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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규제프리존법 찬성하는 더불어민주당 규탄

시민사회, 규제프리존법 찬성하는 더불어민주당 규탄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08/28 [03:2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시민사회단체들이 규제완화 관련 법안 통과에 나서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사진 : 민중의소리)     © 편집국

 

더불어민주당이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과 함께 오는 30일 임시국회에서 규제프리존 특별법’ 등을 통과시키기로 합의한 가운데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발이 거세다.

 

규제프리존법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으로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을 제외한 14개 지방자치단체에 각각 2(세종시는 1)의 전략사업을 지정해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해 주는 것이다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규제프리존법이 안전 규제를 없애고 대기업 특혜를 준다며 반대했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와 규제프리존법·서비스산업발전법 폐기와 생명안전 보호를 위한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등은 27일 오후 2시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규제프리존법 등 박근혜-최순실 법을 졸속 합의한 더불어민주당을 규탄했다.

 

공동행동은 규제프리존법을 포함한 일련의 법안들과 관련해 민간자본의 규제특례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며 규제특례는 국민의 안전과 관계된 의료법 등 기존의 규제 법안을 무력화하는 효력을 발휘하며사전허용-사후규제를 기본 원칙으로 하는 한국형 규제샌드박스를 도입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공행동은 기업이 원하면 언제든 사전에 허용하고 문제가 생기면 사후에 규제하겠다는 것이며신제품의 테스트 목적으로 국민을 시험·검증 대상으로 삼고 기업이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안전성 판단을 하도록 허용하겠다는 취지라며 안전성·유효성이 미확립된 의료기술의약품 등도 첨단·혁신이라는 포장 하에 조기 시장진입이 가능하도록 규제특례를 적용하겠다는 것규탄했다.

 

또한 공동행동은 국회가 규제혁신을 명분으로 처리하려는 관련법 일체는 보건의료 및 정보통신을 포함하여 산업분야 전반을 겨냥한 것이라며 국민의 건강과 생명정보인권과 연계된 민감한 법안들을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졸속 합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관련 법안 폐기를 촉구했다.

 

▲ 경찰에 막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 면담은 불발됐다. (사진 : 민중의소리)     © 편집국

  

한편공동행동은 기자회견 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를 면담해 의견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경찰에 저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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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규제프리존법 등 박근혜 적폐 악법 추진하는 더불어민주당 규탄한다

-국민 볼모 삼는 민간자본 규제특례 반대한다-

-국회 졸속합의 즉시 철회하고 촛불정신 파기하는 적폐 법안 폐기하라-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공약파기를 일삼고 있다은산분리 완화원격의료 허용규제프리존법 처리 등 줄줄이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의료 영리화 등 재벌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은 중단한다고 약속하였다그러나 집권 2년차에 접어들면서 지난 정권에서 추진한 재벌 친화적 정책보다 더 위험한 규제완화 기조를 내세웠다민간자본이 주도하는 신기술의 시험·검증을 목적으로 규제특례를 적용하는 규제샌드박스 도입과왠만해서는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 포괄적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완화가 그것이다국민을 신제품의 안전성위해성 검증을 위한 시험대상으로 내모는 현 정부의 규제정책 기조는 정말 경악스럽다산업육성을 위한 신기술의 우선사용·사후규제규제샌드박스규제특례가 모두 이 같은 기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이런 식의 경제기반 조성이라면 4차산업혁명이건 그 이상이건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국민을 볼모로 삼는 부도덕한 경제기반 조성은 어떠한 이유라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다지난 정권에서도 경험했듯이 대기업 및 산업자본을 위한 특혜성 규제완화는 일자리 창출과도 무관하며또 다른 독점적 이윤 창출의 수단과 경로를 마련해 줄 뿐이다.

 

지난 8월 17일 국회 교섭단체 3당은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 완화와 규제샌드박스를 골자로 하는 규제프리존법지역특화발전특구규제특례법산업융합촉진법정보통신융합법 등 개악 법안들을 오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일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위협적인 법안을 어떠한 사회적 합의나 검증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하겠다는 것이다우리는 이 같은 졸속 합의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하며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힌다.

 

첫째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민간자본 규제특례 허용은 중단해야 한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대기업 청부 입법'으로 규정한 규제프리존법을 포함하여, 3당 교섭단체가 강행 처리하기로 졸속 합의한 지역특구규제특례법 등 일련의 법안들은 민간자본의 규제특례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규제특례는 국민의 안전과 관계된 의료법 등 기존의 규제 법안을 무력화하는 효력을 발휘하며사전허용-사후규제를 기본 원칙으로 하는 한국형 규제샌드박스를 도입한다는 것이다기업이 원하면 언제든 사전에 허용하고 문제가 생기면 사후에 규제하겠다는 것이며신제품의 테스트 목적으로 국민을 시험·검증 대상으로 삼고 기업이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안전성 판단을 하도록 허용하겠다는 취지이다이미 우리는 가습기살균제라돈침대 등 시민의 생명과 안전성에 심각한 폐해를 가하는 사건들을 경험하였다사후규제는 어불성설이다기업이 판매하는 상품과 서비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특히규제샌드박스는 지역 제한 없이 신기술·서비스에 대해 민간이 신청하면 모두 허용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이 같은 무제한적인 규제완화는 국민안전을 한층 위협하는 것으로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정부는 산업간 융합이 되는 모든 신제품과 서비스를 규제특례의 일차적 대상으로 규정하였다기존 규제프리존법의 지역전략사업까지 포함하면 대상범위는 보다 확장된다보건의료자동차에너지관광농생명화장품 등 해당 영역은 거의 제한이 없으며빅데이터와 스마트 기술이 융합·접목 신기술이라면 예외 없이 규제특례가 가능하다스마트헬스케어(원격의료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3D프린팅 의료기기바이오의약품 등)분야가 포괄되며안전성·유효성이 미확립된 의료기술의약품 등도 첨단·혁신이라는 포장 하에 조기 시장진입이 가능하도록 규제특례를 적용하겠다는 것이다또한 병원의 부대사업은 조례 제정만으로도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허용이 가능한 것으로 병원자본의 증식 경로를 보다 강화해 주었다국민안전은 뒷전으로 하고 민간자본 특례 일색의 무분별한 규제완화는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

 

둘째국회 졸속 합의 즉시 철회하고 적폐 법안 폐기하라

 

지금 국회가 규제혁신을 명분으로 처리하려는 관련법 일체는 보건의료 및 정보통신을 포함하여 산업분야 전반을 겨냥한 것이다국민의 건강과 생명정보인권과 연계된 민감한 법안들을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졸속 합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규제특례와의 연관성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기존 규제 법안들만도 60여 개를 넘으며관계 부처 간 협의도 잇따라야 하는 사항이다무엇보다기존의 법률적 근거를 초월하는 과도한 민간자본 규제특례가 과연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시민사회를 포함하여 어떠한 논의나 협의도 진행된 바 없다절차적 정당성만을 따져 보아도 문제가 되는 법안들을 불과 며칠 사이에 졸속으로 심의하고 일괄 처리하겠다는 것이 지금 집권 여당의 입장이다이는 국회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명백히 남용하는 것으로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국회교섭단체 3당은 이 같은 입장을 즉시 철회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규제프리존법은 박근혜 정부가 미르와 K스포츠재단을 통해 대기업에 입법을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대기업 청부 입법'"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청산해야 할 이런 적폐 법안을 다시 불러내 현 정부 경제운영의 기틀로 삼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인가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촛불정신의 파기가 아니라면 대기업거대자본 규제 특례 위주의 경제정책은 반드시 수정해야 하며이를 뒷받침하는 규제프리존법 등 일련의 규제특례법안은 모두 폐기해야 한다지금 국회가 처리하고자 하는 규제특례 법안들은 국민의 안전을 볼모로 한 악법이다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기업 특례 중심의 경제기반 조성은 어떠한 경우라도 합리화 될 수 없다는 점을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명심해야 한다.--

 

2018년 8월 27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

규제프리존법·서비스산업발전법 폐기와 생명안전 보호를 위한 공동행동

건강과대안건강세상네트워크공공운수노조노동자연대민주노총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보건의료노조보건의료단체연합사회진보연대의료연대본부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진보네트워크센터참여연대환경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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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경제학'은 던지고 진짜 '진보 경제'를 내놓을 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8/28 06:33
  • 수정일
    2018/08/28 06:3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특별기고] 미래노동사회 가치와 비전 위한 격렬한 논쟁 필요
2018.08.27 17:54:08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시장경제로 압축되는 세 바퀴 경제를 기치로 내세웠던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이 최근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시장 상황이 더는 해석의 문제로 합리화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악화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 발표된 7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장기구조화되고 있는 청년실업을 넘어 경제활동인구의 중추적 세대인 40대에서조차 외환위기 이후 최대라고 할 만큼 취업률이 감소하고, 실업자가 7개월째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어 노동시장의 고질적 문제였던 정규직-비정규직간의 양극화 문제를 넘어 노동의 전반적인 프레카리아트화(불안정화)가 우리 사회를 엄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조업에서의 신규일자리 창출이 급감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은 보이질 않아 소득(임금)-유효수요창출(투자)-성장의 선순환에 대한 기대는 거품처럼 사그라지고 있다.  


고용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세바퀴 경제의 전륜구동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하였던 소득주도성장론이 이 모든 상황의 주범으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십수 년 전 의사들도 할 말이 있다고 고소득 자영업자를 대변하던 한 학자는 이제는 최저임금이 중소기업과 자영업의 생살여탈권을 박탈하고 있다면서 다시 자영업자의 대변인을 자임하고 나섰다. 

 

지난 2년 동안의 두 자릿수에 달하는 급격한 최저임금인상이 그 원흉이라는 것이다. 소위 현장의 목소리를 참칭한 이러한 목소리는 사실 별반 새로운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사실은 대단히 악의적이어서 기업 로비스트에게나 어울릴만한 저급한 주장이다. 

 

1997/98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추진된 금융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적 성장전략은 지금까지 한국경제의 열쇠였으며, 노동유연화의 이름 아래 양산된 저임금 노동력과 생존형 자영업자는 심각한 사회불평등과 양극화 현상의 처음과 끝이다.  

 

일부 대기업과 첨단 산업기술분야를 제외하면 한국의 수출경쟁력은 주요 경쟁국 대비 상당 부분 저가노동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불안정한 사회안전망에 대한 '유연한 인간'의 대응전략은 각종 갑질로 점철된 직장에서 노예가 되기보다는 자영업자라는 이름으로 규제 없는 시장 상황 속에서 스스로 내 노동의 주인이 되는 방식이다.

 

중소기업에 '가본' 사람들은 알지만, 국가의 다양한 보조금과 '병’ 대한 착취를 방치하는 지금의 조건에서 '을'이 생존하는 기이한 구조가 오랫동안 유지됐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시장 행위자들에게 대단히 마약 같아서 근본적인 구조개혁에 심각한 금단현상을 유발하고 있는 지경이다. 자영업자마저 임금인상의 아우성으로 이런 상황을 존속시키는 일은 더는 안 될 일이다. 

 

 

▲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26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취재진에 답하고 있다. 장 실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소득주도 성장과 관련한 최근 논란에 대해 설명했다. ⓒ연합뉴스


일자리 창출, 개념의 성찬으로 끝내선 안돼

 

 

그렇다고 소득주도성장론이 현재의 구조를 개혁하는 대안으로 국민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기존에 소득주도성장론의 가치와 정책적 효과를 대변한 홍장표 전 경제수석의 경질은 청와대의 어떤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일관성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데, 더욱 아이러니한 상황은 올 상반기 동안 보수언론과 학자들의 이 경제철학에 대한 광기어린 비난 속에서 스스로도 별반 적극적으로 방어의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이 정책의 입안에 별반 관여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던 정책실장이 현재는 가치의 수호자로 인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문재인 선거캠프에 결합하고 정권 출범 후 각종 국가자문위원회에 포진한 경제학자 중 이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과연 신자유주의철학과 재벌의 하수인으로 찍힌 엘리트 '관료'만의 문제로 돌리면 될까? 이 무슨 허약한 경제철학이란 말인가? 거기서 힘들면 나오시던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논쟁이라도 해야지 이 무슨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러한 소동은 예고된 일일 듯싶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소득주도성장' 혹은 '포용적 성장'은 새롭다기보다는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국제노동기구(ILO)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같은 국제기구가 제시한 일종의 권고모델이다. 

 

대단히 진보적 경제정책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정책의 핵심가치는 1960년대 후반 이후 현재까지 자본주의 주요국가가 직면한 핵심적 문제인 수요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신자유주의의 첨병을 자임했던 국제기구조차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소득과 분배의 불균형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소위 2014년 발표된 OECD의 '포용적 성장론'이다. 최저임금도입, 공공부문의 일자리 확대, 노동시간 단축, 확장적 재정정책은 기업로비스트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시쳇말로 국제적 대세이며, 당장 OECD 한국보고서마저 이를 권장하고 있는 지경이다.


그럼에도 고용이 단순히 경제성장의 결과라는 낡은 자유주의 경제학의 가치를 부정하고 정부가 앞장서서 일자리를 창출하려 한다면 개념의 성찬으로 끝내서는 안 될 일이다. 포용적 성장이나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개념의 차용에 안주하지 말고 정책의 목표와 추진력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경제 컨트롤타워, 심각한 철학의 빈곤 드러내 

 

일부 여론의 동향에 민감해서 우왕좌왕하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현 정부의 경제 컨트롤타워는 심각한 철학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는 이미 필자도 참여한 지난달 '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사회경제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에서 이미 제기된 바 있다. 

 

아쉽게도 이후 진보진영에서조차 정작 정부정책의 방향성을 둘러싼 대안적 논의가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비판과 우려, 심지어는 비아냥의 목소리가 칼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지면을 채우고 있다. 흡사 노무현 정부 시즌 2를 상기시킨다. 

 

이래서는 안 될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시민의 염원을 담아 탄생한 정부이나 이를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참칭하거나, 혹을 그들만의 것으로 희화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촛불시민은 정부의 교체가 아닌 이 사회의 근본적인 권력지형의 변화를 원하였으며, 현 정부가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기존의 권력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착각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진보적 가치와 정책이 이를 견제하고 보완하지 않는다면 집권여당의 희망대로 우리사회의 헤게모니가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우리사회 중도와 진보의 대단히 역설적인 공동정부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의 내용을 채우던지 혹은 심지어는 이를 대체할 수도 있는 보다 진보적인 정책들이 각축을 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의 가치와 정책이 유일한 진보정책도 아닌 마당에 관념엔 순사(殉死)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례로 고용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신자유주의 이념 속에 시장의 문제로 축소된 고용의 문제를 성장의 동력으로 이해하려는 소득주도정책의 기본발상을 보다 더 구체화하고 나아가서 이를 사회정책의 문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자리 문제를 노동시장의 문제로 제한하여 고용정책의 미세조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지난 잃어버린 10년 동안 확인된 바이다. 유감스럽게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유연안정성이나 직업훈련 및 사회안전망 강화 등을 골자로 한 다양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과거의 정책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고 하기는 어려울 만큼 별다른 정책적 변화는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자리에 대해 논의하는 한, 그 동력은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31개 대기업이 전체 수출의 66%를 차지한다고 자화자찬하는 한국경제연구원의 보고서조차 연구개발(R&D)비중은 45%에 불과하다고 실토한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가 OECD 하위수준일 정도이니 재벌개혁을 넘어 재벌에게 투자와 고용창출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제1 가치와 연계시키는 정책은 시급하다. 물론 이때 (노사간의) 사회적 합의가 투자의 전제가 되는 황당한 논의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지 않는 임금의 재분배는 결국 미래세대의 일자리를 좀먹을 뿐이다. 임금중심의 단체협약에서 투자 중심의 단협의 중요성은 지난 봄 GM사태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수출주도적 성장전략에서 향유된 저임금구조(정규직의 고임금구조와의 샴쌍둥이)로부터 대기업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생산적 투자는 요원할 뿐이다. 


이미 신자유주의적 금융시장 구조에서 대기업은 생산보다 금융에서 달콤한 수익을 내는 데 익숙해졌기에 생산적 투자에 미온적이었고, 따라서 시민사회는 오랫동안 금산분리를 반대해왔는데 다시 은산분리를 완화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한편,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서 재벌식 경영을 규제하겠다는 일부 시민사회와 정부의 발상도 무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금융시장주도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러한 긍정적 사례가 있었던가? 해외 연기금과 자산운용사와 같은 약탈적 그림자금융(Shadow Banking)은 차치하고서라도 국민연금은 과연 수익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소버린과 엘리엇의 기억을 재벌과 연계시키는 게 악의적이라고 느낀다면 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CalPERS)의 악랄한 전략을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와 같은 제도가 재벌을 규제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기업의 투자구조를 바꾸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재벌에 대한 규제와 기업의 투자문제를 혼동하면서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는 방식은 연목구어에 불과하다.  


애플식 경영방식을 벤치마킹하겠다는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의 꿈은 재벌뿐만 아닌 신흥벤처기업까지 포함한 오너의 꿈일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등으로 대변되는, 소위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Barbrook/Cameron)로 무장한 '디지털 자본주의자'들은 생산적 투자보다는 금융시장 수익과 규제없는 고용의 파라다이스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모든 사회적 문제는 기술이 해결해줄 수 있다는 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솔루셔니즘(Solutionism)의 맹신자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맹신이 과연 국내의 얼치기 미래학자들의 이상과 다를까? 산업현장의 근처에도 안 가본 듯한 느낌이 드는 자칭 4차산업 전문가들은 허구한 날 인공지능 기술과 미래사회의 변화를 떠들어댄다(이들의 화려한 프레젠테이션도 몇 번 보면 신기할 정도로 똑같다. 창의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서로 베껴대기 일쑤인데 안습이다).  

 

필자 개인적으로 소위 산업 4.0으로 독일식 4차산업혁명의 중심에 서 있는 대기업 기술이사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던진 질문이 인상적이었다. 인공지능 연구로 한국은 도대체 얼마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냐고? 미래사회의 변화에 둔감해서도 안 되겠지만, 기껏해야 시끄러운 '노동자놈들'이 싫어서 자동화를 추진하려는 한국의 기업문화 속에서 뜬금없이 인공지능 연구가 산업과 고용의 미래라고 떠드는 말도 안 되는 행태도 더 이상 경제정책에서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소위 '사람' 중심이 되는 4차산업혁명위원회’의 위원들을 보면 노동부 장관을 빼고 모두가 기술 솔루셔니스트들로 채워져 있다. 당연히 일자리와는 상관없는 뜬구름 잡은 논의만 무성할 수밖에. 기업의 투자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만 투자의 방향과 목표는 국가의 고용정책과 연계된 산업정책의 전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것이 최근 국내에 자주 소개되는 독일 산업 4.0/노동 4.0의 요체이다. 직무와 직업이 일치하는 과거 포디즘적 고용 행태는 앞으로 점차 사라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미래의 산업 전망 속에서 어떠한 일자리가 생성될 것인지, 어떠한 교육과 직업훈련이 필요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 산업구조에 맞는 연구가 있어야 할 텐데 산업정책도, 그와 연계된 고용정책도 보이질 않는다. 이러하니 소득(최저임금)을 둘러싼 헛소동과 혁신성장이라는 빈 수레만 요란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국민세금으로 정부가 공무원이나 창출한다는 보수언론과 경제학자들의 비난과는 달리 정부 지원에 따른 공공부문에서의 좋은 일자리 창출은 지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부의 확대재정지출은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켜야 하며, 이는 인건비 지출에 대한 지원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에 대한 투자는 더욱 필요한데, 이는 보다 구체적 비전 속에서 효과적일 수 있다. 


