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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드러난 김정은 위원장의 자신감

싱가포르에서 드러난 김정은 위원장의 자신감
 
 
 
곽동기 주권연구소 수석연구원 
기사입력: 2018/07/11 [09:28]  최종편집: ⓒ 자주시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제 북한과 미국은 첨예한 대결 상대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내는 시험에 들어섰다. 싱가포르 회동 과정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보였던 행보를 보면 향후 북미관계를 내다볼 수 있다.

북한-싱가포르 정상회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6월 10일 오후 2시 36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를 찾은 목적은 북미정상회담이다. 하지만 그는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북미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절차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먼저 싱가포르 대통령궁 이스타나에서 리센룽 총리와 양자회담을 가졌다. 싱가포르 외교부에 따르면, 비공개로 진행된 북한-싱가포르 회담에서는 북한-싱가포르 관계, 최근 한반도에 나타난 긍정적인 상황을 포함한 북한 및 지역 정세가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싱가포르 정부가 집안일처럼 성심성의껏 제공해주고 편의를 도모해줬다”며 사의를 표했으며 “북미 상봉이 성과적으로 진행되면 싱가포르 정부의 노력이 역사적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회담에는 북한 측에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리수용 부위원장, 로광철 인민무력상이 배석했다. 북미정상회담을 조율할 핵심인물들이 회담 전날에 모두 북한-싱가포르 회담에 참석한 것이다. 싱가포르 측에서는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외교장관 등이 배석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도 이튿날인 6월 11일 오전에 싱가포르 정부와의 정상회담에 나섰다. 하지만 세계적 패권국가라 불리는 미국과 달리 그런 미국과 정상회담을 벌이는 북한 최고지도자가 여유롭게 싱가포르 정부와 정상회담을 벌이는 것은 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사의”라는 말 그대로 싱가포르 정부에 감사를 표한 것일 수 있다. 경호문제나 기타 안전상의 이유로 개최지로 나서기 부담스러울 수 있는 북미정상회담을 선뜻 맡으며 북한당국과 미국당국에 성심성의껏 편의를 도모한 데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한 것이다.

파격적인 심야참관

김정은 위원장은 이튿날에도 파격행보를 보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북미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6월 11일 밤, 김정은 위원장은 싱가포르의 주요 명소를 참관하였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마리나 베이 샌즈 건물의 전망대에서 시내 야경을 둘러보고는 “싱가포르가 듣던바대로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건물들마다 특색이 있다”고 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오늘 참관을 통하여 싱가포르의 경제적 잠재력과 발전상을 잘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가든스 바이 더 베이, 마리나 베이 샌즈 건물의 스카이 파크, 싱가포르항,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등을 참관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를 참관하는 동안 김정은 위원장을 알아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장면들은 언론에 이미 공개되었다. 그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관광객들에게 여유로운 인사를 건네며 참관을 마쳤다.

이날의 심야참관은 2시간 넘게 이어졌다. 싱가포르 세인트리지스 호텔에 머물던 김정은 위원장은 현지시각으로 11일 오후9시4분(한국시각 오후 10시4분)께 시내 관광에 나섰으며, 같은 날 오후 11시22분(한국시각 12일 오전 0시22분)께 숙소로 돌아왔다.

이 날의 심야참관에는 싱가포르의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외무장관과 옹예콩 전 교육부 장관이 동행·안내했다고 한다. 북측에서는 김영철·리수용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 로광철 인민무력상,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등이 동행했다고 한다.

사뭇 달랐던 트럼프 대통령

그에 비해 트럼프 대통령의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조용하였다. 대낮인 오후 2시에 창이 국제공항으로 내렸던 김정은 위원장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시간으로 밤 9시 20분에 파야 레바 공군기지를 이용하였다. 안전상의 이유로 군사지역을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 비해 대중 접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튿날 싱가포르 총리를 만난 것 이외에는김정은 위원장이 파격적으로 보였던 “심야 참관”같은 외부 일정도 없었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의 싱가포르행은 캐나다에서 열렸던 G7 정상회의 직후에 배치된 일정이었는데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이 황급하게 상가포르로 떠나는 바람에 다른 수반들이 미국에 서운함을 내비칠 정도였다.

자신감 가득했던 김정은 위원장

김정은 위원장의 심야 참관은 북미정상회담 성공의 자신감을 내비친 행동이다. 6월 11일 밤은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불과 하루 앞둔 시기였다. 대개 주요 회담을 앞두고서는 상대방의 정황을 끊임없이 탐문하며 협상대응전략을 세우기 마련이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일명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불릴 만큼 예측하기 힘든 외교행보를 보였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적인 발언에 따라 역사적인 회담의 성과가 흔들릴 수 있는 위험요소가 다분하였다. 게다가 상대는 세계패권을 쥐락펴락하는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은 “심야참관”이라는 전례 없는 파격을 내보였다. 우리는 참관의 형식이 낮에 있던 의례적인 “참관”이 아니라, 구태여 하지 않아도 외교상 문제가 전혀 않는 심야시간대에 참관이 이뤄졌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즉 김정은 위원장의 “심야참관”은 그 누구의 요청이나 외교적 필요에 의해 결정된 사안이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 스스로 내렸던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 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직접 둘러보겠다는 속내였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심야참관”은 일종의 배짱 두둑한 행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6월 12일의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영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을 깍듯이 예우하였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의 북한-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도 여유가 묻어나지만 “심야참관”이라는 배짱 두둑한 행보는 북미정상회담 성공의 자신감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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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김정은, 미북간 계약과 악수 존중 확신”

첫 고위급회담 ‘합의 불발’에도 북미공동성명 이행 의지 간접 피력
▲ 역사적인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성명 전문.[사진 : 뉴시스]

북미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첫 고위급회담이 별 합의 없이 마무리돼 우려를 사고 있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각) 밤 김정은 북한(조선) 국무위원장을 신뢰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평양 고위급회담이 끝난 지 이틀만의 입장 표명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기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이 미-북이 서명한 계약,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두 사람이 나눈 악수를 존중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밝혔다고 미국의 소리(VOA)가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조선)은 북의 비핵화에 동의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입장 표명은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신뢰에 근거에 북미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고위급회담을 이어갈 의지를 간접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중국은 중국의 무역과 관련한 미국의 태도 때문에 (북미)합의에 부정적 압력을 가하고 있을 수 있다”며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국 입장은, 애초 미국이 더 적극적이었던 한국전쟁 종전선언에 대한 입장 변화의 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세 차례에 걸친 북중 정상회담 과정에서 제재 완화와 경제협력 등의 카드로 중국이 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그래서 북미간 최대 현안인 공동성명 이행에 중국이 개입하려 한다고 의심한 것이다. 종전선언의 경우 싱가포르 회담 당시 미국이 북과 단독으로 체결을 추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북이 남쪽은 당연하고, 중국의 참가도 긍정적이어서 결국은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첫 고위급회담에서의 사실상 합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한 만큼 싱가포르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고위급회담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북미정상간 합의가 갖는 추동력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다만 미국쪽 태도 변화가 변수다. 북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보듯 미국이 이후에도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고집한다면 공동성명 이행은 더 큰 암초를 만날 수 있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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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김포공항 테러 : 진상과 은폐의 서사

 
[기고]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생각하며
 
강진욱  | 등록:2018-07-10 10:28:55 | 최종:2018-07-10 11:06:4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전두환 정권의 테러·간첩 조작

전두환 정권 시절 치안본부장(1986.1∼1987.1)을 지낸 강민창 씨가 7월 6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 나라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의 주역. ‘턱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그의 말은 부도덕한 정권의 폭압과 비인간성, 반인륜성을 상징하는 경구가 됐다. 

▲강민찬 전 치안본부장 

전두환 정권 시절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용공 조작의 산실이었다. 치안본부만이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와 보안사령부, 정보사령부 등등 전두환 체제를 떠받치는 모든 권력기관들이 경쟁적으로 용공 조작에 나섰다.

아람회 사건, 오송회 사건, 한울회 사건, 금강회 사건.. 부림사건,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전북 김제와 전남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 ... 전두환네는 왜 저렇게 많은 간첩들을 만들어 내야 했을까? 극도의 반정부.반미 감정을 대북 적대감으로 치환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방조로 자행된 광주에서의 학살에 지식인들과 대학가는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정통성 위기에 몰린 정권을 살리기 위해 미국과 전 정권은 없는 ‘북괴 간첩’을 만들어 북한에 화살을 돌리려 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저들은 ‘북한의 테러’를 조작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해마다 기획된 ‘북한에 의한 전두환 광주학살 응징 시해’ 사건들, 그 사건의 최종판인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1983.10.9), 이 테러가 일어나기 약 20일 전 일어난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물 테러(1983.9.22), KAL 858 테러(김현희 사건, 1987.11. 29)가 그것이다. 또 있다. 1986년 9월 14일 일어난 김포공항 테러.

이들 사건이 없었다면 전두환 체제는 지탱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제2의 전두환 정권인 노태우 정권으로의 이양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소련과 북한을 적대시하는 미국의 한미일 3국체제도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의 활약이 돋보였던 김포공항 폭탄 테러는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에서 KAL 858 테러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격이다. 아웅 산 묘소 테러는 ‘북한의 전두환의 광주학살 응징’을, 김포공항 테러와 KAL 858 테러는 ‘북한의 86 아시안 게임 방해 공작’이라는 해설이 붙여졌다. 김포공항 테러의 내막을 잘 아는 어떤 이는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했더라면, 김현희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86 아시안게임 개막 엿새 전

김포공항 테러는 아시안게임이 개막되기 엿새 전인 1986년 9월 14일 오후 3시 10분 경 김포공항 국제선터미널 입구 바깥에서 폭발물이 터져 공항관리공단 전기공 유주환(柳周桓.41) 씨 등 5명이 죽고 약 30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사건 발생 직후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이 폭발 사건은 수법으로 보아 83년 10월 [버마]랭군폭발암살 사건 및 83년 9월 대구 미 문화원 폭발 사건과 유사”하다며 “이는 북괴의 소행이거나 북괴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의 소행”이라고 떠벌렸다. 그는 또 “이번 폭발 사건은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수행[?]을 방해하려는 불순하고도 야만적인 흉계에서 저질러진 것이 분명하다”며 “폭발물 설치는 특별경비 강화로 공항 내부에 설치를 못하고 건물 외곽 쓰레기통에 설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경향신문 1986.9.14) 웃기는 얘기다. 유리창 안은 특별경비구역이고, 창 바깥은 테러리스트들의 구역이었다는 얘기! 

신문들은 너도 나도 전두환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연일 ‘북괴의 테러’를 외쳐댔다. “목격자들의 입을 통해 본 폭발 순간은 83년 9월 대구 미 문화원 폭발 사건 및 같은 해 10월 북괴의 ‘랭군’폭탄테러(한국외교사절 암살 사건) 등의 사건 순간과 너무나 비슷했다”거나 “강력한 폭발로 미루어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직감”한다거나, “아시아경기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방해하려는 흉계”라는 식이었다. (동아일보 1986.9.15). 

 

 

경찰은 그러면서 국내외 불순분자를 찾는다며 9월 1일부터 23일까지 출입국한 내외국인 16만여 명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 중 아랍권 국가 등 ‘북괴가 테러를 수출하는’(?) 25개국 국적자들의 행적을 조사한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전두환 정권은 또 시민의 제보를 기다린다며 전단지 수십 만 장을 전국에 뿌렸고 결정적 제보자에게는 1천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제보니 현상금이니 떠든 것은 쇼였다. 뒤에 밝히겠지만, 당시 공항 경비를 맡고 있던 보안사는 소방호스까지 동원해 현장을 말끔히 청소했다. 혹시라도 무슨 증거가 나오지 못하도록 현장을 훼손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 쓰레기통에 뭔가를 집어넣는 것을 봤다고 제보했다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이 제보자는 즉시 격리돼 입을 다물라는 강요에 시달렸을 것이고 살아가는 동안 내내 경찰의 감시를 받았을 것이다. 
     

폭발물의 정체를 은폐하라!

당시 언론은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치안본부가 나서 사건의 진상을 은폐한데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가 심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천장 보수 공사를 하다 직격탄을 맞아 하반신이 날아간 관리공단 직원 유주환 씨의 몸에선 90개의 볼베어링(납탄)이 나왔지만, 언론은 이를 ‘스테인레스 쓰레기통 파편’이라 했다. 죽거나 다친 이들의 신발을 뚫고 들어온 것도 모두 ‘파편’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스테인레스 쓰레기통은 순식간에 터져나갔을 것이고, 클레이모아에 장착됐던 700개 납탄이 총알처럼 날아가 사람들의 몸 속을 파고 든 것이다.

사람 몸에 박혔거나 구두를 뚫고 들어온 것을 ‘스테인레스 조각’ 또는 ‘파편’이라고 표현한 것은 테러에 사용된 폭약이 우리 쪽 특수공작원들이 ‘북파공작’ 등에 사용하는 클레이모아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숨기기 위해 ‘클레모아성’ ‘클레모아와 비슷한’ 등등의 해괴한 표현을 동원했다.

 

 

 

 

『금속 파편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고, 사건 현장 주변에서 30여개의 파편이 발견돼 클레모아성 폭약류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폭발물 정체-사제폭탄.원격조정 가능성」경향신문 1986.9.15)

『폭탄이 폭발하면서 그 아래 360도 방향으로 파편과 폭풍 등이 퍼진 것이 아니라 군용 클레모아처럼 한 쪽 방향으로만 .. 또 스테인레스 쓰레기통을 이 폭발물의 표피로 이용, 폭발 때 파편이 날아가게 ..』(「폭파 기술 완벽...테러전문가 확실」경향신문 1986.9.16)

『국내에서 생산되는 콤포지션은 군부대에서만 사용되며..』(「폭약 ‘콤포지션C’ 출처를 찾아라」동아일보 1986.9.16)

『경찰 관계자는 “그러나 범행에 사용된 폭약이 ... 고성능 폭약인 콤포지션으로 국내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군사용..』(「김포 테러 수사 원점」경향신문 1986.9.19)

볼베어링이 카트 바퀴에서 나왔다는 기사도 있었다. 클레이모아가 사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누군가 필사적으로 막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콤포지션C’ 종류의 폭발물을 쓰레기통에 은폐, .. 폭발 순간에 스테인레스가 산산조각나면서 파편 구실을 .. 현장 부근에서 수거한 베어링은 공항의 짐수레에 달린 바퀴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폭발물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폭약 ‘콤포지션C’ 출처를 찾아라」동아일보 1986.9.16). 
  
김현희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여 전, 김포공항 사건 발생 1주기에 즈음해 다시 한 번 ‘북괴의 테러’를 상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향신문은 사건 발생 1주기에 즈음해 피해자인 경기기계공고 교사 옥윤철(玉潤哲. 53) 씨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옥 씨는 누이동생과 조카 등 4명을 한꺼번에 잃었고 딸은 반불구가 됐으며, 자신도 사건 발생 후 1년이 다 되도록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옥 씨는 “그동안 내 몸에서 꺼낸 파편이 몇 개나 되고 지금까지 몇 차례나 수술을 받았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못할 정도”라며 “아직도 내 몸에 박혀 있는 100여개의 파편이” 박혀 있다고 말했다.(「김포공항 폭발테러 1주...수사는 미궁에」경향신문 1987.9.14) 폭탄이 터지면서 스테인레스 쓰레기통이 조각조각 났고 그 조각이 무려 100여개나 사람의 몸에 박혔을까?
 

