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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 창설 65주년과 숙대 ‘여성 안보전문가 육성’ 프로그램

 
2015. 05. 18
조회수 67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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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군단에서 시행한 청파무제에서 찍은 예도무 사진


 여군이 창설된 지 65주년을 맞았다. 2014년 한국 여군의 수는 8천3백여 명으로 전체의 2.9% 수준이다. 최근 여군 비율을 2020년까지 전체 병력의 5.6% 수준인 1만1천500여 명으로 확대하는 국방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이에 맞물려 여성안보전문가 육성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적인 게 숙명여자대학교의 ‘여성 안보전문가 육성’ 프로그램이다. 
 숙명여대는 국가안보와 큰 인연을 맺어왔다. 애초 학교 창설자가 조선 말 육군참장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파일럿 이정희 공군대위 또한 숙명여대 출신이다. 2009년에는 국내 제1호 ‘여성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되어 매년 장교 30명을 배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부과정에서는 ‘안보학 연계전공’, 국제관계 대학원에서는 ‘글로벌 안보협력 전공’이 있으며 ‘안보학 연구소’까지 있다.  숙명여대를 중심으로 여성과 국가안보, 그 오랜 인연을 되짚어 봤다.

여군들 너무 잘나가서 학군단 순위 공개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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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백주념기념관 앞에서 찍은 학군후보생들의 모습


 안보 분야에서 여대생의 위상은 단연 학군단 성적에서 드러난다. 숙명여대는 지난 2012년 학군단 하계훈련에서 109개 학교 중 종합 1위를 차지했고 2012~2013년 동계훈련에서는 성신여대가 110개 학교 중 1위의 성적을 거뒀다. 여대생들이 2012년부터 화생방과 통신장비, 개인화기, 유탄발사기 등의 과목에서 남자 학군단을 누르고 종합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2013년에는 학군사관후보생 4천500여 명 중 졸업성적 1위는 숙명여대 학군단 1기 박기은(당시 23·체육교육과)후보생이 차지했다. 숙명여대와 성신여대 학군단이 2014년과 올해 차례로 110개 학군단 중 훈련 성적 1위를 차지한 데 이은 여성 돌풍이었다. 
 오죽했으면 2014년 여학교 학군단이 계속 상위권을 차지하자 군은 서열화에 따른 사기저하를 우려해 순위매기기를 중단했다. 
 올해 학군사관후보생에 지원한 신혜진(글로벌 협력학과 2학년)학생은 현재 1차 서류평가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학군단에 지원한 이유를 물었더니 “안보에 대해서 아직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안보분야에서 일을 하려면 군경험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지원했다”며 “혹시 군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을까 걱정도 됐다. 안보에 가장 가까운 분야가 군이라 생각해서 필수로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국가안보의 안방마님 숙명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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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보학 과목인 ‘북한학’수업 중 정재욱 교수와 학생들


 숙명여대는 2009년 국내 최초 여성학군단(ROTC)을 설립했다. 후보생 중심으로 안보학 과목들을 만들었고, 안보학 연계전공을 개설하면서 후보생이 아닌 일반 학생들이 복수전공으로 안보학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숙명여대 안보학 과정은 독립적인 전공은 아니며 각기 다른 전공을 택한 학생들이 연계전공으로 택하는 과정이다. 
 여성 국방․안보 전문가 육성 및 진출을 위해 국내 일반대학교 최초로 개설한 안보학 전공 학위과정이다. 현재 20명의 학생이 안보학 과정을 밟고 있다. 정치외교학과가 다수지만, 역사학과 아동복지학과 생명과학과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공부 중이다. 
 이 과정은 여성 안보전문가로서 다양한 분야의 연구 및 진출에 요구되는 전문지식을 집중적으로 함양시키는 데 있다. 교과목을 살펴보면 국가안보론, 북한학, 안보리더십, 전쟁과 무기, 국제법, 국제안보론, 국제협상과 위기관리, 외교정책의 이해 등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특성상 안보 전문가가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광범위하다. 특히 점점 더 전통적·비전통적 안보문제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국방부, 국정원, 통일부와 국방․안보 관련 국책연구소 그리고 국내외 국방안보 관련 언론기관, 기업체 등에 끊임없는 수요가 있다. 
 숙명여대에서 안보학을 연계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는 최보윤(역사문화학과, 3학년)씨는 안보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를 “역사학이 전공인데 역사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쟁에 대해서 흥미를 갖게 되고 어떻게 진행되는 지 자연스럽게 궁금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사실 20대는 전쟁을 대중매체 등으로만 접한 경우가 대다수다. 이들을 위한 눈높이 통일안보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숙명여대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생활 속 북한 알기’ 강좌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강연에서는 북한방문 경험이 있는 전문가 등이 생생한 통일·안보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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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속 북한 알기’ 강좌를 듣는 학생들과 강의계획서


 김예진(미디어학부 2학년)씨는 “과거에 들은 북한 관련 강의는 이론이나 책 위주였는데 이 과목은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체험한 분들이 직접 설명해줘 신기하다”고 말했다. 강좌는 젊은이들이 북한을 알아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황선혜 숙명여대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도 청년들이 나서 통일을 연구하고 남·북간 벽을 허물 길을 찾는 데 동참해 달라고 말했는데 이 강의가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교육을 바탕으로 숙명여대는 육군사관학교가 주최하는  ‘전국 대학생 안보토론대회’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이 대회는 육·해·공군 사관생도는 물론 국내 52개 대학교 학생들과 미국·일본·이탈리아 등 6개국 사관학교 외국인 생도들도 참가한다. 2013년에는 박소원(정치외교·11), 허선필(정치외교·12)씨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최우수상을 받은 허선필씨는 “관련 경험이 없는 학생들도 대회에 참가하면서 안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며 “군과 안보를 남성들만의 영역으로 치부하지 말고 우리들도 건강한 안보의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여성 안보전문가, 학부부터 연구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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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학 연구소 설립목적 

 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에는 ‘글로벌 안보협력’ 전공과정이 있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며 국제사회에서 제기되는 인간, 집단, 국제전 등 다양한 안보쟁점들을 글로벌 거버넌스 관점에서 다룬다. 
 예비역 장성출신 또는 국제기구 및 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임 및 겸임 교수진들은 현장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국제관계대학원 내 ’글로벌 안보협력’ 전공은 국내 유일전공으로 졸업자들을 국제기구나 대사관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2년 숙명여대는 국내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국방부 제안 ‘사업계획서’를 바탕으로 “안보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여성 국방안보 메카로 도약할 수 있는 연구기관으로 발전하기 해서다. 이화여대의 ‘통일학 연구소’, 성신여대의 ‘동아시아연구소’도 있지만 안보학 분야에서 여성 전문가를 양성하고 배출하기 위한 연구소로는 숙대 안보학연구소가 유일하다. 
 뿐만 아니라 숙명여대는 국방, 안보 전문가 양성을 위한 다양한 커리큐럼을 개발하고 있다. 1년에 한번씩 학술논문집 ‘안보학 저널’을 발간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며 ‘평생지도교수제’를 통해 국방 안보분야 진출 희망자를 위해 국방관련 연구소 인턴을 추천해주는 등 체계적인 경력관리 및 컨설팅도 마련하고 있다. 또한 국방정책학회, 유엔군사령부, 국방대학교 등 주요 안보기관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채널을 구축하고 세미나를 통해 학술교류를 하고 있다. 한국국방정책학회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학술세미나 연 3-4회 개최된다. 
 안보학연구소는 2013년10월31일에는 ‘한반도 안보와 통일 기원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한민구 당시 합참의장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국방안보’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또 GK전략연구원 배정호 이사장이 ‘한반도 통일의 당위성과 과제’에 대해 강연했다. 
 지난 3월 27일에 안보학 연구소의 주관으로 한국국방정책학회, GE코리아와 함께 "사드(THAAD), 한국은 어떻게 해야하나?"를 주제로 안보학술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이처럼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성안보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학술회가 열리고 있다. 숙명여대 관계자는 “지금까지 안보 및 국방 분야에 특화된 민간전문가를 양성해 낼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숙명여대 안보학연구소 설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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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출신 안보전문가 이민룡 교수

 숙명여대 안보학 관련 과목을 책임지고 있는 이민룡 교수(이하 이교수)와 정재욱 교수(이하 정교수)를 만났다. 두 교수 모두 육사 출신으로 안보분야 전문가이다. 숙명여대로 온 후 두 교수는 학부과정에 '안보학 연계 전공', 국제대학원에 '글로벌 안보협력 전공'을 개설하는데 기여하고, 안보학연구소에서 학술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등 국방 및 안보분야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학술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현재 한국국방정책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안보학 연구소장 이민룡 교수(이하 이 교수)는 2011년 8월부터 숙명여대에서 안보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교수는 2009년에는 장군(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여 교수부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숙명여대로 옮기기 전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30여년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그동안 '자원안보', '환경안보'를 한국 사회에 최초로 소개하고, 관련 이론을 정립하고 연구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오고 있다. 특히 숙명여대로 자리를 옮긴 이후 국제 저명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매년 학술서적을 펴내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특이한 이력 (사관학교와 여성대학 교수)과 그의 활발한 연구활동을 인정하여 세계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 인명사전 'Who's Who in the World'에서 2016년 등재 후보자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정재욱 교수는 현재 한국국방정책학회와 한국유엔체제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정교수는 독일 통일문제연구소, 비확산연구소 초빙 연구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2006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핵 6자 회담’에 국방부 대표로 참석했고, 2005년부터 5년간 국방부 정책실 북한 정책과에서 총괄장교를 역임한 이력이 있다. ‘일본 방위 산업의 변화와 한국의 대응전략’, ‘북한의 군사 도발과 적극적 억지전략의 국면방향’,‘북한의 군사도발과 한국의 대응전략’등 주요 학술지와 국방저널, 국방개혁보고서에 지속적으로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안보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민룡 교수(이하 이): 학군단 설치 제안서를 국방부에다 제출할 당시 연구소를 설립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이유는 국내 최초 여자대학 학군단을 설치하면서 이 기회에 안보학 학술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국내 대학 연구소 실태를 조사했는데, 안보학 분야 연구소는 숙명여대가 최초였다. 그래서 안보학 연구소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은 여성 인재를 안보-국방분야에 진출시키도록 저변에서 도와주는 일을 꼽는다. 안보학을 연구하는 고급 인재를 석사, 박사로 키워내고, 학부 졸업생들에게는 안보 국방분야 공직에 진출시키는 한편, 국내 기업체에는 주로 방위산업체로 취업을 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추진하는 것이다.

 -안보학 연계전공은 여대 중에서 숙대가 유일한데, 차별화된 부분이 있는가?
 =이: 차별화 된 부분은 글로벌 환경에서 전공 학생들을 국제기구로 진출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여성 안보학 전공 학생들은 미래에 국제사회로 진출하여 유엔이 지향하는 인간안보, 환경안보, 지구안보 쟁점 영역에서 기여할 분야가 많이 있다고 본다. 현재 우리대학에서는 안보분야 뿐만 아니라 통일 분야 전공 까지를 포괄하여 새로운 연계전공으로 추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이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에는 진로를 어느 쪽으로 가는가?
 =정재욱 교수(이하 정): 군대 쪽에는 학군 장교 뿐만 아니라 학사장교로 진출하도록 도와주고 있고, 기업체 쪽으로는 주로 방위산업체를 운용하는 기업체로 진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국방 분야에서 선발하는 군무원 시험에도 응시하도록 컨설팅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여성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면 무엇이 있는가?
  =정: 미래 우리나라의 안보환경을 예측했을 때 향후 10년 후가 되면 여성도 군대로 진출할 여지가 높아질 것이고 본다. 남자들처럼 징병제도는 아니겠지만 모병제로 갈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민간인 신분으로 국방 안보조직에 진출할 기회가 확대되고, 국제사회에도 인간안보 환경안보 분야에서 여성들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육사 교수로 재직한 이력이 있는데, 수업이해력에 있어 생도들과 여대생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 육사 생도들은 안보의 하드웨어 측면에서 강하지만 여대생들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매우 강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안보분야에서도 정보 분석, 정밀한 무기 관리, 행정 합리화, 환경 코드 해석 등 여성 인재들이 두각을 나타낼 분야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미래에는 숙명여대 출신의 여성 인재들이 국방 안보 분야에서 지도층을 형성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숙명여대 학생들이 활동적이고 국방 분야에 적합한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 마지막으로 안보학과 학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이: 숙명여대에서 안보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개척자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이제 막 개척해서 나간다는 마인드를 가져야 하고, 여기서 배운 잠재력을 가지고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로 진출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전공 학생 각자가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남다른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정혜수 인턴기자 hally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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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일격 암시하는 북극성-1호

최후일격 암시하는 북극성-1호
 
한호석의 개벽예감 <15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5/18 [20:4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수중시험발사장에 나타난 신포급 전략잠수함
2. 바닷물 가르며 솟구쳐 오른 탄도미사일 2발
3. 발사수심 50m에서 대기하는 전략핵탄미사일 
4. 조선은 대서양에서 최후일격 날린다   

 

▲ <사진 1> 2015년 5월 9일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장에 나타난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외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잠수함이다. 그런데 그 잠수함은 전략잠수함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작은 잠수함이다. 전략잠수함에는 가압경수로와 탄도미사일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 사진에서 보는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크기가 너무 작다. 크기가 저렇게 작은 경량급 잠수함이 어떻게 전략잠수함으로 될 수 있을까?      ©자주시보

 


1. 수중시험발사장에 나타난 신포급 전략잠수함

 

핵탄미사일로 무장한 최강의 수중전략무기는 전략잠수함이다. 전략잠수함들에는 강력한 추진력을 뿜어내는 가압경수로가 설치되었다. 가압경수로를 잠수함에 설치하면, 잠수함의 중량이 그만큼 더 무거워지고, 몸집도 더 커진다. 5대 핵강국들인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이 모두 비대화된 중량급 전략잠수함을 운용하고 있다. 중량급 전략잠수함을 비대한 순서대로 열거하면, 러시아의 아쿨라급(Akula-class) 전략잠수함은 48,000t, 미국의 오하이오급(Ohio-class) 전략잠수함은 18,750t, 영국의 밴가드급(Vanguard-class) 전략잠수함은 15,900t, 프랑스의 트리옴팡급(Triomphant-class)급 전략잠수함은 14,335t, 중국의 진급(Jin-class) 전략잠수함은 11,500t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조선의 전략잠수함도 중량급 잠수함일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그런데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2015년 5월 9일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두 눈을 의심하리만치 작은 경량급 잠수함이었다.


전략잠수함에는 가압경수로, 탄도미사일, 중어뢰를 모두 설치해야 하므로 중량급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는데,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크기가 너무 작아서 중어뢰 이외에 가압경수로와 탄도미사일은 들여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 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보도기사의 제목에 “전략잠수함 탄도탄수중시험발사에서 완전성공”이라고 썼고, 보도기사의 본문에서도 그 잠수함을 전략잠수함이라고 수차례 명기하였다. 조선에서는 전략잠수함이라는 말을 다른 뜻으로 쓰는 것일까?

 

▲ <사진 2> 신포급 잠수함은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수직으로 설치하였다. 그 발사관 안에 탄도미사일이 들어있다. 그렇게 하면 경량급 잠수함에서도 얼마든지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다른 핵강국들이 운용하는 중량급 전략잠수함들은 함교가 아닌 함체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10문 이상 수직으로 설치하였다. 하지만 유사시 조선의 전략잠수함들은 그처럼 많은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필요가 없다. 조선이 말하는 최후일격은 한 방으로 끝내버리는 핵타격이기 때문이다.     © 자주시보

 

 
▲ <사진 3> 위쪽 사진은 신포급 잠수함을 촬영한 것이고, 아래쪽 사진은 조선의 로미오급 잠수함을 촬영한 것이다. 함교의 크기와 높이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자주시보


미국 국방부는 조선이 이번에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에 사용한 잠수함을 신포급 잠수함이라 부른다. 조선에서는 크고 무거운 탄도미사일을 경량급인 신포급 잠수함에 어떻게 설치하였을까?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조선에서는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설치하도록 독특하게 설계하였다.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조선의 로미오급 잠수함의 함교와 신포급 잠수함의 함교를 비교하면, 신포급 잠수함의 함교높이가 더 높고 특히 함교폭이 훨씬 더 넓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이 들어갔으니 신포급 잠수함의 함교가 그처럼 커진 것이다.


그런데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설치하는 경우, 문제가 생긴다. 잠수함 함교 안에는 4가지 장비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고 남은 공간에는 도저히 그 4가지 필수장비를 들여놓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함교에서 해수면 위로 떠밀어 올려놓고 사용하다가 필요에 따라 함교 안으로 완전히 집어넣는 4가지 필수장비는 통신장대(communication mast), 레이더장대(radar mast), 전자교란장대(ECM mast), 잠망경이다.

