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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똘레랑스'의 혁명투사로!

 

 

[노정태의 논객시대] 다시 '가장자리'에서 시작하는 홍세화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7-05 오후 7:10:57

 

 

1.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그런 책을 쓰고 삶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많을까. 독자들이 아무리 '내 인생의 책'을 손에 꼽아봐야, 그것이 저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견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면, 책이 만드는 '사람'에 더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독자가 아니라 저자라는 뜻이다.

가령 홍세화가 그렇다. 1995년 그 유명한 책이 출간된 후 그는 지금까지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불리고 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 펴냄),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출판 펴냄),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한겨레출판 펴냄), <빨간 신호등>(한겨레출판 펴냄), <생각의 좌표>(한겨레출판 펴냄) 등 혼자만의 이름을 달고 낸 책이 벌써 다섯 권이며, 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사회의 주요 진보 논객으로 손꼽혀왔고, 2011년부터는 진보신당의 당대표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홍세화는 어디까지나 "빠리의 택시운전사"인 바로 그 홍세화인 것이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특정한 그 누군가는 어쩌면 홍세화 본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일지 모른다. 다소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홍세화'라는 이름의 노래는 없지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이름의 노래(☞바로듣기)는 존재한다. 무키무키만만수라는 2인조 그룹이 바로 그 책의 제목을 따서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것이다. 해당 곡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맴버 중 한 사람의 방바닥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굴러다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 격월간지 <말과활> 창간호를 준비 중인 홍세화. ⓒ프레시안(최형락)

요컨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심지어 출간 후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젊은 독자들에게 팔리고 있는 책이다. 그것이 '읽히고' 있다고까지 단정 지을 수야 없겠으나, 인터넷 서점 등을 확인해보면 꾸준히 독자들의 리뷰가 올라오고, 낮지 않은 판매지수가 유지된다. 유난히 순환이 빠르고 유행에 민감한 한국의 문화 시장에서 이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책 힘'이 죽지 않는 것이며, 그만큼 다른 그 누구보다도 그 책의 저자 스스로가 본인의 저작을 끝없이 의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진보신당의 서울마포당협 당원인 홍세화는 2011년, 진보신당의 당원게시판 '세상사는 이야기'에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 -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심지어 이 글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였던가요,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라고 말했던 이는. 당원 동지 여러분. 저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령 만신창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 척박한 땅에 참된 진보정당의 뿌리를 내리는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젊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얻은, 그것 아니었다면 쎄느강변에서 소멸했을 허명에 값하는 의미로서 이미 충분합니다. 동지 여러분이 진보신당의 당원임을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반드시 오게 하기 위해 오늘과 내일 받을 상처 때문에 뒷걸음질 치지 않겠습니다. (☞바로가기 :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 -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

홍세화 자신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겐 이래저래 '택시운전사'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또한 그는 "실제로 나는 나의 정체성에서 택시운전사가 많은 부분 그대로 남아 있기를 기대한다"(<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20쪽)는 소망을 피력한다. 이는 홍세화가 많은 글에서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제시하는,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의 이미지와도 상응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시작한 기나긴 망명 생활 도중 한 권의 책으로 뜻하지 않게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고국에 돌아와 본인이 소망하던 대로 진보정치의 일원이 되어 투신할 때, 그가 만든 '택시운전사', 혹은 '척탄병'은 꾸준한 일관성을 유지하며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발휘해왔다.

그 택시운전사가 제시한 담론의 무기가 바로 '똘레랑스'였다. 프랑스어로 관용, 용인을 뜻하는 그 개념을 홍세화는 자신의 것으로 전유했고, 프랑스에서 온 신선한 어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가 똘레랑스를 말하면서, 또한 '앵똘레랑스'에 대한 결연한 투쟁을 선포하면서, 한국 사회의 담론과 지형도에 새로운 획 하나가 추가되었다.

2.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창비

1947년, 해방되었지만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에 태어난 홍세화는, 경기중학교를 나오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들도 이른바 '시국'에 관련된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1964년과 1965년에 걸쳐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대일 외교에 대한 반대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홍세화는 "3학년 때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처음으로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종로경찰서였는데 몇 시간 잡혀 있다가 이른바 훈계 방면으로 나왔"(<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168쪽)던 것이다.

아무튼 고3이었던 그는 영어보다 수학을 더 잘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이과를 지망하고, 서울 공대 금속공학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될 첫 번째 사건이 벌어진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린 시절 그가 "단물이 다 빠진 멸치를 나의 콩나물국에서 그리고 할아버지의 국에서도 할머니의 국에서도 걸귀처럼 건져 먹었던"(160쪽, 같은 책)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66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 공대에 입학한 그해, 남이 부러워하는 이른바 KS마크가 되어 남 보란 듯이 교복을 입고 충남 아산군 염치면 대동리, 일명 '황골'이라고 부르는 그곳, 바로 현충사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되는 그곳에 갔던 날까지는 그랬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그곳에서 나는 그 대부를 만났다.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말씀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고 또 내 기억 속에도 없는 그 굶주림의 실체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내 기억에 없는 나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 (같은 책, 161쪽)

그 '황골'이라 불리는 동네에서, 한국전쟁을 피해 피신 중이던 홍세화의 아버지와 어머니, 홍세화 본인과 그의 동생은 가까스로 몸을 숨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인민군이 들이닥쳤고, 앞서 언급된 "그 대부"의 가족들은 몰살당했으며, 돌도 차지 않았던 홍세화의 동생 역시 "죽는 병이 아닌 병에 걸려 죽었다."(같은 책, 170쪽) 그런 일을 겪은, "옥토끼를 잃은 젊은 나의 어머니는 혼을 뺏겼고 나를 키울 자신도 잃었다."(같은 곳) 결국 조부모의 손에 맡겨진 채 홍세화는 서울에서 자라났고 장성하여 출세의 보증수표인 KS마크를 달게 되었는데, 그 성인식이 끝나자마자 본인이 기억하지 못했고 기억할 수도 없었던 비극적인 역사를 알게 된 것이다. 형인 세화는 살아남았지만, 동생인 민화는 살아보지도 못한 세상을 떠났다. 전쟁 때문이었고, 넓게 보자면, 그 전쟁의 배후에 있는 미국과 소련 때문이었다.

소년 홍세화가 얼마나 '깨어있는' 학생이었는지 지금의 우리가 가진 자료만으로는 다 확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남들이 시위한다고 할 때 팔짱 끼고 뒤로 물러설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1965년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이른바 '민족사적 비극'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새겨진 피의 역사였다. 홍세화에게 그 가족사를 가르쳐준 아버지가 어떤 뜻을 품고 있었을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일차적으로 성적표에 찍혀 나오기 시작했다.

어렵게 입학한,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 공대였는데 다니기 싫어졌다. 관성에 의해 학교에 가기도 했지만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여지없이 낙제를 했다. 그것은 나의 학창시절 중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불상사였고 또 실패였다. 충격이었다. 다시 잡념을 버리고 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기숙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물리학, 화학, 수학 등의 과목은 나에게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같은 책, 228쪽)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자퇴서를 내고, "기차를 타고 이리 역에서 내린" 홍세화는 "역 앞에서 어느 여인의 품에 잠깐 안겼다가 마냥 걷고 또 걸어 군산까지 갔다. 다시 군산에서 통통배를 타고 개야도라는 섬에 갔다."(230쪽, 같은 책) 그 섬은 밀물이면 잠기고 썰물이면 길이 드러나 걸어서 드나들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거기서 한 차례의 밀물 때를 보내며 비를 맞고 고뇌하던 그는,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민화야!"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물이 빠지고 다시 육지가 되자 그 섬에서 빠져나왔다.

드디어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갇혀 있던 섬이 다시 육지가 되었다. 나는 해방되었다. 뛰었다. 희열로 젖어 있는 몸으로 뛰었다. 육지였던 곳까지 뛰었다가 다시 섬이었던 곳으로 뛰었다. 신나게 왔다갔다하며 뛰었다. 나는 그가 되고 그는 내가 되었다.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드디어 나는 하나가 되었다. (같은 책, 231쪽)

3.
 

▲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짐작건대 이 책을 이미 읽었을 여러분이 기억하는 것과는 퍽 다른 책이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손에 쥔 내가 바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저자 홍세화는 '택시운전사' 이후의 홍세화이다. 이미 그가 프랑스에 오래도록 살다가 한국에 왔다는 것,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한국 사회를 비평하기 위한 이론적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것,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평판에 누가 될 만한 오점을 남기지 않은 채 '선비'의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 등을, 우리는 알고 있고 홍세화를 그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택시운전사'의 아우라가 너무도 강한 탓에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잊게 되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이른바 '남민전의 투사', '정치 난민' 홍세화의 자전적 에세이로 기획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1995년을 돌이켜보자. 이른바 '민중가요'를 불러왔던, '철의 노동자'를 부르던 그 뜨거운 목소리의 안치환이 '내가 만일'이라는 노래가 담긴, 같은 제목의 네 번째 음반을 내놓았다. 문제는 그 노래를 아무리 열심히 들어봐도 그 속에서 노동과 민중과 투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에는 한없는 서정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이른바 '운동권'들은 한없이 허탈해했다.(심지어 당시 학생이었던 나도 신문 지면에 이 노래에 대한 찬반 양론이 쏟아졌던 것을 기억한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고 1992년 소련이 망했지만, 이토록 빨리 '운동'이 '문화'의 영역으로 쏟아질 줄은, 혹은 '문화'가 '운동'의 영역을 집어삼키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남민전의 투사 홍세화의 자전적 에세이가 창작과비평사라는 이른바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오게 된 것은 이런 전후 사정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 가능하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던 사람도 아니었던 그에게 이렇게 큰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안치환은 '내가 만일'로 1995년 '대중가요' 가수로 거듭났다.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내며 1997년 이른바 '전향', 혹은 '변절'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남민전, 즉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일원이었던 홍세화가 '불란서', '빠리'를 자신의 키워드로 제시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상화된 센세이션의 일부였던 것이다. 거론된 이들과 홍세화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가 그랬다는 뜻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홍세화가 이제 투사가 아닌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책에 더 가깝다. 적어도 처음 쓰일 때에는 그렇게 시작된 책이다. 남민전의 투사 홍세화는 조직 안에서 자신이 이런 일을 했다고 술회한다.

조직 안에서 내가 했던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당시의 상황에서는 대단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애드벌룬을 이용하여 서울 시내에 10만 장의 삐라를 뿌려, 서울 거리를, 그 무거웠던 침묵의 거리를 삐라의 바다로 만들 계획에 참여했던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같은 책, 79쪽)

애드벌룬에 삐라를 넣고, 미리 부착해둔 심지에 불을 붙인 채 하늘에 띄우면, 적당한 고도에 올라가 서울 시내에 삐라가 살포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10킬로그램짜리 애드벌룬을 넘겨받아 접선지로 향하던 홍세화는 공포감에 짓눌렸지만,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소나기가 되어 떨어졌다." 너무도 눈에 잘 띄는 행동을 하고 있던 홍세화는 "조금 전까지 진하게 남아 있던 공포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감이 가슴 가득히 충만해오는 것을 느꼈다. 젖은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축복으로 젖는 것 같았다."(같은 곳)

앞서 언급한 홍세화의 개인사적 기술에서, 밀물에 의해 갇힌 섬에서 비를 맞고 썰물을 기다리다 빠져 나온 대목을 떠올려보자. 홍세화는 바로 이 애드벌룬을 운반하다 비를 맞은 사건과, 유년 시절의 비극적 비밀을 알게 된 후 바다 한가운데에서 비를 맞으며 죽은 동생의 이름을 외친 사건을 하나로 꿰어 회고한다. "나는 그가 되었고 그는 내가 되었다.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드디어 나는 하나가 되었다."

독자는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대문시장에서 두려움에 떨며 애드벌룬을 들고 가던 내가 어떻게 그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는가를.(같은 책, 231쪽)

4.
 

▲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한 성인이 인생의 특정한 시점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경우, 그것은 반드시 어떤 서사의 형태로 재구성된다. 이것은 왜곡도 아니고 조작도 아니다. 인간 존재의 필연적 조건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 그리고 내가 바라는 미래의 나까지 연결하는 하나의 큰 서사 속에서 구성하고 파악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쓰던 홍세화가 바라보던 자기 자신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민족사의 비극을 가족의, 개인의 역사 안에 안고 있었던 청년.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홍세화라는 저자는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고뇌 끝에 대학을 자퇴하고 같은 대학에 다시 들어갔지만,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당하는 등의 고난을 겪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혔지만, 지금도 가슴 속 한 구석은 뜨거운 빠리의 망명객. 그러나 이제는 '남조선'의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꼬레'의 '똘레랑스'를 위해 붓을 든 사나이.

이 책의 목적의식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밀물이 들이닥쳐 섬에 고립된 후 비를 맞고 동생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다가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드디어 나는 하나가 되었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투신하는 그의 자기 서사를 일종의 은유로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물론 이 책의 서술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실은 단순한 사실의 총합을 넘어설 것이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죽어간 동생과 자신이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밀물로 인해 고립되었다가 썰물이 빠지면서 다시 세상과의 접점을 찾는 그 이야기는, 눈 밝은 독자에 의해 어떤 메타포로든지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학과 신입생으로 다시 들어간 홍세화가 한미행정협정에 대해 알고 아연실색하는 장면이 이어진다는 것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라는 이름에서 이미 잘 드러나듯이, 당시에는 이른바 NL과 PD의 분화가 본격화되기 전이었지만, 어쨌건 '조국통일'과 '독재타도'를 하나의 맥락으로 꿰뚫어 파악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긴급조치 시대에 독재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고자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평가를 받기 충분할 것이다. 그 구성원 중 29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판정을 받았고, 검거된 남민전의 투사들 중 대부분은 1988년 이전에 사면 등으로 석방되었다.

물론 조직의 중심에 있던 이재문은 사형을 선고받은 후 감옥에서 사망하였으며,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경우도 있었다. <조국은 하나다> 등으로 유명한 김남주 시인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그 외 많은 이들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남민전 사건 자체는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 강남 일대에서 벌어진 강도 및 절도 사건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면으로 드러났다. 자금 확보를 위해 범죄를 저지르다 꼬리가 밟혔던 것이다. 결국 유신 말기의 큰 시국 사건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므로 남민전 사건을 기억하는 이에게, 즉 '홍세화'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의 말마따나 "남민전의 전사"를 떠올리는 이들에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자아내는 정조는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책을 읽게 될 독자 중 만약 남민전 사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강도와 절도 등의 혐의로 인구에 회자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그 이미지를 쇄신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5.
 

▲ <빨간 신호등>(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그가 진보신당의 당대표에 출마하기로 한 후, SNS에서는 한 낯선 이국 여성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씰비"라는 퍼스트 네임으로만 알려진 그 여성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홍세화와 미묘한 정서적 울림을 주고받다가, 결국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감정을 서로 확인하는 그런 누군가로 등장한다. 일부 짓궂은 진보신당 관계자 및 네티즌들이 그 이름을 굳이 거론하며 홍세화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8장인 "씰비와 실비"를 읽어보면 그와 같은 접근을 안 하기가 더 어렵다. "씰비를 만나면 나는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졌다. 말친구로 시작된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점점 가까워졌고 이윽고 말친구로 멈출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같은 책, 131쪽) 두 사람은 흔히 말하는 '썸남'과 '썸녀'의 관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과 그 베트남 음식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호로 화제를 옮겼다. 홍세화는 씰비가 베트남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마치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착취를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역시 내 말은 너무 지나쳤다. 결국 그녀는 넴을 다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고 나는 거듭 사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그 넴 사건이 있은 뒤 우리 사이가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었다. 그 며칠 뒤 우산을 같이 쓰고 걷게 되었을 때,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었다. 나는 흠칫했으나 맥박이 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같은 책, 136쪽)

좋은 로맨스물이다. 하지만 홍세화는 "그녀의 애정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고 또 감당할 자신도 없었"(같은 곳)기에, 두 사람은 실컷 '썸'만 타다가 끝나고 말았다. 빠리에서 택시를 몰며 자신의 지성과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홍세화를 보고 안타까워하던 씰비는, 홍세화가 가르쳐준 '실비'라는 단어를 이용해,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실비를 맞으러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당신의 나라예요. 지금 돌아가면 안 되나요? 돌아가면 무슈 옹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잖아요.""(같은 책, 138쪽)

그 절대적인 명령, 하지만 망명객의 신세가 되어 이룰 수 없는 소망이 들려오자 홍세화는 어지럼증을 느끼고 허물어졌다. 그는 씰비의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 상대의 품에 안겼다. 돌아갈 거야, 돌아갈 거야,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제대로 말을 잇고 있지 못하자, "그녀가 내 입을 막아버렸다."(같은 책, 139쪽) 그리고 8장이 끝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주 훌륭한 로맨스물이다.

