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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 부부, 남측 예술단 단독공연 관람


김 위원장 "가을 공연 서울서 하자"...김영남.김여정도 동행
평양공연 공동취재단/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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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1  23: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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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봄이 온다'라는 주제로 열린 '남북평화협력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에 참석, 손을 흔들고 있다. 오른쪽은 도종환 문체부 장관. [사진 - 공동취재단 방송 캡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1일 오후 6시 20분(서울시간 6시 50분)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북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과 나란히 관람했다.

'봄이 온다'를 주제로 한 이날 공연은 오후 5시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북측이 7시로 늦춰달라고 요청했다가 다시 6시로 조정됐고, 실제로는 6시 20분에 개막됐다. 북측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람 편의”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참석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시 20분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고, 아나운서가 2층 귀빈석을 가리키며 직접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를 소개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장,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김창선 서기실장 등도 함께 했고, 도종환 문체부 장관과 김상균 국정원 2차장,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윤상 수석감독도 2층 귀빈석에 자리했다.

   
▲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종환 문체부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공동취재단 방송 캡처]

가수 서현의 사회로 백지영, 강산에, 윤도현밴드(YB), 레드벨벳, 최진희, 이선희,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등이 무대에 올랐고, 서현이 북측 노래 ‘푸른 버드나무’를 부르고, 조용필의 선창으로 ‘친구여’를 모든 공연자들이 부른 뒤 ‘다시 만납시다’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으로 2시간 공연이 마무리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공연을 관람하며 박수를 치기도 했고, 공연 후 출연진과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하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한 출연진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공연이 끝나고 출연진을 격려하면서 “문화예술 공연을 자주 해야 한다”며 “남측이 ‘봄이 온다’라는 공연을 했으니, 가을엔 결실을 갖고 ‘가을이 왔다’라는 공연을 서울에서 하자”고 말했다. 아울러 “이런 자리가 얼마나 좋은지 문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내가 레드벨벳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 원래 모레 오려고 했는데 일정 조정해서 오늘 왔다”면서 “평양 시민들에게 이런 선물 고맙다. (부친인)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하겠다”고 사례했다.

정부 고위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북남이 함께하는 합동공연이 의의가 있을 수 있으나 순순한 남측 공연만 보는 것도 의미 있다”며 “문재인 대통령께서 합동공연 보셨는데 단독공연이라도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는 2월 11일 평창동계올림픽 계기로 방남한 삼지연관현악단의 서울 공연을 김영남, 김여정 등 북측 고위급대표단과 함께 관람한 바 있다.

도종환 장관은 “남측 공연 중 노래와 가사에 대해 물어보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다.

   
▲ 공연 직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종환 장관과 악수를 나누며 사의를 표하고 있다. 왼쪽에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 보인다. [사진 - 공동취재단 방송 캡처]
   
▲ 공연 직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종환 장관과 악수를 나누며 사의를 표하고 있다. 왼쪽에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 보인다. [사진 - 공동취재단 방송 캡처]

‘위대한 탄생’의 한 멤버는 “2층에 위원장님 계신다고 아나운서가 말하더라”며 “리설주 여사는 앉아있고 위원장은 박수를 막 쳤다”고 전했다. 아울러 “관객 분위기는 아주 감격적으로 반응해줬다”며 “그분이 와계시니까 무게가..(실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동평양대극장은 경계가 삼엄했고, 남측 기자들은 카메라 기자 1명 외에는 북측의 차단으로 공연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추가,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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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하라 ②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4/01 13:21
  • 수정일
    2018/04/01 13:2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대화를 통한 해결의 의의와 그 가능성
 
김종익 | 2018-04-01 08:18: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북한 핵 문제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북한이 왜 핵 개발에 목을 매고 있는지, 그런 북한의 의도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알게 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청일 전쟁, 한국 전쟁, 북한 핵 개발 이후, 한반도는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또 하나의 고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고비를 제대로 이해하고, 슬기롭게 넘어가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감춰진 ‘역사’를 보는 느낌입니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3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우메바야시 히로미치梅林宏道
1937년생. 도쿄대학 수물리계數物理系 박사(磁性물리학). 태평양 군비 철폐 운동 결성 및 대표 취임. 저서로는 『저항의 과학 기술』(1982년), 『재일 미군』(2002년), 『미군 재편 - 그 목적은』(2006년) 등이 있다.


역사를 날조하는 여론 형성

북한은 예사로 거짓말을 하는 국가이며, 교섭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호소한 지난해 9월의 아베 수상의 유엔 총회 연설은, 안보리 결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연설 자체의 내용에서도 엄격하게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통감하는 것은,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북한은 핵, 미사일 개발을, 단념할 의도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화란, 오히려 북한에게는 우리를 기만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2017년 9월 2일, 아베 수상 유엔 총회 일반 연설)

이렇게 단언한 아베 수상의 연설은, 어떠한 史實로 입증되고 있는 것일까. 한반도와 겨우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직접적인 당사국,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인 일본이라는 국가의 수상이 국민을 대표해 행한 이 연설은, 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심사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것은 역선전Demagogie에 의한 선동이 아닐까. 

아베 수상이 증거로 내건 것은 두 가지 ‘史實’이었다. 하나는,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 다음해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설립부터 2002년에 KEDO가 기능을 정지하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 하나는, 6자 회담이 2005년 9월 19일에 한반도의 비핵화에 합의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그 실시 단계로 걸음을 내딛고, 북한이 핵 실험을 반복해 2009년 6자 회담에서 탈퇴하기에 이른 과정이다.

먼저 KEDO 프로세스부터 생각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북미 합의를 유린하고, 이 프로세스를 붕괴시킨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다. 게다가 이 역사는 미국에서 케케묵은 이야기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논쟁이 이루어져 온 것이며, 미국 공화당의 보수 강경파가 우라늄 농축 문제를, KEDO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용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일본 수상이 유엔 총회에서, 새로운 정보도 아닌, 북한을 계략에 빠뜨리기 위해 들고 나오기에는 부끄러울 정도의 화제였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얄궂게도 아베 수상의 유엔 총회 연설 3일 후, 미국의 『The Nation』지에, 저명한 저널리스트 팀 쇼락Tim Shorrock이 KEDO 붕괴의 역사를 검증한 장문의 기사를 쓰고 있다. 이하는 다양한 문헌, 자료에 기초한 내가 요약한 KEDO 붕괴의 역사이다.

KEDO 프로세스는, KEDO가 북한에 2기의 경수로를 제공하고, 그 가동에까지 연결되는 重油를 제공하는 한편, 북한이 그때까지의 플루토늄 生産爐였던 黑鉛爐와 건설 중인 2기의 대형 흑연로 계획 등 관련 활동을 모두 동결하고, NPT에 잔류하는 것과 함께 IAEA 감시하에 둔다. 또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 사용 위협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한다고 한 내용의 합의였다.

이 과정은, 북한의 스파이 잠수함 좌초 사건, 金昌里 지하 핵 시설 의혹 사건, 북한의 대포동 발사, 회의의 저항에 따른 미국의 중유 공급 정체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거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 클라이맥스는 2000년 가을, 클린턴 정권 말기에 찾아왔다. 10월, 북한 권력 서열 2위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회담했다. 거기에서 양국 관계의 개선 원칙에 대해 “상호 적의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획기적인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새로운 관계로 나가는) 중요한 첫걸음으로, 양국은 어느 쪽 정부도 상대에 대해 적대적 의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고, 과거의 적의에서 자유로워진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앞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고 서약했다. …양국은 불신을 없애고 상호 신뢰를 구축해 중요한 불안 사항을 건설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것과 관련해 양국의 관계는, 상호 상대의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 원칙에 기반을 둔 것임을 재확인했다…”

10일 후에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답례 방문했다. 올브라이트는 회고록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인상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뭔가를 아는 총명한 남자” “고립되어 있었지만 정보통이다. 나라가 비참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고뇌도 보이지 않는, 자신에 차 있어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 핵 문제만이 아니라 KEDO 프로세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미사일 문제도 집중해 협의가 지속되었다. 클린턴 대통령 특별보좌관이었던 웬디 셔먼은 퇴임 후 곧바로 뉴욕 타임스에 「미사일 협의도 합의에 접근했다」는 제목의 글을 게재한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부시(아들) 정권이 탄생한 시점에서도, 클린턴 정권이 달성한 북미 관계의 도달점은 차기 정권으로 인계될 예정이었다. 부시 정권의 첫 국무장관이 된 콜린 파웰은 2001년 1월 상원에서의 인증 공청회에서 그 방침을 진술했다. 

그러나 체니 부통령, 럼스펠트 국무장관 이하 모든 네오콘 세력은, 강경한 북한 적대 정책을 주장하고, 그 영향은 노골적으로 표면화해 갔다. 먼저 2001년 말에 의회에 제출된 「핵 태세의 재검토(NPR)」는, 북한과 이란을 “만성적인 군사적 불안”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거나 숨겨 주거나 하며, 대량 파괴 무기 및 미사일 계획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고 지명하며 핵 공격 대상임을 시사했다. 이것을 안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발표해 “미국은 8년간 준수되어 온 양국의 합의를 깔아뭉갰다”고 비판했다.

“상호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2002년 1월 말에 이루어진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 연설에서, 더욱 공공연하게 깨졌다. 주지하듯이 연설은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부르며, “북한은 국민을 굶주리게 하면서 미사일과 대량 파괴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정권”이라고 평했다. 다짐이라도 하듯이,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 “인민을 해방하지 않는 한, 저 남자, 김정일에 대한 생각은 변함없다”고 적의를 드러냈다. KEDO의 이행을 통해 도달한 관계 개선이라는 북미 합의는, 이렇게 하여 미국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우라늄 농축 문제의 진상

여기까지의 경과에 의해 우라늄 농축 문제를 꺼낼 필요도 없이, 미국 정권이 이데올로기적으로 KEDO 과정을 파괴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후, 부시 정권은 미국 정보기관이 입수한 우라늄 농축 계획에 관한 정보를 이용해, 북한의 합의 위반을 국제적으로 선전, 일본, 한국을 끌어들이면서 KEDO를 완전하게 매장했다.

당시 미국이 입수한 북한의 우라늄 농축에 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수준의 것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뭔가 시험적인 연구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시는, KEDO가 제공하는 경수로는 아직 콘크리트 다지기가 막 시작된 단계이며, 원자로의 노심 반입 단계로 과거의 활동을 포함한 검증이 시작되는 긴 여정의 초반에 불과했었다.

북한이 핵무기 계획을 포기한 후를 예측한 NPT가 허용하고 있는 원자력에 관한 기초 능력 유지를 고려하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혹은 협상 소재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기초 기술 확보를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긴 역사를 가진 상호 불신을 불식시키면서 관계 개선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라늄 농축 의혹에 관한 해명은, 미국 입장에서도 북한 입장에서도 극복해야 할 외교 과제로 파악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2년 10월, 국무 차관보 제임스 켈리가 평양을 방문해 우라늄 농축 문제를 북한에 내밀었을 때, 그에게는 어떠한 외교도 허용되지 않는 제한이 걸려 있었다. 당시 안전 보장 문제의 대통령 보좌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조차 회고록 속에서 우라늄 농축 문제를 외교 문제로 삼지 않았던 부시 정권의 사정을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짐(켈리 국무 차관보)에 대한 지시가 매우 융통성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것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테이블에 올리는 단서가 될 것인가, 그것을 충분히 탐색할 수 없었다. 그는 상황을 워싱턴에 타전했다. 그것은 바로 누설되었다. 나로서는, 어떠한 교섭의 길도 끊어 버리는 강경파가 전보를 누설한 것이 뻔히 보였다. 북한이 분노해서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렸기 때문에, 강경파는 성공했다.”

