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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다녔어도 2년마다 신입”..한국장학재단 콜센터상담사 전면파업 나선 이유

한국장학재단 콜센터 상담사들, 하루 전면파업 돌입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20-09-15 18:59:09
수정 2020-09-15 19: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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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학재단 콜센터에서 국가장학금과 학자금 대출이 필요한 학생·학부모 상담을 담당하는 상담사들이 15일 하루 전면 파업에 나섰다. 2년마다 위탁업체가 바뀌면서 겪는 고용불안과 10년을 다녀도 신입사원과 똑같은 최저임금을 받는 현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해보고자 지난해 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생애 첫 파업에 나선 것이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동조합 한국장학재단지회는 15일 한국장학재단에 식대·명절상여금·복지포인트 지급 및 임금 인상, 정규직·비정규직 차별 금지 등을 촉구하면서 총파업에 나섰다. 노조에 따르면, 2020년 임금교섭 결렬 후 2개의 센터에서 진행된 쟁의찬반 투표 결과 각각 94%·97%의 높은 찬성률로 가결됐다.

무엇이 이들 상담사를 이렇게 분노하게 한 것일까.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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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동조합 한국장학재단지회는 15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총파업 기자회견을 열고 공공기관인 한국장학재단을 위해 일하는 상담사들의 처우개선 등을 촉구했다.
ⓒ김철수 기자

8년간 3개 업체 소속으로 일한 상담사
2년마다 새로운 근무지서 신입사원처럼

“희망을 나누는 한국장학재단 상담사 ○○○입니다”

 

한국장학재단 콜센터에 전화하면 들을 수 있는 상담사의 첫 인사말이다. 그런데 이런 매뉴얼에 따른 인사말과는 다르게, 이들 상담사들은 한국장학재단이 아닌 모두 민간위탁 사업장 소속 노동자들이다. 이 때문에 2년에 한 번씩 일하던 위탁업체가 바뀌면서 정들었던 근무지가 바뀌거나 센터가 통째로 통폐합되는 등 고용불안을 겪어 왔다.

또 2~3만원 수준의 근속수당이 적용됐다가도, 2년 뒤 업체가 바뀌면 다시 신입사원이 되는 수모를 반복해서 겪었다.

2013년부터 한국장학재단 콜센터에서 일해 온 상담사 이재순 씨 또한 신입이 받는 똑같은 최저시급에 따른 임금을 받고 있다. 8년을 일했건만, 업체가 바뀔 때마다 신입사원이 되기를 반복한 것이다. 그가 지난 8년간 거쳐 간 업체만 유베이스, 유니에스, 한국코퍼레이션 등 3개다. 내년에 또다시 공개입찰로 업체가 선정되기 때문에 다시 소속 업체가 바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점은 2년마다 바뀐 근무지였다. 유베이스 소속일 땐 경기도 부천 송내동에서 근무했다. 유니에스로 바뀐 뒤엔 서울 용산구에서 일했다. 또 한국코퍼레이션으로 바뀐 뒤엔 서울 영등포구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들었던 동료들과 반복해서 헤어지고 다시 신입사원처럼 새로운 근무지에서 적응하기를 반복했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을 발표한 뒤 ‘더 이상 근무지를 옮겨 다니거나 고용불안에 떨어야 하는 일은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기도 했지만, 정규직 전환은 요원한 상황이다. 한국장학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재단 콜센터 상담사들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3단계 대상이기 때문에 관련 절차에 따라 기관에서 실태조사 후 현행 민간위탁 체제를 유지하는 게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다고 한다. 고용노동부 또한 이 같은 기관 측의 결정을 사실상 승인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상담사들은 10년을 일해도 근속수당 등 아무런 수당 없이 최저임금만 받는 처우라도 개선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임금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1년에 5만원은 인상할 수 있다”였다. 이에 15일 청와대 분수대 앞 기자회견에서 만난 한 상담사는 “상담사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라며 “1년에 5만원 임금 인상하겠다는 회사는 처음봤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콜센터 직원. (자료사진)
콜센터 직원. (자료사진)ⓒ제공 = 뉴시스

상담사들을 총파업에 나서게 한 이유는 또 있다. 감염병 앞에서조차 벌어진 차별적인 대우 때문이다.

노조에 따르면, 지난 7월 24일 영등포 타임스퀘어 8층에서 11시경 확진자가 발생했다. 당시 상담사들은 4시간 넘게 이동을 할 수 없었고, 외부 식사도 금지됐다. 그러면서도 상담업무를 계속해야만 했고, 오후 4시10분경에서야 귀가조차 됐다. 그런데 지난 8월 25일 한국장학재단 서울사무소가 있는 연세빌딩 22층에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땐 조치가 달랐다. 24층에 있던 한국장학재단 정규직 직원들을 즉시 귀가시킨 것이다.

이에 한 상담사는 “코로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해서 감염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한편, 노조는 이날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한국장학재단의 무책임, 무대책에 분노한다”라며 “상담사들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무기한 총파업도 불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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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역사의식, 이것밖에 안되나

  • 기자명 현장언론 민플러스
  •  
  •  승인 2020.09.15 20:17
  •  
  •  댓글 0
 
   
 
▲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지난 9월 2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지난 9월 2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결국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정의기억연대) 관계자가 기소되었다. 
검찰에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검찰조사를 통해 위안부 운동, 정의연 운동에 대한 명예가 회복되고 진실이 바로 잡히길 바랬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이었다.

위안부 운동을 ‘묻지마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위안부 운동이 그저 돈으로 보상이나 받자고 시작한 것이 아님은 검찰도 잘 알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성노예로 아시아 전역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할머니들에게 그동안 국가가 해준 것이 무엇인가. 국가가 받아내지 못한 식민지 지배와 성노예 범죄에 대한 진정어린 인정과 사죄를 받고자 하는 것이 위안부 운동이다. 그런데 국록을 먹는다는 검찰이 이게 뭔가. 일제의 국가적 범죄를 단죄하고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정의감이나 역사의식을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국가가 국민을 외면하고 일제에게 팔아먹기까지 했을 때, 지난 30여년 동안 윤미향 등 시민활동가들이 할머니들과 함께 국가를 대신해서 스스로 나섰고 국제적으로도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인권운동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과 국제여론의 열화같은 지지도 받았다. 그런데 지난 4개월은 뭔가. 위안부 운동은 처참하게 마녀사냥을 당했고 헌신적 활동가 한 분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차라리 일본놈들에게 당했으면 목청껏 싸움이라도 크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녀사냥의 선봉에서 필봉을 휘둘렀던 자들이 친일의 후예임을 생각할 때, 참으로 통분할 일이다. 

윤 의원과 정의연을 사리사욕에 눈이 먼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했던 가짜뉴스들이 제기한 의혹들의 상당부분이 이번 검찰조사의 결과로 무혐의처분되어 다행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라. 친일수구언론들은 검찰의 기소가 그 동안 제기된 의혹을 사실로 확인한 것인양 다시 악귀같이 짖어대고 있지 않은가. 결국 검찰의 기소는 이들에게 먹이감을 다시 던져준 것이나 진배없다. 
검찰은 이번 기회에 정의연에 대한 의혹을 깨끗하게 풀어줌으로써 상처받은 위안부운동과 이와 함께했던 시민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했어야 했다. 

정치논리로 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전쟁범죄에 대한 사법적 눈을 가진 검찰은 어디갔냐는 것이다. 이번에 검찰이 혐의를 둔 기소사항들을 보면 검찰이 빠져있는 형식주의적 논리가 어떤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내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검찰이 윤의원에게 적용한 ‘정부와 지자체 보조금 부정수령’, ‘사전등록 누락한 기부금 모금’, ‘개인 계좌로 기부금 모금 및 사적 사용’, ‘안성쉼터 시세보다 고가 매입’ 등의 사항은 열악한 시민운동환경속에서 발생한 미숙성들이다. 시민단체활동가들이 인권을 위해 거리에서 악전고투할 때 검찰은 고시원에 있었을 것이고, 연수원에 있었을 것이다. 검찰이 불법혐의를 둔 이런 사항들은 자주적으로 운영되는 단체내 규약과 절차에 따른 조치들이다. 게다가 법적 규정이 시민사회단체 운영 현실을 다 반영하지 못해 발생하는 불일치적 요소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공권력이라는 검을 사용하는 검찰이 형식논리로 마구 휘두르면 걸려들지 않을 국민이 누가 있겠나. 기껏해야 시정경고나 벌금 정도의 사안에 불과한 것들을 무슨 어마어마한 범죄로 취급하는데 검찰도 한몫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검찰의 기소는 사실에도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찰은 윤미향 의원이 ‘피해자(길원옥) 심신장애 악용하여 기부와 증여’를 받았다는 ‘저의’가 의심되는 기소를 하였다. 길원옥 할머니가 충분한 사실인식과 가치인식 속에서 위안부 운동의 확산에 기여하고자 한 기부행위라는 점에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약간의 관심만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한 팩트를 검찰은 왜 외면하는가. 게다가 이 건은 길원옥 할머니를 끼고도는 사적관계자의 고소를 인정한 데 기초한 것이다. 사적 욕망과 인권운동의 가치 중에서 어떤 법익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초보적 판단도 없어 보인다.

혐한정치의 주범이자 위안부, 징용노동자 문제로 한일무역전쟁까지 벌인 아베 수상이 물러나고 스시 전 관방장관이 제4기 아베내각을 꾸리는 정세이다. 스가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초강경정책으로 일관했다. 앞으로 대일관계가 중요할 것이다. 스가 내각은 이번 검찰 기소를 위안부나 강제징용문제를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풀어가는데 매우 유리한 정황으로 간주할 것이다.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역사로부터 고립되어 미시적인 형사법이니 소송법이니 법전이나 뒤져서 사건들을 처리할 때 골병드는 것은 민초들이다. 일본 제국주의 전쟁범죄를 이 나라 검찰이 앞장서서 사법적 정의를 행사하지 않을 때,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다시 일본군국주의가 부활하고 한반도를 넘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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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은 모른다? 그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아니었다"

[공소장 분석 인터뷰 ①] '이재용 저격수'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야 할 일'

20.09.15 07:08l최종 업데이트 20.09.15 09:57l
사진·영상: 유성호(hoyah35)
와 만나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공소장을 본 소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 총수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실현하기 위한 주가조작과 고의 분식회계가 있었다고 주장해온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공소장을 본 소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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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의 시간은 딱 5분이다. (국회에서) 지적을 해도, 금융관료들이 '검토하겠습니다' 하면 끝난다. 확인해주지 않은 일들이 공소장에서 드러나니 정글 안에 갇혀있던 고대 석상이 나타난 느낌이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4일 진행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불법 경영권 승계 의혹 공소장을 본 소감을 말하며 지난 4년을 떠올렸다. 2016년부터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 의문을 제기, 삼성바이오로직스(아래 삼바) 내부 문건 공개 등 총수 일가를 위한 승계 작업 과정에 불법이 있음을 주장해온 그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0일 이재용 부회장 등에 대한 공소장을 단독 공개했다. (관련기사 : [전문보기] 이재용 공소장 전문을 공개합니다  http://omn.kr/1ovbn

그가 인터뷰 도중에 금융당국을 언급한 건, 정무위나 예결위 등 현안질의 때마다 제기한 주가 조작, 회계 부정에 대한 질의에 금융위원회 수장 등이 보인 태도 때문이다.
 

"그 내용은 제가 이따 별도로 파악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지 못합니다." - 2018년 11월 7일 예결위원회,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br /><br />"주가가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조사할 순 없는 겁니다." - 2016년 12월 8일 정무위원회,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

 
속기록 속 박 의원은 각각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국민연금의 꺼림칙한 주식 매도 흔적이나, 일부 회계 법인의 허술한 삼바 기업가치 평가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금융 관료들에게 대놓고 답답함을 드러냈다. 그가 인터뷰에서 금융 당국을 향해 "워치독(감시견)이 잠만 자면 어떡하나, 자는 척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꼬집은 이유다.

박 의원은 최근 공소장이 공개된 이후 금융당국이 삼성증권 조사에 착수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금융감독원이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해명자료를 낸 사실에도 주목했다. "조사를 안 하면 웃긴 것"이라고도 했다. 박 의원은 "(공소장에 적시됐듯) 삼성증권은 제일모직의 자문사인데, 삼성물산의 주주들에게 이해상충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선 감독기구가 바로 잡아야하는 것 아니냐"며 "조사를 강력하게 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그동안의) 논리가 공포스러웠다. 시가총액 430조가 넘는 그룹의 리더가 아닌가. 그런데 공소장을 보니 그렇지 않더라."


공소장에서 이 부회장이 직접 합병 과정에 참여한 사실을 언급한 대목에도 방점을 찍었다. 앞으로 시작될 재판의 쟁점 또한 여기에 있다고 봤다. 박 의원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두 기업의 합병을 성사하기 위해 투자자 이익에 반하는 결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숨겨진 조각들이 나올 것으로 본다"고 기대했다.

아래는 박 의원과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워치독] "언제까지 눈감나... 금융당국, 검찰 수사 별개로 나서야 할 때"
 
▲ 박용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공소장을 본 소감은?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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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고위 간부들의 불법 재산 승계 의혹을 담은 검찰의 공소장이 공개됐다.
"4년이라는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삼바 내부문건을 공개하고, 증권선물위원회를 압박해 고발토록 하고...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다 드러난 거다. 너무 신기했다. 국회의원의 시간은 딱 5분이다. 지적을 해도 금융관료들이 '검토하겠습니다' 하면 끝나는 거다. 묵인하고 확인해주지 않았던 일들이 공소장에서 드러나니, 칠흑 같은 정글 안에 갇혀있던 고대 석상이 나타난 느낌이었다."
 
- 가장 주목한 대목은?

"주가조작이다. 시장 경고음이 있었고, 누군가에 의해 조정됐을 수도 있다는 법원의 판단도 있던 상황이었다. 피해자들도 그런 징후를 이야기했고. 그때 당국자들은 시장에서 1(제일모직)대 0.35(삼성물산)로 합병비율이 나온 것을 어쩌란 말이냐는 식이었다. 그런데 공소장에선 (주가 조작) 움직임이 있었다고 나온다.

삼성물산의 경영진이 물산 주식은 단 한 주도 없는 이 부회장의 명령과 미래전략실의 지휘를 받아 물산 입장에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합병에 뛰어다니는 정황들이 나타났을 때 가장 놀랐다. 불리한 합병을 위해 삼성증권 PB들이 동원돼 순진한 투자자들이 왜곡된 결정을 하도록 만드는 것도 공소장을 통해 확인됐다.

비록 법정에서 확정되진 않았지만, 이런 정황이 증거와 함께 제출된 것 자체가 재벌 총수 일가 몇몇에 의해 장악된 한국 자본 시장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추진 당시 삼바 내부문건 등을 공개하며 분식회계 의혹을 뒷받침해왔다.
"무슨 이야기만 하면 보수 언론이나 경제인 단체 등에서 삼성을 왜 그렇게 괴롭히느냐고 했다. 난 괴롭힌 적이 없다. 누가 투자자의 이익을 반했고, 자본시장에서의 신의성실을 위반했나. 공소장에 딱 나와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검찰의 수사 결론은 '(박용진 의원은) 반기업주의자'라는 낙인에 대한 사면장 같았다. 이재용 등 범법 혐의자들에게는 정말 지옥 같은 일일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선 터널 끝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 이 부회장이 실제로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비리 의혹에 얼마나 직접 참여했는지가 관건이었다. 공소장에서도 일부 언급돼 있긴 하지만, 제일 대표적인 대목은 어디라고 보나.
"삼성 측 변호인들의 작전 논리가 '우리 부회장님은 모른다'였다고 들었다. 실제로 국정농단 재판 과정에서도 같은 논리였다. 이 부회장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건데, 공포스러웠다. 시가총액 430조가 넘는 그룹의 리더라는 사람인데. 아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 공소장을 보니 정말 자기 이익에 충실하더라. 워런버핏이나 골드만삭스 CEO도 만나고, 바이오젠 CEO도 2번이나 만났다. 지시하고 회의에 개입하고. 재판 과정에서 그 부분은 확인 될 거라 본다."

- 지난 7월 인터뷰 당시엔 검찰 수사심의위원회 불기소 권고에 비판적 입장이었다. 검찰은 결국 기소했고, 수사심의위 제도의 취지를 묵살했다는 비판도 일부 제기되고 있다.
"수사심의위를 제도적으로 손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지가 기소 독점권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면 책임 있는 자리로 구성돼야 맞다. 비전문가들이 반나절 뚝딱 심사할 문제가 아니었다. 회계사나 법조인들도 각자 전문영역이 다르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이 부회장의 혐의가 범죄냐 여부를 따지면 되는데 왜 그 자리에서 '한국경제'를 운운했을까. 당시 검찰은 짧은 브리핑 시간에 증거 자료도 제대로 제시 못했을 거다. 예를 들어 삼성증권 PB가 어떤 명령체계에서 지휘 받았을지, 이건 기소하고 재판에서 따져야할 문제다. 반나절 만에 '아니다'라고 할 사안이 아니었던 거다. 수사심의위의 회의록을 심의해 봐야 할 문제다. 달라고 하면 줄까?"

-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나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 등 국회 질의에서 금융 관료들의 주가 조작, 회계 부정 의혹 방치를 질타하기도 했다. 당시 관계자들의 공통 답변은 '수사진행중'이라는 것이었는데. 수사 결과가 나온 상황에서, 금융 당국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까.
"(수사진행중이란 말은) 하기 싫으니까 하는 이야기였다. 검찰의 수사와 별개로 금융당국이 해야 하는 일은 시장 신뢰 유린 행위를 바로잡는 거다. 워치독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나가기만 했다. 그건 지금도 욕먹을 일이다. 워치독이 잠만 자면 어떡하나.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그것도 의심스럽다."

- 공소장 공개 이후 금융감독원에서 삼성증권 조사 필요성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금감원 측에선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해명자료를 냈다.
"안 하면 웃긴 거다. 삼성증권 PB들이야 법적으로 죄를 묻지 않아도 될 사람일지 모르지만, 금감원 입장에선 '우린 물어야겠다'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삼성증권은) 제일모직 자문사인데, 삼성물산의 주주들에게 이해상충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감독기구가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조사를 강력하게 요구할 생각이다. 검찰과 자료도 공유해서 금융 당국 권한에 따른 원칙을 바로세우길 바란다."
 
- 삼성 측 변호인단의 해명은 주주들에게 보유 주식에 대한 이벤트를 안내한 것일 뿐이고, 이해상충이 아니라고 반박했는데.

"증거와 증인이 이야기할거라 본다. 삼성증권에서 안내를 받아 의결권을 행사한 사람들이 그 (합병) 시점에 30%씩 피해를 본 것 아닌가. 주식시장과 법의 정의는 다르다. 돈만 많이 벌면 된다? 사람 속여 다치게 하고, '다쳤으니 보험금도 받고 며칠 쉬니 다행이다'라고 하면 말이 되나? 누구를 속여 그 사람의 이익을 훼손시키지 말라는 게 우리 사회의 합의다. 삼성 측 변호인단이 이야기하는 '결과론'은 대한민국의 합의를 무시한 말이다. 공정한 룰이 작동돼 얻는 이윤을 보고 누가 뭐라 그러나. 내 선택도 아닌데, (총수 일가를 위한) 합병이 이뤄져 손해 보고 판 사람들은 어떡하란 말인가."

[또다른 워치독] "내가 다 화끈... 언론도 뼈저린 사과와 반성 필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뇌물공여, 특정경제가중처벌법(횡령),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위증) 위반 혐의에 대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월 8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뇌물공여, 특정경제가중처벌법(횡령),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위증) 위반 혐의에 대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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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다수 언론들은 삼성물산 건설부문 대표이사 등이 합병 주주총회 직전 36억 원의 광고를 발주했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내가 다 화끈거렸다. 특히 노대래 전 공정거래위원장이란 사람이, 공무 역할을 망각하고 자기 이름을 팔았다는 것. 기업의 이익이 아니라 총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기고문에 이름을 빌려줬다는 대목에 너무 창피했다. 이름을 얹는 매명 행위와 다름없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떡값은 떡 사먹으라고 주는 돈이 아니라 뇌물인 것처럼, 이 수준이라면 언론 홍보비도 뇌물이다. 공적기능을 망각하고 광고비를 받아 장사를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책 <재벌은 어떻게 우리를 배신하는가>에서 재벌의 영향력이 아닌 '통제력'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사실이라면, 반사회적 기능을 한 언론들은 뼈저린 사과와 반성을 해야한다."

- 관련 의혹을 4년 쫓았는데, 검찰의 수사 결과 전체 평가를 한다면?
"2018년 11월 7일인가, (삼바 내부 문건을) 받아놓고 일주일 전전긍긍했다. 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데 증선위에서도 이 자료를 봤다는 거야. 공개했고, 기자회견장은 인산인해였다. 보도는 몇 군데 안 나더라고? 그 다음날 경제면 1면 대부분이 이재용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회장의 만남, 두 남자의 호텔 미팅... 이런 걸로 쫙 깔렸더라. 뭐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덮이는 느낌을 받았다.

내부 문건을 공개하고 일주일 뒤인 11월 14일, 증선위가 고발한다고 밝혔다. 난 거기까지가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에. 검찰이 삼성물산을 갔다는 거다. 미사일이 날아오면 사람들은 무너진 자국만 쳐다보기 마련인데, 검찰은 발사 원점을 찾아갔다. 골드만삭스도 가고, (합병에 유리한 보고서를 쓴) 4개 회계 법인도 갔고, 국민연금도 뒤지는 걸 보면서 수사 의지가 있구나, 생각했다."

- 수사팀을 공개 응원하기도 했다.
"검찰 흉보는 게 국민 스포츠 중 하나 아닌가. 저도 못지 않았다. 검찰을 방송에서 칭찬하긴 처음이었다. (수사팀장인) 이복현 당시 경제범죄형사부장을 라디오 방송에서 '상한가'라고도 평가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에게도 기소 못할 거면 물러나라 했고,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도 끌어다가 이야기 하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국민에게도 (총수 일가 수사는) 검찰이 보여준 실망감을 누그러뜨리는 과정이었다."
 
 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 이복현 부장검사가 이른바 '삼성 불법승계 의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지난 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 이복현 부장검사가 이른바 "삼성 불법승계 의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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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워치독] "삼성의 촉수가 국회 감쌌을 때, 이름을 올리라는 동료 의원들"

- 삼성 측 변호인단이나 검찰의 여론전도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슈의 관심이 이어지는 게 관건인데.
"지금부터 두 가지가 중요하다. 이런 반기업적인 범죄를 실행한 사람들을 정확히 처벌한다는 의지가 있는 정부가 유지되는 게 중요하다. 여러 말들이 많지만, 우리 정부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수사심의위원회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왔을 때도, 기자회견을 하자고 하니 당 의원들이 함께 했다."

- 하자고 하니 하는 것 아닌가. 능동적이진 않다.
"그게 어딘가. 여당 의원들은 삼성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 안다. 호떡집에 불났더라고. 내가 단체 카카오톡 방에 (기자회견 예고를) 올리고 한 시간도 안돼서 전화가 쏟아졌다. 삼성의 촉수가 국회를 감쌌다. 와중에도 '(회견문에) 내 이름 올려'라는 의원들이 많았다. 고마웠다. 당이 국민에게 이야기한 공정이란 불도저는, 아직 폐기처분 되지 않았기에 몰고 갈 수 있다고 본다."
 
- 나머지 하나는?

"수사팀 입장에서도 대국민 선전의 시간이 됐다. 공판 과정에서 경악스러운 일들이 많이 나올 거라 본다. 공판 전략상 공소장에 담지 못한 것도 많을 거다. 그 흐름을 잘 유지했으면 좋겠다."

