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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사는 무조건 노조편? “현장 잘아는 노사 조정자죠”

등록 :2018-01-08 07:20수정 :2018-01-0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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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기획] 한 걸음 더+ ③ 거수기 이사회 확 바꾼 노동이사제
박원준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원준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난해 11월 서울교통공사는 무기계약직 노동자 자살사건 이후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사이에 책임공방이 벌어졌다. 노조의 요청으로 회사의 인터넷 사내소통망이 임시로 폐쇄됐다. 하지만 회사가 사전 상의 없이 소통망을 재개하고, 사장이 노조의 사과 요구를 거부하며 갈등이 깊어졌다. 이때 노동이사가 중재에 나섰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이사회 이틀 전인 12월26일 사장이 유감 표명을 하고 노조가 수용하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내 사태가 일단락됐다”며 “경영진도 노동이사제의 취지를 이해하고 장점을 살리려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법적으로 사용자
“현장 목소리 전하지만
경영진 입장도 노동자에 전달
양쪽 매개하고 조정 역할
선입견 벗어났으면 좋겠다”

 

 

최대 강점은
“경영진은 실무 잘 몰라
현장 잘 아는 노동이사 통해
현장문제 합리적 해결되면
회사에도 큰 도움된다”

 

 

아직도 답답한 한계
“현장요청 경영에 반영하려해도
이사회 외 다른 통로 없어
이사회서 현장소리 전하려 하면
정식 안건만 얘기하라고 제지”

 

 

공사의 노사는 지난달 31일 밤 10시 1300여명에 이르는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협상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노사 간 이견은 물론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사이에 이른바 ‘노노갈등’까지 겹쳤다. 공사의 노동이사들은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장, 노조, 무기계약직을 모두 만나 설득했다”고 털어놨다.

 

<한겨레>는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서울시 노사정 서울모델협의회 사무실에서 서울교통공사의 박희석, 박원준 노동이사와 박윤배 사외이사를 만났다. 서울지하철공사(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의 합병으로 출범한 교통공사는 직원이 1만7500여명으로 지방공기업으로는 최대 규모다. 공사는 지난해 9월 두 사람을 노동이사로 선임했다. 두 노동이사는 지하철공사 공채 출신으로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왔다.

 

박윤배 서울교통공사 공익성 사외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윤배 서울교통공사 공익성 사외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노동이사제의 최대 강점은 이사회에 현장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현장을 잘 아는 노동이사를 통해 현장의 문제가 합리적으로 해결되면 회사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이사가 단순히 현장의 요구만 전달하는 데 그친다면 노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노동이사는 직원과 이사 역할을 겸하지만, 법적으로는 사용자로 간주된다. 박원준 노동이사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지만 경영진 입장도 노동자나 노조에 전달해 양쪽을 매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노동이사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동이사는 경영투명성도 높일 수 있다. 박원준 노동이사는 “기업의 이사회가 경영진에 예속되어 거수기라는 오명을 듣는데, 노동이사가 감시와 견제 역할을 제대로 하면 이사회의 틀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며 “두차례 이사회에 참석해보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의욕을 보였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경영진이 보기에 이전보다 이사회가 더 까다로워졌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현장의 의견이 경영에 반영되면 노사 간 마찰을 더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이사에게는 공익성 확보도 중요하다. 공사가 운영하는 서울과 수도권 전철은 하루 750만명이 이용하는 ‘국민의 발’이다. 2016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작업자 사망사고에서 드러나듯이 직원과 시민의 안전 확보가 시급하다. 공사의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경영혁신과 대국민 서비스 증진 노력도 당면과제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노인 무임승차 문제만 해도 교통복지 차원에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막대한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유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하다”고 말했다.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노동이사제 정착을 위해서는 개선할 점도 많다. 무엇보다 지원시스템이 없다. 공사는 직원이 1만7천명을 넘고, 역은 277개에 달한다. 노동이사들이 직원과 수시로 만나 의견을 수렴하고 타당성을 검토해서 회사 경영에 반영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면담 내용이 빼곡히 적힌 수첩을 보여주며 “현장 요청을 회사 경영에 반영하려고 해도 이사회 이외 다른 협의 통로가 없다. 또 이사회에서 현장 소리를 전하려고 하면 정식 안건과 관련된 얘기만 하라고 제지한다. 노동이사는 일하고 싶은데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고 말했다. 자료를 검토하고, 직원을 만나고, 회의할 수 있는 공간도 없다.

 

이사회 운영의 개선 필요성도 제기된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3조2천억원의 내년도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처리하는 데 2~3시간의 이사회는 너무 짧다. 필요하다면 하루가 아니라 이틀에 걸쳐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이사에게는 직무수행에 필요한 정보요구권이 있다. 하지만 이사회가 열리기 한주 전에 안건 자료를 보내주는 게 전부다. 박원준 노동이사는 “이사회에서 실질적 논의가 이뤄지려면 이사회 이전에 안건이 생성되는 단계부터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며 “국회도 본회의 이전에 상임위에서 심도 깊게 논의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노동이사는 법적으로 비상임이사이기 때문에 이사회 결정이 잘못되면 공동책임을 진다. 박원준 노동이사는 “노동이사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참여와 권한을 좀더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회 산하에 소위원회를 두는 방안도 제기된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공사가 매년 적자를 기록하면서 부채가 12조원에 달한다. 이자 부담만 연간 1천억원이 넘는다. 민간기업 같으면 진작에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문제해결을 위한 소위원회 구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개선 필요성에 공감하고, 1월부터 전문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개선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경총, 전경련, 보수언론들은 노동이사제에 강하게 반대한다. 노동이사의 이사회 참여로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노동이사들은 펄쩍 뛴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2018년 사업계획은 무려 400페이지에 달한다”며 “신속한 의사결정보다 신중한 의사결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원준 노동이사도 “현장 직원들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노력하지만 경영 측면을 함께 고려한다. 노동이사가 또 하나의 노조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곁에서 노동이사를 지켜본 사외이사도 보수진영의 비판은 지나친 기우라고 지적한다. 박윤배 사외이사는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걱정은 안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이사는 노동자의 입장과 회사의 중장기 발전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노동이사 1호는 서울연구원의 배준식 노동이사로, 지난해 1월 임기를 시작했다. 서울시 노동이사제가 출범한 지 꼭 1년이 되는 셈이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당장 시민들의 박수를 받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 ‘개혁의 빛’ 역할을 할 가능성이 보인다”고 희망을 나타냈다. 박윤배 사외이사는 “유럽에서는 노동이사가 노사 모두의 신임을 얻어 경영 책임을 맡기도 한다”며 “한국도 노조 지도자들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거나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는데, 노동이사가 사장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말했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임기 3년간 열심히 하겠다”며 웃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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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평창 흥행? 북의 비핵화 약속 끌어내야”

[아침신문 솎아보기] 트럼프 “100% 남북대화 지지” 발언 제각각 해석…8일 UAE 행정청장 방한, 각종 의혹 해소되나

노지민 기자 jmnoh@mediatoday.co.kr  2018년 01월 08일 월요일

 

다음은 8일 전국단위종합일간지 1면 머리기사.

 

경향신문 “‘전교조·전공노 합법화’ 빗장 여는 정부”
국민일보 ““100% 지지” 힘 실어주는 美”
동아일보 “‘평창 넘어 북핵’ 내일 판문점에 달렸다”
서울신문 “장·차관만 3명…판 커지는 남북회담”
세계일보 “‘천사들의 비명’…아동학대 사망 75%가 영유아”
조선일보 “최저임금 뛰니 동네물가 뛴다” 
중앙일보 “트럼프의 통남통북 ‘김정은과 통화 용의’” 
한겨레 “남북 고위급 5:5 회담…통일부-조평통이 주도” 
한국일보 “남북대화 국면, 트럼프의 ‘대북 3원칙’” 

 

 

‘판 키운’ 남북 고위급 회담…트럼프 “100%지지” 해석 제각각

 

남북이 9일 판문점에서 열릴 고위급 당국회담 대표단 명단을 공개했다. 양국이 각각 장차관급 인사 3명을 포함한 ‘중량급 대표단’을 구성하면서, 향후 금강산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등 남북관계 전반을 논의하는 회담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북한은 7일 고위급 회담에 나올 대표단 명단을 판문점 연락채널로 남측에 통보했다.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장관급)을 수석대표로 하고, 전종수 조평통 부위원장(차관급), 원길우 체육성 부상(차관급), 황충성 조평통 부장, 리경식 민족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 등 4명이다. 남측 대표단은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수석대표로 천해성 통일부 차관,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안문현 국무총리실 심의관, 김기홍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기획사무차장으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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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김정은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 및 남북 만남에 대한 의사가 언급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양측은 회담 개최뿐 아니라 대표단 명단까지 확정했다. 북한 중앙통신은 7일 “북남관계 개선 의지는 말로써가 아니라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고 자주통일을 위한 실천 행동으로 안받침(뒷받침)돼야 한다”며 회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과거와 같은 신경전이 없는 것은 좋은 신호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의 성공에 협조한다고 결론을 내린 게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회담에선 북쪽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 문제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단엔 체육 관련 인사가 남북 모두 2명씩 포함됐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평창 참가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 선수단을 어느 종목에 얼마나 출전시킬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는 어떻게 협의할지, 또 북쪽 응원단은 어떻게 할지, 단일팀은 시간이 촉박해 어렵겠지만 개막식 공동입장은 어떻게 할지 등 남북이 의견을 조율할 사안들이 만만찮다”고 말했다.  

남북 고위급 정상회담의 대표단 구성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발언에 대한 해석은 각 언론사별로 온도차를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시각)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공화당 지도부 등과 회동한 뒤 기자회견에서 ‘김정은과 당장 전화 통화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물론이다. 나는 늘 대화를 믿는다.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전혀 문제없다”고 밝혔다. 이어 “적절한 시기가 되면 미국도 (북한과의 대화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남북이) 올림픽에 대해 협상하려는 생각은 좋다. 그건 남북간에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문재인 대통령이 이틀 전에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매우 훌륭한 대화를 나눴다”며 “나는 100% (남북대화를)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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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두고 한겨레는 트럼프 대통령이 “남북 고위급회담 등을 거쳐 조건이 갖춰지면 북-미 대화에도 나설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며 “남북대화 재개가 2016년 대선 때 ‘김정은과의 햄버거 만남’까지 거론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정한 외교적 공간을 열어주고, 그의 발언이 다시 남북회담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라고 평가했다. 경향신문은 ‘트럼프의 공개 지지로 힘 실린 남북대화, 책임도 커졌다’는 사설을 통해 “미국이 적절한 시점에 북한과 대화에 참여하고, 자신이 직접 김정은과 대화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밝힌 것은 남북대화가 북핵대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의 발로이자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한국일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운전자’를 자처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일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정세에서 자신의 위상과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과 관련, ‘자기방어’ 측면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며 미국·영국 언론의 평가를 실었다. 한국일보는 “우리 정부 역시 대화 국면 조성을 위해 전략적으로 한반도 정세에서 트럼프의 영향력과 위상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접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반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뉘앙스는 달랐다. 두 신문은 당장 이번 회담에서 북측 ‘비핵화’ 약속을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남북 대화는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돼야 하며, 최소한 북핵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나침반이 돼야 한다”며 “평창올림픽 흥행을 위해 국제사회가 어렵게 구축해 놓은 대북 제재 원칙을 허문다든지, 일부 대통령 참모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미 동맹의 뼈대인 연례 군사훈련을 북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겠다는 약속과 맞바꾸는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사설 역시 “회담이 북한의 시간 끌기용 선전장이 되거나 터무니없는 요구로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면 미국은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미국은 남북 회담을 북-미 대화를 위한 예비 테스트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정부는 북한의 올림픽 참가만 환영할 것이 아니라 북한으로부터 핵·미사일 도발을 중단하겠다는 약속도 끌어내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칼둔 UAE 청장 8일 방한…文대통령에 친서 전달 가능성 

칼둔 칼리파 알 무바라크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행정청장이 8일 방한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초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UAE 방문을 둘러싼 논란이 종식될지 주목된다. 칼둔 청장은 지난달 초 임 실장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왕세제를 예방했을 때 배석한 인물이다. 칼둔 청장은 1박 2일 일정으로 8일 오전 전용기 편으로 입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방한은 임 실장의 특사 방문에 대한 답방 성격을 띄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청와대 측은 “칼둔 청장 방한으로 UAE와의 갈등설 등 각종 의혹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칼둔 청장은 양국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임 실장을 면담할 것으로 전망된다. 야당·언론은 임 실장 UAE 특사를 두고 현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UAE와 관계가 틀어졌다거나, MB정부 원전 수주 과정을 뒷조사했다는 등의 의혹을 제기해왔다.  

UAE 왕세제의 최측근인 칼둔 청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예방해 친서를 전달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한 외교·국방 관련 인사, 경제계 인사들과의 면담도 진행될 예정이다.  

‘아부다비 왕실이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뉴욕타임스)인 칼둔 청장은 한국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아부다비 행정청장이다. 2009년 한국이 수주한 바라카 원전 발주처인 UAE 원자력공사 이사회 의장과 정부 소유 투자 회사인 무바달라 개발그룹 이사 등을 맡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 이명박 정부 당시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도 친분이 두터운 인물로 알려졌다.  

네이버, 한화 김동선씨 요청에 ‘국정농단’ 연관검색어 삭제 

네이버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관련 검색어를 당사자 요청이나 자체 판단에 따라 다수 삭제한 사실이 확인됐다. 7일 한국 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의 ‘네이버 노출제외 검색어에 대한 검증보고서(2016년 하반기)’에 따르면 네이버는 2016년 10~11월에 연관검색어 1만5584건과 자동검색어 2만3217건을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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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간 삭제된 연관·자동 검색어에는 국정농단 사건 관련 키워드가 상당수 포함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아들 김동선씨를 검색했을 때 연관검색어 ‘정유라 마장마술’의 경우 본인 요청에 따라 삭제됐다. KISO 검증위는 “국정농단 사건 중요 인물인 정유라 등의 행적에 대해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조사도 이뤄지고 있었으므로 검색어를 삭제한 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네이버가 ‘루머성’ 검색어로 판단, 기타 사유로 삭제한 ‘박근혜 7시간 시술’의 경우 ‘명예훼손’으로 분류했어야 한다고 검증위는 지적했다. 명예훼손·반사회성·음란성·비속어·오타·개인정보유출·저작권 침해 등 네이버가 자체 기준으로 지운 검색어 중에는 ‘청라 푸르지오 철근’ ‘티볼리 결함’ 등 소비자 알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도 포함됐다.

금융당국, 6개 은행 ‘가상화폐 계좌’ 특별검사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과 금융감독원이 8일 가상화폐 취급업자(거래소) 관련 계좌를 보유한 은행들에 대해 합동 검사를 시작한다. NH농협은행, IBK기업은행, 우리은행, KDB산업은행, KB국민은행, 신한은행 등 6개 은행이 대상이다. 이들 은행에 만들어진 거래소 관련 계좌는 지난달 기준 111개, 예치 잔액 약 2조 원이다. 금융당국은 은행들이 가상계좌를 운영하면서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제대로 이행했는지 점검할 계획이다. FIU는 가상화폐를 ‘고위험 거래’로 규정해 의심거래 등에 40개 이상 체크리스트 의무를 부과한 바 있다.  

지방 3억원 이하 다주택에 양도세 중과 제외 

다주택자가 4월부터 청약조정대상지역에서 집을 팔 땐 양도세가 중과되지만 수도권·광역시·세종시가 아닌 곳의 3억원 이하 주택은 보유 주택 수 계산에서 제외된다. 조정대상지역은 서울 25개구, 경기 과천·성남·하남·고양·광명·남양주·동탄2, 부산 해운대·연제·동래·부산진·남·수영구·기장군, 세종이다. 30대 이상 무주택자의 경우 이 지역에서 분양권을 팔아도 양도소득세를 50% 내는 중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기획재정부는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 세법 시행령 주요 내용을 발표했다. 8일부터 부처 협의, 입법예고, 차관회의, 국무회의 등을 거쳐 다음달 중순부터 순차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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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 보낸 "미친" 탄원서 52년뒤 문재인에 보낸 "마지막" 탄원서

[서산개척단⑪]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대고 하소연해야 하는지요?"

18.01.08 10:11l최종 업데이트 18.01.08 10:31l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1966년의 탄원서와 2018년의 탄원서.
▲  1966년의 탄원서와 2018년의 탄원서.
ⓒ 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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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장의 탄원서가 있다.

하나는 1966년의 "박정희 대통령 각하 앞에", 하나는 2018년의 "문재인 대통령님께" 보내는 탄원서다. 52년의 시차. 전자는 한자가 빽빽한 수기로, 후자는 컴퓨터 문서파일로 작성돼 세월의 변화를 가늠케 한다. 그 사이 800명이던 탄원인은 불과 11명으로 줄었다. 

