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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올해 10개 양묘장 현대화 사업 추진

산림협력 분과회담, 공동방제 등 공동보도문 채택 (전문)
개성=공동취재단/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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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22  20: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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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은 22일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산림협력 분과회의를 열고, 공동보도문을 채택했다. [사진-개성 사진공동취재단]

남북이 올해 10개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측은 다음 달까지 소나무 재선충 방제약품을 제공하고 내년 3월까지 공동방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남북은 22일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산림협력 분과회의를 열고, 공동보도문을 채택했다.

우선, 남북은 소나무재선충병을 비롯한 산림병해충 방제사업을 매년 병해충 발생 시기별로 진행하기로 했다. 병해충 발생 상호 통보, 표본교환 및 진단.분석 등 산림병해충 예방대책과 관련한 약제 보장문제를 협의.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당면해, 남측은 11월 중 소나무재선충 방제에 필요한 약품을 북측에 제공하고, 내년 3월까지 공동방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지난 7월 남북이 금강산 지역 산림병해충 방제 공동조사를 한 만큼, 금강산 지역 방제가 우선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측에서 시범적으로 해야 할 곳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금강산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박종호 산림청 차장이 밝혔다.

   
▲ 남북이 올해 10개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측은 다음 달까지 소나무 재선충 방제약품을 제공하고 내년 3월까지 공동방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사진-개성 사진공동취재단]

남북, 올해 내 북측 양묘장 10개 현대화 사업 추진..대북제재 위반여부도 검토

남북은 북측 양묘장 현대화를 위해 도, 시. 군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우선 올해 내 10개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현대화 사업 대상지인 양묘장 10개는 북측이 제시하는 데 따라 논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계획이다.

양묘장 온실 투명패널, 양묘 용기 등 산림 기자재 생산 협력문제를 협의하고, 필요한 시기에 북측 양묘장과 산림 기자재 공장에 대한 현장 방문을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문제로 북측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북측 단장인 김성준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 부총국장은 이날 종결회의 발언에서 “우리 민족이 귀중히 여긴, 사랑해 온 소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재선충병 구제 문제와 양묘장 현대화를 위한 문제 등 산림협력사업에서 실천적 의지를 다지는 이러한 문제들을 정말 토론했는데, 민족이 바라는 기대만큼 토론됐다고 볼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보다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성과를 이룩해내기 위해서 서로 진심어린 손을 잡고 산악같이 일떠서서 폭풍을 맞받아나가자고 호소하고 싶다”고 말했다.

   
▲ 남측 수석대표인 박종호 산림청 차장은 현지 회담 결과 브리핑을 열고 있다. [사진-개성 사진공동취재단]

이에 남측 수석대표인 박종호 산림청 차장은 현지 회담 결과 브리핑에서 “북측에서 기대한 것이 많았는데, 저희는 바로 추진할 수 있는 사항도 있는 사항도 있고, 논의해 가면서 해야 할 것도 있어서 북측의 기대치에는 그런 것이 좀 있었다”고 설명했다.

“모든 산림협력은 관련국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서 추진되고 있”으며 “(제재 문제 등도) 포함되지만, 관련국과 협의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통상적으로 국제제재나 이런 부분에서 (산림협력은) 자유로운 분야”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다리도 두들겨 간다고, 하다 보면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제재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그런 부분을 보면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남북은 산불방지 공동대응, 사방사업 등 자연생태계 보호 및 복원을 위한 협력사업을 추진하고, 산림과학기술 공동토론회 개최를 비롯해 아시아산림협력기구와 협력, 산림을 활용한 온실가스 감축 협력 등도 협의하기로 했다.

   
▲ 이날 남북은 오전 10시부터 10시간 넘게 전체회의 2회, 수석대표접촉 4회, 대표접촉 2회 등을 하며 회담을 이어갔다. 회담을 마친 남북 대표단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개성 사진공동취재단]

이날 남북산림협력 분과회담에 남측은 박종호 산림청 차장을 수석대표로 임상섭 산림청 산림산업정책국장, 김훈아 통일부 개발지원협력과장, 북측은 김성준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 부총국장을 단장으로 최봉환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 부국장, 손지명 민족경제협력위원회 참사 등이 마주했다.

이날 남북은 오전 10시부터 10시간 넘게 전체회의 2회, 수석대표접촉 4회, 대표접촉 2회 등을 하며 회담을 이어갔다. 

(추가2, 22:23)

[전문] 남북산림협력 분과회담 공동보도문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고위급회담 합의에 따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남북산림협력 분과회담을 진행하고 다음과 같이 실천적 대책을 취해나가기로 하였다.

1. 남과 북은 소나무재선충병을 비롯한 산림병해충방제사업을 매년 병해충 발생 시기별로 진행하며, 병해충 발생 상호 통보, 표본 교환 및 진단, 분석 등 산림병해충 예방대책과 관련된 약제 보장문제를 협의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이와 관련, 남측은 11월 중 소나무재선충 방제에 필요한 약제를 제공하고 공동방제를 다음해 3월까지 진행하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북측 양묘장 현대화를 위해 도, 시, 군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으며, 당면하여 올해 안에 10개의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양묘장 온실 투명패널, 양묘용기 등 산림기자재 생산 협력문제를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시기에 북측의 양묘장들과 산림기자재 공장에 대한 현장 방문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산불방지 공동대응, 사방사업 등 자연생태계 보호 및 복원을 위한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하며, 산림과학기술 공동토론회 개최를 비롯한 제기되는 문제들을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산림협력에서 실무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문서교환 방식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다.

2018년 10월 22일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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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마웅 자니 인터뷰 “천천히 타오른 로힝야족 학살, 스마트폰이 혐오 폭탄 됐다”

[단독]미얀마 마웅 자니 인터뷰 “천천히 타오른 로힝야족 학살, 스마트폰이 혐오 폭탄 됐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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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와 미얀마 민주화운동 이끈 마웅 자니 박사 방한 인터뷰
페북발 가짜뉴스, 불교도·버마족의 두려움 증폭 역할…공격이 정당화돼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로힝야족 탄압과 학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미얀마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인사인 마웅 자니 박사가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로힝야족 탄압과 학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미얀마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인사인 마웅 자니 박사가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모든 사람의 손에 ‘혐오 폭탄’을 발사할 무기가 쥐어졌다. 이 폭탄이 실제로 터져 로힝야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다.” 

‘로힝야 집단학살’ 문제의 세계적 권위자 마웅 자니 박사(55·사진)는 2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유포되는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는 1995년 미국 유학 중 ‘자유버마연합’을 창설해 미얀마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다. 아웅산 수지와 함께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앞장서서 이끈 자니 박사가 한국 언론과 공식 인터뷰한 것은 처음이다.

자니 박사는 이날 경향신문과 만나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는 가짜뉴스 문제에 우려를 나타냈다. ‘페이스북이 로힝야족 대량학살을 가속화시켰다’는 최근 연구 결과 때문이다.

군부독재 시절 제한적인 정보만 접했던 미얀마인들은 새로운 정권의 수립과 함께 2013년 스마트폰의 ‘SIM카드’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가격이 폭락하자 누구나 쉽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유일하게 미얀마어 서비스를 지원하는 페이스북으로 사용자가 몰렸다. 현재 미얀마 인구 5300만명 중 1800만명가량이 페이스북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이 시작된 후 페이스북은 ‘혐오 폭탄’의 도화선이 됐다. 수천명의 로힝야족이 목숨을 잃고 70만명이 국경 밖으로 도망가는 동안에도 로힝야족을 개·돼지로 묘사한 혐오 게시물들은 ‘좋아요’를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자니 박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로힝야족이 테러를 저질렀다’거나 ‘수염이 있는 로힝야 남자가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식의 가짜뉴스가 빠르게 퍼지면서 로힝야족에 대한 공격과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감정을 조작하고, 거짓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가짜뉴스가 혐오 범죄를 부추긴다고 봤다. 가짜뉴스 자체가 혐오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지만, 미얀마인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불교도와 버마족들의 두려움·혐오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니 박사는 “혐오와 두려움은 늘 함께 움직이는데, 가짜뉴스는 로힝야족과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을 거짓으로 과장되게 꾸며 그들을 향한 혐오를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며 “신문·TV를 통해 유포되던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을 모든 개인이 스마트폰을 통해 전파할 수 있게 됐다. 모두가 혐오를 퍼트리는 무기를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군대·정부, 집단학살 피 묻히면, 아웅산 수지가 손 씻겨주고 있어”

미얀마 마웅 자니, 국내 언론 첫 인터뷰 

미얀마의 ‘치부’가 된 로힝야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자니 박사는 현재 ‘국가의 적’으로 몰려 있다. 자니 박사의 내한 소식이 알려지자 ‘재한 미얀마 국민’ 이름으로 그의 한국 강연을 반대하는 인터넷 청원이 이어졌다. 이들은 자니 박사가 “과장되고 자극적 주장과 일방적이기만 한 견해”를 퍼트리고 “사익만 추구하는 용병”이라고 비판했다. 자니 박사는 “많은 미얀마인들은 나를 ‘배신자’ ‘사기꾼’이라고 하거나 ‘국가의 적’이라 부른다”며 “그들이 나를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학자는 양심에 따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니 박사는 2014년 공동발표한 논문에서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을 1960년대부터 미얀마 정부와 군대, 불교계 등에 의해 조직적으로 지속돼온 ‘천천히 타오르는 집단학살’이라고 정의했다. 이 논문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을 집단학살로 정의한 첫 연구로 꼽힌다.

자니 박사가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천천히 타오른다’고 정의한 것은 보스니아·르완다·캄보디아 등에서 “번개 같은 속도로” 벌어진 대량학살과 달랐기 때문이다. 장기간 동안 육체, 정신, 문화, 경제, 종교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짧은 시간 벌어진 대량 인종학살 범죄보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니 박사는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은 집단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의 교과서적인 사례이며, 나치 시절 독일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과 비슷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는 단순히 불교와 이슬람교의 갈등도 아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인종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와도 다른 전형적인 집단학살”이라고 설명했다. 

민주화 위해 함께 싸웠지만 
수지에 대한 모든 기대 끊어
로힝야족 향한 잔인한 탄압 
‘제노사이드’ 전형적 사례

자니 박사는 한때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싸웠던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 겸 외무장관에 대한 모든 기대를 끊었다고 했다. 그는 “군대와 정부가 로힝야족을 학살해 손에 피를 묻히면 아웅산 수지가 그 손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게 지금의 미얀마”라고 직격했다. 그는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되길 기대했지만, 지금의 미얀마는 민주주의가 아닌 파시즘 국가이며 여러 소수민족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서 “지금의 미얀마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아웅산 수지를 비판하면 언론인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것은 파시즘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자니 박사는 지난 30년간 어머니를 단 3번 만났다. 영국에 주로 체류하면서 전 세계에서 강연·연구 활동을 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지만 2006년 이후로는 미얀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미얀마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자적인 양심과 책임감으로 로힝야 문제에 대한 비판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자니 박사는 “우리 집안의 많은 친척이나 친구들도 군인 출신이다. 로힝야에서 벌어지는 학살은 내 친구가 저지르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는 미얀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서,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과 탄압을 멈추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국제사회 국가들이 앞장서서 미얀마에 전향적인 태도를 요구하고, 로힝야족에 대한 폭력이 멈출 때까지 무역을 중단하는 등 실제적 행동에 나서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지금 미얀마는 파시즘 국가 
스스로 해결할 상황 안돼
한국 등 국제사회 행동해야
 

자니 박사는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자 K팝 가수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등 문화 강대국인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로힝야족 대량학살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낸다면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며 “한국인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이 일을 멈추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자니 박사는 이날 세계선교협의회(CWM) 콘퍼런스에 참여한 뒤, 22일엔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에서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등 ‘로힝야와 연대하는 한국시민사회모임’ 주최로 강연을 열어 로힝야 사태의 배경을 설명하고 해결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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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지율스님의 추억

 
가슴 아픈 지율스님의 추억
 
 
 
정운현 | 2018-10-22 09:44:4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단식 50일째를 맞은 지율스님

아, 지율스님..
스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스님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두 차례, 무려 150일이나 단식을 하셨을까. 누가 뭐래도 스님처럼 목숨을 건 투쟁을 한 사람은 흔치 않다.

지율스님을 생각하면 잊히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두 번째 단식이 100일이 다 돼 갈 무렵이었다. 스님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각계에서 터져 나왔는데 스님이 갑자기 행방을 감추었다. 청와대는 물론 언론에서도 스님의 행방을 수소문 하느라 난리가 났다. 그때 오마이뉴스로 제보가 들어왔다. 양평 모 수도원에 계시다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가 연말연시여서 나는 그날밤 전직장 OB모임에 참석해 있었다. 핸드폰으로 스님 소식을 접한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급히 광화문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는 몇몇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을 비상소집하였다. 나는 당시 김병기 사회부장에게 회사에 남아서 기사를 처리하라고 지시하고는 권우성 사진기자까지 너댓 명이 새벽 너댓시경 경기도 양평으로 향했다. 수도원의 정확한 이름이나 위치도 모른채. (이날 우리는 여건이 되면 현장에서 기사를 부르고 김 부장이 사무실에서 받아서 속보로 현장중계를 할 예정이었는데 여의치 않아 기사를 쓰지 못했다. 대신 그 이튿날 내가 당시 상황을 칼럼으로 하나 썼다)

광화문 회사에서 한 시간여를 달려 양평에 도착했다. 한겨울이어서 사방이 캄캄해 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요기도 할 겸 양평의 명물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주인에게 사정얘기를 했더니 근처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며 위치를 알려주었다. 히끄무리하게 날이 밝아오자 우리는 식당주인이 알려준 곳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초행길이어서 좀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번짓수도 정확히 모르는데다 요즘처럼 네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어렵게 수도원을 찾았다. 구불구불 2차선 도로가에 있었는데 간판이 너무 작아서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도로에서 제법 멀리 정문이 있었는데 경사가 상당히 가팔랐다. 차를 몰고 경사진 곳을 올라 정문앞에 다다르자 큰 개 너댓 마리가 우루루 나와 차를 막아섰다. 개 짓는 소리가 나자 잠시 뒤 사람이 나왔는데 수도사 복장이었다. 신분을 밝히고 용건을 얘기하자 나를 그곳 대표자 되는 분에게 안내해주었다.

나는 일단 대표자에게 스님의 안위부터 물었다. 여기 계시는데 상태는 위중하다고 했다. 한번 뵙기를 청했더니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떠나서 스님 목숨부터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내가 목청을 높였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잠시 뒤 한 마디 했다. “종교인은 믿음에 따라 목숨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섬뜩했다. 우리는 쉬 납득하기 어렵지만, 종교인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나는 한사코 스님을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며 떼를 쓰다시피 했지만 도통 말이 통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스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했더니 안된다고 했다. 외부인을 일체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님을 두번 만나 뵌 적이 있고 오마이뉴스가 스님 관련 기사를 여러번 보도해서 신뢰감을 갖고 계실 거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내가 그 대표자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스님을 설득할 수 있는 분이 안계십니까?”
그분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분이 입을 열었다.
“정토회관으로 법륜스님을 찾아가 보십시오.”

우리는 스님이 누워계시다는 별채의 겉모습만 한 장 찍고는 급히 서초동 정토회관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전후로 정토회관에 도착했다. 나는 다짜고짜 법륜스님을 급히 좀 뵙고 싶다고 부탁했다. 마침 계시다고 했고 스님께로 안내해주었다. 스님께 제대로 예를 갖출 겨를도 없이 거의 떼를 쓰다시피 내가 말씀을 드렸다. “지율스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제발 법륜스님께서 좀 나서주십시오. 방금 양평 수도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법륜스님은 듣고만 계셨다. 이미 상황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하셨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들 가십시오..”
스님은 무슨 묘책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럼 저희는 스님만 믿고 물러가겠습니다.”

그로부터 2, 3일 뒤에 지율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초동 정토회관으로 나오셨다. 그때가 설날 하루 전날이었다. 이걸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스님 취재 때문에 몇몇 언론사 기자들이 귀성을 못해 불평을 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어느새 근 13년 전의 얘기다. 

단식 100일 무렵 체중이 28.3kg까지 떨어진 지율스님

대법 “ ‘지율스님 때문에 6조원 손해’ 조선일보 기사는 허위”
(연합뉴스 / 임순현 기자 / 2018-10-19)

“천성산터널 공사중단 손해 6조원 아냐…정정보도문 게재하라”

▲2004년 8월 25일 단식농성 중인 지율(오른쪽)스님을 방문한 문재인(왼쪽) 당시 시민사회수석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지율스님의 ‘도롱뇽 단식’ 등으로 인해 대구 천성산 터널 공사가 지연돼 6조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조선일보 기사는 허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지율스님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9일 밝혔다.

지율스님은 2003년 2월 정부가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위해 대구 천성산에서 터널 공사를 시작하려고 하자 도롱뇽이 서식하는 고산습지 생태계가 파괴된다며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공사를 중단하고 대안 노선 검토를 추진했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2003년 9월 공사를 재개했다.

그러자 지율스님은 법원에 공사금지 가처분을 신청했고, 정부는 법원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2004년 8월∼11월, 2005년 8월∼11월 두 차례에 걸쳐 공사를 중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06년 6월 공사금지 가처분 기각을 확정했고, 조선일보는 2010년 5월 ‘도롱뇽 탓에 늦춘 천성산 터널…6조원 넘는 손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재인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천성산 터널 문제 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공사가 중단되면서 2조5천억원의 사회·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지율스님은 “공사중단으로 인한 손실이 51억원에 불과한데도 기사 제목에 손해가 6조원이 넘는다고 허위로 보도했다”며 소송을 냈다.

1심은 “기사의 중요 부분이 진실하거나 그것이 진실하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면서 조선일보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2심은 “기사의 제목과 내용, 문구의 배열 등을 종합하면 독자들에게 원고의 단식농성 등으로 공사가 지연돼 총 6조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묵시적으로 적시해 허위 사실을 보도했다”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는 ‘6조원이 넘는 손해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포함된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고 선고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10/18/0200000000AKR20181018159700004.HTML?input=1195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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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책사들과 점령군 철수,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개벽예감 319] 6명의 책사들과 점령군 철수,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10/22 [09:3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세계지배책략을 설계한 6명의 책사들

2. 500명만 남고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

3. 미국이 태평양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이유

4. 6.25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은 이유

5. 7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1. 세계지배책략을 설계한 6명의 책사들

 

미국은 79년 전 독일이 뽈스까(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직후 핵무기개발에 달라붙었다. 1939년 10월 21일의 일이었다. 그 이후 미국은 핵무기와 원자력에 관련된 핵기술개발사업에 총 5조3천억 달러(한화 약 6,000조 원)를 쏟아부었고, 1,054회 핵시험을 하였으며, 2018년 현재 핵무기 약 4,000발을 쌓아놓았다. 