- 내달 22일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첫 재판이 시작된다.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민들에게 해당 재판의 관전 포인트를 미리 꼽아 준다면?
"검찰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봐야 할 거다. 우리 개미들은 주식 투자를 할 때 뉴스나 공시를 보고 하는데, 이게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누군가를 위한 홍보나, 거짓 정보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는 정보 조각들을 가지고 국회서 따졌는데, 이 조각이 피라미드 어디에서 떨어져 나온 건진 몰랐다. 그 피라미드가 재판과정에서 드러날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개인과 기업의 이익은 다르다는 것. 이재용의 이익과 삼성의 이익은 다르고, 총수와 전체 경제의 이익은 오히려 거꾸로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두 기업의 합병을 성사하기 위해 투자자 이익에 반하는 결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숨겨진 조각들이 나올 거라고 본다. 그 점을 주목해서 보시면 될 거 같다."

- 재판을 어떻게 지켜볼 생각인가.
"공소장을 보면서 유죄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회장도 더 이상 이렇게는 안된다는 걸, 우리 경제도 이런 행위를 용납해선 안된다는 게 분명해지면 다르게 갈 거라고 본다. 사건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보다 제도 개선으로 옮겨갈 때가 온 것 같다. 삼성생명법, 상법, 공정거래법, 자본시장법 등의 개정안을 통해 '이 정도 반칙은 괜찮아' 했던 것들을 법적으로 안되도록 만들려고 한다."

- 재벌 지배구조 개선 법안도 마찬가지고, 21대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회계사 등 자본시장에 민감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이런 일 많니?'라고 물어보면 '비일비재하지'라고 한다. 삼성 쪽에선 '이게 왜 죄야' 할 수도 있다. 자본시장법에 '남을 속이지 말자'고 꼼꼼하게 써 있다. 마치 신호등이 있어도 '원래 막 다녔어' 하는 것과 같다.

(이번 기소로) 딱지 하나는 떼는 중이다. 빨간 불이 아닌 파란 불에 건너야 한다는 단순한 원칙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괜찮아, 우리 아버지 이건희야, 가도 돼' 식이라면, 어떻게 선진국으로 가겠나. 거창하게 말하면 공정을 지켜내는 사명이 검찰의 어깨에 달려 있다. 감시하고, 발언하고, 안 될 땐 고함도 지르는 국회의원들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삼성물산 부당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고의 분식회계에 대해 금융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삼성물산 부당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고의 분식회계에 대해 금융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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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09/15 10:15
  • 수정일
    2020/09/15 10:15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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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10)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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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학으로 의료 개혁을 이끌다,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열일곱 살에 자신과 했던 약속,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보건·의료·복지가 정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다. 사진은 1870년의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열일곱 살에 자신과 했던 약속,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보건·의료·복지가 정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다. 사진은 1870년의 나이팅게일.

 

영국 귀족 사회 박차고 나와
전염병 만연한 크림전쟁 자원
병사 의무기록체계부터 개혁
 

“저는 공직에 계신 분들을 언제나 믿어왔어요.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 이분들이야말로 제가 본능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사태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이고 공식적으로, 고의적인 방식으로 타인들은 알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지금껏 벌어진 일만큼이나 혐오감이 밀려듭니다. (…) 정부는 1854년도에 겪은 끔찍한 교훈의 산물을 고의로 파괴했어요. 누구에게든 다시 편지를 보내어 정부와 군대가 책임져야 할 군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마저 박탈당할까 두려워요. 물론 여성 한 명이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기회가 언제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선량한 행위로 시작된 실험과 무자비한 행동 모두에 제가 희생양이 되고 말았지요.”

1853년 7월, 러시아군은 오늘날 루마니아 영토에 해당하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 침입했다. 석 달 뒤인 10월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 받은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교훈을 남겼다”고 역사에 기록된 크림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투로 인해 사망한 영국군의 수는 약 5000명이었다. 더 큰 복병이 나타났다. 전염병이 돌았다. 콜레라로 군인 1만5000명이 사망했다. 영국은 부상병 간호를 위한 자원봉사대를 모집했다. “영국에는 진정 크림반도로 갈 용기 있는 간호사가 없는가?” 당시 런던의 한 요양소 경영을 맡고 있었던 서른세 살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전쟁터로 돌진했다.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크림반도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육군부의 허락이 없어도 저는 크림으로 가겠습니다.”
 

1820년 영국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나이팅게일은 열일곱 살에 자신의 삶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간호사를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에는 귀족의 딸이 할 만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잠시 쓰러졌다. 나이팅게일의 언니도 동생을 뜯어말렸다. 가족 가운데 누구도 나이팅게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혼자서 의료 서적을 읽고, 병원과 요양소를 방문하면서 차분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 귀족 사회를 박차고 나왔다. 1852년 쓴 글에서 나이팅게일은 영국 상류층 여성들에게 “할 일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영국 사회를 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남성의 시간이 여성의 시간보다 더 귀중한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1853년 나이팅게일은 런던 요양소에 책임자로 부임했다.

[여성, 정치를 하다](10)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막사를 둘러보는 나이팅게일을 그린 일러스트(위 사진)와 1907년 노년의 나이팅게일.

막사를 둘러보는 나이팅게일을 그린 일러스트(위 사진)와 1907년 노년의 나이팅게일.

1854년 11월4일,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에 도착했다. 나이팅게일은 “스쿠타리 막사 병원”에서 절규한다. “누구도 씻을 곳, 씻을 도구 하나 없어요. 깨끗한 물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용감하게 뚫고 가는 5만명의 병사를 위해 가져온 군용 리넨 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은 러시아군이 아니라 무능하고 무책임한 영국 군부였다. 약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침대와 이불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나이팅게일은 영국 육군부 장관 시드니 허버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매트 한 장을 공급하는 데에도 반드시 문서가 필요합니다. 침대 구입부터 병동을 새로 개설하는 것까지 상부에 보내는 서신과 제출 서류를 몇 백 통이나 작성해야 합니다.”

나이팅게일은 영국 군인들에게 먼저 옷부터 만들어 입혔다. 악취와 해충이 전염병 환자 수를 증폭시켰다. 나이팅게일은 병원 청소를 시작했다. 환자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나이팅게일은 ‘타임스’ 구호기금 약 3만파운드로 주방용품과 식재료를 구입했다.

나이팅게일이 부임한 지 닷새 후인 1854년 11월9일 수많은 부상자가 스쿠타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총감은 아비규환의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이팅게일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녀에게 진료 지원과 간호를 요청했다.

나이팅게일은 군 병원의 의무 기록 시스템부터 개혁했다. 일분일초를 아껴 가며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살아 숨 쉬는 것 이외에는 한순간도 여유가 없습니다.” 야전병원에서 사망자 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운영일지를 기록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이팅게일은 환자 숫자와 질병 종류를 의무적으로 기록하고 보고하는 체계를 다졌다. 간호부장 나이팅게일은 부상자와 사망자 숫자를 꼼꼼하게 살폈고, 물품 보유 현황도 반드시 신고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 한 사람의 노력으로 전염병과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감염자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1855년 2월 애버딘 총리는 책임을 통감하고 내각 전원 사퇴를 발표한다. 파머스턴이 후임 총리로 결정되었다. 시드니 허버트 장관도 내각에 다시 등용되었다. 같은 달 야전병원 실태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병원 내부 위생 상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비로소 공론화되었다. 스쿠타리 병원은 병원 하수구와 급수로를 손보았다.

특별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나이팅게일은 간호부대를 결성하여 존경할 만한 헌신의 마음으로 환자와 부상병을 돌보는 일을 맡아 왔다”고 평가했다. 나이팅게일은 입원 중인 환자들을 위해 병원 내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영어 수업을 개설하는 한편, 휴게실을 만들어 교양 강좌를 운영했다. 군인들의 월급을 관리하고 송금할 수 있는 시스템도 도입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나이팅게일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주길 바랍니다.” 나이팅게일의 개혁은 빛을 보기 시작했다. 1856년 스쿠타리 병원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질서를 확립했다. 영국으로 귀환한 군인들이 나이팅게일의 업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이팅게일 기금 4만5000파운드가 순식간에 모였다. 하지만 그녀가 대중적 지지를 얻을수록 반대 세력도 늘어났다. 군사령관 존 홀은 나이팅게일을 음해하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나이팅게일과 간호 원정단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반항적이며, 정직하지 않고, 사치스럽고, 부정부패와 낭비를 일삼았다.”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확인된 바도 없었다. 여성이 개혁을 주도하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 여성들은 항상 어떤 사람과 어울리면 안 되는지 혹은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성공과 안위에만 몰두해 있는 자들이 승진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더 막막할 따름”이라고 응수했다. 자신을 “잔 다르크처럼 불에 태워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 앞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1856년 3월16일 나이팅게일에게 씌워진 혐의는 모두 근거 없는 모략으로 결론이 났다. 나이팅게일은 영국군 병원 총책임자로 공식 임명된다.

[여성, 정치를 하다](10)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통계에 기초, 정치까지 발 넓힌
보건·의료·복지 향상의 신념
“정치는 인류 행복의 기본 조건
여성이 정계의 중심에 있어야”
 

1856년 3월30일 파리 강화회의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으로 크림전쟁은 끝이 난다. 4개월 후인 7월28일 나이팅게일은 프랑스로 갔다. 영국에서 준비 중이던 자신의 귀국 환영회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1856년 9월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나이팅게일은 영국군 보건 왕립위원회의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보건의료 체계 구축에 매진했다. 의료 개혁을 위해 자료와 통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통계의 실효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수학에 큰 매력을 느꼈다. 나이팅게일은 1856년 의료 통계학자 윌리엄 파르에게 통계 처리 과정을 직접 배웠다.

1858년 나이팅게일은 ‘로즈 다이어그램’을 발표했다. 크림전쟁 기간에 발생한 부상자와 사망자 수, 질병의 종류와 입원 기간 등을 재조사하고 기록했다. 복잡한 숫자로 나열된 통계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나이팅게일은 분석 결과를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게 그림으로 정리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통계 작업에 매달렸다. “나는 살해당한 사람들의 제단에 서 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들을 죽인 원인과 싸울 것이다.”

1858년 나이팅게일이 발표한 ‘로즈 다이어그램’. 크림전쟁 기간에 발생한 부상자와 사망자 수, 질병의 종류와 입원 기간 등을 분석해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그림으로 정리했다.사진 크게보기

1858년 나이팅게일이 발표한 ‘로즈 다이어그램’. 크림전쟁 기간에 발생한 부상자와 사망자 수, 질병의 종류와 입원 기간 등을 분석해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그림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의 통계 방식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만만하지 않았다. “통계는 세상의 모든 읽을거리 중에서 가장 건조해야만 합니다.” 나이팅게일은 통계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860년 나이팅게일은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통계학대회에 참석했다. 통계와 확률론으로 인간 행동과 사회 질서의 규칙성을 밝혀내고 ‘사회 물리학론’을 발표한 아돌프 케틀레를 만났다. 나이팅게일은 케틀레의 이론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가 제시한 비판적 사고의 틀은 존중했다. 나이팅게일의 학문적 깊이는 점차 높아졌다. ‘타임스’는 “그녀는 외국어뿐만 아니라 수학과 예술, 과학, 문학에까지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재원이다. 현대인이 쓰는 외국어 중에 그녀가 모르는 말이 거의 없을 정도다” “최고의 강점은 수학이다. 숫자와 통계를 전문가 수준으로 다룬다.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데이터를 정리하고 추론한다”고 나이팅게일을 소개했다.

나이팅게일은 통계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학문적 신념을 철저하게 지켰다. 1868년 그녀는 왕립위생위원회에서 주택 위생을 위해 배수 및 하수 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공공보건의료 법률 제정을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지역별 보건진료소 운영도 정부에 건의했다. 그녀는 간호학에 국경이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 전역은 물론이고, 1867년에는 호주 시드니 병원에 나이팅게일의 간호학 이론을 따르는 학교를 설립했다. 1870년대에는 미국의 간호사 양성 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나이팅게일은 열일곱 살에 자신과 했던 약속,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로서의 소명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보건·의료·복지가 정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특히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다. “정치는 행복한 인간 생활을 하는 데 매우 커다란 힘을 가졌다. 여성이 정계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사회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소외될 수밖에 없다.” 영국 의료 개혁의 초석을 닦은 여성 정치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910년 90세의 나이로 생을 평화롭게 마감했다. “나는 행복하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거의 다 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행복은 인류에게 축복이 되었다.

 
[여성, 정치를 하다](10)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장영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150600005&code=960100#csidx16d2968b4124337beeb25a32c8221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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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법칙으로 본 문재인 정권의 위기

 

  • 기자명 김광수 정치학(북한정치) 박사/‘수령국가’ 저자/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
  •  
  •  승인 2020.09.14 1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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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법칙 [사진 : SBS 현장21 캡처]
▲ 하인리히 법칙 [사진 : SBS 현장21 캡처]

추미애 장관 아들논란의 경우는 아직 사건이 진행되는 현재진행형이고, 적폐들 준동에 의한 '가짜뉴스'가 뒤섞여 진실게임이 끝나지 않는 쟁점이니 섣불리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은 그 지점을 넘어선다. 이 정부가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성찰적으로 들여다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 출발지점을 다음과 같이 잡는다. 

지금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가 민주당 지지세력을 제외한다면 초기 출범할 때의 그런 희망과 설레임으로 가득한 ‘촛불시민’적 지지라 할 수 있겠는가? 

마지못해, 즉 적폐세력들의 총체적 공격 앞에 무기력하기만 한 이 정부에 대한 연민과, 그래도 적폐세력들에게는 결단코 다음 정권을 넘겨줄 수는 없으니 더 이상 이 정부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내어야 한다는 ‘정치적’ 방어 외엔 없다. 

그래서 정말 이 정권의 담당자, 담지자들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는 지점이 하나 있다. 

무릇 정치라는 것이 자신들의 정권출범 의의와 시대적 소명, 이를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때로는 한 발짝, 때로는 반 발짝, 그것마저도 힘들면 0.01mm라도 앞서 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데도 이 정부는 어찌 된 판인지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정치를 법 타령과 윤석열 때리기, 적폐세력들의 준동과 반격에 방어하기에만 급급하고, 나아가 지난 정부 탓만 하고 있다. 

왜, 정반대의 인식을 하지는 못하는가?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가 지난 정부와 비교되면서 정당성을 입증해야만 될 만큼, 그렇게도 자신감이 없는가? 

준거를 세우려면 청산해야 될 시대적 과제는 분명하게 청산하고, ‘이게 나라다’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국가에 대해 '자긍'하게 만들고, 국민들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는 희망을 주고, 꽉 막힌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평화와 통일로 화답하는, 그런 정치가 되게 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적폐세력들의 준동이라는 미명하에 자꾸만 뒤에 숨는다.

한두 번 변명이면 충분하게 족하다. 

대신, 국민들만 바라보고 정치를 하겠다고 했으니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삶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자긍하게 만들기 위해 지금이라도 초심 때와 같이 혼신의 힘을 다해 분투해야만 한다. 

비록 검찰과 제도, 관료들의 저항과 현실적 장벽, 나아가 ‘가짜뉴스’와 적폐세력들의 준동이 제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그건 반드시 뛰어넘어야만 하는 과정으로, 아니 숙명으로 여겨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걸 뛰어넘으라고 촛불정부를 만들어 줬고, 그렇게 하라고 180여석의 거대 집권여당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협치니, 뭐니 하면서 국민들을 볼 생각대신, 적폐세력들과 손잡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들다 이 지경까지 왔다면 그건 반성과 성찰의 영역이지, 변명의 영역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그 위기의 징후를 알린다. 

‘위태롭다’는 의미를 ‘몰락’ 직전이라는 해석 대신,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집권 3년 차를 지나고 있는 문재인 정권은 정말 위태로운 상황까지 와있다.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명하려 한다.

첫째는, 하인리히 법칙으로 읽는 정치적 위기징후이다. 

양극화 해소, 소득주도 경제를 비롯한 일자리 창출, 청년실업 해소정책, 부동산정책, 여성 성 감수성 등 기층민중 중심의 정책은 물론 대부분의 공약에서도 후퇴했다. 특히, 예기치 못한 한미동맹으로의 포박은 지난 적폐정부보다 더한듯하다. 한미 워킹그룹도 모자라 ‘동맹대화’라는 것까지 만들었다. 남북관계도 더할 나위 없다. 충분히 기대 이하이다. 사실상 낙제점인 F이다. 

둘째는, 논란에 대응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모든 문제제기에 적폐세력의 뒤에 숨어버린다. 그리고 진영만 있다. 비겁할 뿐만 아니라, 정직하지도 않다. 

▶ 이미 집권한 지 3년이나 지났다. 
▶ 정치는 진실게임이 아니다. 그런데 모든 문제를 진실게임으로만 본다.
▶ ‘내로남불’을 너무나 당연하다 여긴다. 

안희정, 오거돈, 추미애 아들 문제가 그 연장이다. 관련해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국민들은 위 문제들이 진실이냐·아니냐의 문제도 들여다보지만, 다른 각도에서도 충분히 보고 있음이 간과되고 있다. 

예하면 이런 것이다. 추미애 아들의 경우, 역린을 건드렸다며 자식 휴가 문제같이 사소한 문제 갖고 왜 그렇게 난리들이라는 주장을 여권에서는 하지만, 진작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즉, 휴가 연장 문제 하나만 놓고 보면 사소한 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불공정과 특혜문제, 그것을 대하는 고위공직자의 태도 및 정직성 문제 등으로 다 연결되어진다면 권력 갑질(gab-jil)여부로 민심이 흐른다는데 있다. 

즉, 애초 시작은 사소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름하여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세운 ‘기회는 균등하며,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강조, 필자)이라는 정치철학이 무너지고 있다. 

셋째는, ‘첫째’와 둘째‘의 합으로 존재하는 이 정권에 대한 연민문제이다. 

박근혜 탄핵을 통해 우리 국민들은 진정으로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 ‘이게 나라다’라고 자긍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정부는 그럴 국민들에게 전혀 만족을 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지금의 ‘촛불시민들’은 이 정부에 대해 믿음과 신뢰에 바탕 한 ‘자긍’적 지지라기보다는, 마지못해 이 정부를 지지하는 ‘버티는’ 지지이다. 그래서 연민만 늘어나고 있다. 

이렇듯 문재인 정부는, 아니 정권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벼량 끝에 선 위기상황이다.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사)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력  자문위원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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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4개월 만 의원 재산 10억 불어...국민의힘 전봉민 800억 넘게 ↑

경실련 발표, 상위 15인 증가액 112억 달해

특히 국회의원 중 평균 재산액보다 더 크게 재산이 증가한 상위 15명의 증가액은 111억7000만 원에 달했다. 당선 후 매달 30억 원씩 재산이 불어난 셈이다.

 

14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21대 국회의원들의 총선 당선 전후 전체 재산과 부동산 재산의 증감 현황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이들이 입후보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전체 재산 평균은 18억1000만 원이었고, 부동산 재산 평균은 12억4000만 원이었다.

 

그러나 당선 후 국회사무처에 신고한 전체 재산 평균은 28억1000만 원, 부동산 재산 평균은 13억3000만 원이었다.

 

21대 총선은 4월 15일 치러졌다. 국회공직자윤리위원회가 21대 국회 신규 등록 국회의원 175명의 재산 내용을 공개한 때는 지난 달 28일이다. 해당 자료는 총선 입후보 과정에서 국회의원이 선관위에 신고한 재산신고 내용과 당선 이후 국회사무처에 신고한 재산신고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경실련은 두 해당 자료(선관위 자료, 공직자윤리위 자료)를 비교해 이 같은 평균치를 얻었다. 단순히 비교하면, 단 4개월여 사이에 국회의원 재산이 평균 10억 원, 부동산 재산은 평균 9000만 원씩 불어난 셈이다.

 

국회의원들이 선관위에 거짓 신고한 게 아니라면, 4개월 간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급격한 재산 증가가 국회의원들에게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국회의원 중 당선 전후 전체 재산 신고차액이 10억 원 이상, 즉 전체 평균보다 컸던 이들은 15명이었다. 이들의 평균 차액은 111억7000만 원에 달했다.


 

당선 전후 재산 격차가 가장 컸던 이는 전봉민 국민의힘 의원이었다. 전 의원은 후보 당시 전체 재산 48억1000만 원, 부동산 재산 9억8000만 원을 각각 신고했으나, 당선 이후에는 전체 재산 914억1000만 원, 부동산 재산 22억2000만 원을 신고했다.


 

전체 재산 차액은 866억 원, 부동산 재산 차액은 12억4000만 원에 달한다.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은 후보 당시 전체 재산 163억6000만 원, 부동산 재산 103억5000만 원을 신고했으나, 당선 후 전체 재산 452억1000만 원, 부동산 재산 105억1000만 원을 각각 신고해 차액이 288억5000만 원이었다.

 

이상직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후보 당시 40억3000만 원(전체), 25억8000만 원(부동산)을 신고한 후, 당선 뒤에는 212억7000만 원(전체), 30억 원(부동산)을 변경 신고했다. 차액이 172억4000만 원이었다.


 

이주환 국민의힘 의원(86억2000만 원),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83억6000만 원), 문진석 더불어민주당 의원(37억 원),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23억6000만 원),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20억1000만 원), 강기윤 국민의힘 의원(18억6000만 원), 양정숙 더불어민주당 의원(17억1000만 원), 서병수 국민의힘 의원(14억3000만 원),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12억5000만 원),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12억2000만 원),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11억6000만 원), 조수진 국민의힘 의원(11억5000만 원)의 당선 전후 재산 증가액도 전체 평균 10억 원을 넘었다.


 

이들 15인 중 10명이 국민의힘 의원이었고 5명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다른 정당 의원은 없었다.

 

이들 15인 중 전봉민 의원부터 강기윤 의원까지 상위 9명은 재산 증가 사유가 비상장주식의 재평가라고 밝혔다. 양정숙, 서병수, 이광재, 홍성국 의원은 부동산재산 가액 변화와 추가등록에 따른 가액 상승을 사유라고 전했다. 조태용 의원은 모의 예금자산과 임차권을 재산에 추가했고, 조수진 의원은 본인과 배우자, 장남 예금자산을 추가해 재산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전체 부동산 자산 신고 평균액 9000만 원보다 부동산 재산이 당선 후 더 크게 불어난 국회의원은 총 60명이었다. 이들의 재산 합계액은 후보 신고 당시 1122억 원에서 당선 후 1343억 원으로 220억 원 상승했으며 1인당 평균 상승액은 3억7000만 원이다.


 

이수진(지역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후보 신고 당시 부동산 재산 5억4000만 원을 신고했으나, 당선 후에는 23억2000만 원을 신고했다. 불어난 가치가 17억8000만 원이다. 실거래한 서울 서초구 아파트의 추가 잔금납부가 후보자 재산신고 이후 이뤄지면서 후보자 재산 신고 내역에 기재됐다.


 

서병수 국민의힘 의원의 부동산 재산은 16억 원 증가했다. 본인 토지 7개 필지, 자녀 주택 1채 등 8건이 추가됐다.

 

전봉민 국민의힘 의원의 부동산 재산은 분양권 잔금 납부, 공시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12억3000만 원 증가했다.

 

이들 외 홍성국, 이광재, 허은아, 홍기원, 이수진(비례대표) 의원도 부모 재산을 추가 등록하면서 부동산 재산 가액이 5억 원 이상 늘어났다.


 

한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서울 서초구 아파트 매도와 종로구 아파트 매입에 따라 부동산 가액이 6억3000만 원 증가했다. 

양항자 의원의 경우 본인 소유 화성시 토지의 신고가액을 후보 시절 5000만 원이라고 밝힌 후, 당선 후 실거래가로 정정 기재해 부동산 재산이 5억4000만 원 불어났다.


