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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5/31 응시
  3. 2010/05/27 [레비나스] 레비나스와 고통의 윤리학
  4. 2010/05/25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 2010/05/09 길은 복잡하지 않다
  6. 2010/05/07 [만화] 내가 살던 용산
  7. 2010/04/26 악마와 성찰
  8. 2010/04/21 2010. 4. 21. 대검찰청
  9. 2010/04/21 [진실위원회] 이거 하믄 뭐한다우?
  10. 2010/04/12 진실은 남이 볼 때 비웃음이다
  11. 2010/03/01 [山色] 바쁜 몸은 죽고 나면 그만이지만 분주한 마음은 끝나지 않으니
  12. 2010/02/25 [금강경]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한결같아 흔들리지 말지어다
  13. 2010/02/19 깊은 용서 (1)
  14. 2010/02/17 [금강경] 사람이 깨어 있을 때는 전체로 깨어있고
  15. 2010/02/08 [반야심경] 큰 지혜의 완성에 대한 핵심적인 가르침
  16. 2010/02/02 임금삭감을 반대합니다
  17. 2010/01/25 새 아침의 기원 (1)
  18. 2010/01/18 [이현상/박헌영]조선의 혁명가 (1)
  19. 2010/01/04 2010년을 시작하면서
  20. 2009/12/31 2009년을 보내면서
  21. 2009/12/14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22. 2009/11/30 [김훈] 공무도하 (1)
  23. 2009/09/24 [서경식] 생명은 선이고 죽음이 악이다?
  24. 2009/09/04 [고백] 동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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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2009/07/29 [김현진] 자기 꼬셔줬으면 하는 소리지 (7)
  29. 2009/07/28 [바다]세월이 흐르듯 사랑도 그렇게...
  30. 2009/07/10 [단가] 사철가 (조상현)

[수경스님] 다시 길을 떠나며

2010/06/15 16:55

다시 길을 떠나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먼저 화계사 주지 자리부터 내려놓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은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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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

2010/05/31 23:34

자기 내면의 두려움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진짜 일을 할 수 있다.

 

2010. 5. 31.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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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와 고통의 윤리학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inerva.asp?clip=C&idx=170&page=1&src=email&kw=000045

 

아우슈비츠와 레비나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독일에 유학하여 후설의 현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하이데거의 존재론 탐구에 열정을 쏟은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교수가 된 평범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나의 가족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렇다. 레비나스는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었고, 포로수용소에서 2차 대전을 보낸 전쟁 피해자였다. 그에게 있어 죽음과 고통은 관념 따위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실재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그의 철학이 그토록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죽음의 복마전을 힘겹게 건너왔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사역 당시 숱한 구타와 굶주림을 경험해야 했다. 그와 다른 수감자들에게 피로란 한결같이 따라다니는 멍에와도 같았다. 레비나스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피로해지면 삶의 의욕을 잃기 쉽고, 또 다시 피로가 더해지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를 레비나스는 ‘존재가 오그라드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렇듯 육체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일을 해야 했던 수감자들은 이미 인간성을 잃고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나치와 히틀러 그리고 전쟁 가해자들은 그렇게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경험을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의 고통, 나아가 인류 보편의 고통으로까지 확장시켜 타인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철학을 전개한다.


고통의 윤리학

그간 서양철학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그리 깊은 성찰을 보여주지 않았다. 성찰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통이 ‘더 나은 선을 이룩하기 위해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설파하는 것에 그쳤다. 칸트는 고통이 전제된 이후라야 진정한 쾌락이 올 것이라 하였고, 니체는 성장을 위한 발판인 고통에 동정을 보태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다르게 말한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고 쓸모없는 경험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이성으로 고통을 파헤치려는 행위는 보여주기 토목공사만큼이나 무의미한 삽질로 보일 뿐이다. 단지 고통은 우리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며, 감당하지 못할 질료이고 고통을 종합하는 우리 감성은 그것을 수용해 낼 능력이 없을 뿐이다.


고통을 받은 인간은 그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하기 쉽다. 이는 주체적으로 미래를 건설하려는 의지 자체를 상실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의지 혹은 그에 관한 계획은 자신의 미래를 긍정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이러한 능동적 활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저 ‘당하는 것’이고,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고통을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이라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 없이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타인에게 고통 받고, 사회구조에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레비나스의 말대로라면 우린 그저 고통의 순환에 몸을 맡기고 존재의 오그라듦 속에서 한없는 쭈구리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아니다. 레비나스는 되려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해괴한 소리를 하는 레비나스의 저의는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고통의 무의미성은 현상으로서의 고통 그 자체였을 뿐이다. 윤리가 존재론적인 것보다 선행하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의 근거가 된다고 믿는 레비나스는 고통을 윤리와 직결시키고 나서야 의미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작업은 고통을 단순히 정당화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것을 현상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고통의 윤리학을 생성시키는 것이었다.


고통의 쓸모있음

옆에 있던 누가 나를 때렸다고 치자. 무방비로 가격당한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아!’하고 신음소리를 낼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렇듯 고통과 대면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표현을 하고 더 나아가 타인에게 호소의 메시지를 보낸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고통과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이런 관계의 열림은 실행에의 직결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기에 레비나스는 이 열림을 ‘절반의 열림’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 고통과 열림의 순차적인 고리에서 윤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일 때, 또 그의 찡그린 얼굴에서 고통을 발견하고 난 후라야 비로소 연민, 존경, 행복이란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 고통은 철저히 무의미한 현상이고, 극도의 고독이지만 그것을 통해 관계성이 열린다는 데에서 다른 역설적 의미가 발생시킨다.


물론 우리는 타인 정확히 말하면 소외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인생은 살아진다. 하지만 그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주체의 주체됨은 타인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구성된다. 우리의 존재가 고통의 심연에 내던져져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속죄하고 그것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진정한 주체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21세기 창조의 시대에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는 것으로 바꾸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 필요하다면 말이다.  

[작성자 : NILNILIST (nilnilist@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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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2010/05/25 09:26

2010. 5. 23. 봉은사 법회에서 도올 김용옥은

'동서남북 회통의 깨달음 -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난 동영상으로 보았다

 

도올 김용옥은,

99마리 양떼무리에서 홀로 떠나는 한마리 양의 기쁨(도마복음)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가름침대로 사는 삶은 '떠나는 자, 방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는(숫파니파타)' 지혜가 필요한 시대이며

무리에 휩쓸려 살다보면 '타락한 인간'만 남게 된다고 경고한다

또한 인간이 백년을 사는 것보다 하루라도 깨인 날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용옥의 강의를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말빨이 서는 사람이고 알아먹게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다.

 

대학교수, 박사, 전문가들, 그들에게 김용옥처럼 '시정잡배와 같이 거침없는 목소리로 지성을 노래하라'고 말하고 싶다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약삭빠르게 엎드려서 눈치만 볼 줄하는 거짓 지식인들에게 말이다

고귀한 언어로 온 몸을 장식하여 몸짓과 말이 어색하고 둔해져 버린 지식인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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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복잡하지 않다

2010/05/09 21:30

이갑용, 2010, [길은 복잡하지 않다], 철수와영희. 

일독을 권한다

노동운동의 허물과 거짓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때 그때 달라지는 헷갈리는 현장과 자본가들의 세련된 탄압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의 계급적 자각'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타협하지 않는 원칙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최근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 김예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에 이어, 이갑용의 [길은 복잡하지 않다]라는 책을 읽었다

모두 읽고 보니 같은 점이 있었다

이 책들의 글쓴이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고백하고 있다

조직 내의 '의리'를 이유로 숨겨진 사실, 말하기 힘든 분위기 깨는 사실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 그런 거지 머~'라는 일상적 대답에 철퇴를 가하고 있다

 

김예슬은 대학의 가치가 헛 것임을 깨달고 인간과 나눔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김용철은 삼성재벌의 엄청난 불법과 타락을 고발하고 시민의 의식개혁이 필요하다고 깊히 있게 말하고 있다

이갑용은  노동운동의 깊은 파도와 거친 싸움, 그리고 내부의 어처구니 없는 노동운동가들의 이중성을 고백하고 '지난 10년 동안 퇴화된 싸움의 근육'에 새로운 피가 흐르기를 갈망하고 있다

  

김예슬의 대학거부 선언에 교수와 지식인들이 꼼짝 못하고 뻘쭘해 있고

김용철의 삼성범죄 고백에 삼성과 권력이 무시하고 있고

이갑용의 민주노총의 허물과 노조관료들의 이중성에 대한 발언에 가짜 활동가들이 침묵하고 있다

사실 뻘줌하고 무시하고 침묵하는 자들은 엄청 쫄아있을 것이다

음지와 어둠을 좋아하는 자들의 신체적 특징이다.