 

▲ <사진 4> 신포급 잠수함 함교부분을 확대한 사진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부분은 잠수함으로 드나드는 2개의 출입문이다. 함교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였으므로, 출입문을은 함교 바깥쪽에 냈다. 푸른 원으로 표시된 미확인 물체가 함교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잠망경, 레이더장대, 전자교란장대, 통신장대를 함교에 일렬로 길게 늘어놓지 않고 그 물체 안에 모두 집어넣었다. 함교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 자주시보


신포급 잠수함의 함교부분을 확대한 <사진 4>를 보면, 붉은 원으로 표시된 것이 잠수함으로 드나드는 2개의 출입문임을 알 수 있는데, 푸른 원으로 표시된 미확인 물체도 보인다. 소형 선박의 돛대 비슷하게 생긴 그 물체는 함교 상판 뒤쪽에 설치되었다. 조선의 잠수함설계가들은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이 설치된 함교에서 통신장대, 레이더장대, 전자교란장대, 잠망경을 일렬로 늘어놓을 공간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것은 모두 한 다발로 묶은 물체를 함교 뒤쪽에 그렇게 설치한 것이다. 


미국의 해군전문 웹싸이트 <커벗 쇼어즈(Covert Shores)>에 현시된 ‘분석-신포급 탄도미사일 잠수함’이라는 제목의 자료에 따르면, 신포급 잠수함의 함체길이는 68m이고, 함체폭은 6.5m로 추산된다. 한국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조선일보> 2014년 11월 2일 보도에 따르면, 신포급 잠수함의 수중배수량은 2,500~3,000t, 함체길이는 67m, 함체폭은 6.6m로 추산된다.

 

▲ <사진 5> 이 사진에 보이는 프랑스의 루비급 잠수함은 함체크기가 신포급 잠수함과 거의 같은 경량급 잠수함이다. 그런데 그처럼 크기가 작은 루비급 잠수함에 가압경수로가 설치되었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조선의 신포급 잠수함을 전략잠수함이라고 부른 것은 조선이 그 잠수함을 루비급 잠수함처럼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자주시보


수중배수량이 2,500~3,000t밖에 되지 않는 경량급 잠수함 함교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였다면, 함체 안에 가압경수로도 설치할 수 있을까? 기존 핵잠보유국들이 운용하는 각급 잠수함들 가운데 수중배수량과 함체길이가 신포급 전략잠수함과 아주 비슷한 경량급 잠수함은 <사진 5>에서 보는 프랑스의 루비급(Rubis-class) 잠수함이다. 루비급 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2,600t이고, 함체길이가 73.6m이므로, 신포급 잠수함과 함체크기가 거의 같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포급 잠수함과 크기가 거의 같은 루비급 잠수함에 48메가와트급 가압경수로 1기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중배수량이 10,000t이 훨씬 넘는 중량급 핵추진 잠수함들에는 출력이 200메가와트가 넘는 대형 가압경수로가 설치되었지만, 크기가 작은 루비급 잠수함에는 소형 가압경수로가 설치되었다. 소형 가압경수로를 설치한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의 루비급 잠수함이 핵추진 잠수함이지만 전략잠수함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루비급 잠수함은 사거리 180km의 엑소제(Exocet) 대함미사일과 533m 중어뢰를 실을 뿐, 핵탄미사일은 싣지 못한다. 수중미사일발사관이 없는 루비급 잠수함은 어뢰발사관에서 엑소제 대함미사일을 수중발사한다. 핵탄미사일을 설치하지 못하는 루비급 잠수함은 전략잠수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프랑스가 1970년대의 잠수함건조기술로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였다면, 조선도 2000년대의 잠수함건조기술로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능히 건조할 수 있다. 잠수함건조기술과 핵기술에서 조선보다 뒤떨어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도 핵잠건조사업에 착수했다는데, 지난 40년 동안 독자적인 잠수함건조기술을 축적해왔을 뿐 아니라, 고도의 핵기술까지 개발, 완성하여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만드는 조선이 어찌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지 못하겠는가.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 데서 결정적인 문제는 소형 가압경수로를 만드는 기술인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은 녕변핵시설단지에 완공된 35메가와트급 경수로가 이미 2014년부터 시험가동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에게는 이전에 소형 가압경수로를 만들어 신포급 잠수함에 설치해본 선행경험이 있기 때문에, 녕변핵시설단지의 소형 경수로를 그처럼 매우 짧은 기간에 속성으로 건설할 수 있었다. 35메가와트 출력의 경수로는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에 설치하기에 아주 적합하므로, 신포급 잠수함에 설치된 소형 가압경수로는 35메가와트급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신포급 잠수함은 몸집이 디젤전동식 잠수함만큼 작아도 핵추진 잠수함이기 때문에,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그 잠수함을 전략잠수함이라 부른 것이다.


조선에서는 전략잠수함을 설계할 때 기존 핵잠보유국들의 고정격식화된 발상과 완전히 결별하여 독자적으로 착상하였다. 기존 핵잠보유국들은 중량급 전략잠수함을 만들려고 서로 경쟁하지만, 조선은 정반대로 경량급 전략잠수함을 만든다는 것, 바로 그런 기발한 착상이 중량급 전략잠수함밖에 알지 못하는 세계핵잠건조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신포급 핵추진 잠수함의 작전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프랑스의 루비급 핵추진 잠수함은 침하수심 300m, 승조원 68명이며, 도중에 추가로 식량보급을 받지 않고, 해수면에 떠오르지도 않고 15,700km를 잠항하면서 60일 동안 계속 작전할 수 있다. 디젤전동식 잠수함의 최장잠항일수는 15일밖에 되지 않는다. 디젤전동식 잠수함은 시속 37km로 잠항하지만, 핵추진 잠수함은 시속 60km의 경이적인 속도로 바다속을 종횡무진 누빈다. 조선의 신포급 핵추진 잠수함도 그처럼 뛰어난 수중작전능력을 가졌다.

 

▲ <사진 6> 이 위성사진은 2014년 12월 18일 신포항 부두에 있는 신포급 잠수함을 촬영한 것이다. 그 잠수함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매우 큰 직사각형 구멍이 함교 상판에 나있는데, 그 구멍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는 것이다. 수중미사일발사관 설치작업에 사용하는 대형 기중기가 함교 바로 옆에 서 있다. 푸른 원으로 표시된 것은 미사일발사시험선박이다.     © 자주시보

 

 

2. 바닷물 가르며 솟구쳐 오른 탄도미사일 2발


2015년 5월 9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동해에서 배를 타고 현장에 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신포급 전략잠수함의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그 날 성공을 거두기까지 몇 달 동안 신포급 전략잠수함 1척이 신포항 부두에 계속 모습을 드러냈는데,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분석해온 위성사진들에서 그 잠수함의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첫째, 2014년 12월 18일에 촬영된 <사진 6>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하는 작업현장을 보여준다. 이 사진에서 붉은 원으로 표시된 것처럼 신포급 전략잠수함의 함교 상판에 매우 큰 직사각형 구멍이 하나 보이는데, 그 구멍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이 들어가는 것이다. 수중미사일발사관을 함교 안에 수직으로 세워놓을 때 사용하는 대형 기중기가 함교 바로 옆에 서 있다.

 

▲ <사진 7> 이 위성사진은 2015년 3월 2일에 촬영된 것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것처럼, 함교 상판에 열어놓은 수중미사일발사관 사출구 2개가 선명하게 보인다.   ©자주시보


둘째, 2015년 3월 2일에 촬영된 <사진 7>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것처럼 함교 상판에 수중미사일발사관 사출구 2개를 열어놓은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설치하는 작업이 완료된 것이다. 미국 전략군사령관 쎄실 헤이니(Cecil D. Haney)가 연방상원 청문회에서 조선의 잠대지탄도미사일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것은 신포급 전략잠수함 함교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는 작업이 완료된 직후인 2015년 3월 19일이었다.


셋째, <사진 6>과 <사진 7>을 다시 살펴보면, 신포급 전략잠수함 왼쪽에 정박된 특이한 형태의 선박 1척이 보인다. 이 선박은 탄도미사일 수상시험발사에 사용되는 것이다. 2015년 1월 23일 조선은 바다에 띄워놓은 그 시험선박에 설치한 수직발사관에서 탄도미사일 수상시험발사를 진행하였다.

 

▲ <사진 8> 이 위성사진은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가 진행된 다음 날인 2015년 5월 10일에 촬영된 것이다. 푸른 원으로 표시된 물체들은 미사일운반통에 넣은 탄도미사일을 실어나른 대형차량들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물체는 대형차량에서 내려져 X형으로 겹쳐놓아둔 2개의 미사일운반통이다. 미사일운반통을 겹쳐놓은 것은 그 안에 미사일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넷째, <사진 8>은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다음 날인 2015년 5월 10일에 촬영된 것이다. 사진에서 푸른 원으로 표시된 두 물체는 탄도미사일을 미사일운반통에 넣고 실어나르는 대형차량들이다. 사진에서 붉은 원으로 표시된 물체는 대형차량에서 내려져 X형으로 겹쳐놓아둔 2개의 미사일운반통이다. 미사일운반통이 그렇게 겹쳐놓인 것을 보면, 그 안에 미사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사일이 들어있는 미사일운반통이라면 X형으로 겹쳐놓을 수 없다.

 

▲ <사진 9> 2015년 5월 9일 신포급 잠수함에서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솟구쳐오르는 출수장면이다. 근처에 소형선박이 보인다.     © 자주시보

 

▲ <사진 10> 위의 사진과 거의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는 근처에 있던 소형선박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신포급 잠수함이 탄도미사일 2발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발사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탄도미사일은 해수면에서 약 70도 각도로 상승비행을 하였다. 그런데도 미국과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신포급 잠수함이 잠대지탄도미사일 1발을 시험발사했는데 150m 정도 날아가다가 해수면에 떨어졌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 자주시보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사진 8>이 촬영되기 하루 전인 지난 5월 9일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를 진행할 때 신포급 전략잠수함에서 탄도미사일 2발이 발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9>에서 보는 선박 1척은 탄도미사일이 발사될 때 잠수함 곁에 있었는데, 탄도미사일이 발사된 동일한 현장을 촬영한 <사진 10>에서는 그 선박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탄도미사일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2발 발사하였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잠수함기지는 모두 지하요새화되었다. 조선에서 잠수함을 건조, 개조하거나 수리, 정비하는 작업은 언제나 지하잠수함기지 안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의 공중정찰수단들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14년 12월부터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지하잠수함기지에서 나와 신포항 부두에 계속 머물렀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전략잠수함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는 작업이 신포항 부두에서 대낮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수중미사일발사관은 잠수함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그 설치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건조과정 중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함교에 설치하고 나서 신포급 잠수함을 진수한 것인데, <사진 6>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하는 작업현장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에 없는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새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그 전략잠수함에 들어있는 수중미사일발사관을 밖으로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 재설치작업을 미국의 공중정찰수단에 노출된 신포항 부두에서 대낮에 진행한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런 재설치작업은 조선이 자기의 전략잠수함 보유사실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조선의 무장장비들 가운데 최강의 수중비밀병기인 전략잠수함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드러내 보인 것은, 조선이 국가적 중대사를 앞두고 미국에게 강력한 경고신호를 보낸 것이다.

 

 

3. 발사수심 50m에서 대기하는 전략핵탄미사일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은 전략잠수함을 보유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핵강국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다. 핵보유국이면서도 아직 전략잠수함을 갖지 못한 인도는 러시아에서 전략잠수함 1척을 10년 동안 빌려 쓰고 있다. 전략잠수함 개발에 힘쓰는 인도는 2014년에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를 2번 진행하였는데, 그 수중시험발사는 해수면 아래로 침하한 잠수함에서 발사한 것이 아니라 수심 30m에 설치해놓은, 판툰(pontoon)이라 부르는 잠함(潛函)에서 발사한 것이다. 인도는 5대 핵강국을 추격해온 후발핵보유국이지만, 잠대지탄도미사일 개발과정에서 제기된 공학기술적 난제들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군사과학기술강국이라면 잠대지탄도미사일도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중국은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잠대지탄도미사일로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들면서도 왜 잠대지탄도미사일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것일까? 그 까닭은 잠대지탄도미사일을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수중미사일발사체계를 만드는 것이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 <사진 11> 이 사진은 발사수심 50m에 침하한 미국 해군의 핵추진 잠수함에서 수중미사일발사관 사출구를 열고 탄도미사일 트라이던트-1호를 발사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가압공기가 발사관 안으로 고속사입되기 시작한 찰나에 물거품이 뿜어져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 자주시보


해수면 아래 발사수심까지 침하한 전략잠수함은 수중미사일발사관 사출구를 열고 탄도미사일을 발사한다. 탄도미사일을 발사수심 50m에서 해수면 위로 밀어올리는 수중고속사출은 <사진 11>에서 보는 것처럼, 발사관으로 고속사입시킨 가압공기의 폭발적인 힘으로 무거운 탄도미사일을 밀어올려 밀도가 강한 바닷물을 뚫고 상승시키는 것이다. 수중고속사출에 필요한 몇 가지 공학기술을 열거하면, 잠수함 안에서 공기를 초고압으로 압축시키는 기술, 가압공기를 발사관으로 고속사입시키는 기술, 고속사출시 함내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소음과 충격을 감소시키는 기술, 탄도미사일이 해수면 위로 출수하는 순간 로켓엔진을 1초 이하의 단위에 맞춰 점화하는 기술, 탄도미사일이 해수면 위로 출수할 때 상승비행자세를 유지하는 기술 등이다.


위에 열거한 것처럼, 탄도미사일 수중발사기술은 인공위성 공중발사기술보다 더 어려운 고난도 기술이다. 그래서 5대 핵잠보유국들이 그 고난도 기술을 반세기 동안 장기독점해올 수 있었다. 그 기술이 오죽 어려우면, 달궤도에 관측위성을 쏘아올리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가진 인도가 탄도미사일 수중발사기술을 아직 정복하지 못하였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은 이번에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5대 핵잠보유국들이 반세기 동안 유지해온 독점구도에 파열구를 내고 여섯 번째의 핵잠보유국으로 등장하였다.

 

▲ <사진 12> 2015년 5월 9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배를 타고 동해로 나가 수중시험발사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발사수심까지 침하한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북극성-1호를 발사하였다. 수심 50m에서 고속사출되어 굉음을 내며 솟구쳐오른 그 미사일 동체에 북극성-1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선명하다. 유사시 핵탄이 들어갈 탄두부는 검은 색을 칠했고, 동체의 앞쪽과 뒷쪽에 굵고 검은 띠를 하나씩 둘렀다. 그 미사일은 화염과 연기를 뿜으며 동해의 하늘로 높이 날아갔다.     © 자주시보


2015년 5월 9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배를 타고 동해로 나가 수중시험발사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발사수심까지 침하한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탄도미사일 북극성-1호를 발사하였다. 수심 50m에서 고속사출되어 바닷물을 가르며 솟구쳐 오른 북극성-1호는 <사진 12>에서 보는 것처럼 굉음 속에서 화염과 연기를 내뿜으며 동해의 하늘 높이 날아갔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그 놀라운 장면을 격동적인 필치로 이렇게 묘사하였다. “잠시 후 바다면을 뚫고 불쑥 솟구친 탄도탄이 거세찬 불줄기를 뿜으며 창공 높이 날아올랐다. 시험발사를 통하여 함내소음준위, 발사반충력, 탄도탄의 수면출수속도, 자세각 등 전략잠수함에서의 탄도탄수중발사가 최신군사과학기술적 요구에 완전히 도달하였다는 것이 검증확인되였다.”


북극성-1호의 작전성능은 육안관찰로 검증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 측정기구를 배치해놓고 수중시험발사과정을 정밀관측하는 것이다. <사진 9>에서 붉은 원으로 표시된 선박은 측정기구를 싣고 현장에서 북극성-1호의 작전성능을 검증한 조선의 관측선이다.


미국의 온라인언론매체 <워싱턴자유횃불(WFB)> 2015년 5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해수면 아래로 침하한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수중미사일발사관에서 탄도미사일을 사출하는 수중시험발사는 2015년 4월 22일에 진행되었고, 4월 말과 5월 초에도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되었다. 지난날 5대 핵잠보유국들은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에서 20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성공하였는데, 조선은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를 4번 만에 성공시켰으니 세계가 놀랄 경이적인 사변이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그 경이적인 소식을 전하면서 “완전성공”이라고 썼다.


조선이 그처럼 잠대지탄도미사일 개발을 완성하였으니, 이제는 신속한 실전배치일정만 남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전략잠수함 탄도탄이 계렬생산에 들어가고 가까운 시일 안에 실전배비”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은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를 4번 실시하였으므로 그 미사일을 8발 발사하였고, 그보다 먼저 2015년 1월 23일 조선은 바다에 띄워놓은 시험선박에서 탄도미사일 수상시험발사를 선행하였으므로 그 미사일을 모두 10발정도 발사한 것인데, 그런 수량이라면 북극성-1호 계렬생산체계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북극성-1호의 작전성능을 파악하려면, 지난 시기 미국, 소련, 중국이 각기 자기 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잠대지탄도미사일과 비교,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폴라리스(Polaris)는 길이 8.7m, 지름 1.4m, 중량 13.1t이고, 소련의 R-13은 길이 11.8m, 지름 1.3m, 중량 13.7t이고, 중국의 쥐랑(巨浪)-1호는 길이 10.7m, 지름 1.4m, 중량 14.7t이다.

