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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지상군 투입 임박.... 전면전 조짐

지상군 투입 조짐 속속들이 목격, 2008년 재앙 재현되나

12.11.18 09:36l최종 업데이트 12.11.18 09:36l

 

 

16일, 주한 이스라엘대사관 앞에서 열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규탄시위.
ⓒ 김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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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하마스 군 지도자 아흐메드 자바리에 대한 이스라엘의 표적 암살로 촉발된 갈등이 4일째 긴장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로켓탄을 발사하고, 이스라엘은 공중, 해상 폭격으로 맞대응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5일 하마스의 로켓이 이스라엘 남부 키럇 말라치의 아파트에 떨어져 3명의 이스라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군의 폭격은 더욱 치열해져 14일 이후 17일까지 800회 이상 가자지구를 공격하였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에 따르면 현재까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39명이 사망하고 345명이 부상당했다.

'외과적 정밀타격'을 통해 하마스의 로켓탄 공격에 억지력을 확보할 것이라는 공식 발표와 달리, 이스라엘 군의 폭격에 희생된 사람들의 상당수는 임산부, 신생아를 포함한 민간인이었다.

이스라엘군은 하마스 총리실, 하마스 본사, 경찰청등 정부관련 시설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시설에 폭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로 이어지는 가자의 유일한 식량, 연료 및 구호물품 보급로가 끊기고 전력시설이 파괴되어 가자의 밤은 이스라엘군의 폭격의 화염을 제외하고는 빛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가자지구의 가장 큰 병원인 쉬파병원 관계자는 비상 발전기를 가동해 전력을 공급하고 있으며 입원실 수용능력이 한계치를 벗어나 응급 환자들을 이집트로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하마스가 발사한 수백발의 로켓탄 중 3발이 이스라엘의 경제수도인 텔아비브에 떨어졌다. 1991년 걸프전쟁 이후 처음으로 공습경보가 울린 텔아비브는 공포에 질려 대피하는 사람들로 혼란스러웠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인근에는 1970년 이후 42년 만에 처음으로 1발의 로켓탄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하마스의 공격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피해는 민간인 사망자 3명과 군인을 포함한 부상자 13명이다.

하마스 로켓의 확장된 사정거리에 관해 이스라엘군은 하마스가 이란산 파즈르 로켓을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외부 인사들의 가자지구 방문 그리고 국제사회의 반응

이집트 대통령 모르시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맹비난 하며 즉각 공습중단을 촉구하고 나선 가운데 15일엔 이집트의 총리가 가자지구를 방문하였다. 총리의 방문기간 동안 양측은 휴전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고 이 기간 동안 가자에서 2명의 민간인이 이스라엘 군 공습으로 폭사했다. 이집트 총리가 떠난 뒤 그가 머물렀던 하마스 본사건물이 이스라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17일 오전(현지시각) 튀니지 총리가 가자지구를 방문하여 폭격당한 건물 등을 둘러보고,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격중단 촉구와 국제사회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를 호소하였다. 튀니지 총리의 방문 도중 지속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4명이 사망하였다.

유엔은 문제해결을 위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가자지구 방문이 있을 것이라 발표하였으나 구체적인 시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 러시아 등 많은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표적암살과 공격에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과 달리,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은 자국을 방어할 권리가 있다'며 이스라엘을 옹호하였다.

가자지구에서 점점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함에 따라 전 세계 시민들이 이스라엘 정부의 가자지구 공격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4일 이후 약 50여개 국가에서 폭격으로 고통 받는 가자지구 사람들에 대한 연대시위가 열렸다. 한국은 16일 (금요일) 나눔문화, 참여연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등 17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이스라엘의 전쟁범죄 규탄시위를 열고 대사관 측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려 하였으나 전투경찰의 제지로 직접 전달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지상군 투입 조짐... 코앞에 닥친 전면전

이스라엘군의 공중폭격이 무차별적으로 민간시설까지 확대대고, 하마스의 로켓탄은 이스라엘의 주요도시에 떨어졌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7만5000명의 이스라엘 예비군 소집안이 통과되었고 이중 약 1만6000명의 예비역이 현역으로 편입되었다. 이스라엘군의 탱크, 장갑차, 불도저 등의 지상군 장비와 군인들이 가자지구 국경 근처로 이동하는 모습이 속속 목격되고 있다.

17일 오후 1시(현지시각)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주변 주요도로를 봉쇄하고 '군사지역'으로 선포하였다. 이는 가자지구에 지상군 투입이 임박했다는 조짐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군의 지상군 투입은 곧 가자지구의 전면전과 대규모의 민간인 피해를 의미한다. 2008년 겨울, 전 세계가 목격하였듯이 이스라엘군은 22일간 지상군 투입을 통한 공격과 무차별 폭격으로 팔레스타인인 1400명을 살해하였다. 지금 이스라엘군의 움직임과 전반적인 상황이 2008년 이스라엘의 가자공습과 매우 흡사하다.

대규모 공습의 배경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이집트의 중재로 평화협정에 서명한지 이틀도 안되어 발생한 대규모 공격의 배경에 대해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스라엘은 최근 골란고원에서 시리아 정부군과 교전 등 외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시점에서 굳이 대규모 공습이라는 무리수를 둔 이유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총선을 한 달 앞둔 집권당의 집권야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8월 이스라엘에서는 물가폭등, 높은 실업률 정부의 경제정책에 반해서 전례 없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국제적인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국내 경제가 악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내부적으로 국민들의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지난달 조기총선을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집권당인 리쿠드당과 극우정당인 베이타누당이 연합하여초극우 정당을 탄생시켰다.

이런 시점에서 가자지구의 대규모 공습을 감행한 것은 총선을 앞두고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이슈를 부각시켜 국내의 '안보' 위기감을 조성하여 표를 얻는 것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써온 고전적인 전략이다.

이스라엘이 총선을 앞두고 감행한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1955년, 1961년, 1981년, 1996년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과, 1981년 이라크 원자로 폭격, 1996년 레바논 공습, 2009년 가자지구 공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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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7호는 왜 서쪽으로 갔을까?

 

 

 

화성 7호는 왜 서쪽으로 갔을까?
 
[한호석의 개벽예감](37) 시리아 전방위 지원하는 북이 제공한 것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2/11/17 [22:13] 최종편집: ⓒ 자주민보
 
 

445개의 흑연실린더가 말해주는 정반대의 진실

<교도통신>을 인용한 유엔본부발 <연합뉴스> 2012년 11월 14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2012년 5월 중국을 떠나 부산항에 중간기착한 시리아행 중국 화물선에서 북에서 제조된 것으로 보이는 탄도미사일 부품을 남측 당국이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화물선은 중국 상하이에 본부를 둔 선박회사(China Shipping Container Line) 소속 6,9000t급 신옌타이(Xin Yan Tai)호였고, 북에서 제조된 것으로 보이는 탄도미사일 부품은 흑연실린더 445개였다. 흑연실린더는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린 미사일이 대기권으로 다시 돌입하는 재돌입 운반체(re-entry vehicle)의 맨 앞부분에 들어가는 부품이다.

위의 보도기사에서 주목하는 것은 2012년 5월이라는 시점이다. 그 특정시점에 주목하는 까닭은, 대북제재 이행상황을 감시하는 유엔안보리 대북제제위원회가 유엔전문가실무단이 작성한 보고서를 유엔안보리에 제출한 날이 5월 14일이기 때문이다. 대북제재 이행상황에 관한 그 보고서는 그 날 유엔안보리에 제출되었으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이 보고서 외부공개를 반대하여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이터 통신>이 2012년 5월 17일에 그 보고서를 입수하고 이튿날 그에 관한 보도기사를 냈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 가운데 어떤 나라가 유엔안보리 결정을 어기고 문제의 보고서를 언론에 유출한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가운데 대북제재문제를 유엔안보리에까지 끌고 가서 대북적대정책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나라는 미국이므로, 유엔안보리의 보고서 비공개 결정을 어기고 문제의 보고서를 언론에 유출한 비열한 행위는 미국이 저지른 짓이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문제의 보고서에는 어떤 정보가 들어있었을까? <로이터 통신> 2012년 5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2010년 11월 프랑스가 시리아와 미얀마로 항해 중이던 일본 가와사키(山崎)기선주식회사 소속 71,000t급 화물선 샌프란시스코 브리지(San Francisco Bridge)를 동남아시아 어느 공해상에서 정선시키고 검색하였더니, 그 화물선에서 북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포탄제조에 쓰이는 청동제품 및 동제품들과 로켓제조에 쓰이는 알루미늄관을 발견하였고, 이 사실을 담은 보고서가 2012년 4월 유엔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에 제출되었다고 한다.

당시 유엔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보고서가 중국의 반대로 세상에 공개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중국의 그런 행동에 잔뜩 불만을 품은 미국은, 마침 부산항에 중간기착한 중국 화물선에서 북이 제조한 것으로 보이는 미사일 부품들이 발견되자, 유엔안보리의 보고서 비공개 결정을 깨고 그 보고서를 <로이터 통신>에 슬그머니 넘겨주는 비열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위의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북은 2010년 11월에 포탄 제조물품과 로켓포탄 제조물품을 시리아와 미얀마에 제공하려 한 것으로 보이고, 2012년 5월에는 미사일 부품을 시리아에 제공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북이 시리아를 군사적으로 적극 지원해주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미국은 시리아에 대한 북의 군사지원을 유엔안보리 제재결의를 위반한 ‘범죄’라고 국제사회에 선전하지만, 국제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살펴보면 미국의 그런 흑색선전과는 정반대의 진실이 드러난다. 정반대의 진실은, 음흉한 정권전복공작으로 시리아 내란을 부추긴 범죄자는 미국이고, 미국의 시리아 침공을 막아주는 옹호자는 북이라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정보를 살펴보아야 그 정반대의 진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첫째, 다른 나라들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시행하는 위성발사를 북도 시행하였는데, 그것을 ‘국제규범 위반’으로 규정하고 무슨 제재를 가하겠다는 식으로 조작된 유엔안보리의 부당한 대북제재결의를 북은 원천무효로 보고 배격하였다. 만일 어떤 약소국이 유엔안보리 제재결의를 무시하는 행동을 계속하는 경우, 미국이 추종국들을 거느리고 그 나라를 곧바로 침공하겠지만, 북은 부당한 유엔안보리 제재결의를 무시하는 행동을 계속해도 아무도 막지 못한다. 북은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군사강국이므로, 부당한 유엔안보리 제재결의 따위는 완전히 무시해도 되는 것이다.

둘째, 북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전복하려는 미국의 내란유발공작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리아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을 마땅한 의무와 도리로 여기고 있다. 북이 시리아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자기의 의무와 도리로 여기는 까닭은, 북의 주장에 따르면 북이 한반도의 자주화만이 아니라 세계의 자주화를 위해 적극 활동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북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북은 제국주의침략을 받은 약소국과 피압박민족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원해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북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한 김일성 주석은 제국주의침략과 무력강점에 맞서 투쟁하는 약소국과 피압박민족들에게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대로 계승한 그 전통은 오늘도 김정은 제1위원장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제국주의침략과 무력강점에 맞서 투쟁하는 약소국과 피압박민족들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북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이 가리키는 자주화 강령이므로, 북에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수령의 위업으로, 누구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국시로 되는 것이다.

지난날 경험을 돌아보면, 제국주의나라들이 도발한 중동전쟁과 베트남전쟁, 제국주의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알제리전쟁 등에서 제국주의침략전쟁과 무력강점에 맞서 투쟁하는 약소국들과 피압박민족들에게 북은 군사훈련을 지도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공급하거나, 인민군 부대까지 파병하는 등 성심성의로 도움을 주었다. 또한 북은 이스라엘의 무력강점과 국가테러에 맞서 혈전을 벌이는 팔레스타인을 적극 지지하고, 미국의 침공위협에 맞서 투쟁하는 쿠바와 이란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쿠바나 이란보다 더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진 시리아를 북이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주는 것은, 북이 수행하는 세계 자주화 과업의 견지에서 보면 너무도 정당한 일이다.

이미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시리아에서 폭동, 테러, 내란을 도발한 반란세력에게 정치적,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퍼주고 있는데, 시리아 반란세력의 소굴인 ‘시리아국가연합’을 ‘합법정부’로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을 추종하는 제3국들을 통해 각종 무기와 군사장비를 반란군에게 은밀히 제공해주고, 이른바 인도주의적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2억 달러를 퍼주었다. 이런 사정을 헤아려보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반란세력에 맞서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북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은 국제관계의 견지에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특히 북과 시리아의 전통적 유대관계는 매우 길고 깊다. 그 유대관계는 지난 시기 김일성 주석과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Hafea al-Assad) 대통령 사이에 맺어진 긴밀한 유대관계에서 시작된 것이다. 시리아 아랍공화국은 중동지역에서 아랍식 사회주의를 실현한 유일한 사회주의나라이며, 이스라엘에게 무력으로 강탈당한 골란고원을 되찾으려는 영토수복투쟁을 벌여온 나라이며, 중동지역에서 반제군사전선의 한 축을 떠맡은 반제자주국이다. 그런 나라가 미국의 내란도발공작에 걸려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북이 수수방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최후통첩 무시한 시리아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2010년 2월 비밀전문에 따르면, 힐러리 클린턴(Hillary R. Clinton) 미국 국무장관은 시리아 방문 중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 대통령의 접견을 받은 자리에서 “시리아가 레바논에 주둔하는 헤즈볼라에게 신형 미사일을 공급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시리아 외무차관 파이잘 알 미크다드(Faisal al-Miqdad)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헤즈볼라에 대한 시리아의 작전적 지원은 시리아의 전략적 오판”이라고 지적하였고, 시리아가 헤즈볼라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주는 문제에 관해 영국, 프랑스, 터키 외무장관들과 각각 협의하였다.

비밀전문은 힐러리 클린턴이 시리아에게 요구하였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요구가 아니라 헤즈볼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지 않으면 엄중한 사태를 불러온다는 협박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그런 협박발언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국무장관의 시리아 방문을 통해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팔레스타인을 강점하고 팔레스타인 인민들에게 극악한 국가테러를 자행하는 중동의 깡패국가 이스라엘에 맞서 혈전을 벌이는 레바논 주둔 무장단체이며 정치조직인 헤즈볼라를 도와주려는 시리아에게 미국의 그런 협박성 최후통첩이 통할 리 없었다. 반제자주국 시리아는 미국의 협박에 굴복하여 아랍민족의 의리를 저버릴 그런 나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자기들의 최후통첩을 무시해버린 시리아에게 증오심을 품고 보복의 기회를 노리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국무장관의 시리아 방문을 통해 최후통첩을 보낸 때로부터 1년이 지난 2011년 3월 15일 미국의 조종과 지원을 받은 격렬한 반정부 폭동이 시리아에서 일어난 배경에는, 헤즈볼라에 대한 군사지원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시리아와 미국의 보이지 않는 정면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시리아에서 반정부 폭동이 일어난 때로부터 오늘까지 1년 8개월, 시리아에서 무려 300만여 명에 이르는 전쟁난민이 발생한 그 숨막히는 기간 동안 시리아 반란세력을 앞세운 미국은 테러지원→내란도발→무력침공→정권전복으로 이어지는 4단계 도발책동을 단계적으로 밀고 나가는 중이다. 시리아의 현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2012년 7월 9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 ‘내란도발과 정권전복을 노리는 ‘친구들’’(관련기사 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0059)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미국 국무장관이 시리아에게 헤즈볼라에 제공하지 말라고 협박한 신형 미사일이 바로 북의 설계기술로 생산된 강력한 미사일이라는 사실이다.

시리아가 아랍민족의 의리를 지켜 헤즈볼라에게 미사일을 제공한 것을 오늘 미국이 시리아 내전도발의 구실로 삼았다면, 북이 자주화 투쟁에서 맺은 의리를 지켜 시리아에게 미사일 설계기술을 제공한 것을 오늘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앞세운 국제적인 대북제재의 구실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북미관계에서 다시 설명하면, 한반도의 자주화 문제를 놓고 북과 미국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과 동시에 중동지역에서 아랍민족의 자주화 문제를 놓고 북과 미국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면, 북이 ‘선군정치’로 구축한 반제군사전선은 한반도 영역을 뛰어넘어 저 멀리 중동에까지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멀리 서쪽으로 간 화성 7호

미국이 시리아 내란도발의 구실로 삼았던 그 신형 미사일, 시리아가 미국의 협박성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아랍민족의 의리를 지켜 헤즈볼라에게 제공하였던 그 신형 미사일, 시리아가 북의 설계기술로 개발하고 생산한 그 신형 미사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미사일이었을까?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과 언론매체들이 퍼뜨린 왜곡된 정보밖에 모르는 서방 각국의 군사전문가들은 북에서 시리아를 거쳐 헤즈볼라에게까지 제공된 그 신형 미사일을 스커드(Scud) D라고 지목하였으나, 그것은 사실왜곡이다. 북이 시리아에 제공한 것은 스커드 D 설계기술이 아니었다.

원래 스커드 D는 소련이 1989년에 개발한 것인데, 그 당시에는 세계 최강의 지대지 전술미사일이었다. 그런데 북은 스커드 D에 맞먹는 세계 정상급 고성능 지대지 전술미사일을 자체 기술로 개발하여 1994년 초부터 실전배치하였다. 당시 세계 최강의 지대지 전술미사일을 만들어낸 러시아의 최첨단 설계기술을 북이 곧바로 따라잡아 독자적으로 개발한 그 신형 미사일이 바로 화성 7호다. 미국 국가정보기관들과 언론매체들이 퍼뜨리는 왜곡정보만 듣고 있는 국제사회에서는 화성 7호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들린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북의 미사일 설계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의 미사일 설계기술을 가졌다는 러시아와 비교하여 불과 4년 격차로 좁혀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북이 미사일 설계에서 러시아와의 기술격차를 4년으로 좁혀놓은 때가 벌써 근 20여 년 전이므로,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 미사일 설계에서 북의 기술은 러시아의 기술과 격차를 두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북의 미사일 설계기술을 결코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소련의 계승국인 러시아는 스커드 D 설계기술을 시리아에 제공하지 않았지만, 북은 화성 7호 설계기술을 시리아에 제공하였다. 북과 러시아가 세계 최고 수준의 미사일 설계기술을 똑같이 가졌어도, 그 쓰임새는 그처럼 달랐다. 2010년 5월 11일 일본을 방문 중인 이스라엘 외무장관 애빅돌 리버만(Avigdor Lieberman)은 일본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북과 시리아의 협력은 경제발전이 아니라 대량파괴무기(WMD)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하면서, 북이 시리아에 대량파괴무기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북으로부터 화성 7호 설계기술을 전수받은 시리아의 과학연구조사센터(Scientific Studies and Research Center)는 하마(Hama)시 인근에 있는 자발 타크시스(Jabal Taqsis) 연구단지에서 ‘프로젝트(Project) 99’라는 이름의 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하였다. 요즈음 시리아군과 반란군이 하마지역에서 격전을 여러 차례 벌인 까닭은, 바로 그 지역에 시리아 미사일 연구단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는 가장 혐오하는 물리적 대상이며, 시리아에게는 자기 조국을 지키는 최후의 물리적 수단인 미사일을 개발하는 능력을 무참히 파괴하려고 미쳐 날뛰는 반란군의 속셈이 드러나 보인다.

시리아의 과학연구조사센터는 화성 7호 복제품 개발에 부지런히 힘쓴 끝에 2005년 5월 27일 첫 번째 시험발사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2007년 1월 28일에 실시한 두 번째 시험발사에서 마침내 성공하여 개발사업을 완료하고 화성 7호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서방 군사전문가들의 추정자료에 따르면, 지금 시리아는 화성 7호를 연간 15-30기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시리아가 지난 4년 동안 그런 속도로 화성 7호를 생산하였다면, 지금쯤 아마 100기 이상 실전배치하였을 것이다.

시리아의 과학연구조사센터가 북의 미사일 설계기술을 전수하여 복제생산에 성공한 시리아판 화성 7호는 무게 800kg짜리 탄두를 싣고 800km를 날아가는 실로 위력적인 지대지 미사일이다. 이스라엘의 온라인 군사전문지 <디펜스 업데이트(Defense Update)> 2009년 5월 4일 자료에 따르면, 시리아의 과학연구조사센터가 북의 미사일 설계기술을 전수하여 복제생산하는 화성 7호는 적국의 방공미사일이 요격하지 못하도록 탄도비행 중에 동체와 탄두가 분리되는 데, 탄도비행 중 미사일 본체에서 분리된 탄두는 길이가 65cm밖에 되지 않아 방공레이더망이 포착하기 힘들고, 탄두부는 화학탄두도 장착할 수 있게 개조되었고, 탄두 꼭지에 감지기(sensor)가 장착되어 있어서 탄두가 표적을 향해 초고속으로 돌진하는 마지막 낙하비행단계에서 낙하방향을 자동으로 조절하면서 탄두를 표적에 명중시킨다. 그에 따라, 화성 7호는 원형공산오차(CEP)가 50m 정도로 명중률이 높으며, 발사 직후 차량에 실려 재빨리 이동하므로 적의 대응타격을 피할 수 있다.

