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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세상 꿈꾸는 하상윤 “세상과 더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등록 :2019-02-05 08:57수정 :2019-02-05 10:42

 

 

<한겨레> 보도 뒤 다시 만난 탈시설 장애인 하상윤
3개의 액자 속에 신문기사 담아 집에 보관
“‘자립, 나를 결정할 권리’라는 제목이 좋았어요
자기결정권, 지금까지 그걸 말하고 싶었거든요” 
‘장애인 향한 시선’ 겁나 댓글 안봤지만
뒤늦게 확인 뒤 미소 “더 많은 사람들 알고 싶어”
하상윤이 자신의 기사가 담긴 액자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상윤이 자신의 기사가 담긴 액자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얼굴도 모자이크 했으면 좋겠고, 이름도 가명으로 하고 싶어요” 하상윤은 겁을 냈었다. <한겨레>가 장애인자립리포트를 준비하며 ‘48시간 동행취재’를 제안했을 때, 그는 모자이크와 가명을 요구했다. “아버지가 보고 찾아오면 어쩌죠” “혹시라도 활동지원시간이 깎일 수도 있어요” 현실적인 걱정들이었다. 하상윤을 시설에 보내고 그가 시설에서 나온 사실을 알고 불같이 화를 냈던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무능력’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시간. 하상윤은 자신이 임대아파트에서 웃으며 살고 있는 모습이 나가면 현재의 삶이 뒤틀릴 수 있다 우려했다. 하지만 용기를 냈다.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었어요. 시설에서 나와서 살 수 있다는 걸”

 

장애인 자립에 대한 지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그는 이불 하나와 수납장 하나만 들고 시설에서 나왔다. 부양의무제 때문에 기초수급자도 될 수 없었다. 부양의무가 있는 아버지는 “시설에서 나오면 단 한푼도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당장 거주할 곳이 없어 서울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먹고 잤다. 하지만 지금은 임대아파트도 얻고, 사랑도 하고 꿈도 키우며 산다.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은, 모자이크하고 가명이면 기사에 못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까. 사실 신문에 나오고 싶은 욕심도 있었어요” 하상윤은 웃었다.

 

<한겨레>를 통해 하상윤의 이야기가 소개된 지 5일 뒤인 1월31일 성북구 길음동 하상윤의 집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관련기사: 27년 시설 생활을 끝냈을 때 저, 하상윤을 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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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에 담긴 기사…“불쌍한 장애인 아닌 나의 일상이 나와서 좋았어요”

 

47일 만에 다시 만난 하상윤의 집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하나 있었다. 집에 액자 3개가 생겼다. 액자에는 하상윤의 이야기가 소개된 <한겨레> 신문이 각 면 별로 담겨 있었다. 1면에서 자신의 사진이 나온 부분만 오려 액자 중앙에 담았다. “아직 벽에 걸지는 못했어요. 떨어질까봐요” 하상윤은 액자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는 취재 이후 거의 매일 연락을 해왔다. 신문을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도 물었다. “신문 나오잖아요? 신문크기를 알고 싶어요. 액자에 사서 끼우려고 하는데, 그럼 액자 크기를 정해야 하니까” 하상윤은 웃었다. “축하 메시지도 많이 받았어요. 기사 잘 봤다고요”

 

사실 그가 언론에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6월 비리 장애인 시설인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벗어나 자립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던 ‘마로니에 8인’ 시절 그의 농성과정은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상윤은 대체로 천막에서 농성을 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시청 앞에서 서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투쟁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불쌍한 장애인도, 투쟁하는 장애인도 아닌 그냥 하상윤의 모습 말이다. “신문 지면에 ‘자립, 나를 결정할 권리’라는 제목이 좋았어요. 권리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거잖아요. 누군가의 동정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것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자신이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좋았다고 했다. “자기결정권, 그걸 말하고 싶었으니까요”

 

하상윤이 자신의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하상윤이 자신의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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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달린 응원 댓글…“새로운 세상이 열렸어요”

 

상윤은 처음엔 댓글을 읽지 못했다고 했다. 두려웠다.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있잖아요. 그게 무서웠어요” 그가 과거 외출 다닐 때 겪었던 일들을 하나둘 꺼내놨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노인은 상윤을 향해 “장애인이 외출을 뭣하러 나왔냐”고 타박하며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꾸짖었다.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며 지하철을 멈춰세우거나 명절에 고속버스·시외버스를 막아설 때면 사람들은 “왜 교통을 방해하느냐”고 쏘아붙였다고 했다. 사실 그는 자립 뒤에도 비장애인들을 만나본 일이 거의 없다. “시설에서만 27년 살았고, 나와서 10년은 자립을 위해 장애인운동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래서 비장애인들을 만나본 일이 별로 없었죠” 그와 관계를 맺었던 비장애인은 시설 직원, 장애인 운동활동가, 센터 직원, 활동지원사가 대부분이었다.

 

‘댓글에 응원의 말들이 많다’고 알려줬다. 상윤은 조심스레 휴대전화를 켰다. 댓글을 하나둘 읽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번졌다. 화면이 내려갈수록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새로워요. 댓글을 보니까, 비장애인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요. 더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서로를 알아가는 세상을 꿈꿨다. “서로서로 알아가고 싶어요. 장애인의 삶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고 싶어요”

 

 

하상윤이 새로산 포토샵·일러스트레이터 책을 꺼내들고 웃고 있다.
하상윤이 새로산 포토샵·일러스트레이터 책을 꺼내들고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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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더 넓은 세상으로

 

상윤은 이번 설에 특별한 일정 없이 집에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다. 최근 체력이 많이 떨어져 병원에도 자주 간다고 했다. 만날 가족이 없는 그에게 설은 어쩌면 다른 날과 비슷한 하루하루일 뿐일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보고싶은 것도 아니니까요. 어머니는 보고 싶지만,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그는 휠체어를 태울만한 차량을 구할 수 있게 되면, 꼭 어머니의 산소에 찾아가볼 생각이라고 했다.

 

대신 그는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봄이 오면, 새로운 복지관에도 나갈 거예요. 이사 온 뒤에 이곳 복지관은 가보질 못했거든요. 야학도 2개를 다니려고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상윤의 표정이 지난 번보다 밝아진 것 같았다.

 

상윤은 최근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공부하기 위해 640쪽짜리 책을 1권 샀다. 매주 2회 듣는 컴퓨터 수업도 평소보다 더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이제 신문에도 나왔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그래서 책도 새로 샀어요” 그가 책을 들어보였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어쩌면 상윤에게는 벌써 봄이 찾아온 것도 같다.

 

상윤은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기사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기사가 나올텐데, 자립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세요. 자립을 통해서, 장애인들도 부모나 시설의 보호가 아니라 혼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47일 전 취재가 끝난 뒤 마지막 자기소개를 할 때처럼 그가 수줍게 말했다. 상윤은 이제 ‘자신만의 공간’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꿈꾸고 있다.

 

글·사진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handicapped/881032.html?_fr=mt1#csidxa14db48f560e96590697b5203afec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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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운운하는 2차 북미정상회담, 과연?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2/05 11:36
  • 수정일
    2019/02/05 11:3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아침햇살11]미국에서 운운하는 2차 북미정상회담, 과연?
 
30년 북미 핵대결의 교훈과 미국의 선택
 
문경환 기자 
기사입력: 2019/02/05 [00:15]  최종편집: ⓒ 자주시보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면담 이후 미국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소식을 계속 내놓고 있다. 실제로 북미 사이에 실무 협상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북한은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차 북미정상회담 과정에서도 미국이 막판까지 취소와 번복을 이어간 것을 염두에 둔다면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기정사실화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지난 1월 31일(현지시각) 스티브 비건 대북특별대표는 한 강연에서 “지난 25년의 외교기록이 보여주듯 실패는 셀 수 없을 정도”라며 기간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평가는 트럼프 정부 초반부터 있어왔다. 2017년 10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전임) 대통령들과 정부들이 지난 25년 동안 북한과 대화를 해왔으며, 합의를 이뤘고, 많은 돈을 지불했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왜 미국은 수십 년 동안 북한에게 패배하였을까? 여기서부터 이번 칼럼을 시작한다. 

 

북한의 국가 핵무력 완성으로 귀결된 30년 북미대결

 

북미 핵대결을 이야기한다면 25년보다는 30년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북핵 문제는 1989년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 영변에 핵무기 제조로 이어질 수 있는 핵 재처리시설이 있다는 의혹이 나오면서 미국이 북한에 핵사찰 압력을 넣었고 이것이 장장 30년 북미 핵대결의 시작이었다. 

 

북미 핵대결 초반은 의외로 격렬함이 덜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내세워 북한을 압박하던 미국은 1991년 들어 북한과 직접 협상을 시작했으며 9월 27일 해외 전술핵무기 폐기 선언, 10월 28일 주한미군 전술 핵무기 전면 철수 합의 등이 이어지며 12월 22일 북한이 핵사찰을 수락하였다. 이에 미국은 1992년 1월 7일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발표했고 1월 22일 북미 최초의 고위급회담이 열렸다. 

 

당시 미국이 전술핵무기 철수, 한미연합훈련 중단 등을 결정한 데는 좀 더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 1980년대 말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 구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 완전 해체에 이르렀다. 냉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소련 붕괴에 성공한 미국은 다음 순서로 중국과 북한을 꼽고 내부 파악에 들어갔다. 즉, 일시적으로 북한과 접촉면이 필요해진 것이다. 

 

또한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하면서 중동 지역 정세가 요동치고 1991년 1월 17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걸프 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단 군사력을 중동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생긴 미국은 북한과의 군사적 대결을 미뤄야 했다. 

 

그러다 1993년 1월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핵사찰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핵 재처리시설이 나타나지 않자 미국이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특별사찰을 거부하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1992년 중단한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면서 한 달 안에 굴복하지 않으면 영변을 폭격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북한은 3월 8일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12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은 끝내 전쟁을 개시하지 못하고 북한과 협상을 해야 했다. 전쟁 시뮬레이션 결과 예상되는 미국의 피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협상 결과 미국은 북한을 핵으로 위협하지 않고 주권을 존중하며 팀스피리트 훈련도 취소하기로 하였고 북한은 NPT 잔류를 합의했다. 이후 1994년 10월 21일 북미 제네바 합의가 탄생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약속을 확실히 지킨다는 담보서한까지 보냈다. 

 

이후 북미 대결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됐다. 1998년 미국은 북한의 금창리에 지하핵시설이 있다고 주장하며 북미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려고 하였다. 이에 북한은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다단계로켓에 실어 발사해 미국 본토 타격 능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미국은 결국 3억 달러어치의 참관료를 지불하고 문제의 ‘금창리 지하시설’을 구경하여 어이없게도 텅 빈 땅굴임을 확인하였다. 이후 미국은 2000년 12월 북미공동코뮤니케를 합의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약속하게 되었다. 

 

2001년 집권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태세검토보고서를 통해 북한에 대한 핵 선제공격 정책을 공개하였다. 나아가 특사로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였고 미국은 북미 제네바 합의를 폐기하였다. 이에 북한은 NPT 즉각 탈퇴로 맞섰고 이후 중국의 중재 아래 6자 회담이 열렸다. 6자 회담에서도 미국은 북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 즉 CVID를 주장하며 회담을 결렬시켰다. 이에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핵보유선언’을 하였고 결국 미국은 6자 회담 9.19 공동성명에 합의하였다. 

 

6자 회담에서 패배한 부시 정부는 바로 다음날인 9월 20일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있는 북한 계좌를 동결시키는 이른바 BDA 사태를 일으켰다. 이에 북한은 이듬해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무더기 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였고 10월 9일 첫 핵실험을 강행하였다. 깜짝 놀란 부시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하겠다며 상황을 진정시키고 북미 양자회담에 나섰다. 결국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삭제하여 대북제재를 부분 철회하였다. 

 

2009년 집권한 오바마 정부는 북한에 대해 ‘선핵폐기’를 강요하며 북한 인근 해역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인 ‘키리졸브’ 한미연합전쟁연습을 강행하였다. 이에 북한은 새로운 인공위성을 발사하며 미국을 압박했고 5월 25일 2차 핵시험을 실시하였다. 북한의 초강경 행보에 놀란 미국은 8월 4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전격 방북시켜 양자대화의 물꼬를 열었고 12월 8일에는 스티븐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방북시켜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오바마 정부는 북한과 대결에서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전면 대결도, 대화도 중단하고 내부 붕괴 전략을 추진하는 ‘전략적 인내’ 정책에 들어갔다. 오바마 정부 내내 유지된 전략적 인내 기간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전력을 다해 마침내 2017년 11월 국가 핵무력을 완성시켰다. 북한의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으로 미국은 결국 역사적인 첫 북미정상회담 자리에 나가야 하였다. 

 

©이정섭 기자

 

왜 미국의 패배인가

 

30년 북미대결을 종합 정리하면 결국 미국의 패배로 결론내릴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비건 대표의 말처럼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단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 버렸다. 

 

첫째, 미국의 공식 목표였던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폐기에 실패하였다. 폐기에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원래 없던 핵폭탄, 수소폭탄,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까지 허용했으니 완벽하게 패배한 것이다. 

 

둘째, 미국의 내부 목표였던 북한 체제의 교체에 실패하였다. 미국은 북한 체제 전복을 반공개적으로 추진했다. 부시 정권 시절 국방부 장관을 지낸 도널드 럼즈펠드는 2011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당시에 미국이 북한 체제를 전복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고 공개하였다. 또 많은 전문가들도 미국이 북한 체제 전복 구상을 포기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미국 정부가 북한 체제 전복 구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앞서 초반에 언급한 비건 대표의 발언 중에도 트럼프 정부는 북한 정권 전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그 전까지 북한 체제 전복을 추구해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북한 체제 전복 시도는 결국 실패하였다.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북한 체제가 더욱 튼튼해졌으니 완벽하게 패배한 셈이다. 북한은 북미대결 과정에서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며 선군정치라는 강력한 정치방식을 전면화하였으며, 김정은 체제로 이어지는 후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였고, 강력한 국방력은 물론 자립경제노선에 따른 경제성장까지 이뤄 자체 목표인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날 북한에서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은 미국의 내부 공작이 전혀 통하지 않는 수준이다. 

 

셋째, 경제제재와 같은 강력한 봉쇄정책이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의 비약적인 성장만 보게 되었다. 미국은 반미국가를 상대로 다양한 구실로 봉쇄정책을 펼쳐왔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경제가 붕괴하고 사회혼란에 빠져 결국 무너지고 만다. 북미 핵대결 과정에서도 미국은 사상 유례없는 대북 봉쇄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했으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나아가 동북아 경제에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고 세계 경제마저 선도할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미국의 자본가들조차 북한에 투자하겠다고 나설 지경이다. 

 

북미 대결 30년의 특징과 교훈

 

미국의 패배 과정에서 두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자업자득이다. 미국은 북한을 굴복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들이 미국의 목을 조르는 꼴이 되었다. 미국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대표적 사례는 금창리 사건이다. 이런 단편적인 사건뿐 아니라 북미 대결 전반에서 미국은 자기가 겨눈 칼끝이 결국 자기 목을 겨누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우선 북한이 핵개발을 하게 된 계기도 미국이 만들었다. 미국이 애초에 주한미군 기지에 천여 기의 전술핵무기를 배치해 북한을 압박하지 않았다면 북한도 핵개발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주한미군은 1958년부터 핵무기를 반입하기 시작해 1960년대에는 최대 950기의 전술핵무기를 배치하였다. 이런 미국의 핵위협에 맞서 북한은 핵보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사실로 되자 자유한국당을 필두로 “핵에는 핵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들의 논리는 미국의 핵위협에 맞서 핵개발을 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2003년 7월 26일 인터뷰에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북핵 위기를 초래한 책임의 대부분은 부시행정부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각에서는 북한 핵개발의 일등공신은 미국이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다음으로 북한의 핵무기가 미국을 위협하는 것도 사실 미국이 자초한 것이다. 애초 북핵문제가 불거진 1990년대 초 북한은 자신들은 핵개발 의사가 없다며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주장했다. 2008년 미국의소리(VOA)는 「미-북 관계, 대결과 탐색의 58년」 방송에서 냉전 해체로 북한이 “한국,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됐고 실제로 1988년부터 1991년까지 18차에 걸쳐 비공식 북미 참사관급 대화가 열렸으며 1992년 1월에는 “당시 북한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 김용순이 뉴욕을 방문해 미 국무부의 아놀드 캔터 정무차관과 회담을 하는데, 이것이 미-북 관계 개선을 위한 최초의 고위급 회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북핵 사찰에만 관심을 갖고 관계개선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아무런 정치적 관계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수교를 맺는 등 관계정상화를 했다면 설사 북한이 핵개발을 했다고 해도 미국에게 직접적인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구 소련, 중국 등 미국의 경쟁국가들도 핵무기가 있지만 미국이 이 때문에 일상적인 핵전쟁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 것과 같다. 결국 미국은 자신들의 대북적대정책 때문에 북한의 핵무기를 자신의 위협으로 만들어버렸다. 

 

끝으로 미국이 북한에 쓸 수 있는 카드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도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대북제재와 경제봉쇄 정책을 고수하였다. 장기간 지속된 미국의 대북 봉쇄정책은 북한으로 하여금 ‘항복’이 아닌 ‘자력갱생’의 의지만 키웠다. 북한은 정치적으로 자주정치, 경제적으로 자립경제, 군사적으로 자주국방을 기본 국가노선으로 채택하였다. 이 결과 미국은 물론 구 소련, 중국 등 그 어떤 나라도 북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와서 미국이 북한을 회유, 압박하려고 해도 더 이상 봉쇄의 강도를 높일 수도 없고, 중국을 쳐다본들 중국도 ‘북한은 우리 말을 듣지 않는다’며 답답해할 뿐이다. 

 

나아가 미국이 대북 봉쇄를 강화할수록 동북아 경제에서 미국이 소외되는 역 고립 현상이 심화될 뿐이다. 대북제재 완화 혹은 해제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중국, 러시아는 지난해 10월 북·중·러 3자 외교차관 회담 공동성명을 발표해 일방적 제재를 반대하고 대북제재 재검토를 촉구하였다. 중국, 러시아는 이미 비공식적으로 북한과 경제협력을 시작했거나 제재해제에 맞춰 대규모 경제협력을 곧바로 개시할 준비를 상당 수준으로 해놓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투자처에 목마른 미국 자본은 성장 가능성이 높은 동북아 경제에 뛰어들어 초반 장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미국 자본가 내에서도 빨리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대북투자를 열어달라고 주장하는 이들(조지 소로스, 짐 로저스 등)과 대북 압박을 지속하자는 군수자본 등의 갈등이 커지는 상황이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대북 봉쇄정책을 지속할지 중단할지 골치 아픈 상태인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북한이 강경한 태도로 미국을 때릴 때마다 미국은 북한의 구상대로 끌려왔다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은 대화 혹은 대결 둘 중 하나로 접촉해왔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한 번도 스스로 대화에 나선 적은 없었다. 미국은 오로지 북한과 대결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북한이 핵시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 군사적 압박을 가하면 미국이 결국 대화의 자리에 나오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북핵대결의 30년에서만 나타난 게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도 북한의 군사적 우세가 확인되면 미국이 정전협상장에 돌아왔고, 푸에블로호 사건, 판문점 도끼사건 등 북미 사이의 충돌에서도 북한의 초강경 대응이 나오면 그제야 미국은 협상을 시작하였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북한 입장에서 해석해보면 ‘미국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정리할 수 있다. 지난해 1차 북미정상회담 역시 북한의 국가 핵무력 완성이 이끌어낸 대화의 자리였다. 결국 미국이 대화를 거부하고 대결을 추구할 때마다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군사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북한이 언제까지 똑같은 수위의 대응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미국이 또 대화를 거부한다면 북한이 보여줄 ‘미국 때리기’는 단순한 군사력 시위를 넘어서 실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미국은 지난 북미대결의 역사에서 교훈을 잘 찾아야 할 것이다. 

 

중국 모델, 리비아 모델, 그리고...

 

지난 30년의 북미 핵대결 결과 지금 국면은 질적으로 다른 상황이 되었다. 바로 북한이 국가 핵무력을 완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 길을 갈 수 있는가. 크게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중국 모델이다. 미국이 구 소련이나 중국을 상대하던 길이다. 미국은 구 소련과 정상적인 국교 관계를 맺고 부분적인 핵군축을 통해 서로의 핵무기가 상대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였다. 중국과는 대만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하고 대만과의 군사동맹을 파기하는 조건으로 국교를 수립하였고 중국은 선제핵공격을 하지 않고 핵공격을 당하는 경우에만 핵보복을 한다는 제한적 억제전략을 채택, 핵무기 생산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과 미국은 직접적인 핵전쟁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미국도 북한과 관계정상화를 하고 교류협력을 추진하면서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고 군사적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 이를테면 북한은 핵무기를 동결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를 철수하고, 핵공격 전략을 폐기하여 상호 핵위협을 제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핵전쟁의 가능성은 남아있지만 당장의 위기, 직접적 위협은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 양국 지도자가 집무책상 위에 핵단추를 올려놓고 발사 대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양국 국민들도 핵전쟁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이 결과는 남북통일과 주한미군 철수가 될 것이다. 편의상 이 방식을 ‘중국 모델’이라고 하자. 

 

두 번째 방식은 리비아 모델이다. 경제지원 등 비군사적 요소와 북핵폐기를 맞바꾸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리비아 모델을 북한에 적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하지만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리비아 모델을 고려하고 있다는 발언을 종종 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리비아가 미국의 경제지원만 믿고 핵프로그램을 폐기했다가 결국 약속한 경제지원도 못 받고 내전 끝에 붕괴한 것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리비아 모델을 그대로 쓸 수 없다. 

 

북한은 미국이 북핵폐기를 요구하면 미국의 핵도 폐기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동시 핵폐기, 나아가 전 세계 비핵화다. 북한은 핵대결 초기에도 자신들의 핵시설 사찰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주한미군도 전술핵무기를 제대로 철수했는지 사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미가 상호 핵폐기를 하려면 미국이 주장하던 CVID, 즉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를 해야 할 것이다. 편의상 이 방식을 ‘리비아 모델’이라고 하자. 

 

리비아 모델과 중국 모델의 차이는 미국이 북한에게 핵폐기를 요구할지, 핵동결을 요구할지의 차이다.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미국이 치러야 할 대가도 달라진다. 과연 미국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겠는지 스스로 잘 판단해야 한다. 

 

세 번째 방식은 핵전쟁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흥미로운 사건이 미국에서 발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가정에 갑자기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국 영토로 날아오고 있다는 경고 방송이 나온 것이다. 집에 있던 부부는 끔찍한 공포를 경험했는데 처음에는 어디서 방송이 나오는지조차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집안에 설치한 보안 카메라(CCTV)에서 나오는 방송임을 알았다고 한다. 다행히 경고 방송은 오보였고 카메라 제조업체인 네스트(Nest)는 “해커들이 네스트 카메라를 사용해 가짜 핵미사일 경고를 전파”한다며 자사 카메라 사용자들에게 인증 절차를 강화하라는 긴급 경고를 발송했다. 

 

이런 사건은 단순 오작동이나 해커의 장난일수도 있지만 정보기관의 내부 시험이나 홍보용일 수도 있다. 즉, 핵전쟁이 발발했을 때 국민과 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대비태세를 시험했거나, 핵전쟁 불사를 주장하는 강경파들을 반박하는 여론전일 수 있다. 

 

아무튼 이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미국 국민들은 지난해 1차 북미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약 북한의 핵미사일이 진짜로 미국 본토로 날아간다면 미국 사회에 대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미국은 결코 전쟁을 선택할 수 없다. 

 

미국이 2차 북미정상회담을 한다고 강조하는 배경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지난해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중국 모델’을 합의하고서 약속을 어기고 ‘리비아 모델’을 시도하다가 북한에게 ‘전쟁의 길’에 대한 경고를 받은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을 경고한 것은 전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나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올해 북남관계가 대전환을 맞은 것처럼 쌍방의 노력에 의하여 앞으로 좋은 결과가 꼭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라고 한 표현도 눈여겨 봐야한다. ‘믿고 싶다’는 표현은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분노, 그러나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인내, 그러나 그 이상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응축되어 있다. 미국은 ‘리비아 모델’ 시도를 포기하고 빨리 ‘중국 모델’로 복귀해야 할 것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면

 

1993년 북한의 준전시상태 선포와 NPT 탈퇴가 미국을 협상장에 불러내 북미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다. 2005년 북한의 핵보유 선언이 미국을 협상장에 앉혀 6자 회담 9.19 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2017년 북한의 국가 핵무력 완성 선포가 미국을 대화의 자리로 불러내 1차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홍보하는 것처럼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이는 북한 신년사의 ‘새로운 길’ 경고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북미 핵대결 30년의 역사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으니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도 북한의 의도가 관철될 것으로 보인다.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정치 관계의 정상화, 군사적 긴장 완화, 경제협조, 사회문화교류협력 등을 논의해 양국이 정상적인 국가관계로 나아가는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정치 관계의 정상화에서는 북미 양국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국교를 수립하는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해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할 것이다. 이미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종전선언 의제를 언급했다. 사회문화교류협력에서는 예술인, 체육인 교류 등을 논의할 것이다. 

 

경제협조와 관련해서 미국은 경제지원을 계속 언급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자본주의식 협상전략일 뿐이다. 미국은 중국, 러시아가 동북아 경제권을 선점하기 전에 자신이 들어가고자 하지만 후발주자로 들어가면 주도권을 쥘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아쉬울 것 없다, 북한이 경제지원을 원해서 들어간다’는 입장을 취하고 싶은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협상의 기본은 ‘갑’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은 아쉬울 것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 흔한 말로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영업하는 사람들이 자기 경제형편에 맞지 않게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국이 동북아 경제권에 편입하고 싶다면 이런 자본주의 근성을 버려야 할 것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을 이야기하는 미국은 지금 고민이 많을 것이다. 2차 회담 성사를 위해서는 ‘리비아 모델’을 버리고 ‘중국 모델’로 복귀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 정부의 25년 북미대결이 실패했다고 비판했지만 자신도 북미대결에서 패배했다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다. 