사건이 있었던 당시에 기록하였다 해도 이런 종류의 개인적 추억에는 객관적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이 더욱 강한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하물며 그가 프랑스에 발을 디딘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겪었던, 글을 쓸 당시에도 10년도 더 되었던 일인 다음에야, 이 내용들의 진실성을 따져 묻는 것은 그저 어리석고 할 일 없는 행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안에 마치 "젊은 느티나무"를 연상케 하는 이 싱그러운 사랑 이야기가 굳이 왜 들어갔어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이미 다 설명했다. 홍세화는 남민전의 투사였고, 남민전은 대중들에게 강도 사건으로 알려진 운동 조직이기도 했다. 물론 그 자체가 정권 차원에서의 조작일 수도 있고, 긴급조치가 발령되던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마치 독립군이 군자금 확보를 위해 일본인 지주의 곳간을 터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대중들에게는 남민전의 이미지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남민전의 투사는 빠리에서 본의 아닌 망명 생활을 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겪고 만다. 그리고 그는 생계를 위해 묵묵히 임대 택시의 핸들을 잡는다. 이른바 '운동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텍스트 중, 이토록 로맨스로서의 완성도가 높으면서, 동시에 소기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글을 또 찾아보기란 어렵다. 한국에는 실비가 내렸고, 씰비는 무슈 옹그의 입을 막아버렸으며, 홍세화는 남민전의 투사가 아닌,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얻게 되었다.

5.
 

▲ <생각의 좌표>(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기존과는 다른 '운동권 논리'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홍세화 개인의 고안에서 비롯한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소련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구심점을 상실한 채, 이미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한국 사회의 기타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대답의 총합에 가까운 것이다. 이른바 '보수' 진영은 계속 일본과 미국을 모델로 삼아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면 될 것이지만, '진보'는 사정이 달랐다. 혁명의 화살표가 부러진 곳에서도, 이 완벽하지 않은 세상과 맞서긴 해야 했고, 거기에도 투쟁의 논리와 발전을 향한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세화는 하필이면 빠리에 살고 있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쓸 당시, 본인이 이미 한국에 돌아올 수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입국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프랑스의 망명허가증이 있었지만, 한국은 다른 남민전 연루자들의 죄를 사면한 상태였다. 그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해외에서 10년의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자녀들이 한국과의 접점을 많이 상실했음을 안타까워하며, 홍세화는 이렇게 말했다.

새삼스럽게 나에 대한 공소시효가 87년인가 88년에 만료되었다는 사실을 98년에 확인해 준 한국 정부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국내의 가족과 친지들은 10년 동안 법대로 처리할 만한 용기를 가진법대로 처리하는 일에 무슨 용기씩이나 필요하겠는가마는법무부 인사를 찾지 못했다. 정치 논리에 종속되어 법에 따른 법적 처리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한국 법무부가 처량할 뿐이다. 아직도 귀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터에 하릴없고 배부른 소리인 줄 알지만 자식들이 방학 동안만이라도 한국 땅을 자주 밟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미련을 끝내 지우기 어렵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13쪽)

홍세화는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만약 그의 망명생활이 1987년 혹은 88년에 끝났다면, 그래서 그가 자유롭게 한국을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여기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떤 유의미한 가정이나 추측도 내놓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1995년의 홍세화는 오랜 세월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비운의, 하지만 애틋한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다. 하지만 1987년의 홍세화는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타국에서 택시 운전 및 관광 안내 등을 하며 세월을 보낸 한때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80년대 말은 뜨거웠던 운동의 열기가,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큰 좌절을 겪었지만, 아직도 활활 타오르던 시점이었다. 과거의 투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았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90년대는 달랐다. 이른바 중산층이 대폭 늘어나면서 한국인들의 구매력이 높아졌고,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봇물 쏟아지듯 관광객과 유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이른바 '진보 언론'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프랑스, 특히 파리에 대한 동경의 눈빛을 한껏 머금고 있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도 그렇거니와, 다음 책인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역시, 프랑스의 문화 및 문물에 대한 다양하고 친절한 소개를 담고 있다. 가령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을 상급생들이 골탕 먹이는 행사인 "비쥐타쥬"나, 파리 지하철 노동자들이 만우절을 맞이하여 어떤 역의 이름을 슬쩍 바꿔놓은 행사 등이 <쎄느강은...>의 지면을 채우고 있다. 다음 문단을 보면, 이것이 과연 '진보 논객' 홍세화의 글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될 지경이다. 다소 길게 인용해보자.

두 소녀는 특별한 아이들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이 보기 좋아야 하는 사회 환경,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을 뿐이다. 요리도 우선 보기 좋아야 구미를 돋운다. 구운 고기에 야채를 곁들이면서 색깔을 맞춘다. 그래서 요리사는 '접시 위에 맛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포도주를 따를 때 잔을 끝까지 채우면 안 된다. 반 정도에서 7분의 4쯤 따라야 한다. 포도주로 포도주잔을 황금 분할하는 것이다. 독자는 이 정도 채운 포도주잔과 꽉 채운 포도주잔을 놓고 한번 비교해 보기 바란다. 촛불 아래에서 비교하면 더욱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먹고 마셔 없어질 대상(오브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으니, 사는 집의 내부 장식이나 가구, 입는 옷 그리고 몸의 선(線)에 이르기까지 항상 보는 것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83쪽)

홍세화가 프랑스에서 불필요하게 더 보낸 10여 년의 시간동안, 한국 사회는 그를 배제한 채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직선제 쟁취라는 가시적 목표를 달성한 한국 사회는 두툼해진 지갑을 들고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세화는 파리에 있었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고등학생도 한국의 대학원생보다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나라. "무대가 파리였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예컨대 '나는 베를린의 택시운전사'나 '나는 도쿄의 택시운전사'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같은 책, 6쪽)고 홍세화는 허허롭게 인정한다. 물론 그도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파리를 어느 정도는 사랑했을 것이지만, 파리에 가보지 못한 한국 사람들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맹목적인, 가닿을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한 동경과 사랑이, "빠리의 택시운전사"에게 묘한 낭만적 떨림을 제공했다.

6.

그게 없었더라면 똘레랑스가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개념으로 정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 유학생이었던 진중권이 그저 '독일식 사민주의'라는 밋밋한 개념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던 반면, 문학과 예술과 낭만의 도시인 파리에서 온 정치적 개념은 달랐다. 그것은 발음할 때부터 아름다웠고, (얼마나 실질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수용되었는지와는 별개로) 국내에서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홍세화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물론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에게 부정적인 즐거움만 주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똘레랑스'가 국내에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토론 주제가 되었던 일은 나에게 더없는 즐거움을 주었다. '관용(寬容)'이라는 말이 예전에 비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소식도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국내 어디엔가에 '똘레랑스'라는 이름의 찻집이 생겼다는 얘기조차도 나에겐 즐거움이었다. 글을 쓴 사람에게 그런 일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같은 책, 7쪽)

'똘레랑스'라는 이름의 찻집이 생겼다. 이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불러일으킨 반향을 잘 보여주는 사건도 없을 것 같다. 즉 홍세화의 책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는 결코 들어올 수 없는 망명객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더 큰 후광을 부여해주었다. 게다가 그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은 이전의 운동권들이 말하던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프랑스인들의 생활, 파업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은 인종차별에 대한 단호한 공적 제제. 이 모든 것들은 이전의 운동권들의 그것처럼 구질구질하거나 목숨을 걸거나 울부짖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깔끔했고 울림이 깊었다.
 

▲ 격월간지 <말과활> 창간호를 준비 중인 홍세화. ⓒ프레시안(최형락)


홍세화는 기존의 운동권적 논리에서 한 발 벗어났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해 발언하고 대중들을 설득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두 개의 거울"이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현재를 살며 한국의 과거를 반추하던 그에게, 그 두 이미지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고, 대체로 후자가 전자에 비추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홍세화에게 있어서 "프랑스 사회는 내가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갈 수 없는 거울"이었고, "고마움과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비판 대상이 되지 않는"(<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18쪽)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두 사회를 동시에 보며, 그 중 '내 자식'인 한국을 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바라보기 위해 프랑스 사회를 거울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그가 도입한 최고의 히트상품인 '똘레랑스'에 중대한 수정이 가해졌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초판에 딸린 부록인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에는 등장하지 않는, "앵똘레랑스"가 주요 개념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7.

이처럼 두 개의 거울,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프랑스 사회라는 거울은 나에게 악역을 맡을 것을 요구한다. 그 위에 외유에는 내강이 전제되어야 하듯이, 똘레랑스의 온화함은 앵똘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앵똘레랑스가 전제되어야 한다. 단호하지 않을 때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일상 속에서 무뎌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악역자의 칼날을 일상적으로 벼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꼭 악역의 칼날로 비쳐지지 않을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20쪽)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앵똘레랑스'는 대부분의 경우 <조선일보>를 지시한다. 그가 '앵똘레랑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또 다른 예시를 찾아보면 그렇다.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를 상대로, 그가 강준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때 사용한 어구를 그대로 들려주며, "나를 고소하라!"고 외친 칼럼을 설명하는 글에서, 홍세화는 자신이 그런 점잖지 못한 소리를 하게 된 연원에 대해 논한다. 길게 인용해볼 가치가 있다.

나는 <한겨레> 칼럼 '빨간신호등'에 <조선일보> 기자를 향하여 '나를 고소하라!'고 썼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발적인 언사임에 틀림없다.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그리고 점잖은(?) 사람이라면 함부로 꺼낼 소리가 아니다. 실상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나와 다른 남의 생각을 다른 그대로 용인하라는 똘레랑스를 무척이나 강조해 왔다. 그러나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까지 용인해 버리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똘레랑스의 부드러움은 앵똘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반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근대사상사에서 보더라도 로크나 볼테르, 루소 등 똘레랑스를 강조했던 사람들일수록 앵똘레랑스와 과감하게 싸웠다. <조선일보> 기자는 앵똘레랑스를 부추기는 행위를 저질렀다. 한국 사회에서 사상 검증이란 행위, 즉 '당신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드러내놓고 주장하건, 그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건, 빨갱이로 몰아가기 위한 행위임이 틀림없고 그것은 앵똘레랑스의 전형이다. 나의 "나를 고소하라!"에는 티끌만큼의 지나침도 없다. (같은 책, 100쪽)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가 최장집 교수를 빨갱이로 몰기 위해 그의 논문을 임의적으로 인용하고, 그 점을 비판하는 강준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것 등은 모두 '똘레랑스'와 거리가 있는 행동이다. 설령 최장집이 진짜 '빨갱이'라 하더라도, 마치 드골이 사르트르를 두고 "그도 프랑스야"라고 관용하였듯이, 그렇게 똘레랑스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는 국가기관 등이 아니지만 명백히 사회 권력이므로, "똘레랑스는 개인이 권력에 요구하는 것이지 권력이 개인이나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302쪽)닌 만큼, 한 개인으로서 홍세화는 <조선일보>와 그 구성원인 이한우를 향해 똘레랑스를 요구할 수 있다.
 

▲ <발자국을 포개다>(박노자·이선옥·홍세화·김소연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들을 '앵똘레랑스'로 규정짓고 나면, 정치적으로 가능한 선택지가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는 데 있다.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까지 용인해 버리면 자기모순에 빠지"지만, 그 정의상 똘레랑스라는 것 자체가 권력이 개인에게 허용하는 것이지 개인이 권력에게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즉 일개 개인인 홍세화나 노정태 같은 이에게는, 가령 <조선일보>나 박근혜 정부 같은 권력을 '똘레랑스'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똘레랑스' 세력이 '앵똘레랑스' 세력의 개과천선을 이끌어내고 그들마저도 똘레랑스로 감싸주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권력이 커야 한다. 이쪽이 저쪽보다 힘이 없고 세력이 약한데, 누가 누구를 관용하고 용인한다는 말인가? '앵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해야 한다'고 홍세화가 외칠 때, 그것은 그가 소개한 본래적 맥락의 똘레랑스와는 다소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는 자가 힘이 있는 자를 어떻게 봐주고 참아주고 용납해준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똘레랑스'론이 오직 '똘레랑스'만으로 구성될 때와 달리, '앵똘레랑스'라는 대립항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이것은 단순한 사회비평의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적, 혹은 상대방을 적시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앵똘레랑스가 도입되는 것이며, 그 앵똘레랑스 세력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똘레랑스할 수 있을만한 여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일종의 투쟁론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똘레랑스 세력도 앵똘레랑스 세력에 대하여는 앵똘레랑스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같은 책, 127쪽)는 결론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회창을 떨어뜨리고, <조선일보>를 끊고, 이문열의 책을 반납하거나 장례식을 치르는 것 등이 바로 그 "앵똘레랑스로 대응"하는 실천의 구체적 내용이 될 것이었다.

8.

이 논리는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거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다. 물론 홍세화는 대부분의 진보정당 당원들보다 열성적으로, 그의 표현대로라면 '사병'으로서 진보정당을 홍보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진보정당의 당원 혹은 지지자들 가운데, "가령 추석에 고향을 찾은 기회에 당 선전을 하는 당원은 얼마나 될까?"(같은 책, 233쪽) 같은 질문에 떳떳하게 '나는 한다'고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홍세화는 늘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그가 특정 국면의 특정 갈등들을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투쟁'으로 정의한 순간, 많은 것이 기울어졌다. 장 마리 르펜을 떨어뜨리기 위해 "공화국을 지키자"고 외쳤던 프랑스 좌파 청년들의 예를 들어, 그는 이른바 '보수 정당'과 '보수 정치인'의 차이를 구분하고 그 속에서 좀 더 지지되어야 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 곳곳에 극우-수구 세력이 헤게모니와 물적 토대를 움켜 쥐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혹시 헌법 제1조가 보장하고 있는 공화주의에 대해 천착하지도 않은 채 사회민주주의를 뛰어넘자고 외치면서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신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똑같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경쟁 대상과 극복 대상을 구분할 줄은 알아야 한다. (같은 책, 253쪽)

당시의 한나라당은 '극복 대상'이지만, 당시의 민주당은 '경쟁 대상'이라는 함의가 깔려있는 이 문장을 읽고, 홍세화를 좋아하지만 진보정당을 지지하지는 않는 수많은 독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그렇지, 나와 내가 지지하는 후보는 '앵똘레랑스'가 아니지. 하지만 저 앵똘레랑스 세력을 끌어내리기 위해 우리는 일단 서로 뭉쳐야 하는 거지. 그런데 그 지지자의 눈에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신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똑같다고 부정하고 있는" 누군가가 보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똘레랑스고 저들이 앵똘레랑스인데, 똘레랑스인 나를 똘레랑스하지 않는 이 '좌빨'들은, 결국에는 앵똘레랑스 아닐까?
 

▲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이상대 ·이계삼· 홍세화 등 지음, 교육공동체벗 펴냄). ⓒ교육공동체벗

앵똘레랑스를 우선 철저하게 앵똘레랑스해야 한다는 홍세화의 논리는, 그의 바람과 달리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앵똘레랑스를 향한 똘레랑스님들의 마니교도적 투쟁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 사이에 제3의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다. A와 not A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특정 정당, 혹은 정치세력을 앵똘레랑스라고 지목한다면, 그 순간 제3당이 설 자리 또한 없어진다.

물론 그런 식으로 선거에서 한 번 이길 수는 있지만, '앵똘레랑스 정당'을 지지하는 '앵똘레랑스 국민'들까지 마치 프랑스의 구교도들이 신교도를 학살하듯 앵똘레랑스 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결국 이 영원한 순환 고리는 끝나지 않는다. 척탄병 홍세화는 묵묵히 적진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있었지만, 진보정당의 입장에서 볼 때, 작전장교 홍세화는 "경쟁 대상"인 영원한 우방이 지목하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아군 병사들을 소모시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9.

두산중공업에 재직 중이던 파업노동자 배달호 씨가 분신자살했다. 2003년 1월 9일의 일이었다. 당시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취임하기 전부터, 앵똘레랑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앵똘레랑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홍세화는, 자신이 만들어낸 논리를 그에게 들이대는 한때의 독자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후회는 크고 비판은 깊었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후 홍세화의 칼럼의 비판은 전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향했다.

하지만 "경쟁 대상"들은 진보정당을 자신들은 똘레랑스하겠다고, 진보정당이 지향하는 정치와 공정한 경쟁을 하겠다고 말하며 얻어갔던 지지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세화는 "반민주세력이 득세하는 것보다는 민주 건달들이 득세하는 편이 수백 배 낫다. 역사 진보의 발자취로 보더라도 '민주 건달'들도 한 자리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생각의 좌표>, 235쪽)는 입장을 바꾸지는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의 쌍두마차가 된 심상정과 노회찬 두 사람이 모두 의석을 잃었다. 홍세화는 그들이 고배를 마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계급 배반 투표에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끝까지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의식을 계속 고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같은 책, 92쪽)을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여기서 우리는 비단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진보정당을 찍지 않는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그런 이들의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지적하는 홍세화 자신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던져볼 수 있다. "한나라당이 변하지 않은 채 주류 정당으로 남고 조중동이 주류 신문으로 남아 있는 한, 사회주의든 사민주의든 그 언저리에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에겐 '사민주의 대 사회주의 논쟁'보다 "어떻게 하면 한나라당과 '조중동', 뉴라이트의 영향력을 줄일 것인가"와 같은 물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같은 책, 181쪽)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진보정당의 입당 원서를 돌리는 평당원이었으며, 2011년이 되자, 아무도 나서지 않는 자리에서 손을 들어 결국 진보신당의 당대표를 역임했다.