두 탄원서의 작성자는 모두 서산개척단(대한청소년개척단) 단원들이다. 

'말도 안 되는' 탄원서에서도 드러난 진실
 

 서산개척단 정영철씨
▲  서산개척단 정영철씨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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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발전향상과 국민의 생활안정질서를 위해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써 힘써 노력해주시는 (박정희)대통령 각하 앞에 감사를..."

 

이라고 시작하는 1966년의 탄원서는 민정식 당시 서산개척단장의 각종 국가지원금 착복과 운영 부조리를 고발하며 내사에 착수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탄원인은 '대한청소년 개척단 서산자활정착사업장 탄원인 일동, 800명 대표 정용일'이라고 돼 있다. 민 단장의 서산개척단 운영 비리에 대해 다른 간부급 관리자들에게서도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서산개척단 출신 정영철(77)씨도 물론 '탄원인 일동 800명'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1966년 당시엔 이 탄원서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그건 우리가 쓴 게 아니여. 정용일이 같이 최고 높은 간부들이 쓴 거니께. 민정식 단장이 중간에 혼자 도적질을 너무 심하게 하니께 쫓아내버리려고 쓴 거지."

정용일 감독관은 당시 민정식 단장의 오른팔로 불리던 개척단 내 실세였다. 그는 탄원서에서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던 개척단의 근황을 소개하며 이렇게도 썼다.

"저희들은 지난 날 사회악을 조성해온 탓으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어온 무의무탁한 남녀들로서... (중략) 반성과 청산된 선도의 길로 달리기 시작해서 오늘날에는 정부당국에 적극적인 지원으로 완전한 인간 개조는 물론 125쌍 합동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저희들과 같이 불우했던 여성들과 짝을 지어 그 속에서는 벌써 제 2세들이 탄생하여 더욱더 보람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영철씨는 "미친 소리"라고 했다.

"말도 안 되지. 허허허, '보람된 나날'? 민정식이가 나쁜 짓 했단 내용은 맞어. 근데 보람된 나날? 합동 결혼은 무슨 다 강제로 결혼시켜뿐 건데. 그 밑에서 우리들은 맨날 얻어터지면서 뻘바닥 논 맨드느라고 뒹굴고 있었던 거 아니여."

그러나 이 '말도 안 되는' 탄원서에도 당시 개척단 상황의 참혹함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형편없이 영양실조에 걸려있으니 부식이라곤 소금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일까요?"
- "주택은 지붕이 뚫어졌고 비가 새고 방은 흙벽 속에서 자는데도..."
- "식량은 겨우 1일분 씩 구입해다 먹을 정도로 자금이 두절상황에 놓여..."

1966년 탄원서 존재조차 몰랐던 이들이 쓴 2018년 탄원서
 

 서산개척단 정화자, 윤기숙, 성재용씨.
▲  서산개척단 정화자, 윤기숙, 성재용씨.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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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2년 후, 알지도 못했던 탄원서에 함께 이름을 올려야 했던 이들이 다시 탄원서를 썼다. 정영철·성재용(75)·정화자(76)·윤기숙(84)씨를 비롯해 아직 서산에 남아있는 개척단 출신 어르신 11명이 머리를 맞댔다. 지옥 같았던 개척단에서 고생한 끝에 가분배 받은 폐염전 부지를 어렵게 옥토로 만들었건만 다시 국가로부터 그 땅을 빼앗긴 이들이었다. 그들이 그간 겪은 고초와 절망감을 A4용지 5쪽 분량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이미 여러 차례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패소한 정영철씨는 이번 탄원서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탄원서는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님!!"으로 시작한다.

"저희들의 사연에 귀를 열어주실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끝 무렵에선 이렇게 묻는다. 

"누가 국가에게 국민을 사사로이 이용하고 도구로 사용하는 권한을 주었습니까? 그러한 권한이 없음에도 저희들이 당한 인권 유린에 대해 처벌 받은 사람도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도대체 어디에 대고 이러한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해야 하는지요?"

1966년의 탄원서와 2018년의 탄원서를 여기에 함께 싣는다.

1966년의 탄원서

<탄 원 서>

국가발전향상과 국민의 생활안정질서를 위해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써 힘써 노력해주시는 대통령 각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탄원서를 올리게 된 저희들은 이미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지난 날 사회악을 조성해온 탓으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어온 무의무탁한 남녀들로서 기 못된 악의 과업을 받어온 그릇된 생활인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올바른 인간생활의 터전을 찾고저 고심하던 중 행인지 불행인지 4, 5년 전 저희들의 현 단장님이신 민정식씨의 도움으로 약 70여 명이 함께 뭉쳐 새생활의 보금자리를 기대해 가며 일로 반성과 청산된 선도의 길로 달리기 시작해서 오늘날에는 정부당국에 적극적인 지원으로 완전한 인간 개조는 물론 125쌍 합동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저희들과 같이 불우했던 여성들과 짝을 지어 그 속에서는 벌써 제 2세들이 탄생하여 더욱 더 보람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61년 11월 14일 보사부 장관으로부터 위촉을 받은 민정식 단장 인솔 하에 현 정착지에 기틀을 마련코자 불과 4, 5년 사이에 1771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고 또한 간척지 332정보를 맨손으로 개간에 착수, 그 희망을 목표삼아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음을 관찰하실 때 저희들의 고생이 결코 헛되지 않었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 탄원서를 올리게 된 기 근본 취지를 말씀드려야 할 사정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5여년 동안 친부모와 같이 믿고 의지하고 살아온 저희들의 단장님이신 민정식 씨께서는 운영방법이 너무도 허술하며 그것을 시정해 줄 것을 수차례 걸쳐 요구했으나 그 분은 우리들의 건의를 일절 무시하고 마치 자기사제로 이끌어가는 단체인양 모든 운영을 '팟쇼' 식으로 농지개간을 비롯한 운영문제에 이르기까지 도회시하고 운영자금 일체를 자기수 중에서 낭비하는 등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위로 인하여 현재 저희들은 완전히 도탄에 빠져 자칫 잘못 하면 정부당국의 본래 시책이 위해 됨은 물론 저희 자신들은 다시금 암흑 속으로 뛰어들게 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난날도 그랬거니와 지금은 의리 하나만을 철두철미하게 뿌리가 박혔기에 단장님께서 어떠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이 잘못과 부정인 줄 알면서도 모든 것을 순종해 왔고 또 맹종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외적으로 명목을 세우기 위해서도 무조건 단장님을 옹호해왔고 감싸왔던 것은 오직 그분만을 믿었고 또 그분이 아니면 우리들은 꼭 죽는 것으로만 생각했기에 단장님은 그것을 기화로 어리석은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정년 통탄할 일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은 허수아비로 만들어놓고 형식상 각 부서와 자치회를 구성해서 자기 혼자서 (운영권, 경제권, 지휘권)을 장악했으니 누구하나 이에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못한 것은 의리 하나만을 생각해서 오늘날까지 묵과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에 죄과를 뉘우치지 못 하고 계속 우리들을 기만 다른 방향으로만 걸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요구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루 속히 현 개간지를 국토화시켜 자립자족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끔 해달라는 요청인데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사업을 한답시고 단 운영자금을 다른 곳으로 돌려 현지사정은 그야말로 비참한 생활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사실을 고백하자면 
1. 정부당국에서 지원해주신 보조금이 어느 정도며 또 어떻게 사용된 것인지?
2. 외원당국에서 지원해주는 양곡은 얼마나 되며 또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처리되는지?
3. 구호물자들은 어데서 나오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나오는지? 또 그것을 매각했다면 얼마나되는지? 등은 전연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려고 하지도 않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단장님을 믿었으면 그리했겠읍니까? 그런데 단장님은 그것을 선의로 생각지 않고, 바보들이니까, 하는 야비한 생각에서 역이용했던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입니다.
4. 민정식 단장님은 대외적으로 말할 때 언제나 자신의 사제가 기천만원 투입 되었다고 하나 그러한 사실은 10여 년 전부터 저희들이 모셔온 바 있기에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오히려 우리들이 건축장에 필요한 타이루 붙이는 작업 등을 해서 수입되는 것으로 단장님이 생계를 유지해온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할 수도 있고
5. 지금까지 정부당국과 외원당국에서 지원해준 보조금 외원양곡 등에 실제성과는 어느 정도인가?하는 것은 관계 당국에서 판단하실 줄 믿고
6. 대외적으로는 항상 당국에서 지원이 부족하며 많은 부채가 생겼다고 하지만 그것은 현찰을 줄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도 계획적으로 외상거래를 해서 고의로 부채를 만들어 놓았고
7. 당장 목전에 급한 농사문제를 시급 해결해서 완전자립을 서둘러 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장님은 이에 등한시하고 모든 자금은 '너희들 때문에 교재비를 드렸다' 고 하지만 그 교재비가 어느 정도나 되며 어데다 썼는지? 조차 믿을 수 없고
8. 현재단원들은 생활 상태는 오히려 지난 날 악에 과호해서 생활할 때보다 더 형편없이 영양실조에 걸려있으니 부식이라곤 소금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일까요?
9. 주택은 지붕이 뚫어졌고 비가 새고 방은 흙 벽속에서 자는데도 이에 대책은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은 자금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10. 식량은 겨우 1일분 씩 구입해다 먹을 정도로 자금이 두절상황에 놓여있는 점은 부득이 나지 않습니다.

이상 몇 가지 사실을 드려 탄원하는 내용은 추호도 거짓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또 사직당국에서 내사 하신다면 완전한 사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바라온 건데 이 불우한 사람들의 갈길을 굽어 살펴 주십시오. 저희들의 갈길은 어데입니까? 저희들은 앞으로 어떡해 살아야 됩니까? 저희들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저희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과거는 험악했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었기에 그 과오를 청산하고지금은 이렇게 보람 있게 살려고 발버둥치며 피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장님은 그런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 자기의 친자 민병철군 가족일행을 '파라과이'로 이민시키고 있는 것은 그 이유가 어데 있으며 또 경제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에 운영을 제대로 못한다고 하면서 무슨 돈이 있어서 해외로 보내는 것입니까. 이것이 부정 축재한 증거의 하나입니다.

12. 또한 단장님은 우리단원 전체를 이끌고 '파라과이'로 집단이민을 할 터이니 그리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하였는데 그리고 책자까지 인쇄하며 배부하는 등 그 행위는 지금까지 오년동안 아무런 실적이 오르지 못하고 모든 것이 실패만 되니까 결국은 최후적 기만 술책으로써 집단이민 계획을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도대체 믿을 수도 없거니와 만일의 그 방법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기경비가 적어도 일인당 족비만 20만 원 정도가 될 것인즉 차라리 그 많은 거액을 들여 외국에까지 가서 개간할 바에는 현개간지에서 더 투자해서 완정성과를 보는 것이 국가적으로 볼 때 얼마나 큰 이득입니까? 하물며 집단이민 자체가 되지도 않을 것을 누구보다 단장님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면서 행한다고 호언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들에게 감언이설로서 해놓고 자신도 친자와 내통하여 외피 하려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13. 끝으로 하나의 신례를 든다면 지난 5월 30일박대통령 각하께서 임석한바 있는 장흥 난민 정착사업장의 농지분배식을 보더라도 그 얼마나 부러운 사실임니까? 장흥은 뚝을 새로 쌓은 간척사업이었고 우리는 쌓여있던 뚝 속의 간척지를 앞으로도 몇 년을 더 계속해야 할 지경이니 진정 책임자를 잘 만나야만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또한 단장님께서 농지개간에 전연 관심이 없었다는 산증거이기도 합니다. 관대하신 대통령님께서 저희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생활의 올바른 개척자가 되도록 적극 선처해주신다면 저희들은 아무 사심 없이 오로지 본연의 목적 그대로 인간개조 생활에 한층 열을 가하여 아직도 사회에서 허덕이는 악의 무리들을 선도하는데 앞장서 정부시책에 적극 호응해서 보답하겠습니다.

1966년 6월
대한청소년개척단 서산자활정착사업장 탄원인 일동 올림

추가의 말씀

저희들이 감독기관이며 주무관청이 보사부인 고로 그곳을 무시할 수 없어 제 일차로 탄원서와 함께 진정을 했던 것이나 보사부에서는 단장인 민정식 씨의 비행사실을 인정은 하면서도 전부적이며 철저한 조사는 하지 않고 다만 형식적인 조사로서 단장직만을 9월 1일부로 해임조처 하는 것으로 안착시켰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민단장은 자기에게 부정이 하나도 없다고 자부하면서 단 운영 시에 정부 보조가 없었기 때문에 부채(600여만 원)를 줬으나 기부채를 보사부가 갚아달라는 억지를 쓰면서 심지어 인계인수서적에 날인을 거부하고 있으며 또한 책임자로서의 책임은 느끼지 못하고 이제 와서는 '너희들을 전부 죽인다' '단을 해체시킨다'는 등 공포 속으로 몰아놓고 또 지난날 자기 슬하에서 약간의 잘못된 점을 들추어 현지 경찰에다 고소를 하는 등 비굴한 추태까지 나타내며 보복적인 행동을 하고 있어 불안한 실정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으로 세부적이고도 철저한(장부 및 근거서류. 현지상황) 조사를 단행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애원하는 바입니다. 

1. 1771명분의 외원,곡을 타서 실제인원 800명 분만 유지해온 점(1771명 외원, 곡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3개월에 700부터 800여 만 원인데 실제 투입된 액수는 1개월에 90만 원부터 120만 원이 최고 인 바 3개월간이면 평균 120만 원으로 계산해도 360만 원만 투자한 셈이고 보면 3400만 원은 사용처가 불명인 사실이고 (현인원에 일개월분은 150부터 180만 원이면 충분히 운영 유지됨)
2. 그래서 단원(남녀)들의 생활 상태는 걸인 이상이며 뼈다귀만 남고 심지어 소금국만 먹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님
3. 배급비료는 수십 차에 걸쳐 전부 매도처분해서 농지에는 하나주지 않았으며
4. 구호물자 미군 개통에서 원조 받은 세멘트 등 전부 매각 처분
5. 대구영천에 있는 하천개간지도 단명의로 시작해놓고 결국은 단장부인명의로 변경해놓은 점 

기타 비슷한 사건이 부지기수임에도 불구하고 단장은 전부 운영자금으로 투입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장부상에는 전부가 허위 기재한 것 뿐이니 곧 철저한 조사를 해주셔야만 저희들 불우한 자들은 마음 놓고 정부시책 그대로 받드러 올바른 인간이 되어 잘 살겠습니다. 

끝으로 이번 사건에 대해 종전 보사부에서 조사하던 식의 형식적이 된다면 저희들은 영구 의지할 곳 없는 몸이 되어 다시금 과거와 같이 악의 소굴로 다시 돌아가게 될 위기에 처해있사오니 이번 기회만은 사후정정에 이를 것을 눈물로서 남녀 800명이 호소하는 바입니다.

800명 대표 정용일 올림.

그리고, 2018년의 탄원서

<탄 원 서 >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님!!  

저희들은 1961. 5. 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에 의해서 강제로 '서산 개척단'이라는 단체에 속하여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3구 지역에서 간척지 개척 사업에 참여한 후 위 지역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거나 거주하였던 자들입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불가침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 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격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과거 국가가 저희들에게 자행하였던 인권 유린, 강제 노역, 재산권 침해 등과 관련하여 평생에 한이 맺힌 사연을 달리 토로할 길이 없어 이와 같은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부디 저희들의 탄원을 외면하지 마시고 저희들의 사연에 귀를 열어주실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 

저희들은 1961. 5. 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정부에 의해서 시행되었던 사회 정화라는 미명하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 즈음 영문도 모른 채 백주 대낮에 군인과 경찰들에게 납치를 당하여 '서산개척단'이라는 이름의 단체에 속한 채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3구 지역에 있었던 '서산자활정착사업장'에서 과거 폐염전 등으로 사용되었던 황무지를 개간하는 사업에 동원되어 강제노역을 하였습니다. 

당시 군사정부는 군인 및 경찰 등의 공권력과 깡패와 건달을 동원하여 저희들을 납치 한 후 반항을 하면 몽둥이로 무자비한 폭행을 행사하였고 도망을 가지 못하게 불법으로 감금한 채로 최소한의 주거환경이나 식량을 제공하지 않는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일삼았습니다.

일부 서산개척단원들은 위와 같은 처사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기도하기도 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집단구타와 그로 인한 죽음뿐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집단 폭행과 강제 노역으로 죽어간 동료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았고, 저희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묵묵히 강제 노역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으며, 오직 생존을 위해 버티면서 곡괭이로 땅을 파서 손수 집터를 닦는 등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또한 국가는 1961년경부터 1963년경까지 '취직을 시켜준다'고 하면서 여성들을 납치하여 서산개척단원들과 여성들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255쌍을 강제로 결혼을 하게 하는 등 현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였습니다.

