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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찬노숙" 시절보다 험난... 국민의힘 쇄신의 성공조건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9/06 10:49
  • 수정일
    2020/09/06 10:4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헝가리사회당과 국민의힘20.09.05 19:40l최종 업데이트 20.09.05 19:40l김종성(qqqkim2000)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비대위원장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비대위원장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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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으로 개명한 보수 정당의 변신 노력은 지난 2004년 봄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천막 당사'로 상징되는 쇄신 작업을 벌였을 때보다 치열하다. 당시는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려다가 역풍을 당하고 대선 불법자금으로 인해 차떼기 사건이 발생한 뒤였다. 

한나라당이 국회 앞 10층 당사를 나와 여의도 공터의 천막당사에 입주한 날은 정확히 2004년 3월 24일이다. 이날 서울의 낮 기온은 제주·강릉·부산보다 3℃ 낮은 13℃였고, 구름도 많고 안개와 비도 있어서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음산했다.

천막당사 입주식에서 박근혜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개혁의 참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국민에게 공약했다. 자서전인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그것은 우리가 부패와의 절연을 선언하고 풍찬노숙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했다.

지금 국민의힘은 10층 당사를 나와 천막 당사로 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험의 길을 걷고 있다. 박근혜는 '부패와의 절연을 선언했다'고 했지만, 그 정도 절연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험난한 상황이 국민의힘 앞에 놓여 있다. 임시정부 법통을 인정하고 5.18 정신의 계승을 선언하며 사회적 약자 배려 및 경제민주화를 지향하는 정강정책만 봐도, 과거 기억의 상당부분을 지워버리고자 애쓰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990년 전후 동유럽 공산당의 사례

국민의힘보다 더 절박한 상황에서 당 쇄신을 시도한 정당들이 있다. 1990년을 전후한 동유럽 공산당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공산당의 존립 기반이 극히 취약해진 정치지형 속에서 생존과 활로를 모색했다.

동유럽 정당들은 공산주의를 추구했고,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은 극단적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를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존립기반이 크게 동요해 기존의 지배적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무엇보다 '너희들은 안돼!'라는 국민의 신호를 명확히 수신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동구권 몰락 후로는 이곳에서 공산당이 소멸됐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공산당 계열의 정당들이 있다. 헝가리어 약자가 MSZP인 헝가리사회당(Hungarian Socialist Party)도 그중 하나다. 
 

 헝가리사회당 홈페이지의 영문판.
▲  헝가리사회당 홈페이지의 영문판.
ⓒ 헝가리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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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조상인 훈족은 중국 한나라의 압박정책에 밀려 몽골초원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흉노족과 동일하다는 역사학계의 학설이 있다. 이 훈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낳고 유럽문명의 원형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훈족의 후예인 헝가리는 또 다른 면에서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과 미소 냉전체제의 와해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13명의 유럽 고교 교사 및 대학 교수들이 쓴 <새 유럽의 역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확산된 세계적 탈냉전 속에서 일어난 헝가리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미 경제 자유화의 선두주자로 나와 있던 헝가리인들이 최초로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1988년 5월,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56년 이래 국가원수 자리를 지켜온 야노슈 카다르의 축출을 결의했다. 이듬해 초부터는 소련에 의한 탄압의 피해자들이 복권되었으며, 40년 넘게 유지된 일당 독재가 막을 내리고 복수정당제가 부활했다.<br /><br />이어서 헝가리 지도부가 내린 상징적인 결단은 유럽 전역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철조망을 절단하고 그럼으로써 철의 장막을 뚫는 돌파구를 연 것이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 구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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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는 1989년 11월 9일 있었다. 헝가리 정세는 이 사건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동독보다도 먼저 공산당이 약해진 헝가리에서, 김종인과 국민의힘처럼 당의 쇄신을 도모하는 그룹이 있었다. 헝가리 공산당인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개혁파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자본주의 당이 아니라 여전히 공산주의 색채를 띤 정당이었다. 당명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산당 경력이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전 이름과 비슷한 당명을 갖고 활로를 모색했으므로, 이들이 처한 난관은 국민의힘이 처한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자산 90% 사회 환원... 처절한 생존전략

하지만 헝가리사회당의 도전은 결국 성공했다. 그동안 부침이 있긴 했지만, 이들은 소련도 몰락하고 동구 공산권도 몰락한 세상에서 지난 30년간 유력 정당 지위를 유지해왔다. 이들의 쇄신 작업이 성공한 비결과 관련해, 2013년에 명지대 미래정치연구소가 발행한 <미래정치연구> 제3권 제1호에 실린 정치학자 박경미의 '탈공산화 이후 공산당 계승정당의 생존전략'은 이들의 전략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 번째 전략은 공산당의 법적 정통성을 계승하되 차별화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왔지만 그곳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정강정책을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수정하고 좌파가 아닌 중도좌파의 노선을 표방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은 정치인들을 대체로 불신한다. 과거와의 차별을 선언하고 이념을 수정하면 당이 어느 정도는 바뀌겠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문서나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중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헝가리사회당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했는지,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당이 보유하였던 자산을 버림으로써 공산당과 실질적인 거리두기를 실현하는 방식을 꼽을 수 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다는 명분에서 공산당을 잇는다는 법적 연속성은 유지한다고 하였지만, 1990년 초까지 공산당 자산의 90%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여 실질적인 단절을 추진하였다."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둘 수는 없지만, 자기 재산을 무언가에 사용하는 것은 진심을 명확히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다. 공산당 때 확보한 재산의 90% 이상을 환원하는 조치는 헝가리사회당의 진심을 보여주는 첩경이 됐다. "이는 MSZP가 초기에 대중적 인기를 얻게 한 중요한 요인"이라고 위 논문은 평가한다.

2004년 3월 24일 한나라당과 박근혜는 10층짜리 당사를 나와 천막당사로 들어갔다. 헝가리사회당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재산을 거의 다 버리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당 쇄신의 격이 달랐던 것이다.

헝가리사회당의 두 번째 전략은 체질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산당의 조직 원리인 민주집중제에 연연하지 않았다. 당 간부나 기관들을 상향식으로 선거하되 하부가 상부에 복종하는 민주집중제에 집착하지 않고, 지방 지부에 정책결정권과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권 등을 나눠줬다. 당비 액수도 지방 지부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이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당에 애착을 갖도록 하고 그들에 의해 당이 살아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세 번째 전략은 특정 그룹의 유권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었다. 공산당 몰락이라는 위기 상황 앞에서 여러 그룹을 죄다 끌어들이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노동조합 쪽으로 집중적인 구애 작전을 벌였다. 과거 공산당의 지지 기반과 겹치는 노동조합 쪽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직을 확충하는 확실한 방안을 선택했던 것이다.

헝가리사회당은 재산을 내놓고 권한을 이양하는 과감한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지지 계층을 고를 때만큼은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이전에 거리를 뒀던 그룹을 상대로 '앞으로는 우리가 책임질 테니 지지해달라'며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핵심은 외형 아닌 '내면 혁신'에 있다
 
 3일 오전 국민의힘 관계자가 국회 당 대회의실 백드롭을 교체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2일 '국민의 힘'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당명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함축한 것이라는 것이 당의 설명이다. 2020.9.3
▲  3일 오전 국민의힘 관계자가 국회 당 대회의실 백드롭을 교체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2일 "국민의 힘"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당명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함축한 것이라는 것이 당의 설명이다. 2020.9.3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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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사회당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맺었다. 1990년 의회 선거에서는 10.9% 득표율로 386석 중 33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4년 뒤에는 33.0%로 209석을 차지해 제1당에 올랐다. 1998년에는 28.2%, 2002년에는 42.0%, 2006년에는 43.2%, 2010년에는 19.3%, 2014년에는 25.7%, 2018년에는 12.3%를 기록했다. 2010년부터는 세가 약해졌지만 동구권 몰락 후로도 오랫동안 상당한 득표율을 올렸던 것이다. 공산당의 법통을 승계하면서도 이런 생존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동구 공산권 몰락 뒤의 공산당 후예정당은 '몰락한 부잣집 자녀' 같은 존재였다. 공산당 일당독재 하에서 그들은 형식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공산권 몰락 뒤에는 수많은 정당들이 난립하는 속에서 일종의 자유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헝가리사회당이 유력 정당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고 체질을 전면 개선하면서, 가까워지기 쉬운 유권자들에게 집중 구애를 벌인 데 있다. 헝가리사회당은 이전의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과 당명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당명을 확 바꾸지 않고도 생존에 성공한 것은 외형적 혁신보다 내면적 혁신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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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은 여성들 자신이 이룩한 업적

전쟁은 여성들이라고 하여 인도주의를 선사하지 않는다

김현환 박사 | 기사입력 2020/09/05 [16:21]
 

<여성해방>은 여성들 자신이 이룩한 업적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애국의 일념으로 불타는 조선의 어머니들과 딸들은 남성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 부담과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과감하게 혁명의 길에 나셨으며 일제를 조국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성스러운 싸움에 생명도 청춘도 가정도 다 바쳤다. 1936년 봄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을 편성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직하였던 <여성중대>에 대하여 김일성주석은 감회깊게 회고하였다. <여성중대>를 따로 조직한 것은 유격대오의 급속한 확대발전과 전반적 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앙양을 시사해주는 경이적인 사변이었다고 김주석은 언급했다. <여성중대>의 탄생은 봉건적 질곡에 의해 수천년 동안 뒷방에 갇혀있던 조선의 여성들이 혁명투쟁의 제일선에 당당히 나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대사였다. 지금은 우리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두고 말할 때마다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항일혁명시기에만 해도 여성이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우기 여자가 총을 잡고 남성들과 같이 장기간 무장투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주석 자신도 초기에는 여성들의 참군을 불합리한 것으로 보았다고 고백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육체적으로 연약하다는 생각, 그들이 그 연약한 몸으로 유격투쟁 앞에 나서는 모든 난관을 극복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였다고 그는 진술했다.

 

사실상, 항일유격전쟁에서는 여성들이 간호원이나 재봉대원이나 취사원과 같은 보조적 역할 뿐 아니라 전투원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감당해야 하였다. 일단 참군이 결정되면 여성들도 무자비한 전쟁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전쟁은 여성들이라고 하여 인도주의를 선사하지 않는다. 정세가 요구하면 남자들과 똑같이 무거운 짐들을 이고지고 며칠씩 강행군도 해야 하고 언땅에 배를 붙이고 포화 속에서 싸움도 해야 한다. 정치공작이나 식량공작을 위해 적구에 파견될 수도 있고 강추위 속에서 토목일 같은 것도 해야 한다. 엄동설한에 풍찬노숙하며 몇 년을 싸워야 할지, 몇십 년을 싸워야 할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이 모든 난관을 과연 여성들이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지판에 여성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처사로 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음을 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김주석은 그때의 심정을 토로했다. 여자들이 무장투쟁에 참가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것은 남성들이나 할 일이다, 여자들에게는 여자들만이 하는 일이 따로 있다, 여성들을 뒷방에서 끌어내어 사회혁명에 참가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무장투쟁까지 하라고 하겠는가 하고 김주석도 생각했다.

 

무장투쟁준비가 성숙되고 여기저기에서 유격대들이 계속 조직되자 참군을 열망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지하조직들에서 활동하던 여성들 가운데는 남들이야 뭐라건말건 막무가내로 유격대에 들어와 승인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는 동무들이 적지 않았다. 형세가 이쯤되자 김주석은 여성들의 참군문제를 정식으로 논의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참군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일부 기혼자들은 한마디로 그 가능성을 부정해버렸다. 여성들은 집안 일을 보고 남성들은 집 밖의 일을 보는 것이 조상전래의 관례이다, 여성들이야 어떻게 험한 산발을 타고다니며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유격활동을 하겠는가, 여성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내는 것은 모험이라고 대부분 주장하였다.

 

한편, 차광수를 비롯한 일부 대원들은 자식이 불 속에 들면 그 속에 맨먼저 뛰어드는 것이 여성이다, 하물며 나라가 피눈물에 잠겼는데 여자라고 왜 가만히 앉아만 있겠는가, 여성참군은 여성들 자신의 요구일 뿐 아니라 시대의 부름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참군을 찬성하였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자 결국 여성참군에 대한 논쟁은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일시 중단되었다. 그렇게 미루어오던 여성참군문제가 아무런 의견충돌도 없이 모두의 지지 속에 매듭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계기로 된 것은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간도여성들의 투쟁소식이었다. 화룡현에 사는 용감한 두 여성이 빨래방망이로 일본경찰을 때려눕히고 보총을 빼앗아냈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어 여성참군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입을 봉해버렸다. 온 간도가 무장을 해결하기 위해 떨쳐나섰던 때였다. 무기를 빼앗은 두 처녀는 1933년 여름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였다.