 

또한 이대로 가면 남북은 자주통일로 나아가게 된다. 주한미군 철수도 불가피하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치명타가 된다. 동북아 전략의 파산은 인도-태평양 구상, 나아가 세계 패권 전략에도 타격이 된다. 이는 구 소련이나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타격이다. 똑같은 중국 모델을 적용했어도 중국에 대해 미국은 대만을 포기하는 대신 중국-소련 갈등을 키워 소련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또 중국에 자본주의 바람을 불러 넣을 수 있었다. 실보다 득이 훨씬 컸다. 

 

하지만 북한에는 통하지 않는다. 미국은 원래 북한에도 중국 모델을 적용해 북한-중국의 갈등을 키워 중국 포위망에 북한을 인입하려 하였지만 북중정상회담 등으로 북중관계가 오히려 최고조로 상승해버렸다. 북한에 자본주의 바람을 넣는 것도 북한의 자주노선, 자립경제 노선으로 인해 불가능하다. 이대로 가면 남북통일로 한반도에 강력한 자주국가가 출현하며 동북아와 세계를 주도하는 새로운 강성국가가 등장해 세계 질서가 변화할 것이다. 미국은 상상할 수 없는 미증유의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다. 

 

2차 북미정상회담 성사까지의 과정이 말만 많고 순조롭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지난해 1차 북미정상회담도 미국이 막판에 취소를 했다 번복했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추상적인 합의만 하고서 북핵폐기를 밀어붙여볼 구상이었을 것이다. 즉, 중국 모델을 제시해 북한을 안심시키고 리비아 모델을 추진해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북한의 강경하고 원칙적인 대응으로 인해 시작도 하지 못했다. 이제는 미국의 구체적인 실천이 불가피하다. 그동안 미뤄왔던 약속들을 지켜야 한다. 

 

미국은 2차 북미정상회담이 당장에라도 성사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앞으로도 얼마든지 휘청할 수 있다. 만약 정상회담을 한다면 실질적인 진전이 부분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암초는 곳곳에 남아 있다. 미국은 2차 정상회담의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또 딴소리를 할 수도 있다. 그만큼 미국은 구석에 몰렸고 고민이 많다.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풀려나갈지 지켜보자. 

 

※이 글은 주권연구소와 자주시보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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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죽음 앞 성완종 메모도 배척한 법원, 드루킹은?"

"드루킹이든 버거킹이든 정치적 지지 표현은 범죄 아냐"
2019.02.04 21:45:57
 

 

 

 

변호사인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대한 성창호 부장판사의 판결문을 분석하며 "김경수 지사에 대한 유죄 판결과 법정 구속은 판사의 경솔함과 오만, 무책임과 권한 남용"이라고 조목조목 비판했다.
 
'드루킹과 공범'이라는 판결의 전제 자체부터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다, '댓글 여론 왜곡'으로 인한 피해자 역시 모호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공무원'도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인 '경공모'의 댓글 활동을 범죄로 낙인 찍는 근거 자체가 모호하다는 근본적인 지적도 내 놓았다.  
 
송 의원은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경수 경남 도지사에 대한 성창호 판사의 판결문 분석 비판"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성 판사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을 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그러나 신빙성이 수차례 탄핵된 김동원의 진술만 채택하고 나머지 합리적 의심을 묵살하는 유죄 판결은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법 대원칙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송 의원은 이어 "그런데 성창호 판사의 김경수 지사에 대한 1심 판결문을 보면 '의심스러울 때는 검찰의 이익으로'라는 판결을 한 것 같다. 대부분 정황증거로 추정하여 판단한 것"이라며 "킹크랩 시연 현장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느냐의 여부에 대해 양자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이고, 판결문 자체도 확정적인 증거 없이 의심에 의심을 기초로 추정한 사실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송 의원은 "근대 헌법과 근대 형사소송법을 통해 배운 커다란 원칙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이다. 유죄의 심증이 가더라도 합리적 의심에 침묵을 명할 정도의 확실한 증거(beyond reasonable doubt)가 아니면 유죄 판결을 할 수 없다는 원칙"이라며 "증거에 대해서 형사소송법의 증거판단의 두 기둥이 자백법칙과 전문법칙이다. 즉 자백이 유일한 증거일 때는 보강 증거 없이 유죄 선고를 할 수 없다는 것과,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들어서 한 말은 증거가 될 수 없다(hearsay is no evidence)는 전문법칙이다"라고 설명했다.  
 
송 의원은 "그런데 성창호 판사의 김경수 지사에 대한 1심 판결문을 보면 '의심스러울 때는 검찰의 이익으로'라는 판결을 한 것 같다. 대부분 정황증거로 추정하여 판단한 것"이라며 "킹크랩 시연 현장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느냐의 여부에 대해 양자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이고, 판결문 자체도 확정적인 증거 없이 의심에 의심을 기초로 추정한 사실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송 의원은 또 "드루킹의 범죄 행위와 김경수 지사가 공모했다는 내용은 댓글의 순위조작, 즉 '좋아요'와 '공감' 버튼을 킹크랩이라는 기계적인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눌렀다는 것이고, 그래서 피해자가 네이버, 카카오, SK 커뮤니케인션스라는 회사"라고 했다. 
 
송 의원은 이어 "드루킹이든 버거킹이든 간에 국민들이 정치적 지지나 반대의사를 표하는 댓글을 다는 것은 허위사실과 명예훼손, 모욕죄에 해당하는 글이 아니면 범죄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번 판결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죽음 앞두고 작성한 성완종 진술은 배척, '오락가락' 김동원은 100% 수용?
 
송 의원은 판결문을 근거로 '드루킹 일당'의 실체 자체가 김 지사와 연관이 없다고 지적했다. 송 의원은 판결문 등을 근거로 "이들은 김경수만이 아니라 노회찬, 유시민, 안희정 등에게도 접근을 시도하였고 친박, 자유한국당과도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따라서 경공모는 김경수 지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도 아니고 자금을 지원해준 단체도 아닌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지사와 드루킹 일당의 조직이 관계가 없음에도 '공모' 관계를 인정한 1심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송 의원은 "김동원이 김경수 지사에게 돈을 받았다고 거짓 진술을 하자 이에 맞추어 조직원들이 따라 진술하다가 진술을 번복하자 다같이 번복하는 점 등에 비추어볼 때 김동원(드루킹)과 그 조직원들의 진술의 신빙성은 인정되기 어렵다"며 "(이를) 성창호 판사는 이를 애써 외면했다. 성완종 씨가 자살을 하면서 남긴 메모도 신빙성이 없다고 배척한 사법부가 과대망상 의심이 크고 자신의 청탁이 거절되자 앙심을 품고 피고인을 해하고자 내지르는 김동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연루된 '성완종 사건'에서 법원은 성완종의 진술을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락가락 진술'의 김동원의 진술을 거의 100% 인용한 재판부의 판결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윤승모 전 부사장은 성완종의 지시를 받고 홍준표 의원실을 방문, 직접 돈을 건넸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리고 의원실을 방문한 기억을 뒷바침하기 위해 의원실에서 '척당불기'라고 쓰여진 액자를 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승모의 진술도, 성완종의 진술도 재판부는 주의깊게 듣지 않았다.

송 의원은 "유일한 직접 증거인 김동원(드루킹)의 진술 역시 일관성이 없고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부분과 공범자 간의 진술 조작의 의심이 존재한다"고 지적한 뒤 "1995년 서울에서 발생한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에 남편에 대한 최종 무죄 판결이 난 이유 역시 부부 간의 불화 등을 이유로 남편의 살해 의심이 가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무죄 판결을 한 경우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그만큼 과학적인 수사, 증거 수집의 중요성을 지적한 말"이라고 지적했다. 
 
송 의원은 홍준표, 나경원 등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을 향해 "드루킹 사건은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유권자 운동조직인 경공모(경제공진화모임)의 단체가 자신들의 영향력 과시를 위해 김경수 지사를 유혹하여 끌어들이려는 시도에 대한 평가 문제이다. 그리고 2017년 대선결과도 문재인 41.8%, 홍준표 24.03%로 문재인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승리하였다. 드루킹 사건이 선거 결과에 미친 영향은 국정원 등의 댓글 사건 때와 비교가 안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송 의원은 이어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 못하고 국정원 등의 국가기관 댓글조작 사건과 민간인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조직인 드루킹 댓글 사건을 동일시하는 자유한국당의 정치 공세는 국가권력의 범죄행위와 민간인의 일탈 행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 의원은 "민주당은 법이 정해진 불복 절차를 통해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의 문제점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뒷받침해야 한다. 아울러 박근혜 정권 때 오염된 양승태 체제의 사법농단 세력을 정리하여 사법부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명선 기자 overview@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방송국과 길거리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다, 지금은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기자' 명함 들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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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끼 P-1의 위협비행에 얽힌 사연들

[개벽예감 333] 가와사끼 P-1의 위협비행에 얽힌 사연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2/04 [17:17]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일본 초계기들이 연속 감행한 네 차례 군사도발

2. 미국 국방부는 왜 유엔군 사령부를 개편하는가?

3. 미국의 고심하는 철군과 통일 이후 동북아정세

4. 국가적 열패감을 상쇄하려는 일본의 충동

 

 

1. 일본 초계기들이 연속 감행한 네 차례 군사도발

 

2019년 1월 18일 한국 해군 소속 7,600톤급 구축함 율곡이이함은 경상남도 울산에서 동남쪽으로 83km 떨어진 동해 해상을 항해 중이었다. 그런데 오전 11시 39분 갑자기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 P-1 한 대가 1.8km까지 접근하더니, 비행고도를 해수면으로부터 60~70m로 낮춘 초저공으로 선회비행을 하였다. 

 

초계기 P-1은 일본 가와사끼중공업 산하 항공우주회사가 미국 보잉과 기술협력으로 2007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일본해상자위대가 2013년 3월 26일부터 실전배치하기 시작한 최신형 초계기다. 프로펠러 엔진을 장착한 기존 초계기와 달리 제트 엔진을 장착한 일본산 초계기의 명칭은 가와사끼 P-1이다. 율곡이이함에 바짝 접근하여 초저공선회비행을 한 가와사끼 P-1은 일본해상자위대 제4항공군 산하 제3항공대 소속인데, 가나가와현 아쯔끼비행장에서 이륙하여 율곡이이함에게 접근하였다. 가와사끼 P-1은 공중정찰만 하는 정찰기가 아니라, 해상목표물과 지상목표물은 물론이고 잠수함도 공격할 수 있는 중무장 해상작전기다. 그래서 가와사끼 P-1에는 각종 무장장비들이 탑재되는데, 그 중에는 적함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80식 공대함미사일 ASM-1도 있다. 초계기는 공대함미사일로 적함을 공격할 때, 초저공비행을 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 가와사끼 P-1은 한국 해군 구축함에 초저공으로 접근하여 위협비행을 감행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제항공안전협약은 해수면으로부터 150m 이하 고도에서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것을 위협비행으로 간주하여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가와사끼 P-1이 한국 해군 구축함에 바짝 접근하여 초저공선회비행을 감행한 것은 국제항공안전협약을 위반하면서 한국 해군 구축함을 위협한 도발행위가 아닐 수 없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9년 1월 23일 오후 2시 3분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섬 이어도에서 서남쪽으로 131km 떨어진 해상을 항해 중이던 한국 해군 소속 4,400톤급 구축함 대조영함으로부터 540m 근접상공까지 바짝 다가선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 P-3가 비행고도를 해수면으로부터 60~70m로 낮추며 초저공위협비행을 감행하는 장면이다. 당시 대조영함은 경고통신을 수 십 차례 연속 발신했으나, 일본 초계기는 경고통신을 무시한 채 대조영함 상공에서 원을 그리며 초저공위협비행을 계속하였다.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들이 한국 해군 군함들에게 위협비행을 연속 감행한 충격적인 도발사건은 2018년 12월 20일에 시작되어 2019년 1월 23일까지 한 달 동안 네 차례나 발생하였다. 이런 군사도발은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 일본 극우정권의 망동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2019년 1월 22일 오후 2시 23분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 P-3 한 대가 제주도에서 동남쪽으로 95km떨어진 해상에서 항해 중이던 한국 해군 소속 노적봉함과 소양함으로부터 3.6km 떨어진 근접상공까지 다가오더니 비행고도를 해수면으로부터 30~40m로 낮추면서 또 다시 초저공위협비행을 감행하였다는 사실이다. 2018년 11월에 취역한 노적봉함은 4,500톤급 상륙함이고, 2018년 9월에 취역한 소양함은 10,000톤급 군수지원함이다. 취역한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이 군함들은 졸지에 군사도발을 당했다.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들의 위협비행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노적봉함과 소양함을 상대로 위협비행을 감행한 다음날인 2019년 1월 23일 오후 2시 3분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섬 이어도에서 서남쪽으로 131km 떨어진 해상을 항해 중이던 한국 해군 소속 4,400톤급 구축함 대조영함으로부터 540m 떨어진 근접상공에 나타난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 P-3 한 대가 비행고도를 해수면으로부터 60~70m로 낮추며 또 다시 초저공위협비행을 감행하였다. 비상상황을 직감한 대조영함은 자기 쪽으로 바짝 접근하여 위협비행을 하는 초계기 P-3을 향해 “더 이상 접근하면 자위권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통신을 수 십 차례 연속 발신했으나, 일본 초계기는 경고통신을 무시한 채 대조영함 상공에서 원을 그리며 위협비행을 계속하였다.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들이 한국 해군 군함들에게 위협비행을 연속 감행한 충격적인 도발사건은 2018년 12월 20일 동해 해상에서 발단되었다. 그날 남측 해군 소속 3,200톤급 구축함 광개토대왕함과 남측 해양경찰 소속 5001함이 동해에 있는 대화퇴어장 인근 해상에서 조난당한 북측 어선을 구조하고 있었는데,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 가와사끼 P-1 한 대가 500m 떨어진 근접상공까지 바짝 다가오더니 비행고도를 해수면으로부터 150m로 낮춰 위협비행을 감행하였다. 

 

사정이 그러했는데도, 일본 방위성은 한국 해군 군함이 일본해상자위대 초계기를 향해 사격통제레이더를 가동하며 위협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푼수 없이 떠들어댔다. 만일 한국 해군 군함을 위협하는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의 초저공선회비행이 한 차례로 끝났다면, 한국 국방부가 일본 방위성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초저공위협비행을 무려 네 차례나 연속 감행한 것은 항의와 재발방지촉구가 통하지 않는 매우 심각한 군사도발인 것이다. 계획적인 군사도발을 연속 감행하고서도 한국 해군 군함이 사격통제레이더로 위협했다고 떠들어댄 일본의 적반하장격 망동이야말로 저들의 간악한 정체를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2018년 12월 하순에서 2019년 1월 하순에 이르는 한 달 동안 그런 계획적인 군사도발을 연속 감행한 일본의 의도는 무엇일까? 누구나 아는 것처럼,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 극우정권은 주변국에 대한 군사도발을 감행하여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는 경우,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을 추진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에, 극우정권은 언제나 군사적 긴장을 적정수준에서 유지하기 위한 군사도발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들이 한국 해군 군함들에게 연속 감행한 네 차례 군사도발도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 일본 극우정권의 망동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여기까지는 일반 언론보도를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인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막을 파악하려면 다음과 같은 분석이 요구된다. 

 

 

2. 미국 국방부는 왜 유엔군 사령부를 개편하는가? 

 

일본 극우정권이 초계기를 동원하여 한국 해군 군함을 위협한 군사도발사건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인 2018년 7월 30일 경기도 평택에 있는 미국군통합기지 캠프 험프리스에서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 특별한 행사는 미국 국방부가 유엔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한 캐나다군 공군 중장 웨인 에어의 취임식이었다. 미국 국방부는 서울 용산 주한미국군기지 안에 있던 유엔군 사령부를 2018년 6월 29일에 경기도 평택에 새로 건설된 미국군통합기지로 옮긴지 한 달 뒤에 유엔군 부사령관 취임식을 진행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주한미7공군 사령관이 유엔군 부사령관을 겸직하였다. 

 

이 글에서 논의하려는 유엔군 사령부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유엔군 사령부는 불법군사조직이다. 왜냐하면,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7일, 당시 중국의 유엔안보리 대표권 문제로 미국과 갈등하던 소련이 유엔안보리 회의에 불출석하면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이 그 기회를 틈타 추종국들을 동원하여 불법적으로 유엔군 사령부와 유엔군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가 전 세계 분쟁지역에 파견하는 유엔평화유지군은 분쟁지역에서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임무를 수행하지만, 미국이 소련을 따돌리고 유엔안보리에서 불법적으로 조작한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을 방지하기는커녕 1950년 10월 1일부터 북위 38도선을 넘어 조선을 침공하여 비전투원 학살, 무차별 폭격, 산업시설 파괴, 세균전 같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6.25전쟁 중에 미국이 유엔의 이름을 도용하여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를 자행한 역사적 사실은 많은 자료들에 의해 입증된다. 이를테면, 2011년 1월 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6.25전쟁 중에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미국군이 자행한 전쟁범죄에 의해 민간인 5,291명이 학살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학살만행을 피해 살아남은 유가족의 요청에 따라 그 위원회가 조사한 사건들에서 파악된 민간인 피학살자들이 5,291명이므로, 실제로는 몇 배 더 많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군의 전쟁범죄가 집중되었던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학살만행이 자행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쟁범죄를 처벌하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없었기 때문에, 남과 북의 피학살자 유족들은 해리 트루먼, 더글러스 맥아더, 이승만을 국제전범재판에 세울 수 없었다. 만일 국제전범재판이 벌어졌다면, 특급 전범자들이 유엔의 이름을 도용하도록 방치한 유엔안보리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전범자로 걸려들 판이었다.  

 

미국은 6.25전쟁에서 패하여 조선과 정전협정을 체결한 이후, 패전에서 교훈을 찾고 자중하기는커녕 자기들이 불법적으로 조작한 유엔군 사령부와 유엔군을 틀어쥐고 조선을 또 다시 들이칠 침공호기를 끊임없이 노려왔다. 그런 까닭에 미국 국방부는 유엔군 지휘관 전원을 미국군 장성들로 채워놓았던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미국 국방부가 유엔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한 캐나다군 공군 중장 웨인 에어가 커다란 유엔기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이다. 그는 2018년 7월 30일 유엔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미국 국방부가 미국 군사지휘관이 아닌 동맹국 군사지휘관에게 유엔군 모자를 씌워주고 그를 유엔군 부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이변이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 국방부가 유엔군 사령부의 독자성을 형식적으로나마 인정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저들의 '개편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불고 있을까?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유엔군 사령부가 불법적으로 조작된 때로부터 64년이 지난 2018년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 국방부는 미국 군사지휘관이 아닌 동맹국 군사지휘관들에게 유엔군 지휘관의 모자를 씌워주기 시작한 것이다. 유엔군 사령관이며 주한미국군 사령관이며, 한미연합군 사령관인 미국군 육군대장 빈센트 브룩스는 2018년 7월 30일 평택 미국군통합기지에서 진행된 유엔군 부사령관 취임식에서 축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유엔군 사령부 고위지휘관은 한미연합군 사령부나 주한미국군 사령부에서 한 개 또는 두 개의 직책을 겸직했었는데, 오늘부터 유엔군 부사령관은 한 가지 직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달에 부임할 유엔군 참모장도 유엔군 사령부 직책만 맡을 것이며, 오는 9월 또는 10월에 부임할 유엔군 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지휘관도 유엔군 사령부 직책 이외에 다른 직책은 맡지 않을 것이다.” 

 

위에 인용된 발언은 유엔군 사령부를 주한미국군 사령부의 부속물처럼 여겨오던 미국 국방부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들이 유엔군 사령부의 독자성을 인정해주는 듯한 야릇한 태도를 취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날에 있었던 브룩스 사령관의 축사발언을 좀 더 들어보면, 미국 국방부의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축사발언 중에 그는 앞으로 유엔군 사령부를 이끌어갈 4대 운영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바 있다. 

 

(1) 유엔군 사령부는 정전협정 이행상황을 감독한다. 

(2) 유엔군 사령부는 조선과 대화한다.

(3) 유엔군 사령부를 한미연합군 사령부와 주한미국군 사령부로부터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4) 미국 군사지휘관이 아닌 동맹국 군사지휘관들을 유엔군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명백하게도, 미국 국방부는 2018년 여름부터 유엔군 사령부의 독자성을 형식적으로나마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한미국군 사령부의 부속물로 전락한 채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유엔군 사령부에 갑자기 ‘개편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3. 미국이 고심하는 철군과 통일 이후 동북아정세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2019년 1월 18일 빈센트 브룩스 유엔군 사령관이 미국 방송 <PBS>와 진행한 대담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날 대담방송진행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기할 것으로 생각하는지 빈센트 사령관에게 질문하면서, 대조선제재완화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종전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는가 하고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은 빈센트 사령관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추구하는 “더 광범위한 목적은 동북아시아에서 완전히 새롭게 개편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과 함께 방금 당신이 언급한 구체적인 결정들 같은 부속적인 요구들도 제기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대담방송진행자는 브룩스 사령관의 답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그 답변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엿볼 수 있다. 브룩스 사령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마익 팜페오 국무장관이나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가 언급을 회피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민감한 정치감각에 따라 발언수위를 시시때때로 조절할 줄 아는 닳아빠진 정치인들과 달리, 저돌적인 군사지휘관들의 정치감각은 상대적으로 좀 둔감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상부로부터 들은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는 경우가 가끔 있다. 위에 인용한 빈센트 사령관의 답변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의 답변을 좀 더 정확한 어법으로 정리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조선제재완화나 전쟁종식 같은 문제들보다 더 폭넓고 중요한 문제, 다시 말해서 동북아시아정세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할 중차대한 문제를 추구할 것으로 예견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브룩스 사령관의 답변은 과연 정곡을 찌른 ‘명답’이었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동북아시아에서 완전히 새롭게 개편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만 말했을 뿐,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 다시 말해서 동북아시아정세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할 중차대한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한반도의 통일이다. <사진 3> 

 

▲ <사진 3> 유엔군 사령관 빈센트 브룩스와 유엔군 부사령관 웨인 에어가 미국 국기와 캐나다 국기가 게양된 유엔군 사령부 청사 안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장면이다. 브룩스 사령관은 2019년 1월 18일 미국 방송과 대담을 진행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조선제제완화나 전쟁종식 같은 문제들보다 동북아시아정세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할 더 중차대한 문제를 추구할 것으로 예견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그날 방송대담에서 그는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가 언급한, 동북아시아정세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할 중차대한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한반도의 통일이다. 그가 그렇게 발언하기 1년 전인 2018년 2월 중에 미국의 고위관리들은 각각 다른 시점에, 각각 다른 공식석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추구하는 목적이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이것은 나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다. 브룩스 사령관이 그런 답변을 꺼내놓기 1년 전인 2018년 2월 중에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해리 해리스 당시 태평양사령관(현재 주한미국대사), 마익 팜페오 당시 중앙정보국장(현재 국무장관), 댄 코우츠 국가정보국장은 각각 다른 시점에, 각각 다른 공식석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추구하는 목적이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구동성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 글의 길이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내용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한반도의 통일이 한반도 정세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판을 더 넓혀 동북아시아정세까지 완전히 새롭게 개편하게 되는 까닭은,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조미관계개선에 따른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수와 남북관계개선에 따른 남북의 단계적 군비감축이 각각 실현되고, 미국의 북침전쟁지휘거점들인 유엔군 사령부, 주한미국군 사령부, 한미연합군 사령부가 해체되고, 더 나아가 미국이 중시하는 한미일 3자 군사협력구도까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대격변이다.  

