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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결의 "5.18 폄훼 시도에 저도 맞서겠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2/21 08:43
  • 수정일
    2019/02/21 08:4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일부 망언 계속, 저 또한 분노를 느낀다"... 5.18 관련 광주지역 원로들과 오찬 간담회

19.02.20 16:29l최종 업데이트 19.02.20 16:47l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낮 청와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관련 광주지역 원로 초청 오찬 간담회에 입장하고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낮 청와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관련 광주지역 원로 초청 오찬 간담회에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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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5.18 망언'에 "분노를 느낀다, 저도 맞서 싸우겠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20일 낮 12시부터 70분간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5.18 민주화운동 관련 광주지역 원로인사들과 만나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왜곡하고 폄훼하는 일부 망언이 계속된 데 대해 저 또한 분노를 느낀다"라며 "상처받은 5.18 영령들과 희생자, 광주 시민들에게 대통령으로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상규명은 끝까지 이뤄져야 한다는 약속과 함께 5.18 역사 폄훼 시도에 대해서는 저도 함께 맞서겠다"라고 비장한 결의를 내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5.18 민주화운동 관련 광주지역 원로 인사들을 만났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5.18 민주화운동 관련 광주지역 원로 인사들을 만났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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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문 대통령은 "저는 대통령 취임 직후 5.18 기념식에 참석해서 5.18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한 바 있다"라며 "5.18은 국가의 공권력이 시민의 생명을 유린한 사건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광주 시민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희생 속에서도 맞섰고 이는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둥이었다"라며 "그 위대한 역사와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날 행사 마무리 발언에서 문 대통령은 "5.18이 광주의 지역적인 사건, 지역적인 기념 대상, 광주만의 자부심이 아니라 전국민의 자부심, 기념 대상으로 승화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라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의 탈지역화'를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4.19나 6월 항쟁처럼 전국적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그리고 민주주의를 더 빛내고 오늘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역사적인 운동이었다는 점들이 될 수 있게끔 다른 시민운동 세력들과 함께 연대를 많이 했으면 한다"라고 당부했다.

김후식 5.18부상자회 회장 "우리는 괴물집단이 아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과 인사 나누는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낮 청와대에서 5.18 민주화운동 관련 광주지역 원로를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하기에 앞서 김후식 5·18 광주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 등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5·18 광주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과 인사 나누는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낮 청와대에서 5.18 민주화운동 관련 광주지역 원로를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하기에 앞서 김후식 5·18 광주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 등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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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참석자들은 최근 있었던 5.18 망언에 대해 깊은 유감의 말들을 했다"라고 전했다.

박경린 전 광주YWCA 사무총장은 "너무 마음이 아프고 견디기 힘들었다, 울분을 금할 수 없다"라고 토로했다. 김후식 5.18광주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은 "우리는 괴물집단도 아니고, 세금을 축내고 있지도 않다"라며 "대통령이 2명의 위원을 재추천하라고 요청한 것은 적절하고 의미 있는 조치였다"라고 평가했다.

김후식 회장은 지난 18일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역사 왜곡과 폄훼는 우리 민주화의 역사와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다"라고 비판한 것을 언급하면서 "역사를 바로 세워준 데 대해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감사의 말을 전해 왔다"라고 전했다.

고민정 부대변인은 "그밖에도 참석자들은 지역의 독립유공자 발굴, 5.18특별법 제정,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 등의 의견을 전달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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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해적국가 미국 반성이냐 단두대냐 결정?

조선, 해적국가 미국 반성이냐 단두대냐 결정?
 
 
 
리인숙 재미동포 
기사입력: 2019/02/20 [20:15]  최종편집: ⓒ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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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국가 미국을 반성시킬지 단두대로 보낼지 결정하게 될 회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이달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릴 예정인 가운데 그에 대한 성과에 대해 사람들의 엇갈리는 모습을 본다.

난 일전에 말했듯이, 내 생애 처음으로 공화당 대통령을 투표한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기대가 잘못됐다해도 힐러리나 트럼프나 도찐개찐이기에 후회는 없다.

트럼프가 자본주의의 정확한 표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이고, 우월주의에 흠씬 젖은 인종차별적인 비도덕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단지 그가 김정은 위원장과 햄버거를 먹으며 대화할수 있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말과, 그가 아직은 힐러리 처럼 전쟁광 군산복합체의 앞잡이로 발목이 잡혀있지는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트럼프라는 럭비공이 미국 파워엘리트들의 의도와는 달리 튀어, 혹시나 한반도의 평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해서 그를 찍었다. 물론 트럼프라는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을 했었다.

트럼프는 미국 국경선에 230억 달러를 쏟아 붓고 연방정부 문을 닫으면서까지 아직도 국경장벽에 매달리고 있다. 트럼프 전에도 미국에서는 불법 체류자를 수색하며 남미 노동자들을 추방하여 많은 공장들이 남미인들에게 주던 값싼 노동자를 구할 수 없어 애를 먹은 적이 있다. 남미인들이 떠난 후 그 공장에 취직한 미국사람들이 남미인들이 하던 일을 하면서 일주일도 못 버티고 그만뒀다라는 기사를 본적이 많다. 사실 미국에서 남미 노동자들이 가장 힘들고 더러운 막노동을 저임금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유지되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극성을 부리던 ‘불법체류자색출’이라는 프로그램이 흐지부지 중단되었었다.

그런데 또 다시 트럼프가 ‘미국인에게 일자리창출’한답시고 같은 맥락의 정책을 하고있는 것이다. 근본 문제는, 미 대륙은 인디언의 땅이었으나 거의 전멸시켰고, 캘리포니아나 텍사스도 사실 멕시코에 속했던 것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의 땅을 빼앗듯이, 남미인들의 땅을 빼앗은 것이라는 사실로 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대형 범죄적인 행위가 팔레스타인들에게 매일 가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트럼프는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다른 동맹국가들에게도 옮기라고 촉구하였고,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구조금까지 중단하면서 팔레스타인을 두번 죽이는 잔인한 짓을 자행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도 ‘ 이스라엘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미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인 친이스라엘 인이다. 물론 대부분의 미국정치인들이 이스라엘의 로비에 다 녹아나 이스라엘이면 무조건 뻘 짓들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2019.02.12한겨레) 이스라엘 이익단체 비판했다가…미국 무슬림 초선의원의 수난 … 트위터에서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 로비 비판했다가…

<< Democrats Join Republicans In Bill Criminalizing Speech Critical Of Israel by MJ Rosenberg, HUFFPOST >>

<< The New Israel Anti-Boycott Act Is Still Unconstitutional By Brian Hauss, MARCH 7, 2018, ACLU >>

지난 해 12월 19일 트럼프가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 하겠다고 했으나 그 후 미국 주도하에 있는 70개국이 넘는 똘마니국가들이나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더 많은 폭격을 더 자주 가하여 인민들을 죽이고 그땅을 더욱더 파괴하고 살륙하고있다.

트럼프의 말과 행동이 제각기 놀아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악의 편에 서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신에 대해 자랑질도 잘 한다.‘자신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다면 북과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전화 몇 통으로 주한미군방위비 분담금 5억 달러가 올랐는데, 앞으로 계속 방위비 분담금을 올릴 것이다’ 라며 으쓱거린다.

(2019.02.13 김원식기자 VOP) 트럼프 “한국 정부, 전화 몇 통에 방위비 분담금 인상에 동의했다” 과시 / 백악관 각료회의서 “몇 년 동안 엄청나게 오를 것” 주장...인상액도 공식발표와 달라 http://www.vop.co.kr/A00001378579.html

(2019.02.10연합) 주한미군 주둔비 8.2% 인상 1조389억 '유효기간 1년' 韓美방위비분담협정 가서명

이렇듯 악한 일에는 사정없이 달려가던 럭비공이 오직 조미관계에서만은 주춤하고 있는 것이다. 그 험한 말이 오가던 2017년 말 폭탄들과는 비교가 안 되게 고분고분해졌고 공손해졌다. 트럼프가 이 ‘조미회담’ 카드를, 탄핵 배척위기에 있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그리고 차기 대선을 위한 자기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트럼프 정부가 끝날 때 까지 이용해 먹을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한반도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전자의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도 끊임없는 비핵화 요구, 그리고 국제법을 제멋대로 어기는 미국이 받아야 마땅한 제재를 오히려 피해자 나라들(조선 이란 베네스엘라 시리아…)에 가하는 황당무개함, 인권유린이나 해킹 등의 사기중상모략들의 끓임 없는 연속, 한국에서의 주인노릇과 한국정부에 명령하는 것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때에 한국좀비들의 놀아나는 꼴들을 보노라면 희망이 절벽된다. 남녘국민들은 삶에 쫓겨 절망과 자살이 이어지는데, 미군주둔비를 받기는 커녕 왜 미국에 방위비를 바쳐야하나?? 주한미군은 미국을 위하여 한국에 있을뿐, 한국의 안녕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중러일의 패권전쟁이 터지면 그들은 미군사기지가 있는 한국을 일차 타격대상으로 삼게 된다. 타민족을 위해 손해 불려고 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하나 없는데도, 왜 남부조국의 찌질이 들은 “한미동맹”을 외치며 외세에 돈 주고 목숨주고 나라까지 바치려할까? 이런 노예근성의 “대한미국”을 조폭양아치 같은 미국지도자들이 우숩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들이 한국의 대통령들을 하인취급한 것이다.

북에서는 끊임없이 우리민족이 굳게 뭉쳐 함께 나가면 어떤 외세의 방해와 책동에도 우리 힘으로 이겨나갈 수 있다며 양손을 벌려 어서 탕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 매국노들은 손을 내민 내동족의 손을 무시하고 미국 상전 똥만 먹으려 달려가고 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반민족 반통일 매국노 세력인 자한당뿐만 아니라 더불당도 별다를 바 없이 “혈맹” “한미동맹” 운운하며 우리분단의 원수인 미국을 절대 상전으로 모시고 있다. 이번 한국 5당 지도부가 국민의 혈세로 미국에 와서 하는 짓거리를 보아도 한국에 과연 기대할 희망이 있을까 싶다.

(2019.02.15아시아경제) 문희상, 뉴욕서 연설…"남북관계 진전시키려는 것은 북핵포기 목표 때문” ...

|| 문희상 의장 "남북관계 진전은 북핵포기·북미관계 개선 위한 것" - SBS뉴스

|| (2/15연합) 문의장 "美조야, 北비핵화 대한 비관 희망적으로 많이 바뀌어"

문희상은 모든 것은 한미동맹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해찬은 "북한은 시간 끄는 것을 좋아하고 상대방이 시간의 압박을 느끼도록 하는 게 일관된 전략이니 북한과 대화할 때 꼭 유념해야 한다."면서 "북한 경제가 너무 심각해 전쟁을 치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니 (북한에) 빨리 노선을 바꿔 경제개발을 하라고 이야기하면 그쪽에서도 인정할 것"이라고 언급했고 ,

나경원은 종전선언을 섣불리 하게 될까 우려된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에 조선대해 흠 짓을 내기 위해 같이 동행한 다른 당을 내쳐두고 미국보수파들과 따로 만나는 추태까지 벌렸으며 박근혜와 다름없는 국제 병신 같은 짓거리까지 했다.

이 오적 5당은 미국 상전 보수들과 만나 상전의 명령대로 일본과 철통같은 동맹을 재확인했다고 한다.

발췌: <<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손떼라! 2019.01.29 한토마 http://c.hani.co.kr/hantoma/3641053

……..베네수엘라는 미국과 지척에 있으면서 세계 석유매장량 제 1위라 한다.

당연히 미국 자본가들이 빨대를 꼿고 있고 마름 노릇하는 베네수엘라 자본무리들이 있고 대다수 국민들은 궁핍했다.“대한미국”이 자유당 민주당 매국노양당체재이듯이, 베네수엘라 역시 매국정당 두개가 번갈아가며 집권하는 양당체제였다. 1998년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제헌의회소집” 을 내세운 우고 차베스가 압도적으로 대통령이 되어,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선거공약대로 기존헌법은 효력정지 시키고 헌법을 새롭게 뜯어 고쳤다. 기존국가 기구들이 모조리 체해되어 국회의원이건 판사건 직책을 잃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었으며 나라가 일신됐다. 석유를 국유화하고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헌법에 명시되어 실시되고, 궁핍했던 국민들에게 사회복지 혜택이 주어지고 빈곤 문제 등이 개선되었다. … >>

문재인 정부가 진정 촛불혁명으로 태어났다면, 차베스 처럼 새헌법을 만들어, 반민족 반통일의 대명사인 자한당 같은 적폐들을 가장 먼저 청산했어야 했고, 따라서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뿌리인 국가보안법도 없어져야 했다. 명박근혜라는 적폐대장들이 감옥에 갇히고 그 똘마니들이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며 무릅꿇고 빌며 힘을 쓸수 없었을때 이 더럽고 추악한 적폐들을 전멸시켜야 했었지만, 80%나 국민지지를 받은 문재인 정부는 “연정”, “협치”를 주장하며 이들을 살려주어 지금은 독사의 머리를 뻣뻣히 치켜 올리고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친일친미행각을 하고 있다.

소수 국민만이 지지를 했던 매국노 독재자들도 제맘대로 국회를 해산시키고 학살해가면서 한국을 농락해온 (민주주의?)나라인데, 하물며 80%의 지지를 받는 자가 명박근혜 똘마니들 - 사분오열 지리멸렬한 소수 매국노들의 눈치를 보며 “협치”노래를 부르다니 말이 되는가?

<< 남부조국은 언제까지 그렇게 찌질 하게 놀 것인가? 2019.01.04 한토마 http://c.hani.co.kr/hantoma/3627847 >>

사진: 명박근해매국당 똘마니들의 살려달라는 애원>

“그렇게 하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북과 손을 잡고 북핵을 우리민족 남북 공유로하면 어느 나라도 군사개입 할 수 없고, 미국이 경제제재를 하면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에 들어와 있는 모든 미국자본들을 몰수하면 미국이 손을 든다, 미국을 상대하지 않아도 북과 같이하면 중국 중동 러시아 유럽으로 쭉 뻗어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60여 년간 조선이 끊임없이 평화 대화를 요구했어도 오히려 공갈협박만을 일삼던 미국이 조선 핵 이후에는 먼저 대화신청을 했다. 것이 핵을 가진 우리민족의 위상이다. 왜 우리가 지금도 외세의 눈치를 보아야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내일을 주체적으로 결단해 나가야지, 이완용이 나라를 완벽하게 일제에 넘길 때 까지 “기다려 보자”할 것인가?

한반도를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에 서명을 해놓고도 남쪽 군부는 우리의 기대와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만일 조선이 남녘을 공격하려면 핵을 쓸 필요도 없이 작은 미사일폭탄으로 남녘의 원자력발전소 몇 개만 폭파해도 한국은 죽음의 땅이 된다. 또한 절대 다수가 살고 있는 서울이 장사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어 남부조국은 북부조국과 절대로 전쟁할 수 없는 무방비상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북부조국은 절대로 남부조국의 유리창 하나도 깨지말라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확고히 받들며, 우리민족 형제사랑으로 감싸안아 주며 같이 부국강병 대국이 되는 길로 가자고 한다. 미국과 맞장뜨고 있는 북부조국을 남녘 좀비들이 우습게 보는 모습이, 조폭 빙신똘마니가 지기 두목만 믿고 앞장서 큰소리치며 지랄하는 모습과도 같다.

독립군들을 때려잡던 일제매국노 관동군의 후예들은 한국 군사비를 예전보다 13. 6%나 더 늘리겠다고 하고, ‘핵 및 대량살상무기대응체계’라는 이름하에 살상무기들을 대대적으로 사들이고 배치하고 있다. F-35A를 오는 3월부터 실전배비하며 올해중에 10여대 들여오겠다고 공개했다. 박한기 합참의장은 지난 2월 2일 공군 1전투비행단과 해군 3함대사령부, 육군 31사단을 차례로 방문해 군사대비태세를 점검한데 이어2월 11일부터 강원도 화천일대에서 사단급 ‘혹한기 훈련’을 강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민족끼리는 “군사분야합의서리행을 약속하고 뒤돌아앉아서는 그에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크든작든 상대방을 겨냥한 어떤 형태의 군사행위도 군사분야합의서와 배치된다는것은 상식이다.”라고 했다. 또한 이에 대해 우리민족끼리의 최은경은 “군사적긴장완화의 흉내를 피우고 돌아앉아서는 상대방에 대한 타격을 노린 무력증강에 광란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남조선군부의 행태를 과연 누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듯이 조선이 아무리 한반도에 더 나가 세계에 평화의 씨를 뿌리려 해도 남쪽과 미국이 상응하지 않고 방해만 한다면 결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 알수 없지만 내가 그 위치라면 나는, 북핵대륙간탄도 미사일을 뉴욕 앞바다에서 폭발시켜 미국에 경고할 것이며, 한국에 대해서는 폭삭 썩고 비굴한 매국노들이 개소리하는 장소 – 여의도, 법원, 언론사, 적폐재벌주거지등을 정밀미사일로 박살내줄 것이다.

법부터 썩고 언론 종교도 썩고 정부도 썩었는데 그 밑 사회 전반에 흐르는 물 역시 당연히 썩지 않을 수 없으며, 영육이 망가진 한국을 살리는 길은 오직 박살날수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어, 회개하고 바른길을 가라고 경고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때때로 남부조국에 비밀결사대 ‘레지스탕스 운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한다. 사악한 정치계, 사법계, 경제계, 언론, 지식인들, 관료들, 그와 관련된 자들을 비밀리 처단하고 그 죄목 딱지한장을 같이 붙여두면 다른 흉악한 매국노들도 겁이나서 자중하게되고, 따라서 사회흐름의 방향도 바꿔질수 있지 않을까 꿈 같은 생각을 해보기도한다.

<< 나는 레지스탕스가 되고 싶다 2014.12.31 http://c.hani.co.kr/hantoma/2755793

나를 좌빨 빨갱이라 불러 주오 2013.06.07 http://c.hani.co.kr/hantoma/215113

내가 믿는 빨갱이 예수 2012.05.25 http://c.hani.co.kr/hantoma/1936642 >>

지금 세계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잔인한 횡포로 인해 통곡의 소리가 멈출 날이 없다. 지금 이시각에도 이란혁명수비대 차를 향한 자살폭발로 이란 혁명대를 포함하여 41명이나 살상했으며 시리아 리비아 예멘등에 시시각각으로 폭격을 하고 있다. 탐욕에 찌든 미국 전쟁광들과, 그 미국이 흘린 부스러기 라도 주워 먹기 위해 악의 축에 합류한 똘마니 동맹국들이 폭격하여 생지옥이 된 예멘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라틴 아메리카 소말리아 …등등에서 굶어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볼때 밥을 먹는 내 자신이 때로는 죄의식이 든다.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자원으로 충분히 배 굶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건만 날강도 국가들의 침략과 강탈로 이렇게 굶어 죽고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볼 때 자국과 인민을 지키는 길은 오직 자국의 힘(최강의 무기, 핵) 밖에 없다는 것을 재삼 절감한다.

양심과 정의가 죽은 깡패사회에서는 대화 양심 정의가 통하지 않는다. 오직 힘쎈 주먹만이 나를 지킬 수 있고 인민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중동전쟁을 남미로 이동시켜 하려고 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가하는 행패를 보노라면 분노를 넘어 핵무기를 준비하지 않은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해서도 화가 날 지경이다. 패권 국가들의 개입과 약탈이 아니었더라면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제 1위 석유매장량과 금 다이아몬드 가스 등등 수많은 풍부한 자원으로 베네수엘라 인민들이 배부르게 먹고 잘 살 수 있다.

춈스키와 함께 베네주엘라 선거에 직접 참관하였던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가장 공정한 선거’라고 말하였듯이, 국민들의 68%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된 마두로를 미국은 부인하고 10년전 부터 미CIA의 훈련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는 엉터리 듣보잡 과이도(Guaido)를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군사개입까지 하려는 트럼프 정권을 악마의 화신이라고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손떼라! 2019.01.29 한토마 http://c.hani.co.kr/hantoma/3641053 >>

예전에는 돈독이 든 인간들이 강도짓을 할 때면 가면이라도 쓰고 했지만 트럼프는 가릴 것도 없이 완전히 벌거벗고 강도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심과 도덕과 정의가 죽으면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흉악한 짐승이 된다.

