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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8 [박노자] 자본주의와 인권의 역설적 관계 (2)
  2. 2009/07/03 [일기]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2)
  3. 2009/06/22 [원장현의 대금소리-항아의 노래] 꽃상여(花葬与)
  4. 2009/06/02 [장사익] 찔레꽃 (1)
  5. 2009/05/05 神에 대한 사랑
  6. 2009/04/20 [잡념] 사랑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5)
  7. 2009/02/04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1)
  8. 2009/01/29 [단상메모] 용산사건-학살자는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9. 2009/01/15 [메모] 우리 예술 한번 할까요 (2)
  10. 2009/01/13 [메모] 삶과 죽음 (9)
  11. 2009/01/08 [이정우] 당신에겐 어떤 쾌락이 존재하는가? (4)
  12. 2009/01/07 不變 (5)
  13. 2009/01/05 天命
  14. 2008/12/21 祈願 (1)
  15. 2008/12/16 잘 살피면서 살아야겠다 (3)
  16. 2008/12/15 [우석훈] MB 정부 예산에 '배고픈 국민들'은 없다
  17. 2008/12/09 '평온함'에 대하여 (9)
  18. 2008/12/03 [박노자] 가톨릭 교회와 평화/반전문제 (1)
  19. 2008/11/18 『노자』 제45장 고요함이 조급함을 이긴다 (4)
  20. 2008/11/18 [송상용]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21. 2008/11/13 조사 후기(後記) (5)
  22. 2008/11/07 [참소리]남원지역 민간인희생 사건 (2)
  23. 2008/11/03 [조문익] 나는 누구인가
  24. 2008/10/29 사람은 가슴에 묻는 것이다 (2)
  25. 2008/10/28 검결[劒訣] : 칼노래 칼춤 (2)
  26. 2008/10/27 『노자』 1장 (1)
  27. 2008/10/27 [일기] 2008. 10. 26. 늦가을 밤 (1)
  28. 2008/10/24 월급 받는 날 (2)
  29. 2008/10/24 우정과 환대 (1)
  30. 2008/10/23 [일기] 늦가을 비내리는 종로에서 2008.10.22

[박노자] 자본주의와 인권의 역설적 관계

  - 출처 : 박노자 강의노트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2326

 

밑에다가 제가 7월16일 저녁 7시에 부산일보사 10층 강당에서 "이주민과 함께"라는 단체의 주최로 발표할 대중 강연의 원고를 첨부합니다. 이 강의의 주제는 자본주의적 근대와 인권의 역설적인 관계사입니다. 사실, 보편적 인간이라는 개념의 탄생 자체는 세습신분제의 봉건제 아래에서 불가능했으며 자본주의 초기에 들어서야 가능해졌습니다. "모두"를 포함시킨 노동 시장의 탄생은, "보편적 인간"을 탄생시켰으며 "보편적 인권"이라는 관념이 성립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특히 19-20세기에 국가와 자본의 통제-개입-억압은 사실상 인권의 신장을 계속 억제했으며 지긐 같으면 "종족 계급"의 출현 등으로 "보편적 인간"이라는 이념 자체를 깨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자본주의 극복만이 인권 신장의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게 이 글의 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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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 자유, 인권 – 자본주의 하에서 인권 실현은 가능한가?
 
1. “권리”의 개념: 영어 “right”는 희랍어 orektos (“바른”, “올바른”), 나전어 rektus (“바른”, “바로 서는”)에서 파생된 것임. 지중해의 고대 사회나 유럽의 중세 사회에서는 “권리”란 결국 해당 개체 내지 공동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 또는 “마땅히” 해도 되는 일을 지칭한 것이었음.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개념은 적어도 법적으로 18세기 이전까지 성립되지 않았기에 “보편적 인권”이란 존재할 수 없었으며 개별적 공동체/신분 계층의 “권리” 정도는 사회적으로 인식됐다. 대체로 17-18세기의 사회계약설 대두 이전까지 각종 신분계층들의 “정의로운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라면 “좋은 사회”로 인식됐음 –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부 권리론”. 이 “천부 권리는” 일단 원칙상 개체가 아닌 공동체에 귀속됐음 – 즉, 유기체로서의 도시국가는 개별적 가족의 존재의 조건이었으며, 가족은 개체의 존재 조건이었음. 즉,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의 대표적 사상가들에게는 “전체”에 대한 의무를 떠난 개체의 권리란 논할 수도 없는 것이었음. 또한 개체들은 절대 동등하지 않았으며 그 “정의로운 권리”들도 각자 달랐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노예제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노예란 자연적으로 남에게 복종하기를 좋아하는 예속적 존재” – “천부 노예론”). 즉, 서구의 전통사회는 공동체적/신분계층적 “권리” 의식은 있어도 근대적 의미의 보편적 “인간”도 “인권”도 개념조차 성립되지 않았음.
 
단, 이미 희랍/로마 시절부터 전통 서구 사회는 “신성한 법”에 대한 존경 (준법 의식)을 상당히 강조했음: “솔론 (아테네의 유명 정치인) – “나는 오로지 신성한 법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법이 자연법을 따른다는 이념은 여기에 큰 영향을 미쳤음.
 
2. “보편적 인간/인권”의 탄생 - 17-18세기 부르주아 혁명의 시기. 토마스 홉스 (1588-1679) – 모든 인간 (신분 계층 소속과 무관하게)에게 해당되는 “자연법”. 홉스가 생각했던 “자연법 16칙” – “모든 인간들이 다 평등하다”, “모든 인간들이 평화를 갈망하지만, 평화를 향유할 희망이 없을 경우 전쟁을 택한다” 등등 “보편적 인간”에게 해당되는 “자연의 법칙”들이 발견된다는 것 자체는 “진보”이었지만, 홉스는 모든 인간들에게 같은 “인권”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음. 왜냐하면 인간들은 원칙상 평등했음에도 “모두와 모두의 전쟁”이 자연의 정상적 상태인 만큼 인간의 세상에서도 많은 경우에는 “정의”가 아닌 “힘”은 당연히 우세해야 했다는 것. 예컨대 홉스는 전쟁 포로나 “야만인”들을 힘으로 잡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자연 상태에서의 모두와 모두의 전쟁의 당연한 결과”라고 봤음. 이 “모두와 모두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지전능한 국가가 필요했으며, 홉스가 생각했던 이 “리바이어던” (괴물)과 같은 국가는 삼권 분립 없이 개인들의 권리를 얼마든지 침해할 수도 있었음. 부르주아적 “계몽”의 역설: “보편적 인간”이 탄생되는 순간 이 인간의 국가에 대한 예속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아울러 탄생됐음: 개인의 자유 가능성들이 강해지는 동시에 개인에 대한 억압도 강해지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 역사의 원칙임.
 
존 로크 (1632-1704) – “개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 즉 사회계약적 국가를 옹호했는데, 여기에서는 “개인”이란 “재산 보유자”임. 국가의 목적도 생명과 재산의 보호임. 즉, 명시적 제한이 없는 “재산 보유”를 “근본적 권리”로 제시한 것인데, 이것도 초기 계몽주의자들의 인권론의 잡노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줌.
 
3. 근대적 “보편적 인권”의 정형화 –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프랑스 혁명의 인권 및 시민권 선언, 1789) – 무죄 추정 원칙 및 고문 금지 등은 역사적 의미가 컸음. 그러나 이 “인권 선언”은 원칙상 여성이나 흑인 노예 등에게 아예 해당되지 않았으며, 집회의 자유 등 여러 중요한 인권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음. 노조 결성의 권리 등은 구미 지역에서 1830년대 이후에야 어느 정도 인정되기 시작했으며, 노동자 파업권은 최초로 헌법에서 보장된 것은 1917년 멕시코 헌법임 – 초기 부르주아 사회의 “인권” 인식은 그렇게까지 “보편적”이지 않았음. 19세기 내내 – 인권 신장의 지속적 진척. 1900년까지 – 노예 소유는 거의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금지됐으며, 뉴질랜드 (1893) 등지에서 여성 투표권까지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 인권 신장과 함께 “리바이어던”과 같은 국가의 개인 관리 능력도 계속 강화돼 갔음. 사례: 징병제 – 프랑스 혁명 (1793년)이 시작이 되어서 1900년에 이미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 열강/구미권 국가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음 (미국 – 평시 징병은 없어도 전시 징병은 늘 존재했음) – 인권 신장과 국가적 억압의 강화는 병행되는 것은 부르주아 문명의 특징. 국제 여행용 여권 등 인구 이동 관리 장치의 시발점도 바로 19세기임.
 
19세기 부르주아 인권 담론의 재미있는 특징: 전쟁 수행 권리는 국가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는 전시의 징병된 군인의 전사는 “인권 침해”로 인식되지 않았음 (단, “전시 국제법 기준” 개발 – 포로 대우 등에 대한 규정은 “문명 국가” 간의 전쟁에서 지켜졌음. 그러나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 규정을 지켜도 한반도에서 “의병 토벌”할 때에 포로로 잡은 의병들을 얼마든지 쉽게 살해하는 등 한국인에게 “문명국가들의 국제법”을 적용시키지 않았음). 인간 생존권도 “인권”으로 간주되지 않았음 - 19세기 후반기에 인도에서 1천5백만 명 정도로 대량 기근으로 아사했음에도 유럽에서 이를 영국 지배로 인한 범죄로 인식한 것은 일부 사회주의자 (Hyndman – The Ruin of India by British Rule, 1907) 뿐이었음. 상당수 주류 평론자는 “과잉 인구의 자연스러운 소멸”이라고 인도에서의 대량 기근을 환영했음.
 