소방호스로 현장 ‘말끔히’ 훼손

현장 검증은 제대로 했을까?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현장은 말끔히 치워졌고, 심지어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모든 흔적과 잔유물들을 깨끗이 쓸어갔다.

『폭발사건 현장이 사건 발생 2시간 만에 소방호스로 말끔히 청소되는 초동수사의 잘못 때문 ..』(「김포공항 폭발 수사 미궁 1년」동아일보 1987.9.17)

소방호스까지 동원해 현장을 말끔히 훼손했으니 무슨 증거물이 나올 리 없다.

『수사본부가 폭발물을 ‘콤퍼지션C’ 종류로 결론을 내린 것은 사건 현장에서 스테인레스 쓰레기통 파편만 수거했을 뿐 거의 증거물이나 유기품 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 ..』(「폭약 ‘콤포지션C’ 출처를 찾아라」동아일보 1986.9.16).

현장에 증거물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정황도 드러났다.

『수사본부는 또 현장감식을 통해 15일 뇌관과 전원을 이은 전선을 찾아냈다. 수사본부는 이 전선이 한국화약 제품인 뇌관에 붙은 것과 흡사해 정밀감정을 의뢰했다. 경찰은 이 폭약이 한국화약에서 생산, 군납만하고 잇는 콤퍼지션 시리즈임에는 틀림없어 이 뇌관용 전선도 한국화약 것으로 보고 있다.』(「화약 출처에 수사력 집중」경향신문 1986.9.16)

『수사본부는 당초 현장에서 수거된 길이 1.2cm 직경 1mm의 붉은 전선이 한국화약에서 생산되는 뇌관 ‘상용 6호’의 연결선으로 추정했으나, 정밀분석 결과 이 전선은 폭발 당시 건물 청장에서 떨어진 것으로 결론지어졌다.』(「김포 테러 수사 원점」경향신문 1986.9.19)

이처럼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조작한 뒤 군용폭약이 아닌 사제폭탄이라는 엉터리 결론을 내림으로써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이 사건은 범행에 사용된 폭탄이 ‘콤포지션C’로 만들어진 사제(私製)라는 사실만 밝혀냈을 뿐 수사는 지금까지 미궁에 빠져 ... 수사본부는 [사건 발생 4개월만인] 올[1987년] 1월 17일 서울 강서경찰서로 옮겨졌으며 8명의 경찰관이 배속돼 있으나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지 못해 영구미제 사건화 할 전망이다.』(「김포공항 수사 미궁 1년」동아일보 1987.9.14)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박종철 고문 치사(1월 14일) 소식이 알려지고, 강민창 본부장이 1월 21일 사임하면서 김포공항 테러 사건도 그냥 흐지부지 됐다.  


현장 출동 폭약 전문가 “보안사 의심”

왜 이 사건이 이렇게 엉터리 수사로 결말이 났는지 잘 아는 이가 있다. 사건 발생 뒤 40분 만에 현장에 출동했던 당시 치안본부 총포화약계 주임 S씨. 당시 민간 부문의 화약 및 총포 인허가를 총괄하는 곳은 치안본부 총포화약계였고, S 씨는 민간시설에서 일어난 모든 폭탄 또는 폭파 관련 사건을 가장 먼저 검증할 책임과 권한이 있었다.

김포공항 관할경찰서인 서울 강서경찰서는 사건 발생 10분 만에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신속하게 현장을 보전할 것을 지시하고 30분 만에 현장에 출동했다. 그런데 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폭심 2m를 남겨놓고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물청소까지 한 것으로 보아 증거를 인멸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는 폭심을 살폈다. 혹시 남아 있을 증거가 있나 해서였다. 바닥에 검은 그을음을 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어, 군용폭약이 터졌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보안사 복장의 대령 2명’이 인상을 쓰며 윽박질렀단다. “젊은 사람이 뭘 안다고 떠들어?” 기가 찾지만 그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연대장님, 폭약에 대해 잘 아십니까?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산업용은 작업자의 안전을 위해 옥시젼 밸런스를 맞춰.. 산소를 많이 주입하지만, 군용은 살상용이라 그럴 이유가 없으니 산소량이 적어 Co3(탄산)나 Co2(이산화탄소)가 아닌 Co(일산화탄소) 결합으로 불완전연소돼 그을음이 생깁니다. 여기 그을음을 보면 군용폭약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장교 둘은 황망히 자리를 떴다. 쏜살같이 달려가 상급자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여기 웬 이상한 놈이 나타나 일이 꼬이게 생겼다고.. S 주임은 치안본부로 돌아오자마자 무려 6단계 위 계급인 강민창 본부장에게 불려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갔을지는 안 봐도 빤 한 일. 조직의 최고위 상급자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였지만, 올렸던 손이 다 내려오기도 전에 험한 욕지기가 그의 얼굴에 꽂히더란다. “너 이 자식, 왜 헛소리 하고 다녀?” “헛소리 한 적 없습니다.” “김포공항 갔었지?” “예...” “삼척동자가 봐도 ‘북괴 소행’이 빤한데 왜 딴 지를 걸어, 엉?” “... ...” S씨는 “순간 내가 위험에 빠졌구나 싶었고, 적당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강민창 본부장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그의 어깨까지 두드려주며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살아야 너도 살지”했단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건의 정황과 증거 인멸, 사건의 진상을 감추기 위한 수사 및 엉터리 결론에 비춰 S 주임의 말은 실제와 다름이 없어 보인다. S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곧 공개하려 한다. 사건 당시 소신을 굽히고 타협한데 대해 괴로워했다. 그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진상을 밝혔더라면 김현희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현장을 방문한 김포공항 폭탄 테러와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 1987년 일어난 KAL 858 테러 모두 ‘동일한 조직’의 소행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여담 : 미궁에 빠진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내다

사건은 왜 미궁에 빠졌을까? 우선, 1983 버마 사건이나 1987 김현희 사건처럼 가짜 북한 공작원을 준비해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 1983 버마 사건 때처럼 ‘이거 북한이 한 거 맞아요’하고 기자회견 쇼를 벌일 ‘북괴 간첩’(?)을 잡지 못했다.

‘북괴 간첩’을 만들려 하긴 했다. 사건 당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이들을 잡아다 두들겨 패며 자백을 강요했다. 마침 이들 가운데 화약을 다루는 이가 있었다. ‘사제폭탄’ 결론에 딱 맞는 ‘사제 기술자’였다. 전두환 정권은 어쩌면 이 화약 기술자를 ‘고정간첩’으로 만들려 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내국인으로 거주해 온 김00씨는 1986년 모월모일 북괴의 지령을 받아...김포공항에 잠입 .. ” 그런데 그에게는 치안본부에 아는 이가 있었다. 바로 위에 등장한 S 주임이었다. S씨의 증언으로 다잡은 간첩을 풀어주려니 저들은 무척 아쉬웠했을 것이다. 

아무튼 전두환 정권은 ‘북괴 간첩의 소행’을 입증할 증거나 증인을 조작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그런데 그렇게 사건이 흐지부지되고 난 뒤 23년 만에 ‘혜성처럼’ 새로운 증인과 증거가 동시에 등장한다. 이런 일에 전문성을 보이는 모 월간지를 통해서였다. 

이 월간지 2009년 3월호.「1986년 김포공항 테러는 북한 청부받은 아부 니달 조직 소행」미국에 의해 ‘팔레스타인계 테러리스트’로 불렸던 아부 니달이 북한으로부터 500만 달러를 받고 부하들을 시켜 청부 테러를 자행했다는 말이었다. 반 푼 어치도 논할 가치가 없는, 웃기는 얘기다. 그래서였는지, 이 월간지가 나올 때는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뒤, 특히 지난해(2017.2) 김정남 사건이 벌어진 직후, 이 월간지 기사를 여러 언론사들이 재탕하고 삼탕하면서 ‘북한의 사주에 의한 아부 니달의 테러’가 거의 기정사실화됐다. 이 또한 웃기는 얘기다. 이 나라 언론의 진면목!

왜 이런 작태를 보였을까? 우선 월간지 출간 시점인 2009년 2월(3월호는 2월에 나온다). 2008년 10월 미 국무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시킨데 대한 울분에 찬 반격이었을 것이다. 북한을 다시 테러지원국 명단에 넣기 위해 미국과 한국 내 지배세력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기투합할 때였다. 당시 한국은 이명박의 세상이었다.

다음은 아부 니달. 미국의 적. 이미 2002년 사망한 것으로 돼 있으니 마음대로 주무른들 누가 뭐라겠나. 북한은? 찰떡궁합을 자랑한다는 절친 한국과 미국의 공적(公敵)이다. 아부 니달의 테러는 1986년 4월 미국의 리비아 폭격을 합리화할 수도 있다. 아부 니달은 리비아 원수 가다피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저들은 떠벌렸으니까. 그로부터 5개월 뒤에 일어난 김포공항 사건을 북한과 아부 니달의 청부테러로 만들면, 북한과 아부 니달 및 리비아의 가다피를 동시에 ‘테러’의 책임을 지울 수 있다. 일타삼피!

1986년 사건을 조작할 당시부터 이런 시나리오가 있었는지, 뒤늦게 그렇게 역사를 ‘편찬’하기로 공모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저들은 얼마든지 자신들의 이념적 필요에 의해 제 멋대로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 무리들이다. 김정남 사건이 일어난 직후 김포공항 사건을 ‘북한의 사주 테러’로 규정한 것은, 김정남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북한을 다시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덕분에(?) 북한은 다시 미 국무부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1983 버마 보러가기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581&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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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이재용을 ‘JY’로 호명

[아침신문 솎아보기]
누가 자유한국당의 좌클릭을 두려워 하나
보수신문들 윤석헌 새 금감원장에 맹비난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8년 07월 10일 화요일

매일경제 오늘(10일) 4면엔 ‘JY, 대통령 오셔서 큰 힘’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순간 얼마전 작고한 JP를 잘못 쓴 줄 알았다. 아니면 YJ엔터테인먼트를 줄인 말인 줄 알았다. 제목 뒤에 붙은 ‘文, 양국 국민들 기대 커’를 읽고서야 인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이 만나 나눈 대화라는 걸 깨달았다.

▲ 매일경제 10일 4면
▲ 매일경제 10일자 4면

 

매경은 10일 1면 머리기사도 ‘文, JY 만나 일자리 더 많이 만들어달라’고 제목을 달아 이재용 부회장을 ‘JY’로 불렀다. 대통령은 ‘文’이라고 호명하면서 ‘재용’이라고 달면 안 되나. 영어로 제목 달면 높임말이라도 되나. 

누가 자유한국당의 좌클릭을 두려워 하나 

누가 자유한국당 좌클릭을 두려워 하나.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이다. 류 전 주필이 10일 조선일보 34면에 ‘죽은 자유한국당 左클릭 하면 살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류 전 주필은 “우파가 2020년 총선에서 전멸하면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 사회적 경제체제, 1948년의 대한민국 말소가 체제화할 것”이라고 했다. 이때가 되면 우파에게 다시 기회가 온다는 뜻이다. 류 전 주필은 자유한국당을 향해 적당한 왼쪽 명당은 신기루에 불과하니 참고 견뎌서 ‘갈수록 더 과격해지는 좌파의 종국적 실패를 노리라고 주문한다. 

▲ 조선일보 10일 34면 류근일 칼럼
▲ 조선일보 10일자 34면 류근일 칼럼

 

 

류 전 주필은 칼럼의 시작을 “요즘 떠오르고 있는 중요한 의제의 하나는 보수라 할까 (중략) 하는 정치‧사회‧문화적 범주가 과연 오늘의 ‘폭망’에서 되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라고 했다.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시라. 오늘 한국사회의 중요한 의제가 ‘자유한국당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지. 국민 대부분은 아무 관심 없다. 입만 열었다하면 50년전 케케묵은 얘기나 읊조리는 ‘세금충’들 안 봐서 그나마 좋다고 한다.  

류 전 주필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혁명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더 무자비하고 더 순혈적이며 더 자살 특공대식 전위투사가 연이어 나오고 또 나와야” 하는 좌파 세상이라고 진단하면서 “영구 혁명은 마침내 우파 멸종, 보수 소멸, 좌익 혁명 독재에 도달한다”고 예견했다. 한국에서 독자가 가장 많은 신문의 주요 칼럼니스트가 현 정부를 영구 혁명이나 꿈꾸며 좌익 혁명 독재로 내달리는 봉인열차쯤으로 여기는 건 분명 정상이 아니다.  

동아일보, 초미세먼지 지역이동 밝혔지만  

동아일보가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이 19개 미세먼지 예보권역별 초미세먼지(PM2.5) 이동량을 처음으로 분석한 결과를 10일자 22면 전면을 털어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기사 제목을 ‘서울 초미세먼지 88% 외부서 유입… 국내선 충남發 가장 많아’라고 달아 미세먼지의 지역간 이동경로를 관리할 법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옳은 지적이다. 

▲ 동아일보 10일 22면
▲ 동아일보 10일자 22면

 

그러나 건 초미세먼지 배출 자체를 줄이기 위한 지역별 관리체계가 더 필요해 보인다. 동아일보가 공들여 만든 한반도 지도상에 광역시도별 초미세먼지 배출비율을 보면 의외의 지역이 초미세먼지를 더 많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충남(27), 전남(21), 부산(20), 경기남부(19), 경남(18) 순으로 많은 배출량을 보였다. 특히 1, 2위가 공기 좋은 농촌으로 여기는 충남과 전남이었다.  

두 지역은 석탄화력발전소과 석유화학단지 같은 공단이 몰려있는 곳이다.

어차피 공기를 통한 이동을 차단할 수도 없는 마당에 배출량 자체를 줄이려면 답은 간단하다. 석탄화력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동아일보가 석탄화력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산업 육성에 얼마나 공력을 쏟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보수신문들 새 금감원장에 맹비난 

윤석헌 새 금융감독원장이 9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금융감독혁신 과제를 발표했다. 한국일보는 10일자 17면에 ‘윤석헌, 소비자 피해 발생하면 금융사 일벌백계’하겠다고 보도했다. 같은 17면 아래엔 ‘금감원, 키코(KIKO) 사건 원점서 재검토… 피해 기업 보상안 마련’이란 제목의 관련기사도 실었다. 담담하게 새 금감원장의 말을 옮겼다.

▲ 조선일보 10일자 경제1면
▲ 조선일보 10일자 경제1면

 

그러나 조선일보는 달랐다. 조선일보는 10일자 경제1면에 ‘금감원장 윤석헌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도 ‘금융개혁 한다면서 10년 전 일 재조사 지시한 금감원장’이란 제목으로 법원과 공정위, 검찰 조사에서도 혐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10년 전 키코 사건을 지금 와서 들춰내는데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키코 사건이 과연 끝난 건가. 2007년 하반기부터 중소기업들이 환율변동에 따른 손해를 줄이기 위한 파생상품 키코에 대거 가입했으나 예측과 달리 환율이 상승하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1000여 개 중소기업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성동조선은 키코에 수천억원이 묶여 파산의 수렁에 빠져 수천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분명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수사결과와 법원 판단을 누가 믿겠는가.