조선의 평화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중동 남미 등 세계에서 자행되고있는 미국의 패악질은 한도 끝도 없기에, 이번 제 2차 조미정상회담에서도 미국을 믿을 수만은 없다. 조선이 말한 “완전한 한반도의 비핵화”란 조선만의 비핵화가 아니라 세계비핵화를 말한다. 조선이 비핵화를 설령했더라도 미국 본토에서 평양에 미니트맨-3핵을 날리면 단 30분만에 도착하는데 이것이 어찌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가 되겠는가? 더욱이 미국은 이 미사일 개량을 위하여 어마어마한 돈을 책정하고 수시로 시험하고 있는데, 북핵폐기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것과 같은 핵폭탄을 6천여 개나 만 들 수 있다는 일본소유 플루토늄 47t도 폐기해야 함을 말하고, 단 몇 분 만에 지구 끝에서 부터 한반도에 날라 올 모든 핵미사일들도 폐기함을 말한다.

(2018.09.11 자유아시아방송) 문 대통령 “북 핵 폐기 단계로 가려면 조.미 정상 결단 필요”

(2019.01.09연합뉴스) 문대통령 "北, 대북제재 빠른 해결위해 과감한 비핵화 조치해야" || (01.11자주시보)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의 대변인인가

작년 2018년 초에 조선을 다녀온 문재인 정부 고위인사가 ‘북이 한반도 비핵화를 하겠다고 했다’라며 미국 전쟁광들이 듣기좋은 소리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제재 속에서도 미국의 위협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개발한 핵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미국 전쟁광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대한미국” 정부가 ‘북 핵 폐기’라는 여론몰이 방향을 터 주었으니 그 얼마나 신바람이 날 일인가? “CVID” “북 핵 폐기하면 잘 살게 해 주겠다”는 등 헛소리들이 언론을 장식하고, 지금까지 미국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조선을 압박하는 일에만 몰입했다. 조선은 미국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재가 되어도 자력갱생 자체적으로 일취월장 발전하게 되어있다. 공산주의권이 무너지고 대자연재해를 대책 없이 받았던 90년대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국제법상 경제제재는 전쟁행위로 간주되고 종전선언도 없으니 조선은 그에 대해 상응하는 대응으로 소형핵폭탄으로 침략전쟁광들의 여기저기를 자근자근 박살내주고, 미국이 대륙간탄도 시험을하면 조선도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해야 하고, 미국이 핵무기를 폐기하면 조선도 그에 비례하는 만큼만 핵을 없애야 한다. 여러 나라들이 핵을 가지고 있어도 핵 폐기 요구를 하지 않으면서, 남의 나라를 침략 한번해보지 않은 평화의 나라 조선의 핵은 폐기해야한다는 논리는 악당들의 잡소리에 불과하다. 조선은 핵동결 이상의 그 어떤것도 양보해서는 안된다. 설령 이번에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해도 날강도 사기꾼들의 말을 0.00001%도 믿을 수 없다.

미국은 역사상 한 번도 약속을 지켜본 적이 없다. 미국은 한반도침략전쟁에서 맺은 정전협정도 3개월도 안가 깨뜨렸다. 아메리카원주민들과 맺었던 2백여 협약들을 단 하나도 지키지 않은 해적국가이다. 미국은 아쉬울 때 순간 협정을 맺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그 협정을 인권 해킹 등등의 구실을 만들어 그 협정을 배반하고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을 누워 떡먹기 식으로 해왔다.‘배반의 달인’ 미국 전쟁광들을 떠받들고 있는 나라가 바로 남녘의 우리 민족이라는 한국매국노들이다. 보수 정당이나 자한당 패거리들이나 북 핵 폐기를 입에 물고 살고 있는 꼴을 보면 역시 남쪽은 일제매국노 뿌리답다는 생각이 든다. 남쪽 정부가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정신 차려야 한다. 눈을 뜨고 세계를 보라 미국제국주의 패권국가가 Divide & Rule (Divide & Conquer)를 사용하여 어떻게 약소국을 짓 밟고 온 땅과 산천이 피로 물들이고 있는가를 말이다.

우리 북부조국은 이런 해적국가들의 속성을 잘 알고있으며, 이번 회담에서 이 해적들을 회개시켜 양민이 되게할지 단두대로 보내야할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세계 양심인사들은 조선이 세계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우리 남부조국 동포들도 자긍심을 가지고 자기운명은 자기가 결정하는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북형제가 얼싸안고 새하늘과 새땅을 함께 이루어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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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돌아온 문희상 의장이 연일 ‘버럭’하는 이유는?

미국서 돌아온 문희상 의장이 연일 ‘버럭’하는 이유는?

등록 :2019-02-20 11:23수정 :2019-02-20 11:38

 

 

정치BAR_서영지의 오분대기
17일 미국에서 귀국한 뒤 참모진 전화로 호출
지난 18일 국회 ‘주간업무보고‘에선 답답함 호소
“국회가 너무 낯뜨겁다. 국회가 한 게 뭐가 있냐”
19일 원내대표 회동서 고성 뒤 직접 ‘친전‘도 보내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지난 19일 오전 국회 의장실에서 5개 정당 원내대표가 회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윤소하, 민주평화당 장병완,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문 의장, 자유한국당 나경원,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 공동취재사진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지난 19일 오전 국회 의장실에서 5개 정당 원내대표가 회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윤소하, 민주평화당 장병완,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문 의장, 자유한국당 나경원,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 공동취재사진
 
 

지난 18일 오전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주간업무보고‘가 있었습니다. 국회의장은 매주 월요일 오전 국회 사무총장 등 사무처 간부들과 회의를 하는데요. 이번엔 이 자리에서 문 의장이 국회 상황을 언급하며 ‘격정적 토로‘를 했다고 합니다. 국회 의사과 관계자가 “2월 임시국회가 아무래도 열리기 어려울 거 같고, 3월이 돼야 가능할 거 같다”고 보고하자, 문 의장이 강력한 톤으로 ‘멈춰선 국회’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했다는 겁니다.

 

 

“굉장히 강력한 톤으로 ‘국회가 너무 낯 뜨겁다’고 했다. 여야가 매일 정쟁만 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회의조차 안 하니까… 촛불로 정권이 바뀌고, 그 뒤 국회가 한 게 뭐가 있느냐면서. 그동안 의장이 협치에 공을 많이 들였다. 5당 대표들과 ‘초월회’도 하고, 5선 이상 중진의원들의 모임인 ‘이금회’도 만들고 일하는 국회를 강조했는데, 가만 보니까 된 게 하나도 없지 않냐는. 그래서 화가 난 거 아닌가 추측했다(회의 참석자)”

 

 

또 최근 문 의장이 여야 지도부와 함께 미국을 방문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실감했기 때문에, 완전히 멈춘 국내 국회 상황을 더 갑갑하게 느꼈을 것이라는 게 참석자들의 얘기입니다. 특히 내년 4월 21대 총선이 예정된 만큼 국회가 개혁입법을 처리할 수 있는 시한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국한 일요일에 참모들을 전화로 호출할 정도로 이 문제에 신경을 썼다 . 국회 주간업무보고에서도 많은 걱정을 했다 . 19일에도 계속 비서진을 불러들이고 하면서… 헌법상 임시국회 소집을 위해서는 대통령 또는 재적 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어야 하므로 의장이 직권으로 회의를 소집할 수가 없다. 의장은 북-미 정상회담이 8000만 민족의 생존이 걸린 회담인데 우리 국회는 뭘 하고 있느냐는 말을 계속했다. 2월, 3월이 국회가 일할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이 있다. 민생입법, 개혁입법 등은 시간이 지체되면 처리하기가 어렵다. 5당 원내대표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호소했는데 19일 비공개 회동에서 자기들 얘기만 하니까 역정을 낸 것이다. (또 다른 회의 참석자)”

 

 

국회가 멈추면서 민생입법, 개혁입법 문제뿐 아니라 국회의 ‘인사 처리’ 문제도 미뤄지고 있습니다. 문 의장은 각각 지난해 12월 차관급인 국회 예산정책처장과 입법조사처장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운영위원회에 제출했지만, 국회가 열리지 않으면서 이에 대한 처리도 ‘감감무소식‘입니다. 국회예산정책처법과 국회입법조사처법에 따라 의장은 두 처장에 대한 임명 동의를 운영위원회의에서 받아야 합니다.

 

국민이 보다 쉽게 국회에 청원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국회법 일부 개정안도 운영위에 계류 중입니다. 여기에는 현재 국회의원의 소개를 받아야 청원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는 현행 청원제도를 고쳐 ‘청원심사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누구든지 단독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서면이나 전자형식으로 청원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운영위 소위원회는 국회법 개정안 6건을 병합 심사해 전체회의로 넘겼지만, 국회가 파행하면서 운영위를 포함한 모든 상임위 가동이 중단된 상황입니다. 국회 관계자는 “여야가 정쟁만 할 게 아니라 국회가 국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문 의장이 지난 19일 5당 원내대표들과 가진 비공개 회동에서 큰소리를 친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의장 밖으로 문 의장의 고성이 새어 나왔습니다. “국회에서 뭐 하나 하는 게 있어요? 사법개혁이 됐습니까. 국가기관 개혁이 됐습니까. 그러니까 5.18 (망언과 같은) 이런 일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괜히 생겼습니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 5.18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예요.”

 

입법부를 대표하는 의장으로서 국회 공전에 대한 책임감과 답답함이 응축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문 의장은 2월 임시국회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손혜원 의원 투기 의혹 등에 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자유한국당과, 손 의원뿐 아니라 다른 의원들의 ‘이해충돌 여부’까지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협상이 결렬됐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문 의장이 원내대표들에게 화난 민심이 국회를 향해 쓰나미처럼 몰려올 수 있다고 질타했다”고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지난 19일 문 의장이 여야 국회의원 전원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지난해 12월 이후 국회 주변에서는 3차례의 안타까운 분신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는 개인의 절규일 뿐만 아니라 성난 민심이기도 합니다. 제20대 국회가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연말까지 불과 10개월 남짓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국회가 민생입법, 개혁입법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지금처럼 지리멸렬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국민의 촛불이 쓰나미처럼 국회를 향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회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싸워도 국회 안에서 싸워야 합니다. 국민의 삶과 마음 앞에서는 이유도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국회는 지금 당장, 무조건 열려야 합니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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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살은 어떻게 냉전 해체를 가로막았나?

[기고] 5.18과 1980년 한반도 주변 역학 관계

 

 

 

1980년 5.18 광주 항쟁에 대한 극우 진영의 왜곡이 도를 넘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북한군 개입설 등이 공론장에서 떠돈다. 이는 민주 진보 진영의 광주 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그간 주춤했던 탓도 있다. 한국 현대사를 똑바로 살피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이 나온다. 광주 항쟁을 다룬 대표적 저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어판 내는 일을 했던 설갑수 씨의 글을 싣는다. 2017년 5.18 기념재단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을 설 씨와 재단 측의 동의를 받아 다시 소개한다. 지만원 박사 등이 주장하는 북한군 개입설은 실증적인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1980년 당시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글이다. 당시 북한은 한국에 대해 군사 행동을 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당연히 광주 항쟁에 개입할 의사도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 역시 같은 판단을 했었다. 탐사보도 전문기자 팀 셔록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한 미국 정보기관 자료로 확인된 내용이다. 반면, 광주 항쟁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폭력 진압은 미국과 중국이 손 잡는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가로막은 사건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 세력의 역사적 과오는 광주 시민 학살과 성폭행 등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다 일찍 완화될 수 있었던 냉전 질서를 다시 굳혔다. 다음은 설 씨의 글 전문이다.   

 

소위 보수 정권 기간 동안, 즉 이명박의 임기가 시작된 2008년 2월부터 박근혜의 탄핵에 이르는 2017년 3월까지 광주 항쟁의 집단적 기억과 역사는 극우세력에 의해 극심한 왜곡에 시달려 왔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빛나고, 가장 비극적인 열흘이었던 광주항쟁은 진상 규명이 활발했던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의 버금가는 사건으로 대중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디게나마 도약하는 시기에는 북한 특수 부대 개입설 등과 같은 광주 항쟁에 대한 왜곡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왜곡은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방증일 뿐이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광주항쟁에 대한 탐사보도와 학문 연구가 사실상 정체했다는 것도 극우의 왜곡을 가능케 한 다른 요인이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다시 불붙기 시작한 진상규명 노력조차, 여전히 과거에 이미 거론됐거나, 찾아냈던 사실을 복기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 내 진실규명 상황이 착잡하게 더딘 탓도 있겠지만, 한국 전쟁 이후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던 광주 항쟁에 대한 국제적 역학 연구는 미국의 항쟁 진압을 규명하는데 국한돼 왔다. 광주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역학과 세계 경제정치적 맥락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다.


사실상 첫 시도이므로, 글의 범위를 1980년 전후의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역학에 제한한다. 또한 논증을 위한 데이터 역시 1차 자료, 외교, 정부 문서 그리고 언론 자료 등으로 제한한다. 


기존의 연구가 거의 부재한 탓이다. 또한 자료 접근성의 극심한 제한 때문에 중국 측 1차 자료를 인용할 수 없었다. 보다 많은 1차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중국이 어떤 논리와 목적을 갖고 한반도의 1980년 5월을 접근했고 개입했는지를 보다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광주항쟁 : 신냉전시대의 길목 


광주항쟁은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 카터-레이건 행정부를 잇는 신냉전 시대의 중심인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관계 역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총을 겨누고 싸운 27년 만에, 미국과 중국은 1979년 1월1일을 기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에 앞서, 1978년 8월 12일, 일본과 중국이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서로 손잡고, 소련을 견제하면서 서로의 시장에서 경제적 활로를 찾으려는 미국과 중국이 새로 짠 거대한 장기판을 비집고 나온 시험대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각자의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의 분쟁이 군사행동으로 격화할 수 있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에 대한 첫 시험대였던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구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해체될 기미조차 없던 동서 양극체제 하에서,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가 필요했다. 

미국이 구상하고, 중국이 적극적이었던 미국-남한-북한의 3자회담이 그것이다. 미중 국교 정상화 7개월 이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와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공동성명에 3자 회담 제안을 포함시킨다. 


미국의 의도는 중국의 지지 하에 미국-남한-북한 세 주체가 모여 서로 교차 승인 후, 남북 불가침 선언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식한다는 게 회담의 장기 목표였다. 남북의 교차 승인은 물론, 북미, 한중 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장기적 프로젝트였다. 유념할 것은 이것은 단순히 평화체제는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이 손잡고 소련을 견제하려는, 냉전체제의 한계 안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주변 열강의 의도와 무관하게, 남북한 민중들에게는 고단한 군사대결 체제를 종식하고, 냉전 체제 하에서 평화 공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였다. 빈약한 기회였으나, 한반도의 대전환이 가능한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 기회가 무산된 결정적 계기는 광주 항쟁의 무력 진압과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살 정권과 당장에 평화를 대화한다는 것은 실리도 명목도 없었다. 대화를 줄다리기하던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중국의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항쟁의 유혈 진압과 관련해서 미국을 비판했다. 광주항쟁의 무력 진압과 그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미중의 냉전적 동맹 하에서조차, 한반도에서 남북을 둘러싼 두 열강이 이해가 상충되며, 서로의 영향권에 대해 계속 갈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 후, 급속히 냉각된 남북관계는 간헐적 해빙기를 제외한다면,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가 체결까지 냉전 상태를 지속했다. 이 또한 노태우 정권 하의 제한적 국내 민주 역량이 이끌었 다기보다, 동구권의 해체와 탈냉전 구도의 영향 등 국제 정세에 대한 남북 지배층의 적극적 대응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0 년 5월 항쟁 전후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어떻게 재편하려고, 광주의 무력 진압과 전두환의 집권이 그것을 결정적으로 종결 했는지 살펴보자.


여력이 없는 북한 


1970년대 중반과 말기에 접어들어서, 격변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와 더불어, 남북의 국내 정세도 녹록지 않았다. 1970년대 말, 남한은 중공업 과잉 투자로 말미암아, 경제는 급작스럽게 냉각됐고, 기층 민중의 불만이 기존의 지식인과 학생 중심의 민주화 운동과 접목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점증하는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경제지표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북한 경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장기침체에 들어갔다는 게, 좌우를 아우르는 합의다. 또한 이런 정치경제 상황에서,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마무리되고 있었으나, 적어도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할 여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남과 북 모두,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남한에서는 1979년 부마 항쟁에 이어, 10.26 그리고 이듬해 5.18에 이르는 정변이 일어났다. 외부에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지만, 북한도 비슷한 시기에 정치 불안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1980년 5월 28일, 평양주재 헝가리 외교관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은, 시민의 자발적 봉기라는 초유의 비상사태가 남한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정보부에 해당하는 국가안전보위국의 국장 이진우가 조선 만주 국경의 소요 대응을 현장지도하고 있었다고 밝힌다. 


헝가리 외교관과 면담한 부국장은 "남한의 최근 소요(광주 항쟁) 이래, 북한 당국은 남한이 (항쟁 진압에) 쏠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남측의 도발보다, 북쪽에 자리잡은 적대 세력의 체제전복 활동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Wilson Center Digitnal Archive 1980) 미국 정보기관 사이의 협의체인 국가 정보 위원회(National Intelligence Council)에 미 중앙정보국(CIA)가 제출한 1980년 6월 2일자 회의의제에서 정보국은 미국의 단호한 군사공격 의지 표명이 북한이 광주 항쟁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 한다. (CIA, Agenda Items for 10 June NUC Warning Meeting 1980)


그러나 사실상 북한은 남한의 정치 혼란을 이용할 의사도 능력도 이미 고갈되어 있었다. 미국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미국 정보공개법(FOIA)을 활용해 입수한 북한 지도자들의 대화는 이 점을 드러낸다. 김일성과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등이 나눈 대화다. 1980년 5월 30일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정보 보고서는 "'최종 검증이 안된' (not finally evaluated) 첩보(intel)"를 담고 있다고 적시된 것으로 봐서 제3국이나 북한 내부 인적 첩보(humint)를취합한 자료로 보인다. 정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월 19일 남한에서 학생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 학생 소요가 일어나는 와중, 북한의 주석궁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무력부장 오진우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비밀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북한의 지도자들은 광주 소요가 전국적 인민 반란으로 확대된다면, 남한을 침공하는 일을 자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김일성이 실제로 침공을 준비한다고 시사하는 이상 징후는 없다." 


요약하면, 광주 항쟁이 전국 반란으로 번지면, 군사행동을 한번쯤,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북한의 입장이었고("자제하지 않겠다"), 실제로는 그조차 아무런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의사도 능력도 없는 말의 성찬이었다. 이 점은 2017년 5.18 기념재단이 CIA FOIA 웹사이트에서 찾아낸 광주항쟁 관련 20여 개의 기밀해제 문건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1980년 7월, 미국 정치인으로서 북한을 최초 방문한 스티븐 솔라즈(Stephen Solarz) 하원의원을 만난 김일성은, 비록 외교적 수사라 할지라도, 광주에 개입을 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경고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조금 길지만 인용한다.

 

"광주사태(incident)가 일어나자, 미국은 제3자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발언이 우리를 향한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봉기에 개입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역시, 이러한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남한 당국이 말하는 북조선의 남침 위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북한이 남한의 혼란상을 이용해 남침하려 한다는두려움도 사라졌다. 미국의 가장 큰 우려인 즉, 남한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남한으로 전진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자만, 이번 사태는 우리가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StephenS. 1980,9-10) 


이에, 솔라즈는 "북 측이 남한의 소요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며, "그러한 북의 입장은 건설적이었다"고 답한다. (242. Memorandum of Conversation 1979) 북으로 출국 전, 국무부와 정보부의 대북 브리핑을 받은 미국 하원의원의 화답이었던 셈이다. 