 

위와 같은 대격변을 일찌감치 예견한 미국 국방부는 그에 대처할 방도를 찾기 위해 고심하였다. 두 눈을 번득이며 대처방도를 찾던 그들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서 문득 멈췄는데, 그것이 바로 유엔군 사령부다. 왜 하필이면, 존재감도 없는 유엔군 사령부인가? 한반도 평화통일이 촉발하는 동북아시아정세의 대격변에 대응하려는 미국 국방부는 자기의 지배 밑에 두는 동북아시아군사체제의 판을 새로 짤 수밖에 없는데, 그 새로운 판의 중심에 앉힐 것은 유엔군 사령부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 국방부가 새로운 동북아시아군사체제를 수립하려면, 미국군이 주도하고 일본자위대, 캐나다군, 오스트레일리아군, 영국군 등이 참가한 유엔군을 이끌어갈 새로운 지휘통제체계가 필요할 것인데, 유엔군 사령부가 바로 그러한 지휘통제체계로 아주 적합한 것이다. 미국 국방부가 유엔군 사령부를 개편하기 시작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조선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는 것과 더불어 유엔군 사령부도 해체하라고 미국에게 요구하지만, 미국 국방부는 주한미국군을 철수한 이후에 유엔군 사령부가 더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에 유엔군 사령부를 해체할 생각은 없고, 그 대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면서 유엔군 사령부를 일본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다. 해체가 아니라 해외이전이다. 일본에는 미국 국방부가 요즈음 한창 개편하고 있는 유엔군 후방사령부가 있으므로, 유엔군 후방사령부라는 간판을 유엔군 사령부라는 간판으로 간단히 바꿔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미국은 1950년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를 불법적으로 조작하여 일본 도쿄에 설치하였다가, 1957년 7월 1일 그 사령부를 도꾜에서 서울로 옮긴 경험이 있다. 당시 미국은 일본 영토에 배치한 미국군기지들을 무기한으로 사용하기 위해 1954년에 일본과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체결하였는데, 그 협정을 체결하면서 주일미국군 사령관이 아닌 유엔군 사령관을 체결주체로 앞에 내세웠다. 그렇게 체결된 미일주둔군지위협정 제15조에 따르면, 그 협정은 유엔군이 일본에서 철수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일미국군은 유엔군 모자를 쓰고 일본 영토에 무기한으로 주둔한다는 뜻이다. 도꾜 인근에 있는 요꼬다 공군기지, 요꼬하마 인근에 있는 요꼬스까 해군기지, 나가사끼현에 있는 사세보 해군기지, 오끼나와현에 있는 가데나 공군기지와 후뗀마 해병대 항공기지와 화이트 비치 해군기지, 가나가와현에 있는 캠프 자마 육군기지에 미국 국기와 함께 유엔기가 언제나 내걸리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일본 도꾜 인근 요꼬다공군기지 안에 있는 유엔군 후방사령부 청사 정문을 촬영한 사진이다. 주일유엔군 본부라고 영어로 쓴 간판이 내걸렸다. 경기도 평택 미국군통합기지 안에 있는 것은 유엔군 사령부이고, 일본 도꾜 인근 요꼬다공군기지 안에 있는 것은 유엔군 후방사령부라고 알려졌는데, 위의 사진을 보면 유엔군 후방사령부가 아니라 주일유엔군 본부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조선은 미국에게 유엔군 사령부를 해체하라고 요구하지만, 미국은 유엔군 사령부를 해체할 생각은 없고, 장차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때 유엔군 사령부를 일본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때쯤이면 위의 사진에 나온 간판도 바뀔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유엔군 후방사령부는 일본 도쿄 인근에 있는 요꼬다공군기지 안에 있다. 유엔군 후방사령부는 행정, 지원, 연락, 의전 등을 담당하는 비전투사령부다. 비록 지금은 존재감이 없는 비전투사령부이지만, 장차 미국 국방부가 유엔군 사령부를 일본으로 이전하면 유엔군을 지휘하는 핵심거점으로 변신하게 될 것이다. 현재 유엔군 후방사령부 사령관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지휘관 애덤 윌리엄스이고, 부사령관은 캐나다공군 대령 태미 히스콕이다. 

 

원래 미국은 유엔군 사령부를 한국에 두고, 유엔군 후방사령부를 일본에 두면서 유엔군 후방사령부에게 행정, 지원, 연락, 의전 등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장차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게 되면 유엔군 사령부를 일본으로 이전하여 유엔군 사령부와 유엔군 후방사령부를 통합한 새로운 유엔군 사령부를 조작해내고 그것을 동북아시아군사지휘거점으로 삼으려고 지난해부터 획책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국방부는 2018년 11월 말 박종진 1군사령관을 유엔군 후방사령부로 초청하여 유엔기가 내걸린 주일미국군기지들을 둘러보게 하였고, 2019년 1월 30일에는 김태진 외교부 북미국장을 유엔군 후방사령부로 초청하여 유엔기가 내걸린 주일미국군기지들을 둘러보게 하였다. 그들의 방문일정에는 유엔군 사령부 참모장 마크 질렛이 동행하였다. 

 

 

4. 국가적 열패감을 상쇄하려는 일본의 충동

 

4자 평화협정 체결 → 주한미국군 철수 → 남북 군비감축 → 한반도 평화통일 실현으로 이어지는 8천만 겨레의 활로가 동북아시아정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직통로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그런 대격변 속에서 일본이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고 한반도 평화통일이 실현되면 미국이 막대한 안보손실을 입을 것처럼 예상하지만, 그런 예상은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한 채, 철군과 통일을 가로막고 제 잇속만 챙기려는 세력들이 퍼뜨린 허위선전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고 한반도 평화통일이 실현되는 경우, 미국은 잃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미국인들의 귀에 듣기 좋게 꾸며낸 사탕발림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전망이다. 물론 한반도 통일국가는 그 어떤 나라와도 동맹관계를 맺지 않는 중립국으로 될 것이므로, 한반도 평화통일이 실현되면 미국은 한미동맹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한미동맹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으로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하였으므로, 한미동맹을 잃어버려도 그보다 훨씬 더 큰 안보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길이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 흥미로운 문제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위에 서술한 발전경로를 거치며 한반도 평화통일이 실현되는 경우, 동북아시아정세의 대격변 속에서 일본만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예견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이후 일본은 미국에게 종속되어 자기의 안보이익을 구걸해왔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정세가 근본적으로 개편되는 대격변에 자주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종속은 곧 무기력이다. 따라서 4자 평화협정 체결 → 주한미국군 철수 → 남북 군비감축 → 한반도 평화통일 실현으로 이어지는 대격변이 일어나면, 일본의 대미종속은 지금보다 더 심화되어 극도에 이를 것이다. 물론 일본의 대미종속이 더욱 심화되는 것은 미국이 내심 바라는 바다.   

 

하지만 일본은 대미종속을 심화시켜 안보불안감을 해소할 수는 있어도, 국가적 자존심을 버리고 미국의 발밑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대미종속에서 더 심한 열패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대미종속이 심화될수록 일본은 더욱 심한 국가적 열패감에 빠져드는 것이다. 일본은 그런 국가적 열패감을 상쇄해보려는 충동적 발작을 일으키게 되는데, 충동적 발작은 두 가지 증세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는 한국을 깔아뭉개려는 도발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에 미쳐 날뛰는 광란증이다. 

 

일본 극우정권의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면, 한국은 지난날 자기들이 식민지로 짓눌렀던 열등한 존재로 보일 것이며, 오늘에도 자기들이 물리적으로 깔아뭉갤 수 있는 허약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자존심을 심히 훼손하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일본이 던져주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에 눈이 팔린 친일정권은 식민지피해 청구권을 포기하면서 대일국교수립을 구걸하였고, 독도영유권을 포기하는 이른바 ‘독도밀약’까지 맺었으니, 일본 극우정권이 어찌 한국을 업신여기지 않겠는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제관동군 731부대 관련 전범자들인 가도 가쓰야, 사사가와 료이찌, 다께미 다로의 목에 친일정권이 훈장을 걸어주었으니, 일본 극우정권이 어찌 한국을 업신여기지 않겠는가! 해마다 12월 초 서울 한복판에서 정계, 관계, 재계의 친일인사 수 백 명이 집결하여 이른바 ‘천황폐하 탄생 축하연회’를 버젓이 열고 있으니. 일본 극우정권이 어찌 한국을 업신여기지 않겠는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서술한 것처럼, 얼마 전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들이 한국 해군 군함들을 초저공근접비행으로 위협한 것은, 2018년 조미정상회담, 남북정상회담, 조중정상회담을 보면서 동북아시아정세의 대격변을 예감한 일본 극우정권이 자기가 느끼는 국가적 열패감을 상쇄하기 위해 한국을 깔아뭉개려는 흉악한 군사도발연습을 감행한 것 이외에 다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번에 군사도발연습을 감행했으므로, 앞으로는 연습 수준을 넘어선 군사도발을 감행할 위험이 보인다. 날로 심해지고 있는 일본 극우정권의 독도강탈책동은 군사도발위험을 부추기는 자극제가 아닐 수 없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9년 1월 28일 시정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그는 시정연설에서 조일정상회담을 개최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을 깔아뭉개려는 오만방자한 태도다. 동북아시아정세의 대격변을 예감하는 일본 극우정권은 미국에 점점 더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국가적 열패감을 상쇄하기 위해 한국을 깔아뭉개려는 도발망동을 감행하고 있다. 그들의 독도강탈책동이 그런 도발망동이라는 점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식민지강점범죄를 은폐하고, 그 범죄에 대한 사죄는커녕 배상과 보상을 거부하면서, 한국 해군 군함들에 대한 위협비행으로 군사도발까지 감행하려는 것이다. 일본 극우정권은 그런 도발망동과 함께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에 미쳐날뛰는 광란증을 보이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2년 말에 집권한 이후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차츰 낮춰오다가 2019년 1월 28일 시정연설에서는 조일정상회담을 개최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을 깔아뭉개려는 오만방자한 태도다. 

 

동북아시아정세의 대격변을 앞두고, 미국에 점점 더 종속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일본 극우정권은 자기의 국가적 열패감을 상쇄하기 위해 또 다른 충동적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이다. 지금 일본 극우정권은 미일군사동맹을 중시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동북아시아정책에 기대어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을 더욱 가속화하는 대응책, 그러나 실제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무모한 대응책에 매달리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일본 극우정권은 2030년부터 퇴역하게 될 일본항공자위대 F-2 전투기의 후속기종을 독자적으로 생산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미쓰비시중공업을 중심으로 여러 군수기업들이 달라붙어 개발한, X-2라고 부르는 스텔스전투기 시제품이 2016년 4월 22일 첫 시험비행에서 성공하였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정세가 일본 극우정권의 예상을 뛰어넘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다급해진 일본 극우정권은 개발시간이 오래 걸리는 스텔스전투기 독자개발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미국산 최신형 F-35 스텔스전투기를 대량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 F-35 스텔스전투기 42대를 수입하려고 하였던 일본 극우정권은 동북아시아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보면서 조급증에 사로잡힌 나머지 F-35 스텔스전투기 105대를 추가로 수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2) 일본 극우정권이 추가로 수입하는 미국산 F-35 스텔스전투기 105대 가운데 42대는 아주 짧은 거리에서 이륙할 수 있고, 공중에서 전진비행을 멈추고 수직으로 착륙할 수 있는 F-35B이다. 일본이 그런 기능을 가진 F-35B 스텔스전투기를 42대나 수입하려는 것은, 스텔스전투기를 탑재한 항공모함을 보유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일본 극우정권은 2018년 12월 11일 ‘안전보장과 방위력에 관한 간담회’를 총리관저에서 열어놓고 헬기를 탑재하는 이즈모 호위함(이름은 호위함이지만 실제로는 경항공모함)을 스텔스전투기를 탑재하는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하였다.  

 

(3) 일본 극우정권은 10년 주기로 개정되는 이른바 ‘방위계획의 대강’을 2018년 12월 18일 각료회의에서 개정, 채택하면서 사거리가 500km에 이르는 노르웨이산 장거리공대지순항미사일(JSM)과 사거리가 900km인 두 종의 미국산 장거리공대지미사일(LRASM과 JASSM)을 수입하는 계획을 확정하였다. 

 

(4) 일본 극우정권은 2018년 12월 중순에 채택한 ‘2019~2023년 중기방위력 정비계획’에서 무기구입비로 17조엔(169조8,878억원)을 책정하였다. 일본의 군사비 상승률은 2014~2018년에 연평균 0.8%이었는데, 2019~2023년에는 연평균 1.1%로 크게 늘었다. 

 

(5) 일본 극우정권은 2018년 12월 18일에 개정, 채택한 ‘방위계획의 대강’에서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를 통합하는 것은 물론, 우주감시부대, 싸이버방위대, 해상수송대까지 통합하여 이른바 ‘통합기동방위력’을 강화하고, 그것을 일괄적으로 지휘통제하는 통합사령부를 창설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튿날, 미국 국방부 대변인은 일본 극우정권이 ‘방위계획의 대강’을 무력증강과 군비확장에 맞춰 대폭 개정한 것에 대해 지지입장을 밝혔다.   

 

이제는 눈길을 한반도로 돌려 결론을 맺어야 할 차례다. 미국에게 종속되어 미국의 힘을 믿고 날뛰는 일본 극우정권의 온갖 망동에 문재인 정부가 대처할 방도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하며, 남북관계개선을 급속히 촉진시켜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길밖에 없다. 오직 평화통일만이 우리를 질곡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핵무력 완성으로 미국군대를 철수시킨 평화의 강토 위에 위대한 자주통일강국을 건설한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과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치는 날, 그 위세에 눌린 섬나라는 망동을 멈추고 잠잠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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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안 했지만, 더는 명절에 도망다니지 않습니다

[비혼으로 명절나기] 평범한 삶에 속하지 못했지만... 나는 내 선택이 마음에 든다

19.02.04 11:39l최종 업데이트 19.02.04 11:39l

 

'정상가족'이 기준인 한국의 명절 문화에서 비혼은 '천덕꾸러기'거나 '낯선 존재'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비혼 인구가 날이 갈 수록 증가하고, '정상가족'의 틀이 조금씩 깨지면서 새로운 명절문화를 원하는 목소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프로비혼러'들에게 다른 명절의 가능성을 들어봤습니다.[편집자말]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눈치 보지 않고 명절 연휴를 보낸다. '결혼이 늦어져서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쳐야 하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이다.
▲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눈치 보지 않고 명절 연휴를 보낸다. "결혼이 늦어져서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쳐야 하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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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번 추석엔 집에 못 가. 출장 가야 해."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회사에서 새로 맡게 된 과제가 미국의 어느 대학과 함께 작업해야 하는 일이었다. 과제 진행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에 가봐야 했는데, 당시 회사에서 다른 일도 맡고 있어 평일 해외 출장을 쉽게 허락받을 수 없었다.

마침 추석을 앞두고 있었다. 내 명절을 희생하기로 했다. 연휴에는 다들 잠시 일을 멈추니, 그 기간에 잠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회사에 말했다. 사실, 명절 내내 어른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다 출장을 핑계로 그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당시 친척 어른들에게 나는 서른을 넘긴 '노처녀(!)'였다. 고향에 내려가면 친가와 외가의 친척들에게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뻔히 짐작됐기 때문이다.

"이제 직장도 구했으니 남자도 데려와야지."
"결혼은 안 할 거야?"
"더 늙어서 애 낳으면 키우기도 힘들다니까!"
"네가 계속 그러고 있으면, 셋째는 언제 (시집) 가냐?"


명절을 피하는 방법  

고향의 일몰 나의 고향은 일몰이 끝내주게 멋진 서해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 고향의 일몰 나의 고향은 일몰이 끝내주게 멋진 서해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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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리 집 4남매의 큰딸인데, 둘째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다. 당시 주변 어른들이 하도 내 걱정을 하셔서 마음이 불편했다. 큰딸이라 느낄 수밖에 없던 부담이 짜증으로 쌓였던 시기였나 보다. 부모님은 내가 느끼는 부담을 인정하고 별말씀을 안 했는데, 1년에 두 번 만나는 친척들의 걱정을 듣다 보면 화부터 치솟아 오르곤 했다. 만나서 싸우는 것보다 피하기로 결정했다. 연휴 출장을 결정한 이유였다.

 

"언제 가는데?"
"연휴 시작하는 주말에 출발해야 해. 돌아와도 집에 갈 시간은 없을 거야."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전화기 너머의 아빠 목소리에서 걱정과 불만이 느껴졌다. 먼 길을 떠나는 딸이 걱정스럽지만 하필 명절에 집에 오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 게 불만이셨을 테다. 완고한 원칙주의자인 아빠 성격에 혼자 여행을 가는 거면 혼을 내서라도 불러들였겠지만, 회사 일이라니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화를 속으로 삭이신 거다.

어쨌거나 나의 첫 번째 명절 탈출은 회사의 도움으로 그렇게 시작됐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눈치 보지 않고 명절 연휴를 보낸다. '결혼이 늦어져서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쳐야 하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이다. 도리어 집에서 빈둥거리면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결혼 안 한 시누이'로 신분이 전환됐다. 세월이 지나 4남매 중 막내 남동생까지 결혼하면서부터다. 이제 명절이면 고향 집은 그 유명한 '시월드'가 된다.

"애들이 이제 출발했대."
"그래? 늦겠네. 엄마, 음식은 조금만 하자. 애들 오기 전에 끝내자고."
"알았어. 그래도, 일찍 와서 같이하면 좀 좋니."
"됐어. 많이 할 것도 아니면서. 시어머니 노릇 좀 해보려고?"
"그런가? 하하하."


지난 추석이었나 보다. 엄마가 전화를 끊으며 투덜거리신다. 사연을 들어보니 아들네 가족이 이제야 출발했다는 모양이다. 인천에서 고향인 서산까지 내려와야 하는 길이라 막히는 것이 뻔한데도 서운하신가 보다. 우리는 서로가 '홀로 남은 시어머니'와 '결혼 안 한 시누이' 노릇을 할 거냐며 한바탕 웃었다. 사실, 나야 '시누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가족이 된 '며느리'에겐 우리 집이 익숙한 곳은 아닐 테니, 서로가 조금은 조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내 선택이 마음에 든다
 
엄마와 일본 온천여행  설연휴를 틈타 엄마와 함께 일본의 온천에 갔었다. 근사한 료칸에서 대접을 받고 있으려니 엄마도 마음이 놓이셨나보다.
▲ 엄마와 일본 온천여행  설연휴를 틈타 엄마와 함께 일본의 온천에 갔었다. 근사한 료칸에서 대접을 받고 있으려니 엄마도 마음이 놓이셨나보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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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아빠가 먼저 떠나신 후, 우리 가족의 명절은 훨씬 단출해졌다. 아빠가 계실 때는 친척들도 어른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멀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받아들이려 하지만 아빠가 보셨으면 안타까워하시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쓸쓸하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멀어지는 거리 때문에 좋은 점도 있다. 예전 같으면 연휴 동안 집을 비우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다면, 요즘엔 어른들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명절을 보낼 수 있다.

어느 설날엔 엄마와 함께 온천에 다녀왔고, 추석 연휴를 끼고 일주일 동안 라오스 여행을 하기도 했다. 이제 나에게 연휴는 더 이상 불편한 시간이 아니다. 나의 가족들은 내가 마흔다섯의 비혼임을 인정해줬다. 내가 원하는 것들로 명절 연휴 일정을 채워 넣어도 나의 그런 선택을 존중해준다. 내가 명절 때 맡아야 하는 일이 있는데 자리를 비우면, 가족 중 누군가 그것을 기꺼이 대신 맡아준다. 나도 그들의 일을 대신해야 할 때가 온다면, 기꺼이 맡아 줄 준비가 돼 있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자유'는 그동안 우리 가족 모두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 믿는다. 부모님은 당신들이 살아왔던 방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세상에 내보낸 네 명의 아이들은 덕분에 자신의 방식대로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어른이 됐다. 내가 가족의 골칫거리인 '노처녀'로 머물지 않을 수 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른들이 얘기하던 '평범한 삶'에 속하지 못했다. 이십 대에 결혼하지 못했고, 삼십 대에 아이를 낳지도, 학부모가 되지도 못했다. 마흔이 된 주변 친구들이 아이들의 대학 입시로 걱정할 때, 나는 그런 걱정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40대 비혼인 나의 삶은 실패작일 것이다. 누군가는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 독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난 회사에서도 매일 버티는 신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의 내가, 정확히는 나의 자유가 마음에 든다.

"설 연휴에 어디 간다며."

지난주에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가 묻는다. 난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이 59년 만에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보겠다며 UAE행 비행기를 예약해둔 차였다(결국, 대한민국이 8강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여행은 하루 전에 급하게 취소했다). 엄마는 이제 철없는 큰딸이 어디를 가든 크게 걱정하지 않으신다. 가족의 믿음은 내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문이고 든든한 배경이다. 또한, 그들의 믿음이 있기에 나는 삶을 더 잘 살고 싶다.

인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중년을 넘어가면서 나이 듦과 병약해짐에 대한 걱정이 늘어가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지금의 내가 맘에 든다. 늙은 엄마의 걱정거리이거나 우리 집 며느리의 '못된 시누이'가 되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나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모든 것은 내 선택의 결과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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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기 문자’보다 부끄러운 ‘박수환 문자’

자녀취업·명품·의약품까지 받으며 로비스트 한 마디에 기사삭제까지
추락한 언론인의 민낯 보여준 뉴스타파 연속보도…언론계가 응답해야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9년 02월 04일 월요일

‘장충기 문자’보다 부끄럽다. 그만큼 심각하다. 적나라하다. 장충기는 삼성그룹을 총괄하는 핵심인사였지만 박수환은 홍보대행사를 운영하던 일개 로비스트였다. 최근 뉴스타파를 통해 공개된 박수환의 휴대폰 문자파일 속에는 삼성 앞에서 비굴하고 초라했던 언론인들이 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자녀취업·명품·의약품까지 건네받으며 기사거래는 기본에, 로비스트 한 마디에 기사삭제까지 이뤄지고 있었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2015년 6월 이학영 당시 한국경제 편집국장이 박수환을 통해 자신의 딸이 한국GM 인턴에 채용되도록 청탁한 정황이 드러났다. 한국GM 인턴 합격자 발표 날이 2015년 6월11일이었는데 이 국장의 딸 이력서가 GM에 들어간 날은 6월16일 이후였다. 문자에는 ‘선 채용 후 면접’이란 표현도 있었다. 



 

 

▲ 뉴스타파 보도화면 갈무리.
▲ 뉴스타파 보도화면 갈무리.
 
송의달 당시 조선일보 산업부장 딸 역시 한국GM에 인턴으로 채용됐다. GM측이 송 부장 딸의 이력서를 박수환에게 요청한 시점 역시 원서 마감이 9일이나 지난 뒤였다. 당시 송의달 부장은 박수환을 통해 딸의 인턴근무 희망시기까지 지정해 한국GM에 통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채용청탁의혹을 부정했지만 증거는 명확해 보인다.

 

기자들이 직접 박수환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황도 드러났다. 앞서 박수환은 기사 청탁 대가로 송희영 조선일보 주필에게 수천만 원대의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지난해 2월 징역6월 집행유예 1년의 유죄를 선고받은 인물로 현재 또 다른 건으로 수감 중이다. 박수환은 조선일보 주필 외에도 다른 간부들에게 각종 금품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된 송의달 조선일보 산업부장은 파리바게트 등을 운영하는 국내 1위 제빵업체 SPC그룹으로부터 미국 왕복 항공권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송 부장 부녀의 항공권을 SPC그룹이 대신 구매해 박수환에게 전해줬다는 것. 왕복 티켓 비용은 최소 300만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항공권 구입 관련 문자들이 오가기 전인 2015년 4월, 조선일보에는 SPC그룹이 운영하는 파리바게뜨 홍보 기사가 실렸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기사가 나가기 전 SPC그룹 상무와 박수환 사이에 여러 문자가 오갔는데, 여기 보면 조선일보 측이 기사를 싣기 힘들다고 했는데 박수환 부탁을 받은 송 부장이 기사 강행을 결정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기사에 대한 대가성으로 미국 왕복 항공권이 오고갔을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다. 

2014년 2월 당시 해외연수를 앞두고 있던 박은주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 역시 박수환에게 금품을 받았다. 이후 박 부장은 박수환씨가 한 전시회의 소개 기사를 부탁하자 “내일 좋은 시간에 올리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강경희 조선일보 전 사회부장 역시 박수환에게 명품을 선물받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강 부장은 “비판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 

 

▲ 뉴스타파 보도화면 갈무리.
▲ 뉴스타파 보도화면 갈무리.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은 더 심각하다. 그는 박수환을 통해 의사 처방 없이는 구입이 불가능한 전문의약품을 제공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수환은 2013년 3월11일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이사에게 “사장실로 직접 보내드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문자를 보냈고 김 사장은 “헉, 이거 민망한데요”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박수환은 “전문의약품이라 처방전 없이는 못 구합니다. 선수끼리는 기밀성이 최우선입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해당 의약품은 박수환의 홍보고객사였던 동아제약이 제조·판매하는 약이었는데 김 사장이 전문의약품을 받고 보름 뒤 동아일보는 ‘국내 1위에서 글로벌 제약기업으로 변신 하겠다’는 제목으로 동아제약 홍보 기사를 실었다. 김재호 사장측은 “제약회사의 약을 부적절하게 받은 바 없고 문자 내용 또한 아는 바 없다”고 해명했으나 해명보다 증거가 명확해 보인다. 

로비스트 박수환에게 조선일보는 언론사라기보다 영업수단이었다

무엇보다 ‘1등 신문’을 자처해온 조선일보의 기사거래 정황은 낯이 뜨거울 정도다. 조선일보는 기자칼럼 지면을 이용해 박씨를 도운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9월 “크라운 베이커리와 군산 이성당의 차이점”이란 제목의 김영수 당시 조선경제i 대표 기명칼럼에선 파리바게트를 언급하며 정부의 프랜차이즈 빵집 규제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겼다. 박수환은 회사 메일을 이용해 김영수 대표에게 칼럼 원고를 보냈고, 3주 뒤 김 대표는 SPC에 유리한 칼럼을 조선일보 지면에 실었다. SPC는 박수환의 고객사였다.

2014년 7월 조선일보에 게재된 김영수 대표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제목의 칼럼은 CJ 등 대기업 총수 구속으로 경제가 불황이니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담겼는데, 역시 이 칼럼 뒤에도 박수환과 칼럼의 수혜자인 CJ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문자로 드러났다. 

조선일보는 기업청탁원고를 ‘독자의견’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2014년 4월 실린 “한국형 전투기, 빨리 날 수 있게 해야”란 제목의 기고는 양아무개 전 국방대학 교수가 썼지만 기고의 배후엔 GE(제너럴일렉트릭사)가 있었다. 게재 5일 전 조아무개 GE 전무는 박수환에게 기고자 이름과 전화번호를 문자로 보냈고 박수환은 이를 송희영 조선일보 주필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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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박수환이 요구하면 기사를 빼주거나 수정하기도 했다. 2013년 10월 송희영 주필과 박수환이 주고받은 문자의 한 대목은 이러했다.

 

“대우 빼라 했음다”(송희영)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박수환) 

“사회면 톱을 일단 2단 크기로 줄였음다”(송희영) 

뉴스타파는 “송 전 주필이 대우조선해양 관련 기사를 빼도록 조선일보를 움직였고, 신문지면에서도 기사 크기를 축소하도록 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라며 “실제로 이 문자가 오고 간 다음날 조선일보에는 문자내용과 똑같이 대우조선해양 관련 기사가 배치됐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박수환에게 조선일보는 언론사라기보다 고객사를 위한 영업수단이었다. 

