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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없는 유엔사가 막고 있다... 이인영 장관 와달라"

[인터뷰] 개성공단 재개 선언 촉구 '통일대교 1인 시위' 23일째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20.12.02 07:10l최종 업데이트 20.12.02 07:10l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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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온이 영하 6도를 오르내린 11월 30일,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오전 11시가 되자 어김없이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 철제 바리케이드 앞에 섰다. 그의 목에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대형 피켓이 걸려 있다. 피켓에는 '한반도 평화번영의 첫걸음, 평화의 새로운 길 개성공단 정상화'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98년 개통된 통일대교는 지난 20년간 남북 간 평화를 연결하는 다리였다. 고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할 때 처음 통일대교를 건넜고,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통일대교를 지나 평양으로 가서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개성공단이 폐쇄된 2016년 2월까지 입주기업들은 매일 통일대교를 통해 인력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2018년 4월 청와대를 출발한 문재인 대통령은 통일대교를 거쳐 남북정상회담 장소인 판문점으로 향했다. 

이재강 부지사도 사무실 집기를 싸들고 이 다리를 건너 비무장지대(DMZ) 내에 있는 도라전망대로 집무실을 옮기려고 했다.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평화부지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취임하면서 경기도의 남북 교류 및 평화 정책 등을 전담할 수 있도록 신설한 자리다. 하지만 유엔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 아래 유엔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통일대교를 건너지 못한 이 부지사는 결국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바람의 언덕' 위에 임시 집무실을 꾸렸다. 그는 2일 현재 기준 23일째 통일대교 앞에서 유엔사 규탄과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재강 부지사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정전협정에 의하면 유엔사의 승인권은 군사적인 성질의 것에 대해서만 한정하고 있는데 평화부지사의 집무실 설치까지 막은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자 월권"이라며 유엔사를 비판했다. 그는 또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하면 (대북) 제재를 넘어서 국제적인 협력을 끌어내 남북이 함께 화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면서 이인영 통일부장관의 동참을 호소했다.

다음은 이재강 부지사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요지이다.

"비군사적인 사무실 집기 옮기는 것도 안된다니... 참담하다"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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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바람의 언덕'에 평화부지사 임시 집무실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11월 9일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날이다. 그래서 그날 남북의 장벽을 무너뜨리자는 생각에 평화부지사 집무실을 (DMZ 안에 위치한) 도라전망대로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유엔사가 못 들어가게 해서 다음날 여기에 (임시로 집무실을) 만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들어와 있는) 이 몽골텐트도 도라전망대에 들고 가려고 했다. (도청에 있는 평화부지사) 집무실과 똑같은 시스템을 도라전망대에 만들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여기에 임시로 해 놓았다. 매일 오전 10시에 회의하고, 부서별 보고도 받고, 결제 시스템도 다 되어 있다. 실제 평화부지사 업무를 여기서 다 하고 있다. 원래 도라전망대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 유엔사가 도라전망대에 평화부지사 집무실 설치를 막은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 (도라전망대를 담당하고 있는 육군) 1사단과는 협력이 잘 되어서 (집무실) 설치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유엔사의 승인이 없어서 설치가 안 되겠다고 (1사단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유엔사에서 직접 연락 온 것은 없다. 유엔사에서 '불승인'이라고 한 것은 아니고 '검토 중'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못 듣고 있다. '검토 중'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불승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전협정에 대한 유엔사의 유권해석이나 관행에 의해서 못 들어가게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유엔사는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로 계속 그렇게 해왔다."

- 1인 시위가 20일을 훌쩍 넘었다.

"도라전망대에서 매일 개성공단을 눈으로 보면서 출퇴근하고 싶었다. 그렇게 개성공단 재개를 남북 정부에서 선언만 해달라고 촉구하려고 했는데... (1인 시위를 하는) 통일대교가 철문으로 막혀 있는 모습이 참담하더라. 우리 땅인데 막아놓았다. 그 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걸어가신 길이다. 차만 세우면 방송으로 나가라고 하고, 사진도 못 찍게 한다. 통일대교로 들어갈 때 (통일대교를 지키고 있는) 1사단에서 유엔사에 전화하더라. 거기서 승인이 떨어져야 들어갈 수 있다. 유엔사가 다 장악하고 있다. 개성공단 문제도 심각하지만, 이런 상황이 너무 참담했다. 빨리 공론화해서 국민의 합의를 모아내는 게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 '유엔사의 승인권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떤 문제가 있나.

"전해철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유엔사의 승인에 관한 질문을 했을 때 국방부에서는 '정전협정에 의하면 군사적인 성질의 것에 대해서만 한정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라전망대에 평화부지사 집무실 설치를 막은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다. 총칼을 들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비군사적인 사무실 집기 등을 옮기는 것이 안된다는 것은 국방부에서 밝힌 것과 상반되는 이야기다. 군사적인 부분에 한정된 유엔사 권한을 존중한다지만 비군사적인 부분에까지 굳이 유엔사가 개입해서 승인해야 하는가. 그런 부분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것이다.

정전협정의 기본 정신은 한반도 평화 증진인데 그에 부합해서 유엔사에서 승인하거나 제재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지난 2018년 남북이 합의해서 철로를 조사하기 위해 방북하는 것도 유엔사에서 승인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유엔사의) 월권이고 오버다. 도라전망대에 화‧수‧목‧금요일에만 들어가게 하고,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 사이 하루에 200명으로 인원도 제한했다. 판문점에서도 미군 장교의 설명을 한국 사람이 통역해준다. 우리 땅인데 왜 (유엔사가) 그렇게 제한을 하는지, 이제는 다시 생각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가짜 '유엔사' 해체를 위한 국제캠페인>이라는 단체가 지난 24일 임진각에서 '가짜 유엔사의 주권침해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유엔사가 유엔의 하부기구도 아니고 유엔과 아무 관계가 없는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이름으로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를 가로막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동의하는가?

"그 단체가 참고하라고 준 자료를 보니까, 1975년에 유엔총회에서 유엔사를 해체하라고 결의를 했더라. 맞는 얘기다. 미군이 만든 유엔사는 족보가 없다. 유엔에는 유엔사에 대한 어떤 규정도 없다. 유엔의 산하 기구도 아니고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고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누차에 걸쳐서 유엔에서 한국에 있는 유엔사는 유엔의 것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 단체에서는 유엔사에 유엔 깃발을 떼라고 계속 요구한다고 한다. 그분들 주장이 좀 과격하지만, 맞는 말이다."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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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시민단체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던 유엔사의 승인권 문제를 이재강 부지사가 공론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유엔사의 승인권은 모순적이다. 대대적인 토론을 통해서 국민적인 동의를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러 시민단체에서 저를 위해 지지방문을 왔는데,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 유엔사 승인권 문제를 우리가 함께 해결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처음에 1인 시위를 할 때는 유엔사에 관한 내용을 피켓에 담았는데,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러 왔다가 유엔사 얘기만 하는 게 좀 이상해서 다시 만든 피켓에서는 유엔사 얘기를 뺐다. 개성공단 문제에 집중하자는 의미였는데, 유엔사가 계속 승인을 안 해주고 있어서 다시 유엔사 문제를 피켓에 담아야 할 것 같다. (웃음)"

- 우리 정부와 통일부의 입장은 뭔가?

"정전협정에 따라서 유엔사가 승인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입장이 없다. 정전협정의 내용이나 유엔사 권한에 대해서 상반된 견해가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공론화를 했으면 좋겠다. 정부도 참여하고 시민단체도 참여해서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 남북이 개성공단 재개 선언에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차원에서 도라전망대에 집무실 설치를 추진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국제 정세 속에서 개성공단 재개는 쉬운 문제가 아닌데, 선언만 하면 되는 것일까?

"미국의 승인이나 (유엔의) 대북 제재라는 틀 속에 갇혀서는 개성공단 재개가 불가능하다.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하면 (대북) 제재를 넘어서 국제적인 협력을 끌어내 남북이 함께 화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특히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남북의 시간이 왔다'고 했는데, 그래놓고 정부나 통일부의 입장은 비핵화를 얘기한다. 비핵화를 얘기하는 순간 남북 화해는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작심해서 김정일 전 위원장과 함께 개성공단을 만들었다. 그때 미국의 승인은 없었다. 2016년 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미국 동의도 안 받고 개성공단을 없앴는데, 지금은 개성공단 재개하려면 미국 승인을 받으라고 한다. 말도 안 된다. 우리 것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작심해서 시작한 공단,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작심해서 문 닫은 공단을 왜 남북이 만나서 못 여는 것인가. 왜 미국 승인을 받아야 하나."

"쇼라고? 가만히 있는 게 직무유기... 3보 1배로 도라전망대 간다"

- 개성공단 조업 재개가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의미는?

"(개성공단이 처음 가동된) 2004년부터 (문을 닫은) 2016년까지 누적 생산량이 3조 8000억 원이다. 남한의 약 900명의 노동자, 북한의 5만 5000명의 노동자, 그렇게 5만 5900명의 노동자가 매일 만나서 매일 통일이 이뤄지는 현장이었다. 그런데 누적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즈음에 폐쇄되었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과 토지가 결합한 남북 경제 공동체가 실험되는 장이었는데, 공단이 폐쇄되면서 평화도 폐쇄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161개의 개성공단 입주 기업이 있었는데, 개성공단 폐쇄로 너무 힘들어하고 있다. (개성공단 내) 공장에 기계를 두고 와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 그들 중에서도 경기도에 41개 기업이 있다. 그들의 경제적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도 공단 재개를 해야 한다. 경기도는 유일하게 그 기업들에 1년에 3억 원 정도씩 지원금을 주고 있다. 그 기업들이 여기에 매일 온다. 꼭 (개성공단을) 열어달라고, 더는 먹고 살기 어려워서 죽겠다고 한다.

개성공단을 폐쇄했다고 하는데, 최근 한 재미교포가 개성공단에 갔더니 매일 꽃을 갈고 청소를 하더라고 한다. 그들은 (남한의 기업들이) 들어오길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도 조건 없이 들어오라고 선언했다.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공동선언의 첫 번째 합의가 개성공단 재개였다. 그것만 국회에서 비준해도 개성공단에 지금 당장 들어갈 수 있다."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11월 24일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11월 24일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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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공단 재개에 대한 의지는 알겠지만, 굳이 도라전망대에 집무실까지 설치해야 하는가? 일각에서는 '비무장지대에 무슨 집무실이냐', '쇼 하지 마라' 등의 비아냥도 들린다.

"개성공단이 문 닫은 지 4년 10개월이 됐다. 저는 입주기업들이 매일 찾아와서 고통을 호소하는 민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개성공단 중단으로 가장 피해를 당한 곳이 경기도다. '보여주기식 쇼'라는 얘기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평화정책을 담당하는 부지사가 그런 말이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도민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비난을 듣더라고 경기도 기업들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길을 모색하는 것이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역할 아니겠나."

- 한편으로는 지방정부 부지사도 저러는데, 끊어진 남북 대화 채널 복원 등을 위해 나서야 할 통일부 등 현 정부가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많은 분이 저에 대한 지지 방문을 오시는데, 정부나 국회에서, 특히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한번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같이 얘기도 하고, 공동으로 남북 관계의 발전을 모색하는 실마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집무실을 (도라전망대로) 옮기려는 것은 이 정부에 촉구하는 의미도 있다. 항의하고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관계가 잘 될 수 있도록 제가 촉매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단식하거나 농성을 하게 되면 현 정부에 대한 반기를 드는 모습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해서 하고 있다. 단식 농성 같은 것은 안 한다. 여기에 집무실을 계속 유지하면서 평화부지사로서의 역할을 잘할 것이다."

- 1인 시위 외에 다른 활동도 계획하고 있나?

"2004년 12월 15일 개성공단에서 만든 통일 냄비가 처음 들어왔는데, 서울에서 하루 만에 완판됐다. 그래서 개성공단 첫 출품을 기념해서 (12월 15일에)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기 위한 3보 1배를 하려고 한다. 개성공단 입주기업과 많은 단체에서 함께 한다. 여기서 도라전망대까지 3보 1배로 가면 약 6시간 정도 걸린다. 힘들겠지만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다. 그 정도 해서 국민적 의지를 모으고 국민적 합의를 만든다면 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 남북 평화교류 사업과 관련 경기도의 계획은?

"비핵화 프레임을 앞서는 것이 평화 프레임이다. 평화 프레임을 먼저 장착하면 비핵화는 저절로 해결된다. 그래서 평화프레임을 가져오는 첫걸음이 저는 개성공단 재개라고 본다. 그런 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또한 이런 경색된 국면에서도 경기도는 유일하게 남북 간 인도주의적 보건의료 교류를 계속 해왔다. 실제 성과도 있었다. 인도주의적인 협력, 보건의료 협력은 계속 추진하고 예산도 만들고 있다. 경기도가 한반도 평화의 오솔길을 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위해서 평화부지사로서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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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화력발전소 화물노동자가 추락한 뒤 한동안 방치된 이유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12/02 10:27
  • 수정일
    2020/12/02 10:2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 씨 아들 “왜 아버지를 방치했나”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20-12-01 22:30:35
수정 2020-12-02 08: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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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노동자 심장선 씨 응급구조 시간대별 정리
화물노동자 심장선 씨 응급구조 시간대별 정리ⓒ공공운수노조 제공  
 
지난달 28일 영흥화력발전소에서 석탄재를 화물차에 싣다가 추락해 숨진 화물노동자 심장선(52) 씨가 추락한 이후 한동안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끄러워 추락할 위험이 있는 차량 위 구조물에서 혼자서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뒤 방치된 것이다. 현장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도 없었고, 안전관리자도 없었다.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와 유족은 사고 현장 CCTV를 통해 확인한 응급구조 상황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1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다.

화물연대본부와 유족에 따르면, 사고 발생 당일 화물노동자 심장선(52) 씨가 작업 중 추락한 뒤 발견되기까지 약 5분의 시간이 걸렸다. 신고가 접수되고 발전소 내 구급대원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10여분이 더 소요됐다. 심폐소생술과 출혈부위 지혈 등의 응급처치도 그만큼 늦어졌다.

심장선 씨의 아들은 “사고가 일어난 뒤 골든타임에 관리감독관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관내 119에서는 현장 출동까지 15분이 걸렸다”라며, 왜 아버지를 이렇게 방치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남동발전 영흥화력본부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씨 사망사고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심씨는 지난 28일 3.5m 높이의 트럭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는 작업을 한 뒤 내려오다 떨어져 숨졌다. 2020.12.01
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남동발전 영흥화력본부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씨 사망사고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심씨는 지난 28일 3.5m 높이의 트럭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는 작업을 한 뒤 내려오다 떨어져 숨졌다. 2020.12.01ⓒ김철수 기자
석탄재가 나오는 모습
석탄재가 나오는 모습ⓒ공공운수노조 제공

심 씨가 사고를 당한 곳은 언제든 추락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30일 고용노동부 관계자, 유족 등과 함께 현장을 둘러본 노조 관계자는 석탄재가 나오는 관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먼지 때문에 차량 위 구조물은 굉장히 미끄럽다. 노동자가 중심을 잃게 되면 낙상사고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구조였다”라고 설명했다.

현장에는 “(석잔재) 출하 버튼을 누른 후 35t에 상부에 올라가 넘치는지 지켜봐 달라”는 공지가 적혀 있었다. 트럭 탱크에 석탄재가 약 35t가량 채워지면, 석탄재가 넘치기 전에 올라가서 상차를 정지시키라는 안내다.

공지문에 2인 1조 등의 규정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안전벨트(안전고리)’ 등 안전장구를 착용하라는 안내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구조물 위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작업을 하다 보면 오히려 ‘안전벨트와 구조물을 연결하는 줄’에 걸려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2인 1조 등의 규정 없이, 안전장구 착용만 안내하며 위험 작업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흥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남동발전은 “추후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면서도 “연료환경설비 적정운영인력 산정 용역(2019.11. KMAC) 결과, 2인 1조 구성이 필요한 작업은 컨베이어벨트 운전원과 밀폐공간(옥내저탄장)으로 한정됐다. (심 씨가 일하던) 현장은 작업 여건 등을 감안했을 때 2인 1조 작업장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 용역연구에서 2인 1조 작업장이라고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2인 1조로 운영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해당 작업장은 2인 1조로 일할 필요가 없는 곳이라는 한국남동발전 측 주장에, 화물연대는 기자회견에서 “그렇다면 홀로 일하다 방치되어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했다.

이어, 화물연대는 올해 9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스크루 상차 작업을 수행하던 화물노동자의 사망사고 등을 언급하며 “(용역 연구는) 태안화력 故 김용균 노동자 사망사고 이후 연료환경설비운전의 상주 하청업체에 대한 인력충원 문제만 다루었고, 석탄재 반출 및 중량물 운반 등 화물노동자의 안전 문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남동발전 영흥화력본부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씨 사망사고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심씨는 지난 28일 3.5m 높이의 트럭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는 작업을 한 뒤 내려오다 떨어져 숨졌다. 2020.12.01
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남동발전 영흥화력본부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씨 사망사고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심씨는 지난 28일 3.5m 높이의 트럭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는 작업을 한 뒤 내려오다 떨어져 숨졌다. 2020.12.01ⓒ김철수 기자

또 화물연대는 석탄재 상차를 위한 작업이 심 씨의 계약상 본래 업무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발전소에 상하차 작업을 담당하던 노동자가 있었는데, 발전소에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해당 작업을 화물노동자에게 전가하다 보니, 계약상 업무도 아닌 상하차 작업을 화물노동자들이 떠맡게 됐다는 것이다.

화물연대는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지침에 따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해 승인받은 건을 예로 들었다.

화물노동자는 사실상 회사와 종속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온 대표적인 특수고용직이다. 이런 이유로 화물노동자는 계약 내용과 다른 업무까지 떠맡아 일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떠맡은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면 산업재해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지난해 6월 28일 ‘계약 내용과 다른 업무수행 중 발생한 화물자동차 운전자 사고 처리 요령’을 발표했다. 화물노동자가 계약과 다른 업무를 수행하다가 산재를 겪더라도 재해 발생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로 간주해 산재보상을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화물연대는 이 지침을 근거로 올해 5월 27일 근로복지공단에 화물노동자들의 산재사고 사례를 집단 신청했고, 일부 사건에 대해 승인을 받았다. 그중 하나가 2019년 7월 석회석 가루 적재 작업을 하던 화물노동자가 탱크 폭발로 한쪽 눈을 잃은 사고였다.

화물연대는 이 같은 사례를 소개하며 “결과적으로 산재는 승인됐고, 이는 화물을 적재하는 작업이 화물노동자의 업무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화물의 상하차 업무를 위해 수반되는 작업은 화물노동자가 수행해야 할 업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화물연대와 유족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남동발전 측에 ▲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원청의 사과, 유가족 보상 ▲ 화물노동자 상하차 작업 전가 금지 ▲ 상하차 작업 설비 개선 등을 촉구했다. 또 정부와 국회에 ▲ 안전운임제 전면 확대적용 ▲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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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하고 딱 폐지시키면 그냥 끝이다”

[추가] 각계단체, 국보법 72주년 맞아 폐지 촉구 기자회견 (전문)

  • 기자명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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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2.0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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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0.12.0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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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한국진보연대 등 각계단체는 국가보안법 제정 72주년을 맞은 1일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상호 합의에 기초한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도 20년이 지났지만 국가보안법이라는 모순된 법이 아직 남아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화해협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1948년 12월 1일 탄생한 국가보안법 72주년을 맞은 1일, 137개 단체와 161명의 인사는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한다”면서 이같은 주장을 담은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진보연대 등은 1일 오전 10시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근 국회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상정되었다”며 “지난 총선에서 국민들은 적폐세력을 다시 한번 심판하였고,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이 집권 여당에 주어졌다”고 상기시키고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국가 보안법이 이미 사문화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분단 적폐, 국가보안법의 폐지 없이는 민주주의도, 이 땅의 평화통일도 이뤄낼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에 적극 나서, 적폐청산과 평화통일을 향한 중요한 디딤돌을 만들어야 한다”며 “각계 시민사회 또한 범국민 기구 구성 및 적극적인 공동행동 등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최대한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의장이 여는 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이창복 의장, 김경민 한국YMCA 사무총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여는말을 통해 “72년이 되도록 아직까지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다는 것이 참 창피한 일”이라며 “특히 국가보안법 제7조는 결정적으로 헌법에 의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될 수 있는 조항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는 이른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양산해온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히고 있다.

