 생산력, 뒤처진 문화를 발견하겠지만, 그들은 거꾸로 반문할 것이다. “왜 10배나 더 생산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데 필요한 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물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다. “쓰고 남은 건 팔아서 돈을 벌면 되잖아. 그 돈으로 다른 것도 사고, 저축해서 재산을 모아도 되고.”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험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은 틀림없이 남들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데 사용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를 초과하는 생산은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었다. 즉 필요 이상의 생산을 저지하는 것, 그것은 이런 점에서 미개함의 증거가 아니라 자연이나 인간을 대하는 그들의 ‘지혜’의 증거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생산력이 형편없이 뒤처진 그들의 경우, 가령 아프리카 부시맨의 경우 하루나 이틀 일하면 하루나 이틀 쉰다. 하루에 대략 3~4시간 일하는 꼴이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발전된 생산력을 가진 자본주의 세계의 우리는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사회가 더 ‘발전된’ 사회인 걸까?


이러한 사실은 한 두 사람이 지적하는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원시부족’들이 이런 식으로 산다. 그래서 그걸 조사하던 인류학자들 중 일부는 그 ‘본원적’ 세계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해체된 사실에 거대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기도 했고, 다른 일부는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은 그들 세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삭막한 삶을 대신할 ‘미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을 쓴 마르셀 모스 역시 ‘선물’로 특징지어지는 그 원시적 문화에서 자본주의를 대신할 미래적 세계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후 이 책은 바타이유처럼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실망한 좌파 지식인들이 새로운 종류의 미래를 구상 내지 상상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했다. 이 책에서 모스는 수많은 현지조사 보고서(‘민족지’)를 뒤져서 이른바 원시부족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선물’의 문화, 혹은 ‘증여’의 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포틀래취’와 ‘쿨라’일 것이다.


치누크 ‘인디언’의 말로 ‘식사를 제공하다’ 내지 ‘소비하다’를 뜻하는 포틀래취는 일종의 ‘선물게임’이다. 결혼식이나 성인식, 조상신에 대한 제사 등의 축제 때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을 실컷 먹이고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기에 초대된 사람들은 초대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게임’에서 진 것이 된다. 이는 대개 경쟁이나 전쟁처럼 격렬하게 진행되며, 종종 대대적인 물자의 파괴를, 특히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동판의 파괴를 수반한다. ‘이런 것쯤 얼마든지 내다버려도 돼’라는 듯이. 이러한 선물과 파괴는 명예 내지 권위로 되돌아온다. 다른 누구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쎄게’ 나간 사람이 최고의 명예와 권위를 얻어 추장이 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재산의 대부분을 소모하여 별로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권위를 경제적 재산의 소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위가 하나로 겹쳐져 필경 남들을 지배하게 되는 국가적 권력이 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것이었을까?


쿨라는 트로브리얀드 군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선물이 증여자와 답례자 두 항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과 달리 섬 전체를 돌며 여러 항 사이에서 행해진다. 그것은 두 개의 정해진 물건을 선물하는데 하나는 음왈리라는 팔찌고, 다른 하나는 술라바라는 목걸이다. 가령 A가 음왈리를 B에게 선물하면, B는 그것의 답례를 A가 아니라 C에게 하는 것이다. C는 그것을 D에게 주고···. 이런 식으로 전해지는 음왈리는 아마도 하나의 순환을 그리며 A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술라바의 경우는 음왈리와 반대 방향으로 순환한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답례하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하는 것. 이것이 반복된다면 한 번의 선물은 대대적인 선물의 연쇄를 만들어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선물의 체제는 이들 원시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근대 이전 우리가 살던 세계에도, 모스가 살던 서구에도 있는 것이다. 포틀래취까지는 안 가더라도, 잔치를 벌이면 음식이 남도록 만들어 싫컷 먹이고 가는 손님에겐 음식을 싸주는 것은 이미 근대화된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이사만 가도 떡을 해 이웃에 돌리지 않던가! 모스는 이를 좀더 강하게 말하기 위해 로마 시대의 채권-채무관계조차 선물을 주고받는 의무체계로 해석한다.