 

▲ <사진 13> 핵잠보유국들의 잠대지탄도미사일들 가운데 조선의 북극성-1호와 형태가 가장 비슷한 것은 중국의 쥐랑-1호다. 이 사진에 나타난 미사일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모사한 쥐랑-1호다. 두 미사일을 비교하면, 쥐랑-1호가 북극성-1호보다 조금 더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북극성-1호는 길이 약 10m, 지름 약 1.3m, 중량 약 13t인 것으로 추정된다.     © 자주시보


여기 열거한 세 종류의 잠대지탄도미사일 가운데 미사일형태가 북극성-1호와 아주 비슷한 것은 <사진 13>에서 보는 쥐랑-1호인데, 쥐랑-1호가 북극성-1호보다 조금 더 커 보인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북극성-1호는 길이 약 10m, 지름 약 1.4m, 중량 약 13t인 것으로 추정된다. 웹싸이트 <커벗 쇼어즈>에서는 북극성-1호가 길이 9.3m, 지름 1.5m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미사일의 작전성능을 살필 때 시선이 가장 먼저 가닿는 것은 사거리다. 북극성-1호의 사거리는 몇 km가 되는 것일까? 기존 핵잠보유국들의 사례를 보면, 미국의 폴라리스는 사거리가 1,800km, 소련의 R-13은 사거리가 600km, 중국의 쥐랑-1호는 사거리가 1,700km다. 
사거리를 비교할 때, 소련의 R-13이 미국의 폴라리스나 중국의 쥐랑-1호에 비해 매우 짧은 까닭은, 소련이 초기의 미사일제작기술로 R-13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R-13을 만든 직후 긴 사거리를 가진 후속미사일들을 연속하여 만들었는데, R-15의 사거리는 1,000km이고, R-21의 사거리는 1,400km다.


위에 열거한 핵잠보유국들의 선행경험을 살펴보면, 그 나라들이 자기의 잠대지탄도미사일을 1,000km 이상 날아가도록 만들었고, 후속미사일을 만들면서 사거리를 단계적으로 늘려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북극성-1호의 사거리가 1,000km 이상이라는 점이 자명해지는데, 쥐랑-1호의 사거리가 1,700km이므로, 크기가 그보다 조금 작은 북극성-1호의 사거리는 1,500km로 추정된다. 

 

▲ <사진 14> 조선의 북극성-1호가 연기를 뿜으며 동해의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 미사일의 사거리는 1,500m인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가 약 10m로 추정되는 그 미사일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고도를 비행하였는데도, 미국과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150m밖에 날아가지 못했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 자주시보


북극성-1호의 사거리가 그처럼 길기 때문에 수중시험발사를 진행할 때는 사거리를 대폭 줄여서 쏘아야 한다. 지난 5월 9일에 진행된 수중시험발사에서 북극성-1호가 단축된 사거리를 날아가 떨어진 동해상의 탄착점은 어디쯤이었을까? 잠대지탄도미사일은 광역타격수단이므로 점타격에 사용되는 전술핵탄을 장착하지 않는다. 광역타격수단의 정밀도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진 14>에 보는 것처럼, 북극성-1호는 육안으로 그 동체를 볼 수 없을 만큼 높은 고도로 날아갔다.


미사일의 작전성능을 거론할 때, 사거리와 함께 중시하는 것은 파괴력이다. 북극성-1호의 파괴력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잠대지탄도미사일에는 반드시 핵탄이 장착된다. 핵탄이 아니라 고폭탄이 장착된 잠대지탄도미사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달리, 잠대지순항미사일에는 핵탄이 아니라 반드시 고폭탄이 장착된다. 그래서 잠대지순항미사일로 무장한 잠수함은 전략잠수함보다 한 급 낮은 공격잠수함으로 분류된다.


다른 핵잠보유국들이 초기에 만들었던 잠대지탄도미사일의 파괴력을 살펴보면, 미국의 폴라리스에는 600킬로톤급 핵탄 1발이 장착되었고, 소련의 R-13에는 1메가톤급 핵탄 1발이 장착되었고, 중국의 쥐랑-1호에는 300킬로톤급 핵탄 1발이 장착되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조선의 북극성-1호에는 300킬로톤급 전략핵탄 1발이 장착될 것으로 보인다.

 

4. 조선은 대서양에서 최후일격 날린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5년 5월 9일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를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조선이 북극성-1호를 보유한 것은 “적대세력들의 뒤잔등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탄을 매달아놓는 것으로 된다”고 지적하였고, “적대세력들을 임의의 수역에서 타격소멸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전략무기를 가지게 되였”다고 말했다.


적대세력들의 잔등에 시한탄을 매달아놓은 것이라는 표현은 북극성-1호의 타격범위가 미국의 후방작전구역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조선과 미국이 70년 동안 무력으로 대치해오는 상황에서 태평양이 미국의 전방작전구역이라면 대서양은 미국의 후방작전구역이다. 적대세력들을 임의의 수역에서 타격소멸할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은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가릴 것 없이 전후방작전구역 어디에서나 미국을 타격소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시에 북극성-1호가 대서양에서 미국 본토를 향해 불시에 발사될 것임을 예고한다. 다시 말해서,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북극성-1호를 싣고 대서양에 가서 미국 본토 동부지역을 불시에 기습타격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중량급 전략잠수함들은 태평양작전구역과 대서양작전구역에 각각 나누어 배치되었는데, 그런 잠수함대국과 대치한 조선의 경량급 잠수함은 동해에서 연안작전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조선의 잠수함작전능력이다. 그런 까닭에 태평양에도 가지 못할 조선의 경량급 잠수함이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대서양까지 가서 원정작전을 할 것이라고 말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과장어법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북극성-1호라는 이름에 들어있는 깊은 사연을 알면, 그런 낡은 고정관념은 사라질 것이다. 


자국산 미사일에 별이름을 붙이는 것은 조선에서 볼 수 있는 오랜 관례다. 이를테면, 조선에서 대전차미사일은 수성(나중에 불새로 개칭)이라 부르고, 대함미사일은 금성이라 부르고, 도로이동식 지대지미사일은 화성이라 부르고, 수직갱발사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목성이라 부르는데, 잠대지탄도미사일에는 북극성이라는 별이름을 붙였다.


조선의 미사일들에 붙여진 수성, 금성, 화성, 목성이라는 이름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들의 이름인데, 유독 잠대지탄도미사일은 지구로부터 434광년 떨어진 천구의 북극점에서 밝게 빛나는 별의 이름으로 부른다. 신형 미사일을 만들 때마다 태양계 행성의 이름을 순서대로 붙여온 조선의 미사일작명관례에 따르면, 잠대지탄도미사일은 토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데 그런 관례에서 벗어나 그 이름을 북극성으로 정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의 잠대지탄도미사일이 북극성이라는 색다른 별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 미사일이 북극성과 관련된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무엇일까? 아래의 정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전시에 조선이 미국과 추종국들의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타격할 때는 전술핵탄을 쓰게 될 것인데, 신포급 전략잠수함에 전략핵탄 2발이 실리는 것은 그 잠수함의 타격범위가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넘어 미국 본토로 향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둘째, 선제핵타격에는 점타격수단인 전술핵탄이 사용되고, 보복핵타격에는 광역타격수단인 전략핵탄이 사용되는데, 신포급 전략잠수함에서 발사할 핵탄미사일은 미국의 전술핵타격을 받았을 때 보복핵타격에 사용하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하면, 조선의 북극성-1호는 미국 본토에 대한 보복핵타격에 사용되는 최강의 전략무기라는 점이 자명해진다.


전시에 조선은 전술핵탄을 발사하는 동시다발-기습타격으로 미국과 추종국들의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선제공격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미국도 전술핵탄으로 조선의 군사기지들을 보복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조선의 선제핵타격을 받아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상실한 뒤에도 항복하지 않고 전술핵탄으로 조선에게 반격하는 경우, 조선은 최후일격으로 미국을 멸망시키려고 할 것이다. 조선이 최후일격에 사용할 비장의 전략무기가 바로 북극성-1호다. 북극성-1호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300킬로톤급 전략핵탄 1발이 장착된다.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전시에 조선이 북극성-1호를 발사하는 최후일격은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 디씨를 타격하는 것이다.


2005년 11월 19일 미국의 핵시대평화재단(NAPF) 웹싸이트에 현시된 ‘워싱턴 디씨에서 발생한 300킬로톤급 핵폭발 결과’라는 제목의 글은 전시에 미국의 심장부를 덮칠 핵재앙을 아래와 같이 예언하였다.  


워싱턴 디씨 상공에서 일어난 핵폭발로 발생하는 거대한 핵섬광은 하루 중 태양빛이 가장 밝은 시간대인 정오에 사막지대에 내려쬐는 강렬한 태양빛보다 5,000배나 더 밝다. 그 핵섬광을 바라보는 순간 사람들의 두 눈은 즉시 멀게 된다. 천지를 뒤덮는 핵섬광과 함께 지름이 2km나 되는 거대한 핵화염이 터져나오는데, 핵화염 중심부의 온도는 태양 중심부의 온도보다 4~5배나 더 높은 섭씨 1억1,100만도이므로 지상의 모든 물체는 핵화염 속에서 형체도 없이 타버리거나 녹아버린다. 또한 핵폭발 1초 뒤 폭심에서 발생한 시속 1,200km의 초강력한 핵폭풍과 그 핵폭풍을 따라오는 시속 480~640km의 후폭풍은 방사선형으로 휘몰아치면서 지상의 모든 물체를 폭심으로부터 바깥쪽으로 멀리 날려버린다. 그로부터 4초 뒤에는 거대한 핵화염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면서 발생시킨 초강력한 흡입력에 의해 핵폭풍의 방향이 반대방향으로 갑자기 바뀌면서 시속 80~112km의 역폭풍이 몰아쳐 모든 물체를 폭심쪽으로 날려버린다. 그로써 100~168㎢ 안에 있는 모든 물체는 완전히 파괴, 소멸된다.


미국은 자기의 심장부가 조선의 전략핵타격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 멸망하는 참극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야 한다. 미국이 조선과의 전쟁에서 자기 본토를 지키려면,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에 대한 방어는 포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이 전술핵탄을 발사하는 선제공격으로 미국과 추종국들의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파괴해도 미국은 조선에게 보복하는 반격을 포기해야 하는 뼈저린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쟁씨나리오는 어디까지나 예견이다. 조선은 예견만 믿고 미국과의 최후결전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오판한 미국이 전술핵탄으로 조선에게 보복공격하는 최악의 씨나리오에도 당연히 대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조선은 미국의 심장부를 최후일격으로 날려버릴 보복핵타격준비도 갖춰야 하는 것이다.


전시에 조선의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워싱턴 디씨에 최후일격을 가하려면 대서양으로 가야 한다. 북극성-1호의 사거리는 1,500km로 추정되기 때문에,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미국 본토 서부해안에 근접한 태평양 바다속에서 그 미사일을 쏘면, 사거리가 너무 짧아 워싱턴 디씨에 도달하지 못한다.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백악관까지 직선거리는 3,923km이므로,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샌프란시스코 해안에서 200km 떨어진 태평양 수역에 수중매복하는 경우 사거리가 4,500km인 잠대지탄도미사일을 쏘아야 하는데 경량급 잠수함은 크고 무거운 미사일을 싣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미국 본토 동부해안에 근접한 대서양 수역에 수중매복해야 하는 것이다.


냉전이 막바지 이르렀던 1980년대에 수중배수량이 9,300t인 소련의 얭키급(Yankee-class) 핵추진 잠수함은 미국 본토 동부해안에서 약 1,000km 떨어진 버뮤다라는 섬의 동쪽에 있는, ‘초계초소(patrol box)’라 부르는 구역에 수중매복하며 미국의 심장부에 최후일격을 가할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 잠수함에는 500킬로톤급 전략핵탄을 장착한 R-31 탄도미사일이 실려 있었다.

 

▲ <사진 15> 베링해를 지나 북극해로 들어서면 북극점을 중앙에 두고 두 개의 항로가 나타난다. 캐나다 최북단을 오른쪽에 끼고 북극해를 지나는 북서항로가 바로 조선의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전시에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하기 위해 지나게 될 원정항로다. 북서항로를 타고 북극해를 지나 대서양에 들어선 조선의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대서양수중매복구역에서 최후일격으로 미국의 심장부를 초토화하기 위해 수중매복에 들어갈 것이다.     © 자주시보


전시에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동해의 지하잠수함기지를 떠나 미국 본토 동부해안에 근접한 대서양수중매복구역으로 가는 항로는, 동해→오호쯔끄해→베링해→북극해→래브라도해를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가는 북극항로밖에 없다. <사진 15>에 표시된 것처럼, 북극항로는 북서항로와 북동항로로 갈라지는데, 북서항로는 베링해에서 북극해를 거쳐 북미주로 가는 항로이고, 북동항로는 베링해에서 북극해를 거쳐 북유럽으로 가는 항로다.


북서항로는 냉전기에는 물론 요즈음도 러시아군 잠수함들이 쿠바를 오갈 때 이용하는 중요한 항로다. <뉴욕타임스> 2009년 8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쿠바를 향해 가던 러시아의 전략잠수함 2척 가운데 1척이 미국 동부해안에서 약 320km 떨어진 위치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시에 조선의 신포급 전략잠수함도 북서항로를 따라 대서양으로 갈 것이다.


전시에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대서양수중매복구역으로 가기 위해 북서항로를 지나려면 거대한 빙산들이 들어찬 북극해 바다속을 잠항해야 하는데, 디젤전동식 잠수함은 빙산바다 속을 잠항하지 못한다. 핵추진 잠수함이라야 북극해 바다속을 지날 수 있다. 조선이 미국과의 최후결전에서 이기기 위해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반드시 만들어야 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1958년 8월 태평양을 출발한 미국의 1세대 핵추진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북서항로를 타고 대서양으로 나갔다. 노틸러스호가 북서항로를 지날 때 시속 17km의 잠항속도로 4일 걸렸는데, 전시에 동해를 출발한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대서양수중매복구역까지 12일이면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최후결전을 앞두고 북극성이 빛나는 북서항로를 지나게 될 조선의 잠대지탄도미사일이 북극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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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건, 제36차 공판 방청기2편

 
 
5년 전 기록을 들추어 보다, 천안함의 진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장유근 | 2015-05-19 09:53:5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5년 전 기록을 들추어 보다 
-천안함 사건, 제36차 공판 방청기2편-

천안함의 진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지난 11일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서관 524호 법정에서 천안함 사건 제36차 공판(형사36부 재판장 이흥권 부장판사)이 속개됐다. 이날은 전국에 봄비가 예고되고 있었지만 법원으로 가는 길은 봄날씨 답지 않게 후텁지근했다. 마치 여름을 방물케 하는 날씨랄까. 지하철 교대역에서 법원으로 가는 짧은 여정을 통해 필자(‘나’라고 한다)의 머리속은 별로 개운치 못했다. 천안함 침몰사건이 5년을 맞이했지만 적지않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이 사건은 지워져 가고 있었던 것.

단정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와 유사한 사건 등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랬다. 천안함 사건 뿐만 아니라 세월호 침몰사건 조차 정부와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서서히 체념을 배워가는 듯 정부 혹은 위정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것. 자국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말거나, 국민들의 세금이 허투로 쓰여지거나 말거나,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린 채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

사람들은 진실에 목말라하지 않았다. 지위 등을 통해 사람들을 적당히 속이면 돈을 얻고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자’가 되지만, 진실은 무지개가 되어 쫓으면 쫓을수록 사회로부터 멀어지며 도태되는 것이랄까. 천안함 사건의 중심에서 '진실'의 화두를 붙들고 지난 5년 동안 법정에서 세월을 보내온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진실의 길 대표)을 법정에서 만나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이 못됐다.

법원으로 가는 발길이 무거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설령 천안함의 진실이 밝혀져 명예를 회복하고 향후 국가를 상대로 그만한 댓가(?)를 얻는다 할지라도, 신 선생에게 남은 건 상처 뿐이자 진실을 갈망했던 사람들까지 허망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거짓을 양산한 사람들이나 국가기관은 여전히 뻔뻔스러울 것이며 ‘자기의 잘못은 없다’며 버틸 것.

주목해야 할 이종인 대표의 증언

그동안 법정에서 봐 왔던 증인 등의 모습이 주로 그랬다. 하나같이 그들은 천안함의 진실로부터 멀어지려 애쓰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방청석에 앉은 내게 눈에 띈 건 증인들의 증언이 석연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증언들은 누군가로부터 학습을 받은 내용이거나 정체가 모호한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받는 듯한 모습들. 천안함 침몰사건 이후 우리사회에 던져진 사건의 실체가 주로 그런 느낌이랄까.

이날 법정에는 두 사람의 증인이 출두했는데 피고인측 증인으로 나선 알파잠수공사 이종인 대표의 증언은 주목할만 했다. 그는 관련 업계에서 몇 안되는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베테랑이었다. 이 대표는 이날 자기의 지식과 경험등을 증언을 통해 “천안함에는 폭발 흔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크게 놀랄만한 주장사실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 대표의 주장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부가 기관을 총동원해 ‘과학으로 포장된 거짓주장’을 하고 있었다면, 이 대표의 이날 주장은 (전문가의)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었다. 천안함에 폭발 흔적이 없었다는 당신의 주장이, 한 때 천안함 피격사건의 실체를 부정하는 70%의 여론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들이랄까. 법정을 나선 후 속기록을 정리하면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동안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사실을 다시 되돌려 보는 것.

