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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천덕꾸러기 해파리, 생태계 기초 식량 가능성

바다 천덕꾸러기 해파리, 생태계 기초 식량 가능성

조홍섭 2018. 10. 12
조회수 780 추천수 0
 
펭귄, 다랑어, 뱀장어, 해삼…다양한 포식자가 먹어
칼로리 낮지만 쉽게 잡고 소화 잘돼…’보릿고개’ 식량
 
GettyImages-474017168.jpg» 해파리를 잡아먹는 바다거북. 훨씬 다양한 동물이 해파리를 먹이로 삼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보름달물해파리만 잔뜩 걸린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민은 ‘바다는 비어가고 해파리가 그 자리를 채운다’고 한탄한다. 남획과 수질오염 등으로 물고기는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해파리만 늘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런 비명이 터져 나오는 까닭은 해파리가 바다 생태계 먹이그물에서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해파리는 몸의 95%가 물이다. 영양가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해파리만 먹고 사는 동물도 드물다. 해파리는 작은 물고기와 동물플랑크톤을 잡아먹지만 늘어난 해파리를 먹을 포식자는 거의 없다. 따라서 먹이그물은 순환을 멈추고 해파리만 끝없이 넘친다. 그런데 이런 통념이 깨지고 있다.
 
512.jpg» 서해안 어부의 그물에 잔뜩 걸린 해파리. 한겨레 자료 사진.
 
그래미 헤이스 오스트레일리아 디킨대 생태학자 등은 과학저널 ‘생태학 및 진화 경향’ 최근호에 실린 리뷰 논문에서 “먹이로서 해파리의 중요성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제까지 알려진 전문적인 해파리 포식자는 장수거북과 개복치다. 체중 450㎏인 장수거북은 하루에 해파리를 몸무게의 4분의 3인 330㎏이나 먹는다. 몸무게가 5000㎏에 이르는 대형 물고기인 개복치도 막대한 양의 해파리를 잡아먹는다. 이들의 덩치가 큰 이유는 두 가지다. 해파리의 칼로리가 워낙 작아 많은 양을 먹어야 한다. 물고기를 한 입 먹으면 될 것을 해파리로는 30입을 먹어야 한다. 또 해파리가 대번성하는 곳은 따로 있어서 그런 행운과 마주치기까지 장수거북은 6개월 이상 굶기도 한다.
 
그러나 최신 기술을 이용한 연구결과 이런 전문적인 포식자 말고도 해파리를 먹는 동물은 매우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다. 포식자 신체 조직의 동위원소와 배설물·위 내용물의 디엔에이 분석, 포식자에 소형 카메라를 달아 촬영하기 등을 동원한 연구결과이다.
 
예를 들어, 해파리를 우발적으로만 먹는 것으로 알려진 펭귄에 카메라를 매달아 촬영했더니 먹이의 42.4%가 해파리로 밝혀졌다. 대형 바닷새인 앨버트로스의 배설물 분석에서는 20%가 해파리였고, 유럽산 뱀장어의 위 내용물 디엔에이 분석에서는 놀랍게도 76%가 해파리에서 온 것이었다. 
 
또 죽은 해파리가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으면 해삼, 게, 새우 등 다양한 저서생물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건이 맞는 곳에서 해파리는 엄청난 양으로 증식한다. 예컨대 유럽의 배럴해파리는 한 마리의 무게가 30㎏에 이르지만, 수십㎞ 해역에 걸쳐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해파리는 엄청난 양의 ‘아직 먹지 않은 먹이’ 자원인 셈이다.
 
jellyfish-1.jpg» 해파리를 먹는 다양한 포식자가 보고된 장소. 헤이스 외 (2018) ‘생태학과 진화 경향’ 제공.
 
해파리는 칼로리가 낮지만, 먹이로서의 이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양이 많고 어디에나 있으며 도망치지 않아 쉽게 잡을 수 있다. 게다가 소화가 잘되고, 영양가가 낮지만 대부분 수분인 갓 부분을 떼어내고 생식선 등 핵심 부위만 먹으면 에너지 밀도를 몇 배 높일 수 있다. 열량이 아닌 콜라젠 등 유용물질도 많이 들어있다.
 
연구자들은 이런 특성에 비춰 볼 때 해파리는 쉽사리 집단이 붕괴하는 물고기와 달리 해양생태계의 안정된 기초 먹이로서 기능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시 말해 영양가 낮은 다른 먹이가 사라진 어려운 시기에 해파리가 해양생태계를 살리는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cm08281070-2.jpg» 바다에서 가장 흔한 생물의 하나인 해파리는 먹이그물에서 알려진 것보다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연구자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증거로 볼 때 해파리를 먹이사슬의 막다른 골목으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해파리는 광범한 해양 포식자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먹는 중요한 먹이이다”라고 논문에 적었다.
 
한편, 이처럼 해파리가 폭넓은 먹이가 된다면 해양동물이 해파리로 오인해 종종 섭취하는 플라스틱 폐기물의 생태계 영향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클 수 있다고 논문은 지적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Graeme C. Hays et al, A Paradigm Shift in the Trophic Importance of Jellyfish? Trends in Ecology & Evolutionhttps://doi.org/10.1016/j.tree.2018.09.001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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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 노동자의 실종된 인권 “화장실은 허락받고 5분안에, 성희롱은 다반사”

12일,민주당 이용득 의원실 ‘콜센터노동자 국회 증언대회’ 개최

김도희 기자 doit@vop.co.kr
발행 2018-10-12 19:47:00
수정 2018-10-12 19: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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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자료사진ⓒ뉴시스

고객에게 무조건 ‘친절’해야 하고, 무조건 ‘빠르게’ 요구를 받아줘야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전국의 콜센터에서 일하는 50만 명의 상담노동자들 이야기다.

이들은 회사로부터 매일 실시간 관리를 당해 화장실도 허락을 받아야 갈 수 있다. 하루 동안 주어진 휴식시간은 고작 30분. 물을 마시든, 화장실을 가든, 모든 것은 이 30분을 쪼개 해결해야 한다. 월경이라도 하는 여성 노동자에겐 너무나 불안정한 노동환경이다. 

회사가 저지른 사회적 문제에 분노한 고객에겐 “죄송하다” 고 대신 사과해야 했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폭언마저 묵묵히 인내해야 했다. 그동안 이들의 정신과 육체는 피폐해져 갔다.

12일 오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 주최로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실에서 ‘콜센터노동자 국회 증언대회’가 열렸다.  

삼성전자서비스, 콘센트릭스서비스코리아(애플, 아이튠즈 관련 상담을 하는 애플케어 외주업체), 트랜스코스모스코리아(콜센터 서비스 전문 위탁업체), 다산콜센터 소속 상담 노동자들이 참석해 현장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폭로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업무 현장을 ‘노동문제 종합백화점’이라고 지칭했다. 

콜센터 노동자들
콜센터 노동자들ⓒ뉴시스

“사무실에 앉아 전화만 받으면 되는데 뭐가 힘드냐고요?” 

“1년 10개월을 근무한 동료는 입사 후 일을 하며 천식이 생겼습니다. 입사 전에는 없던 병입니다. 너무 힘들어 일을 못 할 지경이라 당일에 연차를 내려 하면 ‘지금 쉰다고 그게 나아?’라는 식의 언사를 들어야 했습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까지는 생리휴가를 써본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회사는 진통제 먹고 참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1~2알 먹던 진통제를 이제는 8알씩 먹는 동료도 있습니다. (중략) 어떤 사람은 말하더군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사무실에 앉아 전화만 받으면 되는데 뭐가 힘드냐고요.” 
(삼성전자서비스 콜센터 상담사 정은선 씨) 

다닥다닥 붙은 좁은 책상, 사이사이 세워져 있는 칸막이. 정은선 씨는 근무환경이 마치 ‘닭장’ 같다고 표현했다. 상담 노동자는 그 공간에서 하루에 적게는 70명, 많게는 180명과 통화를 했다. 쉬지 않고, 미동 없이 연달아 전화를 받아야 했다. 

원격서비스를 요청하는 고객이 야한 동영상이나 사진을 보내는 등 성희롱에 노출돼 있다고도 말했다. ‘뚱뚱하지 않은 사람, 30대가 넘지 않는 사람’으로 상담원을 연결해 달라는 고객의 억지스러운 요구까지 들어야 했다.  

정 씨는 “삼성이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서비스를 하는 회사인데, 그만큼 서비스에 대해 앞서가는 회사라면 상담원에 대한 처우도 최고겠지 하는 생각으로 입사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다닌 회사 중 상담원에 대한 처우나 인식이 최악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준비해 온 증언 내용을 이야기하는 내내 차오르는 눈물을 삼켜냈다. 

“쉬지 않고 말하는 상담사에게 하루종일 30분 휴식은 터무니없는 시간입니다. 화장실 갈 때 승인 없이는 갈 수 없으며, 그마저도 5분으로 제한됩니다. 이를 노사협의회에서 이야기하자 ‘화장실을 승인받고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화가 많으니 나중에 가라고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우리 아내도 젊었을 때 은행 직원이었는데 방광염을 달고 살았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콘센트릭스서비스코리아 소속 애플케어 상담사 이혜진 씨) 

상담 노동자들은 고객과 약속한 시간에 전화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사측은 이들이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 ‘고객과의 약속’을 위해 협조해야 하는 사항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씨는 고객 만족을 위해 화장실조차 자유롭게 갈 수 없는 현실을 토로했다. 그 과정에서 상담사 개개인의 인권은 점점 더 중요치 않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매월 바뀌는 근무시간과 휴무 요일 등 스케줄도 문제였다.  

이 부위원장은 “9시부터 13시 30분까지 출근 시간 차이가 크다. 18시부터 22시 30분까지 퇴근 시간 차이도 크다”라며 “고객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주말‧공휴일‧밤낮 없이 일하고 필요하면 추가 근무도 해야 한다. 휴무와 연차는 승인이 거절됐고, 노동자 의사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호소했다.

자료사진
자료사진ⓒ민중의소리

“대체로 1년 정도면 다 퇴사합니다” 

“저희 같은 회사를 보면 7천 명 규모인데, 한 달 퇴사 인원이 500명, 입사 인원이 500명입니다. 1년이 되면 대체로 다 퇴사해 전체 직원이 항상 바뀝니다. 회사는 상담사 다루기가 더 쉬워지겠죠. 회사는 채용할 때도 경력이 있는 상담사보단, 신입사원을 우선 채용합니다.” 
(트랜스코스모스코리아 소속 노동자, 서비스연맹 전국콜센터노조 이윤선 위원장)

상담 노동자들은 업무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삶에 대한 희망마저 잃고 있었다. 도시가스 관련 콜센터에서 일하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업무 중 실신한 노동자, LG유플러스 고객상담센터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특성화고 여학생,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끝내 세상을 등진 LG유플러스 상담사까지.  

이 위원장은 콜센터 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콜센터 사건‧사고는 전화상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외부로 이슈화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밝혔다.

그는 “기업에서 고객의 개인정보, 기업의 보안을 이유로 녹취한 상담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 전화상담사들은 사건‧사고가 일어나도 입증이 거의 불가능해 참고 넘기기 일쑤다”라며 “우리가 뉴스 등을 통해 접하는 콜센터 사건‧사고는 아주 일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따르면, 회사는 노동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을 제한하고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이석 관리’를 한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따르면, 회사는 노동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을 제한하고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이석 관리’를 한다.ⓒ이용득 의원실 제공
삼성전자서비스 상담자가 사측 관계자로부터 전달받은 감청 피드백 내용
삼성전자서비스 상담자가 사측 관계자로부터 전달받은 감청 피드백 내용ⓒ이용득 의원실 제공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따르면, 회사는 노동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을 제한하고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이석 관리’를 한다. 실적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고객과의 상담내용을 감청하는 실시간 모니터링까지 한다. 

한 상담사가 고객과 통화 뒤, 이를 감청한 사측 관리자로부터 받은 피드백 내용이 이날 공개됐다.

관리자는 ‘장점:적극적인 음성과 상담 태도’, ‘개선점:불편 공감 표현 없음’, ‘올바르지 않은 표현: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성함 말씀해주시겠습니까’라며 상담 노동자의 모든 것을 실시간 평가했다.

이 위원장은 “노동청에서 근로감독, 특별감독을 나오더라도 근본적 해결을 위해 상담사와 감독관의 직접 면담 시간이 꼭 필요하다”며 “법과 정책을 만드시는 분들이 콜센터에 대해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비상한 관심을 갖으셔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노동환경을 연구하시는 분들은 콜센터에 대해 종사 인원 조사를 비롯해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조사와 연구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다산콜센터지부 출범식
다산콜센터지부 출범식ⓒ양지웅 기자

‘노조’ 만든 후 노동환경 개선된 다산콜센터 노동자들 

증언대회에 참석한 상담 노동자들은 콜센터 현장에서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문제 제기하고, 자신의 권리를 정당히 주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노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또 이날 증언대회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토로할 수 있었던 것은 “보호해줄 노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산콜센터는 노동자들이 앞장서 노조를 만들고 노동조건을 개선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희망연대노조 다산콜센터지부 김효민 부지부장은 2012년 9월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다산콜센터 또한 휴식시간 미보장, 연차 사용제한, 실적압박, 실시간 모니터링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노조가 생기면서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다”는 것이 김 부지부장의 말이다. 

그는 다산콜센터에서 노조가 생긴 뒤 1시간마다 5분씩 휴식시간이 생겼고, 상담사 스스로 업무를 제어하며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김 부지부장은 “노조가 생긴 지 벌써 6년이 넘었다. 이제 ‘비정규직 철폐, 감정노동자 보호 대책 마련’은 우리 노조만이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사회적 이슈가 됐다”며 “ 노조 중심으로 단결해 전국 콜센터 노동자의 처우개선, 정규직화를 위해 함께 싸워나가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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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간 미뤄온 숙제, ILO 핵심협약 비준하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10/13 09:52
  • 수정일
    2018/10/13 09:5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26년간 미뤄온 숙제, ILO 핵심협약 비준하라”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10/13 [01:0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민주노총이 ILO 핵심협약 비준과 7대 입법과제의 연내 처리를 촉구했다. (사진 : 민중의소리)     © 편집국

 

민주노총은 12일 오전 10시 노사정대표자회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시 종로구 S타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ILO(국제노동기구)핵심협약 비준과 7대 입법과제의 연내 처리를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ILO핵심협약 비준과 이를 위한 최소한의 입법은 지리한 협의를 넘어 신속한 집행이 당장의 과제라는 점을 강조하며 경총대한상의 등 사용자단체와 정부의 사회적 책임과 결단을 촉구했다.