국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산개척단원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이를 무마시키고자 단원 1인당 간척치 1정보(약 3,000평)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말을 하여 저희들은 '땅을 가질 수 있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군사정부는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던 1966년경 정부 지원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서산 개척단은 해체되었습니다. 꽃다운 청춘의 시간 동안 강제 노역에 시달리면서 단 한 푼의 노임도 받지 못한 저희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어 당시 서산군청, 보건사회부 등을 방문하여 임금 지급 및 간척지 분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1968년 서산 간척지에 대한 토지분배계획, 즉 <서산자활정착사업장 농지 및 주택가분배 계획>을 수립하고 '세대당 1정보(3,000평)를 무상으로 가분배 하기로 확정하였고, 저희들은 그때 가분배 받은 토지가 '내 땅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1980년대 간척지에서 비로소 벼농사가 가능하게 됐을 때까지 간척지 개간사업에 매진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들어간 모든 경작비용은 저희들이 전부 부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1975년경 이후 저희들에게 그 어떠한 통지 또는 협의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저희들이 피땀흘려 개간한 토지를 쥐도 새도 모르게 국유지로 몰수하였고 저희들은 국유지 몰수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직 간척지 개간사업에 몰두하였습니다.  

국가에 의한 국유지 몰수 소식은 저희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고 국가는 저희들의 항변을 전혀 듣지 않았고, 오히려 저희들에게 간척지 무단점유를 이유로 임대료를 부과하거나 시세보다 비싸게 20년 상환방식의 국유지 매입 등을 권유하는 등 저희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 등을 제시하여 저희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습니다. 

국가의 위와 같은 조치들은 오직 '내 땅을 가질 수 있다'라는 국가의 약속을 믿고 온갖 억압과 학대를 견디면서 단 한 푼의 노임도 받지 않고 약 20년 동안 폐염전에 불과한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한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이후 저희들은 헌법재판소와 법원에 국가를 상대로 한 토지무상분배소송을 수차례 하였지만 가분배 단계이후 정식분배를 위한 시행령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 

국가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현대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헌법에 규정대로 국가는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의 재산권 행사를 보호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정의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국가는 지난 57년 동안 저희들에게 위에서 제시한 국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첫째, 국가는 군사정권하에서 깡패와 건달 등 온갖 시정잡배 등을 동원하여 무고한 국민들을 납치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며 강제 노역에 임하게 하고, 저희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결혼을 강제로 시키는 등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박탈하고 이를 수수방관하였습니다.

둘째, 국가는 저희들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동안에 저희를 보호하거나 구출해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서산개척단'을 사회 정화 작업 또는 국가 재건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홍보하는 등 자국의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지 않고 정권 홍보의 도구로 저희들을 이용하였습니다.

셋째, 국가는 저희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대가 없이 일군 간척지를 아무도 모르게 강탈하였습니다. 국가는 저희들이 피와 땀으로 개간해 온 황무지보다 더 못한 폐염전과 같은 토지를 수십년에 걸쳐 개간했음에도 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간척지를 불로소득하였음에도 저희들에게 토지분배 또는 아무런 보상을 해주고 있지 않는 등 국민의 재산권 행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넷째, 저희들이 지난 57년 동안 당해왔던 모든 부당한 대우는 모든 인간 관계속에서 통용되는 정의 관념에 합치되지 않습니다. 저희들의 억울한 사실은 객관적으로 분명한 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국가에게 국민을 사사로이 이용하고 도구로 사용하는 권한을 주었습니까? 그러한 권한이 없음에도 저희들이 당한 인권유린 등으로 처벌받은 사람도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도대체 어디에 대고 이러한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해야 하는지요? 이것이 그 동안의 정권이 외치던 정의의 실현인지요?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서산개척단 운영에 대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그리고 그에 따른 적절한 토지분배 및 보상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지금까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의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 

국가는 저희들에게 가분배 단계이후 정식분배를 위한 시행령이 마련되지 않은 점, 가분배 이후 시간이 너무 흘러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면서 저희들의 청구를 외면해왔습니다. 도대체 국민에 대한 국가의 불법행위에 소멸시효가 어디 있습니까? 은밀히 국가 소유로 토지를 몰수 하고서 시행령을 만들지 않는 것이 정말 저희들 잘못입니까?

국가는 권위주의 통치시대에 위법·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크나큰 시련과  겪었던 저희와 같은 사람들에게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공적으로 사죄를 구하고, 저희들이 감수해야 했던 인격적 불명예를 뒤늦게나마 복원시키는 의미에서라도 서산간척단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에 따른 마땅한 보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저희들의 이와 같은 간절한 소망을 귀담아 여겨 조속히 저희들의 평생의 소원이 풀릴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탄원합니다.

2018. 1. 
탄원인 정영철 외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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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의 주류 등극으로 한국 민주화는 완성됐을까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입력 : 2018.01.07 09:10:03

 

87세대의 기억에서 1987년 6월의 기억은 세대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br />사진은 1987년 6월 1일, 호헌철폐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서울 명동 미도파 백화점 인근에 모인 시민들. / 경향 자료 사진

87세대의 기억에서 1987년 6월의 기억은 세대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진은 1987년 6월 1일, 호헌철폐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서울 명동 미도파 백화점 인근에 모인 시민들. / 경향 자료 사진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달라졌다. 87년의 부모들은 거리에 데모하러 나가지 말라고 했다. 데모를 하면 패가망신한다고 했다. 지금은 달라졌다. 지난해 겨울 탄핵 촛불시위 때 부모들은 자녀들의 손을 잡고 나왔다. 자신들이 못 나가면 따뜻하게 입고 가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오세제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말이다. 오 연구위원은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진행한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 조사의 책임연구원이었다. 2017년의 부모들은 1987년 부모들의 자식들이었다. 그들 386세대가 부모가 된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보고서를 읽다보면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평화로운 집회’라는 정도로 설명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근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세대의 변화가 한국 사회를 바꾸고 있다.”

영화 <1987>이 다루지 않은 미완의 승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FGI 참가자 섭외는 1987년 6월항쟁에 참여한 소위 ‘운동권’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이 세대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자 당시의 인구, 학력, 성별 구성을 얼추 맞췄다. 대학 재학생이라고 하더라도 데모 참여자뿐 아니라 비참여자를 섭외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영화 <1987>의 개봉. 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에서부터 이한열 죽음까지의 과정을 다룬 영화다. 당시 거리에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엊그제의 일 같을 것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그후 한국 사회는 정말 바뀐 것일까. 

영화에서 민주화세력은 승리했다. 하지만 미완의 승리다. 영화를 연출한 장준환 감독은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6월항쟁의 매우 아름다운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는 영화다. 만일 끝부분 자막에 한 줄만 덧대도 이 영화는 아예 다른 영화가 된다. ‘그해 12월 군사정권을 승계한 노태우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는.” 이어 그는 그때 그 광장에 모여 외쳤던 ‘386’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덧붙인다. “그 광장에 모여 외쳤던 사람들을 소위 386세대라고 하는데 그 이후 386들이 어떻게 살았나. 아파트값을 이렇게 올려놓고. 나는 이 영화가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대체 그 순수함은 어디로 갔느냐는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영화이기를 바란다.” 장준환 감독은 89학번이다. 1987년 6월항쟁이 이뤄질 때는 고등학생이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다수, 2040세대 대부분은 이미 87년 6월항쟁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다.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 1월 4일 <경향신문>에 박성민 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가 기고한 글이다. 글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의 ‘주류’는 보수였다. 진보를 지배하는 의식은 좋게 말해 비판의식이었고,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비주류의식이었다. 예를 들어 정권을 잡고 집권당이 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보수가 순식간에 급속도로 몰락했다. 박 대표에 따르면 이미 그 징후는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1987년 이래 ‘선거’는 치를 때마다 보수의 아성을 무너뜨려 왔다. 2010년 이후 모든 선거에서는 보수가 20대에서 40대까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는 50대마저 잃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보수 몰락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60년간 한국을 지배해온 보수의 두 축, 세상을 ‘반공’과 ‘돈’의 프리즘으로 보는 안보보수와 시장보수가 1987년과 2017년의 광장에서 탄핵당했다는 것이다. <주간경향>은 2주 전 ‘대한민국 대개혁과 연속 집권의 길’이라는 제목의 더불어민주당 내부 교육문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박 대표의 주장은 민주당의 현 정세 인식과 일맥상통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불과 3~4년 전만 하더라도 ‘진보의 미래’ 전망과 관련해서는 비관적 인식이 컸다. 박근혜 당선 이후 보수 장기집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선거지형에 대한 평가에서도 ‘기울어진 운동장론’이 대세였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거친 이후 나오는 주장은 반대다. 보수 궤멸론과 진보 20년 집권론의 ‘우려’가 나오는 것은 자유한국당 쪽이다.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1987>을 상영 중인 서울 용산구 CGV에서 영화 선전광고물 앞을 관객이 지나가고 있다. / 김창길 기자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1987>을 상영 중인 서울 용산구 CGV에서 영화 선전광고물 앞을 관객이 지나가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보수 궤멸론’으로 

“(민주화)운동이 주류가 된 것이 아니라 운동권 출신들이 주류가 된 것이다.” 김선철 미국 에모리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는 지난해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운동>이라는 제목의 영문저서를 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이 경향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나 브라질, 68운동이 벌어진 유럽과 미국에서도 ‘운동권 출신’이 정권을 잡거나 정치권에 들어오면서 운동의 언사, 담론까지 같이 가지고 들어온다. “자신들의 운동 경험을 자원으로 삼으면서 제도의 영역은 확장되지만 여전히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주변화된다. 한국의 경우, 제도권에 들어간 386들이 그 주체였다.” 

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들은 지금도 민주화운동 ‘경력’을 이야기하지만 1980년대라면 그들에게 던져졌을 질문, 예를 들어 현재 벌어지고 있는 파인텍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이나 그 밑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내가 그들을 대변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그들 중 몇 사람이나 있는지 묻고 싶다” 김 교수가 볼 때는 그것이 바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다. 비주류 약자, 언더도그가 권력을 가진 주류가 되었을 때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거나 정치적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나 ‘현실’과는 여전히 괴리된 착각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가 여전히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헬조선’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긍정적 정체성을 찾을 기재가 없다는 것이 헬조선의 핵심이라고 보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찾는다.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것, 즉 불확실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해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것은 ‘나이’였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민주주의가 사회로 확산되면 서열문화가 완화될 줄 알았는데 거꾸로 한국 사회는 더욱 심해졌다.” 정치나 K팝 등의 팬덤도 자기 긍정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다. “팬덤 사이의 연대감을 보이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은 불링(bullying), 즉 누군가를 적으로 상정하는 것인데, 일상의 좌절이나 분노를 그런 식으로 치환해 표출하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2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압구정 CGV에서 열린 영화 <1987> 제작보고회에서 출연배우들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지난해 11월 2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압구정 CGV에서 열린 영화 <1987> 제작보고회에서 출연배우들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주류 교체의 원인, 인구 구성 변화 

한국 사회의 주류 교체에서 구조적 조건은 인구 구성의 극적인 변화다. 50대가 더 이상 보수계열 정당을 지지하지 않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87년 6월’이라는 강력한 코호트(cohort)를 공유하고 있는 386의 대부분이 이제 5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보수화된다’고 말하는 연령효과와 ‘특정 시기의 경험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는’ 코호트 효과를 보이는 연령대가 교차되는 지점이 이미 훨씬 전부터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점이 1963년생이라는 것이다.

<주간경향>은 이 극적인 인구 구성 변화가 한국 사회에 가져올 충격과 관련해 ‘장기 386시대’라는 개념을 내놓은 바 있다. 2차에 걸친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의 코어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 386집단이 사회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핵심 위치에 일단 올라서면, 급속하게 고령화되는 인구 구성 변화와 맞물려 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시기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그 서막은 상당히 빠르게 왔다. 그 이전 20대 국회의 경우 이미 50% 이상의 의원이 386세대에 속한다. 장기 386세대는 그 세대들의 독특한 연대, ‘그 시절’을 경험한 동료의식, 세대 간 결속보다 세대 내의 결속을 전제로 한다. 

‘헬조선’ 담론은 다른 말로 한다면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혁신이 없는 사회를 말한다. 이 주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3개의 문예지에 10년 동안 발표된 비평문들을 취합해 평론가들이 어떤 단어 꾸러미를 쓰느냐, ‘지형도’를 분석한 연구다. 이 연구에 참여한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직위가 있어야 자유를 느낀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혁신은 다시 말해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고 나오는 것인데, 젊은 세대라고 딱히 개성이 있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가, 문예지 편집위원이라도 직위가 생기고 난 다음에서야 개성이 있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평론은 가장 진취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단어를 써서 기존의 해석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인데, 새로 진입한 젊은 그룹이 쓰는 단어들이 평균적 단어로 수렴되는 것은 기존의 ‘평단권력’에 그들이 포섭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연구 결과다.”

앞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FGI 결과를 보면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386세대는 자기 세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드러내는 한편, 정치권에 진출한 386세력에 대해서는 신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를 진행한 오세제 연구위원은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아주 깊게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선출되는 과정이 온전히 자기 실력에 의해서라기보다 기성정치인, 이를테면 YS나 DJ에 의해 발탁되는 방식의 비민주적인 형대로 정치에 입문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가정하고 있다”며 “발탁과정의 일방성뿐 아니라 그 이후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민생이나 민주주의와 관련한 입법이나 의정활동을 다른 세대에 비해 탁월하게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5월 8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 제19대 대통령 선거 마지막 유세에서 연호하는 시민들의 손을 잡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지난해 5월 8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 제19대 대통령 선거 마지막 유세에서 연호하는 시민들의 손을 잡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분노와 탄핵’이 적폐청산으로 귀결된 이유 

분노와 탄핵. 장덕진 교수팀이 지난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촛불시위가 열린 24주의 SNS로부터 추출해낸 핵심 키워드다. “전체적으로 보면 분노와 탄핵으로부터 진화하지 못했다. 촛불이라는 광장이 열리면서 그 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이슈가 아주 무질서하게 결합했는데,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에 여야 모두 불신과 비판을 받았다. 2008년 촛불과 2016∼2017년 촛불이 다른 점은 2008년 촛불이 대선 직후였다면, 이것은 촛불이 끝나자마자 대선이었다는 것이다. 대선국면에서 홍준표 후보는 생각보다 선전했고, 결집할 절박성에 문재인 후보로 결집하는데 지금까지 조직화한 방식으로 의제가 쌓인 것이 없다보니 모든 요구를 아울러 하나의 두루뭉술한 부대자루에 담는 담론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 논리적 결론은 적폐청산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장 교수의 SNS 데이터 분석에서 더 중요한 함의를 드러내는 부분은 다음의 언급이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민주당 지지나 386 정치인 내지는 실세에 대한 지지는 그 세대가 대표해온 가치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것처럼 대의제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우리가, 우리의 대표인 대통령이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대표적인 슬로건과 수단은 적폐청산이었다. 여기서 문재인이라는 핵심적 연결고리가 빠지면 이 모든 것의 결합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오세제 연구위원은 ‘1987년 6월의 경험과 세대효과’의 지속성을 깊게 천착해 왔다. 박사논문을 통해 성별이나 학력, 재산의 유무와 상관 없이 다른 세대와 구별되는 87세대들의 코호트적 특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온 오 위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386이 우리 사회를 이끄는 실질적인 주체가 되려면 세대이익을 넘어서야 하며, 특히 20대에서 40대까지의 아랫세대와의 연대와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지금 제일 고통받는 세대가 386의 자식세대, 취업하지 못하는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청년실업자다. 이들에 대한 집단적인 사회적 배려와 그것을 강제하는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가진 집단은 현재 없다. 나는 386세대가 그것을 주도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할 때만이 미완의 87년 정신을 마무리하고 실현하는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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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 수익은 모른 척, 모든 것이 최저임금 탓인가?

[비평] “자영업자 몰락하고 물가 상승하고, 일자리 없어진다”는 비판…폐업 요인은 훨씬 다층적이다

정상근 기자 dal@mediatoday.co.kr  2018년 01월 07일 일요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당장 자영업자들은 비상이 걸렸다. 편의점은 이미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자영업자들은 아예 ‘알바’ 쓰기를 꺼려해, 앞으로 구직난은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최저임금 인상분이 물가에 반영돼 물가가 상승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의 삶의 질 개선을 최우선 국정목표로 삼겠다“고 밝혔지만 정부가 오히려 일자리를 줄이는 역설을 만들고 있다.”

지난해에 비해 16.4% 인상된 최저임금이 올해 1월1일부터 적용됐다. 그런데, 불과 하루도 안된 2일부터 한 주 내내, 최저임금으로 인해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있을 것이라는 많은 언론의 우려 섞인(?)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처음에 요약한대로 언론이 최저임금 인상에 회의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 시각이다. 첫 번째는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 그리고 인건비 비중이 높은 소상공인들이 어려워질 것이고, 이로 인해 오히려 일자리 창출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소상공인들에게 인건비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고, 최저임금 인상이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소상공인에게 문제는 인건비만이 아니다. 소상공인으로서는 물론 인건비를 조정하는 것이 지출을 줄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체감이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지만, 일부 언론에서 영세상인들의 문제를 ‘최저임금’으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진실’일수는 없다. 왜일까?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첫째,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의 폐업 요인은 훨씬 더 다층적이다.
 