당시의 일본 신문은, 북한이 비밀 우라늄 농축 계획을 인정했다는 큰 제목으로 도배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당사자들의 증언을 모두 읽어도, 북한은 우라늄 농축 계획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대표단은 북한의 책임자였던 강석주 제1외무 차관과의 회담 후,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했다. 그 결과, 우라늄 농축 계획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라고 미국은 해석했다. 실제 중요한 것은, 강석주는 이 건에 대해 “서로 의논해 가자”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앞으로도 염두에 두어야 할, 북한 외교의 특징에 관한 중요한 교훈이 시사되고 있다. 북한은, 상대국이 강하게 집착하는 문제를 재료로 삼으면서 자국에 유리한 교섭 결과를 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냉정한 교섭자라는 점이다. 당시 미국이 KEDO 프로세스를 유지하면서 우라늄 농축 문제를 협의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나가는 利點을 찾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하라 ①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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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남 북 문화상 "형제끼리 마주앉은 것 같다"

평양 공연단, 고려호텔 도착...예술단, 공연 리허설
평양공연 공동취재단/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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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31  23: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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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남측 공연단 대표들이 공항 귀빈실에서 환영나온 북측 대표들과 마주앉았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앞으로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서 통일의 새 장을 써나가는 데서 한번 우리가 기수가 되고, 힘을 합쳐봅시다. 그러면 못해 낼 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술단과 태권도 시범단을 이끌고 31일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맞이한 박춘남 북한 문화상은 “형제끼리 마주앉은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전 10시 33분 이스트항공 ZE2815편으로 김포공항을 이륙한 예술단과 태권도 시범단 본진 120명은 한 시간 만에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해 북한 땅을 밟았다.

단장을 맡은 도종환 장관과 부단장 김상균 국가정보원 2차장,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윤상 수석감독은 공항 귀빈실로 이동해 북측 박춘남 문화상, 현송월 단장, 김순호 부단장의 환영을 받았다.

   
▲ 평양 공연단 단장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오른쪽)이 환영나온 박춘남 북한 문화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윤상 수석감독(왼쪽)이 북측 현송월 모란봉관현악단 단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실무회담 남북 대표로 만난 바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측 모란봉관현악단을 이끌고 왔던 현송월 단장은 “반갑다. 평양에 오니 우리가 기대가 크다. 유명한 가수들도 많이 오고, 성의껏 준비해 오니 기대가 크다”며 “빨리 만났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반겼다.

도종환 장관은 “꽃이 피었냐”고 묻고 “우리가 공연을 통해 만나면서 남북의 교류와 화해와 평화의 꽃도 활짝 피게 되길 바라겠다”고 인사했다.

박춘남 문화상은 남북정상회담 계획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중국 방문 등을 거론하며 “세계의 이목이 지금 평양으로 쏠리고 이런 때 또 한핏줄 한겨레인 도 선생 일행이 직접 예술단을 인솔하시고 평양에 왔으니까 정말 기회가 왔고 아주 도 선생은 행운이 깃든 분”이라며 “얼마나 좋냐”고 화답했다.

평양 공연단 일행은 려명거리와 김일성광장 등을 거쳐 숙소인 고려호텔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마친 뒤 예술단은 다음날 공연을 위해 동평양대극장에 리허설을 하러 갔다.

   
▲ 가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해, 2005년 공연 당시 안내원을 다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16년만에 다시 평양을 찾은 가수 윤도현 씨는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2002년 MBC 평양 공연 이후 16년 만에 다시 평양을 찾은 가수 윤도현 씨는 “가슴이 벅차다”며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제일 크다. 16년 전과 지금 관객 반응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가장 궁금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2003년 처음으로 육로로 방북해 공연했던 가수 이선희 씨는 “다들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남측 공항에서 오히려 더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지금 긴장이 풀렸다”며 “잘하고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환대에 감사를 표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멤버들은 2005년 단독 공연 때 안내원을 다시 만나 반갑게 대화를 나눴고, 기타리스트 최희선 씨는 안내원에게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날 도착한 공연단 본진 120명을 포함해 방북단은 총 186명이고, 대표단 4명, 가수 11개 팀 총 25명, 태권도 시범단 22명, 정부지원단 17명, 기자단 10명 등으로 구성됐다.

   
▲ 고려호텔에서 내려다 본 평양 거리 풍경.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오랜 만에 남측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긴 평양 사람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오랜만에 남측 취재진이 확인한 평양거리는 차량이 많지 않았고, 일반 승용차보다 택시가 더 많았다. 또한 평양국제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계속혁신, 계속전진’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의 뜻을 이어받자는 내용의 선전문구들도 눈에 띄었다.

‘봄이 온다’를 주제로 진행되는 ‘남북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은 4월 1일 오후 5시(이하 평양시간) 동평양대극장에서 단독공연으로, 3일 오후 4시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남북 합동공연으로 펼쳐진다.

태권도 시범단은 4월 1일 평양 태권도전당에서 단독공연을, 2일 평양대극장에서 남북 합동공연을 갖는다.
 

   
▲ 걸그룸 레드벨벳이 고려호텔 직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숙소인 고려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남측 공연단이 북측 언론의 요청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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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미디어 제국 징검다리는 중앙일보

[삼성 연재기고 (12)] CJ그룹과 지분 공유 삼성 출신, 중앙일보 의사결정 과정 참여 외국자본과 적극 협조

김춘효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 media@mediatoday.co.kr  2018년 04월 01일 일요일

한국 경제의 최대 권력이 삼성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 미디어의 최대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저자는 이건희로 대표되는 삼성 오너 일가라고 단언한다. 삼성은 한국 최대의 미디어 집단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광고, 협찬 등으로 한국 언론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미디어 통제력은 이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디어 권력은 근본적으로 미디어를 둘러싼 제도 장악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삼성의 성장史,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 이병철의 제국 통치 방식, 삼성家와 한국 파워 엘리트, 이건희의 범 삼성家 확장, 삼성 미디어 제국,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한국 미디어 (신문, 유료방송, 광고, 영화) 시장 구조와 삼성의 미디어 검열 영향력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성 권력은 자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 미디어의 구조 장악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에 대한 삼성의 지배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성의 경제력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력의 뿌리가 되는 미디어 통제력을 정밀 분석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이에 저자는 미디어오늘·자유언론실천재단과 함께 한국 미디어 통제 체제와 나아가 한국 사회 지배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삼성의 한국 미디어 통제에 대한 심층 연구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 편집자주 

목차는 다음과 같다. 

(01) 왜 삼성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02) 삼성 제국과 내부 통제 라인 
(03) 이병철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한국 파워 엘리트 
(04) 한국 매스컴 속의 삼성 미디어史 
(05) 금융 자유화와 이건희의 범 삼성계 
(06) 누가 한국 신문 시장을 지배하는가 
(07) 누가 한국 광고 시장을 통제하는가 
(08) 누가 한국 영화 시장을 지배하는가 
(09) 누가 한국 유료 방송 시장을 통제하는가 
(10) 삼성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1) CJ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2)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 구조와 이사회 
(13)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과 2005년 X-파일 
(14) 범 삼성가의 미디어 검열 방식 
(15) 누가 미디어 자유화의 최대 수혜자인가 
(16) 삼성 없는 한국 미디어를 위하여 

 

[ 미디어오늘 Beta Sit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삼성과 대한민국 미디어 ]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8·15 해방직후 신문사를 경영 한 적이 있다. 당시 대구지역 사업가들의 친목단체 ‘을유회’ 소속이었던 이병철은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민보’를 인수했다 (삼성비서실, 1988년 215쪽). 하지만 그는 이 신문사를 오랫동안 경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업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이병철은 사업 본거지를 대구에서 서울로 옮겼다. 효성 창업자인 조홍제와 엘지 창업자인 구인회와 공동으로 ‘삼성물산’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들면서 언론사와의 인연은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1963년 이병철은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을 포함하는 언론사업 진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언론사업 청사진을 이승만 정권 때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와 함께 그렸다. 그 결과 1964년 5월 ‘라디오 서울’을 개국했고 같은 해 12월 동양방송국(TBC)을 개국했다. 삼성은 1년 뒤인 1965년에 중앙일보를 창간했다. 사실 이병철은 1961년 중앙일보 창간을 위해 삼성 비서실에 신문창간 기획안 마련을 지시했다. 그는 특히 중앙일보 창간에 앞서 일본 3대 신문사인 아사히·마이니치·요미우리 신문사를 직접 방문하고 경영과 편집시설 등 신문제작 전반을 시찰한 후 중앙일보를 창간했다(삼성비서실, 1988년 225~226쪽). 중앙일보 창간 당시 이병철은 대표이사직을 홍진기는 부사장직, 이병철의 둘째아들인 이창희는 이사직을 갖고 경영에 참여했다. 중앙일보는 이렇게 ‘이병철-홍진기’ 통제 아래 종합 일간지로서 성장해갔다.

 

▲ 1965년 9월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 1965년 9월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중앙일보는 사실 이병철 삼성 그룹의 중핵기업이다. 오너 일가가 직접 소유지분을 갖고 있고 경영에도 직접 참여한다. 이병철 셋째아들이자 홍진기 사위인 이건희는 1970년 초반부터 중앙일보 경영에도 참여했다. 이건희 부인인 홍라희는 1980년 초반까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에서 미술 등 문화관련 기사를 작성했다. 특히 홍라희 큰 동생인 홍석현이 1994년부터 중앙일보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홍석현이 명실공히 중앙일보 최대 실력자가 된 것은 그 후 5년이 지난 1999년, 삼성그룹에서 분리하면서 부터다. 삼성그룹을 이어받은 이건희가 그의 형제와 삼성 중핵기업들이 갖고 있는 중앙일보 지분을 홍석현 등 홍씨 일가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일보 통제라인이 ‘이병철-홍진기’에서 ‘이건희-홍석현’으로 전환됐다는 걸 의미한다. 즉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가문과 정치 엘리트인 홍진기 가문이 창간 단계에서부터 공동 기획·운영한 가족 미디어 기업이다. 그 전통은 2018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9년, 불안한 중앙일보 독립 

중앙일보는 1965년 창간 이후 2000년대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표1’에서 보듯 중앙일보가 관여하는 미디어 사업은 종합일간지 등을 포함하는 인쇄매체, 종합편성 케이블방송 등의 방송, 영화 투자와 제작 등의 영상 매체 그리고 광고 제작과 유통 등이다. 

 

▲ 표1) 중앙일보 연혁
▲ 표1) 중앙일보 연혁
 
중앙일보는 이병철과 홍진기의 통제 아래에 있던 1987년까지는 신문과 방송 사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신문과 방송 겸업을 금지하면서 방송 사업은 접어야했다. 그 뒤 이병철과 홍진기는 신문 등 인쇄사업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건희가 삼성그룹을 인수 한 다음 중앙일보는 1996년 일본 다국적 광고회사인 덴츠와 50:50 지분으로 종합 광고대행사인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해 한국 10대 광고대행사로 성장시켰다. 그 뒤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한 1999년 이후 중앙일보는 인쇄매체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 등 영상 제작과 유통 그리고 영화관 사업까지 확장했다. 2005년 중앙일보 계열사는 79개에 달했다. 그 뒤 중앙일보가 광고회사와 반도체 장치 그리고 리조트와 편의점 사업 등을 묶어 보광그룹으로 분할하면서 중앙일보 계열사 숫자는 40개 내외로 줄었다.