10.
 

▲ <임박한 파국>(임민욱·이택광·홍세화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존재와 완전히 포개지는 의식이라면, 그 의식에는 의식으로서의 고유성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의식과 완전히 포개지는 존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뿐이다. 모든 제한된 피조물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 존재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가령 '무한' 등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의 존재로 구현할 수는 없다. 의식과 존재는 서로를 배반하게 되어 있다. 그 현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를 어떻게 배반하고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은 그래서이다.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홍세화의 의식은 한국에 있었고 그의 존재는 파리에 머물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뒤늦게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조국에 발을 디뎠을 때, 그의 존재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홍세화의 의식이 계속 파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입당 원서를 돌리고 당 기관지의 정기구독자를 모으는 홍세화는 실천하고 발로 뛰는 모범적인 진보정당 당원이었지만, 책상 앞에 앉은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똘레랑스와 엥똘레랑스의 끝날 수 없는 전쟁에 참전하라는 홍보 문구를 작성하고 있었다. 남민전의 전사는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지만, 파리의 택시운전사 역시 삐라를 뿌리기 위해 애드벌룬을 조심스럽게 나르던 그때의 삶을 여전히 살고 있기도 했다.

어떤 모순은 사람과 사람들의 집단을 고양시킨다. 반면 어떤 모순은 반대의 효과를 낳아, 개인과 집단을 몰락시킨다. 홍세화라는 개인이 품고 있던 그 모순은, 결과적으로 볼 때 홍세화라는 한 사람을 한 차원 다른 경지로 드높였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들이 모여 있던 진보정당운동은 그렇지 못했다. 의식과 존재의 분열은 다시 합쳐지면서 새로운 테제를 낳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약 우리가 앵똘레랑스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적을 굳이 꼽자면 바로 그것이다. 의식과 존재의 분열, 갈등, 대립,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어하는 나 자신,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그렇게 썰물이 빠진 자리에서 어쩌면 우리는, 젊은 날의 홍세화가 그러하였듯이, 향후의 고난과 시련을 짊어지고 갈 수 있게 해줄 자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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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얼굴 ‘먹칠’한 국정원, 진선미의원 고소

 
 
 
사법부 “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제기할 자격 없어”
 
耽讀 | 등록:2013-07-06 08:58:27 | 최종:2013-07-06 09:05:0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남재준 국정원장은 지난 달 24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이유를 "국정원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국정원 명예를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대한민국은 정보기관이 정보 유출자"라는 비판을 받아 대한민국 얼굴에 '먹칠'을 했습니다.


국정원, 진선미 의원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

'국가정보원 부정선거'에 연루된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씨(29)씨는 지난 5일 민주당 진선미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습니다. 진 의원이 지난 1일 SBS라디오에 출연해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여직원이 오빠라는 사람을 불렀는데 알고 보니 국정원 직원이었고, 그 두 사람이 안에서 국정원의 지시를 받아가며 증거들을 인멸했다"고 말했습니다.

▲ 진선미 의원 ⓒ 유성호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씨 측은 "진 의원의 근거 없고 터무니없는 악성 주장으로 인한 고소인의 심리적 피해가 크다"며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이라도 명백히 허위임을 알면서 허위의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처벌될 수 있다는 판례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씨는 또 진 의원을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습니다.

국정원도 4일 보도자료를 내고 "국정원은 당시 여직원이 불러 오피스텔에 찾아간 사람은 친오빠가 맞고, 그는 민주당 관계자들의 제지로 오피스텔 내부로 들어가지도 못했으며, 음식물을 전해주려던 여직원 부모조차 출입하지 못했다"며 진선미 의원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국정원은 이뿐만 아니라 "'좌익효수' ID를 사용한 국정원 직원이 특정지역이나 여성을 비하하는 게시물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주장과 관련, 이 ID 사용자는 국정원 직원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좌익효수'ID 사용자는 국정원 직원"이라는 거짓 내용을 유포한 사람에 대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특히 "국정원은 앞으로도 무책임한 거짓 주장과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강력하게 법적 대응하겠다"고 밝혀 앞으로도 강력한 법적 대응을 시사했습니다.


한홍구 "국정원은 지켜야 할 명예 없어"

정말 두렵고, 떨립니다.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커녕, 검찰에 고소부터하고, 경찰에는 수사 의뢰를 그리고 거짓 주장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협박입니다. 그리고 국정원은 명예가 있을까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국정원은 지켜야 할 '명예'가 없어요. 불평도,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는다'는 게 정보기관의 숙명"이라고 했습니다.

국정원은 자신들이 명예를 훼손 당했다며 고소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있을 때 언론사와 인터뷰한 내용을 문제삼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습니다. 박 시장은 지난 2009년 6월 <위클리경향> 830호 <"이명박 정권, 내년 하반기엔 레임덕 올 것"> 인터뷰 에서 "(국정원이) 시민단체와 관계를 맺은 기업 임원들까지 전부 조사해 개별적으로 연락하는 통에 (후원이 끊기거나 줄어) 많은 단체들이 재정적으로 힘겨운 상태"라며 "명백한 민간사찰이자 국정원법 위반"이라며 '민간인 사찰 의혹'을 주장했었습니다.


국정원은 '고소원'(?)...박원순·이석현·표창원·<한겨레>고소

그러자 국정원은 같은 해 9월 '국가'를 원고로 삼아 "국정원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됐다며 박원순 상임이사를 상대로 2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그럼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요? 서울중앙지법 민사 14부(김인겸 부장판사)는 지난 2010년 9월 15일 "국가는 기본권의 보장 의무를 지는 존재이지, 누리는 주체가 아니다. 국가가 국민의 비판에 소송으로 대응하려 할 경우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언로가 봉쇄될 우려가 있다"며 "국가의 청국을 기각"한다고 박원순 시장에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특히 재판부는 "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으로 인한 피해자로서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며 "국가나 국가기관이 업무를 정당하게 처리하고 있는지 여부는 국민들의 광범위한 비판과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국가는 당연히 이를 수용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판결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민을 대상으로 명예훼손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국정원이 국민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사법부 "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제기할 자격 없어"

국정원이 손해배송 소송을 냈을 때 대한변협은 "국정원이 개인을 상대로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면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국가기관의 잘못을 비판할 자유가 헌법상 보장돼 있다"고 했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국정원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사법부가 "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으로 인한 피해자로서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면 이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명예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국정원은 지난 2012년 1월 이석현 민주당 의원을 역시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습니다.

이 의원은 지난 2011년 6월 국회 대정부질문 과정에서는 "국정원이 2009년 4~7월 20명 규모의 전담 사찰팀을 구성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집중 사찰했다"고 말했고, 같은 해 12월 국회 현안질의에서 "국정원장이 유럽과 베트남에 갔다 오면서 과일 3박스를 사오다 세관에 걸렸다는 얘기가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국정원, 이석현 "국정원, 박근혜 사찰" 고소...검찰 "국회의원 면책특권"

이에 대해 국정원은 2012년 1월 보도자료를 통해 "이 의원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원 원장에 대한 정치권의 일방적 허위 주장에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습니다. 국정원은 또 "당시 베트남 정부 측이 수행원에게 선물로 과일을 건넸고, 수행원은 반입불가 물품인 열대 과일을 원장에게 보고 없이 폐기처분했으며 세관통과를 시도하지도 않았다"며 이 의원을 고소했습니다.

국정원은 이번에는 아예 재판까지도 못갔습니다. 검찰이 지난 2012년 2월 11일 "이 의원을 직접 소환하진 않았지만 서면답변서를 제출받았다"며 "이 의원의 발언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에 해당하기 때문에 공소권이 없어 기소하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석현 의원은 국회대정부 질문에서 한 발언이고, 진선미 의원은 언론과 인터뷰에 한 말이기 때문에 발언 당시 상황은 다릅니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이 정말 진 의원을 고소할 자격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5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10만인클럽 시국특강 - '자유시민 표창원, '국정원게이트' 최전선에 서다' 특강이 열리고 있다. ⓒ 권우성

국정원은 위기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첫째, 정치관료가 국정원을 장악해 정보와 예산, 인력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의도적 정치화가 아니라면 국제 첩보 세계에서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무능화·무력화돼 있다. 어떤 경우든 대수술이 필요하다. 생명은 살리되 뇌 속 암세포는 제거하는 정밀하고 체계적인 대수술만이 국정원을 살려내 국민이 신뢰하는, '한국의 007'로서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2013.01.08 <경향신문> [표창원의 단도직입] '풍전등화' 국정원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지난 1월 8일 쓴 글입니다. 국정원 한 직원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같은 달 18일 고소했습니다. 표 전 교수는 "슬픈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소식"이라며 "'허위인줄 알면서 악의적으로 피해를 입힐 의도로 행한 표현'이 아닌한 국가나 고위공직자는 명예훼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법원칙이며 우리 판례로 확립된 사실"이라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언론도 국정원 고소에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한겨레>는 지난 1월 31일 김씨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오늘의 유머' 정치적인 내용의 글 91건을 직접 작성해 올렸다고 단독보도했습니다. 바로가기 국정원 여직원, 대선 글 안썼다더니 야당후보 비판등 91개 글 올렸다

<한겨레> 보도는 묻힐 뻔한 국정원 부정선거 사건을 물 위로 끌어올린 보도였습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국민의 알권리가 아니라 이런 보도가 바로 국민의 알권리입니다. 당시 <한겨레>가 보도한 기사는 이랬습니다.

"신변안전 보장 강화에 대한 약속이 없으면 관광을 재개할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은 너무도 당연한 거 아닌가? 금강산 한번 가보고 싶기는 하지만 목숨 걸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2012.11.20

"어제 (대선) 토론 보면서 정말 국보법(국가보안법) 이상의 법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다. (중략)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조차 대한민국을 남쪽 정부라고 표현하는 지경이라니"-2012.12.05

"김영환 고문사건 진상규명 촉구 결의안에 반대가 4표나 있었다. 진상규명을 하지 말자는 국회의원이 정상이냐?"-2012.09.05

"이번이 자그마치 48번째 해외순방이라는데 압도적인 역대 최고. MB는 진짜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스타일인 듯"-2012.11.06

국정원 <연합뉴스>

하지만 국정원은 반성과 사과는커녕 보도 다음 날인 2월 "직원 김씨의 인터넷 아이디를 불법으로 기자에게 제공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인터넷 누리집 관리자 또는 경찰 관계자를, 이 아이디를 이용해 불법으로 누리집에 접속해 기록을 열람한 혐의(개인정보보호법 위반)로 <한겨레> 기자를 김씨 명의로 고소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진선미 의원을 고소했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국정원(국가)가 직접 고소를 한 것이 아니라 직원(개인)이 했다는 점입니다. 박원순 시장때 사법부가 "국가는 "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제기할 자격 없다" 고 판시한 것을 염두한 것 같습니다.

누리꾼 "적반하장,공범임 자인하는 것"

하지만 직원이든, 국정원이든 시민과 언론 나아가 국회의원까지 고소에 힘쓴다는 점입니다. 국정원이야 말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훼손했습니다. 대화록을 공개했습니다. 이 정도면 자중하면서 반성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만 고소에 발벗고 나섰습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습니다. 국정원이란 이름보다는 '정권안보원', '댓글원'에 이어 이제는 '고소원'이 될 모양입니다.

누리꾼이 분노하는 이유입니다.

"국정원의 반격인가요? 국정원 댓글녀가 뻔뻔하게 진선미 의원을 고소했습니다. 박근혜가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무관하다면 현 국정원장은 오히려 원세훈에게 미루고 이런 싸움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정원의 이런 적반하장의 태도는 공범을 자인하는 것입니다."(@mett****)

"국정원 여직원은 자신을 감금했다며 민주당 당직자를 고소하더니, 국정원은 여직원 감금했다며 진선미의원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다.불의가 정의를 고소하는 나라, 불의가 더 당당한 나라, 지금 정권의 모습이다."(@__ho***)

"말세 군! 말세여! 국정원 불법 댓글사건의 주인공인 자체 잠금녀가 국정원 부정선거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민주당 진선미 의원을 허위사실 공포 명예훼손으로 고소 했다네요! 검찰이 찾은 댓글 내용을 보니 국정원 댓글녀가 되려면 무개념,적반하장"(@yw***)

"국정원 여직원의 진선미 의원 고소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쇼에 불과하다 그직원은 자신이 해온 어처구니없는 댓글 놀이에 대한 책임은 뒷전으로 하고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고소를 한다 방귀 뀐 놈이 더 큰소리 낸다더니 그 모양일세"(@Legen*******)

국정원이 진선미 의원을 고소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 명예를 훼손했다고 국정원을 고소할 사태입니다. 국민을 '물'로 보는 국정원, 이번에 제대로 개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가장 앞장 설 권력기관입니다. 이참에 다시는 민주주의를 훼손하서도 오히려 더 당당한 국정원이 되지 못하록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보호는 정보기관으로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국정원은 국정원이지, '정권안보원', '댓글원', '고소원'이 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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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일가에 고소당해 구속수감 등 편할날없어

서울의소리 백은종 대표 보석허가 결정
 
박근혜 일가에 고소당해 구속수감 등 편할날없어
 
이호두 기자
기사입력: 2013/07/03 [16:26]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장준하 겨레장에서 만장을 들어올리고 있는 초심 백은종 편집인 © 이호두 기자





































법원이 지난 3일 서울의소리 www.amn.kr 백은종 편집인의 보석을 허가했다.
초심이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백은종 편집인은 '박근혜 일가 5촌 살인사건'을 다룬 해외 언론사의 글을 전제하였다가 박근혜-박지만 남매에게 명예훼손, 선거법 위반 등의 명목으로 고소당해, 지난 5월 14일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이 결정되었다.
 
▲ 영장실질 심사가 있던 중앙지법에서 주진우 기자와 백은종 편집인 © 이호두 기자


























백은종 편집인이 중앙법원에서 영장실질 심사를 받은 이 날, 같은 기사로 같은 영장심사를 받은 '나꼼수' 주진우 기자는 실질심사에서 불구속되어 '같은 사안, 같은 판결 왜?' 라는 여론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법원의 보석허가와 관련 백은종 편집인의 변호인인 한웅 변호사는 "법원의 결정에 일단 환영한다. 다만 증권이 아닌 현금으로 납부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라고 했다. 법원이 요구한 보석금의 액수는 1000만원으로 별다른 수입이 없는 서울의소리로서는 상당히 버거운 금액이다.

서울의소리 한 관계자는 "살아있는 권력과의 싸움에서 편집인의 보석결정이 무척 기쁘지만, 보석금의 액수가 워낙 커서 마련할 길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 보석금 마련에 힘을 보태주길 앙망합니다 © 서울의소리












현재 안티 이명박과 서울의소리에서 초심 백은종 편집인의 보석금 모금이 진행중에 있다.
계좌번호는 우체국 103317-02-188471 예금주 백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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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회담, 우리는 잘 하자고 준비해 나간다”

 

개성 8.15공동행사 주창한 김완수 6.15북측위원장

베이징=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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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06 06: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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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에 참석한 김완수 6.15북측위원회 위원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4,5일 양일간 중국 베이징 평양관에서 4년만에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가 공동보도문을 발표하고 막을 내리자 남과 북, 해외의 위원장들은 서로 포옹하며 짧고 깊은 만남을 아쉬워했다.

 

김완수 6.15북측위원회 위원장은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6.15남측위원회 모든 분들께도 안부를 꼭 전해달라”고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의 손을 잡았다.

이틀간의 인터뷰 요청 공세에도 불구하고 공식 인터뷰를 사양하던 김완수 위원장은 “우리 겨레에(게) 기쁜 소식을 선참으로 전해준데 대해서 상당히 고맙게 생각한다”면서 환송만찬장에서 편안하게 대화에 응해줬다.

김완수(72세) 위원장은 “우리가 온 민족의 소감을 다 대변해서 허심탄회하게 의견들 교환하고, 더더욱 훌륭한 보도문을 채택했다”며 “문제는 이것을 잘 이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8.15 민족공동행사를 개성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한데 대해 “개성에서 8.15 68돌 경축 공동행사를 하는 게 특별한 의의가 있다. 시기적으로 보나 북남 상황으로 보나 한반도 정세로 보나 꼭 성사시켜야 한다”면서 “8.15행사 자체를 거역하는 것은 바로 (8.15)해방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혀 주목된다.