4. 20세기 –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 혁명들은 “인권”의 개념을 대폭 확대시켰음.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 – 제2차대전 종식 이후에 앙양된 좌파 운동의 상당수의 요구 사항을 그대로 담았음: “제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23조 2-4: 모든 사람은 아무런 차별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하여 동등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에게 인간의 존엄에 부합하는 생존을 보장하며, 필요한 경우에 다른 사회보장방법으로 보충되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 – 노조 결성/가입권을 “인권”으로 처음 생각한 것은 사회주의 운동이었음. 물론 세계인권선언도 전혀 완벽하지 않음: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당연한 인권”으로 명기하지 않았음 (그 당시 대다수 국가들은 징병제를 운영했으며, 스탈린 시대 소련을 위시한 많은 국가들은 병역거부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음). <사회, 정치 권리 국제 협약> (1966 – 유엔의 주요 인권 관련 문서 중의 하나) – “전쟁을 부추기는 선전선동” 금지 (20조) – 반전 운동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는 이 조항은, 예컨대 “북한에 대한 선제 공격”에 대한 주장을 원칙상 북한 주민의 생존권에 대한 부정 (인권 침해)로 볼 근거를 제공함.
 
그러나 인권 의식이 이처럼 성장해온 동시 공동체/개인 생활에의 국가/자본의 개입 능력과 범위는 우리 상상 이상으로 늘어났음: 국제 인구 이동 (이민) 제한 – 1920년 이후의 여권 소지 및 필요 시 사증 (비자) 사전 신청의 의무화; 일부 기업들의 세계 시장 독점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 인도/이란/중국/한국/미국을 제외한 모든 세계 국가에서 미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50% 이상임); “자유 무역”의 강요에 의한 개발도상국가들의 “주체적 개발 권리의 박탈” – 많은 빈민들의 “생존권 박탈”; 환경 파괴의 대대적인 가속화 (이상 기후의 문제 등). 21세기 벽두의 “보편적” 인간: 국가와 자본 앞에서 전보다 훨씬 더 무력해짐.
 
보편적 인권 – 근대사의 귀중한 발견이었지만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됐으면서도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잘 호환되지 못하는 부분들은 많음.
 
총결론: 원칙상 인종 차별 등이 오래 전부터 세계적으로 금지됐지만 오늘날의 뚜렷한 세계적 현상은 “종족적 계급 (ethno-class)”의 출현: 자주적-주체적 개발의 권리를 박탈 당한 수많은 세계 주변부 국가 출신들이 이산/국제적 이동하면서 국적/종족 별로 특정한 업종을 전담하는 것처럼 된다. 사례: 일본/한국에서의 방글라데시/파키스탄/네팔 남성 출신의 다수 공장 노동자 집단 출현, 유럽에서의 몰도바/우크라이나/루마니아 등 유럽 동남부 남성 출신의 저숙련/비숙련 공장 노동에의 대대적 진출. 노르웨이 – “폴란드 남자”는 수리공의 대명사가 되는가 하면, “필리핀 여자”는 하녀/베비시터의 대명사가 됨. 이 “종족적 계급”에 대한 각종의 차별들은 성별 차별 (“폴란드 남자”/”필리핀 여자”에 대한 각종 편견/차별)과 맞물리면서 세계 주변부 계통의 새로운 “종족적 계급”들을 신흥 빈민 계급인 precariat의 최하 부류로 만듦. 격차 사회가 점차 고질화되어감에 따라 외부 출신의 precariat와 “토착” precariat 사이에서 처절한 (그리고 우파가 계속 부추기는) “생존권 싸움”이 벌이지고 이 과정에서 극우 정파와 각종 인종주의자들이 계속 정치적 이득을 보고 있음. 자본주의 후기의 세계: 인권에 대한 의식은 심화됐음에도 실제로 가면 갈수록 훨씬 반인권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 자본주의와 인권의 기본적 호환성에 대한 새로운 비판적 검토가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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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2009/07/03 05:28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몸이 힘들면 소주 한잔이 생각나고, 그걸 먹고 버틸 생각을 하니 말이다

순전히 육체적 힘겨움을 이길 생각으로 마시는 소주 1병,

그리고 술을 먹고 토해내는 감정의 찌거기들

 

술이 취하면 고단함과 생각의 격렬함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내 몸은 사회적 무중력 상태를 만끽하면서 잠이 든다

 

요즘은 술심으로 일한다

이쯤되면 나도 완전히 아저씨가 된 것이다.

 

 - 2009. 7. 3. 새벽. 경남 함안 장미모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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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찔레꽃

2009/06/0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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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에 대한 사랑

2009/05/05 19:22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이다

 

( 도대체 인간의 사랑처럼 불완전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떻게 보면 인간은 동물보다 더 천박한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

 

신을 사랑하는 자가

신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신을 사랑할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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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사랑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2009/04/20 20:44

0. 인간

인간은 체력이나 물질적 에너지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으로 살아간다


1. 사랑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삶의 장소는 여행이나 꿈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중에서 사랑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이 가장 독특하다

사랑은 기존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를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반복되는 사랑 안에는 끝없이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사랑은 카오스이다


2. 죽음

따라서 사랑의 완성은 죽음이다

영원한 그 무엇이 완성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의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이다

죽음에 이르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이다


3. 예술

혁명은 예술이다

사랑이 가장 강력한 혁명이며 이 혁명의 표현이 예술이다

인간은 유한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술을 갈망한다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예술이 등장한다

이제 예술이 유일한 돌파구가 된다


4. 섹스

이성 간의 사랑은 뜨겁고 동성 간의 사랑은 더 뜨겁다.

이성간의 섹스는 본능을 전제로 한다

이성간의 섹스에 등장하는 쾌락의 근원은 종족이나 유전자 재생산이라는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임신의 공포와 종족번식 본능이 사라진 섹스에서 진정한 원초적 쾌락이 등장하며, 이런 육체적 쾌락의 원천은 동성 간의 사랑이다

그래도 이성간의 섹스가 뜨거운 것은 쾌락의 한계로 인한 처절함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이든 이성이든 이들의 사랑에 대한 깊이는 알 수가 없다

사람의 깊이도 알 수 없지만 사랑의 깊이는 더더욱 알 수가 없다


5. 고통

인간은 (다양한) 사랑의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

고통의 끝은 편안함이다 고통이 강렬할수록 그 뒤에 찾아오는 편온함이 더 한다

그 깊이가 더 할수록 성숙한 내면의 깊이를 간직하게 된다


6. 부활

사람은 죽지만 자기 마음속에 반드시 부활하다

부활하지 못하는 이유는 죽지 않았거나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나

나는 아직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할 자신이 없다 신을 사랑할 자신이 없다

가끔 푸른 하늘과 태양, 구름 그런 것들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행복한 죽음과 사랑은

내가 죽을 때 내 곁에 있어줄 단 한명의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수준이다

그것이 神이어도 상관이 없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말을 나누면 행복하겠다

‘이젠 쉬어 그리고 잘가......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런데 가끔은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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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깨달음의 열린 삶으로

함께 사는 아름다움으로

아! 찬연한 빈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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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사고(accident )와 사건(evenement)

 

학살(虐殺)

비국민

학살자들은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행복하지 않다. 자신이 사회와 일체감을 느낄때 행복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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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우리 예술 한번 할까요

2009/01/15 06:08

한밤의 짙은 잠에서 깨어보니

난 아직 죽음이 두렵다

아직 내가 인간의 정리(精理)에 약하기 때문이다

 

난 아직 사랑이 그립고,

그래서 예술을 열망한다

 

우리 예술 한번 할까요

 

 

- 2008. 1. 15.  새벽 6시 홍제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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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삶과 죽음

2009/01/13 15:38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삶에 대한 공포때문이다

죽음이 아름다운 것은 삶이 아름답기 때문

따라서 부활(復活)의 핵심은 삶!!!

 

삶의 미련은 죽음의 공포로 작동한다

언제나 죽음을 대비하는 삶 (맞이하는 삶, 준비하는 삶)

 

'지금 죽어도 좋다!!!'

깨달음의 핵심은 현실의 삶(현존)

그 삶의 강도

 

삶의 긍정은 죽음에 대한 긍정이다

삶에 대한 열정은 죽음에 대한 열정

삶이 강렬할수록 죽음을 긍정한다

 

강하게 빛나는 태양의 저녁 노을이 (붉게) 아름다운 것은,

가득찬 달(滿月)이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이즈러질줄 알기 때문이다

 

삶이 강렬해야 이즈러짐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죽음?

 

- 2009. 1. 11. 북경의 어느 맥주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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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메일] 당신에겐 어떤 쾌락이 존재하는가?