 

미국의 안보문제연구기관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이 2015년 10월 28일에 펴낸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을 포함하여 29개 나라, 10억 명 인구를 ‘핵우산’으로 ‘보호’해준다고 한다. 그들은 보호라는 말을 썼지만, ‘핵우산’으로 보호해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29개 나라를 거느리고, 10억 명의 인구를 가진 아메리카핵제국(Nuclear Empire of America)은 세계 각지에서 무력침공과 내정간섭, 막후통치와 강권외교, 전쟁위협과 군사대결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그런 아메리카핵제국의 세계지배전략을 25년 동안 주물렀던 책사들이 있었다. 언론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흑막 뒤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세계지배책략을 조언해준 책사들이다.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들인 월터 아이삭슨(Walter Isaacson)과 에번 토머스(Even Thomas)가 공동으로 집필한 ‘현자들: 6명의 벗들과 그들이 만든 세계(The Wise Men: Six Friends and the World They Made)’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 책사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1986년에 출판된 그 책은 1945년 트루먼 행정부에서 1969년 존슨 행정부까지 장장 25년 동안 아메리카핵제국의 세계지배책략에 결정적인 영항을 미쳤던 6명의 책사들에 대해 서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세계사적 전환기였던 1945년 4월에 자기들끼리 비공개협의체를 결성한 6명의 책사들은 갓 출범한 트루먼 행정부의 막후에서 세계지배책략수립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으로 첫 작업을 시작하였다. 6명의 책사들은 다음과 같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7년 어느 날 트루먼 대통령이 백악관 대통령집무실에서 책사들과 토론하는 장면이다. 사진에서 왼쪽부터 트루먼, 제벌총수로 국방장관을 역임한 로벗 로벳, 소련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한 조지 케넌, 소련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한 찰스 볼런이다. 1945년부터 1969년까지 장장 25년 동안 아메리카핵제국의 세계지배책략을 설계한 6명의 책사들 가운데 사진에 나타난 사람은 3명이고, 미국 국무장관과 재무장관을 역임한 딘 애치슨, 재벌총수로 상무장관을 역임한 애버럴 해리먼, 세계은행 총재를 역임한 존 맥클로이는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5년 동안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국가건설운동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행동에 옮긴 미국의 세계지배책략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그 격렬한 정면충돌 이후 오늘까지 7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 민족은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우리 민족은 미국의 세계지배책략을 돌파해야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딘 애치슨(Dean G. Acheson, 1893~1971) - 미국 국무장관과 재무장관 역임

조지 케넌 (George F. Kennan, 1904~2005) - 소련주재 미국대사 역임

찰스 볼런 (Charles E. Bohlen, 1904~1974) - 소련주재 미국대사 역임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 1891~1986) - 재벌총수로 상무장관 역임

로벗 로벳 (Robert A. Lovett, 1895-1986) - 재벌총수로 국방장관 역임

존 맥클로이 (John J. McCloy, 1895~1989) - 세계은행 총재 역임

 

1945년부터 1969년까지 25년 동안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소련봉쇄와 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일본 점령과 유엔 창설,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 중동전쟁과 베트남전쟁, 대만해협위기와 꾸바미사일위기 같은 워싱턴발 대격변들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945년 조선해방 4개월 전부터 1953년 정전협정체결 6개월 전까지 8년 동안, 한반도가 해방과 점령, 분단과 전쟁을 겪었던 바로 그 기간에 제33대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분단고착, 대량학살, 전쟁범죄 같은 극악한 죄악을 저질렀던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의 한반도책략수립에 6명의 책사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5년 동안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국가건설운동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행동에 옮긴 미국의 세계지배책략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그 격렬한 정면충돌 이후 오늘까지 7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 민족은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2018년 10월 현재 한반도의 정세는 우리 민족이 70여 년 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였던 미국의 세계지배책략을 돌파해야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명백한 이치를 말해준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미국의 세계지배책략은 무엇이었던가? 6명의 책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소련을 새로운 적국으로 규정하고 소련의 팽창주의를 무력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믿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소련봉쇄전략의 설계자가 조지 케넌이었다는 ‘정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소련봉쇄전략의 설계자는 케넌을 포함한 6명의 책사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부에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였던 냉전체제는 바로 그런 정치적 배경에서 성립되었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에서 중심적인 내용은 소련봉쇄전략이었고,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봉쇄전략의 일환으로 한반도책략을 수행하였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는 바로 그런 정치적 배경에서 성립된 것이다.

 

 

2. 500명만 남고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

 

1949년 6월 21일 미국 연방하원 외교위원회가 특별한 청문회를 열었다.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군사지휘관들이 그 청문회에 불려나갔다.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하원의원들과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은 그 청문회에서 남조선점령군 철수문제를 놓고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당시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한 자기 군대를 남조선점령군(occupation forces in South Korea)이라고 불렀다.

 

연방하원의원 - “합참본부가 이번에 점령군 철수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건의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 - (이구동성으로) “그렇다.”

연방하원의원 - “귀관은 육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선호하였다고 하는데...”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확실히 그렇다. 전술부대들만 철수한 것이다.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국군 고문단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병력이 증강된 연대급 전투부대들인 전술부대들의 철수다.” 

연방하원의원 - “미국군 고문단의 규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500명의 장교들과 사병들이다.”

연방하원의원 - “점령군 철수에 의해 발생한 공백을 한국 정부가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확실하다.”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하원의원들과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 사이에서 오간 위와 같은 청문회 질의응답이 어떤 원인과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알려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트루먼 행정부는 1948년 한 해 동안 남조선점령군 40,000명 가운데 7,500명만 남겨놓고 대폭 감축하였다. 그것은 계속주둔을 위한 병력감축이 아니라 완전철수를 위한 단계적 병력감축이었다. 1948년 4월 2일 트루먼 행정부는 1948년 9월 15일부터 시작한 남조선점령군의 단계적 철수를 1949년 6월 30일 이전까지 완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군 합동참모본부가 트루먼에게 남조선점령군 철수계획을 제출하였고, 트루먼은 그 철군계획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상정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남조선점령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소련봉쇄정책을 수행하는 데서 중요한 요소이므로,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시 연방의회의 일반적인 견해였는데, 트루먼 행정부는 그런 기존관념을 뒤집고 남조선점령군을 완전히 철수하였다. 당시 미국 연방의회는 트루먼 행정부가 왜 남조선점령군을 완전히 철수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위와 같이 철군문제를 다루는 특별청문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트루먼 행정부의 남조선점령군 철수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르면, 남조선점령군 철수는 트루먼 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6명의 책사들이 남조선점령군 철수라는 정세변화를 촉발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에서 소련봉쇄전략과 남조선점령군 철수는 서로 어떻게 연관되었던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1948년 11월 23일 트루먼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된 비밀문서 ‘NSC 20/4’에서 찾을 수 있다. 6명 책사들이 작성한 세계지배책략 설계도에 의거하여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관료들이 작성한 이 비밀문서에서 미국의 전후 세계지배책략이 드러나는데, 미국군을 해외에 배치하는 우선순위가 그 문서에 명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군사비와 병력을 대폭 감축한 트루먼 행정부는 한정된 병력을 해외 각지에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배분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밀문서에 명기된 우선순위에 따르면, 영국은 1위에 올랐고, 일본은 13위로 쳐졌고, 한국은 15위로 완전히 밀려났다. 트루먼 행정부의 세계지배책략에서 서유럽이 최우선이고, 중동이 그 다음이고, 아시아는 뒤로 밀려났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트루먼 행정부가 해외배치병력 배분순위에서 한국을 최하위로 밀어놓았으니,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하고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겨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한 것은 소련봉쇄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한반도가 전략적 가치를 갖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남조선점령군 사령관으로 군림했던 존 하지 미국 육군 중장이 미국 육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과 악수하는 장면이다. 1948년 5월 19일 하지는 브라운을 제주도에 군사지휘관으로 파견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와 경찰의 지휘권을 맡기고, 제주양민학살을 명령하였다. 미국은 1948년 9월 15일부터 남조선점령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949년 6월 30일 철수를 완료하였는데, 단계적으로 철수하면서도 그들은 제주학살, 여순학살을 지휘하였다. 나중에는 보도연맹원 학살도 지휘하였다. 당시 남조선점령군은 그처럼 잔인포악하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여 철수한 게 아니라, 자기들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철수한 것이었으므로, 그처럼 극악무도한 양민학살을 지휘하면서 철수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남조선점령군이 철수한 뒤에 남은 군사고문단의 임무는 1948년 9월 5일에 창설된 한국군의 무력증강과 군사작전을 계획, 지휘하는 한편,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에 체류하는 미국인을 일본으로 탈출시키는 비전투원소개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며 광분하였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점령군 철수와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궐기한 진보적 민중 약 100만 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한국군과 경찰이 자행한 제주항쟁 대량학살, 여순항쟁 대량학살, 보도연맹원 대량학살은 남조선점령군 군사고문단의 명령과 지휘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상 가장 잔혹한 만행이다. 또한 남조선점령군 군사고문단은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한국군의 공격작전을 지휘하면서 북침광기를 부추겼다.    

 

남과 북은 북위 38도선 지역에서 1948년에 930여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고, 1949년에 2,617여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고, 1950년에는 6월 25일 직전까지 1,147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는데, 특히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 등에서는 사실상 내전이 벌어졌다. 그처럼 6.25전쟁의 전주곡이 울리고 있었던 긴박한 상황에서 트루먼 행정부는 남조선점령군을 증강하기는커녕 정반대로 완전히 철수해버렸다. 거기에 더하여 한국에 대한 무력증강지원도 중지하려고 하였다. 이를테면, 1950년 6월 23일 미국군 합참본부 합동전략기획위원회가 작성한 1급 비밀보고서는 “합동참모본부는 한국이 전략적 측면에서 별로 가치가 없다는 점에 동의했다. 따라서 상호방위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한국에 군사자금을 추가로 지원하는 것은 정당한 처사로 보기 어렵다”고 명기하였던 것이다. 

 

 

3. 미국이 태평양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이유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1947년 6월 16일 미국군 합참본부가 작성한 ‘문라이즈(Moonrise)’라는 명칭의 대소전쟁전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미국군 합참본부가 작성한 대소전쟁계획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팽창주의정책에 매달리는 소련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며, 가까운 장래에 소련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  

(2) 미국군은 유럽전선에서 소련군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지만, 전쟁이 유럽전선과 아시아전선에서 동시에 일어나면 미국군이 그 두 전선에서 모두 이길 수 없으므로, 아시아전선에서는 공군력을 동원하여 소련군의 남진공격을 저지해야 한다. 따라서 오끼나와공군기지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3)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점령군 2개 사단과 남조선군은 패할 것이고, 소련군 5개 사단은 북조선군과 협공하여 개전 20일 안에 남조선 전역을 점령할 것이다. 

(4) 미국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남조선점령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 

(5) 미국은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섬들로 연결된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하여 소련의 태평양진출을 저지해야 한다. 

 

위에 서술된 대소전쟁전략에 따르면, 한반도는 전략적 가치를 잃고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되었으므로, 트루먼 행정부는 당연히 남조선점령군을 일본으로 철수해야 하였다. 그렇게 되어 미국군 합참본부는 1948년 4월 2일 남조선점령군 철수계획을 문서화한 ‘SANACC 176/39’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였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철군계획을 승인하였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1949년 2월 28일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극비정보평가서다. 이 비밀문서는 1976년에 기밀해제되었다. 제목은 '1949년 봄 코리아에서 미국군 철수의 영향들'이다. 미국군 합참본부는 1948년 4월 2일 남조선점령군 철수계획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여 최종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남조선점령군은 1949년 6월 30일에 철수를 완료하였는데, 철수가 완료되기 전에 작성된 위의 비밀문서는 철수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예견한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1947년 9월 18일에 창설되었으므로, 위의 비밀문서를 작성하였던 1949년에는 저급한 정보력밖에 갖지 못했고, 따라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발언권도 약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가장 강한 발언권을 가진 부서는 합동참모본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여서 군부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군 합참본부의 철군계획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철군결정에 따라, 남조선점령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되기 시작하여 1949년 6월 30일까지 완전히 철수되었다. 미국군 합참본부는 1949년 12월 8일 ‘문라이즈’를 보강하여 ‘앞태클(Offtackle)’이라는 명칭의 대소전쟁전략을 완성하였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전국언론인협회(NPC)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 대해 설명한 것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른 발언이었다. 또한 1950년 6월 루이스 존슨(Louis A. Johnson) 미국 국방장관과 오마 브래들리(Omar N. Bradley) 미국군 합참의장이 하와이, 필리핀, 일본, 알래스카를 순방, 시찰하면서, 한국만 빼놓았던 것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런데 1949년 6월 30일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하였던 트루먼 행정부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군을 급파하여 3년 동안 격전을 벌였다. 그 전쟁이 정전상태로 전환된 이후 오늘까지 65년 동안 미국은 주한미국군을 계속 유지해왔다. 

 

 

4. 6.25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은 이유

 

의문이 생긴다. 한반도가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판단하고 점령군을 철수하였던 미국은 왜 미국군을 다시 한국에 파병하였고, 정전 이후에도 65년 동안 유지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주는 해답은 다음과 같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집행한 소련봉쇄전략에서 말하는 미국과 소련의 전쟁은 유럽전선과 아시아전선에서 일어나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였다. 당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가졌던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핵무기로 소련군을 궤멸시키면 자기들이 이길 것으로 타산했다. 

 

그런데 트루먼 행정부가 예상했던 소련이 도발한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참전하지 않은 6.25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신생독립국 조선과 국지전을 벌였다. 핵무기를 가진 미국은 창건된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조선을 전쟁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조선에 대해 크게 오판한 것이었다. 미국의 예상을 뒤엎고, 조선인민군은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개전 두 달 뒤에는 38도선 이남지역을 거의 점령하였다. 애초에 전쟁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던 신생독립국과 맞붙은 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이며 세계 유일의 핵보유국이 패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치욕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3년 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6.25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패주하던 미국군 병사들이 어느 산비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철모가 옆에 나뒹구는 것을 보면 매우 큰 심리적 충격을 받은 듯하다. 아마도 전투 중에 사망한 전우들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곁에 앉아 있는 한국군 병사는 종이쪽지에 무엇인가 쓰고 있다. 애초에 전쟁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던 신생독립국 조선과 맞붙은 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이며 세계 유일의 핵보유국인 미국이 패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치욕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3년 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0년 6월 16일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Harry S. Truman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에서 ‘코리아전쟁 60주년 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워싱턴D.C.에 있는 윌슨 쎈터(Wilson Center)가 공개한 소련의 비밀문서를 분석한 ‘코리아전쟁 중 조선과 중국의 갈등’이라는 제목의 특이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논문은 6.25전쟁 개전일로부터 석 달 동안 조선이 소련의 군사지원제의와 중국의 파병제의를 모두 거절하면서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었다. 당시 조선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조국해방전쟁’을 주체역량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원칙을 지켰던 것이다. 조선이 주체적 전쟁수행원칙에 얼마나 철저했으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이 프랑스 통신사 <AFP>의 긴급보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알고 깜짝 놀랐겠는가. 조선은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에야 연락장교 한 사람을 베이징에 파견하여 전황을 처음 통보했다. 1950년 7월 초 마오쩌둥 주석은 평양주재 중국대사에게 조선측과 중국의 파병문제를 협의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조선은 파병문제를 협의하기는커녕 중국대사에게 전황정보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조국해방전쟁’에 중국이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전황을 알지 못해 잔뜩 답답해진 중국은 군사고문단을 조선전선에 파견하여 전황을 알아보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조선은 그 요청도 거절하였다. 미국의 대규모 파병으로 전쟁정세가 바뀌자, 1950년 8월 11일 마오쩌둥 주석은 조선전선에 파병하겠다고 직접 제의했으나, 김일성 주석은 파병제의를 또 다시 거절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전황이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오쩌둥 주석은 김일성 주석에게 중국의 파병을 다시 제안하였고, 9월 21일에는 소련까지 나서서 중국의 파병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조선에게 간곡히 권고하였다. 조선로동당 정치국이 소련의 군사지원제의와 중국의 파병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날은 1950년 9월 28일이었다. 

 

만일 소련이 중국과 함께 6.25전쟁에 파병하였더라면, 미국은 대소전쟁계획에 따라 공군력을 동원하여 소련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방을 폭격하여 전선을 한반도 밖으로 확대하였을 것이며, 미국과 소련의 전쟁은 대만해협으로, 일본 홋까이도(北海道)로, 동유럽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것처럼, 조선은 6.25전쟁 초기에 소련의 군사지원과 중국의 파병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미국군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 국지전에 대처하는 전쟁계획만 수행하였고, 6.25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았던 것이다.  

 

 

5. 7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을 행동에 옮긴 트루먼 행정부가 그 전략에 따라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한 때로부터 어언 70년 세월이 흘렀다. 2018년도 기울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 민족은 지난 70년 동안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올해 들어 일어난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70년 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트루먼 행정부의 소련봉쇄전략은 오늘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봉쇄전략과 러시아봉쇄전략으로 대체되고, 확대되었다.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만 상대하면 되었지만,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아시아에서 중국과 맞서야 하고, 유럽에서 러시아와 맞서야 하는 매우 불리한 처지에 빠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불리한 처지에서 벗어나보려고 집착하는 중국봉쇄전략과 러시아봉쇄전략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중심내용은 미국의 핵무력증강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기존 핵군축조약들을 줄줄이 파기하면서 핵무력을 증강하려고 광분하고 있다. 이를테면, 트럼프 행정부는 이전에 러시아와 체결하였던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ABM)’에서 이미 탈퇴하였고, ‘중거리핵무력조약(INF)’을 곧 파기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신전략무기감축협정(NSART)’까지 파기할 기세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의 핵무력증강은 한반도 비핵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트럼프 행정부가 핵무력을 증강할수록 조선에게 비핵화를 요구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한반도 비핵화가 조선의 단계적 핵동결과 미국의 단계적 철군으로 귀결될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2)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자국의 첫 핵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함으로써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험에 빠뜨렸던 상황은 2017년 11월 29일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여 미국의 국가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지난 70년 동안 미국이 유지해오는 태평양방어선 전체가 조선의 핵공격권 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미국 본토 전역도 조선의 핵공격권 안에 들어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 소련이 조선의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가 11,000km가 넘는 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한 날이 1961년 2월 2일이었으므로, 소련은 1960년까지는 미국 본토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못하였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70여 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의 핵시험 성공 직후에 직면했던 국가안보파탄위기보다 오늘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의 화성-15 시험발사 성공 직후에 직면한 국가안보파탄위기가 훨씬 더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진 5> 

  

▲ <사진 5> 요즈음 트럼프 대통령은 고민에 빠졌다. 70여 년 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였고, 트루먼 행정부가 구축해놓은 태평양방어선을 자기 임기 동안만이라도 지켜야 하겠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중국은 현대화되고 증강된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태평양방어선을 돌파하는 군사작전을 수시로 연습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서유럽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미사일부대들을 자꾸 서쪽으로 이동시키며 전진배치하고 있다. 더욱이 조선은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기세로 백악관을 전방위로 압박하면서 조미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수리아(씨리아)에서 패한 미국군은 조만간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미국의 힘으로는 유지하기 힘든 세계지배체제를 유지하려고 버티다보니, 트럼프의 고민인들 오죽하겠나. 더 심각한 문제는 트루먼에게는 6명의 책사들이 있었지만, 트럼프에게는 유능한 책사가 없다는 것이다. 팜페오와 볼턴은 책사로서는 수준이 낮은 실무관료에 가깝다. 책사가 없는 백악관에서는 전략적 판단이 자꾸 흐려져 툭하면 고위관료들끼리 고성이 오가는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곤경에 빠진 트럼프 대통령이 찾아야 할 비상탈출구는 우선 조미협상을 진척시켜 한반도 비핵화문제와 철군문제를 동시적, 단계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 70년 전, 미국군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소련군 5개 사단이 북조선군과 협공하여 개전 20일 안에 남조선을 점령할 것으로 예견했고, 1945년 8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남조선을 점령했던 미국군 2개 사단과 미국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남조선군이 참패할 것으로 예견하였지만, 오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조선인민군은 초단기속결전으로 개전 72시간 만에 주한미국군과 한국군에게 패배를 안겨줄 것으로 예견된다.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남조선점령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하였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조선인민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주한미국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  

 

(4)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는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섬들로 연결된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하여 소련의 태평양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 - 괌으로 이어지는 태평양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중국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저지하기 힘들다.   

 

미국은 태평양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첨예한 군사대결을 벌이고 있다. 쌍방이 공군력과 해군력을 각각 동원하는 군사대결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미국과 중국이 장거리전략폭격기를 동중국해 상공과 남중국해 상공에 각각 출동시켜 군사대결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2018년 8월 13일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2대가 동중국해 상공에 나타났고, 8월 23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1대가 동중국해 상공에 나타났으며, 9월 24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여러 대가 남중국해 상공에 나타났고, 10월 16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2대가 남중국해 상공에 나타났다. 2018년 9월 하순, 중국은 미국의 장거리전략폭격기 출동에 대응하여 중국 남부에 있는 해군항공기지에 최신형 H-6J 장거리전략폭격기 4대를 전진배치하였다. 중국의 항공모함 함대와 장거리전략폭격기 편대들은 수시로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을 돌파하는 장거리기동훈련을 반복함으로써 그 방어선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태평양방어선을 지키려는 미국의 공군력과 해군력은 제한적이다.    

 

(5) 미국의 온라인 군사전문지 <브레이킹 디펜스(Breaking Defense)> 2015년 2월 24일 보도와 미국의 온라인 안보전문지 <워싱턴자유횃불(Washington Free Beacon)> 2015년 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4-2-1 전쟁전략’을 대폭 축소하였다고 한다. 구체적인 사정은 다음과 같다.