이번 공동위원장회의 과정에서 6.15북측위원회는 8.15 민족공동행사의 개성 개최를 강력하게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김 위원장의 이같은 발언으로 미루어 보아 이후 북측은 남측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의지를 이를 통해 평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 북측은 걱정 말라. 다 준비돼 있다”고 장담하고 “이번에 나는 남측에서 그것을 꼭 성사시킬 수 있으리라고, 우리 남측위원회가 많은 힘을 넣어서 꼭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하루 뒤인 6일로 예정된 남북 당국간 개성공단 실무접촉에 대해 그는 “우리는 일단 잘하자고 준비해 가지고 나가는데, 남쪽에서 그것을 알고 합리적으로 다 쌍방에 이롭게 타결되도록 손질을 잘해 가지고 나오면 성과를 보는 거고, 또 그렇지 않고 다른 마음 가지고, 딴 생각 가지고 나오게 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함경남도 김책시 출신인 김완수 위원장은 지난 6월 6.15북측위원회 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 국장을 맡아왔고, 2002년부터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대남 실세’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문제는 우리가 민족을 위해서 서로 잘 협력하고 잘 이해하고 잘 합심해서 가자는 생각만 가지고 마주 앉으면 다 해결된다”며 “이번에 우리를 보라. 가장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담아서 우리가 문서에 넣지 않았느냐. 어떻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대하는가? ‘민족공조’에 서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최근 논란을 빚었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의 ‘급’에 대해서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은 상(장관)급이다. 내각 상들과 대등한 급이다”고 재확인하고 “이번에 남북회담하면서 의도적인지 혹 착오인지 모르겠지만, 북과 남이 대화한 지도 수십 년인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지위를 모를 수 없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조국전선 서기국 국장 역시 상급(장관급)이라고 확인했다.

그는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에 대해 “이창복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만나는 순간부터 마음에 끌렸다. 이번에 길지 않은 시간에 상봉하면서 역시 폭이 크고 이해력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고 호감을 표하고 “앞으로 계속 공동위원회 사업을 해나가면 성과물이 상당히 많이 나올 걸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공동위원장회의에 배석한 6.15남측위 대표단들도 이번 공동보도문 채택이 순조롭게 진행된 데는 김완수 위원장과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의 리더십이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5일 오후 9시 40분경 베이징 평양관 2층 환송만찬장에서 김완수 6.15북측위원회 위원장과의 대담 내용이다.

“손을 잡아도 뜨겁게 잡아야 한다”

 

   
▲ 김완수 위원장은 공식 인터뷰를 사양하다 5일 환송만찬장에서 기자의 질문에 응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4년 만에 열린 공동위원장회의가 공동보도문을 발표하고 막을 내렸다. 소감은?

 

■ 김완수 위원장 : 이번에 우리가 6.15 13돌 행사를 전 민족적인 범위에서는 못했지만 북과 남, 해외를 대표한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서 했다고 본다.

비록 몇 명 안 되는 대표들이 모여서 했지만 우리가 온 민족의 소감을 다 대변해서 허심탄회하게 의견들 교환하고, 더더욱 훌륭한 보도문을 채택했다. 문제는 이것을 잘 이행하는 것이다.

나이 많으신 곽동의 위원장 선생도 그렇고 이창복 상임대표 선생도 다 결심이 크겠는데, 나도 그 결심을 따라가야겠다. 이 자리에 앉아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 다지게 된다. 위원장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하다.

그래서 북과 남 해외를 대표하는 위원장들부터 먼저 단합하자. 손을 잡아도 뜨겁게, 정말 놓기 싫게 뜨겁게 잡아야 한다.

이창복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만나는 순간부터 마음에 끌렸다. 이번에 길지 않은 시간에 상봉하면서 역시 폭이 크고 이해력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계속 공동위원회 사업을 해나가면 성과물이 상당히 많이 나올 걸로 기대한다.

□ 이번 공동보도문은 합의 항목도 많고 범주도 넓고, 특히 당국 간 대화 흐름도 있기 때문에 현안을 많이 다룬 것 같다.

■ 이제 우리 민간뿐만 아니라 당국도 마주앉아서 민족의 공동문제를 협의하지 않느냐. 우리가 다시 한 번 출발하니까 우리 민족에 주는 감회가 새롭다.

그런 의미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 북쪽을 책임진 저로서 책임감을 더 깊이 간직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할 생각이다.

“8.15공동행사를 거부한다면 8.15해방 자체를 거역하는 것”

 

   
▲ 공동보도문 발표 의식에 앞서 손을 맞잡은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들. 왼쪽부터 김완수 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곽동의 6.15해외측위 위원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8.15 공동행사의 개성 개최를 공동보도문에 명시했는데, 실현이 가능한가?

 

■ 개성에서 8.15 공동행사를 어떻게나 성취해야 한다. 개성에서 8.15 공동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크다.

우리가 40년 동안 왜놈의 식민지로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가. 해방 당시의 기쁨과 희망이 그냥 이어져 우리 반도에 하나의 조선이 세워졌으면, 우리 민족이 휘황찬란하게 세계무대에 이미 강성국가로 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단이 오랜 시간 흐름으로 해서 우리 민족이 많은 고통과 희생을 당했는데, 이것을 계속 지속시킬 수는 없겠다. 반드시 이것은 우리 세대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 힘과 지혜로 해결해 나가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개성에서 8.15 68돌 경축 공동행사를 하는 게 특별한 의의가 있다. 시기적으로 보나 북남 상황으로 보나 한반도 정세로 보나 꼭 성사시켜야 한다. 개성은 여러 가지 의미가 깊지 않나.

□ 지금과 같은 남북관계 상황에서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 우리민족에게 해방의 기쁨과 통일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8.15공동행사를 거부한다면 8.15해방 자체를 거역하는 것으로 된다. 그야말로 식민지 노예로서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사는 사람들만이 거부할 수 있는 작태다. 그렇기 때문에 8.15행사 자체를 거역하는 것은 바로 해방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이번에 나는 남측에서 그것을 꼭 성사시킬 수 있으리라고, 우리 남측위원회가 많은 힘을 넣어서 꼭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북측은 걱정 말라. 다 준비돼 있다. 정말 온 민족이 새롭게 다시 한 번 새로운 6.15시대를 맞이하는 그런 기쁨과 감격 속에서 행사 준비를 잘 하자. 그때 다시 만나서 남은 회포를 풀자.

“조평통 서기국장 지위를 모를 수 없다”

 

   
▲ 환송만찬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6.15남,북,해외측위 대표단.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조국전선 서기국 국장을 오랫동안 맡았는데, 주로 남북관계를 취급하는 기구인가?

 

■ 온 민족 각계각층이 사상과 제도, 이념을 초월해서 하나로 단합해서 통일이라는 목표로 향하는 그런 사업을 하는 기관이다.

조국전선은 한생을 통일성업에 바쳐온 우리 수령님(김일성 주석)께서 해방 직후에 북한의 각계각층을 단합해서 하나로 뭉치기 위한 조직으로서, 1946년 7월 22일에 민족전선을 결성할데 대해 발기하시고 조직을 무어주시었다. 조국전선 창립은 그것을 시발로 계산하고 있다.

그 후에 49년 6월 26일 북과 남이 합쳐서, 정당, 단체, 각계각층이 합쳐서 평양모란봉극장에서 조국전선 결성대회를 했다.

□ 당시 조국전선 초대 의장은 누구이고, 지금은 누가 의장인가?

■ 초대 의장은 우리 수령님이고, 지금은 조국전선 의장이 여러명 있다. 노동당을 대표하는 의장, 사민당을 대표하는 의장, 청우당을 대표하는 의장,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의장이 있다.

조국전선은 의장단이 있고 서기국이 있다. 의장단이 사업하고 서기국은 서기국 대로 사업한다. 조국전선은 북과 남, 해외가 다 뭉친 그런 정당.단체 연합기구이다.

□ 최근 남북은 장관급 회담 개최에 합의하고서도 남측이 조평통 서기국 국장의 ‘급’을 문제삼아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내세워 회담이 결렬됐다. 조평통 서기국 국장은 어느 급인가?

■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은 상급이다. 내각 상들과 대등한 급이다.

이번에 남북회담하면서 의도적인지 혹 착오인지 모르겠지만, 북과 남이 대화한 지도 수십 년인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지위를 모를 수 없다.

지난 시기에는 우리가 상급회담 할 때 단장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1부국장을 내각 책임참사 직책을 줘가지고 나섰는데 이번에는 급을 높여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을 상급회담에 나가는 것으로 했는데, 남쪽이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 조국전선 서기국장도 마찬가지로 상급인가?

■ 그렇다.

개성공단 실무회담, “우리는 일단 잘 하자고 준비해 나간다”

 

   
▲ 김완수 위원장이 이창복 상임대표의장과 포옹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내일 개성공단 실무접촉이 있는데, 바람이 있다면 간략히 전해 달라.

 

■ 우리가 공동보도문에 개성공업지구 당국 국장급 실무회담이 잘 되도록 응원하기로 했다. 우리는 잘 되리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대화라는 게 상대가 있으니까.

우리는 일단 잘 하자고 준비해 가지고 나가는데, 남쪽에서 그것을 알고 합리적으로 다 쌍방에 이롭게 타결되도록 손질을 잘해 가지고 나오면 성과를 보는 거고, 또 그렇지 않고 다른 마음 가지고, 딴 생각 가지고 나오게 되면 안 되는 거고.

문제는 우리가 민족을 위해서 서로 잘 협력하고 잘 이해하고 잘 합심해서 가자는 생각만 가지고 마주 앉으면 다 해결된다.

이번에 우리를 보라. 가장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담아서 우리가 문서에 넣지 않았느냐. 어떻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대하는가? ‘민족공조’에 서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들어서고 간부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고, 나이가 많은 간부들을 교체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다.

■ 일부 그렇지만, 우리 원수님(김정은 1위원장)께서는 우리 수령님, 우리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 뜻을 이어서 오랜 노간부들을 아끼신다. 노-장-청을 결합하면서 우리 장군님(김정은 1위원장)이 아끼신다. 우리는 다른 데와 좀 다르다.

□ 야위어 보이는데 건강은 괜찮은가?

■ 육체가 사람을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이 주재한다. 어떻게 결단하고 사는가가 중요하다. 몸이 나서(살이 쪄서) 좋은 것 없다. 장수비결의 하나가 몸을 내지 않고 음식을 많이 안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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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비밀을 간직한 장소

 

창작의 비밀을 간직한 장소

 
휴심정 2013. 07. 04
조회수 240추천수 0
 

편집최재봉논산집한겨레.jpg
박범신의 논산 집필실 뒤꼍. 논산/한겨레 이정아 기자
 
그가 새롭게 정착한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는 탑정호라는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호숫가 마을이다. 마을이라고는 해도 근처에 인가가 많지는 않고, 여행객을 겨냥한 식당과 숙박시설 등이 드문드문 서 있는 한적하고 운치있는 곳이다.
 
“작년 여름 모든 사회적 타이틀을 내려놓고 새 출발을 위한 모종의 변화가 필요하다 싶었을 때 논산이 다가왔어요. 저는 사실 고향이 싫어서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논산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지요. 서울을 뜨더라도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러 우연이 겹치면서 결국 논산으로 오게 됐네요.”
 
퇴역 교장 선생님이 지어서 살았다는 이 이층집이 작가의 마음을 끈 것은 크게 두 가지. 대문에서 마당에 이르는 진입로의 비스듬한 경사, 그리고 집 뒤꼍의 너른 암반과 그 아래 작은 연못이었다. “처음부터 언젠가 와 본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었어요. 입구의 야트막한 경사는 저의 오랜 로망이었고, 뒤꼍의 바위는 앉아서 소주 한잔 하기 딱 좋아 보이더군요.”
 
그러나 서울을 뜨기 싫다며 뒤에 남은 부인의 배웅을 받으면서 평창동 집을 나설 때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유배를 가는 기분”이었다고 그는 2011년 11월27일치 페이스북 일기에 썼다. ‘나는 대체 왜 이 길을 가려고 하는가.’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듯 떠나온 길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 논산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뜻밖에도 ‘귀신’들이었다.
 
“낮에는 집 앞 호수와 그 너머 산들을 보거나 차를 몰고 논산 전역의 골목골목을 둘러보는 일로 소일할 수가 있어요. 문제는 밤이죠. 천지 사방이 깜깜한 가운데 집 안에 홀로 웅크려 있자니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우선은 책을 읽으면서 버텨 보지만, 밤 열 시쯤 되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주를 아주 빠른 속도로 마시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취기가 돌면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고 헛것이 보이기도 해요. 결국은 그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지경까지 가는 거죠.”
 
논산 집에서 그가 만난 귀신들은 모두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라고 그는 말했다.
 
“호수가 끝나는 안쪽이 계백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황산벌이에요. 미륵세상을 꿈꾸었던 견훤을 무너뜨리고서 왕건이 세운 절 개태사가 그 인근이구요. 동학의 남북 접주들이 모여 우금치 전투를 준비하던 곳도 근처입니다. 금강 유역이란 대대로 패배의 역사가 짙은 곳이죠. 5천 년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었을까요. 뗏장 밑의 억울한 영혼들이 저를 매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저를 이곳으로 부른 것만 같아요. 서울에 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죠.”
 
그는 또 조선 중기 예학(禮學)의 태두 격인 사계 김장생으로 대표되는 유구한 유학적 전통 역시 그가 발견한 고향 논산의 새롭고 중요한 면모라고 강조했다.
 
“흔히들 논산 하면 육군훈련소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논산은 사실 매우 유서깊은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고장입니다. 율곡 이이의 법통을 이은 게 김장생이고,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바로 사계의 제자입니다. 그 송시열의 제자 격임에도 주자학에 반기를 든 개혁적 지식인 윤휴에게 우호적이었던 윤증의 고택 역시 논산에 있습니다. 소론의 태두로 불리는 윤증이라는 관찰자의 눈으로 보수의 거두 송시열과 진보의 거두 윤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소설도 쓰고 싶어요.”
 
수구초심이랬다고, 나이 든 작가가 고향으로 내려가면 대체로 자연과 벗하는 가운데 차분하게 삶을 정리하는 말년을 상상하기 쉽지만 ‘영원한 청년 작가’를 자처하는 박범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유유자적과 안빈낙도는 가라! 나는 작가로서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 여기 왔다.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인간이 온 것이다!’ 예순을 훌쩍 지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안에 도사린 채 형형한 눈빛을 번득이고 있는 어느 불온한 청년이 그의 귀에 대고 외쳐 대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내려간 고향에서 그는 그러나 아직 새 소설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소설 <말굽>을 탈고한 때로부터 치자면 1년 반 동안 ‘작가 휴업’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90년대 초중반의 ‘절필’ 기간을 포함해 작가 생활 39년 동안 중단편집을 제하고 장편만도 39편을 낸 작가치고는 썩 이례적인 일이다. <은교>에서 <비즈니스>를 거쳐 <말굽>까지 세 장편을 1년 반 동안 몰아서 썼던 그 아닌가. “소설을 안 쓰는 게 더 힘들다”던 그가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는 게 걱정스럽다기보다는 그 배경이 궁금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해서 내려오긴 했는데, 그 방향이 어디일지에 대해 아직 확신이 서질 않네요. 1993년 절필 선언을 하고 96년에 <흰소가 끄는 수레>로 복귀한 뒤부터 <말굽>까지는 말하자면 초월을 향한 갈망에 끄달렸던 시기라 할 수 있지요. 지금은 그 갈망의 시기가 끝나고 내 문학 인생의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는 지점인데, 그게 어떤 것일지 저부터가 촉수를 내밀고 기다리고 있는 셈이에요. 그렇지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편집그작가그공간.jpg
 

<그 작가, 그 공간 - 창작의 비밀을 간직한 장소 28> (최재봉 지음, 한겨레출판)

'그가 지금 꿈꾸는 문학 - 소설가 박범신의 논산 집필실' 중에서

 

■저자 최재봉

1961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경희대 영어영문학과와 그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한겨레> 문학기자로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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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2013 아리랑 공연 승리와 경축의 장

북, 2013 아리랑 공연 승리와 경축의 장
 
아리랑 첫장 출연자 한명도 없이 특색 있게 구성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7/05 [08:3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 된 대집단 체조와 예술 공연 아리랑이 오는 22일부터 진행된다고 북 언론이 밝혔다. ©
조선의 김일성상 계관 작품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 된 대집단 체조와 예술공연인 아리랑이 승리와 경축의 장으로 구성 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인 우리민족끼리는 5일 커다란 관심 속에 펼쳐질 승리의 아리랑, 경축아리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승리자의 긍지 넘치는 우리 조국 땅에 아리랑열풍이 세차게 일고 있다.”면서 “김일성상 계관작품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진행된다는 보도는 만 사람의 가슴을 또다시 아리랑열풍으로 달구어주고 있다.”고 쓰고 우리 민족끼리 기자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국가 준비 위원회 일꾼과 대담한 소식을 보도했다.

우리민족끼리 기자는 “올해에 진행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 《아리랑》은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질문햇다.