이러한 선물의 체계는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분리된 가구나 가족들 사이에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쿨라에서 선물은 섬들로 분리된 마을이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증여되는 재화의 순환이 사람들을, 혹은 삶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마나’ 내지 ‘하우’라고 불리는 ‘靈’이 선물의 순환을 통해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며, 공동체에 하나의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의 삶은 어디든 증여의 양상을 취한다. 역으로 선물의 순환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물을 개념을 좀더 확장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아주 간단하게 도식화해서, 식물이 동물에게 산소를 선물하고, 동물이 식물에게 유기물을 선물하는 관계 역시 선물의 순환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서로 기대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싶다면, 어떻게 선물의 순환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모스는 ‘계산기’가 되어 버린 근대적 ‘경제동물’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꿈꾼다. 선물의 체제, 그것이 그 꿈을 향한 출구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물의 체제를 일반화하기 위해 교환이란 개념에 포섭한다. 선물에 대한 답례가 의무라는 것이 그 이유다. 답례가 의무라면, 선물과 답례란, 다시 말해 선물의 교환이란 상품의 교환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는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채권과 채무도 의무적으로 답례하게 되어있는 선물의 일종이 된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답례’하기 때문에 이를 일종의 ‘신용거래’라고 이해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선물을 교환이라는 ‘일반적’ 현상으로 포착하는 모스의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찾아내는 능력으로 격찬한다.


그러나 그 결과 선물이 사라지게 된다. 상품교환의 일종이 되어버린 선물은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채무의 일종이 되어버린 답례 역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을 받고 나중에 답례하는 것이, 그게 비록 의무라 해도 정말 교환일까? 일부러 등가성을 피해 다른 값어치의 선물을 하게 하고, 일부러 동시성을 피해 나중에 답례하게 하는데도. 답례가 의무라는 것이, 그것이 채무와 똑같다고 말할 이유가 될까? 갚아야 할 채무와 달리 어떤 종류의 등가성도 없는데. 이는 결국 ‘원시사회’의 선물을 우리가 익숙한 ‘교환’이란 개념 안에 끼워맞춰 무용하게 만드는 게 되진 않을까? 이를 놓치면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선물을 오해하는 일반적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책이 될지도 모른다.


 -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75446.html)

서평자 추천 도서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한길사 펴냄.

[폭력의 고고학] 클라스트르 지음, 변지현·이종영 옮김, 울력 펴냄.

[저주의 몫]바타이유 지음, 조한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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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죽은 사물의 부활

2007/02/06 10:37

- 죽은 사물의 부활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눈에 익숙한 사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지나쳐버리고 마는 '죽은' 사물들. 예술에서는 이렇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죽은 사물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 방식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는 주위의 사물을 기괴한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또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죽은’사물을 살려내려 시도했다.

 

마그리트는 ‘낯설게 하기’의 소재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을 사용했다. 난로, 나무, 사과, 유리잔 등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마그리트는 ‘낯설게 하기’의 소재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을 사용했다. 난로, 나무, 사과, 유리잔 등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옆의 그림은 마그리트의 ‘낯설게 하기’를 표현하는 ‘고립’의 방법이다. ‘고립’이란 어떠한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걸 말한다. 그림을 보라. 평범한 하늘이 보이는 방과 물고기 한 마리. 따로 떼어놓고 보면 어느 것 하나 낯선 사물이 없지만 천장을 향해 서있는 물고기 한 마리에서 오묘하고 신기한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원목재가 깔려있고 빛이 잘 드는 방 한 칸과 커다란 풋사과가 있다. 역시 눈에 익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빛을 잘 받은 푸릇한 사과가 묘한 위압감을 풍긴다. 이 방법은 ‘크기의 변화’다. 이처럼 사물의 크기만 바꾸어 놓아도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마그리트는 유사의 방식을 취하지만 유사를 거부하면서 상사를 지향한다. 그의 작품에 ‘닮음’이 있다면 시뮬라크르들 사이의 닮음일 뿐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시뮬라크르 놀이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이 은폐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준다.

 

진중권 <현대미학-숭고와 시뮬라크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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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민중"에 대한 생각 | 만감: 일기장  2007/02/05 00:54 

 [출처: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304]