지난해 1월 한국은행 남윤미 연구원이 발표한 ‘국내 자영업의 폐업률 결정요인 분석’의 추정결과에 따르면, “자영업체가 위치한 지역의 인구 및 1인당소득과 같은 지역특성과 지역내총생산, 소비자물가지수와 같은 경기를 반영하는 요소들뿐만 아니라 임대료, 대출이자율, 고정인건비와 같은 비용 요소들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동종업체수와 해당 업체의 업력 및 규모 또한 폐업률을 결정하는 요소로 나타”났다. 

2012년 중소기업청 통계에 따르면 점포면적 50㎡ 상가(1층)의 해당년도 1월말 임대료 기준은, 서울 강남역 인근의 경우 2010년 2800만원에서 2012년 4600만원으로, 명동은 2010년 3200만원에서 2012년 5300만원으로, 인천 남동구 구월동의 경우 2010년 270만원에서 320만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수도권 평균치도 2010년 946만원에서 1420만원으로 474만원 상승했다. 불과 2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올해 7월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담 완화를 위한 소상공인·영세중소기업 지원대책’에 따르면 5인 미만 영세 사업장의 영업비용은 최근 5년 간 연 평균 7.2%나 증가해 같은 기간 중 연평균 매출액 5.8%를 상회했다. 이는 인건비도 인건비지만 신용카드 결제 활성화에 따른 신용카드 수수료 부담 증가, 임대료 상승, 높은 부채수준 등의 이유도 크다. 실제로 대기업에게는 1% 안팎인 신용카드 수수료가 자영업자에겐 최고 2.5%에 이른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의 경우 초기 투자비용부터 상당하다. 2013년 한국경제의 “프랜차이즈 창업 때 본사에 얼마나 내나”기사에 따르면 프랜차이즈 가맹사업의 초기 투자 비용은 편의점 기준으로 최대 7220만원, 제과·제빵점업 5200만원, 외식업은 2억7830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본사로부터 홍보 비용 등을 넘겨받고 불필요한 부분까지 본사물품 사용을 강요받는 등 갑질 문제도 심각하다.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이 ‘최저임금’만의 탓인가? 

 

중앙일보 2018년 1월4일자. 24면.
중앙일보 2018년 1월4일자. 24면.
 
둘째. 기사에 언급된 각종 근거가 빈약하다.

 

중앙일보 4일자, 김동호 논설위원의 ‘최저임금의 역습…일자리 축소와 물가상승 태풍 분다’에는 최저임금 정책이 “점포 무인화 바람에 기름을 붓고 있다”며 이는 “전년 대비 16.4% 오른 최저임금이 그간 주저해오던 무인결제시스템 도입을 자극하면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동호 논설위원 스스로 언급했듯 무인화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현상이며 그것이 최저임금 때문이라는 근거도 없다. 

아시아경제는 4일 ‘편의점 月 200곳 문 닫는다’ 제하의 기사에서 “올해부터 최저임금이 대폭 오르면서 지난달 폐점한 편의점이 속출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에는 “관련업계에 따르면 주요 6개 편의점의 총 점포수는 3만9709개로 잠정 집계됐는데, 특히 지난달의 경우 폐점 점포수가 203개로 연간 처음으로 200개를 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기사에도 언급됐듯, 12월에 창업한 신규 점포가 398개다. 그 전달 창업 점포 470개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신규 점포 창업이 줄어든 것이 최저임금 때문이라는 근거는 빈약하다. 기사에서는 하나금융투자 자료를 인용해 “매출·임대료·관리비 등이 동일한 경우 최저임금 인상분이 적용되는 편의점 가맹점주의 순수익은 14.3%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근거를 들었지만 역으로 최저임금이 동일한 경우 가맹점주의 순수익은 증가할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매출·임대료·관리비 때문이다.

언론은 소상공인들이 “차라리 내가 일하지 알바를 쓰지 않겠다”는 답답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고용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한겨레가 5일 보도한 “편의점·피시방 등에 ‘구인’ 문의하니…50곳 중 47곳 ‘오른 최저임금 주겠다’” 제하 기사를 보면 한겨레는 50곳을 대상으로 최저시급 지급 의사를 물었고 이에 47곳에서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몇몇 사례를 들어 자영업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아르바이트생을 기피한다는 보도와는 다른 분위기다. 

최저임금, 타격은 맞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최저임금 인상 역시 소상공인들의 운영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인 것은 맞다. 하지만 최근 언론의 보도는 최저임금 ‘때문에’ 소상공인이 몰락하고 있다고 몰아가고 있다. 임대비 상승은 ‘부자’인 건물주들의 소득을 늘리고, 신용카드 수수료는 ‘재벌’인 신용카드사 소득을 늘린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갑질은 역시 프랜차이즈 본사의 배를 불린다. 하지만 많은 언론은 그 층층이 쌓인 원인 중 하나, 가난한 최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쥐어지는 ‘최저임금’만을 탓하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는 경비노동자들이 해고될 위험에 처했고, 일부 사용자들이 수당을 없애고 식비를 빼가는 등 불법·편법 행태를 자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최저임금 때문’이라고 탓할 수는 없다. 해당 강남 아파트의 경우 최저임금을 준수하는데 드는 관리비 인상분은 한 가구당 월 3천원대 수준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권오인 사회정책팀장은 “(인상된 최저임금이) 시행된지 몇일도 안됐고 첫 월급도 안나왔다”며 “언론의 보도가 과도하다”고 비판했다. 권 팀장은 “정부가 지원책을 가지고 있는데 엄밀한 판단도 없이 쓰러질 것처럼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며 “인건비 비중이 높긴 하지만 비용구조를 뜯어보면 임대료, 프랜차이즈 로열티, 신용카드 수수료 등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 팀장은 “오히려 정부가 관리감독을 제대로 해야 한다”며 “실태조사를 하고 재벌·대기업 중심의 관행을 구조개혁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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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구속은 시간문제" 그는 왜 플랜다스의 계를 만들었나

[e사람] 안원구 국민재산되찾기운동본부 사무총장이 말하는 '다스 사건' 해결책

18.01.06 19:53l최종 업데이트 18.01.06 19:53l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실소유주라고 의심을 받는 자동차부품 회사 '다스' 관계자들이 검찰에 줄줄이 소환되고 있다. 다스의 전 경리팀장, 전 총무차장은 물론 다스 회장의 운전기사로 일했던 이들도 검찰 문턱을 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실소유주라고 의심받는 이명박 전 대통령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전 대통령이 검찰 포토라인 앞에 설 수 있을까.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국민재산되찾기 운동본부'에서 지난 3일 만난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이하 국민재산되찾기 운동본부 사무총장)은 <오마이뉴스> 기자의 질문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은 시간문제"라고 단언했다.
 안원구 국민재산되찾기운동본부 집행위원장 겸 사무총장(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을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 그는 다스 실체 규명을 위해 '플랜 다스(Plan Das)의 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안원구 국민재산되찾기운동본부 집행위원장 겸 사무총장(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을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 그는 다스 실체 규명을 위해 '플랜 다스(Plan Das)의 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남소연
그가 이렇게 자신 있게 답하는 건 '플랜(Plan)다스(Das)의 계'라는 모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뤄냈기 때문이다. 플랜다스의 계는 범죄자의 은닉재산을 찾아 환수하는 것이 목표인 '국민재산되찾기 운동본부'의 첫 행보로, 다스 주식 구입 금액을 모으는 운동이다. 모금을 시작한 지 3주 만에 150억 원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그 돈이면 다스 주식 3%를 살 수 있다. 그러면 소액이지만 주주로서 다스의 회계장부는 물론 거래상황, 소유구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다스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네 가지만 제대로 조사하면 MB 구속된다"  

물론 플랜다스의 계만으로는 다스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안 사무총장은 사정 기관 등에서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실소유주라고 의심할 만한 정황과 증언 등 자료는 이미 차고 넘친다. 검찰, 공정위, 국세청 등 관계 기관이 나서주면 (구속) 시간을 당기느냐, 마느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구속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 안 사무총장은 "검찰, 국세청, 공정위가 4가지를 해야한다"라고 설명했다. ▲다스의 120억 원 비자금 조성 의혹 ▲이 전 대통령의 다스 투자금 140억 원 회수 개입 의혹 ▲다스 주식 일부가 상속세로 대신 납부됐던 과정 조사▲이 전 대통령의 아들인 이시형씨의 다스 경영권 승계 의혹 등에 대한 조사와 수사다.

이 중 두 가지는 이미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서울중앙지검은 다스의 BBK 투자금 회수에 청와대 등 정부기관이 동원됐다는 의혹을 수사중이다. 다스는 지난 2000년 BBK에 190억 원을 투자한 뒤, 50억 원을 돌려받고 140억 원은 받지 못했다. 이 돈은 이 전 대통령 재임기간이었던 2011년에서야 BBK대표 김경준씨의 스위스 비밀계좌에서 다스로 송금됐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개입한 의혹 등을 검찰이 수사중이다.

검찰은 또 지난해 12월 서울동부지검에 '다스 횡령 등 의혹 고발사건 수사팀'을 꾸리고 다스가 수입하는 원자재 가격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12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관리했고 정호영 전 BBK 특검이 이 사실을 확인하고도 덮었다는 의혹도 조사중이다. 하지만 정 전 특검의 수사결과 발표가 2008년 2월에 있었기 때문에 '다스 비자금' 공소시효는 2개월도 남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안 사무총장은 "(다스 수사는) 검찰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검찰에게만 기대하기 보다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국세청·공정위 안 나서면 직무유기다"
 안원구 국민재산되찾기운동본부 집행위원장 겸 사무총장(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을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 그는 다스 실체 규명을 위해 '플랜 다스(Plan Das)의 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안원구 국민재산되찾기운동본부 집행위원장 겸 사무총장(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을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 그는 다스 실체 규명을 위해 '플랜 다스(Plan Das)의 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남소연
"다스 사건은 기업이 관련된 사건이다. 검찰도 필요하지만 국세청과 공정위의 조사가 필요하다."

안 사무총장은 국세청과 공정위가 나서야 다스 수사의 시계가 빨라진다고 했다. 일단 국세청이 다스 주식이 상속세로 대신 납부되는 과정을 조사해야한다. 다스 최대주주이자 이 전 대통령의 처남 김재정씨가 2010년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의 가족들은 1000억원대 상속에 대한 세금을 다스 주식으로 냈다. 이 과정에서 의문이 많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상속세를 낼 때, 대부분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을 하는데 김씨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관련기사 : 'MB'겨냥 박영선 "수상한 다스의 상속세 처리, 수사의뢰해야" )

"다스 주식보다 현금으로 상속세 납부하는게 상속인들에게는 유리하다는 보도도 나오지 않았나. 주식으로 납부하는 방법은 다스에게 유리한 것이다. 게다가 상속세를 납부할 때 현금을 가장 먼저 납부하게 돼있다. 현금화가 가능한 순서인데 부동산, 채권, 상장주식 등 당시 현금화가 가능한 재산이 있었다. 국세청이 그런 것들 다 조사해서 현금으로 받았어야 했는데, 다스 주식으로 받았다. 그 결과 국고로 환수돼 예산으로 써야 할 450억 원 상속세가 7년째 주식이라는 종이쪼가리로 있는 것이다."

그는 "다스의 지분 구조는 물론 다스 주식 물납 과정 등을 보면 차명주식·차명재산이라는 의혹이 짙다"라면서 "늦었지만 국세청이 조사에 나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의혹이 있음에도 수사 안 하는게 오히려 정파적 색깔이 있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안 사무총장과의 인터뷰 다음 날인 4일 국세청이 움직였다. 국세청은 경주시 다스 본사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국세청은 이날 서울지방국세청 조사 4국 조사관 40여명을 보내, 회계 장부와 컴퓨터 등의 파일을 확보했다. 서울청 조사4국은 '국세청의 중수부'로 불린다.

다스 본사가 경주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국세청장의 지시에 따른 '교차 세무조사' 성격이 짙다. '교차 세무조사'는 해당 기업의 관할 세무관청이 아닌 곳에서 직접 조사에 나서는 것을 말한다. 안 사무총장의 말대로, 국세청이 이번 기회에 다스의 상속세 납부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인지, 비자금 조성과정에서의 세금 탈루 의혹 등이 규명될지도 두고볼 일이다.

이제 남은 것은 공정거래위원회다. 안 사무총장은 이 전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의 다스 승계 의혹에 대해서도 공정위가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는 다스의 씨에프오(CFO, 최고재무책임자)이며 다스의 중국 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무엇보다 이씨는 에스엠(SM)이라는 회사를 세워, 다스의 핵심 하청 업체들을 인수하고 있다. 연매출 600억 원이 나올 정도로 흑자 경영을 하던 업체가 갑자기 적자를 기록해 100여만 원에 인수돼 '우회 승계'라는 의혹이 나오는 상황이다.

"다스 주식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이 전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가 최고재무책임자를 맡은 것도 말이 안 된다. 거기다 에스엠이 인수합병하는 과정을 보면 사실상의 다스 경영권 승계 작업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공정거래법 위반이 있는지 공정위가 나서서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은닉재산 국고환수 특별법 통과 막은 사람, 제2의 이명박"
 안원구 국민재산되찾기운동본부 집행위원장 겸 사무총장(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을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 그는 다스 실체 규명을 위해 '플랜 다스(Plan Das)의 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안원구 국민재산되찾기운동본부 집행위원장 겸 사무총장(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을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 그는 다스 실체 규명을 위해 '플랜 다스(Plan Das)의 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남소연
안 사무총장은 "다스의 주인을 찾으면 BBK의 주인을 찾는 것이다. 그 사람이 5000여 명의 개미투자자들을 속인 BBK 주가조작의 주범이다"라고 다스의 실소유주를 찾는 운동의 의미를 말했다.

"그저 사실 여부를 확인해서 밝히라는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이 실소유주가 아니라면 아닌 대로 조사해 밝히면 된다. 일부로 아닌 것을 맞게 만들거나, 맞는 것을 아니라고 하는게 문제이지 사실을 밝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스의 실소유주를 찾는 일은 국민재산되찾기 운동본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안 사무총장은 "박근혜, 최순실, 이명박 등 국내외 은닉 재산을 찾아 국민에게 돌려줄 것이다"라고 목표를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특별법 제정이 꼭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법 통과는 요원해 보인다. 국회에 최순실씨 등 국정농단 세력의 불법축재와 관련해 국고환수를 추진하는 법안이 4건이나 올라와있지만, 일부 야당이 반대해 계류된 상태다.

"은닉재산을 찾을 때 국가기관들간 역할 조정, 입증책임, 시효 등의 문제가 있어 특별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파적 이해 때문에 국회통과가 안 되고 있다. 그걸 막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또 다른 이명박, 국정농단세력과 다를 바가 없다. 은닉재산을 못 찾도록 돕는 것이니까 말이다. (계속 반대한다면) 의원들을 상대로 낙선운동 이상의 국민적 불만이 쏟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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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 정보국장, 북이 미사일 쏴도 대화해야

미 전 정보국장, 북이 미사일 쏴도 대화해야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1/07 [03:4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이 사진은 2016년 10월 25일 대외관계협의회 대화모임에 연사로 참석한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질의응답을 진행하던 중에 생각에 잠겨있는 장면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미국이 조선에 핵포기를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핵시험 중지를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므로, 마개를 씌우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북의 현재 핵무기를 인정하고 핵시험 중지보다 한 급 낮은 핵시험 유예를 가장 현실적인 방책으로 인정한 발언이다. 이런 발언내용이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워싱턴디씨와 서울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일 뉴스1 보도에 따르면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2일(현지시간) CNN에 북의 핵 프로그램 중단 가능성과 관련해 "그 기차는 한참 전에 역을 떠났다"면서 "북한은 비핵화하지 않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클래퍼는 "나는 미사일 시험 발사와 한국과의 대화 합의를 나란히 놓는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 있다. 이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이건 긴장을 다소 완화시킬 것이다. 협상은 여기 앞에 놓인 유일한 길이다. 다른 현실적인 옵션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당장은, 북한이 핵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들(북한)은 그걸 증명하겠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화할 때, 협상을 할 때, 그들은 우세한 입장에서 그렇게 하길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클래퍼 전 미국정보국장은 2016년 10월부터 여러 언론을 통해서 북의 핵보유를 인정한데 기초해서 더 이상의 핵무장력 강화라도 막기 위한 대화를 당장 진행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워싱턴과 서울에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그 후에도 그는 이런 주장을 굽힌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북이 추가적인 미사일시험발사를 단행하더라도 북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미국의 수뇌부와 한국의 자유한국당이 들으면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하겠지만 사실 북의 입장을 고려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 수 없다.

