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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만에 1억 오른 아파트... 제 선택은 다시 '전세'입니다

대출·카드빚·부부싸움에서 벗어난 지금... 집 없다고 기죽어 있을 당신에게 진짜 하고 싶은 말20.07.19 10:52l최종 업데이트 20.07.19 10:52l양정숙(hayun99)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퇴근길에 찍은 우리 동네 이 많은 집 중에 내집이 없다는 것이 새삼 서러웠다
▲ 퇴근길에 찍은 우리 동네 이 많은 집 중에 내집이 없다는 것이 새삼 서러웠다
ⓒ 양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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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주택자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가장 조롱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아마도 나와 같은 무주택자였을 것이다. 무주택은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며,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8년 전 그 결정에 대해 정말 내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후회가 분노, 좌절로 바뀌고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몰려왔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잊고 있었던 나의 무주택 기간 8년이 떠올랐다.

내가 무주택자로 전락(?)한 것은 2012년이다. 그리고 2020년이 된 지금까지 약 8년간을 전세로 살아왔다. 나는 생애 첫 집을 5년간 살다가 팔았다. 입주하던 날 가슴이 벅차 잠을 못 이뤘던 그 집을 결국 팔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슴 벅차게 집을 사고 알게 된 것들

첫째, 빚이 너무 많았다. 24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으면서 약 1억2000만 원가량의 대출을 받았다. 나와 남편은 IMF 직후인 1998년 결혼했는데, 그때 얻었던 신혼집이 전세 3000만 원이었다. 출발 금액이 적었으므로 2억 원가량의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면 도저히 빚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주택담보대출의 금리가 5%가량이었다. 
 

매달 이자로만 50만 원을 내면서 5년을 버텼다. 5년이 지나자, 원금상환부담이 덮쳐왔다. 매달 80만~90만 원을 상환해야만 해야 했다. 그것도 약 30년 동안이나. 60살이 넘도록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게다가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 맞벌이를 하지 못했던 때라 원금을 미리 상환할 여력도 없었다. 둘째, 신용카드로 생활비 돌려막기를 했다. 빚만 갚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달 대출금 상환하는 것만 신경 쓰고 나머지 가정 경제는 엉망이었다. '생각 없이 신용카드를 긁는다→명세표가 날아온다→월급으로 카드값을 꾸역꾸역 갚는다→다시 신용카드를 쓴다' 이 패턴이 매달 반복되고 있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카드회사에서 퍼가니까 늘 집에 현금이 말랐다. 그래서 또 카드를 긁다 보면 내가 매달 얼마를 쓰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나중에는 카드 명세표를 열어보는 것이 성적표 받는 것처럼 두려워졌다. 그래도 집이 있다는 안도감과 집값이 조금씩 오르고 있다는 것에 만족해서 이 패턴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셋째,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당시 내가 살던 신도시는 특정 대기업 직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기업 사원을 남편으로 둔 그들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남편을 둔 나와는 차원이 다른 씀씀이를 가지고 있었다.

사교육비로 아이 하나당 백 단위를 쓰는 것은 보통이었고, 중형 이상급의 자동차를 전업 주부 엄마들도 타고 다녔다. 연말에 상여금이라도 받고 나면,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명품가방을 하나씩 장만해서 모임에 나타났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부내와 경제적 안정감은 나의 처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을 들볶는 일이 많아졌고, 없는 살림을 쥐어짜서 아이를 사교육에 몰아넣었다.

나의 열등감을 가족을 통해 해소해 보려는 짓을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내가 괴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집을 팔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 같다.

결국 집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집은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시가 어른들의 걱정은 그냥 무시했다. 대출금 일부를 도와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그분들의 노후 자금을 내 집 밑에 깔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집값이 더 뛰면 어쩔래"라고 길길이 반대하는 남편을 겨우 설득해서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그리고 집을 내놓은 지 약 10개월 후, 집이 드디어 팔렸다!

그동안 집값이 올라서 얼마 정도 시세 차익을 남겼지만, 대출금을 상환하고 세금, 복비를 제하고 나니까 변두리 지역에 전세를 얻을 돈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전세자금 대출을 약 3000만 원가량 더 받았다.

집을 팔지 않았더라면 못했을 것들

집을 전세로 옮기면서 가지고 있던 빚을 모두 청산했다. 주택담보대출은 물론이고 마이너스 통장도 없앴으며, 신용카드를 가위로 잘라 버렸다. 그리고 오로지 현금만을 가지고 생활해 보자고 다짐했다. 그때 제윤경씨의 <착한 소비의 시작, 굿바이 신용카드>를 읽었는데, 가정 경제를 구조적, 가시적으로 만드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신용카드를 썼을 때는 보이지 않던 수입과 지출의 현황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생활비를 항목별로 나누어 통장을 만들어 관리하고 정해진 금액 내에서만 돈을 썼다. 그리고 월급이 들어오면 저축부터 했다(전세자금 대출은 주택담보대출보다 금리가 싸고 그나마 소액이라 금방 갚았던 것 같다).

현금이 돌기 시작하자, 저축과 노후 준비를 함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국민 연금에 임의가입자(당시 나는 전업주부였다) 자격으로 가입하고 개인연금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약관내용과 보장액도 모르고 난잡하게 넣어놓았던 보험 중 과도한 보험은 해지하고 손품을 팔아 직접 보험을 설계하여 필수적인 보험만 남겨놓았다.

아이들의 사교육비도 줄였다. 그러기 위해서 전에 살던 아파트 엄마들은 의도적으로 '손절'했다. 그리고 소득을 늘리기 위해 파트타임 강사일을 시작했다. 자동차는 '굴러만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지 않았고, 온 가족 휴대폰도 현금을 주고 사고 알뜰 통신사에 가입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할부금이나 빚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을 살다 보니, 이제 남편과 나의 월급이 입금되면 자동으로 돈이 각 항목에 맞게 착착 이체되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12월이 되면 다음 해의 변화된 소비 항목에 맞춰 각 통장에 이체될 금액을 조금씩 수정해 두기만 하면 되었다. 저축액도 상당히 늘어갔으며, 검소한 소비 패턴은 생활화되었다.

남의 집 자식들과 비교할 일이 없어지니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게 되었고, 다행히 아이들도 사교육비를 많이 들이지 않아도 나름대로 알아서 공부를 했다. 남편과의 다툼도 줄어들고 우리의 노후 준비를 위한 대화도 가능해졌다.

이렇게 가정 경제도 안정되고 여유자금도 확보되어서 슬슬 외곽의 집이라도 사볼까 했는데, 이번에 부동산 문제가 터진 것이다.
 
 정부가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다주택자와 단기간 투기성 매매자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사진은 5일 오전 경기도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 모습. 2020.7.5
▲   5일 오전 경기도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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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세를 선택하다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의 매매가가 1억 원 이상 오른 가격으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그게 최근 두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겨우 두 달 말이다. 남들은 오른 집값에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는데, 나 혼자만 복장이 터져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집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서러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내가 그동안 헛짓을 했구나... 부동산은 경제 이론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사회 각 당사자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사람들의 공포, 불안, 욕망 등의 심리가 함께 맞물려서 돌아가는 게 부동산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경제책 몇 권 읽고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울분과 좌절이 잦아들면서, 조금씩 이성을 찾게 되었다. 세상은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전세를 살 뿐이고, 남들은 1억 이상을 벌었지만, 아직 그 집에서 살고 있으므로 1억을 실제로 손에 쥔 집은 사실 몇 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괴로웠던 이유는 '이제 집을 사야겠다'라는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마침 집을 사려고 했고, 모아둔 돈도 준비되었는데 턱없이 올라버린 집값이 나의 상실감을 자극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간단했다. 집을 안 사면 된다.

8년 동안, 큰아이는 대학생이 되어 독립을 했고, 작은 아이는 고1이므로 2년 후에는 그도 독립을 할 것이다. 학군이나 통학거리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전셋집 선택이 매우 자유로워진다. 게다가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면 책상, 옷가지 등의 짐들이 사라지므로 더 작은 평수의 집으로 이사가도 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몇 번씩이나 이사를 다녔는데, 그 짬밥으로 두 명 사는 집을 이사하는 건 껌이다. 그리고 집을 사지 않아서 남는 여유자금은 노후 준비자금으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도 전세 살아?"라는 말에서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나는 집을 살 기회를 놓쳤지만, 그동안 저축으로 모은 꽤 많은 종잣돈을 집을 사는데 '꼬라박지' 않아도 되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남아 있다.

"낼모레 오십인데 아직 전세 살아?"라는 남들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지금 바로 집을 사지 않아도 별문제는 없다. 남들에게 내가 몇 평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지, 어떤 브랜드의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지 알게 하고 싶은 욕망만 잠재우면 된다.

남들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떠벌릴 때 자존심을 버리고 '부럽네'라며 가볍게 말해줄 수 있는 멘탈만 갖추면 된다. 그리고 남들에게 자랑할 수는 없지만, 우리 가족이 8년간 단련했던 검소한 생활은 앞으로의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그 산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다.

집을 살 수 있는 것도 기회다. 그러나 탄탄하고 검소한 가정 경제를 만들어 놓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 둘을 한꺼번에 할 수 있으면 더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아직 집이 없다고 기죽지 말자.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만약 집이 없다면 어떨까?
집이 없다고 죽지는 않는다.
대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면 된다.
내 노동과 자유를 남들의 시선과 바꾸면 된다.
- <내일의 부>, 조던 김장섭, 트러스트북스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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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안 돼도 좋으니 더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나의 꿈은 '노동자'입니다 ⑨] 이태성 한국발전산업노조 한전산업개발 발전본부 사무국장 20.07.17 20:20l최종 업데이트 20.07.17 20:20l정현주(chamir) 

정치인, 지식인, 혹은 스타들의 목소리만 넘쳐나는 속에서 진짜 이 사회의 주인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살려내고자 합니다. 노동자 개인의 삶을 인터뷰하면서, 어릴 적 꿈과 직장을 구하는 과정, 일터에서의 보람, 힘든 점,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의식의 변화 등을 중심으로 진솔한 삶을 기록합니다.[기자말]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김용균 사망 소식 전하는 이태성씨 2018년 12월 11일, 이태성씨는 태안화력에서 김용균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비정규직 대표 100인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막 열릴 참이었다. 이씨는 이 자리에서 김용균 노동자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김용균 사망 소식 전하는 이태성씨 2018년 12월 11일, 이태성씨는 태안화력에서 김용균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비정규직 대표 100인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막 열릴 참이었다. 이씨는 이 자리에서 김용균 노동자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 이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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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친한 동생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어요. 태안화력에서 함께 일하다가 승진해서 보령화력으로 갔는데, 거기서 그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나기 일주일 전에도 통화를 했는데... 조금 있으면 딸이 백일이 되니까 보령에 와서 술 한잔하자고 했어요. 그때 그 동생 나이가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노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노조는 그런 사망 사고가 나면 사실을 알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싸워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고작 위로금이나 걷고 있었어요."

한국발전산업노조 한전산업개발 발전본부 사무국장 이태성씨, 그가 이렇게 긴 직함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전력공사의 복잡한 하청구조와 관계 있다. 한전은 효율성 제고라는 명분으로 1990년대부터 발전소 설비정비, 운전 업무를 외주화하기 시작했다. 그가 근무하는 한전산업개발은 발전사의 9개 하청 업체 중 하나다.

하청업체들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공개 입찰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회사는 입찰에서 떨어질까 봐 산재가 발생할 때마다 사고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사고 원인을 노동자 개인의 과실로 돌렸다. 하청노동자들은 회사가 입찰에서 떨어지면 직장을 잃는다는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2014년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이태성씨와 노조는 무력했다.

"제가 1998년도에 입사했는데, 20년째 작업 환경이 변하지 않았어요. 저와 동료들이 일하는 작업장은 초속 5m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고 석탄 가루로 앞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한 곳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4km 정도의 거리를 왕복하며 안전 점검을 하고 탄가루 치우는 일을 하고 있어요. 컨베이어 벨트가 도는 속도가 빨라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위험이 있기에 접근 방지 펜스와 자동제어 스위치를 달아줄 것과, 시야 확보를 위해 조도를 높여달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회사는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년 전인 2018년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에야 펜스와 조명이 설치됐습니다."
  
 
▲ 태안화력 발전소 내부
ⓒ 이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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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마다 입찰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태성씨가 근무하는 동안 실제로 태안화력에서 공개 입찰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3년마다 재계약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회사는 비용 절감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위험한 근무 환경은 20년 이상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12월 31일에 태안화력에서 처음으로 입찰이 나왔다. 노조의 반대를 우려해서 어수선한 연말연시에 입찰을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한전산업개발은 이 공개 입찰에서 떨어졌다. 태안화력에서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 전원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낙찰받았던 기업들이 숙련된 인력을 다 채울 수가 없어서 차례로 낙찰을 포기했다. 결국 3순위였던 한전산업개발이 다시 낙찰을 받고 직원들은 회사에 남았다.