 

김홍걸 의원이 신고한 아파트, 상가 등 4채의 부동산 가액은 후보시절 76.4억에서 당선 직후 81.6억으로 5.2억 늘었다. 이중 최근 차남증여로 논란이 된 서울 개포동 루첸하임 아파트 가치는 후보 등록 시기 17억2000만 원에서 당선 후 12억3000만 원으로 4억9000만 원 감소했고, 서초동 아파트와 서대문구 상가의 가액은 10억 원 상승했다.

 

한편 국회의원 당선 후 신고가액이 감소한 의원도 있었다. 1억 원 이상 감소한 경우는 18명이었다. 후보 시절 신고 부동산 재산을 매각 등의 사유로 당선 후 재산에서 제외했거나, 신고가액이 변경했거나, 후보 시절 신고한 가족 재산 고지 거부 등이 주요 이유다.


 

유기홍 의원은 본인 토지 1필지를 신고 재산에서 제외해 18억5000만 원이 감소한 부동산 재산을 당선 후 신고했다. 김은혜 의원은 배우자 토지 2필지를 제외(감소액 8억8000만 원)했고, 박성민 의원은 배우자 토지 1필지를 제외(감소액 3억2000만 원)했다.


 

후보자 등록 당시 시세로 부동산 재산을 신고한 후, 당선 뒤에는 공시가로 신고해 재산이 감소한 경우도 있었다.

 

김민석 의원은 후보 등록 당시 어머니가 보유한 서울 양천구 빌라 1채를 시세 3억6000만 원으로 신고 했으나, 당선 후 1억6000만 원으로 낮춰 신고했다.


 

경실련은 "국회의원 후보 등록 당시 제대로 된 검증 절차가 없어서 허위신고가 이뤄진 결과"라며 "선관위 내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있으나, 후보자 신고 재산검증 여부는 임의조항에 불과하다"고 이 같은 사태의 근본 원인을 지적했다.

 

경실련은 관련 법이 정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단 당선 전후 재산이 크게 차이 난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재산 변동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경실련은 강조했다.


 

경실련은 "당선 전보다 증가액이 큰 국회의원은 후보 시절 재산 누락이 원인인지, 당선 후 추가 매입이 이유인지, 단순한 공시가 변동이 일어났는지 등을 철저히 소명"해야 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경실련은 아울러 향후 의원실의 소명 내용을 확인하고, 정당의 해명 내용을 청취한 후, 관련 내용을 추가 조사해 문제가 있을 경우 검찰 고발 등을 진행하겠다고 전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1414044364035#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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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계속된 전쟁은 없다. 더 기다릴 수 없다"

한반도 종전·평화 집중행동, "남북·북미합의 이행,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전문)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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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14  21: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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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공동대표들은 14일 오후 참여연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앞으로 2주동안 한반도 종전 평화 집중행동 계획을 발표하면서 한반도 평화선언 서명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계기에 시작된 '한국전쟁 종식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국제 캠페인'이 9월 평양공동선언 2년을 맞아 14일부터 26일까지 세계 시민과 함께 하는 '한반도 종전 평화 집중행동'으로 추진된다.

7대 종단을 포함해 전국 353개 시민사회가 참여하고 있는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공동대표들은 14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반도 주민들이 나서 70년간 지속된 한국전쟁 완전 종식과 조속한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한반도 평화선언(Korea Peace Appeal) 서명운동'에 함께 할 것과 이를 위해 앞으로 2주동안 한반도 종전 평화 집중행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들은 이날 김삼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과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이 낭독한 기자회견문에서 지난해 하노이 북미회담이 합의없이 끝난 이후 사실상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멈춰선 상태가 장기화되고 있지만 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위주 처방에 묶여 정작 남북간 불신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는 취하지 않고 있다며, "이제 정부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이땅에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야 할 한반도 주민 스스로 평화만들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냉전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것은 지난 70면으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함께 외치자고 제안했다.

정부의 대북 접근법과 정책이 지금과 달라져야 한다며, "군사적 불신을 가중시키는 군사훈련이나 군비증강 정책은 자제하고 변경"해야 하며, "(제재 일변도의 압박정책을 펴는)미국의 논리와 주장을 관성적으로 따르기보다 불가피한 차이는 국민앞에 과감히 드러내고 민주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사회를 맡은 이현숙 여성평화외교포럼 명예대표를 비롯해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공동대표들은 국내외 온 겨레와 세계 평화를 지지하는 모든 세력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 왼족부터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공동대표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지은희 전 여성가족부 장관,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한반도 분단은 민족내부의 갈등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외세에 의한 것"이라며, "우리는 일제 식민지 36년만해도 서러운데, 끝난 뒤에도 2차세계대전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우리가 일본 대신 분단되어 70년간 민족상잔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반도 평화와 종전이 아니라 완전히 '휴전' 그 자체를 없애는 평화체제를 이룩하는 것. 그것은 결국 외세에 의존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70년 분단을 겪은 오늘날 우리들의 각오여야 한다"며,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말했다.

지은희 전 여성가족부장관은 "평양공동선언 2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 이런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것은 그동안 진전이 하나도 없이 국민모두를 실망시키고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일들만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그 원인을 따져보고 지금 생각하는 바는 "미국이 과연 한반도 평화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그리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진정으로 맺고자 하려고 하는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직격했다.

이어 "70년을 지속되면서 종전되지 않은 전쟁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북미나 한국정부에만 맡겨놓아서는 힘들고 한반도 뿐만 아니라 세계시민 모두가 나서 70년간 계속되는 이런 전쟁을 막아내고 평화를 만들어 내자고 호소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최근 미국이 일본, 인도, 오스트레일리아를 축으로 아시아판 나토, 안보동맹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면서, 한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열심히 우리 당국자들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이고 있는데, "절대로 한국정부는 그런 일에 응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있기도 전에 또 다시 미국과 중국간 대결의 구체적인 표현인 아시아판 나토결성에 참여한다면 종전협정도 평화협정도 다 날라가는 그런 결과가 생길 것"이라며,"그런 것을 거부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선언을 확고하게 만들어 가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번에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대대적인 서명을 해보자는 것은 새로운 발상이고 효과가 어찌되었든 한번 해볼만하다고 판단하여 미력이나마 돕고자 하는 생각"이라고 기자회견에 참여한 소회를 밝혔다.

백 교수는 '왜 70년이 가깝도록 한반도 평화협정이 안되고 있느냐'라는 질문앞에서 '인식의 전환', '좀 더 새롭고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한반도의 이런 현실이 오래 지속되는 원인은 한편으로 실제 전쟁 재발위험은 크지 않지만 전쟁위험은 끊임없이 남아있는 이런 세상을 너무 즐기는 소수의 세력이 있고, 그 뿐만 아니라 이런 현실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거기에 길들여져서 다른 생각을 잘 하지 않으려는 다수의 사람들이 합작해서 (이런 분단체제를) 이루어놓고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분단체제의 삶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꿀 것인지에 대한 전환이 좀 더 일찍 일어난다면 "3년 후 정전협정 70년이 되기 전이라도 평화협정이 체결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서명운동 시작이 동시에 한층 깊은 공부와 삶에서 큰 전환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한반도평화선언.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태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이날 유튜브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26일까지 2주일간 한반도 종전 평화 집중행동을 진행한다며 앞으로 온라인을 통해 한반도 종전과 평화를 위한 선언에 대한 지지와 서명, 홍보를 위한 활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소개했다.

18일에는 경기도가 주관하는 2020DMZ포럼의 평화운동협력 6개 세션에 함께 참여하고 평양공동선언 2주년을 맞는 19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집중행동으로 종전 평화 피케팅 1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21~25일까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종전 평화 릴레이1인 시위가 진행되고 전국 곳곳에 한반도 평화선언(Korea Peace Appeal) 포스터를 부착한다.

26일에는 그간 성과와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대선 후보들에게 한반도 평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낼 계획이다.

남북, 북미 합의 이행하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전문)
 
9월 평양공동선언 2년, 한반도 종전 평화 집중행동 주간 시작을 알리며

오는 9월 19일은 남과 북이 평양공동선언과 군사분야합의서를 채택한 지 2년째 되는 날입니다. 앞서 남북 정상은 온 겨레와 국제사회의 관심 속에 만나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남북 정상은 한반도 문제의 ‘운전대’를 우리가 잡고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항구적인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고 전 세계에 선언했고, 온 겨레와 약속했습니다.

남북 정상의 4.27 판문점 선언이 촉매제가 되어 북미 정상은  싱가포르에서 만나 새로운 북미 관계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실현해나간다는 데 합의하고,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 속에서 남북 정상이 다시 9월 평양공동선언과 군사분야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노이 북미회담이 합의이행의 순서와 상응 조치에 대한 이견을 이유로 합의 없이 끝난 이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사실상 멈춰 섰습니다. 북미 간 협상이 교착되는 가운데 북한에 대한 미국 주도의 국제 제재는 더욱 엄격해지고 있고, 남북 간의 최소한의 교류 협력조차 번번이 가로막히면서 남북 간에도 합의가 이행되지 않는 현실을 둘러싸고 이견과 불신이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급기야 지난 6월에는 일부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계기로 남과 북의 군사적 긴장이 충돌 직전까지 치달아 남과 북이 맺은 군사분야합의서의 효력마저도 위태로운 위기 상황이 초래되었으며, 북한의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재 남북 간에는 대부분의 대화와 협력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심지어 코로나19,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 같이 함께 마주하고 있는 재난에 관한 협력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대로 상황을 방치한다면 합의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합니다.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는 수준을 넘어 한반도에는 새로운 차원의 군비경쟁과 위기가 일상화할 것입니다. 반목하고 대결하는 남과 북은 갈수록 심화되는 미중 간의 냉전적 대결의 대리전에 손쉽게 휘말리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반도 주민들의 삶은 다시금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의해 크게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2017년의 위기를 넘어서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돌파구를 열었던 그 지혜와 결단력이 다시금 절실합니다.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주변국, 특히 미국과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실현해나갈 것을 확인하면서도, 남과 북이 합의하여 추진할 수 있는 군사적 긴장 완화와 교류 협력만큼은 남과 북, 스스로의 힘으로 전진시켜나갈 것을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과연 이 합의와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남과 북의 교류와 협력은 우리 정부와 시민의 판단보다는 한미워킹그룹을 통해 전달되는 미국의 제재 위주의 처방에 묶여 있습니다. 한미워킹그룹은 정작 미국 조야에 조성된 북한에 대한 근본주의적이고 강퍅한 입장을 변화시키고 조율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자극적인 대남비난을 불편해하면서도, 정작 남북 간의 불신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는 제대로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군은 9.19 군사합의 이후에도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규모만 축소한 채 지속하고 있고, 북한의 총 GDP 이상의 규모에 도달한 지 오래된 군사비를 매년 대폭 인상하면서 미국으로부터 공격적 신무기를 연이어 도입하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은 끝났다고 선언한 마당에, 코로나19와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에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토록 많은 재원을 공격적 군비 확장에 투입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직 남북, 북미 간 합의가 파기된 것은 아니고, 소통과 연락이 완전히 단절된 것도 아닙니다.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 희망을 살리자면 정부의 접근법과 정책이 지금과 달라져야 합니다.

한반도 문제를 우리가 주인이 되어 해결하겠다는 초심을 더욱 분명히 다지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남북 대화와 협력을 능동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하여 일방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군사적 불신을 가중시키는 군사훈련이나 군비증강 정책은 자제하고 변경해야 합니다. 미국의 제재 일변도의 압박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미국의 논리와 주장을 관성적으로 따르기보다 불가피한 차이는 국민 앞에 과감히 드러내고 민주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합니다. 

톱다운 방식으로 당국 간 진행하는 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정부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야 할 한반도 주민 스스로 평화 만들기에 나서야 합니다. 냉전과 전쟁의 한가운데서 고통받는 것은 지난 70년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70년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함께 외칩시다. 우리의 평화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줍시다. 70년 이어온 한국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이 땅에 항구적 평화를 가져올 평화협정을 조속히 체결할 것을 남북 정부와 미중 등 전쟁 당사국 정부에 촉구하는 한반도 평화 선언(Korea Peace Appeal) 서명운동에 함께 해 주십시오. 9월 평양공동선언 2년을 맞아, 오늘로부터 9월 26일까지 2주 동안을 한반도 종전 평화 집중 행동주간으로 정해 전쟁 종식과 한반도 평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내외에 드러내 보여주고자 합니다. 한반도와 전 세계 시민 여러분의 지지와 참여를 호소합니다. 


2020년 9월 14일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공동대표

구중서(기지평화네트워크 운영위원장), 김경민(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김삼열(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 김영순(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문정현(신부), 백낙청(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윤정숙(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이기범(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회장), 이부영(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이현숙((사)여성평화외교포럼 명예대표),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조성우(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정강자(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정기섭(개성공단기업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지은희(전 여성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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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이트작전과 월미도방어전 70주년

[개벽예감 411] 크로마이트작전과 월미도방어전 70주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9/1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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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1950년 6월 19일 미국의 북침작전계획

2. ‘작전계획 크로마이트’에 담긴 네 가지 씨나리오

3. 맥아더의 극비작전계획 빼돌린 조선인민군 정찰병 

4. 75,000명 대 400명의 싸움

5. 월미도의 마지막 혈전

6. 금성-4 순항미사일과 익명의 탄도미사일

 

 

1. 1950년 6월 19일 미국의 북침작전계획 

 

1950년 6월 25일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고속기동전으로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한 조선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공격을 중지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조선인민군의 서울점령으로 3일 만에 종식되었다.  

 

그런데 남북무력충돌이 종식된 이튿날인 1950년 6월 29일부터 미국 원동군 소속 폭격기들이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와 폭격을 감행하면서 전쟁을 도발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사상자를 많이 내지 않고 3일 만에 종식되었는데, 미국의 전쟁도발로 조선은 새로운 전면전에 돌입해야 했다. 만일 미국이 무력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6.25전쟁은 3일 만에 끝났을 것이다. 

 

1950년 6월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었던 미국 원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원동사령부 산하 합동전략기획단에게 조선을 침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3일 만에 끝난 6.25전쟁을 재발시키고 확전시킨 전쟁도발의 주범이다. 1950년 7월 4일 합동전략기획단은 자기들이 완성한, ‘블루하츠(Bluehearts)’라는 제목의 작전계획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그 작전계획에 따르면, 미국 해병대가 1950년 7월 22일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미8군은 남부전선에서 북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떠오른다. 1950년에는 컴퓨터도 없었는데, 합동전략기획단은 어떻게 그처럼 짧은 시간에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후닥닥 완성할 수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것처럼, 작전계획을 완성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개념계획을 작성한 다음, 세부적인 작전씨나리오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켜 작전계획을 완성하려면 몇 달이 걸린다. 그런데 합동전략기획단은 불과 5일 만에 작전계획을 완성했다. 졸속작업이었을까?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0년대 말 일본 도꾜 치요다구 유라구초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청사의 모습이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점령지였으므로, 그 건물에서 일본을 지배하는 최고권력이 행사되었다. 이 석조건물은 1938년에 건립되었는데,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원동사령부 청사로사용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원동사령부의 공식명칭은 연합국 최고사령부였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총사령관이었다. 그 건물에 맥아더의 집무실이 있었다. 1950년 6월25일 38도선에서 남북무력충돌이 일어나자, 맥아더는 특별기획참모단을 조직하고그들에게 조선을 침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사상자를 많이 내지 않고 3일 만에 종식되었는데, 미국은 바다를 건너와 무력침공을 감행하면서 전쟁을 도발했다.  

 

몇 달 걸리는 작전계획수립을 5일 만에 완성한 이변의 내막은 미국 역사학자 스탠리 웨인트롭(Stanley Weintraub)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2000년 미국에서 출판된 ‘맥아더의 전쟁: 코리아와 미국 영웅의 파멸(MacArthur's War: Korea and the Undoing of an American Hero)'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는 미국 국방부가 6.25전쟁 직전에 ’SL-17‘이라는 제목의 작전계획을 마련해두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작전계획 SL-17'에 따르면, 38도선에서 일어난 남북무력충돌에서 패한 한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여 부산방어선을 구축하면, 미국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북진한다는 것이다. 이 작전계획을 일정별로 정리하면, 미국군 1개 군단이 1950년 9월 30일까지 인천을 점령하고, 10월 15일까지 서울을 점령하고, 1951년 1월 31일까지 남포와 원산에 동시상륙하여 평양을 점령한 다음, 1951년 6월까지 38도선 이북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6일 전인 1950년 6월 19일, 미국 국방부는 이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이처럼 미국 국방부가 6.25전쟁 직전에 작전계획을 완성해놓았기 때문에, 미국 원동사령부 산하 합동전략기획단은 6.25 전쟁 직후 맥아더의 명령을 받은 때로부터 5일 만에 ‘작전계획 SL-17'의 재판인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맥아더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 7월 당시 조선인민군은 고속기동전을 벌이며 부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미국군은 참패를 거듭하며 낙동강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1950년 7월 3일 한강을 도하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7월 5일 오산전투에서 미국군 제24보병사단 선견대를 궤멸시켰고,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금강을 도하했고, 7월 20일에는 미국군 제24보병사단을 궤멸시키고 대전을 점령했다. 

 

맥아더는 합동전략기획단이 자기에게 보고한 ‘작전계획 블루하츠’가 ‘작전계획 SL-17’의 재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폐기하고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의 명령을 받은 합동전략기획단이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제목의 개념계획(conceptual plan)을 완성한 날은 1950년 7월 23일이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경상북도 포항으로 진격하고 있었던 1950년 8월 15일 맥아더는 개념계획을 작전계획으로 완성하기 위한 사업을 극비리에 추진할 것을 합동전략기획단에 명령했다. 그런 명령에 따라 개념계획을 작전계획으로 완성할 특별기획참모단(Special Planning Staff)이 조직되었다. 

 

 

2. ‘작전계획 크로마이트’에 담긴 네 가지 씨나리오

 

1950년 8월 23일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청사에서 중요한 전략회의가 진행되었다. 맥아더가 소집한 전략회의에는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조섭 콜린스(Joseph L. Collins), 원동군 참모장 육군 소장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L. Almond), 해군참모총장 해군 대장 포레스트 셔먼(Forrest P. Sherman), 원동군 해군사령관 해군 중장 터너 조이(C. Turner Joy), 상륙전단사령관 해군 중장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제7함대사령관 해군 중장 아서 스트러블(Arthur D. Struble), 공군사령부 작전국장 공군 중장 아이드월 에드워드(Idwal H. Edward)가 참석했다. 맥아더는 합동전략기획단이 작성한 개념계획을 꺼내놓고 인천상륙전으로 6.25전쟁의 전세를 바꿔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은 인천 앞바다의 수로가 함대가 들어가기에 비좁다는 점,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세계 최고 수준이므로 함선이 개펄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 인천항 해안에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방조제가 있어서 상륙하기에 매우 불리하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맥아더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고집을 부리며 45분 동안 그들을 설득하더니 이런 해괴한 말도 했다.

 

“나는 제2운명의 손길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만일 우리가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지 모른다. 인천(상륙전)은 성공할 것이고, 100,000명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나는 적들을 짓밟을 것이다.”

 

맥아더와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이 인천상륙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낙동강 전선에서는 조선인민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은 미국군 방어선이 무너질 위험에 빠졌다. 낙동강 방어전을 지휘하던 미8군사령관 육군 중장 월튼 워커(Walton H. Walker)는 맥아더에게 미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맥아더는 인천상륙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더욱이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에게 인천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에 상륙하는 것을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는데도, 맥아더는 그런 지시를 따르지 않고 인천상륙을 고집했다.  

 

1950년 9월 1일 맥아더는 인천상륙전의 공식명칭을 크로마이트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정했다. 크로마이트라는 말은 황연(Chrome)원광석을 뜻한다. 맥아더의 특별기획참모단이 작성한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1950년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거쳐 당시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의 최종승인을 받았다.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작전씨나리오로 구성되었다.   

 

1) 100-A: 미국 해병대가 전라북도 군산에 상륙하여 금강계선에서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2) 100-B: 미국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미국 육군과 합세하여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3) 100-C: 미국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였으나, 미국 육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는 경우 미국 해병대가 군산에 상륙하여 대전을 점령하는 작전씨나리오.

4) 100-D: 강릉-주문진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미국 육군과 합세하여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3. 맥아더의 극비작전계획 빼돌린 조선인민군 정찰병 

 

맥아더가 인천상륙전 준비를 다그치던 1950년 8월 30일 평양에 있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무전실로 한 장의 무전통신문이 날아들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정보가 담겨있었다. 

 

“최고사령부 앞. 

미 극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아군의 배후를 타격하고 압록강 계선까지 북진하기 위한 작전이 결정되였음. 

상륙개시날자는 9월 13일. 

상륙지점은 인천.”

 

맥아더가 극비 중의 극비라고 하면서 철저한 정보보안조치로 은폐하였던 인천상륙전 극비정보를 빼돌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사람은 당시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한 조선인민군 정찰병이었다. 조선은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2017년 12월 5일 온라인매체 <조선의 오늘>에 실린 ‘특집 - 전쟁과 녀인’에서 6.25전쟁 중에 배출된 여성영웅 14명을 소개하면서 맥아더의 극비정보를 빼돌린 여성정찰병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 여성정찰병의 이름은 로남교다. 특집방송에 따르면, 1950년 8월 30일 로남교가 무선통신으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것은 ‘작전계획 크로마이트’ 중에서 인천상륙전씨나리오인 ‘100-B’였다고 한다. 

 

특집방송에서는 평양에 있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영웅의 묘비를 방송화면을 통해 보여주었는데, 네 줄로 새겨진 묘비명에 영웅이 걸어온 한생이 비껴있었다. 

 

로남교 동지

남조선혁명가, 공화국 영웅

1907년 3월 3일 생 

2006년 1월 25일 서거

 

이 짤막한 묘비명만 읽어보면, 6.25전쟁의 운명을 바꿔놓은 극비정보를 빼돌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하기까지 로남교 영웅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 날 김일성상 계관인 허문길 작가는 로남교의 영웅적 투쟁을 형상한 장편소설 ‘포성 없는 전구’를 창작했고, ‘눈보라 창작단’은 그녀의 영웅적 투쟁을 형상한 다부작 영화 ‘포성 없는 전구’를 2014년에 창작했다. 조선의 특집방송에서 해설자는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한 로남교 영웅이 “사랑하는 자식을 멀리 떼어두고 피눈물을 삼키며 적후활동을 벌였다”고 하면서, “몇 글자 안 되는 그 무전문에서 그가 넘어야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들, 뛰여난 지략과 용감성으로 헤쳐야 했던 나날들과 죽음의 고비들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50년 8월 30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전 극비정보를 평양에 있는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조선인민군 정찰병 로남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그녀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하여 극적인 정찰활동을 벌였다. 그녀가 무전통신으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것은 맥아더의 '작전계획 크로마이트' 중에서 인천상륙전씨나리오인 '100-B'였다. 그런 공로로 로남교는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극적인 정찰보고를 통해 '크로마이트작전'에 관한 정보를파악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전을 개시할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로남교 영웅의 극적인 정찰보고를 통해 ‘크로마이트작전’에 관한 정보를 파악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전을 개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두 가지 해결하기 힘든 작전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조선인민군 주력부대를 낙동강 전선에 집결시켜 부산으로 진격하는 마지막 고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결정적인 시기에 주력부대 일부를 차출하여 인천으로 급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주력부대 일부를 인천으로 급파하면, 미국군은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약화된 틈을 타서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었고, 조선인민군 주력부대 일부가 인천으로 이동하는 중에 미국군의 공습을 받아 인명손실을 입을 위험도 있었다. 

