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300건

  1. 2007/02/07 반복되는 생활 (6)
  2. 2007/02/07 [고전다시읽기] ‘선물’은 부족 공동체 묶는 끈
  3. 2007/02/06 [진중권]죽은 사물의 부활
  4. 2007/02/05 [박노자] 근대적인 "민중"에 대한 생각
  5. 2007/02/02 [편지] 보고싶은 조선배에게
  6. 2007/01/31 [박노자]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7. 2007/01/31 [생각] 사람은 진짜로 아픔을 나눌 수 있을까 (1)
  8. 2007/01/31 황금에 대한 생각
  9. 2007/01/23 들뢰즈의 ‘기관 없는 몸’
  10. 2007/01/23 레비나스 - 불면과 일리야
  11. 2007/01/23 몸 철학자 메를로-퐁티, ‘봄의 나르시시즘’
  12. 2007/01/23 “창조적 삶을 살아라!” -열정의 철학자 니체
  13. 2007/01/23 세상을 두 번 놀라게 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이론
  14. 2007/01/23 관계의 생성을 논하는 접속의 논리학 ‘리좀(rhizome)’
  15. 2007/01/23 혼재면(混在面)을 향해
  16. 2007/01/23 기예(技藝)/기예(氣藝) “암적인 리좀과 창조로 나아가는 리좀”
  17. 2007/01/23 되기(devenir) “자신의 존재의 외피를 뚫고서 나아가라.”
  18. 2007/01/23 [생각하기] 화가는 무엇을 그리는가 (1)
  19. 2007/01/23 [생각하기]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20. 2007/01/23 [생각하기] 잠재성과 가능성
  21. 2007/01/23 [생각하기] 거짓과 진실
  22. 2007/01/19 [메모] 한국사회와 주체, 폭력의 문제
  23. 2007/01/19 [맑은공기] 막걸리 공장에 불이 난건 당연하다
  24. 2007/01/19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25. 2007/01/19 [메모] 무아(無我) 코뮌주의 (1)
  26. 2007/01/19 [메모] 모두에게 모든 것을
  27. 2007/01/19 2004 붓다들의 꿈
  28. 2007/01/19 여성(운동)에 관한 메모
  29. 2007/01/19 공포, 테러, 전쟁...
  30. 2007/01/19 자본주의 위기와 전쟁

반복되는 생활

2007/02/07 10:22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씻다가

 '나는 매일 같은 일을 하는 구나. 세수하고 담배피고, 지하철로 달려가는 나는 어제와 똑같구나.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퇴근하면 정말 끔찍하다. 이렇게 똑같은 일상이 평생 반복되면 어떻하지?' ......

 

 

차이 그 자체(즉자적 차이)...

대자적 반복...

반복 :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반복은 생성하는 가운데 소멸한다.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시간의 방향......

 

- Gilles Deleuze. [차이와 반복]. 2005. 김상환 옮김. 민음사.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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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선물’은 부족 공동체 묶는 끈 

- 마르셀 모스 <증여론>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미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까? 아마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을 것이다. ‘원시사회(promitive society)’라는 단어로 그들이 사는 세계를 표현하는 현재의 관습이 남아 있는 한, 그 단어를 통해 작동하는 ‘문법의 환상’은, 다시 말해 그 사회는 ‘원시적’이고, 따라서 뒤처진 사회며 미개한 사회라는 식의 환상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원시사회를 연구하러 그 속으로 들어갔던 인류학자들은, 그 세계가 '본원적(primitive)'일지언정 결코 미개하거나 뒤처진 사회가 아님을 발견한다. 가령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아직도’ 돌도끼를 사용하는 남미 원주민들에게 그보다 10배는 효율이 좋은 쇠도끼를 주었을 때, 그것으로 동일한 시간 일해서 10배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10분의 1시간만 일해서 동일한 물량만을 생산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뒤처진 생산력, 뒤처진 문화를 발견하겠지만, 그들은 거꾸로 반문할 것이다. “왜 10배나 더 생산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데 필요한 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물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다. “쓰고 남은 건 팔아서 돈을 벌면 되잖아. 그 돈으로 다른 것도 사고, 저축해서 재산을 모아도 되고.”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험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은 틀림없이 남들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데 사용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를 초과하는 생산은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었다. 즉 필요 이상의 생산을 저지하는 것, 그것은 이런 점에서 미개함의 증거가 아니라 자연이나 인간을 대하는 그들의 ‘지혜’의 증거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생산력이 형편없이 뒤처진 그들의 경우, 가령 아프리카 부시맨의 경우 하루나 이틀 일하면 하루나 이틀 쉰다. 하루에 대략 3~4시간 일하는 꼴이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발전된 생산력을 가진 자본주의 세계의 우리는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사회가 더 ‘발전된’ 사회인 걸까?


이러한 사실은 한 두 사람이 지적하는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원시부족’들이 이런 식으로 산다. 그래서 그걸 조사하던 인류학자들 중 일부는 그 ‘본원적’ 세계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해체된 사실에 거대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기도 했고, 다른 일부는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은 그들 세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삭막한 삶을 대신할 ‘미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을 쓴 마르셀 모스 역시 ‘선물’로 특징지어지는 그 원시적 문화에서 자본주의를 대신할 미래적 세계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후 이 책은 바타이유처럼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실망한 좌파 지식인들이 새로운 종류의 미래를 구상 내지 상상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했다. 이 책에서 모스는 수많은 현지조사 보고서(‘민족지’)를 뒤져서 이른바 원시부족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선물’의 문화, 혹은 ‘증여’의 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포틀래취’와 ‘쿨라’일 것이다.


치누크 ‘인디언’의 말로 ‘식사를 제공하다’ 내지 ‘소비하다’를 뜻하는 포틀래취는 일종의 ‘선물게임’이다. 결혼식이나 성인식, 조상신에 대한 제사 등의 축제 때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을 실컷 먹이고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기에 초대된 사람들은 초대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게임’에서 진 것이 된다. 이는 대개 경쟁이나 전쟁처럼 격렬하게 진행되며, 종종 대대적인 물자의 파괴를, 특히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동판의 파괴를 수반한다. ‘이런 것쯤 얼마든지 내다버려도 돼’라는 듯이. 이러한 선물과 파괴는 명예 내지 권위로 되돌아온다. 다른 누구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쎄게’ 나간 사람이 최고의 명예와 권위를 얻어 추장이 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재산의 대부분을 소모하여 별로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권위를 경제적 재산의 소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위가 하나로 겹쳐져 필경 남들을 지배하게 되는 국가적 권력이 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것이었을까?


쿨라는 트로브리얀드 군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선물이 증여자와 답례자 두 항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과 달리 섬 전체를 돌며 여러 항 사이에서 행해진다. 그것은 두 개의 정해진 물건을 선물하는데 하나는 음왈리라는 팔찌고, 다른 하나는 술라바라는 목걸이다. 가령 A가 음왈리를 B에게 선물하면, B는 그것의 답례를 A가 아니라 C에게 하는 것이다. C는 그것을 D에게 주고···. 이런 식으로 전해지는 음왈리는 아마도 하나의 순환을 그리며 A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술라바의 경우는 음왈리와 반대 방향으로 순환한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답례하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하는 것. 이것이 반복된다면 한 번의 선물은 대대적인 선물의 연쇄를 만들어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선물의 체제는 이들 원시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근대 이전 우리가 살던 세계에도, 모스가 살던 서구에도 있는 것이다. 포틀래취까지는 안 가더라도, 잔치를 벌이면 음식이 남도록 만들어 싫컷 먹이고 가는 손님에겐 음식을 싸주는 것은 이미 근대화된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이사만 가도 떡을 해 이웃에 돌리지 않던가! 모스는 이를 좀더 강하게 말하기 위해 로마 시대의 채권-채무관계조차 선물을 주고받는 의무체계로 해석한다.


이러한 선물의 체계는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분리된 가구나 가족들 사이에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쿨라에서 선물은 섬들로 분리된 마을이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증여되는 재화의 순환이 사람들을, 혹은 삶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마나’ 내지 ‘하우’라고 불리는 ‘靈’이 선물의 순환을 통해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며, 공동체에 하나의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의 삶은 어디든 증여의 양상을 취한다. 역으로 선물의 순환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물을 개념을 좀더 확장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아주 간단하게 도식화해서, 식물이 동물에게 산소를 선물하고, 동물이 식물에게 유기물을 선물하는 관계 역시 선물의 순환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서로 기대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싶다면, 어떻게 선물의 순환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모스는 ‘계산기’가 되어 버린 근대적 ‘경제동물’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꿈꾼다. 선물의 체제, 그것이 그 꿈을 향한 출구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물의 체제를 일반화하기 위해 교환이란 개념에 포섭한다. 선물에 대한 답례가 의무라는 것이 그 이유다. 답례가 의무라면, 선물과 답례란, 다시 말해 선물의 교환이란 상품의 교환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는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채권과 채무도 의무적으로 답례하게 되어있는 선물의 일종이 된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답례’하기 때문에 이를 일종의 ‘신용거래’라고 이해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선물을 교환이라는 ‘일반적’ 현상으로 포착하는 모스의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찾아내는 능력으로 격찬한다.


그러나 그 결과 선물이 사라지게 된다. 상품교환의 일종이 되어버린 선물은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채무의 일종이 되어버린 답례 역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을 받고 나중에 답례하는 것이, 그게 비록 의무라 해도 정말 교환일까? 일부러 등가성을 피해 다른 값어치의 선물을 하게 하고, 일부러 동시성을 피해 나중에 답례하게 하는데도. 답례가 의무라는 것이, 그것이 채무와 똑같다고 말할 이유가 될까? 갚아야 할 채무와 달리 어떤 종류의 등가성도 없는데. 이는 결국 ‘원시사회’의 선물을 우리가 익숙한 ‘교환’이란 개념 안에 끼워맞춰 무용하게 만드는 게 되진 않을까? 이를 놓치면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선물을 오해하는 일반적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책이 될지도 모른다.


 -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75446.html)

서평자 추천 도서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한길사 펴냄.

[폭력의 고고학] 클라스트르 지음, 변지현·이종영 옮김, 울력 펴냄.

[저주의 몫]바타이유 지음, 조한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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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죽은 사물의 부활

2007/02/06 10:37

- 죽은 사물의 부활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눈에 익숙한 사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지나쳐버리고 마는 '죽은' 사물들. 예술에서는 이렇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죽은 사물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 방식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는 주위의 사물을 기괴한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또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죽은’사물을 살려내려 시도했다.