 

중앙일보는 1999년 4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몇개의 반도체와 LCD 제작 기업, 제2금융기업, 편의점, 레저 스포츠, 광고와 케이블 등 미디어 사업 등을 넘겨받았다. 사업을 넘겨받음과 동시에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표2’에서 보듯 홍석현은 1998년 중앙일보 최대주주였지만 중앙일보를 혼자서 경영할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지분을 제외할 경우 삼성 총수인 이건희와 그의 통제 아래에 있는 범 삼성가의 지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홍석현은 중앙일보를 CJ그룹 계열사와 2010년까지 공동 소유하고 있다. 유민재단은 그의 부친인 홍진기를 기념하는 재단이다. 특이하게도 2016년 지분에서 보듯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홍석현 지분보다 더 많다. 이 회사는 2011년 중앙일보 유상증자를 통해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한 중앙일보 미디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다.

 

▲ 표2) 중앙일보 대주주 변동
▲ 표2) 중앙일보 대주주 변동
 
하지만 1999년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가혹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탈세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중앙일보가 삼성에서 분리될 당시 증여세와 법인세 등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백병규, 1999년 77쪽). 세금 탈루 혐의에 연관 된 기업들은 지난 1983년 홍진기가 설립한 텔레비전브라운관 부품업체와 반도체 장비기업들, 종합 레저시설, 1990년 일본 세이유 그룹과 제휴해 설립한 ‘훼밀리 마트’ 등이었다. 최대주주의 구속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최대 위기였다. 오너가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재벌의 경영방식에 비춰보면 오너의 부재는 통제라인 부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뒤 중앙일보를 제외한 광고와 반도체 제조, 리조트, 편의점, 금융사업을 묶어 그의 형제들에게 사업을 분리해 줬다. 그 기업의 이름이 보광그룹이다. 중앙일보 그룹이 2005년을 두 개의 재벌기업으로 분할했다.

 

기업사냥, 중앙미디어 제국 발판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이후 중앙일보를 복합 미디어 제국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지분을 투자했다. ‘표3’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무료 신문사업, 방송 제작업, 영상 투자사업, 경제 신문, 연극과 뮤지컬 등 공연 투자사업, 종합편성채널 획득, 온라인 신문 등에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이들 투자기업들은 중앙일보가 영상 사업 분야로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한다. 

▲ 표3) 중앙일보 주요 타법인 출자 시기
▲ 표3) 중앙일보 주요 타법인 출자 시기
 
중앙일보도 CJ 그룹처럼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미디어 제국을 완성해 갔다. 이는 금융자유화 이후 재벌들이 미디어 사업 확장을 위해 사용한 ‘우회상장’ 기법과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우회상장이란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장된 중소기업을 인수한 다음 사업 내용에 미디어 사업을 추가하고 이름을 바꿔 재상장하는 수법을 말한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bond with warrant)는 새로운 주식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된 신 금융기법이다. 하지만 재벌 오너들이 세금을 적게 내고 그룹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등 그의 자녀들에게 그룹을 상속하기 위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 SDS 그리고 제일기획 등 중핵기업을 상속 통로로 활용했다.

 

중앙일보는 계열사인 제이콘텐트리에서 우회상장과 BW 기법을 활용했다. 사실 중앙일보가 이 기업을 인수할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이 신문은 사실 종합일간지 시장에서 중앙일보 경쟁사였던 한국일보가 소유한 스포츠와 연예소식을 주로 보도하는 대중지였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경영이 악화된 한국일보는 피혁제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상장사인 한길무역 지분을 획득한 다음 회사이름을 일간스포츠로 변경했다. 그뒤 사정은 ‘표4’에서 보듯, 이 회사 이름은 일간스포츠-아이에스플러스코프-제이콘텐트리로 개명했다.  

 

▲ 표4) 제이콘텐트리 연혁
▲ 표4) 제이콘텐트리 연혁
 
‘표5’에서 보듯, 이름이 변할 때마다 최대주주가 바뀌었다. 이 회사는 2001년에는 한국일보 소유였다. 2003년에는 한국일보사, 중앙일보사 그리고 매일경제신문가 공동소유했다. 그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중앙일보사는 2007년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1년 뒤인 2008년 회사이름이 아이에스플러스코프 개명했다. 그뒤 중앙일보가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로 지정하면서 다시 이름을 제이콘텐트리로 바꿨다.

 

 

▲ 표5) 제이콘텐트리 대주주 변동 현황
▲ 표5) 제이콘텐트리 대주주 변동 현황
 

‘표6’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최대주주로 확정된 2005년 이후 영상과 영화 그리고 공연관련 사업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대주주 변동이 있었던 2000년 초반 이 기업은 미디어 기업을 확대하지 않았다. 피혁회사가 소유할 당시에는 미디어 투자 기업이 아예 없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매일경제신문이 공동으로 이 기업을 소유할 당시에는 아예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상장된 중소기업이 미디어 투기 자본의 돈놀이터임을 암시한다.  

 

 

▲ 표6) 제이콘텐트리 타 미디어법인 출자
▲ 표6) 제이콘텐트리 타 미디어법인 출자
 
중앙일보는 제이콘텐트리를 영화 상영관 사업 확장 통로로 활용했다. 이 회사는 2007년 중소형 독립 영화 상영관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씨너스를 인수한 다음 영화 상영관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2010년 씨너스는 한국 3대 영화 상영관인 매가박스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해 2012년 완결했다.

 

 

▲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중앙일보 제공
▲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중앙일보 제공
 
또한 홍석현의 중앙일보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과 협력해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휘닉스커뮤니케이션과 터너브로드캐스팅 그리고 팍스스포츠 채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외국 기업들과 지분을 공동투자하고 이사회 의사를 공유하지만 후자는 느슨한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중앙일보의 선택적 사항이기 보단 외국 자본의 속성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미디어 시장에 진출해 있는 외국인들은 광고시장을 제외하곤 한국 시장에 자본을 투자하기보다 국내 파트너와 사업적 협력만을 유지하고 있다.

 

 

‘표7’에서 보듯,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한국 광고시장이 완전 개방된 1996년 설립된 이후 2003년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그 뒤 지속적으로 다국적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휘닉스가 협력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은 광고를 대행보단 광고 제작에 더 치중해 있다. 오프라인 매체보다는 온라인과 모바일 광고에 집중하고 있다.

 

 

▲ 표7)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연혁
▲ 표7)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연혁
 

 

‘표8’에서 보듯, 다국적 기업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2014년 소유지분을 다른 기업에게 매각했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부터 유지하고 있던 동일 지분 비율이 201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홍석규가 2014년까지 지분을 보유했다. 그 이후 그의 지분은 보이지 않는다.  

 

▲ 표8) 대주주 변동 현황
▲ 표8) 대주주 변동 현황
 
중앙일보는 삼성과 무관한가?

지금까지 중앙일보의 미디어 사업 확장 현황과 주요기업의 소유구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중앙일보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홍석현이 소유지분과 경영권한 행사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2012년 이후 중앙일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등장하면서 홍의 권한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 지주회사에 대한 정보가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2016년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권을 분석해 보면 신문과 잡지 등 인쇄 매체를 총괄하는 중앙일보(32.86%), 영화 제작과 영화관사업을 통제하는 제이콘텐트리(21.39%), 방송사업을 총괄하는 JTBC(21.39%), 온라인 미디어 선두기업인 조인스(100.0%), 미디어 서비스를 책임지는 중앙판교개발(72.82%)가 최대주주이다. 즉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대한 지분 정보는 공개돼 있지 않다. 

 

▲ 2016년 중앙일보 통제 라인. 그래픽=안혜나 기자
▲ 2016년 중앙일보 통제 라인. 그래픽=안혜나 기자
 
사실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는 2008년 중앙일보가 영어신문과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기 위해 중앙일보가 설립한 자회사다. 그런데 2010년 중앙일보사가 자산 약 6547억 원과 부채 5583억 원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넘긴다. 그리고 2011년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이때 중앙일보와 CJ의 지분이 일부 줄어들었는데 그 뒤 2012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가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1995년 삼성에버랜드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2011년 중앙일보에서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중앙일보는 홍씨 가문의 것인가라는 점이다. 서류상으로는 홍석현과 CJ그룹이 공동소유하고 있다. CJ그룹은 이재현이 통제한다. 그러므로 중앙일보는 홍석현과 이재현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최대주주는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다. 홍석현과 이재현의 공조관계는 케이블 방송 회사인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와 ‘에이스토리’에서도 발견된다. 홍석현은 오리온시네마네크워크 지분을 2012년 매각했다. 이로인해 CJ와 사업적 협력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3년 에이스토리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양쪽 집안의 협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2013년 지분 비율을 보면 중앙일보(8.32%)와 제이콘텐트리(8.32%) 그리고 CJ E&M(16.64%)이다. 2015년에는 2013년 지분에 보광 18호 콘텐츠조합(3.4%)과 보광 20호 청년창업투자조합(3.4%) 등이 더해진다. 즉 중앙일보와 CJ는 여전히 미디어 사업 협력자이다. 

 

▲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시찰하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사진 오른쪽),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사진 왼쪽), 이건희 회장(이병철 회장 뒤), 이재용 사장(사진 가운데). 사진=삼성그룹
▲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시찰하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사진 오른쪽),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사진 왼쪽), 이건희 회장(이병철 회장 뒤), 이재용 사장(사진 가운데). 사진=삼성그룹
 
마지막으로 중앙일보가 삼성그룹과 무관하다고 확언하기 어려운 점이 중앙일보 중핵기업 이사진 명단에서 발견된다. CJ도 2000년대 삼성 비서실이나 구조본부 출신들이 CJ 미디어 계열사 경영 총괄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중은 2010년이 넘어가면서 줄어들었다. 이와 달리 중앙일보는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건희 삼성 회장의 고등학교 동창생이자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이 홍석현 회장 측근에 배치돼 있다. 또한 재정을 감사하는 이사도 중앙일보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에서 분리할 당시 중앙일보에 배속됐다가 보광그룹으로 분할해 나간 휘닉스커뮤니케이션 등기 이사들이 삼성의 중핵기업 이사들이다. 이처럼 삼성맨들이 2010년 이후까지 중앙일보 주요기업 이사로 등재돼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중앙일보는 온전히 홍씨 가문의 것으로 확인할 수 없다.

 

즉 중앙일보는 1965년 이병철-홍진기가 협력해서 창간하고 기반을 구축했다면 2018년 이 회사는 이건희-홍석현이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공동 소유 운영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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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철수, 지금 최적기다!

주한미군 철수, 지금 최적기다!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04/01 [11: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 3월 31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한미군사훈련 중단, 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는 집회를 열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 3월 31일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미군영구주둔 반대의 내용으로 집회를 열었다.

 

4월 1일은 평창올림픽으로 연기되었던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된다집회 참가자들은 평화와 통일의 바람이 불러오는 한반도에 한미합동군사훈련 완전 중단하라.’, ‘이 땅을 강점하고 있는 주한미군을 반대한다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의 내용으로 연설과 다양한 문화행사로 미 대사관 앞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먼저 집회는 5명이 연설자가 나와 한미합동군사훈련 반대미군은 이 땅을 떠나라 등의 내용으로 연설을 했다.