 

ㄱ. 미국 본토 방어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변함없이 계속 유지한다.

ㄴ. 미국군이 전진배치된 유럽, 동북아시아, 중동, 서남아시아 등 4대 해외작전구역 전체에서 군사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폐기하고, 해외군사력을 재배치한다.

ㄷ. 2개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작전능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폐기하고, 1개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작전능력만 유지한다.

ㄹ. 다른 나라에서 갑자기 발생하는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작전능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사항들은 미국이 ‘1-4-2-1 전쟁전략’을 대폭 축소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미국의 전시증원군을 급파하는 능력이 감소된 반면, 미국과 맞선 조선, 러시아, 중국의 군사력이 급속히 증강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전시증원군을 급파하는 능력이 감소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 본토 전역이 조선의 핵공격위험 속에 빠지는 바람에 전시증원군을 파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 오늘, 주한미국군은 존재가치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했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행정부도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곤경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대통령은 복잡한 정세변화를 파악할 만한 지적 능력은 갖지 못했으나, 자기의 직관력으로 주한미국군 철수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가 백악관 고위관리들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여러 차례 제기한 것은 그런 사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1969년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기하였으나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이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9년 지미 카터(Jimmy E. Carter) 대통령도 주한미국군 철수를 검토하였으나 백악관 고위관리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오늘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백악관 고위관리들이 주한미국군 철수를 반대할 수 없는 여러 조건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 미국과 중국의 대결,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이미 일정에 오른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게 된 상황 등이 바로 그런 조건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의사는 그런 조건들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그가 자기의 철군의사를 관철시킬 것으로 예상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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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박근혜 '드레스덴 연설'을 비판했나?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⑫]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
2018.10.22 09:51:59
 

 

 

옛 동독 출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일 재통일을 조망해 보는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의 마지막 주인공은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다. 그는 독일 내에서 손꼽히는 동아시아 전문가로, 북한 김일성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유학생활을 한 적도 있다.  

프랑크 교수는 지난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에 대해 "연설문 작성자를 해고하라"고 비판한 바 있다. (☞ 기사 보기 : 동독 출신 교수 "박근혜, 연설문 작성자 해고하라") 그가 박 대통령 연설에 이같이 다소 과격해보일 수 있는 주장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드레스덴 연설이 있은 지 4년이 지난 2018년, 서울에서 프랑크 교수를 만났다. 그는 당시 연설을 비판한 이유에 대해 "(박 대통령이) 독일 통일이 동독에 대한 서독의 승리인 것 같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이 북한에 대해 이와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남한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평양(북한에)에 신뢰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랑크 교수는 당시 동독 사람들이 서독과 통일을 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독의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면서도 "우리는 동독이 좀 더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나은, 그리고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프랑크 교수는 "서독에 흡수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로운 혁명을 원했다. 물론 먼 미래에 통일을 하는 것은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통일이 아니라 개혁을 원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독일의 재통일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뤄졌다. 통일 당시 20대였던 프랑크 교수는 동독 내 자신의 부모님 세대들이 통일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이러한 측면이 당시 동독에 있던 10~20대에게 대물림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공통적인 이념이 없다는 점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독일의 재통일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이에 대해 프랑크 교수는 "독일 국가주의(애국주의)는 나치 시대의 경험 때문에 선택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공통의 이념을 공유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이 독일로부터 배울 것은 일단 통일의 과정이 시작되면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 뿐이라면서, 통일 전에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랑크 교수는 "보통 약자가, 즉 북한이 한국의 체제를 따를 것이고 한국으로부터 도움이나 자금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통일 전에 북한이 나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본다"며 북한이 일방적인 도움을 필요로하지 않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이러한 가능성도 열어두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프랑크 교수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 차 한국을 방문했던 지난 7월 16일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동독 출신으로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청년기에 직접 경험했는데, 당시 동독 지역의 분위기는 어땠나? 그리고 당시 청년 세대들은 어떤 변화를 바라고 있었나? 

프랑크 : 동독의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련, 심지어 중국과 같은 개혁을 원했다. 동독이 좀 더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나은, 그리고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원했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개혁하고 싶었지 통일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서독에 흡수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로운 혁명을 원했다. 물론 먼 미래에 통일을 하는 것은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통일이 아니라 개혁을 원했다. 

이런 저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혁명이 서독의 정치 세력에 의해 장악됐을 때 많은 불만이 있었다. 많은 동독인들이 느끼기에 통일은 서독의 프로젝트였다. 동독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프레시안 : 여전히 동서독 간에 갈등이나 동독인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갈등이나 차별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주목할 만한 차이는 있다. 독일 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더들이 서독 출신인 경우가 많다. 정치인이나 교수 등을 보면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동독에 살고 있는데도 서독 억양을 쓰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대학 총장이나 교수의 80%가 서독 출신이다. 

물론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동독 출신이긴 한데, 사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 즉 메르켈 총리의 경우 원래는 서독 출신인데 동독 출신으로 바뀐 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메르켈 총리가 동독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서독 간 갈등과 관련해서는, 세대에 따라 좀 다른 것 같다. 몇 주 전에 예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는 내가 라디오에 출연한 것을 들었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독 리포터의 멍청한 질문에 대해 동독 출신의 교수가 똑똑한 대답을 했다고 평가했다.  

반면에 지난 2월 나의 새 책을 소개하기 위해 TV에 출연했을 때 나는 익명의 서독 사람으로부터 엽서를 하나 받았다. 그는 내가 동독 출신이라는 것에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물론 이런 반응은 구세대의 이야기다. 그들은 냉전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양쪽의 '프로파간다'를 모두 겪었고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통일 당시 40대였던 이런 분들은 그때의 사회 변화에 적응하기가 정말 어려웠고 직업도 많이 잃었다. 물론 당시에 직업이나 지식이 통일된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지는 몇몇 분들은 행운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적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또 동독이 서독의 체제나 법을 받아들이는 상황, 즉 외부 시스템이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에 동독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이름을 쓰거나 일본 신을 숭배하는 등의 행위를 싫어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제 세대는 좀 달랐다. 통일된 이후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고, 대학도 졸업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법도 알고 있었고,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통일된 이후 태어난 제 아들은 지금 18살인데 그 아이에게는 통일이 중요하지 않다. 이미 통일된 독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제 아들은 독일을 그냥 독일 그 자체로 생각한다.  

또 부모님 세대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이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한국에도 그렇겠지만 부모가 소득이 낮고 대학교육을 받지 못하고 좋은 관계망(연줄)을 갖지 못하면 그게 다음 세대까지 넘어가는 경우가 있지 않나? 독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특히 통일 이후에도 같은 장소에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교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 차이를 없애는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가 고향이 라이프치히인데, 아직 거기에 살고 있는 친구 중 한 명은 여전히 소득이 매우 적다. 기본적인 생활 외에 다른 것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독일 통일의 패배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등이 있는 작센주는 통일 성공의 상징처럼 보인다. 통일로 인해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분석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동독의 경제 수준이 서독의 70% 정도라고 대체적으로 보고 있는데, 통일 이후 장기적으로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있었나? 

프랑크 : 경제적으로 몇몇 긍정적인 사례들이 있고, 작센주의 경우 통일 이전부터 발전됐던 곳이긴 하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 통일 이후 산업이 많이 붕괴됐고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 옛 동독 지역에 위치한 인구 25만 명의 켐니츠 시의 모습. 동독 당시에는 '칼마르크스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전시 도시로서 번화했지만, 통일 이후 경제 위기를 겪으며 쇠락했다. 사진을 촬영한 곳은 중앙역 부근 시내 중심가였는데 평일 오전 9시였음에도 지나다니는 차량도, 사람도 많지 않았다. ⓒ특별취재팀


그런데 이같은 일이 북한에서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북한은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이같은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고난의 행군). 게다가 독일과는 달리 통일 이후 북한에 투자할 자본이 있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다. (북한이) 중국과 근접해있다는 것이 이러한 배경 중 하나다.  

그리고 동서독 간 경제 문제와 통일을 연결짓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다. 1990년대 통일 이전에는 동독과 서독이 체제가 달랐기 때문에 경제적 격차가 있을 수 있는데, 30년이나 흐른 지금은 그 차이가 통일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만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같은 서독인데 뮌헨은 좀 더 돈이 많고 브레멘은 그렇지 않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요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인지, 어떤 것이 통일 때문에 생긴 변화인지 구분 짓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동독 쪽에 특별한 지원이나 프로그램은 없을 것 같다. 도시 간의 차이처럼 개인 간의 삶도 통일이라는 변수로 구분 짓기는 굉장히 어렵다. 

프레시안 : 지역 격차, 세대 격차, 가치관 변화 등이 동독 지역에 급격히 일어났을 텐데, 그로 인해 동독 내부에 새로운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통일의 영향으로 새로운 사회 문제, 예를 들면 극우화 현상 등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프랑크 : 일단 스킨헤드, KKK(Ku Klux Klan, 백인 우월주의 단체) 등 극우적인 행동이 서방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동독 지역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지만 사실 이건 동독 지역의 현상이 아니다. 심지어 이건 독일의 현상도 아니다. 

정치적 극단주의는 이념의 공백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강자에 의해 식민지가 됐다'는 느낌과 결합된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건은 동독 지역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났고 이것이 동독 지역에서 극우적인 움직임이 힘을 얻게 된 이유다. 

그런데 소위 "새로운" 사회적 문제들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라 매우 오래된 것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직업과 수입이 없고 그래서 미래가 없다는 문제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부동산이 가치를 잃고, 나이든 사람들은 불만이 많아지면서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현상은 동독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동독 지역에서 정말로 새로운 현상은 이러한 모든 일이 매우 갑자기, 그리고 빠르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실제 이러한 현상은 구 동독 지역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통일 이후) 불과 1~2년 사이에 실업률이 0%에서 10%, 심할 때는 20%까지 올라갔다. 

프레시안 : 경제분야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분야의 문제 때문에라도 '독일 통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내부 평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프랑크 : 독일 통일은 예상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다. 우선 정치적으로 동서독 간 공통된 이념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 국가주의(애국주의)는 나치 시대의 경험 때문에 선택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공통의 이념을 공유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예를 들면 월드컵에서 독일 깃발을 흔드는 것이 한국인들이 태극기를 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인가?  

프랑크 : 국기를 흔들고 응원하는 문제가 독일 신문이나 TV에 자주 나오는 토론 주제다. 일단 국기는 그 경기가 있을 때만 흔드는 것이다. 다른 데서 흔들면 '나치 아니야? 우파 아니야?'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월드컵 기간 중에 항상 그런 문제가 제기된다. 근데 이건 독일 사람에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정치인이 이런 주제를 꺼내면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정부든 공통된 사회 통합의 가치를 만들고 확보하려는 욕망이 있을 것 같은데 독일 정부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지?  

프랑크 : 사회통합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그런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각자가 알아서 하면 좋겠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동독의 유산 

프레시안 : 독일의 통일이 서독 중심의 흡수통일이었지만, 동독에도 통일 이후에 계속 남길 만한 가치나 유산이 있을 것 같다. 동독으로부터 전해내려온 것 중에 통일 이후에도 살릴 만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프랑크 : 알다시피 우리는 독재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이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 중 하나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하고,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 뤼디거 프랑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동독에서는 정치적인 자유도,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통일 이후 이런 자유를 쟁취하다 보니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반대로 서독에서는 원래 그런 게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덜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프레시안 : 통일 당시 여성학자들의 인터뷰를 보니까 통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동독의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동독 사회에서 여성은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했는데 서독 사회는 여성의 일자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 이후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많이 잃었다고 한다. 

프랑크 : 당시 동독 여성들은 사회 내에서 영향력이 강하고 독립적이었다. 동독 경제가 여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육아도 도움을 주고 사회복지도 잘 마련했어야 했다. 그런데 통일 이후에는 많은 여성들이 정규직보다는 파트타임으로 많이 일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동독 때보다 적은 상황이다.

사회적 시스템으로 인해 여성들이 일을 많이 하지 않고 있는 측면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세금 문제다. 독일은 결혼하면 부부의 수입을 합해 세금을 매긴다. 또 세금에 누진세가 있어서 부부가 모두 일을 할 경우 수익이 많아지고, 그만큼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들 중에서는 차라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정 전체 수익 측면에서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프레시안 : 통일 후와 비교했을 때 예전 동독이 더 좋았던 사례 중 하나로 여성이 노동하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까? 

프랑크 : 그런데 이건 잘못된 이유로 좋은 결과가 나왔던 사례다. 동독 정부는 여권 신장의 차원에서 여성의 노동을 권고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동을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물론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평등을 보장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프레시안 : 통일 후 동독 지역에서 한동안 '오스탈기'(Ostalgie, '동쪽'이라는 뜻의 '오스텐(Osten)'과 '노스탤지어'의 독일어인 '노스탈기(Nostalgie)'의 합성어. 동독에 대한 향수를 의미한다. 편집자) 현상이 일어났고, 최근에는 오스탈기 제품이 이른바 '힙스터 문화'의 소비재로 각광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스탈기 현상은 단순히 통일 부작용으로 설명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한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프랑크 : '오스탈기'와 같은 예전을 그리워하는 현상이 특별히 구 동독 지역에서만 나타난다고 오해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노스탤지어'는 모든 곳에 있다. 이건 과거에 대해 이상적으로 해석하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다. 모든 언어에 "좋았던 옛 시절"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또한 과거에 대한 갈망은 예전의 국가, 예전의 시스템 또는 예전의 생활 환경에 대한 것이 아닌,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크다. 이는 왜 노스탤지어가 중산층이나 고연령층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동독에 대한 향수 또는 그리움을 갖는 경우도 동독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본인이 젊었을 때, 어렸을 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여러 비판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당신에게, 그리고 독일에 준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프랑크 : 14세기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을 때 그 시기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처럼 (독일의) 통일은 내 삶의 일부다. 몇몇 사람들은 일본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 또는 1987년의 민주화를 경험했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는 좋은 방향 또는 나쁜 방향으로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한 사건이 있다. 이는 종종 동시에 나타난다. 통일을 동떨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통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바꿨다. 나에게 있어서 통일은 큰 변화였다. 

그러나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통일 보다는 세계 2차대전이 더 큰 사건이었고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또 1999년 태어난 내 아들 입장에서는 통일은 단지 역사 책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일 뿐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때때로 큰 변화들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단지 살아남아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계기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른 변화들과 마찬가지로 통일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오직 이기거나 오직 패하기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독일 통일의 영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독일 내에 존재하는 많은 개인들의 삶 만큼이나 다양하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을 것으로 본다.  

준비하지 않으면 실수할 것 

프레시안 :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을 두고 '독일 통일과 동독에 대한 이해 없이 만들어 진 연설문'이라고 비판했다. 드레스덴 연설이 왜 문제였는지를 간략히 설명해 달라. 아울러 남북이 독일 통일 혹은 동독 개혁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독일 통일이 동독에 대한 서독의 승리인 것 같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이 북한에 대해 이와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남한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평양(북한에)에 신뢰를 줄 수 없다. 

독일의 사례가 한국에 어떤 교훈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한국은 독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 독일과 한국은 너무 많은 측면에서, 너무 많이 다르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일단 통일의 과정이 시작되면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한국이 동독으로부터 배울 점이라고 본다. 따라서 한국은 통일 전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우선 통일 이후 재산권 처리 문제가 쟁점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누가 북한의 땅을 가지고 있는지. 남한에서는 부동산 서류 있으면 땅의 소유가 어느 정도 증명이 되지만 평양의 경우, 예를 들어 누군가가 류경호텔이 있던 자리에 대해 이거 내 땅이라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 뤼디거 프랑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이러면 누가 진짜 소유권자인지에 대한 싸움이 일어나고 몇 년에 걸쳐 법적 공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법적 공방이 진행될 동안에는 누구도 거기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면 일자리도 사라질 것이고 통일 비용도 그만큼 많이 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이 아직 독일의 사례를 제대로 배우거나 이를 통해 통일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두 번째로 북한의 엘리트들을 통일 이후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특히 노동당의 고위층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독재에 가담했으니 그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감옥에 보낼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을 것인가? 북한군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결정을 미리 내려 놓아야 한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독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너무 당연히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그렇다. 

왜 한국이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한국 정부 관계자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알고 있는데 나중에 통일되고 나서 생각해 볼게" 라고 한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독일의 경험에 따르면 지금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프레시안 : 현재 통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준비가 너무 미흡하다는 뜻인가? 

프랑크 : 한국이 대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인이 문제지. 그래서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당신이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생각해 보라. 일단 임기 동안에 할 수 있는 것만 하자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어려운 문제는 미룰 수밖에 없다. 

북한 당 간부 및 군, 관료 등의 처리 문제만 해도 만약 어떻게 처리하겠다고 발표하면 당연히 북한에서는 굉장히 화를 낼 것이다. 화해 기조랑 평화 분위기를 무너뜨린다고 반발할 수 있음 있다. 그래서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다. 또 정치인들에게 장기적인 일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트럼프와 같은 대통령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웃음)  

프레시안 : 한국 정부는 올해 안으로 종전선언이 나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남북 경제협력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보다는 통일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지?

프랑크 : 일단 경제협력은 북한에 대한 제재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투자할 수 있으니까.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올해 안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정부가 무엇인가 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매우 한국적인 사고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하는 것보다는 예를 들어 민간 부문에서 투자가 가능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투자를 하라고 강제하는 것보다는 환경을 마련해줘서 기업들이 스스로 결정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또 특정한 한 정부에 국한된 단기적인 통일 정책보다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그리고 모든 사회가 함께할 수 있는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해결책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필요 없을 수 있지만 가능성이 있는 한 대비해야 한다. 북한이 붕괴하지 않고 남한처럼 개발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를 통해 최악의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 한국 도움 필요 없을 수도  

프레시안 : 올해 들어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문가로서 최근 급변하는 남-북-미 관계를 어떻게 지켜봤나? 

프랑크 : 2018년 초 남북이 단지 (어떤 상황이 일어나서 거기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더욱이 그들은 미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에서 힘을 가진 국가들을 다루기 위해 협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0년대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외교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사진은 함께 군사분계선(MDL)을 넘는 남북 정상 ⓒ공동취재단


남북이 필요에 의해 이같은 협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의 주도권을 남북이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읽혔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내전이 있었을 때 일본이 침입했는데,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단 내전을 멈추고 협력해서 일본을 무찔렀다. 그 이후에 다시 경쟁했다.

지금 남북은 함께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평창 올림픽에 맞춰 의제를 설정했다. 또 4월 27일 정상회담을 이뤄냈다. 남한은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모든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방침에 감사를 표시했으며 심지어 노벨 평화상까지 언급했다.  

프레시안 : 통일 이전에 남북이 서로 만나는 것이 필요해 보이는데, 남북 주민들은 여전히 제한적인 교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앞으로 남북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펴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통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독일의 통일 과정이랑 똑같을 거라고 전제하는데 그건 오류다. 보통 약자가, 즉 북한이 한국의 체제를 따를 것이고 한국으로부터 도움이나 자금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통일 전에 북한이 나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본다. 북한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발전 과정을 거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즉 둘 다 경제 성장을 이뤘을 때 통일이 되면 북한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에서 북한으로 일자리가 넘어가면서 한국의 일자리가 부족해질 수도 있다. 독일 같은 경우 동독에서 서독으로 일자리가 이동했다. 그래서 동독이 어려워졌는데, 한국에서는 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프레시안 : 한국 경제의 큰 특징은 소수의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 경제 체제를 좌우한다는 점이다. 통일이 되면 한국 경제의 이러한 특수성이 더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프랑크 : 재벌의 자본이 북한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북한은 텅 빈 공간이 아니다. 북한 내에서도 재벌이 생기고 있다. 주유소, 화장품, 컴퓨터 공장 등도 있고 고려항공의 경우에는 항공사업뿐만 아니라 택시나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이 통일된다고 해서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북한의 기업은 국가기업이긴 한데 족벌 경영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가족이 경영하기도 하고 군이 경영하기도 하는, 약간 섞여 있는 형태다. 기업 이름 중에 '승리'라는 말이 들어있으면 보통 군이 경영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남북이 교류를 하면 북한도 사실상 한국이 과거에 겪었던 것과 같은 고도성장을 거칠까?  

프랑크 : 경제성장이 어떻게 될 거라고 완벽하게 예측하지는 못하겠지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독일 통일 과정처럼 북한이 붕괴해서 남한이 흡수통일 하는 것과 북한이 내부의 개혁을 통해 정치 체제는 유지하되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방식이다. 