북의 비핵화 기차는 이미 역을 떠났다는 말은 대화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북의 현재 핵무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진단이다. 특히 북은 결코 비핵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미국과 대화를 진행하는데 있어 핵무장력을 강화할수록 대화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북의 입장에서는 핵무장력 강화를 중단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대화에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진행되지 않는다. 클래퍼는 북과 대화를 하려면 핵무장력을 강화해나가는 북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패권국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충격적이지만 호혜 평등한 관점에서 보면 클래퍼의 주장이 사실 매우 합리적인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클래퍼의 주장은 나아가 북의 핵무장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대화에서 미국은 불리해지게 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결국 시간은 미국 편이 아니며 당장 북과 대화를 하는 것이 그래도 미국에 가장 유리한 결과를 도출할 길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클래퍼의 주장을 좀더 확대분석해보면, 대화가 아닌 전쟁으로 승부를 보려고 해도 북의 핵무장력이 강화되기 전에 승부를 보는 것이 미국에는 유리할 것이기 때문에 대화건 전쟁이건 이제는 당장 택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진단도 담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패권을 휘두르며 다른 나라를 멋대로 침략하고 자원을 헐값으로 마구 약탈하다시피 해왔으며 온갖 금융대란을 일으켜 세계의 재부를 한순간에 싹쓸이 해온 그 패권의 단맛에 취한 미국의 수뇌부들은 이런 클래퍼와 같은 합리적인 주장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미국이 북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온갖 협상을 해왔지만 결국 북과 해결을 보지 못하고 북이 수소탄 시험에 그 수소탄을 장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까지 성공시키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클래퍼 전 미국정보국장은 그런 미국의 수뇌부들에게 제발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의미로 CNN과 이런 충격적인 내용의 대담을 진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 국가정보국은 미국 CIA, 국가보안국(NSA) 연방수사국(FBI)를 비롯, 국방정보국(DIA), 국가정찰국(NRO) 등 미국의 16개 정보기관의 모든 정보를 종합분석하고 조절통제하는 핵심기관이다. 그 국가정보국장을 오바마정권 기간 오랜동안 역임한 제임스 클래퍼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결코 쉽게 여길 수 없다.

 

그런데도 미국 수뇌부 대다수는 여전히 북을 인정하고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에 북이 참가한 것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풀리고 이어 북미대화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을지 아니면 대화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또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진행되어 북이 추가적인 핵무장력을 과시하여 더욱 위험천만한 위기상황으로 치달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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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급 남북당국회담’ 남측 수석대표 조명균 통일

노태강 문체부 제2차관 등 대표단 명단 북측에 통보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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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6  17:3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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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오는 9일 열리는 '고위급 남북당국회담' 수석대표를 맡았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오는 9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리는 ‘고위급 남북당국회담’ 남측 수석대표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나선다.

통일부는 6일 “우리측은 금일 오후 대표단 명단을 북측에 통보하였다”며 “아울러 북측에도 조속히 대표단 명단을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고위급 남북당국회담 남측 대표단은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수석대표로, 천해성 통일부 차관,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안문현 국무총리실 심의관, 김기홍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기획사무차장 등이 회담대표로 구성됐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남측 수석대표에 북측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이 북측 단장으로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남북의 이른바 ‘통-통 라인’이 회담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조명균 장관은 통일부 교류협력국장, 개성공단사업지원단장,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 등을 지내며 남북회담에 정통한 인물로, 2007년 10.4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단독회담에 배석하는 등 남북회담 베테랑으로 꼽힌다.

통일부는 “앞으로도 유관부처와 긴밀한 협의 등을 통해 고위급 남북당국회담을 차질없이 준비해 나갈 것”이라고 알렸다.

한편, 남북은 이날 오전 9시30분경 판문점 연락업무를 시작했으며, 오후 5시 45분경 마감통화를 했다. 남북은 휴일인 7일에도 정상근무를 하기로 했다.

(추가,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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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1987 그리고 나]보안계장은 그가 ‘비둘기’인지 몰랐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입력 : 2018.01.06 07:00:11 수정 : 2018.01.06 08:46:53

 

ㆍ‘박종철 고문치사’ 진실 밝힌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교도관 한재동씨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인 안유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오른쪽)과 한재동 전 교도관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박종철기념관 5층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과거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이었던 이곳에서 1987년 1월14일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던 도중 숨졌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인 안유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오른쪽)과 한재동 전 교도관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박종철기념관 5층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과거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이었던 이곳에서 1987년 1월14일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던 도중 숨졌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씨(당시 21세·언어학과 3학년)가 숨졌다. 경찰은 이튿날 “책상을 ‘탁’ 하고 내려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쇼크사로 위장하려던 경찰은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자 다시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했다. 정부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법무부·내무부·검찰·청와대 비서실 등이 모여 관계기관 대책회의까지 열며 정권 차원의 조작·은폐를 시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이 드러났고, 6월항쟁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영화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1987년 민주화운동을 다룬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1주일 만인 4일 현재 302만명이 관람했다. 정치인들과 경찰이 단체관람을 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에서 수감 중이던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김의성)에게 고문경찰관이 더 있다고 알린 보안계장은 안유씨(74)를 모델로 했다. 이부영의 편지를 몰래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전달한 교도관(유해진)은 한재동씨(71)와 전병용씨를 합쳐놓은 것이다. 실제로는 한씨가 전씨를 통해 이부영의 첫번째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했고, 두번째 편지부터는 한씨가 직접 가져다줬다. 

지난 4일 저녁 서울 남영동 옛 대공분실에서 안유씨와 한재동씨를 만났다.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 숨진 대공분실은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로 변했고 그 안에 박종철기념관이 있다. 안씨와 한씨는 2012년 박종철 열사 25주기 기념식에서 수십년 만에 재회했다고 했다. 그러다 최근 <1987> 시사회에 초대돼 함께 영화를 봤다고 했다. 관람 소감을 묻자 안씨는 “당시 외부의 최루탄가스가 바람을 타고 교도소 안까지 날아오는 날이 많았다”며 “나의 경우 박처원 치안감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 등 픽션이 가미됐지만 그때를 돌아보게 돼 감회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안씨는 “당시엔 이부영씨의 비둘기(몰래 교도소 밖으로 검열받지 않은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가 한재동씨인 줄 몰랐다”고 덧붙였다. 한씨 역시 “안유 형님이 이부영 형에게 고문경찰이 더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당시엔 확신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한씨는 “영화 속 장면들은 당시의 아슬아슬함에 비할 바가 못된다”며 “옛 기억이 상기되면서 다시는 저런 시절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심했던 1986년 한 해 동안 전국 구치소·교도소에 수감된 공안사범만 2800여명이었더군요. 

 

안유 = “당시 영등포교도소는 시국사범 증가로 감방이 모자랄 정도였어요. 처음에 대학생이 들어오면 독거방을 배정했는데, 숫자가 늘면서 일반 재소자와 같은 방에 넣을 수밖에 없었죠. 몰려 있으면 안되니까 대학생들을 2~3방 건너 한 명꼴로 배정했어요. 이들을 감당하기 위해 1986년 서울 및 수도권과 대도시 구치소·교도소마다 ‘공안 및 공안 관련 사범 전담반’이 꾸려졌는데 보안계장이던 제가 영등포교도소에선 전담반장이었습니다.” 

“두려웠죠, 하지만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실 알린 교도관 2명의 증언 

지난 4일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씨(왼쪽)와 전 교도관 한재동씨가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둘러보고 있다. 두 사람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의 진상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지난 4일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씨(왼쪽)와 전 교도관 한재동씨가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둘러보고 있다. 두 사람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의 진상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한재동 = “인천 5·3항쟁 이후 학생운동이 더욱 강력해졌어요. 구치소나 교도소에 수감된 학생들은 집단으로 구호를 외치고 단식하고 출정을 거부하는 일이 많았죠.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어요. 시국사범, 양심수들은 죄없이 갇힌 거니까 저항할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에서 교도관들과 마찰도 많았죠. 당시 학생들이나 양심수들은 교도관들을 정권의 시녀라고 했습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을 바깥에 알린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도 ‘5·3 인천항쟁’의 배후 조종 혐의로 그때 구속돼 영등포교도소에 있었지요?

안유 = “이부영씨가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서울구치소에 투옥된 1974~75년쯤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났어요. 이부영씨와 군대생활을 같이한 제 고교 동창이 구치소 관구 주임이었던 제게 그를 부탁했죠. 자주 대화하며 친분을 쌓다 헤어졌는데 1986년 영등포교도소에 이부영씨가 들어오면서 재회했습니다. 당시 그에게 집단구호, 단식 등으로 저항하는 학생들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이부영씨는 재소자 대표, 전 교도소 대표로 협상을 했고, 학생들은 그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했어요. 주로 법무부가 금지한 책을 반입해달라는 내용이었고, 전 당국 몰래 눈감아줬죠.” 

한재동 = “1976년쯤 부영이 형을 서울구치소에서 만났어요. 형이 출소한 후에도 자주 만나 같이 데모하러 다녔죠. 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신념이 강해 당시 저는 거의 모든 시국사범들과 알고 지냈어요. 부영이 형이 영등포교도소에 들어온 후엔 매일 오후 5시 형을 찾아가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다 퇴근했어요. 당시 제게 배정된 업무공간이 오후 5시에 일을 마치는 수형자 작업실이었는데, 퇴근시간은 6시니까 1시간이 비잖아요.” 

박종철이 쇼크사가 아닌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들통난 후 경찰은 1월19일 치안본부 대공수사3부 5과 2계 조한경과 강진규가 고문치사 가해자라고 발표했다. 이후 불과 5일 만인 24일 검찰 수사팀은 이를 인정하는 1차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이 둘을 구속 기소했다. 안씨는 “20일 새벽 2시쯤 영등포경찰서에 봉고차가 도착했는데 내린 사람이 다섯이었다”며 “경찰은 이들이 대공 담당이어서 얼굴이 알려지면 안된다는 이유로 똑같은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다섯명의 경찰을 봉고차에 태우는 촌극을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 당시 취재 인파도 많이 몰렸죠. 

안유 = “그랬지요. 전 고문경찰 둘을 어디에 수감할지 고민했어요. 양심수들이 있는 사동에 같이 넣으면 큰일날 테니까 이부영씨가 있는 사동에 넣었어요. 이부영씨도 학생들과 섞이면 결과적으로 그에게 안 좋을 것 같아 당시는 사용하지 않던 여자 사동에 배정했거든요. 그곳 창살을 통해 이부영씨가 조한경과 강진규에게 ‘당신들도 독재의 희생자들’이라며 ‘박종철을 위해 함께 명복을 빌자’고 했다고 해요.” 

한재동 = “박종철 고문에 둘만 가담했다는 검경 발표가 가짜라는 걸 저는 처음부터 알았어요. 서울구치소에 근무할 때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찰이나 안기부, 보안사 등에 끌려가 고문당한 걸 목격했으니까요. 동료 교도관도 개 패듯 폭행당하고 돌아온 것을 봤고요. 가담자가 더 있을 거라고 짐작했죠. 가해 경찰들이 영등포교도소로 온 후 동료 교도관들을 통해 진상을 파악해보려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조한경은 매일 성경을 크게 읽고 찬송가를 불렀고 강진규는 흐느껴 울기만 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경찰은 교도소 측에 조한경, 강진규를 조용한 공간에서 계속 특별접견(가림막을 사이에 둔 접견이 아닌, 별도 장소에서 편하게 대화하는 접견)해야겠다는 것과 자신들의 면회를 교도관이 참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안씨는 법무부에 보고한 후 규정을 들어 거부했다. 그러자 경찰은 중견간부가 입회할 것과 내용을 일절 기록하지 말 것을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교도소 측은 간부 침실에 임시 사무실을 차려놓고 경찰에 접견실로 제공했다. 2월19일 대공5과장 등 6명이 가해 경찰관들을 면회했다. 이 자리에서 안씨는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안유 = “경찰들이 거의 매일 면회를 왔어요. 2월19일 면회온 사람들이 ‘너희 둘이 다 짊어지고 가라. 그럼 빨리 재판받게 해서 가석방이든 사면이든 빨리 석방되도록 하겠다. 대공조직을 위해 너희 둘이 끝까지 책임지라’고 했어요. 조한경은 실제 물고문했다는 동료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반발했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잊을까 봐 얼른 업무일지에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반금곤의 오기), 경장 이정오(이정호의 오기)라고 고문경찰 3명의 이름을 들리는 대로 적었죠. 그들은 대화에 빠져 있어 제가 적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어요.” 

안씨는 며칠을 고민한 후 이부영을 사무실로 불렀다. 커피를 내주고 “큰일났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 형이 언젠가 출소할 테니 기록으로 남기라”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안씨는 “당시 분노를 느껴 고민 끝에 이부영씨에게 전했지만 그게 곧바로 바깥세상에 알려질 줄은 몰랐다”며 “다음날인가, 이부영씨가 내게 박종철 관련 모든 업무일지와 자신과 면담한 기록까지 다 없애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소름이 돋았다”고 회고했다. 정권을 뒤엎을 정보라고 판단한 이부영은 그 내용을 그날 바로 편지에 써서 다음날 한재동씨를 통해 외부로 내보냈다. 정권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했다는 내용이 편지에 담겼다.

- 비둘기 노릇은 위험한 일인데 어떻게 이뤄졌나요. 

한재동 = “여느 때처럼 오후 5시 부영이 형을 만나러 갔는데 부영이 형이 ‘재동아,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필기구를 가져오라’고 해요. 직감적으로 박종철 고문경찰들 얘기인 줄 알았어요. 사무실에서 재생갱지를 찢어 제 볼펜과 함께 건넸죠. 부영이 형이 내일 오라고 하더군요. 이튿날 가서 늘 그랬듯이 감방 창문의 쇠창살을 손으로 잡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 형이 제 소매 속에 몇번 접은 편지를 스윽 밀어넣었어요. 그래야 지키고 있는 교도관이 눈치채지 못하거든요. 형은 저의 동료 교도관이었던 전병용한테 편지를 줘서 김정남에게 전달하도록 하게 하라고 말했어요. 전 편지가 교도소 정문을 나설 때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다섯 손가락으로 소매 끝을 부여잡고 퇴근했죠.”

그즈음 교도관을 그만둔 전병용은 당시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다. 김정남의 요청으로 이부영, 장기표 등을 숨겨줬다가 장기표가 검거되는 바람에 범인 은닉 혐의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한씨는 전병용과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자주 만났다. 편지는 전병용을 거쳐 3월15일에야 김정남에게 전달됐다. 역시 수배 중이던 김정남이 연락하지 않으면 전병용도 그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병용은 편지 전달 이틀 후인 3월17일 경찰에 붙잡혔다. 김정남이 받은 편지는 2월23일자 외에 추가로 3월1일자로 작성된 것도 있었다. 2월27일 담당검사인 안상수가 두 고문경찰의 요청으로 찾아와 가혹행위 가담자가 3명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어느 쪽이 유리한지 잘 알아서 판단하라’고 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드러난 후 경찰은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특별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밑에서 두번째)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하면서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맨 아래)는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드러난 후 경찰은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특별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밑에서 두번째)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하면서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맨 아래)는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발각됐을 때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감이 없었습니까.

한재동 =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큰 두려움은 없었어요. 박정희 때부터 민주화를 위해 독재자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죠. 자질구레한 감정에 흔들려선 안되잖아요. 이전부터 정치범들의 비밀편지를 수없이 전달하기도 했고요.” 

안유 = “저는 달랐어요. 역추적이 들어오면 간첩 누명이 씌워져 남영동에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려웠습니다. 솔직히 가족에게도 말 못한 채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죠. 내가 어떻게 되면 우리 남은 가족은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걱정했습니다.” 

- 검문검색이 삼엄하던 시절인데, 편지를 전달하러 가실 때 미행 등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한재동 = “중요한 걸 지니고 있으니까 항상 뒤를 나름대로 살피며 다녔어요. 예감이 안 좋은 날엔 일부러 골목을 돌면서 살피기도 하고, 버스와 택시, 지하철도 자주 갈아탔죠. 그러나 별일은 없었어요.” 

- 영화에서 보안계장의 역할이 미화돼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안유 = “전 의인이 아닙니다. 대학생들은 저를 가리켜 ‘전두환의 주구, 사냥개’라고 했어요. 학생 수형자들은 제 얼굴에 짬밥을 뿌리기도 했죠. 그때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당시엔 수형자들이 고성 등 문제를 일으키면 포승과 수갑을 채우고 입을 막는 방성구를 씌웠어요. 그게 규정이었습니다.” 

- 안상수 등 수사검사들은 2월27일, 3월4일, 3월27일 고문경찰을 면담했지만 이들의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며 본격적인 수사 착수를 미뤘습니다. 당시 면담 자리에 교도관이 입회했나요.

