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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7 [메모] 층, 분절, 초월적인 것, 가능, 잠재면
  2. 2007/08/08 [일기] 2007. 8. 8. (1)
  3. 2007/06/13 참회진언
  4. 2007/06/04 [박노자] 거절의 미학
  5. 2007/06/04 6월 아침에
  6. 2007/05/09 [박노자] 김승연 회장과 고려대 당국
  7. 2007/04/12 [조성택] 황사 환경문제 불교철학
  8. 2007/04/12 [박노자] 왜 한국 기독교는 참회하지 않나
  9. 2007/03/27 [프로이트] 꿈은 자신의 소망을 왜곡한다
  10. 2007/03/23 [우석훈]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11. 2007/03/20 파놉티콘(panopticon) 뒤로 숨은 권력의 전략! - 감시를 통한 훈육
  12. 2007/03/19 [보르헤스] 죽지 않는 사람
  13. 2007/03/19 [박노자] 제가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14. 2007/03/10 [고전다시읽기] ‘사화’ 판치던 절망시대 정치권력 정당성 묻다
  15. 2007/03/09 [박노자]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16. 2007/03/06 [김수영] 구슬픈 肉體
  17. 2007/02/28 [사유] 새가 나는 이유?
  18. 2007/02/27 [루쉰]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19. 2007/02/23 [나눔문화] 새해 다짐
  20. 2007/02/21 [푸념] 고해(苦海)
  21. 2007/02/20 [고병권] 니체가 말하는 참사랑 (1)
  22. 2007/02/19 [메모] 남쪽으로 튀어 !
  23. 2007/02/15 [술묵고] 몇가지 생각들 (3)
  24. 2007/02/14 [안치운]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25. 2007/02/14 [생각] 하나님과 거울 (2)
  26. 2007/02/13 [그림] 쿠르베와 밀레의 풍경화
  27. 2007/02/12 [메모]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1)
  28. 2007/02/12 [이학수] 금주법, 매카시즘, 그리고 뉴라이트
  29. 2007/02/07 [박노자] "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4)
  30. 2007/02/07 개미의 원죄 (1)

strate, stratification   
    
층(strate) ― 동질적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물리-화학적 층, 유기적 층, 인간적/문화적 층이 가장 큰 세 층을 형성한다) 인간이 개입될 경우,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이질적/다질적 조성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기관들’은 반드시 신체의 기관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의 ‘부’들, 대학의 ‘과’들, 관료조직에서의 ‘국’, ‘처’, ...등도 모두 ‘기관들’이다)은  ‘탈기관’ 상태 또는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가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자연적인 또는 문화적인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재구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articulation, segmentarite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é) ― 삶을 일정한 단위들로 가르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이다.
분절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plan d'immanence


들뢰즈의 내재면의 사유는 초월자를 거부하는 것이지만 그런 거부는 이미 예전에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오늘날 특별히 실효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초월적인 것"에는 여러 가지 맥락이 존재한다.

1. 신이나 이데아 등의 초월자.(이데아가 과연 그런 초월자인가는 자체로서 논쟁거리가 된다.)
2. 세계에 내재적이지만 개별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을 넘어서 있는 초월자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주자의 리 등) 3. 선험적 주체. 경험적인 것들을 넘어서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자.(칸트의 선험적=초월론적 주체 등)
4. 관계망. 관계망이 그 자체로서 고착될 때 그것은 또한 초월자의 성격을 띤다.

 

1이 이미 전개된 사상이라고 해서 "내재면"이 유효한 사상이 아니라는 것은 "초월적인 것"이 이런 다양한 맥락을 띤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2, 3, 4의 초월성은 지금도 우리 삶과 사유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내재면은 단지 초월자가 없는 면이 아니라 2, 3, 4의 초월성이 성립할 수 없는 면(지평)이다. 그것은 어떤 절대적 실선도 그어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점선으로만 존재하는,
즉 모든 A는 dA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d=differentiation, differentiel)면이다. 그것은 개방계(open system) 자체라고 할 수 있다.

 


"le possible"과 "le virtuel"      
  
베르그손이 "Le possible et le reel"에서 사용한 "le possible"은 사실상 "le virtuel"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그손은 여기에서 "추후적 사고(pensee retrospective)"를 비판한다. 무엇인가가 현실화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그 전에 "가능했기" 때문에 현실화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는 세계에 대한 고전 역학적 개념의 거의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다고 하겠다.

베르그손은 "가능하다"라는 말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1) 소극적 의미: 불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소극적 규정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만 의미할 뿐이다.
2) 적극적 의미: 그렇게 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의 "가능"이란 사실상 "잠재"이다.

결국 베르그손이 말하려는 것은 잠재적인 것은 그것이 오로지 현실화되었을 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화되기 전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화됨으로써 비로소 그 때 "가능했던" 것이 "되는" 것이다.
<가능과 현실>은 지금 읽어보아도 참으로 뛰어난 글이다.

 

 

 plan de consistance      
 
 'plan de consistance'는 들뢰즈/가타리 개념들 중 특히 까다로운 용어들 중 하나이다. 다음은 간단한 정리이다.
 
 ‘plan de consistance’는 ‘plan d'organisation’(또는 ‘plan de dévéloppement’)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생물학’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던 ‘조직화의 도안’(또는 그 후에 등장한 ‘발생의 도안’)은 형식(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의 발생과 실체(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의 형성(형식화)를 지배한다. 이로써 ‘유기체’가 성립한다. 조직면, 발생면은 정합성의 면이다. ‘plan de consistance’ 또는 ‘plan de composition’ 즉 ‘planomène’는 조직면, 발생면을 일탈하는 존재들이 성립하는 면이다.(결과적으로 조직면/발생면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들이 이 면에서는 공존할 수 있다.

‘plan de consolidation’에서의 공존

즉 기존의 종/유 체계에서 볼 때 기형으로 간주되는 ‘괴물들’, 기존의 존재론으로 포착되지 않는(기존의 존재론은 배제해 온) ‘이것’들(‘유목적 본질들’), 비물체적 변환으로서의 ‘사건’들, 상수들과 변수들을 일탈하는 ‘연속적 변이’=‘강도 연속체’들, 일반성과 특수성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되기’들, 홈 패인 공간을 가로지르는 ‘매끄러운 공간’들.

때문에 ‘plan de consistance’는 중간(milieu)이 아닌 어떤 시원에서 시작하게 만드는 ‘원리면(plan de principe)’, 또는 어떤 궁극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목적면(plan de finalité)’, 복수성들을 정합적으로 통일되게 만드는 ‘통일면(plan d'unification)’/‘총체화면(plan de totalisation)’에 대비된다. 우리는 ‘plan de consistance’가 ‘virtualité’의 또 다른 개념화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plan de consistance’는 ‘잠재면’/'혼효면'으로, (조직화의 도안에서는 불가능한,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plan de consolidation’은 ‘혼효면’으로,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함축하는) ‘plan de composition’은 ‘조성면’으로, ‘noumène’을 대치하는 ‘planomène’(‘물자체’에서 ‘잠재성’으로)는 ‘잠재계’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

 

 

***이정우의 소운서원http://www.sowoon.org/ [21세기존재론] 게시판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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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07. 8. 8.

2007/08/08 21:21

0.

 '내가 갈대처럼 흔들릴때조차 결코 전진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미 내가 애초에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존재임을 알아버렸기때문이다.

하여 나는 난 날도 모른다. 돌아갈 날에도 무심하다.

그리고 다만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사랑하는 사람아.'

 

 

1.

하루종일 비가 왔다

無心하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가

'인간이 자신의 죄업을 씻고 참회하는  방법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인가'라는 말을 했다

같이 마주 서 있는 동료가

'그것은 자기 만족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네'라고 답을 했다.

 

2.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언제 끝이나 어디로 갈 지도 無願하다

단지 두려울 뿐이다 !

平常心은 사라지고 妄想만 지배한다. 안타깝다.

 

3.

나는 지금 전진하지 않고 있다.

전진하는 힘이 없는 것인지 나아갈 방법을 모르는 것인지 아무튼 멈춰있다.

나는 無力하다.

 

4.

인간의 존재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가끔 '끝'을 생각해 본다. 역시 두렵다.

 

5.

다시 날고 싶다. 이것이 진짜 이유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생명체들에게 깊히 감사한다 

죽을 때까지 反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6.

두려움이 사라질 때 비로소 '나는 무한한 자유와 대자비의 화신'이 된다.

공포는 정신의 무능력에서 생긴다.

두려움 너머에 생동하는 反省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제낄 것이다. 그러면 열린다.

 

 

 

 

 

* '내가 갈대처럼...~...사랑하는 사람아' : 조문익 선배의 시에서 인용

* 공포는 정신의 무능력에서 생긴다 : 스피노자 [에티카] 제4부 '인간의 예속 또는 정서적 힘에 대하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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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진언

2007/06/13 09:15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

 

- 인간의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반배 염송하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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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거절의 미학

2007/06/04 11:06

"거절"의 미학 | 만감: 일기장  2007/05/30 22:34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6491   

 

저는 "한국이 이렇다, 한국인이 저렇다"는 식의 일반화 방식을 매우 싫어합니다. 개인마다, 세대마다, 계층마다 다 제각기 다르기에 어떻게 "국적"/"민족"이라는 기준으로 이렇게도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가 라는 것은 저의 반대 논리입니다. 그런데, 지나친 일반화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문화 차이"를 이야기하자면 예컨대 "거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야 없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거절"이라는 것은 제가 아는 다른 문화들 (예컨대 러시아문화나 북구 문화)에 비해서 한국에서 조금 더 하기 어려운 행위인 듯합니다. 초면이면 그나마 비교적으로 쉽지만, 구면일 때에는 아주 불가피한 사정을 자세히 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킬 수 있어도 그래도 왠지 미안한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수직성이 있는 관계라면 - 특히 사제지간은 좀 그렇습니다 - 아주 우회적인 형태의 거절이라 해도 때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더랍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하면, "안그런 데가 어디 있느냐"는 식의 반응이 나올 것을 충분히 예상합니다. 그런데 장담컨대 안그런 데가 있긴 있습니다. 러시아만 해도 비교적으로 권위주의가 강한 분위기에다가 특히 학계의 조직에서 위계성이 철저한데도, 저만 해도 한 번 한국에서 온 한 목사에게 좀 도와주라는 제 지도 교수의 요청을 - 물론 꽤나 우회적으로 - 거절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절했을 때에는 느낌이 좀 좋지 않았지만 결국 다행히도 스승과의 관계는 그대로 잘 유지됐습니다. 노르웨이에서 같으면 제게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을 한 제 제자도 꽤 있었습니다. 한 석사과정의 제자에게 학위 논문을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제출할 것을, 기존의 한 전례에 입각해 요청을 했을 때에는, "그럴 수 없다, 이와 같은 요청이 반복될 경우 상급기관에 법적 해결을 요청하겠다"는 답을 받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 답을 받아 '법적 해결'과 같은 문구를 접했을 때에, 제 기분은 약간 묘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런 방식은 사람 살기 좋은 방식이란 결론이 나서,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한국 같으면 특히 서비스부문의 노동자들이 고객에게 어떤 이유로든 거절을 할 때에 비상하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우곤 하는데, 노르웨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약 6년 전에, 경험이 좀 없었을 때에 신분증 없이 은행에 가서 돈을 빼려 했는데, "신분증 제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은행 직원은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더랍니다. 그 때에 기분이 비상히 안좋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직원이 과연 미안할 이유가 있었나 싶었습니다. 규칙을 모르는 게 고객의 잘못이 아닙니까?