 

마그리트는 ‘낯설게 하기’의 소재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을 사용했다. 난로, 나무, 사과, 유리잔 등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마그리트는 ‘낯설게 하기’의 소재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을 사용했다. 난로, 나무, 사과, 유리잔 등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옆의 그림은 마그리트의 ‘낯설게 하기’를 표현하는 ‘고립’의 방법이다. ‘고립’이란 어떠한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걸 말한다. 그림을 보라. 평범한 하늘이 보이는 방과 물고기 한 마리. 따로 떼어놓고 보면 어느 것 하나 낯선 사물이 없지만 천장을 향해 서있는 물고기 한 마리에서 오묘하고 신기한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원목재가 깔려있고 빛이 잘 드는 방 한 칸과 커다란 풋사과가 있다. 역시 눈에 익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빛을 잘 받은 푸릇한 사과가 묘한 위압감을 풍긴다. 이 방법은 ‘크기의 변화’다. 이처럼 사물의 크기만 바꾸어 놓아도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마그리트는 유사의 방식을 취하지만 유사를 거부하면서 상사를 지향한다. 그의 작품에 ‘닮음’이 있다면 시뮬라크르들 사이의 닮음일 뿐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시뮬라크르 놀이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이 은폐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준다.

 

진중권 <현대미학-숭고와 시뮬라크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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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민중"에 대한 생각 | 만감: 일기장  2007/02/05 00:54 

 [출처: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304]



1970년대부터인가 "저항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테마는 한국 "진보" 진영의 가장 큰 화두가 됐지요. 장길산의 미륵신앙이 꼭 "공산당의 선언"처럼 읽혀지고, 동학 농민의 "제폭구민"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처럼 들리고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물론 "지금, 여기"의 현실 속에서의 "저항의 주체"들이 열성적으로 탐색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동일방직이라는 유명한 방직업체에서 민중 중의 민중이라 할 예비역 출신의 남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선 여성 노동자들에게 오물을 투척하고 있는데도 말씀입니다. 물론 1987년 창원 등지에서 노조를 설립하겠다고 파업에 나선 삼성 중공업의 노동자들은 "투쟁하는 민중"이었지만 과연 구사대는 민중이 아닌 사회 귀족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제발로 삼성의 문에 들어와 이건희의 어록을 외우는 이들은 과연 민중의 일부분이 아닙니까? "민중의 저항성"이라는 문제는, 사실 생각보다 단순하지가 않더랍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대중의 사고 역시 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말이 역시 마음 아픈 진리입니다. 대체로 어릴 때부터 벌어서 쓰는 "생산, 소비" 순환의 맛을 몸에 들이고, 서민까지도 가질 수 있는 돈의 힘을 알고, 학교에서 "잘 사는" 것의 미덕을 익히고,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보다 훨씬 못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영식이나 John은, 아주 특별한 생활의 여정을 밟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극단"을 반대해도 자본주의 그 자체에 "자연발생적으로" 의문을 가질 확률은 높지가 않아요. 꼴보기 싫은 상사에게 굽신거리는 것도 자본주의지만, 김태희의 새로운 드레스의 노출도를 눈으로 확인하는 재미나, 월드컵 때에 힘껏 외쳐보는 재미도 자본주의 아닙니까? 부동산, 은행 빛, 사채 빛, 아이 사교육비 - 이 걱정거리의 더미 밑에서 사는 이들은 무슨 "대안"을 찾을 만한 여유도 없지요. 무론 여기에서 지역별 차이가 좀 있어요. 예컨대 선거때마다 노동당을 찍는 노르웨이의 노동자는 자신의 실질 임금이 그래도 해마다 1-2% 올라가는 이 복지 자본주의에 반대가 없어도 일단 "계급 의식"이 아주 강한 반면, 이쪽에서 삼성의 사가를 제창하고 회장님의 어록을 외우다 보면 "삼성가의 충신" 의식이 트일 수도 있고 순전히 생존본능대로 살아갈 수도 있지요. 그러나 노동당의 지지자든 회장님을 모시려는 일편단심의 소유자든 "평상시" 자본주의하의 대중들을 진정한 반자본 투쟁에 이끌기가 매우 힘들지요. 경제 투쟁이야 당연히 빈번히 일어나고 또 대중의 좋은 학습 기회가 되지만, 이건 "반자본의 투쟁"이라기보다는 자본과의 공존의 조건을 좀 개선시키기가 위한 투쟁이지요. 물론 그러한 투쟁이라도 없으면 노동자가 한국의 1980년대초처럼 한달에 200달러나 받고 쪽방에서 새우잠을 자게 돼 있지요. 다만, 한국처럼 주인네들이 노동자들에게 학교/군대 시스템을 통해 "복종 훈련"을 시켜 대중을 원자화시킨 뒤에 정규직/비정규직 등을 잘 분리 통치하고 조합 관료들을 계속 매수하면, 경제 투쟁조차도 참 외롭고 어려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상황을 바꾸는 것은 자본주의의 온갖 균열의 시공간과 불경기의 시공간이지요. 자본주의는 늘 "전쟁"을 의미하는데, 이라크 등지에서 수십 만 명의 무고한 이들이 죽는 모습은 아주 배부른 노르웨이 노동자에게도 결국 "도대체 이게 무슨 세상이야?"라는 생각을 심어주지요. 또 1973년 이후에 유럽에서 점차 불경기가 심화돼 결국 "복지"를 놓고 주인네와 머슴네가 아죽 격렬한 "겨루기"를 하게 되지요. 작년 불란서의 젊은이 반란이나 독일의 공무원 장기 파업 등을 참고하시기를. 이러한 시공간들은 결국 "순응하는 민중"을 "투쟁하는 민중"으로 조끔씩 바꾸는 효과를 갖고 있어요. 문제는, 이 "투쟁하는 민중"을 조직, 이념적으로 응집시킬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조직체가 필요한데, 유럽에서는 나라마다 몇 군데의 급진적 정당들이 있다 해도 거의 그 역량이 많이 제한돼 있는 것 같아요. 또 섹트적인 근성이 너무 강하거나, 그 반대로 "사민주의의 재탕삼탕"밖에 제안하지 못하거나.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세계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의 균열이 계속 심화될 듯하고 아마도 결국 "파열"로 갈 것 같은데, "세계 혁명"이 안될 경우 그 대신에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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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보고싶은 조선배에게

2007/02/02 12:08

보고싶은 조선배에게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선배 생각을 하다 울었습니다.

당신을 떠난 보낸 후, 참 오랜만에 인사를 합니다. '잘 계시지요?'

저는 당신과 헤어진 후 서울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갑작스런 서울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쳤는지 이번에 많이 아팠습니다.

쉬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참 많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조선배,

당신이 학교를 떠난 뒤에 저에게는 온통 슬픔만 남았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도 힘들고 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날마다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당신이 그리워 많이 울었습니다. 서울은 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참견하는 사람이 없었고, 지하철에서 갑자기 질질질 울어도 창피하지 않았습니다.


조선배,

가끔 당신이 꿈에 나옵니다. 꿈에 당신이 나타나면 저는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고, 사람이 어디를 가면 간다고 말을 하던지 해야지, 혼자 말도 없이 갔다가 이렇게 오면 어떻게 하냐고...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그렇게 무심하게 하냐고" 성질을 내면서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꿈에서 화를 잔득 내다가 잠을 깨면 참으로 허망했습니다.

선배는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떠났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눈을 보면 첫사랑 같은 달콤한 로망을 생각하지만 저는 선배 생각이 먼저 납니다. 그래서 저는 눈이 많이 내리면 슬픕니다.

조선배, 이제보니 당신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어때요? 거기도 살 만 한가요? ... ...
그저 선배가 보고 싶고...선배는 참 무심하게 떠났습니다. 진짜 무심한 사람입니다.

조선배, 저도 이제 잘 살겠습니다.


p.s.

당신은 생전에 외롭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그곳은 외롭지 않나요?



2007. 2. 1. 서울 충무로에서 만복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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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 만감: 일기장  2007/01/29 20:40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 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 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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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

 

이렇게 심하게 아프다 보니 나의 일상과 일들이 정지된다.

 

그래서 돌이켜 보니, 내가 참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미워한 사람들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러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프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내가 아픈 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다.

 

사람은 진짜로 아픔을 나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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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에 대한 생각

2007/01/31 09:53

옛날에 세 명의 도적이 있었다. 어느 날 이들은 힘을 합쳐 한 무덤을 파헤쳤다. 그런데, 그 무덤 안에서 큰 금덩이가 나왔다.

“오늘은 정말 고달프구나. 금을 얻었으니 술과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한 사람이 기뻐하며 술을 사러 나갔다. 술을 사러 나간 그 자는 길 위에서 하늘이 주신 기회라면서 자축을 하였다.

‘셋이 나누느니 오히려 혼자 독차지 하는 것이 좋겠구나.’ 하고는 음식을 사서 독을 풀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도적이 갑자기 술을 사온 도적을 때려죽이는 것이 아닌가. 남은 도적들은 먼저 음식을 먹은 후 금을 양분하기로 하고 술과 음식을 먹는데, 먹은 후에는 무덤 옆에서 두 도적이 다 죽었다.


참으로 애석하구나. 이 금이라는 것은 반드시 길옆에서 돌다가 누군가에게 습득되는데, 습득한 자는 반드시 하늘에 감사할 것이나 다만 금이라는 것이 무덤 사이에서 나온 것이면서 독의 유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앞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독살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천하의 사람 중에는 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은 왜일까?

나는 원하건대 천하의 사람들이 금이 있다고 기뻐할 것도 없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눈앞에 황금이 이르면 놀라기를 천둥을 맞은 것처럼 하고 귀신을 만난 것처럼 하고 풀숲의 뱀을 만난 것처럼 해서 머리털이 빠짝 서서 뒷걸음질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연암 박지원의 황금에 대한 생각이다. 황금이라는 것이 매우 위험한 물건으로 취급된 이유는 황금의 속성이 다양한 가치들을 잠식시켜 자신의 유일한 가치로 모든 기타의 것들을 재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신숭배란, 하나의 가치가 다양하던 가치들의 관계들을 굴복시켜 무덤으로 보내고, 그 무덤 속에서 태어난 자신의 유일한 가치로 모든 사물들과 관계 맺도록 강요하는 관계의 형식을 의미하며, 바로 이점이 황금의 가장 위험한 속성이라 할 수 있다. 