1970년대부터인가 "저항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테마는 한국 "진보" 진영의 가장 큰 화두가 됐지요. 장길산의 미륵신앙이 꼭 "공산당의 선언"처럼 읽혀지고, 동학 농민의 "제폭구민"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처럼 들리고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물론 "지금, 여기"의 현실 속에서의 "저항의 주체"들이 열성적으로 탐색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동일방직이라는 유명한 방직업체에서 민중 중의 민중이라 할 예비역 출신의 남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선 여성 노동자들에게 오물을 투척하고 있는데도 말씀입니다. 물론 1987년 창원 등지에서 노조를 설립하겠다고 파업에 나선 삼성 중공업의 노동자들은 "투쟁하는 민중"이었지만 과연 구사대는 민중이 아닌 사회 귀족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제발로 삼성의 문에 들어와 이건희의 어록을 외우는 이들은 과연 민중의 일부분이 아닙니까? "민중의 저항성"이라는 문제는, 사실 생각보다 단순하지가 않더랍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대중의 사고 역시 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말이 역시 마음 아픈 진리입니다. 대체로 어릴 때부터 벌어서 쓰는 "생산, 소비" 순환의 맛을 몸에 들이고, 서민까지도 가질 수 있는 돈의 힘을 알고, 학교에서 "잘 사는" 것의 미덕을 익히고,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보다 훨씬 못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영식이나 John은, 아주 특별한 생활의 여정을 밟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극단"을 반대해도 자본주의 그 자체에 "자연발생적으로" 의문을 가질 확률은 높지가 않아요. 꼴보기 싫은 상사에게 굽신거리는 것도 자본주의지만, 김태희의 새로운 드레스의 노출도를 눈으로 확인하는 재미나, 월드컵 때에 힘껏 외쳐보는 재미도 자본주의 아닙니까? 부동산, 은행 빛, 사채 빛, 아이 사교육비 - 이 걱정거리의 더미 밑에서 사는 이들은 무슨 "대안"을 찾을 만한 여유도 없지요. 무론 여기에서 지역별 차이가 좀 있어요. 예컨대 선거때마다 노동당을 찍는 노르웨이의 노동자는 자신의 실질 임금이 그래도 해마다 1-2% 올라가는 이 복지 자본주의에 반대가 없어도 일단 "계급 의식"이 아주 강한 반면, 이쪽에서 삼성의 사가를 제창하고 회장님의 어록을 외우다 보면 "삼성가의 충신" 의식이 트일 수도 있고 순전히 생존본능대로 살아갈 수도 있지요. 그러나 노동당의 지지자든 회장님을 모시려는 일편단심의 소유자든 "평상시" 자본주의하의 대중들을 진정한 반자본 투쟁에 이끌기가 매우 힘들지요. 경제 투쟁이야 당연히 빈번히 일어나고 또 대중의 좋은 학습 기회가 되지만, 이건 "반자본의 투쟁"이라기보다는 자본과의 공존의 조건을 좀 개선시키기가 위한 투쟁이지요. 물론 그러한 투쟁이라도 없으면 노동자가 한국의 1980년대초처럼 한달에 200달러나 받고 쪽방에서 새우잠을 자게 돼 있지요. 다만, 한국처럼 주인네들이 노동자들에게 학교/군대 시스템을 통해 "복종 훈련"을 시켜 대중을 원자화시킨 뒤에 정규직/비정규직 등을 잘 분리 통치하고 조합 관료들을 계속 매수하면, 경제 투쟁조차도 참 외롭고 어려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상황을 바꾸는 것은 자본주의의 온갖 균열의 시공간과 불경기의 시공간이지요. 자본주의는 늘 "전쟁"을 의미하는데, 이라크 등지에서 수십 만 명의 무고한 이들이 죽는 모습은 아주 배부른 노르웨이 노동자에게도 결국 "도대체 이게 무슨 세상이야?"라는 생각을 심어주지요. 또 1973년 이후에 유럽에서 점차 불경기가 심화돼 결국 "복지"를 놓고 주인네와 머슴네가 아죽 격렬한 "겨루기"를 하게 되지요. 작년 불란서의 젊은이 반란이나 독일의 공무원 장기 파업 등을 참고하시기를. 이러한 시공간들은 결국 "순응하는 민중"을 "투쟁하는 민중"으로 조끔씩 바꾸는 효과를 갖고 있어요. 문제는, 이 "투쟁하는 민중"을 조직, 이념적으로 응집시킬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조직체가 필요한데, 유럽에서는 나라마다 몇 군데의 급진적 정당들이 있다 해도 거의 그 역량이 많이 제한돼 있는 것 같아요. 또 섹트적인 근성이 너무 강하거나, 그 반대로 "사민주의의 재탕삼탕"밖에 제안하지 못하거나.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세계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의 균열이 계속 심화될 듯하고 아마도 결국 "파열"로 갈 것 같은데, "세계 혁명"이 안될 경우 그 대신에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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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 만감: 일기장  2007/01/29 20:40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 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 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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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에 대한 생각

2007/01/31 09:53

옛날에 세 명의 도적이 있었다. 어느 날 이들은 힘을 합쳐 한 무덤을 파헤쳤다. 그런데, 그 무덤 안에서 큰 금덩이가 나왔다.

“오늘은 정말 고달프구나. 금을 얻었으니 술과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한 사람이 기뻐하며 술을 사러 나갔다. 술을 사러 나간 그 자는 길 위에서 하늘이 주신 기회라면서 자축을 하였다.

‘셋이 나누느니 오히려 혼자 독차지 하는 것이 좋겠구나.’ 하고는 음식을 사서 독을 풀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도적이 갑자기 술을 사온 도적을 때려죽이는 것이 아닌가. 남은 도적들은 먼저 음식을 먹은 후 금을 양분하기로 하고 술과 음식을 먹는데, 먹은 후에는 무덤 옆에서 두 도적이 다 죽었다.