 

 

수백년 동안 여성들을 구속하고 있던 봉건의 질곡을 대담하게 타파하고 무력항전에까지 참가하는 경지에 도달하게된 것은 손에 총을 잡고 나서는 길 외에는 달리 살 수 없는 조선여성들의 참혹한 생활이 마련해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여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은 속박의 사슬과 원한 뿐 이었다. 조선의 봉건사회가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남존여비”를 계율로 삼아 모든 여자들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구속하고 천대한 것이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음식이나 준비하고 밭을 가꾸고 길쌈이나 하는 집안의 머슴과도 같이 치부되고 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잃어도 홀몸으로 늙어죽어야야 하는 것도 여자였고 빚에 팔려가는 것도 여자였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이 모든 불행위에 여성의 “도구화, 상품화”라는 불행을 더 첨가시켜 놓았다.

 

항일혁명은 그 모든 악적 조건과 부조리의 근원을 송두리채 쓸어버리는 “폭풍”이었으며 조선 여성들을 혁명의 길로 인도해준 “세기적인 사변”이었다. 조선의 여성들은 “펜이 아니라 선혈로써” 대지위에 자기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하였다고 김주석은 평했다.

 

여성참군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혁명군은 그들을 더 잘 돌봐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총은 잡았어도 여성은 역시 여성인 것만큼 유격전쟁을 하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여성고유의 생활을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하였다. 여대원들로 따로 대오를 편성해줌으로써 그들의 생활단위와 군사행동단위를 일원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여대원들만으로 따로 <여성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1936년 4월 만강부근의 수림 속에서 <여성중대>의 탄생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조선혁명군은 이 중대를 사령부직속으로 두고 소대와 분대들을 직접 편성해주었다. 첫 중대장으로는 박록금이 임명되었다. 여성중대는 우리 나라 군건설 역사상 처음으로 생겨난 여성전투부대였다.

 

< 여성중대>의 탄생은 수천년 동안 고질화되어 왔던 <남존여비> 사상과 인습을 타파하고 여성들의 지위를 실제적으로 남성들과 동등한 수평선상에 올려세운 하나의 사변이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또한 여성중대의 출현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전민족적인 폭과 인민적인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크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조선항일혁명군에 <여성중대>가 있고 그 여성중대의 대원들이 남성군인들 못지 않게 용맹스럽게 잘 싸운다는 사실은 곧 전 만주일대와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를 경탄시키는 화제거리로 되었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이 손에 총을 잡고 항일무장대오에서 용감하게 싸운다는 소식은 조선의 모든 여성들과 인민대중을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그 소식은 국내와 해외에서 인민혁명군에 입대할 것을 열망하는 수많은 참군지망자들을 낳게 하였다.

 

< 여성중대>는 어디에 가나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하였다. 오각별이 빛나는 군모를 쓰고 어깨에 기병총을 멘 여대원들의 모습이 먼발치에 얼핏 나타나기만 해도 사람들은 <여자군대가 왔다!>고 소리치면서 동네방네를 뛰여다니었다. 여성중대가 사람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된 것은 우선 여대원들이 어떤 정황에서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도덕품성”을 가지고 성심성의로 인민을 도와주고 존대하면서 처신을 잘한데 있었다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여성중대는 어느 부락에 주둔할 때나 주인집 뜨락을 쓸어주고 물을 길어주고 설겆이를 해주고 터밭의 김을 매주었다. 여대원들은 인민들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연설도 하고 글도 가르쳐주었다. 여성중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자랑이었고 진귀한 꽃”이었다고 김주석은 표현했다.

 

여성중대는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여성중대는 탄생후 반년 정도밖에 존재하지 못하였지만 조국이 영원히 기억하고 인민이 길이길이 따라배울 불멸의 위훈을 남기었다. 항일혁명의 일선에서 무장을 잡고 일제를 상대로 하여 피어린 싸움을 벌려온 여전사들이야말로 현대 조선여성들의 빛나는 귀감이며 <여성해방투쟁사>에서 뿐 아니라 <인류해방투쟁사>에서 참다운 전형으로 내세울 수 있는 여성영웅들이라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사회적 평등>을 남먼저 이룩하고 우리 나라 <여성해방>의 길을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었다. 김일성주석은 생전에 조국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전장과 교수대에서 장열하게 최후를 마친 여투사들과 마지막까지 혁명적 의리에 충실하였던 여대원들에 대해서 자주 회고하였다.

 

초기 대성산에 건설된 <혁명열사능>에는 10여명의 여성투사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김일성주석은 이들을 하나씩 기억하며 그들의 업적을 추억하였다. 공청일꾼으로 투쟁을 하다 적들에게 잡혀 무수한 고문을 받았지만 일체 비밀을 대지 않고 죽은 이순희동지, 혀를 깨물며 조직의 비밀을 지킨 마동희를 낳아키운 혁명가로서 딸과 며느리도 유격대에 보낸 장길부여사, 김주석의 부인으로 도천리일대에서 어려운 적후공작임무를 잘 수행하였으며 군복제작에 큰 공을 세운 김정숙여사와 그녀와 함께 임무를 다한 최희숙동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절대로 혁명가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던 안순화동지, 북만에서 싸운 재봉대 책임자로 혁명가의 지조를 지킨 한주애동지, 혁명가답게 절개를 잘 지킨 남만유격대원들의 친근한 누나였던 이순절동지, 장백현 주경동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체포되어 희생된 김수복동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민의 충실한 복무자, 교양자, 선전자로서의 사명과 본분을 다한 이계순동지, 등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쳐 혁명가로서의 존엄과 절개를 지켜낸 여성들의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고 김주석은 술회하였다.

 

그 중에서 김일성주석은 김희숙동지를 가장 못잊어했다. 주력부대의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최희숙동지의 뛰어난 “충실성과 혁명성”을 언제나 경이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김주석은 그녀의 숭고한 의리와 인격에 탄복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추억했다. 고난의 행군때 최희숙동지는 남들이 다 자는 한밤 중에도 우등불가에서 언 손을 녹여가며 전우들의 꿰진 옷들을 기워주었다. 그는 맹물로 끼니를 때우면서 이틀이건 사흘이건 맡은 일을 끝내기 전에는 절대로 쉬지 않았다.

 

소할바령회의후 소부대공작에 참가하였던 최희숙은 중요한 정보자료를 가지고 사령부로 찾아오다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적들에게 붙잡혔다. 적들은 비밀을 뽑아내려고 그녀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들이대었다. 나중에는 그녀의 두눈까지 뽑아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문과 위협도 최희숙동지의 굳은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에게는 지금 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진리성을 확신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며 혁명절개가 강한 투사들만이 할수 있는 명언이라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그 말은 여투사 최희숙의 “한생의 총화”이기도 하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오늘날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는 말은 조선인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낙관주의>를 상징하는 금언으로 되고 있다.

 

여성들이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담당한다”는 김주석의 주장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피로 물들여진 항일의 혁명역사와 조선 <여성해방운동>의 직접적인 참가자, 증견자로서의 산 체험에 기초한 것이라고 김주석은 주장했다.

 

오늘 김정은 시대에 조선인민군대에는 항일의 <혁명전통>을 이어받은 수많은 여성구분대들이 있다. 총을 잡고 조국의 국방을 지키고 있는 여전사들은 비단 인민군대의 여성구분대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농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들에도 총을 잡은 여대원들이 많다. <전민무장화>를 실현한 조선에서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1, 000만의 여성 전체가 유사시에 조국의 국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총을 잡고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이 1, 000만 여성무장대의 원형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직속 <여성중대>였다.

 

지금 조선노동당시대는 항일혁명투쟁시기 여성중대원들이 발휘한 <백두의 혁명정신 과 투쟁전통>을 이어받은 무수한 여성 영웅들과 여성 활동가들, 여성 노력혁신자들을 배출하였다. 노동당시대가 낳은 여성영웅들의 사고와 실천을 지배한 것은 <백두의 넋>, <백두의 혁명정신>이었다. 조선의 수백만 여성들은 오늘 김정은시대에도 이 넋으로 조선 땅에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주체사회주의 보루를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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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당대표 취임 후 제일 먼저 바뀐 것은?

임병도 | 2020-09-04 09:35: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29일 민주당 전당대회를 통해 이낙연 의원이 당 대표로 선출됐습니다. 아직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낙연 당 대표가 주재하는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로 회의 참석자들의 발언 시간입니다.

전임 이해찬 당대표에 비해 이낙연 대표의 발언 시간은 굉장히 짧습니다. 대략 3분 정도이고, 메시지도 간결합니다. 이 대표는 말을 길게 하지 않습니다. 국무총리 시절 국회 본회의 답변 때나 기자 질문에도 핵심만을 말하거나 짧게 대답했습니다.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이 대표는 말을 길게 하거나 중언부언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히 회의 시간에 주제와 벗어난 얘기를 하면 콕 집어서 지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대표는 쓸데없는 말로 회의 시간이 길어지기보다 간결하게 핵심을 짚어 끝내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 대표의 이런 성향을 반영한 듯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는 1차와 2차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8월 31일 1차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와 9월 2일 열린 2차 최고위원회의 이낙연 당대표, 김태년 원내대표 모두 발언

이낙연 당대표의 모두 발언을 보면 8월 31일 1차 회의와 9월 2일 2차 회의 모두 분량이 비슷합니다. 이에 반해 김태년 원내대표의 2차 회고위원회의 모두 발언 분량은 1차에 비해 거의 3분 1 수준으로 바뀌었습니다.

8월 3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김태년 원내대표는 8분, 김종민 최고위원은 6분가량 발언했습니다. 2차 회의에서는 두 사람 모두 3분 내외로 확 줄었습니다.

1차 최고위원회의가 신임 지도부의 첫 번째 회의라고 해도 참석자들의 발언이 길었고, 이 대표 스타일이 아니라 바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2일 국회 본청 당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를 취재할 때마다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참석자 대부분 준비한 원고를 보면서 읽는 것이 전부입니다. 간혹 박주민 전 최고위원 같은 경우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면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매우 드뭅니다.

언론에 보여주는 최고위원 회의는 모두 발언뿐입니다. (모두 발언 이후 기자들은 퇴장) 모두 발언을 언론에 공개하는 이유는 야당이나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너무 많은 내용을 담다 보니 말이 길어지거나, 비슷한 주제를 여러 최고위원이 중복으로 발언하는 일이 잦다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민주당 최고위원들은 “최고위원들 메시지가 겹치면 안 되니 미리 분야를 나눠서 발언하자”고 논의했다고 합니다. 법사위 김종민 최고위원은 사법, 수원시장 엄태영 최고위원은 지방분권, 노웅래 최고위원은 미디어와 외교·안보 , 신동근 최고위원은 사회·의료, 양향자 최고위원은 산업·경제 부문을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이낙연 당대표의 회의 스타일이 무조건 옳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국민들에게 언론을 통해 보내는 메시지라면 짧고 간결한 편이 훨씬 낫습니다. 실제로 뉴스에도 모두 발언 전부가 보도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보다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하는 발언이 많아지길 기대해봅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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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 내분... 4학년 '의사 국시 거부 유지' 전체 공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09/05 05:48
  • 수정일
    2020/09/05 05:4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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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의사 비대위, 의협-정부 합의안 거부 "집단행동 유지"... 일부 의대생들 반발

20.09.04 17:39l최종 업데이트 20.09.05 00:45l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서 정부와 의협의 협약식에 참석하려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의 항의를 받으며 장소를 빠져 나가고 있다.
▲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서 정부와 의협의 협약식에 참석하려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의 항의를 받으며 장소를 빠져 나가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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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와 대한의사협회 사이의 합의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4일 오후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입주한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1층 로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전공의들은 보건복지부와 의협이 집단휴진을 중단하고 의대정원 확대 등 의료정책을 협의하는 의정협의체를 구성하는 내용의 합의문을 작성한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  정부와 대한의사협회 사이의 합의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4일 오후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입주한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1층 로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전공의들은 보건복지부와 의협이 집단휴진을 중단하고 의대정원 확대 등 의료정책을 협의하는 의정협의체를 구성하는 내용의 합의문을 작성한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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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과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이 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집단휴진을 중단하고 의대정원 확대 등의 의료정책을 협의하는 의정협의체를 구성하는 내용의 합의문에 서명한 후 합의문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과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이 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집단휴진을 중단하고 의대정원 확대 등의 의료정책을 협의하는 의정협의체를 구성하는 내용의 합의문에 서명한 후 합의문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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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사협회(아래 의협)와 정부·여당 합의 이후 의료계 내부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젊은 의사 비상대책위(아래 비대위)가 의협의 의사결정 과정을 지적했고, 반대로 일부 의대생·전공의들은 집단행동을 유지하려는 비대위의 행동을 비판하고 나섰다.