- 고미숙 <『열하일기』, 숨어있는 보석을 찾아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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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기관 없는 몸’

2007/01/23 17:53
 

들뢰즈의 ‘기관 없는 몸’

-조광제 (철학자)

 

 

“감각이란 어떤 강렬한 현실성만을 가지고 있는데, 이 현실성은 더 이상 그 속에서 재현적인 여건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소적(同素的)인 다양성을 규정한다. 감각은 진동이다. 우리는 알이 바로 유기적으로 재현되기 ‘이전에’ 이러한 상태에 있는 몸을 제시함을 안다. 알은 축들, 벡터들, 비율들, 지대들, 역학적인 움직임, 역동적인 경향들을 제시하는데, 이에 비하면 형태들이란 우발적이고 보조적일 따름이다.

'입도 없고, 혀도 없고, 이도 없다. 후두도 식도도 없으며 위도 없다. 배도 없고 항문도 없다.'

생명이란 도대체 유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가두기 때문이다. 몸은 전적으로 살아있다. 그러나 유기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감각이 유기체를 관통하여 몸에 이르면, 감각은 과도하고 발작적인 모습을 띤다. 그때 감각은 유기적 활동의 경계들을 잘라버린다. 살이 충만해지면서 감각은 직접 신경의 파장이나 생생한 흥분 위에 직접 실린다.”


『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를 통해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해석하면서 질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가 감각에 대해 무서운 기세로 일갈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조그마한 바늘로 피부를 찌르면 따끔하면서 국소적으로 감각적인 흥분이 일지요. 만약 송곳을 푹 찌르면 어떻게 될까요? 온 몸이 놀라면서 감각적인 흥분이 전신으로 급하게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칼이나 창으로 푹 찌르면 어떻게 될까요? 감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각적인 흥분이 너무나도 극심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급격하게 온 몸을 송두리째 뒤틀리게 하면서 발작하게 만들 것입니다. 들뢰즈가 노리고 있는 감각이 바로 이런 극단적인 감각입니다. 그런 감각적인 흥분이 온몸을 가로지른다면, 아! 그때 감각과 몸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구분이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몸과 감각, 감각과 몸이 하나로 덩이지면서 몸이 감각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차라리 몸은 감각 덩어리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의 몸을 들뢰즈는 전혀 유기적이기 않은 ‘기관 없는 몸’(le corps sans organes)이라 합니다. 온통 뜨거운 감각의 파장으로 넘쳐흐르는 감각 덩어리로서의 몸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어느 때고 이러한 강렬한 몸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곧 예술적인 본능이 우리의 몸 즉 우리의 삶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한 몸을 느낄 때, 그러한 몸이 저기 우주에 넘쳐나는 모든 사물들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때,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감각 덩어리인 한 몸이 되어 전 우주적인 감각의 떨림으로 바뀔 때, 그때야말로 근원적인 예술과 시가 태동하는 시점인 것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이 그러한 지경에서 열려나온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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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 불면과 일리야

2007/01/23 17:52
 

레비나스 - 불면과 일리야

- 조광제 (철학자)

 

 

“불면은 불면의 상태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의식, 즉 우리를 붙잡고 있는 ‘깨어 있음’의 상태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 목적도 없이 깨어 지키고 있는 상태. 여기에 묶여 있는 순간, 시작점과 종착점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한 번쯤 불면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시인이나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면의 위력에 사로잡혀버리면 정말이지 얼마나 황당한지요. 불면의 이유를 아는 자는 진정 불면증을 앓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동기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찾아오는 것이 불면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기 싫은데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깨어 있음만큼 진저리쳐지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무슨 열정이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비애가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정확하게 걸려들었다는 느낌 외에는 특별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불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면의 지경에서 사물은 어떻게 다가오던가요? 불면을 앓고 있는 나만 부조리하고 황당하던가요? 그게 아니지요. 상황 전체가 부조리하고 황당했습니다. 그러니 그 상황 속에서 사물들 역시 각자의 경계를 상실한 나머지 하나로 덩이지고 말았지요. 저 멀리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와 내리 누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허공에 붕 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밤 짙은 시각, 불을 끄고 누웠기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설사 불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할지라도 사물들은 그렇게 마치 뱀이 벗어놓은 허물처럼 멍하게 서 있을 뿐입니다. 불면은 그렇게 해서 잠들지 못하는, 잠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나 자신마저 그러한 허물로 변신하여 덩이져 있는 사물들 속으로 끌고 갑니다.


그럴 때, 그렇게 불면이 나 자신을 엄습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으로 다가올 때, 존재론적인 근본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본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오늘날 의미 있게 유행하고 있는 타자의 철학을 건립한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내세웠던 글귀는 그가 쓴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의 한 대목입니다. 그 근본 상황에서 열리는 존재를 레비나스는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불가능한 ‘il y a'(일리야)라고 합니다. 불면과 일리야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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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철학자 메를로-퐁티, ‘봄의 나르시시즘’ 

-조광제 (철학자)

 

보는 자는 그가 보고 있는 것에서 포착되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모든 봄에는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보는 자는 그가 봄을 수행할 때 그의 봄은 사물들을 대리하여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행하고, 흔히 많은 화가들이 말하듯이 나는 내가 사물들에 의해 주시되고 있음을 느끼고, 나의 능동성은 수동성과 동일하다.


몸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유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눈은 마치 바깥 사물들이나 사건들을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충족될 수 없는 듯 보고자 하는 ‘욕정’으로 충혈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각을 통해 온갖 것들을 봅니다. 풍경을 보고, 그림을 보고, 사진을 보고,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무용을 보고, 혁명을 보고, 상품을 보고,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글을 보고, 심지어 ‘두고 보자’고도 합니다.

특히 우리말은 이 ‘본다’는 말을 아주 넓고 다양하게 씁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보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면 아연실색 골치 아파집니다. 두말 할 것이 없다고요? 그거야 당연히 두 눈을 뜨고 있는 내가 보는 것이라고요.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이야깁니다. 우리는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보지 않습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눈을 뜨고 있는 한, 아니 심지어 눈을 감고 있어도, 도대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보려고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자꾸 보게 됩니다. 굳이 보려고 마음을 먹은 대상도 아닌데 주변에서 저절로 치고 들어옵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는 나를 제 마음대로 막 치고 들어와 나의 시각 즉 나의 봄을 가득 채웁니다. 화가 세잔은 “풍경이 내 속에서 자기를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풍경을 생각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풍경 저 놈이 나의 의식을 치고 들어와 자기를 생각한다니 도대체 될 법한 말인가요? 충분히 될 법할 뿐만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이 메를로-퐁티가 ‘봄의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하는 사태입니다.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여의 경지라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을 번연히 뜨고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이러한 경지를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는

화가가 되고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는 정확한 길목에 들어선다 하겠습니다. 감각의

비의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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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삶을 살아라!” -열정의 철학자 니체

-조광제 (철학자)

 

 

죽음의 설교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 지상은, 삶으로부터 등을 돌리라는 설교를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자들로 가득 차 있다. 대지는 남아도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삶은 많은, 너무도 많은 자들로 황폐해졌다. 그들이 ‘영생’에 홀려 이 삶으로부터 사라져버리기를!

(…)

이 무서운 자들, 그들은 아직까지도 인간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삶으로부터 등을 돌리라고 설교하다가 자지 자신들마저도 제발 없어져버리기를!

(…)

그러나 단지 그들 자신이 부정되었을 뿐이며, 삶의 한 면밖에 보지 못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눈이 부정되었을 뿐이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최승자 옮김, 청하, 1997) 중에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으나 한편으로 너무나도 잘 알지 못하는 철학자가 니체인 것 같습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외침으로 반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역설한 것으로 대략 알려져 있지요. 물론 조금 더 잘 아는 사람은 그가 『비극의 탄생』에서 제시한 디오니소스적인 적극적인 긍정의 삶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초인을 떠올리고 정오의 시각에 더없이 응축되는 영원회귀를 떠올릴 것입니다.

코 밑 수염을 한껏 두툼하게 기르고 깊게 패인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철학자, 시적으로 무장된 사상의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대는 저항적인 철학자, 매 구절마다 명언이 넘치기에 결코 쉽사리 요약할 수 없는 책을 수없이 많이 쓴 철학자, 타고난 광기로 쉽게 잠들지 못하고 미친 듯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저 받아쓰듯 한 영감의 철학자, 죽기 전 지독한 우울증으로 10년씩이나 삶을 저주하며 병원 생활을 했던 철학자, 더없는 그의 매력을 사랑한 나머지 그와 사랑한 여자들을 한없이 질투했던 누이를 가졌던 철학자, 자유분방함의 춤을 통한 생성 자체를 역설하면서 여전히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남아있고 천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무진장하게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면서 창조적인 삶을 부추기는 철학자, 대지의 살갗에 깃든 병 중의 하나가 인간이라고 하여 반인간주의를 외쳐대는 철학자. 그가 바로 철학자 니체입니다.


오늘 인용한 니체의 글은 삶에 대한 우리의 의식에 무와 무의미의 위력을 심어 넣고자 하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텅 빈 손에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올려놓았을 때, 삶은 끝없이 무의미함의 중력에 이끌려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때 내세에서의 영생을, 존재의 갈퀴에서 완전히 벗어난 무로의 해탈을 권유하는 자들을 우리 속에서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일상의 삶이 구역질을 일으키고 지독한 권태가 시간을 뒤덮습니다.

니체는 그러한 죽음이 주는 무의미의 사상을 설교하는 자들을, 설교하는 그의 혀의 놀림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버리라고 외칩니다.



그렇다면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길은 어디로부터 열립니까? 니체는 아직 미답의 천 개의 작은 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길들은 아무래도 감각으로 충만해 있을 것입니다. 길을 막아서는 거대한 무의미의 벽을 쳐다보고만 있을 일이 아닙니다. 뒤돌아서면 엄청 화려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감각의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전신을 적셔오는 각종 예술적 감각은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거룩한 인간의 삶을 긍정하게 하는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예술에 미쳐버립시다.

쉽게 그럴 수 없다면, 미쳐버릴 수 있는 예술을 찾아야 합니다.

찾을 수 없으면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오늘 니체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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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두 번 놀라게 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이론

- 조광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동성연애자이면서 프로펠러를 맨 처음 설계했고 마지막 죽기 전에 노르웨이의 어느 절벽에 스스로 집을 짓고 살다가 ‘좋았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긴 인물,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간간히 메모를 해 조그마한 책,『논리 · 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출간했더니 그 책을 보고서 인간들이 감탄한 나머지 이른바 ‘비엔나 학파’라고 하는 일단의 학자 집단을 형성하게 만든 인물,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철학을 다 했다고 아예 철학을 버리고 병원 짐꾼으로 일하기도 하다가 갑자기 철학을 아직 다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나서 다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를 출간했더니 이제는 아예 인간들이 기겁을 하면서 감탄한 나머지 ‘일상언어학파’라고 하는 일단의 학자 집단을 형성하게 만든 인물,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실컷 머리 아픈 세미나를 하고 나면 영화관 맨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곤 했던 인물, 비트겐슈타인을 아시나요?


