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300건

  1. 2008/03/21 [박노자] "민족적" 자위와 카타르시스: "주사"의 정치 (1)
  2. 2008/02/12 [고전읽기] 화살을 따라가는 과녁을 그리는 꼴
  3. 2008/02/04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221번지
  4. 2008/02/03 [일기] 점심을 먹다가
  5. 2008/02/03 그 동안 사용했던 블로그 이미지
  6. 2008/01/29 [일기] 깨어보니 아득하다
  7. 2008/01/25 [채근담] 마음을 닦는 법
  8. 2008/01/21 [일기] 술먹은 민주주의
  9. 2008/01/14 피면 피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살아야지
  10. 2008/01/13 스타벅스의 로고, 엘레베이터의 거울
  11. 2008/01/13 [니체] 여성, 자신의 가치, 강자와 약자 (1)
  12. 2008/01/13 [라캉] 상상적 동일시
  13. 2008/01/13 [고전] 홍익인간의 바른 의미
  14. 2008/01/13 [펌] 용서의 유익
  15. 2008/01/05 [일기] 천박한 욕망
  16. 2008/01/04 [메모] 인사동에서 한 시인이
  17. 2007/12/30 [일기] 눈이 왔어요
  18. 2007/12/24 [일기] 노래방에서 울었다
  19. 2007/12/20 [메모] 선거와 민주주의
  20. 2007/12/19 [푸념] 이명박의 경제
  21. 2007/12/19 [일기] 길상사에 다녀오다 (1)
  22. 2007/12/18 [일기] 나는 외롭지 않다
  23. 2007/12/07 [일기] 나는 나를 사랑한다
  24. 2007/12/07 [일기] 내면이 바뀌어야 한다
  25. 2007/12/05 [일기] 다시 독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1)
  26. 2007/11/21 [잡념] 눈부처
  27. 2007/11/20 [이정우]특이한 것과 특수한 것
  28. 2007/11/16 3% 바닷물 (1)
  29. 2007/09/14 죽지 않는 어떤 것
  30. 2007/09/04 [조광제] 제논의 역설-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박노자] "민족적" 자위와 카타르시스: "주사"의 정치 

만감: 일기장 2008/03/20 19:42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2160 

 

 며칠전 주위의 소위 말하는 "주사파"에 평소에 많이 시달려오신 한 지인 분과 점심 하면서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 알 것을 다 알게 된 요즘 세상에서 1980년대말의 이 정치적인 "유물"이 어떻게 이렇게 잘 "보존"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은 저희 두 사람의 공동된 궁금증이었습니다. 같이 생각하다 보니 현실과 "주사파"의 상상 세계가 사실상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현실이 아무리 바뀌어도 "주사파"는 바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사파"의 "상상의 정치"를 표현하자면 이게 성교 상대방의 실질적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종의 "자위 행위"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성욕을 극복치 못하는 보통 중생이 실질적인 성행위를 못하는 경우에는 대개 자위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러한 표현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실제로 성인의 절대 대다수는 자위의 경험이 있는 것이고, 이는 정상적인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상 (내지 상상)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할 수 없는 이들은 대개 상상 속에서 가상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그 완벽한 유토피아에 대한 찬양을 하면서 충성을 다짐하지 않습니까? 일부 서구 중산층 출신의 불자들이 보는 "오로지 명상에만 잠기는, 평화로운 샹그릴라와 같은 티베트"도 그러한 유토피아에 속하고 (실제로는 티베트 역사는 전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후반의 서구 마오이스트들이 생각했던 "혁명적 열정에 가득찬 신 중국"도 그랬고 (실제로 문혁은 "혁명"이라기보다는 대규모의 야만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조선 사대부들의 "요순시대"나 "세종대왕 시대의 치국"도 그러한 "행복한 상상"에 속합니다. 세상이란 바로 고(苦) 그 자체라는 진리, 중생이 있는 곳에 모순과 갈등이 늘 있다는 진리, 국가라는 폭력 조직이 - 그게 달라이라마의 국가든 모택동의 국가든 -  그 성질상 "아름다울 수" 없다는 진리는 인간에게 참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안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지요. 가는 데마다, 심지어 본인이 속하는 집단에서까지 모순을 발견하고 자아를 집단과 분리시켜야 하니까요. 그러기에 차라리 집단적인 "행복한 상상", 어디에선가의 유토피아 찾기에 정신을 파는 게 더 쉽습니다. 그것이 광의의 집단적 자위 행위가 아니라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민족"이라는 코드가 아주 잘 통하는 병영형 국가주의적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집단적인 사상적 수음의 행복한 시간"은 필연히 "민족"을 그 소재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기꾼과 각종 소인배들이 제 이익을 추구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서울 한복판에 앉아서 "어진 어버이 수령님", "완벽무구한 사회주의 조국", "어버이다운 배려에 감사를 하면서 조화롭게 사는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인민", 그리고 "미제를 언제나 쳐부쉴 수 있는 민족의 귀중한 핵"을 상상하며는 얼마나 행복해집니까? 특히 저 악취나는 앙키놈들을 일격에 박멸할 수 있는 "민족"의 페티쉬, 핵 미사일을 상상하면 아마도 진정한 극렬 민족주의자라면 거의 클라이막스로 갈 듯합니다. "남"들을 언제나 제압할 수 있는 "우리" 강성대국의 "힘의 잔치"... 현실 속에서는 그 놈의 영어와 씨름하면서 나날을 보내야 하지만, "외래어를 더 걸러낸 순수한 우리 말"과 "충성/효성" 그리고 핵무기의 고장을 수시로 염하면 절로 혈액 순환이 빨라집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보고 인민의 아편이라 했지요? 요즘은 그 아편이 다양화, 다변화돼 꼭 정통 종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보면 자위 행위가 성생활의 필수적 일부일 것입니다. 집단적인 "사상적 자위"는 어떤가요? 아마도 특정 제도 내지 정치적 장치에 대한 비현실적인 집단적 미화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대다수에게 거의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학교에 올 때마다 성조기라는 역겨운 페티쉬 앞에서 "충성 맹세"를 하는 미국 아이들을 보시기를... 그런데 수천만 명이 아사, 폭사했던 모택동 시대의 중국이나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정치수가 존재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오늘날 북한을 집단적인 "사상적 자위" 대상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도덕적으로 죄가 됩니다. 아무리 폭력적 포르노를 좋아한다 해도, 사람을 진짜 죽이면서 촬영하는 "snuff film"을 그래도 보통 안보는 것이지 않습니까? 북한에서 사람이 죽는 것이 가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문제이기에 "민족의 핵"을 운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해서 안될 행위인 셈이지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연암 일행은 북경의 선무문 안 상방에서 그리고 한 번은 열하의 선무문 안 상방에서 코끼리를 직접 볼 기회를 가졌었다. 연암은 서적이나 소문으로만 듣던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을 직접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상기에 코끼리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는 등 그 충격어린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빨도 다 아래로 드리워져 막대기를 짚은 것만 같고, 갑자기 앞으로 향할 때는 환도를 잡은 것 같기도 하며, 갑자기 마주 사귈 때는 예자같이도 보여 그 쓰이는 법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당 명황 때에 코끼리 춤이 있었다는 말이 사기에 있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의심을 했더니, 이제 보아 사람의 뜻을 잘 알아먹는 짐승으로는 과연 코끼리 같은 짐승은 없었다.

 

“승정 말년에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코끼리 우리를 지나갈 때에 뭇 코끼리들은 눈물을 지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대체로 코끼리는 꼴은 둔해 보여도 성질은 슬기롭고, 눈매는 간사해 보이면서도 얼굴은 덕스러웠다. “코끼리는 새끼를 배면 다섯 만에 낳는다.” 혹은 “열두 해 만에 낳는다.”한다. 해마다 삼복이면 금의위 관교들이 의장 깃발을 늘인 노부로 쇠북을 울리면서 코끼리를 맞아 선무문 밖을 나와 못에 가서 목욕을 시킨다. 이럴 때는 구경꾼이 늘 수만 명이나 된다.