참으로 애석하구나. 이 금이라는 것은 반드시 길옆에서 돌다가 누군가에게 습득되는데, 습득한 자는 반드시 하늘에 감사할 것이나 다만 금이라는 것이 무덤 사이에서 나온 것이면서 독의 유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앞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독살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천하의 사람 중에는 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은 왜일까?

나는 원하건대 천하의 사람들이 금이 있다고 기뻐할 것도 없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눈앞에 황금이 이르면 놀라기를 천둥을 맞은 것처럼 하고 귀신을 만난 것처럼 하고 풀숲의 뱀을 만난 것처럼 해서 머리털이 빠짝 서서 뒷걸음질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연암 박지원의 황금에 대한 생각이다. 황금이라는 것이 매우 위험한 물건으로 취급된 이유는 황금의 속성이 다양한 가치들을 잠식시켜 자신의 유일한 가치로 모든 기타의 것들을 재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신숭배란, 하나의 가치가 다양하던 가치들의 관계들을 굴복시켜 무덤으로 보내고, 그 무덤 속에서 태어난 자신의 유일한 가치로 모든 사물들과 관계 맺도록 강요하는 관계의 형식을 의미하며, 바로 이점이 황금의 가장 위험한 속성이라 할 수 있다. 

- 고미숙 <『열하일기』, 숨어있는 보석을 찾아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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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기관 없는 몸’

2007/01/23 17:53
 

들뢰즈의 ‘기관 없는 몸’

-조광제 (철학자)

 

 

“감각이란 어떤 강렬한 현실성만을 가지고 있는데, 이 현실성은 더 이상 그 속에서 재현적인 여건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소적(同素的)인 다양성을 규정한다. 감각은 진동이다. 우리는 알이 바로 유기적으로 재현되기 ‘이전에’ 이러한 상태에 있는 몸을 제시함을 안다. 알은 축들, 벡터들, 비율들, 지대들, 역학적인 움직임, 역동적인 경향들을 제시하는데, 이에 비하면 형태들이란 우발적이고 보조적일 따름이다.

'입도 없고, 혀도 없고, 이도 없다. 후두도 식도도 없으며 위도 없다. 배도 없고 항문도 없다.'

생명이란 도대체 유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가두기 때문이다. 몸은 전적으로 살아있다. 그러나 유기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감각이 유기체를 관통하여 몸에 이르면, 감각은 과도하고 발작적인 모습을 띤다. 그때 감각은 유기적 활동의 경계들을 잘라버린다. 살이 충만해지면서 감각은 직접 신경의 파장이나 생생한 흥분 위에 직접 실린다.”


『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를 통해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해석하면서 질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가 감각에 대해 무서운 기세로 일갈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조그마한 바늘로 피부를 찌르면 따끔하면서 국소적으로 감각적인 흥분이 일지요. 만약 송곳을 푹 찌르면 어떻게 될까요? 온 몸이 놀라면서 감각적인 흥분이 전신으로 급하게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칼이나 창으로 푹 찌르면 어떻게 될까요? 감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각적인 흥분이 너무나도 극심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급격하게 온 몸을 송두리째 뒤틀리게 하면서 발작하게 만들 것입니다. 들뢰즈가 노리고 있는 감각이 바로 이런 극단적인 감각입니다. 그런 감각적인 흥분이 온몸을 가로지른다면, 아! 그때 감각과 몸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구분이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몸과 감각, 감각과 몸이 하나로 덩이지면서 몸이 감각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차라리 몸은 감각 덩어리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의 몸을 들뢰즈는 전혀 유기적이기 않은 ‘기관 없는 몸’(le corps sans organes)이라 합니다. 온통 뜨거운 감각의 파장으로 넘쳐흐르는 감각 덩어리로서의 몸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어느 때고 이러한 강렬한 몸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곧 예술적인 본능이 우리의 몸 즉 우리의 삶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한 몸을 느낄 때, 그러한 몸이 저기 우주에 넘쳐나는 모든 사물들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때,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감각 덩어리인 한 몸이 되어 전 우주적인 감각의 떨림으로 바뀔 때, 그때야말로 근원적인 예술과 시가 태동하는 시점인 것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이 그러한 지경에서 열려나온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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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 불면과 일리야

2007/01/23 17:52
 

레비나스 - 불면과 일리야

- 조광제 (철학자)

 

 