이창복 의장은 “개정 운동은 일부 몇 사람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뜻이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면서 힘을 모아낼 때 정치권에서 움직일 거라 생각한다”며 “이번 기회에 개정이 될 수 있도록, 나아가서는 폐지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다 힘을 모아 보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경민 한국YMCA 사무총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민주주의가 완성됐다”는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며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완성은 국가보안법 폐지 없이 불가능하다”면서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탄압받고 시달렸던 사람들의 한숨이 가득 찬 사회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남과 북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국가보안법은 폭력을 동원한 날치기 통과로 만들어진 법이다. 귀태법률이라고 할 수 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법”이라고 규정하고 “마침 21대 국회, 이른바 민주개혁세력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심하고 딱 폐지시키면 그냥 끝이다. 이제 딱 폐지하기를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피해 당사자인 진보당의 김재연 대표(앞줄 맨 오른쪽)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피해 당사자인 진보당의 김재연 대표(앞줄 맨 오른쪽)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날 기자회견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피해사례 등이 거론됐고, 블랙리스트와 검열로 얼룩진 예술계와 이석기 전 의원이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는 진보당 등 피해 당사자들의 대표들도 참석해 폐지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헌법재판소 앞에서 매주 월요일 1인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와 국회앞 1인 시위 등을 진행해 온 ‘국가보안법 폐지 대학생 실천단’의 국민청원 활동도 소개됐다.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 김도형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 조헌정 예수살기 대표, 한미경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박미자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 운영위원장, 강부희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국가보안법 폐지 대학생 실천단’ 단장 등이 발언에 나섰고,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등이 배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기자회견문(전문)] 국가보안법 제정 72년에 즈음한 각계 공동선언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 제정 72년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었던 ‘치안유지법’을 바탕으로 탄생하였다는 점에서, 태생부터 정권이 반대자를 억압하고 처벌하기 위한 법률이었습니다. 또한 상대방을 적대하고 배제하려는 ‘냉전 대결’의 산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72년간 국가보안법은 끊임없는 검열과 통제를 통해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왔고, 화해와 협력의 당사자인 북을 적으로 강요하는 분단체제의 수호자로서 군림해 왔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상호 합의에 기초한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도 20년이 지났지만, 국가보안법이라는 모순된 법이 아직 남아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화해협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가보안법이 이미 사문화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전세계가 연결된 지금, 누구라도 북한의 인터넷 사이트를 접속하여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오직 우리 국민만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낙인만으로 끝없는 검열과 정치적 통제가 가능한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분단 적폐, 국가보안법의 폐지 없이는 민주주의도, 이 땅의 평화통일도 이뤄낼 수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4.27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등 남북화해협력의 구체적인 사항들에 합의하였습니다. 평화와 통일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만큼, 분단대결 체제를 유지,강화하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들은 적폐세력을 다시 한번 심판하였고,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이 집권 여당에 주어졌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향한 촛불 민의의 발현이며, 정부 여당이 보다 철저히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에 매진하라는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

악법을 그대로 둔다고 결코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되살아나 다시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통일의 발목을 잡게 마련입니다.

최근 국회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상정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에 적극 나서, 적폐청산과 평화통일을 향한 중요한 디딤돌을 만들어야 합니다.

각계 시민사회 또한 범국민 기구 구성 및 적극적인 공동행동 등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최대한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갈 것입니다.

2020년 12월 1일

(사)겨레하나, (사)정의·평화·인권을위한양심수후원회, (사)통일의길, 4.27시대 연구원, 6.15경기본부, 6.15제주본부, 6.15청학본부, 6.15충북본부, 615 시민합창단, 가톨릭농민회, 경기정의평화기독교행동, 경기진보연대, 경남진보연합, 고난받는 이들과함께하는모임, 공공연대노동조합, 광주진보연대, 구속노동자후원회, 국가보안법7조부터폐지운동시민연대, 국가보안법철폐 긴급행동, 국민주권연대, 권리찾기유니온,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기본소득당, 노동당(인천시당), 노동 사회과학연구소, 노동자연대, 노동전선, 녹색당, 다른백년, 다른세상을향한연대, 다산인권센터, 대구경북진보연대,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동학천도교 보국안민실천연대, 민들레,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민족통일애국청년회, 민주노동자 전국회의, 민주노점상 전국연합,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언론 시민연합, 민주평등사회를위한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 협의회, 민중공동행동, 반올림, 법과인권연구소, 보건의료단체연합, 부산민중연대, 빈곤사회연대, 빈민해방실천연대, 빈민해방철거민연합, 사월혁명회, 사회변혁 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서울진보연대, 수원지역목회자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안산새사회연대일:다, 알바노조/알바연대, 예수살기, 울산 진보연대, 이석기의원내란음모사건피해자한국구명위원회,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권운동사랑방, 인천자주평화연대추진위원회, 자주 평화통일실천연대, 재일한국민주여성회,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도쿄본부), 전국 노점상총연합,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북도연맹 정읍시농민회소성면지회), 전국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 빈민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여성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 철거민연합, 전국청소년행동연대 날다, 전국학생행진, 전남시민단체연대회의, 전남 진보연대, 전두환심판국민행동, 전태일노동대학, 전태일재단, 정의당, 제주 통일청년회, 제주평화인권센터,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주권자전국회의, 진보네트워크센터, 진보당, 진보대학생넷, 참여연대, 천주교 인권위원회, 촛불문화연대, 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통일광장, 평등교육실현을위한 전국학부모회,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평화통일시민행동,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한국민족예술단체 총연합회 (서울민예총, 부산민예총, 인천민예총, 대구민예총, 대전민예총, 광주민예총, 울산민예총, 경기민예총, 강원민예총, 충북민예총, 충남민예총, 경남민예총, 전북민예총, 전남민예총, 제주민예총, 세종민예총),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 한국진보연대, 한국청년연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형명재단, 화성노동인권센터

개인

강소영, 강순정, 강은주, 곽호남, 구연철, 권오창, 권오헌, 권정호, 권처흥, 김경민, 김관영, 김교영, 김근래, 김기완, 김도경, 김도형, 김동순, 김동한, 김서중, 김수형, 김승균, 김식, 김영만, 김영승, 김영식, 김영옥, 김영호, 김옥임, 김은진, 김재명, 김재연, 김재왕, 김재하, 김주업, 김준기, 김지영, 김차경, 김하나, 김한성, 김형태, 김환석, 김희룡, 나창순, 남경남, 남궁석, 노수희, 노정현, 명숙, 모성용, 문경식, 문한성, 박교일, 박덕신, 박봉열, 박석운, 박순자, 박용규, 박정원, 박종린, 박중기, 박홍섭, 박흥식, 박희성, 방석수, 배종렬, 변형관, 서경원, 서희원, 소순관, 손영현, 손형근, 송기호, 송명숙, 송무호, 송봉준, 송상교, 시공스님, 신건수, 신윤경, 신창현, 심재환, 안주용, 양연수, 양원진, 염성태, 오민애, 오인환, 원진욱, 윤한탁, 윤희숙, 이경민, 이경우, 이규재, 이근선, 이단아, 이덕규, 이래경, 이명주, 이문상, 이보람, 이성우, 이성재, 이아란, 이용수, 이용위, 이원호, 이재선, 이재승, 이종철, 이종철, 이주희, 이진호, 이창민, 이창복, 이천재, 이청산, 이형호, 임문철, 임승규, 장범식, 장범식, 장창원, 전덕용, 전지윤, 정병욱, 정은영, 정종성, 정진우, 정현우, 정현찬, 정혜열, 정효순, 조대회, 조세현, 조영건, 조영주, 조용신, 조헌정, 조회환, 좌세준, 진광수, 채희준, 최영준, 최영찬, 최을상, 최인기, 최형권, 하주희, 하해룡, 한기명, 한도숙, 한명옥, 한미경, 한상균, 한충목, 허진선, 홍기룡, 홍성국, 홍성규, 황금수, 황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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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 '초고령화' 옥천의 현실

홀몸노인 등 지역사회 대책 시급, 옥천 치매안심센터 중심으로 사례 관리

20.12.01 07:30l최종 업데이트 20.12.01 10:1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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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5년 사이 옥천군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 및 그 비율
▲  최근 5년 사이 옥천군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 및 그 비율
ⓒ 월간 옥이네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외곽에 사는 80대 A씨는 매일이 불안하다. 혼자 지내는 집에 자꾸 도둑이 들기 때문. 건넛방에 누군가 오가는 것 같기도 하고, 마당에 찍힌 낯선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한다. "도둑이 들었다"고 경찰에 신고하기를 여러 번. 하지만 도둑을 잡을 순 없었다. 처음부터 도둑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치매를 앓는 A씨가 도둑이 든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의 이상행동을 감지한 이웃들과 보건소 측의 협조로 A씨는 치매 검사와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 면에 사는 80대 B씨는 온 집안과 마당 가득 물건을 쌓아둔다. 가만히 살펴보면 '도대체 저걸 어디에 쓸 수 있을지 모를'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치매와 함께 저장강박증세를 보이는 B씨의 사연을 듣고, 지역 봉사단체가 나서 한바탕 대청소를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B씨의 마당은 마을 구석구석에서 주워온 고물로 다시 메워졌다.

농촌 지역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치매 환자 수도 증가하고 있다. 국내 치매환자가 7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초고령화 사회로 돌입한 충북 옥천 역시 매년 치매 환자가 늘고 있다. 옥천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치매 환자는 2015년 11.03%에서 2019년 12.06%까지 1%가량 더 늘었다(중앙치매센터, 전국 및 시도별 치매유병현황).
     

치매 진단을 받은 주민 중 중등도‧중증 환자 비중도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 2015년 기준 최경도 환자 243명, 경도 577명, 중등도 358명, 중증 216명이던 것에서 2019년에는 최경도 299명, 경도 711명, 중등도 441명, 중증 266명으로 상승세에 있다. 고령화가 심해지다 보니 치매 환자 수가 높아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 하지만 그만큼 지역사회 안의 대책을 마련하는 데도 고민이 깊어진다. 

지난해 옥천읍 가화리에 문을 연 옥천군치매안심센터는 ▲ 치매 조기검진 ▲ 상담 ▲ 사례 관리 ▲ 예방 교육 및 홍보 ▲ 치매 가족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치매 검진의 경우 60세 이상 주민을 대상으로 보통 2년 주기로 실시하지만 옥천은 1년 단위로 검진을 시행한다. 지역 고령화가 심한 만큼 치매 환자의 조기 발견을 위한 것. 현재 센터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사례 관리 역시 빠질 수 없다. 사례 관리는 보호자나 가족이 없어 돌봄을 받기 어려운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대상자별로 필요한 지원서비스, 지역사회 의료 및 복지제도를 연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앞의 두 치매 환자 역시 이런 사례 관리를 통해 발굴된 것.

옥천군보건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옥천군 내 홀몸노인은 4193명으로 이 중 친인척이 거의 없어 외부의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2839명에 달한다. 홀몸노인의 비중이 높은 만큼, 치매 환자 사례 관리 역시 지역에서는 더욱 중요한 서비스일 수밖에 없다. 현재 옥천치매안심센터에 등록된 사례 관리 대상자는 약 290명. 이 가운데 절반이 홀몸노인에 해당한다.

'기억지키미' '실버건강지도사' 양성해 인력난 해소
       
 치매안심센터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상담 중인 모습
▲  치매안심센터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상담 중인 모습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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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옥천군 치매안심센터
▲  충북 옥천군 치매안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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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인력은 4명에 불과하다. 담당자 1명이 70명 이상의 대상자를 관리해야 하는 셈. 대상자의 집을 찾아 환경과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위험한 상황은 아닌지, 별도의 지원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은지 등을 확인한다. 치매 정도에 따라 방문 횟수는 달라지지만 양호한 경우 두 달에 한 번 꼴로 방문하는 일정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코로나19로 현장 방문이 어려워졌다. 현재는 전화나 마을 이장, 부녀회장 등을 통한 확인으로 대체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례 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옥천군보건소 건강관리과 치매관리팀 노승원 주무관은 "치매환자가 증가하면서 사례 관리 대상자가 많아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그만큼 담당자 1명이 맡아야 하는 대상자 수가 늘어나는 부담이 있다"며 "치매 특성상 담당자가 오랫동안 속속들이 잘 알아야 효과적인 관리나 지원이 가능한데 인력 부분에 있어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관리팀 강은주 팀장 역시 "담당자 4명이 관리하기엔 역부족인 게 사실"이라며 "특히 면 지역에 대상자가 많아 거리상으로도 어려움이 있다. 그나마 지역사회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있어 어려움을 덜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례 관리라는 게 단순히 잘 계시는지 확인하는 수준이 아닌, 직접 냉장고도 열어보고 집안이나 주변 환경은 어떤지, 약을 제대로 챙겨먹고 있는지, 식생활의 질 등 현장에서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치매안심센터는 이 같은 인력의 어려움을 지역 주민 연계 활동을 통해 풀고 있다. 기존 지역봉사단체 외에 '기억지키미'나 '실버건강지도사' 등을 양성해 치매 환자에 대한 인식이 높은 봉사자를 키워내고 있는 것.

기억지키미는 관련 교육을 이수 받은 봉사자가 주 1회 대상자를 만나 인지변화 관찰, 치매예방체조, 간단한 학습지 풀이 등을 진행하는 활동이다. 실버건강지도사의 경우 지난해 기본교육과정과 올해 심화교육과정을 이수한 주민이 대상자와 함께 교구 수업, 인지능력 확인 및 인지 강화 수업을 진행한다는 게 기본 계획.

강은주 팀장은 "혼자 사시거나 부부 모두 치매인 경우, 부부 중 한 명이 치매인 노인 부부 세대 등에 대한 실제적인 보호와 돌봄 지원을 위해 지난해와 올해 준비 중인 게 실버건강지도사"라며 "11월에 2기 기본과정과 함께 심화 과정을 추가로 실시하고 우선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가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외에 치매 조기 검진을 비롯해 경도인지장애를 겪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라며 "이 시기에 확실한 예방과 관리가 중요한 만큼 센터 차원에서도 관련 활동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 치매에 대해 아직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지만, 주민들께서도 센터를 부담 없이 찾아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주 1회 어르신들 만나며 돌봄 문제 돌아보게 됐어요" http://omn.kr/1qrlw

월간 옥이네 2020년 11월호(통권 41호)
글·사진 박누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옥이네> 11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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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화재 털어간 '큰 창고(오쿠라) 작은창고(오구라)'

(小倉)입니다.” 2015년 2월 웃지 못할 기사가 하나 떴다. 한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이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14년 11월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일본 문무과학생 대신에게 “오쿠라 컬렉션 등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문화재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얼핏보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발언 같다. 하지만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은 “아마도 문화부 장관이 오구라를 오쿠라로 잘못 언급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문화부는 “장관 발언을 보도자료로 옮길 때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장관이 잘못 발언했든 아니든 헷갈리기 십상이다.

오쿠라와 오구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자성으로 오쿠라는 ‘대창(大倉)’이고, 오구라는 ‘소창(小倉)’이다. 예전엔 큰 대(大)자를 ‘오오’라고 해서 ‘대창(大倉)’을 ‘오오쿠라’로 읽었지만 지금은 표기법이 바뀌어 그냥 ‘오쿠라’라 한다. 그래서 원래 ‘오구라’로 읽는 ‘소창(小倉)’과 헷갈리게 됐다.

오구라 유물 중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큰 창고’와 ‘작은 창고’

그러나 솔직히 말해 ‘대창’이든 ‘소창’이든, ‘오쿠라’든 ‘오구라’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오십보백보이다. 둘 다 일제강점기에 귀중한 한국문화재를 가져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이다.

그러고보면 오쿠라의 ‘대창(大倉)’은 큰 창고, 오구라의 ‘소창(小倉)’은 작은 창고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큰 창고’인 오쿠라가 가져간 문화재의 규모가 컸다는 이야기인가. 딴은 그렇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청·일 전쟁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 거부가 된 인물이다. 구한말 부산에 진출,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한 오쿠라는 엄청난 양의 한국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렸다.

‘대창(大倉)’ 오쿠라 기하치로(왼쪽 사진)이 가져간 이천 석탑(가운데)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 팔각탑(오른쪽).

‘대창(大倉)’ 오쿠라 기하치로(왼쪽 사진)이 가져간 이천 석탑(가운데)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 팔각탑(오른쪽).

특히 일제가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답시고 철거한 경복궁 자선당(세자의 침전) 건물을 통째로 뜯어갔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 때 경기 이천 향교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온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도 가져갔다. 오쿠라는 그렇게 반출한 자선당 건물과 석탑, 유물 등으로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1917년 개관)을 꾸몄다. 오쿠라슈코칸의 조선실에 진열된 미술품이 3692점이나 됐고 서적도 1만5600여권에 이르렀다.

하지만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자선당을 비롯한 슈코칸의 진열관이 모두 소실되었다. 오쿠라가 모았던 고려자기 등이 모두 불에 탔고, 석조물(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만이 남았다. 1996년 겨우 살아남은 자선당의 유구만이 반환되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쓸어간 남의 나라 문화재를 화재로 잃어버린 오쿠라의 죄상을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찾아오고 싶어도 찾아올 수 없게 만들어버린 죄를 어지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오쿠라슈코칸에 옮겨진 경복궁 자선당 건물(위 사진).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불에 타서 유구만 남아있다가(아래 사진) 김정동 목원대교수가 찾아냈으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반환됐다.

오쿠라슈코칸에 옮겨진 경복궁 자선당 건물(위 사진).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불에 타서 유구만 남아있다가(아래 사진) 김정동 목원대교수가 찾아냈으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반환됐다.

■‘작은 창고’의 묻지마 싹쓸이 수집

그렇다면 ‘작은 창고’(小倉)인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어떤가. 그 역시도 어마어마한 수의 한국문화재를 쓸어간, 악명이 높은 자이다. 오구라는 일본에서 아버지의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한 뒤 ‘한국행’을 택했다. 당시 ‘한국행’을 택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불량도항자들이었다. 일본에서 발붙일 곳이 없던 자들이 한국행 배를 탄 것이다.

오구라는 부동산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유명인사로 행세했다. 수재의연금을 내고 영남지역의 명망가로 평가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닥치는대로 수집한 한국문화재를 특별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오구라는 부동산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유명인사로 행세했다. 수재의연금을 내고 영남지역의 명망가로 평가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닥치는대로 수집한 한국문화재를 특별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건너온 오구라는 막 개발붐이 일어난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번 뒤 전기사업에 뛰어든다. 사업수완을 발휘한 오구라는 곧 전국의 전기사업을 통합 경영하면서 재력가로 급부상했다. 그렇게 떼돈을 모은 오구라가 눈길을 돌린 분야는 바로 문화재 수집이었다.

오구라는 “일본 고대사 중에 조선의 발굴 및 고미술품에 의해 비로소 분명하게 밝혀지는 부분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면서 문화재 수집 동기를 밝혔다.

‘전 울산’ 금동관(왼쪽 사진)과 ‘전 경주’ 금동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전 울산’ 금동관(왼쪽 사진)과 ‘전 경주’ 금동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실제로 오구라가 한국문화재 수집을 위해 2000만엔을 썼다고 한다. 이것은 당대의 수장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투자한 돈의 10배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있다.

아무리 일본인이지만 꼬박꼬박 제 돈 주고 문화재를 수집한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가. 그것을 팔아넘긴 한국인들의 잘못이 더 큰 게 아닐까. 그러나 오구라의 행적을 추적하면 절대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오구라 유물 가운데 ‘전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수식’이 눈에 띈다. 금관총 발굴 당시 도굴품을 오구라가 구입한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가운데 ‘전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수식’이 눈에 띈다. 금관총 발굴 당시 도굴품을 오구라가 구입한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우선 오구라는 특정분야 문화재를 집중 구입한 수집가들과 달랐다. 장르불문, 출처불문으로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묻지마 싹쓸이’ 수집이었다. 불교문화재와 도자기, 목칠공예품, 회화, 전적, 서예, 복식까지….

그렇게 모은 유물 중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다. 국립도쿄(東京)박물관은 오구라가 기증한 한국문화재 1030점 등이 이른바 ‘오구라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다.