햇볕을 증오하는 뱀파이어 같은 자들. 사회적 흡혈귀들.

 

정치인이나 유명인들의 핑게나 다름 없는 자서전 말고,

자신의 기득권을 생각치 않고 삶의 중심을 관통하는 이런 진지한 고백과 성찰이 절실하다

먼저 고백한 김예슬, 김용철, 이갑용에게 깊은 인간적 연대와 배움을 얻는다

나같이 경험이 미천하고 삶이 흐트러진 사람에게는 이들 모두가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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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내가 살던 용산

2010/05/07 17:52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신성식, 앙꼬, 유승하 만화, 2010, [내가 살던 용산] , 보리.

 

- 만화를 읽고 사건을 파악한 결과, 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은 아래와 같다.

 

2009. 1. 20.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사건은,

사건이 발생 했던 때가 공권력의 사용을 피할 수 없고 상황이 다급했다 하더라도

국가기관에 소속된 경찰이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민간인이 시위현장에서 자위적인 위력행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살해하거나 사망하는 것을 방기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야만적 행위로서,

임의 박탈이 금지된 헌법상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한 것이 명백하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빼앗거나 인신을 구속하는 처벌을 할 경우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하나,

이 사건의 가해 경찰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책임은 당시 경찰을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었던 국가에까지 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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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성찰

2010/04/26 11:15

- 김용철, 2010, [삼성을 생각한다], 사회평론. ; (  )는 쪽수.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악도에 살고 있음을 깨달고 성찰하지 않으면

나도 이 악마와 한편이 되거나 작은 악마가 될 것이다. 

 

회사가 붙잡고 싶어 하는 우수한 인재일수록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다. 반면 다른 일자리를 얻기 힘든 사람일수록 회사에서 윗사람에게 아부하며 자리를 지키려 든다. 회사가 임직원을 일회용 소모품처럼 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때, 우수한 인재들이 먼저 회사를 떠나게 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188)

 

이건희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게다. 그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묶어주는 끈은 혈육간의 정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을.(235)

 

정치적 영향력은 탐나지만, 정치인 개인의 권력은 십 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게 언론재벌이다. 영속적인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242)

 

현실이 절망적이라는 게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다 그런거지"라는 체념과 냉소 속에서 부패는 관행이 되고, 결국 거스를 수 없는 구조가 된다. 지금이 그런 상태다.(386)

 

"이용훈 대법원장은 신영철 대법관을 늪에서 빼내는 대신 사법부 전체를 사지(死地)로 내몰았다"는 이야기가 법조계 주변에서 나왔던 것도 그래서다.(387)

 

대법원당의 반성은 그저 과거사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 꿈틀대는 권력 앞에서는 옛날 버릇 그대로였다. 대법원장은 촛불집회 재판에 개입한 법관을 비호했고, 삼성사건 심리에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대법관을 배제하려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사과문을 발표한 지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루어졌다.(388)

 

삼성에 대한 입장은 재벌 친화적인 우리 사회 주류의 가치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통한다. 삼성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는 "나는 반(反)기업적인 법조인이요"라고 선언한 것과 같다. 그런데 대형 로펌에서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변호사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재벌 계열 대기업들이다.(389)

 

군사정권 시절에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했다면, 이제는 '반(反)기업적'이라는 낙인을 모두들 겁낸다.(389~390) 현직 판,검사들 역시 변호사 개업 이후를 대비해서 재벌에게 '반기업적'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몸을 사린다. 언론 역시 재벌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 분주하다.(390)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들이 보이지 않는 그물망으로 단단하게 묶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그물을 쥐고 있는 것은 재벌이다. 이게 현실이다.(391)

 

아무리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는 견고한 주류 질서. 그것을 지탱하는 힘은 끈적끈적하고 촘촘하게 엉켜 있는 인맥이다. 검사시절, 법조 비리를 수사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연루된 자들이 모두 특정 학교 동문이었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복잡하게 얽힌 인맥은 불법도 합법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391)

 

친분 있는 선후배를 돕기 위해 법과 원칙을 무시하는 경우에 대해 죄의식을 갖기는 커녕 '남자다운 일', '의리있는 행동', '통 큰 배짱' 등으로 여기는 일도 흔하다. 공식적인 법질서보다 사적인 관계가 우선하는 사회인 셈이다.(392)

 

검사 후배를 두지 않는 사람, 검사 친척이 없는 사람들만 억울해진다. 물론, 많은 이들이 검찰에 '끈'이 있으면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꽤나 견고한 것이어서, 너도나도 검찰에 '끈'을 만들려고 한다.(392)

 

부패한 재벌 총수들에게 관대한 법은 대체로 서민에게는 가혹한 법이다. 단 한 명도 구속되지 않았던 삼성 비리 사건과 당사자 전원이 구속됐던 용산 참사 사건을 비교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393)

 

미네르바, YTN 노조 위원장, [PD수첩]제작진을 체포한 검찰의 행태는, 과거 군사정부 시절 공안검사들이 한 짓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396)

 

[PD수첩] 수사는 미국산 쇠고기 관련 정책을 다뤘던 정운천 전 농림부 장관의 소송으로 시작됐다. 이 수사는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보복"일 뿐, 그 외에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은 명예훼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제정신을 가진 검사라면, 정 전 장관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하는 게 당연하다.(397)

 

검찰은 다시 과거 공안검찰 수준으로 돌아갔다. '죽은 권력'을 물어뜯기에 급급했지,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는 몸을 사렸다. 그리고 영속 불변하는 권력, '죽지 않을 권력'인 재벌에 대해서는 한없이 비굴해졌다.(402)

 

검사를 사직하였다 하여 이미 벌을 받은 양 더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이는 정말 말이 안 된다. 사직함으로써 중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고 경력 변호사로서 돈을 벌며 종신토록 차관급에 해당하는 연금을 받으니 축복받은 일일 뿐이다. 부패한 자의 안락한 삶을 평생 보장한다면 범죄자에 대하여 사회보장이 잘되어 있는 비정상적인 나라가 아닌가.(406)

 

(용산 참사 사건) 당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에는 2009년 1월 참사 현장에서 아버지가 사망한 경우가 있다.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 거꾸로 아버지를 죽였다고 기소된 셈이다. 통상적인 재판에서라면, 이런 경우 설령 혐의가 인정된다고 해도 실형이 선고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감경 사유로 보는 것이다. 법원은 이런 상식을 무시했다. 그뿐 아니다. 재벌 비리 사건 재판에서는 온갖 명목으로 이루어졌던 작량감경이, 용산 참사 재판에선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408)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에 대한 재판에서는 한없이 관대했던 법원이, 가장 힘없고 연줄도 없는 이들에 대한 재판에서는 끝없이 가혹했다.(408)

 

법원이 권력의 눈치를 보고, 돈 많은 자들의 편을 들었던 역사가 워낙 오래됐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사법부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410)

 

무턱대고 권력자들에게 끈을 대고 억지 친분을 쌓으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데 억지로 친한 척하는 것은 영혼을 녹슬게 할 뿐이다.(412) 평범한 이들까지 '마당발'을 동경하게 된 한 원인은 허술한 사회안전망이다. 개인의 삶이 위기에 닥쳤을 때,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는 구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412)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는 편인 이건희, 김인주 등이 광범위한 로비를 통해 한국 사회를 제멋대로 흔들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보통 사람이 아무리 친화력이 좋다한들, 돈으로 인맥을 산 자들을 당해낼 수는 없는 일이다.(413)

 

자신이 속한 집단 구성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게 꼭 옳은 일은 아니다. 조직의 이익과 사회 정의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414) 우리 사회에서는 소속 집단에서 인정받는 것만을 중시하는 분위기 탓에 옳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동료 및 선후배들에게 좋은 평가만 받으면 된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인맥을 통해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은 까닭에, 자신이 속한 인맥 그물에서 떨어져나갈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414)

 

조세 투명성이 낮으니, 지하경제만 번창한다. 대표적인 게 룸살롱이다. 그리고 공권력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으니, 다들 권력층에 줄을 대려고만 한다. 이들이 끈끈하게 어울리는 곳은, 역시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다. 마음에서 우러난 교제가 아닌, 억지 친분을 쌓으려면 술과 접대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끼리 폭탄주를 주고받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법과 질서는 기득권층에게만 유리해진다.(420)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병역을 회피하고, 세금을 탈루하는 나라가 튼튼한 안보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인류역사를 아무리 샅샅이 훑어도 이런 사례는 없을 게다. 이건희 집안 사람들에게 병역 등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세금 제대로 내고,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래서 국가의 안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424)

 

부패와 비리는 곰팡이와 같아서 햇볕 아래 드러나는 순간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령 권력이 양심고백한 내용을 덮어버린다고 해도,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일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늘어나면, 권력이 비리를 덮어버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444)

 

권력층이 부패한 사회는 힘센 자가 아무런 견제 없이 횡포를 부리는 무법천지일 뿐, 우파의 이상도 좌파의 이상도 될 수 없다. 부패를 막는 문제는 좌-우 이념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동시에 좌파도, 우파도 끊임없는 감시와 성찰이 없다면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시민이 부패에 맞서는 장면을 꿈꾼다. 반(反)부패시민혁명에 관한 염원이다.(446)

 

삼성 비리 관련 재판 결과가 나오자, 이런 목소리에 "역시나"하고 힘이 실렸다. 이들은 말한다.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고. "질 게 뻔한 싸움에 뛰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내 생각은 다르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448)

 

 

- 김예슬, 2010,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느린걸음. ; (  )는 쪽수.