이에 대해 국가준비위 일꾼은 “이미 보도된바와 같이 공화국창건 65돐과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승리 60돐을 맞으며 수도 평양의 5월1일경기장에서는 김일성상 계관작품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은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 제국주의를 타승하시여 유례없는 군사적 기적을 창조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의 불멸의 전승업적과 우리 조국을 정치사상강국, 인공지구위성제작 및 발사국,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일떠세우신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선군혁명영도업적을 감명 깊은 화폭들로 펼쳐보이게 된다.”며 “또한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나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현명한 영도아래 나날이 부강 번영하는 내 조국의 밝은 모습을 펼쳐보이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여 어제 날의 수난의 아리랑이 절세위인들의 현명한 영도에 의하여 오늘은 어떻게 승리의 아리랑, 행복의 아리랑으로 승화되고 있는가를 감동깊이 보여주게 된다.”며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공화국창건 65돐과 전승 60돐을 맞으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승리의 아리랑, 경축아리랑으로 높이 울려 퍼지도록 현명한 가르치심을 주시여 우리 창작가, 예술인들과 출연자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시었다.“고 전했다.

기자는 “이번에 진행되는 공연에서 지난 시기와 다른 특색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고 묻자 일꾼은 “일찍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놓고 보아도 위대한 시대가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고 가르쳐주셨다.”며 “우리 혁명이 새로운 전환의 시기에 들어선 지금 우리나라(조선)에서는 세인을 경탄시키는 사변들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의 성과적발사와 제3차 지하핵 시험의 성공, 미제를 괴수로 하는 제국주의연합세력의 광란적인 핵전쟁소동에 대처하여 연이어 취해진 우리 공화국의 자위적조치들, 《마식령속도》창조를 위한 장엄한 대진군, 승리자의 신심 드높이 힘있게 벌어지는 공화국창건 65돐과 전승 60돐 경축행사준비들…”이라고 말을 끊은 뒤 “이런 장엄한 현실은 창작가들에게 창작적 영감을 불러일으켜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을 또다시 시대적 명작으로 되게 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지난 시기 꽃다발을 들고 명절옷차림으로 단장한 녀성들의 첫 출연으로 시작되던 경축장에는 출연자는 한명도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가지 조명과 음악을 비롯한 특수효과로 경축의 분위기를 살리게 된다.”고 말하고 각장의 구성을 설명했다.

그는 “1장 3경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0년전 강철의 영장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승열병식광장에서 연설을 하시는 역사적인 장면을 육성녹음과 함께 펼치며 위대한 장군님의 태양상도 정중히 모셔 위대한 대원수님들에 대한 그리움과 경모의 정을 더해주게 된다. 또한 경애하는 원수님의 영상도 밝고 정중하게 모시여 그이의 령도따라 최후승리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우리 인민들의 투쟁을 크게 고무추동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뿐만 아니라 5장 친선아리랑의 폭을 넓힌 것을 비롯하여 모든 장, 경들이 보다 높은 수준에서 창조되고 있다.”며 “궤도축포를 이용하여 봉화를 지펴 올리는 등 조명과 장치를 비롯한 형상부문에서도 혁신적인 창조물들이 많이 도입되게 된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성공은 배경대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번에도 배경대에는 역사적인 내용들을 실감 있게 펼쳐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의 품격을 더욱 돋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공화국창건 65돐과 전승 60돐을 맞으며 진행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승리의 아리랑, 경축아리랑으로 진보적 인류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민족 기자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욱 기다려진다. 현재 준비는 어느 정도이며 언제부터 공연을 시작하겠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는 질문을 이어갔다.

국가준비위원회 일꾼은 “마식령속도를 창조하기 위한 투쟁의 불길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창작가들과 출연자들의 가슴속에서도 세차게 타오르고 있다.”며 “출연자들은 긴장한 전투를 벌려 6월중순에는 모든 장, 경들의 틀 거리를 갖추었다.”며 “이번에도 대다수의 인원이 처음으로 인입되고 많은 부분을 새롭게 창조하여야 하는 조건에서 이것은 대단한 혁신이라고 할수 있다. 많은 면에서 비약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경애하는 원수님의 역사적인 호소문을 피끓는 심장에 받아 안은 우리 창작가들과 출연자들의 열의는 대단하다. 우리는 제2, 제3의 《마식령속도》를 창조하여 선군조선의 기상을 떨칠데 대한 당의 뜻을 받들고 모든 장, 경들을 빠른 시일내에 만점짜리로 만들어내겠다. 하여 공화국창건 65돐과 전승 60돐을 맞는 올해에 승리의 아리랑, 경축아리랑이 더 높이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우리민족끼리는 “이미 보도 된 대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7월 22일부터 막을 올린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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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불회' 회주 명진 스님 인터뷰

 

"국정원 댓글사건, 박 대통령 정말 몰랐을까?
밤11시 경찰 허위 발표...선진국이면 선거무효"

[나는 분노한다②] '단지불회' 회주 명진 스님 인터뷰 ①

13.07.04 17:40l최종 업데이트 13.07.05 09:05l
유성호(hoyah35)

 

 

기사 관련 사진
단지불회 회주 명진 스님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억지 주장이고, 국정원이 댓글 사건을 덮으려다가 자기 발등을 찍은 격"이라고 일침을 날렸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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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기원정사에 있을 때 목련존자가 작은 암자에서 공부를 했는데, 부처님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양치기들이 양떼를 몰고 와서 해가 지면 돌아가는데, 무리에서 떨어진 양 한마리가 표범을 봤답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겠죠. 산양은 그 순간 뿔을 앞세우고 사정없이 달려들었고 표범이 움찔하는 사이 무리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목련존자에게 말합니다. '정말로 나쁜 놈에게는 정중함이 필요가 없다' '법도 필요가 없다' '싸우는 길이 최선이다'. 본생담(本生譚. 석가의 전생 생활을 묘사한 설화)에 나오는 말입니다. 불의한 정권, 악한 정권, 정의롭지 못한 정권이라면 표범에게 달려드는 산양과 같아야 합니다."

'단지불회(但知不會)' 회주 명진 스님의 말이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무실에서 명진 스님을 만났다. 사무실 창문을 닫아도 조계사에서 친 목탁소리가 방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스님은 제주 왕벚나무로 만든 함지박을 뒤집어놓은 다도상 앞에 앉았다. 1년 전보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다. 대상포진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국정원 게이트'에 대해서는 결기어린 표정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이날 인터뷰를 마친 뒤 '발언의 엑기스'를 모아 기자의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6분 분량이다. 이른바 '명진 스님의 시국선언'.
 
명진스님의 시국선언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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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댓글사건과 3.15 부정선거

그는 동영상을 촬영하기 전 2시간여 동안 이런 시국선언이 나온 배경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죽비소리처럼 따끔했고 때론 절묘한 비유를 들었다. 또 유머와 위트로 국정원 게이트 정국의 맨얼굴을 양지로 드러냈다.

"영남제분 회장 부인의 청부살인 사건은 국정원 댓글 사건과 너무 닮았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산탄총으로 여대생을 쏘아 죽인 회장 부인은 무기징역을 받았는데 호텔급 병원 특실에서 지냈어요. 파렴치한 악질범죄죠. 허위진단서를 써준 사람은 누구죠? 의사입니다. 변호사도 동참했겠죠? 학연, 지연을 통해 비리의 모순덩어리를 지탱했어요. 이게 한국 사회 상위 1%의 단면입니다."

명진 스님은 "국정원 댓글 사건도 상위 1%의 기득권층이 저지른 국가 권력의 조직적 범죄행위"라면서 "지난 대선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필두로 박원동 전 국익정보국장,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권영세 전 새누리당 선거대책본부 종합상황실장(현 주중대사)들이 상의해서 저지른 부정선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지난 대선은 불법적인 권력 찬탈"이라며 "3.15부정선거에 버금가는 부패 타락선거"라고 규정했다. 그는 "미국 CIA와 FBI가 이런 일을 벌였다면 그냥 넘어가겠느냐"고 반문한 뒤 "선진국에서는 선거 자체를 무효로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평소 법과 원칙을 강조해 온 박근혜 대통령은 그 직을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거 때 선거 사무장이 큰돈을 돌린 불법 사실이 드러나면 본인이 몰랐더라도 국회의원은 그 직을 상실합니다. 그런데 대선에서 국가 권력이 유기적으로 합작 공모했습니다.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이 한쪽을 깎아내리고 다른 한쪽을 당선시키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정황이 나왔습니다. 그런 불법을 덮으려고 대통령 기록물 보존기한을 어겨가면서 NLL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런 날치기, 들치기꾼 같은 사람들이 국가권력을 좌우하는 최고 정점에 있습니다."

그는 국정원을 '걱정원'이라고 새롭게 작명했다. 앞날이 걱정스럽다는 뜻이다. "국정원 고급 인력들을 댓글이나 쓰게 만드는 작태도 한심하고, 국기문란 사건을 저지르는 직원들의 월급을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도 국가 예산낭비"라는 것이다.

그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 남북정상회담 발췌록과 대화록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도 쐐기를 박았다.

"국정원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요? '음지에서 일하지 말고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국가 기록물은 다 깐다. 망신당해도 좋다'라고 모토부터 바꿔야 합니다. 국정원이 만든 발췌록도 정상이 아니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나'라고 표현한 것도 '저'라고 바꾸고 북측 김계관 부상이 정상회담 중간에 6자회담 경과를 남북 정상에게 '보고'한 것을 노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고 드린다'로 둔갑시켜 국민들을 오도했습니다."

그는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억지 주장이고, 국정원이 댓글 사건을 덮으려다가 자기 발등을 찍은 격"이라고 일침을 놨다.

집권 여당의 대국민 사기극과 도적질
 
▲ 명진 스님 인터뷰 단지불회 회주 명진 스님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박근혜 대통령의 평가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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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요일 심야에 벌어진 경찰의 허위 수사발표가 선거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국가변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연쇄 살인사건 수사결과 발표도 아닌데, 서울경찰청장이 선거 3일전, 그것도 대선후보 마지막 TV토론이 끝난 뒤인 일요일 밤 11시에 (댓글 사건에 대해)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고 중간 수사 발표를 했습니다.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양심 고백하지 않았으면 이 어마어마한 진실이 그냥 묻혔을 겁니다. 당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주말인데도 쉬지 않고 출근해 발견된 댓글 증거를 조작하고 은폐하라고 지시해서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만일 수사결과를 있는 그대로 밝혔다면 선거가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핵폭탄급 파괴력이 있었을 겁니다. 선거가 그대로 치러질 수 있었을까요? 아마 곳곳에서 선거 보이콧 같은 사태가 일어나고 야단이었을 겁니다. 불법을 저지른 국정원 직원에게 인권 운운하면서 옹호했던 새누리당의 정치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날 하루에 국가의 운명이 뒤집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당시 경찰의 수사 결과 발표가 되기도 전에 김무성 총괄선대위원장, 박선규 대변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수사결과 발표 직전에 박선규 대변인이 한 언론 인터뷰를 예로 들기도 했다. 박 대변인은 한 방송국 생방송에서 "아마 내 생각에는 국가적인, 국민적인 관심이 있기 때문에 조사 결과가 오늘 나올 것"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은 정말 몰랐을까요? 16일 당일 TV토론 때 자신 있는 태도를 봐서 대략의 흐름은 감지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결국 국가기관인 국정원과 경찰,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합작한 불법적 대선 개입이고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고 저도 화가 납니다."

- 박 대통령이 '대선 때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입장을 밝힌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이심전심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보는 게 상식이지 않습니까? 국정원 직원들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숨어서 누구에게 유리하라고 댓글 달았습니까? 경찰은 왜 증거를 조작하고 은폐해서 발표했습니까? 문재인 후보를 위해서요? 국민을 위해서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박 대통령은 TV토론 때 자신의 입으로 댓글을 단 국정원 직원을 (민주당이) 감금했고 인권을 유린했다고 했습니다. 흑색선전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흑색선전이 아니라 사실이었죠.

박 대통령 당시 문재인 후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젠 입장이 거꾸로 됐죠. 국가기관의 불법적 대선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대선 때 NLL 문서도 몰래 도적질을 해서 불법적으로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김무성 선대위 총괄본부장이 자기 당 회의에서 그걸 자신이 입수해 읽었다고 자백하지 않았습니까? 청와대와 국정원에 밖에 없는 그 자료를 어디서 어떻게 누구로부터 구했는지 수사해야합니다. 그 불법적으로 입수한 NLL문건을 12월 14일 부산 선거 유세 때 김무성 총괄본부장이 박근혜 후보를 옆에 세워놓고 그걸 읽었어요. 그런데 국회에서 할 일이라고 물러서 있을 일인가요. 박 대통령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젠 NLL을 피로 지키지 말자"

- 얼마 전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자신의 트위터에 "법과 정의 짓밟은 박근혜, 더 이상 제겐 대통령이 아닙니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대선 결과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표창원 전 교수의 시각이 과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표창원 교수는 국가범죄를 저지른 국가기관에 대해 '도둑이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청난 용기와 자기희생이 따르는 일이죠. 도둑을 보고 '도둑이야'라고 소리쳤는데 어떻게 도둑을 알게 됐느냐고 수사에 들어갔어요.(국정원이 기관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에 대한 수사를 지칭함.)

국정원은 지난해 12월 16일 댓글을 찾지 못했다고 경찰이 발표하자 11분 뒤 전광석화처럼 보도자료를 내 '국정원 직원 댓글 알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불법행위가 밝혀진 지금 사과 한 마디 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밝혔다고 고소를 했습니다. 세상천지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요? 얼마 전에 민간인 불법사찰을 폭로했던 장진수 주무관도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면서 불기소 청원을 했습니다.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만 불구속 기소하고, 박원동 전 국익정보국장은 기소도 하지 않은 것 때문입니다. 박 전 국장은 위에서 시켰기 때문이랍니다. 장진수씨의 청원을 검찰이 어떻게 처리할 지 궁금합니다."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과 발췌록이 공개된 뒤에도 새누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게 드러났죠. 그리고 정상회담에서 막말하나요? 예의를 갖춥니다. 그렇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기 전에 NLL을 없앤 것도 아니지 않나요? 박근혜 대통령은 '피와 젊음으로 지킨 NLL'이라고 말했는데, 노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평화어로구역을 정하자고 이야기한 것은 앞으로는 NLL을 피로 지키지 말고 평화적으로 막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YS집권 때 이양호 국방장관이 NLL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조선, 동아 등의 보수신문도 마찬가지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노무현의 발언은 NLL포기라고 주장합니다. 노무현이 포기라면 그들 모두는 이미 NLL을 포기한 것 아닙니까?

사실 이명박 정권에서도 국무회의 할 때 70%가 병역 미필, 기피자였습니다. 정치권에서 NLL 지키자고 외치는 사람치고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꾸 '좌파 축출' '종북 척결'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국가안보는 총칼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존경받는 지도자 아래서의 단합된 국민의 힘이 곧 안보입니다."

- 이 사건이 향후 남북 관계에 얼만큼 영향을 줄까요?
"북쪽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방북 당시 대화록을 내놓겠다는 의중을 비쳤습니다. 묘향산의 만국친선전람관에 가면 남쪽에서 보낸 선물이 많습니다. <동아일보>는 '보천보 전투에 대해 김일성 장군이 만든 위대한 전투'라고 쓴 동판(1.2킬로그램짜리 원판)을 제작해 바쳤죠. 전두환 대통령도 김일성 주석에게 친서(親書)를 보내면서 '주석님께서 광복 후 오늘까지 40년에 걸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쳐 이 땅의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쓰신 데 대해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한 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외교적 수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이후락이 평양갔을 때 한 말은 달랐을까요? 난마처럼 꼬인 원한과 적대의 관계를 교류와 협력, 평화의 관계로 바꾸어 놓으려면 정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지 않고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북쪽에 가서 교류와 협력의 입장에서 한 여러 이야기를 공개한다면 남북관계가 진전될 수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잘 풀 수 있었는데 찬스를 놓친 것 같아 아쉽습니다."

- MB정부 때의 남북 관계가 대물림될 수 있다는 건지요?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인조 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머리를 세 번씩 땅에 찍어가면서 절을 했는데, 박 대통령이 중국에서 환대받은 것은 보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찌르자 오랑캐'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컸습니다. 중국도 적이었죠. 6.25전쟁 때는 어땠나요? 100만 대군을 밀고 들어와서 '멸공통일'을 가로막았습니다. 요즘도 서해에서 노략질을 하고 우리 경찰도 흉기로 죽였습니다. 그런 중국과 우호선린 관계를 맺었다고 좋아하는데, 북한과 못할 이유는 없는 거죠."

- 그럼 왜 북한과의 관계가 계속 꼬인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신라와 고려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조선 왕조는 유교인 성리학을 국가를 다스리는 철학 체계로 잡았습니다. 대한민국은 뭐죠?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의장이 된 뒤에 첫 번째 혁명공약이 반공이었습니다. 무엇에 반대하는 것이 국가 정책일 수 있나요. 평화통일 얘기했던 조봉암 선생은 간첩으로 몰려 사형까지 당했습니다. 말로는 평화통일을 이야기하는데 안보론자들은 여전히 '멸공통일'에 갇혀있습니다. 지금도 '종북타도'라는 이름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쪽에만 진정성을 요구할 게 아니라 남쪽도 평화적 방법으로 상생을 길을 가야한다는 진정성을 가져야 대화할 수 있을 겁니다."