모르면 어때? 맞습니다. 사실은 몰라도 어쩌면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알면 또 어떻습니까? ‘노느니 코 푼다’는 말도 있듯이, 알면 그만큼 머리가 아프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아,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만든 지 5년 반쯤 된 철학 전문 시민학교 <철학아카데미>에서 공동대표로 일하면서 철학 강의를 하는 조광제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아시나요?’의 첫 주인공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오스트리아)이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를 하나 전하면서, 그 이야기에 대한 사족을 달아볼까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동물들은 정신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동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것들은 말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히 말하지 않을 뿐이다. 또는 더 잘 표현하자면: 그것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 우리가 가장 원초적인 언어 형식들을 도외시한다면. ― 명령하기, 물음을 묻기, 이야기하기, 잡담하기는 걷기, 먹기, 마시기, 놀기처럼 우리의 자연사(自然史)에 속한다.(『철학적 탐구』, 이영철 옮김, 서광사, 2002, 6쇄, 33쪽 25절)


철학 공부를 한 30년 쯤 하고 보니 제 나름대로는 말 좀 하는 편입니다. 지금처럼 말이죠.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나더러 ‘네가 정신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지라 그냥 본래부터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말과 행동의 배후에 정신능력이 있어서 그것들을 통제하고 조절한다는 생각을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사(natural history)에 속한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동물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하지 않는 것이듯이,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말로 바꾸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하는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맞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한다는 것은 곧 말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말이 없으면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말한다는 것은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생각 역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어쩔 거나? 생각을 이렇게 말로 바꾸어버리니 생각한다고 제법 폼을 잡고 살아온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그냥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라고, 아니 말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고, 그런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차이를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마음이 참 편합니다.


요즈음 차이를 인정하자는 것이 유행인데요. 그 참 뜻은 서로 다른 것들은 그냥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다름 때문에 지배/피지배에 의한 차별을 일삼아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늘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시 쓰기를 좋아한다면, 나는 본래 시 쓰기를 좋아할 뿐이다 하고 생각하시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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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의 생성을 논하는 접속의 논리학 ‘리좀(rhizome)’

- 이정우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저작 『천의 고원』에서 중심이 제거된 세계의 논리학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제거된 중심은 초월적 중심만이 아니라 내재적 중심이기도 하다. 서구 신학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초월적 중심으로서의 신, ‘선의 이데아’…등만이 아니라 내재적 중심(예컨대 ‘태극’), 나아가 근대 철학이 제시한 ‘선험적 주체’ 같은 내재적 중심도 거부된다.(내재성을 가장하는 초월성의 한 예를 난바라 시게루의 ‘공동체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다)

들뢰즈의 초기 작업은 이런 입장을 정립하기 위한 지난한 철학사적 연구들로 채워져 있다.

리좀의 논리학은 ‘접속’의 논리학이다. 그것은 관계의 생성을 논한다. 고중세의 실체 중심적 사유가 현대의 관계 중심의 사유로 전환한 것은 사상사의 큰 성과이지만, 관계의 그물이 고착화될 때 이번에는 관계망이 실체의 역할을 대체한다. 관계 자체가 생성할 때에만 본질주의가 극복된다. 리좀은 다양한 접속들을 통해서 관계가 생성해 가는 장(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배치, 다양체, 추상기계를 중심으로 하는, 어지러울 정도의 다양한 개념들을 통해서 리좀의 논리학을 구성한다.

리좀의 세계는 개체들 ― 집합적 개체들까지 포함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계’(스토아 학파의 ‘體’) ― 이 일정한 동일성으로 고착되지 않고 계속 생성하는 관계들을 통해서 변해 가는 세계이다. 그것은 氣가 개체성에 갇혀 제한되기보다 계속되는 생성으로 개체성을 변화시키는 세계이다. 개체는 氣를 제한하지만, 氣는 그 개체를 넘어서는 ‘잉여’이며 개체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는 힘이다. 세계를 일정하게 조직된 氣, 일정한 체계에 따라서만 존재할 수 있는 氣로 파악할 때, 氣의 잉여는 이해되지 못한다. 선험적 理를 전제할 때 氣는 理의 체계에 입각해서만 이해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서구의 수목형(樹木型) 사유를 비판하고 동양의 리좀적 사유를 찾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주자의 ‘이일분수(理一分殊)’ 체계만큼 수목형 사유를 단적으로(거의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체계가 어디 또 있겠는가. ‘분수’라는 말만큼 수목형 사유의 사회학적 변용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 어디 또 있겠는가. 문제는 서양/동양이라는 지역적 구분이 아니라 수목형/리좀형의 사유상의 구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氣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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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재면(混在面)을 향해

2007/01/23 17:45

혼재면(混在面)을 향해  “나를 가르는 분절선을 무너뜨리고 독창적 꼴라쥬를 생성하라.”

- 이정우 (철학자)

 

 

우리의 삶은 층화(層化)되어 있는 삶이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인간’이라는 층에 속한다. 우리는 새나 곤충이 아니다. 한 사람은 사회학적으로 부유층, 중산층, 등의 층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 대학에 들어갈 때 우리는 수목형 구조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이과냐 문과냐? 인문대학이냐 사회대학이냐? 문학이냐 역사냐 철학이냐? 우리의 삶은 시간적으로도 분절되어 있다. 초등학생 6년, 중학생 3년, …

우리의 삶은 층화되어 있고, ‘영토화’되어 있다. 사회는 항상 선택을 요구한다. 그래서 한 인간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통합체와 계열체처럼, 선택지들에서의 선택의 계열로 구성된다.

철수는 “경기도 사람이고, 기독교도이고, A 대학을 나와 B 회사에 다니고, …”

이러한 구조는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정치적이다. 사회는 기호체제(記號體制) ― 기호체계가 아니다 ― 이다. 기호들의 분절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호체제인 것이다.

노마디즘은 분절선들을 가로지르는 탈주선을 찾는다. 그러나 탈주선은 어디에나 있다. 세계의 근원은 氣이고 氣 자체가 애초에 생성이요 잉여이기 때문이다. 분절선들이 본래적이고 인위적으로 탈주선을 찾는 것이 아니다. 분절선들 자체가 본래의 氣에 작위(作爲)의 그물을 던져 코드화 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체제도 동일성으로 고착되지 못하며, 그 아래에는 항상 탈주선들의 누수(漏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힘, 탈주선들로 표현되는 힘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들의 욕망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다. 욕망은 氣의 근본 성격이다.

분절선들을 무너뜨리고 삶의 꼴라주를 만드는 것, 이것은 혼재면(plan de consistance)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어진 격자의 어느 한 섹터를 선택하기보다는 격자를 가로지르면서 고유의 꼴라주를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한 인간의 ‘스타일’이다.(격자의 한 섹터를 선택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스타일이다) 큰 인간은 그만큼 독창적인 꼴라주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장자가 말한 “化而爲鳥”의 경지,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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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예(技藝)/기예(氣藝)  “암적인 리좀과 창조로 나아가는 리좀”

- 이정우 (철학자)

 

 

개체들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만 氣는 잠재성이다. 잠재성은 현실성으로 분화(分化)된다.

이것은 곧 개체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예컨대 생명은 생명체와 구분된다. 생명은 개개의 생명체들로 분화된다. 그러나 생명은 개체들을 넘어서는 잉여이고 이 잉여가 ‘진화’를 가능케 한다. 이 과정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두 요소가 특이성과 강도이다. 즉 氣는 그 안에 지도리들을 내장하고 있고(그러나 역동적으로 변해 가는 지도리) 또 강도의 차이들을 통해서 운동한다.(이 부분은 들뢰즈 철학의 핵을 이루고 있으며, 『차이와 반복』의 4, 5장을 숙독해야 한다)

또 하나, 특히 주의할 것은 노마디즘이 제시하는 구분들에 가치들을 실체적으로 부여하는 일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 다른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매끈한 공간은 좋은 것이고,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인가? 몰적인 사유는 나쁜 것이고 분자적 사유는 좋은 것인가?

이런 식의 가치론적 이분법이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리좀이 기존의 분절선들을 극복하고 창조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마약 같은 ‘기관들 없는 신체’로 갈 수도 있고 또 파시즘 같은 암적인 리좀으로 갈 수도 있다. 무조건 분자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맥락에 따라서는 몰적으로 사유해야 할 때도 있다. 창조적 삶을 위해서는 리좀적 사유를 해야 하지만, 리좀적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꼭 창조적 삶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구분들은 우리가 ‘상관적 정도(correlative degrees)’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을 이룰 뿐이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맥락에 따라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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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기(devenir)  “자신의 존재의 외피를 뚫고서 나아가라.”

- 이정우 (철학자)

 

 

기예(氣藝)의 개념은 ‘되기’를 다루고 있는 부분을 읽음으로써 가장 잘 포착된다. 되기는 변신이다.

그것은 기존의 동일성에 고착되지 않고 다른 존재로 화(化)해 가는 것, 즉 존재론적인 변신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적”은 “실재적”을 뜻한다. 현대 사상은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이라는 세 개념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노마디즘의 되기는 상상적인 되기나 상징적인 되기가 아니라 실재적인 되기이다. 예컨대 학-되기는 학을 상상하는 것도, 학을 흉내내는 것도, ‘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실재적으로 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학이 된다는 것이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인간이 학이 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이것은 상상적 되기이다) 무엇이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氣를 변화시켜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의 氣에 가까이 가져가는 것이다. 학춤의 명인은 단순히 학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학을 상상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부단한 수련으로 자신의 氣를 학의 氣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거미-되기는 「스파이더 맨」에서처럼 우연히 유전자 변이를 겪는 것도 아니고(영화 버전), 기계의 도움으로 건물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다.(만화 버전)


그것은 자신의 氣를 부단히 수련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자신의 ‘존재’=외피를 뚫고서 거미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 다른 존재로 자신의 氣를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마디즘은 강렬한 윤리적-정치적 함축을 띠게 된다. 되기는 존재론인 동시에 윤리학이자 정치학이다. 노마디즘은 윤리학 이론, 정치학 이론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자신의 氣를 실제 변화시켜서 지금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는가이다. 즉 노마디즘은 여성을, 어린이를, 흑인을 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고 타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실제 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마치 만화에서처럼 남성이 여성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그렇게 말한다면 하리수가 노마디즘의 실천자일 것이다) 남성이 남성으로서의 동일성에 고착되지 않고 여성의 氣를 가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여성의 氣, 여성의 감응(感應), 여성의 정(情)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나가는 것이다.(여기에서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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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화가는 무엇을 그리는가

2007/01/2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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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2007/01/23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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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잠재성과 가능성

2007/01/2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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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거짓과 진실

2007/01/23 13:24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거짓말이란 나쁜 것이며,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왔다. 또 그 가르침을 받고 자라면 후손에게 그 가르침을 전하며 언제나 진실할 것을 강요한다. 과연 인간은 언제나 진실을 말해야 할까? 거짓말에 대한 여러 입장들을 살펴보자.