놀랍게도, 북은 화성 7호 설계기술만이 아니라, 500kg의 탄두를 싣고 130km를 날아가는 신형 지대지 단거리 미사일 금성 2호 설계기술도 시리아에 전수해주었다. 미국은 금성 2호를 ‘KN-02’라고 제멋대로 부르는데, 주한미국군은 이 미사일을 가장 두려워하여 ‘독사’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오늘 시리아군이 화성 7호와 금성 2호로 무장한 것은, 고폭탄두 또는 화학탄두를 장착한 그 강력한 미사일들이 미국의 기술지원과 재정지원으로 건설된 이스라엘의 방공미사일망 ‘철갑지붕(Iron Dome)’을 뚫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에게는 끔직스런 악몽이고, 이스라엘에게는 파멸적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상대로 전면전을 감히 도발하지 못하고, 시리아 내부에서 반란세력을 부추겨 폭동과 테러, 그리고 내란을 일으켜 아사드 정권을 전복하려고 광분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시리아 전선과 세계 자주화 투쟁

시리아가 내란의 불길에 휘말린 요즈음 러시아와 중국은 시리아에 대한 지지발언만 공허하게 되풀이하고 있지만, 북은 위기에 처한 시리아를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적극적인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중동 정세에 정통한 외교관’의 발언을 인용한 <교도통신> 2011년 11월 6일 보도에 따르면, 2011년 4월 25일 북은 시리아의 미사일 개발진척상황을 살펴보고 시리아에 미사일을 추가로 제공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시리아에 대표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 보도기사가 사실이라면, 시리아에게 이미 화성 7호와 금성 2호 설계기술을 전수해준 북은 그보다 더 강력한 미사일을 완제품으로 제공하려는 것이다. 화성 7호보다 더 강력한 미사일은 무엇일까? 지중해에 배치되어 시리아 무력침공의 날을 기다리는 제국주의침략전쟁의 돌격대인 미국 해군 항공모함을 한 방에 격침시킬 강력한 대함미사일인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북이 위기에 처한 시리아에 항모격침 미사일을 제공하였다면, 그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과 시리아가 반제군사전선에서 맺은 혁명적 의리를 지켜 시리아의 자주권 수호를 위해 제공하기로 자신의 생애 마지막 해에 내린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었을 것이다.

북은 군사부문에서만 시리아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문들에서도 시리아를 적극 도와주고 있다. 그야말로 총체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2011년 7월 15일 북과 시리아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조선-수리아 경제공동위원회 제7차 회의’를 진행하고, 관세, 통신, 전시회, 항만, 정보서비스 등 여러 분야에서 상호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합의서를 조인하였다. <시리아 아랍 통신사(SANA)> 2011년 7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북측 정부대표로 그 회의에 참석한 리용남 무역상은 “북의 지원조치들이 시리아 정부가 (시리아의) 안정과 안전을 회복하는 데 쓰일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시리아를 노리는 음모와 계략에 맞서 단결한 시리아 인민과 군대와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또한 2012년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평양에서 ‘조선-수리아 경제공동위원회 제8차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북과 시리아는 각종 양해각서와 합의서를 또 다시 조인하였다. 특수경제지대 및 자유지대에서의 상호협조에 관한 양해각서, 환경보호분야 협조에 관한 양해각서, 농업과학연구분야에서의 협조와 교류에 관한 합의서, 정보통신분야 집행계획서, 관광협조에 관한 협정이행을 위한 제1차 집행계획서 등이다.

오늘 북과 시리아의 상호관계를 바라보면, 내란의 불길을 헤쳐 가는 시리아의 간고분투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또한 북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선군의 기치’를 들고 시리아 전선에 힘을 집중하는 북의 세계 자주화를 위한 투쟁이 시야에 들어온다.(2012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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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결성 22돌 기념식.. ‘평화통일 대통령 뽑자’

 

“범민련이 있기에 우리가 건재하다”
범민련 결성 22돌 기념식.. ‘평화통일 대통령 뽑자’
 
 
2012년 11월 17일 (토) 23:55:23 이계환 기자 khlee@tongilnews.com
 
   
▲ 17일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범민련 결성 22돌 기념식에서 김을수 권한대행이 대회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범민련이 있기에 우리가 건재하다.”

17일 오후 3시,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 22돌 기념식에서 격려사를 하기 위해 연단에 올라선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범민련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냐” 하고 묻고는 이같이 답했다.

권 대표는 “범민련 관계자 5명이 구속됐다. 공안탄압을 받아 범민련이 해산된다면 그 다음 공안의 칼날이 어디로 올 것인가” 하고 재차 묻고는 곧바로 “통일광장 그리고 진보연대로 올 것이다”고 답했다.

권 대표는 “그런 점에서 볼 때 범민련이 통일운동의 맨 앞에서 조직을, 개인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라고는 “공안탄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범민련에 경의를 표한다”며 감사를 전했다.

   
▲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가 격려사를 통해 “범민련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냐” 하고 묻고는 “범민련이 있기에 우리가 건재하다”고 답하면서, 범민련 남측본부에 경의를 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 범민련 결성 22돌 기념식은 올해 12월 대통령선거를 의식해 ‘평화통일 대통령으로 정권교체 실현하자’는 구호와 외침의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이 구속 중이라 김을수 의장대행이 나서 대회사를 낭독했다.

김 권한대행은 “이명박 집권 5년은 온 이남 땅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며 “이명박 집권 5년은 새누리당이 집권한다면 어떤 평화도, 화해협력도, 민중의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린 교훈으로 남겨주고 있다”고 ‘이명박=박근혜’를 동일시했다.

김 권한대행은 “우리는 이명박근혜 새누리당의 재집권 저지를 위해 굳게 단결과 단호한 투쟁으로 평화통일 대통령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한다”면서 “그래야 우리 민족의 미래도 있고, 민중의 생존권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후보가 연대사를 통해 이번 대선에서 ‘상상하라 코리아 연방’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며 대선후보로서의 전략적 구호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후보가 연대사를 했다.

이 후보는 “통합진보당이 당면한 전쟁위기를 해소하고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이번 대선에서 ‘상상하라 코리아 연방’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며 대선후보로서의 전략적 구호를 소개했다.

이 후보는 “대선을 앞두고 누구나 남북관계 회복을 이야기하고 누구나 남북경제협력을 이야기 한다”면서도 “하지만 통일지향성을 분명히 하지 않고 정치 군사적 문제의 선차성을 인정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현실화 될 수 없다”며, 다른 대선후보들이 남북관계 개선에서 ‘경제적 측면’만 강조하는 것에 일침을 놓으며 차별화를 극대화했다.

특히, 이 후보는 “(대통령이 된다면) 이런 기준과 원칙아래 새 정부 출범 즉시 곧바로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면서 3차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분위기 조성 작업으로 △6.15선언, 10.4선언 이행 의지를 먼저 밝힐 것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 △5.24조치를 철회할 것 등 세 가지를 제시하고는 “통합진보당은 임기 내에 민족통일기구인 6.15통일추진본부를 창설하여 1단계 통일을 완료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 후보는 야권 단일화와 관련 “저는 진보적 정권교체를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이라면서 “저와 진보당은 더 좋은, 더 넓은, 더 강한, 야권연대를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 대회장 전경. 대회장 벽면에 ‘평화통일 대통령으로 정권교체 실현하자’는 구호가 붙어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어, 영상을 통해 ‘감옥에서 보내온 편지’가 전해졌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이규재 의장, 노수희 부의장, 원진욱 사무처장, 최동진 편집국장 그리고 이경원 전 사무처장 등 5명이 구속돼 있는 상태다.

이들이 구속되기 전 활동모습이 영상을 통해 나오며 동시에 감옥으로부터 온 편지가 소개되자 일순간 대회장 분위기가 숙연해지면서 참가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이날 대회에는 200여명이 참석해 대회장을 꽉 채웠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계속해서, 연대사가 이어졌다.

황수영 민주노총 통일위원장은 22년 전 범민련 결성으로 민중의 통일운동이 대중화되었음을 알렸으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범민련 간부 5명의 구속으로 범민련이 역사상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였음에도 공안당국의 가혹한 탄압에도 투쟁을 잃지 않는다며 연대의 인사를 전했다.

북측과 해외측에서도 연대사가 보태졌다.

범민련 북측본부는 “범민련 남측본부 통일애국투사들은 일신의 안락과 가정의 행복은 뒤에 두고 분단의 비극을 끝장내기 위한 통일성업에 자기들의 한 몸을 깡그리 바쳐가고 있는 것으로 하여 통일운동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또한 범민련 해외본부도 “모진 시련과 탄압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언제나 통일애국의 길을 굿굿이 걸으며 철창 속에서 굴함 없이 싸우고 있는 여러분들의 투쟁모습은 우리 해외동포들에게 큰 고무가 되어 있다”고 각각 범민련 남측본부 성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 범민련 남측본부 회원들이 대회 마지막에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 전체 참가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6.15, 10.4선언을 고수 이행해 나갈 것 △평화통일 대통령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할 것 △대북 적대정책, 한미일 전쟁책동을 분쇄할 것 △진보세력 단결과 전민중의 연대로 진보정당 강화하고 분단독재 유신잔재 청산할 것 등을 결의했다.

이날 대회는 범민련 간부 5명의 구속이라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12월 대선에서 ‘평화통일 대통령을 뽑자’는 절박함이 한데 아우러진 가운데 속도감 있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한편 이날 대회에는 통일광장 회원 등 비전향장기수들, 사월혁명회, 민자통, 민권연대, 양심수후원회 그리고 범민련 지역본부 성원들이 참석해, 대회장 200석을 꽉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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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새와 시골 새, 이솝우화를 쓴다면?

서울 새와 시골 새, 이솝우화를 쓴다면?

 
조홍섭 2012. 11. 16
조회수 4581추천수 1
 

도시는 소음, 스트레스, 위험과 함께 풍부한 먹이, 따뜻한 시선 교차하는 곳

잘만 적응하면 도시도 새들에게 살 만한 곳…소리 바꾸고, 성질 죽이고, 고양이 발톱 피하면

 

김진수.jpg » 도시는 새들에게 위험과 스트레스로 가득 찬 곳이지만 수도꼭지에서 물을 먹는 법을 배운 참새처럼 적응한 개체에겐 뜻밖의 좋은 서식지가 될 수 있다. 사진=김진수 기자
 
잘 알려진 ‘시골 쥐와 서울 쥐’ 동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시골 쥐가 먹는 초라하고 거친 음식을 불쌍하게 여긴 서울 쥐는 시골 쥐를 서울로 초대한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널렸어도 사람과 고양이 등쌀에 시골 쥐는 맘 놓고 먹을 수가 없었다. 시골 쥐는 ‘물질적 풍요보다는 마음 편한 삶이 낫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고 귀향한다. 정말 시골 쥐는 서울 쥐보다 살기가 나을까. 쥐는 어떤지 몰라도 새를 가지고 한 연구는 세계적으로 많다.
 

도시의 소음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바꾸어 놓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참새 노랫소리를 1969년부터 현재까지 비교한 연구 결과를 보면, 도시의 소음이 늘어남에 따라 새들의 노래에서 저음부가 사라지는 변화가 일어났다. 자동차 등 인위적 소음은 대개 저주파 형태를 띤다.
 

이곳의 참새 노래에는 3개의 사투리가 있다고 저명한 조류학자 루이스 뱁티스타가 1969년 밝힌 바 있는데, 30년 뒤에는 2가지로 줄었고 특히 시끄러운 도심에선 고음의 사투리로 노래하는 참새만 살고 있다. 새들이 주로 노래하는 아침 시간이 출근 러시아워와 겹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런던, 파리 등 유럽의 10개 대도시 안과 주변 숲에 사는 박새의 노래를 비교한 연구도 있는데, 소음에 적응해 도시 박새는 숲 박새보다 노래가 짧고 빠르며 높은 특징을 보였다.
 

blackbird.jpg » 유럽 도시에 널리 분포하는 검정지빠귀. 약 200년 전에는 숲에만 살았던 종이다. 사진=J.D. 이바네스 알라모

 

새에게 도시는 각종 스트레스로 가득 찬 곳이다. 소음뿐 아니라 사람과 개, 고양이의 간섭이 심하고 공기도 탁하다. 독일 연구자들은 숲과 도시에서 각각 태어난 검정지빠귀가 스트레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조사했다. 그랬더니 도시 검정지빠귀는 숲 친구에 비해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이 둔감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도시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인데, 만일 스트레스 호르몬이 계속 분비된다면 생식과 면역, 두뇌기능에 손상을 입게 된다.
 

그렇다고 도시가 새에게 해로운 곳만은 아니다. 도시는 시골보다 온화하고 먹이가 많으며, 사람들의 시선도 농촌보다 따뜻하다. 미국에서의 연구를 보면, 농촌과 달리 도시에선 포식자가 많아지더라도 새의 둥지가 털리는 피해가 늘지 않았다. 도시엔 고양이, 까마귀, 너구리 등 포식자가 득실거리지만 이들의 주 먹이는 새보다는 인간이 남긴 음식이었다.

뉴시스.jpg » 최근 우리나라 대도시에 부쩍 많아진 직박구리. 열매를 많이 맺는 조경수를 심은 환경변화에 적응했다. 사진=뉴시스

 

스페인 과학자들은 최근 도시 새와 시골 새는 포식자를 회피하는 행동에서 일관된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연구자들은 잡은 새를 손에 올려놓고 출신별로 반응이 어떻게 다른지 살폈다. 그랬더니 도시 새는 손가락을 쪼고 몸부림을 치는 등 포식자 대항행동이 시골 새보다 약했다. 도시가 농촌보다 포식압력이 낮다는 반증인데, 실제로 사람이 접근했을 때 도시 새는 시골 새보다 2배나 가까운 거리를 허용한다.
 

도시 새는 덜 공격적이지만 잡혔을 때 비명을 지르고 풀려날 때 경계음을 내는 비율은 높았다. 친척이 몰려 사는 도시 새들은 위험을 주변에 알리려 하기 때문이라고 연구자들은 설명했다.

또 도시 새는 잡혔을 때 기절해 뻣뻣해지거나 깃털이 뽑히는 비율이 높았는데, 이는 주요 포식자가 시골에선 맹금류이지만 도시에선 고양이이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죽은 척하거나 깃털만 몇 개 내어 주고 도망치는 자질을 가진 개체들만 도시에서 살아남은 결과이다. 결국 잘만 적응하면 도시는 새들에게 그리 나쁜 곳만은 아닌 셈이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Escape behaviour of birds provides evidence of predation being involved in urbanization
A. P. Møller a, J. D. Ibáñez-Álamo

Animal Behaviour. doi:10.1016/j.anbehav.2012.04.030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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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재개 해법, 박-문-안 '제각각'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2/11/17 09:52
  • 수정일
    2012/11/17 09:52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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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재개 해법, 박-문-안 '제각각'

[오마이공약-오마이뉴스가 묻는다⑩] 금강산 관광,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요?

12.11.16 10:21l최종 업데이트 12.11.16 20:51l
공약검증팀(endofwinter)

 

 

대통령 선거가 한달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여야 후보들의 공약들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0가지 물음을 던졌습니다. 집값, 의료비, 등록금, 일자리 등 일반 국민들이 삶속에서 가장 궁금해하는 것들입니다. 이번 <오마이뉴스가 던진 10가지 물음>에는 누리꾼들이 참여하는 공간도 마련했습니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명의 후보가 내세운 정책을 보시고, 좋다고 생각하는 후보에 '하트'를 보내주세요. [편집자말]
[공약검증팀 : 김종철 김시연 최지용 강민수/ 그래픽: 고정미]

지난 2008년 7월 11일 오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 총을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 관광 중단된지 4년이 되었다. 금강산 육로 관광객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붐볐던 '화진포 아산 휴게소' 넓은 주차장에는 금강산으로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던 미니버스 4대만 운행이 중단된 채 주차되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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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을 흐르던 혈관이 끊긴 지 4년이 지났다. 한반도에 뜨거운 피를 공급하던 금강산은 얼어붙었고, 개성공단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 서해에서는 수차례 큰 상처가 났다. 남쪽이 막힌 북은 압록강의 경계를 풀고 살 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관계는 '단절' 두 음절로 정리된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그 사이 북은 새 지도자에게 권력이 이양됐다. 남쪽의 대선 유력 후보 가운데 누가 됐든 인공호흡에 들어가야 한다.

금강산 관광은 남북교류뿐 아니라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의 상징이었다. 지난 1998년 여객선을 통한 관광에서 2003년 육로관광으로 전환된 후 2006년에는 관광객 100만 명을 넘어섰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내금강이 열렸고 2008년에는 승용차로도 갈 수 있게 됐다. 수차례 남북이산가족들의 상봉장소가 됐고, 남북 민간교류가 빈번히 이뤄졌던 곳이다.

2008년 7월 11일 관광객이 북한군의 피격에 사망하는 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 관광은 재개될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는 박근혜 새누리당, 문재인 민주통합당,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에게 "금강산 관광,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세 후보 모두 '금강산 관광은 재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 상징성과 필요성에 모두 동의한 것이다.

다만 재개 과정에 대한 입장 차이는 분명했다. 세 후보 모두 관광객 피격 사건에 대한 조치의 필요성을 밝혔지만, 박근혜 후보는 "북한 당국의 재발방지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고, 문재인 후보는 "피격사건의 조치가 필요하지만 선행조건은 아니"라고 밝혔다. 안철수 후보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북한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그 시점은 명확히 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치 상황에 영향 받지 않고 인도적 지원 계속"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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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뿐 아니라 다른 남북교류 사업에서도 세 후보는 각기 다른 형태로 적극성을 보였다. 박근혜 후보는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돼야 한다, 경제협력을 위한 대화는 일단 시작"이라면서도 "천안함 사태에 대한 사과 등 북한의 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사과가 있은 후에야 남북관계, 북한의 식량지원 등 대북지원을 전면 중단한 '5·24조치'를 철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후보는 보다 적극적으로 남북교류에 나설 태세다. 인수위 단계에서 특사를 파견에 곧바로 대화를 시작하고, 상호 신뢰를 회복한 상태에서 피격사건, 천안함 사태 등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문 후보는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를 재가동 시켜 남북경제협력을 제도화 시키고,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와 인천-개성공단-해주 삼각지대의 '남북공동경제자유구역' 추진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안철수 후보 또한 남북경제협력을 제도화 시킨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서해안과 동해안의 접경지대에 남북경제공동체를 건설해 개발하고 대륙으로 연결되는 철도연결사업을 핵심으로 제시했다. 다른 후보와 구별되는 특징은 남북공동영농을 통한 농업개발을 제시한 점이다. 또 남북파트너십을 기반으로 과학기술 발전에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답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안철수 후보의 공약집에는 북인권의 실질적 개선 공약도 담겨있다.

서울대 서보혁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한반도 문제에서 고려해야 할 상황을 국내, 북한, 국제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것은 북한의 반응"이라며 "그런 면에서 박 후보의 선조치 요구는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을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쪽이 높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문 후보와 안 후보의 정책의 경우 국내 보수적인 여론의 반발이 예상돼 정책 집행 과정에서 대내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 교수는 "남북경제협력 부분에서도 박 후보가 '경제공동체를 통한 작은 통일'을 이야기 했지만 다른 두 후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다"며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겠다는 것은 이전보다 진일보한 태도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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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安, 단일화 상식적으로 해결해야

文安, 단일화 상식적으로 해결해야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사람들 철저히 경계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11-17)


 

단일화를 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하라.