안유 = “규정상 입회하는 게 맞고, 그날 제가 입회를 했는데 안상수 검사가 ‘수사할 땐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가 조·강에게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는 얘기는 추측건대 이부영씨가 같은 사동에 있는 조·강으로부터 밤에 전해들은 게 아닌가 싶어요.” 

한재동 = “박종철 사건은 최환 검사가 은폐 시도에 맞서 부검을 밀어붙여 물꼬를 텄고, 안상수 검사는 덮으려 한 건데 안상수 검사가 덕을 본 것 같아요.” 

그사이 경찰들은 조한경과 강진규를 계속 찾아와 회유했다. 금품 회유도 있었다.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고문경찰의 부인들을 불러 각 300만원을, 강민창의 뒤를 이어 2월 말 치안본부장이 된 이영창이 각 1000만원을 줬고, 동료 경찰들이 4379만6000원을 모금해 줬다. 박처원 치안감(대공수사단장)은 고문경찰 명의로 된 5000만원짜리 개발신탁장기예금에 2계좌씩 가입한 후 조·강에게 보여주며 “장래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있으라”고 회유했다. 안씨는 “1억원이 들어 있는 통장으로 회유하는 걸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권의 조직적 은폐 기도는 그해 5월18일 세상에 폭로됐다. 이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5·18 특별미사 2부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이부영이 보낸 편지를 토대로 김정남이 작성한 것이었다. 

파장은 엄청났다. 2월 말 이미 진상을 파악하고도 본격 수사에 미온적이었던 검찰은 뒤늦게 5월20일 2차 수사팀을 꾸리고 5월29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를 구속 기소했다. 은폐 조작에 관여한 박처원, 유정방 등 경찰 간부들도 구속됐다. 국무총리 노신영과 정권 2인자였던 안기부장 장세동도 물러났다. 치안본부장과 내무부 장관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초기인 2월에 이미 퇴진했다.

전국에는 거리로 뛰쳐나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부르짖는 ‘독재 타도’ ‘호헌 철폐’ 구호가 물결쳤다. 6월9일 교문 앞에서 전경과 맞서다 전경이 쏜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이 심지가 돼 활활 타올랐던 6월항쟁은 결과적으로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권교체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한재동 = “개인적으로 많이 속상하고 허망했어요. 조금만 더 밀어붙여 전두환을 끌어내리든가 그 패거리들이 못 나오도록 약속을 받아냈어야 하는데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기쁨에 도취돼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으니까요. 내가 이러려고 목숨 걸고 싸운 게 아닌데, 싶었습니다.”

안유 = “오판한 거죠. 김대중씨나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될 줄 알았는데 분열되는 바람에…. 어쨌든 박종철, 이한열의 희생이 민주화의 초석이 된 거예요. 그들의 희생이 헛되게 해선 안돼요.”

- 촛불집회로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리와 관련한 검찰 수사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 차원의 비리는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한재동 = “정권에 충성하는 것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다릅니다. 고문경찰이나 군인 등 많은 공무원들이 흔히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변명할 때 국가를 위해서였다고 말하죠. 실제로는 자기들의 권력이나 부를 위해서였고, 국가가 아닌 정권에 대한 충성이었으면서도요. 정권이 아닌 국가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국민이 깨어나 양심적 행동을 하는 만큼 정권도 바르게 가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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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속 '연희네슈퍼'에는 비밀이 있다

연희네슈퍼 뒤편에 30미터 동굴... 일제강점기 시절 조성

18.01.05 20:44l최종 업데이트 18.01.05 20:44l

 

 연희네슈퍼로 나오는 건물은 실제로도 하나뿐인 동네 문구점이자 상점이었다. 
사진은 영화촬영 이전 모습.
▲  연희네슈퍼로 나오는 건물은 실제로도 하나뿐인 동네 문구점이자 상점이었다. 사진은 영화촬영 이전 모습.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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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희네슈퍼는 러시아와 관련한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연희네슈퍼 바로 뒷집을 ‘러시아집’이라고 부른다.
▲  연희네슈퍼는 러시아와 관련한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연희네슈퍼 바로 뒷집을 ‘러시아집’이라고 부른다.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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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에서 삼촌 한병용(유해진 분)과 조카 연희(김태리 분)는 연희네슈퍼에 산다. 또한 배우 강동원과 연희는 이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시국을 이야기한다.

영화 <1987>이 흥행몰이를 하면서, 영화에 나오는 배경이 된 실제 장소도 관심을 끌고 있다. 그 가운데 '연희네슈퍼'는 목포 선창가에 있다. 해안로 127번길에 있는 이 작은 건물과주변은 비밀과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연희네슈퍼로 나오는 건물은 실제로도 하나뿐인 동네 문구점이자 상점이었다. 상점 뒤로 방 한 칸과 주방이 딸린 단조로운 콘크리트 건물구조다. 건물 뒤로는 두세 평(6~7㎡) 크기의 마당과 화장실이 있다. 이 집의 비밀은 마당 앞에 있다. 마당 앞에 30미터에 달하는 제법 큰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일제강점기 때 미군의 폭격 등 전쟁에 대비해 일제가 조선인을 동원해 파놓은 것이다. 근대 역사현장이 작은 동네 상점 뒤편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셈이다.

 

이 집의 주인은 김현일(백제한우한돈 대표·49)씨다. 김씨가 주인이 된 건 지난해 3월이다. 목포시내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동굴을 탐사하던 김씨는 이 건물을 눈 여겨 봤다. 이후 주인을 설득해 사들였다. 김씨에 의해 동굴의 존재도 널리 알려졌다.

김씨는 "현재 동굴탐사협회를 만들어 일제강점기 시절 목포지역에 만들어진 20여기의 동굴 탐사와 이를 활용한 근대역사 체험과 관광활성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전 주인이 운영하던 상점을 영화 <1987> 속 연희네슈퍼로 정비해 다시 열 계획"도 밝혔다.
 

 연희네슈퍼로 나오는 건물은 실제로도 하나뿐인 동네 문구점이자 상점이었다.  이 집의 비밀은 마당 앞에 있다. 마당 앞에 30M에 달하는 제법 큰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일제강점기 때 미군의 폭격 등 전쟁에 대비해 일제가 조선인을 동원해 파놓은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은 김현일(백제한우한돈 대표·49)씨다.
▲  연희네슈퍼로 나오는 건물은 실제로도 하나뿐인 동네 문구점이자 상점이었다. 이 집의 비밀은 마당 앞에 있다. 마당 앞에 30M에 달하는 제법 큰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일제강점기 때 미군의 폭격 등 전쟁에 대비해 일제가 조선인을 동원해 파놓은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은 김현일(백제한우한돈 대표·49)씨다.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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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집’은 위치상 연희네슈퍼 동굴 위에 있다. 동굴은 ‘러시아집’ 아래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꺾어져 있는 형태다.
▲  ‘러시아집’은 위치상 연희네슈퍼 동굴 위에 있다. 동굴은 ‘러시아집’ 아래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꺾어져 있는 형태다.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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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만이 아니다. 연희네슈퍼 일대는 목포 근대사가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연희네슈퍼 정면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명 '유곽거리'다. 히빠리마치 또는 히빠리골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힛빠리'(引つ張り)라는 말은 일본어로 '잡아당긴다'는 말로, 호객행위를 뜻 한다.

목포항은 1897년 개항되었고, 목포에 유곽이 생긴 것은 1905년도의 일이다. 당시 자료를 보면, 1936년 목포에는 요릿집이 12곳, 음식점이 336곳, 카페가 20곳, 청루가 7곳이었다. 당시 번성했던 목포 경기를 느낄 수 있다.

연희네슈퍼 앞 유곽거리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주길정(住吉亭), 현해루(玄海樓), 만직지루(萬直志樓), 삼교루(三橋樓) 등이 있었고,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곽으로는 일출정(日出亭), 명월루(明月樓), 영춘정(永春亭) 등이 있었다.

지금도 유곽거리에는 2층짜리 옛 유곽 7~8채가 세월의 흔적은 간직한 채 남아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개량되고 부서졌지만, 옛 유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53년을 거주했다는 김금석(76)씨는 "이 일대가 모두 유곽거리였다"면서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유곽이었는데 개조했다"고 말했다.

점령군 일본인들의 유희와 환락의 장소였던 유곽거리는 이후 갈 곳 없는 동포들을 보듬는 곳이 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 시모노세키 등지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이 귀국 뒤 빈 유곽에 수용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이 조선을 점령했던 일본인들의 환락의 장소에 정착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연희네슈퍼 일대는 목포 근대사가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연희네슈퍼 정면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명 ‘유곽거리’다. 점령군 일본인들의 유희와 환락의 장소였던 유곽거리는 이후 갈 곳 없는 동포들을 보듬는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곳이 된다.
▲  연희네슈퍼 일대는 목포 근대사가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연희네슈퍼 정면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명 ‘유곽거리’다. 점령군 일본인들의 유희와 환락의 장소였던 유곽거리는 이후 갈 곳 없는 동포들을 보듬는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곳이 된다.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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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희네슈퍼 일대는 목포 근대사가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연희네슈퍼 정면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명 ‘유곽거리’다.
▲  연희네슈퍼 일대는 목포 근대사가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연희네슈퍼 정면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명 ‘유곽거리’다.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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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재일조선인들을 품어줬던 연희네슈퍼 일대는 이후 다시 한번 갈 곳 없는 동포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란민들이 목포에도 몰려들었다. 피란민들은 유곽거리 일대와 연희네슈퍼 근처 언덕 등에 판자촌을 세우고 정착했다.

이들은 산 중턱에 정착하면서 일제 상징을 뽑아냈다. 피란민들이 정착한 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산에 무성한 벚꽃나무 때문에 '사쿠라마치'라고 불렀었다. 피란민들은 벚꽃을 모두 뽑아내고 터전을 잡았던 것이다. 마을주민 김금석씨는 "과거에는 이 일대에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는데 대부분 떠나고 없다. 피란민들도 대부분 군산과 인천 등지로 떠났다"고 말했다.

연희네슈퍼는 러시아와 관련한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연희네슈퍼 바로 뒷집을 '러시아집'이라고 부른다. '러시아집'은 위치상 연희네슈퍼 동굴 위에 있다. 동굴은 '러시아집' 아래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꺾어져 있는 형태다. 또 러시아집은 유곽거리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위치로, 목포앞바다가 훤히 보인다.

한 주민은 인근 산을 '러시아 산'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목포가 개항되어 각국 거주지가 획정되자 러시아는 영사관 부지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현재의 연희네슈퍼 주변과 및 인근지역의 토지 등을 사들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패망으로 일반에게 불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이라는 아픈 근대사, 현대사에서 가장 잔혹했던 동족상잔의 아픔을 준 6·25한국전쟁, 비록 영화 속이지만 현대사의 변곡점이 된 1987년 6월 항쟁까지. 목포 서산동 연희네슈퍼가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영화 1987>이 흥행몰이를 하면서, 영화에 나오는 배경이 된 실제 장소도 관심을 끌고 있다. 그 가운데 ‘연희네슈퍼’는 목포 선창가에 있다.
▲  <영화 1987>이 흥행몰이를 하면서, 영화에 나오는 배경이 된 실제 장소도 관심을 끌고 있다. 그 가운데 ‘연희네슈퍼’는 목포 선창가에 있다.
ⓒ 영화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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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당’ 없이 4일 만에 고위급회담 합의한 남북, 관계 개선도 파란불?

정부, 단계적 접근 강조...“‘밀당’보다 신중하게 반보씩 다가갈 듯”

최지현 기자
발행 2018-01-05 20:00:05
수정 2018-01-05 20: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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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오후 3시 34분경 경기 파주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연락사무소 '남북직통전화'를 통해 우리측 연락관이 북측과 통화하고 있다.

지난 3일 오후 3시 34분경 경기 파주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연락사무소 '남북직통전화'를 통해 우리측 연락관이 북측과 통화하고 있다.ⓒ통일부 제공

 

북한이 5일 우리 정부의 고위급 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동안 남북이 제안에 역제안으로 ‘밀당’을 벌여온 모습과는 달리 우리 정부가 회담을 제안한 지 4일 만에 회담이 확정된 것이다.

북한은 이날 전통문을 보내 우리 정부가 제안한 9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고위급회담 개최 제안을 수락한다고 밝혔다.

통일부에 따르면 북한은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명의로 발신, 조명균 통일부 장관 수신으로 전통문을 보냈다.

의제에 대해서는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대회를 비롯한 남북관계 개선 문제로 하자고 제안했으며, 회담 개최와 관련한 실무적인 문제들은 문서 교환 방식으로 협의하기로 했다.

이번 북측 전통문은 북한이 날짜, 장소, 의제 등 우리 정부의 제의를 그대로 수락한 것으로, 그동안 남북 대화 과정에서 남북이 상대방의 제안에 사소한 사항을 변경해 역제안하는 등 신경전을 벌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남북 양측이 이전과 같이 사소한 신경전보다는 실리적이고 신중한 태도로 대화에 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창현 현대사연구소 소장은 이날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실리적으로 대화를 하자는 김정은 체제의 경향에 맞는 것”이라며 “예전과 달리 회담 일정 등을 가지고 기싸움 벌이는 모습은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동엽 경남대 교수도 “괜히 사소한 것을 가지고 쓸 데 없는 신경전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더 남북 모두 더 큰 걸 잃을 수 있다”면서 “과거에 ‘밀당’하는 것과는 다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통해 남북 모두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에 대해 배려와 신중함을 가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북의 신중한 자세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직접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용의를 밝히는 등 남북 지도자가 직접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밝힌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 평창올림픽 참가 용의를 밝힌 이후에도 3일 리선권 위원장을 통해서도 판문점 연락라인을 재개하고 재때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전부터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평창 올림픽 기간 동안 한미 군사연합훈련을 연기를 확정하는 등 북한 대표단 유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남북 지도자 모두 평창올림픽 뿐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도 나타내고 있어 평창올림픽 이후에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문 대통령은 4일 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미 연합군사훈련 연기는 물론 “문 대통령을 100% 지지한다”는 답을 얻어냄으로서 한반도 문제에서 어느 정도 주도권을 확보하고 북한을 상대할 수 있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5일 청와대에서 대한노인회를 초청해 신년 오찬을 가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5일 청와대에서 대한노인회를 초청해 신년 오찬을 가졌다.ⓒ청와대

남북 지도자도 의지 보여...남북관계 개선도 논의

남북은 일단 평창올림픽 성사를 위한 협의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성급하게 남북관계 진전을 기대하기보다 단계적 접근을 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문 대통령은 5일 “아직 성급한 낙관이나 기대는 금물”이라면서 “이제 연락채널부터 복원하고 남북회담을 거쳐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게 되고, 거기에서 남북관계 발전의 기회를 만들어내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조 장관도 이날 “기본적으로는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에 북측이 참여하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집중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평창올림픽 이후 남북 양측이 신중하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동력을 만들어 낼 것으로 내다봤다.

김동엽 교수는 “일단은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문제에 집중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의제는 그다음 논의하게 될 것”이라며 “평창올림픽을 성공시키면서 좋은 모멘텀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서 양쪽이 반보씩 신중함하게 다가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핵문제나 탄도미사일 등 무겁고 합의하기 힘든 문제를 먼저 꺼내기보다 이산가족상봉이나 남북 군사간 핫라인 복구 등 당장 합의할 수 있는 것부터 이끌어내면서 남북 간 긍정적인 분위기를 먼저 형성해 나간다는 설명이다.

특히 평창올림픽 이후에는 연기된 한미군사훈련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잘 협의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 소장은 “한미군사훈련 연기가 (북측 반응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지만, 평창 이후 연기된 훈련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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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에서 멸종위기종 흰꼬리수리를 만나다

[언론 네트워크] "되살아난 모래톱에 하천생태계도 부활...낙동강 6개 보 수문 다 열어야"
2018.01.05 16:53:15
 

 

 

낙동강 보 개방하자 모래강 회천이 되살아났다

낙동강의 주요 지천인 회천이란 강이 있습니다. 회천은 합천창녕보(이하 '합천보') 상류 3킬로미터 지점에서 낙동강과 만납니다. 회천은 참 모래톱이 아름다운 강이었습니다. 모래강으로 유명한 낙동강의 제1지류인 내성천과 견줄 정도로 모래톱이 아름다운 모래강이었습니다.

그런 회천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은 4대강사업으로 합천보가 들어서고 합천보에 강물을 가두면서부터입니다. 합천보 담수에따라 높아진 낙동강의 수위는 그 지천인 회천의 수위도 동반 상승시켜 회천의 그 아름답던 모래톱이 모두 물에 잠겨버린 것입니다.
 