 

코끼리의 지혜와 재주, 그리고 충성심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물론 연암의 관심이 이런 신기한 이야기들에서 멈출 리가 없다. 그의 상상은 훨훨 나래를 펴 코끼리를 통해 천지자연의 원리를 사유하는 장으로 나아간다. 그 구체적 결과물이 <상기>이다. 오히려 초월적 존재를 초월한 코끼리.

 

코끼리는 범을 잡고, 범은 쥐를 잡으나 코끼리는 오히려 쥐에게 잡힌다. 그러니 이 셋의 관계를 하나의 척도로 재단하려 한다면 필연코 궤변에 빠지고 만다. 즉 이들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척도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조건의 네트워크에서 만남에 의해 척도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상대주의로 판단하게 되면 모든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허무주의적 사유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절대주의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의 척도나 이치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궤변이 됨은 코끼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연암은 자신의 사유를 그 사이에 놓고 있다. 이는 관계나 배치 속에서 가치나 이치가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는 만남에 의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만나야 하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코끼리에 대한 상상을 통해 ‘주역’의 오묘한 원리를 엿보는 것, 이것이『열하일기』가 자랑하는 명문 <상기>의 결말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요점은 간단하다. 세계를 주재하는 외부적 실체란 없다. 고정불변의 법칙 역시 있을 수 없다. 무상하게 변화해 가는 생의 흐름만이 있을 뿐! 그런데도 사람들은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이거야말로 번뇌를 자초하는 꼴인 셈이다.
만물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차이들, 거기에 눈감은 채 한 가지 고정된 형상으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 비유하자면, 그건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는 꼴에 다름 아니다.

 

-출처 : 고미숙 <『열하일기』, 숨은 보석을 찾아라!> 제10강 상기(象記): 하늘이 코끼리를 낸 뜻은?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노자』 7장 中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너르고 오래갈 수 있음은, 자기의 삶을 조작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무(無)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무의 상태란 아무 것도 없음이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엔 담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두 털어냄으로써 그 어떠한 것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능히 사사로운” 것들을 담아낼 수 있게 된다.

 

생의 사사로움 이란 무엇일까?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그 식단 안에 3대 영양소를 골고루 배합하는, 더 나아가 3대 영양소를 포함하면서도 혀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혀를 만족시켜 주는 것과 동시에 분위기 있는 장소에서 근사한 옷을 맘껏 뽐내며, 멋스러운 여유를 즐기는 것. 그런데 그것은 한이 없다. 근사한 치마를 사면 그에 따르는 근사한 구두를 신어야 하고 또 그에 걸 맞는 핸드백과 스카프라든지 어울리는 아이템을 걸쳐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있다. 한 끼 식사에는 분위기 있는 장소와 근사한 옷과 신발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이것들은 분명 사사로운 것들이리라.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시기하며, 반대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 또한 ‘사사로움’ 혹은 ‘덧없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좋음’ 또는 ‘싫음’ 감정 자체는 사사로운 것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생기는 그야말로 사사로운 감정의 격변들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의 사소한 행동과 습관까지도 거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슬림’은 자신의 행동과 마음까지 바꿔놓게 된다. ‘있는 대로의 현상과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대로 주위의 환경과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짓는 데서 사사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노자는 “몸을 내져짐으로 해서 몸이 존하고, 새로이 존한 몸으로 모든 사사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해탈’의 경지와 다름 아니다. 지고의 득도에 의한 어려운 해탈이 아니라, 나와 너를 이해하고 ‘너의 사사로움’을 인정할 때 생기는 작은 인정의 샘이 바로 무한의 그릇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몸을 내던지는 것만큼 어렵고도 쉬운 것은 없다. ‘될 대로 되라’의 자포자기적인 내던짐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삶의 작은 모든 것을 담을 소박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미 ‘무한그릇’의 초벌굽기는 마친 셈이다.

 

-출처 : 김시천 <도가사상과 현대철학: 노자부터 데리다까지> 제13강 형이상학에서 은유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221번지

2008/02/04 12:22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221번지

 

내가 잠시 머물렀던 곳.

출장 다녀 오는 길에 사진에 담아왔다

이제는 애틋한 기억만 남아있다

 

 

논실마을 학교이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깨끗하지만 봄부터 시작해서 가을까지는 풀이 운동장에 가득했다

어느 때 여름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갈매기 선생님은 학교 운동장을 걷다가 뱀을 보았다고 했다

여름에 학교 운동장을 멀리서 보면 잔디밭 같지만, 학교에 손님이 오거나 수련회 따위를 오면 풀 베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내가 남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형수가 운동장 한켠에서 쪼그려 앉아 풀베는 모습이 기억난다

운동장에 비하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교실이나 숙소를 청소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규모가 크다 보니 여러 사람의 손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전라도 말로 '테'가 나는 곳이다

 

 

내가 살았던 관사이다

별과 달이 그려져 있으며, 방이 두개인데, 난 달이 그려진 방에서 살았다

별과 달은 성매매 여성들이 학교에 와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뒤 편에 보이는 화장실과 관사에 그린 것이다

내부에는 화장실이 있고 싱크대가 있어 밖에 나가지 않고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겨울에는 방안의 수도관은 물론이고 화장실 물까지 모든 것이 얼어버린다

밤에 술을 먹고 관사 앞에서 운동장을 눈 밑으로하여 하늘을 보면 별이 너무 좋다.

검은 밤의 빛나는 별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뚜렷하다

 

출근시간에는 용화나 용창이가 달려와서 나를 깨웠고,

늦은 밤에는 전주나 남원, 장수시내를 나갔다가, 5인승 1톤 트럭의 뽕짝 테이프 음악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조선배가 들러서 하루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 하는 곳이었다

형수가 동네 어른들 몰래 담배 피는 장소이기도 했다.

 

 

 

현관 앞에 앉아 있으면 햇볕이 참 따뜻하다

겨울에는 그 고마움이 더하고, 초봄에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아 그냥 지금 여기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가끔 바람이 불면 생각도 같이 날라간다

교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보니, 풀을 베거나 청소를 할때도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곳이다

풍경이 달려있어 바람이 불면 그 소리가 청정한데, 나른한 봄날 오후에 담배 피기에는 지구에서 최적의 장소라 생각된다

 

이제 이 모든 기억이 저편으로 넘어갔다

학교를 떠나면서는 혼자 속으로, '언젠가는 다시 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 생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공간은 시간과 함께 변하며, 시간은 그것을 재거나, 영위하는 인간이나 생물들과 함께 변한다

언뜻보면, 그대로 인 것 같지만, 이제 공간과 시간과 사람이 변하여 사뭇 낮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情)은 사람이나 키우는 개들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땅이나 건물과도 나누는 것인데, 이제 내가 매정하게 이별했으니 할 말이 없다.

 

20008. 2. 1. 점심때를 약간 넘은 시간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점심을 먹다가

2008/02/03 16:43

혼자 생활하다 보니 주말에는 혼자서 식당을 찾아 밥을 먹는다

 

설렁탕 한 그릇 떠 먹다가 우연히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졸업할 날, 간짜장을 사주었고, 중학교를 졸업할 날, 육개장을 사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때는, 졸업식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새벽에 집에 왔는데, 아버지는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밥을 먹다 보니 그 생각이 나더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그 동안 사용했던 블로그 이미지

2008/02/03 16:39

 

그 동안, 몇 년 동안 사용해던 블로그 이미지 이다

대학 다닐 때인가, 대학원 다닐 때인가 인터넷에서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그 뒤로 출처가 어디인지 찾을 수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깨어보니 아득하다

2008/01/29 00:42

저녁 먹으면서 소주를 몇 잔 먹고, 마져 자리를 옮겨 맥주까지 걸치고 나니 기분이 좋네

과하게 마시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네

별스런 이야기도 없는 자리였는데, 기분이 좋네

 

그래서, 기분만 좋을 뿐 별일이 없어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와서 잤다

한숨자고 나도 아직 한 밤중이다

그런데, 깨어보니 좋았던 기분이 아득하다

좋은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나 깨어보니 모두 꿈이네

 

그래도, 아득하게 좋은 기분만 여운이 남아 있어 살짝 부끄럽다

 

뭔가 간단하고 따뜻한 요깃거리가 없을까 하다가, 맨발에 운동화 신고 나가 오뎅국물 두어잔 먹으니 다시 일상이다. 그런데 아직 한밤중이다.