 

둘째, 조선인민군 주력부대 일부가 인천으로 이동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해도, 미국군은 계획을 바꿔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에 기습적으로 상륙할 수 있었다. 만일 미국군이 인천상륙-서울점령계획을 포기하고 남포상륙-평양점령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조선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난제들이 가로놓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았으면서도 주력부대 일부를 인천에 증파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바야흐로 결전의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 

 

4. 75,000명 대 400명의 싸움

 

지도에서 월미도를 찾아보면, 그 섬을 중심으로 사방에 펼쳐진 묘한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원래 월미도는 면적이 0.7㎢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그 섬의 가운데에는 해발고가 108m인 월미산이 있다. 1950년 9월 당시 월미도에는 주민 6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월미도에서 마주보이는, 면적이 104㎢인 영종도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영종도에는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섰고, 영종대교와 인천대교가 영종도와 육지를 연결해주었지만, 1950년 9월에는 영종도와 월미도는 월미수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6.25전쟁 당시 미국군은 월미수로를 날치수로(Flying Fish Channel)라고 불렀다. 미국군이 인천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월미수로를 통해 월미도에 상륙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군에게 월미도는 인천과 서울을 방어하는 전략요충지였고, 미국군에게 그 섬은 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상륙지점이었다. 

 

미국과 한국에서는 인천상륙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그들의 상륙지점은 인천이 아니라 월미도였다. 조선에서는 인천방어전이 아니라 월미도방어전이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는 인천상륙전을 월미도상륙전으로 고쳐 부른다.   

 

미국 해군 제7함대사령관 아서 스트러블이 월미도상륙전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의 노르망디상륙전에 지휘관으로 참전했고, 필리핀의 레이트상륙전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어서 ‘상륙전의 백전로장’으로 자처했다. 

 

그는 1950년 8월 18일과 8월 20일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적도와 영흥도에 정찰병들을 침투시켜 조선인민군의 해안방어태세를 파악했다. 그는 정찰보고를 통해 월미도에 소수의 조선인민군 방어대가 주둔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월미도상륙전에 참가한 제7합동타격단은 제77항모타격단, 제91해상봉쇄단, 제99해상정찰단, 제79전투비행단, 제90상륙공격단, 해상수송단, 한국군 해군부대로 편성되었다. 

 

제7합동타격단은 1950년 9월 4일부터 인천지역을 폭격하면서 동시에 군산지역과 남포지역도 함께 폭격했다. 월미도가 상륙지점이라는 정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군산과 남포도 함께 폭격한 것이다. 그들은 매일 같이 B-29 폭격기를 출격시켜 인천 중심부로부터 반경 50km 안에 있는 모든 대상물을 파괴했다. 

 

제7합동타격단은 월미도상륙전 직전인 1950년 9월 10일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함재기 43대를 출격시켜 주민 600여명이 사는 월미도에 소이탄(napalm tank) 93발을 투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 해병대 여단장으로 월미도상륙전에 참전한 에드윈 씨몬즈(Edwin Simmons)는 2013년에 출판된, ‘해안벽을 너머(Over the Seawall)’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날 소이탄 폭격으로 월미도에 있는 집들이 모두 완파되었다고 회고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50년 9월 초 미국군 항공정찰기가 촬영한 월미도 사진이다. 당시 월미도는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그 섬의 가운데에는 월미산이 있다. 월미도는 월미수로를 사이에 두고 영종도와 마주보고 있다. 6.25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게 월미도는 인천과 서울을 방어하는 전략요충지였고, 미국군에게 그 섬은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상륙지점이었다. 1950년 9월 13일 미국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싸운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인민군 월미도 방어대에게는 물리력으로 싸울 수 없는 전투였고, 죽음을 각오한 정신력으로 싸워야 하는 혈전이었다.  

 

결전의 날, 월미도상륙전에 참가할 제7합동타격단의 총병력은 75,000명이었다. 그들의 무장력은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상륙정, 상륙함, 보급함 - 261척 

함포, 견인포, 기관포 - 1,600문 

전차 - 500대 

함재기 - 500대

 

제7합동타격단의 상륙을 저지할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제918포병련대 일부병력, 제3보병대대 일부병력, 제226륙전대 일부병력을 합쳐 400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들의 무장력은 다음과 같다.

 

76mm 견인포 - 5문

37mm 견인고사포 - 2문

37mm 박격포 - 소량

 

1950년 9월 13일 마침내 결전의 날은 왔다. 바다를 건너와 남의 땅을 침공하는 ‘미제침략군’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조국의 작은 섬을 피로써 사수하는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싸운 전투였다. 항공모함을 비롯한 방대한 규모의 최신식 무장장비로 중무장한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견인포 7문밖에 갖지 못한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피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에게 그것은 물리력으로는 싸울 수 없는 전투였고, 죽음을 각오한 정신력으로 싸워야 하는 혈전이었다. 

 

1950년 9월 13일 오전 10시 10분, 전운이 감도는 월미수로에 순양함 4척과 구축함 6척으로 편성된 함대가 나타났다. 10척의 거함들은 40mm 기관포를 쏘아 월미수로의 부유기뢰를 하나씩 폭파하면서 서서히 월미도로 접근했다. 

 

오후 12시 20분, 순양함 4척은 월미도에서 11~16km 떨어진 먼 바다에서 기동을 멈췄고, 구축함 6척은 월미도에서 730m 떨어진 해상까지 바짝 접근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평선 넘어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함재기들이 까마귀떼처럼 하늘을 뒤덮으며 월미도 상공으로 몰려들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이미 9월 4일부터 계속되어온 9일 동안의 연속폭격으로 월미도는 폐허로 변했건만, 함재기들은 폐허 위에 또 다시 폭탄을 투하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보유한 37mm 견인고사포 2문은 포신을 85도 각도로 세워 공중으로 사격하는 방공무기인데, 유효사고도는 3km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월미도상륙전에 출격한 코쎄어(Corsair) 함재기의 비행고도는 10km 정도였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37mm 견인고사포로 코쎄어 함재기를 격추할 수 없었다. 미국 해군 항공모함 한 척에는 날개가 접히는 코쎄어 함재기를 100대나 실을 수 있었는데, 그 함재기에는 20mm 기관포 4문이 장착되었고, 127mm 로켓탄 8발 또는 1,800kg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코쎄어 함재기의 집중폭격이 끝나자, 구축함 6척이 1시간 동안 월미도를 향해 127mm 함포를 집중사격했다. 폭격과 포격이 끝났을 때, 타래치는 포연과 불길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 월미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제7합동타격단 지휘관들은 완전히 파괴된 월미도에서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으로 여겼다. 포연과 불길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 월미도는 죽음의 침묵을 말해주는 듯했다.   

 

 

5. 월미도의 마지막 혈전

 

그런데 상상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났다. 집중타격을 받고 전멸한 줄 알았던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75mm 견인포 5문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불을 뿜었다. 수백 발의 포탄과 폭탄을 맞아 산산이 부서지고 불타버린 작은 섬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월미도방어대가 75mm 견인포를 지하진지 밖으로 끌어내 미국 구축함에게 기습타격을 시작한 것이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반격은 어떤 전과를 가져왔을까? 미국 역사학자 로이 애플먼(Roy E. Appleman)이 집필했고, 미국육군군사연구소가 1961년 워싱턴에서 초판을 발행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포탄 9발을 명중시킨 2,200t급 미국 구축함 콜렛함(USS Collett)은 화력통제장치가 파괴되었고 승조원 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또한 포탄 3발이 명중한 3,400t급 구축함 걸크함(USS Gurke)도 부분적으로 파손되었고, 승조원 3명이 부상당했으며, 2,200t급 구축함 스웬슨함(USS Swenson)은 포탄이 함체에 스치면서 승조원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으며, 2,000t급 구축함 드 헤이븐함(USS De Haven)도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사용한 76mm 견인포의 사거리는 13km다. 주목되는 것은, 그 견인포가 BR-350A 철갑탄을 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철갑탄을 쏘면 2km 밖에 있는 타격대상을 60도 각도로 직격하는 경우 43mm 두께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부대가 쏜 76mm 철갑탄이 명중했어도 거대한 미국 구축함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을 뿐 격침되지는 않았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기습반격을 받고 놀란 미국 구축함들은 오후 1시 47분 견인포 사거리 밖으로 달아났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국 순양함들은 오후 1시 52분부터 월미도를 향해 1시간 30분 동안 203mm 함포를 미친 듯이 쏘아댔고, 함포사격의 뒤를 이어 함재기들이 까마귀떼처럼 또 다시 날아와 월미도를 맹폭했다. 폭격이 끝나자 미국 순양함들은 오후 4시 10분부터 30분 동안 또 다시 함포를 쏘아댔고, 오후 4시 40분이 되어서야 수평선 너머로 물러갔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9월 15일 월미도 전투가 끝난 직후 촬영된 월미도의 모습이다. 상상을 초월한 격전이 3일 동안 벌어진 월미산에는 온전한 나무가 한 그루도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아침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76mm 견인포를 지하진지에서 끌어내 해안으로 몰려드는 미국 해병대 상륙정들을 향해 마지막 남은 철갑탄을쏘았다. 해안으로 밀려든 상륙정들에서는 미국 해병대원들이 긴 사다리를 해안방조제 곳곳에 걸쳐놓고 개미떼처럼 기어올랐다. 사흘 간의 격전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해안방조제를 기어오른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에 맞서마지막 순간까지 혈전을 벌였다.  

 

이튿날인 1950년 9월 14일 오전 11시경 제7합동타격단 함대가 다시 월미수로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전날과 달리 순양함들이 먼저 월미도를 향해 203mm 함포를 집중사격했고, 그 다음에 함재기들이 날아와 월미도를 맹폭했고, 마지막으로 구축함들이 월미도를 향해 127mm 함포를 집중사격했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반격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철갑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5일은 월미도 전투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오전 5시 함재기들이 날아와 월미도를 폭격했고,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포격했고, 203mm 로켓포를 탑재한 군함 3척이 월미도 해안으로 접근하여 로켓포탄 1,000여 발을 난사했다. 오전 6시 25분, 월미도 해안에서 약 2km 떨어진 해상에 집결한 상륙정 17척과 상륙함 3척이 연막탄을 터뜨리며 일제히 해안으로 돌진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부대는 76mm 견인포를 지하진지에서 끌어내 해안으로 몰려드는 상륙정들을 향해 마지막 남은 철갑탄을 쏘았다. 마지막 철갑탄은 벌떼처럼 몰려드는 상륙정 3척에 명중했다. 

 

이제 월미도방어대에게는 소총과 수류탄 같은 개인화기들, 그리고 37mm 박격포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군 상륙정들은 해안방조제에 접근했다. 해병대원들은 꼭대기에 갈고리가 달린 긴 사다리를 해안방조제 곳곳에 걸쳐놓고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포연이 자욱한 월미도 해안에 운명의 시각이 왔다. 지난 사흘 동안 맥아더의 75,000명 대군을 상대로 벌인 격렬한 방어전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을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미국 역사학자들이 서술한 많은 기록들은 월미도방어대의 마지막 전투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날 해병대원들과 함께 월미도에 상륙한, 미국의 저명한 여성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가 남긴 목격담이 월미도방어대의 마지막 전투를 증언해주는 유일한 역사기록이다. 

 

“우리가 사다리를 타고 수직에 가까운 해안방조제에 기어올랐을 때, 치명적인 함포사격과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북조선 병사들이 해안 가까이에서 소총과 박격포로 쉴 새 없이 공격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히긴스의 목격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해안방조제를 기어오른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에 맞서 마지막 순간까지 혈전을 벌였다. 미국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210여 명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나머지 136명은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6. 금성-4 순항미사일과 익명의 탄도미사일

 

월미도가 피로 물들었던 그날로부터 세월은 흘러 70년이 지났다. 그 동안 월미도에서 혈전의 흔적은 사라졌고, 포탄화염이 작열했던 바닷가에는 유원지가 들어섰다. 

 

그러나 조선은 월미도 혈전을 잊지 않고 있다. 2014년 7월 23일과 7월 26일 <로동신문>은 “조국해방전쟁시기 47개 주요전투들”을 간략하게 해설한 기사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월미도방어전이 들어있다. 1982년 조선에서 첫 상영의 막을 올린 영화 ‘월미도’는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맞서 혈전을 벌이며 최후를 맞는 이야기를 담은 명작인데, 요즈음도 그 영화는 가끔 <조선중앙텔레비죤> 전파를 타고 방영된다. 

 

월미도 혈전은 조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다. 조선은 미국과 또 다시 결전을 벌여 그들을 기어이 꺾어버릴 강한 힘을 키워왔다. 월미도방어전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강한 힘이다. 70년 전 조선인민군에게는 눈앞의 적함을 격침시키지 못한 72mm 견인포와 철갑탄밖에 없었지만, 70년이 지난 오늘에는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적함을 격침시킬 타격력이 있다. 금성이라고 불리는 순항미사일이다. 

 

조선인민군은 금성-1 지대함순항미사일, 금성-2 공대함순항미사일, 금성-3 함대함순항미사일,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을 해안지대 지하기지들 안에 대량으로 실전배치했다. 2017년 6월 8일 강원도 원산 인근 해안에서 동북방향으로 시험발사된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은 레이더망을 피하여 낮은 고도로 200km를 날아가더니 표적에 가까운 상공에 이르러 공중에서 1~2차례 선회비행을 하고 아주 작은 표적에 명중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도화된 정밀타격력이다. 이런 적아식별능력과 선회비행능력은 섬 뒤쪽에 숨은 적함까지 쫒아가 타격한다는 뜻이다.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은 2020년 4월 14일과 7월 4일에도 시험발사되었다.  

 

그런데 미국이 자랑하는 100,000t급 핵추진항공모함은 함체길이가 332m인 거함이므로, 금성 계렬 순항미사일로는 격침하지 못한다. 조선인민군의 항모격침미사일은 따로 있다.

 

2017년 4월 15일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 중에 세계 군사전문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특이한 모양의 탄도미사일이 등장했다. 조선은 그 탄도미사일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미국은 ‘KN-18’이라는 자의적 명칭으로 부른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2017년 5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로 진행된 시험발사에 다시 등장했다. 비행거리가 450km이었으므로, 실제 사거리는 500km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다음과 같은 절묘한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7년 4월 15일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에 등장한 특이한 모양의 탄도미사일이다. 이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2017년 5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로 진행된 시험발사에 다시 등장했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초정밀타격력을 지난 항모타격미사일이며,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이며,500km 밖에 있는 거대한 핵추진항공모함을 단 한 방에 격침시킬 수 있는 고체연료탄도미사일이다. 70년 전 월미도에서 견인포와 철갑탄을 쏘며 혈전을 벌였던 조선인민군은 70년이 지난 오늘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을 보유했다.  

 

1) “적함선을 비롯한 해상과 지상의 임의의 바늘귀 같은 개별적 목표들을 정밀타격할 수 있는 정밀조종유도체계가 도입되었다. 중간비행구간에서 소형 열분사발동기에 의한 속도교정 및 자세안정화계통의 정확성이 재확증되였고, 보다 정밀화된 말기유도체계에 의한 재돌입구간에서의 초정밀유도정확성이 확증되였다.” 그리고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예정목표점을 7m의 편차로 정확히 명중하였다.” 

 

(해설 -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대기권을 벗어나 120km 고도에서 중간비행을 하는 동안, 미사일 탄체에 장착된 여러 개의 소형 열분사발동기로 비행속도와 비행방향을 조절했다. 또한 대기권 밖에서 대기권 안으로 재돌입할 때, 말기유도장치로 비행방향을 조절했다. 그리하여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450km 밖에 있는 작은 해상표적을 7m의 편차로 맞추는 초정밀타격능력을 과시했다.)

 

2) 시험발사에서는 “조종전투부의 말기유도단계까지 세밀한 원격관측”을 할 수 있었다. 

(해설 -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대기권 밖 120km 고도에서 해상표적을 향해 극초음속으로 낙하돌진비행을 했는데, 조선국방과학원 과학자들은 낙하돌진비행을 원격관측했다. 이것은 450km 밖에 있는 해상표적 인근 상공에 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보내 원격관측을 했다는 뜻이다. 450km 밖에 있는 작은 해상표적은 레이더로 포착할 수 없으므로, 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 보내야 포착할 수 있다. 이로써 익명의 탄도미사일과 무인전략정찰기가 연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민군이 운용하는 방현-5 무인전략정찰기는 시속 200km의 속도로 10시간 동안 비행하는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다. 이런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 보내 원격관측을 하지 않으면, 익명의 탄도미사일로 450km 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맞추기는커녕 포착할 수도 없다. 조선은 2016년에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를 개발했고, 2017년에 그것과 연동되는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

 

3) “발사 전 준비공정이 고도로 자동화되여 발사시간을 훨씬 단축하도록 체계가 완성”되었다. 

(해설 - 발사준비공정이 고도로 자동화되었다는 말은 고체연료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은 액체연료를 주입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발사준비시간이 대폭 단축된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이다.)

 

4)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에 탑재되었다. 

(해설 -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차륜식 자행발사대와 달리 길이 없는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있다. 미국의 위성감시는 도로망을 따라 진행되므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가 도로를 멀리 벗어나 산악지대로 들어가면 미국의 위성감시망은 ‘먹통’이 된다. 또한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모래사장에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다. 차륜식 자행발사대가 모래사장에 들어가면 차체 중량으로 발사대가 기울어져 미사일을 쏠 수 없지만,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모래사장에서도 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다.)  

 

2018년 2월 12일 미국의 안보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는 2017년 7월 중국에서 발행된 해군전문지에 실린 분석기사를 인용하면서, 2016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화성-9 탄도미사일이 적함을 정밀타격하기 위한 무기로 생산되었는데, 이 탄도미사일은 중국의 둥펑(東風)-21D처럼 고도화된 정밀타격력을 지닌 탄도미사일이며,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고 해설했다. 그런데 그 분석기사의 필자는 미국이 'KN-17'이라고 부르는 탄도미사일, 다시 말해서 조선에서 2017년 5월 29일에 시험발사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화성-9로 착각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익명의 탄도미사일이 중국의 둥펑-21D처럼 초정밀타격력을 지닌 항모타격미사일이며,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이며,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이다.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조선의 항모타격미사일은 500km 밖에 있는 핵추진항공모함을 단 한 방에 격침시킬 수 있다.

70년 전 월미도에서 사거리가 13km밖에 되지 않는 견인포로 철갑탄을 쏘며 혈전을 벌였던 조선인민군은 70년이 지난 오늘 사거리가 500km인 항모타격미사일에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했다. 그런 엄청난 위력 앞에서 미국의 핵추진항공모함은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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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블루’ 앓는 청년들…2030 자해·우울증 확 늘었다

등록 :2020-09-14 04:59수정 :2020-09-14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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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자해, 20대 213건 30대 161건
전년 동기보다 두배 가까이 증가
확진 많은 대구·경기 증가율 높아
우울증 진료도 28~15% 증가
“취업난·거리두기에 스트레스 커져”
이은주 의원 “정부 차원 지원책을
우울증과 자해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은주(가명)씨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lt;한겨레21&gt;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우울증과 자해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은주(가명)씨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우울증을 앓고 있는 대학생 이아무개(23)씨는 지난달 23일 다시 자해를 했다. 이날은 이씨가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을 1년 만에 만날 약속이 있었지만 돌연 취소됐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전국에서 397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기대에 부풀었던 이씨는 크게 실망했다. 이씨는 <한겨레>에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면 스트레스가 조금 풀렸는데 최근엔 혼자 사는 좁은 방에서 매일 온라인 강의만 듣다 보니 우울함이 계속 커진다. 대형서점에서 종일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코로나19 재확산 이후엔 그마저도 할 수 없어 너무 힘들다”고 했다.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이후 청년층의 정신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2020년 상반기 청년층의 자해 발생 진료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정의당 이은주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제출받아 13일 공개한 ‘(고의적) 자해 발생 현황’ 자료를 보면 2020년 상반기에 20대가 자해로 병원 진료를 받은 건수는 213건으로 지난해 118건에 견줘 80.5% 증가했고, 30대는 161건으로 전년(86건) 대비 87.2% 증가했다. 20, 30대 다음으로는 60대가 자해 건수 증가율(69.2%)이 높았다. 전체 나이를 놓고 보면 올해 상반기에 1076명이 자해로 진료를 받아 지난해(792건)에 비해 35.9% 늘었다. 지역별로는 대구(87.5%↑)와 서울(36.9%↑), 경기(73.2%↑) 등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많은 지역에서 자해 건수 증가율이 높았다.
우울증도 지난해에 견줘 늘었다. 2020년 상반기 동안 20대 우울증 진료 건수는 9만3455건으로 전년도(7만2829건)에 비해 28.3% 늘었다. 30대 우울증 진료 건수도 지난해 6만7394건에서 올해 7만7316건(14.7%)으로 늘었다.전문가들은 병 분류를 위해 파악한 수치는 최소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제 청년층의 자해 건수와 우울증 건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본다. 장창현 느티나무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코로나19 이후 진료를 받으러 오는 2030 청년들이 늘고 있는데 감염병 유행 이후 커진 취업 어려움과 줄어든 대인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며 “혼자 사는 청년들이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스트레스 관리와 마음 건강 챙기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감염병 유행 상황이 장기화되자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자해 경험을 공유하고 우울증을 호소하는 게시글이 잇따르고 있다. 대학생 ㄱ(24)씨는 “코로나19 이후 반년 가까이 집에만 갇혀 지내면서 주먹으로 벽을 치는 등의 자해를 하게 됐다. 코로나19로 인한 우울증이 의심된다. 심리상담 선생님이 약물치료를 권장하는데 전문가의 조언을 더 듣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중학생 ㄴ(14)씨는 “지난 1월 이사하면서 새 친구를 만들지 못해 우울감이 찾아왔고 살이 많이 찌면서 자해도 하게 됐다”며 역시 조언을 구하는 글을 남겼다. 이은주 의원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심리적 불안감과 고립감이 커지고 있어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며 “청년층과 저소득층에 대해선 (정신과) 상담과 치료비 지원 등 구체적인 대안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61983.html?_fr=mt1#csidxffe6f6fae419f0aad3528250b699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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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짜장면의 고향은 인천이다

개항 이후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 그들이 남긴 짜장면 

20.09.13 18:10l최종 업데이트 20.09.13 18:1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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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루 그냥 짜장면  예나 지금이나 제일 잘나간다. 가격 5,500원. 몇 알씩 올라가던 완두콩이 빠져 조금 서운하다
▲ 복화루 그냥 짜장면  예나 지금이나 제일 잘나간다. 가격 5,500원. 몇 알씩 올라가던 완두콩이 빠져 조금 서운하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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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의 위대한 탄생

인천은 항구다. 백여 년 전 근대적 개항을 단행했다. 우리의 뜻은 아니었다. 호시탐탐 한반도를 넘어 중국을 노리던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인천항을 통해 외래문물과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행렬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항구는 잠들지 않는다. 덩달아 그곳의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늘 뜬 눈이어야 한다.

그 몇 해 전부터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았다. 화교라 불렸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남성이었고, 배움이 짧았으며 가진 게 없었다. 그들은 집단생활을 하며 고된 육체노동을 주로 했다. 항구의 짐꾼도 대다수 그들이었다. 그들을 따로 '쿨리'(苦力)라 불렀다. 고객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을 불렀다.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야 했다. 밥을 먹다가도 뛰어 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먹을 수 있는 게 필요했다.

