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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월급부터 깎아라!”…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성토

  • 기자명 조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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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7.0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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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임위 5차 전원회의, 사용자위원 ‘삭감안’ 변화 없어
최저임금 노동자, 삭감안에 분노… “사용자 월급 깎고, 재벌 곳간 열어라”

2021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 지난 1일 4차 전원회의에서 노동자위원들은 올해 최저임금 대비 16.4% 인상한 시급 1만원을, 사용자위원들은 2.1% 삭감안인 시급 8,410원을 최초 요구안으로 제시했다. 이후, 7일 열린 5차 전원회의에선 노사가 제출한 수정안을 바탕으로 격차를 좁히려 했으나 사용자위원들은 ‘삭감’에 대한 입장에 변화가 없었고, 양측의 수정안은 제시되지 않았다.

사용자들의 최저임금 삭감안에 대해 대표적인 최저임금 노동자인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8일 마트산업노동조합(마트노조)이 보도자료를 통해 사용자들을 향한 현장노동자들의 분노를 전했다.

▲ 사진 : 마트노조
▲ 사진 : 마트노조

“이재용 부회장의 시급은 5,600만 원, 말로만 고통 분담하지 말고 같이 좀 살자.”
“사용자들부터 월급 깎고 최저임금으로 좀 살아봐라!”
“매출 잘 나올 때는 많이 줬나? 2.1% 인상해도 어려운데 깎자니 골이 당긴다.”
“재벌 곳간 열어라! 최저임금 노동자가 무슨 봉이냐?”
“재벌은 쌓아 두는 게 목표지만, 최저임금 노동자는 먹고사는 문제다.”

정준모 마트노조 교선실장은 마트노동자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고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지난해 실태생계비로 예측한 내년도 실태생계비는 225만7702원이다. 주요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월급여는 이마트 1,797,000원, 홈플러스 1,795,310원, 롯데마트 1,601,300원 수준(무기계약직 기준)으로 실태생계비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최임위에 참여하는 사용자위원들은 이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나 할까?

최임위에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정민정 마트노조 사무처장은 “오늘(5차 전원회의)도 사용자들은 삭감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저들은 코로나19 위기에 고용해 주는 것이 어디냐며, 임금이 깎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냐고 한다. 사용자위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신들이) 경기 좋을 때는 임금 잘 올려주고, 한 명만 써도 될 걸 굳이 두 명 쓰고 그랬던 것처럼 말하는 것 같다”고 5차 전원회의에서 사용자위원들의 태도를 돌이켰다.

정 사무처장은 또, “회의 중 ‘최저임금은 누군가의 돈을 빼서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치 우리가 남의 것을 빼앗는 도둑으로 치부된 것 같아 분노를 금치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사용자들이 벌어들이는 수익, 누가 만든 것인가? 우리 노동자들의 노동 없이 사용자가 돈을 벌 수 있는가?”라고 따져 묻곤 “일한 사람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이 팍팍한 것은 “사용자들과 우리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노동을 ‘(임금) 조금만 줘도 되는 하찮은 노동’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 아니냐”고 분노했다.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최저임금. 올해 코로나19 재난 속에 논의되는 2021년 최저임금 결정은, ‘최저임금이 곧 월급’인 최저임금 노동자들에게 더 큰 관심일 수밖에 없다.

“재난시기 가장 보호받아야 할 최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돌리기 전에, 재벌들의 사회적 책임 강화로 사내유보금을 1000조 원의 일부를 환원해서 최저임금 노동자와 중소기업·소상공인을 위해 환원하라”라는 것이 노동자들의 요구다.

김기완 마트노조 위원장은 “2020년 최저임금 1만원을 약속하고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최저임금 1만원을 책임있게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은 다음 달 5일 최저임금 고시 시한을 고려해 오는 13일을 최저임금 심의 기한으로 제시했다. 최임위 6차 전원회의는 9일 15시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열린다. 심의 기한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이날 최저임금의 윤곽이 나올 거라는 전망이다.

지난 7일부터 세종시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일일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민주노총은 이날 오후 3시30분 ‘먹고 살자 최저임금 투쟁승리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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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윤석열에 최후통첩…“9일 오전 10시까지 기다린다”

강경훈 기자 qa@vop.co.kr
발행 2020-07-08 10:24:30
수정 2020-07-08 10:24:30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추미애 법무부 장관ⓒ정의철 기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검언유착 의혹 사건 지휘권 발동에 대한 답변을 하루 안에 달라고 8일 최후통첩을 보냈다.

추 장관은 이날 오전 10시께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더 이상 옳지 않은 길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총장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다”며 “9일 오전 10시까지 하루 더 기다리겠다”고 밝혔다.

추 장관은 지휘권 행사 다음날인 지난 3일 있었던 전국 검사장 회의에서 윤 총장의 수사 지휘를 배제하는 내용의 지휘가 위법·부당하다는 의견이 나온 것과 관련해 “검찰조직 구성원의 충정과 고충을 충분히 듣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다만 “공(公)과 사(私)는 함께 갈 수 없다. 정(正)과 사(邪)는 함께 갈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추 장관은 “어느 누구도 형사사법 정의가 혼돈인 작금의 상황을 정상이라고 보지 않을 것”이라며 “국민은 많이 답답하다. 우리 모두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고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 장관은 최초 지휘권 발동을 한 지난 2일 이후 윤 총장의 답변이 없자, 닷새 째인 지난 7일 “좌고우면 말고 지휘사항을 문헌대로 신속히 이행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검찰 내부에서 수사팀 교체 및 제3의 특임검사 주장이 제기된 데 대해서는 “명분과 필요성이 없고 장관의 지시에 반한다”고 일축한 바 있다.

강경훈 기자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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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문재인 저격 후 조중동이 받아든 성적표

[정연주의 한국언론 묵시록 23] 조중동 쇠락사(4)

 등록 2020.07.08 08:21 수정 2020.07.08 08:21
 
 

▲ 조선일보앞 '1차 페미시국광장' 개최 고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 관련 왜곡, 은폐, 축소 수사를 규탄하고 실체적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제1차 페미시국광장 - 시위는 당겨졌다. 시작은 조선일보다'가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조선일보사 부근 동화면세점앞 광장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 주최로 열렸다. 주최측이 조선일보 대형 간판아래쪽에 대형 빔프로젝트를 이용해서 '고 장자연 배우에게 사죄하라' '폐간하라' '검찰 경찰 모두 공범' '수사 외압 언론 적폐' 구호를 비추고 있다. 2019.7.12 ⓒ 권우성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바닥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은 나라 안팎의 여러 자료들에 의해 확인된다. 국제 자료로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해마다 시행하는 나라별 신뢰도 조사가 있다. 한국은 이 신뢰도 조사에 포함된 2016년부터 올해까지 '5년 연속 꼴찌'의 불명예를 기록했다. 국제 사회에 비친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 이슈' 2020.6 6권 3호). 
 
'뉴스 전반에 대해 신뢰한다'는 조사에서 한국은 2016년 23%, 2017년 23%, 2018년 25%, 2019년 22% 그리고 올해 21%로 조사 대상국 가운데 모두 꼴찌를 차지했다.
 
이 조사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한국의 뉴스 매체에 대한 신뢰조사 결과가 나왔다. JTBC가 1위를 차지하고 MBC, YTN, KBS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는 결과인데, 신뢰도가 바닥인 꼴찌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정파성에 갇혀 신뢰도 바닥

지역신문을 제외하면 신뢰도 바닥은 조·중·동 순으로 나왔다. '1등 신문' 경쟁을 하고 있다는 조중동이 가장 품질이 불량하다는 판정을 받은 셈이다. 그렇게 된 원인이야 여러 가지 있지만, 같은 사안을 두고 정권에 따라 주장이 정반대로 바뀌는, 정파적 말바꾸기도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정파성에 갇혀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하고, 일방적 주장을 하는 그동안의 반 저널리즘적 행태가 신뢰를 갉아 먹어온 것이다.
 

▲ 한국은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 항목에서 40개국 중 최하위였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이런 결과는 이미 2년 전 국내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층 조사에서 예측되었다. 당시 조사에서 기자들은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바닥에 이른 가장 큰 원인으로 '오보, 왜곡보도, 선정보도 등 낮은 수준의 기사' (81.8%)를 꼽았으며, 그 다음으로 '정치적·이념적 입장에 기초한 정파적 보도'(40.9%)라고 응답했다(복수응답). [관련기사 : 우린 왜 오보를 쓰게 됐나 기자 22명의 고백(http://omn.kr/1mcc4)]
 
지난 번 글에서 '대북 전단 살포'라는 같은 사안에 대해 조중동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와 문재인 정부 때 어떻게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는지 기록했다. 이번에는 경제위기, 재정확대 정책, 인사청문회 등에서 어떤 이중 잣대와 말바꾸기를 했는지 보도록 하자.
 
'단군 이래 최대 환란'에 대한 조중동의 시선

국가 부도로 나라 경제가 파산하기 직전, 한국은 굴욕적인 조건들을 감수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 1997년 12월 3일의 일이다.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에 이르렀고, IMF 구제금융이 아니었으면 국가부도가 현실화할 정도로 외환위기가 심각했다.
 
'단군 이래 최대 환란'이라던 엄청난 경제위기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는데, 당시 조중동은 이를 외면했다. IMF 구제금융 한 달 전인 11월 1일 중앙일보는 '경제위기감 과장말자'라는 사설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11월 3일 '경제, 비관할 것 없다'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시론을 실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이 글에서 환율상승은 긍정효과가 있으며, 증시불안도 일시적이라며 낙관론을 폈다. 동아일보는 11월 8일, 당시 외환위기 상황을 '한국 흔들기 특정세력 유포 가능성'이라는 기사에서 "최근 국제금융시장에 한국 경제를 의도적으로 흔들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악성 소문이 횡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3당 합당으로 정권을 잡은 김영삼 정부 말기 때 일이다.
 
시간이 흘러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 되었다. 조중동은 참여정부 기간 줄곧 '경제 위기' '경제 파탄'을 이야기했다.

- 한국 경제는 시한부 생명인가 (조선일보 2003.8.26. 사설)
- 상승하는 세계 경제, 추락하는 한국 경제 (조선일보 2003.10.17. 사설)
- 한국이 선진국 되기도 전에 주저앉는다는데(조선일보 2005.10.7. 사설)
- 한국 경제 이대로 가다간 회복 불능 (중앙일보 2004.5.10. 사설)
- 경제는 참여정부처럼 하지 말라 (동아일보 2007.8.8. 사설).

 

▲ 이명박정부의 재정확대 정책에 적극적이던 조중동이 코로나19 사태로 전세계적으로 경제가 곤두박질 친 위기에서 문재인 정부가 재정확대 정책을 펴자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 조선일보

 
"지금은 재정 쏟아부을  때" → "나랏돈 못써 안달 난 분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발 금융위기가 휘몰아쳤다. 조중동은 IMF 위기 직전 '위기감 과장 말자', '경제 비관할 것 없다'며 애써 위기론을 잠재우려 했던 그 역할을 이번에도 반복했다.

- 한국 경제, 불신을 풀자 – 소문과 공포가 스스로 위기 부른다 (조선일보 2008.10.30.)
- 공포심 과민반응이 사태 악화시킨다 (중앙일보 2008.10.8.)
- 국가적 위기설은 '괴담' 수준. 정부도 대증요법 벗어나야 (동아일보 2008.9.4.)

 
미국발 금융위기가 폭풍처럼 무서운 기운으로 번지자 각 나라 정부는 재정확대 정책을 서둘러 도입했다. MB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중동도 적극 지원에 나섰다.

- 지금 국가부채 걱정할 때인가 (조선일보 2009.1.10.)
- 한발 앞선 대응 긍정적... 위기 심각성에 비해 규모는 미흡 (조선일보 2008.11.4.)
- 재정 확대가 유일한 대안 (중앙일보 2009.1.30.)
- 지금은 재정 쏟아 부을 때 (중앙일보 2008.12.11.)
- 작은 정부 일단 접고, 한국판 뉴딜정책 예고 (동아일보 2008.10.28.)

 
이렇게 재정확대 정책에 적극적이던 조중동이 코로나19 사태로 전세계적으로 경제가 곤두박질친 위기에서 문재인 정부가 재정확대 정책을 펴자,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 빚으로 GDP 끌어 올리기... 이번엔 '좋은 채무론' 들고나왔다 (조선일보 2020.5.26.)
- 문 대통령 돈 쓰겠다면서 증세 등 재원 얘기는 안해 (조선일보 2020.5.26.)
- 나랏돈 못 써 안달 난 분들 (중앙일보 2020.5.28.)
- 정부 전시재정 선언... 눈덩이 나랏빚 비상 (중앙일보 2020.5.26.)
- 참을 수 없는 현금살포의 유혹 (동아일보 2020.5.18.)
- 국가채무 급증, 재정지출 늘려도 물 뿌리기식 현금 살포 안 되게 (동아일보 2020.5.26.)

 
"약간의 흠도 안 된다" → "후보자 능력이 중요"

정권에 따라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중 잣대와 놀라운 변신을 아주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인사청문회 때 등장하는 정반대의 논리와 주장이다.
 
노무현 정부 때 조선일보는 '사소한 불법이나 도덕적 상처'도 안된다며 이렇게 비판했다.
 
... 200년의 인사청문회 전통을 갖고 있는 미국에선 내정자들이 사소한 불법이나 도덕성에 상처받는 사안이 불거지면 자진해서 사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직을 맡겠다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인격 수양은 돼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2006.2.9. 사설 '대통령은 또 인사청문회 결과를 무시할 것인가')
 
3년 뒤 이명박 정부 때 조선일보는 완전히 다른 논리를 동원하면서 '후보자 능력'을 강조했다.
 
공직 후보자 검증에서 도덕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후보자의 업무 능력과 각종 현안에 대한 견해다. 미국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가 과거에 재직했던 자리에서 어떤 성과나 오점을 남겼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로 다뤄지고 있다. (조선일보 2009.9.15. '후보자 검증, 과거 자리서 무엇을 어떻게 했냐 따져 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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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사건, '과거사' 아닌 '현재사'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7/08 10:34
  • 수정일
    2020/07/08 10:34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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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넘어 '레짐'을 극복해야…


 지난 5월 20일,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하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2010년 1기 과거사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한 지 10년 만의 일이다.