젊은 의사 비대위 반발 "최대집에게 결정권 있는 건 맞지만... 우리를 배제시켰다" 비대위는 의협이 정부·여당과 합의한 것을 두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4일 오후 3시에 SNS 플랫폼 인스타그램에서 생방송을 진행한 비대위 측은 이번 합의 결정이 최대집 의협 회장의 독단적 의사 결정이었다고 지적했다. 약속과 달리 본인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했다는 것이다.


앞서 젊은의사 비대위 측은 협상의 주체를 범의료계 4대악 저지투쟁 특별위원회(아래 범투위)로 단일화 했다. 범투위 위원장은 최대집 의협 회장이다. 의결권도 최 회장에게 있다. 

서연주 대한전공의협의회(아래 대전협) 부회장은 "최대집 회장에게 (우리가 위임한) 결정권한이 있다. 하지만 (의사 결정) 과정이 우리와 공유되지 않았다"면서 "우리를 배제시켰다"고 비판했다.

서 부회장은 "저희는 새벽 4시에 협상안을 봤는데, 저희가 의료계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안건으로 기재됐던 게 누락됐던 상태였다. 문장도 왜곡돼 있었다"면서 "이 부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고쳐줄 수 있는지 의견을 전달했다. (중략)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시됐고, 결국 저희가 접한 다음 소식은 TV를 통해 전달된 민주당과 최대집 회장의 단독 합의였다"고 말했다.

비대위, 집단 휴진 유지 방침
 
 박지현(왼쪽)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서울특별시의사회에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과 아울러 파업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박지현(왼쪽)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서울특별시의사회에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과 아울러 파업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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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박지현 젊은 의사 비대위원장은 우선적으로 단체 행동을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집단 휴진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박 비대위원장은 "우리는 의협 공식 산하 단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단체"라며 "그들이 마음대로 의사 결정 과정을 거치든 말든, 우리의 행동을 억제하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집단행동과 관련해) 우리의 정당한 절차를 따를 예정이다"라며 "부디 우리를 믿고 각자 병원 대표의 말을 믿고 함께 해달라"고 당부했다.

박 비대위원장의 발언은 이날 최 회장이 민주당과 합의한 내용과 배치된다.  최 회장은 "더 이상은 집단행동이 있어선 안 된다"라며 "(의료진들이) 진료 현장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후 3시에 발표된 비대위 측의 입장에 따라, 이날 오후 국가고시 실기시험(아래 국시) 응시자 대표단은 의대 4학년들에게 전체 공지를 내렸다.

"국시 취소자들은 현행과 같이 국시원의 전화, 이메일, 문자에 대해 무응답을 유지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두 고생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역 소재 의대 4학년 A씨는 "본래 오늘 6시까지 국시 재접수인데, 대전협이 오늘 의-정, 의-당 협의는 대전협을 패싱한 것이라며 단체 행동을 중단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재접수를 하려면 전원이 해야하고, 안 할거면 모두가 안 해야 하니 각자 개인행동 하지 말고 버티라는 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입을 피해를 대전협과 의과대학학생협의회이 책임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부 의대생들 반발 "대전협, 의대생에게 행해지는 국시 거부 압박 멈춰라"
 
박능후 장관 서명식 참석 가로막은 전공의들 정부 합의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물리력 행사로 인해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과 합의서에 서약하지 못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4일 합의 장소인 서울 퇴계로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을 떠나고 있다.
▲ 박능후 장관 서명식 참석 가로막은 전공의들 정부 합의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물리력 행사로 인해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과 합의서에 서약하지 못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4일 합의 장소인 서울 퇴계로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을 떠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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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을 가진 의대생/전공의'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위 사안에 대한 긴급 성명문이 올라왔다. 국가시험 실기 재접수 기한이 오늘 오후 6시까지 3시간 조금 넘게 남은 상황에서 의대협은 본과 4학년의 의견을 수렴하지도 않은 채 "어떤 타결이 있어도 국시 응시자가 9월 8일부터 시험보는 경우는 없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는 것.

심지어 "학생 단위에서 이탈 방지를 목적으로 일부 병원 전공의들이 본과 4학년 단톡방(단체 온라인 대화방)에 단결을 주문했다"면서 "국시 재접수를 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는 등 압력이 행사되고 있다"라고 고발했다.

이들은 "오늘의 합의문 발표 이후 더이상 젊은 의사 비대위 측이 얻어낼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은 없다"면서 "더 이상 의사 사회의 약자인 학생을 투쟁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한편, 이날 일부 전공의들은 오전 11시에 예정됐던 의협과 복지부의 합의문 서명식을 막기 위해 현장을 점거하기도 했다. 이들은 합의 주체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과 최대집 의협 회장이 서명식 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결국 오전에 예정됐던 서명식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이뤄졌다. (관련 기사 : 의-정 서명식 가로막은 전공의들... 몰려와 실력 저지)

의협 "의사 국시 정상 응시토록 할 것"

의협은 이날 오후에 "고발된 전공의 구제하고 의사 국시 정상 응시토록 할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 의협은 "젊은 의사 주축으로 얻은 성과를 반드시 가시화 하겠다"면서 "올해 의사국가시험 응시 취소자들이 시험을 볼 기회를 잃지 않도록 만전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의협은 "정책 협약 체결 전부터 이미 고발된 전공의에 대한 고발을 철회하고, 고발 예정인 전공의들에 대한 고발도 취소하는 한편, 의대 및 의전원 학생들의 의사국시 응시에도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줄 것을 여당과 정부에 강력히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복지부는 이날 오후 의사 국시 실기 시험 재접수 기한을 9월 6일까지 연장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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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중국의 히든카드 : 전쟁이 터지면 우린 이길 수 있을까?(1)

  • 기자명 김정호 북경대 박사
  •  
  •  승인 2020.09.04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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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방어선의 경우

번역자주

정작 미중 간 전쟁이 발발한다면 승패는 어찌될까? 본 글은 중국 내 익명의 군사전문가가 쓴 글인 듯하다. 필자가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 발견하였다. 현대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제 병과(兵科)간의 관계를 체계적이고 알기 쉽게 설명하였기에 군사 문외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최근 미군 정찰기가 타이완 내 모 기지에서 이륙한 정보를 중국정부가 입수한 것 같다(8월31일자 환구시보 사설 참조). 이제 타이완의 독립파인 집권 민진당은 중국정부가 설정한 마지노선을 넘어 서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감이 감돌던 양안 관계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국 국내정세 또한 심상치 않다. 코로나 감염자가 600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곧 20만 명에 육박할 기세다. 여기에다 내부 인종분쟁까지 겹쳐 미국 통치세력으로선 대내 모순을 국외로 전가할 필요성이 절박한 실정이다. 거기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트럼프는 중국 때리기를 재선 가도의 중요 전략으로 삼고 있다. 

 

이상의 제반 요인들을 감안 할 때 대만해협의 긴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만간 도래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대만에서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아무리 작은 국지전일지라도 그것은 한반도 정세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 글은 당면 대만해협을 둘러싼 국제정세뿐 아니라, 달러-군사 패권으로 이어지는 미국 중심의 현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예측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글이 길어서 3차례로 나누어 싣는다.

 

원저자: 观雨大神经 
중국의 히든카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까?

2020-05-30 16:37:10 (현지시각)

폭력세계의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힘이 셀수록
위험은 그만큼 적다.

신중국 성립 이래 총 8차례 대외전쟁을 치렀다. 이 8차례의 전쟁 간 간격은 모두 10년을 넘지 못했지만, 마지막 전쟁이 끝난 뒤 지금까지 우리는 32년간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
요즘 공기에 다시 포연이 감도는 것 같다.     

중미 간 무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지금의 긴장된 국면을 놓고 사람들 심중엔 어쩔 수 없이 '만약'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만일 미국인이 정말로 시작하면 어떡하나?
좋다, 그런 걱정이 어떻든 해소될 수 없다면, 오늘 아예 '만일'에 대해 터 넣고 얘기 해보자.
먼저 정치니 모략이니 하는 것은 제쳐두고, 순전히 중미 양국의 군사 하드파워만 비교해 보는 것이다.

군사력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상 국가의 마지막 카드이자 모든 외교결정에 있어 근간이 된다.
생존과 안전의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이 직면한 환경은 항상 열악했다. 세상을 하나의 숲으로 보면 중국은 명실상부한 정글의 고아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성장 역정에서 단합과 우애는 하나의 희망사항일 뿐,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일상적 상태이었다.
이 세상에서 큰형(大哥)은 잠시일 뿐이다. 오직 큰형이 당신의 목숨 걸 것을 요구 할 때, 그 때서야 큰형은 큰형인지 알 게 된다. 친구는 슈뢰딩거이다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다는 뜻-주). 오직 친구가 미국에게 버림받았을 때만, 친구는 비로소 친구이다.
중국의 근대사를 들춰보면 기본적으로 뭇매 맞는 얘기뿐이다.    

▲ 고독한 팬더곰 [사진 : 원문 중에서]
▲ 고독한 팬더곰 [사진 : 원문 중에서]

 이런 열악한 생존 환경은 군사력 발전에 대한 중국의 절박한 욕구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군사력이라는 것은 당신이 발전하고 싶다고 해서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 당신들 양심이 있소 없소? [사진 : 원문 중에서]
▲ 당신들 양심이 있소 없소? [사진 : 원문 중에서]

군사 발전은 경제성을 창출하지 못하면서 비용은 매우 높다.
그래서 국력이 약하면 못 가지고 놀고, 못 가지고 놀면 실력이 없게 되고, 실력이 없으면 매를 맞게 되고, 매 맞는 나라는 발전하지 못하고 국력은 더 약해진다……

 

1. 해상방어선

현재 중국의 최대 군사적 위협은 해상이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해군이 1차 방어선이고, 그것은 적을 국경 밖에서 방어하는 관건이 된다.
우리가 편안하게 잘 수 있느냐 여부는 해군 능력에 달려 있다.
중국 해군의 근대사에 있어 최고 전성기는 북양함대이었다.
북양함대는 비록 전적은 나빴지만 순위는 눈부셨다. 1888년 창단 당시 그 최고 전성기 때 실력은 아시아 1위, 세계 6위였다.

하지만 창단 때를 정점으로 이후 순위는 계속 떨어졌다. 어쨌든 세계 10위 안에 들었던 것이지만, 그 후 100년 동안 중국 해군은 그 자리를 되찾은 적이 없었다.
해군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쉽지만 올라가는 것은 어렵다. 그 이유는 함대를 건조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돈과 기술이 필요하며, 장기적인 투자가 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군은 '돈 먹는 거대한 괴물'이라고 불려졌다.
가난하면 좋은 군함을 만들 수가 없다. 1974년 서사해전(西沙海战)에서는 인민해군이 몇백t짜리 보트로 베트남의 2천t급 군함에 맞서야 했다.

※서사해전
1974년 중국과 베트남 간에 서사군도(西沙群島) 영토분쟁이 빌미가 돼 벌어진 해전. 당시의 베트남 정권은 지금의 정권이 아닌 남부 베트남의 헨상린 정권이었음

세계 군사수준의 발전은 당신이 가련하다고 해서 멈춰 서서 당신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1980년대부터 열강 해군은 점차 '이지스함시대'로 접어들었다.      

▲ 미국의 첫 이지스 순양함 티콘드로 급
▲ 미국의 첫 이지스 순양함 티콘드로 급

이지스함은 ‘상호제어레이더(相控阵雷达)’를 기반으로 방공 및 요격미사일 시스템을 구축한다.

현대 이지스함은 ‘상호제어레이더’와 수직 미사일 발사시스템으로 공중 목표물 10여 개, 심지어는 20여 개를 동시에 요격할 수 있어 미사일과 다른 공격 대비한 방어 능력을 극대화했다. 모든 해전규칙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중국 해군의 주요 군함전력은 서방 50년대 수준에 머물러서 방공 능력이 거의 없고 전투기 한 대만으로도 GG(게임에서 실패-주)가 가능했다.

▲ 중국 여단급 구축함 vs 미국 버크급 구축함
▲ 중국 여단급 구축함 vs 미국 버크급 구축함

1996년에는 미국이 항모 한 척만 보내 산책을 시키면 중국은 대만해협 훈련을 대충 마무리해야 했다.
중국은 몇 년 후 허리띠를 졸라매고 러시아로 가서, 소련 시대에 완공하지 못한 현대급 구축함을 구입해 억지로 체면을 유지했다.

