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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트럼프·김정은 3자 회담을 상상한다

[민경태의 북한 미래학] ① 북-중 경제협력, '신한반도체제'로 대체하자

 

 

 

북-미 실무 협상단이 수차례 만나 준비했던 합의문이 있었음에도 결국 2월 28일 하노이 선언은 무산되었다. 합의 결렬에 대한 해석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겉으로는 북-미 양측이 설명한 바와 같이 핵 폐기 대상 지역과 경제제재 해제 범위에 대한 양측의 이견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도 한몫을 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사전 협의된 수준으로 하노이 선언이 이뤄진다 해도 미국 내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트럼프 대통령이 차라리 반전을 모색했다고 할까. 북미 정상회담 전 이미 언론에 유출된 예상 합의문에 대해 여론의 반응이 시큰둥한 상황에서 뭔가 더 큰 승부수가 없이는 청문회 국면을 타개하기 어렵다고 보았을 것이다. 즉, 북한 핵문제 해결이라는 중요한 카드를 큰 성과 없이 사용해 버리기 보다는 적절한 시기를 다시 모색하는 것이 좋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고 본다. 

여기까지는 북한 핵 협상을 둘러싼 전략적 이해관계를 북-미 간의 문제로 국한해서 보았을 때의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엔 동북아 지정학에서 매우 중요한 중국 요인이 빠져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열차를 타고 베트남으로 이동하던 많은 시간은 중국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시진핑 주석이 직접 등장하진 않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중국 통과는 여러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북한이 가장 넓은 접경지역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 경제제재만 해제되면 언제라도 중국은 북한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미국이 가장 싫어하는 것,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강화

북한은 미국에 경제제재의 일부를 해제해 달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UN 제재 결의 11건 중 2016~2017년에 채택된 5건, 그 중에서도 민수 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의 일부 해제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입장은 다르다.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이 사실상 전면 해제를 요구한 것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북-미 간의 주장에 차이가 있을까?

이것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도록 주장한다기보다는 제재 해제의 효과를 판단하는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 북한은 민생 경제에 해당되는 최소한의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미국은 그것이 제재의 거의 전부라고 보는 것이다. 북한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해제 조치가 이뤄진다면 대체 어떤 상황이 발생하기에 그런 것일까?

중국에 대한 북한의 경제 의존도는 90% 이상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UN 제재가 해제되면 중국을 통해 유류와 공산품 공급이 확대되고 북한의 광물 자원과 인력이 수출되는 등 북-중 간 무역이 더욱 활성화 될 것이다. 즉,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진다는 뜻이다. 지금 미국은 UN 제재를 빌미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가능한 억제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북한이 중국을 통해 숨통을 틔우게 되면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자가 볼 때 북한의 물리적 비핵화는 '비가역적'인 것이고, 미국의 경제제재 완화는 상대적으로 '가역적'이라고 해석하기 쉽다. 즉,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어기게 되면 언제라도 미국이 다시 경제제재를 재개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북-중 경협이 확대되면 북한은 미국에 대해 협상의 우위에 설 수 있다. 지금은 UN에서 결의한 경제제재를 중국이 마지못해 지키고 있지만, 상황이 전환되어 북한 핵위협이 감소된 후에도 중국이 그대로 따르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지 못한 채 중국과 북한에 끌려가는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강화, 바로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이 단계적 제재 완화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일 수 있다.  

베트남 모델이 상징하는 미국의 제안은 무엇일까? 

베트남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상징적인 곳이다. 미국과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경제발전을 이뤘다. 반면,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는 오히려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게 이런 모델을 제안하고 싶지 않았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경제성장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얘기했다. 핵문제가 해결되면 북한에 국제 원조와 자본 투자를 유도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중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기존의 성장 모델이 아니라, 서방의 투자를 받고 글로벌 경제체제로 들어오라는 신호인 것이다. 중국이 아닌 한국의 길을 따르라고 북한에게 손짓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미-중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다. 핵 폐기 대상에 대한 이견은 사실상 구실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아마도 북한이 모든 핵시설의 폐기에 합의했다고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전면적 제재 해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북-중 간의 경제협력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미국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원한다. 과거에는 한일 해협이 중국을 봉쇄하는 독트린이었으나, 이제는 휴전선을 지나 북쪽으로 끌어올려 북-중간 국경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북한은 이제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외형상으로는 비핵화의 문제이지만, 실제로는 미-중 간의 주도권 싸움에서 어느 편에서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기존에 걸어온 길을 완전히 바꾸는 전환을 요구받는 것이다. 

북-중 경제협력을 남-북 경제협력으로 대체하자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등장해야 할 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Chief Negotiator'로서 역할해 주기를 요청한 바 있지만, 이제는 단순한 중재 역할 이상이 필요한 순간이다. 북-미 간 실무진이 수차례 만났음에도 결국 베트남 합의가 결렬되는 것을 경험한 이상, 이제는 기존의 협상 방식이 힘을 잃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북-미 '실무' 협상까지 해주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게는 기회이다. 더 이상 북핵 문제의 조언자나 중재자로 한발 물러서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미국과 북한의 필요를 모두 충족시키면서 한국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고 북한과 미국을 이끌어가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을 말하면, 한국이 기존의 중국 역할을 담당하면 된다. 중국에 의존하는 북한 경제 성장 방식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이 지원하는 북한의 도약적 경제 성장을 준비해야 한다. UN 경제제재를 완전히 해제해서 북한이 다시 중국에 의존하는 형태로 북-중 경협이 활성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남북한의 경제협력에 국한하여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조치를 구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한반도 내의 남북한 경제협력일 경우에는 UN 제재 조치로부터 예외 적용을 받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국제사회와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북한은 경제 성장을 추진하고 남북한의 협력 관계를 심화하게 된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 대신 동맹국 한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지원하면서, 남북한 기업과 합작한 외국 기업의 참여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자본도 북한에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  

한국이 주도하는 남-북-미 3자 정상회담 추진  

마침 문재인 정부는 3.1절을 맞아 '신한반도체제' 구상을 소개했다. 새로운 평화협력공동체와 경제협력공동체를 구성하여 미래의 한반도를 남북한이 함께 주도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제 신한반도체제는 기존 북-중 협력을 뛰어넘은 수준으로 남북한의 경제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우선 남북이 마련한 틀 안에서 미-중-러-일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북한에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의 협력을 북한 경제 성장의 주된 동력으로 삼는 것, 이것은 북한에게 있어 매우 어려운 결정이겠지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에 의존하여 생존하던 경제체제를 남북한이 함께 주도하는 신한반도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 철도연결은 그 시작을 상징하는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남북한을 잇는 물류와 에너지 망을 통해 북한 경제의 대동맥이 글로벌 경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더 큰 임무가 주어 졌다. 이제는 북-미 협상을 뒤에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에서 리드해야 한다. 북한의 어려운 결단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을 안심시키고 설득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열어 한반도 비핵화와 경제제재 해제, 북한 경제성장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중장기적 로드맵을 포함한 일괄 타결을 추진하는 것은 어떨까.  

날씨 좋은 봄날 제주에서 3국 정상이 만나 그동안의 밀린 숙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 민경태 여시재 한반도미래팀장은 <서울...평양...스마트시티>(미래의창 펴냄)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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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반민족 부패 적폐 정당 척결해야

범민련, 반민족 부패 적폐 정당 척결해야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9/03/05 [09:24]  최종편집: ⓒ 자주시보
 
 

 

범민련반북 부패 적폐 정당 척결해야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가 어제 4오는 4월 3일 치러지는 재보궐선거의 선거구가 확정 발표되자 성명을 통해 범 진영이 후보 단일화를 통해 보수 정당을 심판 할 것을 촉구했다.

범민련은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경남 창원시 성산구와 통영시 고성군 2곳의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다시 뽑고경북 문경시 나와 라 선거구전북 전주시 라 선거구 등 3곳에선 시의원을 다시 뽑는다며 진보 진영의 후보 단일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     ©


성명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성명서]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의 철저한 실천을 위해

4·3 재보궐선거 후보단일화로

반북대결·친일친미사대·민주주의파괴·분단적폐정당

자유한국당을 퇴출시키자!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민족자주와 통일평화와 번영의 새시대를 힘차게 열어가는 새로운 민족역사의 한가운데서 오는 4월 3일 재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1. 2019년의 민심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남북관계 전면 파탄과 전쟁위기로 치닫던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남북화해한마당으로 펼쳐진 평창올림픽을 거쳐 2018년 4월 27일 탄생한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은 한반도 정세를 단번에 평화와 번영통일을 위한 화해와 단합의 물줄기로 뒤바꿔 놓았다.

  판문점시대의 개막은 6.15공동선언, 10.4선언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파격적이고 전격적인 남북화해와 단합의 호소가 운명적으로 이루어 낸 획기적인 사변이며 민족사적 쾌거이다.

  판문점선언의 국회비준동의에 대해 국민의 71.8%가 찬성하고 반대는 13.6%(2018.8 한국갤럽 조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평화통일에 대한 여론은 압도적이다.

통일이 되면 세계적인 경제강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소득격차 심화실업률 악화물가 상승제조업 위기내수경제 침체환율·유가·관세 파동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경제의 예속성과 기형성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남북경협을 통한 민족경제의 실현밖에 없다.

    집권 3년차를 보내고 있는 문재인정부는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와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노동자농민빈민영세자영업자 등 대다수 서민들이 길거리로 떠밀리고 투쟁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보수적폐재벌적폐사대예속적폐분단적폐 등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대담한 사회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촛불항쟁의 정신을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

촛불은 어느 특정정당에 유리한 입지발판을 만들어 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보수적폐 분단악폐를 청산하고 주권재민의 새정치와 평화통일의 새 역사를 바라는 거대하고 숭고한 민심의 항쟁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낡은 정치의 숙주로 받들어 온 자유한국당은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팔뚝질 한 번 해본 적이 없으며민주주의를 위해 밥한끼 굶어 본 적도 없는 오로지 분단독재와 미일 외세에 나라의 자존심과 국민재산을 팔아넘기고 온갖 특권을 누리며 국민위에 군림해 온 부패망국노집단에 불과하다.

    민심은 온갖 적폐를 청산하고 진정한 민주·민권·민생의 봄평화통일의 새시대를 바라고 있다.

    2. 4·3 재보궐선거는 남북공동선언이행세력과 5.18망언·탄핵부정·분단적폐세력과의 대결이다.

    촛불민심의 준엄한 심판과 사법정의의 심판을 받은 박근혜 추종 적폐세력들은 5.18망언 탄핵부정 최순실 태블릿PC조작설을 유포하고 전국 곳곳에서 박근혜 무죄석방과 대선무효를 외쳐대며 우리사회를 극도의 분열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민생은 안중에도 없이 권력욕에만 환장한 정치추물들정치부활을 꿈꾸는 탄핵오물들의 발악이 계속되는 한 사회대개혁과 역사바로세우기남북공동선언 이행에 중대한 장애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는 남북공동선언이행세력과 5.18망언·탄핵부정·분단적폐세력과의 대결로 되어야 한다.

오늘의 정세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과 더불어 민족분열과 불행의 원흉인 미국의 남북관계 개입과 간섭을 끝장내고 이 땅에서 영구히 전쟁의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해 나감으로써 우리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을 이룩할 천재일우의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3. 시대와 민심의 요구에 따라 4·3 재보궐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기필코 성사하여 평화통일시대 새정치의 승리를 안아오자 

대화는 곧 평화이며통일은 공동번영이다.

6.15공동선언이 낳은 통일의 옥동자인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을 차단한 것도 모자라 미국의 전략자산을 동원한 대북응징을 외쳐대며 체제흡수통일을 노골적으로 떠들어대고 탈북공작을 통한 북의 급변사태를 조장해온 자유한국당이다동족대결전쟁정당 자유한국당은 우리민족의 고통과 불행전쟁위기를 고조시켜 온 악의 근원이며 독버섯이다.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이라 호도하고비핵화가 되기 전에는 제재해제와 조미관계개선은 결코 있을 수 없다며 대결정세로 되돌리려 발악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자유한국당이다 

평화가 확고히 실현되고 통일의 여건이 무르익어야 민주주의도 민생도 비로소 담보될 수 있다남북관계와 조미관계의 침체는 사대냉전세력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것이며정치가 진흙탕 개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정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는 그 어느 당이라도 한 석을 늘리는데 연연하거나 내년 총선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등의 당리당략에서 과감히 벗어나 철저히 민심에 의거해야 한다.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지역사회와 진보개혁진영의 단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방전명분쌓기식책임전가식의 행태는 민심을 훼손할 뿐이다.

민심은 거대한 반보수적폐투쟁으로 자유한국당을 무덤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중대한 변곡점에 올라 서 있다.

평화통일의 시대가 순항하고민족공동번영 시대의 탄탄대로를 여느냐 마느냐는 이번 선거에서 남북공동선언이행세력의 합심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민심의 지향과 요구에 역행하는 자유한국당을 매장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민심의 요구를 받아 안은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지 못한다면 또 다시 어부지리를 주게 되고판문점선언을 부정하고 대결과 전쟁위협의 아수라장으로 사회혼란은 극도에 달하게 될 것이다정녕 죽 쒀서 개주는 정치참극을 재연하지 말아야 한다.

보수적폐잔당을 퇴출시키고 구태의연한 양당구도를 깨게 된다면 이 땅의 진보정치 새정치의 무대는 더욱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민주와 통일의 제단에 피를 뿌려온 역사에서 이제는 찬란히결코 되돌이킬 수 없는 평화와 번영통일의 새시대를 활짝 열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선거는 역사적인 남북선언을 지지이행하는 자주평화통일세력과 한사코 이를 막으려 최후발악을 하고 있는 반민족냉전세력과의 대결이다.

  4·3 재보궐선거에서 후보단일화로 승리하여 사회대개혁과 평화통일시대의 진전에 박차를 가하자.  

  2019년 3월 5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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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업에 매각된 후 언제 잘릴지 두려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3/05 10:16
  • 수정일
    2019/03/05 10:1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현장기획 - 한국 제조업 위기의 축소판, 곡성 ②] 추락하는 금호타이어 노동자 삶

19.03.05 08:04l최종 업데이트 19.03.05 08:12l

 

 

전라남도 곡성은 고용위기를 겪는 여러 지방도시 가운데 대기업에 대한 지역 경제 의존도가 매우 높다. 민간연구단체인 랩2050은 최근 곡성을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고용위기가 가장 취약한 곳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금호타이어가 중국 기업에 매각된 후, 곡성 공장은 가동률이 크게 떨어졌고 고용불안과 지역경제 공동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곡성을 통해 한국 제조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진단하고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본다.[편집자말]

 

 곡성 금호타이어 공장은 중국 기업 매각 이후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면서 고용불안과 지역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곡성 금호타이어 공장은 중국 기업 매각 이후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면서 고용불안과 지역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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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마지막 날 곡성에는 눈발이 휘날렸다. 올 겨울 내내 서울에선 보기 힘든 눈이었다. 기자가 곡성으로 향한 이유는 금호타이어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날 오후 곡성공장 인근에서 만난 이아무개씨는 기자와 이야기를 이어가며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 과거 회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보다 최근 3년 동안이 더 힘들다고 했다. 이씨는 "그때(워크아웃)는 회사에서 어느정도 임금 등을 조율할 수 있는 여건이라도 됐는데, 지금은 정규직들도 녹록치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사가 어렵다 보니 공장 가동을 멈추고 있다"면서 "한 달에 적게는 3~5일 정도 (일을) 쉬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휴무기간은 중국업체인 더블스타로 회사가 매각 뒤 더욱 늘어났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이씨는 "예전엔 회사가 워크아웃을 신청했더라도 (타이어) 생산량은 전보다 더 늘어났던 것 안다"면서 "그런데 회사가 (중국 회사로) 팔리고 나서 (생산량을) 상당히 조율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노조에 따르면, 올해 2019년 곡성공장의 1일 최대 실제 가동률은 70% 수준이다.

 

워크아웃은 졸업했지만 지속된 영업적자와 쌓여가는 부채. 회사는 제품을 추가로 만드는 계획생산에서 계약만큼만 소화하는 오더생산으로 체계를 바꿨다. 생산량이 감소하자 근무일수도 줄어들었다. 구조조정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비정규직일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이씨는 "정규직 자리가 비면 비정규직 선출해서 (정규직) 금액의 반 또는 60%만 주고 채워 (생산에) 영향이 덜 가도록 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는 "회사가 더 힘들어지면서 결국에는 비정규직 자리를 건들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직원들 사이에) 많다"고 말했다.

첫 타깃

그는 지난해 11월 계약만료 및 경영난을 이유로 업체 변경 과정에서 집단해고 위기에 놓였던 미화담당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가 이를 반증한다고 봤다. 이씨는 "공장에서는 미화가 첫 타깃이 됐다"면서 "비정규직 정리하려고 회사에서 손 쓴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왔다"라고 전했다.

이런 방식의 비용절감에 대해 노조쪽에서도 강하게 반발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까지 보듬어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는 게 이씨의 이야기다. 그는 "(생산) 현장은 최대한 회사와 갈등 없게, 줄일 거 줄이고, 도와줄 거 도와줘서 가타부타 말이 나오지 않도록 죽어있는 듯한 분위기"라고 힘들어했다.

직원들은 심리는 물론 소비도 위축됐다. 회사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금호타이어 직원이라면 아파트 3채 정도는 기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곡성군 입면은 금타, 옥과면은 전남과학대학교와 골프장이 있어 곡성군 가운데 소득이 높은 지역에 들어간다.

물론 잘나가던 시절의 재산 축적은 정규직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 몇년새 정규직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이씨는 "임금이 축소되다 보니 정규직도 첫마디부터 죽었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면서 "저희보다 씀씀이가 컸을 텐데 상여금이 임금에 비례해서 나와 임금이 줄면서 상여금도 대폭 줄어 많이들 힘들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금호타이어 직원들이 지갑을 닫자 옥과면 경제도 타격을 입었다. 이씨는 "곡성 관내에 사는 금호타이어 분들이 많지는 않다"면서도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치킨 한 마리를 먹더라도 줄지 않았겠나"라면서 "기존 월급에 맞춰 살다가 (금액이) 줄면 그만큼 지출이 줄게 마련"이라고 한탄했다.

또 "금호타이어 내에서 광주에 거주하는 분들이 많지만, 곡성 출신이거나 이쪽에 부모님이 계시는 경우가 대다수"라면서 "자식들이 용돈을 드려도 두 번 드릴 거 한 번 드리는 등 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을 이었다. 그는 "옥과면 주민들 가족 중 한 명은 금호타이어에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강조했다.