 

하여간 노르웨이가 "거절이 좀 쉬운" 풍토라면 한국은 거절이란 외교적으로 잘 하지 않으면 안될, 외교적으로 잘 해도 안통할 수 있는 중대한 사항이더랍니다. "관계 문화", 집단에서 낙오되거나 관계망에서 차질이 생기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문화, 거기에다가 사회나 국가가 개인의 생존을 공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사회적 "정글" 현실이다 보니 대인 관계가 "외교화"될 수밖에 없지요. 노르웨이에서 자기 스승(? - 사실, 그런 개념도 아닌데 말씀입니다)에게 "무리하다 싶은 요구를 하면 법적 해결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 석사과정생 뒤에 그녀의 미래를 책임질 사회와 국가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어려운 관계"일 때에 거절하면 "내 미래가 불안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6-25 이후에 "가족끼리 튼튼히 뭉쳐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생존 도모'의 가족주의적 형태도 공고화된 부분이 있고 하니까 "거절"이나 "거부"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같으면 매우 독선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전통시대 지배계층, 사대부의 문화는 "대의명분"에 관련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필요할 때에 "거절"이 잘 통하는 문화이었지요 (그것도 미화만 할 수 없지만). 그런데 이제는 우리 이상은 "둥글게 둥글게" 관계를 잘 관리하면서, "거절"로 거래처들을 화나게 만드는 "무례함"을 잘 보여주지 않는 "민간인 외교관"인 셈입니다. 신자유주의로 가면 갈 수록 이와 같은 풍토가 심화되지 않을까 싶어요. "모나지 않게, 둥글게, 사이 좋게, 원만하게"... 이러다가 무슨 재미로 살다 가려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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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아침에

2007/06/04 08:44

6월 아침. 눈뜨기 전에 문득

 

참 많은 잡념과 미련과 미움과 기대감이 나를 잡아 흔들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회문을 외우고 삼배를 했지요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며, 참 많은 복이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출근 길. 걸어가면서

 

'인간은 누구나 분명히 '존재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 모든 생물체가 존재하므로  조심조심 잘 살펴서 살아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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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김승연 회장과 고려대 당국

2007/05/09 13:28
 

김승연 회장과 고려대 당국 | 만감: 일기장  2007/05/05 14:21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5849   

최근에 세상이 온통 한화재벌 총수의 "의리의 사나이"로서의 행각으로 떠들썩하더랍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뉴스를 듣고 별로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국가가 지금처럼 세습적인 "왕조 경영"을 허용해주고, 노조의 경영 참여 등 독단적인 "제왕 경영"의 폐단을 좀 줄일 수 있는 "직장 민주주의" 제도 발전에 무관심만 보이고, 재벌 총수가 법을 어겨도 "국민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답시고 법에 정한 벌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면 결국 재벌 회장이 괴거의 제왕들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뭐가 놀라운 일입니까?


천한 백성이 감히 왕태자의 옥체를 상하게 했으니 마마께서 직접 나서서 곤장을 친히 치신 셈인데, 21세기 벽두 서울의 한복판에 조성왕조의 가장 퇴폐적인 측면들을 재현시킨 것은 결국 재벌들의 행정 대행 회사로 전락하고 만 국가입니다. 경찰에 신고만 하면 문제의 주점의 직원들에게 경찰이 모범 케이스로 본때를 보여줄 줄을 잘 알았던 김 회장이 이렇게 친히 매를 드시고 천한 머슴놈에게 사형을 가하는 길을 택한 배경에, 국가가 자신에게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 없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과연 오산뿐이었을까요? 사실, 언론에 특별히 공개되어 공분을 일으킬 일만 없다면 재벌 회장이 홧김에 손을 좀 쓰다가 나중에 합의금 얼마 주어서 일을 무마시키는 것은 일상일 뿐이지요. 어떤 재벌 같으면, 노조를 만들겠다는 노동자를 납치하다싶이 차에 태워 며칠간 끌고 다니면서 "생매장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노동운동가들이 있는데, 이들의 주장에 상당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평소에 그 재벌이 어떤 방법으로 노조 결성을 막고 있는지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민주공화국에서 산다는 환상부터 버리시기를.


그런데, 이 번의 김 회장의 "싸나이다운" 행동, 야산에서의 "보복 활극"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들었습니다. "눈에 눈, 이에 이"식으로 하다가는 김 회장이 놀랍게도 (!) 붙잡혔는데, 한 때에 이건희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몇 명 학생들을 "찜하여" 나중에 "교수 억류 사건"으로 그들을 제재할 기회가 오자마자 "대학가의 사형"이라고 할 "출교"로 그들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급진적인 학생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싶은 고려대학교는 과연 법의 제재를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물론 고려대학교 당국의 조치 내용 그 자체만 본다면 "보복"이라는 생각이 안들 수도 있습니다. "교수 감금"이라는 충분한 빌미를 불행하게도 학생들이 스스로 제공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로 이건희 반대 시위로 "찍혔던" 학생들이 결국 "사형수"가 된 점이라든가 시위를 주도했다는 특정 "외부 단체"가 그 뒤에 학교에서 "기피의 대상"이 되어 당국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온 점이라든가 등을  종합해보면 이 번의 "출교"도 일종의 "보복 행위"이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무서운 것은, 학교 당국이 "하극상", "패륜" 등 봉건적이다 싶은 개념들을 동원하여 일부 "급진 분자"들을 최강력으로 징계했을 때에, 사회가 이를 당연지사처럼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다수의 교수들이나 한총련과 같은 (제가 보기에는 제 역할을 전혀 제대로 못하고 있는) 학생 운동 단체들이 단순히 함구하고 있거나 한 발짝 앞서서 "스승에게 감히..."라고 "패륜아"들을 비난했고, 다수의 학우들도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취급해온 듯하고, 사회가 전체적으로는 한 때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다가 이제는 다 잊은 듯하고... "감히 윗분에게 무례하게 한 어린 것", 감히 힘센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냉혹한 사회이다 보니 각종의 "김 회장"들이 이렇게 용감하게 (?)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 모두가 힘과 사회적 지위, 나이 등 위계질서적 관념들의 노예처럼 일상적으로 행동한다면 "보스"들에게 쇠파이프를 들 유혹이 늘 강할 것입니다. 한 대 패도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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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황사 환경문제 불교철학

2007/04/12 14:50
 

- 자연의 무서운 복수-환경오염 문제


황사주의보가 발령되었던 날, 하늘은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은 듯 보였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음껏 크게 숨 한 번 들이마실 수도 없던 공기. 인간 생존의 필수적인 조건이자, 건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공기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중국의 무분별한 산림개발을 저지하거나, 중국을 상대로 국가적 손해배상청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우리나라 역시,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며 무분별한 개발을 일삼았으며 그 결과 심각한 환경문제에 부닥치고 있다. 황사문제는 중국에라도 그 책임을 돌릴 수 있다지만, 그 외 우리가 자초한 환경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자연은 마치, 복수라도 하듯 시시각각 인간에게 그 악영향을 되돌려주고 있는데 말이다.


- 환경운동의 패러다임, 불교


불교를 환경운동의 패러다임으로써 주목하는 사람들은 생태계 파괴의 원인을 인간중심주의, 인간의 절제되지 못한 욕망이라 보고 그 대안을 불교적인 사유에서 찾는다. 불교의 자연관은 서구의 이성중심적 사고에서 바라 본 자연관과 확고한 차이를 보인다.


초기 불교의 자연관‘불살생(不殺生, ahimsa)'의 계율.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거나 해치는 것은 불건전하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나쁜 업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사람과 동물 뿐 아니라 식물, 종자, 심지어 물과 흙까지도 정식(正識)이 있다고 간주했고 비구와 비구니들은 식물과 종자를 해치는 것조차도 명확히 금지했다.


대승불교의 자연관대승불교의 입장에 따르면 각각의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어떤 한 존재가 무엇을 하건 간에 그것은 다른 모든 존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생태 이해는 연기와 자비의 관점 위에서 상생의 생태학을 지향한다.


- 환경운동은 참회와 반성을 통한 전향의 의지로!


환경위기는 자원을 무한하다고 단정하고 정복과 지배를 통해, 바로 앞날의 풍요만을 좇기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불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인간은 끊임없이 업보를 쌓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업보는 오늘날 고스란히 되돌아와 환경오염과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환경운동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토대로 한 전향의 의지를 담는 것이어야 한다.


환경운동은 다른 운동과는 달리 저항하고 저지하는 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심하고 살피는 운동이다. 또한 수행을 통해 자연의 근본을 통찰하며 생활양식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환경운동의 상당부분에 걸쳐 도움을 줄 수 있다.


수많은 생태학자들이 동양의 깊이 있는 사상과 개인의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큰 비전과 가능성을 걸고 있다. 황사 심한 도심 속에서 무조건 중국 탓을 한다고 황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부터 환경문제를 해결할 작은 실천들을 해보자. ‘불살생의 계율’, ‘상생의 생태학’과 같은 불교철학의 자연관을 자주 상기하면서.


-조성택의 <불교철학입문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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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 기독교는 참회하지 않나



군목제 만든 이승만을 ‘한국의 모세’라 칭하고…베트남전쟁 때는 기독교인만의 부대를 만든 역사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한겨레21 : 2007년03월22일 제652호)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나에게 다른 종교에서 찾기 어려운 기독교의 매력은 기독교적 평화주의다.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들도 원칙상 살생을 금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개교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병역거부, 폭력거부의 전통을 꾸준히 이어온 기독교 평화주의자들만큼 권력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 강한 종교인들은 없다. 물론 기독교의 주류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된 313년 이후로는 초기 교회 시절과 달리 병역거부를 더 이상 ‘기독교인의 당연한 의무’로 여기지 않았고 국가적 폭력에 부역했다. 하지만 그 주류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아온 소수 교단과 개인들은 중세부터 지금까지 예수의 평화 정신을 지켜왔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한 톨스토이의 다음과 같은 말은 평화주의적 기독교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박애의 정신으로 죽여라


“내면의 하나님의 법만을 따르는 기독교인은, 내면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외부의 어떤 법체계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러기에 기독교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국가 존재의 전제 조건인 국가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배교에 해당하는 행위다. …폭력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만이 결국 이 세계 전체를 외부 권력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1893)

물론 자본과 국가 권력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내면의 하나님의 법’만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기독교의 평화주의적 내용을 인식하는 사람 역시 소수다. 그럼에도 복음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 감리교회, 루터교회 등 미국의 주류 교단의 전쟁관과 평화관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회중교회 계통에 속하는 오벌린대학의 학장 에드워드 도스워스는 1917년에 미국이 제1차 대전에 뛰어들어 징병령이 내려졌을 때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명성’을 얻었다.