- 쾌락이란 무엇인가?
쾌락이란 뭘까? 듣기만 해도 오묘해지는 이 단어를 단숨에 정의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쾌락을 느끼다’라는 말에는 오래간 묵었던 갈증을 단번에 풀었다는 ‘쾌(快)’한 느낌이 있는가 하면 도덕적 금기를 넘어 음탕한 행위를 하였다는 ‘불쾌(不快)'의 감정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쾌락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부끄러움을 대동하는 부정적인 의미인가? 아마도 그 대답은 각자만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쾌락이 어떻게 다가오느냐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은 다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쾌락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극단이라고 한다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은 흥분을 가라앉혔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다. 인간의 삶은 늘 흥분으로 점철된다.

섹시한 이성을 보면 요동치는 심장, 음식을 제때 섭취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감정, 그리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을 때 드는 불안감은 늘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흥분들이다. 그러한 흥분들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또 그때마다 해결되는데 그 흥분과 해소의 반복이 바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원칙’이다.

앞서 말했듯이 ‘쾌락원칙’은 늘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 때문에 프로이트는 쾌락을 단순히 흥분의 국소적 해소가 아닌 인간 심리 현상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로 본다.


- 영화 <색, 계>에서의 쾌락원칙!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는 쾌락의 흐름경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친일파인 리(양조위)는 우리가 이미지 짓고 있는 친일파와는 달리 철두철미하고 냉철한 감성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는 체포된 테러리스트들에게 그악스러운 고문을 서슴지 않으며 나아가 살인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한다.

반대로 그는 늘 암살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리는 어두운 극장에는 일체 출입을 하지 않으며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항상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 테러리스트들에게 있어서 친일파 ‘리’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城)과도 같다. 그는 그렇게도 신중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평범한 일상이란 가능한 것일까? 그의 삶에는 쾌락원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흥분이 가라앉을 새도 없이 그의 기분은 언제나 상승곡선을 이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그가 선택한 삶이며 살아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쾌락에 다다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왕치아즈(탕웨이)라는 여인과의 만남과 그녀와의 섹스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녀와의 섹스를 통해 이미 최고치에 다다른 흥분을 해소할 뿐이다. 살인과 고문을 통한 흥분은 섹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흥분과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둘 다 삶과 죽음을 담고 있지만 그 자장의 범위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고로 섹스라는 행위는 더 큰 흥분을 가라앉히는 희석제가 되어주는 것이다. 일상생활이란 어쩌면 섹스보다도 더욱 흥분되는 장(場)인지도 모른다.


- 당신에겐 어떤 쾌락이 존재하는가?
쾌락 없이 우리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이 쾌락이란 우리 삶 전체를 연동시키는 중추를 맡고 있다. 일상에서 차례로 혹은 중층적으로 고개를 드는 흥분들은 해소가 됨으로써 쾌락을 낳는다. 그 해결 과정을 들뢰즈는 리비도 집중, 수축, 종합으로 설명한다. 지금 이 순간도 나에게는 수많은 해결되지 않는 흥분들이 존재한다. 그 존재들을 하나씩 해소시켜 나갈 때마다 나는 적절한 쾌락을 면면히 이어 갈 것이다. 당신에게는 어떤 쾌락이 존재하는가?

 

(출처 :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know.asp?idx=98&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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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變

2009/01/07 07:54

사랑이 變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움이 變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이 變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變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變한다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생명력이다

 

그러나

끝없이 변화하는 萬物은 자신의 시간이 끝났을 때 소멸한다

인간의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짙은 새벽이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영겁과 찰라의 時空이 교차한다

시간은 무한대의 밀도로 압축되고 공간은 초월된다

그리고 不變의 어떤 것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순간을 알지 못한다.

  

 

     - 2008. 1. 7. 새벽 6시 충무로 사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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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命

2009/01/05 13:30

謨事在人   成事在天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하늘이다"라고 했다.

 

이욱연. 2008.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창비. p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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祈願

2008/12/21 22:41

願하옵니다.

 

나와 관계 맺은,

그리고

관계 맺을 수많은  因緣에게

 

깊은 容恕와 慈悲를.

 

그 願力을 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2008. 12. 21.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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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피면서 살아야겠다

2008/12/16 14:45

말을 잘 해야 한다. 되도록이면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중요한데,

살다보면 여러가지 이유로 불필요한 말을 쏟아내게 된다

1년 동안 했던 말들과 이런 말들을 되새김질 하다보니 여러가지로 내면이 불편하다.

 

말을 쏟아낸 내가 이렇게 불편한데, 그 말들을 듣고 지낸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상대방을 언짢게 하는 말과 함께 기분이 좋아서 흘러보낸 말도 항상 잘 살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니 그렇다.

잘 살피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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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칼럼] <21> MB 정부 예산에 '배고픈 국민들'은 없다

 

 

정부가 드디어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2%대로 낮추겠다는 것 같다. 이게 낮은가? 아직 충분히 정신 차렸거나, 어떤 일이 2009년도라는 시점에서 벌어질 것인가 실효성 있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원래도 한국 경제는 내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일방적으로 희망하는 것과 달리 내년도 상반기에 세계 경제가 저점을 통과하고 무난히 하반기부터 회복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건 지난 칼럼에서 이미 얘기한 바가 있다.

 

이 상황에 들기름을 쏟아 부은 것은 지금 여당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뒤죽박죽 예산들이 통과된 내년도 예산안이다. 즉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 방향이다. 정부와 토목관련자들이 당분간 TV와 라디오 그리고 신문을 장식하며, SOC의 불가피성과 경제적 효과 등을 얘기하며, 마치 무당굿 하듯이 "내년에는 다 잘 될거야"라고 외쳐댈 것이다.

 

먼저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뉴딜 때 토목과 관련된 예산은 아무리 높게 추정을 해도 10% 이상 나오지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90%는 복지와 사회안전망 관련 예산이다.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서는 평균증가율 정도만 올라갔다. 그리고 지금 오바마의 '새로운 뉴딜'의 방향 역시, 절반 이상이 의료복지와 노후된 학교시설 보수 등이고, 나머지 토건 예산도 오랫동안 보수되지 못한 고속도로에 대한 '리뉴얼' 작업 그리고 세계 10위권 바깥으로 추정되는 인터넷 고속망 설비라는 점이다. 뉴딜은,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토건 비중이 전체의 10%를 넘지 않는다. 지금 미국의 금융위기가 건설부문 과잉투자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터져나왔지만, 미국 경제 내에서 건설부문의 지출은 10%를 넘지 않는다.

 

한국은 평소에도 그 두 배 가까운 건설지출을, 국책사업이라는 형태로 억지로 끌어오면서, 지난 10년 동안 새만금과 각종 특구와 지역도시 등을 만들어냈다. 많은 지방공단의 입주율이 50%도 제대로 넘지 않는 현 상황에서, 국민경제의 나머지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건설에 넣으면, 위기가 극복이 될까?

 

불행히도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지는 경기침체가 하반기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내수 위축으로 연결되면서 내년 9월 이후 청명한 가을 어느 날, 한국 경제는 사회붕괴라고 할 수 있는 '경제 빅뱅'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사람은 굶고는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사람들의 밥과 일자리에 들어갈 돈을, 시멘트 사는 돈, 불도저 움직이는 돈, 그리고 토호들에게 토지 보상비로 풀 돈으로 쓰고, 정작 "배고파"라고 하는 국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주류 경제학 혹은 표준 경제학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경제원론 체계를 지지하는 그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약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이 '위기이론'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 이론은 '일반 균형' 그것도 '장기 균형'이라는 개념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케인즈의 거시경제 이론을 교과서에 끌어다 놓았다. 그러나 케인즈의 경제이론에도 왜 위기가 생기고, 이 위기의 전개, 즉 '과정'에 관한 이론은 거의 없다. 지난 주에 내가 얘기한 위기의 패턴 분석 같은 것들은 표준 경제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콘트라티에프의 장기파동설과 '공황론'과 같은 비주류경제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패턴 분석들이다.

 

내년에 한국에서 벌어질, 1945년 시작된 한국 경제사 초유의 사건에 대해 경제학 교과서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같은 구조가 재생산된다"는 전제 하에 진행되는 어떠한 시뮬레이션 모델도 내년도의 한국 경제 상황을 모델 속에서 재현해줄 수는 없다. 이건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인 문제이며, 동시에 모델 구조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데이터는, 지금 부동산을 위해 국민들이 융자한 개인 부채가 상당하고, 이로 인해 실제 '소비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내년도에 '건설 일용직' 일부를 제외하면 추가적인 일자리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현 정부가 염두에 둔 2~3%의 지방토호와 재력가들의 '다주택 보유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어차피 내년 내내 부동산 경기는 일부 지방개발지에 대한 투기를 제외하면 꽁꽁 얼어붙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현 상황은 여러 가지 이유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국민 혹은 이사가 필요했던 국민들이, 이 공간에 대한 지출을 일시 정지시키고, 경제빅뱅이 초래할 최소 2~3년 간의 대공황 상황에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가처분 소득'을 지키려고 하는 상황이다. 불행히도 경제빅뱅이 진행되면 현재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반 가까이는 영세민 혹은 도시빈민으로 경제적 위상이 변하게 될 것이다.

 

그 밑의 사람들은? 일부는 7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지방으로 공사장을 따라다니며 일용직 근로자로 살게 되는, 1939년 출간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연출될 것이다.