"'이명박근혜'란 조어가 진실을 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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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은 "국가기관인 국정원과 경찰,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합작한 불법적 대선 개입이고 대국민 사기극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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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MB정부를 비판해왔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출범 130여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대략 1부 능선 가까이 오른 것인데, 이명박 대통령과의 차별성이 있다고 보는지요?
"해방 직후에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말자' '일본 놈 일어선다 조선아 조심하라'라는 말이 동요처럼 회자됐습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는 '이명박근혜'라는 말을 누가 지어냈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말이 정확하게 진실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MB정부는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정권입니다. 불량, 불법 정권입니다.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건설회사에서 자재 빼내기를 전문으로 했던 야바위꾼이 747 경제공약으로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런데 4대강 사업과 미디어법 날치기 등은 친박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동조했습니다.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과 거리를 두면서 차별화 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대선에 김무성, 권영세, 원세훈, 그리고 하수인 김용판과 박원동이 긴밀하게 연락해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한 게 드러났습니다."

- 마지막으로 국정원 정국의 한가운데 서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법문을 해주신다면?
"소떼가 강물을 건너갈 때 길잡이 소가 길을 바로하지 않으면 뒤따르는 소가 위험합니다.중생도 그와 같아서 대중에는 반드시 지도자가 있나니 나라의 임금이 바른 법을 행하면 모든 백성이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아함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논어>의 안연편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공이 국가 경영 정치의 요체를 물으니 공자가 '경제를 풍족히 하고 군사력을 튼튼히 하고 백성을 믿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중 하나를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처음에는 군사를 버리고 그 다음으로는 경제를 버리고 마지막까지 신뢰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정직한 데서 나옵니다. 정치지도자는 정직함을 기본으로 해서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박근혜 정권 출범 초기입니다. 여러 가지 실수가 있고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초기에 터져 나왔기에 좀 더 솔직하고 진정어린 판단으로 국민을 대한다면 훌륭한 지도자로 다시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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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무엇을 뜻하는 줄 아느냐?” AOK 의 미국인 동참자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7/05 09:44
  • 수정일
    2013/07/05 09:4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연재> 정연진의 원코리아 운동이야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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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04 18: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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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피해자들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즐겁게 수행하는 배리 피셔 변호사

“Do you know what Tongil means (통일이 무엇을 뜻하는 줄 아느냐)?” 미국인 변호사가 동포 2세들에게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영어권에서 자라나 우리말이 서툰 그들에게 “통일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읽는 줄 아느냐?”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 줄 아느냐?” 라고 열심히 2세들에게 통일이라는 말을 가르치는 사람은 푸른 눈의 배리 피셔 변호사. 이번 칼럼에서는 한국 사람 못지 않게 한국의 통일에 큰 열정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 Action for One Korea의 미국인 동참자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세계적인 인권변호사인 배리 피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들의 법정 투쟁과 인권 회복을 위해 1999년부터 함께 활동해온 피셔 변호사는 저와는 오랜기간을 함께해온 동반자 같은 벗입니다.

미국에서 1990년대 후반 나찌전범 기업들을 상대로 유대인들의 집단소송이 대규모로 제기되었습니다. 벤즈, 스위스은행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 유대인의 강제노역이나 휴면구좌로 부당이익을 취한 기업들을 상대로 수 많은 소송건이 제기됩니다. 독일에 대한 여론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독일정부는 법정밖 합의를 통해 정부와 소송당한 기업들이 반반씩 배상기금을 조성할 것을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1999년 7월 70억불에 달하는 거액의 배상기금이 조성되고 일부를 피해자들의 보상에 일부는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재단을 만드는게 쓰이게 됩니다.

이렇게 성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데는 정부, 피소기업, 피해자들간의 협상을 이끌어낸 변호인단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 일련의 소송들은 ‘홀로코스트 소송’이라 불리는 세기적인 소송이 되는데, 배리 피셔 변호사는 이 세기적 소송이 최종 합의에 이르도록 주도적으로 기여한 변호사입니다.

여러 나라의 헌법에 대한 자문도 하고 있는 피셔 변호사는, 동구권이 몰락한 다음 생긴 여러 나라들의 헌법을 자문해 주면서 이들 나라들이 민족 단위로 독립을 성취하는 것을 목격하고 2차대전의 가해국인 독일도 통일을 이루었는데,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의 피해자였던 한국이 아직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남과 북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20세개의 불운한 역사를 마감할 수 있는 길이라 믿으며 피셔 변호사는 통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AOK의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 2008년 10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 국제평화회의 103주년 기념 컨퍼런스에 참석한 배리 피셔 변호사, 정연진 바른역사정의연대 대표,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에 대한 역사재단’ 사무총장 (왼쪽부터) [자료사진 - 정연진]

 

그는 한국과 중국의 징용피해자, 한국, 중국 필리핀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2000년부터 약 6년간 일본을 상대로 전개된 국제소송에서 변호단을 조직하고 소송을 이끌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일제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여러 컨퍼런스와 국제 회의에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도쿄, 상하이, 베이징, 타이페이, 헤이그 등 어디든 마다않고 세계 곳곳을 다녔고, 남과 북이 일제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합칠 수 있도록 북의 소송참여를 타진하기 위해 3차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 배리 피셔 변호사는 전문 악단을 가진 프로 음악가이기도 하다. 4월 5일 AOK 창립식에서 “We are all brothers” 라는 유대민요 노래 반주를 위해 아코디온을 직접 연주하고 있다. 2002년 북을 방문할 때 무거운 아코디온을 가지고 갔다. ‘허리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왜 무거운 악기를 가져가시냐’고 말리는 나에게 ‘북측 담당자들을 음악으로 즐겁게 해주어야 이야기가 잘 풀릴 것’ 이라며 한사코 가지고 가셨다. [자료사진 - 정연진]

 

북은 미국 법정에서 전개되는 징용/위안부 소송에 동참하기를 원했으나, 당시 미행정부가 부당하게도 일본편을 들면서 소송에 적극적으로 훼방을 놓고 있었고, 부시행정부가 북을 ‘악의 축’으로 몰아가던 험악한 시기라서 북의 소송참여는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피셔 변호사는 역사의 매듭을 짓기 위해 장기간 보수도 없이 기여한 공로로 2008년에 만들어진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의 봉사상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피해자들을 위해 일해온 피셔 변호사가 늘 즐겨하는 말, ‘우리는 2차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습니다.’ 비장한 각오가 서린 이 말은 언제 들어도 마음에 여운을 남깁니다.

로버트 케네디 정신으로 AOK 운동을 지지하는 제인 케이건

또 한 분, 제인 케이건(Jane Kagon)은 미디어 전문가로 UCLA 평생교육기관의 엔터테인먼트 디렉터를 거쳐 현재 LA 소재 로버트 케네디 학교의 미디어센터 (Robert F. Kennedy Legacy in Action)의 총괄책임자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고 한국의 한류 콘텐츠 관련 컨퍼런스에서 연사로도 여러 차례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제인은 ‘아마도 과거에 (전생에) 한국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심취해 있는 분입니다. 한번은 한국에서 발표할 컨퍼런스 자료 준비를 위해 디지털미디어 시대를 헤치고 나가는 말탄 기사의 형상이 필요했는데, 비서가 인터넷에서 수집한 수 많은 말탄 기사의 이미지에서 하필 고구려 수렵도에 나오는 기사를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수 많은 무사 이미지 중에서 하필이면 고구려 무사를 골랐을까, 아마도 당신은 전생에 고구려인이었을 것이다”라고 제가 놀리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본인이 전생에 한국사람이었다고 믿습니다!)

제인은 현재 미국 문명은 인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면서 문명적 대안을 한국에서 찾습니다. 한국인이 높은 문화적 저력과 인류애의 가치를 가지고 세계사에 전환점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예견합니다. 그리고 남과 북의 화합과 통일을 통해 그러한 기반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 AOK 로스앤젤레스 창립식에 격려사를 하고 있는 제인 케이건 Robert F. Kennedy Legacy in Action (RFK-LA) 총괄책임자. [자료사진 - 정연진]

 

로버트 케네디 재단과도 밀접하게 일하고 있는 그는 로버트 케네디의 정신이 오늘날 미국에도 절실히 필요하고 케네디의 정신으로 미국인들도 AOK의 풀뿌리 통일운동을 성원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 로버트 케네디 -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기수. 35세에 최연소 법무장관을 지냈고 민주당대통령 후보로 유력했던 정치인.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해에 석연치 않은 암살을 당함)


   
▲ 1968년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선거 유세중 암살당한 유서깊은 장소인 암배서더 호텔의 부지에는 로버트 케네디 정신을 기리는 6개의 학교군이 있는 거대 학교단지가 들어서 있다. RFK-LA 는 6개의 학교군을 위한 미디어교육을 관장하고 있다. [자료사진 - 정연진]

 

4월 5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AOK 의 LA 창립식에서 제인은 다음과 같은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구절을 낭독하면서 AOK 운동이 로버트 케네디의 비전을 공유하는 불의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작은 물결이 커다란 해류가 되듯이 앞으로 크게 성장해 나갈 것이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 조금씩 변화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용기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무수한 행동에 의해 결국 역사는 만들어집니다. 한 사람이 어떠한 이상을 위해, 다른 이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또는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설 때 그 한 사람은 세상에 잔잔한 희망의 물결을 내보냅니다. 수백만의 무수한 에너지 센터를 가로지르며 그 당찬 물결은 마침내 큰 해류가 되어 억압과 저항의 거대한 벽을 휩쓸어 내립니다.”

 

   
▲ LA 로버트 케네디 학교 정면에 세워진 케네디의 연설문을 조각한 기념물. [자료사진 - 정연진]

 

세계적인 인권변호사 배리 피셔와 미디어 전문가 제인 케이건의 지속적인 참여는 원코리아 운동이 앞으로 미국사회에서 미국인들이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는 통일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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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과 CIA, 그들만의 '비밀기록물'

 


미국의 CIA와 한국의 국가정보원은 하는 일이 비슷한 국가의 정보기관입니다. 이들은 명칭 그대로 정보를 수집, 분석하여 정부 여러 부처에 보고하는 임무가 기본임무입니다. 정보를 수집하는 공작 업무를 위해 정보기관은 블랙요원이나 정보원을 활용하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도 합니다.

원래 정보수집이 목적인 정보기관이 정보만 수집, 분석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실제로 국가 정보기관이 여러 사건에 개입한 정황은 많습니다. 미국 CIA는 국내 정치와 사건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그들도 미국 국내 사건에 손을 댔었고,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대한민국 정치를 좌지우지했었습니다.

미국 CIA와 한국 국가정보원은 임무와 성격이 거의 같지만, 전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관여한 임무에 대한 기록물을 국가기록물로 이전, 보관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국가기록원, 국정원 기록물 단 한 건도 없어'

현재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은 국정원으로부터 단 한 건의 기록물도 이관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7월 4일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국정원은 비공개 기록물은 물론이고, 국정원 생산 기록물 목록까지 모두 국가기록원이 아닌 국정원이 자체 보관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기록물 자체 보관은 명확히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행위입니다.

 

 

 


대한민국의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 기관이 생산한 문서 중 영구대상 기록물은 모두 국가기록원에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국가기록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기관에서 9년 동안 보관하고 그 후에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반문서와 다르게 비공개 기록물은 보호기간 만료 때까지 생산기관이 자체 비공개 보관하다가 또는 30년이 경과하면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합니다.

국정원처럼 비밀문서를 많이 다루는 곳에서는 최장 50년까지 연장이 가능한데, 아마 국가기록물로 이관되는 문서 중에서 최장 생산기관 보관 규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밀문서라고 해도 50년이 지나면 국가기록원에 이전되어야 하는데, 대한민국 국정원은 이와 같은 법률을 위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정보원에 나온 국정원 역사. 출처:국정원 홈페이지

 


국정원의 역사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6월 10일 설립된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인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부터 1963년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지정되기까지의 기간에 생산된 중앙정보부의 비밀문서들은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됐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정부 문서를 보관하는 국가기록원에 국정원 관련 문서가 없다는 사실은,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이 명백히 대한민국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CIA 비밀문서를 감독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한국의 국정원이 자신들의 문서를 국가기록원에 넘기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 CIA는 철저히 국립문서기록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 모든 문서를 이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미국 CIA는 생산한 문서와 기록물 등을 보관 연한에 따라 자체 보관한 후 국립문서기록청으로 이관합니다. 그중에 비밀문서는 최대 50년까지 보관이 가능하지만, 그 이후에는 국립문서기록청으로 이관해야 합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NARA)은 한국 국가기록원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CIA가 기록물을 함부로 보관하지 않도록 기록관리 실태를 조사할 수 있으며, 이관된 CIA 비밀문서도 국립문서기록청 산하 비밀해제센터(NDC)에서 공개 여부를 검토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시스템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NARA 산하의 정보보안감독국(ISOO)이 국가안보를 위해 꼭 필요한 정보는 공개를 최소화하면서, 비밀문서의 지정이 과도한 문서를 공개하도록 감독한다는 점입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의 철저하고 실리적인 감독과 운영 탓에 미국 CIA비밀문서가 종종 해제되어 공개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중에 대한민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서가 바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CIA 문서입니다.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시기, 미국무부와 주한미대사관,국방부,CIA는 몇 분마다 전문을 주고받을 정도로 광주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CIA가 생산한 비밀문서는 해제됐고, 대한민국은 이런 비밀문서가 공개되어 당시의 진실을 철저히 규명할 수 있게 됐었습니다.

 

 

▲미국국립문서기록청이 보관하고 있는 OSS 관련 문서. 출처:NARA

 


정보기관의 문서 관리가 얼마나 역사에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 CIA의 전신은 전략사무국 OSS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정보를 담당했던 OSS는 대한민국 역사를 조명하는 기록물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OSS가 한국인을 훈련해 조선 본토에 침투시키려는 계획서입니다.

[시사] - 광복군OSS특수부대의 국내진공 침투작전은 성공했을까?

미국 국립문서기록청이 공개한 OSS 관련 문서 목록 5,6번을 보면 'OSS 미션, 한국, 훈련'이라는 항목이 나옵니다. 이 문서를 통해 우리는 미국이 조선 본토 침투작전을 위해 한국인을 훈련시켰다는 역사적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안보에 필요한 정보는 최소한으로 공개하되, 정보기관의 문서를 어떻게 관리, 감독하느냐에 따라 기록이 남겨지고, 역사의 진실을 나중에라도 알 수있습니다.

' 국정원, 그들만의 불법을 이제는 막아야 한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이번에 진실을 파헤치고, 그들의 불법을 처벌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역사는 퇴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정치 역사에서 정보기관은 정권 창출에 깊숙이 관여했고, 여기에는 언제나 불법과 폭력의 범죄가 동반됐었습니다.
 

 

 


박정희와 군사쿠데타를 모의하던 김종필은 쿠데타 이후의 집권을 위해 정보기관의 설립을 강조했고, 5.16군사쿠데타 이후 곧바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합니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이 가장 먼저 손댔던 일이 군사쿠데타 이후 민정 이양으로 가는 데 필요한 정치자금을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중정은 1백억환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협이 보관하던 한국전력 주식 12만8천주를 외상으로 사들이고, 주가조작을 통해 2만환짜리 주식을 6만환에 팔았습니다.

중정이 증권브로커와 짜고 벌인 주가조작을 통해 남긴 차익은 고스란히 박정희 쿠데타 정권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됐습니다.

당시의 중정문서는 고스란히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50년 넘었는데도 왜 당시의 기록물을 국정원은 국가기록원에 넘기지 않을까요? 국정원이 벌인 파렴치한 정치 공작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으며, 당시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부도덕한 정권임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통해 대학가의 시국선언이 발생하자, 국정원이 대학을 관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것은 유신체제에서 중정이 벌였던 학원사찰의 불법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단독,한겨레] 국정원, ‘시국선언’ 대학까지 사찰

단순히 용공조작을 통해 정치인을 불법 연행,감금,고문했던 일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졌던 학원사찰에 중정이 개입했던 증거들을 보면서, 2013년 국정원이 왜 개혁되고, 불법적인 일을 심판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 미연방법원은 정부관료를 향한 명예훼손에 대해 “이런 소송이 허락된다면, 향후 정부관료를 향한 비판들이 - 설사 그것이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 공포와 두려움의 장막에 갇혀 얼어붙게 되고, 이는 곧 [정당한 비판 이전에] 자기검열로 이어질 것이다” 라고 판결한 바 있다.

 


예전에 '블랙요원'(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신분을 숨기고 정보를 수집하는 국정원요원)을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정보는 얻지 못하고 그저 힘들었던 삶의 얘기만 듣고 왔습니다. 그에게 물었던 말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험한 일을 목숨을 걸고 왜 했느냐'였습니다. 그 요원은 '가슴 속의 애국심'때문이라고 답했었습니다.