재정에 대한 보수진영의 과도한 우려는 이미 OECD 한국보고서가 반박해준 바 있지만, 궁극적으로 소득과 자산의 공정분배를 위한 시도 속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만으로 현재의 소득과 자산불평등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기대는 환상이다. 2012년 이후 지속된 경상수지 흑자 속에서 사회불평등의 확대, 심화라는 당혹스러운(?) 결과를 바로잡는 일은 조세정의를 통해 세수를 확보하고 내수진작은 물론 미래의 일자리를 위한 공적 투자를 늘려나가는 것이다. 보유세든, 토지세든, 법인세 인상이든 조세의 공적 지출 내역을 분명히 하면 저급한 국가만능주의 시비에 휩쓸리지 않고 사회의 동의를 얻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던 조세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가치는 사회연대의 원칙을 공고히 하는 일이다. 

 

이처럼 경제정책은 성장과 고용이라는 관점에만 제한되지 않고, 고용정책, 산업정책, 조세정책, 사회정책의 모든 분야에 대한 가치와 비전을 담지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급격한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과거와 같은 잣대, 심지어 정치경제학에 대한 기초적 안목도 없이 지금은 희미하게만 존재하는 1970/80년대의 서구 복지국가의 이상향에 맞춰 개별 이슈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대안적 경제정책의 전망을 그려내는 일은 불가능하고 헛소동에 불과하다. 

 

진보진영, 대안 제시 못하고 마을만들기 사업 등 복마전 우려 수준

  

미래 노동사회의 가치와 전망을 담아내는 일은 자본주의의 미래와 관련된 만큼 다양하고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태친화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진영의 경제정책은 여전히 소득주도성장론의 대안으로 제시되지도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규모가 50조 원이 넘어 4대강 사업보다 규모가 큰 마을만들기 사업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복마전이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러울 정도이다.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는 이 사업의 지지자들은 고용창출까지 염두에 둔다고 하는데 정말 걱정스러울 정도이다. 


이런 수준으로 진보적 지식인과 진보적 사회운동 및 정당이 문재인 정부를 견인해내기란 언감생심이다. 이제 소득주도성장론의 정책적 한계(가치의 한계가 아니다!)가 분명해진 만큼 이 정책의 기본적 가치는 존중하되 보다 넓은 차원에서 미래노동사회의 비전과 전망을 담아내는 포괄적 산업-고용정책, 사회정책의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사회개혁의 다양한 전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건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격렬한 진보적 경제정책의 쟁론이 전개되어야할 시점이라고 판단된다. 이는 단순히 경제성장과 분배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내에서 민주적 정치시스템을 공고히 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그의 대표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의 사상은 옳건 그르건 간에 세간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강력하다. (...) 스스로 어떠한 지적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믿고 있는 실용적 사람은 대개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들이다."  


그렇다.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본주의의 급격한 전환기에 더욱 구체적이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경제학의 쟁론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은 그러한 논쟁의 끝이 아닌 출발점에 되면 충분하다. hic Rhodus, hic saltus!(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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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는 분단선이 없었다

스포츠를 넘어 ‘단숨에’ 가까워질 남북을 기대하며
자카르타=이하나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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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8  0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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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나 통신원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정책국장

얼마 전 팔렘방에서 카누 남북단일팀이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단일기가 시상대에 올랐다. 선수들은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울고 웃었다. 국제대회에는 ‘코리아’의 메달이 공식 기록된다. 아시안게임 현장에서 남도 북도 아닌 ‘코리아’를 응원한 사람들. 6.15남측위원회가 한겨레통일문화재단등과 주최한 2018 아시안게임 ‘원코리아 공동응원단’의 활동 소감을 전한다. / 편집자 주

 

   
▲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개막식장에서 단일기를 든 응원단.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농구장에 ‘단숨에’가 울려퍼지다

“단숨에! 단숨에!”

20일 여자농구 남북단일팀과 인도와의 경기장에는 원코리아 응원단 및 현지 남북 교민들 200여명의 응원단이 함께 했다. 이 날 새로운 구호 ‘단숨에’가 등장했다. 이 구호는 가수 강산에씨 말에서 시작됐다. 19일 자카르타 팀코리아 하우스에서 열린 ‘원코리아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평양방문 소감을 밝히던 강산에 씨가 이렇게 말했다. 

“평양에서 우리가 ‘원샷’이라며 건배를 하는데, 북측 분들이 ‘단숨에!’이러면서 한잔 마시더라. 원샷이라는 정체불명의 구호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이제 우리 ‘단숨에’라고 하자.”

   
▲ 남북 응원단은 단일팀의 농구경기를 응원하며 ‘단숨에’를 외쳤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단일팀 농구경기장, 원코리아 응원단 및 현지 남북교민들이 함께 응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농구 특유의 빠른 경기 호흡에 맞추어 응원단들은 신나게 외쳤다. “단숨에! 단숨에!” 북측 응원단들은 익숙한 구호여서인지 더욱 목소리가 커졌다. 이 날 단일팀은 인도를 104대 54로 앞서며 크게 승리했다.

   
▲ 20일 단일팀의 농구경기장에는 이낙연 총리, 도종환 문체부 장관등이 응원단을 찾아 격려했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가수 강산에 씨는 19일 열린 ‘원코리아 페스티벌’에서 평양 공연 소감을 전하며 ‘단숨에’ 구호를 제안했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팬미팅을 방불케 한 리성금, 엄윤철 선수와의 만남

20일 역도경기장. 북측에서 여자 48kg 리성금 선수, 남자 56kg 엄윤철 선수가 출전했다. 경기장에는 인도네시아 응원단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리성금 선수와 엄윤철 선수가 등장했을 때만큼은 경기장 전체가 떠나가라 선수들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리성금! 힘내라!” “엄윤철! 엄윤철!”

긴장된 표정으로 선수가 등장하고 모두가 숨죽여 경기를 바라본다. 리성금 엄윤철 선수가 번쩍 바벨을 들어 올리는 순간, 모두가 일어서 함께 환호했다. “장하다 리성금! 장하다 엄윤철!”

   
▲ 아시안게임 역도경기장, 단일기가 가득했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선수들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 함께 기뻐하는 응원단.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금메달의 기쁨과 함께 경기장은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북측 관계자들은 경기가 끝나고 응원단석에게 엄지를 치켜들고, 수고했다며 인사를 건넸다. 

금메달을 목에 건 리성금 선수는 멀리서부터 응원단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응원단 옆 좌석에 리성금 선수가 앉는 순간 응원단은 처음엔 조심스럽게, 나중엔 열광하며 몰려들었다. 팬미팅을 방불케 하는 순간이었다. 옷에 사인을 받고, 같이 사진을 찍으며 금메달을 함께 축하했다.

리성금 선수의 사인 줄이 끝나질 않자 북측 관계자들은 “거 사인 내일 해주라고. 우리 내일 시간 많다고~”라며 웃었지만, 응원단은 오늘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며 리성금 선수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금메달을 딴 엄윤철 선수에게도 응원단이 다가가 사인을 요청했다. 엄윤철 선수는 이날 세계신기록에 도전했다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의식한 듯 “더 좋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지만, 우리는 “너무 멋진 메달을 선사해주어 고맙다. 남쪽에서도 모두 응원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 리성금 선수와 함께 사진을 찍은 원코리아 응원단 대학생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여느 선수와 팬들처럼 응원단 옷에 사인을 해주는 북 리성금 선수.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엄윤철 선수가 단일기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응원단에게 세계기록을 성공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웃으며 인사한 엄윤철 선수.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이날 응원단과 리성금, 엄윤철 선수의 만남을 두고 몇몇 언론들에서는 ‘북한 선수들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처음 보게 된 장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선수에게 응원단이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고, 사인을 받고 악수하는 모습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동안 무수한 스포츠대회에서 남북 선수들과 응원단이 만났는데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것이 이상한 일 아니었을까.

평창과 달랐던 자카르타

올해 2월 평창올림픽에서도 남북은 자유롭게 만나지 못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고 경기장에서는 국정원 관계자들이 북측 응원단을 차단하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남북 응원단이 악수하는 것조차 가로막기도 했다. 평창은 물론 그 이전의 스포츠 대회들에서도 만남과 교류보다는 차단과 경계가 익숙했다.

자카르타에서 남북은 함께 응원하고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응원단과 현지 남, 북 교민들은 정말 똑같았다. 응원단의 구호를 열심히 따라하다가도 경기가 긴박해지면 앞에 선 응원리더들에게 좀 비켜보라고 말하는 것도 똑같았고, 선수가 공을 놓치면 ‘어이구’라고 탄식하는 순간도 똑같았다. 남이나 북의 대학생들이 외신기자와 영어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우리 학생들 다 영어 잘 한다”면서 자랑하는 모습마저도 똑같았다. 

남과 북의 사람들은 쉬는 시간마다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게 하트에요”라며 손가락 하트를 가르쳐주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고, 엄마를 따라왔던 북측 아이는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앞에 서서 열심히 응원하던 누나에게 사탕을 쥐어주기도 했다. 

   
▲ 남측 응원단 대학생이 북측 교민들에게 ‘손가락 하트’를 알려주는 모습.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남북은 같이 하트를 만들며 기념 사진도 찍었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응원단과 친숙해져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해준 북측 아이.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응원단이 처음 마주치던 날, 북측 교민들이 바로 뒷좌석에 앉자 남측 응원단 한 사람이 “우리 같이 앉아도 돼요?”라고 물었다. 그렇게 조심스러웠던 것도 잠깐, 한 경기 두 경기 지날수록 남북은 섞여들었다. 우리가 꿈꾸는 자유왕래가 이루어진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자카르타에는 분단선이 없었다 

“대동강 맥주 너무 먹어보고 싶어요. 한국 맥주는 맛이 없거든요.” 

자카르타 농구경기장에서 남북응원단이 나눈 대화다. 격세지감이다. 재미동포 신은미 씨가 대동강 맥주가 더 맛있다고 해서 북을 ‘찬양’한 죄라고 검찰 조사까지 받은 일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자카르타에는, 분단선이 없었다. 판문점 선언 이후 우리의 마음에서도 두려움이나 경계, 걱정은 사라지고 있었다.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손잡고 분단선을 넘나들었듯 우리도 이렇게 넘나들며 장벽을 허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갖게 된 경험이었다.

원코리아 공동응원단을 함께 준비한 현지 교민 이주영(4.16 자카르타 촛불행동 공동대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인도네시아에도 많은 북측 교민들이 살고 있지만, 우리가 북측 동포들을 이렇게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남북이 모여앉아 같이 응원하면서 어느 순간에는 정말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이제 만남이 시작됐으니 앞으로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생긴다. 통일이 별게 아니지 않나. 이렇게 만나는 계기가 늘어나고, 자꾸 만날 수 있는 것. 그것이 통일인 것 같다.”

“단일기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요” 

역사적인 남북 공동입장 순간, 개막식장에는 단일기가 나부꼈다. 경기장 저 멀리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응원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는 하나다’를 외쳤다. 선수들은 입장부터 퇴장까지 관중석을 바라보며 손 흔들어 주었고,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도 평화의 상징으로 남북 공동입장을 강조했다. 

현지 자원봉사자들도, 외국 관광객들도, 응원단이 지나가면 ‘코리아?’라고 물으며 엄지를 치켜들거나 단일기를 같이 흔들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다. 19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원코리아 페스티발’ 현장에도 외국인과 현지 교민들이 참가해 단일기를 흔들며 코리아를 함께 응원했다.

   
▲ 현지 자원봉사자들에게도 원코리아 응원단은 인기 만점이었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개막식 경기장에 가득했던 단일기.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북한'은 다른 국기를 가진 다른 나라였는데 단일기를 들고 응원하고, 북한선수와 사진도 찍고 북한교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정말로 하나된 느낌이 들었다. 북한선수가 경기를 할 때에도 원래 우리나라 선수였던 것처럼 진심으로 목이 터져라 응원하게 되었다.” 성희윤(19, 대학생 겨레하나)

“누군가한테 북한은 아직도 적대국가겠지만, 우리는 그런 마음 없이 같은 마음으로 응원했다. 북한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고 좋아하는 것을 보는데 그 마음이 뭔지 나도 조금 알 것 같았다. 같은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리성금 선수와 사진 찍고 인사하는데, 남측 응원단이라서 더 반갑게 대해준다는 것이 느껴졌다.” 방슬기찬(21, 대학생겨레하나)

응원단에 함께 했던 대학생들은 “이제 단일기만 봐도 가슴이 뭉클하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단일팀을 응원하면서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꼈다는 것이다. 

평창에 이어 자카르타까지. ‘통일응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더 큰 꿈을 꾼다. “스포츠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단일팀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농구경기장에서 남북이 함께 외친 ‘단숨에’라는 구호처럼, 앞으로 스포츠를 넘어 민간교류의 장이 단숨에 열리는 날을 기대한다. 

   
▲ 아시안게임 개막식장에서의 단일기. 앞으로 스포츠를 넘어, 민간교류가 ‘단숨에’ 열리기를 기대한다. [사진-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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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공격하는 보수진영의 근거는 ‘가짜뉴스’였다

언론이 ‘가짜뉴스’를 계속 생산한다면, 처벌과 책임도 무겁게 져야 할 것
 
임병도 | 2018-08-27 08:55:5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8월 24일 <한국경제>는 ‘최저임금 부담 식당서 해고된 50대 여성 숨져’라는 제목의 기사를 온라인으로 발행했습니다.

<한국경제> 조재길 기자는 기사 서두에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를 잃은 50대 여성이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확인됐다.’라며 50대 여성의 사망 원인이 최저임금 인상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 기자는 기사 말미에 ‘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해 식당, 편의점, 주유소 등에서는 최저임금 적용을 받는 종업원을 해고한다’ 라며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경제>의 이 기사는 온라인으로 보도되자마자 인터넷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보수 진영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근거가 됐습니다.


강용석, 최저임금 인상에 서민경제 파탄

▲강용석 변호사와 김세의 전 MBC 기자가 제작한 유튜브 영상에 등장한 기사. <한국경제>의 기사를 인용한 <정규재TV>의 기사를 캡처했다. ⓒ유튜브 화면 캡처

강용석 변호사와 김세의 전 MBC 기자는 ‘최저임금 인상에 서민경제 파탄’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이 동영상에는 최저임금 때문에 서민 경제가 파탄 났다는 근거로 여러 기사를 캡처한 사진이 등장합니다. ‘최저임금 부담 식당서 해고된 50대 여성, 스스로 목숨 끊어’라는 기사도 등장합니다.

다만, 동영상에 등장한 기사는 <한국경제>의 기사가 아니라 한국경제신문을 인용한 <정규재TV>의 기사였습니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가 나오면 보수 진영 언론에서 이를 인용하고, 보수 성향의 유튜브 영상 등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사무총장, 기사 삭제에 강한 의문 제기

▲지난 8월 25일 김용태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이 자신의 페이스에 올린 글. 해당 기사가 삭제돼 해당 기사를 옮겨놓은 블로그 링크를 공유했다. ⓒ페이스북 화면 캡처

8월 25일, 김용태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은 <한국경제>의 기사가 캡처된 블로그 링크를 페이스북에 공유했습니다.

김 사무총장은 ‘이 뉴스는 국민들의 공분을 사 청와대 청원까지 신청된 상황’이라며 ‘지금은 뉴스가 사라졌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김용태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괴물이 노동취약계층의 국민들을 죽이고 있다’라며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기사가 사라진 것일까요?’라며 강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대전경찰청 “변사 사건 자체가 없었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한국경제> 조재길 기자는 ‘내부 협의를 거쳐 기사가 삭제됐다’라며 ‘구체적 이유는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경제> 편집국장은 ‘기사 내용을 처음 들었다’며 삭제 사실도 몰랐다고 밝혔습니다.

 

▲ <한국경제>의 ‘”최저임금 부담” 식당서 해고된 50대 여성, 스스로 목숨 끊어’라는 기사는 현재 삭제된 상태이다. ⓒ 네이버뉴스 화면 캡처

 

<오마이뉴스>의 취재 결과 , 기사에 나온 사망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기사에서 인용된 둔산경찰서 관계자는“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이며, 처음 듣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전지방경찰청 관계자도 “해당 기사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지난달 말, 대전 시내에 50대 여성이 자살한 사건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대전지방경찰청 관계자는 “보도가 나간 후 월평동은 물론이고 대전시를 다 뒤져봤으나 변사 사건 자체가 없었다”라며 기사를 쓴 기자에게 그런 사실이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 이후에 기사가 삭제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습니다.


검증 없는 언론사 기사는 오보가 아니라 ‘가짜뉴스’이다

<한국경제> 조재길 기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그 기사는 제보 내용을 바탕으로 썼는데, 보도 이후 가족이 받을 2차 피해가 우려됐고, 나이·기초수급 여부 관련 팩트 오류가 드러나 기사를 삭제했다. 하지만 변사 사건이 있었다는 점, 최저임금 부담 때문에 해고됐다는 주변 지인의 증언은 사실이다” (한국경제 조재길 기자의 주장)

조재길 기자는 ‘변사 사건이 있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는 ‘변사 사건이 아예 없었다’며 이후에 기사가 삭제됐다고 밝혔습니다.

상식적으로 진짜 변사 사건이 있었는지 기자가 검증을 했다면, 굳이 기사를 삭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나이와 기초수급 여부가 틀렸다고 해도 언론사 관행으로 수정을 하지, 삭제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한국경제>의 기사는 최저임금 인상을 비판하기 위해 검증 없이 한 사람의 죽음을 무리하게 연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기사는 단순 ‘오보’가 아니라 의도적인 ‘가짜뉴스’로 봐야 합니다.

언론사 가짜뉴스,오보 (생산)→ 자유한국당 (인용) →보수성향 언론사 (공격) → 보수 진영 커뮤니티 (확산)

기업과 경제인 단체, 언론, 보수 정당과 보수진영이 합심해서 ‘최저임금’을 비판하며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패턴을 보면 생산과 인용, 공격, 확산하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언론이 저널리즘의 원칙을 망각하며 ‘가짜뉴스’를 계속 생산한다면, 그에 따른 처벌과 책임도 무겁게 져야 할 것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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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서 회장, “연내에 한번 더 이산가족 상봉”

“잘 되면 10월말쯤”, 구체적인 날짜 등은 국장급 실무회담에서
금강산=공동취재단/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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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6  12: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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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 환영만찬에서 만찬사를 전하는 박경서 회장. [사진-공동취재단]

박경서 대한적십자사(한적) 회장이 25일 단체상봉 직후 기자들과 만나 “박용일 북측 단장과 (이번) 21차 상봉 행사와 같은 방식의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올해 안에 한 번 더 하기로 협의했다”라고 밝혔다.

이번 이산가족상봉행사의 남측 단장인 박 회장은 북측 단장인 박용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과 만나 이같이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전했다. “대강 현재와 비슷한 규모로 한다”면서 “잘 되면 10월 말쯤”이라고 내다봤다.