회사가 부정적인 소식으로 시끄러워지면 옥과면은 되려 조용해진다. 이씨는 "대학교와 골프장이 있다고 해도 금호타이어 직원들이 술 한잔 먹을 곳은 옥과밖에 없다"면서 "그런데 광주 거주하는 분들이 택시비가 나오고 하니까 이제는 아예 그쪽으로 다같이 넘어가 버린다"라고 말했다.
 
 곡성 금호타이어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한 노동자가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마친 뒤 학원에 있는 자녀를 데리러 가고 있다.
금호타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는 “회사 경영난 때문에 근무일수가 줄어들어 임금과 상여금 축소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  곡성 금호타이어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한 노동자가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마친 뒤 학원에 있는 자녀를 데리러 가고 있다. 금호타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는 “회사 경영난 때문에 근무일수가 줄어들어 임금과 상여금 축소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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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씨의 지출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취학 두 자녀를 둔 이씨 부부는 본인들을 위한 소비는 모두 중단했다. 아이들 위주로 돌아간다. 이 또한 제약이 있다. 급여가 줄면서 큰 아이만 학원에 보내고 있다. 고정지출을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아내가 모은 저축을 생활비로 쓰고 있다.

제조업 노동자는 일한만큼 가져간다. 잔업과 야근, 휴근(다른 노동자의 휴일에 근무) 빈도에 따라 월 급여와 이에 따른 상여금이 달라진다. 이씨의 지난해 상여금은 400%에서 200% 수준으로 줄었다. 이중 100%는 고통분담을 위해 반납한 금액이다. 이렇게 두 달에 한번씩 45만 원 정도를 쥐었다.

"금타직원이면 아파트 3채는 기본"이라던 시절은 옛말

박아무개씨도 임금과 상여금 축소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 이씨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박씨는 금호타이어라는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싶어 옥과면에 자리를 잡았다. 입사 당시 워크아웃 막바지였지만 초봉 3800만 원 정도를 받았다. 물가가 싼 지방에서는 외벌이로도 넉넉히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최근 급여는 예전보다 못하다. 일이 없어 출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잔업도 없고, 상여금도 불투명하다. 박씨의 도움으로 그의 지난해 4달치 급여명세서를 살펴봤다. 4월까지만 해도 4일과 8일씩 잔업 및 야간 잔업에 투입됐다. 이후 5월은 단 하루도 없었으며, 9월과 12월은 이틀에 불과했다.

이로 인한 지급액 차이는 컸다. 급여에서 약 16만 원이 빠졌고, 평일 근무 일수에 따라 지급되는 상여금이 40~50만 원 정도 쪼그라들었다. 박씨는 "원래 상여금이 약 110만 원이었는데, 지난해 들어서 65만 원 정도로 대폭 줄어 생계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하다"고 힘들어했다.

없던 마이너스 통장부터 만들었다. 부부의 보험을 해지했다. 아이들 것을 제외하고 매달 20여 만 원을 납입하던 암과 치아보험 등을 해약했다. 부부는 추가적으로 아낄 수 있는 비용을 고민하는 중이다. 박씨는 일단 돈을 안쓰는 것이 답이라고 했다. 쌀과 계란 등 주요 식재료는 타 지역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부모님에게서 받아오고 있다.

회사는 회식을 지원하지 않았고, 직원들도 지역에서 돈을 쓰지 않았다. 그는 "회사에서도 두 달에 한번 회식을 시켜줬는데 지금은 일절 없다"면서 "우리가 십시일반 모아서 하자고 해도 빠지는 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공장 직원들의 발길이 줄자 이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은 가게들도 이미 여럿이다.

박씨는 "옥과면에 사람이 아예 다니질 않는다"면서 "지난해 회사가 더블 스타로 매각되기 전 몇 달 동안 임금이 안 나와서 상권이 죽어버렸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사람들이 소비를 안 한다"면서 "근래의 상황이 당시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산산조각난 30년 전 비전..."고용 보장만 돼도 된다, 지금 이게 제일 불안"
 
 31일 전라남도 곡성군 기차마을시장 상인이 상가 앞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상인은 “설 대목을 앞두고도 2~3년 전보다 곡성군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하소연 했다.
▲  31일 전라남도 곡성군 기차마을시장 상인이 상가 앞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상인은 “설 대목을 앞두고도 2~3년 전보다 곡성군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하소연 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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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박씨는 쉬는 날 다른 임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그는 "벌이가 없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주말에 쉬는 오후반의 경우 이미 일용직 나가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직원들이 최근 3~4달 동안 부쩍 많아졌다. 워크아웃 때도 이랬다고 한다.

그는 "만약에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하게 되면 (곡성에서) 엄청 큰 사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금타 공장 아니고서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박씨는 "곡성 관내 사람들이 (공장에) 많이 다니는데 (금호타이어가) 나가면 지역경제가 죽어버리지 않을까"라고 예상했다.

회사는 당초 제시한 고통분담 기간을 연장하고 싶어하는 분위기다. 이에 박씨는 "회사가 경영을 잘못했다"면서 "영업과 해외 판로를 확보하지 못한 것을 노동자의 임금으로 보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도 고용만 보장된다면 고통분담은 참을 수 있다는 분위기. 박씨는 "제가 제일 원하는 거는 임금을 올려 달라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고용 보장만 돼도 된다, 지금 상황에서 이게 제일 불안하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군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기를 바랐다. "앞으로 고용 보장이 안된다면 이 많은 노동자들이 밖을 내쫓기는데 실제 현실로 닥치면 큰 문제가 된다"면서 "군수 등 군청 쪽이 나서서 회사와 이야기를 좀 해야한다"고 소망했다.

'경쟁력을 선도하는 아름다운 곡성인'이라는 비전에 따라 30년 간 가동된 곡성공장은 문구와 달리 현재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보기 어렵다. 준공 이후 부분적으로 시설 투자 및 교체가 있어왔지만, 사실상 노후화가 상당히 진행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둘러본 공장 부지 내 건물들은 여기저기 페인트 칠이 벗겨지고 연혁만큼 낡은 흔적이 보였다.

노동자운동연구소의 이유미 연구원은 국내 타이어 업계 3개 회사의 유형자산 비교를 통해 금호타이어가 설비 투자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그가 작성한 '금호타이어 해외매각 최악의 선택' 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6년까지 금타의 유형자산은 15%(1537억 원) 증가한 반면, 한국타이어와 넥센타이어는 각각 45%, 530% 늘어났다.

한승권 금호타이어 노동조합 곡성지회 기획실장​​은 "(곡성 공장은) 감가상각비가 제로나 마찬가지인데 사실상 값어치 없는 기계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직원들의 고통분담으로 이익을 내고 있는 상황"이라며 "2010년 중반까지도 회사가 (곡성 공장에) 시설투자를 했다면 경쟁력을 충분히 확보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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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 “국익 위해 양보없이 싸워라”

[아침신문 솎아보기] 왜 삼성 직업병 기사는 한겨레·경향신문에만 보일까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9년 03월 05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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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분열의 원흉 ‘친일파’

[칼럼] 민족분열의 원흉 ‘친일파’
 
외세청산, 친일잔재부터
 
이기명  | 등록:2019-03-04 12:56:53 | 최종:2019-03-04 13:06:4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덴노헤이카반사이(천황폐하만세)
 
총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착검한 내 총에는 히노마루(日の丸 일장기)가 묶여있다. 나는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순간 총알이 가슴에 박혔다. 아 아 죽는구나. 이제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목이 터져라 외쳤다. 덴노 헤이카 반사이(천황폐하만세) 마지막 출성이다. 한데 어! 쓰러지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꿈이었다. 나는 꿈에서도 천황에게 충성을 했다. 교육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단군의 자손인 내가 꿈에서도 일본 천황을 위해서 죽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충성인가. 끔찍한 교육이다.
 
지금도 일제 때 애들 앞에서 일본 군가를 부르고 칭찬을 들으며 반드시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겠다고 맹서하던 나를 기억하고 있다. 해방되지 않았다면 나는 일본인이 되었을 것이다. 교육의 힘이다.
 
유치원 교육으로 시끄럽다. 그 속셈을 누가 모르랴. 돈 푼 좀 있다고 떵떵거리며 내 새끼 남다르게 교육해서 자라서도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아는 인간을 만드는 부모의 병든 욕망. 이것을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 지금 한유총이 어린애들을 볼모로 행패 부리는 작태를 보라. 그게 교육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인간들의 행동인가. 참고로 알아두자. 이번 한유총 개학 연기 투쟁에서 선두 투쟁을 이끌고 있는 유치원이 한유총의 대형 유치원 75곳이란 보도가 있다. 왜 이들이 앞장을 섰을까. 눈치 빠른 국민은 알 것이다.
 
자기들 마음에 안 든다고 파업하려면 하라고 해라. 간이 배 밖에 나왔다. 국민 여론 81%가 한유총을 비판한다. 한국당 믿는가. 실컷 믿어라.
 
사람답게 기르기 위해서,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잘못된 부모의 못된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하고 코흘리개를 미끼로 배 채우려는 교육 장사꾼들도 엄단해야 한다. 장관과 총리는 소신을 접지 말라. 교육이 잘못되면 나라는 망한다.

(사진 출처 - 청와대 홈페이지)

■ 우리는 쪽바리가 되었을 것이다
 
교육이란 가르치는 것이다. 왜 교육을 시키느냐고 하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다. 일본이 우리 애들을 교육한 것은 일본 국민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한국말 쓰면 벌을 받았다. 해방되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일본인이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교육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위대한 것이다. 미국 덕분에 공산화가 안 됐고, 덕분에 우리 교육은 모두가 미국식이다. 초기에 있는 집 자식들이 유학 가면 거의 미국이었다. 모두들 미국만이 장땡이었다.
 
오늘이 3·1 절 100주년이다. 3·1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행사장 맨 앞줄에 높은 분들이 앉아 계시고 그들은 대통령의 말이 한 구절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친다. 약속을 했을 리는 없고 옳다고 생각하거나 또 남이 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칠 것이다.
 
유난이 내 눈은 황교안과 나경원을 지켰다. 박수를 칠 때 보니까 자발적으로 치는 박수가 없다.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지못해 몇 번 친다. 그럴 거면 차라리 치질 말지. 너희들이 박수 안 친다고 욕할 사람 없다.
 
거기 앉은 황교안, 나경원은 아마 기분이 좋을 것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었기 때문이다. 어젯밤부터 난 가슴이 천근이다. 나경원, 황교안 등 한국당 지도부는 김정은-트럼프 회담이 깨진 게 잘 됐다고 할 것이다.
 
이유를 물으면 바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해서 남북의 왕래가 성사되고 남북의 경제가 살아나면 자신들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남북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판문점에서 총을 겨누고 사는 세상만 있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은 남의 얘기다. 아마도 트럼프가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떠날 때 ‘형님 잘 하셨습니다’ 하고 절하는 꼴통들 많았을 것이다. 일본도 같다. 남북이 힘을 모으면 일본은 어쩌나. 아마 어지간히 속을 끓였을 것이다. 아베의 입이 얼마나 찢어졌을까.
 
이게 교육 탓이다. 군대 안 보내려고 소 팔아 대학 보내 ‘우골탑’이란 신조어가 생기고 ‘반공이 국시의 제일’인 5·16쿠데타 이후의 세대들은 ‘북진통일’과 ‘때려잡자 공산당’만이 최선인 줄 알았다. 진짜 북한과 맞붙어 이길 자신 있느냐고 일선 장교에게 물으니 그냥 웃는다. 머릿속에만 승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쫄병 때 있는 집 자식들은 국방부나 육군본부, 카투사 등 편한 곳에서 근무했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가슴속에서 불타고 있는 것은 증오심이었다. 그런 애들이 전쟁 나면 목숨 바쳐 싸우겠는가.
 
교육은 사람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요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 하락이 젊은 애들 때문이라는 여론조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민주당 안에서도 옥신각신이다. 나는 잘못된 교육 탓이라는 주장에 동조한다. 대한민국처럼 교육제도가 자주 바뀌는 나라는 하늘 아래 없을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도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반공 외치며 남북회담 제대로 할 수 있는가. 정신 차려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 덕분에 지지율 유지하고 있다는 거 명심해야 한다. 다음 총선에 떨어지면 누굴 원망할 거냐.
 
■ 빨갱이란 굴레도 뽑아야 할 친일잔재
 
16세 때 6·25를 겪었다. 이승만의 거짓말 때문에 피난 못 간 서울시민들은 도리 없이 빨갱이가 됐다. 서울에 입성한 국군은 살벌했다. 못된 인간들은 이를 복수의 기회로 삼았다.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모략한 것이다. 재판도 없이 거리에서 총살됐다. 그렇게 죽은 서울시민이 부지기수다. 그들 가족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한을 어찌할 것인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것이 친일 잔재다”
 
‘빨갱이’라는 표현은 해방 후 좌우 이념 대립이나 냉전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단어는 대표적인 친일 잔재다.
 
해방되자 북한에 잘 살던 친일파 지주들이 야밤 도주했다. 남한에 온 이들은 이를 갈았다. 특히, 북에서 경찰을 하던 자들은 독립운동 하던 애국자들을 무조건 사상범(빨갱이)으로 몰았다. 탄압받은 애국자들은 월북했다. 이들은 친일파들에 의해서 빨갱이가 됐다.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 할 일이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빨갱이란 말은 해방 뒤에 친일 청산을 가로막고 양민 학살과 간첩조작,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도 국민을 적으로 모는 낙인으로 사용됐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경찰 출신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규정돼 희생되고 가족과 유족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감을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이고, 서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버릴 때 우리 내면의 광복은 완성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빨갱이’를 다섯 번 언급하며 우리 안의 혐오와 분열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비극적 한국 현대사가 낳은 문제적 단어이기도 하지만, 현재까지도 국민을 가르는 대표적 표현으로 사용되는 만큼 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셈이다. 실제로 연설문 준비 과정에서, 청와대 안에선 대통령 공식 연설에 ‘빨갱이’란 자극적인 단어를 굳이 선택해야 하는지를 두고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정면으로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며 관철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100주년을 사흘 앞둔 지난달 26일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사진출처 -청와대 영상 캡처)

■ 사라져야 할 빨갱이란 단어
 
나는 오늘 이 칼럼을 쓰면서 한겨레신문 성연철 기자의 기사를 허락도 없이 많이 인용했다. 이해를 부탁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나를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다시 한 번 찬찬히 읽기를 바란다. 아울러 당신의 머릿속에 틀어박혀 있는 빨갱이란 단어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깨닫기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에서 북한 국민 15만 명에게 ‘우리는 하나다’ 강연을 했고 북한 주민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 장면을 중계로 보면서 떨리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 83세다. 16세 때 6·25전쟁을 겪었고 34개월 20일 동안 군대 생활하면서 반공을 국시로 알았다.
 
어떤가. 아직도 그들은 우리가 타도해야 할 대상인가.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이루어지고 그가 한국 국민을 향해 평화를 말하며 ‘우리는 하나다’를 외칠 때 우리는 그를 빨갱이라고 매도할 것인가.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의 회담이 결렬되었을 때 내 가슴에는 천근 바위 덩어리가 가라앉았다. 아 아 어찌 되는 것이냐. 미국이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냐. 남과 북의 같은 민족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평화인데 이게 뭐란 말이냐.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외침이 있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우리가 백두산을 마음대로 오르고 북한 주민이 신나게 한라산을 오르고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북한산을 마음 놓고 다니는 세상은 반드시 온다.
 
너희들 미국이 아무리 반대하고 일본이 밤새도록 초를 치고 나경원·황교안이 냉수 떠 놓고 빌어도 국민의 뜻을 도리가 없다. 우리는 하나다.
 
친일 잔재도 사라지고 빨갱이란 낙인도 사라질 것이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723&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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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창립 46년 KBS “정치공세 일희일비 안해”

콘텐츠 중심으로 조직개편 “국민에게 최고 콘텐츠 제공”… 과거 반성 KBS 영상 눈길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9년 03월 04일 월요일
 

양승동 KBS 사장이 4일 오전 한국방송공사 창립 46주년 기념식에서 “KBS 콘텐츠가 독보적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공영방송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며 “일련의 개혁 작업을 하나하나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 사장은 “외부 정치 공세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며 “내부 구성원들의 집단지성을 믿고 충분히 소통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KBS는 46년 전인 1973년 국영에서 공영 체제로 전환했고 그해 3월3일 한국방송공사 창립식을 가졌다.

4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KBS 신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KBS 임직원 200여명이 참여했다. 김상근 KBS 이사장과 김영헌 감사, 교섭대표 노조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의 이경호 본부장, KBS 직능단체 협회장 등도 참석했다.

양 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라며 “이번 3·1절 아침 KBS 라디오에 출연한 도올 선생이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3·1운동은 민족 에너지로 해방 이후에도 4·19혁명, 5·18광주와 6월항쟁, 촛불혁명까지 면면히 3·1운동 정신이 이어져 왔다”고 말했다.  

양 사장은 “창립기념일에 지난 10년을 돌아보게 된다”며 “지난 10년의 과거 역주행은 견디기 어려웠다. 정치권력의 노골적 개입으로 언론 자유와 제작 자율성이 위축됐고 파행을 빚었다”고 지적했다.  

 

▲ 양승동 KBS 사장이 4일 오전 한국방송공사 창립 46주년 기념식에서 “KBS 콘텐츠가 독보적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공영방송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며 “일련의 개혁 작업을 하나하나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김도연 기자
▲ 양승동 KBS 사장이 4일 오전 한국방송공사 창립 46주년 기념식에서 “KBS 콘텐츠가 독보적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공영방송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며 “일련의 개혁 작업을 하나하나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김도연 기자
 

양 사장은 “취임 이후 국장 임명동의제를 시행하고 편성위원회를 정상화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고 더 이상 제작 자율성 침해와 같은 파행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고 자평한 뒤 “사내 비정규직과 작가, 독립 제작자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다. 비일반직 구성원 223명을 일반직으로 전환했고 성평등 조직 문화를 위해 성평등센터를 출범시켰다. 또 과거를 성찰하고 대안을 만들기 위해 진실과미래위원회가 활동하는 등 개혁 작업을 시행 중”이라고 밝혔다.

 

KBS는 지난 1일 콘텐츠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이를 테면 ‘제작2본부’ 신설해 예능 및 드라마 기획·제작 기능과 마케팅·콘텐츠사업 조직을 통합했다. KBS는 “기존보다 제작 조직 자율성을 확대하고 의사 결정 단계를 줄였다”고 설명했다. 또 시청자국을 사장 직속 ‘시청자센터’로 강화하는 등 시청자 권익을 강화한다는 포부다.