 

ILO핵심협약은 ILO가 채택한 189개 협약 중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는 8개의 협약을 말한다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98강제노동에 관한 협약(29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105취업의 최저연령에 관한 협약(138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182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남녀노동자의 동등보수에 관한 협약(100고용 및 직업에 있어서 차별대우에 관한 협약(111)이 그것이다.

 

한국은 1992년 ILO에 가입했으면서도핵심협약 중 제879829105호 4개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민주노총은 ILO 회원국 191개국 중 비준협약 수를 기준으로전체 협약 중에서는 118기본협약 중에서는 177위가 우리의 자리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민주노총은 7대 입법과제에 대한 조속한 처리도 요구했다.

 

7대 입법과제란 노조법 2조 개정을 통한 비정규직 노조 할 권리 보장 자격제한 없는 노조 할 권리 보장 노조 설립 신고제 복수노조 자율교섭 보장 전임자 임금 지급 자율교섭 공익사업범위·필수유지업무 축소 업무방해죄손배가압류 없는 파업권 보장 등이다.

 

지난 7월 20일 노동존중사회 실현과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새로운 노사관계 법제도 및 관행 구축을 목표로 발족한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는 현재 7대 입법과제 중 4가지 과제를 10월 우선입법과제로 정하여 협의 중이다.

 

논의 중인 4대 과제는 노조설립신고제도 및 노조임원자격 개선방안 공무원노조법과 교원노조법의 노조 가입범위 해고자실업자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노조 가입 노조전임자 급여지급금지 및 근로시간면제제도 등이다.

 

민주노총은 이 네 가지 과제는 그야말로 기본 중 기본이라며 사회적 합의도 이미 끝난 것들로 더 이상 미뤄져서도미뤄질 수도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민주노총은 나머지 과제들에 대해서도 즉각 논의에 돌입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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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기본 중에 기본인 노조 할 권리 전면보장

사용자단체와 정부의 빠른 결단을 촉구한다

 

지금 이곳에서는 노사정대표자회의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 회의가 매주 열리고 있다지난 9월부터 ILO핵심협약 비준 관련 우선 입법과제가 한창 협의되고 있다우리는 ILO핵심협약 비준과 이를 위한 최소한의 입법은 지리한 협의를 넘어 신속한 집행이 당장의 과제라는 점을 강조한다이와 함께 경총대한상의 등 사용자단체와 정부의 사회적 책임과 결단을 촉구한다.

 

국제노동기구 ILO에는 총 189개 협약이 있다회원국은 모두 191개국이다비준협약 수를 기준으로전체 협약 중에서는 118기본협약 중에서는 177위가 우리의 자리다심지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 탓에 통상마찰 발생마저 우려 될 정도라 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우리는 조속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촉구한다또한 우리는 이와 직결돼 있는 입법과제의 연내 입법을 강하게 요구한다.

 

현재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는 7대 입법과제 중 4가지 과제를 10월 우선입법과제로 정하여 협의 중이다이 네 가지 과제는 그야말로 기본 중 기본이다사회적 합의도 이미 끝난 것들로 더 이상 미뤄져서도미뤄질 수도 없는 시대적 과제다그 중 특히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230만에 달하는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기본권의 문제는 ILO는 물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지속적으로 개정을 권고해 온 내용이며고용노동부 산하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에서도 최근 조속한 입법을 권고하기도 한 사항이다경총대한상의 등 사용자단체가 계속하여 반대를 주장할 경우앞으로 투쟁의 타깃은 경총과 대한상의로 향할 것임을 경고한다.

 

우리는 지금 협의중인 네 가지 과제의 조속한 협의결과 도출에서 나아가 현재까지 11월 논의과제로 정립돼 있는 나머지 과제에 대해서도 즉각 논의에 돌입할 것을 촉구한다말뿐인 비정규직 철폐가 아니라 진짜 비정규직 철폐의 출발이 될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노조 할 권리 보장사용자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는 교섭창구 단일화강제제도 폐지와 복수노조 자율교섭 보장헌법에 보장된 파업권을 제약해온 온갖 적폐를 걷어내는 논의를 차후로 미룰 문제가 아니다.

 

헌법은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1천만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원청의 계약해지 등의 협박에 시달리며 노조 할 권리 바깥에 있다이명박근혜 때 개악된 복수노조 창구단일화제도를 악용한 노조파괴 공작이 더 이상 없어져야 한다그리고 파업권을 제약해 온 손배가압류업무방해죄필수공익사업 지정 등의 전면개혁도 시급하다우리는 현재 논의되는 4대 논의과제에서 나아가 민주노총에 요구한 연내 우선입법 7대 과제 전체가 바로 ILO핵심협약이 말하는 노조 할 권리 그 자체임을 강조한다.

 

민주노총은 민주노총이 참여하고 있는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라는 사회적 대화를 통한 협의결과가 국제사회에서 부끄럽지 않게 노동자 기본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온전히 부합하도록 지속하여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이에우리는 함께 노동자의 요구를 모아 외친다.

 

하나, 4대 우선입법과제 당장 실현하고, 7대 입법과제 즉각 논의하라!

하나촛불항쟁 시대정신이다노동적폐 청산하자!

하나조속한 ILO 핵심협약 비준으로 노조 할 권리 보장하라!

 

2018년 10월 12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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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베를린 출신 오스카 수상 감독, 그가 보는 통일은?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⑥] 동독 출신의 프라이당크 영화감독

 

 

'독일 영화'는 한국에서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 영화제가 있지만, 한국에서 독일 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은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인 빔 벤더스, 베르너 헤어조크 등의 몇몇 대가, 할리우드 감독이라 해야 할 롤랜드 에머리히 등 소수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독일 영화계란 곧 서독 영화인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독 출신이 독일 영화계에서 설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영화계뿐만이 아니다. 독일 사회에서 서독 출신의 엘리트 계층 독점 현상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가 2012년 발표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독일 엘리트층의 95%가 서독 출신이며, 동독 출신은 2.8%에 불과하다. 이 같은 현상은 시간이 더 지나야, 즉 독일의 재통일 후 태어난 젊은 세대가 충분히 사회에 진입해야만 완화될 것이다.  
 
지난 달 12일 만난 요헨 알렉산더 프라이당크(Jochen Alexander Freydank, 1967년생) 감독은 예외적 사례다. 프라이당크 감독은 지난 2009년 <토이랜드(독일어 Spielzeugland)>로 아카데미 단편 영화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로 세계의 관심을 받은 프라이당크 감독은 지난 2014년 영화 <카프카의 굴>로 부산 국제 영화제를 찾기도 했다. 동서독 출신 지역을 넘어, 독일 영화인 중 이처럼 세계적으로 성공한 감독 자체가 많지 않다. 프라이당크 감독을통일 독일에서 두각을 나타낸 구 동독 출신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프라이당크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주제는 통일 후 동독, 정확히는 베를린의 변화와 동독인의 독일 주류 사회로의 진입 스토리다. 프라이당크 감독은 1967년 베를린 카를 마르크스 대로(Karl-Marx Allee)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힙스터 천국' 베를린에서도 주목받는 클럽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 부근이다. 한 때 동독 체제 선전용으로 기획한 거리가 지금은 세계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는 힙스터 거리로 변했다. 
 
프라이당크 감독이 현재 거주 중인 프렌츠라우어베르크(Prenzlauerberg) 또한 옛 힙스터 거리로 유명했다. 지금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완료돼 가난한 이는 찾아보기 힘든 비싼 지역이 됐지만 말이다. 프라이당크 감독과 프렌츠라우어베르크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그의 어조로 각색해 정리했다.   
 

▲ 프라이당크 감독. 동독 출신으로 여러 벽을 뚫고 예술적 성취, 비평적 성취를 모두 얻어낸 감독이 되었다. ⓒ프라이당크 제공

영화감독을 꿈꾼 동베를린 청년 
 
전 1967년 9월, 동베를린 카를 마르크스 대로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통일 후에는 여행의 자유가 주어졌으니 세계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봤죠. 하지만 항상 베를린이 제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지금은 프렌츠라우어베르크 부근에서 생활하죠. 
 
전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셨죠. 통일 이후 많은 동독 출신이 그랬듯, 서독에서 온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했지만요. 
 
가정 환경 덕분에 전 어릴 적부터 상대적으로 풍부한 문화적 세례를 받고 자랐죠.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동독에서 영화는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반면, 연극은 더 예술적 장르로서 자리 잡았죠. 그 덕분에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조금은 정치비판적인 연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 영화에 빠져들었죠. 연극보다 더 콤팩트하고, 더 확장성도 좋았으니까요. 미학적 실험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동독 시절 저에게 영향을 준 작품요? <차가운 심장(Das Kalte Herz)>과 1980년대 동독 펑크 록 씬(Scene)을 다룬 다큐멘터리 <속삭이고 울부짖다(Flüstern und Schreien)>를 꼽겠습니다. 기본적으론 (한국의 AFKN과 같은) 주독 미군 방송 RIAS를 더 접했네요. 동베를린 젊은이들은 다 서독 방송이나 미군 방송을 시청했죠.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기에, 아비투어를 치른 후 동독 국영 방송 ARD의 어린이, 청소년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인민군에서 사진병으로서 18개월 간 복무했죠. 동독에서 징집을 거부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징집을 거부하면 수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동독에서 수감 생활을 한다는 건 죽으러간다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징집을 피할 길이 없었죠. 더구나 징집을 거부한다는 건 (영화를 위한)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전 기독교 신자였고, 그 때문에 무기를 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안을 찾은 게 사진병입니다. 당시 저는 배우로서도 조금 활동했고, 영화계 일을 했기에 이 같은 대안을 겨우 찾을 수 있었죠.  
 

▲ 과거 동독 시절의 상징이었던 TV타워. 368m로 독일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 동독 정부가 1969년 설립했다. TV 송신탑이지만, 체제 선전 목적이 있었다. 당시 기준으로 장벽 바로 인근에 세워졌다. 서독에서도 바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했다는 뜻이다. ⓒ특별취재팀

바닥에서 상공으로 
 
장벽이 무너질 당시 전 작은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지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죠.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일단 너무나 충격적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구 동독 지역에서는 연일 평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장벽이 무너진 후 시위 구호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국민'이라는 구호가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라는 구호로 변했습니다. 이어서 시위에 국기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동독기가 나왔으나, 나중에는 망치, 컴퍼스, 호밀 고리가 그려진 동독기가 사라지고 독일 국기(서독기)가 등장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그렇게 통일을 맞았습니다. 기회가 열리리라 생각했죠. 하지만 쉽지 않더군요. 베를린과 포츠담의 영화 대학에 다섯 차례 지원했지만, 모두 낙방했습니다. 
 
독일 영화계는 기본적으로 인맥이 중요합니다. 대부분 성공한 독일 출신 감독은 부모님이 이미 유명한 영화인이었거나, 유력 집안 자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시는 더했습니다. 도제식이었죠.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과해야만 대학 입학이 가능했는데, 인터뷰 때마다 교수들과 부딪쳤습니다. 미학적 기준의 차이였죠. 교수들은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흡수할 수 있는 학생을 원했는데, 그 부분에서 저와 의견 차이가 났죠.  
 
결국 밑바닥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방송, 연극 무대를 가리지 않고 현장 일을 했습니다. 영화 영역에서는 의상을 제외한 모든 일을 해봤고, 공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일해보기도 했습니다. 동독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이런 일을 겪었느냐고요?
 
글쎄요. 답변하기 조금 어렵네요. '동독 출신이라 차별 받는다'라고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같은 느낌은 갖고 있었습니다. 비단 영화계뿐만이 아니라, 독일의 모든 중요한 자리, 즉 엘리트 계층에서 대체로 구 동독 출신은 극소수인 게 현실입니다. 반면, 인구로만 따지면 구 서독 출신이 구 동독 출신보다 더 많지만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독일 군인의 절반가량은 동독 출신입니다. 체제가 서독 위주였으니 구조적 출발선이 달라서 생긴 결과랄까요. 어떤 분야든 더 높은 위치로 가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있는데, 이 때 중요한 학벌, 인맥 등에서 동독 출신은 부족할 수밖에 없죠. 이 때문에 재통일의 열기가 가라앉은 후에는 너무나 컸던 기대에 따른 실망감이 사회에 번지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신분제 사회라고 느끼느냐고요? 그건 전혀 아니죠. 그 주장은 너무 나갔습니다. 일단 중요한 건 제 세대, 즉 통일을 경험한 세대와 통일 후 세대는 다르다는 겁니다. 지금 젊은 독일 세대에게는 출신 지역이 의미가 없습니다.  
 
어찌됐든, <토이랜드>를 위해 힙겹게 돈을 모아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외국의 유명한 상을 타니 저를 보는 독일 영화계 시선도 달라지더군요. 
 
참고로 독일의 영화 시스템은 한국과 조금 다릅니다. 영화에 국가가 재정적으로 참여하는 할당분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공영방송사가 수신료 이익 중 일부를 영화에 투자하는 시스템이죠. 다만 모든 영화가 이 같은 지원을 받진 못합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열린 도시가 사람을 바꾼다 
 
결과적으로 전 동독 출신이었다는 점 때문에 삶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만은 않습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늦잠을 잘 때 전 새벽부터 일어나 일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죠.  
 
더구나 전 구 서독 출신이 갖지 못한 경험을 했습니다. 동독 체제에서 독일 체제로, 일종의 경계를 넘어가는 경험을 해봤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다른 두 세상을 경험해 봤죠. 그 덕분에 다른 이들보다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동독보다 중요한 건 베를리너로서 정체성입니다. 분단 시절 동베를린은 동독의 문화 중심지였습니다. 동독에서 예술 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베를린에 모였습니다. 동독의 파리였다고나 할까요. 동베를린 특유의 사투리가 있는데, 당시 그 사투리를 쓰면 뭔가 쿨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동베를린이 물질적 측면에서 동독의 다른 도시보다 조금 더 풍요로웠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도시에서는 케첩을 구하기 어려웠지만, 동베를린에서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웠습니다. 물론 1인당 2병으로 제한되긴 했지만요. 자연히 동베를린은 다른 곳에 비해서 생동감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서베를린과 가까웠기 때문에 서독 사람들과 연락하기도 쉬웠고, 그 덕분에 더 살아있는 서구 소식을 들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동베를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동독 독재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이런 외부와의 교류는 중요합니다. 동베를린만큼은 아니지만, 분단 시기 라이프치히도 박람회로 인해 일찍부터 외부 사람과 교류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같은 작센(Sachsen) 주의 도시임에도 라이프치히는 드레스덴, 켐니츠 등과 다릅니다. 더 열려 있죠. 요즘 라이프치히에 젊은 예술인이 몰려드는 이유입니다. 반면 작센의 프라이탈(Freital)은 지형 문제로 인해 분단 시기 서독 방송을 보기 힘들었는데, 현재 난민, 극우 문제에 관해 가장 극단적인 도시의 하나입니다.  
 