만약 두 번째 시나리오가 현실 가능하다면 북한은 한국과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북한에는 값싼 노동력도 있고 높은 교육을 받은 숙련된 노동자도 존재하고 있으며,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관념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북한은 독재 체제라서 특정한 산업을 공략,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 또 북한은 섬이나 다름 없는 남한과는 달리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광물자원도 남한에 비해 많다. 다만 미국과 같은 정치적인 파트너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적인 파트너를 만들어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는 젊은 세대가 통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를 계기로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통일 가능성에 대해 전망해본다면? 

프랑크 : 통일은 여론의 문제가 아니다. 1990년 당시 많은 독일 사람들은 통일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통일은 일어났다. 최근의 사건들은 거의 20년 동안 (남한 사람들이) 가져왔던 북한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통제 불가능할 수도 있고 1990년 전후로 생겨났던 동유럽의 상황으로 (국면을) 이끌 수도 있다. 또는 1978년 이후 중국처럼 강력한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한국 통일의 기회가 커질 것으로 본다.  

트럼프와 한반도 평화 

프레시안 : 중국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크게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북한 경제가 붕괴해 난민이 발생하지 않게끔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적 우려 또한 있다. 

프랑크 : 우선 북한과 중국은 무역 분야에서는 계속 교류를 했다. 그런데 한국-미국과 같은 동맹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리더로 입지를 굳히길 원한다. 이를 위해 인접해있는 국가인 한국이 꼭 필요하다. 마치 미국이 멕시코, 캐나다, 쿠바와 같은 이웃 국가들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중국이 한국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중국에 우호적인지, 한국이 안정적인지 등이 중국에게는 중요하다. 

또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를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미국이 남한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도입하려고 할 때처럼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의 밑바탕에는 최소한 현 상황을 유지하거나 미국의 영향을 없애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 뤼디거 프랑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북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 이건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을 두려워하는 중국은 북한의 붕괴 위협이 커지면 이를 막으려고 할 것이다. 이게 중국이 북한의 안정을 원하는 이유다. 

프레시안 : 현재의 한반도 평화 국면을 만드는 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역할이 어느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트럼프 정책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반도 정책에 대해서는 트럼프가 매우 긍정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 미국 정부는 북한과 대화하기 위해 조건을 높이면서, 즉 CVID를 먼저 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전제조건을 내세웠는데 트럼프는 '이전에는 어땠든지 상관없이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행동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가 위험한 부분도 있다. '화염과 분노', 지난해 유엔 총회에서 발언했던 완전한 파괴, 핵 단추 이야기 등 그의 발언에는 우려스러운 지점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입장을 계속 고수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트럼프의 인내심이 끊어져서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면 정말 위험해질 수 있고 2차 한국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재선을 하지 못하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질까? 

프랑크 : 부시 정부는 ABC(Anything but Clinton), 즉 전임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했던 것을 부정하고 이와 반대되는 정책을 취했다. 트럼프는 ABO, 'Anything but Obama', 즉 오바마 정부에서 했던 정책을 부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에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마찬가지로 트럼프가 했던 정책과 반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북미 간의 이러한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 (통역 : 이지인)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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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은 분단된 조국 원하지 않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10/22 09:54
  • 수정일
    2018/10/22 09:5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대전시민들, 현충원 둘레길 걸으며 평화통일 염원
대전=임재근 객원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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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22  01: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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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현충원 둘레길을 걸으며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 둘레길 걷기’ 행사가 10월 21일 오후 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되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대전현충원 둘레길을 걸으며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 둘레길 걷기’ 행사가 10월 21일 오후 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파란색 한반도 모양이 새겨진 손 깃발과 손수건을 들거나 묶고 둘레길을 걸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10월 21일 오후 대전현충원에서 둘레길을 걸으며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 둘레길 걷기’ 행사가 진행되었다. 출발 직전 참가자들은 한반도 손 깃발을 들고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평화로 한걸음! 통일로 더 큰걸음!’

10월의 21일 일요일 오후. 대전현충원(대전 유성구 노은1동)은 휴일을 맞아 참배 온 가족들뿐만 아니라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한 가을을 만끽하기 위해 대전현충원 둘레길을 걷기 위해 온 시민들까지 많은 인파가 몰렸다.

초록빛 상록수와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잎 사이로 파란색 한반도 모양이 그려진 손 깃발을 든 사람들이 둘레길을 줄지어 걷고 있었다. 바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전본부(상임대표 김용우)가 주최한 ‘평화로 한걸음! 통일로 더 큰걸음!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 둘레길 걷기’ 행사 참가자들이었다. 휴일을 맞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참가한 가족 참가자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걷기대회 출발에 앞서 진행된 개회식에서 유성겨레하나 김강식 대표는 “좋은 날, 좋은 분들과 좋은 취지로 함께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라며, “이 걸음이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큰 걸음으로 또 하나의 족적이 남겨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노원록 사무처장은 “내년이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라며, “뜻깊은 해를 앞두고 선조들이 바랬던 한반도의 완전한 독립은 지금에서는 통일”이라며, “이번 행사를 통해 통일의 의지를 높이자”고 호소했다.

이날 평화둘레길 걷기행사는 대전지역 사회참여 대학생 동아리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민중당유성구위원회, 유성겨레하나,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가 함께 주관했다.

   
▲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 둘레길 걷기’ 행사 주관단체 대표자들이 출발에 앞서 인사를 하고 있다. 민중당유성구위원회 강민영 위원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걷기대회 출발에 앞서 참가자들은 몸풀기 체조를 했다. 걷기대회에 참가한 정용래 유성구청장(왼쪽 2번째)과 오광영 시의원(왼쪽 3번째)이 몸풀기 체조를 따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정용래 유성구청장도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정용래 청장은 “대전현충원은 역사를 많이 돌아볼 수 있는 장소인데, 이곳에서 평화 둘레길 행사를 하게 돼서 굉장히 의미가 있다”며, “현 시점이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전환기”라며, “통일 한반도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이 길을 걸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정 청장은 또한 “이런 행사가, 발걸음들이 더 크고 확장될 수 있도록 유성구에서도 노력하겠다”고도 덧붙였다.

대전현충원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평화 둘레길은 대전현충원 보훈매점 옆 만남의 장소에서 출발해서 ‘빨강길(1.4km)’을 따라가다 ‘순직 공무원 묘역’을 들른 후, ‘빨강길’에 이어진 ‘주황길(1.3km)’을 따라 ‘사회공헌자 묘역’으로 이어진다.

사회공헌자 묘역을 나와 국가원수묘역 뒤편으로 이어진 다시 주황길로 접어 들면 보훈샘터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계단을 따라 장군 제1묘역으로 올라간 후 노랑길(1.4km)의 일부를 거쳐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내려오면 평화 둘레길은 끝이 난다.

이번 평화 둘레길은 2015년 11월 조성된 대전현충원 보훈 둘레길을 활용해 약 4km 구간으로 기획되었다. 보훈 둘레길은 무지개 빛깔의 이름을 따 7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난해 4월 기존 8.2㎞에서 10.4㎞로 증설됐다.

   
▲ 해설사 이지수 학생(충남대 정외과 4학년)이 순직공무원묘역에 양승진 선생님의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순직공무원묘역에 안장된 세월호 교사들의 사연을 듣고 있는 참석자들. 순직공무원묘역에는 세월호 순직 교사 10명이 안장되어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평화 둘레길을 걷는 동안 순직 공무원 묘역, 사회공헌자 묘역, 제1장군 묘역, 애국지사 2묘역에서는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야기 해설사는 충남대, KAIST 등 유성구 소재 대학교 학생들이 준비했다.

순직 공무원 묘역에서는 양승진, 유니나, 김초원, 이지혜 선생님 등 세월호 희생자 교사 10명이 안장되어 있어,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순직한 교사들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 ‘유해 없이 현충원이 안장할 수 없다’는 관련법 때문에 안장을 못 할 뻔하다가 머리카락과 체모를 모아 안장할 수 있었던 양승진 선생님 사연이나 19명을 탈출시킨 후에도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학생의 전화를 받고 다시 선실로 들어갔다가 순직한 유니나 선생님의 사연 등을 들으면서 참가자들의 숙연해지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 매주 화요일 저녁 으능정이 거리에서 노란 리본 나눔 행동을 지속하고 있는 ‘님들의 행진’에서는 이날 순직공무원묘역을 찾은 평화 둘레길 행사에 참석자들에게 노란 리본을 나눠줬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금용선 해설사(충남대 언론정보학과 1학년)가 사회공헌자 묘역에서 손기정 선수와 오제도 검사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손기정 선수의 묘소(10번)와 오제도 검사의 묘소(8번)는 바로 인접해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사회공헌자 묘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손기정 선수와 오제도 검사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 우승자로 잘 알려진 손기정 선수는 올림픽 우승 이후 강제로 일본제국 주의를 찬양하는 데 동원되기도 하였으나, 그의 행적 곳곳에는 식민지 조선 청년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울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손기정 선수는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 건국동맹에 참여하기도 했다.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의 손기정 선수는 죽을 때까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으며, ‘죽기 전에 남북통일이 된다면 신의주-부산 간 역전경주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002년 눈을 감아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되었다.

국가보안법의 초안을 잡고,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해 ‘사상검사’로 알려진 오제도 검사는 한국전쟁 당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총지휘관을 맡아 부역혐의자 처벌과 학살에 앞장섰다.

또한 국회 프락치 사건, 진보당 사건 등에 관여하며 무고한 희생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사망한 그는 “‘반공검사’로서 건국에 이바지한 공적을 인정받아” 법조인 최초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대전현충원 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장군 제1묘역에서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맡으며 오제도 검사와 함께 민간인 학살에 앞장섰던 김창룡과 12.12 군사반란으로 징역 6년 형을 받았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을 20여일 앞두고 지병으로 사망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유학성,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광주 진압 책임자였던 소준열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적절하게 안장된 이들의 이장을 위해 국립묘지법 개정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 박준형 해설사(KAIST 동아리 쏘셜메이커 회장)가 장군 제1묘역에서 유학성, 소준열 등 반민주인사들의 이야기를 해설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10월 21일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 둘레길 걷기’ 행사에 참가해 둘레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10월 21일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 둘레길 걷기’ 행사에 참가해 둘레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평화 둘레길의 마지막 지점은 ‘애국지사 2묘역’으로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지사와 장남 김인 지사 안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해설을 맡은 오미선 학생(충남대 정외과 4학년)은 “일제 강점기 나라를 찾기 위해 떨쳐나섰던 분들은, 독립 이후에 분단에 반대하는 활동에 나섰고, 분단 이후에는 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반면, 일제 강점기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은, 독립 이후에 분단에 앞장섰고, 분단 이후에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반공을 내세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8년 올 한해는 판문점 선언이 있었고, 9월 평양공동선언이이어지며 역사에 길이 남을 해가 될 것”이라며,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로부터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그리고 평화를 위해 모두 함께 노력하자”고 덧붙였다.

   
▲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 둘레길 걷기’ 행사를 마친 이들이 곽낙원 지사와 김인 지사의 묘소가 있는 ‘애국지사 2묘역’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한 자리에? 굉장히 아이러니!

평화 둘레길 행사에 참가한 최현진(유성구 지족동, 51)씨는 “반민족행위자, 친일파가 아직도 이곳(현충원)에 묻혀 있다는 게 가슴 아프다”며, “여기에 김구 선생님의 어머님과 자제분도 여기에 계시던데, 항일운동을 했던 분들과 그분들을 핍박했던 사람들이 한곳에 있다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다”고 참가 소감을 말했다.

오광영 대전시의원(온천1동,온천2동,노은1동)도 “이야기도 듣고 대전현충원 둘레길을 걸으면서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며, “평화 둘레길 행사를 지속적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성 장대중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참가한 지홍아 학생은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어서 슬프고, 한편으로는 꼭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황서영 학생은 “(손기정 선수와 김구 선생 등)책에서만 읽었던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여기에서도 듣게 되어 좋았다”고 말했고, 김민주 학생은 “이은 곳에 있어서는 안 될 법한 안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기분이 안 좋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출발지점에서는 남북정상회담과 평창올림픽 개최 등 최근 남북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판넬 전시가 진행되었고, 지난 9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북 두 정상이 손을 잡은 장면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코너도 마련되었다.

평화 둘레길 행사가 끝난 후에 참가자들은 애국지사 묘역에서 묘비 닦기 및 환경정화 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는 약 200여명이 참가했고, 오후 2시에 시작해 5시경에 끝났다.

대전현충원은 1985년 약 322만㎡(97만 4천평) 규모로 준공됐다. 시설공사를 마치기도 전인 1982년 8월 첫 안장을 시작해 현재는 애국지사와 순국선열, 국가유공자, 군인 등 8만 5천여명이 안장되어 있다.

   
▲ 평화 둘레길 행사가 끝난 후에 참가자들은 애국지사 묘역에서 묘비 닦기 및 환경정화 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묘비 닦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출발지점에서는 지난 9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북 두 정상이 손을 잡은 장면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코너가 마련되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출발지점에서는 남북정상회담과 평창올림픽 개최 등 최근 남북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판넬 전시가 진행되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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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꺼내지못하게 한 성철스님

돈을 꺼내지못하게 한 성철스님

조현 2018. 10. 21
조회수 3 추천수 0
 

 

1-.jpg» 성철 스님이 원영(맨왼쪽) 법정(오른쪽에서 두번째) 원택(맨오른쪽) 스님과 서있다.

 

표지-.jpg성철 스님1912~93)이 열반에 든지 25년이 됐다성철 스님은 팔공산 성전암에서 철조망을 치고 정진하고해인사 백련암을 찾아온 신자들에게 3천배를 시키는 등의 신화적인 일화들이 주로 전해진다.

그런데 성철 스님 열반 25주기를 맞아 성철 스님의 새로운 면모들이 나타난 인터뷰집이 출간됐다. ‘성철 큰스님을 그리다’<성철>(장경각 펴냄유철주 지음)이다이 책은 성철 스님을 가깝게 모신 16명의 출가자들과 성철 스님과 인연이 있는 20명의 재가자들을 인터뷰한 것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은 큰스님이 열반한 뒤 다른 상좌들이 텔레비전에 인터뷰한 것을 보고다들 큰스님이 무서웠다고 얘기하지않고 자상하고공부 길을 잘 일러주셨다고 해 큰스님이 두 분 계셨나” 나는 어렵게만 느껴졌는데다른 상좌스님들은 다르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성철 스님을 모시고 산 제자들간에도 경험이 다르고스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 놀랐다는 것이다.

 

이 책엔 1953년 성철스님에게 출가해 맏상좌가 된 천제 스님그리고 그와 함께 성철 스님을 시봉하며 무려 10년간이 행자 생활을 한 만수 스님 등 초기 제자들이 나와서 성철 스님이 1960년대 후반 백일법문을 하면서 불교계의 혜상으로 등장하기 전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천제 스님은 6남매 출가자로 유명하다속가 장남인 그가 성철 스님에게 출가한뒤 5명의 동생들도 모두 출가한 것이다그는 부친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49재를 모시면서 그곳에 주석해있던 성철 스님과 인연을 맺었다천제 스님은 성철 스님이 당시엔 신자들에게 3천배를 시키지는 않고, 1천배를 시키거나 상황에 따라 절을 시켰다고 한다또 성철 스님의 부친이 방문했을 때 부친이 좋아하는 수박도 대접하면서 나름대로 효도를 다했지만 스님의 권위를 위해 속가 부모에게 하심할 수는 없다고 해 부친이 불편했을 때도 자신을 대신 문병 보내고장례식 때도 자신을 보냈다고 회고했다천제 스님은 성철스님이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었던 점을 전했다.

 

천제6남매-.jpg» 모두 출가한 맏상좌 천체스님 6형제와 함께 한 성철 스님

 

요새도 그렇지만 전에도 돈이 있는 분이나 권력 있는 분이 절에 와서 예불을 드리면 스님들이 목탁을 치고 불공을 드린다기도하러 온 사람들은 대접을 받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그러나 큰스님은 이런 방식은 불공이 아니라고 했다불공하러 온 사람은 반드시 공양간에서 음식을 해 나르도록 하고 직접 예배를 해 자기 신심을 돈독하게 해서 부처님께 성의를 보여야한다고 했다그렇게 해서 자기변화와 발전이 있는 것이 진정한 불공이 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스님들을 고용한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2-.jpg» 가야산 정상에 오른 성철 스님과 상좌 원택 스님

 

 통상 6개월간 한다는 예비승려 단계인 행자를 무려 10년간이나 하며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만수 스님은 큰스님은 책방인 장경각에 한번 들어가면 몇 시간 동안은 꼼짝도 안했고또 어린 행자들과 함께 직접 목탁을 잡고 예불을 올리고 108참회와 능엄주 독송을 했다고 회고했다.

또 성철 스님은 한문 경전을 읽으려면 문리를 터득해야한다며 처음 대학-중용-논어-맹자 순으로 사서를 보게 했다고 한다만수 스님의 회고다.

 “<논어>를 다 읽고 큰스님께 말씀을 드리니 子曰 可以行而行 不可行而不行 (자왈 가이행이행 불가행이불행) ’을 풀이해 보라 했다글자 그대로 가히 행할 만하면 행하고 행하지 못할 것 같으면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 드렸더니,큰스님께서는 좀 더 분명히 대답하라고 하시더니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반드시 행할 것만 행하고 안 해도 될 것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야라고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수행자로서 하지 않아야 할 것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 것 같다요즘 보면 스님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다녀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가큰스님은 그런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셨다고 생각한다.”

 

3-.jpg» 제자들과 경주 남산에 오른 성철 스님

 

 1950년대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을 찾아간 이래 평생 성철 스님을 사표로 수행해온 김덕이 보덕화 보살(2015년 별세)은 백수를 앞둔 나이에도 성철 스님의 철저한 삶의 자세를 전했다.

성철 스님은 쌀을 한톨이라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않은만큼 근검절약했다그리고 성전암에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에게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은 절대 땅에 놓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그래서 신도들이 성전암에 올라갈 때는 공양물을 땅에 놓지않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쉬었다또 성철 스님은 당신 앞에서 절대 돈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평생 돈을 멀리했기 때문에 신도들에게도 이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성전암 살림이 어려운 것을 알았던 신도들은 할 수 없이 성철 스님 몰래 시봉하는 스님들에게 시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쓴 유철주 작가는 지금까지 성철 스님이 스님들에게 책을 보지 마라한 것으로 전해져왔지만실제 성철 스님은 제자들이 처음 입산하면 나름의 커리큘럼에 따라 처음 2년 정도 경전 공부를 시키고불교에 대해 안목이 생기면 선방에 가도록 했다면서 인터뷰에 응한 성철 스님의 제자들의 얼굴이 참 깨끗한 것을 보고 수행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성철 스님의 맏사제 천제 스님이 돈을 받지 말고 법보시용으로 만들 것을 제안해 서점에서 판매하지않은 비매품으로 출간해 성철 스님 열반 25주기 추모기간에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는 추모객들에게 배포하기로 했다.

성철 스님 25주기를 맞아 오는 24일부터 28일까지 해인사 백련암에서 44야 초모 참회법회, 27일 해인사 사리탑에서 초모 삼천배 정진, 28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25주기 추모재가 봉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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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 비판한 조선일보 노조위원장 ‘불신임’ 위기

정부의 탈북 기자 취재 불허 통보에 조선일보 책임 지적했다가 내부서 반발… “노보 사유화” 비판에 “누구라도 의견 담을 수 있어”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8년 10월 21일 일요일
 

‘탈북민 출신’ 조선일보 기자에 대한 정부의 남북회담 취재 불허 조치가 조선일보 노조 구성원 간 갈등으로 비화됐다. 정부 조치를 비판하면서 조선일보 책임도 함께 물은 박준동 노조위원장이 불신임되는 상황에 몰렸다.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통일부는 지난 15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고위급 회담을 취재하려던 김명성 조선일보 기자의 판문점 출입을 불허했다. 김 기자는 지난 2002년 남한으로 넘어온 탈북민 출신이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남측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판문점의 지역적 특성, 남북고위급회담이라는 성격, 상당히 제한된 인원이 조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감안했다”고 해명했지만 통일부 기자단은 ‘언론 자유 침해’라고 반발했다. 