먼저, 『원숭이는 왜 철학 교사가 될 수 없을까』의 저자 미셀 옹프레는 “진실을 말해서 좋을 때는 거의 없다. 왜 그런가. 가감 없는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폭력이 될 때가 있다. 선생이 학생한테 너는 못한다고, 절망적이라고 진실을 얘기한다면 일종의 폭력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므로, 일상생활은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 일종의 거짓말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라며 거짓말에 대해 찬성의 의견을 밝혔다.


미셀 옹프레와는 다르게 거짓말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먼저,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진실하지 않은 것은 전부 죄다.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거지를 만났는데 돈을 주지 않았다면 이것은 선한 행동인가, 악한 행동인가.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선한 행동은 아니다. 그렇다고 악한 행동 역시 아닐 것이다. 선과 악 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순이다. 제3의 선택, 즉 중립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선도 악도 아닌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 둘로만 본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게으름’이 죄가 된다. 착한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또한 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전부 나쁜 것이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칸트 역시 거짓말에 대해 부정의 의사를 밝힌다.

“거짓말은 의도적으로 틀리게 하는 진술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 거짓말이 행복을 의도하거나 단기적으로 행복한 결과를 보여줄지 몰라도 실제적으로 상대를 해치게 된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법인데,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상황을 자꾸 겪게 하면 법을 지키려는 신의나 신뢰를 떨어뜨려서 일종의 도덕의식 또는 법질서 전체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거짓말은 결과적으로 항상 나쁜 것이다.


거짓말에 대한 의견은 진실을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가치로 놓을 수 있는지, 아니면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되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일종의 의무의 관점에서 진실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므로 무조건 진실해야 된다는 관점이 있을 수 있고 또, 결과주의의 관점에 서서 접근을 하는 것도 하나의 관점이다.


일상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정하 <철학기초입문:『거꾸로 읽는 철학』함께 읽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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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2005.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인물과 사상사.] 발제문  2006. 5.

 

 * 오늘날의 되고 싶은 ‘나’ : 남성-어른-이성애자-본토박이-건강한자-지성인-표준어를 쓰는 사람⇒이성에 입각하여 설정된 표준적인 근대적 인간상

-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성다움’: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

- 정기적 훈련으로 단련된, 잘 복종하는 몸을 늘 ‘국가와 민족’에 바칠 각오로 사는 ‘애국적 신심’의 군사주의적 남성이 우리시대의 모델임. 이것은 일제말기의 총동원체제와 식민지 이후의 남북한 군사문화로 인해 명령과 복종의 파시스트적․남성적 미학이 본격적으로 파급된 것임

- 오늘날의 남성다움: 양복복장, 수염이 없는 ‘깨끗한’ 얼굴 모양=(획일적 복장과 면도 습관을 강요하는 군대문화)+(단정한 모습을 중시하는 유교문화)+(단발, 양복등을 물신화시켰던 개화기나 일제시대 개화파 풍조의 계승)+(학교에서 키워지는 습성)


- 오늘날의 대장부=(조직에 충성하고 돈을 잘 벌고 그 경제적 능력으로 가족들의 존경을 받아 가족들을 잘 ‘관리’하고 ‘조직생활’과 돈벌이에 필요한 인간관계(인맥)들을 ‘둥글게 둥글게’ 잘 유지․발전시키는 사람)+(독서인으로서 남성다움)+(힘의 숭배자(서울대 동창회 수첩, 삼성의 명함, 공무원증을 내심 받드는 자)로서 남성다움)


- 우리사회의 궁극적 목적 ‘이윤추구’≠인간심신의 태생적인 특징과 항상 충돌,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인 동료와의 경쟁, ‘보스’나 상급자에게의 종속과 고용의 불안 등은 각종의 스트레스를 강력하게 안겨주어 상당시간을 술이나 포르노, 돈 주고 사는 ‘윤락’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듬→반인간적 체제를 강요한 결과, 사실 국가나 재벌 같은 집단들은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립, 운영됨(국가의 핵심)


⇒ 연대와 평등한 대인관계를 위주로 하는 체제가 필요함: 현 체제가 인간의 심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빼앗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함


* 힘의 숭배: 미군은 한국에 있어야 한다?

한반도의 미군 주둔의 역사는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분군 사령부가 들어섰던 용산기지를 모태로 한 미군의 한국 주둔 역사가 일본군 주둔 역사보다 훨씬 더 길다.

‘남한 전역에 주둔하는 대규모 미군 병력은 1953년 정전이후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병사들은 낮에는 탱크에서 꾸벅꾸벅 졸고, 밤에는 매춘부 품에 안겨서 보낸다. 61년부터 93년까지 미국은 한국에서 역대 군부 독재자들을 지원하거나 권좌에 앉혔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군사대표단 및 제8군 사령관과 참모 장교들이 남아 있어서,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시도하는 평화적인 대화자체를 어렵게 하고 있다. 한국은 냉전의 절정기에 미국이 중앙정보국 고위관리 출신을 두 번이나 대사로 보낸 유일한 국가다’

찰머스 존슨은 한국이나 일본은 군사제국주의 나라 미국의 전형적인 식민지다. 미국은 과거 로마나 중국제국과는 달리 식민지가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국외 군사기지들만으로 작동되는 신형제국이다. 미국은 국외주둔 미군기지들을 통해 세계를 통제하고 석유 등 전략자원과 경제 잉여를 무제한 빨아올린다. 평택미군기지가 그렇다.


* 폭력의 변형

- 강압적 지시와 통제→보편주의 이데올로기 작동

- 달라진 지배 이념 : 덕치(德治)를 들먹이는 사대부들의 권력기반은 궁극적으로 물리력

폭력수단과 행정구조가 근대에 비해 훨씬 취약했던 전통 시대로서 적어도 지배이데올로기만큼은 포섭적이며 다원적이며 관용적이었음


* 힘의 숭배-상무(尙武) 정신의 일상화

어떤 지배담론도 단순한 이야기만으로 존재하지 않음

담론: 시각화, 의례화→이미지 소비, 참여의무화, 보편화 시켜야 함

⇒‘힘의 숭배’라는 근대 거시담론의 미시적 침투과정(ex. 군대(징병제), 스포츠)

but, 경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군대에 대한 양면적 인식-폭력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완전하지 않음을 증명


* 개신교는 왜 막강한가?

- 토착적인 것들에 대한 배척의 바탕에는,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한국의 대리 세력이라는, 한국 교회의 세속적인 위치에 대한 강력한 자긍의식이 깔려 있음


- 19세기 개신교의 종교 제국주의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된 중세 기독교적 배타주의가, 제국주의적 담론을 내면화한 상당수의 한국 개신교 신도들에게 전염된 것임


- 한국에서의 종교적 다원주의


* 교육: 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지식’이라는 상품이 거래된다(지식기반정보산업), 그러나 사실은 지식 그 자체가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가 거래되는 것이다.


- 선생님과 선배가 때릴 수 있는 ‘권리’, 온갖 규칙과 제한으로 가득 찬 학창생활,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풍토


- 의무교육 : 교육 권력이 의료․경찰 권력과 함께 일체 국민들을 훈육하면서 국가, 자본의 질서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자강과 국민 만들기를 위한 문명 교육론


- 지배층들은 그들을 특권층으로 대접해줄 어떤 국가에라도 충성하는 자세를 취해, 인민들에게 ‘국가에의 복종과 충성의 덕목’을 계속 가르칠 준비가 돼 있었던 것.


- 교육을 국가와 자본에 적합한 인간을 만드는 기제로 인식하고 교육 체제의 상부(핵심적 고등교육 기관)를 있는 자들에게 훨씬 들어가기 쉬운 신분상승의 사다리로 만든 것


* 영웅: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다?

- 미국의 영웅 링컨은 ‘미국의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도발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흑인들을 위한 실질적인 위치 개선의 노력도 없이 정략적으로 노예해방의 쇼를 벌인 무자비하고 타산적인 냉혈아’이다. ‘형식뿐인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 나서 거의 한 세기 동안 모든 남부 주들의 대다수의 흑인들은 계속 무서운 차별을 당했으며 투표권도 박탈‘당해 왔다.


- ‘영웅’을 이용하는 국가: 영웅이란 ‘초인적인 이미지를 갖고 피지배민을 쉽게 압도하여 동원할 수 있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강력한 지도자’를 말하는 것으로, 국가는 ‘영웅’을 이용하여 피지배민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국가에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목적⇒국민만들기, 국민통합이 목적이었던 근대국가의 계몽주의자들


- 세계 위인전을 아이들에게 읽히는 풍속은 식민지 시기 내내 조선의 식자층 세계를 풍미하다, 1945년 이후에는 교육의 기회가 넓어지며 거의 전사회적으로 남한에 확산되었음, 결국 아이들에게 냉혈한 정객 링컨과 대량학살자 나폴레옹과 노예주 워싱턴은 지금도 따라야 할 영웅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 경찰: 경찰은 국민을 보호해주고 지켜준다?

- 경찰국가: ‘경찰의 억압 장치화’와 ‘경찰들에 의한 개인들의 신체 존엄권 박탈’


- 하위직 경찰 공무원: 대다수 중산층의 하위계층이나 서민층 출신인 일발경찰을, 지배층이 언제나 대체 가능한 기계쯤으로 보고 있다.