 

 항구 주변에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꽤 있었다. 아주 고급스러운 몇 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점상 수준이었다. 그 중 한 곳에서 부두 노동자를 위한 신메뉴를 개발했다. 중국 산동지역의 '자지앙미엔(炸醬麵)'을 조선식으로 재해석한 비빔국수였다. 그 이름 자체가 튀긴(炸) 장(醬)이다. 돼지기름을 두른 무쇠 웍에 춘장을 달달 볶아, 삶은 면 위에 얹어 냈다. 짜장면은 그렇게 탄생했다(위키백과 '짜장면' :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p193-195, 인천광역시, 2015).


그런데 정말로 자지앙미엔이 짜장면의 원조인지, 중국본토에는 우리식 짜장면이 없다는 말은 맞는 건지 등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남아 있다. 짜장면을 한국음식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의견은 갈린다. 논쟁을 불렀던 한글 표기 문제는 지난 2011년 국립국어원이 '짜장면'과 '자장면' 둘 다 표준어로 인정하면서 일단락됐다.

어쨌든 짜장면의 고향은 인천이다, 그건 아무도 토 달지 못하는 명백한 사실(fact)이다. 인천항 인근의 차이나타운은 그걸 증거한다. 명칭만 남은 다른 도시와 달리 인천 차이나타운은 지금도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당과 중국 식료품 가게 등이 즐비하다. 짜장면을 처음 개발했다는 옛 '공화춘' 자리엔 짜장면 박물관도 있다. 지금이야 코로나로 뜸하지만 얼마 전만 해도 경향 각지에서 짜장면 마니아들이 몰려들었다.

짜장면이 가장 대표적인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한국인에게 짜장면은 추억이다. 졸업식, 첫 데이트, 이삿날 등 추억의 디테일은 달라도 각자의 역사와 감성이 그 한 그릇에 오롯이 담겨있다. 있는 사람들보단 없이 산 사람들에게 특히 그렇다. 지금은 서민음식이 되었지만 모두가 곤궁한 시절에는 큰 사치였다. 특별한 날 아니면 먹을 수 없었다. 그런 애틋한 심정은 그룹 GOD의 <어머님께>란 노래에 잘 담겨 있다.

사실 짜장면 조리법은 간단하다. 면 삶고, 춘장과 재료 볶아 얹으면 그만이다. 누구나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맛은 아무나 내지 못한다. 면 반죽, 삶는 시간 등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장도 식자재의 신선도, 볶는 시간, 불의 온도 등이 다 중요하다. 면과 장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중식당의 평가 기준은 으레 짜장면이다. 짜장면이 맛있으면 다른 메뉴도 틀림이 없다. 동네 배달전문 중국집도 짜장면이 맛없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짜장면의 성지인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 잘하기로 소문 난 집이 한 집 건너 하나씩이다. 백년짜장, 유슬짜장 등 다른 곳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짜장면 메뉴도 다양하다. 그러나 짜장면 잘하는 집이 거기에만 있는 건 아니다. 인천 곳곳에 은둔고수들이 일가를 이루고 있다. 이주 초기 그들은 토박이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들은 대개 수십 년 이상 한 자리를 지켜오며 단골들의 사랑을 대물림하고 있다.

기본에 충실하라, 부평시장 '복화루'
 
  1945년 처음 문을 열었다. 3대 째 한 자리에서 짜장을 볶고 있다. 손주가 물려받으면서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   1945년 처음 문을 열었다. 3대 째 한 자리에서 짜장을 볶고 있다. 손주가 물려받으면서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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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루도 그중 하나다. 중국 산동성에서 건너온 이곡충씨가 1945년 문을 열었다. 아내와 함께 인천항에 내린 그는 화교들이 많은 바닷가 동네를 마다하고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 부평이었다. 행정구역은 인천시 관내지만 지금도 부평을 별개의 도시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큰 재를 넘어야 오갈 수 있어서 그랬는지 문화와 정서가 사뭇 다르다. 부평에는 규모가 큰 시장이 있었다. 이곡충씨는 그곳 부평시장에 터를 잡았다.

시장 뒷골목의 테이블 서너 개짜리 작은 가게였다. 처음엔 한국말이 서툴러 애를 많이 먹었다. 거친 시장사람들의 텃세도 힘들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손님이 들기 시작했다. 비결은 냄새였다. 돼지기름에 춘장을 볶을 때 나는 냄새는 강렬하고 강력하다. 침샘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는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 시장사람들은 그 냄새에 홀린 듯 가게 문을 열었다. 장 보러 나온 아낙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무리해서 사람이 많이 모인 시장에 가게를 낸 전략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일종의 향(香) 마케팅이었다. 사람들은 난생처음 맡는 희한한 향기의 유혹에 넘어간 거였다. 짜장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장사 시작한 지 2년 만에 아들 이본위가 태어났다. 아기가 복덩어리였다. 매출이 몇 배는 올랐다. 그 아들이 가게를 맡겨도 될 만큼 장성하자 아버지는 미련 없이 열쇠를 넘겼다.

이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예나 지금이나 짜장면이다. 그중 가장 저렴한 그냥 짜장면(5500원)이 제일 많이 나간다. 물론 가장 맛있어서다. 그 맛은 참 담백하다. 기름진 느낌이 별로 없다. MSG 첨가를 최대한 자제하는 듯 쓴맛이 남지 않는다. 아무리 주문이 많아도 재료는 순서대로 볶는다. 양파와 호박을 맨 나중에 넣는다. 아삭거리는 본연의 맛과 향이 살아 있다. 면은 부드럽고 매끈하다. 전분과 밀가루의 배합이 기막히다.

"우리는 매일 새벽에 두 내외가 장을 보러 가요. 신선한 재료야말로 좋은 음식의 첫째 비결이죠. 이건 우리 시아버지께서 가장 강조하신 가르침이에요. 작년(2019년)에 큰아들에게 사업자는 물려줬지만 건강이 허락 되는 대로 계속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단골들은 꼭 우리만 찾거든요."

안주인 왕수영씨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복화루엔 나이 지긋한 단골들이 많다. 모두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맺어 왔다. 식구나 다름없다. 두 부부는 그들의 소소한 것들도 기억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네들은 다른 집에선 짜장면 못 먹는다며 맞장구친다. 맛도 맛이지만 정 때문에 그런단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길을 끊는 단골들이 늘어 속이 많이 상한다. 사람 생명이야 영원한 게 아니니 어쩔 도리는 없다.

신흥동 제일에서 대한민국 제일로, '신일반점'
 
신흥로터리 신일반점 1950년 문을 열었다. 지금은 수석주방장이었던 유방순 사장이 주방과 경영을 모두 책임지고 있다.
▲ 신흥로터리 신일반점 1950년 문을 열었다. 지금은 수석주방장이었던 유방순 사장이 주방과 경영을 모두 책임지고 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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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반점은 신흥동 로터리에 있다. 가게 이름은 '신흥동 제일'을 표방한다. 신흥동을 넘어 인천 최고라 해도 과하지 않다. 1950년 즈음에 산동성 옌타이 출신인 임서약씨가 문을 열었다. 지방의 식자재 상에서 일 하던 그는 거래처 식당 딸과 결혼하면서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의 아버지가 청관거리 부근에서 하던 호떡집을 업그레이드 해 신일반점을 차렸다. 물론 처가댁은 중국식당을 하던 화교 집안이었다(한국일보 '한국의 노포 14회', 2003년 12월 23일자 기사 참조).

2000년대 초 아들 헌일씨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몇 년 동안 그가 운영하다가 수석주방장이던 유방순 현 사장에게 넘겼다. 유방순 신임 사장은 그 세계에선 꽤 유명한 실력자다. 젊은 시절 태화관이나 국일대반점 같은 유명 업소에서 실력을 닦았다. 임 사장에게 인정받아 스카우트 됐다. 오기 전부터 자타가 인정하는 고수였지만 이곳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유 사장은 임씨 가문의 비방에 자신의 노하우를 접목했다.

신일반점은 일찍이 유명세를 탔다. 유 사장 취임 후에도 언론매체나 블로거들이 자주 찾아 자발적으로 홍보해 주었다. 지난해(2019)엔 공중파 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달인의 메뉴는 탕수육이었다. 탕수육은 전임 임 사장 시절부터 유명했다. 그로부터 전수 받은 비법과 자신만의 노하우를 더 했다.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초마면도 유명하다. 초마면은 말하자면 짬뽕의 원조다. 국물은 하얗고 걸쭉하다.
 
 맨 상단에 유니짜장이 있다. 다른 집들은 짜장면이 있는 자리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말이다
▲  맨 상단에 유니짜장이 있다. 다른 집들은 짜장면이 있는 자리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말이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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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 사장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는 건 유니짜장이다. 식당 벽에 붙은 메뉴판의 최상단에 유니짜장이 있다. 예전엔 다른 집처럼 그냥 짜장면이 그 자리에 있었다. '유니'는 '간다'는 뜻이다. 모든 재로를 곱게 갈아서 춘장과 볶는다. 하지만 신일반점 유니짜장은 고기만은 갈지 않는다. 식감 때문이다. 고깃덩이가 제법 두툼하니 씹는 맛이 좋다. 면은 말도 못 하게 차지다. 쫀득쫀득 씹히는 식감이 풍성하다. 면과 장을 비비면 그야말로 혼연일체가 된다.

"임 사장님은 제겐 시부이자, 친할아버지 같은 존재죠. 함께 일하는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중 제일이 정직입니다. 거짓은 손님이 먼저 알아챈다고 가르치셨죠. 앞으로 해삼 쥬스나 불도장 같은 고급 중식을 대중화해 많은 분이 드실 수 있게 하는 게 꿈입니다."

유 사장은 화교 3세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말이 부자연스럽다. 사장뿐 아니라 가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 보조 주방장도, 카운터도 하물며 서빙하고 배달하는 사람들까지 다 똑같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땐 순 중국말만 쓴다. 매장은 늘 떠들썩하고 분주하다. 내용을 모르고 들으면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그들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활기찬 대화에는 중화민족의 자긍심이 한껏 묻어난다.

화교들에겐 에너지를, 한국인에겐 추억을

이 땅 화교들의 삶은 여전히 신산하다. 재산권은 근 100여 년 이상 제한 받았다. 영주권이 주어진 건 불과 20여 년 전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출생한 화교로 국한 되어 있다. 아직도 교육이나 복지 혜택에서 상당 부분 소외되고 있다. 세금은 대한민국 국민과 똑같이 내는데도 그렇다. 그들을 비하하는 모욕적인 별칭들은 아직도 듣기 괴롭다. 그래도 그들은 특유의 만만디 정신과 강한 생활력을 무기로 지금껏 꿋꿋하게 버텨오고 있다.

짜장면은 그런 그들의 삶을 상징한다. 모질고 힘들지만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하소연하지 않고 온전히 제 몸뚱이로만 역경을 이겨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은 선 채로 후다닥 짜장면을 먹고는 다시 일터로 달려 나갔다. 짜장면은 그렇게 고생하는 동족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우리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GOD의 어머니는 짐짓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속내는 아니었을 거다. 단언컨대 진짜 짜장면을 싫어하는 한국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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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 서부는 '기후 재앙 현주소'...100여개 산불 동시다발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9/14 08:01
  • 수정일
    2020/09/14 08: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남한 면적 약 20% 초토화, 사망자 최소 28명...트럼프 14일 캘리포니아 방문 예정

<뉴욕타임스> 등 전세계 주요 언론들이 캘리포니아 주를 비롯한 미 서부 3개 주 일대를 화마에 휩싸이게 한 전대미문의 산불 사태를 '기후변화 재앙'으로 규정하며 연일 대대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

 

13일(현지시간) 미국 전국합동화재센터(NIFC)에 따르면 미 서부 지역에서는 약 100여 건의 대형 산불이 동시다발로 진행 중이다. 특히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주가 피해가 심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4일 캘리포니아 주를 방문할 예정이다.

 

8월 초부터 현재까지 산불로 희생된 사망자 수는 최소 28명이며, 최근 며칠새 사망자가 집중적으로 늘었다. 실종자가 수십명이어서 수색작업이 끝나면 실제 인명피해는 훨씬 더 클 전망이다. 산불 피해 면적은 1만9125제곱미터에 달한다. 남한 면적 약 5분의 1(19.1%)에 해당한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주 역사상 피해 규모가 1·3·4위에 달하는 대형 산불 3건이 한꺼번에 발생하는 등 현재 확산세를 잡지 못해 애를 먹는 주요 산불만 28개 달한다. 오리건 주에서도 겨울 우기가 될 때까지 최소 8건의 대형 산불이 진화되지 않을 것으로 당국은 예상했다. 워싱턴 주에서는 16개의 대형 산불이 진행 중이다. 아이다호·몬태나 주까지 포함하면 미 서부 지역에서 약 100여건의 산불이 진행 중이다.

 

민주당 소속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캘리포니아는 존재론적 기후 위기의 한 가운데 서 있다"며 "캘리포니아 주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산불이 나타난지 고작 2년이 지났는데, 또 다른 거대 산불이 몇 마일 밖에서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선후보를 포함한 민주당 진영은 "산불 사태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것"이라면서 "미래를 위해 이제 행동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기후 전문가들도 미 서부 대형 산불은 온난화에 따른 '지구의 경고'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속된 건조한 날씨 속에 벼락이 떨어지며 시작된 산불이 높은 기온과 강풍이 지속되면서 산불 피해가 더 크게 확산됐다는 것이다. 산불로 인한 연기로 이 지역의 대기질은 현재 전세계 최악인 상황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1314005767316#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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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과 미국의 전후 신탁통치 구상

<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20)-제2부 해방과 외세(1)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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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14  00: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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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반도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해방과 함께 분단되는 운명에 처했다. 우리로서는 억울하고 분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우리의 운명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결과였다. ‘역사의 저주’라고 해야 할지, 해방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근대 이후 축적된 역사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해방과 함께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3년간의 수많은 분란 끝에 결국 한반도는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고 말았다. 한반도가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로 분단되고, 다시 2년 뒤 참혹한 전쟁을 치를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더욱이 그렇게 시작된 분단과 대결 상태가 70년을 넘어 한 세기를 향해 나아갈 줄 누가 꿈에라도 생각이나 했을까. 분단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 가운데 그걸 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단은 외부의 힘, 그러니까 세계 질서를 좌우하는 강대국들에 의해 이뤄졌다. 김구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고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고 했을 때 이미 강대국의 영향력을 염려했었다. 다른 독립운동가와 독립세력들도 2차 대전이 끝나기 전부터 전후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게 될 것이며, 한반도는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란과 갈등이 한반도의 양단과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역사에서 한반도와 비슷한 운명에 처한 나라들은 종종 있었다. 독일(프러시아)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제국(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서 고통받았던 폴란드가 대표적이다. 18세기 이들 강국들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영토가 분할되면서 한때 폴란드는 아예 지도상에서 사라진 적도 있었다. 서유럽과 러시아의 세력 교차점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는 자신의 주도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여러 민족, 국가들이 한 나라로 통합되었다가 냉전체제가 와해된 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거쳐 이제 또 다시 7개의 나라(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로체고비나, 코소보)로 쪼개졌다. 역시 서구와 러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분단되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두 개의 세력이 충돌하며 내전을 치르고 있다.(주1) 그럼에도 현대사에서 우리처럼 세계 최강국이 모두 참여한 전쟁을 3년간이 치르고 70년 동안 계속 분단된 경우는 없다. 전후 세계질서 재편 과정에서 분단되었던 독일도, 전후 재식민화를 위해 개입했던 제국주의와의 전쟁 과정에서 분단되었던 베트남도 통일을 이뤘으나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에 있다.

대체로 강대국과 강대국의 사이, 문명권과 문명권, 세력권과 세력권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나라들이 외세의 개입으로 고통받거나 심할 경우 분단을 겪었지만, 근대 이후 한반도만큼 지독하게 그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경우는 없다. 왜일까? 그것은 한반도가 근대 이후 그만큼 중요한 세력권의 충돌지점,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며 세계 최강국의 이해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에 의한 분할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할 점령된 나라는 여럿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 두 나라에 의해 양분된 것은 한반도밖에 없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국과 소련은 전후 자유주의(자본주의) 세계와 공산주의(사회주의) 세계라는 두 진영을 대표하는 초강대국으로서 전후 냉전체제를 이끌었다. 한반도가 두 나라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냉전 대결이 첨예한 곳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가 이처럼 강대국의 이해관계의 충돌점이 된 것은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근대 이후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반도는 오랫동안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교차점으로서 강대국의 첨예한 대결장이 되었다.

   
▲ 폴란드의 분할. 오스트리아(분홍색 계열), 프로이센(노란색 계열), 러시아(하늘색 계열)에 의해 분할되었던 18세기의 폴란드. 

동아시아는 오랫동안 중국대륙을 장악한 중원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책봉 관계가 국제관계의 골격으로 유지되었다. 중국 중원을 지배한 제국은 한족뿐만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었다. 몽골은 몽고 초원지대를 통일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 지금의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세계제국을 구축하면서 중국대륙에 원이라는 몽골제국의 종주국을 구축했다. 이때 고려는 몽골제국(원)의 부마국으로서 반예속국(주2)이었으나 독자적인 왕조를 인정받았다. 그 외에도 한반도에 있던 국가는 중원의 제국 또는 강국의 침략을 숱하게 받았지만 한번도 완전히 독립성을 잃은 적은 없었다. 한편으로 조공-책공 관계는 그러한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이기도 했다.

   
▲ 몽골제국과 고려. 
   
▲ 근대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관계.


조선시대 명과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국가는 중원국가로부터의 형식적인 책봉관계를 인정하되 중원국가가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공-책봉관계의 불문율이었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중원국가가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했는데, 이는 양자 모두에 적지 않은 타격이 되었다. 중원국가는 한반도와 전쟁을 치를 경우 항상 북방민족, 배후를 걱정해야 했으므로 외교(외형)·정치적으로는 황제국과 제후국의 책봉관계를 유지하면서 교역·경제관계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원래 조공은 중국 내에서 제후(또는 제후국)가 천자(황제. 또는 황제국)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진상)을 의미했지만,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설명해주는 의미로 확장되면서(주3) ‘조공무역관계’로 그 내용이 변화되었다. 황제국과 제후국의 무역과 교역, 문물교류의 수단으로 통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제후국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근대 이후 강대국의 충돌점이 된 한반도

동아시아에서 조공-책봉관계라는 국제질서가 가장 안정적으로 운용된 것이 근세 명·청시대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의 경우 명과의 관계에서 사대를 분명히 천명하였고, 외부적인 외교상의 안정을 바탕으로 국내의 경제·문화 발전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명·청 시대 중국 주변의 여러 국가들, 몽골, 신장티베트, 신강위구르(서역)지역,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이 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열도국가의 경우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때로는 중원국가와 조공책봉 관계를, 때로는 고립단절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근세가 되면서 이러한 대륙중원국가 중심의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세계사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유럽국가들이 주도한 ‘대항해 시대’와 이른바 ‘신대륙’의 발견이었다.(주4) 로마제국 이후 중세기 동안 낙후를 면치 못하던 유럽은 ‘대항해 시대’에 ‘신대륙 발견’을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였고, 근대 이후 서세동점의 상황을 연출하며 제국주의·식민지 시대를 연출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차적으로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그 여파가 세차게 몰아쳤다.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거쳐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그 기세를 몰아 조선과 중국을 공략하러 나섰는데 이때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총기 성능을 개량한 조총을 비롯해 네덜란드 등을 통해 받아들인 유럽 문물이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크게 한번 흔들었으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주5) 그럼에도 300년 뒤 동아시아 역사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게 될 해양세력의 기세를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중대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이 있고 300여년 뒤인 1894년 일본은 중국(청)과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다시 붙었고, 이 싸움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청) 중심의 전근대적인 조공-책봉관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이른바 ‘만국공법’ 체제(주6)가 등장하게 되었다.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아시아 패권국가가 되었으나 일본의 야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대만을 식민지로 확보, 경영하면서 1931년에는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함으로써 일본제국의 지배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 야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중국 본토 침략에 나섰고, 나아가 동남아와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영과 세계패권을 두고 전면전을 벌였다. 일본은 마지막 순간에는 자본주의국가인 미·영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로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신흥 초강국으로 등장하고 있던 소련도 상대해야 했다. 일본이 아무리 강국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모두 상대해서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일본은 패망하고 말았다.

   
▲ 근대 이후 한반도는 미국, 일본, 러시아(소련) 등 세계강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근대 이후 한반도는 미국, 일본, 러시아(소련) 등 세계강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이라는 해양세력과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대륙국가가 맞붙은 전쟁에서 해양국가 일본이 승리했다. 유라시아 국가 러시아제국과 해양국가 일본이 맞붙은 러일전쟁에서는 해양세력인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고, 그 후 상당기간 이들 세 나라는 상호 경쟁하면서도 기본적으로 협조,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영향력을 확장,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를 넘어 중국 대륙으로 침략을 확대하며 중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려 하면서 미국, 영국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침해하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은 동남아와 태평양으로 진출하면서 같은 해양세력인 미국·영국과 전면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독일·이탈리아 등 파시즘 동맹에 대항하여 대륙세력인 소련·중국과 해양세력인 미국·영국이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형성해 싸운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직전까지의 대립 관계를 바꿔놓은 전쟁이었다. 이 세계전쟁에서 연합국이 승리함으로써 파시즘 추축국 동맹은 몰락했지만 전후 동아시아에서는 재차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충돌하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미국은 과거 적이었던 일본을 동맹 관계로 돌아섰다.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패전국가 일본은 미국·영국 등 해양세력의 동맹국이 되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한반도는 일본 대신 분단국가가 되고 말았다. 동아시아에서 두 세력권은 한반도를 접점으로 하여 첨예하게 부딪쳤고, 그 결과 한반도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대응한 미국의 전후 구상

한반도 분단의 출발점이자 결과물이 된 냉전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이른바 ‘전통주의’는 냉전체제의 형성과 한반도 분단의 1차적 책임을 소련의 팽창주의에서 구하는 반면, ‘수정주의’는 이와 반대로 미국의 전세계적인 정치·군사적 패권전략 추구에서 냉전 및 한반도의 분단이 비롯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우선 전통주의적 시각은, 미국에 의한 세계체제의 재편과 자본주의 질서의 확립은 전 세계적으로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냉전은 결국 소련의 ‘팽창야욕’에서 비롯되었고, 미국은 이에 수동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결국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전통주의적 입장을 강력히 비판하며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재고를 요구한 수정주의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수정주의적인 시각은 미국의 팽창주의적 외교정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냉전질서의 기원을 소련이 아니라 미국에서 찾고 있다. 이들은 트루만 이전에는 미국과 소련의 협조분위기가 비교적 잘 유지되었는데 이를 먼저 깨뜨린 것은 바로 ‘트루먼 독트린’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소련은 방어적 위치에 있었고 전후 복구사업에 급급하여 미국의 정책에 수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해방 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한국민의 자주적이고 통일적인 민족국가 수립을 거스르는 미국의 국가이익의 실현 과정이었다고 본다.(주7)

이처럼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이 문제는 결국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에 책임이 있지만, 누가 책임 더 큰가 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국과 소련 모두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체제를 세우고자 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전체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 양측의 대한반도 정책은 서로의 국가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나라에 모두 꼭 같은 비중의 책임이 있다고 ‘균등한 양비론’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 문제는 저울로 물건의 무게를 재듯이 비교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급적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분단의 출발점이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현실화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과 소련, 특히 미국 전후 한반도 정책 구상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시아에서 일본과의 전쟁(중국에서 장제스 국민당군 지원, 동남아 버마전선 지원, 태평양에서 일본과의 직접적인 전쟁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미국이었고, 전후 질서 재편에서도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시작한 뒤 대만, 만주, 중국 등 침략 전쟁으로 확보한 지역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배를 목표로 한 구상을 제기했는데 거기서 발전한 것이 바로 ‘대동아공영권’ 주장이었다. 대동아공영권의 선구는 1938년 11월 3일과 12월 22일 일본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의 ‘동아신질서 구상’이었다. 이는 원래 구미제국주의와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명분 아래 ‘일만중(日滿支)블록론’을 통해 중국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배를 구축하겠다는 논리를 제창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조선과 만주, 중국을 넘어 동남아와 태평양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범위도 확대되었다. 이것은 나치즘의 ‘생활권’ 이론과 마찬가지로 파시즘 국가들에 의한 세계분할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다.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대아시아주의로 분식(위장)되었지만 그것은 손문이나 안중근 등이 주장했던 것처럼 구미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피억압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구미열강을 대신한 지배자가 되는 것에 불과했다.(주8)

   
▲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지도(지도=김득중/ 사진=한겨레21, 2019.9.12.)