“불면은 불면의 상태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의식, 즉 우리를 붙잡고 있는 ‘깨어 있음’의 상태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 목적도 없이 깨어 지키고 있는 상태. 여기에 묶여 있는 순간, 시작점과 종착점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한 번쯤 불면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시인이나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면의 위력에 사로잡혀버리면 정말이지 얼마나 황당한지요. 불면의 이유를 아는 자는 진정 불면증을 앓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동기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찾아오는 것이 불면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기 싫은데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깨어 있음만큼 진저리쳐지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무슨 열정이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비애가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정확하게 걸려들었다는 느낌 외에는 특별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불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면의 지경에서 사물은 어떻게 다가오던가요? 불면을 앓고 있는 나만 부조리하고 황당하던가요? 그게 아니지요. 상황 전체가 부조리하고 황당했습니다. 그러니 그 상황 속에서 사물들 역시 각자의 경계를 상실한 나머지 하나로 덩이지고 말았지요. 저 멀리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와 내리 누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허공에 붕 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밤 짙은 시각, 불을 끄고 누웠기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설사 불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할지라도 사물들은 그렇게 마치 뱀이 벗어놓은 허물처럼 멍하게 서 있을 뿐입니다. 불면은 그렇게 해서 잠들지 못하는, 잠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나 자신마저 그러한 허물로 변신하여 덩이져 있는 사물들 속으로 끌고 갑니다.


그럴 때, 그렇게 불면이 나 자신을 엄습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으로 다가올 때, 존재론적인 근본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본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오늘날 의미 있게 유행하고 있는 타자의 철학을 건립한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내세웠던 글귀는 그가 쓴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의 한 대목입니다. 그 근본 상황에서 열리는 존재를 레비나스는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불가능한 ‘il y a'(일리야)라고 합니다. 불면과 일리야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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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철학자 메를로-퐁티, ‘봄의 나르시시즘’ 

-조광제 (철학자)

 

보는 자는 그가 보고 있는 것에서 포착되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모든 봄에는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보는 자는 그가 봄을 수행할 때 그의 봄은 사물들을 대리하여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행하고, 흔히 많은 화가들이 말하듯이 나는 내가 사물들에 의해 주시되고 있음을 느끼고, 나의 능동성은 수동성과 동일하다.


몸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유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눈은 마치 바깥 사물들이나 사건들을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충족될 수 없는 듯 보고자 하는 ‘욕정’으로 충혈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각을 통해 온갖 것들을 봅니다. 풍경을 보고, 그림을 보고, 사진을 보고,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무용을 보고, 혁명을 보고, 상품을 보고,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글을 보고, 심지어 ‘두고 보자’고도 합니다.

특히 우리말은 이 ‘본다’는 말을 아주 넓고 다양하게 씁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보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면 아연실색 골치 아파집니다. 두말 할 것이 없다고요? 그거야 당연히 두 눈을 뜨고 있는 내가 보는 것이라고요.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이야깁니다. 우리는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보지 않습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눈을 뜨고 있는 한, 아니 심지어 눈을 감고 있어도, 도대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보려고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자꾸 보게 됩니다. 굳이 보려고 마음을 먹은 대상도 아닌데 주변에서 저절로 치고 들어옵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는 나를 제 마음대로 막 치고 들어와 나의 시각 즉 나의 봄을 가득 채웁니다. 화가 세잔은 “풍경이 내 속에서 자기를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풍경을 생각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풍경 저 놈이 나의 의식을 치고 들어와 자기를 생각한다니 도대체 될 법한 말인가요? 충분히 될 법할 뿐만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이 메를로-퐁티가 ‘봄의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하는 사태입니다.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여의 경지라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을 번연히 뜨고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이러한 경지를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는

화가가 되고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는 정확한 길목에 들어선다 하겠습니다. 감각의

비의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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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삶을 살아라!” -열정의 철학자 니체

-조광제 (철학자)

 

 

죽음의 설교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 지상은, 삶으로부터 등을 돌리라는 설교를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자들로 가득 차 있다. 대지는 남아도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삶은 많은, 너무도 많은 자들로 황폐해졌다. 그들이 ‘영생’에 홀려 이 삶으로부터 사라져버리기를!

(…)

이 무서운 자들, 그들은 아직까지도 인간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삶으로부터 등을 돌리라고 설교하다가 자지 자신들마저도 제발 없어져버리기를!

(…)

그러나 단지 그들 자신이 부정되었을 뿐이며, 삶의 한 면밖에 보지 못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눈이 부정되었을 뿐이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최승자 옮김, 청하, 1997) 중에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으나 한편으로 너무나도 잘 알지 못하는 철학자가 니체인 것 같습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외침으로 반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역설한 것으로 대략 알려져 있지요. 물론 조금 더 잘 아는 사람은 그가 『비극의 탄생』에서 제시한 디오니소스적인 적극적인 긍정의 삶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초인을 떠올리고 정오의 시각에 더없이 응축되는 영원회귀를 떠올릴 것입니다.