"발전소는 1급 보안시설로 폐쇄된 공간이에요. 발전소 출입을 위해서는 신원확인을 하고 서약서를 써야 할 정도로 출입도 통제되죠. 전쟁 나면 타격 1번이 될 만큼 국가의 존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 기간산업입니다. 국민의 생명 안전과도 직결되고요. 그런데 여기에 민간기업의 이윤추구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와 민영화와 외주화를 한 겁니다.

노동자가 안전하지 않은 일터에서, 안정적인 전기 공급이 가능할까요? 외주화 결과 20년 30년씩 노후된 시설이 안전 설비도 없이 방치되고, 근무 조건이 열악해서 수많은 산재가 발생했고요. 더 심각한 것은 그런 현실을 '입찰에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숨겨왔다는 거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도 받아왔고요."

  
한전산업개발 발전노조는 2016년 입찰을 저지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소 민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2017년 11월에 태안화력에서 또 보일러 밸브에 머리가 끼여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담당자들은 태안화력방재센터에 사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다친 노동자는 구급대원의 안전조치 또한 받지 못했고, 구급 차량이 아닌 협력 업체 소장의 차로 이송됐다. 입찰에서 감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산재 사고를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로 인한 죽음 막아야
  

산업사회에서 '공기'와 같이 필수적인 '전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비용절감과 효용성 제고라는 명목 아래 다치고 죽어가는 하청 시스템은 반드시 바뀌어야만 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발전분야 비정규직 연대회의'가 만들어졌다.

발전 노동자들은 이정미 정의당 의원과의 국회간담회를 시작으로 기자회견과 국회의원 면담을 이어나가며, 정규직화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이태성씨는 노조 사무국장으로 이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2018년 12월 11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기다리던 그는 전날 밤 태안화력에서 김용균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비정규직 대표 100인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막 열릴 참이었다. 이씨는 이 자리에서 김용균 노동자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관련기사: "취임 초 문 대통령 행보에 펑펑 울었는데 지금은..." http://omn.kr/1exkg)
  
 1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이태성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한전산업개발 발전지부 사무처장은 "오늘도 또 동료를 잃었다"라며 울먹였습니다.
▲  2018년 12월 1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이태성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한전산업개발 발전본부 사무국장은 "오늘도 또 동료를 잃었다"라며 울먹였습니다.
ⓒ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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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동료를 잃었습니다. 정규직 안 돼도 좋으니 더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꽃다운 젊은 청춘이 또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용균은 12월 10일 밤, 혼자 일하다가 석탄을 이송하는 설비에 끼어 사망했으며 발견되기까지 4시간 동안 방치됐다. 2019년 작성된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7년까지 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노동자 수는 39명이고, 부상을 포함한 사고 발생 건수는 428건에 이른다. 그리고 2018년 이후 현재까지 사망 사고만 3건이 더 발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산재 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약했으나, 최근 5년간 산재 사고의 97%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김용균 사망 이후 올해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었어요. 28년 만에 처음으로 개정되었습니다. 개정된 법안에 '위험 작업은 2인 1조'라는 조항이 담겼지만, '위험 작업'의 기준이 명시되지 않아서 여전히 혼자 일하는 곳도 있고요. 이 법은 재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 12월 12일 '당정 발전산업 안전강화 방안 발표'로 한전산업개발을 공기업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한전의 상시적 업무인 발전소 설비정비, 운전 업무를 원청이 직접 관리하고 책임지도록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 요청이 있은 지 7개월이 지나고 있는 현재 시점까지 현실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태성씨는 김용균 노동자가 사망한 지 570일이 넘어가는 현재에도 김용균의 동료들은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덧붙여 집권 여당이 약속을 지키고, 노동자가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김용균 사망 이후 하루하루 날짜를 세면서 천막농성부터 일인 시위까지 노동자들은 아직도 거리를 지키고 있다.
  
당당하고 차별받지 않는 노동을 위하여
  
“가족의 힘이 없었더라면, 사실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힘들어하는 이태성씨의 모습에 안타까워 하면서 노조활동을 반대했던 가족들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했다. 딸들은 집회현장에도 함께 하고 아빠를 존경한다며 위로한다. 아내도 "열악한 노동현장을 알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발전소 현장이 바뀌고 있다"며 신뢰를 담은 응원을 해주고 있다.
▲ “가족의 힘이 없었더라면, 사실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힘들어하는 이태성씨의 모습에 안타까워 하면서 노조활동을 반대했던 가족들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했다. 딸들은 집회현장에도 함께 하고 아빠를 존경한다며 위로한다. 아내도 "열악한 노동현장을 알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발전소 현장이 바뀌고 있다"며 신뢰를 담은 응원을 해주고 있다.
ⓒ 이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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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엔 어촌 특화사업을 해보고 싶어 했던 이태성씨는 1992년 태안에 건설된 화력발전소에 1998년 12월 한전산업개발로 입사해 화력발전소 운전 분야에서 일해 왔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나 학창 시절에는 막연히 '노조는 과격하고 불온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그는, 비정규직의 부조리를 겪고 동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변해갔다.
   
2019년 이태성씨는 '허위사실을 무차별적으로 언론에 유포해서 회사의 명예를 실추했다' 하여 원청 정규직 노조 관련자로부터 명예 훼손 혐의로 고발당했다.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경찰서에 가서 몇 시간씩 조사받고 마음고생을 했다. 조사 결과 '기소 의견 없음'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관련 기사: "노동자가 김용균 대책위 노동자 고발... 의도가 다분하다" http://omn.kr/1j8rl)

"가족의 힘이 없었더라면 사실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힘들어하는 이태성씨의 모습에 노조 활동을 반대했던 가족들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했다. 딸들은 집회 현장에도 함께 하고 아빠를 존경한다며 위로한다. 아내도 '열악한 노동 현장을 알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발전소 현장이 바뀌고 있다'며 신뢰를 담은 응원을 해주고 있다.
   
"정규직은 위험한 일을 시켰을 때 거부권이 있지만, 비정규직은 없어요. 이것도 변해야 합니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다뤄서는 안 되죠. 노동자의 목숨이 깃털은 아니거든요. 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법 제정으로 기업들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나 '비정규직 사용제한법' 같은 것들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기업은 엄히 처벌해야 하고, 비정규직이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쓰는데 악용되는 일도 막아야 합니다."

이태성씨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무임승차'라고 비난하는 시선에 대해, 특히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들은 지금 당장 거부감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규직화는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일임을 알아줄 것을 당부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90%는 노동하는 사람들인데, 왜 어떤 노동의 가치는 천박하게 인식되는 걸까요? 특히나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생산직 노동을 더 그렇게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나라도 노동교육을 의무화하고 어릴 때부터 노동은 소중하고, 나는 기업이 주는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내 당당한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기업과 노동자는 평등한 계약관계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노동자가 마치 기업의 소유물처럼 인식되고 있으니 이건 아주 잘못된 거죠. 우리나라는 10년째 OECD국가 중 산재 사망률이 1위라고 해요. 경제 대국인 나라에서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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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세균전’에 ‘부산 폭로전’으로 맞선다

  • 기자명 선현희 기자
  •  
  •  승인 2020.07.17 18:38
  •  
  •  댓글 0
    •   
  • <h4 class="subheading"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 0px 0px 1.875rem; padding: 0px 0px 0px 0.75rem; font-weight: bolder; text-rendering: optimizelegibility; line-height: 1.25; font-size: 1.25rem; letter-spacing: -0.075em; border-left: 3px solid rgb(174, 174, 174); word-break: normal; overflow-wrap: break-word;">18일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을 위한 전국연석회의와 부산시민 원탁회의 열려</h4><article id="article-view-content-div" class="article-veiw-body view-page font-size17" itemprop="articleBody" style="box-sizing: inherit; font-size: 1.063rem; letter-spacing: -0.05em; margin-bottom: 5rem;">

    ‘부산 8부두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하라’는 목소리가 전국에 퍼진다.

    오는 18일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을 위한 전국연석회의와 부산시민 원탁회의가 연달아 개최된다.

    3시 전국연석회의에서는 미군 세균전 계획을 꾸준히 추적한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가 ‘미군 세균전계획’을, 소파협정 전문가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미군 세균전계획과 소파협정’에 대해 발제할 예정이다.

    또한 부산 8부두 미군기지에 맹독세균샘플을 반입한 주한미군 사령관을 검찰에 고발한 것과 관련된 보고가 이뤄지며, 2015년 탄저균 밀반입을 겪은 경기도 평택의 단체대표를 통해 경험과 현황을 청취한다.

    이날 회의에서 오는 8월 15일 미 대사관 앞 항의 기자회견과 9월 UN총회 미국 제소 등 향후 투쟁계획을 확정하게 된다.

    7시 부산시민 원탁회의에서는 장마와 코로나19의 여파로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된다.

    회의결과는 ‘부산시민 원탁회의 결정문’으로 발표되며 ▲하반기 대규모 ‘추방 궐기대회’ 결의, ▲9월까지 주한미군 사령관 고발인단 1천인 모집, ▲풀뿌리 소모임까지 관련 교육 확대, ▲규모있는 선전홍보진행 등을 논의 의결할 예정이다.

    [세균전부대 추방 부산시민 화상 원탁회의 참가안내]

    장마로 인한 불확실한 기상조건과 코로나19 부분확산에 대한 우려에 따라, 7월 18(오후7시 백운포에서 개최 예정이던 부산시민원탁회의를 아래와 같이 화상(온라인)회의로 전환하여 진행됨을 알려드립니다.

     

    1. 소속단체로 참가신청하신분 자신이 속한 테이블 조장이 별도로 안내해 드린 회의장소로 오후 7시까지 모여주세요.

    2. 온라인으로 개인참가 신청하신분 오후 7시 노동복지회관 2층 대강당

    구글로 참가신청을 하신 개인에 한 함. (현장 참가자 접수는 없습니다)

    3. (참관유투브주소 https://youtu.be/LbonuZPX_vs

    </article><article id="article-view-content-div" class="article-veiw-body view-page font-size17" itemprop="articleBody" style="box-sizing: inherit; font-size: 1.063rem; letter-spacing: -0.05em; margin-bottom: 5r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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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섯째 이야기, 사드 가고 평화 오라(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35)
정해랑  |  jhr13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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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18  01: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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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경복궁역에서 청와대 앞 분수대로 가는 길을 가면서 신돌석씨는 촛불시위가 한참이던 2016년 겨울의 마지막 토요일을 떠올렸다. 그날 세월호 참사 피해자 유가족들이 시위하는 군중에게 노상에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거기까지 오는 데도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0월 말부터 11월까지에는 경찰에 막혀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계속 가처분신청을 내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전진했다. 그 과정을 보면서 신돌석씨는 이렇게도 역사가 진전하는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느꼈었다.

그렇게 시위 등의 압력과 합법적인 절차를 병행하는 전술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도 신돌석씨 주위에는 많았다. 특히 8-90년대의 거친 상황을 지나오면서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래봤자 저들이 굴복하냐고 하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러한 전술은 어떤 개인이나 조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것을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집단지성이 창출해낸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었다.

그때 불만을 말한 사람들은 막상 박근혜가 탄핵이 되자 별 말이 없다가 그 뒤 새 정부 들어서 적폐청산이 더디게 되자 다시 비판의 칼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그때 국회를 해산시켰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런 전략 전술에 대해서 명쾌하게 이야기할 지식도 부족하고 논리력도 없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그때 국회를 해산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었는데도 안 했단 말인가?

청운동 동사무소를 지나서 사랑채에 갔다.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도 들어갈 때 발열체크를 하고 이름을 썼다. 나와서 보니 분수대 앞에는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11시 10분 전에 도착해서 한번 죽 둘러보았다. 작년에 했을 때 보았던 신천지 피해자 가족이라는 사람은 아직도 있었다. 동일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딸이 집을 나갔는데 신천지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작년에만 해도 좀 황당하게 생각했는데 코로나19 이후 신천지에 대해 보도가 많이 되면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11시 정각이 되자 장선우가 피켓을 들고 왔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전쟁의 불씨 사드 배치 문재인 정부 규탄한다’ 라는 구호가 적힌 것들이었다. 부근의 시민단체에 피켓을 갖다 놓고 매일 시위할 때마다 가지고 왔다가 가져가는 모양이었다. 보통 1인 시위는 1시간을 하는데 이번에는 두 시간을 하였다. 바람이 좀 세차게 불었다. 피켓이 자꾸 날아가려고 하였다. 그것을 꽉 붙들고 있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였다.