3자회담 : 북한의 대담한 제의, 중국의 후원, 그리고 미국의 화답


위에서 인용한 김일성의 발언은 북한이 1970년대 중반부터 취한 외교 노선의 논리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군사력을 통한 남한의 무력 점령 전략을 점차 포기하고 있었다. 


열전 대신, 북한은 스스로를 둘러싼 냉전구도의 재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미국과 중국이 데탕트의 일환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1970년대 중후반, 북한은 중국과 함께 미국을 상대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의 지위를 활용 한반도에서 유일한 자주국가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그리하여, 체제 안전 보장을 확보하려 했다. 1974년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결의했고, 1977년 1월,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공식 제안했다. 한편 남한에 대해, 연방제 구성과 단일국호 유엔 가입을 제안했다. 박정희는 남북 불가침 조약 회담을 역제안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유신정권 하에서, 한미 관계가 소원해졌다 해도, 미국이 한국을 완전히 배제한 채, 냉전체제 하에서 북한과 한국 전쟁의 강화 조약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미국의 제안이 남북미 3자 회담 제안이다.


카터 행정부 당시, 국무부 파일을 살펴보면, 미국은 1979년 7월 카터와 박정희 정상회담의 코뮤니케를 통해 3자 회담을 제안하려고 했고, 1979년 초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내부입장이 정리되자, 5월에는 중국과 이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한다. 5월 4일 백악관 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nski)는 주미 중국대사 차이 제민(柴泽民)과 만난다. 하루 전, 차이 대사와 카터 대통령과 미소 군축회담에 대한 면담의 내용을 재확인 것을 제외한다면, 3자 회담이 유일한 대화 주제였다. 미국은 3자 회담을 실현시킬 방법을 중국에게 물었다. 브레진스키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통한 극동 지역의 안정이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이해이지만, 소련의 이해는 아니라며, 3자 회담을 통한 남북 긴장 완화의 목적이 종국적으로 소련 봉쇄 전략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242. Memorandum of Conversation 1979)


차이 대사가 북한이 남한이 참여하는 3자 회담 틀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하자,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대북 대화는 남한의 의구심을 사게 될 것이며, 미국과 중국이 3자 회담을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 해결책(creative solution) 을 모색하자고 제의해 중국의 동의를 얻는다. 중국의 지원을 확인하자, 미국은 3자 회담 제안 준비를 재빠르게 진행한다. 5월 23일에는 정상회의 준비 명목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전 주한대사 필립 하비브(Philip Habib)를 특사로 서울로 보내, 이를 조율한다. 그리고 대중 접촉을 통해, 북한의 입장과 의중 변화를 계속 확인해 간다.


미국의 뜻대로, 그리고 중국의 의도대로, 7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남북한 미국의 고위당국자 회담이 제안됐다. 북한은 7월 10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한미 공동 제안을 거부하고, 종전 서명의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이 주도하고 남한이 옴저버 자격으로 참석하는 3 자 군사회담을 역제안 한다. 이 시기부터 미국은 중국과 루마니아와 같이 미국과 통하지만 북한의 우방인 나라를 통해 북한을 설득해 나간다. 급기야, 1979년 10월 13일, 당시 루마니아 외상이었던 스테판 안드레이(Stefan Andrei)을 통해 북한의 3자 회담 거부가 최종 입장이 아니며, 이 제안을 계속 고려하겠다는 전언을 듣는다. (Romanian Remarks on the Korea Trilateral Proposal 1979)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은 10.26 박정희 암살로 시작한 남한의 정변과 5.18 광주 항쟁의 진압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중단되었다. 무엇보다 광주의 유혈진압과 그에 대한 지지로 말미암아, 한국과 미국 모두 남북 긴장 완화를 위한 정치적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상실했다.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의 회고록(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한국판 제목은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의하면, 1980년 5월 22일, 국무성 아태 차관보 리차드 홀부르크(Richard Holbrooke)는 중국 대사 차이를 국무성으로 불러, 중국이 북한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고무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광주에서는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한지 하루가 채 되지 않고, 미국이 전두환의 유혈 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백악관 회의와 같은 날 만난 이 두 사람이 당시 남북한 사정에 대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중국은 일면 미국을 제한적으로 비판하고, 북한을 단속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정을 조기에 확보하고, 자신의 대북 영향력을 확인 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맞닿아 있었다.

체로키 파일 
 

3자 회담 협상 무산과 더불어 주목할 지점은 소위 체로키 파일(Cherokee files)이다. 팀 셔록이 1996년 정보공개법을 통해 입수해서 세상에 알려진 체로키 파일은,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10.26 이후 한국 상황을 점검하고 비상사태를 대비하려고 구성된 것이 아니라, 3자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국무성은 1979년 6월 8일을 기해 3자 회담 관련 모든 전문들에 "Cherokee"라는 분류 캡션을 넣으라고 지시한다. (DepartmentState 1979) 보안등급이 높은, 한반도 담당 고위관리만 3자 회담 전문을 읽고, 토론하고 회담의 성사를 진행할 사실상의 태스크 포스가 이 즈음 시작된 것이다. 체로키 팀은 최소 13명의 고위관리들로 이뤄져 있었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한 회담을 촉진하기 위해 구성된 테스크 포스가 이듬해 5월에는 신군부의 군사쿠데타를 인정하고, 광주의 유혈진압을 사실상 승인한 것은 언뜻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전혀 모순된 상황이 아니다. 위에서 서술한대로, 당시 한반도의 긴장 완화는 목적이 아니라, 지역을 재편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수단이었다. 수단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서 언제나 폐기될 수 있다. 미국은 신군부 지지를 통한 질서회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지역구도 재편을 위한 한반도 긴장완화라는 수단을 버렸다. 요컨대 기존의 냉전질서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쉽게 진압을 결정한 것이고, 중국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면서, 지역에서의 자신을 영향력을 유지했다.

 

결론을 대신해서. 

 

1. 1980년 5월, 광주 항쟁은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었다. 주변 열강의 어느 정부도 광주 시민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중국과 미국은 극동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했다. 양국 모두 광주 항쟁이 신속히 종결될 것을 원했고, 그러한 구도를 만들어 나갔다. 

 

2. 이러한 구도 속에서, 북한이 광주 항쟁을 획책하거나,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극우 지만원의 북한개입설은 실증적으로나 지역 역학적으로나 어불성설이다.

 

3. 현재까지는, 남북미 3자 회담 더하기 중국이라는 구도 하에서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표면 상, 1970년대 말 시도됐던 3자 회담의 구도가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때와 다른 점은 긴장 완화와 화해가 회담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점이다. 

 

4. 주변 열강 구도를 비집고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통성 있는 건강한 민주정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 화해 구도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주체가 촛불혁명 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5. 또한 1970년대 말 당시, 열강 구도의 재편 속에서, 미국과 중국의 3자 회담 구상을 적극 활용하지 못한 남북한 권위주의 체제의 경직성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남북 모두, 이 빈약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적극 활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고립시키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6. 광주 항쟁의 유혈진압으로 주변 열강들의 긴장 완화 흐름을 한반도에 주입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남북관계도 냉각되어 갔다. 한반도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남북화해도 불가능하고, 세계열강에 자기 운명을 내맡길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격동과 동북아시아의 세력의 재편 속에서 중국이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했고, 정책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충분한 자료와 논쟁을 통해 그런 연구가 진행된다면, 광주항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올곧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mendrami@pressian.com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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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은 ‘할아버지 길’ 따라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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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부대는 왜?

제1야당 전당대회 좌우하는 극단주의, 현대 정치의 민낯 보여줘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19.02.20 09:09
 

오늘도 언론은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이야기를 주요 소재 중 하나로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이른바 ‘태극기’ 들의 비상식적 언동과 행동으로 난장판이 되었으며, 제1야당이 이런 모습만 계속 노출하면 혁신은 기대하기 어렵고, 결국 다 망하고 말 것이라는 얘기다. 거의 모든 주류 언론이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런 지적에 말 한 마디 보태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시점에선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태극기 부대들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것일까? 사실 이전의 여러 글을 통해 이들의 심리를 한 마디로 정리한 바가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이들이 당연하다고 여겨 온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으로 다가온 여파이다. 과정이 아니고 결과, 명분이 아니라 효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고 실제로 많은 것을 이에 희생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는데, 갑자기 헌법이니 뭐니를 꼬치꼬치 따져서 대통령을 끌어 내릴 정도의 세상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면서 이것을 인정할 수도 없고 하여 누구 덕에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는 둥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잘못한 게 무엇이냐는 둥 너희들도 똑같이 하면서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둥 하는 거다.

그런데 ‘피플파워’ 정부의 오늘을 돌아보면 그렇게 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태극기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그 ‘대한민국’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사석에서 “기대를 갖고 지지했건만 왜 바뀌는 게 없는지 모르겠다”란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그 때마다 “원래 그렇다”고 답했다. 정치란 게 원래 다 똑같은 놈들이 하는 거니 애초에 포기했어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정치의 속성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자유한국당 2·27 전당대회의 대구·경북(TK) 합동연설회가 열린 18일 오후 대구 엑스코 앞 바닥에 대형 태극기가 깔렸다. (연합뉴스)

영화 <관상>을 보면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이런 말을 한다. “소신을 유배보내라 명하셨지요. 성공했더라면 제 목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것입니다. 내가 죽거나 아니면 상대가 죽지요.” 얼굴의 생김새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믿음을 소재로 한 오락영화의 이 대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형적 정치관의 일면을 보여 준다. 이런 믿음은 소수가 독점하는 엘리트 정치의 실체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소수의 기득권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근대 이후에 ‘나’와 ‘상대’를 규정하는 방식에는 또다른 전형이 생겼다. 그것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통치를 뒤엎는다는 어떤 신화적 경험이다.

혁명사는 근대 민중이 본 기득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대개 왕과 귀족들은 통치의 비밀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파렴치한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인물들이며 무능력하고 오로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열중하는 인물들로 묘사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왕정을 타파한 혁명의 순간에는 언제나 이런 기득권을 민중의 힘으로 끌어 내린다는 서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여기서 ‘민중의 힘’이란 세상의 주인임에도 부당하게 억압당해 온 이들이 자기 권리를 되찾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실효성을 갖는 통치 체제로서의 왕정이 거의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이 서사는 모습을 달리해 반복되고 있다. 현대 정치에서 비주류와 주류의 거의 모든 싸움은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싸움이라는 외양을 취한다. 이것이 어느 시기에는 파시즘의 조건이 되기도 했다. 나치가 스스로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변한 것은 ‘유대인의 음모’라는 피해망상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데 부당하게 권력을 소유한 기득권의 음모가 다른 민족에 대한 지배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태극기와 일베들이 상정하는 구도는 정확히 이와 일치한다. 이들은 스스로가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증명하려 한다. 나라 발전에 기여 했다며 굳이 태극기라는 상징을 취하는 게 그렇고 학벌이나 직업을 인터넷 공간에 ’인증’해 과시 하려는 것도 그렇다. 이들이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호남과 여성을 내세우는 민주정부와 종북세력이 음모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해 권력을 탈취해 기득권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광주 북한군 개입설이나 5.18 유공자 명단 공개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대중주의 정치의 반대편에는 흔히 엘리트주의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실제로 현대정치가 돌아가는 방식은 대중주의와 또 다른 대중주의가 경합한 결과가 무엇이건 간에 엘리트가 언제나 승리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태극기들이 지지하는 김진태 의원이 뜻밖의 선전을 해 이를 바탕으로 2022년에 대선후보까지 됐다고 쳐보자. 과연 광주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명확한 입장표명 없이 선거전을 치를 수 있을까? 이 시점에 이르면 태극기들은 낙담해 정치를 멀리하다가도 또 때가 되면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사실은 이게 ‘촛불혁명’ 이후 ‘피플파워’의 지지자들이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겪어야 했던 일이다. ‘개혁’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말을 하거나 ‘내로남불’이라는 둥의 똥물을 뒤집어 쓰고 그저 사라지는 운명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결국 칼자루를 휘두르는 것은 어느 정권에서든 승승장구 하는 관료-엘리트들이다. 그래서 남은 방법은 그저 원래 하던대로 하는 것이다. 이 정해진 운명을 ‘피플파워’ 정부도 거스르지 못하고 있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 곳곳이 다 그렇다. 미국에서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고 있다. 영국 노동당의 중도적 의원들은 제러미 코빈 대표를 향해 정확히 같은 혐의를 제기하며 탈당을 주장하고 있다. ‘유대인은 기득권’이라는 믿음과, ‘유대인은 기득권이라고 믿는 파시스트’라는 규정과, ‘상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해 반사이익을 얻는 정치’라는 비난이 서로를 기득권으로 규정하며 정신없이 교차하고 있다. ‘촛불혁명’ 때는 무능한 정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를 말하던 사람들이 오늘날엔 국가와 정부의 과도한 개입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침해돼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음란사이트 차단에서 북한과 중국의 전체주의 독재를 꺼내고, 지상파 방송에 대한 일종의 권고를 담은 안내서에 대해선 ‘여자 전두환’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지지한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대중의 변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앞서의 영화 대사를 빌려 오자면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런 악순환에서 탈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결국 정치 그 자체를 바꾸는 어려운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게 결론이다. 사건의 주변을 그저 떠돌기만 하는 말장난들과 일회적 가치판단에 열중하는 걸로는 안 된다. 사건의 핵심을 짚고 잠복돼있는 실제 갈등의 구도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게 첫 걸음이다. 대안을 자처하는 정치와 언론이 이 역할을 해야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태극기들의 시대는 당분간 여러 모습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것 같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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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 3·1 혁명' 명칭 변경, 국민 절반 "찬성"

[오마이뉴스 주간 현안 여론조사] 찬 49.4% vs 반 38.8%... 20대 찬성 67.3% 제일 높아

19.02.20 07:38l최종 업데이트 19.02.20 10:02l

 

ⓒ 리얼미터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1 운동의 명칭을 '3.1 혁명'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오마이뉴스> 여론조사 결과 우리 국민의 약 절반은 이런 개칭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대에서 찬성 의견이 67.3%로 매우 높게 나타나 젊은 세대일수록 명칭 변경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마이뉴스>는 19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500명(7968명 접촉, 응답률 6.3%)을 대상으로 '3.1 운동 → 3.1 혁명 명칭 변경'에 대한 국민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질문은 아래와 같았다.

"최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무총리실과 일부 정치권에서는 현재의 '3.1 운동'이란 명칭을 '3.1 혁명'으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당시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항일투쟁에 참여한 것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고, 임시정부 등에서도 '3.1 혁명'으로 불렀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요. 선생님께서는 현 '3.1 운동' 명칭을 '3.1 혁명'으로 바꾸는 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사 결과, 49.4%가 명칭 변경에 찬성한다고 답해(매우 찬성 22.9%, 찬성하는 편 26.5%) 반대한다는 응답 38.8%(매우 반대 15.3%, 반대하는 편 23.5%)보다 오차범위(±4.4%p)를 넘어 10.6%p 높았다. (모름·무응답 11.8%)

연령별로 살펴보면, 60대 이상을 제외한 전 세대에서 '3.1 혁명'으로의 개칭 찬성 의견이 높았다. 20대는 찬성 입장이 67.3%로 반대 입장 26.7%를 크게 따돌려 전 세대 중 찬성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이어 30대는 55.4%, 40대는 51.7%, 50대 역시 51.7%가 찬성한다고 응답해 모두 과반을 넘겼다(반대 응답은 각각 29.7%, 41.0%, 35.3%). 반면 60대 이상은 반대 53.8% - 찬성 30.3%로 찬반 비율이 뒤집혔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대부분 지역에서 고루 찬성 입장이 높았다. 서울의 경우 53.2%가 찬성 응답을 밝혀 가장 높았고, 광주/전라의 52.0%, 부산/울산/경남의 50.8%가 찬성 의견을 밝혀 과반을 넘겼다. 경기/인천의 찬성 응답도 49.6%로 거의 과반에 육박했다. 대전/충청/세종(찬성 47.6% - 반대 41.1%)과 대구/경북(찬성 46.4% - 반대 40.6%)도 오차범위 내이기는 하지만 명칭 변경에 찬성하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

이념성향 및 지지정당별로는 답변이 갈렸다. 자신의 이념성향을 '진보'라고 밝힌 응답자 중에서는 절대 다수인 70.6%가 명칭 변경에 찬성한다고 응답한 반면(반대 19.2%), '보수'라고 밝힌 응답자 중에서는 거꾸로 반대 응답이 65.5%로 압도적이었다(찬성 27.8%). 가장 숫자가 많은 '중도' 층에서는 찬성 52.7% - 반대 42.1%로 찬성 의견이 오차범위를 넘어 높게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찬성 65.5%), 정의당(찬성 65.0%), 민주평화당(찬성 73.1%) 지지층에서는 찬성 비율이 매우 높았고, 반면 자유한국당(반대 66.9%), 바른미래당(62.8%) 지지층에서는 반대 비율이 매우 높았다.
 
"촛불혁명 경험한 청년층, 낡고 고루한 역사관 벗어나"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부산 동구 일신여학교를 출발한 시민들이 동구청까지 행진하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재현하고 있다.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은 부산·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2018.2.28
▲  지난해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부산 동구 일신여학교를 출발한 시민들이 동구청까지 행진하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재현하고 있다.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은 부산·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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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오래 전부터 '3.1 혁명' 개칭을 주장해온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100년 동안 공식적으로 운동이라고 표현해왔기 때문에 개칭 찬성이 높게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대한민국 100주년을 맞아 국무총리를 비롯해 사회 각계에서 정명(正名)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 빛을 본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 전 관장은 20대가 명칭 변경에 제일 높은 찬성 입장을 보인 것에 대해 "지금의 20대는 촛불혁명을 거치며 낡은 고루한 역사관을 완전하게 벗어났다"라고 해석했다.

그는 "혁명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신해혁명도 프랑스 대혁명도 결과적으로 수십 년의 과정을 거쳐 혁명으로 완성됐다"라며 "3.1 혁명은 당시 우리 조상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 1만5000여 명이 학살당하고 수만 명이 감옥에 가는 상황에서 완성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동학혁명도 처음에는 동학난으로, 광주민주화운동도 광주사태라고 불렸다"면서 "당장 3.1 혁명으로 개칭하는 것은 법적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역사는 원래 정명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번 3.1절 100주년을 기해 우리가 먼저 3.1 운동 대신 3.1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조사는 무선 전화면접(10%)과 자동응답(ARS) 무선(70%)·유선(20%) 혼용방식으로 집계됐으며, 조사 대상은 무선전화(80%)와 유선전화(20%) 병행 무작위생성 표집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RDD) 방식으로 선정했다. 2019년 1월 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기준 성, 연령, 권역별 가중치 부여 방식으로 통계 보정이 이루어졌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p이다. 자세한 조사 개요와 결과는 리얼미터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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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놀라게 한 3.1혁명의 총연출가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천도교 교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록 2019.02.19 08:05 수정 2019.02.19 08:49
 
<오마이뉴스>는 창간 19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3일동안 특별연재 '민족대표 33인 열전'을 시작한다. 필자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 처장을 지낸 친일문제 전문가이다. 이 글은 첫번째로 의암 손병희 편이다.[편집자말]
 

▲ 손병희 ⓒ


손병희의 삶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동학군의 북접 통령으로서 10만 혁명군을 이끈 혁명가이자 동학 3세 교조로 천도교를 창건한 종교지도자이기도 하다. 또 국권회복을 위해 3.1혁명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선각자이자 수많은 학교를 세우고 인수해 후세교육에 앞장선 교육자요, <만세보>와 <천도교월보>를 창간하고 보성사를 차려 출판 사업을 한 언론·출판인이기도 하다. 이 모두를 아울러 한 마디로 집약한다면 그는 한국 근세사의 경세가(經世家)라고 할 수 있겠다.

'서자' 콤플렉스 손병희, 동학을 만나다
   
손병희(孫秉熙)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 대주리에서 태어났다. 청주목(牧)의 하급관리 출신의 부친 손두흥(孫斗興)과 그의 둘째부인 경주 최씨 사이의 서자 출신이다. 본관은 밀양, 아호는 소소(笑笑), 도호는 의암(義菴)이다. '의암'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내린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응구(應九)인데 언제 병희(秉熙)로 개명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본 망명 시절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쓴 적도 있다.