5년 전 기록을 들추어 보다

나는 귀가하는대로 짬잠이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5년 전의 기록을 살펴봤다. 천안함의 폭발(?)이 세뇌된 정보인 지, 사실인 지 등을 상식적으로 되짚어 보는 것. 5년 전, 그러니까 지난 2010년 5월 20일 오전 11시 경부터 필자의 카메라에 담긴 ‘천안함 피격사건의 실체’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리게 만들어 카메라의 초점까지 놓치고 있었다. TV를 통해 방영된 합조단의 발표 속에서 차마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것.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이런 모습들이었다.

(5년 전에 기록된 장면들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당시 나는 합조단이 생중계로 발표한 이런 장면들을 캡쳐해 두고 분노하고 있었다. 나의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장면들이 공중파를 통해 버젓이 안방으로 송출되고 있었던 것. 지난 36차 공판 당시 증인으로 나선 알파잠수공사 이종인 대표가 ‘천안함에는 폭발이 없었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게 주로 이런 모습들이었다. 그는 법정 증언에서 합조단이 제시한 북한제 (1번)어뢰(?)를 보는 순간 “4~5년은 됐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5년 전의 기록속에서 다시 만나게 된 1번 어뢰의 민낯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기록들 중에는 법정의 증언을 통해 상식 밖의 일 등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천안함 침몰사건에 ‘폭발이 없었다’는 걸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상식밖의 일들을 과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 만큼 더 어리석을 일도 있을까. 지금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소인의 우격다짐을 보면서 내가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정리했다. 5년 전의 기록을 들추어보며 상식과 몰상식 혹은 과학 등을 비교해 보는 것. 이종인 대표는 그러한 과정을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었다.

“...천안함에는 폭발 흔적이 없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5&table=dream_jang&uid=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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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 간첩? 내란? 5.18 진상 담은 '20분 영상'

 

5.18기념재단·기억하겠습니다 5·18, 35주년 기념 영상 공개

15.05.18 21:26l최종 업데이트 15.05.19 09:00l

 

 



'기억하겠습니다 5.18' 캠페인을 벌여 온 동명의 페이스북 페이지(바로가기)가 18일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을 공개했다(관련 기사 : "1980년에 SNS가 있었다면" 조국도 함께한 캠페인). 

5·18기념재단과 함께 영상 제작 작업을 진행한 '기억하겠습니다 5.18'은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한다는 것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2015년 지금 여기 우리의 삶으로 그 정신을 실천해가는 것입니다"라면서 영상을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올렸다(유튜브에서 보기).

"지금 광주 큰일났습니다. 군인들이 시민들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화면으로 시작하는 영상은 5.18민주화운동의 경과와 의미를 여러 근거와 증언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영상에는 5·18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은 물론, 당시 계엄군이었던 5.18 최초 양심선언자도 출연해 5.18의 진상을 증언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홍구 한신대 교수,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임철우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순태 소설가,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신문> 사진기자, 안종철 5.18기록관 추진기획단 자문위원 등도 목소리를 보탰다.

영상 말미에는 캠페인에 참여한 이들이 '기억하겠습니다 5.18'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찍은 사진 여러 장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장면이 담기기도 했다.

아래는 영상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5.18, 현행법이 규정한 명백한 민주화운동"
 
기사 관련 사진
▲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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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그때 우리에게 SNS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나경택 "그 당시에 그런 게 있었으면 정말로 광주의 진실이 바로…."

2014년 11월 SNS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된 미국의 퍼거슨 시위. 2011년 1월 이집트가 이뤄낸 페이스북 혁명. 2002년 한국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 함께 지켜봐주고 함께 응원하는 마음 안에서 불필요한 폭력은 사라졌고, 새롭고 힘찬 가능성이 시작됐습니다. 끝을 알 수 없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네트워크. 그 개방적 확장성이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습니다.

피로 물든 역사가 지나가고 그 자리에 자유라는 꽃이 피어났습니다. 쾌적한 환경, 자유로운 분위기, 소중한 권리를 지켜주는 법과 제도, 그 모든 것들 틈 사이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이전 세대들의 핏방울들이 스며 있죠.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와 자유를 활짝 꽃피우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조국 : "5.18은 현행 법률과 판례에 따라서 민주화운동으로 명백히 규정돼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 대법원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5.18은 폭동이나 내란이나 간첩 이런 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중심적 사건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2011년 5.18민주화운동의 기록물들이 한국 현대사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5.18에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민주, 평화의 정신이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되고, 계승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잊혀서는 안됩니다. 인류의 양심과 기억의 일부분으로 영원히 남아있어야 합니다." - 로슬린 러셀 박사(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

"어떻게 사람에게 택배네, 썩은 홍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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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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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의 뚜렷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신군부가 계획적으로 전파한 5.18에 대한 부정적인 첫 인상은 오늘날 지역적, 정치적 갈등의 요소로 남아 희생자들을 괴롭힙니다. 

김점례(고 장재철 열사 어머니) : "어떻게 사람을 갖고 택배네, 일광욕을 허네, 썩은 홍어에다 비교를 해서 쓰겄어. 오메, 글 안해도 기가 맥히고 그런데 그런 소리르 들으니 난 몇날, 며칠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기가 콱 맥혀부러갖고."

유족들을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

문건양·김길자(고 문재학 열사 부모) : "몰라도 너무 모르죠. 너무 모르고. 우리 지역에서만 알지 다른 데서는 모르잖아요."

1980년 5월 당시에도 다른 도시의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신군부에 의해 시외전화가 두절됐고, 광주로 들어오는 모든 육로도 완전히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임철우(소설 <봄날> 저자, 5.18 당시 전남대 4학년) : "광주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여기서는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설마 (광주의 상황을) 모르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죠, 당연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이듬해, 정권을 차지한 군부의 중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3선 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폭압성을 더해가던 그의 독재에 시민들은 저항했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은 부하 김재규의 총탄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는 민주화를 열망하던 전국의 대학생들을 1980년 5월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그 열흘 간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안종철(전 5.18 기록물유네스코 등재 추진단장) : "타 지역에서 5.18을 조금씩 알아가는 게 1985년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저)라는 책이 발간되지 않습니까.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됨에 따라서 518의 진실을 좀 알기 시작했고."

1988년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 야당은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을 쟁점화시켰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른바 광주 청문회를 통해 그 동안 왜곡되고 은폐됐던 진실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총기 수없이 풀려도, 어디 한 군데 털린 곳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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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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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가 처벌되기까지 걸린 17년의 세월. 5.18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침묵의 역사이자, 왜곡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위대한 항쟁의 힘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마침내 평화의 역사, 민주주의의 역사로 바꿨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하겠습니다.

한홍구 : "공권력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총기가 수천 정이 풀렸어요. 그런데 은행, 금은방, 슈퍼마켓, 전당포, 어디 한 군데 털린 데가 없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얘기에요. 말이 안 되는 높은 도덕성이에요."

송희성 오월민주여성회장 : "보급도, 장사도 안 되고, 교역이 안 되니까 집집마다 쌀이 떨어질 거 아닙니까. '쌀 없어' 그러면 '응 내 거 같이 먹어' (그러고), '김치 없어' 그러면 김치 갖다주고. 대동정신이 살아난 거예요. 정말 나는 그런 세상 한 번 다시 살고 싶어요." 

하지만 신군부는 대동세상을 꿈꾸며 평화를 지켰던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5월 21일 자정, 시외전화가 일제히 두절됐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이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오후 1시, 스피커에서 돌연 애국가가 흘러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는 애국가를 배경으로 2만여 명의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했습니다.

이경남 평택 효덕감리교회 목사(오일팔 당시 계엄군, 계엄군 최초 양심선언자): "제가 광주 전남도청 지하실에 내려가 쉬고 있었어요. 지하에 있는데 갑자기 애국가를 틀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니 왜 갑자기 무슨 방송이 나오나', 이상하게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근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애국가를 틀면서 사격을 했다고 그러더라고."

나경택 : "그때 (내가) 계엄군들 사이에 들어갔었습니다. 12시는 넘었고, 1시는 못 됐었습니다. 그때 차 모 대위, 아주 잘생긴 대위였습니다. 차아무개 대위가 '야 통신병, 발포명령 어떻게 되는 거야' 막 다그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근데 통신병이 '아직 발표명령이 없습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다 한 10분 후에 '발표 명령입니다' 하더라고. (차 대위가) '그래?' (하는) 그 순간에 이제 막 총으로 갈겨대고 그랬죠."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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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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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자정, 광주 전역의 시내전화가 두절됐고, 오전 3시 신군부가 탱크와 헬기를 동원해 도청을 조여왔습니다. 오전 4시 10분 공수부대의 일제 사격으로 시작된 최후의 항쟁. 그곳을 마지막까지 지킨 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끝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최정운 :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게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하는 것,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로서의 어떤 가치, 그게 사실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거고, (전남도청 안 최후의 시민들은) 그걸 지키려고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인화씨(평화반점 운영, 518당시 도청 항쟁 생존자) : "깨끗이 입고 죽어야 천당에 간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옷 갈아입고 이모님한테 '저 주민등록증 넣고 가니까 아버지한테 내 시체라도 가져가라고 하슈' 말했죠. 근데 이렇게 살아있네요. 아유, 목이 메일라 그러네. '내가 오늘 여기서 죽음으로써 광주시민 아니면 내 형제가,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만 가졌지…." 

조국 :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 뭘까 생각하면 한편으론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의 결별인 것이고, 하나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거든요. 이걸 잊는 민족, 나라는 희망이 없는 거죠." 

피와 통곡의 역사위에 피어난 꽃, 자유. 그 자유가 우리에겐 묻습니다. 당신은 현재만을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입니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한다." - 조지 산타야나

정부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공식 사망자 수를 165명으로 발표했지만 암매장으로 인한 행방불명을 고려하면 추측되는 사망자 수는 훨씬 많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최초 발포를 명령한 책임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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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언론’은 ‘광주’를 어떻게 말했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5/18 09:43
  • 수정일
    2015/05/18 09:4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광주사태가 전두환의 정권 장악을 위해서라고 보도했던 외신’
 
임병도 | 2015-05-18 09:12:5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35년 전 5월 18일, 대한민국 광주는 수많은 시민이 죽고 다쳤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5.18광주 민주화운동이라 부릅니다.(공식 명칭은 5.18민주화운동) 지금이야 우리가 민주화운동이라 부르고 있지만, 당시 언론은 광주를 가리켜 ‘폭동’과 ‘폭도’라 불렀습니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신문 대부분이 발행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일보는 5월 18일 1면에 5,17쿠데타라 불리는 ‘전국비상계엄 확대’를 보도했습니다.

한국일보는 전국비상계엄이 북한의 동태와 전국적인 소요 사태를 감안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이 있음에도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 정권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1980년 5월, 언론은 광주를 어떻게 말했는지 그때의 언론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광주 이야기’

19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와 마주칩니다. 공수부대에 맞서던 생들은 공수부대원에 의해 구타를 당했고, 5월 18일 오후 광주 시내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됩니다.

계엄군은 시민들과 학생을 무차별 폭행을 하고, 이에 항의하던 학생과 시민을 향해 5월 21일 집단 발포가 시작됩니다.

이미 5월 18일부터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과 폭력, 발포가 발생했지만, 신문에 광주 이야기가 나온 것은 5월 21일이었습니다. 이전에 광주 이야기는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5월 21일 자 동아일보 1면의 광주 이야기도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는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됐습니다.
 
시민과 학생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어떤 언론도 광주의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광주 이야기는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광주 이야기를 숨겼던 신군부’

모든 언론이 광주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전남매일 신문은 광주에서 벌어진 참혹한 진상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다는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학생들을 유혈 진압했고 시민들이 합류했지만, 계엄군이 발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했고, 신문을 발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간부들의 방해로 결국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은 발행되지 못했습니다.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사장에게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유인물을 내놓습니다.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죽어가는 사실을 목격한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했지만, 대한민국 언론 그 어디에서도 광주 시민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사태가 전두환의 정권 장악을 위해서라고 보도했던 외신’

대한민국 언론이 광주에서 시민들이 죽어가도 보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외신 기자들은 광주사태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진실을 보도했습니다.

5월 28일 CBS 뉴스는 ‘한국 정부가 광주사태의 원인을 공산주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함으로써 시위가 계엄령 반대와 군부의 과잉진압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숨기려 하고 있다’ 보도했습니다.

5월 28일 ABC 뉴스는 ‘전두환 장군과 소수의 선택된 장군들이 민간 정부를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혁명의회를 구성해서 군사독재를 감행하려 하고 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 오고 있으며, 광주사태와 더불어 군사독재 가능성이 우려된다’ 보도했습니다.

외신들은 이미 광주사태의 원인이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에 의한 정권 장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사태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인 고영재(경향신문 사회부), 정교용(중앙일보 월간중앙), 이수언(부산일보 서울지사 정치부), 이홍기(KBS 경제부)와 감사 박정삼 (서울경제 정경부), 편집실장 김동선 등 6명을 체포했습니다.

이들이 체포된 이유는 5월 16일 한국기자협회가 신군부의 검열거부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신군부가 언론을 검열하고 언론인을 체포한 5월 17일 직후에 구속된 언론인은 모두 24명이었고, 그중 19명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됐습니다.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광주를 진압하기 전, 이미 언론을 장악했고, 신문사와 방송은 무자비한 총칼 앞에 검열을 택했습니다.

만약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진상이 제대로 언론에 보도됐다면 과연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결코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광주를 제외한 다른 도시의 시민들은 1980년 광주가 간첩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언론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해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론이 진실을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한국의 대다수 언론은 침묵했고, 오히려 광주 시민을 폭도와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언론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이 개입됐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 언론은 1980년 5월과 비교해 나아졌을까요?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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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분열 넘어 통일로 한걸음


[친절한 통일씨] 민족무예의 탄생과 분열, 그리고 통합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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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7  21: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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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WTF) 시범단이 지난 12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5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시범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WTF]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 시범단이 지난 12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5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제공-WTF]

북측 태권도 시범단 22명이 사상 최초로 한국 주도의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주최하는 ‘2015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참석, 12일(한국시간) 대회 개막식 무대에 올랐다.

북측 조선태권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배능만 단장이 이끄는 국제태권도연맹(ITF) 시범단은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이날 오후 6시부터 시작된 개막식에서 약 20분 동안 대련과 고공 격파 등을 선보였다.

당초 참석하기로 했던 북측 장웅 ITF 총재가 동행하지는 않았지만, 조정원 WTF 총재는 지난해 11월 장 총재에게 시범단 초청의사를 밝혔고, 올해 1월에 처음으로 공식 초청장을 보냈다.

이는 두 단체가 지난해 태권도 발전을 위해 체결한 의향서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8월 21일 장웅 ITF 총재와 조정원 WTF 총재는 제2회 유스올림픽에 참가한 기회에 중국 난징에서 만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토마스 바흐 위원장 입회하에 태권도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한 의향서에 서명한 바 있다.

당시 의향서에 따르면, 두 단체는 상호 이해와 단결을 목적으로 상대방이 주최하는 대회에 선수를 파견하기로 하고 교류의 일환으로 시범단도 서로 파견하기로 했다.

또 이르면 내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하계올림픽에 ITF선수들도 참가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명기했다.

지난 2011년 미국인 최초로 북한에서 태권도학 박사학위를 받은 조지 바이탈리 씨는 남북 태권도인들이 나란히 선 이번 행사를 ‘역사적인 무대’로 평가했다.

또 이번 교류를 기점으로 두 태권도 연맹 선수들이 서로의 경기규칙을 준수하면서 상대 단체가 주최하는 대회와 행사에 교차 출전할 수 있는 길에 더욱 다가섰다고 말했다.

태권도의 탄생과 WTF·ITF분열

태권도는 1955년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고 최홍희 장군이 민족무예를 집대성해 창시했으며, 그는 1959년 창립한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1966년 ITF를 창설하고 총재로 취임했다.

최홍희의 회고록 『태권도와 나』에 따르면, 조선학병 출신으로 반일조직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6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은 최홍희는 박정희를 늘 아래로 내려다 봤으며, ITF를 창설한 이후 자신이 노란 띠를 달아준 경호실 출신의 김운용을 박정희가 총재로 임명하려한다는 걸 눈치챈 후 캐나다로 망명을 결행한다.

이후 최홍희는 캐나다를 중심으로 ITF의 국제화 사업을 벌였고 그 과정에 북한에도 태권도를 널리 보급하던 중 1979년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된다.

민족무예를 집대성해 태권도를 창시한 최 총재의 공로를 인정한 김 주석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벌이던 ITF는 2002년 최 총재가 평양에서 사망한 후 줄곧 북측 인사가 총재를 맡아왔다.

그 사이 국내에 있던 대한태권도협회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설립하고 초대 총재로 IOC위원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역임한 김운용을 선출했다.

   
▲2015년 5.1절 125돌 경축 수도건설자들의 체육경기가 열린 김일성경기장에서 진행된 ‘건강태권도’ 시범경기 모습. [캡쳐사진 - 노동신문]
   
▲2003년 10월 제주민족평화축전에서 선보인 북측의 태권도 시범. [자료사진 - 통일뉴스]

WTF는 형의 종류와 동작, 기술명칭 그리고 대련규칙을 비롯한 전반적인 형식이 ITF와 다르며,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었다.