여기서 보면 촛불혁명 뒤에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한눈에 보였다. 바로 옆에 여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방위비 인상 반대와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사드반대와 가장 가깝게 느껴졌는지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역시 세월호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참사피해 유가족들이 노란 점퍼를 입고 서 있었는데 7명이 와 있었다. 이곳에 터줏대감이라고 장선우가 소개한 사람은 전교조 조합원이었다. 교직에서 은퇴한 뒤 전교조 합법화를 요구하며 여기서 살다시피 한단다. 아예 의자를 갖다 놓고 가림막도 쳐 놓은 사람은 ‘이석기 전의원 석방’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다 아는 주장들인데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잘 모르던 요구사항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돈 농가의 피해를 보상하라는 것과 토지강제수용을 하지 말라는 요구도 있었다. KT 전 회장 황창규를 구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에 1인 시위했던 사진을 내걸고 있었다. 억울한 관청 피해에 대해 호소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이런 사람들의 피켓일수록 작은 글씨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제일 특이한 사람은 신돌석씨의 왼쪽에 있는 사람인데 라엘 오르그라는 프랑스인의 방한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말을 걸어오기에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후쿠시마에 있다가 오키나와로 옮긴 사람인데 1983년에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서 한국에 못 들어온다고 하였다. 오키나와에서도 주일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단다. 거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가 UFO를 보았고, 그것이 후쿠시마 지진도 유발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1인 시위의 요구가 꼭 진보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19를 우한 폐렴이라고 하면서 중국인을 막지 않은 문재인이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현수막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곳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들이 몰려와서 시위를 할 가능성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코로나19 이전에 이곳에서 죽치던 성조기 부대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면 정말 민주주의는 죽 쒀서 개 주는 것 아닐까?

장선우가 먼저 가고 남아서 1시까지 1인 시위를 하고, 피켓을 들고 다시 청운동 주민센터 쪽으로 나왔다. 피켓이 두 개를 이어 붙인 것이라서 들고 가기에 쉽지 않았다. 장선우는 한 정류장 정도 거리이니 버스를 타고 가라고 했는데 그것도 뭐해서 그냥 들고 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보곤 하였다. 이전에는 부자들이 살던 동네였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이 사람들은 아마 정치적 구호에 꽤 익숙하리라. 온갖 시위가 다 이곳에 와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 어딘가에 외할머니가 살았었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외삼촌을 여의고 며느리인 외숙모와 손주들과 사셨다. 주로 아니 거의 대부분 외할머니가 찾아왔지 신돌석씨 형제가 외할머니한테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신돌석씨에게는 항상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면서 어머니를 옥죄는 사람이라는 양면적 이미지가 있었다. 그 외할머니도 세상을 뜬 뒤에는 외숙모나 외사촌들과는 경조사 때나 보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사진을 찍고 나서 조금 있다 보니 상황실장이 왔다. 올 때마다 보는 사람이었다. 대구에서 평화와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인데 벌써 4년째 이곳에서 먹고 살면서 상황실장을 하였다. 처음 오던 때 그의 안내에 따라 기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달마산에 올랐었다. 걸어서 가기에도 좁게 보이는 산길을 그가 운전하는 경차를 타고 갔다. 어느 지점에 가서 내린 뒤 걸어 올라갔는데 그는 빨치산이 연상될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비탈진 산을 올라갔었다.

   
▲ [삽화-백소(白笑)]

사드가 배치되고 해가 바뀐 2018년 지방선거가 있던 6월 13일이었다. 신돌석씨는 장선우와 지역 문화 단체 활동가인 최운영과 함께 소성리에 내려갔다. 그때는 최운영이 가져온 차를 타고 갔다. 그래도 명색이 그랜저였는데 오래 되어서 기름값이 너무 많이 든다고 최운영이 투덜대었다. 그래서 좀처럼 타지 않는데 장거리를 가야 하니 몰고 간다는 것이었다. 지방선거라 공휴일인데도 길은 그렇게 막히지 않았다. 그래서 2시간 조금 넘어서 소성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전해에 있었던 기습 배치 이후에 매주 토요일에 김천역 앞에서 집회가 있었고, 소성리에서는 수요일마다 집회를 하였다. 수요 집회 주관을 공동행동에 소속된 여러 단체가 돌아가면서 하였다. 그날은 신돌석씨의 지역에서 하기로 했는데 막상 갈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신돌석씨와 최운영이 가게 되었다. 집회를 주관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소성리 지역 대책위원들, 현지의 상황실과 원불교 성지 수호 대책위원들이 다 준비해 놓았다.

가자마자 집회에 참석하였다.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 커다란 차양이 쳐져 있었다. 들어서 옮길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주민들이 앞자리에 앉았다.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이 동네 할머니들이었다. 경북 지역의 개신교나 천주교 목회자 활동가들, 지역에서 평화운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왔다. 집회에 참석한 인원이 40여 명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 동네는 100가구가 안 되고, 인구 수도 200명 안 된단다. 사실상 마을 주민 모두가 사드반대 투쟁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발언을 시켰다. 장선우나 최운영더러 하라고 했는데 굳이 신돌석씨가 가장 연장자니까 해야 한단다. 그래서 나가서 발언을 했다. 오늘이 지방선거 날이다. 지방자치를 잘 하자고 선거를 하는 날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고 있는 사드를 왜 엉뚱한 동네 사람이 결정해서 하려고 하냐? 한 마디 묻지도 않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잘 한다고 박수를 쳤다. 장선우도 최운영도 말 잘 했다고 하면서 이제 기회만 되면 하란다. 신돌석씨는 손사래를 쳤다.

그날은 1박하기로 하고 가서 집회가 끝나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교무의 안내로 원불교 성지를 둘러보았다. 원불교 사원이 있는 곳과 2대 종사인 정산송규종사의 생가는 좀 떨어져 있었다. 사드만 아니면 평온하기 그지없는 곳일 듯하였다. 신돌석씨 일행을 안내한 교무는 원불교 내에서도 사드 반대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성지를 수호한다는 뜻에서 출발했다가 이제 사드 배치 자체가 교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반대를 한다고 하였다.

저녁 5시 반이 되자 부대 앞으로 이동하였다. 마을회관에서 진밭교까지 10분 정도 걸었고, 거기서 부대 앞까지는 걸어서 가기에는 꽤 멀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돌석씨 일행도 걸어가다가 도중에 상황실장의 차가 와서 거기에 동승해서 갔다.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져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드 기지는 미군 기지임이 분명한데 우리 군이 지키고 있단다. 그것도 최정예부대의 하나라고 하는 특공대 장병들이 지킨다는 것이다. 한미상호방위협정의 어느 조항에 우리 군이 미군부대를 지켜 주기로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상황실장은 이야기하였다. 법이나 규정이 별 소용이 없는 것이 한미관계인 것 같다.

원불교 교무의 사회로 진행된 집회는 낮에 있었던 집회와는 달리 참석한 사람들이 플랭카드를 들고 부대 앞에서 노래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참석한 사람 모두가 짧게라도 연설을 하거나 구호를 선창하였다. 오는 도중에 보았던 가지각색의 현수막에 적혀 있는 구호가 소리가 되어 나오는 듯하였다. 전국의 모든 운동단체들이 다 현수막을 내건 것 같은데 왜 저지할 힘이 되지는 못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집회를 끝낸 뒤에는 진밭교로 내려와서 공사하는 사람들의 차량을 막았다. 여기서도 약식으로 집회가 있었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 차량에 탄 사람들은 기다렸다. 매일 있는 일이라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경찰들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서로 암묵적으로 약속이 되었는지 약식 집회가 끝나고 그들을 향해 우리 민족을 위험에 빠뜨리고 미국의 이익만을 위한 사드기지공사를 하지 말라고 한 뒤 길을 터주었다. 일단 이 사람들은 명분상 사드기지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지 내 장병들을 위한 편의시설 공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밤에는 주민들이 마련해준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마을회관에서 잤다. 세 사람과 상황실장이 함께 잤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상황실장이 차려 준 아침 식사를 한 뒤 진밭교에서 하는 예배를 드리러 갔다. 아침마다 거기서 개신교 목사 집도로 예배를 본다고 하였다. 어제 저녁과는 달리 진밭교에는 경찰 수십 명이 와 있었다. 할머니들인 주민들 10여 명과 상황실장, 원불교 교무, 개신교 목사 그리고 거기서 잔 신돌석씨 일행 세 명이 전부였다. 경찰의 절반도 안 되는 수였다. 경찰을 보자 신돌석씨는 갑자기 긴장감이 느껴졌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찬송을 부르고, 목사의 기도가 있고, 설교가 있었다. 7시 40분쯤부터 차들이 오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에 퇴근한 사람들이 다시 공사장에 출근하려는 것이었다. 입구를 막고 예배를 보고 있는데 차들은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7시50분이 되자 경찰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입구를 열어 달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끝까지 막고 싸워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켜 주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외부에서 온 사람이 싸우자 말자 하기도 뭣하였다.

원불교 교무가 귀띔을 해주었다. 그냥 일어설 수는 없고 경찰이 옮겨 줄 테니 거기에 몸을 맡기시라고 했다. 지휘관이 지시를 내리자 경찰 세 명이 일조가 되어 의자채로 들어서 옆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고 ‘사드 가고 평화 오라’라는 노래를 계속 불렀다. 어찌 보면 형식적인 싸움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비참한 현실이기도 하였다. 저항을 해봤자 들려 나가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 [삽화-백소(白笑)]

상황이 종료되고 상황실장에게 물으니 공사를 우리가 막고 있다는 것을 아침 저녁으로 보여준다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해는 되었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렇다고 신돌석씨에게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더 말하기도 어려웠다. 예배가 끝나고 마을회관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상황실장이 기왕 오셨으니 시간이 되면 달마산에 한번 가보자고 하였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사드 기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란다. 그래서 그의 차를 타고 달마산에 가게 되었다. 상황실장이 운전하느 경차를 타고 마을 밖으로 나가서 산을 빙 돌아서 갔다.

그러다가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차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을 한참 올라갔다. 차를 세워 놓고도 걸어서 산길을 타고 올랐다. 세 사람은 상황실장을 따라가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이럴 때 자주 나오는 말이 나왔다. 운동 좀 해야 하는데. 산에만 가면 중년의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산만 내려가면 다시 잊어버리고 음주에 찌들어 버리곤 했다. 상황실장은 산을 잘 타는 것뿐만 아니라 이 산에 아주 익숙한 듯 평지에서 뛰듯이 올라가다가 뒤돌아보고 기다려 주곤 하였다.

정상에 올라 너럭바위 위에 앉으니 정말 기지가 한눈에 보였다. 상황실장은 망원경을 들고 갔다. 매일 한 번씩 여기에 올라와서 상황을 체크한단다. 사진도 여러 장을 찍었다. 신돌석씨도 핸폰으로 몇 장 찍었다. 헬리콥터가 오르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반대쪽에 출입구가 없다고 한다. 출입구가 이쪽에만 있는데 우리가 막고 있으니 병사들의 부식 등을 헬리콥터로 나르는 것 같다고 한다.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기지 내 도로를 따라 차들이 이동하는 것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정지된 느낌을 주었다.

달마산에서 본 기지는 정말 천혜의 요새였다. 어떻게 산 꼭대기에 그런 평지가 있는지 희한하게 느껴졌다. 롯데에서 이 땅 내놓기가 아까웠을 것도 같다. 어쩌면 더 큰 것을 받아내기 위해 알아서 준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쉽게 주기에는 아깝게 보였다. 원래 그 자리에 목장이 있었는데 롯데가 사들여서 골프장을 운영한 지 얼마 안 돼서 사드 기지로 낙점되었다고 한다. 상황실장이 망원경을 건네주면서 저게 바로 문제의 사드니 잘 봐두라고 하였다. 저게 무엇이기에 이 마을 주민들을, 우리 국민들을 괴롭게 하는 것일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코로나19 때문에 마을회관이 폐쇄되어서 어디서 묵고 있냐고 물었더니 상황실장은 웃으면서 소성리가 다 자기 집이라고 하였다. 대구에서 평화운동, 통일운동을 하다가 이곳에 파견되어 왔던 이 사람은 벌써 햇수로 5년째 여기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 사람처럼 말없이 헌신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쉽게도 오늘은 대구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하였다.