구체적인 날짜 등은 국장급 실무회담에서 논의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 지나간 날을 담은 사진을 같이 보는 북측 송창호(78) 씨 가족. [사진-공동취재단]
   
▲ 기념사진을 찍는 북측 임기산(87) 씨 가족. [사진-공동취재단]

박 회장은 생사확인, 정례적 만남, 화상상봉, 고향방문 추진 등에 대해서도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했다. 또 “제반 여건이 허락된다면 고향방문단을 빠른 시일 내에 하자는데 긍정적인 협의를 진행했다”고 했으나, 북측 박 단장은 원론적인 수준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4일 환영만찬에서, 박경서 회장은 “아직도 헤어진 가족들이 생사마저도 모른 채 이산의 한을 품고 남측에서만 매년 3천~4천여 명의 이산가족들이 운명하고 있다”면서 “살아 있는 동안에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자유롭게 만나고 추억이 깃든 고향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 박용일 북측 단장. [사진-공동취재단]

북측 박용일 단장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북과 남의 상봉자들은 민족의 한 성원, 한 핏줄을 나눈 혈육으로서 민족 분열로 인한 불행과 고통의 직접적인 체험자들”이라며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나라의 분열을 끝장내고 통일의 새 아침을 앞당겨오기 위한 투쟁에서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나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민족이 단합해야 남북관계 개선과 발전에서 경이적인 성과가 이루어질 것이며 “바로 여기에 우리 민족이 부흥하고 북과 남으로 갈라진 친혈육들이 함께 모여살 통일의 그날을 앞당겨오는 지름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21차 상봉) 2회차 행사’ 마지막 날인 26일 남북 이산가족들은 ‘작별상봉과 공동중식’ 이후 각자 버스에 올라 짧은 만남의 기억을 안은 채 다시 기약없는 이별의 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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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핵무력, 일본의 핵야망, 미국의 철군정책

[개벽예감 312] 중국의 핵무력, 일본의 핵야망, 미국의 철군정책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8/27 [08: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중국은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나? 

2.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국의 핵야망 

3. 고용간첩 도미탈주극으로 파탄된 대만의 핵개발사업

4.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과 저우언라이의 오판

 

 

1. 중국은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나?

 

1964년 4월 14일 미국 정책기획협의회(Policy Planning Council) 의장 월트 로스토우(Walt W. Rostow)가 작성하여 맥조오지 번디(McGeorge Bundy) 국가안보보좌관에게 1964년 4월 22일에 보낸 극비문서가 기밀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문서에는 ‘중국 공산주의 핵시설들에 대해 가능한 기본행동의 탐색(An Exploration of the Possible Bases for Action Against the Chinese Communist Nuclear Facilities)’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극비문서에 따르면, 1961년 1월에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와 1963년 11월에 출범한 존슨 행정부는 중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핵시설들을 예방타격(preventive strike)으로 파괴하는 공습계획을 검토해왔는데,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들을 공습할 경우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것으로 우려한 나머지, 공습계획 대신에 특수부대를 중국에 침투시키는 급변사태계획들(contingency plans)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중앙정보국(CIA)과 다른 관련부서들에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핵시설들을 파괴하려는 각종 작전계획을 검토했으면서도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실행하지 못했다. 

 

왜 실행하지 못했을까? 중국에게 섣부른 불질을 하는 경우 전면전으로 확전되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갈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는 미국이 겁쟁이여서 생겨난 것만이 아니었다. 1950년대에 일어난 대만해협위기가 미국에게 심각한 교훈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생겨난 것이었다. 

 

중국내전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도주한 장졔스(蔣介石) 정권은 1954년 8월 중국 본토 앞바다에 있는 섬들에 방대한 규모의 군사기지를 건설하였다. 대만군 병력 58,000명이 진먼(金門)섬을 뒤덮었고, 15,000명이 마추(馬祖)렬도에 밀려들었다. ‘본토수복’에 광분하는 장졔스의 도발을 방치할 수 없었던 중국은 진먼섬과 마추렬도에 대한 맹렬한 포격과 폭격을 계속하였다. 그 전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이장산(一江山)섬과 다첸(大陣)군도를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1954년 9월 3일부터 1955년 5월 1일까지 계속된 제1차 대만해협위기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64년 10월 16일 중국이 진행한 첫 핵시험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는 광경을 보며, 중국인들이 승리의 환성을 올리는 장면이다. 1964년 가을, 서울에서 국민학교(당시 명칭) 4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핵시험 이후 중국에서 대기의 흐름을 타고 우리나라 상공으로 날아오는 낙진을 맞으면 방사능오염으로 죽는다"는 학교당국의 거짓안전교육을 받았는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방사능낙진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비옷으로 몸을 감싸고 등교길에 올랐던 일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중국은 1980년 5월 18일 미국 본토 전역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적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파탄되고, 미국이 적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역사상 첫 사례로 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갈까봐 다급해진 미국은 1955년 3월 3일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허겁지겁 체결하였고,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막아줄 미국 해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황급히 들이밀었으며, 미국산 전투장비들로 대만군을 무장시켰다. 대만을 중국에서 떼어내려는 미국과 대만의 국가분렬책동은 진먼섬과 마추렬도에 대한 중국의 집중공격을 또 다시 촉발하였는데, 이것이 1958년 8월 23일부터 9월 22일까지 계속된 제2차 대만해협위기다. 

 

중국의 통일전쟁을 우려한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을 파괴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중국은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첫 핵시험에서 성공하였고, 1966년 7월 1일에는 전략미사일부대인 제2포병부대를 창설하였으며, 1980년 5월 18일에는 미국 본토 전역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둥펑(東風)-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적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파탄되고, 미국이 적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역사상 첫 사례로 되었다.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승리한 중국은 자기의 핵무력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008년 3월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은 중국인민해방군 전략미사일부대가 주둔하는 거대한 지하핵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길이가 약 5,000km에 이른다고 보도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서울에서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까지 거리가 약 5,000km인데, 중국이 그렇게 긴 지하핵기지를 건설했다는 말은 누구도 선뜻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2009년 12월 중국인민해방군 언론매체인 <중국국방일보>가 위의 보도내용이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길이가 약 5,000km라는 것은 지하핵기지를 한 줄 직선으로 길게 뚫어놓았다는 뜻이 아니다. 중국의 지하핵기지는 수많은 지하시설, 지하도로, 지하철도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된 거대한 지하도시다. 험준한 타이항(太行)산악지대에 건설된 지하핵기지에는 미사일발사구 수 백 개가 지표면으로 나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진짜 발사구이고 어떤 것은 가짜 발사구이므로 적국 정찰위성의 식별능력을 교란할 수 있다. 

 

2017년 5월 22일 <중국중앙텔레비전> 온라인 보도매체는 1966년에 창설된 중국의 첫 전략미사일부대인 둥펑(東風) 제1여단이 허난(河南)성 쑹산(嵩山)에 있는 지하핵기지 미사일발사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놀라운 장면을 공개하면서, 만일 중국이 핵타격을 받으면 10분 안에 보복핵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중국의 험준한 타이항산악지대에 건설된 지하핵기지의 내부를 촬영한 것이다. 그 지하핵기지는 수많은 지하시설, 지하도로, 지하철도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된 거대한 지하도시다. 그 지하핵기지에는 미사일발사구 수 백 개가 지표면으로 나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진짜 발사구이고 어떤 것은 가짜 발사구이므로, 적국 정찰위성의 식별능력을 교란할 수 있다. 2017년 5월 22일 중국 언론매체는 1966년에 창설된 중국의 첫 전략미사일부대인 둥펑 제1여단이 허난성 쑹산에 있는 지하핵기지 미사일발사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놀라운 장면을 공개하면서, 만일 중국이 핵타격을 받으면 10분 안에 보복핵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중국이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승리한 때로부터 37년이 흐른 2017년 11월 29일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고, 미국과 맞선 운명적인 핵대결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의 승리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뒤집어버린 엄청난 사변이었다. 

 

중국은 첫 핵시험에서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기까지 16년 걸렸으나, 조선은 첫 핵시험에서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기까지 11년 걸렸다.  

 

핵무기를 틀어쥐고 세계를 지배한다고 떠들어댔으나,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핵제국은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또 패했다. 지난날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대만에서 미국군을 철수해야 했고, 오늘날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한국에서 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궁지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현대화사업으로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겠노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 지난 반세기에 걸쳐 힘이 차츰 약해지고 있는 핵제국의 몰골을 신형 핵무기로 감출 수는 없다.  

 

 

2.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국의 핵야망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핵탄개발을 시도한 나라는 전범국 일본이다. 일본은 이미 1940년대에 핵탄개발에 손을 댔다. 당시 일본은 핵탄개발부문에서 미국과 경쟁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핵탄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미국은 영국과 협력하여 핵탄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과 미국 가운데서 어느 나라가 먼저 핵탄을 만드는가에 따라 태평양전쟁의 운명이 결정될 판이었다.   

 

2015년 7월 26일 일본 언론매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1944년 10월 4일 일본 해군은 교또제국대학(당시 명칭)의 핵과학자 아라까쓰 분사꾸(荒勝 文策)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하였는데, 아라까쓰 교수와 도꾜계기제작소가 각각 작성한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 설계도면 두 점이 그 대학의 이전 방사성동위원소연구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설계도면에는 원심분리기제작이 완성되는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일제 패망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이 완성예정일이었다. 그들이 거의 완성해가던 원심분리기는 미국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일본 육군은 일본 해군보다 먼저 핵탄개발에 손을 댔다. 일본 육군은 1941년 도꾜제국대학(당시 명칭)의 저명한 핵과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했고, 그로부터 2년 뒤 니시나는 폭발위력 10,000t급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비밀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 보고를 받은 1급 전범 도조 히데끼(東條 英機) 일본 총리는 일본 육군항공본부에게 핵탄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핵탄개발사업은 1943년 9월부터 추진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제의 핵탄연구시설들을 파괴하였고, 핵탄연구문서들을 압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폐지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에 급파한 핵공학전문가집단의 일원으로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조사하였던 로벗 퍼먼(Robert R. Furman)은 2008년 미국 언론매체와 진행한 대담에서 1945년 8월 당시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은 초기단계에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심층정보를 모르는 몇몇 미국인 연구가들은 1945년 8월 12일 새벽 일제가 식민지조선의 흥남 앞바다에서 감행한 수중대폭발시험이 핵시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고성능폭약을 터뜨린 고폭시험이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5년 9월 패전국 일본에 급파된 미국 핵공학전문가집단이 교또제국대학(당시 명칭)에 있는 핵연구장치들을 해체하는 장면이다. 일본 해군은 1944년 10월 4일 교또제국대학의 핵과학자 아라까쓰 분사꾸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하였다. 당시 아라까쓰가 추진하고 있었던 원심분리기제작이 완료되는 날은 일제 패망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로 예정되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폐지하기 위해 미국이 현지에 급파한 핵공학전문가집단의 일원으로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조사하였던 로벗 퍼먼은 1945년 8월 당시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은 초기단계에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고도의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조선을 비핵화하겠다고 떠들어대면서,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하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일제가 패망하여 핵야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패망 이후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자기 죄행을 반성하고 자숙하기는커녕 핵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흉악한 1급 전범으로 마땅히 사형을 당했어야 하지만, 미국이 사형집행 직전에 극적으로 살려주어 전후 일본을 미국의 요구대로 재건하는 임무를 맡긴 기시 노부스께(岸 信介) 일본 총리는 1957년에 “현행 헌법 아래서도 자위를 위한 핵보유는 용인된다”고 하면서 핵야망을 드러냈다. 

 

2013년 11월 29일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Nautilus Institute)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원동지역 연구부가 1957년 8월 2일에 작성한 보고서는 “1950년대 일본의 보수정권은 원동지역이 냉전적 긴장상태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핵무기를 생산하는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기시 노부스께 일본 총리는 핵무기가 일본 방위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핵무기 생산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여야 했기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2014년 7월 24일 일본 텔레비전방송 <NHK>가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를 보도하였는데, 그 문서에는 기시 노부스께의 뒤를 이어 일본 총리가 된 이께다 하야또(池田 勇人)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미국 국무장관이 1964년 1월 28일 일본 도꾜에 있는 총리관저에서 진행한 회담내용이 담겼다. 회담에서 러스크 국무장관은 중국이 1~2년 안에 핵시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께다 총리는 중국이 한 두 차례 핵시험을 해도 정세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과학수준과 경제수준을 보면, 핵시험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실전에 사용될)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께다는 당시 중국의 핵무기개발능력을 과소평가하였다. 이께다가 러스크 앞에서 과소평가발언을 늘어놓은 때로부터 9개월 만에 중국은 핵시험에서 성공하였고, 1966년 10월 27일에는 사거리가 1,250km인 둥펑-2 탄도미사일에 전술핵탄두를 장착하고 시험발사하여 기폭시켰으며, 1967년 6월 17일에는 3.3메가톤급 수소탄 기폭시험에서 성공하였다. 

 

중국의 핵무기개발은 일본을 자극하였다. <NHK> 2010년 10월 4일 보도에 따르면, 1964년 중국의 첫 핵시험 직후 일본 정부는 비밀보고서에서 중국의 핵보유가 일본에 미치는 정치적, 심리적 영향이 크다고 하면서, 일본은 “언제라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중국보다 높은 수준에서 항상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핵야망이 꿈틀거리자 미국은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핵우산’ 공약을 확인해주어야 했다. 일본 외무성이 2008년 12월 22일에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핵무기개발에 자극을 받은 사또 에이사꾸(佐藤 英作) 일본 총리는 1965년 1월 12일부터 13일까지 워싱턴을 방문하여 린든 존슨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일본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보증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존슨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가 보증한다”는 확답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사또 총리는 로벗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미국 국방장관과 진행한 회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은 즉각 핵공격을 포함한 반격을 해주기 바란다”고 하면서, “해상에 배치된 핵무기탑재 함선이라면 즉각 핵공격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것은 ‘핵우산’ 공약을 보증해달라는 소리였다. 말귀를 금방 알아차린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해상에 배치된 핵무기탑재 함선이라면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2007년 9월 14일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이 수소탄 기폭시험에서 성공한 직후인 1967년 11월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워싱턴을 또 다시 방문한 사또 총리와 회담하면서 그에게 “핵무기 사용이 중국의 핵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방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공약확인과 더불어, 미국은 일본과 핵밀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일본의 핵야망을 억제하였다. 1969년 11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일정상회담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과 사또 에이사꾸 총리는 긴급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일본은 미국이 오끼나와 미국군기지에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미국의 핵전략자산이 오끼나와를 통과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오끼나와에서 핵무기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한다는 핵밀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 핵밀약을 체결하였으면서도 핵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은밀히 책동하였다. 독일 외무성의 기밀문서를 인용한 <NHK> 2010년 10월 4일 보도와 <요미우리신붕> 2010년 1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1969년 2월 3일부터 5일까지 일본 도꾜에서 진행된 일본-서독 정책기획협의에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국제적으로 감시해도 핵분열물질을 5% 정도 추출하는 것을 차단하지는 못하므로, 핵탄생산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일본은 핵무기 원료를 만드는 기술을 가졌다”고 밝히면서, 서독에게 핵공학기술협력을 요청했는데, 서독 외무성 대표단은 자기들이 그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발뺌하였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1967년 12월 사또 총리는 일본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던 중에 이른바 ‘비핵3원칙’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일본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반입하지 않고, 만들지 않겠다고 뇌까렸지만, 그것은 흑막 뒤에서 핵야망을 실현하려고 책동하면서, 무대 위에서는 마치 핵야망을 포기한 것처럼 연출한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사기극에 감쪽같이 속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비핵3원칙’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하여 1974년 3월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핵야망을 실현하려고 책동해도, 미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직후 일본의 핵야망은 또 다시 꿈틀거렸지만, 일본은 중국이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핵야망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미국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3. 고용간첩 도미탈주극으로 파탄된 대만의 핵개발사업

 

1988년 1월 9일 미국 서북단에 있는 워싱턴주 씨애틀-타코마 국제공항에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홍콩발 미국 민항기에서 내린 중국인 한 사람이 특별입국절차를 마치더니 중앙정보국 전용차량을 타고 순식간에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 중국인은 미국 중앙정보국에게 포섭되어 오랜 기간 대만에서 고용간첩으로 암약해온 장셴이(張憲義)였다. 그는 당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대만 중산과학연구원 제1연구소 부소장이었다. 1988년 1월 13일 장셴이는 미국 연방의회 비밀청문회에서 대만의 핵무기개발에 관한 극비정보를 털어놓았다. 첩보영화장면처럼 흘러가는 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대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만도 중국의 첫 핵시험에서 자극을 받고 핵야망을 품었다. 대만이 중산과학연구원을 설립하고 ‘신주(新竹)계획’이라는 이름의 핵무기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1969년이었다. 당시 중산과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장셴이는 미국에 유학하였는데, 그가 미국에서 핵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때는 1973년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대만이 핵무기개발사업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다시 말해서 장셴이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대만 국립칭화대학에서 핵공학을 공부할 때부터 그를 포섭하여 고용간첩으로 육성하였다. 

 

대만은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던 1980년에 기존 ‘신주계획’을 ‘타오위안(桃園)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핵무기개발사업을 가속화하였는데,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이 가속화될수록 장셴이의 간첩활동도 더욱 대담해지고 활발해졌다. 대만은 핑둥(屛東)현에 건설된 주퍼(九鵬)지하시설 안에 각종 핵공학설비들을 들여놓고 플루토늄추출기술을 확보하였고, 연속적인 고폭시험으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핵탄두운반수단을 만들기 위해 ‘텐마(天馬)계획’이라는 이름의 탄도미사일개발사업도 병진시켰다. 그리하여 대만은 늦어도 1989년까지 핵무기개발을 완료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대만 중산과학연구원 경내에 있는 연구개발전시관 외부를 촬영한 것이다. 중국의 첫 핵시험에서 자극을 받은 대만은 1960년대 후반에 핵무기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대만은 1969년 중산과학연구원을 창설하고, '신주계획'이라는 이름의 핵무기개발사업에 집착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던 1980년에 대만은 기존 '신주계획'을 '타오위안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핵무기개발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리하여 대만은 늦어도 1989년까지 핵무기개발을 완료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은 20여 년 동안 대만 핵무기개발사업의 핵심부에 박아둔 고용간첩 장셴이를 1988년 1월 8일 미국으로 빼돌려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파탄시켰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의해 주한미국군 제7사단이 전격 철수되자 안보불안에 사로잡힌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을 추진하던 중 미국의 제지를 받고서도 계속 강행하다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김재규의 총에 암살당했고, 중국의 국가핵무력 완성에 자극을 받은 대만 총통 장징궈는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을 추진하였으나 미국 중앙정보국 고용간첩 장셴이와 그의 가족이 도미탈주한 사건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고 비명횡사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핵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 대만, 일본은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만일 대만이 핵무기를 만들고 독립을 선포하면, 중국은 즉각 대만을 복속시키는 통일전쟁을 단행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핵보유국과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따르는 미국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대만을 중국에게 넘겨주게 될 판이었다. 1987년 중국-대만-미국 삼각관계는 극도의 긴장 속에 휘말렸다.   

 

중국이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가는 씨나리오는 미국에게는 대재앙인데, 미국이 그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20여 년 동안 대만 핵무기개발사업의 핵심부에 박아둔 고용간첩 장셴이를 미국으로 빼돌려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파탄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1988년 1월 8일에 일어난 장셴이와 그 가족의 극적인 도미탈주극으로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은 파탄되었다. 장셴이의 도미탈주극을 보고받고 심한 충격에 빠진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는 병석에서 피를 토하다가, 장셴이가 미국 연방의회 비밀청문회에서 대만의 핵개발사업에 관한 극비정보를 털어놓은 바로 그날 숨을 거두었고, 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말을 잘 듣는 리덩후이(李登輝)가 권좌에 올랐다. 리덩후이는 미국이 정해준 비핵화씨나리오에 따라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하였다.  