▲베를린의 명물 암펠만과 관련한 관광상품을 파는 기념품 숍. 암펠만은 지금도 신연방주에서는 일상에서 시민과 함께 숨쉬는 공공디자인이다. 통일 정부는 이 디자인까지 모조리 서독식으로 통일하려 했다. ⓒ특별취재팀

서독 주도 재통일의 그늘 
 
맞아요. 요즘 구 동독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극우 문제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나쁜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일종의 선동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사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듯합니다. 물론 동독 지역에 극우적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서독 지역에도 많습니다. 지난 켐니츠 사태 때 몰려든 극우 시위자 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더 중요한 건 왜 저들이 불만을 갖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태의 악화를 막고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구 동독 출신이 사회에 불만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처럼 자신보다 더 약한 자(외국인)를 차별하는 문제로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글쎄요, 극단적으로 동독 출신을 단정하는 건 반대합니다만,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주변 지인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독일 언론에 불만이 많습니다. 구 서독 언론이 미디어를 지배하니, 그들의 시각으로 동쪽을 바라본다는 거죠. 예를 들어 보죠. 구 동독에서는 저축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를 과하게 축적하는 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나쁜 일로 인식됐죠. 이처럼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돈 관리 개념이 없이 살아왔는데, 재통일 후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구 동독 출신이 불만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생각됩니다. 이런 점부터 살펴봐야 왜 신연방주의 일부 도시에서 극우 집회가 집중적으로 열리는가를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동독이 가진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장점이 사라진 게 아쉽습니다. 교육제도, 보육제도 등에서는 동독 체제도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모두 서독식으로 바꿔버렸죠.  
 
심지어 재통일 초기에는 교통 신호등 체계까지 일방적으로 서독식으로 바꿨다가 시민의 반발로 원래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습니다(암펠만, 베를린의 상징인 공공 디자인으로 구 동독의 신호등 체계로 사용됐다. 서독 지역에서는 암펠만을 보기 힘들지만, 구 동독 지역에서는 지금도 신호등 문양으로 암펠만을 사용한다.). 이처럼 재통일 후 정부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동독의 흔적을 지우려 했습니다.  
 
반발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구 동독의 유명한 저항적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였던 필링 비(Feeling B) 멤버 하나는 재통일 후 반어적으로 "동독에도 충분히 문제가 많은데, 이제 우리가 서쪽 문제까지 감당하게 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 밴드 출신 2명이 나중에는 독일 인기 록 밴드인 람슈타인(Rammstein)의 멤버가 되어 유명인으로 살아가죠. 통일에 비판적이었던 이가 지금은 통일 후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인 베를린 프렌츠라우어베르크에 산다니 재미있죠.  
 

▲ 프라이당크 감독이 태어난 카를 마르크스 대로 부근의 모습. 옛 동독 시절 체제 선전용으로 만든 널찍한 대로다. 평양이나 베이징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디자인과 크기의 건물들이 거대한 도로 주변을 메우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는 보기 힘든 이색적 풍경이다. ⓒ특별취재팀

베를린이라는 환상 
 
제가 사는 곳이기도 하죠. 최근에는 이곳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며칠 전 이곳 부근 교회에서 시위가 있었습니다. 예전 이곳에서 살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밀려난 구 동독 사람들의 시위였습니다. 이제 동베를린은 평범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됐다는 증거죠.  
 
통일 전에는 이 지역(프렌츠라우어베르크 쉔하우저 대로 부근)에서 방 하나를 구하는 데 서독 화폐로 3마르크, 유로화로는 1.5유로 정도면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월세로 1000유로(약 130만 원)가량이 듭니다. 30년 만에 670배 정도 올랐죠. 전 동독 출신으로 비교적 성공한 사례라 그나마 여기서 현실 유지가 가능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죠. 
 
집 문제는 재통일 후 동독 출신이 경험한 가장 새로운 문제입니다. 동독 당시 집은 보급의 대상이었고, '일단 사람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가난한 사람은 기본권조차 얻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최근 취재를 위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갔는데, 그곳도 젠트리피케이션이 극심하더군요. 딱 과거 동베를린의 모습이었어요.  
 
당신들이 뭘 물어볼지 알아요. 통일 후 동베를린의 이른바 저렴한 물가가 젊은이를 모았고, 그 덕분에 베를린이 힙스터 천국으로 거듭났다는 거죠? 제 경험으로 보자면, 실제 1990년대 말까지는 창조적인 분위기가 존재했어요. 통일 후 돈도 없고 직업도 없지만 집은 있던 동베를린의 젊은이들이 할 일이 뭐 있었겠어요? 파티 했죠. 더구나, 동베를린의 특수성이 존재했어요.  
 
독일 말로 '키츠(Kiez)'라고 하는데, 그냥 동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종의 문화적 지역 개념이지만 지금은 행정적으로도 사용하죠. 베를린에 17개의 키츠가 있어요. 각 키츠별로 문화가 다릅니다. 이런 다양성이 베를린을 개방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베를린의 개방성이란 백인에게만 그렇죠. 가난한 비 백인에게는 결코 열려있지 않아요. 난 오픈 마인드라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너희 아이를 터키계, 아랍계 아이들이 많은 학교에 보내도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싫다고 답하죠. 소위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가난한 예술가 동네'는 사실 좀 미신과 같은 측면이 있어요. (통역: 추영롱)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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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종전선언, 사전에 미측과 충분한 논의했다”

<추가> BBC 인터뷰서, “늦지 않게 2차 북미 정상회담 열릴 것”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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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2  16: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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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은 유럽 순방을 앞두고 12일 청와대에서 영국 공영 BBC방송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제공 - 청와대]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미국의 상응 조치와 함께 속도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타임 테이블에 대해서 양쪽 정상들이 통 크게 합의를 했으면 하는 기대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유럽 순방에 앞서 영국 <BBC방송>과 인터뷰를 갖고 “저는 이 프로세스의 진행에 대해서 아주 강한 낙관을 가지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은 “종국에는 비핵화의 완성과 동시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될 것”이라며 “그런 프로세스로 나아가는 것이 미국이 취해 주어야 할 상응하는 조치라고 생각한다”고 미측의 ‘상응조치’를 강조했다.

특히 “종전선언은 사전에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서 미 측과 충분한 논의를 한 것”이라며 “가급적 일찍 조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점에 대해서 한미 간에 공감대가 있었다”고 밝히고 “종전선언은 시기의 문제일 뿐, 반드시 될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미측의 상응조치로 종전선언 외에도 “당장 경제 제재의 완화가 어렵다면 경제 제재하고는 무관한 인도적 지원을 허용해 나간다든지, 그리고 또 문화예술단이 서로 교환 방문을 한다든지, 또는 앞으로 경제 제재가 풀리고 난 이후의 준비를 위해서 경제시찰단을 서로 교환한다든지, 또는 북한에 미국의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든지 하는 등의 조치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시했다. 나아가 “북한의 비핵화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서서히 완화해 나가는 것까지도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묻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프로세스는 북미 간에 협의해야 될 내용”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김정은 위원장이 말하는 완전한 비핵화는 추가적인 핵실험과 핵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서 핵을 생산하고 미사일을 발전시키는 시설들을 폐기한다는 것, 그리고 현존하는 핵무기와 핵물질들을 전부 없애겠다는 것, 전부가 포함된 것이었다”며 “완전한 비핵화의 개념 속에 그 모든 것이 포함된다는 것은 서로 분명히 의견이 일치할 수 있었다”고 확언했다.

아울러 “김정은 위원장은 아주 젊지만 이 가난한 나라를 발전시켜야겠다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또 아주 예의바르고, 솔직담백하면서 연장자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그런 아주 겸손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 문재인 대통령은 로라 비커 BBC 서울 특파원과 인터뷰하며 경내 소정원을 산책하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풍산개 '곰이'와 '송강이'와 조우했다. [사진제공 - 청와대]

문 대통령은 기자와 산책하며 평양 5.1경기장 연설을 회고하고 “긴장된 순간이었는데 다행히 잘해낸 것 같다”며 “김정은 위원장이 그 연설을 전하면서 아무런, 말하자면 조건을 달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적으로 저의 분별에 맡겨 주었는데 그것은 북한이 그만큼 달라졌다는 것과 함께 김정은 위원장이 제게 대단한 신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

문 대통령은 “그렇게 늦지 않게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중간선거 이후에 빠른 시일 내에 2차 정상회담을 열기 위해서 지금 실무적으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 양국 간에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확인했다.

대북제재와 남북경협에 대해서는 “남북 간에 본격적인 경제 협력은 이 제재가 풀리거나 또는 제재에서 남북 간의 경제 협력이 예외적인 조치로 그렇게 용인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며 “본격적인 경제 협력은 그 제재의 완화에 따르되, 그때까지 경제 협력을 위한 사전 준비들을 미리 해 두자는 것”이라고 밝히고 공동 조사, 또는 공동 연구, 앞으로의 방안들에 대한 협의 등을 예시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북한도 보편적인 그런 인권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가장 실질적으로 개선해 주는 방법은 이런 남북 간의 협력, 그리고 국제사회와 북한 간의 어떤 협력, 그리고 또 북한이 개방의 길로 나와서 이렇게 정상적인 국가가 되어 가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유럽은 지금까지 북한의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자라고 하는 우리 정부의 목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지지해 줬다”며 “앞으로 남북 대화나 또는 북미 대화가 교착에 빠질 경우에 이란 핵협상에서 유럽이 아주 창의적인 그런 방안들을 제시하면서 중재를 했듯이 그런 대화의 교착 상태를 중재하고 창의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그런 역할도 EU가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나아가 “앞으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이렇게 구축되려면 결국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전체의 다자평화안보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며 “유럽의 지혜와 경험을 많이 나눠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부탁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3일부터 21일까지 7박 9일의 일정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교황청, 벨기에, 덴마크 순으로 유럽을 방문하고, 18일 교황을 만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교황 초청 의사를 전달할 계획이다.

이날 로라 비커 (Laura Bicker) BBC 서울 특파원과의 인터뷰는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경내에서 진행됐으며, BBC는 1922년 세계최초로 설립된 공영방송의 대명사이자 유럽 및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 공영방송사다.


(추가,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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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에게 한국은 미국의 속국인가

[기고]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18.10.12 09:38l최종 업데이트 18.10.12 09:38l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강경화 외교장관의 '5·24 제재'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강경화 외교장관의 "5·24 제재"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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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국회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발언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인 이해찬 의원이 "북한의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응한 5·24 조치를 해제할 용의가 있느냐"고 묻자 강 장관은 "관계부처와 검토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야 의원들이 집요하게 캐묻자 그는 "범정부 차원의 본격적 검토는 아니다"라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북이 평화공존과 협력의 길로 치닫고 있는 시점에서 교류의 걸림돌인 5·24 조치를 해제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주권자들의 여론에 따라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이다. 그 조치는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것이므로 문재인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언제라도 해제할 수 있고 유지하겠다고 정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원수가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5·24 조치 해제 문제가 국회에서 도마에 오르자마자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한국 정부)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AP통신은 트럼프가 대북 독자 제재를 해제할 것이라는 한국의 제안은 "자신이 허락할 때에만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속국으로 여기는 오만방자한 언행이다. 트럼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대북한 경제 제재조치'라 하더라도 "나의 승인 없이는 그것을 해제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을 텐데, 한국의 대북정책인 5·24 조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천만부당한 일이다.

트럼프의 한국 주권 모독 발언에 대해 국내의 여야 정치인 대다수가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유독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만이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유엔 제재사항은 유엔 제재위원회의 승인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그 외에 우리나라의 5·24 조치나 미국의 대북제재 등 한·미 단독 제재 사항은 상호 '협의' 사항이지 누구의 '승인'을 받아야 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는 "'승인'이 아니라 '긴밀한 사전협의' 취지였음을 트럼프 대통령이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정부도 이런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트럼프의 식민지 지배자 같은 행태 비판해야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에 들어간 직후부터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미국에 종속되는 속도가 아주 빨라졌다. 그런 길로 가게 만든 결정적 동인은 미국과 한국이 1953년 10월 1일 조인한 뒤 이듬해 11월 18일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그 조약 4조에는 "상호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유엔군사령관 겸임)이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한국은 군사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체결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과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에 얽매어 군사적으로 미국은 '갑', 한국은 '을'이 되고 말았다. 트럼프는 얼마 전에 "한국이 주한미군 주둔비를 100% 부담하라"고 말한 바 있다. 식민지나 속국에 대해서만 내릴 수 있는 오만한 '명령'처럼 들렸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한반도의 남반부를 속국처럼 여기는 미국의 권력자들을 향해 당당하게 자주적 태도를 보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에다 막강한 비밀정보기관까지 보유한 미국의 지배세력에 저항했다가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에 힘입어 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이전의 정부들보다 경제와 군사 분야에서 자주권을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서, 북한 정권과 손을 잡고 냉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꿀 수 있는 바탕을 다져나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이 함께하는 '종전선언', 그리고 훨씬 더 나아가 평화협정을 실현하기 위해서 유연한 자세를 보여야 하겠지만 트럼프의 식민 지배자 같은 행태는 엄중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종철(1944년생)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서울대 국문학과에 재학중이던 1967년 11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하지만 1975년 3월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됐다. 이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대표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거쳐 <한겨레> 논설위원과 <연합뉴스> 대표, 사단법인 ‘한국·베트남 함께 가는 모임’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동아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유라시아문화연대 이사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민주주의국민행동 공동대표, 2016민주평화포럼 상임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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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트랙터야, 분단의 선을 넘자” 농민들 북에 트랙터 100대 보낸다

전국농민회총연맹, 11일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8-10-11 18:32:11
수정 2018-10-11 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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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뉴시스
 
"가자 통일트랙터야, 한반도 분단의 선을 넘자"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에 담긴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남측의 농민들이 트랙터 100대를 북에 보내는 계획을 추진한다. 남북 교류의 물꼬를 열었던 1998년 소 떼 방북의 정신을 하겠다는 취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본관 2층 중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 결성을 선언했다. 대북제재 해제와 남북 민간교류 활성화를 위해 꾸려진 운동본부에는 전농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약 20여개의 농민·노동·시민 단체들이 참여했다.

운동본부는 발족 선언문을 통해 "대북제재와 남북의 교류 협력 증진은 함께 갈 수 없다"며 "통일트랙터를 통일 대장정의 선봉에 세우자"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분단의 철조망을 녹여 통일의 농기구를 만들자'는 민중의 염원이 통일 트랙터에 있다"며 "통일트랙터로 남북 민간교류의 첫 삽을 뜨자"고 덧붙였다.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뉴시스

북에 통일 트랙터를 보내자는 제안을 가장 먼저 한 것은 전농이다. 박행덕 전농 의장은 "우리 민족이 5천년을 같이 살아왔고, 불과 70년 떨어져 살았다"면서,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철조망을 트랙터로 깔아뭉개고 걷어내고 통일에 한 발자국 다가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도 운동본부 발족식에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 상임대표는 "남측 농민들이 북측 농민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 계획 안에 스며있다"면서, "대북제재 완화 또는 철회, 5.24 조치 해제 등 통일 장애물을 제거하는 핵심적인 통일 운동이 될 것"이라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이날 조직 결성에 참여한 단체들은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의사를 밝혔다.