전 창녕 출토 금동제품들. 1920~30년대 창녕 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오구라 등에게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전 창녕 출토 금동제품들. 1920~30년대 창녕 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오구라 등에게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거액으로 도굴품 마구 사들인 죄

물론 오구라가 도굴을 주도했거나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오구라는 도굴범들의 장물을 너무도 후한 값을 치르고 긁어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오구라는 경산의 한 농부가 들고온 ‘청자 죽작문주전자’(대나무와 참새 그린 주전자)를 5000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20칸짜리 기와집 가격이 4000원 정도였다니 농부가 받은 돈은 지금으로 치면 수십억원은 족히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농부가 고향에 가서 떠벌리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에 체포됐다가 오구라와의 대질 끝에 풀려났다는 일화가 회자됐다.

오구라 유물 중에는 고종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쓰고 입었던 익선관(위 사진)과 당의(아래 사진)가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에는 고종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쓰고 입었던 익선관(위 사진)과 당의(아래 사진)가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니 모든 골동품상과 도굴꾼들이 오구라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고령의 가야 고분 300여 기를 파헤친 악명높은 도굴꾼은 장물 전부를 오구라에게 건넸다고 한다. 이때 개당 2원씩 샀다는 ‘굽은옥’(곡옥)의 양은 두 되가 넘었다. ‘후하게 쳐줘서 고맙다’는 인사치레에 오구라는 “물건만 많이 가져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개성경찰서장을 지낸 나가타(永田) 경시(총경급)는 개성 근무 당시 장물로 압수한 고려청자 5점을 자기 개인 소유로 둔갑시킨 뒤 이를 오구라에게 팔았다. 니가타는 10만원을 부른 평양 골동품상의 제의를 거절하고 ‘부르는 대로 다 준’ 오구라에게 넘겼다고 한다.

경주 계림보통학고 교장인 지바 젠노스케(千葉善之助)라는 자의 일화도 기막히다. 지바는 일요일마다 건장한 학생 몇몇을 불러 모은 뒤 미리 보아둔 신라 고분을 대놓고 도굴했다. 지바는 이 도굴품을 교장 관사에 옮겨두고 경주경찰서장과 오구라에게 연락하여 “유물 좀 보러 오라”고 했다. 그러면 오구라는 한밤중에 술을 사들고 찾아왔고, 마음대로 값을 계산한 뒤 경찰서장과 지바 교장에게 얼마씩 나눠주고는 유물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교장이라는 작자가 학생들을 도굴에 동원했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오구라 같은 자가 이렇듯 광적으로 한국 문화재를 싹쓸이했으니 엄청난 수의 유적이 파괴되고 유물이 도굴되는 악순환이 초래됐던 것이다.

1929년 10월29일 동아일보. 왕실유물이 유실되고 있다는 기사이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 등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 오구라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29년 10월29일 동아일보. 왕실유물이 유실되고 있다는 기사이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 등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 오구라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라진 금관총 유물 어디갔나 했더니

그런 탓에 절대 다수의 ‘오구라 유물’ 명칭에는 ‘전(傳)’자가 붙어있다. 출토지가 어디인줄 모르는, 혹은 밝힐 수 없는 유물이라는 뜻이다. ‘어디 어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傳)하는 유물’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전(傳)’자가 붙는 유물의 결정적인 흠은 ‘출처, 즉 근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유물의 출토지와 출토상황 등을 모르는 유물로는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그러니 ‘근본을 모르는 유물’은 문화유산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오구라 유물 중 ‘전(傳) 금관총 유물 일괄’이다.

금관총은 1921년 9월 주막집 확장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고분이다. 여기서 사상처음으로 신라금관을 비롯,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출토됐다. 그러나 유적조사 전문가들이 신고한지 3일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경험이 없는 경주 지역 조사원들이 불과 4일 만에 발굴을 해치우고 말았다. 이 혼란의 와중에 상당수 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구라 유물’ 중에 있는 ‘전 금관총 출토유물’은 ‘금제수식’과 ‘금제흉식금구’, ‘금제도장구’, ‘곡옥’(굽은옥), ‘청령옥’(유리구슬옥) 등이다. ‘금제수식’은 금관테의 둘레나 귀고리에 붙인 중간장식이다. ‘금제흉식금구’는 장식에서 몇가닥으로 늘어진 구슬을 고정하려고 일정간격으로 끼운 부속구이다. ‘금제도장구’는 칼의 손잡이나 몸통에 돌려감은 얇은 금판이다. 모두 완성품의 부품들인데, 금관총 발굴 때 누군가 슬쩍 훔쳤다가 오구라에게 팔아넘긴 장물이었을 것이다.

‘전 동래 연산동’ 유물. 투구(왼쪽)와 갑옷(왼쪽 밑), 원두대도(오른쪽 사진)가 눈에 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전 동래 연산동’ 유물. 투구(왼쪽)와 갑옷(왼쪽 밑), 원두대도(오른쪽 사진)가 눈에 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왜 유물 앞에 ‘전(傳)’자가 붙었나 했더니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금관(전 경남)과 금동관 2점(전 경주 및 전 울산), 금동관모(전 창령) 등도 모조리 ‘전’자가 들어가 있다. 도굴품이라는 얘기다.

이중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 양식인 ‘초화형(草花形)’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고령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관(국보 제138호)과 비슷하다”면서 “국내에 온다면 국보의 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통일신라시대 피리. 오구라 유물의특징은 장르불문, 출처불문인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

통일신라시대 피리. 오구라 유물의특징은 장르불문, 출처불문인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

또한 ‘전 창녕 금동관모’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경남 창녕 또한 오구라의 집중 표적이 된 듯하다. 일본 학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다수의 창령고분군이 도굴로 거의 내용물을 잃었는데 그 부장품들은 대구 오구라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등의 소장품이 됐다”(우메하라의 <조선고대묘제>, 1972년)고 밝혔다.

‘창녕’이라면 최근 도굴분 밑에 가려있다가 온전한 모습으로 확인된 무덤(63호분)에서 금동관 등 금제유물이 쏟아진 교동·송현동 고분군을 가리킨다. 오구라 유물 중 ‘전 창녕’ 출토품은 ‘금동관모’ 외에도 ‘금동제조익형관식’(새날개모양관장식) 등이 있다. 둘 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지금도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에는 무자비한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다. 도굴을 조장한 오구라 등이 고분군에서 불법으로 유출된 장물들을 수중에 넣었다는 얘기다. ‘전 동래 연산리 출토 유물’과 ‘경주 입실리 출토품’도 1920~30년대 마구잡이 도굴로 흩어진 뒤 오구라의 품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밖에 ‘전 경주 출토품’으로 표기된 ‘견갑형 동기’는 현재까지 오구라 유물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청동기에는 두마리 사슴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마리는 등에 화살이 꽂혀있다.

7세기 백제시대 작품으로 여겨지는 금동일광삼존불상. 본존은 좌상으로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된 원형광배를 갖추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7세기 백제시대 작품으로 여겨지는 금동일광삼존불상. 본존은 좌상으로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된 원형광배를 갖추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고종이 썼던 익선관은 왜?

오구라의 유물 가운데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몇 점이 보인다. 익선관과 당의, 치마 등 조선왕실 최고위층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다. 실제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성된 오구라 유물 목록에는 ‘익선관(임금의 곤룡포에 쓰는 관모)=이태왕소용품’이고, ‘당의, 치마, 속곳 등=이왕비 소용품’이라는 기록이 나란히 발견됐다. ‘이태왕’은 고종(재위 1863~1907)을, ‘이왕비’는 순종(재위 1907~1910)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런 왕실유물들이 대체 언제 오구라의 수중에 넘어갔을까. 동아일보 1924년 10월19일 기사에서 실마리가 잡힌다.

“덕수궁에 보존된 왕실유물이 땅으로 새었는지, 하늘로 올라갔는지 사라져서 재작년에 남은 물건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재고품 목록을 만들었지만 이 역시 점차 없어졌다.”

나라 잃은 지도자의 유품마저 유물 사냥꾼의 손아귀 안에 잡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오구라 유물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 금동일광삼존불상과 금동약사여래입상 등 93건의 불교문화재가 있다.

또 각종 고려자기와 분청사기, 조선백자 등은 물론이고 소반과 주칠장까지 다방면의 문화유물을 긁어 모았다. 회화에도 손을 뻗쳐 겸재 정선과 심사정, 최북, 김득신, 강세황, 이인문, 김홍도, 변상벽, 장승업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물들도 소장했다. ‘괴물 불가사리’가 따로 없을 정도다.
 

수레모양 토기와 네 발 달린 항아리.|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수레모양 토기와 네 발 달린 항아리.|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해방되자 자기 집 마루밑에 숨기고간 유물

오구라는 해방 되기 10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긁어모은 유물을 야금야금 일본으로 옮긴다.

그중 고운무늬청동거울(정문경)과 고려청자 등이 일찌감치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다. 아마도 도굴품 거래의 증거가 되는 유물을 일본으로 옮겨 혐의를 피하려 했을 것이다. 기막힌 일이 또 있었다.

8·15 해방 직후 오구라는 트럭 한 대를 국립부여박물관까지 몰고와서 “소장 문화재를 나에게 팔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단다. 그러자 박물관의 일본인 관리가 하도 어이가 없어 “아니 부여박물관 물건은 나라의 재산인데 어찌 당신한테 팔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단다. 그러자 오구라가 했다는 말이 기막히다.

“지금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구라는 마지막까지 한국문화재를 쓸어모으려고 발악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오구라의 유물들은 ‘적산문화재’으로 한국측에 귀속될 처지였다. 오구라는 눈물을 머금고 700~800점을 대구부(시)에 기증했다. 그러나 오구라는 다 주지 않았다. 트럭 7대분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그러고도 상당수 문화재를 700평에 달하는 대구의 저택 마루 밑과 천장에 숨겨두었다.

200여점의 유물은 과수원을 갖고 있던 심복(최창섭)에게 맡겨놓았다. 오구라는 최창섭에게 “10년 후에 다시 올테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쫓겨가던 일본인들 중 상당수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자기 재산을 땅 밑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이 또한 기막힌 일이다.

1964년 5월27일 옛 오구라 저택의 밑바닥에 숨겨놓았던 유물 142점이 전기공사 도중 발각됐다. 이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인계됐다. 그런데 오구라는 “142점이 아니라 500여점을 마루 밑에 묻어놨다”느니, “소장품 중 8할을 대구에 두고왔으니 행방이라도 알고 싶다”느니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오구라 유물 중 가장 독특한 유물로 평가되는 견갑형 동기.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 가장 독특한 유물로 평가되는 견갑형 동기.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결국 돌아오지 못한 오구라 유물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은 어찌 됐을까. 오구라가 일본으로 돌아올 때의 나이는 76살이었다.

모든 생활의 기반이 한국에 있었던데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오구라는 결국 수집한 문화재를 야금야금 팔아 생활비를 충당했다. 오구라는 1964년 당시로서는 천수를 다한 9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구라 유물 중 남은 1030건의 한국문화재가 1981년 국립도교박물관에 기증된다.오구라 유물은 1965년 한일회담 당시 한국측이 반드시 가져와야 할 ‘반환목록’에 올랐다. 1958년 4차회담에서 한국측은 “오구라 컬렉션이 개인소장품이라지만 대부분이 도굴품이고 일본의 국보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것이 많다”면서 “가치나 중요도로 비춰볼 때 당연히 반환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정부는 1960년 제5차 한일회담에서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오구라 소장품을 보물로 지정하거나 유출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총독부가 오구라의 유물 반출을 방관 혹은 허락한 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게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오구라 컬렉션은 어디까지나 개인소장품(사유재산)”이라면서 미온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끝내 1965년 한·일 양국이 합의한 반환문화재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1964년 6월17일자 조선일보. 오구라가 살던 대구의 저택 마루 밑바닥에서 유물 142점이 발견됐다는 기사다. 오구라는 조만간 다시 돌아온다는 일념아래 40여 년 간 긁어모은 문화재들을 여기저기에 숨기고 귀국했다.

1964년 6월17일자 조선일보. 오구라가 살던 대구의 저택 마루 밑바닥에서 유물 142점이 발견됐다는 기사다. 오구라는 조만간 다시 돌아온다는 일념아래 40여 년 간 긁어모은 문화재들을 여기저기에 숨기고 귀국했다.

지금 국립도쿄박물관이 갖고있는 오구라 유물은 1030점에 이른다. 이중 일본의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무려 39건이다. 그중 절대 다수가 출처, 근본을 잃어버린채 남의 나라 박물관 진열장이나 수장고에 놓여있는 처량한 신세이다.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고 반환을 요구해야 할 ‘한국 문화재’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한국내에서 ‘오구라컬렉션’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어떤지 모르겠다. 한반도를 도굴천지로 전락시키면서까지 한국문화재를 닥치는대로 쓸어간 자의 유물을 ‘오구라 컬렉션’으로 세탁해주는 셈이 아닐까. ‘오구라 도굴품’ 혹은 ‘오구라 도굴조장품’ 쯤으로 일컬어야 하지 않을까. 또하나 일본정부는 ‘개인소장품’이어서 반환이 난색을 표했단다. 그렇다면 1981년 이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면 이제는 ‘개인소장품’이 아니다. 정부차원이라면 얼마든 반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 아닌가.

<참고자료>

김동현·김삼대자·남은실·오다연·오영찬·이순자·이원복·이한상·정다움·최연식, <오구라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정규홍, <유랑의 문화재>, 학연문화사,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 12책), 2005

황수영 편,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이순우,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1-2>, 하늘재 200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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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코로나 전쟁' 발발 1주기...종군기자가 돌아본 '인간과 인간의 전쟁'

[코로나 1년 성찰과 희망 찾기] ①

우리는 지난 1년간 코로나19에 얼마나 잘 대처해왔는지를 살펴보고 코로나가 일상이 된 현실을 어떻게 현명하게 타개해나갈지를 성찰해야 한다. 정치가 과학을 무시하거나 과학 위에 군림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코로나19에 잘 대처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코로나 시대에 나타난 인간의 군상들은 어떠했는지 톺아보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 불안에 빠진 사람들을 겨냥해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제품과 상품을 파는 장사꾼들과 이들의 홍보꾼으로 전락한 언론의 부끄러운 모습도 다시금 되짚어야 한다. 방역 우선이란 무기를 앞세워 인권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일은 없었는지 살피는 것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성찰이다.

 

코로나가 바꾼 세상과 앞으로 바꿀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 지에 대한 통찰과 분석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백신과 치료제 개발, 그리고 각자도생과 각국도생이 아니라 국제협력을 바탕으로 코로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코로나가 지구를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씩 냉철하고 과학적으로 톺아보고 이를 토대로 코로나 일상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개인과 국가, 세계가 터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코로나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1. 코로나 전쟁 1년, 종군기자의 주마간산기(走馬看山記)


 

1년 만에 6천2백만 명 확진, 145만 명 사망


 

2019년 12월 1일 인간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바이러스와 맞닥뜨렸다. 전문가들은 최초의 코로나19 환자, 즉 제로 환자(Patient Zero)가 2019년 12월 1일에 나왔다고 보고 있다. (Huang, Chaolin; Wang, Yeming; Li, Xingwang; Ren, Lili; Zhao, Jianping; Hu, Yi; Zhang, Li; Fan, Guohui; Xu, Jiuyang; Gu, Xiaoying; Cheng, Zhenshun; Yu, Ting; Xia, Jiaan; Wei, Yuan; Wu, Wenjuan; Xie, Xuelei; Yin, Wen; Li, Hui; Liu, Min; Xiao, Yan; Gao, Hong; Guo, Li; Xie, Jungang; Wang, Guangfa; Jiang, Rongmeng; Gao, Zhancheng; Jin, Qi; Wang, Jianwei; Cao, Bin (February 2020). "Clinical features of patients infected with 2019 novel coronavirus in Wuhan, China". The Lancet. 395) 

나중에 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사스코로나바이러스2(SARS-CoV-2)란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 그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중국은 2002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이란 신종 감염병이 등장했을 때처럼 자신들이 미지의 병원체한테서 공격 받은 사실을 숨겼다. 병원체의 은밀한 침입을 눈치 채지 못한 인간은 이들의 치명적 공격에 쓰러지는 사람이 잇달아 나오고 나서야 새로운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치명타를 가할지에 대해 당시 중국은 예상하지 못했다.


 

1년 만에 6200만 명이 넘는 인류가 코로나19에 걸렸다. 사망자는 145만 명이 넘는다. 한두 명의 감염자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아무 장애물 없이 마구 밑으로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할 것이 분명하다. 그 끝이 언제가 될지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바이러스가 생겨나고 인간의 몸에서 개체수를 불리는 것은 신의 손이 저지른 일이 아니기에 신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코로나 발발 1주기를 맞아 여전히 불안해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불확실성에 있다.


 

중국 최초 보고, WHO 팬데믹 선언 모두 늦어 위기 자초


 

세계보건기구(WHO)는 3월 11일 코로나19를 세계적 대유행병, 즉 팬데믹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중국이 자신의 국가에서 치명적인 신종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국가들에 드러내는 공표가 늦었던 것처럼 팬데믹 선언 또한 상당히 늦었다.


 

감염병 퇴치는 전쟁과 같은 것이다. 아니 전쟁이다. 초전에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공격자들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인다. 특히 상대방이 결정적이고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코로나19는 실은 자신이 침입한 인간이란 숙주 몸 안에서 본격적인 증상을 나타나게 만들기 전에 이미 다른 숙주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바이러스의 놀라운 특성을 감염병이나 바이러스 전문가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증상 감염자를 인간 집단에서 구별해 이들이 타인에게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코로나, 비장의 무기인 무증상 전파에 초토화


 

이런 능력을 지닌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인간이 승리하기는 정말 어렵다. 코로나19는 이미 오래 전에 일일생활권이 된 지구촌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중국을 벗어나 인근 아시아 국가는 물론이고 미국, 유럽 등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유럽에서는 3월부터 코로나 유행이 본격화했다. 유럽은 6백여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한 선페스트, 즉 흑사병이 이탈리아에 상륙해 불과 4~5년 사이(1347~1351년)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량의 목숨을 앗아간 아픈 역사를 지녔다. (<전염병과 역사> 셀던 와츠 지음, 태경섭,한창호 공역, 모티브 북, 2009.) 코로나19는 그 전파 속도가 흑사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각 나라는 공포와 불안의 나날을 보냈고 지금도 2차 대유행을 겪고 있다.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등 북미와 브라질 등 중·남미, 인도 등 세계 곳곳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코로나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가 마비되고 의료체계가 붕괴됐다. 병원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고 숨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수많은 주검들이 집단 매장됐다. 병원이나 장례식장에 안치할 수 없는 주검들을 냉동 트럭에 보관하거나 길거리에 방치하는 나라들도 속출했다.


 

기저질환자와 노인에 치명적, 사망자 급증


 

코로나는 특히 기저질환이 있거나 면역력이 약한 노인 등에게서 치명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의료 선진국이자 복지 선진국이었던 유럽의 많은 나라는 이미 고령사회여서 특히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브라질, 인도 등 개발도상국 또한 치명적 감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미비와 열악한 의료 자원과 체계로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유행 초기 우한에서 걷잡을 수 없이 코로나가 확산하자 1천만 명이 넘는 도시 전체를 봉쇄했다. 인류 역사에서 그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에서도 도시 전체를 봉쇄하거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검역차단(콰란틴)이 이루어졌다.


 

세계 각 나라는 자국에서 코로나가 유행하는 것을 막거나 줄이기 위해 아예 국경을 폐쇄하거나 사실상 문을 걸어 잠그는 강력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는 인류 역사상 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사실상 세계 관광이 중단됐다. 국가 간 인적 교류도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스포츠 교류 등은 사실상 멈췄다. 사람이 아닌 물건과 상품의 교역만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올림픽 연기, 외국 관광 사라지고 마스크 사회 도래


 

감염병 때문에 올림픽 대회가 연기됐다. 내년에 열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세계 각 나라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가 되었다. 잠자거나 집에서 혼자 있을 때만 제외하고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일상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외출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 공공장소를 드나들거

나 대중교통을 타면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려면 QR코드를 찍거나 출입명부를 작성해야만 한다. 건물을 출입하려면 먼저 열화상카메라 앞에 서야 하고 여기서 체온이 37.5도 이하가 되어야 한다. 수업도 유행 정도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경기가 침체되고 실업자가 폭증하고 있다. 특히 음식점과 관광산업 등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배달 문화 등 비대면 사회가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인공지능과 정보통신, 로봇 등 새로운 산업기술이 각광을 받고 있다. 각 나라들은 이런 기술 개발과 발전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다.