코 밑 수염을 한껏 두툼하게 기르고 깊게 패인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철학자, 시적으로 무장된 사상의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대는 저항적인 철학자, 매 구절마다 명언이 넘치기에 결코 쉽사리 요약할 수 없는 책을 수없이 많이 쓴 철학자, 타고난 광기로 쉽게 잠들지 못하고 미친 듯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저 받아쓰듯 한 영감의 철학자, 죽기 전 지독한 우울증으로 10년씩이나 삶을 저주하며 병원 생활을 했던 철학자, 더없는 그의 매력을 사랑한 나머지 그와 사랑한 여자들을 한없이 질투했던 누이를 가졌던 철학자, 자유분방함의 춤을 통한 생성 자체를 역설하면서 여전히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남아있고 천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무진장하게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면서 창조적인 삶을 부추기는 철학자, 대지의 살갗에 깃든 병 중의 하나가 인간이라고 하여 반인간주의를 외쳐대는 철학자. 그가 바로 철학자 니체입니다.


오늘 인용한 니체의 글은 삶에 대한 우리의 의식에 무와 무의미의 위력을 심어 넣고자 하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텅 빈 손에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올려놓았을 때, 삶은 끝없이 무의미함의 중력에 이끌려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때 내세에서의 영생을, 존재의 갈퀴에서 완전히 벗어난 무로의 해탈을 권유하는 자들을 우리 속에서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일상의 삶이 구역질을 일으키고 지독한 권태가 시간을 뒤덮습니다.

니체는 그러한 죽음이 주는 무의미의 사상을 설교하는 자들을, 설교하는 그의 혀의 놀림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버리라고 외칩니다.



그렇다면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길은 어디로부터 열립니까? 니체는 아직 미답의 천 개의 작은 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길들은 아무래도 감각으로 충만해 있을 것입니다. 길을 막아서는 거대한 무의미의 벽을 쳐다보고만 있을 일이 아닙니다. 뒤돌아서면 엄청 화려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감각의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전신을 적셔오는 각종 예술적 감각은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거룩한 인간의 삶을 긍정하게 하는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예술에 미쳐버립시다.

쉽게 그럴 수 없다면, 미쳐버릴 수 있는 예술을 찾아야 합니다.

찾을 수 없으면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오늘 니체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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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두 번 놀라게 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이론

- 조광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동성연애자이면서 프로펠러를 맨 처음 설계했고 마지막 죽기 전에 노르웨이의 어느 절벽에 스스로 집을 짓고 살다가 ‘좋았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긴 인물,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간간히 메모를 해 조그마한 책,『논리 · 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출간했더니 그 책을 보고서 인간들이 감탄한 나머지 이른바 ‘비엔나 학파’라고 하는 일단의 학자 집단을 형성하게 만든 인물,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철학을 다 했다고 아예 철학을 버리고 병원 짐꾼으로 일하기도 하다가 갑자기 철학을 아직 다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나서 다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를 출간했더니 이제는 아예 인간들이 기겁을 하면서 감탄한 나머지 ‘일상언어학파’라고 하는 일단의 학자 집단을 형성하게 만든 인물,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실컷 머리 아픈 세미나를 하고 나면 영화관 맨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곤 했던 인물,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모르면 어때? 맞습니다. 사실은 몰라도 어쩌면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알면 또 어떻습니까? ‘노느니 코 푼다’는 말도 있듯이, 알면 그만큼 머리가 아프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아,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만든 지 5년 반쯤 된 철학 전문 시민학교 <철학아카데미>에서 공동대표로 일하면서 철학 강의를 하는 조광제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아시나요?’의 첫 주인공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오스트리아)이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를 하나 전하면서, 그 이야기에 대한 사족을 달아볼까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동물들은 정신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동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것들은 말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히 말하지 않을 뿐이다. 또는 더 잘 표현하자면: 그것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 우리가 가장 원초적인 언어 형식들을 도외시한다면. ― 명령하기, 물음을 묻기, 이야기하기, 잡담하기는 걷기, 먹기, 마시기, 놀기처럼 우리의 자연사(自然史)에 속한다.(『철학적 탐구』, 이영철 옮김, 서광사, 2002, 6쇄, 33쪽 25절)


철학 공부를 한 30년 쯤 하고 보니 제 나름대로는 말 좀 하는 편입니다. 지금처럼 말이죠.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나더러 ‘네가 정신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지라 그냥 본래부터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말과 행동의 배후에 정신능력이 있어서 그것들을 통제하고 조절한다는 생각을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사(natural history)에 속한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동물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하지 않는 것이듯이,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말로 바꾸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하는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맞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한다는 것은 곧 말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말이 없으면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말한다는 것은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생각 역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어쩔 거나? 생각을 이렇게 말로 바꾸어버리니 생각한다고 제법 폼을 잡고 살아온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그냥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라고, 아니 말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고, 그런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차이를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마음이 참 편합니다.