어려서부터 그는 의협심이 강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런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징크스가 하나 있었다. '서자 출신'이라는 딱지였다. 이 때문에 그는 성장기에 적잖이 방황하였다. 그 무렵 이복형(손병권)의 장남으로 7년 연상의 조카 손천민(孫天民)과 동학접주 서순택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때가 1882년 10월 5일,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신분차별에 크게 좌절하였던 그에게 동학은 커다란 희망이었다. 그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골자로 하는 동학이야말로 당대의 사회적 모순을 척결하는 시대정신이라고 인식하였다.

동학 입도 2년 뒤인 1884년 10월 그는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만났다. 해월은 첫 눈에 그의 인물됨을 알아봤다. 1892년 그는 동학 교단의 지도자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운동을 전개하였다. 일행은 광화문 앞 차가운 길바닥에 엎드려 소위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였는데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3월 중순 동학교인 2만여 명은 충북 보은에 집결하여 '보국안민'과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으며 정부를 상대로 보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때 그는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가 되어 충청도 일대 동학교인들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정읍 고부에서 전봉준이 봉기하였다. 동학교도 출신의 전봉준은 봉기하면서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였다. 지역의 농민 수천 명은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불법적으로 수탈한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남접(南接)이 중심이 된 농민군은 봉기 10여 일 만에 그 숫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5월 10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이어 정읍관아를 점령한 후 기세를 몰아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해월과 손병희가 이끈 북접(北接)은 지원은커녕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당시 북접은 농민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상황이 반전되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남접, 북접 할 것 없이 농민군을 공격하자 급기야 9월 18일 해월은 각 포(包)의 두령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이 때 손병희는 중군 통령(統領)에 임명돼 북접 소속의 10만 명에 이르는 농민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9월 중순부터 한 달 만에 북접 산하의 농민군은 경기도 일대를 석권하고 충북 보은으로 집결하였다. 이후 보은수비대를 격파한 농민군은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과 만나 연합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이 잘 훈련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당시 양측의 화력은 250대 1수준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벌인 첫 대규모 접전은 공주 우금치 전투였다. 예상했던 대로 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남북접 연합군은 순창에서 공동행동을 포기하고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이후 관군의 추격이 심해지자 지도부는 12월 24일 잔여부대를 해산하고는 후일을 도모하였다. 얼마 뒤 전봉준 등 주도세력은 체포되었고,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음력) 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전봉준이 처형되자 관군은 해월과 손병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도피생활로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던 해월은 후계자 선정을 서둘렀다. 그는 손병희·김연국·손천민 등 북접의 대표적 지도자 3인을 불러 놓고는 손병희를 북접 대도주(大道主)에 임명했다. 이로써 손병희는 입도 15년 만에 동학의 3세 교주가 되었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우선 해월이 처형당한 후 교단은 잠시나마 교권다툼을 벌였다. 입도 등에서 앞선 김연국의 반발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교단을 정비하는 일도 급선무였지만 관군의 추적을 따돌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경북 예천에 은신해 있던 무렵 관군의 추적을 피해 충북 제천까지 하루 만에 100리 길을 걸어 피신하기도 했다. 1900년 8월 교단의 지도자 손천민과 서장옥이 붙잡혀 결국 처형되었다. 손천민은 혈족이자 그를 동학으로 인도한 은인이었다. 그는 급히 호서지역으로 이동해 몸을 피한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그 무렵 시국은 날로 급변하였다. 서양의 신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조선반도를 두드렸다. 1895년에 유길준이 펴낸 <서유견문>은 당시로선 큰 충격이었다. 그는 동학을 널리 포교하려면 세계 문명국처럼 개화(開化)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그는 문명개화를 배우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였다. 여기에는 관군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할 요량도 있었다.

1901년 3월 그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동생 손병흠과 이용구를 대동하고 원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미국행은 좌절되었는데 경비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일본에 눌러 앉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선진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정세를 두루 살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훗날 3.1거사를 도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게 될 동지들을 여럿 만나게 됐다. 그들은 조선에서 피신한 망명객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을미사변에 연루돼 망명한 무관 출신의 권동진(權東鎭), 소위 '일심회 쿠데타 사건'에 연루돼 망명한 오세창(吳世昌) 등이 그들이다.

당시 그는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으로 '충청도 부자' 행세를 했는데 이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 체류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의 자제 64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선진문물을 배우도록 하였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문학가이자 나중에 그의 사위가 된 소파 방정환(方定煥), 춘원 이광수(李光洙)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또 일본 체류시절 소위 '삼전론(三戰論)'을 통해 독자적인 개화 자강책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 무렵 일본과 러시아는 1903년 5월에 발생한 '용암포 사건'을 계기로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급기야 이듬해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그는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보고 일본군에 군자금 1만 원을 기증하였다. 그의 속셈은 일본군이 승리하면 그 힘을 빌려 국정을 일대 쇄신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 일로 그는 친일파란 비난을 사게 됐고, 이 와중에 동생 병흠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러일전쟁에 앞서 그는 조선정부에 상소문을 보내 비정(秕政) 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망명객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1904년 4월, 그는 이종훈(李鍾勳) 등 동학 지도자 40여 명을 도쿄로 불러 민회(民會)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민회는 처음에는 대동회로 불렀는데 도중에 중립회로 바꾸었다가 최종 진보회(進步會)로 정했다. 1904년 8월 전국에 진보회를 결성한 후 단발을 시행하고 흰옷 대신 흑의(黑衣·개화복)를 입게 하였다. 소위 '갑진(甲辰)개화운동'이 그것이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민회를 조직하여 조선을 근대 국민국가로 개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도에 악재가 터져 이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심복이자 진보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용구(李容九)가 개인적인 이권을 위하여 송병준의 일진회(一進會)와 통합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일진회는 '을사늑약' 직전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한 친일단체였다.

이 일로 동학은 세간에서 매국단체로 매도당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자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이어 이듬해 1월 5일 급거 귀국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해 9월에는 이용구 등 62명의 일진회 무리를 출교(黜敎)처분하는 등 교단정비에 나섰다.

이용구 무리를 쫓아냈지만 교단은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교단의 재정을 쥐고 있던 그들에게 재단의 재산 상당 부분을 탈취 당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한동안 집세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대문을 봉쇄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용구 일파가 떨어져 나갈 때 신도 가운데 상당수가 따라 나가 교세도 현저하게 준 상태였다.

이 때 그가 고안해낸 것이 성미제(誠米制)였다. 끼니마다 쌀을 조금씩 모아 교단에 바치는 성미제는 의외로 신도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교단의 재정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도주를 지낸 박인호(朴寅浩)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각 교구에서 모은 쌀을 금전으로 환전하면 매년 10만 원 정도 됐는데 그 중 5만원은 해당 지방에서 쓰게 하고 5만원은 중앙총부로 보냈다고 한다.

탄탄한 재정을 토대로 그가 시작한 사업은 '삼전론'의 마지막 '언전(言戰)', 즉 언론·출판 사업이었다. 일본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활자 등 인쇄시설을 기반으로 1906년 2월 27일 박문사(博文社)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그해 6월에는 천도교 기관지로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하였는데 초대사장은 오세창이 맡았다. 오세창은 창간사에서 "아한(我韓) 인민의 지식을 계발키 위하여 작(作)함"이라며 민중 계몽지를 자임했다. 실지로 <만세보>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으로는 문명개화·문화계몽 등 민중계몽에 적극 앞장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세보>는 운영난으로 창간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무렵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교육 사업이었다. 그는 일본 체류시절에도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 교육을 받게 하였다. 우선 1차로 당시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보성학원(현 고려대)을 인수하였다(1907.12). 당시 그가 보성학원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고려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 후 고려대는 교정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이어 여자 교육기관인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가 심한 경영난에 빠진 것을 알고 매월 10원씩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이밖에도 보창학교, 양명학교, 창동학교 등 20여 개의 사립학교에 매달 일정액을 지원하는 등 후세교육에 관심을 쏟았다.

1910년 8월 일제는 조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총독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손병희를 '사이비 교주' 등 갖은 비방과 음해를 일삼았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천도교의 신도 수는 되레 급증하였다. 당시 나라 잃은 민중들에게 천도교는 유일한 마음의 의지처 같은 존재였다.

교인이 폭발적으로 늘고 교세가 확장되자 교인 수련도장으로 북한산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의 지도급 간부들을 이곳으로 불러 '연성회(練性會)'라는 수련회를 개최했다. 겉으로는 기도회요, 수련회였으나 이는 3.1혁명에 대비한 정신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회합을 갖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3.1혁명 거사가 이곳에서 싹 튼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권상실 이후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 선두에는 제국신문 사장 출신으로 독립선언서 인쇄를 맡았던 옥파 이종일(李鍾一)이 있었다. 그가 남긴 회고록 <묵암 비망록>에는 그런 흔적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보성사 사원들은 비밀결사체인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등을 꾸려 활동했다. 이들은 또 군자금을 모아 독립의군부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1913년에는 '천도구국단'을 꾸려 민중봉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천도구국단의 명예총재는 손병희, 단장은 이종일, 총무는 보성사 직원 장효근이 맡았다. 이들은 실지로 장총과 실탄을 구입해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였다.

1918년 파리 세계평화회의 '민족자결주의'

1918년 1월 중순, 파리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렸다. 이는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차원이었다. 이 회의에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4대조 평화원칙'을 공표해 주목을 끌었다. 그 가운데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국에겐 복음과도 같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도 이를 눈여겨 본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종일 등은 손병희를 찾아가 민중봉기 계획을 설명하고 타 종교단체와 연대하여 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아직 때가 아니다"며 이를 만류하였다. 그 나름의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1919년 1월 상순, 그는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측근 3인방을 불렀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국권회복 방안으로 여섯 가지를 신중하게 연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여섯 가지 방안은 △무력봉기 여부 △대중시위 수단 △외교활동 전개 △국민대회 개최 △독립청원서 제출 △독립선언문 발표 등이다. 그리고는 2월 28일 그는 천도교 교주 자리를 대도주 박인호에게 넘겨주었다. 이를 두고 "손병희 스스로가 죽음을 각오하고 3.1운동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민족진영 내 여러 그룹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재일 한국유학생들은 현지에서 발행된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고는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또 상해 신한청년당의 여운형(呂運亨) 대표는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에 파견하여 국제정세를 살폈다.

기독교 진영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주의 유명 기업가 출신이자 기독교계에서 신망이 두텁던 남강 이승훈(李昇薰)은 상해에서 밀파된 선우혁의 방문을 받고 관서지방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11월(음력)에는 만주·노령(露領) 지역의 망명 지사들이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전선에 불을 지폈다.

3.1혁명 과정에서 천도교의 빼놓을 수 없는 공로 가운데 하나는 자금조달이다. 김규식의 파리 파견 경비 10만원 가운데 3만원, 3.1 거사 때 기독교 측의 경비 5천원은 전부 천도교에서 부담했다. 천도교는 100만원의 독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1918년 4월 4일 열린 부구(部區)총회에서 중앙대교당 및 중앙총부 건물 신축을 결의했다. 건축자금 명목으로 모은 돈 가운데 일부를 독립기금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실지로 교당 건축성금으로 모인 1백만 원 가운데 건축비로 쓴 돈은 27만여 원이었으며, 대부분은 독립기금으로 사용되었다. 성금은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품삯을 모은 돈이었다.

1919년 1월 20일, 권동진 등 측근 3인방은 동대문 밖에 있던 손병희의 사저(상춘원)를 찾았다. 이들은 그에게 때가 무르익었으니 교단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흔쾌히 허락하고는 '3대 원칙'을 결정하였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3인방에게 역할을 분담시켰다.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최린은 천도교 외부와의 관계를 담당하도록 했다. 그밖에 구체적인 사안은 이들에게 위임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내부에서 3.1 거사의 깃발이 오른 셈이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외부 인사들과의 연합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대상은 타 종교 지도자들과 구한국 관료 출신 가운데 명망가들이었다. 당시 천도교를 비롯해 종교계 지도자들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아 이들을 얼굴로 내세울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1차로 윤용구·박영효·한규설·윤치호 등을 대상자로 선정해 접촉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모두 허사였다. 때가 좋지 않다느니 혹은 칭병(稱病)을 내세워 하나같이 참여를 거부하였다. 심지어 그는 매국노 이완용을 찾아가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이완용마저도 끝내 사양하였다. 그러자 최린은 "독립운동의 신성한 제전에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는 말로 자위하면서 자신들이 대표로 나서기로 하였다.

결국 종교계로 집중하기로 방향을 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천도교 내에서는 기독교 쪽과 교섭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이에 대외교섭 담당인 최린은 일본 유학시절에 알게 된 육당 최남선(崔南善)을 찾아가 부탁했다. 육당은 기독교 측과도 교류가 깊었고 청년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육당은 김도태를 통해 평북 정주의 이승훈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2월 11일 상경한 이승훈은 천도교 측을 대리한 송진우와 만나 천도교 측의 거사 추진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이튿날 평북 선천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장로교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협의하였으며, 이후에는 다시 감리교 지도자들과도 협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함태영, 이갑성 등이 큰 도움을 주었다.

2월 22일, 기독교 측 대표 격인 이승훈과 함태영은 최린의 집을 방문했다. 이날 모임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당초 기독교 측에서 계획했던 독립청원서 대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양측이 연대하여 '일원화'를 이뤄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틀 뒤 24일 이·함 두 사람은 다시 최린을 만나 양측의 연대를 최종 결정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또 독립운동의 추진방법에 대해 세부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로 하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②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인쇄하여 서울에서는 독립선언 당일 군중에게 배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며, 지방에는 이를 분송(分送)한다.
③ 독립선언서를 각 지방에 분송할 때 서울에서의 일시 및 독립선언서 배포 절차를 전달하여 각 지방에서도 서울을 따르게 할 것.
④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기초와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담당할 것.
⑤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분송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에서 각각 담당할 것.
⑥ 일본 정부와 일본 귀족원·중의원의 양원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 측에서 담당하여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 측에서 담당하여 보낼 것.
⑦ 조선민족대표로서 각 서면에 연명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십수 명을 선정하도록 할 것.
⑧ 독립운동에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불교도도 연명에 참가시킬 것.


기독교 측과의 연대문제가 해결되자 불교 측 섭외에 나섰다. 최린은 2월 24일 밤 서울 재동 43번지 만해 한용운의 집을 방문하였다. 당시 만해는 이 집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행하면서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만해는 즉석에서 동참할 것을 승낙하고는 불교계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선승이라는 특수 신분과 사찰이 산간 오지에 있어 연락이 쉽지 않았다. 결국 당시 서울 종로 3가 대각사의 백용성 혼자 서명을 받아내는 데 그쳤다. 당시 불교계의 다수가 이미 친일의 길로 들어서 상태여서 더 이상 동참을 이끌어내는 일이 쉽지도 않았다.

결국 민족대표로 참가한 33인은 전부 종교인들이었다. 이들이 3.1거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당시 상황 때문이었다. 총독부의 무단정치 하에서 웬만한 민족단체는 전부 해산 당하여 씨가 말라 있었다. 그나마 국내에 남은 조직적인 세력은 종교단체와 학교뿐이었다. 유림 역시 접촉하였지만 소극적인데다 참여의사를 밝힌 심산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 때문에 뒤늦게 연락이 닿아 선언서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들은 한때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할 계획으로 선언서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최종적으로 민족대표들과 연대하기로 하였다. 3.1혁명 당시 이들은 민족 대연합전선의 전위대로 활동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장로교 7, 감리교 9), 불교 2인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 외에도 천도교의 박인호와 노헌용, 기독교의 함태영과 김세환, 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등을 포함하여 흔히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함태영, 송진우 등은 뒷일을 대비해 일부러 빠졌으며, 최남선은 "학자로 남겼다"며 선언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서명자가 확정되자 2월 27일 밤 최린의 집에서 각 종교별 대표자들이 모여 독립선언서 날인 순서를 정하였다. 논의 끝에 손병희를 영도자로 모시기로 하고 제일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 다음은 기독교를 대표해 길선주(장로교)·이필주(감리교) 목사가 2번과 3번을, 네 번째로는 불교 대표 백용성의 이름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재동 손병희 집에서 최종 점검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행사 장소를 당초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선언식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들이 일경과 충돌하여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정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3월 3일은 고종의 인산일인데다 3월 2일은 일요일(주일)이어서 이 날짜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선언식 장소인 태화관은 한때 이완용이 살던 집으로 이곳에서 을사5조약과 한일병탄조약이 입안·논의되었다. 바로 그런 치욕의 장소에서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반(反)독립적인 조약을 전부 무효화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 3.1 선언 당시 상황을 담은 기록화. ⓒ


3월 1일 오후 1시, 그는 권동진 등 측근 4~5명과 함께 태화관에 도착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예정대로 태화관 1실(室)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 시각 인근 6호실에 열혈청년 6명을 극비리에 잠입시켜 당시 상황 일체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3.1운동비사(秘史)>를 펴낸 이병헌은 6인 가운데 한 사람임)

선언서 낭독은 생략한 채 바로 한용운이 간단한 인사말을 시작했다. 이어 참석한 29인의 민족대표가 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곧이어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쳐 민족대표들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지방에서 뒤늦게 올라온 길선주·유여대·정춘수 등도 자진해서 경찰에 출두하여 이들과 합류하였다. 김병조 한 사람만 상해로 망명하여 구속을 피했다.

연행 당일로부터 취조가 시작되었다. 경무총감부에서 1차 취조를 마친 후 일행은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몇 차례의 심문을 거쳐 4월 4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일제의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으니 일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사범(國事犯)에 해당됐다.

아니나 다를까 예심 재판부는 민족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극형에 처할 방침이었다. 재판부는 특히 '공약 3장'의 제2항 가운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대목을 문제 삼았다. 이는 민중폭동을 선동한 것이 아니냐며 심문과정에서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따져 물었다. 8월 상순 재판은 경성고등법원으로 이송되었다.
 

▲ 손병희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6) ⓒ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조선인의 반감을 우려한 나머지 이들에게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의회의 여론은 곧 재판에 반영되었다. 고등법원은 내란죄 대신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명목으로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장차 조선이 독립되면 민주정체(政體)로 할 생각이었다"며 "조선이 독립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그의 신문조서 가운데 1919년 7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진술 한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피고 등은 독립을 선언하면 어떤 순서에 의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답: 나는 세계가 개조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에 보내면 일본정부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조선을 독립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 조선이 독립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는가.
답: 민주정체(政體)로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유럽전쟁이 한창일 때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을 때,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문: 피고는 천도교를 생명으로 한다는 것이고, 사람을 훈화해야 할 지위에 있으면서 정치의 와중으로 뛰어 들어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다는 것은 피고의 사상에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그것은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는데,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문: 그러나 역사상 순정한 종교는 정치와 혼효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데, 천도교는 정치에 대한 비밀결사이었기 때문에 이번 조선독립을 기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 것이다. 나는 조선이 독립국이 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독립 후에 벼슬길에 나아간다고 한다면 정치상의 야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할 수가 없지만, 나에게는 종교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손병희는 측근 3인방 등 7명과 함께 최고형인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도중에 양한묵은 옥사하였다. 33인 가운데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사이에 서울과 상해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대한민간정부와 대한국민의회에서는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어의 몸이어서 부임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뜻도 아니었다. 이는 당시 그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한 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손병희가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다"

서대문감옥 독방에 갇힌 그는 천도교 주문을 외고 수련을 하면서 하루 일과를 보냈다. 평소 위장이 좋지 않은 그를 위해 주옥경은 하루 두 차례씩 사식을 차입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11월 28일 뇌일혈로 쓰러져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이에 주옥경은 그의 보석을 신청하였으나 감옥 측은 허락하지 않았다. 경성복심법원 재판 때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출정하여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근 1년 뒤인 1920년 10월 22일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매일신보, 1920.10.24). 보석금으로 1500원을 내고서였다. 상춘원에서 요양을 하던 그는 이듬해 1922년 5월 19일 새벽 3시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날 아침 서울시내 거리에는 그의 부음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졌다.
   