윤여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상임대표는 "북의 농업하고 우리 농업하고 협력하면, 세계 어느나라와 FTA(자유무역협정)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북에 없는 게 우리한테 있고, 우리가 많은 게 북에 없다"며 남북 농업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 대표는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2005년 평양 시내 공단에 농기계 조립공장을 설립했고, 2010년 5.24 조치 이전까지 4~5년 동안 농기계를 만들어 북에 공급했다.

그는 "북에는 지금 농기계가 거의 없다"며 "가을에 가서 보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못 앉아 있고, 전부 나와 벼베기 전쟁에 다 나간다. 우리가 콤바인으로 한 나절이면 벨 것을 북은 낫으로 한 달동안 벤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이 약 150만톤 정도의 식량이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의 경지 면적은 남보다 넓지만, 같은 면적에서 나오는 양이 남의 절반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에 대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문화를 일치시켜나가는 아주 중요한 운동"이라면서, "우리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들이 앞장서서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고, 통일을 할 때 만이 통일 이후 8천만 겨레와 민족이 소외되는 사람 없이 함께 더불어 잘 사는 평등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트랙터 자료사진
트랙터 자료사진ⓒ정의철 기자

이날 운동본부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통일트랙터는 제2의 소 떼 방북으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것"이라고 자부했다.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1998년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염원하며 소 1001마리를 이끌고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거쳐 방북했다. 당시 소떼 방북을 계기로 남북 민간 교류가 급물살을 탔고 이는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 공단이 세워지는 초석이 됐다.

또 이들은 "통일트랙터는 전 국민의 지지와 환호 속에 분단선을 넘을 것"이라며 "통일트랙터를 밀고 당겨달라"고 국민적 참여를 호소했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내년까지 장기적으로 트랙터 100대 보내기를 추진할 것"이라면서 "향후 40억 원(트랙터 100대)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펼쳐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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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교육자, 조만간 만나리라 기대”

 10.4 평양대회 참석한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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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1  19: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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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부터 6일 동안 평양에서 열린 10.4선언 11주년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조만간 남북 교육자들이 만나는 행사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남측 전교조와 교총, 북측 교직동의 만남이 성사됐으면 한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지난 4일부터 6일 동안 평양에서 열린 10.4선언 11주년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은 조만간 남북 교육자들이 만나는 행사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10년간 중단된 남북 교육교류가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이미 북측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에 남북 교육교류를 제안, 조만간 첫발을 뗄 것이라고 밝혔다.

교직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라고 소감을 밝힌 조창익 위원장을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사무실에서 <통일뉴스>가 만났다.

처음 방북한 조창익 위원장,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눈길”

5만여 명의 전교조 조합원을 대표하는 조직의 위원장이기에 앞서 교사이기도 한 조창익 위원장의 눈에는 북녘 아이들이 먼저 들어왔다. 

새벽녘 고려호텔 주변을 산책하던 조 위원장은 탁아소 풍경을 바라봤다. 등원하는 아이들에게 의사인지 보건교사인지 모를 이가 하나하나 아이의 건강을 챙기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보기 좋았다.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참관한 그는 “재능을 발굴해서 완성하는 완결구조 자체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며 “체제 자체가 우선적으로 차이가 있어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관심을 보였다.

남쪽 인사들에게 처음 공개된 과학기술전당에서 “전율을 느꼈다”던 조 위원장은 “세계 최고 우주공학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국가적 목표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교육을 상당히 우선순위로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세대가 조국의 미래라는 점, 그런 부분들은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 평양을 방문한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파트너인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 6.15북측위 관계자들과 만났다. 사진은 6.15북측위 소속 강승일 씨와 찍은 사진. [사진제공-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남북 교육자모임, 조만간 성사될 것”

조 위원장은 이번 방북 기간 북측 파트너인 교직동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만간 남북 교육자모임이 성사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교조는 지난 8월 서울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기간 북측에 △남북교육자 교류협력체계 복원과 유지, △2019년 1월 전국참교육실천대회 북측 대표단 초청, △남북교육자 합동연구대회 추진, △남북학생 교류사업, △남측 학생 북녘 수학여행, △교육견학단 상호방문, △역사바로세우기 공동사업, △조선학교 지원 공동사업 등을 제안한 상태.

조 위원장은 “(남북 교육단체 간) 간극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신뢰구조는 쌓여있다”면서 남북 교육교류 가능성을 크게 내다봤다.

다만,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이후 북미 정상회담, 종전선언 등이 있어, 북측이 속도를 내기보다는 현 상황을 지켜본 뒤 나설 뜻을 밝혀, 본격적인 남북교류는 내년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관측했다.

“정부, 시민사회진영 통일운동 배려해야.. 통일운동진영 재편도”

조창익 위원장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이 아닌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 교육부문 위원장 자격으로 방북했다. 6.15남측위가 이번 방북 과정에서 정부와 마찰이 있던 것도 사실.

이를 두고, 조 위원장은 “그 부분을 갖고 갈등상황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이후 펼쳐가는 데 별로 좋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대신 “정부가 그간 시민사회진영의 통일에 대한 열정, 꾸준한 노력, 진정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현 정부의 통일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공통의 지향점으로 힘을 모으자는 쪽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했다.

조 위원장은 남북교육교류 외에도 교사와 학생들의 통일 감수성을 높이는 자체적인 사업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남북교육교류가 전교조에 국한된 것은 아닌 만큼, 한국교원단체총연합(교총)과 협력하려는 의지도 강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첫 방북,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

□ 통일뉴스 : 10.4민족통일대회 방북단으로 다녀오셨다. 평양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신가?

■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 처음이다. 사실 올라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양보심이 강해서, 선배님이 가신다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그랬다. 분위기 좋아서 다음에 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됐다. 10년이 넘으니 아쉬웠다.

□ 첫 방북 하셨는데 소감이 어떠하셨는가.

   
▲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 온화했다. 사람은 따뜻했다. 새벽에 뭐도 모르고 호텔 주변을 돌아다녔다. 아이들 보고 싶어서. 8시 25분경 탁아원에 갔어요. 아이들을 맡기는데,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인지 보건교사인지, 아침에 나오는 아이들에게 ‘아픈 데 없니’ 하고 검사하더라.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아이의 건강을 아침부터 챙겨주더라. 너무나 보기 좋았어요.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평양과 북한에 대한 사전인식과 현장에 가서 직접 목도하고 느낀 감정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안도감이라고 할까. 황금 들녘을 봤다. 식량난 등 항간에서 이야기하는데, 다른 지역은 모르지만, 평양 인근 들녘은 남녘의 들녘과 다름없이 황금색이었고, 추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자체적으로 넉넉하게 만들고 공급하는 토대는 되어있었다.

흥분상태였다. 산천, 들녘, 건물, 농촌, 도시. 그 전에 있었다는 혁명적 구호나 선전선동 구호, 그것과 현재 나와 있는 인민의 경제적 자립성을 강조하거나, 생활에 대한 강조나 인민존중사상,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한다’는 구호 등 과거에는 우리에게도 좀 있을 수 있는 구호이지만, 강성대국이나 군사강국으로 위용을 떨치고자 하는, 그런 전쟁의 분위기가 많이 잊혀지고 수그러들고 극복하면서 변하고 있는 북의 모습에, 한편으로 안도하고 한편으로 응원하고 싶고 감격했다.

뭐랄까, 새벽에 붉은 닭이 홰치는 소리, 도약을 준비하는 느낌이랄까, 우스개로 개구리가 뛰려고 웅크리고 있는, 도약하는 모습, 그런 느낌이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둘러보니,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눈길”
과학기술전당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 이번 방북에서는 아쉽지만, 학교를 방문하지 못했다. 대신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참관했는데, 교사로서 느낌이 어떠했는가.

■ 사전지식이 충분치 않았다. 다만, 듣는 정도였는데, 하루 5천여 명이 방과 후 원하는 학생들 와서 일정 기간 동안, 일정 수준이 될 때까지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예컨대 재능을 발굴해서 완성하는 완결구조 자체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

그것이 일반화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만 아니었을 것이라는, 교육을 통해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싶어 하는 목표 등 이런 것들이 느껴졌다.

우리로서는 갖고 있지 않은, 사회주의국가에서 교육을 우선시하고 국가책임제로 관철시키는 그런 모습은 한편 시장화되어있고 경쟁과 효율성을 따지는 우리의 교육질서에 견주어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유훈과 현재 살아있는 언어로 교육의 방향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라고 하는 그것은 사회주의국가, 혁명을 성취한 국가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부심 같은 것이라고 느꼈다.

□ 남북이 정치.사회적인 차이점은 있다. 하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보면서 우리 교육 현실에도 접목할 만한 점이 있었는가.

■ 체제 자체가 우선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국가책임제가 관철되는 북한하고 우리는 공교육 체제가 일정 정도 책임지는 상황에서 운용해야 하는 환경이 있다 하더라도, 교육방법과 내용, 교수방식에서 현장에서 구현되는 모습들은 소인수 학생들을 상대로 각 영역별로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책임지고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모습들은 우리 대한민국 교육체제에도 차용될 부분이 있었다.

교육이 국가정책의 우선순위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느냐는 부러움이 있었다. 우리 교육에 비하면, 소수 아이들이 각 분야에서 자기 재능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내려는 국가의 목표와 의도성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 10.4민족통일대회 방북단이 지난 4일 평양 과학기술전당을 방문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이번에 북측에서 남측 인사들에게는 처음으로 과학기술전당을 공개했다. 어떠했는가.

■ 과학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전율이 느껴졌다. 건물 구조 자체가 각자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학생들이 끝나고 와서 공부를 각자 컴퓨터 앞에서 하는데, 상대가 어떻게 하는가도 보이지만, 모든 것을 집중, 최고의 목표, 하나의 목표, 과학기술혁명의 하나의 목표는 은하 3호로 구현되는 발사체, 세계 최고 우주공학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국가적 목표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핵 무력에 대한 기초공사가 그런 과시용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과학기술 인력을 키워내겠다는 것, 여명거리, 과학자거리 보면, 과학자를 고급아파트로 이주시키고 대우하고 이러면서 과학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 과학을 앞세우고 교육을 앞세우고, 군사가 있지만, 산업에 대한, 빛나는 조국에서도 주제영역별로 펼치는데, 교육을 상당히 우선순위로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세대가 조국의 미래라는 지침. 그런 부분들은 중요한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중고생도 오더라. 컴퓨터를 다루는 데 고개만 들면 발사체가 있다. 눈앞에 있는 거다. 과학이. 그게 인공위성이라고 하는 우주에 대한 진출에 대한 욕망, 꿈이 있고, 무장으로서 세계지배력 확보하겠다는 그 꿈만이 아니고, 과학기술, 우주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력을 증진시킴으로해서 아이들에게 과학 인재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렇게 끌고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하면 그렇게 진지하지 않을 것 같다. 모두가 다 다른 주제인데, 텍스트 보고 어떤 사람은 동영상 보고 자기 글을 쓰고 다양하게 주제별로 다르고, 모두가 다. 굉장히 많이 와있는데, 지켜본다고 조용할까? 자기 집중력을 보이고 있고, 억지로 온 학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평양의 교육기관들을 둘러보면서 남측에도 접목할 만한 내용이 있었는가.

■ 문화예술자산, 교육자산에서 국가책임제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존엄한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앞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국가 중심부에서 인적 영혼에 대한 가치, 자유로운 상상력 영역은 오롯이 국가책임제로 뒷받침하는 무상교육 등이 와닿았다.

방북 기간 북측 ‘교직동’ 관계자 못만나... 그러나 “조만간 남북교육자모임 열릴 것”

□ 전교조의 북측 파트너는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이다. 이번 방북 기간 동안 교직동 관계자와 만났는가.

■ 만나지 못했다. 직총 관계자도 못 오고, 교직동도 못 오고, 여성, 농민 각 분야가 못 왔다. 6.15북측위 중심으로 만났다. 남측 전교조, 교총과 북측 교직의 만남이 성사됐으면 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 북측 교직동을 만나지 못했지만, 전교조 차원에서 남북 교류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것 같다. 어떤 것을 북측에 제안하려고 하는가.

   
▲ 조창익 위원장이 북측에 제안한 남북교육교류제안서를 보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지난 8월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당시 북측에 우리의 남북교류제안서를 보낸 바 있다. 교육교류를 촉진하자는 내용이다. 남북 간 교육교류는 상당히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다. 

먼저, 남북교육자교류를 복원하고 복원해야 한다. 남북 교사들이 교류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로 오는 1월 부산대에서 열리는 참교육실천대회에 북측이 오셨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교류의 발판을 굳건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 번째로는 교사교류이다. 교사들이 남과 북으로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처음부터 크게 할 수 없지만, 교사교류를 통해서 교육내용, 방법, 통일, 판문점선언의 교육적 이행을 실천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 등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교류이다. 학생들의 북녘 수학여행, 교육견학단 등을 꾸리고 싶다. 이밖에도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 이와 별도로 조선학교 지원 공동사업도 제안한 상태이다. 저희들은 하고 싶은 게 많다.

□ 10년간 단절된 남북관계는 민간영역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남북 단체들이 다시 신뢰를 쌓아야 하는 단계라고들 한다. 전교조는 어떠한가.

■ 간극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신뢰구조는 쌓여있다. 북에서 전교조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연민의 정을 느끼고 연대하고 싶다고 하고 응원하는 그럼 마음들은 확인된다.

다만,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 이후에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서 한쪽으로 가는데, 상수 관계는 거기에 있으니까. 연말 이전에 큰 변화가 종전선언 다음 평화선언 등 여러 정치적 변수들이 작동함으로써 이후에 교육 분야에도 협의할 수 있지 않나 싶다.

□ 북측이 남북교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꼈는가.

■ 제가 있는 데서 북측이 직접 이야기를 했다. 곧바로 속도 내기 어렵다. 예를 들면, 대학생 교류 이런 것들은 안 해본 부분이라 새롭게 하는 것은 하기 어렵다. 기왕 해오던 것, 예를 들면 전교조, 교총과 북측 교직동과의 교류는 해오던 것이니까 북에서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은 부담이 되는 것 같다.

지자체가 열정적으로 남북사업에 관심이 높은데, 수십 수백 개가 몰려들며 교통정리가 안 되니까, 우선은 어렵다는 의사를 북측이 표명했다. 농민, 지역, 여성 등도 안 해온 부분이라 북측이 자신이 없다, 천천히 가자고 했다.