지난 2002년 서울을 방문한 북측 태권도 시범단은 WTF 규칙을 따르는 남측과 달리 보호장구 없이 도복만 입고 마우스피스와 손·발 글러브를 착용한 채 시합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의 경기 시범을 보여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WTF에서 ‘품새’, ‘겨루기’, ‘격파’라고 사용하는 용어를 ITF에서는 ‘틀’, ‘맞서기’, ‘위력’으로 쓰고 있었으며, 품새는 태극 1~8장, 고려, 금강 등 16가지로 구성돼 있는 반면, 틀은 천지, 단군, 도산, 원효 등 24가지로 이뤄져 있었다.

또 겨루기에서도 WTF와 달리 주먹을 이용한 안면 가격을 허용하는 등 박진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남측 태권도 관계자들은 남북이 기본 동작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북측은 60년대 태권도의 고유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또 남측이 태권도의 기술적인 측면을 발전시켰다면 북측은 힘을 바탕으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태권도 통일과 올림픽 정식종목

IOC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태권도를 정식경기로 추가했으며, 경기에는 WTF 규칙을 적용하고 참가자격도 WTF 소속선수에게만 부여해왔다.

두 단체는 IOC의 권유를 받아들여 지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통합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WTF는 기술통합을 우선시하고 ITF는 기구통합을 전제로 앞세워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5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 무대에 함께 오른 WTF와 ITF 시범단의 교류는 ‘태권도 통일’을 향해 내딛은 첫 걸음일지 모른다.

대회 기간 중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세계태권도대회의 다음 개최지로 전라북도 무주가 정해진 가운데, 내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이어 무주에서도 ITF 선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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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 대북정책 근본적으로 재검토 필요

박근혜정부 대북정책 근본적으로 재검토 필요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5/17 [16:3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6.15공동선언실천 남측본부 이창복 상임대표 의장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16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6·15 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대변인이 16일 담화를 통해 "북과 남, 해외 민간단체들이 합의한 공동행사 장소와 내용을 남측 당국의 강요에 의해 바꾼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납득할수 없는 일"이라며 8.15남북공동행사를 평양에서 하기로 한 합의를 절대로 바꿀 수 없으며 정치색을 배제한 순수 문화, 체육 교류행사로 진행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15일 본지에서 보도한 ‘광복 70주년 한반도정세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라는 기사에서 우려한 바가 바로 하루만에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본지에서 심양회담에 참석한 남측 민간단체 관계자를 취재하는 과정에 원래 남측 6.15공동선언실천위원회에서 6.15를 서울에서 8.15는 평양에서 진행하기로 북에 제안을 했었는데 그 구체적인 행사진행을 논의하는 심양회의 자리에 와서 갑자기 정부의 요구라며 6.15, 8.15를 모두 서울에서 하거나 8.15만은 서울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갑자기 말을 바꾸어 북이 강하게 거부감을 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양회의에 참가한 한 관계자는 올해가 광복 70주년이어서 8.15가 주변국이나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는 행사여서 정부가 갑자기 8.15 행사를 서울에서 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왜 정부가 민간교류행사에까지 이렇게 심하게 간섭하는지 모르겠다. 정 8.15를 남측에서 추진하고 싶었다면 애초부터 그렇게 제안을 했어야지 6.15 행사를 한 달여 남겨둔 시점에서 갑자기 말을 바꾸는 것은 누가 봐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민간교류행사는 말 그대로 민간교류행사이다. 민간단체들끼리 합의한 내용을 정부가 존중해주고 더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입장을 가져야지 합의한 내용까지 뒤집으라고 지시하고 간섭한다면 민간교류와 정부교류의 구분을 없애버리는 문제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 정부교류와 민간교류는 각기 다른 몫이 있다. 물론 정부교류가 결정적이라는 점은 6.15, 10.4선언과 이산가족상봉 행사만 봐도 익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잘 풀리지 않거나 막혔을 때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사업으로 꼬인 실타래를 풀어갈 수가 있고 선거에 의해 정권이 바뀌어 정부차원에서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할 때에도 민간차원의 교류협력 사업만은 계속 진행되게 하여 남북교류의 맥은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민간교류도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야 하고 일정한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행사 내용도 아닌 이미 합의한 일정과 장소까지 정부에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뒤집어엎게 지시한다면 이는 누가 봐도 과도한 정부의 간섭이 아닐 수 없다.

 

이병박 정부 내내,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임기 절반이 흐를 때까지 제대로 된 민간교류 행사가 제대로 한 번 열리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런 정부의 통제와 간섭 때문이었다. 모든 민간 행사를 정부에 완전히 틀어쥐고 허가 하네 마네 하면서 벌서 7년 여 허송세월만 보냈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를 원천 차단함으로써 북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잡아주었다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문제 전문가들은 남북관계에 있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최악의 정부였다는 평가를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대선 기간 박근혜 후보도 강조했던 내용이다. 그러면서 박근혜 후보는 전쟁 중에도 적장과 대화는 필요하다며 남북정상회담 추진 의지도 밝히고 민간교류 특히, 인도주의적 교류는 적극 지원하겠다는 국민들 귓맛 좋은 말들을 적지 않게 흘렸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정권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드레스덴 연설이니, 통일은 대박이니 뭐니 하는 말을 대대적으로 언론에 흘리거나 러시아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천연가스관을 남쪽으로 연결하겠다는 한러정상합의 발표로 국민들을 혹하게 하여 남북경협주 주가를 하늘 높이 올려놓았다. 하지만 후속조치는 전무하여 결국 주가는 곤두박질로 끝나는 일이 계속 반복되어왔다.

 

이런 장밋빛 말은 많았지만 천안함 사건으로 시행한 5.24 대북제재조치를 절대 풀 수 없다는 원칙론을 앞세워 정부차원의 남북교류는 전무했고 민간교류도 통일부에서 완전히 차단해왔다. 지난해 처음으로 개천절 행사에 30여명 남측 인사 방북을 최소한으로 허용한 것이 유일했다. 최근 들어 기업인과 대북인도주의적 지원단체의 부분적 방북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박근혜 후보 남북관계 공약 이행의 유일한 내용일 것이다.

 

서독은 오히려 이런 민간교류를 적극 지원해주었고 오히려 사회주의권이었던 동독정부가 못하게 통제했었다. 대만도 민간차원의 교류와 경제교류만은 친중국이건 반중국이건 무조건 보장해주었으며 중국 정부와 관계가 아무리 악화되어도 민간교류만은 막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남북 민간교류 사업을 거의 전면 불허하다시피 해왔으며 최근 들어 민간교류를 조금씩 허용하는 듯 하더니 실제로는 이렇듯 철저히 간섭하고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박근혜 정부가 생각하는 대북 정책의 기조라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이런 자세로는 남북관계를 조금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북은 남측과의 교류협력사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거나 무슨 도움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북은 개성공단도 남측 중소기업을 돕고 남과 북이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서로 힘을 합치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최전방 핵심 군부대까지 후방으로 철수시켜가며 공단자리를 마련해주었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이런 남측과의 교류가 없더라도 북은 지금 다른 나라가 1년 걸릴 경제발전을 1달도 안 되어 달성하며 폭발적인 속도로 경제강국 건설을 다그쳐가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더 경제력이 커진 중국과 교류가 활발한데다가 최근에 러시아까지 북과 경제협력에 비상한 속도를 내고 있다.
거기에 전통적인 우호국인 이란, 시리아, 쿠바, 베네수엘라 등 제3세계 여러 반미국가는 물론 인도, 브라질 등 신흥브릭스 경제대국들도 북과의 교류협력에 적극 나서고 있다. 물론 북은 외부와 완전 차단되더라도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자립경제 기반을 다져놓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교류협력이 없다면 지금처럼 북이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구가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봉쇄가 더 이상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남측과의 경제교류 없이도 북은 얼마든지 경제강국 건설을 다그쳐갈 자신이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사실 중국 관광객만 잘 유치해도 북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있다.

 

오히려 남북경협이 시급한 쪽은 우리 남측이 아닐 수 없다. 성장 동력이 고갈되어가 가고 있다. 중국과 인도, 베트남 등 신흥 산업국들이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유럽, 일본이 저환율정책을 펴 한국 수출품들을 갑자기 비싼 고가상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미국은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더 빼가려고 삼성, 엘지, 코오롱 등 별별 소송을 다 제기하며 우리 기업들의 피를 말리고 있다. 이젠 정부의 세금까지 최대한 뜯어내려 론스타는 5조원대 소송을 제기해 최근 첫 심리가 열렸다. 요즘 추세를 보면 미국과 소송에서 연전연패다. 삼성, 현대, 엘지, 코오롱도 다 미국 기업들에게 특허 도용, 연비과장, 덤핑 판정 등으로 수백억, 수천억의 배상금을 물어주었다. 거기다가 미국 무기 사들이느라 천문학적인 세금이 마구 미국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정부의 재정 적자는 갈수록 심화되어가고 있는데 국민들은 세월호 후 최악의 경제사정으로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최경환호가 예산 조기 집행, 부동산 거래 활성화로 경제를 살리려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런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잘나가던 수출마저 급감하는데다 가계부채는 천문학적으로 높아지고 있어 언제 가계부채폭탄이 폭발할지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와 걱정이 날이면 날마다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보수언론들도 이제 살길은 남북경협 북방진출이라는 말을 자주 제기하고 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서 특히 이런 보도를 많이 내놓고 있다. 기업연구소 중에서는 현대경제연구소가 앞장서서 남북교류협력의 중요성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박근혜 정부 비서진에서 이젠 더 이상 대북제재는 무의미하다는 발언을 내놓는 등 북과 관계개선에 나서겠다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민간교류행사에 협의에 간섭했던 것과 같은 태도로 북에 접근한다면 무슨 사업추진은 고사하고 대화의 물꼬도 트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지금 정부의 태도라면 북은 조만간 개성공단 노동자 전면철수와 같은 조치도 거침없이 단행할 우려가 높다.

하도 정부에서 북에 대해 통제를 많이 해서 구체적이니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북을 여행하고 온 해외 여행객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북의 여러 행보들만 종합해봐도 북은 남북경협에 아쉬울 것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정부의 태도의 근본적 변화가 없다면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며 서해 등지에서 전례 없이 위험한 극단적인 위기 상황도 조성될 우려가 높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라도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국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것마저도 못한다면 경제위기에 내몰려 희망을 잃어가는 국민들의 실망은 극에 달할 것이 자명하다.

이런 식이라면 정말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뜻이 있는지 국민들은 그 진정성을 의심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남북관계 파탄 책임을 북으로 돌려 책임을 피하려고 하겠지만 그것을 모를 국민들이 아니다. 어쨌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잘 나가던 남북관계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들어 전혀 열리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인지 국민들이 왜 모르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과 식견있는 학자들의 심판만 봐도 이는 명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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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유가족, 5·.18묘역 참배 및 기념식 참석

"1년 갖고 실망 마세요"... 망월동서 만난 5.18과 4.16

[현장] 세월호 참사 유가족, 5·.18묘역 참배 및 기념식 참석

15.05.17 19:51l최종 업데이트 15.05.17 19:51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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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구묘역 방문한 세월호 가족 5.18 민주화운동 3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광주 북구 망월동 광주시립공원묘지(5.18 구묘역)를 방문해 오월 어머니의 위로의 말을 들으며 흐느끼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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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국가는 절대 해선 안 될 일을 했다. 2014년 4월 16일, 국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35년 전 국가의 만행과 1년 전 국가의 방기는 5월 어머니와 4월 어머니가 손을 맞잡게 만들었다. 

5.18민중항쟁 3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실종자 가족들이 광주를 찾았다. 이날 오전 1시 광주광역시 북구 시립공원묘지(5.18 구묘역)에 도착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고 정원석(단원고)군의 어머니는 시야를 가득 메운 봉분을 보고 가슴을 쥐어 짰다. 

"두려워요. 이렇게 많이, 이렇게 많이…. 이렇게 많은 묘를 보고도 깨닫지 못한 대한민국이 용서가 안 돼요."

이날 구묘역과 신묘역(국립5.18민주묘지)을 참배한 4월의 가족들은 "5.18 정신을 계승해 4.16 진실을 밝혀내자"고 다짐했다. 어떤 아버지는 5.18 희생자 묘비에 쌓인 먼지를 연신 닦았고, 어떤 어머니는 묘 앞에 털썩 앉아 눈물을 훔쳤다. 하늘을 향해 든 손을 어색하게나마 흔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했다.

5월 어머니 위로에 4월 어머니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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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가족 손잡은 오월어머니 5.18 민주화운동 3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오월어머니집 회원인 이귀임씨와 인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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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가족이 5월의 가족을 위로했다. 5월의 가족은 4월의 가족을 보듬었다. 

신묘역 앞,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고 정차웅(단원고)군의 어머니가 흰 소복을 입은 이귀임 오월어머니집 이사의 옷고름에 노란 리본 배지를 달았다. 이 여사는 "몸이 허락하는 데까지 나도 여러분과 함께 하겄소"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저희도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서로 손을 맞잡았다.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관장이 마이크를 잡자, 세월호 유가족은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안 전 관장은 이날 오후 1시 30분 구묘역에서 열린 '4.16연대 진실규명다짐대회'에 참석해 "여러분, 제발 아프지 마세요"라고 당부했다.

"중학교 1학년 방광범(1980년 5월 24일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 11공수여단 63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사망)이라는 애기가 오늘처럼 이렇게 더워서 저수지에서 목욕하고 저 멀리를 쳐다봤나 봐요. 그런데 그놈들이 쏴 죽인 거예요. 광범이 아빠는 애기 시신을 보고 눈이 뒤집혀 정신병이 와버렸어요. 

광범이 엄마가 남편과 자식의 아픔을 안은 채 동전을 모아 넣은 핸드백을 휘두르며 전경들과 싸웠어요. 그렇게 참 열성적으로 하던 광범이 엄마도 긴 세월에 지쳐 버립디다. 지금 광범이네 가족이 어떻게 됐는지 모라요. 광범이 엄마만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여러분, 어떤 경우라도 아프지 말고, 서로 힘을 주십시오. 밥 안 먹으면 밥 먹으라고 말해주고, 울다 지치면 이제 울지 말고 힘내자고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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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가족, 5.18 앞두고 광주 방문 5.18 민주화운동 3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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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하는 세월호 가족 5.18 민주화운동 3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 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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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전 관장은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고 덧붙이며 흐느꼈다. 

"여러분, 그래도 여러분은 정보과 형사가 집 앞을 지키고 있진 않죠? 우린 집 밖으로 나가도 못하게 했어요. 직장에서도 다 쫓겨나고요. 망월동 묘역(구묘역)을 없애려고 전두환·노태우가 가족끼리 싸움도 엄청 붙였어요. 1050만 원 줄테니 묘를 옮겨가라고 해서 묘 27개가 옮겨갔어요. 엄마들은 찬이슬 맞아가며 묘를 지키고 그랬어요. 맨날 울고만 있을 수 없으니 세수하며 울었어요. 

여러분, 1년 갖고 실망하고 울지마세요. 대한민국 국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인이 아니라, 세월호 가족들이 바른 나라를 세우겠다, 내 자식이 나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만들었다는 심정으로 포기하지 마세요. 진실이 밝혀지고 물 속의 애기들을 다 건져낼 때까지 저도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다신 이런 고통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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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가족, 국립 5.18 민주묘지 방문 5.18 민주화운동 3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 후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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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전 관장의 외침에 유경근 위원장은 "35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온몸으로 안고, 오히려 누명을 써 가며 이 긴 세월은 인내하고 싸워 온 5월 가족들에게 사죄의 말을 전한다"고 답했다.