▲ 손병희의 서거를 알린 동아일보 호외(1922.5.19.) ⓒ


총독부는 그의 장례식도 방해하였다.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면 시위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장례는 천도교장으로 6월 5일 치르기로 했고, 장례위원장은 권동진이 맡았다. 5일 아침 상춘원에서 발인하여 천도교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도중에 삼선교에서 약 한 시간 동안 시민·학생 등과 고별식을 가졌다. 5천여 명이 참석한 영구행렬은 30리에 달했는데 그 뒤로 자동차 10여 대와 200여 개의 인력거가 따랐다. 그의 유해는 이날 오후 5시 우이동 봉황각 인근에 안장되었다. 해방 후 환국한 백범 김구는 순국지사 순방 첫 번째로 그의 묘를 찾았다.

1959년 3.1독립선언 40주년을 맞아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가 꾸려졌다. 기념사업회는 그해 10월 8일 우이동 그의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비문은 노상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했다. 서거 44주년을 맞아 3.1혁명의 성지인 탑골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1980년 청주 삼일공원에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0년에는 그의 생가 유허지에 '의암기념관'이 건립됐다.

그의 측근이자 평생 동지였던 권동진은 한 잡지 기고문에서 "손 의암(義菴)은 천도교의 태양이자 우리의 구주(救主)였다"며 "실로 근세에 조선이 가진 거인(巨人) 중 한 분"이라고 상찬했다.

<의암 손병희 평전>의 저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기미년 3.1운동은 의암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성사가 가능했을까 할 만큼 선생은 인격, 신앙심, 리더십, 인력동원과 자금지원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실로 그는 3.1혁명을 기획하고 사람을 엮어내고 자금을 대는 등 3.1혁명의 기획·연출자라고 할 수 있다.
 

▲ 손병희 묘소(서울 우이동). 금년 1월 12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총리로는 처음으로 참배, 헌화했다. ⓒ 정운현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채륜, 2017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손병희 편', 1992.3
- 이진기, '의암 손병희의 문명개화론 인식과 천도교 개창',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2
- 박성수, '3.1운동과 의암 손병희', <중앙사론> 제21집 특집호, 2005.6
- 이현희, '의암 손병희와 3.1운동', <동학학보>, 13권 1호, 2009.6
- 송영헌, '의암 손병희의 민족독립사상',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8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삼천리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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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당이 광주항쟁을 모독하는 까닭


시사평론 겉과속 20190218
  • 안호국 시사평론가
  • 승인 2019.02.19 07:59
  • 댓글 0
▲ 6.25전쟁중 이승만 정권의 최대학살 사건의 하나인 보도연맹 학살장면[사진 : 나무위키 캡처]

1. 쿠데타를 서둘러야 했던 절박한 이유

‘민간인학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것은 1961년 박정희를 우두머리로 하는 군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였다. 
그 전해인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붕괴하자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요구들이 봇물터지듯이 솟구쳤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운동중의 하나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자행되었던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전쟁이 일어난 지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생생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학살이 자행된 전국 곳곳에서는 산더미같은 유골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학살된 민간인은 형무소 수감자 2만여명과 국민보도연맹원 20만∼25만명을 포함하여 45만명에 이른다. 제주4.3때와 여순사건때의 학살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이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투와 관련없이 자행되었으며 어떤 재판도 거치지 않고 벌어졌다. 그러니 그 잔혹함과 참상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조국의 산천도 고발한다. 푸른 별도 증언한다.’ 당시 유가족들이 내걸었던 구호를 보면 그들의 피맺힌 고통과 원한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일당이 제일 먼저 한 일 중의 하나는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이 요구를 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국 곳곳에 세워졌던 위령비를 모두 파괴하였다. 단순히 철거한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을 냈다. 부산에 세워졌던 위령비는 아예 가루를 내어 철길변에 뿌렸다. 
진상규명운동에 나섰던 유족들을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고 고통을 주었다. ‘민간인 학살에 관한 것은 털끝만큼이라도 알려고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2. 학살로 만들어지고 유지된 정권

쿠데타를 일으킨 그들이 바로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이들의 학살 전력은 단지 해방정국과 한국전쟁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일제가 자행한 조선인에 대한 야만적인 학살을 집행했던 경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지금은 ‘일제때 친일 안한 사람이 어디있느냐?’는 궤변으로 자기들의 반민족행위를 가려보려 하지만 이들이 일제식민지배자들보다 훨씬 더 흉악한 야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피를 묻힌 손에 수십만 민간인의 피를 더한 박정희일당은 자신들의 야만적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그 일이 그들 자신의 범죄에 그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민간인학살은 이승만정권을 수립하고 유지한 핵심적인 일이었다.
80년 신군부는 광주에서 학살을 다시 자행하였다. 이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했던 것은 민주화요구를 억누르고 군부독재를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전두환은 당시 ‘누가 독침으로 사람을 찔렀다’, ‘불순분자가 개입하고 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조작된 간첩사건을 발표하는 등 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신들의 만행을 정당화하려고 갖은 수를 썼다. 
이처럼 이승만정권이나 전두환정권 즉 자한당의 뿌리인 민정당정권은 학살의 토대위에 세워진 정부라는 점에서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독재정권은 18년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학살로 수립되었을 뿐만아니라 학살에 의해 유지된 정권이었다. 이 또한 이 정부들의 공통점이다.

3. 학살을 꿈꾸는 무리들

자한당의 국회의원들이 ‘광주항쟁에 북한군이 개입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기괴한 상상력을 동원하여도 만들어내기 힘든 소문의 창작자는 극우편집증이 날로 심해지는 지모를 포함한 극우맹동에 사로잡힌 인물들이다. 
자한당 당대표로 출마하고 있는 4인중 2명이 이 주장의 유포에 앞장서고 있고 다른 자들도 적극 부정하지 않고 있으니 자한당의 입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들이 이런 괴이한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들의 정체가 다 밝혀지면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항쟁은 ‘지난 일’이다. 아픔과 고통이 그대로 남아있고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 매우 미흡하지만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것을 뒤집어보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태극기부대’라고 불리우는 극우맹동집단의 집회에서는 듣기에도 끔직한 저주와 폭력을 선동하는 말이 넘쳐난다. 이들의 주장대로 하자면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이나 광주학살은 열 번도 더 일어나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적폐집단, 국정농단세력이 권력을 다시 쥐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최근 이들의 생각은 행동으로 나가고 있다. 황당한 ‘북한군개입설’을 퍼뜨리며 광주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은 이런 책동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어이없다’고 웃어넘기기에는 한국의 현대사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친일매국세력이 결집했던 서북청년회로 대표되는 야만적인 극우집단은 대한민국 건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이어받은 군부가 50년 넘게 야수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우리 사회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런 때로 되돌아가는 것을 열망하고 있다.

4. 광기에 사로잡힌 집단은 없어져야 한다

사대매국과 집단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무리들은 지금에 와서 태극기부대라 불리우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자한당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8천명의 태극기부대들이 선거권이 있는 자한당 당원이 되었고, 3만명이 입당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110석이 넘은 의석을 가진 자한당은 명실상부하게 태극기부대들이 벌이는 극우망동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었다. 
태극기부대의 정당을 자처하였던 대한애국당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한국 정치와 대한민국 국회에게는 참혹한 사태다. 촛불혁명에게 매우 위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한당의 원내대표 나경원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기로 되어있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반대한다며 뉴욕까지 갔다. 
나경원은 ‘북이 뉴욕DC를 핵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천기를 누설해가며 반북대결을 선동하며 돌아다녔다. 아무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북의 미사일능력까지 주장하는 만용을 부린 것이다. 
이들은 한반도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흐름을 적대와 대결, 파괴와 살육의 낡은 시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친일로 시작한 사대매국의 광기에 사로잡히면 정신이 나간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된다. 따라서 자한당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 것인지는 정상적인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다. 
‘설마 그런 일을?’ 또는 ‘어차피 망하게 되어있는 집단이다’는 식의 이성적인 반응만으로는 이들의 책동을 막을 수 없다. 이는 한국의 현대사가 말해주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 자한당은 태극기부대식 극우선동에 앞장서는 김모가 당의 유력한 정치인으로 되어 있으며, 국정농단의 돌격대장이었던 황모가 당대표를 차지할 것이 유력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당이 촛불혁명시대의 대한민국 국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정부 집권2년차가 넘어서며 이런 저런 트집거리가 생기자 적폐집단들, 국정농단의 공범자들이 촛불혁명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이들을 부추키고 뒤를 봐주는 것이 국회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한당이다. 
이들이 사로잡힌 광기의 수준으로 볼때 집단학살로 얼룩진 비극과 아픔이 되풀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적폐집단, 국정농단 세력은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반성할 줄 모르며, 그들이 쥐었던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다시 쥐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정당화하려고 광주항쟁을 모독하는 당치도 않는 주장을 버젓이 해대는 것이 증명해주고 있다.
자한당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완전히 박탈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한줌의 힘도 남겨주어서는 안된다. 
적폐청산, 국정농단 관련자처벌을 향한 촛불혁명에 힘을 모으고 더 힘있게 전진시켜야 한다.

안호국 시사평론가  webmaster@minplus.or.kr

관련기사icon[사설] 괴물집단 자유한국당을 해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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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100년, 이젠 복지국가 혁명이다

[복지국가SOCIETY] 3.1혁명 명칭 변경보다 중요한 복지국가 운동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정명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라는 것이다. 운동이 기존의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에 그치는 것이라면, 혁명은 기존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을 말한다. 기존의 3.1운동을 3.1혁명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정명론자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3.1운동과 3.1혁명
 
첫째, 3.1운동의 내용과 성격에 관한 것이다. 3.1혁명은 전근대 사회를 근대 사회로 바꾸고, 제국이 빼앗은 주권을 회복하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은 1919년 4월 11일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로 이어진다. 1910년 황실과 양반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했던 국가에서 3.1혁명을 통해 민중이 처음으로 주인으로 등장했으며, 제국의 시대를 끝내고 민국의 시대를 처음으로 열었다는 것이 3.1혁명론의 근거다.
 
3.1혁명 덕분에 해방 이후에 정치 체제를 민주공화국으로 하는 것은 당연시되었고,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다른 나라에서 흔히 있었던 왕정복고파와 민주공화파의 갈등과 혼란이 없었다. 역사상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경험이 없었는데도, 수천 년 간 전제왕권과 35년간의 천황제를 경험한 국가에서 좌·우파를 막론하고 민주공화정 이외에 다른 정치체제를 주장한 이들이 없었다. 3.1혁명이 제국주의에 대항한 독립운동임과 동시에 역사상 처음으로 민국으로 전환을 촉발시키고 근대 시민을 등장시킨 마중물 역할을 했다. 
 
둘째, 3.1혁명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명칭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제헌헌법 이전까지 3.1운동은 3.1혁명으로 불렸고, 제헌헌법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않은 채 3.1운동으로 명명되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의 서문에는 “삼일대혁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3.1혁명'은 '3.1', '3.1운동', '3.1(대)혁명', '독립선언', '만세운동', '기미운동', '기미독립운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특정한 이름이 확정적이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1948년 5.10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제헌헌법을 만들기 위해 30명의 의원으로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고, 유진오 안을 중심으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만든 헌법 초안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전문이 들어 있었다. 
 
유진오의 회고에 따르면 제헌의원의 합의에 의해 '3.1혁명'이 헌법 초안의 전문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조헌형이 제안한 '기미 3.1운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자는 안건에 이승만이 기존의 입장을 바꿔 동의하면서 제헌의회에서 토론이 생략된 채 표결을 진행했다. 이로 인해 우리 역사에서 3.1혁명이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이처럼 3.1운동의 성격이나 용어의 역사성을 볼 때, 이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사회시스템 전환의 근본적인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에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1절 기념식 당시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앞에서 3.1 만세 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청와대

3.1혁명 100주년의 '지금, 여기'  
 
민주공화정을 채택한 해방 이후에 1960년 4월 혁명,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민주화항쟁, 2017년 촛불시민혁명 등 독재와 전제를 하려는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민중이 주도하는 운동과 혁명이 있어왔지만, 여전히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미완의 상태다. 완전한 민주공화국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든 비그포르스의 말처럼 잠정적인 유토피아를 설정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래에 촛불 시민혁명은 민주공화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세계적으로 등장하는 극우주의 세력이 우리 사회라고 비켜갈 리 없다.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해야 한다. 형식적·제도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경제 문제, 특히 일자리 문제다. 한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는 먹고사는 경제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지만, 우리 사회의 집권 세력과 진보 세력도 경제 문제의 해결에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경제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기업들을 만나 고용과 투자를 유도하고 소득주도 성장, 혁신 성장, 공정 경제의 온전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 하지만 지난해 후반기부터 친기업적 행보를 자주 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가 변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진보적 시민들이 보기에 필요한 것은 자본과 노동 간의 공정한 관계를 만드는 경제민주화의 확립이지 재벌 대기업 규제 완화 등의 친기업적 방식은 아니다.
 
자본과 노동 간의 문제는 마치 우리 사회의 부동산 문제와 비슷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주택 보급률이 100%를 넘었지만, 서울 시민의 절반이 자기 집을 가지지 못한 것은 공급의 문제가 아니라 소유와 분배의 문제다. 이런 구조 하에서 아무리 주택 공급을 늘려도 다주택자들의 소유만 늘어날 뿐 일반 서민들의 주택 소유율을 높이기는 어렵다. 대기업의 투자도 이와 비슷하다. 이미 국제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의 국내 총투자율은 이미 최상위권이며, 투자를 더 유도하더라도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진보적 경제학자들은 지적한다.  
 
새로운 100년, '복지국가 혁명'이 필요하다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100년으로 도약하려면 '복지국가 혁명'을 해야 한다. 2010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인 복지국가 담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회복지 지출 수준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0.2%로 OECD 평균인 19%의 절반 조금 넘는 수준(53.7%)에 그쳤다. 프랑스(32.0%)나 스웨덴(26.3%), 독일(24.9%)에는 비할 바가 못 되고, 심지어 신자유주의 국가인 일본(21.9%)과 영국(21.6%)에 비해서도 절반에 못 미친다. 사회복지 지출이 낮기 때문에 국민들이 부담하는 정도 또한 낮은 상태다. 2015년 기준으로 GDP 대비 국민부담률은 25.2%로 OECD 평균인 33.7%에 크게 미치지 못 하면서 32위에 머물렀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라는 불명예를 극복하기 위해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제대로 된 전환이 필요하다는 데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 문제'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좀처럼 꺼내지 않고 있다.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복지에 대한 투자는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장기 투자, 경제 활성화,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기에 공공분야에서 복지에 대한 보다 과감한 투자와 고용 창출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공공서비스 분야의 고용 비중이 선진국의 2분의 1, 심지어 3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
 
우리의 교육 환경을 둘러봐도 교사 인력이 여전히 부족하다. 교사 1인당 아동 수가 OECD 평균에 비해 초등학교는 7.1명, 중학교 9.7명, 고등학교 6.9명이 많아 OECD 국가들 평균 교사 수의 6~70%에 그치고 있다. OECD 평균을 기준으로 한다면 13만 명 이상의 교사 충원이 필요하다. 어린이집과 같은 아동 보육시설에서도 마찬가지다. 5세 아동을 기준으로 우리의 교사 1인이 감당해야 할 아동이 평균 25~30명인데 비해 유럽연합은 5명에 불과하다. 유럽 기준으로 맞춘다면 최소한 5~6배의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 더구나 국가가 제공하는 국공립 보육시설에 다니는 아동 수는 2018년 기준으로 13%에 불과해서 그동안 육아를 민간 시장에 내팽겨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육아와 교육에 대해 엄마와 가족들에게만 책임을 돌리고 국가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에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출산 파업이라는 결과를 맞고 있다. 이런 문제는 육아와 교육뿐만 아니라 노동과 노후 등 생애주기별로 모든 분야에 걸쳐 있기 때문에 세계 최저 출산율, 세계 최고 자살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합계 출산율 1.0이라는 것은 한 세대가 지날 때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계적으로 보자면 한국 사회는 집단적으로 '국가 소멸'의 길로 가고 있다.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꾸자는 정명론이 일자,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 대표도 공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지난 100년 전의 사건을 제대로 정리하고 명명하는 역사 작업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이다. 지금의 경제사회적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독일 바이미르 공화국의 무력한 길을 가거나 극좌·극우의 극단적인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1919년 3.1혁명을 통해 민주공화정의 단초를 열고, 지난 100년 동안이 민주공화국의 틀을 만드는 시간이었다면, 다음 100년은 복지국가 혁명을 통해 실질적인 민주공화국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3.1혁명 100주년은 역동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100년의 청사진을 만들고 실행 계획을 구체화시킬 시점이다. 
 
(☞이상이의 칼럼 읽어주는 남자 : http://www.podbbang.com/ch/10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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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사회·경제 민주화를 통해 역동적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2007년 출범한 사단법인이자 민간 싱크탱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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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만난 김용균 어머니가 기자들에게 당부한 말은

유가족과 시민대책위 기자회견 “언론에 감사… 협의체 이행과 발전산업 민영화 보도해주길 당부”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2019년 02월 18일 월요일
 

고 김용균씨의 유가족이 18일 문재인 대통령을 면담한 뒤 기자회견에서 용균씨 참사를 보도한 언론에 후속 취재를 거듭 당부했다.

유가족은 이날 언론에 계속 관심을 가져 달라고 요청했다. 김미숙씨는 “언론도 성심성의껏 어렵고 힘든 상황을 다 알려주셔서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언론이 함께 해주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용균씨 아버지 김해기씨도 “남은 용균이 동료들이 지금 힘들게 일하는데, 이를 해결하려면 앞으로도 여러분(기자들) 협조가 많이 필요하다. 함께 힘 모아 좋은 사회 되도록 노력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시민대책위는 정규직 전환 과정을 두고 후속 보도를 촉구했다. 당정은 지난 5일 석탄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를 꾸려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조사하고 방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김용균씨가 일한 연료·환경설비운전 분야 정규직 전환을 위해 통합 노·사·전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약속했다. 경상정비 분야도 정규직 전환을 논의할 통합 노·사·전 협의체를 만든다. 

박준선 시민대책위 상황실장은 “협의체가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하고 차별을 없앨 계기가 되도록 언론에서도 합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취재와 보도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통합협의체와 경상정비분야 노사전협의체 어떻게 구성할지 이날을 시한으로 한 공문을 보냈으나 세부답변을 받지 못했다. 

▲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18일 앉아서 진행한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및 시민대책위원회 대통령면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 끝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언론의 관심을 거듭 요청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18일 앉아서 진행한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및 시민대책위원회 대통령면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 끝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언론의 관심을 거듭 요청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기자들의 질문이 끝난 기자회견 끝무렵, 김미숙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한고비 넘겼지만, 아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갈 길이 멀다”며 끝까지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 (언론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용균씨 유가족과 시민대책위원회는 이날 저녁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 대통령과 면담한 결과를 밝혔다. 

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문 대통령에게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김미숙씨는 “이제는 한 고비를 넘겨, 앞으론 용균이 동료들을 살리는 일을 생각한다. 대통령께 진상규명이 잘 되는지 유가족과 함께 점검해주길 부탁 드렸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이 같이 해준다고 약속했다. 진심으로 말했다고 생각해 정말 마음이 놓인 기분으로 나왔다”고 했다. 

▲ 고 김용균씨 유가족과 시민대책위원회는 18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및 시민대책위원회 대통령면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고 김용균씨 유가족과 시민대책위원회는 18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및 시민대책위원회 대통령면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시민대책위는 발전산업 민영화도 언론 조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석운 시민대책위 공동대표는 “기자들이 (김용균 노동자 참사를) 눈물 흘리며 취재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언론노동자들이 열심히 해 줘 이만큼이라도 새로운 변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박석운 공동대표는 “비정규문제 핵심으로, 에너지산업 분할민영화의 구조적 문제, 발전마피아와 전력마피아를 심층취재하는 새 흐름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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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그 감춰진 이야기

‘말모이’, 그 감춰진 이야기<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동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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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8  0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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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로 출발해 『큰사전』으로 결실맺다

‘말모이’란 영화가 세간의 화제다. 일제 말기 조선어학회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팩션(faction)이다. 작가의 기발한 구상에다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로 그 줄거리의 진위를 떠나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생소한 말모이란 단어도 새삼 회자되고 있다.