 

코로나 전쟁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들은 대체적으로 과학적인 방역 전략을 제때 세우고 이를 국민들이 잘 실천해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감염병 유행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잘 갖춘 국가 또는 신속하게 준비한 국가는 상대적으로 혼란을 적게 겪고 있다. 베트남, 뉴질랜드, 대만, 한국, 일본 등이 그런 나라에 속한다.

 

코로나, 개인 자유 구속과 국가주의 강화란 과제 던져


 

코로나 1년이 인류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는 여전히 짙다. 또 코로나가 우리에게 던진 여러 숙제를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는 사회경제적 약자와 안전 약자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들은 감염과 사망 위험뿐만 아니라 실직과 소득 감소의 위험이 높은 영순위 집단들이다.


 

이들의 보호와 방역뿐만 아니라 경제 침체를 막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는 역으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전체주의, 국가주의의 강화를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코로나 일상 시대에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표준인지 논란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코로나 대유행 시대는 혼돈의 시대다. 무엇이 우리가 좆아야 할 표준인지 성급하게 제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 국가에서 표준으로 정하고 있는 것을 다른 나라가 그대로 본떠 시행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중국과 한국, 미국, 유럽 국가들이 지닌 국가 정체성과 인권 존중, 민주주의 수준, 문화와 역사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한 국가에서 잘 작동된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서 잘 작동할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전쟁, 지난 1년은 인간과의 싸움


 

지금까지의 코로나 전쟁, 즉 1년간 치른 전쟁은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었다.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안종주, 동아앰엔비, 2020.) 그동안 코로나 확산 방지는 바이러스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도록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 등을 얼마나 잘 실천하느냐, 즉 인간의 행태에 달려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가 본격 나오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하는 2년차부터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과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병행하는 과도기를 거쳐 백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그때는 코로나 전쟁이 바이러스와의 정면 승부가 된다. 이 단계에서 인간이 승리하면 인간과의 싸움 때 나타났던 비대면 등 많은 문화와 행태가 바뀔 것임이 분명하다. 서서히 코로나 이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다. 그 희망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필자 안종주는 최근 코로나 사태를 분석한 책으로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낸 저자입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13015033004176#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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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하고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 조속 도출’ 합의

한미, 미국 대선 후 첫 방위비분담협정 화상협의 개최

  • 기자명 김치관 기자 
  •  
  •  입력 2020.12.01 02:17
  •  
  •  수정 2020.12.01 02:22
  •  
  •  댓글 0
 
정은보 한·미 방위비분담협상대사가 미국 대선 이후 처음으로 30일 밤 도나 웰튼(Donna Welton) 미 국무부 방위비분담협상대표와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 화상협의를 가졌다. [사진제공 - 외교부]
정은보 한·미 방위비분담협상대사가 미국 대선 이후 처음으로 30일 밤 도나 웰튼(Donna Welton) 미 국무부 방위비분담협상대표와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 화상협의를 가졌다. [사진제공 - 외교부]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협의가 30일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돼 협상 현황을 점검했다. 여전히 트럼프 행정부의 임기가 남아있지만 미국 대선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외교부는 30일 밤 “정은보 한·미 방위비분담협상대사와 도나 웰튼(Donna Welton) 미 국무부 방위비분담협상대표(정치군사국 선임보좌관)는 공평하고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를 조속히 도출하기 위하여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합의하였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제11차 협정 협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과도한 인상요구로 지난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7차 회의 이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미 양측은 지난해 분담금(1조389억원)에서 13%가량 인상안에 잠정 합의하기도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거부로 타결짓지 못한 채 시간을 끌어왔다. 이에따라 주한미군 한국인 근로자 4,000여 명이 처음으로 강제 무급휴직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우리 정부가 올 연말까지 급여를 지원키로 해 시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화상협의는 내년 1월 들어설 조 바이든 행정부와의 본격 협상을 앞둔 상황 점검에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는 이번 화상협의에 한미 양측은 협상대표 이외에 한측에서 외교부·국방부 및 미측에서 국무부·국방부 관계자들이 협의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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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11가지 이유

  • 기자명 조혜정 기자
  •  
  •  승인 2020.11.30 23:34
  •  
  •  댓글 0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 기자회견

▲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있다.[사진 : 시민연대 제공]
▲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있다.[사진 : 시민연대 제공]

국가보안법 제정 72년째를 맞이하여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가 오늘 오전 11시 헌법재판소 앞에서 <국가보안법 7조폐지 법안의결 및 위헌심판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현 21대 국회에서는 지난 10월 22일 이규민의원의 대표발의로 15명의 국회의원이 함께 국가보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한 상태이다(의안번호 4605). 헌법재판소에서는 국가보안법 7조 위헌심판청구사안이 현재 심의중에 있다.

▲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지보당 김재연 상임대표와 대학생들[사진 : 시민연대 제공]
▲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지보당 김재연 상임대표와 대학생들[사진 : 시민연대 제공]

이날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국회에서는조속히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 법안을 의결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헌법재판소를 향해 심의중인 국가보안법 7조 위헌심판청구사안을 속히 위헌 판결하여 헌법정신을 수호해야 할 것을 촉구했다. 

▲ 국가보안법 폐지 1인 시위중인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 [사진 : 시민연대 제공]
▲ 국가보안법 폐지 1인 시위중인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 [사진 : 시민연대 제공]

기자회견 후 김재연 전의원이며 현 진보당상임대표가 1인시위를 진행했다. 대학생들 역시 1인 시위에 동참했다.

아래는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가 발표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11가지 이유이다.

▲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대학생들[사진 : 시민연대 제공]
▲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대학생들[사진 : 시민연대 제공]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11가지 이유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치안유지법(1941년 시행)은 “국체를 변혁할 목적”을 처벌하며,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은“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목적”을 처벌한다. 치안유지법은 독립운동을 하는 목적을 처벌했고, 국가보안법은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목적을 처벌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행위가 아니라 생각을 처벌하는 법은 없다. 그동안  유엔인권위원회와 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규약위원회, 국제 엠네스티 등 국제사회에서는 반인권적인 국가보안법에 대한 폐지를 권고했다. 우리나라의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특히,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부터 즉각 폐지해야 한다.

1.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한다. 
현대사회는 SNS상에서 세계적인 정보가 공유되고 북에 대한 정보도 실시간으로 넘치기 때문에 수많은 개인적인 관심과 호기심등 다양한 목적으로 습득한 정보들에 대하여 검사나 판사가 목적을 판단하여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2. 북맹을 조장하여 평화통일을 가로막는다.
통일을 지향하며, 평화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은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국가사업이다(제4조).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북을 알고 교류해야 한다. 7조는 북에 대한 정보를 알고 탐구하는 것을 단죄하기 때문에 통일교육이 위축되고, 통일관련 토론은 불가능하다.

3. 민주화운동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처벌하는데 악용한다.  
국제교류와 여행이 자유로운 시대이다. 국제여행이나 국제학술대회나 국제협력사업의 과정에서 북쪽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남북한 동시수교국이 158국 정도). 만약 북쪽 사람들과 사업을 하거나 만날 경우,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경력을 가진 사람을 색안경을 쓰고 선택적으로 조사·처벌하는 것으로 악용할 수 있다(사업가 김호의 사례)   

4. 언제나 모든 국민이 고소·고발에 시달릴 수 있으며 현재도 진행중이다.
문재인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7조 위반으로 고발당함(2020년). 유시민노무현재단이사장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계몽군주’발언도 국가보안법 7조위반으로 고발당함(2020년). 인디밴드의 프로듀서 박정근씨는 우리민족끼리트위터계정을 비판하며 리트윗하여 국가보안법 7조위반으로 구속되어 재판받았다(2012). 

5.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인 비판적 사고와 다양한 의견표명을 불가능하게 한다.
자유로운 생각이나 비판적인 발언에 대해서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게 되어, 전체주의적 사고를 조장한다. 무상급식이나 무상의료, 부의 불평등 문제, 보편적 복지제도 등에 대한 정책이나 사학비리에 대한 문제제기 등에 대해서도 빨갱이로 매도한다.

6. 정부의 성향에 따라 다르고, 사법처벌이 달라질 수 있다.  
정부의 성격과 평화통일정책 추진의지에 따라 사법부의 처벌을 받는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 남북교류협력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면서 탄압받고 사법처리될 수 있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민주화 운동의 경력도 빨갱이 경력으로 조롱당하고 가중 처벌을 받음. 

7. 예술가들의 표현이 고소·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제작진들은 국가보안법 고발과 수사를 각오함. 영화 ‘강철비2’에서 북한 위원장 역할로 꽃미남 배우를 기용했다는 것 등을 7조 위반으로 감독과 제작자가 고발당함.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도 국가보안법 7조 위반으로 고발당함. 

8.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교육하기 어렵다. 
4·3제주항쟁, 부마항쟁, 5·18민주화 운동 등 우리 현대사의 시대적인 사건을 다룰 때, 당시 정부에 대한 비판과 미군정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을 가르칠 때, 당시 정부와 미군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하는데, 심리적인 불안감으로 제대로 교육하기 어렵다. 당시 유행했던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도 7조 위반으로 처벌될 수 있다.

9. 내부검열( 처벌이전에 생각의 검열체제로 작동) 교육권과 학습권을 침해한다.
심리적으로 38선을 갖고 살고 있다. 해야 될 생각과 하지 말아야할 생각을 구분하는 자기검열, 내부검열이 일상화되어 있다. 어린학생들의 사고력을 제한하고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창의력은 갇힌 사고에서는 나오지 않고 열린 사고와 도전의식에서 나온다. 
 
10. 증오와 혐오문화를 유포시키는 반교육적이고 비인간적인 법이다. 
민주시민교육의 기본인 ‘다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위배하고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유포한다. 북에 대해서 긍정적 정보나 사실 확인의 과정도 유죄가 될 수 있으며(고무찬양혐의), 북을 바로 알기 위해 자료를 탐색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범죄행위(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에 북에 대한 막연한 비난과 욕설은 무한대로 용인한다.

11. 국가보안법 7조는 정치공작의 최후 안전장치, ‘보험용’ 기소의 수단이다. 
수사기관은 사찰 및 내사를 거쳐서 간첩죄, 내란죄, 이적단체 구성 가입 등의 사건을 만드는데, 주거와 직장 등을 무차별적으로 압수수색하고 서적과 문서, 컴퓨터와 USB에 저장된 파일들을 수거한다. 이 자료들은 다른 혐의가 무죄가 될 경우에 대비하는 ‘보험용’으로 국가보안법 7조 1항과 5항을 끼워 넣어서 기소했다. 노래 한 곡을 부르거나 책 한 권을 서재에 가지고 있었던 피해와 낙인은 너무나 혹독했다. 민중가요‘혁명동지가’를 제창했던 안소희파주시의원은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서재에 <민족의 세시풍속 이야기>를 두었던 박미자교사는 30년 일한 교단에서 파면되었고 연금도 박탈당했다. 

* 특히 국가보안법 7조는 그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민주화운동이나 평화통일운동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혹하게 탄압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결국 민주주의 사회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폐지해야 맞다. 
* 북도 보안법이 존재하는데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남북교류와 협력에 걸림돌이 되는 법이 있다면, 우리가 먼저 개정하고 선제적으로 북에 대해서도 민주적 요구를 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7조부터 폐지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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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1981년 2월, 광주는 ‘전두환의 미소’를 봤다

입력 : 2020.11.30 06:00 수정 : 2020.11.30 06:00 

전두환씨 대통령 시절 광주 방문 사진 69점 입수 

[단독]1981년 2월, 광주는 ‘전두환의 미소’를 봤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5·18민주화운동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지나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위 사진). 하지만 제12대 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광주를 방문한 대통령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은 전씨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고 있다. 금남로는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숨진 곳이다. 이 사진들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았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5·18민주화운동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지나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위 사진). 하지만 제12대 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광주를 방문한 대통령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은 전씨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고 있다. 금남로는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숨진 곳이다. 이 사진들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았다.

5·18 유혈진압 9개월 뒤 ‘개선장군’처럼 금남로서 손 흔들어
시민들 ‘싸늘’…30일 광주지법 사자명예훼손 혐의 선고공판
 

번호판 대신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표장’을 단 검정 차량 행렬이 도로를 지나고 있다. 승용차 뒷좌석에 탄 남성은 차창 유리를 내리고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행렬이 지나고 있는 곳은 광주 동구 금남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숨졌던 곳이다.

‘개선장군’처럼 광주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남성은 5·18학살의 책임자로 꼽히는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89)다. 금남로를 위풍당당하게 ‘행차’하고 있는 전씨의 모습은 5·18 유혈진압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찍혔다.

경향신문은 29일 정보공개를 청구해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서 전씨가 재임 당시 광주를 방문한 사진 69점을 받았다. 전씨의 사진들은 당시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이 촬영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전씨는 1980년 9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매년 수차례 광주를 찾았다. 부인 이순자씨(81)와 동행한 행사도 여럿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사망한 금남로를 전씨 일행이 지나는 모습이다.

이 사진들은 ‘대통령선거인’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1981년 2월25일 ‘제12대 대통령선거’를 1주일 앞두고 있던 시점에 촬영됐다. 사진 속 ‘400만의 화합 약진 새 전남, 새 희망 큰 광주’라고 쓰인 아치형 홍보물이 설치된 곳은 당시 금남로에 있던 광주은행과 광주가톨릭센터 앞이다. 광주가톨릭센터에는 현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 제목은 ‘광주시민 가두 환영인파’이지만 금남로에 선 시민들은 전씨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는다.

전씨는 1981년 2월18일 포항제철 제4기 확장공사 준공식에 참석한 뒤 광주를 찾아 민주정의당 전남도지부 관계자들을 만났다. 경향신문은 이튿날 보도에서 전씨가 이 자리에서 “지난해의 광주사건과 관련된 구속자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는 대로 최대한의 관용조치를 베풀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5·18 당시 보안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장·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며 사실상 권력을 장악해 5·18 유혈진압의 최고 책임자로 꼽히는 전씨가 사과는커녕, 오히려 ‘관용’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같은 전씨의 태도는 5·18 이후 40년간 이어지고 있다.

1997년 대법원에서 군사반란과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특별사면된 전씨는 5·18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다.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는 5·18을 부정하고, 5·18유공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2018년 5월 기소됐다. 지난 4월 광주 법정에 출석한 전씨는 “내가 알기로는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지난달 결심공판에서 전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전씨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은 30일 오후 2시 광주지법에서 열린다. 전씨도 법정에 출석해야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300600005&code=940100#csidx0ac76796ef6d83499fb4846c7e63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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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마산 민간인학살 유족 노상도 노현섭 형제의 고난기20.11.30 08:40l최종 업데이트 20.11.30 08:40l박만순(us2248)

 5.16 군사정변.
▲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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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예, 마산유족회입니더." "지는 부산기지사령관 박정희라 캅니더." "그런데예?" "내도 유족인데,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동래유족회'가 결성되던 1960년 8월 25일 오전 마산유족회 사무실로 걸려 온 전화였다. 당시 마산유족회는 마산 중앙동 부두노조 사무실에 공간을 마련해 사용하고 있었다. 마산유족회의 노현섭은 자유노련 소속 부두노조 위원장이었다.

 

유족회로서는 군인이, 더군다나 고위 장성이 관심을 갖고 식사를 하자고 하니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의도가 있는가 하는 의심에 실제로 식사에는 응하지 않았다.

노현섭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12일 마산유족회를 결성했다. 그는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의 전화를 받고 한껏 고무됐다. 박정희는 대구 10월 항쟁 사건으로 희생된 박상희의 친동생이었다.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은 선산유족회 부녀부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조귀분은 경북 지역 유족회 활동에 적극 발품을 팔았다. "내 시동생이 부산기지사령관이라예. 울산에서 유해 발굴할 때 트럭도 내줬다 아입니꺼." 조귀분은 동네방네 다니며 자신의 시동생 박정희를 칭찬했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박정희

노현섭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족회 임원들은 박정희를 같은 유족이자 한 식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임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이틀 후인 1961년 5월 18일 전국유족회장 노현섭(1921년생)은 영장도 없이 202방첩대에 다짜고짜 연행됐다. 그는 마산교도소와 육군교도소를 거쳐 1961년 8월 23일 서울 서대문교도소로 이감됐다. 이후 그는 '혁명재판부'로부터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1972년 4월 11일 가석방될 때까지 1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박정희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박정희는 4.19 혁명 이후에는 민주화세력이 대세라고 판단하고 '피학살자유족회'에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에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는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제1의 국시로 '반공(反共)'을 내걸었다. 그런 연유로 피학살자유족회 임원들을 반국가행위로 전부 구속해 사형부터 7년까지 골고루 선고했다.

동생은 트럭에서 뛰어내리고, 형은 괭이바다서 수장
 
 일본 유학시절의 노상도 형제.  오른쪽 앉은 이가 노현섭, 그 뒤가 노상도.
▲  일본 유학시절의 노상도 형제. 오른쪽 앉은 이가 노현섭, 그 뒤가 노상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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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무소로 부역하러 나오시오"라는 전갈을 받은 노상도는 삽과 소쿠리를 들고 면사무소로 갔다. 하지만 면사무소에는 구산지서 경찰들이 대기시켜 놓은 트럭만 있었다.

경남 창원군 구산면 일대의 보도연맹원들이 전부 소집되자 구산지서 지서장은 '출발' 신호를 내렸다. 보도연맹원들을 태운 GMC 트럭이 움직이자 노현섭의 마음도 출렁거렸다.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이 길모퉁이를 돌 때였다. "저 놈 잡아라!" "탕탕탕" 트럭에서 뛰어내린 노현섭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경찰들은 그를 쫓지 않았다.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을 데려가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당시 트럭에 같이 탔던 노상도는 동생의 탈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집안에 한 명은 살아남아야 했다. 트럭은 마산시내 강남극장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6.25가 발발한 지 20일 만인 1950년 7월 15일의 일이었다.

마산형무소는 나무로 된 단층 건물로 기결수를 수용하는 1사와 결핵환자를 수용하는 병사인 2사 등을 모두 합쳐 수용 인원이 300명밖에 되지 않았다. 보도연맹원들이 몰려들어 형무소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대다수 보도연맹원들은 형무소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노숙을 했다. 이날부터 특무대(CLC) 대원들의 심사가 진행되었다. '골'로 갈 사람과 '석방' 될 사람의 분류작업이었다.(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1~2주일간 형무소에서 진행된 분류작업 이후 전차상륙함(LST)에 실려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마산시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재소자들은 모두 1681명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기겁할 일이 발생했다.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중에는 여성이 50명이었다. 이들을 심사하던 CLC 대원 4~5명이 이들을 강간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 47명은 석방됐지만 완강히 거부한 3명은 형무소 인근에서 사살되었다. 이는 1960년 4.19 혁명 후 제4대 국회 '양민학살특위 경남반'이 경남도청에서 진행한 증언 청취에서 증인 김용국이 진술한 내용이다. 

노현섭의 형 노상도는 1950년 8월 18일 마산지구계엄사령부고등군법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괭이바다에서 수장되었다. 동생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았지만, 형은 괭이바다에서 학살된 것이다.

일본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한 형제

"이놈아, 머리가 이기 뭐꼬!" 노상도는 길게 머리를 땋고 "하늘 천 땅 지"를 외는 동생 노현섭에게 꿀밤을 먹였다. 동생보다 열 살이 많은 노상도(1911년생)는 구산국민학교와 부산 동래중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 풍전중학교를 다니던 그가 방학 때 고향에 왔는데, 동생 현섭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천자문을 외우고 있었다.

상도는 일찌감치 동생을 일본에 데리고 갔다. 형은 와세다대를, 동생은 주오대학에 다녔다. 일제강점기에 형제가 모두 일본 명문대에 다닐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상도·현섭의 아버지 노용환은 구산면에서 대구어장을 해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노용환의 재산 정도로 자식 둘을 일본 유학 보내기에는 버거웠다. 하지만 '교육만이 민족과 집안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노용환은 자식들을 가르쳤다.