 

내가 학생운동을 하고, 그 시간 동안에 어울렸던 모임에서

단 한명의 대학거부자 또는 그런 선언을 하지 못한 것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단 한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도 없었던 것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내가 학교를 싫어했지만 대학을 거부하지 않았고,

내가 군대를 꺼려했지만 병역을 거부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의 사상과 가치관은 내 삶과 내면에 깊숙히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가 너무 부족했음을 고백한다.

참으로 부끄럽다.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국가야말로 일정한 봉급을 보장 받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 기업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 맞지 않은가?(47)

 

그리하여 내 몸으로 하지 않는 것조차 내가 안다고 믿게 하며, 그런 자신을 지식 엘리트라고 착각하게 한다.(58)

 

아이는 유아방과 유치원과 학교에 맡기고, 아이들의 대화상대는 TV와 컴퓨터에 맡기고, 가사는 도우미에게 맡기고, 옷과 생활도구는 마트와 백화점에 맡기고, 영혼은 제도 종교에 맡기고, 건강은 병원에 맡긴다. 이 체제는 온전한 것을 갖고 태어난 인간을 매일 매일 불구자로 망가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59)

 

'탐욕의 포퓰리즘'(60)

 

시인과 작가가 되려고 해도 문예창작과를 나와야 한다. 사진을 찍고 싶어도 사진학과를 나오고 유학을 가야 한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삶을 바치고 싶어도 사회복지학과를 나오고 자격증 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요리를 하고 싶어도 비싼 돈을 들여 무작정 대학가서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알바해서 이탈리아, 프랑스 유학부터 가야 한다.

(중략)

시에 대한 순수한 정신도, 다규멘터리 사진에 대한 사명감도, 가난한 이를 섬기는 자발적 친절도, 아픈 사람에 대한 치유와 정성도, 법에 대한 정의감도 생기기 이전에 들인 돈부터 뽑아내야 한다는 계산이 먼저 작동하지 않겠는가?(64)

 

알기는 하는데 느끼지는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85)  불안과 실존의 문제를 키에르케고르 책에서 발견하게 하면서, 정작 살아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불안한 가슴과 포개지는 실천과 경험은 지나쳐 버린다.(85)

 

지식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삶과 실천의 흡수능력을 넘어서는 인문학은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가난한 마음이 없다면, 그런 자기 내어줌의 실천이 없다면, 그 많은 지식과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87)

 

지금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모르는 건 없는 역설의 시대이다. 네비게이션으로 찾을 수 없는 길은 없으나 나의 기억력과 야생의 본능은 사라진 것처럼. 가난한 이들 속에서 세끼 동냥으로 밥을 얻어 먹고 지붕 있는 집이 아닌 나무 밑에서 수행하고 잠자던 혁명가 붓다를,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불교 대학을 나와 성직자 옷을 입거나 대학 교양과정의 인문학을 공부하면 다 아는 듯 말할 수 있게 되었다.(87)

 

머리는 계산이지만, 가슴은 직관이기에,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머리를 잠시 멈추고 진정으로 내 가슴이 부르짖고 있는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자.(95)

 

제발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 주십시오. 당신의 몸을 빌어 왔지만 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성하고 고유한 존재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이를 위해 '좋은 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100)

 

우리 젊은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부모산성을 뛰어 넘어야 한다. 부모의 사슬도 사슬은 사슬이다. 자신의 눋 날개를 얽어 맨다면 사랑의 사슬도 사슬이다.(101)

 

거짓고 더불어 제 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친 듯이 사는 쪽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115)

 

나는 먼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것이다. 주관적 바람이나 희망를 섞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볼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직시할 것이다. 거짓 희망의 말들에 속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 버린 것은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서 이기에. "억압 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 상처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117)

 

자기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건강법을 익힌다.

지감각을 되살리고 민감한 감성으로 / 절정체험의 순간을 느낀다.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사는 법을 익힌다.

우정과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 슬픔과 고통을 다루는 삶의 기술을 배운다.(119)

 

억지로 하지 말고 자유롭게 하되 / 서로의 약속을 지키고 사람으로서 '안 되는 건 안된다.'(120)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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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1. 대검찰청

2010/04/21 15:03

 

 

{그림 출처] daum 아고라 자유토론방

 

 

리얼리즘의 극치,  검사들 좆됐다.

  

2010. 4. 20. MBC [PD수첩] '검사와 스폰서' 방송에 따르면,

부산의 한 건설업체 대표가 20여년간 검사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하였고,

성접대도 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은 들은 사람들은 그날 밤, 대검찰청 홈페이지로 몰려들었다.

 

아랫도리을 그대로 드러낸 검사들이 헐떡거리고 있었고,

그들의 성기가 깃발이 되어 펄럭이고 있었다.

 

깃발에 그려진 중심을 본  검사들이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쥐면서

'너무 작게 그린 것 아니야~'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들은 거만하게 의자 깊숙히 앉아 자신의 힘을 느끼면서 탐욕을 부풀리고 있었다.

 

(흥,  multi-orgasm시대에 말이야~ 촌스럽게 성기섹스만 생각하는 프로그램된 로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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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위원회] 이거 하믄 뭐한다우?

2010/04/21 10:38

이직보원(以直報怨) : 원한을 바름으로 갚는다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이거 하면 할수록 참 어렵다. 벌써 이 일을 시작한지 4년이 되어가면서 노하우가 쌓이고 요령이 생길 법도 하지만, 매번 현장에서 부딪칠 때마다 쉬운 것이 없다. 특히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가지는 우리 위원회에 대한 궁금함을 질문할 때, 답하기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 중 가장 답하기 힘든 물음은 "(전라도 할머니) 이거 하믄 뭐한다우?"이다. 이 물음은 그분들의 삶의 오랜 경험에서, 또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짜증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던지는 가벼운 말일수도 있지만, 국가의 법을 지켜 일을 하는 조사관 입장에서는 함부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늦게나마 한국전쟁 전후 시기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그 동안 그 진실을 밝히기 어려웠던 우리 역사를 생각해보면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일은 전쟁의 폐허와 깊은 상처를 딛고 국가와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고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야기되고 정리되었어야 할 문제이다. 특히 전쟁 중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관한 문제는 인류의 전쟁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 경험과 기억이 생생히 보존되고 있을 때 해결해야 정상적인 일이 된다. 60년이 지나 ‘사건을 해결’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근대 이후 우리 역사는 몇가지 사실이 중층으로 복합되어 있다. 일제 강점하의 친일과 독립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사실이 있고, 외세에 의한 해방과 분단, 그리고 그 이후 남북과 좌우의 대립을 통한 상반된 국가 건설 프로그램의 진행이라는 사실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남과 북에서 ‘왜곡’된 형태로 결합되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사실들은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어렵다.

 

이 문제를 어떤 사람들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며 (가해자에 대해) 구체적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을 원통해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다 지나간 일을 지금 들추어 그 동안 근대화의 과업들을 성취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을 매도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비판하고 반대한다. 그래서 어렵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물질적 수준이나 민주주의 수준 그리고 국민 의식의 성숙이라는 점에서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생각해보면, 좌우 대립의 피비린내 위에서 쌓아올린 이 성숙함 위에서 혹시라도 과거의 ‘왜곡’이 있으면 그것을 푸는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치적 견해와 사상을 달리 한다는 이유로 암살과 불법적인 폭력, 학살, 고문이 일상화된 시대를 돌이켜 볼 때, 지금의 사회적 갈등과 충돌은 그 피비린내 나는 시절과 비교해서 꽤 성숙(?)된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아직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제공되는 보수와 진보라는 말의 사용이 왜곡되게 이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이후 진행된 불법적인 폭력과 학살을 제대로 밝혀 국가의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오히려 ‘보수’에 가깝고, 인류적 삶에 주목하면서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는데, 일부 언론매체와 어르신들이 잘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제 "이거 하믄 뭐한다우"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원한을 덕으로써 갚는다면 어떠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면 은혜에 대하여는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되물으면서 ‘원한은 곧음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지금 우리에게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以德報怨)’는 명제는 사실 아직 요원한 이상세계이다. 우리 모두의 실력이 그렇다. 그렇다고, 대립과 원한을 확대하고 반복하는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다(以怨報怨)’는 발상은 우리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원한을 바름으로 갚는다(以直報怨)’는 생각이 알맞은 것 같다.