 

1기 과거사위는 9000여 건에 달하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권위주의 통치 시기 인권침해 사건 등에 대해 조사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사회 하층민에게 자행되었던 강제수용과 노역동원 등 '밑바닥 인권'까지 시선이 닿지는 못했다. 이처럼 '지연된 정의'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기나긴 싸움을 통해 다시 회복될 길을 찾았다. 2012년부터 시작된 이들의 투쟁은 단식농성, 국토대장정, 고공시위 등으로 이어지며 잊힌 기억을 다시금 공론장에 소환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국회에서 수년간 잠자고 있던 과거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국가의 시간표 안에 하층민에 대한 인권침해 진실규명이라는 과제를 기입해 넣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가의 시간표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필연적으로 하나의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다. 이는 대부분의 과거사 이슈들이 겪는 것이긴 하나, 형제복지원 사건처럼 사회 하층민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더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딜레마를 다소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형제복지원 사건 해결하라"라는, 너무나 자명해서 의문에 부칠 필요도 없어 보이는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를 국가가 이해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왜곡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뜻밖의 일'로 여겨지는 형제복지원 사건


 

형제복지원의 실상은 1987년 초 한 초임검사의 인지수사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수사가 본격화되자 관련 보도들이 쏟아졌다. 어느 날 갑자기 부랑인으로 낙인찍혀 난데없이 가족과 이웃을 잃고 잡혀 들어왔다는 사람들, 이유를 알 수 없는 규율과 폭력 그리고 의문의 죽음들,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는 박인근 원장 일가 등의 이야기가 지면을 가득 채웠다.


 

이때 형제복지원은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사건'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을 받을 만한 뜻밖의 일'로 정의된다. 단어의 정의대로, 형제복지원은 우리 사회가 충분히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여기던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뜻밖의 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는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한여름 밤 도시괴담처럼 소비되었고, 이내 6월항쟁의 파도에 밀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뜻밖의 일'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명백히 드러난 범죄사실에 대한 적법한 처리조차 검찰 수뇌부의 외압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87년 당시 우리 사회가 마땅히 해야 했던 일은 그 '뜻밖의 일'의 감춰진 '뜻'을 헤아리는 일이었다. 형제복지원이 그저 박인근 원장 일가의 악마적 소행에 의해 건설된 지옥굴이기만 했다면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의 부랑인 수용 업무는 부산시와의 위탁계약에 의해 이뤄진 것이며, 정부 차원에선 '내무부훈령 제410호'를 제정해 부랑인 단속 및 수용 업무 전반을 관리했음이 이미 그때 다 드러났다. 형제복지원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랑인시설도 36개나 확인되었다. 따라서 박인근을 중심으로 한 시설 운영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적 문제점이 이러한 '생지옥'을 만드는 데 일조했는지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한 논의가 이어졌어야만 했다.


 

물론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87년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계기로 전국 복지원 실태 특별조사를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특별조사의 첫 대상이었던 대전 성지원에서 신민당 의원들은 원장 노재중과 그의 호위대 격인 원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이후로 부랑인 시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어떠한 체계적 조사도 진행되지 못했다. 그 결과 형제복지원 '사건' 뒤에 가려진 '구조'는 드러나지 못했고, 오직 사건의 잔인하고 극단적인 이미지들만 남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노력으로 이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언론의 보도는 그 극단적 이미지만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언론은 오직 더 잔인한 폭력의 증언, 그리고 그 폭력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보이는 '불쌍한' 피해자의 초상만을 쫓고 있다.

 

이런 조건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할 때, 국가가 취할 수 있는 '형제복지원 과거사 해결'이란 무엇을 뜻하게 될까. 이 사건의 구조적 책임을 밝히는 진정한 의미의 진상규명이 수반되지 못했을 때, 피해자들은 그저 국가로부터 개별적인 피해보상을 받을 원자화된 개인으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는 곧 '과거사 해결'이 그간 누적된 부정의를 극복하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와 피해자 사이의 묵은 채무 관계를 처리하는 회계 절차로 축소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국가는 이 채무 관계가 정리되면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역사적·정치적 책임도 완수된 것으로 결론지을 것이다. 이는 이미 5.18 피해보상법 등 기존의 많은 과거사 관련 법들이 거쳐 왔던 과오이기도 하다.


 

징벌적 치안행정과 공공부조제도의 잘못된 만남


 

그러나 과연 형제복지원 사건이 이처럼 개별 피해자에 대한 민·형사 사건처럼 이해되면 그만인 문제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덜 무겁게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드러난 자료들은 그런 편리한 이해방식에 '멈춤'을 요구하고 있다.


 

형제복지원이 자체적으로 기록한 입소자 규모는 75년부터 86년까지 총 12년에 걸쳐 3만8267명에 달한다(형제복지원 소식지 <새마음> 1987년 1월호, 183쪽). 매해 최소 1500명이 입소했고, 84년에는 4355명으로 최고치를 찍었다. 한편 87년 당시 확인된 전국 36개 부랑인 시설(형제복지원 포함)의 동시 수용 규모 합계는 1만2978명이었다. 어림잡아 이 수치를 연인원이라고 가정하고(1년 이상 장기수용자도 적지 않지만 2~3개월 정도 수용되었다가 퇴소하는 사람 수도 상당했으므로 실제 연인원은 이보다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75년부터 86년까지 12년간 총 수용인원을 계산하면 15만 명이 넘는다.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는 죄인도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수용시설에서 살았다는 것은 보통 일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현재 언론이나 시민단체를 통해서 자신의 수용 피해를 드러낸 사람들은 정말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복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강제수용이 한국 사회에 매우 규모 있고 견고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우선 이 수치로나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시설에 수용되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여기서는 형제복지원의 자체 자료를 바탕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형제복지원 자체 자료는 주로 80년대 중후반에 집중되어 있고 부실하게 작성된 기록이 많아 그 신뢰성이 대단히 의심스럽지만, 형제복지원이 각각의 수용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처리했는지를 내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자료에 기초한 분석이 중요하다.


 

필자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5월까지 부산시가 동아대산학협력단에 위탁해 진행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연구책임자: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에 참여하면서, 형제복지원에서 86년도에 퇴소한 사람들 중 127명의 신상기록카드를 확보하여 분석해 볼 수 있었다. 신상기록카드의 첫 페이지 하단에는 입소 사유가 한 문단 정도로 간단히 적혀 있는데, 이를 비슷한 사유끼리 묶어 유형화 해 보았다. 그 결과 노숙 및 단순 배회 등 흔히 '부랑인'이라 여겨지는 이들을 단속해 수용한 경우는 51건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많은 수를 차지한 유형이 있었다. 그것은 음주·폭행·소란·가정폭력 등 각종 무질서 행위 또는 소년비행이나 준(準)절도와 같은 경범죄에 해당하는 것들로, 총 61건이었다.(그 외 사유는 타 시설 입소 의뢰, 미아, 자진 입소 등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에서 음주·폭행·소란 등 무질서 행위는 경찰이 개입된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소란을 자제토록 하거나 벌금 또는 구류와 같은 즉결처분 등으로 해결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또한 소년비행에 해당한다면 소년법 절차에 따라 보호처분을 받거나 소년원에 가는 것이 적법하다. 형제복지원이 부산시와 1975년 7월에 맺은 '부랑인 선도(수용보호) 위탁계약'은 '부산시 재생원 설치조례'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조례는 아동복리법 및 생활보호법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두 법령은 경범죄 및 소년비행에 대한 처분과는 무관하며, 일상 치안 문제에 대한 경찰력 개입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의 경우, 즉 노숙 및 단순 배회의 경우라 하더라도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에 기한의 정함 없이 수용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생활보호법에는 '생계보호를 행할 장소'로서 "피보호자가 그 주거가 없거나 주거가 있어도 그곳에서는 보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 또는 피보호자가 특히 희망하는 경우"에는 보호시설에서 보호를 행할 수 있다고 규정(제10조 제2항)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제1항 "생계보호는 피보호자의 주거에서 행한다"에 대한 보충적 조항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수용조치가 불가피하게 요청된다 하더라도, 그에 앞서 연고자 및 주소지 파악 등이 철저하게 이뤄져야만 했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자료를 확인해 본 결과, 이런 기본적인 절차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85년 12월 한 달간 입소한 총 300명의 신병인수증(입소 전 작성)과 수용자연명부(입소 후 작성)를 일련번호 순으로 대조한 결과, 주소가 다르게 적힌 경우가 122건이나 됐다. 그것도 단지 번지 정도만 다른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시·도가 적혀 있거나 심지어 '주례동 산18번지'(형제복지원 주소)가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통해 형제복지원 운영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치안 문제를 가장 징벌적인 방식으로 대처하되 이에 '복지'라는 외양을 씌웠다. 둘째, 적절한 공공부조제도에 의한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단수용이라는 행정·재정적으로 가장 손쉬운 처방으로 대응했고 이 과정에서 인권적 고려는 전무했다. 형제복지원은 취약계층을 위한 공공부조제도가 징벌적 치안행정과 결합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응답해야 할 정치적 책임


 

사회복지서비스의 한 형태로서 시설보호는 한국전쟁 직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자리 잡았고, 따라서 다소 불가피한 측면도 존재했다. 초기의 시설수용 대상은 주로 전쟁고아, 미망인 등이었다. 그러나 전후 복구가 완료되고 전쟁고아가 성인이 된 시점에는 시설보호의 사회적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재원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해외원조 단체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시설의 물적 기반도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설은 살아남았다. 정부는 사회적으로 불건전한 주체들을 교화한다는 명목의 '사회정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시설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환기시켰다. 또한 전후 해외원조 단체의 지원을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권력 형성에 활용했던 시설운영자들에게, 70년대 이후 정부가 수익 사업화의 길까지 열어주면서 '사회복지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인 자체의 '비즈니스적 필요'에 의해 시설을 운영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었다. 나아가 시설보호가 징벌적 치안행정과 결합되면서 우리 사회의 하층민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준경찰기관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형제복지원은 '뜻밖의 일' 또는 '사건'이 아니라, 한국 공공부조 역사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명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국의 공공부조는 상당 기간 동안 형제복지원 레짐(regime) 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1차적 피해자는 당연히 그곳에서 수용피해를 겪었던 당사자들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모든 논의가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가 수용당사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제삼자로서 거리를 두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절멸 수용소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논하면서, 이 학살을 유대인이라는 특정한 민족에 대해 범해진 범죄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의 몸에 범해진 '인류에 대한 범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형제복지원을 포함한 당시의 부랑인 강제수용 정책에 의해 훼손당한 것은 수용당사자 뿐만이 아닌, 포용적인 복지체계 발전을 통해 건강한 공동체를 수립할 가능성을 억제당한 '사회' 그 자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훼손된 '사회'는 결국 배제된 사람들을 추방하는 가해자의 얼굴을 띄게 되었다.


 

따라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응답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또한 그 책임은 단순히 개별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구제를 넘어서, '형제복지원 레짐' 하에서 누적된 한국 공공부조의 모순을 성찰하고 이를 개혁하는 것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상당 부분 사회복지계가 짊어져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2년 한종선 씨의 시위로 이 사건이 재점화된 이후 지금까지 사회복지학계의 집단적 성찰 노력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2018년 2월 19일에 일부 학회와 지역 사회복지사협회 등이 공동으로 특별법 제정 촉구 성명서를 발표한 게 전부였다.


 

이처럼 소극적인 사회복지계의 태도는 냉정히 말해 한국 사회가 여전히 형제복지원 레짐 하에 있으며 학계와 사회복지단체 역시 이 체제의 침묵의 동조자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로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2년 6개월의 짧은 감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와 오랫동안 지역의 복지재벌로 행세했으며 2016년에야 비로소 형제복지원 운영 법인은 해산 처분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87년 형제복지원과 함께 문제로 지적되었던 36개 부랑인 시설 중 상당수가 여전히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난 30여 년 간 사회복지계에서는 이 사안에 대해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형제복지원이라는 '과거사'는 결코 과거의 일일 수 없다. 사회복지계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형제복지원 레짐'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 응답을 내놓아야 하는 '현재사'이다. 이는 올해 말 2기 과거사위원회 활동 개시와 함께 당장의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이를 과거사위원회만의 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시민사회와 사회복지계 등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시설 중심의 공공부조 역사를 성찰하고 개혁의 전망을 내놓는 과정이 함께 이뤄져야만 '형제복지원 사건 해결'은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70717481630125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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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대통령 아들 ‘주민등록 공개 요구’ 곽상도… 정작 본인 아들은 재산 공개 거부

임병도 | 2020-07-08 08:46:5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문재인 대통령 가족에 대한 각종 의혹 제기로 유명한 통합당 곽상도 의원이 아들 문준용씨가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수억 원의 수익을 얻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곽 의원은 5일 페이스북에 “문준용씨가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신도림팰러티움’이라는 주상복합아파트 84㎡를 2014.4월 3억 1000만원에 매수하였고, 약 6년 뒤인 2020.1월 5억 4000만원에 매도하여 2억 3천만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곽상도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은 국토부 장관에게 투기성 주택 보유자의 부담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면서 “문준용씨가 이 아파트에 실거주한 것이 아니라면 전세끼고 은행 대출받아 사서 투기적인 목적으로 보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5분만 검색하면 알 수 있는 대통령 아들의 실거주 여부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공개한 재산 내역. 장남 문준용씨의 재산도 공개됐다. ⓒ김남국 의원실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은 6일 페이스북에 “대통령 아들 실거주, 5분 검색하니까 확인됩니다”라는 제목으로 곽상도 의원이 제기한 문준용씨의 실거주 여부에 답했습니다.

김 의원은 “국회 공보 문재인 대통령의 재산 공개 내역을 통해 딱 ‘5분’이면 근거 없는 의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서 “해당 주상복합아파트가 문준용씨 소유의 적극 재산으로 신고되어 있으며 ‘임대차보증금 반환채무’가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부동산을 소유한 공직자들은 대출을 받았다면 어느 은행으로부터 얼마나 대출을 했는지와 임대를 했다면 전세금 등 보증금은 얼마인지 상세히 밝힙니다. 이또한 채무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15~2016년도 정기재산공개 내역을 보면 문준용씨는 1억 4655만원의 은행 채무만 있지 보증금 반환 채무는 없었습니다.

김남국 의원은 “상식적으로 대출 이자를 물면서 전·월세도 주지 않고, 실거주도 하지 않는 무식한 투자는 없겠죠??”라며 “문준용씨가 소유한 주상복합 아파트에 임대차보증금 반환채무가 없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실거주를 했다는 의미”라고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김 의원은 곽상도 의원에게 “무작정 언론에 한 번 나오고 묻힐 근거 없는 ‘정치공세’ 하지 말라”면서 “‘정치공세’ ‘대통령 저격수’라는 의원님의 ‘낡은 전공’은 과감하게 버려라”고 권유했습니다.