조선일보 역시 사설에서 “북 눈치 살피는 정도가 거의 ‘심기 경호’ 수준”이라고 정부를 거세게 비난했다.   

 

▲ 조선일보 사옥 간판. 사진=미디어오늘
▲ 조선일보 사옥 간판. 사진=미디어오늘
 

반면 박준동 조선일보 노조위원장은 지난 16일 조선노보에서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남북회담 취재에 탈북민 출신 기자를 보내는 것이 협상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가 이번 사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었다. 

 

국민 여론도 살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박 위원장은 “언론 자유 침해 상황에 대한 국민 여론이 언론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며 “평화체제 구축이 험난한 시대적 과제이기에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언론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정부를 비판함과 동시에 책임 있는 언론의 자세를 되새겨봐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현재 조선일보에 대한 국민 시선이 곱지 않다는 사실을 곱씹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노보 발행 이후 노조 소속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들이 “노보가 대다수 조합원들의 ‘민심’이 아닌 특정인의 정치적 입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의심된다”며 박 위원장을 비난했다. 박 위원장이 발행하는 노보가 조합원 입장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해 박 위원장은 “노보는 공론의 장이다. 조합원들이 들어볼만한 가치 있는 의견이라면 노조 집행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글을 기고하고 반론할 수 있다”며 다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사주 심기를 거스른다고 해서 노보에 글을 자유롭게 게재할 수 없다면 공론은 형성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노보 발행 하루 뒤 지난 17일 ‘노보 사유화’ 논란을 이유로 박 위원장도 참석한 긴급 노조 대의원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 위원장은 이 사태를 이유로 조합원들이 책임질 것을 계속 요구한다면 탄핵 또는 불신임 투표를 받겠다고 말했다. 대의원들도 박 위원장이 제안한 불신임 투표 진행 여부에 대해 조합원들 총의를 묻기로 결의했다. 오는 22일 대의원 회의에서 의견 수렴 방식을 논의할 예정이다.  

노조위원장 등 노조 임원 불신임은 조합원 또는 대의원의 재적인원 4분의1 이상의 발의로 시작된다. 이후 총회 또는 대의원회에서 직접·비밀·무기명 투표가 이뤄지는데 재적인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인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불신임된 임원은 직책으로부터 해임되며 그 직무가 정지된다. 

 

▲ 박준동 조선일보 노조위원장이 지난 1일 발행한 조선노보. 그는 노보에서 조선일보 사주의 언론 사유화와 세습 문제를 직격했다.
▲ 박준동 조선일보 노조위원장이 지난 1일 발행한 조선노보. 그는 노보에서 조선일보 사주의 언론 사유화와 세습 문제를 직격했다.
 

통일부의 취재 불허 사태 관련 노보로 빚어진 노조위원장과 조합원 간 갈등이지만 그동안 사내에서 박 위원장이 발행하는 노보는 ‘골칫거리’였다.

 

그는 노보를 통해 △처우가 열악한 사내 비정규직과 연대 호소 △임직원 임금 상승에 비해 과도한 사주 배당금 문제 비판 △언론사 세습 문제 지적 △노동 시간 단축 필요성 강조 △회사의 노조 교섭 불성실 비판 △‘뇌물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관련 자사 옹호 보도 비판 등 자신의 소신을 피력해왔다.  

조선일보 경영진은 물론 동료 기자들이 불편할 수 있는 글도 주저하지 않았다. 노보를 낼 때마다 조선일보 논조와 다른 관점이 언론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조선일보 기자들 사이에선 박 위원장 개인 생각이 노보에 지나치다”는 지적이 상당했다. 기자들로 구성된 조선일보 노조 조합원 수는 207명이다. 지난해 12월 연임한 그는 위원장 1년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 박준동 조선일보 노조위원장.
▲ 박준동 조선일보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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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판사' 명단 읊은 시민들, "박근혜도 잡았는데 양승태는?"

[현장] 사법적폐 청산 3차 국민대회, 3000여 명 참석해 "특별재판부 설치" 등 요구

18.10.20 20:41l최종 업데이트 18.10.21 11:41l

 

 105개 단체로 구성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가 2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사법적폐 청산 3차 국민대회를 열었다.
▲  105개 단체로 구성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가 2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사법적폐 청산 3차 국민대회를 열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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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도 잡았는데 박근혜 개인변호사 양승태도 못 잡으면 말이 되겠나!"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인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가 20일 '사법적폐 청산 3차 국민대회'에 참석해 "억울한 일 생겨 법정에 가면 억울함을 풀어줄 것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법관) 이들이 도적들이었다"며 이 같이 외쳤다.

그러면서 "(이들을) 국민과 함께 손잡고 잡아내겠다"라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과 사법농단 관련 판사의 이름을 읽기 시작했다. 집회에 참석한 일부 참가자들도 이 대표를 따라 이름을 읊었다.
 
"이게 사법부냐"... 집회 참석한 피해자들의 '울분'

 

 105개 단체로 구성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가 2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사법적폐 청산 3차 국민대회를 열었다. 가수 송희태씨가 집회에서 '정의의 여신상' 등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  105개 단체로 구성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가 2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사법적폐 청산 3차 국민대회를 열었다. 가수 송희태씨가 집회에서 "정의의 여신상" 등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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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집회에는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에 이름을 올린 105개 단체와 시민을 합해 3000여 명(집회 측 추산)이 참석했다. 앞서 오후 4시 30분부터 집회 장소인 청계광장까지 가두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게 사법부냐 국민은 분노한다", "사법농단 진상을 규명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 적폐법관 탄핵 ▲ 사법농단 피해 원상회복 ▲ 특별법 제정 및 특별재판부 설치를 요구했다.

특히 사법농단 피해자 혹은 그들의 대리인이 집회에 참석해 목소리를 높였다. 김명환 민주노총위원장은 "(해고된) KTX 승무원들은 1, 2심에서 직접고용하란 결론이 났고, 쌍용자동차 회계조작은 노동자들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란 게 드러나고 있었으며, 선생님들의 노조할 수 있는 권리는 헌법정신에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누차 확인되고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런데 대법원 판사들이 박근혜를 위해, 재벌들을 위해 (판결을) 바꿔버렸다"라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던 30명이 넘는 (쌍용차) 노동자들은 세상을 등져버렸다"라며 "양승태를 구속, 적폐법관을 탄핵, 특별법 제정, 특별재판부 설치는 어느 하나 과도하지 않은 최소한의 요구이자 우리 사회가 촛불로서 정의로운 사회가 됐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라고 확신한다"라고 강조했다.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저희가 2005년 (강제징용 문제로) 신일본제철을 제소했을 때 원고 할아버지는 총 네 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98세의 이춘식 할아버지 한 분만 살아 계신다"라며 "오는 30일 뒤늦게 판결이 잡혔는데 어떤 판결이 나오더라도 기본권과 국가 근간을 짓밟고 피해자들의 삶을 파괴한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2005년 제소 후 13년이 흘렀는데 세 분의 원고가 돌아가시는 동안 (법원은) 가만히 있었다"라며 "할아버지들의 말씀을 모아 탄원서를 내고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에게 의견서까지 냈는데 그 동안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은 뒤에서 협잡을 일삼고 있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덧붙였다.

"사법농단 연루된 법관들에게 재판 받을 수 없어, 파면해야"
 
 105개 단체로 구성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가 2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사법적폐 청산 3차 국민대회를 열었다.
▲  105개 단체로 구성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가 2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사법적폐 청산 3차 국민대회를 열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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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와 시민단체도 이날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탰다. 김호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은 "법원 내 누구하나 국민 앞에 떳떳이 나서 사법정의를 세우자고 소리 내지 못하고 있다"라며 "사법정의가 복원될 때까지 절망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법농단) 피해자 분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린 반민특위라는 자랑스럽지만 애석한 특별재판부의 역사와 교훈을 갖고 있다"라며 "국회는 특별재판부를 구성할 특별법을 제정하고 객관성과 공정성이 담보된 특별재판부를 통해 (사법농단 문제 해결을 위한) 재판을 해야 한다, 이러한 국민의 요구가 드높고 사법농단 문제를 해결할 우리 사회의 역량은 충분하다"라고 요구했다.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도 "(사법농단에 연루된) 기억해야 할 퇴임법관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연루 법관들이 현직에서 끊임없이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있다"라며 "우리가 왜 그들의 헌법상의 지위를 보장해줘야 할까, 우리와 국회가 가만히 있는 건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에게 더 이상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해야하고 그들은 반드시 파면돼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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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대북 인도적 지원.제재 완화’ 촉구

ASEM 외교, ‘UN 안보리 중심 대북 견인책’ 필요성 강조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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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20  07: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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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은 18~1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12차 ASEM(Asia Europe Meeting)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사진출처 - 청와대 페이스북]

문재인 대통령은 18~19일(이하 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12차 ASEM(Asia Europe Meeting) 정상회의에 참석, 두 차례의 발언과 프랑스, 영국, 독일 등과의 양자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대해 설명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과 제재완화를 요청했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19일 오후 현지 브리핑을 통해 “ASEM 정상회의 참석차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오전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쁘라윳 찬오차 태국 총리와 잇따라 양자 회담을 갖고, 한반도에서 진행 중인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한반도 프로세스 및 양국 간의 경제, 무역, 문화, 인적 교류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와 이어진 독일 메르켈 총리와의 회담에서 “북한은 지난해 11월 이후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했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동창리 미사일 실험장 및 발사대 폐기 약속에 이어 미국의 상응 조치 시 플루토늄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핵물질을 만들 수 있는 영변 핵시설 폐기 용의까지 밝혔다”며 “북한이 계속 비핵화 조치를 추진하도록 국제사회가 UN 안보리를 중심으로 견인책에 대한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오전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와 양자 회담을 가졌다, [사진출처 - 청와대 페이스북]

특히 문 대통령은 메이 총리에게 “적어도 북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핵화를 진척시킬 경우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나, 대북 제제 완화가 필요하고, 그런 프로세스에 대한 논의가 UN 안보리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말해 주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당국은 북한의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대북 제재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문재인 대통령은 비핵화 프로세서를 촉진시키기 위한 견인책으로 대북 인도적 지원과 제재 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제재 완화를 국제무대 공론의 장에 띄워 올려놓은 셈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에 대해서 두 총리도 공감했다”고 확인하고 “또 한편으로 북한도 CVID에 대한 보다 더 과감하고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그런 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나 영국 메이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언급한 것은 EU의 정리된 입장에 근거한 것이다.

   
▲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오전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양자 회담을 가졌다. [사진출처 - 청와대 페이스북]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EU의 경우는 어쨌든 상임이사국들은 안보리에서의 결의한 내용들, 사실은 본인들도 주체이기 때문에 그 용어에 대한 변경도 다자 간의 협의를 통해서 용어의 변경을 할 수 있다는 그런 입장”이라며 “양자회담에서 그 나라가 그 용어를 임의적으로 바꾸도록 그렇게 강제할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설명하고 “그 용어 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집착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도 지난 18일 한-프랑스 정상회담 직후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된 EU의 공동안보 입장이 CVID다. EU 차원에서 정리돼 있다”며 “정부도 완전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써 왔는데 실질적 의미에 있어서 완전한 비핵화와 CVID가 같은 의미라고 보고 유연하게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EU는 저희들이 일상적으로 한반도 프로세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나라들은 아니고, 그래서 현재 진행되는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해 했다”며 “일단 EU가 가지고 있는 관심에서 한반도의 현재 진행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많은 이해를 했다”고 전하고 “많은 진적이 이루어졌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같은 입장이 ASEM 의장성명에는 어떻게 담길지 주목된다.

문 대통령은 19일 ASEM 정상회의 리트리트 연설에서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는 전면적인 실천과 이행의 단계에 들어갔다”며 “여건이 조성되면 남과 북은 본격적으로 경제협력을 추진할 것이다”고 밝혔다.

나아가 “이는 자연스럽게 동북아시아의 경제협력을 넘어, 다자 안보협력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나는 올해 8월, 이러한 비전을 담아 동아시아 6개국과 미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제안했다”고 상기시키고 “ASEM 회원국 정상과 대표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린다”고 협조를 요청했다.

   
▲ 제12차 ASEM 정상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두 차례의 공식 연설과 여러 차례의 양자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출처 - 청와대 페이스북]

벨기에 브뤼셀에서 ‘글로벌 도전에 대한 글로벌 동반자’를 주제로 18~19일 열리고 있는 제12차 ASEM 정상회의는 19 오후 폐막식을 개최하고 전문(chapeau)과 3개 주요 축(정치안보, 경제금융, 사회문화)으로 구성된 결과문서인 의장성명을 채택한다.

ASEM은 아시아-유럽간 관계 강화를 위한 지역간 협의체로서 1996년 창설됐으며, 아시아 21개국과 유럽 30개국, 지역협의체 2개(EU, ASEAN)가 회원국으로 참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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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비들에 의해 타살당한 통합진보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

법비들에 의해 타살당한 통합진보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10/21 [10: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10월 20일 대법원 앞에서 '통합진보당 명예회복대회'가 열렸다.     © 자주시보

 

▲ 대회를 제안한 강병기 옛 통합진보당 비상대책위 위원장     © 자주시보

 

20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통합진보당 명예회복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약 2,000여명(주최 측 추산)이 참석했다대회를 제안한 강병기 전 통합진보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해오병윤 전 원내대표안동섭 전 사무총장이혜선 전 노동부문 최고위원최형권 전 농민부문 최고위원 등 옛 통합진보당 지도부와 민중당 이상규 대표김종훈 국회의원 등 민중당 지도부도 함께 참석했다.

 

통합진보당 명예회복대회를 제안한 강병기 옛 통합진보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대회사에서 통합진보당이란 피 묻은 깃발 뒷면엔 우리가 짐작한데로 법의 이름을 더럽히고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정의와 양심을 오염시킨 자들의 추악한 면모가 있었고 그것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며 더러운 자들에 의해 타살당한 통합진보당의 이름으로 엄중히 요구한다내란음모 통합진보당 사건의 진실을 밝혀라양승태를 비롯한 법비(法匪)들을 응징하고 이석기 의원을 석방하라. 10만 통합진보당 당원들의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라라고 주장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내란음모사건정당해산사건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가 함께 광기와 마녀사냥의 시대를 견뎌왔다라며 사법부가 대단한 기록을 남겼다국민이 뽑은 정당을 한 순간에 해산시켰고현역 의원을 구속시켰다지금 그 사건의 진실을 밝히자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응답이 없다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법부를 다시 세울 기회를 주는데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를 발로 걷어차는 중이다고 사법부를 규탄했다.

 

대회에서 민중당 이상규 대표는 연설을 통해 집회 내내 가슴이 아팠다우리 당원들이 그동안 겪었던 배제와 고통고립 이제는 정말 우리의 손으로 10만 당원의 손으로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우리 곁에서 빼앗아간 이석기 의원을 되찾고 싶다국정원이 조작한 내란음모사건 이석기 의원 체포 동의안을 당시 새누리당 뿐 아니라 민주당정의당 의원들도 당론으로 찬성했다."며 통합진보당 해산 당시를 돌아보고대법원을 향해 "독재시절도 아니고 이명박박근혜 민간 대통령 시절에도 사법거래재판거래를 한 적폐판사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범죄자다저 대법원의 적폐 대법관들적폐판사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청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대회에서는 소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소를 한 사람들도 함께 했다현재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9명 중이석기 전 의원을 제외한 8명이 만기 출소한 상태다.

 

김홍렬 옛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위원장은 자신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되던 2013년 8월 28일을 떠올리며 하지만 제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그 날이 아니라고 청춘을 던져 평생을 바친 나의 당우리 민중의 당우리 통합진보당의 깃발이 사라진 그날저는 그들의 올가미에 걸린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그 악마에게 걸린 게 저의 죄가 아닌가 싶었다며 속마음을 토로했다.

 

이날 대회 참가자들은 선언문을 채택하며 5가지를 법원과 국회정부에 요구했다.

 

이들은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은 국가가 국민 10만 명을 비국민으로 도려낸 사건이다헌법의 이름으로 헌법을 짓밟은 한국정치 최악의 비극이다낡은 시대를 벗어나는 마지막 관문은 통합진보당의 명예회복이다. 10만 당원의 상처치유는 민주주의와 통일의 새로운 시대로 가는 첫 번째 통과의례다라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했다.

 

이어 통합진보당 강제해산공작 진상규명 공작정치 사법농단 김기춘양승태 즉각 처벌 6년째 수감중인 이석기 전 의원 석방 ▲ 통합진보당 당원 인권침해 전면 조사 해당 사건 관련 국가폭력에 대한 대통령 사과를 언급했다.

 

▲ 양승태 구속, 이석기의원 석방, 통합진보당 명예회복의 구호가 적힌 대형 골을 대법원을 향해 보내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 자주시보

 

 

한편 대회에서는 김재연 옛 통합진보당 의원이 뉴욕에서 온 글을 낭독해 많은 이들이 가슴을 울렸다.

 

글 전문을 실는다

 

 

안녕하십니까?

 

미국 뉴욕에서 인사 전합니다저희는 민중당 뉴욕연대라는 단체의 회원들입니다민중당 뉴욕연대는 민중당을 지지하고 연대하기위한 목적으로 올해 3월 뉴욕지역 재미동포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몸은 멀리 바다 건너있지만저희의 마음은 이 곳 통합진보당 명예회복대회장에 와 있습니다.

 

통합진보당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입니까진보집권의 시대자주와 평등통일시대의 꿈이 서려있던 그 통합진보당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2014년 12월 19일 박근혜 정권과 사법 적폐세력수구 언론이 통합진보당을 강제해산시키던 그날설움에 복받쳐 울던 당원들의 그 눈물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바다 건너 우리는 발만 구르며 안타까움만 깊었습니다아무 것도 못한 우리의 무기력을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4년이 흐르고 이제 통합진보당 명예회복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오늘 이렇게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결기있게 다시 모인 것은 물론 박근혜 일당과 사법 적폐세력이 자행한 검은 음모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감옥에 갇힌 이석기 전 의원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어떤 시련이 와도 민중을 지켜내고자주와 평화를 지켜낼 우리의 정당민중의 정당을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의하기 위해서 모였다고 생각합니다격동의 정세 속에 민중의 시대자주와 통일의 시대를 열어내기 위해못다한 통합진보당의 꿈을 꼭 이루어내기 위해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통합진보당 동지들동지들을 믿습니다찬란한 민중집권의 시대진보집권의 시대를 동지들이 꼭 열어낼 것을 믿습니다웃으며 맞을 승리의 그날을 확신합니다저희 민중당 뉴욕연대는 그 길에 동지들과 늘 함께 하겠습니다.

투쟁!

 

2018년 10월 20

민중당 뉴욕연대 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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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유치원 공개 뒤엔 이 ‘엄마들’의 추적 있었다

비리 유치원 공개 뒤엔 이 ‘엄마들’의 추적 있었다

등록 :2018-10-20 09:20수정 :2018-10-20 09:36

 

 

[토요판] 커버스토리
‘정치하는 엄마들’의 비리 유치원 명단 추적기

명품가방 사고 급식비 빼돌려도
엄마들만 몰랐던 비리 유치원 이름
알고 보니 비공개 이유도 없어

비영리단체 ‘정치하는 엄마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위해
정보공개 청구, 행정소송 내며
1년 넘게 끈질기게 매달려와
▶ 정부와 교육청이 감사를 해 비리를 적발하고도 묵혀뒀던 사립유치원 명단이 공개돼 일주일째 파장이 계속되고 있다. 이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라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다. 비리를 저질러 적발되고도 되레 큰소리치는 유치원, 감사를 하고도 유치원 이름을 숨겨줘온 교육당국과 정부에 항의하고자 1년 넘게 노력해온 이들이 있다. 엄마들의 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이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요구 작업에 1년 넘게 끈질기게 매달려온 ‘정치하는 엄마들’의 조성실 공동대표(왼쪽부터), 남궁수진 활동가, 장하나 공동대표, 김신애 활동가가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겨레>와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요구 작업에 1년 넘게 끈질기게 매달려온 ‘정치하는 엄마들’의 조성실 공동대표(왼쪽부터), 남궁수진 활동가, 장하나 공동대표, 김신애 활동가가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겨레>와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엄마들만 몰랐다. 경기도 화성 동탄신도시 환희유치원 원장이 2014년 3월부터 2년 동안 자기 월급으로 4억원을 챙기면서도 유치원 체크카드로 명품가방을 사고, 개인 카드값과 아파트 관리비까지 유치원 비용으로 처리했다는 사실을 경기도교육청은 2016년, 국무조정실은 2017년 감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원장이 전남 나주의 대학에 재학 중인 자기 아들을 유치원 사무장으로 앉혀 고액의 급여를 주고 유치원 교육비 계좌에서 그 대학 등록금까지 내는 동안 환희유치원 아이들은 사업자등록이 되지 않은 농장에 가서 체험학습을 했고, 폐업한 업체가 만들어준 영상앨범을 받았다.