 

공자의 지혜를 빌려 할머니의 물음에 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올곧게 진실을 밝히는 것이 통합과 일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올바름(直)이 원(怨)을 해결하는 지혜를 얻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런데, 공자의 지혜를 할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그래서 참 어렵다.

 

- 2010.4.21. 새벽. (위원회 소식지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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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남이 볼 때 비웃음이다

2010/04/12 12:51

바로 이것이다 이게 옳다 확신할 때

과감히 버리고 한발짝 더 나아갈 때

그때가 수행이다

진짜 진보이다

진실은 남이 볼 때 비웃음이다

비웃음 받을 때 잘하고 있다는 댓가이다

그 이상은 없다

언제든 연락해라

 

[ 4. 9. 밤 11시에 받은 문자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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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길에, 지리산 피아산방에서 돌배주 한잔 마시고 떠나는 길에 김병관님에게 책을 받았다

짙은 밤, 구례로 나서는 나에게 그는 '지리산처럼, 꿋꿋하고 의연하게 --~~'라고 책에 써주었다.

일독하고 삼배를 올렸다.

 

바쁜 몸은 죽고 나면 그만이지만 분주한 마음은 끝나지 않으니, 그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가서 다시 태어나며, 다시 바쁘다가 다시 죽으니, 죽고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나고 죽도록 정신이 아득하고 혼미한 것이 마치 술에 취한 듯 꿈을 꾸는 듯 하명 백겁百劫 천생千生을 지낼지라도 벗어날 기약이 없다. (39)

 

날쌘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내달린다. 송곳이 살갗에 꽂혀서야 알아채는 것은 둔한 말이다. (90)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은 호흡하는 사이에 있다" 하셨다. (92)

 

고인의 명훈明訓에 "오늘도 이미 다 지나갔으니 목숨도 따라서 그만큼 줄어들었다.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하라" 하신 말씀이 있다. (99)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고 열반의 즐거움을 누림이여! (101)

 

마음의 변덕이 죽 끓듯하여 (150)

 

뜻이 지극하고 공력이 깊어지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득 삼매에 들게 되니, 이는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사람이 비비는 작업을 멈추지 않아야만 불꽃이 일어나며, 쇠를 단련하는 사람이 담금질을 쉬지 안아야만 강철을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153)

 

결정심(처음에는 의심하지 않는 '결정된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용맹스러운 정진 - 한결같은 서원과 불러서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 (156)

 

그래서 옛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없애고 마음은 없애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없애고 경계는 없애지 않는다" 하신 것이다. (162)

 

옛말에 "예는 의義로써 행하는 것이 옳다"하였으니 (205)

 

 

- 운서 주굉 지음, 연관 옮김, 2005, [산색山色  - 죽창수필 선역], 도서출판 호미. ; (  )는 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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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즉비를 통해서 삶을 보라고 합니다.

즉비卽非란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곧바로 공空으로 환幻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를 동반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실체가 없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리면 마음이 열립니다. 우리가 매순간 삶의 모습을 즉비로써 지켜보면, '집착할 만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16)

 

[금강경 풀이]

 

1. 법회가 열리고

2. 수보리장로께서 묻고

3. 대승의 바른 가르침은

4. 미묘한 활동은 얽매임이 없고

5. 이치에 맞게 참되게 보나니

6. 바른 믿음은 드물고

7.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고

8. 법에서 의지해서 나오니

9. 하나 된 모습에는 모습조차 없고

10. 정토를 장엄함은

11. 조작 없는 복의 뛰어남은

12. 바른 가르침을 존중하기를

13. 법답게 받아 지니니

14. 상을 떠난 고요함은

15. 경을 지니는 공덕은

16. 끝내 자아는 없고

17. 한 몸으로 함께 관하니

19. 법계가 전체적으로 변함은

20. 몸과 상호를 떠나서

21. 말도 말의 대상도 아니나니

22. 법에는 얻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23. 마음을 밝히고 착한 일을 함은

24. 복과 지혜를 비유할 수 없으니

25. 교화하나 교화의 대상은 없고

26. 법신은 모습이 아니니

27. 소멸해 없어진 것도 없으니

28. 받지도 않고 욕심내지도 않고

29. 품위와 거동이 고요하고 고요함은

30. 하나로 합쳐진 이치의 세계는

31. 생각으로 헤아림은 일어나지 않고

32. 응신, 화신은 참되지 않고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한결같아 흔들리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모든 조작된 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42~43)

 

- 정화스님 풀어씀, 2005, [금강경], 도서출판 법공양. 에서 발췌. ;  (  )는 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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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용서

2010/02/19 03:15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고백하고 깊은 용서를 구합니다

 

나로 인해 치명적 상처를 입었고, 속상하고 화가 났으며, 엄청난 짜증이 밀려왔다면,

진심으로 깊은 용서를 구합니다.

나의 천박한 마음과 조급한 행동 탓입니다.

 

2010. 2. 19. 완도. 새벽 3시.

['마음을 항상 열겠다' 그래서 어떠한 것에도 화내거나 욕심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내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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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은 이 책의 서문에서 '생각을 쉰다' 라는 말을 합니다.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이 '그냥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것' 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옳다거나 그르다고 판단했던 생각을 쉬고 '생각의 흐름을 그냥 지켜보는 것', 그리고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 고 알아차려야 한다고 합니다.

 

어제는 잠이 오질 않아 뒤척이다가 밤 2시쯤 정화스님이 풀어쓴 금강경을 계속 읽었습니다.

 

'사람이 깨어 있을 때는 전체로 깨어있고' 미혹되어 있을 때는 전체로 미혹되어 있습니다. (93)

 

- 정화스님 풀어씀, 2005, [금강경], 도서출판 법공양.; (  )는 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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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지혜의 완성에 대한 핵심적인 가르침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관자재 보살께서

깊이 지혜의 완성을 닦아 나갈 때

오온이 다 빔을 비춰 보고

모든 괴로움을 건넜습니다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 그대로 공이요 공 그대로 색입니다

수와 상과 행과 식도 또한 그렇습니다

 

사리자여,

모든 법의 빈 모습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고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안의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안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계도 없고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얻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리살타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고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까닭에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통한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견줄 데 없는 뛰어난 주문으로

모든 괴로움을 다 없앨 수 있으며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했습니다

 

바로 주문을 말하겠습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깨달음으로,

함께 사는 아름다움으로

아! 찬연한 빈 삶이여!

 

 

- 정화스님 풀어씀, 2005, [반야심경], 도서출판 법공양, p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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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삭감을 반대합니다

2010/02/02 00:10

임금삭감을 반대합니다

 

1. 전문위원 2010년 1월 임금이 삭감되었습니다. 전문위원이라는 직급은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위원회의 대표적인 비정규직입니다.

 

2. 전문위원의 2010년 1월 보수명세서는 1월 19일자 메일로 통보되었는데, 작년과 동일하였습니다. 1월 25일 통장으로 입금된 임금은 5만원이 삭감되어 지급되었습니다. 변경된 임금에 대한 보수명세서는 1월 29일자로 재통보 되었습니다.

 

3. 그 내역을 살펴보니 조사활동비 명목으로 지급되는 수당이 15만원에서 10만원으로 하향 조정된 것입니다. 전문위원은 시간외수당과 함께 조사활동비가 유일한 수당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전문위원 조사수당 5만원을 깍아 과/팀장의 조사활동비를 인상한 것입니다. 하위직의 수당을 깍아 간부들의 수당을 늘린 격입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4. 먼저, 하위직급으로 분류되는 전문위원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회사와 근로자간 사전 동의 없는 일방적인 임금삭감은 근로기준법 위반입니다. 노동자에게는 권리의 문제이며, 관리자에게는 상식의 문제입니다.

 

5.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하후상박(下厚上薄)이라고 했습니다. '아래쪽은 두루 베풀더라도 위쪽 정신만은 제대로 수습하며 살아야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지도자나 간부의 기본 덕목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공무원 임금을 동결하면서 직접 '특히 하위직의 고충을 위로'하였습니다. 간부들의 수당을 덜어 그야말로 사무실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무원의 임금을 인상할 일입니다.