▲ 모래톱이 드러난 황강 합수부. 모래톱 위에 그간 담수의 영향으로 뻘이 조금 쌓여 있지만, 상류로 갈수록 하얀 모래톱이 드러난다. 그리고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 합천보 수문을 개방하기 전의 회천 합수부의 모습. 강물이 가득 담겨 모래톱이 사라진지면서 모래강 회천의 특징이 완전히 수장돼버렸다. 회천도 낙동강처럼 거대한 인공의 수로가 돼버린 것이다.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모래의 강 회천에서 거대한 수로의 형태로 그 모습이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회천에 다시 변화가 시작된 것은 지난 11월 13일 낙동강 보 개방에 따라 낙동강의 수위가 내려가면서부터입니다. 낙동강 합천보 개방에 따라 회천 합수부에서는 지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018년 1월 5일 현재 합천보의 수위가 해발 4.9미터입니다. 원래 합천보의 관리수위가 해발 10.5미터이니 정확히 5.6미터나 낙동강의 수위가 내려간 것입니다. 낙동강의 수위가 5미터 이상 내려가자 회천에서도 덩달아 수위가 내려가면서 그간 강물에 잠겨있었던 회천의 모래톱이 돌아오고 그간 강물이 역류해 흐름이 사라졌던 회천이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낙동강에서 만난 멸종위기종 흰꼬리수리 

모래강 회천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모래톱이 돌아오고 맑은 강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살아난 낙동강의 지천 회천에서 지난 1월 1일 새해 아침 흰꼬리수리를 만난 것입니다. 너무 반가웠습니다. 

흰꼬리수리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종으로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엄격히 보호하고 있는 법정보호종입니다. 그만큼 개체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고, 서식처 또한 그만큼 제한되어 있다는 있다는 뜻입니다.  
 

▲ 합천보 수문 개방으로 드러난, 낙동강 회천 합수부 모래톱에서 만난 멸종위기종 흰꼬리수리.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이런 귀한 새를 낙동강 보 개방에 따라 되살아난 모래의 강 회천에서 만난 것입니다. 너무 반가웠습니다. 녀석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흰꼬리수리는 맹금류로서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이지요. 그런데 그런 맹금류 흰꼬리수리가 까마귀 두 마리의 공격을 받고 줄행랑 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참으로 희안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두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맹금류 흰꼬리수리, 까마귀에 쫓겨 줄행랑치다 

경위는 이랬습니다. 흰꼬리수리가 내려앉아 쉬고 있던 모래톱에서 불과 수십미터 떨어진 곳에 까마귀 두 마리가 내려와 역시 모래톱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영역에서 평화로이 놀고 있는 까마귀 녀석들이 갑자기 흰꼬리수리에게로 다가갑니다. 겁도 없이 말입니다.
 

▲ 까마귀 두 마리도 모래톱에 내려앉아 평화로이 쉬고 있다.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흰꼬리수리는 무심한 듯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까마귀 녀석들이 양쪽에서 번갈아 가면서 흰꼬리수리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말이지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정말 쉽게 이해가 안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반대로 되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까마귀가 흰꼬리수리를 공격을 하다니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까마귀 두 마리의 공격을 받은 흰꼬리수리가 우습게도 줄행랑쳤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목격한 것입니다. 혹시 흰꼬리수리가 어디 다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날것'들의 제왕이라고 알려진 흰꼬리수리가 까마귀 따위에 쫓겨난단 말인가요? 흰꼬리수리 체면이 말이 아닌 게지요. 
 

▲ 흰꼬리수리에게 까마귀 두 마리 날아왔다.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 까마귀 두 마리가 갑자기 흰꼬리수리를 공격한다. 놀라운 장면이다.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 까마귀 두 마리에 쫓겨 달아나는 흰꼬리수리.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전문가의 설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 환경운동연합에서 새박사로 통하는 대전환경운동연합 이경호 국장에게 기자가 목격한 사실을 전하며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을 전해옵니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 '모빙'(집단공격하는 행위)이라는 건데요. 까치까마귀 등 머리가 좋고 집단생활을 하는 새가 자기들 영역권에 들어온 맹금류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자연 생태계란 참으로 복잡미묘한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가 봅니다. 우리 인간들이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란 것은 이처럼 복잡미묘한가 봅니다.

낙동강 보 모두 열려야 한다, 낙동강이 부활한다 

낙동강 보의 수문 개방으로 복원된 낙동강 모래톱에서 이처럼 다양한 새들이 목격됩니다. 모래톱이 부활하자 하천생태계 또한 부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합천보 수문이 열리자 모래강 회천이 되살아났다.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 합천보 수문을 열자 회천의 아름다운 모래톱이 되돌아왔다. ⓒ대구환경운동연합(정수근)


이처럼 다양한 새들이 도래하고 있는 낙동강은 대자연의 질서를 회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 생명들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낙동강 보의 수문이 계속해서 열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행히 합천보는 올 한해 최저수위까지 내린다고 하니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될 놀라운 변화가 기대됩니다. 

지금 낙동강에서는 하류의 2개 보의 수문은 열렸지만, 여전히 남은 낙동강 6개 보는 굳게 닫혀 있습니다. 나머지 6개 보의 수문도 곧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강이 흐르게 되고, 떠났던 생명이 돌아옵니다. 저 멸종위기종 흰꼬리수리처럼 말입니다. 4대강 보의 수문 모두가 활짝 열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낙동강 보의 수문을 모두 열어라, 생명들이 약동한다. 낙동강이 되살아난다!" 

프레시안=평화뉴스 교류 기사

pnnews@p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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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대선공약대로 촛불 100대 개혁과제를 조속히 이행하라!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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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01/06 09:26
  • 수정일
    2018/01/06 09:2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문재인 정부는 대선공약대로 촛불 100대 개혁과제를 조속히 이행하라!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1/06 [05: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시민주권행동과 국민주권연대 광주지역본부에서 5일 '문재인 정부의 대선공약대 100대 개혁과제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은 전국민적인 촛불항쟁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100대 개혁과제를 공약으로 내건 것은 응당한 일인데 그 이행율이 현재 2%밖에 되지 않는다는 연구조사결과가 나왔다며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양심수 사면을 아직 단 한 명도 하지 않은 점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박근혜 정부가 국민들의 촛불항쟁으로 무너지게 되었던 점을 상기시키며 그 국민들이 문재인 정부를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다음은 관련 성명 전문이다.

 

.......................................................................................................

[성명]

        문재인 정부는 대선공약대로 촛불 100대 개혁과제를 조속히 이행하라!

 

1700만의 위대한 촛불혁명이 두해 째를 맞이했다. 지난해 우리 국민들은 촛불혁명으로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켰고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다.

바야흐로 국민주권의 새시대를 열어낸 것이다.

 

촛불혁명은 현재 진행형이다. 박근혜를 구속하고 정권을 교체한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촛불혁명은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 전면적인 사회대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제일의 국정과제를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이라고 발표했다. 촛불에 의해 탄생한 정부로서 응당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게 가졌던 기대는 불과 수개월여만에 우려와 실망으로 바뀌었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지난해 문재인 정부의 촛불 100대 과제 이행률을 2%라고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을 금할 수 없는 내용이다.

 

특히 지난 연말에 발표한 특별사면에서 박근혜 적폐일당에 맞서 의롭게 저항한 양심수들을 배제한 것을 보면,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에 대한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2018년 새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촛불국민을 믿고 적폐청산, 사회대개혁을 위해 과감히 나서라. 

 

반민주 적폐, 반민생 적폐, 반통일 분단 적폐를 걷어내는 일이 쉽사리 될리 없다. 적폐세력의 반발도 날로 거세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눈치를 보며 사회대개혁에 주춤해서는 안된다. 적폐세력은 청산의 대상일뿐 눈치를 볼 상대가 아니다.

 

그토록 견고하게 보였던 박근혜 권력의 아성이 어떻게 허물어졌는지 돌아보라. 국민주권의 새시대를 열어낸 위대한 촛불 국민들이 있기에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은 역사의 필연이다.

 

문재인 정부에게 거듭 촉구한다.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정권을 교체해낸 1700만의 촛불국민들이 문재인 정부를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말고, 2018년 촛불 100대 과제 이행을 시작으로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을 위해 과감히 나서라!

 

                           2017년 1월 5일

                       국민주권연대 광주지역본부

 

[성명]

      문재인 정부는 촛불의 염원을 받들어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에 적극 나서라!

 

 지난 해, 전 세계가 경이롭게 바라본 촛불혁명은 국민들이 직접 정치의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시대의 서막을 열어낸 장엄한 사변이었다. 위대한 국민의 힘으로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촛불혁명은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고,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2018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7월, 촛불대선을 통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1,700만 촛불에 담긴 국민의 염원을 실현하겠다며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을 첫 자리에 놓은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였다. 스스로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가 응당 완수해내야 할 첫 번째 역사적 책무이기에 국민들은 적극 환영하였다. 

 

 그로부터 수 개월의 시간이 지났지만, 지난 정권들에서 나라를 망치고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면서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고 적폐를 쌓아왔던 세력은 아직 건재하다. 자유한국당등 보수 세력은 공공연히 정치보복 운운하며 정국을 반전시켜보려는 적반하장의 총공세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적폐청산의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는 검찰과 사법부의 태도도 의구심을 갖게 한다. 법원에서는 연이어 명백한 국정농단 피의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는가 하면, 검찰총장이 직접 나서 “연내 적폐 수사를 마무리하겠다”고 했다가 여론의 질타 속에 발언을 철회하기도 하였다.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 적폐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갇힌 시국관련 양심수를 단 한 명도 사면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의 연말 특별 사면을 보노라면, 기대보다 불안감이 커지는 게 사실이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철저하고 완전한 적폐 청산”에 어울리지 않는 행보이다. 촛불 국민이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져가며 적폐세력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촛불의 염원에 의해 탄생한 촛불정부의 사명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기 바란다.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이 ‘시간이 오래 걸려도 적폐 수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다시 들여다보라.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 100대 국정과제 실현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촛불 정부가 되길 바란다. 

오로지 국민만 믿으면 된다.

 

                                 2018년 1월 5일

                                  시민주권행동

 

 

▲ 2016년 12월 31일 천만 촛불시위를 돌파한 광화문 현장,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는 시대적 과제인 분단독재 적폐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사회역사의 주인으로서의 권리와 역할을 깨우쳐 주었던 산 교육장이었다.  이제 국민들의 바람을 외면하는 정권은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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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화학물질,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해결한다

유해화학물질,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해결한다

이수경 2018. 01. 05
조회수 62 추천수 0
 
집안에 가전제품 쌓아두고도 반도체 산재 무관심 놀라워
노동자 작업환경이 상품의 위해성을 막아 내는 방파제
 
05729560_P_0-1.jpg» 반도체 산재 피해자인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가 2016년 12월 열린 '박근혜 퇴진을 위한 민중총궐기 행사'에서 “삼성은 우리 유미에겐 고작 500만원을 줘 놓고, 비선실세에겐 500억원을 줬다”고 비판했다.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시민은 그 반도체로 만든 가전체품을 쓰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산재와 무관하지 않다. 한겨레 자료사진.
 
삼성전자와 반도체의 직업병이 사회문제가 된 지 10년 만인 2017년, 마침내 ‘삼성 직업병’이 법적으로 폭넓게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간 삼성 직업병으로 혈액암, 뇌종양, 유방암만 인정되었으나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까지도 산업재해(산재)로 확인되었고(■ 관련 기사: 산재를 산재라 부르는 데 10년이 걸렸다), 생산공정에서 일한 적이 없는 협력업체 관리자가 삼성반도체로 인해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도 인정되었다(■ 관련 기사법원, 삼성반도체 협력업체 관리자 백혈병도 산재 첫 인정). 또한 삼성반도체에 이어 삼성디스플레이에서도 산재로 백혈병이 발생한 것이 확인되면서 ‘삼성 직업병’이라 불리는 전자, 반도체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직업병이 법적으로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관련 기사삼성 반도체 이어 ‘LCD 공장’ 백혈병도 산재 첫 인정). 반도체 산업의 산재는 비단 삼성계열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엘지 디스플레이에서도, 에스케이 하이닉스에서도 또 그 협력업체에서도 작업장 유해물질로 인한 산재 피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07년 황유미 씨의 사망으로 세상에 알려진 삼성 백혈병 문제가 10년이 지나고,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협상 조정위원회(조정위)’가 구성된 지도 4년이 지났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반도체 산업으로 인한 산재 사고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하 반올림)에 의하면 2007년 이후 2016년 12월까지 삼성 반도체, 디스플레이 노동자의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78명에 이른다.
 
게다가 2004년 경기도 화성에 있는 디스플레이(LCD, DVD) 부품 사업장에서 일하던 태국 노동자 8명이 하반신 마비로 걷지 못하게 된 사건, 2006년 경기도 광주에서, 부천에서, 구미에서 반도체 하청기업의 이주 노동자들이 사망한 사건 등 반도체 관련 산업에서 발병하고 사망한 노동자의 직업병까지 고려하면 반도체 산업으로 인한 피해는 이 산업의 성장에 발맞춰 피해 정도와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1) 그런데도 정치권도, 대부분의 언론도 반도체 산재 피해자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비단 정치권과 언론만의 문제도 아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산재를 일으킨 원인물질이 생리대 문제를 일으킨 유해물질과 유사하고 피해 정도, 피해 기간은 물론 피해자도 절대 작지 않은데도 소비자는 삼성 직업병에 관심이 없다. 가습기살균제, 살충제달걀, 유해생리대 문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과 대응에 견주어 보면 반도체 산재에 대한 무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집안에 삼성전자 물건을 쌓아놓고 소비하는 삼성 소비자가 무관심한 사이 삼성은 피해를 부정하고 약속한 보상마저 늦추고 있다(■ 관련 기사반도체 백혈병 논란의 오해와 진실-삼성의 다섯 가지 거짓말).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기도 한, 삼성 소비자의 무관심 속에서 지난 10년간 삼성반도체 산재 피해자와 반올림 같은 피해자 지원단체만 진실규명을 위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05752990_P_0.JPG»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4월 1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3주기를 추모하는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위한 대국민약속식'에 참석해 세월호 유족,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삼성반도체 백혈병 유족 등을 위로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케모포비아’(chemphobia, 화학 생활용품 공포증)란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화학물질에 대해 민감해진 소비자와 시민이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반도체 산재에 둔감한 이유는 무엇일까? 상품의 직접적 유해성만 아니면 물건을 생산하는 작업환경이 어떠하든 소비자는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일까? 소비자는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유해물질로 인한 잠재적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정말 작업환경 문제가 소비자와 시민의 문제는 아닌 것일까?
 
유해생리대에서는 톨루엔, 스타이렌, 1,2,3-트리메틸벤젠 같은 접착제의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문제가 되었다. 삼성반도체에서도 트리클로로에틸렌(TCE), 시너, 감광액(PR), 디메틸아세트아미드, 아르신(AsH₃), 황산(H₂SO₄) 과 같은 발암물질을 포함한 세척, 식각제에 쓰인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유해 생리대에서 문제가 된 세척제와 접착제에 포함된 유해물질은 반도체 공정에서 문제가 된 유해물질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휘발성 유기화합물이다.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유해성으로 산업현장이나 상품에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자 국가는 규제 대상 물질을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표 1. 휘발성 유기화합물질 설명, 규제 대상 물질, VOC 물질별 위해성).
 
표 1. 휘발성 유기화합물 규제 대상 물질 
 

연번

제품 및 물질명

연번

제품 및 물질명

1

아세트알데히드

20

메탄올

2

아세틸렌

21

메틸에틸케톤

3

아세틸렌 디클로라이드

22

메틸렌클로라이드

4

아크롤레인

23

엠티비이(MTBE)

5

아크릴로니트릴

24

프로필렌

6

벤젠

25

프로필렌옥사이드

7

1,3-부타디엔

26

1,1,1-트리클로로에탄

8

부탄

27

트리클로로에탄

9

1-부텐, 2-부텐

28

휘발유

10

사염화탄소

29

납사

11

클로로포름

30

원유

12

사이클로헥산

31

아세트산(초산)

13

1,2-디클로로에탄

32

에틸벤젠

14

디에틸아민

33

니트로벤젠

15

디메틸아민

34

톨루엔

16

에틸렌

35

테트라클로로에틸렌

17

포름알데히드

36

자일렌(o-,m-,p-포함)

18

n-헥산

37

스틸렌

19

이소프로필 알콜

 

 

 
삼성 반도체 산재의 경우 규제대상이 된 유해물질조차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규제대상이 된 휘발성 유기화합물질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규제대상이 된 물질은 용도가 다양하거나 성능이 뛰어나고 가격이 저렴해 널리 쓰이는 바람에 그 과정에서 유해성이 드러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규제대상이 아닌 물질이라고 해서 안전하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화학물질은 약 10만여 종에 이르며 전 세계적으로 매년 2000여 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개발되어 상품화되고, 국내에서도 매년 400여 종의 신규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2) 이렇게 많은 화학물질에 대한 정부의 규제나 관리는 소비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과 거리가 멀어 사실 화학물질의 위해성에 대해 충분히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05647888_P_0.JPG»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가습기살균제 원료 물질인 CMIT/MIT 성분이 검출된 치약 149종을 전량 회수한다고 발표한 뒤 서울 성수동 이마트 고객센터에서 고객들이 치약을 반품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가령 가습기 살균제에 쓰인 PHMG, PGH, MCIT와 같은 살균제처럼 상대적으로 안전한 물질이지만 쓰이는 방법(분무)에 따라 매우 위험한 물질이 되기도 하고 상식과는 다르게 고농도가 아니라 저농도에서 위해성을 나타내는 물질도 있다(화학물질, '안전기준'만 충족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또 단일물질로 사용할 때는 안전하던 물질이 다른 물질과 함께 사용할 때는 해롭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개별물질이 어떻게 얼마나 사용되어야 위해한지에 대해 제대로 연구된 것이 매우 적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화학물질 특히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경우는 그 위해성이 사고와 경험을 통해 드러난다.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이처럼 작업장과 소비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지만 작업장에서는 용도가 다양해 널리 쓰이고 특히 반도체 산업 같은 전자산업에서는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용도나 쓰이는 양이 많다. 반도체 칩 한 개를 만드는데 1.7㎏의 화석연료와 화학약품이 쓰이고 컴퓨터 한 대를 만드는데 상당수의 발암물질을 포함한 천 가지 이상의 화학물질이 한데 섞여야 한다. 청정산업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도체 산업이야말로 유해물질의 독성실험실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3)
 
반도체 생산공정.JPG» 반도체 생산공장의 청정실 모습. 수많은 유해화학물질이 쓰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삼성전자 제공.
 