요즈음 차이를 인정하자는 것이 유행인데요. 그 참 뜻은 서로 다른 것들은 그냥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다름 때문에 지배/피지배에 의한 차별을 일삼아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늘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시 쓰기를 좋아한다면, 나는 본래 시 쓰기를 좋아할 뿐이다 하고 생각하시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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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의 생성을 논하는 접속의 논리학 ‘리좀(rhizome)’

- 이정우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저작 『천의 고원』에서 중심이 제거된 세계의 논리학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제거된 중심은 초월적 중심만이 아니라 내재적 중심이기도 하다. 서구 신학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초월적 중심으로서의 신, ‘선의 이데아’…등만이 아니라 내재적 중심(예컨대 ‘태극’), 나아가 근대 철학이 제시한 ‘선험적 주체’ 같은 내재적 중심도 거부된다.(내재성을 가장하는 초월성의 한 예를 난바라 시게루의 ‘공동체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다)

들뢰즈의 초기 작업은 이런 입장을 정립하기 위한 지난한 철학사적 연구들로 채워져 있다.

리좀의 논리학은 ‘접속’의 논리학이다. 그것은 관계의 생성을 논한다. 고중세의 실체 중심적 사유가 현대의 관계 중심의 사유로 전환한 것은 사상사의 큰 성과이지만, 관계의 그물이 고착화될 때 이번에는 관계망이 실체의 역할을 대체한다. 관계 자체가 생성할 때에만 본질주의가 극복된다. 리좀은 다양한 접속들을 통해서 관계가 생성해 가는 장(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배치, 다양체, 추상기계를 중심으로 하는, 어지러울 정도의 다양한 개념들을 통해서 리좀의 논리학을 구성한다.

리좀의 세계는 개체들 ― 집합적 개체들까지 포함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계’(스토아 학파의 ‘體’) ― 이 일정한 동일성으로 고착되지 않고 계속 생성하는 관계들을 통해서 변해 가는 세계이다. 그것은 氣가 개체성에 갇혀 제한되기보다 계속되는 생성으로 개체성을 변화시키는 세계이다. 개체는 氣를 제한하지만, 氣는 그 개체를 넘어서는 ‘잉여’이며 개체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는 힘이다. 세계를 일정하게 조직된 氣, 일정한 체계에 따라서만 존재할 수 있는 氣로 파악할 때, 氣의 잉여는 이해되지 못한다. 선험적 理를 전제할 때 氣는 理의 체계에 입각해서만 이해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서구의 수목형(樹木型) 사유를 비판하고 동양의 리좀적 사유를 찾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주자의 ‘이일분수(理一分殊)’ 체계만큼 수목형 사유를 단적으로(거의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체계가 어디 또 있겠는가. ‘분수’라는 말만큼 수목형 사유의 사회학적 변용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 어디 또 있겠는가. 문제는 서양/동양이라는 지역적 구분이 아니라 수목형/리좀형의 사유상의 구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氣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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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재면(混在面)을 향해

2007/01/23 17:45

혼재면(混在面)을 향해  “나를 가르는 분절선을 무너뜨리고 독창적 꼴라쥬를 생성하라.”

- 이정우 (철학자)

 

 

우리의 삶은 층화(層化)되어 있는 삶이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인간’이라는 층에 속한다. 우리는 새나 곤충이 아니다. 한 사람은 사회학적으로 부유층, 중산층, 등의 층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 대학에 들어갈 때 우리는 수목형 구조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이과냐 문과냐? 인문대학이냐 사회대학이냐? 문학이냐 역사냐 철학이냐? 우리의 삶은 시간적으로도 분절되어 있다. 초등학생 6년, 중학생 3년, …

우리의 삶은 층화되어 있고, ‘영토화’되어 있다. 사회는 항상 선택을 요구한다. 그래서 한 인간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통합체와 계열체처럼, 선택지들에서의 선택의 계열로 구성된다.

철수는 “경기도 사람이고, 기독교도이고, A 대학을 나와 B 회사에 다니고, …”

이러한 구조는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정치적이다. 사회는 기호체제(記號體制) ― 기호체계가 아니다 ― 이다. 기호들의 분절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호체제인 것이다.