매일경제신문은 조선일보 보다 한 술 더해 1면에 ‘윤석헌 금감원장, 금융사와 전쟁불사’라는 제목을 달았고, 14면 전면을 털어 ‘지배구조 감시하는 검사역 신설… 은행권, 우리만 부담 떠안아’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보수신문은 금융재벌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윤 금감원장을 공공의적으로 만드는데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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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 특별지시한 문 대통령 "'계엄령 검토' 기무사, 신속 수사"

국방장관에 '특별 지시'... "독립수사단 통해 촛불 계엄령·세월호 사찰 의혹 기무사 수사"

18.07.10 10:30l최종 업데이트 18.07.10 11:41l

 

문재인 대통령 '오늘 수보회의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집회 당시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한 국군기무사령부와 관련해 독립수사단을 구성, 수사에 나설 것을 송영무 국방부장관에게 지시했다.(자료사진)
▲ 문재인 대통령 '오늘 수보회의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집회 당시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한 국군기무사령부와 관련해 독립수사단을 구성, 수사에 나설 것을 송영무 국방부장관에게 지시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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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0일 오전 11시 30분]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집회 당시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한 국군기무사령부와 관련해 독립수사단을 구성해 신속히 수사에 나설 것을 송영무 국방부장관에게 지시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10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 특별지시 관련 브리핑'을 통해 이런 내용을 전했다. 

 

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과거 촛불집회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가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한 것과 관련, 독립수사단을 구성해 신속하고 공정하게 수사할 것을 국방부장관에게 지시했다. 대통령은 또 독립수사단이 기무사의 세월호 유족 사찰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대통령이 독립수사단 구성을 지시한 이유는 이번 사건에 전·현직 국방부 관계자들이 광범위하게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고, 현 기무사령관이 계엄령 검토 문건을 보고한 뒤에도 수사가 진척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라며 "기존 국방부 검찰단 수사팀에 의한 수사가 의혹을 해소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의 특별지시는 현안점검회의 등을 통해 모아진 청와대 비서진의 의견을 인도 현지에서 보고받고 서울시각으로 어제 저녁 내려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부터 인도를 국빈 방문 중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인도 현지에서 이례적으로 특별 지시를 한 데 대해 청와대는 "사안의 위중함과 심각성, 폭발력 등을 감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사안의 위중함·심각성·폭발력 등을 감안해 국방부와 청와대 참모진들이 신중하고 면밀하게 들여다봤다. 그런 의견을 인도 현지에 가 계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며 "대통령이 보고 받은 뒤, 이를 순방이 끝난 뒤 지시하면 너무 (시간이) 지체된다고 판단, 현지에서 바로 지시를 내렸다"라고 설명했다. 

인도 순방 중 특별 지시한 이유? "사안의 위중함·심각성 감안" 
 

 국군기무사령부 홍보동영상 화면.
▲  국군기무사령부 홍보동영상 화면.
ⓒ 국군기무사령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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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독립수사단은 군내 비(非)육군, 비(非)기무사 출신의 군 검사들로 구성되며, 구성 뒤엔 별도 수사지휘·보고 없이, 독립·독자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게 된다. 이 고위관계자는 "(통상) 독립수사단은 대검 훈령과 관계없이, 검찰총장 지휘권으로 구성한다"며 "이번 독립수사단은 기존 민간검찰의 독립수사단을 준용해 구성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앞서 5일, 국회 국방위 소속 이철희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이 보도자료를 통해 2017년 3월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문건을 공개하면서 논란이 됐다. 이는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결정을 앞둔 2017년 3월 초 기무사령관이 국방장관에 보고한 문건으로, 군이 위급상황시 위수령·계엄령을 준비·검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어 9일, 같은당 김병기 의원(서울 동작갑)도 추가로 기무사에서 작성한 '세월호 실종자 가족 대상 탐색구조 종결 설득 방안' 문건을 공개해 논란이 확산됐다. 이는 기무사가 2014년 9월 초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상대로 수색 종결을 설득하는 논리까지 개발해 보고한 내용의 문건이다.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자유한국당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극도의 무질서한 치안, 국정이 혼란한 상황을 대비해 비상 조치를 검토한 것이다. 기무사로선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일, 더불어민주당이 '쿠데타' 운운하는 건 음모론일 뿐(김영우 의원, 9일 CBS김현정의 뉴스쇼)"이라는 논리로 맞섰다. 

이에 이철희 의원은 "시민들 집회를 계엄의 대상, 위수령 발동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 자체가 틀렸다고 본다. 유신시대 사고"라며 반박했다. 그는 앞서도 "치안확보를 빌미로 군을 움직이려 한 위험천만한 시도가 없었는지, 또 기무사 외 가담한 군 조직이나 국방장관의 윗선은 없는지 등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대통령 특별 지시와 관련, 국방부는 "빈틈없고 철저하게 후속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최현수 대변인은 같은 날 정례브리핑에서 이같이 밝히면서도 관련한 기자들 질문에는 "아직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만 답했다. 

그는 다만 이날 '국방부가 해당 문건을 은폐하려 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국방부가 문건을 먼저 공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묻자 "그건 여기서 단정적으로 답변드릴 수 없다"고 답하면서 "대통령 지시 관련, 추가로 내용을 확인해야 더 정확히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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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내란을 음모한 자들을 처벌하라”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7/10 11:40
  • 수정일
    2018/07/10 11:4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시민사회, “내란을 음모한 자들을 처벌하라”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07/10 [00:1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시민사회단체들이 최근 기무사의 '내란음모' 계획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사진 : 퇴진행동 페이스북)     © 편집국

 

최근 기무사가 촛불국민을 진보(종북)로 규정하고일부 보수진영이 계엄령을 필요 하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계엄령을 준비한 것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시민사회단체들이 관련자들의 처벌을 촉구하고 나섰다.

 

퇴진행동기록기념위원회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민중공동행동, 416연대는 9일 오후 130분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위 군사쿠데타 기획내란 음모 기무사를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들은 문건을 보면 단순히 위수령과 계엄령에 대한 법적 검토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계획까지 세운 것으로 보인다며 이것은 헌법 파괴행위이고친위군사 쿠데타이며내란음모라고 분노했다.

 

이들 단체들은 기무사의 정치개입과 민간인 사찰 행태는 이미 두고 볼 수 없는 수준이라며 기무사는 댓글 공작에도 개입했고세월호 참사 피해자와 시민들에 대한 사찰에도 간여했다고 규탄했다.

 

이들 단체들은 국군기무사의 역사는 군사쿠데타와 군의 정치개입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며 이들의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는 전두환 노태우가 주축이 되어 1979년 신군부가 권력 장악을 위해 12·12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했던 만행을 주도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들은 기무사가 존재하는 한 군의 정치적 중립은 있을 수 없다기무사가 존재하는 한 군은 잠재적 쿠데타 세력이라며 군에 대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무사를 해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들은 구체적으로 ▲ 기무사의 모든 불법 행위 관련 자료 공개▲ 철저한 진상규명▲ 한민구 전 국방장관김관진 청와대 전 안보실장황교안 전 권한대행 등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와 관련자 처벌▲ 국군기무사 해체 및 군의 민간인 사찰 전면 금지▲ 피해자 및 피해 단체에 대한 원상회복과 배상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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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친위 군사쿠데타 기획내란 음모 기무사를 해체하라

 

국군기무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면 위수령을 발령하고 이후 계엄령 선포를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계엄군으로 탱크 200장갑차 550특전사 1400명 등 무장병력 4800여명을 동원하기로 했고심지어 저항하는 시민에 대한 발포까지 계획했다.

 

문건을 보면 단순히 위수령과 계엄령에 대한 법적 검토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계획까지 세운 것으로 보인다보도검열단과 언론대책반을 통한 언론통제 계획을 마련했고국회가 위수령 무효법안을 가결하더라도 대통령 거부권을 이용해 두 달간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적극적 제안도 담겨 있다.

 

기무사 문건이 작성된 지난해 3월 당시 태극기집회에서는 계엄령선포촉구범국민연합이란 단체가 등장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구호가 외쳐졌으며기무사가 세월호 진상규명 반대 집회를 개최하기 위해 보수단체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알려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계엄령 계획이 군을 넘어 박근혜 정권 내 핵심세력과 교감 아래 진행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헌법 파괴행위이고친위군사 쿠데타이며내란음모다충격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누가 기무사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는가구 정권은 누가 기무사와 더불어 이 모의를 기획했는가?

 

그 밖에도 기무사의 정치개입과 민간인 사찰 행태는 이미 두고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기무사는 댓글 공작에도 개입했고세월호 참사 피해자와 시민들에 대한 사찰에도 간여했다심지어 안산 단원고에까지 기무 활동관을 배치해 일일보고를 하도록 했다문제는 기무사의 이런 위헌위법 행위가 여러차례 지적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어왔다는 점이다.

 

1990년 윤석양 일병의 양심선언으로 민간인 사찰의 실체가 밝혀진 이래 기무사는 민간인 사찰 중단을 약속했었지만드러나는 사실은 기무사가 단 한순간도 무도한 불법행위를 중단한 적이 없음을 보여준다. 1990년에 밝혀진 민간인 사찰 문건에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등의 정치인들을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 등 4000여명의 민간인정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이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는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이명박 정부 초기에도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사실이 드러나 공분을 샀었다용산참사, 4대강 사업 등에 대한 여론공작이나정부비판 인사들에 대한 사찰 등 지금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이미 이명박 정부 말기에 사실로 확인돼 큰 논란이 일었던 사안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은 박근혜 정부 내내 이어졌던 것이고 심지어 친위쿠데타 기획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국군기무사의 역사는 군사쿠데타와 군의 정치개입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이들의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는 전두환 노태우가 주축이 되어 1979년 신군부가 권력 장악을 위해 12·12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했던 만행을 주도하기도 했다. 80년 광주와 87년 6월 항쟁, 2016년 퇴진촛불 등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심화되었지만 기무사는 이름을 바꿔가며 어두운 권력 뒤에 숨어 여전히 국민들을 감시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헌법을 유린해 왔던 것이다.

 

몸서리쳐진다기무사가 존재하는 한 군의 정치적 중립은 있을 수 없다기무사가 존재하는 한 군은 잠재적 쿠데타 세력이다군에 대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무사를 해체하는 것이다기무사는 해체되어야 한다그렇지 않고 미봉책으로 대책이 마무리 된다면 기무사는 언젠가는 또 다시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댈 것이 자명하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기무사의 민간인 또는 민간단체 사찰위수령 계엄령 계획 등 친위 군사쿠데타 등을 포함 모든 불법 행위 관련 자료를 전면 공개하라!

 

2. 국회 청문회국정조사특별검사 등 모든 법제도를 활용해서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라!

 

3. 당시 한민구 전 국방장관김관진 청와대 전 안보실장황교안 전 권한대행 등에 대해 성역없이 철저하게 수사하라이 사건에 대한 책임자 및 관련자 모두를 즉각적으로 직무에서 배제하고엄중 처벌하라!

 

4. 국군기무사를 해체하라군의 민간인 사찰을 전면 금지하라!

 

5. 피해자 및 피해 단체에 대해 국가가 원상회복과 배상하라!

 

이러한 요구가 이뤄질 때까지 촛불국민들은 지켜볼 것이며근본적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우리는 공동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다.

 

2018년 7월 9

퇴진행동기록기념위, 416연대민중공동행동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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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 '내란 음모', 황교안·김관진 조사하라"

시민단체들, 기무사 해체 및 구 정권 관계자들 조사·처벌 촉구
2018.07.09 15:41:49
 

 

 

 

군 기무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기각시 위수령 및 계엄령 선포를 계획했다는 내용이 공개되면서 후폭풍이 거세다. 시민단체들은 군 기무사의 불법 행위 관련 전면 공개와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 이 사건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퇴진행동기록기념위, 416연대, 민중공동행동,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무사를 해체하고 내란음모에 가담한 관련자 모두를 처벌하는 등 군이 과거의 위험하고 구태한 과거와 단절하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관진, 황교안 등 성역없이 수사해야 한다" 
 
국군기무사가 2017년 3월 작성한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문건을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되면 계엄군으로 탱크 200대, 장갑차 550대, 특전사 1400명 등 무장병력 4800여명을 동원하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시민에 대한 발포까지 계획했다. 
 
이는 단순히 위수령과 계엄령 관련, 법적 검토를 한 게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주고 있다.     
 

▲ 퇴진행동기록기념위, 416연대, 민중공동행동,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무사를 해체하고 내란음모에 가담한 관련자 모두를 처벌하는 등 군이 과거의 위험하고 구태한 과거와 단절하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프레시안(허환주)

기무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보도검열단과 언론대책반을 통한 언론통제를 계획했고, 국회가 위수령 무효법안을 가결하더라도 대통령 거부권을 이용, 두 달간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제안까지 계획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기무사의 계획이 단순히 군 내부에서 계획됐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박근혜 정권 내 핵심세력과 교감이 없었다는 진행되기 어려운 계획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퇴진행동 등은 이번에 밝혀진 군 기무사의 계엄령 계획 관련해서 "헌법 파괴행위이고, 친위군사 쿠데타이며, 내란음모"라며 "누가 기무사에 이런 권한을 주었는가. 구 정권의 누가 기무사와 이 모의를 기획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당시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김관진 청와대 전 안보실장, 황교안 전 권한대행 등을 성역 없이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며 "이 사건에 대한 책임자 및 관련자 모두를 즉각적으로 직무에서 배제하고, 엄중 처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무사, 어두운 권력 뒤 숨어 헌법을 유린해 왔다" 
 
이들은 군 기무사의 그간 역사도 지적했다. 이들은 "군 기무사의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는 전두환, 노태우가 주축이 되어 1979년 신군부가 권력 장악을 위해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며 "또한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입했던 만행을 주도하기도 했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1980년 광주와 1987년 6월 항쟁, 2016년 퇴진촛불 등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심화되었지만 기무사는 이름을 바꿔가며 어두운 권력 뒤에 숨어 여전히 국민들을 감시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헌법을 유린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기무사의 해체도 주장했다. 이들은 "기무사가 존재하는 한 군의 정치적 중립은 있을 수 없다"며 "기무사가 존재하는 한 군은 잠재적 쿠데타 세력이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무사를 해체하는 것"이라고 요구했다. 
 
박석운 기록기념위원회 대표는 "이 사안은 기무사 내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김관진 당시 안보실장, 그리고 황교안 직무대행까지 연계된 것"이라며 "의혹을 투명하게 성역 없이 조사한 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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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먹는 국회, ‘특활비’ 펑펑

[칼럼] 국민의 비판이 부당한가
 
이기명  | 등록:2018-07-09 12:23:21 | 최종:2018-07-09 13:47:2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채귀(債鬼)라는 귀신이 있다고 한다. 빚 받아내는 귀신이다. 어찌나 독한지 죽은 다음에도 저승까지 쫓아온다. 채귀를 피할 무슨 방법이 있는가.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 빚은 종류는 다양하다. 치사한 노름빚도 있다. 마누라 잡혀먹는 노름꾼 빚쟁이도 있었다. 구한말, 일본에 빚을 졌다.
 