□ 남북교류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교총)과 연대도 필요하다. 협력방안이 있는가. 

■ 교총 회장과 제가 만나서 약속했다. 사무처장과 실무협의하고 가서 이야기 나누고, 필요하다면, 남북교육교류사업 이전에 합동기자회견을 해서 양 단체의 교류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양 집행부 만나서 논의구조 확보하자고 했다. 교총과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 조창익 위원장은 정부의 시민사회 통일운동 진정성 배려를 주문했다. 그리고 통일운동진영도 재편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정부, 시민사회 통일운동 진정성 배려해야 한다”
“공통의 지향점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 6.15남측위 소속으로 방북하셨다. 이번 방북 과정에서 정부와 마찰이 있었다. 어떻게 보고 있는가. 

■ 시민사회단체가 10년 동안 줄기차게 투쟁으로 돌파한 이 어려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시민사회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시당한 처사로 절망을 안겨준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을 갖고 갈등상황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이후 펼쳐가는 데 별로 좋지 않다.

다만, 정부가 그간 시민사회진영의 통일에 대한 열정, 그동안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온 노력에 대해서, 통일운동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현 정부의 통일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좋은 시기라고 해서, 과실 따 먹는 형식으로 집권세력 내부에 기득권이 부활해서 차지하면 반발심이 생긴다. 투쟁 양상이 비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경고를 스스로 해야 한다. 

지향점을 크게 깔고 공통의 지향점으로 힘을 모으자는 쪽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통일운동은 너와 내가 차지할 수 없는 일이다. 6.15 남측위도 최대한 역할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본다.

서울로 내려오는 민족통일대회는 내년에 해야죠. 그때는 이제 6.15남측위를 존중해주는 정부의 모습을 기대한다.

   
▲ 지난 4일 10.4민족통일대회 환영공연이 열린 평양대극장 앞에서 단일기를 펼쳐보이는 조창익 위원장. [사진제공-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전교조, ‘판문점선언’ 시대 본격 준비”

□ 전교조 교사들의 통일역량, 통일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시기이다. 어떻게 내부적으로 준비하고 있는가.

■ 이제 본격적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일위원회를 중심으로 해서 사업을 해왔다. 이제 실제로 대중운동적 차원에서 북한 바로 알기, 북한 교육내용 등에 대해서 정보가 공유되어 있지 않은 데, 학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교육교류를 계기로 조금 더 대중운동적 차원으로 확산시킬 계획이다.

□ 학생들의 통일감수성도 중요하다. 과거 6.15 계기 수업 같은 것도 있었다. 판문점선언 시대에서는 어떻게 준비하는가. 

■ 판문점선언은 역사적 계기이다. 교과서가 새로 나올 것이라고 본다. 계기 수업 자료도 만들 것이다. 통일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꾸는 등 사실 굉장히 할 일이 많다. 애정을 갖고 북측을 바라보는 등 구체적인 지침서도 마련하고 힘차게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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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10대 동독 소년, 지금은 어떻게 살까?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⑤] 동독 1020세대가 기억하는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기존 동독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30~50대의 동독 주민들 중에서는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똑같은 변화를 겪은 10~20대는 이들과는 좀 달랐다. 물론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양태는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동독 사회와 비교했을 때 보다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서방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프레시안>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며 청년‧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요하네스 빈클러(Johannes Winkler, 1965년 생), 세바스티안 플뤼겔 (Sebastian Flügel, 1973년 생), 칼 에릭 다움 (Carl Erik Daum. 1978년 생) 씨를 만나 그들이 기억하는 독일 재통일과 동독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독일의 재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재통일로 인해 동독 사회와 주민들이 받았던 충격과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의 인터뷰는 지난 9월 9일(현지 시각) 신 연방주(옛 동독 지역이었던 5개주) 중 하나인 튀링엔(Thüringen) 주에 위치한 예나 시에서 진행됐다.  

재통일의 출발, 교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 김나지움 6학년(김나지움은 독일의 인문계 중등 교육기관이다. 김나지움 6학년은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에 해당한다. 편집자) 이었던 다움 씨는 동독 이야기를 꺼내자 가장 먼저 동독 시절 국가보안부이자 소위 '비밀 경찰'로 악명 높았던 '슈타지'(Stasi)를 언급했다.  

"아버지가 동독 시절 철물점을 운영하셨다. 그런데 가게에 이따금 정보를 캐내기 위해 슈타지 요원들이 들르는 경우가 있었다. 슈타지 요원이 들어오면 금방 표시가 났기 때문에, 가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 "당신 슈타지 맞지?"라고 말하면 그 요원은 그냥 나가버리곤 했다. 이런 식으로 슈타지 요원들이 정보를 캐내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움)

다움 씨에 따르면 슈타지는 교회나 환경단체와 같이 동독 내에서 활성화된 주민들 모임에 이른바 '정보원'을 한 명씩 심어놓았다. 그런데 이 정보원은 단체 내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을 관찰하기만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누가 정보원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플뤼겔 씨는 교회를 관리하는 고위층은 누가 슈타지인지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목사들은 오히려 슈타지가 한 명씩 심어져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동독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는 반정부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교회의 경우, 슈타지가 교회에 와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했다는 설명이다. 
 

▲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 ⓒ특별취재팀

 
동독 정부에서 슈타지를 교회에 보낸 이유는 분명했다. 교회가 반정부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1989년 9월 25일, 라이프치히(Leipzig)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를 중심으로 시민 8000여 명이 집결한 '월요 시위'가 동독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독 내에서 교회가 민주주의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냐는 질문에 플뤼겔 씨는 "민주주의 같은 개념은 아니었고 교회나 환경 단체가 큰 가족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들 하고 있으면 편하다, 좋다고 느꼈고 여기서는 내가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실제 동독 시절에는 지금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두 배 정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주말에 교회를 가지 않고 다른 곳에 놀러갈 수도 있지만, 동독 시절에는 교회를 가는 것외에 다른 여가 생활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독 내에서) 재통일을 주도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교회나 환경 단체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동독 정부는 교회를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했지만, 1970년대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고 소련의 지원도 떨어지자 정부의 힘이 약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교회나 환경단체에 더 많이 가게 됐다" (플뤼겔)  

동독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슈타지의 활동도 많이 위축됐다. 플뤼겔 씨는 장벽이 무너진 이후인 1989년 12월 즈음부터 슈타지가 교회나 다른 단체에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슈타지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재통일 이후 슈타지들이 보험회사나 운전 학원, 부동산 중개소 등으로 전업했지만 동독 사람들은 누가 슈타지였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충성심을 보여라  

동독 정부는 체제에 충성심을 보이는 학생들에게만 대학 진학의 기회를 열어뒀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대학 진학과 취업의 갈림길에 섰던 빈클러 씨는 동독 체제가 이어졌다면 자신의 대학 진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내가 아비투어(Abitur, 대학입시자격)를 치르고 대학 공부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학급이 25명이라고 한다면 동독 정부는 그 중 3명 정도만 아비투어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나는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의 집권당)의 소년단이라고 불리는 FDJ(Freie Deutsche Jugend, 자유 독일 청년단) 활동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SED의 당원도 아니었다" (빈클러) 

결국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엔지니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동독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9월, 광학회사인 칼자이스(Carl Zeiss)가 운영하는 엔지니어 교육기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장벽이 무너진 뒤인 1990년에는 이 교육기관의 본부가 있는 예나에서 공부했다.  

동독 시절에 정부에 충성하면서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빈클러 씨는 "아버지가 교회 목사였다. 아버지는 성경의 십계명에 써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니가 생각하는 것을 소신있게 이야기한다고 가르쳤다"며 정부에 거짓으로 충성하는 표시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 요하네스 빈클러 씨 ⓒ특별취재팀


다움 씨 역시 동독 내에서 대학을 가려면 충성심을 증명하는 증표가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다움 씨보다 10살이 많은 형은 장벽이 무너졌을 때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동독 시절에는 대학에 가려면 동독 정부에 충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FDJ에 속하거나 당원이 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군대에 3년동안 복무해야 했다.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는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형은 동독이 계속 유지됐다면 (군 복무를 했더라도) 대학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통일이 되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다움)  

동독 TV를 누가 봐?  

슈타지와 충성 유도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던 동독 정부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특히 서독의 TV 채널이 동독에서도 방영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동독의 몇몇 지역만 빼고 서독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아마 동독 사람 중에 동독 TV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가끔 동독 TV에서 좋은 영화를 보여주거나, 호네커(동독 최고 집권자, SED의 서기장)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만 동독 TV를 봤다. 

요즘도 그렇지만 뉴스 시작하기 전에 시계가 나오지 않나. 당시 서독 방송에는 동그란 시계가, 동독 방송에는 네모난 시계가 나왔다. 가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TV 속 시계 모양을 물어봤는데, 학생들 대부분 당연히 동그랗다고 대답했다. 다 서독 TV만 보니까.(웃음) 

1989년 가을 서독 방송에서 헝가리가 국경을 열어 사람들이 넘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또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한 엄마가 수 미터 정도 되는 (서방국가의) 높은 대사관 담장 위로 자기의 아이를 넘기는 장면이 방영됐다. 동독인들은 이 방송을 보면서 사람들이 아무런 폭력적인 상황 없이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교회를 주축으로 평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100명이 모였다가 다음날 500명이 됐고, 학생이나 젊은층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도 같이 나갈 정도였다. 방송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플뤼겔) 
 

▲ 세바스티안 플뤼겔 씨 ⓒ특별취재팀


동독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와중에 1989년 5월 사람들의 시위에 불을 당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SED가 부정선거를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에서 SED는 98.9%가 자신들에게 표를 던졌다고 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치였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에게 실제 어느 정당에 투표했냐고 조사를 해봤다. 그 결과는 SED가 말한 것과 너무 달랐다" (빈클러) 

"당시 선거는 기표소에 들어가서 후보를 찍는 비밀선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가 비밀선거를 하는지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다. 비밀투표를 하겠다고 기표소에 들어가는 순간 정부에 낙인이 찍혔다" (다움)  

"기표소에 들어가면 비밀투표를 했다고 표시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다음 날 직장 상사가 불러서 기표소에 좀 들어가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 회사가 지원을 못 받는다면서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플뤼겔)  

동독이 소위 '큰 형님'이라고 부르던 소련의 태도 변화도 동독 사람들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키는 데 주요한 촉매제가 됐다.  

"동독 사람들에게 소련은 모범적인 국가로 인식돼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개방을 한다고 하니까 동독에서 혼란이 커졌다. 소련에서 동독으로 보내는 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개방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동독 정부는 그 잡지에 대한 판매를 금지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동독 사람들은 정부에 더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내게 됐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당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게 "도와줄게"가 아니라 "변화 늦게 하면 너한테 벌을 줄거야"라고 이야기하니까 동독 주민들은 "이게 뭐지" 싶었다" (플뤼겔)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이 시위를 막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시위에 나서게 됐다" (다움) 

장벽 붕괴를 전후로 학교의 분위기도 변하기 시작했다. 다움 씨는 동독으로부터 도망친 선생님도 있었다고 말했다.  

"19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동독 정부는 중국 정부가 정말 잘했다고 칭찬했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었다. 동독 정부에 대해 친화적인 발언을 했던 선생님들도 그 발언 수위가 약해졌다. 

동독은 당시 매년 9월 1일 새 학기가 시작됐다. 학기 시작 첫 날에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 한 분이 안 계셨다. 알아보니 프라하에서 (서방국가 쪽) 대사관으로 넘어갔다고 하더라. 선생님뿐만 아니라 서독으로 넘어간 친구들도 많았다. 하루하루가 변화의 연속이었다" (다움) 

통일이 아니었다면?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졌다. 다움 씨와 플뤼겔 씨는 당시 통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동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연방주(구 동독)가 서독에 흡수되고 화폐 개혁도 예정보다 몇 달 더 빨리 이뤄졌다. 동독에서는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 매일 매일 느껴졌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동독 내에서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혁된 동독을 유지하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흡수통일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더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 같다"(다움) 

"서독이 동독을 흡수했거나 훔쳐갔다고 보지 않는다. 동독에서 그 상태로 뭘 유지할 수 있었을까? 경제를 비롯해 동독 내의 많은 것이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플뤼겔) 

빈클러 씨 역시 당시 시위에 나섰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는 통일로 인해 유토피아가 열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동독 말기에는 (1989년 5월 지방선거와 같은) 부정선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SED에서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시위에 나갔다. 사회주의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물론 당시 시위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  

개인적으로는 동독에서 여행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동독 내에서 억압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 권리인데 그게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흡수통일이 내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긴 했다.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빈클러 씨는 튀링엔 주 천문관측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편집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낙원이 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빈클러)  

빈클러 씨와 다움, 플뤼겔 씨에게 통일이 나름의 기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움 씨는 본인이 통일로 인한 이득을 가장 많이 본 세대일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인의 부모님 세대는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여전히 서독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경우도 있을 거라고 전했다.  
 

▲ 칼 에릭 다움 씨 ⓒ특별취재팀


"통일될 무렵에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후 서독 교육 시스템에 바로 안착해서 아비투어를 보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10살 많은 형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에게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또 연금과 관련, 재통일 체제에서 동독 사람들이 동독 시절 직장에 다녔다는 것을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동독 내에서는 세계적인 수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만한 기술이 있는 공장도 있었지만, 재통일 체제에서 이런 공장을 없애버린 경우도 많다. 기존 서독 지역에 경쟁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도 서독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부분 때문이다" (다움) 

30년이 지났지만  

독일 재통일이 이뤄진 지 30여 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동서독 간 차이는 존재한다. 이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서독 사람들과 만났을 때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가 동독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첫 1년은 뮌헨에 있었다. 당시 회사 사장이 동독 사람에게 '프로젝트가 언제 끝나냐'고 물으면 동독 사람은 '한달 후'라고 대답하고 정말 한 달 후에 끝냈다. 그런데 서독 사람에게 물어보면 일주일 후에 끝난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 하지만 절대 그 기간 내에 끝나지 않는다.  

동독 사람들은 불평도 많고 좀 딱딱하긴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약속은 지키는 성향이 있는데, 서독 사람들은 말은 다 해줄 것처럼 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플뤼겔)  

"서독 출신들은 동독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랐기 때문에 생활 방식도 다르다. 유머감각도 좀 다르고. 예를 들어 서독 출신 사람들은 동독 출신에 비해 자산 관리를 잘하는 것 같다. 