- 경찰에 대한 불신: 국가기구에 대한 서민들의 전반적인 불신과 불만이 존재, 부패한 조직이라는 불명예, 한국에서 근대적 경찰조직은 공포감을 안겨줬을망정 결코 ‘사회안전’의 이미지화는 존재하지 않음⇒멸시적이고 적대적인 ‘전통적 포졸관’이 존재함


- 한국에서의 전통적 포졸관: 법치(法治)가 아닌 예치(禮治)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왕조. 따라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불법이나 비도덕적 비행은 그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음→마을의 질서가 주민들에 의해 유지되고, 반면 부패가 국가 권력의 간섭은 주로 뇌물 갈취를 의미했던 19세기 조선사회에서 포절은 대개 귀찮고 위험한 존재로 간주됨.⇒서구사회의 ‘공익의 권신으로서의 경찰’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상(像을) 당시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었음


- 양심에 따른 처벌: “어리석은 백성이 굶어서 도적질로 그 생존을 구하는데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이익의 ‘도적론)→도적떼를 진압해야 할 주체인 정부가 도적떼의 출현과 민란의 이유가 국가 기강 해이와 관료 부패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함(1862년 진주민란에 따른 철종의 대응-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탐관오리를 처벌)


- 경찰의 필요성: 자본주의 지향적 관료와 지주들의 이해타산에 의한 것임, 다시 말해 재산가들은 국가로부터 자신의 재산에 대한 확실한 보호를 원했음, 따라서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재산을 무조건 지켜줄 경찰국가 체제가 필요했으며, 이에 따라 경찰에 의한 국내적 폭력의 독점화를 ‘문명사회’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19세기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음


- 현대의 처벌은 법에 의한 처벌: 다른 사람의 ‘신성한 사유재산’에 손을 뻗친 가난뱅이는, 국가가 무자비하게 처벌하고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수시로 감시→처벌과 감시를 통해 ‘정상적인 국민’으로 만들어야 할 대상물로 전락. 이에 따라 ‘범법자’를 적군의 병사보다 훨씬 더 적대적인 ‘타자’, 위험한 ‘비국민’으로 여기는 것이 현재의 담론임.→‘우리 모두의 공적’인 ‘범죄’와 ‘범인’은 근대적 제도와 논리에 의해서 수배, 징벌해야 할 대상이 되고, 근대적 이성의 권신인 경찰은 ‘우리의 현대적 영웅’이 됨


- 한국의 경찰: 글을 모르고(1945년 조선 문맹률 75%) 살인적인 가난에 시달린 일제 말기 조선인에게, 뇌물 갈취와 폭력을 일삼는 6만명의 일제 경찰은 조선시대 포절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로 등장→미군정하에서도 일제시대 조선인 경찰 고용→극우반공 체제는 경찰을 엄청나게 두려운 존재로 만듬(경찰에 대한 외경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음)→후발 자본주의 남한 사회는 지배자들의 사적인 폭력이 언제나 가능하고 국가기구의 사유화 정도가 높았음, 이에 따라 남한은 물리적 폭력위주의 ‘외삽된’ 경찰국가임. 이는 극소수 재산가들을 위한 폭력적인 우리로부터의 ‘근대화’와 이승만, 박정희에 의한 식민지 시대 국가 모델의 재현이 가져다 온 당연한 결과.


* 징병제: 군대는 가야한다?

- 우리들의 군대: 학교와 직장에서 장기간의 격리 생활, ‘윗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습득하여 자신의 존엄성(신체와 정신을 포함하여)을 지킬 방법이 거의 전무함, 무조건 반말을 하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고참 앞에서 헌법이나 군법, 유엔인권선언문 따위는 무의미함.→따라서 한국에서 군대를 간다는 것은-20대 다수는 소극적인 불안과 공포감, 부담감부터 적극적인 원망까지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부정적 감정을 두루 갖추게 됨


- 한국 수구언론의 횡포에 의한 군대 이미지 조작: 내무반에서 ‘칼잠’자는 모습보다 해병대와 특전사의 ‘진짜 사나이 만들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임. TV의 군대 관련 프로그램에서 어머니와 여자친구는 ‘남성이 여성을 지켜주고 여성이 남성을 챙겨준다’는 가부장적 전통논리에 직접 호소하여 군대에서 열심히 훈련받는 ‘자랑스러운 남성’들의 상을 만듬.


- 직장생활의 군사문화적 요소: 취업에서 예비역을 선호하고 기업들이 연수 프로그램에 ‘극기훈련’을 포함시킴→‘위로부터’ 세뇌와 같은 각종의 채찍과 당근으로 강요되는 군사주의적 세계관이 징병제에 대한 심적 의존을 유도하고 있다.


- 한국에서 초기 군사력의 열등감: 서구 근대국가들은 무소불위의 폭력에 의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 형성, 이들과의 접촉을 시도한 조선은 ‘그들’의 우월한 군사력에 대한 압도감과 ‘우리들’의 비극적인 열세에 대한 열등감을 가져다 줌(1876년 불평등강화조약, 1885년 한성조약, 1904년 한일의정서 등)→조선의 ‘개화’는 위로부터의 보수적 개혁 프로그램 속에서 외국 군사력에 대한 정보수집과 병력 증강이 핵심적인 과제로 떠오르게 됨


- 고종의 징병제 프로젝트는 실패: 러-일간의 대립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위협을 느낀 고종은 1903년 징병제 실시 조칙을 실시. 그러나 무산됨, 그 원인은 만성적인 정부 재정부족, 병역자원을 파악할 만한 행정력을 갖지 못한 정부의 통치력의 한계, ‘백성’들에게 무기를 맡기기 꺼려했던 지배층으 ‘근대’의식의 한계→지배자의 수탈에 찌든 백성들은 ‘애국 국민’으로 교육, 훈련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 고총 측근 세력들도 ‘백성’을 ‘국민’으로 인식할 만한 근대적 국가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


- 절망이 국가 형성의 열망으로: 징병제 실시계획의 무산에 따른 국가 지배자들의 좌절감이 강한 만큼 ‘부강의 비결은 바로 징병제’라는 생각이 굳어짐→근대적인 국민만들기 프로젝트로 ‘군인’을 새로운 ‘국민’을 위한 하나의 준거틀로 만듬


- 계보상으로 100여 년 전 개화파의 징병제 실시의 좌절된 꿈, 일제 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징병제 구국론’으로 거술러 올라가는 이 의식은, 박정희․전두환의 병영국가 시대에 더욱 강화돼 오늘날의 징병제에 대한 보편적인 ‘집념’으로 이어졌다.


- 남한의 징병제 군대는 ①반공규율 사회의 이념적 세뇌기구 ②군사주의적 훈육기구 ③ 초기 문맹퇴치와 기술지식 보급자 역할 ④ 각 지역의 한계를 초월한 ‘전국’ 의식 보급에 기여한(?) 강요된 합숙 생활과 공식․비공식의 수직적인 훈육체제이다.


- 민족/국가적 생존과 국난 극복 그리고 그 수단으로 ‘전사(戰士)로서의 남성키우기’가 중심이 된 개화기 이후 한반도의 내셔리즘 담론임(국가주의 담론)→전쟁장면의 ‘낭만’을 즐겁게 소비(국가주의적 주체)


- 지도자에 대한 복종의 미풍→권력에 대한 복종의 미풍→‘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국가에 의한 상명하달적인 생활양식으 훈련을 받을 권위주의 사회 남성 구성원의 ‘사회화 의무’를 의미함.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대

- 우리는 아직도 나폴레옹의 침략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근대’라는 살육의 대량화․낭만화․물신화시대를 그대로 살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 국가형성시기의 전투성․폭력성에 대한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성찰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가장 일상적이고 생활적인 것들이, 보이지 않게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현 체제는 인간의 심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빼앗는다: 개인차원의 적극적인 저항은 가능하다

- 자본과 국가가 강요하는 생활방식을 생각과 몸으로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 필요

- 서울대 갈 수 있어도 학벌타파의 의미에서 안가고,

- 병역을 거부하고,

- 재벌기업 대신에 시민사회단체에 취직하는 것

위에 것들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면,

- 재벌이 만드는 물건을 쓰더라도 노동탄압과 극우 보수 정당 기부로 악명을 얻은 악질 재벌들의 물품을 보이콧하기

- 학벌타파를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을 지원하고 후원하기

- 합법적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위한 친화적 여론을 인터넷등을 통해 조성하기등 개인이 온 몸을 내던지지 않아도 할 수 있다.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오늘날의 한국 ‘시민사회’

- 한국 중심주의 강한 나라(중국이나 북한, 3세계는 멸시의 대상으로 인식-아시아의 자랑, 축구, 과학, 한류 따위의 것들이 작동함)

- 제도적 민주화와 시민사회가 성장해도 노동계급의 정치가 아직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적 현실

- ‘시민사회’의 학연중시, 정치적 커넥션들에 의한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

- ‘명망가’ 또는 ‘전문가 집단’과 일반 활동가들의 차별대우등의 구조적 문제점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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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공장에 불이 난건 당연하다]
-막걸리와 휘발유는 부으면 부을수록 더 뜨거워진다



막걸리 공장에 불이 났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막걸리를 찾는 민중들이 늘어나고 있다.
중급 음식점들이 문을 닫고
막걸리 집을 개업한다.
막걸리 공장에 불이 났다.

막걸리 공장에 불이 났다.
막걸리 수요가 늘자
주주들의 욕심도 늘어난다.
정작 막걸리를 만들고
옮기는 노동자들은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그자리가 그자리다.

막걸리 공장에 불이 났다.
막걸리 운반 업자가
생계 유지를 위해
막걸리 운반비 인상을 요구해왔으나
주주들이 이를 묵살했다.
열받은 막걸리 운반업자는
주주들이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모인 주주총회 자리에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주주중 3명이 죽고
열받은 막걸리 운반자는 감방에 갔다.
막걸리 공장에 불이 나는 건 당연하다.

 

[맑은공기님이 2004년에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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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2007/01/19 16:04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어 있고
한 톨의 밥에도 만인의 노고가 깃들어 있으며
한 올의 실타래 속에도 베 짜는 이의 피땀이 서려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 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정진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일체중생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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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무아(無我) 코뮌주의

2007/01/19 16:00
코뮌적 관계에 들어온다고 해서 모두가 저절로 코뮌적 주체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차별이 없기 때문에 자의식의 견고한 벽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런 시행착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 노마드가 되고 싶다면 그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면 사라진다'고 했던가. 강렬하게 접속하되 집착과 소유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 것. 활동이 하나의 영역에 멈추지 않고 다른 활동들로 흘러 들어가게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어야 한다.