곽상도 의원, 현금만 20억 부동산은 15억

3월 26일 국회공보를 보면 곽상도 의원의 재산은 총 38억 7416만원이었습니다. 이중 건물이 14억5900만원이었고, 예금은 무려 20억7948만원이었습니다. 2008년 대구지검 서부지청장 재직 시절 재산이 6억 9133만원이었으니 12년 만에 31억이 증가한 셈입니다.

곽 의원의 재산은 2009년 검사를 그만두고 난 이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크게 증가했습니다. 곽 의원의 재산이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가 전관예우 때문인지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변호사 수입이 크게 차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3월 <조선일보>는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장미아파트가 재건축 대상 아파트 중에서 ‘대어’라고 보도했습니다. 곽상도 의원이 보유한 아파트입니다. 김남국 의원은 “국토부 실거래가나 부동산 거래 정보를 보면 최근 5년 사이에 최소 6~7억이 올랐던데 정상이 아니다”라고 지적했을 정도로 시세 차익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곽 의원은 6일 페이스북에 “대통령 공직자 재산신고에 보증금 반환채무가 기재되지 않았으니 실거주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엉뚱하고도 궁색한 해명이다”라며 “그냥 주민등록을 밝히면 쉽게 설명이 가능한 것 아닙니까”라는 반박 글을 올렸습니다.

2020년 곽상도 의원의 재산 공개 내역을 보면 아들은 독립생계유지를 이유로 재산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본인의 아들은 재산 공개를 거부하면서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민등록까지 공개하라는 것은 지나친 정치적 공세라고 봐야 합니다.

곽 의원이 청와대에 요구한 것처럼 본인도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스스로 해명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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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원로 안재구 선생 별세

통일원로 안재구 선생 별세
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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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08  07: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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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원로 안재구 선생이 8일 새벽 4시 30분 군포 소재 새소망요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차려질 예정이며, 오후 12시부터 문상이 가능하다.

고인은 1933년 10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외갓집에서 태어나, 경남 밀양에서 항일혁명가인 조부 안병희 선생 슬하에서 성장했다.

1947년 5월 밀양중학교 1학년 때 노동절 집회 참가사건으로 퇴학당했다. 1948년 2·7구국투쟁에 참가했고, 남로당 밀양군당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1951년 대구시 달성군 구지국민학교 교사로 지냈다.

1952년 3월 경북대 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1970년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경북대 문리대 수학과에서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역임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1988년 12월 가석방됐다. 1994년 6월 구국전위 조직사건으로 다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999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2013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저서로는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광야, 1989),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죽산, 1990), 《수학문화사》(일월서각, 1990),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돌베개, 1996),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 (아름다운사람들, 2003) 《끝나지 않은 길1,2,3》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딸 안소영, 아들 안영민이 있다.

(추가,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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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핵심협약 비준’ 국제사회 약속 24년째 미룬 한국, 이번엔 지킬까

정부, ILO 핵심협약 비준동의안 국무회의에 상정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20-07-07 10:24:24
수정 2020-07-07 10: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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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뉴스1  
 
정부가 1996년 OECD 가입 당시부터 국제사회에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24년째 지키지 않고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이행하기 위해 비준동의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은 6일 ‘ILO 핵심협약 비준동의안’ 관련 브리핑에서 “정부는 지난해 10월 제105호 협약을 제외한 3개 협약의 비준 동의안과 노조법·공무원노조법·교원노조법·병역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20대 국회의 임기만료로 통과되진 못했다”며 “사안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고려해 다시 국회에 제출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무회의 상정한 ILO 핵심협약 비준안

정부는 지난달 23일 노조법·공무원노조법·교원노조법·병역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뒤 국회에 제출했다. 이어 3개 핵심협약 비준안을 이달 내로 국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이번에 국무회의에 상정되는 3개 비준안은 ▲ 제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 ▲ 제98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의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 ▲ 제29호 ‘강제 또는 의무노동에 관한 협약’ 등이다.

제87호는 노사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단체의 설립 및 가입과 활동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제98호는 노사의 자유로운 교섭 보장과 노조활동에 대한 불이익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해고자·실업자 노조가입 허용 등을 반영한 노동관계법 개정안(노조법·공무원노조법·교원노조법)이 국회에 제출된 상황이다.

이전 정권은 ILO 핵심협약 비준을 늦추면서 지금도 남아있는 전근대적인 악법을 근거로 노동조합을 탄압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근혜 정부 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해고노동자 9명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노조 아님’을 통보한 경우다. 이 때문에 전교조는 노조활동의 큰 제약이 걸렸고, 수많은 노조 전임자를 상대로 한 해고가 이어졌다. 공무원노조도 이와 비슷한 탄압을 받았다. 그 피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제29호 협약은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4급 보충역 대상자에게 복무선택권을 부여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국무회의 의결 후 국회에 제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청와대 충무실에서 유럽연합(EU)의 샤를 미셸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화상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20.06.30.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청와대 충무실에서 유럽연합(EU)의 샤를 미셸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화상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20.06.30.ⓒ뉴시스

ILO 핵심협약 비준해야만 하는 이유
한·EU 분쟁절차로 국익문제로 이어져
협약, ILO 가입 187개국 80%가 비준

이같이 정부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려는 이유는 최근 국익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ILO 핵심협약 미비준으로 인해 한·유럽연합(EU) FTA 분쟁 해결 절차를 겪고 있다. EU는 우리나라가 ILO 핵심협약 비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며 2018년 12월 FTA 협정상 분쟁 해결 절차의 첫 단계로 정부 간 협의 절차를 요청했고, 2019년 7월 두 번째 단계로 전문가패널 소집을 통보하며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지난 6월 30일 열린 한·EU 정상회담에서도 EU 정상은 한 목소리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EU FTA 이행 강화와 함께 ILO 핵심협약 비준을 촉구한 바 있다.

EU 정상이 우리나라를 이같이 압박하는 이유는 한국 기업이 국제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기준을 두면서 부당한 비용 절감으로 이득을 누리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국격과도 직결된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전 세계 어느 노동자라도 기본적 노동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가장 보편적인 규범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ILO에 가입한 187개 국가 중 약 80% 정도가 8개 핵심협약 전체를 비준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1996년 OECD 가입 당시부터 국제사회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해 왔으나, 24년째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 금지 관련 핵심협약 비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임 차관은 이 같은 상황을 짚으며 “K-방역으로 높아진 우리나라 국격을 고려할 때 ILO 핵심협약 비준은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자 선진국이 이행해야 할 당위적 의무”라고 지적했다.

또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탓에 진행되고 있는 한·EU FTA 분쟁 해결 절차 등을 언급하며 “ILO 핵심협약은 단순히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통상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으며, 핵심협약 비준이 되지 않을 경우 EU 측의 다양한 비무역적 조치를 통한 압박도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ILO 핵심 협약 비준은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일이며, 잠재된 통상 리스크를 해소하고 국익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관계자들이 지난달 8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가진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3개 법안 입법 예고에 대한 전교조 법외노조 해고자 입장 발표 및 해고자 투쟁 알림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6.8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관계자들이 지난달 8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가진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3개 법안 입법 예고에 대한 전교조 법외노조 해고자 입장 발표 및 해고자 투쟁 알림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6.8ⓒ뉴스1

“정부안, 자세히 보면 비준이 아니라 역행”
“특수·하청·간접고용노동자 노동권 통째로 누락”

한편, 이번에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마련한 관련법 개정안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10개월 동안 논의를 거쳐 마련된 안이다. 노사정 합의에 이르진 못했으나 노사가 추천한 전문가들이 권고한 최종 공익위원안을 토대로 정부입법안을 마련했다는 게 임 차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이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상정해 국회에 제출한 관련 개정안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게 아니라 역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달 24일 성명을 통해 “특수고용노동자, 하청·간접고용노동자 노동3권 보장이 통째로 누락되어 있고, 유럽연합이 한·EU FTA 13장 위반사항이라고 문제 제기하여 분쟁 대상이 된 2조 ‘근로자’ 정의에 관한 개정이 없어 통상문제의 불확실성 해소에도 역행하며, 비종사자 조합원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해고자의 ‘노조 할 권리’를 추가적으로 제약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ILO 헌장(19조8항) 역진 금지 원칙에 반하여 직장 점거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 노동기본권은 후퇴시키는 내동이 포함돼 있으므로 ILO 핵심협약 비준 취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기존에 국제사회로부터 지적받아 온 내용을 이번 ‘ILO 핵심협약 비준안’에 담는 대신 경영계의 요구를 받으면서 발생한 문제다. ILO 핵심협약 관련 비준안을 마련하면서 이를 다시 어기는 안을 마련한 셈이다. 이에 민주노총 등은 “ILO 협약은 노동기본권을 위한 최소한의 국제 기준으로 주고받기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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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 낌새 알아채고... 체육계 폭력 수법 교활해져"

 

[스팟 인터뷰] 정용철 서강대 스포츠심리학 교수 "정부, 답 알아... 의지 없는 것"

오수미(breathee) 20.07.06 19:02최종업데이트20.07.06 21:19 
스포츠공정위 출석하는 김규봉 감독 고 최숙현 선수가 가해자로 지목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김규봉 감독이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철인3종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가해자로 지목된 김 감독과 선수들에 대한 징계를 결정할 예정이다.

▲ 스포츠공정위 출석하는 김규봉 감독 고 최숙현 선수가 가해자로 지목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김규봉 감독이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철인3종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가해자로 지목된 김 감독과 선수들에 대한 징계를 결정할 예정이다. ⓒ 권우성


 
한 젊은 선수가 팀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알리며 극단적 선택을 했다. 피해자가 수년간 모은 녹취록에는 상습적인 폭행과 폭언, 괴롭힘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었다. 

지난 6월 26일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고 최숙현 선수가 사망한 사실이 알려진 뒤 전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관련 청원이 등장했다. 경주시청은 가해자로 지목된 감독을 곧바로 직무정지 시켰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지난 2일 "선수 출신인 최윤희 문체부 차관이 나서서 전반적인 스포츠 인권 문제를 챙기라"고 지시했으며 여야 의원들도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정용철 서강대 스포츠심리학 교수는 향후 전망을 다소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지난 수년간 체육계에서 폭행, 성폭력 등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정부는 강력한 재발 방지책을 세우겠다고 공언했지만 바뀐 게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6일 오전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지난해 (심석희 선수 등) 체육계 폭력 문제로 국민적 공분을 샀고, 당시에도 대통령까지 나서서 개혁을 지시하지 않았나. 그런데 오늘도 같은 환경에 노출된 선수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고, 혁신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마련해왔다. 그게 하나도 작동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최숙현 선수는 여러 번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제대로 된 조사나 처벌로 이어지진 못했다. 지난 2월 경주시에 민원을 제기하고 수사 당국에 가해자들을 고소했으며 4월엔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6월엔 대한철인3종협회와 국가인권위에도 진정을 접수했다. 그러나 해당 기관들은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피해자를 방관했다. 정용철 교수는 "범죄자 몇 명 잡아서 처벌하는 수준으로는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체육계의 고질적이 문화를 그대로 보여줬다"
 
 체육시민연대, 인권과 스포츠 등 스포츠ㆍ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고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 체육시민연대, 인권과 스포츠 등 스포츠ㆍ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고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번 사건은) 체육계의 고질적인 문화를 그대로 보여줬다. (폭행 당사자인) 팀 닥터나 감독, 선배 선수들을 처벌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야 한다. 아주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수준의 처방이 있지 않으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2~3개월 지나면 흐지부지 지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특히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에 대해 더이상 책임을 회피해선 안 된다며 강한 비판을 이어갔다. 

"조재범 사건 때도 이기흥 회장은 뼈를 깎는 쇄신을 하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똑같은 얘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책임자를 처벌하는) 선례가 안 생기니까 이런 문제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고개만 숙이면 지나갈 일이라고 체육계 전반이 인식하고 있다. (최 선수) 발인 다음 날 골프나 치고, 그걸 관계자는 또 자랑스럽게 페북에 올리고. 그 정도의 수준으로 사안을 보는 것이다. 전혀 고치거나 개선할 의지나 능력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한편 이날(6일) 국회 소통관에서는 '고 최숙현 선수의 마지막 요청에 답하기 위해 모인 단체'라는 이름으로 모인 40여 개 스포츠·시민단체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철저한 진상 조사를 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독립성, 전문성, 신뢰성, 책임성이 보장되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하라"라고 요구했다.

해당 기자회견에도 참석한 정 교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자괴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사람이 없어, 구호만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어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대해서도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과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 장관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질타했다. 

"책임 지고 누구 하나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람이 없다. 그냥 남의 얘기하듯 엄중한 처벌을 하겠다고 한다. 대한체육회장이나 문체부 장관이나 모두 책임지고 조사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가. 자기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인 양 언론이나 국회에 발언을 하고 있다. 긴급 현안질의에서도 결국은 (대한체육회 회장과 박양우 장관에게) 사과하라고 해서 사과하지 않았냐. 그게 면죄부를 준 거다. 사과한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이렇게 되면 상임위도 하나마나다.

시민단체를 꾸리고 개혁해나가겠지만 승산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현재 여야 의원들은 정치적 이득에 따라 피해자를 이용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저는 비관적으로 본다. 과거 조재범 전 코치 사건 때보다도 훨씬 공격 지점이 무디다. 하나마나한,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더 무기력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독 진술 들은 피해자들, 바로 손 떨면서 억울해 해"

정치권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5일 TV조선 보도에 따르면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최 선수의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왜 이렇게 부모님까지 나서서 가혹하게 자식을 검찰, 경찰 조사를 받게 했나", "(가해자들을) 징계할 다른 절차가 충분히 있고, 제명을 할 수도 있는 방법이 있는데"라며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 또 최 선수 동료에게는 "지금 폭력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체육 선수 전체가 맞고 사는 줄 안다", "경주시청이 독특한 것 아니냐", "남자친구와의 문제는 없었냐"는 등 문제를 축소시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해 빈축을 샀다. 임 의원은 이에 "보수언론의 음해"라고 반박했다.