"1980년 저희는 초등학생, 중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잘 몰랐습니다. 당연히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지난 35년 동안 5월 가족들이 싸워올 때 관심을 갖지 않았고, 위로의 말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4월 가족들께서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지난 35년 동안 그렇게 싸워오신 그 모습을 저희가 본받아, 우리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이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유 위원장은 "다시는 국가에 의해 국민의 생명이 희생되지 않는 세상이 올 때까지 싸우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35년을 고통 속에 살아온,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겠다고 말하는 5월 어머니의 말을 반드시 기억하겠다"며 "더 이상 이런 고통, 이런 억울함, 이런 한을 어떤 분들도 다시 겪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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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가족 손잡은 이한열 열사 어머니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17일 광주 북구 망월동 광주시립공원묘지(5.18 구묘역)를 방문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영석 엄마' 권미화씨의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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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묘역 참배를 마친 세월호 유가족들은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으로 자리를 옮겨, 광주시민대성회, 민주대행진, 전야제에 참여했다. 18일 오전 10시에는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리는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한편 5.18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는 정부의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식 제창 거부에 항의하며 국가보훈처 주관의 신묘역에서 열리는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옛 전남도청 앞에서 따로 기념식을 열기로 했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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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복면 시민군’의 35년

등록 :2015-05-17 21:51수정 :2015-05-18 01:04

 

 

임성택씨는 일부 극우세력이 ‘북한군 특수부대원’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에 등장하는 복면 시민군(왼쪽 사진 오른편)이 자신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 5월25일 광주시 서구 농성동에서 외신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광주시 제공
임성택씨는 일부 극우세력이 ‘북한군 특수부대원’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에 등장하는 복면 시민군(왼쪽 사진 오른편)이 자신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 5월25일 광주시 서구 농성동에서 외신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광주시 제공
도청 남아있다 체포된 임성택씨
‘극렬분자’ 낙인찍혀 고문·실형…
‘오월 시민군’ 자부심으로 버텼는데
아직도 우릴 ‘북한군·홍어’라 매도
극우논객 고소해도 ‘무죄’ 면죄부
‘5·18 왜곡’ 맞서 당당하게 싸울것
설핏 잠이 들었다가 고함소리에 깼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외침을 듣고 카빈총을 집어 들었다. 1980년 5월27일 새벽 5시30분, 그는 시민군 지도부가 있었던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에서 체포됐다. 계엄군은 당시 17살이던 그의 등 뒤에 ‘극렬분자’라고 휘갈겨 썼다. 상무대 헌병대로 끌려갔다. 두달 동안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했다. 그때 후유증으로 지금도 온몸이 상했다. 군법회의에서 내란 부화 수행죄로 징역형(1년6월)을 선고받았다. 5·18 시민군 임성택(52)씨는 80년 10월 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80년 5월 당시 양복점에서 기능공으로 일하던 그는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때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피가 끓었다. “돌아가신 분들한테도 미안했구요. 그래서 맞서 싸우자는 각오로….” 동네 선후배들이 타고 있던 군용 트럭에 올라탔다. 80년 5월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가 집단발포해 시민 수십명이 목숨을 잃은 뒤 시민들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하던 직후였다.

 

계엄군이 진입하기 전날 밤 시민군 지도부는 대원들을 모아놓고 ‘갈 사람은 가라’고 했다. 그는 밤늦게까지 시내를 돌며 계엄군 동향을 살피다가 도청으로 복귀했다. “에무식스틴은 자동이라 (계엄군들은) 무조건 긁어불드만요. 총 맞은 이들은 소리없이 푹 쓰러졌고요….”

 

세상에 나왔지만,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5월단체의 조직실장을 맡았고, 수년 동안 5월 진상규명 투쟁에 참여했다. 괴로움에 술로 살았고 몸은 망가졌다. “아픈 데만 생기네요. 양쪽 어깨 수술을 했고, 목·허리도 안 좋아요. 신경정신과 약을 복용하는데도, 우울증이 도졌는지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하고요….”

 

그래도 5·18은 그를 지탱해준 자부심이었다. “딱 한번 후회한 적이 있어요. 형이 청와대 경비대 시험에 합격했는데, 신원조회에서 떨어졌어요. 나 때문에 떨어진 것이지요…. 그때까지도 (우리는) 폭도였거든요.” 80년 5월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석달 동안 찾아헤매다가 애가 다 타버렸던 노모(77)는 요즘 치매 증상을 보인다. 그는 어머니를 최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면서 죄스런 마음만 들었다.

 

임성택(52·맨 오른쪽)씨가 지난 16일 오후 경북 경주시 경주향교에서 전통 방식으로 결혼식을 한 아들·며느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경주/정대하 기자
임성택(52·맨 오른쪽)씨가 지난 16일 오후 경북 경주시 경주향교에서 전통 방식으로 결혼식을 한 아들·며느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경주/정대하 기자
요즘 그를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인터넷 등에 5·18민주화운동과 북한을 연계하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마스크를 쓰거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총을 든 시민군 2명의 사진을 갈무리해 ‘북한 특수군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그 사진의 오른쪽 시민군이 임씨다. 80년 5월25일 군용 지프를 타고 광주 시내를 순찰하던 중 서구 농성동에서 외신기자에게 찍힌 사진이다. 당시 임씨 등 시민군은 계엄군의 보복을 두려워해 일시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임씨는 사진 속 왼손 새끼손가락을 의식적으로 감추고 있는 시민군이 자신이라고 설명했다. “일하다가 다쳐 왼손 새끼손가락 1개 마디가 절단됐어요. 지금도 습관처럼 왼손을 구부려요.”

 

임씨는 “법으로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지정됐는데, 시민군을 간첩으로 매도해도 무죄판결해불고…. 이것이 문제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광주시민단체들이 꾸린 5·18역사왜곡대책위는 종합편성채널에서 ‘5·18 때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한 4명과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등에 5월 희생자 관을 ‘홍어 택배’로 빗댄 악성 글을 게시한 5명 등 9명을 2013년 6월 광주지검에 형사 고발했다. 하지만 1명만 모욕죄로 형사처벌을 받았고, 나머지는 불기소 처분 등을 받았다. 2008년 9월 극우 성향 논객 지만원씨 등 20명이 5·18 민주화운동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명예훼손)로 고소당했지만, 대법원은 2012년 12월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판시하면서도, ‘피해자를 특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것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 김상훈 변호사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4000여명이나 돼 누구의 명예훼손에 해당되는지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법부의 소극적인 법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아들이나 며느리, 미래의 손주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요.”

 

지난 16일 경북 경주향교에서 치러진 아들(29)의 혼례식에 혼주로 앉은 그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아들이 네살 때 이혼한 아내가 세상을 뜬 뒤, 아들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럭비 선수였던 아들은 대학 졸업 후 부사관으로 군 생활을 하다가 2011년 경주에 정착했다. 자동차 시트를 만드는 회사에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는 아들은 경주 출신 아내(33)를 만났다. “아들에게는 항상 술을 마시고 데모만 하는 아빠였어요. 몇년 전 휴대전화로 ‘미안하다’고 하면서 눈물이 났어요. 5·18을 빨갱이로 매도해도 가만히 보고 있는 아빠는 되고 싶지 않아요.”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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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30여만명 침묵의 5분간 염원은

광화문의 불교대중 평화 염원

조현 2015. 05. 17
조회수 10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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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밤 연등행렬을 끝내고 광화문에서 열린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기원대회’중

‘세계 간화선 무차대회’      사진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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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대회에 참석한 불자들.   사진 김봉규 기자.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부처의 지혜와 자비로 한반도 통일과 세계 평화를 위한 염불과 염원이 허공 속으로 퍼져나갔다. 

 

16일 오후 6시 오색 연등이 화려하게 수놓은 광화문에는 31만명(주최측 추산)이 운집한 가운데,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기원대회’중 ‘세계 간화선 무차대회’가 열렸다. 무차대회는 아무런 조건이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보시의 정신에 입각해 승려나 속인, 빈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해 법문을 듣는 불교의 전통 대중 법회다. 이날 대회는 조계종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광복 70주년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 기원대회’라는 주제하에 세계 최고의 수행력을 갖춘 200여 명의  고승 대덕을 한 자리에 모아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고,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법인 간화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자리였다.

 

 이 대회는 동국대학교에서 출발한 오색의 연등행렬이 동대문과 종로를  거쳐 행사장으로 속속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광화문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법고소리가 본 대회의 시작을 알리자 조계종 종정인 진제 스님이 동자승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고, 조계사 범종각에서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5번의 타종이 화면으로 생중계됐다.

 

조계종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은 이날 ‘공존과 상생, 합심으로 통일의 길을 열어나가자’는 요지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2015 불교 통일선언문’을 발표했다.

 

 자승 스님은 “진정한 통일은 ‘땅의 통일’과 함께 ‘마음의 통일’을 이뤄내는 것”이라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나만 옳다’는 자기중심적 마음을 내려놓고 상대방과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비로소 공존, 상생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진제 스님의 법어에 앞서 모든 참석자가 5분간 선정에 들었다. ‘탁, 탁, 탁’ 세 번의 죽비 소리가 울리자 행사장에 모인 세계 각국의 고승과  불자들은 침묵 속에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한반도 통일과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이날 20여분간 법어를 한 진제 스님은 인류의 참된 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화두 참선을 통해 참나를 깨닫는 ‘간화선’ 수행법을 제시했다.

 진제 스님은 “마음을 깨달아 참나를 찾아 세상의 주인이 되면 영원한 행복과 대지혜를 누릴 수 있다”며 “사람이 곧 부처임을 깨달아 서로 존중하고 상생하는 삶을 사는 일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서원”이라고 강조했다.

 

 진제 스님의 법어에 이어 해외 종교지도자 4명이 앞서 열린 ‘세계종교인회의’에서 채택된 ‘세계 종교지도자 평화기원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이 시대 마지막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 지구촌의 모든 갈등과 대립을 종식해 인류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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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세월호 분향소를 찾아 유족들을 위로하는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과 총무원장 자승스님 사진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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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행사에 참여한 승려와 불자들.   사진 조계종 제공.

 

 

이날 본 행사에 앞서 진제 스님과 자승 스님은 해외 종교지도자 10명과 함께  세월호 분향소를 방문해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전명선 세월호 피해자가족대책위원장과 유병근 가족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진 위원장은 “세월호 참사로 단원고등학교 어린 학생들이 희생됐다”며 “아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종정 스님이 함께 해 달라”고 요청했고, 진제 스님은 “어린 학생들의 영혼이 극락왕생하도록 기도하겠다”고 답했다.

 

 또 식전행사에서 네팔 지진 모금 영상이 상영되자 참석자 군중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핸드폰을 꺼내 자동응답시스템(ARS) 성금 모금에 동참해 네팔의 피해자들을 위해 보시 행렬에 함께 했다.

 이 본 행사에 앞서 열린 식전 행사에서는 러시아의 텔로 툴쿠 린포체 스님, 방글라데시의 우빤야조타 스님, 스리랑카의 니얀고다 스님 등 세 명의 스님이 무대에 올라수행법과 한국인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전하는 달마토크가 있었고, 세계평화를 위해 힘쓰다 넋을 달리한 영혼들을 달래는 진혼제가 펼쳐졌다.

 

 한국과 외국의 스님들은 17일엔 서울 조계사에서 한국전쟁 희생자를 위한 수륙무차대재가 봉행했다.

 한편 15~17일 3일 일정으로 열린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기원대회’의 첫날인 지난 15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각국 스님과 종교계 대표 20명이 참여하는 ‘세계종교인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선 진제 스님, 수뜨아모 호주불교연합회 회장, 캄보디아 승왕인 텝봉 스님 등 각국 스님들과 미국 세인트 존 더 디방인 대성당의 제임스 코왈스키 수석사제, 앤토니 세네라 종교간이해센터 회장, 바와 제인 세계종교지도자 협의회 사무총장 등 종교계 대표자들이 참석해  “이 시대 마지막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 지구촌의 모든 갈등과 대립을 종식해  인류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섯 가지  실천항목을 담은 ‘세계평화 기원문’을 발표했다.

 참석자들은 기원문에서 “내면의 평화를 통해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함이 세계평화로 가는 출발점임을 자각하며 인성을 도야하고 마음을 닦는 수행에 힘쓰자”고 다짐했다.

 

 이들은 또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떤 폭력이나 배타적인 행위도 반대하며, 종교 간 대화와 교류에 적극 협조해 종교화합과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진정한 세계평화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자연환경과 생태계 보존을 위한 다양한 실천에도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이어 “마지막 분단국인 한반도의 통일과 지구촌의 모든 테러와 전쟁이 종식되기를 염원하며, 온 인류가 자비와 사랑의 심성을 계발하도록 힘써 노력하자”며 “온 인류가 한가족임을 깨달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지구촌의 모든 소외되고 고통받는 형제들을 지원하는 인도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자”고 당부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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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본부 해고 6인방의 수다 “박근혜 비판하면 죽는 줄 알아”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5/17 12:55
  • 수정일
    2015/05/17 12:5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창간 20돌 특별 방담] 강지웅·박성제·박성호·이용마·정영하·최승호…“MBC 보도·시사 기능 없는 반쪽짜리 방송으로 전락”
 
입력 : 2015-05-13  16:18:44   노출 : 2015.05.17  06:42:27
 

“방송 공정성 보장은 언론 노동자의 근로조건이다.” 

법원의 이 말 한마디가 갖는 힘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민사와 형사 항소심 재판부 모두 2012년 언론노조 MBC본부의 파업 정당성을 인정하며 이와 같이 판단했다. 사측은 “파업이 반복될 것”이라며 우려하지만 언론계에서는 역사적 판결이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파업 과정에서 해고된 MBC 언론인 6명(강지웅·박성제·박성호·이용마·정영하·최승호)에게 덧씌워진 해직이라는 굴레는 법원에 의해 잠시나마 벗겨졌다. 언제가 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남았다. 그래도 이들 얼굴에는 미래의 두려움보다 당장의 해방감과 기쁨이 가득했다. 미디어오늘이 12일 오전 이들 6명을 상암동 MBC 신사옥 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 지난달 항소심에서 '해고무효' 판결을 받은 MBC 해직 언론인 6명이 지난 12일 오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최창호 'way' PD)
 

- 파업 손배소를 제외한 항소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정영하 : 재판이 계속될수록 공허함을 지울 수 없었다. MBC는 법원 판결과 결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니까. 저항해서 무언갈 바꾸자고 우리가 나선 건데 시간만 가는구나 싶었다. 2심에서 지면 대법에서도 진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판결이라는 바늘구멍을 이제야 뚫고 나왔다. 이제는 결실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최승호 : 방송사에서 파업을 했다하면 거의 다 업무방해로 판결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배들도 업무방해로 기소되고, 집행유예 등 범법자로 결론났던 게 현실이었다. ‘공정방송이 근로조건’이라는 말을 법원에서 판결로 들었을 때 귀가 의심스러웠다. 1심에서는 ‘진보적인 판사들이 사고쳤다’는 느낌이 앞섰다.(웃음) 2심에서도 판결이 유지되는 걸 보면서 비로소 파업의 의미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박성호 : MBC 구성원들이 ‘정의로운 일을 했다’는 응원을 밖에서 듣는 건 익숙했다. 그러나 사법적으로 객관적으로 판단을 받았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우리의 주장이 남들의 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무엇보다 의미있다고 본다. 내부에 던지는 메시지를 넘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도 있지 않나 싶다. 최근 대학생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학생이 ‘기자님이 정의롭게 싸운 것은 알겠다. 그러나 리더로서 전술적으로 패배한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 더 큰 일을 위해 파업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느냐에 대한 의문이었다. 또 다른 학생은 ‘우리 젊은 세대에게 그러한 저항과 용기를 요구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하더라. 학업, 취업 등 일상화한 좌절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재판은 꼭 이겼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혹여 ‘불의가 승리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청년들에게 전할까 싶어 많은 걱정을 했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메세지를 줄 수 있어 기쁘다.

- 해고무효 판결 직후 박성제 기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나?

박성제 : 아니, 옆에서 이호찬 노조 민실위 간사가 흥분하면서 내 손을 꼭 잡더라고. 그래서 나도 눈물이 좀 났어.(웃음) 1심 때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재판정에 나가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1심 재판부가 워낙 판결을 잘 정리했다. 판사들 사이에서 상당히 주요한 이슈가 아니었을까 싶다. 수많은 사건 가운데 우리 사건을 길게 설명해주고 별도의 보도자료 내는 걸 보고 더 그랬다. 판사들이 이번 기회에 MBC 판결을 우리 사회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던 게 아닌가 싶다. 대법에 가서도 잘 유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 박성제 MBC 해직기자. (사진=최창호 'way' PD)
 

- 1·2심 재판부 모두 ‘공정방송은 근로조건’이라는 결론을 냈다. 역사적 판결이라는 평가도 나오는데.

이용마 : 공정방송이 근로조건에 해당이 된다, 그리고 공정방송이 단순히 경영진에게만 주어진 자유 내지는 의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라는 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선고 직후 이야기했지만 공정방송이 사측의 일방적인 행위로 인해 침해된다면 언론인들이 저항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한 것이라고 본다. 언론사 파업과 관련해 이전까지는 업무방해죄로 처벌하곤 했다. 이번 형사판결을 보면, 업무방해 혐의로 무조건 처벌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파업의 목적이나 절차가 정당하다면 하위법률인 업무방해죄로 헌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파업을 처벌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얘기다. 노동 운동 차원에서도 의미있는 판결이다. 

박성제 : 너무 낙관적인 전망 아닌가.(웃음) 이번 판결의 결과는 MBC노조가 파업에 앞서 지속적으로 공정방송협의회 개최를 요구했고, 공정방송 요구를 절차에 따라 제기했다는 점을 판사들이 인정한 거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사장 반대라는 명분만으로 파업한다고 지금처럼 정당성이 인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성호 : 법원은 절차를 굉장히 중요하게 판단했다. 공정성을 지킬 의무가 노사 양측에 있는데, MBC 노조는 끊임없이 (불공정 방송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절차를 지켜 복구하려고 애썼지만 사측은 불응하고 회피했다고 했다. 2012년 당시 노조가 절차를 지켜 싸웠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 계기다. 핵심은 노사 모두에게 공정방송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강지웅 : 대법에서도 확정 판결을 받고 우리가 다시 MBC로 복귀하는 과정이 이뤄지게 된다면, 한국 언론사(史)에 획기적인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 우리 싸움이 진행 중이라고 본다. 170일 파업도 끝나지 않은 것이고. 어떤 식의 결말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이제 7부 능선을 넘었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재판 과정이었다. 공정방송 요구에 체화돼 있지 않은 판사나 배심원들, 그들에게 사측은 ‘MBC노조는 정파적’이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공정방송을 위해 싸웠다’고 설파했다. 2심에서는 최고의 변호사끼리 맞섰고 증인으로 많은 관계자들이 나왔다. 그 과정이 한 편의 영화처럼 되게 멋있었다.(웃음) 사료로서 재판 과정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 종사자들이 그 기록을 꼭 봐야 하지 않을까.