산업안전보건법에서는 산재의 발생을 은폐해서는 안되며(제10조), 신규 화학물질을 제조하거나 수입하려면 위해성, 위험성을 조사하여야 하고(제40조), 화학물질의 명칭, 구성성분의 명칭 및 함유량, 안전·보건상의 취급 주의 사항, 건강 유해성 및 물리적 위험성 등을 기재한 물질 안전보건자료에 대해 작업자에게 공개하고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제41조)고 밝히고 있다. 또 안전·보건상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만을 분리하여 도급(하도급을 포함한다)을 할 수 없다(제28조)고도 분명히 적고 있다.
 
작업환경 때문에 산재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감추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제대로 원인 진단에만 나섰어도 유해물질로 인한 노동자의 피해를 더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만 지켰어도 100명 가까운 삼성반도체 사망자와 하반신 마비가 된 8명의 태국 노동자와 파악조차 되지 않은 이주 노동자를 포함한 하청업체 노동자의 산재 문제는 예방되거나 최소한의 보상 문제라도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작업장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화학물질의 안전성 검사나 정보의 공개만 이루어졌어도 노동자는 물론 소비자의 피해도 줄이거나 빨리 해결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작업장에서 위해성이 확인된 물질만이라도 쓰이지 않았더라면, 생리대와 같은 상품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 작업공정에서 쓰인 물질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고 공개만 되었더라면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물질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품을 생산하는 데 쓰이는 물질에 대한 정보가 노동자뿐 아니라 소비자에게까지 법대로만 공개되어도 유해한 물질이 상품 생산에 쓰이는 일도 상품의 유해성이 발견되었을 때 우왕좌왕 원인을 찾아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가 기업의 이익을 위한 기밀유지보다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서는 더 중요하고 절실하다(SK는 하고 삼성은 하지 못한 것).
 
05117261_P_0.JPG» 삼성 직업병 피해 노동자와 가족 등이 2014년 8월 18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삼성의 사과와 보상 등을 촉구하며 희생자들을 표현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작업환경을 지키는 것은 소비자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박종식 기자
 
수많은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에서 작업자의 안전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들이 결국 유해물질을 걸러내는 최소한의 조처가 되기 때문에라도 소비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상품의 작업환경과 산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업장에서 사용되는 유해물질은 많든 적든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제품에도 섞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상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사업장에서 쓰이는 유해물질에 대한 소비자의 감시가 필요하다. 또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노동자의 산재 피해를 통해 물질의 유해성이 드러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의 산재 피해에 대해 소비자가 관심을 갖고 해결 과정을 지켜보고 지원하는 일은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작업환경만 제대로 관리되어도 가습기 살균제 문제나 유해성 생리대 문제는 생겨나지 않거나 더 빨리 원인이 밝혀져 해법을 강구할 수도 있었다. 생산품에 유해한 물질이 사용되는 것을 막거나 최소한 어떤 물질이 사용되는지를 보다 빨리 파악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 나라에서 온 이주 노동자의 산재 문제가, 2017년 한 해에만 55조의 이익을 냈다면서도 산재보상에는 인색한 삼성전자의 산재 문제가, 사실 화학물질로 범벅된 소비재를 집안에 쌓아놓고 사는 소비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해작업장에서 더 많은 농도로 더 많은 물질에 더 오랜 시간 노출되는 노동자의 작업환경이 상품의 위해성을 막아내는 방파제이기 때문이다. 
 
삼성반도체가 영업비밀을 내세워 공개하고 있지 않은 물질정보를 공개하라며 산재 피해자와 반올림은 지난 10여년간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노동자가 내민 외로운 손을 삼성을 포함한 전자·반도체 제품 소비자가, 알려지지 않은 알 수도 없는 유해물질의 잠재적 피해자인 소비자가 맞잡아줘야 한다. 노동자는 소비자 앞에서 먼저 유해물질을 겪어내는 선험적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이수경/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1) 이동수, 이수경, 이주 노동자를 위한 작업장 유해화학물질 정보(한글, 영어, 필리핀어(따갈로그), 중국어, 태국어, 인도네시아어, 몽골어, 미얀마어, 네팔어, 베트남어), 환경과 공해연구회, 2008 https://goo.gl/ujr52i

2) 신인재, 현장 중심의 해설로 배우는 알기 쉬운 산업안전보건법의 원리와 활용: 현장 중심의 안전보건 관리, 2014

3) 테드 스미스 외,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 메이데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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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환경과 공해 연구회 환경운동가
전 환경과 공해연구회 회장. 1980년대부터 환경운동을 했으며 에너지 문제와 지역균형발전에 특히 관심이 많다.
이메일 : eprgs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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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중동·아프리카 침탈사(1)


아프가니스탄 : 무자헤딘, 탈레반, 알카에다 
  • 김영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8.01.04 17:05
  • 댓글 0

들어가며 : 제국이 뿌린 씨앗 

두 번의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까지 20세기는 전쟁의 세기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떨까? 인간성 상실, 환경파괴, 핵전쟁 같은 파멸적인 전망을 제외하면, 21세기는 전쟁의 세기를 날려 보내고 인류에게 평화·공존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됐다. 뉴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세계는 희망과 낙관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21세기는 시작과 함께 굉음을 내며 추락했다. 2001년 9월 11일 8시 46분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을 들이받았다.

맙소사, 이슬람이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서구 문명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냉전과 핵 위협을 극복하고 이제 겨우 새로운 도약을 꿈꿨는데 ‘야만인’들에게 발목이 잡혔다. 9·11테러는 이슬람이 세계를 야만의 시대로 이끄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 갈등, 인종청소, 영토분쟁 등 끊임없는 갈등은 중동을 근대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전근대적 세계로 여겨지게 했다. 즉 이들은 문명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정말로 몰지각한 야만인들이 문명인들의 새 세기를 초를 쳤는가? 냉전이 끝나자 걸프전이 발발했다. 다국적군이 이라크로 들이닥쳤다. 사고와 오인사격으로 미군 294명이 죽는 동안, 이라크인 수만 명이 죽었다. 핵 위협으로부터 해방, 민주주의 승리로 포장되는 냉전 종식은 도대체 누구의 해방이고, 누구의 승리인가? 자유 진영의 승리는 미국의 승리를 뜻했다. 걸프전은 승리의 축포였다. 미국은 새로운 세기를 자축하며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자신들이 뿌린 씨앗은 까마득히 잊은 채로 말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세속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고 탈레반 정권이 세워지도록 했다.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부추겼다. 쿠르드족 학살은 이 과정에서 일종의 덤이었다. 또 두 번의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키웠다. 미국은 야만이라는 이름의 씨앗을 세계 곳곳에 뿌렸는데, 중동은 좀 더 신경 쓴 듯하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중남미가 스페인 제국과 미 제국의 공동작품인 것처럼 중동·아프리카 또한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과연 중동·아프리카는 종교, 종족, 인종 따위에 집착하는 야만의 대륙인가? 서구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수호자인가? 이제 우린 제국이 뿌린 씨앗을 추적함으로써 진짜 ‘야만’의 기원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


아프가니스탄 : 무자헤딘, 탈레반, 알카에다 
19세기 중반 무렵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 침공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영토 일부를 잃는다. 이후 2차 침공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프가니스탄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1919년 8월에 독립하게 된다. (203)

▲내전 배경, 무자헤딘의 탄생: 독립 후 반 세기간 지속한 입헌군주제는 1973년 다우드의 쿠데타로 무너진다. 그는 공화제를 수립하고, 미국 패권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을 이용하려 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중동의 맹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으면서 한편으론 이란과 파키스탄 같은 친미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양면정책은 국내 친미·친소파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다우드는 점점 공산파를 배척했다. 1978년 4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PDPA은 좌익쿠데타를 일으킨다.

인민민주당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토지개혁은 물론 종교의 자유, 여성의 참정권 보장, 여성의 부르카(베일) 착용 금지 등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소련과 우호선린조약을 체결하고 원조도 받았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친소정책은 이슬람 보수세력과 친미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다. 이 기회를 놓칠 미국이 아니었다. CIA는 이들 세력을 모아 반정부 무장세력을 조직했다. 무자헤딘(‘성전용사’라는 뜻)이 탄생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자유의 투사’라 불렀다. (203~205)

▲미국이 유발한 제1차 내전 : 무자헤딘 게릴라의 무차별적 파괴와 학살로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정부는 소련에 파병을 요청한다.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미국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라며 파병에 부정적 의사를 내비쳤다. 미국은 소련의 개입을 더욱 부추겼다. CIA와 M16이 손잡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무자헤딘에게 자금과 무기를 공급했다. 소련은 국경을 맞댄 아프가니스탄에 반소정부가 들어서는 걸 좌시할 수 없었다. 결국, 소련은 1979년 12월 24일 지상군을 파병한다.

미 안보보좌관 브렌진스키는 “우리의 비밀공작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드디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이란 덫에 걸렸다.”며 쾌재를 불렀다. 미국과 유엔은 불법 침공이라며 소련을 규탄했다. 도덕적 판단과 별개로 소련군 파병을 불법 침공이라 규정하기엔 모호했다. 아프간 정부는 거듭 파병요청을 했고, 소련은 우호선린 조약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무자헤딘의 테러는 더욱 격화되었다. CIA와 M16이 43개국에서 모집한 무자헤딘은 무려 3만 5000명에 달했다. 10만의 무자헤딘이 관공서와 교육·의료시설을 파괴하고 의사와 교사를 살해했다. 10년간의 내전으로 2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피난민은 500만 명에 육박했다. 정말 미국의 바람대로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베트남이 되었다. 1989년 2월 소련군이 철수했다. 1992년 4월에는 인민민주당 정부도 무너졌다. (205~208)

▲탈레반 정부와 빈 라덴 :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살인, 강간, 약탈 그리고 군벌들 간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파슈툰족 수니파와 군벌들이 만든 정치·종교집단 탈레반은 이런 혼란스러운 정국을 평정했다. 물라 오마르가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그는 무자헤딘 출신으로 다른 군벌들을 물리치며 국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여기엔 미국의 역할이 컸다. 1991년 CIA는 탈레반 조직 강화를 위해 파키스탄을 통해 30억 달러를 지원했다. 탈레반은 극단적인 신정일체정책을 펼쳤다. 이슬람 율법을 어긴 자는 공공장소에서 돌로 쳐 죽이거나 사지를 절단하는 식으로 사회를 통제했다. 여성은 반드시 부르카를 착용했다. 중등 과정 이상의 교육도 금지되었다.

▲ 오사마 빈라덴 사진출처 Hamid Mir - http://www.canadafreepress.com/

물라 오마르와 빈 라덴은 반제국주의 성향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동기로 결속했다. 두 사람 모두 무자헤딘 출신이기도 했다. 빈 라덴은 1984년 맥 MAK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무자헤딘에 자급을 공급했다. 1988년에는 알카에다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었다. CIA는 알카에다 출범 당시 무기와 활동자금을 지원했다. 알카에다 조직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테러단이 형성되었다. (208~213)

▲9·11 사건과 음모론 :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반부터 약 2시간 동안 민항기를 이용한 테러가 발생했다. 297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24명이 영구 실종되었다. 미국은 곧바로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발표는 많은 논란과 의문점을 일으켰다.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 되었다는 점에서 과거 쿠바 메인호 조작이나 루시타니아호 사건, 진주만 공작 등을 연상시킨다.

첫 번째 의문은 사전에 알았는지 아닌지다. 미국 정부는 이를 전면 부인해왔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의 증언이 하나둘 공개되자 슬쩍 태도를 바꿔 ‘사전 입수한 테러 정보를 국외에서 발생하던 테러 정도로만 여겨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당일 미온적인 대응은 업무 미숙‘ 이라고 변명했다. 사실 미국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9·11 테러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

-1998년 12월, <타임> 지는 빈 라덴이 워싱턴이나 뉴욕에 대규모 테러계획이 있다고 보도했다.

-오클라호마 FBI는 중동계 청년들이 미국에서 비행기 조종 훈련을 받는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CIA도 항공기로 세계무역센터를 테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상부에 보고했다.

-2001년 6월~8월, 독일 정보기관은 중동 테러리스트가 공중납치와 미국시설 공격을 위한 훈련을 받고 있다고 CIA에 통보했다. 탈레반 정부의 무타와킬 외무장관도 미국 정부에 8~9월 빈 라덴의 대규모 테러가 있을 것이라고 은밀히 통보했다.

-2004년 1월 9·11 조사위원회에서 CIA 전 국장 테닛은 2001년 7월 10일 라이스 안보보좌관에게 빈 라덴의 테러가 임박했음을 경고했고, 그녀 역시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고 증언했다.

두 번째 의문은 미국 정부의 석연치 않은 대응조치다.

-사건 직후 부시 대통령은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구성하자는 요구에 반대했다. 여론에 밀려 9·11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공식보고서는 언론 보도를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미연방법원 포스너 판사는 공식 보고서를 ‘문학작품으로서는 걸작’이라 조롱하기도 했다.

-공식보고서는 북미 방공사령부가 민항기 자폭공격을 가상한 도상연습을 수차례 진행했다는 사실을 누락했다. 북미 방공사령부 사령관은 훈련은 했지만, 국내 공항에서 발진한 민항기는 가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2003년 5월 9·11 조사위원회에서 미연방항공국(FAA) 테러 전담 요원 자코빅은 9·11 발생 직전 공항이나 민항기의 보안 상태를 점검하는 일을 상부에서 금지했다고 증언했다.

여러 의혹에도 불구하고 9·11 사건으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부시 정부 참모들이 대선 기간에 구상했던 사담 후세인 제거와 중동지역 패권 강화 전략이 실현되었다. (213~222)

▲아프가니스탄 침공 : 미국의 침공 명분은 ‘빈 라덴과 알카에다 제거’였다. 그러나 침공 다음 날 미 중부군 사령관은 “우리의 목표는 빈 라덴과 알카에다보다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온 탈레반 정부”라고 말한다. 빈 라덴 체포에 미온적이라는 비판에, 부시 대통령은 “솔직히 말해 나는 빈 라덴 체포에 별 관심이 없다”고 속내를 터놓았다. 빈 라덴 신병을 인도하겠다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제안도 여러 번 무시했다. 빈 라덴이 빨리 체포될 경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2001년 10월 7일부터 미·영 연합군은 재고 폭탄을 처리하듯, 도시와 산간을 가리지 않고 수만 파운드의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마을, 학교, 병원까지 잿더미가 되었다. 국제협정으로 사용이 금지된 클러스터 폭탄도 투하했다. 무차별 살상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익명의 국방성 관계자는 “우리는 민간인에게 죽으라고 그런 것이다”라고 답함으로써 의도적인 학살임을 시인했다.

아프가니스탄 포로에 대해 고문과 학살도 자행되었다. 미·영 연합군은 2001년 11월 항복한 탈레반 병사 및 동조자 3000명을 학살했다. 연합군은 화물 운송용 컨테이너 한 개에 포로 300여 명을 구겨 넣고 숨구멍을 내준다며 컨테이너에 총을 난사했다. 구멍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시체들은 사막에 버려 들개가 먹게 했다. 포로수송을 빙자한 학살은 4일간 계속되었다. 이는 전쟁포로에 관한 국제협약 위반이지만, 누가 미 제국 군대의 불법행위를 단죄하겠는가?

미국의 주류언론은 미국의 점령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평화와 발전이 앞당겨졌다고 자화자찬했다. 5만 명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 사망자는 부수적 피해일 따름이었다. (222~225)

김영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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