 

그렇다면 대만은 핵야망을 영구히 포기하였던가? 리덩후이가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한 때로부터 18년이 지난 2007년 11월 11일 중국 홍콩에서 발간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대만이 핵보유국인 인도로부터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에 관련된 기술지원을 받고 있다는 폭로기사였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1998년 5월 인도가 핵시험에서 성공하였을 때 인도 국방장관으로 재직하였으며, 평소에 중국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쉬리 조지 퍼난데스(Shri George Fernandes)는 2004년 11월 대만을 처음 공개적으로 방문하여 대만 총통 천수이볜(陳水扁)을 만난 이후 여러 차례 비공개로 대만을 방문하였는데, 대만에 갈 때마다 그는 총통의 안보자문기관인 국가안전회의 인사들을 비밀리에 만났고, 대만 국가안전회의 인사들도 여러 차례 인도를 비밀리에 답방하여 인도 국방부 관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만의 야당인사는 2007년 10월 19일 대만 입법원에서 대정부질의를 하면서 천수이볜 정부가 인도의 전직 국방장관과 핵무기개발전문가들을 비밀리에 대만으로 초청하였다고 폭로하였다. 

 

대만이 인도의 기술협력을 받으며 핵무기개발을 재개하였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는 보이지 않지만, 양자 사이의 비공개 교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2020년까지 대만을 복속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국이 대만의 분리독립책동을 억제하려는 군사활동을 대만 주변에서 계속 벌이고 있는 오늘의 긴장된 정세에서 대만이 또 다시 핵야망을 추구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4.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과 저우언라이의 오판

 

1960년대 말에 핵탄두를 개발한 중국은 그것을 운반할 탄도미사일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0년 1월 30일 중국은 둥펑-4 중거리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다. 2단형 로켓으로 설계된 이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실전배치되면, 미국의 서태평양전략거점인 괌(Guam)을 사정권 안에 둘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은 1970년 4월 24일 중국의 첫 인공위성 둥팡홍(東方紅)-1호를 탑재한 위성운반로켓 창정(長征)-1호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렸다. 이것은 중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국가핵무력 완성을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감시해오던 미국은 국가안보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신흥 핵보유국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수밖에 없었다. 닉슨 대통령은 자기의 심복 헨리 키씬저(Henry A.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대중관계개선을 추진하라는 특명을 주고, 그를 베이징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1971년 7월 9일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키씬저 미국 대통령 밀사의 비밀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철군지역들을 지적하였는데, 그가 중요순위에 따라 열거한 지역은 베트남, 대만, 한반도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관한 심층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은 베트남중부전선 케산전투에서 미국군이 패한 이후 베트남에서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고,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이후 대만에서도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닉슨은 1968년 1월 23일 미국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해군에게 나포된 사건, 1969년 4월 15일 미국 첩보기 EC-121이 동해 상공에서 조선인민군 공군 전투기에게 격추당한 사건으로 핵제국의 체면이 무참히 짓밟힌 한반도에서도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고 생각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71년 7월 9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한 미국 대통령 밀사 헨리 키씬저와 상봉하는 장면이다. 1960년대 말 국가핵무력 완성을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감시해오던 미국은 국가안보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신흥 핵보유국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자기의 심복 키씬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대중관계개선을 추진하라는 특명을 주고, 그를 베이징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저우언라이-키씬저 비밀회담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관한 심층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만일 저우언라이가 정세를 오판하지 않고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였더라면, 닉슨은 자기의 철군구상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고, 그런 정세급변에 대처하지 못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고, 평화통일을 천명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김대중 정부와 북측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에 제시된 조국통일 3대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을지 모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969년 8월 21일 미국 쌘프랜시스코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닉슨은 박정희에게 “북의 도발이 계속되기 때문에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철군을 두려워하는 박정희를 속인 거짓말이었다. 닉슨은 자신을 수행하여 한미정상회담에 배석한 윌리엄 포터(William J. Poter) 주한미국대사를 한미정상회담 직후 따로 부르더니, 주한미국군 철수훈령을 곧 내리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은 닉슨 대통령의 철군준비지시를 받고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런데 키씬저가 철군을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닉슨은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던 자신의 구상을 접고, 감군훈령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닉슨의 감군훈령에 따라, 미국 국방부는 1971년 3월 27일 주한미국군 제7사단을 전격 철수하였고, 남겨둔 제2사단은 서부전선 방어임무를 한국군 전방사단에게 넘겨주고 뒤쪽으로 물러서게 조치하였다. 

 

키씬저는 왜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하였을까? 이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주는 문서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그는 두 가지 반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주한미국군이 철수하는 경우,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어 한국을 잃어버리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에 키씬저는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고, 미국이 한국을 잃어버리는 경우, 정세급변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이 핵야망을 다시 추구하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에 키씬저는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닉슨의 철군구상은 키씬저가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제7사단만 철수하였는데, 당시 그런 내막을 알지 못한 중국은 제7사단 철수가 주한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완전히 철수하는 ‘서막’인 것으로 오판하였다. 미국군이 베트남과 대만에서 각각 철수하기 훨씬 전에 한반도에서 먼저 제7사단이 전격 철수했으니, 중국이 그렇게 오판할 만도 했다.  

 

중국이 그런 오판에 빠져 있었던 때, 다시 말해서 주한미국군 제7사단이 철수된 때로부터 약 석 달 뒤, 키씬저가 베이징에 나타났다. 그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일본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1971년 7월 11일 베이징에서 키씬저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25년 뒤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본은 강해졌다. 만일 지금 원동지역에서 미국군이 모두 철수하면, 일본을 강화시켜 아시아 나라들을 통제하는 데서 미국의 전위대로 내세우려는 것이 미국의 목적”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일본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키씬저에게 들이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키씬저는 미국이 일본의 해외팽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꺼내놓았는데, 저우언라이의 의심은 그런 답변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1971년 10월 22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2차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키씬저에게서 확답을 받아내기 위해 이렇게 다그쳤다. “나는 한 마디 덧붙고 싶다. 만일 당신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남조선에서 미국군을 철수하는 것이라면, 미국군을 일본군으로 대체하는 것도 당신들의 목표인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이 물음에 키씬저는 이렇게 답변했다. “주한미국군을 일본자위대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일본자위대의 대만 파병에 대해 내가 어제 언급했던(반대했다는 뜻-옮긴이) 일반적인 원칙과 똑같다. 미국은 일본의 군사팽창을 반대한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을 오판한 저우언라이는 주한미국군을 일본자위대로 대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키씬저의 답변을 믿을 수 없었다. 일본자위대가 한국에 파병되는 최악의 씨나리오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저우언라이는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만일 저우언라이가 정세를 오판하지 않고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였더라면,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해 수세에 몰린 닉슨은 자기의 철군구상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며, 그런 정세급변에 대처하지 못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고, 1971년 4월 27일 대선에서 ‘3단계 평화통일’을 천명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김대중 정부와 북측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에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구현하여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을지 모른다. 

 

당시 베트남이 통일된 과정을 보면, 1968년 1월 21일부터 7월 9일까지 계속된 케산전투에서 패한 미국은 1973년 3월 29일 베트남에서 미국군을 철수했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민족은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베트남의 역사적 경험은 미국의 패배로부터 철군까지 5년, 철군에서 통일까지 2년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우리 민족에게 다가왔던 철군의 기회는 사라졌고, 전쟁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전체제는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 민족은 금은보화보다 더 귀중한 두 번째 기회를 맞았다. 어떤 기회인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으로 미국이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하였고, 근 반세기 전에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철수를 구상하였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대통령도 주한미국군 철수를 구상하고 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미핵대결에서 승리한 기세로 주한미국군을 철수시키고 자주통일을 실현하려는 전략구상을 추진하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토록 험악했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하에서도 3단계 평화통일론을 외쳤던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남북관계개선에는 상당히 적극적이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변화들이 정전-분단체제를 뒤흔드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 조미정상회담, 조중정상회담이 잇달아 성사되면서 종전선언 발표가 일정에 올랐고, 철군기회가 마침내 시야에 들어왔다. 

 

위와 같은 정세인식에 이르면, 올해 1월부터 주체적 조건들과 객관적 조건들이 서로 착착 맞물리면서 조국통일정세가 성숙되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나니, 8천만 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 몇 해 안에 통일공화국을 건설할 눈부신 내일을 뉘라서 감히 외면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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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폼페이오 방북 ‘전격 취소’ 미스터리... 백악관 막후에서 무슨 일이?

핵심 정책결정권자 모두 백악관 불려들어가 통보받아... 이번 ‘뒤집기’ 카드는 실패 가능성 농후

김원식 전문기자
발행 2018-08-26 14:51:21
수정 2018-08-26 15: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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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을 백악관으로 불려 대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을 백악관으로 불려 대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댄 스커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 트위터
 
 

“하룻밤 지나고 나니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바뀌었다. 정치뿐만 아니라, 외교관계도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을 자신하는 그에게 누군가가 보고나 전화를 한 것이 분명하다”

지난 24일(이하 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하루 만에 전격 취소한 배경에 관해 워싱턴의 한 소식통이 전한 말이다. 누가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바꾸게 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그날 오전 백악관이 급박하게 돌아간 것은 분명하다.

24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의 호출을 받은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비롯해 새로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그동안 대북 실무회담 총책을 맡았던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그리고 북한과 막후 실무협상을 주도하는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이 모두 백악관으로 불려들어갔다.

댄 스커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이 25일, 공개한 그날 백악관 회의 사진을 보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물론 존 켈리 비서실장을 포함해 백악관 대변인 등 주요 참모진도 모두 배석했다.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전격 방북 취소를 거의 통보한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을 백악관으로 불려 대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을 백악관으로 불려 대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댄 스커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트위터

주요 외신과 외교 소식통의 전언에 따르면, 백악관은 물론 국무부의 주요 핵심 실무자들도 급작스러운 전격 취소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특히, 방북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을 개최해 방북 내용을 설명하려고 준비하던 국무부 관계자들은 거의 멍하니 언론 발표를 보고 취소 사실을 알아야 했다.

백악관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들도 전혀 전격 취소 발표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분위기다. 우크라이나를 방문 중이던 존 볼턴 보좌관도 스피커폰을 통해 백악관 회의에 참여해서 트럼프 대통령의 통보를 들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의문이 남는다. 대통령이 중요한 외교관계 문제를 급히 결정하는데, 만약 중앙정보국도 백악관 NSC도 국무부도 전혀 몰랐다면, 누가 미국 대통령을 움직였을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존 볼턴 보좌관을 중심으로 하는 대북 강경파 일원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번에도 ‘빈손 귀국’을 한다면, 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추론마저 난무한다.

북미관계 자랑하던 트럼프, 하루 만에 스스로 궁지에 빠진 꼴

트럼프 대통령이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북한과 중국에 양보를 더 얻어내기 위해 또 ‘판 뒤집기’의 충격 전략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별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불과 하루 전까지도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랑하던 그가 “비핵화와 관련해 충분한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을 바꿨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가짜 뉴스’라고 비난하던 미 주류 언론들은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북미협상이 교착된 좌절감의 첫 공개적인 신호”라는 비판이 가세하면서, 온통 트럼프 대통령의 그동안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칼럼들이 넘쳐난다.

북·중의 양보를 얻기 위해 던진 승부수라고 해도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기도 전에 내부 비판의 치명상을 입고 있는 셈이다. 이 치명상을 각오하고도 북·중 양국에서 양보를 받아낼 가능성도 크지 않다. 당장 중국 외교부는 중국 탓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무책임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북한도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의 사정하고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름대로 핵 실험장 폭파는 물론 미군 유해까지 송환해가면서 북미공동성명을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북한이 똑같은 양보는 하지 않고 초강수를 계속 두는 미국에 이제는 양보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 취소 하루 전까지도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에 관해 칭찬과 친밀감 일변도로 북미관계를 설명해 왔다는 것이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다. 한미 연합군사훈련도 중단하면서, 북한 칭찬으로 일관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대북 강경책을 구사하려면, 자신의 기존 말을 다 뒤집어야 하기 때문이다.

온통 미 주류 언론들이 ‘차라리 안 가는 것이 잘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트럼프 대통령을 가장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는 말에 불과하다. 미 의회전문 매체 ‘더 힐’은 이에 관해 25일,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 방북 취소는 ‘실수’였다고 비판했다.

미 전문매체들 “트럼프 결정은 ‘실수’... 한국인들 ‘우려’ 더 커져”

이 매체는 “폼페이오 장관은 평양에 가서 김정은 위원장의 진짜 의도를 테스트해야 했다”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과 대화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골치 아픈 문제는 더욱 뒤로 미뤘다(kick the can farther down the road)는 이유를 발표했다”고 꼬집었다.

‘더 힐’은 또 다른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국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무언가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비핵화라는 큰 것을 원한다면, ‘평화 협정’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큰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관해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25일, 장문의 기사를 통해 한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관한 ‘염려(anxiety)’가 확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한국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선언은 보장하지 않으면서, 단지 김정은 위원장과 회담한 것을 자신의 ‘승리(trophy)’라고 치부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매체는 또 많은 한국인들은 북한에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협력이 필요한 시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전쟁을 개시한 것에 실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이는 첫 만남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급한 개인 성격과 관계가 있다고 우려한다고 설명했다.

‘폴리티코’는 특히, 한국 매체의 한 전문기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트럼프 개인의 성격과는 관계없이 그가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를 지지할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그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 점점 의문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또 다른 한국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를 가져온다면, 그의 접근법이나 태도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은 없다”면서 “하지만 지난해가 재앙(disaster)이었듯이 지금도 미래는 불확실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희망은 있지만, 어쩌면 다시 험악한(nasty)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19년 전, 트럼프 “지금 협상하지 않으면, 큰 어려움 직면할 것” 예언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부터 19년 전인 지난 1999년 10월, 자신의 자서전 출판을 계기로 미 NBC 방송에 출연해 “북한의 핵 개발을 멈추려면, 지금 협상을 해야 한다”며 “북한이 우리(미국)가 협상에 진지하다고 생각하면, 협상에 응할 것이고 문제가 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99년 11월 미 CNN 방송에 출연해 “지금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년 후에는 더 엄청나게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99년 11월 미 CNN 방송에 출연해 “지금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년 후에는 더 엄청나게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미 CNN 방송화면 캡처

그는 같은 해 11월에도 미 CNN 방송에 출연해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면서, “지금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년 후에는 더 엄청나게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결국, 북한과의 협상은 고사하고 더욱 강경책을 펼친 조지 W. 부시 정권의 등장으로 현재까지 그의 예언은 적중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폼페이오 방북 전격 취소’ 카드는 불발탄을 넘어 트럼프 자신의 발목에서 터질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 국내적으로는 자신의 말도 책임지지 못하고 대북 정책에 관해 ‘오만(hubris)’에 가득 찼음이 드러났다는 비판이 봇물을 이룬다.

한국 정부(외교부)도 공식적으로는 “아쉽게 생각한다”고 발표했지만, 늘 ‘긴밀 공조’를 강조하던 미 백악관의 처사의 당혹함을 넘어 혼란에 빠지고 있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되새겨 들어야 할 말은 어쩌면 바로 자신이 19년 전에 스스로 했던 “지금 북한과 협상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엄청나게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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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쇼크'는 헛소리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다른 말 하는 취업자 통계와 고용보험 행정통계

 

 

 

일주일째 '고용 쇼크'를 놓고 온갖 주장과 해석이 범람하고 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7월 고용 동향' 자료 하나를 놓고 벌어진 일이다. 여기에 나온 수치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논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일방적으로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재앙을 불러왔다"는 공격, 그리고 "원인을 정확히 찾기 어렵다"는 정부의 어설픈 변명뿐이다.
 
놀랍게도 통계청 발표자료의 적합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논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일수록 <인사이드 경제>는 언제나 삐딱한 접근법을 선호한다. 도대체 그놈의 '7월 고용 동향'의 실체가 뭐야? 조사는 어떻게 하는 거고 결과는 신뢰할 수 있는 건가? 고용 지표 조사를 위해 이것보다 더 좋은 자료나 데이터는 없는 거야? 아무도 묻지 않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고용 쇼크’ 논쟁에 뛰어들어 보기로 했다.
 
표본 추출에 기반한 통계청 조사 
 
통계청 발표 자료의 원본은 매월 시행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이다. 7월에 시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취업자 수는 약 2708만3000명이라고 한다. 작년 7월에는 2707만800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1년 뒤에 취업자 수가 고작 5000명 늘어난 것이다. 올해 1~4월에는 전년 동월 대비 최소 10만 명 이상씩 늘었는데 7월에는 5000명으로 나왔으니 ‘쇼크(shock)’라는 거다. 
 
<인사이드 경제>가 던지는 기본 질문은 이거다. 통계청이 2700만에 달하는 취업자를 모두 조사했을까?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실업자, 비경제활동인구, 취업자를 구분해야 하니 5000만 국민 전체를 조사해야만 취업자 수를 정확히 추산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10~20만 명도 아니고 5000만 명을 무슨 수로 매월 조사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럼 통계청은 저 숫자를 대체 어떻게 내놓는다는 말인가. 통계학적으로 검증된 ‘표본 추출’ 방식에 의존한다. 경제활동인구조사의 경우 전국의 1737개 조사구에서 약 3만5000 가구를 선정해 조사를 벌인다고 한다. 이 표본들은 노후화 방지를 위해 매월 970가구씩 교체된다. 
 
한두 번 조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매월 하는 것이니 이런 표본 조사의 신뢰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합리적인 가정’일 뿐이다. 전수 조사가 아닌 이상 표본 조사는 통계적으로 반드시 오차를 가질 수밖에 없다. 표본 설계가 얼마나 정밀하가에 따라 오차율 범위를 줄일 수 있을 뿐, 표본 조사를 하는 이상 오차를 배제할 수 없다.
 
오차율 범위에 따라 실제 취업자가 5000명만 증가했을지, 아니면 10만 명 이상 증가했을지, 오히려 취업자가 줄었을지도 모른다. <인사이드 경제>는 통계청 조사의 신뢰도 전체를 깔아뭉갤 생각이 아니다. 표본조사에서 오차가 불가피하다면, 다른 조사를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연합뉴스

전수조사에 입각한 행정통계 노동시장 동향 
 
참조해볼 만한 다른 자료가 하나 있다. 박근혜 정권 시절인 2016년 6월부터 고용노동부가 매월 발표하고 있는 ‘행정통계로 보는 노동시장 동향’이다. 이건 주로 고용보험 DB와 Work-Net 등을 활용한 행정통계인데,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데이터가 다뤄지므로 사실상 전수조사나 다름없다. 
 
고용보험 DB를 활용하면 매월 피보험자 전체 규모를 1명 단위까지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고용보험 신규가입자, 피보험자격 상실자 수도 파악할 수 있어서 매월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노동자, 해고·계약해지를 당하는 노동자 규모도 파악이 가능하다. 가입자들의 연령·성별·지역·산업도 알 수 있기에 통계자료를 연령별·성별·지역별·산업별로도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이 통계자료에는 분명한 약점이 있다. 우선 ‘고용보험에 가입된 노동자’들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활동인구 중 자영업자들이 기본적으로 빠지게 된다. 또한 고용보험 가입대상에서 제외되는 월 60시간 미만(주 15시간 미만)을 일하는 초단시간 노동자와 공무원들이 빠진다. (공무원이 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아울러 여러 가지 이유로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노동자들도 있다. 사용자들이 4대 보험 납부를 꺼려 근로계약서조차 체결하지 않는 영세기업이나 사각지대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고용보험 행정통계는 전수조사에 가깝다는 장점이 있긴 하나, 자영업자·공무원·초단시간·사각지대 노동자들이 통계에서 제외된다는 분명한 약점과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앞서 살핀 것처럼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역시 표본조사라는 약점을 갖고 있지 않던가. 고용지표를 정확히 보여주는 완전무결한 통계자료가 있다면 좋겠지만, 각자 약점을 가진 자료들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자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자료를 동시에 참조하되, 각각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옳지 않을까.
 