비록 거금을 주고 산 새 것이지만, 이지스 시스템이 없는 시대에 뒤떨어진 제품이어서 미국의 이지스함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엄청난 실력 차는 중국이 문 앞의 제해권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해권이 없으면 적국 항모는 쉽게 함재기를 가지고 당신 곁에 와서 당신의 땅을 마구 폭격할 수 있다.
남들이 툭하면 당신 배후를 위협하고, 그 때문에 툭하면 국토 사수를 위한 결전을 준비하는 판국이 되면, 각종 외교적 의사결정에 있어 겁을 집어먹게 된다.

만약 2000년대 초의 문턱에서 바라보면, 중국은 브라질 인도와 비슷한 2류 빈국에 불과해 해군은 열강 함대와 근본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작은 나라도 아무대서나 서방의 중고 군함 몇 척을 사게 되면 서류상 실력으로는 중국 해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이점이 미국이 왜 2000년대 초에 주의력을 중동에 집중한 이유이다. 이른바 “중국에 10년 동안 숨 돌릴 기회를 줬다”라는 것은, 사실은 그들이 중국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 너 몇 등이나 하니?
▲ 너 몇 등이나 하니?

10년? 당신에게 50년을 더 준들 어떠한가.
하지만 중국은 결코 인도나 브라질이 아니었다. WTO에 가입 후 중국은 자신의 실력을 두텁게 쌓을 수 있는 시대를 맞았다.
국력이 급속히 신장함에 따라 잠자고 있던 해군 공업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2003년 중국은 마침내 자신의 첫 번째 ‘상호제어레이더’와 수직발사체계를 갖춘 군함을 진수했다.

▲ 중국 이지스함 [편집자 주]
▲ 중국 이지스함 [편집자 주]

이 중국의 이지스 시스템은 전적으로 중국인 스스로 개발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팔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중화 신의방패(中华神盾)'라고도 불린다.
편의상 '이지스함'과 '중화 신의방패' 군함을 모두 이하에선 '방패함(盾舰)'이라 통칭한다.
중국 해군은 당장 이 같은 신형 군함을 양산하는 대신, '작은 걸음으로 빨리 달리기(小步快跑)' 방식을 택해서 세계 선진 수준을 추격했다.

▲ 묵묵히 과학기술 실력을 쌓다
▲ 묵묵히 과학기술 실력을 쌓다

소위 ‘작은 걸음으로 빨리 달리기‘라고 하는 것은, 한 세대의 기술로 적은 양의 제품만 생산함으로써 검증과 기술 축적을 한 후, 이를 바탕으로 기술 진보를 이룬다. 그리고 다시 소량의 제품을 생산해 새로운 검증과 축적을 하는 것이다……이렇게 순환이 반복된다.
‘작은 걸음으로 빨리 달리기‘ 식의 급속한 세대교체를 거쳐, 중국은 다른 해군 강국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룬 진화과정을 마무리했다. 2010년 마침내 국산 군함이 세계 최고 수준을 따라잡게 되었다.
이때서야 인민해군은 정식으로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함대 건조의 광풍을 일으켰다. 이후 매년 중국이 진수하는 군함 톤수는 전 세계 다른 나라의 모든 것을 합친 수치에 근접했다.

▲ 2018년 각국이 새로 건조한 군함 톤수 비율
▲ 2018년 각국이 새로 건조한 군함 톤수 비율

미소 양국의 냉전 기간 주력 구축함의 최고 건조 속도는 연간 각기 3.1척, 2.6척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은 10년 가까이 연간 3.7척에 이르렀다.
이 중 2019년 한 해에만 해도 주력 방패함 (이지스함) 10척이 진수되었다. 이 방패함 10척만으로도 영‧프‧이탈리아 해군의 모든 방패함을 합친 것보다 실력이 뛰어나다.
이는 전체 인류의 해군 역사상 감탄할 만한 놀라운 속도이다.

연이은 조함(造艦) 광풍 속에서, 인민해군의 실력은 2013년 프랑스를 제치고 5위권에 진입하였다. 2016년에는 러‧일‧영을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섰으며, 2019년엔 결국 열강을 완전히 따돌리고 미국 다음가는 독보적 존재가 됐다.
현재 인민해군 현역 군함의 실력은 이미 유럽연합의 해군 총합을 능가한다.
이러한 폭발력이 너무 갑작스러워 사람들이 어찌된 일인지 깨달을 틈도 없었다. 중국 해군은 미국 이외의 열강들을 멀리 뒤로 따돌렸으며, 그 중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정조차도 없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비교적 강한 해군은 전투력에 따라 5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하는 TOP5 국가의 주력 해상전함의 수와 규모에 관한 목록이다. 그중 방패함 혹은 이지스함과 유사한 시스템을 갖춘 군함은 녹색으로 표시했다.

중국은 비록 열강들을 하나 둘씩 빠르게 뒤로 제쳤지만, 한가하게 스스로 즐길 틈이 없다. 왜냐하면 중국군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적수인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미 해군 간의 지금 실력 격차는 어떠한가?
중국의 경우 현재 수량이 가장 많은 방패함(이지스함)은 052D이며, 배수량이 약 7000t이다. 그 전투력은 유럽 최강의 영국 45형 주력 구축함보다 강하며, 미국 버크급 주력 방패함에 비해서는 취약하다.

그러나 수천t급 배수량의 구축함은 해군의 최고 왕패(王牌, 로얄카드)가 아니다. 진짜 결정적 힘을 가진 것은 1만t급 대형 방패함이다.(계속)

▲ 중국 12000t급 대형 이지스함: 055
▲ 중국 12000t급 대형 이지스함: 055
 #중미전쟁 #중국이과연승리할수있을까?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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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사훈련 감시용 U-2가 오산공군기지에서 출격?

[정욱식 칼럼] 우리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외부의 위협은?


 한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외부의 위협'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북핵을 떠올릴 것이다. 아니다. 북한이 다짜고짜 핵을 사용할 리도 없지만, 이건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북핵을 인정하자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그건 바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한국이 여기에 휘말릴 위험이다. 무역전쟁과 코로나 책임론에 이어 정치체제 갈등까지 겪고 있는 미중관계는 최근 군사적 갈등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네 개의 약한 고리'로 불리는 남중국해, 대만해협, 동중국해, 한반도 인근 가운데 어느 곳도 평화로운 곳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한국이 처할 위험의 심각성은 미국이 주한미군 전력을 대중국용으로 사용하려는 유혹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이를 막을 수 없는 제도적 장치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한국이 미중간의 무력 충돌을 예방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도도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위험의 심각성은 배가된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졸저,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 참조)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하듯 최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중국은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칭다오 인근 해상과 보하이만(발해만)에서 항행 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실탄훈련을 실시했다. 그런데 미군 U-2기가 중국군의 훈련 해역 상공에 불쑥 나타났다.


 

이에 대해 중국 국방부는 "U-2기의 출현은 중국의 정상적인 훈련과 연습에 중대한 지장을 주었고, 미중간의 항공 및 해상 안전 규칙 합의와 국제적 관례를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미국 국방부는 U-2기의 진입을 인정하면서도 "어떠한 규칙도 위반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미국 국방부의 입장은 이러한 갈등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해준다. "U-2기의 출격은 인도-태평양 작전 지역에서 국제 규칙과 항공 안전 규제의 범위 내에서 실시되었다"며, "태평양의 미 공군은 앞으로도 미국이 선택하는 시점과 템포로 국제법이 인정하는 어느 곳에서도 비행과 작전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미국 언론들은 U-2기가 한국에 있는 오산공군기지에서 발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앞서 언급한 미중 무력 충돌시 한국의 연루 위험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한국에 배치한 자국 군사력을 중국을 상대로 사용하면 제3자인 한국이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셈이 되고, 이는 한국이 미국을 지원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이 한중관계에 초래할 문제는 이미 사드 사태로 드러난 바 있다. 아니 사드 사태 이후에도 이러한 문제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번 오산공군기지발 U-2 출격 논란은 그 예고편에 해당된다.

 

결국 우리는 한미동맹의 존재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한미동맹이 북한의 남침을 억제함으로써 '소극적 평화'에는 기여해왔다고 하더라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함으로써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한미동맹은 갈수록 중국 견제·봉쇄용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결과 한미동맹은 '위협대응형'이라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위협초래형'으로 변질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국위협론'이 유행이지만, 한중 양자관계만 높고 보면 이는 어디까지나 막연한 것이다.


 

우리가 피해야 할 가장 위험한 미래는 중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화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미국과 함께 중국에 맞서야 한다며 한미동맹의 강화를 추구하거나 주한미군의 군사력이 대중국용으로 사용되는 것을 허용하거나 묵인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0315181870638#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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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마이삭’ 강타한 제주… 물폭탄에 암흑천지 ‘공포에 떨었다’

임병도 | 2020-09-03 10:57:3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9월 2일 제9호 태풍 ‘마이삭’이 제주를 강타했습니다. ‘마이삭’은 시간당 120mm가 넘는 많은 비와 함께 최대순간풍속 초속 49.2m의 강풍을 몰고왔습니다.

제주도 곳곳에는 강풍으로 인해 가로수가 부러지고, 신호등이 쓰러지는 등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간판이 떨어지는 등 3일 오전 4시 기준으로 무려 616건이 넘는 강풍 피해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강풍으로 고압선이 끊기면서 제주 도내 4만335가구가 정전이 됐습니다. 한전이 복구 작업을 시도했지만 강한 바람으로 작업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제주 일부 지역은 단전과 단수로 밤새 암흑 속에서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월대천 범람, 주민들 긴급 대피하기도

▲제주시 구좌읍 중산간마을 하천 모습

제주는 화산섬이라 비가 바다로 빠지거나 지하로 스며들어 다른 지역에 비해 비 피해가 적을 것 같지만, 집중 폭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물이 빠질 곳이 없어 하천이 범람하거나 바다와 맞닿은 저지대 마을이 침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2일 오전 제주시 우도면 천진항 주변은 물이 넘쳐 출입이 통제됐습니다. 제주시 삼도동 해안마을과 외도동 월대천이 위험 수위에 도달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긴급히 대피했습니다.

집중 폭우로 도로가 침수되거나 물이 역류하면서 마을 안쪽 길이나 일부 밭이 물에 잠기면서 피해를 입었습니다. 하천 주변 도민들은 물이 넘칠까 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도로 침수로 버스 운행 중단

▲2일 오후 서귀포시 색달동 도로 주변이 토사와 빗물로 넘쳐 차량들이 멈춰서 있는 모습. 제주도는 저녁 9시 버스 10개 노선의 운행을 중단했다.

집중 폭우로 도로가 침수되면서 일부 지역은 자동차가 물에 잠겨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제주도는 9일 오후 9시를 기해 버스 10개 노선의 운행을 중단했습니다. 제주도와 서귀포를 잇는 버스들의 운행이 중단되면서 도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도로가 침수되면서 제2산록도로 (탐라대사거리~핀크스 골프장), 국도대체우회도로 (상창교차로~서귀포 호텔) 등 일부 구간이 통제돼 차량진입이 전면 금지됐습니다.

2일부터 3일 오전까지도 제주 평화로 ,애조로, 중산간도로 등 일부 구간에서는 토사와 빗물이 도로로 흘러넘치면서 차량 통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연이어 오는 제10호 태풍 하이선

▲3일 오전 4시30분 기준 태풍 하이선 예상 이동 경로 ⓒ기상청

제8호 태풍 ‘비바’가 의외로 큰 피해 없이 제주를 지나가면서 ‘마이삭’도 넘어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이삭’이 몰고 온 강풍과 폭우의 위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불과 하루 사이 제주 전역은 태풍 마이삭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직 피해 집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 다른 태풍 소식이 전해지자 도민들은 불안감에 떨고 있습니다.