점심때가 되니 할매들이 점심 먹기 위해 나타났다. 진밭교를 지키던 사람들과 할매들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장선우가 오늘은 마을회관도 닫히고 해서 빵으로 점심을 때우자고 했는데 뜻밖에도 갈비탕이 점심으로 왔다. 함께 둘러앉아서 갈비탕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이지만 여러 번 오니 낯이 익은 할매들도 많았다. 그 중 한 할매가 지난 번 경찰의 침탈 이야기를 하면서 성주경찰서가 괘씸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장선우가 술 마시다 간 날도 이 조그마한 동네에 무려 4천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그것도 의경들이 아니라 기동대 소속인 듯 거구들만 모였단다. 순식간에 마을회관부터 통제해서 진밭교로 못 올라오게 하고, 진밭교에 이중으로 진을 쳐서 장비를 진출입시켰다고 한다. 분을 못 삭이며 이야기를 하는 할매는 지방선거 이기고, 국회의원 선거 이기면 뭐하냐고 하면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을 몇 번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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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말리는 연장전 끝에 되살아난 오뚝이…이재명표 정치 날개달다

등록 :2020-07-16 16:21수정 :2020-07-17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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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하게 괴롭힌 모든 혐의서 벗어나
16일 경기도청 신관에 출근 중인 이재명 경기지사. 경기도 제공
16일 경기도청 신관에 출근 중인 이재명 경기지사. 경기도 제공

피말리는 연장전 끝에 이번에도 되살아난 오뚝이 정치인.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친형 강제 입원과 관련해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벌금 300만원의 당선 무효형을 받은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취지의 파기 환송 결정을 내리면서 이 지사는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4가지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다. 다시 한번 정치인으로 기사회생에 성공하면서 코로나19 대응으로 높아진 인지도와 지지도를 기반으로 대선가도에도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 지사는 지방선거 이후인 2018년 12월 ‘친형 강제 입원’과 관련한 허위사실공표 외에도 성남시 분당 대장동 개발 관련 업적을 과장하고, 2002년 검사를 사칭했던 전력을 부인했다는 공직선거법(허위사실유포) 위반 등 4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친형 강제 입원과 관련한 허위 사실 외에 나머지 3가지 혐의에 대해서는 1,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선 성남시장에서 경기도지사로 당선되면서 시작된 재판과 곧이어 터진 여배우 스캔들, 조폭 연루 의혹 등을 한꺼번에 받았던 지난 2년은, 이 지사의 말처럼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였다. 특히 여배우 스캔들은 대형 악재였다. 이 지사는 사건을 조사중인 경찰에 신체 감정을 요구한 뒤 거부되자, 자신이 직접 아주대 병원으로 이동, 의료 전문가와 언론이 참관한 현장에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내기도 했다.

숱한 고비를 넘겨온 이 지사지만 항소심 재판 이후 대법원 선고가 지연되면서는 “단두대에 올라간 심정”이라며 극도의 긴장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확정할 경우, 지사직 상실은 물론 여권 잠룡에서 추락하며 정치적 앞날이 불투명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 지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수사·재판에 시달려왔던 이재명표 경기도정이 활력을 얻는 동시에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날개를 달게 됐다.

피말리는 송사 외에도 그의 삶엔 고난을 딛고 일어선 장면이 여럿이다. 경북 안동 출신의 이 지사는 가정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성남 상대원공단에서 5년간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산재로 장애인 6급 판정을 받았던 이 지사는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사법고시에 합격,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당시 생활을 담은 책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그는 “고통스럽고 혼란한 미래에 두려움을 겪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리틀 이재명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이후 시민운동가로 성남시립의료원 건립에 나섰으나 현실의 벽에 부닥치면서 정치의 길로 나선 이 지사는,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성남시에서 재선 시장을 지냈다. 당시 성남시 모라토리엄 선언과 극복, 성남시 청년수당 등 3대 무상복지를 통해 점차 ‘변방 사또’에서 ‘스타 시장’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 지사는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 당시 문재인, 안희정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최종 후보가 되지 못했다.

다음해인 2018년 지방선거에서 남경필 자유한국당 후보를 24%의 큰 표 차이로 누르고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이 지사는 ‘억강부약’을 기조로 공정과 평화의 가치가 담긴 자신의 정책을 쏟아냈다. 경기도 청년수당의 지급과 경기도 내 하천 불법 시설물 일제 철거 등의 강력하고 신속한 정책 등이 그 예들이다. 특히 자타 공인 국내의 대표적인 ‘기본소득론자’인 그는,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명실상부한 대선주자급 정치인으로 체급을 늘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난지원금 지급을 한 것은 물론, 집단 감염의 진앙지로 거론된 신천지 고발과 현장 점검 등의 강력하고 선제적 대처, 남북 간 대치 국면 속에서 대북 전단 살포 강력 대응 등을 통해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받아왔다.

이는 이 지사에 대한 지지도 상승으로 귀결됐다. 취임 직후 각종 의혹 등 악재에 시달리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29.2%로 전국 17개 시도 단체장 중 꼴찌로 시작했던 그는, 지난달 조사에서는 71.2%로 1위에 오르는 등 드라마 같은 지지율 변화를 끌어냈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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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키워드로 본 이인영 후보자 통일관

[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 인도적 지원은 "꾸준히"... 북한인권법엔 "실효성 없다"

20.07.17 08:25l최종 업데이트 20.07.17 08:25l

 

통일부 장관 후보자, 밝은 얼굴로 출근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남북회담본부로 출근하고 있다. 2020.7.6
▲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남북회담본부로 출근하고 있다. 2020.7.6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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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통일부 장관에 내정된 이인영 후보자는 평소 북한과의 적극적 교류협력을 강조해온 인물이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 이래 4선(17·19·20·21대) 의원인 이 후보자는 20대 국회 전·후반기 모두 외교통일위원회(외통위)에서 활동했고, 21대 국회에서도 외통위를 희망해 배정됐다. 민주당 남북경제협력 특별위원회 위원장, 남북관계 발전 및 통일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때문에 여권에선 이 후보자가 통일부 장관으로 취임하면 대북 인도적 지원에 본격 발판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반면 야당에서는 이 후보자를 가리켜 "과거 편향적인 대북관을 가졌던 분"(박진 미래통합당 의원), "그동안 행적을 보면 굉장히 북한에 편애를 많이 보였던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김기현 미래통합당 의원)고 공격하기도 한다.

이 후보자의 과거 발언과 저서, 발의했던 법안들을 중심으로 몇 개의 중심 키워드를 추린 다음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여다봤다.

[① 대북 인도적 지원] 정치·군사 상황 떠나 꾸준히
 북한은 지난 2019년 5월 4일 강원도 원산 호도반도에서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쏜 데 이어, 9일에도 평안북도 구성 일대에서 두 차례 미사일 발사 시험을 했다. 당시 여당 원내대표였던 이 후보자는 남북·북미 대화 소강 국면에서 대북 식량 지원 카드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이 후보자는 북한의 군사적 행동과 식량 지원은 별개라는 의견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2019년 5월 10일 이 후보자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지체 없이 인도적 지원을 해서 (남북) 서로의 신뢰를 강화하고, 또 그런 남북관계를 통해서 북미 관계가 개선되는 쪽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긍정적 기여를 해야 하는 때"라고 강조했다.

같은 날 이 후보자는 현장 최고위원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서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식량 지원 문제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흔쾌히 하겠다는 입장이었다"라며 "미사일 문제와는 별개로 식량 지원 문제는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북한의 소출 상황도 좋지 않고, 많게는 150만 톤의 식량이 부족하다고 한다"라면서 "어린이·산모·노약자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에 식량 지원은 인도적 차원에서 즉각적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인도적 교류와 협력'을 강조한 이 후보자는 관련 법안 발의에도 적극적이었다.

지난 2016년 12월에는 일관성 있는 대북 인도·협력사업 추진을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 '남북한 간의 인도지원과 개발협력에 관한 법률안'은 대북 인도·협력사업을 정치·군사적 상황에 연계하지 않고 인도주의 원칙에 기반해 중립적으로 이뤄지도록 한다는 기본원칙을 법에 명시했다.

2019년 4월에 발의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개정안'과 2017년 9월 '남북협력기금법 개정안'에선 각각 '남북 간 교류와 관계 발전에 필요한 사업'을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로 명시하고, 남북경협기업의 사업이 경영 외 사유로 중단됐을 때 보상 범위를 넓히는 조항을 넣었다.

다만 이들 법안은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대부분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② 북한 미사일] 합의 위반, 도발은 이제 그만

이인영 후보자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지난 2019년 5월 10일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가 '북한의 발사체 발사가 9.19 군사합의 위반이라고 보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는 정신적으로 9.19 군사합의 위반"이라고 밝혔다.

이 후보자는 "법률적으로는 위반이냐 아니냐를 따질 수 있겠지만, 정신적 측면에서는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합의의 반대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북한의 군사적 행동은 한반도 평화에 역행하고, 남북관계 발전을 통한 북미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는 데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북한이 더 이상 도발적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③ 대북전단] 접경지역 주민에 위협이자 피해 
 
박상학 대표가 북한에 보낸 전단 박대표가 북한에 살포한 전단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세습수령절대독재를 위해 형님(김정남)까지 독살한 희대의 악마, 인간백정'이라고 규정했다.
▲ 박상학 대표가 북한에 보낸 전단 박대표가 북한에 살포한 전단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세습수령절대독재를 위해 형님(김정남)까지 독살한 희대의 악마, 인간백정"이라고 규정했다.
ⓒ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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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대북전단 살포 문제가 쟁점이 된 적이 있었다. 2016년 9월 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서 여야 의원들은 대북전단 살포의 적합성 유무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윤후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중 대북전단 살포행위 규제를 협력법으로 규율하는 것을 놓고 정부·여야의원들의 입장이 엇갈렸던 것이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미래통합당의 전신)은 대북전단 살포를 법으로 금지할 경우 북한의 도발에 대해 한국 정부가 대응할 수 있는 카드가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해 이인영 후보자는 외통위 회의에서 "(대북전단 살포가) 해당지역 주민에게는 명백한 위협이고 재산상 피해가 있을 수 있다"라며 "정부와 통일부는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6월 30일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대북전단 살포행위 등 남북합의서 위반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신설하고, 미수범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해 사전적 차단조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의 '남북관계발전에관한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21대 국회 첫 번째 법안으로 발의했다.

개정안에서는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확성기 방송행위, 시각매개물 게시행위 및 북한 전단 살포행위 등 남북합의서에 위배 되는 금지사항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반하여 국민의 생명·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심각한 위험을 발생시킬 우려가 있는 행위를 한 자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후보자는 12명의 민주당 소속 외통위원들과 함께 이 법안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④ 북한인권법] 실효성 없다, 북한 개방이 더 현실적

이인영 후보자는 북한인권법에 대해 "미국, 일본의 북한인권법과 같이 한국의 북한인권법은 압박 수단일 뿐 실효적이지 않다"라면서 "북한을 압박 및 고립하는 정책은 그동안 효과적이지 않고 실패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지난 2011년 12월 김재원 한나라당 의원과 함께 펴낸 <진보 보수 마주보기>에서 "법의 실효성이 있어야 하는데, 남한에서 북한인권법을 만드는 것 자체가 북한에서 실효성이 없지 않나요. 미국의 북한인권법이든, 일본의 북한인권법이든 모두 일종의 북한 압박 수단이지 그 법 자체가 실제로 북한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실효적인 지배력은 없지 않을까요"라고 꼬집었다.

이 후보자는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북한과 소통하고 문호를 열어서 북한 사회 전체에 변화가 생기도록 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우리가 북한 인권을 개선하자는) 말을 하는 것까지도 인색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사실 저는 그것조차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라며 "북한 인권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으면서도 북한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끌어 동반해 간다고 하면 당연히 그리 가자는 것이죠"라고 주장했다.

[⑤ 한미워킹그룹] 독자 추진 가능한 일 하겠다 
 
 통일부 장관에 내정된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이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의원실로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통일부 장관에 내정된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 사진은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의원실로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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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워킹그룹은 지난 2018년 11월 남북 교류협력 사업 관련 대북 제재 면제를 효율적으로 협의하기 위한 채널로 출범했지만, 실제로는 북미 비핵화 협상보다 남북 교류협력 사업이 앞서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측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실상 한미워킹그룹의 제재 면제 '승인' 없이는 철도·도로 연결, 이산가족 화상 상봉, 양묘장 건설,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 사업 등 남북 정상이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합의한 사안들을 자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인영 후보자는 지난 6일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이 차려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로 출근하며 기자들과 만나 "한미워킹그룹을 통해 할 수 있는 일과 우리 스스로 판단해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면서 "(대북)제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므로 창의적 해법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라면서 "우리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남북 간의 대화와 북미 간의 대화가 끊기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한미간 대북정책 조율 기능을 담당하는 한미워킹그룹의 틀을 벗어나 통일부가 독자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독자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오는 23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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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문재인 대통령 향한 ‘구두 테러’ 현장 목격기

구멍 뚫린 대통령 경호, 만약 폭탄이었다면?
 