 

쪼끔 술이 덜 깨었나 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채근담] 마음을 닦는 법

2008/01/25 09:11

洗心(세심) : 마음을 닦는 법

 

아기가 태어나는 기쁨 뒤에는 어미의 목숨에 위험이 따르고,  子生而母危
돈 꾸러미가 쌓이게 되면 도둑들이 수시로 엿보게 되니,  鏹積而盜窺
어느 기쁨인들 근심이 아니겠는가?  何喜非憂也

가난은 비용을 아끼게 만들고  貧可以節用
질병은 몸을 지키게 만드니,  病可以保身
어느 근심인들 기쁨이 아니겠는가?  何憂非喜也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故達人
일이 잘 되고 안 되는 것을 한가지로 보아  當順逆一視

기쁨과 슬픔을 모두 잊는다.  而欣戚兩忘
 

-『채근담』中에서


 * 채근담(菜根譚) : 중국 명나라 말기에 洪自誠(홍자성)이 지은 어록집. 유교를 중심으로 불교·도교를 가미하여 처세법을 가르친 警句的(경구적)인 단문 약 350조로 되어 있다.

 

<한자공부> 鏹(돈꿰미에 꿰어둔 돈 강) 窺(엿볼 규) 欣(기뻐할 흔) 戚(겨레 척)

원고작성 : 배원룡(연구위원)
 
*** 출처 : 고전의 오솔길 http://www.cyberseodang.or.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술먹은 민주주의

2008/01/21 23:56

1. 

술을 한잔 먹고 집에 왔지요

월요일이라 먹었지요

술은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지요

감정이 증폭 되는데 

재미있게 시작하면 즐거운 기분이 나타나지요

슬프게 시작하면 미친 놈 되지요

 

술을 한잔 먹고 집에 왔지요

그동안 보고 싶은 얼굴들 때문에 먹었지요

술은 먹으면 그 얼굴이 다가오지요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되는데

그리운 사람 생각하면 웃고요

미운 사람 생각하면 미친 놈 되지요

 

술을 한잔 먹고 집에 왔지요

한잔 때문에 먹었지요

먹다보면 술 잔이 늘어나는데

달면 많이 늘어나고요

쓰면 진짜 한잔이 되지요

 

난 오늘 기분좋게 그리운 사람 옆에 두고 여러 잔 잡쉈지요

물론 목이 타도록 담배를 피웠지요

내 모가지는 섭씨 800도의 온도로 녹아버릴 것이다

아~ 이 끝없는 갈증유발

그래서 타는 목마름. 민주주의.

   

말이 되냐?

 

 

 

2. 

(오줌 싸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조선배 당신이 그랬다지요

난 바람같은 놈이라고.

내가 바람이요? 당신이 바람이요?

지나고 나니 헷갈리요

 

난 참 생각이 많은 놈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아무 생각없이 있어도)

내 자신을 어디에 둘 건지 그게 중요해

 

그렇게 두고 밀려가는 거야

 

시절이 잘 맞으면 필 수도 있고, 안 필수도 있어

(할 수 없는 거라)

 

피면 피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살아야지.

 

- 종림 스님.

 (출처 : 인터넷한겨레 조현글방

http://well.hani.co.kr/board/view.html?board_id=jh_san&uid=225829 )

 

 

 

나도 나이를 제대로 먹었나 보다. '피면 피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살아야지'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깊이 마음에 고이던지... 이 번득임이 깨달음으로,,,나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2008. 1. 14. 오후 서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스타벅스는 왜 사이렌을 로고에 차용했을까-오디세우스의 모험 이야기]


오디세우스는 모든 그리스 영웅 중에서도 정신적인 면, 지략이 특출한 인물이다. 오디세우스의 길고 긴 모험에 지혜와 정의의 여신 아테네가 함께할 만큼 영웅으로 손색없는 육체적, 전투적 능력도 갖추고 있다. 로토파고스의 섬부터 스타벅스 로고의 상징인 사이렌의 섬까지, 지금부터 흥미진진한 오디세우스의 모험 속으로 들어가 보자.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 영웅들은 전쟁종료 후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만 오디세우스의 귀환에는 10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신성한 가축을 잡아먹고 포세이돈의 아들을 죽여 신들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전쟁기간과 모험기간을 합쳐 최소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서야 오디세우스는 고향인 이타케왕국으로 돌아온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키코네스족이 사는 항구도시인 이스마로스에 상륙하지만 그곳 주민들과의 싸움으로 그곳에서 모든 부하를 거의 다 잃고 만다. 이때부터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순조롭지 않다. 폭풍으로 아흐레 동안(9-고난의 수) 표류한 후 로토파고스에 정박하게 된다. 그곳 사람들은 연근 같은 것을 먹고살았는데 그것을 음식으로 취하면 모든 기억을 잃고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오디세우스는 부하 셋을 보내지만 그들은 그 음식을 받아먹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자, 오디세우스는 그곳에 살겠다고 우기는 부하들을 밧줄로 묶어 빠져나온다. 그리고 외눈박이 거인인 폴리페모스의 섬에 도착한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식량과 물을 보충하기 위해 폴리페모스 섬에 정박한다. 그들은 어떤 동굴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먹을 것이 잔뜩 쌓여 있다. 폴리페모스의 거처인 것이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식량을 취하려다 발각되어 부하 여섯이 잡아먹히고, 동굴 안에 갇히게 된다. 이때 지략가 오디세우스는 포도주로 폴리페모스를 취하게 하고 아름드리 통나무를 불 속에 넣어서 빨갛게 달군 후 부하와 함께 잠든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른다. 눈이 지져진 폴리페모스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가 기르던 양떼들을 세 마리씩 묶는다. (폴뤼페모스는 양을 치는 거인이기 때문에 아침이 되면 양들을 데리고 나간다.) 폴리페모스는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떼들을 내보내고, 그때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양들의 배 밑에 숨어 폴리페모스의 검사를 피해 무사히 탈출한다.


그 후 오디세우스는 세이레네스의 섬을 지나간다. 세이레네스는 세이렌이라고도 불리는 바다괴물로 얼굴은 아름다운 여인이고 몸은 바닷새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들은 선원들은 그 소리에 취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진다. (경보를 뜻하는 사이렌이 여기서 유래)

세이레네스의 아름다운 목소리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의 귀를 막게 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돛대에 밧줄로 묶어서 빠져나온다.


사이렌은 스타벅스 로고로 더욱 유명해 졌다. 스타벅스는 왜 사이렌을 로고로 차용했을까?

아름답고 달콤한 노랫소리고 지나가는 배의 선원들을 유혹하여 죽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이렌(siren).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홀려서 스타벅스에 자주 발걸음을 하게 만들겠다는 뜻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김길수 <그리스신화 다시 보기>중에서.