“일본에 국채 1,300만 원을 빚졌다. 갚지 못하면 대한제국의 존망과 직결된다. 국고가 텅 비어서 갚을 도리가 없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고 그 대금으로 빚을 갚아 나라의 위기를 구하자”
 
이게 국채보상운동이다. 나랏빚을 갚자는 국민운동이다. IMF 위기 때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을 폈다. 손주 놈 돌 반지까지 내놨다. 국민은 정부보다 훨씬 애국이다. 정치가들은 느낌이 어떤가.

(자료사진 – 팩트TV 신혁 기자)

 ■ 특활비란 귀신의 국민세금
 
박근혜 정부의 국가정보원은 특활비란 이름의 돈을 박근혜에게 상납했다. 특활비란 도대체 무엇인가. 말 그대로 특수 활동비다. 특수 활동은 무엇인가. 특수한 활동이니 알 수가 있는가. 분명한 것은 말썽이 났으니 당당한 돈은 아닌 모양이다.
 
국회의원들의 특활비가 문제로 터졌다. 그토록 죽어라 공개를 요구했는데 죽어라 입 다물고 있더니 참여연대의 3년여간 소송 끝에 대법원 결정으로 공개됐다. 국민의 대표가 특수 활동비 좀 썼기로서니 그걸 공개하라는 야박한 인심이 어디 있느냐고 야속해 할지도 모른다. 야속한가. 그래 야속해라.
 
긴소리 하면 피곤하다. 자세한 내용은 언론을 통해 자세하게 공개됐다.
 
국민들은 눈이 뒤집히게 됐다. 없는 살림에 세금 냈더니 마음대로 펑펑 쓰느냐. 기막힌 사실 몇 가지만 말해 보자. 우선 국회는 매년 80억을 썼다. 공개된 3년간 240억이다. 이는 국회가 참여연대에 제출한 2011년에서 3013년까지의 3년간 내역이다. 이번에 공개된 특수활동비는 영수증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의원들이 국회에서 받아간 돈이 정작 어디에 쓰였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국민들은 가슴에서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 특활비(특수활동비)의 벌거벗은 모습
 
노무현 대통령 후원회장을 하면서 수십 년을 지켜봤다. 참여연대 운영위원도 했다. 한때 공정한 매체로 평가받던 ‘서프라이즈’의 회장도 했다. 노사모는 거짓말을 금기로 했다. 이번 특활비의 진상을 세상에 알린 것도 참여연대다. 나는 믿는다. 그러기에 참여연대의 발표를 믿음으로 인용한다.
 
참여연대 분석 2011~2013 특활비 지출 내역
 
국회 교섭단체 대표, 상임위원장 등 특정 직책에 있는 국회의원은 매월 월급처럼 정기적으로 특활비를 지급받았다. 기밀 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 수사에 쓰라는 특활비는 국회의원 ‘제2의 월급’이었다.
 
교섭단체 대표는 실제 특수활동 수행과 상관없이 매월 4,000여만 원(짝수달에는 6,000~7,000여만 원)의 특활비를 받았고 상임위원장과 함께 예산결산특위원장, 윤리특위원장,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회의가 열리지도 않은 달에도 위원장이라는 이유로 똑같이 매월 600만 원씩을 받았다. 
 
특히 법제사법위원회는 ‘법제사법위원회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매월 1,000만 원을 받아 법사위 여·야 간사와 위원들에게 특활비를 배분해 추가 지급했다. 법사위 간사에게 매월 100만 원을, 위원들에겐 매월 50만 원씩 지급했다. 법사위는 위원들뿐만 아니라 수석전문위원에게도 매달 150만 원씩 줬다. 제 식구 감싸기 특위라고 비판받는 윤리특위는 2011년에 단 네 차례, 2012년 다섯 차례, 2013년 네 차례만 회의를 열었지만, 위원장은 매월 600만 원씩 활동비를 꼬박꼬박 받았다. 이와 별도로 정기국회 시기인 9월에 ‘윤리특위 정기국회대책비’로 300만 원, ‘윤리특위 위원회활동지원비’로 700만 원을 수석 전문위원에게 지급했다.
 
정체불명 수령인에게 전달된 특활비도 있다. 국회 특활비를 한 번이라도 받은 이는 298명에 달하는데 이중 가장 많은 금액을 받은 수령인은 ‘농협은행(급여성경비)’이었다. 2011~2013년까지 약 59억 원의 특활비가 농협통장에 입금됐는데 이는 전체 특활비의 4분의 1 정도지만...실제 사용한 실수령자가 누구인지 누가 통장에서 인출해 누구에게 어떤 명목으로 지출했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
“나는 원내 교섭단체(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 대표이기 때문에 전체 3,000만 원의 절반은 은행으로 계좌이체가 돼 왔고, 나머지 절반은 5만 원권 현찰로 밀실에서 1대 1로 만나서 직접 받았다.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줬는지 흔적이 남지 않는 방식으로 수령했다. 설사 제대로 주지 않더라도 배달 사고가 나도 알 수 없고, 받은 돈을 어떻게 쓰든 간에 흔적이 남지 않는 그런 ‘깜깜이’ 돈이었다”
 
벌거벗은 특활비의 모습이다.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의 말이다.
“의회·외교 명목의 상당한 돈이 특정인을 통해 어디로 갔는지, 또 농협 통장을 통해 어디로 누구한테 갔는지 모른다. 구체적으로 수령인 누가 어떤 내역으로 얼마만큼 특활비를 받았는지 조만간 다시 추가 자료를 정리해 내겠다.” 
 
“참여연대는 농협(급여성경비) 통장 등으로 입금된 특활비가 이후 누구에게 어떤 용도로 전달됐는지 위법사항이 발견되면 소송을 제기하거나 검찰에 수사를 의뢰할 방침이다.”
 
“실제로 지난 2007년 감사원이 국정홍보처·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국가청소년위원회·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 4개 기관의 특활비 감사를 실시해 부정 사용 내역을 적발했다.” 
 
“감사원이 국회 특활비 사용내역을 전수조사해서 우리가 공개한 것 외에 집행내역 확인서나 신용카드 매출전표 등 증거서류가 더 나올 수 있고, 검찰이 압수수색해 확인하면 더 명백히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3년의 시간이 걸려 받아낸 국회 특활비 지출내역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게 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열어본 상자 속엔 너무나 엉망진창인 국회 모습이 들어 있어 안타깝다” “앞으로 우리는 국회뿐 아니라 특활비가 편성된 20개 중앙행정기관의 특활비 지출내역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정보공개 청구하겠다.”

 
눈 먼 돈은 아무 데고 찾아간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 개막식 참석경비(2011)’ ‘런던올림픽대회 참관단 경비(2012)’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국회 연설 관련 경비(2012)’ 등이 대표적이다. 박병석 국회부의장 중유럽 공식방문(2012), 이병석 부의장 서유럽 공식방문(2013) 등 ‘공식’일정에도 특수활동비가 지급되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현충일 추념식 참석경비, 제헌절 경축식 행사경비, 광복절 경축행사 관련 경비, 삼일절 기념식 행사경비 등도 매년 국회 특수활동비에서 빠져나갔다. 의회 외교에 지급된 돈은 2011년 6억 3,800여만 원, 2012년 5억 3,500여만 원, 2013년 6억 3,100여만 원 등이었다. 그러니까 핑계만 있으면 특수활동비다.
 
■ 의원들에게 빚진 거 없다
 
밥값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치욕적인 말이다. 밥을 먹어야 목숨을 부지하는데 밥값도 못한다면 죽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요즘 국회 꼴을 보며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밥이야 각자가 집에서 먹을 테니까 천상 할 수 있는 말은 ‘세비 값도 못 한다’는 말이다. 얼마나 치욕적인 말인가.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 열심히 의정활동을 하는 의원들이 많다. 국민에게 겸손하고 수시로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 시정하는 의원들을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들은 특활비로 의원들이 국민으로부터 지탄 받을 때 무척 괴로울 것이다. 원래 까마귀 소굴에 백로가 들어가면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그 안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제도개선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속 들여다보이는 소리 하지 말라. 폐지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도대체 특활비를 사용할 무슨 명분이 있는가. 개인이 아닌 국가를 위한 특활비라면 당당하게 사용하면 된다. 오히려 이렇게 나라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해야 한다. 영수증도 없이 도둑놈 물건처럼 쓰기가 염치없지 않은가. 폐지하는 이외에 어떤 제도 개선도 있을 수 없다.
 
의원들이 출마했을 때 국민에게 온갖 약속을 다 한다. 국민에게 한 약속은 바로 빚을 지는 것과 같다. 약속을 이행했는가. 국민은 자신의 대변자인 국회의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요즘 의원들의 행동을 보면서 욕을 할 생각도 포기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버린 자식으로 여길 것이다. 미운 짓을 골라가며 한다는 말이 있다. 이번에 들통이 난 특활비가 바로 그것이다.
 
■ 훌훌 털어버리면 어떤가
 
특활비 문제는 이제 그냥 사라질 문제가 아니다. 하루가 가면 그만큼 국민의 분노는 커질 것이다. 국회의원의 배짱이 제아무리 고래 심줄 같아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특활비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특활비를 털어버려야 한다. 그다음 특활비가 아닌 정상적으로 돈을 써야 한다. 모든 범죄는 숨기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야당은 모두 특활비 폐지에 의견을 모았다. 왜 거대 정당만 뜸을 들이는가. 연구해서 잘 운영하면 된다고 한다. 뭘 잘 운영하는가. 차라리 뭉텅이로 들어오는 현금의 맛을 잊지 못하겠다고 고백해라.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겠지. 편하게 생각지 말라. 세상이 달라졌다. 느껴지지 않는가. 느끼고 안 느끼고는 마음대로지만 남은 의원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고 다시 배지를 달려면 특활비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 갚지 않으면 어디까지든 쫓아갈 것이다. 국민에게 존경받는 국민의 대변자,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특활비는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578&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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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미국의 핵 보유·통제에 '의문'... 퍼그워시 성명

63년전 아인슈타인의 경고, 현실이 되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아인슈타인, 미국의 핵 보유·통제에 '의문'... 퍼그워시 성명

18.07.09 13:40l최종 업데이트 18.07.09 13:40l

 

 

큰사진보기 알버트 아인슈타인.
▲  알버트 아인슈타인.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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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핵문제의 보안관은 미국이다. 미국 스스로 보안관 완장을 차고 있다. 그런 미국을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본 과학자가 있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국에 핵 보유를 권고한 적이 있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다. 그랬던 그가 나중에는 미국의 핵 보유 및 통제에 염려의 마음을 갖게 됐다. 

그런 염려의 마음을 담아 아인슈타인은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 등과 함께 1955년 7월 9일 이른바 퍼그워시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동북쪽 끝부분과 캐나다가 만나는 곳이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컴버랜드군 퍼그워시읍이다. 

여기서 과학자 11명이 모여 성명을 발표했다. 핵무기 폐기에 대한 세계 각국의 보편적 열망을 담은 성명이었다. 정식 명칭은 '핵무기 없는 세계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하는 선언'이다.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으로도 불린다. 

핵문제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는 당연히 '보안관 국가'다. 세계 최초로 핵실험을 했고,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사용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을 투하했으니, 핵범죄 전과도 2범이나 된다. 한국전쟁 때도 핵무기를 사용하려 했었다. 그래서 보안관 역할을 할 자격은 분명히 없는 나라다. 하지만, 그 보안관 완장을 떼어낼 만한 나라도 없으니, 마음 놓고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섬 3개를 사라지게 한 미국

 

퍼그워시 성명 당시, 핵실험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소련·영국 세 나라였다. 아인슈타인 등이 주로 겨냥한 쪽은 미국 핵무기다. 미국 핵무기를 견제하는 성명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성명문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인류가 비극적 상황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면서, 이 회의를 통해 과학자들이 대량살상무기가 발달한 결과로 야기된 위험한 상황을 평가하고, 첨부된 초안에 담긴 정신에 입각해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성명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제 우리는 특히 비키니 실험 이후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핵폭탄이 점차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비키니섬으로도 불리는 비키니 환초는 필리핀에서 동쪽을 향해 태평양 중앙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 산호충 분비물이 축적돼 만들어진 약 20개의 환초로 구성돼 있다. 

미국은 1946년부터 1958년까지 23차례의 핵실험을 여기서 실시했다. 1954년에는 원자폭탄보다 훨씬 파괴적인 수소폭탄(열핵폭탄) 실험도 했다. 이 때문에 이곳 섬이 3개가 사라졌다. 방사능 피해가 이 지역에 확산됐음은 물론이다. 미국 본토의 사막에서도 할 수 있었지만, 환경문제 때문에 여기서 핵실험을 하게 된 것이다. 
 

 비키니섬 핵실험.
▲  비키니섬 핵실험.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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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등이 행동에 나선 계기는 1954년 비키니 핵실험이다. 미국 핵무기의 발달을 보면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자폭탄보다 파괴력이 강할 뿐 아니라 작고 가벼워 더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수소폭탄이 비키니 실험을 계기로 더욱 확산될 경우, 인류의 앞날을 보장할 수 없다는 염려가 든 것이다.  

이들은 성명문에서 "원자폭탄 한 발로 히로시마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던 반면, 수소폭탄 한 발로는 런던이나 뉴욕 혹은 모스크바처럼 규모가 훨씬 큰 도시들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라면서 이렇게 우려를 표명했다. 

"수소폭탄을 사용하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대도시는 틀림없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우리가 겪게 될 작은 재앙 중 일부에 불과하다."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방식"

아인슈타인 등은 핵무기의 기술적 발전만 걱정한 게 아니라 마땅한 통제 시스템이 없다는 점도 걱정했다. 미국이 보안관 역할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때 시각으로 볼 때도 미국은 불완전한 보안관이었다. 

"수소폭탄을 사용하지 말자고 평화 시에 협정을 맺었다 해도, 막상 전쟁이 발발하면 그런 협약이 더 이상 구속력이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쌍방은 수소폭탄 제조에 착수할 것이다. 어느 한쪽만 폭탄을 제조하고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경우, 폭탄을 제조한 쪽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수소폭탄을 가진 쪽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대전이 발발할 만한 상황이 되면 국가들이 그것부터 확보하려 들 거라고 염려했다. 국가들이 보안관 미국의 역할을 신뢰하며 핵을 억제하는 게 아니라 그와 정반대되는 상황이 출현할 거라고 염려한 것이다. 

아인슈타인 등은 공정성을 의심받는 '보안관'이 세계 핵 통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어느 한 나라의 관점이 아니라 중립적 관점에서 핵문제를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인류 구성원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중략) 공산주의자든 반공주의자든, 또는 아시아인이든 유럽인이든 아메리카인이든, 또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간에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이 기울어진다면 이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미국은 자국 중심주의에 입각해 핵 문제를 처리하려 하지만, 아인슈타인 등은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방식'에 입각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방식으로 핵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누구도 핵을 갖지 않는 쪽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이중 삼중의 잣대를 보여왔던 미국

이제까지 미국이 핵 확산을 막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핵 통제가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국은 핵을 가진 상태에서 남한테만 갖지 말라 하니 핵 통제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소련·영국·프랑스의 핵 보유는 물론이고 이스라엘·중국·인도·파키스탄의 핵 보유도 막지 못했다. 이는 미국의 비핵화 외침이 공감을 얻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세계 최강의 군대로 국제사회를 수시로 위협하는 나라가 핵을 통제하려 하니, 불신을 사는 것도 당연하다. 