 

6. 위원장은 2010년 신년사에서 올해 위원회를 마무리해야 하는 위원장으로서의 고뇌와 함께 조사관들의 분발을 촉구하면서 '직원 여러분들이 최적의 조건에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가능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고 약속하였습니다. 2010년 첫달 봉급을 받은 전문위원은 비참할 뿐입니다. 우리는 직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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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아침의 기원

2010/01/25 19:34

새 아침의 기원

새해에는
남 부럽지 않게 살겠다고
홀로 다짐하지 않게 하소서
좀 부러워도 하고 질투도 하면서
모자란 만큼 착실하게 살게 하소서

새해에는
신세지지 않고 살겠다고
홀로 다짐하지 않게 하소서
허점도 있고 좀 기대기도 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갚아가며 살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점 허물없이 살겠다고
홀로 다짐하지 않게 하소서
실수도 하고 때로 오점도 남기면서
늘 돌아보고 맑아지며 살게 하소서

 

* 출처 : 나눔문화 숨고르기http://www.nanum.com/nanum/soom/meditation.php?no=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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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박헌영]조선의 혁명가

2010/01/18 11:20

재작년 [이현상 평전]에 이어 올해 [박헌영 평전]을 읽었다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동지에 대한 사랑과 자애를 잃지 않았던 혁명가이고, 박헌영은 운동과 조직이 얽히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원칙을 깊히 생각하고 실천한 혁명가이다.

 

특히,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혁명가들을 안재성은 꼼꼼한 자료와 구술로 잘 정리하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미군정기, 남북한의 정부수립, 10월사건,  27사건, 43사건,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조선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실천과 생각과 고뇌를 읽을 수 있고, 중앙과 지역(지부), 정파와 (통일)전선, 이론과 실천, (운동가들의) 관계에 대해서 읽을 수 있다.

 

안재성, 2007, [이현상 평전], 실천문학사(실천문학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2009,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실천문학 역사 인물 찾기 27)

 

p.s. [박헌영 평전] 주말 동안 단숨에 읽었다. 태준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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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을 시작하면서

2010/01/04 21:44

마음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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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을 보내면서

2009/12/31 00:05

2009년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정말 빨리 지났으면 하는 한해였습니다.

그런데 2009년이 끝났습니다.

 

욕망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살아가는 삶의 가치에 대해서 깊히 되새겨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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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2009/12/14 14:12

 Primo Michele Levi, 이현경 옮김, 2007,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 ( )는 인용된 책의 쪽수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케 하리라)’ : 아우슈비츠 강제노역수용소Arbeitslager에 붙여진 문구


서경식(이 책의 작품해설)에 의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자신을 제외한 만인에 대한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장이며, ‘노동을 통한 절멸’이라는 정책이 실행되는 곳이다. 수인들의 평균수명은 고작 3개월이다. 아우슈비츠 희생자 110만~150만명, 아우슈비츠 이외의 수용소 등에서 희생된 자를 합친 총수는 600만명이 넘는다. 이들은 다양한 국적의 정치범과 전쟁포로, 집시, 동성애자, 그 외 나치가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낙인을 찍은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구제된 수인은 약 7,000명뿐이라고 한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작가이면서 증언자로서 ‘거의 법적인 차원의 증언을 펼친다. 스스로 ‘심판관 보다는 증언자 역할이 좋다’(285)고 고백한다. 이 책은 과거의 잔혹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증언이 전달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위기에 대해서도 증언하고 있다. ‘증언 문학의 고전’(331)이다.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단테 『신곡(174)


레비는 1987년 4월 11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6)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6~7)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 전통은 엄격한 의식을 규정해놓기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정념과 분노가 이제는 사그라졌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정의로운 행위가 사회에 대한 슬픈 의무의 표현인 까닭에 사형집행인도 사형수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수는 모든 외적 근심을 피할 수 있고 고독을, 또 원한다면 모든 정신적 위안까지도 보장받는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주변에서 증오나 부조한 독단이 아닌 필연성과 정의를 느끼고, 형벌과 함께 용서받음을 느끼도록 세심하게 배려된다.(14~15)


새벽이 배신자처럼 우리를 덮쳤다. 새로운 태양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적들과 결탁이라도 한 것 같았다.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난 뒤, 우리의 내부에서 요동치던 갖가지 감정들, 자포자기, 쓸모없는 반항심, 종교적 체념, 두려움, 절망감이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제어할 수 없는 집단적 광기 속으로 흘러들었다. 명상의 시간, 결정의 시간은 끝났다. 이성적은 활동은 모두 격정적인 혼란 속에서 흩어져버렸고, 그 순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집들에 대한 따뜻한 기억들이 섬광처럼 번득이며 칼에 베인 것 같은 날카로운 아픔을 안겨주었다.(16~17)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변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 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고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 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 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여행 중에 그리고 그 후에도,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우리는 평범한 인류의 표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8~19)


수용소의 은어들 중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Morgen früh', 내일 아침이다. (204)


폭탄이 시작한 작업을 인간의 작업이 완성한 꼴이었다. 해골같이 마르고 쇠약한 환자들이 누더기를 걸친 채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꽁꽁 언 땅 위로 벌레들이 습격을 한 것 같았다. 그들은 먹을 것과 불 땔 것을 찾아 막사들을 모두 뒤졌다. [……] 자신들의 내장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사방을 더럽혀 놓았고 전 수용소를 통틀어 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인 눈을 오염시켰다.(242)


수용소에는 이런 불문율이 있었다. “네 빵을 먹어라.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네 옆 사람의 빵도 먹어라.”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갖지 마라.(244)


움직이는 거라면 뭐든 좋으니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심지어 바람마저도 정지한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불 속에 누워 근육과 신경과 의지가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로 나를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처럼 무심하게 모든 것이 끝나기를 혹은 끝나지 않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249)


1945년 1월 26일, 우리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에 누워 있었다. 문명의 마지막 흔적은 우리 주위에서, 우리 내부에서 사라져 버렸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인들이 시작했던,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은 패배한 독일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263)


우리 머리 위 수천 미터 상공의 회색 그름들 사이에서 비행기들이 공중전으로 복잡한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힘없고 헐벗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가장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가락만 한번 움직이면 수용소 전체가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힘과 의지를 모두 합쳐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할 수 없었다.(263~264)


나는 증오란 동물적이고 거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만일 내가 실제로 우리의 박해자들 중 한 명을, 아는 얼굴을, 그 오래전 거짓말을 다시 마주쳤다면 아마도 증오와 폭력의 유혹에 굴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이탈리아와 외국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나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럴 때만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지만) 적을 용서하라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는 적은 더 이상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268~270)


독재국가에서는 [……] 진실은 위에서 명령한 한 가지 밖에 없다. 신무의 내용이 모두 똑같다. 모두 똑같은 진실만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 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국가(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271~272)


확실히 공포체제의 세부 사항들을 엄격하게 비밀에 부치는 방법은, 그 고통이 미지의 것이었기에 더욱 효과를 발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곳에서 이미 밝힌 대로, 자기 손으로 직접 포로들을 수용소로 보냈던 대다수의 게슈타포들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다.(274)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물론 공포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거기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독일 국민은 전체적으로 저항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시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리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결국 그리 오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하고 생각한다.(276)


고통을 덜 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279)


우리는 수용소 없는 사회주의를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실현된 일이었다. 하지만 수용소 없는 나치즘은 상상도 할 수 없다.(289)


부적절하게도 반유대주의라고 불리는, 유대인을 향한 적대감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다. 즉 그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 품는 적대감의 한 예이다. 이는 원래 동물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동물들은 같은 종이라도 다른 그룹에 속해 있는 동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은 가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닭장에 있던 암탉이 다른 닭장에 들어가면 그 닭은 며칠 동안 다른 닭들에게 주둥이로 쪼이며 거부당한다. 쥐와 꿀벌들의 세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회적 동물들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런 동물적이 불관용을 모두 용인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법률이 그것을 제한하는 데 이용된다.