“기독교적 군인은 기독교 박애정신으로 적병에 부상을 입히고 살해한다. 그 마음속으로 적병을 저주하지 않으면서 살해만 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전쟁 방식이다.” 당시 미국 주류 사회의 전쟁 히스테리 속에서 직장을 잃지 않으려 전쟁 부역을 해야만 했던 그의 처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적병 살해’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닌가? “박애의 정신으로 죽여라”는 이야기는 심한 쪽에 속하지만 “우리는 조국을 위해 싸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운다” 정도는 제1,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주류 교단의 통일된 입장이었다. 그 범죄성이 명백한 베트남 전쟁 때에 이르러서야, 감리교회와 같은 일부 주류 교단이 전쟁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신도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권리를 인정하는 ‘발전’을 이루게 된다. 현재는 우파 복음주의 교회를 제외한 미국의 다수 교회들이 이라크 침략의 지속을 반대하지만 원칙상 ‘의로운 전쟁’의 가능성은 아직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의 주류 기독교는 이처럼 전쟁 때에 국가의 종교적 보조원의 역할을 조직적으로 했지만 적어도 소수 성직자들은 전쟁 반대나 군목으로서 참전 이후의 참회 등 전쟁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싹이 약간이나마 틔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 교회사에서는, 주류 교회의 문 밖에 내몰렸던 함석헌 선생과 같은 특수한 개인을 제외하고는, 국가적 폭력과의 관계에 대해 반성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개신교가 처음 전해진 구한말에는 선교하는 쪽과 새로운 종교를 접하는 쪽 모두 자기 나름의 국가적 의식을 바탕으로 행동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에서 일본을 지원했던 미국이나 영국 등 본국 정부의 입장을 따랐던 선교사들은 1901년부터 일본의 식민지화 계획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해 합방 이후에 총독부와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수많은 조선 개화주의자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가진 배경에는 ‘최강의 문명국’인 구미 열강에 대한 흠모가 깔려 있었다. 궁극적인 관심이 ‘문명의 힘’에 있었던 만큼 기독교적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독립신문>은 1898년에 ‘덜 개화된’ 스페인에 대한 ‘개화 종주국’인 미국의 승리에 갈채를 보내는 등 ‘문명인’들의 무력 사용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국가보다 ‘반공 성전’에 더 열을 올려


일제 말기에 식민지 모국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다수 성직자들의 행위가 당국의 강요로 인한 타율적인 행동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해방과 미군정으로 한국 기독교인과 국가의 관계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목사 이상의 종교적인 열정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던 감리교인 이승만의 기독교적 기도로 1948년 8월18일 수립이 선포된 대한민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전 민족 기독화’의 꿈을 키우는 ‘우리의 국가’였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기대어 그 세를 급격히 넓힌 교회는 1952년의 선거에 이승만을 “한국의 모세”라고 부르고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그 이유로 ‘정치의 기독화’(기독교 의례의 국가적 수용) 이외에 군목 제도의 설립을 들었다. 즉, 동족상잔을 치르고 있던 한국군에 목사들이 파견되어 ‘공산 악마와의 성전’을 격려해주었던 것은, 교회로서는 ‘문제’라기보다는 ‘성취’였다. 이 제도의 신설을 이승만에게 요청했던 한경직 목사는, 전쟁 때에 “군대의 정신 무장이 기독교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해 ‘전군의 기독화’를 촉구하고, 1956년에 성경을 “애국애족의 교과서”라고 평가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주류 교회들이 국가에 전시 협력을 했을 때 국방부 산하의 ‘종교 관련 부서’로 전락했다고 평화주의자들이 비판했지만, 어쩌면 국가보다 ‘반공 성전’에 더 열을 올렸던 한국 교회들의 당시 언행은 국가를 “공산 악마 박멸”의 도구로 여긴 듯한 감마저 든다. 그러한 토양에서는 국가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원론적으로 불가능했다.

교계의 총아였던 이승만이 “한국군을 3사단 정도 보내고 싶다”고 했던 베트남전쟁을, 한국 교회는 6·25를 그대로 이은 ‘멸공 성전’이라고 인식해 국군 베트남 파병에 앞장섰다. 1966년 8월, 백마부대의 베트남 파병 환송식이 기독교 기도로 진행됐고, 그 부대장까지도 성경을 인용해가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나님의 십자군”을 보호하겠다는 자신의 신앙적 전쟁관을 밝혔다. 베트남 전선에 수많은 군목들이 간 것은 물론, 백마부대 안에서는 아예 ‘임마누엘부대’라는 기독교인만의 중대가 편성되어 교계에서 ‘신앙의 십자군’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거기에다 백낙준 등 한국 기독교의 원로들이 나서서 국제 교계의 반전 운동을 “공산 침략을 당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모르는 소리”라고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당시에 베트남에서 미국 침략에의 부역을 글과 말, 기도로 옹호한 수많은 기독교 지식인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중에 공개적으로 참회한 적이 있었던가?


제국의 ‘힘’보다 제국에 희생된 ‘사랑’을…


국가를 부단히 상대해야 하는 현대의 대중적인 주류 교회가, 국가 권력에 의해 법살을 당한 예수나 국가 권력과 불협화음을 냈던 톨스토이의 평화 정신을 그대로 살릴 수 없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해된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국가적 폭력을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계급사회에 교회가 적응한 이상 그 교회에 예수 정신의 완전한 구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이 미국의 주류 교단처럼 전쟁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적어도 병역거부를 “개인이 자유 의사에 따라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양심적 선택”으로도 인정할 수 없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교회가 개과천선해 참회할 줄 아는 종교집단답게 되려면, 이미 역사의 비극으로 인정된 6·25 동족상잔 때나 침략전쟁으로 정리된 베트남전쟁 때의 한국 기독교의 호전성에 대한 참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가 찬양했던 전쟁들의 와중에서 죽은 이들을 살릴 수야 없지만, 적어도 당시의 행동이 예수의 정신을 배반했다는 것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면 다음에 주류 기독교 집단이 국가에 무비판적으로 부화뇌동할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과연 성조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대형 교회의 성직자들에게는 제국의 ‘힘’보다 제국에 희생됐던 예수의 ‘사랑’을 우선시할 용의가 있을까?


참고 문헌:


1. <국가와 종교> 최종고, 현대사상사, 1983.

2. ‘한경직 목사와 한국전쟁’ 이승준,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15호, 9~38쪽, 2001.

3.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태도’ 유대영,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21호, 73~99쪽.

4. ‘한국군 베트남 파병과 박정희’ 최용호, 정성화 편 <박정희 시대 연구의 쟁점과 과제>, 선인, 355~405쪽,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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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트] 꿈은 자신의 소망을 왜곡한다



욕망을 생물학적 필요의 충족이나 결여된 표상의 획득으로 이해하는 순간, 꿈은 어떤 ‘의도를 지닌 인격’의 표현물로 이해된다. 이 숨어 있는 인격이 꿈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이유는 낮 동안에 법적, 도덕적 검열을 받기 때문이다. 밤에는 그 마음속의 검열자도 꾸벅꾸벅 졸고 있다. 문제는, 졸기는 해도 완전히 쉬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수면 중에도 ‘숨어 있는 인격’은 검열자의 눈을 피하느라, 마치 범인이 탐정의 눈을 피하기 위해 범죄 현장을 어지럽히는 것처럼 자신의 소망을 왜곡시킨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 사례 1 - 어느 여성 환자의 꿈

여자는 저녁식사에 어떤 사람을 초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집에는 훈제 연어가 조금 있을 뿐, 손님을 접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시장을 가려는데 일요일 오후라 상점 문이 닫혀 있고 전화도 고장이 나서 배달이 되지 않는다. 결국 그 손님을 초대하려는 소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분석 : 여자에게는 친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항상 자신의 친구를 칭찬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질투의 감정을 느낀다. 남편은 통통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다행히 그녀는 마른편이다. 그러나, 이 여자친구도 자신이 좀 더 살찌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는 더 위기의식을 느낀다.


여자의 소망은 친구가 살이 찌지 않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찌고 싶어 하는 친구의 소망이 좌절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소망이 채워지지 않는(표면적 소망-손님 초대의 실패) 꿈을 꾸고 있다. 자신을 피해자로 보이게끔 함으로써 자신의 범행사실을 감추는 범인처럼 말이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 사례 2 - 어느 처녀의 꿈

한 젊은 여자의 언니에게는 칼이라는 어린 아들이 있다. 칼의 형 오토가 있었지만, 여자가 언니와 같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을 무렵 죽고 말았다. 여자는 조카인 오토를 꽤 귀여워했었고, 현재의 칼도 귀여워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옆에 칼이 죽어 있는 꿈을 꾼다.


분석 : 이 젊은 여자는 언니와 함께 살 때, 집을 방문했던 한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언니의 반대로 그 남자와의 사랑은 좌절을 겪는다. 오토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그 남자와 마주쳤던 것이 마지막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언니의 집을 나오게 된다. 하지만 칼이 죽는다면? 장례식장에서 다시 그 남자와 마주칠 수 있을까? 즉 남자와 다시 마주치고 싶은 여자의 소망이 귀여워마지 않던 조카, 칼의 죽음으로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프로이트의 결론은 이렇다. “꿈은 어떤 억압되고 배척된 소망의 충족이다.” 앞의 사례처럼 고통스러운 꿈 표상은 진정으로 소망하는 표상을 감추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법적, 도덕적 검열을 피하기 위해 왜곡된 형태로 자신의 소망을 드러내는 꿈. 별 거 아닌 것이라 생각하고 지나쳤던 꿈들이, 실은 당신의 ‘숨기고 싶은 본심’을 그대로 담고 있을지 모른다.



- 박정수 <정신분석학 입문: 프로이트, 파농, 푸코, 지젝 탐구> 중에서

- 출처: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들키고 싶지 않은 ‘본심’이 꿈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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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명랑국토부]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 우석훈/성공회대 외래교수


리빠나 모노 데스네, 리빠나 모노 데스네

낚싯대 접고, 고무 장화 벗고

순천의 특급 호텔 싸우나에 몸 풀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써비스 한 번 볼만한데 음, 음

환갑내기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그저 아이스 박스 가득,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

(정태춘, <나 살던 고향> 중)



국토라는 말을 듣자마자 어떤 생각이 들까? 조국강산이라는 말이 생각나고, 시인 서정윤이 노래하였던 먼 옛날 만주벌판을 지나 이 땅에 정착했던 그 옛날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국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개발해야 잘 산다”는 붉은 글씨로 논밭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와 “xx지역 개발 막는 정부는 각성하라”와 같은 날선 구호들이 연상된다. 내가 사는 집 앞의 “지주들 단결하여…”라는, 문정 법조단지에 보상금을 높여달라는 구호들이 국토와 관련되어 있고, 골프장, 임도, 경마장 등등 전국 그 어느 곳이든 개발이익과 관련해서 몸살을 앓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런 현장은 한 편으로는 “대한민국은 공사중”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며, 차를 세우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태춘의 해금 반주와 함께 애절하게 울려펴지던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는 노래 가사를 가슴에 떠올리게 한다.