 

경제학 이론에서 답을 찾기가 어려우므로, 잠시 시계를 십년 전으로 되돌려 1998년 막 집권한 DJ 정권 내부에서 있었던 논의들을 잠시 생각해보자.

 

당시 나는 재벌사였던 어느 그룹의 내부에 있었고, 1월초 어느 날 기획실 간부들이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이후에 벌어진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매각하는 계열사의 가격을 조금이라도 높게 받기 위해서 '기업 가치평가'를 맡은 컨설팅 회사들에게 줄 자료들을 정리하거나, 조금이라도 이 회사들이 나아보이게 하기 위해서 경영계획서 같은 것들을 영문으로 만드는, 그런 귀찮지만 어쩔 수 없던 일들도 했었다. 그리고 막 구성된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몇 가지 자문을 해주기도 하고, 또 개혁적인 경제학자들끼리 정부에 대한 직간접적인 건의에 대한 논의들도 같이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인수위원회, 그리고 청와대 경제팀에서 가장 심각하게 학자들의 건의에 대해 경청했던 것은 '폭동'에 관한 것이었다. 서울역으로 노숙자들이 밀려들고 있었고, 이런 노숙자들은 서울만이 아니라 부산 등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여기에 잠시 후 기업에서 정리해고 이후로 쏟아지게 될 해직자들에 대한 사회적 프로그램을 경제적으로 디자인하는 것들을 시급히 하지 않으면, 대규모 폭동으로 인해 정부가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것들을 논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혼동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할 정치적 여건이 형성됐고, 자활 사업 등 한국에는 없었던 적극적인 복지정책들이 급하게 도입됐고, '사회안전망'이라는 복지담론이 성립됐다. 당시 급하게 도입됐던 이런 프로그램들이 과연 실효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당시 소장파 학자들이 기대했던 대로 발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실증적 검토와 같은 아카데믹한 논의는 추후에 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1998년 1월과 2월, IMF 경제위기라는 엄청난 사건 속에서 새롭게 정권을 인수한 사람들에게는 '폭동'이라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내 시각이 너무 비관적일까? 나는 지금 이명박 정부가 최근에 보여준 모습대로 '토건 위주의 재정정책'을 강행한다고 하면, 내년 상반기가 지나더라도 중산층과 하층민들, 즉 도시빈민들의 소비여력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고, 그 효과는 끔찍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내수경제로 인해 9월 이후에 경제빅뱅이라는 클라이막스로 가게 될 것 같다.

 

경제학적이거나 정치적인 수사를 다 제외하고, 이번에 한나라당이 강행처리한 예산은, 솔직히 이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경제 위기 예산'이라기보다는, 2010년 6월의 지역선거를 겨냥한 선거용 선심선 예산처럼 보이지 않는가? 어차피 내년이 되면 선거를 치르기 위해 각 지역에 도로를 놓고, 건물을 짓고, 또 하천정비 등 별의별 사업을 '무슨 무슨 르네상스', '무슨 무슨 중심축 개발' 이렇게 해서 여야가 잘 합의해서 했을, 그런 선거용 예산 사업이다. 이번에는 그 선거용 예산을 1년 당겨서 미리 선거준비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비상편성을 해놓고, 내년도에는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몇 가지 간단한 원칙을 생각해보자. 지금 재정지출이 가야할 곳은, 지역복지, 노동, 그리고 창의성 이 세 가지이다. 창의성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것은, 2~3년 경제가 힘들다고 해서, 산업활동이나 생산활동을 그만둘 수는 없기 때문이고, 글로벌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과 발상을 위해서 예를 들어보자. 지금 사실 이번 국회에서 시급히 논의해야 했던 것은, 실업급여의 지급 기간을 한시적으로라도 1년 이상 장기로 연장하는 방안과 같은 것들이다. 어차피 내년에는 실업자 혹은 유사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있는데, 1929년의 대공황과 달리, 이미 존재하는 실업급여 제도를 약간 손질하고 그 기간을 특별대책 등으로 연장하면, 가장 시급한 서민들에게 바로 재정정책이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런 간단한 방법을 두고,온 국토를 헤집는다고 해서, 그게 내년도에 바로 '삽질 들어가게' 만들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멘트 사오는 돈이 늘어난다고 해서 국민들의 지급여력이 단기에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실업급여, 사회적 일자리, 창의성 사업, 이 세 가지만 주력해도 단기적인 충격을 받아내면서도 장기적인 산업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데, 정부는 도무지 이런 일들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년 9월과 10월, 아마도 한국 경제에 다시 폭동 형태로 배고픈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위기가 실제 닥칠 가능성이 높다. 배고픈 사람들이 가게에서 생필품을 집어가거나, 그중의 일부가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기 시작하면, 그 혼동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러 가지 형태로 국민경제 내에서 폭동의 위험은 항상 잔존하고 있지만, 그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경제 폭동이다. 이게 내년도 하반기에 실재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굶어봐라. 역사가 '근대의 탄생'이라고 찬미하는 프랑스 대혁명도, 경제적 눈으로 보면, 자식들에게 빵을 먹여야겠다고 길거리로 나선 여성들이 베르사이유 궁으로 행진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경제빅뱅이 여의도 증권가와 정가 그리고 과천의 관청에서 사무직들의 컴퓨터와 서류 위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는 2009년도 한국 경제의 전개과정에 대해 아직 하나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국민경제라는 것은 부자들만의 것도 아니다. 경제를 구성하는 가장 아랫 단계에는 "배고프다"라고 아우성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지금이 그 시기이다.

 

대기업와 중소기업에서 내년 한국 경제를 헤쳐나갈 힘과 일자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시 자활 혹은 시민경제의 영역을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정부가 조금 더 적극적 복지로 연초부터 사회안전망을 대대적으로 확대시키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그냥 대책 없이 삽질만 하고 있다가는, 정말로 '빈곤형 경제빅뱅'을 볼 수 있다. 제발 폭동이라는 개념이 경제 과정에 존재한다는 것을 탑재하기 바란다. 한국은 좋든 싫든 이미 중남미형 경제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중남미에서 언제 폭동이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됐는지, 내년 연초 경제팀은 그걸 연구해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서로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출처 : [프레시안] 우석훈 칼럼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215141254§ion=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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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함'에 대하여

2008/12/09 11:25

평온함

 

1. '평온하다'는 말은 참 어감이 좋다.

 

2. '평온하다'는 말은 '편안하다'는 말에 비해 동적인 것 같다.

태풍이나 땅이 파일 정도의 비바람이 몰아친 뒤에는 평온함이 오는 것이다.  '태풍 뒤의 편안함'은 부자연스럽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평온함은 '(자신이나 어떤 결과의) 노력으로 찾아오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3. 평온한 삶과 편안한 삶을 보면 더욱 그렇다. 

 

4.삼국지를 보면, 제갈공명은 항상 부채를 가지고 다닌다. 이에 의문을 품고 물어보니 제갈공명은 '항상 냉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 부채질을 한다'고 말한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첫 장면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등장하는데, 이에 주인공은 스승에게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바람때문입니까, 아니면 나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까'라고 물어본다. 스승은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네가 흔들리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5. 되물어 본다. 

'나는 어떤 격정이나 두려움에도  들뜨지 않고 항상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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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와 평화/반전 문제 

 

출처 : 만감: 일기장 2008/12/01 22:50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7406 
 
 
                            ”평화의 아들은 전장에 나가도 되는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글을 보내달라는 청탁에, 처음에 망설였다. 자본주의•국가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정의와 사랑이 원천적으로 결여돼 있는 이윤추구 체제에 적응한 어느 종교조직도 ”태생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지 않을 수 없지만, 종교학자 최준식 교수 (이화여대)도 일찍이 지적했듯이 국내의 종교조직 치고 가톨릭교회는 그나마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한 소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보기만 들자면, 불자로서 필자에게 중요한 사실이 가톨릭교회가 불교와 화목한 교류관계를 맺어 ”종교간의 상생”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을 이야기하자면, 전쟁과 평화, 폭력과 비폭력 저항의 문제를 보는 국내 가톨릭교회의 시각에서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유구한 역사의 숨결도 해외교회들과의 유기적 관계성도 느낄 수 없다는 부분이다. 20세기에 군사적 폭력에 가장 멍든 사회라면 분명히 두 쪽으로 갈라져 아직 평화협정도 맺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부터 이야기해야 하지만, 이 폭력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 힘을 국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서 얻기가 힘들다는 것은 한탄스러운 일일 뿐이다.
 