임병도 | 2020-07-17 08:40:4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어제(7월 16일) 국회는 다른 날과 달리 검문검색이 철저했습니다. 21대 국회 개원식에 맞춰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연설이 예정됐기 때문입니다.

국회 본청 주변에는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과 경호 차량이 자리를 잡았고, 입구에는 국회 방호직원과 청와대 경호원들이 이중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본회의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엑스레이 장비를 통과하고 난 뒤에도 경호원의 몸수색과 가방 검사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국회 본회의장과 본청 입구 계단, 로텐더홀은 사전에 취재 허가를 받은 비표를 착용한 기자들만 갈 수 있을 정도로 삼엄했습니다.

기자는 원래 국회에서 촬영도 하고 있지만, 국회 영상 기자단 소속이 아니라 카메라를 휴대하지 못하고 취재 비표만 받고 겨우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 2시 20분에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한 문재인 대통령은 약 30여분 동안 연설을 했습니다. 2시 52분쯤 연설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은 박병석 국회의장 등을 만나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오길 기다렸던 50대 남성

▲기자와 구두 던진 남성이 서 있던 자리. 빨간 카페트 주변에만 경호원들이 있었고, 장애인 통로 주변에 바로 옆에는 경호원이 없었다.

본회의장에서 취재를 한 뒤 본청 입구로 내려왔습니다. 경호 차량과 문재인 대통령 전용차가 입구에 대기하고 있어, 가시는 모습을 보고 소통관(국회 미디어센터)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본청 입구에는 구역 비표를 받은 취재진만 있을 수 있어, 야외기단 옆 장애인 통로 쪽에 서 있었습니다. 기자 옆에는 50대 남성이 스마트폰을 들고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 남성의 목에는 국회 출입증도 없고, 행사 참석이 가능한 비표도 없었습니다. 국회 직원이나 보좌관, 취재진, 방문객은 모두들 출입증을 착용하고 있는데 남성은 없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구두에 맞을 뻔한 문재인 대통령

 

 

15분 정도 기다리자 문재인 대통령이 나오시는지 경호원들과 취재진들이 분주해졌습니다. 이윽고 문재인 대통령이 나오시고 차량에 탑승하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는 50대 남성이 “빨갱이 문재인”이라는 소리와 함께 신고 있던 구두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던졌습니다.

다행히 문 대통령은 구두에 맞지 않았고, 그저 이쪽을 한 번 쳐다보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차량에 탑승하고 국회를 떠났습니다.

남성이 구두를 던지고 소리를 치자 즉시 경호원들이 움직였습니다. 갑자기 저에게 달려드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놓칠 뻔했습니다. 다행히 경호원들과 방호직원들은 제가 아닌 그 남성을 제압했습니다.

“빨갱이 문재인을 자유대한민국에서 당장 끌어내라”고 소리쳤던 남성은 급히 달려온 청와대 경호원과 국회 방호직원에 의해 제압당했지만, 계속해서 “가짜평화주의자, 가짜 인권주의자 문재인이 어떻게 평화와 인권을 운운하냐”며 소릴 질렀습니다.

이 남성은 방호직원들이 제압을 한 상태에서 ‘잡지 말라’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에게 구두를 던져 놓고 잡지 말라고 하는 소리를 옆에서 듣고 황당했습니다.

덧붙여 이 남성은 “신발을 문재인을 향해 던졌으니, 그 사람 보고 고소하라고 하라”면서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잘 모르고 있는 듯했습니다.

구멍 뚫린 대통령 경호, 만약 폭탄이었다면?

▲기자와 구두 던진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서 촬영한 사진. 대통령 전용차 탑승 통로와 불과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구두 테러 사건을 목격하면서 만약 구두가 아니라 폭탄이었다면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청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방 검사를 했지만, 이 남성은 야외기단 쪽에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검사를 받지 않은 듯했습니다.

사진은 저와 구두를 던진 남성이 위치한 곳에서 촬영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전용차 탑승 위치와 약 10미터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총을 들었다고 해도 경호원들 때문에 저격할 수는 없었겠지만, 수류탄이나 사제 폭탄이라면 충분히 살상 반경 범위 내였습니다.

남성이 구두를 던진 직후 경호원들과 방호직원이 뛰어왔지만, 그 시간이 약 3초 이상이었습니다. 충분히 두 번째로 뭔가를 던질 시간적 여유가 됐습니다.

사실 경호원들이 남성을 바로 제압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장애인 통로라서 경호원들이 돌아서 올라와야 했고, 제가 좁은 통로에 서 있어 저를 밀치지 않고서는 바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호원들이 제 쪽으로 뛰어 오길래 저도 놀랐습니다.

극우 세력 중심으로 유사 사건이 벌어질 수도

▲경찰에 인계되기 전까지 방호직원에게 둘러싸인 구두 던진 남성. 이 남성은 자신은 일반 시민이며 국민이 받는 치욕을 느껴보라고 구두를 던졌다고 말했다.

아마 청와대 경호실은 이날 난리가 났을 겁니다. 비록 구두였지만 대통령 바로 곁에 떨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경호상의 허점을 보여준 셈입니다.

이날 경호원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설마 하는 마음 때문이었지 모릅니다. 저 또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향해 구두가 날아올지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 런식의 테러는 계속 생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극우 유튜버들은 마치 정씨를 애국지사나 의사로 지칭하며 오죽하면 구두를 던졌겠느냐며 옹호하고 있는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갖은 막말과 욕설을 하는 극우 세력 중에 또다시 비슷한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으로 청와대 경호실은 극우 세력들을 주시하며 지금보다 더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문재인 대통령에게 구두 던진 남자의 최후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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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면한 세계, 쿠바는 어떻게 코로나를 이겼나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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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0/07/17 12:01
  • 수정일
    2020/07/17 12: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쿠바와 코로나19] 느린 사회, 코로나바이러스를 만나다

여기, 우리가 외면해 온 작은 나라가 있다. '저개발국'이라 치부되던,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세계, 쿠바에도 코로나19는 찾아왔다. 그러나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2020년 7월 3일까지 쿠바의 누적 확진자는 2400명 이하이고, 총 사망자는 86명이다. 사망률도 WHO의 평균보다 낮은 3.6%이다. 쿠바는 어떻게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을까. <프레시안>은 현재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교에 재학중인 김해완 씨가 본 '쿠바의 의료 체계'와 관련된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가 혼비백산하기 전까지, 쿠바는 한국의 배낭족들 사이에서 격상하고 있던 새 여행지였다. 올해 3월에 쿠바 국경이 닫히기 직전까지도 아바나 시내를 돌아다니는 한국 여행객들이 보일 정도였다. 숨 쉴 틈도 없이 돌아가는 한국과 정반대라는 이질성에 끌렸던 것일까? 수많은 여행 책자들은 쿠바를 ‘시간이 멈춘 곳’이라고 소개했다.

 

쿠바가 원래부터 이런 정적인 이미지였던 것은 아니다. 한때 쿠바도 찬란한 근대화를 꿈꿨다. 1959년에 시작된 혁명 정부는 쿠바 경제를 왜곡시키는 외국 자본을 일소하고 국민 모두를 위한 발전을 추진했지만, 발전의 시계는 1991년에 멈췄다. 쿠바를 지원국이었던 소련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그 후로 쿠바는 미국의 경제 봉쇄를 홀로 버텨냈다. 이 고립된 생태계가 역설적으로 오늘날 어떤 사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느린 풍경’을 만들어냈다. 쿠바에서는 거의 모든 물품이 품귀이고, 인터넷 환경도 몹시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게 또 쿠바의 대체 불가능한 매력이다. 50년대 미국산 올드카가 여전히 길거리를 굴러다니고, 밤이 되면 말레꼰(아바나 바닷가의 방파제)에 모인 사람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여흥을 즐긴다. 개발의 열기가 침투하지 않은 커뮤니티 속에서 쿠바인들은 정을 나누며 소박하게 살아간다.

 

쿠바는 어떻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했나

 

이 조용한 섬나라에도 어김없이 코로나바이러스가 도착했다. 2019년 12월 중국에서 출발한 바이러스가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고 대서양을 가로지르기까지 석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쿠바의 국가수입 1위를 책임지는 것이 관광업인데, 이곳으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보내는 국가가 코로나바이러스를 혹독히 겪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쿠바 정부도 공항에 열화상 카메라를 설치하는 수준의 조치를 취했지만, 지역 사회 감염 리스크가 점점 불거지면서 결국 국경 봉쇄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관광업을 잠시 접더라도 팬데믹 방역에 힘을 쏟겠다는 뜻이었다.

 

국경 봉쇄를 나흘 앞두고 뉴스가 나오던 날, 쿠바에 있던 외국인들은 앞 다투어 쿠바를 탈출했다.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한국과 중국이 겨우 코로나바이러스의 불길을 잡았고, 의료 물자가 넉넉한 유럽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신속한 페이스에 완전히 휘둘렸다. 그런데 쿠바 같은 나라가 어떻게 코로나바이러스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곳에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도 없고, 의료 물자는 만성적으로 부족하며, 음압병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쿠바는 파죽지세의 바이러스를 막아낼 무기가 없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공유했던 믿음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예상을 깨고 쿠바가 연신 훌륭한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2020년 7월 3일까지 쿠바의 누적 확진자는 2,400명 이하이고, 총 사망자는 86명이다. 사망률도 WHO의 평균보다 낮은 3.6%이다. 수도 아바나를 제외한 지방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며, 3단계에 걸친 정상화 과정이 이미 진행 중이다. 중남미 대륙이 팬데믹의 새 진원지로 부상하고 있음에도 쿠바의 방역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루에 새 확진자가 4만 명씩 늘어나는 브라질 같은 이웃나라는 물론이고, 중남미 대륙 바깥과 비교해도 상황이 좋은 편이다.

 

게다가 쿠바는 의료 붕괴를 겪는 나라들을 돕기 위해 의료진을 외국으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시작부터 그랬다. 쿠바 의사들이 이탈리아로 파견된 것이 국제 뉴스에 떴을 때는 쿠바도 막 방역을 시작하던 3월이었다. 그 동기가 국제적 이타심이냐 의료의 정치화냐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세계 만국이 의료 붕괴로 쩔쩔 매는 상황에서 이는 대단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쿠바가 내민 손길이 그 나라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쿠바 아바나 시내의 거리 ⓒ박세열

쿠바의 발명품, 의료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떻게 이런 성취가 가능했을까? 쿠바의 의료체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결과에 놀라지 않는다. 쿠바에는 ‘가난한 의료선진국’이라는 별칭이 있다. 비록 경제규모는 선진국에 한참 못 미치지만, 의료 부문만큼은 그 수준이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 기준으로 쿠바는 인구 천 명 당 8명의 의사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나 중국보다 최소 네 배는 더 높은 수치다. 또 쿠바 의료 시설은 완벽하게 공공 영역으로서 전 국민에게 무상으로 제공된다. 따라서 쿠바의 평균 수명과 유아사망률이 선진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나은 것은 당연한 결과다. 물론 쿠바 의료를 미화해서도 안 된다. 쿠바의 어려운 상황은 의료 부문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의료 물자의 부족은 언제나 의료진의 발목을 잡고, 낙후된 의료 시설이 위험을 초래할 때도 있다. 제1세계의 인력과 제3세계의 조건, 쿠바 의료 시스템은 이 양면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이 독특한 의료제도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기세를 꺾을 수 있었던 것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지난 몇 달 간 쿠바의 방역 활동에 직접 참여한 의대생으로서, 나는 총 세 가지 이유를 꼽겠다. 첫 번째는 의료 제도의 높은 접근성이고, 두 번째는 뻬스끼사(pesquisa)라 불리는 의대생들의 문진(問診) 활동이며, 세 번째는 주민들의 끈끈한 커뮤니티다. 이번 프레시안 연재를 통해서 이 항목들을 하나씩 소개할 예정이다. 이번 글에서는 의료시설의 접근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번에 코로나 사태 때 쿠바인들이 보여준 일사분란함은 이 나라가 반세기 넘게 쌓아온 의료제도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 시간 동안 의료가 주민들의 일상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쿠바의 의료제도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100% 무상’이라는 키워드에 먼저 시선을 뺏긴다. 병원 문턱을 넘은 쿠바인들 중 누구도 돈을 내지 않는다. 방문 이유가 해열제 처방이든 간이식수술이든 상관없다. 이는 의료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지정한 헌법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병원비 무료만으로 의료 접근성이 개선되지는 않는다. 물리적인 접근성도 몹시 중요하다. 병원이 너무 멀어서 걸음하기가 어렵다면 이는 의료제도로부터 물리적으로 소외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쿠바 의료의 또 다른 아이콘이 탄생한다. 가족주치의와 그들의 근무지인 꼰술또리오(Consultorio)가 바로 그것이다. 꼰술또리오는 동네 산보를 하다보면 몇 개씩 볼 수 있을 만큼 흔하다. 어느 가정집에서든 도보 가능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가족주치의는 그곳에서 몇 년씩 상주하면서 평균 500가구의 가족들의 건강을 상시적으로 살핀다.