양 사장은 이번 조직 개편에 “국민들이 KBS에서 최고 콘텐츠를 접할 수 있도록 조직이 최적화해야 한다”며 “KBS 신뢰도와 영향력 위기에 대다수 구성원들이 인식을 같이 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시행할 수 있었다. 운용의 묘를 살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에선 보도 공정성이 위축됐던 과거 KBS를 반성하는 영상이 눈길을 끌었다. 1980년대 오후 9시 정각 뉴스 시작음과 함께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 동정을 보도했던 ‘땡전뉴스’, 1987년 6월항쟁 축소·왜곡 보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KBS 라디오 주례 연설, 2014년 세월호 보도 참사와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무보도 등 보도 불공정 사례를 열거한 뒤 “국민에게 웃음을 주는 동시에 국민을 기만했던 KBS”라고 자사를 반성했다. 

지난해까지 사내 비일반직 사원(자원관리원)이었다가 올해 일반직으로 전환한 고아무개씨는 이날 기념식에서 “지난 30여년 간 수신료 관련 현장을 누볐다”며 “자녀들이 아빠 직업을 물었을 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직원 신분이 아니라 자원관리원 신분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오는 6월 말 정년 퇴직을 하는데 직원 신분으로 명예롭게 퇴직할 기회를 만들어주신 양 사장에게 감사를 전한다. 직장 내 신분 차별을 없애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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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7120#csidx5c0c036ad0ec9bdba264315703bb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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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저급한 거래수법은 통할 리 없었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3/04 13:00
  • 수정일
    2019/03/04 13:0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개벽예감 337] 트럼프의 저급한 거래수법은 통할 리 없었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3/04 [08:4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사전에 회담결렬씨나리오 구상했던 두 사람

2. 전례 없이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비핵화방안

3. 최상의 해법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4. 미리 준비된 역제안, 무엇을 노렸을까? 

5. 저급한 거래수법이 안겨준 자업자득의 내상

 

 

1. 사전에 회담결렬씨나리오 구상했던 두 사람

 

8천만 우리 겨레의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세계 인민들의 기대와 관심 속에 웰남사회주의공화국 수도 하노이에서 2019년 2월 27일부터 28일까지 1박2일 동안 진행된 제2차 조미정상회담은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못하고 끝났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될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까닭은, 그 회담이 시작되기 직전 2월 21일부터 4박5일 동안 하노이 현지에서 진행된 사전실무협상에서 정상회담 마지막 일정에 채택, 발표될 공동성명 초안이 쌍방의 원만한 합의에 의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사전실무협상에서 공동성명 초안이 합의된 것은 본회담이 99% 성공할 것임을 예고하는 좋은 징조이므로, 하노이 정상회담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무르익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해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못한 채 회담을 끝마쳤다. 회담결렬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 하노이 정상회담을 결렬시켰는가? 두말할 나위 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그 회담을 결렬시켰다. 2019년 2월 28일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필리핀 마닐라로 떠난 마익 팜페오 국무장관은 전용기 안에서 진행된 약식기자회견 중에 취재기자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 서명식이 진행될 것이라고 예고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대통령이 그런 결정(회담결렬결정을 뜻함-옮긴이)을 내렸다”고 답변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자 즉흥적으로 회담을 결렬시킨 것이 아니다. 그는 하노이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팜페오 국무장관과 함께 여러 가지 회담씨나리오를 준비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회담결렬씨나리오도 있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서술할 필요가 있다. 

 

(1) 2019년 2월 25일 쎄르게이 라브로브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국이 자기들에게 하노이 정상회담에 관한 여러 가지 씨나리오를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였다고 말했다. 미국이 다른 나라 정상과 회담을 진행하기 전에 회담씨나리오를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회담씨나리오에 대한 조언을 제3국에 요청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하노이 정상회담 씨나리오와 관련하여 미국이 매우 이례적으로 제3국에 조언을 요청한 것만 봐도, 트럼프 대통령과 팜페오 국무장관이 회담을 치밀하게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9년 2월 28일 윁남사회주의공화국 수도 하노이에 있는 메트로폴 하노이 호텔에서 진행된 조미정상회담 둘째날 확대정상회담 장면이다. 바로 이 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원래 정오에 끝마치고 오찬을 함께 하기로 예정되었던 회담일정을 1시간 이상 뒤로 미루면서 강도 높은 협상을 벌였으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다. 8천만 우리 겨레의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세계 인민들의 기대와 관심 속에 진행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은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못하고 끝났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될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까닭은, 그 회담이 시작되기 직전 2월 21일부터 4박5일 동안 하노이 현지에서 진행된 사전실무협상에서 정상회담 마지막 일정에 채택, 발표될 공동성명 초안이 쌍방의 원만한 합의에 의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이 작성한 몇 가지 하노이 정상회담 씨나리오들 가운데는 그 회담을 결렬시키는 부정적인 씨나리오도 있었다. 2019년 2월 28일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필리핀 마닐라로 떠난 팜페오 국무장관은 전용기 안에서 진행된 약식기자회견 중에 “(하노이 정상회담을 위한) 준비작업을 많이 하였다. 우리는 그런 결과(회담결렬을 뜻함-옮긴이)가 나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준비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2)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2월 19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취재기자들에게 하노이 정상회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 시간표는 촉박하지 않다.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2월 20일 “나는 이번 회담이 마지막 회담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2월 24일 백악관에서 진행된 전국주지사협의회 만찬에서 연설하는 중에 하노이 정상회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누구도 서두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2월 2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단독회담을 시작하기 직전 모두발언에서 서두르지 않는다는 말을 서너 차례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조미협상을 신중하게, 차근차근 진행하려고 한다는 긍정적인 뜻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그의 진짜 속셈은 하노이 정상회담을 결렬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가 하노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반복적으로 되뇌었던 서두르지 않는다는 말에 담긴 진의는 정상회담을 한 번쯤 결렬시켜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3) 2019년 2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현지에서 진행된 공식기자회견 중에 “우리는 실제로 문서들에 서명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그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무슨 뜻인가? 하노이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직전 트럼프 대통령은 사전실무협상에서 마련한 공동성명 초안을 받아보았지만, 공동성명 초안에 들어있지 않은 또 다른 문제를 정상회담 중에 갑자기 제기하여 정상회담을 결렬시켰다는 뜻이다. 

 

(4)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해결방안을 자신에게 제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노이 정상회담 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제기할 해결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역제안을 제기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역제안을 받아주지 않으면 회담을 결렬시키겠다는 결심을 안고 회담장에 들어섰다. (이 문제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므로, 아래에서 자세히 분석, 고찰한다.)  

 

 

2. 전례 없이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비핵화방안

 

하노이 정상회담 사전실무협상에서 마련된 공동성명 초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2019년 2월 16일 미국의 온라인 언론매체 봑스(Vox)는 당시 하노이 정상회담 준비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익명의 소식통 3명으로부터 전해들은, 정상회담 공동성명 초안에 담길 세 가지 조항을 보도한 바 있다. 

 

제1항 - 조선과 미국은 코리아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선언을 채택한다. 조선은 코리아전쟁 중에 사망하여 조선영토에 묻혀있는 미국군 유골을 추가로 발굴하여 미국에 송환한다.

 

제2항 - 조선과 미국은 관계정상화의 첫 조치로, 자국 수도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한다.  

 

제3항 - 조선은 녕변핵시설을 중단하고, 미국은 그에 상응하여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조치 가운데 남북경제협력에 관련된 제재조치를 해제한다.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항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은 제3항이다. 두 정상은 제1항과 제2항은 쉽게 합의하였지만, 제3항은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합의하지 못한 제3항은 조선이 녕변핵시설을 폐쇄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조치들 가운데 인민경제에 관한 제재조치들을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사전실무협상에서 최종적으로 조율을 마친 공동성명 초안의 제3항이 어떤 문장으로 서술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노이에서 사전실무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미국은 조선이 녕변핵개발단지 전체를 폐쇄하지 않고 일부만 폐쇄하겠다고 할까봐 우려하였고, 외부로부터 폐쇄현장에 대한 검증을 받지 않겠다고 할까봐 우려하였으며, 폐쇄작업에 외부 기술자들을 참여시키지 않고 조선 기술자들끼리 폐쇄하겠다고 할까봐 우려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우려는 기우였다. 리용호 외무상은 2019년 3월 1일 하노이 현지에서 진행한 기자회견 중에 미국의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였음을 말해주는 중대한 사실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그의 기자회견 발언에 따르면, 조선이 미국에게 제시한 비핵화방안은 “녕변지구의 플루토니움과 우라니움을 포함한 모든 핵물질생산시설들을 미국 전문가의 입회하에 두 나라 기술자들의 공동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이다. 

 

조선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제기한 위와 같은 비핵화방안은 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획기적이며 파격적이다. 전례와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2007년 2월 13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5차 6자회담 3단계회의에서 채택된 ‘9.19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최종조치’에 담긴 비핵화방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궁극적인 포기를 목적으로 재처리시설을 포함한 녕변핵시설을 폐쇄, 봉인하고, 국제원자력기구와의 합의에 따라 모든 필요한 감시 및 검증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 요원을 복귀하도록 초청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비핵화방안에는 녕변핵시설단지 전체를 폐쇄한다고 명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폐쇄작업도 조선과 미국이 공동으로 하는지 아니면 조선이 단독으로 하는지 명시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조선이 녕변핵시설을 단독으로 폐쇄하면, 미국이 나중에 사찰, 검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 과거의 비핵화방안과 비교하면, 이번에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조선이 제시한 비핵화방안은 조선과 미국의 핵기술자들이 미국 전문가의 입회하에 녕변핵시설단지 전체를 완전히, 영구히 폐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고 파격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이런 비핵화방안이 실행되면, 미국이 나중에 사찰, 검증할 필요조차 없게 될 것이다. 아주 완벽한 비핵화방안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하노이 정상회담 둘째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단독정상회담을 마치고 오전 9시 35분 회담장으로 사용된 호텔의 정원에서 환담을 나누며 산책하는 장면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열대식물들이 꽃과 잎새를 펼친 정원산책로를 걸으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다. 정원산책과 환담은 약 5분 동안 이어졌다. 이때까지만해도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두 정상은 산책과 환담을 마치고 회담장으로 들어가 예정에 없던 짤막한 회담을 진행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이번에 조선이 전체적으로, 완전히, 영구히 폐쇄하겠다고 미국에게 제의한 녕변핵시설단지는 900만㎡ 부지에 각종 핵시설이 들어있는 건물 390여 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핵개발단지다. 한국군 정보당국과 국정원의 분석자료를 인용한 <연합뉴스> 2013년 2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녕변핵개발단지건설에 7억~8억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조선은 녕변핵개발단지건설에 그처럼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였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중요한 의의는 녕변핵개발단지가 장장 40여 년에 이르는 조선의 국가핵무력건설과정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핵심역할을 수행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은 가장 중요한 국가핵심시설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폐쇄하고, 잠정적으로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폐쇄하고, 불완전하게가 아니라 완전하게 폐쇄할 뿐 아니라, 미국의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폐쇄방법까지 제시하여 외부에서 제기하는 우려와 의심을 모두 가셔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비핵화방안이다. 그런 까닭에 리용호 외무상은 3월 1일 하노이 현지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이것(녕변핵개발단지폐쇄방안을 뜻함-옮긴이)은 조미 양국 사이의 현 신뢰수준을 놓고 볼 때, 현 단계에서 우리가 내짚을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의 비핵화조치”라고 언명하였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핵화문제와 관련하여 참으로 대범하고 통이 큰 결단을 내렸다. 그처럼 대범하고 통이 큰 결단은 세계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결단은 8천만 겨레가 기대하는 좋은 결실을 안아오려는 성의의 발현이었으며, 비핵화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시한,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비핵화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2019년 3월 1일 하노이 현지에서 남측 취재기자들과 만나 약식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중에 “녕변에 대해서 정말 깨끗하게 포기하고 깨끗하게 폐기할 립장을 내놨지만, 잘못된 화답이 왔기 때문에 이게 아니라,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고 하면서, “모든 성의를 가지고 우리 딴에는 최상의 안을 내놨다고 생각했는데 잘 안됐다”고 말했다. 

  

 

3. 최상의 해법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사전실무협상에서 마련되었으나, 본회담에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한 공동성명 초안의 제3항에는 미국의 상응조치도 들어있었다. 미국의 상응조치는, 조선이 녕변핵개발단지 전체를 완전히, 영구히 폐쇄하는 비핵화조치에 상응하여 미국은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조치 가운데서 인민경제와 관련된 제재조치를 해제한다는 것이다. 리용호 외무상은 3월 1일 하노이 현지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요구한 것은 전면적인 제재해제가 아니라 일부 해제, 구체적으로는 유엔제재결의 총 11건 가운데서 2016년부터 2017년에 채택된 5건, 그 중에서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대조선제재는 이중구조로 설계되었다. 이를테면, 미국의 독자제재와 유엔안보리의 국제제재에 해당하는 구조도 있고, 군사부문에 대한 제재와 인민경제에 대한 제재에 해당하는 구조도 있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대조선제재를 한꺼번에 전부 해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하면, 제재해제도 단계적으로 추진되어야 마땅하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조선이 미국에게 요구한 것은, 미국의 대조선독자제재와 유엔안보리 대조선국제제재를 모두 해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유엔안보리 대조선국제제재를 해제하라는 것이었고, 군사부문에 대한 제재와 인민경제에 대한 제재를 모두 해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민경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라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미협상반대파들로부터 강한 견제와 감시를 받고 있으므로, 미국의 대조선독자제재부터 먼저 해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해제하기 쉬운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부터 해제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의 군사부문에 대한 제재를 먼저 해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인민경제에 대한 제재부터 먼저 해제하라고 요구하였다.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조치는 모두 11건이고, 미국의 독자적인 대조선재재조치는 470여 건이나 된다. 그런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 중에서 인민경제에 대한 제재조치 5건만 해제하라고 요구하였다.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요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해제를 요구한 5건의 제재조치는 유엔안보리가 조선의 지하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시험발사를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발동한 조치들이다. 조선은 지하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시험발사를 이미 400여 일 전에 전면 중단하였을 뿐 아니라, 리용호 외무상이 3월 1일에 진행한 기자회견에 따르면 “이번 회담에서 우리는 미국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서 핵시험과 장거리로케트시험발사를 영구적으로 중지한다는 확약도 문서형태로 줄 용의를 표명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시험발사를 영구히 중단했으므로, 조선의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시험발사에 대한 유엔안보리 제재조치도 등가교환원칙에 따라 해제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등가교환은 누구도 이견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의 부분적 해제를 요구하였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그 정당한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분적 해제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게 되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받아줄 수 없는 역제안을 꺼내놓고 고의적으로 난관을 조성하였다. 협상과정에 난관을 조성하여 회담을 결렬시키려는 음모가 끝내 발동된 것이다. 리용호 외무상이 3월 1일 기자회견 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회담과정에 미국측은 녕변지구핵시설폐기조치 이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고 한다. 이 발언을 들어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역제안을 제기하고 그것을 끝까지 주장하여 회담을 결렬시켰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역제안을 꺼내놓은 것이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9년 2월 27일 하노이 정상회담 첫째날 메트로폴 하노이 호텔에서 진행된 상봉식에서 만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첫째날 단독정상회담을 마치고 만찬을 나누는 장면이다. 조선과 미국의 대등한 협상원칙은 그날 만찬에 차려진 음식에도 적용되었는데, 조선음식과 미국음식이 각각 절반씩 만찬에 나왔다. 이튿날 오전 확대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유엔안보리 대조선재재조치 가운데 인민경제에 관한 제재를 해제하라는 부분적 해제를 요구하였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그 정당한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당한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게 되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받아줄 수 없는 역제안을 꺼내놓고 고의적으로 난관을 조성하였다. 협상과정에 난관을 조성하여 회담을 회담을 결렬시키려는 음모가 끝내 발동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녕변핵개발단지폐쇄와 관련하여 트럼프 대통령은 2월 28일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현지에서 진행된 공식기자회견에서 “마익(팜페오 국무장관을 지칭-옮긴이)과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문제를 논의하고 협상하였다”고 말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녕변핵개발단지폐쇄방안에 대응할 역제안을 사전에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2019년 2월 28일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필리핀 마닐라로 떠난 팜페오 국무장관은 전용기 안에서 진행된 약식기자회견 중에 “우리는 심지어 오늘 아침까지만해도 희망적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희망적이었다고 말한 오늘 아침은 하노이 정상회담 단독회담이 진행된 시점을 뜻한다. 그러므로 단독회담까지는 난관이 조성되지 않았는데, 단독회담 이후에 열린 확대회담에서 난관이 조성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트럼프 대통령과 팜페오 국무장관은 단독회담에서는 역제안을 제기하지 않고 협상을 진행하다가, 확대회담에서 역제안을 꺼내놓고 고의적으로 난관을 조성하는 수법으로 회담을 결렬시켰음을 알 수 있다.    

 

(3) 트럼프 대통령이 확대회담에서 꺼내놓은 역제안은 그가 즉흥적인 발상으로 제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밀정보에 관련된 역제안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면, 트럼프 대통령이 2월 28일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직후 현지에서 진행된 공식기자회견에서 뉴욕타임스 기자 데이빗 쌩어와 주고받은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 “우리는 그 이상의 것(녕변핵개발단지폐쇄 이상의 것을 뜻함-옮긴이)을 (조선측에 요구)해야 하였다. 언론매체들이 이야기하지 않고, 서술하지도 않았으나 우리가 발견한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조선측에 요구)해야 하였다.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 우리는 그것을 (조선측에 요구)해야 하였다. 

 

쌩어 - “제2우라늄농축시설이 포함되나?”

트럼프 - “그렇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았다는 것에 대해 그들이 놀랐을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질의응답에서 늘어놓은 두서없는 답변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시한 녕변핵개발단지폐쇄방안을 거부할 명분이 없게 되자, 조선의 우라늄농축과 관련된 또 다른 시설,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공개시설을 녕변핵개발단지와 함께 폐쇄해야 한다는 역제안을 꺼내놓았다. 

 

하노이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껏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우라늄농축관련시설에 관한 비밀정보를 국가정보기관들로부터 보고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 비밀정보를 가지고 회담결렬씨나리오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런 씨나리오에 따라 하노이 정상회담 중에 녕변핵개발단지와 함께 비공개우라늄관련시설도 폐쇄해야 한다는 역제안을 꺼내놓은 것이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 2018년 4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가지구공간정보국(NGIA) 국장 로벗 카딜로는 트럼프 대통령과 핵심각료들이 매일정보보고에서 특별히 조선에 관한 정보를 가장 중시하고 있으며, 첩보위성을 비롯한 최신첩보장비들을 동원하여 파악한 조선에 관한 정보가 매일정보보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하였다. 카딜로 국장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이 가까워질수록 대통령에게 제출되는 매일정보보고에서 조선에 관한 정보가 두 배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지난해 싱가폴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러했으므로, 올해 하노이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그러했을 것이다. 