전쟁, 폭력이란 예수의 교회에 있어서 애당초부터 ”우상숭배”, 즉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로마제국의 어용종교와 거의 같은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이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시킨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155-222)도 예수를 따르는 ”평화의 아들”이 전장에 나갈 일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었지만, 대체로 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평화주의와 병역거부는 다수 초기 기독교인들의 굳은 자세이었다. 단,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국교화되자 교회와 국가 사이의 타협의 일환으로 교회가 – 신약의 가르침에서 분명히 없는 – ”의전” (義戰: 정의로운 전쟁)의 논리를 받아들여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 능력을 일시적으로 잃게 된 것이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 5:29)는 말씀이 망각됐을 때에 교회는 결국 상처를 입어 만신창이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주 등 비(非)유럽 지역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의 침략에 편승하기도 하고 그 침략을 ”선교”의 이름으로 합리화한 것도 교회로서 씻겨지기 어려운 죄악이 됐지만, 독일 가톨릭들과 프랑스 가톨릭들이 서로를 전장에서 죽이게 된 제1차세계대전과 같은 상황들은 새삼 교회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많은 신자들에게 일으켰다. 이 세계에서 최대의 종교조직이라 할 가톨릭교회마저도 그 신자들이 각자 세속 정부들의 명령에 따라 서로 죽이게 되는 사태를 예방할 수 없다면 신자 개개인이라도 예수의 평화정신을 따라 제 양심을 살려야 하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은 반성이 제1, 2차 대전 사이, 그리고 그 뒤에 축적된 결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는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유의미한 결론을 내려 개개인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권리를 신앙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그 덕분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많은 미국 가톨릭들의 병역거부가 미국 주교회의의 지원을 얻어, 1970년에 이르러 가톨릭계 거부자들이 전체 거부자들의 8%나 됐다. 이와 아울러 1980년대 이후에 전쟁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도 많이 분명해졌다. 지금의 이라크 침략은 물론이거니와 1990-91년의 제1차 걸프 전쟁도 교황청이 반대해온 것이다. 물론 예수와 초기 기독교인들의 평화정신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이것보다 훨씬 더 수위가 높은 전쟁 반대가 필요했을 것이지만, 교황청의 반전 입장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좋아할 일이 없는 중남미, 아프리카 등 수많은 주변부 국가들에서의 신자들에게 환영 받았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와 같은 평화주의적 자세를 교회가 취하지 않는 이상 세계 체제의 주변부, 준(準)주변부 빈민들이 신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오늘에 과연 그 교세를 유지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준(準)주변부의 국가 중에서는 가톨릭들의 반전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한 나라가 있는데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라크 침략이 시작됐을 때에 한국 주교회의는 평화 촉구 성명서 (2003년2월14일)를 내는 등 세계 가톨릭 교회와 보초를 맞추었지만 국내 정치적 문제로서의 이라크 파병을 다룰 때에 교황청보다 훨씬 더 보수적, 그리고 거기에다가 상당히 자가당착적 입장은 일부 고급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확인됐다. 한국 가톨릭의 최고의 권위인 김수환추기경이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 – 이라크 전쟁 자체는 잘못된 전쟁이라고 전제를 하고 - “파병문제에 대해 노대통령이 나에게 물었을 때 이라크의 평화를 위한 파병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평화를 위한 봉사단 성격으로 파병할 것을 권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공격받을 때를 대비해서 자위수단의 병력은 가야 할 것입니다. 이라크 문제는 이라크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평화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라크는 석유보유국이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 평화가 복구되도록 이라크 자치정부 수립을 함께 걱정해야 합니다” (김추기경의 인터뷰, <경향신문>, 2003년11월24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하면 할수록 비(非)논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전쟁 자체가 침략이었다면 침략국의 편에 서서 파병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평화와 복구”를 위한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침략국의 편에 서서 파병된 한국 군인이 이라크 애국자들의 공격을 당해 “자위수단”으로서의 화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이는 침략 동참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겠는가? 세계 교회가 이라크 침략을 반대했을 때에 한국교회의 가장 존경 받는 어른은 예수의 평화정신을 배반하고 가톨릭교회의 비극적인 역사의 교훈들을 무시하는 침략 옹호의 주장을 피력한 것이었다.
 
평화정신의 또 하나의 축인 병역거부 등 적극적 반전 행동의 차원에서도 국내와 국외 교회의 “온도차”가 뚜렷하다. 아직까지도 미국에서의 철저하게 반전적, 병역거부 지향적 “가톨릭 노동자 운동”과 같은 대규모 “좌파 가톨릭” 단체들이 국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일부의 기능을 정의구현사제단 등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태어난 가톨릭 사제 단체들이 담당하지만, 그 역량의 한계가 있어 가톨릭 교회의 전체적 보수성을 깨뜨리기에 “역부족”인 듯한 느낌이다. 그러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분명히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대체복무제에 대한 국내 가톨릭의 입장도 놀라울 정도로 “온건”(?)하다. 2002년3월에 김수환추기경이 <교육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국가의 안보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면 병역 의무에 못지않은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대체복무를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라도 천만다행이지만, “국가 안보를 해치지 않는다면”라는 – 종교인보다 정치인에게 더 어울리는 – 전제와 “강력한 요구” 대신에 단순히 “괜찮다”고 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구미 가톨릭에게 보기 드문 무관심을 나타낸다. 실제로 지난 2005년10월19일에 가톨릭 청년 고동주가 국내 가톨릭으로서 최초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바 있었는데, 그에 대한 교회의 제도적 지원이 너무 취약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폭력을 거부한 이들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다 죄가 있는 만큼 예수의 재림까지 전쟁의 위협이 계속 임박할 것이다. 그러나 죄악을 사랑의 단결을 통해 지워버릴 수 있다면 폭력도 아울러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Non possumus non laudare eos, qui in iuribus vindicandis actioni violentae renuntiantes.. Quatenus homines peccatores sunt, eis imminet periculum belli, et usque ad adventum Christi imminebit; quatenus autem, caritate coniuncti, peccatum superant, superantur et violentiae”).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의문 ()을 충심으로 실행할 만큼 한국 교회가 과연 그 특유의 보수성을 약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사유제와 사유제가 부추기는 탐욕, 가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전쟁을 모두 다 거부한 예수의 – 진정한 의미에서의 – “공산주의적”, 즉 사랑으로 뭇 존재들을 아우르는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많아져 제도권에서의 안주의 관습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폭력 정지”에 대한 바티칸 제2공의회의 말씀이 한국교회에서 “공염불”로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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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제45장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衝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靜爲天下正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 신영복. 2008.『강의』. 돌베개.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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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Science is what you know, philosophy is what you don't know.
 
송상용(과학기술학자)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버트런드 러셀의 상당히 명쾌한 말이다. 그렇게 구분을 해서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 도대체 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고 탐구한 것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에 대한 뭔가 알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은 과학으로 넘겨주고 철학은 계속 모르는 것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론이 천문학으로 독립해나가고 또 영혼의 문제 등을 철학에서 탐구했는데 그것을 조금 알게 된 부분은 심리학으로 넘어가고...... 이런 식으로 철학은 개별과학을 계속 독립시켰다.

 

그러면 이와 같이 다 과학으로 넘겨주면 철학의 역할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실지로 그런 경향 때문에 철학의 위기가 얘기될 때가 있었다.
 
리어왕이 딸들에게 땅을 다 나눠주고 나중에는 황야에서 울부짖고...... 철학의 가련한 운명이 아니냐 이런 얘기까지 나왔는데 사실 우리가 수학에서 무한이라 정의함은 거기다 보태도 무한이고 빼도 무한이기 때문에 결국 아무리 가감을 해도 무한은 무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철학에서 아무리 살림을 많이 낸다고 하더라도 철학의 영역은 계속 무한한 것으로 남는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 영국의 과학자 보일(1627~1691)이 이전의 화학과 다른 점은, 물질에 관한 신비적인 설명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보일에게는 화학물질이 왜 그렇게 변하느냐라는 것이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학물질이 변하되 ‘왜?’가 아닌 ‘어떻게’ 변하는가?를 중점적으로 보는 것이 보일의 목적이다.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무거운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느냐?라는 질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이라면 갈릴레오는 거기에서 ‘왜’를 제거하고 무거운 물체가 ‘어떻게’ 떨어지느냐, 또 속도가 ‘어떻게’ 변하느냐는 것이 갈릴레오의 관심이었다.

 

‘왜’에서 ‘어떻게’로 넘어가는, ‘why’가 아니라 ‘how’로 넘어가는 이것이 바로 과학혁명의 특징이다.

 

-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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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후기(後記)

2008/11/13 17:51

‘남원지역 민간인희생 사건’ 을 마치고

 

 

0.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을 조사할 때는 사무실에 앉아 책을 찾고 면사무소에 가서 자료를 뒤지는 것보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직접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나이든 노인들을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사건 현장을 갈 때 조사관들은 노트북, 프린터, 녹음기, 카메라, 수첩을 비롯해 인주, A4 용지, 스테이플러까지 모두 지고 간다. 그 날 이야기하는 분위기에 따라 어르신들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지, 얼마나 이야기를 해 주실 지가 달라지기 때문에 다음에 약속을 따로 잡기는 어렵다. 그래서 현장 분위기를 봐서 바로 조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 많은 짐을 다 짊어지고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어깨도 아프고, 딱딱한 정장 구두를 신은 발도 아프다. 그래도 운동화나 등산화를 신고 출장을 갈 수는 없다. 시골에서는 ‘검정색 기지 바지’ 입고 ‘깜장 구두’를 신고 다녀야 있어 보이고, 동네 어른들한테 조금이나마 먹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는 꾀를 내서 구두 밑창에 운동화 깔창을 하나 더 깔아서 속은 운동화 같은 구두를 신고 다닌다.