또 동독 사람들은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지 않았나? 그래서 물건을 샀는데 뭔가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고쳐서 써보려고 노력하는데 서독 사람들은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동독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방식에서 동독의 잔재 같은 것이 남아있다. 동독 시절에 언론 매체가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지금도 언론 매체를 통해 나오는 기사를 보면 일단 덮어놓고 믿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빈클러)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동독 시절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밖에서 자유롭게 말하면 안 되는 사회였는데, 서독의 경우에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스스로 자신감이 있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딸이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계속 발표 수업을 한다. 자꾸 자기를 보여주는 교육을 십수 년 동안 배우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움)  

동서독 간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경제적 차이도 여전하다.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기 전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나이대에 서독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출발할 때의 자본이 두 배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리고 그 아이들의 자손 세대 정도가 되어야 서독과 대등한 경제적 출발 자본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일반 기업들도 40년 동안의 동독 시절에 다 망가졌다. 지금 동독에 큰 회사들이 이따금 있지만 나머지는 굉장히 영세하다. 겨우 겨우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키워 놓으면 서독에서 그 회사를 사버리곤 한다. 앞으로 두 세대는 더 지나야 동서독이 비슷한 경제적 수준이 되지 않을까" (플뤼겔)  

동서독은 40년 동안 따로 살다가 재통일됐지만 남북은 분단만 해도 70년이 넘어가고 있다. 또 전화나 편지를 교환하고 서로 방문도 할 수 있었던 독일에 비하면 남북은 교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북은 독일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동독의 다수는 체제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독 정부는 개인의 의견을 통제하지 못했다. 서독에서 친척이 오고 가면 동서독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정보가 왔다갔다 했는지 동독 정부는 몰랐다. 이런 측면에서 동서독은 남북 상황과 비교되지 않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다움) 

"동서독은 재통일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남북은 이런 식으로 통일하면 안된다" (플뤼겔) (통역 : 조경혜) 

"너희도 통일할 것 같아?"  

플뤼겔 씨의 부인은 한국인이다. 바로 독일에서 호평을 받은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독일어판으로 번역한 조경혜 번역가다. 조 번역가는 1996년 예나로 유학을 왔고 이후 지금의 남편인 플뤼겔 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22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느꼈던 소회와 바깥에서 본 한국의 모습은 어떤지 들어보기 위해 9월 10일(현지 시각)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 조경혜 번역가 ⓒ특별취재팀


우선 1990년대 중반, 독일이 통일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예나라는 구 동독 지역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서독 지역에도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많았을텐데 왜 하필 예나였을까?

"1996년이면 재통일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독문학을 공부하려고 알아보던 중 교수님이 요즘에는 동독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서독 지역에도 지원하고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와 예나에 있는 대학에도 지원했는데 예나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입학허가서 들고 바로 왔지.  

그 때만 해도 한국 사람이 예나에 얼마나 있는지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짐 싸서 왔다. 예나에 도착해서 알게 됐는데 당시 한국 사람이 5명 있었다. 첫 번째 한국인을 만나는데 3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여기가 예전 동독 지역이다 보니,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물어봤다. 어르신들 중에는 동독 시절에 북한 사람 많이 알고 지냈다는 분도 계신다"  

학위만 따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느새 독일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 20년 넘게 백인이 아닌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물어봤다. 특히 요즘 독일에서는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떠오르면서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도 늘어가고 있어 독일 내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독일 극우 집단들의 타깃이 동아시아 쪽은 아니라서 제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느낀 건 없다. 그런데 지난해 60대 여성이 한 난민에 의해 강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독일 사람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일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느끼진 않는다. 다만, 이슬람 문화를 좋아하는 독일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베를린의 경우 터키계 무슬림이 많이 거주하는데도 그렇다.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경우 전략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동독 지역을 공략한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난민 때문이라는 식으로 선전을 한다. 

그런데 난민에 대한 반감은 극우뿐만 아니라 중산층에도 좀 있는 것 같다. 자기가 낸 세금을 가지고 난민의 생활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어 보인다"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도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주로 동독 지역에서 지지를 얻은 이유가 됐을 거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실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면서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를 느낀 적은 없었을까?  

"예전 서독 지역에 가면 분위기가 동독 지역과는 좀 다르다. 물론 예전 서독 지역 중에서도 주로 큰 도시를 가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히 동독 지역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독일 기준으로 외국인도 훨씬 많고. 

또 예나는 대학이 있어서 동독 내에서도 발전이 좀 이뤄진 도시이지만 여전히 동독 지역 도시들은 좀 어렵다. 라이프치히만 해도 큰 공장 건물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리할 수 있는 자본이 없어서 빈 건물로 놔둔 곳이 상당수 있다.  

물론 예나도 재통일 전에는 좀 어두웠다고 한다. 그런데 재통일 이후에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색을 칠하고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밝아졌다고 한다. 예나의 건물 중에 웬만한 건 다 수리했다고 보면 된다. 하다못해 페인트칠이라도 다 새로 했다" 

분단 40년에 통일 30년이 가까워 오지만 동서독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 있으면 분단 100년이라는 시간표를 받아들지도 모를 남북은 앞으로 어떤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것이 좋을까?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남북 간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여기가 한국보다 더 난리다. 지난해에는 저도 걱정되더라.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너희도 통일할 거 같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려울 거 같다고 답했다. 우리는 전쟁을 하기도 했고 분단됐을 때 교류도 안했고. 또 이산가족도 이제 많이 남지 않았고. 

독일은 40년 분단 기간 20년 정도는 TV부터 시작해서 통신 등을 허가하면서 동서독 간 교류를 해왔다. 이게 기반이 되어 국제 정세가 딱 맞아 떨어질 때 통일을 한 것이다. 이 사람들도 통일을 해야겠다고 계획하고 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남북이 교류하는 게 선행되어야 통일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경제적인 문제보다 남북이 이질화가 심각해졌다는 것이 가장 문제 아닐까 싶다. 남한은 문명과 변화에 너무 민감하고 북한은 너무 통제돼서 사실 극과 극이다. 이 둘이 융화되려면 남북이 서로 개방하고 교류하면서 조금씩 통일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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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법부냐!”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 318명,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 발표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10/12 [01: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 318명이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사진 : 참여연대)     © 편집국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원로 및 시민사회민중단체정당 등 각계인사 318명이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11일 오전 930분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3차 시국회의를 개최하고이어 11시 같은 장소에서 시국선언 및 활동계획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들 인사들은 시국선언을 통해 감옥으로 가야 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아직 수사도 받지 않고 있고재판거래와 사법농단을 저지른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구속 영장은 거의 대부분이 기각되었다며 대법원장이 약속한 성실한 수사협조는 온 데 간 데 없고학벌지연저들만의 카르텔에 기반한 제 식구 감싸기만 횡행하고 있다고 통탄했다.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들은 사법부를 향해 더 이상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며 성실한 수사협조관련 모든 자료 제출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국회를 향해서도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의 원상회복을 위해 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하며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이 있는 적폐법관들을 지체 없이 탄핵소추함으로써 이들에 의한 추가적인 사법왜곡을 방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끝으로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들은 국민들을 향해 법원이 제 식구 감싸기식으로 사법적폐를 비호하고 있는 지금이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며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또 국민의 기본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광장에 다시 모여 촛불을 들 것을 호소했다.

 

한편 기자회견에 앞서 진행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3차 시국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사법농단 법관 탄핵과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캠페인 나는 사법농단에 관여한 법관을 파면한다를 10월 동안 진행해 11월 초 국회에 제출하고, 11월 탄핵돼야 할 법관 명단과 탄핵소추 사유를 발표하기로 했다또 20일엔 3차 사법농단 규탄집회 및 행진을 광화문 일대에서 진행하고 영장 기각 규탄 1인 시위지역별 시국선언신문광고 등의 행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번 시국선언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김중배 전 MBC 사장한승헌 변호사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이해동 목사함세웅문정현 신부명진 스님 등 시민사회원로와 각계 인사 318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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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법부냐!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문

 

오늘 우리는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누적된 사법적폐를 뿌리 뽑을 것을 다시금 촉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주지하다시피양승태 대법원은 박근혜 적폐정권의 비위를 맞추며 재판을 거래하고이를 통해 제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7~80년대 노동탄압 관련 소송쌍용차 정리해고 소송, KTX 여승무원 소송강제징용 소송긴급조치 국가배상 소송전교조 법외노조 소송키코 피해자 등 중소상공인 소송그리고 강제해산당한 통합진보당 관련 소송 등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고통의 나락으로 내몰렸다가히 민주주의와 헌법의 근본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법농단이었다.

 

사법농단의 전모가 드러나면서그리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를 공개하고 성실한 수사협조를 약속하면서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박근혜 정권 당시의 사법 적폐가 낱낱이 청산되기를 기대했다이를 주도한 적폐 법관들이 퇴출되고 사법부의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했다그러나 사건이 공개된 지 넉 달이나 지난 지금그간의 기대는 실망과 분노로 변하고 말았다.

 

감옥으로 가야 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아직 수사도 받지 않고 있고재판거래와 사법농단을 저지른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구속 영장은 거의 대부분이 기각되었다그러는 사이에 사법 농단의 증거자료들은 파기훼손되고 있다사법농단과 재판거래 범죄의 최고 책임자인 전직 대법원장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청구에 대해서는 주거안정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사유로 연거푸 기각하였다실로 기가 막힐 지경이다.

 

대법원장이 약속한 성실한 수사협조는 온 데 간 데 없고학벌지연저들만의 카르텔에 기반한 제 식구 감싸기만 횡행하고 있다사법부가 실정법 준수에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조직적으로 수사방해를 일삼으면서 법질서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법관들이 사실상 법위에 군림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법관들 스스로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법치주의를 부정하고국민 기본권보장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의 존재의의를 짓밟는 실로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지금우리는 김명수 대법원장과 양심적인 사법부 구성원들에게 촉구한다더 이상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스스로 국민들에게 공개 약속한 대로 성실하게 수사협조하라사법농단과 재판거래 관련 모든 자료를 제출하라이 길만이 사법부가 국민의 법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 촉구한다국회는 더 이상 뒷짐지지 말고 직접 나서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사법농단과 재판거래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의 원상회복을 위해 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그것만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법부의 수사방해와 셀프재판으로 인한 재판왜곡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다또한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이 있는 적폐법관들을 지체 없이 탄핵소추함으로써 이들에 의한 추가적인 사법왜곡을 방지해야 한다.

 

우리는 국민에게 호소한다법원이 제 식구 감싸기식으로 사법적폐를 비호하고 있는 지금이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또 국민의 기본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광장에 다시 모여 촛불을 들 것을 호소한다.

 

이에 우리는사법적폐 청산을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담아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양승태 전 대법원장그리고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있는 적폐법관들을 즉각 구속처벌하라!

둘째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즉각 제정하라!

셋째사법농단 적폐법관들을 지체없이 탄핵하라!

넷째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원상 회복조치를 실시하라!

 

2018년 10월 11일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해결 촉구를 위한 각계 시국선언 참가자 318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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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개인주의의 한계

휴심정 2018. 10. 11
조회수 350 추천수 0
 

 

 

“서울 같은 대도시도 해법은 마을과 골목에서 찾아야”

 

[더 나은 사회] 박원순-데이비드 코튼 좌담

 

박원순 서울시장
“전환도시 방향 확고하게 정할 시점
협동으로도 경제 살릴 수 있어
1 대 99의 사회, 마을에서 눈으로 확인”

데이비드 코튼 교수
“현재의 경제체제는 ‘자살경제’
공동체에 보탬 되는 경제 틀 짤 때
부자들도 미래 없다는 걸 깨달아야”

 

1.JPG»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10일 오전 서울시청 6층 시장실에서 생태문명과 도시전환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생태문명 담론을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인 코튼 교수는 11~12일 이틀간 서울에서 열리는 ‘2018 서울 전환도시 국제콘퍼런스’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첫 만남이라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10일 아침 서울시청 시장실에서 열린 좌담에 앞서 박원순 시장과 데이비드 코튼 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시장실 내부를 장식한 다양한 지도와 전광판을 가리키면서 잠시 환담을 나눴다. 박 시장은 코튼 교수의 ‘생태담론’에 공감과 동의를 나타냈고, 코튼 교수는 친필 서명이 담긴 자신의 영어판 저서(국내엔 <이야기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라는 제목으로 2017년 출간)를 선물하며 서울시의 도시혁신 활동에 지지를 보냈다. 생태문명을 설파하는 대표적 학자 중 한 사람인 코튼 교수는 11~12일 이틀간 서울시 주최로 열리는 ‘2018 서울 전환도시 국제콘퍼런스’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문명 전환과 도시의 실험’을 주제로 내걸고 열리는 이 행사는 서울시의 도시혁신 경험을 지구촌과 함께 나누고 도시 전환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는 자리다. 코튼 교수는 첫날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도시의 역할’이란 제목의 발제를 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마련한 이번 좌담은 한 시간 남짓 진행됐다.

 

2.JPG» 최근 유럽의 4개 도시를 다녀온 박원순 서울시장은 “경쟁이 아닌 협동으로도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개발·원조 일하다 ‘자본주의 비판가’로
 인류가 끊임없이 물질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지구와 자연환경에 끼친 부정적 영향도 무시하기 힘들다. 지구의 나이를 가르는 구분으로 ‘인간세’(인류세)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인류 문명이 걸어온 길에 대한 두 분의 견해부터 듣고 싶다.
데이비드 코튼(이하 코튼) “인류란 무엇인가, 문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필요한 때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자연과 사람을 파괴하며 발전해왔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며, 대중과 생명체, 지구를 억압하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재화를 창출하는 현재의 경제체제는 생명체를 파괴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자살경제’(suicide economy)라 부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박원순(이하 박) “큰 방향에서 코튼 교수의 이야기에 충분히 동의한다. 성장 일변도의 사회가 자연을 파괴할 뿐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사회적 불평등도 키웠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더이상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 우리가 처한 위기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 그리고 대안이 필요하다. 서울시는 원전하나줄이기 노력을 펼쳐오고 있고 보행친화도시로의 전환도 노력 중이다. 에너지 자립마을이나 에코마일리지 제도도 있다. 서울시도 전환도시로서 방향을 확고하게 정할 때다.”

 

3.JPG» 전형적인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선진국의 개발과 원조가 원주민의 삶을 파괴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열정적인 ‘자본주의 비판가’로 돌아섰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937년 보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코튼 교수는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국제개발처 고문으로 일하면서 서유럽 나라들의 개발정책이 개발도상국 빈곤층 주민들의 삶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지켜보다 물질문명의 한계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비판가’로 돌아섰다. 그가 강조하는 생태담론이 과연 발전 단계와 상황이 다른 남반구와 북반구 모두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코튼 교수는 “외국에 나가기 전까지는 이상주의적인 미국 중산층이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아 대화를 이어갔다.
코튼 “20년 동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빈곤을 줄이는 운동을 했다. 개발과 원조가 공동체 중심의 삶을 일궈왔던 주민들과 공동체에 오히려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수도 없이 눈으로 지켜봤다. 그나마 도움을 준 거라곤 보건분야 정도뿐이다. 주민들을 땅에서 내몰고 공장의 싼 노동력으로 탈바꿈시켰다. 좀 더 발전한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돈이 중개자 노릇을 하는 사회가 됐다. 오늘 아침 여기 오기 전 레스토랑에서 밖을 바라보니 사람보다 차가 더 많더라. 차 안에는 죄다 한 사람만 타고 있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너졌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자문해봐야 한다.”