 

엄마들은 알 수가 없었다. 유치원 설립자가 교재·교구비 명목으로 받은 학부모 부담금을 가로챈 경기도 성남 서판교유치원에는 필수 교구조차 턱없이 부족했고, 식자재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간헐적으로 구입해 아이들에게 신선도 낮은 급식이 제공됐다. 이런 사실이 지난해 경기도교육청 감사를 통해 드러났고 검찰이 교재비 편취 혐의로 유치원 설립자를 기소해 재판까지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엄마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유치원 당첨을 염원하며 서판교유치원 앞에 줄을 서왔다.

 

엄마들은 몰라도 된다고, 엄마들만 모르면 된다고 우기던 바윗덩어리 같은 세상을 내려친 건 결국 엄마들이었다. 지난 11일 언론 보도와 박용진 의원(더불어민주당)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져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전국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라는 사건 뒤에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끈질기게 이를 추적해온 ‘엄마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모순에 대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고자 모인 엄마들의 모임 ‘정치하는 엄마들’이다. 19대 국회의원이었던 장하나씨가 지난해 <한겨레> 토요판(연재 ‘장하나의 엄마 정치’)을 통해 제안하면서 만들어진 비영리단체다.

 

 

“비공개 당연하다”던 국무조정실 
소송 걸자 명단 들고 찾아와
언론 제보에 나서 ‘사건’을 만들다

 

 

국공립 확충, 경영 감시 말하면
한유총 무력시위에 토론회도 무산
“휴업 협박 원장에겐 명단 공개가 답”

 

 

비리 유치원 숨겨준 교육당국
전수 감사 잘할 능력 있을까
엄마 당사자 참여 가능케 해야

 

 

회원 500명, 페이스북 멤버 2300명
서로 처지 공감, ‘이어달리기’하며
보육, 교육, 노동 문제 바꿔나갈 것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치하는 엄마들’ 장하나(41)·조성실(32) 공동대표와 활동가 남궁수진(38)·김신애(36)씨를 만났다. 국무조정실과 교육청이 유치원 비리를 적발하고도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지난해부터 “왜 유치원 이름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지고 나서며 정부와 교육청 등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 행정소송 등을 지속해온 이들이다. 이날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교육부를 규탄하는 연대 기자회견에 참여한 이들은 “아이들 하원(어린이집·유치원을 마치고 나오는 것)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며 인터뷰를 서둘렀다.

 

정치하는 엄마들 로고. 정치하는 엄마들 강미정 활동가 제공
정치하는 엄마들 로고. 정치하는 엄마들 강미정 활동가 제공
“설거지하는데 계속 웃음이 났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요구하며 여러 행동에 나섰던 것으로 안다. 일단 명단 공개 파장이 큰데, 소감이 어떤가?

 

장하나(이하 장) 비리 유치원 명단이 공개된 날 일이 바빠 밤늦게 귀가하는 길에 뉴스를 봤다. 비리로 적발된 사립유치원들이 실명으로 거론되는 걸 보니 계속 웃음이 나더라. 나중에는 너무 웃어서 입꼬리 주변 근육이 아플 정도였다. 자정 넘어서 밀린 설거지를 하는데 춤추면서 했다. 같은 시각, 오랫동안 유아교육을 돈벌이로만 생각하고 정말 부당하게 돈을 벌었던 사립유치원의 나쁜 원장들이 어디선가 화내고 난감해하고 박용진 의원과 ‘정치하는 엄마들’을 욕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 기쁘고 좋아 춤을 췄다. 이 맛에 사회운동을 하고 행동에 나서는 게 아닌가 싶었다.

 

김신애(이하 김) 마침내 비리 유치원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보고 감격스러웠다. 명단 공개를 1년 넘게 요구하다 보니 이게 정말 될까 싶은 순간도 많았다. 어디서 막혀 있는 건지 답답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공개되고 나니, 엄마들이 이렇게 노력하니까 되는구나, 계란으로 정말 바위를 깰 수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파장이 이렇게 클 줄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사는 동네 맘카페에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위해 ‘정치하는 엄마들’이 해온 활동에 대해 글을 올렸더니 조회수가 폭발적이었다.

 

조성실(이하 조) 6살 아이와 함께 뉴스를 보는데 어느 유치원에서 원장이 급식비를 아끼느라 아이들에게 포도를 두 알씩만 줬다는 얘길 듣고 같이 울었다. 우리 애가 4.3㎏으로 우량하게 태어나 먹성이 좋은데, 그래서 공동육아 하는 데서도 아주 많이 먹는 편이다. 뉴스를 보고는 아이가 “엄마, 저는 저런 유치원 안 다닐래요. 나는 포도 두 알 주는 유치원은 절대 안 갈 거야. 너무 싫어. 너무 나쁜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돼?” 이렇게 물어보더라. 내가 “그래서 엄마가 ‘정치하는 엄마들’ 하는 거야”라고 대답했더니 “엄마 응원해요”라고 하더라. 밤새 마음이 너무 슬펐다. 결국에는 당연히 공개되어야 하는 건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진짜 고생을 많이 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보다 더 슬픈 건 부모들이 알고자 했을 때는 관련 기관들이 전혀 압박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터질 게 터져서 정말 다행이다.

 

남궁수진(이하 남궁) 감사에 적발된 사립유치원의 비리 내역을 정리하면서 정말 많이 분노했다. 아이의 보호자들이 비리 내용을 확인하고 이게 내 아이의 유치원이라는 걸 알면 정말 분노하게 될 텐데, 이름이 전부 가려 있었다. 역시 유치원 이름이 공개되니 모두 분노하고 있고 부모들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지금은 분노에서 끝나지 않게 해야겠다는 책임감 같은 것도 든다.

 

지난해 2월 국무조정실 부패척결추진단이 “대도시 유치원·어린이집 95곳을 골라 감사한 결과 91개 기관에서 205억원을 부당하게 사용한 사실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무조정실과 교육부, 보건복지부가 공동으로 낸 보도자료에는 현재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하고 있는 비리의 거의 모든 내용이 들어 있었다. 보도자료와 함께 기자들에게 보낸 ‘유치원·어린이집 분야별 위법 부당한 사례’ 자료에는 앞서 언급한 환희유치원과 서판교유치원의 비리 내역도 자세히 적혀 있었고 ‘루이뷔통’ 명품가방 영수증까지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오직 유치원 이름만 없었다. 유치원 이름이 빠진 보도가 이어졌고 엄마들은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별수 없이 아이들을 계속 유치원에 보냈다.

 

지난해 6월 ‘정치하는 엄마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칼퇴근법'과 ‘보육 추경'의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지난해 6월 ‘정치하는 엄마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칼퇴근법'과 ‘보육 추경'의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조직되지 못한 엄마들의 불안감’이란 힘이 없었다. 아이를 맡기는 입장에서 엄마 혼자서는 원장이나 교사들에게 밉보일까봐 행여 자신의 유치원이 비리 유치원은 아닐까 걱정이 되더라도 작은 질문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비리 유치원 이름이 뭡니까?”라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정부도 유치원 이름은 비공개가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국무조정실 발표가 나온 2월이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국무조정실의 당시 발표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국에 사립유치원은 4220개, 국공립은 4801개가 있다. 언뜻 양쪽 수가 비슷해 보이지만 국공립에는 초등학교에 딸린 한 반짜리 병설유치원도 포함돼 있다. 수용 원아 수로 따지면 사립유치원이 50만5743명, 국공립이 17만2553명으로 3배 정도 차이(2018년 4월 기준)가 난다. 당시 국무조정실이 감사한 유치원은 55곳이었다. 전체의 1%에도 못 미치는 유치원을 감사했는데 그중 54곳에서 비리가 적발된 것이었다. 위반사항이 398건, 부당 사용금액 182억원에 달했다.

 

국무조정실의 발표로부터 몇달이 흐른 지난해 6월 ‘정치하는 엄마들’이 출범했다. 출범 직후부터 비리 유치원의 이름을 묻고 나섰다. 엄마들은 아이를 업고 나와 비리 유치원의 이름을 공개하고 사립유치원의 회계를 투명하게 하라며 거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각종 토론회에 참석했으며, 지난해 12월부터 여러 차례 국무조정실과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 100여곳의 교육지원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정보공개청구는 거듭 무시당했고 엄마들은 지난 5월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요구하며 국무조정실과 인천시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에 나섰다. 소송에 나서고서야 지난 7월 국무조정실로부터 비리 적발 유치원·어린이집 명단을 받을 수 있었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이를 언론에 제보했다.

 

언론이 취재에 나섰고,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던 국회 교육위 소속 박용진 의원과의 협업도 시작했다. 박 의원은 시·도 교육청과 교육지원청에 자료를 요청해 교육청·교육지원청 차원에서 2013~2017년 사이 감사를 벌여 비리를 적발한 유치원 1878곳의 명단과 비리 내역을 입수했다. 박 의원이 이를 국정감사에서 공개했고 큰 파장이 일었다. ‘정치하는 엄마들’이 만들어 놓은 발판 위에 박 의원이 받아낸 자료가 더해지면서 비리 유치원 문제의 심각성은 더 선명하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렇게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라는 사건이 완성됐다.

 

 

‘부재중 전화 64통’의 추억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위한 ‘정치하는 엄마들’의 노력은 어떻게 시작됐나?

 

장 ‘정치하는 엄마들’이 창립총회를 연 지난해 6월 국회에서 ‘새 정부 보육정책 이것은 꼭 바뀌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있었다. 이 토론회에 우리가 패널로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국무조정실의 유치원·어린이집 감사 내용을 더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해 2조원 가까운 국고가 지원되지만 유치원은 감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고 감사에 적발되고도 명단이 공개되지 않았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텔레그램을 통해 활발하게 회의를 하는데 당시에도 ‘텔방’(텔레그램방)에서 논의를 하면서 비리 유치원 명단 정보공개청구에 나서자고 결정했다.

 

김 정작 해보자고 나섰는데, 사실 정보공개청구는 물론 소송에 이름을 올리는 일도 처음이었다. 유치원에 대한 감사가 워낙 원칙 없이 이루어지다 보니까 정보공개청구 대상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국무조정실 따로, 17개 시·도 교육청 따로 해야 했다. 또 교육청 산하 교육지원청별로 정보가 나뉘어 있어서 결국 100여개 교육지원청에 일일이 청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보공개를 청구하기도 힘든데 하고 나면 수십 군데에서 전화가 빗발치고…. 저도 애 키우고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어떤 날은 ‘부재중 전화 64통’ 이렇게 와 있더라. 전화해서는 좀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이런 건 비공개인데 뭘 알고 싶은 거냐’ 묻기도 하고…. 그 뒤에는 우체국 아저씨가 도대체 무슨 일 하냐고 물을 정도로 등기가 쏟아졌다. 전국의 교육지원청에서 등기우편이 날아오는데 대부분 ‘유치원 이름은 비공개다, 우리는 답변했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행정소송을 하려고 보니까 정보공개청구를 한 지 90일 안에 소장을 접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또 한번씩 정보공개청구를 더 하고, 질문을 잘못해서 비리 내용은 안 오고 비리 유치원 명단만 와서 또다시 하고… ‘맨땅에 헤딩’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감사에 적발된 유치원이라 해도 전부 비리 유치원은 아닐 수 있다며 명단 공개를 우려하는 시각이 있는데, 부모들도 감사에 적발된 비리 내용을 보면 이게 단순 행정상의 착오인지 아니면 진짜 악의를 가지고 행한 고질적인 문제인지 분별할 수 있다. 그런데 비리가 적발된 유치원이 어느 곳인지 전혀 확인할 수 없고 그나마도 비공개 결정을 하는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김 이미 유치원 실명으로 감사 내용을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있던 전남지역 교육지원청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관에서 비공개 결정을 통보해왔다. 거듭 요청해도 대부분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 1항 5호, 6호(감사 과정에 있어 공개될 경우 업무 수행에 지장 초래, 개인에 관한 정보 공개가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 침해할 우려)에 의거해 비공개 결정을 한다고 했다. 비공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에 나서기로 하고 국무조정실과 인천시교육청 산하 교육지원청들을 상대로 소장을 접수하며 지난 5월30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내 이름으로 소장을 접수하려니 혹시 내가 뭔가 서류 작업을 잘못해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추가로 서류 등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회원들이 이야기해줘 자신있게 소송에 이름을 걸 수 있었다.

 

‘운영의 자율성’이라는 논리 아래 아이들과 부모들이 접근할 수 없는 사립유치원의 세계를 표현한 그림. ‘정치하는 엄마들’ 강미정 활동가 제공
‘운영의 자율성’이라는 논리 아래 아이들과 부모들이 접근할 수 없는 사립유치원의 세계를 표현한 그림. ‘정치하는 엄마들’ 강미정 활동가 제공
장 기자회견을 열고 소장을 접수하고 나니 국무조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그제야 국가기관이 당연히 공개해야 하는 자료인데 착오로 정보공개를 거부했다며 95곳의 유치원·어린이집에 대해 벌인 감사 결과와 적발된 91곳의 명단을 7월20일 넘겨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국 시·도 교육청의 유치원 합동점검 담당자들은 이미 지난 7월5일 모여 ‘공개가 맞는다’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비리 적발 유치원 명단을 비공개함으로써 보호되는 이익과 그 공개로 보호되는 국민의 알권리를 비교해 봤을 때 공개가 합당하다’는 서울고검 송무과와 정부법무공단의 법률자문 결과도 받은 상태였다. 유치원 이름 공개로 감사 업무에 지장을 받지도 않으며 개인 사생활의 비밀 침해에도 해당되지 않아 공개가 합당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런데도 법률을 근거로 엄마들의 요구에 비공개라는 답변을 계속해온 것이어서 분통이 터졌다.

 

―19대 국회의원이었던 장하나 공동대표의 경우 국회의원이었다면 좀더 수월하게 자료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

 

장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0대 국회의원이 됐으면 ‘정치하는 엄마들’을 못 만났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세상을 못 바꿨을 것이다. 그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노력했을 것이다. 우리 애가 4살이라 아직 유치원에 가지도 않았으니까 비리 유치원 문제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당사자로서 조목조목 애타게, 절실함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있을까? 이것은 자료 하나를 받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당사자들이 모여 백년 묵은 적폐를 흔들고 있다. 엄마들을 만나 같이 울면서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니까 보육, 교육, 노동 문제가 큰 그림으로 보인다. 어떤 국회의원도 그걸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민의 목소리가 녹아든 단체 활동의 힘이다. 이렇게 같이 바꿔나갈 것이 너무도 많다.

 

 

1년여 전 토요판에 ‘이제 우리 만납시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한겨레> 토요판에서 태어났다. 지난해 3월25일, 장하나 전 의원은 <한겨레> 토요판에 ‘장하나의 엄마 정치’라는 제목의 연재를 시작했다. 딸 두리를 낳은 지 2년이 될 무렵이었다. 연재 첫회 ‘엄마들이여, 정치합시다!’란 제목의 글에서부터 그는 작정하고 ‘엄마 모임’에 시동을 걸었다. “정치에 여성(엄마)들이 나서야만 독박육아를 끝장내고 평등하고 행복한 가족공동체를 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울한 여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아이들과 제 딸 두리에게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저와 마음이 통하신다면, 이제 우리 만납시다.” 기사 끝에 페이스북 주소(www.facebook.com/political.mamas)를 적어두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떻게 엄마정치 모임을 제안했고, 또 어떻게 그걸 보고 모이게 됐나?

 

장 19대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임신과 출산을 했다. 아이를 낳고 보니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이 출산하고 망가진다는 사실이 비로소 보였다. 정치적으로 너무도 많은 문제가 있는데 대표적인 시민단체들이나 여러 노동조합에도 엄마들은 존재하지만 엄마들의 문제로 싸우는 사람은 없었다. 국회의원 재선에 실패하고 혼자 힘으로 엄마들을 조직할 수가 없었던 차에 <한겨레> 토요판 연재를 시작하는 첫 글에서 엄마 당사자들의 세력화를 제안하며 모이자고 했다.

 

김 <한겨레> 토요판을 통해 ‘우리 만납시다’라는 글을 읽을 당시는 산후우울증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연년생으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둘째는 50일이 지난 시기였는데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다. 글을 읽고 나니 이건 너무 내 얘기고 이 사람은 나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로서의 고충과 고민 등 모든 것이 내 얘기여서 누가 내 마음을 대필해준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모임에 나갔고 체력을 아끼느라 뭐든 소극적이었던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조 지난해 4월22일 첫 모임에서 생판 모르는 이들이 각자 자기 얘기를 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모임 이름을 어떻게 할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고 제가 ‘정치하는 엄마들’이 어떻겠냐고 했다. 몇년 전부터 메모장에 적어둔 이름이었다. 그 순간 하나 언니가 절 보며 ‘마치 운명 같다’고 하더라. 페이스북 주소로 쓴 단체 영어 이름이 ‘정치엄마’(political mamas)라면서. 두 아이를 낳고 일을 그만둔 상태였는데 첫 모임부터 사무국장 역할을 맡아 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이후 공식 출범하고부터는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치하는 엄마들’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비리 유치원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지난해 11월 ‘정치하는 엄마들’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비리 유치원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남궁 정치하는 엄마들을 만난 이후로 이 모임이 나에게 진짜 힘이 많이 된다. 유대감이 다르다. 우리끼리는 ‘이어달리기’라고 하는데 텔방에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올리면 자발적으로 서로 일손을 돕는다. 누군가 하다가 힘에 부쳐도 이어받아 할 사람이 나선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서로 100% 공감하면서 격려하며 가는 것이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작업도 서로가 같은 마음으로 해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게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첫 만남을 한 지 두달이 안 된 지난해 6월11일. ‘정치하는 엄마들’은 비영리단체 창립을 선언했다. 창립총회는 묵념으로 시작했다. “뼈 빠지게 착취당한 우리 엄마들을 위해 모두 같이 묵념하겠습니다.” 지난 5월 ‘정치하는 엄마들’이 펴낸 책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에서는 당시 엄마들의 감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의 어머니, 시어머니, 할머니, 모든 선배 엄마들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엄마들의 삶은 태곳적부터 존재해왔으나 엄마들의 삶을 역사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건 생소한 일이었다. 엄마들은 항상 국가 혹은 사회와 같이 거대한 존재로부터 외면당하고 또 착취당했다. 한 집안의 남성 가장을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이 사회의 구조 속에서 엄마들은 늘 구조를 떠받치기 위해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존재였다. 이름도 없이, 그저 엄마라는 단어에 갇힌 채 강요당한 모성의 역사는 얼마나 무수했던가.”

 

이후 1년여 동안 ‘정치하는 엄마들’은 왕성한 활동을 벌였고 회원 수는 늘어갔다. 회원이 수십명 수준이던 초창기부터 보육, 교육, 노동, 여성 관련 토론회에 50회 이상 패널로 참석했고 ‘비리 유치원 감싸기 정부 규탄 기자회견’ 등 자체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만 30차례 넘게 했다. 시민단체와의 연대 기자회견에도 적극 나서고 엄마 당사자의 목소리가 필요한 인터뷰에는 적극 출연했다. 현재 ‘정치하는 엄마들’에 가입된 회원 수는 500여명, 페이스북 페이지 ‘정치하는 엄마들’의 참여자(멤버)는 2300여명에 이른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회계 투명성 강화 등에 목소리를 내면서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와의 대립도 심했다고 들었다.