 

꼰술또리오는 쿠바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료 시설이다. 그 위에는 24시간 운영되는 동네 종합 병원인 뽈리끌리니꼬(Policlínico)가 있다. 하나의 뽈리끌리니꼬가 스무 개 정도의 꼰술또리오를 관리하는데, 가족주치의가 전문의의 소견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환자를 받는다. 뽈리끌리니꼬에서 해결할 수 없는 소수의 케이스만 오스삐딸(Hospital)이라 불리는 대형 병원으로 따로 운송된다. 이 체계적인 시스템은 무(無)에서 창조되지 않았다. 이는 ‘예방’을 화두 삼아 80년대부터 설계되었다.

 

▲쿠바 아바나 시내 바닷가의 풍경 ⓒ박세열

예방 의학, 1차 진료의 중요성 보여준 쿠바의 코로나 대응

 

물자가 항상 부족한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좋은 치료법은 무엇일까? 처음부터 발병을 막는 것이다. 병이 싹을 틔울 때 일치감치 그 뿌리를 뽑는 것이다. 이것이 일차 진료(primary care)의 의미이며, 일차 진료의 꽃인 꼰술또리오와 뽈리끌리니꼬는 실제로 80%의 환자를 조기에 치료한다.

 

예방의학에 최적화된 쿠바의 의료제도는 전염병 예방에도 제 몫을 해냈다. 이번 코로나 사태 때 쿠바 정부가 실행한 고육지책 중 하나가 대중교통의 전면 중단이었다. 통행량을 줄여서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였다. 쿠바에서는 개인 승용차를 소유한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들의 발을 묶어놓는 조치와 다름없다. 하지만 이 고립 조치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는데, 교통수단 없이도 의사를 만나는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사람들과 함께 동네에 산다. 병원은 먼 시가지가 아니라 바로 동네에 있다. 사람들에게 의료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팬데믹 속에서 이 ‘동네 의료팀’은 대체불가능한 자원이다. 덕분에 쿠바 정부는 안심하고 교통을 멈출 수 있었다.

 

동네의 고립은 오히려 의료인들의 역량을 지역 사회에 더 효과적으로 집중시켰다. 가족주치의들과 간호사들은 현재 휴일도 없이 근무하면서 동네 상황을 스캔하고 있다. 온 주민들이 자기 집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사태 파악이 더 용이하다. 확진자는 발생하자마자 동네에서 격리 시설로 신속하게 이동된다. 접근성 높은 의료체계에 양질의 의료진이 더해지면서 이뤄낸 쾌거다.

 

쿠바의 방역은 쿠바 맞춤형이다. 그대로 따라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쿠바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소중한 현장이다. 우리는 선진국에서만 과학과 의료가 발전할 수 있다고들 생각한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의료 환경을 갖추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쿠바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현장으로 증명한다. 테크놀로지가 발달하지 않고 정보도 전산화되지 않은 쿠바지만, 쿠바의 ‘아날로그 방역’의 효과는 훌륭한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세포 밖에서, 즉 사람 밖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렇다면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양상도 사람 사는 모습을 닮을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방법도 사람 사는 모습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저개발’이라고 치부되는 느린 사회에도 바이러스를 잡는 느린 전략들이 살아있다.

 

앞으로 이 전략에 대해 하나씩 소개할 예정이다. 의료진 외에도 의대생과 주민들 역시 방역에서 톡톡히 제 몫을 하고 있다. 전 세계 국경이 막혀버린 현재, 이 연재가 독자들에게 머나먼 쿠바를 여행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되었으면 좋겠다.

 

필자 김해완은 현재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교 재학생입니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 (북드라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북드라망), <뉴욕과 지성> (북드라망) 이 있습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71516230592795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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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생각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여성서사로 본 국보법 8월25일부터 한달간 전시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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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16  21: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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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원회'는 16일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8월 25일부터 9월 26일까지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사진제공-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원회]

지난 72년동안 국가보안법은 누군가의 생각과 말을 가로막는 악법이었다.

이 법이 특별한 어떤 개인들에게만 피해를 주는 법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한 전시회가 열린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원회'(추진위원회)는 오는 8월 25일부터 9월 26일까지 한달간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전시회를 개최한다.

추진위원회는 15일 오전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전시회 개최를 앞두고 사전 설명회 성격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전시회는 그동안 온전히 기록되지 않았던 국가보안법 피해자이거나 피해자의 가족인 여성들의 구술을 젠더석 관점에서 채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되며, 여성들의 구술은 책으로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1부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과 2부 '국가보안법 연대기'로 구성되며, 주요 주제인 1부에서는 구술채록집에 담긴 여성들의 목소리를 실제로 낭독하고 2부에서는 국가보안법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맥락을 인포그래픽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고애순, 권명희, 김은혜, 김정숙, 배지윤, 안소희, 유가려, 유해정, 정순녀 씨 등 국가보안법으로 감금된 세계를 경험한 11명의 여성들이 한 구술을 구술작가단의 홍세미, 이호연, 유해정, 박희정, 강곤 씨가 기록하고 구술자들의 사진은 정택용 사진작가가 촬영했다.

이들 여성들의 구술은 배우 문소리, 조민수, 소설가 정세랑, 황정은, 영화감독 김일란, 임순례, 래퍼 슬릭, 가수 요조, 문학평론가 손희정,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고 김시연 어머니 윤경희, 변호사 이상희 씨의 목소리로 일상공간에서 녹음되었다.

1부는 남영동 대공분실 심문실로 사용되던 5층에, 2부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한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자료를 바탕으로 4층 전시장에 구성된다.

민주인권기념관 중앙정원에는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을 상징하는 '12개의 문'이 설치된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국가보안법으로 잡혀온 사람들을 가둔 문을 뜻하는데, 각각의 문에는 국가, 민주주의, 자유, 평화, 정의, 그리고 법에 대한 질문이 새겨진다.

기념관 1층에는 국가보안법에 감금된 세계를 의미하는 검은 방이 설치된다. 끊임없이 국가보안법 법조항이 읊어지는 이 방에서 관객들은 방 구석 책상에서 국가보안법에 저항하는 글을 쓰고 그 글을 벽에 걸어두는 실천 체험을 할 수 있다.

전시회를 총괄 감독하는 권은비 예술감독은 "국가가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을 가지고 사람을 억압했는데 그 피해는 개개인의 몫이었다. 전시에 아티스트를 섭외하기보다는 당사자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며, "감금됐던 사상의 자유, 억압된 것들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 국보법 폐지운동을 주되게 한 이들은 여성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잘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시 취지를 밝혔다.

『기억, 기록, 망각에 반하여-여성의 목소리로 전하는 국가보안법』(가제) 책을 준비하고 있는 구술 작가단 강곤 작가는"'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라는 시민운동이 준비되면서 국가보안법이 박물관으로 간다면, 가기 전부터라도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목소리'’를 기록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이 작업의 출발점이었다"며, "그 목소리에는 당연히 국가보안법에 의한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가 담겨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당사자 주변의 사람들, 당사자이지는 않지만 피해를 당했던 사람들,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보안법과 당당히 맞선 싸우는 사람들, 더 나아가 국가보안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활용한 권력자, 가해자, 그리고 이 법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주요 주제로 잡은 이유는 "2018년 미투 이후 한국사회는 리모델링 되고 있는데,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환기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그와 같은 흐름과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거대담론이 아닌 우리의 삶, 일상, 소소한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김명환 위원장은 "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배치하거나 전시하는 것이 박물관인데 이번 전시에서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어야 할지 뚜렸이 보여주었으면 한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자, 죽어야 할 것은 국가보안법"이라고 강조했다.

김도형 민변 회장은 "국가보안법이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몇 국가가 되지 안된다. 특히 7조 천양고무죄는 이미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다. 전시회가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촉발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남규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이번 전시회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예술가가 함께 하고 시민의 참여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마련하려고 한다"며, "코로나 상황에서 많은 시민들이 관람하고 참가할 수 있도록 온라인으로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NSA.Museum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nsa_museum/

   
▲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전시회 포스터. [사진제공-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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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군사훈련, 알고보니 참수작전 포함된 ‘선제공격’

  • 기자명 강호석 기자
  •  
  •  승인 2020.07.15 18:05
  •  
  •  댓글 1
 
   
 

​주한미군을 비롯한 태평양사령부 미군기지들에서 코로나19 환자가 속출해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한 우려가 커진다. 하지만 정작 더 큰 걱정은 딴 데 있다.

오는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예정대로 전개되면 지난 6월 정식 편제로 출범한 레인저 부대가 출격한다.

이 경우 북한(조선)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대북전단에 대해 ‘최고 존엄’을 건드렸다며 보복을 각오하라던 북한(조선)이 ‘참수 작전’ 임무를 띤 레인저 부대를 어떻게 취급할지 불 보듯 뻔하다.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여부에 한반도 평화가 달렸다. 단지 미군부대에 만연한 코로나19가 군사훈련 과정에 확대되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적으로 대하는 행위를 중단키로 한 ‘4·27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대로 이참에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영구중단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의 길이다.

한미합동군사훈련은 참수작전 포함된 선제공격 훈련

한미합동군사훈련은 주한미군사령관이 비준한 ‘작전계획OPLAN’에 따라 전쟁연습을 진행한다.

2015년 6월에 발효된 ‘작전계획 5015’는 북한(조선)과의 전면전에만 초점을 두고 있던 작전계획 5027을 개선한 후속 계획이다.

작전계획 5027이 방어·반격·수복으로 짜인 방어개념인 반면, 작전계획 5015는 북한(조선) 핵심시설 700곳 이상을 유사시 선제타격하는 계획이다.

특히 작전계획 5015에는 북한(조선) 지도부를 겨냥한 ‘참수작전’을 위해 전쟁 시기에나 창설되던 미군 최정예 특수부대 ‘레인저’(제75레인저연대)를 한국에 둔다는 계획이 포함되었다.

단지 계획에 그친 게 아니라 2017년 5월에 임시 부대로 창설된 제75레인저연대 정보대대는 지난달 정식 편제로 출범했다. 이 부대는 무인항공기 운용, 정보 수집 및 분석(인간정보, 기술정보, 지형정보 등), 방첩, 사이버 대응 등을 맡게 된다.

▲ 레인저 부대에서 운용하는 MH-6M Little Bird. 레인저 부대는 1942년 창설된 제1레인저대대가 시초이고, 영화 라이언일병구하기의 밀러 대위가 제2레인저대대 C중대장이며, 영화 블랙호크다운에서 고전하는 부대는 제3레인저대대 B중대.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창설되어 전쟁이 끝나면 해체했다. 그러나 1975년 상설부대로 제75레인저연대가 창설되었다. [사진 : 미 특수 작전 부대 홈페이지]
▲ 레인저 부대에서 운용하는 MH-6M Little Bird. 레인저 부대는 1942년 창설된 제1레인저대대가 시초이고, 영화 라이언일병구하기의 밀러 대위가 제2레인저대대 C중대장이며, 영화 블랙호크다운에서 고전하는 부대는 제3레인저대대 B중대.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창설되어 전쟁이 끝나면 해체했다. 그러나 1975년 상설부대로 제75레인저연대가 창설되었다. [사진 : 미 특수 작전 부대 홈페이지]

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투입됐던 레인저 부대는 1950년 한국전쟁 때 6개 레인저 중대로 재창설되었다. 제8군, 제2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1기병사단, 제187공수연대, 제1해병사단 등에 배속되어 정찰, 습격, 매복, 반격 선두 부대 임무를 맡아보던 레인저 부대는 전쟁이 끝난 1956년 해체되었다.

한미합동군사훈련 종류만 14개

한미 합동군사훈련은 봄·가을에 실시하는 동맹연습(alliance exercise)이 대표적이다.

3월에 열리는 동맹연습은 1976년 팀스피릿(Team Spirit)으로 시작해 1994년에 한미 연합전시증원연습(RSOI)로 바뀌었다가, 2008년 키 리졸브(Key Resolve)와 독수리 연습(Foal Eagle)으로 대체됐다.

2018년엔 평창동계올림픽 관계로 쉬었다가 2019년에 “19-1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지만, 2020년 3월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실시되지 않았다.

하반기 동맹연습인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UFG)은 1954년부터 유엔사가 주관하던 포커스렌즈 군사연습과 정부 차원의 군사지원훈련인 을지연습을 통합한 훈련으로 매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실시한다.