서양에서 가장 먼저 화폐를 사용한 사람들은 페니키아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또한 가장 먼저 창녀 제도를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오따르는 상품화폐가 아닌 진짜 화폐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기 딸을 창녀로 팔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뭔지 아는” 사회에서야 비상품 화폐라는 제도가 도입될 수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딸을 파는 비정함과 물건이 아닌 화폐를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내어주는 정신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선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아버지가 딸을 내어주고 몸값을 받는 것과 똑같은 원시적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국토를 혹은 고향을 내어주고 외지에서 온 골프장 주인이나 건설업체에 동네마다 환영 깃발을 걸어놓고 있는 저 사람들이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의 진짜 아버지일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리스 시대의 페니키아처럼 결국 사라지고 말 타락한 문명의 길 한 가운데 들어서 있는 셈이다. 정부는 “돈돈”하고 외치는 건설업자의 입에 새만금을 내주었고, 지방정부는 인천 계양산부터 제주도 한라산까지 마찬가지 방식으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생태계를 내어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신석기부터이든 아니면 요즘 얘기하듯이 구석기 문명부터이든 이 땅에 깃들어 산 것은 긴 땅의 역사에 비하면 찰라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 민족은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비장한 심정의 아버지처럼 “단돈 육만엥”에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있다.


몸서리치는 이 국토 인신매매의 현장에서 우리는 딸을 내어주는 아버지 또는 주5일제를 내세우며 “나에게 놀 곳을 내놔”라고 말하는 비정한 성매매범과 논리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지방정부는 포주고, 중앙정부는 더 큰 포주고, 손님들은 “이렇게 지저분해서 내가 돈 쓸 맛이 나겠어”라고 외치는 관광객이다. YS가 사투리로 “강간 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실수를 했다고 했는가? 현실은 ‘관광입국’을 꿈꾸는 온 국민이 ‘강간입국’을 철학적으로 외치는 셈이다.


이걸 눈 앞에 보면서 경제학자가 왜 “육만엥 밖에?”라고 질문하는 것은 정신분열증이다. 이 사태를 보고도 정신분열증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있을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이 상황에서 뇌구조가 붕괴하지 않을 수 있는 알리바이는 딱 하나다. “저들은 지방토호들이다.” 그리고 “저들은 지방토호”들이다를 입증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상황을 보면 어머니처럼 그 지역에서 살포시 살았던 주민들 중에 돈 독 오른 사람은 없다. 이 싸움은 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랑이 같아 보이지만, 만약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현실을 훨씬 부드럽고 정신분열증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명랑해질 수 있다.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퐁당퐁당 던져줄 수 있게 된다. 돈독오른 아버지를 비판하기 어렵지만, 돈독 오른 날강도와 포주를 비판하기는 너무 쉬울 뿐 아니라 즐겁기까지 할 수 있다. 지역별로 좀 다르지만, 돈독 올라 지역의 생태계를 외지에 팔아넘기는 지역의 외지인 토지소유 비율은 60%가 넘는다. 부재지주와 악덕지주 그리고 그들과 붙어먹었던 마름들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한 것이 바로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의 정신이다. 왜 아버지는 딸을 이렇게 파실 수밖에 없느냐고 비장하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저들은 조선조부터 이 땅과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근본정신을 배신한 바로 그 내부 부패세력, 친일파 그리고 유신세력과 연결된 악질들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점점 명랑해진다. 멀게는 몰리에르의 코메디와 가깝게는 아르헨티나 에두아드 갈레아노의 글들과 만나게 된다. 몽환적이거나 명랑하거나 두 가지의 방식이 있는데, 판소리와 마당극에 등장하는 우리의 “가짜 아버지” 다루는 방식은 명랑한 방식이다.


그런게 내가 생각하는 명랑국토의 정신이었다. 진짜 아버지를 비난하는 컴플렉스 가득한 시리적 증후군의 두려움 없이 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는 가짜 아버지를 두둔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명랑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진취적인 미래 자세이며, 또한 판소리의 즐거움과 만나고 장터의 흥을 만나는 흥겨운 길이 아니겠는가. 여러분들도 “돈이 뭔지 아냐?”는 지방토호와 건설업자들에게 어깨에 힘빼고 “명랑이 뭔지 아냐?”는 작은 돌덩이를 퐁당퐁당 던져주시길 바란다. 이 시대에 국토가 장터처럼 흥겹게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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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panopticon) 뒤로 숨은 권력의 전략! - 감시를 통한 훈육



“죄인의 가슴과 사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하고,국왕을 살해하려 한 단도를 집어 유황불로 지지고…(『감시와 처벌』1부「신체형」 중)”


법률 기록에 의하면 ‘감금’ 이전의 형벌은 ‘수형자의 신체’, 즉 끔찍한 체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들은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였고, 비용 부담이나 집행 절차에 있어 국가가 관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또한 잔혹한 처형 장면으로 대중의 폭동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권력은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된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차츰 과시적 의식으로서의 체형, 그리고 감금형과 강제노동 등 새로운 형태의 형벌이 도입된다. 이것을 진보된 형태의 형벌로 보고 인본주의적인 변화로 진단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푸코는 그것에 회의적이었다. 형벌의 변화는 한계에 부딪힌 권력이 그 대안으로 전략 · 전술을 바꾼 결과일 뿐이라고 보았다.


일망 감시체제: 파놉티콘


18세기 말 영국의 제레미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이름의 아주 특수한 건축 설계도를 고안했다.


독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하나는 안쪽을 향하여 탑의 창문에 대응하는 위치에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에 면해 있어서 이를 통하여 빛이 독방을 구석구석 스며들어 갈 수 있다. …역광선의 효과를 이용하여 주위건물의 독방 안에 감금된 사람의 윤곽이 정확하게 빛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탑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망 원형 감시의 이 장치는 끊임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있고, 즉각적으로 판별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적 단위들을 구획 정리한다. …충분한 빛과 감시의 시선이, 결국 보호의 구실을 하던 어둠의 상태보다 훨씬 수월하게 상대를 포착할 수 있다. 가시성의 상태가 바로 함정인 것이다. (『감시와 처벌』중)




애초에 파놉티콘은 감옥 건축을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파놉티콘이 감옥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병원, 정신병동, 공장, 병영, 즉 개인들의 감시와 거기와 관련된 조직의 문제를 전제하는 모든 기관들의 구축에도 확대 적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상에서 흔히 시간을 보내는 거의 대부분의 기관들이, 권력으로 하여금 우리를 감시하기 쉬운 구조로 지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러한 감시 형식은 놀라운 훈육효과를 허용한다. 개인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계측과 검증이 가능하며 보다 쉽게 통제가 가능한 개인들을 추출해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파놉티콘은 학생, 수감자, 병자, 혹은 광인에게 빛 속에서 항시 그들을 염탐하는 감시인들이 있고, 잠재적으로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준다. 이러한 가시성의 체제 하에서 매 순간 감시 받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각각의 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억압한다.

덕분에 권력은, 감시를 통해 생명을 가두거나, 제거하거나, 억압하지 않고서도 개인의 신체와 행동에 훈육효과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감옥의 구조로 권력의 숨은 의도를 파헤친 푸코의 놀라운 연구 성과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권력에 훈육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자각을 깨우쳐준다.

--- 심세광 <미셸 푸코 가로지르기> 중에서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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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죽지 않는 사람

2007/03/19 09:54

보르헤스는 [죽지 않는 사람]을 빌어 불사에 대해 말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불사의 존재임을 확인한 후, "불락에서 [천일야화]를 필사하기도 하고, 사마르칸드의 감옥에서 장기도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하며 수많은 삶을 산다. 불사의 존재란 이처럼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죽는 존재고, 그 모든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삶 안에 담을 수 있는 존재다.

죽음을 거부하고 기존의 동일한 삶을 지속하려는 집착을 던진다면, 사실은 우리 모두가 불사의 존재임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 한계레신문 2007. 3. 16. [책과 지성], 이진경 [고전다시읽기] 소설로 담은 '색즉시공 공즉시색'(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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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제가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만감: 일기장  2007/03/17 17:11 

  