진정한 애국심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가슴 속에 살아 움직입니다. 국정원의 명예 운운하며, 고소,고발을 자행하는 지금의 국정원을 보면 그들이 무슨 정보요원이냐는 한숨만 나옵니다. (국정원은 불법 정치 공작을 폭로한 진선미 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으며, 앞으로 그와 관련한 글을 올린 블로거와 게시자들 또한 고발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영화 속 스파이들은 고문을 당해도 정보를 불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나라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국정원은 고문은커녕 알아서 자신들의 비밀기록을 술술 공개합니다. 하지만 정작 대한민국 법에 따라 국가기록원에 넘겨야 할 비밀문서들은 절대 넘기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한복음 8장 31절~36절)



미국 CIA의 국훈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 속 구절을 인용한 문구입니다. 어쩌면 아이엠피터도 국정원에 고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진리를 찾다가 몸이 피곤한 삶이
거짓을 진실로 믿고 사는 일상보다
하나뿐인 인생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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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서도 산속서도, 옹달샘은 새의 천국

 

 

도심서도 산속서도, 옹달샘은 새의 천국

윤순영 2013. 07. 03
조회수 4536추천수 1
 

새들에겐 마시고 목욕할 깨끗한 물 필수, 옹달샘에 다양한 종 몰려들어

도심에 옹달샘 파고 횃대 놓아주면 작은 '새들의 천국'

 

윤순영.jpg » 경기도 김포 야산에 인공으로 만들어 준 옹달샘에서 직박구리가 목욕을 한 뒤 힘차게 물을 털고 있다. 사진=윤순영

 
도심 야산의 인공 옹달샘
 
도심의 산에도 개울은 있지만 메말라 있기 십상이고, 비가 내리면 잠시 물이 흐르다가 곧 메말라 버립니다. 가까스로 물기가 남아 있는 경기도 김포의 한 야산 개울에서 새들이 물을 먹고 목욕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개울 한 곳에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해 주었습니다. 새들의 다리 높이를 고려해 바닥에 작은 돌멩이를 깔아 물 깊이를 10~15㎝로 유지하게 했습니다. 목욕하기에 적당한 깊이입니다.
 

04747702_P_0.jpg » 통나무로 만든 인공 횃대에서 쉬는 직박구리

 

이 인공 옹달샘 가장자리에는 통나무와 가지를 구해 횃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 주면 늘 편안하게 목욕도 하고 물을 마실뿐 아니라 목욕 후 물기를 털어 내는 곳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횃대는 또 옹달샘을 오갈 때 징검다리 구실을 하고 천적이나 위험을 경계하는 장소도 됩니다.
 

샘으로 새가 쏜살같이 날아오는 건 목이 타 매우 다급한 상황임을 보여줍니다. 보통 산새들은 여유있게 쉬엄쉬엄 이곳저곳의 나뭇가지를 이용해 물가로 접근합니다.
 

04747692_P_0.jpg » 목욕을 마치고 깃털을 다듬는 호랑지빠귀

 

04747698_P_0.jpg » 옹달샘에 물을 마시러 온 청딱따구리

 

새들이 모여듭니다. 직박구리가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뒤 호랑지빠귀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며 슬금슬금 다가옵니다. 갓 태어난 곤줄박이, 쇠딱다구리, 청딱다구리가 주변을 서성대고 있고, 물까치는 옹달샘을 아예 제 집 목욕탕인 양 터줏대감 노릇을 하려 듭니다.
 

잡식성인 물까치를 위해 식빵 조각을 잘게 뜯어 횃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처음 한두 마리가 날아들더니 숲속에 소문이 퍼졌는지 물까치 십여 마리가 몰려옵니다. 옹달샘에서 목욕은 여러 종류의 새들이 사이좋게 하지만 먹이 경쟁에선 집단행동을 하는 물까치를 누구도 맞서지 못합니다.
 

04747690_P_0.jpg » 던져준 빵조각을 차지하려 싸움을 벌이는 물까치들

 

자연을 조금만 배려하면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작은 인공 옹달샘과 횃대가 그런 예입니다. 새들이 안심하고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을 우리 주변의 야산이나 공원에 만들어 주면 놀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새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지리산 깊은 산속 옹달샘

04747683_P_0.jpg » 지리산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몸을 흠뻑 적신 채 목욕을 즐기는 작은 쇠박새.  
 
몇 해 전, 1200여 편의 동시를 선물로 남겨주시고 떠난 분이 계십니다. 윤석중 선생님입니다. 동요의 노랫말이 된 동시가 무려 800여 편입니다. 선생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아 그 많은 동요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또한 현재의 나는 어떤 다른 모습이 되어있을지도 무척 궁금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깊은 산 속 옹달샘은 토끼와 노루가 먹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토끼는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고, 노루는 달밤에 숨바꼭질하다가 목마르면 달려와 얼른 먹고 간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옹달샘을 찾는 친구가 또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옹달샘을 지켜보고 있을 때에는 이 친구들이 다른 곳에서 놀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았나 봅니다. 
 

지리산 깊은 숲속에 옹달샘 하나가 있습니다. 두 손을 모아 퍼내면 몇 번 지나지 않아 바로 바닥이 드러날 작은 옹달샘이건만 수많은 새가 모여들어 목을 축이고 목욕도 하다 갑니다.
 

04747677_P_0.jpg » 검은머리방울새

 

04747678_P_0.jpg » 박새 무리와 함께 온 곤줄박이.

 

오늘의 첫 손님 검은머리방울새는 ‘쮸잉, 쮸잉’ 소리를 내며 와서는 아주 급하게 물을 마시고 떠납니다. 이어 박새, 진박새, 쇠박새, 곤줄박이의 순서로 박새과의 새들이 총출동하여 물을 마시러 옵니다. 다음 손님 동박새는 남해안 섬지방에서 동백꽃 꿀을 즐겨 먹는 텃새이지만 근래에는 남부지방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엔 몸이 조금 큰 친구 흰배지빠귀가 나타납니다. 계곡이 있는 곳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으로부터 땅으로 내려와 깡충깡충 뛰듯 이동하여 물로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치칫, 치칫’ 소리를 내며 노랑턱멧새가 온 뒤 마침내 ‘귀한 몸’ 유리딱새도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04747684_P_0.jpg » 깊은 산의 귀한 손님 유리딱새가 옹달샘에 파란 몸을 드러냈다.

 

숲의 노래꾼 직박구리 역시 갈증이 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 새매가 찾아왔습니다. 새매는 슬며시 나타나 소나무 죽은 가지에 숨어 있더니 검은머리방울새 한 마리를 공중에서 그대로 낚아 채 갑니다.
 

새들이 옹달샘에 모여드는 과정을 찬찬히 지켜보는 것으로도 저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숲의 고요함 너머로 귀를 손으로 감싸야 알아차릴 수 있는 아주 작은 크기의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귀에서 손을 떼어도 좋을 만큼 소리가 커질 즈음이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아주 멀리서부터 분명 옹달샘을 향해 모여드는 것은 틀림없지만 단숨에 날아오지 않습니다. 앞서는 친구가 한곳에 있다 이동하면 다음 친구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옹달샘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나뭇가지까지 와서도 한참을 또 망설입니다. 마침내 한 친구가 옹달샘으로 내려와 물을 마시고 떠나면, 뒤를 이어 몇 마리씩 내려옵니다.
 

흰배지빠귀_김.jpg » 흰배지빠귀

 

어떠한 경우든 귀한 물을 두고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이 신통합니다. 옹달샘 주변에 모여 있는 새들이 많으면 순서를 기다렸다가 내려앉을 때가 대부분이며, 목욕을 하더라도 홀로 차지한 채 오래 버티지 않습니다.
 

숲속의 새들과 친구가 되는 것,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옹달샘 하나를 마련해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물이 귀한 계절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숲에서 너무 먼 곳에 사시는 분들이 계시군요. 그렇다면 가슴에 작은 옹달샘 하나를 지니고 사는 길도 있습니다.

 

글·사진 김성호/ 서남대 생명과학과 교수

 

※ 김성호 교수의 글은 2011년 10월10일 물바람숲에 실린 김 교수의 글 '깊은 산 속 옹달샘, 새가 와서 먹지요'를 간추려 다시 실은 것입니다.

 

 

새에게 물은 얼마나 중요할까
 
새는 땀을 흘리지 않고 오줌을 조금만 싸는 물 절약형 동물이다. 포유류는 노폐물을 요소 형태로 배출하는데, 요소는 독성이 심해 이를 희석하기 위해 물을 많이 마시고 오줌으로 배출한다. 그러나 새가 배출하는 요산은 물에 잘 안 녹고 독성이 덜해 물로 희석할 필요가 없다.

 

물론 새는 호흡과 배설로 물을 잃기 때문에 작은 새라면 하루 2번은 물을 마셔야 한다. 곤충 등 먹이를 통해서도 수분을 섭취한다. 새는 비행을 위해 심장박동과 호흡이 빠르고, 체온이 높아 더운 여름에 물이 꼭 필요하다. 목욕도 새에게 매우 중요하다. 목욕을 통해 흙먼지나 기생충을 씻어내 깃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야 비행과 단열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새들은 물을 마실 때 부리에 물을 담아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어 마시지만 비둘기는 포유류처럼 부리를 물에 담그고 꿀꺽꿀꺽 마신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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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225명, 시국 선언 동참…"MB를 법정에 세워야"

 

 

 

"국정원, 정치 공작에 몰두…새누리당, 혹세무민 멈추고 석고대죄해야"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7-04 오전 11:21:48

 

 

전국의 역사학자 225명이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과 여론 조작을 규탄하는 시국 선언 대열에 동참했다.

4일 하일식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연세대 사학과 교수) 등은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주권 유린, 국기 문란 범죄에 온 국민이 나서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는 국민 주권을 유린하고 민주 국가의 법질서를 무너뜨린 불법 행위를 덮으려는 집권 세력의 선동으로 상식적 판단과 이성적 사고가 실종된 듯한 상황에 놓여 있다"며 "우리 역사학자들은 오랜 기간 많은 국민의 숭고한 희생으로 이룩한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현실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권 내내 국정원이 정치 공작에 몰두했음이 드러났"고 "심지어 국가 최고 비밀인 '남북 정상대화록'까지 왜곡 편집해 새누리당과 함께 선거 운동에 활용했다"며 "이는 (4월혁명으로 이어진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버금가는 범죄이며, 군사 독재 시절 중앙정보부·안기부가 공화당·민정당과 함께 민주주의를 유린하던 상황을 방불케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다수 국민과 외신들도 이해하는 순 한글 문서인 남북 정상대화록의 문맥조차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채 정략과 선동의 소재로 활용한 무지와 무모함에 아연실색했다"며 "여기에 수구 언론은 앞장서서 진실을 왜곡하며 여론을 호도하는 데 열중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7월 2일 국회에서 대화록 원문 열람·공개를 표결한 것도 법 정신을 훼손하는 부당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정치권은 더 이상 엉뚱한 일을 벌이지 말고 국기 문란의 실체를 밝히는 데 힘써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들은 "우리 역사학자들은 국민의 일원으로 저들의 책임을 묻고, 모든 실상을 역사에 분명히 기록하고자 한다"며 "집권 세력과 수구 언론이 국민을 '어리석은 무리'로 간주하고 거짓 선동을 벌여 빚어진 참담한 결과를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민주공화국의 법질서를 바로 세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회는 법적·제도적 개혁 및 보완책을 마련해야"하며, "모든 불법과 정치 공작 근원에는 권력을 사유화해 정략적으로 이용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는 만큼, 이 전 대통령을 원세훈과 함께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새누리당에 "저급한 궤변으로 혹세무민하는 선동을 즉각 멈추고", 국정 조사에 "석고대죄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정치 공작과 주권 교란에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그 조치가 미흡하면 각종 불법 행위의 암묵적 수혜자로 남아 정통성에 타격을 입고, 국정 운영에 큰 부담을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성명과 관련해 하일식 회장은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불과 36시간 만에 225명의 역사학자가 동참해 놀랐다"며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이 성명에 동참하겠다고 한 학자들이 많았으며, 재정적으로 후원할 뜻을 밝힌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국정원 선거 개입 및 대화록 공개 규탄 '시국 선언' 관련 기사

- 국정원 선거 개입 파문…대학 시국 선언 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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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 땅의 민주주의 기로에 서다

 
 
 
국정조사로 최소한의 정의 회복될 수 있을까?
 
육근성 | 2013-07-04 09:54: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정원 대선 개입에 대한 국정조사가 실시되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문이 공개된다.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지만 사실상 하나다. 여권이 정권 연장을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자행한 불법행위인 것이다.

멈춰버린 민주주의 시계

국정원 대선개입과 대화록 불법 유출·공개는 민주국가가 유지되는데 필요한 기본적 법도와 질서를 유린한 사건이다. 국정원은 대선에서 여당 후보가 유리할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여론조작을 했고, 새누리당은 국정원과 공모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선거전략에 활용했다. 대화록을 보관하고 있던 곳이 국정원이니 불법유출도 국정원의 작품인 게 확실하다.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새누리당과 국정원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것이다. 숱한 희생과 역경을 헤치며 힘겹게 여기까지 온 이 땅의 민주주의 시계가 저들에 의해 멈춰버렸다.

국정조사와 대화록 공개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회복하고 정의를 바로 세운다면 멈춰진 시계가 다시 앞으로 움직일 수 있을 테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민주주의 시계는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국정조사로 최소한의 정의 회복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룩한 민주주의인가. 이승만 정권의 관권 부정선거,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전두환 정권의 정권찬탈 등에 맞서 투쟁하며 피 흘린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생각해야 한다. 이들의 피와 희생이 헛되지 않을 최소한의 정의라도 회복돼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부정적이다. 민주주의의 근간과 국기를 유린해 얻은 결과물로 정권을 거머쥔 이들이다. 그런 저들이 자신들의 범행과 치부가 드러나도록 손을 놓고 있겠나.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진상을 덮고 여론을 호도하려 들 것이다.

국정원 사건은 야당의 정치공작에 불과하고, 대화록 공개는 역사적 진실과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억지 주장으로 정의와 진실을 덮으려 할 게 분명하다.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작성한 2200쪽의 ‘국정원 범죄 일람표’에는 게시글 977건과 찬반 클릭 행위 1711건이 수록돼 있다. 새누리당은 이 가운데 직접 대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댓글은 73건 뿐이라며, 대선 개입이라는 민주당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우긴다.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낸 '6월 항쟁'/서울 시청앞. 1987년 >

여당의 억지와 괴설 더 심해질 텐데

상식도, 일말의 양심도 없는 주장이다. 검찰이 작성한 ‘범죄 일람표’는 불과 서너명을 조사한 결과일 뿐이다. 다수의 국정원 직원과 얼마나 될지 가름도 할 수 없는 댓글 알바가 동원된 사건이다. 또 이들과 연계된 단체가 여럿이라는 의혹도 있다. 제대로 조사할 경우 대선에 관여한 댓글과 게시글의 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수 있다.

또 경찰의 축소수사와 검찰의 부실수사로 이어지는 동안 많은 중요한 증거들이 인멸됐다는 정황이 수두룩하다. ‘뉴스타파’ 등 일부 언론과 네티즌들이 증거인멸을 확인하고 문제를 제기해도 이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증거인멸 혐의가 뚜렷한 국정원 직원들을 구속하지 않고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검찰이다.

검찰의 ‘범죄 일람표’는 ‘빙산의 일각’이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이게 전부인 양 대선 관련 댓글은 수십개에 불과하다며 거꾸로 야당을 몰아세운다. 국정조사 과정에서 이런 유형의 억지는 더 집요하고 가증스러워질 것이다.

새누리당의 목표는 '결과 없는 국조' '소득 없는 대화록 공개'

대화록이 공개되면서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존재하지 않은다는 게 확실해 졌다. 분쟁지역인 NLL을 평화지역으로 바꾸자며 ‘서해평화협력지대’를 만들자고 제안한 게 전부다. 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세웠던 ‘서해공동어로구역’과 대등소이하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여전히 포기란다. “포기라는 직접적인 단어는 없지만 누가 봐도 NLL 포기를 뜻한다”며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고 우긴다.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면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NLL 포기’가 아니라 NLL을 지키려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도 괴설을 늘어놓기 바쁘다.

국정조사 내내 새누리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정원 사건이 대선 개입이 아니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밀어붙일 게 분명하다. 대선개입 정황이 분명해지고 박 대통령까지 연루됐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겠다고 판단할 경우, 온갖 트집을 잡아 시간을 끌고 자리를 뜨는 등의 방법으로 국정조사 기간인 45일을 버텨 ‘결과 없는 국정조사’로 만들려 할 것이다.

대화록 공개도 마찬가지다. 설령 원본에서 노 전 대통령이 ‘NLL 포기 안 한다’ ‘NLL 지키겠다’는 명확한 표현이 나온다 해도 온갖 괴설을 다 동원해 ‘그래도 포기를 뜻한다’고 우길 것이 확실하다. 새누리당의 억지에 밀린다면 국가의 체면과 외교적 손실을 감수한 채 남북 정상회담 기록물을 공개한 게 헛것이 되고 만다.