반유대주의는 전형적인 불관용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거부감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접촉하는 두 그룹 사이에 눈에 뜨일 정도의 차이점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신체적인 차이(흑인과 백인, 금발과 갈색 머리)일 수도 있지만 복잡한 문화로 인해 우리는 언어나 방언, 혹은 악센트 같이 미묘한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 중 외적으로 완전히 표현되고, 옷을 입는 방식이나 행동방식 같은 삶의 방식과 공적․사적인 습관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종교라는 것이 있다. 유대 민족의 고통스러운 역사로 인해 유대인들은 거의 어느 곳에서나 이런 차이들 중의 하나를 드러내게 되었다.(292~293)

반유대주의의 본질에는 거부라는 비이성적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교가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굳어져가기 시작하던 때부터 반유대주의가 종교적인, 아니 신학적인 옷을 입게 되었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디아스포라의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또 하나는 유대인들이 사방에 존재하는 것이, 역시 사방에 있는 기독교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도처에서 형벌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죄를 저지른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영원히 증명해야만 하고,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되며, 유대인들은 박해는 받아도 살해되어서는 안 된다. (294)

히틀러는 멋진 약속을 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을 경제적 파탄으로 내몬 계급에게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묻고 그들에게 적대감을 돌려야 했으나, 히틀러는 그 적대감을 유대인들에게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1933년부터 시작해서 몇 년 동안 히틀러는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독일인의 분노와, 루터, 피히테, 헤겔, 바그너, 고비노, 체임벌린, 니체 같은 선각자들이 북돋워놓았던 국가적 자존심을 이용해 당을 하나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가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은 먼 미래가 아니라 빠른 시일 내에 독일이 지배권을 갖는 것이었다. 문화적 사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력으로 말이다. 그가 보기에 독일적이 않은 모든 것은 열등할 뿐만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었다. 독일의 첫 번째 적은 유대인들이었는데 히틀러가 독선적인 분노를 품고 밝힌 수많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다른’ 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히틀러 자신은 우상으로 숭배받기를 갈망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는 지성과 의식을 불신하고 본능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주저 없이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독일계 유대인의 상당수가 경제, 재정, 예술, 학문, 문학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실패한 화가이고 실패한 건축가였던 히틀러는 유대인들에게 분노와 좌절로 인한 질투심을 쏟아 부었다. 이런 거부의 씨앗이 비옥한 토양에 떨어지면서 믿을 수 업을 정도로 활기차게, 새로운 형태로 뿌리를 뻗어갔다. 파시스트 스타일의 반유대주의와 히틀러가 던진 말 때문에 독일 국민들에게 되살아난 그 반유대주의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야만적이었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생물학적 이론이 덧붙여졌다. 이 이론에 따르면, 힘이 없는 인종은 강한 인종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상식에 의해 수세기 전에 모습을 감추었던 어리석은 민중 신앙이 되살아났고, 쉴새없는 선전 활동이 시작되었다.(296~297)


“책을 불태우는 사람은 조만간 인간들을 불태우게 될 것이다” 독일계 유대인 시인 하이네 (298)


자살하기 몇 시간 전 구술한 정치적 유언장에 히틀러는 이렇게 썼다. “인종법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며, 전 세계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전 세계 유대인과 끝까지 싸우라고 독일 정부와 국민에게 명한다”(300)


이런 집단적인 광기, 이런 일탈은 대개 개별적으로는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런 요인들 대부분은 히틀러의 성격, 독일 국민과 그의 깊이 있는 상호작용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개인적인 망상, 증오심, 폭력 교사가 깊은 실의에 빠져 있던 독일 국민에게 걷잡을 수 없는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히틀러에게 두 배로 되돌아와 그 스스로 니체가 예언했던 영웅, 독일의 구원자인 초인이 되었다는 미치광이 같은 확신을 갖게 한 것도 사실이다.

[……] 일반적으로 히틀러가 전 인류에 대한 증오심을 유대인에게 쏟아냈다고 말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자신의 결점 몇 가지를 찾아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증오하면서 스스로를 증오했다는 것이다. 그의 폭력적인 적대심은 자신의 혈관 속에 ‘유대인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탄생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런 설명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 현상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 돌려(끔찍한 명령을 실행에 옮긴 자들도 결고 무죄일 수 없다!)설명한다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한 개인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행동의 동기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가정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을 변명하며 죄의 양이 아니라 죄의 질을 설명한다. 나는 솔직히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독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몇 진지한 역사학자들(블록, 슈람, 브라허)의 겸손함을 좋아한다.(300~301)

나치즘의 증오 속에는 이유가 없다. 그 증오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밖에 있다.(302)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공개적으로 연설을 할 때 사람들이 그들을 믿었고 박수갈채를 보냈고 감탄했으며 신처럼 경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자신들의 한 말의 신뢰성이나 정의로움을 앞세우지 않고 장황한 말로, 연극배우 같은 방법으로, 본능적으로 혹은 끈기있는 훈련과 습득을 통해 암시적으로 말을 했으며 사람을 홀리는 비밀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들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대개 비정상적이거나 어리석거나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환영을 받았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수백만의 추종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안 이런 추종자들은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던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303)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

이는 모든 경우에 적용하기엔 너무 단순한 공식임이 틀림없다. 불관용, 압제, 예속성 등을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파시즘이 이 나라 밖에서 탄생되어 살금살금, 다른 이름을 달고 이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혹은 내부에서 서서히 자라나 모든 방어장치들을 파괴해버릴 정도로 난폭하게 변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지헤로운 충고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 저항할 힘을 찾아야 한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유럽의 한폭판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이 힘이 되고 교훈이 될 것이다.(303~304)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미래를 묘사한다 해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대중의 행동을 예측해보려는 시도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기란 너무나 힘든,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 뒤로 아주 다양한 다른 것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끝없이 펼쳐진다.(305)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서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307)


나치스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일기 “게토를 관리하는 일은 인도적 과업이 아니라 외과적 과업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잘라내는, 그것도 근본적으로 잘라내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 전체가 유대인이라는 질병을 앓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 곧 인위적 절멸이었다. (324)


[서경식의 작품 해설]

그가 항상 그의 저작을 통해 아우슈비츠에서 파괴괸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레비 자신이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도 우리가 ‘인간’에 희망을 이어갈 수 있는 근거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현대 오디세우스였다. 그런 그가 돌연 자살한 것이다. 그는 그 방대한 이야기의 말미에 ‘자살’이라는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멍과 같은 미완의 물음을 우리에게 던졌다. 근 자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최후의 경종을 울리려고 했던 것일까(339)


무엇하나 진정으로 끝난 것이 없다. 지금도 사회의 곳곳에, 또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길한 징후가 존재한다. 단지 사람들이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 아닐까? 그런 징후들은 다양한 조건 아래에서 언제고 다시 잔혹한 폭력으로 분출될지 모를 일인데도…….

과거의 고난이나 먼 장소에서 일어난 비참한 사건에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들은 상상이 미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를 의식해야 한다. 그러한 공포를 잃어버리는 순간, 냉소주의가 개선가를 울릴 것이다. 우리들 ‘인간’을 태우고 표류하는 배가 난파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리모 레비가 우리들에게 남긴 경고이다.(340)



※ 레비가 강제 수용되었다가 살아난 아우슈비츠는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오시비엥침’이라는 슐레지엔 인근 폴란드 지역에 독일식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323~330쪽에서 발췌)

○ 개요

- 철도 교통의 요충지

- 1940년 4월 수용소 설립 명령,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 총 20동의 건물

- 1940년 6월 14일 게슈타포(나치스의 비밀경찰)에 의해 아우슈비츠의 첫 번째 수감자 호송 (폴란드 정치범 728명)

- 1941~1942년 : 수감자들의 노동으로 단층에서 2층으로 개축, 8동 증축(총 28동)

- 평균 1만 3,000~1만 6,00명 수감(1942년 한때 2만 8,000명 수감)


○ 시설

①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오시비엥침) : 수용소 본부와 행정부서, 일반 물품과 군수품 생산(공장)

②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브제진까 마을, 비르케나우 수용소) : 대량 학살과 시체처리를 위한 거대한 장치를 갖추고 있음(5개의 가스실과 시체소각실) 여기에서 학살된 사람의 수는 150만명 추정

③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모노비츠 마을, 부나 수용소) : 수용인들이 모두 ‘부나’라는 합성고무를 만드는 합성고무 공장


○ 살해과정

화물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이들 중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돤된(혹은 그저 단순히 줄을 잘못 선) 이들은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이동해 옷을 모두 벗어두고 귀중품을 보관소에 맡긴 후 샤워실이라는 간판의 붙은 가스실 앞으로 내몰린다. 몇몇 절멸수용소에서는 먼저 여자들의 머리를 자르기도 했다. 사체에서 제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머리카락으로 매트리스와 천 등을 제작했다. 낯선 독일어로 외치는 고함과 채찍에 몰려 사람들은 샤워실이 가득 찰 때까지 들어간다. 샤워실 문이 잠기고 천장의 샤워 꼭지들에서 물 대신 치클론 B 가스가 새나온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맨 아래쪽에 깔리고 가장 힘 센 사람들이 꼭대기에 올라 차곡차곡 쌓인 채로 모두 사망할 때까지는 15~20분 정도가 걸린다. 모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면 역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수인들이었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시체처리조)들이 들어와 피와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사체들을 끌어낸다. 금니와 머리카락을 뽑고 수레에 실어(나중에는 켄베이어벨트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각로로 운반한다. 사체가 너무 많을 때는 그냥 밖에 쌓아두기도 한다. 화장시킨 사체의 재는 가까운 곳의 하천에 버리거나 비료로 썼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과정은 아무리 처리대상 인원이 많을 때도 세 시간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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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공무도하

2009/11/30 16:38

김훈의 글은 스케치가 정확하다. 매력魅力적(charming)이다

매력이 진짜 힘(권력)이다

매력이 사라진 인간은 죽는다.