 

 

4. 미리 준비된 역제안, 무엇을 노렸을까?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3월 1일 공식기자회견 중에 언급한 조선의 비공개우라늄관련시설은 1개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공식기자회견에서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장소들(sites)이 있다”고 답변하였다. 보통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미국 대통령은 알고 있다는 조선의 비공개우라늄관련시설은 무엇일까?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의 정보보고를 읽어본 트럼프 행정부 관리 5명이 전해준 정보를 인용한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 2018년 6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2018년 상반기 몇 달 동안 몇 군데 비밀장소에서 핵무기제조에 필요한 농축우라늄생산을 다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핵무기제조에 필요한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하려면 원심분리기가 설치된 우라늄농축공장을 건설해야 한다. 원심분리기 1천 기를 설치한 우라늄농축공장을 1년 동안 가동하면 핵무기 1개를 만들 수 있는데, 600㎡의 크지 않은 건물만 있으면, 원심분리기 1천 기를 들여놓을 수 있다. 만일 조선이 그런 소규모 지하공장을 10개소만 가동해도, 해마다 핵무기를 10개씩 만들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을 생산되는 것이다. 조선은 원심분리기 1천 기를 설치한 소규모 우라늄농축시설들을 지하화하고, 전국적으로 분산시켜 건설하였으므로, 그런 지하시설들이 얼마나 많은지 미국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국은 조선이 핵물질생산을 중단하였다고 발표하면, 그 발표를 믿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조선의 비핵화는 검증이 아니라 조선과 미국의 신뢰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조선의 지하우라늄농축공장 2~3개소를 거론하면서, 녕변핵개발단지와 함께 그 공장들도 폐쇄한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기한,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조치들 가운데 인민경제에 관한 제재조치를 해제하라는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고 역제안하였다면, 회담은 결렬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많은 지하우라늄농축공장들 가운데서 2~3개소를 폐쇄하더라도 농축우라늄생산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므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역제안을 받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핵심시설인 녕변핵개발단지 전체를 완전히 폐쇄하려고 결심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있어서 소규모 지하우라늄농축공장 2~3개소를 덤으로 폐쇄하는 것은 전혀 문제로 되지 않는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꺼내놓은 역제안은 녕변핵개발단지와 함께 지하우라늄농축공장 2~3개소를 폐쇄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하노이 정상회담 둘째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호텔정원에서 환담을 나누며 산책한 뒤에 확대정상회담을 시작하기 직전인 오전 9시 40분경 김영철 부위원장과 마익 팜페오 국무장관을 각각 동석시킨 가운데 예정에 없던 회담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이 긴급회담은 약 4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짤막한 긴급회담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정에 없던 긴급회담을 진행한 것부터 심상치 않았으며, 바로 그때부터 회담분위기는 차츰 긴장되기 시작하였다. 예정에 없던 긴급회담을 마치고, 두 정상은 회담장으로 가서 확대정상회담을 시작하였는데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오전 11시 55분에 예정되었던 오찬과 오후 2시 5분에 예정되었던 공동성명 서명식이 모두 취소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트럼프 대통령이 꺼내놓은 역제안에서 녕변핵개발단지와 함께 폐쇄대상으로 지목한 것이 지하우라늄농축공장이 아니라면, 그가 지목한 폐쇄대상은 농축우라늄생산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떤 다른 공장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조선의 농축우라늄생산을 중단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도는 우라늄정련공장을 폐쇄시키는 것이다. 우라늄정련공장이 폐쇄되면, 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없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에서 녕변핵개발단지와 함께 우라늄정련공장을 폐쇄하는 경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기한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조치들 가운데서 인민경제에 관한 제재조치를 해제하라는 요구를 받아주겠다는 역제안을 꺼내놓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우라늄정련공장은 어디에 있을까? 1992년 조선이 국제원자력기구에 제출한 신고서에 따르면, 황해북도 평산군과 평안북도 박천군에 우라늄정련공장이 각각 있다고 한다. 당시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평산우라늄정련공장과 박천우라늄정련공장을 각각 방문한 바 있다. 우라늄정련공장은 우라늄광산에서 채취한 우라늄원광을 화학적 여과과정(정련)을 거쳐 우라늄농축분말로 만드는 곳이다. 노란색 분말상태로 추출되는 산화우라늄(urania)이 바로 우라늄농축분말인데, 노란떡(yellowcake)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조선이 연간 20만t 정련능력을 가진 대규모 우라늄정련공장을 황해북도 평산에 건설하였던 때는 1990년이다. 그 공장에서 생산되는 산화우라늄은 경수로 연료나 우라늄핵탄제조에만 사용되는 핵물질인데, 1990년대 조선에는 경수로가 없었으므로, 생산된 산화우라늄은 우라늄핵탄을 제조하기 위한 핵물질이었다.  

 

2015년 8월 12일 미국의 온라인매체 39노스(North)에 실린 위성사진분석기사에 따르면, 조선은 2013년에 평산우라늄정련공장을 확장하는 공사를 벌였다고 한다. 연간 정련능력이 20만t인 공장을 확장하였으니, 산화우라늄생산량이 대폭 증대된 것이 분명하다. 평산우라늄정련공장과 박천우라늄정련공장에서 우라늄원광 40만t이 해마다 정련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두 공장에서 얼마나 많은 산화우라늄을 생산하는지 알 수 없고, 더욱이 우라늄핵탄 1개를 만들려면 우라늄농축공장에서 얼마나 많은 산화우라늄을 고순도로 농축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조선이 고농축우라늄을 매우 방대한 규모로 생산해왔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이 원심분리기를 제작하여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하기 시작한 때는 2000년이므로, 지난 18년 동안 소규모 지하우라늄농축공장 10개소를 가동하여 해마다 핵무기를 10개씩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2019년 3월 현재 조선은 우라늄핵탄 180개를 보유하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거기에 더하여 녕변핵시설단지에서 생산되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사용하여 제작된 플루토늄핵탄도 20개 보유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조선의 핵무기보유량을 200개 이상으로 추산하는 근거다.  

 

위에 열거한 내용은 미국의 가슴을 옥죄는 고통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녕변핵개발단지와 함께 우라늄정련공장도 폐쇄하는 역제안을 꺼내놓았던 것이다. 

 

 

5. 저급한 거래수법이 안겨준 자업자득의 내상

 

그러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역제안을 받아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녕변핵개발단지 이외의 핵시설을 폐쇄하는 것은 앞으로 열릴 제3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해야 할 다음 단계의 비핵화조치이기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에 채택, 발표한 9.19평양공동선언에는 “북측은 미국이 6.12조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녕변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고 명시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의 비핵화조치가 녕변핵개발단지를 폐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 단계에서 다른 핵시설을 폐쇄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녕변핵시설단지를 폐쇄한 이후 다음 단계에서 취해질 비핵화조치는 우라늄정련공장들을 폐쇄하는 것이다. 현 단계에서 녕변핵시설단지를 폐쇄하는 것은 플루토늄생산을 중단하는 비핵화조치이고, 다음 단계에서 우라늄정련공장들을 폐쇄하는 것은 우라늄생산을 중단하는 비핵화조치이다. 플루토늄생산과 우라늄생산이 모두 중단되면, 핵무기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는 비핵화조치(핵동결)가 완료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조선이 녕변핵시설단지를 폐쇄한 이후 우라늄정련공장들까지 폐쇄하여 핵물질생산을 완전히 중단하는 최종적인 비핵화조치를 실행하려면, 미국도 그에 상응하여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한반도 핵우산을 철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 단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역제안을 받아줄 수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리용호 외무상은 3월 1일 하노이 현지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회담과정에 미국측은 녕변지구핵시설폐기조치 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으며, 따라서 미국이 우리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언명하였다. 그는 미국이 조선의 부분적인 제재해제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외교적 표현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기한 부분적인 제재해제요구를 받아들 수 없었던 트럼프 대통령은 미리 준비해둔 역제안, 다시 말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받아들일 수 없는 역제안을 꺼내놓아 회담을 고의적으로 결렬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기한 부분적인 제재해제요구를 왜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2월 28일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현지에서 진행된 공식기자회견에서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수준(녕변핵개발단지폐쇄를 뜻함-옮긴이) 이상을 (조선측에 요구)해야 하였다. 만일 우리가 한 가지 수준만 (조선측에 요구)한다면,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해오던 (조미협상의) 모든 지렛대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조선제재는 조미협상에서 미국의 협상력을 유지해주는 협상의 지렛대이므로,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대조선재재를 해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협상의 지렛대를 전부 포기하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두 나라의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포기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두 나라가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조건, 다시 말해서 인민경제에 대한 제재만 해제하라는 최소한의 요구마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실책은 언제나 오판에서 나오는 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의 지렛대를 포기할 수 없다는 한 가지 사실에만 골몰한 나머지, 유엔안보리 대조선제재조치를 부분적으로 해제하지 않으면, 조미협상이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더 중대한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하노이 확대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장 밖 복도에서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비록 회담은 결렬되었지만,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트럼프 대통령과 좋은 분위기 속에서 작별하였다. 아마 이 사진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과 조미협상의 앞길에 대해 우려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미심장한 미소는 조미협상이 머지 않아 반드시 재개될 것이라는 확신을 전해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미소 속에는 곡절도 많고 난관도 많은 조미협상을 여기서 끝내지 않고 머지 않아 다시 재개하려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있고, 저급한 상거래수법으로 하노이 정상회담을 결렬시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의 오판과 실수를 깨닫고 바른 길로 돌아서기를 바라는 기대감도 담겨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협상원칙을 깨닫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제3차 조미정상회담을 제의하기까지 아마 3~4개월 걸릴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최선희 부상이 3월 1일 기자회견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미국식 계산법”이라고 지적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전에 부동산재벌총수로 사업하면서 써먹었던 상거래계산법이다. 상거래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거래조건이 제기되는 경우, 실거래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러 난관을 조성하면서 거래를 중지시키는 수법을 쓰는데,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바로 그런 상거래수법으로 회담을 결렬시킨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차원이 완전히 다른 정치협상과 상업협상을 혼동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상업협상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상거래수법이 통할 수 있지만, 정치협상에서는 그런 저급한 거래수법이 통할 리 없다. 더욱이 협상원칙을 중시하고 고수하는 조선에게 그런 저급한 거래수법이 통할 것으로 생각하였다면, 그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협상과 상업협상을 혼동하는 바람에 자기에게 다가온 결정적인 해결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리용호 외무상은 3월 1일 하노이 현지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현 단계에서 우리가 제안한 것보다 더 좋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겠는지 이 자리에서 말하기 힘들다. 이런 기회마저 다시 오기 힘들 수 있다”고 말했고, 그 기자회견에 동석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도 “이런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나 같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리용호 외무상은 3월 1일 기자회견에서 “완전한 비핵화로의 려정에는 반드시 이런 첫 단계공정이 불가피하며, 우리가 내놓은 최량의 방안이 실현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원칙적 립장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고, 앞으로 미국측이 협상을 다시 제기해오는 경우에도 우리 방안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이번에 결정적인 해결기회를 놓친 트럼프 대통령은 자업자득의 내상을 입었다. 체면을 차려야 하기에 내색을 할 수 없는 그는 내상의 쓰라림을 고스란히 견디는 수밖에 없다. 비록 자업자득의 내상을 입었으나 조미협상을 포기하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 아니 조미협상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가 정치협상원칙을 깨닫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제3차 조미정상회담을 제의하기까지 아마 3~4개월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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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분쟁과 해외매각... 한 기업 넘어 지역 전체가 '휘청'

[현장기획 - 한국 제조업 위기의 축소판, 곡성 ①] 10년 전엔 그리 잘 나가던 금호타이어였건만

19.03.04 07:51l최종 업데이트 19.03.04 08:06l
전라남도 곡성은 고용위기를 겪는 여러 지방도시 가운데 대기업에 대한 지역 경제 의존도가 매우 높다. 민간연구단체인 랩2050은 최근 곡성을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고용위기가 가장 취약한 곳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금호타이어가 중국 기업에 매각된 후, 곡성 공장은 가동률이 크게 떨어졌고 고용불안과 지역경제 공동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곡성을 통해 한국 제조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진단하고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본다.[편집자말]

 

 곡성 금호타이어 공장은 중국 기업 매각 이후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면서 고용불안과 지역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곡성 금호타이어 공장은 중국 기업 매각 이후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면서 고용불안과 지역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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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4일 전라남도 곡성. 서울을 떠날 때 보였던 파란 하늘을 이곳에선 볼 수 없었다. 곡성 기차역에서 내린 하늘은 회색의 미세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기자는 곧장 발걸음을 재촉해, 곡성군 입면에 위치한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으로 향했다.

이날은 지난해부터 끌어온 임금 및 단체협약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들의 찬반 투표가 열리기로 돼 있었다. 합의안에는 임금 동결을 비롯해 인원 전환배치 등 하나같이 조합원들에게 만만치 않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회사와 어렵사리 합의안을 이끌어낸 노동조합 집행부 역시 조합원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곡성공장 입구에는 조합원 투표를 위한 기표소 2곳이 마련돼 있었다. 투표가 한창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현장은 썰렁했다. 4조 3교대로 돌아가는 작업 환경 탓도 있지만, 그동안 회사를 둘러싼 부침이 생산 현장의 활기를 앗아가 버린 듯 했다.

결국 투표 결과, 합의안은 조합원 대다수의 반대(74.7%)로 부결됐다. 회사에 대한 불신과 인력 구조조정에 대한 조합원의 두려움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잘 나가던 금타는 어쩌다?

 

국내 3대 타이어 제조업체 중 하나인 금호타이어는 호남 향토기업인 금호그룹의 한 사업으로 시작됐다. 전남 광주와 곡성, 그리고 경기 평택 등 전국 3곳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다. 광주와 평택처럼 대도시 중심이 아닌 곡성에 타이어공장이 들어선 것은 지난 1989년 10월이었다.

당시만 해도 공장이 지어진 곡성군 입면은 말 그대로 산골 오지 중에 오지였다고 한다. 이런 곳에 대기업 공장이 들어선 경우 자체가 드물었고, 곡성 공장은 이후 입면과 주변 옥과면 등 곡성군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입면 출신인 정송강 금호타이어 노동조합 곡성지회장은 "지금은 큰길에서 공장까지 차로 5분이면 들어갈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버스도 하루에 한 대만 다니는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광주 출신으로 1996년 회사에 들어온 한승권 곡성지회 기획실장​​도 당시를 또렷히 기억했다. 그는 "하루에 4~5대에 불과하던 버스 배차 간격이 곡성공장이 들어오고 나서 30분~1시간 단위로 바뀌었다"면서 "지금은 30대 정도 다닌다"라고 말했다.
 
 31일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에 위치한 한 자동차 정비센터에 타이어가 수북히 쌓여 있다.
▲  31일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에 위치한 한 자동차 정비센터에 타이어가 수북히 쌓여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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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곡성공장은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지난 2004년 당시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품질경쟁력 우수기업에 5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2008년 연간 공장가동률은 94%를 기록했고, 생산 실적도 1410만여본(타이어 갯수 단위)이나 됐다. 역설적이게도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로 회사의 자금이 최저였던 2010년 전후로 전세계 타이어 시장은 최대 호황기였다.

하지만 이것도 옛말. 금호그룹 오너가의 경영권 분쟁과 회사의 유동성 위기는 노동자의 인건비 희생으로 돌아왔다. 임금은 삭감됐고, 상여금을 반납해야 했다.

한 기획실장은 "2005년에서 2010년 워크아웃(재무구조개선작업) 직후까지 (타이어 업계가) 가장 호황이었다"면서 "2012년 매출이 지금의 2배였고 이익도 엄청나게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노동자는 힘들었는데 실제로는 회사는 돈을 가장 많이 번 시기였다"면서 "워크아웃 들어가는 시점에 임금 5% 반납과 10% 삭감을 해서 실질임금이 30% 줄었다"고 덧붙였다.

노동자 중에는 이 시기에 가장 높은 연봉을 받았던 이도 있다. 수요가 많았던 만큼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매일 가동해야 해서 휴원근(사고자 대신 근무)이 언제나 발생했다. 이를 통해 삭감된 임금을 보전 받았다. 금호타이어는 여느 제조업과 달리 시급제가 아닌 일당제로 기본급이 주어진다. 800%의 상여금도 기본급이 아닌 온갖 수당을 붙인 전체 임금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 시기마다 직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다. 퇴직금 중도인출 인원수가 이를 반증한다. 노조 쪽에 따르면, 회사의 존폐가 걸린 매각이 있었던 지난해 약 300명 이상이 신청한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지난 2016년 적자가 계속되던 때에는 382명이, 워크아웃 절차가 본격 진행됐던 2012년에는 무려 845명이 중도인출로 숨통을 틔워야 했다.

젊은이들의 이탈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에 위치한 금호타이어 사원아파트. 사원아파트에 입주한 공장 노동자들이 줄어들면서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에 위치한 금호타이어 사원아파트. 사원아파트에 입주한 공장 노동자들이 줄어들면서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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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는 약 280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사원아파트도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1995년에 입사한 정송강 지회장은 "신입사원 시절 사원아파트가 꽉 차서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면서 "복지 차원에서 사원아파트 내 자체 어린이집도 운영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에 따르면 미취학 아동 인원이 많아 인근에 사설 유치원도 들어섰다. 그는 "사내 유치원 입학은 추첨으로 진행됐고, 떨어지면 억울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아이들이 많아 사원 아파트 인근을 비롯해 입면 소재지 초등학교가 3곳이나 됐다.
  
그러나 20년 이상 지속된 회사의 부침에 직원들이 점차 줄어들자 사설 유치원을 비롯해 2개 초등학교가 문을 닫았다. 공장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정규직 1722명 중에 곡성소재에 거주하는 가구는 270세대이다. 이 가운데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수는 29명, 초등학생은 108명이다.

1995년에만 해도 곡성군은 인구 4명 가운데 1명 가량이 20·30대였을 만큼 젊은 도시였다. 당시 곡성의 20~39세 인구는 1만1633명으로, 전체 인구 중 27.85%를 차지했었다. 2016년 말 기준 곡성의 20~39세 인구는 5081명으로 절반 넘게 줄어들었고, 그 비중도 16.71%로 크게 감소했다. 

자연히 아기 울음소리도 줄었다. 1995년 1765명이었던 곡성군의 0~4세 인구는 2016년 719명으로 1000명 넘게 감소했다. 곡성군민 가운데 4세 이하 인구의 비중도 같은 기간 4.22%에서 2.36%로 반토막 났다. 