[엘레베이터에는 왜 거울이 있을까-창의적 사고의 시작]


우리는 보통 기존에 없던 것을 반짝 생각해낸 것, 새로 떠올린 것을 창의적이라 생각하고, 창작활동은 창의적인 것의 결과물을 향한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의성의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 바꾸기를 통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관점을 전환할 수 있는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해서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이 고도의 응용력, 적용력이 창의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디오게네스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간단하고 단순하게 욕망을 채울 것을 주장했는데, 그는 아무 데서나 잠자고 뒹굴고 방귀를 뀌었으며, 심지어 아테네에서 자위행위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디오게네스는 금기를 파괴하는 모습이 기존의 관습을 뒤엎는 행위라고 했다. 금기를 파괴하는 것은 냉소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단순한 냉소가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찾고자 하는 열정도 담겨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왜 중요한가? 세계가 복잡해지고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있는 것을 활용하는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을 해석하면서 국사에 적용하는 것은 문학작품을 다른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생물에서 진화론을 배우면 진화론을 사회론에 적용해보는 것이다. 사회적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만드는 것이다. 결국 우리 시대가 강조하고 있는 것과 관점 바꾸기 형식은 다르지 않다.


하나의 재미있는 예를 보자. 지금은 엘리베이터 벽에 거울이 있지만, 사실 초기의 엘리베이터에는 거울이 없었다. 그러면 엘리베이터의 거울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미국은 엘리베이터가 가장 먼저 발달한 나라인데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빠른 엘리베이터를 원하게 되었다. 왜 빠른 엘리베이터를 원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지루하니까, 모르는 사람과 같이 타야 하니까 빨리 타고 빨리 내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결국 시간의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갇힌 공간 안에서 ‘할 일 없음의 지루함’ 때문에 빠른 엘리베이터를 원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거울을 달았고, 거울로 인해 할 일이 생기자 사람들의 불만은 없어졌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을 생각해낸 사람의 창의성처럼 지루함에서 도발을 보는 방식이 관점의 변화이다.


창의력을 기르려면 우선 근본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근본적인 사고는 왜? 라는 질문에서 나온다. 누구나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철학의 시작이다. 이것을 비판적 사고라고 부르며 비판적 사고가 관점 바꾸기, 창의성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비판적 사고는 흠잡기의 사고가 아니다.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틀렸다고 문제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맞고 어디까지가 틀린지 금을 긋는 것이다. 여기에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창의적 사고는 어려운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관점 뒤집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박정하 <논리학 입문>중에서

***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니체의 여성]


- 니체가 보는 세 부류의 여성

니체가 여성혐오주의자라는 오명을 얻게 된 계기는 비교적 명확하다. 여자는 봉사하며 행복을 느낀다느니, 학구적 성향의 여성들은 성적 결함이 있다느니! 그가 남긴 어록들로도 충분하다. 그의 험담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왜 그럴까?

니체가 생각한 세 부류의 여성, 거세된 여성과 거세하는 여성, 거세와 무관한 여성이다. 이 세 여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니체가 말하는 진짜 여성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니체가 본 첫 번째 여성: 여성을 누가 타락시켰는가

니체가 본 첫 번째 여성은 남성이 그려낸 이미지다. 그는 『즐거운 지식』에서 “남자들이야말로 여자를 타락시켰다. 남자들이 이미지를 만들었고 여자의 이미지도 거기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남성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내면화가 문제라고 했다. 니체는 여성의 이미지가 남자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이미지이고, 권력이 만들어낸 이미지이며 여성은 그 이미지를 연기한다고 했다. 내면화된 여성 즉, 남자들이 생각한 이미지를 연기하다가 내면화되어버린 여성이다.

이것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긍정적인 여성은 이미지를 전략으로 쓰지만, 부정적인 여성은 상상한 장소에 있으려고 한다. 니체는 이런 여성을 거세된 여성이라고 부른다. 거세된 여성은 연기하다가 자기 것이 되어버린 여성이다. 결핍으로 정의된 여성, 남근적인 사회 속에서 갖지 못한 존재로서의 여성, 뒤집혀있는 존재로서의 그것은 거세된 여성이었고 니체는 그것을 혐오했다.


- 니체가 본 두 번째 여성: 남성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

니체가 본 두 번째 여성은 남성들이 상상한 이미지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이다. 그들은 진정한 여성을 찾아 스스로 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니체는 그 예로 페미니스트를 든다. 이것은 남성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보고, 남성 같은 여성이라고 비판한다.

이미지에 갇힌 것도 문제지만 독단적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도 문제다. 그것은 남성적인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여성해방운동, 평등에 대한 권리와 요구의 문제점은 자신이 비판하고 싶어하는 남성의 어리석음, 독단적 이미지를 답습한다는 것에 있다. 영민한 여성이라면 분명히 본래 있던 남성들의 잣대를 부끄러워했을 텐데 이 여성들은 이것을 승리인양 취해버렸다는 것이다.


- 니체가 본 세 번째 여성: 삶과 구원을 낳는 역활

니체가 본 세 번째 여성은 거세와 무관한 여성이다. 니체는 세 번째 여성을 사랑했다. 여성의 생식기는 항상 거세와 관계되어 왔다. 남근이 상실된 마이너스 남근, 결핍 결여로써 해석되어 왔다. 거세는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생산이고 그것은 대지이다. 니체 메모 중 ‘무엇이 내 삶을 유지시키는가.’라는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 니체는 임신이라고 써 놨다. 차라투스트라를 보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구토가 무엇을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해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입덧을 했다. 임신을 한 것이다. 입덧이 심해질수록 아기를 낳는 것으로 나아간다. 위버멘시에 가까이 갈수록 새로운 것이 잉태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시를 원하는 아버지이고, 위버멘시인 자신이며, 자기 안에서 위버멘시를 낳은 자이다. 네가 너의 미래를 임신하고 있느냐라는 말은 너는 자궁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말이다.


니체의 말에는 여성을 폄하하는 얘기가 많다. 특히 학문하는 여성을 싫어했다. 물론, 그는 학자 자체를 싫어했다. 학자도 싫어했는데 공부하는 여성은 얼마나 싫어했겠는가?

하지만, 니체 철학에 깊숙이 다가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리와 동등한 자리에 여성을 올려놓기도 하고, 완전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도 말하며 여성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즉, 니체가 비판한 여성은 남성에 의해 그려진 여성, 남성의 이미지를 연기하고 나중에는 내면화하기까지 하는 그런 여성이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니체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을까?

- 고병권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중에서.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라!]


우리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규정 속에서 살아왔고, 규정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규정된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아직도 사실 너무나 힘든 일이다. 부모님의 마음에 꼭 드는 것,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 직장 상사의 말을 따르는 것, 인생의 진리를 따른다는 것 등은 너무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세계가 규정된 형태가 없고 변화만 하는 세계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어쩌면 더 힘들고 심지어 절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이를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즐거운 세상으로 생각한다. 니체가 말한 삶은 죄를 규정하는 보편적 규범을 제거한 하나의 놀이다. 자유라는 것은 환상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진정한 진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환상과 오류들을 활용해 내 삶의 재료로 삼는 것이라 정의한다. 즉, 니체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규범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자유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에서 그것을 벗는 것뿐만이 아니다. 색안경을 끼지 않고도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각자가 보는 방식으로 세상이 존재하고, 자신이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라고 말한다. 여태까지의 가치는 진리가 아니라 빈곤한 환상에 불구하기에 더욱 다양한 환상을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진리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풍부하게 만든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규정된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니체의 귀가 될 필요가 있다. 정상성을 깨고, 비정상적인 니체의 말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니체는 “나를 가장 즐겁게 만든 사람은 과일 행상 할머니들이었다.”라는 말을 한다. 그들은 자신이 과일을 살 때 가장 맛있는 과일을 찾아주려고 안절부절 못해 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좋고 나쁨의 기준을 확실히 가지고 있으며, 이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월적인 보편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 자신의 행복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철학의 목적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지, 형이상학적인 기준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것이 좋다, 이것이 나쁘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규범에 따라 죄를 규정하고 스스로 죄인이 될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를 받아들여 세계를 풍요롭게 받아들이고 풍요롭게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조원광 <니체로 세상 보기>중에서.