미국은 새롭게 핵을 가지려는 나라들한테도 공정하지 못했다. 한국이나 리비아 같은 나라의 핵 보유는 끝까지 저지했지만,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스라엘 경우에는 유대인 국가라는 이유로 핵 보유를 묵인했고, 중국 경우에는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의 아시아 패권 상실을 막으려면 중국과의 공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핵 보유를 국제법적으로 합법화해줬다. 

또 인도 핵무기는 중국 견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파키스탄 핵무기는 인도 견제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각각 용인했다. 처음에는 핵 확산을 막겠다며 경제 및 군사제재를 불사하던 미국은 어느 순간에는 국익을 이유로 태도를 바꾸곤 했다. 핵 폐기가 불가능해지면 체면 손상을 막고자 국익을 명분으로 핵 보유를 용인한 뒤 물러서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자신들의 핵무기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핵무기도 통제할 역량이 매우 낮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나라가 핵문제 보안관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인류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엄격하고 정치해야 할 핵무기 통제 시스템이 이처럼 허술하게 운영되고 있으니 불안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은 핵무기의 세계적 확산에 관련해서 무능력을 보여왔다.
▲  미국은 핵무기의 세계적 확산에 관련해서 무능력을 보여왔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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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워시 성명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아인슈타인 등은 세계적인 핵 확산을 충분히 목격할 수 없었다. 미국의 능력 부족을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핵 확산은 그 뒤에 일어난 현상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미국의 능력에 의문을 품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미국의 무능력이 훨씬 전부터 예견 가능한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여전히 미국의 핵 통제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공정성도 낮고 성공 가능성도 별로 없는 그들의 행보를 그저 구경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세계 최강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한계 속에서도 인류가 할 수 있은 일은 있다. 

그것은 미국의 핵 통제 정책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 것이다. 또 미국이 욕하는 나라들을 덩달아 욕하지 않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핵무기를 관리할 보다 나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는 것이다. 미국이 보안관을 자처하도록 두는 게 아니라, 인류의 이익을 대변할 핵문제 보안관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국이 욕하는 상대방에 대해서만 핵 폐기를 요구할 게 아니라 그런 욕을 하는 미국에 대해서도 똑같이 핵 폐기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핵을 통제할 보다 나은 시스템을 모색하는 게 아인슈타인 등이 63년 전 퍼그워시 성명을 발표할 때의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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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숙제를 하고 있는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7/09 16:10
  • 수정일
    2018/07/09 16:1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칼럼>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정영철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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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08  15: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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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3번째 방북이 마무리되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복잡한 문제가 있었지만 ‘진전’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고, 북의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유감’을 표명하였다. 두 당사가가 협상이 끝난 후,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북의 ‘유감’ 표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서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협상을 지속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유감의 핵심은 미국의 일방적인 ‘비핵화’ 요구만이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종전선언, 나아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요구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의 이런 태도를 ‘과거 이전 행정부들이 고집하다가 대화과정을 다 말아먹고 불신과 전쟁위험만을 증폭’시킨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그리고는 자신들 스스로를 가리켜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어리석다고 말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북이 이처럼 어쩌면 위태해보일 정도로 강력한 비판이 담긴 담화문을 공개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담화문에서는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신뢰감을 드러내고 있고, 미국과의 합의와 협상의 틀을 깨기보다는 미국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런 점에서 이 담화문의 핵심은 바로 미국이 해야 할 일을 성실히 수행하라는 것이다. 즉, 관계 개선, 비핵화,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싱가포르 3대 약속에 상응하는 조치들을 단계적으로 잘 준비하고, 그것들을 잘 조율하여 단계적이고 동시적으로 진행하자는 것을 재차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중요한 문제가 놓여있다. 우리는 현재의 북미 정상회담 이후의 국면을 일방적인 북의 비핵화 과정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미국 주류 언론와 정치권의 입장이 그러하고, 우리 내부의 언론 또한 그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의 비핵화가 북이 떠 안은 ‘숙제’라고 한다면 – 사실, 북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가 정확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 종전·평화 체제 구축의 문제 등은 주로 미국이 떠 안은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미국은 자신들이 해야 할 숙제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북의 담화문이 말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은 숙제를 하고 있는가?

북의 비핵화는 쉽고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기술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치적으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한 세대가 넘는 동안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마치 ‘신화’와 같은 한 가지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는 변치 않는 진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북의 비핵화’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북에 있고, 문제의 해결 역시 북이 비핵화를 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이 문제는 북-미간의 정치-군사적 대결·대립 구조가 중심에 놓여있고, 남북 관계, 미중 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금방이라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북미 관계의 신뢰 구축과 관계 개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외에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지난 한 세대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모두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가 올바르다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다. 모든 남북관계 합의문, 그리고 싱가포르 합의문 등이나 협상장에 있는 미국 관료들에게서 일관되게 나오는 발언은 바로 ‘한반도 비핵화’이다.

지난 싱가포르 회담은 바로 이러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큰 진전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북미 양국의 최고지도자가 직접 만났다는 것 이외에도, 지금까지 서로를 갈라놓고 있던 불신의 구조를 제거하면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등의 문제를 풀어가기로 한 합의가 이전과는 달라진 점을 확연히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싱가포르 합의문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북과 미국이 동시에 풀어야 할 수 많은 숙제도 동시에 떠안게 되었다. 북은 당장 핵과 미사일 시험을 중단하고, 핵 시험장을 폐기하고, 나아가서는 미사일 엔진시험장을 폐기하겠다는 숙제를 안게 되었고, 미국은 이에 상응하여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을 밝혔다. 그런데 그 뿐이었다. 더 이상의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아직까지는 북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적인 발언이 나오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북도 반미 집회의 중단, 반미 구호의 중단 등 미국에 대한 호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많은 조치들이 서로 조율되어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언론이나 미국의 주류 언론은 북의 비핵화, 비핵화 시간표 등의 일방적인 요구를 내놓고, 그에 대한 북의 반응만을 떠들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북의 비핵화’라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북의 악마화’라는 불신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주류 언론과 우리의 언론은 서로가 앞 다투어 낡은 틀의 보도에 매달리고 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정작 자신들이 해야 할 숙제는 하지 않고, 북에 대해서는 숙제를 강요하고 자신들의 눈에 미흡할 때에는 모든 책임을 북에만 돌리는 과거의 낡은 사고의 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북의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잘 보면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 눈에 띈다.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낡은 방식으로는 절대로 새것을 창조할 수 없으며 백전백패한 케케묵은 낡은 방식을 답습하면 또 실패밖에 차례질 것이 없다.
조미관계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싱가포르수뇌회담에서 짧은 시간에 귀중한 합의가 이룩된 것도 바로 트럼프대통령 자신이 조미관계와 조선반도비핵화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북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 그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숙제는 성실히 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마땅히 해야 할 숙제는 하고 있는가?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문학박사, 2001)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 방문연구원(2002-2003)
서울대 국제대학원 연구위원(2004-2006)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원(2007)
현재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중 

주요저서로 북한의 개혁·개방: 이중전략과 실리사회주의(2004), 김정일 리더십 연구(2005), 서울과 도쿄에서 평양을 말하다(2008),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번역서,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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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오는 3대 재앙, 생존방도는 어디 있는가?

[개벽예감 305] 닥쳐오는 3대 재앙, 생존방도는 어디 있는가?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7/09 [08:0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

2. 그것은 오판과 착각이다

3. 세계무역전쟁이 세계대공황 불러온다

4. 예고된 세계석유위기

5. 생존방도가 여기 있다

 

 

1.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

 

2018년 6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일자리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이례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를 두고 한국 언론매체들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경제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된 책임을 물은 문책성 인사조치라고 논평하였다. 문책성 인사조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번 인사조치는 “국민들께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성과를 속도감 있게 내자는 취지가 강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가 말한, “국민들께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성과”라는 것은 민생경제가 발전되는 성과라는 뜻이므로, 6.26 인사조치에 민생경제를 발전시키려는 강한 취지가 담겼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달리 민생경제발전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2017년 12월 27일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 제1차 회의 및 경제관계장관회의가 청와대에서 진행되었을 때,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2018년도 경제정책기조를 일자리중심경제와 공정경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라고 요점적으로 명시한 바 있었는데, 당시 그런 경제정책기조를 발표하게 된 것으로 하여 고무된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내년(2018년을 뜻함-옮긴이)에는 거시경제지표도 좋을 뿐 아니라,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질도 나아지는 해가 될 것”이고, “소득주도성장, 사람중심경제가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국민이 공감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고 하면서 기대와 희망을 표시하였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7년 12월 27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국민경제자문회의 제1차 회의 및 경제관계장관회의 장면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소득주도성장, 사람중심경제가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국민들이 공감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고,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은 2018년도 경제정책기조를 "일자리중심경제와 공정경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라고 요점적으로 명시하였다.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가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파탄에서 건지려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출발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새로운 경제정책은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근본문제는 손대지 않고 임시방편들만 제시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7년 12월 27일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경제정책 4대 기조로 제시하였던 일자리중심경제와 공정경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은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라는 새 정책의 중심개념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시절인 2017년 4월 12일 기자회견에서 “사람에게 투자해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살리는 사람중심의 경제성장구조로 바꾸겠다”는 선거공약을 내걸었는데, 집권 이후 그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사람중심경제’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사람중심경제’에서 사람이라는 개념은 사람 일반이 아니라 근로대중을 뜻하므로, ‘사람중심경제’는 근로대중중심경제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중심경제’라는 새 정책에는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우선적으로, 중점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뜻이 담겼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사정을 살펴보면,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는 고용을 증대시키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실업자와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한다는 내용으로 요약되는데, 그 실행방도는 다음과 같다. 

 

(1) 중소상공인과 영세업자에게 일자리안정지원자금을 제공하여, 고용을 증대시킨다.

(2) 고용을 증대시킨 기업체에게 일정한 비율로 세금공제혜택을 주어 고용증대를 유도한다. 

(3)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기업체에게 법인세 공제액을 확대하여, 비정규직축소를 유도한다.

(4) 근로소득증대에 대한 세금공제를 확대하여, 근로대중의 납세부담을 덜어준다. 

(5) 실업급여지급액을 50%에서 60%로 올리고, 지급기간도 8개월에서 9개월로 연장하여 실업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한다.

(6) 저소득층 청년과 신혼부부에게 임대주택 10,000채를 공급하여, 근로대중의 주거생활을 안정시킨다.

 

이처럼 ‘사람중심경제’가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파국에서 건지려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출발한 것은 분명하지만, 위에 열거한 실행방도들을 보면 임시방편들만 제시되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만일 문재인 정부가 위에 열거한 실행방도들만 추진한다면,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파국에서 건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민생경제는 ‘극약처방’ 이외에는 백약이 무효일 만큼 파탄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적인 조치를 단행하지 않으면,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살릴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민생경제파탄은 일시적으로 침체하였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회생하는 불황이 아니라, 1962년부터 지금까지 56년 동안 끊임없이 누적되어온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일촉즉발지경으로 격화된 파국적 결과다. 이런 근본문제를 파헤쳐야 ‘사람중심경제’를 일으켜 세울 ‘극약처방’을 모색할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한국 경제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생각에는 이르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파국을 모면할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런데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덧쌓이기 시작한 시점을 왜 1962년으로 특정하였을까? 그것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1962년부터 1966년까지 5년 동안 수출액을 1억1,750만 달러로 늘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한 때가 1962년 1월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근 3년이 지난 1964년 12월 1일 박정희는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봐라, 하면 되지 않느냐.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하면서 감격하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한 11월 30일을 ‘무역의 날’로 제정하였으며, 정부, 여당, 기업체, 금융기관, 종합상사, 경제연구기관의 대표들이 100명 이상 참석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달 몸소 주재하였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수출에 총력을 집중함으로써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를 확립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정권은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근로대중에게 고통과 불행과 궁핍을 강요하는 착취체제라는 사실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들의 눈에는 근로대중이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성장을 위해 쓰다가 내버리는 소모품으로 보였을 뿐이다. 박정희식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는 수천만 근로대중을 소모품처럼 착취하면서 고속팽창의 길을 달려왔다. ‘압축성장’이라고 부르는 경제성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근로대중을 가혹한 착취로 내몰아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고착시켰다는 점에서,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압축성장’에는 질적 발전은 없었고 오직 양적 팽창만 있었다.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압축성장’을 보여주는 각종 통계자료들은 넘쳐나지만, 그 ‘압축성장’ 뒤에서 소모품처럼 착취당해온 근로대중의 삶과 투쟁은 억압과 외면의 그늘 속에 가려졌다. 한국의 근로대중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확립하였고, 그 이후 역대 정권들이 계승해온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압축성장’ 뒤에서 고통과 불행과 궁핍으로 신음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에 맞서 싸우다 저항의 불꽃으로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삶과 투쟁,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고귀한 목숨을 바친 94명 노동해방열사들의 투쟁 속에 수천만 근로대중이 자주적 삶을 쟁취하기 위해 흘린 피눈물이 진하게 응축되었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95년 11월 13일 서울에서 개봉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전태일 열사가 분신산화하는 장면이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마지막 순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절규하면서 22년의 짧은 생을 끝마쳤다. 그의 장렬한 분신투쟁은 박정희식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강요한 고통과 불행과 궁핍 속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던 근로대중을 투쟁의 길로 이끌었다. 전태일 열사의 뒤를 따라 고귀한 목숨을 바친 94명 노동해방열사들의 투쟁 속에 한국의 수천만 근로대중이 자주적인 삶을 쟁취하기 위해 흘린 피눈물이 진하게 응축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도 맹신자들과 문외한들은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로 ‘압축성장’을 실현한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찬양하였다. 1997년 동아시아 자유시장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간 외환위기 속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수명을 다했고, ‘압축성장’의 허상은 깨졌다. 허상이 깨지자, 그 뒤에 오랜 세월 가려졌던 실상이 드러났다. 절대다수 근로대중을 가혹한 착취로 내몰아 빈부격차를 극대화시킨 고통과 불행과 공핍의 실상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정권 이후 그 어느 정권도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와 근로대중의 민생경제가 양립할 수 없다는 진리, 한국의 사회경제사 50년이 실증해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사람중심경제’를 천명한 문재인 정부도 예외로 되지 않는다. 2017년 12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54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전체 중소기업 354만 개 중 수출에 참여하는 기업은 9만4,000개로 2.7%에 불과한데, 수출을 통해 기업을 키우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중소, 중견기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하면서 “수출을 통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도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2017년 12월 5일 ‘무역의 날’ 기념식 축사에서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를 역설하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그로부터 22일이 지난 2017년 12월 27일 청와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제1차 회의를 주재하면서 ‘사람중심경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피력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중심경제’와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양립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2. 그것은 오판과 착각이다

 