고용보험 피보험자는 매년 30만 명씩 꾸준히 증가 
 
그래서 2개의 자료를 동시에 보기로 했다. 일자리 통계의 경우 계절적 요인이 있으므로 전월과 비교하는 것보다 전년 동월과 비교하는 것이 좋다. 가장 최근 통계가 2018년 7월 데이터이니 매년 7월 현재 취업자수(경제활동인구조사)와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를 아래와 같이 나타내 보았다. 
 
자, 어떤가?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은 2개 자료의 숫자 규모이다. 자영업자·공무원·초단시간 노동자가 빠진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치가 취업자 수치에 비해 절반 가량으로 떨어진다. 이를테면 지난 7월 현재 취업자 수는 2708만 명인 반면,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는 1318만 명이다. 이건 고용보험 행정통계가 가진 약점과 한계를 반영한다.
 
그러나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을 살펴보자. 취업자 수의 경우 1.13%, 1.79%의 증가율을 보이며 매년 약 30~40만 명씩 늘어나다가 갑자기 올해에 고작 0.02%, 작년 대비 5000명 늘어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는 매년 2~3%씩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똑같은 일자리 관련 통계인데 결과치가 왜 이렇게 다른 걸까?
 
다행히 2개의 통계 모두 산업별 데이터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전체 규모만 보는 것보다 산업별 세부 데이터를 보면 좀 더 변별력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2개의 통계자료로부터 주요 산업별로 매년 7월 데이터만 추출해 아래와 같이 표를 만들어 보았다.
 
농림어업의 경우 당연히 대부분의 농민들은 피고용인이 아니라 자영업자로 분류될 것이다. 교육서비스업의 경우 대표적인 공공분야여서 공무원으로 분류되는 종사자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 2개의 산업에서 피보험자 숫자는 취업자에 비해 훨씬 작게 나타나며, 이런 부분은 고용보험 행정통계가 가진 약점 중 하나이다. 
 
제조업을 한번 보자. 한국 제조업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피보험자 수 증가율도 이를 반영하듯 느림보 걸음이다. 그런데 취업자 수 통계는 마이너스에서 3%대로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마이너스로 널을 뛴다. 제조업의 경우 취업자와 피보험자 수의 차이도 크지 않기에 전수조사에 가까운 피보험자 수의 변화가 좀 더 현실을 잘 반영한다고 보는 게 옳다. 이런 지점은 통계청 표본조사의 명백한 한계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 특히 도소매와 숙박음식 분야에서 일자리 성장률이 높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일자리의 질적 측면에선 따져볼 얘기가 많지만, 어쨌건 이 분야 일자리가 늘고 있다는 건 평범한 이들도 체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피보험자 숫자 증가율은 매우 큰 폭인데 반해, 취업자 수는 제조업처럼 증가와 감소를 오락가락한다. 점점 이상해지는데? 
 
출판·영상·통신과 전문과학기술 분야 역시 2개의 통계자료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피보험자 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반면 취업자 수는 -5%에서 8%까지 정말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널뛰기를 한다. 사업서비스와 개인서비스 등 일자리 성장을 가져온다고 알려져 있는 서비스업의 경우에도 2개의 통계자료는 아무런 상관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보건복지 분야, 이것 하나만큼은 2개의 자료가 일치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자리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복지 수요가 점점 증가함에 따라 보육시설, 복지관, 상담소 등이 포함되어 있는 비거주 복지시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 쇼크' 논쟁에 뛰어들며 
 
고용보험 자료만 봐서는 아무리 우울하게 해석해도 '고용 쇼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피보험자 규모 역시 매년 30만 명씩이나 증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용 쇼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원인을 찾는 게 아니다. 도대체 왜 2개의 통계가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고용보험 행정통계만을 본다면 통계청 자료와는 정반대의 얘기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작년까지는 두 자료 모두 매년 30만 개의 취업자 내지 피보험자가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자리 성장을 선도하는 것은 고용보험 피보험자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즉, 고용보험 가입조차 할 수 없는 영세한 일자리가 아니라 보험에 가입하는 상용직 일자리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의 경우 전체 일자리의 ‘양’은 늘어나진 않았지만, 고용보험에 가입하는 괜찮은 일자리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어서 일자리의 ‘질’은 좋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2015년에 최저임금 제도를 다시 도입한 독일의 경우, 고용보험에 가입하는 괜찮은 일자리 71만3000개가 늘어난 반면, 고용보험 가입조차 안되는 ‘미니잡(Mini Job)’ 등 안 좋은 일자리 14만 개가 사라졌다는 통계도 나오지 않았던가! (☞ 관련 기사 : “독일서 최저임금 올렸더니, 깜짝 놀랄 변화가 일어났다”) 
 
<인사이드 경제>는 저런 자료들을 들먹이며 "한국의 고용 문제 전혀 없다"는 주장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다. 이미 평범한 이들도 체감하고 있듯이, 한국의 고용과 일자리 문제는 좋은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도대체 그 문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무엇인지 정확히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울러 <인사이드 경제>는 문재인 정권의 정책을 방어하거나 비호해줄 생각도 전혀 없다. 문재인의 ‘노동 존중’은 허상이거나 사기에 불과하며, 문재인의 경제정책은 박근혜 적폐정권의 것과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한국의 고용과 일자리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이전 정권 탓이 아니라 이전 정권과 똑같은 길을 걸으며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책임이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인사이드 경제>는 경제는 물론이고 어떤 학문이건 석·박사 학위 한 장 갖고 있지 않다. 무식하니까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학위 하나 갖지 않은 필자의 눈에도 전문가들의 헛소리들이 보이니, 보이는 만큼 떠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평범한 시민들이 던지는 아래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고용 쇼크' 논쟁에 뛰어들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도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 '소득 주도 성장'은 일자리 정책인가? 
▴ 정말 최저임금 상승 때문에 일자리와 고용에 문제가 생긴 걸까?
▴ 최저임금 말고 일자리와 고용, 소득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일까?
▴ 그렇다면 지금 일자리·고용 문제의 핵심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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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면장댁 셋째’ 이해찬 다잡은 딱 세줄 아버지 엽서

‘청양 면장댁 셋째’ 이해찬 다잡은 딱 세줄 아버지 엽서

등록 :2018-08-25 19:44수정 :2018-08-25 21:35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225
민주당 새 선장 이해찬 대표 들여다보기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 아버지 큰 영향
민청학련·김대중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
6월항쟁 뒤 평민당 입당 13대 국회 출마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진보에 기여”
“리더는 잘 맞지 않아···리더 도와주는 장기”

2010년 “2012년 정권교체는 어렵다” 예측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 지내며 재집권 준비

“민주개혁진영 정체성·가치·비전 명확해야”
늦게 출마했어도 역량·경험은 ‘준비된 대표’
“한 표 줍쇼!”

 

“한 표 주소!”

 

“한 표 줘유!”

 

2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 폭소와 박수가 터졌습니다. 기호 3번 이해찬 후보가 연설 말미에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 얘기를 하며 대의원들에게 표를 구걸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존심 강한 저 사람이 표 구걸을 다 하네”라고 촌평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7선의 전직 국무총리 이해찬 의원(66)이 새 대표에 당선됐습니다. 어떤 정치인을 알고 싶을 때 그가 과거에 썼던 글과, 했던 말을 찾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역사의 고비에서 시대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서전이 있었습니다. <청양 이 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2007, 푸른나무)입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쓴 책입니다. 책 표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발표를 한 뒤 나는 아버님 산소를 찾았다. 사람들 눈에는 으레 하는 ‘의식’이나 ‘절차’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청양 이 면장’께 고하고 싶었다. 당신의 짧지만 한없이 무거운 당부를 잊지 않겠다고. 정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번잡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이 면장 댁 셋째 아들’로서 그 속에서도 담백하고 가식 없이 살아보겠노라고.”

 

 

이해찬 대표는 1952년 7월 10일 충남 청양에서 출생했습니다. 청양초등학교,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음 해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뒤 민청련과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활동하던 재야인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서전도 아버지 얘기로 시작합니다.

 

 

 

나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 재판이 끝나고 대전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던 한겨울의 어느 날 , 엽서를 한장 받았다 . 아버님이 보낸 엽서였다 . 아버님은 서대문구치소에 있을 때 한 번 면회를 오셨고 , 그 뒤 재판정에도 한 번 오셨지만, 교도소로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으셨다 .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추운 겨울에 동상 걸리지 않도록 해라 .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해라 .

 

애비 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딱 세 줄이었다. 나는 그 엽서를 보고 혼자 가만히 웃었다.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 그 엽서는 아버님이 살아오신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이기도 했다.

 

 

자서전에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진로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한겨레신문 >에 갈 생각을 했다 . 재야운동을 할 때 늘 정책이나 기획 분야를 맡아 정세 분석이나 글 쓰는 일에 익숙했고 , 예전부터 책이나 잡지 ·출판에 관심이 많아서 나한테 잘 맞을 것 같았다 . 그런데 평민당(평화민주당)이 재야인사들한테 영입을 제의해 왔다 .

 

 

 

이 대목을 읽으며 만약 이해찬 대표가 정치를 하지 않고 <한겨레신문>에 왔다면 뛰어난 논설위원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해찬 대표는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에 입당했고 1988년 총선이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평민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민정당의 김종인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수한 후보 등 거물들을 꺾고 당선됐습니다. 재야인사에서 정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자서전에는 이해찬 대표 자신의 정체성이나 정치적 스타일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정치인 이해찬’의 본질을 잘 묘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개량주의자라고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인 주장에는 잘 끌리지 않는 개량주의자이다 .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가장 공감했던 말은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배우라 ”는 말이었다 .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는 불성실하고 불철저한 근본주의자보다는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사회의 진보에 훨씬 더 기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즐겨 쓰던 말 중에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이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해찬 대표를 좋아했던 이유가 바로 이해찬 대표의 이러한 가치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야 출신인 이해찬 대표가 처음부터 균형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89년 출판한 <이해찬 평론집 : 민주와 통일의 길목에서>라는 책에서 평민당 초선 국회의원이었던 이해찬 대표는 자신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을 꽤 진솔하게 써 놓았습니다.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강신옥 의원, 평화민주당의 이해찬 양성우 의원이 ‘우리에게 정치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좌담을 했습니다. 사회를 본 이해찬 의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노 의원께서 말씀한 것처럼 정치에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 집단들이 여러 가지 로비와 여론의 형태로 압력을 가해오기 때문에 단순히 이념만을 가지고 정치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념 이외에 이해를 대변하고 조정하는 문제가 우선 재야에서 하던 일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재야에서는 어떤 이념이다 통일문제다 노동자들의 권익 문제다 하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저 없이 밀고 나가면 됩니다. 일이 해결되든 안 되든 하다 보면 일정한 성과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데 적어도 자기 운동으로서의 자기실현은 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재야운동권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많은 요구를 하지 않아요. 적어도 직접 일상적인 자기 문제를 호소하는 일이 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정당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해가 다 쏟아져 들어오는 곳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것을 선별하고 중점을 두고 하는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중요한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만 열심히 추구하기 어려운 그런 구조상의 문제들에서 재야와의 차이를 느낍니다.(중략)

 

이렇듯 각 부문에서의 운동성과 정당의 노력이 불가분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것이 국민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능한 한 그러한 운동과 정당 간에 괴리를 줄이도록 하는 작업이 앞으로 계속되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고, 그동안에 국회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빨리 극복하려면 이번 국회에서처럼 약간의 성과라도 국민들에게 바로바로 알려지고 그 반응이 돌아오고 하면 정당이나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성이 높아지리라 봅니다. 그리고 당내에서부터 그리고 국회 내에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재야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어떻습니까? 이해찬 대표는 다른 자리에서도 여러 차례 자신이 현실 정치를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성장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으며, 재야에서 받아들였던 민족경제론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2007년 시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처음으로 자서전까지 써가며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패배했습니다. 정동영-손학규-이해찬 후보가 겨룬 경선의 승리자는 이해찬 대표의 친구였던 정동영 후보였습니다. 정동영 후보는 2007년 대선에서 참패했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2008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5월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의 의정보고서를 냈습니다. 의정보고서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저는 올해 20년간의 관악구 국회의원 생활을 마감하고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 관악주민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에 대한 보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관악이 길러낸 정치인 이해찬으로서 좀 더 큰 시야에서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여러분께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민족사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 독립투사 운암 김성숙 선생님의 기념사업회 일을 맡았습니다 . 아울러 한국 개혁진영의 정체성과 노선을 복원하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재단법인 광장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기로 하였습니다 . 관악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을 관악주민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

 

 

 

2010년 1월 이해찬 대표는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이었습니다. 이때 출판된 <문제는 리더다>(2010, 메디치)라는 책이 있습니다. 방송인 정관용씨가 남재희, 김종인, 윤여준, 이해찬 네 사람과 나눈 대담을 묶은 것입니다. 이 시기 이해찬 대표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우선 자신의 정치적 자질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나옵니다.

 

 

 

나는 리더가 잘 맞지 않아요 . 리더를 도와주는 데는 대단한 장기 ( 長技 )가 있어요 . 김 대통령도 그렇고 노 대통령도 그렇고 , 내가 두 번 선거에서 모두 기획본부장을 했는데 , 두 번 다 쉬운 전술이 아니었어요 . 그리고 굉장히 용의주도하게 해야지 허술하게 해서 되는 게 아니었어요 .

 

 

 

흥미로운 대목은 2010년 시점에서 내다본 정치 전망입니다. 이해찬 대표는 2012년 정권교체 가능성을 매우 낮게 봤습니다. 2017년에나 반전이 올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2012년 대선에서 야당이나 진보진영의 집권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 혹 2017년에는 가능할지 모르죠 . 민심의 역사적 반전 ( 反轉 )이 오는 시점이 있는데 , 그냥 오진 않아요 . 현재 이쪽 진영의 인물이나 역량으로 보면 2012년에 반전을 기대하긴 어려워요 . 그런데 한 십 년 하고 나면 국민들의 정서나 마음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 2017년에 가서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반전이 올 가능성이 있어요 .(중략 )

 

우리에게도 그런 식의 정권교체 내지 새로운 역할이 요구될 때가 올 텐데 그것에 맞춰서 2017년 후보는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거기에 누가 가장 적합할 건가를 생각하지요 . 7년 후면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할 텐데 , 그 시대와 국민들의 요구를 생각해보면 , 지금 40대 초중반에서 50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 앞으로 십 년을 앞두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 유시민 전 장관과 박원순 씨가 가시적인 후보고 , 2022년쯤이면 민노당의 이정희 의원도 가능하다고 봐요 . 상당히 야무지고 열정도 많고 , 2022년이면 나이가 50대니까 , 지금 페이스로 십 년만 열심히 하면 제 2의 노무현이 나올 수도 있어요 . 노 대통령이 초선을 40대 초반에 해서 13년 만에 대통령이 된 거거든요 . 이정희 의원은 능력도 있고 , 품성도 훌륭하고 , 제가 보기에는 유시민 , 박원순 , 이정희 정도가 2017년 , 2022년 후보로서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어떻습니까? 2010년 시점에서 이해찬 대표는 유시민, 박원순, 이정희 세 사람을 장래의 대통령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시민, 이정희 두 사람은 정치를 아예 그만뒀으니, 이제 박원순 서울시장 한 사람만 남았네요.

 

이해찬 대표는 공직에서 물러나 있는 기간에도 쉬지 않았습니다.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으로 수많은 좌담, 토론, 출판을 기획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활동이 모두 민주·개혁 세력의 재집권 준비였던 것 같습니다.

 

 

“나쁜 정치를 바로 잡고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선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현 집권당이 무능하고 사심이 가득하며, 오만하다 할지라도 대안이 되어야 할 비판 진영이 지리멸렬하다면 국민은 좌절하고 무관심하게 됩니다.

 

대안을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할 일은 민주개혁 진영의 정체성과 가치, 그리고 비전을 명확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 하고 내가 실현할 가치가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는지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이 선택할 근거가 마련됩니다.“(2011, 광장에서 길을 묻다 : 이해찬과 진보 지성 23인의 대화)

 

 

“저는 주로 정책을 다룬 사람인데, 그러다 보면 사회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자주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으면 자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 특성 가운데 핵심은 분단입니다. 분단된 나라는 지금 우리나라밖에 없죠. 분단 때문에 전쟁도 터지고, 각종 음해도 일어나고, 국방비도 많이 써야 하는 등 별일이 다 생기는 겁니다. 분단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구조적 제약입니다.

 

두 번째는 지역주의입니다. 지역주의 때문에 정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가 개방형 통상국가입니다. 우리는 수출 위주로 경제성장을 추진하다 보니 구조적으로 개방형 통상국가가 돼버렸어요. 이 구조를 조금 벗어나기 시작하면 경기가 불황으로 빠져버립니다. 네 번째는 사회의 양극화입니다.(중략)

 

이 구조 때문에 사회의 안정을 이룰 수가 없는 겁니다. 남북분단, 지역주의, 개방형 통상국가, 사회적 양극화, 이 네 가지는 쉽게 고칠 수 없습니다. 제도 몇 가지를 고친다고 해서 금방 바뀌지 않거든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생경제를 안정시키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과제죠. 김대중 대통령은 5년 동안 왜 못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5년 동안 왜 못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했잖아요. 5년, 10년 안에 고칠 수 있는 것이었으면 벌써 고쳤죠.”(2011,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이해찬 대표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세종시로 옮겨 다시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6·9 전당대회에 박지원 원내대표와 이른바 ‘이-박 연대’로 출마해 대표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에서 퇴진론이 터져 나와 대표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복당했습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세종시 국회의원 이외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발간된 ‘국회의원 이해찬 의정보고서 제 6호’는 세종시 관련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동안 국회 상임위원회에서도 전직 국무총리로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세종시 관련 정책 질의에 치중했다는 것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전언입니다. 이번 전당대회 대표 출마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뤄졌다는 정황 증거들입니다.

 

 

아무튼 이해찬 대표가 이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됐습니다. 출마는 갑작스럽게 이뤄졌지만 그의 인생과 가치관, 정치적 역량과 국정 경험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준비된 집권여당 대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한 축을 담당하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국정과 정치를 잘 이끌어주기를 기원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2007년 자서전 표지
2007년 자서전 표지
이해찬 대표의 가족
이해찬 대표의 가족

 

이해찬 대표의 어릴 때 모습
이해찬 대표의 어릴 때 모습

 

13대 총선 평민당 후보 벽보
13대 총선 평민당 후보 벽보

 

 

 

1989년 이해찬 평론집
1989년 이해찬 평론집

 

1989년 이해찬 평론집
1989년 이해찬 평론집

 

2008년 의정보고서
2008년 의정보고서

 

2010년 <문제는 리더다> 책 표지
2010년 <문제는 리더다> 책 표지

 

2018년 의정보고서
2018년 의정보고서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859206.html?_fr=mt1#csidxd3eb83cf8972d61966be37f4032c9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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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또 만날까'…이산가족 오늘 눈물의 이별

南가족, 작별상봉으로 마지막 인사한 뒤 버스로 귀환 예정

 

이 눈물로 그리움이 잊혀질까
이 눈물로 그리움이 잊혀질까(금강산=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둘째날인 25일 오후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남측의 박춘자(77)씨가 북측의 언니 박봉렬(85)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2018.8.25 jieunlee@yna.co.kr

 

(금강산·서울=연합뉴스) 공동취재단 백나리 기자 = 이산가족 2차 상봉 행사 마지막 날인 26일 남북의 가족은 작별 상봉을 마지막으로 다시 긴 이별에 들어간다.