[나는 강자일까 약자일까?-강자와 약자의 구별]


우리는 흔히 지배자는 강자, 피지배자는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강자와 약자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면 강함과 약함은 무엇일까? 바로 주체와 활동이 결합되어 있느냐, 분리되어 있느냐의 문제이다. 선거 때마다 보면 알 수 있듯이 후보들은 대부분 국민을 위한 일꾼이 되겠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라면 결국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닌 국민을 위해 손발이 되어주는 일꾼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강자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 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가 그 힘과 결합되어 있느냐 분리되어있느냐의 문제를 놓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 힘이 작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체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강자인 것이다.


강함과 약함은 갖고 있는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분리된다. 근대는 약자가 승리한 역사이다. 어떻게 약자가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약자가 강해져서 강자를 이긴 게 아니라 강자를 약자가 되게 함으로써 이긴 것이다. 이것은 병든 자가 병을 퍼뜨려 건강한 자를 이길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즉 강자를 약자로 만듦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고, 그의 힘을 그와 분리하게 함으로써 부정의 권력의지가 작동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고병권은

“학교 다닐 때 단체를 조성해서 학생운동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여기서 적을 만났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적은 전경이 아니라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해봤는데 안되더라고 말하며 말렸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행동의지를 꺾는다.

나중에는 나 역시 말리던 그들과 똑같아지고, 그 세력은 점차 커진다. 그렇게 문화가 지배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가장 큰 적은 전경이 아닌 오랫동안 학생운동, 민중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니체의 표현을 빌려 ‘귀에 무거운 납 방울을 떨어뜨리는 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무거운 납덩어리가 내 몸을 짓누르면 어쩔 수 없이 몸이 가라앉고 마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능력 혹은 의지로부터 그것을 박탈시킨다. 사람들을 본인과 똑같이 만드는 것, 약자는 그렇게 이긴다. 강자를 약자로 만들어서 승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리학자들 사유를 보면 힘이라는 재미있는 개념이 있는데, 승패가 갈라지면 우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에는 양적 차이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모든 힘에는 내면적 질들이 있다. 내면의 질은 물리적 양과는 다르다. 결국, 강함과 약함은 지배와 피지배, 승리와 패배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자와 약자로 나뉘는 것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우리는 강자가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고, 승리하는 자가 꼭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약자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고병권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중에서.

 

*** 출저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라캉] 상상적 동일시

2008/01/13 16:07
 

- 라캉의 상상적 세계

라캉은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의 길목에 있는 철학자다. 라캉의 사유는 굉장히 복잡하다. 현대사상에서, 가장 심오한 사람 중의 하나다. 라캉은 우리 인생의 출발점을 imaginary 한 차원, 상상적인 차원으로 본다. 상상적인 차원이라는 것은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차원이다. 보통 아기가 태어나서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기 전의 아기의 세계, 그것이 상상적인 세계다.


우리가 보통 imagination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사물을 지각해서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도 imagination이고,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그 이미지들을 변형시키는 것도 imagination이다. 지금 우리는 보통 후자로 사용한다. 그래서 라캉이 말하는 imagination도 지각한다는 뜻의 이미지이다. imaginary 한 차원은 어떤 이미지의 차원인데, 이 이미지의 차원은 상상적 동일시, 상상적 동일화, 상상적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 아기의 입장에서 상상적 동일시는 무엇인가?

아기는 태어나면 시간 대부분을 주로 엄마하고만 생활하게 된다. 이것이 양자관계 또는 이자관계다. 정신분석학에서 엄마, 아빠라는 말을 쓸 때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엄마, 아빠만 뜻하는 게 아니라 넓은 의미의 엄마, 아빠를 뜻한다. 예를 들어 옛날 황제는 거의 다 유모가 키운다. 보통 중국의 황제들을 보면, 엄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유모를 좋아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보통 할머니가 많이 키워준다. 이때의 엄마라는 말은 꼭 실제의 엄마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아기를 맨 처음 안고 키우는 그 사람, 설사 엄마가 없어 아빠가 키워도 정신분석학 이론적으로는 이게 엄마인 것이다. 그 아기와 엄마의 관계가 이자관계다.

아기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나고, 저 사람은 엄마라는 주객 이분이 없다. 주객 이분이 없는 관계가 이미지의 관계다. 객과 주의 거리가 생기지 않는, 그런 어떤 관계가 상상적 동일시라고 볼 수 있다.


- 상상적 동일시: 윤동주[소년]의 예

윤동주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윤동주의 소년이라는 시이다. 여기서도 상상적 동일시의 예를 볼 수 있다. 예컨대 내가 하늘을 봤더니 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들고, 볼을 쓸었더니 손바닥에 파란 물감이 묻어났다. 이 부분에서는 주객 분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하늘을 봄으로써 나도 하늘이 되고 하늘도 내가 되는 것이다. 이건 주체고 저건 오브젝트가 아니라 저것과 내가 이미지에서 얽히는 것이다. 이것이 imaginary 한 차원이다. 이것은 어떤 언어, 룰, 법, 주객 분리가 없는 세계다.


즉, imaginary 한 세계는 양자 관계, 이자 관계다. 그 단계에서는 어떤 언어나 룰이 개입하기 이전에 그 이미지들의 세계, 상상적 동일시의 세계다.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 이정우 <현대 사상의 ‘개념-뿌리들’>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고전] 홍익인간의 바른 의미

2008/01/13 15:26

오늘날 한국인은 弘益人間을 흔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로 풀이한다. 우리가 ‘弘益人間’의 ‘益’에 해당하는 본디 낱말을 생각하지 않고, ‘益’을 ‘利’로 새겨서 弘益을 ‘널리 利롭게 한다.’로 풀이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한국인은 ‘益’을 흔히 ‘더할 益’으로 새기지만 有益, 國益, 益友 등에 쓰이는 ‘益’의 경우에는 ‘도울 益’으로 새겨야 한다. 有益은 ‘어떤 도움이 있음’을, 國益은 ‘나라에 도움이 됨’을, 益友는 ‘도움이 되는 벗’을 말한다. 이때 益은 단순히 어떤 것을 더하기보다는 더욱 좋아지도록 더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은 어떤 것이 더욱 좋아지도록 더하는 일을 ‘돕는 것’으로 말한다. 이런 까닭에 제헌절 노래에서 고조선의 건국정신을 기리는 부분에서 益을 ‘도우다’로 풀이하고 있다. 즉,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 예순 남은 일이, 하늘 뜻 그대로였다”에서 ‘인간을 도우셨다’는 부분에 나오는 ‘도움’은 홍익인간의 ‘益’을 풀이한 것이다.

한국어에서 ‘돕다’는 ‘되게 하다’, ‘답게 하다’의 뜻으로서 어떤 것이 본래의 속성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나를 도우는 일은 나를 나답도록 만드는 일이고, 너를 도우는 일은 너를 너답도록 만드는 일이다. 홍익인간에서 益은 바로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도록 도우는 일을 말한다.

사람들이 益을 利로 새기는 것은 利益, 즉 ‘利를 더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利益에서 益은 ‘돕는다’는 뜻이 아니라 ‘더하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홍익인간처럼 문장 속에서 益이 단독으로 쓰였을 때, 그것을 곧장 利益으로 풀이하는 것에는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도우는 일과 달리 이익을 더하는 일은 반드시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홍익인간의 益을 ‘利롭게’로 새겨서 弘益을 ‘널리 이롭게 한다.’로 풀이하면 본래의 뜻에서 크게 벗어나게 된다.

- 항공대 최봉영 교수 논문「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교육목적에 대한 검토」중에서 -

<요약>
弘益人間의 益의 개념
1. 益을 利로 새기는 것은 利益, 즉 ‘利를 더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利益에서 益은 ‘더하다’는 뜻을 지닌다. 利益을 더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이하 할 수 없다.
2. ‘益’을 ‘도울 益’으로 새겨야 한다. 有益은 ‘어떤 도움이 있음’을, 國益은 ‘나라에 도움이 됨’을, 益友는 ‘도움이 되는 벗’을 말한다. 이때 益은 단순히 어떤 것을 더하기보다는 더욱 좋아지도록 더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은 어떤 것이 더욱 좋아지도록 더하는 일을 ‘돕는 것’으로 말한다.