평범한 시민 1인이 인내를 거듭하며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야권 단일화를 지켜보고 있다. 참 지루하다. 짜증스럽다. 가끔은 화가 나기도 한다. 단일화가 그렇게 어렵나. 문제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해결책은 또 무엇인가 등등을 놓고 한 번 쯤은 생각해 봤을 사람들이 야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심정일 게다. 글쓴이 조차 단일화 방식 등에 대해 지나치게 시간을 끌고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답답함을 연출하고 있는 두 후보측이 안스럽다. 물론 단일화 과정이 오히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쏠릴 시선을 끌어당기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나치면 그러하지 아니함만 못한 법. 협상이란 반드시 적당히 끌고 당겨야 제 맛이 아니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적절한 협상(딜)이란 상호간 물리적인 힘 등이 형평을 이룰 때 가능할 것이다. 예컨데 골리앗과 다윗의 협상과 같은 설정은 애시당초 불가능 하다. 마치 새누리당을 개그당으로 비하시킨 격투기 선수 최홍만이 상대를 리듬체조 선수 손연재로 택한 격투기 시합 쯤이라고나 할까. 이런 설정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협상의 모습이 지. 실제할 수 없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 내부의 적 다윗과 골리앗의 차이점과 장단점은 뭔가

예컨데 최소한 최홍만의 상대는 추성훈 정도나 돼야 이벤트가 가능하지 않나. 덩치만 크고 파괴력 없는 최홍만과 덩치는 작지만 촌철살인의 무술을 보유한 추성훈 선수가 사각의 링 위에서 일전을 벌인다고 가정하면 사람들의 호기심 정도는 살 것이다. 실제로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스스로를 일컬어 다윗에 비교하며 민주당(문재인 후보)측을 골리앗에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 후보가 비유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다룬 바이블에 따르면, 투구와 갑주로 무장한 골리앗이 바지 저고리만 걸친 어린 목동 다윗에 패하게 된다. 다윗에게는 양들을 늑대무리들로부터 보호할 때 사용하던 '돌팔매'를 지닌 돌팔매 선수인 데, 자신을 하찮게 본 골리앗에 대항한 다윗은 돌팔매질 한 번으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된 것이다. 투구 사이에 드러난 골리앗의 이마(헛점)를 정확히 가격해 쓰러뜨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현실에 적용되기란 결코 쉽지않다.

헛점은 있을 망정 기득권을 쥔 골리앗이 총명한 다윗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골리앗과 다윗의 협상이 안 되는 이유가 분명하며 또 골리앗이 굳이 협상을 할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어쩌면 골리앗으로 대변되는 민주당이 이길 것 같은 총선에 패한 것처럼 대선에 패한다고 해도, 그들은 전과 같이 적당히 사람들을 기망해 가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을 그냥 지켜볼 수 없다는 게 다윗의 입장이자 다윗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입장이다. 그렇지만 대통령 선거에는 골리앗과 다윗이 동시에 출마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할까. 상대는 치마만 두른 여자로 소문나 있고, 부정부패와 권력맛에 찌들대로 찌든 독재자의 딸이다.

따라서 여러 경우의 수 중에 안철수 후보가 늘 주장하던 '상식(상식파)'에 따라 단일화 협상에 접근해 보면 이런 모습이다. 결혼을 하신 분들이라면 공감하실 '연애와 결혼'의 차이이다. 그게 어떻게 다른 지 등에 대해 다룬 샘플 하나를 채취해 봤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 부인 김정숙 여사의 담화를 실은 <나는 딴따라다-시즌 2, 3회>에 실린 내용이다. 매우 평범한 듯 한 내용이지만 욕심을 버리고 보면 바이블 이상의 교훈이 생활 중에서 체득된 귀한 내용으로, 요즘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는 야권후보 단일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문재인 후보 부인 '김정숙 여사'의 담화 중에서

"...이런 질문을 저번에 한 번 받았어요. 그랬는데.(네) 어쩌면 당신은 문재인씨 같은 사람을 무슨 기술이 있어서 만났습니까.(하하하) 이런 이야기를 해서 제가 일언지하에...(이뻐서) 아뇨. 지금의 문재인은 내가 만들었다.(짝짝짝...박수 터져나옵니다 (스튜디오)바깥에서) 그리고 지금의 나도 문재인씨가 만들었다. (아...감탄)결혼이라고 그러는 것은 남녀가 짜릿하게 만나서 정주고 이런 그런 것들은 한 일 이년, 이 삼년, 오래가면 오 년(정도) 갈 수 있지만, 결혼을 했을 때 것은 사람의 삶이거든요.(네)

그 삶에는 신뢰가 있어야 하고 노력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을 잘 추켜줘서 장점을 장점으로 살리는 그게 있어요. 그럴 때에는 내가 나 보다 그 사람의 장점을 키워줄 때는, 내가 옳지않을 때는 그 사람을 키워주는 거죠.(네) 그리고 내가 좀 위태롭고 힘들 때, 그 사람 한테 나는 사실은 본심은 이런 데 하며, 그 사람이 나를 알게 됐을 때 또 나를 위로해 주면서 키우거든요.(네) 그래서 자매지간도 엄마 아버지도 엄마 딸도 맨날 싸우는 데. 남의 가정에서 (다른)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이 싸우거든요.(네) 그런데 그랬을 때 접점이 마련되면서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데, 내가 어디까지 지켜줄 수 있는 데(네) 이러면서 커 가는 게 가정인 거 같아서...<하략>"

 


연애와 결혼은 어떻게 다른가

위 샘플은 안철수 후보 측에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안 후보 부인의 담화가 이렇게 정리된 걸 찾지 못해 두 개를 싣지 못했다. 그러나 두 후보 다 국민적 신뢰를 받고 있는 분들이어서, 어쩌면 평범하고 상식적인 부부상에 대해 공감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위 자료는 연애와 결혼의 차이 내지 결혼을 하게 되면, 두 당사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야 올바른 가정을 영유할 수 있는 지 등에 대해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글쓴이는 이 샘플을 두 후보의 단일화에 적용시켜보고 싶은 것이다.

문 후보의 부인 김정숙여사는 (대통령 후보가 된 남편 때문에)자신을 부러워 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지금의 문재인은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 뜻을 잘못 곡해하면 김정숙 여사의 품격은 금방 곤두박질 칠 게 틀림없다. 문재인을 김여사가 만들었다고?...그러나 김 여사를 만든 당사자가 또 문재인이다라는 데 공감하면 바람직한 부부상이 어떤 지 쉽게 공감할 거 같다. 그런 이유에 대해 김 여사는 매우 편안한 경험을 제시하고 있었다. 연애와 결혼 내지 결혼 초기의 부부 모습과 결혼 후에 부부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가 뭔가

예컨데 연애를 할 때 또는 결혼 초기 때는 "남녀가 짜릿하게 만나서 정주고 이런 그런 것들은 한 일 이년, 이 삼년, 오래가면 오 년(정도) 갈 수 있지만..."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연애 당시와 결혼 초기에는 이성적 판단 보다 감성적 판단에 충실하다는 거다. 과학자들은 인간들의 이런 행위 등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2세를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 쯤으로 생각하고, 보통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대해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표현을 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애나 결혼 초기의 모습은 주로 이러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집안 다른 환경(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자와 여자는 결혼에 이르기까지 적지않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지고지순하고 또 허접하며 또 비극적이거나 기적적이며 환상적이자 절망적인 상황 따위를 동반하는 지 등등. 드라마 작가들은 거의 매일 이런 모습을 시나리오로 만들어 안방극장에 재연 시킨다. 그 주제가 주로 연애나 사랑이며 결혼 따위의 갈등을 다룬 주제다. 또 그 주제 속에는 반드시 삼각관계가 등장해야 극을 재밌게 연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허구이며 소설이자 현실이 아니다.

사실은 김 여사가 담화에서 주장한 내용과 별로 틀리지 않다. 같은 이유로 김여사가 말한 결혼 후의 모습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며 현실적 삶에 있어서 부부는, 문재인 후보의 부부나 안철수 부부의 부부상이 매우 바람직 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간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관계 설정이 있어야 건강한 가정이 영위된다는 점이다. 만약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의 두 부부 중에 이런 과정을 소홀히 했다면, 오늘날 대통령 후보라는 실로 막중한 권리와 책임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방법은 없나

이런 모습에 대해 옛 사람들은 일찌감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사용하며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신(修身)'의 과정을 통과 하도록 순서를 정해놓고 있다. 그게 김여사가 담화에서 말한 연애와 결혼의 차이점인 것이다. 수신을 통해 안정된 가정(齊家)을 가질 수 있으며 안정된 가정 속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治國平天下)이 나옴은 분명한 이치이다. 그 시작은 연애이며 결혼인 데 요즘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는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런 과정에 대입해 보면, 결혼을 눈 앞에 둔 두 남녀 같은 모습이다.

누가 남자인 지 여자인 지 역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 후보나 안 후보는 최소한 대한민국의 유권자 절반 이상이 지켜보고 있는 크나큰 축복 속에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두 사람이 평소 열애를 하고 있었으면 김여사가 지적한 '짜릿한 쾌감'을 동반한 결혼에 이를 것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평소 열애를 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등을 떠밀려 '중매결혼' 같은 과정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오늘날 야권 후보 단일화를 앞 둔 불협화음의 정체로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김여사의 담화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는 데 김여사는 그 과정을 "남의 가정에서 (다른)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이 싸우거든요"라고 말하며, 서로 다른점을 이해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나 보다 그 사람의 장점을 키워줄 때는, 내가 옳지않을 때는 그 사람을 키워주는 거죠."라고 말한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나가는 것이다. 이 모습이 김여사가 말한 '내가 문재인을 만들었다'는 주장사실이다. 이런 과정은 결혼을 한 부부가 "사실은 본심은 이런 데 하며..." 속 마음을 털어놓고 상호간의 의견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문재인 후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까지 겪은 비하인드스토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요즘 야권 후보 단일화를 앞 두고 불거진 불협화음의 속에는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그 문제를 몇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중매결혼을 앞 두고 양가 부모가 두 약혼자와 한 곳에 모여 "결혼 할래 안 할래" 또는 "결혼 언제 할 거야" 또는 "좋으냐 싫으냐,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느냐" 등등 약혼자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습이다. 또 어떤 약혼자는 자기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제3자를 통해 입장을 전달하고 있는 모습이다. 결혼 이렇게 하면 200% 실패한다. 특히 중매결혼에 있어서 피차간의 유불리를 따져가며(이른바 머리를 굴려가며) 결혼에 이르면 그게 행복한 결혼으로 이어질까.


따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말하라

그래서 현명한 어른들이라면 결혼을 앞 둔 두 사람이 함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만들어 주거나 ,두 사람 만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 이른바 '솔직토크'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실은 본심은 이런 데 하며..." 두 사람간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그 과정을 제3자에게 위탁해 놓고 보니 끝말 잇기처럼 본심과 다른 상황이 자꾸만 연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은 "쟤가 반칙을 한 데요."라고 말하고 "반칙 안 했는 데요.반칙했으면 사과 드립니다."라는 것과 다름없는 해프닝을 통해, 이제나 저제나 어부지리를 얻고자 하는 새누리당으로부터 파경신호를 연출하게 만드는 것이다.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바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피차간에 문제를 안고있다. 한 사람은 구태정치의 헛점을 노출시킨 골리앗이며 또 한 사람은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 해도 현실정치를 가능케 해 줄 조직이 전무한 다윗이다. 단점이다. 그러나 '주부 김여사'가 체득한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의 장점을 결합하면 최상의 시나리오가 탄생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프트웨어가 부실한 컴퓨터에 짜임새있는 소프트웨어를 부착하는 것 또는 그 반대의 융합을 통해 장점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그렇게 탄생하는 게 야권 단일화 후보이며, 이름하여 '골리다윗'이라는 정치개혁 프로그램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완성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되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라는 거다. 비공개 장소에서 뽀뽀를 하던지 스킨십을 나누던지 고성을 지르든지 의견차를 보완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반드시 단일화 이후의 상황을 약속할 수 있는 신뢰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길게 끄적일 필요도 없건만 우리 정치판이 안고있는 문제들은 간단한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같이 망하는 공멸을 택하지 않고 상생의 묘가 필요하다면 민주당은 (실질적인)전권을 문재인 후보에게 맡기고, 안철수 후보로 대변되는 '약자의 항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게 옳은 거 같다. 천재와 바보의 차이에 대해 누군가 말했다. 천재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하고, 바보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 자료사진은 경남도민일보(갱상도 해딴에) 주최 팸투어에서 촬영한 합천영상테마파크의 모습일 뿐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합의 도장 찍어라

요즘 야권의 두 후보가 해내야 하는 단일화 모습을 보니 단순한 걸 꼬이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의 고질병인 '대통령'이라는 직함 등 권력을 향한 욕심 때문이다. 김여사가 말한 것처럼 나라살림도 가정과 다르지 않아서 집안의 가장이 가부장적인 판단으로 전권을 가지려 든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며, 성숙한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 남편과 아내가 가사를 분담하는 효율적인 가정을 꾸린다면,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게 만드는 행복한 가정 건강한 나라가 될 걸로 확신한다. 아울러 안철수 후보는 '정치인 문재인'의 모습 보다 단일화 이후 장차 나라살림을 함께 할 문재인 개인과 가정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

민주당이나 새누리당 모두 구태정치에 물들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 한 사람 내지 그 가정의 모습을 살펴보면 안철수 후보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인 개혁정치가 전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때마침 포스트를 끄적이고 있는 시간에 김정숙 여사의 근황이 보도됐다. 민주통합당 대전선대위 민주캠프와 시민캠프에 참여한 김 여사는 "문재인의 힘은 책임감, 착한 마음, 따뜻한 카리스마"라고 말했다. 문재인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의 증언이다. 이런 모습은 안철수 후보도 다르지 않다는 판단이 든다. 길게 끄적였지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무조건 '두 사람이 따로 만나라'고 주문하고 싶다. 따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단일화 과정과 이후의 과정에 대해 논의하고 그 결과를 공표해 주시기 바란다. 경우에 따라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옵션(문서를 주고 받는 것)을 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두 사람이 어떤 역할을 통해 다 썩어빠진 대한민국의 정치판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더 중요하다. 그 내용이 후보 단일화 속에 담겨야 한다. 민주.개혁세력이 연애하듯 몇 년간만 집권 할 게 아니다. 따라서 눈 앞에 보이는 5년 임기의 대통령이 아니라 대대손손 나라와 민족을 친일.숭미 외세에 내맡기고 휘둘린 수구보수세력에게 내주지 않는 장기적 전략을 짜야한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사람들을 철저히 경계하는 것도 잊지말기 바란다. 상대는 결혼을 한 경험도 없고 출산을 해 본 경험도 없는 그야말로 '치마만 두른 여자'일 뿐이다. 수신은 물론 제가의 기초부터 안 된 여자인 것이며, 부정부패와 권력맛에 찌들대로 찌든 독재자의 딸로 인식된 유신독재의 아이콘이다.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가 힘을 합치면 누가 나서도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욕심을 버리고 상식선에서 두 후보간의 역할을 조율하시기 바란다. 그게 당신들의 후보 단일화를 눈여겨 보고있는 국민 1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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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회'를 발명하라]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강연

안은별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1-16 오후 6:42:05

 

2008년 말부터 조금씩 볼륨을 키워 온 자본주의의 파열음이 보수적 경제학자·관료의 입에서도 메아리 칠 정도로 커졌다. 수많은 광장에서 유례없는 봉기가 일어나 이 파열음에 화답했지만 '자본주의 이후'를 내다보게 하는 조직적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지금 이곳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무덤 파는 이들"이라 기대됐던 이들조차 위기라는 진단 속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주의'는 오랫동안, 일부에겐 금기어 일부에겐 그저 이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새로운 사회의 재구성을 위해 돌아가야 할 자리는 아마 그곳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한반도의 특수한 사정과 결합된 특정한 연상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전에 경험한 적 없는 사회주의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이자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인 장석준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가시적인 실체로 나타나는가. 오랫동안 우리는 그것을 '국가'라고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기업의 횡포에 맞서 국유화가 답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장석준에 따르면 '국가 사회주의'를 벗어나는 가능성이 존재하며, 우리는 거기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이미 100년도 더 전에 누군가 그 길을 걸었으며, 역사책이란 분명한 증거를 남겨 놓았다고 한다.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상상력과 용기를 위해, 장석준은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G. D. H. 콜 지음, 김철수 옮김, 장석준 감수, 책세상 펴냄)를 힌트로 제시한다.

이 책은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발한, 근대적 의미의 노동자가 최초로 탄생한, 그래서 그 운동사 역시
세계에서 가장 긴 영국의 사례를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던 콜의 눈으로 집중 조명한다. 본문만 600쪽 이상인 방대한 양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의 곡절이 지금 정체에 빠져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진보 진영에 던지는 질문이 무겁기에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기업별·산별 노조를 뛰어넘는 형태의 노조는 어떻게 가능할까. 왜 우리의 노동운동은 협동조합운동, 정치운동과 만나지 못하고 '노동조합 운동'에 그쳐 왔을까.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

'프레시안 books'는 이 책의 감수자인 장석준 그리고 스무 명의 독자들과 함께 이 책을 '미리 읽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달 24일과 31일 양일 총 5시간에 걸쳐 진행된 장석준의 영국 노동 운동사 강연을 지면 중계한다. 분량은 길지만, 모든 이슈가 '대선'에 빨려드는 현재, 결국 중요한 것은 대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만들어나가야 할 새로운 사회라는 사실에 공감하는 독자에게는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편집자>


지금 왜 영국 노동운동사를 읽는가?
 

▲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조지 더글러스 하워드 콜 지음, 김철수 옮김, 장석준 감수, 책세상 펴냄).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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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운동의 역사>가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선보인 것은 1980년의 일입니다. 시절이 시절이다보니 운동하는 심정 아니었으면 내기 힘든 책이었지요. 이 발행 연도는 신군부의 집권과 광주항쟁이 일어난 해와도 일치합니다. 광주를 목격한 노동운동 세력에게도 이념적 무기가 절실해졌던 때였지요. 그로부터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운동 일선에서 다시 '사회주의'가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한국의 운동권들은 이론적으로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를 주로 따르면서 거기서 벗어나 있는 사상들은 주변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책도 잊혔습니다.

2012년, 이 책을 다시 펴낸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요. 2008년 말부터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데, 그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노동운동 역시 자본주의와 함께 위기에 빠진 답답한 상황이죠. 그런 차원에서, 지구상에서 노동운동의 역사가 가장 긴 나라인 영국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뜻이 깊습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노동자가 이 나라에서 처음 등장했으니까요. 그 역사가 길고, 드라마틱한 국면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를 시발점으로 해서 세계는 신자유주의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그 압박을 고스란히 떠안은 민중들이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아큐파이(Occupy) 운동을 벌였습니다. 우리 삶을 우리 것으로 되찾겠다는 의미죠. 이 운동은 도시 중심의 광장을 점거해 무기한 농성을 벌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과연 광장을 점거한다고 자본주의가 '점령' 될까요? 전 이 운동의 출발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어떤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점령할 게 있는데 아직 점령하지 못 한 거죠.

리처드 울프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점령이 '아큐파이 프로덕션(Production)'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가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현장인 생산의 현장을 점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수행하는 조직은 무엇이죠? 기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어떻게 점령할 것인가 입니다. 또, 그것이 지속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겠지요. 커다란 숙제입니다.

예전엔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던 정답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유화입니다. 노동 계급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대자본을 가진 기업을 점거해 국가의 것으로 만든다는 시나리오입니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지요.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다시피 이 시나리오가 실현된 곳도 있지만 대체로 그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자본가가 앉아있던 자리에 당에서 임명한 사장이 앉는 것으로 바뀐 정도라고 할까요. 이게 과연 현재 우리의 핵심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장석준. ⓒ프레시안(최형락)

국가 사회주의라는 노선

오늘 이야기하려는 G. D. H. 콜(1889~1959)의 사상이 우리에게 힌트를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콜은 단순히 운동사의 서술가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국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가이자 운동가이기 때문에, 책의 어조나 문체가 그다지 태평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 삶을 살펴보는 것은 책 자체의 파악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길드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했고, 길드 사회주의의 이룩을 평생의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100년 전부터 논의된 사상이지만 우리에겐 생소합니다. 길드 사회주의는 무엇이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어렵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시작하죠. 자본주의는 무엇이 주인 되는 사회인가요? 자본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인은 어떤 가시적인 조직체로 나타나죠? 기업과 은행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경우, 그 요체를 '사회'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실체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국가'는 100년 이상 넘게 이어진 전가의 보도 같은 정답이었습니다. 국가는 기업이나 은행처럼 너무나 뚜렷하게 체감되는 조직체이지요. 남자 분들이라면 병역 통지서를 받고 그것을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웃음)

그런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궁극적으로 이뤄야 할 사회에 대해 뭐라고 표현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었습니다. 실제로 깊이 들어가면 국가를 시민 사회의 대안으로 내세웠던 헤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는 게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국가는 '사회'에 의해 다시 흡수되고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측면이 더 많은 무엇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런 이야기도 하죠. 노동자 계급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국가 권력을 먼저 장악해야 한다고요.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종합되어 있는 게 마르크스 이론의 특징이고, 사람들은 이걸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사회주의를 꿈꾸면서도 자본을 대체할 실체적 조직을 떠올리는 데 모호함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정돈된 교과서처럼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이, 그들의 사상이 다른 사회주의 사상에 비해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보편적인 사상으로 정착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겁니다.

문제는 그 후계자들이 노동운동과 좌파 정당 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편향입니다. 국가를 극복한, 국가 없는 인민들의 연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상은 책 안에 남아있게 되고, 실제 역사에서 마주친 것은 거의 다 '국가=사회주의'였던 것이죠.