말모이란 보통명사와 고유명사로 이해할 수 있다. 보통명사로는 사전(辭典)에 대한 순우리말 표현으로, ‘말’이라는 명사에 ‘모이’가 붙어 만들어진 합성어다. ‘모이’는 ‘모(으)다’의 어근인 ‘모’에 명사파생접사 ‘이’가 붙어 형성된 말이다. 따라서 ‘말모이’란 ‘우리말을 모아 놓은 것’ 혹은 ‘우리말을 모아 놓은 책’ 정도로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다. 후일 최현배가 사용한 ‘말광(말을 모아놓은 곳간)’이라는 순우리말 역시 이와 유사한 단어다.

고유명사로서의 『말모이』는 1910년대 조선광문회(이하 광문회라 칭함)가 주도한 ‘현대적인 국어사전’의 제목을 뜻한다. 『말모이』 사전 편찬의 출발은 1911년 광문회를 중심으로,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인 김두봉·권덕규·이규영이 민족주의적 각성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주시경의 죽음(1914)과 김두봉의 망명(1919), 연이은 이규영의 죽음(1920)으로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그 원고가 계명구락부로 이어지고 조선어학회로 계승되면서 편찬 작업이 이어졌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당시 압수된 원고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3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면서 1947년 『조선말큰사전』(1권)으로, 이후 1957년 『큰사전』(6권)이란 이름으로 완간되었다. 『말모이』(1911)로 출발하여 『큰사전』(1957)으로 결실을 맺었다.

국문연구회로 출발해 한글학회까지 이어지다

영화 ‘말모이’로 대유(代喩)되는 조선어학회의 맹아는 국문연구회(혹은 국어연구회, 1907년 1월)로부터 출발한다. 주시경이 연구원 겸 제술원으로 참여한 이 단체는 지석영이 대한의학교내에 설치한 최초의 우리말 연구회였다.

이후 1907년 7월 우리말 연구의 필요성에 의해 마련된 기관인 국문연구소가 등장한다. 이 기관은 대한제국 학부 안에 설치한 한글연구기관으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정음청(正音廳) 설치 이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연구기관이었다. 주시경은 국문연구소의 주임위원(奏任委員)과 후일 전임위원(專任委員)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뿌리는 1908년 주시경에 의해 조직된 국어연구학회다. 이 학회의 주축은 하기국어강습소의 졸업생 및 유지들이었다. 이 강습소는 주시경이 1907년 국어·국문을 강습하여 자국사상(自國思想)을 장려할 목적으로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한 강습기관이었다.

국어연구학회는 1909년 국어강습소(후일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를 정식으로 부설하고 이후 수많은 수강생들을 배출하였다. 1917년까지 중등과가 6회에 걸쳐 총 265명, 고등과가 5회에 걸쳐 110명, 초등과는 1914년 1회 졸업생 8명을 길러냈다.

주시경의 후계학자 대부분이 이 곳 출신으로 후일 조선어학회의 주축을 이뤘다. 김두봉·이규영·권덕규·신명균·최현배·이병기·정열모 등을 위시하여 윤복영(尹福榮)‧송창희(宋昌禧)‧박승두(朴勝斗)‧김두종(金斗鍾)‧이세정(李世楨)과 같은 인물들이 모두 이곳 출신들이다.

그러나 국가가 망하면 국어도 없어진다. 일제의 병탄 이후인 1911년 9월 국어연구학회를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로 바꾸게 된 배경이다. 국어강습소 역시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하였다. 주권을 빼앗겼던 시기, 일제의 강압에 의해 우리의 국어를 국어라 못하고 조선어라는 명칭으로 타자화 시킨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국어로 자리 잡은 것이 일본어다. ‘나’를 ‘나’라 못하고 ‘그’라고 칭하게 된 역사적 아픔이다.

그 배경은 이렇다. 조선언문회로 바꾸기 한 달 전인 1911년 8월,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조선교육령」을 발포한다. 제5조는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기능을 전수하고 특히 국민다운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일본어-필자 주)를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우리말이 나그네의 언어인 조선어로 몰락하고, 일본어가 국어의 자리를 차지하여 주인 행세를 하게 됨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지금은 비록 한글학회로 자리 잡았지마는, 조선어학회란 명칭 역시 그 아픔의 연장이었다.

국어를 국어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에서, 조선언문회라는 명칭은 주시경에게도 뼈아픈 충격이었다. 조선언문회를 순우리말 ‘배달말글모듬’으로 바꾼 이유다. 1913년 ‘배달말글모듬’을 ‘한글모’로 다시 개칭하고 1914년에는 조선어강습원도 ‘한글배곧’으로 바꿔 불렀다.

1914년 7월 주시경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제자 김두봉과 신명균 등이 중심이 되어 ‘한글모’와 ‘한글배곧’을 이끌었다. 광문회로부터 시작된 『말모이』를 조정하여 사전으로 개편하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다.

1916년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말본』을 출판한 김두봉이 1919년 상해로 망명했다. 또한 1920년에는 조선언문회통사(朝鮮言文會通史)인 『한글모죽보기』를 기록한 이규영마저 사망하고 만다.

신명균‧권덕규‧장지영‧김윤경‧이병기 등은 새로운 재충전의 길을 모색하였다. 1921년 휘문의숙에 모여 조선언문회(한글모)를 조선어연구회로 재창립한 배경이다. 이들은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가갸날’(1926, 1928년에 한글날로 개칭)을 제정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에 적극 앞장섰다. 그리고 1927년에는 기관지로 『한글』을 창간하여 한글 보급에 더욱 매진한다. 이 조선어연구회가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편되었고 해방 이후인 1949년 지금의 한글학회로 이어진 것이다.

감춰진 이야기, 대종교

‘말모이’에서 감춰진 부분도 지나칠 수 없다. 가장 꼽아야 할 이야기가 대종교와의 연관성이다. 흔히 원초주의(原初主義) 입장에서 민족을 이해할 때 중시되는 요소로 종교와 언어를 꼽는다. 이 두 요소는 집단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정체성은 중차대한 위기의 시기였다.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에 의한 대종교 말살과 일본어 국어정책에 의한 우리말의 탄압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에 대한 대종교의 저항 역시 총체적 방면에서 이루어진다. 언어적 저항도 대종교 항일투쟁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역사적으로도 훈민정음 등장 이후 구한말까지, 우리의 말과 글은 국어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저 언문(諺文)이나 ‘암클’ 정도로 업수이 여김이 전부였다. 그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화적 사회구조와 밀접하다. 까닭에 우리글의 의미를 민족문화의 반열 위에 내세운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틀과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의미와도 상통했다.

정신적으로는 유교적 사대모화사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며, 구조적으로는 기득권 지식층의 한문어(漢文語)를 청산하고 우리글의 민중 보급을 조직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말모이’ 시대의 한글운동은 중화적 가치의 청산과 함께 일본어 국어정책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이중투쟁이었다.

대종교와 ‘말모이’는 표리 관계다. 『말모이』 편찬을 주도한 단체나 연관 인물들의 그 불가분성에서도 살필 수 있다. 『말모이』는 광문회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어학회로 연결된다. 최남선이 주도한 광문회는 대종교의 정신으로 국학의 재건을 도모했던 모임이다. 또한 우리의 고전들을 수집‧간행‧보급하여 우리 민족 역사와 전통의 우수성을 일깨우려 단체였다.

당시 직접 참여한 인사로서는 최남선‧김교헌‧박은식‧류근‧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이인승‧남기원 등을 꼽을 수 있다. 김교헌‧박은식‧류근 등은 최남선의 실질적 스승이었다. 또한 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 등은 『말모이』를 주도한 핵심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대종교의 중심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말모이』의 1차적 성과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1936년)한 조선어학회 역시 대종교의 국내비밀결사였다. 당시 대종교의 핵심이었던 이극로를 비롯하여 최현배‧신명균‧권덕규‧이병기‧이윤재‧한징‧정인보‧안재홍 등이 그 중심인물들이다,

조선어학회사건도 대종교와의 연관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당시 교주였던 윤세복이 만주 동경성에서 이극로에게 보낸 ‘대종교 노래 가사[檀君聖歌]’와 연결된다. 그 가사가 조선어학회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일경(日警)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조선어학회사건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일제가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중심(神道中心)으로 단군문화를 다시 발전하는 표방 하에서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 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 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 목적”이라고 못 박은 것이나, “(조선어학회는) 어문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이념을 삼아가지고, 겉으로는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독립은 목적한 실력배양단체”로 지목한 것도 동일하다.

국내의 조선어학회사건과 만주의 임오교변(壬午敎變, 대종교지도자 일제구속사건)이 1942년 10월〜11월 사이 동시에 자행된 것도 이러한 배경과 연결된다. 우리 정체성의 중심인 정신(대종교)과 언어(조선어학회)를 일거에 붕괴시키기 위함이었다.

가슴에 새겨야 할 인물들, 주시경부터 한징까지

‘말모이’ 그 중심인물들의 삶 또한 굴곡이 컸다. 그 대표적 인물이 대종교적 언어민족주의의 선봉에 섰던 주시경이다. 배재학당 졸업 당시에 받은 예수교 세례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무력침략보다 정신적 침략을 더 무서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1914년 7월 27일 39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한글을 통한 언어민족주의와 한글 대중화를 위해 오로지 헌신했다.

그는 국어학자인 동시에 국어를 통하여 민족혼을 불어넣은 사상가였다. 1908년에 이미 우리말에 대한 연원을 단군시대로부터 찾았으며, 그러한 우수한 언어와 문자에 대해 사천 년 동안 연구가 없어 어전(語典) 한 권도 갖추지 못했음을 개탄한 인물이다.

주시경은 1909년 대종교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대종교의 교리와 거의 동일한 주장으로 그의 논리를 펼쳤다. 그가 1909년 『국문연구』에서 주장한 단군의 신성한 정교(政敎)에 의해 그 언어는 고상하고 국문의 본원도 심원하다고 말한 것이나, 1910년 『국어문법』을 통해 드러낸 대동아주의적 역사관 및 우리 국어의 출현이 단군의 강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특히 1909년에 저술한 『국문초학』에서는 단군의 출현 배경과 조선이라는 국호에 대해 설명하고, 단군신앙과 연관된 유적 소개와 함께, 단군시대의 광활한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찬양하고 있다.

주시경의 이러한 주장은 대종교 사관에 나타나는 ‘단군-부여 정통론’과 맞닿는 것이며, 단군시대의 신성한 역사에 대한 찬양 또한 대종교 사관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우리글의 명칭을 ‘한글’이라고 처음 명명한 인물도 주시경이었다.

광문회 시절부터 주시경과 함께 『말모이』 편찬을 주도한 김두봉·이규영·권덕규의 삶도 애환이 많다. 김두봉은 1914년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이어 『조선말본』을 저술하고, 이어 1916년에는 대종교 교주 홍암 나철의 구월산 순교(殉敎)를 시봉(侍奉)하였다. 1919년 상해로 망명한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도 『깁더조선말본』(1922년)을 간행한다. ‘깁더’란 증보(增補)했다는 의미다. 해방 이후 북한을 택한 김두봉은 북조선의 국어 확립에 적극 기여하였으나, 종파주의자로 낙인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규영 역시 31세라는 짧은 삶을 살면서 우리말 바로잡기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저술 『온갖것』(비망록), 『말듬』(기초문법서), 『한글모죽보기』(조선언문회연혁), 『한글적새』(국어연구서), 『읽어리가르침』(敎案) 등에 나타나는 우리말 갈고 닦음이 그 흔적들이다.

권덕규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김두봉의 망명과 이규영의 죽음 이후 『말모이』의 유업을 떠안다시피 한 그였다. 식민지라는 ‘술 권하는 사회’ 속에서 집 팔아 술로 채운 인물이 누가 있을까. 그가 바로 권덕규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병으로 인해 기소중지가 되고 해방 이후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 애틋한 것은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27년 『한글』 창간의 동인인 이병기·신명균·최현배·정열모 등의 자취도 더듬어 볼 일이 다. 이병기는 우리나라 현대시조의 개척자로,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직접 배웠다. 창씨개명의 거부와 일체의 친일적 내용이 담긴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은 대쪽 같은 애국자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적 배경 또한 대종교와 무관치 않다.

신명균의 삶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는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으로, 1933년 10월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을 선도한 인물이다. 그해 11월 『주시경선생유고』를 엮어 발행한 인물도 신명균이다. 그의 삶에서도 대종교는 정신적 버팀이었다. 1941년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개명에 반항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지막 자결 당시 그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도 스승 홍암 나철의 사진이었다.

‘한배나라’ 하면 최현배가 떠오른다. ‘조국(祖國)’을 그렇게 부른 최현배다. 그는 주시경‧김두봉의 영향으로 대종교에 입교한 후 한글공부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한배’ 역시 대종교적 용어다. 학창시절 그가 중시한 두 가지가 주시경에 의한 한글공부와 나철에 의한 대종교 참여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최현배의 한글사랑과 나라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보여준 일제에 대한 문화투쟁의 배경 역시 대종교였음을 알게 해 준다.

정열모는 김두봉‧이극로와 함께 잊혀진 한글학자다. 6‧25 당시 월북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대종교 정신을 배경으로 조선어사전편찬위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한글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대종교의 주요 요직 활동은 물론 해방 후 대종교단에서 설립한 홍익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인물도 그였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도 있다. 치타(러시아)에서 상해까지 걸어와 이광수를 놀라게 했다던 이극로가 그다. 조선어학회의 동력은 사실상 이극로의 열정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사장으로 어학회를 사실상 이끌었던 그는 주시경의 제자인 김영숙(金永肅, 대종교명으로는 金振)을 통해 한글연구에 눈을 뜬다. 이후 윤세복, 신규식, 안희제로 연결되는 대종교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독일로 유학을 했다. 더욱이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에 조선어과를 설치해 전세계에 우리 국어‧국문 그리고 우리 문화를 최초로 선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은인이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와 한징도 묻어둘 수 없다. 특이하게도 이윤재는 1920년대 초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귀국 후 흥사단 활동과 더불어 대종교에 적극 가담하면서, 1928년 대종교남도본사에서 창간한 『한빛』을 주간한다. 이윤재는 그의 한자 호인 ‘환산(桓山, 한뫼)’의 ‘환’을 대종교의 ‘환인‧환웅’에서 따올 정도로 대종교 신자로서의 역사 인식이 투철하였다.

한징은 1920년대 초 민족언론 창달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자 출신이다. 그 역시 1923년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민족적 저항의 지평을 크게 넓혀 갔다. 그 정신으로 언어민족주의에 눈을 뜨고 조선어학회에 적극 가입한다. 그리고 이윤재·이극로·신명균·최현배·이중화 등, 대종교 동지들과 조선어사전편찬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다시 나라고 외쳐댈 이 누구 없는가

올 해는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나 민간이나 그 의미를 새긴답시고 세상 시끄럽다. ‘말모이’ 영화 역시 그러한 시의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 주제 설정이나 올 초에 개봉한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말모이’는 그 영화에서 보여주는 현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핀 바와 같이 그 본질은 숨겨진 정신 속에 있다. 영화 ‘말모이’가 던지는 메시지 역시 그 본질을 찾아가라는 암시일 듯하다.

모든 것이 타자화 된 지금이다. 나를 나라 하면 눈총을 받는다. 국수주의자, 배타주의자, 편협주의자로 낙인됨이 태반이다. 그러나 묻는다. 나 없는 세상에 너는 누구고 그는 또 누구냐. 그저 너 나 없이 아무개일 뿐이다. 나를 나라고 못하는 세상에서는 너도 없고 그도 없다.

이제 한힌샘도 가고 배못, 검돌, 한별도 갔다. 가람, 주산(珠山), 외솔, 백수(白水), 고루, 한뫼, 효창(曉蒼) 등등의 인물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말모이』를 도모하던 동아리 역시 흔적마저 희미하다. 그들이 찾고 만들고 버티고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다. 나의 정신을 통한 나의 언어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감춰진 부분을 지금껏 말하려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나를 위하여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그들이다. 나를 나라고 외치며 살고자 목숨까지 걸었던 그들이다. 시간이 가고 아무개들만 날뛰는 이 세상에서, 또다시 나라고 외쳐댈 이 누구 없는가.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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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흐려도 아름답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2/18 11:44
  • 수정일
    2019/02/18 11:44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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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사진 여행기] 제주 동부지역 오름 탐방... 구름을 뚫고 내려온 빛내림

19.02.18 10:44l최종 업데이트 19.02.18 10:44l

 

이 기사의 사진은 모두 네거티브 필름을 이용해 촬영 후 직접 스캔하였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 사진마다 기종 및 필름의 종류를 괄호 내에 표기하였습니다. - 기자 말

1월 7일 새벽 0시 30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위해 차량에 각종 야영 장비와 옷을 잔뜩 넣고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눈이 쌓인 맑은 날을 기다려 한라산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열흘 동안 기다리게 되었고, 2주 정도 기간 동안 여유롭게 많은 곳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전 기사: 눈 귀한 겨울... 열흘 기다렸더니 한라산에 드디어

16박 17일 동안 계속되었던 여행은 미세먼지와의 눈치 싸움이었다. 하루 전에 예보를 확인하고 그날 그날 여행 계획을 즉석으로 세웠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바다로 나갔고 비교적 시야가 좋은 날은 산으로 올랐다. 최고로 심했던 이틀은 실내에서 책을 읽었다.

손자봉에서 바라본 동쪽 풍경

그리 유명하지 않은 여행지를 좋아한다. 창작이 가미되지 않는 풍경사진을 찍다보니, 다소 소박하더라도 흔치 않는 모습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위성 지도를 볼 수 있으니 참 편하다. 밤이 되면 텐트에서 다음 날 가고 싶은 곳을 지도 어플을 통해 찾는다.

1월 10일 오후, 손자봉(손지오름)으로 향했다. 그곳에 오르면 용눈이오름과 성산일출봉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발걸음이 많이 닿지 않다 보니 등산로를 찾기 어려웠다. 오름은 그리 높지 않아서 20분도 걸리지 않아 능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손자봉에서 본 용눈이오름 (SW612/Portra400)늦가을이었다면 하얗고 풍성한 억새꽃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갈색으로 물든 용눈이오름의 곡선이 참 아름답다.
▲ 손자봉에서 본 용눈이오름 (SW612/Portra400)늦가을이었다면 하얗고 풍성한 억새꽃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갈색으로 물든 용눈이오름의 곡선이 참 아름답다.ⓒ 안사을

손자봉의 매력은 비단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에만 있지 않다. 손자봉 자체의 모습도 꽤나 아름답다. 어떤 블로거는 '모히칸 머리를 한 사나이'같다고 표현했다. 아래의 사진은 동검은이오름(동거미오름)과 손자봉 사잇길에서 담은 모습이다.
 