  

▲ 31일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현유진 대학생당 대학생문제해결팀장, 양희원 강원대학생, 박민아 동덕여대학생, 윤태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교육국장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현유진 대학생당의 대학생문제해결팀장 연설에서 평창올림픽으로 연기되었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4월 1일부터 시작된다비록 규모와 일정은 축소되고 일부 전략무기들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미연합훈련을 해도 되는가아무리 축소해도 북을 적으로 하는 군사훈련이며선제폭격의 성격을 띠고 있어 위험하다이것은 언제든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봄과 함께 평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한미연합훈련은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남북북미정상회담 개최는 어느 때보다 대화를 통한 화해의 가능성이 높아진 지금한미연합훈련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해서 강원대 양희원 학생이 연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65년간 바뀌지 않는 정전협정이 있다수구보수 세력은 정전협정을 방패삼아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많은 피를 강요해왔다빨갱이종북과 같은 말로 국민들을 탄압했다정전협정은 도구 삼아서 그들의 집권을 유지해온 수구적폐 세력에게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 국민들의 새로운 뜻을 4~5월 보여줘야 한다그리고 북미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집회 참가자들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하라','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세 번째 연설자로는 동덕여대 노래패 놀해랑의 박민아 학생은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기간 싸늘했던 남북관계가 따끈따끈하게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오고 있는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는 것이 있다바로 대북제재이다북은 양보해서 비핵화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는데트럼프는 북에게 여전히 최대의 압박과 제재로 유지겠다며 대북제재를 고집하고 있다미국의 행위는 옳지 않다남북북미 교류사업 활성화를 해야 할 것이며미국은 당장 대북제재를 해제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연설했다.

 

이어 윤태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교육국장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미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자로 내용으로 연설했다.

분단 78년이다우리 민족끼리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것은 미국이며, 78년 간 온갖 해를 끼쳐왔다그러나 이제 분단의 끝이 보인다민족이 만나고얼굴을 맞대니 그 어떤 외세도 두렵지 않다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우리 민족끼리 철석같이 손을 잡고 누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민족단결을 강조했다.

 

▲ 가극단 미래가 '주한미군 철수, 지금이 최적기다'라는 격문을 낭독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마지막 연설은 가극단 미래가 주한미군 철수지금이 최적기다라는 격문을 낭독했다.

  

▲ 청춘의지성 소속 시사콩트 동아리 '퀵'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주제로 시사콩트를 선보였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문예공연을 보면서 함께 즐기는 집회 참가자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집회 2부는 미군철수, 제주4.3, 한반도의 평화통일 등을 주제로 대학생들의 시사콩트 노래패 악단 씽, 동덕여대 노래패 '놀해랑', 대학생노래패연합, 한국대학생노래패연합 '내일'이 노래공연을 선보였고, 청춘의 지성 율동패 '흥'의 율동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로 채워졌다. 

 

문화공연을 보는 집회참가자들은 흥겹게 박수도 치고노래도 부르며 함께 군사훈련 중단, 미군철수의 의지를 다졌다.

  

▲ 청춘의 지성 율동패의 공연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집회참가자들이 문예공연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이날 투쟁에는 노세대부터 젊은세대,아이들까지 함께 참여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노래악단 '씽'이 제주 4.3을 주제로 한 노래, '누가'를 부르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들어라 양키야'이 노래와 율동공연. 미국은 한미연합군사훈련 완전 중단하고, 이 땅을 떠나야 한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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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간지대로 대피한 주민들(1948. 5.)

중산간지대로 대피한 주민들(1948. 5.)ⓒ 미 국립기록문서관리청


일본의 패망 이후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좌우의 극심한 이념 대립과 정치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진흙탕 싸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평범한 국민들이었죠. 

그중에서도 '제주 4.3 사건'은 수년에 걸쳐 수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가장 참혹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육지와 단절된 제주도에서 벌어졌고 이념 문제까지 얽혀 있었기 때문에 진상이 밝혀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뜻있는 사람들의 줄기찬 노력은 계속됐고,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작업 및 특별법 제정이라는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 

4.3 사건 다룬 첫 번째 영화
 
 영화 <레드 헌트>의 한 장면. 생존자들의 기억은 수십년이 지나서도 생생하다.

영화 <레드 헌트>의 한 장면. 생존자들의 기억은 수십년이 지나서도 생생하다.ⓒ 조성봉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1997)는 4.3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영화입니다. 당시에는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웠던 소재를 다뤘기 때문에 제작부터 상영까지 공권력의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1992년 제주도 '다랑쉬굴'에서는 백골 시신 여럿과 그들이 은신했던 생활 흔적이 함께 발견됩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이들의 유해를 신속히 화장해 버리는 등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했습니다. 왜 이들은 동굴 속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까요? 왜 발견되고 나서 급히 화장되는 신세가 돼야 했을까요? 이런 의문은 4.3 사건의 전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전반부에서는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4.3 사건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짚어 나갑니다.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무장봉기만이 아니라, 그 전해인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있었던 무장 경관의 발포 사건이 4.3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적시합니다. 6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서 제주도의 민심은 악화됩니다. 일반인들과 공무원들까지 똘똘 뭉쳐 총파업을 벌일 정도였죠. 미 군정 당국은 극우 인사를 도지사로 임명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고, 이는 4.3사건 내내 악명을 떨친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들어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듬해 4월 3일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월 10일 선거를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납니다. 이 봉기를 주도한 남로당 인사들은 발생한 지 한 달도 안 돼 진압군과 협상을 벌이며 평화롭게 해결할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협상이 결렬되면서 진압군의 토벌 작전이 시작됩니다. 이후 군경과 서북 청년단이 제주도 전역에서 벌인 '빨갱이 사냥'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내면서 수년간 계속됩니다. 

후반부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끔찍한 기억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그날의 아픔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입산한 반군이나 혹은 동조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제주도 중산간 지역의 수많은 마을을 초토화한 만행부터, 해안가 동네에서 공개적으로 자행된 집단 학살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증언은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4.3 사건의 배경과 경과는 물론, 이후 벌어진 악몽 같은 토벌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제주도민이 아니더라도, 4.3 사건의 핵심적인 부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1989년 설립되어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수집해온 '제주 4.3연구소'와 지속적인 취재를 통해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한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물론 2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긴 하지만, 그때 기준으로 봐도 투박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어체로 일관하는 해설이나, 짜임새가 부족한 구성 등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관련 연구자 및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아낸 사료적 가치, 그리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소재를 최초로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공권력이 국민을 저버린 사건
 
 영화 <레드 헌트>의 한 장면. 4.3을 겪은 사람들은 아직도 공권력에 치를 떨고 있다.

영화 <레드 헌트>의 한 장면. 4.3 피해자 유족들은 아직도 공권력에 치를 떨고 있다.ⓒ 조성봉


4.3 사건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모습'이 전형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국가 혹은 공권력이 일반 민중의 기대를 수없이 배반한 사건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는 데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부터 시작된 이 '배신의 역사'는, 부패한 왕정과 일본의 식민 지배, 해방 이후의 권위주의 정부 등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이어졌지요.  

20세기 내내 우리나라 지배층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데 공권력을 남용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5.18 광주 민주화항쟁은 4.3과 매우 흡사한 비극으로서, 무고한 국민을 거리낌 없이 학살한 것부터 '빨갱이' 탓을 하며 사후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까지 그대로 빼닮았습니다. 민주 정부 10년을 겪고 난 21세기에도 이런 일은 계속됐습니다. 

올해는 4.3 사건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활동이 시작됐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사과한 적도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4.3 사건 추념식에 직접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역대 민주 정부가 4.3 사건의 진상 조사와 해결에 힘쓴 이유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와 결별하고 진짜 국민을 위하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4.3 사건을 기억하는 일은 또한 평화를 염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은 평화밖에 없으니까요. 마침 우리나라는 곧 있을 남북 및 북미 간의 정상담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긴 여정을 다시 한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레드 헌트>는 이런 시점에 보기 딱 알맞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이 담아낸 비극적인 역사는 평화 정착을 위한 중단없는 노력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웅변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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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에서 예수가 부활했다

그의 삶에서 예수가 부활했다

조현 2018. 03. 30
조회수 1835 추천수 0
 

 

부활절-.jpg 

 

1일은 부활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언제까지 부활을 기념만 할 것인가. 오직 그런 부활을 신화니 기념일로만 박제화한다면, ‘그리스도’는 만우절의 거짓이 된다. 믿는다는 것과 삶의 불일치, 자본주의에서 더욱 벌어지는 그 간극이 그 거짓신앙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피흘림,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려는 이들이 이땅에 있었다. 우리 곁에 온 예수였다. 우리 곁에 머물렀던 참그리스도인 9명의 삶이 <사랑하며 춤추라>(신앙과지성사 펴냄)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예수의 삶을 살아낸 어른들의 이야기’란 부제가 붙었다.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성자적 의사 장기려, 풀무원공동체의 창설자 원경선,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 김용기, 광주의 여성운동 대모 조아라, 원주의 헌신적 선교사 나애시덕, 거지와 고아들의 아버지 황광은, 고난의 삶의 대변자 권정생,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나 이들 가족 혹은 제자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9명의 각자의 저자로 나서 그 감동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살려냈다. 

 

 발문을 쓴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는 “지난 세기 이 척박한 땅에 태어나 한 세상 살다 떠난 그들의 삶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 내면의 어둠이 조금씩 스러진다”며 “그들의 삶과 실천은 온통 욕망 주위를 맴돌며 사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을 환기시키지만, 새롭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일깨운다”고 했다. 추천사를 쓴 김상근 목사(한국방송공사 이사장)는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간 분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밝혔다. 또 김신일 박사(전 부총리,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는 “작게라도 흉내 내며 조용하고 진실하게 예수를 따르자”고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눈물의 감동만 주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택한 고난과 헌신, 사랑이 얼마나 큰 삶의 기쁨, 특히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쁨의 자장으로 끌어올리는지를 보여준다. 일화 한토막씩을 통해 그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본다. 

 

 ◇대천덕(양혜원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저)

 1-.jpg경제와 영성을 연결한 예수원 철학의 중심에는 코이노니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대신부님은 ‘물만두 신학’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물만두는 다른 음식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만두에는 껍질이 있지 않습니다? 껍질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별 맛이 없습니다. 껍질 속에 고기가 있는데 만두의 참맛은 만두소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껍질이 없으면 속에 든 고기가 다 풀어지기 때문에 껍질로 꼭 싸주어야 합니다. 껍질이나 소나 둘 다 필요합니다.”

 대신부님은 경제 정의와 성령의 은사를 연결시키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많았는데도 병든 자들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드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라고 대신부님은 설명한다. 기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누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나눔을 해야 하나님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교인들이 서로 나우어 주고 서로에 대하여 진실한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코이노니아는 믿는 사람들이 서로 자원하여 물질을 나누는 것이고 이러한 만두 껍질이 있어야, 만두소, 곧 하나님의 능력인 고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신부님은 이것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가르치셨다.

  

2-.jpg◇장기려(지강유철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저)

 선생의 다른 인간됨은 어떤 사람을 거지, 대통령, 행려병자 등 그가 가진 권력·돈·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은 평양에서든 부산에서든 자기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했다. 겨울에는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주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복음병원장 시절, 사택에 숨어들었던 도둑이 책이라도 갖다 팔면 돈이 될까 싶어 가지고 나가려다 선생에게 들켰다. “젊은이,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 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그 책값을 쳐 줄테니…”하며 돈을 주고 놓아 주었다.

 선생이 6·25전쟁 이후 고집을 부리며 무료 병원을 계속한 것이나, 부산대학교 뒤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던 것은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산 간질환자들의 모임을 알고 평생 그 회장직을 놓지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정부보다 10년이나 먼저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던 것, 그리고 몇 년 뒤 보사부 장관이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조합을 ㅁ나들 수 있었던 것 또한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그런 선생에게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 병자든 모두가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3-.jpg원경선(원혜영 국회의원·원경선의 아들 저)

 전 세계 인류 중 4분의 1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과 2초에 1명꼴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결심하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사림이다. 곧 국제기아대책본부에 가입했다. 정농회 회원들, 기독동신회 교인들, 풀무원 회도도 적극 동참케했다. 아버지는 풀무원 회사의 직원들을 교육할 때마다 나에게 갈비탕 두 그릇 사 줄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사람들은 다 손을 들었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갈비탕 두 그릇 값인 만 원씩을 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마련한 기금들이 보태져 에티오피아로 전해졌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임을 갖기만 하면 자식들은 물론 손자들에게도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얼마를 내놓을 것인가를 적어내라고 했다. 귀가 뜨일 때마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자란 손자들은 월급을 받을 나이가 되자 자동이체로 통장을 등록하고 다달이 일정 금액을 기부하게 되었다.