제10호 태풍 하이선은 다음 주 월요일쯤 한반도 영향권에 들어올 예정입니다. 기상 전문가들은 10월까지도 계속해서 태풍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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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탄핵 후 세번째... '국민의힘' 아직은 못 믿겠다

[안호덕의 암중모색] 당명 바꾼 야당, 진정성 있게 개혁하라

20.09.03 18:37l최종 업데이트 20.09.03 18:37l
 3일 오전 국민의힘 관계자가 국회 당 대회의실 백드롭을 교체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2일 '국민의 힘'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당명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함축한 것이라는 것이 당의 설명이다. 2020.9.3
▲  3일 오전 국민의힘 관계자가 국회 당 대회의실 백드롭을 교체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2일 "국민의 힘"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당명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함축한 것이라는 것이 당의 설명이다. 2020.9.3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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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미래통합당의 새로운 당명인 '국민의힘'이 확정되었다. 논란이 없지는 않았지만 비상대책위원회와 상임전국위원회에서 연이어 추인하고 전국위원회가 최종 의결함으로써 미래통합당은 7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너무 잦은 당명 변경에 귀에 익고 입에 붙을 만하면 바꾼다는 세간의 우스갯소리도 없는 건 아니지만, 당명 교체를 통해 탈이념을 강화하겠다는 포부에 지금과는 다른 보수 정당으로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불과 7개월 만에 막을 내린 미래통합당. 지난 2월 17일 자유한국당은 유승민계의 새로운보수당, 이언주 의원의 미래를향한전진4.0 등과 미래통합당으로 합치면서 새로운 보수 정당을 공언했다. 이후 실시된 4.15 총선에서 국정농단 세력이라는 손가락질에 이제는 '탄핵의 강을 건넜다'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박근혜 없는 새누리당이었고 반성 없는 자유한국당이었을 뿐 새로운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들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국정농단 사건으로 대통령이 탄핵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꿀 이유는 딱히 없었을 것이다. 또 자유한국당이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했다면, 총선 직전에 미래통합당으로 당명을 바꿀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자유한국당에서 미래통합당으로 당명을 개정하면서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믿어 달라고 큰절하고 읍소도 했지만, 그것이 쇄신의 다짐이라기보다는 과거 나쁜 흔적 지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만한 국민은 다 알았던 셈이다. 이 때문에 미래통합당에서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바꾼 데에도 나쁜 과거 흔적 지우기에 불과하다는 비난과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변화의 기대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고 진정성을 증명해야 하는 게 국민의힘의 과제다. 당명은 언제나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당명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은 국민의 관심과 지지다. 국민의힘의 전신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그 당명들이 허물어진 건 폐기해야 할 낡은 정당의 서까래로 또다시 새집을 지어왔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으로 당명 개정을 확정한 전국위원회는 기본소득 도입, 피선거권 연령 인하 등 개혁적인 정강 정책과 '국민통합위원회', '약자와의동행위원회' 신설을 위한 당헌도 의결했다. '보수 정당이 이런 정책을'이라며 놀랍기도 하지만 아직 박수는 이르다. 빈 공약이 될지, 변화의 시발점이 될지, 판단의 근거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7개월 만에 사라진 미래통합당도 '혁신, 확장, 미래'를 비전으로 모두에게 열린 기회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등의 10대 약속을 내세웠다. 자유한국당이나 새누리당 당명 개정 때도 숱한 말잔치는 넘쳐 났다. 국민의힘도 언어의 성찬으로 끝나지 않을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말의 성찬 넘어설 수 있을까

김종인 비대위가 의원직 4연임 금지안을 내놓았다가 중진들의 반발에 좌초됐다. 연임의 횟수가 갑질과 부패의 크기처럼 저울질 되는 현실에서 4연임 금지안은 여야 지지를 떠나 국민 대부분이 지지할 개혁안임이 틀림없다.

당은 좌초의 원인이 헌법 위반 소지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대통령 5년 단임제, 지자체장 4연임 금지(3연임까지만 허용)와의 형평성을 생각하면 급조된 핑계라는 생각이 든다. 또 논란과 좌초의 과정에서 나타난 구태 세력의 발목잡기에 국민의힘이 내세운 개혁적인 정강 정책과 국민들의 아픔을 치유하겠다는 위원회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쇄신을 표방하던 비대위 체제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로 빠르게 되돌아갔던 보수 정당. 내년 4월로 정해진 김 위원장이 임기 내에 구태로 회귀할 길을 끊어놓을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인 회의는 김 위원장이 개혁적인 의제 발굴을 넘어 입법까지 강제할 진정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과거 경제민주화 의제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선거를 지휘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 의제는 번번이 국민들의 표를 모으는 달콤한 공약이었을 뿐 정책으로 입안되지 못했다.

훗날 김 위원장은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탓으로 돌렸지만, 양당을 넘나들며 공약 보따리 장사를 했다는 세간의 비아냥도 영 틀린 지적은 아니다. 기본소득 도입과 피선거권 연령 인하가 국민의힘 잔칫상에 올리는 고명이 되지 않으려면 진정성을 증명할 김 위원장의 적극적인 행보가 필요하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출범부터 당명을 바꾼 최근까지 여전히 보수 정당의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많다. 8월 15일 광화문 집회가 코로나 재확산의 계기가 되어 국가의 경제와 국민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마당에 집회 참석자의 외침은 새겨 들어야 한다며 오히려 극우 난동 세력을 옹호했던 주호영 원내대표. 국민 건강을 볼모로 잡은 의사들의 파업에 정부가 협박만 하고 있다고 의사 편을 든 김종인 위원장. 본인들의 수십 억 시세차액은 묻어두고 정부 다주택 고위 공직자에게 왜 강남 아파트를 안 팔고 지방 아파트를 파느냐고 다그치는 의원들. 이전 보수 정당과 다를 바 없다.

낡은 과거와 싸워야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온라인 화상회의 시스템을 활용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0.9.3
▲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온라인 화상회의 시스템을 활용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0.9.3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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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의 지지율을 올리고 수권 정당이 되려면 투쟁의 상대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정강정책을 내놓아도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식 낡은 사고의 의원들이 다수라면 국민의힘 당명 개명 효과는 7개월 만에 간판을 내린 미래통합당보다 짧을 수도 있다.

당명 개정이 빛을 발하려면 개혁 정책이 말잔치로 끝나지 않도록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하고, 의원 개개인이 변화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국민의힘은 당명에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의 3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말의 성찬일 수 있지만 국민을 떠받들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 국민의 힘에 맞서고, 국민을 편 가르고, 권력의 힘으로 국민을 지배하려 했던 보수 정당의 과오를 되풀이해선 안된다. "시대 변화에 뒤처진 정당, 기득권 옹호 정당, 이념에 치우친 정당, 계파로 나눠 싸우는 정당을 바꿔 변화를 선도하고, 국민과 호흡하는 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게 김종인 위원장의 포부다.

기대도 있고 의심과 우려도 반반이다. 국민의힘의 당명 개정이 보수 정당에 새로운 주춧돌을 놓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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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법외노조화는 헌법과 법률 위배’ 명확히 한 대법원 판결

강경훈 기자 qa@vop.co.kr
발행 2020-09-03 15:41:43
수정 2020-09-03 15:44:53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참석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 선고를 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참석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 선고를 하고 있다.ⓒ뉴시스  
 
박근혜 정부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화가 헌법과 법률을 위배한 조치였음이 대법원의 판단으로 명확히 확인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3일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법외노조 통보 처분이 적법했다고 판단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시행령 조항은 법률상 근거 또는 법률의 위임 없이 법외노조 통보 제도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헌법상 법률유보원칙에 반하여 무효”라며 “따라서 이 사건 시행령에 근거한 법외노조 통보는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해 대법관 12명 중 10명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했고, 나머지 이기택, 이동원 대법관은 적법하다는 취지의 소수의견을 냈다. 이 사건 소송대리인이었던 김선수 대법관이 전원합의체 심리에 관여하지 않았다. 법외노조 통보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한 10명 중 8명은 처분의 근거가 됐던 교원노조법 시행령 9조 2항이 무효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고, 나머지 2명은 각각 다른 사유를 제시했다.

대법관 다수(8명)는 해당 시행령의 위헌성을 명확히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노동조합법은 법외노조 통보에 대해 규정을 두고 있지 않으며 이를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위임하지도 않는데, 시행령상 법외노조 통보 제도는 입법자가 반성적 고려에서 폐지한 노조 해산명령 제도와 실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며 “단순히 통보로 법외노조가 되도록 하는 것은 헌법상 노동3권을 실질적으로 제약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시행령 조항은 법률상 근거 또는 법률의 위임 없이 법외노조 통보 제도를 규정하고 있고,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에 대한 본질적 제한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헌법상 법률유보원칙에 반하여 무효”라며 “따라서 이 사건 시행령에 근거한 법외노조 통보는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럼에도 원심은 이 시행령 조항을 유효하다고 보고 법외노조 통보를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은 헌법상 법률유보원칙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봤다.

문제의 조항은 노조 설립신고서에 반려 사유가 발생한 경우 행정관청이 시정을 요구하고 기간 내 이행하지 않을 때 ‘노조 아님’을 통보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전교조는 노조 해산명령이 1987년 삭제된 만큼 대통령령인 시행령만 갖고 사실상의 노조 해산명령에 해당하는 ‘노조 아님’ 통보를 할 수 없다고 맞서왔다. 대법원이 사실상 전교조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다수의견은 현직 교원만 가입할 수 있다고 규정한 교원노조법 제2조에 따른 법외노조 처분을 통보한 행위가 재량권 남용에 해당하는지, 해직 교사가 일부 포함됐다고 해서 노조의 자주성이 훼손되는 것인지 등의 기타 쟁점에 대한 판단을 내놓지는 않았다.

해직 교사로 인해 노조 자주성이 훼손되는지와 관련해서는 별개의견을 낸 대법관 1인의 지적이 있었다. 해당 대법관은 “진정한 쟁점은 시행령에 있지 않고,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면 더이상 적법한 노조가 아니라고 정한 법률 규정에 본질적 문제가 있다”며 “헌법상 노동3권, 특히 단결권의 의미와 취지에 비춰볼 때 조합원으로 활동하다가 해고된 근로자의 조합원 자격을 부정하고, 이를 이유로 해당 노조의 법적 지위까지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전교조가 법외노조임을 전제로 한 법외노조 통보는 위법하다”고 봤다.

또 다른 별개의견을 낸 대법관 1인은 “시행령 조항이 무효이기 때문이 아닐, 전교조의 위법 사항에 비해 과도하기 때문에 법외노조 통보는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반면 이기택, 이동원 대법관은 “이 사건 법령 규정은 매우 명확하므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며 “법률 규정에 의하면 전교조는 법외노조이고, 시행령 조항에 의하면 노동부는 반드시 법외노조 통보를 해야 하므로 법외노조 통보는 적법하다”며 상고를 기각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이 제시한 법리에 기초해 해고 노동자의 노조 가입 문제, 결격 사유가 있는 노조에 대한 규율 문제 등에 관한 사회적 공론화와 입법적·정책적 해결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번 판결의 의미를 설명했다.

강경훈 기자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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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의 통일부 너마저도!

<기고> 김광수 정치학 박사
김광수  |  no-ultar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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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03  12: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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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북(북의 사상과 정치) 정치학 박사, <수령국가> 저자,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


기대가 컸다. 통일노선을 자기 노선으로 갖고 있던 전대협 의장 출신에다 4선의 중진의원, 거기다가 직전 집권 여당 원내대표까지 역임했으니 이제는 통일부가 뭔가 좀 달라지겠지, 뭔가 좀 변화가 있겠지, 남북관계에 뭔가 숨통이 좀 트이겠지 등등 그러한 기대가 정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를 알았는지 장관도 나름 열심히 노력하려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취임 한 달여가 지났으나 기대는 난망으로 바뀌는 듯하다. 

그 중심에 해법의 번지수를 잘못 짚은 원인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물론 아직까지 여기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은 좀 더 기다려 보자는 말도 서슴없이 꺼낸다. 여전히 기대를 못 버리는 여운이다. 

그렇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지금 안고 있는 이인영의 통일부는 시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위에서 지적했듯이 잘못 짚은 해법의 번지수에 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크게 2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취임과 함께 교착되어있는 남북의 판을 흔들지 못한 것이다. 

즉, 취임과 함께 장관이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교착되어 있는 판을 흔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기껏 생각해낸 것이 인도적 지원단체의 장이나, 사업체 CEO로써 자기 역할을 자임한 자충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여전히 지금까지 실천적으로 정신 못 차리고, 번지수도 잘못 짚고 있는 실체적 징표이다.

크게 세 가지가 이를 증명해 준다. 

첫째는, 통일부가 참으로 맥없이 무너진 것이 그 첫째이다. 

아시다시피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 취지는 북의 핵 문제를 푸는데 있다. 그래서 결의안 원문에도 ‘resolution’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해서 결의안 그 자체의 정신은 제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북핵 문제를 풀어내라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통일부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그 ‘작은 교역’은 유엔 안보리 정신을 절대적으로 위배하지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물물교환 방식의 교류 협력사업은 유엔에서 문제를 삼았던 ‘벌크 캐시’ 문제에 전혀 저촉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는 제재의 목적이었던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는데 전용될 위험성이 전혀 없다는 말과도 동의어다.(이 접근법도 맞는 것이 아니지만, 설령 유엔 정신을 수용한다하더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통일부는 유엔과 미국의 강압에 굴복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엔과 미국에게 ‘대북 제제 결의안’ 정신을 지키라고 외교적 노력을 했어야 했고, 우리 국민들에게는 설득력 있게 그 홍보를 다각적으로 해내었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런 노력은 전혀 없이, 덜커덩 미국의 한마디에(그것도 대북 제재 전문 변호사의 발언 한마디 포함), 또 국가정보원의 ‘친미적’ 판단에만 맡겨 너무나도 허망하게 ‘없었던 일’로 한, 통일부의 무기력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둘째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8월 28일 통일부 장관실에서 금강산 기업인들과 면담을 하면서 밝힌 "개별관광의 형태를 통해서라도 금강산 사업이 재개될 수 있는 길을 적극적으로 열어놓으려고 한다"이다.