 

1.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은 한국전쟁 때 주민 90여 명이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특히 일부 국군이 일본도(日本刀)로 주민들 목을 잘라서 살해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마을 주민들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사건 조사를 신청한 사람은 없다. 어쩔 수 없이 마을 전체를 수색(?)해야 했다. 이틀쯤 마을에 살다시피 하니까 마을 분위기가 대충 파악됐다. 마을 어르신들께 군인들이 칼 휘두른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군인들이 일제강점기 순사들처럼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어요?”
“아니여, 빨간 보자기에 숨겨 왔어. 장교들이 가지고 다녔지. 그 칼로 사람 목을 치는데 우리가 보기에도 신기하게 칼질을 잘했어. 사람 목이 잘렸는데 사람 모가지 앞에 가죽만 붙어 있게 잘라서 누구 머리인지 알 수 있게 잘라 놨어. 그리고 거기에다 소금을 뿌렸어. 비린내 나지 말라고 그랬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2.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와 덕치리는 지리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들을 조사할 때는 아예 등산화를 신고 다녔다. 조사는 겨울에 다녔는데 겨울은 조사관들에게는 가장 좋은 계절이다. 봄, 여름, 가을은 한창 농사일이 바쁠 때라 아침 일찍부터 다들 논, 밭으로 일을 나가서 집에 사람이 있는 일이 거의 없는데 겨울에는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노인당이나 마을회관에 모여 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으니 혼자 집에 있으면 외롭기도 하거니와 보일러 기름 값 걱정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지낸다.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에 있는 노인당을 찾아갔더니 역시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소개를 하면서 인사를 드리니 노인들은 젊은 사람이 시골에 온 것도 신기하거니와 ‘진실화해위원회’라고 무슨 국가기관이라는데 당최 뭐라고 하는지 어려워하는 눈치다. 한참을 약장사처럼 떠들면서 “어르신들이 해 주는 이야기가 정말 중요하다.” 하는 이야기를 하니, 노인들도“그 때 우리 아부지도 죽었소.”“내 남편도 거기 있다가 죽었소.”하며 슬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동안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인원체크(?)를 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내일 면사무소로 꼭 나오시라고 당부를 하면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안하고 앉아계셨다.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왜 암말도 안 허요?”하고 물으니 갑자기 눈물부터 쏟아내신다.

 

할머니가 노치마을로 시집온 지 얼마 안됐을 때 전쟁이 나고 국군들이 남편을 죽였다. 남편이 어이없게 죽고 할머니는 서러워할 새도 없었다. 살던 집도 군인들이 불을 질러서 오갈 때가 없었는데 배는 불러있었다.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몰래 애를 낳았다. 남편 죽고 혼자 온갖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할머니의 기구한 팔자 이야기를 눈물범벅을 해서 털어놓으신다.


서럽게 우는 할머니 옆에서 암말도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다가 “할머니, 제가 예쁜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게요”하고 사진을 찍었다. 눈이 동그란 할머니 사진은 아직도 나한테 있다. 사건 조사가 끝나서 도통 갈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를 접고 할머니 말이 담긴 보고서를 직접 들고 가 할머니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3.
한국 전쟁 때 공비토벌작전과 관련된 지역 조사를 할 때는 항상 육군본부에서 묶어 낸 『한국전쟁사료』를 옆에 두고 본다.『한국전쟁사료』는 한국 전쟁 때 전투 상황 보고, 정기 정보 보고, 작전 계획이나 명령 따위를 담은 국내의 유일한 사료(史料)이다. 이 사료를 보다보면 민간인희생사건과 관련된 날은 전투 기록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거창사건도 그렇고 함평사건도 그렇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져보고 또 뒤져본다.

 

『한국전쟁사료』59권에는 전쟁 당시 호남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전담했던 국군 11사단 제9연대, 13연대, 20연대의 전투와 작전 보고가 들어있다. 그래서 공비토벌작전과 관련된 민간인희생사건 조사를 할 때는 주로 59권을 자세히 살피면서 실마리를 찾는다.

 

남원지역 민간인희생 사건은 국군 제11사단이 남원에 주둔하였고, 지리산이 있는 지역이어서 9연대, 13연대, 20연대 보병부대 모두 작전을 한 지역이다. 여러 참고인들이나 노인들한테 물어보아도 ‘11사단’만 기억하지 더 이상 소속부대는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참전경찰들도 “11사단이라고만 알지 구체적인 소속 부대는 몰라.”하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 사건과 주천면 고기리 사건은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가운데 제11사단이 벌인 대표적인 사건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0년 5월 『동아일보』기사에 제11사단이 실렸고 이를 기초로 지금까지 거의 모든 언론자료나 민간인집단학살과 관련된 책과 글에도 ‘11사단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증거자료나 소속부대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다시 『한국전쟁사료』제59권을 펼쳐 보았다. 작전기록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한국전쟁사료』제60권을 펼쳤다. 이 제60권에는 제11사단이 1951년 4월부터 전방으로 배치되면서 벌인 작전 기록과 직할부대인 공병중대, 의무중대, 병기중대들의 기록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전차공격대대가 들어 있다. 전차공격대대 작전보고를 보다보니 ‘남원 주천면 내기리 고촌리 전과’라는 글이 보였다. 더 제대로 말하자면 글씨가 느닷없이 나한테 달려온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작전보고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일일이 한글로 옮겼다. 대강면 강석마을 사건은 물론, 산내면 사건하고도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사건이 풀리기 시작했다.

 

작전기록을 정리하고 전차공격대대 생존자를 찾기 시작했다. 생존 군인을 찾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60년이 지난 일이니 더더욱 그러하다. 거기다 명단을 확보하고 찾았다고 하더라도 대개 사망하였거나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전차공격대대 작전주임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계급이 중위였던 작전주임은 전차공격대대가 “남원에서 제11사단사령부 경비와 자체방어 임무, 수색임무, 작전규모가 작은 전투에 참여했다.”고 말해 주었다. 자신은 전차공격대대의 부대이동, 배치, 작전 투입 시 부대 선정 같은 작전업무를 담당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사료』기록은 ‘괴문서’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사료』에 실린 전차공격대대장의 이름이 당시에 자신이 모시던 대대장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육군본부의 협조를 받아 전차공격대대 역대 대대장들을 확인해보니 『한국전쟁사료』와 같았다. 당시 전차공격대대 작전주임의 말은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 찾다보니 놀랍게도 당시 대대장이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통화를 하고 그 이후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전화도 안 되고 집에도 없었다. 첫 통화 할 때 몸이 아파서 보훈병원에 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보훈병원에 조회를 해 보았으나 ‘그런 사람 없다’는 답변만 왔다. 출석요구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가해자 조사에 능숙한 인권침해조사국 조사관에게 자문을 구하고 다시 2차 출석 요구서를 보냈다. 드디어 대대장의 아들한테서 연락이 왔고 대대장은 전직 국회의원과 함께 위원회를 찾아왔다. 위원회에 출석한 전차공격대대장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당시 사단장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주위 친구들에게 물어 쪽지에 적어 왔다며 쪽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중령 계급이었던 전차공격대대장을 불러놓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만 듣고 있었다. 집단희생조사국에서 가해부대 조사에 능통한 조사관들을 모두 동원하여 질문하였으나, 전차공격대대장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중에 조사관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런 중요한 분(?)은 한 번에 말을 꺼내기가 어려우니 시간을 두고 일을 하는 법이라고 조언해 준다. 역사적 기록 하나 없이 묻혀진 사건이 산적한데다가 사건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프거나 죽은 경우가 많아서 항상 시간에 쫓기는 조사관들로써는 금방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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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소리]남원지역 민간인희생 사건

2008/11/07 18:32
한국전쟁 당시 군경 남원 주민 90명 학살
'수복 공비토벌 과정서 집단총살, 칼로 목을 베기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당시 남원지역에서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진실화해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전쟁기 1950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남원 일대에서 수복과 공비토벌 과정에서 국군 11사단 군인과 경찰에 의해 90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남원 대강면, 주천면, 산내면, 산동면 등에서 인민군 부역혐의자와 좌익 가족 등 90명의 희생을 확인했다.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가 90명이고 일가족이 몰살됐거나 유족이 타 지역으로 이주한 경우, 조사 신청을 하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하면 최소한의 희생자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당시 전차공격대대를 비롯한 11사단 군인들과 경찰은 남원지역에서 공비토벌과 빨치산 거점 제거를 이유로 빨치산이 거쳐갔던 마을의 주민들 중 청장년을 선별해 무차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군과 경찰은 마을주민들을 집단총살하기도 하고 부역혐의자나 좌익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인척까지 몰살시키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주민 중 일부를 일본도로 목을 베어 살해하기도 했다. 남원 산내면에서는 ‘손을 들라’는 군인의 지시를 무시한다며 청각장애인을 사살하기도 했다.

당시 군인들이 빨치산이 거쳐간 지역의 주민들을 의심해 임산부를 비롯해 고령의 여성, 당시 면장을 포함한 지역의 지주들까지 살해하는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육군본부,『한국전쟁사료』60권, 273쪽>
(3)남원군 주천면 내기리 급 고촌리 전과
      1.단기4283년 11월 20일
      3.전과 ②지방세포원 사살 32명
             ③세포원가옥200호소각,삐라다수포획

진실화해위원회는 육군본부의 『한국전쟁사료』를 통해 국군 11사단 소속 전차공격대대가 남원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벌인 사실과 전과(戰果)기록 등을 확인했다. 당시 군은 인민군과 교전 중 지방 세포원 등 적을 사살한 것으로 상부에 보고됐지만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위원회는 “사건이 전시 계엄하에 발생했다고 해도 군인과 경찰이 재판 등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적에 도움을 줬다는 의심만으로 비무장·무저한의 민간인을 집단총살하거나 칼로 목을 베어 살해한 행위는 야만적 행위”이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이는 헌법상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이 사건의 책임이 당시 군경을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던 국가에까지 귀속된다”며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과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실시 등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한편 위원회는 남원뿐 아니라 나주군에서 군․경의 토벌을 피해 피신한 주민 등 133명, 김포지역은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 등 110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했다.