 

 

-  아래의 발췌는,  김훈, 2009, [ 공무도하 公無渡河 ], 문학동네 ;  인용 (  )는 쪽수

  

1. 하늘의 구름

구름의 세력 (7)

 

2. 기상청의 예보

기상청은 비구름의 뒷자락에 매달려 갈팡질팡했다 (7) 

 

3. 배달된 자장면

먹다 남은 자장면이 비닐랩에 뒤엉켜 말라붙어 있었다 (17)

 

4. 샤워하는 장면

몸이 물의 온도 속으로 퍼졌다 (23)

창자와 허파와 자궁이 몸속에 가득 들어차는 꿈틀거림 (23)

 

5. 연대

역사와 문명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서로 연대하고 있었다 (25)

 

5. 햇빛

녹슨 지붕들이 햇빛을 튕겨내면서 막무가내로 색을 뿜어냈고 (29)

녹으로 삭아가는 함석지붕은 풍화의 시간 속에서 신생의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29)

녹을 벗겨낸 탄두는 쇠의 푸른 속살로 햇빛을 튕겨냈다 (311)

 

6. 인간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35)

 

7. 해지는 저수지 풍경

수면에서 명멸하는 빛과 색 (41)

기우는 해에 끌리는 쪽으로 빛들은 떼지어 소멸했고 소멸의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서 신생과 소멸을 잇대어가며 그것들은 어두워졌다 (41)

산그늘에 덮여서 빛이 물러서는 가장자리 수면에서 색들은 잠들었고, 바람이 수면을 스칠 때는 물의 주름사이에서 튕기는 빛이 잠든 색들을 흔들어 깨웠다 (41)

저녁의 수면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지우면서 어두워갔다 (43)

 

8. 밤에 울리는 핸드폰

램프는 바늘귀 같은 구멍으로 새빨간 섬광을 쏘아대어 어둠을 찔렀다. 중학생 때 저수지 뚝방에서 본 뱀의 눈알이 떠올랐다. 핸드폰은 살아서 교신을 갈구하는 작은 짐승의 눈구멍처럼 깜빡거렸다 (44)

가늘게 찌르륵거리는 신호음은 어둠의 저편에서 건너오는 벌레 소리로 들렸다. 소리의 느낌은 무력했고, 무력한 만큼 다급했다. 여러 산꼭대기의 기지국 철탑들을 거쳐서, 폭우가 쏟아지는 캄캄한 공간을 건너오는 한 가닥 신호의 여정이 노목희의 마음에 떠올랐다. 신호음이 멎고, 철탑과 철탑 사이가 끊어졌다가, 다시 신호음이 울렸다. 서로 알게 된다는 것은 때때로 신호를 보내오는 개입을 용납한다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노목희는 폴더를 열였다 (45)

 

9. 새

새들의 울음소리는 속이 비어 있었고 높이 떠서 멀리 나아갔는데 (48)

 

10. 폭격

폭격기들이 저공으로 접근하면서 공대지 미사일을 발사할 때 수평선 너머의 어둠이 찢어졌다 (50)

삶 속에서 죽음이 폭발했고 (258)

폭격기들이 바다에 박힐 때, 물기둥이 치솟았고 물보라가 날렸다. 파도가 물기둥을 지워버리고 바람이 물보라를 쓸어내고 폭격기들이 물속으로 잠기면 바다는 다시 제 리듬으로 돌아갔다 (258)

 

11. 노을

해망의 노을은 깊고 또 가까웠다. 해가 내려앉고 수평선 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하면 붉은 기운이 물 위에 가득 찼다. 해망의 노을은 하늘로 번졌고 대기중에 스며서 어두워지는 내륙의 산맥 너머로까지 펼쳐진다. 해망의 노을은 바다와 마을에 가득 내려앉아 사람과 가축의 들숨에 실려서 몸속으로 빨려들었고 썰물의 갯고랑에서 퍼덕거렸다 (73)

마을에 걸린 빨래가 노을을 튕기며 펄럭였고 소금이 내려앉은 염전 바닥이 붉었고 숲으로 돌아오는 새들의 가슴이 붉었다 (74)

해가 더 기울자 노을은 산맥과 마을의 윤곽을 거두어서 어둠에 합쳐졌다 (80)

 

12. 죄수

해안초소에서 내려와보면 죄수들의 몸놀림은 지나간 시간의 지층 위를 기어가는 슬로 리뷰였다. 죄수들의 작업은 노동이 아니라 시간을 인내하는 자들의 종교의식처럼 보였다 (74)

 

13. 소금

소금은 노을지는 시간의 앙금으로 염전에 내려앉았다. 소금 오는 바닥에는 폭양에 졸여지는 시간의 무늬가 얼룩져 있었고 짠물 위를 스치고 간 바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공기가 말라서 바람이 가벼운 날에 바다의 새들은 높이 날았고 새들의 울음은 멀리 닿았다 (75)

 

14. 자동차의 불빛

뒤차의 전조등 불빛이 안개에 풀렸다. 딱정벌레 같은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배어나와 백미러를 흘러나갔다 (86)

 

15. 사람의 냄새

그에게서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운 사람의 체취와 비슷한, 몸속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냄새가 풍겼다. 시간이 사람의 몸속에서 절여지면 이런 냄새가 날 것 (91)

 

16. 기억

기억은 고압전류가 되어 몸속을 찔렀다 (94)

기억의 저 너머를 찌르면서 버린 것들의 이름을 불러왔다 (95)

 

17.  화재진압 현장

연기는 수증기에 젖어 무거웠다 (102)

무거운 연기가 바닥에 깔렸다. 손전등 불빛은 수증기에 젖은 연기를 뚫지 못했다 (109)

 

18. 미완성

그가 아름답다는 그 '미완성'이라는 것은 완성을 지향하는 과정이 아니라, 미완성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자족한 국면을 이루는 것처럼 문정수는 느꼈다 (112)

 

19. 국물 담은 봉지

문정수는 멸칫국물 봉지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허벅지에 멀고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120)

 

20. 절박함

그렇게 절박한 것들을 기억할 수 없는 까닭은 보다 더 절박한 것이 보다 덜 절박했던 것들을 지웠기 때문 (123)

 

21. 깊은 잠

아침이 가까워올수록 문정수는 더 깊이 잠들어서 숨소리는 길고 깊었다. 문정수의 숨은 몸 깊은 곳의 소리와 냄새를 토해냈다 (131)

 

22. 죽음

이 세상의 헤아릴 수 없는 죽음과 끝없이 되풀이되는 죽음 중에서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죽음은 저 자신의 죽음뿐일 테지만, 그 죽음조차도 전할 수 없고 옮길 수 없어서 이해받지 못할 죽음일 것이었다 (131)

변사變死라기 보다는 폐사斃死에 가까웠다 (132)

 

23. 욕

니미, 쓰벌, 좆도 같은 욕설을 그가 손댈 수 없는 세상을 향해 내뱉었다 (133)

 

24. 낡은 배

낡은 목선들이 배의 희미한 흔적을 그리며 삭아갔다 (140)

 

25. 동물의 콧구멍

낙타는 콧구멍을 바람에 열어놓고 지평선 너머를 냄새맡고 있었는데, 콧구멍 언저리가 메말라 보였다 (201)

 

26. 저녁이 오는 시간

그림자가 어둠에 녹아서 사라질 무렵 (245)

 

27. 민들레

풀들의 세력은 풍매하는 솜털 씨앗으로 피어났다. 그것들은 가볍고 사소했다 (267)

그것들은 바람에 올라타서 이동했고 바람의 끝자락에서 착지했다. 한 점의 솜털로 떠돌던  그 하찮은 것들은 땅 위에 재집결해서 세력을 확장했고, 뿌리를 박으면 물러서지 않았다 (267)

 

28. 인연

인연은 풀려서 흩어졌다. 그것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었다. 부재하는 것들의 한시적 응집일 뿐이었다. 자궁은 증발하고 혈연은 해체되었다 (270)

 

29. 술 많이 먹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아침에, 문정수는 갈증에 몰려서 눈을 떴다. 입안이 목구멍까지 말라서 혀가 버르설거렸다. 혓바닥이 돌멩이처럼 입안에 떨어져 있었다. 속이 뒤집히고 골이 패였다. 술이 덜 깨서, 세상이 멀어서 아득헤 보였는데, 멀어 보이는 세상이 술이 덜 깬 망막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문정수는 간밤에 강경감이 준 드링크를 마셨다. 인삼을 흉내낸 인공향료 냄새가 목젖을 치받았다. 칫솔을 입안에 넣자, 창자의 먼 끝에서부터 구역질이 올라왔다 (320)

 

30. 섹스

문정수의 몸은 다급했다. 노목희의 몸이 깊어서 문정수는 닿을 수 없었다. 몸이 다가가면, 몸은 달려들면서 물러섰다. 노목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문정수는 닿아지지 않는 저쪽 끝으로 몸을 몰아갔다. 노목희는 다가와서 넘치는 몸을 느꼈다. 노목희의 머리카락이 땀에 엉겼다. 문정수가 놓쳐버린 세상이 모두 내 몸속 깊은 곳으로 들어와서 거기에서 녹아서 편안해지기를, 그리고 그것들이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기를, 그래서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몸이 새로운 시간 앞에 다시 서기를, 홀로 그 시간 속을 걸어갈 수 있기를 노목희는 바랐다. 그 바람은 문정수가 물러선 몸속 깊은 곳에서 체액으로 분비되었다. 문정수는 쉽게 무너졌다. 문정수는 숨을 몰아 쉬었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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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선이고 죽음은 악이다'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디아스포라(diaspora) 서경식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 따르면, '개인의 독립성은 죽음에 대한 독립성'이며, 이런 정신적 독립성은 삶과 죽음에 대한 끝없는 사유를 통해 (새로운 주체성이) 획득된다는 것이다.