2018년 6월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도 한국의 연간수출액은 5,739억 달러이고, 세계수출시장 점유율은 역대 최고 수준인 3.6%에 이르렀으며, 세계수출순위는 6위로 올라섰다. 이런 ‘눈부신 경제성장’을 보고, 문재인 정부는 기뻐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기쁨과 긍지 대신에 실망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박정희식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고도로 성장할수록 문재인식 사람중심경제를 살릴 방도가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2017년도에 한국의 수출총액은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지만, 한국의 민생경제발전수준을 말해주는 취업자 증가폭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그에 따라 근로대중의 소득지표도 크게 악화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제관리들과 경제분석가들은 2017년에 고용지표와 근로소득지표가 급격히 떨어진 원인을 놓고 설왕설래하였지만, 그들은 민생경제파탄의 근본원인이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면서, ‘정책실패’라는 아리송한 말만 늘어놓았다. 근로대중의 민생경제파탄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실패를 근본원인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근본원인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명백하게도,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근본원인이고, 근로대중의 민생경제파탄은 파국적 결과다. 인과관계를 바로 알아야 해결방도를 찾을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사람중심경제’를 천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정희 독재정권이 ‘수출입국’을 천명하였던 1962년부터 장장 반세기 동안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는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체계적으로 파탄시켜왔다.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성장역사는 근로대중의 민생경제가 황폐화되어온 역사다. 아래에 제시된 통계자료들이 그런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8년 3월 초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연간소득이 5,047만 원 이상인 한국의 상위계층 10%의 소득집중도는 1995년까지만 해도 29.2%밖에 되지 않았고, 2003년까지는 30%대에 머물렀는데, 2004년에 40.71%로 급상승한 이후 해마다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2008년 43.45%, 2012년 44.9%, 2014년 48.7%, 2016년 49.19%를 기록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소득’이라는 개념은 근로소득만이 아니라 금융소득과 사업소득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인데, 한국의 10% 상위계층은 근로소득이 아니라 사업소득과 금융소득 같은 불로소득으로 막대한 재부를 거머쥐었고, 그로써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발생한 것이다. <사진 3>   

 

▲ <사진 3> 위쪽 사진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빈민촌의 모습이고, 아래쪽 사진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 타워 팰리스의 모습이다. 허물어져가는 구룡마을은 고통과 불행과 궁핍 속에서 신음하는 수백만 빈곤층의 현실을 보여주고, 첨단경비체계와 수영장, 골프연습장와 주차장을 두루 갖춘 호화로운 타워 팰리스는 부귀와 사치와 안락에 빠진 극소수 부유층의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고착되었다. 최저임금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으며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266만4,000 명에 이르고, 실업자는 453만8,000 명에 이른다. 이것은 소득분배 불평등이 악화될대로 악화되어 사회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위험선에 접근하였음을 의미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예컨대 프랑스나 스웨덴 같은 서유럽 나라들의 경우, 상위계층 10%의 소득집중도는 30% 안팎에 머무는데, 한국의 경우 상위계층 10%의 소득집중도는 50%에 이른 반면, 하위계층 50%의 소득집중도는 해마다 급격히 낮아졌고, 올해는 전 세계에서 소득분배 불평등이 가장 악화된 미국이나 중국보다 더 나쁜 사상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한국 통계청이 2017년 12월 17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노동계급 중에서 최저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 다시 말해서 가장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2003년에는 4.8% 수준이었는데, 2007년 이후에는 10~12%로 급증했고, 2016년에는 13.6%로 더 상승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의 전체 노동계급 1,962만7,000 명 가운데 266만4,000 명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청소년노동자, 노인노동자, 여성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가 급증하였으니, 가장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급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2017년 1월 12일 한국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실상 실업자’는 2016년 말을 기준으로 453만8,000 명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수치는 문재인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실업자’보다 4.5배나 많은 것인데, 특히 청년실업사태가 매우 심각해져서 청년 4명 가운데 1명이 사실상 실업자다.  

 

한국 통계청의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분배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되는 지니계수(Gini coefficient)는 한국의 경우 2015년에 0.396이었는데, 2016년에는 0.402로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유엔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분배 불평등이 악화되어 사회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지니계수는 0.4인데, 한국은 2016년에 이미 위험선을 넘어선 것이다. 

 

위에 열거한 사회경제지표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문재인 정부가 ‘사람중심경제’를 일으켜 세울 방도는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와 결별하는 ‘극약처방’밖에 없는데, 불행하게도 문재인 정부는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성장하면 ‘사람중심경제’도 성장할 것이라는 오판과 착각에 빠져있다.  

 

 

3. 세계무역전쟁이 세계대공황 불러온다

 

문재인 정부가 오판과 착각에서 벗어나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와 결별하고 ‘사람중심경제’를 일으켜 세울 혁명적인 조치를 단행해도, 때는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세계무역전쟁이 한국 경제를 파국으로 끌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민생경제파탄으로 비틀거리는 한국 경제를 파국으로 끌어가는 세계무역전쟁은 어떤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89년 전인 1929년 10월 29일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로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세계대공황으로 사경에 빠진 미국은 무역전쟁을 도발하는 것으로 생존방도를 찾아보려고 몸부림쳤다. 1930년 6월 17일 미국 연방의회는 수입품목에 대한 관세를 대폭 증액시킨 스뭇-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채택하여 세계무역전쟁을 도발하였다. 스뭇-홀리 관세법은 미국의 농업과 제조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20,000여 개에 이르는 수입품목에 대해 52.8%의 관세를 부과한 조치였다. 미국이 관세증액조치를 감행하자, 당시 미국의 최대 교역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미국산 수출품에 대한 관세보복조치를 단행하였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세계무역전쟁은 그렇게 서로 뒤엉키면서 자유시장경제를 대파국으로 몰아갔다.

 

1930년대에 발생한 세계대공황과 세계무역전쟁으로 세계교역량은 63% 감소되었고, 세계산업생산은 40% 감소되었으며, 선진공업국들의 실업률은 25~33%로 치솟았다. 세계대공황과 세계무역전쟁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지만, 보호무역주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공화당 대선후보 허벗 후버(Herbert C. Hoover)가 1929년 3월 4일 제31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였을 때, 세계무역전쟁은 예고되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31년 미국 뉴욕에 있는 실업자를 위한 무료급식소 앞에서 구호음식을 받기 위해 뉴욕시민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장면이다. 1929년 3월 4일 보호무역주의 신봉자인 공화당 대선후보 허벗 후버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을 때, 세계무역전쟁은 이미 예고되었고, 1929년 10월 29일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되었을 때 세계대공황은 시작되었다. 당시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로 쫓겨난 미국의 빈민들은 길거리에서 구호음식으로 연명하면서 세계대공황의 혹독한 시련을 견뎌야 하였다. 89년 전 세계무역전쟁과 세계대공황이 거의 동시에 폭발하였던 공포의 씨나리오가 지금 재연되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보호무역주의 신봉자인 허벗 후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때로부터 89년이 흐른 2017년 1월 20일, 또 다른 보호무역주의 신봉자가 백악관의 주인으로 등장하였으니, 그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다. 후버의 계승자 트럼프가 도발한 세계무역전쟁은 세계대공황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될 것이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2018년 6월 10일에 발표한 자료에서 오늘 세계무역전쟁이 세계대공황을 촉발시킬 것으로 우려하였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룩먼(Paul R. Krugman)은 2018년 6월 27일 제주도에서 진행된 특별강연에 출연하여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무역전쟁은 70년에 걸쳐 형성된 자유무역체제를 붕괴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무역전쟁으로 관세가 40%로 치솟고, 세계교역량이 67% 감소하고, 대량실업사태가 일어나, 세계무역체제는 앞으로 5~10년 안에 1950년대 수준으로 퇴행할 것으로 우려하였다. 

 

뉴욕과 런던에 각각 본사를 둔 국제신용평가기관 핏취 그룹(Fitch Group)이 2018년 7월 3일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무역전쟁으로 세계자유시장경제는 2조 달러(2,232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손실을 입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2017년도 한국의 수출총액이 사상 최대인 5,739억 달러에 이르러 세계수출순위 6위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한국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하였던 2018년 6월 1일은 공교롭게도 세계무역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그 날 0시부터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연합, 캐나다, 멕시코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철강제품에 25%의 관세를, 알루미늄제품에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는 조치를 발효시킨 것이다. 이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게 도발한 무역전쟁을 미국의 주요동맹국들을 상대로 하는 세계무역전쟁으로 확대하였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8년 5월 8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제철산업부문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서명한, 철강제품 및 알루미늄제품에 대한 수입관세를 증액한다는 대통령 행정명령서를 들어보이는 장면이다. 2018년 6월 1일 0시,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연합, 캐나다, 멕시코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철강제품에 25%의 관세를, 알루미늄제품에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는 조치를 발효시켰다. 그로써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게 도발한 무역전쟁을 미국의 주요동맹국들을 상대로 하는 세계무역전쟁으로 확대하였다. 세계자유시장경제를 대파국으로 몰아갈 세계무역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2018년 6월 15일 트럼프 대통령은 500억 달러에 이르는 중국산 수출품목에 25%의 추가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발표하였다. 평시에 중국과 미국의 교역관세는 2% 미만인데,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무려 25%로 대폭 증액시킨 것이다. 관세증액조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만일 중국이 미국의 관세증액조치에 관세보복으로 맞서면 중국산 수출품목에 대한 미국의 관세를 더 증가시킬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노리는 관세증액의 공격목표가 대중무역적자를 줄여 미국의 시장을 보호하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국이 추진하는 ‘중국제조 2025(Made in China 2025)’라는 첨단산업진흥책을 봉쇄하여 중국의 첨단기술획득을 가로막고, 세계원자재시장에 대한 중국의 통제기도를 가로막는 것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2018년 6월 19일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미국과 세계의 기술, 지식재산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경제침략’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들어있다. 

 

‘중국제조 2025’라고 불리는 중국의 첨단산업진흥책은 항공우주산업, 인공지능산업, 로봇산업, 생명공학 등 첨단주력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정책인데, 트럼프 행정부는 그 정책을 가로막아 세계첨단산업분야에서 앞서나가려는 중국을 저지하는 기술패권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공격과 반격의 악순환은 시작되었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적국들을 제재할 때 들이대는 ‘긴급국제경제권한법(IEEPA)’을 중국에게 들이대는 정면공격기회를 노리고 있다. 기술강국으로 올라서려는 중국을 대적국제재조치로 가로막으려는 미국의 공격시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공격하고 중국이 반격하는 충돌의 악순환 속에서 시시각각 격화되는 세계무역전쟁은 세계대공황을 촉발시킬 것이다. 

 

2018년 6월 27일 제주도에서 진행된 특별강연에 출연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룩먼은 세계무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대국들의 교역량 감소폭은 15~20%에 머물 것이지만, 한국의 교역량 감소폭은 30~40%로 치솟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한국의 교역량이 30~40% 급감하면, 한국 경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 

 

 

4. 세계석유위기도 다가온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17년 5월 10일 산하 특수정보기관인 코리아임무쎈터(Korea Mission Center)를 설립하였고, 거의 같은 시기에 산하 특수정보기관인 이란임무쎈터(Iran Mission Center)도 설립하였다. 

 

코리아임무쎈터 책임자로 임명된  앤드루 김(김성현)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과 아시아태평양지역 책임자(차관보급)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마익 팜페오(Mike R. Pompeo) 국무장관이 중앙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때부터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비공개 실무작업을 전담하였으며, 2018년 7월 6일부터 7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조미정상회담 후속회담에도 팜페오 국무장관의 수행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배석하였다. 

 

그런데 이란임무쎈터의 책임자로 임명된 마이클 댄드리아(Michael D’Andrea)는 오랜 세월 중앙정보국의 비밀군사작전을 지휘해오며 ‘어둠의 왕자(Dark Prince)’라는 악명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오싸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암살작전을 지휘하였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등에서 국제테러범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 수 천 명을 살해한 무인항공기공습을 지휘하였다.    

 

앤드루 김과 마이클 댄드리아의 대조적인 모습은,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을 상대로 대화와 협상을 추구하지만, 이란에게는 비밀군사작전과 무력침공을 자행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에게 위험한 도발을 감행하였다. 

 

2018년 6월 28일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라고 불리는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서 탈퇴한 것을 구실로 내세우며 대이란제재조치를 오는 8월 6일부터 강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제재조치에 따르면,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는 원유수입국들은 오는 11월 4일부터 이란산 원유를 수입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란의 원유수출을 봉쇄하여 이란을 압살하려는 도발책동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8년 5월 8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미국의 이란 핵합의 탈퇴를 확정한 문서를 취재기자들에게 들어보이는 장면이다. 2018년 6월 28일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은 이란에 대한 초강력한 제재조치를 오는 8월 6일부터 강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제재조치에 따르면, 한국은 오는 11월 4일부터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지 못하게 된다. 2018년 7월 4일 이란혁명수비군 사령관은 미국이 이란의 원유수출을 가로막으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언명하였다. 날로 격화되고 있는 미국과 이란의 정면대결은 세계석유위기를 불러올 것이고, 그 위기 속에서 원유공급이 끊기면 한국은 살아남기 힘들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하지만 이란은 그런 협박과 강압에 굴복할 나라가 아니다. 2018년 7월 4일 모하마드 알리 자파리(Mohammad Ali Jafari) 이란혁명수비군 사령관은 미국이 이란의 원유수출을 가로막으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호르무즈해협(Strait of Hormuz)을 봉쇄하겠다고 언명하였다. 페르시아만과 오만만 사이에 있는, 폭이 54km밖에 되지 않는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해상수송원유의 약 35%가 통과하는 전략요충지다. 이란이 그 해협을 봉쇄하면, 국제유가가 폭등하면서 세계석유위기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한국은 미국, 중국, 인도, 일본에 이어 세계 순위 5위에 오른 원유수입국이다. 한국석유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한국은 11억1,817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중동산 원유수입량은 81.7%였다. 이것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날, 한국의 원유수입도 사실상 중단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한국석유공사가 9개 기지들에 분산, 비축해둔 1억3,320만 배럴의 원유를 아껴 쓴다고 해도, 108일(3개월 19일)밖에 버티지 못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가 유류공급을 끊어버리면, 한국의 산업 전체가 마비될 것이고, 자동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전기불빛이 꺼진 어둠 속에 잠길 것이다. 

 

 

5. 생존방도가 여기 있다

 

미증유의 대파국을 불러일으킬 세계무역전쟁, 세계대공황, 세계석유위기는 한국에게 3대 재앙이다. 3대 재앙들 가운데 하나만 닥쳐와도 한국은 견디지 못하는데, 불행하게도 3대 재앙이 거의 같은 시기에 대폭발을 일으키는 사상 최악의 시나리오가 예고된 것이다. 

 

한국에 3대 재앙에 닥쳐올 때, 생존방도는 없는 것일까? ‘철통같은 한미동맹’을 입으로만 되뇌는 미국은 한국이 3대 재앙으로 사경에 빠져도 외면할 것이고, 세계무역전쟁으로 허덕이는 중국에게 도움을 기대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한국이 3대 재앙에 휘말려 사경에 빠지면, 누가 도와줄 것인가? 세계무역전쟁, 세계대공황, 세계석유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회주의자립경제를 발전시키는 분단선 이북의 동족밖에 없다. 장차 통일공화국에서 함께 살아갈 동족만이 도움을 줄 것이다. 동족의 피는 물보다 진하고, 더 뜨겁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8천만 민족에게 안겨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야말로 동족이 사경에 빠졌을 때 도와줄 희망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는 역사적인 문서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에 서명하고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다. 한국이 세계무역전쟁, 세계대공황, 세계석유위기라는 3대 재앙에 휘말려 사경에 빠지면, 누가 도와줄 것인가? 3대 재앙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회주의자립경제를 발전시키는 분단선 이북의 동족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괴물' 같은 한미동맹을 믿지 말고, 미국의 대조선제재를 무시해버리고, 우리 민족끼리 판문점 선언을 이행함으로써 임박한 대파국에 대비할 생존방도를 모색하는 것밖에 없으며, 조국통일이 8천만 민족의 생명선이라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판문점 선언 제1항에는 이렇게 명기되었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나갈 것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온 겨레의 한결같은 소망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절박한 요구이다.”    