 

▲ 2016년 8월22일, 구속되기 전 박수환씨(가운데)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2016년 8월22일, 구속되기 전 박수환씨(가운데)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명백한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위반, 기성언론은 無보도 수준으로 일관

 

 

우리는 일반적으로 언론이 각종 부정청탁을 비롯해 사회 부조리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정작 언론사 간부들이 부정청탁을 받으며 지면을 대가로 금품을 받고 있는 반 저널리즘적인 행태가 이번 ‘박수환 문자’로 드러났다. 언론계로서는 매우 치명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안을 지면에서 보도한 신문사는 뉴스타파가 보도를 시작한 1월28일부터 2월2일까지 단 한 곳도 없다. 온라인에서는 주요일간지 중 한겨레만 인용 보도했다.  

특히 최근 손석희 JTBC대표이사 관련 보도량을 생각해보면 ‘박수환 문자’와 관련해 無보도에 가까운 보도량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손 사장 관련 의혹 보도가 설령 ‘관음증’ 비판을 받더라도 영향력 있는 언론인에게 필요한 도덕성 검증차원에서 공익성이 있다고 본다면, 처방전 없이는 구할 수 없는 의약품을 제공받은 명확한 정황증거가 있는 동아일보 대표이사의 사건은 왜 많은 기자들이 검증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다.

앞서 뉴스타파 보도에 등장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경제 등은 2016년 9월28일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 도입 당시 언론인이 법적용 대상에 포함되자 신문사 경영과 언론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던 언론사들이다. 한국신문협회는 2016년 10대뉴스로 김영란법 도입을 거론하며 이 법을 “신문규제법안”으로 꼽았다. 돌이켜보면 이 법은 ‘기사거래규제법안’이었고, ‘뇌물과 향응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안이었던 셈이다. 이에 비춰봤을 때 대부분의 기성언론이 ‘박수환 문자’를 보도하지 않는 이유는 짐작가능하다. 박수환이 주고 받은 문자는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남을 비판하고 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에 있는 언론인들이 왜 공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투철한 직업의식과 자존심을 모르는 걸까. 무디어진 윤리의식으로 좋은 게 좋다 식의 자기 독선에 빠져 애써 어두운 부분을 외면하면서 받는 금품과 향응 속에 언론인 스스로 자기비하의 길을 걷고 있다.” (1989년 1월20일자 기자협회보 우리의 주장 가운데)

 

30년 전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 슬픈 현실이다. 앞서 권석천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수년 전 김영란법 도입 당시 “직업적 자존심만은 지키겠다는 각성이 이어질 때 김영란법은 성공할 수 있다”고 적었다. ‘박수환 문자’ 관련 보도량을 보면 많은 언론인들이 벌써 칼럼에 담겨있던 시대적 ‘절박함’을 잊어버린 것 같다.  

뉴스타파 보도에 등장하는 언론인들은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2항 공정보도(우리는 뉴스를 보도함에 있어서 진실을 존중하여 정확한 정보만을 취사선택하며,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한다), 3항 품위유지(우리는 취재 보도의 과정에서 기자의 신분을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하지 않으며, 취재원으로부터 제공되는 사적인 특혜나 편의를 거절한다)조항을 위반했다. 

조선일보는 송희영 사태 이후 2017년 12월 노사 공동으로 조선일보 윤리규범을 만들었다. 당시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일단 ‘1등 신문’을 자부하는 조선일보부터 이번 보도에 대해 ‘책임 있는 행동’으로 답해야 할 것 같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6695#csidx25621df1fefb6119bbaf25c685c9d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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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 닥치자, 방 30개 빌려 노숙인에게 제공…미국 30대 여성

혹한 닥치자, 방 30개 빌려 노숙인에게 제공…미국 30대 여성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입력 : 2019.02.03 19:37:00 수정 : 2019.02.03 21:22:09

 

캔디스 페인이 지난달 31일 앰버 인 모텔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카고 트리뷴/AP·연합뉴스

캔디스 페인이 지난달 31일 앰버 인 모텔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카고 트리뷴/AP·연합뉴스

 

미국 시카코에 30년 만의 기록적인 한파가 닥치자 30개의 모텔방을 빌려 노숙인들에게 제공한 30대 여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결정한 일이에요.” 시카고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는 캔디스 페인(34)은 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체감온도가 영하 50도 이하로 떨어진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얼음 위에서 자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뭔가를 해야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앰버 인(Amber Inn)’ 모텔에 연락해서 30개의 방을 1실당 70달러(약 8만원)에 구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당시 시카고의 기온은 영하 25~26도에 달했다. 페인은 신용카드로 객실 비용을 지불한 뒤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노숙인들의 이동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곧바로 승합차와 SUV 등의 차량을 가진 자원봉사자들이 나섰다. 이어 페인의 캐시앱(간편 송금 앱) 계좌에 기부금도 쏟아져 들어왔다. 

페인은 자원봉사자들과 노숙인들이 텐트를 치고 살고 있는 도시고속화도로 주변으로 갔다. 노숙인들은 이곳에서 몇 년째 살고 있었다. 처음에 모텔에 머물게 된 노숙인들은 두 명의 임산부와 다섯 가족이었다. 페인은 세면 도구, 음식, 임신부용 비타민, 로션, 탈취제, 간식 등을 구입해 꾸러미로 만든 뒤 노숙인들에게 제공했다. 음식점들은 노숙인을 위한 음식을 무료로 제공해 주기도 했다. 페인은 지금까지 객실과 기타 비용으로 4700달러(약 526만원)를 썼다고 밝혔다.

페인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앰버 인 모텔의 관리인 로빈 스미스는 “지역 사회 주민들이 모두 캔디스의 행동을 따르기 시작했다”며 “사람들이 서로를 불러모아 익명으로 방값을 지불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노숙인에게 제공되는 방은 30개에서 60개로 늘어났다. 노숙인들은 본래 기온이 다시 오르는 목요일(31일)까지만 머물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1만 달러(약 1120만원) 이상의 기부금이 모이면서 100여명의 노숙인들이 일요일(3일)까지 걱정없이 지낼 수 있게 됐다.

지난주 시카고 지역 기온은 1985년 이후 30여년 만에 가장 낮게 떨어졌다. 혹한이 닥치자 노숙인들은 시민들이 기증한 휴대용 프로판 가스통을 이용해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달 29일에는 가스통 하나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화재 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당국은 노숙인 텐트촌에 프로판 가스통 100여 개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공공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전량 압수했다. 이에 시 당국은 구세군 측에 노숙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가 있는지 문의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페인의 용기가 노숙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 셈이다.

페인은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라며 “이 일이 부자가 한 일로 들리겠지만 나는 남부에서 온 작은 흑인 여성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우리 모두 이 일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페인은 “이번 일은 일시적인 해결책이었지만 영구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도록 영감을 줬다”며 시카고의 노숙인들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법도 모색하는 중이다. J. B. 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도 페인에게 전화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주지사는 “이 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가장 큰 선행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2031937001&code=970201#csidx36b331edca0c7508c2f0917d4df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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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사법농단 피해자는, 설이 없다

[포토스토리] 13년차 맞은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
2019.02.03 22:26:43
 

 

 

 

삶은 오르막길이었다. 길은 거칠고 날씨는 궂었다. 해고자들은 거리에 눕고, 고공에 오르고, 밥을 끊어가며 싸웠다. 숱한 갈등과 회한과 우울과 무기력감에 시달렸고, 긴 세월 위에서 하나 둘 떠나는 동료의 등을 지켜봐야 했다. 부당함은 명백했지만 그것을 되돌리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어느새 머리가 하얗다. 정년의 나이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복직을 기다린다. 복직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에게 복직은 그 이상의 의미다. "명예롭게 복직해서 명예롭게 퇴직하겠다". 정년을 맞은 해고자의 말이다.  

 

긴 세월이 앗아간 것은 셀 수 없지만 의미 없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삶에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고마운 사람들과 숱한 빚을 지고 갚았다. 잃은 것들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 이유다.

 

참으로 긴 시간. 이제는 정말 끝내고 싶다. 최장기 투쟁 사업장이라는 불명예도 내려놓을 때가 됐다. 늦었지만 전직 대법원장의 구속으로 석연찮던 판결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장기 투쟁 사업장들이 속속 노사 합의로 농성을 끝내는 요즘 이들도 오래 묵은 축하를 받고 싶다. 

 

2007년 4월 시작된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싸움이 12년, 햇수로 13년차를 맞았다. 콜텍 해고자들은 ‘끝장 투쟁’을 선언하고 10일 광화문의 천막을 콜텍 본사 앞으로 옮겼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이후 '사법 농단'의 피해자이기도 한 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천막을 들여다 봤다.  


 

 

▲ 싸우다보니 정년의 나이가 됐다. 그는 말한다.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30일 금속노조 집회에 참석한 김경봉 씨. ⓒ프레시안(최형락)

 

 

 

 

 

 

▲ 지난해부터 많은 장기 투쟁 사업장들이 노사 합의로 투쟁을 끝냈다. '최장기 투쟁'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콜트콜텍의 해고자들 역시 이제는 축하를 받고 싶다고 말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콜트콜텍 사태가 길어진 배경에는 이른바 '사법 농단'도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24일 구속됐다. ⓒ프레시안(최형락)


 

 

 

 

 

 

▲ 58년생 김경봉 씨 ⓒ프레시안(최형락)




 

▲ 임재춘 씨가 30일 열린 금속노조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날 이른 아침 천막을 찾았다. 임재춘 씨의 첫 마디는 "너무 늦었다"였다. ⓒ프레시안(최형락)


 

 

 

 

 

▲ '정년이 되기 전에 복직'이라는 말이 쉽지 않다. 정년이 다 되도록 싸웠다는 말이기도 하고 복직해도 얼마 일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복직을 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명예롭게 퇴직하기 위해서' ⓒ프레시안(최형락)

 

 

 
 
 
 

▲ 서울 강서구 등촌동 콜텍 본사 앞 ⓒ프레시안(최형락)

 

 

 

 

 

 

 

▲ 30일 콜텍 본사 앞에서 열린 문화제. 바나나몽기스패너, 윙크차일드태퍼스 등이 공연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콜텍 본사 앞 천막의 비닐에 물방울이 맺혔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장. 그는 2008년 10월 양화대교 옆 송전탑에 올라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12년이 어떤 시간이었느냐는 물음에 김경봉 씨는 느끼고 생각한 바가 많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최형락 기자 chr@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9년 입사. 사진기자로 일한다. 취재 중 보고 겪는 많은 사건들에서 어떤 규칙성을 발견하며 놀라곤 한다. 전시 <두 마을 이야기>(2015), 책 <사진, 강을 기억하다>(2011, 공저).
 

 

 

 

 

▲ 30여년 기타만 만들어온 임재춘 씨가 13년째 거리에 서 있다. 이제는 정말 끝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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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입사. 사진기자로 일한다. 취재 중 보고 겪는 많은 사건들에서 어떤 규칙성을 발견하며 놀라곤 한다. 전시 <두 마을 이야기>(2015), 책 <사진, 강을 기억하다>(2011,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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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미 특별대표, 4일 정의용 안보실장 면담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2/04 09:16
  • 수정일
    2019/02/04 09:16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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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판문점서 김혁철 북 대표와 ‘비핵화-상응조치’ 논의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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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04  0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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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3일 오후 한국을 방문했다. 남북 당국자들과 연쇄 회동을 통해 다가오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3일 밤 외교부는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오늘 방한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특별대표와 북미 후속 실무협상 등 현안에 관해 협의를 가졌으며, 향후 추가 협의를 지속적으로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비건 특별대표는 4일 오후 청와대를 방문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만난다.   

5일 판문점에서는 북한 국무위원회 소속 김혁철 대표와 실무회담을 개최할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지난달 17~19일(현지시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의 워싱턴 방문 때 상견례를 겸한 첫 실무회담을 개최한 바 있다. 

실무회담 의제와 관련, 비건 특별대표는 지난달 31일 스탠포드대 강연에서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명시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관련 이행 로드맵을 짜고, ‘공동성명 초안’에 담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 조치가 관건이다. 

지난해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은 △5월말에 폐기한 풍계리 핵실장에 대한 유관국 전문가 참관, △유관국 전문가 참관 아래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 및 미사일 발사대 영구 폐기를 약속했다. 

북한은 또 미국의 상응조치를 조건으로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를 포함한 추가적 비핵화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상응조치로는 인도적 지원 재개와 평양 연락사무소 개설, 종전선언이 꼽힌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명시된 관계 개선, 평화 구축 관련 조치들이다. 지난달 31일 비건 특별대표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 전쟁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상응조치 중 난제는 제재 완화 여부다. 지난해 9월 남북 정상 간 평양공동선언에 명시됐고,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거론한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재개와 직결된 문제다. 비건 특별대표는 “우리는 ‘비핵화가 완료될 때까지 제재를 해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맞다”면서도 “‘당신이 모든 걸 할 때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여지를 남겼다.  

제재 완화의 폭은 영변 핵시설 관련 조치의 수준과 맞물릴 것으로 보인다. 영변에는 연료봉공장-5mw 원자로-재처리시설로 이어지는 플루토늄 생산시설과 원심분리기 2,000개 이상으로 구성된 우라늄농축시설 등이 있다. 

2007년 북한은 ‘2.13합의’를 통해 영변 핵시설을 폐쇄(shutdown)하고, ‘10.3합의’를 통해 불능화(disablement)한 바 있다. 당시 영변에는 우라늄농축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영변은 북한 핵 프로그램의 중심이고, 폐기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미군 유해 추가 송환이나 공동 발굴, 평양 보통강변에 전시 중인 미국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 반환을 약속할 수도 있다.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북한 친선예술단이 미국에서 공연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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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기다립니다” 설 명절 앞두고 학교 밖으로 쫓겨난 청소년상담사들

화성시, 2018년 12월31일 일방적 계약종료...해고된 인원만 40명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9-02-03 11:01:45
수정 2019-02-03 11: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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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계약종료로 해고된 화성시 학교 청소년 상담사들이 경기도 교육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
일방적인 계약종료로 해고된 화성시 학교 청소년 상담사들이 경기도 교육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김화민 제공
 

설 명절을 앞두고 화성시 학교 청소년 상담사 40명이 무더기로 해고됐다. 지난해 12월 31일 일방적인 계약 종료로 해고된 청소년 상담사들은 학교 밖으로 쫓겨났다. 이들은 설 연휴 첫날인 3일에도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39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해 8월부터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중학교에서 청소년 상담업무를 맡아 근무했던 김화민 씨는 졸지에 해고자가 됐다. 그는 많게는 5~6년, 짧게는 3년 가까이 일하던 상담사 가운데에서 막내다. 화성시에 있는 초·중·고에 있는 40개 학교의 청소년 상담사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는 상담교사 또는 전문상담사가 배치되지 않은 중학교에서 학생 심리상담업무를 진행해 왔다. 상담은 보통 한 시간 정도로 진행되며 하루 평균 5건의 상담을 진행했다. 그는 학생들이 상담을 자발적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경우에 따라 담임교사와 학생부에서 학생 상담을 요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작년에 상담 건수가 500건 나왔다"며 "많은 선생님 중엔 1000건 넘는 선생님도 있다"고 말했다. 

"상담실에 문을 열고 들어와 자해를 하는 아이도 있고, 친구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존재하지 않는 친구를 만드는 망상 장애 학생도 있어요."  

김 씨는 "학교 현장에서는 선생님만으로 커버할 수 없는 교실 안 사각지대에 학생들이 존재한다"며 "아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상담실"이라며 상담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해고됐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며, "인터넷에서 기사 보고 알게 된 친구들이 '선생님 관두면 자기는 비뚤어질 거다'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너 비뚤어진다고 걱정할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라고 농담삼아 말했죠. 마음이 아팠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이 상담사 선생님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문 상담가들이 학교 두곳을 맡아 순회 상담을 하는 곳이 많아 실질적으로 상담이 어려운 상태"라며 "자해와 자살, 우울과 불안, 학교폭력 등과 관련해 상담을 필요로 하지만, 상담사들은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빈 교실의 모습. 사진과 내용은 무관합니다.
빈 교실의 모습. 사진과 내용은 무관합니다.ⓒ제공 : 뉴시스

경기도 교육청과 화성시는 2012년 혁신교육지구 사업을 위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했다. 이 협약에는 시에서 예산을 지원하고 학교에서 상담사를 직접 선발해 학교장과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2015년 사업 2기를 진행하며, 근속 기간 2년 초과자들은 경기도교육청 소속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2년 미만, 만 2년 근무자들은 계약이 종료되며 대량 해고됐다.

이후 경기도교육청이 학교장 고용을 금지했고, 화성시는 학생 보호와 상담사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해 위탁 형식으로 해당 사업을 지속했다. 2016년엔 YMCA를 위탁기관으로 선정해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 재위탁하는 방식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상담사들은 상시지속업무를 하면서도 1년에 한 번씩 계약 해지와 재계약을 반복해야 했다.  

또한 그는 2016년 3월 28일부터 2017년12월 31일까지 1년 9개월 '쪼개기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시측이 2016년 1월1일부터 계약하는 경우 정규직 전환 조건이 되는 '만 2년'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상담사들은 2016년 1월1일부터 3월28일까지 약 3개월 동안 강제적 실직 상태에 놓여 고용불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화성시가 2017년 말 위탁기관을 청소년불씨운동으로 바꾸면서, 상담사들은 기간을 지난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계약하게 됐다.  

화성시에서 학교에 보내온 공문
화성시에서 학교에 보내온 공문ⓒ민중의소리

김 씨는 이같은 '쪼개기'가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한 '꼼수 계약'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 측이) 2019년부터는 1년 계약이 아닌 10개월 계약을 주장하자 상담사들이 이의를 제기했다"면서, "'2년 근무 연장 대신 각서를 쓰라'고 요구해 상담사들이 항의했더니, 결국 12월 31일 사업종료 시켰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11월 12일, 화성시에서 보낸 사업 종료 공문이 학교에 내려왔다. 날벼락 같은 해고 통지였다. 그는 "당시 상황이 믿기질 않았다"며 "아이들이 지금 정신적으로 (상담이) 너무 필요한데 이게 말이 되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고 말했다.  

이어 "1천만원 이상을 들여서 상담실을 만들어 놓고, 상담실엔 사람이 없고 학생들이 상담을 못 받는 현실이 말이 되나. 학교가 필요로 하는데 그걸 없앨 수 있나 이런 생각을 했다"면서 "교육청이나 시청 하는 거 보면 노동자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는 거 같다"고 지적했다.

계약종료로 해고된 화성시 학교 청소년 상담사들이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오체투지를 하는 모습.
계약종료로 해고된 화성시 학교 청소년 상담사들이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오체투지를 하는 모습.ⓒ김화민 제공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상담사들은 학교 밖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해고는 살인이다, 고용안정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항의 행동에 돌입했다. 상담사들은 1월 11일과 24일 두 차례 차가운 아스팔트에 온 몸을 누이고 행진하는 오체투지를 벌였다. 하지만 경기도교육청과 화성시는 사태해결을 위한 책임 있는 조치를 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화성시 측은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사업종료가 됐다"면서 "다른 방향을 저희가 모색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그분들이 저희 근로자가 아니지 않냐"면서 "시에서 채용해서 학교로 보낸 분들인데 저희가 관리하고 그랬던 분들이 아니다. 지금 거기 담당자가 누구다라고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한편, 설 연휴에도 청소년 상담사들의 농성은 이어진다. 김화민 씨는 "일을 쉬는 것도 정말 지옥 같다"며 "가족들을 만나는 기분 좋은 설이 오히려 불안하고 피하고 싶다. 어디라도 도망가고 싶다"라며 편치않은 심정을 털어놨다.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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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부과방식으로 가면 된다고요?

[오건호의 연금개혁 완전정복] 부과 방식 전환의 역설
 
2019.02.03 10:32:31
 
 

 

 

 

<1회> 문재인 정부 연금안 평가 : 재정 개혁 방기
<2회> 국민연금 재정 계산 : 70년 계산 믿을 수 없다?
<3회> 국민연금의 특징 : 미래 재정 불안정
<4회> 국민연금의 재정 목표 : 재정 균형
<5회> 외국에서 연금 재정이 안정적인 이유
<6회> 국민연금의 부과방식 전환, 가능한가?
<7회> 국민연금의 역설 : 재분배 vs. 역진성
<8회> 기초연금의 강점 : 사각지대 없는 노인 기본소득
<9회> 퇴직연금의 잠재성 : 중상위계층 노후 소득 보장
<10회> 연금 개혁 대안 : 한국형 다층 연금 체계

 

연금 개혁의 방안을 살펴보자. 물론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국민연금은 재정불균형이 크고 향후 인구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전문가 사이에서도 백가쟁명식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이다. 그런 만큼 국민연금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각 개혁안의 타당성을 엄격히 검증해야 한다.  
 
국민연금 미래 재정구조의 방향은? 
 
이번 글의 주제는 국민연금 논의에서 긍극의 해법으로 등장하는 '부과 방식 전환'이다. 연금 재정 구조는 크게 적립 방식과 부과 방식으로 구분된다. 적립 방식은 퇴직연금처럼 가입자가 나중에 받을 연금액을 미리 보험료로 적립해두는 재정 구조이다. 받을 만큼 쌓아두기에 기금운용에서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재정은 안정적이다. 사적 연금은 당연히 적립 방식으로 제도를 운영한다. 
 
부과 방식은 그해 필요한 지출을 그해 가입자(혹은 시민)에게 부과하는 재정 구조이다. 그때마다 재정을 조달하니 굳이 적립금을 보유할 필요가 없다. 예비비 성격으로 몇 년치 지출분만 지니고 있으면 대체로 부과 방식으로 불릴 수 있다.  
 
서구 공적 연금은 대부분 부과 방식 재정구조로 운영된다. 대표적으로 독일 소득비례연금은 현재 보유한 기금은 한 달치 지출분에 불과하다. 이 기금은 현금 유동성을 조정하는 역할에 그치고 수급자에게 지급하는 연금 재정은 매달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로 충당한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어디에 속할까? 미래 받을 연금을 대비해 보험료를 쌓아두니 일단 부과 방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래 받을 연금액만큼을 모두 적립하지 않는다. 평균 소득 가입자의 평균 수익비, 즉 급여/기여 배율이 2.1배이기에(기금수익률 할인, 40년 가입 기준), 급여 대비 절반만 보험료로 내고, 나머지 절반은 미래 세대에게 의지하는 구조이다. 언젠가는 기금이 소진되겠지만, 현재는 연금의 역사가 짧아 가입자가 많기에 기금이 상당히 쌓여 있다. 이에 연금학계에서는 국민연금을 '부분 적립 혹은 수정 적립' 재정 구조라고 부른다. 
 
이러다 보니 국민연금 재정 구조의 미래 전망을 두고 논란이 생긴다. 계속 지금처럼 부분 적립 방식으로 갈지, 기금이 소진된 후 부과 방식으로 전환할지, 혹은 받을 만큼 보험료를 모두 내 완전 적립 방식으로 갈지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국민연금의 미래 재정 구조의 방향에 대해 본격적인 토론이 진행된 적은 없다. 부과 방식 전환 역시 서구 사례가 소개될 뿐, 한국 국민연금의 이행 경로가 구체적으로 제시된 경우는 없다. 이렇게 연금 개혁 대안을 막연한 기대 수준에서만 되풀이하는 건 생산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지금의 과제를 뒤로 미루는 효과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부과 방식 전환'의 의미와 타당성을 엄격히 살펴봐야 할 때이다.
 

ⓒ연합뉴스

 
부과 방식, 아름다운 세대 간 연대  
 
나는 공적 연금에서 '부과 방식' 제도들을 볼 때마다 감동을 느낀다. 인류가 만든 여러 제도 중에서 부과 방식 연금은 세대 간 연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수십년에 걸쳐 부과 방식을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 그 시민들을 존경한다. 
 
2016년에 유럽 나라들의 노인 비중은 평균 20%이다(한국은 2017년 노인 비중 14%, 2025년 20% 전망). 공적 연금이 부과 방식이라는 건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후를 위해 보험료를 쌓아두지 않고 지금 노인을 위해 모두 사용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면 지금 보험료를 내는 가입자의 노후는 누가 책임지지? 무엇을 믿고 보험료를 현재 노인을 위해 모두 사용해 버린다 말인가? 사회복지 분야에서 우문같지만 이는 무척이나 중요한 질문이다. 바로 '믿음'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늙었을 때 연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세대 간 믿음, 부과 방식 연금제도는 이렇게 그 사회의 신뢰와 연대를 보여준다. 
 
어떻게 서구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물론 2차 대전 이후 경제, 인구 환경이 공적 연금이 성숙되기에 유리했다. 부과 방식으로 전환했던 경제가 순조롭게 성장하는 자본주의 황금기였고 노인의 기대 여명도 지금보다 짧았다. 그럼에도 내가 주목하는 이유는, 각 세대가 공적 연금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자신의 책임 몫을 성실히 다한 결과라는 점이다. 
 
서구 나라들에서 공적 연금은 길게는 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다. 처음 시작할 때는 대체로 대체율과 보험료율이 모두 낮았다. 이후 노후 보장의 중요성이 부상하면서 점차 '더 내고 더 받는' 연금 개혁을 추진하였고, 어느 시점이 되어선 대부분의 나라에서 굳이 보험료를 쌓아두지 않는 부과 방식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부과 방식 사례인 독일 공적 연금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연금기금을 전시자금으로 전용해 소진하자 1957년부터 1967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재정 구조를 부과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 전환 기간 보험료율은 14% 수준이었고 이후 1980년까지 18%로 단계적으로 인상해 현재까지 18~20% 범위에서 운영되고 있다.  
 
국민연금을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자? 
 