 

장 ‘정치하는 엄마들’이 10대 과제로 ‘보육기관 관리 감독 강화’ ‘보육기관 정보 공개 및 경영 투명화’ 등을 내세우면서 토론회나 세미나 같은 곳에서 마주친 한유총 원장들에게 야유받고 욕먹고 거의 멱살잡이까지 당한 적도 있다. 지난해 7월 서울시교육청이 국공립 유치원 확충 관련 여론 수렴을 위해 마련한 세미나도, 지난 5일 박용진 의원실이 마련한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도 한유총 원장들이 욕설과 고성, 몸싸움으로 무산시켰다. 이런 행태를 봤을 때 이들을 압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리 유치원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비리를 저질러도 이름이 공개되지 않으니까, 익명성 뒤에 숨을 수 있으니까 부끄러움 없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다. 악성댓글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알권리라는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리 유치원 이름과 그 유치원 원장이 누군지 공개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토론회 패널로 참석할 때면 방청석에 앉아 있는 ‘정치하는 엄마들’ 회원들 옆에서 한유총 원장들이 저를 보고 쌍욕을 한다더라.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 기어나와서 난리냐” “직장도 없이 경단녀(경력단절여성) 돼서 사회운동 한다고 다닌다”는 등 욕을 하다가 “그냥 파업하자, 맞벌이 가정에서 별수 있겠어” “어차피 워킹맘들은 우리 볼모야, 우리가 휴원하면 워킹맘들 난리난다”는 말까지 해 회원들이 놀라곤 했다. 1년 전 한유총이 정부 재정 지원 확대와 국공립 유치원 증설 정책 폐기를 주장하며 집단 휴업에 돌입하겠다고 나선 것은 결국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교육자가 아닌 사업자의 모습만을 드러낸 행태다. 그 당시에는 엄마들이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번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는 ‘정치하는 엄마들’이라는 조직된 엄마들이 이뤄내고 이후 대응까지 맡아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마들의 ‘든든한 뒷배’가 된 듯해 뿌듯하다.

 

 

전수 감사에 당사자 참여 늘려야

 

―교육부가 유치원 전수 감사와 신고센터 운영 등 대책을 발표했다. 엄마 당사자 입장에서 앞으로 이 분노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라는가?

 

남궁 전 유치원 운영위원이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한달에 원비 40여만원을 내고 분기별로 12만원의 특별활동비와 1년에 180만원의 기타경비를 낸다. 그런데 운영위원이어도 회계장부를 볼 수가 없다. 회계 내역을 보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와도 행여나 내 아이가 미움을 받을까봐 말을 못한다. 원장은 운영위원회가 의결기관이 아니라 자문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운영위를 여는 것도 원장 재량이다. 반면 국공립은 회계 내역을 공개하게 한다. 사립유치원 감사를 위해 기존 운영위원들, 엄마아빠 당사자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법적으로 그 길을 열어줬으면 좋겠다. 조 유치원 원장들의 자금 유용과 회계 비리도 물론 화나는 일이지만, 급식 비리나 위생상의 문제, 중대 안전사고가 났을 때 보고하지 않은 일 등으로 감사에 적발된 유치원도 여러 군데였다. 그 유치원 이름들마저 당장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게 너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전수 조사를 하려면 앞으로 인력이 문제가 될 것이다. 감사에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운영위원이나 학부모 당사자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해 성명을 낼 때부터 감사에 당사자 참여를 보장하라고 이야기해왔다. 또 회계 프로그램인 ‘에듀파인’을 사립유치원에도 무조건 도입하고 장기적으로는 국공립 단설유치원을 확충해야 한다.

 

김 사실 앞으로 전수 감사를 한다는데 얼마나 제대로 될까 걱정이 된다. 제 지인이 비리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있었는데 특별활동비를 차명계좌로 받더란다. 그래서 유치원 원장이 돈을 차명계좌로 받는데, 이걸 어디로 신고하면 되냐고 교육청에 물으니까 그건 교육부 소관이 아니라면서 국세청에 신고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유치원이 이번 공개된 명단에도 올라 있는데 비리 내역에 차명계좌 건은 들어가지 않았다더라. 전수 조사 한다 해도 회계를 얼마나 투명하게 조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남궁 ‘교육자치’라는 말이 좋기는 한데 어떤 교육청은 비리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어떤 데는 너무 간략하게 쓰여 있다. 이번에 보면 경기도교육청이 가장 의지를 갖고 감사를 해서 환희유치원 등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된 것으로 안다. 지역별로 감사의 시기와 정도가 너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에 대한 조정과 기준 확립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20일 토요일, 서울 시청역 4번 출구 앞에서 단체 이름으로 주최하는 첫 집회를 연다. ‘유아교육·보육 정상화를 위한 모두의 집회’라는 제목이다. 집회의 형식은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상냥한 집회’라고 한다. 엄마들만 몰랐던, 엄마들은 몰라도 된다던 세상을 향해 한번 존재감을 드러낸 엄마들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다음으로 엄마들은 비리 어린이집 명단 정보공개를 청구해둔 상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이슈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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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서 바라보는 한국은 아시아의 등대"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⑪]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

 

 

 
남북미의 평화를 향한 움직임은 올 한해 내내 한반도를 넘어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은둔의 독재자에서 정상국가의 지도자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였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던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과 발걸음을 함께 하며 북한과 타협의 문을 열려 하고 있다. 
 
한국과 비슷하게 냉전의 대결장이 되어 분단을 경험한 독일에서도 한반도 소식은 화제를 모았다. 냉전 체제 극복을 넘어 재통일까지 이룩한 독일인에게 한반도의 이 같은 변화는 다른 어떤 나라 사람에게서보다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취재진이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를 만난 이유다. 
 
정 대사는 독일을 잘 아는 인물이다. 1954년생인 그는 1979년, 청년기에 서독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올해 1월 2일에는 주독 한국대사로서 통일 독일을 찾았다. 독일의 분단과 재통일 체제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장벽 너머 사람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다. 
 
그간 취재진은 크게 재통일 당시 독일의 기성세대, 그리고 지금은 장년이 된 재통일 당시의 청년세대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집중했다. 정 대사와는 한국인의 시각으로 본 독일 재통일을 이야기하고, 현재의 한반도 변화를 바라보는 독일인의 시각을 관찰자의 눈으로 재정리하는데 집중했다.  
 
인터뷰에서 정 대사는 독일 정치권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동아시아의 등대"라는 상찬도 나왔다고 전했다.  
 
정 대사는 다만 구 동독 지역이 여전히 과거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며, 독일의 급박했던 재통일을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독일의 재통일 과정과 당시 상황이 한국과는 여러모로 다르지만, 여기서 우리가 참고할 건 참고해 북한과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정 대사는 지난 3일에는 베를린의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 이전식에 참석해 박남영 북한대사와 포옹하는 모습을 남기기도 했다. 정 대사는 대사 부임 후 박 북한대사를 세 차례 만났다.  
 
지난 달 13일 베를린 한국대사관에서 실시한 정 대사와의 인터뷰를 정리했다. 
 

▲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 그는 분단 시절 서독에서 유학했고, 지금은 통일 독일에서 생활한다. 독일의 분단과 그 극복기를 생생히 지켜보고 있다. ⓒ특별취재팀

독일이 한반도에 관심 갖는 이유는? 
 
프레시안 : 주독대사로 부임하신 지 약 8개월여가 지났다. 그동안 한국에서 남북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분단을 극복한 국가인 독일에서도 한국 문제에 관심이 있을 것 같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독일 현지의 관심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 그저 단순한 외신 한 꼭지 이상의 의미가 있었나? 
 
정범구 : 독일이 아무래도 한국 상황을 특별히 바라보는 분위기가 있다. 우리처럼 분단 체제였다가, 이를 극복한 국가니까. 제가 만나는 독일사람 중 여럿이 한국 상황에 마음이 쓰인다고 한다.  
 
'단순 외신 수준'의 관심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난 4.27 판문점 선언 당시 독일 언론은, 많게는 신문 3개 면을 이 소식을 전달하는 데 사용했다.  
 
특히 옛 동독 시절 고위 인사들을 만나보면 특별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 시각에 따르면 동독 입장에서 독일 재통일은 '통일을 당한 경험'이다. (남북 힘의 격차가 있는) 우리 상황과 비교해서 생각하게 된다.  
 
프레시안 : 독일 언론의 관심이 예상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주로 어떤 시각으로 한반도 변화를 바라보나? 
 
정범구 : 우선 놀라움이다. 지난해만 해도 한반도는 핵 위기 상태였는데 한해 만에 급반전이 일어났으니까. 이곳에서 동아시아는 (아랍 지역과 마찬가지로) 분쟁 지역의 하나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대 강으로, 전면으로 맞부딪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우려가 컸다. 당시 메르켈 총리가 "한반도에서 무력 사용은 안 된다"는 입장을 바로 내고, 독일이 한반도 문제에서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맡겠다는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올해 들어 달라졌으니 아주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프레시안 : 한반도 안정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되는데, 북핵 문제 해결에 포커스를 맞춘 미국, 일본과는 시각이 달라 보인다.  
 
정범구 : 그렇다. 독일은 남북한 동시 수교 국가다. 일방적으로 미국식 입장을 고수하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독일의 입장은 한반도 문제를 전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동아시아의 등대" 
 
프레시안 : 대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독일 정치인도 만나보셨을 텐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특별히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었나? 
 
정범구 : 지난 3월 27일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연방 하원의장을 만났는데, 이분이 예상보다 한반도 문제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우선 이 분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1972년부터 정치인 생활을 시작해서 지금도 활동하는 유일한 현역 정치인이다. 46년 내내 지역구 의원 생활을 했다. 제가 유학생이던 서독 시절에도 정치인이었던 분이다. 
 
이분과 당초 20분간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는데, 이분의 관심이 워낙 커서 40분간 한반도 문제를 이야기했다. 당시 이 분이 저에게 한국의 변화, 한반도 정세의 변화 등과 관련해 "한국은 동아시아의 등대"라고 했다. 인상적 표현이었다. 비록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의 이야기지만, 당시 이미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었을 때다. 
 
한국을 이처럼 높이 평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한국이 빠른 산업화에 성공해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점. 둘째, 동시에 한국이 모범적으로 민주화 이행에도 성공했다는 점. 세 번째로 얼마 전까지도 전쟁 위협이 고조된 지역(한반도)에서 주도적으로 극적인 평화의 모멘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도 한국의 다이나믹한 변화를 인상 깊게 보고 있다다.  
 
프레시안 : 아무래도 독일이 분단, 급격한 발전 등 한국과 현대사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이 같은 반응이 나온 듯하다.  
 
정범구 : 그렇다. 다만 상찬의 포인트가 우리 일반 국민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 
 
보통 한국 기성세대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이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물론 이것도 놀라운 성과지만, 독일은 한국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체화한 나라라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극단적으로 말해, 독일은 상대국을 민주주의 국가냐 아니냐는 점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독일이 대외관계를 설정할 때 상대국에 관한 최상의 표현은 '가치 공동체'다. 이 '가치'에는 '민주주의적 가치', '다원주의적 가치', '자유무역에의 신봉' 등이 포함된다. 이 가치를 모두 만족하는 나라가 세계에 그리 많지 않다. 유럽연합(EU) 소속국과 기타 G7 국가를 포함해 한국 정도다. 이 점을 고려하면, 독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을 더 높이 평가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자신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국제 문제에 책임을 가져야 할 일원이라는 거다. 
 

▲ 프로이센 왕국이 세워 지금은 베를린의 랜드마크가 된 브란덴부르크 문. 냉전 시기에는 베를린 장벽 8개 검문소 중 하나로 쓰인 탓에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독일 재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남북한으로 비교하자면, 판문점과 같은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

독일서 배울 것: 준비 없는 통일은 재앙 
 
프레시안 : 동서독 분단 시기 서독으로 유학을 떠나 상당 기간에 걸쳐 동서독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통일 독일과 당시를 비교하면, 특별히 눈에 보이는 차이점이 있나?
 
정범구 : 난 1979년에 서독으로 나왔다. 공부를 끝내고 귀국한 때는 재통일 시기인 1990년이다. 아무래도 당시와 비교하면, 이제 통일이 확실히 사회에 녹아들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동서 베를린 간 자유 통행이 가능해졌다. 당시 저도 서독 브라운 슈바이크에서 국도를 통해 동쪽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처음 떠올린 생각이 지금도 선명한데, 20세기에서 18세기로 돌아온 듯했다. 
 
동독의 실체를 보기 전만 해도 나에게 동독은 동구권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내가 동독에서 약 60㎞ 떨어진 지역에서 공부했기에, 동독TV 전파가 잡히곤 했다. 당시 동독TV를 보면 서독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여름에 휴가들을 잘 다니고, 트라비라는 차량은 전 인민이 한 대씩 갖고 있고...  
 
하지만 막상 실체를 보니 현실이 달랐다. 특히 도로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도로 곳곳이 깨진 상태라 시속 30㎞를 내기도 어려웠다. 집들도 외관상으로만 보면 벽이 멀쩡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인상에 남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아직도 북한을 쉽게 방문하지 못하잖나. 당시 나는 '북한도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동독 지역을 돌아봤다. 
 
1989년 독일 재통일 당시 자료를 보면, 대략 동독은 서독의 33% 수준 국가였다. 그랬는데도 외관상으로는 그처럼 엄청난 격차가 보였다. 그런데 현재 남북 상황은 어떤가? 2017년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남북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격차가 47대 1이다. 동서 격차보다 훨씬 크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급격한 통일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만일 어떤 변수에 의해 북한 체제가 붕괴해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상황이 온다면, 남한에도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실제 옛 동독은 서방 홍보용으로 인민이 자유롭게 산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고 들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전시장 국가였으니, 인민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줬고 인민을 위해 청바지를 생산하기도 했다. 강력한 통제가 지금도 작동하는 북한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던 듯하다.  
 
정범구 : 동독도 기본적으로 경찰국가였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다른 통제 사회에 비해서는 자유가 조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동독만 해도 사회주의 독재 이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민주 공화국을 경험했다. 북한과 역사 배경이 다르다. 
 
프레시안 : 그처럼 기본적 경험이 있었음에도, 재통일 후 동서 격차가 엄청났다. 그 때문에 지금도 독일은 통일 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3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재통일 28주년 기념행사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 통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재통일 28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당면한 도전 과제"라며 "통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완성까지는 머나먼 길을 걸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범구 : 아무래도 구 동독 지역에서는 통일 이후를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동독이 무너질 당시 마지막 집권자가 한스 모드로 전 총리다. 올해 나이가 90세다. 이분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한 서류를 보여주시더라. 동독이 나름대로 만든 통일 플랜이었다. 하지만 이미 당시 통일 주도권은 서독이 쥔 상태였고, 결국 서독 주도로 흡수 통일이 완성됐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자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당시 헬무트 콜이 동서독 마르크화를 통합하면서 특히 큰 비판이 일었는데, 그처럼 급박한 조치가 없었다면 독일 재통일이 더 더뎠고 힘들었으리라는 생각 말이다.  
 

▲ 동독 정부가 청바지에 열광하는 인민을 위해 생산한 청바지 '복서.' 동독 정부는 청바지를 입은 동독 연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롭게 거리를 달리는 모습, 가족이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는 모습 등을 홍보영상으로 만들어 서방에 홍보했다. 복서 바로 곁에 당시 동독 젊은이의 꿈이었던 리바이스 청바지가 걸린 모습이 인상 깊다. 베를린 DDR박물관 전시. ⓒ특별취재팀


김정은 위원장이 변해야 북한도 변한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나? 
 
정범구 : 내부의 노력과 국제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독일 내부적으로 보자면,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펴면서 냉전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 때 동독에서도 라이프치히 시민을 중심으로 체제 항쟁이 이어져 통일의 전기가 마련됐다. 때맞춰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으로 대표되는 변화를 이끌면서 통일이 가능했다. 기실 고르바초프가 아니었다면 동서독의 재통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1989년~1990년의 사태 전개 상황이 궁극적으로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베를린 장벽이 1989년 무너졌지만, 당시 서독 정치인들은 독일이 통일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동서독은 여전히 미영불소 4개국 합의 하에 관리되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즉, 이니셔티브는 저들 강대국에 있다고들 보았다. 실제 영국의 대처는 강경하게 독일 재통일을 반대했다.  
 
이 상황에서 소련이 변화하고, 이에 맞춰 독일 정치인들이 역할을 분담해 미국의 통일 협조를 이끌어내면서 국제 여론을 통일 찬성 분위기로 바꿨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을 남북관계에 비유하자면, 한반도 변화에도 국제 여론이 매우 중요하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꾸준히 북한은 물론, 미국과 EU 등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반면, 분명히 당시와 지금의 다른 점도 있을 듯하다. 특별히 다른 점이 무엇일까?
 
정범구 : 아무래도 북한과 동독 사회의 차이점이 눈에 보인다. 동독만 해도 슈타지가 엄청난 힘을 지닌 경찰국가였다. 슈타지 요원만 9만 명에, 비공식 협력자(IM)는 18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동독의 경찰 체제는 기본적 인권을 어느 정도는 지키려했다. 예를 들어 정치범도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비록 동구권으로 한정되긴 했지만, 인민의 여행도 보장됐다. 특히 기독교 문화는 동독도 통제하지 못했다. 이런 최소한의 기반이 있었기에 동독 체제 말이 되자 반독재 시민 투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즉, 내부의 변화 움직임이 생길 수 있었다. 
 
반면, 북한은 아무래도 이런 자생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다. 따라서, 결국 북한이 변화하려면 최고 권력자의 결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제가 독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김정은 위원장이 정말 비핵화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본다고 대답한다. 이제 북한도 더는 사회주의적 구호, 선전만으로 체제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김 위원장이 젊다는 게 중요하다. 그는 외국 유학 경험이 있다. 핵만으로는 체제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인민의 실질적인 생활 수준 개선을 이뤄내야만 체제가 안정될 수 있음을 안다고 본다. 핵만 내주면 경제를 살려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데, 왜 안 하겠는가.
 
이런 관점으로 북한을 바라보니, 북한의 관료주의 체제가 강하다는 점도 눈에 들어오더라. 관료 체제에서 최고지도자 혼자 혁신적 생각을 한다고 변화가 쉽게 일어나나? 그렇지 않다. 아무리 최고지도자라도 나라 구석구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즉, 북한이 실질적으로 변화하려면 중간 관료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기득권층이 약 3만 명 정도 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면서 체제를 바꾸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당장 우리 사회에서도 촛불 이후 대통령이 바뀌었는데 왜 현실이 변하는 게 없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크잖나? 북한은 오죽하겠나? 김 위원장이 변화의 말을 한 마디 해도, 그 이행 과정을 누군가 확인하지 않는다면 변화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현장 지도에서 화를 많이 낸다는 데,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말할 때 눈앞의 간부들은 고개를 숙이지만, 정작 현장에 와 보면 제대로 변화되지 않겠지. 북한의 변화에는 대외적 문제는 물론, 이처럼 바깥의 우리는 알기 어려운 내부적 사정도 극복해야 한다는 숙제가 있다. 
 

▲ 남북관계 변화는 한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뤄질 수 없다. 남북 두 정상과 함께 주변 국의 변화, 관료의 변화도 함께 이행되어야만 한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통일에의 의지 계속 이어져야 
 
프레시안 : 많은 사람이 '남북 관계는 동서독 관계와 너무 달라 한국이 독일로부터 배울 건 없다'고들 한다. 동의하나? 
 
정범구 :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물론 동독과 북한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갔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나. 특히 한국은 독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우선 빌리 브란트 정부의 대 동독 원칙이다. 접근을 통한 변화, 즉 가까이 다가가서 변화를 이뤄내겠다는 것이다.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끝없이 동독과 접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의 보좌역으로 전 서독 경제협력부 장관이자 ‘독일 재통일의 설계사’로 불린 에곤 바르의 말이다. 이 기조를 서독 정부가 계속 유지했다. 서독 사람들은 동독의 친지를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위해 서독 정부가 동독으로 가는 시민을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함부르크와 베를린 간 고속도로도 서독 정부가 깔았다. 당장은 돈이 나가는 것 같지만, 그만큼 동서독 접촉 면이 넓어진다는 이유였다. 이 같은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배울 건 통일에의 의지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재통일 기념일마다 통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이 같은 우려에 관해 브란트가 한 말이 있다. "같은 뿌리에서 자란 나무는 결국 함께 성장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앞서 보았듯 남북의 격차는 동서독 격차보다 크다. 우리가 무리하게 통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만, 통일에의 전망과 비전은 꾸준히 갖고 가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동서독 통일로부터 받아들일 교훈이라고 본다.  