정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임오경 의원은 대한체육회의 의견을 대변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런 분이 여당 의원으로, 문광위 민주당 의원으로 들어가 있는 게 문제다. 뭘 잘못하고 있는지, 왜 비난받는지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보수언론의 음해라는 해명은, 상황 판단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상임위 차원의 조사를 크게 기대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또한 정용철 교수는 이날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한 김규봉 감독에 대해서도 뻔뻔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 교수는 "가해자로 꼽히는 팀 닥터도 감독의 지인이다. 팀 닥터가 (피해자를) 때리면서 '내가 미리 널 때려야 감독이 안 때릴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폭력을 했다더라. 감독이 오늘(6일) 국회에서 '안 때렸다'고 부인하던데, (그렇다고 해도) 묵인이나 방조를 한 것은 사실이다. 감독의 진술을 듣는 피해자들이 바로 손을 떨면서 억울해하더라. 가해자들은 뻔뻔하게 발뺌하고 사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앞서 정용철 교수는 2012년 논문 '한국에서 핸드볼 선수로 살아가기'를 통해 체육계의 성폭력과 폭행을 고발하기도 했다. 핸드볼 선수 출신 제자가 은퇴한 여자 핸드볼 선수 4명을 심층 면담한 결과를 가지고 쓴 논문이었는데, 체육계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반향은 크지 않았고 그로부터 8년이 흘렀지만 상황도 변하지 않았다. 정 교수는 과거보다 체육계 폭력 문제의 "빈도는 줄었을지라도 범죄는 오히려 지능적으로 변했다"고 평했다.

"(녹취록이나 피해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폭언, 폭행 이런 것들이 상시적으로 있었다더라. '나가 죽으라'는 말도 자주 했고, 또 실제로 선수가 죽은거다. 거기 있던 선수들은 언어 폭력이 그만큼 일상적이었던 거다. 게다가 선수들을 때릴 때 그냥 때리는 게 아니라, 이런 건 문제될 수 있다는 걸 알고 '니가 나 한대 쳐라, 니가 나 쳤으니까 나는 정당방위야' 하고 때린다고도 했다. 오히려 더 수법이 교활해진 것이다. 은폐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도 고발을 위해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가해자들은 이미 낌새를 알아채고 이걸 막으려 압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 최숙현 선수 유족, 문체위 방청석에서 지켜봐   고 최숙현 선수의 유족들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나와, 최 선수가 가해자로 지목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김규봉 감독과 주장 장아무개 선수, 김아무개 선수의 답변을 지켜보고 있다.

▲ 고 최숙현 선수 유족, 문체위 방청석에서 지켜봐 고 최숙현 선수의 유족들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나와, 최 선수가 가해자로 지목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김규봉 감독과 주장 장아무개 선수, 김아무개 선수의 답변을 지켜보고 있다. ⓒ 남소연

 
특히 정용철 교수는 지난해 2월 발족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스포츠혁신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체육분야의 구조를 혁신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이번 사고에 더욱 참담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스포츠혁신위원회는 지난해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 폭력-성폭력 사태로 불거진 체육계 폭력, 성폭행 문제를 뿌리뽑기 위해 출범했다. 1년여 간 전국에서 간담회, 토론회를 개최하고 7차례 권고안을 발표하는 등 제도적 기반 마련을 위해 힘써왔지만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진 것이다. 

정용철 교수는 정부가 이미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답을 알고 있다며 "스포츠혁신위에서 반복되는 폭력과 그 문제의 원인, 방법을 모두 규명해서 발표했다. 그런데 문체부의 실현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스포츠혁신위의 권고안이 여러 문제로 변질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포츠 혁신위에서 체육계에서 폭력과 성폭력 문제가 끊이지 않는 원인, 일이 벌어졌을 때 책임져야 할 사람과 그 방법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이를 통해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윤리센터가 생겼다. 원래 취지는 인권센터였는데 이것 역시 미래통합당에서 반대하면서 윤리센터로 바뀌었다. 초안에서 조금씩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세세한 부분도 하나하나 진행이 안 되고 있다. 학교 체육을 정상화하고 스포츠 기본법을 만들고. 스포츠혁신위에서 발표한 권고안에 모두 답이 쓰여 있다. 답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를 추진할 정책권자들이 의지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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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님께 드리는 다섯 번째 브리핑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07/07 10:10
  • 수정일
    2020/07/07 10:10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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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의 중심을 장악한 법무·검찰대란에 대하여
 
신상철 | 2020-07-07 09:07:3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문재인 대통령님께 드리는 다섯 번째 브리핑

· 이슈의 중심을 장악한 법무·검찰대란에 대하여
· 추미애 vs 윤석열 대립 가운데 누구 손을 들어주실 겁니까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님,

저는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천안함 재판으로 너무나 지치고 힘든 상황이고 현재도 항소심 재판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 뉴스의 중심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검찰대란(檢察大亂)을 보고 있는 마음이 너무나 불편하여 그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지랖 넓다 마시고 苦言의 말씀을 잘 살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은 지난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검찰 때문에 일 년 내내 시끄러운 나라는 한국뿐”이라며 “기소권은 물론 초강력울트라슈퍼파워의 검찰 수사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상황에서 윤 총장 같은 비상식적 검찰 제일주의자가 나타나면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유사한 검찰파쇼, 즉 검찰숭배를 최고의 가치로 여김으로써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일갈하였는데 저는 황운하 의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국민들이 문재인 대통령님께서 그 자리에 오르시도록 힘을 모으며 대통령님께 바랐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개혁과 적폐청산>입니다. 

그러나 윤석열의 검찰을 보면 국민의 요구인 검찰개혁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자신과 가족 그리고 수하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언제까지 이 모습을 보아야 합니까?

검찰發 합법적 쿠데타 모의

 

 

검언유착 수사와 관련하여 추미애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하여 지휘서신을 내리자 바로 다음 날 윤 총장은 전국 검사장을 소집하였습니다.

이것이 검찰의 조직적 반기와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는 하나의 퍼포먼스 수준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윤 총장의 이러한 행위는 <합법을 가장한 조직적 쿠데타 모의>와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검찰총장은 필요할 경우 전국 검사장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와 시기가 법입니다. 법무부 장관의 지휘서신은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아 내리는 명령입니다.

국방부의 경우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방부장관이 합참의장에게 경고와 함께 업무 지휘를 내리자 합참의장이 권총을 차고 각 군 참모총장과 전 군 사령관을 한 자리에 모은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윤 총장의 행위는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1960년대에는 권총으로 권력을 잡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손 놓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양 손에 쥐고 노무현 대통령을 능멸하며 벼랑 끝으로 압박하던 그때 그 검찰이 바뀌고 달라졌기를 바라는 것은 국민의 착시현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윤 총장의 행위는 본질 흐리기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윤 총장이 전국 검사장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은 그 자체로 사안의 본질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버리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사안의 핵심 본질은 <검·언유착>이며 <윤석열의 오른팔 한동훈이 연루된 사건>입니다. 그에 대한 수사가 본질이며 그 수사 방식에 있어서 검찰총장의 처신의 적절성 여부가 부차적 본질에 해당하는 사안입니다.

그러나 윤 총장이 전국 검사장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던진 화두는 <법무장관 지휘서신이 적절한지 여부>와 <법무장관 지시를 따라야 하는지 여부>로 이는 애초 논란의 중심과 본질을 완전히 벗어나 전혀 엉뚱한 곳으로 모두의 시선을 돌려놓아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교묘한 행위입니다.

하여 뉴스에서 <검언유착 사건 수사 방식의 적절성 여부>는 온데간데 없고 <윤 총장이 법무장관의 지휘서신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만이 초미의 관심사로 도마 위에 오르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검찰은 썩었습니다. 전국 검사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음에도 그 가운데 윤석열 총장의 부적절한 처신과 행위에 대해 송곳처럼 지적하는 검사장이 단 한 명도 없었다면 그 조직은 이미 썩은 것입니다. 윤 총장은 그렇게 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윤석열은 정의로운 검사인가?

민주진보 성향 가운데에도 윤석열을 정의로운 검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입니다. 윤석열은 정의로운 검사 맞습니다. 그의 내면 가운데 분명 ‘정의’가 자리하고 있음을 여러 중대한 권력형 사건들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배짱 두둑한 사람입니다. 인내심도 강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알며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면 아무리 윗선이라도 정면으로 들이 받을 줄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카리스마도 넘치고 리더십도 강해서 그를 열성적으로 따른 측근이라면 그를 ‘주군’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위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윤석열표 정의가 선별적 정의’라는 데에 있습니다. ‘정의’와 ‘자신의 가족과 측근의 이익’이 상충하는 경우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내팽개칠 수 있는 검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곧 ‘검사로서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사람이 검찰조직을 총괄하고 있다는 현실이 바로 오늘의 비극인 것입니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사이다 발언과 인사청문회에서 보여 주었던 그의 당당한 모습에 수많은 사람들이 현혹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말에 매료되어 ‘올인’몰빵으로 신뢰를 보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혼란을 겪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 대통령님 역시 동일하게 그를 신뢰하여 검찰총장에 임명하셨고 현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고충을 겪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대통령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 진영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순간 집단최면에 빠졌던 터라 누가 누구를 나무랄 것 없이 모두의 잘못인 셈입니다.

윤석열 그가 그의 가족을 위해 벌였던 위법적 행위가 검사로서 부적절했음이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억울한 피해자가 절규하듯 외치는 목소리도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더 큰 대의를 위해 소소한 소의에 눈감아 주자’고 하지 않았나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윤석열의 정치적 행보 그 종착점은?

윤석열 총장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정치적 행보인가 아닌가, 혹은 그가 정치를 목표로 하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아무 의미없는 얘깁니다. 

이미 그는 지반이 붕괴되어 함몰 상태인 수구보수 세력을 구원할 유일한 구세주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런 그가 그들의 러브콜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를 가늠하거나 예측하는 것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한 마디 말 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에 주어진 선택지는 개구리 혹은 럭비공 튀는 방향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씩 나타나고 있는 결과물 속에 우리가 예측 가능한 단서들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

검사로서 재직하는 내내 새까만 후배들의 지휘를 받으며 절치부심, 와신상담, 절차탁마하였던 그가 검찰총장 자리에 올라 고진감래의 단맛을 보자마자 등장한 세 살 어린 법무장관의 검찰개혁 화두를 좌절시키기 위해 모든 검찰력을 총동원하며 조자룡 헌 칼 쓰듯 휘둘렀던 행태 하나만으로도 그의 미래를 가늠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검찰의 모든 화력을 추미애 법무장관에게 조준하고 있는 검찰총장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까? 그 다음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대통령님께서 윤석열 검찰총장을 임명하며 “눈치 보지 말고 청와대든 여당이든 살아있는 권력에 엄정하게 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지나놓고 보니 만용이셨습니다. 분명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권력에 ‘선별적이고 주관적 정의’를 들이밀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수하를 보호하기에 급급한 검찰총장을 세우셨으니 국민들은 통탄할 노릇입니다.

대통령님 손으로 거두십시오

대통령님은 임명권자입니다. 그러니 대통령님께서 거두셔야 합니다. 폼 나게 퇴진하도록 만들지도 마십시오. 그러면 김종인씨가 버선발로 마중나와 그를 마왕자리에 앉히려 들 것입니다. 

이미 드러난 그의 죄가 적지 않습니다. 그가 그의 가족과 측근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죄를 덮기 위해 저지른 잘못의 크기가 적지 않습니다. 그 죄를 물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정의의 칼은 준엄하지만 무겁습니다. 그 무게가 두려워 들기를 꺼리신다면 불의의 칼이 춤추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BBK 사건에서 이명박을 무혐의 처리한 결과로 얼마나 우리가 먼 길을 돌아야 했고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BBK 사건은 ‘선별적 정의’를 즐기는 자들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렇듯 죄악을 처벌하고 응징하지 않으면 그 죄악은 반드시 선의 탈을 쓰고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 재판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십니까?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의로운 판결이 나온다 하더라도 2년 뒤 정권재창출에 실패한다면 ‘선택적 정의’를 업으로 삼는 무리들이 검찰권력의 중심에 다시 서서 그 사건을 도마 위에 끄집어 올려놓고 난도질을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김경수 도지사를 향하던 칼끝이 퇴임하신 대통령님을 겨누지 않을 것이라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칼이 보이는데 대통령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2020년 7월 5일
前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본부 조사위원 신상철 드립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1003&table=pcc_772&uid=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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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대남 공세 속 언론보도와 국보법, 한미동맹

<연재> 고승우의 ‘국가보안법 연구’ (19)
고승우  |  konews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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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06  14: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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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 / 언론사회학 박사

 

19. 북의 대남 공세 속 언론보도와 국보법, 한미동맹


북한이 대남군사행동방침을 유보한다고 밝힌 뒤 한미정치권과 국내 언론 등은 북미회담이 오는 10월 경 극적으로 이뤄지지 않겠나 하는 전망을 내놓으면서 분위기가 머잖아 호전되는가 하는 감을 주었으나 북측의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북미 대화 불가, 남측의 중재 역할 비판’ 발언을 하면서 머쓱해진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내에서 고전을 하면서 북미정상회담을 통한 정치적 승부수를 띠울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물론 북미정상회담이 완전 불가능하다고 까지 말할 수 없겠지만 정치 공학적 발상에 따라 여론이 춤을 추는 것은 볼썽 사납다. 

북측이 최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대남 전단을 대량으로 살포하겠다는 등 남측에 대한 비판과 공세를 가하면서 과정에서 국내 대중매체는 미국이나 남북한 정부당국의 발표를 전달하거나 그 과정에서 보도 경쟁이 벌이지면서 당사국들이 쏟아내는 ‘말 폭탄’ 정보를 중계하느라 바빴다. 미국에 나가 있는 대중매체 특파원들은 대부분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을 뒤지거나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또는 미 군사전문가들의 관련 견해를 보도하는데 열중한다. 