 

4.JPG»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이 10일 오전 서울시청 6층 시장실에서 열린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와의 좌담에서 코튼 교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사회적 경제가 대세구나’ 자신감 얻어”
박 “최근 도시 네 곳(바르셀로나·빌바오·취리히·탈린)을 다녀왔다. 바르셀로나에선 기존의 역사 흔적을 파괴하지 않고도 생활환경을 더 인간적으로 바꿀 수 있구나 느꼈다. 빌바오에선 서울시가 의장도시를 맡고 있는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에 참석했다. 86개 나라에서 1700여명이 왔다. 경쟁 아닌 협동으로도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시도 의욕적으로 힘을 쏟고 있는 사회적 경제가 세계적 대세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서울시는 도시재생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혹시 코튼 교수가 서울시에 한마디 조언을 한다면?
코튼 “박 시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힘이 난다.(웃음) 도시는 중앙정부보다도 공동체를 좀 더 배려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중앙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다국적기업이나 대기업을 위한 정책이 대부분이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에 보탬이 되는 경제 틀을 짜는 일은 도시가 더 잘할 수 있다. 서울시가 노동이사제를 시행한다고 들었다. 아주 훌륭한 정책이다. 덧붙이자면 도시는 차보다 사람을 위해 디자인돼야 한다. 개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치, 제도, 인프라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도시의 전통을 살리는 도시재생도 그런 맥락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코튼 교수는 시장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서울시 보행도로 지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멋지다, 훌륭하다”고 치켜세웠다. 이에 박 시장은 지난여름 강북의 삼양동 옥탑방 체험을 떠올리며 코튼 교수의 이야기에 맞장구쳤다.
박 “마을(옥탑방)에 살아보니 마을 경제가 다 무너졌더라. 골목식당, 철물점, 미용실 이런 건 다 사라지고 죄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뿐이다. 거기서 나온 수익은 전부 본사로 돌아간다. 1 대 99의 경제를 마을에서 눈으로 확인했다. 도시재생 사업을 위해 서울시가 돈을 써도 정작 건설사 주머니로 돌아갈 뿐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서울시가 세금으로 쓰는 돈만이라도 동네 주민들한테 돌아가도록 하자, 이렇게 마음먹었다. 지역 주민들이 만드는 제품들이 팔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jpg»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서울시청 6층 시장실 전광판을 뒤로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혹시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박 “귀한 조언 잘 새겨듣겠다. 서울시가 마을공동체 사업을 처음 시작하자 대도시에 무슨 마을 타령이냐, 19세기 농촌경제로 되돌아가자는 말이냐 반문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니다. 대도시도 마을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울 같은 대도시도 해법은 마을과 골목에서 찾아야 한다. 지역과 마을의 재생이 대도시의 성장과 대립하는 게 아니다.”
박 시장은 내친김에 코튼 교수를 향해 “아예 한달 정도 서울에 머무르면서 동네를 들여다보시라”고 웃으면서 권하기도 했다. 좌담을 마무리하며 코튼 교수는 ‘세가지 결론’을 하나하나 정리하듯 짚었다.
코튼 “첫째, 세계 리더십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만심에서 나오는 서구의 개인주의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아는 동양의 사고방식으로. 둘째, 이대로는 부자들도 미래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과 지구가 죽으면 모두 끝이다. 부를 분배하고 공동체를 되살리는 사회로 가야 한다. 셋째,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변화를 만들어내기에도 너무 늦었다. 가능한 한 빨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행·정리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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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러 3국 협상 “대조선 단독제재 반대” 합의

북·중·러 3국 협상 “대조선 단독제재 반대” 합의공동보도문 발표… “유엔안보리 대조선 제재 조절과정 가동해야”
▲ 최선희 북한(조선) 외무성 부상이 지난 9일 북중러 3자 회담을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외무부 영빈관에 도착했다.[사진 : 뉴시스/ NHK 캡쳐]

최선희 북한(조선) 외무성 부상과 쿵쉬안유(孔鉉佑) 중국 외교부 부부장, 그리고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무차관이 지난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3자 협상을 갖고 결과를 담은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

11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3자는 공동보도문에서 “조선반도의 비핵화 실현과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의지를 재확언”하곤 “이러한 과정들이 신뢰조성을 선행시키면서 단계적이며 동시적인 방법으로 전진되여야 하며 관련국들의 상응한 조치가 동반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공통된 인식을 가지였다”고 밝혔다.

이어 “3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의의 있는 실천적인 비핵화 조치들을 취한데 대해 주목하면서 유엔안보리사회가 제때에 대조선 제재의 조절과정을 가동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견해일치를 보았다”면서 “3자는 단독제재를 반대하는 공동의 립장을 재천명하였다”고 밝혔다. ‘조절과정’이란 간접적 표현을 사용했지만 유엔안보리가 대북 제재 해제 또는 완화 조치를 취해 나가야한다는 데 사실상 합의했다는 얘기다. 특히 미국이나 일본 등 개별 국가들의 대북 제재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 주목된다. 대북 제재 문제와 관련해 북중러 3국이 유엔에서 공조하기로 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3자는 또 “조선반도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평화적이며 정치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데 대하여 의견일치를 보았다”면서 “조선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관련국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호상 우려를 해소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북남조선 사이의 협상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더불어 “협상에서는 조선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해당 나라들 사이에 쌍무 및 다무적 협력을 강화하여야 할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토의되였다”면서 “3자는 대화를 계속 진행해나가기로 합의하였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조선중앙통신은 “3자 협상에서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기울이고 있는 공화국의 적극적인 노력이 높이 평가되였으며 조선반도 정세의 현 긍정적인 추이가 지속되도록 그에 상응한 조치들이 취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대해 견해일치를 보았다”고 알렸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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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새로운 방식의 비핵화 '빅딜' 필요하다

[현안진단] '시퀀스' 빅딜이 현실적 대안
2018.10.11 11:00:15
 

 

 

 

종전선언과 영변 핵시설의 교환은 '스몰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으로 북·미간 비핵화 협상의 교착국면 해소를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당일치기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면담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북·미간 이견의 조정이나 실무협상이 아닌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에 대한 '확약'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직후 미 국무부는 김정은 위원장이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 확인을 위한 사찰단을 초청했다고 밝혔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사찰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언급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평양 공동선언'에서 영변 핵시설의 영구 폐기를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계기로 종전선언과 영변 핵시설을 등가물로 교환하는 협상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영변 핵시설은 북한 현재핵의 핵심인 원자로와 재처리 및 농축시설을 포함하고 있다. 북한이 미래핵인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에 이어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의 해체에 착수했다는 점에서 다음 단계 현재핵의 비핵화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으로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화하고 있으며, 그 동안 북한의 집착을 고려할 때 북·미 정상회담의 재개는 종전선언의 성사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북·미간의 스몰딜의 수준을 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종전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입구일 뿐이며 불가침을 포함하는 항구적 평화상태의 달성, 즉 한반도 평화협정의 길은 아직 요원하기 때문이다.  

영변 핵시설은 북한 현재핵의 핵심시설이지만 북한의 다른 지역에도 우라늄 농축시설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핵의 다른 핵심분야인 ICBM 제조시설은 더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개연성이 있다. 북한의 단거리 및 중장거리, 그리고 ICBM 제조시설은 상호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의 핵심은 과거핵이다. 과거핵은 이미 생산한 핵물질, 핵탄두, 그리고 ICBM 등 운반수단이다. 과거핵은 당장 쓸 수 있는 무기라는 점에서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이 핵심적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다. 과거핵 폐기는 북한 비핵화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영변 핵시설의 폐기와 종전선언이 등가물로 교환된다고 해도 보다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비핵화 방식에 대한 북·미간 이견 

북·미간 이견이 반복되는 근본적 원인은 비핵화 방식에 대한 큰 틀의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는 신고-검증-폐기를 내용으로 하는 사찰 매뉴얼 방식이다. 매뉴얼 방식은 초기에 북한 핵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으며 투명하게 비핵화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에 매뉴얼 방식을 적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상존한다. 우선 핵연료의 채취에서 농축, 재처리 그리고 운반수단의 제조 등 핵무기생산 일관체계를 갖춘 북한과 같은 자발적 핵보유국에 대한 매뉴얼 방식에 따른 비핵화 사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방대한 규모의 북한 핵시설 및 폐기의 기술적 문제를 감안했을 때 단기간 내 완전한 비핵화도 어렵다. 

매뉴얼 방식의 보다 큰 문제는 당사자인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선 신고단계에서 북한 핵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신고내용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의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북한은 제한된 장소와 분야를 공개하길 원할 것이며, 미국은 제한이 없는 검증방식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마찰의 가능성이 있다. 신고단계의 이견으로 협상이 파기될 경우 북한은 성과 없이 자신들의 핵능력만 공개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신고단계에서의 협상파기는 이미 과거 북·미 비핵화협상에서 경험한 바다. 신고단계가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해도 비핵화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대북제재의 해제와 체제보장 조치가 단행되기도 어렵다. 매뉴얼 방식을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다.

북한이 선호하는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시행한 자발적 비핵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자발적으로 비핵화 조치를 실시한 이후 NPT 가입 및 IAEA의 사찰을 받아들였다. 검증과정에서의 잡음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폐기 1년, 검증 2년 등 비교적 단기간 내 비핵화 전 과정을 마무리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와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의 해체, 그리고 영변 핵시설의 영구폐기 제안 등의 조치는 모두 북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발적 비핵화에 해당한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북한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프로그램은 농축방식의 핵물질 제조시설과 7개가량의 원자탄급 핵탄두 등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반면 북한은 농축과 원자로를 이용한 재처리 등 2가지 방식의 핵물질 제조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운반수단인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제조시설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핵프로그램이 방대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비핵화의 대가로 체제보장과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북한은 비핵화조치를 단계화하여 상응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자발적 비핵화의 가장 큰 문제는 비핵화 완료시점 이전까지는 북한 핵프로그램의 전모를 알 수 없으며, 궁극적 비핵화의 신뢰성을 사전에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북한의 일방적인 자발적 비핵화는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이다. 
 

▲ 7일 북한에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오른쪽) 미 국무장관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가졌다. ⓒ폼페이오 트위터


북·미간 '시퀀스 방식'의 빅딜이 현실적 대안이다 

종전선언 이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비핵화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빅딜, 즉 북·미간 이견을 보이고 있는 비핵화의 방식에 대한 합의이다. 양측의 이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자발적 비핵화 방식과 미국의 프론트로딩(front loading)방식을 결합하는 절충안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자발적 비핵화 방식을 일부 수용하되 주요 비핵화의 시간표와 절차에 합의하고, 핵심적인 비핵화를 조기에 선행하는 일종의 '시퀀스 방식'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북한 비핵화의 시간과 단계를 서너 덩어리의 완결된 핵심부분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시퀀스 방식은 신고에서 출발하는 매뉴얼 방식의 문제를 우회할 수 있으며, 신속하게 실질적인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미 모두에게 유용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시퀀스 방식에 있어서 선행조치는 완전한 비핵화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실질적 임기인 2020년 말까지 핵심대상의 폐기시간표를 약속하는 것이다. 방대한 북한 핵프로그램과 기술적 문제를 감안했을 때 단기간 내 완전한 비핵화는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핵무기 및 제조시설 등 핵심분야를 대상으로 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비핵화는 가능하다. 

비핵화의 절차와 대상을 구체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질적 비핵화가 완료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미래핵, 현재핵, 과거핵의 핵심부분이 완전하게 폐기되어야 한다. 이미 폐기절차에 돌입한 미래핵에 이어 영구 폐기의사를 밝힌 영변의 원자로와 재처리 및 농축시설과 아울러 은닉된 농축시설과 ICBM급의 주요 제조시설에 대한 비핵화 조치도 필요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된 핵물질과 핵탄두, ICBM 등 과거핵의 상당부분을 조기반출 또는 폐기하는 프론트로딩의 실행이다. 프론트로딩의 대상이 북한 핵능력의 전모가 아니라는 점에서 미국의 상응조치가 수반될 경우 북한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다. 프론트로딩은 사실상 북한의 진정성과 비핵화 프로세스의 순조로운 이행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큰 관건이 될 것이다. 

비핵화 프로세스에 상응하는 체제보장 및 보상조치의 시퀀스도 중요하다. 북한에 대한 체제보장과 보상은 종전선언과 단계적 제재해제, 그리고 평화협정 체결의 순서가 될 것이다. 종전선언으로 비핵화와 한반도평화체제 구축의 입구가 마련될 경우 평화협정으로 가는 협상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영변핵시설 영구 폐기의 시작 또는 과거핵 폐기가 명확해지는 상황에서는 대북제재의 단계적 해제를 통해 비핵화를 견인해야 할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핵심분야의 북한 비핵화가 실질적으로 완료되었다는 판단이 섰을 때 가능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평화협정 체결은 핵심분야 비핵화조치의 완료와 북한 핵프로그램 전모의 투명한 공개를 의미한다. 남은 과제는 잔여 핵프로그램의 중장기적 비핵화조치가 될 것이다.  

시퀀스 방식은 북한 핵의 전모에 대한 투명한 조기 비핵화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의 차선책이다. 시퀀스 방식의 신뢰성은 각 단계를 구성하는 비핵화 조치들이 독립적으로 북한 핵프로그램에 불가역적이고 영구적 손상을 주는 형식을 통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하며, 핵심분야의 비핵화로 북한의 전략적 핵능력과 핵위협이 신속하게 실질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는 확신과 신뢰가 필요하다. 

한국의 운전자 역할은 멈출 수 없다 

비핵화를 위한 협상의 테이블에서 북·미 모두 일방적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다. 북한은 비핵화를 향한 확고한 신뢰를 입증해야 하며, 미국은 일방적 압박과 제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비핵화의 실질적인 진전을 도모해야 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한반도 비핵·평화체제구축 프로세스를 진행해야 할 것이며, 시퀀스 방식의 비핵화는 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퀀스 방식의 북한 비핵화과정에서 한국의 운전자 역할은 중요하다.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는 것은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며, 북·미간 신뢰의 형성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비핵화의 단계마다 이견이 부각될 가능성도 상존한다. 지난 5월과 8월 북·미 정상회담과 폼페이오 장관 방북 연기로 초래된 북핵 협상 교착국면에서 보여준 한국의 운전자로서의 역량이 향후에도 필요한 이유이다.  