태평양전쟁에서 일제에 대항해 연합국의 군사적 대응을 주도한 미국은 이 무렵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대체할 만한 구상을 내놓았다. 미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분할방식이나 태평양전쟁 이전 동아시아에 대해 미국이 취했던 세력균형책과는 질적으로 다른 단일한 세계체제에 입각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구상하였고,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을 미국이 주도하는 이 신세계질서의 핵심지역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전후 미국 중심의 신세계질서와 세계전략의 기획을 주도한 것은 미국의 독점자본가집단의 이해관계를 대외정책으로 구체화시키는 기능을 맡고 있던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 : CFR, ‘협의회’)가 2차 대전 발발 후 만든 ‘전쟁과 평화 기획’(War and Peace Project, 약칭 ‘기획’)과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국무부 내에 조직한 ‘전후 대외정책에 관한 자문위원회’(The Advisory Committee on Postwar Foreign Police, 약칭 ‘자문위’)였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이 ‘기획’과 ‘자문위’를 주도한 인사들을 늘 ‘나의 전후고문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유엔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전후 미국의 세계전략과 대외정책을 만들어냈다.(주9)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정책은 미국이 이 지역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전후 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패권과 주도권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문제 해결의 일방적 방안으로 마련된 것이 신탁통치안이었다. 이는 전후 유럽의 구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른 강대국이 동아시아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이 지역의 각성한 민중들에 의해 민족주의운동이 점차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독립열망을 일정하게 개량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안전밸브’가 필요하다는 점이 고려되어 마련된 방침이었다. 미국의 신탁통치안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와 미국 자본의 자유롭고 안전한 전세계적 활동을 위한 장치이자 식민지역에 대한 새로운 관리방식으로 고안된 것이었다.(주10)

   
▲ 전략첩보국(OSS)이 제작한 지구본을 바라보고 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1942년)(사진= 김득중/ 한겨레21, 2019.9.12.) 루즈벨트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대응하여 미국의 신질서 구상을 내놓았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루즈벨트의 신질서 구상의 한 부분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근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국제 질서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20세기 전반기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아시아를 분할, 지배하는 데서 일정한 타협점을 찾았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중국을 두고 갈등하고 대립했지만 큰 틀에서는 협력적 관계, 연합 관계를 이어갔다.(주11) 한반도와 대만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 동남아지역은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식민지로 차지했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중국을 두고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그 누구도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타협하였다. 일차적으로 만주를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치열하게 경쟁했고, 산둥반도를 두고는 일본과 독일이, 화북과 화남, 연안지역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가 각축전을 폈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의 경제력이 세계 최강으로 부상하고, 그 뒤를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가 뒤쫓는 형국이었다. 러시아 혁명 후 사회주의 국가가 된 소련은 이들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동의 견제를 받으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지만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가 되면서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힘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최강국의 위치를 차지한 가운데 일본과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를 능가하는 공업생산능력을 바탕으로 강국으로 부상했고, 서구열강들은 당시에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 혁명’을 통해 공업 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으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의 분할, 협력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으나 1940년 중반까지도 미국은 일본에 항공유를 제공하는 등 갈등 속에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협력적 관계를 이어갔다.(주12) 1940년 하반기 마침내 미국이 일본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경제적 봉쇄조치를 취함으로써 일본으로서는 미국과 패권을 위한 일전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일본·독일·이탈리아 삼국동맹을 축하하기 위해 국기를 높이 들고 있는 일본 아이들(1940년). (사진=김득중/ 한겨레21, 2019.9.12.) 삼국동맹에 대응하여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 등이 국제반파시즘민주연합을 이루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격돌했다.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라는 제국주의 국가와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중국이라는 반식민지국가가 연합해 일본제국과 싸우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물론 이 전쟁의 주역은 미국과 일본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자신의 모든 국력을 총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과 연대, 동맹했다. 미국은 체제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 소련과 연합했고, 유럽전선에서 독일에 묶여 힘을 쓰지 못하고 있던 영국과도 손잡았다.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던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으로 나뉘어 항일전쟁을 치렀고,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연합했다. 미국이 좀 더 넓은 시야로 마오쩌둥의 공산당도 포섭할 수 있었다면 전후 상황도 달라졌겠지만 미국은 그걸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이 시기의 미국과 중국의 선택에 뿌리를 둔 동아시아 냉전체제는 20세기 전반부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대륙 침략이 남긴 역사적 상처와 결합하면서 전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주13)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주14)

   
▲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일본은 미국과 격돌했다. 유럽전선에서 독일과 격돌했던 소련도 독일 항복 후 대일전에 참전함으로써 전후 냉전의 단초를 열었다.

20세기 초반 러일전쟁에서 일본과 연합한 뒤 1940년까지 갈등하면서도 협력-연합관계를 유지했던 미국·영국의 해양세력은 동아시아에서의 이해관계와 세계패권을 둘러싸고 소련과 일시적인 제휴를 선택하며 일본과 전면전을 시작했다. 미국은 전쟁을 시작한 뒤 얼마 있지 않아서 전쟁이 끝난 후의 동아시아에 대한 정책 구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그 핵심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 일본의 패권 준동을 막고 중국을 견제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 대륙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지원함으로써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 일본 군국주의체제를 해체하고 민주적으로 개조하는 것을 방향으로 잡았다. 그러나 전후 중국 대륙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배함으로써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고, 결국 일본 파시즘 체제의 완전한 해체를 통한 민주적 개조 대신 소련과 공산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국으로 확보하는 반공전략으로 선회하였다.(주15)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전후 동아시아 구상 및 정책의 큰 카테고리 안에서 마련되었는데,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쉽게 버릴 수 없는 요충지였지만 일본처럼 반드시 독점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사활적 이해관계에 비해서는 부차적인 지역이었고, 그 때문에 소련과 분할점령이라는 타협책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 남단을 소련의 팽창과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고 일본과 미국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동아시아 반공전선의 보루로 만드는 것이 미국의 전후 대한반도 정책의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주16)

미국의 전후 정책 -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

전후 일본이 점령, 지배했던 동아시아 문제의 처리에 대한 미국의 구상은 우선, 중국 대륙과 부속지(대만)은 중국에 넘기되, 동남아시아 등 인접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중국이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점령지였던 만주와 한반도의 처리는 주변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다소 복잡했지만, 미국은 만주와 한반도를 일본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기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분리하는 방식에서 만주는 중국에 귀속시키기로 했으나 한반도에 대해서는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만주는 소련과 일정한 타협이 필요하지만 중국에 귀속시킴으로써 소련을 견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주변국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어느 한 강대국의 독주를 막고 미국 주도하의 지역안보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었다.(주17)

미국의 대외관계협의회(협의회)와 대외정책자문위원회(자문위)는 1942년 중반 이후 국제신탁통치안을 다각도로 검토하였고, 이를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 세부적 방안들을 마련했다. 자문위 정치소위는 1942년 여름 한국에 대해서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독립시키되 기간 중 연합국 공동관리(국제기구)에 의한 신탁통치를 통해 자치능력을 배양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자문위 영토소위는 1943년 5월 한국 독립의 실현 방안, 국내 정치구조, 독립에 대한 주변 강대국의 태도, 경제자립 전망, 영토와 국경선 문제 등을 검토하였다. 정치소위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요구와 처리방침을 정리했다면, 영토소위는 한국문제에 대한 각론적인 검토를 신탁통치와 연결시켜 정리했다. 미국의 전후 기획집단은 1942년에서 1943년 중반 사이에 한국의 전후 처리에 관한 일반적 원칙과 세부적 문제점들에 대한 검토를 일단락 지었다.(주18)

루즈벨트는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열린 준비모임에서 “신탁통치의 가능성을 매우 강조하고 이를 모든 종류의 상황에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 안보의 관점에서 세계의 많은 부분을 국제신탁하에 두어야 한다”는 점과 “여러 가지 상이한 신탁통치안을 식민지역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참모들에게 강조하였다. 결국 카이로 회담에서 발표했던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은 미국 정책기획 집단이 내린 결론을 그대로 관철시킨 것이었다.(주19)

미국은 태평양 전쟁 기간 중 대일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전후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골몰했다. 미국은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등 전시 연합국 회담에서 영국, 중국, 소련으로부터 신탁통치안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려 하였고, 종전이 가까워오면서 소련으로부터 신탁통치안에 대한 확약을 받아두려고 했다. 전후 한국의 장래에 대한 최초의 국제공약인 카이로선언(1943.11)의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조항은 미국의 주도 아래 이뤄진 것이었지만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는 영국, 중국, 소련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었을 뿐 종전까지 명문화된 국제 협약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주20)

   
▲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명시한 카이로 회담(1943.11.) 때의 각국 영수들. 좌로부터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쑹메이링(장제스 부인).

카이로에 뒤이어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한국에 대한 결정사항을 언급하며 신탁통치를 주장하자, 스탈린은 “한국은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1944년 1월 12일 태평양전쟁위원회 회의에서 스탈린이 한국에 대한 40년간의 신탁통치 필요성에 동의했다고 했다고 전했다.(주21)

1943년 가을 국무부 내에 ‘동아시아에 관한 국간위원회’(FEAC. ‘국간위원회’)가 설치되어 일반 방침에 따른 실무문제를 조율했다. 국간위원회는 1944년 2〜4월 한국에 관한 계획을 한층 발전시켰다. 신탁통치안이라는 상위안에 입각해 그 실현경로와 방법들을 검토했고, 군정(軍政)과 군사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국간위원회는 군사적 점령과 군정에 대한 일반적 방침과 그것을 적용할 때 필요한 고려사항들을 점검했으며, 육군부 작전국(OPD)과 민정국(CAD)에서도 한국의 민정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국간위원회는 연합국 공동점령과 공동군정을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했는데, 이때까지도 분할점령안은 본격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주22)

그러나 미국이 이 지역에서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정치·군사 상황을 준비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군사적으로 주도했을 뿐 아니라 다른 연합국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군비 지원도 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지역의 막강한 소련 지상군의 존재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가져올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군부는 이러한 불투명한 상황에 대비하여 연합국 공동점령 방침 또는 분할점령안을 마련하였다. 38선 분할점령도 이러한 점을 고려하고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 현실적인 군사적 배치 상황, 소련의 대응 등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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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들 강대국의 충돌로 내전이나 분할, 분단의 고통을 겪는 경우와 달리 세력권이 교차하는 완충지점에서 독립을 유지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태국이다. 태국은 제국주의 시대 영국과 프랑스가 동남아를 침략, 식민지로 만들는 과정에서 완충점에 있어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태국의 대응도 중요한 측면이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교차점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 말 영국과 러시아의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 와중에 완충국이 되었으나 결국 영국의 침략을 받았으며, 냉전시대에는 소련으로부터, 냉전 해체 이후에는 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고통당하고 있다.

2) 몽골제국의 영역 내에서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해준 상태에서 간접지배 방식을 유지한 나라는 고려가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몽골의 영역 안에 들어가게 되면 직접통치가 대부분이었고, 이를 거부하게 되면 전쟁에 의한 복속이나 항쟁을 통한 물리침이 있을 뿐이었다. 고려는 30여년간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다가 복속되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독자적인 왕조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간섭을 받는 속국으로 남았다.

3) 이 과정에 대해서는 임기환,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조공·책봉,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동아시아의 역사 Ⅰ』, 2011, 377〜386쪽 참조

4) 엄밀하게 말해 아메리카 대륙은 신대륙도 아니고 발견도 아니지만 유럽 중심의 역사를 일정부분 차용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냥 사용한다.

5)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정두희·이경순,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2007, 휴머니스트; 하우봉, 16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전쟁,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동아시아의 역사 Ⅱ』, 2011, 201〜269쪽;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참조

6) 만국공법(萬國公法)이란 국제관계가 국가 간의 상호 조약과 국제법 등에 기초하여 이뤄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말이 좋아 ‘만국공법 체제’이지 사실은 총과 대포, 협박에 의한 약소국 침탈과 식민지화 등 서구자본주의 열강 중심의 ‘제국주의 체제’를 의미했다.

7) 한국역사연구회, 『한국현대사 1』, 풀빛, 1991, 27〜28쪽

8) 정용욱·박진희, 해방 전후 미국 대한정책의 변화와 임정의 대응, 한국역사연구회 37, 2000.9., 200〜201쪽

9) 정용욱,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14〜15쪽

10) 정용욱·박진희, 해방 전후 미국 대한정책의 변화와 임정의 대응, 201〜202쪽

11) 이삼성,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한길사, 2018, 806〜807쪽

12) 이삼성, 위의 책, 807쪽

13) 이삼성은 분단체제를 한반도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질서 전반을 개념화하기 위해 사용했는데, 백낙청 교수가 ‘한반도 분단체제’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감안해, 이와 구분하기 위해 ‘대분단체제’라는 표현을 썼다.(이삼성,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806쪽)

14)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한길사, 2009, 505〜506쪽

15) 오수열·김광수·류영구, 종전 후 중국 대륙 형세와 미국의 전후 아시아 구상에 관한 연구, 『한국동북아논총』 81호, 2016년 12월, 38〜39쪽

16) 신복룡, 군정기 미국의 대한반도 점령정책: 1945-1948,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0권 2호(2009), 8〜12쪽

17) 정용욱,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 20〜21쪽

18) 정용욱, 위의 논문, 21〜23쪽

19) 정용욱, 위의 논문, 23쪽

20) 정용욱·박진희, 해방 전후 미국 대한정책의 변화와 임정의 대응, 202〜203쪽

21) 정용욱,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 23쪽

22) 정용욱, 위의 논문, 24쪽

23) 정용욱·박진희, 해방 전후 미국 대한정책의 변화와 임정의 대응, 202〜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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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세입자 권리금 빼앗은 건물주에 '철퇴' 내렸다

재판부 "건물주는 세입자의 권리 회수 기회 보장해야" 판결

이때 세입자들 사이에서 거래되던 권리금이 사라진다. 일부 건물주들은 이를 악용한다. 리모델링한다고 기존 세입자와 계약 해지를 한 뒤 새 세입자와 계약하면서 자신이 권리금을 받거나, '무권리 점포'로 임대료를 높게 책정해 계약한다.

 

'리모델링'하겠다고 나가라던 건물주...권리금 회수 기회도 빼앗아

 

서울시의 한 대학가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황상민(가명) 씨도 그런 경우였다. 임대차 계약 기간이 끝나고 당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보장하던 5년의 계약갱신요구권도 사라졌을 때, 건물주는 리모델링을 이유로 계약 해지를 요구했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은 '권리회수기회'를 보장한다. 즉, 세입자가 다음 세입자를 구해 권리금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황 씨도 리모델링 이후 들어오겠다는 세입자를 구했다. 새 세입자가 건물주와 계약을 하면 새 세입자로부터 권리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건물주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황 씨의 일상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명도소송에서 승소한 건물주는 3차례의 강제집행을 시도했고 지난해 12월, 불법 강제집행으로 황 씨는 가게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지난 8일, 2심은 원심을 엎고 황 씨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등법원 제33민사부(재판장 정재오)는 "황 씨가 새 세입자를 주선했음에도 건물주가 이를 거절해 황 씨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했다"며 건물주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 1심 선고가 나기 불과 며칠 전, 대법원에서는 "계약갱신요구권 소멸 여부와 관계없이 건물주는 세입자의 권리회수기회를 보장 해야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1심은 이를 반영하지 않고 "리모델링으로 인한 계약해지는 정당하다"며 건물주의 손을 들어줬었다. 그러나 2심은 앞선 대법원의 판결을 따랐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건물에 붙어 있는 점포 임대 안내문 모습. 기사와 상관없다. ⓒ연합뉴스

재판부, "리모델링해야 할 이유 없다"


 

2심 재판부는 건물주가 계약 해지의 이유로 든 리모델링에 대해서도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로 우선 "건물주가 대수선 또는 리모델링해야 할 정도로 상가건물이 노후·훼손 또는 일부 멸실되는 등 안전사고의 우려가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했다.


 

해당 건물은 지난 2016년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다. 건물주도 리모델링의 이유로 이 화재 사고를 들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화재 사고가 상가건물의 전기시설 노후화로 말미암아 발생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전기시설을 소홀하게 다루어서 발생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상가건물의 대부분을 철거하거나 재건축을 해야 비로소 예방할 수 있는 정도의 안전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건물주의 뜻에 따라 리모델링한다고 하더라도 "건물을 대수선 또는 리모델링한다는 사정이 곧바로 '건물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철거하거나 재건축하기 위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즉, 리모델링한다 하더라도 기존 세입자와의 계약을 해지해야만 한 건 아니라는 판단이다.


 

엉터리 견적서에 실체 없는 회사...'가짜 리모델링'


 

재판부는 나아가 건물주가 주장한 리모델링이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리모델링을 이유로 세입자를 내쫓은 뒤 실제로 리모델링을 하지 않는 경우는 허다하다.


 

재판부는 "건물주가 황 씨에게 계약 해지를 요구하면서 공사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기간 등을 알려주지 않았다"면서 "더욱이 공사 명세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짚었다.


 

특히 리모델링 공사를 맡은 회사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견적서를 작성한 회사와 실제 존재하는 회사의 이름이 다르다"며 "실제 회사는 상업등기부로 확인할 수도 없을뿐더러 인테리어 회사로 보일 뿐, 상가건물을 철거하고 대수선 공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회사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이유로 기존 세입자들과 계약을 해지하는 중에 새로운 세입자를 받았다는 점도 들었다. 재판부는 "건물주는 황 씨에게 가게 인도를 요구하면서 해당 건물 지하에 스포츠 마사지 점포를 임대하고 건물 1층에 친누나의 약국 개업을 허용했다"며 "상가건물이 안전사고의 우려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원고의 실질적 경영자의 친누나에게 임대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짚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건물주에게 "황 씨에게 임대차 종료 당시의 권리금 감정가 1억9822만9000원과 이 돈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세입자 "묵묵히 일을 열심히 했을 뿐"


 

황 씨는 판결에 대해 "법원이 제 권리를 모두 인정해줘서 다행"이라면서도 "2015년 건물주가 바뀌고 2017년에 소송, 2019년에 강제집행까지 마음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했다. 10년 동안 그 자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쌓은 게 모두 날아갔다"고 복잡한 심경을 전했다.


 

그러면서 "저 같은 세입자들은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했다는 것밖에 없다"며 "이 판결로 법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세입자들의 손을 잡아준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쌔미 민생문제활동가(황상민 씨 대리인)는 "거짓 재건축, 거짓 리모델링을 이유로 세입자와 계약을 해지하고 권리회수기회를 빼앗은 건물주들이 많다"며 "이번 판결이 그런 사례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1120090160030#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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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 눈이 빨개 흉측했다" 1800명 죽어나간 '해골광산'

기자 강창덕과 최승호의 경산 코발트광산 진실규명 투쟁기

20.09.12 20:44l최종 업데이트 20.09.12 20:4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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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950년 한국전쟁 발발직후 35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돼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산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이 갱도를 따라 50여미터를 걸어가면 아직도 수십구의 유골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9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서는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올해에도 7월 첫째 주 일요일 이곳에서는 위령제가 열리게 된다. [사진1]-1950년 한국전쟁 발발직후 35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돼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산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이 갱도를 따라 50여미터를 걸어가면 아직도 수십구의 유골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9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서는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올해에도 7월 첫째 주 일요일 이곳에서는 위령제가 열리게 된다.
▲  한국전쟁 직후 민간인들이 대량 불법학살된 경북 경산시의 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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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8일. 날씨는 화창했다. 굴 앞에 마련된 제사상에는 갖은 음식이 놓였고, 주변에는 여러 기관에서 보낸 조화가 줄지어 있었다.

이태준 경산코발트광산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의 초헌과 송기인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의 추모사로 이어진 '제8회 한국전쟁전후 경산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는 엄숙함 그 자체였다. 비좁은 굴 입구에 세워진 천막은 햇빛으로부터 참석자들의 얼굴을 겨우 가렸지만, 그들의 타오르는 가슴을 식힐 수는 없었다.

위령제는 개토제(開土祭)를 겸해서 열린 행사였기에 약식으로 끝났다. 드디어 한국전쟁 때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된 이들의 유해를 국가가 57년 만에 처음으로 발굴하는 날이 온 것이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내빈들과 소복을 입은 이태준 회장이 삽을 뜨자 개토제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지금부터 굴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굴 안에는 물이 흘러 발이 진흙에 빠질 수 있으니 장화로 갈아 신으세요"라는 이상길 경남대 교수의 당부에 일행들은 무릎까지 오는 노랑색 장화로 갈아 신었다. 이상길 교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발굴 책임자였다.

"천장이 낮아 위험합니다. 모두 헬멧을 쓰세요"라는 이 교수의 말과 함께 일행 선두가 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두에는 이상길 교수와 송기인 위원장, 노용석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 담당자, 최승호 경산신문사 사장이 섰고 뒤를 이어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따랐다. 굴 안으로 50m쯤 들어갔을 때였다.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의 학살지 무덤을 발굴했을 때 나온 유골의 모습.
▲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의 학살지 무덤을 발굴했을 때 나온 유골의 모습.
ⓒ 경남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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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주위가 캄캄해 서로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한숨과 비통의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굴 양쪽 흐르는 물 위에 시커먼 물체가 빼곡하게 보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유해였다.

살은 썩은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두 눈과 코, 치아의 위치가 선명한 두개골이었다. 마치 원혼이 '왜 이제야 찾아왔나?'라고 항의하는 듯했다. 두개골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양쪽 가에는 두개골이 나뒹굴었으며 팔, 다리뼈와 가슴뼈들이 널려 있었다. 비전문가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백여 구의 유해가 굴 안에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굴 안 양쪽 가에는 작은 도랑물이 흘렀다. 굴 깊숙이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와 실내외 기온 차이로 인해 돌에서 흐르는 석간수가 합쳐졌다.

"저 위에 보이는 곳이 수직굴 입구입니다. 수직굴 입구에서 총살해 밑으로 던져 버리면 여기 주변에 떨어집니다. 그렇게 수천 구의 시신이 떨어져 수평굴로 떠밀리게 된 것입니다."
 
산위에서 본 경산코발트 광산의 수직갱도 입구- 이 수직갱도는 100여미터 깊이로 우물처럼 구덩이가 나있고, 당시 학살은 이곳에서 이뤄져 100미터 아래의 수직갱도로 시신을 던져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산위에서 본 경산코발트 광산의 수직갱도 입구- 이 수직갱도는 100여미터 깊이로 우물처럼 구덩이가 나있고, 당시 학살은 이곳에서 이뤄져 100미터 아래의 수직갱도로 시신을 던져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  산위에서 본 경산코발트 광산의 수직갱도 입구.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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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아니 어떤 공포 영화나 소설에도 나오지 않았던 일이 1950년 7월 경북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광산에 펼쳐졌다. 코발트광산에서 나온 수백구 유해는 대체 누구인가? 1950년 7, 8월에 경북 경산·청도·대구·충북 영동군의 보도연맹원들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일부가 이곳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57년 동안 햇볕을 쬐지 못한 유해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말로만 전해지던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사건'이 국가에 의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 연속으로 이 지역에서 유해발굴을 실시, 총 363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강창덕 기자의 취재수첩
 
강창덕 옹이 쓴 경산 코발트 폐광 학살 사건 보도 기사 매일신문 기자로 근무하던 1960년 5월 22일 전국 최초로 경산 코발트 폐광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을 취재해 보도했다.
▲ 강창덕 옹이 쓴 경산 코발트 폐광 학살 사건 보도 기사 매일신문 기자로 근무하던 1960년 5월 22일 전국 최초로 경산 코발트 폐광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을 취재해 보도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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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1일. 아침 일찍 집을 나온 강창덕 대구매일신문 기자는 싱숭생숭했다. 그는 경북 경산시 코발트광산에서 10년 전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고, 그 유해가 광산 주변에 널려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에 나서는 길이었다.
 