   
▲ 박성호 MBC 해직기자. (사진=최창호 'way' PD)
 

- 재판 과정에서 MBC의 위증이 드러나는 등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박성호 : 회사 측은 막판까지 우리가 주장했던 보도 불공정성 사례가 왜곡됐다면서 반박 자료를 제출했다. 자료를 보면 숱한 증거 조작이 드러난다. 한두 건이 아니었다. MBC 경영진은 사법부마저 속이려 들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사법부도 안중에 없던 것이다. 지난 2011년 한미FTA 보도에서 발생했던 리포트의 누락, 왜곡, 삭제의 방식이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서도 똑같이 확인됐다. 기본적인 법질서마저도 우습게 여기고, 한국 사회의 시스템을 자의적으로 이용한다는 데서 현재 MBC 경영진의 인식 수준이 드러난 것이다. 

- YTN 해직자들이 대법원 판결을 받는 데까지 3년 반이 걸렸다. MBC 판결은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이용마 : 1·2심은 판사들이 독립적인 판결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현 대법관들은 MB정부 이후에 임명됐다. 철도노조 파업, 쌍용차 정리해고 등에서 원심을 뒤집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그래서 현재 MBC 판결이 그대로 굳어지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래도 2심 판결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우리와 같은 사례가 다시 생긴다면 MBC 판결이 기준이 될 테니까.

최승호 : 일반 국민 인식이 중요하다. 1심에서 2심까지 과거 없던 판결이 다섯 차례(업무방해 형사 1·2심, 해고무효 1·2심, 손배소 1심)나 나왔다. ‘김재철은 정말 심하다’, ‘MBC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데 여론이 모아진 결과다. 보수적 국민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현재 MBC는 심각하다. 이제 국민들은 세월호 사건을 경험하면서 ‘공영언론을 보고 행동하다가는 내 생명도 위험할 수 있겠구나’라고 판단하게 됐고, 이러한 현실 인식이 재판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언론 공정성을 요구하는 국민 여론을 대법원이 뒤집는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용마 : 최승호 PD 말씀대로 업무방해 2심 형사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 결과를 인용했다. 평균적인 시청자인 배심원들이 공정방송 요구에 손을 들어준 사실을 반영했다. 이번 판결이 만약 한 건이었다면 대법원 입장에서 부담이 적을 텐데 사실상 형사, 민사, 손배소까지 3건이다. 대법원도 고민이 많이 될 것이다. 

   
▲ 이용마 MBC 해직기자. (사진=최창호 'way' PD)
 

- 이보다 앞서 김재철 사장에게 배임 혐의로 징역형이 내려졌다. 

이용마 : 인과응보다.(웃음) 

정영하 : 살짝 측은지심도 들었다.(웃음) 저 양반은 무엇을 얻자고 그때 그랬을까 싶다. 모든 걸 (정치권에) 바쳤으면서.

최승호 :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했다. 후세대 언론인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언론을 망가뜨린 인간의 종말이 저렇구나’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정영하 : 김 사장은 끊임없이 사리사욕을 챙겼으나 결국 반면교사가 됐다. 공영방송 사장이 사천 시장 나가서 4등한 것은 또 뭔가. 법정에서 판사의 꾸짖음을 들으며 실형을 받았다. 너무 말 안 되는 행보가 이어지니까. 이런 사례는 앞으로도 없을 거다. 

이용마 : 사천 시장 후보로 나가기 위해 새누리당에 공천 신청을 하면서 속내가 드러났다. 그런 자리 몇 개 더 얻기 위해 그동안 정권 뜻에 맞춰서 움직인 거 아닌가. 

정영하 : 김재철 사장은 이 정도로 자기가 MBC를 (정권에) 팔았으면 솔직히 총리는 돼야 한다.(웃음) 

박성제 : 김재철 사장이 당시 사천 시장에 나올 때 공약 가운데 박정희 고등학교를 만들겠다고 한 게 있다. 그걸 보면서 만약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됐다면 노무현 고등학교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을까.(웃음)

박성호 : 이번 판결에 비춰보면, 김재철 사장 사례는 경영진의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김재철 사장의 인사들이 여전히 경영권을 쥐고 있다. 

강지웅 : 적어도 김재철 사장은 전면에 나섰다. 노조가 던진 계란을 자기 얼굴로, 정면으로 맞았다. 안광한 현 사장은 뒤에 있었다. MBC 조합원 징계의 수장은 안광한 사장이었다. 과거에는 김재철 사장 등 뒤에 숨어 있었다. 지금은 MBC라는 회사 뒤에 숨어있다. 그들(현 MBC경영진)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자기 실명이 거론되고 ‘당신은 좀 나쁜 사람인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는 걸 제일 두려워한다. 김재철 사장은 이와 비교하면 전국구 스타다. 만약 법원이 개개인을 특정해서 실명을 얘기했다면 바짝 엎드렸을 것이다. 정말 비겁하다. 최소한 언론인이라면 양심에 따라 당당하게 법원 판결에 입장을 밝혀야 한다. 언론사에 남을 판결인데 그들은 결코 자기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박성호 : 만약 이 재판이 끝까지 가서 지게 된다면 우리는 책임을 질 것이다. 판결에 따라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의 결과가 확정된다면 임원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우리의 복직보다 시급한 것은 회사의 정상화다. 현 경영진 태도를 보면, ‘사주가 있는 회사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수신료를 받아 국민과 의회의 감시에 있다면 이런 행태를 보일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공영방송이 제 기능을 하려면 인적 자원이 제대로 정상화해야 할 텐데 아직도 경영진은 파업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런 문제 제기를 하면 비제작부서로 배제를 하잖나. 안광한 사장은 구성원 징계에 있어서 인사위원장이었다. 이것을 주워 담기가 어려울 거라고 본다. 다시 말해 MBC 정상화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데, 자기가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안광한 사장은 MBC를 정상화시킬 수 없다. 

최승호 : MBC는 과거 대단한 언론사였고 MBC가 어떤 보도를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식인들은 MBC가 어떤 보도를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언론 관련 시민단체에서는 더 이상 MBC를 모니터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MBC 소식을 듣는 것도 귀찮고, MBC가 어떻게 개선돼야 하는지에 대해서 ‘굳이 필요하느냐’는 반응이 크다. 종편은 가끔씩 박근혜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MBC 경영진은 박근혜 비판하면 죽는 줄 안다. 사소한 비판에도 어쩔 줄 몰라 하잖나. 시청자에게 외면받는 이유다.

   
▲ 2012년 파업 과정에서 해고된 강지웅 PD(왼쪽)와 정영하 전 언론노조 MBC본부장. (사진=최창호 'way' PD)
 

- 지속적으로 축소·왜곡·누락되는 공영방송의 보도에 대해 무용론을 제기하는 여론도 있다. 세월호 보도에서 드러나듯 공영방송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용마 : 공영방송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국, 이탈리아 등은 상업 방송 천국이다. 그런 국가에서 공익을 대변하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있느냐를 봤을 때 굉장히 회의적이다. KBS, MBC라는 공영방송이 있다는 것 자체는 국민에게 혜택이다. 빈대 잡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처럼 지금 공영방송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 제도 자체를 아예 없앤다고 하는 건 기득권 세력이 원하는 걸 채워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박성호 : 오죽하면 공영방송 무용론이 나올까 싶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종편 등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되면서 다시 중심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시청자들이 파편화한 상태의 매체를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공영방송과 같은 질 높은 콘텐츠가 제공돼야 한다. MBC를 없애면 그 자리는 누가 채울까. 재벌 방송 하나 탄생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정영하 : MBC 하나만 싹 들어내면 차라리 나을 거다.(웃음) 그러나 그 자리를 사영방송과 관영방송이 채운다. 중립 지대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비판하겠다는 방송이 아니라 한쪽 편, 힘을 가진 편에 서게 되는 방송이 들어설 것이다. 결국 국민들이 계속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다. 공영방송은 무게 중심이 잡혔을 때 건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재 MBC는 보도·시사 기능이 없는 반쪽짜리 방송이다. 드라마, 예능은 잘 만들고 잘 나간다. 하지만 구성원 얘길 들어보면 굉장히 버겁고 허덕이고 있다. MBC는 엔터테인먼트 주식회사가 아닌데 보도·시사라는 큰 기둥이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버거워한다. 시청률이 빵빵 터져도 ‘역시 MBC’가 아니라 ‘쟤들은 왜 저런 것만 할까’ 이런 반응이 나온다. 칭찬이 아닌 비난을 받는 거다.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게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그게 안 되면 축이 틀어지고 서로 이상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예전에 파업할 때 김현석 언론노조 KBS본부장이 우스갯소리로 ‘더도 덜도 말고 9시 KBS뉴스, 개콘 만큼만 해라’고 했다. 얼마나 풍자스럽나. 보도가 못하니까 예능에서 그런 소재를 하게 되고, 사람들이 이제 예능을 예능이 아닌 시사로 받아들이지 않나.(웃음)

박성호 : 우리사회가 공영방송을 가진 지 얼마 안 됐다. 역사가 짧다. 유럽 공영방송은 20세기 초반에 생긴 경우가 많다. 그만큼 우여곡절, 여러 질곡 끝에 정립이 됐다. 한국의 공영방송을 논하기 위해 87년 민주화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과연 적당한지 의문이다. 그 이전에 관영매체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문 역사와 비교해봐도 공영방송 역사는 일천하다. 우리사회가 좌충우돌하면서도 가꿔나가고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다. 공영방송은 토론과 의사소통의 장이다.

강지웅 : KBS PD와 어제 이야기하는데 그분이 ‘MBC가 망가지면 KBS가 숨 좀 돌릴 줄 알았는데 같이 무너진다’고 하더라. KBS와 MBC는 경쟁구도에 있지만 사실 우군이었다.(웃음) 

최승호 : 엄청난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그래도 중심 역할을 하는 공영방송이 가치 중립적으로 취재해 많은 국민에게 인식을 시켜주면 그 기반 위에서 토론이 일어난다. 여론이 결정되고 최종적으로 수렴된다. 지금은 갈등이 계속되면서 한쪽에서는 음모론이 일어난다. 천안함, 대선부정, 세월호와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실 관계가 확정되지 않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국민들이 공적 기관 발표를 신뢰하지 않은 채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담론들이 우리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다. 공영방송이 제 기능을 못한 결과다. 

강지웅 : 공영방송 종사자에게는 일반 시민과 국민이 ‘공정해라’고 요구할 수 있다. 적어도 SBS나 종편보다는 더 요구할 권리가 있다. 공공의 장을 축소한다는 것 자체가 언론을 자본과 권력에 넘기는 것과 같다. 

   
▲ 최승호 MBC 해직PD. (사진=최창호 'way' PD)
 

- 올해 MBC 방문진 이사진이 교체된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요구가 다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어떤 권력이든 방송을 장악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해법은 무엇인가.

이용마 : 현실적으로 정치권이 공영방송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나.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하는데 정치권이 언론에 손을 떼지 못하겠다면 나누는 건 어떨까 싶다. 공영방송사 사장 임기를 2년 정도로 단축해서 한 번은 여당 추천이, 한 번은 야당 추천이 사장을 하는 방법이다. 방송사 사장도 검찰총장도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최소한 대통령 임기 내에서 야당이 임명을 한 방송사 사장이나 검찰 총장이 2년 임기를 채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막가파식으로 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 사장이나 총장이 불거진 문제를 시정할 수 있고. 

박성호 : 정치 권력과 연계되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공영방송 종사자뿐 아니라 의회에 있는 이들, 학자 및 시민사회가 이 안과 저 안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는 자리와 기회다. 어떤 안이 제일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많이들 해외 공영방송 지배구조와 관련해 몇 나라 언급하지만, 특정한 제도를 따라가야 할 만큼 완벽한 제도는 없다. BBC 지배구조가 벤치마킹할 정도로 완벽하게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공영방송 경영진의 수준, 종사자의 수준, 이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관점, 시민사회가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든 게 논의돼야 한다. 공영방송은 우리 것이 아닌 국민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공영방송의 이사회와 관련해서도 지금처럼 원로 언론인, 법조인, 교수 등 한정적인 구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다양한 인사가 참여해야 한다. 

이용마 : 그런데 그런 식이면 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권에서 추천하는 극우 시민단체 인사들이 (공영방송 이사회에) 참여하는 부작용도 낳을 수 있다. 지금의 방문진처럼 숫자 싸움이 된다. 차라리 그럴 바엔 독식하지 말고 권력과 (이사진) 자리를 나누는 게 답이 되지 않겠나.

강지웅 : MBC 재판에서 판사가 김환균 PD(현 언론노조위원장)에게 ‘증인이 생각하는 공정성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김 PD의 대답은 ‘그냥 다 모여서 막 떠드는 것’이었다. 권력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에서 떠들다 보면 정리가 된다는 대답이었다. 그런 절차가 공정성이 아니겠느냐고 했을 때 판사가 납득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는 8, 9월에 공영방송 이사진이 교체되는데 국민과 정치권이 너무 조용하다. 많은 게 공개돼야 한다. 방문진 이사들의 면면과 그들의 회의록도 공개돼야 한다. 

최승호 : 지금까지 수렴된 여론은 여야 이사 2/3 이상의 찬성표가 있을 때 사장을 임명하는 특별다수제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차선이다. 그것과 함께 편집권 독립을 위한 내부 장치를 확실히 만드는 게 중요하다. 국장 직선제라든지. 양면의 장치가 필요하다.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경영진을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고, 그 경영진으로부터 보도 조직을 독립시키는 이중 시스템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 MBC는 이러한 독립성이 문화로서 확립돼 있었다. 경영진은 보도 내용에 대해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게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만큼 정착된 곳은 없었다. 이제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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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연대 <종로광견찰서, 우리는 이제부터 한놈만 팬다!>

  • [사회] 코리아연대 〈종로광견찰서, 우리는 이제부터 한놈만 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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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가 17일 <이제부터 한놈만 팬다, 종로광견찰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청와대앞시위를 벌이다 연행된 코리아연대회원 석방촉구기자회견에서 종로경찰서가 벌인 불법폭력연행을 두고 <5.16군사쿠데타가 벌어졌던 날에, 오늘 5.17군사쿠데타가 벌어지기 전날에 그날의 극악무도한 야만성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할정도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보여줬다.>며 <세상민심은 경찰을 두고 견찰이라 부르며 조롱할 때는 박근혜청와대의 충견노릇을 한다는 뜻이지만 미친개처럼 날뛴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있는 것을 우리는 이제야 깨달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오늘의 광주학살로 불리우는 세월호참사로 수백명이 죽고도 오늘의 계엄령으로 불리우는 쓰레기시행령이 강행통과되는 청와대에 맹종맹동하면서 민주시민들의 마지막 남은 저항권마저 살인적으로 유린하는 금수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계속해서 <우리는 단언한다. 종로광견찰들의 일제충견역사까지 멀리 갈 것도 없다.>며 <이런 인간말종들은 틀림없이 35년전 오늘 5.17군사쿠데타와 같은 상황이 도래하면 서울의 민주시민들에게 총질을 하고 칼질을 하고도 남을 천하의 개망나니들이라는 것을!>이라고 힐난했다.
     
    그러면서 <그 충견노릇에 이골이 난, 청와대안방마님을 싸고돌며 광화문농성유족들을 두들겨패는 천하의 인간말종들의 소굴인 종로광견찰서, 우리 코리아연대는 이제부터 한놈만 팬다!>며 <민중의 피눈물과 한을 반드시 우리가 10배, 100배로 되갚아준다. 그리하여 이땅에 다시는 이런 악질적인 광견찰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고 천명했다.
     
    다음은 전문이다.
     

    이제부터 한놈만 팬다, 종로광견찰소! 

    - 가장 악질적인 광견찰 윤명성서장을 해임하고 종로광견찰서를 해체하라!

     

    코리아연대가 일개 경찰서를 상대로 규탄성명을 낼줄은 꿈에도 몰랐다. <선거쿠데타독재자> 박근혜와 그 상전 제국주의 미국을 상대하기에도 바쁜 코리아연대가 아닌가. 허나 종로서는 일개 경찰서가 아니었다. 어제 5.16군사쿠데타가 벌어졌던 날에, 오늘 5.17군사쿠데타가 벌어지기 전날에 그날의 극악무도한 야만성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할정도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보여줬다. 세상민심은 경찰을 두고 견찰(犬察)이라 부르며 조롱할 때는 박근혜청와대의 충견(忠犬)노릇을 한다는 뜻이지만 미친개처럼 날뛴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있는 것을 우리는 이제야 깨달았다. 