지난 2000년 362명이었던 곡성군 출생아수는 2017년 115명으로 고꾸라졌고, 혼인건수도 204건에서 107건으로, 초등학생수도 2169명에서 967명으로 절반 가량 떨어졌다. 반면 곡성군의 65세 이상 고령인구비율은 2000년 18.09%에서 2018년 33.85%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현재 곡성에 살고 있는 사람 3명 가운데 1명은 65세 이상 노인이라는 얘기다. 

공장 노동자의 평균 연령도 50대다. 비정규직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공장에서는 '딱 봤을 때 젊은 사람이면 100미터(m) 밖에서도 광채가 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정 지회장은 "면이나 군에서 예산 확보를 위해 계속해서 회사 쪽에 직원들의 관외 이사를 막아달라는 식의 협조 요청을 한다"면서 "실제로 예전에 한창 직원들이 빠져나갈 때는 학교에서도 협조 요청 및 이사 이유를 물어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떠나자 경제도 무너졌다
 
 31일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한 건물에 지역경제 침체로 인해 새 주인을 찾는 임대문의 안내가 붙어 있다.
▲  31일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한 건물에 지역경제 침체로 인해 새 주인을 찾는 임대문의 안내가 붙어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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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한 건물에 지역경제 침체로 인해 새 주인을 찾는 임대문의 안내가 붙어 있다. 상인들은 “할인행사를 해도 경기침체로 인해 손님도 없고 상권이 많이 죽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  31일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한 건물에 지역경제 침체로 인해 새 주인을 찾는 임대문의 안내가 붙어 있다. 상인들은 “할인행사를 해도 경기침체로 인해 손님도 없고 상권이 많이 죽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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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22개 시·군 가운데 곡성군의 지역내총생산(GRDP) 순위는 지난 2005년 14위에서 2016년 16위로 2단계나 하락했다. GRDP는 지역의 경제상황, 쉽게 말해 '부'를 나타내는 지표다.

지난 20년 동안 곡성군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기업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 곡성군 전체 사업체수는 1996년 2217개에서 2016년 2042개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제조업수는 242개에서 200개로, 도·소매업은 813개에서 533개로 줄었다. 반면 숙박 ·음식업수는 1996년 374개에서 2016년 399개로 소폭 늘었다. 

이와 같이 곡성군의 젊은 인구가 줄어들고 경제순위가 하락한 데에는 '금타의 위기'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지난 2010년 본사가 워크아웃에 돌입하면서 불어닥친 칼바람이 곡성공장까지 닿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조업 불황까지 겹쳤다. 회사가 매각되자 비용 절감 차원에서 도급협력업체 대상의 구조조정이 우선 실시됐다.

노조 쪽은 이의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4개 업체에서 하나로 통폐합된 미화업체를 꼽았다. 한 기획실장은 "도급협력업체 쪽들은 구조조정 하면서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한 신규 인력으로 대체해오고 있다"면서 "지난해 60억 원이었던 미화업체 계약에 책정된 금액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비용 절감을 실현했는데, 구체적인 금액은 회사 쪽에서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내식당의 식자재 납품 업체도 지역 업체에서 CJ 프레시안으로 4년 전 교체됐다. 한 기획실장에 따르면 당시 인근 농가에서 업체 변경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다. 기존 업체는 지역 농산물을 주로 구매했지만 CJ 프레시안의 경우 이미 확보된 유통 경로가 있어 이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타의 식자재 납품 업체 변경은 인근 지역 농가 소득에 영향을 미쳤다.

한 기획실장은 "매각 이전에 회사 쪽에서 도급업체를 방만하게 운영했다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도급업체) 사장들이 금타 임원 및 부장 등의 직위 출신으로 비효율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지만 업체 변경을 통한 비용 절감 정도를 알 수 없다"면서 "도급업체를 바꾸면서 고근속 근무자 고용을 승계하지 않고 신규채용으로 채우는 식으로 비용을 아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금타 공장을 다니는 지역 주민의 수가 줄었다. 정 지회장은 "곡성 지역 채용이 가장 활발했던 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까지는 직원 중 30~40%가 인근 지역 주민이었다"면서 "추천 채용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당시는 2000명 조합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던 시기였다. 어림 잡아도 600명~800명이 곡성 주민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사정도 회사가 부침을 겪으면서 180도 바꼈다. 한 기획실장은 "설비파트의 경우 지원자격은 제가 입사하던 시기와 같을지언정 대학을 나와도 입사가 어려울 정도로 취업문이 좁아졌고, 지역 추천도 더 이상은 없다"고 말했다. 노조 쪽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비조합원 포함한 정규직 1722명 가운데 곡성주민은 313명이다.

곡성군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5년 곡성군 전체 사업체 종사자 9096명 가운데 2086명이 금타 곡성공장에서 근무했다. 곡성에서 일하는 사람 100명 중 23명은 금호타이어 직원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후 2016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 직원은 1755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곡성 안에서의 금호타이어 노동자 비중도 15.48%로 감소했다.

금호타이어와 곡성은 그렇게 같이 쇄락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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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하는 교통문화⑦ 도로교통 환경미화원 편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101회)
최재영  |  9191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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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04  11: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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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눈에 띄게 증가하는 평양시내 도로교통 환경미화원들

필자는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동포로서 간혹 서울과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두 도시에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매번 체감한다. 다름 아니라 서울을 방문해 인도를 걷다보면 도심이나 외곽을 막론하고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악취가 풍긴다. 일명 ‘시궁창’ 냄새와도 같은 이 악취는 화려한 수도 서울의 미관과는 아무 상관없이 나의 후각에 지속적으로 감지되며 길을 걸을 때마다 불쾌감을 주고 있다.

아울러 엄청난 교통량과 거기서 뿜어 나오는 매연으로 인한 탁한 공기들까지 합세해 그리운 고국의 수도 서울을 걷는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 아마 역겨운 냄새들은 맨홀 뚜껑 밑이나 하수구, 배수구등 지하 오폐수 시설 운영 시스템과 구조상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곳에 사는 현지 서울시민들과 거주민 동포들은 그런 냄새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반면 평양은 서울과 달랐다. 서울보다는 아직 교통량이 많지 않아 매연도 적을 뿐 아니라 도시계획이 잘 돼 있어서 아직까지는 그런 악취가 감지되지 않아 그런지 계절과 기후에 상관없이 언제나 공기의 쾌적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평양에도 시민들이나 관료들의 입에서 ‘교통체증(Traffic jam)’이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차량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며 머지않아 평양도 매연과 악취가 나지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이다.

평양 거리는 더 이상 한산하지 않고 역동적이다. 도심 차도 위에는 부지런히 오가는 버스와 전차, 트럭과 택시, 승용차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으며 이에 질세라 다양한 오토바이, 자전거들까지 합세하고 있고 땅속에는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신호시스템이 없는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제복차림의 여성 교통보안원들은 여전히 주목을 받으며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반면에 교통량 증가로 인해 신호등들은 여기저기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새로 준공한 평양국제공항(순안공항)과 평양기차역 등의 공용주차장과 백화점, 시장 등의 주차장에서는 주차요금을 철저히 징수하고 있다. 또한 평양시내 한복판은 물론이고 외곽지역에서도 주유소 찾기가 이전보다 훨씬 더 쉬워졌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그만큼 교통량이 많아졌고 이에 따른 대책으로 평양식 새로운 교통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최근 평양의 색다른 교통 문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차도를 종횡무진하며 청소를 하는 거리의 천사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유니폼을 입고 도로가를 누비며 청소부들인데 이들이 바로 여성들로만 구성된 도로교통 환경미화원들이다. 김정은 위원장 취임 이후 평양은 시시각각 급속도로 변모하며 발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것은 바로 이들 도로 환경미화원들의 출현이다. 사회주의식 교통문화와 도시미화 사업이 한데 어우러진 평양의 도시 미관이 나날이 청결해지는 비결은 도로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 여성 도로환경미화원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평양시 각 구역별로 조직된 도시미화사업소에 소속된 도로환경미화원들은 주황색뿐만 아니라 창의적으로 디자인한 다양한 유니폼을 입고 그 위에 야광조끼를 걸쳐 입고 차량들이 다니는 대로와 인도의 청결을 책임지고 있다.

   
▲  필자가 차를 타고 이동 중에 만수대의사당과 인민대극장이 있는 큰 사거리에 당도할 무렵 환경미화원이 청소도구를 실은 리어카를 몰고 차도 한복판을 횡단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 오페라극장 광장에는 대규모 청년대학생들의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마침 관할 환경미화원들이 청소도구를 실은 손수레 옆에서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시민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과거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추대될 무렵에 도로 환경미화원 한 명이 차도를 말끔히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필자가 찍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도로환경미화원들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

평양은 사회주의 국제도시로 주목받으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어울리는 유니폼을 입은 환경미화원들의 출현과 활동들은 예견된 일이다. 필자가 볼 때 지난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시작된 평양시 현대화 사업이 2010년 무렵에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당시 궤도전차 노선을 도로 중앙에서 도로 양 옆으로 옮기는 공사를 비롯해 도로포장공사, 인도의 보도 블럭 교체작업들도 모두 보기 좋게 완성되었고 아울러 천리마거리, 영광거리 등 평양 도심지의 도로와 순안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9.9절 거리, 금성거리등도 말끔히 조성되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후 관리는 모두 도로환경미화원들의 몫이었다. 평양시 현대화 사업은 주로 대동강변 미화사업과 주택개건사업 외에도 주요시설물의 조명교체작업이나 강안도로건설, 가로수심기, 교량개보수, 영화관과 음식점 등 문화 편의시설 개축 등에 주력하며 새롭게 탈바꿈했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 시대의 말기이자 김정은 위원장 시대의 시초가 되는 2010년과 2011년도의 새해 신년사는 인민생활 향상과 강성국가 건설을 최대과제로 제시되었고 그 후 본격적으로 김정은 시대가 개막되면서 나무 심기, 잔디 깔기, 도로 주변 정돈 등을 위한 녹화사업, 도로정비사업 등 일반적인 도시미화사업이 가장 먼저 평양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아울러 국토건설 전략은 도시미화 사업과 유희오락시설 건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대도시에서는 주로 인민생활 향상과 함께 주택 거리 조성사업과 도시의 공원화 사업이 중요과제로 추진되었으며 평양 외에도 전국의 각 지방 도시들도 도시미화 사업과 산림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환경미화원들뿐 아니라 일반시민들과 주민들은 과거 보다 더 환경 미화사업에 책임을 지는 구성원들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사회주의 수도 평양은 국가 공동체의 권력과 문화가 집중된 특수 지역이다 보니 평양에서의 거리와 차도들은 도시를 구성하는 일상적인 건물들과 그곳에서 이뤄지는 삶의 모습들이 어우러진 공간이 되었다. 특히 도로의 시작점과 끝점, 교차점들에 높고 규모가 큰 공공건물들과 아파트 살림집들을 배치하여 거리의 축을 형성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평양 중심부에는 사상교양지구, 대학지구, 과학지구, 보건지구, 체육지구, 중심봉사지구 등 기능별로 지구를 구축하고 다양한 형식의 건축물들을 건설함으로써 도시미학의 다양성과 입체성을 설계대로 확고하게 완성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차량증가와 교통량의 증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에 완공하지 못한 창전거리 공사를 재개해 2012년 6월 만수대지구에 45층의 초고층 아파트단지를 완공한 것을 시작으로 2013년 은하과학자거리(일명 과학자살림집), 체육인살림집, 김일성종합대 교육자(교수)살림집, 위성과학자 주택지구, 김책공대 교육자(교수)살림집, 2015년 미래과학자거리를 완공했다. 이처럼 공공주택거리들을 빠른 속도로 건설하면서 평양의 교통량은 더욱 증가하였다.

2009년 12월에는 김정은 후계 체제가 진행 중이던 시기였는데 만수대 아파트 단지거리에 800여 세대의 입주가 이뤄졌다. 이를 시작으로 2010년에는 평양 10만호 건설사업이 시작되면 앞에 언급된 공공주택들이 들어선 것이다. 소위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규정한 2012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안에 10만호를 짓겠다는 목표 아래 추진한 결과 계획대로 완성한 것이다. 이처럼 인구유입과 유동인구 증가는 교통량 증가 현상으로 나타난다.

원활한 교통 흐름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업무와 도로를 관리하고 유지 보수하는 사업들 그리고 도로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도로 환경미화 사업들과 직결이 되어 평양시 당국은 시시각각으로 분주해졌다. 도로 환경미화사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도로청소기계 운행과 청소인력 등을 보강하는 것은 물론 쓰레기 수거 화물차와 담당 인력 등을 보충하기 위한 재정과 인원을 계속 투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분화된 평양의 도시환경미화 종사자들

과거에는 청소를 담당하는 부서가 평양시를 비롯해 지방의 각 시군 경영사업총국 산하의 경영사업소에서 맡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각 구역별로 도시미화사업소에서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시의 경우 쓰레기 수거차로 사용되는 화물차는 과거에는 승리 58형 2.5톤 트럭 1백대와 청소원 2백여 명 정도가 담당을 하며 미화사업을 맡았는데 지금은 그 인원과 장비가 3배 규모로 늘었으며 중국제 수거용 화물차등이 사용된다고 한다. 이밖에도 과거에는 자동차 전용도로 청소요원이 2백여 명 정도였고 도로 청소차 20대와 가로수 관리원이 50여명 정도가 근무해도 충분히 감당을 했는데 지금은 당시보다 5배 정도의 규모로 증가되었다고 한다.

창전거리, 백두산 영웅청년발전소, 청천강 계단식발전소, 과학기술전당,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 김정은 위원장 취임 이후 매년 대규모 건설사업이 이어졌고 이어서 평양시 차원을 넘어서 당과 내각 차원에서 대규모 거리 조성과 도시문명의 경관화가 이뤄졌다. 지난 8-9년 동안의 김정은 시대를 함축하는 의미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면 “조미대결전으로 인한 핵과 미사일 고도화와 함께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문화 건설 사업 주력”이라고 볼 수 있다. 평양에는 도로교통 환경미화 분야 외에도 아래와 같이 모두 일곱 가지로 세분화되어 종합적인 도시환경 정책을 펴 나가고 있다.

첫째, 다양한 유니폼을 입고 그 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은 채 빗자루를 들고 차도와 인도를 청소하는 도로환경미화원들이다. 이들은 빗자루와 청소도구를 손수레(리어카)에 실고 다니며 차도를 활보하며 다닐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둘째, 도로의 도면 전용 청소기를 운행하며 부지런히 차도 갓길과 도면을 운행하며 청소하는 환경미화 요원들이다. 이들은 일반 환경미화원들의 재래식 청소방법이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차로를 비가 오나 눈이오나 청소기를 몰고 다니며 청결하게 하고 있었다. 이들도 유니폼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었다.

셋째, 평양시에도 살수차가 정기적으로 차도를 지나가며 물을 뿌린다. 살수차를 운행하는 운전기사와 관계자들도 도로환경미화원들이다.

넷째, 공공기관이나 중요 국가기관 건축물, 유적지, 사적지, 관광지등에 배치되어 청소를 담당하는 환경미화원들이다. 이들은 주로 건물과 부대시설, 주차장등의 청소를 전담하고 있으며 이들의 유니폼은 매우 화려하고 밝은 색상이며 야광조끼는 착용하지 않는다.

다섯째, 평양시내 각 지역의 일반 주택단지나 아파트단지에 설치된 대형 쓰레기 보관함을 화물트럭을 몰고 주기적으로 찾아가 시민들의 생활 쓰레기를 전문적으로 수거하는 일을 맡고 있다. 화물차량 운전기사와 이를 돕는 환경미화원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들도 유니폼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는다.

여섯째, 시 당국에 소속된 전문적인 환경미화원 외에 평범한 일반 평양시민들도 각 지역마다 조직된 인민반별 담당 청소구역이 정해져 있다. 반별로 집집마다 반드시 의무적으로 참여하여야 하며 자기 집은 물론 정해진 동네 구역을 책임지고 청결을 유지해야한다. 또한 각 직장별, 인민반별로 잔디밭이나 작은 공원이나 녹지 등을 담당구역을 정해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일곱째, 일반 시민들이나 거주 민간인 외에도 특별한 국가행사나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공공사업이 벌어질 경우 군인들이나 학생들도 동원되어 참가한다.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차량들이 다니는 평양시내의 대로변과 거리, 골목 등이 청결하게 유지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일곱 가지를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1. 차도와 인도위에서 빗자루 청소를 하는 도로환경미화원들

손수레를 끌고 이동하면서 차도나 인도위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환경미화 봉사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필자가 만수대의사당과 만수대인민대극장이 있는 큰 사거리를 지날 때 차도 한복판을 유니폼을 입은 환경미화원 여성이 청소 리어카를 몰고 도로를 횡단하는 모습도 가끔 목격했고 인민대학습당 뒤편 차도를 청소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담당구역을 청소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교통법규상 환경미화원들은 홀로 걸어가며 청소를 하거나 리어카를 끌고 차도를 종횡무진 다닐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 아울러 리어카 한 대에 3-4명의 청소요원들이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덕담을 나누며 함께 이동하는 모습들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필자가 개선문을 방문해 구경하는 동안에도 환경미화 요원들이 부지런히 내 주변에서 청소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고 승합차를 타고 시내를 달리던 도중에 고가도로 밑에서 환경미화원들이 청소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또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인도위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의 모습이다. 또한 특수한 지역에 있는 도로는 환경미화원들이 정기적으로 물청소를 하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이들은 모두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밝은 유니폼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었으며 모두 각 평양시 각 구역의 도시미화사업소 소속이며 그곳에서 월급을 지급받는다.

하지만 아파트단지나 주택가의 작은 골목 등은 그곳에 거주하는 인민반이 앞장서 자치적으로 담당제를 만들어 청소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환경미화원들이 관여하지 않는다. 상점과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평소 자기 가게 앞이나 가게 앞 인도를 자발적으로 청소를 해야한다.

   
▲ 평양시내 경사진 인도를 환경미화원들이 청소를 하는 광경. 공사가 방금 끝난 장소라 유난히 먼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네 명의 환경미화원들이 일을 마치고 복귀하는 모습. 리어카 한 대를 모두가 함께 끌며 덕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네 명의 환경미화원 일행 중 한 명이 멀리 휴지가 떨어진 모습을 발견하고 대열을 이탈해 휴지를 줍느라 세 명만 이동하는 광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 인민대학습당 건물 뒤편 차도를 청소도구가 실린 리어카를 끌고 이동 중인 환경미화원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고가도로 밑에서 환경미화원들이 청소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환경미화원들은 인도는 물론 차도에도 상황에 따라 정기적으로 물청소를 실시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청소 도구 없이 관할지역의 인도를 걸으며 휴지를 줍는 환경미화원. 필자와 평양의 청소행정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2. 차도 전용 노면청소기계차 담당미화원들

평양에도 정기적으로 청소차가 도로에 물을 뿌리기도 하는데 그 뒤를 도면 청소기가 따라가며 도로를 청소한다. 최근에는 새로운 대체에너지로 제작한 도로청소기가 운행되고 있다. 특히 필자가 2015년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교파인 정백교회당을 방문하기 위해 인근 도로를 지나다가 노면청소기가 도로를 청소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체 개발한 최신 청소기계가 차도를 청소하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졌다. 알고 보니 낙랑구역 하천시설 사업소가 자체 개발한 기계였는데 태양전지로 작동된다고 했다.