이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 노선, 하나는 현실사회주의 노선입니다. 전자는 이른바 보통선거 제도를 쟁취한 노동자들이 선거에 참여하고, 그를 통해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사회를 대변'해 자본을 압박하는 시나리오로 나타납니다. 다른 하나는 보다 강력합니다. 혁명이란 방식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기존의 국가기구를 분쇄해버리고 새로운 국가기구를 건설하죠. 필연적으로 폭력이 수반됩니다. 역사 속에서 소련과 중국이 갔던 노선이지요.

위의 두 흐름은 실제론 굉장히 다르지만, 한 가지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야기했던 자리로 돌아가 보자면, 그것은 '국가'를 통해 '사회'라는 것에 접근하려 했던 점이지요. 사회 그 자체가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국가를 통해 발언하게 된다는 점에서 같다는 얘기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20세기를 지배했던 사회주의는 국가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의 '사회'가 곧 국가라는, 등치 관계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에 따른 실천들은 엄청난 한계를 노출시켰습니다. 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전자, 즉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한 곳에서는 복지 국가를 만드는 성과를 이뤄내긴 했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를 극복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근본적인 성찰과 재출발이 요구됩니다. 과연 국가가 오롯이 사회를 대변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윌리엄 모리스의 힌트

▲ 윌리엄 모리스. ⓒwww.marxists.org/archive
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중요한 인물을 짚고 넘어갑시다.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도 영향을 준 인물, 영국의 공예가이자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1834~1896)입니다. 모리스는 사실 사회주의자가 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직접 공방을 운영하는 자본가였으니까요. 그는 존 러스킨 같은 미학자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중세의 장인들이 공들여 만든 수공업 작품들이야말로 진정한 미를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게 사라지고 없는가', '어째서 당시의 노동이 지금은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이 타들어가는 과정에서 부딪힌 문제가 당시 그가 살고 있던 영국의 산업 자본주의였던 겁니다. 그는 그가 '미'라고 상정한 세계를 대중들이 향유하게 되려면 반드시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되어간, 독특한 사람입니다.

당시(1880년대) 영국에는 사회주의자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때 유명한 디자이너이자 중소기업의 사장이나 되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지요. 그리고 그는 단순히 이슈만 되었던 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세계에 들어와 독창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기 시작합니다. 모리스가 왜 예술가에서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삶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100년 후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파머 톰슨(1886~1946)이 쓴 <윌리엄 모리스>(윤효녕·엄용희 옮김, 한길사 펴냄)에 잘 나와 있습니다.

모리스에 관해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 사람은 현 사회를 '이른바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얽혀있는 모습 자체는 사회인데, 사회라고 부르기 찝찝한, 금방 해체될 것만 같은 혹은 해체되는 와중에 있는 사회라는 의미입니다. 무한 경쟁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협력 관계가 아닌 서로 내리눌러야만 하는 관계가 되기 때문에 '사회'라고 제대로 부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사회'가 진짜 '사회'가 되는 그 순간이, 사회주의가 목표로 해야 할 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그가 말하는 '진짜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모리스에 관해 두 번째로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그 역시 경제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의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것은 바로 '도덕적 변혁'이었습니다. 모리스가 말하는 도덕적 변혁이란, 새로운 사회의 주역이 되어야 할 노동자 민중들이 스스로 자신이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자본주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해 위에서부터 사회를 뜯어고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반드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이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변혁하는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경쟁의 사회관계가 아니라, 협력의 사회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개인들더러 옆에 있는 사람과 인간적인 정을 나누도록 해라, 협력의 사회관계를 맺도록 해라, 라고 하는 데 그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걸 받쳐줄 수 있는 조직적인 틀을 제시해야만 하겠지요. 모리스는 그 답을 완전히 제시해 주지는 않았지만, 묘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교과서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어받아서, 물질적으로는 더 발전된 기업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윌리엄 모리스는 그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발전된 어떤 유산들을 활용하되 그것이 반드시 다른 것과 결합해야 한다고 봤어요. 그것은 '중세의 생활양식', 즉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의 생활양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미래와 과거가 합쳐져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자 한다면 <에코토피아 뉴스>(박홍규 옮김, 필맥 펴냄)라는 책을 참고하십시오. 유토피아를 다룬 '소설'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미래인 20세기에 등장한 어떤 사회를 다루고 있는데, 이곳은 농촌과 소도시가 결합한, 마을 중심의 자치가 이루어지는 전원 사회입니다. 이것이 국가와 기업을 대체하여 '사회'로서 기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페이비언 협회와 콜

윌리엄 모리스의 이러한 착상과 원칙들이, 콜과 그의 길드 사회주의 사상에 들어서서 좀 더 구체화됩니다. 콜은 경제학자이자 정치·사회학자이며 역사학자이고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운동가입니다. 게다가 저명한 추리 소설 작가이기도 했으니, 전형적인 르네상스적 인간이었습니다.

그 역시 모리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가 되기 쉽지 않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좌파나 노동운동과는 상관없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거든요. 아버지 조지 콜은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보수당원이자 국교회 신도였습니다. 콜 역시 영국 사회에서 부유한 집안의 똑똑한 아들이 밟는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으며 성장했습니다. 명문 세인트 폴 학교에서 10대를 보냈고, 1908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베일리얼 칼리지에 입학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소위 '의식화'될 수 있었던 데엔 모리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내가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부와 빈곤, 지배와 종속이라는 쌍둥이 죄악에서 벗어난 평등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접하면서 이런 사회만이 인간의 존귀함과 동료애에 부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회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윌리엄 모리스가 상상한 사회는 내게 인간관계의 올바른 형태를 구현한 것으로 보였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존경할 만한 것으로 다가왔다."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해제 중, 본문 707쪽)

알려져 있다시피 옥스퍼드 대학의 학풍은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그 속에서도 콜은 옥스퍼드 대학 페이비언 협회(Oxford University Fabian Society, OUFS)라는 사회주의 서클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영국의 유서 깊은 사회주의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는 그 이름고대 로마의 파비우스 장군에서 따 온, 혁명이 아닌 점진 개혁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자는 전략을 가진 모임이었습니다. 뒤에 버티고 숨어서 한니발의 군대가 지칠 때를 기다리는 '만만디' 전술이 파비우스 장군의 전투 방법이었거든요.

이 협회를 만든 인물은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 즉 '웹 부부'라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도 결합합니다. 이들은 협회를 만들면서 <페이비언 논집>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걸 보면 그들의 주장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 사회주의입니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나아가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는 기존의 국가 기구에 새로운 세력이 진출하여 그 기구를 통해 정책을 펼쳐나가면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봤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조류 가운데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고, 실제로 영국 노동당은 이 노선에 의해 100년간 움직여 왔습니다.

▲ 비어트리스 웹과 시드니 웹 부부. ⓒwww.thinkinghousewife.com

콜이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이미 페이비언 협회원들은 시의원이나 시장 등의 직책으로 지자체에 많이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시 정부도 내각 책임제였고, 이들 가운데는 노동당이 아닌 자유당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19세기 후반 시 정부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에 민간 기업이 장악하고 있던 상수도, 전기, 가스 등 생활 필수 공공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국유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것을 '지방자치 사회주의', '가스와 수도관의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이 시절로서는 실로 커다란 진보였고, 그런 권위 때문에 콜 역시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했을 거라고 봅니다.

생철학과 생디칼리즘

그런데 젊은 콜과 그의 친구들은 점점 페이비언 협회와 생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시대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1889년에 태어난 콜이 대학에 진학한 1900년대 말은 '벨 에포크'라 불리는, 1차 세계대전을 몇 년 앞두고 전개된 자본주의의 최 전성기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지성계에서는 그러한 물질적인 번영에 회의를 가지고 인간의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상 사조가 물결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뿐만이 아니라 페이비언식 사회주의가 전제하는 19세기 식 실증주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감을 의미했고, 이러한 반(反) 실증주의 이념과 정서는 특히 젊은 좌파들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발휘했습니다. '약동하는 생'을 강조하는 베르그송의 생(生) 철학이 유행했고, 그 제자 격이라 할 수 있는 조르주 소렐(1847~1992)의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혁명적 노동조합주의 사상이 이런 사조를 좌파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의 페이비언 식 사상과는 다른 좌파 사상을 만들고자 하는 조류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지적 흐름에 대해서는 스튜어트 휴즈의 <의식과 사회>(황문수 옮김, 개마고원 펴냄)를 참고하길 바랍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앞서 페이비언주의는 국가 사회주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국가 사회주의에는 전통적인 경쟁 상대(?)가 있지요. 바로 아나키즘입니다. 아나키즘은 자본보다도 국가를 오히려 더 때려 부수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요. 하지만 아나키즘 역시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주인 되는 세상을 지향하는데요. 그렇다면 사회는 어떤 주체로 나타나야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아나키스트들은 별 대답을 내놓지 못했어요. 물론 크로포트킨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강의 진행을 위해 비약을 허용한다면 이쪽도 결국 모호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반 실증주의 사조를 좌익에 전파시키는 역할을 했던 조르주 소렐은 사실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한 발 나아갔지요. 소렐의 시대는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이 막 발전하고 있는 시대였고, 소렐이 활동하는 프랑스 노동조합은 유럽의 다른 어떤 노조보다 전투적이었습니다. 그는 "국가는 아니다. 그럼 사회를 대변하는 역할은 누가 해야 하는가? 바로 조직화된 노동자 자신이라는 의미에서의 노동조합이다"라는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노조가 우리나라 식의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직업별 노조, 혹은 조금 더 현대화되고 거대화된 형태의 산업별 노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렐은 노조가 자본주의와 싸우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봤고, 그래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핵심적 수단은 총파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의 총파업은 시한이 있고 어떤 한정적인 요구를 내거는 그런 파업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그야말로 '총파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무너진 현장에서 사회를 작동시켜야 할 것은 좌파 정당의 사회주의자 정치인이 아니라 노조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의 흐름 중 하나인 생디칼리즘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앞서 설명 드린 ①국가 사회주의 ②아나키즘과 함께 ③번으로 매겨 봅시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운동권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주로 ①번입니다.

아무튼 이런 사상이 전개되던 당시 콜은 젊은이였고, 비록 그 출발은 페이비언이었지만 윌리엄 모리스가 꿈꾼 세계를 연상하면서 ①에 문제의식을 갖고 ③과 같은 새로운 사상에 끌리게 됩니다.

"원 빅 유니온"

이 당시 콜과 그의 동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단순히 사상만이 아니었고, 중요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때는 1912년, 그는 스물세 살, 대학 마지막 학년 때였겠지요.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에도 한 챕터에 걸쳐 묘사되는 이 시기는, 우리로 치면 1987년 같은 시기였습니다. 6.29 선언 이후 울산에서부터 자발적인 파업이 벌어졌고, 7~9월 석 달에 걸쳐 노조가 없는 곳에선 노조가 만들어지고 어용 노조가 있던 곳에 민주 노조가 들어서는 등 노동운동의 출발이 이루어졌는데요. 영국의 경우 1912년이 바로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노동조합이 등장하여 아주 강력한 파업을 펼치면서 온 나라를 흔든 해입니다. 이 무렵엔 영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탈리아, 벨기에, 러시아 곳곳-도 들썩였습니다. 특히 이탈리아는 거의 폭동으로까지 발전했는데요. 그 2년 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더 길게 지속되고 더 커다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1차 대전에 각국의 내부 계급 투쟁을 잠재우기 위한 측면이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sittingdownforsomething.wordpress.com
이 시기를 '레이버 언레스트(Labour Unrest)'라고 합니다. 이 책은 '노동 불안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시기 젊은 콜도 옥스퍼드에 있는 버스 노동자 등이 파업을 감행할 때 직접 결합해서 싸웁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콜은 더욱 성장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생디칼리즘 사상뿐 아니라 어떤 운동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세계 산업 노동자 연맹(Industrial Workers of World, IWW)의 운동인데요. 이는 현대적 의미의 대규모 산업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시발점이 된 운동입니다.

그 전까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의 노조 형태는 우리가 떠올리는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 '직업별' 노조였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과 비슷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직업 협회 비슷한 형태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을까요? 철도 산업을 예로 들어 봅시다. 철도 노동자를 아우르는 노조가 아니라 기관사 조합, 화부(火夫) 조합, 승무원 조합이 있고, 교섭도 파업도 다 따로 하니까 단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이 발전하면 할수록 어떤 '기술적 정체성'을 갖지 못한 미숙련 노동자들, 즉 며칠 단위로 어떤 공장에 '픽업' 되어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소외됩니다. 특정 기술을 요하는 노동자들의 조합이라면 똘똘 뭉쳤을 경우 자본가들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와서 할 수 있는' 노동이라면 대항력이 없으니까요. 이런 사람들이 마치 현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 바깥에 존재하듯 직업별 노조 외부에 포진하게 된 겁니다. 다수의 미숙련 이주민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던 미국의 경우 이 한계가 더 심각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IWW 운동은 '원 빅 유니온'이라는 구호를 내겁니다. 섬유 노동자 따로, 금속 노동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노동자 안에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나라의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노동조합' 안에 다 조직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사실 그 목표는 나아가 나라 바깥의, 전 세계 노동자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월드(World)가 붙은 거고요. 여담이지만 이 운동의 가장 열렬한 대변자 중 하나가 바로 사회주의자로 성장한 성인 이후의 이야기는 위인전에 등장하지 않는, 헬렌 켈러입니다.

프랑스에서 촉발된 생디칼리즘과 미국의 IWW 운동이 만나게 되면 굉장히 많은 상상력이 촉발될 수 있습니다. 동시대에 두 가지 흐름을 목도한 콜은 머릿속에서 둘을 결합시키게 됩니다. 실제로 결합되면 어떤 불꽃이 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와중에 1차 대전이 터졌고, 어느 나라든 국내 투쟁은 소강 상태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었고요. 사실 콜도 군대에 끌려가기 좋은 나이였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징집에서 면제됩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던 안토니오 그람시 역시 척추 장애 때문에 목숨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길드 사회주의에 주목하다

당시 콜이 주목한 것이 앞서 말씀드린 '길드 사회주의'입니다. '길드'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중세 시대 유럽에 존재했던 수공업자들의 조합이죠. 자기 기술을 갖고 먹고 사는 수공업자들은 반드시 그 도시에 있는 수공업자 조합에 가입을 해야 했습니다. 거기엔 도제-직인-장인이라는 엄격한 위계가 존재했습니다. 훈육을 거쳐 마지막으로 장인이 되면,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영자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지금과는 다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위계는 분명했고, 말 그대로 봉건적 위계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어떤 인간적인 관계가 있었던 거죠.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지만, 길드 사회에서는 다 같이 책임을 졌던 겁니다. 무엇보다 길드 사이에서는 자본주의에서 기업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길드 사회주의를 처음 주장한 사람이 윌리엄 모리스의 제자였던 아서 펜티라는 사람입니다. 펜티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사회는 자본주의의 유산을 일정하게 이어받으면서도 자본주의 이전의 어떤 질서, 전통, 자원과 결합해야 한다'는 모리스의 착상을 이어받아 자기 나름대로 구체적인 제안을 내놨습니다. 길드를 되살리자는 이야기였지요.

생디칼리즘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생디칼리즘에서 상정하는 것은 현재의 산업 질서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지금 존재하는 노조'였습니다. 펜티가 얘기하는 조합은 자생적인 조직이라기보다, 중세 길드를 되살리는 방향의 인위적 변혁을 필요로 하는 조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드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생산과 시장 유통의 전반적인 과정을 통제하고 이윤을 나누자는 것이었는데,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맡았던 경제를 움직이는 기본 단위 역할을 길드가 맡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전히 모호하긴 하지만 모리스의 생각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된 이 구상에 S. G. 홉슨과 A. R. 오레이지라는 사람이 감응을 했고, 이들이 <뉴에이지>라는 잡지를 창간합니다. <뉴에이지>는 길드가 자본주의의 기업을 곧바로 이어받아 도시 수준에서 진행될 게 아니라, 전국 단위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꽤나 야심찬 이야기를 했는데요. 전국 단위의 각 산업 길드를 조직하여 '길드 의회'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서로 소통하고 합의를 하게 된다면 국가의 기존 관료 기구를 폐지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어떤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까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즉각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 길드란 것은 무엇을 중심으로, 어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가? 생산 현장을 중심으로, 생산자·노동자들이 만드는 것일 터다. 그렇다면 '소비자'의 이해는 어디에 있는가? 생산자와 소비자는 같은 사람일 수도 있는데! 이 조직체를 통해서는 '생산자로서의 민중'의 이해만이 대변될 수 있다. 소비자로서의 이해는 사상될 수 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소비자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콜과 동지들은 펜티 유의 주장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론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드러난 문제에 대해서는 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대의 길드 사회주의가 등장하게 됩니다.

콜은 1915년 웹 부부가 이끄는 조직 노선에 반발하여 페이비언 협회를 탈퇴하고, '전국 길드 연맹'이란 조직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길드 사회주의 이론의 체계를 정돈하는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 저서가 <길드 사회주의 재론>이란 책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자본주의 사회보다 다원적인

이 <길드 사회주의 재론>을 중심으로 콜이 생각한 대안 사회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는 현재의 '민주주의'에 어떤 문제가 있는 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지금의 민주주의는 대리 정치'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대표자를 뽑으면 그들의 임기는 몇 년간 보장되지만, 뽑아준 사람들을 대변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당파에 따라 더 많은 힘을 가진 사람들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대리 정치에서 '자치'로 발전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노동자 민중이 중요한 결정을 직접 내리고, 대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두 번째로는 민주주의 정치가 좁은 의미의 정치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4년에 한 번 국회의원 뽑을 때만 유권자로서 정치에 참여한다는 지적이지요. 그게 아니라 실제 경제 현장, 즉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현장으로까지 민주주의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조직적 실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콜은 홉슨 같은 '선배'들처럼 길드라는 조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일을 하는 공장이라는 단위에서 자치가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결정 사항은 이사회가 아닌 노동자들이 투표로 뽑은 대리자들이 결정하고, 그 대리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 소환권을 발송할 수 있으며, 더 크고 중요한 사항들은 총회에서 논의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자치가 개별 공장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개별 공장이 지역 차원 혹은 산업(섬유 산업 길드 등)으로 모일 수 있으며 이것이 전국 길드로 이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전국 단위의 산업 길드들이 전국적으로 모여서 산업 길드 회의(Industrial Guild Congress, IGC)라는 것을 조직합니다. 이 산업 길드 회의에는 전국 섬유 길드 대표도, 금속 길드 대표도 모여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중앙 계획 당국이 했던 역할을 맡는 것이죠. 다시 말해 어느 산업에 어느 정도의 자원을 할당할 것인지, 발생한 이윤은 사회적으로 합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 그것이 과한 이득일 경우 세금을 얼마나 물릴 것이며 어디에 투입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이 의회(산업 길드 회의)에서 결정한다는 겁니다.

의회니까 당연히 표결도 하고 합의 과정도 거쳐야 하고 싸우기도 하겠죠. 그것이 비록 비효율적일 수는 있겠지만, 바람직한 사회를 실현하려면 갈등을 겪으면서도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소련의 중앙 계획 당국이 지령을 내리는 사회주의보다는 대한민국 국회 같은 모습을 포함하는 사회주의가 더 낫다는 발상이라 할까요. 이런 모델을 통해 자본주의와도 국가 사회주의와도 다른 사회상을 만들 수 있는 겁니다.

한편 홉슨이나 오레이지가 맞닥뜨린 문제가, '소비자의 이해가 소외된, 생산자만의 길드'라는 문제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반박에 콜은 어떤 답을 내놨을까요. 그는 '소비자 길드'를 포함하는 훨씬 더 다원적인 사회를 제시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 하면 '획일적인 사회'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죠. 그것을 모래 같은 작은 물질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는 바위 같다는 의미에서 '일괴암적 사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콜은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훨씬 더 다원적인 사회여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생산자 길드 혹은 노조가 국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사회 조직'이 국가를 대신하는 체제를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선 산업 길드뿐 아니라 소비자 길드 역시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비자 길드는 생활이 이뤄지는 '지역' 중심으로 꾸려지겠지요. 소비자 길드 역시 생산자 길드와 마찬가지로 상급으로 대리자를 올리면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면 또 그 한 단계 위에서 소비자 길드 대표와 생산자 길드 대표 사이의 협상도 필요하겠죠. '너희들이 생산한 섬유의 값을 낮출 수 있지 않겠느냐'라든가, 어떤 요구를 하고 싸울 수 있겠지요. 생산했는데 질 좋은데 값이 비싸다, 값 낮출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걸 요구해서 싸우기도 하고요.