대중매체는 차분하게 이번 사태의 원인과 향후 대책 등에 대해서 심층보도 하기 보다 새로운 이슈를 뒤쫓는데 바쁜 경마식 보도, 상업주의적 보도에 매몰되는 체질화된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특히 공공성과 공익성을 강조하는 공영매체나 비슷한 노선을 주장하는 매체들도 한반도 관련 이슈에 대해 국민의 알 권리, 궁금증을 해소하는 진지한 노력이 매우 미흡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KBS가 최근 경영난을 이유로 수신료 인상을 고려한다고 밝혔는데 한반도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남북  문제 등에 대해 공영언론다운 보도를 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북한이 최근 청와대를 맹비난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동안 남측정부, 학계, 관변단체나 시민사회에서 제기된 견해는 주로 미국의 지나친 간섭과 방해를 지적한 것들이었고 언론은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러나  봇물처럼 쏟아진 미국에 대한 쓴 소리가 실천 가능한 것인지를 따져보는 언론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남측 정치권과 언론이 진지하게 한미관계 등에 대해 성찰하고 문제점을 짚어보기는커녕 남북관계보다 국내 정치에서 여권의 입장을 강화시켜주는 식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어 미국에 대한 볼멘소리와 시정 요구에 대한 후속 보도가 이어질지 여부는 불투명해 보인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나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 등에서 미국이 고자세를 취하고 한국 정부가 방어적인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국제정치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미국이 남북한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만큼 막강하기 때문이다. 정치, 군사, 외교, 문화 등 다 방면에 걸쳐 미국은 강대국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그 이전 미국 대통령들도 이라크 침공 등에서 보듯 국제 무법자와 같은 짓을 했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한국이 대단히 주도면밀한 기획을 하지 않으면 미국이 향후 남북관계를 훼방 놓지 못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이런 부정적인 전망을 하게 되는 이유를 좀 더 깊이 살피면, 미국이 남한에 대한 간섭하고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가 여러 개이고 대단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유하면 고래 심줄처럼 질기고 그물망처럼 촘촘하다 할 것이다. 미국이 남한에 대해 군사, 경제, 정치 등 전 방위적으로 간여하고 제동을 걸거나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한미간 조약과 각종 협정, 수많은 협의체  등 공적인 것 외에 친미인사들을 통한 유무형의 압력과 영향력 행사 등이다. 그 가운데 군사적인 것은 남북한에 직접적, 즉발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를 위해 미국은 주한미군 사령관이 유엔군과 한미연합사 사령관을 겸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필요에 따라 유엔, 한미워킹그룹 등을 앞세워 남북교류에 제동을 걸거나 툭하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카드를 내미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미국이 막강한 슈퍼 갑의 위치를 지속할 수 있는 조약, 협정 등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여러 장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뿐 아니다. 미국의 대북 제재에는 거기에 관여하는 기업, 관련 인사 개개인에 대해 보복을 가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이라는 미국 국내법도 포함된다. 이런 점을 십분 고려해서 미국이 꼼짝 못하고 신경을 쓸 묘책을 내놓아야 한다. 거기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필리핀과 미국의 군사동맹 수준으로 정상화 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을 빌미로 남한을 교두보로 삼아 대북 선제공격까지 할 수 있는 카드를 휘두르면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역기능적 측면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같은 유엔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는 국가대 국가 간의 위상이 보장되지 않는 한미군사동맹은 자칫 동북아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주권자인 국민이 알아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수십 년간 국가보안법이 한미동맹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친북으로 몰아간 탓으로 한미동맹의 문제점이 공론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사태에서 확인되듯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한미군사관계는 그 모순이 비대해지면서 정상화할 필요가 커졌다. 사회 전체가 노력해야 하고 특히 대중매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 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정상화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KBS, MBC, 연합뉴스 등 공영언론에서 한미 군사동맹을, 필리핀과 일본이 미국과 맺고 있는 군사동맹을 단순 비교만 해도 그 모순이 들어날 터인데 지금껏 그런 보도를 한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특파원들이 이들 국가에 상주하고 있으니 힘들 것도 없을 것이다. 

국내 언론은 이번은 물론 과거 한반도 사태에 대해 제 3자적 또는 객관적 입장에서 한반도 또는 북미관계 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내놓은 적이 거의 없다.  남북한과 미국이 지난 수년간 한반도 비핵화와 교류협력을 놓고 각각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지, 이런 사태의 원인과 그 해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층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보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왜 이럴까. 과거에도 그랬지만 최근의 대중매체의 한반도 관련 보도는 국가보안법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기는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가 지난 수십 년간 갇혀 있으면서도 오늘날 별로 불편해 하지 않는 좁은 공간 안에서의 제한된 보도만 반복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긴장상태가 고조되면 당사국들은 대부분 심리전 차원의 정보를 남발하게 되는데, 심리전의 목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겁박해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대중매체가 보도할 경우 사실관계 확인 등의 절차가 필요하다. 그래야 언론 소비자들이 혼란에 빠지거나 전쟁공포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안타깝다. 대중매체간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남북 긴장상태나 미국의 대북 적대적 태도에 대해서도 선정적 보도가 춤을 춘다. 더 쌔거나 격렬하고 자극적인 그런 메시지를 찾거나 그런 식으로 가공된 기사 또는 기자나 언론사의 추리나 추정이 활자화되어 전파된다. 예를 들면 중앙일보는 지난 21일 “[단독] 이래서 文 욕했나..시진핑, 北에 식량 80만t 보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중국이 최근 경제난과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에 쌀 60만t과 옥수수 20만t 등 약 80만t의 식량을 지원했으며 북한은 지난해 6월 한국이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식량 5만t을 거절한 적이 있다는 사실 등을 보도하면서 제목으로 남북한을 흠집 내는 내용을 내보냈다. 

위와 같은 기사 작성은 언론의 자유에 속한다 해도 상상력이 특정 방향으로 과도하게 쏠린 것이란 비판을 자초한다. 이런 식의 보도 태도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국보법이나 공안당국의 매서운 눈초리를 의식하거나 그쪽의 주문을 받아서 해왔던 보도 형식의 하나였다. 기자가 북한에 대해 기사를 쓰지만 북한을 고무찬양 동조하는 것이 아니고 북한을 해롭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자위조치의 하나였다. 

오늘날 북한 관련 기사가 대부분 “~으로 보인다.” “~으로 추정된다.” “~ 노림수로 해석된다.”라는 식으로 비트는 기사 형식이 일반적인 것도 바로 국보법의 폐해가 언론의 적폐로 남아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대중매체를 통해 이런 식의 보도를 접하는 언론소비자들은 북한에 대한 보도를 통해 북한에 대한 불신과 이질감이 커질 뿐이다. 언론이 대북 보도에서 공정성과 공익성을 앞세운 사회의 목탁이나 소금과 같은 보도를 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왜 이럴까? 역시 국보법과 한미동맹의 구속력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국보법과 언론

우선 국보법에 대해 살펴보자. 대중매체는 어느 나라든 전시 상태에서는 국가의 검열을 받는다. 전쟁에서 적국을 이기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언론이 징발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남북 분단이 장기화되고 국보법이 상시적으로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장를 통제하면서 대중매체는 남북관련 보도 시 전시 상태의 징발된 언론과 유사한 보도를 타율에 의해 또는 자율적으로 반복해 왔다. 대중매체는 남측 정부의 대북 선전 홍보기구로 활용된 측면이 많았다. 

북측의 언론은 자본주의의 그것과 판이해서 정부의 한 기구이기 때문에 정부의 선전홍보 기구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다. 남측 언론은 언론자유,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 하지만 남측 정부가 공개하거나 언론에 제공한 북측 관련 정보는 상당부분이 심리전 차원의 것이었다. 국정원 같은 공안기구는 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대북 심리전을 목표로 한 자료를 보도 자료로 기자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남북 분단과 대치가 활동무대인 공안기구가 제공한 대북 자료는 대중매체의 기사 요건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대중매체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보도하는데 익숙하다. 독재시절 통제 받던 언론의 부정적 측면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남북문제 보도에서 군부독재 시절 남측 정부의 보도지침과 함께 멸공작전에 동참한다는 전시언론의 분위기 속에서 보도를 해왔던 세월이 길었다. 국보법은 북한을 반드시 궤멸시켜야 할 존재로 규정하면서, 누구나 북에 대해 방안에서 혼자 상상하고 낙서만 해도 찬양고무, 동조로 잡아가두고 패가망신을 강요했다. 

이러니 북한의 움직임은 도발이고 그곳에 대한 추정은 파괴적, 악마적일 수밖에 없다. 북측이 개성공단의 남북협력의 상징인 건물을 폭파하자 대부분의 언론의 추정기사는 결국 군사적 대남 도발이라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개성공단 건물 폭파는 북한의 영역 안에서 벌어진 것이지만 남측에 대해 적대적 군사 조치가 뒤따를 것이란 전망이 주를 이루게 만들었다. 정보화 시대라서 그 장면이 남측에 신속하게 전달되어 공포와 두려움을 일이키기에 충분했다. 북측의 심리전 작전이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국내외에서 한국의 언론자유를 말할 때 국보법이 장애요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거나 이 법으로 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촛불혁명이후에도 여전하다. 이런 대중매체가 언론 소비자에게 공정, 공익적 보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한반도 관련 보도는 기레기 언론이라는 손가락질을 면키 어렵다. 오늘날 문재인 정권에서도 집권세력, 대중매체나 언론인들이 국보법을 불편해 하거나 그 문제점에 대해서 침묵하는 기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한미동맹과 언론

다음은 한미동맹이다. 지난 70 여 년간 국가보안법의 지배를 받은 대중매체는 한반도 안보와 북한을 괴멸시키는데 한미동맹이 절대 필요하다는 논리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이른바 진보 매체조차 대부분 이런 논리의 틀에 갇혀 있다. 군사주권 차원에서 남한은 미국의 군사 식민지와 유사한 상황이지만 이를 문제 삼는 경우가 거의 없다. 미국이 슈퍼갑인 군사관계의 구조는 절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지극히 지엽적인 것들만 건드린다. 예를 들면 미국이 주한미군 주둔 비를 5배나 인상하자고 하고 미국의 전략무기에 대해서도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는 요구를 할 경우 이런 미국의 비상식적인 요구의 뿌리가 어디인지 언급치 않는다. 그것은 한미동맹관계의 핵심 사항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는 미국이 한반도에 군사력을 배치하는 것을 권리(right)로 규정해 놓고 이 4조의 부속협정으로, 주한미군의 기지와 시설비용을 한국이 부담토록 SOFA를 만들었다. SOFA에 따르면 주한미군 주둔 비는 미국이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이 이를 부담하도록 만들기 위해 S0FA의 예외규정으로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 (SMA)를 만들었다. 주한미군은 미국의 동북아전략 수행에 기여하는 것으로 공인되어 있지만 한국이 몽땅 부담을 지는 SOFA와 SMA가 왜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를 따지는 언론이 없다. 이는 필리핀과 일본이 미국과 맺은 방위협정이나 조약과 비교하면 한미군사동맹이 얼마나 심각한 불평등 조약인지 자명해진다. 그러나 필리핀과 일본의 경우를 한국과 비교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촛불혁명 뒤 고고도방위미사일체계, 사드 문제가 여전히 시끄럽지만 문재인 정권이나 대중매체 모두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 의해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은 미국에 보장된 권리(right)를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치 않는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사드의 국회비준을 추진한다는 등의 논리에도 맞지 않는 공약을 한 뒤 집권 뒤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대중매체도 마찬가지다. 같이 침묵하면서 기레기 언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국보법도 그 이유의 하나이다. 미국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나 비판도 한미동맹을 약화시킨다거나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식의 국보법 논리에 겁박당한 결과라 하겠다. 국내에서는 미국의 참전이 6.25 한국전쟁에서 적화통일을 막아준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점에서 한미동맹을 비판하거나 비우호적인 태도로 보도하는 것은 국보법에 저촉된다는 식의 강압적 분위기가 냉전시대 내내 지속되었고 그 후유증은 여전하다. 

북측이 최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남측을 향해 남북간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식의 말 폭탄을 쏟아내자 미국은 한미연합훈련 재개 및 전략자산 전개 등을 통한 효과적인 연합 방위 능력 보장 등을 위해 한국과 지속해서 논의할 것이라고 밝히고 국내 언론도 이를 크게 보도하고 있다<연합뉴스 2020년 6월 20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한국 영토 내에서 대북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을 언급한다는 점이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이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과 관련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전략을 수립했다는 것을 밝힌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선제공격을 하려면 남한을 전진기지로 삼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한이 주권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육해공군 병력의 주둔을 허용하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한국이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과 그 후속 군사작전을 가능케 하는 미군사력의 남한 배치를 불허하면 미국은 대북 선제공격 전략을 수행하기 어렵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선제공격을 할 경우 미국은 수십만 명의 육상병력과 수백 척의 군함, 1천 여기의 군용기를 한국이나 가까운 일본에 미리 배치해서 북한의 주한미군 공격 등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군사력을 남한에 배치하려면 남한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런 형편인데도 미국은 왜 한반도 군사 긴장상태만 되면 군사적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조치를 먼저 언급하는 것일까. 국제법에 의해, 한국이 군사적 자주권을 행사한다면 미국보다 먼저 언급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갑이고 한국이 을인 군사적 현상이 고착되어 있고 그것이 반복되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가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미국이 한국을 무시하는 군사적 행동 을 반북하는 관행의 기본 뿌리는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다. 이 조약에 의해 미국은 자국 군사력을 한반도에 배치할 권리(right)를 행사할 수 있고 대북 선제공격 전략도 이 조약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다. 

최근 전개되고 있는 남북한 간 긴장고조의 이유는 한반도 비핵화 추진 과정에서 남한이 미국의 종속변수의 역할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좁혀지고 있다. 남북 정상 간에서 판문점과 평양합의 등으로 교류협력의 청사진을 내놓았지만 유엔과 미국의 대북 제재에 걸려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향후 특별한 계기가 없을 경우 미 대선이후에도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한국이 자주적 공간을 확장시키거나 독립적 변수의 역할을 하기는 힘든 것으로 북한이 판단한 결과로 보인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주한미군 방위비 문제에서 미국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유엔과 미국의 대북 제재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다는 전략이어서 남북정상간 합의는 거의 실천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미국은 공군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 등 특수정찰기 등 각종 전략자산을 지난 5월 들어 거의 격일 간격으로 한반도 주변에 출동시켰다< 뉴스1. 2020년 5월 17일>. 미국의 이런 조처는 남북 정상간 합의나 남북한 간의 9.19군사합의 등을 무력화시키는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내 대중매체는 남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나 여러 조치 등에 대해 언론소비자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보도하지 않는다. 대부분 주변부를 훑는 식의 변죽만 울리는 것이다. 왜 이럴까. 결국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국보법 논리가 대중매체와 학계, 통일운동 시민사회, 국내 정치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태를 보면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구도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할 만큼 그 내부 모순이 심화된 결과로 보인다. 남북한이 전쟁은 절대 안 된다면서 교류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의 대원칙에 동의했지만 남측의 경우 국보법 때문에 대북 교류협력은 집권 세력 특히 대통령의 의중만이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헌법에 규정된 주권자인 국민은 대북 교류협력에서 그 역할이 국보법에 의해 제한되고 협소한 상황이다. 시민사회의 각성과 그 동원력이 촛불혁명을 가능케 할 정도가 되었지만 국보법은 국민을 여전히 사회주의 사상에 취약하고 그것에 오염될 가능성이 큰 존재로 규정되고 있어 남북교류협력의 주체로 공인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시민사회의 높은 의식화 수준과 큰 괴리를 보이고 있다. 