이들은 이날 오전 단체로 작별 상봉을 하고 함께 점심을 먹는다.

재회의 기약이 없는 작별이라 1차 상봉단의 작별 상봉 때처럼 곳곳에서 눈물을 쏟으며 헤어짐을 아쉬워할 것으로 보인다.

작별 상봉이 끝나면 남측 가족들은 오후 1시 30분께 버스를 타고 금강산을 떠나 남측으로 귀환할 계획이다.

이로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27 정상회담에서 합의했던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마무리된다. 앞서 1차 상봉단이 20∼22일 금강산에 가 북측 가족을 만났고 이어 24∼26일 2차 상봉이 이어졌다.

이번 상봉행사에서는 65년 넘게 헤어졌던 남북 가족이 호텔 객실에서 가족만의 식사를 했다. 개별상봉은 상봉행사마다 있었지만, 개별식사를 한 것은 처음이다.

'눈물 흘리는 남매'
'눈물 흘리는 남매'(금강산=연합뉴스)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둘째 날인 25일 오후 북한 금강산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북측 안길자(최성순에서 개명, 85) 할머니가 남측 동생 최성택(82) 할아버지 등 가족들과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8.8.25 [뉴스통신취재단]
photo@yna.co.kr

 

nar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8/08/26 0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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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한민국 리콜 시스템을 망가뜨렸나

누가 대한민국 리콜 시스템을 망가뜨렸나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입력 : 2018.08.25 14:48:01

2013년 6월 26일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연구원들과 관계자들이 급발진 공개 재현실험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013년 6월 26일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연구원들과 관계자들이 급발진 공개 재현실험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자동차 결함 조사에 제작사들 비협조… 심평위 위원은 자동차 회사와 ‘긴밀한 관계’
 

“(자동차) 제작 결함을 연구하는 연구원은 13명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후진적이고 많이 모자란다.” 

8월 21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한 말이다. BMW 화재로 국내 자동차 안전관리체계를 들여다본 김 장관은 ‘시스템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제 막 취임 1년이 지난 장관도 한눈에 파악한 시스템의 문제점을 여태껏 아무도 몰랐을까. 아니면 문제를 알고도 그동안 방치하거나 감춰온 것일까. 

대한민국은 2017년 기준 연간 411만대를 생산하는 세계 6위의 자동차 생산국이자 세계적인 고급차 시장이다.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는 올해 2300만대를 넘어설 전망이다. 외형은 자동차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의 안전관리체계는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안전관리체계의 이면에는 로비와 회유로 잘못을 입막음하려는 기업과 이에 호응해온 소수의 전문가집단이 자리잡고 있다.
 

연구원 13명이, 하루 20~30건 처리 

문제를 살펴보려면 국내 자동차 결함 신고 과정부터 차근차근 따져봐야 한다. 자동차 결함이 발생하면 국토부 산하 자동차리콜센터에 신고하게끔 돼 있다. 지난해에만 5400건이 넘는 차량 결함 신고가 자동차리콜센터에 들어왔다. 대부분 차량 이상 증상으로 사고가 나거나 사고위험을 느낀 운전자들이 넣은 신고다. 

접수된 신고는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으로 전달된다. 자동차안전연구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결함조사기관이다. 한국소비자원에서도 결함 신고를 받아 조사할 권한이 있기는 하지만 안전운행과 관련된 사안은 자동차안전연구원 결함조사실 결함조사처에서 전담한다. 김 장관이 언급한 ‘연구원 13명’이 이곳 소속이다. 

원칙대로라면 연구원은 신고내용을 토대로 결함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자동차 결함 문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결함조사에 착수하기 전부터 온갖 난관에 부딪힌다. 13명의 연구원이 하루 20~30건이 넘게 접수되는 결함 신고를 받아 현장조사에 나서는 것 자체가 일단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연구원에서 조사에 착수할지 여부를 정할 권한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 조사에 나서야 하는지의 기준도 없다. 조사를 하려면 일단 국토부로부터 결함조사에 착수하라는 지시부터 받아야 한다. 문제는 국토부 지시를 받고 나가보면 너무 늦은 터라 제대로 조사를 못한다는 것이다. 조사가 지연된 사이 자동차업체들이 결함에 대해 미리 손을 써두기 때문이다. 말끔히 고친 차를 갖고 결함조사를 해봐야 나오는 게 있을 리 없다. 익명을 요구한 연구원 관계자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가야 결함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며 “며칠 지나서 가면 제작사가 고장코드를 삭제하고 블랙박스까지 지우기 때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조사에 착수해도 제대로 된 조사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결함을 조사하려면 자동차업체의 협조가 필수지만 업체들이 조사를 돕지 않는 탓이다. 연구원에서 자료를 요청해도 주지 않거나 필요한 내용을 다 뺀 ‘껍데기’ 자료만 제출한다. 자동차관리법을 보면 업체들은 조사기관에서 요청받은 자료를 15일 이내에 제출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를 어겨도 과태료는 한 회차당 고작 100만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최근 10년간 국토부가 수입·국내 완성차 업체에게 자료 미제출 및 지연, 조사 방해 등의 이유로 과태료 처분이나 벌칙을 부과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8월 8일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BMW 차량의 결함 부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김기남 기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8월 8일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BMW 차량의 결함 부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담당자 바뀌자 말 달라지는 제작사 

권병윤 한국교통안전공단 이사장이 지난 21일 “(BMW에) 수차례 기술자료를 요청했지만 BMW는 자료를 회신하지 않거나 누락한 채 제출했다”고 볼멘소리를 한 배경이다. 소비자들은 정부가 안전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해결해 줄 것으로 믿고 신고를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결함 신고가 신고접수 그 자체로만 그치는 셈이다. 

연구원들이 조사에 착수해 증거와 소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도 ‘윗선’에서 무마되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안전연구원 스스로 자동차업체들의 눈치를 보는 탓이다. 2015년까지 연구원 제작결함조사실에 재직했던 박진혁 서정대 자동차과 교수는 2013년에 벌어진 현대차의 ‘제네시스’ 리콜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한다. 

박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13년 1월 자동차리콜센터로 한 건의 결함 신고가 접수된다. 제네시스의 ABS 제동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연구원에서 제작결함 조사업무를 담당했던 박 교수는 현대차 전주서비스센터에 내려가 결함 조사를 벌였다. 제동페달에서 이른바 ‘스펀지 현상’과 제동시 차량쏠림 현상이 확인됐다. 운전자의 주장대로 ABS 제어장치에서 결함이 발생했다는 증거였다. 이를 방치할 경우 브레이크 오일이 부식을 일으켜 브레이크 성능이 떨어지고 결국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박 교수는 리콜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리콜을 할 경우 2009년 12월부터 2012년 3월까지 제작된 10만3214대의 제네시스가 리콜 대상이었다.

현대차는 이미 결함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다. 2012년 1월부터 해당 차량을 대상으로 비공개 무상수리를 진행해오고 있었다. 무상수리는 불만을 제기한 차주에 한해서 이뤄지는 조치로, 제조사는 결함과 관련해 차주에게 알릴 필요가 없는 조치다. 현대차는 이를 들어 “일단 무상수리를 진행하고 이후 차량에서 문제가 발생되면 공식적인 리콜 절차를 밟겠다”고 연구원에 알려왔다.

연구원과 현대차 간 한창 리콜 얘기가 오가던 시기에 연구원에 대규모 인사가 났다. 제네시스를 조사했던 담당 실장과 팀장이 바뀌었고, 조사인력도 교체됐다. 박 교수는 계속 결함조사실에 남아있었지만 인사가 난 뒤 갑자기 현대차는 말을 바꿨고 리콜도 진행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현대자동차 이모 이사와 정모 부장이 문제 부품을 교체하겠다고 해서 리콜을 합의한 상태였다”며 “하지만 연구원 인사이동으로 조사 책임자가 바뀐 뒤에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현장조사 결과를 근거로 재차 현대차에 리콜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연구원과 국토부에서도 제네시스 리콜 시행 관련 지침은 내려오지 않았다. 결국 박 교수는 2013년 2월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에 제네시스의 문제점을 제보했다. 정부 산하 소속 연구원이 미국 정부에 손을 내밀어 문제 해결에 나선 것이다.

미 교통안전국은 박 전 연구원의 신고를 받기 전부터 23건의 미국 소비자 신고를 근거로 내부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2013년 10월이 되자 미 교통안전국이 “공식적으로 제네시스 결함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현대차는 즉각 2009년부터 2012년 생산해 미국에 판매한 제네시스 4만3500대와 한국에 판매한 10만3214대에 대해 ‘자발적 리콜’을 실시했다.

현대차의 리콜 조치에도 미국 정부는 현대차에 1735만 달러(약 179억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현대차가 제네시스 제동장치 이상 사실을 2012년에 발견하고도 미국 정부 조사가 들어가고 난 뒤에야 리콜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연방법에는 제작자들이 안전 관련 결함을 5일 이내에 정부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미국과 달리 당시 박근혜 정부는 늑장 리콜과 관련해 아무런 제재나 처벌을 하지 않았다. 자동차안전연구원이 정부에 제출한 ‘제네시스 제동장치 작동불량현상 조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현대차의 시정방법이 적정했다”고 밝힌 덕분이었다. 국토부는 이를 근거로 현대차가 늑장 리콜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9일 BMW피해자모임 대표자들이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김효준 BMW그룹 코리아 회장을 자동차관리법위반 혐의로 고소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지난 9일 BMW피해자모임 대표자들이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김효준 BMW그룹 코리아 회장을 자동차관리법위반 혐의로 고소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심평위 관계자 자녀 수입차 업체 재직 

제네시스 리콜 사태로 자동차안전연구원은 발칵 뒤집혔다. 연구원에서는 누가 미 교통국에 제보를 했는지를 놓고 색출작업이 시작됐다. 연구원에는 현대차에서 제보자가 누군지 궁금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압박이 심해지자 박 교수는 결국 자신이 신고한 사실을 시인했다. 당시 연구원 제작결함실 책임자는 박 교수에게 “이 사안이 얼마나 큰일인 줄 아느냐”며 “현대차가 널 고소하면 파면될 뿐 아니라 우리 연구원이 없어질 수 있다”고 질책했다. 

박 교수는 “결함을 조사하는 자동차안전연구원이 자동차업체 손 안에 있는 셈”이라며 “심지어 결함 조사결과가 담긴 보고서를 미리 업체에 보내주라는 지시를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연구원 측과 갈등을 빚던 박 교수는 결국 연구원을 떠나야 했다. 최영석 선문대 스마트자동차학부 교수는 “실무를 담당하는 연구원이 문제를 지적해도 위에서 압력을 가한다는 사실은 업계에서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아예 결함 조사를 하지 말라고는 못하지만 우회적으로 결함 조사를 제대로 하기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 리콜 여부를 심사하는 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이하 심평위)의 경우 연루 차원을 넘어 자동차업체들과의 유착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심평위는 25명으로 구성된 국토부 자문기구다. 당초 국토부 자동차정책과장과 자동차운영보험과장, 첨단자동차기술과장과 한국소비자원 위해정보국장 등 당연직 4명과 전문가 16명을 더해 모두 20명이 심평위원직을 맡았는데, 올해 4월 규정이 바뀌면서 25명으로 늘어났다. 

‘자문’을 하는 집단이지만 실제 리콜 여부는 이들의 심사에 따라 결정된다.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아무리 리콜 결정을 내려도 심평위에서 거부하면 리콜은 무산된다. 국토부 역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심평위의 결정을 수용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심평위의 결정을 정부가 뒤집은 사례는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실제로도 심평위 결정을 거스르기 힘든 구조”라고 밝혔다. 심평위가 리콜 결정을 내릴 경우 자동차업체들은 막대한 리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이 때문에 자동차업체들 입장에서 심평위는 ‘절대갑’이자 특별관리 대상이다. 

심평위의 전문가 16명 대부분은 자동차 관련학과의 교수들이다. 심평위원 중 일부 교수들은 각 대학에서 산학협력단을 이끌고 있다. 교수들이 연구하거나 산학협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의 주제도 물론 자동차 분야다. 문제는 이런 프로젝트 진행에 필요한 비용을 정부나 기업에서 따와야 하는데 교수들에게 지원을 해주는 기업들이 현대차와 한국GM, 쌍용자동차 등 자동차업체들이라는 점이다. 

자동차업체들은 이들 교수와 아예 업무협약(MOU)을 맺고 정기 지원을 하거나 연구에 필요한 비싼 장비를 기증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자동차회사 내부 관계자는 “회사에서 심평위 소속 교수들에게 산학협동 과제를 빌미로 재정지원과 졸업생 취업을 시켜주면서 관리를 한다”며 “당연히 리콜 여부를 심사할 때 제작사 입장을 봐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정지원뿐 아니다. 업계에서는 업체들이 심평위원들을 대상으로 해외연수를 보내거나 골프 모임을 갖는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며 관계를 이어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김장철이 되면 각 회사 담당자들이 심평위원들 집에 김장을 해다가 바친다’는 소문도 돈다. 심평위원 자녀들을 자신들의 회사에 특채로 ‘모셔’오기도 한다. 심평위 한 관계자의 자녀도 모 수입차업체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평위 관계자는 “국내 자동차산업 생태계 구조상 학계와 기업, 정부가 연결될 수밖에 없다”며 “자동차업체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서 심평위에서 교수들을 제외시키면 심평위의 전문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기업의 연구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교수들은 사안에 따라 스스로 심평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심평위의 해명과 달리 심평위의 심사가 공정치 못하다는 의혹은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다. 지난해 2월 알려진 현대차 핸들 잠김 불량부품(MDPS) 리콜 축소 의혹이 대표적이다. 현대차에서 판매한 ‘아반떼’ 차종에서 이른바 ‘파워핸들’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게 발단이었다. 파워핸들이 안 되면서 아반떼의 조타력이 무거워지는 현상이 발견됐다. 이 증상이 해당되는 차량은 아반떼와 ‘i30’ 2종, 45만8662대로 집계됐다. 

하지만 현대차는 대상 차량 중 9%에 불과한 4만705대만 자발적으로 리콜하겠다고 정부에 신고했다. 반면 미국에서 판매된 동일한 아반떼와 i30의 경우 리콜 대상을 더 넓여서 미국 정부에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현대차가 국내 차량의 리콜 대상 기간을 축소해 리콜 받아야 할 차량 수를 줄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연구원의 권고 결정 뒤집는 심평위 

이에 대한 자동차안전연구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당초 연구원은 미국과 같은 기준을 적용해 45만8662대에 대한 리콜을 진행할 것을 국토부에 권고했다. 보고를 받은 국토부는 심평위에 안건을 올렸다. 그러자 심평위는 연구원의 권고를 뒤집고 현대차가 당초 신고한 차량 4만705대만 자발적으로 리콜하면 된다고 결정했다. 심평위는 “자동차 핸들에 대한 부품 기준을 충족해 강제리콜이 어렵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심평위의 논리대로라면 사실상 리콜할 이유가 없는 현대차가 자발적으로 ‘착한 리콜’을 한 셈이 된다. 심평위의 ‘부품 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에 강제리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자동차관리법에 어긋난다. 자동차관리법 제31조 1항에는 ‘안전운행에 지장을 주는 결함이 있는 경우 제작 결함을 시정(리콜)해야 하며 무상수리(사전점검)는 불가하다’고 명시돼 있다.

현대차 엔진 결함 문제를 폭로해 공익제보자로 인정받은 김광호 전 현대차 부장은 지난 6월 공익제보자 신분으로 심평위 회의에 참석한 바 있다. 김 전 부장은 “심평위가 아니라 제조사 임원회의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며 “자동차회사 입장에서 회사를 대변해주는 발언을 서로 쏟아내고 있었다”고 전반적인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심평위가 그간 리콜조치에 대해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리콜 심사가 시작된 이래 국토부가 내린 강제리콜 명령은 지난해 현대차를 대상으로 한 5건이 전부다. 2003년부터 2016년까지 국내 평균 리콜 대상 차량은 54만5000대로, 리콜 은폐 의혹과 관련한 내부 고발이 시작된 지난 한 해의 221만대와 비교하면 4배 이상 차이가 난다. 

심평위와 자동차업체 간 유착의혹은 국회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조사에 나설 예정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은 “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가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혀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판단을 해왔는지 여부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며 “심사과정의 투명성도 들여다보고 문제점이 발견되면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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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찌 대상자 120명 가석방, 피해자들은 두렵다"

[현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판결 규탄 집회

18.08.25 20:29l최종 업데이트 18.08.25 20:50l

 

큰사진보기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 참석한 시민들.
▲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 참석한 시민들.
ⓒ 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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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많은 죄수들이 가석방됐습니다. 120명의 전자발찌 대상자도 포함됐습니다. 그 피해자들은 충분히 안전할까요?"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서 나온 말이다.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소속 탁수정씨가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그들(가해자)이 감옥에 가기까지 피해자들이 했을 노력,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탁씨는 "최소 120명의 피해자들이 광복절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며 "그들에게는 그날이 광복절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헌법에 있다"며 "국민의 절반인 줄 알았던 우리는 예외인 것 같다, 조국의 법이 상식적으로 작동하길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이날 지지발언에 나선 김지예 법무법인 태율 변호사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측근으로부터 변호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으며 겪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아래는 김 변호사의 말이다.

김지예 변호사 "안희정 사건 후 손해배상 전제로 변호 맡겠다 했더니 배제돼"

"이제와 고백해보자면 저는 사실 안희정 지지자였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한) 김지은씨의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가 있고 난 뒤 (안 전 지사의) 사퇴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지지자들의 모임에 있던 여러 변호사들과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러던 중 안희정 측근이 '김지예 변호사가 변호를 맡아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기꺼이 맡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안 전 지사가) 자백하고, 반성하고 김지은씨에게 손해배상을 하고, 합의를 시도한다는 전제 아래 변호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모든 다른 변호사들이 정말 무슨 미친X 보듯 (저를) 바라봤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논의에서 배제됐고, 이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김 변호사는 "(선배 변호사에게) 이 사건은 유죄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설명했더니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김 변호사는 "이번 안희정 사건의 1심 판결을 보며 여전히 법이 여성에게는 지배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법원이 법에 없어 판결을 못하겠다는 비겁한 변명을 하지 말고, 법 조항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항소심에선 인정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부, 미투 관련 신고센터 예산 줄여... 여성들 목소리 좌시해선 안될 것"
 
큰사진보기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사회자들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의 방조와 편파 수사에 항의하는 의미로 폴리스라인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사회자들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의 방조와 편파 수사에 항의하는 의미로 폴리스라인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 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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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도 이날 집회에 참석해 연대발언에 나섰다. 신 위원장은 "불법 촬영물 문제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며 "소수 몇 명이 촬영물을 온라인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웹하드 산업이 피해 촬영물을 기반으로 공고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웹하드 업체가) 한 달에 9억 원을 벌고, 헤비업로더(대량으로 영상을 올리는 사람)는 한 달에 500만 원씩 벌어들이는 산업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신 위원장은 "정부가 대책을 낸다고 했지만 오히려 약속과 달리 미투 관련 신고센터 예산을 감축했다"고 덧붙였다.