형 노상도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노현섭은 귀국 후 마산부청(馬山府廳)에 근무하면서 아나키스트 운동에 몸 담았다.(홍중조·이상용, 『불세출의 노동운동가 소담 노현섭』)

해방 후 형 노상도는 마산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구산면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후에 노상도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1948년 4월에 포고령 2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는 징역 1년 5개월을 선고받아 만기출소했다. 이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찰에 예비검속되었다.

동생 노현섭은 마산공립상업중학교(현 용마고)에서 교직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직후에는 형 노상도와 함께 구산면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형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노현섭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정부는 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김용국군과 단 둘이서 침묵의 시위를 온 시내로 하였다. 1,600여 명의 행방불명자의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노현섭 육필일기』)
 
1960년 5월 24일 노현섭과 김용국이 현수막을 들고 한 이날의 시위는 경남 마산 괭이바다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최초의 진실규명 외침이었다.

그는 그해 5월 25일부터 마산시 중앙동 마산자유노조 사무실을 연락사무소로 운영하고 <마산일보>에 광고도 했다. "6.25 사변 당시에 보도연맹 관계자로서 행방불명된 자의 행방과 그의 진상을 알고 관계 당국에 진정하고자 하오니 유가족께옵서는 좌기(左記)에 의하여 연락하여 주시옵기 자이 경망하나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민간인학살 피해 유족들은 노현섭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노현섭은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했다.(이창현, 『1960년대 초 피학살자유족회 연구』)

1960년 6월 12일 마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마산유족회 결성식'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노현섭은 유족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60년 8월 28일 부산상공회의소에서 '경상남도피학살자유족회연합회(경남유족회)'를 결성했다. 이후 1960년 10월 20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전 자유당 중앙당부 회의실에서 경남·북 유족 대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유족회 결성대회'가 열렸다. 회장은 노현섭이 맡았다. 

아버지는 전쟁 때 수장... 아들도 간첩 누명
 
 위령제에서 인사말 하는 노치수 회장
▲  위령제에서 인사말 하는 노치수 회장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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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 지프차에서 헌병들이 후다닥 내렸다. 헌병들은 노치영(1936년생)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와 이러십니꺼?" "너를 간첩죄로 체포한다." 노치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헌병대에 끌려간 노치영은 구타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그가 간첩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하소연해도 고문관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노치영 스스로도 답답했다. "내가 뭔 죄를 졌는지, 갈차 주이소." 차라리 자신의 간첩죄를 얘기해주면 승복하겠다는 말이었다.

수사관들은 노치영의 먼 친척뻘 아줌마의 남편이 월북해서 교육 후 간첩으로 남파되었는데 그가 "노치영에게 돈을 줬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간첩 혐의자가 된 노치영은 오랜 고문과 수사, 재판 끝에 1962년 무죄석방되었다.

사실 노치영은 6.25 때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노상도의 아들이다. 그러다 보니 노치영은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 처리되었다. 그가 간첩으로 내몰린 것은 아버지 노상도 사건과 무관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설움과 국가로부터의 끊임없는 감시는 그를 평생 옥죄었다.(노치수 증언. 74세.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아들의 무죄에 이어 아버지 노상도 역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6.25 때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 무죄라는 것이다. 2020년 2월 14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의 재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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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거대한 시한폭탄

[개벽예감 421]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거대한 시한폭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11/3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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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다량생산 시작한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2.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은 실패작이다

3. 갱도관통폭탄으로 갱도진지를 파괴할 수 있을까?

4. 무인정찰기와 전파교란공격

5. 요새 너머에 군종합동타격력

 

 

1. 다량생산 시작한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2020년 9월 4일 남측 국방과학연구소는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KTSSM)이 100km 이상 떨어진 표적에 명중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을 자기 웹싸이트에 올려놓았다. 이 사진은 2017년 7월 29일에 이미 공개된 적이 있다. 북측 국방과학원이 2017년 7월 4일에 진행한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보고 자극을 받은 남측 국방과학연구소는 그로부터 며칠 뒤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했고, 명중장면을 찍은 사진을 2017년 7월 29일 세상에 공개했던 것이다. 

 

위성항법장치(GPS)로 유도되는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은 타격오차범위가 2~3m로 초정밀타격을 할 수 있고, 사거리는 120km이며, 탄체지름은 600mm이고, 500kg 열압력탄두가 장착되어 1.5m 두께의 콘크리트를 뚫을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남측 국방과학연구소가 전술미사일 명중장면을 찍은 사진을 외부에 공개한 것은, 자기들이 북의 갱도진지를 파괴하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즈음 북측 국방과학원은 미사일시험발사를 하지 않는데, 남측 국방과학연구소는 왜 그 사진을 다시 공개한 것일까? 2020년 11월 25일 서욱 국방장관이 주재한 방위사업청 화상회의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2020년 11월 25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날 방위사업청 화상회의에서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을 다량생산하기로 의결했다고 한다. 전술미사일을 다량생산하는 문제가 국방부 내부에서 논의되고 있었던 때에 맞춰 남측 국방과학연구소는 3년 전에 찍은 사진을 다시 공개했던 것이다. 2020년 11월 25일 방위사업청 화상회의에서 의결된 사항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5년까지 3,200억 원을 투입하여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200여 발을 생산하게 되는데, 2023년부터 실전배치할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고 한다.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을 다량생산하는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에서 한국군 연평부대가 피격당하는 장면을 실시간 동영상으로 지켜보며 낙담한 당시 대통령 이명박은 조선인민군 갱도진지를 파괴할 미사일을 2~3년 안에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지금은 횡령죄와 뇌물죄로 징역 17년을 선고받고 서울동부구치소에 갇혀있는 그는 미사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군사문외한이었으므로, 전술미사일을 2~3년 안에 개발하라는 ‘무식한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와 한화그룹이 전술미사일을 개발하기까지 근 10년이 걸렸다. 2020년 10월 16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국방과학연구소와 한화그룹이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개발을 완료한 때는 2020년 1월이라고 한다. 그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10년이 걸린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에 장착되는 군사용 위성항법장치를 미국에서 수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2015년 5월 미국 국무부는 미국군이 사용하는 군사용 위성항법장치 300개를 한국에 수출하는 사업을 승인했고, 2016년 1월 수입계약을 체결했다. 

 

2) 2018년 5월 29일 충청남도 대전에 있는 한화대전사업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시제품을 제작하고 있었던 그 사업장에서 로켓추진용기에 고체연료를 주입하던 근로자들이 고체연료가 잘 주입되지 않자 주입설비밸브에 나무막대기를 대고 고무망치로 내려쳤는데, 그 순간 고체연료가 폭발했다. 로켓추진제로 사용되는 고체연료는 폭발력이 엄청나게 강한 물질이므로, 잘못 다루면 폭발한다. 근로자 5명이 작업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폭발참사로 생산이 중단되자, 2020년 2월 감사원은 전술미사일개발사업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고, 그래서 생산이 더 늦어졌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남측 국방과학연구소가 2017년 7월 29일에 진행한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시험발사 중에 미사일이 100km 이상 떨어진 표적에 명중하는 장면이다. 2020년 9월 4일 남측 국방과학연구소는 이 명중장면을 보여주는 사진을자기 웹싸이트에 또 다시 올려놓았다. 2020년 11월 25일 서욱 국방장관이 주재한방위사업청 화상회의에서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을 다량생산하기로 의결했다.이 미사일은 200여 발이 생산되는데, 2023년에 실전배치될 것이다.  


  

2.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은 실패작이다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발되었고, 다량생산에 들어갔지만, 그 미사일은 실패작이다. 2023년에 실전배치될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과 조선인민군이 실전배치한 조종방사포를 비교하면,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이 왜 실패작인지 알 수 있다. 한국형 전술미사일과 조선인민군 조종방사포는 탄체지름이 600mm로 같고,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것도 같고, 타격오차범위를 최소화한 초정밀타격능력도 서로 같다.  

 

1) 한국군이 보유한 600mm 4관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은 지상에 고정된 발사대에 탑재되지만, 조선인민군이 보유한 600mm 4관 조종방사포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4축8륜 포차에 탑재된다. 고정발사대에서 전술미사일을 쏘면 사격원점이 교전상대에게 노출되어 반타격을 받지만, 4축8륜 포차에서 조종방사포를 쏘고 재빨리 이동하면 사격원점이 교전상대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2) 남측 방위사업청은 조선인민군 갱도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600mm 4관 전술미사일을 개발했는데, 그 미사일은 1.5m 두께의 콘크리트를 뚫는 관통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관통력으로는 조선인민군 갱도진지를 파괴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은 정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6년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Nautilus Institute)에서 펴낸 ‘조선편람: 북조선의 강화된 포진지(DPRK Briefing Book: HARTS in North Korea)'라는 제목의 논문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서술되었다.

 

- 조선인민군 갱도진지의 강철문은 앞면이 최소 10mm 두께의 강철판으로 되어 있고, 뒷면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다. 

- 갱도진지 강철문 안쪽에는 방사능과 폭탄파편을 막아주는 방호장막이 설치되었다.  

- 갱도진지는 5cm 두께로 다져놓은 토사층 아래에 15~20cm 크기의 화강석을 다져넣은 30~60cm 두께의 화강석층이 있고, 그 아래에 30~60cm 두께의 방수토사층으로 구축된 방호벽으로 둘러싸였다. 

 

위의 정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갱도진지 방호벽은 1.45m 정도의 두께이므로, 1.5m 두께의 콘크리트를 관통하는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직격탄을 맞으면 파괴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의 논문이 발표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86년이다. 40년 전에 나온 철지난 정보를 가지고 오늘 조선인민군 갱도진지의 견고성을 평가하는 것은 오류다. 

 

2013년 10월 25일 미국의 반사회주의언론매체 <자유아시아방송>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연평도 포격전에서 군공을 세운 무도방어대 갱도진지를 2년 동안 보강, 개조하여 요새화했다고 한다. 또한 그 보도에 따르면, 2013년 9월 초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보강, 개조된 무도방어대 갱도진지를 본보기로 하여 전방지대의 모든 군사시설을 2014년까지 보강, 개조하고 요새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보면, 조선인민군 갱도진지가 갱도관통폭탄으로 파괴할 수 없는 금성철벽으로 요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한국군이 보유한 600mm 4관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의 사거리는 120km인데, 조선인민군이 보유한 600mm 4관 조준방사포의 사거리는 400km다.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의 사거리는 너무 짧다. 사거리가 짧으면 피격위험이 그만큼 커진다. 

 

4) 사거리가 120km인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을 쏘면 포물선에 가까운 비행궤적을 그리면서 성층권 최상층 50km 고도까지 상승했다가 지상타격목표를 향해 돌진락하비행을 한다. 그런데 비행고도가 50km로 높아지면, 조선인민군 반항공미사일의 요격을 받게 된다. 그에 비해, 조선인민군이 보유한 600mm 조종방사포는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비행고도보다 훨씬 낮은 25~35km 고도로 비행한다. 2020년 3월 2일 조선인민군이 동계훈련 중에 발사한 600mm 조종방사포는 35km의 저고도로 240km를 비행했다. 조선인민군이 보유한 600mm 조종방사포는 저고도비행만 하는 게 아니라, 타격대상을 향해 날아가다가 돌발적인 변칙비행도 한다. 이처럼 저고도변칙비행을 하는 조종방사포탄은 그 어떤 반항공미사일도 요격하지 못한다. <사진 2> 

 

▲ <사진 2> 위의 사진은 조선인민군 해안포병들이 130mm 해안포를 갱도진지에서밖으로 끌어내 사격훈련을 하는 장면이다. 이 해안포를 쏘면 27km 밖에 있는 적함을 타격할 수 있다. 그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적함은 수평선 너머에 있어서 육안으로 관측하지 못한다. 한국군은 미국에서 수입한 갱도관통폭탄을 전투기에서 발사하여 조선인민군 장거리포병대 갱도진지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1.5m 두께의 관통력을 가진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로는 2014년 보강개조작업을 거쳐 금성철벽으로 요새화된 조선인민군 갱도진지를 파괴하지 못한다.  

 

 

3. 갱도관통폭탄으로 갱도진지를 파괴할 수 있을까?

 

2016년 11월 28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공정통제사훈련을 각각 두 차례씩 진행했다고 한다. 공정통제사는 적지에 침투하여 파악한 기상정보를 아군 공군기지에 알려주고, 아군 전투기의 정밀폭격을 유도하는 전문병이다. 한국군이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진행한 공정통제사훈련은 황해남도에 공정통제사를 침투시킨 것으로 가정하고, 전투기 정밀폭격을 유도하는 훈련이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 당시 초계비행을 하던 남측 공군 F-15K 전투기들이 서해 5도 남쪽 상공에 긴급히 출동했다. 그런데 2015년 10월 12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 전투기들에는 조선인민군 장거리포병,대 갱도진지를 타격할 공대지미사일이 탑재되지 않았고, 공중전에서 사용할 공대공미사일만 탑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해 5도 상공에 출동한 남측 공군 F-15K 전투기들이 공대지순항미사일 슬램이알(SLAM-ER)을 발사하면, 조선인민군 갱도진지를 정밀타격으로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슬램이알의 사거리는 270km이고, 타격오차범위는 3m다. 하지만 남측 공군 F-15K 전투기가 공대지순항미사일 슬램이알을 먼 거리에서 발사하여 조선인민군 갱도진지를 파괴한다는 것은 단순논리에 불과하다. 돌발요인들이 복잡하게 발생하는 실전상황에서는 그런 단순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내막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 미국산 슬램이알은 1발에 300만 달러(약 33억 원)나 하는 아주 비싼 미사일이기 때문에 평소에 한국군 전투기는 그 미사일을 탑재하고 비행훈련을 하지 못한다. 슬램이알을 전투기에 탑재하고 비행훈련을 자주 하면, 미사일 작전수명이 단축된다. 더욱이 남측 공군은 슬램이알의 값이 너무 비싸 47발밖에 수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슬램이알을 쏘는 실탄사격훈련을 1년에 한 차례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슬램이알은 항온항습장치가 가동되는 탄약고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2) 국지무력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남측 공군이 슬램이알을 탄약고에서 꺼내 전투기에 탑재하면 즉각 이륙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투기에 슬램이알을 탑재하고 이륙시키려면 최소 2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한국군 합참의장은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부터 슬램이알을 탑재한 전투기를 출동시키는 허가를 받아야 하고, 전투기에 타격대상좌표를 입력해야 하고,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슬램이알을 사용하는 타격임무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서해 5도 수역에서 국지무력충돌이 2시간 이상 치렬하게 계속되면, 국지무력충돌은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측 공군 전투기들이 슬램이알을 탑재하고 출격을 서두르는 사이에 조선인민군 방사포부대들은 400mm 방사포, 500mm 방사포, 600mm 방사포, 610mm 방사포를 총동원하여 한국군 공군기지와 레이더기지를 비롯한 전략거점들을 순식간에 파괴할 것이다. 

 

3) 슬램이알은 오발사고를 일으키는 치명적 결함을 가졌다. 2011년 11월 29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2011년 6월 15일 남측 공군 F-15K 전투기가 서해 상공에서 실탄사격훈련을 하면서 슬램이알 1발을 쏘았는데, 비행도중에 미사일 엔진이 오작동을 일으켜 바다에 떨어지는 바람에 잔해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2013년 3월 15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남측 공군은 3월 4일 슬램이알 사용을 잠시 중지해달라는 미국 해군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얼마 전 뛰르끼예군이 슬램이알을 시험발사하는 중에 미사일 엔진이 오작동을 일으켜 추락했기 때문에 사고원인을 규명할 때까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통고였다. 그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이 보유한 슬램이알 40여 발 중에서 16발에 엔진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4)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통신위성과 항법위성을 교란하는 능력을 가졌고, 교전상대가 식별하지 못하고 그대로 수신하는 기만전파를 발신하는 기술도 가졌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그들이 교란전파와 기만전파를 동시다발로 발사하는 입체적인 전파교란전을 벌이면, 위성항법장치로 유도되는 공대지순항미사일 슬램이알,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합동정밀직격탄(Joint Direct Attack Munition: JDAM)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게 된다. 

 

한국군은 조선인민군 갱도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두 종류의 미국산 갱도관통폭탄을 실전배치했다. 위성항법장치로 유도되는 합동정밀직격탄과 레이저유도장치로 유도되는 GBU-24 폭탄이다. 스웨리예 정부기관인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펴낸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에서 합동정밀직격탄 294발과 GBU-24 레이저유도폭탄 50발을 수입했다고 한다. 이 두 종류의 갱도관통폭탄은 3.4m 두께의 콘크리트를 관통할 수 있다. 

 

조선인민군은 교란전파와 기만전파를 동시다발로 발신하여 슬램이알을 피할 수 있지만, 레이저유도장치로 유도되는 GBU-24 레이저유도폭탄에는 전파교란이 통하지 않는다. 전투기에 장착된 레이저발신기가 타격대상에 레이저광선을 쏘면, 타격대상에 맞아 반사된 광선이 비치게 되는데, 레이저유도폭탄은 바로 그 반사광선을 추적하여 타격대상에게 날아간다. 교란전파발신으로 레이저유도폭탄공격을 피하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레이저유도폭탄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기발한 장치를 개발했다. 2013년 10월 25일 <자유아시아방송> 보도기사에서 그 기발한 장치를 확인할 수 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2013년 9월 초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모든 군사시설을 요새화할 데 대한 명령을 하달했는데, 그 명령 가운데는 갱도진지 입구를 먹지로 여러 겹으로 둘러싸놓으라는 특이한 명령도 있다고 한다. 갱도진지 입구를 먹지로 여러 겹 둘러싸면, 남측 공군 전투기에 장착된 레이저발신기에서 투사되어 레이저광선을 먹지가 모조리 흡수해버려 반사광선이 비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반사광선을 추적하여 날아가는 GBU-24 레이저유도폭탄은 무용지물로 된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1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 1주년을 맞은 날, 남측 공군F-15K가 공대지순항미사일 슬램이알(SLAM-ER)을 탑재하고 이륙하는 장면이다.사진 속에서 탄체에 가느다란, 노란 띠를 두른 미사일이 슬램이알이다. 슬램이알의 사거리는 270km이고, 타격오차범위는 3m다. 슬램이알은 위성항법장치(GPS)로 유도되기 때문에 초정밀타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교란전파와 기만전파를 동시다발로 발사하는 입체적인 전파교란전으로 슬램이알을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게 만들 수 있다.  

 

 

4. 무인정찰기와 전파교란공격

 

한국군이 연평도 포격전에서 패한 결정적인 원인은 조선인민군 방사포부대의 사격징후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한국군이 무인정찰기를 투입했더라면, 조선인민군 방사포부대의 사격징후를 포착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한국군은 무인정찰기를 투입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국군 무인정찰기가 조선인민군 고사포의 사격권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군 85mm 고사포는 사격고도가 10.5km인데, 한국군이 보유한 이스라엘산 무인정찰기 써처(Searcher)의 비행고도는 6.1km이고, 남측에서 개발된 무인정찰기 송골매의 비행고도는 4.5km다. 그런 형편이므로, 한국군은 연평도 포격전에 무인정찰기를 투입할 수 없었다. 

 

한국군이 보유한 무인정찰기 써처와 무인정찰기 송골매는 실전에서 사용하기 힘들 만큼 너무 낡았다. 2020년 10월 22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써처와 송골매의 작전수명년한은 각각 15년인데, 2020년 현재 작전수명년한을 1~3년 넘긴 것도 있고, 6년이나 넘긴 ‘고물’도 있으며, 부품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아 주간 7회씩 해오던 무인정찰비행을 주간 1~2회로 축소했다고 한다. 

 

작전수명년한을 넘긴 무인정찰기는 정비를 해도 사고를 피하기 힘들다. 2020년 11월 현재 무인정찰기 460여 대를 운용하는 한국군에게 무인정찰기 사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2020년 10월 10일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무인정찰기가 실전배치된 2001년 이후 지금까지 각종 사고가 106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사태가 이처럼 심각해지자, 한국군 수뇌부는 차세대 무인정찰기를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2019년 10월 24일 <TV조선>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작전수명년한이 2017년에 끝난 무인정찰기 송골매를 대체할 차세대 무인정찰기를 1,180억 원의 비용을 들여 개발했는데, 2019년 10월 감사원의 감사결과에 따르면, 차세대 무인정찰기의 비행고도가 9km밖에 되지 않아 조선인민군 85mm 고사포의 사격권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실전용으로 배치하지 말고 훈련용으로나 사용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한국군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개발한 차세대 무인정찰기는 실패작이었다.  