비핵화 및 평화체제구축 단계와 연계하여 지속가능한 새로운 남북관계를 형성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의 전략적 목표는 비핵·평화체제를 기반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남북협력의 시대를 개막하는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중장기적인 통일로드맵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반도와 동북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대로 역내 국제정치구도의 근본적 변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북한 비핵화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태평양전쟁에 대한 미완의 전후처리에 기반을 둔 동북아 국제질서, 즉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새로운 신안보질서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동북아 신안보질서 형성과정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한국의 국가이익을 구현하기 위한 신국가전략을 모색할 때다. 한반도가 열강의 패권경쟁 속에서 표류했던 구한말의 아픈 기억을 성찰하고 시공간을 보다 길고 넓게 내다보면서 국가발전을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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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해제 검토’ 공방에 트럼프까지 뛰어든 이유는?

‘5.24 해제 검토’ 공방에 트럼프까지 뛰어든 이유는?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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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1  11: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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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벌어진 ‘5.24 제재 해제 검토’ 공방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뛰어들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0일(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에서 ‘5.24 제재 해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국정감사 발언 관련 질문을 받고 “우리의 승인 없이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리의 승인 없이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10일 강 장관은 ‘5.24 제재 해제 용의가 있는가’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질문에 “관계부처와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가 “관계부처(통일부)가 검토 중”이라고 말을 바꿨다. 논란이 커지자 “범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검토는 아니다”고 물러섰다. 

외교부는 별도 자료를 통해 “5.24 조치 해제 문제는 남북관계 상황 및 대북제재 국면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하여 검토해나갈 사안”이라며, “10일 외교장관의 언급은 남북관계 발전 및 비핵화 관련 대화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안보리 결의 등 대북제재의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나아가 “현 단계에서 정부 차원에서의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강 장관과 외교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증폭되는 이유는 ‘대북 제재 완화 문제’가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달 17일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유지’를 당부했으나, 중국.러시아는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7일 방북 계기에 한.중.일을 찾아 ‘대북 제재 유지’를 강하고 주문했다. 반면, 북.중.러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3자 차관 대화’를 열어 “비핵화 문제에서 조선(북한)의 중요한 조치와 결합하여 적시에 안보리 대북 제재조치 조정 개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 

한편, 폼페이오 장관이 7일 방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2차 북미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실무협상’을 조기에 개최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최선희 외무상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조만간 마주 앉을 예정이다. 최 부상이 미국 측에 요구할 ‘상응조치’에 ‘제재 완화’가 들어갈 가능성이 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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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안 나서면 아무도 친구의 죽음을 밝히지 않을 거예요”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10/11 11:16
  • 수정일
    2018/10/11 11:16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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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노동자 단속 중 추락사한 현장목격 증언 “단속반이 발 붙잡은 뒤 중심잃고 머리부터 추락”
경찰 수사 부진 “단속반이 찼던 바디캠 영상 봤지만 더 확인해봐야”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열흘 전인 지난달 30일, 코코(29‧가명)씨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발언대에 올랐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미등록체류자 단속 중 추락해 숨진 친구 딴저테이씨(27)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부평역 앞 광장에서 열린 ‘법무부 죽음의 단속 규탄·딴저테이씨 죽음 진상규명 촉구 추모집회’에서였다. 코코씨 발언은 이주인권운동가 소모뚜씨가 한국어로 동시에 옮겼다.

“저도 미등록체류자입니다. 여기 나오면 위험하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친구가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 죽어갈 텐데. 제가 나와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요. 그래서 왔습니다. 무섭지만. 무섭지만.” 지난 8월22일 코코씨는 딴저테이씨가 단속반에 둘러싸여 창밖으로 추락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단속반은 점심시간에 들이닥쳤다. 코코씨와 딴저테이씨는 건설현장에 딸린 식당에서 닭고기 반찬을 배식 받아 마주앉았다. “오늘 맛있겠다. 많이 먹자”고 대화를 나누고 첫 술을 뜨던 참이었다. 출입구쪽에서 쾅 소리가 났다. “앉아, 앉아, 앉아! 야! 앉아!” 한 미얀마 노동자는 ‘중국 노동자들끼리 싸움이 난 줄 알았다’고 돌이켰다. 들이닥친 이들은 곧바로 출입문을 걸어 잠갔다. 

“단속 나왔어. 위험해, 뛰어.”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영문을 모르던 코코씨에게 딴저테이씨가 말했다. 돌아보니 공무원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3명, 몸집이 큰 사복 차림이 5명. 유니폼 중 1명은 영상을 찍고 있다. 둘은 서로 반대쪽으로 뛰었다.

식당에 딸린 창고로 향해 뛰며 코코씨는 친구를 돌아봤다. 딴저테이씨는 앞서 뛰어내린 4명에 이어 창틀에 올랐다. 코코씨는 “단속반이 친구가 뛰지 못하게 다리를 붙잡는 걸 봤다”며 “친구는 중심을 잃어 창문 넘어 8m 지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고 했다. 딴저테이씨가 떨어진 곳은 창문 밑 얕은 평지 너머 공사 중이던 현장이었다. 앞서 뛴 4명은 평지에 착지해 살아남았다.

▲ 지난 8월22일 딴저테이씨가 창문에서 추락한 위치. 사진=코코씨 제공
▲ 지난 8월22일 딴저테이씨가 창문에서 추락한 위치. 사진=코코씨 제공
 

딴저테이씨가 추락한 직후에도 단속반은 단속작업에 열중했다고 코코씨는 말한다. “‘야, 1명 떨어졌어’ 하고 외치는 소리를 창고 안에서 들었어요. 그래도 상관 없이 계속 (단속 색출)해요.” 현장을 지켜본 노동자들은 딴저테이씨가 추락하고 30분가량 흐른 뒤에야 구급대에 실려갔다고 말한다. “추락 20~30분 후 한국인 동료(과장)가 와서 소장에게 무전기로 말했어요. 소장님이 와서 ‘야, 아직 안 죽었잖아. 119 불러’라고 했어요. 5분 뒤에 구급차가 와서 딴저테이를 데려갔어요.” 딴저테이씨는 17일 간 뇌사상태에 있다 9월8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건 당일 중국, 베트남 등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가운데 36명이 붙잡혔다. 미얀마 팀 9명 가운데 5명이 붙잡힌 뒤 본국에 보내졌다. 

법무부 해명은 현장 증언과 엇갈린다. 법무부는 지난 1일 ‘장기기증 미얀마인 불법체류자 추락 보도 내용 관련 설명자료’에서 “보도된 미얀마인은 발견 즉시 법무부 직원에 의해 119에 신고됐다”고 했다. 단속반이 12시5분 단속을 시작했고, 추락한 딴저테이씨를 8분에 발견하자 마자 구급대를 불렀다는 설명이다. 이주인권운동가 소모뚜씨는 “법무부와 현장 목격자 말이 다른데, 증거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법무부는 딴저테이씨 죽음이 “막을 수 없었던 사고”라는 입장이다. 법무부는 설명자료에서 당시 “외국인의 안전사고에 대비하고자 창문 등에 단속직원을 미리 배치”했다고 말했다. 법무부 입장을 전해들은 코코씨는 안전에 대비한다면 그날 그 시간과 장소를 택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건 아이도 못 믿는 말이에요. 현장에서 단속하는 게 제일 위험해요. 5명이 창문으로 도망쳤고, 딴저테이는 밖으로 떨어져 죽었잖아요.” 법무부 훈령인 ‘출입국사범 단속과정의 적법절차 및 인권보호 준칙(준칙)’은 “제3자의 주거지, 영업장소에서의 단속은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최소한도로 실시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단속반의 반말과 폭언 주장을 두고는 “단속 과정에서 소란이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욕설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준칙은 “외국인 등에 대하여 폭언이나 가혹행위 또는 차별적 언행을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밝히고 있다. 

 

▲ 딴저테이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주노동자 동료 코코(29)씨(왼쪽)를 인천 부평역 인근 미얀마이주민 협동조합 식당에서 7일 만났다. 오른쪽은 인터뷰 통역을 도운 틴아웅(25)씨. 사진=김예리 기자
▲ 딴저테이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주노동자 동료 코코(29)씨(왼쪽)를 인천 부평역 인근 미얀마이주민 협동조합 식당에서 7일 만났다. 오른쪽은 인터뷰 통역을 도운 틴아웅(25)씨. 사진=김예리 기자
 

병원 기록에 추락 사유가 ‘자살’로 적힌 점도 미스터리다. 119 구급대 쪽은 이같이 사유를 밝힌 적이 없다고 밝혔다. 법무부도 부인하고 있다. 설명자료에서 “법무부 직원은 (119 차량이 병원에 도착한) 그 이후에 병원에 도착”했다며 “병원에 이송된 뒤 기록에 추락사유가 ‘자살’이라고 표기돼있는 것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전혀 관여한 바가 없다”고 밝혔다. 

경찰이 “사건을 수사 중”이라고 했지만 추락 원인 규명은 지지부진하다. 김포경찰서는 현장 단속반원이 찼던 바디카메라 영상 원본을 제출받아 추락 경위를 확인했다고 밝혔으나 접촉 여부를 놓고는 “수사 중이라 말하기 어렵다”며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다. 경찰은 “(단속 과정에서) 다른 문제점이 없는지 더 확인할 예정”이라며 새로운 현장 증언도 참고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8월 일어난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현재까지 가려내지 않은 점은 의문이 생기는 대목이다. 

경찰은 단속반원 1명과 건설업계 관계자를 대상으로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이 단속반원과 건설업계 관계자는 추락 장면을 정확히 목격하지 못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지난 2008년부터 10년 동안 정부가 미등록체류자 단속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인정한 사망자 수는 10명이다. 징계받은 법무부 직원은 1명도 없다. 

미등록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토끼몰이식’ 강력단속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이주인권센터 활동가 박정형씨는 “이전 정권이 미등록이민자를 범죄율과 연동시켰다면, 이제는 서민일자리 보호라는 명분으로 조직적인 과격 단속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미얀마 난민이기도 한 소모뚜씨는 “건설현장을 보면 관리자만 한국인이다. 나머지 청소 등 밑바닥 일은 이주노동자가 아니면 하려 하지 않는다”며 “서민 일자리 창출을 말하며 이주노동자가 죽고 다치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은 부조리”라고 말했다.

딴저테이씨 사건 이후에도 정부는 강력단속 기조를 지속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달 20일 “불법체류 외국인이 국민 일자리를 잠식”한다며 “건설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불법취업자 단속활동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1일에는 ‘불법체류자 특별대책’을 시행한다며 △특별 자진출국 기간 △집중단속 등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 8월22일 출입국관리사무소 강제단속 과정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은 미얀마 미등록 이주노동자 딴저테이(27)씨. 사진=코코씨 제공
▲ 8월22일 출입국관리사무소 강제단속 과정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은 미얀마 미등록 이주노동자 딴저테이(27)씨. 사진=코코씨 제공
 

딴저테이씨는 “1년만 ‘불법체류자’로 일하다 고향에 가겠다”고 동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딴저테이씨의 비자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지난 10월 만료됐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단속 과정에서 사상자가 생기면 자체 가입한 보험으로 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한다. 딴저테이씨의 입원치료비 3600만 원과 장례비 600만 원은 건설사 측이 낸 위로금 5000만원으로 지불했다. 딴저테이씨는 한국인에게 장기를 기증하기로 해 총 4명이 장기를 이식받았다. 

 

인력부족 3D 업종 채우도록 묵인, 착취 방조하다 2004년 이후 추방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의 역사] 
 

1. 1980년대 – 묵인 

인접 아시아 국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유입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정부의 이주민정책 골자는 ‘묵인’이었다. 기업들이 저임금 고강도-위험노동 업종에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때였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이 자리를 채웠다. 인력이 모자르다는 기업의 호소에 정부는 1992년 6월부터 17차례에 걸쳐 미등록 노동자들의 출국을 유예했다. 이주노동자는 정부의 침묵 속 승인 아래 10년이 넘게 노동시장 밑바닥을 지켰다. 

2. 1990년대 – 착취 

1994년에는 산업연수생제도가 생기면서 산업노동자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이주해왔다. 제도 명목은 개발도상국의 노동력을 받고 한국의 기술을 전수한다는 ‘경제협력’이었다. 그러나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제도를 ‘교육의 이름을 한 착취’라고 했다. 산업연수생을 노동자가 아닌 교육생 신분으로 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했다. 열악한 노동조건 탓에 업장 내 가혹행위도 늘어났다. 관리운영 업체의 횡포에도 그대로 노출됐다. 

산업연수생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업장을 바꾸면 ‘불법체류자’가 됐다. 산업연수생 신분을 벗어나 미등록 노동자가 되면 돈도 더 벌 수 있었다. 그 탓에 미등록 체류자가 급증해 2002년엔 이주노동자 가운데 미등록율이 79.8%(36만 2천여 명 가운데 28만 9천여 명)에 달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때리지 마세요.’ 1995년 네팔 산업연수생들이 푯말을 내걸고 명동성당 쇠사슬 농성에 나서 ‘현대판 노예제’ 폐지를 촉구했다.

한편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둔 3월 정부는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을 발표하고 신고자에 한해 2003년 3월31일까지 출국 유예했다. 이 기간에 전체 미등록 체류자의 93%가 자진신고를 마쳤다. 

3. 2004년~현재 – 추방 

산업연수생제도 폐지 요구가 커지자 정부는 다른 제도를 꺼내들었다. 고용허가제다. 명목은 △이주노동자 시장을 양성화해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연수생제도에 따른 인권탄압 시비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제도로 정부는 인력을 연수생이 아니라 노동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간 중소기업중앙회가 맡았던 인력 도입과 관리를 정부가 도맡았다.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이 전환기를 ‘정부가 공인한 추방’으로 꼽는다. 2003년 말 고용허가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 차례 미등록 체류자 19만여 명을 합법화한 후 법무부는 대대적 강제 단속에 나섰다. 인권단체 ‘이주노동자 지원대책위원회’에 따르면 2004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강제단속으로 8명이 숨졌다. 미등록 체류자들은 단속을 피하다 객사하거나 적발된 후 강제추방이 두려워 자살했다. 

4. 산업연수생 제도의 착취는 여전 

현대판 노예제라는 오명은 그대로다. 고용허가제도 모든 권한이 사업주에게 집중되긴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상습 폭언이나 성폭행 등 사유를 대고 입증하지 못하면 이주노동자가 업장을 옮길 수 없다. 횟수도 4년 10개월 내 3번으로 제한한다. 이를 어기면 그대로 단속 대상이 된다. 이주노동자들에겐 옴짝달싹하면 ‘불법체류자’로 전락시키는 제도인 셈이다. 

토끼몰이식 단속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법무부에 제출 받은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하며 80명이 부상하거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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