또 신 위원장은 "사법기관과 정치권, 행정부의 권력을 갖고 있는 50~60대 기득권 남성층은 여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여성 피해를 방임하는 데 앞장섰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정부 등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결코 좌시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희정 판결, 불평등 길 터줘... 미투 입법 추진돼야"

이날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정치인들은 영상메시지를 통해 지지의 뜻을 전했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영상에서 "그동안 가해자 시각에서 성폭력 문제가 다뤄져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라며 "(사법부는)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하도록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무수히 많은 누리집에 여자대학교 몰래카메라 영상이 수도 없이 올라왔을 때 과연 경찰은 무엇을 했나"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금 의원은 "(경찰이) 신속하게 대응하고 피해자들을 보호했나, 우리가 분노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금 의원은 "이번 (안희정) 판결로 미투 운동이 위축돼선 안 된다"며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받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피해 사실을 폭로한 모든 분들과 집회에 나온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편파 판결 항의하는 사람들 있다 보여주고 싶어 참석"

홍미영 전 부평구청장은 "미투 운동으로 새로운 변화가 진행되는 이때 (안희정) 판결은 성폭력 불평등의 길을 터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아직도 동일범죄, 동일처벌을 외치고 있다"며 "잘못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미투 관련 입법은 강력히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최근 성폭력 사건 판결을 계기로 직접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아무개(30)씨는 "안희정 사건이나 최근 기사를 보면 데이트폭력 등 비슷한 사건에도 가해자가 여성이면 징역 10개월로 (처벌이) 세게 나오고, 남성이면 집행유예가 나오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만 하다가 직접 집회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유아무개(28, 여)씨도 "동일범죄, 동일처벌이라는 당연한 말이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쉽지 않다"며 "앞으로도 이런 집회에 참석해 사법부와 경찰의 편파성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동일범죄 동일수사 그게 그리 어렵더냐", "성범죄자 무죄판결 사법부도 공범이다", "피해자를 재판 말고 가해자를 재판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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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여당 대표 이해찬과 다시 충돌할 조선·동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8/26 07:59
  • 수정일
    2018/08/26 07:59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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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총리시절 조선·동아 겨냥 “역사에 반역” 소신… 6년전에도 “수구언론이 가장 기피하는 정치인” 자평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8년 08월 26일 일요일

지난 25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의 전당대회 정견발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저 이해찬,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당대표가 되면, 당이 안 보인다는 말은 사라질 것입니다. 당의 존재감이 커지고 보수의 정치공세를 단호히 막아낼 것입니다.”

자유한국당 역시 이날 이해찬 대표 당선에 “‘수구세력이 경제위기론 편다’, ‘최근 악화된 고용지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탓’이라고 하는 등 보수를 향한 날선 인식은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가 25일 당대표 수락 연설문에서 “주제와 형식에 상관없이 5당 대표 회담을 조속히 개최하면 좋겠다”며 ‘협치’를 강조했지만 과거에 비춰보면 보수언론 공세는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 2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3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이해찬 당대표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는 이날 민주당 신임 당대표로 선출됐다. 사진=민중의소리
▲ 2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3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이해찬 당대표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는 이날 민주당 신임 당대표로 선출됐다. 사진=민중의소리
 
‘광고시장’ 언급에 발끈 조중동

 

이 대표가 과거 보수언론과 크게 충돌했던 때는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 시절이었다. 거침없는 발언은 연일 보수언론 지면에 오르내렸다.  

2004년 9월16일 당시 이해찬 총리는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조찬간담회 초청강연에서 “언론들이 계속 경기 부양을 하지 않느냐고 볶아대는데 경기 부양을 시켜야 광고시장도 돌아가겠지만 우리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 뒤 “외국인 투자가 줄고 노사 분규도 심각한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일부 언론에서 경제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도하면서 말로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지만 실제로는 사실을 오도하고 심리적 위축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고 비판했다. 언론이 경제 위기를 과도하게 부풀린다는 지적이었다.  

 

다음날 보수언론의 공세가 이어졌다. “‘언론이 경기부양 볶아대는데 그러면 광고는 돌아가겠지만…’”(동아일보), “‘언론이 경기부양 볶아대는데 그래야 광고시장 돌아가겠지’”(조선일보), “‘언론이 경기부양 볶아대는데 그래야 광고시장 돌아가겠지만…’”(중앙일보)등의 제목이 달렸다. 

이들 신문의 보도는 “‘좌파적 이념갖고 정책집행 안한다’”(국민일보), “이총리 ‘참여정부는 좌파아니다’”(서울신문) 등 정책 방향에 초점을 맞춰 보도한 타 신문과 차이를 보였다. 특히 조선일보는 ‘총리는 대통령의 악역 보조에 나섰는가’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짝을 맞춰 국민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만 골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밤의 대통령’ 시대 끝났다” 

이 대표는 조중동 가운데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반감을 드러냈다. 유신 시절 기자들을 강제 해직했던 언론 탄압 역사와 관련 있다. 이 대표는 2004년 10월18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은 용서해도 지금도 계속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에 대한 반역죄는 용서 못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나라를 흔들던 시대는 지나갔다. 조선과 동아가 심지어 나라 인사를 좌지우지한 일도 있으며 박정희 시대엔 안기부 정보로 특종하기도 했으나 한 번도 역사 발전에 기여한 일 없다”며 “그러나 이젠 ‘밤의 대통령’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조선·동아는 맹공을 가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이 총리의 발언이 과연 ‘말씀’ 대접을 받는 국무총리의 발언인지 의심스럽다. 총리의 말이 아니라 노사모의 발언이라면 그런 사람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겠지만 말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이 총리의 조선·동아를 향한 적개심은 이 총리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를 포함한 정권 전체의 정서라는 이야기”라며 당시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확정한 언론개혁법과 이 대표 발언을 한데 묶어 비판했다.  

당시 이종원 조선일보 정치부장대우는 칼럼에 “조선·동아는 총리가 태어나기 32년 전에 창간돼 지금까지 온갖 풍상을 겪어 왔습니다. 이민족의 압제를 견디고, 우리도 잘 살아보자고, 우리도 민주주의 해보자고, 나름대로 싸워온 것이 두 신문의 역사”라며 “조선·동아도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세태에 영합하며 정권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는 언론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조선·동아가 무슨 힘이 있고, 까불어서가 아닙니다. 그 순간 독자들의 외면으로 두 신문의 84년 역사는 그날로 막을 내릴 것”이라고 썼다. 

 

▲ 2004년 10월21일자 조선일보 34면 조선데스크 칼럼.
▲ 2004년 10월21일자 조선일보 34면 조선데스크 칼럼.
 
동아일보도 사설에서 “‘민주화 세력’을 내세워 집권하고 ‘개혁’을 빌미로 자유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리는 정부여당이야말로 역사에 반역하는 게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10월21일자에서 “동아일보 84년 역사에 권력자를 비롯해 그 어느 특정인에게서도 이런 폭언을 들은 적이 없다”면서 ‘공개 질의’ 형식을 빌려 이 대표 발언을 반박하고 해명을 요구했다.

 

중앙일보도 사설에서 “도대체 여권이 지향하는 사회는 어떤 것인가. 정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없고 무조건적인 맹종만 있는 ‘동물농장’과 같은 사회를 바라는가”라며 “노동신문·민주조선·평양신문 등이 입을 모아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찬양하는 북한의 언론체제를 닮기를 원하는가”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이 같은 논란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004년 10월28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 대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30년 전 1974년 유신 긴급 조치 때 자유 언론을 주장한 수많은 기자들을 집단 해고하고 다시 복직시키지 않았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볼 때 시대에 반하는 행위이자 역사의 반역”이라며 보수신문을 두고 나온 발언이 “평소의 소회”라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보수언론과 총리시절의 이 대표 사이에 갈등과 불화는 계속됐다. 이 대표는 2006년 3월 ‘3·1절 골프 파문’으로 취임 21개월 만에 국무총리에서 물러났다. 언론은 연일 ‘골프 로비’ 의혹을 제기했고 이 대표는 대국민사과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 2012년 6월9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민주통합당 임시전국대의원대회가 열린 가운데 새 당대표가 된 이해찬 대표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2012년 6월9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민주통합당 임시전국대의원대회가 열린 가운데 새 당대표가 된 이해찬 대표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6년 전에도 “거친 발언으로 국민과 멀어져

 

향후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언론은 어떠할까. 이 대표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달린 것이지만 그가 2012년 6월9일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로 선출됐을 때 언론 보도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때도 이 대표는 선거 공보물에 “수구언론과 새누리당이 가장 기피하는 정치인”이라는 문구로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민주당 당대표 경선에 보수언론이 개입한다는 비판은 적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당대표 당선 이튿날 사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대표 당선 후 민주당 지지도가 올랐다는 자료는 없다. 당 밖 분위기는 그 반대라는 게 정확할 듯하다. 설사 이 대표의 그런 판단이 옳다 하더라도 이 대표의 거친 발언으로 일반 국민과 민주당의 거리는 더 멀어졌고, 어두운 대선 전망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대선 승패를 좌우할 중도층 유권자는 민주당과의 거리를 더 실감할 것이다.”(조선일보 6월11일자 사설 ‘이해찬의 민주당, 집권에서 더 멀어지나 가까워지나’)

 

문재인 정부는 야당 협조가 뒷받침된 개혁 입법 통과가 절실하다. 이해찬 신임 대표가 25일 당선 직후 “5당 대표 회담을 조속히 개최하면 좋겠다”고 말한 까닭이다.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인 그도 ‘협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다. 반면 이 대표를 바라보는 보수언론 시각은 좋을리 없다. 불과 2년 전 “친노좌장 이해찬 잘라낸 더민주 공천이 새누리당보다 낫다”(동아일보 2016년 3월15일자 사설)던 그들이다. 이 대표가 보수언론의 공세를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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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은 박쥐 회피 위해 진화했다

조홍섭 2018. 08. 24
조회수 603 추천수 1
 
반딧불과 느린 비행으로 박쥐에게 ‘위험한 먹이’ 경고
박쥐 출현 이후 발광 진화, “박쥐가 반딧불이 발명했다”
 
ff1.jpg» 배에서 빛을 내는 북아메리카 반딧불이. 발광으로 박쥐를 회피한다는 가설이 제기됐다. 스티픈 마셜 박사 제공.
 
여름밤 하늘을 수놓는 반딧불이의 발광은 짝을 찾는 사랑의 신호이다. 그러나 애초 발광이 출현한 까닭은 한밤의 포식자인 박쥐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나왔다. 반딧불은 남아메리카 열대림의 독개구리처럼 포식자의 눈에 잘 띄는 경계 신호라는 얘기다.
 
브라이언 리벨 미국 보이스 주립대 생물학자 등 미국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스’ 22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북아메리카 반딧불이와 갈색 박쥐(우리나라의 문둥이박쥐와 같은 속)를 이용한 실험에서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북아메리카 반딧불이는 박쥐 등 포식자가 먹기에 맛이 없을뿐더러 독이 있어 자칫 삼켰다간 1시간 안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맛 없는 먹이를 박쥐는 어떻게 알까.
 
ff2.jpg» 반딧불이 회피 실험을 한 북아메리카 갈색 박쥐. 우리나라 문둥이박쥐와 가깝다. 앤 프로샤우어,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국 제공.
 
연구자들은 먼저 캄캄한 실험실에서 박쥐 3마리 앞에 반딧불이를 날려 보았다. 박쥐는 한 번도 반딧불이를 접해보지 않은 개체였다. 박쥐는 날아오른 반딧불이를 공중에서 포획했지만 곧 뱉어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박쥐는 반딧불이를 기피하는 것을 배웠다. 반딧불이와 함께 날린 다른 딱정벌레는 날리는 족족 잡아먹었다. 
 
이번에는 반딧불이의 발광기관에 두텁게 페인트를 칠해 빛을 내지 못하게 한 뒤 날렸다. 박쥐 한 마리는 발광하지 않는 반딧불이를 대조군인 일반 딱정벌레와 마찬가지로 포획했다. 반딧불이의 시각적 신호가 포식자에 단서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의 박쥐는 빛을 내지 않는 반딧불이를 여전히 기피했다. 이 박쥐는 시각 이외에 무슨 정보를 얻는 걸까.
 
연구자들은 박쥐가 밤중에 비행하고 사냥할 때 쓰는 초음파 음향 정보에 주목했다. 반딧불이는 다른 딱정벌레와 다른 방식으로 날았다. 독성물질을 보유해서인지 반딧불이는 느리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태연하게 비행했다. 박쥐는 반사한 초음파를 통해 먹이의 크기, 형태, 재질 등을 알아낸다. 박쥐는 먹이를 붙잡기 직전 초음파를 빠르게 발사하는데, 반딧불이임을 알아챈 며칠 뒤에는 아예 초음파를 내지 않았다.
 
ff3.jpg» 반딧불이는 느리고 예측가능한 비행을 함으로써 유독 곤충임을 표시한다. 스티픈 마셜 박사 제공.
 
연구자들은 “박쥐가 맛이 없는 먹이인 반딧불이를 피하기 위해 시각 또는 초음파를 이용한 반향정위를 이용하며, 두 가지 정보를 통합할 때 더 빨리 회피법을 배우는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자들은 또 불나방 같은 다른 야행성 곤충도 비슷한 방어술을 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나아가 반딧불이의 발광이 이런 포식자 회피를 위해 기원했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반딧불이의 조상 종들은 애벌레 때만 발광을 하고 성체는 발광 대신 페로몬 분비를 통해 짝짓기한다. 연구자들은 낮에 활동하던 반딧불이가 야행성으로 바뀌면서 당시 새롭게 등장한 포식자인 박쥐에 대응하기 위해 발광을 진화시켰을 것으로 보았다.
 
ff4.jpg» 박쥐의 초음파를 들으면 자신이 만든 초음파를 발사해 혼선을 일으키는 불나방. 시각적 방어에 치중하던 곤충은 청각을 무기로 내세운 박쥐의 등장으로 큰 위기에 빠졌고 진화적 대응을 서둘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실제로 반딧불이 성체의 발광은 여러 종 사이에서 6번이나 독립적으로 진화했다. 반딧불이가 지구에 출현한 것은 7500만년 전이고 박쥐는 6500만년 전에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반딧불이의 계통분화 시기가 정확히 밝혀진다면 발광이 박쥐가 출현하면서 나타났으며, 결국 박쥐가 반딧불이를 발명했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박쥐 생태 연구자인 김선숙 국립생태원 박사는 “우리나라 박쥐와 반딧불이 사이에 이런 포식자-피식자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연구가 이뤄진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Brian C. Leavell et al, Fireflies thwart bat attack with multisensory warnings, Science Advances, 2018;4: eaat6601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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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왜 두려워하나…외롭게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

“왕따를 왜 두려워하나…외롭게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

등록 :2018-08-25 09:14수정 :2018-08-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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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인터뷰
르네상스적 지식인 박홍규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건 시골에서 산 거다. 자연과 더불어 느리게 사니까 책도 많이 쓸 수 있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지난 17일 낮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음리 자택 인근 텃밭에서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건 시골에서 산 거다. 자연과 더불어 느리게 사니까 책도 많이 쓸 수 있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지난 17일 낮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음리 자택 인근 텃밭에서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네트워킹의 세상에서 각종 인연을 가능한 끊은 채 시골에서 느리고 홑지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책을 쓴다. 올초 정년 퇴임한 뒤 평화주의자로서의 삶을 더 밀어부치고 있는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다. 지난 17일 오후 경북 경산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경산역에서 탄 택시가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음리 마을 입구에 멈췄다. 똑같은 모양의 집 10여 가구가 골목길 양쪽에 들어서 있었다. 어느 집이지? 평일 낮시간 햇볕 쨍쨍한 골목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 물어볼 데도 없다. 현대 문명에 너무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터여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휴대전화의 지도 앱을 열어 번지수를 찍었다. 목적지까지 125m. 길은 짧았지만, 온라인의 길을 오프라인에 맞추고 방향을 찾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길 끝에서 덥수룩한 수염의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66·이하 호칭 생략)임을 금방 알았다. 때로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더 편리하고 정확하다.

 

박홍규는 철저하게 아날로그적 인간이다. 자동차도 운전면허증도 없다. 자전거를 타거나 웬만하면 걷는다. 먼 곳을 오갈 때는 고속열차(KTX) 등 빠른 것보다는 무궁화호 등 느린 것을 좋아한다. 해외여행도 가급적이면 비행기보다 배를 이용한다. 휴대전화는 아예 없고, 인터넷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번 인터뷰도 섭외부터 만남까지 모두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느리긴 했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여생의 과제, 초암평화사상연구소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와 부인이 가꾸는 텃밭을 먼저 가자고 요청했다. 1999년 이 곳으로 이사온 뒤 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식재료가 나오는 박홍규 삶의 터전을 보고 싶었다. “매년 산에서 낙엽 썩은 부식토를 가져와서 땅에다 넣었다. 이제는 완전 유기농으로 자리잡았다. 땅 속에는 지렁이와 두더지 천지이다. 인근 논밭은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니까 동네 두더지가 전부 이 밭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 하하.”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검은 빛이 감도는 흙은 이 땅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호박, 박, 오이, 고추, 땅콩, 고구마, 들깨 등 서로 어울리거나 따로 자기 자리를 잡은 다양한 작물들로 인해 600평의 밭이 그다지 넓게 느껴지지 않았다.

 

600평은 그가 정한 소유의 한계다. 우리 국토에서 경작 가능한 땅을 7천만 인구로 나눴을 때 한사람에게 300평씩 돌아가는 것으로 계산되자, 자신과 부인 몫을 합한 크기만큼만 땅을 샀다. 밭 입구에 있는 허름한 농막도 그가 손수 지었다. 황토 흙을 개어 벽돌을 만들고, 버려진 목재를 주워 틈틈이 만들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더미 속에 양파와 마늘 등 수확한 농산물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책은 보관할 데가 없어 가져다 놓았다. 양파와 마늘은 여기에 보관하면서 1년 내내 먹는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해 집 안으로 옮겨 자리를 잡자, 부인(서현숙·67)이 직접 만든 음료를 내왔다. 부부가 텃밭에서 키운 매실과 비트로 만든 효소라고 했다.

 

-지난 2월 정년 퇴직을 했는데 요즘도 늘 학교에 가나.

 

“낮에는 매일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 오늘은 공영형 사립대와 관련한 회의에 참석했다. 제가 오랫동안 관여해온 문제여서 빠질 수 없었다.”

 

영남대는 상지대, 조선대 등 문제가 많았던 다른 사립대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공영형 사립대로 전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내년도 공영형 사립대 예산을 전액 삭감함에 따라 이들 대학이 크게 낙담하고 있다. 박홍규는 정부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공영형 사립대는 어빠진 사립대를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데 사립대 개혁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까봐 걱정스럽다”며 비판과 우려를 표시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17일 낮 경북 경산시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17일 낮 경북 경산시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명예교수로 강의는 맡고 있나?

 

“아니다. 시간강사가 50%를 넘는데 퇴직 교수가 강의하겠다고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 자리를 뺏는 것이다.”

 

그는 요즈음 경산 압량을 평화사상 연구의 메카로 만들 꿈에 부풀어 있다. 그동안 혼자서 주로 공부해왔다면 앞으로는 연구소를 만들어 뜻맞는 사람들과 평화에 관한 연구를 할 계획이다. ‘초암평화사상연구소’라고 이름도 지었다. 선친의 호(초암)에서 따 왔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의 일부가 종잣돈으로 쓰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생 성실한 교육자로 살다간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이 갖는 평화정신을 기리는 뜻도 담았다. 집 옆 공터나 텃밭에 40평 규모의 2층짜리 연구소 건물을 세워서 1층에는 연구실과 강의실, 2층에는 자료실과 전시실을 꾸밀 계획이다. 전시실에는 간디와 톨스토이, 마틴 루서 킹, 본 회퍼 등 평화사상을 고민하고 실천했던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서 걸 생각이다.