멀리서 본 손자봉 (SW612/Pro400H)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는 벌판과 파란 하늘 사이로 손자봉이 보인다. 왼편에 있는 오름은 다랑쉬오름이다.
▲ 멀리서 본 손자봉 (SW612/Pro400H)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는 벌판과 파란 하늘 사이로 손자봉이 보인다. 왼편에 있는 오름은 다랑쉬오름이다.ⓒ 안사을
 
손자봉과 동검은이오름 주변은 그야말로 제주 내륙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풍경으로 가득했다. 관광지로 개발할 만큼 엄청난 경치가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바람을 친구 삼아 홀로 몇 시간이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이름없는 언덕에서 (SW612/Portra400)왼쪽부터 다랑쉬오름, 족은다랑쉬오름, 손자봉이 있고 그 뒤로 아주 작게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 이름없는 언덕에서 (SW612/Portra400)왼쪽부터 다랑쉬오름, 족은다랑쉬오름, 손자봉이 있고 그 뒤로 아주 작게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안사을
북쪽을 바라보면 (SW612/Portra400)왼편에는 높은오름, 오른편으로는 다랑쉬오름의 일부가 보인다. 가운데 작게 보이는 오름은 돗오름이고 그 오른편으로 비자림이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15킬로 가량 떨어진, 제주 북쪽 바다.
▲ 북쪽을 바라보면 (SW612/Portra400)왼편에는 높은오름, 오른편으로는 다랑쉬오름의 일부가 보인다. 가운데 작게 보이는 오름은 돗오름이고 그 오른편으로 비자림이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15킬로 가량 떨어진, 제주 북쪽 바다.ⓒ 안사을

이 날의 탐방은 사실 사전답사에 가까웠다. 일출경을 담을 위치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손자봉에서 용눈이오름과 성산일출봉을 방향으로 사진을 담을 위치를 정하고 며칠을 기다렸다. 이윽고 먼지가 없는 날이 되었고 어둠 속을 천천히 달려 손자봉을 다시 찾았다. 

수면과 맞닿은 해는 찍을 수 없었다. 구름이 잔뜩 몰려왔기 때문이다. 일출시각 직전에는 하늘이 비어있었는데 해가 떠오르는 속도와 맞추어 기가 막히게 해를 가렸다. 허탈감에 터덜터덜 산을 내려와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구름을 뚫고 빛이 내려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다시 산을 올랐다. 삼각대 채로 카메라를 손에 들고 뛰었다. 이런 극적인 풍경은 10분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침이 말라 목이 붙으면 소리를 질렀다. 원맨쇼에 가까운 행위 덕분에 용눈이오름을 향한 태양의 스포트라이트를 잡을 수 있었다. 
 
손자봉에서, 아침 (SW612/Pro400H)빛내림을 선명하게 담기 위해 노출을 두 스톱 아래로 계산했다.
▲ 손자봉에서, 아침 (SW612/Pro400H)빛내림을 선명하게 담기 위해 노출을 두 스톱 아래로 계산했다. ⓒ 안사을
하늘의 틈 사이로 (SW612/Pro400H)5분 후의 모습. 이전 사진과 달리 한 단계만 아래로 노출을 계산했다.
▲ 하늘의 틈 사이로 (SW612/Pro400H)5분 후의 모습. 이전 사진과 달리 한 단계만 아래로 노출을 계산했다.ⓒ 안사을
 
성읍 영주산의 계단을 오르면

예로부터 성읍마을의 주산으로 여겨진 산이 하나 있다. 그 이름도 신성한 '영주산'이다. 사실 영주산이라는 명칭은 한라산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세 개의 산이 있는데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 그것이다.

봉래산은 금강산이고 방장산은 지리산이며 영주산은 지금의 한라산이다. 성읍의 주산에 영주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을 보면 그만큼 이곳이 주민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성읍마을에서 천미천을 따라 서북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영주산의 들머리를 만날 수 있다. 정상까지는 약 25분이 소요된다. 오름의 특성상 높이는 낮지만 쉼 없이 올라가는 길이니 잠시나마 숨이 찰 각오는 해야 한다.

이곳은 '산'이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역시 오름 중의 하나이다. 말굽형 분화구가 있어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산체로 보이고, 동남쪽이 터져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직접 오르기 전까지는 기생화산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영주산 초입 (SW612/Pro400H)왼편의 움푹한 곳이 분화구. 서북쪽 방향으로 올라간다.
▲ 영주산 초입 (SW612/Pro400H)왼편의 움푹한 곳이 분화구. 서북쪽 방향으로 올라간다.ⓒ 안사을
색색의 계단과 동쪽 풍경 (SW612/Pro400H)숨이 찰 즈음에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풍경
▲ 색색의 계단과 동쪽 풍경 (SW612/Pro400H)숨이 찰 즈음에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풍경ⓒ 안사을
 
이 날의 미세먼지 상황은 '나쁨'이었다. 영주산은 해발 326미터의 작은 산이지만 주변이 평지이고 건물이 거의 없어서 동쪽으로는 해변까지의 평원, 서쪽으로는 한라산의 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뿌연 시야였지만 마음을 비우고 셔터를 눌렀다.
 
영주산 정상에서 (SW612/Pro400H)정상에서 바라본 동편의 모습
▲ 영주산 정상에서 (SW612/Pro400H)정상에서 바라본 동편의 모습ⓒ 안사을
정상에서 본 성읍저수지 (SW612/Pro400H)지도나 네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저수지. 사진의 가장 왼편에 매우 희미하게 한라산이 보인다.
▲ 정상에서 본 성읍저수지 (SW612/Pro400H)지도나 네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저수지. 사진의 가장 왼편에 매우 희미하게 한라산이 보인다.ⓒ 안사을
 
성읍저수지 주변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억새 평원이 펼쳐져 있다. 저수지의 주변은 산에 오르기 며칠 전에 미리 탐방을 다녀왔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곳이었는데 몇몇 글을 보니 밭을 일구는 주민들이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들로 불편을 겪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역시 아무도 없는 길을,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흔적 없이 답사했다. 저수지와 평원은 영주산과 개오름의 사이에 있다. 개오름으로 가는 길은 고요한 산책로로 손색이 없었는데 개오름으로 진입할 수는 없다. 사유지를 보호해 달라는 팻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읍저수지와 영주산 (645N/Ektar100)파란 하늘보다 더 짙은 물빛 뒤로 영주산이 보인다.
▲ 성읍저수지와 영주산 (645N/Ektar100)파란 하늘보다 더 짙은 물빛 뒤로 영주산이 보인다.ⓒ 안사을
물과 길 (SW612/Pro400H)두시간여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아도 좋을 듯 한 곳.
▲ 물과 길 (SW612/Pro400H)두시간여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아도 좋을 듯 한 곳.ⓒ 안사을
억새 사이로 걷는 길 (645N/Ektar100)개오름 방향으로 향하는 길.
▲ 억새 사이로 걷는 길 (645N/Ektar100)개오름 방향으로 향하는 길.ⓒ 안사을
영주산 뒤편 억새밭 (SW612/Pro400H)억새의 지평선 너머로 오름들이 하나 둘 씩 보인다. 제주도의 전형적인 풍경.
▲ 영주산 뒤편 억새밭 (SW612/Pro400H)억새의 지평선 너머로 오름들이 하나 둘 씩 보인다. 제주도의 전형적인 풍경.ⓒ 안사을
 
백약이오름에서 다시 만난 빛내림

기사에 다룬 곳들 외에도 붉은오름, 동검은이오름, 아부오름 등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 중 관광객이 가장 많았던 곳은 백약이오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오는 등산객들과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수 있었다.

백약이오름은 분화구의 모양이 확연히 드러나있다. 분화구 능선까지 오르막을 오른 뒤 분화구 주변을 한바퀴 돌면 훌륭한 산책 코스가 된다. 한라산을 비롯해서 그 동안 올랐던 많은 오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날 역시 구름이 잔뜩 하늘을 가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제주도는 흐려도 아름답다.
 
백약이오름에서(1) (SW612/Pro400H)회색 하늘에도 빛은 있다.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바로 영주산이다.
▲ 백약이오름에서(1) (SW612/Pro400H)회색 하늘에도 빛은 있다.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바로 영주산이다.ⓒ 안사을
구름과 분화구 (SW612/Pro400H)잔뜩 찌푸린 하늘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하다.
▲ 구름과 분화구 (SW612/Pro400H)잔뜩 찌푸린 하늘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하다.ⓒ 안사을
백약이오름에서(2) (SW612/Pro400H)흩뿌리는 빛줄기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 백약이오름에서(2) (SW612/Pro400H)흩뿌리는 빛줄기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안사을
 
※ <필름사진 여행기>, 제주도 야영 생활 및 해변 풍경에 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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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광·풍력 발전이 혐오시설이 된 까닭

태양광·풍력 발전이 혐오시설이 된 까닭

이수경 2019. 02. 18
조회수 9 추천수 0
 
괴담보다 그 토양이 문제다… 지역과 주민이 개발의 주체 돼야
 
06036318_P_0.JPG»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30일 전북 군산시 유수지 수상 태양광 부지에서 열린 '새만금 재생에너지 비전 선포식' 행사를 마치고 수상 태양광 시설을 돌아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은 대표적인 지속가능에너지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에너지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원자력과 석탄발전을 대체할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려가야 한다. 그런데 지속가능하다는 신재생에너지 중에서도 풍력과 태양광이야말로 성골에 해당하는 진짜배기 지속가능에너지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지속가능에너지 풍력과 태양광발전이 혐오시설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나라 전력 생산량에서 신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7년 5.57%1), 태양 및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수력 포함)은 3.4%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정부가 지속가능에너지를 꾸준히 늘리겠다는 계획을 거듭 밝혀왔지만 재생에너지가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오히려 줄거나 정체를 거듭해 왔다.(그림 1)
 
재생.jpg
그림 1. 전기생산에서 재생에너지(태양광·열, 풍력, 수력 포함) 점유율 연도별 변화(자료: 세계에너지통계, 에너데이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공약은 우리나라도 이제 지속가능한 에너지 구조로 전환되어 친환경적인 신재생에너지가 확대되는 전기를 마련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재생가능에너지 확대가 예상치 못했던 암초를 만났다. 친원전 전문가나 업계의 반발이야 예상했던 일이지만 지역주민이 태양광발전을 혐오시설 대하듯 반대에 나서리란 건 의외였다.
 
2016년 전북 장수에서는 주민과 전북 환경단체의 반대로 풍력단지 개발이 무산되었다. 장수 대규모 풍력발전단지가 백두대간을 파괴하고 가야유적을 훼손할 것이라는 주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장수 뿐 아니라 풍력발전에 대한 인근주민의 반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대규모 풍력단지의 환경훼손과 소음 등으로 인근 주민과 환경단체마저 풍력단지의 대규모 입지를 반대하는 것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보편적 추세다.  
 
06038901_P_0.JPG» 전남 신안 주민 300여명이 지난해 9월 전남도청 앞에서 해상풍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신안 임자도 해상풍력 반대대책위 제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태양광 발전마저 인근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사업이 속속 난항을 겪고 있다. 경기도 과천에 위치한 서울대공원 주차장에 설치하려는 태양광발전에 대한 과천시민의 반대가 그 대표적 사례다. 과천뿐 아니다. 태양광을 설치하겠다는 지역마다 주민의 반대와 민원이 거세다. 주차장도 산도 저수지도 바다도 간척지도 모두 안 된다고 한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반드시 필요하고 또 시급한데 주민들은 풍력도 태양광도 원자력발전소만큼 혹은 그보다 더 유해하다며 우리 마을에는 절대 들어설 수 없다고 한다.
 
정부는 이렇게 거세진 재생에너지 반대 뒤에는 주민을 선동하는 가짜뉴스가 있다고 믿고 있다. 태양광 발전이 산림을 훼손하고 경관을 해친다는 문제야 제기할 수 있다고 해도 중금속 덩어리로 범벅이 되어 있다거나 발전시설이 오염원이라는 주장에 이르면 분명 괴담을 만들고 유포해서 이익을 얻는 세력이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든 문재인 정부에 반대하든 거짓뉴스를 퍼트려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고 이 거짓 뉴스와 지역 이기주의에 휘둘리는 지역주민이 있다는 것이다.
 
태양광토론회.jpg» 태양광에 관한 가짜뉴스가 사회적 논란이 되자 관련 학회와 시민단체가 연 토론회 포스터.
 
“태양광 패널의 독성이 핵발전의 300배 이상”이라는 근거를 찾을 수도 없는 괴담에 이르면  정부의 의심에 일견 수긍이 가는 면도 있다(사라지지 않는 가짜뉴스 태양광 중금속 괴담). 그러나 어느 사회든 괴담은 있다. 괴담이 재생에너지 사업을 가로막기보다는 괴담으로 부푸는 민심이 사업을 가로막는다.
 
2018년 10월 30일, ‘새만금 재생에너지 비전 선포식’에서 정부는 2022년까지 새만금의 10% 면적에 4기가와트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재생에너지 글로벌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축사에서 “새만금 재생에너지 사업의 개막은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산업의 경쟁력을 세계적으로 높이는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새만금에 새롭게 조성되는 태양광과 풍력 발전단지에 관련 제조업체, 연구시설, 실증센터를 설치하여 재생에너지 기술력을 한 차원 더 끌어 올리겠다”고 덧붙였다(새만금에 4GW 규모 태양광·풍력발전단지 조성한다). 이 계획에 대해 새만금의 개발과 보전을 두고 대립해왔던 지역사회, 지자체, 환경단체는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우려와 기대를 표명했다. 
 
정부가 달라지고 계획이 달라지고 비판이 달라져도 30여년 동안 여전한 건 늘 정부의 계획은 “세계 최대”라는 것이다. 여느 개발과 마찬가지로 재생에너지를 추진하는 방법도 속도와 물량공세다. 정부에서 신재생에너지를 책임지고 있는 한 관계자는 “재생에너지 중 가장 유력한 재생에너지인 태양광발전의 경우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전력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고 해도 국토면적 5%에서 적게는 2%면 태양광발전만으로도 필요한 전력을 충당할 수 있어 부지는 문제가 안 된다”고 의견을 밝혔다
 
서울의 면적이 전국토의 0.6%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국토 면적의 5%의 부지를 확보하는 일의 규모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부지를 확보한다는 것이 단순히 토지와 같은 물리적인 영역을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06043365_P_0.JPG» 경기도 안성시 금광저수지 수상 회전식 태양광 발전소 모습. 연합뉴스
 
2018년 3월 강원 정선군 임계면 주민이 꾸린 임계면 풍력·태양광발전소 설치 반대 투쟁위원회는 주민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풍력·태양광발전소 사업 인허가 백지화를 요구했다. “태양광과 풍력발전은 소음과 환경훼손, 재산가치 하락과 자연재해 등의 문제가 있다. 공공의 자원인 햇빛과 바람을 이용해 개인사업자의 배만 불리고 있는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주민 우려와 반대가 큰 만큼 지역 실정에 맞게 개발되고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풍력·태양광 신재생에너지 봇물’ 임계주민 뿔났다).
 
재생에너지 개발사업이라고 다른 개발사업과 다르지 않다. 개발계획에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지도 개발이익이 지역 주민에게 돌아오지도 않는 개발사업이 지역의 환경을 훼손하고 폐기물만 남기고 떠난 지난 경험 위에서 재생에너지 사업도 출발한다. 따라서 이 정부는 개발이익은 서울에 빼앗기고 혐오시설만 더 소외된 지역으로 밀려 온 역사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제시해야만 계획한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목표를 향해 출발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는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말해도 폐기물을 지역에 남기지 않겠다고 말해도 주민들이 목도하는 것은 지난 개발 사업과 똑같이 진행되는 개발과정이다. 중앙집중적이고 대규모로 개발되고 운영되는 원자력과 화력발전을 대신한다는 재생에너지도 개발되는 과정에서는 여전히 지역주민을 배제한 채 중앙정부가 속도와 물량으로 밀어붙인다. 그러면서, 재생에너지는 원자력과는 다르다는 과학적 근거를 들이민다고 지역주민이 다르게 받아들여 주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달라야 오랜 불신을 뚫고 믿어 볼 마음이 싹튼다.
 
04932065_P_0.JPG» 재생에너지개발사업이 주민의 환영을 받으려면 주민이 개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사진은 대관령의 풍력 단지. 이병학 기자
 
집에 곰팡이가 슬면 살균제로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곰팡이가 스는 습한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다시 또 곰팡이가 슨다. 곰팡이 포자처럼 괴담은 언제 어느 곳에나 떠돈다. 그러나 곰팡이가 퍼지는 데는 습한 환경이 반드시 필요하다. 곰팡이를 막고 싶으면 햇빛과 바람을 집안으로 들여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발전도 확대하려면 지역과 주민이 개발에 주체가 되어야 하고 그 이익이 지역과 주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괴담이 문제가 아니라 괴담이 깃드는 서운한 마음과 불공정한 세상이 문제다.
 
이수경(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장)

1) 에너지원별 발전량, 국가통계포털, 통계청

2) 전기생산에서 신재생에너지 비율, 세계에너지통계 2018, 에너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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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대결의 전략적승리에서 핵담판의 전략적승리에로

[개벽예감335]핵대결의 전략적승리에서 핵담판의 전략적승리에로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2/18 [08:4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조선이 거둔 4 대 0 전술적 승리

2. ‘가짜 황금’도 없고, ‘값진 양보’도 없다

3. 조선의 요구는 제재완화가 아니라 제재해제다

4. 미국이 조선에 제의한 상호불가침선언

5. 마지막 기회에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1. 조선이 거둔 4 대 0 전술적 승리

 

2019년 1월 18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제2차 조미정상회담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시점에 나온 그 사설은 미국의 언론매체들이 언급하기 꺼리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읽어볼 만하다. 그 흥미로운 사설을 다시 읽어보려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외교의 재개는 분렬되고 무능한 미국 행정부에 대한 김정은 정권의 또 다른 전술적 승리(another tactical victory)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사설은 지적하였다. 외교의 재개가 아니라 조미협상의 재개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사설에서 지적한 것은, 조선과 미국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조선이 또 다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는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응당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은 아직 개최되지 않았지만, 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것 자체가 조선에게 전술적 승리를 또 다시 안겨준 것이며 미국에게는 전술적 패배를 또 다시 안겨준 것이다. 아직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두 나라가 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면, 어느 한 쪽이 승리하고, 어느 한 쪽이 패배하는 승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워싱턴포스트> 사설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이 이번에 전술적 승리를 또 다시 거두었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이 조선에게 제기했던 요구조건들을 포기하고, 다시 말해서 조선의 시각으로 보면 미국이 자기의 강도적 요구들을 포기하고 대폭 후퇴한 것으로 하여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조선이 대미협상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9년 2월 13일 당시 동유럽을 순방 중이던 마익 팜페오 미국 국무장관이 뽈스까 수도 와르샤바에서 미국 텔레비전방송 과 단독대담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그 자리에서 대담진행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에게는 12가지 전제조건을 제기하였으면서도, 왜 조선에게는 아무런 전제조건도 제기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팜페오 국무장관은 "상황이 매우 달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오늘 북조선은 미국에 도달하는 핵무기를 가졌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대로 우리가 지금 즉각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는 위협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선택하였다"고 답변하였다. 다시 말해서, 미국 본토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조선의 강력한 국가핵무력 앞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런 전제조건도 내걸지 않고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이 조미핵대결에서 거둔 전략적 승리가 미국을 조미협상으로 끌어냈고, 지금은 그 협상에서 또 다른 전략적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9년 1월 18일부 사설에서 <워싱턴포스트>는 조선이 미국을 상대로 벌인 치열한 협상에서 거둔 전술적 승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2019년 1월 16일 <자주시보>에 실린, 재일동포 통일학자 강민화 박사와 진행한 신년대담기록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큰 정세격변 일어난다’에서 조선이 대미협상에서 거둔 압도적인 승리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 바 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2018년에 조미협상이 시작되었을 무렵, 조선의 핵무기를 미국 본토로 반출하여 해체해야 한다는 이른바 ‘핵반출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결국 ‘핵반출론’을 철회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또한 미국은 2018년에 조미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조선이 미국에게 핵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핵신고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더 이상 ‘핵신고’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또한 미국은 그 무슨 미중공조로 조미협상에서 조선을 고립시키고 우위를 차지할 것처럼 이른바 ‘미중공조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과 조중정상회담을 보고 움찔하더니 더 이상 ‘미중공조’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또한 미국은 조선이 협상재개 선결조건으로 제기한 제재완화요구에 응할 수 없다느니 뭐니 하면서 이른바 ‘제재완화불가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조선의 눈치를 보면서 최근에 제재조치를 완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사실들은 조선이 ‘핵반출론’, ‘핵신고론’, ‘미중공조론’, ‘제재완화불가론’ 같은 미국의 헛소리들을 하나씩 배척하면서, 지난해 조미협상에서 4 대 0으로 압도적인 판정승을 거두었음을 말해줍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 본토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여 조미핵대결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둔 조선은 미국이 제기한 여러 가지 부당한 전제조건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미국을 조미정상회담으로 끌어내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마익 팜페오 미국 국무장관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2019년 2월 13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BS>는 뽈스까 수도 와르샤와에서 당시 동유럽을 순방 중이던 팜페오 국무장관과 단독대담을 진행하였는데, 이란에게 12가지 전제조건을 제기한 트럼프 행정부가 왜 조선에게는 아무런 전제조건도 제기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 질문을 받은 팜페오 국무장관은 “상황이 매우 달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오늘 북조선은 미국에 도달하는 핵무기를 가졌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대로 우리가 지금 즉각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는 위협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선택하였다”고 답변하였다.  