우리나라도 서구처럼 부과 방식으로 국민연금을 운영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미래에 국민연금기금이 소진되면 국민연금을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부과 방식은 이미 연금 선진국에서 무난하게 운영되고 있고, 세대 간 연대를 잘 보여주는 제도이기에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근래 등장한 부과 방식 관련 논의들을 살펴보자. 우선 2013년에 진행된 제3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에서 공식적으로 '부과 방식 전환'이 제시되었다. 당시 제도 개혁 방안을 담당한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는 국민연금 재정 개혁 방안으로 복수안을 내놓았다. <1안>은 '적립배율 2배 재정 목표'를 위해 보험료율을 12.9%로 인상하는 방안, <2안>은 기금 소진은 부과 방식 전환을 의미한다며 재정 목표를 '부과 방식으로의 연착륙'을 제안했다. <2안>에 의하면 기금수입이 지출보다 많은 2043년까지는 국민연금 재정이 최소한 위기라고 볼 수 없기에 당장은 보험료율 인상이 불필요하다. 
 
- 기본 방향: 기금 과다 적립 및 기금의 급격한 소진을 피하면서 부과 방식으로 연착륙(soft landing)
- 개선 방안: 현행 보험료율은 유지하되, 보험료율을 장기적으로 안정화시키는 포괄적 대책 집중 강구

이번 4차 재정계산에 따른 연금 개혁 논의에서 참여연대도 비슷한 내용을 펼친다. 애초 국민연금은 기금이 소진되도록 설계했기에 점진적으로 기금을 줄여 부과 방식으로 전환해 가자는 취지이다.  
 
"국민연금은 도입 당시에 본래 기금이 소진되는 것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국민연금제도가 성숙하면서 지나치게 많이 쌓인 기금이 점차 줄어들고, 매년 걷는 보험료와 세금으로 연금을 지급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참여연대, '적정 노후소득보장을 위해 국민연금이 나아가야 할 방향 : 참여연대 연금개혁안', 2018년 12월 31일)
 
한편 작년 12월에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제4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을 바탕으로 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에도 부과 방식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정부는 4개의 연금개혁안을 제안한 후에 "장기적인 공적 연금 개혁 방향"을 다루면서 사실상 '부과 방식 전환'을 의미하는 미래 국민연금 재정 곡선을 제시한다.  
 
<그림 1>은 현행 국민연금기금이 소진되기 얼마 전부터 연금 개혁이 진행돼 매우 작은 적립금을 유지하는 '장기 개혁 방향'이다. 연금 재정 구조에서 작은 적립금은 예비비 성격을 지니기에 <그림 1>은 사실상 부과 방식 재정 구조로 평가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순 없지만, 아직 부과 방식 전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미래 연금 개혁 방향으로 부과 방식 그래프를 제시한 건 다소 파격적이다.
 

ⓒ프레시안(이한나)

  
처음부터 국민연금은 부과 방식을 전망하고 설계했다?
 
내 주변을 보면, 친복지 경향의 사람일수록 '부과 방식 전환'을 선호하는 듯하다. 부과 방식이 지닌 '아름다운 연대'를 주목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부과 방식 전환을 둘러싼 논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정말 국민연금이 부과 방식 전환을 염두에 두고 도입했을까? 또 하나는 앞으로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려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할까? 
 
우선, 국민연금이 부과 방식을 전망하고 설계된 것인지 살펴보자. 1988년 국민연금이 시작되었다. 당시 설계도는 소득대체율 70%, 보험료율 9%였다(보험료율은 3%에서 시작해 1998년 9% 예정). 이는 수지 균형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후한 설계이다. 당시 소득대체율은 성숙 단계에 접어들어 높은 서구의 수준을 반영했지만, 보험료율은 급여 수준에 비해 무척 낮게 책정했다. 대체로 연금 도입 시점에는 가입자의 제도 순응성을 높이기 위해 보험료율을 낮게 설정한다 해도 국민연금의 경우는 그 격차가 컸다. 이러한 재정 불균형 구조에서는 언제가 기금이 소진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금 소진을 예상하고 미래 부과 방식 전환을 염두에 둔 설계라는 추측이 생길 수 있다. 
 
당연히 '저부담 고급여' 구조에서 제도를 그대로 놔두면 언제가 기금이 소진될 것이다. 국민연금 설계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이들은 향후 기금 소진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재정 안정화 조치를 동시에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연금을 설계하고 도입에 큰 역할을 한 기관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다. 국민연금 시행 2년 전인 1986년 발간된 KDI 보고서 <국민연금제도의 기본 구상과 경제사회 파급효과>를 보자. 보고서는 앞으로 도입되는 국민연금에서 기금이 2033년에 정점에 도달하고 2049년에 고갈될 것이라 전망했다. 실제 2003년 진행된 제1차 재정 계산 결과(2047년 기금 소진)와 거의 같은 예측이다. 또한 보고서는 기금이 소진되면 필요 보험료율이 21.5%이 되어야 하므로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2010년대에 보험료율을 12.5%로 인상하고 2020년대부터 15%로 올리는 방안을 검토했다. 1988년 한국인구보건연구원 국민연금연구팀이 낸 <국민연금 확대방안 연구> 보고서의 결론도 비슷하다.  
 
국민연금이 시행된 이후에도 비슷한 보고가 계속되었다. 1992년에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국민연금관리공단이 함께 개최한 <국민연금 확대와 재정안정방안에 관한 세미나>는 2039년 기금 고갈을 예상하며 기금운용의 고수익률 추구, 수급연령의 65세 연장, 보험료율의 단계적 인상 등의 재정안정화 방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연구 내용을 보면, 국민연금 설계자들은 제도 도입 당시에 이미 미래 재정 불안, 기금 소진을 예견했고 또한 단계적인 재정 안정화 조치를 제안하고 있다. 이는 국민연금 기금이 소진된 후 부과 방식 전환을 지향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1998년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5년 주기 재정 계산과 재정안정화 조치'가 법제화되었다. 이는 사실상 기금이 소진되지 않도록 급여 수준에 부응하는 보험료율 개혁을 취하라는 의미이다. 결국 국민연금이 도입될 당시에도 그랬고, 현행 국민연금법 조항까지 감안하면, 국민연금이 부과 방식 전환을 염두에 둔 제도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한 조건: 전환 앞뒤 가입자의 부담 형평성
 
물론 중요한 건 앞으로 우리의 의사결정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국민연금을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는 논의를 할 수 있다. 문제는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한 조건이다. 아무리 부과 방식이 아름다운 제도이고, 다른 나라가 시행하고 있다 해도,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바로 전환 앞뒤 재정 부담의 형평성이다.
 
국민연금기금이 소진되는 2057년에 부과 방식으로 전환한다고 가정하자. 제4차 재정계산 결과에 따르면, 연금 지출을 모두 보험료로 충당하는 부과 방식 필요보험료율이 26.5%에 달한다. 당시 가입자들은 이전 가입자들과 비교해 동일한 소득대체율을 적용받으면서도 3배의 보험료를 내야 한다. 이들에게 이 보험료를 납부하라고 권할 수 있을까? 당신이 그 때 청년이라면 이 제도를 순순히 수용하겠는가? 
 
이에 대해 반론이 제기된다. 미래 국민연금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후세대 부담의 적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지표는 보험료율 수준이 아니라 연금 지출 규모라는 주장이다. 미래 국민연금 지출 규모가 현재 유럽 나라들의 연금 지출 규모와 비슷하니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즉 "(지금 서구와 비슷한 규모의) 연금 지출이 미래 세대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어 미래 세대를 경제적 파국으로 이끌 것이라는 '세대 간 도덕질'이 설득력이 없다"는 비판이다.  
 
나의 계산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의 공적연금 지출은 총 국내총생산(GDP)의 3.3%, 2060년 즈음에는 대략 GDP 12% 수준으로 추정된다(기초연금, 특수직역연금 포함), 국민연금만 보면, 2018년 지출은 GDP 1.3%에 불과하지만 2060년에는 8.9%에 이른다. 
 
또한 지금 유럽 나라들은 미래 우리 수준의 연금 지출을 감당하고 있다. 2016년 기준 유럽나라들이 평균 공적 연금 지출이 GDP 12.3%에 달한다. 그리스(17.3%), 이탈리아(15.6%), 프랑스(15.0%) 등은 15%가 넘는다.  
 

ⓒ프레시안(이한나)


물론 한국의 미래 세대도 지금 서구만큼의 경제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런데 미래 세대의 경제력과 이들의 제도 수용 여부는 사실 별개의 주제이다. 여기서는 경제력보다는 형평성이 논점이다.  
 
국민연금이 현행 방식에서 그대로 부과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세대별로 책임져야 할 재정 몫의 차이가 너무 크다. 부과 방식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 차이가 다음 세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여야 한다. 부과 방식 전환의 관건은 우리가 그러한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지금 그러한 방향으로 연금 개혁을 진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미래 연금 지출 규모 비교가 현재 우리의 책임을 면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부과 방식 연금의 도전, 인구구조의 초고령화 
 
부과 방식 운영에 큰 영향을 주는 인구학적 조건도 만만치 않다. 부과 방식은 노인 비중이 높을수록 약속된 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당시 세대의 보험료율이 높아지는 구조이다. 한국의 경우 서구나라가 부과 방식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비해 고령화 수준이 매우 높다. 미래 인구구조 전망에서도 한국은 서구에 비해 노인 비중이 높다고 전망된다. 2050년 노인부양비가 72.4%로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53.2%보다 높다(여기서 노인부양비는 2064세 인구 대비 65세 인구 비중이다). 
 
이러한 인구 전망에서는 국민연금이 부과 방식 전환한 직후 필요 보험료율이 높게 나오고, 이로 인해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한 앞뒷세대 보험료율 격차도 커진다. 서구와 비교하면, 현재 국민연금은 제도 내부의 수지 격차가 큰 문제와 함께 미래 인구 구조에서도 부과 방식 전환에 무척 불리한 조건에 있다. 지금의 인구구조의 개선이 필요하고, 동시에 미래 세대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일정한 적립금을 유지할 필요성이 오히려 제기되는 상황이다. 실제 서구 몇 나라에서는 이러한 취지에서 적립금을 일부 확보하는 방향으로 연금 개혁을 진행하기도 한다. 
 
부과 방식 전환의 역설, '부과 방식으로 가려면 보험료율 인상해야'
 
다소 완화된 부과 방식 전환도 제안된다. 아무래도 기금 소진 시점까지 그대로 놔두는 건 곤란하니 기금이 최대로 오른 후 줄어드는 시점부터 보험료를 올리면서 서서히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이다. 앞의 주장에 비해 보험료 인상 시기를 앞당기니 나름 책임 있는 제안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막연하다. 기금 적자 시점부터 어느 정도 보험료를 올리자는 것인지 구체적 이행 경로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략의 참고를 위해서 제4차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에서 나온 재정안정화 '가'안을 살펴보자. '가'안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45%로 인상하고 보험료율도 9%에서 11%로 올린다. 이 때 보험료율 인상분은 소득대체율 인상에 따른 것이므로 기존 국민연금 40%/9%의 재정불균형은 그대로 존재한다.  
 
'가'안이 재정안정화 조치를 취하는 건 앞으로 15년 후인 2034년부터이다. 이때 보험료율을 11%에서 12.3%로 조금 인상하고 이후에는 재정 계산마다 '30년 적립배율 1배' 재정 목표에 따라 보험료율을 조정한다. '가'안의 논리에 따르면, 기금 소진시점을 2088년으로 늦추기 위해서는 보험료율이 2034년에 12.3%로 시작하지만 2048년에 20.2%, 2058년 23.9%로 급격히 올라야 한다. 국민연금기금이 적자로 돌아서기 이전부터 재정안정화 조치를 취하더라도 지금부터 15년 동안은 보험료율을 그대로 놔둔 까닭에 보험료율 인상 경로가 가파른 편이다.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제4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을 바탕으로 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 요약본" 18쪽에 '가'안이 소개돼 있다. 하지만 필요재정을 '보험료율 상한 18% + 기타 재정안정 수단' 으로 설명해 보험료율 기준 최종수치 23.9% 정보는 담겨 있지 않다. 보건복지부가 연금개혁에 필요한 수치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지 않는 사례이다.)
 
결국 부과 방식 전환을 제안하면서 지금 보험료율 인상에 소극적으로 임할수록 향후 보험료율 인상 폭은 크고 가파르다. 부과 방식 전환을 주장하며 재정 안정화 개혁을 미룰수록 오히려 부과 방식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절벽은 높아지는 '한국식 부과 방식 전환의 역설'이다. 
 
국민연금 부과 방식 전환, 21세기에 현실화 어려워 
 
국민연금에서도 부과 방식 전환이 가능하다. 경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득대체율 인하이다. 소득대체율 인하는 미래 필요 보험료율 수준을 낮추기에 부과 방식 전환 전후의 재정 부담의 차이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부과 방식 전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하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이 방안은 현재 논의의 대상이기 어렵다.
 
또 하나의 길은 현행 소득대체율을 유지하면서 지금부터 단계적으로 보험료율을 올려 부과 방식 필요 보험료율과 격차를 줄이는 방안이다. 이후 어느 시점에서 보험료률 차이가 미래 세대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라고 판단되면 그때부터 보험료율을 유지하거나 아주 조금씩만 올리면서 점진적으로 기금을 줄여나갈 수 있다.  
 
나 역시 긍극적으로는 부과 방식에 매력을 느낀다. 미래 인구 환경을 감안해 적립금을 일부 지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연금 재정 구조에서는 부과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올려가야 한다. 부과 방식 대안이 현단계 연금 개혁을 회피하는 논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정녕 부과 방식 국민연금을 원한다면 지금부터 우리 세대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 방식에서는 우선 보험료율이 오르므로 당분간 기금은 더 늘어난다. 결국 한국에서 부과 방식 전환은 21세기에는 현실화되기 어려운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이 부과 방식 전환에 주는 영향을 생각해 보자. 이 부과 방식 전환과 관련을 맺는다. 정부의 연금개혁안에는 보험료율 인상안도 존재한다. 이는 소득대체율 인상을 충당하는 보험료율 인상이다. 미래 재정안정화의 의미를 지니지 않기에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한 보험료율 격차를 개선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험료율 인상 몫을 소득대체율 인상을 위해 사용해 버리면 앞으로 부과 방식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보험료율 절벽은 더 높아져 버린다.  
 
그래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연금 보장성 강화는 국민연금을 넘어 기초연금, 퇴직연금을 포괄하는 다층연금체계에서 모색하고, 국민연금 보험료율 카드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활용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하는 이유이다.
 
이미 부과 방식 연금 존재한다 : 기초연금 
 
정말 한국에서 내 생애 동안 부과 방식 연금을 접할 수 없는 걸까? 이미 우리 곁에 부과 방식 연금이 운영되고 있다. 바로 기초연금이다. 기초연금은 매해 노인에게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부과 방식 연금이다. 2019년에 약 540만 명의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약 15조 원이 필요하다. 얼굴도 모르는 노인들을 시민들이 부양하는 아름다운 연대 제도이다. 또한 내가 늙었을 때도 이만큼의 기초연금을 받으리라는 기대도 점차 생기고 있다.  
 
기초연금의 발전 속도도 빠르다. 2008년 이름으로 약 10만 원으로 시작한 기초연금은 10년만에 30만 원을 내다보고 있다. 서구 나라의 부과 방식 연금을 부러워하기만 할 이유가 없다.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앞으로 노인 수가 늘어나기에 기초연금 재정 규모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부과 방식 연금을 가진다면 기초연금 제도 하나를 운영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부과 방식을 통한 직접적인 세대 간 연대를 구현한다면 무엇보다 기초연금의 강화가 가장 적절한 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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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필요한 미투 법안 소개합니다

미투 보도 117건 중 6건 실형, 법안 145건 중 35건 통과… 피해자 2차피해 보호할 법 국회 계류 중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9년 02월 03일 일요일

미투 운동은 제도 밖에서 진행했다. 성범죄를 학교 안에서, 사내에서, 심지어 사법부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불신 탓에 여론에 호소했다. 지난해 1월29일 JTBC에 나온 서지현 검사는 그 불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서 검사의 고백은 사실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검사조차 성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사법체계를 이탈했다.

미투 운동의 문제의식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오는 작업이 다음 단계다. 법이 문제면 이를 개정하고,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미투 관련 법안 처리 현황을 전수조사한 결과 20대 국회에서 발의한 관련법 145건 중 35건(24.1%·부분 통과 포함)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나머지는 여성가족위원회(여가위)·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등에 계류 중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판결 이후 재판에서 이슈가 된 ‘비동의 간음죄’(폭행·협박이 없어도 의사에 반한 성관계를 처벌)를 신설하는 형법 개정안이 법사위에서 논의도 없었다는 지적은 언론에 많이 나왔다. 미디어오늘은 그 외에도 미투 운동 이후 한국사회에 필요하지만 국회에서 통과하지 못한 법안을 살펴봤다. 

▲ 서지현 수원지검 부부장검사. 사진=연합뉴스
▲ 서지현 수원지검 부부장검사. 그의 고백이 1년 지났다. 사진=연합뉴스
 

 

누구든지 성희롱하면 안 된다는 법

현행법에선 사실상 성추행 이상만을 범죄로 본다. 이는 법에서 성희롱·성차별을 제한적으로만 금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미투 운동으로 한국 사회의 성인지 수준이 높아진 만큼 성희롱·성차별 제재를 강화할 법이 필요하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양성평등기본법·국가인권위원회법 등을 보면 ‘직장 내’ 성희롱만 규정했고, 피해자의 범위도 법마다 다르다. 또한 국가기관의 경우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를 언급하지 않아 권리구제에 미흡하다.  

성차별의 경우도 헌법 11조에 성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법률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꼴이다. 게다가 지난 2005년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를 폐지한 이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한 채 실체법이 없는 상태다.  

이에 남인순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3월 ‘성별에 의한 차별·성희롱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대표발의했다. 성차별·성희롱 금지를 다룬 일반법으로 19대 국회 때도 발의했지만 폐기됐다.  

누구든 성희롱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을 수 있고, 인권위가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도 명시했다. 또한 여성가족부장관이 피해자 상담을 지원하고 실태조사에 적극 나서도록 규정했다. 성희롱·성차별 신고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해선 안 되고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 징역·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성폭력 신고자도 공익신고자로 보호하는 법 

“지난 1년간 입을 연 피해자·공익제보자로 살며 느낀 고통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였다.”

미투 1년을 맞아 서지현 검사가 29일 국회에서 한 말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옥죄는 2차 피해는 직장·언론·수사당국 등에서 광범위로 벌어진다. 신고자가 사적인 욕심으로, 특정인을 해하려 문제를 제기했다는 인식이 여전하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살라야 하는 시대”(서 검사)를 끝내려면 성폭력 피해자를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

▲ 국회 본회의장. 사진=이치열 기자
▲ 국회 본회의장. 사진=이치열 기자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이 지난해 2월 대표발의한 공익신고자보호법 일부개정안에는 공익침해행위 대상 법에 남녀고용평등법을 포함했다. 같은 문제의식으로 지난해 12월 고용진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공익신고자보호법 일부개정안에는 공익침해행위 대상 법에 남녀고용평등법 뿐 아니라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도 포함했다.  

공익신고자법을 보면 사용자는 공익신고자 등이 인사조치를 요구할 때 요구내용이 타당하면 우선 고려해야 하며 공익신고자가 불이익 조치를 받으면 국민권익위원회에 원상회복 등을 요구할 수 있다. 또한 공익신고자에게 손해를 입힌 자는 손해에 대해 3배 이하의 배상책임을 진다. 현행법상 약 200개의 법률에 규정된 공익침해행위만 보호한다.  

채 의원은 “성희롱·성폭력 범죄는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뿐 아니라 국민의 안전·건강을 해치고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중대한 공익침해 행위”라며 “성폭력 신고자를 법으로 두텁게 보호해 신고자에게 불이익을 가하는 자를 제재할 수 있게 한다”고 발의 이유를 밝혔다. 고 의원은 “신고자에 대한 불이익을 금지하고, 불이익을 받을 경우 구조금 등을 받을 수 있게 했다”고 발의 이유를 밝혔다. 

▲ 광주지역 예술인들과 여성단체는 지난 17일 오후 5·18민주광장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진행하고 있는 #Me_Too 운동에 함께하는 #With_You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광주지역 예술인들과 여성단체는 지난 17일 오후 5·18민주광장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진행하고 있는 #Me_Too 운동에 함께하는 #With_You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2차 가해자 처벌 강화법

비슷한 맥락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줄 경우 처벌을 강화하자는 법안은 더 있다. 현행법상 사용자가 직장 내 성희롱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거나 인사 등 불이익 조치를 할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형법상 범죄가 아니므로 ‘솜방망이 처벌’이란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 3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김경진 민주평화당 의원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하지 않거나 피해자가 요청했는데도 근무장소의 변경,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은 사업주에게 기존 500만원의 과태료가 아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해 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하겠다”고 발의 이유를 밝혔다.  

지난해 4월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같은 법 개정안을 같은 취지로 대표발의했다. 직장 내 성희롱 은폐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성희롱 가해자를 처벌할 때 2차가해 여부도 고려하도록 했다.  

또한 사업주가 사실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할 경우 제재수위를 현행 과태료에서 벌칙으로 상향하도록 했다.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은 정보가 퍼질 경우 또 다른 2차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사업주가 성차별·성희롱으로 손해를 입힐 경우 3배 이하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국민일보가 지난해 2월부터 약 1년간 언론에 알려진 미투 117건을 본 결과 가해자가 구속돼 실형을 받은 사례는 6건에 불과했다. 안태근 전 검사장,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등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등장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법 제도의 미비를 여론의 힘으로 보완했다는 뜻이다. 계류 중인 법 통과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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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이들만 시댁으로... 12년 차 며느리의 반란

[며느라기, 그후] 나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 결혼한 게 아니다

19.02.03 11:34l최종 업데이트 19.02.03 11:34l

 

여성에게 희생과 침묵을 요구하는 명절문화에 반기를 드는 며느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며느라기'를 지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웹툰 <며느라기> 6_4.제사편 중 한 컷 (작가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  웹툰 <며느라기> 6_4.제사편 중 한 컷 (작가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 며느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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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나는 시가에 가지 않았다. 반란의 시작은 부부 싸움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하기 싫었던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결혼한 지 12년, 추석과 설날 전날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시어머니, 형님, 나 셋이 모여 항상 전을 부치고 음식을 준비했다. 간혹 시부모님이 나서서 '이번 명절에는 쉬라'는 집들도 있다는데, 나의 시부모님은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 스스로 안식년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들만 시가로 갔다.

눈치 싸움

 

그동안 여러 번의 명절을 겪을 때마다 형님과 나, 어머님이 서로 장 보는 일을 미루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을 벌였다. 여러 신경전이 오가면서 서로 감정이 상하는 건 기본이었다.

게다가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명절 전날에는 최대한 늦게 시가에 가려고 눈치를 봤다. 시부모님과 가까이 사는 덕에 저녁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도리어 가깝기 때문에 명절 당일에는 남편과 아이들을 놔두고 새벽 일찍 시가에 가 오전 6시부터 명절 음식을 차려야 했다. 형님은 차례를 지내기 10분 전에 도착하시곤 했다.

이 모든 것이 명절 때마다 되풀이되는 신경전이었다. 어머님, 형님, 나, 이 집안의 여자들 누구 하나 달갑게 명절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매번 명절 음식을 차려야 하고, 차례를 지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님, 즉 남편의 형수님은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리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니 남편의 형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나는 '형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존댓말을 써야 했고, 형님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결혼을 하고 나니, '나'란 존재는 없어졌다. 시가에서 나는 전통의 역할을 부여받은 둘째 며느리일 뿐이었다. 모두에게 당연한 이 상황이 나는 내내 불편했다. 

누군가는 이틀만 참으면 된다고 했고, 아이들 생각해서 그냥 참으라고도 했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야 후손들이 잘되는 것이라고 또 참으라고 했다. 이 조언들의 기본 사상은 엄마는 희생하고 참는 존재, 그래야 아이들이 잘되고, 가정이 평화롭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궁금했다. 아이와 모성을 볼모로 여성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추석 때 시가에 가지 않았다는 말을 하자 주변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대단하다', '용기 있다'가 첫 번째였고,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냐', '그 이후가 궁금하다'는 질문이 두 번째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음이 불편했다. 추석 이후 어머님과 꽤 오랜 시간 냉랭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워킹맘인 나는 어머님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아이들 하원 후부터 내가 회사에서 돌아올 때까지 어머님이 아이들을 봐주시는데, 어머님은 추석 이후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셨다.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웹툰 <며느라기>의 한 장면(작가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  웹툰 <며느라기>의 한 장면(작가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 <며느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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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는 '추석의 반란(?)' 이후를 고민하기도 했다. 어머님께서 아이들을 봐주지 않으시겠다고 하면 아이 돌보미를 구하는 것까지도 고려했다. 그만큼 나에게는 힘든 결정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계속 돌봐주셨지만, 한동안 불편함은 감수해야 했다.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명절에 가기 싫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결혼하고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명절을 참고 지낸 이유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이들의 양육 문제 때문이었고, '응당 명절은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이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같이 둘러앉아 즐겁게 지내야 한다는 것.

평균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삶에 관대하지 않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평균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나는 왜 갑자기 평균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사위는 백년손님... 며느리는?

가끔 남편에게 묻는다. 왜 나와 결혼했는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서라는 대답이 나왔다. 나도 같은 이유였다. 나를 존중해주고, 내가 하려는 것들에 대해 지지해줄 것 같아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왜 같이 살 수 없는 조건들이 우리 관계에 따라다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능력을 바라거나, 남편에게 의지하기 위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다. 남편이라는 존재를 보고 선택했는데, 결혼이라는 제도에 붙어오는 의무들이 너무 많았다. 서로 대등한 부부 사이를 유지하고 싶은데, 자꾸 가사노동이, 명절이라는 문화가, 며느리라는 역할이 내게 따라 붙었다. 불편했다. 그 불편함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남편도 내가 명절 때 시가에 가지 않는 것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나름 불편했던 모양이다. 추석을 지내고 와서 나에게 말했다.