소비자 길드만 있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콜은 최소한으로 존재해야 할 길드에 대해 꽤나 장황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가령 '문화' 생산물은 도저히 다른 산업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며 문화 평의회를 따로 조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건도 마찬가지고, 수도·가스 등 공공재도 그러하며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있어서도 별도의 평의회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한마디로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가 해결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시장에서 해결했던 문제들을, 이 구상 속에선 그야말로 다원적인 결사체들, 개인이 복수로 속해 있는 결사체들 사이의 협상과 합의로 처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국가 자체도 남아서 일부 기능을 존속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행했던 필수적인 역할-예를 들어 세금을 관리한다든지 은행 같은 신용 기관을 통제한다든지 외교적 역할을 한다든지 하는 역할-을 여전히 맡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죠. 하지만 콜은 그 조직체가 지금까지의 국가와는 다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코뮌'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정치학에서는 이런 입장을 다원주의 국가론이라고 부르는데요. 한마디로 일괴암적 사회가 아닌, 권력이 최대한 사회의 다른 조직체들로 분산되어 있는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콜은 의회에 참석할 의원을 지역 단위로만 뽑을 것이 아니라, '기능별 대의제'라는 또 다른 축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기능을 대변하는 것이 길드란 조직일 수 있겠지요. 이 두 축이 맞물려야만 인민의 의사를 좀 더 촘촘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논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개혁과 혁명은 만나게 된다!

혁명과 개혁 가운데 콜이 선호한 것은 개혁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두긴 하지만 일단 개혁이라는 출발을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위와 같은 구상을 내놓은 것은 그러한 조직들의 맹아를 지금부터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일 텐데, 어디서부터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사실 당시 영국에는 노총 역할을 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내셔널 센터가 있었고 이는 '노동조합 회의(Congres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산업 길드 회의'는 이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산업 길드 회의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그 청사진이 던져진 게 아니라, 그 당시 영국 노동운동이 실제로 갖고 있던 조직이 이런 식으로 '진화'되어야 한다고 봤던 것이죠. 자본가들로부터 무엇을 더 받아내느냐에서 나아가, 우리가 이 산업을 자본가 없이 운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바꿔나가자는 얘기였죠. 콜은 그것이 지금부터 해야 할 개혁적 운동의 시작이라고 봤습니다. 그는 이러한 맹아를 변형시키고 발전시켜 놓아야 혁명적 시기가 왔을 때 더 쉽게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기 때문에, 개혁과 혁명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닌 만나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람시도 마오쩌둥도 그 자신을 역사에 남긴 사상이나 당을 20대에 만든 것처럼, 콜도 위와 같은 주장을 모두 20대에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생애 동안, 어떤 식으로 자기 논지나 운동을 전개해 갔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해제에 맡기도록 하고 길드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한 것만 언급하자면, 사실상 그것은 1920년대 초 부분적 길드 실험의 실패나 운동권 내 정치적 분열 등을 겪으며 그 자체로는 좌절되게 됩니다. 이후 콜은 노동당과 관계를 맺으면서 좌파 운동은 계속하지만, 길드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걸지는 못하게 됩니다.

이후 영국 노동운동의 주요 길목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특히 대공황 당시 케인즈와 함께 공황 해결을 위해 정부가 재정 확대 정책을 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케인즈주의적 당면 과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끈질기게 그것을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장기 과제와 연결할 방안을 고민했고, 그 고투의 산물로 <경제 계획의 원리(Principles of Economic Planning)>(1933)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소련 사회주의가 중앙 계획 기구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둔 시기였기에, 콜도 과거에 비해 국가의 역할을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각 생산 주체가 직접 목소리를 내면서 전체적인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참여형 계획 경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런 점에서 길드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을 줄곧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계획 가운데 개별 경제 행위자들이 충분한 소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구매력의 계획'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신용론>을 쓴 더글러스 소령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이 주장한 것은 지금으로 보면 기본 소득 같은 것입니다. 모든 시민들에게 최저 생계비에 준하는 현금 소득을 그냥 주고 그것이 일자리 소득과 합쳐져 전체 소득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콜은 선구적인 기본 소득 논자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영국엔 노동당 정부가 들어섰고 복지 국가의 초석을 놓는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냉전 때문에 국방비 지출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복지 예산이 삭감되고 개혁은 어설프게 끝나버립니다. 콜은 노동당을 강하게 비판했고,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많은 책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세대의 사회주의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며 젊은이들을 규합했고, 그가 제시한 방향은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어 스튜어트 홀 등 신좌파(New Left)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59년 당뇨병으로 눈을 감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로버트 오웬, 세 가지 얼굴

노동운동의 역사라는 제목을 보고 아마 '노동조합'의 역사를 떠올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른바 사회'를 대체할 진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콜이 다룬 세계는 거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봅시다.

"특히 필자는 노동운동의 세 부문-노동조합, 협동조합 및 정치조직-은 하나의 노력이 세 국면으로 나타난 것이고, 이 노력은 공통의 필요와 감동에서 우러나오며, 때로는 분열을 겪는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길은 공통의 목적을 향해 뻗어 있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깨닫는 데 이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14쪽)

노동조합과 함께 협동조합 및 정치조직을 언급하고 있어요. 이런 아이디어는 노동운동의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과 연결됩니다. 노동운동이 노조만의 운동이라고 한다면 그 과제는 현재의 질서 내에서 더 많은 소득을 확보하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콜은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봤고, 세 축이 어우러져 새로운 사회가 성립되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한국에선 노동운동 하면 노조의 운동만이 일방적으로 부각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정치조직은 그래도 2000년대 들어서 노동운동의 주요 축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지만, 협동조합 같은 경우엔 여전히 노조완 상관없는 지역운동이나 소시민 운동으로 치부되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콜의 언급은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렇다면 노동조합, 협동조합 및 정치조직 세 부문이 구성해 나가야 할, 사회주의의 '사회'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기 전에, 사회주의의 창시자라 할 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 봅시다. 콜보다 100년 앞선 18세기 말~19세기 초, 역사 속의 중요한 사회주의자로 누가 있을까요? 소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생시몽(1760~1825)과 푸리에(1772~1837), 영국의 로버트 오웬(1771~1858)이 있습니다. 이 셋 중에 마르크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또 우리에게도 중요한 인물이 바로 오웬입니다.

▲ 로버트 오웬의 초상. ⓒrobert-owen.com
오웬은 자수성가한 자본가였습니다. 찰스 디킨스 소설에 악역으로 나오는 영국 1세대 자본가에 속했죠. 이 1세대들은 원래 돈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은행이나 대상인으로부터 돈을 꾸어서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재산을 굴렸습니다. 그들은 악독하고 독선적이었습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일수록 '너희들도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정서가 있죠. 그런데 오웬은 자신이 굴리는 공장 제도 속에서 사회의 말살, 소멸, 와해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문명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을 가졌고, '뉴 라나크' 실험에 나서게 됩니다.

그것은 라나크라는 농촌에 공장을 지어서 사회주의적으로 운영해 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이게 성공하면서, 자본가나 귀족들도 오웬에 주목하게 되지요.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문제로 떠오른 계급 갈등이 여기선 일정하게 해결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오웬은 이 실험의 규모를 넓혀서 실시해보고자 했고, 미국으로 건너 가 뉴하모니라는 마을에서 좀 더 큰 실험을 벌입니다. 하지만 이건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는 사회 전체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섬 같이 통제된 곳에서 실험만 해서는 자신이 생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뼈저리게 느꼈고,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낙담하고 돌아온 그는 곧 당황하게 됩니다. 그 앞에 '오웬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었으니까요. (웃음) 다시 힘을 얻은 오웬은 당시 1세대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생산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합니다. 노동조합이 아니라 생산협동조합을요. 초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노동조합보다 생산협동조합을 중시하고, 이것을 어떻게 전체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는가를 고민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건설노동자조합'이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노동조합과는 달리, 개별 노동자들이 '오야(작업 반장, 현장의 자본가와 종속되어 있는 존재)'를 거치지 않고, 자본가의 직접 지휘를 받지 않고 '생산자' 조합으로 기능한다는 발상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생산의 지휘와 통제를 아예 스스로 만드는 거죠. 이는 현재 파견 노동자나 비정규 노동자 문제에 있어 어떤 영감을 던져줄 수 있다고 봅니다.

오웬은 또 '전국 노동조합 대연합'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는 IWW 운동이 추구했던 이상('원 빅 유니온')을 이미 100년 전에 추구한 것이지요. 특정 기술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당시의 직업별 노조 체계를 벗어나, 노동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한 조직에 뭉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직을 만들기는 하지만 얼마 안 가 흐지부지 되어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이것들이 다 실패한 후 오웬은 또 다른 운동의 결합을 시도합니다. 그것이 유명한 차티스트 운동, 우리 식으로 말하면 헌법 개정 운동이지요. 이는 노동자들의 선거권 확보를 위한 일종의 정치 운동이었습니다.

왜 오웬 이야기를 했는지 아시겠지요. 이 사람 안에, 100년 뒤에 실현될 노동 운동의 '최소한의' 세 얼굴(노동조합 운동, 협동조합 운동, 정치조직 운동)이 집약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가 이런 것들을 통해 필생의 과제로 생각한 것은, 와해되어 가는 사회를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할 것인가 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한국이 노동운동은 오웬의 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의 모태, 사실은 교회에?

사실 영국 노동운동에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문화적 전통이 있습니다. 바로 디센트(Dissent)라 불리는 비국교도 전통입니다. 초기 비국교도로는 대표적인 게 장로파가 있지요. 또 '조합 교회'라고도 하는 회중파가 있고, 거기서 더 발전해 퀘이커가 나왔고, 18세기 이후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유니테리언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게 감리교(메서디스트)입니다. 감리교는 원래 성공회 소속이던 존 웨슬리(1703~1791)의 반성적 신학 운동으로부터 등장했습니다. 감리교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이 감리교의 문화적 기반 속에서 영국의 노동운동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노동자들의 중요한 집결점이 됩니다. 한국 노동운동사를 보다가 외국 역사를 보면 전혀 다른 뿌리와 문화적 DNA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차이가 어디서 왔나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러한 비국교도 전통이 나옵니다.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의 경우, 각 마을마다 지금의 공무원 비슷한 담당 신부가 있었습니다. 그 운영진 자리는 고스란히 지역의 명사, 자본가, 지주들에 돌아갔지요. 교회 안에서도 맨 앞자리는 명사, 그 다음은 중산층, 뒤에는 못 사는 사람 이런 식으로 사회 지배 질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서구 전통에 있어서 조직체로서의 '사회'의 원형을 제공한 건 사실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교회가 보여주는 이런 지배 질서를 못 견뎌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속엔 교리적인 반감뿐 아니라 사회적인 반감도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반감이 컸겠지요. 그 반감을 결집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준 게 바로 감리교회입니다.

국가에서 임명한 신부가 아니라 떠돌이 목사들이 교회를 운영했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푼돈을 모아서 목사의 생활비를 마련해 줬습니다. 공동체성이 상당히 강하고 운영도 민주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이는 단순히 대안적 교회였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바라는 사회의 모태를 보여주는 대안적 사회이기도 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노동운동의 문화적 원점을 제공한 셈이지요.

▲ <민중의 집>(정경섭 지음, 레디앙 펴냄).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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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이겁니다. 새로운 사회라는 먼 미래의 과제를 위해서 체험 가능한 영역 속에 나름의 씨앗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당시로서는 비국교도 교회, 특히 감리교회였다는 겁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그렇게 모여야만 평범한 생활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겠죠. 이렇게 '노동자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행위는 노동당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다른 나라엔 어떤 게 있었을까요? 스웨덴 같은 곳에는 '민중의 집'이 있습니다. 민중 회관 같은 곳입니다. 노동자들은 이런 건물에 모여서 교육, 토론 같은 문화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들어져야 할 사회의 모태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던 거죠. 이와 관련해서는 올해 출간된 <민중의 집>(정경섭 지음, 레디앙 펴냄)이란 책도 있습니다.

새로운 노동조합을 상상하라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첫 장부터 읽게 되면, 처음엔 흥미롭고 역동적인 얘기가 많이 나와서 책장이 죽죽 넘어갑니다. 그러다 중간을 지나 1850년대에 이르면(이는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자본론>을 쓰던 시기이지요) 책이 지루해집니다. 실제로 역사가 그랬습니다.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여왕이 왕좌에 있었던 때를 '빅토리아 시기'라고 부르는데, 노동운동사로 보면 2세대 내지는 3세대로 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직업별 조합 가운데 합동 기계공 조합 같은 소위 '잘 나가는' 조합이 생기고, 이들이 자본가와의 일상적인 교섭 기회를 확보하면서 상당한 실질 임금 상승을 거두어냅니다. 그런데 이런 조합에 속해 있는 노동자들이 한마디로 '중산층화'되기 시작합니다. 주로 남성인 그들은 부르주아가 쓰던 챙 높은 실크해트를 쓰고 다니는 등 복장부터 다르게 하고 다닌 거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노동 귀족'이라는 말을 발명하게 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노동 귀족의 등장을 전 지구적 맥락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영국 자본주의라는 틀에서 보면 사실 노동자들이 살기 좋아진 건데 뭐 하러 비판을 하느냐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영국의 일부 노동자들은 지구 자본주의의 맨 꼭대기에서 제국주의의 수혜를 누리는 셈이었던 것이죠. 만일 이 상황이 지속되었다면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이렇게 두꺼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귀족이 되었습니다"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요.

문제는, 이걸 혁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상황을 한국 사회에 옮겨 놓고 보면,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그 테두리 바깥에 있는 중소기업·비정규 노동자들과의 격차를 떠올려 볼 수 있는데요. 참 어려운 상황이죠. 우리가 이 책을 긴 시간 들여 읽는 이유가 있다면 그겁니다. 적어도 이 책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거든요.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발한 국가에서 어느 순간 화석화된 운동도 결국엔 분명 바뀌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만큼 우리에게 신뢰 있는 정보가 있을까요?

1880년대 초부터 일단의 선구적인 운동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끼리끼리 운동에 그쳤지만, 물방울로 바위를 뚫듯 서서히 이들이 뿌린 씨앗이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런던 부두노동자 대파업이 일어난 1889년이 제1차 전환기입니다. 부두노동자들은 기존 영국 노동운동 질서에서조차 배제된, 그야말로 미숙련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조직을 이루고 1889년에 폭발한 겁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신(新) 조합주의 운동'이 시작됩니다.

기존 조합이 기능별이었다면 이 조합들은 한 지역에 있는 '자본가와 싸울 의향이 있는' 노동자들을 기능과 상관없이 규합하는 조합이었습니다. 오웬이 말했던 대 일반 노동조합의 꿈을 다시 꾼 사람들인 거죠. 이들을 대표하는 말은 '만인을 위한 조합'입니다.

이후 잠시 퇴조기를 거치고 제2차 전환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1912년의 '레이버 언레스트'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노동조합이 공공 및 일반 노동자 조합(Transport and General Workers' Union, TGWU)이었는데요. 여기 '일반'이 왜 붙었을까요. 핵심은 운수 노동자였지만 가입하고 싶은 노조라면 어느 분야든지 가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TGWU는 부두·철도 등의 파업을 벌이면서 영국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성장합니다. 연맹이 아닌 '단일 노동조합'으로 20세기 초에 벌써 조합원 수가 90만 명이었으니 대단하죠. 현재 영국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 두 개가 각각 조합원 100만 명이 넘는 유니즌(Unison)과 유나이트 더 유니온(Unite the Union)인데, 그 모태가 TGWU입니다.

현재 한국의 주된 노동조합 형태는 기업별 노조입니다. 당시 영국의 직업별 노조하고도 다르지만, 어떤 형태와 틀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소수의, 테두리 안에 있는 노동자만 가입할 수 있다는 틀이지요. 그걸 벗어나 자본가가 아닌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조합으로 관념 자체를 바꿔나간 게 TGWU입니다.

한국 기업별 노조가 산업별로 전환하겠다고 하고, 민주노총에 금속노조나 금융노조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위와 같이 관념을 바꿔내진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청년 유니온이 내세운 '유니온'이, 신 조합주의 운동이 등장했던 당시의 이미지 혁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노동조합'이란 말을 쓰면 기업별 노조라는 이미지를 벗어버리기 어려워 굳이 영어로 유니온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노동당의 실패가 말해주는 것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에는 노동자 정치 세력화, 즉 노동자 정당 건설과 관련해서도 상당 부분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정치 세력화 실험에는 그대로 배울 측면도 있고, 반면교사로 바라 볼 측면도 있습니다.

노동당을 건설하고 빠른 속도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은 '집단 입당제'라는 조치를 취합니다. 정당이 개별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당원으로 받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 전체가 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TGWU에서 대의원 회의를 해서 조합 전체가 노동당 입장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가입이 결정되면 무려 조합원 90만 명이 입당하게 되는 거죠. 90만 명의 조합비를 생각해 보면, 운신의 폭이 얼마나 커졌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맹점이 있었습니다. 집단 입당제로 들어온 당원들에게 노동당 당원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할 리 없었으니까요. '선거 때 노동당을 찍어야겠다' 정도의 인식이지, 당의 강령을 인지한다든지 당 후보 당선을 위해 뭘 한다든지 하는 노력은 없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당의 이념적 기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 노동당은 유럽 대륙의 다른 좌파 정당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 이념을 내세우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기존 자유당의 자유주의와 크게 구분이 안 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념적 구분을 명확히 할 경우 우리나라에서 '공산당'이란 당명을 갖기 어려운 것처럼 대중적으로 표를 모으기 어렵다는 위험성이 있었던 겁니다. 자유당과 이념적 구분은 잘 안 되지만 노동자를 내거니까 다수의 노동자들은 노동당을 선택했고, 이것이 노동당의 급속 성장을 도왔습니다. 참고로 대륙의 다른 나라들은 영국과 달랐는데요. 특히 독일 사민당의 경우 철저하게 개별 노동자들을 설득해 당에 가입시키는 방식이었기에 급속 성장은 불가능했어도 당원 정체성이 강력했고 이념적 기반이 탄탄했습니다.

잠재된 문제는 위기 상황에서 반드시 폭발하고 맙니다. 그 대표적 사건이 대공황 발생으로부터 2년 뒤인 1931년에 일어났습니다. 대공황 와중이니 불황과 일자리 문제가 심각했는데, 당시 집권 중이던 노동당은 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는 유럽의 다른 좌파 정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결과는 영국에서 어떤 나라보다 비극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 필립 스노든. ⓒwww.npgprints.com
당시 총리는 램지 맥도널드, 재무장관은 필립 스노든이었습니다. 노동당 창당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해낸 주역들이었지요. 그런데 이들은 위기 속에서, 좌파 정당으로서의 대안 제시가 아니라 극히 자유주의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특히 스노든은 당시 영국의 리버럴리스트 대부분이 그랬듯 금본위제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고 있었거든요.

불황이 닥쳤고, 거리에 노동자들이 나앉았습니다. 실업 보험지급해야 하는데 실업자 숫자가 워낙 많아 기금은 점점 고갈되어 가겠지요. 그러자 정부에 실업 보험금을 깎아야 한다는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노동당 의원들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자본가들의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았던 당 수뇌부들은 엄청난 일을 벌이고 맙니다.

어느 날 아침 맥도날드 총리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 '실업 보험금 인하 등을 위한 보수당과의 대 연정'을 발표한 겁니다. 당 간부·일반 당원에게 사전 고지는 없었고, 오로지 보수당 총재와의 밀실 회담을 통해서 이루어진 전격적 발표였지요. 당장 당이 뒤집어졌고 현역 총리를 출당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총리가 무소속이 된 상황에서 조기 총선을 실시한 결과, 노동당은 대 참패를 맞게 됩니다. 노동당의 자리는 50석으로 현격히 줄어들고 말았지요.

이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해결하지 못한 과제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냥 미룰 수 있는 숙제는 어디에도 없다는 거지요. 오히려 더 큰 재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노동당은 이후 재생력을 보여줍니다. 위기를 당의 재구성 과정으로 삼은 거지요. 곧바로 연례 당 대회에서 은행 국유화 등 자유주의와 절연하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부 지식인의 담론이었던 사회주의를 당의 전면에 내걸고 새로운 좌파 정당으로 거듭납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 국가를 건설한 노동당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노동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국의 경험은 우리의 노동자 정치 세력화라는 과제에도 통렬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는데요. 노동자 정당 성장의 척도는 눈에 보이는 지표를 통해서 평가되곤 하지만, 그것보다 심층의 토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집단 입당제를 통한 성장은 겉으론 빨라 보여도 내실이 있진 않았던 겁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 정당

ⓒ프레시안(최형락)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영국의 노동당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를 살펴볼까 합니다.