결론적으로 이 발언이 갖는 문제점은 관광문제를 바라보는 시선(관점)이 북의 의도하고도 전혀 맞지 않으며, 또 지난 김연철 장관이 추진하려 했던 그 ‘잘못된’ 접근방식에서 단 1mm 오차도 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북은 관광이 재개되고 안 되고 그 자체에 대한 결과보다는, 관광 재개를 통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민족공조적 관점을 문재인 정부가 갖고 있느냐 없느냐를 더 중시해서 보고 있는데도 여기에 대한 시그널을 전혀 보내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다. 

그 결과 이인영의 통일부는 여전히 두 정상의 합의정신과 공동선언에 맞게 남북교류협력을 추진하려 하기보다는 어찌됐든 ‘모로 가더라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개별’관광을 고집하고 있다. 

이는 북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합의정신과 공동선언에 맞게 문제를 풀려는 기대 반영이 아니다.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남과 북, 즉 민족 내부의 문제인데, 이를 마치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미국에게 ‘뭔가 우리가 잘못했으니’ 우리가 죄지은 사람 마냥 미국이 허용하는 범위(=개별관광) 내에서 그 문제를 풀려는 대한민국 정부를 전혀 신뢰할 수 없음이다.  

이렇듯 문제의 본질은 관광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풀려는 문재인 정부의 태도 문제에 있다. 그러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과연 이인영 장관이 북의 그러한 메시지를 읽을 정치적 감각이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북의 그러한 메시지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그냥 ‘나는 (엄청) 노력하고 있다’, 그런 메시지를 우리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를 하고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전자라면 무능함을 드러내서 문제이고, 후자라면 통일부장관이라는 직보다는 ‘정치인’ 이인영을 드러내 보이고 있어 문제이다. 

세 번째는, 9월 2일 추석을 앞두고 정치인 출신답게 타이밍을 잘 잡아 신희영 대한적십자사 회장을 예방한 자리에서 "이산가족 화상상봉 간절... 北이 마음먹으면 장비 전달"이라고 밝힌 데서 확인되듯이 ‘잘못된’ 번지수 인식에 있다. 

무엇보다 이산가족 상봉이 안 되는 것이 그 어찌 ‘장비 문제’이겠는가? 또한 이산가족 상봉이 안 된 것이 어찌 북의 잘못이란 말이겠는가?

그런데도 잘못한 북의 결단을 압박하는 것 같은(‘평양서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는 뉘앙스가 그 인식의 한 단면이다. 즉, 장관의 이 워딩은 우리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절실히 바라는데, 마치 북이 호응하지 않아 이산가족 상봉이 안 되고 있다는 식의 인식의 한 단면이 노출되어 전형적인 ‘내로남불’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절대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풀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질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산가족 문제가 풀려지지 않는 것은 9.19공동선언을 합의해놓고도 이를 전혀 이행해내지 못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탓이 크다. 

미국 핑계만 대면서 정상의 합의도 못 지켜내는 우리 정부를 향해 전혀 신뢰를 보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근원이 자신(문재인 정부)에 있고, 그 지점에 대해 주무부서의 장으로서 무한 책임을 느껴야 하건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정직하지 않은 장관의 모습이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북을 악마화 하는 프레임에 동조한다. 아니라면 이런 시각이 맞는 것이다. 

북에게는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다. 두 정상이 그렇게 어렵사리 합의해냈음에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한 발짝도 이행해나가지 못한 주무부서 장관으로서 매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해서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하루라도 빨리 합의서 이행을 위해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70여 년간 헤어진 혈육의 정을 반드시 다시 잇게 하겠다. 그러니 북도 혜량하여 조금만 시간을 내어 기다려 달라. 그러면 반드시 그 길을 열어 내겠다. 북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과 유감을 표한다.” 뭐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메시지를 담으려면 그 정도는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도 분명하다. 남북관계는 그 대상이 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남쪽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가 될 수 없다. 즉, 북을 마치 남측에서 정치하듯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산가족 문제를 마치 정치적, 혹은 정략적으로 활용해 북이 호응해오지 않아서 진행하지 못한 것으로 둔갑시켜 모든 행위의 잘못을 북에게만 전가시키려 하는 그런 행위야말로 정말 정직하지 못한 장관의 모습이다. 

자꾸만 그렇게 북을 악마화해 놓고, 어떻게 북의 실체적 진실에 우리 국민들이 접근하길 바라는가? 과거 정부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해서 이인영 장관께 정말 고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북에게만 있는, 즉 북을 악마화 하는 프레임 유혹에서 벗어나 그 방법론도 ‘작은 교역’과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인도적 접근, 금강산 관광과 같은 교류협력 추진이 지금의 꽉 막힌 남북관계를 푸는 열쇠가 절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지금의 시기가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은 변화를 통해 큰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그런 상황이 절대 아니라는데 착목해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러한 방법론에 환상을 가져 빠져나올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건 무식하거나,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기 이전이라면 그러한 접근법이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시간을 이미 훨씬 넘어서 버렸다. 

철저하게 철지난 방법론에 불과하다.(그러한 방법론으로 백날 문을 두드려봐야 북은 절대 호응 해오지 않는다.) 

그러니 제발 근본문제, 남북합의문 이행이라는 본질적 문제에 집중하시라. 그 근본문제 매듭이 풀려지지 않는다면 절대 다른 매듭도 풀려지지 않음을 명심하시라.

그리고 그 매듭을 풀려면 이인영 장관은 ‘정치인’ 이인영에서 통일부 장관의 ‘이인영’이 되어야 한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써서라도 성사시키려고만 하는 그런 정치인이 아니라, 또한 모든 대북사업 하나 하나를 정치적 이벤트로만 볼 것이 아니라, 맞잡아야 할 상대인 북에게 그들의 고민과 문제의식에 대해 진정성 있게 대해주고,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실천적 진정성에 ‘신뢰’를 더하시라. 

이름하여 민족공조의 관점에 철저히 서시라. 오직 그것만이 지금 이 파국 직전의 남북관계를 풀어낼 수 있다. 꼭 명심해주길 바란다. 

첩경은 다시 한 번 ‘북이 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는지’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사)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력  자문위원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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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파 지배해 온 혁명의 노스탤지어여, 이젠 안녕

[장석준 칼럼] 비혁명의 시대를 넘어 전환의 시대로

1991년 5월의 기억은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의 역사에 크나큰 상흔으로 남아 있다. 경찰 폭력으로 강경대 열사가 무참히 희생되자 폭발한 전국적 시위는 4년 전 기억(1987년 6월 항쟁)을 떠올리게 만들며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불과 4년 전의 경험과는 달리 그해 5월은 쓰라린 죽음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패배로 끝나 버렸다. 그렇다. 패배였다. 이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비혁명의 시대>의 저자는 이 패배가 이후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을 둘러싼 논의와 고민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추적하려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미처 책을 들기도 전에 이와는 다른 방향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 것이다. ―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좌파를 움직여온 힘은 과거의 향수, 노스탤지어가 아니었을까?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 내내 이 사회를 바꿔보려 노력했던 이들은 실은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패배가 확정된 과거에 매달려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국 좌파를 지배해온 노스탤지어적 이념들

 

1991년 5월의 거리에서 막연하나마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1987년에 미완으로 남은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생각이었다. 군부독재 세력이 심판을 받기는커녕 선거로 집권을 연장한 제6공화국은 1987년 6월의 거리에서 희구했던 그 민주주의 혁명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은 절대 끝난 게 아니었다. 단지 긴 소강 국면을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앞에 붙은 수식어는 다르더라도 '민주주의 혁명(DR)'론을 내세우던 거의 모든 운동권이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밑바탕에는 민주주의 혁명이 더 높은 단계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대중 항쟁에 바탕을 둔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들 믿었다. 누구는 그러한 다음 단계 혁명이 '민족해방혁명'이라 했고, 누구는 '민중민주혁명'이라 했다. 하지만 어쨌든 제6공화국의 불철저한 민주화에 대한 불만이 오히려 모종의 탈자본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라는 전제만은 다들 같았다.

 

1991년 5월의 패배는 이런 운동권 공통 이념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대중은 4년 전 거리에서만큼 시위대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더 많은 대중은 1987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 실패로 확정된 현실 정치 경로를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민주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의 재개라는 범운동권 비전은 이들 비전이 상정하는 만큼 '전 민중적'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더불어, 민주주의 혁명의 '성장, 전화'에 바탕을 둔 다음 단계 혁명들의 시나리오 역시 모두 붕괴했다.

 

즉, 당시 한국의 범좌파는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이미 지나간 기회에 미래를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혁명은 1987년에 시작된 불철저한 민주화 이행으로 완결되어가고 있었고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혁명의 급진화를 통한 더 높은 수준의 변혁이라는 전망을 저만치 추월하고 있었는데도, 범좌파는 민주주의 혁명의 미완성에 집착하며 그 뒤늦은 완성을 꿈꾸고 있었다. 그들을 지배한 것은 어쩌면 회한으로 남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강박이었다. 한 마디로, 노스탤지어적 이념이었다.

 

따지고 보면, 198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범좌파 내에서 갑자기 다수가 된 민족해방(NL)파야말로 이런 노스탤지어적 이념의 극단적 형태였다. 민족해방파는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가 한반도 통일국가 수립 실패에서 비롯됐다 주장하면서 모든 실천을 예외 없이 조국 통일 완수로 수렴시켰다. 강박적으로 해방 직후의 처참한 실패의 순간들로 돌아갔고, 마치 그 실패들을 만회하려는 노력인 양 현재 자신들의 실천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들의 그 도저한 회한과 향수에도 불구하고 한국 자본주의는 분단 현실을 등에 짊어진 채 이미 저 앞으로 아득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해방파만의 문제나 한계는 결코 아니었다. 민족해방파의 정통 노선과는, 거의 정반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먼 이념-노선 역시 한국 사회에서는 결국 어떤 노스탤지어적 사고와 실천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진보정당운동을 지배해온 한국식 사회민주주의 흐름이 그러했다.

 

다름 아닌 1991년 5월의 패배를 겪은 뒤에 좌파 지식인, 운동가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넓은 의미의 사회민주주의 흐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불만족스러운 형태이지만 한국식 민주화 과정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군부 쿠데타의 사후적 불법화와 양김 씨의 순차적 집권 등)에 이르러 있었고, 민주주의 혁명의 급진화를 통한 탈자본주의 전망은 한국 사회 자체의 경험뿐만 아니라 현실사회주의권 붕괴를 통해서도 처절하게 무너졌다. 그럼 남은 길은 하나였다. 개혁의 길, 즉 그 내부에 다시 여러 차이가 존재할지라도 어쨌든 '사회민주주의'로 통칭될 수 있는 길이 그것이었다.

 

한데 사회민주주의에도 역시 그만의 전제 조건들이 있었다. 민주주의 혁명(DR)론들이 아주 까다롭게 여러 역사적 조건들이 교차하는, 거의 예외적이다 싶은 상황을 전제하는 것처럼, 사회민주주의의 성공도 그만큼 흔치 않은 조건들의 만남을 요구한다. 대의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돼야 할 뿐만 아니라 고도로 단결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노동계급이 형성돼 있어야 한다. 20세기 초중반에 좌파정당과 산업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서유럽 여러 나라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그럼 한국 사회에 이런 노동계급이 성장해 있었던가? 1996-97년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반대 총파업 와중에는 머지않아 이 물음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으리라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때는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과 몇 달만에 상황이 반전됐다. 외환위기와 함께,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시작된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대장정은 돌연 중단됐다. 아니, 정반대 방향으로 꺾여 버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정부에 구제금융 조건을 강요해, 한국 사회에 이미 그 싹이 존재하던 이중 노동시장을 새로운 시장지상주의 축적 구조를 뒷받침할 토대로 확대했다.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할 법률 근거들이 도입됐고, 기업별 노동조합들은 비정규직의 존재를 전제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전략을 실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참담한 노동 현실로 이어지게 될 20여 년 여정의 시작이었다. 국회 날치기로는 열 수 없었던 길이 외환위기를 빌미로 한 초국적 개입을 통해 열린 것이다.