2019년엔 프리덤가디언을 떼어내어 역시 “19-2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후반기 한미연합지휘소훈련’으로 교체됐다.

상·하반기 실시하는 한미 연합공중훈련 맥스 선더(Max Thunder)와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는 2019년부터 ‘연합 편대군 훈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밖에도 한미연합 상륙훈련인 쌍용훈련(격년제), 대테러 종합모의훈련인 연합대테러훈련(연 1회), 해상에서 모의전투·함포사격 등을 훈련하는 환태평양훈련(격년제), 선박수색 및 구조를 훈련하는 한·일 수색 및 구조훈련(격년제), 잠수함 승조원 구조를 위한 서태평양 잠수함 탈출 및 구조전 훈련(3년 1회), 기뢰대항전 훈련인 서태평양 기뢰대항전훈련(격년제), 잠수함 전력을 평가하는 한미 잠수함전 훈련(격년제), 상륙돌격을 위한 연합상륙전훈련(연 1회), 전력 중고도 침투훈련인 연합공격편대군훈련(연 6회), 저고도 침투 및 비포장 활주로 전술강습 이착륙 훈련인 태평양 공군 연합전술훈련(격년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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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은 환경잡지가 아니라 정치잡지다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산업주의 문화는 이러한 겸손의 자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성장해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인간'은 도덕적, 정신적으로 극히 왜소한 미숙아가 되어버렸다. 산업의 세계에서 만물의 척도는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자기 확대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분별없이 확대되어 왔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난폭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현재의 전 세계적 위기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웅변한다. 즉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農)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신문‧잡지의 칼럼을 모아 2016년 발간한 <발언 1,2>의 머리말에서 그는 "칼럼을 쓰는 동안 매일매일 발간되는 국내외 신문, 뉴스 매체들을 훑어보는 일이 어느덧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발언'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주목('경청')하는 게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열어 경청한다는 것은 '발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농민, 노동자, 생활인들의 '현장'이 논밭과 공장 혹은 시장인 것처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현장'은 뉴스매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끼니를 거르는 일은 있어도, 신문이나 뉴스매체를 거르고 지나가는 날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구독하는 몇몇 국내 신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터넷을 통해서 외국 언론매체들의 주요 기사, 논평들을 읽는 데 골몰하다 보면 오전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실제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한국에서 최초 또는 유일한 정기구독자인 외국 간행물이 여럿 된다고 자랑(?) 삼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탁월한 생태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처럼 폭넓은 탐색과 치열한 고민 끝에 지역화폐, 기본소득, 시민의회에 이르기까지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나아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에 참여하는 등 그는 근래 보기 드문 전 방위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걸은 길은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1999년 펴낸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의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2008년 펴낸 <땅의 옹호>에서는 2004년 대학 교수직을 떠난 이후 4년간 계속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대학생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자본주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김종철의 사상과 통찰이 절실한 이때,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가 말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저서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발언 1,2>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중에서 9편의 글을 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지금부터 28년 전 <녹색평론> 창간 직후, 주변에서 떠도는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간간이 들려왔다. 즉, 이 잡지가 하려는 것은, 비유컨대 물난리가 나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헐벗은 산 때문에 홍수가 났으니 모두들 산으로 가서 나무를 심자고 외치는 것과 같다, 라고. 요컨대, 내가 새로운 잡지를 창간하여 무엇인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은 지나치게 근본적인 문제, 즉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녹색평론>에 대한 이런 식의 비판 혹은 유보적인 태도는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아마도 그렇게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사람들은 아마 잡지의 이름이 주는 피상적인 인상에 근거하여 <녹색평론>을 단순한 '환경잡지'로 오인하고, 그럼으로써 이 잡지가 당면한 환경 현안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제안을 해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녹색평론>이 의도한 중심적인 작업은,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별생각 없이 당연하게 수용해왔던 삶의 관행, 즉 '서구식 근대'의 논리에 따른 산업경제와 그것에 의존한 문명을 근원적인 각도에서 의심해보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고 넓히는 데 기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단기적인 이해득실의 관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장기적, 포괄적, 심층적인 시각에서 현실을 진단하고 분석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한국 사회를 포함해서 온 세계는 지난 수십 년간 아까운 시간을 터무니없이 허비해왔다. 세계는 지금 기후변화와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비롯해서 미증유의 수습하기 어려운 환경적·사회적 위기에 직면해 있지만, 이는 이미 <침묵의 봄>이 나온 1960년대 초, 혹은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가 출판된 1970년대 초 이래 충분히 예고돼왔던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1970년대 동안 두 차례나 발생한 ‘오일쇼크’는 석유와 석탄,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기반을 둔 산업경제가 조만간 수명을 다할 것임을 명확히 경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는 화석연료에 너무도 깊게 중독된 나머지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하는데도 계속해서 같은 방식을 되풀이하면서 점점 헤어나기 어려운 수렁으로 빠져버렸다. 그 결과, 인간생존의 불가결한 기반인 자연 및 사회 생태계가 대규모로 파괴되었고, 마침내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조만간 여하한 형태의 문명이 존속하는 것도 불가능할지도 모를 심히 불길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만약에 우리 모두가 수십 년 전부터라도 '나무 심기'에 집중해왔더라면, 지금은 훨씬 더 희망적인 상황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물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문제는 이제부터라도 최악의 시나리오만은 피해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성실히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 ⓒ프레시안

말할 것도 없이,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인류사회는 그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의를 증대시켜왔다. 물론 그러한 풍요와 편의로 인한 혜택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인구는 언제나 매우 제한적이었고, 아직도 세계에는 최소한의 연명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역사상 유례없이 인간사회가 이토록 엄청난 생산성을 기록했다는 것은 놀라운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어리석고, 자기파멸적인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난 2~3세기 동안 이른바 문명세계가 산업문명을 통해서 이룩했다고 하는 높은 생활수준은 실은 인간사회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끊임없이 찢고 할퀴는 난폭한 짓을 되풀이함으로써 얻어진 부산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구 자본주의의 산물인 산업경제와 그것에 의존해온 근대적 문명은, 그것이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와 지하자원을 대량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인 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종말의 파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계를 그 출발점에서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영구적인 지속이 가능한 방식, 즉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적 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순환적' 방식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탐구하고,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방향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유한한 지구상에서 직선적인 성장·진보를 끝없이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인 모순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이상, 지금 가장 긴급한 것은 순환적 삶의 패턴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혜롭게만 실행한다면 거의 영구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영위를 보장하는 거의 유일한 생존·생활 방식이 농사라는 점을 재인식하고, 그 농사의 궁극적인 토대인 토양을 건강하게 가꾸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숙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순환적 삶의 질서의 회복과 흙의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회로 방향전환을 하자면, 우리의 집단적 삶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사결정 과정, 즉 '정치'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이 "지금 인류사회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환경위기가 아니라 정치의 위기이다"라고 했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녹색평론>과 그 밖의 지면을 통해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내가 되풀이해서 강조해왔던 것은 그 때문이다. <녹색평론>의 창간 전후로부터 그동안 나는 위와 같은 생각을 계속해서 토로해왔다. 그중에서 특히 지난 10년간 여기저기서 행한 발언들을 추려서 한 권으로 묶은 것이 이 책이다. 여기에 실린 상당수의 글은 원래 여러 시민단체나 자주적인 학습모임의 초대를 받아서 행한 강의 혹은 강연을 녹취해서 정리한 것들이다. 녹취록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부분적으로 때로는 대폭적으로 수정·보완 작업을 했지만, 글들 하나하나의 기본적인 논지나 전체적인 어조는 강의나 강연 당시의 현장 분위기를 가급적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책상 위에서 홀로 글을 쓰는 작업에 몰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과 숨김없이 번민을 나누며, 그들의 눈에 내 눈을 맞추고, 그들의 표정의 변화를 살피면서 한 시간이나 두 시간씩 집중해서 이야기를 하고, 또 그들의 질문이나 의견을 귀 기울여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늘 사전에 원고를 준비하는 대신에, 대충 요지만 적은 메모지를 들고 강의나 강연에 임해왔는데, 나의 오래된 이 습관은 물론 찬양할 만한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내 습관 때문에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사람들과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분히 주관적인 착각일 수도 있겠으나, 어떻든 그러한 생각과 말하기 습관의 산물이 이 책이라는 점을 여기서 밝혀두고 싶다.


 

일찍이 소비에트혁명의 성과가 스탈린주의라는 폭력적 지배에 의해 변질되고 왜곡되어 가던 참담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뛰어난 시인, 작가, 지식인, 예술가들 중 너무나 아깝게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시대가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런 캄캄한 시대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절망적으로 살아가면서도 한 줄기 가냘픈 희망의 빛을 보고자 갈망해마지 않았던 이들의 심경을 표현하는 말에 "hope against hope"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아마도 지금 우리들의 경우에 가장 적합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암울하다고 해서 우리는 마냥 절망 속에 빠져 있거나 체념에 잠겨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책임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장에 희망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데 전념하는 길 이외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위대한 영화예술가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걸작〈희생>의 모티프가 되었던 중세 수도사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현실이 될지 모르는 것이다. 즉,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일망정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일념으로 물을 길어 붓기를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그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보는 행운이 우리에게도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출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녹색평론사, 2019년, 5~9쪽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71417244614004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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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출범 법정시한 넘긴 공수처, 개혁 훼방꾼 자처한 통합당

민주당 “공수처 출범 연기는 민의 배신이자 국회 책임 방기”, 7월 국회서 후속 입법 처리 방침

김도희 기자 doit@vop.co.kr
발행 2020-07-15 18:15:31
수정 2020-07-15 18: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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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시행일인 15일 경기 과천 정부과천청사에 차려진 공수처장 사무실이 언론에 공개되고 있다. 2020.07.15.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시행일인 15일 경기 과천 정부과천청사에 차려진 공수처장 사무실이 언론에 공개되고 있다. 2020.07.15.ⓒ뉴시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결국 법에 명시된 출범 시한을 지키지 못했다. 공수처법은 15일부터 시행되지만 이를 진두지휘할 공수처장에 대한 논의는 아무런 진척이 없다.

공수처장 후보자 임명 전 대통령에게 후보자를 추천하기 위해 국회에 꾸려져야 할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회조차 아직 미완성 상태다. 공수처법에 따라 후보추천위원은 7명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여야 교섭단체인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각각 2명씩 위원을 국회의장에 추천해야 한다.

이에 민주당은 지난 13일 여당 몫 추천위원 2명으로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장성근 전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선정했다. 하지만 장 변호사가 ‘텔레그램 n번방’ 사건 피의자 조주빈의 공범 강 모 씨의 변호를 맡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국 사임했다.

통합당은 애초에 추천위원 추천에 관심이 없다. 이들은 공수처가 입법부·행정부·사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공수처 자체를 ‘야당 탄압 수단’으로 규정했다.

앞서 2월과 5월 헌법재판소에 공수처법 위헌 여부를 따지는 헌법소원을 제기한 통합당은 이를 핑계 삼아 헌법소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공수처장 추천을 ‘쭉’ 거부하겠다는 태세다.

 

더군다나 장 변호사 사임 뒤 통합당의 목청은 더욱 커졌다.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전날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이 무리하고 성급하게 독촉하다가, 드디어 급하게 먹다가 체했다”고 말했다. 공수처 관련 논의를 차일피일 미루는 통합당에 공수처 출범은 첫 단추부터 단단히 발목이 잡혔다.

이 밖에도 공수처 공식 출범을 위해 밟아야 할 절차는 첩첩산중으로 남아있다. 공수처장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 진행을 위해 인사청문회 대상에 공수처장을 포함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과 인사청문회법 개정안 등 후속 입법도 이뤄져야 한다. 일단 민주당은 7월 임시국회에서 인사청문회법 등 공수처 후속 법안들을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1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2020.07.15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1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2020.07.15ⓒ정의철 기자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수처를 출범시켜야 할 국회가 법률에 따른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 공직자의 위법, 탈법을 조사하는 기관의 출범을 공직자인 야당 국회의원이 막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지적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민주당 박주민 최고위원은 통합당의 헌법소원 제기와 관련해 “전혀 타당하지 않다”며 “공수처는 국회가 입법으로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입법과 사법 그리고 행정 권력이 모두 관여하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라고 하는 삼권분립의 원칙이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박 최고위원은 “통합당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타당하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서 공수처 설치를 위한 진행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라며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만들어진 공수처인 만큼 출범을 연기하는 것은 민의를 배신하는 일이며 국회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만약 통합당이 공수처 출범에 비협조로 일관할 경우, 민주당은 통합당이 자신들 몫 공수처장 후보추천위원을 요청 기한까지 추천하지 않을 때 국회의장이 교섭단체를 ‘지정’하고 위원 추천을 요청하도록 하는 강수를 둘 수 있다. 민주당 백혜련 의원이 이러한 내용을 담은 공수처장후보추천위 운영 규칙안을 발의한 상태이다.