한미군사 동맹의 경우 필리핀과 일본이 미국과 맺고 있는 군사동맹과 비교하면 얼마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불평등한 조약인지 금방 들어난다. 이에 대해 국내 어느 언론도 한미동맹의 정상화를 위해 해외 사례와 비교하는 식의 보도를 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트럼프는 주한미군 방위비를 터무니없이 올려달라는 행패를 부리고 미국의 전략무기에 대해서도 한국이 그 비용을 올려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는 중국을 겨냥한 목적이 더 큰 것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이에 대항할 무기 체계를 배치하거나 합동군사훈련을 통해 미국 사드의 한국 기지를 격파할 훈련을 있는 상황이다. 특히 한중 경제관계를 볼 때 중국이 수년전 사드 관련 경제 보복 조치를 취한 것을 되돌아보면 한국이 군사적인 면에서 자주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 결과는 비참할 것이다. 남북교류협력이나 평화통일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국내 대중매체가 진정으로 제 4부의 역할을 자임한다면 국보법과 한미동맹으로 빚어진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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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36개 시민단체 "검역주권 훼손, 폭죽 난동 주한미군 나가라!"

조윤영 통신원 | 기사입력 2020/07/06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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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윤영 통신원

  

 "범죄난동, 방역 무시 주한미군은 당장 이 땅을 떠나라!"

 

“노 마스크”, “폭죽 난동” 등 주한미군 행태에 대해 국민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본국 출국을 자제 당한 주한미군과 그 지인들은 휴가철을 맞이하여 부산 해운대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를 대비하여 부산광역시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 해변가에서 마스크를 나눠주고 있으나 대부분 거절한 채 휴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시민들의 불안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4일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휴가 중이던 주한미군이 민간인과 인근 건물에 폭죽을 직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오산, 대구 등지에서 근무하는 주한미군으로 밝혀진 이들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도 폭죽을 쏘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등 안보를 위해 일하는 군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 논란이 되고 있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마스크도 쓰지 않고 인파 속으로 도망친 것이 밝혀졌다.

 

36개 부산 시민, 사회단체들은 6일 백운포 미 해군기지 앞에서 해당 상황에 대한 미국당국의 책임 있는 조치와 굴욕적인 한미관계 청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주한미군이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SOFA협정으로 인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이번에도 범죄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똑같이 되갚아줄 것임을 명백히 밝힌다”라며 “방위비분담금 인상 강요, 세균무기실험 자행도 모자라 우리 국민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나왔다”라고 기자회견의 취지를 밝혔다.

 

최병학 NCC 통일위원장은 “이전에 주한미군이 저지른 범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은 피해자는 있으나 죄지은 사람은 없는 사건이다.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며 “나라 이름에 들어가는 아름다울 ‘미’ 자가 아깝다”라고 발언했다.

 

신새벽 청년 진보당 당원은 “자신들의 독립은 소중한 줄 알면서 우리를 식민지처럼 취급하고 있다. 경찰에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하는 행동들이다. 이 땅에서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며 “감만동에서는 세균무기실험 자행, 해운대에서는 난동 부리는 미국은 희대에 민폐 국가이다. 이제는 이들과 단호히 결별해야한다”라고 말했다.

 

▲ 신새벽 청년 진보당당원이 발언하는 모습  © 조윤영 통신원

▲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는 모습  © 조윤영 통신원

 

참가자들은 오늘(6일)부터 주한미군에 방역 행동에 적극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만약 협조하지 않을 시 강도 높은 행동을 이어갈 것이라 경고했다.

 

한편, 주한미군은 SOFA협정에 근거하여 우리나라에 출입국시 세관검사를 받지 않아 코로나 방역의 구멍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전염성이 높은 코로나19 특성상 정확한 출입국 인원조차 공개하지 않는 것은 검역주권 훼손이라는 주장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집단발병으로 논란이 된 이태원 확진자들 검사 결과 미국 등지에서 발병된 C형 코로나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태원에서 코로나가 재확산되자 주한미군이 코로나19의 새로운 진원지로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래는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아래----------

 

코로나19 방역 무시한 무법천지 폭죽난동 미군가만두지 않겠다

 

7월 4일 밤 휴가를 나온 미군들이 해운대에서 휴가를 즐기던 우리 국민들에게 화약폭죽을 쏘고 위협을 가하며 난동을 부린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은 술에 취해 서로 치고 받고 싸움판을 벌이는가 하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차관들을 비웃고 조롱하며 도망을 치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짓들을 해 댔고 거리 시민들을 향해 정면으로 화약폭죽을 발사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코로나사태 와중임에도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떼를 지어 거리를 활보하고 곳곳에 침을 뱉고 다니기도 했다정작 미국에서는 코로나 감염확산을 막기 위해 독립기념일 파티를 자제했다고 하는데 주한미군은 이 땅에서 거나하게 광란의 난동파티를 벌인 것이다.

 

온 국민이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는데 주한미구과 그 가족들은 무슨 특권으로 마스크 하나 한지 않은 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가그래놓고도 왜 제대로 처벌받지않는가왜 우리를 무시하고 종할고 위협하는가.

 

최근 점차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가 C타입의 새 형이고 이는 한국의 검역을 받지 않는 주한미군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심이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지고 있는 이 민감한 시기에 미군들에게 대거 휴가를 줘서 전국 곳곳에 풀어놓고 난동과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책임은 분명 미국 당국에 있다.

 

우리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책임을 묻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주한미군이 이번에도 전횡을 부리며 범죄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똑같이 되갚아줄 것임을 명백히 밝혀두는 바이다.

 

방위비분담금으로 우리 혈세를 강탈하고 맹독세균을 들여와 세균전 실험을 해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코로나19도 무시한 채 공권력가 국민을 조롱하고 위협해대는 주한미군은 당장 이 땅에서 나가야 옳다.

우리는 격분의 마음을 안고 명한다.

 

범죄난동방역무시 주한미군은 당장 이 땅에서 나가라

세균전실험혈세강탈 주한미군은 나가라

식민지 점령군 노릇하는 주한미군 당장 이땅에서 꺼져라

 

2020년 7월 6

 

6.15남측위부산본부감만동8부두미군부대세균무기실험실철거남구지역대책위겨레의길민족광장국민연금노동조합부울지회노동예술지원센터 흥동아대학교민주동문회민주노동자전국회의부산지부민주논총부산본부발전노조부산지부범민련부산연합부경대핚교민주동문회부경주권연대부산겨레하나부산대학교민주동문회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산민중연대부산여성단체연합부산여성회부산예수살기부산지역대학생겨레하나부산청년진보당부산평통사부산풀뿌리네트워크부산학부모연대부산환경운동연합부울경518민주유공자회열린포럼자주평화친선한의사연대동백전교조부산지부전국공무원노동조합부산지역본부전국학교비정규집노동조합부산지부진보당부산시당철도노조부산본부청년가치협동조합평화통일센터하나희망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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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명운 걸린 ‘3대 과제’…직접 페달 밟는 문 대통령

정제혁 기자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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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 국정 전면에 왜? 

정권 명운 걸린 ‘3대 과제’…직접 페달 밟는 문 대통령
 

부동산 안정, 민심 서둘러 진화
한반도 평화, 인사 통해 재정비
검찰개혁, 공수처 출범에 박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부동산 정책에 대한 긴급 현안보고를 받았다. 3일에는 청와대와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을 대폭 교체하며 북·미 중재자 행보 재개를 위한 진용을 갖췄다. 그에 앞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시한 내 출범을 여러 번 촉구하며 검찰개혁 제도화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문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3대 이슈로 부상한 부동산 안정, 한반도 평화, 검찰개혁의 전면에 나섰다. 현 정부 아킬레스건(부동산), 정체성(한반도 평화), 적폐청산 상징(검찰개혁)에 해당하는 이들 이슈는 정권의 성패와 직결된다. 안정(부동산), 대반전(한반도 평화), 가속화(검찰개혁)를 통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발등의 불은 부동산이다. 정부가 6·17 대책을 내놓았지만 집값은 잡히지 않고, 대출 제한으로 내 집 마련 문턱만 높아졌다는 실수요자의 볼멘소리가 크다. 청와대와 정부 고위 공직자 상당수의 다주택 보유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본질은 우연을 가장해 모습을 드러낸다. 청와대 내부 의사소통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강남 아파트 처분 번복 해프닝은 ‘강남불패’ 신화가 현 정부 고위 공직자들에게 얼마나 내면화되어 있는지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손색이 없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방향은 문 대통령이 제시했다. 다주택자와 고가 주택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인상,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을 돕기 위한 물량공급 확대와 세부담 완화 등이다. 국토부는 부처 간 협의를 거쳐 문 대통령의 지시를 구체화한 추가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여당은 종부세법 개정안을 7월 임시국회에서 밀어붙일 공산이 크다. 부동산 입법을 둘러싼 여야 대치가 예고돼 있는 셈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노영민 비서실장의 ‘다주택 해소’ 권고를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이 이행할지 여부다. 시한으로 제시한 이달 말까지 권고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인사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로 누군가 옷을 벗는 초유의 사태가 현실화할 경우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들의 기강과 청와대 내부 갈등의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이 지난 3일 단행한 외교안보 라인 개편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내정이다. 박 내정자는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19대 대선, 20·21대 총선에서 문 대통령의 정적이었다. 그런 박 내정자를 깜짝 발탁한 것은 남북관계 경험과 정치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박 내정자, 서훈 국가안보실장 내정자, 임종석·정의용 외교안보특보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들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 내정자는 통일운동을 전면화한 86세대 중추다. 민주화 이후 세 차례 민주정부에서 쌓은 남북관계 역량, 통일운동 역량의 총집결인 셈이다. 오는 11월 미 대선 전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현 정부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현실적 판단도 깔려 있다.

검찰개혁 전선은 두 갈래다. 하나는 공수처 출범을 위한 입법 전선이다. 문 대통령은 법 부칙에 적힌 대로 이달 중순 공수처를 출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출범 시점, 공수처장 후보자 추천 등을 놓고 여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국정 전면에 나서는 문 대통령 

다른 하나는 법·검 갈등이다. 윤석열 검찰총장 측근인 한동훈 검사장 관련 수사를 놓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 총장이 연일 충돌 중이다. 사태가 봉합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누구의 손을 들어주건 정치적 부담이 작지 않다. 절반의 인사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과 검찰개혁은 내치 영역이다. 문 대통령의 무기는 국회 다수 의석이다. 다만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이다. 한반도 평화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문 대통령이 외교안보라인 교체를 통해 북측에 대화 메시지를 던진 다음날,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북·미 대화 가능성을 일축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7060600005&code=910203#csidx6bf41cc027578b68c00094c438fed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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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코로나19 재확산?..."자만 안돼, 비상 방역 더 강화"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시 이행 차원...코로나 19 경계 강화 주문

북한 당국이 코로나 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없다고 자만해서는 안된다며, 방역에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5일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1면 사설을 통해 지난 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주재한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14차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코로나 19 방역이 주로 논의됐다는 점을 상기한 뒤 "오늘의 방역 형세가 좋다고 자만 도취되어 긴장성을 늦추지 말고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전염병 유입 위험성이 완전히 소실될 때까지 비상 방역 사업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신문은 "세계적으로 악성 비루스(바이러스)의 전파가 날로 확대되고 있는 조건에서 사소한 방심과 방관, 만성화된 사업태도나 서뿌른(섣부른) 방역조치의 완화는 상상할 수도, 만회할 수도 없는 치명적인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며 "국가의 안전과 인민의 안녕을 백방으로 보장하고 담보하자면 정치국 확대회의 결정대로 이미 이룩된 방역성과를 부단히 공고화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문은 "세계적인 규모에서 악성전염병의 재감염, 재확산 추이가 지속되고 있고 그 위험성이 해소될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방역전초선이 조금도 자만하거나 해이됨이 없이 최대로 각성, 경계하여야 한다"며 "방역 사업을 재점검하고 비상방역체계를 엄격히 유지하기 위한 보다 세밀하고 적실한 대책들을 강구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신문은 "우리 당은 세계적인 대유행병의 발생초기에 벌써 선견지명있는 영도력을 발휘하여 악성비루스의 경내침입을 막기 위한 철저한 조치를 취하였다"며 지난 6개월 간 방역과관련해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 3일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날인 2일 제7기 제14차 정치국 확대회의를 주재했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

이와 함께 신문은 평양 종합병원 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건축공사가 일정계획대로 추진되는 데 맞게 시공 부문, 자재보장 부문, 운영준비 부문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해야 평양 종합병원이 우리 당의 인민관이 완벽하게 구현된 로동당(조선노동당) 시대의 기념비적 창조물로 일떠서게 된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건설에 동원된 시공단위들에서는 당이 바라는대로 기념비적창조물을 최상의 수준에서 완공하기 위한 충성의 돌격전, 과감한 전격전을 벌려나가야 한다. 성, 중앙기관들과 공장, 기업소들에서는 세멘트(시멘트)와 철강재, 연유와 목재 등 공사에 필요한 자재와 설비들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여야 한다"고 말해 병원 건설을 위한 자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신문은 "이번 정치국 확대회의야말로 인민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인민을 위하여 멸사복무하는 우리 당의 인민대중제일주의정치를 철저히 구현해나가는데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리정표(이정표)"라며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14차 정치국 확대회의 기본정신을 철저히 구현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앞서 김 위원장은 2일 열린 확대회의에서 "6개월간에 걸치는 국가적인 비상 방역 사업 실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했다며 "최근 주변나라들과 인접 지역에서 악성전염병의 재감염, 재확산 추이가 지속되고 있고 그 위험성이 해소될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방역전초선이 조금도 자만하거나 해이됨이 없이 최대로 각성경계하며 방역사업을 재점검하고 더 엄격히 실시할 데 대하여 지적"했다고 북한 관영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70514051119281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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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비밀은 없다

[개벽예감 402] 영원한 비밀은 없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7/06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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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긴급작전회의 소집한 미국 육군 소령

2. 하우스만이 취한 두 가지 긴급행동

3.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했을까? 