 

弘 : 클 홍,   益 : 도울 익,   弘益 : 크게 돕는다.

 

◈ 오늘 하루도 ‘크게 돕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 출처 : 사이버서당에서 제공하는 전자우편 [고전의 오솔길] www.cyberseodang.or.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펌] 용서의 유익

2008/01/13 00:39

용서의 유익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당신의 마음에서 놓아주라.
그 상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놓아줄 수 있는가?
용서하는 것, 그것만이 그들을 놓아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이 용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보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릭 워렌의《회복으로 가는 길》중에서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천박한 욕망

2008/01/05 00:25

출장 다녀와서 집에 들렀다

전주에서 택배로 보낸 이불짐을 정리하니 제법 든든하다

달력과 무화과즙을 같이 보내준 전주식구들이 고맙다

 

한참을 뭘할까 하다가 오늘 또래 직원들끼리 술한잔 하기로 한 자리에 연락받고 나간다

저녁먹기에는 약간 늦은 시간이라 분식점에서 2500원짜리 라면 하나 먹고 지하철을 탄다

 

맥주를 세잔, 아니 네잔을 다 못 마셨나

그냥 서성거리는 듯한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오는데 따뜻한 하얀 쌀밥 한 상 먹고 싶었다

그렇게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없는데 따뜻한 뭔가가 느껴지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기어이 집 근처 순대국밥 집에서 5000원짜리 의정부순대국밥 한그릇 먹었지

 

다 먹고 걸어오는 길에 괜히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가 너무 부르기도 하고....

참 식욕이라는 것이. 천박한 식욕...

 

나는 아직도 욕망을 긍정하는가?

 

 

 

p.s. 내일이 토요일이라 금요일 밤은 마음이 참 한가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메모] 인사동에서 한 시인이

2008/01/04 02:19

 

나,

그대

알고 싶어

오늘

불을 밝혀

우리...길 찾기

 

 

*** 인사동에서 만난 시인같이 생긴 아저씨가 메모지에 써준 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눈이 왔어요

2007/12/30 00:35

1. [눈이 왔어요]

토요일이라 늦게까지  안 자고 있는데 눈이 왔어요

제법 길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왔지요

좋네요

겨울에는 눈이 와야 지요

겨울 같아서 참 좋네요

이제 나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네요 눈을 보고 기쁨과 설레임을 느낄 수 있으니. 

올 겨울에는 펑펑 눈이 내리면 너무 너무 좋아하리라^^

 

2. [술]

요 며칠 년말이라는 핑계로 계속 술을 먹었다

오늘은 술 안 먹었다

좋다.

 

3. [반성]

2007년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은 것 같다

열정이 사리진 것이다

다시 뜨거움이 내 안에서 자라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2008년에는 열심히 일하리라 다짐해본다

열심히 해야지.

 

4. [되물음]

내가 좀 더 성숙해지는 거겠지

내가 좀 더 자라는 거겠지

내가 좀 더 발전하는 거겠지

세월이 흘러감이 무의미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겠다

진심이다.

 

5. [기도]

다시 나를 사랑하고, 이로 인해 당신을 사랑하고, 급기야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허무함보다는 용기를

지친 어깨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을

미지근한 언행보다는 뚜렷한 뜨거움을

어리석음보다는 지혜를

과거의 연민보다는 미래의 사랑을

갈구하여 지닐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다시 한번 강렬함으로, 매력으로, 솔직한 부드러움으로 부활하리라

 

2008년. 나에게 영광과 축복 있으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노래방에서 울었다

2007/12/24 10:05

일요일 저녁에 술을 한잔 하고 노래방에 갔다

노래방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방으로 되어 있는 노래방이다

방석이 놓여있고, 사각모양의 보조 소파가 있고, 쿠션도 있으며, 무선 마이크가 장착된 노래방이다.

밖은 추운데 방바닥이 따뜻해서 편안함이 더했다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첫 곡으로 부르고, 김민기의 [친구]를 불렀다

[친구]를 부르다가 갑자기 목이 메이더니 눈물이 흘렀다. 조금 지나니 꺼이꺼이 울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왜 울었을까, 누가 보고 싶었을까.

노래방에서 울어 보기는 처음이다

(생각해보니 노래방에서 두어번 정도 운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같이 따라 죽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 또는 창작이 끝나면 자결할 수도 있다 

아름다움의 끝, 행복은 죽음일지도 모르며, 타인의 죽음이 자신과 같을 수도 있다

 

참 오랜만에 흘린 눈물이다

요즘 그렇게 재밌는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슬퍼할 일도 없이 사는 형편이다

 

다시 되물어 본다.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그렇게 서럽고 힘들었으며, 누가 그렇게 그리웠는가.

 

 

 

 

김 민 기 - 친 구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 앞에 보이는 수 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소

눈 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메모] 선거와 민주주의

2007/12/20 09:46

'선거가 민주적인 방식이다' 라는 것에 대해

 

선거에 따른 정치적 복종이 도덕적 완결로 드러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무기력하다. 선거는 용광로와 같이 모든 것을 녹여 버린다. 선거에 의해 인증된 권력은 제도와 법률에 의해 철저하게 보장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그 완결성이 포함된다

 

그런데, 선거가 개인의 의사를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하고 집합시키는 제도인가?

선거 해 본 사람은 안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부터 지자체 의원 선거, 국회의원 선거, 노동조합 선거, 총학생회 선거 등 이 모든 선거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돈과 조직으로 좌우되는 것이며, 그에 따른 엄청난 뒷거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기에서 개별화된 개미 유권자들은 그저 강물에 휩쓸려가는 나뭇잎과 같은 것이다......(말이 되나?)

 

도대체, 선거에 의해 당선된 자들 중에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 레닌과 선거

 

- 그래도 선거에 당선 되어서 목숨을 걸고 사는 일부 인간들-자결하는 노조 위원장, 젊은 대졸 출신 마을 이장...

 

- 착한 사람이 선거에 의해 무너지는 경우, 또는 당선 되고 나서 달라지는 경우

 

- 제도와 정서의 문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푸념] 이명박의 경제

2007/12/19 21:28

1. 이명박의 경제는 낡은 토목경제이다

돈만 벌면 된다는 발상이고,  눈으로 보기에만 좋으면 된다는 조경철학이며, 끝없이 창조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개발경제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일부인 상위 계급 2%정도만 또 다시 목돈을 챙기고 행복을 만대로 누릴 기쁨을 이어갈 것이며, 나머지 수 많은 인간들-수준과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98%~80%의 인간들과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들은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정함과 슬픔, 우울함으로 현세를 살아 갈 것이다.

 

2. 이명박의 경제는 비리경제임과 동시에 위장경제이다

원래 한국의 경제는 부패와 비리, 사람을 속이는 위장경제였다.

현물 경제와 시장 경제는 현대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허구경제가 진짜 경제를 움직이는 힘으로 등장한다. 관건은 버블이 얼마나 커지냐는 것이고, 그것이 언제 허무하면서도 냉정하게 터지냐는 것이다. 복지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 없는 국가의 국민들과 전쟁시에도 안전성이 보장된다는 땅에 대한 봉건적 믿음으로 부동산 투기에 열광하는 세력들은 현재의 세계 시장의 위기 또는 다가올 공황을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기에서 한국이 폭풍의 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폭풍의 눈에 현재보다 조금 더 가속을 붙여서 달려가는 것이 이명박의 그 작은 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명박의 탈모 증상은 지속 될 것이며, 따라서 전두환과 똑같이 힘과 폭력으로 자신의 정치적 어려움을 돌파하는 대머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체육관 선거나 관권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파시즘이 등장한다

경제의 노골적인 부정부패와 비리가 정치적 파시즘을 열망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한국사회는 겪어 본 사실이다

백만명을 학살한 이승만이나 힘으로만 실력행사을 할 수 있는 박정희 시대가 그렇다. 50년전 그들의 슬로건은 부정부패 척결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이것을 열망했다. 파편화된 개인의 불편한 행복을 위해서 그런 것 같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다른 점은 과거에는 조작과 폭력이 가세했다면 현재는 허상과 개인적 속물 근성이 가세했다는 사실이다.