  

4-.jpg◇김용기(김장생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교수 저)

 가난안농장에서의 공동체의 일과는 새벽 4시에 김용기의 차남 김범일이 치는 개척의 종과 함께 시작된다. 개척의 종은 매일 세 번씩 10차례를 친다. 첫 번째 종은 육체의 종이다. “육체의 잠을 깨자. 육체의 잠이 들면, 나태와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종은 정신의 종이다. “정신의 잠을 깨자. 정신의 잠이 들면, 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세 번째 종은 영혼의 종이다. “영혼의 잠을 깨자. 영혼의 잠이 들면, 하나님을 빼앗기게 된다.”

 기상 후 애국가를 4절 까지 부르고, 4킬로, 8킬로, 12킬로 구보를 한다. 구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정신 개척’, ‘우리는 젊다’, ‘역사는 부른다’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7시부터 아침식사 전까지 아침기도회를 한 후 식사를 한다. 가난안농장에서의 식사는 구호로 시작을 한다. “먹기 위하여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하여 먹자.” 주식은 고구마였고 음식은 조금이라도 남길 수 없었다. 치약은 3미리, 비누는 남자 2번, 여자 3번만 사용한다. 저녁 10시까지 노동은 계속 된다. 생일이나 회갑 또한 이곳 가나안에서는 없다.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고 기쁜 일임으로 매일매일을 새로이 태어나는 자세로 살아야지 일 년에 한번 생일상을 차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회갑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허례허식이 된다며 자신부터 생일이나 회갑을 없앴다.

 

 5-.jpg조아라(유성희 한국 YWCA 사무총장 저)

 여성으로 조아라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26세에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살기에도 조아라의 인생은 벅찬 것이었다. 자신의 아이들은 뒷전에 두고 버려진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했던 조아라는 평생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둘째 아들이 장로 장립을 받던 날, 조아라는 직접 안수를 하면서 울고 말았다. 기쁘면서도, 서럽고 힘들었던 세월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 땅의 수고를 모두 마친 후 그녀가 자신의 방에 남긴 것은 평생 사용했던 낡은 재봉틀과 구석구석 닳은 가방 한 개와 손수 만들어 입었던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조아라는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품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다. 우리도 조아라처럼 살 수 있을까. 조아라를 닮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조아라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어렵더라도, 무섭더라도,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물러서지 말아라.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섭섭해하지 말아라. 묵묵히 네 길을 가면 하나님은 늘 동행해 주신다.”

 

 6-.jpg◇나애시덕(최종수 미 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

 나애시덕은 2003년 케이비에서 텔레비전이 <인물현대사>에 선정한 유일한 외국인이다. 어느 감리교 목사가 자기 교인 한 사람을 입원시키기 위하여 자기 교인 한사람을 입원시키기 위하여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와서 독실한 감리교인이니까 꼭 입원시켜 달라고 나 선생님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나 선생님은 뜻밖에도 불교신자였던 환자를 먼저 입원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감리교 목사는 대단히 화가 났다. 이 목사가 나 선생님에게, “당신은 감리교에 충성스럽지 못하다”라고 항의하면서 화를 냈다. 감리교인 대신에 불교신자를 먼저 입원시키다니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나 선생님은 “요양원에서 누가 먼저 입원해야 하느냐는 흉부 엑스레이가 보여주는 병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엑스레이 사진에는 감리교인, 비교인의 표시가 없지요!” 나 선생님은 고국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하여 항상 마음 아파했다.

 

 7-.jpg◇황광은( 김정호 후러싱제일교회 담임목사 저)

 황광은은 거지들 고아들과 늘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당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정신을 길러줬다. 그것이 삼동 사업이었다. 종로 네거리 뒷골목에 원래가 변소였던 자리를 개조해 살 집을 마련하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지냈다. 여름에는 심한 냄새가 났었고 겨울에는 또 견딜 수 없을만큼 추웠다. 추운 겨울에도 고아들과 함께 거기서 잤고, 냄새나는 여름에도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훗날 와이엔시에이 총무를 지낸 현치호씨의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거기 음식을 한 끼도 먹지 않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데 그걸 어떻게 먹고 앉아 있습니까. 그러나 광은은 그 고약한 냄새나는 곳에서 보기에도 지저분한 음식을 함께 먹곤 했었지요. 아무튼 천성이 아니고는 못 할 일이었습니다.”

  

8-.jpg ◇권정생(이철지 전 종로서적 대표 저)

 이오덕 선생은 권정생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조그만 교회 한쪽에 있는 부속 건물의 방 한칸을 빌려 자취를 하고 있는 그는 내게 모든 신상 얘기를 해 주었다. 그는 한 해 동안 총 수입이 4천5백 원으로 살았다고 했다. 4천 원은 원고료 수입이고 5백 원은 어느 낯선 할머니가 주고 갔다는 것이다. 신춘문예 시상식도 못 갔단다. 입을 옷도 여비도 없었고, 건강 때문에도 갈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다만 동화를 쓰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듯한 이 작가가 깜박거리는 목숨의 불을 간신히 피워 가면서 40년 가까운 반생을 온갖 신체적 물리적 또 정신적 고통 속에서 얼마나 처절한 생활을 하여 왔는가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 민족의 온갖 불행을 한 몸에 지니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 어느 가을날에 그의 토담집을 다시 방문했다. 권 선생은 그의 표현대로 불쌍하게 떨어진 낙과를 주워 모았다면서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일행들은 흠집 난 곳을 피해 가며 맛있게 먹었다. 먹성이 안 좋은 편이라 주저하는 내겐 먹어보라는 흰소리도 하지 않았다.

 방 한구석에는 흰쌀밥 담은 양재기가 놓여 있었다. 그 밥을 셋으로 구분하고 한쪽은 ‘누렁이’ ‘꾸구리’ 몫, 다른 한쪽은 ‘생쥐’ 몫, 또 다른 한쪽은 ‘당신’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이 없다.

 

 9-.jpg◇이현필(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저)

 이현필은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현필이 한국전쟁 중 설립한 동광원에서는 언님(동광원의 수녀)들이 출가 전 낳은 아이들을 고아들 속에 넣어 함께 키웠다. 자기 자식들과 고아들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먹는 것도,입는 것도 똑같이 키웠다.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었다. 그때 아이들이 오는대로 받다보니 먹이고 재우는 아이들이 정원을 몇배나 넘는 600명이 넘었다. 제대로 허가받은 고아원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많아지자 광주시청에서 아이들을 모두 다른 고아원으로 분산시켰다. 가까운 데로 보내면 아이들이 다시 찾아온다며 멀리 순천과 목포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아이들이 절반 이상이 돌아왔다. 걸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빼고는 대부부의 아이들이 며칠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동광원을 걸어 찾아왔다. 고아들을 자식처럼 대하는 그곳이 배곯더라도 그 어떤 곳보다 좋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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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다녀와 본 조용필의 너스레 "긴장할 것 없다"

[현장] 남북평화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 공연 '봄이 온다' 본진, 31일 김포공항 통해 방북

18.03.31 11:38l최종 업데이트 18.03.31 12:33l
사진·영상: 유성호(hoyah35)

 

평화 위해 V 포즈 취하는 방북예술단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들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평화 위해 V 포즈 취하는 방북예술단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들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유성호
방북예술단 "잘 다녀오겠습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들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방북예술단 "잘 다녀오겠습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들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유성호
"이번 공연의 주제는 '봄이 온다'이다. '봄이 온다'는 주제처럼 따스한 평화의 봄기운이 한반도에 불어올 수 있도록 여러분들께서도 지지해주시고 청원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인사가 끝나고 박수가 나왔다. 31일 오전 9시 40분께, 김포공항 국제선 로비에 마련된 간이무대에는 20여 명의 음악인들이 자리했다. 남북평화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봄이 온다'에 참여하는 예술단 본진이 오늘 평양으로 떠난다. 방북 전 국민들게 인사하기 위해 마련된 이 자리에는 여러 매체의 기자들 그리고 예술단을 응원하기 위한 팬들까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윤상 "공연 바라보는 시선, 한 가지만 있는 것 아니지만..."
 
방북하는 도종환 "평화의 봄기운이 한반도 불어올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들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고 있다.
▲ 방북하는 도종환 "평화의 봄기운이 한반도 불어올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들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고 있다.ⓒ 유성호
윤상 "평화 염원 담아 최선을 다하겠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을 이끄는 가수 윤상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윤상 "평화 염원 담아 최선을 다하겠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을 이끄는 가수 윤상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유성호
주무부서의 장관이자 이번 예술단의 단장이기도 한 도종환 장관은 "13년 만의 평양공연이 성공적으로 치러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면서 "문화·체육 분야에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 그리고 남북간 상호존중과 화해의 물꼬를 터나가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다"라고 인사말을 전했다.

이번 예술단의 음악감독을 맡은 윤상은 "너무나도 큰 영광임과 동시에 설명하기 힘든 만큼의 무게감도 동시에 느끼고 있다"라면서 "대중음악계 별들이 한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윤상은 "어떤 분은 방송을, 광고를, 콘서트를 미뤄야 했다"라며 "그 짧은 시간 안에 준비를 하다보니까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참여해준 모든 아티스트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얘기했다. 끝으로 윤상은 "지금 이 공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라면서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봄이 온다'처럼 한반도에도 그런 평화의 봄이 함께할 수 있는 염원을 담아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돌아오겠다"라고 응원을 부탁했다.

이어서 출연하는 아티스트들이 짧게 한마디씩 소감을 전했다. 이날 예술단 단원들은 '봄이 온다'라는 이번 공연 제목처럼 '한반도의 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소녀시대 서현은 앞서 평창동계올림픽을 기념하여 내려온 북측예술단의 공연에서 함께 사회를 본 바 있다. 

북한에서도 노래뿐만 아니라 공연 사회를 볼 예정인 그는 이날 자리에서도 마이크를 붙잡고 간담회를 진행하며 자신의 소감도 전했다. 서현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동포들과 함께 공연할 수 있어서 벅차다"라며 "오늘 벚꽃이 피고 있더라. 우리 곁에 봄이 이미 와 있는 것 같다. 남과 북 사이에도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가수 백지영은 "(북측과) 잘 섞이는 공연을 하고 오겠다"라고 말했고, 알리는 "따뜻한 봄 전해드리고 오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뒤늦게 추가로 합류한 강산에는 "솔직하게, 아직도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라며 입을 열었다. 음향사고 때문에 잠깐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나자 "이제 꿈에서 깨어나라고 그러나 보다"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영혼을 담아서 목청껏 잘 다녀오겠다"라며 감사를 전했다. 

이번 예술단의 막내인 걸그룹 레드벨벳은 멤버 조이가 드라마 촬영으로 인해 빠진 채 북한으로 떠나게 됐다. 앞서 윤상은 "가장 막내인 레드벨벳 같은 경우에는 처음 연출부의 섭외 때부터 많은 어려움들이 예상 됐었는데, 우려했던 대로 완전체로 참가하지는 못하게 된 상황"이라며 "멤버들이 다 한마음으로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아쉬워했다. 