4. 미국공산당 당원과 조선공산당 당수의 비밀회동

5. 미육군 방첩대가 구축한 재북간첩망

 

 

1. 긴급작전회의 소집한 미국 육군 소령

 

2020년 6월 29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를 집필하던 나에게 수수께끼 같은 의문이 생겼다. 나는 그 글에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 백선엽의 회고록에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인용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 있었던 그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전화를 당일 오전 7시경에 받았다고 한다. 누가 백선엽에게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백선엽은 누가 자기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주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의문은 백선엽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왜 밝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자료를 뒤진 끝에 나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백선엽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왜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하우스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하우스만이 백선엽에게 긴급작전회의에 나오라는 소집통보전화를 걸었기 때문이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소집해야 하는 긴급작전회의를 왜 하우스만이 소집했을까 하는 의문을 풀려면, 하우스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1995년 서울에서 출판된, 하우스만의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따르면, 그는 1946년 7월 말 춘천지구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8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1개월 근무했다. 그는 국방경비대 연대장에서 국방경비대 집행국장으로, 국방경비대사령관 고문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국방경비대사령관 고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한국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일개 미국 육군 대위의 손에서 창설되었다는 치욕의 역사는 하우스만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철수를 완료하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군사고문단이 설치되었던 1949년 7월 1일 하우스만은 소령으로 진급하고 미국군사고문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미국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육군 준장 윌리엄 로벗츠(William L. Roberts)는 도꾜와 워싱턴으로 출장을 가서 머무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참모장 하우스만이 단장의 직무를 대행하면서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대령급 또는 중령급 미국군사고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하우스만이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들을 통해 한국군 전체를 지휘통제했음을 말해준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채병덕과 같은 방에서 나란히 책상을 놓고 근무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직접 (한국군의)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을 뿐 아니라,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용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다”고 했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매주 한 차례 군사안전위원회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미국측에서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와 참모장 제임스 하우스만이 참석했고, 한국측에서 대통령 이승만,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참석했다. 하우스만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었는데, 이승만은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에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는가 하는 고위급 인사문제까지 하우스만에게 물어보고 결정했다. 이런 사정은 이승만이 하우스만의 꼭두각시였고, 채병덕은 하우스만의 허수아비였음을 말해준다.  

 

하우스만은 극악무도한 반공광신자였다. 토벌대사령관 백선엽은 사살당한 남조선인민유격대 지휘관의 목을 20리터들이 휘발유통에 넣어 하우스만에게 보냈고, 하우스만은 휘발유통 속에서 얼굴이 퉁퉁 부어 누군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된 피살자의 목을 건져 올려 자신이 직접 신원을 확인하는 잔인성을 드러냈다.  

 

하우스만은 6.25 전쟁 중인 1951년에 미국 국방부 코리아정보과로 잠시 전근했다가 이듬해 주한미국군사단 고문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1956년 3월에 주한미국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8년에 전역하면서 주한미8군사령관 특별고문에 임명되어 1981년까지 그 직위에서 한국군을 사실상 지휘통제했다. 

 

한국군을 지휘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의 내부사정을 파악해야 6.25전쟁 개전상황에 그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는데, 하우스만이 회고록에 서술한 미국군사고문단의 내부사정은 다음과 같다.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는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 전역명령을 받은 그는 1950년 6월 22일 일본 도꾜종합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던 아내를 퇴원시키고 아내와 함께 미국행 수송선에 올랐다. 한국군을 지휘통제하는 미국군사고문단 단장은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수송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전역한 단장의 빈자리를 채워 한국군을 지휘통제해야 할 미국군사고문단 부단장(육군 대령) 스털링 라이트(W. H. Sterling Wright)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가족을 바래주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일본 도꾜에 있었다. 

 

위에 서술한 사정을 보면, 하우스만이 한국군을 지휘통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의 운명은 일개 미국 육군 소령의 손에 놓여 있었다. 

 

하우스만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중대한 정보를 어떤 경로로 파악했을까? 1950년 6월 24일 밤 미국군사고문단 장교들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한국군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사교춤을 즐기다가 각자 집에 돌아가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하우스만은 예외였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폐결절에 걸려 도꾜종합병원에서 치료받던 그의 아내 버트가 1950년 6월 11일에 퇴원하여 남편을 만나기 위해 서울행 C-54 수송기를 탔는데, 이륙하기도 전에 고장이 나는 바람에 수송기를 고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녀가 긴급수리를 받은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내린 때는 1950년 6월 24일 오후였다. “아직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아내를 집에 데리고” 간 하우스만은 한국군 장교구락부 연회에 나갈 수 없었다. 하우스만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5시쯤 한국군 육군본부에서 걸려온 긴급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그가 자기 집에서 약 100m 떨어진 육군본부 청사로 달려갔더니,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채병덕의 직속상관인 국방장관 신성모는 어디에 있는지 전화연락이 되지 않았고, 채병덕의 작전참모인 육군 대령 장창국은 집을 이사하는 바람에 새 주소를 알지 못해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한국군 최전방 전투부대 지휘관들은 무선통신을 통해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채병덕에게 무질서하게 보고했다. 공식보고체계에 따라 제대로 보고하려면,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단 정보고문이 전황보고를 취합, 정리하여 하우스만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미국군사고문들은 서울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난장판에서 하우스만이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9년 9월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연설하는 장면이다. 단상에는 미국군 지휘관들이 앉아있다. 사진에서 맨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제임스 하우스만이다. 그는 당시 미국 육군 소령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세워진 이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매주 한 차례 군사안전위원회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미국측에서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와 참모장 제임스 하우스만이 참석했고, 한국측에서 대통령 이승만,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참석했다. 하우스만은 미국군사고문단 참모장으로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하우스만은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무력충돌이 국지전으로 확전되자,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일본 도꾜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개전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의 운명은 일개 미국 육군 소령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2. 하우스만이 취한 두 가지 긴급행동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하우스만은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접경지대에서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으로 판단했다가, 약 3시간 뒤에는 초기판단을 수정하여 조선인민군이 “전면적인 공격으로 보이는”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한 하우스만은 두 가지 긴급행동을 취했다. 

 

1) 하우스만이 취한 긴급행동은 미국군사고문단을 일본 도꾜로 철수시키는 일이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백선엽과 함께 경기도 파주에 나가 전황을 파악하던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이드 로크웰은 급히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선을 떠나 서울로 돌아갔다. 하우스만이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하우스만은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왜 도꾜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이 의문을 풀어줄 해답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에서 찾을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군사고문단은 즉시 도꾜로 철수하라는 미국 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명령이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하달되었다고 한다. 이런 정황은 맥아더가 6.25전쟁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이미 알았고, 전쟁에서 한국군이 패주할 것이라는 정보도 이미 알았음을 말해준다. 맥아더가 그런 정보를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하는 문제는 개전전황을 파악하는 데서 중요하므로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주한미국대사관은 서울에 체류하는 미국인들을 급히 일본 도꾜로 대피시켰는데,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미국군사고문단도 함께 대피시키려고 했다. 서울에 체류하는 미국인 2,000여 명은 수송기 또는 수송선을 타고 이틀에 걸쳐 일본으로 대피했다. 

 

그런 와중에서 하우스만은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John J. Muccio)와 상의한 끝에 미국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남아있는 것이 한국군의 사기를 위해 필요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한국군에 남기를 자원하는 군사고문은 남아도 된다고 명령했다. 그렇게 되어 미국군사고문단 소속 장병 487명 중에서 약 32명이 남았다.   

 

2) 하우스만이 취한 또 다른 긴급행동은 개전전황을 상부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긴급작전회의를 소집한 하우스만은 그 자리에 주한미국대사 무쵸도 불렀다. 개전전황을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하우스만은 급한 김에 개전전황을 자기가 아는 대로 무쵸에게 설명했다. 하우스만의 설명을 들은 무쵸는 당일 오전 10시경 워싱턴에 있는 미국 육군성에 긴급히 타전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하우스만은 왜 무쵸를 통해 상부에 개전전황을 보고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 의문을 풀어줄 해답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에서 찾을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1949년 6월 30일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주한미국군 제5보병연대가 하와이로 철수한 직후, 미국군사고문단은 독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주한미국대사관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사정이 그렇게 바뀌었으므로, 하우스만은 자기가 직접 육군성에 보고하지 않고 무쵸를 통해 보고한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제주도인민유격대가 무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던 1948년 6월 18일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미국 육군 준장 윌리엄 로벗츠가 제주도토벌사령부를 시찰하는 장면이다.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윌리엄 로벗츠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개전 직전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 전역명령을 받은 그는 1950년 6월 25일 자기 아내와 함께 미국행 수송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가 떠난 미국군사고문단에서 참모장인 제임스 하우스만은 단장의 직무를 대행했다.   

 

3.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했을까?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한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8일 오전 서울 전역을 점령했다.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한 그들은 진격을 멈췄다. 2020년 6월 29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나의 글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에 서술한 것처럼, ‘서울해방작전’은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10일 동안 ‘해방’하고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한강도하장비를 가져오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진격하려고 했다면, 한강, 금강, 낙동강을 건널 도하장비를 가져왔어야 한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경 한국군 공병부대는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조선인민군은 서울에서 진격을 멈추고 한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한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패주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해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자초했다. 그런데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폭파되지 않은 한강 철교의 철로 위에 널빤지를 깔면 조선인민군 전차부대가 얼마든지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작전계획에 따라 서울을 점령한 후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서 3일을 보냈다.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은 3일 동안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맥아더가 한강방어선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용기를 타고 도꾜를 출발한 맥아더가 경기도 수원비행장에 내린 시각은 1950년 6월 29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내리자마자 곧장 군용차를 타고 북상하여 한강방어선으로 나갔다. 그의 참모들은 한강방어선 시찰이 매우 위험하다고 만류했으나 맥아더는 듣지 않았다. 한강방어선에 도착한 맥아더가 언덕을 오를 때, 주변에 포탄이 떨어졌다. 낙탄각도가 조금 더 예리했으면, 맥아더는 즉사했을지 모른다.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맥아더는 포탄이 날아오는 한강방어선에 왜 위험을 무릅쓰고 나타난 것일까?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시찰이 백전로장의 용감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겁쟁이였다. 이를테면, 태평양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942년 3월 11일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자, 마닐라에 있던 맥아더는 어뢰정을 타고 이틀에 걸쳐 민다나오로 꽁무니를 뺏고, 민다나오에서 다시 B-17 폭격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으로 달아났다. 맥아더가 제 목숨을 건지려고 멀리 도망치는 바람에 약 70,000명에 이르는 미국군과 필리핀군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런 겁쟁이 맥아더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것은 결코 용감성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맥아더는 패주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군의 사기를 올려주려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것도 아니었다.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시찰은 은밀한 행동이었으므로, 한국군 전투부대들은 그가 한강방어선에 다녀갔는지 몰랐다. 

 

1950년 6월 27일 오전 맥아더는 육군 소장 존 처치(John H. Church)를 전선사령관으로 임명해 경기도 수원에 보냈다. 처치는 ‘전방지휘연락단(Advanced Command and Liaison Group)’이라는 명칭의 전선사령부를 수원에 설치하고 전쟁을 지휘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도꾜 집무실에 앉아서 전선사령관 처치로부터 수시로 전황보고를 받아보면서 작전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맥아더가 굳이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 그 까닭은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군사고문단이 도꾜로 철수하라는 맥아더의 대피명령이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내려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맥아더가 전쟁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미리 알았다고 서술했는데, 거기에 더하여 맥아더는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까지 알았던 것이다. 

 

당시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를 아는 조선의 최고위급 인사들은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다. 조선의 최고위급 인사들만 아는 극비정보를 맥아더가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간첩망이 조선의 최고위층에 침투해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맥아더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대북간첩망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47년 9월 18일에 창설된 미국 중앙정보국은 적국에 독자적인 간첩망을 구축할 능력을 아직 갖지 못했고, 따라서 1950년 6월 당시에는 정보분석에 집중하고 있었다. 2007년에 기밀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의 2급 비밀문서 ‘비밀공작사(Clandestine Service History)’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이 독자적인 간첩망을 북에 구축하기 시작한 때는 1950년 9월 말경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1950년 5월 15일에 작성한, ‘북조선 정권의 현재 능력’이라는 제목의 비밀보고서(ORE 18-50)는 조선인민군이 38도선에서 무력을 증강하고 있다는 정보에 근거하여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는 제한적이고, 단기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이것은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을 예측한 중요한 정보였지만, 중앙정보국을 신뢰하지 않는 맥아더가 그들이 작성한 비밀보고서를 보고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맥아더에게 알려준 간첩망은 따로 있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6.25전쟁 중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간 미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와 담화하는 장면이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용기를 타고 도꾜를 출발하여 경기도 수원비행장에 도착해 곧장 한강방어선으로 나갔다. 그의 참모들은 한강방어선 시찰이 매우 위험하다고 만류했으나 맥아더는 듣지 않았다. 맥아더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모험을 감행한 까닭은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극비정보를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를 아는 조선의 최고위급 인사들은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는데, 그런 극비정보를 맥아더가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간첩망이 조선의 최고위층에 침투해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4. 미국공산당 당원과 조선공산당 당수의 비밀회동

 

1945년 12월 어느 날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꾜에서 날아온 수송기 한 대가 착륙했다. 수송기 탑승자들 중에서 유난히 시선을 집중시킨 사람은 미국 육군 소위 군복을 입은 조선여자였다. 조선여자가 미국 육군 군복을 입고 서울에 나타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현미옥이고, 미국 이름은 앨리스 현(Alice Hyun)이다. 당시 미국의 점령지였던 남조선에서 현미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녀가 장차 엄청난 사건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 육군 소위 현미옥은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에 배속되었다.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정보참모부 지휘관은 미국 육군 대령 쎄실 니스트(Cecil W. Nist)였다. 그의 밑에는 미국 육군 장교 10명과 사병 16명, 육군성 군속 45명, 조선인 군속 363명이 있었다. 정보참모부는 행정과, 남조선과, 북조선과, 군사실, 정치부, 평양연락사무소를 두었다. 정보참모부 관하에는 방첩대분견대(Counterintelligence Corps Detachment)와 민간통신검열단(Civil Communication Intelligence Group)이 이었다. 

 

방첩대(CIC)분견대는 비밀공작과 간첩활동을 수행했는데, 1946년 4월 제971방첩대분견대로 개편되었다. 제971방첩대분견대는 서울에 있는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관하 부대이면서도 도꾜에 있는 미원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지휘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맥아더는 제971방첩대분견대가 구축한 간첩망을 통해 남북조선의 내부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점령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던 1949년 5월 미점령군에 속한 제971방첩대분견대도 철수했지만, 맥아더는 서울에 특수조사부(Special Investigation Section)와 코리아연락실(Korea Liaison Office)을 설치하고 공작망과 간첩망을 계속 운영했다. 현미옥이 배속된 민간통신검열단은 남조선에서 오가는 우편물과 전보를 검열하고, 전화통화를 도청하는 민간사찰부대였다. 그런데 현미옥은 누구인가? 