 

또한 판문점 선언 제1항 6조에는 이렇게 명기되었다.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10.4 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나가며,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여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들을 취해나가기로 하였다.”

 

판문점 선언에는 그런 희망의 약속들이 명기되었지만, 미국이 대조선경제제재를 풀지 않으면, 남측은 사경에 빠지는 경우 북측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사경에서 벗어날 민족경제의 공동번영도 추진할 수도 없다. 한미동맹이라는 ‘괴물’이 한국의 생존을 가로막는 불의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 인도, 싱가폴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임박한 대파국에 대비할 생존방도를 모색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다른 나라들에 기대를 거는 것은 헛수고다. 문재인 정부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괴물’ 같은 한미동맹을 믿지 말고, 미국의 대조선제재를 무시해버리고, 우리 민족끼리 판문점 선언을 이행함으로써 임박한 대파국에 대비할 생존방도를 모색하는 것밖에 없으며, 조국통일이 8천만 민족의 생명선이라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판문점 선언에는 “당면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가을 평양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기록되었지만, 가을이 오기 전에라도 평양을 방문하여 생존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세계무역전쟁, 세계대공황, 세계석유위기라는 3대 재앙이 한국을 집어삼킬 기세로 닥쳐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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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에 모인 2만 여성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전혜원 기자 one@vop.co.kr
발행 2018-07-07 19:13:36
수정 2018-07-07 19: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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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 3차 시위
혜화역 3차 시위ⓒ민중의소리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경찰의 성차별적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3차 대규모 시위가 7일 서울 혜화역에서 열렸다.

포털 사이트 다음 카페 ‘불편한 용기’ 측은 이날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혜화역 1번 출구 앞에서 시위를 열었다. 28도를 웃도는 더위에도 시위 참가자들은 아스팔트 거리에 앉아 ‘성차별 수사를 중단하라’ ‘여성유죄 남성무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꾼다’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성차별적 수사를 규탄했다.

오후 4시 기준 2만명(경찰 추산 1만7천명) 여성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지난달 열린 1차 시위에는 주최 측 추산 1만2000여명(경찰 추산 1만여명), 2차 시위에는 3만명(경찰 추산 1만5천여명)이 참가했다.

혜화역 시위
혜화역 시위ⓒ뉴시스

시위 참가자들은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는 구호와 함께 불법촬영에 대한 경찰의 성차별적 수사를 규탄했다. 또 “4만5천명의 여성들이 불법촬영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는 여전히 안이한 대응을 보이고 있다”며 “불법촬영 문제에 실질적인 대책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시위에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참여자들은 “페미니즘 공약을 걸어 당선된 문 대통령이 여성의 문제의식을 축소하려 한다”며 “우리의 요구를 무시하는 정부의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외쳤다. 문 대통령은 이달 3일 국무회의에서 홍대 몰카 사건과 관련해 “편파 수사는 맞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성차별 없는 수사와 함께 불법촬영에 대한 엄정한 수사, 몰래카메라 판매와 유통 규제 등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검찰 및 경찰 내 여성의 비율을 늘려 공정한 수사를 위한 토대 마련을 촉구했다.

2차 시위에 이어 이날 열린 3차 시위에도 삭발식이 진행됐다. 시위 참가자 가운데 사전 신청을 받은 여성들이 무대에 나와 머리카락을 잘랐다. 주최 측은 “전 세계 시위에서 삭발은 강력한 의지와 물려서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담는다”며 “우리는 행동으로 우리의 의지를 보이려 한다”고 강조했다.

혜화역 3차 시위
혜화역 3차 시위ⓒ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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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반국가적 범죄집단’ 기무사를 해체하라

[데스크 칼럼] 경악할만한 군부내 반국가세력들의 준동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절정에 이르던 2016년 11월 18일 추미애 민주당대표는 “박근혜정권이 ‘박사모’를 시켜 물리적 충돌을 준비하고...계엄령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정보가 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 때만 해도 뜬금없는 소리로 치부되었던 추대표의 이 경고는 최근 소름이 돋을 만할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이 지난 7월 5일 공개한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2017. 3 작성) 문건에는 계엄준비실행 계획이 구체적으로 들어 있다. 광화문과 여의도 등 서울 시내에만 탱크 200대, 장갑차 550대, 무장병력 4,800명, 특전사 1,400명을 투입하는 등 촛불집회에 대한 치밀한 무력진압계획을 세웠다.

▲ 군인권센터가 공개한 계엄발령 시 서울 시내 병력 추가투입 배치도[사진 : 뉴시스]


문건은 계엄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을 고려,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하고, ‘폭력사태’ 등을 계기로 ‘경비계엄’을 거쳐 전국적 ‘비상계엄’으로 확대하여 국가를 완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세부 시나리오까지 담고 있다. 
장기간에 걸쳐 병력 동원과 무력진압을 계획하고, 국회의 반발에 대한 대응, 야당 정치인사들에 대한 조치, 이른 바 ‘주동자’ 색출과 체포, 언론통제와 장악에 이르기까지 단계마다 필요한 조치와 행동계획을 세부적으로 작성했다. 평화적 시위를 무력으로 유혈진압하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 계엄을 확대하는 것까지 전두환 신군부의 1212쿠데타와 비상계엄확대, 5.18광주학살, 군정 실시로 이어지는 시나리오와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 기무사령관이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을 앞둔 2017년 3월 초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수행방안'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문서.(제공=이철희 의원실.뉴시스)

경악스러운 것은 박근혜정권과 기무사의 ‘계엄령준비계획’이 오래전부터 정권의 위기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군부장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엄준비실행계획문건을 작성한 기무사의 사령관인 조현천은 ‘알자회’의 핵심멤버로 알려져 있다. 알자회는 1212쿠데타를 주도한 ‘하나회’와 같은 군부내 육사출신 사조직이다. 92년 적발되어 해체된 것으로 알려진 ‘알자회’는 최순실게이트로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 2014년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을 전후로 박지만 육사 동기 그룹이 경질 좌천되면서, 최순실 라인을 통해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등용된다. 
2016년 12월 28일 세계일보가 입수 보도한 ‘최순실을 활용한 군인사개입 보고서에 따르면 추명우(육사 41기 알자회, 국정원 8국장)는 최순실과 친분이 있는 누나를 이용, 조현천을 기무사령관으로 추천했다. 기무사령관으로 내정된 조현천은 군 인사정보를 추명호에게 제공했고, 추 국장은 다시 청와대 우병우와 안봉근에게 보고했다. 우병우는 군 인사 정보를 통해 알자회 회원들의 장성 진급에 관여했다. 추명우는 다 아는 것처럼 국정원특활비 제공, 블랙리스트작성, 촛불시위동향보고 등 우병우와 연계된 국정농단관련 인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2014년 이후 조현천 기무사령관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임호영 대장을 필두로 항작사령관 장경석 중장, 특전사령관 조종설 중장,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장경수 소장, 12사단장 성일 소장, 전투지휘훈련(BCTP) 단장 송지호 준장, 논산훈련소 참모장 김덕영 준장 등 알자회 멤버들이 군부의 요직을 독차지했다.

계엄령의 주무부서는 합동참모본부다. 그런데 계엄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무사가 계엄령 실행계획, 계엄사령부 직제구성, 실행준비까지 담당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합참의장이 육사출신이 아닌 이순진 대장(3사 14기)이었기 때문이다. 계엄령발동 계획 수립과 병력 동원에 관계된 사람에서 해군과 공군을 철저히 배제하고 모두 육사 출신으로 채운 것이다.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우병우 등 청와대와 연결된 기무사령관을 중심으로 계엄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계엄준비계획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정권 핵심부에 의해 기획된 ‘친위쿠데타음모’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기무사의 ‘사악한 국가범죄’는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0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방산비리로 구속된 이규태 일광공영회장의 배후에는 기무사가 있었다. 당시 이규태회장이 갖고 있었던 군관련자료는 콘테이너 박스에 1톤이 넘었는데 군 관련 비밀문서가 수두룩했다. 이 비밀문서들이 미국과 러시아 등 무기수입국에 흘러 들어갔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사상최대의 방산비리인 이 사건은 기무사 실무자 두 명을 구속한 것으로 끝냈다. 이규태회장은 자신이 운영하던 연예기획사 사장에 전직 기무사령관을 앉혀 보은했다.

2012년 대선댓글공작을 시행한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도 기무사의 주도로 창설했다. 당시 기무사는 댓글공작에 직접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심지어 기무사는 댓글공작TF도 감청했다. 당시 댓글공작을 지시한 국방장관이었던 김관진은 사법처리에서 제외되었고, 사이버사령관 옥도경은 집행유예 연제욱은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지난해 5월 국정기획위(인수위)에 대한 국방부 보고에서는 추가로 반입된 사드4기를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는데 당시에도 기무사와 알자회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무성했다. 
최근에는 기무사가 세월호 참사 당일부터 선사인 청해진해운과 연락하며 사건에 관여한 것이 드러났다. 국방부 사이버 댓글사건 조사 TF는 지난 2일 기무사가 60명 규모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여론 형성 등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고 조사결과를 밝힌 바 있다. 댓글조사TF는 기무사가 참모장(육군 소장) 중심으로 사령부 및 현장 기무부대원 등 60명으로 TF를 꾸려 유가족 사찰, 탐색구조·인양통제, ‘불순세력’ 관리 등을 했다고 보고했다.

기무사의 원형은 1948년 5월 조선경비대 정보처 산하 특별조사과다. 당시 주한미군 CIC(방첩부대)917부대는 각 연대 정보담당 장교 33명을 선발 교육하여 특별조사과를 창설했다. 이후 특무부대, 방첩부대, 보안사령부, 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꾸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무사 5층 복도에는 역대 기무사령관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배후인 백인엽(2대특무대장), 김창룡(5대특무대장)도 버젓이 걸려있다. 1998년 기무사는 김창룡을 대전현충원국립묘지에 안장시킨다. 전두환, 노태우가 걸려 있음은 물론이다. 반면 김재규는 없다.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이유에서다. 부부 사기사건으로 유명한 장영자의 남편 이철희(11대사령관,방첩대장)도 걸려있다. 이 사진들만 보더라도 기무사가 우리 역사에서 얼마나 사악한 반국가적 범죄의 온상이었는지 한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명박 박근혜정권 10여 년 간 정치권과 기업에 진출한 기무사의 약진은 대단히 경이적이다. 군 내부에서도 4000명이 넘는 거대조직에다가 장교의 동향을 관찰하는 기무사의 권위는 무소불위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정권의 친위대로서 온갖 사악한 반국가적 범죄행위를 일삼는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찰과 감시, 진압해야 할 적이다. 퇴직 후에는 정치권과 방산업체, 군납업체 등 공기업, 예비군과 민방위조직, 보수단체의 상층을 타고 앉아 현역과 결탁하여 거대한 정보와 이권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정권이 바뀌고 사악한 범죄행위가 드러날 때마다 요란스럽게 ‘기무사개혁’을 떠들었지만 그들은 거대한 힘으로 이를 좌절시켜왔다. 사실 보안사령부를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꾼 것도 1990년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정계와 종교계, 재야 등 민간인 1300명을 불법사찰한 ‘청명계획’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는 기무사를 국방부 정보본부 산하로 통폐합하는 국방개혁안을 막강한 영향력으로 무산시킨 바 있다. 노무현 정부도 기무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기무사는 개혁안을 무력화하고 거꾸로 군 사이버사령부 창설안을 입안하여 조직 확장을 시도하였다. 이명박 정권 때는 사이버사령부를 창설, 기무사 세력 확장에 대한 부정적 여론 때문에 국방부에 그 기능을 형식상 양보했으나 기무사 출신과 ‘알자회’가 사실상 장악했다. 김대중정부 때 중단된 기무사령관 대통령 독대도 이때부터 부활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무사 개혁TF>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 TF에는 소강원 기무사참모장, 기무사 101부대장, 기무사 102부대장 등 현직 기무사 고위 간부 3명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소강원 참모장은 계엄령 검토 문건작성을 한 당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국방부는 처음에는 ‘계엄준비문건’에 대한 조사도 이 기무사 개혁 TF에 맡긴다고 했다가 국방부 검찰단이 한다고 말을 바꿨다. 조사도 국방부에서 하고 위법성에 따른 수사 여부도 국방부에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 문건이 당시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셀프조사’를 한다? 지금도 알자회의 장악 아래 있는 국방부가?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두말할 것 없이 기무사는 당장 없애야 할 사악한 반국가적 범죄집단이다. 의문의 여지도 없이 해체해야 한다. 그 어떤 대안도 기무사 해체 위에서 찾아야 한다. 군의 방첩기능이 필요하다면 국방부 정보본부가 담당하면 될 일이다. 
나아가 군부 내 독버섯처럼 또아리를 튼 알자회를 비롯한 ‘특권 사조직’을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 무엇을 하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지난 수십 년의 역사가 오롯이 증명한다. 해체하고 도려내지 않으면 그들은 악랄한 생존력으로 부활할 것이다. 
계엄준비문건이 우리에게 안겨 주는 살 떨리는 교훈은 기무사가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계엄령과 군부쿠데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기무사 해체와 군부숙정, 그 출발점은 당연히 철저한 조사와 엄중한 처벌이다. 국방부와 기무사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운 수사기관에서 즉각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 우리는 국민과 함께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사악한 반국가적 범죄집단 기무사와 알자회의 운명을!

김장호 편집국장  jangkim2121@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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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철의 음악카페] 김희숙 여사님 추모특집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장준하
 
여인철 | 2018-07-06 09:37: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 부인이신 김희숙 여사님 추모특집

(추모특집이라 글이 김. 긴글 읽는거나 노래 듣는거 취미없는 분들은 여기서 바로 pass! 바람 ㅎ)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장준하

얼마 전 잘 모르는 사람이 “음악 잘 듣고 있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와 민망하기도, 미안하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인철의 음악카페]라는 코너를 모 매체에서 만들어줬는데 시간에 쫓기다보니 1주일에 한번, 늦어도 2주일에 한번은 올리겠다는 언질도 못지키고 가뭄에 콩 나듯 올리는 곡들을 “잘 듣고 있다” 하니  황송했지요..

“음악 좀 올려달라”는 질타의 다른 말로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 그가 정말 잘 듣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 후론 웬만하면 가급적 시간을 내서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부터 우선 이 코너를 이용해 나에게 힐링이 되는 음악을 좀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벌어질 치열한 전투(?)에 대비해서이기도 하고, 이틀 전 세상을 떠나신 장준하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대접을 보며 화가 좀 나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에겐 정말 힐링이 필요합니다. 제가 누구 다른 사람에게 힐링을 선사할 수 없을 만큼.