경제가 나름대로 괜찮았던 과거 군부독재는 거짓 희망으로 민중을 동원해서 지탱하는 야만의 시대였다면, 경제가 박살나고 파시즘이 도래하면 아비규환이 현실에서 연출되는 광기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것도 편집증적인 끔찍한 광기로 어떤 해방의 출구도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아무런 토대가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경제적으로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3. 정동영이 되었으면 다가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노무현 체제를 겪여본 자가 금방 잊어버리고 그러면 못쓴다. 대통령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고 '각하'라고 부르던 시대나 '대통령님'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같은 것이다. 권영길이었으면 괜찮았을까, 난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노무현 정부나 그 참모들의 정치 작동방식과 권영길과 그 주변의 정치 작동방식이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의 5년은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능력을 지닌 세월이었다

 

4. 정치에 대한-선거, 대통령, 국회의원, 권력 이런 것들, 이것의 작동하는 것들로 부터 탈출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깨끗히 몰락할 것이다. 그것도 오명만 남긴채 어색하게 역사 속에 사라질 것이다. 지금처럼 말이다.

 

5. 그런데, 바로 어쩌면 이미, 총선에 열망하고 있다. 암담하다.

 

6. 우리는 바다에 흘러버린 시커먼 기름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길상사에 다녀오다

2007/12/19 17:41

그 동안 벼르던 길상사에 다녀왔다

성북구로 이사 온 뒤로 어디 산책할 만한 곳이 없을까 했는데 길상사라는 절이 있다 하여 약도를 그린 지도까지 인터넷으로 뽑아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가 오늘 기어히 다녀 왔지요

 

다른 이야기 이긴 하지만, 난 주4일 근무가 되어야 인간이 좀 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연속적으로 쉬지 않고 5일간 근무하거나 일을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일을 하다보면 수요일 정도는 쉬어가면 좋겠다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 8시간을 안 쉬고 일을 한다는 발상도 너무 고된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기계가 아닌 다음에야 다들 불가능한 일인데, 현대 인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들 일하고 산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있으니 어떻게 버텨볼만 하다

그러나 이틀정도 일하고 하루는 쉬어야 최소한의 '인간적 행복'이 가능할 것 같다

최소한의 '인간적 행복'은 일을 하는 사람이 노동이나 그에 따른 임금에 얽매이지 않고 조금 더 자신을 살피고 삶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며, 이로 인해 인간이외의 것들과 같이 생존하거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쉬는 문제와 이틀이나 하루를 일하고 하루를 쉬었다가 다시 일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의식이다

일주일이나 한달 단위의 삶의 사이클에 복종하여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발상이다. 사실 임금을 위한 노동을 멈춘다고 삶의 가치가 멈추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노동자가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을 멈춘다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튼 '남의 집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노력하여 수요일 정도는 쉬어야 한다는 공감을 확대하고, 실제로 법률로 이틀이상의  연속적 노동은 문제가 있으니 금지하여야 한다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대통령선거일을 핑계로 수요일인 오늘 하루 쉬니 참 좋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실컷 늦잠을 자고  길상사를 갔다는 이야기이다

 

걸어서 갔는데 딱히 몇 시까지 가야한다거나 같이 동행하는 사람이 없어서 느긋하게 걸어갔다

주변 서울지리도 익힐겸 거리의 간판들도 꾸준히 살피고 두리번 거리면서 걸어갔으니 서울 토종들은 나를 어디 촌놈같은 모양새로 보였을 것이다

 

길상사는 조용한 곳에 있었다.

주위에 대사관들이 있었고, 시골에나 있을 법한 고급 전원주택들-그럼에도 도시냄새에 풍겨나는 거대 집들을 지나서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다

부처님은 보질 못하였으나, 누구나 명상을 하는 공간이 있어서 용기를 내서 그방에 들어갔다

다행히 아무도 없어 향을 피우고 삼배를 하고 직사각형의 두툼한 방석을 깔고 앉았다

길상사에 들어설때부터 불만이었는데 길상사 한쪽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것.

눈을 감고 앉아 있는데 온갖 잡념들이 몰려온다. 집세가 너무 비싸서 방을 옮겨야 하나, 보고서를 써야 하고 조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집을 옮긴다면 얼마짜리로 옮겨야 하나, 옥탑방은 그래도 싸고 살기에도 괜찮지 않을까, 침대를 하나 살까, 그래도 에이스 침대를 장만하면 방이 누추해도 우와하지 않을까......이런 잡념들을 그대로 지켜 보다가 몸의 흔들림을 느낀다 가만히 앉아서 정지하고 호흡만 하고 있으면 가끔 몸이 흔들릴때가 있다. 이런 느낌은 대학시절 국선도를 접할때 느낀 것인데, 나중에 명상공부를 하다가 선생님한테 물어보니 괜찮다고 했다. 몸의 느낌을 알아차릴 정도가 되니 내 몸이 참 가볍고 호흡도 스르르 잠이 올 정도로 안정되어 갔다. 근데 공사장의 드드득 땅 파는 소리가 들려 다시 현실의 잡념이 몰려왔다. 계속 밀고 나갈까 하다가 주변 여건을 핑계로 명상을 중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어놓은 향불이 거의 다 타들어 갔는데, 신기하게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향 연기로 몰리우고 있었다. 음...기분 좋군.

다시 삼배를 하고 명상방을 나온다

 

길상사를 한 바퀴 산책하고 나온 김에 북악산 쪽으로 올라가 본다

장작불 설렁탕 집이 있고, 역시 고급 주택과 빌라들이 공기 좋은 쪽과 산 가까운 쪽은 내 차지라는 심보를 드러내듯 계속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지나가다 부동산 유리에 붙여진 시세를 보니 전세도 1억이 넘고 매매는 22억짜리도 있으니 나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이렇게 길상사를 다녀왔다

올때는 마을버스를 탈까 하다가 역시 딱히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뚜벅뚜벅 걸어왔다

 

집에가서 따뜻한 커피한잔 타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오자 마자 커피를 타서 먹었다. 좋다~

 

가스 검침하는 아줌마인지 아가씨인지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나를 계속 괴롭히고 있어 집에 오는 길에 오후에 들러달라고 전화도 했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대통령은 분위기이지 않은가

실제로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구체적인 김대중, 노무현,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인간이 존재할 뿐이며,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들이 생각하는 대통령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허구로 존재하는 대통령이 항상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실제보다도 허구가 더 무섭게 촘촘하게 나를 움직이는 세상이다

사실 대통령과 왕이 사회적으로 똑같이 작동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도 봉건시대를 사는 듯 하다

 

그래도 대통령이 누가 될까

그 인간은 무슨 생각으로 대통령이 됐을까 ㅎ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나는 외롭지 않다

2007/12/18 22:48

참으로 오랜만에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언제나 보고 싶고 얼마나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 처지가 딱하여 그러지 못한 내가 못났다

아무튼 망설임 반, 설레임 반으로 약간의 용기를 곁들여 만났다

......

밥 먹고, 차 마시면서 한참을 이야기 한 후 헤어졌다

......

헤어진후 돌아보니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어색했다

......

그녀들과 헤어진 후 사무실에서 직원 송별회 하는 자리가 있어 잠깐 들러 맥주를 두어잔 마셨다

......

모든 사람들과 헤어진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했다

 

'난 이제 외롭지 않다!'