 

이때 노동 유연화 공세에 가장 격렬히 맞선 것은 노동운동 내 급진좌파였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이 결국 좌절되면서 기회를 영영 놓친 것은 오히려 다른 세력이었다. 바로 범사회민주주의 흐름이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국가복지제도 확장이나 광범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단체협약 등 사회민주주의적 성과를 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반인 노동계급 형성과 연대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빠르게 신자유주의화한 한국 사회는 20세기에 서유럽에서 열렸던 이런 기회를 저항 세력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후 20여 년간 한국의 진보정당-사회운동은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한국 사회의 역사 전개 경로가 이미 이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쪽으로 갈라져 버렸는데도 좌파 지식인, 운동가들은 마치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것처럼 '북유럽형 복지국가'의 꿈을 놓지 않았다. 무산된 기회에 대한 또 다른 강박, 또 다른 노스탤지어적 이념이었다.

 

생태 전환, 이제까지와는 다른 도전

 

이것이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와 그 저항 세력이 전개해온 역사다. 한국 사회가 선택한 돌진적 근대화의 속도는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변화하는 전 지구적 상황에 맞춰 변형하는 데는 더없이 효과적이었지만, 한국 사회 내부에서 이 질서에 맞서며 새 질서를 준비할 세력이 성장하고 역사적 기회를 부여잡기에는 지나치게 빨랐다. 이런 세력이 되고자 했던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은 늘 지배 질서 재편의 속도에 추월당하며 의도하지 않게 향수병 환자가 되고 말았다.

 

새삼스레 이렇게 지난 역사를 회고하는 것은 단지 <비혁명의 시대>가 오랜만에 환기시킨 지난 세기 마지막 10년대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지금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이 마주한 역사적 상황과 과제를 더욱 정확하고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역사적 상황과 과제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기후 재앙에 따른 인류 문명의 존립 위기이고, 이에 맞서 문명의 생존력과 회복력을 최대화하려는 생태 전환의 노력이다.

 

기나긴 장마 뒤에 다시 잇단 태풍을 맞이하는 요즘,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이 지면에서 굳이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기후 변화를 되돌릴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기후 급변 속에서 문명을 최대한 유지, 생존시키기 위해서라도 생태 전환에 매진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장벽은 결국 자본주의다. 자본의 끊임없는 확대 재생산이 전제 조건이 되는 사회 질서는 인류 생존의 최대 걸림돌이다.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새로운 질서를 사고하고 실행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역사적 경로를 밟아온 지구 위 모든 이들에게 '동시'에 닥친 도전이다. 물론 돌진적 근대화의 궤적을 등지고 선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한국의 좌파도 다른 나라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탈자본주의 방향에서 생태 전환을 추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의 진보정당-사회운동이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정확히 현재의 급박한 과제를 풀어나가는 노력으로서 자신의 이념-운동을 정초할 기회이기도 하다. 노스탤지어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현재적'인 과업을 떠안을 기회다.

 

향수병은 병일 뿐이다. 그간 한국 좌파 이념 지형을 지배하던 미완의 과제들은 향수병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풀려나가지 않는다. 지배 질서의 진화에 추월당한 미해결의 문제들은 오직 가장 최근에 닥친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분단 질서를 넘어서는 일도, 20세기 복지국가가 그랬듯이 사회권을 보장하는 일도 생태 전환과 결합됨으로써만 과거의 실패나 공백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21세기의 현재적 과제가 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혁명의 시대는 오직 않았고, 개혁의 시대는 그저 '비혁명의 시대'에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배 질서의 승리로 역사가 종언을 고한 것은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도 더는 피하거나 건너뛸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전환의 시대다. 이제 우리의 지난날에 대한 모든 진실한 애도와 해원은 이 전환의 시대를 가장 충만하게 살아감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0212562594817#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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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당할 때도 "감사합니다"... 해병대의 반복된 비극

[김형남의 갑을,병정] 해병대에서는 왜 인권침해 계속 되

20.09.03 08:17l최종 업데이트 20.09.03 08:17l
 대한민국 해병대
▲  대한민국 해병대
ⓒ 해병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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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랜만에 한 해병대 병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몸 건강히 무사하게 전역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2019년 초 군인권센터의 인권침해 상담과 지원을 받았던 사람이다. 이병 시절부터 선임 해병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타를 당하고 인격 모독을 겪었던 그가 벌써 만기 전역을 할 때가 되었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고 느꼈다.

그 사이 가해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고, 피해자는 새로운 부대에서 일상을 되찾았다. 가끔 SNS에 올라오던 사진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새로 만난 전우들과 알찬 군 생활을 보낸 것 같았다. 자신이 겪은 피해를 잊지 않고 군 생활 중에 목격한 병영 부조리를 바로 잡기 위해 힘썼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폐쇄적인 군대 조직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는 사건 자체를 해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피해자가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되고 마는 폭력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사건을 지원한 나로서는 그의 전역 인사가 반갑고 보람된 소식이었다.

또 다시 터진 해병대 가혹행위

다시 시간을 뒤로 돌려 2019년 초를 복기해본다. 군사경찰(헌병)의 피해자 조사에 신뢰 관계인으로 입회했을 때였다. 조사 중간 쉬는 시간에 수사관과 잠깐 이야기를 나눌 틈이 있었다. 수사관에게 이러한 구타 사건이 많냐고 물었다. 2014년 윤 일병 사건 이후 병영 내에서 구타나 잔혹한 가혹행위가 많이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충격적인 구타 사건을 마주하게 된 터라 추세가 궁금하였다. 그런데 수사관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해병대는 특성상 여전히 구타 사건이 종종 발생하는 편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를 보는 경우가 많아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것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해병대에서는 주기적으로 엽기적인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했고 지금도 그렇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올해 1월 해병1사단에서 선임 해병들이 전입 신병을 때리고 살아 있는 잠자리를 강제로 먹게 한 사건이 있었다(관련기사: "잠자리 산 채로 먹어라" 해병대 가혹행위-성희롱 폭로 http://omn.kr/1mclx).

그런 해병대에서 또다시 가혹한 인권침해 사건이 터졌다. 군인권센터는 1일 해병1사단에서 선임 해병들이 6개월간 한 병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성추행, 구타를 밤낮없이 매일 저질렀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해병1사단에 자대 배치를 받은 A씨는 B 병장에게 지속해서 괴롭힘과 폭행을 당했다. B병장은 A씨에게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고 얼굴에 들이미는 등의 성추행을 저질렀다. B병장이 제대한 뒤에도 그 다음 선임들에 의해 괴롭힘은 계속 됐다. 샤워실에서 A씨를 부동자세로 세워놓은 뒤 바디워시로 거품을 만들어 성기를 만져 추행하는가 하면, 침대에서 성추행을 하면서 피해자에게는 "감사합니다"를 복창하게 하는 등 피해 내용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가해 행위가 대낮에 부대 복도, 흡연장 등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졌지만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대 간부들이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병대 군사경찰은 이 사건을 7월에 접수하고 수사를 시작해 가해자 중 현역 3명(병장 2명, 상병 1명)을 강제추행, 폭행 등의 혐의로 구속해 군검찰로 송치했다. 전역한 B씨는 관할 경찰서에 사건을 이첩했다고 밝혔다.

이빨, 악기바리... 뿌리깊은 해병대 악습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해병대는 강도 높은 부대 진단과 가해자 엄중 처벌을 천명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해왔다. 그러나 툭하면 벌어지는 인권침해 사건은 가해행위의 양상까지 흡사할 정도로 반복적이다. 사건이 발생한 부대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이빨'이라 부르는 악·폐습이 공유되고 있었다.

선임이 물어볼 때 '~ 할 수 있다'라고만 대답할 것, 선임에게 대답할 때 '맞습니다'라고만 답할 것, 선임의 몸에 손을 대지 말 것, 모든 답변은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똑바로 하겠습니다', 질문 시 '~인지 알고 싶습니다'로 통일할 것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해병대에는 병사들끼리 '우리의 주적은 간부'라 외치며 병영 악습을 간부에게 이야기하면 소위 '기수열외'를 시켜 투명인간 취급하는 못된 폐습이 온존하고 있다. 그 탓에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오랜 시간 피해를 참고 견디느라 몸과 마음이 깊이 병든 뒤에야 구제를 호소해왔다. 부대 간부들이 오랜 시간 구타와 가혹행위를 인지하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해병대가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16년 여름, 해병대에서 '악기바리'로 불리는 식고문 사건이 불거진 적이 있다. 악기바리는 해병대에서 전해지는 전형적인 악·폐습의 하나로, 후임병에게 빵, 과자 등의 취식을 계속 강요하는 고문이다.

당시 피해 병사는 밥을 먹은 뒤 빵, 피자, 치킨, 초콜릿, 우유, 음료수 등을 강제로 먹는 식고문을 한 달 동안 10번이나 당했다고 한다. 밥과 치킨 2마리, 초콜릿 파이 1상자, 과자 3봉지, 빵 3개, 음료 1.5ℓ를 통째로 다 먹게 하는 식이었다.
 
 이상훈 해병대 사령관이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거수경례로 인사하고 있다. 2016.6.29
▲  이상훈 해병대 사령관이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거수경례로 인사하고 있다. 2016.6.29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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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상 초월의 엽기행각에 여론의 뭇매를 맞은 해병대는 병영 내 인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었던 이상훈 중장의 결단으로 2017년 외부 인권 전문가들로 구성된 '해병대 인권자문위원회'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군 조직의 폐쇄성을 감안하면 사령부가 민간인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꾸린 것은 용기 있는 일이었다.

위원회는 해병대에서 발생하는 각종 인권침해 사건을 검토하고 대책 수립을 자문했으며, 해병대 역시 위원회에서 논의된 결과들을 충실히 이행해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성과를 보여 얼마간 해병대에서는 큰 사건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사령관이 바뀐 뒤 해병대사령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판단을 내렸고, 2019년 2월 위원회를 해산했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위원들이 우려를 제기했지만 해산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기사의 서두에서 다루었던 구타 사건, 후임병에게 개 흉내를 내며 네 발로 걸어 다니게 한 사건, 치약으로 머리를 강제로 감긴 사건 등 인권침해 사건이 다시 확인되기 시작했고, 해가 바뀌어 잠자리 강제 취식 강요 사건, 성추행·구타 사건 등에 이르게 됐다.

인권은 소란스럽게 지키는 것

인권에는 완성형이 없다. 여러 사람이 맞부딪히며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구성원이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고 인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보호 장치를 겹겹이 갖춘다고 권리 보호가 빈틈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매 순간의 섬세한 노력과 관심이 경주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권리를 침해 당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군대처럼 권력 관계가 뚜렷한 조직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인권 옹호의 핵심은 매 순간의 섬세한 노력과 관심을 어떻게 상시적인 시스템으로 구축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병대의 인권자문위원회 해산은 인권 옹호를 군사 작전처럼 '임무 달성'의 관점으로 바라보았기에 가능했던 발상으로 보인다. 2년 남짓한 시간을 외부의 감시자를 통해 인권 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해나가는 상시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쓰기보다는 인권 상황 개선이란 목표 달성의 기간쯤으로 인식한 것이다. 인권에 대한 지휘부의 그릇된 인식이 오랜 시간 힘써 만든 성과를 한순간에 수포로 돌리는 촌극을 빚어낸 셈이다.

이것이 비단 해병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방부와 육·해·공군이 앞다투어 인권 전담 기구를 신설하고 상담 창구를 열지만 인권침해 사건은 끊이지를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계급 질서의 장막 속에서 암암리에 크고 작은 형태의 폭력이 대물림되는 구조는 지금도 병영 곳곳에서 재생산 되고 있다. 군이 폐쇄 조직이기 때문이다. 인권 상황에 대한 외부의 통제와 감시를 간섭과 지휘권 침해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발전의 기회로 인식하고 이를 어떻게 시스템화할지 고민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곧 국방부 장관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다. 군의 문민통제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병영 인권 상황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인권은 특별히 기간을 두어 진단하고,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번지르르한 간판을 단 기구를 새로 설치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깔끔하고 멋있게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인권은 소란스럽게 지키는 것이다. 외부의 통제, 바깥의 쓴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군이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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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찾아 수원서 군포까지…” 공포가 된 집단휴진

등록 :2020-09-03 04:59수정 :2020-09-03 07:14

 

전공의 휴진 13일째 ‘커지는 불만’
항암치료·수술 연기된 암환자들
“생명에 위협받는 지경” 울분
‘의사 4만명 증원’ 15만명 동의…“수술 미뤄져 식물인간 돼” 글도
응급실 의사 부족해 문전박대
“고위험 산모 출산 거부” 분통
전공의 총파업이 13일째 이어지고 있는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전공의 1인시위와 파업 철회를 요구하는 참여연대 1인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전공의 총파업이 13일째 이어지고 있는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전공의 1인시위와 파업 철회를 요구하는 참여연대 1인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3일째 이어진 전공의들의 집단휴진 사태로 수술과 진료가 연기되고 응급실 입원을 거부당한 환자들이 “공포에 가까운 집단휴진을 멈춰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비롯해 각종 커뮤니티에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비판하는 중증 환자 가족들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가장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은 항암치료나 수술이 연기된 암 환자들이다. 이들은 2일 <한겨레>에 “집단휴진으로 생명에 위협을 받을 지경”이라고 전했다. 외래진료를 봐야 할 교수들이 전공의 업무 등에 투입되면서 정상적인 진료를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6년째 폐암 투병 중인 김종환(56)씨는 “암 환자들에게는 ‘암 전이’만큼 무서운 게 없다. 전이가 된 상황인지 파악해서 치료나 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들한테 항암치료나 수술이 연기되는 상황은 공포를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6년째 식도암 투병 중인 김성주(58)씨도 “식도암 수술 뒤 설사가 며칠째 반복돼 살이 46㎏까지 빠졌다. 한밤중에도 설사가 너무 심해 응급실에 가려고 했지만, 주치의 진료는 한참을 기다려야 되고, 응급실은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말만 들었다”고 말했다.