레드벨벳을 대표해 마이크를 잡은 멤버 슬기는 "뜻깊은 자리에 저희가 멋진 선배님들과 함께 공연하게 되어서 너무 영광이다"라면서 "저희가 막내니까, 밝은 에너지를 북측까지 잘 전달해드리고 오겠다"라고 말했다.

평양에 다시 가게 된 이들도 있어... 팬들도 응원
 

 
방북하는 조용필 "잘 하고 오겠습니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조용필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고 있다.
▲ 방북하는 조용필 "잘 하고 오겠습니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조용필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고 있다.ⓒ 유성호
방북하는 조용필 "잘 하고 오겠습니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조용필, 이선희가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에 참석하고 있다.
▲ 방북하는 조용필 "잘 하고 오겠습니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조용필, 이선희가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에 참석하고 있다.ⓒ 유성호
방북하는 서현 "남과 북 사이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서현과 알리가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고 있다.
▲ 방북하는 서현 "남과 북 사이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서현과 알리가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고 있다.ⓒ 유성호
이날 방북하는 아티스트 중에서는 북한 공연이 처음이 아닌 이들도 눈에 띄었다. 앞서 2005년에 평양에서 공연한 바 있는 조용필은 "여기서 공연하듯이 또, 북측에 가서도 편안하게 공연할 것"이라며 "저뿐만 아니라 뭐 여러 가수분들 긴장할 것도 없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연습도 다 마쳤고, 즐겁고 편안하게 저희들의 음악을 보여드리겠다. 잘하고 오겠다"라며 웃어보였다. 이선희도 "즐겁게 하고 오겠다"라며 짧고 굵은 한마디를 남겼다.

YB의 리더이자 보컬인 윤도현은 "16년 만에 다시 평양을 가게 되었다"라며 "그때에도 참 감동적이었지만, 이번에도 정말 감동적인 공연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밴드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 최희선 역시 "13년 전에 단독 공연을 다녀왔다. 그때는 긴장이 됐는데, 이번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아쉬웠던 건, 준비시간이 굉장히 짧아서 가수 분들이 악보와 같이 왔다"라면서도 "딱 한 번 맞춰봤는데,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포토타임에 앞서 서현은 "브이가 공연장에서는 피스, 평화라는 뜻으로 쓰인다"라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다함께 브이를 하며 사진을 찍겠다고 안내했다. 포토타임이 끝나고 아티스트와 매니저는 모두 휴대폰을 반납한 뒤 평양으로 떠나는 비행기 탑승 수속을 밟았다.

조용필을 응원하기 위해 온 50대 여성 팬은 "2005년에 (조용필이) 평양 공연을 했을 때, 그때도 걱정을 많이 했지만 TV로 공연을 보면서 많이 자랑스럽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5월 12일 잠실에서 콘서트가 있는데, 갑자기 평양 공연이 결정되어서 힘들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라면서도 "오빠가 결정한만큼 무조건 응원하고, 잘 하고 돌아오셨으면 좋겠다"라고 웃었다.

북한에서 공연하게 될 예술단은 조용필, 이선희, 최진희, 윤도현, 백지영, 레드벨벳, 정인, 서현, 알리 그리고 추가합류한 강산에, 피아니스트 김광민까지 총 11명(팀)이다. 예술단 규모는 총 190여 명으로 태권도 시범단과 공연 스태프, 취재진, 정부지원 인력이 포함된 숫자이다. 

이날 방북한 예술단은 오는 4월 1일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단독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태권도 시범단은 평양 태권도전당에서 같은 날 공연한다. 이어 2일에는 예술단이 합동공연 리허설을 갖고, 태권도 시범단은 평양대극장에서 합동공연을 선보인다. 마지막으로 3일에는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남북 합동 공연을 선보이고 인천공항을 통해 돌아온다.

남북합동공연 실황은 TV프로그램 제작 및 녹화방송 될 예정이다.
 
방북에 들뜬 백지영-정인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백지영과 정인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으며 들뜬 표정을 짓고 있다.
▲ 방북에 들뜬 백지영-정인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백지영과 정인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으며 들뜬 표정을 짓고 있다.ⓒ 유성호
방북하는 레드벨벳 "밝은 에너지 북측까지 잘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레드벨벳 멤버인 예리(왼쪽부터), 아이린, 웬디, 슬기가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으며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날 또다른 멤버 조이는 국내 스케줄을 이유로 방북 예술단에 불참했다.
▲ 방북하는 레드벨벳 "밝은 에너지 북측까지 잘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축 예술단 평양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레드벨벳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 절차를 밟으며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성호
출국 절차 밟는 방북 예술단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참가자들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 출국 절차 밟는 방북 예술단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참가자들이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평양 순안 공항으로 출국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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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청년이 실명했다, 범인은 누구인가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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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03/31 12:48
  • 수정일
    2018/03/31 12:4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서평] 메틸알코올 중독으로 실명한 청년의 이야기 <실명의 이유>
2018.03.31 10:24:14
 

 

 

 

2년 전 이맘때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였다. 삼성전자에 휴대전화 부품을 납품하는 3차 협력업체 노동자 4명이 메틸알코올(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단다. 이 중 3명은 실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했다.(현재는 총 6명이다)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로 넘어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매틸알코올로 시력을 잃는다고?" 
 
메틸알코올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소독약 정도로만 추측될 뿐이었다. 메틸알코올이 눈에 닿는다고 실명이 되나 하는 의문이 생긴 이유다. 뒤늦게 알게 됐다. 무지의 소치라는 것을. 
 
메틸알코올은 투명·무색의 인화성 액체다. 분무기로 뿌려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반면, 인체에는 치명적이다. 고농도에 노출될 경우, 두통 및 중추신경계 장애가 유발된다. 심할 경우, 실명까지 올 수 있다.  
 
당시 시력을 잃은 노동자들은 모두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메틸알코올을 사용했다. 메틸알코올은 휴대전화의 부품을 식히는 데에 사용한다. 이때 메틸알코올이 노동자에게 튈 수가 있다. 또한 식히면서 발생하는 증기가 노동자의 호흡기로 흡입되기도 한다.   
 

ⓒ민석기

아무 교육도 장비도 없는 파견 노동자 
 
이런 사고를 겪은 노동자들은 단순히 재수가 없어서 실명했을까. 이들을 취재한 선대식 <오마이뉴스> 기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선 기자는 최근 그들을 취재한 내용을 묶은 <실명의 이유>(북콤마)를 책으로 냈다.  
 
선 기자는 그러한 작업이, 메틸알코올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도 노동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반 사람 입장에서는 메틸알코올의 위험성을 알기는 힘들다. 기자 역시도 메틸알코올로 시력을 잃는다는 이야기에 의문을 품었다.  
 
작업의 위험성을 노동자에게 고지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과 장비를 마련하는 것은 업체의 의무다. 하지만 이들 노동자가 일한 업체에서는 안전교육은 고사하고 작업할 때 변변한 안정장비조차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들이 실명한 이유다.  
 
"꿈에서는 앞이 안 보여요. 꿈이 안 깼으면 좋겠어요." 
 
김영선 씨는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 메탄올 수증기가 가득 들이찬 스마트폰 부품공장에서,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1년 반 후, 같은 피해자가 5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순 씨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자기가 사용하는 액체가 눈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도 그 액체가 위험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일하는 12시간 내내, 환기도 되지 않는 좁은 공장에서 메탄올을 들이마셨다. 무방비 상태였다. (<실명의 이유> 중에서)
 
실명,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 
 

▲ 선대식의 <실명의 이유> ⓒ북콤마

선 기자는 이들의 실명 이유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그들 삶의 궤적도 추적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실명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꼬집는 것. 
 
선 기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들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도 짚어낸다. 실명을 당한 노동자들이 모두 파견노동자임을 지적하면서 파견법 문제를 조목조목 따진다. 
 
파견노동자로 공장을 돌리는 사업주는 파견업체를 통해 언제든 파견노동자를 채용한다. 
 
반면, 고용주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지지 않는다. 파견업체에 공을 돌린다. 파견노동자를 사용하면서 권리는 무한으로 누리지만, 정작 그에 수반되는 의무, 즉 산업안전법 등은 전혀 지키지 않는 셈이다.   
 
파견법은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 파견노동자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다만 일시·간헐적 사유가 있을 경우 6개월에 한해 파견 노동자를 쓸 수 있다는 예외가 있다. 그렇다보니 안전교육이나 안전장비 지급 등은 노동자에게 아득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불법이지만 법이 무력하다 
 
노동자들에게 메틸알코올의 위험성만 알려줬어도 그들이 그렇게 어이없이 실명을 했을까. 선 기자는 "이것은 '불법'이지만 여기서(파견법 구조 하에서)는 법이 무력하다"고 토로한다. 
 
"우리 눈 다 나으면 벚꽃 보러 가자." 
현순 씨는 자기처럼 앞이 캄캄한 동갑내기 피해자 진희 씨에게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현순 씨는 창밖 풍경이 오후 6시의 어스레한 저녁 시간 때처럼 보인다고 말했고, 
진화 씨는 빛이 물러간 밤 9시의 세상으로 보인다며 말을 받았다. 
그땐 봄날 맑은 하늘에서 햇빛이 가장 강하게 쏟아지는 시간이었다. <실명의 이유> 중에서
 
실명을 한 노동자들의 눈에 빛이 보이기란 요원한 일이다. 다만, 그들과 같은 이유로 실명하는 노동자들은 더는 없어야 하지 않을까. 선 기자가 <실명의 이유>를 낸 이유다.  
 

▲ 스물아홉의 이진희 씨. "저도 다치기 전에 풍경을 보면 시각이 먼저였어요. 근데 다치고 나서는, 바람을 타고 오는 꽃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됐어요." ⓒ민석기

▲ 전정훈 씨는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는 법도 터득했다. 문자메시지 화면을 갈무한 뒤 저장하고, 이를 최대한 확대해서 본다.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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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규 기자, 북 주민들 개성공단에 분노

진천규 기자, 북 주민들 개성공단에 분노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3/31 [02:4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진천규 기자는 부산에서 북-미 간의 군사적 긴장이 팽팽하던 지난 해 말, 20일 간 인천에서 심양, 단둥을 거쳐 신의주로 평양으로 방북 취재를 다녀온 바 있다.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지난해 말 평양을 방문취재하고 온 진천규 기자를 만나 북의 동향에 대해 들어볼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진 기자는 북 주민들이 남측과의 경협에 대해 큰 실망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개성공단의 성공을 위해 노동력과 땅 등을 거의 무료로 지원해주다시피 했지만 남측 언론들과 반북 수구세력들은 무슨 큰 돈이라도 북에 지원하는 것처럼 꼴불견 생색내기에 핵개발 자금이요 뭐요 하면서 쩍하면 개성공단 문을 닫네 마네 하더니 결국 북에서 하지도 않은 천안함 격침을 이유로 개성공단 문을 닫아버린 남녘의 처사에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북은 해외에 노동력을 파견하면 그 나라의 월급을 다 받는다. 중국 현지에 가서 취재해보니 북은 식단표에 하루 계란 몇 알까지도 구체적으로 요구하여 다 관철시켰다. 그래도 워낙 일사분란하게 일을 잘하고 속썩이는 일이 없어 중국 기업들이 서로 북 근로자를 고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한달에 10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개성공단을 위해 북 주민들이 헌신해온 것은 순전히 어려운 남측의 중소기업가들과 그 기업에서 먹고 사는 남녘동포들을 위한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다. 결국 남측은 개성공단에서 받은 배려와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것이다.