 

삶의 긍정은 '죽음에 대한 긍정'이라고 말한 니체의 사유와 함께, 그리고 '개인의 독립성'은 소수자(minority), 특이성(singularity), ~되기(become) 등의 개념들과 결합해서 생각해 봄직하다.

 

아래에 몇 개의 문장을 발췌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의 재생산'도 백성들이 전부 다 죽고 없어지면 안 되죠. 인간이 일을 하게 하려면 일단 살아야 하니까 부유층이나 권력자는 인간인 살고자 하는 욕망을 어느 정도 보장해 줍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주권, 결정권은 안 주지요. 자살 같은 건, 자기 멋대로 죽는 건 신의 뜻을 거르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괴롭고 삶에 보람이 없더라도 그냥 살라는 거지요

 

'I was born'이라고 할 때, 누군가의 의도로 우리가 태어났다, 자기 스스로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거죠. 그럴 때 저는 돼지 같은 가축을 생각합니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로 태어나지요. 무엇 때문일까? 먹기 위해서예요. 그렇다면 돼지에게 삶의 보람이 뭐가 있을까요? 그저 인간이 돼지를 먹기 위해서 번식하게 하는 거예요. 그럼 돼지가 자살하면 안 되지요. 돼지가 사는 보람이 없다고 해서 자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돼지가 동성애을 하면 안된다는 거지요. 이거 웃기는 애기가 아니라 진짜예요. 그럼 우리 하고 돼지가 다른가? 우리는 돼지가 아닌가? 지금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것이예요

 

인간 대부분을 백성으로, 노동자로, 노예로 재생산시켜야 한다는 것은 돼지를 사육하는 것하고 다름이 없지 않나요?

 

'인간은 살아야만 한다. 자살하면 안 된다.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그런 사고가 어떻게 보면, 인간을 영영 착취할려고 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역활을 할 수도 있고 해 왔다고 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래서 국가권력은 자살을 금기시하고 죽음에 대한 사상을 금기시해요

 

인간이 태어나서 살고 죽어가는 그런 과정 자체를 국가가 지배하고 있다, 통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결단, 우리 자신의 독립적인 정신으로 볼 수 없는 한 우리는 국가나 권력의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이런 거지요.

 

내가 여기 있는 어떤 사람에게 애정이나 책임감, 연대감, 이 사람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고 이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느낄 때, 진짜 이것이 자기 것인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어떤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누구를 모방한 것인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우리가 독립되어 가는 것입니다.

 

개인의 독립성이야말로 공공성의 바탕이다, 개인의 독립성은 죽음에 대한 독립성이다, 정신적인 독립성이야말로 개인의 독립성의 바탕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으면 안되는지, 되풀이해서 생각하는 행위야 말로 인간다운 주권을, 주체성을 자기 자신이 획득하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봅니다.

 

- 서경식, 2009,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철수와 영희, pp. 136~16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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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동지들에게

2009/09/04 23:11

사랑하는 동지들에게

 

이제 나는 동지라는 말이 어색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동료하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동지라 함은 뜻을 나누는 것이고

뜻을 나누는 것은 생각을 나누는 것이고

생각을 나누는 것은 마음을 내어놓은 것이고

마음을 내어놓은 것은 몸을 벼리는 것이며

몸을 벼리는 것은 나의 존재조건을 내어놓는 것인데

나는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지라는 말이 어색합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다시 새길을 찾을까 합니다

다시 반성하면서 그렇게 할까 합니다

이제 내 나이 38인데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이제까지 나를 사랑해주고 동지라고 불러주었던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받고 서운하고 울분이 터졌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내 덕이 부족하고 내 성깔이 그러했으며 그걸 이기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내가 지닌 욕망, 프레임 그리고 습을 깨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단절합니다.

그래서 동지들에게 깊은 감사함으로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그대들을 사랑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끝으로 나는 미련을 두지 않겠습니다

마음을 내려놓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길을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햐

 

만복이 합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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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따와나

2009/08/31 11:05

제따와나(jetavana)

2009. 8. 29. 토요집중수행 ; 들숨날숨에 대한 챙김(아나빠나사띠/부처님의 호흡명상법)

 

제따와나 초기불교 선원 http://www.jetavana.net/

다음카페 제따와나 http://cafe.daum.net/jetavana

 

- 다시 (마음)공부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함부로 내려놓지 않겠다. 精進하리라!!! (2009.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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祈禱

2009/08/14 19:25

중재야

잘 가라

이 세상의 것들을 훌훌 털고 편안하게 가라

당신의 평온한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내일 화장을 하여 주암호에 뿌린 다는 소식을 듣고

2009. 8. 14. 저녁 서울 충무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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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2009/08/10 15:57

불꽃처럼 살고 싶다

이렇게 심없이 사그러드는가 싶다

 

난,

다시 불을 지필수 있을까?

 

나 같은 개잡놈이 말이다.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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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을 지하철에서 읽는데, 통쾌한 문장을 보았다.

 

이렇게 기성세대의 위선을 까발리고  자유분방한 김현진씨를 매도하는 사람들도 많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단식 농성을 할 때는 농성장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는 둥, 파업 현장마다 다니면서 남자를 꼬셨다는 둥 하는 소리도 들었다. 김현진 씨는 "웃기고 있네, 자기 꼬셔줬으면 해서 하는 소리지. 왜 남자들은 자기하고 안 자 주면 화를 내는 걸까? 됐어! 너랑 안 잘 거야. 아무리 욕을 해도......"하고 가볍게 넘겨 버린다.

 

([B급연애](청림출판사)라는 책을 쓴 이유)

"20대가 연애하면서 많이 받아먹고 살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오빠'들한테 돈 뜯기고 공짜로 섹스나 해주고. 맞기나하고, 애나 떼고, 그런 일이 천지인데 그런 이야기들은 아무도 안 하니까. 그런 리얼한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어요."

 

출처 : 도서출판 작은책, '사진으로 보는 사람이야기, 이명박이 만든 스타, 김현진 씨',  [작은책 2009. 8. 제170호], 9쪽에서 발췌.

 

김현진, 매력적인 인간이다. 부럽다.

당장 그녀의 책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읽을 욕심을 낸다.

내가 그녀처럼 명랑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오래 준비된 상상력과 깊은 매력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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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연 ‘세월이 흐르듯 사랑도 그렇게…Ⅱ’, 100×100cm, Oil on canvas, 2008 

ⓒ 전라도닷컴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정호승 ‘바닷가에 대하여’ 중)
 

[출처 : 전라도닷컴 http://www.jeonlado.com/v2/ch01.html?&number=10727]

 

인터넷을 떠돌다 바다그림을 보았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든다

그림 제목이 '세월이 흐르듯 사랑도 그렇게' 이다

전라도닷컴에 의하면, 이 그림을 그린 김정연는 무안 조금나루나 해남의 바닷가를 즐겨 찾는다고 한다

고향의 바다...가기에는 뭔가 쑥쓰러운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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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가] 사철가 (조상현)

2009/07/10 13:15

 




 

 

이산저산 꽃이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 되고 보면 월백설백 천지백허니
모도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올줄을 모르는구나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보소
인생이 모도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날과 잠든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산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 불로생전 일배주만도 못허느니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마라 가는 세월 어쩔끄나

늘어진 계수나목 끄끝터리에다
대랑 매달아 놓고 국곡투식 허는 놈과 부모불효허는 놈과
형제화목 못허는 놈 차례로 잡어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어서 한잔더 먹소 덜먹게 허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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