영국엔 노동당이 있고, '독립 노동당'이 따로 있습니다. 먼저 만들어진 건 독립 노동당으로, 케어 하디라는 노동운동 출신의 도덕적 사회주의자가 중심이 되었지요. 아직 노동운동계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 세력화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할 때 선구적으로 나선 조직입니다. 독립 노동당은 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생존했으며, 다른 노동조합들처럼 노동당의 '가입 단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하나, '협동조합당'이란 것도 있습니다. 협동조합 운동 세력이 결의해 당을 만든 거죠. 그런데 선거에서 협동조합당이라는 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어요. 그런데 영국 하원에는 협동조합 당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들은 노동당과 이중으로 가입되어 있습니다. 협동조합당 소속이되 선거에 나갈 때는 노동당으로서 자신을 알리는 거죠.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면 자기 이름 옆에 노동당/협동조합당 의원으로 소속을 기재하고요.

이 독특한 구조를 말씀드린 이유는 한국의 정당 모델을 돌아보기 위해섭니다. 한국의 정당은 정당의 형태를 대한민국 정당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선관위가 규정해준 범위 내에서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지난 총선 당시 제가 속해 있는 진보신당은 신문 사설 등에서 국민참여당이나 통합진보당과 합당하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거는 연합 형태로 치루고 거기서 화합이 이루어지면 다음 단계를 물색해 보자는 논의가 더 합당하지 않을까요. 말씀드린 대로 영국 노동당은 그 안에 협동조합당을 '품고' 있는 등 여러 형태를 유연하게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도 열어놓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지난 봄 겪었던 '통합진보당 사태'를 되새긴다면, 그런 고민은 더욱 더 절실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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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꼭 봐야할 영화 ‘남영동1985’

 

박근혜가 꼭 봐야할 영화 ‘남영동1985’
 
합천 팸투어에서 마주친 대한민국의 암울한 그림자, ‘남영동’
 
장유근 | 2012-11-16 22:55:5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대한민국을 암울하게 만드는 원인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얼마 전 경남도민일보가 주최(갱상도 해딴에)한 합천팸투어를 다녀오면서 불편한 장면과 맞닥뜨리게 됐다. 그냥 지나쳐도 될 법 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면 두 번 다시 못 볼 장면들 같아서 자료사진으로 남겼다. 그건 합천의 영상테마파크에 시설된 (서울)남영동의 모형이었다. 드라마 세트장이 합천에 시설된 것인 데 마치 남영동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 풍경이 7080을 추억하게 만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일행과 저만치 떨어져서 세트장 속의 남영동을 둘러보게 됐다. 그곳에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 그대로 연출돼 있었는 데 그 속에서 눈에 띄는 게 '반공.방첩'이라는 표어였다. 반공이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고, 방첩이란 적의 첩보 활동을 막고, 비밀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남영동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세대는 이 표어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며 세뇌됐다.

반공과 방첩은 동족인 북한을 의식한 표어였으며,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이 표어를 통해 북한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피부빛깔이 빨갛고 머리에 뿔이 난 줄 알았다. 그래서 6.25날을 전후해 미술 시간에 그리는 그림 속에는 철조망을 너머 남한으로 돌진하는 탱크 곁에 북한군의 모습을 그려넣고 빨간 칠을 하며 머리에는 뿔을 그려넣기도 했다. 요즘 탈북자들이 '삐라'를 날려대는 세상에 이런 걸 추억해 보면 피식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말 웃기잖아.

그리고 드라마 세트장 골목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동안 '남영동 공안분실'이 머리 속에 오버랩되고 있었다. 그곳은 25년 전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물고문'을 받아 숨졌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경찰청 남영동 공안분실(현재 경찰청 인권센터)이었다. 그리고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다 기억하고 있을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다. 세상에는 별의 별 기술자들이 다 있는 데 그 중에 하필이면 인간의 신체는 물론 정신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며 고통을 주는 '고문 기술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반공·방첩이라고 쓰인 당시의 시대상과 어쩌면 그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지.

그 암울했던 장면들이 합천의 드라마 세트장에서 7080세대가 겪었던 애환이 오버랩되고 있었던 것이다. 참 묘한 건 당시 반공·방첩을 국시로 삼았던 유신독재자 내지 광주학살의 주범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독재자의 딸 박근혜와 전두환이다. 주지하다시피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는 김재규에 의해 총살을 당할 때까지 민주·애국지사를 괴롭혀 왔고, 박정희가 총살을 당한 후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피비린내로 도배한 광주학살의 주범이었다.

이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내 건 표어가 반공·방첩이었으며, 남영동 공안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민주·애국지사들은, 요즘 이명박 정권의 한나라당에서 포장지만 바꾼 새누리당의 습관적 표현이 된 '좌빨'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동족을 적대시한 '이념'을 무기삼아 반정부 투쟁을 벌였던 사람들을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을 동원하여 괴롭힌 악명높은 곳이 남영동의 대공분실이었다. 그러나 민주·애국지사들의 희생적 노력으로 민주화가 얼마만큼 진행된 요즘 7080세대 이후의 세대들에게 이런 유산을 되물려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릿고개를 겪지도 않은 세대더러 배고픔을 강요하는 건 어른들이 할 짓이 아닌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므로 과거의 교훈을 잊고 산다면 언제인가 과거사에 발목이 붙들려 불행을 겪지 않을 수가 없는 게 역사가 가르쳐준 중요한 가르침이다. 합천팸투어에서 발견된 한 두 가지 키워드가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남영동 굴다리가 잘 표현된 세트장은 합천에 있고 광주학살 주범의 고향이 또한 합천이므로 박정희에 이어 군정을 이어간 전두환이 절로 오버랩 되는 건 당연지사. 그리고 전두환과 함께 이어지는 키워드 속에는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아울러 한 사람의 재산은 29만원 밖에 없다며 국민을 우롱한 초라한(?) 신세지만, 또 한 사람은 장물인 정수장학회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대한민국에 드리워진 암울한 그림자였으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존재가 아닌가.

범죄자가 뻔뻔스럽게도 떵떵거리며 살고있는 나라. 남의 재산을 강탈하여 사유재산처럼 여기고 있어도 누구 하나 말 못하는 나라. 장물을 기반으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는 나라. 또 그런 사람을 비호하기 위해 '홍어좆'을 입에 담으며 국민을 우롱하는 나라. 이게 국민들에게 반공·방첩을 강요하고 세뇌하며 챙긴 최후의 전리품일까.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이렇듯 중증 장애를 겪으며 현대사를 써 오는 동안 새로운 산업이 부차적으로 뒤따랐다. 이들 유신독재와 군정을 가능케 한 게 언론산업이었으며, 경찰산업이었으며, 검찰산업이었으며, 국회의원산업이었으며, 공무원산업이었으며, 재벌산업이었으며, 최근에는 글쟁이산업도 생겼다. '오적'이란 시로 세상을 비웃던 김지하도 알고 보니 새로운 적에 포함돼야 옳은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세상이 이런 마당에 교육의 필요성이란 이들 산업 중 하나를 택하는 교육산업으로 변질된 것이다. 세상이 이런 마당에 '가치'를 따져봤자 바보 축에나 낄 수 있지 어디에 써 먹을 수 있겠나.

그래서 능력이란 우리 사회에 널리 성행하고 있는 각종 산업의 일원이 돼야 가능한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게 반공·방첩을 국시로 삼았던 친일·숭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니. 우리가 해방 이후 정리하지 못한 과거사가 물귀신처럼 최소한 67년 동안 대한민국의 발목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데 반공·방첩의 산물인 5.16군사쿠데타와 인혁당사건과 정수장학회 문제 등에 자유롭지 못한 독재자의 딸을 어쩌자고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놓았는지.

합천영상테마파크 남영동 세트 곁에 있던 탱크 위에 누구인가 '유신잔당'이라는 피켓을 꽂아두었다. 그 잔당들이란 누구인가?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은 미래도 희망도 없는 나라인데, 우리가 가진 재산이라곤 사람 밖에 없는 나라가 사람의 교육과 사람의 보육에 힘을 쏟지 않고, 오로지 강 바닥에 수 십조원을 쏟아붓는 대통령을 뽑아놓은 결과 어떻게 됐나. 우리가 돈에 미치지 않았던들, 미친 대통령, 미친 장차관, 미친 국회의원, 미친 군대, 미친 장성, 미친 정치인, 미친 재벌, 미친 검찰, 미친 경찰, 미친 교육자, 미친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겠나….

때마침 우리의 자화상을 담은 <남영동 1985> 시사회가 국회에서 열렸다고 한다. 영화는 우리가 잘 아는 故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자전적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 영화였다. 시사회를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다시는 이런 영화가 이 땅에서 제작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주십시오."

아마도 적지않은 사람들은 고인이 겪은 고문 등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을 남의 일로 자조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의 미쳐 돌아가던 유신독재 시절과 군정 시절 남영동 공안분실에서는, 미쳐도 여간 미치지 않은 인간들이 멀쩡한 시민을 고문하며 거짓진술을 강요했다. 그게 남의 일이며 나를 제외한 이웃들만 겪어야 하는 불행인가.

글쓴이가 김근태 고문(왜 하필이면 '고문'이란 직책을…. ᅮᅮ)을 만난 때는 2005년 가을 화천의 광덕리에 위치한 시골교회에서였다. 말이 교회이지 겉으로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조차 없는 작은 공동체였다. 그곳에서 농민운동의 대부였던 임락경 목사님의 출판기념회에 김근태 고문이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그곳에는 임 목사가 세상에 기댈 곳 없는 장애우들과 함께 농토를 일구며 살고있는 곳이었다. 행사 때 임 목사는 초청 인사들께 당부의 말씀을 드렸다.

"오늘 초청된 귀빈들은 늘 앞자리에 높은 자리에 앉으시는 분들이지만, 이곳의 식구들은 평생 앞자리나 높은 자리에 앉아볼 수 없는 식구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만큼은 이 식구들이 맨 앞자리 의자에 앉고 귀빈들은 바닥에 깔아둔 멍석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임 목사께서 농담으로 하시는 말씀일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실천으로 이어졌다.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한 김근태 고문은 행사를 돕고자 곁에 있던 글쓴이에게 악수를 나누는 등,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주변의 손님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철퍼덕 멍석에 앉았다. 힘 없어 보이는 하얀 피부에 해맑은 얼굴의 당신께서, 이름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한 '남영동 공안분실'의 고문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내게 있어서 합천의 영상테마파크 드라마 세트인 남영동의 모습은 암울한 추억이자,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은 '끔찍한 유산'이었다. 오죽하면 이 영화를 본 시민들이 "다시는 이런 영화가 이 땅에서 제작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주십시오."라고 당부하겠는가.
 

영화 '남영동1985' 포스터

 

하지만, 독재자의 딸과 그녀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가 과거사를 떠올리는 장소를 방문하여 눈물을 훔치는 것과 달리, 독재자의 딸의 눈에서 눈물을 발견한 사람은 없다.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냉혹한 포식자의 모습으로 또 다른 불행을 잉태하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대한민국을 암울하게 만든 당사자들이 총집결해 있는 새누리당과 독재자의 딸이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았다면, 영화 <남영동 1985>를 반드시 관람하고 대한민국에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를 걷어내야 한다. 당신들이 그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시민의 경고이자 충고다. 마지막 남은 반성의 기회가 이번 대선이란 점 명심해야 한다. 동족을 팔아 연명한다면 그건 금수의 나라에서 조차 패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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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예수처럼 쓰러져도 평화의 표지 될 것”

“강정마을, 예수처럼 쓰러져도 평화의 표지 될 것”

 

‘24시간 공사’ 이어지는 해군기지 앞 끈질기게 지키는 사람들

강한 기자 | fertix@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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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1.15 11:14:37

 

 

 

 

 
▲ 11월 12일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강한 기자

 

11월 12일, ‘24시간 공사’가 진행 중인 강정마을 제주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는 천주교 생명평화 미사, 개신교 기도회와 함께, 공사장 문을 막아선 활동가들과 경찰의 몸싸움도 계속되고 있었다.

“고착”이라는 생소한 낱말은 이제 경찰뿐만 아니라 공사장 앞을 지키는 활동가와 사제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돼버렸다. 이는 경찰이 바닥에 주저앉은 활동가나 사제를 강제로 들어 옮기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말한다.

오전 11시 미사와 묵주기도가 끝난 후 점심시간. 공사장 정문 앞으로 몰려온 경찰 수십 명이 활동가들을 강제 이동시키고, 문 앞에 놓여 있던 팻말과 돌, 드럼통 난로 등을 치우자 철문이 열린다. 레미콘을 비롯한 공사차량 십여 대가 공사장을 드나든다.

강정마을에 상주하며 활동하는 한경아(세실리아) 씨가 마이크에 대고 연신 경찰을 비판하고, 경찰들 틈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된 활동가들도 목소리를 높여 항의한다. 그러나 경찰들 대다수는 이제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 무심한 얼굴이다. 공사장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벌어지는 몸싸움과 입씨름은 강정마을의 일상적 풍경이 됐다.

 

 

   
▲ 11월 13일 오전 미사가 끝난 뒤 점심시간, 공사 차량을 통과시키기 위해 공사장 정문으로 몰려온 경찰과 사제, 활동가들이 대치하고 있다. ⓒ강한 기자

 

 

 

   
▲ 11월 12일 점심시간, 정문 앞을 막고 있던 사람들을 경찰이 해산시키자 레미콘 등 공사 차량이 들어서고 있다. ⓒ강한 기자

 

“이렇게 급하게 공사를 진행해서야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올지 의심스럽다”

강정 공소 정선녀(잔다크) 회장은 여느 때처럼 해군기지 공사장 앞 생명평화 미사의 해설을 맡고 있었다. 미사 이후에는 늘 ‘제주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도’와 묵주기도가 이어지고, <구럼비야 사랑해>를 노래한다. 정선녀 회장은 “해군이 정해진 시간 안에 무엇인가 달성할 목적으로 24시간 공사를 하는 것일 텐데, 이렇게 급하게 공사를 진행해서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올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정선녀 회장은 최근 귤 수확이 한창인 강정마을 주민들과는 주로 저녁 때 만날 수 있으며, “밤에는 주민들이 팀을 짜서 공사장 앞에 머물며 함께 지켜 주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해군기지에 찬성하는 사람조차도 내놓고 찬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군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데 대한 충격이 큰 것 같다”고 강정마을의 여론을 판단하고 있었다.

“주민들과의 모임은 자주 있어요. 활동가들을 위해 자기 집 방까지 내주는 등 주민들이 많이 애써주고 있지요. 공사장에서 케이슨 작업이 끝난 뒤에는 ‘마을 잔치’도 열렸습니다. 마침 비가 내려서 공사가 중단되니 쉴 수도 있었지요. 지킴이들이 지쳐서 많이 먹지는 못했습니다.”

 

 

   
▲ 11월 13일 오전, 공사장 앞 미사 해설을 맡고 있는 정선녀 강정 공소 회장 ⓒ강한 기자

 

 

 

   
▲ 11월 12일 오후, 제주 해군기지 공사장 앞 천막에서 봉헌하는 생명평화 미사 ⓒ강한 기자

 

“강정마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쓰러지더라도 온 세상 평화의 표지 될 것”

12일 오후, 제주 중앙 주교좌성당에서 봉헌하는 이영찬 신부 등 구속자 석방 촉구 시국 미사를 앞두고 서울, 인천, 전주 등 곳곳에서 찾아온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들이 모여들며 공사장 앞도 활기를 띠었다.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을 맞아 홍색 영대(領帶)를 착용한 신부들은 공사장의 두 출입구와 제대가 있는 천막으로 나누어져 미사를 봉헌했다.

공사장 앞 오후 4시 미사를 주례한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는 강론에서 “작은 고을 강정은 겉으로 봐서는 지치고 소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쓰러져 갈지도 모른다”면서도 “평화에 대한 신념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우리는 세상을 둘러보고 셈하여 이익을 따지지 말고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2천 년 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한 젊은이의 삶이 온 세상을 바꾼 것처럼, 오늘날의 강정도 온 세상 평화의 소중한 표지가 될 것입니다.”

미사가 진행되는 도중 경찰이 몰려들어 해군기지 사업단 정문 앞에 앉아있던 사제와 활동가들을 들어 옮기기 시작하자 미사는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천막 안에 있던 신부들까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사업단 앞으로 달려와 “헌법이 보장한 종교 행사를 경찰이 방해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이 와중에 군복 입은 이들을 가득 실은 해군 버스 몇 대가 사업단으로 들어서자 성직자, 활동가들의 항의와 야유 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 11월 12일 오후 미사 도중, 해군기지 사업단 정문 앞의 사제와 활동가들을 경찰이 에워싸자 미사가 중단됐다. 사제들이 경찰에게 항의하고 있다. ⓒ강한 기자

 

 

 

   
▲ 11월 12일 오후, 제주 해군기지 사업단 정문을 막고 있던 사람들을 경찰이 해산시킨 사이에 해군 버스가 진입하고 있다. ⓒ강한 기자

 

 

 

   
▲ 장성심 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사제들 틈에서 기도하고 있다. 11월 12일 오후, 공사 차량 출입으로 중단됐던 미사가 다시 시작된 뒤의 모습 ⓒ강한 기자

 

제주교구 신자 장성심 씨, 공사장 앞에서 일주일 넘게 단식하며 기도 이어가
“내가 매일 짧은 옷 입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이유..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호소”

제주교구 남원본당 신자인 장성심(루치아) 씨는 공사장 앞에서 단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11월 13일로 일주일째다. 삭발한 머리는 11월 10일 열린 ‘제15차 제주해군기지 백지화 전국시민행동의 날’ 행사에서 깎은 것이다. 세례 받은 지 약 3년이 됐다는 장 씨는 자신이 정해둔 기도 시간까지 약간의 여유가 남아 있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매일 공사장 앞에서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있다. 낮밤도 없다. 최근에는 밤에도 침낭에 의지해 공사장 정문 앞을 지키며 농성하고 있다. 정선녀 회장은 장성심 씨가 십 년 넘게 택시를 운전한 “강한 제주 여자”라고 소개했다.

처음에는 물조차도 마시지 않는 단식을 시작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자살 행위다, 물이라도 마셔라” 하고 설득하자 5일째부터는 물과 효소를 먹으며 몸을 추스르고 있다. 그는 단식을 언제까지 계속할지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자매님 마음을 알겠으니 7일째인데 그만 단식을 풀라”고 권하는 한 신부에게는 “제가 죄를 짓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만하라고 하면 그때 중단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장성심 씨는 11월 6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영찬 신부의 구속적부심을 지켜봤다. 그는 이영찬 신부가 수인복(囚人服)을 입고, 손을 묶인 채 법정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말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정 뒤편에 앉아서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장 씨는 강정마을 문제에 대해 제주도민, 특히 제주도 천주교 신자들의 호응이 적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강정마을의 평화활동가들 대부분이 ‘육지’에서 온 분들”이라면서 “제가 매일같이 미사 시간에 짧은 옷을 입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제발 깨닫기를 바라는 호소”라고 말했다.

13일 오후 4시 제주지방기상청은 제주도 전역에 강풍주의보를 내렸다. 1박2일 일정으로 강정마을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며 한산해진 공사장 앞에도 거센 바람이 불고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식당에 모여든 활동가들은 추위와 바람에 몸은 움츠러들어도 악천후에 공사가 중단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반기는 기색이다. 거센 바람 속에 강정마을에 다시 긴 밤이 찾아들었다.

 

 

   
▲ 11월 13일 오후, 공사가 한창인 제주 해군기지 공사장의 모습 ⓒ강한 기자

 

 

 

   
▲ 11월 13일 새벽, 공사장 앞을 지키는 활동가들의 천막에 불이 밝혀져 있다. ⓒ강한 기자

 

 

 

   
▲ 11월 13일 새벽, 공사장 정문 앞에서 장성심 씨가 자주색 침낭을 덮고 추위를 견디고 있다. ⓒ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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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명태 사라진 이유, MB 때문이다

국산 명태 사라진 이유, MB 때문이다

[접경지를 가다⑦ - 강원도 고성] 이명박 정부 5년, 아이들마저 떠난 도시

12.11.16 10:16l최종 업데이트 12.11.16 10:16l
이종득(dongdong2)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사건, 금강산 관광 중단, 대북단체 '삐라' 살포와 북한의 조준타격 논란 등. 이명박 정부 내내 남북 관계는 차가웠고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북한과 맞닿아 있는 접경 지역은 곧바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지금, <오마이뉴스>는 접경지를 찾아가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편집자말]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프레스센터에서 '강원평화특별자치도' 정책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강원도청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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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금강산관광 중단 4년, 강원도 고성은 어떤 모습일까. 주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여러 의문을 안고 9일 강원도 고성으로 향했다. 강원도 양구를 찾을 때처럼 이번에도 강원도청 관계자가 동행했다. 기자가 사는 홍천에서 출발해 인제를 지나 진부령을 넘어 간성을 지났다. 그곳에서부터 고성 거진읍과 대진항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공사중이었다.

경북 포항에서부터 이어진 동해안 해안도로는 강원도 고성 간성까지 1997년 4차선으로 완공됐다. 하지만 간성에서 거진을 거쳐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은 2008년에 착공했지만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 길이 바로 금강산으로 향하는 4차선 해안도로다.