"대구서 경산을 지나 자인방면으로 가는 국도에서 우측으로 향하여 약 3킬로 들어가면 일제강점기에 '돈방석'이라고 알려졌던 코발트 광산 터가 있다. 이곳에는 6.25사변 당시 그해(1950년) 여름 8월경 현재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총 가진 사람들에게 총살되어, 그 시체가 광산 곳곳에 널려 있는데, 1,500구에 달하고 있어 '해골광산'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대구매일신문> 1960년 5월 22일자 기사. 원문을 필자가 현대적 표기법에 맞게 일부 고쳤음)
 
이날 경산 코발트광산을 찾은 강창덕 기자는 인근 주민들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외지인의 눈을 피하며 묵묵부답이었다. "광산을 안내해주시오"라는 요청에도 손가락으로 방향만 가르치고는 "혼자 가시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들에서 뛰놀던 아이들만이 뒤쫓아 왔다. 강 기자는 혼자서 굴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연찮게 마을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은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갑자기 평산 1, 2구 주민들을 몰아내고, 포장을 친 트럭이 하루 5대씩 6일에 걸쳐 왔습니다. 매일 총소리가 들렸고, 총을 쏜 군인들의 눈이 빨개, 흉측했습니다"(경산신문사, 『경산코발트광산의 진실』, 2008)

이렇게 대구매일신문에 강창덕 기자의 특종기사가 나가면서 코발트광산 주민들만 알고 있던 역사의 진실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강창덕 기자는 자신이 취재한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규명할지를 놓고 고심했다.

그러던 끝에 그는 뜻 맡는 이들과 함께 실태조사반을 꾸렸다. 이른바 '경산군하 피학살자 실태조사회'가 그것이다. 대구매일신문에 코발트광산 기사가 보도된 지 10일 만인 1960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강창덕은 1읍 10면에 접수창구를 개설했다. <대구매일신문> 1960년 6월 1일자에 피해신고를 받는다는 광고를 대문짝만하게 내보냈고, 전단 1만장을 제작해 마을마다 배포했다. 또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아 "가족 중에 6.25 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까? 피해자의 신청을 받습니다"라는 방송을 목이 쉬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접수된 피해자가 354명이었고, 이 신청서는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경북반에 제출되었다. 피해접수 활동의 공은 유족들에게 넘겨졌다. 강창덕은 유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창덕 대구매일신문 기자(94세)
▲  강창덕 대구매일신문 기자(94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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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960년 6월에 '경산유족회'(회장 김종석)가 결성됐고 8월 7일에는 경산중앙국민학교에서 합동위령제도 치렀다. 위령제에는 경북유족회 이원식을 포함한 임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또 8월 13일에는 코발트 현장을 찾아 유해를 수습했다(물론 2000년도 이후의 유해발굴과는 달리 이때는 현장을 확인하고 수습하는 정도였다).

유족들의 진실규명운동이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8월 7일 경산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위령제에는 경산경찰서 1개 소대의 경찰들이 동원되었다. 경비를 선다는 명분이었지만 주최 측 항의를 받은 경찰들은 학교 뒤편으로 물러갔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흥분한 남천면 유족들이 경산경찰서에서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발굴보고서 3권 』, 2008).

또 위령제가 열리기 두 달 전인 1960년 6월 6일 저녁에는 당시 경산군 안심면 유족 30여 명이 전쟁 기간에 불법학살을 저지른 전 민보단 부단장 김만석의 집을 습격해 가재도구 20여 만환 어치를 파괴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유족 5명이 재물손괴죄로 구속되었다. (<대구매일신문> 1960년 6월 8일자. 노용석,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사』, 2018 산지니에서 재인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쿵 쿵 쿵."
 

굴삭기 기사는 경산 코발트광산 수평굴 입구 콘크리트 벽을 뚫기 위해 초봄의 날씨에도 비지땀을 흘렸다. 그리고 갱도 입구를 막고 있는 흙더미를 걷어내는 데는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후부터였다. 굴삭기를 포함한 중장비를 총동원했지만 단단한 콘크리트 벽은 철옹성이었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는 주민이 귀띔을 해주었다. "그 콘크리트 벽은 벼농사를 짓기 위해 주민들이 1m 이상 막아 놓았기 때문에 중장비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은 급하게 화약 전문가를 수소문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벽을 폭파시켰다. 반세기 만에 금단의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1960년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이 세상에 알려진 지 40년도 지난 2001년 3월 9일의 일이었다. 

수평 갱도를 따라 30여 미터를 가자 유골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3일간 작업해 유해 40구를 수습할 수 있었고, 이는 MBC에 의해 전국으로 전파를 탔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이 경산유족회와 시민단체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유족들이 제기하는 3500구의 유골이 과연 존재하는지 발굴을 해보자는 제안이 성과를 이룬 것이다.

이 보도로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은 전국 언론과 시민사회로부터 조명을 받았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경산지역 시민단체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특히 <경산신문> 최승호 기자의 노력이 컸다.

최승호 기자는 1960년 4.19 혁명 직후 활동한 <대구매일신문> 강창덕 기자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강창덕 기자가 최초로 경산 코발트광산 문제를 공론화했지만, 1년 후 발발한 5.16 쿠데타로 코발트광산 사건은 오랫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1993년 코발트광산 사건을 접한 최승호 기자가 그해 8월에 <경산신문>의 전신인 <경산향토신문>에 학살의 진실을 알렸다. 그 후로 경산지역사연구회가 만들어졌고, 1995년 4월 2일에는 코발트광산 앞에서 최초의 진혼제가 열렸다. '경산시민모임'은 전국의 유족회·시민단체와 함께 '통합특별법' 제정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2005년 5월 30일 국회에서 '과거사법'이 통과되었다.

2020년 현재에도 <경산신문> 사장을 맡고 있는 최승호 기자는 처음 코발트광산 사건을 접한 때로부터 만 27년째 이 사건에 매달리고 있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탐방객들을 안내하고, 코발트광산 사건을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해 '역사의 기억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유족회는 전 이태준·박의원 회장과 현 나정태 회장이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 진실규명과 기억화 사업에 주력해왔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정부는 2009년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희생 사건'을 진실규명 했고, 사건 현장에는 자그마한 위령공간이 경상북도와 경산시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곳 코발트광산에서 죽은 이는 누구이고, 어떻게 죽었는가?

'고바루도' 광산에서 학살되었소
 
 제4대 국회에 제출한 윤목의 피해신고서
▲  제4대 국회에 제출한 윤목의 피해신고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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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윤목의(1925년생. 경산군 고산면(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산3동) 신매리)가 1950년(이하 불명) 경산경찰서에 연행 후 불명되었사오나 그 후 소식에 고바루도 광산에서 피살된 줄 알았음'

1960년 6월 4일 윤목의 형 윤현우가 제4대국회 양민학살특위 경북반에 제출한 '피해자 신고서'다. 여기서 말하는 고바루도 광산은 코발트 광산을 말한다.

윤목의를 포함한 경산군(현재의 경산시) 보도연맹원들은 경산경찰서를 거쳐 경산수리조합 창고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살생부(殺生簿)가 작성되었다. 경산경찰서 사찰과와 CIC 경산파견대는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을 갑·을·병 등급으로 분류해, 병은 석방하고, 갑·을 등급은 코발트 광산으로 이송해 학살했다.

당시 예비검속 된 후 병 등급을 받아 풀려난 김○○의 증언이다.

"1950년 모내기가 끝나갈 무렵 경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사찰계 형사와 육군 중위로부터 봉화불을 놓는 데 동원된 사실이 있는지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갑과 을로 분류된 사람은 경산코발트 광산에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학살 정황은 당시 코발트광산 인근 마을인 압량면 갑제동에 살았던 문○○이 증언했다.

"전쟁이 나고 7월 20일이 지났을 무렵 (트럭) 덮개를 씌우고 군인들이 올라탄 트럭들이 경산코발트광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광산으로 올라간 차들은 수직 굴 밑에 삼베 및 모시옷 등을 입고 실려 온 사람들을 하차시켰으며 약 10명씩을 수직굴로 데려가 총살을 시켰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경북 청도와 대구지역 보도연맹원들도 마찬가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형무소 재소자 약 800명과 경북 경산·청도·대구·충북 영동군 보도연맹원 약 1000명, 총 1800명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경산유족회와 경산지역 시민사회단체는 인근지역 주민들과 생존자의 증언을 종합해 35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추정한다.

최소 1800명에서 최대 3500명이 학살된 코발트광산 사건은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정확한 피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과 더불어 아직도 차가운 광산 안에 묻혀 있는 유해들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음습한 굴 안에 갇혀 있는 원혼들이 "유골이 아닌 진실을 발굴해 주이소"라고 외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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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COVID-19 총 사망자 및 감염자 수(모든 국가 사례)

인도는 오늘도 감염자와 사마자 발생에서 모두 1위를 차지

이용섭 기자 | 기사입력 2020/09/12 [11:39]
 

현재까지 COVID-19 총 사망자 및 감염자 수(모든 국가 사례)

 

▲ 세계척도《(Worldometer)》에 의하면 9월 12일 8시 00분 현재 전 세계적으로 COVID-19전염병에 감염된 사람들의 누적 총계는 28,637,593명으로 어제보다 300,298명이 증가하였으며, 사망자는 918,892명으로서 어제 하루 5,602명 증가하였     ©이용섭 기자

 

세계척도(Worldometer)에 의하면 9월 12일 8시 00분 현재 전 세계적으로 COVID-19전염병에 감염된 사람들의 누적 총계는 28,637,593명으로 어제보다 300,298명이 증가하였으며사망자는 918,892명으로서 어제 하루 5,602명 증가하였다. 20,560,145명이 회복되었다.

 

어제 자료상 감염자 발생은 어제 하루 감염자 발생은 그제 발생 수치보다 1,982명 추가로 더 늘어났다반면 사망자 발생은 오늘 자료상으로 어제 하루 188명이 추가로 더 줄어들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이 9월 12일 오전 8시 32분에 올린 자료에는 전 세계적으로 COVID-19 전염병에 감염이 된 사람들의 누적 총계가 28,316,230명이며 어제 하루 321,542명의 감염자 발생하였다사망자의 누적 총계는 912,212명으로 어제 하루 6,0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오늘 통계자료 상 감염자 발생자는 어제 통계자료보다 25,966명 추가로 늘어났으며사망자 발생은 25명 추가로 늘어났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의 우리 시간 9월 12일 오전 3시 08분 기준으로 올라온 자료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누적 감염자 총수는 28,040,853명으로 어제 하루 288,787명 감염자가 발생하였다사망자의 누적 총수는 906,092명으로 어제 하루 6,176명의 사망자 발생하였다.

 

감염 발생자는 어제 자료보다 38,784명 추가로 늘어났다사망자 발생자는 어제 통계자료보다. 1,198명 추가로 늘어났다.

 

세 자료를 보면 오늘 자료상으로도 누적 감염자 수에서는 여전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세계척도는 28,637,593존스 홉킨스대학 28,316,230세계보건기구 28,040,853명으로서 가장 많은 세계척도와 세계보건기구와는 무려 596,740명이나 세계척도가 많다반면 세계척도와 존스 홉킨스 대학 간에는 321,363명 세계척도가 많다존스 홉킨스대학과 세계보건기구 간에도 275,377명 존스 홉킨스대학이 많다.

 

세 자료의 어제 감염자 발생에서는 세계척도 300,298명 증가존스 홉킨스대학 321,542세계보건기구 288,787명으로서 세계척도와 존스 홉킨스대학 사이에는 21,243명 존스 홉킨스대학이 많으며세계척도와 세계보건기구 간에는 11,511명 세계척도가 많다존스 홉킨스대학과 세계보건기구 간에는 32,755명으로 존스 홉킨스대학이 많다.

 

세 자료의 사망자 누적 총계에서는 세계척도 918,892존스 홉킨스대학 912,212세계보건기구 906,092명이다세계척도와 존스 홉킨스대학 간에는 6,680명 세계척도가 많고세계척도와 세계보건기구 간에는 12,800명 세계척도가 많다존스 홉킨스 대학과 세계보건기구 간에는 6,120명 존스 홉킨스 대학이 많다.

 

어제 하루 사망자 발생에서는 세계척도 5,602존스 홉킨스대학 6,017세계보건기구 6,176명으로 세계척도와 존스 홉킨스대학 간에는 415명 존스 홉킨스대학이 많으며세계척도와 세계보건기구 간에는 574명 세계보건기구가 많다반면 세계보건기구와 존스 홉킨스 대학 간에는 159명 세계보건기구가 많다.

 

세 자료에 의하면 어제 자료상의 수치보다 오늘 자료상으로 보면 어제에 이어 세계적으로 COVID-19 전염병에 감염된 감염자나 사망자 발생이 모두 약간 증가하였다.

 

COVID-19전염병에 감염된 나라들의 수에서도 존스 홉킨스대학은 188개국이지만 Worldometer의 자료상에는 215개국세계보건기구 216개국으로서 세 자료 사이에는 27, 28개국이라는 차이가 난다.

 

같은 자료상 미국의 COVID-19 전염병 감염자 및 사망자 누적 총계를 보면 존스 홉킨스 대학의 우리 시간 9월 12일 오전 8시 32분 자료상으로는 감염자는 6,440,541명이며어제 하루 44,938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였다사망자는 오늘 자료상 192,886명이며, 1,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미국 역시 어제 하루도 COVID-19 전염병 감염자 및 사망자 발생이 그제와 비교해 약간 늘어났다.

 

반면 Worldometer의 9월 12일 오전 8시 00분 현재 자료상으로 미국의 감염자 누적 총계는 6,634,306명으로서 어제 하루 44,659명 감염자가 발생하였고사망자 누적 총계는 197,361명으로 어제 하루 1,03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세계척도의 통계상으로는 어제 하루 미국의 COVID-19 전염병 감염자 및 사망자 발생자에서 감염자는 8,309명 추가로 늘어났으며사망자 발생은 127명 추가로 늘어났다.

 

본인이 판단하기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이나 세계보건기구의 통계자료보다 COVID-19를 전문으로 분석하고 또 통계자료를 수집하는 Worldometer의 자료가 더 최신이며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Worldometer는 아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때그때 감염자 및 사망자의 증가자 수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Worldometer의 자료에는 그 외에도 각 나라별로 회복자 총수활성화 사례경증중증총 검사 수각 나라별 인구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다만 본 기사에서는 그 많은 것들을 분석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탓에 국가별누적 총 감염자감염 증가자누적 총 사망자사망 증가자 등 4부분에 대해서만 분석을 한다.

 

우리 시간 9월 12일 오전 8시 00분 기준 Worldometer의 자료상으로 한국은 감염자가 총 21,919명으로서 어제보다 176명 증가하였으며사망자는 350명으로 어제 하루 사망자가 4명 발생하였다오늘 한국의 총 감염자 순위는 76위로 어제와 같다.

 

같은 시간 중국은 총 감염자가 총 85,168명으로서 어제보다 15명 증가하였으며사망자는 4,634명으로서 역시 변함이 없다중국은 감염자 순위에서 39위로 변함이 없다.

 

예멘은 우리 시간 9월 12일 오전 8시 00분 기준으로 감염자가 총 2,007명으로 어제 하루 감염자가 4명이 발생하였으며사망자는 582명으로 어제 하루 사망자가 2명 발생하였다사망률은 29.00%이다예멘의 이와 같은 사망률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미국과 사우디 연합국들의 끔찍한 예멘 침략에 의해 5년 7개월여간 진행되고 있는 전쟁으로 의료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도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정이 이러함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은 여전히 예멘 후티군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자비하게 폭격과 포격 그리고 해상과 공중 등을 봉쇄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건데 9월 12일 현재까지도 COVID-19 전염병의 확산은 중남미와 아시아 일부 나라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급격하게 진행하고 있다.

 

각 대륙별 COVID-19 전염병에 감염자 총수에서 20위 권까지 포진해 있는 숫자는 미국 및 유럽 대륙이 6개국아시아가 7개국중남미가 6개국아프리카 1개국으로서 오늘 자료상 이라크가 유럽의 독일을 제치고 20위로 올라서서 아시아가 7개국유럽 및 북미주 국가가 6개국이 되었다.

 

 

 

COVID-19 전염병 감염국 상위 20개국의 대륙별 분포도

 

북미 및 유럽

6

아시아

7

중남미

6

아프리카

1

 

▲ COVID-19 전염병 감염 상위 20개국 대륙별 분포그래프     ©이용섭 기자

 

 

위 그래프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COVID-19 전염병 감염 상위 20위권 내에 유럽 및 북미줒 6개국아시아 7개국중남미는 6개국아프리카 1개국으로서 감염자 상위 20개국의 각 대륙별로 들어있는 수치는 변함이 없다유럽과 북미주의 나라들은 미국러시아스페인을 제외하고 영국이탈리아프랑스 등이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중남미 나라들이 10위권 내에 6개국이나 들어가 있다반면 아시아 나라들은 10위권 내에 인도 한 나라만 위치하고 있다아프리카 역시 남아프리카 한 나라만 10위권 내에 들어가 있다.

 

이로 보아 현재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는 중남미계에서 가장 확장이 된 상황이다아시아(중동)의 이라크는 어제까지만 해도 20위권 밖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 감염자가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오늘 자료상으로 20위에 올라 있다.

 

 

COVID-19 전염병 사망자 상위 20개국의 대륙별 분포도

북미 및 유럽

9

아시아

4

중남미

6

아프리카

1

 

 

▲ COVID-19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상위 20개국의 대륙별 분포 그래프     ©이용섭 기자

 

 위 그래프를 통해 알 수 있듯이감염자 상위 20위 권 내에 유럽 및 북미주의 나라들이 8개국이었으나 사망자에서는 9개국이나 된다.

 

중남미는 감염자와 사망자 모두 20위권 내에 누적 감염자 6개국누적사망자 7개국이 들어있다이러한 통계자료를 보아 현재 중남미가 세계에서 COVID-19 전염병사태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아시아 나라들은 감염자 및 사망자 상위 20개국 내에 각각 7개국 및 3개국이 들어있다이러한 수치는 아시아 나라들이 비록 감염자 발생이 높다해도 사망자 발생을 다른 대륙들에 비해 대단히 저조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유럽 나라들은 감염자 상위 20개국 내에 6개국사망자 상위 20개국 내에 9개 나라가 들어있다이는 아시아와는 반대로 유럽 나라들은 사망자 발생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이 말은 백인계가 아시아계보다 세균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COVID-19 전염병에 백인계 나라들이 특히 약하며중남미계 인민들 역시 COVID-19 전염병에 약하다고 볼 수가 있다반면 아시아 나라들의 인민들은 COVID-19 전염병에 타 대륙의 인민들에 비해 강하다고 분석할 수가 있다아프리카계는 아직 분석하기에는 감염자 순위가 20위권 내에 들어온 나라가 남아프리카 한 개국밖에 없기에 자료가 부족하다.

 

 

 

3.상위 20개국의 감염자 총수

 

순위

국가

총 감염자

감염 증가

증가 순위

1

미국

6,634,306

44,659

2

2

인도

4,657,379

97,654

1

3

브라질

4,283,978

44,215

3

4

러시아

1,051,874

5,504

7

5

뻬루

710,067

0

20

6

꼴롬비아

702,088

7,424

6

7

메히꼬

652,364

4,857

8

8

남아프리카

646,398

1,960

13

9

스페인

576,697

4,708

9

10

아르헨띠나

535,705

11,507

4

11

칠레

430,535

1,860

14

12

이란

397,801

2,313

12

13

프랑스

363,350

9,406

5

14

영국

361,677

3,539

11

15

방글라데시

334,762

1,792

15

16

사우디아라비아

324,407

687

18

17

파키스딴

300,371

516

19

18

뛰르끼예

288,126

1,671

16

19

이탈리아

284,796

1,616

17

20

이라크

282,672

4,254

10

합계

23,819,353

250,142

 

 

COVID-19 감염자 상위 20개국에 대해서 동시에 분석하고 있다그래야만 유럽국가들은 안정세에 들어서고반면 중남미아시아 일부 나라 그리고 아프리카 나라들이 COVID-19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으며그 심각성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는 오늘 자료상으로 어제보다 894명 늘어난 97,654명의 감염자 발생1위를 차지하였다인도는 근 한 달 반 이상 감염자가 6만 명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인도는 10여 일째 8만 명 이상의 감염자를 내었다.

 

미국 역시 오늘 자료상으로 어제보다 대폭 늘어난 44,659명의감염자가 발생하여 발생자 순위에서는 2위를 차지하였다.

 

브라질은 오늘 자료상으로 44,215명의 감염자를 내어 감염자발생자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하였다최근 브라질이 하루 감염자가 1만 명대 초중반을 기록하다가 어제 오늘 또 다시 4만 명대로 솟아올랐다.

 

아르헨띠나는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11,507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여 감염 발생자 4위를 차지하였다최근 들어서 아르헨띠나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와 그로 인한 사망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아르헨띠나가 감염자 발생에서 최근 감염자 발생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유럽의 프랑스는 오늘 자료상 어제보다 약간 줄어든 9,406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여 감염자 발생에서 5위를 차지하였다또 프랑스는 누적 감염자 수에서 13위로 뛰어올랐다.

 

꼴롬비아 역시 오늘 자료상 어제와 비슷한 7,424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여 프랑스에 이어 6위를 차지하였다최근 근 한 달 반 동안에 있어 꼴롬비아는 감염자 수에서 한 4, 5위를 차지하고 있다가 최근 며칠 동안 5~7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메히꼬는 오늘 자료상 4,857명의 감염자를 내어 감염자 발생 8위를 차지하였다스페인은 오늘 어제보다 무려 6,056명이나 줄어든 4,708명의 감염자를 내어 감염자 발생에서 9위를 차지하였다그리고 최근 들어서 감염자가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라크가 4,254명의 감염자를 내 감염자 발생 10위를 차지하였다반면 뻬루는 오늘 자료 수집이 안되어 감염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위 도표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COVID-19 전염병 감염국 상위 10개국이 감염 증가자를 11위권 아래 위치해 있는 나라들보다 전반적으로 많이 내고 있다하지만 오늘은 11위권 아래에 있는 프랑스와 이라크가 10위권 내에 들었다.

 

COVID-19 전염병 감염자 발생에서 순위와는 관계없이 감염자 발생 절대적인 수치에서는 상위 10위권 국가들과는 비교가 안 되게 적다나머지 11위권 아래에 위치해 있는 나라들은 감염 증가자에서 상위 10위권 국가들보다 감염자가 덜 발생하였다.

 

COVID-19 감염자 상위 20개국 가운데 유럽 및 북미주 나라들이 6개국중남미가 6개국 아시아가 7개국 아프리카가 남아프리카 1개국이다이는 그간 본지에서 끊임없이 강조해온 바이지만 현재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 감염확산사태는 중남미와 아시아 일부 나라들에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전과 같이 오늘은 인도미국브라질이 감염자 발생 1, 2, 3위를 차지하였다그동안 감염자가 대폭 늘어났던 유럽 나라들에서 어제에 이어 오늘 자료상으로 어제보다 감염자 발생이 약간 늘어났다.