출처 : http://www.cham-sori.net/        2008-11-06 11:11:50   박재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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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익] 나는 누구인가

2008/11/03 22:04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비뿌리는 삼천천 산책길을 소요하며
안개핀 다가공원 숲길을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잊어지든 잊어지지 않든 잊었다고 되뇌이며
흰 칼로 붉은 손가락 자르듯이 단호하게 일어선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다.
광곡리 샆짝에는 이제 갓심은 쑥갓 싹이 피어올라
담벼락 아랫녁에 고즈넉이 몸을 구부렸다.
나는 누구인가?
아이는 둘이나 되고
아내는 아직 독립할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내 길만 가고자하는
그것만이 사람사는 길이겠거니 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사랑도, 명예도, 재물도, 생명도, 가정의 행복, 인간의 윤리도 다 중요하지만
나는 그것을 갖지 않겠다며
천변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는 누구인가?
가지지 않은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조건임을 이미 알아차려버린 나는 누구인가?
그 속에 담긴 외로움과 추위마저 인정하고 수용한 나는 누구인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아!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사랑하는 사람'이란 원래 없단다.
그 스스로 사랑할뿐, 사랑하는 대상은 없단다.
세상에는 객체는 없고 오직 주체만 있단다.
광곡리  안선생네 돌담에는 이제 연녹빛 벗어버린 감나뭇잎들
쟁쟁하게 손마디 흔들며 바람과 해후할텐데
해후는 멀마나 아름다운가?
어쩌다가 이렇게 만나 다음 순간 헤어진다고 말하지만
무엇이 만나는 것이고 무엇이 헤어지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나는 내 느낌만을 알 뿐이고
말할 수도 없구나.
생각으로 번역되는 나의 물음은 이미 해답
나는 누구인가?
질문만이 세상에 떠돈다.
발밑으로 풀잎들처럼 가볍게 뒹군다.
아아, 맨발이었더라면 풀잎들도 발가락사이로 유쾌하게 들어와 지저귈텐데
아아, 맨발이었더라면....

2000년 5월 22일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단심혈기(丹心血旗)

언젠가부터 내마음속에는
마음으로 모아낸
진홍 빛 깃발 나부끼네
모든 역사적 문명과
모든 사람들에 대한 외경과 존중속에서
정성스럽게 간직한 나의 열정
폭발하듯이 마음을 열수는 없지만
다소곳한 깃발은 항상 퍼드득 나부끼네

너무나 오래되어서
언제부터인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살아갈 길을 잃고 헤매일 때
내가 누구인가 다시 물었을 때
해방과 연대를 향한
붉디붉은 마음 간직하는 것이
피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움켜쥐고
저벅저벅 걸어야하는
행복한 길임을
다시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보았네
푸르청청한 하늘에
내 가슴속 붉고 힘찬
심폐(心肺)의 깃발 다시 휘날렸네
아, 그 깃발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우주의 중심에서
우주목(宇宙木)으로 나부꼈던 것을.
내가 그 깃발 항상 움켜쥐고 있었던 것을.
내마음의 영원한 붉은 마음 핏빛 기치(丹心血旗)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깃발이다.
나의 사랑이 바로 만인의 깃발이다.
내가 붉은 깃발 되어 이땅에 왔고
이제 의당 사라지기위해 사소하게 걷는다.
깃발되어 간다.

2001년 6월 28일 이른 아침

 

 

저녁노을 깔린 들녘에서 그대에게 갈꽃다발을 바친다


내가 한때 갈대처럼 흔들렸던 것은 세상이 다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갈대였으며 그러므로 뿌리를 항상 갈밭 깊숙히 내리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갈대처럼 흔들릴때조차 결코 전진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미
내가 애초에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존재임을 알아버렸기때문이다. 하여
나는 난 날도 모른다. 돌아갈 날에도 무심하다. 그리고 다만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사람하는 사람아. 그럼에도 노을지는 갈꽃 들녘,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가끔씩 흔들리기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대가
존재하는 사실이 나에게 희망이 되고 있음을 알리려는 사치일뿐. 저녁노을 깔린
들녘에서 그대에게 갈꽃다발을 바친다.  - 사실 우리는 매일 다시 태어나고
있지않나요?

 

200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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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슴에 묻는 것이다

2008/10/29 23:51

사람은 가슴에 묻는 것이다

땅에 사람을 묻지만 그대로 흙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사람이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가슴으로 묻는 것은 그 사람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땅이 푸석푸석하고 척박하면 사람을 묻기가 곤란하다

누구나 편안한 곳에 사람을 묻고 싶어한다

 

내 마음의 땅이 평온하고  고요해서

사람을 편안하게 가슴에 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가슴에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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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결[劒訣] : 칼노래 칼춤

2008/10/28 17:50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로다

 

용천검(龍泉劒)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無袖長衫) 떨쳐 입고

이칼 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

일신(一身)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 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日月)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 명장 어데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씨고 좋을씨고

이내 신명(身命) 좋을씨고

 

 

 

(풀이)

"개벽 후 오만 년 동안 처음 맞는 다시 없는 나의 때가 이르렀으니

한울님을 모시고 지극한 도를 깨친 대장부 영웅이 천하의 명검을 빼어들고 달려나가

생명과 진리의 칼춤을 추노니,

온 천지를 벗하여 홀로 우뚝 서서 해와 달과 온 세상, 온 우주를 뒤덮을 듯 용맹을 떨치는데

세속의 만고 명장인들 당할 자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 검결은 유·불·선의 전통과 민간신앙에 반봉건·반침략 의지를 창조적으로 종합하여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대장부 영웅의 우주개벽적 기개가 호탕한 기운으로 출렁이는 혁명적인 노래와 춤으로,

교도들이 몸을 닦고 주문을 외우고 약을 먹으면서 칼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는

동학의 종교의식이자 수련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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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1장

2008/10/27 17:51
 

『노자』  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道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1. 제1장의 핵심적인 개념은 道와 名이 아니라 無와 有


2. (서술방식)

도道 - 무無 - 천지지시天地之始 - 묘妙 -

                                                              현玄

명名 - 유有 - 만물지모萬物之母 - 요徼 -


3. 언어의 한계, 즉 개념적 사유의 한계


4. 무와 유는 동체同體이며 통일체


5.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이다.


- 유가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이며,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며, 여기서 노자가 가르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이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

 

- 『노자』는 81장 5,200여 자로 구성 : 상편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림



출처 : 신영복. 2008.『강의』. 돌베개. pp. 253~271.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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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08. 10. 26. 늦가을 밤

2008/10/27 00:46

올 가을엔 단풍도 보질 못하고 산에도 가질 못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처럼 쌀쌀한 가을 밤이다

 

다시 겨울이 온다

서울에 올라와서 맞이하는 세번째 겨울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최근 몇년 사이 겨울이 너무 힘들었다

올 겨울은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

 

울지도 않을 것이며

서글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반드시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저녁에 삼겹살을 먹고 소주 두세잔을 마셨는데 아딸딸하다

 

기어이 집에 와서 있다가

잘가는 막걸리 집에 가서

맥주 두병을 먹고 잔다.

 

멀리서 메세지가 왔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요

멀리 보면 희극이다.

[Charles Chap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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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받는 날

2008/10/24 23:11

월급쟁이는 월급 받는 날 술을 마셔야 한다

 

한달 동안의 즐거움, 괴로움, 서러움, 쪽팔림, 그리고 슬픔까지 모두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음 달을 준비하는 날이 월급날이다

 

그래서 월급 받는 날에는 가족이나 연인 또는 가까운 친구와 술을 먹는 것 보다는

그동안 미운정 고운정 깃든 직장동료들과 함께 해야 한다.

 

사실 월급쟁이는 월급 받는 날 하루를 위해서 한달을 산다

사는 것이라기 보다는 버티는 것이다.

이것이 월급쟁이의 하루살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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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과 환대

2008/10/24 11:11

0.

오랜 전 부터 갈 볼 만한 강의가 있었다

아마 여름에 김상봉 선뱅의 '학벌사회'라는 강의를 듣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2008. 10. 23. 작은책에서 우석훈 선생이 '신자유주의 어디까지 갈까'라는 제목을 걸고 강의를 했다

퇴근하자 마자 쏜살같이 지하철을 탔는데 합정역에서 작은책 사무실까지 가는 길에 비가 꽤 많이 왔다

대충 비를 털어내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석훈의 강의에 따르면,

 

1. 

한국경제는 1960년을 시작으로 본다면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1979년과 1980년 유신정권이 무너질때 2차 석유파동과 함께 0%(GDP/N%)을 기록하는 위기가 있었고, 1998년 IMF라고 불리는 위기때 -4%을 맞게 되었다.