 출처: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980   


사람이 왜 신을 찾게 됩니까? 레닌의 고전적인 설명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탐색하지 못한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원시공동체 해체기의 인간의 집단을 갖고 이야기한다면 맞겟지만 이미 완숙한 계급사회 안에서의 한 개인의 다양한 내면적인 움직임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종교발생론이 아닌 듯합니다. 붓다가 병들고 가난하고 노년이 된 사람의 모습,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직면한 것이 수행의 계기가 됬고, 예수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의 "악마"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또 하나의 목소리겠지요?) 속삭임에 유혹을 받았다가 결국 세속의 권력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 계기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모순이든 계급 사회의 현실적인 모순이든 우리가 당장 현실적으로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할 때에 인간에게 종교심, 즉 자기 내면 안에서의 "신성한 것", 모순 해결의 능력을 갖는 "영원하고 안락스러운 것"을 찾으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저 같으면 제가 부딪쳤던 모순이 "폭력"이라는 사회의 현상이었는데, 그 시기는 아주 일렀습니다. 지금 기억 같으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한 번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위대한 조국 전쟁" 관련의 영화가 또 방송됐습니다. 소련이 철저하게 군사화된 사회이었는데, 텔레비전의 일정표 중에서 상당부분은 소독 전쟁 ("위대한 조국 전쟁") 때의 소련군을 찬양하는 "국책 영화"들이 차지했지요. 대체 전쟁 영화란 다 폭력적이지만, 그 때에 제가 본 영화는 개중에서도 좀 특별했어요. 감독에게 무슨 사디즘 취향이 있어서인지 그 영화의 여러 "클라이막스" 중의 하나는, "영웅적인 소련 군인"이 독일 여군의 가슴에 칼을 꽂아 그 여군을 "장렬히 처단"시키는, 꽤나 긴 장면이었지요. 죽어가는 "적"과 그 옆에서 "아, 참, 내가 수고했구먼!'과 같은 만족스러운 표정의 "아군의 용사"를 카메라가 약 5분간 클로즈업한 것이에요. 그런데 제게 있어서는, 그 장면의 효과는 감독이 의도한 바와 정반대이었어요. 제 어머니와 같은 중년의 여성을 근육질의 남성이 칼로 찔러 죽이기에, 저는 "불쌍하게 죽은" 그 여성에 대한 동정과 함께 제 어너미도 누군가가 이렇게 죽여 제가 고아가 될 것 같은 절망과 공포만을 느꼈을 뿐이지요. 그러다 영화를 보다가 씩씩해야 할 남아 초등학생답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 후로는 "국책 영화" 시청을 가급적 피했는데, 학교에서 교련을 시키고 전쟁게임까지 시키는 것이 하도 부담이 되기에 근육질의 남성들이 무기라는 나쁜 노리감을 갖다가 남을 괴롭히는 일이 없는 좋은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한 번 이렇게 "국책 영화"의 폭력성에 놀란 뒤에는, 제가 이 세상에 폭력을 금하는 윤리체계가 있는가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어요. 소련의 공식 윤리체계는 "적군의 살해" 정도를 당연지사이자 "남자다운 일"로 봤기에 제가 기독교에 눈을 돌렸는데, "애국애족"을 외치는 것은 주류 기독교 집단, 즉 희랍정교회도 마찬가지이었어요. 그러다가 병역거부의 전통을 자랑하는 비주류 교파 - 소련말기에는 그게 주로 침례교파이었어요 - 에 관심을 가졌다가 그 쪽의 아주 엄격한 "집단적 규범"에 압박감을 느껴서 결국 원시 불교의 경전을 읽는 것을 본업으로 삼게 됐어요. 저는 고교시절에 <법구경>과 <숫타니파타>의 초역본을 읽고서야 자기 내면에서의 분노와 그 분노의 원천인 탐욕, 아집, 어리석음을 없애고 자기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역시 "남성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을 찾았어요. 남을 칼로 찌를 생각과 능력이 없는 저 같은 사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결국 제게 종교적 심성을 심어준 것은 "폭력", 그것도 알고 보니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었던 셈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미 고교시절부터 인식한 이 문제의 복합성은, "폭력"의 사회적인 연원에 있었던 것이지요. 군대를 운영하는 국가,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계급, 지배계급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계급적 지배 질서가 있기에 결국 칼침 놓는 일을 찬양하는 영화들이 만들어져 저와 같은 사람들을 울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불교 같은 종교의 경전들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는 내면의 길, 즉 팔정도를 가르치지만, 내면이 아닌 외면의 차원에서는 불교가 역사상 한 번이라도 계급적인 평등을 외치거나 승려가 아닌 속인의 병역거부를 제창했던가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삼계도와 같은 특수 불교 종파, 그리고 일부 특수 개인 빼고는, 불교는 일부 성직자의 평화로운 "내면의 구도" 가능성을 지배계급의 폭력자로부터 보장 받기 위해 폭력자와의 대결/투쟁은 물론 폭력자에 대한 솔직하고 바른 말까지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지요. 사상으로서의 불교는 제 초발심에 그대로 맞지만 제도로서의 불교에 대해 늘 느끼는 것은 심한 배신감일 뿐입니다. 종교적 심성의 초발점은 "모순"과의 만남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만남의 과정에서는 종교적 심성은 생기지만, (계급 사회의 하나의) 제도로서의 종교는 이 "모순"의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금으로서는 주로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를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여 절에 가지 말자!"라고 외치면 제 자신도 마음의 일면에서 미안함을 느끼지만 사실 부처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승방에서 예비군 군복이 걸려 있다는 것이 어쩔 수없다는 셈친다 하더라도 <법구경>을 갖다가 설법하시는 분들이 총들고 살인 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계속 하시고 계시다면 - 즉 병영화된 사회와 불교 교의의 기본적 충돌에 대한 의식조차 없다면 - 이건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초발심도 배반하고 짓밟는 "가사 입은 도둑"의 집단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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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사화’ 판치던 절망시대 정치권력 정당성 묻다

고전 다시읽기 / 조식 <남명집>



지·리·산이란 ‘앎이 다른 산’(智異山)이다. 앎이 다르면 꿈이 달라지고, 꿈이 다르면 삶이 달라진다. 이미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은 도회나 들에서 살 수가 없다. 지리산은 앎과 삶이 다른 사람들을 품어온 산이다. 파르티잔, 이현상과 남도부가 지리산으로 숨어든 까닭도 그 산이 ‘앎이 다른’ 이들을 품어온 이력 때문이리라.


16세기 조선 중엽, 도회(서울)와 들(김해)을 벗어나 지리산 밑으로 파고든 이가 있었다. 짱짱한 유교의 시대였음에도 짐짓 ‘다른 생각’을 품은 <장자>에서 이름을 따 남명(南冥)으로 자호한 이였다. 조식(1501~1572)! 이황과 한 해에 태어난 유자가 그였다. 하나 고작 책상물림의 백면서생은 아니었다. 방울을 옷 춤에 달아 거기서 나는 소리로 제 행동거지를 단속한(敬) 엄한 ‘선비’였으면서 동시에 칼로써 정의(義)를 세우려던 ‘사무라이’이기도 했다. 곽제우가 그의 제자였음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유자로서의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비틀어버린 것은 연이은 사화였다.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송인수를 비롯한 많은 벗들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으며 몰살을 당했다. 그에게 이 시대는 실로 절망의 시대였다. 마치 ‘광주사태’가 1980년대 젊은 지식인들에게 물었듯, 연속된 사화는 당시 살아남은 유자들에게 물었다. “정당한 권력이란 무엇이냐?” 라고.


적어도 이황과 조식에게 중년이후의 삶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황이 스스로 퇴계, 즉 ‘골짜기로 물러난 사람’으로 정의하고 긴장된 삶을 살았다면 조식은 남명, 즉 딴 세상으로 떠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황이 정권으로부터 물러서긴 했으나 돌아서지는 않았다면, 조식은 끊고서 다시는 돌아서지 않았다. 미진한 듯 도회에 끈을 남긴 동년배, 이황을 그가 힐난한 것도 그래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 사태는 유자였던 조식에게 몇 가지 선택적 질문으로 와 닿았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아버지와 숙부를 죽인 정권에 충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 사이에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유교이념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 관계는 천륜(운명)이요, 국가와 신민의 관계는 인륜(계약)이다. 부모를 죽인 정권에 저항은 못할망정 참여하는 것은 유교의 기본원리에 어긋난다. 이것이 조식이 유자였으면서도 장자풍의 은둔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다. 유교적 이념에 충실할수록 도교적 실천으로 빨려드는 아이러니, 아마 이것이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든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둘째, 정치사상의 차원에서 사화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연이은 살육의 사태에 대한 궁극적 책임자는 누구인가. 조식은 그 근원적 책임이 군주에게 있다는 점을 단단히 못 박는다. 숨어사는 그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면서 손길을 내민 군주에게 이런 날선 언어로 응대한 터다.


“나랏일은 벌써 결단이 났소이다. 신하와 관리들은 둘러서서 쳐다보기만 할 뿐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소. <논어>에서 말하듯 ‘어쩌면 좋을까’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시점은 진작 지나가버린 거요. 그런데도 임금이 이 꼴을 보고서도 모른 척한다면 장님이요, 알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이 나라의 소유자가 아닌 것이외다.”(“음식물을 베풀어준 것을 기화로 올리는 상소문”)


정책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는 자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의 형국이라는 것. 유교이념에 의하면 군주란 ‘하늘 아래 자기 땅이 아닌 데가 없고, 인민 가운데 자기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는’ 국가의 소유권자다. 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데 지금 조선의 국왕은 정책적 결과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중종, 명종, 선조는 옳은 군주가 아니다. 섭정의 명목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문정왕후(명종의 모친)에 대해 “궁궐 속의 한낱 과부에 불과하다”(즉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는, 사적 존재다)라는 파격적인 비판을 행할 수 있었던 것도 ‘정치가는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인식의 선상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는 그 책임의 소재를 더욱 분명히 한다. “내가 권할 말씀은 단 한 마디, 군의(君義)라는 글자올시다. 이 글자로써 임금의 몸을 닦고 나라를 잡는 근본으로 삼기를 권하외다.”(상동) 여기 ‘군의’, 즉 “임금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은 거꾸로 ‘임금이 의롭지 못해 빚어진 사태에 대해 통절히 반성하라, 또는 문제의 핵심은 곧 임금이 의롭지 못한데 있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임금이 정의로워야 한다’라는 이 한마디에 그의 정치 생각이 응축되어 있다. 당시 정치의 실패와 천륜 파괴의 궁극적 책임이 ‘임금의 불의’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조식에게 정치는 적법한 행정절차, 분배의 정의, 사건 처리의 효율성 따위가 아니었다.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도덕적 행위였다. 이것은 군주뿐만 아니라 정치참여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그가 “선비의 가장 큰 일은 정치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그 순간에 있을 따름”이라고 지적한 것도 정당성에 대한 판단과 선택에 정치성의 핵심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선비들을 다 죽여 놓고도 뻔뻔하게 왕정의 이념을 내건 정부와 그런 정부에 눈을 질끈 감고 꾸역꾸역 참여하는 지식인(선비)들의 몸짓, 두 방면에 대한 문제제기다.


셋째 ‘폭력집단으로 타락한 국가에 대해 지식인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실천적 질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선택을 가상할 수 있다. 망명, 혁명 그리고 은둔의 길이다. 첫째, 망명이란 춘추전국시대처럼 유동성이 강한 사회는 몰라도 반도의 갇힌 지형에다 이미 중앙 집권력이 강고해진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둘째, 혁명은 내심으로야 강한 충동을 가졌을지 모르나(그의 ‘칼’에 대한 깊은 욕망을 두고 보건대) 실제로는 행동으로 드러낼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소극적이긴 하지만 은둔 외에는 정치적 불만을 표현할 길이 봉쇄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은둔은 정치적 영향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힘을 발휘할 계기일 수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는 조선이 유교경전을 통치정당성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조식의 행동이 근거하고 있는 경전 구절은 “천하에 도가 있으면 출사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논어>)는 대목인데, 이것은 권력자에게 당혹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은둔 자체가 ‘도가 없음’ 곧 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숨은 선비가 신망을 얻을수록 권력의 부당성은 더욱 짙게 채색된다. 즉“정당하면 나아가고, 부당하면 곧 숨는다”는 선비의 출처(出處) 구도는 은둔자의 도덕적 파워에 따라 정권의 정당성이 결정되는 곤혹스런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둔은 겉으로는 도피일지 모르지만, 안으로는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 된다.


요컨대 조식의 행동과 언설은 여러모로 정치사상적 문제를 제기한다. “유교국가에서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서 비롯하는가”라는 주제 아래 (1) 충성과 효도 사이의 선택문제, (2) 정치적 실패(사화)에 대한 책임의 문제, 그리고 (3) 부당한 권력에 대해 신민은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문제가 그것들이다.