 

실제 중국에 투자했다가 망해나자빠진 많은 남녘의 중소기업들이 개성공단에 투자하여 2-3년만에 빌딩을 사고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그런 중소기업들이 북측에서 월급을 좀 올리자고 했을 때 '그러면 남는 것이 없게 되니 어쩌니' 하면서 우는 소리를 치는 것을 보고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가장 한심한 태도는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인 외화로 핵개발을 했다는 언론과 반북 보수세력들의 주장이었다. 그래 개성공단 폐쇄되어 핵개발이 중단되었던가. 오히려 수소폭탄이 만들어져 지구를 뒤흔들었다. 

 

개성공단은 북이 남측과 가장 가까운 군부대를 후방으로 철수하는 등 전략적 요충지까지 내주고 북의 성실한 근로자들을 거의 무료로 지원하다시피 해서 남과 북이 힘을 합치면 잘 살 수 있다는 '우리민족끼리'의 꿈을 키워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북에 무슨 큰 시혜라도 베푸는 양 꼴값을 떨다가 결국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천안함 격침이 북의 소행이라는 억지 근거를 내세워 그런 망동을 부렸다. 양식이 있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천안함을 건져올린 인양업체 대표가 폭발 증거라고는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이런 사람들을 협박하고 탄압해왔다. 최근 KBS '추적60분'에서도 이것이 명백히 증명되었다.

 

지금 남녘은 청년실업문제, 가계부채문제, 중소기업 경쟁력 약화로 경제 상황이 말이 아니다. 미국 달러가 오르니 금리까지 올라 역전세난에 깡통아파트까지 속출하고 있다. 대기업도 중국의 사드보복,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로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답은 남북경협뿐이며 북을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는 길밖에 없다는 주장이 대기업 경제연구소에서도 숱하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남북경협에 대한 이런 시혜적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나아가 북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북적대시정책을 근본적으로 철폐하지 않는 한 남북경협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북의 좋은 점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 반포요 뭐요 하며 감옥으로 끌고 가면서 무슨 경제협력사업을 한단 말인가. 지금도 본지 이용섭 기자는 국가보안법 상 찬양고무죄 위반으로 동부구치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있다.

 

북중정상회담은 북중경제교류협력 사업의 폭발적 전개를 예고하고 있다. 북이 언제까지 세계로 진출할 기회를 포기하면서 남녘을 기다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북미정상회담, 북일정상회담에서 북과의 교류협력사업추진을 타진할 것이 자명하다. 이대로 가면 남측만 배제되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없는 철조망에 갇힌 섬으로 전락할 것이다. 스스로 철조망에 목을 매다는 꼴이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고위급회담에서 의제에 대한 논의를 했다고 하는데 통일부 장관 입과 언론에서는 그 무슨 비핵화 논의가 핵심 의제가 될 것이란 말만 나오고 있을 뿐 남북교류협력, 남북통일에 대한 의제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북의 핵은 남측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대북 핵위협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북미정상회담에서 풀어야될 문제라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그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핵심의제로 삼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남북정상회담의 본령은 남북관계의 확고부동한 발전전망을 밝히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북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중심으로 완전히 일심단결되어 있어 북 주민들이 남북경협에 아무리 실망했다고 해도 북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과거를 덮고 다시 하자고 하면 다시 일터로 달려나올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동포들에게 그런 실망과 분노를 안긴다는 것이 동포에 대해 얼마나 죄스런 일인가. 

 

문재인 정부가 부디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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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마트 무빙워크 사망’ 21세 청년의 장례식장, 남겨진 동생의 편지

청년·노동단체 “하청의 또 하청, 위험의 외주화”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8-03-30 19:29:11
수정 2018-03-30 19: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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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故이명수씨 유족과 친구들은 사망현장 앞에 국화를 놓았다.
30일 故이명수씨 유족과 친구들은 사망현장 앞에 국화를 놓았다.ⓒ민중의소리
 
 

지난 29일 故이명수씨 장례식장엔 그의 친구들만 100여명이 왔다갔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장례식장은 전날과는 다르게 한산했다. 조용한 장례식장에선 명수씨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어머니가 울음을 그치자 외할머니의 오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수씨의 아버지는 이날 아침 일찍부터 진행되는 시신부검을 참관하러 고대안암병원에 갔다. 장례식장은 명수씨의 어머니, 삼촌, 여동생이 자리를 지켰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삼촌은 “이런 일이 제 주변에서 일어날 줄은 추호도 몰랐다”며 “집이 힘들어서 스스로 특성화고에 가고 돈을 벌겠다며 졸업하자마자 일자리도 구해 기특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린 두 동생은 장례식장에 앉아 오빠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는 가족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외삼촌 민씨는 핸드폰카메라 편지를 찍어뒀다. 민씨는 이날 오후 3시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앞서 故이명수(21)씨는 지난 28일 남양주 이마트 다산점 무빙워크를 점검하다가 기계에 끼여 숨졌다. 안전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작성된 안전교육점검일지엔 10분 동안 교육을 했다고 적혔지만, 실제로 CCTV에선 1분도 채 교육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이씨는 외주의 외주화 관계에 놓인 하청노동자였다. 이마트가 계약한 업체가 또 하청을 줘 이씨가 속한 회사가 해당 무빙워크를 점검한 것이다. 경찰은 정확한 계약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고용노동부에 자문을 구한 상태다.

30일 사고 현장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이명수씨의 외삼촌 민수홍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30일 사고 현장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이명수씨의 외삼촌 민수홍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민중의소리

“편안하게 잠자, 내 마지막 소원이야”

 

“우리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게 잠자. 내 마지막 소원이야. 하늘나라 가서 천사되어 우리가족 지켜준다고 꼭 약속해. 갑자기 떠나버린 오빠가 우릴 위해 먼저 갔다고 생각할게. 17년 동안 행복했고 고마웠어. 사랑한다 오빠. 잘 있어 안녕. 사랑하는 주현.”

故이명수씨의 동생 이주현(17)양이 쓴 편지다.

30일 사고 현장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명수씨의 외삼촌 민수홍씨는 “여기서 여러 말 드릴 건 없고, 명수 동생이 오빠를 보내는 편지를 갖고 와서, 편지만 읽겠다”며 편지를 낭독했다. 애써 덤덤하게 이양의 편지를 읽은 민씨는 “얘 아래 이제 11살 먹은 동생도 있다. 걔 편지도 갖고 왔는데, 나머진 못 읽겠다”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는 “두 조카가 기둥 같은 오빠를 한순간에 잃었다”며 “제발 귀 기울여주시고, 제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여러분이 도와달라. 잘못한 사람은 꼭 처벌을 받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명수씨와 같은 특성화고를 졸업한 이제현(21)씨가 미리 적어놓은 하고 싶은 말을 읽어내려갔다. 친구 이씨가 말하기 시작하자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도,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도, 말하는 당사자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친구 이씨는 “제 친구 명수가 세상을 떠났다”며 “지금 명수가 떠난 게 실감이 나지도 않고, 믿기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명수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선생님을 존중하며 항상 성실했던 친구였고,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쉬는 날이면 집에서 동생을 챙기고, 삼촌과 함께 게임을 즐긴다고 자랑하던 명수였다. 그런 제 친구 명수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이마트는…”이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삼촌 민씨도 이명수씨와 함께 했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뒤로 젖히며 소리 내어 울었다.

30일 고 이명수씨 장례식장 모습
30일 고 이명수씨 장례식장 모습ⓒ민중의소리

“하청에 또 하청… 위험의 외주화”
“이마트 정직원 사고였어도 다음날 떳떳하게 장사 했겠나?”

이날 기자회견에는 故이명수씨의 외삼촌과 친구들 말고도 청년단체, 노동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해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청년단체 청년전태일 김재근 대표는 “이마트 다산점은 사고현장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놨을 뿐, 아무렇지도 않게 영업을 하고 있다”며 “한 명의 직원이 사고현장 앞에 서서 무빙워크를 이용하려던 고객들을 돌려보내기만 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고객들은 발길만 돌릴 뿐”이라고 한탄했다.

또 그는 “어제도 이곳에서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그땐 이마트 직원이 나와 여러분의 행동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했다”며 “왜 그렇게밖에 해석하지 못하는지, 너무 마음이 슬펐다”고 말했다. 이어 “이 억울한 청년의 죽음을 결코 망각하지 말고 우리사회가 알아야 한다”며 “원청 이마트가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도록 우리가 촉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장은 “젊음을 꽃피우지도 못한 청년들이 산업현장에서 쓰러지고 있다”며 “2년 전 구의역 사고를 접한 우리는 비통했고, 안전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잔인한 현실에 반성했다. 하지만 그 잔인한 현실은 오늘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사고에 대해 이마트는 책임을 지겠다는 아무런 말도 없다. 우리사회가 청년노동자들을, 사람을 대하는 태도인 것만 같아 비통하다”고 성토했다.

최은철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은 “28일 꽃다운 나이에 숨진 이 청년은 이마트 직원도 아니고, 이마트에서 무빙워크를 맡긴 티센크루프 업체도 아니다”라며 “하청에 하청을 받은 재하청업체의 직원”이라고 지적했다. 최 본부장은 “이마트 정직원이나 고위직에게 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렇게 떳떳하게 다음날 장사를 할 수 있었겠나 싶다”며 “더 이상 정부기관은 이 사태를 방치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유족, 친구들, 노동·청년단체 관계자들은 이마트 사고현장으로 내려가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명수씨가 숨진 무빙워크 앞에 들고 간 국화꽃을 내려놓았다. 금세 수많은 국화가 그곳에 쌓였다.

한편, 미루어졌던 발인은 오는 31일 오전에 진행된다. 기자회견 이후 이마트 관계자들은 장례식장을 방문할 예정이며, 가족과 사측은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것으로 전해졌다.


■[단독] ‘무빙워크 사망’ 이군, 안전교육 시간은 ‘1분’... 교육일지 서명 조작 의혹도
■이마트 ‘무빙워크’ 끼어 숨진 특성화고 출신 21살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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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민간인 사찰’ 폐해에도…경찰청 ‘정보국 폐지 불가’ 버티기

[단독] ‘민간인 사찰’ 폐해에도…경찰청 ‘정보국 폐지 불가’ 버티기

등록 :2018-03-30 05:03수정 :2018-03-30 08:51

 

 

정보경찰 개혁소위 권고안
경찰청 정보국·정보과 폐지 등 전달
“조직 유지되는 한 오남용 재발 위험”
시민사회서도 사개특위에 폐지 의견

경찰청 수용 난색, 개혁의지 의심
경찰대 출신 중심 정보라인들 반발
“내부 논의 더 필요” 수용 뭉기적
‘정부부서 통제권 밖 아닌가’ 지적도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이명박 정부 시기 경찰의 민간인 사찰 청와대 보고 문건 파문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경찰청 자문기구인 경찰개혁위원회 정보경찰개혁소위원회(정보경찰 개혁소위·위원장 서보학)가 경찰에 ‘본청 정보국과 일선 경찰서 정보과를 폐지하고 기존 정보과의 업무는 기능별로 해당 부서에 이관’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개혁안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경찰청은 정보국 폐지에 난색을 표하고 있어 진통이 예상된다.