‘공공의료를 위하여 4천명이 아니라, 4만명의 의사인력 증원을 청원한다’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이날 오후 3시 기준으로 15만여명이 동의한 상태다. 청와대 국민청원 누리집에는 “한 담낭암 환자가 8월7일 수술 당일 새벽에 집단휴진 때문에 수술이 연기된 뒤 식물인간이 됐다”는 내용의 청원글도 올라왔다. 환자의 손녀인 청원인은 이 글에서 “전공의 집단휴진 당시 외과 당직 교수의 일탈로 발생한 의료 사고”라고 주장했다.

지난달 26일 저녁 경기도 수원에 사는 ㄱ씨도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었다. 자녀가 화장실 욕조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입어 당장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집 근처 대형병원에서는 “응급실에 의사가 부족하다. 동네 개인병원을 찾아보라”며 돌려보냈다. 또 다른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도 문의 전화를 해봤지만, 돌아온 답은 “파업으로 인해 의사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ㄱ씨는 집에서 차로 40분 넘게 걸리는 경기도 군포시의 한 병원을 찾았고, 자녀는 가까스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출산을 앞둔 임신부들의 커뮤니티에는 전공의 휴진으로 분만 중 통증을 줄여주는 ‘무통주사’를 안 놓아준다거나, 고위험 산모의 출산을 대형병원에서 거부했다는 호소가 올라왔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60517.html?_fr=mt1#csidxb17073b897f18918219d8f8b28a8c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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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어샤이머, “자유주의 국제질서 붕괴는 불가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9/03 08:43
  • 수정일
    2020/09/03 08:4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왕지스, “많은 국가들이 한쪽 편 들어야 하는 상황 처할 수도”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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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02  12: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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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략적 경쟁의 수위를 더 높여가는 미국과 중국은 어떤 계산을 하고 있을까? 1일 ‘2020서울안보대화’ 첫 세션(좌장 김지윤)에 화상으로 참석한 두 나라 전문가들은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전부터 미.중 간 패권경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해온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현재 깊은 곤경에 처해 있다”며,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밑받침이 되는 지각판들이 현재 움직이고 있고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을 바로잡거나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탓하는 전문가들과는 달리,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이러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몰락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일부의 책임은 있겠지만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체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

   
▲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 [2020서울안보대화 영상 캡쳐]

미어샤이머 교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단극체제에서만 발생할 수 있고,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2차대전 직후인 1945년이 아니라 냉전 이후인 1989년에 시작된 것이며, △냉전 이후에 등장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내재적인 결함이 있었다고 봤다.

“즉 붕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면서 “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들을 살펴보면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는 정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정책이 ‘자유민주주의 확산’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고 “끔찍한 희생”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중국 및 러시아와 충돌하게 됐다.  

국경을 개방하면서 이민문제가 발생했고 많은 국가들이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근간으로 ‘민족주의’가 대두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국제기구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몇몇 국가들에서는 주권이나 국가의 정체성과 같은 문제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보니 영국이 ‘브렉시트’ 결정을 했을 수도 있다”고 미어샤이머 교수는 진단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는 ‘초세계화’를 추진했다. 글로벌 무역과 투자장벽을 최소화한 결과, 중국이 부상하게 됐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유지되려면 단극체제여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그 질서에서 추진한 정책으로 인해서 중국이 우뚝 서고, 중국-러시아가 부활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오늘날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근간이었던 단극체제가 다극체제가 되었다. 새롭게 등장하는 다극화 세계에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면서 “결국은 현실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로 재편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왕지스 베이징대 국제전략연구원 원장. [2020서울안보대화 영상 캡쳐]

중국 내 저명한 미중관계 전문가인 왕지스 베이징대 국제전략연구원 원장도 “중국과 미국의 지정학적, 지경학적인 경쟁은 세계정치에서 뉴노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국제질서의 분기, 즉 두 갈래로 나뉘는 현상이 강화될 것”이며,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전략 지정학적 경쟁이 심해짐에 따라 다른 국가들의 무역, 금융, 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국과 미국 사이에 한쪽을 선택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베이징과 미국 모두 흑백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데, 베이징의 눈에는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경쟁 또는 갈등으로 보고 있고 미국의 눈에는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의 분열로 세계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왕지스 원장은 “2020년에 (미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는지와 상관없이 중국과 미국 모두 장기적인 전략적 경쟁에 각각의 글로벌 자원을 동원하겠다는 입장”이라며 “이에 따라 전 세계는 많은 영역에서 냉전을 연상시키는 ‘분기 위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많은 국가들은 결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한쪽 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두 강대국의 각축장인 남중국해에 인접한 아세안 국가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키쇼어 마부바니 싱가포르국립대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 학장은 ‘코로나19 팬데믹’ 아래에서 일어나는 “혼돈”의 근원을 세 가지 모순으로 설명했다.

△협력의 필요성과 갈등의 모순, △서국 국가들 내에서 다자적 협력을 하려는 경향과 자신의 힘을 유지하려는 경향 사이의 충돌(모순), △번영을 기회를 맞은 아시아 국가들 내 지정학적 경쟁이 고조되는 모순이다. 

마부바니 학장은 ‘코로나 사태’에서 얻어야 할 교훈을 배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세계화 이전에, 코로나 사태 이전에 우리는 193개국에서 각각 살고 있었는데, 마치 193개의 배에 각각 살고 있는 것이었다. 각 배마다 선장과 선원이 있고 이 배들이 충돌하지 않기 위한 규칙들이 있었다. 이것이 과거의 국제질서다. 그렇지만 세계화로 인해서 전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있고,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더 작아지고 있다. 지구에 살고 있는 78억명이 더 이상 193개의 배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배에 타고 193개의 캐비닛에 살고 있다. 같은 배에 탔는데 불이 났을 때, 가장 어리석은 일은 ‘누가 이 불을 냈느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화재가 발생하면 일단 불을 꺼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지금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인해서 미국과 중국이 서로 협력해서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싸우는 상황이 대두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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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서울은 중재자인가, 할 소리를 하는 주인인가?

이흥노 재미동포 | 기사입력 2020/09/0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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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문제나 조미 관계를 논하려면 꼭 염두에 두고 고려돼야 할 역사적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평양이 “핵무력 완성, 힘의 균형”을 선언하면서 핵보유국 대열에 진입한 2017년 11월 29일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무산시킨 2019년 2월28일이다.

 

전자는 트럼프를 북미 대화로 떠밀어 넣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워싱턴은 평양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핵무력을 완성하리라 상상을 못 했던 터라 정작 오금이 저리도록 기절초풍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련한 미국 외교관 출신 펠트먼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이 ‘힘의 균형’ 선언 2주 만에 평양에 급파됐다. 그는 유엔 업무차 방북이라고 시치미를 뗐지만, 실제로는 펠트먼 일행이 예상을 뒤엎고 닷새나 평양에 지체하면서 조미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엔의 2인자 펠트먼 사무차장의 방북과 비교되는 사건을 이 기회에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15년 5월 예정됐던 반기문 유엔총장의 방북 허가를 평양이 돌연 취소한 사건이 떠오른다. 방북길에 서울에 잠시 머문 반 사무총장은 평양에 대고 비핵화에 나서야 하고 인권도 개선돼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이 기자회견 발언이 평양을 자극했을 수 있지만, 그보다 미국과 유엔 대북제재 강화 조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미국의 충견이라는 게 평양의 평가기 때문에 방북 취소가 내려졌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사실, 같은 동포 사무총장이라는 좋은 위치에서 펠트먼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반북 활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는 건 같은 민족 성원으로 부끄러운 처사다.  

 

후자는 미국의 정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남북이 값진 교훈을 터득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실패라고만 볼 일이 아니다. 남북미실무진이 완벽하게 만든 하노이 조미공동선언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호전 네오콘 반대 세력의 높은 장벽을 뚫지 못하고 주저앉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마련된 만찬도 거부하고 재회 약속도 없이 하노이 회담장을 박차고 귀국해버린 것은 전례없는 외교적 결례다. 물론 남북 두 지도자와 우리 겨레를 정면으로 모욕 배신한 작태라고 봐야 맞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을 향해서는 19년 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남측을 향해서는 ‘오지랖 넓은 중재자가 아니라 할 소리를 하는 당사자, 주인 행세를 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미국을 꿰뚫어 보고 내린 기막힌 지적이라고 평가된다. 트럼프의 식지 않은 미련 때문에 어렵사리 판문점에서 남북미 세 정상 회동이 2019년 6월 30일에 있었다. 곧이어 스톡홀름 조미 실무회담이 개최됐다. 그러나 여기서도 트럼프의 뜻은 오간 데 없고 하노이 회담 결렬에 써먹었던 ‘빅 딜’ 소리만 미국 측 실무진이 복창하자 평양 실무진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가 버렸다.

 

트럼프의 핵협상 타결 의지가 우익보수 네오콘 반대 세력의 집요한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는 것이 트럼프의 한계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절감케 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트럼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과거 전임자나 차기 백악관 주인이 누가 돼도 동일하게 적용될 이야기다. 요즘 서울에서는 ‘중재자’ 소리와 ‘선순환’ 소리가 들리질 않는다. 아마 할 말을 하는 주인이 되려는 징조인가 싶다. ‘중재자’ 역할론, ‘선순환’ 논리를 도입하고 거기에 메몰됐던 외교안보통일 최고위 참모들이 최근 교체된 것도 그 일환일 수도 있다. 사실, 이들은 지나치게 친미색채를 띤 미국의 예스멘 (Yes Men)으로 알려져 규탄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미국에 순종하는 자세를 ‘중재자’ 역할이라는 말로 포장한 대단한 재간꾼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주도 한미실무그룹 창설에도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라는 게 중론이다. 남북 관계 발전을 저지 차단하는 직접 당사자가 바로 한미실무그룹으로 지목되고 있어 온 국민이, 우리 겨레 전체가 일제 ‘총독부’라며 즉각 폐지돼야 한다고 거세게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해리스 미국대사가 여기에 올라타고 앉아 일제 총독 행세를 한다는 비난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고 있다. 그는 여야 국회의원들 앞에서 “문 대통령이 좌경 친북이라는 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정도로 거만한  외교관으로 실무그룹을 거치지 않곤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소리를 한다.

 

해리스는 남북 교류 협력 사업을 사사건건 시비 걸고 훼방을 논다. 따라서 남북 관계 발전은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되고 있다. 2019년 초, 독감 약 타미플루 인도적 지원이 허용됐으나 미군이 이를 실고 갈 차량의 군사분계선 통과를 거부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서 당시 일각에서는 기발하게 지개부대 동원  제안까지 내놨다. 정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해괴망측한 일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정력적으로 남북 교류 협력 추진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제재 회피 방도를 찾는 데에 몰두할 게 아니라 제재를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지혜를 발휘하는 게 더 생산적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 좋겠다.

 

드디어 때가 왔다. 우리의 이익, 민족의 화합, 겨레의 최대 숙원을 성취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이다. 미국 대선, 일본의 아베 후임 작업, 중미 대결, 코로나 대재앙, 세계 경제 파멸, 등으로 세상이 급변하고 요동치고 있다. 더구나 트럼프는 난파선에 매달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일대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이야 말로 할 말을 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우리의 이익을 챙길 절박한 순간이다. 우리 민족문제는 민족 내부 문제라는 사실을 설득시켜야 하고 관철해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건 간에 우리 민족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한다는 원칙에서 이탈하면 안 된다. 자주는 양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고 끝까지 사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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