 

무인정찰기운용이 부실해지자 한국군은 미국산 고고도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Global Hawk)를 수입했다. 한국군은 2019년 12월부터 2020년 9월까지 기간에 글로벌 호크 4대를 인수했는데, 2021년 하반기에 실전배치된다. 글로벌 호크의 비행고도는 18km이므로, 조선인민군 고사포의 사격권을 벗어나 비행한다. 

 

그런데 한국군이 글로벌 호크를 실전에 배치하기도 전에 고장이 났다. 2020년 10월 21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이 인수한 글로벌 호크 1대의 착륙장치에서 기름이 새는 치명적 결함이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군이 고고도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를 보유했으므로, 조선인민군은 그것을 상대하는 작전방안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민군이 글로벌 호크를 상대하는 여러 가지 작전방안들 중에서 전파교란이 손꼽힌다. 

 

20,200km 상공의 궤도에 떠 있는 항법위성은 항법신호를 25와트 출력으로 발신하고, 그것을 수신한 지상기지국은 10~16와트 출력으로 항법신호를 재발신하는데,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가 쏘는 교란전파의 출력은 1,000와트다.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가 위성항법장치의 주파수 대역으로 출력이 1,000와트인 교란전파를 쏘면 항법신호는 교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위성항법체계에서 사용되는 상업용 주파수 대역은 1,575.42메가헬쯔이고, 군사용 주파수 대역은 1,227.6메가헬쯔다. 

 

2012년 5월 17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의 전파교란이 계속되는 기간에 무인정찰기 송골매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2012년 5월 8일 미국의 반사회주의선전매체 <미국의소리> 보도에 따르면, 2011년 3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진행되는 기간에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가 위성항법장치를 교란하는 전파를 발신하였더니 주한미국군 정찰기가 이륙 후 40여 분 뒤에 정찰을 포기하고 출격기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2012년 5월 11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보도당일 인천에서 시험비행을 하던 무인정찰헬기 1대가 이륙한지 30분 만에 위성항법장치에서 오작동을 일으켜 조종차량에 추락하면서 불이 나는 바람에 조종차량에 타고 있던 외국인 무인항공기 기술자 1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다른 직원 2명은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 무인정찰헬기는 남측 해군이 서해 5도 수역에서 대북정찰활동을 하기 위해 개발한 것인데, 추락사고가 일어난 시간에 조선인민군 전파교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남측을 향해 교란전파를 발신하는 작전을 계속해왔다. 2016년 4월 1일 <뉴시스> 보도와 <연합뉴스> 보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들어있다. 

 

1) 2016년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진행되는 기간에 맞춰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가 남측을 향해 교란전파를 쏘았는데, 이것은 네 번째 전파교란전이었다.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2016년 2월 말부터 교란전파를 시험적으로 발사해오다가 3월 31일에는 교란전파의 출력을 최고로 높여 본격적인 전파교란전을 벌였다.

 

2) 2016년 3월 31일 당시 교란전파강도는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났는데, 철원군과 화천군 경계에 있는 대성산 일대에서는 100데시벨이었고, 강화도에서는 70데시벨이었다. 교란전파는 서해 5도 수역의 섬들, 수도권, 철원군 등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3)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상업용 위성항법주파수 대역과 군사용 위성항법주파수 대역으로 동시에 교란전파를 쏘았다. 

 

4)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2011년 3월 4일부터 14일까지, 그리고 2012년 4월 28일부터 5월 13일까지 진행한 전파교란전에서 군사용 위성항법주파수 대역으로 교란전파를 발신했다. 그렇게 되자, 한국군의 함선과 항공기에 장착된 위성항법장치가 교란당했다. <사진 4> 

 

▲ <사진 4> 한국군은 2019년 12월부터 2020년 9월까지 기간에 미국산 고고도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 4대를 수입했다. 글로벌 호크는 2021년 하반기에 실전배치된다. 글로벌 호크의 비행고도는 18km이므로, 지상에서 육안으로 관측하기 힘들고,조선인민군 고사포의 사격권을 벗어나 비행한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가 위성항법신호와 유사한, 신호파형이 다양한 기만전파를 발신하면 글로벌 호크는 기만전파를 정상전파로 오인하고 수신하게 된다. 2011년 12월 4일 이란혁명수비군은 기만전파를 발신하여 미국의 스텔스무인정찰기 RQ-170을 공중에서 유인, 착륙시켜 나포했다.  

 

2008년 11월 조선을 방문한 미얀마 고위급 군사대표단이 군부대들과 군사시설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의 전파발신거리는 300km라고 한다. 2012년 9월 14일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가 사용하는, 차량탑재형 교란전파발신기는 전파출력이 매우 강해서 남측 전역을 영향권 안에 두고 있으며,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교란전파를 발신하기 때문에 발신위치를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의 작전능력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교란전파를 발신하는 수준을 넘어서 기만전파를 발신하는 능력을 가졌다. 2012년 9월 14일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위성항법장치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교란전파를 발신하는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위성항법신호와 유사한 기만전파를 발신하는 기술, 이른바 기만기술(spoofing)을 보유했다고 한다. 한국군은 교란전파를 식별할 수 있지만, 신호파형이 다양한 기만전파는 식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만전파를 발신하면, 위성항법장치가 기만전파를 정상전파로 오인하고 수신하게 된다. 2011년 12월 4일 이란혁명수비군은 기만전파를 발신하여 미국의 스텔스무인정찰기 RQ-170을 공중에서 유인, 착륙시켜 나포했다. 

 

2)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항법위성을 교란하는 기술을 가졌다. 2012년 11월 14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평양 남쪽에 설치된 거대한 안테나에서 통신위성 무궁화 5호를 향해 강력한 교란전파가 발신되었다고 한다. 통신위성 무궁화 5호는 한국군과 민간인이 공동으로 사용한다.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남측 통신위성만이 아니라 미국 항법위성도 교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데, 평시에 미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국 항법위성에는 교란전파를 발신하지 않는다.  

 

3)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는 침투교란능력을 가졌다. 위성항법체계에서 사용되는 전파와 그 체계에 오작동을 일으키는 교란전파는 모두 직진파이므로, 송신기와 수신기 사이에 장애물이 있으면 직진파는 차단된다. 그러므로 위성항법장치를 달고 장애물 없는 공중을 비행하는 항공기나 미사일은 교란전파를 피하지 못하지만, 지상에서 사용하는 위성항법장치는 산이나 건물 같은 장애물에 가로막혀 교란전파강도가 약해지거나 아예 차단되기도 한다. 따라서 지상에서 사용하는 위성항법장치를 교란하려면, 전파교란장비를 대상에 바짝 접근시켜야 한다. 2020년 10월 10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참가한 전파교란부대는 배낭형 전파교란장비를 메고 적지에 침투한 다음, 교전상대에 접근하여 가까운 곳에서 교란전파를 발신하는 작전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었다.  

 

 

5. 요새 너머에 군종합동타격력

 

연평도 포격전 이후 지난 10년 동안 주목되는 것은, 조선인민군이 서해 5도 수역의 섬들과 황해남도 해안지대에 있는 군사기지들을 요새화하고, 전투병력과 군사장비를 증강배치해왔다는 사실이다. 2019년 11월 6일 남측 국방정보본부는 ‘북한의 서해도서 요새화작업실태’라는 제목의 자료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제출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2015년 이전부터 연평도 북쪽에 있는 계도, 대수압도, 소수압도, 용매도에 포진지를 구축했고, 백령도 동남쪽에 있는 마합도, 기린도, 창린도, 어화도, 비압도, 순위도에도 포진지를 구축했다고 한다. 또한 2015년에는 연평도 서북쪽에서 가장 가까운 무인도들인 장재도, 무도, 갈도에 122mm 방사포 4문, 해안포 10문, 병력 100여 명을 각각 배치했고, 2016년에는 연평도 동북쪽에서 가장 가까운 무인도인 아리도에 포진지를 구축했으며, 2017년 5월에는 강화도에서 가장 가까운 무인도인 함박도에 감시소와 레이더시설을 설치했다고 한다. 

 

2019년 11월 27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한강 하구에 있는, 남측이 관할하는 섬인 교동도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황해남도 연백지역에 여러 개의 대남감시초소를 증설함으로써 5년에 걸쳐 진행된 서해 5도 지역의 요새구축사업을 완료했다고 한다. <사진 5>

 

▲ <사진 4> 한국군은 2019년 12월부터 2020년 9월까지 기간에 미국산 고고도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 4대를 수입했다. 글로벌 호크는 2021년 하반기에 실전배치된다. 글로벌 호크의 비행고도는 18km이므로, 지상에서 육안으로 관측하기 힘들고,조선인민군 고사포의 사격권을 벗어나 비행한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전파교란부대가 위성항법신호와 유사한, 신호파형이 다양한 기만전파를 발신하면 글로벌 호크는 기만전파를 정상전파로 오인하고 수신하게 된다. 2011년 12월 4일 이란혁명수비군은 기만전파를 발신하여 미국의 스텔스무인정찰기 RQ-170을 공중에서 유인, 착륙시켜 나포했다.  

 

서해 5도 지역의 섬들과 황해남도 해안지대에 수많이 구축된 요새들에는 장거리포병대가 주둔하는데, 조선인민군 전투력은 장거리포병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조선인민군은 여러 군종의 전투력을 배합하는 합동타격능력을 키우고 있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밑에 2020년 2월 28일, 3월 2일, 3월 9일에 연이어 합동타격훈련을 진행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이 합동타격전을 수행하는 작전범위는 지상과 지하, 해상과 해저, 대기권과 외기권을 전부 포괄한다. 이런 사정을 보면, 조선인민군은 국지무력충돌이 몇 시간 만에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합동타격능력을 키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3년 3월 11일 서부전선 월래도방어대를 시찰하면서 “전선부대들을 비롯한 륙군, 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전략로케트군 장병들이 우리식의 전면전을 개시할 만단의 준비가 되여있다. 적들이 예민한 수역에서 우리를 또 다시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망동질을 해댄다면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전 전선에서 정의의 조국통일대진군을 개시할 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겠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5년 1월 26일 서부전선 기계화타격집단 장갑보병구분대들의 겨울철 도하공격연습을 지도하면서 “우리의 타격은 일단 시작되면 조국통일의 력사적 위업을 완수할 때까지, 이 땅에서 침략과 악의 근원이 완전히 청산될 때까지 중단 없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한미해군사령관이 한강 하구에서 백령도 서쪽 해상에 이르는 278km 구간에 제멋대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거대한 시한폭탄이다. 조선인민군은 서해 5도 수역에서 우발적 무력충돌이 일어나 거대한 시한폭탄이 폭발하는 그날이 곧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할 결정적 시기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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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난의 진짜 원인 찾기, 개혁에는 쉬운 길이 없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11/30 10:11
  • 수정일
    2020/11/30 10: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기고] 다주택자 세대 분리와 증여가 만들어낸 전세난

정부의 전세 대책에도 전세 가격이 꺾일 기미가 없다. KB 월간 주택가격 동향 기준으로 10월 전국 전세수급지수가 191.8로 2001년 8월 이후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11월 26일 한국감정원의 주간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지난 19일 정부의 전세 대책 발표 이후인 11월 넷째 주에도 서울아파트 전세 가격은 0.15% 상승하며 74주 연속 상승을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부동산 정책효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며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결국 지난 17일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정부의 정책을 성공이라 말하기 어렵고, 고통받는 국민들께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며 사과하고, 19일 전세 대책을 발표하며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도 "새로 전셋집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며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11.19 전세 대책에서 정부는 전세난 원인으로 저금리 추세와 갑작스러운 가구 분화로 인한 가구 수 증가를 꼽고 있다. 일리 있는 원인 분석이긴 하지만 왜 갑자기 8월 이후에 전세난이 심화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저금리 기조와 가구 분화가 8월 이후 갑작스레 일어난 것인가? 갑작스러운 가구 분화가 일어났다면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전세 시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진보와 보수가 주장하는 전세난 원인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전세난의 주요 근거는 저금리 추세와 매매가 상승 기대 하락이다. 저금리 추세는 전세를 받아 집주인이 얻을 수 있는 기회비용을 낮추기 때문에 전세주택 공급 물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받아 은행에 넣어서 얻는 1~2% 이자 수익보다 월세로 받는 수익이 더욱 크기에 저금리 상황이 지속되면 전세주택이 월세주택으로 전환된다. 실제 200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전세주택은 줄어들고 월세주택이 늘어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매매가 상승의 기대가 없으면 시세차익을 얻기 위해 주택을 여러 채 사둘 유인이 없기에 전세주택 공급이 줄어들 수 있다.


 

▲ 임차가구 중 전세 및 월세 비율(출처 : 국토교통부, 2019년 주거실태조사결과)

세입자 입장에서도 전세금 대출에 대한 이자 비용이 낮아지니 월세보다 전세주택을 선호하게 마련이고 이는 곧 전세 수요 증가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은 장기적으로 서서히 전세 공급 물량을 감소시키고 전세 수요를 늘리는 요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인들로 8월 이후 갑자기 전세 가격이 급등한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연결고리가 부족하다.

 

반면 보수진영은 지난 8월 도입한 임대차3법을 집중 공격하며 전세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계약 갱신 청구권, 임차료 상승 제한을 담은 임대차3법이 8월부터 적용되자 전세 공급 물량이 줄어들었다는 보수진영의 주장 역시 무언가 빠진 구석이 있다. 임대차3법이 전세 공급 물량을 줄인 것은 사실이다. 이사 갈 필요가 없는 대다수 세입자는 2년 더 머물러 살기로 결정하고 계약 갱신 청구권을 사용했기에 2년마다 나오던 전세 주택 물량 대다수가 2년 뒤로 밀리면서 전세 공급 물량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세입자가 2년 더 머무르기로 결정해 전세 공급 물량이 줄어들었다면 2년 더 머무르는 세입자만큼 전세주택을 찾는 전세 수요도 줄어든다. 장기적으로 임차료 상승 제한은 전·월세주택 공급자의 수익을 줄이기에 전·월세주택 공급이 줄어들 수 있지만 단기에는 공급과 수요 측면 모두에서 줄이기 때문에 임대차3법이 전세 공급을 줄여서 전세 가격이 급등했다는 보수진영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11.19 전세 대책을 발표하면서 정부가 내놓은 또 하나의 원인은 가구 분화로 인한 가구 수 증가이다. 가구 수가 늘어난 만큼 주택이 공급되지 않으면 주택 부족으로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맞지만 서울의 가구 수 증가는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에 기인한다. 실제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전체 가구 수 증가보다 1인 가구가 더 많이 증가했다. 3~4인 가구는 오히려 감소했지만 1인 가구의 압도적 증가가 서울시 가구 수를 증가시켰다.

 

▲ 서울시 1인 가구 대비 전체 가구 수 증가 비교(출처 : 통계청)

현재 전세난의 진원지는 2~4인이 살기 적당한 아파트인데 1인 가구 증가가 아파트 전세난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 아파트를 중심으로 전세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전세난의 원인을 찾는 바른 방법이다.


 

시장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기본에서 생각해야 한다. 결국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현재 전세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이유는 결국 전세 공급보다 수요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임대차3법은 단기적으로는 전세 수요와 공급을 동일하게 줄이는데 왜 공급이 수요보다 더 가파르게 감소했을까? 임대차3법 외에 전세 수요가 늘어나는 이유와 전세 공급이 줄어드는 주된 이유를 찾는 것이 합리적이다.


 

로또청약 대기 수요가 이끄는 전세 수요 증가


 

먼저 전세 수요가 늘어나는 이유를 찾아보자. 현재 서울과 서울 인근 도시들은 용산 정비창 및 태릉, 3기 신도시에 공급될 신규아파트 청약 대기 수요가 많다. 집값 잡기에 골몰한 정부가 매매 수요를 청약 대기 수요로 전환하기 위해 허용한 '로또청약' 제도 때문이다. 현재 분양제도는 '로또청약'이라고 부를 정도로 수분양자가 가져가는 시세차익이 크기에 청약경쟁률이 수백, 수천 대 일이 될 정도로 청약 대기 수요가 엄청나다. 문재인 정부는 다주택자에 대한 패널티를 매우 강화시켜 두었기에 신규아파트 청약 시장은 무주택자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로또청약은 다주택자에게 시세차익이 돌아가는 것은 막았지만 수많은 무주택자들을 전·월세 시장에 남아있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로또청약이 기대되는 지역에 무주택자 자격을 유지해야 청약 당첨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로또청약을 기대하는 많은 무주택자들이 해당 지역으로 이사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수도권 도시 중 GTX 노선이 경유하는 3기 신도시 대상 지역인 남양주, 부천, 광명, 고양시 덕양구 등이 전세 가격 상승률이 높은 상황이다.


 

전세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전세 가격이 싼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 어려운 수요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요가 자녀교육을 위해 해당 지역에 머무르는 학군 수요이다. 서울 주요 지역 및 성남 분당, 수원 영통, 용인 수지 등 전세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지역은 학군이 좋은 곳으로 알려진 지역들이다. 자녀교육으로 인해 좋은 학군에 남아있고자 하는 학군 수요는 전세 가격이 올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지역에 머무른다.


 

전세 공급량 감소 핵심 원인 : 다주택자 세대 분리 및 증여 

 

임대차 3법은 공급과 수요 모두 줄어들게 하지만 수요보다 더 가파르게 전세 공급 물량을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 있다. 다주택자의 세대 분리와 증여이다.


 

지난 7월까지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주요 화두는 집값 안정화였다. 집값을 불안하게 만드는 범인으로 다주택자를 지목하고 다주택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택 물량을 내놓게 하여 집값을 안정시키고자 다주택자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을 가했다. 지난 7월 다주택자 취득세·보유세·양도세 중과세 등 고강도의 다주택자 규제정책을 낸 이후 다주택자들의 주택 매입을 막아 서울과 수도권의 주요 지역 집값 상승을 막았다. 하지만 다주택자 규제 정책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았다.

 

정부는 지난 7월 10일 부동산대책을 끝으로 다주택자들이 숨을 수 있는 마지막 구멍을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집값은 오를 것으로 판단한 다주택자들은 보유주택을 매각하기보다는 자식들에게 증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실제 7, 8, 9월의 서울 아파트 증여 거래량은 상반기 평균 1400건에 비해 2배가 넘는 3000건에 달한다.

 

▲ 2020년 서울 아파트 증여 거래량 추이(단위 : 건 / 출처 : 한국감정원)

증여를 한다 해도 2021년 6월 전에만 증여하면 양도세, 보유세 중과는 피할 수 있어 올해 7, 8, 9월에 집중적으로 몰릴 이유는 없다. 올해까지는 관망을 하며 집값이 상승할지, 하락할지 추이를 보면서 내년에 증여를 할지, 매각을 할지 결정하는 것이 다주택자의 수익 극대화 전략에서는 유리하다. 하지만 7~9월에 증여가 급증한 이유는 임대차3법이 기폭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임차인이 임대차3법을 활용해 계약 갱신 청구를 하면 다주택자는 아파트를 매각하기도 쉽지 않고 매각하더라도 매수자가 입주하고 싶을 때 입주할 수 없기에 아파트를 시세보다 낮게 팔아야 할 수도 있다. 목 좋은 지역의 아파트는 앞으로도 가격이 계속 오를 것으로 생각하는 다주택자 입장에서 자녀를 세대 분리시켜 아파트를 증여하고 자녀가 들어가서 살도록 하는 것이 양도소득세도 내지 않는 등 향후 가족 전체의 부동산 수익을 극대화하는데 유리하다.


 

아파트를 증여받은 자녀 입장에서도 1주택자 양도세 장기 특별 공제를 받기 위해서는 2년을 실거주해야 하기에 일단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 필요가 있다. 아파트에서 1년이나 2년을 살다가 다시 전세나 월세로 아파트를 내놓으면 계약 갱신 청구와 임차료 상한 제한이 적용되지 않기에 전·월세 시세대로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수익 극대화 전략 차원에서는 일단 증여받은 아파트에 잠시라도 들어가는 것이 모든 상황상 유리하다.