 

-왜 하필 평화사상이냐?

 

“사실 가장 기본은 자유다. 평소 제 생각이나 철학은 자유로운 개인이 모여서 자율적인 사회를 만들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라는 말은 너무 진부하고, 또 자유사상연구소라고 하자니 우익단체처럼 들리더라. 제가 강조해왔던 삼자주의 즉, 자유와 자치, 자연을 포괄하는 게 뭘까 생각했더니 평화로 집약되더라. 물론 전쟁과 평화라는 식의 정치학적인 논의에는 저는 관심이 없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사상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 평화사상 저널도 발간할 계획이다.”

 

-연구소에 연구원도 있어야 하고, 그러자면 돈도 꽤 들텐데.

 

“제 꿈은 베트남과 인도의 친구 하나씩을 포함해 서너명의 동학을 여기에 모으는 것이다. 그들이 여기 앉아서 대화하고, 사람들과 만나 공부하는 것이다. 돈은 없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반 일리치가 멕시코에서 일종의 학문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리치의 공동체에서는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뿐만 아니라 강의를 하는 사람도 오히려 돈을 냈다. 그런데도 전세계의 진보인사들이 몰려들었다. 일리치처럼 사람들을 모을 능력도 없고, 그동안 인간관계를 너무 소흘히 해서 걱정이긴 하다.”

 

학교와 병원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스템과 체제를 비판했던 이반 일리치(1926~2002)는 1960~70년대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대안 학문공동체인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운영했다. 여기서 함께 생활한 폴 굿맨과 도스 산토스 등이 2000년대 미국이나 유럽, 남미의 진보 사상을 주도했다.

 

-인간관계는 일부러 안 맺지 않았나.

 

“그렇다. 하하. 이런 거 할려니 사람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한데 별안간 변신은 안 되고 어려움이 있다.”

 

-변신하면 선생님의 본질을 잃을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 하하. 연구소도 소박하게 하겠다.”

 

 

20년전 시골로 거처 옮긴 뒤

 

왕따 자처한 박홍규 명예교수

 

혈연 지연 학연 등 끊고 살아

 

밭농사 지으며 글쓰기 전념

 

“외톨이 생활도 나쁘지 않아”

 

 

“시스템적인 인간이 아니어서 사회 변화를 위한 대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능한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박홍규 명예교수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시스템적인 인간이 아니어서 사회 변화를 위한 대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능한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박홍규 명예교수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는 고독사를 꿈꾼다”

 

박홍규의 삶은 소박하고 단촐하다. 새벽 2~3시쯤 일어나면 아침까지 글 쓰고, 밥 먹기 전에 텃밭에 가서 일한 뒤 아침을 먹고는 학교로 간다. 저녁에는 돌아와서 밥 먹고 보통 8시쯤 잔다. 혈연과 학연, 지연의 줄은 찾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끊어버리고 산다. 가족이나 친족 안에서도 ‘이단아’다. 각종 동창회나 회식 등 사교 모임에도 일절 가지 않는다. 책 친구, 생각 친구는 있어도 죽마고우니 동창 친구는 없다.

 

-선생님은 삼자주의 가운데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측면에서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관혼상제에 안 가고, 동창회 안 가고 하는 정도일 뿐이다. 일부러 그런 곳에 안 끌려가고 혼자 산다. 그런데 혼자 사는 것은 굉장히 쓸쓸한 것이다.”

 

-외롭다는 뜻인가?

 

“외롭다는 표현은 안 맞다. 외로우려면 심심해야 하는데 제가 할 일이 워낙 많고 재밌는 게 많아서 전혀 심심하지는 않다. 책이나 영화 볼 것도 많고, 외국 다닐 일도 많다. 사람들을 안 만나서 외롭다는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면 더 외롭고 괴로운 거 아니냐.”

 

-보통 사람들은 동창회나 회식 등을 썩 좋아하지 않더라도 빠지려고 하지 않는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왕따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젊은 학생들을 보면 친구가 없는 것이나 왕따를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 같더라. 집단 속에 들어가야 안심이 되고, 사는 느낌을 가지는 것 같다. 나는 언젠가 그런 책을 쓰고 싶더라. ‘친구 없어도 괜찮아. 불알친구 없고, 계 없고, 동창회 안 가고, 에스엔에스 안 해도 괜찮아.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얼마 전에 중학생이 에스엔에스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자살을 했다고 하던데 제발 그런 것 때문에 소중한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흔히 친구 친구 하는데 로마 철학자들은 우정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또, 사람들이 고독사를 굉장히 문제시하는데 나는 고독사하고 싶다. 집사람한테도 ‘나중에 아프면 집을 나가 산꼭대기에 가서 고독사할 것이니 찾지 말라’고 가끔 말한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고독사는 다른 차원 아닐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죽음의 미학을 논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다만, 꼭 무리지어야 하고, 그게 아름답고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양 하는 것은 황당하다. 더구나 어린 학생들까지 그런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

 

-고독해도 괜찮아라는 말은 이해는 되지만, 보통사람이 행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외롭게 사는 게 훨씬 더 가치가 있고, 외로운 것도 해볼만 한 일이라는 얘기를 누군가는 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한테는 말이다. 그 점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이 할 말이 많다.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외로움을 즐기고, 혼자 사는 방법을 아는 데는 도사들이다.”

 

어릴 적 사진 몇장 구할 수 있겠느냐는 요청에 그는 24일 “찾을 수가 없다”면서 아래와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중고교 때 별명이 ‘데카당’이었고, 미술실에 처박혀 외톨이로 살았어요. 그 뒤로도 평생 외톨이로 살았네요.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랑할 것도 없지만, 외톨이로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더러운 세상에서 자발적 왕따로 살라고 용기를 주고 싶어요.”

 

 

150권 이상의 대중서적 펴내

 

전공인 법학보다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 망라한 책 쓰기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내 첫 소개

 

“학문 권위 아닌 교양에 만족”

 

 

박홍규 명예교수 자택의 거실 양쪽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힌 책장이 놓여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홍규 명예교수 자택의 거실 양쪽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힌 책장이 놓여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원고료 안 받는 저자

 

박홍규는 흔히 무정부주의자라고 번역되는 ‘아나키스트’다. 중고교 시절 읽은 신채호의 책에서 영향을 받고, 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1912~1997)을 만난 게 계기였다.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하기락은 고등학생에 불과하던 박홍규를 동료처럼 “정중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인 아나키즘을 알게 해줬다. 지금은 탈퇴했지만, 한국 아나키즘학회 회장도 한때 맡았다.

 

-고등학교 때 형성된 생각이 지금까지 사상의 지주로 있는 건가.

 

“그렇다. 학창 시절에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정권에 대한 저항 이런 차원의 것 말고, 좀 더 근본적인 게 뭘까를 고민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일제시대 때는 사회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고, 해방 이후에는 교원노조 운동을 했던 분이 박정희 정권이 출범한 이후에는 보수적으로 변하더라. 사람들이 왜 저렇게 변할까 고민하다가 저한테 잡힌 게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은 근본적인 얘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국가보안법과 노동관계법 등 사상에서의 국가주의나 교육에서의 국가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강해서 공부를 할수록 아나키즘 쪽으로 쏠리더라.”

 

-변하지 않고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는 비결이 뭔가.

 

“일관됐다는 표현은 맞지 않고, 나름대로는 굉장한 부침이 있었다. 예를 들어 니체든 톨스토이든 그들에 대한 제 인식은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욕했다가 등등의 변화가 많았다. 또, 지금도 이게 답인가에 대해 굉장히 회의한다. 아나키즘은 딱 정해진 것이 없고, 사상가 나름대로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그 중에 제가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톨스토이나 간디, 러시아의 크로포트킨 정도다. 그들은 폭력주의를 배격했다.”

 

-비폭력 평화주의자로서의 아나키스트인가.

 

“그렇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아나키즘을 무질서하고 무책임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나키즘은 무법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법이나 도덕 등 규범과 오히려 잘 통한다. 전제 군주나 지배층의 폭력에 저항하다가 불법이나 무법자라고 낙인찍힌 아나키스트는 있지만, 스스로 살인이나 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전혀 없다. 오히려 아나키스트일수록 철저히 평화와 질서를 끔찍하게 지킨 사람들이다.”

 

 

박홍규 명예교수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닌다. 먼 길을 갈 때도 가능하면 무궁화호나 배 등 느린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박 명예교수가 2005년 6월 자전거로 등교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박홍규 명예교수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닌다. 먼 길을 갈 때도 가능하면 무궁화호나 배 등 느린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박 명예교수가 2005년 6월 자전거로 등교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평화주의자로서의 박홍규의 삶은 책이다. 그는 <윌리엄 모리스 평전> <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저, 번역) <학교 없는 사회>(이반 일리치 저, 번역) 등 지금까지 모두 150권이 넘는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자신의 전공인 노동법이나 법학과 관련된 책은 오히려 소수다.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문학, 예술 분야를 망라한다. 프랑스 철학자인 미셸 푸코,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으며, 플라톤과 니체,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민주주의 관점에서 재평가했다. 가히 통섭의 지식인,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부를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번역서든 저서든 책이 교수 평가의 척도가 아니어서 논문 쓸 시간만 잡아먹는 방해물로 취급받기 일쑤다. 대개의 교수들은 할당된 논문을 채우느라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은 쓰고 싶어도 못 쓰더라. 그런데 선생님은 매년 평균 3~4권을 썼더라.

 

“제 책이 다 시시하다. 하하. 교양적이고 계몽적인 차원의 책이다. 그래서 저는 어떤 책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권위나 가치를 인정받고 싶지도 않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렇게 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냥 읽어주는 사람이 한두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냈다. 출판 불황에도 써달라고 요청하는 출판사가 다행히 있으니 앞으로도 제 힘 닿는 데까지 쓸 생각이다.”

 

-선생님의 책은 사상의 지평을 넓혀주고, 일반 통념과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는 식의 비판적인 읽기를 가르쳐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공이 아닌 분야의 책을 낼 생각을 어떻게 했나.

 

“제가 원래 잡독을 한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지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읽다 보니, 국내에도 꼭 소개가 됐으면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사이드나 윌리엄 모리스 등이 대표적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고는 이 책을 번역 좀 하라고 영문학 전공자들한테 얘기를 했는데 바빠서 그런지 아무도 안 하더라. 할 수 없이 나라도 해야겠다고 해서 나섰다.(1991년 첫 출간)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됐는데, 그때부터 전공이 아닌 분야도 과감하게 뛰어들게 됐다. 하하.”

 

그는 인세나 번역료 등 원고료를 챙기지 않는 저자로도 유명하다. 한 두 권 빼고는 모두 작은 출판사에서 책을 냈으며, 그 경우 대부분 원고료를 받지 않았다.

 

-원고료를 안 받은 것은 출판사를 돕기 위해서인가.

 

“그렇게 말하면 교만한 것이다. 나야 월급 받는 교수니까 원고료가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리고 처음에 책을 낼 때는 노동자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제가 1980년대 창원대학에 있을 때 밤에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법 강의를 했다. 그때 강의 중간 중간에 비틀스의 ‘이매진’이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들려주고, 고흐의 그림도 보여줬다. 실제로 고흐는 노동자를 좋아했고, 자기 그림이 노동자들의 거실에 걸리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겼다. 베토벤도 마찬가지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나도 노동자를 위한 책을 쓰자고 결심했다. 그들이 책을 사 보려면 가격이 조금이라도 싸야 하지 않겠나.”

 

 

비폭력평화주의 아나키스트

 

자유·자치·자연 3자주의 실천

 

자동차·휴대폰 없이 느린 삶

 

“체제변화 이룰 대안 아니나

 

지구 위해 소박하게 살아야”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왼쪽)가 17일 경북 경산 자택 인근의 텃밭을 둘러보면서 기자에게 작물을 설명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왼쪽)가 17일 경북 경산 자택 인근의 텃밭을 둘러보면서 기자에게 작물을 설명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전태일과 5·18에 대한 속죄의식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뭔가.

 

“많이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시골에서 조용하게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시에서 번잡하게 살면 글 쓸 시간이 없겠지만, 여기서는 매일 새벽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박홍규의 독서는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향 구미를 떠나 중학교(대구중)를 대구로 진학한 그에게 헌책방은 지적인 파라다이스였다. 살림이 넉넉지 못한 부친은 그에게 용돈 없이 통학 버스비만 줬다. 박홍규는 달성공원 뒤쪽에 있는 고모집에서 학교까지 먼 길을 걸어서 아낀 버스비로 중고책을 한권씩 샀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사서 읽은 책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당시 책 제목은 <운명의 별이 빛날 때>)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유명 화가들의 일본어판 화집도 열심히 샀다. 그 화집을 보기 위해 혼자 사전을 들고 일본어를 익혔다.

 

고교(경북고)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함께 아예 학교 앞에 아틀리에를 차려놓고 그림을 그리면서 각종 책을 읽었다. 책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눈뜬 그는 고 3 때(1969)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했다. 이 때문에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결국 대학 입시에 두번이나 실패했다.

 

재수 때도 교과서나 수험서가 아닌 철학과 사상, 문학, 예술서를 끼고 살았다. 책이야말로 스승이었다. 1971년 영남대 법대에 입학했을 때 그는 이미 스스로 성장한 운동권이었다. 책과 함께 독재정치가 빚은 암담한 현실이 그를 키웠다. 경상도의 젊은 청년을 아무도 공부하지 않았던 노동법 전공으로 이끈 것은 근로기준법을 들고 분신한 전태일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당시 캠퍼스 분위기에 따라 노동법보다 마르크스를 더 열심히 읽었다.(<젊은 날의 깨달음>, 2005, 인물과사상사) 각종 학생 시위에 적극 가담했던 그는 4학년 때 민청학련 사건의 영남대 총책으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학생운동의 거물이었나.

 

“전혀 아니다. 민청학련에 연루됐던 사람들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데 사건을 키우기 위해서 그들이 엮은 것이다. 영남대는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몇명 안 돼서 제가 눈에 띄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학생운동에 제 딴에는 열심히 참가했고, 4학년 때부터는 노동자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보고 노동야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 광주의 5·18 비극도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줬다. “(1982년 오사카시립대에서 공부할 때) 지금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그 곳에서 만난 전라도 친구들에게 무조건 경상도 군인들(전두환 노태우 등)이 저지른 5·18의 용서를 울면서 빌었다는 점이다.”(<젊은 날의 깨달음>)

 

그러나, 박홍규는 기본적으로 행동가가 아니라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혁명가나 사회운동가가 아니라 학자의 길이 그에게는 자연스러웠다.

 

“이 사람은 대학 때부터 직접적으로 리더가 되는 성향의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학보사 기자를 했었는데, 학교 신문에 이 사람이 논문이나 시국에 관한 긴 글을 자주 실어서 꽤 유명했다. 학생으로서 글을 아주 잘 썼지만, 그 때도 자기 세계에 빠져 있었다. 데이트할 때 한번은 제가 프랑스 화가인 로렌셍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여러 화집에서 로렌셍 부분만 찢어서 책을 만들어줬다. 또, 사르트르를 얘기하면 사르트르에 관한 수십권의 책을 가져다주면서 읽어보라고 권했다.”(부인 서현숙)

 

박홍규는 1981년 모교의 노동법 전임 교수 모집에 최종 후보로 올라갔지만, 박근혜가 새 이사장으로 취임한 영남대는 시위 전력을 들어 그를 탈락시켰다. 마침 그해 4년제로 승격한 창원대가 이 젊은 학자를 전임교수로 채용했다. 그는 박근혜가 떠난 영남대로 돌아올 때(1991년)까지 10년간 노동자 도시인 창원에서 대부분 활동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야간에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법 강의를 하는가 하면 노조 결성을 도왔다. 노동자들을 위한 대중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창원에 있을 때였다. 텃밭 가꾸기 등 생태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창원에서였다.

 

—1999년 대구의 집을 정리하고 경산으로 이사올 때는 단순한 주거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결심에 따른 것이라던데.

 

“그렇다. 올해도 몇십년 만에 가장 덥지만, 1998년에도 제 기억에는 몹시 더웠다. 그 여름을 지나면서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는 작은 실천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셋집을 정리하고 이 곳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정말 한적한 시골이었다. 시골에서 차 대신에 자전거를 타고, 동물을 키우고, 주경야독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자유와 자치, 자연이라는 삼자주의의 실천을 꿈꿨다. 60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건 시골에서 산 거다.”

 

그는 지금도 수염을 한달에 한번씩 가위나 바리캉으로 스스로 자른다. 머리도 집에서 가끔 깎는다. 목욕도 자주 하지 않고, 씻을 때는 비누만 사용한다. 그의 부인도 평생 화장을 하지 않는다. 자기 몸을 가꾸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은 유한계급이 남긴 나쁜 유산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지구 생태계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윤리적 삶의 실천이다.

 

—삼자주의 중에 자유로운 개인, 자연과 어울리는 삶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치는 어떤가.

 

“처음에 여기 올 때는 마을도서관을 열고, 일종의 대안학교인 자유학교 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학교 일 때문에 바빠서 그랬나.

 

“그것보다는 마을사람들과 친해지기가 참 어려웠다. 새로 조성된 이 마을은 거의 외지인으로 여기서 잠만 자고 대구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어서 서로 얼굴 보기도 어렵다. 또, 저쪽의 원래 마을은 농사짓는 사람들인데 만나면 ‘공주님’(박근혜) 얘기만 하니까 대화가 안 된다. 처음에는 막걸리를 사들고 가서 대화하려고 노력했는데 솔직히 힘들더라. 앞으로 연구소를 짓고 나면 동네 사람들이 와서 영화도 같이 보고 음악도 듣고 얘기도 할 수 있을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박홍규 명예교수의 유기농 텃밭 입구. 오른쪽 건물은 그가 직접 빚은 벽돌과 폐자재로 손수 지은 농막이다. 안에는 책과 올 봄에 수확한 양파, 마늘 등이 보관돼 있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홍규 명예교수의 유기농 텃밭 입구. 오른쪽 건물은 그가 직접 빚은 벽돌과 폐자재로 손수 지은 농막이다. 안에는 책과 올 봄에 수확한 양파, 마늘 등이 보관돼 있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중학생때부터 버스비 아껴

 

헌책 사모은 책벌레로 유명

 

스스로 성장한 ‘운동권’이었지만

 

사회운동가·리더 성향 아니야

 

“다르게 사는 사람 많았으면”

 

 

“다들 서울로 모이는 게 새 문제”

 

 

—올초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인 웹 부부의 책(<산업민주주의>)과 함께 그 두 사람 평전을 펴냈다.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찾은 건가.

 

“하나의 대안이긴 한데 우리한테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저는 사회 체제를 바꾸는 정책적인 대안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고, 그런 시스템적인 사고에 익숙하지도 않다.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한번도 이게 대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질에 미친 사회에서는 오히려 삼자주의가 공소하고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하기에 우리는 누구나 생태와 환경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안이라는 것은 가능한 이렇게 소박하게 살고, 가능한 걷고, 가능한 낭비하지 않고 사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문화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삶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조금씩이라도 대안적 생활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꽤 나오기는 하는데 다들 서울로 모인다는 게 또다른 문제다.”

 

두어시간 남짓이면 충분하겠지 했던 인터뷰가 4시간을 훌쩍 넘겼다. 준비한 질문 하나는 꺼내지 않았다. 영남지역 진보인사 일부가 제기하는 ‘말만 진보이지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관한 물음이었으나, 꺼낼 필요를 못 느꼈다.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책으로 또 삶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언제던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왕따를 즐기는 지식인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원하면서 그의 집을 나섰다. 글 경산/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사진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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