- 고미숙 지음. 2004.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p.247~248.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괴로움과 얽매임이 밖으로부터 오는 줄 착각하고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 절,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행복과 자유를 구하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그것은 안심입명의 도는 밖으로 찾아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안으로 살펴보면
그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의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일으킨 한 생각에 사로잡혀
옳다 그르다 모양짓고
그 모양에 집착해서 온갖 괴로움을 스스로 만든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즉시 사라진다.

- 정토회 [수행법요집]의 수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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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모두에게 모든 것을

2007/01/19 15:58

 

1.
이런 자리들마다 사파티스타 민중해방군은 자신들은 앞장서서 싸우는 사람일 뿐이라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

- Marcos. 2001.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들려주는 하늘과 땅, 사람의 이야기』. 박정훈 옮김. 다빈치. p.203.



2.
마키아벨리는 아래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기획은 "무기"와 "돈"을 필요로 한다고 제안하며 우리는 외부에서 그것들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이미 그것들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필요한 무기들은 바로 대중의 창조적이고 예언적인 힘 안에 놓고서 이번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무기"와 "돈"을 갖고 있지 않은가?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종류의 화폐는 사실상 생체정치적 생산 및 재생산의 직접적 행위자인 대중의 생산성에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되는 종류의 무기는 대중이 사보타주할 잠재력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대중 자신의 생산력으로 탈근대적 명령의 기생적 질서를 파괴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선언, 즉 정치적 담론은 스피노자적 예언적 기능을, 대중을 조직하는 내재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열망해야 한다. 결국 여기에는 어떤 결정론이나 유토피아도 없다. 즉, 이것은 오히려 어떤 "미래를 위한 공백"이 아니라 대중의 현실적 활동에, 대중의 창조, 생산, 권력에 존재론적으로 근거한 철저한 대항 권력이다.

- Negri, Antonio and Hardt, Michael. 2000. Empire. Harvard University Press.: 윤수종 옮김. 2001. 『제국』. 이학사. p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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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붓다들의 꿈

2007/01/19 15:44

2004. 01. 01~ 01. 04.
명상과 통합적 예술매체(무용, 심리극, 미술, 음악)를 활용한 자아존중감 향상 프로그램

 

 

[누렁이에 대해]

누렁이는 영빨을 받아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엉덩이가 뜰것 같아서 똥구녕을 땅에 대고 있으려고 노력했다고
하더군요. 사실 나도 누렁이가 웃는것인지 평화로운것인지
서서 "당신은 참으로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임다"하면서
눈물을 줄줄흐르는데, 찡한 기운이 표면을 뜹디다.
실은, 내 자신 현실에 대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환장하겠습디다. 영빨 받아 현실(물론 이때 현실이란
개와 노예들의 자본척도의 현실과 다른)과 접촉하는 누렁이가
너무 부럽습디다.

<희랍인조르바>란 소설이 있는데,
거기 나오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누렁일 보고 교주라고 했습니다.
허버 즐겁고 유쾌한 교주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변에 누렁이와
뭘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와이키키란 이름을 쓰고 내 고민을 털어놨고,
이걸 사이코드라마로 만들었는데 누렁이가 이걸 해줬습니다.
존나 잘해줬습니다.

자기전에 잠시 나누던 성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습니다.폴리네시아의
사랑에 대해서는 감동적이고 나도 빨랑 시도해보고 싶었습니다.


누렁이는 나보고 '선배'라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병헐럼의 습관이 붙어 있어 사람 만날때
연줄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회학과 연줄이 거기에는 들어있습니다.
또 누렁이는 나에게 네트웍이란 말을 쓰지말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병헐럼의 네트웍이냐 이거죠.
네트웍이란 부르조아가 하는것입니다.
돈빨아먹으려고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바로 연대입니다.
요런걸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누렁이는 정말이지 공부해볼만한 인간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웃긴거 인데,
나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웃긴 사람을 좋아한다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젼에서 누구 보고 흉내내는 웃김이 아니라
살면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그런 웃긴걸
좋아합니다.
다 아는데, 털어넣기 힘든 어떤 걸
파악 공격욕 없이 나오는 어떤 힘~~요런것이 바로 개그의
힘인데, 그런면에서 누렁이는 참 힘이 있습니다.
부럽습디다.





[명상프로그램, 참여후에..]


명상치료 프로그램 이름은 "붓다들의 꿈"이었습니다.
붓다란 말은 '깨달은자'라는 말입니다.
참 싸가지 있는 말입니다. 나는 불교가 어떤점이 맘에 드는데,
다른 어떤 가르침이나 이성적인 교육,지식과는 달리
이미 깨달은 것에서 시작해 '연역'해서 찾아나선다는 의미가
강하지요. 모든이가 깨달은이니, 누가 누굴 가르칠수 있다는 말인가요.
참 싸가지 있는 발상입니다. 개새끼들은 이런 태도를 교육을 부정했다
느니 해대겠지요. 이점 생각해봅니다.


누렁이의 지령으로
-이 어감을 보세요. 이제 '누렁이'선배가 아니라 누렁이입니다.-
명상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전사들과 함께 한 최초의 프로그램
참여입니다.


춤을 춰서 자기를 표현하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자기를 표현하라고 했습니다.
울라고 했습니다. 웃으라고 했고, 날뛰라고도 했습니다.
가끔은 나이트 분위기도 났습니다.
여자활동가 들과 껴안기도 했습니다.


나는 주로 마징가를 그렸습니다. 내 이름은 '와이키키'였습니다.
누렁이는 영빨을 받아 교주로 등극했습니다.


밥은 천천히 먹었습니다. 밥공양하는 공산주의자를 만났습니다.


오는길에 호박엿이랑 추주뿡이랑 날개랑을 생각했습니다.
이년들아, 니기들도 와야 했다, 이런 걸 나누고 싶었습니다.


명상참여후에 가진 묵직한 어떤것은..
<~~되기>를 위해서
<전략적>인 태도가 아닌 사람 자체의 공산주의적인 인간형을 위해서
명상은, 그것도 집합적인 명상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좋고/싫고의 판단중지를 하면서 <~되기>를 지향하는 프로그램을
집단적으로. 수행을 중놈들이 절하고, 신부들이 기도하고,
또 섹스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걸, 삶자체를 '수행화'하는 것이야 말로 공산주의적 인간이라는것.

또 공산주의자란...
자본에 물든 노예가 아닐터인데
그 구분은 역시 예술로서...예술적 감이 없다면? - 나처럼- 그걸 키워야
한다는 것. 훈련을 통해. 소리치고, 그리고 흔들고 싸대는 난교를 통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수카님. 안녕하세요? 저, "와이키키"입니다.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저는 누렁이랑 함게 맑은공기 집에 가서 한잔 꺽고
광주로 내려왔는데 집에 오니 꽤 되었더군요.
3박 4일간 즐거웠습니다. 내려오면서 사람들 이야길 하다가
아스카님이 귀엽다는 것에 우리 모두 영빨을 받고 동의했습니다.
남자도 귀여울수 있다고 누렁이교주는 말하더군요.
반가웠습니다. 건강하시고요. 가끔 들어와 구라 혹은 투덜대거나
해도 될까요?^^



2004년 1월4일부터... 저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아니, 찾은걸가요?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내 주변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았습니다.
이번캠프 주제가.. '자아찾기' 던가요?
내 안의 고통과 슬픔, 기쁨, 고민들을 다 털어버리고 나니까..
이제 다른것을 받아들이는게 너무 쉽습니다.
얼마나 울기도 많이 울었는지.. 이제는 얼굴에 웃음을 담아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수원으로 올라오는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 차한잔하면서 집에 전화를 했어요.
엄마에게 반갑게.. '사랑해요.. '라고 고백했습니다. 처음이에요..
너무나 좋아하시는 엄마.. 아빠... 왜 진작 이렇게 쉬운말 한마디 하지 못했을까요?

집에 돌아와.. 역할극에서 만났던 성훈씨와 그 여자친구에게
하고싶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밥 한번 함께 먹은적이 없는 우리..
신년회식을 하기로 했지요.. ^^

그리고, 오늘아침 사무실에 출근하여.. 사람들을 한번씩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좀 부담스러워 하더이다.. 히히.. 그래도 좋아하던걸요.
그러고 나니, 너무나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해보니.. 정말 쉬워서 좀 실망이 들 정도였었습니다.

이제 조금 화가 나는 일도 극복이 됩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준 전북지역의 활동가들과 계속 함께갈 것을 설득해준 아스카..

부족한 형편을 알고 재정을 지원해준.. 행동연대 회계님..^^
맘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준 저의 일터 사람들과..
그 공간을 싸게 제공해주신 임실의 목사님 내외분..
좋은 음식으로 제 몸을 가볍게, 편하게 만들어주신 동지들..
저를 맘과 성의를 다해서 꼬옥 안아주던 4일간 식구였던 사람들...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낍니다.
나도.. 여러분도.. 너무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 밝고 행복한 에너지가 느껴져서 간직하고 싶은 글^^ 200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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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에 관한 메모

2007/01/19 15:34
* 여성 운동은 자본(제국)의 발전-산업노동자의 증가와 자본의 요구로 여성노동력이 필요해짐-과 더불어 시작됨. 즉 여성운동은 자본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면서 자신의 신체와 권리를 성장시킴; 자본의 의도와 맞물리면서 발생하고 성장하는 운동들...

*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는데, 왜 여성운동이나 여성의 권리가 어느 시공간에서 시작하는가? (비정규직이나 불안정노동도 마찬가지?...)

* 대중(민중)의 사고와 이해는 지배 체제의 이데올로기: 지배이데올로기는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 남한에서 노동운동의 폭발과 발전은 (포스트 포디즘시대의) 자본이 더 많은 노동력을 싼 값에 제공받기 위한 전략이었다?-자본의 전략!
즉, 자본에 의해 기존의 억압적이고 처참한 공장에서 '인간다운 삶'이 보장 될 수 있는-그것도 노력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지만-노동의 표상으로 전환시킴.

* 자본과 운동의 문제는 자본의 확대발전과 더불어서 나타남.

* 자기 자신의 고유한 생성을 형성하는 것.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즉, 어떻게 생성이 포섭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해서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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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테러, 전쟁...

2007/01/19 15:30

* 공포에 대하여

제16항
... 공포는 정신의 무능력에서 생긴다...