"너도 아들 둘 키우잖아."
"내가 시어머니 된 다음에 누가 차례 지낸대? 그리고 특별한 날엔 내 아들들만 보면 되지, 굳이 며느리까지 애타게 보고 싶을 것 같진 않은데?"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노동을 위해서만은 아닐 테다. 하지만 사위는 '백년손님'이고, 며느리는 음식 준비라는 노동을 대물림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 그게 대한민국 명절의 현실이다.

아는 지인 A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지 않고 십 년째 동거 중이다. 남자친구가 장남이라는 게 이유다. 그와 결혼하면 각종 제사와 차례 등 맏며느리의 의무가 자신의 몫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란다.

A는 남자친구의 가족 행사에도 대부분 참여한다. 남자친구 부모님 생신 때도 손님으로서 함께한다. 그러나 명절에는 가지 않는다. 남자친구는 남자 형제만 3명인데, 둘째 며느리가 제사 및 차례를 전담하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지인 B는 맏며느리인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은근히 제사를 가져갈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제사를 가져가라는 이야기는 제사 준비와 지내는 것 모두 지인 B의 집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B가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B는 그 뒤로 은근히 시어머니를 피하고 있다고 했다.

지인 A와 B의 사례, 나의 추석의 사례가 모두 가사노동의 대물림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며느리는 손님처럼 시가에 가면 안 되는 것일까? 남편이 백년손님인 것처럼.

그건 반쪽짜리 평화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는 부처의 얼굴을 하고 참아야 하는 걸까?
▲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는 부처의 얼굴을 하고 참아야 하는 걸까?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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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명절에도 나는 반란을 꿈꾸고 있다. 물론 불편하고 두렵다. 여전히 어머님께서 아이들 등하원을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다. 내가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으니까. 아이들 양육을 독립하겠다고 가정 경제를 내려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온전히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을 벗어 던질 수 없는 이유다.

추석이 지나고 한동안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던 어머님과 내가 다시 화해를 하게 된 건 어머님 덕분이었다. 어머님은 다시 예전처럼 말을 걸어오시고, 이전처럼 아이들을 돌봐주시고, 파김치가 되어 퇴근한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씀해주신다.

가끔, 어머님과 형님을 시가라는 관계가 아닌 일상 속 타인으로 만났다면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명절이라는 노동과 며느리라는 의무를 제외한 그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어머니는 아들 둘을 훌륭하게 키워내신 존경스러운 여성이었을 것이고, 형님은 편하게 수다 떨 수 있는 동네 친구 엄마였을지도 모른다. 

가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족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하고, 그 희생으로 인해 불행하다면, 그건 반쪽짜리 평화다. 며느리도 가족의 일원이다. 그림자가 아니다. 모두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그림자처럼 부엌에 숨어들어 고된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에 머물러선 안 된다. 

설 연휴를 앞둔 지금, 나는 또다시 치열하게 고민한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은 것인지, 어떻게 해야 나와 가족의 행복을 지킬 수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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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北 신년사 제대로 읽기(3): 북미관계

2019년 北 신년사 제대로 읽기(3): 북미관계<기고> 김광수 정치학 박사
김광수  |  no-ultar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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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02  22: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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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 정치학 박사(북한정치 전공) · 『수령국가』 저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

 

모두가 신년 벽두부터 북의 신년사를 분석하느라 무척 바쁘다. 격세지감이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북의 신년사에 이렇게 관심을 가졌던가? 과거에는 주로 운동권이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 신년사가 이제는 대한민국의 정계, 언론계, 학계를 넘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희한한’ 일이다. 왜 그렇게 북의 존재가 180°로 확 바뀌었을까? 뭐니 뭐니 해도 그 중심에는 북의 핵무력 완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 달리 설명할 길도 없다. 

 그 전제하에 이 글은 총 세 번에 걸쳐 2019년도 북 신년사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유는 많은 분들이 북 신년사를 분석해 내었지만, 본질을 제대로 짚은 신년사가 많이 없기 때문이다. (본인 또한 제대로 된 신년사에 접근하기 노력할 뿐 ‘완전하다’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제1부는 <2019년 북 신년사 제대로 읽기: 북 내부문제>이다. 제2부는 <2019년 북 신년사 제대로 읽기: 남북문제>이다. 좀 의역하면 ‘남북문제에 있어 2019년 북 신년사에서 오독하지 말아야 할 것들’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 편에 해당되는 제3부는 미국문제(대외정책)에 해당되는 <2019년 북 신년사 분석: “새로운 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실리게 된다. 

  독자들의 많은 필독을 원하고, 문재인 정부에게는 제대로 된 이해에 바탕 해 2019년도는 남북, 북미관계 정책을 세워내는데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필자 주>  

 

  막상 시작해놓고 보니 고민이 많아졌다. 논리적 정합성 문제도 그렇고, 북의 정확한 의도를 읽어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니... 그렇게 옥죄던 그 무게도 제3부, ‘북미관계’를 끝으로 종결하려하니 정말 가슴이 후련하다. 아울려 이제까지 부족한 글을 정독해주신 독자들께도 정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황금 돼지해에 첫 반가운 소식은 뭐니 뭐니 해도 제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낭보였다. 2월 말(혹은, 3월)이면 정말 열리게 된다.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협상 2라운드가 그렇게 열리는 것이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말이다. 해서 이 글은 2019년 북 신년사 분석을 토대로 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정론적으로 고찰해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유는 그래야만 ‘결렬과 파국’보다는 ‘협상과 해결’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고, 그것보다 더 선행되어져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착화되어있던 ‘북미협상 2라운드가 왜 그렇게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가?’라는 물음에 답이 가능해져서 그렇다. 동시적으로 2017년에 발표된 북의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에 대한 진가도 알 수 있다. 종착점은 다름 아닌, 그로 인해 미국의 버티기는 끝나고, 결국에는 북미간의 관계변화와 주한미군 철수 및 한반도에서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과 평화지대라는 대격변이 있다. 

  이 글은 그 전제하에 있다. 

  ■ 2019년 신년사에서 밝힌 ‘핵동결 선언’이 갖는 그 정치적 의미는?  

  아시다시피 북은 2018년 4월 20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새로운 핵정책을 결정한다. 더 이상 핵무기를 시험하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고, 전파하지도 않는다는 3개 원칙의 명시가 그것이다.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핵무기를 이제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하나 더 추가하여 4원칙을 새로운 핵정책으로 천명한다. 이른바 4불(不) 핵정책이다. 

  생기는 의문은 (그 정책전환이 너무나 빨라) 갑자기 웬 동결? 충분히 생겨날 수 있는 의문이고, 그런 갑작스러운 우리의 인식이 과연 북의 전략시간표 상으로도 그럴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이다. 

  2018년 신년사에서 이미 그 전략노출과 북이 달성해낸 국가 핵무력 완성속도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속도이다. “핵무기 연구부문과 로켓공업 부문에서는 이미 그 위력과 신뢰성이 확고히 담보된 핵탄두들과 탄도로켓들을 대량생산하여 실전배치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해나가야 합니다”라는 신년사 언급이 그것이고, 이후 북은 1년 만에  핵무기와 미사일의 대량생산과 실전배치가 완료되었음을 선언한다. 

  바로 그 ‘1년’에 숨은 비밀이 들어있는 것이다. 북의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이 서방세계 인식으로는 불가능했던 엄청난 속도전이었듯이 그 대량생산과 실전배치 또한 그들의 속도방식(만리마속도)에 의한 1년만의 충분히 완성 가능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해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2018년 후반기 어느 시점에 핵무기 대량생산이 마침내 최대 생산목표에 도달하여 더 이상 추가생산을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음으로 이번 2019년 신년사에서 핵동결 선언을 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 <NBC>방송 2018년 12월 27일 보도를 보면 이는 금방 이해된다. <NBC>는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쎈터의 제1부소장 로벗 리트웍(Robert S. Litwak)의 발언을 인용 보도했는데, 북이 현재 추세로 핵무기를 계속 생산하면 내년 2020년에는 영국의 핵무기보유량(185발)의 절반에 이르는 약 100발의 핵탄두를 보유하게 된다고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또 핵탄두 추정치 개수는 다르지만, 보다 확실성을 띄고 있는 정보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북을 핵을 갖고 있는 그런 국가로 인정하지 않던 미국이 주일미군사령부(USFJ)를 통해 지난 1월 18일 발표된 동영상에서 북을 중국, 러시아와 함께 ‘핵보유 선언국’으로 확인해줬다. 숫자도 아주 구체적으로 북 15개, 중국 200개, 러시아 4000개로 각각 표시하면서 말이다. 

  이상과 같이 북이 핵동결 정책을 추진할만한 충분한 주·객관적 토대는 확보되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해서 더 이상 북이 핵보유 국가, 핵전략무기 보유국가, 전략국가로서의 위상을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식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런 국가-핵을 보유한 국가만이 할 수 있는 그런 핵동결 선언을 했다는 것, 그것자체가 이를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어서 그렇다.  

  그러면 다음의 의문도 풀려질 수가 있는 것이다. 

  미국이 왜 제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단계적, 동시적, 등가적 이행방식에서 버티다가 전격적으로 2차 북미정상회담에 응했는가?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가설은 이렇다. 핵보유국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핵동결(nuclear freeze)정책이 핵무기의 생산, 시험, 사용, 전파를 중단한다는 의미에서의 4불(不) 정책이라고 한다면, 2018년 4월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생산’을 미완으로 남겨났고, 그 마지막 퍼즐에 해당되는 ‘생산’ 중단을 왜 이번 신년사에서 발표했는지가 설명되어지면 미국의 입장변화가 설명되어질 수가 있다는 가설이 그것이다.  

  결론에 북이 원래 가지고 있던 목표량, 적정량의 생산과 실전배치가 완료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북도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감수했다. 간과해서는 안 될 지점이다. 온갖 간난신고와 국제사회의 멸시와 조롱, ‘그 돈으로 굶어죽는 인민들을 먹여 살려라!’를 견뎌내었어야만 했다. 그리고 북은 마침내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을 내왔고, 이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총화(결산)는 “우리 공화국은 마침내 그 어떤 힘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결코 나와 우리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보지 못합니다”였다. 

  구체적으로는 북이 2017년 11월 29일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을 쏴 올렸고, 그렇게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기술과 ‘국가 핵무력 완성’을 정확하게 일치시켰다.(2017년 11월 29일) 이후 2018년도에는 수소폭탄을 포함한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에 의한 대량생산과 실전배치를 완료시켰다. 그것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적대관계 ‘철천지 원수’에 있는 북이 미국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등 전략무기를 보유하면서 말이다.  

  2018년 신년사에서 "핵탄두들과 탄도로켓을 대량생산하고 실전배치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면서 핵전력 강화를 선언한 것과, 그러고는 1년 만에 핵탄두와 로켓의 대량생산및 실전배치가 완료되었다는 의미의 ‘핵동결’선언을 내온다.(2019년 신년사) 말 그대로  ‘완료’되었기에 핵동결 선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의 정치군사적 의미(북미대결사)는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대량생산과 실전배치가 끝났음을 의미해준다. 

  바로 그 숨길 수 없는 사실이 결국 끝까지 버텨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위능력으로 인해 미국은 미합중국 창건 이래로(이는 북도 마찬가지다.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처음 북과 정상회담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까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렇게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도 기존 취해왔던 ‘전략적 인내’ 정책의 포기, ‘대결과 압박’ 방식에서 ‘대화와 협상’의 그 최상위 형태인 정상회담을 부득불 수용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를 증명해주고도 충분히 남는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국의 입장에서는 미본토를 지켜내어야 하는 절박감이, 패권국가로서는 NPT체제 유지를 그 근간으로 하여 유지되어온 자국 중심의 동북아 및 세계질서 유지라는 급박한 상황이 북과의 대결을 피하고 협상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그런 완료된 핵동결 선언이 미국을 최종적으로 대결과 압박정책을 파기시키고, 대화와 협상의 장으로 다시 나올 수밖에 없게 하였던 것이다.   

  핵동결 선언이 이렇게 제2차 북미정상회담,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를 다시 연동시키는 정치군사적 요인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도 있다. 왜 그러면 지난해 그렇게 수많은 정상회담이 동시적으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의 성격이 정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는가? 하는 그런 점이다. 

  결론에는 위 연동-핵동결  선언, 제2차 북미정상회담,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가 처음부터 읽혀지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이유는 지금에 와서야-핵동결의 의미와 2차 북미정상회담의 그 상관성이 밝혀지고, 북이 왜 핵을 보유하려 했는지에 대한 의도가 분명하게 이해되어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북이 다른 핵 패권국들과는 전혀 다른 패턴의 핵정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를 해석해낸다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국가도 가보지 않는 그 길을 제시하다보니 당연히 그 메시지를 유관국들이 잘 읽지 못했을 뿐더러 완전히 혼란스러워한 것이다. 이른바 ‘긴가, 민가’한 것이다.  

  그래서 혼란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핵보유의 목적이 핵전력 강화를 통한 핵패권 추구에 있다고 본다면, 북은 핵보유의 목적을 처음부터 일관되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세계비핵화에 두고, 이를 핵동결 선언을 통해 시작해보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핵보유 국가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런 패턴이 선보여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도, 중국도, 대한민국도 그 패턴을 이해하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과도 우리가 다 목도했듯이 2018년 내내 북중 정상회담과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1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그 프레임이 ‘북핵 비핵화’ vs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가 대립했음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제2차 북미정상회담부터는, 아니 앞으로 전개될 모든 북미협상의 기본 프레임은 온전하게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라는 개념으로 정립되고, 그 의제도 ▷한반도 평화체제 보장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세계비핵화 추동이라는 그런 개념들로 확정되어질 수밖에 없다. 핵동결 선언으로. 

   ■ 재등장한 ‘중국의 역할론’을 어떻게 해석해낼 것인가? 

  실제 미국을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로 유인하기 위한 최고의 압박전략은 이렇게 정치·군사적 압박요인이 그 기본임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이른바 외교압박전술이 남아있어 그렇고, 그 핵심에 ‘중국의 역할론’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외교전에도 참으로 능한 북이다. 2019년 들어서자마자 전격적으로 발생한 중국방문은 그 화룡점정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자신의 생일(1.8)도 마다하고 2019년 새해 벽두부터 방중 정상회담에 나섰다. 2019년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 그 당사자인 중국의 역할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올해는 또 북중 수교 70주년이기에 그에 걸 맞는 북중 관계수립도 필수적이다. 즉, 작년까지는 북중관계의 복원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면 올해는 그 복원을 넘어 협력관계 ‘공조’를 구축하는 그 단계까지 가야하고, 이를 위한 그 교집합에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주요 사안인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의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은 그렇게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 ‘조선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외교정책에 정확하게 부합하고, 좀 더 직접적으로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제로 인해 단절되었던 북중 경협을 전면적 수준까지 복원해야 하는 그런 이해관계까지 얽히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전격적인 중국 방중을 이행해낸다.

  만나야 할 수요는 그렇게 발생했고, 이것이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1일 신년사에서 밝힌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다자협상’으로 포장되어 언급되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보장 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문장이 그것이다. 미국을 덜 자극하기 위한 문장조절일 뿐 실상은 ‘중국의 역할론’을 공식화한 것과 다름없는 문장이다.  

  이 방중은 또한 이후 김정은 위원장의 다음 행보를 읽어낼 수 있게 하는 그런 바로미터 역할도 된다.   

  ‘2차 북미정상회담→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정상회담) →시 주석의 평양 답방(정상회담)→남북미중 정상회담(그리고 그 어디 사이에선가 북러 정상회담도 열리게 될 것이다.)’ 순서로 말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남북미중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이 완료될 것이고, 북미 간 새로운 관계정립도 본궤도에 오를 것이다.  

  동시에 이는 북으로 하여금 2016년에 채택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완료연도: 2020)을 성공적으로 총화 될 수 있는 그런 충분한 기반과 여건의 마련은 물론, 김정은 체제의 정당성과 위력, 공고성을 더욱더 강고하게도 할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자력갱생’의 정당성과 함께, 대외적으로는 남북 경협과 북중 경협의 복원을 통해 성과가 나오고, 외교안보적으로는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다자 협상"의 개시와 남북미중 정상회담을 통한 평화협정체결로 그 마침표가 찍혀지는, 그런 김정은식 사회주의 강국건설 설계도가 완성되면서 말이다. 

  ■ 대외관계에서 읽어내어야 할 핵심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위 질문과 관련해서는 미국에게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한 것이 그 핵심이다. “미국이 신뢰성 있는 조치를 취하며 상응한 실천적 행동으로 화답해 나선다면”에서 그 전제조건은 ‘신뢰할만한 상응 조치’이다. 따라서 이 같은 전제조건이 충족된다면 북은 적극적으로 대미 협상에 나섰겠으나 반면, 미국이 그러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그 무엇을 강요하려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는 그 반대편의 답변이 그것을 상징해내고 있다하겠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반대편의 답변이 아니다. “어쩔 수없이 부득불”,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등과 같은 이른바 수동태 문장이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따라서 그 본질은 북이 그 같은 상황을 원치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부득불 미국이 그러한 자신들의 메시지를 잘못 읽거나 상응 조치를 거부한다면 그래서 북미 협상에서 진전이 없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는 그런 의미로 해석해내는 것이 그 정석이다. 

  해서 ‘새로운 길’이 그 핵심 키워드가 맞지만, 북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로 보자면 그 핵심에는 미국이 북의 제안에 응하라는 것이 그 본질이 된다.   

  어떻게? 한미군사연습과 전략자산 전개의 중지 등과 같은 평화적 조치가 그 첫 번째이고, 유엔안보리 제재와 미국의 독자적 제재, 즉 대북 제재 해제가 그 두 번째이다. 

  문장으로도 “조선반도 정세 긴장의 근원으로 되고 있는 외세와의 합동 군사연습을 더 이상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외부로부터의 전략자산을 비롯한 전쟁장비 반입도 완전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으로(강조, 필자)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6·12 조미 공동선언에서 천명한 대로 새 세기 요구(강조, 필자)에 맞는 두 나라의 요구를 수립하고 조선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가 “나는 앞으로도 언제든 또다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앉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반드시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에서와 같이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그런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전제하에 이번 신년사중 대외부분에서 파악해야 될 내용은 크게 세 부분이다.  

  그 첫째가, 북의 시선이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수립을 넘어 이미 1960년대 북이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주동했을 때 가졌던 ‘블록불가담운동’과 같은 그런 버전 업(ver.2)된 ‘세계자주역량’ 구축 운운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새로운 길’에 대한 해석을 해냄에 있어 병진노선의 부활, 혹은 중국과의 밀월, 전쟁의 방식이라는 식의 분석을 반대하면서도, 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핵-경제 병진노선’의 부활을 무조건 ‘과거의 길’이기 때문에 그것이 ‘새로운 길’이 아니라는 식의 접근법도 경계해야 함이다. 

  이유는 1960년대의 ‘국방-경제 병진노선’ 버전 업이 2010년대의 ‘핵-경제 병진노선’인데, 그렇다면 이 ‘핵-경제 병진노선’도 낡은 ‘과거의 길’로 진입한 전략노선이었다는 말과도 서로 상통하게 돼 이는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아서 그렇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군정치’를 내세웠던 김정일 집권시기에도 북은 경제에서도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선군 경제 노선을 표방했다.
   
  셋째로는,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가 어떤 로드맵을 통해 이뤄질지에 대한 가설을 간략하게 서술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2019년 북 신년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서 그렇다. 

  (1) ‘세계자주역량’ 구축과 관련된 서술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북의 외교노선 근본이념은 ‘자주, 평화, 친선’이다. 이에 따라 반제자주역량 구축은 항상 일관되어온 외교정책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북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의 단결과 협력을 통해 반제자주운동의 핵심 역량을 구축하는 전략이 항상 있어 왔으며, 이 구현방식이 전통적인 우호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 쿠바, 러시아 등과의 단결과 협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고, 좀 더 넓히면 시리아, 이란등과도 교류를 활발히 한 것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면 우리가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지난해에 교황의 방북 의사에 긍정 반응을 보인 것 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가 남아있어서이다.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위기국면을 모면하기 위해’, ‘종교탄압 국가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위장술로서 해석하는 것은 북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왜곡정도도 심한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들과 세계 여러 나라들 사이 당 국가 교류가 활발히 되어 깊어지고 국제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추동하려는 입장과 의지가 확인되었습니다”(2019년 신년사 중에서)에서와 같이 ‘국제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추동’하려는 것은 북의 일관된 의지이다. 그런 만큼, (편견이 없다면) 그 연장선상에서 교황의 방북 긍정반응을 해석해내어야만 한다.   

   또한 2019년 북 신년사에서 주목해 봐야할 지점은 “세 차례에 걸치는 우리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과 쿠바공화국 대표단의 우리나라 방문은 사회주의 나라들 사이의 전략적인 의사소통과 전통적인 친선협조관계를 강화하는데서 특기할 사변(강조, 필자)으로 되었습니다”라는 평가이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그것도 ‘특기할 사변’으로 말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친선협조관계를 강화하는데서’ 뭔가 특별히 기억되어야만 하고, 새로운 전환점이 될 만한 그 뭔가의 성과가 일어났다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이를 위해 다시 우리는 ‘자주, 평화, 친선’이라는 북의 외교이념을 소환해야만 한다. 연동하면 전통적인 사회주의 우호국과의 관계개선을 넘어 또 다른 한 세계(질서)이자 북이 기간 상당한 노력을 깃들여 만들어낸 제3세계와의 반제자주역량 구축문제가 남아있어서 그렇다. 이것이 고난의 행군 시기와 김정일 시대, 비핵국가 시기를 마감하고 스스로가 전략국가의 위상을 갖게 된 지금, 21세기를 자주의 시대로 전변시켜내기 위한 그 위대한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의지와 신념(자신감)이 ‘특기할 사변’으로 그렇게 총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는 자주, 평화, 친선의 이념에 따라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단결과 협조를 계속 강화하며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모든 나라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갈 것입니다.”

  마치 1960년대에 블록불가담운동으로 제3세계 자주외교를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갔듯이, 이른바 ver.2로 업그레이드된 블록불가담운동을 다시 재가동 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이번 신년사에서 선보였고, 동시에 이는 미국과의 세기의 대결을 끝장내고, 21세기를 자주의 시대로 전변시켜 내기 위한 북의 전략적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자 ver.2된 ‘세계자주역량’ 구축을 그렇게 시작하려는 것과 같다.  

  괜한 억측도 아니다. 충분한 이유도 가능하다. 예전과는 달리 북은 이제 사상강국, 정치강국, 군사강국에 이어 핵강국까지 되었다. 이른바 (경제력과 비례해야 한다는 그 착시와 편견을 떼고 본다면) 전략국가로서의 위용을 갖췄다는 말이다. 그런 국가이기에 미국과 중국 등 대국들을 움직일 수가 있었고, 그 움직임의 최종 종착지는 헌법과 당 규약에 나와 있는 반제평화전략일 수밖에 없게 되어 진다. “조선노동당은 자주, 평화, 친선을 대외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하여 반제자주역량과의 연대성을 강화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선린우호관계를 발전시키며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책동을 반대하고 세계의 자주화와 평화를 위하여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투쟁한다.”(노동당 규약 서문 중에서)

  북의 반제평화전략은 이렇듯 다른 여러 나라들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또렷하고 확고하다. 즉, 세계 최대의 핵강국이자 ‘마지막’ 제국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을 상대로 펼쳐진 전선이기에 그 정당성 또한 대단하다. 그러다 보니 각국에게 “조선반도의 긍정적인 정세발전을 추동하려는 우리의 성의있는 입장과 노력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고는 “평화를 파괴하고 정의에 역행하는 온갖 행위와 도전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할 것”을 호소(주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북은 그렇게 전략국가, 북의 외교버전 ver.2를 재가동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말로써만이 아니라, 핵강국으로서의 힘을 갖고서 말이다. 그 연결고리에 ‘세계비핵화’라는 새로운 반제평화전략이 숨어있고, 결과도 참으로 궁금하게 되었다.

  (2) ‘핵동결 선언’과 제2차 북미정상회담의 상관성에 관한 서술이다

  앞에서 누누이 얘기하고 있었듯이 결론적으로 제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그 자체가 미국이 1차 정상회담 때 합의했던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이해를 이제야 정확히 했다는 것이고, 그 회담전략으로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 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위 글, “■ 2019년 신년사에서 밝힌 ‘핵동결 선언’이 갖는 그 정치적 의미는?” 참조)  

  그 전제하에 우리가 살펴봐야할 몇 가지 지점은 첫째,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가 함의하는 그것은? 둘째, 그러면 ‘스몰딜’ 방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셋째,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과 주한미군 철수문제와의 그 상관성은? 이다.   

  ①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가 함의하는 그것은? 

  다음의 한편 그 기사가 힌트를 주고 있다. 2018년 12월 20일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기사하나가 그것인데, ‘낡은 길에서 장벽에 부딪치기보다 새 길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제목의 논평기사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국은 이제라도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용어의 뜻을 정확히 인식해야 하며 특히 지리공부부터 바로 해야 한다. 조선반도라고 할 때 우리 공화국의 영역과 함께 미국의 핵무기를 비롯한 침략무력이 전개되어 있는 남조선지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조선반도 비핵화라고 할 때 북과 남의 영역 안에서 뿐 아니라 조선반도를 겨냥하고 있는 주변으로부터의 모든 핵위협 요인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데 대해 똑바로 알아야 한다. (중략) 애초에 비핵지대였던 조선반도에 핵무기를 대량 끌어다놓고 핵전략 자산의 전개와 핵전쟁연습 등 우리를 핵으로 끊임없이 위협함으로써 우리가 핵전쟁 억제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장본인이 미국이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조선반도 비핵화란 우리의 핵억제력을 없애는 것이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의이다.” 