 

공식 통계자료로는 증여받은 아파트에 세대 분리한 자녀가 들어가서 사는지 살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주택자 부모와 증여받은 자녀의 입장에서 부동산 수익 극대화를 추구한다면 일단 증여받은 아파트로 들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 증여받은 자녀가 살던 집은 다시 전·월세 물량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지난 7~9월에 이루어진 아파트 증여는 다주택자 부모가 아직 세대 분리를 하지 않은 자녀를 세대 분리시켜 넘겼거나 세대 분리를 했지만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자녀에게 증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들은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던지 1~2인 가구에 적합한 오피스텔 등에 머물렀을 것이다. 현재 전세난의 핵심 주택은 3~4인 가구 아파트이기에 다주택자의 자녀들이 증여받은 아파트로 입주했다면 아파트 전세 공급 물량이 줄어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증여로 인한 전세 물량 감소가 일어났다고 해도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 테지만 계약 갱신 청구권 사용으로 전세의 공급과 수요가 대폭 감소한 상황에서는 증여로 인한 전세 물량 감소가 전세 가격 상승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정말로 증여가 전세난의 원인이 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전체 전세 거래량 대비 증여 건수를 비교해보면 된다. 증여받은 아파트로 얼마나 들어갔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전체 전세 거래량 대비 증여 건수가 상당하다면 증여받은 아파트에 증여받은 자녀가 일부만 들어가 전세 공급 물량이 줄어들어도 전세 시장에 주는 충격이 상당할 수 있다.

 

전세난의 핵심지인 서울 아파트의 전세 거래량과 증여 건수를 비교해보았다.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전세 거래량이 증가하다가 8월부터 대폭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증여 거래량은 6월까지 2000건 이하에서 머물다가 7월부터 대폭 증가하여 전세 거래량 대비 증여 거래량의 비율이 9월에는 40% 수준에 이른다. 전세 거래량 대비 증여 거래량이 이 정도 비중이면 증여받은 아파트에 절반만 들어갔다고 해도 전세 물량이 대폭 감소하여 아파트 전세 가격을 급격히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


 

▲ 서울 아파트 전세 거래량과 증여 거래량 비교(단위 : 건 / 자료 : 서울부동산정보광장, 한국감정원)

임대차3법으로 인해 수요와 공급이 대폭 줄고 언론이 연일 전세난 기사를 쓰는 상황에서는 전세 수요자들은 심리가 극도로 위축되고, 공급자들은 가격을 올려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수월해지기에 수급 균형에 큰 문제가 없는 지방에서도 뒤이어 전세 가격이 상승하는 흐름이 만들어진다.


 

다주택자 규제와 임대차3법의 불행한 만남, 전세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3기 신도시 등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지역의 청약 대기 수요와 자녀 교육 등으로 해당 지역을 떠나기 어려운 고정된 학군 수요가 전세 수요를 증가시키는 한편 다주택자의 세대 분리 및 아파트 증여가 전세 공급 물량을 대폭 줄여 현재의 전세 가격 급등을 일으켰다.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임대차3법이 전세난의 핵심 요인이 아니다. 임대차3법은 다주택자 규제와 맞물려 기폭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다주택자 규제를 강하게 하여 집값을 안정시켜 집값 상승 기대를 꺾으면 갭투자 수요가 줄어들어 민간임대 물량이 줄어들고, 전·월세 시장에 머물러 있으려는 수요가 많아져 임대차 시장이 불안해질 것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고강도의 다주택자 규제정책인 7.10 대책 직후 곧바로 임대차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는 임대차3법을 도입했다. 그 덕분에 많은 임차인들은 전·월세 가격 상승 걱정 없이 2년을 더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정부가 간과한 것은 다주택자 규제로 증여가 늘어날 가능성을 가볍게 여긴 측면과 임차인 보호제도인 임대차3법이 증여를 가속화시키고 전세 공급 물량을 대폭 줄일 것을 예측하지 못한 측면이다. 이러한 부작용까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정부의 가장 큰 실책은 다주택자 규제를 하는 방식에 있었다.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원칙과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차원으로의 접근이 아니라 지역·가격·주택 규모 별 대상을 정해 핀셋 방식으로의 접근이 문제의 근원이다. 아울러 다주택자에게 집값 상승의 책임을 돌리고 1주택자를 정치적 아군으로 확보하기 위해 다주택자 투기꾼/1주택 실수요자 프레임으로 1주택을 권장하는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부동산정책 기조를 이어갔다.

 

증여가 많이 일어난 이유는 따지고 올라가 보면 다주택자를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몰면서 규제를 하는 한편 1주택자를 정치적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보유세 부담을 강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보유세 부담이 주택 가격의 1% 수준이면 증여보다는 매각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보유세 부담이 있으면 1인 가구가 3~4인 가구가 살기 적합한 아파트를 쉽게 증여받고 보유할 수 없다. 토지 보유세를 강화하면 사람들이 각자의 소득과 살림살이 규모에 맞추어 주택을 선택하게 한다. 주택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로 최적화시킨 배분 효과를 만들어낸다. 지대추구행위가 사라진 시장은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자원을 배분하는 시장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때문이다.


 

시장은 영리하고 영악하다. 정부가 보유세 강화와 같은 정공법을 쓰지 않고 다주택자와 1주택자를 갈라치기 해서 다주택자 규제, 1주택자 권장 방식으로 계속 가니까 다주택자 규제/1주택자 권장이라는 정책의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결국 증여까지 시도하며 임대차 시장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이들은 불법을 저지른 것이 아니기에 아직도 다주택자를 탓한다면 곤란하다. 다주택자들이 피할 수 있는 틈을 계속해서 열어둔 채 정책을 만든 정부의 책임이 크다.

 

전세난에서 얻는 뼈저린 교훈 : 쉬운 길은 없다!


 

다주택자 세대 분리와 증여가 최근 3개월간 전세 가격 급등의 원인이라면 다주택자들도 무한히 세대 분리와 증여를 할 수 없기에 전세 가격 상승세는 차츰 잦아들 것이다. 서울 아파트 증여 거래량도 7, 8, 9월에 급증했다가 10월부터 감소하고 있다. 부동산114의 서울 신규아파트 공급량 예측에 따르면 2021년과 2022년의 서울 신규아파트 공급량이 매우 줄어들어 전세난을 가중시킬 수 있지만, 11.19 전세 대책에서 발표했던 것처럼 2년간 11만4000가구의 전세주택을 적재적소에 공급할 수 있다면 신축아파트 공급량 축소를 상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임기 막바지로 가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더 이상 개혁적인 부동산정책을 펼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다음 정부는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시장의 대응이 만들어낸 결과를 곱씹으며 참고해야 한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의 가격을 정부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가 할 일은 시장에 개입하여 가격을 통제하려는 시도보다는 시장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엄격한 심판의 역할을 하며, 시장에서 낙오되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세우는 일이다.


 

현 정부는 부동산 시장의 근본 질서와 원칙을 바로 세우고 부동산 시장 선진화 방안을 제시하며 국민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집값을 안정시키는 정도를 목표로 삼고 다주택자와 1주택자를 갈라치기 하여 수월하게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크든 작든 이익을 누리는 1주택 소유자들의 정치적 저항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소수인 고가주택/다주택자만 핀셋으로 규제하면서 집값을 안정시키고 1주택자와 임차인들까지 정치적 아군으로 확보하려는 전략은 결국 1주택자뿐만 아니라 임차인들의 정치적 지지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개혁은 지난하고 힘든 싸움이다. 정도가 아니라 안전하고 편한 방법으로 가려 하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비싼 대가를 치른 정치적 교훈이다. 차기 대통령을 꿈꾸며 부동산 공화국 대한민국을 개혁하고 싶은 정치인들은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12922550100483#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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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재판부 사찰’의 본질은, 대검찰청 ‘정보조직’에 있다

윤석열도 몸담았던 검찰 ‘정보조직’의 역사...끊이지 않았던 사찰 논란

김동현 기자 abc@vop.co.kr
발행 2020-11-30 09:11:24
수정 2020-11-30 09:11:24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자료사진)
윤석열 검찰총장(자료사진)ⓒ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청구와 직무배제 사유 중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재판부 사찰 의혹’이 떠올랐습니다. ‘주요 특수·공안사건 재판부 분석’이라는 제목의 문건 내용이 공개됐습니다. 이 문건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작성자와 작성 지시자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검사는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실 검사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건이 수사정보정책관실에서 작성됐다는 말입니다.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을 폭로했던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6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해당 검사의 행위가 위법한지 여부는 ‘정보 수집을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여하’, ‘수집된 정보가 공개된 정보인지 여부’ 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당 검사의 직무범위를 넘어섰는지 여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해당 검사는 관련 사건 공판에 관여한 검사도 아니고 대검 공판송무부 소속 검사도 아닙니다. 해당 검사는 수사정보정책관실 소속입니다. 그의 직무는 ‘수사정보 수집, 관리 등’입니다.”

이탄희 의원이 쓴 글은 이 논란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건을 작성한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은 수사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곳이지 재판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재판부에 대한 정보수집이 ‘관행’이라는 주장도 있는데요. 이 관행이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의 관행이라면, 이 논란은 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법률대변인은 29일 브리핑을 통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윤석열 총장에게 묻겠습니다. 본인의 주장처럼 법령상 허용되고 공판유지를 위한 정당한 행위라면, 과거에도 이러한 정보수집을 해 왔습니까? 그리고 작년말 기준 판사 2,872명의 성향에 대한 자료도 공소유지라는 목적으로 앞으로 계속 취합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만약 이러한 질문에 ‘예’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본인의 행위가 위법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윤석열 총장이 ‘예’라고 대답해도 위법합니다. 그 이유는 김한규 대변인이 지적해줍니다.

“국가기관이 본인 동의 없이, 법률에 의해 정당하게 권한을 받지 않고,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여 업무에 활용하는 것이 사찰입니다. 미행, 도청 등의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면 사찰이 아니라는 것은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지휘하였던 사법농단 수사시 공소장에도, 판사의 성향과 활동을 탐문 조사하여 정보수집하는 행위를 ‘사찰’이라고 명시한 바 있습니다.”

대검찰청(자료사진)
대검찰청(자료사진)ⓒ김철수 기자

문건을 작성한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에서 재판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법률에 의해 정당하게 권한을 받지 않았는지’를 따져보겠습니다.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은 대통령령인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 중에 제3조 6항 ‘대검찰청 수사정보담당관의 설치와 그 분장사무’에 따라 설치됩니다. 이 규정에는 수사정보정책관실이 다루는 정보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법령에 규정된 정보의 범위는 ▲부정부패사건ㆍ경제질서저해사건과 관련된 정보와 자료 ▲대공ㆍ선거ㆍ노동ㆍ외사 등 공공수사사건과 관련된 정보와 자료 ▲신문ㆍ방송ㆍ간행물ㆍ정보통신 등에 공개된 각종 범죄 관련 정보와 자료 ▲그 밖에 중요 수사정보와 자료입니다.

규정된 정보의 범위에 ‘재판부 정보’는 없습니다. 이탄희 의원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판사 정보를 수집하라는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 업무 매뉴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상위법령 위반입니다.”

그러니까, 설령 공판담당 검사가 재판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해도 같은 정보를 대검찰청의 수사정보정책관실에서 수집하고 문건으로 만드는 것은 위법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 수사정보정책관실은 예전부터 많은 ‘사찰’ 논란 속에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온 검찰의 ‘정보조직’의 현재 이름입니다. 과거 정부에서 사찰 논란은 주로 공안기관의 정보조직에서 벌어져왔는데요, 검찰에도 정보조직은 존재했고 논란 역시 존재해 왔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찰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검찰의 정보조직

문준영 교수가 쓴 <법원과 검찰의 탄생>이라는 저서에 따르면 해방 이후 검찰청법이 제정되기 전인 ‘과도검찰청법’부터 대검찰청에 ‘정보과’를 두게 했습니다. 검찰직속 ‘수사기구’를 실현하기 위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합니다. 그리고 직속수사기구는 1949년 12월 검찰청법에 ‘대검 중앙수사국 설치규정’이 마련되면서 구체화됩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중앙수사국’은 명목상 존재했고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서 유명무실 했습니다.

1961년 4월 대검찰청 중앙수사국이 본격적으로 출범합니다. 이후 중앙수사국은 수사국으로 이름이 바뀌고 1973년 특별수사부로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검찰총장 하명, 정확하게는 대통령의 하명 사건들을 전담하는 검찰총장 직속기구 성격을 띠게 되면서 조직이 커지고 힘을 계속 키워 나갑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던 1982년에는 중앙수사부로 이름을 바꿉니다. 오랜세월 악명을 떨친 ‘대검 중수부’는 논란 끝에 박근혜 정부 시절에 들어서야 폐지됩니다.

1961년 중앙수사국이 본격화 될 때 4개의 과가 설치되는데요, 수사과, 사찰과, 특무과, 서무과였습니다. 눈에 띄는 과가 있습니다. 바로 ‘사찰과’입니다. 아예 부서명이 사찰입니다. 행정기관에서 국민 감시를 기본으로 했던 시절이었으니 놀랄 것도 아닙니다. 군사독재 시절은 중앙정보부, 안기부 등의 정보기관이 다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시절 검찰의 정보수집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들어선 노태우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 과정에서 검찰은 급성장 합니다. 안기부 등의 공안기관들의 영향력이 여전했지만 검찰은 굵직한 강력사건과 비리사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했습니다. 갈수록 여론이 집중되는 사건이 ‘공안사건’에서 ‘비리사건’으로 옮겨가는데, 이 중심에 ‘대검 중수부’가 있었습니다.

검찰 정보의 중심이 된 대검 중수부

대검 중수부는 1990년대 이후 활약상이 두드러지면서 ‘정보가 모이는 곳’이 됩니다. 그리고 1995년 3월 대검 중수부 산하에 범죄정보과가 설치됩니다. 본격적인 범죄정보 수집 기구가 만들어진 겁니다. 4년 후인 1999년 1월에는 대검 중수부의 범죄정보과를 확대, 독립해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실이 설치됩니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검찰의 모든 정보는 지난 1월10일 대검 차장 직속기구로 신설된 이 부서가 쥐고 있다. 범죄정보기획관 아래 부정부패-경제범죄사범 등 중요 범죄정보를 다루는 제1담당관, 공안사건 정보를 수집하는 제2담당관을 두고 있다. 대검 중앙수사부 산하에 있던 범죄정보과를 확대개편한 것이다. 결국 범죄정보기획관은 대검 중수부와 공안부가 나눠 맡았던 정보 수집 기능을 한 손에 쥐면서 새 요직으로 떠올랐다.”

범죄정보기획관실은 직제상으로는 대검 차장 직속이지만, ‘검찰 내 국정원’이라 불리며 사실상 검찰총장에게 직접보고하는 ‘총장 직속기구’ 성격으로 존재했습니다. 때문에 총장 하명사건을 수사하는 대검 중수부와 함께 총장 권한을 지탱하는 양 축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은 2000년대 검찰의 엘리트 코스 중 하나로 꼽히게 됩니다. 2004년에는 ‘기업의 저승사자’라고 불리며 정보력이 뛰어나도 평가되던 이인규 검사가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으로 발령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인규 검사는 검찰 요직을 거치며 중수부장까지 맡게 됩니다. 이 때,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를 지휘했죠. 윤석열 검찰총장도 이 코스를 밟았는데요, 2009년 대검 범죄정보2담당관으로 있었습니다.

중수부에서 독립한 정보기구 대검 범정

‘범정’은 처음 설치된 1999년부터 계속 각종 사찰 논란을 낳았습니다. 범죄정보 뿐 아니라 정치인, 기업인, 고위관료 등에 대한 개인정보와 첩보까지 수집하면서 ‘정치사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2005년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공개적으로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실은 새로운 정치사찰기관으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재천 의원은 “수사기관이 정보기관화 되어 범죄정보가 아닌 정치(언론, 기업, 노조, 시민단체 등)정보를 수집을 하는 것은 인권침해의 온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국회 법사위원장이었던 박영선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이 검찰이 법사위 소속 의원들의 출입국 기록을 조회한 정황을 제기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박영선 의원은 당시 “국정원에서도 그런 일을 대놓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2017년에는 대정부 질문에서 법무부 장관에게 “범죄정보기획관실에서 민주당 관련 비리첩보를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범정 폐지론이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범정은 검찰개혁의 중요한 과제로 꼽혀왔습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중앙수사부 폐지에 이어 범죄정보기획관실을 축소하겠다고 발표합니다. 하지만 조직이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문재인 정부들어서는 시급히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꼽히게 됩니다. 문재인 정부 첫 검찰총장이었던 문무일 총장은 취임과 함께 대검 범정에서 일하던 40여 명의 직무를 모두 중단하고 원소속 검찰청으로 복귀하라고 지시합니다. 범정을 개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후 조직을 유지하되 인원을 축소합니다.

2019년 문무일 검찰총장은 범죄정보기획관실을 수사정보정책관실로 개편합니다. 당시 문무일 총장은 “정보수집을 하는 건 좋은데 일반정보는 수집하지 않고, 수사에 국한하여 수사정보만 다루고 수집하자는 취지에서 이름을 변경했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일반정보는 ‘동향조사’ 등의 사찰을 뜻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검찰의 ‘정보수집’ 기능은 개혁의 대상으로 남았습니다. 2019년 10월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대검찰청 등의 정보수집 기능을 즉시 폐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구체적으로 대검 수사정보정책관과 수사정보1·2담당관을 폐지하고,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 산하 수사정보과, 수사지원과와 광주·대구지검 수사과의 정보수집 기능을 즉시 폐지하라고 권고합니다.

당시 폐지 권고의 중요한 이유는 ‘선택적 정보수집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범죄정보 수집’이라고 하면서 실질에서는 범죄수사와 관계없거나 사찰에 해당하는 정보수집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이탄희 의원은 “당시 대검은 ‘범죄와 무관한 정보의 수집은 하지 않고 있다’는 취지로 해명한 바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법무검찰개혁위의 권고가 나온 1년여 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에서 ‘범죄정보’가 아닌 문건이 작성된 겁니다. 이번 문건은 그 당시 대검의 해명이 거짓이거나, 법무검찰개혁위의 권고가 옳다는 것을 방증해 줍니다.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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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특별 인터뷰①] “윤석열, ‘판사 사찰문건’ 보자마자 찢어버렸어야 했다”

김백겸 기자 kbg@vop.co.kr
발행 2020-11-28 12:31:56
수정 2020-11-28 14: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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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법학자로 시민사회활동을 활발히 해온 곽노현 전 서울교육감이 지난 19일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자신을 대상으로 한 사찰 정보문건 30건을 받았다.

곽 전 교육감은 '민중의소리'와 직접 만나 사찰 피해 당사자이자 오랜 기간 정보기관의 민주적 통제에 관해 연구했던 법학자로서 이번 사찰정보 공개에 대한 평가부터 최근 사찰 논란이 불거진 검찰의 문제점까지 긴 이야기를 나눴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곽노현 전 교육감의.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11.26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곽노현 전 교육감의.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11.26ⓒ김철수 기자
 

"감개무량하고 짜릿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의 '심리전' 대상이었던 곽노현 전 서울교육감은 자신을 불법사찰했던 국정원 문건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데 대해 이같이 심경을 밝혔다.

26일 삼청동에 위치한 개인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만난 곽 전 교육감은 "사찰당한 사람이 그 사찰 문건을 보게 되리라고 상상하기나 했겠느냐"면서 "민주화가 이만큼 발전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사찰자료를 본 소감에 대해서는 "내용은 아연실색할 정도로 기가 막혔다"면서 "무책임한 '카더라' 내용으로 첩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을 기록한 것을 보니 서글펐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어 "한편으로는 이런 문건이 수십년이 지나서 본인 외에 공개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면서 "이미 사찰 피해자가 사망했을 수도 있는데 해명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야사를 구성하는 등 악용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곽 전 교육감과 함께 사찰정보 공개 청구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내 파일 내놔라' 시민행동은 고 문익환 목사, 장준하 선생, 이소선 여사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찰 대상자에 대한 자료공개 청구도 유족의 동의를 얻어 추진하고 있다.

"국정원에 대한 사법적 통제가 비로소 시작됐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곽노현 전 교육감의.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11.26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곽노현 전 교육감의.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11.26ⓒ김철수 기자

지난 2017년 9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진보 인사에 대한 '심리전'을 펼친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 심리전의 대상에는 현재 국정원장인 박지원 전 의원을 비롯해 초기 진보 교육감으로 당선됐던 곽 전 교육감도 포함돼 있었다. 국정원의 불법사찰과 정치공작이 심증에서 확증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지난 보수정권에서 탄압받은 각계 인사와 시민사회단체들이 국정원을 상대로 사찰 자료를 당사자에게 공개하고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내 파일 내놔라' 캠페인이 시작됐다.