 

 

2. ‘가짜 황금’도 없고, ‘값진 양보’도 없다

 

<워싱턴포스트> 1월 28일 사설을 다시 읽어보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위험을 느끼는 그들의 불안한 심리상태가 사설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워싱턴포스트>만 그런 위험을 느끼는 게 아니다. 미국 여론을 주도하는 미국 연방의회의 지도급 인사들, 미국의 주요언론매체들, 미국의 전문가집단들로 이루어진 조미협상반대파들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위험을 느끼고 있다. 8천만 우리 겨레와 세계 평화애호인민들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 개최합의를 환영하고, 그 정상회담에서 위대한 전변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희망하는데, 그들은 왜 위험을 느낀다느니 뭐니 하면서 희떠운 소리를 꺼내놓은 것일까? 

 

그 까닭은 <워싱턴포스트> 1월 28일 사설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속아넘어가기 쉬운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여 가짜 황금(fool's gold)을 건네주는 대가로 값진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제2차 정상회담을 이용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을 속임수에 넘어가기 쉬운 어수룩한 사람으로 깎아내린 것일 뿐 아니라, 국가안보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조미협상을 속임수가 오가는 협잡거래인 것처럼 악랄하게 비방중상한 것이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환영하지는 못할망정 그 정상회담을 협잡거래인 것처럼 악랄하게 비방중상한 것은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 평화애호인민들로부터 규탄과 배격을 받아 마땅한 악질망언이다. 

 

(1)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가짜 황금’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설에는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았지만,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시할 가장 중대한 사안은 조선의 핵동결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워싱턴포스트>가 1월 28일 사설에서 조선의 핵동결을 ‘가짜 황금’이라고 비방중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에는 조선의 핵동결이 ‘가짜 황금’으로 보일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핵동결은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의 시험, 생산, 사용, 전파를 중단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지난해부터 핵강국인 조선에게 핵무기를 폐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이므로, 핵동결만이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거듭 주장해왔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도 조선의 핵동결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2019년 1월 29일 연방상원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댄 코우츠 국가정보실장은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의 정보판단을 종합한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조선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2019년 2월 12일 미국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인디아양-태평양사령관 필립 데이비슨 해군제독은 청문회 보고서에서 조선이 핵무기 또는 핵무기생산시설들을 전부 폐기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런 발언들은 조선의 핵동결을 사실상 인정한 발언들이다.   

 

물론 조선의 핵동결조치는 단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첫 단계에서는 핵시험과 대륙간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핵물질 생산을 중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핵물질생산중단이란 녕변핵시설단지에서 가동되는 플루토늄생산시설들과 우라늄농축시설들을 전부 폐기하는 것이다. 수 억 달러나 하는 값비싼 핵물질생산시설들을 전부 폐기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복잡한 핵공학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정세를 전변시키는 중대한 정치적 계기를 마련해가는 것이므로, 어찌 간단한 문제이겠는가.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9년 1월 3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조선정책특별대표가 연설하는 장면이다. 그는 연설에서 만일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녕변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것이라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조미실무협상에서 조선의 녕변핵시설해체에 상응하여 미국이 취할 상응조치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2019년 2월 6일부터 8일까지 그는 평양을 방문하여 조선측과 실무협상을 진행하였다. 그러므로 그 실무협상에서 조선의 녕변핵시설해체에 상응한 미국의 상응조치가 논의되었을 뿐 아니라, 쌍방이 그 문제에 대한 합의가능성을 찾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합의는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미협상전략은 조선의 핵동결에서 완료되는 것이므로 핵동결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2019년 1월 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조선정책특별대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에서 채택, 발표된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그리고 팜페오 국무장관이 2018년 10월 7일 방북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접견을 받은 자리에서 만일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녕변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것이라고 약속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조미실무협상에서 조선의 녕변핵시설해체에 상응하여 미국이 취할 상응조치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2)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값진 양보’란 무엇인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제시할 ‘값진 양보’는 조선의 핵동결에 상응하여 미국이 취할 상응조치를 뜻한다. 조미협상의 의의를 폄하하려는 <워싱턴포스트>는 조선이 취할 조치를 ‘가짜 황금’으로 깎아내리는 한편 미국이 취할 조치를 ‘값진 양보’라고 추켜올렸지만, 미국이 조선에게 무슨 양보를 하는 게 아니라 조선과 미국이 서로 공평하게 상응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이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완전히 중단하고, 녕변핵시설을 전부 폐기하는 핵동결조치를 취하면, 미국도 그에 상응하는 핵동결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2019년 1월 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 연사로 출연한 비건 특별대표는 비핵화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에 대해 조선과 미국이 공감하였는가 라고 물은 참석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비핵화 개념에 대한 정의도 없고, 공유된 합의도 없다고 답변하였다. 비건의 답변은 솔직한 답변이지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이 덧붙여진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조선과 미국의 견해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조선과 미국은 비핵화 개념을 합의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조선을 상대로 협상을 진전시키려면,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가도 해결될 수 없는 비핵화 개념논쟁에 매달려 허송세월할 게 아니라,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였을까?

 

<워싱턴포스트> 2019년 2월 12일부에 실린, 미국 언론인 데이빗 익네이셔스의 분석기사에 따르면, 비건 특별대표는 스탠퍼드대학 핵문제전문가들과 카네기국제평화재단 핵문제전문가들로부터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그들이 비건에게 조언한 것은 핵폐기가 아니라 핵동결이라고 한다. 그런 조언을 받은 비건 특별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을 것이고, 그런 보고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인식하였을 것이다.  

 

2019년 2월 15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미국-메히꼬 국경장벽건설문제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진행하던 중 조미협상에 관해 언급하면서 “우리는 단지 시험(testing)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조선의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뜻한다. 이 말은 그가 기자회견 중에 불쑥 꺼낸 것이지만, 미국이 조선에게 바라는 것은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하는 것이라고 밝힌 그 발언은 그가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였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의 정상회담 개최요청을 받아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 곧 핵동결의 의미를 트럼프 대통령이 인정하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이 핵동결조치를 취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도 핵동결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조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조선과 미국의 상호핵동결이다. 두 나라가 상호핵동결을 하지 않고, 조선만 핵동결을 하는 것은 불완전한 비핵화이므로, 그런 불완전한 비핵화가 실현될 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워싱턴포스트>가 2019년 1월 18일부 사설에서 말한 ‘가짜 황금’이나 ‘값진 양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며,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과 미국의 공평한 상호핵동결을 합의할 것으로 예견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호핵동결이란 조선은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완전히 중단하고 녕변핵시설을 전부 폐기하고, 미국은 그에 상응하여 한반도 핵우산을 완전히 철거하는 것이다. 

 

조선의 완성된 국가핵무력이 미국 본토 전역을 사정권 안에 끌어들여 미국의 한반도 핵우산을 힘으로 압도하였으니, 핵우산은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하였다. 그런 까닭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한반도 핵우산을 아까워할 필요가 전혀 없고, 철거하는 수밖에 없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월 18일 사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해당지역에서 미국군과 (전략)자산들이 철수되는 것이 비핵화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서술하였다. 미국이 한반도와 주변지역에서 핵전략자산의 배치, 반입, 연습, 사용을 완전히 중단하는 것은 한반도 핵우산이 완전히 철거된다는 뜻이다. 

 

미국이 한반도 핵우산을 철거하면, 주한미국군도 당연히 핵우산과 함께 철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한미국군은 전시에 조선에게 핵우산을 사용하기 위한 인계철선역할을 수행하는 군대인데, 핵우산이 철거되면 인계철선도 함께 철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은 핵우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위험지역에 자국군대를 방치해둘 수 없으므로, 핵우산을 철거하면 주한미국군도 함께 철수하는 수밖에 없다.  

 

 

3. 조선의 요구는 제재완화가 아니라 제재해제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월 18일 사설에서 “북조선은 제2차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교묘하게 조종(manipulate)하여 제재완화, 종전선언, 주한미국군 철수 같은 새로운 양보를 받아낼 것으로 확실히 바라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정상회담에서 누가 누구를 교묘하게 조종한다는 말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 대한 거부감에서 표출된 황당무계한 궤변이다. 미국 언론계를 대표한다는 일간지가 거친 감정이나 표출하면서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주요언론매체들에게 환멸을 느낄만하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의 핵동결에 따르는 상응조치로 대조선제재문제, 한반도평화문제, 주한미국군철수문제의 일괄타결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요구할 것으로 예견된다. 이것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논의될 3대 주요의제들인데, 그 중에서 제재문제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19년 2월 13일 동유럽을 순방 중이던 팜페오 국무장관은 뽈스까 수도 와르샤와에서 미국 텔레비전방송 <CBS>와 대담을 진행하면서 “그러한 제재를 완화하는 대가로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우리의 완전한 의도(our full intention)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매우 바란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대조선제재를 완화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제재문제에 대한 조선의 견해는 다르다. 일본 일간지 <아사히신붕> 2019년 1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1월 17일부터 19일까지 조선대표단을 이끌고 백악관을 방문하여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하였던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은 백악관을 방문하기 직전 숙소호텔에서 팜페오 국무장관과 회담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조선이 이미 여러 가지 비핵화조치를 취했으므로 이제는 미국이 그에 상응하여 독자적인 대조선제재와 유엔안보리의 대조선국제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중앙일보> 2019년 2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6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조미실무협상에서 조선 협상단은 미국 협상단에게 대조선제재해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비건 특별대표가 즉답을 내놓지 않자 조선 협상단은 워싱턴에 돌아가 협의한 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진행될 실무협상 때까지 답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만일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도 제재해제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조선은 자기의 길을 가겠다는 식으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미국은 대조선제재를 완화하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조선은 제재완화가 아니라 제재해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해제범위도 미국의 단독제재만이 아니라 유엔안보리의 국제제재까지 전면적으로 확대해놓은 것이다. 조선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이 대조선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해야 하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미국이 대조선제재를 해제하지 않으면 자기의 길을 가겠다는 식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7년 4월 1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에 현지에서 성대한 준공식을 진행한 평양 려명거리의 아름다운 야경이다. 평양이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평양 곳곳에 새로 건설된 수많은 고급아파트들이 각계각층 평양시민들에게 완전히 무상으로 공급되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첨단녹색건축기술이 도입된 이 거대한 고층건물들은 조선이 제재나 봉쇄에도 그떡하지 않고, 힘차게 발전하는 자력갱생-자립자강의 강국이라는 사실을 실물로 입증하고 있다. 평양만 그런 게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수많은 기념비적 건축물들과 현대적인 생산시설들과 첨단과학기술성과들이 이룩되면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립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다른 나라에 대한 제재는 실효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조선에 대한 제재는 아무런 실효도 내지 못하는 헛발질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헛발질 같은 제재에 매달려 허송세월할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대조선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하여 조미관계개선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이 감행하는 독자적인 대조선제재를 해제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국의 주도로 조작된 유엔안보리의 국제적인 대조선제재까지 전면적으로 해제되어야, 남과 북은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을 드높이며 8천만 겨레가 절실히 바라는 남북관계개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위대한 자주통일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국면을 열어놓을 수 있다.

 

팜페오 국무장관과 비건 특별대표는 김영철 부위원장과 김혁철 특별대표로부터 각각 대조선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해야 한다는 강한 요구를 받았지만, 그 요구에 제대로 답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전면적인 제재해제가 아니라 부분적인 제재완화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제재해제요구에 답할 수 있는 당사자는 트럼프 대통령밖에 없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월 18일 사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에 대한 제재가 해제될 때까지 그 어떤 조치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하게 제기한 제재해제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당사자도 트럼프 대통령뿐이다. 자력갱생과 자립자강으로 국가경제를 발전시켜나가는 조선에게 제재는 사실상 실효가 없는 헛발질 같은 것에 불과하다. 미국이 헛발질 같은 제재에나 매달린다고 해서 협상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모든 사정을 살펴보고, 사실상 마지막 담판이 벌어질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대조선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하는 용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4. 미국이 조선에 제의한 상호불가침선언

 

2019년 1월 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비건 특별대표는 “우리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미국과 북조선,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평화로 전변되는 한반도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미국은 그런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무엇을 선택했을까? 

 

일본 <교도통신> 2019년 2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6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조미실무협상에서 미국 협상단은 조선 협상단에게 불가침선언 또는 평화선언을 채택할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요즈음 미국과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발표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고, 나는 이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종전선언발표를 생략하고 평화협정체결을 제의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런데 위에 인용된 보도내용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아니라 불가침선언을 제의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불가침협정 또는 불가침조약이 아니라 불가침선언이다. 불가침협정이나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 미국 연방의회에서 비준을 받아야 하는데, 트럼프 반대파가 장악한 연방의회에서 비준을 받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불가침선언이라는 명칭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불가침선언은 불가침협정 또는 불가침조약보다 국제법적 구속력이 약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협정이나 조약도 체결일방이 파기를 선언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효력이 정지되고, 또한 체결일방이 파기를 선언하지 않고서도 위반할 수도 있고, 더욱이 파기나 위반을 제재할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협정이나 조약은 선언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협정, 조약, 선언은 국제법적 구속력에 의해 지켜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지키려는 체결당사자 또는 채택당사자의 정치군사적 힘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관계에서는 강력한 정치군사적 힘이 필요하다. 

 

조선과 미국이 상호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 경우, 그 선언은 조선의 정치군사적 힘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군사적 힘의 실체는 핵억지력이다. 만일 조선이 핵억지력을 갖지 못했다면, 조선과 미국이 상호불가침선언을 채택하더라도 그것의 이행을 위한 담보가 없으므로 그 선언은 빈 종이장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미국이 협정이나 조약을 위반하거나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상습범’이라는 사실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런 ‘상습범’의 말만 믿고 불가침선언을 채택할 나라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8년 11월 하순 비무장지대에 있는 한국군 감시초소가 철거되는 장면이다. 남과 북은 군사합의서에 따라 비무장지대 전 전선에 걸쳐 감시초소 20개에 배치된 병력과 무장장비를 후방으로 멀리 철수하였고, 감시초소들도 2018년 11월 30일까지 모두 철거하였으며, 2018년 12월 12일에는 철거현장에 대한 쌍방의 상호검증도 실행되었다. 그로써 우리 민족끼리 분단선을 뛰어넘어 화해하고 단합하려는 통일의 기운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폐허로 변해버린 감시초소철거현장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8천만 우리 겨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다. 우리 민족은 분단장벽이 철거된 아름다운 폐허 위에 위대한 자주통일강국을 세울 것이며, 반만년 민족사에 빛나는 천하제일강국을 세울 것이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머지않아 이루어질 가슴벅찬 현실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은 조선과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과 중국이 참가하는 2+4 형태의 양자-다자복합회담을 진행하여 채택 또는 체결할 수 있다. 그와 다르게, 상호불가침선언은 한국과 중국은 참가하지 않고, 조선과 미국이 양자회담에서 채택할 수 있다. 미국이 조선에 제의한 상호불가침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논할 필요가 있다.  

 

첫째, 2+4 형태의 양자-다자복합회담을 준비하고 합의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데, 양자회담은 그런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2020년 11월 3일 대통령선거 전까지 조미관계현안들을 해결해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크게 절약되는 상호불가침선언을 바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조선과 미국이 상호불가침선언을 채택하기 위한 양자회담을 진행하는 경우, 한국이 그 회담에 참가할 수 없으므로, 조선과 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반대하는 주한미국군 철수문제와 한반도 핵우산 철거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셋째, 그 동안 종전선언채택문제를 두고 애써온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이 종전선언을 채택하는 다자정상회담에 자신도 참가시켜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믿은 것은 큰 실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을 빼놓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미불가침선언을 채택하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미국군 주둔지원금을 해마다 대폭 증액하여 종당에는 전액 부담시키려는 강도적 요구를 문재인 정부에게 들이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철석 같이 믿는 한미동맹이란 그처럼 한 순간에 버림받을 수 있는 물거품 같은 것이다.   

 

 

5. 마지막 기회에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2019년 2월 11일 당시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한국 여야 5당 지도급 인사들이 존 설리번 국무부 부장관을 면담하는 자리에 동석한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는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의제가 12개 이상 합의되었다고 말했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그처럼 많은 의제를 논의하여야 하므로, 싱가폴 조미정상회담과 다르게 이번에는 1박2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의제가 왜 그처럼 많아졌을까? 비건의 발언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019년 1월 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비건 특별대표는 “우리는 (조미)관계전환,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구축, 완전한 비핵화라는 싱가폴 정상회담의 목표와 병행하여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루어낼 여러 조치들, 두 나라의 신뢰구축에 도움이 되는 조치들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여러 가지 신뢰구축조치들을 합의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9년 2월 15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미국-메히꼬 국경장벽건설문제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그는 기자회견 중에 조미협상에 관해 언급하면서 "우리는 단지 시험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조선의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시험발사를 뜻한다. 미국이 조선에게 바라는 것은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지하는 것이라고 밝힌 그의 발언은 그가 비핵화의 의미를 핵동결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미협상을 바라지 않는 대결주의자들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의 전망이 불투명하다느니 의구심이 생긴다느니 뭐니 하면서 허튼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의 의미를 핵동결로 인식하게 되었으니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정세와 동북아시아정세를 근본적으로 전변시킬 중대한 해결방안들이 합의될 것이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여기서 말하는 신뢰구축조치는 관계개선을 추동하는 실질적인 조치이므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여러 가지 신뢰구축조치들을 합의하게 되는 것은 조선과 미국의 관계개선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뜻이다. 비건 특별대표는 그 강연에서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70년의 전쟁과 적대감을 뛰어넘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미협상을 바라지 않는 대결주의자들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의 전망이 불투명하다느니 의구심이 생긴다느니 뭐니 하면서 허튼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확신한다면 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정세와 동북아시아정세를 근본적으로 전변시킬 중대한 해결방안들이 충분히 합의될 것이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폴공화국 쎈토사섬에서 진행된 제1차 조미정상회담 직후 현장에서 미국 텔레비전방송 <ABC>와 단독대담을 진행한 트럼프 대통령은 대담진행자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안전보장을 주었는가? 협상했는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었고, 그는 기뻐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이 답변은 제1차 조미정상회담 중에 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조치가 합의되었다는 뜻이다. 어떤 안전보장조치였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그날 단독대담 중에 다른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도 유독 그 사안에 대해서만은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였는데, 그런 것을 보면, 중대한 안전보장조치를 합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단독대담 중에 언급한, 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조치가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두 정상이 단독회담 중에 조선의 안전보장조치에 대해 구두로 합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지난해의 조미관계를 돌이켜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단독대담 중에 언급한 조선의 안전보장조치에 관한 구두합의를 미국이 이행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이 각료들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단독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합의한 사안이기 때문에, 구두로 합의하였어도 각료들의 만류에 가로막혀 이행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백악관 내부사정은 지난해에 비해 크게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단독결정을 만류하던 각료들은 모두 해임되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결심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며칠 뒤에 열리게 된다. 각료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의 대조선협상전략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기회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월 18일부 사설에서 “우리는 팜페오 국무장관 같은 보좌관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분별없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권유하기 바라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수리아주둔 미국군 철수명령을 내린 최근 결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보좌관들의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앞으로 제3차 조미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을 것이므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된다.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가 2019년 1월 31일 스탠포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말한 것처럼, 70년 동안 지속된 조미적대관계를 뛰어넘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그 적대관계를 뛰어넘을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그 마지막 기회에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거두었던 전략적 승리가 이제는 조미협상에서 조선이 거둘 전략적 승리로 이어지는 대격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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