동독, 북한, 그리고 민주주의  
 
프레시안 : 언급한대로, 여전히 독일 통일이 완수되지 않았다는 독일 내 평가가 많다. 동서 격차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범구 대사는 독일의 급박했던 통일로부터 좋았던 점과 잘못된 점 모두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정범구 : 물론 경제적 격차 문제는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장벽은 무너졌지만, 동서 독일인 마음 속 장벽은 더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이 실제 독일에서 있다. 아직 구 동독 출신이 2류 취급을 받는 부분이 있다. 
 
지금 구 동독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가 인구 유출이다. 상당수 지역이 농촌 지역인데, 특히 여성 노동 인력이 서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경제적, 문화적 소외 요소가 크다. 
 
구 동독 내 세대 간 갈등 요소도 있다. 지금 구 동독 노령 세대는 동독을 건설한 세대다. 이들은 사회주의 체제가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풍부한 복지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 재통일 이후, 이런 이야기는 이제 공공연하게 하기 힘들게 됐다. 구 동독의 모든 게 잘못됐다는 인식이 강해졌으니까. 이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는 통일의 희생양이다. 장벽이 무너질 때 장년이어서, 급격한 체제 변화를 온몸으로 떠안은 세대다. 이들이 가장 불운하다.  
 
통일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는 부모, 조부모와 전혀 다른 세대다. 서독 출신처럼 당당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통일 독일의 세대다. 이처럼 세 새대의 경험이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동독 내부적으로도 갈등 요인이 있다.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해 지금 구 동독 지역의 극우화가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동독 지역의 극우화는 우리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인 듯하다. 당장 한국에 안착한 적잖은 탈북민이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걸 미디어가 자주 보도한다. 
 
정범구 : 동독의 경우를 말하자면, 구 동독인의 민주주의 훈련 여부도 극우화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본다. 아무래도 서독 출신에 비해 구 동독 기성세대는 민주주의 교육에서 취약한 면이 있었다.  
 
남북관계에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아직 통일을 이야기하기엔 이르지만, 통일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지역에 민주주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체제의 특성상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보다 수직적 관계, 복종에 더 익숙하다. 만일 지금 이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통일이 온다면, 북한이 (동독처럼) 극우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  
 
물론 서독 사람이 동독 사람을 이해해야 하듯,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서독 사람들이 흔히 동독 출신을 비하하며 하는 말이 자기표현을 못 한다, 타자를 관용하지 않는다, 게으르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교성은 자본주의적 습성이다. 자신을 상품화해야 하니 평판에도 민감하고, 좋은 관계에 목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굳이 사교적이려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런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두 체제의 생활 수준 격차를 좁히기 위해 우리가 독일로부터 배워야할 게 있을까?
 
정범구 : 부임 후 상황을 보자면, 독일은 여전히 동서 간 심리적 통합을 위한 노력보다 과거 동독 체제 청산에 더 힘을 쏟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슈타지 활동가에 관한 아카이브화 작업을 하거나,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 하에서 동독인들이 얼마나 비민주적 취급을 받았는지 등을 들여다보는데 집중한다. 이런 노력이 필요하지만, 심리적 통합을 위해서도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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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선체 최초 언론 공개, 5가지 의혹이 남았다

현장] 2기 특조위 출범‧미수습자 수습 마무리 앞두고 기관실 포함한 선체 내부 공개
“선체에 새겨진 의혹은 다 풀고 가야… 1기 특조위와 선체조사위는 방해와 시간 부족으로 못해”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2018년 10월 20일 토요일
 

세월호 선체 내외부가 공개됐다. 세월호 침몰 원인을 둘러싼 의혹의 현장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4·16가족협의회)’와 해양수산부 세월호후속대책추진단은 19일 기관실을 포함한 선체 내외부를 공개했다. 주요 추진기를 설치한 기관실을 언론에 공개하기는 처음이다. 이번 공개는 11월 말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2기 특조위)’ 출범을 앞둔 시점, 미수습자 수습 마무리 단계와 맞물려 이뤄졌다. 

 

▲ 목포시 유달동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19일 좌현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김예리 기자
▲ 목포시 유달동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19일 좌현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김예리 기자
 

4‧16가족협의회는 앞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1기 특조위)’나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체조사위)’가 들여다보지 않은 5가지 의혹을 중심으로 현장을 설명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을 둘러싸고 지금도 밝혀지지 않은 의혹들이다. 정성욱 세월호 선체인양분과장은 “두 특조위가 모두 조사를 하지 못해 가족들이 2기 특조위에 면밀히 조사해달라 요구하는 사항”이라며 “의심이 되는 부분들을 명확히 하고자 기관실 내부를 공개한다”고 했다. 

이날 4‧16가족협의회는 내부 3곳을 빼고 선체 전부를 언론에 공개했다. 조타실과 핀 안정기(스테빌라이저)실, 기관실 룸이 제외됐다. 4‧16가족협의회 “현재와 2기 때도 예민한 조사 대상인 장소”라고 이유를 밝혔다. 핀 안정기실은 선체 외부 변형이 일어난 부위의 안쪽 공간이다. 기관실 내 룸은 조타실과 번갈아 엔진을 통제하는 장소다.

▲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단원고 2학년 동수군의 아버지)이 19일 목포신항만 세월호 거치소 회의실에서 선체 내외부를 공개하는 취지를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단원고 2학년 동수군의 아버지)이 19일 목포신항만 세월호 거치소 회의실에서 선체 내외부를 공개하는 취지를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미디어오늘은 이날 4‧16가족협의회가 내외부 현장과 함께 공개한 5가지 의혹을 정리했다.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단원고 2학년 동수군 아버지)은 “앞으로 2기 특조위에서 선체를 조사하기 때문에 내부를 공개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이날 내부 참관에는 더팩트‧목포MBC‧목포KBS‧민중의소리‧OBS‧조선일보‧KBS오늘밤김제동‧한겨레 등 언론사 8개 팀이 참여했다. 

1. 배 좌우균형 잡는 스테빌라이저, 왜 정상 각도의 2배 돌아갔나

스테빌라이저란 배의 좌우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다. 선박 밑 양쪽 면에 날개 형태로 설치된다. 그래서 세월호가 기울어 넘어진 경위를 밝히는 데 핵심 부위로 꼽힌다. 정성욱 분과장은 “(스테빌라이저가) 많이 돌아가면 배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려 뒤집히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설명했다. 세월호는 뱃머리가 오른쪽으로 빠르게 돌면서 균형을 잃었다. 배 선체는 왼쪽으로 넘어졌다. 

 

▲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이 세월호 좌현 아랫부분에 위치한 좌우 균형장치 스테빌라이저의 발견 당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정 분과장은 ‘스테빌라이저 각도가 최대의 2배 이상 돌아가 있었으나 그 시점과 원인을 조사한 바는 없다’고 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이 세월호 좌현 아랫부분에 위치한 좌우 균형장치 스테빌라이저의 발견 당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정 분과장은 ‘스테빌라이저 각도가 최대의 2배 이상 돌아가 있었으나 그 시점과 원인을 조사한 바는 없다’고 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인양해 보니 스테빌라이저는 최대 회전 각도보다 대폭 비틀려 있었다. 25도까지 돌아갈 수 있는데 50.9도 상태였다. 정성욱 분과장은 “1기 특조위 때 스테빌라이저는 땅 속에 박혀 있었다”며 “(배의) 안쪽은 빔(철근)까지 휜 상태였다”고 했다. “외부에서 충격을 가했거나, 배가 바닥에 닿으면서 휘어지는 등 2개의 가능성이 있다”며 “해수부가 자료를 다 제출하지 않아 정확한 조사를 못 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스테빌라이저는 지난 2016년 5월 해양수산부 선체인양팀이 절단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1기 특조위가 ‘스테빌라이저는 선체가 좌현으로 누운 원인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구조물이기에 함부로 손대선 안 된다’고 전했으나 당시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세월호 선체에서 스테빌라이저 위치.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 선체에서 스테빌라이저 위치. 사진=김예리 기자
 

2. 방향타 조절 장치인 솔레노이드 밸브, 언제 왜 작동 멈췄나

키 조종 명령을 실제 방향타로 옮기는 장치도 한쪽으로 굳어(고착) 있었다. 솔레노이드 밸브다. 솔레노이드 밸브는 조타 명령에 따라 앞뒤로 움직이며 유압장치를 거쳐 실제 방향타를 바꾼다. 솔레노이드 밸브가 굳어진 경위를 알아야 세월호가 급격히 돈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세월호에 있던 2개의 솔레노이드 밸브 가운데 하나가 굳어진 상태로 발견됐지만, 언제 왜 굳어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정성욱 분과장은 “(나머지 4가지 의혹과 달리) 선체조사위에서 조사하긴 했지만 실질적 결과는 없었다”며 “언제 고착됐고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 19일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이 타기실 내 실린더기 앞에서 솔레노이드 밸브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19일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이 타기실 내 실린더기 앞에서 솔레노이드 밸브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2014년 4월15일 당시 세월호 솔레노이드 밸브가 작동하는 타기실 내부. 사진=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 2014년 4월15일 당시 세월호 솔레노이드 밸브가 작동하는 타기실 내부. 사진=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선체조사위는 결론을 요약한 종합보고서에서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배의 우현 급선회와 연관 있는지 판단해볼 수 있다”며 “참사 당시 침몰 원인과의 연관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내인설 종합보고서는 “솔레노이드가 고착된 결과 세월호의 타를 우현 방향으로 돌리는 압력이 계속 작용하여 조타실에서 통제할 수 없는 우선회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열린안 보고서 역시 “(솔레노이드 밸브가) 5도에서 고착됐을 경우 (...) 타는 계속해서 우현 쪽으로 움직이게 될 수 있다”고 했다. 

선체조사위는 지난 8월6일 침몰 원인을 놓고 2가지 엇갈리는 결론을 함께 내놨다. ‘내인설’은 기계 결함 등의 이유로 세월호가 침몰했다고 주장한다. ‘열린안’은 충돌 등 외력에 의한 침몰 가능성 등을 추가로 조사해야 한다고 결론 맺는다.

 

▲ 세월호 내부에서 정상작동하던 또 하나의 솔레노이드 밸브.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 내부에서 정상작동하던 또 하나의 솔레노이드 밸브. 사진=김예리 기자
 

3. 조사가 끝나고서 발견된 선체 외부 패인 흔적

세월호가 지난 5월 바로 섰을 때, 해저면과 맞닿았던 좌현은 곳곳이 훼손돼 있었다. 그러나 아래쪽에 커다랗게 움푹 파인 흔적 2개는 특히 두드러졌다. 내부에 핀 안정기실이 위치해 한층 중요한 부위다. 선체조사위는 자국이 생긴 원인을 조사하지 않았다.

선체조사위는 세월호가 인양된 직후인 지난 3월28일 출범했다. 누운 선체는 5월10일에 이르러서야 바로 세워졌다. 정성욱 분과장은 “선체가 누웠을 땐 이 부분이 안 보이다 직립하고서야 발견됐다”며 “선체조사위에 조사를 요구했지만 그땐 이미 조사가 끝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단계였다”고 했다. 선체조사위는 지난 8월7일 활동을 종료했다.

정 분과장은 “완만한 표면을 움푹 팰 만한 해저 지형지물은 없었다”며 “세월호 외벽에 얼마나 큰 힘이 가해져야 이런 변형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희생자 가족대표로 선체조사위에 참여한 권영빈 상임위원은 이 반달 모양의 자국을 두고 ‘충돌 흔적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이 19일 세월호 좌현에 위치한 2개의 외부 충돌 흔적 앞에 서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이 19일 세월호 좌현에 위치한 2개의 외부 충돌 흔적 앞에 서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19일 기자들이 세월호 좌현 외부 충돌 흔적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19일 기자들이 세월호 좌현 외부 충돌 흔적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종합보고서 열린안은 “직립된 세월호 선체 좌현 핀 안정기실과 그 위쪽 데크스토어 내부의 대변형과 외부의 충돌 흔적과 외력의 연관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고 보고했다. 내인설은 “해양 자문 및 감정 업체 브룩스벨의 외부 손상 조사에서는 외부 물체에 의한 손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외력 작용 가능성을 일축했다. 장범선 위원은 외력 가능성을 부인하면서도 “좌현 핀 안정기실 주변과 후미의 파손이 착저나 인양 중 발생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추가 정밀 조사는 필요하다”고 했다.

4. 배에서 가장 튼튼한 바닥 부분이 움푹 들어간 이유는 

선체 바닥에도 외부에서 충격을 가한 흔적이 있다. 좌현보다는 작게 움푹 패인 부위다. 역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 분과장은 “배 가운데 가장 튼튼한 자리가 바닥인데 이곳을 때려 푹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4‧16가족협의회는 ‘외력충돌설’을 주장하진 않지만, 외력충돌설을 반증하기 위해서라도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성욱 분과장은 “현재는 관점에 따라 결론이 열려있는 상태”라며 “적어도 세월호 외양에서 발견한 의혹은 2기 특조위에서 다 해소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 19일 세월호 선체 바닥 부위가 움푹 들어간 흔적. 사진=김예리 기자
▲ 19일 세월호 선체 바닥 부위가 움푹 들어간 흔적. 사진=김예리 기자
 
▲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이 세월호 바닥 부위 움푹 패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이 세월호 바닥 부위 움푹 패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5. 선수 좌현에 방향이 제각각인 스크래치

뱃머리 좌현에 긁힌 자국이 집중된 경위도 석연치 않다. 정성욱 분과장은 “선체의 칠은 망치로 때려야만 벗겨지는 도장인데, 무엇 때문에 이 부위만 스크래치가 크게 났는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선수는 오랫동안 수면 위에 떠 있던 까닭에 녹슬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부위만 날카로운 물체에 칠이 벗겨져 녹슨 상태다. 정 분과장은 “방향도 제각각이라 설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 세월호 좌현 서로 방향이 다른 스크래치 흔적.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 좌현 서로 방향이 다른 스크래치 흔적.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가 누워있을 당시 좌현 스크래치 모습. 사진=민중의소리
▲ 세월호가 누워있을 당시 좌현 스크래치 모습. 사진=민중의소리
 

“부모로서 원인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정밀 조사 필요”

문호승 2기 특조위 상임위원은 “지금까지 1기 특조위와 선체조사위는 조사 방해와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의혹에 대한 답을 다 내놓지 못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2기 특조위에서는 부분적 사실들 사이 연관관계를 밝히는 게 목표”라며 ‘변침과 배 기울어짐의 관계’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과 침몰의 관계’ 등을 꼽았다. 정 분과장은 “2기 특조위가 이 5가지 의혹을 정확히 해명해야만 외력설(의 사실 여부)을 증명할 수 있다”며 “그 부분을 특별히 밝혀달라는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4‧16가족협의회는 선체 정밀조사뿐 아니라 구조하지 않은 이유를 밝히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분과장은 “세월호가 ‘교통사고’라면 국정원과 기무사까지 나서서 유가족을 사찰하는 등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이들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전혀 모른다. 부모로서 원인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문 위원은 또 “2기 특조위도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지만 특별법(사회적 참사의 진상 규명 및 안전 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에는 이전과 달리 감사원‧검찰‧국회 등 외부 국가기관과 협조할 장치가 많다”며 “차별화된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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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가 사라진다, 기후변화의 새 재앙인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10/20 09:09
  • 수정일
    2018/10/20 09:0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벌레가 사라진다, 기후변화의 새 재앙인가

조홍섭 2018. 10. 19
조회수 1561 추천수 1
 
푸에르토리코 열대림 40년 새 최고 99% 줄어
독일서도 27년 간 75%↓…생태계서비스 위협
 
ㅑ1.jpg» 열대우림의 대벌레. 곤충의 종다양성에 더해 생물량 자체의 감소가 문제가 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지구가 ‘제6의 대멸종’을 맞고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코뿔소나 자이언트판다 같은 크고 카리스마 있는 포유류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세계의 생물종 가운데 포유류는 5% 이하일 뿐이고 곤충과 거미 등 절지동물은 70% 이상이다. 하찮고 성가시기만 한 벌레가 실은 생태계의 기초를 이룬다.
 
곤충은 종이 다양하기도 하지만 양도 풍부하다. 그런데 멸종과 별개로 곤충의 양 자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곤충의 양을 장기간 측정한 연구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곤충 없는 세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구 생태계 먹이그물이 토대부터 흔들린다는 경고가 나온다.
 
View_direction_Dos_Picachos_from_El_Pico_in_El_Yunque_National_Forest.JPG» 곤충의 장기연구가 이뤄진 푸에르토리코의 엘 융케 국유림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브래드퍼드 리스터 미국 렌슬레어 폴리테크닉대 생물학자는 푸에르토리코의 잘 보전된 열대림에서 1970년대부터 곤충을 연구해 왔다. 그는 1976∼1977년 이 원시림에서 곤충과 이를 먹는 새·개구리·도마뱀을 조사했다. 그는 2012∼2013년 멕시코 공동연구자와 함께 다시 같은 장소를 찾아 같은 방법으로 조사했다.
 
연구자들이 16일 과학저널 미 국립학술원회보(PNAS)에 실린 논문에서 밝힌 결과는 충격적이다. 포충망을 휘둘러 잡은 곤충과 거미의 마른 중량은 1977년과 2013년 사이 4분의 1∼8분의 1로 줄었다. 끈끈이를 숲 바닥과 중간에 설치해 포획한 곤충의 양은 30분의 1∼60분의 1로 감소했다. 약 40년 사이 최고 99%의 곤충이 사라진 셈이다. 줄어든 절지동물에는 나방, 나비, 메뚜기, 거미 등 가장 흔한 10종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182819.jpeg» 곤충의 주 포식자인 아놀리스 도마뱀도 곤충 격감과 함께 30% 이상 줄었다. PNAS 제공.
 
곤충과 거미의 감소는 이들을 주 먹이로 삼는 척추동물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 나무 열매나 씨앗을 먹는 새는 그대로였지만 벌레를 먹는 새는 90%가 줄었다. 벌레를 먹는 도마뱀도 30% 이상 감소했다. 개구리의 양도 곤두박질쳤다.
 
연구가 이뤄진 루킬로 숲은 1930년대부터 철저히 보전돼 사람에 의한 교란이 거의 없는 곳이다. 또 1970년대부터 푸에르토리코의 농약 사용량은 농업 축소와 함께 80% 줄었다. 그렇다면 왜 이 천연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Common_Coquí.jpg» 곤충 포식자인 코키개구리 역시 격감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지난 30여 년 동안 숲의 온도는 평균 2도 상승했다. 우리의 연구는 이런 기후 온난화가 숲 먹이그물의 붕괴를 일으킨 원동력임을 보여준다”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온도변화가 상대적으로 적은 열대림에서 기온 상승은 생물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연구자들은 “기후 온난화가 절지동물의 감소를 초래했고, 이는 다시 곤충을 먹는 동물의 감소를 부르는 고전적인 상향식 파급효과가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장기연구에서 곤충의 격감이 보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열대 아메리카 이외에 유럽 온대림의 보호구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지난해 10월 보고됐다.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플로스 원’에 실린 논문에서 1989∼2016년 사이 독일의 보호구역 63곳에 설치한 표준화한 곤충 포획장치에 얼마나 많은 나는 곤충이 잡히는지를 비교해 분석했다. 놀랍게도 곤충의 양은  27년 동안 75%나 줄었다. 그러나 유럽 연구자들은 곤충 감소의 원인이 기후변화나 토지 이용 때문이라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농약과 비료를 많이 쓰는 집약농업과 토지가 쉴 틈을 주지 않는 농사법의 변화가 곤충 격감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i2.jpg» 곤충 양의 변화를 장기 측정해 온 독일 보호구역(위)과 채집 시설의 모습.
 
원인이 어쨌든 곤충의 감소는 곤충이 자연에서 공짜로 해 주던 생태계 서비스, 곧 꽃가루받이, 다른 동물(사람을 포함해)의 먹이원, 병해충의 포식자, 죽은 동물의 청소 등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세계 농작물의 35%와 야생식물의 80%는 꽃가루받이를 곤충에 의존한다. 곤충이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의 규모는 미국만 해도 연간 570억 달러에 이른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Bradford C. Lister and Andres Garcia, Climate-driven declines in arthropod abundance restructure a rainforest food web, PNAShttp://www.pnas.org/cgi/doi/10.1073/pnas.1722477115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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