국정원의 자료 공개 거부에 곽 전 교육감,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 등이 대표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16일 국정원에 정보공개를 명령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내파일 내놔라' 시민행동 캠페인이 시작된 지 3년만, 곽 전 교육감이 불법사찰 피해를 받은 지 9년여만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를 법원이 심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정보공개법'(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은 정보공개의 범위를 규정한 4조에서 '보안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에서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의 분석을 목적으로 수집하거나 작성한 정보'에 대해서는 예외로 두고 있다. 국정원이 정보공개를 거부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에 대해 법원은 '국가안전보장 목적'에 의한 정보수집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부의 소관이라고 판단했다. 그동안 '안보'라는 이유만 대면 사법마저도 '프리패스'였던 국정원의 정보수집 활동이 사법부의 판단 앞에 놓인 것이다.

또다른 쟁점은 당시 공직에 있던 곽 전 교육감에 대한 사찰이 공직자 신원조회권을 가진 국정원의 적법한 정보수집 활동이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법원은 1, 2, 3심 모두 적법한 정보수집 활동이 아니라고 곽 전 교육감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판결에 대해 곽 전 교육감은 "시민들이 '내 파일 내놔라' 운동으로 정보기관의 정보수집 업무를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법원에 제공했고, 법원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사법부가 이제부터 국정원 정보기관의 정보업무 수행의 적법성을 심사해서 통제해야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국정원은 지난 25일 사찰정보 공개 청구에 대응하는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적극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정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전향적인 태도다.

이에 대해 곽 전 교육감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데 대해 국정원도 더이상 달리 행동할 수 없을 것"이라며 "국정원의 대응은 미흡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신속하고 전향적인 건 맞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전향적 태도에는 국정원 개혁의 성과라고 봤다. 그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서훈 전 국정원장이 임명되고, 일성으로 정치사찰부서, 국민감시부서를 해체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해당 인력을 재배치하고, 정보요원의 기관 출입을 금지했다"면서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정원과 차이나는 검찰의 개혁의지...'재판부 사찰'로 드러나"

곽 전 교육감 등 사찰 피해 당사자가 사찰 자료를 직접 받아보게 되고, 국정원도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사찰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과 함께 개혁의 대상이 됐던 검찰이 판사들을 사찰했다는 것이 최근 밝혀진 것이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곽노현 전 교육감의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11.26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곽노현 전 교육감의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11.26ⓒ김철수 기자

이에 대해 곽 전 교육감은 국정원과 검찰의 개혁의 차이를 차이를 비교하면서 "국정원이 검찰과 달리 개혁 수준은 좀 더 나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앞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 24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집행 정지와 징계 청구를 발표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감찰 결과 '재판부 사찰'이 있었다고 밝혔다.

법무부 감찰 결과 지난 2월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현 수사정보담당관실)이 조국 전 장관 가족 의혹 사건 등 주요 사건 재판부 판사들을 상대로 '우리법연구회' 가입 여부, '물의 야기 법관' 여부 등이 기록된 문건을 작성해 윤 총장에게 보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곽 전 교육감은 '재판부 사찰'에 대해 "'우리법연구회'라는 특정단체에 소속했는지 여부를 조사했다는 부분이 가장 문제"라며 "'우리법연구회'라는 판사 단체를 적대시하고 위험하게 생각하는 심리적 바탕이 있는 거다. 일종의 낙인 찍기"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을 윤석열 검찰총장은 알고 있었을텐데 그것을 보고받은 순간에 즉시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찢어버렸어야 했다"면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했던 판사 사찰을 여전히 하고 있냐고 호통을 쳤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 말 없이 3년 반이나 지냈다는 건 너무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곽 전 교육감은 '재판부 사찰'이 행해진 데에는 윤 총장을 비롯한 기존 검찰 조직이 가진 잘못된 사법 철학이 배경에 깔린 것이라고 봤다.

그는 "사법부의 판단을 그 판사의 정치 성향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정치성향이 법리를 압도한다는 철학을 가진 것"이라며 "스스로 사법의 정치화를 용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치와 권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권력과 정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법을 보고 있다"며 "모든 판결을 정치적 이념으로 채색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곽 전 교육감은 '재판부 사찰'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이 수집한 데 대해서도 "대검이 공판부 검사로부터 자기들이 겪은 판사들의 정보를 일괄 수집한 거 아닌가"라며 "판사의 성향이나 취미가 어떻게 '수사정보'가 되느냐. 판사성향정보실이나 재판예단정보실이 됐다"고 꼬집었다.

그는 "만약에 판사들의 정보를 악용하게 되면 법관의 독립에 심대한 침해가 되는 것"이라며 "'이 판사 뒷조사 좀 해봐' 이렇게 된다면 아주 명백한 검찰에 의한 법관독립 침해가 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거꾸로 법원행정처가 검사 정보 수집했다면 검사들이 가만 있었겠나"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곽노현 전 교육감의.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11.26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곽노현 전 교육감의.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11.26ⓒ김철수 기자

'재판부 사찰'을 두고 검찰 내부에서는 '공개된 정보를 수집한 내용으로 관행적 업무'라는 이유로 사찰이 아니라는 반발이 나오기도 한다. 윤 총장 스스로도 "사찰이 맞는지 국민들 판단을 받아보겠다"며 문건 전문을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이에 대해 곽 전 교육감은 "인권감수성이 둔감하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공개된 정보라고 해도 민감정보인 '우리법연구회' 소속 여부를 정보 수집 항목에 하나로 설정한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면서 "이렇게 이야기해도 모자랄 판에 공소유지를 위한 통상적인 일이었다고 하면 얼마나 인권감수성이 없다는 건가"라고 말했다.

곽 전 교육감은 또 '판사를 위협할 목적도 없고, 위협할 위치도 아니다'라는 반발에 대해서도 "거꾸로 법원행정처가 재판에서 겪은 검사들의 동향을 보고하게 하고, 정보를 수집했다고 한다면 검사들은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반박했다. 정보를 수집해서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대상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곽 전 교육감은 검찰이 스스로 개혁 의지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지원 국정원장 스스로도 '심리전' 피해자로서 국정원 개혁법을 수용하겠다고 밝힌 반면 윤 총장은 그런 적극적인 입장이 없었다"면서 "사실상 마지못해 쫓아간 것이 '재판부 사찰'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스스로 목을 칠 각오가 있어야 한다"면서 "정의는 실체적 결과 뿐아니라 실현되는 외양까지 갖춰야 공신력이 쌓이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공정성의 외양을 해치는 윤 총장의 행태가 결국 직무정지의 사유가 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백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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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의 깃발은 더욱 세차게 나부끼게 될 것이다”

[범민련 30주년 기념 인터뷰]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 기자명 이기영 통신원 
  •  
  •  입력 2020.11.2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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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0
 
권낙기 대표와 인터뷰는 지난 11월 9일 서울 중구 충무로 근처 중식당에서 진행됐다. 권 대표는 인터뷰 내내 열정적으로 평소 생각을 이야기했다.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권낙기 대표와 인터뷰는 지난 11월 9일 서울 중구 충무로 근처 중식당에서 진행됐다. 권 대표는 인터뷰 내내 열정적으로 평소 생각을 이야기했다.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전인미답의 혈로(血路)를 걸어온 범민련”

분단 이후 최초로 결성된 남북해외 3자연대 조직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이 결성 30돌을 맞이하였다. 범민련은 남북해외 동포들의 단일한 민족대단결 조직이며 하나의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 활동하는 유일한 거족적인 통일운동 연합체다. 지난 30년간 범민련이 걸어온 노정은 오로지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지키고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참다운 애국애족의 길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결코 누구나 쉽게 결심하고 걸을 수 있는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통일애국의 투철한 신념과 의지가 없이는 감히 선택할 수도 선뜻 내디딜 수도 없는 전인미답의 혈로(血路)였다. 그동안 범민련 남측본부 성원들은 온갖 고초와 정치적 박해를 당하면서도 변함없이 애국애족의 한 길을 걸어왔으며 오로지 민족의 자주와 대단합,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지난 30여년간 엄혹한 공안탄압의 정세 속에서도 언제나 범민련을 지키고 범민련과 함께 투쟁해온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통일광장은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의 모임이다.

“범민련 운동은 정당하다”

권낙기 대표는 “범민련 남측본부 성원들은 온갖 정치적 박해와 가혹한 탄압이 뒤따르고 가슴 아픈 희생도 각오해야 하는 간고하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면서 “범민련 선배들은 이 길에서 조금도 동요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자주와 민주의 제단에 한 몸을 바쳐왔다”고 범민련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권 대표는 “최근 십수년간 통일운동 과정에서 투옥된 사람이 범민련 간부들 말고 누가 더 있냐”면서 “범민련 운동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권 대표는 지금까지도 일부 통일운동단체와 활동가들이 범민련에 대해 ‘원칙이 밥먹여주냐’, ‘합법적으로 통일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범민련 활동에 문제가 있는거 아니냐’, ‘범민련도 이제 감옥 안 가고 운동할 수 있는 길을 찾아라’, ‘범민련이 통일운동 대중화를 가로막고 있다’, ‘6.15공동위가 있는데 범민련이 왜 있어야 돼냐’, ‘범민련이 통일운동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등등의 온갖 비난과 문제제기에 일침을 가하면서도 그럴수록 더욱 더 범민련이 분발하고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한편 권 대표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의 혁명의 신심은 경험 속에서 만들어졌다”면서 어린 시절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 “이건 반드시 해결하고 말겠다는, 바꾸고야 말겠다는 ‘한’에서부터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특히, ‘어느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는가’라고 하는 점에서 ‘시대적 소명’, ‘소명의식’은 대단히 중요하고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조직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범민련 30주년의 의미는 단지 30년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범민련의 결성은 남북해외 3자연대 조직 결성을 절실히 요구하는 당시 시대적 배경과 그 시대를 만드는 인간의 반영이라는 점을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인터뷰는 ‘범민련 결성 30주년’을 맞아 이뤄졌다. 권낙기 대표와의 인터뷰는 지난 11월 9일 서울 중구 충무로 근처 중식당에서 진행됐다. 권 대표는 지팡이를 짚는 불편한 몸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 어디든지 한걸음에 달려가서 열정적으로 말하는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중 범민련 30주년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해서 재구성했다.

“혁명적 낙관성”

권낙기 대표는 인터뷰 도중에도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권 대표는 운동진영 안에서도 가장 발이 넓고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권낙기 대표는 인터뷰 도중에도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권 대표는 운동진영 안에서도 가장 발이 넓고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 통일뉴스 통신원 : 먼저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권낙기 대표 : 내 소개랄 것은 특별한 건 없지만 조금 이야기하면, 나는 1946년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해방’이 된 그 이듬해였다. 부득이하게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출신성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좀 독특하다 보니까. 누가 운동을 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면 나는 그 중에서도 집안환경을 제일 먼저 꼽는다.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께서 감옥 가시는 걸 보고, 백부님이 사형당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교도 가기 전에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구타하고 끌고 가는 모습을 직접 봤다. 그때는 내용도 알 겨를이 없었지만 그런 과정들이 내가 성장하면서 지금의 권낙기가 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그런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집안 사정이라든지 원래 내 기질도 있고, 특수성, 성격 등등 대신 좀 학벌은 없다.(웃음)

다른 친구들 가방 메고 학교 다닐 때 난 중학교 2학년 때 가정형편 때문에 중퇴를 했다. 신문팔이 구두닦이부터 시작해서 인쇄공장, 국수공장 그리고 4부두, 3부두, 2부두 막노동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하지만 그때 일이 다른 한편으로는 먼 훗날 사고의 지평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경험들이었다.

그러던 중에 감옥에서 출소하신 숙부님 밑에서 첫 심부름을 하면서 요즘 말로 하면 ‘비합법활동’,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숙부님이 1966년도에 평양을 다녀오시고, 그리고 관련된 일이 통혁당이었다.

나는 72년도 통혁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 감옥살이를 했다. 1심에서 검사 구형 15년을 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 난리치고 하니까 무기를 선고받았다. 고법에서 10년으로 감형되고,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사형에서 무기, 어머니는 5년에서 3년 6월, 동생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리고 평생 잊을 수가 없는 건 당시 비록 전셋집이었지만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나이 어린 두 동생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참담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놈들의 만행을 70이 넘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평생 한으로 남아있다.

이론 습득 과정을 통해서 갖게 되는 결의도 중요하지만 어떤 생활과 경험 속에서 얻게 되는 어금니 꽉 깨물 수밖에 없는 그런 ‘한’이라고 할까.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한’, 이건 반드시 해결하고 말겠다는 그런 결심이나 각오 같은 것이 이 때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출소해 나와서 민가협 장기수가족협의회 회장, 그리고 2000년 6.15공동선언이 나오고 통일광장을 만들었다. 통일광장 만들었을 때 내가 ‘비합에서 합법으로 나오는데 무려 35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스갯소리 겸 우리 역사의 속도를 비유해서 한 말이다. 그만큼 우리 운동이 쉽게,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마디 덧붙이면 조국통일과 혁명을 말하고 실천하는 우리 범민련 일꾼들은 반드시 머릿속에 기억해둬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혁명적 낙관성’이다. 혁명적 낙관성이란 혁명의 속도도 때로는 늦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지 그저 입버릇처럼 하는 ‘낙천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다.

“역사의 필연으로 탄생한 남북해외 3자연대 조직 범민련”

2018년 8월 14일, 1차 조국통일촉진대회에서 격려사를 하는 권낙기 대표.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2018년 8월 14일, 1차 조국통일촉진대회에서 격려사를 하는 권낙기 대표.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3자연대 조직 범민련 결성의 의미는?

■ 사실 오늘 인터뷰가 범민련 30돌을 축하하고 인사하는 자린데, 지금까지 내 이야기만 했다.(웃음) 개인적으로 칭찬과 배려에 인색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개인한테는 칭찬이 인색할지 모르지만 조직에 대해서는 인색하고 싶지 않다.

3자연대 조직 범민련 결성 30돌을 맞이해서 우리가 ‘축하한다’ 내지는 ‘지지찬성한다’, ‘지원한다’라고 하는 개인의 각오를 말하기 앞서, 먼저 30돌 이전부터 범민련의 역사를 역사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건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말하기 이전에 우리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먼저 알아야 되고, 범민련 30돌을 30년이라는 햇수에 현혹되지 말고 언제 어떻게 무엇 때문에 3자연대 조직이 만들어졌는지 각자 깊이있게 생각해보면 범민련 조직에 대한 뜻이 더 깊어지리라고 본다.

다 알다시피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그 불행의 시대 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우린 확인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 또는 무장투쟁, 이러저러한 개인과 집단, 모든 걸 헌신 희생 탈탈 털어가면서도 조국과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를 내던졌던 우리 역사가 있다.

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도 바로 탈만 바꿨지 미제국주의라는 새로운 굴레를 덮어쓰고 지금 70년 가까이를 살아오고 있고, 싸우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단체들이 양심을 갖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60년대 통혁당도 비합법 조직이지만 만들어졌고, 인혁당 그리고 남민전, 전략당 등 수없이 많이 만들어졌다. 우리 민중들은 기쁨도 가졌고 또 때로는 탄압에 무릎을 굽혔고, 굽혔던 무릎을 다시 펴고 흟어졌던 사람들을 모으고 다시 구두끈을 매면서 그렇게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군사독재 시절,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으로 세상을 옥죄어 오던 그 때 통일은 말도 못 꺼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하로 비합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 때, 30년 전에 범민련이라는 3자연대 조직이 탄생했다. 이것은 바로 시대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시대를 만드는 인간의 반영이다.

왜 3자연대를 만들었을까? 남쪽에 허다한 통일운동 단체들이 있었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바로 멀리 앞을 내다보면서 2000년 6.15공동선언이 나오기 10년 전에 준비되고 결성되면서 범민련이 만들어졌다. 일대 사변이었다. 그리고 10년 후에 우리 민족의, 우리 역사의 서광이라 할 수 있는 6.15공동선언이 나왔다.

나는 30년 범민련 역사 속에서 또 하나 시대의 역할과 역사의 반영으로 만들어졌던 범민련을 생각하면서 기쁨을 갖고 확인을 받을 수 있고 승리를 예감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범민련은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아왔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온갖 단체, 온갖 활동가, 온갖 양심을 갖고 참된 삶을 살겠다고 나선 청년학생, 노동자, 농민, 민중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범민련을 지켜왔고 키워왔다. 오히려 탄압이 범민련을 키워온 측면도 있다. 범민련은 강인한 의지로 화를 복으로 만들어왔다.

“범민련의 깃발은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더욱 세차게 나부끼게 될 것이다”

2019년 11월,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범민련 결성 29돌 기념대회에서 권낙기 대표는 대회 초청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왼쪽부터 권오헌 명예회장,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2019년 11월,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범민련 결성 29돌 기념대회에서 권낙기 대표는 대회 초청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왼쪽부터 권오헌 명예회장,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 범민련 30년을 돌아보면?

■ 범민련은 따뜻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30년을 살아온 것이 아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으면서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지켜왔던 우리 민족의 강인한 의지, 그 결의가 바로 역사에 대한 희망이라고 나는 본다.

그동안 철창 속에서 어금니를 깨물고 결의를 다졌던 우리 선배들, 선열들, 열사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범민련 활동가 중에 감옥에서 투쟁해 보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 되나? 이것이 바로 범민련이다. 불굴의 신념과 통일애국의 의지로 범민련을 지켜왔다.

지난 10월 2일,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故 박정숙 선생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낙기 대표.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지난 10월 2일,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故 박정숙 선생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낙기 대표. [사진제공 - 범민련 남측본부]

범민련 30돌을 맞이해서 꼭 인사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의 내가 어디에 있는가?’ 범민련 조직에 있다. 범민련 조직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왔고, 어떤 역사를 가져왔는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범민련 성원들에게 진정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의 눈물이 내일의 웃음이 되고, 오늘의 고통을, 슬픔을, 비참함을, 화를 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범민련이 갖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범민련 동지들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지지와 성원, 경의를 표한다.

30년 범민련 역사에서 거의 한 10년은 깃대를 꽂는데 다 바쳤다. 내외적으로 법적으로 심지어 같이했던 사람들 한테서도 눈흘김, 비아냥거림, 무시를 당하면서도 범민련 깃발을 지켰다.

615공동선언이 나왔다. 그 좋은 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깃발을 만들었다. 이제 4.27 공동선언이 나왔다.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많겠지만 이제부터는 선배들이 꽂아 놓은 깃발과 또 민중들이 만들어 놓았던 깃발은 이제 우리들이 펄럭이게 하자. 우리 모두가 범민련 구성원이다. 범민련이 이제 산들바람이 되고 더 나아가서 광풍이 불어오는 통일의 큰 바람이 되어 주면 좋겠다.

“범민련 사랑합니다”

제20회 통일애국열사 추모제에서 여는 말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제20회 통일애국열사 추모제에서 여는 말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왼쪽부터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임방규 통일광장 전 대표, 노수희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자료사진 - 범민련 남측본부]
왼쪽부터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임방규 통일광장 전 대표, 노수희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자료사진 - 범민련 남측본부]

□ 범민련 성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 여러분들에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기쁘고 감사하다. 사탕발림 소리, 겉치레 인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중압감도 있다.

다만 솔직히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이 칭찬하는 것보다 범민련 성원들 스스로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다. 범민련 활동이 1년이 되든 10년이 되든 30년이 되든 관계없이 범민련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

30년, 긴 세월이었다. 역사는 점 점으로 이어지고 선이 되듯이 30년 동안 우리 선배 열사들이 얼마만큼 탄압과 고통, 헌신과 희생 속에서 우리들 곁을 떠났나? 또 우리 선배들은 그 사랑하는 후배들이 감옥에 있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시 생각해본다. 이제 30년이 아니라 300년까지도 만들어내는 역사의 주인으로서 주체로서 우리 한번 힘껏 단결해서 나아가보자.

본래 사람이 둘이 있으면 그림자도 둘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업으면 그림자는 하나다. 우리 조국 땅도 하나고 우리 민족도 하나인데도 지금 우린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하나로 만들자.

다시 한 번 여러분의 투쟁에, 동지애에, 조직애에, 모든 사랑에 성원을 보내고 싶다.

“범민련 사랑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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