 

현미옥은 재미동포 1세들이 사탕수수농장에서 고된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던 1903년 미국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현순(1880~1968)은 1911년 가족을 데리고 하와이에서 서울로 돌아갔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현순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19년 4월 이동녕, 손정도와 함께 임시정부수립에 동참했다. 사회주의성향을 지닌 독립운동가인 현순은 1919년 9월 김철훈을 중심으로 로씨야 이르꾸츠크에서 창당된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청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에 머물던 현미옥은 초기 임시정부에 참가한 사회주의성향의 청년들이었던 박헌영, 여운형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26년 현미옥은 가족과 함께 미국에 돌아가 조선독립운동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사회주의운동이 전성기를 맞았던 1930년대 중반 미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대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은 재미독립운동가들이 미국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45년 12월 미국 육군 소위 군복을 입고 서울에 나타나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 배속된 현미옥은 미국공산당원이었다. 서울에서 현미옥은 1920년대초 상하이에서 친분을 쌓았던 박헌영을 남몰래 찾아갔다. 1945년 8월 24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당수였다. 기록에 의하면, 현미옥은 1946년 1월 11일부터 박헌영을 여러 차례 만났다. 미국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 당수의 특이한 만남이었다. 현미옥은 박헌영에게 미국공산당에 소속된 재미동포당원들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공산당 일지’에 따르면, 1946년 3월 2일 현미옥은 미점령군에 배속되어 서울에 체류하던 미국인 미국공산당원 3명과 함께 박헌영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미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연대협력문제를 협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미옥은 박헌영이 자기 직속상관인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의 비밀지령을 받는 제971방첩대분견대 소속 거물간첩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헌영이 제971방첩대분견대에 포섭된 거물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1946년 8월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는 현미옥이 민간통신검열단에 배속된 이후 통신검열이 급격히 하락했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현미옥이 민간통신검열단에서 근무할 조선인 통역자와 번역자를 고용하는 일에 개입하여 공산주의자들을 고용시킴으로써 민간통신검열단 임무를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고 하면서, 현미옥을 “제거했다”고 말했다. 제거라는 말은 민간통신검열단에서 축출하고, 강제전역시켰다는 뜻이다. 강제전역을 당한 현미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다. 1946년 말부터 현미옥을 비롯한 재미동포 미국공산당원들은 체스꼬슬로벤스꼬 프라하에 체류하는 고고학자 한흥수를 통해 북과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미국에는 광란적인 반공선풍이 몰아쳤다. 1947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르먼(Harry S. Truman)은 연방정부 공직자들의 사상을 검열하는 대통령행정명령을 발동했다. 광란적인 반공선풍 속에서 수많은 미국공산당원들이 ‘소련의 간첩’으로 몰려 형벌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1940년대 말에서 1951년까지 기간에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미국공산당원 약 1,500명을 공갈, 협박하여 자기들에게 협력하는 첩자로 만들었다.   

 

한흥수를 통해 북과 연락하던 재미동포 미국공산당원들이 광란적인 반공광풍 속에서 무사할 리 없었다. 미국 연방수사국은 현미옥에게 미국공산당에서 탈당하고 자기들에게 협력하면 석방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공갈, 협박했던 것이 뻔한데, 불행하게도 현미옥에게는 형벌을 받더라도 자기의 사상을 지키려는 신념과 의지가 없었다. 저들의 공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현미옥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거쳐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간첩망에 인입되었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194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된 현미옥의 가족사진이다. 안경을 쓴 사람이 현미옥의 아버지 현순이고, 맨앞쪽에 앉은 사람이 현미옥의 동생 피터현이다. 사회주의성향을 지난 항일독립운동가였던 현순은 1948년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감리교 목사였고, 현미옥과 피터현은 미국공산당원이었다. 현미옥의 미국 이름은 앨리스 현이다. 현미옥은 1945년 12월 미국 육군 소위로 서울에 들어가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관하 민간통신검열단에 배속되었다. 미국공산당원인 그녀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과 여러 차례 접촉했다. 현미옥과 박헌영은 1920년대 초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에 가깝게 지냈었다. 현미옥은 자기가 서울에서 다시 만난 박헌영이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관하 제971방첩대분견대에 포섭된 거물간첩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현미옥은 박헌영과 첩촉한 것이 발각되는 바람에 강제전역을 당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미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체스꼬슬로벤쓰고 프라하에 체류하는 고고학자 한흥수를 통해 북과 연락하고 있었다. 1947년 미국에 몰아친 광란적인 반공선풍 속에서 수많은 미국공산당원들이 체포되어 형벌을 받거나 해외로 추방되거나 미국 연방수사국의 첩자로 전락했다. 재미동포 미국공산당원들도 해외로 추방되었다. 현미옥도 미국 연방수사국의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저들의 공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현미옥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거쳐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간첩망에 인입되었다.   

 

5. 미육군 방첩대가 구축한 재북간첩망

 

1946년 9월 4일 미군정청은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다. 하지만 박헌영 체포령은 그를 평양에 침투시켜 제971방첩대분견대의 재북간첩망을 활성화하려는 자작극이었다. 미군정청은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으나, 제971방첩대분견대는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잠적했던 박헌영은 1946년 10월 6일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의 월북지령을 받고 강원도 홍천에 있는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들어갔다. 

 

박헌영이 월북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1946년 11월 12일 서울에서는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제13차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박헌영이 체포망을 뚫고 월북한 것을 막지 못한 책임을 추궁당한 장택상은 이렇게 말했다. (장택상은 미군정청 경무총감실 부총감 겸 수도관구 경찰청장이었다.) “나는 박헌영 체포명령을 받지 못했는데, 니스트 대령으로부터 박(헌영)을 찾으라는 명령은 받았다. 그런데 하지(미점령군사령관)는 니스트 대령이 하는 일에 결코 관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1946년 당시 미군정청 검찰총장이었던 이인은 1967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남로당 간부 80여 명을 검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하지는 다른 사람이야 (검거해도) 괜찮은데 박헌영(을 검거하는 것)은 잠시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말하고, 4~5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가 박헌영 체포를 보류하고 있었던 기간에 박헌영은 체포망과 경계망을 뚫고 월북했다. 

 

평양에 침투한 박헌영은 1948년 6월 자기 하수인 서득언(남로당 경기도당 조직부장)을 통해 니스트의 비밀지령을 받았다. 니스트는 비밀지령에서 현미옥을 비롯해 몇 사람을 유럽을 통해 북에 들여보내겠으니, 그들의 입국을 보장해주고, 입국한 뒤에는 간첩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건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1949년 1월 현미옥은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침투지령을 받고 평양에 가기 위해 프라하에 도착했다. 이경선이 동행했다. 이사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이경선도 현미옥처럼 미국공산당원이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크게 고무된 이경선은 1948년 11월 15일 미국공산당 조선인 당원대표의 명의로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과 박헌영에게 비밀서신을 보냈다. 이경선은 비밀서신을 서울에 가는 남궁요설에게 주면서, 임화에게 전해달고 부탁했다. 박헌영의 추종자였던 임화는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기획실장이었다. 

 

그런데 미육군 방첩대가 1949년에 작성한 비밀문서에 따르면, 임화는 이강국과 함께 제971방첩대분견대에 포섭된 간첩이었다. 임화처럼 박헌영의 추종자였던 이강국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이었다. 임화를 통해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에게 비밀서신을 보내려던 이경선은 임화가 제971방첩대분견대 소속 간첩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화는 1947년 8월 자기에게 내려진 체포령을 피해 잠적한 척하다가 1947년 11월 20일 월북했기 때문에 전달자가 이경선의 비밀서신을 임화에게 전해주려고 서울에 갔던 1948년 11월 임화는 서울에 없었으나,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평양에 전해졌다. <사진 5>   

 

▲ <사진 5>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오전 조선인민군 전차부대와 모터싸이클부대가 서울에 진입하는 장면이다.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한 그들은 진격을 멈췄다.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10일 동안 '해방'하고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전 미육군 방첩대는 거물간첩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삼은 재북간첩망을 구축하고 북의 비밀정보를 빼냈다. 재북간첩망이 빼낸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도 맥아더의 손을 거쳐 미국 육군성에 전해졌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되었다.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내전이 임박하였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들이 계속 나타났는데도, 트루먼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더라도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서울해방작전'의 극비정보를 알았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미국 연방수사국은 워싱턴주 씨애틀에서 미국공산당원 이경선을 체포했다. 현미옥과 마찬가지로 이경선도 중형을 받더라도 자기의 사상을 지키려는 신념과 의지를 갖지 못했다. 저들의 공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이경선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거쳐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간첩망에 인입되었다. 

 

1949년 1월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침투지령을 받고 평양에 가기 위해 프라하에 도착한 현미옥과 이경선은 체스꼬슬로벤스꼬 정부당국에 북조선에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체스꼬슬로벤스꼬 국가안전기관은 망명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그들을 의심했다. 조선의 사회안전성은 현미옥과 이경선의 망명동기가 분명하지 않다는 체스꼬슬로벤스꼬 국가안전기관의 통보를 받고 그들의 입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헌영은 사회안전성의 입북불허결정을 무시하고, 외무상 직권으로 그들에게 입국사증을 내주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되어 현미옥과 이경선은 프라하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입북했다. 평양에 활동거점을 마련한 현미옥은 박헌영의 후견을 받아 조선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 배치되었다. 박헌영은 현미옥의 직속상관이었다. 박헌영의 후견을 받은 이경선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부터 1968년까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부국장으로 근무했고, 1980년대 중반에 탈북, 입남한 신경완은 평양에 들어간 현미옥과 이경선이 프라하에 자주 편지를 보냈고, 단파라디오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신경완의 회고담에 따르면, 재일본조선인총련맹에서 활동하던 조창영이 아내와 함께 1949년 11월 중국 베이징을 거쳐 입북했다고 한다. 박헌영의 후견을 받은 조창영은 대외문화련락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조국보위후원회로 옮겨갔다. 박헌영은 조창영을 여러 차례 만났고, 조창영은 자기보다 약 한 달 전에 입북한 현미옥과 이경선을 2~3차례 만났다. 그런데 심경의 변화를 겪은 조창영은 1950년 3월 사회안전성에 자수하여 자신이 미육군 방첩대의 입북지령을 받고 귀국했다고 자백했다. 

 

1950년 3월 현미옥과 이경선은 사회안전성을 찾아가 동유럽을 다녀오려는데 해외여행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사회안전성은 해외여행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1950년 7월 현미옥과 이경선은 평양에 있는 이강국의 집에서 두 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간첩활동을 모의했다. 1950년 가을 어느 날 박헌영은 현미옥과 이경선에게 동유럽여행을 허가해주도록 사회안전성에 요청했다. 사회안전성 요원들은 그 두 사람을 미행하다가 경유지인 모스크바공항에서 그들의 짐을 수색했다. 그들의 짐에서는 군사기밀자료를 비롯한 비밀자료들이 나왔다. 

 

6.25전쟁 이전 미육군 방첩대는 거물간첩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삼은 재북간첩망을 구축하고 비밀정보를 빼냈다. 박헌영이 재북간첩망을 통해 수집하여 미육군 방첩대에 보고한 비밀정보들 중에는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도 있었다. 그 극비정보는 맥아더의 손을 거쳐 미국 육군성에 전해졌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되었다.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내전이 임박하였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들이 계속 나타났는데도, 트루먼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더라도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서울해방작전’의 극비정보를 알았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 대신 트루먼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중국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작전’에 돌입할 것을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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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정원장 ‘깜짝 발탁’ 막전막후 “오로지 대통령의 결정”

“국정원장이라고 역할 특정하거나 한정할 수 없어”...대북 소통 창구 역할 주목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20-07-05 17:51:39
수정 2020-07-05 17: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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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정의철 기자  
 
청와대는 5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깜짝' 발탁된 배경에 대해 "박 후보자를 낙점한 것은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의 결정"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박 후보자의 경우 다양한 경로로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이 박 후보자를 낙점하게 된 시기는 대략 6월 17일에 있었던 청와대 초청 원로 오찬 이후였다고 한다. 당시 문 대통령은 대북전단 살포를 계기로 급격히 경색된 남북관계 문제를 풀기 위해 전직 통일부 장관 등 외교안보분야 원로들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는데, 그때 박 후보자도 초청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렇다고 원로 오찬이 (박 후보자 발탁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기자실에서 박 후보자 발탁 소식에 탄성이 나올 정도로 인사 보안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박 후보자 본인"이라고도 평가했다.

박 후보자는 여권 인사가 아닐뿐더러 문 대통령과도 그간 각을 세웠던 이력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내부 정보를 긴밀히 알 수 있는 국정원장이라는 중직을 맡게 된 것을 두고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를 두고 박 후보자 발탁 자체가 적극적인 대북 유화 메시지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박 후보자가 김대중 정부 당시 대북특사로 활약하며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주역 중 한 명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박 후보자는 이번에도 국정원 본연의 역할을 하면서도 북한과의 긴밀한 소통 창구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도 "외교·안보 라인은 콕 집어서 역할을 특정하거나 한정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며 "예를 들어 안보실장, 통일장관, 국정원장 역할이 서로 가능한, 교차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박 후보자의 경우 어떤 역할로 추천이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한 자리, 한 역할이었겠느냐"며 "어쨌든 대통령은 (박 후보자를) 국정원장 후보자로 가닥을 잡으신 것"이라고 부연했다.

아울러 청와대 관계자는 박 후보자와 문 대통령이 과거 불편한 관계를 맺었던 일을 두고 뒷말이 나오고 있는 데 대해 "이번 인사로 대통령께서는 '지난 일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대통령께서는 선거 때 일어났던 과거사보다는 국정과 미래를 생각하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015년 2월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문재인 신임 당대표가 최고위원 당선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박지원, 이인영 당대표 후보 곁을 지나치고 있다. 자료사진.
지난 2015년 2월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문재인 신임 당대표가 최고위원 당선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박지원, 이인영 당대표 후보 곁을 지나치고 있다. 자료사진.ⓒ양지웅 기자

박 후보자는 문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이 공포된 뒤 특검 수사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2015년 민주당 당권 경쟁 과정에서 박 후보자는 문 대통령을 '부산 친노', '패권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2017년 대선 때는 국민의당 소속으로 거의 매일 문 대통령을 비난해 '하루를 문 대통령 비판으로 시작한다'는 뜻의 '문모닝'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박 후보자가 국정원장으로 내정됐다고 청와대에서 발표한 직후 온라인상에서는 2015년 2월 8일 전당대회 당시 사진이 올라와 재조명되기도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이 45.3%로 당시 박지원 후보(41.78%)와 이인영 후보(12.92%)를 꺾고 당 대표에 당선됐는데, 이번 인사에서 박 후보는 국정원장으로, 이 후보는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돼 한배를 타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게 됐다.

문 대통령은 당시 전당대회 마지막 연설에서 "박지원 후보의 관록과 경륜, 이인영 후보의 젊음과 패기를 모두 다 업고 함께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후보자는 이번에 국정원장으로 내정된 뒤 페이스북 글을 통해 "역사와 대한민국 그리고 문 대통령을 위해 애국심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박 후보자는 또 "앞으로 제 입에서는 정치라는 政(정)자도 올리지도 않고 국정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며 국정원 개혁에 매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 후보자는 이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문 대통령의 재가로 최종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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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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