고성에서 명태가 잡히지 않는 진짜 이유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약 5개월이 지난 뒤부터 금강산관광은 중단됐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도로 공사도 예산 집행 문제 탓에 자주 중단됐다.

남한에 5개(수동면 제외) 읍·면이 있고, 북한에도 5개 읍·면이 있는 강원도 고성은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이다. 파도가 아름다운 바다가 있고, 명산과 호수도 있다. 여기에 들판도 넓게 펼쳐져 있다. 김일성 별장은 물론이고, 이승만과 이기붕 별장도 고성에 있다.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먼저 화진포해양박물관 주차장에서 이영일 고성군 번영회장을 만났다. 그는 기자가 도착하기 전에 나와 박물관 앞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는 흥겨운 노래를 틀어놓고 관광객을 기다렸다.

"기자들이 하두 많이 다녀가 이곳 사람들이 귀찮아 할 정도예요. 사람들 마음만 흔들어 놓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죠. 지금 고성 사람들 먹고 살기 힘들어요. 금강산관광보다 더 중요한 게 남북관계입니다. 명태가 잡히지 않는 것도 남북한 긴장관계 때문이에요.

명태가 잡히지 않는 것도 남북관계 때문이라고?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영일 번영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북한과 공동어로구역을 정해 합의하면 명태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중국하고 합의해 중국 어민들이 쌍끌이어선으로 명태는 물론이고 다른 고기들까지 씨를 말리고 있어요. 금강산관광 중단도 이산가족들과 관광객들에게 큰 문제지만, 바다에서 명태 등 물고기를 못 잡는 건 고성 사람들에게 생존의 문젭니다."

이영일 번영회장이 주인이 가게 문을 닫고 떠난 상가 앞에서 속상한 마음을 설명했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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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나빠진 남북관계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고성의 많은 상가들이 문을 닫고, 주민들이 아래 지역으로 이주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고기가 잡히지 않기 때문"이라며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관계가 유화적으로 바뀌어 대출받아 투자한 어민들도 많은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영일 번영회장과 찾아간 곳은 대진초등학교였다. 지난해부터 초등학교 입학생이 현저히 줄어 학교의 고민이 무척 컸다.

이영일 고성군 번영회장과 깅형섭 대진초등학교 교장의 대화.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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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초등학교는 80년 된 학교입니다. 몇년 전만 해도 학급당 학생수가 20명이 넘었어요. 더구나 인근 초등학교가 폐교돼 학생들이 대진초등학교로 입학을 하는데도, 입학생이 크게 줄었습니다. 전학 가는 학생도 급증해 현재 전교생이 64명에 불과합니다. 대부분 조손 가정 아이들인데, 부모님들은 경제활동을 위해 대부분 멀리 떠나 있어요. 초등학생 부모라면 젊은 층이니까 경제활동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곳에는 일자리가 없으니 떠나는 거죠."

자꾸만 작아지는 학교... 부모들은 돈 벌러 외지로

김형섭 교장의 말이다. 김 교장은 "2009년 3월에 부임한 후 해마다 학생 10명 이상씩 전학을 갔다"며 "올해는 입학생이 5명에 불과했는데, 내년 입학 예정 학생 수도 예닐곱 정도"라고 덧붙였다. 입학 예정 학생들도 대부분 조손 가정으로 알려졌다.

대친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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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5회 졸업식 사진 속에는 6학년 2반 학생이 29명이나 되었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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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이영일 번영회장은 길가에 문 닫은 횟집과 건어물 가게 쪽으로 안내했다. 오후 시간인데도 거진 읍내와 대진항 상가 밀집지역에서 손님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최근 준공했다는 대진항수산시장은 단 한 곳도 분양이 안 돼 텅 비어 있었다. 기자는 포구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노부부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어디에서 온 기자야?"

"대선을 앞두고 <오마이뉴스>에서 접경지역 취재를 왔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쓸데없는 짓이네. 말한들 뭐해. 다들 그놈이 그놈들이지. 안 믿어 이제."
"그래도 대통령은 뽑아야 하잖아요?"
"뽑으면 뭐하냐고. 싸움질이나 해 쌌는데. 할 말 없으니까 말 시키지 마."
"왜 할 말이 없어.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지."

앞에서 같이 그물을 손질하시던 부인이 남편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고기는 많이 잡혀요?

기자는 괜히 부부싸움 붙이는 것 같아서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잡히기는. 기름 값도 안 나와 요새는. 기름 한 말이 얼만지나 알어? 한 번 나갔다 오면 두 말이 들어가는데, 그게 면세로 끊어도 오만 원 넘게 들거든. 어떤 때는 빈 그물만 들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되냐고."

"아버님, 금강산관광이 4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는데, 피해가 어느 정도예요?"
"우리와 금강산관광은 상관 없어. 고기가 안 잡히는 게 문제지. 고기만 잡혀도 먹고 살 수 있는데, 고기가 안 잡힌다고. 왠줄 알어?"

"예, 위쪽에서 중국어선이 싹쓸이를 한다면서요."
"그려, 그게 문제라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해결해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같은 국민이 먹고 살 거 아녀. 그런 얘기나 잘 쓰라고, 기자면. 만날 귀찮게 찾아와 일 방해하지 말고."

대진항에 수산시장이 올 봄에 완공되었지만 분양이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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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출입 허가를 받고 들어간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4차선 길은 아직도 공사중이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가니 현내면 명파리를 지나게 되었다. 금강산 출입국관리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금강산 27km'를 알리는 이정표도 왠지 궁색하게 보였다.

통일전망대에 들어서니 광광버스가 보였다. 인천도화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다. 학생들은 통일전망대를 놀이터처럼 돌아다녔다. 이런 학생들과 대비돼 북한 땅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성모상과 불상이 무척 크게 보였다. 북한 땅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하는 관광객들도 더러 보였다.

굳게 닫혀 있는 금강산 출입국 관리사무소와 우측에 '금강산 27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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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망대 앞에 통일염원카드가 큰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숲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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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출범 5년, 모든 게 달라졌다

돌아오는 길에 고성 명파리에서 평생 살며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여기도 연평도처럼 당할까봐 걱정이에요. 이제 전쟁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 싸우지만 말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정말 같은 민족끼리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번 취재에 도청 관계자와 함께 나선 건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접경지 문제 어떤 정책을 갖고 있는지 듣기 위해서다. 사실 강원도 접경지는 대선 때마다 출마자들이 꼭 들르는 단골 지역이다. 대선 후보들은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이런 저런 공약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약들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접경지 공약으로 '평화통일시' 건설을 내세웠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비무장지대 남북 공동 농업개발지역을 제시했다. 17대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은 DMZ 일대를 '통일특구'로 조성해 명품 관광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5년, 1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건 거의 없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에는 평화·화해 분위가 조성돼 고성도 비교적 활기찼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모든 게 달라졌다.

고성 주민들은 "5년 전이 아니라 10년 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 주민은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한 통일특구와 명품 관광산업단지는 고사하고, 그나마 찾아오던 관광객마저 남북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이어지자 발길이 뚝 끊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강산관광이 중단되면서 고성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했던 건어물 가게와 횟집 등은 속속 문을 닫았다. 상인들은 고성을 떠나고 있다. 일부 주민은 "대출받은 빚을 감당하지 못해 떠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간성에서 대진으로 가는 길 옆으로 4차선 확장 공사가 4년째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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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가는 길 4차선 확장 공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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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순 지사는 지난 8월 29일 여야 대선 후보들에게 강원도 5대 공약을 제안했다. 최 지사가 제시한 5대 공약 중 핵심은 '강원평화특별자치도' 설치다. 남북한 주민이 평화지역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같이 생활해 보자는 것이다. 이는 통일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게 최 지사의 주장이다. 당장 실행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꼭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꽉 막힌 고성... 사람들은 남쪽으로 이동중

이와 함께 강원도는 남북경협 산업단지 조성 정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강원도청은 지난 8월 "강릉을 중심으로 동해안권에 비철금속 제련 단지를 만들어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자"며 "올해 안에 부지를 선정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최 지사는 "도내 접경지에 평화산업단지를 만들어 남북이 상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다"며 "북한 근로자들의 출퇴근 문제 등 세부적인 운영 방안에 대한 용역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해안 모습.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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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마을 식당.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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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지사가 청사진을 제시했어도 아직 접경지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가야할 길은 멀고 건너야 할 산도 많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내년도 예산심의에서 강원도 철원, 고성, 양구 등 도내 비무장지대(DMZ) 연계 5개 시·군을 대상으로 한 한반도 평화생태벨트 조성사업 추진예산 40억 원을 전액 삭감했다. 삭감된 예산은 강원도와 경기도, 인천의 접경지역 15개 시·군을 대상으로 하는 '접경지역 종합발전계획'의 5대 사업추진 예산이었다.

고성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언제쯤 다시 열릴까. 고성 어민들은 다시 싱싱한 명태로 만선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고성이 가야할 길은 여전히 막혀 있고, 사람들은 자꾸 '남하'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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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협조하겠다'던 박근혜, 친수법도 지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11/16 08:29
  • 수정일
    2012/11/16 08:2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4대강 사업 찬동 후보, 누구인가?

[나는 '초록'에 투표합니다]<1> '4대강 사업 협조하겠다'던 박근혜, 친수법도 지지

이철재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1-16 오전 8:19:49

 

최근 4대강 사업이 대선 쟁점이 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친수구역활용에관한특별법(이하 친수법)에 대한 논쟁이다. 문재인 후보 캠프와 안철수 후보 캠프에서는 4대강 사업 복원 위원회 및 재검토 등과 함께 친수법 폐지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는 이렇다 할 입장이 나오지 않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이 주최한 대선 후보 캠프 환경공약 토론회 자리에서 박 후보 측 인사는 환경 분야와 관련해 빈 공약을 제출했다. "아직까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박 후보 측 인사의 말이다. 환경 분야 공약이 없다는 것은 MB와 함께 거대 여당을 이끌어온 박 후보라는 점에서 상식적이지 않다. 또한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지겠다는 대통령 후보 캠프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다.

최근 4대강 친수법 관련 된 논쟁을 통해 4대강 사업에 대한 박 후보 측의 입장을 확인 할 수 있다. 지난 2일 새누리당 이철우 원내대변인은 안철수 후보 캠프의 4대강 철거 검토를 두고 "안 후보가 4대강에 설치된 보를 철거하겠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4대강에 22 조 원이 투입됐는데, 단 몇 년간이라도 지켜보는 것이 옳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대변인은 또한 "'친수구역 활용에 관한 법'은 국가하천의 주변지역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성, 이용해 난개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안"이라며 친수법을 옹호하는 발언도 했다.

12일에는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이동환 수석부대변인이 안 후보 측이 친수법 폐지 입장을 밝힌 것을 두고 "안철수 후보의 4대강 강박관념이 부산에코델타시티만 죽인다"고 논평을 냈다. 이 부대변인은 "친수법이 폐지되면 이 법을 근거로 하는 (부산)델타에코시티사업은 무산된다"면서, "안 후보는 정책절차에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선무당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대변인 논평을 통해서 박근혜 후보 측이 4대강 사업과 친수법에 대해 찬성 입장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박 후보는 4대강 사업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독대 후 박근혜 후보는 4대강 사업에 대해 기자들에게 "4대강 사업 자체가 지금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있어 협조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당시는 천안함 사태 등으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참패를 했고, 그에 따라 4대강 사업 추진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 때 박 후보는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에 대해, 분명한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박 후보의 4대강 사업 찬성 행보는 지난 총선에서도 드러났다. 환경운동연합 등은 4대강 사업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던 인사들을 공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했다. 민주당은 4대강 사업 찬동인사였던 최인기 전 국회의원을 공천에서 배제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어떠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희국 전 국토부 2차관을 대구에 전략 공천 하는 등 4대강 찬동인사를 앞장 세웠다. 이러한 일렬의 과정은 4대강 사업에 대한 박 후보와 새누리당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4대강 사업은 실패한 국책사업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실패한 국책사업은 공통적으로 ▲ 타당성 분석 결여 ▲ 속도전에 따른 피해 ▲ 책임자 부재 ▲ 평가 부재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은 ▲ 실패한 국책사업의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에 있으며, 이러한 국책사업은 대부분 ▲ 선거 공약으로 시작됐다는 점도 유사한 상황이다.

여기서 가장 심각한 것은 4대강 사업의 부작용이 계속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부작용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시 막대한 혈세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결국 개발 이익은 극소수가 독점하고, 피해는 국민 모두가 받게 되는 상황이다. 더욱이 4대강 사업은 우리 사회의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켰다는 점에서 그 여파는 앞으로 상당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4대강 사업을 통해 개발 이익을 소수가 독점하게 하는 대표적인 악법이 바로 친수법이다. 친수법은 한국수자원공사(이하 수공)가 4대강 사업에 부담한 8조 원을 회수하기 위해 수공에게 막대한 특혜를 주는 개발법이다. 수공의 8조원에 대한 이자를 정부가 부담하는데, 2011년에 2,550억 원, 2012 3,558억 원, 2013년 4 천 원으로 매일 11 억 원씩 이자 부담하는 꼴이다.

제작년 말,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주도한 2011년 예산 통과 과정에서 함께 날치기 통과된 친수법은 '4대강 사업 후속법'이라 불릴 만큼 난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법률이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한나라당 내부에서 날치기의 진짜 목적은 예산이 아닌 '친수법'이라 목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이 법으로 국가하천 양안 최대 4Km까지 난개발이 될 수 있게 됐다. 서울시 면적의 40배 넘는 2만4000㎢가 대상이며, 전국토의 23.5%에 해당한다.

친수법은 오염원을 걸러주는 강변에서 난개발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민의 식수 안전과 직결된다. 새누리당이 주도한 4대강 사업으로 가뜩이나 '녹조라떼'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국민 식수원이 위협당하고 있는데, 여기에 친수법에 의해 친수구역이 들어서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의 상황이 된다.

최근 발표된 한강 구리지역 친수지역 추진이 대표적 사례이다. 친수법은 상수원 보호를 위한 각종 제도를 무색하게 만드는 법률이다. 따라서 국민의 식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친수법 폐지는 적극 검토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수법을 적극 옹호하는 것이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 측이다.

4대강 사업은 우리 사회의 이성과 상식을 마비 시켰다는 점에서 앞으로 상당기간 회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거란 것은 될 사람을 뽑아 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돼서는 안 되는 이를 속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4대강 사업에 찬동했던 인사와 세력이 이번 대선에서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은 이성과 상식을 영구히 마비시키는 꼴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초록을 위한 투표는 이성과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다.
 

지난 4년 반, 반환경정부가 진행한 온갖 국토 파괴 사업들은 이 땅의 생명들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4대강은 중장비 굉음만 가득한 거대 공사장으로 변했고, 국토는 골프장 등 각종 개발사업에 시달렸으며 평화의 섬 제주도는 강정 미군기지 건설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세계 각국이 원자력발전을 축소하거나 중단하는 흐름 속에서 정부는 신규 원전을 늘리고 있고, 구제역 대처에서 보듯 여전히 동물의 생명권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의 민주화가 가능해야 경제의 민주화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번 18대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현 정부의 반환경 정책에 대한 심판이나 진일보한 환경정책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초록정책을 공유하고 새로운 5년이 생태적 치유와 복원의 과정이 될 수 있도록 범 환경진영은 '나는 초록에 투표합니다'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웹사이트(www.vote4green.org)에서 가장 많이 초록 약속을 받은 제안들은 대선 후보들과 협약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 ⓒ박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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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노조, 하금열·김무성 ‘업무방해’ 고소

 

언론노조, 하금열·김무성 ‘업무방해’ 고소
 
“김재철 MBC 사장 해임안 부결 압박해 MBC 인사문제에 개입”
 
정운현 기자 | 등록:2012-11-15 22:54:14 | 최종:2012-11-15 22:59:5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전국언론노조(위원장 이강택)가 김재철 MBC 사장의 해임안 부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하금열 청와대 대통령실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을 업무방해죄로 15일 검찰에 고소했다.

언론노조는 고소장 제출에 앞서 이날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하금열 실장과 김무성 본부장 두 사람은 ‘청와대 대통령실장’, ‘집권여당 총괄선대본부장’이라는 막강한 사회적 지위와 권세를 이용해 공영방송 MBC의 인사문제에 개입, MBC 김재철 사장의 해임안을 부결시키도록 획책했다”면서 “이를 위력을 사용하여 방송문화진흥회의 업무를 방해한 행위로 판단, 검찰에 고소한다”고 밝혔다.
 

▲ 언론노조는 15일 하금열 청와대 대통령실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을 업무방해죄로 검찰에 고소했다. (사진-언론노조)

 

언론노조는 이어 “피고소인들이 막강한 사회적 지위와 권세를 이용하여 방문진에 상정된 김재철 해임안을 부결시키도록 압박함으로써 MBC의 인사문제에 개입한 것은 형법 제314조 제1항에서 규정한 업무방해 행위로써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형법 제314조 제1항은 위력으로써 사람의 업무를 방해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언론노조는 또 “업무방해죄는 추상적 위험범이므로 업무방해의 결과가 실제 발생할 필요가 없으므로, 막강한 자리에 있는 피고소인들이 개입한 것만으로도 방문진의 인사업무에 위험이 발생하였고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며 “두 사람은 본분을 망각하고 권세와 지위를 남용하여 언론에 개입하고 정략적 의도를 채우려 한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즉각 그 자리에서 물러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언론노조는 특히 “피고소인들의 행위는 단순한 범법행위 차원을 넘어 막강한 지위와 권세를 이용하여 방송의 공공성을 훼손하고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저버린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중대한 범죄행위”라며 “검찰은 실체적 진실에 기초하여 엄정하고 철저한 수사를 통해 이들의 범죄행위를 엄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앞서 양문석 방통위원은 지난 8일 방문진의 김재철 사장 해임안 부결 후 하금열 실장과 김무성 본부장이 김충일 방문진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김재철 사장을 ‘스테이’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전해 해임안 부결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김재철 사장과 관련된 통화 사실을 부인했으나 전화 당사자인 김 이사가 “(두 사람이) 김재철 사장 문제를 물어온 것은 사실”이라고 밝혀 들통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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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5천 받는 33살 아들에게 생활비 주는 '청와대 엄마'


 

 

 


이명박 대통령 일가 '내곡동 사저 특검'이 끝났습니다. 대통령 일가가 연루된 의혹은 검찰의 부실한 수사로 특검까지 이루어졌지만, 사실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은 결과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아들 이시형, 김윤옥 여사 모두 불기소 (혐의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내곡동 특검이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존 검찰 수사에서는 밝히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과 불법 행위를 찾아냈는데, 단지 부족한 수사 일정에 따라 더 깊이 파헤치지 못했을 뿐입니다.

내곡동 특검이 밝혀낸 진실을 통해, 과연 이명박 대통령이 스스로 말한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의 수장이었는지, 과연 이명박 대통령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알아봤습니다.

' 검찰 수사 VS 내곡동 특검'

특검이 이루어지기 전에 내곡동 사저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있었습니다. 검찰 수사에서는 관련자 대부분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검찰 수사를 담당했던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은 국정감사에서 '대통령 일가에 대한 부담'을 언급하며 대통령 눈치때문에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보여줬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특검이 시작되기 전 검찰 고위관계자는 "이게 특검을 할 사안인가, 더 수사할 게 없다. 판단의 문제다" 라는 어이없는 주장까지도 했습니다.

과연 검찰이 말하는 것처럼 더는 수사할 내용이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수사였는지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검찰은 내곡동 수사를 무려 8개월이나 끌었습니다. 그러고도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특검은 단 30일 수사를 하고도, 김인종 전 청와대 경호처장을 비롯한 김태환 청와대 행정관, 심형보 청와대 시설관리부장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이렇게 특검과 검찰 수사가 달랐던 가장 큰 이유는 이시형씨를 서면조사하는 식으로 부실 수사, 눈치 수사를 벌인 까닭입니다. 국민은 내곡동 특검을 통해 정치 검찰이 제대로 개혁되지 않으면 이명박 대통령 퇴임 후에도 정권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 감히 대통령을 수사해? 집요한 청와대의 방해공작'

내곡동 특검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부분 언론에서 내곡동 특검이 정치적 공방이기 때문에 여, 야간의 기싸움으로 표현하고, 이런 논리로 많은 사람들이 별것이 없다고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검에서도 분명히 밝혀내지 못한 여러 가지 의혹은 남아 있습니다.