 

 

(그런데, 집에 와서 한시간쯤 경과하여...)

다시 고개가 푹~ 숙여진다

역시 내 마음 속에서 허전함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힘내자 아자 아자 !!! (유치빤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나는 나를 사랑한다

2007/12/07 21:56

사무실에서 야근하고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계단 올라오면서 생각했다

타인의 향기가 부담스럽거나 불쾌하거나 귀찮거나 짜증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다가...

 

'나는 나를 사랑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마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처럼 은근하게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일기] 내면이 바뀌어야 한다

2007/12/07 00:53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내면을 바꾸는 문제이다

자기반성과 성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잘 살펴서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

 

모처럼 기분좋게 집에 들어왔다

하늘에서 눈이 온다

나도 가끔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일찍 자야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다시 독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 무지막지한 상황에서도 쭉 뚫고 나가는 그 독기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한다

 

난 운동에 있어서 '독하게 마음을 품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깨달은지 5년이 되어간다

지난 5년 동안

조건없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으며

미련없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알았다

모든 잘못은 근원은 나에게 있으며,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다시 겨울이 오는 찬바람 검은 하늘밤에

문득 샤워하다가 내 얼굴을 보니 5년의 세월이 무심할 정도로 서서히 독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내 눈을 내가 보니 그렇다

 

난 어쩔수 없는 지구의 생명체인가보다

살려고 보니 그렇다

서울 생활이 그렇다

 

참 무심한 사람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잡념] 눈부처

2007/11/21 02:18

술 먹고 집까지 걸어올때까지만 해도 차갑게 춥기만 했는데 문득 창밖을 보니 눈이 온다

 

눈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

 

당신은 눈처럼 내려서 눈처럼 사라졌다

 

당신은 눈부처

 

아니면, 바다로 나리는 소금인형

 

참 그리운 사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이정우]특이한 것과 특수한 것

2007/11/20 17:09

들뢰즈/가타리 정치철학에 대한 글들을 읽다 보면 "특이한 것"과 "특수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le singulier"를 "특수한 것"으로 번역한 경우들을 가끔씩 본다.

그러나 "le singulier"와 "le particulier"는 정확히 구분되어야 할 개념들이다.

 

특수성이란 고전적인 개념, 특히 헤겔의 "Besonderheit"에서 유래한 개념으로서, 일반성(Allgemeinheit)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은 "종과 유"라는 고전적인 개념쌍의 한 변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수한 것들의 집합이 일반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 두 개념 사이에서는 "매개"라는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헤겔 정치철학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매개"로서 대의정치를 상기해 볼 수 있다)

 

반면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특이성(singularite)"은 일반-특수라는 계통학적 질서를 모두 지워버리고 내재면(plan d'immanence) 위에서 점선(點線)으로 그려지는 존재들, 즉 '이것(haecceitas)'으로서의 존재들을 뜻한다.

 

비유컨대 특수성들은 대학의 학과들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인문사회와 자연, 인문과 사회, 문학과 역사와 철학,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등등의 특수-일반의 수목형(樹木型) 구조가 성립한다.

 

이에 비해 특이성이란 이런 구분을 모두 지우고 "학문"이라는 내재면 위에서 문자 그대로 "특이한" 전공을 점선으로 만들었을 때 성립한다.

이것은 대학이 아니라 국가라는 전체를 두고서 생각했을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국가라는 체계 내에서 모든 것들은 결국 "특수한" 것들이기에 말이다.

 

어떻게 "특이한 것들"을 창조할 것인가, 여기에 정치의 핵심이 있다.

 

 

* 출처 :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http://www.sowoon.or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3% 바닷물

2007/11/16 02:20

0선배가 나한테 물었다

 

바닷물이 왜 짠지 아냐?

원래 바닷물은 짜지 않아요

 

바닷물이 왜 짜다고 생각하냐?

글쎄...나트륨...잘 모르겠는데요

 

바닷물은 3%의 소금끼 때문에 짜다.

......

 

난 생각했다.

맞아. 바닷물이 짠 이유는 3%의 소금끼 때문이야.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태운다'  바로 이거야~!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

'바닷물이 3%의 소금끼 때문에 짤까'

'바닷물이 3%' 때문에 짤 수 있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

.

.

 

이제 비로소 알았습니다.

바닷물은 3%의 소금끼 때문에 짤 수 있는 이유는 나머지 97%가 소금끼를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코가콜라에 3%의 맹물을 넣어도 97%의 콜라는 변하지 않습니다.

 

3%가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유는 남은 97%가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97%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죽지 않는 어떤 것

2007/09/14 17:24

죽지 않는 어떤 것


두려움 없는 사람,
이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
죽지 않는 어떤 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내면의 존재, 불멸의 존재, 내면 깊숙한 곳의
영원한 존재를  안 사람이다.
그때 그곳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

- 오쇼 라즈니쉬(Osho Bhagwan Shree Rajneesh). 류시화 옮김.  2006. [장자, 도를 말하다]. 청아출판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제논의 역설-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되 거북이를 조금이라도 앞에 보낸 상태라면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제일 처음 거북이가 있던 제1의 지점까지 가는 동안 거북이 역시 나름대로 더 가게 되고,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더 간 제2의 지점까지 가는 동안 거북이 역시 나름대로 더 가게 되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북이를 조금이라도 앞서 보내주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고대 헬라스 지역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C.)의 제자, 제논(Zenon, 490-430 B.C.)의 역설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니 정말 그럴 듯한데 현실에서는 완전히 모순되지 않는가? 제논의 이러한 역설은 일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낯설고 이질적이며 한편으로는 폭력적이다. 논리적 사유가 평범한 일상을 치고 들어와 뒤집는 폭력적인 힘,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제논의 역설에 숨은 비밀

처음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던 지점까지 간 것을 <사건 1>이라 하고, 거북이가 다시 앞서 간 지점까지 아킬레스가 간 것을 <사건 2>라 해보자. <사건 1>과 <사건 2>는 계속되긴 하지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은 그 자체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같은 나무를 꽃이 피기 전의 나무와 꽃을 피운 나무로 나누게 되면, ‘지속’이 사라짐으로써 나무는 전혀 다른 각각의 나무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의미로 <사건 1>과 <사건 2>는 전혀 다른 거북이들과 전혀 다른 아킬레스들 간의 두 경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을 극단적으로 밀고 들어가 아주 극미한 무한소의 영역에 적용시키면,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완전한 정지가 나타난다. <사건 1>과 <사건 2> 뿐만 아니라, 몇 억분의 1초, 아니 그보다 훨씬 잘게 쪼개면 시간이라 부를 수도 없는 무시간의 시간성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지속’은 사라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나름의 새로운 역설을 생각하게 된다. 정지된 상태로 계속 유지되는 것 또한 지속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완전한 정지와 완전한 지속(자신 속에 정지의 계기를 전혀 갖지 않는 지속)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역설이다. 만약 이를 영원이라고 한다면, 영원은 이렇듯 완전한 역설이다. 완전한 정지를 영원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변화가 전혀 없기에 영원이라 하는데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완전한 정지이기 때문이다. 즉, ‘완전한 정지’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하는 데서 영원을 말하게 되기 때문에 역설인 것이다.

  

영원의 역설은 죽음의 추상화

제논의 역설이 지니고 있는 낯선 폭력적인 힘은 이렇게 시간을 파괴하고 역설 중의 역설인 영원한 정지이자 정지된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죽음의 폭력성을 암암리에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의 폭력성은 정지의 폭력성이고, 영원의 폭력성 역시 정지의 폭력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폭력성은 영원의 폭력성에 근거한 것임을 혹은 그 반대로 영원의 폭력성은 죽음의 폭력성을 추상화한 데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열리는 영원과 영원을 통해 열리는 죽음의 역설을 말이다.

  

- 조광제 <시간, 철학을 만나다-플라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