7월, 이 땅의 민주주의가 기로에 서 있다

7월. 이 땅의 민주주의가 기로에 서있다. 다시 앞으로 나갈 수도 있고, 수십년 뒤로 물러날 수도 있다. 새누리당과 그 배후에 있는 권력의 힘을 이겨내야 방법 이외에는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을 길이 없다. 민주당이 잘해내야 한다.

또 민주주의와 정의의 가치를 아는 국민들이 나서야 할 때다. 지금 이때 여당과 그 배후세력들의 만행을 규탄하고 잘못을 엄하게 꾸짖지 못한다면, ‘원세훈 게이트’나 ‘NLL 게이트’보다 더한 일이 권력에 의해 또 다시 자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켜온 민주주의인가. 이렇게 유린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국정원 게이트’와 ‘NLL 게이트’ 모두 최종적인 책임은 박 대통령이 져야 할것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대통령직에 오른 게 확실해지면 스스로 물러나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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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개성기업인들 방북 허용"... 판문점 연락 채널 재개

 

 

"공단관리위도 와서 협의하자"... 공식 채널로 통보

13.07.03 21:58l최종 업데이트 13.07.04 09:36l
안홍기(ano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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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당국회담 결렬과 동시에 다시 끊어졌던 남북 판문점 대화 채널이 3일 오후 재개됐다. 이와 함께 북측은 이날 오후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공단 방문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개성공단에 머물고 있던 근로자들의 전원 철수가 예정된 지난 4월 29일 오후 북축의 실무적인 문제로 귀환이 지연되자, 경기도 파주 경의선남북출입사무소에서 취재기자들이 마지막 입경을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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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당국회담 결렬과 동시에 다시 끊어졌던 남북 판문점 대화 채널이 3일 오후 재개됐다. 북측은 이날 오후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공단 방문을 허용하겠다면서 남측과의 대화의지를 내비쳤다.

통일부는 이날 "오늘 오후 5시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통해 북한 측으로부터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명의로 개성공단관리위원회와 개성공단입주기업협회 앞 문건을 전달받았다"며 "문건에서 북한측은 장마철 공단 설비·자재 피해와 관련, 기업 관계자들의 긴급 대책 수립을 위한 공단 방문을 허용하겠다고 하면서 방문날짜를 알려주면 통행·통신 등 필요한 보장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북측은 이 문건에서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관계자들도 함께 방문해도 되며 방문기간 중 필요한 협의들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고 정부는 밝혔다. 정부는 "해당 문건을 개성공단관리위와 입주기업협회에 전달하였으며 여러 가지 관련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대응책을 검토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판문점 연락관 접촉에서 북측은 남측이 제기한 판문점 연락채널 정상화 요구를 받아들여 이날 오후 5시 30분 남북간 전화통화가 이뤄졌다. 남북간 군사긴장 고조 국면이었던 지난 3월 8일 끊어졌다가 지난달 남북당국회담 실무접촉 과정에서 재개됐고, 회담이 무산되면서 다시 끊어졌던 판문점 연락채널이 복원된 것이다.

북측의 이번 제안은 남측과 대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개성공단 잠정 중단 이후 입주기업들 방북요구를 거듭할 때마다 북측은 남측 당국을 배제한 채 관영매체 등을 통해 '기업인들의 방북을 허용하겠다'는 뜻을 밝혀 남측으로부터 '남남갈등을 유발한다'는 반발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번 제안은 당국간의 정식 연락채널인 판문점을 통해 방북허용 의사를 밝혔다는 게 달라진 점이다.

북측이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관계자들도 함께 방문해도 되며 방문기간 중 필요한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대목도 주목된다. 개성공단관리위원회가 남북 공동 구성의 행정기관이지만 위원장을 비롯한 남측 구성원들이 사실상 남측 당국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북측이 개성공단 정상화와 관련된 협의쟁점을 개성공단관리위원회를 통해 남측에 전달하려는 의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측의 이번 제안에 대해 정부는 3일 밤 현재까진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측의 '기업인 방북 허용'에 대해 정부는 '방북을 위해선 남북 당국간 협의가 필수'라는 입장을 밝혀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 틀을 벗어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측이 판문점 연락채널을 먼저 열어둔 상태여서 정부가 당국간 대화를 제의한다면 성사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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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혐의 배준호씨 노동교화 생활 생생히 보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7/04 09:53
  • 수정일
    2013/07/04 09:5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북의 특별교화소는 어떤 곳?
 
간첩혐의 배준호씨 노동교화 생활 생생히 보도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7/04 [07:5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조선과 중국에서 1,500명의 조직원을 두고 간첩행위를 한 사건으로 15년의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은 한국계 미국인 배준호씨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소개 됐다.

재일동포 신문인 조선신보는 특파원 기자의 기획 취재를 통해 지난 5월 14일부터 《특별교화소》에서 교화생활을 시작한 미국공민 배준호(미국명 케네스 배 1968년 8월 1일생)가 농사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하루일과와 대담까지 싣는 등 이례적 보도가 주목된다.

조선신보는 “《특별교화소》 교화인의 일과대로 배준호는 아침 6시에 기상하고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로동하고 있다. 그사이에 점심시간과 2번의 휴식시간이 있으며 하루 8시간로동제가 적용되고 있다”며 “구체적인 일과를 보면 6시~7시 세면 및 청소, 7시~8시 아침식사, 8시~10시 로동, 10시~10시 30분 휴식, 10시 30분~12시 30분 로동, 12시 30분~13시 30분 점심식사, 13시 30분~15시 30분 로동, 15시 30분~16시 휴식, 16시~18시 로동, 18시~19시 휴식, 19시~20시 저녁식사, 20시~22시 문화시간, 22시 취침 일요일과 명절은 휴식일로 정해져 있다.”는 구체적 일과 계획표도 공개했다.

▲ 배준호씨가 보안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농사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
이 신문은 “지난해 11월 3일 라선시를 통해 입국하였던 배준호는 반공화국적대범죄를 감행한 것으로 하여 해당기관에 억류되고 수개월간의 예심 끝에 재판에 회부 되였으며 올해 4월 30일 최고재판소에서 15년의 노동교화형을 언도받았다.”며 “지난 시기 조선의 법을 위반하여 억류된 미국공민들은 미국의 고위관리들이 평양에 와서 사죄, 재발방지약속을 한데 따라 조선측은 인도주의적견지에서 관용을 베풀어 놓아주었으나 이번에 미국공민이 《특별교화소》에서 교화생활을 하는것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신문은 배준호(미국명 케네스 배)씨 이날 본인의 동의밑에 이루어진 본사기자와의 면담에서 배준호는 자신의 죄행은 용서받기 어려운 행위이지만 조선정부가 선처해주고 미국정부가 노력해주어 조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고 하면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나서주기를 부탁 드린다“는 말을 보도해 배준호씨가 미국으로 돌아 걸 것을 희망하며 미국 정부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 된다.

또한 배준호씨는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해 《원래 당뇨병, 고지혈증, 지방간, 동맥경화증상이 있다. 또 10여년전에 허리를 다쳤는데 통증이 재발되였다.》고 하면서 《건강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인내성 있게 잘 견디여내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전해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고 알렸다.

이어 ‘외국인범죄자수용시설’ 이라는 소제목에서 “보초병이 지켜서있는 《특별교화소》 출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어 커다란 중압감이 느껴졌다”며 “교화소 관계자에 의하면 《특별교화소》는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반국가범죄를 저지른 외국인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관계자의 안내로 배준호가 생활하고 있는 건물로 향하는 길에 잠시후 길옆의 콩밭에서 허리 굽혀 김매기를 하는 중년남자가 보였다. 밭 둘레에는 여러명의 보안원들이 서서 그를 날카롭게 감시하고 있었다.”며 “관계자는 그가 배준호라고 알려주었다. 배준호는 푸른색 교화복을 입고 같은 색깔의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왼쪽가슴에는 《103》이라는 번호가 달려있었다.”고 배준호씨의 교화소 노동모습을 소개했다.

조선신보는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특별교화소》에서의 기본노동은 농사일”이라는 말과 함께 “배준호는 5월 14일의 입소 이래 콩 씨를 뿌리고 지금은 두엄(거름)내기와 감자, 강냉이, 콩 등의 밭의 김매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작업은 소농기구를 가지고 하는 손노동이다. 농사일을 처음 해본다고 하는 배준호는 《이곳에 있는 분들이 많이 배려해주셔서 너무 무리하게 일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건강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기에 어려움은 있다. 여기에 상주하고 있는 의사선생님도 계시고 정기적인 검진도 받고 있다.》”는 배준호씨의 발언도 실었다.

이신문은 배준호씨가 노동하는 동안 그가 갇혀있는 감방 안을 돌아볼 수 있었다며 “약 12㎡(약 3평)의 감방에는 침대, 책상, 텔레비젼 등이 구비되고 변소와 세면장이 있으며 창문에는 쇠살창이 설치되어있다.”고 개인의 교화시설의 규모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신문은 “감방 안에는 《교화인의 생활준칙》이 게시되어 있었다.”며 “《교화인의 생활준칙》에는 교화인은 교화소안에 제정된 일과질서 및 행동질서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교화인은 매일 노동과제를 무조건 수행하여야 하며 태공(태만) 할 때에는 해당한 처벌을 받는다, 교화소안의 보안원들에게 예의를 표시하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와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여야 하며 불복종하거나 반항하였을 경우에는 해당한 처벌을 받는다고 지적되어있었다.”고 썼다.

또한 “배준호는 지난해 11월에 구속되고 《특별교화소》에 입소하기 전까지는 가족 등 외부사람과의 전화통화가 허용되었으나 《특별 교화소》에서는 전화통화는 규정상 불허 되고 있다.”며 “다만 가족, 친척, 친우들과 서신거래는 할 수 있으며 가족측이 보내오는 차입품을 검사한 기초위에서 받을 수 있게 되어있다. 관계자에 의하면 배준호가 《특별교화소》 입소 후 교화소 측에서는 배준호가 쓴 편지를 2차례 내보내주었으며 배준호 앞으로 보내온 편지를 5차례 접수하였다”고 한다는 사실도 전했다.

이어 “규정에 의하면 필요한 경우 조선주재 자국의 외교 및 영사일꾼들과 면회할 수 있다. 조선과 미국사이에 국교가 없는 조건에서 주조 스웨리예(스위스)대사관이 대신하여 배준호를 1차례 면회하였다”고 전하고 “배준호는 조선에 입국하여 구속된 이후 전화통화, 편지, 면회들을 통하여 거듭 자신이 풀려나올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게재했다.

아울러 “이번 면담에서 더 할 말이 있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배준호는 7월 4일에 아버지가 칠갑을 맞는다며 외아들로서 꼭 찾아가 축하해드리고 싶다, 부모들이 많이 걱정하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심려를 덜어드리고 싶다”고 말한 소식을 강조했다.

조선신보가 미국공민 배준호와 대담요지 내용 전문을 게재한다.

반공화국적대범죄를 감행하여 15년의 노동교화형을 언도받고 지난 5월 14일부터 《특별교화소》에 수용된 미국공민 배준호가 6월 26일 본사기자와의 면담에 응하여 현재의 교화생활과 심정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일문일답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재 건강상태는?

▲ 원래 당뇨병, 고지혈증, 지방간, 동맥경화증상이 있다. 또 10여년 전에 허리를 다쳤는데 통증이 재발되었다.

-여기서 어떤 일과를 보내고 있는가.

▲ 주로 농사일을 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8시간 노동하고 있다. 중간에 쉬는 시간도 있고 점심시간도 있다. 농사일은 평생 처음으로 하는 일이다. 이곳에 있는 분들이 많이 배려해주셔서 너무 무리하게 일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건강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기에 어려움은 있다. 여기에 상주하고 있는 의사선생님도 계시고 정기적인 검진도 받고 있다.

-지난해 구속된 이후 스웨리예(스위스)대사관 성원과 여러 번 만났다고 하는데.

▲ 제가 공화국법을 위반하여 조사받고 있는 중이라고 이야기했고 조사받고 있는 내용의 골자를 이야기했다. 어떤 내용으로 기소가 될 것이며 결국 재판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재판(4월 30일)을 받게 되였고 여기에 들어와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을 스웨리예(스웨덴)대사관 성원을 통하여 가족들에게 알렸다. 편지로도 여기에 있는 상황들을 알렸다.

제가 조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미국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야기도 하였다. 재판 후에는 사면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가족들과 전화통화를 했는가.

▲ 2번 했다. 재판전에는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렸다. 재판 후에는 사면을 위해서 노력해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는 교화소로 입소될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못했다.

▲ 조선신보 기자와 대담 중인 배준호씨는 "하루 속히 가족에게 돌아갈 수있도록 조선정부에 선처를 구하고 미국정부에는 석방 될 수 있도록 노략해달라고 요청했다. 배준호씨 왼쪽 옆에는 난방을 할 수있는 보일러 시설이 보인다. ©


-가족들에게 전하고싶은 말이 있는가.

▲ 비록 건강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여기서 인내성 있게 잘 견디여 내고 있다는 것을 전해주면 좋겠다.

(가족들은) 조속히 좋은 조치가 공화국정부와 미국정부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력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계속 기도해주시고 사면요청을 공화국정부와 미국정부에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재판에서 변호인의 변호를 거절하였다고 하는데.

▲ 3개월에 걸친 예심이 있었다. 라선시에 입국해서 조사를 받으면서 제가 법을 위반한데 대한 진술서를 썼고 예심과정에서도 그것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굳이 재판에서 따로 변호인을 선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 7월 4일이 저의 아버지의 70살 생일이다. 공화국정부에서 선처해주시고 미국정부도 더욱더 노력해주셔서 조속한 시간 내에 제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다. 제가 외아들로서 꼭 (부모가 사는 미국 씨애틀에) 가서 아버지를 축하해드렸으면 한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배려와 보살핌 속에서 잘 지내고 있다.

제가 한 행위는 용서받기 어려운 행위들이지만 원만히, 조속히 해결되어 가족들을 다시 만났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망이다.

부모님들이 많이 걱정하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위로해 드리고 싶고 제 걱정 때문에 어려워하실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 염려, 심려를 덜어드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탁드리겠다. 좋은 결과가 있을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나서주시고 노력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한편 조선신보가 이례적으로 조선의 노동교화소를 방문 취재하며 배준호씨와 대담을 한 것은 조선이 반인권 국가라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과 더불어 배준호씨가 미국정부에 자신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의지를 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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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때 내 몸을 씻겨준 계엄군

 

 

5·18때 내 몸을 씻겨준 계엄군

 
최상용 2013. 07. 02
조회수 5319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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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항쟁 학생을 구타하는 계엄군. 사진 <한겨레> 자료

 

 

[나를 울린 이사람]·

 

5·18 광주민주항쟁 이후 교도소 안에 갇혀 있던 당시 투옥과 고문으로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다. 교도소 밖에서 들려오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굉음이 마치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의 아우성 같았다.

 

 밤이면 장난처럼 자행되는 계엄군의 구타와 폭언은 스물한 살 청춘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공포와 충격 그 자체였다. 군인들이 내 뱉는 비속어와 은어 자체를 이해 못해 수없이 구타당하기도 했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곳은 창문하나 없는 창고였다. 안쪽 한 귀퉁이에 임시로 설치한 소대변통에서 풍기는 악취때문에 더운 날엔 군인들도 들어오길 꺼렸다.

 

 그렇게 한 달 여를 세수는커녕 씻지도 못하고 지내다보니 피부병의 일종인 전염성 강한 ‘옴’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다른 수감자들과 격리되었고, 곧이어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 그곳 역시 여건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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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상용 소장. 사진 조현 기자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행운이 찾아들었다. 당시엔 폭군이나 다름없었던 계엄군 중에 천사와도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매일 아침과 저녁, 주저하는 나를 간이목욕탕으로 데려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말끔하게 씻어 주는 게 아닌가! 같은 처지의 동료들도 행여 옮길까봐 날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맨손으로! 온몸 구석구석 꼼꼼히, 마치 세례(洗禮)의식이라도 치르듯. 매번 겸연쩍어 내 스스로 씻는다고 하면 자애로운 형처럼 입가에 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냥 있어, 괜찮아!”라고 위로했다.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얼마나 콩닥거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트라우마를 지우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변변한 약도 먹지 못했는데 채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말끔하게 나았다. 당시 그의 계급은 상병, 이름은 차재욱! 그립고 보고 싶다. 30년도 더 지났지만, 지옥 속에서 만난 그 천사는 아직도 내 가슴에서 훈훈한 자애로움과 사랑으로 자라나고 있다.

 

최상용(인문기학연구소장)

 

518 검거된 시민군들-.jpg

518 당시-.jpg 518 무릅꿇린 진압군들-.jpg 518 연행 시민학생들-.jpg 518 진압군에 연행되는 학생들-.jpg 518광주항쟁 사진2-.jpg 518당시 전남도청 마당 무력진압뒤-.jpg 518당시 트럭에 태움-.jpg518진압군의 시민 구타1-.jpg 518항쟁사진 관1-.jpg 광주항쟁 진압군의 폭행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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