 

 

그림 3-1. COVID-19 감염자 상위 20개국 그래프

▲ COVID-19 전염병 감염자 누적 총계에서 상위 20개국을 나타낸 그래프  © 이용섭 기자

 

 

그래프의 막대를 보면 미국이 한 부류브라질과 인도가 비슷한 수치로 한 부류그리고 러시아가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으며뻬루꼴롬비아남아프리카까지가 한 부류그리고 스페인 이하 마지막 이라크까지는 감염자 수에서 비슷한 차이를 보이며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

 

위 도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위인 미국과 2위인 인도, 3위인 브라질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인도 역시 누적 감염자 수가 4,657,379명으로서 3위 브라질과 그 차이를 점점 더 벌리고 있다.

 

오늘 자료상 누적 감염자 수치에서 얼마 전까지 20위에 있었던 프랑스가 13위로 뛰어올랐다는 점이다.

 

위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COVID-19 전염병 감염국 상위 3위까지의 국가들과 그 아래 국가들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가 종결되는 순간까지 그 순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 확실하다아니 그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벌어질 것이 99.999%이다.

 

 

그림 3-2. COVID-19 감염 증가자 상위 20개국

 

순위

국가

감염 증가자

감염자 순위

1

인도

97,654

1

2

미국

44,659

1

3

브라질

44,215

3

4

아르헨띠나

11,507

10

5

프랑스

9,406

13

6

꼴롬비아

7,424

6

7

러시아

5,504

4

8

메히꼬

4,857

7

9

스페인

4,708

9

10

이라크

4,254

20

11

영국

3,539

14

12

이란

2,313

12

13

남아프리카

1,960

8

14

칠레

1,860

11

15

방글라데시

1,792

15

16

뛰르끼예

1,671

18

17

이탈리아

1,616

19

18

사우디아라비아

687

16

19

파키스딴

516

17

20

뻬루

0

5

합계

250,142

 

 

위 도표를 보면 COVID-19 전염병 감염국 상위 20위권까지의 나라들 가운데 인도가 97,654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여 오늘도 1위를 차지하였으며, 2위 미국은 44,659, 3브라질은 44,215의 감염자가 발생하였다세 나라의 어제 하루 감염자 발생은 그제에 비해 약간씩 늘어났다.

 

유럽 나라들의 어제 하루 감염자 발생 수치를 보면 프랑스가9,406명의 감염자를 내어 감염자 발생에서 5위를 차지하였다스페인인 4,708영국이 어제보다 대폭 늘어난 3,539명의 감염자를 발생시켰다.이탈리아는 1,616명의감염자가 발생하였다.

 

유럽 나라들은 스페인은 어제보다는 대폭 줄어든 감염자가 발생하였다최근 들어 유럽 나라들의 감염자 발생 수치는 한달 전과 비교하여 엄청나게 증가한 수치이다세계 많은 분석가들은 이를 두고 유럽에서 제2차 감염사태가 발생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유럽 나라들이 비록 다른 중남미나 아시아 일부 나라들에 비해 감염자 증가에서 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최근 들어서 프랑스스페인영국이탈리아 등이 꾸준히 천 명대 후반에서 9천 명대 후반의 감염자가 발생하다가 오늘 스페인과 프랑스가 1만 명, 9천 명대 중후반의 감염자를 발생시켰다이로 보아 유럽 나라들에서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가 완전하게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유럽의 나라들이 오늘은 감염자가 대폭 늘어나는 상황을 봐서 유럽 역시 감염자 발생이 널뛰기하는 상황이기에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그림 3-3. COVID-19 감염 상위 20개국의 증가자 그래프

 

▲ COVID-19 전염병 감염자 상위 20개 국의 감염자 증가수치를 나나낸 그래프  © 이용섭 기자

 

 

위 그래프를 보면 COVID-19 전염병 감염자 증가자 수에서 1위를 차지한 인도가 한 홀로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고, 2위를 차지한 미국과 3위를 차지한 브라질이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고아르헨띠나 이하 꼴롬비아까지가 비슷한 차이를 보이면서 한 부류러시아부터 영국까지가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으며이란 이하 이탈리아까지가 한 부류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아 파키스딴이 한 부류를감염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은 뻬루가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다.

 

 

4. 현재까지 사망자 상위 20개국 사망자 총수

 

순위

국가

사망자 총수

사망자 증가

증가자 순위

1

미국

197,361

1,034

2

2

브라질

130,474

899

3

3

인도

77,506

1,202

1

4

메히꼬

69,649

554

4

5

영국

41,614

6

16

6

이탈리아

35,597

10

15

7

프랑스

30,893

80

12

8

뻬루

30,344

0

18

9

스페인

29,747

48

14

10

이란

22,913

115

7

11

꼴롬비아

22,518

243

5

12

러시아

18,365

102

9

13

남아프리카

15,378

113

8

14

칠레

11,850

69

13

15

아르헨띠나

11.148

241

6

16

에쿠아도르

10,836

87

11

17

벨기에

9,917

0

18

18

독일

9,423

4

17

19

카나다

9,163

0

18

20

인도네시아

8,544

88

10

합계

782,103.148

4,895

 

 

오늘은 사망자 발생에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인도가 1미국이 2위를 브라질이 3메히꼬가 4위를 차지하였다.

 

인도는 오늘 자료상으로 1,202미국이 1,034브라질이 899, 메히꼬가 55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5위인 꼴롬비아는 243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였다. 241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아르헨띠나가 611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란이 7위를 차지하였으며남아프리카가 113명의 사망자를 내 8위를, 102명의 사망자를 낸 러시아가 사망자 발생 9위를 차지하였다또 88명의 사망자를 낸 인도네시아가 10위를 차지하였다.

 

미국의 사망자 발생을 매일매일 들쭉날쭉 하고 있다그 폭 역시 대단히 크다이는 미국은 여전히 COVID-19 전염병 사태가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미국은 어제와 비슷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감염자와 마찬가지로 사망 자에서도 중남미에서 COVID-19 전염병 사태가 진행되고 있으며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중남미의 20위권 밖에 머물고 있는 나라들 역시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감염자와 사망자 증가가 월등하게 높다.

 

COVID-19 전염병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상위 20개국의 사망자 증가자 수에서 유럽 나라들이 감염자 증가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바닥을 칠 정도로 안정화 되어있다.

 

 

그림 4-1, 현재까지 사망자 상위 20개국을 나타내는 그래프

 

▲ COVID-19 전염병 감염자 상위 20개국의 누적 사망자 수치를 나나낸 그래프  © 이용섭 기자

 

 

*** 아르헨띠나의 사망자 수치는 11,148명으로 자료 입력에는 문제가 없으나 컴퓨터가 작동이 안 되어 막대 그래프가 나타나지 않은 점 독자들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COVID-19 전염병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상위 20위 권까지의 순위를 나타낸 그래프를 보니 미국과 브라질은 아직까지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망자가 많이 났으며 인도가 3위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1, 2위인 미국과 브라질 사이에는 아직도 그 차이가 대단히 크다.

 

반면 순위가 바뀐 인도와 메히꼬가 비슷한 차이를 보이면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고영국과 이탈리아가 한 부류 그리고 프랑스 이하 뻬루까지가 비슷한 차이를 보이면서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또 이란과 꼴롬비아가 한 부류러시아와 남아프리카가 거의 같은 수의 사망자 수치를 보이며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칠레 이하 이라크까지가 비슷한 차이로 마지막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COVID-19 전염병은 수그러든 것이 아니고 앞서 감염이 발발하였던 나라들에서는 2차 감염이새롭게 전염병 감염이 창궐하는 나라들에서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결론적으로 지난해 12월 말 중국 무한(우한)에서 시작된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는 아직까지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창궐하면서 인간 생활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은 COVID-19 전염병 감염 사태로 인해 경제가 1930년대 초 겪었던 경제 대 공항을 뛰어넘는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다또 유럽연합과 그 외의 나라들 역시 경제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다영국은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로 인해 2020년 전반기 경제가 무려 20%나 추락하였다경제에서 이 정도의 성장률이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이는 거의 경제 붕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성장률 하락이라고 보아야 한다또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로 인해 미국의 달러 패권이 붕괴 직전에 있다고 전 세계 경제 및 정세 분석가들이 한결같이 전망하고 있다.

 

8월 9일 자 러시아의 스뿌뜨니끄 기사를 보면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무역 거래에서 달러로 결재하는 비중이 46% 아래로 떨어져 달러가 두 나라 사이에서 붕괴가 되고 두 나라 사이에 새로운 금융협력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 러시아의 러시아 텔레비전(RT)의 기사를 보면 농담반 진담반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사태로 인해 미국에서 조차 사회주의적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고 전문가가 분석하였다전문가는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로 인해 미국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심지어 인간 통제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적 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며이는 미래의 세계가 사회주의로 향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이처럼 현재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는 지금까지 유지되어오던 전 세계의 패권 방향을 바꿀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COVID-19 전염병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10위까지의 나라들 대륙별 분포는 감염자와는 달리 아직까지 유럽 나라들이 5개국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반면 중남미는 3개국아시아 2개국이다.

 

 

그림 4-2, 현재까지 사망자 상위 20개국 증가자

 

순위

국가

사망자 증가

총 사망자 순위

1

인도

1,202

3

2

미국

1,034

1

3

브라질

899

2

4

메히꼬

554

4

5

꼴롬비아

243

11

6

아르헨띠나

241

15

7

이란

115

10

8

남아프리카

113

13

9

러시아

102

12

10

인도네시아

88

20

11

에쿠아도르

87

16

12

프랑스

80

7

13

칠레

69

14

14

스페인

48

9

15

이탈리아

10

6

16

영국

6

5

17

독일

4

18

18

뻬루

0

8

18

벨기에

0

17

18

카나다

0

19

합계

4,895

 

 

 

사망자 증가자 수에 있어서 비록 하위권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유럽과 북미 등 백인계 국가들이 9개국으로 여전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중남미 7개국 아시아는 3개국아프리카 1개국이 사망자 20위권 내에 있다반면 증가자 절대적 수에서는 인도미국브라질메히꼬가 1, 2, 3, 4위를 차지하였다.

 

사망자에서도 COVID-19 전염병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율에서도 중남미와 아시아 일부 나라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이는 중남미와 아시아 나라들에서 COVID-19 전염병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격하게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반면 유럽 나라들은 사망자 발생에서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어제 하루 COVID-19 전염병 감염으로 인한 전 세계의 사망 발생자가 어제는 약간 줄어들었으며누적사망자 상위 20위 권 나라들에서도 약간 줄어들었다.

 

 

그림 4-3, 현재까지 사망자 상위 10개국의 사망자 증가 그래프

 

▲ COVID-19 전염병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상위 20개국의 어제 하루 사망자 발생 수치를 나타낸 그래프   © 이용섭 기자

 

 

COVID-19 전염병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자 상위 20위까지를 나타낸 그래프를 보면 누적 감염자 상하위 순서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그야말로 천양지 차이를 보이고 있다위 그래프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래프의 막대가 높이 솟아있는 나라들인 인도가 한 부류미국브라질이 각각 한 부류씩을 그리고 메히꼬가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이 네 나라의 사망자 발생 수치는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그래프가 치솟아있다.

 

또 꼴롬비아와 아르헨띠나가 거의 같은 수치로 한 부류이란 이하 러시아까지가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고인도네시아 이하 칠레까지가 한 부류그리고 스페인이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이탈리아 이하 카나다까지가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

 

사망자 발생 상위 10개국 가운데 중남미와 아시아 나라들이 7개국을 차지하고 있다이는 본지에서 그동안 지속적으로 강조해오고 있는 바와 같이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는 아시아와 중남미 나라들에서 감염 및 사망자 발생에서 유럽과 북미주 나라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반면 유럽 나라들은 거의 모두가 바닥에 접근하고 있다어제 유럽과 북미 나라들의 사망자 발생 건수를 보면 프랑스가 80명으로 어제보다 대폭 증가하였고스페인이 48이탈리아 10영국 6독일 4벨기와 카나다는 사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유럽 나라들의 사망자 발생 수치는 어제보다 약간 줄어들었다하지만 이정도 감소는 통계학상으로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본다유럽 나라들의 사망자 발생 수치를 보면 총체적으로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이는 감염자가 또 다시 폭증하는 것과는 정 반대 현상이다.

 

사망자 증가의 차이가 이 정도로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은 유럽 나라들은 감염 증가자에서도 거의 하위권에 머물러 있듯이 사망 자에서도 역시 바닥을 치고 있는데 이는 유럽 나라들이 이제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가 중남미와 아시아 일부 나라들에 비해 안정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망자에 비해 비록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고는 하지만 최근 들어서 유럽 나라들의 감염자 발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이는 여전히 유럽 나라들 역시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의 한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반면 중남미 및 아시아 일부 나라들에서는 COVID-19 전염병 감염자 증가에서도 유럽 나라들을 훨씬 뛰어넘어 엄청난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듯이 사망자에서도 역시 감염자 증가에서와 마찬가지의 추이를 보이고 있다이는 이들 나라들에서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유럽 나라들에서 하루 사망자 증가자가 한 자리 수에 머물러 있는 나라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감염자가 꾸준히 프랑스 스페인과 같이 8천 명대 중반에서 1만 명대 초반가지 발생하는 걸 봐서는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는 여전히 전 세계적 차원에서는 창궐 중이다. COVID-19 전염병 감염사태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월드오메터의 COVID-19전염병 감염 및 사망자 통계자료-----

 

순위

국가

총 감염자 수

감염 증가자

총 사망자

사망자 증가

 

세계

28,637,593

300,298

918,892

5,602

 

 

 

1

미국

6,634,306

+44,659

197,361

+1,034

2

인도

4,657,379

+97,654

77,506

+1,202

3

브라질

4,283,978

+44,215

130,474

+899

4

러시아

1,051,874

+5,504

18,365

+102

5

페루

710,067

 

30,344

 

6

콜롬비아

702,088

+7,424

22,518

+243

7

멕시코

652,364

+4,857

69,649

+554

8

남아프리카

646,398

+1,960

15,378

+113

9

스페인

576,697

+4,708

29,747

+48

10

아르헨티나

535,705

+11,507

11,148

+241

11

칠레

430,535

+1,860

11,850

+69

12

이란

397,801

+2,313

22,913

+115

13

프랑스

363,350

+9,406

30,893

+80

14

영국

361,677

+3,539

41,614

+6

15

방글라데시

334,762

+1,792

4,668

+34

16

사우디 아라비아

324,407

+687

4,213

+24

17

파키스탄

300,371

+516

6,370

+5

18

터키

288,126

+1,671

6,951

+56

19

이탈리아

284,796

+1,616

35,597

+10

20

이라크

282,672

+4,254

7,881

+67

21

독일

259,725

+1,618

9,423

+4

22

필리핀 제도

252,964

+4,040

4,108

+42

23

인도네시아

210,940

+3,737

8,544

+88

24

우크라이나

148,756

+3,144

3,076

+53

25

이스라엘

148,564

+3,038

1,090

+13

26

캐나다

135,626

+702

9,163

 

27

볼리비아

124,205

+860

7,193

+47

28

카타르

121,287

+235

205

 

29

에콰도르

114,732

+1,526

10,836

+87

30

카자흐스탄

106,661

+77

1,634

 

31

도미니카 공화국

102,232

+516

1,941

+15

32

루마니아

101,075

+1,391

4,100

+35

33

이집트

100,708

+151

5,607

+17

34

파나마

100,330

+615

2,140

+13

35

쿠웨이트

93,475

+653

557

+1

36

벨기에

90,568

+877

9,917

 

37

오만

88,337

 

762

 

38

스웨덴

86,505

 

5,846

+4

39

중국

85,168

+15

4,634

 

40

모로코

82,197

+2,430

1,524

+33

41

과테말라

81,009

+703

2,929

+11

42

네덜란드

79,781

+1,270

6,252

+3

43

UAE

77,842

+931

398

 

44

일본

73,901

+680

1,412

+6

45

벨라루스

73,784

+193

738

+6

46

폴란드

73,047

+594

2,169

+10

47

온두라스

65,802

+205

2,049

+5

48

에티오피아

63,367

+789

986

+12

49

포르투갈

62,813

+687

1,855

+3

50

바레인

58,839

+632

208

+1

51

베네수엘라

57,823

 

460

 

52

싱가포르

57,315

+86

27

 

53

나이지리아

56,017

+188

1,076

+1

54

코스타리카

53,969

+1,420

583

+16

55

네팔

51,919

+1,454

322

+5

56

알제리

47,752

+264

1,599

+8

57

스위스

46,239

+528

2,020

 

58

우즈베키스탄

46,160

+687

377

+7

59

아르메니아

45,503

+177

909

+3

60

가나

45,388

+75

285

+2

61

키르기스스탄

44,761

+77

1,063

+2

62

몰도바

42,183

+479

1,114

+8

63

아프가니스탄

38,606

+34

1,420

 

64

아제르바이잔

38,037

+163

557

+1

65

케냐

35,793

+190

616

+4

66

체코

33,860

+1,447

450

+2

67

세르비아

32,228

+92

730

+1

68

오스트리아

31,827

+580

750

+2

69

아일랜드

30,571

+211

1,781

 

70

팔레스타인

29,256

+592

204

+6

71

엘살바도르

26,773

+85

777

+3

72

호주

26,565

+52

797

+9

73

파라과이

25,631

 

485

 

74

레바논

22,983

+546

229

+10

7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2,834

+290

686

+6

76

대한민국

21,919

+176

350

+4

77

리비아

21,908

+969

352

+13

78

카메룬

20,009

 

415

 

79

덴마크

19,216

+292

629

 

80

아이보리 해안

18,916

+47

119

 

81

불가리아

17,799

+201

713

+7

82

마다가스카르

15,669

+45

209

+1

83

북 마케도니아

15,555

+141

642

+5

84

세네갈

14,193

+43

293

 

85

수단

13,470

+33

834

+1

86

잠비아

13,323

+109

306

+6

87

크로아티아

13,107

+190

211

+3

88

그리스

12,734

+287

300

+3

89

노르웨이

12,003

+137

265

 

90

알바니아

11,021

+161

327

+3

91

헝가리

10,909

+718

631

+1

92

DRC

10,361

+18

262

 

93

기니

9,946

 

63

 

94

말레이시아

9,810

+182

128

 

95

프랑스 령 기아나

9,494

+32

63

 

96

나미비아

9,437

+181

98

+2

97

몰디브

8,990

+90

31

 

98

타지키스탄

8,977

+38

72

 

99

가봉

8,621

 

53

 

100

핀란드

8,512

+43

337

 

101

아이티

8,457

+28

216

+1

102

짐바브웨

7,479

+26

224

+2

103

모리타니

7,266

+44

161

 

104

룩셈부르크

7,159

+71

124

 

105

몬테네그로

6,385

+163

115

+1

106

튀니지

6,259

+377

103

+4

107

말라위

5,669

+14

177

+1

108

지부티

5,394

 

61

 

109

슬로바키아

5,252

+186

37

 

110

에스와 티니

5,025

+31

98

 

111

적도 기니

4,990

 

83

 

112

콩고

4,928

+37

88

+5

113

홍콩

4,926

+12

99

 

114

모잠비크

4,918

+86

31

 

115

니카라과

4,818

 

144

 

116

4,749

+2

62

 

117

카보 베르데

4,651

+94

44

+1

118

쿠바

4,593

+42

106

 

119

르완다

4,534

+55

22

 

120

수리남

4,529

+52

93

 

121

우간다

4,377

+86

49

+1

122

자메이카

3,511

+74

40

+2

123

슬로베니아

3,497

+108

135

 

124

시리아

3,476

+60

150

+3

125

태국

3,461

+7

58

 

126

소말리아

3,376

+5

98

+1

127

마 요트

3,374

 

40

 

128

감비아

3,362

+32

100

 

129

앙골라

3,279

+62

131

+1

130

리투아니아

3,243

+44

86

 

131

스리랑카

3,162

+7

12

 

132

과들루프

3,080

+793

24

+1

133

요르단

2,945

+206

21

+1

134

말리

2,912

+3

128

 

135

Aruba

2,898

+79

18

+2

136

트리니다드 토바고

2,825

+127

50

+7

137

바하마

2,814

+93

65

+2

138

에스토니아

2,632

+32

64

 

139

재결합

2,623

+113

14

+1

140

남 수단

2,568

+13

49

 

141

미얀마

2,422

+272

14

 

142

기니 비사우

2,275

 

39

 

143

보츠와나

2,252

 

10

 

144

몰타

2,247

+43

15

+1

145

베냉

2,242

 

40

 

146

아이슬란드

2,161

+4

10

 

147

시에라 리온

2,087

+18

72

 

148

예멘

2,007

+4

582

+2

149

그루지야

1,917

+87

19

 

150

뉴질랜드

1,793

+1

24

 

151

우루과이

1,773

+14

45

 

152

가이아나

1,763

+13

52

+3

153

토고

1,548

+11

37

 

154

키프로스

1,520

+3

22

 

155

부키 나 파소

1,499

+13

56

 

156

라트비아

1,459

+11

35

 

157

벨리즈

1,399

+34

19

+1

158

안도라

1,344

+43

53

 

159

라이베리아

1,315

 

82

 

160

니제르

1,178

 

69

 

161

레소토

1,164

 

31

 

162

차드

1,081

+30

79

 

163

베트남

1,060

+1

35

 

164

프랑스 령 폴리네시아의

953

+96

2

+2

165

마르티니크

939

 

18

 

166

상투 메 프린시 페

906

+5

15

 

167

산 마리노

722

 

42

 

168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712

 

13

 

169

터크 스케이 커스

638

+10

5

 

170

채널 제도

633

+2

48

 

171

신트 마르 턴

530

 

19

 

172

탄자니아

509

 

21

 

173

파푸아 뉴기니

507

 

5

 

174

대만

498

+2

7

 

175

부룬디

469

 

1

 

176

코모로

456

 

7

 

177

페로 제도

416

+1

 

 

178

모리셔스

361

 

10

 

179

에리트레아

361

 

 

 

180

맨 섬

337

 

24

 

181

지브롤터

323

 

 

 

182

몽골리아

311

+1

 

 

183

캄보디아

274

 

 

 

184

세인트 마틴

256

 

6

 

185

부탄

238

+4

 

 

186

케이맨 제도

208

 

1

 

187

바베이도스

180

 

7

 

188

버뮤다

177

 

9

 

189

모나코

168

+3

1

 

190

브루나이

145

 

 

191

세이셸

138

+1

 

 

192

Curaçao

135

+4

1

 

193

리히텐슈타인

109

 

1

 

194

앤티가 바부 다

95

 

 

195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64

+1

1

 

196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62

 

 

 

197

마카오

46

 

 

 

198

피지

32

 

2

 

199

세인트 루시아

27

 

 

 

200

동 티모르

27

 

 

 

201

뉴 칼레도니아

26

 

 

 

202

카리브해 네덜란드

25

 

 

 

203

도미니카

24

 

 

 

204

그레나다

24

 

 

 

205

라오스

23

+1

 

 

206

세인트 바스

21

 

 

 

207

세인트 키츠 네비스

17

 

 

 

208

그린란드

14

 

 

 

209

몬세 라트

13

 

1

 

210

포클랜드 제도

13

 

 

 

211

바티칸 시국

12

 

 

 

212

서부 사하라

10

 

1

 

213

생 피에르 미 클롱

10

 

 

 

214

MS 잔담

9

 

2

 

215

앵 귈라

 

 

 

 

합계:

28,637,593

+300,298

918,892

+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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