조식은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호한한 연구를 남긴 이황에 비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도리어 그는 글에 파묻히는 것을 경계하였다. 각인이 처한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령이라고 믿었다. 현인이 남긴 전적이나 성인의 경전마저도 나의 성찰과 실천을 위한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실천지향의 노선은 그에게 ‘칼을 찬 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넉넉한 것인데, 임진왜란을 맞은 그의 제자들이 각처에서 의병으로서 활동한 것도 이런 가르침 때문이리라. 본시 스스로 남긴 자료가 적은데다, 훗날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그의 제자들이 몰락하는 와중에 또 남은 글마저 덧칠을 당하면서 그의 생각의 전모를 알기 어렵게 된 점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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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2007/03/09 12:56
 

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 만감: 일기장 

 출처 :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862   

최근 며칠 도올의 "구약 폐기론"으로 세상이 약간 시끄러웠습니다.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구약을 읽었을 때에는 가끔 가다 이게 무슨 대량 학살 찬양서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의 땅을 정복했다는 걸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몇 백 명을 칼에 맡겨라고 분부하셨다"는 이야기가 하도 자주 나와서 제 어린 심정으로는 가히 공포없이 읽기가 어려웠어요. 실제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에 가나안의 정복이 없었다는 사실 ("원 유대" 부족들이 원래 주민들과 실제 "섞인" 것이지요)과 야훼가 원래 벼락과 전쟁, 무사의 신이어서 야훼의 숭배에 남성 우월주의적, 폭력적 요소가 강했지만 이는 고대 유대인의 문화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는데, 구약에 대한 반감은 오래 갔습니다 (<아가> 정도는, 여성 가슴에 대한 관능적인 묘사를 포함한 애로틱한 요소도 있고 해서 참 좋았지만....). 결국 종교의 텍스트란 해석 나름이고 구약의 살인주의적, 선민주의적, 폭력주의적 요소들을 "해석"을 통해 어느 정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예컨대 상징적으로만 이해하기를 촉구할 수 있지요) 이걸 인생의 지침서로 삼으면 큰일 나지요. <법구경>이나 신약, <도덕경>과 같은 수준의 보편주의적인 종교 텍스트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수준이기에 구약과 같이 논하기도 어렵지만 제가 봤을 때에는 내부적 모순이 적지 않고 일부는 아나코코뮤니스트로서의 예수의 본격적인 주장과 거리 먼 주장들도 수록된 듯합니다. 예컨대 재판관에게 가지 말라고 하여 사법부 권력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이 세상 (즉, 현존하는 계급 사회)이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부 축적의 부도덕성을 강조하는 예수는, 갑자기 "황제 (시서)의 것을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주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물론 어디까지 예수 본인의 행적에 대한 (이미 애매해진) 기록이고 어디부터 성경 편찬시의 가탁인지 알 게 없어서 "예수의 말"이라고 단정짓기 어렵지만 이게 참 모호한 표현에요. 당장에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일단 바치고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모르지만 만약 보다 깊은 차원에서 "황제에게의 충실한 신민 의무 다하기와 하나님 섬기기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면 이는 원시 기독교의 일부 "반란적" 주장들과 잘 안맞아요.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 전시에 전쟁 자금으로 쓰인다면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의 입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사실, 일반 선남선녀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나라"의 충실한 신민으로 살아가기가, "하나님"을 자기 마음 속에서 찾는 것보다 훨씬 쉽지요. 학교의 상황을 생각해보시지요. 자기 성적을 올리려고 자기의 등수를 높이려고, "황제의 나라" 규칙대로 "열심히 사는" 아이들이 많지만, 서열화된 등수 체계의 비윤리성, 반교육성을 반대하고 탈학교 운동을 벌이고 대안 학교를 찾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있긴 있어도 아직 소수지요. 즉, 이미 우리 마음까지도 상당부분 다스리는 "황제"를 받아들이기는, 무형 무성, 불가시, 불가문의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폭력들을 다 거부하는 "하나님"을 위주로 종교를 조직하자면, "황제"에 대한 거부의 수위를 조금 더 높이는 것이 적절치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거부 수위를 높여도 어차피 대다수가 마음 속의 하나님을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보다 "다들 가는" 군대에 순순히 가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 불가피하다 해도 - 하나님의 논리를 배반하는 행위라는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저 같으면 예수의 "황제와 하나님"의 담론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을 것입니다: "저항할 만한 자신이 없으면 황제에게 당신의 것이 빼앗기도록 일단 두라.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만하지 말라. 황제의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수 없는 것이고, 황제를 거부하는 자만이, 최소한 마음으로라도 황제를 떠난 자만이 하나님에 접근할 수 있다".


제 종교도 아닌데, 이렇게 종교의 경전을 고쳐보는 것이 외람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산 종교가 되자면 그 경전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 계속 이루어지고, 예수 그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 일부의 "빈란적인" 의지와 성경 편찬 당시의 순응주의적 분위기 사이의 차이도 명확히 밝혀져 원시 기독교의 "참신한 반란"에 대한 사상사적 복원도 좀 이루어져야 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종교란 믿는 자의 것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이가 결국 황제에 대한 보다 강력한 거부에 개인적으로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의 대형 교회 같으면 하나님 자체도 이미 황제화됐으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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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구슬픈 肉體

2007/03/06 08:53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자체(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통각(統覺)과

조화(調和)와 영원(永遠)과

귀결(歸結)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大地)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一體)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不屈)의

의지(意志)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天上)의 무슨 등대(燈臺)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海底)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調和)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천사(天使)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肉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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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새가 나는 이유?

2007/02/28 11:07

 

뉴질랜드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5종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관찰해 본 결과 뉴질랜드에는 새의 천적이 없어 새가 굳이 땅을 박차고

힘차게 비상할 이유가 없어서 오랜시간 날지 못하는 새로 진화되었다고 한다.

 

절대절명의 위기와 긴장감이 새가 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매너리즘과 나태한 일상의 수레바퀴에 젖어 있는 한 영원히 날 수가 없다.

마치 날개가 있어도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 뉴질랜드의 새처럼 말이다.

 

 

- lifephilo 카페 [마주보기]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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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든 안락한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그 반대의 생활로 떨어져 버렸다면, 그 떨어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서』)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 ‘중국의 기상나팔’로 불리는 루쉰은 1881년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고 아버지가 병환을 얻으면서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루쉰은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약방으로, 돈을 구하기 위해 전당포로 뛰어다니게 되었는데 약방 계산대와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이 느끼는 세상의 벽만큼이나 높은 것이었다.


“약방 계산대는 내 키만큼 높았고, 전당포의 계산대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었다” (『자서』)


약방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도 익숙했던 현학적인 전통의 세계였기에 루쉰의 눈높이를 뛰어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 화폐의 소중함, 그리고 더러움을 동시에 알게 해준 곳이므로 심리적으로 훨씬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루쉰이 느꼈던 세상의 두 가지 벽이다. 또한 이것은 전통적인 낡은 시대의 유물(약방), 그리고 자본주의적 질서인 서구의 문명(전당포) 사이의 긴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루쉰은 성인이 되어 이 두 가지 것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게 된다.


성장한 루쉰은 양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의학을 통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겠다는 결심으로,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곳에서 인생의 길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바로 ‘환등기 사건’이었다. 수업시간에 환등기로 뉴스필름을 보여주었는데 어떤 중국인이 군사재판을 받고 있고 그 주위에 다른 중국인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이었다. 그 중국인은 곧 일본인에 의해 총살되었고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중국인들을 욕하고 있었다. 루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수련하는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 환호할 수 있는가?’ 라는 분노와 함께 자기 동족이 죽는 것을 둘러서서 가만히 보고 있는 중국의 무지몽매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자신도 무지한 중국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술을 통해 몸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의 낙후된 정신을 각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사의 길을 포기한 채 비로소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허구를 비판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들로 10억 중국인을 깨어나게 한 ‘중국의 기상나팔’ 루쉰이 탄생한 것이다.

- 권용선 <루쉰을 읽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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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문화] 새해 다짐

2007/02/23 17:13

새해 다짐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가지런해야겠다
세상이 어지럽지만
내가 단정하지 못했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고요해져야겠다
세상이 시끄럽지만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멀리 내다 봐야겠다
세상이 숨가쁘지만
내가 호흡이 짧았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간소하고 나직해야겠다
세상이 온통 대박행진이지만
내가 먼저 비우고 나누지 못했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홀로 외로워져야겠다
좀 흔들리고 눈물도 흘리고 가슴아파하면서
내 사람이 온유해져야겠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나의 하루 하루가
좀 더 치열해져야겠다
과녁을 향해 팽팽히 당겨진 화살처럼
하루 하루를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온전히 집중해야겠다
 
 
- 새해에는 더 해맑은 다짐으로 더 진실한 성취와 향기나는 사람의 꽃을 피우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나눔문화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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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 고해(苦海)

2007/02/21 12:13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면서,

 

사람이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인가? 

불가에서는 인간세상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고해(苦海)라고 말한다.

 

탐(貪 탐냄), 진(瞋 화냄), 치(痴 어리석음)

고통의 바다! 바다는 참 넓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이다. 

 

참 세상 사는 일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질 않는다.

예전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였지만, 지금은 그런 에너지가 많이 고갈된 것 같다.

 

괴로움이 없는 하루, 자유로운 하루.

이것이 내가 오늘 갈망하는 하루다.

 

 

-2007.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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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니체가 말하는 참사랑

2007/02/20 10:29
 

[니체가 말하는 참사랑]


비둘기 걸음으로도 폭풍을 불러올 줄 아는 사람, 혁명에 웃음을 선사한 사람, ‘신은 죽었다!’ 라는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은 사람, 하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숫기 없는 사람.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에게는 도덕사학자 파울 레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살로메와의 관계에서 연적이기도 했다. 니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살로메에게 편지를 직접 전해줄 용기가 없어서 레에게 대신 전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연적에게 편지를 전해줬으니 그 편지가 살로메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었고 당연히 니체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현실적인 사랑에는 서툰 니체였지만 이론으로는 사랑에 대한 장광설을 펼쳐놓았다. 니체가 말한 사랑에 대해 한번 들어보자.


흥미롭게도 니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소유욕이자 상대방을 자기화 시키려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소유(Property)라는 단어를 보면 소유라는 뜻 외에도 재산, 고유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은 없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도둑질하여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소유는 한 마디로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도둑질을 은폐하기 위해 정체성이니 고유성이니 하는 말들을 끼워 넣어 신비화 시켜버렸다.’ 라고 니체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니체는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리를 사랑스럽게 창조하고 정말 친구를 사랑한다면 사랑할 친구를 만들어라. 즉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사랑할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만드는 것이다.

니체의 사랑은 놀랍고도 힘들다. 하지만 그만큼 아름답다.

- 고병권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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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남쪽으로 튀어 !

2007/02/19 00:09

 

어른이 아이의 세계에서 무력하듯이 아이는 어른의 세계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다. (p. 304)

 

인간이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자신이 안전할 때 뿐이다. (p.  348)

 

마치 내일 또 만날 사람 같은 인사였다. (p. 395)

 

센티멘털한 기분에 빠지는 건 대부분 어른들이다. 어린이에게는 과거보다 미래가 훨씬 더 크다. 센티멘탈한 기분에 빠질 틈이 없는 것이다. (p. 397)

  

- 오쿠다 히데오. 양윤옥 옮김. 2006. [남쪽으로 튀어! 1]. 은행나무

 

 

"집도 사람이나 매한가지야."

"사람이 와서 살아주지 않으면 금세 늙어버려. 그러다가도 사람이 들기만 하면 갑자기 젊어지거든" (p. 45)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속이지 않는다, 질투하지 않는다, 위세부리지 않는다, 악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지키며 살아왔어. 단 한 가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면 그저 이 세상과 맞지 않았던 것 뿐이잖니?"