휘발유나 경유 등의 연료를 전혀 쓰지 않고 태양전지로만 움직이다보니 매우 효율적이고 비용도 절감되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매우 독특했다. 이 청소기계차는 마치 삼륜 오토바이와 삼륜 자전거를 개조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운전자의 좌석 위에는 100W 태양열전지판이 설치돼 있었으며 기계 앞쪽에는 세 개의 자동 솔이 설치됐는데 이 솔들을 돌려주는 전동장치가 부착되어있었다. 좌우 양옆에는 크기가 동일한 두 개의 솔이 연신 빙글빙글 돌며 쓰레기를 가운데로 몰아주면 가운데 있는 나머지 솔이 빨려온 쓰레기들을 오물함으로 집어넣는 역할을 하는 매우 단순한 시스템이었다.

청소기 한 대가 1시간 동안 무려 2만㎡의 도로 면적을 청소한다고 하니 청소부의 수고도 많이 덜어줄 수 있고 인력으로 하는 것보다 경제적 실리가 클 뿐만 아니라 기름 연료를 쓰지 않아 공해발생이 전혀 없는 친환경적인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도로관리의 기계화를 실현한 이 청소기들은 앞서 밝혔듯이 태양광 전지판으로 축전지 자전거나 오토바이 형태를 결합해 만든 것이다. 바퀴의 회전 에너지와 전기 에너지를 동력으로 제공받는 청소용 솔이 제 구실을 하여 쓰레기를 빨아들이는 것 일 뿐 특별한 부속이나 장치가 없는 단순한 작동원리에 불과하지만 이용 범위가 매우 넓고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어 매우 호기심이 가는 인기 제품이다.

남한에서는 수도 서울 외에도 워낙 전국적으로 대도시가 많고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이 많다보니 거리 청소를 하거나 쓰레기 청소 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들이 많이 발생한다. 어두운 새벽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청소를 하다 보니 청소차량이나 일반 과속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빈번하며 안전이 담보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평양도 이제는 서울처럼 예외가 아니다. 이제 막 기계화의 시작 단계이며 많은 사고에 노출되어 있어서 철저한 안전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도로전용 청소기계차 미화원들은 평양시 각 구역의 도로시설관리소에 소속되어 있고 월급도 그곳에서 받는다.

   
▲ 태양전지를 에너지로 활용하는 자전거 형태의 노면 청소기계를 운행하는 환경미화원이 잠시 운행을 멈추고 주차를 한 후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오토바이 형태를 갖추고 있는 청소기계차를 운전하는 환경미화원이 광복거리일대를 지나며 부지런히 청소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또 다른 환경미화원이 오토바이 형태를 갖춘 청소기계차를 운행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자전거 형태의 노면 청소기계차들이 도로시설관리소에 나란히 주차된 모습. 태양전지를 에너지로 활용하는 친환경적인 제품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3. 살수차를 운행하는 도로환경미화원들

평양에는 대부분 여름철 위주로 살수차를 운행한다. 워낙 항상 건설 붐이 일어나는 도시이다 보니 차도에 먼지가 그칠 날이 없어 살수차로 도로를 씻거나 태양열에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식혀주기도 한다. 살수차는 중국제가 사용되고 있으며 시 각 구역에 한두 대씩 운행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환경미화원들도 주황색 유니폼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었으며 모두 평양시 각 구역의 도시미화사업소 소속이며 그곳에서 월급을 지급 받는다.

4. 공공기관 건물, 부대시설, 주차장 등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

필자는 참관지를 방문할 때마다 도로교통 환경미화원들이 아닌 일반적인 청소 업무만을 담당하는 환경미화원들을 볼 수 있었다. 금수산 태양궁전, 전승기념관, 류경체육관, 인민대학습당 등 여러 공공기관에 가면 도로교통 환경미화원들보다 더욱 세련된 디자인과 밝은 계열 색상 유니폼을 입고 청소를 하는 모습을 목격할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들이 청소하는 모습은 물론 옹기종기 모여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이들은 공공기관이나 중요 국가기관 건축물, 유적지, 사적지, 관광지등에 배치되어 담당을 맡은 건물과 부대시설, 주차장등의 청소를 전담하는 환경미화원들이며 평양시 미화사업소가 아닌 각자가 청소 일을 하는 해당 기관에 소속돼 있다. 가령 인민대학습당에서 청소를 하면 그곳 소속이며 태양궁전에서 일을 하면 그곳 소속인 셈이다. 이들의 유니폼은 매우 화려하고 밝은 색상이며 야광조끼는 착용하지 않는다.

   
▲ 개선문을 방문해서 둘러보고 있는 필자 주변에 환경미화원이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가 전승기념관을 참관하던 중에 환경미화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바로 인근에는 푸에블로호가 있고 멀리 105층 류경호텔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북 전체 인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참배 장소이자 국제적인 관광 명소가 된 금수산태양궁전 공원에서 잔디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환경미화원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태양궁전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들이 빗자루를 들고 본관 앞 광장을 청소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5. 주택단지와 아파트단지 생활 쓰레기를 수거하는 화물차량 환경미화원들

필자가 목격한 평양의 생활 쓰레기 수거 시스템은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과학적이며 효율적으로 보였다. 평양시내 일반 주택이나 아파트 단지 등의 살림집 단지에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제법 큰 규모의 쓰레기 수거함이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다. 버려진 쓰레기가 어느 정도 수거함에 채워질 무렵이 되면 정해진 요일에 쓰레기 수거 전용 화물차(트럭)가 현장에 도착한다. 쓰레기 수거함은 대도시의 경우 각 아파트단지나 주택단지마다 한 개씩 설치되어 있고 농어촌은 반경 1km 정도에 한 개 씩 있다고 한다. 규격과 모양새는 전국이 모두 동일한 구조인데 대부분 시멘트로 만든 축조물이다. 이 시멘트 축조물 한 가운데로 쓰레기 화물트럭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고 양옆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흡사 개선문을 닮았다고도 말한다.

거주자가 쓰레기를 버리려면 계단으로 올라가 가로 5m, 세로 5m 크기의 쓰레기 홈통에 쏟아 붓는다. 어느 정도 쓰레기가 찰 때쯤 되면 시군 소속 화물 청소차가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온다. 쓰레기 화물트럭이 수거함 아래에 정확히 멈추면 수거원이 조심스럽고 능숙한 솜씨로 수거함 바닥을 열어 제친다. 그러면 쓰레기들이 화물차 안으로 정확하게 낙하된다. 안전하게 탑재된 것이 확인되면 화물차는 쓰레기를 싣고 곧 바로 떠난다. 수거가 끝난 후 쓰레기통 청소와 주변 청소는 인민반 안에서 순번을 정해서 맡고 있다.

보통 쓰레기 수거함은 콘크리트 계단 두 개 사이에 매달려 있고 거주민들은 계단을 올라가 쓰레기를 수거함에 넣는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이런 방법은 약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수거함 바닥에 불량 볼트가 있거나 고장이 나서 작동이 잘 안 되는 경우에는 모아 놓은 쓰레기 더미가 한 순간에 쏟아져 나와 주택가 거리를 뒤덮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실제로 그런 일을 발생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이 수거함 시설은 언제나 깨끗하고 깔끔하게 유지되는 듯 했다. 공동 쓰레기 수거함 외에 일반 가정집에서는 가족들이 사용하는 스레기통들은 대개 플라스틱이나 널빤지 나무 등으로 제작한 것을 사용하고 있으며 아파트에서는 철제 쓰레기통이나 양동이를 활용해 사용한다.

최근에 건축한 창전거리, 은하과학자거리 등의 고층아파트에서는 통로마다 쓰레기 투하 입구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고 새로운 주택 단지들도 쓰레기 수거함이 몇 집에 한 개씩 편리한 구조물로 설치되어 있다. 쓰레기 매립장은 별도로 있으나 대개 도시주변의 저지대를 선정해 1-2m 두께로 쓰레기로 메운 다음 흙을 덮어 공장 부지나 공공건물 부지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평양에는 연탄재 쓰레기가 많아 매립공사가 보다 수월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쓰레기 재활용도가 높고 각 지역 인민반별로 재활용품을 수집하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릴 물건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가 않다고 한다.

   
▲ 평양시내 각 건물 입구마다 비치된 쓰레기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각 상점이나 식당 등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게 앞을 철저하게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6. 각 인민반별로 집주변과 거리 환경미화를 책임지는 시민들

특권이 있는 평양의 시민들은 그만큼 의무와 책임도 뒤 따르기 마련이다. 지방에 비해 훨씬 많은 문화생활 혜택이 보장되는 평양에 거주한다는 것은 공민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들도 많다. 북을 방문하는 대다수의 외국인들과 남한사람들, 해외동포들은 평양이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증언한다. 이렇게 평가받기까지는 일반 평양시민들의 눈물겨운 노력들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평양시에는 도로를 관리하는 미화사업소가 별도로 있지만 예로부터 인민반별로 혹은 구역별로 담당과 순번을 만들어 매일 아침 마다 청소를 진행한다. 평범한 일반 시민들도 각 지역마다 인민반별로 청소구역이 정해져 있어 집집마다 반드시 참여하여 자기 집과 동네를 책임지고 청결하게 해야 한다. 보통은 새벽에 모여 빗자루를 들고 지저분한 곳들 위주로 쓸어내는 것이 보통이다.

평양시 각 구역의 인민반장들은 새벽 5시가 되면 주민들에게 담당구역의 청소를 하자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깨운다. 특히 해마다 봄이 돌아오는 3-4월이 시작되면서 도로담당 청소 구역을 만들어 도급제 청소를 진행했다. 이 시기는 단순하게 빗자루로 쓸고 닦는 청소가 아니다. 때로는 새벽이 아닌 한밤중에도 물걸레로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를 방청소 하듯해야만 할 때도 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빨리 청소를 나오라고 확인해주거나 독촉을 하기도 한다.

거리 청소와 집 청소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나 이와는 별도로 큰 국가적인 행사나 경축일이 돌아오면 대대적으로 청소를 실시한다. 특히 외국인들이 참가하는 행사나 남측에서 손님들이 평양을 방문하는 날에는 더욱 신경을 쓴다. 또한 평양에는 기본적으로 매년 최소 네 번은 대대적인 청소를 벌인다. 2.16(광명절), 4.15(태양절), 9.9(공화국 창건일), 10.10(당 창건기념일) 등이다. 이때는 국제적인 큰 행사가 없어도 거리를 깨끗하게 정비해야 하며 손님 맞을 준비도 해야 한다. 이와는 별도로 국제적인 행사가 있거나 남한 대표단이 대규모로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면 오래 전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예를 들어 남조선 대표단이 대동강역 주변을 지나 통일거리로 통과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밤 12시라도 관할 주민들을 비상소집해서 양각 도다리와 대동강 역 주변 도로를 깨끗하게 쓸고 닦는데 도로 연석은 비눗물로 닦는 정도이다. 특정지역의 도로 연석은 찰떡을 굴려 먹을 수 있을 정도 혹은 떨어진 껌을 다시 씹어도 괜찮을 정도로 깔끔하다. 깨끗한 걸레로 비누와 물로 자기가 사는 집 방안처럼 깨끗하게 닦고 검열을 받아야한다.

특히 남북정상회담(북남수뇌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될 경우에는 초비상이 걸린다. 남측 대통령이 참가하게 될 환영 행사장 주변은 호위총국의 지휘로 철통같은 경계 보안이 이뤄진다. 육로 방문일 경우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포함해 방북 경로에 대한 경계가 시작되며 차량이 통과하는 주변 지역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펼쳐진다.

또한 환영행사가 펼쳐질 장소와 부근은 크레인까지 동원돼 새로 단장하고 평양 시민들이 각 구역별로 인민반별로 대거 동원돼 시내 주요 거리 청소도 모두 마쳐야한다. 이런 경우에는 인민반별로 청소구역이 정해져 있어 누구도 예외 없이 동원돼야 한다. 중앙당 가족이나 보위부가족 등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이거나 빠질 수가 없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 기간에는 보통 아침 5시에 인민반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깨운다. 모여든 인민반원들은 주변거리는 물론 담당구역을 돌며 쓸고 닦는 것은 물론 가로수 아래 부분에 횟가루(구운 석회석가루)를 칠한다.

평양의 대표적 대동교나 옥류교의 다리 난간과 철제 난간들을 물걸레로 닦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군중시위나 퍼레이드를 할 경우에는 김일성 광장의 바닥을 중심가에 거주하는 여며어리, 창전거리 아파트 거주민들이 총동원돼 쓸고 닦고 물청소까지 마쳐야 하며 행사직전에는 먼지 한 점 없는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지만 자기가 사는 집주변과 마을을 깨끗이 한다는 보람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또 오랫동안 마을주민들이 함께 모여 일을 하다보면 이웃 간에 정도 쌓이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아침 7시가 되면 직장인들은 출근하고, 직업이 없는 주부와 노인 등 부양가족들은 낮에도 청소를 계속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청소사업에 잘 나오지 않는 세대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직장에 통보해 당 위원회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며 평양시민에게 공급되는 특혜에서 제외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누적되면 자칫 평양 추방령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평양시내에서 가장 변화된 모습을 꼽으라고 한다면 길거리마다 조성된 푸른 잔디밭이다. 평양 버드나무거리 외에도 시내 곳곳에 수많은 잔디밭이 정원처럼 가꿔지고 펼쳐졌다. 잔디가 푸르싱싱하게 잘 자란 거리도 있었고, 뿌려놓은 잔디 씨가 햇볕에 마르지 않게 비닐막을 덮어놓거나 물을 준다거나 잡초를 뽑는 일등은 모두 각 직장별, 인민반별로 잔디밭 담당구역을 정하여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필자가 거리를 지날 때 잔디밭에 물을 주는 살수차도 보였고, 커다란 비닐물통이 실린 손수레도 보았으며 양동이와 물조리개로 물을 주거나 호스로 잔디밭에 물을 뿌리는 주민들도 보였다. 이처럼 잔디밭 가꾸기와 녹지화, 공원화 작업에도 인민반별로 조직된 일반 시민들의 참여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7.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공공사업은 군인들과 학생들도 참가한다

평양시 산하 각 구역 도시미화사업소가 하는 사업들은 무수히 많다. 도로 환경미화원, 도로 청소기운행 전문 환경미화원, 쓰레기 화물차 운전 환경미화원, 공공기관 건물과 시설물들을 담당하는 환경미화원 등 수많은 분야를 관할해야하며 그 외에도 각종 녹지사업은 물론 납골당운영까지 하고 있다. 평양시는 1998년부터 각 구역에 유골보관실을 만들기 시작해 현재는 평양 전 구역에 골고루 설치됐다. 이처럼 미화사업소의 업무가 방대하다 보니 전문적인 미화원들만으로는 도저히 관리가 불가능하다. 자연적으로 일반 평양 시민들이 도시환경미화에 필수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특히 한 겨울 제설작업은 각 구간별로 인빈반 별로 인민들에게 할당되나 때로는 엄청난 폭설이 내리면 군인들도 동원된다.

이와는 별도로 특별한 국가행사나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공공사업이 벌어질 경우 군인들이 대거 동원되어 참가한다. 대대적인 도로 보수작업이나 하수구 사업, 궤도전차 공사, 아파트와 빌딩공사 등에는 인민군 군인들이 대거 동원되어 작업을 해왔다. 또한 소학교와 고등중학교 학생들 혹은 대학생들도 나름대로 만수대 언덕 기념탑을 청소하거나 여러 가지 공공 작업에 참가하여 임무를 마쳐야 하는 경우도 있다.

   
▲ 김일성광장을 청소하는 담당 인민반 청소담당자. 청소를 하는 여성은 전문적인 환경미화요원이 아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청소기계로 도로 주변의 광장을 청소하는 인민반 청소담당자. 이 남성도 전문적인 환경미화원이 아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인민반 주민들이 차도 연석을 청소하는 모습.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지 찰떡을 굴려 먹어도 될 정도라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자신들의 가게 앞을 물청소하는 시민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인민반 주민들이 차도 연석을 청소하는 모습.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를 하던지 씹었던 껌을 버린후 다시 입에 넣어도 될 정도라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여성 교통보안원이 차도에 떨어진 쓰레기를 쓸어 담고 있다. 모든 시민들이 이처럼 애착을 갖고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곳이 평양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한겨울 폭설이 내리면 각 구역 인빈반별로 제설작업을 한다. 때로는 엄청난 폭설이 내린 경우에는 군인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지역 인민반원들이 인도에 조성된 잔디밭 녹지를 손질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보통강변에 사는 주민들이 차도 주변과 도로 연석 등을 물청소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만수대언덕의 대형 기념탑을 청소하는 당번날이 돌아오자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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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통신 ,조ㆍ미 진실 싸움 조선 진실, 미국 거짓

AP 통신 ,조ㆍ미 진실 싸움 조선 진실, 미국 거짓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9/03/03 [06:50]  최종편집: ⓒ 자주시보
 
 

AP 통신 ,조ㆍ미  결렬 진실 싸움  조선이 진실 미국이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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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웰남 하노이 조미 정상회담이 결렬 되자 그 이유를 두고 
조미 양국이 입장차를 드러내며 진실 공방으로 이어졌으나 결과는 조선의 완승으로 귀결됐다.

조미 정상회담 결렬 원인에 대한 진실  싸움은 상식에 근거하면 누구나 미국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일 수 있지만 미국 당국자들은 뻔뻔하게 세계에 대고  조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본지에서도 미국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2일자 통일까치소리에 보도한바 있다.

세계 유수의 언론인 AP통신은 지난 2일 "조선이 모든 제재 해제 원한 것 아니다"라며 이를 확인하는 기사를 내보내며 일명 '진실 게임 '으로 불렸던 사안에 대해 조선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AP통신은 2일(현지시간) 제2차 조미정상회담 결렬을 둘러싼 양국의 진실 게임이 이어지고 있다며,  조선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8일 하노이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후 기자들의 질문에 "조선은 완전한 제재 해제를 원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며 "회담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리용호 외무상은 조선이 요구한 것은 전면적인 제재해제가 아니고, 일부 해제였다고 밝혔다.  조선측은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는 대신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제재 항목의 해제를 원했던  것이다.