 

세계경제를 보면, 1945년을 시작으로 볼때, 또한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1974년 1차 석유파동과 함께 '영광의 30년'을 종식시킨 위기가 있었고, 1990년 동구권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0%을 기록하는 위기가 있었다.

 

대개 글로벌시스템을 보면 30년 정도의 주기를 지닌 파동곡선이 그려지는데, 그렇게 본다면 대충 2010년 쯤이 위기를 맞이한다는 것이며, 지금이 위기가 도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아마 미국 대선이 끝나고 6개월 정도는 혼란이 있으며, 이때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예측하는것은 힘들다는 것이다.

 

아무튼 현재 세계 경제의 위기와 함께 한국 경제도 엄청난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것이 상향곡선으로 올라갈지, 아르헨티나와 같이 추락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마 날개도 없이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우석훈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리만브라더스'라고 불리는 경제정책이 그 추락에 가속도를 붙일 것이라는 것.

 

2. 국민경제구조(시장)에 관한 이야기

 국민경제라는 말은 '국가'라는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시장'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보다 뭔가를 분석하기 위해 장소, 즉 시간과 공간이 구체적이 것이 있어야 훨씬 설득력이나 모델화가 쉬운 것 같아, 시장이라는 말보다 국민경제라는 말을 사용한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버틴 꽤 끈질긴 나라인데, 조선 초기에는 상층부가 적고 하층민이 많은 삼각형구조 였으나, 조선 말기 철종 정도에 이르면, 양반이라고 불리는 상층부가 80%가 넘는 역삼각형 구조가 된다. 결국 조선왕조 사회는 무너진다.

 

삼각형은 힘의 방향을 표시하는 벡터로 설명하면 하층민들이 상층부로만 가고자 하는 획일적인 욕망이 존재하는 단순한 사회이기는 하나 굉장히 안정적인 시스템이다.

또다른 도형은 마름모 꼴이 있는데, 이것을 벡터로 표시하면 오로지 상향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꼭지점으로 사회가 움직일 수 있으므로 그 사회는 훨씬 다양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보면 1994년에서 95년 정도가 그런 사회이고, 유럽의 선진국가들이 이런 마름모형 사회라는 것이다.

 

인간이 조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양새에 대해 생각하면, 아마 마름모꼴(좌우가 넓고 위아래가 짧은 마름모꼴)정도 인데, 신자유주의로 인해 일본이나 유럽 같은 경우는 이 마름모꼴이 위아래가 길고 좌우가 짧은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현재 한국 사회는 8자형(눈사람모양)으로 가고 있는데, 이건 엄청 위험하고 불행한 세상을 의미한다. 이런 8자형 시스템은 공간의 분리, 교육의 분리, 시장의 분리가 시작되는데, 한국은 현재 공간의 분리 중에서 요새주택(타워팰리스) 정도가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 요새도로는 생기지 않았지만 곧 벌어질 일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심하게 진행되면, 하이엔드와 로우엔드로 분리되는데 똑같은 상품이 형태와 질에서 차이가 발생하고 그 구매자가 구별된다는 말이다. 소고기를 예로 들면, 과거에는 똑같은 질의 소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과 적게 먹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한우와 같은 고급 소고기를 먹는 사람과 수입소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나누어 진다는 것이다.

 

더 진행이 되면, 시장 자체가 공식부문과 비공식부문으로 나누어진다. 공식부문은 강남의 백화점 정도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을 말하고, 비공식부문은 빈곤층이 거래하는 시장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불행한 것은 1995년 쯤에 진행된 세계화와 함께 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무렵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이것이 덕담처럼 좋은 것으로 퍼져버린 사회는 정말 불행한 사회라는 것이다.

 

결국 부자가 인간이 지닌 최고의 가치가 되는 사회는 불행을 넘어 잔혹한 사회라는 것.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40~50대(남성)이 그 잔인함을 발휘하는 위치가 있다는 것.

 

한국의 8자형 사회는 위쪽은 40~50대 남성이 자리하고 있고, 아래 쪽은 20대 여성, 고졸, 지방거주민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녀)들은 모두 비정규직이라는 것이다.

 

3. 우정과 환대

 이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몇가지 있는데, 지금 이명박 정부가 진행하는 방식은 제국주의적 방식이다. 이걸 우석훈은 '촌놈들의 제국주의'라고 말했다.

 

이명박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파시즘으로으로 가기 어려운 것은 이 지도자가 매력이라는고는 전혀 없고 천박하게 웃기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이야기를 하거나 패러디한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며, 파시즘은 대중을 감동시킬 엄청난 매력을 지녀야 가능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마 이 발상은 라이히 같은 프로이트 맑스주의자들이 '왜 대중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파시즘에 열광할까'라는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지점인것 같다.)

 

아무튼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전통적으로 국가(공공성)를 강조하거나, 시장(대기업)을 강조하는 방법이 있는데, 우석훈은 제3부문(사회경제)을 생각하고 중요시 하는 것 같다. 이 제3부문은 지역이나 자치, 생협 같은 발상인데, 이것이 국가나 시장이 할 수 없는 영역이나 풀 수 없는 문제를 어는 정도 해결할 수 있으며, 20~30%정도 차지하면 안정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발상이다.

 

약한고리에 대한 생각들,  젠더나 유족인종, 지역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한국사회에 여기에 세대(age)와 학력 또는 학벌이 추가된다.

 

마지막 이야기. '경제'는 수단이며, '사회적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말.

어떤 방식으로 가든 경제는 어느 정도 그 문제를 진행할 수치나 시스템을 만들수 있으나, 그 방향이나 힘(에너지)에 대한 깊은 고민 정도나 사회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여기에서 아마 '우정과 환대'라는 발상을 하는 것 같다.

 

4.

우석훈의 책을 보면, 시즌1(한국경제대한시리즈)에서 1)88만원세대, 2) 조직론(조직의 탄생/샌드위치위기론은 허구다), 3)촌놈들의 제국주의 4)괴물의 탄생이 출간되었다.

88만원세대에서는 90~95%가 망하는 이야기이고, 조직론에서는 5%(정규직 대기업)가 망하는 이야기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40~50대가 잔혹하다는 이야기이고 괴물의 탄생은 이런 것들의 총론격으로 종합판이다.

 

시즌2는 '생태경제학'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1권은 10대들의 이야기로 생태요괴를 등장시킬 생각이란다. 10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담임요괴, 특히 고3담임요괴, 학원선생요괴, 심지어는 엄마요괴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2권은 교사에 관한 이야기(페다고지), 3권은 전문가 집단, 4권은 공무원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라는 것.

 

시즌3은 '국가의 기본'을 말하고 싶은데

1권은 문화경제, 2권은 농업, 3권은 과학과 기술, 4권은 언론/정당 등을 말하는 싶다는 구상.

 

5. (강의 끝나고 돌아가면서...)

'우정과 환대'라는 발상. 참 마음에 든다. 나도 하고 있는 생각. 내 생각에 힘을 보태야지.

 

우석훈의 시즌1을 정리하고 내 주석을 달고 거기에 새로운 주체(성)이라는 발상을 첨가.

여기에 박노자, 들뢰즈/가타리, 푸코, 라캉, 프로이트, 알트세르, 맑스, 레닌, 마오, 공자, 맹자, 주역, 이정우, 진중권에다가 불경, 명상, 굿 같은 것들을 함께 넣고,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연애나 욕망 따위들을 집어 넣어서 매력적인 괴물(새로운 생맹체)을 하나 만들어 볼까 ㅋ~ 

 

이 생명체가 탄생한는 순간 이건 완전히 해탈이고 깨달음의 순간이여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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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내가 맡고 있는 사건이 종결되었다

거의 1년을 매달렸던 사건인데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다

별다른 이유나 적법한 재판없이 국군에게 칼로 목이 잘리고 총살을 당한 영혼들에게

나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위안되었으면 한다.

 

아무튼 잘 마무리되어서 동료 조사관들과 내가 생각해도 엄청 술을 먹었다

 

2.

그래서 오늘은 술이 덜 깬 상태로 술정신에 출근했다

하루종일 헤매다가 위원장이 고생했다는 의미로 형식적으로 마련한 자리에

갈비탕으로 속을 달래고

간신히 하루를 정리할 무렵,

2주전에 떠났던 동료 조사관이 다시 돌아왔다

참 어려운 일이다

 

3.

종로 포장마차에서 영화 '박하사탕' '오 수정'을 제작한 영화인을 만났다

두번째 만나는 것인데 그래서 내가 물었다

"으째 박하사탕의 설경구는 인생을 빠꾸하요?"

그랬더니

"빠꾸~ 인생이 빠꾸가 없는데...그걸 말하고 싶었다" 

이런 휑한 소리만 한다

앞뒤 다 짜르고 이야기하니 어렵다.

 

예술인과 종교인은 참 독특한 인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4.

2차로 노래방을 갔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귀뚜라미'를 불렀다

노래빨이 잘 받아서 내가 생각해도 시원하게 잘 불렀다

 

노래방만 가면 '귀뚜라미'를 불렀던 해남에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5.

종로에서 새벽1시에 잘 잡히지 않는 택시를 타고 간신히 집에 왔다

......

비오닌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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