 

"아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 줄 뿐이야." (p. 287)

 

인류는 돈을 지닌 시대보다 지니지 못했던 시대가 훨씬 더 길었다. 그러한 인류 끄트머리의 기억이 000에게만 진하게 남은 것이다. (p. 299)

 

힘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은 영혼이 지금도 저 먼 남쪽에서 바람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p. 310)

 

 

- 오쿠다 히데오. 양윤옥 옮김. 2006. [남쪽으로 튀어! 2].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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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묵고] 몇가지 생각들

2007/02/15 00:57

오늘 그동안 계속 밀려왔던 일들을 일단락했다

그래서 술한잔 기분좋게 먹었다

 

술먹고 생각해보니

내가 서른다섯이 넘어서

'나도 참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구나'

 '살려면 어쩔수 없지'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변한다. 나도 변한다.

나는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내가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좀 더 깊은 생각과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내일도 행복을 기약할 수 없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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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운]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2007/02/14 13:03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지난주에 열린 한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 갔었다. 곧 복학할 제자가 복싱을 배워 처음으로 하는 경기라서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요사이 케이원(K-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격한 운동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줄 알지만, 그런 싸움질은 복싱과 크게 다르다. 순수한 아마추어 복싱도 잊혀진 스포츠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시 신인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는 아마추어 복싱연맹 주최로 신인을 위해서 일년에 한번 열린다. 한번 출전하면 다시는 출전할 수 없는 것이 대회의 규칙인 모양이다. 전국 신인 아마추어 복싱대회가 있지만, 권투 체육관이 주로 서울에 있기 때문에 서울 대회는 아마추어들을 위한 전국대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대회가 열리는 대학 복싱체육관은 낡고 비좁았다. 선수들은 구경 온 이들과 함께 바닥에 누워 쉬면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서서 몸을 풀어야 했다. 이들이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곳도 없어 보였다. 연맹이 구청의 체육관을 빌려서 진행해도 이것보다는 나은 대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은 죄다 완강하게 주먹을 쥐고 링에 올랐다. 서툰 선수들이지만 허투로 하는 시합은 없었다. 어둠 속에 눈이 빛나 보였지만 몸은 얻어맞고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했다. 링 아래에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선수들이 늙은 코치가 되어 자신의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어린 아마추어 선수와 늙은 코치는 희망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복싱이 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혼자 추는 춤도 아니고 둘이서 추는 춤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싱은 격한 스포츠이긴 하지만 삶의 격정과 슬픔이 묻어 있다. 아마추어 복싱은 육화된 순수이다. 젊은 아마추어들 선수들에게 복싱은 삶의 동력과도 같아 보였다. 말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좁은 링에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피한다. 상대방과 갈등하는 복싱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의 소산일 터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아마추어 복싱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야말로 링 위에 오른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일 터이다.


복싱을 즐기는 제자를 보면서 삶과 연극 그리고 복싱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의 결과이고, 말과 같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어떤 것을 생산하는 씨앗이다. 그러므로 삶과 연극 그리고 복싱에서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삶의 큰 자장이며 밑변이다. 말 없는 삶이 있을 수 없고, 삶 없는 연극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복싱은 육체적 긴장을 넘어서는 절실함이다. 내 앞에 바로 상대가 있고, 나와 상대는 서로 뚫어지게 쳐다보아야 한다.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눈은 링 위에 없다. 연극은 말하는 예술이되, 말하는 이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재의 예술이다. 복싱은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저 아마추어 선수들은 2분 4회전 동안 쓰러지지 않은 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쓰러져 지리멸렬해지면 금세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링 위의 삶은 눈물겨운 좌초이며 끝장이다. 한 생애가 몸부림치는 것이 아마추어 복싱이다.


연극이 말하는 이들을 위해서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처럼, 복싱은 링이라는 공간 위에서 벌어진다. 복싱은 주먹 이전에 링이라는 공간의 역사이다. 연극은 사람이 사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독백, 방백, 고백, 침묵 등. 이 모든 것이야말로 연극이 말하는 형식들이다. 복싱에서 주먹을 내미는 잽, 훅, 어퍼컷이라는 것은 주먹으로 말하는 형식이다. 선수마다 주먹을 내미는 특기가 다른데, 그 이유는 개인의 기억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수마다 다른 주먹의 형식은 그가 관계맺고 있는 가족과 사회라는 그물망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격렬하게 내미는 주먹이 있고, 공허하게 주고받는 주먹이 있다. 말의 형식은 삶의 형식이고, 집단적 기억의 형식은 연극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복싱은 지극히 개인적 삶의 형식과 형식의 대결이다.


말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 삶을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싱에서 발을 움직이고 주먹을 내미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생각해 보라, 제 삶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며, 말하기는 곧 자신에게 말걸기가 아닌가. 제 삶은 모두 제 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복싱에서 주먹은 말이고, 주먹을 내미는 것은 말걸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복싱에서 링은 큰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작은 세상이다. 여기서 각자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복싱의 미덕은 마지막 종소리가 울린 후, 뜨거운 눈물과 땀, 증오가 아닌 피로 범벅이 된 몸들이 첫사랑의 연인들처럼 껴안으며 서로 상대방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이다. 이 순간 얕은 패배도, 초라한 승리도 없다.   


제자는 이제 자신을 겨우 말하기 시작했다. 제 삶을 말하기 위해서 그는 힘들게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했고, 그것을 몸으로 말하기 위해서 링에 올랐다. 그가 치른 첫 번째 경기는 그가 육체로 구현한 삶의 연극이었으리라. 그의 삶과 아마추어 복싱은 짝패이다. 처음으로 링에 올라 타인들 앞에서 경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야만 하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래서 권투하는 이들의 시선은 낮은 곳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반목이 없는 그들은 언어의 순수성과 같은 것을 고민한다. 제자도 어느 날 링에서 육체가 몰락하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더 크게 그의 생애를 알 것이다.


안치운/호서대학교 연극학과 교수, 연극평론가

(출처 : 한계레 신문 2007. 2. 9. 책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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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하나님과 거울

2007/02/14 09:30

1.

아침 지하철 출근길.

기계음과 숨소리와 답답함만 들리는 비좁은 공간에서 어느 젊은 분이

 "......하나님은 온세상에 충만해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이 어쩌면 하느님이 자신의 내부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충무로역에는 공중전화 박스 밑에서는 가끔 노숙자가 늦잠을 자기도 한다

그는 이불을 덮고 잔다

볼때마다 '관세음보살'하며 기도한다

 

2.

나는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은 타인과의 타협의 결과물이며, 그로 인한 이미지이다

진실은 자신만이 알 뿐이다

어쩌면 주관이 객관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지하철의 노숙자가 편하게 늦잠을 잘 수 있고, 젊은 전도사가 악을 쓸 수 있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면서 말하기'에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거짓을 진실인양 고귀하고 강력한 목소리로, 때로는 요염한 목소리로 말하는 자들을 보면 나는 분노한다.

대통령, 대변인, 국회의원, 정부부처 고위공무원, 판사, 검사, 변호사, TV에 연예인처럼 나타나는 박사들, 연예인, 뉴스 아나운서들이 그렇다. 가끔 자기욕심이나, 돈에 다급하여 말하는 내 주변과 내가 그렇다.

 

나는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볼 줄 안다고 생각한다

 

 

- 2007. 2. 14.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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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쿠르베와 밀레의 풍경화

2007/02/13 09:34
 

[ 같은 소재로 다른 느낌을 주는 쿠르베와 밀레의 풍경화 ]



19세기 중반,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활을 꾸려 나가기에도 힘든 민중들은 가난에 허덕였지만 부르주아들은 미술과 음악 등 문화를 마음껏 영위했다. 주 고객층이 부르주아들이다 보니 예술의 흐름도 부르주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점차 흘러가게 되었다. 하지만 쿠르베는 그런 부르주아들의 취향에 어긋나는 그림을 그려 화제가 되었다.

쿠르베를 스캔들 메이커로 만들어놓은 것이 바로 이 <석공>이라는 작품이다.


당시에 이 그림을 본 부르주아들은 그림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인물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위협적인 느낌을 받는데다가 노동자들이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 그림이니, 부르주아에게는 더욱 꺼림칙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 속 시야가 막혀있어서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거리감이 사라지고 내가 ‘그 안에 있다’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위의 <석공>과 비슷한 소재를 다뤘지만 평가가 완전히 반대로 나뉘었던 작품이 있다.

바로 농민생활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밀레의 <이삭줍기>(왼쪽)와 <만종>이다. 이 그림이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풍경 때문이다. 그림은 전체적인 자연과 더불어 인물들을 보게 한다. 게다가 <만종>의 주인공들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들의 노동하는 험한 옷차림들까지도 그 풍경의 일부로 만들어 경건하고 평화로운 의미를 띠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현실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미적인 형태로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그림의 특성 덕분에 <이삭줍기>와 <만종>은 최고의 명화로 칭송받으며 부르주아들에게 사랑받았던 것이다.

- 채운 <풍경을 보는 여섯 개의 시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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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2007/02/12 13:40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is to have to love someone.


The second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is to have someone love you.


The third most important thing is to have the first two happan at the same time.


 

 

[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1872~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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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법, 매카시즘, 그리고 뉴라이트  [한계레 신문 2007. 2. 9.책과 지성]

2006년부터 한국사회는 뉴라이트 운동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뉴라이트 운동의 중심에는 교회세력이 있다. 교직자들은 지금까지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점잖음을 유지하던 종래의 태도를 버리고 아주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사학 개방이사제를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미군이 계속 한국에 주둔해야 한다며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에 되돌려주지 말도록 간청했다. 그리고 북핵문제가 불거지자 이제는 반미를 매국으로 몰아가고 여당과 대통령을 무능하다고 몰아붙였다.


미국의 금주법은 식량을 절약하고, 공장의 작업능률을 향상시킨다는 목적 외에 맥주를 제조하는 독일인들에 대한 반감 등을 배경으로 ‘미국 영토 내에서 알코올의 제조 판매, 유통 수출입을 금지한다’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8조로 1920년 1월에 발효되었다(법안 명칭은 법안 제안자인 하원의원의 이름을 따 ‘볼스테드 액트’라 붙였다). 미국 중산층에 속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침례교) 교인들, 일부 농민들, 일부 여성들, 보수적인 정치인들과 일부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금주법의 입법화를 적극 지지했다.