  참으로 중대한 내용을 많이 담아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의미가 미국의 핵전략 자산들이 배치된 주일미국군기지들, 괌(Guam)의 미 공군기지, 미국의 전략잠수함 등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과 남의 영역 안에서 뿐 아니라 조선반도를 겨냥하고 있는 주변으로부터의 모든 핵위협요인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가 그 증거문장이다.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가 정말 위와 같이 그렇게 해석되고 의미된다면, 그런  엄청난 결정을 트럼프 행정부가 할 수 있겠는가? 절대 할 수 없다. 주일과 괌 기지를 미 본토로 철수하는 문제는 미국의 동북아 지배질서와 연동된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동북아 지배질서를 포기하라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를 임기 4년의 트럼프 행정부가 실현해내기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래서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는 세계비핵화와 연동된 매우 장기적인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는 필연적으로 목표 재조정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왜 부쩍 ‘스몰딜’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지가 이제야 그 의문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속에는 미국이 핵패권 국가로서의 체면유지 때문에 ‘스몰딜’이라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고, 그렇게 자기 합리화 과정이 필요할 만큼 ‘매우 깊은’ 수세에 빠졌음도 분명 보인다는 것이다. 해서 용어는 ‘스몰딜’이지만 그 내용까지 ‘스몰딜’일 수는 없고, 그 해결의 입구에도 ‘핵동결’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도 발견된다.

  연동해서 앞으로의 비핵화 공정도 <‘신고 → 검증 → 폐기’의 절차적, 기술적 공정이기보다는 ‘핵동결 → 핵군축 → 핵폐기’라는 정치적 해결과정>이 될 수밖에 없음도 안내한다 하겠다.   

  그 근거 첫째는, 신년사 제2부(남북관계)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핵동결 선언이 핵보유 국가만이 취할 수 있는 그런 조처라는 사실을 암기해낸다면, 그런데도 이제까지 미국의 태도-북의 핵보유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와는 달리, 일언반구 논평도 없이 곧바로 제2차 북미정상회담으로 응수한 것은 북을 핵보유국(전략국가) 대 핵보유국(전략국가)으로서 동등한 자격으로 핵협상에 응하겠다는 그런 의미밖에 있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겠다는 그런 의미와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이 북의 양해를 받아 국제사회의 이목과 눈들 때문에 IAEA를 통한 검증절차를 이행시키는 그런 시늉은 해낼 수 있겠지만, 그 본질에는 미국과 북이 정치적 해결을 통해 그 비핵화프로세스를 완결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 의미는 결국 핵보유 국가가, 그것도 ICBM 등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한 전략국가가 핵보유를 ‘0(제로)’으 만든다는 의미에서의 ‘무(無)핵화(강조, 필자)’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했다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인식에 제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도, 북도 동의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도 ‘무핵화’가 핵무기와 핵시설이 아예 없어진다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가능성의 유일성은 핵을 가진 모든 국가들이 동시적으로 비핵화를 이루겠다는 동의가 이뤄질 때만이 가능한 그런 개념이라 했을 때 핵을 가진 북만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그런 ‘무핵화’는 절대 이뤄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무핵화는 고사하고, 당장의 현실에서도 미국이 세계패권과 동북아 패권지위 유지와 관련된 그런 괌과 주일기지를 폐쇄한다든지, 거기에 배치된 핵전략자산들을 미 본토로 철수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것들만으로도 트럼프 행정부가 할 수 있는 그런 권한범위 안에 있지 않다. 미국의 동북아 및 세계지배전략과 관련된 전략적 판단개념이기에 그렇다는 말이고, 북 또한 종국에는 세계비핵화, 그리고 지금 당장의 북미협상에서는 그러한 미 전략자산들의 한반도 완전철거가 목적이 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즉 그렇게 서로의 전략적 구상이 확인되어진 지금의 이 상황 하에서는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의 등가도 핵보유 전략국가인 북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핵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현재와 미래의 핵과 그 시설들을 제거해나가는 그런 개념으로서의 비핵화여야 한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비핵화개념이다.(해서 앞으로는 북만의 일방적 비핵화는 가능한 상상력의 범위영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서 그 이후 진행될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공정은 ‘핵동결선언’ (과거의) 핵은 유지’ : 대북제재 해제와 한미군사훈련 중단 및 전략자산무기 한반도 진입금지’, 핵군축’ (현재, 미래)의 핵무기 및 시설 검증 및 폐기’ : 주한미군 완전철수, 평화협정체결과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완전 무핵화: 미국 무핵화’가 다 포함되는 그런 광의의 개념과 그 이행 로드맵 전체를 일컫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 두 번째 근거는 이미 현실에서도 미국의 대북정책이 ‘가능하지’ 않는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정책목표보다는 ICBM 위협 제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가 미 의회에서도 대두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미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으로 내정된 브래드 셔먼 의원은 1월 18일 <VOA>와 인터뷰에서 “북한에 제한된 양의 핵무기 보유를 허용하고 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것이 비핵화보다 현실적”이라고 주장한 것이 그 예다. 

  또한 지난해 12월 국무부 동아태국과 국제개발처 아시아국이 공개한 '공동전략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장기 목적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이나 "단기적으로는 핵개발 동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면서 △핵·탄도미사일 실험 및 분열성 물질 생산 중지 △비핵화 초기조치 획득을 열거한 바도 있다.

  이 외에도 이전과는 달리 현실 가능한 목표에 천착하자는 발언들이 쏙쏙 나온다. 마운트 미국과학자연맹 선임연구원은 "북을 비핵화하겠다는 비현실적 시도에 시간을 쓰느라 북으로부터의 위협을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중략)” 그렇게 지적했고<연합>, 클래퍼 전 미 국가정보국장은 "북의 비핵화, 더 이상 미국의 카드 아니다... 미국이 이를 수용하고 관리에 초점 맞춰야"라고 했으며, <블룸버그>는 "미국의 도전과제는 북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능력을 파악하고 동결시킨 뒤 해체할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라며 동결, 군축, 폐기의 수순으로 보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미국 내 16개 정보기관을 관장하는 댄 코츠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1월 29일(현지시간)  “북, 모든 핵무기 포기하지 않을 듯”이라는 공개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듯 과거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사전 여론정지 작업과 같은 것이다. 충격완화를 위한 그 사전정지 작업으로 말이다. 

  비교적으로도 기간 미국의 북핵정책 목표가 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에서 FFVD(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 최종적이고 전적으로 검증된 비핵화)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지난해(2018) 11월 ‘핵리스트 제출 요구’를 잠정 폐기한다고 했던 것에서 다 확인되며 이런 일련의 초치들이 다 북핵정책 목표 수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면 너무 과한 주장일까? 아니면 후퇴를 나름 정교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겠으나, 엄연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은 그 최종 종착지에게 미국은 북을 핵보유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 핵문제를 정치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그런 입장으로의 최종정리이다.

  이유도 충분하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미국과 소련이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으며, 미중 간의 핵문제도 핵대결로 치닫지 않고 외교관계가 작동하여 해결한데서. 그렇듯 북핵문제도 북이 핵을 보유한 이상, 그것도 이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미본토를 실제 공격할 의사가 있는 그런 국가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을 갖고 있는 이상 정치 담판이라는 외교가 작동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 핵보유 국가 간의 핵문제 해결이 늘 그렇게 되어 왔듯이.

  ② 그러면 ‘스몰딜’ 방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부쩍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이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스몰딜’ 방식의 해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에는 미국의 궁색한 고충을 반영하고 있으며 체면유지를 위한 그 발버둥에 다름 아니다. 

  실체적으로는 북을 핵보유 국가로, 그것도 ICBM 등을 보유한 전략국가로 인정해야 되지만, NPT체제유지와 핵패권 유지를 위해서는 그럴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고육지책 논리가 바로 ‘스몰딜’이라는 해법 그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과 정치적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음을 위에서 이미 밝혀졌다. 이를 다시 한 번 요약해보면 그 첫째에 미국이 기간 고집했던 ‘선(先) 비핵화, 후(後) 제재 해제’를 철회했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져 있고, 둘째는 그러다보니 미본토를 겨냥한 북의 ICBM 위협 우선 제거와 일부 제재해제를 맞바꾸겠다는 그런 식의 인식이 가능해진 것이고, 셋째는 ‘스몰딜’ 운운하는 그 방식에는 기술적으로 북핵 완전폐기가 불가능하다는 그런 인식을 내포하고 있어서 그렇다. 이른바 핵동결 → 핵군축 → 핵폐기의 순으로 가는 그런 경로의 전제와 함께, 위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기술적 해결방식 아니라 정치적 해결방식으로 해결되어진다는 그런 의미이다.  

  이와 관련된 미국의 속내도 분명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1월 11일 “어떻게 하면 미국민에 대한 리스크를 줄여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북·미 간) 대화에서 진전시키고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미국민의 안전이 목표”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보수 성향의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이에 대해 “미국이 본토에 대한 북한의 미사일 위협 문제만 해결되면 (북한과의) 합의를 수용할지 모른다”고 해석했다. 북미가 일단 핵동결과 대북 제재 일부 완화를 주고받는 합의를 하고 상호 이행하면서 신뢰를 조성한 뒤 다음 단계 협상으로 나아가는 ‘선 신뢰 조성, 후 비핵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그런 예측들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어찌 북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비핵화 논의가 정치회담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서 본질을 제대로 이렇게 이해하기만한다면 제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나돌고 있는 그런 굉장한 미국의 희망사항, ‘스몰딜’과 같은 그런 ‘가짜뉴스’가 판치는 충분한 이유를 알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ICBM 폐기-제재 완화'에 합의하고 곧바로 관계개선과 비핵화를 위한 핵사찰·검증을 위해 상호 연락사무소를 평양과 워싱턴에 개설하고, 이 과정에 '종전선언'을 시행하고 '평화협정'도 추진한다는 그런 시나리오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북이 풍계리와 동창리 시설 현장검증 전문가 참관허용, 영변 핵시설 동결 등의 조치를 취하고 미국 자신은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제재 면제, 인도적 지원 재개, 연락사무소 개설 등으로 합의될 것이라며 그 회담의 성격을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박지원 의원 같은 사람은 이에 대해 1월 15일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북의 ICBM 폐기와 개성공단 재개 등 미국의 경제 제재 완화 조치라는 딜이 이뤄질 것이라며 "(그 경우) 금강산 관광이나 혹은 개성공단 두 가지 정도는 합의가 될 것 아닌가, 그래서 경제협력 인도적 지원 차원의 제재완화가 될 것이다"고 판단한다.   이런 판단은 박 의원만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언론, 대북전문가들과 정치권에서도 유사 반복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이러한 바람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우선, 금강산 관광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 등은 민족내부의 문제로써 이런 문제를 북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절대 (공식) 의제화하지 않는다. 좀 더 의역하자면 논의된다 하더라도 비공식 논의이며, 또 백번 양보하여 이 비공식 논의결과가 설령 공개된다 하더라도 그 공개수위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관련된 내용으로 포장될 것이다. (앞으로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남북의 협의사항을 존중한다든지, 남북 간의 교류협력을 적극 이해하고 지지한다든지, 기간 적대정책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다든지 ... 등등으로)      

  왜냐하면 북의 일관된 입장이 ‘민족내부의 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우리끼리 해결해나간다는 그런 민족자주와 자결의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봤을 때는 우리 민족내부의 문제를 미국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논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즉,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만약 미국이 실제 민족내부의 문제인 금강산 관광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에 그 브레이크를 걸어 놓았다면 이는 무조건 그 간섭을 철회해야 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그 대책과 남북 간의 교류협력을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지 북미정상회담에서 공식의제로 채택하여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그런 것의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두 번째로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 이전 북은 일관되게 대북제제 해제와 종전선언을 주장했던 만큼, 그런 상황에서 북이 그 전제조건을 철회하지 않았는데도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그 대전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맞는 것이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2일 "대북 제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지만, 그러면서도 “몇몇 매우 확실한 증거를 얻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하여 그 출구전략을 제시한 것이 그것이다. 즉, ‘매우 확실한 증거’는 정치적 판단의 문제이고, 그 판단을 트럼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 되어서. 결과도 제2차 북미정상회담 2월 말 개최로의 확정이다.  

  그런 만큼,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 평화협정체결 문제를 비롯한 평화체제 구축문제와 북미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이라는 그런 방향에서 그 핵심내용이 다뤄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구체적인 이행방안으로. 

  내용은 북의 선(先)행동에 대한 상호신뢰의 징표로 존재했던 대북제재 해제와 종전협정보다는(이는 이미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 그 자체로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기 때문에)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의 주된 내용은 한반도 평화지대 구축과 관련된 일련의 프로세스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북의 핵동결 확인과 이에 대한 등가로 미국의 한반도내 전략자산들의 배치, 반입, 훈련 등 중단과 한미합동군사훈련 영구중지 등이 협의-확정될 것으로 보인다.(2019년 신년사가 이를 명확히 해준다.)

  이후 핵군축 단계에서는 이제껏 우리 국민들이 귀가 아프게 들어온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북미국교 수립 등 그런 것들이 해결되면서 한반도에서의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과 비핵화정책은 계속 실현되어 갈 것이다.

  이렇듯 북핵문제의 본질은 이제 그 전략적 우위가 미국이 아니라 북이고, 그 성격도 북핵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이고, 그 이행방식도 신고-검증-폐기의 그런 기술적 방식이 아니라 동결-군축-폐기라는 그런 정치적 방식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③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과 주한미군 철수문제와의 그 상관성은?  

  그 과정에서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인 평화체제구축 수립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것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이다. 그런 만큼,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하는 그런 문제는 필히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결론도 매우 ‘깊은’ 연동관계가 있다. 바로미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서 방위비 분담, 동북아평화유지군 등 그런 문제로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도저히 희석될 수는 없다. 본질적으로도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과 주한민군 철군문제는 상수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무조건 철군이 그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최종적으로 향후 북미정상회담에서는 꼭 이 문제가 다뤄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상상해보면 이는 금방 알 수 있다. 

  주한미군이 계속주둔 되고 있는 한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졌다고 해도(‘주한미군 있는’ 평화체제) 한반도는 여전히 언제든지 다시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그런 땅으로 전락하게 되어 진다. 이른바 ‘가역적’ 평화체제라는 것이다. 즉, 평화협정만 체결되어졌지 여전히 미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주권은 획득하지 못했다는 의미와 같다. 

  철수의 당위성은 또한 6.12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종전선언을 구두로 약속하면서 가진 그 기자회견에서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주한미군을 집으로 데리고 오고 싶다”며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이미 공식화하였다. 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문제로 그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채택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국가정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또 연방연합제 통일로 가는 그 과정에서도 주한미군 철수문제와는 비례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 이른바 연방연합제는 ‘주한미군 있는’ 평화체제에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는 그런 통일방안이라는 말이다. 왜? 연방제 통일이 외세로부터 빼앗긴 자주권 회복과 전 민족적인 단합과 단결을 실현하는 그런 방식의 통일이라고 한다면 주한미군 주둔과 자주권은 비례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 그 연장선상에서 참고로 동북아 평화유지군도 반드시 털고 가야만 한다. 이유는 양국체제론에 그 기반을 두고 연방연합 통일대신, 남북 평화공존체제를 합리화시켜 주고 있는 그런 기저이기 때문이다. 

  (3) ‘새로운 길’에 대한 해석이다

  아래 한 문장 때문에 2019년 북 신년사에서 핵심키워드가 유일 결정될 뻔했다.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무엇을 강요하려 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강조, 필자)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대전제에 대한 해석을 참 잘해내어야 한다. 다름 아닌, ‘새로운 길’이라 하여 제1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그 ‘새로운 북미관계’ 그 자체가 파괴되고, 무조건적인 ‘미국과의 힘 대결 추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길’이라 하여 ‘새로운 북미관계’수립 그 자체가 궤도 이탈되는 그런 북의 독자적인 힘 노선이라기보다는 그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한 방도가 ‘대화와 협상’의 방식보다는 다른 방도로도 바뀔 수 있다는 그런 엄중한 경고로 해석해 내어야만하기 때문이다. 

  즉, 그래야만 북의 전략적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019년 신년사에서도 “호상 인정하고 존중하는 원칙에서 공정한 제안을 내놓고 올바른 협상 자세와 문제 해결 의지를 가지고 임한다면 반드시 서로에게 유익한 정착점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그 의미가 읽혀지고 ‘새로운 길’에 대한 진정성을 읽어낼 수가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도 언필칭 전문가들과 언론들, 정치인들은 그 ‘새로운 길’을 2019년 신년사 중 북미관계에서 그 핵심 키워드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으면서 그 ‘새로운 길’에 대한 해석을 병진노선의 부활(‘과거의 길’로 해석), 혹은 중국과의 밀월 등으로 오독해내고 있다.  

  <연합뉴스>는 1월 3일자 기사에서는 "김정은 '새로운 길'은 미국 대신 중국과 손잡기 시사"라는 제목기사가 그 예이고, 통일연구원 또한 같은 날 내놓은 신년사 분석 자료에서 “새로운 길 모색 언급은 과거 경제·핵 병진 노선으로의 회귀나 과거로의 퇴행으로 보긴 힘들다”며 “기본적으로 그런 길들은 새로운 길이라기보다는 과거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연구원은 “결국 미국의 상응 조치들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6·12 합의를 이행할 필요가 없다는 수사적 배수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고까지 해석하였다. 

  결론적으로 둘 다 참으로 1차원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이고, 특히 통일연구원의 해석은 그야말로 정말 형이하학적이다. 병진노선으로의 회귀가 ‘과거의 길’이기 때문에 ‘새로운 길’이 아니라는 그런 식의 분석은 연구원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분석법이 결코 아니다.

  이유는 북이 설령 병진노선으로 되돌아 갔다하더라도, 이것에 대한 분석기준은 대개 어느 한 국가가 전략노선을 변경할 때 그 본질이 해당시기 목표가 어떻게 변화되었느냐에 따라 그 전략노선의 변경이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인과관계가 핵심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에 따라 전략노선의 유의미성을 판단해내어야지 그냥 과거와 같은 동의어가 사용되어졌다하여 그것 때문에 ‘과거의 길’이고, 그 전략적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해석해내는 것은 참으로 정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병진’이라는 단어가 다시 재등장했다는 것만으로 ‘과거의 길’이라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국가의 전략적 목표 달성여부, 시대적 상황, 역사적 과업 등 이런 것들을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소요시기에 맞는 그런 전략노선이 채택되어졌느냐, 아니냐가 그 본질로 되어져야만 한다. 했을 때 단순히 같은 ‘병진’용어가 재등장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과거의 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백번 양보하여 생각해볼 때 굳이 그러한 생각을 계속 갖고 가고 싶다면 기간 북이 핵-경제 병진노선에 대해 ‘혁명적 승리(완전 승리)’라는 총화를 해놓고도, 왜 또 다시 핵-경제 병진노선을 들고 나오느냐? 하는 그런 인식의 연장으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계속 가져가고 한다면 그런 의도까지 매도할 수는 없다고 봐진다.  

  그렇다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인식적 오류는 경계해야 한다. 다름 아닌, 윗글에서도 잠시 언급되었지만, 1960년대의 ‘국방-경제 병진노선’과 2010년대의 ‘핵-경제 병진노선’에는 같은 ‘병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도 그 어느 누구하나 2010년대의 병진노선에 대해 낡은 ‘과거의 길’로 진입한 전략노선이었다는 그런 평가를 하지는 않는다. 

  똑같은 논리로 그렇다면 2018년에 마감한, 그것도 ‘혁명적 승리’로 총화한 그 병진노선이 설령 1년 만에 다시 재등장한다 하더라도 그 용어의 재등장만으로 ‘과거의 길’로 낙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40년의 기간은 되고, 1년의 기간은 안 된다는 것도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략노선이 기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시대적 상황, 역사적 과업달성 여부, 소여시기의 전략적 목표 달성여부 이런 것들로 판단해야 하는 그런 개념이이서 그렇다.) 연동해서 ‘선군정치’를 내세웠던 김정일 집권시기에도 북은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사실상의 선군경제노선도 넓은 개념으로서는 병진노선인데, 그렇다면 이 또한 설명할 길은 없다. 

  다시 말해 결론은 해당시기에 전략상 필요하다면 재등장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본질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전제로 지금의 정세 하에서 정말 정세를 냉정하게 분석해봤을 때 그 ‘새로운 길’을 다시 병진노선으로 회귀해야 할 만큼 그렇게 급변한 정세변화가 일어났느냐하는 그런 문제로 해석해내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선, 상황적으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예상되어 있는 등 북미협상은 계속 진행형에 있어 병진이 등장할 만큼, 그 전략적 환경이 절대적으로 변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억측이 따른다는 점이다. 둘째는, 기간 핵-경제 병진노선을 가장 최상위의 의미가 있는 ‘혁명적 승리’로 결속(총화)하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다시 그 병진노선 구호를 제시한다는 것은 다소 그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셋째는, 핵보유국이자 전략국가는 굳이 병진노선을 채택하지 않더라도 핵전력 강화의 길은 충분이 걸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이상으로부터 ‘새로운 길’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병진노선의 재등장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과의 신(新)밀월을 지칭하고 있는 것일까? 이 또한 가능하지 않는 발상이다. 왜냐하면 북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대국주의 의존전략을 구사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비록 그 해당국가가 사회주의 형제국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가능하지 않는 발상이 될 수밖에.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이는 충분히 증명되는 범위 안에 있다. 

  북은 단 한 번도 중국, 러시아(소련)와 관계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기대지 않았다. 자주, 친선, 평화의 원칙에 입각한 대외정책이 매우 일관되게 작용한 결과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중국 등 사회주의권, 러시아 등 친선국과의 관계는 항상 우호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들 국가들을 통해 평화, 번영을 추구한 것이 북의 아주 오래된 전통적인 대외정책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후 북미관계가 제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이들 전통 우호국보다 우선시하는 그런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뜻은 또한 대국주의와는 더 철저하게 자주, 평화, 친선의 외교관계가 실현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른바 사회주의 형제국가와의 관계 우선주의는 여전히 작동할 것이며 또한 여전히 그렇다하더라도 중국 등 사회주의대국에 기대는 그런 국가발전전략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미국과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면 도대체 ‘새로운 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상상 가능한 범위로는 전쟁도 생각할 수 있다.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북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싸울 수 있는 그런 국가이기 때문이다. 시늉만이 아니라 실제 전쟁을 하겠다는 그런 국가적 의지가 있는 유일국가임이 분명해서 그렇다. 

  그런 만큼, 미국을 최대한 압박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방식도 상상할 수 있다. 역사적 경험으로도 이는 충분히 증명된다. 미국과의 전쟁경험이 그것이다. 그것도 승리한 경험이다.(북의 판단으로) 그러니 신년사에서 밝힌 것처럼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무엇을 강요하려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하여 전쟁을 선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전쟁 그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 형태와 내용, 즉 당시에는 재래식 중심의 전쟁이었다면 지금 현대전은 상상할 수 없는 가공할만한 현대무기들로 치러지는 것만큼 ‘새로운’에 충분히 부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결론은 그리 ‘가능성 그리 높지 않다’이다. 이유는 아래 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핵전력 강화와 연동된 미사일 시험발사 재개, 전략국가에 걸 맞는 최대높이의 정치군사적 압박, 중국과 러시아와의 협력 및 민족공조에 의거한 역 포위 전략 등 다양한 압박수단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렇다.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유효실탄들이 많은데, 굳이 인류의 재앙을 초래할만한 최후의 수단인 핵전쟁을 선택한다? 그렇게 현명하지도 가능성이 높은 발상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길? 우선은, 핵전력 강화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핵보유국의 핵전력 강화는 특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군사영역과 경제영역에서 진행할 수 있는 매우 일상적인 활동들이다. 북이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조건에서는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운용할 수 있는 그런 정책인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해 신년사에서 대량생산과 실전배치라는 핵전력 강화를 언급한 이유도 그런 인식의 연장이라고 봐진다. 

  그리고 이는 또한 핵보유 국가들은 물론이고, 설령 미국과 북이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했다 하더라도 그 약속과도 당장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이유는 위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완전한 비핵화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공정을 거쳐 먼 훗날 실현될 장기과제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와 관련해 김정은 위원장의 ‘의미 있는’ 행보 하나가 눈에 띈다. 2018년 11월 16일 보도된 내용, 김정은 위원장이 현지지도 과정에서 언급된 "우리 당의 정력적인 영도 아래 오랜 기간 연구개발 되어온 첨단전술무기(강조, 필자)는 우리 국가의 영토를 철벽으로 보위하고 인민군대의 전투력을 비상히 강화하는 데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고 밝힌 그 대목이 그것이다. 

  동시에 (핵전력 강화의) 그 본질을 미사일 시험발사(실전) 재개로 국한해서 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국가 핵무력 완성국가에서는 핵전력 강화를 핵시험이나 미사일 시험발사 없이도 진행할 수 있는 그런 충분한 능력과 조건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시뮬레이션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한 그렇게 볼 수 있는 그 근거에는 핵동결을 왜 처음부터 왜 그렇게 완결적인 형태로 선언하지 않고, 이른바 미완의 핵동결‘3불’정책에서 완성된 핵동결 ‘4불’로의 정책전환이 왜 일어났느냐 하는 그런 문제에 천착하면, 숨은 1cm를 찾을 수가 있다.  

  다름 아닌, 미국을 최대한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북미 협상의 진척 정도를 봐가면서 내올 수 있는 그런 정책이었단 말인데, 그 연장선상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잡혔다는 것은 제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많은 부분에서 일정정도의 긍정적 진척이 꽤 진행되었음을 의미해서 그렇다.   

  다음으로는, 전략국가에 걸 맞는 정치군사적 압박도 상상 가능한 범위이다.  