최선희 조선 외무성 부상 역시 조선은 "영변을 다 내놓는다고 했다"며 조선측의 요구 내용을 분명히 했다.

AP통신은  또, 조선이 금속·광물·사치품·수산물·석탄 수출·정제유 수입·원유 수입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제재를 받고 있다면서, 이 상황에서도 조선측이 '민생'에 주목한 것은 주요한 협상과제로 봐야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선은 군수 관련 제재 해제를 요구하지 않았다"며 "조선은 핵무기를 자기방어의 수단이라고 주장하지만, 당분간은 핵미사일과 직접 관련 있는 제재들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피력했다.

조산측이 제재 해제와 관련해 강력한 요청을 한 것은 사실이나 트럼프가 주장한 것과 같이 모든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조선의 매체들은 조미정상회담이 미국 때문에 결렬 됐음에도 이와 관련해 "상호 존중과 신뢰를 강화시키고, 양국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진전되는 새로운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 그 진정성에 세계는 경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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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포토] 환한 미소로 '안녕'... 베트남 떠난 김정은

 19.03.02 20:44l최종 업데이트 19.03.02 20:44l이희훈(leeheehoon)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자신이 타고 온 전용열차를 이용해 돌아갔다.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길게 늘어서 김정은 위원장을 기다렸다. 김 위원장이 들어오자 인파는 인공기와 베트남 국기를 흔들며 그를 반겼다. 

김정은 위원장은 수차례 주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베트남 정부 관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열차가 있는 승강장으로 향했다. 승강장에서도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전용칸에 올라 다시 환송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고 두 손을 모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북미회담이 결렬됐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베트남을 떠났다. 그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베트남 국민들에게는 환한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이희훈
'고맙습니다' 환송인파에 감사 인사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 '고맙습니다' 환송인파에 감사 인사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를 향해 인사를 하고 손을 내리고 있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마친 김정은 위원장의 손.ⓒ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 [오마이포토] ⓒ 이희훈
 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긴 전 환송 인파에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일행이 떠난 뒤의 동당역 승강장에 인공기와 베트남기가 함께 날리고 있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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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협, 조선인 유골 74위 봉환 추모식 뒤 제주에 안치

김홍걸 의장, 5월 평양서 강제동원 피해문제 토론회 개최할 것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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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02  20: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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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화협은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 모셔진 조선인 유골 74위를 봉환해 1일 오후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추모식을 진행했다. 유골은 2일 제주 선운정사에 안치되었다. [사진-조천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대표의장 김홍걸)는 일본 오사카의 통국사에 모셔진 조선인 유골 74위(해군 군속 4위, 노무자 70위)를 봉환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추모식을 진행했다.

추모식은 남측 민화협과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일제강점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공동 주최하고 강제동원진상규명을 위한 공동위원회가 주관하는 제1차 조선인 유골봉환 남북공동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의 혼, 아리랑의 귀향-동포여, 나를 위해 울어주오'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번 추모식에서는 고향을 찾아갈 길 없는 이들을 위해 이호연 명창의 이별가와 긴 아리랑에 맞추어 유골을 모신 청년들이 장내를 도는 상례(喪禮) 행진을 진행했다.

앞서 조선인 유골 74위는 27일 오후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서 팔십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예식을 거쳐 28일 유골봉환단 25명과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고향에 도착하여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앞 잔디광장에서 노제를 거행했다.

   
▲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은 3.1 100주년을 맞이하여 남북이 함께 한 첫 유골봉환 사업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관련 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사진-조천현]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은 추모사에서 "일제 강점하 800만명 이상이 강제동원되었으나 많게는 14만명에 이르는 분들이 사망하셨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남과 북, 남·북·일 사이의 화해와 협력은 어려울 것"이라고 남북 민화협이 유골봉환에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또 "이 운동은 일본과의 갈등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인도주의적 사업을 남북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종교인이 함께 함으로써 한일, 북일 관계 개선에도 기여하고 과거청산을 통해 밝은 미래로 함께 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이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남북이 함께한 조선인 유골봉환 남북공동행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최종 안치 장소는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되는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오는 5월 평양에서 강제동원 피해 문제에 대한 남북 토론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식을 마친 72위의 유골은 2일 오전 제주도 선운정사에 안치되었다.

3.1운동 100주년 공동행사가 취소되어 이날 추모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는 보내온 추모사에서 "지난 세기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죽음의 고역장에서 숨진 조선인 희생자들은 우리 민족에게 가해온 일제의 반인륜적 범죄를 만천하에 폭로하고 있다"며 "조국에로 귀향하는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경건히추모한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죄는 커녕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재침기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하면서 "조선인강제동원희생자들의 유해송환은 일제의 특대형 범죄를 추호도 용서치 않으려는 우리 민족의 단호한 대일 결산의지를 보여주고 온 겨레를 정의의 반일공동투쟁에로 힘 있게 추동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왼쪽부터 김용덕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의 추모사를 대독한 정우창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단장, 북측 민화협에서 보내 온 추모사를 대독한 이영동 민화협 상임집행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용덕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은 일본 정부의 무성의와 비인도적인 처사는 물론 우리 정보도 유골봉환에 소극적이었던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하고는 "일본 오사카 근교의 통국사 스님들이 유해를 수습하여 사찰에 모셔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며, 옛 임진왜란 때 희생당한 귀무덤과 코무덤의 영령 뿐만 아니라 제주 4.3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도 지내고 있는 통국사에 특별히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전했다.

다만 "유족들에게 돌아가신 경위나 그간의 경과를 상세히 설명하고 자료를 제공해는 것이 마땅한 절차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며 "유골봉환 과정에 개별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고 단체로 모시게 된 것을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앞으로 추모공원을 만들어 영령께서 편히 쉬시고, 아직도 일본이나 다른 곳에 머돌고 있는 유해도 봉환하여 모시는 사업을 곧 시작하겠다. 더욱이 북에 고향을 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남북이 공동으로 유해 봉환을 이루게 되면 영령이나마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인도적인 문제들로부터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단서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남·북·일 조선인유해봉환추진위원회 일본대표인 곤노 유리 재단법인 21세기 일본위원회 이사장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자제인 김홍걸 의장이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조선인 유골봉환을 제안해 함께 하게 됐다고 함녀서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나 정치적 문제는 말할 입장에 있지 않지만, 단지 한일 간에 미래지향적인 협력과 발전이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은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과 민화협 관계자들, 김용덕 이사장, 곤노 유리 재단법인 21세기 일본위원회 이사장, 그리고 유괄봉환에 큰 역할을 한 일본 원효종 화기산 통국사 주지인 무애 스님을 비롯한 봉환단 등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 이날 추모식은 배우 박성웅 씨의 사회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74위 유골을 모신 청년들이 장내를 도는 상례 해진을 하고 있다.  [사진-조천현]
   
▲ 유골함을 싸고 있는 한반도기. [사진-조천현]
   
▲ 추모의 글을 남기고 있는 추모객들. [사진-조천현]
   
▲ 추모식 참가자들이 헌화, 참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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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가난’, 왜 말하지 못했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가난’, 왜 말하지 못했나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입력 : 2019.03.02 10:50:00 수정 : 2019.03.02 11:47:24
 
이옥선 할머니(93)가 경기도 광주 퇴촌면에 있는 ‘나눔의 집’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이옥선 할머니(93)가 경기도 광주 퇴촌면에 있는 ‘나눔의 집’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경제적 어려움 등 다양한 피해의 그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부족
 

강일출 할머니(91)는 치매를 앓고 있다. 불과 한두 시간 전 일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인터뷰를 하고도 기자를 향해 “저 선생은 누구야?”라고 주변에 물었다. 하지만 오래전의 기억은 또렷하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일제강점기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후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는 2001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에 나섰다.

강 할머니는 “우리 집은 경북 상주야. 큰길가 집이었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태평양전쟁이 나기 전 강 할머니는 넉넉한 집에서 자랐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서 다 잃었다. 물을 길러 갔다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중국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돌아갈 돈이 없어 중국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중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1993년에 제정된 ‘생활안정지원법’ 

강 할머니는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도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강 할머니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귀향>을 350만명이 봤다는 학예사의 말에 그는 “그래요? 그럼 나한테 돈을 좀 주지. 선생, (나눔의 집) 사무실 가서 말 좀 해줘”라고 했다. 가난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강 할머니는 젊은 시절 꾸미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지금도 외출할 때면 반지를 4개씩 끼고 다닌다고 했다.

 

지난 2월 27일과 28일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을 만났다.

이옥선 할머니(93)는 손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입도 오물거린다. 이 할머니는 “손은 괜찮은데 입 때문에 신경이 쓰여요. 사람들이 할머니 혼자 맛있는 거 먹는다고 흉볼까봐”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눔의 집에서 가장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15살에 식모살이를 갔고 거기에서 일본군에 끌려갔다. 그도 강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돈이 없어 고향으로 갈 수 없었다. 돈이 있었다고 해도 돌아가지 못했을지 모른다. 가족이 그립지 않았냐는 질문에 “왜 그립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위안부 간판을 붙이고 갈 수가 없잖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해방이 되어도 이 할머니가 기댈 곳은 없었다. 할머니는 이 동네 저 동네 밥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정착했다. 남편은 이미 아이가 둘이었다. 이 할머니는 “밥 빌어먹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서 좋은 남자를 만나겠어요”라고 했다. 슬하에 아이는 없다. 할머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다. 

이 할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인 2000년 6월 1일 나눔의 집에 왔다. 50여년 만에 형제자매를 찾아봤지만 모두 세상을 떴다. 이 할머니는 “나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도 여기는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 모르고, 배고픈 줄 모르고 사니까 이게 행복이에요”라고 말했다.
 

후원금과 위로금을 둘러싼 논란 

1993년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고발한 지 2년 만이다. 위원회 심사를 통해 피해자로 인정받으면 정착금과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생활에 어려움이 없는 피해자들은 크게 역사의식이 있지 않고서야 굳이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거주시설 나눔의 집이 1992년 서울 서교동에 문을 열었을 때 신청자가 20명이 넘었다. 당시 나눔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6명이 전부였다. 이 관계자는 “가족에게 돌아가거나 결혼을 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았다. 사는 게 막막하니까 그렇게 신청했던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위안소로 끌려간 피해자들은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각자 밥을 다 따로 해먹었다. 개인 공간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도 강했다. 할머니마다 개인 ‘소쿠리’가 있어 후원물품은 반드시 공평하게 분배돼야 했다. 

2000년대에는 ‘무궁화 할머니회’가 논란이 됐다. 2008년 사망한 심모 할머니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무궁화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나 나눔의 집과 갈등을 빚었다. 그들은 “무궁화회 33명만 진짜 피해자”라며 “후원금을 시민단체가 아닌 피해자 개인에게 달라”고 주장했고, 수요집회 맞은편에서 또 다른 수요집회를 열기도 했다. 

피해자 일부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1995년)과 ‘화해치유재단’(2015) 위로금 등을 받았던 이유도 이런 상황과 맥이 닿아 있다. 특히 가족이 있는 경우, 가족들의 의사가 많이 작용했다. 2015년 당시 생존자 46명 중 34명이 받아갔는데 이 중 피해자 자필서명이 있는 확인증은 7개에 불과했고 대부분 보호자가 대리수령했다. 

그렇다고 가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는 어렵다. 대물림된 가난과 피해의식 때문이다.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자녀들 중 ‘내가 이렇게 사는 건 엄마 때문이다. 엄마가 위안부여서 내가 학교를 제대로 못다니고 직장생활도 못했다. 엄마가 위안부여서 내가 이혼을 했다’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언론도 관심있게 보지 않았다.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부각될 경우, 일본 정부가 이용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 일본 정부는 ‘국민기금’과 ‘위로금’ 등 명목으로 돈을 건넨 뒤 자국과 해외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안 소장은 “일본 정부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가장 약한 고리를 잘 알았다. 어린 시절 끌려가 모진 일을 당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라며 “그걸 알기에 일본 정부는 1995년 국민기금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20년이 지나 또 10억 엔을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눔의집의 고 김군자 할머니의 방. 김 할머니가 2017년 사망한 이후, 방은 비어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나눔의집의 고 김군자 할머니의 방. 김 할머니가 2017년 사망한 이후, 방은 비어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위안부 활동가들은 한국 사회의 폐쇄성을 또 다른 이유로 꼽았다. 우리 사회가 정해둔 ‘피해자의 틀’ 안에서 벗어나면 지지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2018년 미투에서도 피해자다움이 언급됐다. 여기서 벗어나면 돈을 노리는 ‘꽃뱀’이라고 했다. 1990년대는 훨씬 심했다. 피해자를 ‘매춘부’라고들 했다”고 말했다. 

정대협에서 활동했던 ㄱ씨는 “피해 양상이나 이후 입장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피해만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쉽다”고 말했다. 그 외의 욕망이나 욕구, 이야기는 소거된다는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고 나선 지 28년이 지났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이 단선적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가녀린 ‘소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4년 사이 생존자 절반으로 줄어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 위안부 연구센터 연구위원은 “위안부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전쟁사와 동아시아사는 물론이고 여성사도 알아야 하고 식민지에 대한 감각도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려는 노력이 학계나 언론에서 부족했다. 그러니 단선적으로 쓰여질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연구위원은 이어 “피해자는 듣는 사람의 수준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며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할머니들이 말했지만 우리가 제대로 못들은 부분이 있고, 할머니들이 말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해 말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고, 듣고, 기록으로 남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피해자로 등록된 할머니 중 생존자는 23명에 불과하고 평균 나이는 91세다. 2015년 생존자는 46명이었지만 4년 사이 절반으로 준 것이다.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할머니들도 이제는 건강상의 이유로 증언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현재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는 할머니 여섯 분이 거주한다. 이 중 세 분은 집중치료실에 있거나 누워만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이 할머니는 “다 죽고 드러누워 있어서 기자가 와도 말할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정신도 지쳐간다. 이 할머니는 “이제는 기자도 만나기 싫어요. 수천 명의 기자를 만났는데 효력이 하나도 없어요”라며 “내가 15살에 가서 지금 93살이에요. 이 정도 참았으면 잘 참았지”라고 말했다. 고 김복동 할머니도 생전에 “끌려갔다 온 지 71년이 되고 신고한 지 26년이 넘고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이래 오래… 신고도 안 했제!”라고 말했다. 

치매에 걸린 강 할머니는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이 누워 있는 상황이 못마땅한지 혹은 제대로 알지 못해서인지 “지금 대한민국이 불바다가 될지도 모르는데 저 할머니들은 천지도 모르고 누워만 있어. 역사문제를 토론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다”고 답답해했다.

관계자들은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 소장은 “20년 이상 운동을 해온 우리도 책임감을 느끼지만 그동안 정부에서도 한 게 없다. 할머니들의 역사를 남기는 문제와 외교적인 측면 모두에서 일관된 기조 없이 오락가락하다 시간만 보냈다”고 비판했다.

박 연구위원은 “열 번째 단계를 위해서는 앞 단계들이 필요하다. 위안부 연구가 그렇다”며 “하지만 첫 번째, 두 번째 단계에서 바로 열 번째 단계로 가려고 하니까 다양한 피해의 상황 중에서도 빼도 박도 못할 전시(戰時) 성폭력만 놓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를 전공으로 삼고 공부하는 연구자들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연구자는 전략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그는 얼마 전 문희상 국회의장 발언이 일본 내에서 크게 논란이 된 것을 두고 “우리가 듣기에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일본 사회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며 “무작정 사죄를 말할 것이 아니라 양국이 최대한 할 수 있는 것과 또 절대로 할 수 없는 것 등을 면밀하게 살펴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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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3021050001&code=940100#csidxe29ca20cef459ae9b0bd0a0869fef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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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년' 북한은 왜 조용할까?

"김일성 父 김형직이 3.1운동 지도…'수령 영도' 없어 실패한 운동"
2019.03.01 11:50:48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회담 장소였던 베트남 하노이에서 100주년 3.1절을 맞으면서 '북한의 3.1절'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과 만찬 등 베트남 공식 친선방문 관련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며, 3.1절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공개 언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1948년 정권 수립 이후부터 3.1운동을 '3.1 인민봉기'로 불렀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항쟁으로 기리기는 했지만 그 중요성은 한국에서와는 크게 달랐다. 

한국은 국체(國體)의 요강을 밝힌 헌법 전문(前文)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3.1운동은 대한민국 정부 정통성의 뿌리다. 때문에 매년 국가 수반인 대통령이 경축사를 발표하고, 각계 인사를 초청해 성대한 경축식을 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3.1운동에 대해 "자주 독립을 염원한, 식민지 통치 하에서 쌓이고 맺힌 인민의 원한과 분노의 폭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폭발한 우리 인민의 전민족적 반일봉기"(북한 <조선대백과사전>, 2000년 발간)라고 규정하지만, 고(故) 김일성 주석의 무장 항일투쟁을 북한 정권 정통성의 기반으로 내세우는 만큼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3.1절을 중요하게 기념하지는 않는다.  

북한에서 3.1절은 기념일도 공휴일도 아니며, 정권 수립 이래 지난 71년간 3.1절 기념행사에 북한 최고 지도자가 참석한 경우도 없다.  

1980~90년대까지는 평양 시내에서 매년 '3.1 인민봉기 기념보고회' 등의 행사를 열었다는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가 있었지만 이후로는 평양 시민들이 '중앙계급교양관' 전시장을 찾아 3.1운동의 의의를 되새겼다는 등의 보도가 간간이 있는 정도였다. 

1992년 73주년 3.1절에는 평양에서 '3.1 인민봉기 73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가 열렸고 강희원 당시 북한 정무원(현 내각) 부총리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96년과 1997년에도 각각 77돌, 78돌 맞이 '평양시 보고회'가 열렸으며 96년 행사에는 양형섭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이 참석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3.1 인민봉기 90돌 기념 평양시보고회'가 있었다는 소식이 보도됐는데, 이는 1999년 80돌 기념행사에 이어 10년 만에 열린 것으로 전해진다. 1999년과 2009년 행사에도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고, 특히 2009년 행사에서는 그가 직접 행사 보고를 했다.  

2018년 3.1절에는 '3.1 인민봉기 99돌 기념행사'가 평양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교단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으나 행사 주최는 '조선종교인협의회'였고, 3.1절 자체의 의미를 기리는 성격보다는 남북관계 완화 국면에서 남측 종교단체들이 보낸 축전을 공개 소개하는 장으로서의 의미가 더 주목받았다.  