 

 

▲대통령 아들 이시형은 큰아버지 이상은 자택 장롱에서 현금 6억 원을 꺼내 받았다. 이미지 출처: SBS

 


그중의 하나가 자금출처입니다. 이시형씨 명의로 내곡동 사저를 매입했다면, 이는 부동산실명제법 위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이시형씨가 돈을 주고 산 것인데, 매입대금 대부분 빌렸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출처는 제대로 조사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청와대의 집요한 방해공작 때문입니다. 특검이 수사를 제대로 수사할 수 없던 가장 큰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의 특검 연장 거부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특검 연장을 거부했는데, 이런 이상한 논리는 법치주의에 명백히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특검 연장 거부가 얼마나 치졸한 변명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역대 특검 수사기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연장을 거부한 내곡동 특검은 역대 최단 기간 수사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준비기간 10일, 수사기간은 불과 30일이었습니다.

대통령이 특검 연장을 거부한 사례는 분명 있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대북송금 사건'의 특검 연장을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했는데, 그때 수사기간은 70일이었습니다. 지금보다 두 배가 넘습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은 수사기간이 기본 60일에 연장 30일로 무려 90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BBK 의혹은 역대 특검 중 가장 짧았던 40일이었는데, 이번에 그 기록을 깨고 단 30일 수사로 마무리됐습니다. 유독 이명박 대통령 관련 특검이 역대 최단 수사 시간이라는 사실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수사 결과가 늘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특검 수사 연장 거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심형보 청와대 경호처 시설관리부장은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던 내용이 허위였음을 숨기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했습니다. 특검팀은 이시형씨의 검찰 서면 진술서를 청와대 행정관이 대필했다는 의혹을 밝히기 위해 청와대에 인적사항을 요구했지만, 청와대의 자료 제출 거부로 끝내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김윤옥 여사는 대면조사를 거부했으며, 서면질의서도 특검 수사종료 하루 전에야 제출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특검이 밝혀내지 못하도록 끝까지 방해했다는 물증이자, 국가의 대통령이 떳떳하기보다는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 이명박 일가 증여세, 과연 국세청은?'

내곡동 특검은 이번 내곡동 사저 의혹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가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자금 12억 원을 편법으로 증여받은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이번 내곡동 사저 의혹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부분은 부동산실명제법 위반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동산실명제법 위반은 아니라는 점이 수사 과정에서 밝혀졌습니다.
 

 

 


청와대는 처음에는 대통령 사저 매입이 소문나면 집값 상승이 발생해 문제가 될 수 있어 이시형씨 명의로 했다고 주장했다가, 나중에는 실질적인 매입주체가 이시형씨이기 때문에 부동산실명제법 위반이 아니라고 변명했습니다. 특검팀은 처음에는 이시형씨의 부동산실명제법을 조사하다가 영부인 김윤옥 여사의 진술에 따라 부동산실명제법이 아닌 불법증여 쪽으로 판단했습니다.

김윤옥 여사는 13일 제출한 서면진술서에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 사저 부지를 시형이 명의로 구입하되, 시형이가 부지 매입자금을 갚지 못할 경우 자신 소유의 서울 논현동 땅을 매각해 변제할 생각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내곡동 사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아들 이시형씨에게 미리 재산을 마련해주기 위해 생긴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면 대통령이라도 증여세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증여세 문제와 관련하여 나올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특검팀은 이시형씨가 큰아버지 이상은 다스 회장에게서 빌린 6억 원의 차용증 원본이 없다는 부분과, 김윤옥 여사의 증여 의사를 토대로 편법증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무관련 부분은 국세청에서 해서 과세자료를 국세청에 넘겼는데, 국세청이 과연 증여로 판단할지 여부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만약 국세청이 증여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검찰고발이나 세금 추징은 아예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르면 연간포탈 세액이 5억원을 초과해야 고발할 수 있는데, 이번 내곡동 사저 포탈 세액은 최대 4억8천만 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국세청은 대선을 앞두고 있어 부담을 많이 느낀다고 하는데, 대선을 떠나 법적인 부분을 명확히 해야 하지만, 국세청이 과연 그럴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 전 재산 3천656만 원 싱글이 전세 6억4천짜리 43평 아파트를?'

이명박 대통령 일가의 내곡동 사저 의혹을 수사하던 이광범 특검팀이 이명박 대통령 아들 이시형씨가 사는 아파트 전세금 7억여원의 출처를 추적했던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습니다. 특검팀은 이시형씨가 2010년 2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43평 아파트를 전세 6억4천만 원에 계약했던 점을 주목했었습니다.

 

 

▲ 이시형씨가 살고 있는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7억4천만 원짜리 전세 아파트.

 


특검팀이 이시형씨 아파트를 추적했던 이유는 시형씨가 지난 2010년에 강남구 삼성동 아파트 전세계약을 맺으면서 계약금 6,100만 원을 김윤옥씨의 오래 측근인 청와대 직원이 집주인 계좌로 송금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잔금 3억 2천만 원을 청와대 직원 6명이 은행에서 현금을 수표로 바꿔 각각의 이름으로 송금했던 점또한 의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전세금을 집주인에게 보내는데 청와대 직원 6명이 동원된 점을 미루어 특검팀은 자금 추적에 나섰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수사시간 연장 거부로 계좌추적은 무산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시형씨의 43평 아파트가 문제가 되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시형씨는 돈이 없는 싱글 직장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시형씨가 재산신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시기가 이명박 대통령 취임 첫 해였던 2008년입니다. 당시 이시형씨는 전재산이 3천656만 원이라고 신고했습니다.

이시형씨는 2008년 한국타이어에 입사했는데 당시 한국타이어 신입사원 연봉은 3,500만 원이었습니다. 이후 2010년 8월에 다스에 과장으로 입사했지만, 6억4천만 원짜리 43평 전세 아파트를 계약할 때에는 다스 입사 전이라 그의 전 재산은 신고한 금액 3천656만 원과 한국타이어 연봉을 하나도 안 쓴 3천500만 원을 합쳐도 겨우 7천156만 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전 재산 7천156만 원을 가진 31살 싱글 직장인이 6억4천만 원짜리 43평 아파트 전세를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그가 청와대에 있는 엄마,아빠에게 돈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 연봉 5천 받는 33살 아들에게 용돈 주는 '청와대 엄마'

내곡동 특검팀은 이시형씨가 부동산실명제법 위반은 아니더라도 명백한 불법증여를 받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유는 그의 연봉이 5천만 원에 불과하고, 자기 명의 부동산이나 재산이 없으며, 오히려 영부인 김윤옥 여사에게 차량구입비,용돈,생활비 등을 지원받아온 사실 때문입니다.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라고 생각들지 않습니까? 연봉을 5천만 원이나 받는 싱글이 33살이나 됐는데도 엄마에게 차량구입비는 물론이고 용돈과 생활비를 타서 썼다는 사실을 보면, 과히 재벌집 아들처럼 살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전세금 6억을 대출받아서 살고 있기 때문에 월급을 받아도 돈이 없어 엄마에게 돈을 받을수 있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억 원을 7% 금리로 20년 만기일시상환으로 빌리면 월 대출이자만 3백50만 원가량 됩니다. 연봉 5천만 원 받는 33살 총각이 43평 아파트에 혼자 살려고 한 달에 3백5십만 원씩 이자 낸다면 미친놈 소리밖에 듣지 못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아들 이시형씨는 2008년 이후 계속 재산신고 고지를 거부했다.

 


전혀 비상식적인 이명박 대통령 아들 이시형씨의 생활을 보면서, 국민들은 이시형씨가 2008년 이후 재산공개를 단순히 '독립생계유지'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변명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가 얻어준 43평 아파트에 살면서 생활비와 용돈을 받아 쓰는 아들이 어떻게 독립생계유지를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국민들은 이시형씨의 재산공개 거부 사유가 모종의 검은돈이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이시형씨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가정이야말로 교육의 시작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이명박 대통령)

연봉 5천이나 받는 33살 아들이 전세금,생활비,용돈,차량구입비 등 모든 것을 엄마로부터 받고 산다면, 과연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아들이자, 하는 집안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국민에게 돈을 벌어주겠다고 큰소리 쳤던 대통령 후보는 청와대에 들어가서 온 가족이 떵떵거리고 살았습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아들 명의 땅을 사줬고, 어디서 나온 지 모른 돈으로 33살 아들에게 6억 4천만 원짜리 43평 전세 아파트도 얻어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이 돈 벌어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벌어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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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들, 완치돼도 5년 뒤 '폭탄' 떨어진다

[대선후보들은 모르는 암환자의 속내·②] 산정특례제도, 5년 뒤 일괄만료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1-14 오후 1:56:42

 

내 가족 중에 암 환자가 생길 확률은 얼마나 될까?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이 평균 기대수명인 81세까지 살 때 앞으로 3명 중 1명(36.2%)은 암에 걸린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가족 중 언젠가 암 환자가 생길 확률은 80%에 달한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암 환자는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었고 올해 9월에는 130만 명을 경신했다. 가족까지 고려하면 암으로 고통받는 국민이 800만 명이 넘는 셈이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역대 최대 기록으로 꺾었을 때 표 차이가 530여만 표였음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암 생존자도 늘고 있다. 2000년부터 2009년 말까지 생존하고 있는 암 환자는 80만 명이고, 이 가운데 절반(49.7%)은 60세 미만으로 경제활동인구에 속하는 연령층이다. 이들을 방치하면 양극화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암 환자를 비롯한 중증환자의 치료뿐만 아니라 완치 이후의 삶의 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프레시안>은 한국환자단체연합회와 함께 대표적인 중증질환자인 암 환자의 암 제거 이후의 삶을 조명하고, 역대 정부와 대선 후보의 보건의료정책을 분석하는 기사를 마련했다. <편집자>

 

- 대선후보들은 모르는 암환자의 속내
<1>"암 진단 받고 회사 그만두면서 거짓말했어요"

지난해 유방암 2기를 진단받은 서은숙(가명·41) 씨는 다른 유방암 환자보다 상대적으로 치료비를 많이 썼다. 암이 임파선으로 전이됐고, 지난해 6월 임파선 33개를 자르는 대수술을 했다. 500만 원이면 된다던 치료비가 2000만 원으로 불었다.

서 씨와 같은 환자를 위해 보건복지부는 암, 뇌심혈관계질환, 희귀난치성질환 등 중증질환자를 대상으로 5년 동안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의 5%만 내도록 하고 나머지 95%는 건강보험공단이 부담하는 '중증환자 산정특례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산정특례제도의 혜택을 받아도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는 지원되지 않는데다, 특례 기간 전후에도 갖가지 합병증 치료비와 재발검사 비용 등이 드는 탓이다.

암을 제거한 뒤 그는 합병증에 시달렸다. 항암치료로 다리에는 혈전이, 임파선 절개수술로 팔에는 림프부종이 생겼다. 혈전은 일단 치료했지만 림프부종 때문에 수술한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여전히 팔 한 쪽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서 씨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1월까지 산정특례를 적용받아 1000원을 내고 림프부종 치료를 받았다. 두 달 뒤인 3월 가라앉았던 림프부종이 재발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림프부종 치료가 제한된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잘 가라앉혀놔도 무거운 것을 들거나 조금만 자극 받으면 조심해도 금세 붓는다"며 "부종이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업이 됐다"고 말했다.

5년 뒤 합병증 앓아도 '암'만 없으면 된다?

서 씨가 암 진단을 받은 지 5년 후에도 암 합병증을 앓는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5년 안에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되지 않으면 산정특례 기간이 일괄적으로 만료되기 때문이다. 특례가 끝나면 5%였던 본인부담금이 입원진료는 20%, 통원진료는 30~60%로 적게는 4배에서 많게는 12배가량 오른다.

2005년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은 김정은(가명) 씨에게는 골수이식 후 합병증인 이식편대숙주반응이 간, 췌장, 위, 대장, 방광, 안구 등 거의 모든 장기에 나타났다. 암 합병증을 치료하던 중 스테로이드제 과다투여로 그는 골다공증, 대퇴골두무혈성 괴사, 관절염 등 2차 합병증을 겪었다.

5년 뒤 산정특례가 만료된 이후에도 그는 6개월마다 급성골수성 관련 검진, 유방암 및 자궁암 검진과 정형외과 검진을 받아야 했다. 매달 섬유근통 및 관절염 치료도 받고 있다. 그가 매일 복용하는 약만 해도 진통제, 골다골증약, 호르몬제, 섬유근통약, 칼슘제, 혈압약, 수면제 등 13개에 달한다. 지금까지 그는 골수이식비용을 포함해 치료비로 총 1억5000만 원을 썼지만, 암이 발견되지 않아 특례가 중단됐다. 진료비가 6배로 뛰었다.

암시민연대 등 환자단체들은 "암 치료의 대부분은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장기이식 후에 발생하는 각종 합병증을 치료하는 것"이라며 "5년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합병증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라면 경제적 부담은 가중되고 이러한 환자에게는 오히려 산정특례를 더 유지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 고가의 암 진단 장비인 PET-CT. ⓒ연합뉴스

암 검사비 40만원→ 5년 후 120만원…"의학적으로 암 추적검사 필요"

합병증을 앓지 않아도 병원비가 들기는 마찬가지다. 암 환자들은 5년 뒤 '완치'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재발이나 전이 여부를 알기 위해 매년 추적검사를 받아야 한다.

국립암센터가 남성 암 환자 1만4000여명을 7년간 추적 조사해 지난 2007년 내놓은 결과를 보면, 암 이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다른 암에 걸릴 확률이 2.3배 높다. 남성 암 환자가 다른 암(2차 암)에 걸릴 확률은 폐암이 2.1배, 대장암 4배, 간담도췌장암 1.9배, 비뇨생식기암이 2.6배 높다. 한국유방암학회가 발간한 '2012 유방암백서'를 보면 유방암 환자 가운데 20~30%는 암이 재발한다.

암 환자였을 때는 본인부담금 5%가 적용되던 암 검사는 5년 뒤 완치 판정을 받으면 대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으로 분류된다. 그 결과 PET의 경우 산정특례제도를 적용했을 때 3만5000원이었던 환자부담이 5년 이후부터는 43만 원으로 늘어난다.

2년 차 암 환자인 이지민(가명·38) 씨는 "암에 걸린 이후로 의료급여 1종 수급자가 됐는데, 5년 뒤 재발하지 않으면 수급자 자격이 박탈된다"며 "지금은 5만 원만 내고 암 검사를 받고 있지만, 주변 환자들이 5년 뒤에 검사비가 백만 원 단위로 늘어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덜컥 겁이 난다"고 토로했다.

이혜경 한국유암암환우총연합회 부회장은 "보통 추적검사 비용이 산정특례기간 중에는 40~50만 원 정도 들지만, 5년이 지나면 3배 정도 뛰어 120~150만 원정도 된다"며 "아무리 적게 검진해도 100만 원가량이 들기 때문에 암 검사를 못 하시는 분도 많다"고 말했다.

"4년 뒤 큰아이 대학 가는데…암 검사 포기할 듯"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암 검사를 포기하는 암 생존자도 생긴다. 국가암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07년 암 환자 가운데 다른 암 검진을 받은 암 환자는 42%에 불과했다.

서 씨는 "주변 암 환자 중에 5년 뒤 암 검사비용 87만 원이 부담스러워서 피 검사만 하고 간다는 사람도 있다"며 "특례기간이 끝나는 4년 뒤 큰아이는 대학생이 되고 둘째는 고등학생이 되는데, 그때는 나도 피만 뽑고 재발 검사를 포기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환자단체들은 첫 특례기간 종료를 앞둔 2010년 "정기적인 추적검사는 암 환자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치료의 일환"이라며 "5년 이후의 추적검사가 선택사항인 것처럼 산정특례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암 투병으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수많은 암환자와 가족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무조건 5년이 지나서 합병증이 있든 의학적으로 아무리 필요하든 암만 없으면 일괄적으로 특례가 중단되는 것은 문제"라며 "의사의 판단에 따라 의학적으로 필요한 환자에게는 특례를 존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더 나아가 "차라리 비급여 진료를 없애고 본인부담 연간 상한제 100만 원제를 시행한다면 산정특례라는 불안한 제도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며 "현재 1인당 200~400만 원인 본인부담을 연간 100만 원으로 낮추고 고가의 비급여 진료를 건강보험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상 입원' 혜택 받는 의료수급권자 A 씨의 가계가 파탄 난 이유?

2005년 암 환자 산정특례제도를 도입했을 당시,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의 90%를 지원했다. 2009년 말부터 지원 비율을 95%로 높였지만, 암 환자에 대한 건강보험 보장성은 2006년 71.0%에서 2009년 67.7%, 2010년 70.4%로 오르지 않거나 떨어졌다. 건강보험이 지원하는 항목보다 건강보험이 지원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2005년 암에 걸리고 의료급여 1종 수급자가 된 A 씨의 사례를 보자. 2006년 항암 치료를 마쳤을 때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치료비는 총 6950만 원이었다. A 씨가 낸 본인부담금은 16만 원으로 전체 치료비의 0.22%에 불과했다. 나머지 6934만 원(99.78%)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냈다.

그런데 암 치료비로 겨우 16만 원을 낸 A 씨는 치료를 마친 후 가계 파탄을 겪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 4356만 원이 문제였다. 병원은 항암치료제 등 주사료 2571만 원, 선택진료비 814만 원, 암 검사료 525만 원, 수술비 471만 원, 치료재료대 140만 원 등을 100% 환자 부담으로 청구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 항목에 대해서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환자가 진료비를 나눠 부담하는 것과는 달리, '비급여' 진료비는 환자가 비용 전액을 부담한다. 급여 항목에 대해서는 '법정 환자 본인부담금'을 통해 정부가 표준가격 책정에 관여할 수 있지만, 비급여 항목은 의료기관이 자유롭게 가격을 책정할 수 있다.

중증환자 산정특례 제도에 구멍이 많다고 지적되는 것은 그래서다. 정부가 중증환자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급여) 항목 95% 지원'을 설사 100%로 늘려도, 의료기관이 그 이상의 비급여 진료비를 올려 청구하면 환자 부담은 줄지 않는다. 물론 A 씨는 '이론적으로'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만 받으면 되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비급여 진료가 수반된다.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대선후보가 '암 등 중증환자 진료비 100% 국가 부담(박근혜)', '실질적 입원 무상의료(안철수)', '입원 진료비 보장률 90%로 확대, 연간 진료비 100만 원 상한제(문재인)' 등의 공약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항목'에 한해 이미 정부는 지금도 중증환자 진료비의 95%를 부담하고 있으며, 지금도 연간 진료비 400만 원 상한제를 시행하고 있고, 의료급여 1종 수급자에게 입원 무상의료를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의료 1종 수급자로 '입원 무상의료'를 적용받은 A 씨는 입원비 등을 포함한 비급여 진료비 4356만 원(전체 A 씨가 낸 돈의 99.6%)을 냈다.

공약의 실효성은 이들 대선후보가 A 씨의 진료비 중 16만 원(급여)에 손댈 것인가, 아니면 4356만(비급여) 원에 손댈 것인가에 달려 있다. '가계 파탄'의 핵심은 비급여 진료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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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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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중 6명 교회 신뢰 하락은 지도자 탓

10중 6명 교회 신뢰 하락은 지도자 탓

 
조현 2012. 11. 14
조회수 169추천수 0
 

 

국가조찬기도회 지도자들-.jpg

국가조찬기도회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 사진 <한겨레> 자료

 

 

 

우리 국민들에게 소득과 행복도는 비례했다.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은 지난달 17-22일 만 19세 이상 일반국민 800명을 대상으로여론조사를 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12일 밝혔다.

 

 행복도를 백분율로 환산한 결과 월 가구소득 500만원 이상인 응답자의 평균 행복도는 68.3점을 보였으나 200만원 미만은

51.8점에 그쳤다. 2-3년 전보다 더 행복한지를 묻는 말에는 25.9%만 행복하다고 응답했다.

 

 우리 사회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인으로는 물질만능주의(32.7%)를 든 응답자가가장 많았고, 극단적 이기주의(19.8%), 사회양극화(16.4%) 등이 뒤를 이었다. 또 응답자 절반이 넘는 58.6%는 ‘힐링’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일상생활 중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응답자는 62.8%에 달했고, 특히 여성(64.7%)과 30대(77.3%)·20대(69.7%)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응답이 높았다.

 

 스트레스 해소법(복수 응답)으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응답이 29.9%로 가장 많았고 텔레비전 보기(25.8%), 지인과의 수다(17.6%), 취미활동(17%), 술(16.5%) 등의 순이었다.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43%에 달했고, 그 이유(복수 응답)로는 경제 문제(61.2%), 외로움·고독(42.3%), 가정 불화(35.9%), 직장 문제(18%) 순으로 답했다.

 

 정부 수립 후 정치가 국민을 행복하게 했는지에 대해선 70.5%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행복하게 했다는 대답은 5.5%에 그쳤다.

 

 조사에선 기독교인 지도자들 때문에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는 답변이 60.8%였고, 한국 교회가 국민이 바라는 행복과 힐링 역할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도 전체의 62.4%에 달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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