 

29일 <한겨레> 취재 내용을 종합하면, 정보경찰 개혁소위는 △경찰청 정보국 폐지 △경찰서 정보과 폐지 △국민 일반에 대한 사찰 활동 폐지 △정보 생산 실명제 및 문서 보존 의무화 등의 내용을 담은 개혁안을 마련해 최근 정보경찰 개혁회의 때 경찰청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보경찰 개혁소위 위원들은 경찰청 정보국 및 각 지방경찰청의 정보과, 일선 경찰서의 정보과가 폐지돼야만 무분별한 민간인 사찰 등 정보경찰의 일탈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단일 지휘 계통을 통해 각종 정보보고를 취합하고 보고 문건을 생산하는 조직 체계가 유지되는 한, 언제든 정치권력에 의한 오남용이 벌어질 위험성이 남아 있다는 판단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 당시 경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동선 등이 깨알같이 기록된 사찰 문건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이 최근 드러난 바 있다.(<한겨레> 3월22일치 1·6면) 당시 경찰의 사찰 대상은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박원순 서울시장 등 야권 인사 다수였다. 그러나 현재 경찰청 간부들은 문건의 작성 사실 자체를 모르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경찰청 정보국을 중심으로 한 정보경찰의 독자적 생산-보고 체계가 가동되고 있어 전체 경찰 조직 차원에서의 통제와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정보경찰 개혁소위는 범죄 정보의 수집, 집회·시위 등 집단 사태의 관리, 대외 협력 업무 등 경찰 업무에 꼭 필요한 정보 업무를 해당 부서(수사국, 경비국, 기획조정관실)로 이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무분별한 정보 수집의 근거가 됐던 ‘치안 정보’, ‘정책 정보’, ‘신원조사’ 등 업무는 모두 폐지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경찰은 대통령령으로 규정한 직제를 근거로 정치·경제·노동·사회·학원·종교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치안 정보와 정책 정보를 수집해왔다. 사실상 전방위 사찰이 이뤄질 수 있는 근거를 두고 있었던 셈이다.

 

또 경찰이 수집한 정보는 현재 ‘열람 후 폐기’ 원칙으로 운영되고 있어 어떤 정보가 어떻게 수집되는지 사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정보경찰 개혁소위는 경찰관이 정보 수집을 하는 경우 신분을 공개하고, 국가안보 등 예외적 사안에 대해서만 비공개 정보 수집 활동을 허용하라고 했으며 경찰 수집 정보는 폐기하지 않고 보관하되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공개하라고도 권고했다.

 

그러나 경찰청은 난색을 표하는 분위기다. 경찰청 고위 관계자는 <한겨레>에 “경찰 정보국의 각종 개혁을 전향적으로 검토중이지만 (정보국 폐지 등은) 현재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아직 내부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경찰 내부에선 경찰대 출신을 중심으로 한 ‘정보국 라인’의 반발이 거센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국은 경찰 내부의 핵심 보직으로 승진과 보직 관리 등에서 가장 선호되는 직렬이다.

 

시민사회에서도 정보경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8개 시민단체는 지난 14일 “경찰의 정보 수집 분야를 범죄 예방과 범죄 수사 정보로 제한하고 경찰 정보국을 폐지하라”는 의견을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 전달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8365.html?_fr=mt1#csidx0058431a7c70d41bc0589a867ec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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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아픈 역사라도 기록하고 기억해야…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
 
임병도 | 2018-03-30 09:52:4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노수복 할머니는 42년 만에 한국에 있는 동생과 위성중계로 만났다. 당시 할머니가 태국에 있었던 이유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 갔기 때문이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나, 광산 노가, 노수복이. 안동군 풍천면 광덕리 안심부락. 내 동생 노수만이, 여동생 노순음이.”

1984년 3월 할머니 한 분이 방콕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찾아왔습니다. 태국인처럼 보였던 할머니의 입에서는 어눌한 한국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태국에서 40년 넘게 살았던 할머니의 이름은 노수복, 한국에서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한다는 소식에 동생을 만나기 위해 한국 대사관을 찾은 것입니다.

1984년 3월 12일 노수복 할머니는 태국의 BB TV 스튜디오에서 위성중계를 통해 KBS 스튜디오에 있는 동생 노순음씨와 막내 동생 국현씨를 TV 화면으로 만납니다.

30여 분간의 화면 상봉을 했던 할머니는 두 달 뒤인 5월, 42년 만에 고국땅으로 돌아와 동생과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일본 순사에게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가 됐던 노수복 할머니’

 

▲노수복 할머니의 강제 동원 및 위안소 이동 경로

 

1921년 경북 안동군에서 태어난 노수복 할머니는 가난 때문에 14살의 나이에 한센병 환자에게 시집을 갑니다. 혹독한 시집살이와 배고픔에 친정으로 도망쳤으나 다시 아버지에게 쫓겨나, 식모살이를 하러 부산으로 갑니다.

1942년 가을, 부산 근교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노수복 할머니는 갑자기 나타난 일본 순사에게 붙잡혔습니다. 할머니는”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잡혀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40여 일 가량의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였습니다.

“막사로 가서 방을 하나씩 배정받은 후 조금 있으니 장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살려 달라’고 매달리며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 차례 실랑이 끝에 나는 매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군인들의 옷을 빨거나 청소를 해야 했고, 오후에는 탄약통 등을 져 나르는 중노동을 했다. 어떤 때는 하루 60여 명의 병사들을 맞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런 날은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노수복 할머니의 증언)

싱가포르에서 7.8개월을 지낸 노수복 할머니는 군용 트럭을 타고 다시 방콕으로 이동합니다. 방콕에 억류됐던 노수복 할머니는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영국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됩니다. 당시 포로수용소에는 태국이나 버마에서 온 조선인 위안부가 무려 200여 명이나 됐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던 노수복 할머니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뒤 말레이시아와 태국 등지를 전전한 끝에 태국 핫야이에 정착해 결혼도 하고 가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시도 고향을 잊지 못했습니다.

 

▲서울시가 기획하고 서울대 연구팀이 발간한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2”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처절한 증언과 생생한 기록 등이 담겨 있다. ⓒ서울시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노수복 할머니의 이야기는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교수연구팀이 만든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 사진과 자료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이야기”에 실린 내용입니다.

서울시는 2017년 국내 최초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사례집을 발간했습니다. 이후 노수복 할머니를 비롯한 6명의 피해자 증언과 4건의 위안부 관련 주제를 담아 이번에 새롭게 발간했습니다.

기존 증언집이 피해상황 설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 ‘위안부 이야기’는 식민지 사회에서 어떠한 생활을 하다가 끌려가게 되었는지부터 멀고 먼 귀환 여정, 그리고 귀환 후 생활까지 상세히 담겨 있습니다.

또한, 전쟁 수행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에 의해 관리되고 이용당한 ‘기업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피해를 증언하고 일본의 가해책임을 물었던 남・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피해 여성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도 포함됐습니다.

 

▲아시아 각 지역으로 강제 동원된 일본군 위안부, 그들에 대한 화해와 치유는 오직 진정한 사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서울시

 

과거에는 할머니들의 증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가 세상 밖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생존자가 줄어들면서 증언을 기록해 사료로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기록물의 중요성은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등재를 방해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과 중국, 일본, 타이완 등 9개국은 공동으로 일본군 위안부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신청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분담금 지불을 거부하며 일본군 위안부 자료 등재를 막았습니다. 결국,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 등재는 보류됐습니다.

아픈 역사라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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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정상회담, 언론이 놓친 이야기

시진핑 주석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 김정은 위원장 “첫 해외 방문지 중국 마땅”

4월 남북정상회담과 5월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 북한(조선) 국무위원장의 전격적인 방중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의 이목이 온통 북중 두 정상에게 쏠렸다.

관례적으로 비공식 방문에선 볼 수 없던 중국인민해방군 육·해·공군 명예위병대와 군악대의 사열을 실내인 인민대회당에서 거행하는가 하면, 정상회담에 이은 인민대회당에서의 환영연회에는 시진핑 주석 내외는 물론 중국 리커창 국무원 총리를 비롯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고위급관료들이 총출동했다. 중국 외교 역사상 외국 국가원수를 위한 환영연회를 이처럼 준비한 것은 초특급 예우라 할만하다.

앞서 김정은 위원장 일행이 탄 기차가 북중 국경도시 단둥에 도착하자 역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쑹타오 대외연락부장이 마중 나와 극진히 예우했다. 쑹타오 부장은 지난해 11월 시진핑 주석의 특사로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 결과 통보차 북을 방문한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회담록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연회장에서 두 정상이 한 연설을 보면 대략적인 기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 위원장을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라고 부르며, 특별한 시기에 이루어진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방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특별한 시기’란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대한 의의’에 대해 북한(조선)과 중국 쌍방이 “두 나라 관계를 고도로 중시하고 있다는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며 쌍방 사이의 의사소통을 심화시키고 협조를 강화하며 협력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나의 첫 외국 방문의 발걸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된 것은 너무도 마땅한 것”이라고 화답했다.

북중관계에 대해 시 주석은 “전통적인 중조 친선은 두 당, 두 나라 노세대 영도자들께서 친히 마련하고 품을 들여 키우신 것”이라고 언급했고, 김 위원장은 “조중 두 나라 선대 영도자들께서 물려주신 고귀한 유산이며 공동의 재부인 조중 친선의 귀중함을 다시금 되새겨보게 되”었다고 답했다.

회담 성과와 관련해 시 주석은 “두 나라 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올려세우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발전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김 위원장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잇닿아 있는 형제적 이웃인 두 나라에 있어서 지역의 평화적 환경과 안정이 얼마나 소중하며 그것을 쟁취하고 수호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가를 똑똑히 새겼다”고 언급했다.

시 주석은 다소 긴 연설에서 김일성 주석이 40여 차례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를 만났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내가 기억하기에는 1983년 6월 김정일 총비서 동지께서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나의 아버지(시중쉰)가 김정일 총비서 동지를 역전에서 맞이했고 모진 더위를 무릅쓰고 고궁참관에 동행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끝으로 시 주석은 “친선적인 인방이며 친근한 동지로서 우리는 조선 동지들이 정치적 안정을 수호하고 경제발전을 추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굳게 지지하며 조선의 사회주의건설 위업에서 새롭고 보다 큰 성과를 끊임없이 거둘 것을 축원하며 이를 확신”한다며, “나는 전통적인 중조 친선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대를 이어 계승하기 위해, 중조 두 나라의 융성번영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 동지와 이설주 여사의 건강을 축원해, 이 자리에 참석한 중조 쌍방 전체 동지들의 건강을 위해” 잔을 들자고 건배를 제의했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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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소장의 모든 기사가 연재기사에

[알림] 한호석 소장의 모든 기사가 연재기사에
 
 
 
편집국 
기사입력: 2018/03/30 [03:2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유태영 박사와 시사 대담을 나누는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노길남 기자

 

한호석 소장이 개벽예감 연재를 시작한 것은 2012년 2월부터입니다. 하지만 자주시보 이전 기사들은 자주민보 폐간 문제로 보기 어려웠는데 최근 독자들의 요청이 있어 모든 기사를 자주시보에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주민보 관련 재판에서 예정웅 정세분석가의 글은 이적표현물로 판결을 받았지만, 한호석 소장의 글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다시 찾아 올렸습니다.

 

한호석 소장의 모든 기사는 자주시보 첫화면 맨 오른쪽 칸 중간 단에 있는 '연재기사' 꼭지에 있습니다. 기사제목을 딸각하면 기사만 뜨고 '한호석의 개벽예감'이라는 연재제목을 클릭하면 모든 기사 목록이 뜹니다. 

 

이번에 다시 모아 올리면서 살펴보니 한호석 소장의 분석이 매우 정확했음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으며 '북의 인공지능 전투함', '세계에서 가자 조용한 잠수함이 북에 있다' 등등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한호석 소장이 미리 분석 소개했던 북의 이런 무기들이 후에 적지 않게 현실로 증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북에서 공개하지 않은 것도 앞으로 공개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결국 북의 군사력은 미국, 러시아도 압도할 세계 최강이라는 것입니다. 

 

외교는 결국 나라의 힘이 좌우합니다. 그 힘의 핵심은 군사력입니다. 한호석 소장이 분석한 북의 군사력을 살펴보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경천동지할 한반도 대격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분석 전망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애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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