1.
그래서 우선 첫 번째 힐링곡으로 김희숙 여사께서 이 지구별을 떠나신 것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모짜르트의 진혼곡(requiem) 중 ‘Lacrimosa(눈물의 날)’을 신청합니다...^^

요 며칠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의 부인의 별세를 대하는 우리 사회에 슬픔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장준하 선생 당신이 아닌 그분의 부인으로서 별다른 사회활동 없이 사시다 돌아가셨다 해도, 백기완 선생의 일갈처럼 “장준하 선생만큼 ‘위대한’ 삶을 사시지는 못하셨지만, 그에 비길만큼 ‘거룩한’ 삶을 사신” 김 여사님을 그렇게 보내드리는 것은 김 여사님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을 생각해서도 도리가 아닙니다, 단연코.

이건 어쩌면 장준하 선생에 대한 대중의 배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내 마음 가는 대로 ‘진노의 날(Dies irae)’을 택할까 하다가 다중의 힐링을 위해 ‘눈물의 날(Lacrimosa)’을 선택했습니다.

아마 제가 이 곡을 들으며 눈물을 좀 흘리면 힐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s://youtu.be/8oESM64gU5M

2.
두 번째 힐링곡은 Over the rainbow(저 무지개 너머). 1939년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에 나오는 타이틀곡으로 쥬디 갈랜드(Judy Garland)가 불러서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명곡입니다.

오늘은 원가수의 노래보다는 에바 캐시디(Eva Cassidy)의 노래로 듣고 싶습니다.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는 그녀의 노래가 힐링 면으로는 훨씬 더 효과가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바 캐시디는 자기만의 특별한 스타일로 노래를 불렀는데 요절하고 나서야 명성을 얻은 불행한 가수입니다.

에바 캐시디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할 때가 올 것이니 오늘은 여기서 이만하고…

https://youtu.be/2rd8VktT8xY

“Some 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3.
세 번째 힐링곡은 사라 맥라클란(Sarah McLachlan)이 1997년에 발표한 ‘Angel(천사)’.

지상의 한 여의사(멕  라이언)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가 인간이 된 천사(니콜라스 케이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City of angel(천사의 도시)’ 에 OST 로 나오면서 더 유명해졌지요.

오늘은 사라의 품격있고 환상적인 라이브로…

https://youtu.be/i1GmxMTwUgs

3-2
(다음 곡은 jtbc 비긴어게인 2의 헝가리편에서 방영된, 박정현이 다뉴브 강가에서 부른 ‘Angel’로서, 여러분들께 찾아보시라고 하려다가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본인의 재량으로 서비스 하는거임. 음악 오래 듣기에 취미 없는 분들은 불평하지 말고 패쑤! 하시길 바람. 
단, 명곡 놓치는 불행은 책임 안 짐 ㅎㅎ)

https://www.youtube.com/watch?v=2_epUh-zh10

“Let me be empty and weightless, and maybe  I'll find some peace tonight”
근데 제가 그게 잘 안 돼요… ᅲ 그러나 오늘 밤은 그렇게 해볼게요…

“In the arms of an angel, fly away from here...
May you  find some comfort there...”
그래요… 천사의 품에 안긴듯 멀리 날아가 거기에서 안식을 좀 찾아보렵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며 듣다 보면 이따금 울컥할 때가 있는데,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치유가 되는듯합니다.

4.
마지막 네 번째 곡은 노르웨이 출신의 가수 시셀(Sissel) 이 부른 ‘Bred dina vida vingar(Spread your wide wings)(그대의 넓은 날개를 펼쳐라/주님의 날개)’

시셀(Sissel)의 청아한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힐링이 되는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절한 배우 장진영 CF 에 배경음악으로 나옴으로써 널리 알려진 곡이기도 합니다.

아래 올린 둘중에 하나 찍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둘다 썩 마음에 드는 동영상이 아닌지라… ᅲ

https://youtu.be/_19gMyVvw9s

https://youtu.be/B1bH1E0CJdY

오늘의 [여인철의 음악카페]는 저에 대한 힐링 겸 김희숙 여사님 별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의미를 담아 특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도 조금 치유가 됐습니다만, 이 노래를 들으신 분들도 힐링이 좀 되었으면 합니다.

첫 곡은 추모곡으로, 모짜르트의 진혼곡 중 마지막 곡인 ‘눈물의날’로 시작했습니다.

이어 김 여사께서 부디 “저 무지개 너머 저편 어딘가(Somewhere over the rainbow)”-하늘나라-로 가셨으니 “천사(Angel)”가 되셔서, 이미 천사가 되신 부군 장준하선생을 다시 만나 이승에서 채 펼치지 못하신 “큰 날개를 활짝 맘껏 펼쳐보시라(Spread your wide wings)”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김희숙 여사님, 부디 그곳에서 장준하 선생과 함께 행복하시길 빕니다.

2018. 7. 5
장준하부활시민연대
공동대표 여인철 再拜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3&table=music_cafe&ui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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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이촌동이 겪은 '참 치사한' 차별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장마·홍수 앞에서 한국인 차별한 일제

18.07.08 10:50l최종 업데이트 18.07.08 10:50l

 

 

일제강점기 하의 한국인들은 여름철 장마 때도 차별을 당했다. 특히 서민층인 경우에는, 노골적 민족 차별로 자연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도 있었다. 일본은 입으로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선전했지만, 재난피해로 큰돈을 써야 할 때는 한국인을 대놓고 박대했다. 이런 피해를 당한 대표적 지역이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이다. 

이촌동은 원효대교·한강철교·한강대교·동작대교 4개 대교가 강변북로와 만나는 곳이다.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도 여기 속한다. 이촌동과 맞닿은 위쪽은 용산이다.  

강변북로를 따라 원효대교에서부터 동작대교 구간을 달리다 보면, 중산층 아파트를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이렇지만, 일제강점기까지는 빈민가였다. 장마 피해가 유난히 심한 상습 침수 지대였기 때문이다.   
 

 1927년 지도에 실린 이촌동. 이 지도는 <정도 600년 서울지도>에 수록돼 있다. 붉은 글자는 이 기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  1927년 지도에 실린 이촌동. 이 지도는 <정도 600년 서울지도>에 수록돼 있다. 붉은 글자는 이 기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 <정도 600년 서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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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한자 이름이 이촌(二村)인 이유도 여기 있다. 이촌의 '이'는 처음엔 二(두 이)가 아니라 옮길 이(移)였다. 二가 移로 바뀐 것과 관련해 서원대학교 지리학과 송호열 교수의 <한국의 지명 변천>은 이렇게 말한다. 

 

"원래 이곳은 한강변 모래벌판으로 여름철에 홍수가 들면 강 가운데 섬마을(노들섬)에 살던 주민들은 강안(江岸, 강가 언덕)으로 옮겨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원래 지명은 이촌동(移村洞)이었는데, 나중에 한자가 바뀐 것이다."

장마 때면 옮겨 살아야 했다. 그래서 '옮길 이'를 써 이촌동이라 불렸던 이곳은 빈민가라는 이유로 일반 한국인보다 더 심한 차별을 당했다. 차별이 심했던 것은 인근에 용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1882년에 시민항쟁인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가 남대문 밖 용산에 주둔한 게 계기가 돼 훗날 일본군도 이곳에 주둔하게 됐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용산 땅 300여 만 평이 일본 군사기지로 조성됐다. 조선주둔군 사령부를 비롯한 대규모 군사시설이 이곳에 건설됐다. 

용산 일대에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된 사연
 

 일제 강점기 당시의 용산역
▲  일제 강점기 당시의 용산역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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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은 교통 면에서도 요지였다. 대한제국 멸망 6년 전인 1904년, 지금의 용산역이 세워졌다. 그랬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군부대와 철도역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이 용산 일대에 대거 거주하게 됐다. 

여의도와 한강 이북을 잇는 세 다리 중 하나가 원효대교다. 원효대교 북단은 욱천(만초천)이라는 하천과 이어진다. 복개돼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원효대교 북단에서 2km 안 되는 곳에 욱천고가도로가 있다는 사실에서 과거의 욱천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그 욱천을 경계로 서쪽은 구(舊)용산, 동쪽은 신용산이다. 이촌동은 신용산 남쪽과 닿아 있다. 일본인들은 구용산과 신용산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일본이 한국을 빼앗은 지 2년 뒤인 1912년, 이촌동과 용산 일대가 대규모 홍수 피해를 겪었다. 그러자 구용산의 일본인들은 총독부에 제방 건설을 청원했다. 이 요구를 수용해 총독부는 1914년 8월부터 공병대를 동원해 구용산 제방을 건설했다. 인근의 이촌동이 한강과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장마 피해도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이촌동에 제방을 건설하는 게 더 시급했지만, 총독부는 이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20년, 이촌동과 용산 지역이 또다시 홍수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총독부가 내린 판단은, 구용산 제방을 보강해주는 동시에 신용산에도 제방을 세워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신용산 서쪽에서부터 제방을 세워 신용산의 서·남·동쪽을 제방으로 막아주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신용산 서쪽은 욱천과 닿아 있지만, 남쪽은 이촌동과 닿아 있다. 한강물과 닿아 있는 게 아니라 이촌동이라는 거주 구역과 맞닿아 있다. 총독부의 결정은, 이촌동과 신용산 사이에 담장을 쌓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강이 범람하면, 이촌동과 신용산 경계에서 물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촌동에 설치하면 될 제방을 굳이 이촌동-신용산 경계에 세우고자 했다. 이촌동 장마 피해에 대해서는 '알 바 없다'는 식이었던 것이다. 신용산 제방 공사는 1923년 착공됐다. 그러자 이촌동에서 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2012년 <한국사 연구> 제157호에 실린 김종근의 논문 '일제하 경성의 홍수에 대한 식민정부의 대응 양상'은 이렇게 설명한다.

"신용산 제방에서 제외된 서부 이촌동민은 우선 용산의 다른 지역(구용산·신용산)에서 대처했던 방식대로 치수위원회를 조성하고 한인 김용범과 함께 일본인 부전병장(富田兵藏, 도미타 효우조우)을 대표위원으로 선임하여 총독부의 토목부 및 경성부를 찾아가 제방을 쌓아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의 비판... "총독부를 양해할 수가 없도다"

총독부는 이촌동에 제방을 만들어주지 않은 이유로, 제방이 세워지면 배를 대기 어려워져 이촌동 어민들의 생계가 힘들어질 수 있고, 또 제방 때문에 건너편 영등포가 위험해진다는 점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한테 이런 말은 변명으로만 들렸다.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총독부가 이촌동을 무시하기 때문에 제방을 세워주지 않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비판했다. 

"어느 경성부 책임자는 '이촌동민은 조금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까지 발표하였다 하니, 당국의 조치와 방침은 도저히 양해할 수가 없도다."

경성부 토목과장은 민원을 제기하는 이촌동 주민들한테 "이촌동에서 못 살겠으면 이대로 이사를 가라"는 말까지 했다. 침수 지역에 살 수밖에 없는 빈민들을 향해 그런 막말까지 내뱉었던 것이다. 

총독부는 이촌동 제방을 세워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지만, 주민들과 <동아일보>가 나서서 여론을 조성하고 여기에 동조자들까지 생겨나자, 완전히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경성부를 내세워 꼼수를 부렸다. 주민들한테 제방 설계비용의 부담을 요구했다. 설계사무소에 지불할 비용을 주민들이 대신 내주면 제방을 세워주겠다고 제안한 것. 황당한 제안이었다. 빈민들이 설계비용을 부담할 수 없을 거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그 황당한 요구를 이촌동 주민들은 받아들였다. 그렇게라도 장마 피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은 각지에서 모은 후원금을 보태 570만 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설계사무소에 의뢰해 설계서를 만들어서 경성부에 제출했다. 그렇지만 경성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댔다. 

주민들이 탄원서 제출과 항의집회 등으로 투쟁의 강도를 높여가고 <동아일보>의 응원 보도까지 계속되자, 경성부는 할 수 없이 공사 착수 결정을 내렸다. 이촌동 문제가 민족차별의 대명사처럼 부각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공사 비용은 경성부가 대지만, 현장 노동은 주민들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황당한 요구였지만, 주민들은 또다시 받아들였다. 

이제 뭔가 되는가 싶었지만, 또 마찬가지였다. 경성부의 결정은 총독부의 허가를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최종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성부가 허가를 요청하자, 총독부는 '당연히' 거부했다. 총독부와 경성부가 합작해 이촌동 주민들을 농락했던 것이다. 

제방 하나 설치하면 끝날 문제인데, 동을 없애자던 일본
 

 1966년 4월 용산구 이촌동 판자집의 모습.
▲  1966년 4월 용산구 이촌동 판자집의 모습.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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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아야 하나 보다 하고 이촌동 주민들이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마 그대로 살기도 힘들게 만드는 사정이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이촌동을 뒤덮었다. "전멸의 비운을 당한 이촌동"이란 표현을 써가며, 위 김종근의 논문은 피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홍수로 이촌동의 경우, 노들섬에 위치하였던 동부와 중부 이촌동은 과반수의 주택이 쓸려 내려가 거의 황무지화되었고, 서부 이촌동의 경우도 다수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이촌동 피해 상황을 접한 총독부는 이번에는 매우 신속한 결정을 내렸다. 홍수 직후에 내린 대책회의에서 이촌동을 없애기로 하는 '이촌동 폐동'(廢洞) 결정이 나왔다. 총독부는 주민들한테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라고 요구했다. 주민들이 눈물과 땀을 흘려가며 수해복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한강변에 있는 또 다른 지역인 송파·잠실·미사리 등지에도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지만, 이촌동처럼 폐동 조치를 당하지는 않았다. 총독부가 이 조치를 내린 이유 중 하나에 관해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서부이촌동 제방 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당시 한인 차별의 전형으로 인식되던 문제이고 따라서 조선총독부나 경성부에게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문제였다. (중략) 잦은 진정 활동을 일으키며 사회불안을 일으키고 있던 소요의 근원지인 서부이촌동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는 것은 이후 계속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식민정부의 입장에서는 서부이촌동민이 이주되어야만 했다."

이촌동에 제방을 건설해주지 않은 게 민족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됐기 때문에, 차제에 이촌동을 없애 논란을 차단하자고 총독부가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 이촌동 제방을 건설해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위 논문에 따르면, 당시의 이촌동은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다. 빈민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위쪽 신용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이촌동을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곳 일본인들은 자기네 동네와 이촌동이 한 울타리로 묶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굳이 신용산과 이촌동 경계에 제방을 쌓은 것도 모자라 이촌동을 없애기까지 한 데는 그런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촌동이 물에 휩쓸리더라도 같은 제방 안에서 한 동네로 엮이기는 싫었던 듯하다. 

평소에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외치던 일본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큰돈을 써야 할 상황이 되면 한국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조선에서 거둔 세금을, 그런 상황에서는 일본인한테만 사용하려 했다. 일본 식민통치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자연재해 때 국민 일부를 차별하는 일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대한민국에도 종종 있다. 수도권이 집중호우 피해를 입은 1990년, 노태우 정권은 충주 쪽에서 남한강을 거쳐 한강으로 물이 넘쳐드는 것을 막고자 충주댐 수문을 늦게까지 닫아뒀다. 뒤늦은 충주댐 방류로 이 지역이 침수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쁨과 즐거움을 남과 공유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재난처럼 슬프고 힘든 일이 발생했을 때, 위험을 남한테 떠넘기지 않고 함께 감내하는 태도는 사회통합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일제강점기는 당연히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도 이 과제는 아직 충분히 성취되지 않았다. 
 

 충주댐.
▲  충주댐.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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