당연히 금주법 시행은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금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주를 제조하거나 비싼 값을 주고 외부에서 은밀하게 반입한 알코올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밀주단속을 위해 연방정부는 1500명의 공무원을 고용했지만 미국의 국경과 해안선을 모두 감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층민들은 공업용 알코올을 물에 타서 마셨고 대략 2천만 가구의 중산층이 가정에서 비밀리에 배스터브 진(bathtub gin)을 제조했는데 이들을 모두 단속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주법 실시와 함께 확산된 밀조 밀매로 범죄도 증가했다. 알 카포네 같은 범죄자들이 만든 폭력단체들은 밀주수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애주가들은 술을 구입하기 쉽지 않자 술 마실 기회가 오면 한꺼번에 많이 마셔두려고 했다. 공업용 알코올을 마시던 노동자들은 건강을 버렸고 숨지기도 했다. 가장 큰 피해는, ‘선량한’ 미국인들이 이중적 사고를 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공개적으로는 금주법을 지지하면서 몰래 술을 구입해 가까운 친구들과 숨어서 술을 마셔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주법은 쉽게 폐지되지 않았다. 금주법에 대한 반대도 많았지만 금주법을 호전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1929년 경제공황의 여파로 1933년 제정된 수정헌법 제27조에 의해 비로소 금주법은 폐지되었다.


금주법 제정으로 기세를 올리던 당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세력은 막강했고 전 세계에서 전도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특히 동양의 조용한 나라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개신교가 오늘날 강한 보수성을 띠고 민족 정체성과 관계없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금주법 시대의 복음주의가 한국에 상륙하여 오늘날까지 교회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금주법은 음주 자체의 범위를 넘어서는 전통과 현대 간의 갈등으로 파악해야 한다. 1차 세계대전 뒤의 산업화와 도시화, 공장 노동자의 대두 등은 전통세력에게 생소했다. 더구나 일요일 교회에 가는 대신 팝에서 술을 마시는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질적인 도전문화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아메리카의 구 지배세력은 미국사회가 이제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그 수단으로 죄없는 알코올을 찍었고, 음주를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것, 다시 말해 도시의 악으로 선전한 뒤 금주법으로 자신들의 힘을 결집시키고 사회의 주류자리를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미국사회 지배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금주법 제정으로 사회적 경비가 얼마나 소모되든, 미국인들이 위선적인 삶을 살든말든 그것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대원으로 참전했다가 1946년 위스컨신 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1908-1957)는 1950년 2월 상원 비미국활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자 적색분자 추방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화당 여성당원대회에서 매카시는 수첩을 꺼내 흔들면서 “미국 국무부 내에 공산당원들이 205명이나 근무하고 있다”고 폭로 아닌 폭로를 하자 미국사회는 반공광기로 치달았다. 그가 특정인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을 때마다 대중들은 열광했고,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매카시는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것은 공산주의요, 공산주의는 미국의 국익을 해친다.”는 등식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1946-1956년 10년간 등 뒤에서 빨갱이란 손가락질을 당한 1만2천명이 직장을 잃은 채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사람들은 단체나 모임에 가입하지도, 감히 호소문에 서명을 하지도 못했다. 미국인들은 집단광기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매카시는 1952년 상원의원선거에서 상대후보를 빨갱이로 몰아 다시 당선됐다.


흔히 매카시즘을 소련의 핵보유,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 등으로 전 세계에 공산화가 진행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미국 시민들이 지지한 운동이라고 말한다. 매카시즘이란 사회적 병리현상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사회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사회와 2차대전을 치른 후의 미국사회는 달라졌기 때문에 당연히 사회는 재편되어야 했다. 하지만 재편을 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도 종교인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도덕이 땅에 떨어진 데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익숙하지 못한 보수세력이 반공의 이름으로 결집하여 사회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매카시즘은 소련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조국을 지키자는 애국운동이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매카시즘을 정착시키기 위해 차관과 원조를 이용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세계 각국에 설치한 미국 문화원을 통해 문화로 포장한 매카시즘을 전파했다. 같은 시기에 한국의 미 공보원은 매카시즘을 <논단>을 통해 전파했다. 당시 대학교수들은 <논단> 기사의 번역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나오면 폼을 잡을 수 있었다. 미국이 알아주는 한국인이고 무엇보다 원고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포장된 매카시즘을 CIA 공작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하자 미 공보부 잡지들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하지만 한국의 <논단>은 장수했다.) 문제는 매카시즘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미국 정부는 2차대전의 여파가 채 가지지 않았지만 매카시즘 덕택으로 큰 어려움 없이 미국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가들은 방향성이나 한국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 효순이 미순이 촛불시위를 반대하고, 미군 철수를 반대하고, 교육법 개정을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 이들이 기획하는 교과서포럼 내용을 보면 친일, 친유신, 친독재, 친시장주의다. 그런데도 이들은 우파 언론에 의해 한국사회를 선도하는 인물들로 평가되었다. 이들은 부패한 사학은 극소수라며, 사립학교법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학교를 사유물로 생각하는 이들은 약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동원하는 삭발, 단식까지 하고 여당과 정부를 사악한 무리라고 비분강개했다.


이들은 초절정 코미디언이 되었을까? 코미디라니! 그들에겐 처절한 몸부림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움직여온 주류인 자신들이 한국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을 온몸으로 감지했다. 더 이상 한국사회가 자신들이 정해준 아젠다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자 이들은 ‘고상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과 그들의 행동은 얼핏 보면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오죽했으면 정용섭 대구 성서학아카데미원장이 “한국 보수파가 보이는 모습은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임상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역사에 교훈이란 없는 것이어서 세상은 정말 언제나 몇십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걸까?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의 가운데에는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가 격렬한 어조로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기독교계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통와위기(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이후로 기독교계는 신도수와 헌금액수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립학교법이 터지게 되었고 이는 교계 전체의 이익을 건드리는 일이었으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셈이었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도 미국 사립학교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했을 때 복음주의 신도들이 굳건한 복음주의 신앙을 지닌 그한테서 등을 돌리고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는 바람에 낙선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사학법 문제에서 교회와 보조를 같이하겠다는 것은 득표와 연결되는 현실적 전술을 구사하겠다는 메시지다.


미국의 금주법과 매카시즘,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의 공통점은 사회의 주류였던 사람들이 사회가 변화하고 패러다임이 바뀌자, 변화를 수용하지도 않고 주류에서 비주류로 밀리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는 점이다. 대안을 제시하는 건전한 보수가 아니어서 무조건 저항하다 보니 사회적 병리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역사의 도도한 변화 물결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이학수 /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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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박노자 |만감: 일기장  2007/02/07 20:59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379


요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라는 신간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반갑게 느껴지는 측면은, 정 교수께서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정의하시면서도 일단 트로츠키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무오류의 교황"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역시 꽤나 야만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타개하려 했던 그들의 자기 모순 투성이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닌과 트로츠키가 잘한 부분 - 예컨대 처음에 멘세비키들이 추진했던 "소비예트식 노동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적어도 이론상 수용한 것 - 도 배워야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정 교수께서 1920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가 하나의 오류이었음을 매우 옳게 지적하시더랍니다 (445-446쪽). 물론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한 상황의 영향", "레닌, 부하린 등 다수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차원의 착각" 등의 여러 가지 단서를 달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오류의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츠키와 레닌 등이 왜 그러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한번 깊이 고심해보고, 그 당시에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세력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이론상으로 주장했던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기관으로 만들어 그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징집하여 군대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요충지"에 배치하려 했을까요? 노동자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같으면 '징집'되어 가족과 헤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노동자의 심정을 이해해서라도 진시황의 부역 노동 징발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안할 터인데, 트로츠키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단순히 국방부 장관이라는 벼슬의 포획력일까요?


물론 국방부 장관으로써 가지게 돼 있는 "행정 편의주의"란 부분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의 한 가지 비극적인 파행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 정당"을 이끌었던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과연 하루라도 "노동"해본 적이 있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80년대식의 유행어로, 다들 "학출 군단"이었지요. 그들 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짧은 스탈린이라 해도, 그래도 신학 대학을 좀 다녀본 사람이었고 그루지아어로 꽤나 괜찮다는 시 몇 편을 잡지에 싣는 등 "문단 데뷰"까지 했었지요. 상트페데르부르그 제국대학의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해본 레닌 정도며는, 형님이 황제 암살 음모 혐의로 사형집행돼서 그렇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출세를 크게 할 수 있는 "먹물"의 대열에 속했어요. 고급학력이 하도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는 "문단 데뷰"나 "변호사 경력"은 별 것처럼 안보이지만, 인구의 70%가 아예 글을 몰랐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는 레닌/트로츠키와 일반 공장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거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었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글쎄, 1920년대의 조선에서 고급 한문 문장을 잘 구사했던 조공의 최초 책임비서 (1925년) 김재봉선생과 일선 노동자의 "관계"의 형태를 생각해보시기를. 그러니까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지도하의 전위당" 이론은 운동판에서의 "학출 군단"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그들의 "지도, 계몽"에 피로를 느꼈던 많은 일선 노동자 활동가들이 차라리 조직 형태가 조금 더 느슨한 멘세비키 쪽을 택하기도 했었어요. 일찍부터 현장 활동을 한 일도 별로 없이 노동자들을 "조직, 지도"해온 트로츠키 같은 "고급 학출"에게는,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대오로 세워 노동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꽤 쉽게 들 수 있었어요. 즉, 그의 "노동의 군사화" 망상의 근원을, 실제로 자본주의적 사회의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운동판의 정치 역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참, 지금의 한국의 운동판은 좀 달라졌나요?


그러면, 이 망상에 맞선 이들은 누구이었을까요? 1921년3월의 소련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의 "노동 군사화"에 반대한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는 슬랴프니코프 (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1885-1937)이었지요. 최종 학력은 보통학교 3학년 퇴학, 12살부터의 공장 노동, 1890년대 후반에 노동자 파업 주도, 현장 운동하다가 1901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08년 해외 망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레닌과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독일 사민당의 후원금을 받거나 "문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슬랴프니코프는 프랑스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거기에서도 노동 운동의 현장 지도자가 됐지요. 그가 1918년부터 인민위원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늘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서 "벼슬"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국 금속노조의 집행위원을 하는 등 "현장"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에거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독재 아닌 당의 독재를 겪게 되는 감이다"라고 일갈하고 "당의 관료화 위험"에 대해 - 트로츠키보다 훨씬 일찌기! - 경고하고 당과 국가 관료들을 일정 기간의 만료 이후에 다시 공장의 현장으로 보내고 현장 노동자들을 관료를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리고 공장에 대한 관리권과 소비예트 공화국 공업 전체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노조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었지요.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경제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즉,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 그렇게 됐다면 그나마 소비예트 민주주의를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학출" 출신의 고급 "직업 혁명가"들은 어찌 보통학교 출신의 노동자들의 감독을 달게 받겠습니까?


레닌이 슬랴프니코프에게 "신디칼리즘"같은 딱지를 붙였고, 당 대회는 슬랴프니코프와 그 동지들의 주장을 부결한데다 아예 당내의 "종파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후로는 일선 노동자보다 당 관료들이 당의 주인이 되고 말았지요. 트로츠키가 1923년에 정신을 차려 당의 관료화 위험을 눈을 떴을 때, 이미 다 늦었어요...그런데, 우리 주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많이 볼 수 있어도 "슬랴프니코프주의자"들은 별로 없어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갈구했던 보통 학교 출신의 슬랴프니코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안보이나요?


 슬랴프니코프: 그는 1920년대에 혁명사에 대한 좋은 책을 꽤 썼어요 (물론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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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의 원죄

2007/02/0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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