  여기서 잠깐, 전략국가와 관련한 해설을 해내면 김정은 위원장은 2017년 11월 29일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고 난 며칠 뒤인 12월 22일 전략국가라는 개념을 썼다. 당 세포위원장 대회에서였다. 그때 처음 등장했다. 

  이의 정치적 의미가 전략국가라는 것이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국제질서를 변경시킬 힘을 실질적으로 가졌느냐, 안 가졌는가가 더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문제이고, 그 핵심에 바로 핵무력 개념이 있고, 그 핵무력의 실체가 첫째는, 핵보유와 함께, 핵무기를 보유했느냐의 문제. 둘째는, 그 핵무기 보유로 인해 게임 체인지 국가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 셋째는, 그 게임 체인지를 통해 인류의 염원이라 할 수 있는 ‘핵 없는 세계’를 추동해 나갈 수 있느냐로 나타난다 했을 때 북이 지금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얻어 내려는 결과가 한반도에서의 항구적 평화체제, 북미 간의 새로운 관계,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라고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세계질서의 근본변화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고 누가 감히 얘기할 수 있으랴. [전략국가에 대해서는 필자의 <통일뉴스> 기고 글(2018.06.05.), “정상국가와 전략국가 사이(하): 북한은 전략국가가 분명하다” 참조] 

  그렇게 북은 한 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북미대결전에서 사상강국, 정치강국, 군사강국에 이어 국가 핵무력 완성까지 한 핵강국이 되었기에 세계 정치구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국가 반열에 분명 들어섰다.(경제력과 비례한다는 그런 개념으로서의 전략국가를 이해한다면 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북이 전략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이 왜 전략국가이지 않는가? 이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북이 왜 전략국가인가? 도 충분히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국가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사회주의권과의 동맹관계 강화, 제3세계 국가들과의 세계자주역량 재구축, 민족공조이념 복원에 의한 남북의 공동전선, 미국(1) 대 북-중-러-남의 다자구도 구축 등 전략국가가 할 수 있는 그런 정치·외교적 압박은 충분히 미국을 설득해낼 수 있는 그런 압박수단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 결론을 대신하며

  이제 트럼프는 ‘사랑에 빠졌다’는 둥 그렇게 ‘썸’만 탈 수 없게 되었다. 핵동결 선언과 ‘새로운 길’은 정말 ‘사랑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 것이다.  

  실증적으로도 제2차 북미정상회담 그 자체가 회담개최의 대전제였던 제재해제와 종전선언(혹은, 생략하고 바로 평화협정체결로 직행하는 것도 가능하다)에 대해 공식, 혹은 비공식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며, 또 ‘다자 협상’으로 포장된 중국의 역할론에 대해서도 1차 때와는 달리 미국이 일언반구가 없다는 것은 분명 미국이 2차 정상회담에 응할 태세가 완료되어다는 의미와 같다.   

  해서 북미 간의 ‘새로운 관계’와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시간표는 보다 분명 빨라질 것이고, 비례해서 남북관계도 연동되어져 숨 가쁘게 돌아갈 것 같다. 

  희망은 분명 그렇게 동 터오고 있음이다. 북미관계에는 오랜 적대관계, 그것도 ‘철천지원수’ 관계’가 끝장내지고, 남북관계는 분단 74년 만에 그 재결합의 서광이 깃들려 한다. 어찌 흥분되고 감격에 복받치지 않겠는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마침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미의 관계도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선순환 구조가 잘 맞아떨어지는 그러한 상황과 맞닿았다. 분단 70여년 만에 찾아온 엄청난 기회이고, 이는 ‘모세의 기적’에 비견할 만하다. 

  결코 이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 유대민족이 그 타이밍 ‘모세의 기적’ 때문에  살아남았듯이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국운상승도 결국 타이밍을 잡아야만 하는 것과 같다. 

  북에게는 국가 핵무력 완성이라는  정치군사적 힘이 있고, 남에게는 촛불정부라는 정당성이 있고, 미국에게는 국가우선주의라는 자국 중심의 정책우선주의가 있을 때, 그렇게 3박자가 다 맞아떨어질 때 기회를 확 잡아야 한다. 충분한 기회이다. 

  황금 돼지해가 그렇게 우리 민족을 일깨우고 있다.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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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중환자실, 흙더미…시간을 품은 이야기들의 집

여관, 중환자실, 흙더미…시간을 품은 이야기들의 집

등록 :2019-02-02 09:07수정 :2019-02-02 09:11

 

[토요판] 커버스토리
내가 시작된 집 

사진가 24명이 그들 삶 시작된 곳
수십년 만에 찾아가 사진으로 기록
옛 모습 그대로 영업하는 여관부터
주차장 또는 고속도로 중앙선으로, 
재개발이 흔적 없이 지운 집들까지 

 

24명의 사진가가 그들의 삶이 시작된 곳을 찾아 사진으로 기록했다. 재개발로 철거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집, 반짝이는 고층빌딩숲에 지워진 집, 축구 연습장을 만들기 위해 흙더미로 변한 집, 가장 낮은 자들을 품는 무료병원 중환자실로 바뀐 신생아실,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세월을 쌓아온 집들까지…. 과거 옛집에서의 한때를 찍은 사진과 수십년 만에 새로 찍은 사진이 포개져 서로에게 말을 건다. 누군가가 시작된 집에서 사진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대가 사람 할퀴며 역사 쓰는 동안

 

사람 품었던 집은 말없이 시대 기억

 

내가 떠난 집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세계가 나를 흔들고 무너뜨릴 때도

 

끝내 살아남아 나를 지탱할 이야기

 

 

 

농촌의 가난이 몰려드는 곳에 도시가 있었다. 서울까지는 도착했으나 그 이상은 가지 못한 사람들이 비좁은 집에 몸을 포개 살았다. 1966년 박상찬(48·음악단체 프로젝트21앤드 대표)의 부모가 경남 고성군에서 이사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열댓평 집에선 3대 3가구가 가족 구분 없이 섞여 잤다. 5년 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식구는 12명(그의 가족 7명+작은아버지 가족 4명+할머니)이 됐다. 좁은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앵두를 따 먹고, 닭싸움을 하고, 개와 달리기를 했다. 그의 가족은 6살 때(1977년) 북아현동으로 이사 갔고 남아 있던 작은아버지 가족은 1985년까지 살았다. ‘86 서울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서울시가 ‘무허가 건축물을 정화한다’며 허물었다. 골목 안쪽에 있던 판잣집들이 철거돼 골목과 합쳐졌고 집이 있던 자리엔 담장이 세워졌다. 그가 수십년 만에 옛집 터를 찾아 카메라로 찍었다. 41년 만에 찍은 골목 사진 위에 어린 시절의 사진(그가 4살 때 장미를 꺾어 누나에게 주는 장면)을 포갰다. 사진 박상찬 제공,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농촌의 가난이 몰려드는 곳에 도시가 있었다. 서울까지는 도착했으나 그 이상은 가지 못한 사람들이 비좁은 집에 몸을 포개 살았다. 1966년 박상찬(48·음악단체 프로젝트21앤드 대표)의 부모가 경남 고성군에서 이사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열댓평 집에선 3대 3가구가 가족 구분 없이 섞여 잤다. 5년 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식구는 12명(그의 가족 7명+작은아버지 가족 4명+할머니)이 됐다. 좁은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앵두를 따 먹고, 닭싸움을 하고, 개와 달리기를 했다. 그의 가족은 6살 때(1977년) 북아현동으로 이사 갔고 남아 있던 작은아버지 가족은 1985년까지 살았다. ‘86 서울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서울시가 ‘무허가 건축물을 정화한다’며 허물었다. 골목 안쪽에 있던 판잣집들이 철거돼 골목과 합쳐졌고 집이 있던 자리엔 담장이 세워졌다. 그가 수십년 만에 옛집 터를 찾아 카메라로 찍었다. 41년 만에 찍은 골목 사진 위에 어린 시절의 사진(그가 4살 때 장미를 꺾어 누나에게 주는 장면)을 포갰다. 사진 박상찬 제공,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내가 시작된 집에서 그 이야기들도 시작됐다.

 

내가 이 세계로 들어와 섞인 이야기. 나를 이 세계에 심은 사람들의 이야기. 나와 그들이 이 세계에서 ‘서로’가 된 이야기. 나를 이 세계가 흔들어도 끝내 살아남아 나를 지탱해온 이야기.

 

 

시대가 사람을 할퀴는 동안

 

나(홍영진·67)는 섬의 여관에서 시작됐다.

 

서울대병원 소아과 의사였던 아버지(홍창의·96)는 한국전쟁 때 제주도로 파견됐다. 1951년 1·4 후퇴 때 병원도 부산과 제주로 피란했다. 아버지는 서울대병원이 제주 한림에 만든 구호병원에서 일했다. 마땅한 병원 건물이 없어 면사무소 창고를 빌려 피란민들과 제주도민들을 진료했다.

 

아버지의 동료가 소개해준 숙소가 태양여관(제주도 제주시 한림읍)이었다. 어머니가 임신 중이어서 방이 3개뿐이던 여관 전체를 빌려 썼다. 여관은 한림항으로 나가는 뒷골목에 있었다. 육지에서 온 외판원들이 들고 온 물건들을 파는 동안 머무는 여관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가끔 한림항에서 육지의 전쟁을 걱정하며 바다 저편 비양도를 바라보곤 했다. 1951년 7월 의료진이 부산으로 합류했을 때도 아버지는 외과의사 한명과 제주에 남아 환자들을 돌봤다.

 

나는 1952년 그 여관에서 태어났다. ‘결과적으로’ 나는 장남이 됐다.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형이 전쟁통에 세상을 떠났다. 1953년 귀경한 서울대병원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나의 식구들은 태양여관에서 살았다. 나의 기억엔 없는 여관을 아버지는 그리워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수차례 방문 끝에 2015년 여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내 나이 62살에 내 출생의 장소를 처음 봤다.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 태양여관의 이야기도 계속되고 있었다. 6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1층짜리 건물은 2층이 돼 있었고 3개뿐이던 방도 7개로 늘어나 있었다.

 

그사이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던 아버지는 한국 소아의학계의 ‘어른’이 됐다. 1987년 6월항쟁 직후 창립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의 초대 이사장이 됐고, 아버지의 이름을 딴 책(1975년 첫 발간 뒤 263명의 필자가 참여해 현재 11판까지 낸 <홍창의 소아과학>)은 선구적인 한글 의학 교과서로 평가받았다. 아버지를 따라 소아과 의사가 된 나도 전공의 시절 의사가 부족한 제주도에서 파견 근무했고 인의협 창립에도 참여했다.

 

지난해 추석을 맞아 아버지와 나, 내 아들들과 손자, 4대가 제주도로 건너가 태양여관 앞에 섰다. 낡은 새시문에 빨간 글씨로 이름을 새긴 여관 안에선 시간이 품어온 이야기들이 묵고 있었다. 지난 시간을 살아낸 세대와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갈 세대가 서로를 대견해하며 여관 앞에서 오랜 이야기를 풀어냈다.

 

2018년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태양여관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파견 간 소아과전문의 홍창의(오른쪽 둘째·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초대 이사장)씨가 2년 동안 머물며 아들 홍영진(오른쪽 첫째·전 인하대병원 소아과 과장)씨를 낳은 곳이다. 지난해 추석을 맞아 4대가 제주도로 건너가 태양여관 앞에 섰다. 홍영진 제공
2018년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태양여관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파견 간 소아과전문의 홍창의(오른쪽 둘째·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초대 이사장)씨가 2년 동안 머물며 아들 홍영진(오른쪽 첫째·전 인하대병원 소아과 과장)씨를 낳은 곳이다. 지난해 추석을 맞아 4대가 제주도로 건너가 태양여관 앞에 섰다. 홍영진 제공
나(안선영·49)는 동대문상가아파트(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다동 524호에서 시작됐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부모님이 1970년 부산을 떠나 방 하나, 부엌 하나인 집에 닿았다. 12평 남짓인 작은 집엔 한해 먼저 상경한 큰아버지 여섯 식구(큰아버지 부부와 사촌남매 넷)가 살고 있었다. 두 가구 합쳐 아홉인 집에서 단칸방을 쪼개 할머니 방을 따로 만들었다. 밤에 몸을 움직이려면 자고 있는 식구를 타고 넘어야 할 만큼 집은 비좁았다.

 

숨을 곳 없는 집에서 신기하게도 내가 생겼다. 입 하나 느는 게 큰 부담이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큰어머니의 눈치를 볼까 염려한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절대 아이를 지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해 연말 나는 기어코 태어났고 식구를 두자릿수로 만들었다. 인근 병원 의사가 집으로 왕진을 와 어머니의 출산을 도왔다.

 

농촌의 가난이 몰려드는 곳에 도시가 있었다. 서울까진 도착했으나 그 이상은 가지 못한 사람들이 5층짜리 아파트의 4층과 5층에 모여 살았다. 1~3층에선 노동자가 된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땀으로 젖은 동대문의 일상을 구성했다. 누군가는 한국이 입는 옷을 재단했고, 누군가는 한국이 신는 신발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옷과 신발을 등에 지고 날랐고, 누군가는 누군가가 먹는 밥을 머리에 이고 배달했다. 누군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로서 그들은 가난한 노동을 구원하느라 바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집에서 직선거리 600m 떨어진 동화시장에서 양복기술자로 일했다. 한 층을 두개 층으로 분리해 아래층에선 미싱(재봉틀)을 돌렸고 다락이 된 위층에선 재단과 ‘마도메’(미싱 작업 뒤 단추 등을 다는 마무리 손바느질·일본식 봉제용어)를 했다.

 

내가 태어나기 한달 전 붉은 화염(1970년 11월)이 일었다. 아파트에서 300m, 동화시장에선 100m도 안 되는 거리(평화시장)에서 스물두살의 재단사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그의 죽음에 놀란 만삭의 어머니는 두 팔로 뱃속의 나를 꼭 감싸 안았다. 내가 태어나기 8개월 전엔 서울시가 지은 와우아파트가 무너졌고(4월), 내가 태어나고 일주일 뒤(12월15일)엔 제주에서 부산으로 항해하던 남영호가 침몰했다. 불타고 무너지고 침몰하는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 3년 뒤 우리 식구는 그 좁은 집에서 분가(종로구 충신동)했다. 대학생이 된 나는 학생운동을 하며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동대문의 전태일을 다시 만났다.

 

사진을 찍으러 45년 만에 찾아간 아파트는 재개발이 바꾼 풍경 속에서도 옛 모습(신발 도매상가로 특화)을 유지하며 여전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촬영 몇달 전 어머니가 쓰러졌다. 뇌손상으로 기억이 흐려진 어머니의 뿌연 이야기를 부여잡고 내가 시작된 집을 찾아가 사진에 담았다. 낡은 아파트의 계단 창문 너머에 우리 식구가 아파트를 떠나던 해 지어진 ‘동대문맨숀’이 있었다. 그 잿빛 아파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옛날 열 식구의 빨래를 들고 옥상을 오르내리던 엄마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피를 토하며 생산량을 맞추던 시대를 견디고 탄생시킨 오늘은 그때보다 덜 고달플까. 나는 지금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작은 집을 짓고 있다.

 

2018년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1970년 안선영씨는 할머니와 큰아버지 식구가 같이 사는 12평 남짓 아파트에서 머릿수 10명을 채우며 태어났다. 그 한달 전 청년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 소식에 만삭의 어머니는 뱃속의 그를 꼭 감쌌다. 현재 신발 도매상가로 특화된 동대문상가아파트 다동의 모습. 안선영 제공
2018년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1970년 안선영씨는 할머니와 큰아버지 식구가 같이 사는 12평 남짓 아파트에서 머릿수 10명을 채우며 태어났다. 그 한달 전 청년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 소식에 만삭의 어머니는 뱃속의 그를 꼭 감쌌다. 현재 신발 도매상가로 특화된 동대문상가아파트 다동의 모습. 안선영 제공
나(윤수영·38)는 학살이 일으킨 공포 속에서 시작됐다.

 

아직 신혼이었던 부모님은 광주의 이층 양옥집(광주시 남구 양림동) 1층에 방 하나를 얻어 살았다. 집주인 식구들이 1층에서 같이 거주하며 공간을 나눠 가졌다.

 

1980년 5월 아버지의 직장은 전남도청 근처 전일빌딩(5·18 당시 계엄군의 헬리콥터 기총소사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에 있었다. 거래장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러 출근한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나를 업고 금남로가 내려다보이는 집 앞 공원에서 혼자 무서워 떨었다. 밤에도 총소리가 들렸고 불꽃놀이 하듯 밖이 환했다. 소리가 새어나오는 집으로 총알이 날아든다는 소문에 어머니는 백일도 안 된 나를 이불로 말아 장롱 안에 숨겼다.

 

1년 뒤 여수(전남)로 이사 가며 떠난 그 집을 37년 만에 카메라를 들고 찾아갔다. 디자인회사로 바뀐 옛집 앞에서 주름진 어머니가 백발이 된 아버지의 팔짱을 꼈다. 시대가 사람을 할퀴며 역사를 쓰는 동안 사람을 안아주던 집은 말없이 시대를 기억하거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사라졌다.

 

 

나 없는 집을 지키며

 

사진들이 찍은 것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였다.

 

내가 시작됐으나 이젠 내가 없는 곳을 기록했다. 수십년 만에 찍은 내 출생의 장소는 사람 대신 차들이 쉬는 공영주차장이 돼 있거나, 주차장을 나온 차들이 무섭게 내달리는 고속도로 중앙선이 돼 있었다. 수평을 깔고 앉은 수직의 고층빌딩으로 바뀌었거나, 재개발로 흔적을 잃고 아파트 단지 속으로 숨어버렸다. 내가 시작된 집을 담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나였다.

 

나(최경아·49)는 죽음이 대기하는 병원에서 시작됐다.

 

1970년 내가 태어난 성가병원(재단법인 천주교성가회·서울시 강북구 미아동)은 1990년 성가복지병원(사회복지법인 성가소비녀회·성북구 하월곡동)으로 이름과 장소를 바꿔 무료병원이 됐다. 성가복지병원은 일반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 가난한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의탁하는 의료기관(후원: 국민은행 017-25-0001-379)이었다. 노숙인과 무연고자, 장애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찾아가 아픈 몸을 맡겼다.

 

내가 48년 만에 병원을 찾아갔을 때 옛 신생아실은 중환자실이 돼 있었다. 내 삶이 시작된 자리에 죽음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이 세계로 삶이 오고 가는 통로는 그렇게 연결돼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서 처음과 끝을 맞는 삶들이 나를 운명처럼 글에 묶었다.

 

내 생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생을 마무리하는 이들을 촬영하며 나(2018년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 부문 수상자)는 내가 걸어갈 길을 생각했다. 나(현재 르포문학작가)는 방송사에서 시사·다큐 작가로 20년 넘게 일했다. 2015년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기획이 거부당한 뒤 방송 일을 접었다. 나는 웅장하거나 으리으리한 것들에 내 글을 보태지 않을 것이다. 웅크리고 스러지는 것들 곁에서 나는 쓸 것이었다.

 

1970년 당시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 최경아씨가 한살 때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최경아 제공
1970년 당시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 최경아씨가 한살 때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최경아 제공
2018년 서울시 성북구 하월곡동: 최경아씨는 1970년 미아동의 성가병원에서 태어났다. 48년 만에 찾아간 병원의 신생아실은 위치(하월곡동)와 이름(성가복지병원)을 바꿔 무료병원 중환자실이 돼 있었다. 일반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 가난한 환자들이 성가복지병원을 찾아 의탁했다. 최경아 제공
2018년 서울시 성북구 하월곡동: 최경아씨는 1970년 미아동의 성가병원에서 태어났다. 48년 만에 찾아간 병원의 신생아실은 위치(하월곡동)와 이름(성가복지병원)을 바꿔 무료병원 중환자실이 돼 있었다. 일반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 가난한 환자들이 성가복지병원을 찾아 의탁했다. 최경아 제공
나(조혜경·48)는 지금 없는 병원에서 시작됐다.

 

부모님이 살던 동네 산부인과병원(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이었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병원 건물의 위치를 찾아냈을 땐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갓난아기였던 내가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는 동안 병원은 스파게티 전문점이 돼 있었고, 건물 벽에선 벽화로 그려진 나무가 진짜 나무(가로수)와 경계를 섞고 있었다. 내 카메라 앞에서 74살이 된 어머니가 포크를 들었다. 나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던 건물에 앉아 스파게티를 먹으며 어머니는 재빨리 가버린 세월을 낯설고 서먹서먹해했다.

 

나(정지현·45)는 어머니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집에서 시작됐다.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중턱에 그 집(전남 목포시 서산동)이 있었다. 찬 바람이 눈보라를 휘날리던 1974년 새벽에 나는 조부모와 고모·삼촌의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다. 그 사랑이 어머니에겐 미치지 못했다.

 

한해 전 태백산맥 끝자락의 너른 평야(전남 영암)에서 시가로 온 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를 겪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밥을 이불을 덮어 아랫목에 두면서도 갓 결혼한 어머니에겐 누룽지 먹을 시간도 주지 않았다. 물 길으러 갈 때를 빼곤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며 어머니는 눈물겨워했다. 음식 솜씨가 좋은 어머니에게 고모들은 “음식 잘하는 걸 보니 어디서 식모살이라도 하다 왔나 보다”며 핀잔을 줬다.

 

1992년 할아버지 사망(이후 할머니는 부모님의 분가(1976년)한 광주 집에서 생활) 뒤 처음으로 지난해 어머니와 그 집 앞에 섰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던 집을 딸과 오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도 어머니는 집 곳곳에 묻은 기억들을 되살렸다. 태어난 시각에 맞춰 사진에 담은 집의 빛깔은 새벽만큼 검푸르렀다. 이젠 우리 가족 아무도 살지 않는 쇠락한 동네에서 배를 타는 선원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젊었다.

 

나(이연호·50)는 흙더미로 변한 집에서 시작됐다.

 

부모님이 결혼 뒤 마련한 첫 보금자리(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였다. 집은 김포공항에 바짝 붙어 있었다. 공항에 취직시켜준다는 사람의 말을 믿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집에 아버지가 세를 얻었다. 그 사람은 ‘와이로’(뒷돈)만 챙기고 연락을 끊었다.

 

집에 있으면 비행기 뜨고 내리는 소리로 귀가 멍했다.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갈 때마다 비행기 따라 고개를 쳐들던 나는 거꾸로 넘어져 논두렁에 처박혔다. 공항을 포기한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일했다. 아버지가 출근해 집을 비운 사이 큰아버지가 와서 살림살이를 차에 싣고 성남(경기)으로 가버렸다. ‘반강제 이사’를 당한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성남에서 터를 잡고 산다. 비행기 소리에 잠을 설치느라 우리 형제가 많아졌다고 어머니는 그 시절을 웃으며 회상했다.

 

지난해 어머니(아버지는 2010년 작고)와 방문한 옛집은 철거당해 축구장 터가 돼 있었다. 흙과 폐자재가 쌓인 집터에 서서 어머니가 어깨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올려다봤다. 50여년 전에도 어머니는 저 자리에서 출근하는 아버지를 배웅하고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1969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갓난아기 때 이연호씨가 김포공항 옆에 위치한 집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 아버지는 김포공항에 취직시켜준다는 사람의 말을 믿고 공항 옆에 세를 얻었다. 이연호 제공
1969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갓난아기 때 이연호씨가 김포공항 옆에 위치한 집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 아버지는 김포공항에 취직시켜준다는 사람의 말을 믿고 공항 옆에 세를 얻었다. 이연호 제공
2018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이연호씨가 45년여 만에 찾아간 옛집은 축구장 터로 철거돼 흙더미가 돼 있었다. 어머니가 폐자재가 쌓인 집터에 서서 어깨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연호 제공
2018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이연호씨가 45년여 만에 찾아간 옛집은 축구장 터로 철거돼 흙더미가 돼 있었다. 어머니가 폐자재가 쌓인 집터에 서서 어깨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연호 제공
나를 내보낸 집들을 시간이 통과하자 시간이 흘린 이야기들이 남았다. 방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선 나는 맷돌질하는 세상에 갈리지 않으려고 세상보다 빨리 돌았다. 집이 헐려 사라져도 맷돌 사이로 떨어진 이야기의 가루는 땅에 붙어 날아가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건네는 위안에 의지하며 나와 그들과 이 세계의 이야기도 계속될 것이었다.

 

*태어난 집을 이야기하는 사진집단 ‘포토청’의 단체전(‘Birthplace’)이 2월1일부터 28일까지 경기도 성남시 ‘갤러리 카페앤드티’(중원구 산성대로 594 세영빌딩 3층)에서 열린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1992년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 당시 한살이던 ‘아기 김혜리’가 집이 있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유모차를 타고 있다. 김혜리 제공
1992년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 당시 한살이던 ‘아기 김혜리’가 집이 있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유모차를 타고 있다. 김혜리 제공

 

2018년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 27살이 된 김혜리씨가 같은 장소에서 카메라 앞에 앉아 아기 때의 사진을 들고 촬영했다. 김혜리 제공
2018년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 27살이 된 김혜리씨가 같은 장소에서 카메라 앞에 앉아 아기 때의 사진을 들고 촬영했다. 김혜리 제공

 

1973년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성애병원 신생아실에 갓 태어난 김중백씨가 누워 있다. 김중백 제공
1973년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성애병원 신생아실에 갓 태어난 김중백씨가 누워 있다. 김중백 제공

 

2018년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현재의 성애병원 모습. 신생아실이 있는 신관(왼쪽)과 장례식장이 있는 본관 사이를 구름다리가 잇고 있다. 김중백 제공
2018년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현재의 성애병원 모습. 신생아실이 있는 신관(왼쪽)과 장례식장이 있는 본관 사이를 구름다리가 잇고 있다. 김중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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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0947.html?_fr=mt1#csidx4ea1b244e835644a2f77e2fa7efe7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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