노마디즘은 분절선들을 가로지르는 탈주선을 찾는다. 그러나 탈주선은 어디에나 있다. 세계의 근원은 氣이고 氣 자체가 애초에 생성이요 잉여이기 때문이다. 분절선들이 본래적이고 인위적으로 탈주선을 찾는 것이 아니다. 분절선들 자체가 본래의 氣에 작위(作爲)의 그물을 던져 코드화 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체제도 동일성으로 고착되지 못하며, 그 아래에는 항상 탈주선들의 누수(漏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힘, 탈주선들로 표현되는 힘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들의 욕망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다. 욕망은 氣의 근본 성격이다.

분절선들을 무너뜨리고 삶의 꼴라주를 만드는 것, 이것은 혼재면(plan de consistance)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어진 격자의 어느 한 섹터를 선택하기보다는 격자를 가로지르면서 고유의 꼴라주를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한 인간의 ‘스타일’이다.(격자의 한 섹터를 선택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스타일이다) 큰 인간은 그만큼 독창적인 꼴라주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장자가 말한 “化而爲鳥”의 경지,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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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예(技藝)/기예(氣藝)  “암적인 리좀과 창조로 나아가는 리좀”

- 이정우 (철학자)

 

 

개체들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만 氣는 잠재성이다. 잠재성은 현실성으로 분화(分化)된다.

이것은 곧 개체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예컨대 생명은 생명체와 구분된다. 생명은 개개의 생명체들로 분화된다. 그러나 생명은 개체들을 넘어서는 잉여이고 이 잉여가 ‘진화’를 가능케 한다. 이 과정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두 요소가 특이성과 강도이다. 즉 氣는 그 안에 지도리들을 내장하고 있고(그러나 역동적으로 변해 가는 지도리) 또 강도의 차이들을 통해서 운동한다.(이 부분은 들뢰즈 철학의 핵을 이루고 있으며, 『차이와 반복』의 4, 5장을 숙독해야 한다)

또 하나, 특히 주의할 것은 노마디즘이 제시하는 구분들에 가치들을 실체적으로 부여하는 일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 다른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매끈한 공간은 좋은 것이고,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인가? 몰적인 사유는 나쁜 것이고 분자적 사유는 좋은 것인가?

이런 식의 가치론적 이분법이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리좀이 기존의 분절선들을 극복하고 창조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마약 같은 ‘기관들 없는 신체’로 갈 수도 있고 또 파시즘 같은 암적인 리좀으로 갈 수도 있다. 무조건 분자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맥락에 따라서는 몰적으로 사유해야 할 때도 있다. 창조적 삶을 위해서는 리좀적 사유를 해야 하지만, 리좀적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꼭 창조적 삶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구분들은 우리가 ‘상관적 정도(correlative degrees)’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을 이룰 뿐이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맥락에 따라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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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기(devenir)  “자신의 존재의 외피를 뚫고서 나아가라.”

- 이정우 (철학자)

 

 

기예(氣藝)의 개념은 ‘되기’를 다루고 있는 부분을 읽음으로써 가장 잘 포착된다. 되기는 변신이다.

그것은 기존의 동일성에 고착되지 않고 다른 존재로 화(化)해 가는 것, 즉 존재론적인 변신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적”은 “실재적”을 뜻한다. 현대 사상은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이라는 세 개념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노마디즘의 되기는 상상적인 되기나 상징적인 되기가 아니라 실재적인 되기이다. 예컨대 학-되기는 학을 상상하는 것도, 학을 흉내내는 것도, ‘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실재적으로 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학이 된다는 것이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인간이 학이 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이것은 상상적 되기이다) 무엇이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氣를 변화시켜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의 氣에 가까이 가져가는 것이다. 학춤의 명인은 단순히 학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학을 상상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부단한 수련으로 자신의 氣를 학의 氣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거미-되기는 「스파이더 맨」에서처럼 우연히 유전자 변이를 겪는 것도 아니고(영화 버전), 기계의 도움으로 건물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다.(만화 버전)


그것은 자신의 氣를 부단히 수련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자신의 ‘존재’=외피를 뚫고서 거미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 다른 존재로 자신의 氣를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마디즘은 강렬한 윤리적-정치적 함축을 띠게 된다. 되기는 존재론인 동시에 윤리학이자 정치학이다. 노마디즘은 윤리학 이론, 정치학 이론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자신의 氣를 실제 변화시켜서 지금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는가이다. 즉 노마디즘은 여성을, 어린이를, 흑인을 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고 타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실제 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마치 만화에서처럼 남성이 여성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그렇게 말한다면 하리수가 노마디즘의 실천자일 것이다) 남성이 남성으로서의 동일성에 고착되지 않고 여성의 氣를 가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여성의 氣, 여성의 감응(感應), 여성의 정(情)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나가는 것이다.(여기에서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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