당시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보면, 99돌 기념행사에는 강지영 조선종교협의회장과 북한 종교인들이 참석했을 뿐 노동당이나 내각 인사들은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강지영 회장은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북한이 남북 당국회담 수석대표로 내세운 인물로, 당시 직함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이었다. 북한은 조평통 서기국장이 한국의 장관급에 해당한다고 주장했고, 한국은 차관급에 불과하다고 맞서며 결국 회담이 무산됐던 적이 있다. 

북한의 주장대로 강지영이 장관급 인사라 한들, 그가 주최한 작년의 3.1절 기념행사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한국의 3.1절 경축식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작은 행사인 셈이다. 1990년대나 90주년 기념(2009년) 행사도 부총리급(양형섭)이 주재했다. 

한편 작년 기념행사에서 보고를 맡은 북한의 윤정호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부위원장은 "반일 민족해방운동사에 빛나는 장을 아로새긴 3.1 인민봉기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의 야만적 식민지 통치에 항거한 거족적 반일애국항쟁이었다"며 "일제 식민지 통치 기반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3.1 인민봉기를 통해 조선 민족은 결코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 정신이 강한 민족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정신을 지닌 민족이라는것을 온 세상에 과시했다"고 언급했다. 

윤 부위원장은 그러면서 "3.1 인민봉기가 있은 때로부터 한 세기가 되어 오지만 조선 민족은 아직도 외세에 의해 분열돼 완전한 자주권을 실현하지 못하고있다"며 "지금이야말로 온 겨레가 3.1 인민봉기자들처럼 분연히 떨쳐일어나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야 할 때다. 조선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바라지 않는 미국과 일본, 그에 추종하는 민족 내 보수세력들이 제 아무리 북남관계 개선의 앞길을 가로막으려고 발악해도 민족의 통일 염원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북한 정권의 공식 입장을 되풀이해 강조했다. 

기념행사 소식이 없었던 해에도 북한은 매년 3.1절에는 <노동신문> 등 관영 매체를 통해 '남조선(한국)의 민족적 자주권은 여전히 유린되고 있고,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외세를 배격하고 통일을 이루자'는 취지의 주장을 꾸준히 내놨었다.  

올해 3.1절에는 '3.1 인민봉기 100돌 기념 사회과학부문 토론회'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다는 <노동신문> 보도 외에는 관련 행사 등 소식이 없었다. 

북한은 왜 3.1절을 크게 기념하지 않나 

3.1운동을 보는 북한 지도층의 관점은 '위대했지만 실패한 투쟁'이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북한은 3.1운동을 김일성 가계의 우상화·신격화 작업에 동원하기도 했다. 

북한은 1950~70년대까지는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의 서울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해 발생했다"고 공식 문서(리나영 1958 <조선민족해방투쟁사>, 교육도서출판사 1971 <조선력사> 등)에서 기술하고 있으나, 1980년대부터는 서울이 아닌 자신들의 수도 평양에서 3.1운동이 발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올해 <노동신문>은 3.1절 100주년 '사회과학부문 토론회'에서 나온 북측 학자들의 발표 내용을 보도했는데, '사회과학원 연구사 후보원사 교수 박사'라는 직함의 조희승은 "3.1 인민봉기에서 평양의 선봉적 역할은 무엇보다 전국적으로 처음으로 투쟁의 봉화를 든 데서 찾아볼 수 있다"며 "반일 애국정신이 매우 투철했던 평양 사람들이 제일 먼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뒤이어 격렬한 반일 시위투쟁을 벌였다", "평양의 선봉적 역할은 평양을 중심으로 봉기가 급속히 파급되고 평양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봉기의 불씨마냥 각지로 달려가 투쟁의 불을 단(지핀) 사실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평양숭실중학교 학생들의 주동적 핵심적 역할에 의해 평양에서 시작된 독립시위운동의 불길이 서북부지역으로 번졌으며, 평양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남부지역까지 달려가 3.1 인민봉기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적극 기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1990년 평양에서 열린 '3.1 인민봉기 71돌 기념보고회'에서는 3.1운동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에 의해 주도됐다는 주장이 공식 발표됐다.  

1990년 3월 1일자 <노동신문>도 사설에서 "3.1 인민봉기는 반일민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의 지도 아래 벌어진 평양시민들의 대중적 반일시위 투쟁을 도화선으로 하여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김형직은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반면 북한은 최근 문재인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식 서적에서 기술하지 않다가 1999년 펴낸 <조선대백과사전>에서 "3.1 인민봉기 때 일제를 반대해 용감하게 싸운 여학생"으로 소개하고 있다. 

북한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리기는커녕 3.1운동을 "혁명적 당의 지도"가 없어 결과적으로 실패한 운동으로 보고 있고, 특히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그 이후의 친일 행적 등에 초점을 두어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배신행동이었으며 일제 강점자들에 대한 비굴한 투항 행위"를 저지른 이들로 규정(1972 <조선전사>, 1984 <근대조선력사> 등), 비난하고 있다.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인민이 피흘리고 싸울 때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미국에 대한 애국운동만 진행했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나라의 독립을 선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타산(계산)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아양을 떨면서 원조를 구걸했다"(조선전사)라거나 "자산계급 출신의 일부 부르주아 민족운동분자들이 망명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표방하면서 사대주의적인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했다"(조선력사)라고 폄하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3.1운동이나 임시정부는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실패한 운동이었고, 3.1운동 이후 김일성 등의 무장유격투쟁이 실질적 독립을 이룬 바탕이라는 게 북한의 공식 입장인 셈이다. 작년 3.1절 <노동신문> 사설은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중략) 일제의 중세기적인 무단통치 하에서 상갓집 개만도 못한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오던 겨레의 쌓이고 쌓인 원한과 분노는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봉기자들은 '조선 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 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치며 일제 군경의 총칼 탄압에 굴함 없이 맞서 싸웠다. 봉기는 전국적 판도로 번져 갔으며 해외에 있는 조선 동포들에게까지 파급됐다. 수백만 군중이 나라를 찾으려는 공통된 지향을 안고 항쟁의 거리로 달려나왔던 3.1 인민봉기는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겼다. 일제 침략자들을 전률케 한 3.1 인민봉기는 죽을지언정 외세의 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조선 민족의 불굴의 기개를 높이 떨친 거족적인 반일애국항쟁이었다.

그러나 피타는 절규만으로써는 결코 조선 독립의 염원을 성취할수 없었다. 3.1 인민봉기는, 인민대중이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자면 반드시 탁월한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 하며 발톱까지 무장한 침략자들과는 무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피의 교훈을 새겨주었다. 자주와 독립, 강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은 백두산 절세위인들(김일성 일가)에 의해 빛나게 실현되게 되었다. 우리 인민이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조국 해방의 역사적위업을 성취할수 있었던 것은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시며 백전백승의(…중략) 김일성 동지를 높이 모셨기 때문이다." 

올해 <노동신문>에 보도된 '사회과학부문 토론회'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되풀이됐다. 박학철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박사)는 "3.1 인민봉기가 민족사에 남긴 교훈은 첫째로 민족해방 운동은 탁월한 수령의 영도, 혁명적 당의 지도가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거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세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넷째로 무장한 원수들과는 조직적 무장투쟁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다만 북한 중등교육(고등중학교 1학년 과정) 교재인 <김일성 원수 혁명활동>에는 김일성 주석이 8세 때 3.1운동 시위 대열에 참가해 '조선 독립 만세!'를 적극 외쳤다는 내용도 싣고 있고, 3.1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식민통치가 큰 타격을 받았고 다른 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에도 고무적 영향을 주었다는 등 긍정적 면도 일부 평가하고 있다. 

 

곽재훈 기자 nowhere@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국제팀에서 '아랍의 봄'과 위키리크스 사태를 겪었고, 후쿠시마 사태 당시 동일본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통일부 출입기자 시절 연평도 사태가 터졌고, 김정일이 사망했습니다. 2012년 총선 때부터는 정치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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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에 “평화·번영·통일”을 외치다

6.15남측위, 해외동포 함께 ‘자주통일민족대회’… 서울 곳곳서 100주년 기념대회 열려

1일, 서울 곳곳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100년 전 오늘을 기억하고, 새로운 100년을 기약하는 메시지는 단연 ‘자주독립’, ‘민족자주’, ‘한반도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이다.

▲ 사진 : 함형재 담쟁이기자

“통일문제의 주인은 우리 겨레”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는 1일 오후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3.1운동 100년 자주통일민족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엔 남측을 방문한 6.15해외측위원회 등 해외민주통일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15년 만에 모국을 방문한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방문단을 비롯해 일본, 유럽, 중남미 등 해외 각지에서 온 동포들은 남녘 동포들과 3.1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8일 입국했다.

대회사에 나선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은 “3.1항쟁 100년을 맞아 서울에 온 해외 대표들, 동포들을 뜨겁게 환영한다”고 인사했다. 이 의장은 “주권강탈, 분단과 전쟁의 고통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떨쳐나서 오늘날 자주, 평화, 통일이라는 일대 진전을 이루고 있는 우리겨레의 행보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면서 “미국이 남북협력을 가로막고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상호조치에 성의를 보이고 있지 않지만, 여러 가지 굴곡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자”고 독려했다.

이 의장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통일문제의 주인은 우리 겨레다.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등 남북합의를 온전히 이행하고, 대북제재 해제와 민족의 만남과 교류를 활성화하고, 군사적 행동을 모두 중단시키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길에 각계가 연대하자”면서 “3.1항쟁 정신을 되살려 자주평화 통일에 힘차게 나서자”고 강조했다.

▲ 대회사 하는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사진 : 함형재 담쟁이기자]

 

▲ 인사말 하는 신필영 6.15미국위원회 대표위원장 [사진 : 함형재 담쟁이기자]

신필영 6.15미국위원회 대표위원장이 무대에 올라 “3.1 100주년에 동포들과 이곳에 있게 돼 흥분되고 가슴이 뛴다”는 말로 화답했다. 신 위원장은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이 조선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3.1절의 동기가 된 귀한 역사가 있다. 그 역사의 현장인 도쿄를 거쳐 이곳에 왔다”면서 “1919년 3월1일 조선과 일본 곳곳에서 조선인들이 자주독립을 선포하고 봉기가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 3.1대회를 위해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민족은 대단한 민족이다, 이제 통일은 됐다’는 것을 가슴에 새겼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해외 동포들도 서울에서 3.1운동 100년을 가슴에 품고, 한반도 전역에 외세 간섭을 몰아낸 ‘자주국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평화국가’, 외세가 끼어들 수 없는 ‘통일국가’를 이룰 것을 결의했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참가자들은 단일기를 흔들며 “평화체제 실현하자”, “자주통일 앞당기자”고 외쳤다. 해외동포를 대표해 한통련 방문단인 재일한국청년동맹 회원들은 ‘하나’라는 노래를 선보였고, 남측에선 ‘평화가 춤춘다’를 주제로 한 노래공연을 동포들과 참가자들에게 선사했다.

▲ ‘3.1항쟁 100돌 민족자주선언’을 발표하는 최진미 6.15남측위 여성본부 상임대표, 정갑환 6.15중남미위원회 대표위원장, 김지영 재일한국민주여성회 회장, 정종성 6.15남측위 청학본부 상임부대표(왼쪽부터). [사진 : 함형재 담쟁이기자]

이날 남·북·해외는 ‘3.1민족자주선언’을 공동 발표했다. 6.15남측위 여성본부 최진미 상임대표, 6.15남측위 청학본부 정종성 상임부대표, 재일민주여성회 김지영 회장, 6.15중남미위원회 정갑환 대표위원장이 대표로 낭독한 민족자주선언엔 “▲3.1 항쟁 정신을 철저히 계승하자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일제의 과거 죄악을 완전히 청산하고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단호히 저지하자 ▲남북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하여 평화와 번영, 통일을 앞당기자”는 내용이 담겼다.

▲ 사진 : 함형재 담쟁이기자

 

▲ 송세일 한통련 부의장은 자주통일민족대회에서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한통련의 명예회복과 여권발급이 거부된 손형근 의장의 여권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다음 방문엔 손 의장을 단장으로 해 한국에 오겠다”고 밝혔다. [사진 : 함형재 담쟁이기자]

3.1 범국민대회, 광화문광장에서 열려

자주통일대회에 앞서 오후2시 광화문광장에선 ‘3.1백년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100년 전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이 목숨 다 바쳐 싸우리라, 해방의 해방의 그날까지, 총칼을 들고 나가리라, 해방 그날까지~” 독립투사들이 불렀던 만주출정가가 광화문광장에 울려 퍼졌다.

종교시민사회대표들이 연단에 올라 3.1운동 100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들이 강조한 메시지 역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이다.

김희중 천주교 대주교는 “평화야 말로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며, 이를 얻고자 한다면 수많은 희생, 강한 인내가 뒤따른다는 것, 모질고 모진 100년의 세월이 흘러 그 정신이 우리에게 깃들어 있다”고 3.1정신을 되짚었다.

이어 “어제 2차 북미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이 우리민족의 운명과 평화는 우리 손으로 일궈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우리의 힘으로 한반도 평화를 이루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오늘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정강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도 “1919년 이래 우리는 숱한 굴곡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백년의 항쟁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 바탕에는 선조들이 ‘이 땅에 새 시대가 오고 있다’는 선언, 그 믿음이 바탕이 됐다”고 3.1 백년의 의미를 부여하곤 “지금 우리는 새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시작점에 서 있다. 세계 앞에 빛나는 조상들의 힘, 100년의 힘, 이 땅 평화와 통일, 평등과 공존을 향한 길로 당당히 나가자”고 호소했다.

4.16합창단, 6.15합창단, 이소선 합창단 등 시민합창단이 부른 ‘광야에서’, ‘백두에서 한라’, ‘아리랑’ 등이 광장을 채웠고, 이 자리에선 새로운 백년을 여는 ‘3.1범국민선언문’이 낭독되기도 했다.

“일본의 식민역사 우리가 바로잡자”

한편, 해외동포들은 이날 오전 양대노총과 강제징용 공동행동이 주최하는 ‘용산역 강제징용노동자상 합동참배’에 참석했다.

한통련 방문단으로 참석한 송세일 부의장은 “일본 아베 정부는 강제징용에 대해 절대 인정하지 않고 버티면서 책임도 없다, 반성할 필요도 없다, 보상과 사죄도 필요없다는 강경한 자세로 일관돼 있다. 우리민족이 힘을 합쳐 일본정부의 태도에 대해 배격, 규탄, 단죄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100년에 걸쳐 있는 잘못된 역사를 우리가 바로잡고, 우리민족이 단결해 평화, 번영, 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고 말했다.

▲ 합동참배식에 참석해 헌화하는 해외동포 및 대회 참가자들. [사진 : 함형재 담쟁이기자]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100년 전 온 겨레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자주독립이었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70년 분단의 세월을 극복하고 통일 이룩하는 것”이라며 “100년 전 우리 민중들의 자주정신과 투쟁정신을 계승해 우리겨레의 미래는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높은 결의를 세우고, 조국통일 실현을 위해 남북공동선언 이행의 길에 떨쳐나서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1년 일본으로 끌려가 신일철주금에서 강제노역을 한 이춘식 할아버지도 마이크를 잡고 “내가 내년이면 100살이다. 오늘 3.1 행사에 이렇게 모여 줘 무한히 감사하고, 눈물이 철철 흐른다”며 고마움을 표하곤 “일본 놈들은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고 호통 쳤다.

해외동포와 민주통일인사들은 이어 ‘조선학교 차별반대, 고교무상화적용’을 요구하는 209차 금요행동에 참가하기 위해 옛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을 찾았다.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이 주최한 금요행동에 함께 한데 이어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탄압에 항의하고, 조선학교 차별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해외동포 합동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 209차 금요행동 참가자들은 8천만 겨레의 이름으로 ‘일본정부에 보내는 경고문’에 손도장을 찍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사진 : 류경완 KIPF 운영위원장]

 

▲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한통련 방문단. [사진 : 류경완 KIPF 운영위원장]

 

▲ 6.15해외측위원회 방문단. [사진 : 류경완 KIPF 운영위원장]

[3.1 항쟁 100돌 민족자주선언]

우리 민족이 일제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자주독립을 외치며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3.1항쟁 100돌을 맞이하고 있다.

100년전에 일어난 3.1 항쟁은 일제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애국 항쟁이었다.

3.1 항쟁을 통하여 우리 겨레는 일본 제국주의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으며 민족적 존엄과 자주권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자주정신과 불굴의 기개, 열렬한 애국심을 지닌 민족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뚜렷이 과시하였다.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통치를 끝장내고 조국 해방을 이룩한 우리 겨레는 외세에 의한 민족 분열의 비극을 가시고 이 땅의 자주와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굴함 없이 노력해왔으며 마침내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역사의 새시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체제 구축의 역사적 전환점에 들어섰다.

우리는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 불굴의 의지가 어린 지나온 100년을 계승하여 하루 빨리 평화와 번영, 통일된 새 조국을 건설할 드높은 열의를 안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3.1 항쟁 정신을 철저히 계승하자!

100년전 오늘, 삼천리 강토에서 들불처럼 타올랐던 독립만세의 함성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게 넘겨준 친일파들에게 결코 굴하지 않는 온 겨레의 드높은 자주정신, 독립 의지의 거세찬 분출이었다.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주적 권리를 지키겠다는 자주와 대단결의 정신, 3.1 항쟁 정신을 철저히 계승하여 겨레의 숙원인 자주, 평화, 통일을 실현해 나가자!

2.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일제의 과거 죄악을 완전히 청산하고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단호히 저지하자!
3.1항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식민지통치와 강제수탈로 온 민족을 고통에 빠뜨렸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오늘날까지도 과거 침략전쟁과 식민지통치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 하는 것은 물론 군사대국화에 몰두함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갈등을 격화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심지어 일본당국은 우리 민족에 대한 적대의식을 조장하면서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비롯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우리 민족에 대한 잔혹한 식민지통치와 수탈에 대한 명확한 사죄와 배상 없이 호혜평등한 관계 정립은 불가능하며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재현하는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계속되는 한 평화협력은 한낱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징용, 징병, 대량학살 등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과거범죄에 대한 명확한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고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자!
재일동포들에 대한 민족적 차별과 민족말살정책,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반드시 저지하자!

3. 남북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하여 평화와 번영, 통일을 앞당기자!

100년 전 가장 절실한 과제가 자주독립이었다면, 오늘날 민족 최대의 과제는 민족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일이다.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역사적 대업에 모두 함께 떨쳐 나서자!
통일의 이정표이자 단결의 기치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비롯한 남북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하자!
각계각층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고, 군사훈련을 비롯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들을 중단시켜 나가자!
우리 민족의 뜻과 이익에 부합하는 평화, 번영, 통일의 방안들을 함께 모색하여 하루 빨리 통일을 실현해 나가자!

2019년 3월1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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