     

    충견을 노릇하면서 이미 이성이 마비된 견찰에게는 법도 정의도 양심도 사라진지 오래이다. 이들에겐 박근혜와 같이 불법부정선거로 당선돼 아무런 정통성이 없음이 원세훈구속과 성완종자살로 백일하에 드러난 것도, 오늘의 광주학살로 불리우는 세월호참사로 수백명이 죽고도 오늘의 계엄령으로 불리우는 쓰레기시행령이 강행통과되는 청와대에 맹종맹동하면서 민주시민들의 마지막 남은 저항권마저 살인적으로 유린하는 금수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종로서의 윤명성서장 이하 견찰들, 정확히 말해 광견찰(狂犬察)들은 일말의 양심도 일말의 이성도 일말의 감정도 마비된 기계가 되어 인간사냥질에 아무런 꺼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언한다. 종로광견찰들의 일제충견역사까지 멀리 갈 것도 없다. 이런 인간말종들은 틀림없이 35년전 오늘 5.17군사쿠데타와 같은 상황이 도래하면 서울의 민주시민들에게 총질을 하고 칼질을 하고도 남을 천하의 개망나니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제의 단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간 세월호의 희생자들의 부모들인 유족들을 개처럼 끌고가며 폭언하고 폭력하며 상해까지 입힌 개망나니들이 주로 종로서에 우글거리는 광견찰들이라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광주가 수백명을 도륙한 학살이면 세월호도 수백명을 수장시킨 학살이다. 학살자 박근혜의 충견노릇에 눈이 먼 자들이라면 학살자 전두환의 명령에도 얼마든지 총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청와대에 항의했다고 정의로운 코리아연대 지영철전공동대표와 한지은회원을 폭력적으로 연행하고 심지어 이를 취재하는 21세기대학뉴스의 여기자까지 연행하는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상식이하의 폭거까지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허락된 광화문동화면세점에서 청운동사무소까지의 평화적인 행진이 처음부터 불법적으로 봉쇄된 것이고 불법채증이 난무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종로서앞에서 열린 역시 평화적인 규탄기자회견조차 야만적으로 무산시키고 4명의 코리아연대회원과 1명의 일반시민까지 무차별적으로 연행한 것이다. 

     

    종로광견찰서에게 법이란 제멋대로 만들고 붙이는 한갓 폭력탄압의 도구일뿐이고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는 언제든 짓밟아뭉개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다. 하긴 박근혜라는 그들 공권력의 우두머리부터가 불법부정부패선거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무너뜨리고 당선되고는 세월호학생의 생명과 그 유족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아오고 수많은 노동자·서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세계제1위의 인간생지옥을 만든 민주주의와 인권의 교살자가 아닌가. 그 충견노릇에 이골이 난, 청와대안방마님을 싸고돌며 광화문농성유족들을 두들겨패는 천하의 인간말종들의 소굴인 종로광견찰서, 우리 코리아연대는 이제부터 한놈만 팬다!

     

    미친개떼들을 상대하는데 더이상의 격식은 필요없다. 그간 유족들을 패고 무고한 시민들을 패고 숱한 운동가들을 팬 견찰중의 견찰인 종로광견찰서를 앞으로 1년이고 10년이고 그 악질근성을 뿌리뽑을 때까지 끈질기게 우리가 패겠다. 민중의 피눈물과 한을 반드시 우리가 10배, 100배로 되갚아준다. 우리는 이제부터 상전 미국의 대표적인 마름들인 박정희·전두환을 찜쪄먹을 마름중의 마름 박근혜와 상전 박근혜의 대표적인 마름들인 숱한 견찰들중에서도 가장 악질인 견찰중의 견찰 종로광견찰서와 그 광견찰서장 윤명성을 끝장낼 때까지, 마지막 한사람이 남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굴함없이 싸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땅에 다시는 이런 악질적인 광견찰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2015년 5월 17일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 코리아연대 

     

     

    임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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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보수단체 ‘5‧16쿠데타 기념행사’ 진행 논란


네티즌 “서울 한복판에서 쿠데타 기념 놀라워!” 비판..현수막 설치 불법 논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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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기자  |  luwakcoffee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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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7  09:33:56
수정 2015.05.17  10: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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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보수단체들의 ‘5‧16 군사혁명 기념행사’가 논란을 빚고 있다.

지난 16일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5‧16군사쿠데타 54주년 기념행사를 당당하게 하네요’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 5.16 쿠데타 기념행사 진행 현수막을 본 시민이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

게시글에는 ‘경축 제54주년 5.16 기념행사’라는 현수막이 걸린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사진 속 현수막에는 5월 16일 토요일 오전 11시 문래그린공원 박정희 대통령 흉상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 흉상보존회’ 주최로 5.16 쿠데타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다는 홍보 현수막이었다.

현수막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글을 쓴 네티즌은 “2015년 서울 한복판에서 군사정변 기념행사를 한다는군요. 민주주의와 헌법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상인데, 따로 지자체에서 제재도 없나보군요”라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사쿠데타를 기념한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네요. 진심 미친 듯…”이라고 개탄했다. 

이 글 밑에는 “불법이니 신고해야 한다”, “쿠데타 독재 세력을 추종하는 민주주의 사회라니, 아이러니 하다” 등등의 무수히 많은 비판 글이 달렸다.

   
▲ 5.16 군사쿠데타를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한다는 현수막이 설치된 사실을 알게된 네티즌들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라는 비판 댓글들. 출처 ; 오늘의 유머 사이트.

또 현수막 설치가 사전 신고된 것인지 영등포구청에 확인하고, 불법 신고를 했다는 글과 함께 구청으로부터 ‘사전 신고 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문자 내용 인증샷도 게재했다.

이 문자내용대로라면 5.16군사쿠데타 현수막 설치는 구청에서 허가가 나지 않은 ‘불법’이라는 것.

   
▲ 5.16 쿠데타 기념행사 진행 알림 현수막 설치가 사전 관계당국에 허가된 것인지 확인하는 민원을 제기하는 네티즌이 영등포구청으로부터 받은 답변을 캡쳐해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올렸다. 출처 ; 오늘의 유머.

‘go발뉴스’가 17일 영등포구청에 확인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휴일이라 당직자들은 확인이 불가하고 해당부서인 ‘건설관리과’로 18일 오전에 확인해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만일 이들 단체가 사전에 영등포구청에 현수막 설치를 허가 받지 않았다면 ‘불법 현수막’을 설치한 것이 된다. 

문제는 2년 전에도 똑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게시글들이 올라왔고, 그 때도 똑같이 시민들은 구청과 경찰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 출처 '오늘의 유머'

아울러, 이 단체의 기념행사 진행자체가 헌법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4‧19를 사실상 부정한 5‧16은 쿠데타이며 불법이라는 사회적 합의와 법적 판단이 내려진 지 오래임에도, 쿠데타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 자체가 헌법에 반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단체의 행사 진행을 사전 허가해준 정부당국을 향한 시선도 곱지 않다.

‘go발뉴스’가 영등포 경찰서에 확인해본 결과 이들의 행사진행은 사전집회 신고를 마친 것이다.

이와 관련해 17일자 <뉴데일리> 보도에 따르면 이들의 기념행사는 지난 16일 문래공원에서 차질 없이 진행됐다.

뉴데일리는 이 행사를 진행한 ‘박정희대통령흉상보존회’와 ‘(사)박정희대통령정신문화선양회’를 ‘애국단체’라고 언급하면서 “대한민국 근대화에 앞장선 박정희 대통령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이들의 발언을 기사 부제로 달기도 했다.

   
▲ 극우 성향의 매체 '뉴데일리'에서는 5.16쿠데타 기념 행사를 개최한 단체들을 애국단체라고 지칭했다. 출처 ; 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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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적 삶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도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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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의 삶에는 늘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고, 시(市) 정부가 혁신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후 변화에 맞서고, 시민들을 위해 더 깨끗한 공기, 더 안전하고 건강한 공간을 만드는 일은 전세계 주요 메트로폴리스의 시장들과 시의회들의 몫이다.

전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 사는 지금, 이런 이슈들은 도시 생활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어간다. 이 글에서 다루는 도시들은 광범위한 이슈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결과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적인 방법들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도시 10곳을 소개한다.

vancouver

 

밴쿠버

무슨 일을 하고 있나: 가족의 삶, 지속 가능성, 중독 치료

살기 좋은 도시, 삶의 질이 좋은 도시 리스트를 뽑으면 밴쿠버는 늘 상위권에 자리한다. 밴쿠버가 추구하는 바는 다운타운 중심가에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도시가 되는 것이다. 밴쿠버는 고밀도 주거지의 일부를 아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할당하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고, 그 결과 도시 중심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비율이 높다고 시티랩은 보도했다.

아주 비싼 주택 시장에 가족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애쓰는 한편, 밴쿠버는 그린 이미지를 지켜나가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2015년부터 밴쿠버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먹지 않은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는 대신 재활용을 위한 별도의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하고 있다. 이 모든 정책들은 밴쿠버를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밴쿠버는 북미에서 유일하게 시에서 관리하는 안전 마약 주사 장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밴쿠버의 심각한 문제인 정맥 주사 마약 사용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 운영하고 있다. 2003년에 도입한 이래, 치명적인 마약 과용이 상당히 줄었다.

stockholm

 

스톡홀름

무슨 일을 하고 있나: 교통 안전, 걸어 다니기 좋은 도시

스톡홀름은 자동차 의존을 줄이고, 자전거와 도보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도시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차량 진입이 아예 금지된 거리들도 있고, 2010년에는 ‘걸을 수 있는 도시’ 계획을 강화해서 시 전체를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잘 연결된 여러 구역으로 구성된 도시로 만들었다.

스톡홀름 시 행정부는 녹지를 만들고, 인프라를 건설하며 자전거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하는 도시 디자인 전략을 활용했다. 계속 커가는 도시로서, 삶의 질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새로 개발해나가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스톡홀름에서도 차는 필요하지만, 안전 규칙에 초점을 두어 교통사고 사망을 줄이려는 계획이 이미 실행 중이다. ‘비전 제로’는 굉장히 성공적이어서 – 스웨덴은 세상에서 가장 교통 안전이 좋은 나라다 – 뉴욕 같은 도시에서 도입해갔을 정도다.

manhattan

 

뉴욕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폭풍 방재 계획

2012년에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휩쓸고 간 뒤, 뉴욕은 거친 기상 조건과 기후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마이클 블룸버그는200억 달러를 들여 미래의 폭풍에 대비해 시의 인프라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폭풍 방어벽을 세우고, 발전소와 병원을 재난에 대비할 수 있게 하겠다는 등 꽤나 엄청난 계획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설치 미술로 기능하는 접이식 홍수막이 벽을 세우겠다는 야심찬 제안도 있다.

reykjavik

 

레이캬비크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지열 난방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아이슬란드의 독특한 위치 덕분에 레이캬비크는 가정과 건물들에 효율적으로 청정한 난방을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지하의 열원에서 나오는 수증기의 힘을 사용하는 지열 난방이 그것이다. 레이캬비크는 온천부터 심지어 마그마까지 이용해서 전기와 열을 만든다.

레이캬비크의 건물 중 무려 95%가 지열 난방을 이용한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도시인 것이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사용의 최전선에 있는 도시가 바로 레이캬비크다.

singapore

 

싱가포르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아침 지하철은 공짜

출근 시간에 사람들이 붐비는 것을 줄여보고자 도시 국가 싱가포르는 2013년에아침에 일찍 나오는 사람들은 무료로 지하철을 타게 해주었다. 오전 7시 45분 전에 지하철을 타면 요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 러시 아워를 피해 지하철을 탈 유인을 준 것이다.

원래는 한 해 동안만 할 계획이었으나, 워낙 성공적이어서 계속 연장되었다. 싱가포르 교통부는 아침에 전철을 타던 승객 중 총 7%가 이른 시간으로 옮겼다고 발표했다.

hong kong

 

홍콩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수하물 처리

하루 종일 짐을 잔뜩 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짜증스럽다. 여행의 좋지 못한 부작용이다. 그러나 홍콩은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 공항까지 운행하는 지하철 노선 – 의 지정 역에서 수하물을 체크인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지하철 역에서 비행기까지 당신의 짐을 날라주는 것이다. 시티랩이 보도한 바 있다.

불필요한 단계를 제거한 홍콩은 여행과 출장이 더욱 쉬운 국제 도시가 되었다.

paris

 

파리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치솟는 주거 비용 억제

파리는 살 곳을 임대하거나 구매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고 힘든 곳으로 악명이 높다. 당국은 주택가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고, 기존 거주자들이 내쫓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내놓았다.

중심부에 아파트 8,000호를 확보하고, 지역들을 고급화하며 법적으로 시에게 최순위 구입 거부권을 부여하고, 결국 보조금을 지급하는 주택가로 탈바꿈시킨다는 시안이다. 아파트 리스트 열람에 요금을 매기는 것 같은 악랄한 부동산 업계 수법을 근절시킨다는 계획도 들어 있다. 이 정책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당국에서 주택 공급이라는 중요한 이슈를 다뤄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copenhagen city

 

코펜하겐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탄소 억제

어떤 도시가 가장 ‘그린’한지를 정하는 기준은 좀 모호하지만, 덴마크 코펜하겐은 그린 정책과 자전거 친화적인 거리 때문에 늘 상위에 오른다. 2025년까지 이산화탄소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도시가 되겠다는 것이 코펜하겐의 가장 야심찬 목표인 것 같다.

풍력이나 바이오매스 연료 등의 대체 에너지를 사용해, 코펜하겐은 CO2 배출을 대폭 줄이려 하고 있다. 계획대로 된다면 코펜하겐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세계 최초의 수도가 될 것이다.

san francisco

 

샌프란시스코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오픈 데이터 사용

테크놀로지에 집중하는 도시답게, 샌프란시스코는 시민들이 삶의 질을 높이고 기업들이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활용할 데이터를 엄청나게 제공했다. 시장 사무실에서 론칭한 DataSF 프로젝트를 통하면 주거, 건강 정보, 기름을 아끼며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니는 방법까지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리뷰 사이트 Yelp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어서 식당들의 최신 위생검사 결과를 볼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사용해서 음식으로 걸릴 수 있는 질병의 발병률을 빠르고 창의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berlin

 

베를린

무슨 일을 하고 있나: 공간 재활용

넓게 펼쳐진 베를린에는 버려진 공업용 건물과 버려진 공간들이 많다. 오래 전부터 베를린 사람들은 낡은 발전소를 회원제 나이트클럽으로 바꾼다든가, 휑뎅그렁한 버려진 건물을 미술관으로 쓰는 등 이런 공간들을 다양하게 재활용하는 솜씨가 좋았다. 시에서 돈을 댄 재활용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템펠호프 공항이었다.

1934년에 나치가 템펠호프 공항을 확장해 거대한 환승 공항으로 만들었다. 무수한 활주로와 격납고 사이에는 아주 넓은 빈 공간이 있다. 2010년에 베를린은 템펠호프를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거대한 공원으로 바꾸어 재개장했다. 템펠호프 건물 내를 작업장이나 이벤트 장소로 만들 계획도 세워놓았다. 한때 끔찍한 목적으로 사용되던 공항을 사회적 가치를 위한 곳으로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의 10 Cities That Are Shaping The Future Of Urban Living를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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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풍자’ 이하 작가 “시대와 못 어울리는 정부 나가달라”


홍대 비롯 전국 10여 곳서 대통령 ‘우아한 퇴진’ 기원 정치 풍자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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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란 기자  |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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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6  08:44:54
수정 2015.05.16  09: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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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뉴시스)

지난해 12월과 지난 3월에 이어 16일 새벽 1시쯤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인근에 또다시 박근혜 대통령 풍자 전단 3000여장이 뿌려졌다.

작은 수첩 크기의 해당 전단에는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머리 스타일을 한 박 대통령이 그려져 있고 ‘퇴진’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전단은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 풍자 그림을 그려온 팝아티스트 이하 작가의 작품으로 ‘우아한 퇴진’이 작품명이다. 이 전단 1만부 상당이 서울과 부산, 대구, 구미 등 전국 10여 곳에 뿌려진 것으로 전해졌다.

   
▲ ⓒ 이하 작가 페이스북

이날 이하 작가는 자신의 SNS를 통해 “5.16을 기념해 대통령의 우아한 퇴진을 기원하는 정치 풍자 퍼포먼스”라며 전단 제작 이유를 밝혔다.

그는 “현대는 인터랙티브(상호소통)한 다원주의 세상”이라고 강조하며 “상호소통시스템의 특징은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한 무서운 단죄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하 작가는 이어 “나는 예술가다. 거리에서 나의 작품을 발표하고 시민들과 함께 예술행위를 한다. 민주주의의 최고의 가치는 표현의 자유”라면서 “난 나의 권리를 행할 것이다. 이 시대와 어울리지 못하는 정부가 있다면 나가달라고 정중히 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때 ‘정의’를 위해 있는 힘껏 싸웠던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일조했고 미래에 희망을 주었다”고 전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위대한 시민 여러분 저항하십시오. 일상에서도 저항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유와 희망은 저항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라며 시민들의 권리 행사를 당부하기도 했다.

또 이하 작가는 글 말미에 “압수수색해봤자 작업실엔 아무것도 없으니 출석요구서나 빨리 보내주세요”라며 경찰을 겨냥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최근 경찰은 박근혜 대통령 풍자 전단을 살포한 시민활동가들의 자택을 압수수색 하고 구속하는 등 시민들의 전단 살포 행위에 강력대응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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