다만 이는 중립성 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커 민주당 입장에서도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박 최고위원은 같은 날 YTN 라디오에서 “이미 만들어진 법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야당을 지속적으로 설득도 하고 압박도 해나갈 것”이라며 “규칙으로 법을 바꿀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당에서 공식적으로 법 개정을 지금 검토하거나 고민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한편, 지난 2월 정부가 발족한 공수처 설립준비단은 15일 공수처법 시행에 맞춰 관련 법령 정비와 사무 공간 조성 등 업무 수행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남기명 준비단장은 전날 보도자료에서 “공수처의 조속한 출범을 위해 국회가 후속 법안 처리와 처장 인선 등에 적극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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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박원순을 죽였는가?

김봄 | 기사입력 2020/07/1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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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2017년 7월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대통령 당선까지 보고 동면에 들었다가 2020년 7월에 3년 만에 깨어났다고 상상해보자.

 

그 사람에게 그동안 일어난 일들에 관해 설명해준다.

 

“문재인과 함께 대선 경선 후보였던 안희정은 감옥에 갔고, 다른 후보 이재명은 내내 재판 중이며, 김경수 경남지사도 구속됐다가 나왔으나 재판 중이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살했다. 그리고 1년 전부터 조국 사태, 윤미향 사태를 거쳐 이번 박원순 사태를 거치는 동안 진보개혁진영은 자기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고 있다.”

 

그 사람은 뭐라고 할까?

 

아마도 대번에 이 사태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말할 것이다.

 

똑같은 일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반복된다면 그것은 패턴의 형태를 띠는 것이며 그렇다면 공작을 의심해 봐야 한다.

 

팩트가 무엇이냐고 싸우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팩트를 가려볼 수 있는 ‘정보’라는 게 모두 언론과 검찰을 통해서 발표되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하늘로 보내고, 한명숙을 감옥으로 보내고도 아직 일부 진보개혁 세력들은 저들의 ‘정보’를 그대로 믿어버린다.

 

‘논두렁 시계’에 흥분하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분개하던 전철을 그대로 다시 밟는다.

 

한명숙을 감옥에 보내기 위해 한만호를 협박하여 위증하게 했던 사실이나, 한만호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위증 사실을 폭로하자 그와 함께 감옥생활을 하던 수인들을 모아 위증 훈련을 시켜 한만호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던 적폐들의 끔찍한 공작은 잊힌다.

 

박원순 사태에서도 고소인은 이미 피해자가 되어있으며 ‘피해자와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고소인이 모두 피해자라면 조국을 고소하고, 대통령을 고소하고, 진보 인사들을 고소한 보수 인사들은 다 피해자인가.

 

그 사안과 이 사안은 100% 다른 사안인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가?

 

‘미투’가 자칫 저들이 쳐놓은 함정과 올가미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노무현, 한명숙 사례에서 보이듯 ‘팩트’는 오랜 세월과 치열한 노력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두렁 시계’나 ‘돈 가방’과 같은 자극적인 ‘정보’가 아니라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가장 빠른 방법은 이 사태를 통해서 누가 가장 이득을 보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더불어 조선일보 등 적폐들이 어떤 입장을 보이는가를 주목해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사태로 이득을 보는 것은 적폐 세력이다.

 

이렇게 나침반을 다시 살려놓고 사태 분석을 종합해보면 저들의 수법이 얼마나 악랄한지 새삼 놀라게 된다.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세력들은 오랫동안 경찰과 군대를 내세웠고, 국가보안법과 색깔론이라는 무기로 진보개혁 세력을 탄압했다.

 

그러나 지금은 검찰과 언론을 앞세워 공작과 조작을 일삼으며 도덕성으로 교묘하게 공격해서 진보개혁진영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수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수법을 그대로 배운 것이다.

 

미국은 원래 전쟁을 통해 반미국가들을 무너뜨려 왔으나 최근에는 인권 문제 등을 내세워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전쟁의 방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적폐들도 쿠데타나 국가보안법을 포기하진 않는다.

 

하지만 전쟁으로 이기는 것보다 내부를 분열시켜 붕괴시키는 방법은 저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유혹이다.

 

박원순 사태에서 점잔을 떠는 미통당을 보면 저들의 참을 수 없는 기쁨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누가 박원순을 죽였는가.

 

아직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그리고 가해자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죽음이 연속적인 패턴 위에 있으며 그 결과로 이득을 보는 무리는 적폐들이라는 것에서 의혹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보개혁진영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끼리의 싸움을 멈춰야 한다.

 

‘현상’이 복잡하면 가만히 눈을 감고 ‘본질’을 생각해 보아야 하며, 적폐들의 ‘정보’는 무조건 의심하고 봐야한다.

 

또 저들이 ‘도덕성’을 새로운 공격수단으로 즐겨 사용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눈에 불을 켜야 하며 그 공격에 맞서 싸워야 한다.

 

도덕의 ㄷ자도 지키지 않는 저들이 적반하장으로 쳐놓은 ‘도덕성’이라는 덫을 깨부숴야 하며 적폐 청산의 기치 아래 비록 흠이 있더라도 누구라도 단결해야 한다.

 

진보의 도덕성은 적폐를 청산하는 투쟁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없다.

 

지금은 적폐 청산에 진보개혁 세력이 굳게 뭉칠 때다.

 

7월 15일 발족한다던 공수처는 간데없고, 추미애에게 대들다가 두들겨 맞은 윤석열 뉴스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 다른 민주인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적폐들을 완전히 박멸해야 한다.

 

이 시대의 도덕은 적폐 청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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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경기지사 ‘운명의 날’…대법 판결이 몰고 올 후폭풍

묻지 않은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허위사실공표?
 
임병도 | 2020-07-16 09:43:5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재명 경기지사의 정치적 운명이 결정 나는 대법원 상고심이 오늘 (7월 16일) 오후 2시에 열립니다.

이 지사는 성남시장 재임시절에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도록 한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와 TV토론회에서 ‘친형을 강제입원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에 대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대한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2012년 6월 보건소장과 정신과 전문의에게 친형을 강제로 입원시킨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는 1·2심모두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TV토론회 발언에 대한 ‘허위사실 공표 혐의’입니다. 1심은 무죄였지만 2심은 유죄로 판단 당선무효형인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이미 1·2심에서 무죄로 나온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는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허위사실 공표 혐의’는 의견이 엇갈려 판결을 끝까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묻지 않은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허위사실공표?

▲김홍국 경기도 대변인이 이재명 경기지사 대법원 선고를 하루 앞두고 페이스북에 올린 글 ⓒ페이스북 화면 캡처

김홍국 경기도 대변인은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법원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것처럼, 이 재판의 쟁점은 “‘부진술’을 허위사실로 볼 수 있느냐’이다. 쉽게 말해 상대가 묻지 않은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부진술)’을 허위사실 공표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 쟁점”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김 대변인은 “참고로, 1심과 2심 모두 이재명 지사의 친형 강제진단 시도에 대해서는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무죄판단을 내렸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적법한 행위임에도 방송토론에서 상대가 묻지 않은 일부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적극적인 허위사실 공표 행위가 되는지에 대한 판단을 대법원이 내리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대변인은 “정확한 보도로 국민에게 올바른 판단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언론에게 주어진 책임과 역할”이라며 “사실과 다른 보도 내용을 신속하게 바로잡음으로써, 희망과 정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시길 요청드린다”며 대법원 홈페이지에 게시된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쟁점 사항을 첨부했습니다.

내년 재보궐 선거가 위험한 민주당

▲7월 15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해찬 대표는 광역단체장 중도 사임에 대해 참담하다고 말했다.

15일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우리당 광역단체장 두 분이 중도에 사임을 했다”며 “당 대표로서 참담하다”고 말했습니다.

오거돈 부산시장의 성추행 의혹으로 인한 사퇴와 박원순 서울 시장의 사망. 만약에 이재명 경기지사가 당선무효형을 받아 지사직을 박탈당하면 민주당은 초비상 상황입니다.

서울, 부산, 경기도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지방자치단체장을 잃게 되면 내년 재보궐선거는 물론이고 대선까지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재보궐선거에 후보자를 내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민주당 당헌 96조 2항을 보면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하여 재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재보궐선거에 후보자를 내는 자체가 빌미를 제공하기에 당헌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김경수 경남지사의 재판까지도 남은 상황에서 민주당 지도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재명 경기지사의 무죄 판결뿐이 됐습니다. 이재명 지사의 대법원 선고는 TV와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되는 데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이후 두 번째입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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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에도 변한 게 없다” 무력감이 여성 울분 키웠다

등록 :2020-07-15 05:00수정 :2020-07-15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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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왜 이렇게 분노하는가

안희정·오거돈 이어 박원순까지
“권력 차이 확인해 절망스러워”
“반복된 미투에도 변한 게 없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직장인 이상희(가명·33)씨는 지난 6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 넘게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웠다가도 화가 솟아올라 벌떡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지난 6일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씨의 미국 송환이 불허된 뒤 그의 아버지가 “재판부에 감사하다”고 인사했다는 기사가 또렷이 떠올랐고, 같은 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모친상 빈소에 늘어서 있던 정치인들의 근조 화환들이 생각났다. 불면의 ‘정점’을 찍은 건 성추행 피소 이후 죽음을 택한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 때문이다.

 

이씨는 “그나마 손정우 송환 불허 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공감대가 있었는데, 박원순 사건에선 상식적으로 이야기가 통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마저 연령에 따라, 성별에 따라 결국 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명징하게 드러났다”고 했다. 그는 “지난 일주일 동안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내게 준 메시지는 ‘여성은 이 나라에서 동등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니 절대로 결혼하지 말아라. 애도 낳지 말아라’였다”며 “한국에서 젠더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여실히 볼 수 있던 시간”이라고도 말했다.

이씨처럼 지난 한주간 발생한 세 가지 사건으로 인해 분노와 고통을 동시에 호소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양상은 각각 다르지만, ‘여성이 안전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사법부와 정치인, 주요 공직자 등 권력층에게 부정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범죄의 미온적인 처벌과 가해자 감싸기가 반복되면서 일종의 트라우마가 재생산된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각자가 겪은 성희롱·성추행 경험을 떠올리게 만드는데다, 디지털 성폭력, 직장 내 성폭력 등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공론화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학습된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 &lt;한겨레&gt;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 <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40대 중반의 이아무개씨는 “박원순 시장 사건으로 대학 시절 진보적이라는 교수한테 성추행당한 일이 생각났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성추행·성희롱을 여러 차례 겪었다”며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이렇게 일상적인데, 당의 대처 계획을 묻는 기자에게 화를 낸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나, 안희정 전 지사 모친 상가 앞에 놓인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를 보면 ‘민주진보진영’이라고 불리는 인사들의 젠더 감수성이 여전히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직장인 최아무개(28)씨는 “안희정, 오거돈 등 반복되는 ‘미투’ 사건 와중에 이뤄진 성추행 사건이라는 걸 알고 더욱 화가 났다.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겐 어떤 학습효과도 없었다는 절망감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특히 박원순 시장 사건에 분노하는 여성들은 ‘소극적 2차 가해’의 문제를 지적한다. 김은선(가명·31)씨는 “피해자의 신상을 털고 비난하는 게 ‘적극적 2차 가해’라면, 주요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가해자를 칭송하는 건 ‘소극적 2차 가해’”라고 말했다. 김씨는 “개인 에스엔에스에 남긴 글까지 기사화가 될 만큼 큰 ‘스피커’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박원순과의 인연을 언급하며 그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강조할수록 피해자가 위축됐을 것”이라며 “피해자와 가해자 간 발화 권력의 차이를 확인해 참담했다”고 말했다. 김유진(가명·42)씨는 “성폭력 의혹을 받는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나쁜 선례를 남겼는데, 그의 주변에선 여성들의 분노에 오히려 분노하며 ‘예의’를 지키라고 하니 진짜 예의가 뭔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내재돼 있던 트라우마가 외부 사건으로 다시 자극(trigger)을 받을 경우 이상희씨처럼 분노가 불면, 소화불량, 무력감 등 신체적 반응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씨는 “실제로 지난주에 발생한 세 사건으로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상담 신청이 늘었다”며 “피해 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정’과 ‘배상’인데, 공동체가 이를 어떻게 이행해 나갈지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누구도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여성들이 더는 허탈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연대의 힘을 보여줘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정치와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다해 채윤태 기자 doal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953698.html?_fr=mt1#csidx9b05e5a9c423822bfc388784e68d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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