     -스피노자 [에티카] 제4부 '인간의 예속 또는 정서적 힘에 대하여'에서-


'테러는 권력이 경찰장치나 대중매체적인 무기를 남김없이 수중에 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다수의 피착취자를 지배의 망 속에서 더욱이 깊게 빠뜨리는데 사용하는 것이 명백하다...
...
서독의 적군이나 붉은 여단의 자본주의 진지에 흔들림을 가한다고 하는 의미이지만... 개인을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향하는 모든 것, 개인의 무력감을 강화하는 모든 것, 개인에게 죄책감을 부여하는 국가나 집단적 시설 및 그 부속물에 의존하는 것으로 작용하는 모든 것-이러한 대중조작의 현상들에 공격의 예봉을 돌리지 않고 혁명적 행동을 한다고 칭하는 것은 바보같은 이야기이다.
...
당치도 않은 거대한 국가권력과 장악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사소한 정치=군사기계 사이의 대치에서 생겨난, 모든 점에서 부조리 이외에 없는 병적인 드라마라는 핵심을 응시하고 있다.'


     - 가타리. 『자유의 공간을 향하여』. 아우토노미아 총서3; '집단적 멜랑꼬리의 메아리처럼'(pp.70∼71)에서...

2001/09/12...



* 전쟁에 대하여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론]에서,
전쟁을 두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적의 타도(打倒)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과
다른 하나는 '단순히 국경지대에서 몇몇 지역의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으로 구분한다.

전자의 전쟁은 적을 정치적으로 격멸하거나 단순히 방어불능의 상태로 만들어서 아측에 유리한 평화를 강요하는 것이며,
반면 후자의 전쟁은 적 지역을 점유하거나 점령한 지역을 유용한 교환수단으로 하여 평화협상시 활용하는 것이다.

또한 전쟁에 대해 정의하면서 전쟁에 대한 난해한 정론적 정의보다는 전쟁의 요소, 즉 양자결투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확대된 양자의 결투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면서
이들 '양자의 당면 목적(전쟁의 목적)은 적을 타도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추가적인 저항도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전쟁은 我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적을 강요하는 폭력행동이다.'라고 정의한다.

또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성격과 관련해서
1. 적대감정 및 의식에서 연원된 맹목적 본능의 폭력성
2. 확률과 우연의 게임의 성격
3. 순수한 이성의 영역에 속한 정치적 도구의 성격

이 세가지가 삼위일체를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 대한 명확하고 필수적인 관점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전쟁의 핵심적인 본질은
'전쟁이란 다른 수단들을 가지고 행하는 정치와 다를바 없다'라고 말한다.
즉, 전쟁은 도구적 성격을 띤 정치의 한 도구라는 명확한 해석과 관점을 제시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은 다른 수단들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며,
'전쟁은 정치적 행위일뿐만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도구이며,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추구이다'라고 말하면서,
'전쟁의 가치는 정치에 의해 결정되며 정치는 전쟁을 합리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사유 끝, 즉 전쟁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자신의 [전쟁론] 마지막 구절에
'불가능한 것을 구하기 위해 가능한 것을 희생시키는 사람은 바보이다.'라고 쓴다.



* 푸코(Foucault)에 의해 정리된 전쟁에 대한 생각들을 보면,
먼저 블랭빌리에의 사유를 푸코는 가져온다.

-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불랭빌리에(1658∼1722)는 역사-정치적 분석에서 전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분석들에서 전쟁에 부여된 우위성은 사실은 전쟁관계에 부여된 우위성이다. 즉 전쟁을 사회의 일반적 분석지표로 사용하기 위해 불랭빌리에는 전쟁에 대한 세가지 연속적 혹은 중첩된 일반화를 시도한다.

1. 전쟁은 법을 중단시키고 그것을 뒤흔드는 단절의 에피소드이다. 즉 전쟁은 역사를 단순히 뒤흔들거나 중단시킨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뒤덮어 버린다.

2. 전쟁이 한 사회체에 자국(흔적)을 남기는 것은 더 이상 '침략'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군사제도의 교대(변화)를 통해 모든 민간 질서에 전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즉 전쟁은 전쟁을 하는 방식으로서 전쟁이고, 전쟁을 준비하고 조직하는 방식으로서의 전쟁이다. 무기의 분배와 무기의 성격, 전투기술, 군인의 모집과 봉급, 그리고 군대로 귀속되는 세금등으로 이해되는 전쟁. 더 나아가 전쟁은 무기의 일반 경제학이고, 한 특정한 국가 안에서 무장된 사람들과 무장해제된 사람들의 경제학이다.

3. 전쟁은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강해졌으며 누가 약해졌느냐의 문제이다. 즉 강자는 약자가 되고 약자는 강자가 되는 순간부터 새로운 대립과 분열, 새로운 배분이 있게 된다. 여기서 블랑빌리에는 전쟁관계를 모든 사회적 관계 안에 집어넣었다.

따라서 블랑블리에에게 있어서 전쟁은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개념이고 특히 역사적 담론으로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 된다고 푸코는 말한다. 더 나아가 (푸코는) '전쟁이 결국 역사적 담론의 진실의 모태였다'라고까지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를 전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때 전쟁은 담론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역사적 담론과 참조대상이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고 이 담론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담론은 전쟁에서부터 시작되고 전쟁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푸코는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지속되는 정치'에서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으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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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위기와 전쟁

2007/01/19 15:24
[2002.09.13.]
* 97년부터 2001년까지 블레어 총리 내각에서 각료를 지낸 모 몰램 전 장관은 5일일간 가디언 기고문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의 진짜 목적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를 확보하는 것이며, 또한, 이라크는 위협이 되지 않으나 조지 W.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중동지역 장악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신문 2002/09/07 국제면에서 발췌)

* 윤소영은 금융세계화에서 3가지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금리와 환율과 유가라고 말한다. 금리는 추측가능한 계산이 존재하나 신뢰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환율과 유가는 그 변수의 다양함으로 인해 추측이나 계산이 불가능하다.(윤소영,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 공감) 중요한 사실은 위 3가지 중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현실 자본주의는 그 생명력을 다한다는 사실이다.

* 석유위기는 석유의 공급제약과 가격불안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석유공급의 제약이라는 측면은 농경문명시대와 구별되는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고유한 문제제기이다. 기계제 대공업은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원료를 에너지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석유위기는 미국 헤게모니를 특징짓는 현대적 생활양식(마이홈, 마아카; 미국의 냉난방은 세계적으로화려한 수준이다)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겨레 신문, 가라사니 2000, 9, 22에서 윤소영이 쓴 칼럼에서 발췌)

* 따라서 네그리가 '제국'에서 말하는 '비물질적 노동의 전개 속에서 표현되는 생태적 투쟁(ecological struggle), 즉 생활양식에 대한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의 새로운 생산'은 유의미한 대안적 투쟁이다.(제국 pp. 357-361 참고) 이 사유는 가타리의 '세개의 에꼴로지'와 '새로운 에꼴로지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세개의 에꼴로지는 생태/정신/사회 에꼴로지를 말한다. 가타리는 새로운 에꼴로지민주주의를 지성, 연대, 협의, 책임윤리와 같다고 생각한다.(가타리, 아우토노미아 총서3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향하여 pp. 166-197 참고)

* 현재 자본주의 문명을 움직이는 에너지원은 화석원료이다. '문명론'적 입장에서 보면 자연자원의 문제는 '근대시작'의 문제이다. 근대정치는 '인간중심의 정치'라는 사실에 핵심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문제는 멜서스의 '자연자원의 절대적 한계'라는 문제의식과 맞닺아 있으며, 생태계의 문제와 그 생명를 같이 한다. 부르조아 정치는 '지구라는 구명보트'를 구하기 위해 리후회의를 작동한다.


* 미국자본주의가 붕괴하면 남한과 같이 자연자원이 거의 전무한 나라는 야만의 시대가 온다. 상상해보라! 식량과 석유가 공급되지 않는 세상을...

* 따라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자국 자본주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추접한 발악이다. 911테러에 관한 음모설(미국과 이슬람 지배계급간의 자작극)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유이다.(티에리 메이상, 류상욱 옮김, '무시무시한 사기극', 시와사회; 장 샤를르 브리자르, 박언주 옮김, '빈 라덴, 금지된 진실', 문학세계사 참고)

* 석유가격이 제가격이어야 미국이 유리하다. 따라서 미국은 온건파 이슬람을 키워서 강경파 이슬람 죽이기를 작동해 왔다.

* 역사적 자본주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국자본주의와 현재의 미국자본주의는 다르다. 영국헤게모니 시대에는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개인적/민족적/국가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제국주의 전쟁이 필연적(1,2차 세계대전)이다. 그러나 미국헤게모니 시대의 현실 자본주의는 법인 자본주의이다. 이것은 국가자본주의와는 다르게 국가를 넘나들 수 있는 초국적(초민족적)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초국적 자본으로 인해 제국주의 전쟁은 사라진다. 왜냐면 주식등으로 인한 상호투자 관계로 서로 간 대결이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자본이 붕괴하면 일본자본이 붕괴하고 영국자본이 붕괴한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이것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워싱턴 콘센서스(플라자 합의)이며, 이것은 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파운드와 엔화율을 조절하는 정책이다. 쉬운 말로 미국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 유럽자본의 조절과 양보를 말하는 것이다.

* 현재의 위기는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의 이윤율 하락의 위기이며 상쇄기회를 찾지 못하는 위기이다. 새로운 재생산 메커니즘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새로운 헤게모니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초국적 자본의 투자는 없는 상태이다. 자본 재생산의 위기인 셈이다.

* 따라서 미국의 위기는 초국적 자본의 위기이다. 초국적 자본은 전세계 자본의 80%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반미투쟁'은 초국적 투쟁과 국제연대라는 차원에서 유의미하다.

* 현재의 투쟁은 '위기'를 안고 '조직'해야하는 문제이다. 인류는 위기에서 항상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다. 평화로움과 안정에는 새로운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고난속에서 피는 꽃이야 말로 진짜라고 사유한 힐더린의 사유와 맞닿는 지점이다.(문학적 상상력의 사회화!) '위기'시대에 등장하는 '자생적 질서'는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꼬뮨'이나 '(동학)집강소'등을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생적 조직만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뛰어 넘어야만이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 우리는 그 힘과 조직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윤수종의 '다면적 주체성의 실현이 가능해 지는 사회=공산주의'의 한계지점이다.(윤수종, '소수자운동', 민주주의와 인권, 518연구소) 코뮨들의 일상적 다양성을 만들어 가면서 권력을 해체하는 투쟁과 이로 인해 사회의 지형도를 넓히고 확보하는 투쟁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의식이나 새로운 폭발력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
따라서 새로운 구성의 정치와 더불어서 끊임없는 봉기의 정치(해체의 정치)를 사고해야 한다! 비약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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